60화 달밤의 수련
개방은 하오문과 쌍벽을 이루는 중원의 정보 단체다.
그리고 이들은 원활한 정보 수집을 위해 개방도들을 각지에 파견해 정보망을 구축하곤 했다.
개중에는 개방도인 것을 감추고 잠입시키는 경우도 더러 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러한 경우에 속했다.
‘그러니까, 저 청년이 용두방주께서 점찍어 둔 후개라는 거지?’
사결 제자 박칠은 이곳으로 파견되기 전, 일호개 장로와 나눈 대화를 떠올려봤다.
미친개를 두들겨 패는 듯한 봉질로 무뢰배 놈들을 때려잡고 있었다는 한 청년의 이야기.
평범한 몽둥이에 매듭도 없었지만, 타구봉법이 연상되는 몽둥이질로 무뢰배 놈들을 개패듯 잡고 있었다는 한 청년의 이야기.
‘조용히 따라붙어 후개가 맞는지 확인해 보게.’
‘옙.’
그리고 만약 타구봉법을 익힌 후개가 맞다면, 그 자리에 어울리는지 인성과 자질까지도 확인하라는 장로의 요구사항.
‘그리고 사라진 용두방주의 소재도 무슨 수를 써서든 알아내 오고.’
‘넵.’
벌써 수년째 공석인 개방의 우두마리 자리.
용두방주의 귀환은 모든 개방도의 염원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든 알아내 오라니.
‘단, 그 과정에서 차기 용두방주의 심기를 거슬려선 안 되겠지. 그 부분은 알아서 잘해 보게.’
이건 뭐 알아내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아무튼 일호개의 조언을 떠올려 호쾌한 협객을 표방하며 무척 조심스럽게 일행으로 접근한 박칠이었다.
“마중천이라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단무진 소협.
“아, 예…….”
물론 잠입하자마자 정체가 탄로 났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다.
***
성운심법의 영험한 기운이 몸속을 뜨겁게 휘젓고 있다.
운기조식을 끝내고 확인한 내공의 양은 약 20년. 이 기세라면 올해 말쯤엔 반 갑자(甲子)를 찍을지도 모르겠다.
위험을 감수하고 별의 기운을 훔쳤기에 이만한 성장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겠지.
동시에 무슨 운명인지 사건, 사고에 계속 휘말렸단 뜻이기도 하겠고.
“그럼에도 아직 부족해.”
절대적인 내공 양만 따진다면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커 온 다른 명문세가 자제들과 비교해도 꿀릴 것이 없지만.
안타깝게도 무공의 입문 시기가 너무 느려, 무학의 성취만큼은 어쩔 수 없이 뒤떨어졌다.
특히 얼마 전 처맞으며 머릿속에 초식과 구결을 구겨 넣었던 타구봉법.
이제 겨우 초식을 몸에 익힌 1성에 도달했으니 아직 갈 길이 멀다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천살성인 내겐 이를 단축할 방법이 하나 있었으니.
“더 많은 실전, 더 많은 싸움!”
나는 호위 의뢰 도중 산적이나 괴한이 나타나면 전부 내게 맡겨 달라 외쳤다.
조 장주야 주는 돈은 그대로인데 내가 열심히 날뛰겠다고 하니 막을 이유가 없었고.
그렇게 거수자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신나게 춤을 췄던 내 타구봉법.
“크헉!”
“이 새낀 뭐야! 켁!”
시야 속에서 붉은 궤적이 어지러이 그어졌다. 뻗어 오는 살초들을 비집고 들어가 적의 급소를 후려치는 봉끝.
이리 휘고, 저리 감아오는 기이한 봉법에 적들이 비명과 경악성을 내질렀다.
‘악견난로!’
역시 천살성을 키우는 건 훈련이 아니라 피가 낭자한 실전이다.
살기 속에 몸을 내던지고 공방을 섞을수록 타구봉법의 성취가 쑥쑥 오르는 게 체감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없이 싸우다 보면 어느새 봉이 내 팔다리의 연장처럼 느껴지는 이 기묘한 감각.
“잡힐 듯 말 듯, 안 잡히네.”
조금만 더 휘두르면 뭔가 딱 올 것 같으면서도 신기루처럼 잡히지가 않는다.
게다가 곧 소림사를 근처에 낀 도시가 나와서 그런지, 풀 속성 몬스터처럼 갑툭튀 하는 악한들도 더는 나오질 않았다.
여러모로 감질나는 현 상황.
그래도 돈과 명성이 걸린 용봉지회가 코앞이니 나는 여유 시간이 생길 때마다 세차게 봉을 휘두르며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자 슬그머니 다가와 손뼉을 짞짝 치며 말을 걸어오는 정체를 숨긴 개방도.
“신묘한 움직임의 봉법이구려, 혹 따로 이름이 있는 거요?”
산적과 싸우는 내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라. 어찌나 부담스럽던지.
그리고 내가 봉법으로 나쁜 놈들을 때려잡을 때마다 조하랑과 함께 주먹을 불끈 쥐고 뒤에서 좋아하던데.
그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참 곤란한 인간이었다.
“지옥참마봉법(地獄斬魔蜂法)입니다.”
울부짖어라, 지옥참마봉.
일부러 초식을 변형해 펼쳤고, 개방도 앞에서 타구봉법이라 말할 수는 없으니 임시로 붙인 이름이었다.
근데 꽤 마음에 드는데 이거.
“……허어, 거참 살벌한 이름이구려.”
내 기가 막힌 네이밍 센스에 헛웃음을 흘리는 마중천.
“사악한 것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봉법이지요.”
사실 아직 보낸 적은 없고, 보낼 예정이긴 하다.
그마저도 손쓸 도리가 없는 악인 한정이기는 하지만.
“소협, 그만한 무위라면 별호도 있을 듯한데…….”
옆에 대도를 찬 미녀 낭인이 있고, 근처엔 새로운 젊은 고수에게 호기심을 드러내는 조 장주의 딸도 있는데.
굳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내게만 관심을 드러내는 젊은 청년이라니.
개방도라는 사실을 몰랐으면 분명 그 정체성을 오해하고 말았을 것이다.
“강호 동도들 사이에선 운구일협이라 불리고 있지요.”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나를 칭하는 별호다.
“그, 그것참 신박한 별호구려.”
애써 칭찬하는 모습.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활약을 쌓아 가고 이번 용봉지회에서 명성을 떨치면 그럴듯한 것으로 바뀔 테니까.
“아, 대장. 저번에 인신매매범을 싹 다 털어 관아에 넘긴 일 덕분에 이제 별호 바뀌셨어요.”
오, 이건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로군.
일홍이는 그 사건 이후로도 흑점과 이곳저곳을 바쁘게 드나들더니 뭔갈 주워들은 모양이다.
“이제 뭐로 불리는데?”
아무래도 그때 내 손에 구해진 꼬맹이들이 내 부탁대로 활약상을 널리 퍼트려 준 것 같군.
나는 은근 기대하는 얼굴로 일홍의 뒷말을 기다렸다.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 운칠삼협(運七三俠)으로 불리세요.”
“…….”
꼬맹이들아, 이왕 소문을 퍼트릴 거면 힘 좀 더 쓰지 그랬냐.
뭔 놈의 별호가 이리 끈덕지게 붙어서 떨어지질 않는 건지.
혹시 다른 사람들의 별호도 이런 식으로 숫자만 바꿔 가며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건가?
“풉, 운칠삼협이래.”
공감 능력이 부족한 여자 낭인 하나가 대도를 들썩이며 크게 웃었다.
“웃지 마라, 소호도.”
“그치만 별호가 이렇게 찔끔찔끔 바뀌는 건 첨 보는걸.”
얘가 자기 이야기 아니라고 맘 편히 웃는 거 보소.
나는 그녀를 향해 찌릿한 시선을 보냈다.
“좀만 더 활약하면 운오오협이 될 수 있을지도. 힘내 보자 무진.”
“조용히 하라고.”
이래서 사람은 첫인상이, 그리고 첫 별호가 중요하다는 것인가 보다.
용봉지회에서 맹활약해야 할 이유가 더더욱 늘었군 이거.
부웅! 부웅!
그렇게 땀으로 젖어 가는 여행길.
나는 이를 악물며 타구봉법 수련에 더욱 매진하기 시작했다.
***
옛 성어 중에 월명성희(月明星稀)라는 말이 있다.
달이 무척 밝으니 별도 드물다는 뜻인데.
큰 인물이 나타나면 작은 인물이 빛을 바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오늘은 달빛에 별들이 숨었구나.”
마치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도 같군.
조하랑이나 명문정파의 후기지수들도 그렇고, 세상에 고수들이 참 많았다.
반면 나는 흉성을 타고 태어난 무림 킬링 머신임에도 일류의 벽에 막혀 이렇게 끙끙거리고나 있다니.
“에휴.”
나는 별들을 올려다보며 진한 한숨을 뱉어 냈다.
그러자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거는 조하랑.
“무진, 왜 그리 한숨을 쉬어.”
얘도 밤잠이 없는 건가.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과 흐트러진 호흡을 보아 나처럼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던 모양.
“나도 별빛 아래에서 수련하는 거 좋아하거든.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
나는 후개를 위해 제작된 타구봉을 들어 올리며 이곳에 내력이 실리지 않는 게 문제라고 말해 줬다.
정확히는 20년 넘는 내력을 흘려 넣어도 마치 연기처럼 흩어진다고 해야 되나. 좀처럼 또렷하게 맺히질 않았다. 밑 빠진 둑에 물을 붓는 느낌.
“내가 절정의 문턱에서 고생하듯 너도 그러고 있는 모양이구나.”
피식 웃으며 자신의 대도를 꺼내 드는 조하랑.
그녀는 식은 땀방울을 털어 내며 달밤의 허공을 대도로 긋기 시작했다.
후웅!
대도에 실린 내력에 진동하는 거센 기파.
“사실 내력을 넣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아. 무기를 네 몸의 일부분이라 생각하고 흘려보내면 되거든.”
마치 사지의 연장선처럼 생각하란다. 나도 봉을 쉴 새 없이 휘두르며 가끔 그런 느낌을 받긴 했었다만.
“하지만 이건 내 팔다리가 아닌걸?”
스스로를 초절정 미소년이라 생각해도 현실은 그렇게 바뀌지 않는 것처럼, 이 타구봉은 내 팔다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여기고 내력을 운용하란 뜻이야. 마치 임맥과 독맥을 따라 기를 순환하는 것처럼.”
모호한 설명에 내가 볼을 긁적이고 있자 자신의 대도에 손을 대보라고 하는 조하랑.
그러자 나는 마치 소주천을 펼치듯 대도로 들어왔다가 다시 몸으로 뻗어 나가는 기의 순환을 자연스레 느끼게 되었다.
“아, 그런 뜻이었나!”
무식하게 내공을 무기에 가두는 것이 아니다. 기라는 것은 강물처럼 흐르는 성질이 있기에 이 봉을 마치 팔처럼 여겨 내공을 순환시키란 것.
나는 곧바로 기를 세심하게 흘려 넣어 타구봉 내에 혈도처럼 물꼬를 틀어 봤다. 그러자 양극이 모두 연결된 건전지처럼 기가 자연스레 흐르기 시작하는 타구봉.
“된다, 기가 느껴져!”
요령을 익히니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막혔던 둑이 터진 것처럼 타구봉을 향해 콸콸 순환하기 시작하는 20년 내공. 강맹한 힘이 타구봉 안을 꽉 채워 갔다.
나는 시험 삼아 근처의 굵은 나무 하나를 힘차게 후려쳐 봤다.
쾅!
그러자 산산이 부서져 나가는 나무 옆구리의 모습이 보였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나무 쪼가리들.
그 시끄러운 굉음에 호위무사들이 뭔 일인가 싶어 한 차례 기상할 정도였다.
그리고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하고서도 내공의 보호로 흠집 하나 없는 타구봉의 모습.
“허, 이게 무슨…….”
그동안은 신체에 내력을 흘려 넣어 ‘더 세게 휘두르기’ 같은 것에 그쳤다면, 지금 공격은 그 이상의 무언가.
“일류 무인이 된 것을 축하해, 무진.”
멍하니 서 있는 내 옆에서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해 주는 조하랑.
그녀는 이런 건 원래 스승이 가르쳐 줘야 하는데, 자신이 그 역할을 빼앗은 거 같다며 머쓱해했다.
“아니……. 완전 괜찮아. 내 스승이란 양반은 이런 거 형편없거든.”
날 때부터 재능을 갖춘 사람들의 가르침이란 게 그렇다.
항상 두들겨 패고 알아서 배우란 식이지.
“근데 이런 가르침 베풀어도 되는 거야?”
보통 무림인들은 자신의 깨달음이나 무학을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에게 나누지 않는다.
장사로 치면 영업 밑천을 가르쳐 주는 거나 매한가지니까.
그리고 더욱 묘한 건, 나를 죽이겠다고 선언한 여자로부터 이런 도움을 받아 버린 상황.
“안 될 건 뭐야. 딱히 사문의 무공도 아닌데, 그냥 조언만 해 주는 거잖아?”
“아니, 그래도 그렇지……. 왜 이렇게 잘 대해 주는 건데?”
내 질문에 휘황찬란한 달을 한번 올려다보며 대답하는 조하랑.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들보다 더 강해야 하니까. 그래야만 정의를 추구할 수 있잖아?”
그런 사고방식 하나로 의뢰 한 번 같이하게 된 낭인에게 가르침을 베푼단 말인가.
“야, 나 선한 사람 아니다.”
“그래그래, 착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말하더라.”
반면 나쁜 사람들은 스스로를 선한 사람으로 포장한단다.
아무래도 얘는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군. 난 그저 극한의 이득충이라 이득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인데.
지금은 선업을 쌓는 게 생명 연장과 무공 수양에 도움이 되니 그러고 있을 뿐.
“아무튼 이건 언젠간 갚을게.”
은화란의 말마따나 받은 것은 갚는다. 그게 원한이든 은혜든 말이지.
“응, 기대할게.”
둥근 달이 구름에 가리자 그제야 제 빛을 드러내기 시작한 별들.
그리고 환해진 별빛 아래에서 신비롭게 미소 짓는 조하랑이 있었다.
***
다음 날, 우리는 숭산과 소림사를 지척에 둔 등봉(登封)이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도시의 입구를 지나자 또 집합 시간만 알려 준 채 알아서 시간을 보내라 말한 뒤 가족과 함께 사라지는 조 장주.
나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소림사가 존재하는 숭산은 험준하며 먹을 것도 제대로 없으니 일단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인신매매범들을 때려잡아 주머니 사정도 넉넉해졌으니 제법 비싼 객잔에 들러도 괜찮겠지.
나는 그런 생각으로 고급 객잔에 방문했는데 익숙한 얼굴 하나를 보게 됐다.
“앙? 너 뭐냐. 왜 여기서 튀어나와?”
귀밑에서 살랑거리는 똑단발과 여전히 날카로움을 유지하는 붉은 눈매.
“당여혜……?”
“야, 내가 네 친구야? 아주 편하게 부른다?”
사천당문의 싸가지, 독조산혈 당여혜가 닭다리를 질겅이며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61화 식혈귀
중원은 텁텁한 석회수 때문에 차를 즐기는 문화가 발달했다.
사람들은 이를 다예(茶藝)라 부르며 교양인의 기본예절 정도로 여겼는데.
그래서인지 성깔 더러운 무인이라 할지라도 식후에 차 한잔 마실 때만큼은 제법 얌전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너 여기서 뭐 하는데?”
새침한 인상에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꼬리.
언뜻 보면 화났다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제 알지. 저게 그녀의 기본 표정이란 것을 말이다.
“무림맹으로 가고 있었는데, 의뢰인이 소림사가 보고 싶다 해서 중간에 들렀어요.”
“킥킥, 호위 의뢰라도 하고 있나 봐?”
내가 일하고 있는 모습에 재밌다는 듯 키득거리는 당여혜.
“예, 북경 부호인데, 가족 단위로 용봉지회를 구경하고 싶다네요.”
아마 또 며칠간 유람을 즐기다 합류하겠지. 가만 보면 참 속 편하게 산다 싶었다.
누구는 머릿속에 별이 박혀 선업을 쌓고 다니기 바쁜데 말이다.
“근데 호위 중이라는 놈이 참 팔자도 좋아? 양손에 아주 꽃이 피었네?”
그녀는 나를 뒤따라온 일홍과 조하랑을 번갈아 보더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술을 씰룩였다.
“……일홍이에요, 또 뵙네요.”
“동료 낭인인 조하랑입니다. 명성이 자자한 당문의 독조산혈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등 뒤에서 고개만 살짝 숙이는 일홍과 노련한 강호인답게 포권지례부터 취하는 조하랑.
“어, 그래 뭐 반갑고.”
알겠다는 듯 손을 휘젓는 당여혜. 나 때와는 다르게 그녀의 반응은 영 시큰둥했다. 참 호불호가 확실한 사람이라니까.
“들으셨다시피 이쪽은 제 부하고, 얘는 친한 호위 동료입니다. 꽃은 무슨.”
전자는 내가 저점 투자 중인 종목, 후자는 내 목을 날릴 수도 있는 잠재적 천살성 살해자였다.
본의 아니게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두라는 누군가의 조언을 실천 중인 상황.
“근데 멀리서 너를 관찰 중인 저놈도 네 일행이냐?
“아, 그건 아마도 개방도일 건데, 신경 끄셔도 됩니다.”
누가 절정 고수 아니랄까 봐. 그 희미한 인기척을 느꼈나 보군.
나는 살성이가 바닥에 슥슥 언급해 줘서야 알았는데 말이다.
“……너, 뭔 짓을 하고 다녔길래 개방도한테 감시를 당해?”
“글쎄요, 최근에 산적하고 인신매매범을 두들겨 패긴 했는데.”
일단은 시선에서 악의가 느껴지지 않아 두고 보는 중이었다.
아니, 악의는커녕 눈빛에서 점점 영문 모를 기대감이 느껴져 부담스러울 지경이었지.
최근에 타구봉을 열심히 휘둘렀는데, 무언가 낌새를 친 인물이 개방에 존재했던 모양.
사람을 붙여 감시하는 걸 보니 아직은 의혹 단계인 듯했고 말이다.
“근데 그쪽은 무슨 일로 이 도시에 들른 건데요?”
당여혜의 심리해설가, 능삼은 식수와 식량을 사러 상점가로 향했다는 모양.
나는 찻잔 옆에 높인 주전부리를 오독오독 씹으며 물었다.
“야, 그쪽이라니? 호칭이 좀, 아니, 많이 이상하다?”
“음, 그럼 당여혜 여협?”
“아니, 그거 말고 인마…….”
자기 입으로 말하기 뭣한지 빙빙 돌려 언급하는 당여혜.
항상 붙어 있던 능삼 아저씨가 없으니 소통이 참 답답하네.
“약속한 거 있잖아. 기억 안 나?”
무언가 기대하는 듯한 눈빛.
사실 기억이야 진작에 떠올랐지. 그냥 언급하기가 싫어 둘러대고 있었을 뿐.
“끙.”
이십 대 초반이지만 어릴 때 독을 잘못 먹어 키가 좀처럼 자라지 않은 당여혜.
반면 이 몸은 십대지만 키가 제법 컸다. 거리에서 그녀를 이 호칭으로 부르는 순간 모두가 날 이상하게 쳐다보겠지.
“……여혜 누나.”
“어, 그래 누나야. 흐흐.”
내 연장자 대우가 만족스러웠는지 까치발까지 들어서 내 머리를 툭툭 쳐 주는 당여혜.
의형제 꽌시를 맺은 은화란도 그렇고, 이 세계에 와서 벌써 손윗 누이만 둘이구나.
그래도 전생의 내 나이가 이립(而立)에 가까웠는데, 기분이 참 묘하다 싶었다.
“……무진, 저 여자와 많이 친한가 봐?”
당여혜가 흐뭇한 얼굴로 떨어지자 옆으로 슥 다가와 귓속말로 묻는 조하랑.
“헹, 얘하고 나는 사선을 몇 번이나 같이 넘나들었다고. 당연히 친하지.”
그런데 그걸 또 엿들었나 보다.
콧김을 내뿜으며 나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당여혜였다.
“겨우 의뢰 한 번 같이한 낭인이 끼어들 사이가 아니야. 알간? 조 뭐시기.”
“……조하랑입니다.”
“그래, 조랑 어쩌구.”
묘한 신경전이 느껴지는 듯했다. 오늘 처음 만났는데, 아무래도 내 착각이겠지?
“근데요 여혜 누나, 왜 이 등봉에…….”
“야, 말 편하게 해. 우리 사이에 예절은 무슨.”
우리가 뭐 어떤 사이인데.
조하랑을 살짝 의식하듯 쳐다보며 내게 편하게 말해 오라고 하는 그녀.
“그래서 이 등봉엔 뭔 일로 들렀냐고요, 이 누나야.”
왜 왔냐고 세 번째 묻습니다.
내 당돌한 맡투에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리는 당여혜.
“야 근데, 내가 말 편하게 하랬지만……. 되게 쉽게 한다 너.”
조하랑은 이미 겪어 봤다는 듯 내 옆에서 어깨를 으쓱여 댔다.
사실 알고 보면 다 나보다 어린 것들이다. 그러니 굳이 뺄 필요도 없지.
“뭐, 나도 무림맹에 가는 길이었거든? 근데 이곳에서 잡을 놈이 하나 생겼지 뭐야.”
암녹색 손톱을 헐렁한 소매 속에 감춘 채 그리 말하는 당여혜였다.
저 기다란 소매에서 비침에 독탄, 암기까지 다 튀어나온다지. 아주 마법의 소매가 따로 없다.
“어떤 놈인데요?”
“들어는 봤어? 사람의 고혈을 빤다는 식혈귀(食血鬼).”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이름이었다. 정확히는 관아에 붙은 수배 전단지들 앞에서 들어 본 듯한데.
최근에 높으신 분을 헤쳐서 관아의 현상금이 곱절로 뛰었다는 그놈인가?
“전부터 생각한 건데, 당문에서 돈 안 줘요? 왜 둘째 여식이나 되는 분이 뭐가 아쉬워서 낭인처럼 현상금 사냥이나 다니는 건데요.”
저번 표행에서도 돈 없다고 꼽사리 낀 것도 그렇고.
우리 같은 낭인이야, 항상 돈에 쪼들리니 수배범을 쫓는다지만.
당여혜는 사천에서도 부유하기로 유명한 당문의 둘째 여식이 아니던가.
“안 줘. 그리고 준다 해도 그깟 경비 때문에 오라버니한테 굽신거릴 순 없지.”
“……흠.”
그러고 보니 저번에 오라버니를 엿 먹이기 위해 집을 나왔다고 그랬던가?
새삼스럽지만 저쪽도 가정사가 참 복잡한 모양이다.
“그래서 무림맹 멸마대에 가입하려고. 그러면 숙소와 봉급도 주는 데다, 무뢰배들 상대로 독 실험까지 할 수 있잖아?”
악살신녀가 실세로 있는 그 멸마대 말인가.
당여혜는 용봉지회의 참석 말고도 이번 여행에서 여러 계획이 있는 듯했다.
“근데 가입 조건이 생각보다 까다롭더라고. 이름난 살인귀를 하나 잡아 족치라나?”
식혈귀라면 분명 관아에서도 금전 오십 닢을 내건 대형 수배범.
소금에 절여 멸마대에 들고 갈 전리품으로서 이만한 게 없긴 하군.
“그럼 그 식혈귀라는 놈, 마지막 위치는 알아요?”
몇 년 된 수배범이라면 모를까. 최근에 고관대작을 해치고 도주로를 변경한 놈이라 일홍이도 위치를 알 길이 없었다.
“개방에서 구입한 정보에 의하면……. 여기 객잔에 숨어든 게 분명한데.”
찻잔을 들이켜는 척하며 자연스럽게 객잔을 눈으로 한 바퀴 훑는 당여혜.
그때 본 수배지에 의하면 입술이 메기 같고 오른쪽 뺨에 큰 왕 점이 있었던가.
나머지 특징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력이 특출난 일홍이가 있으니 괜찮겠지.
“문제는 놈이 변용(變容)을 했을 확률이 높다는 거야. 수배지의 용모파기가 의미없어진 거지.”
이런 염병, 딱히 괜찮은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위치는 알았는데, 찾지를 못해 찻물이나 들이켜며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건가.
“그놈 누나보다 약하지 않아요? 그냥 다 들쑤셔 보면 될 텐데.”
수배지에 의하면 식혈귀의 경지는 절정 초입. 그리고 독조산혈은 절정 끝자락으로 알고 있었다.
게다가 당문의 무인은 같은 경지라 할지라도 상대하기가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라서 말이다.
“이놈 경공이 엄청 빨라. 지금껏 살아남은 이유가 뭐겠어? 한 번에 확 낚아채지 않으면 다음은 없다고 보면 돼.”
일단 눈치 까고 도망치기 시작하면 그녀라 할지라도 따라잡기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고로 양민도 무참하게 살해한 이 희대의 살인마를 정확하게 골라 내야 한다는 것인데.
‘듣고 보니 이거 딱 내 분야잖아?’
내가 누군가. 사람이 품은 살심을 한눈에 꿰뚫어 보며, 악의 어린 살업을 단번에 알아차리는 천살성이 아니던가.
“저, 숨었다는 식혈귀가 누구인지 지금 알 것 같거든요?”
평소엔 정신이 실시간으로 갉아먹히는 것 같아 꺼 두는 천살안을 뜨자, 어마무시한 살업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찌나 악의가 가득한지 악취로 인해 오독거리던 주전부리를 황급히 내뱉을 지경이었다.
“……확실해?”
“예,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나는 틀릴 리가 없다는 뜻에서 가슴팍을 두어 번 두들겨 줬다.
“대장, 할아버지 없잖아요.”
“스읍, 조용히 해.”
탐정물의 클리셰 같은 장면이다. 그만큼 확신한다는 거지.
“안다면 알려 줘.”
“맨입으로요?”
“야, 너하고 나 사이인데.”
“친할수록 셈은 더 확실하게 하라 그랬어요.”
그래야 관계를 오래 가져갈 수 있는 법이다.
막역지우라 해도 이런 득실 부분에서 누군가의 이득으로 어물쩍 넘어가다 보면 말 못 할 감정의 골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그걸 차치하고라도 돈이란 것은 결국 다다익선(多多益善) 같은 존재.
사람을 비굴하지 않게, 그리고 불의 앞에서 당당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때로는 정승처럼 베풀어서 선업도 쌓게 해 주지.
“족집게처럼 집어 줄 테니, 현상금은 반반 하십시다.”
“야, 날강도 같은 놈이네 이거. 때려잡는 건 난데 왜 돈은 네가 반이나 가져가?”
즉시 눈썹을 오므리며 반발하는 당여혜였다.
확실히 좀 과하긴 했지. 하지만 이런 협상은 일단 크게 질러 보고 타협해 나가는 것.
“그럼 3할로.”
“어림도 없지. 1할 5푼.”
“에이, 그래도 우리 사이인데? 너무 짜다.”
나는 좀 전에 그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줬다.
“야, 그래도 선이란 게 있어. 입 한번 털고 3할이 말이 돼?”
입을 털다니. 그 희귀한 천살성의 능력을 발휘하는 거다만.
“2할. 저 없으면 엄한 놈 찍었다가 한 푼도 못 챙길 수도 있잖아요, ‘누나’.”
마지막에 누나란 말을 강조해 주자 살짝 표정이 풀어지는 당여혜.
제대로 된 연장자 대우가 그동안 그토록 고팠던 것인가. 살짝 안쓰러울 정도군.
“흥, 뭐 좋아. 제대로 맞춘다면, 누이 된 몸으로서 그 정도쯤은 양보해 줄 수 있지.”
동생 노릇을 자처한 보람이 있군. 조건이 붙긴 했지만 허락이 떨어졌다.
“그래서 그 식혈귀가 도대체 누군데?”
얼른 말해 보라는 듯 눈을 부릅뜨며 대답을 채근하는 그녀.
“지금 누나 코앞으로 다가온 점소이요.”
“…….”
살기가 서린 묘한 느낌의 찻잔을 내려놓다 말고 흠칫 굳는 점소이.
찰나간의 침묵이 우리 식탁에 내려앉았다.
일단 말없이 내공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눈으로 점소이를 흘기는 당여혜.
“……진짜로?”
그에 대한 것은 수상하게 생긴 점소이가 스스로 답을 내놨다.
“이런 시발!”
우당탕탕!
***
개방 장로로부터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단무진이란 청년을 감시하기 시작한 마중천.
아니, 정확히는 사결 제자 박칠.
그는 현재 어떤 싸움 하나를 관찰하며 서신을 써내려 가는 중이었다.
아마도 그 중요성 때문에 개방 분타에서 ‘특급’ 인장이 찍히게 될 어떤 화선지.
어느 인물의 중간 보고서가 담긴 서신이었다.
「무공 중(中). 그러나 재능이 무척 뛰어남. 얼마 전 일류에 도달한 것으로 보임.」
합류할 때만 해도 이류 무인에 불과했는데, 간밤에 봉 하나로 나무 하나를 쪼갠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 묵직한 힘과 파괴력은 분명 내력의 결과물이었다.
「인성 상(上). 살인을 즐기지 않으며 선행을 베품.」
말투는 거칠지만 행(行)은 결국 선을 향하고 있으며,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제법 꺼려하는 듯했다.
전반적으로 협객의 자질이 느껴진다 할 수 있는 부분.
‘다만 성격, 성격이……. 크흠.’
이것만큼은 붓을 쥔 손이 쉽사리 움직이질 않았다.
“뒤져 이 십새야!”
“크악!”
길쭉한 손톱으로 식혈귀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당여혜.
“잘한다! 역시 우리 누나야!”
“시발, 무진! 응원만 하지 말고 너도 손 보태! 조랑 너도!”
조하랑이 대도를 거칠게 휘두르며 전투에 합류했다.
“조하랑이라니까요!”
불똥을 튀기며 붙었다 떨어지는 병장기들.
“잘한다 조하랑! 힘내라!”
“야! 지랄 말고 너도 같이 싸우라고!”
“난 지금 누가 관음 중이라 봉 휘두르기가 그래!”
객잔을 뒤집어엎으며 격렬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한 이들. 주변은 이미 난장판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도 차기 용두방주가 될 수도 있으니 좀 좋게 써 주고 싶은데 뭐라고 해야 하지?
‘아, 그렇지 참.’
문뜩 박칠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완벽한 설명 하나.
「현 용두방주를 매우 닮음.」
많은 것이 함축된 의미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 언제든지 기행을 벌일 수 있는 인간.
그렇게 개봉의 고위 간부들의 속을 뒤집어 놓을 보고서가, 등봉의 한 골목에서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62화 별이 빛나는 밤
관아와 무림맹이 동시에 쫓고 있는 마인(魔人), 식혈귀.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놈은 단순히 피만 빠는 괴이한 습성의 고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피를 매개체로 듣도 보도 못한 사술(邪術)을 펼치는 놈이었다.
“놈이 사술을 쓴다!”
누군가가 알지 못하는 무공을 쓸 때 반드시 외쳐 줘야 하는 대사.
거기에 살초를 수십 번 교환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놈은 절정 초입 따위가 아니라 절정 끝자락에 이른 심상치 않은 고수였다.
무려 독조산혈 당여혜와 동일한 경지.
하지만 우리는 정의의 편답게 세 배가 넘는 머릿수로 놈을 사방에서 밀어붙였고, 녀석은 앞뒤, 옆에서 날아드는 다굴 세례에 차츰 굴복하기 시작했다.
챙! 까가각!
도기를 머금은 짧은 수리도(袖裏刀)와 조하랑의 대도가 격돌했다.
샛노란 불똥을 튀기며 대도를 절반이나 자르고 들어간 수리도. 하지만 연이은 격검에 무리가 갔던 것인지 검신 부분이 날카롭게 깨져 나갔다.
이에 패도적인 힘을 주욱 밀고 나아가 식혈귀의 가슴팍을 베어 버리는 대도.
“크아악!”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붉은 핏물이 온 사방에 튀었다.
이에 나는 절호의 기회다 싶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들려 했는데.
츠츠츳-
놈은 자기 피로도 사술을 부릴 수 있었는지, 흩뿌려진 핏물을 콩알만 하게 뭉쳐 탄지공처럼 쏘아 보내기 시작했다.
피피핏-!
“워메 시벌!”
“저게 대체 뭐야!”
난생처음 보는 장면에 경악하는 일행. 나는 지체없이 몸을 옆으로 날려 암기처럼 날아오는 공격들을 피해 냈다.
펑-!
그리고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듯 품에서 꺼낸 원통형 장치를 잡아당기는 일홍.
뾰족한 비침 세례가 폭발음과 동시에 식혈귀를 향해 쇄도했다.
“컥!”
고슴도치처럼 앞부분에 비침이 다닥다닥 꽂혀 털썩 쓰러지는 마인.
“야이씨! 그거 내 앞에서 쓰지 말라고!”
당여혜가 발작 버튼 같은 그 암기의 재등장에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저번에 허락해 줬잖아요!”
“허락이 아니라 눈 감아 준 거지! 이년이 진짜!”
아무튼 두 사람이 툭탁대는 사이에 무력화되어 흙바닥과 일심동체가 된 식혈귀.
나름 머릿수도 많고, 당여혜도 있었기에 쉬운 상대가 될 줄 알았는데 몇 번이고 식겁할 상황이 펼쳐졌군.
당여혜 혼자서 덤벼들었다간 꽤나 안 좋은 결과가 나왔었을 수도 있었겠다.
“쿨럭!”
바닥에 검붉은 핏물을 울컥 토해 내는 식혈귀였다.
그리고 비침의 극독에 완전히 중독되었는지 시커멓게 물든 입술과 얼굴 피부.
“일홍아, 비침에 대체 뭘 바른 거냐.”
“흑점에서 구한 시골단(屍骨丹)이요.”
빨리 죽이는 것보다 고통을 주는 데 주안이 된 독이란다.
안 그래도 고통스러운지 녀석이 꺽꺽대며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왜 하필 그런 살벌한 것을?”
“언젠가는…… 그 배신자 놈 등짝에 꽂아 넣으려고요.”
아버지를 죽이고 하오문주의 자리를 찬탈한 흑진조를 노리고 구입한 독이었나 보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양민들의 고혈을 빨고 다녔던 식혈귀가 그 독침에 맞고 말았군.
“끄르륵, 혈술(血術)의 완성이 멀지 않았건만…….”
점점 허옇게 뒤집히는 눈깔. 피가래를 게워 내며 원통한 듯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마인 녀석.
놈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뒤 허망한 얼굴로 마지막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대업(大業)에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울 따름……. 끅.”
그렇게 꼴깍 넘어가 버린 마인의 숨통.
혈술에 대업이란다. 이놈은 정체가 대체 뭐길래 저런 불안한 단어만 골라서 내뱉다 뒤지는 건지.
서걱!
당여혜가 이가 반쯤 나간 조하랑의 대도를 빌려 식혈귀의 머리통을 도기로 깔끔하게 베어 냈다.
그러고선 머리를 전리품처럼 번쩍 들어 올리는 모습.
거참 야만적인 시대 아니랄까 봐.
“징그러운데요. 꼭 그렇게 들어 올리셔야겠습니까?”
“금전 오십 닢짜리 머리통이라 생각해 봐.”
“오…….”
품속의 단도처럼 언제든지 현금화가 가능한 지급보증서라 그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징그러움이 좀 가셨다.
“뭐 해요? 빨리 소금에 안 절이고.”
***
식혈귀와의 전투로 인해 상당한 심력과 체력이 소모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요양도 할 겸 조 장주의 귀환을 등봉에서 가만히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리고 우리 옆으로 바짝 붙는 당여혜.
“저희랑 합류하시게요?”
“응, 너랑 같이 다니면 항상 사건에 휘말리더라. 난 그게 마음에 들어.”
“…….”
사람을 무슨 불운의 아이콘처럼 말하는데, 반박할 수가 없단 게 조금 슬플 뿐이다.
하여간 천살성, 사건 사고를 끌어당기는 것 같다니까.
“근데 너 그 점소이가 살인귀였단 걸 어떻게 안 거냐?”
“그건 영업 비밀이요.”
알려 줄 순 없지. 그 누가 물어도 모르쇠로 일관이다.
정 뭣하면 그냥 내가 익힌 무공의 특성이라 말할 생각이었다.
이곳은 온갖 기인이사가 판을 치는 중원 무림이니까 말이다.
“……천천히 쉬다 가십시오, 나으리들!”
헤실거리며 우리에게 말을 거는 이곳의 객잔주.
우리는 사파 무뢰배나 파락호가 아니다. 정파의 협객들이지. 그렇기에 무언가를 박살 내면 배상도 할 줄 알았다.
우리가 가 보라는 듯 손을 흔들자 거의 구십 도에 가깝게 허리를 한 번 숙인 뒤 뒤로 물러나는 객잔주.
얼마 전만 해도 박살 난 객잔을 보고 꺼이꺼이 울면서 상태가 말이 아니었는데, 금전 뭉치를 툭 던져 주자 표정이 금세 환하게 변했더랜다.
“근데 왜 하필 내 돈이야?”
홀쭉해진 전낭을 매만지며 불멘 소리를 하는 조하랑.
일다경에 거친 토론 끝에 객잔 수리비를 가불하는 사람은 그녀로 결정되었다.
“그치만 나하고 일홍, 식비와 숙박비도 간당간당한 상태인 걸.”
“나도 능삼 녀석의 식비까지 생각하면 무림맹까지 빠듯해.”
나와 당여혜는 조하랑처럼 착실하게 돈을 모으는 성격이 아니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는 타입이라고 할까. 일홍이도 흑점에 들르느라 씀씀이가 커진 듯했고.
“걱정 마, 이 단도가 금전 스무 닢에, 저 머리통이 금전 오십 닢이니까.”
무림맹에만 도착하면 전부 자연스럽게 이행될 채무다.
걱정할 게 한 톨도 없는데도 표정이 영 별로군.
“대협님들, 이건 객잔주님께서 보내는 술과 요리들입니다. 부디 즐겨 주시지요.”
객주의 언질이 있었는지 빠릿빠릿하게 술과 고기를 대령하려 드는 또 다른 점소이.
“나하고 얘들은 차로 주세요.”
애들이 벌써부터 술맛을 알아서야 되겠나. 나는 수련에 방해가 되니 치우라고 말한 뒤 찻잔을 요구했다.
그러자 팔팔 끓인 찻물과 함께 끊임없이 제공되는 화려한 요리들.
우리는 힘을 한차례 쏟아 냈던 터라 걸신 들린 듯 요리들을 먹어 치웠다.
그런데 우리완 다르게 영 음식을 먹지 못하고 깨작개작 대고 있는 조하랑
“야, 나 못 믿어? 갚는다니까?”
나는 혹여 돈을 빌린 것 때문에 그러나 싶어 그녀의 걱정을 달래려 했다.
“아니, 그것 때문이 아니야…….”
한데 그런 문제가 아니었는지 어두운 얼굴로 반쯤 베인 대도만 만지작거리는 그녀.
저 거대한 날붙이의 이름이 분명 호협도랬었지?
“식혈귀와의 싸움에서, 놈이 꺼낸 자그마한 단도 하나에 대도와 내 목이 함께 썰릴 뻔했어.”
중간에 수리도가 깨져 나가지 않았다면 머리통이 썰려 나간 건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단 말을 중얼거리는 그녀.
“이래서야 사문을 널리 알리긴커녕, 오히려…….”
말끝을 흐린 그녀가 용봉지회에 참석할 것으로 보이는 당여혜를 슬쩍 쳐다봤다.
사문을 나서고 강호에 출도할 때만 해도 자신감에 부풀어 있었는데. 중원은 넓고 고수는 많았다.
그 사실을 첫 용봉지회에 앞서 재차 실감하게 되어 기운이 없어 보이는 모습.
“나도, 나도 검기만 다룰 수 있었다면…….”
그녀의 도법은 거대한 도에 도기를 가득 채워 전장을 마구 휘젓는 것이 특징이라는데.
지금은 자신의 부족함으로 반쪽짜리 도법밖에 못 펼치고 있단다.
“너 정도면 충분히 성취가 빠른데 왜 사서 고통받아?”
“아니, 이걸론 턱없이 부족해……. 난 평범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이거 흘려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
평범한 사람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하지만 울적해 보이는 그녀는 무언가를 물어봐도 대답해 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쪽은 살귀를 때려잡고 돈도 얻고 선업도 쌓아 기쁘기 그지없는데 말이지.
“가끔은 대장도 저런 향상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오리의 갈비뼈에서 살점을 쏙쏙 발라 먹던 일홍이의 중얼거림.
향상심은 무슨, 나는 이미 하루하루가 살기 위한 전쟁이었다.
다들 참 속 편한 소리를 해대는군.
‘그치 살성아?’
‘살(殺)!’
여전히 서로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대화 같지 않은 대화였다.
역시 살성이야. 참 한결같단 말이지.
아무튼 그대로 숙소에서 며칠을 더 기다리니 소림사 구경을 끝낸 조 장주가 객잔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내내 나를 감시하고 있던 마중천도 따로 유람을 다녀온 척 자연스럽게 합류하는 모습.
“자네들, 옷차림이 또 왜 그런가?”
조 장주는 볼 때마다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것 같다며 혀를 쯧쯧 찼다.
“뭐, 이번에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무림맹에 가서 큰돈을 받아 내면 그 즉시 옷차림부터 바꿔야 할 듯싶었다.
이대로 여행을 계속하다간 북경 뒷골목을 누비던 거지꼴로 돌아가고 말겠어.
“그리고 이 여자애는 대체 뭔…….”
“사천당문의 독조산혈 여협입니다.”
나는 조 장주가 지뢰밭에 뛰어들기 전에 황급히 막아 세워 줬다.
내가 소속과 별호를 밝히자 두 눈을 부릅뜨며 입을 헙 다무는 그의 모습.
그러면서 눈인사로 내게 감사를 보낸다.
무얼, 별말씀을. 능삼이 없는 상태에서 저 여자가 히스테리를 부리면 우리도 골치 아프거든.
“조 장주라 그랬나요? 합류해도 되죠?”
“그래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여협을 위해 특별히 마차에 자리도 확보…….”
“아, 됐어요. 나는 동생이랑 같이 짐마차에 타서 갈 거니까. 너도 누나랑 같이 가는 게 편하지?”
“……예에.”
정말 불편하군 이 여자.
상전처럼 모셔야 되는 인간과 함께 수레를 타고 가야 한다니.
“자, 자네. 혹시 소속 가문이…….”
“길거리 고아인데요. 그녀하고는 어쩌다 보니 친해진 겁니다.”
나와 그녀가 누나, 동생 하고 있으니 혹시나 싶어 물어봤던 조 장주가 안도의 숨을 쓸어내렸다.
“하핫, 난 또 뭐라고.”
난 조 장주의 속물스럽지만 투명한 저 근성이 참 좋다. 적어도 사람이 일관되어서 위선은 없잖아.
“그럼 능삼이라는 독조산혈 여협의 일행을 기다렸다가 바로 출발하면 되겠군.”
조 장주는 당여혜와 이런저런 대화를 잠시 나누더니 곧 일정을 정해 왔다.
“다음은 어디로 가실 건데요?”
또 소림사처럼 중간에 들를 곳이 있다거나 그러진 않겠지.
“섬서, 무림맹이라네.”
“오, 드디어!”
수많은 무림인이 모여들고 있는 정파 협객의 성지.
물론 나와 당여혜는 돈을 땡기러 가는 것이다만, 아무튼 기대가 되는 장소였다.
***
별이 유독 시리게 빛나는 어느 밤.
여러 이유로 잠 못드는 두 청년이 있었다.
나는 출발하기 전에 너무 많은 요리를 먹어서 속이 더부룩해 깨어난 것이다만.
소호도 조하랑은 전혀 다른 이유로 지금 깨어 있는 듯했다.
후웅! 후우웅!
마차 근처 공터에서 커다란 대도로 달밤에 칼춤을 추고 있는 미녀.
빠르고 패도적인 도법이었으나, 반쯤 잘려 나간 대도의 틈으로 공기 빠지는 소리가 애처롭게 울려 퍼졌다.
마치 그녀의 씁쓸한 현재 심경을 대변하듯 말이다.
‘흠.’
저번에 얘기를 나눠 보니 워낙에 커다란 대도라 수리는 어찌저찌 가능한 모양인데.
빵꾸난 그녀의 마음은 어떻게 수습이 안 되나 보군.
“칫.”
조하랑은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입술을 꽉 깨물며 더욱 거세게 도를 휘둘러 나갔다.
후우웅!
밤공기를 거세게 터트리는 풍압.
나는 가만히 서서 그녀의 도법을 관찰했다. 원래 이렇게 노골적으로 타인의 무공을 살펴보는 건 대단한 무례이지만, 그녀는 현재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듯했다.
“언제 봐도 살벌한 도법이야.”
참 볼 때마다 기세가 대단하단 말이지. 저기에 휘말리면 붉은 궤적을 읽어 내도 벗어나기 쉽지 않을 거다.
쾌검이 빨라서 문제라면 저건 면적이 너무 넓어서 문제라고 할까.
나는 조용히 천살성의 기운을 끌어올려 그녀의 도법이 그어지는 방향을 살펴봤다.
그런데 천살안을 키자마자 보게 된 어떠한 위화감.
“뭐야, 궤적이 왜 저렇지……?”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63화 동족 의식
강호에서 일정 경지에 오른 고수들은 자신의 심득(心得)을 비급으로 세상에 남겼다.
이는 제자와 후손들이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 깨달음에 이르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사람마다 품은 오성(悟性)이 다르니 같은 비급을 읽어도 얻는 성취는 모두 천차만별이었고.
머리로 이해했다 한들, 타고난 무재(武才)가 없으면 그 이치를 제대로 구현해 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리고 그런 절정(絕頂)이란 경지는 그런 오성과 무재를 한 몸에 품고 있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재능의 영역.
그렇기에 범인(凡人)은 아무리 땀을 흘리며 수련해도 대부분 일류 정도가 한계였다. 날 때부터 정해진 재능에 의해서 말이다.
후우웅-!
하지만 눈앞에서 대도를 휘두르는 저 여인은 척 봐도 범상치 않은 기질이 느껴졌다.
산을 쪼갤 기세로 쇄도하는 묵직한 쇳덩이. 칼날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범의 포효 같은 파공음을 자아냈다.
격검하는 순간 날붙이가 깨져 나갈 기세다. 저런 커다란 게 눈앞으로 날아들면 어떻게 파훼할지 정신이 아득해지겠지.
그녀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는지 넓은 면(面)을 앞세워 시야를 차단하며 짓쳐드는 도법을 주로 선보였다.
그녀의 뛰어난 오성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대도의 무게에 짓눌리기는커녕, 오히려 그 무게를 이용해 더욱 날렵하고 역동적인 몸놀림을 선보이는 조하랑.
후웅!
군더더기를 잘라 낸 탄력적인 움직임과 묵직한 대도를 풍차처럼 휘두르는 괴력에서 심상치 않은 무재도 느껴졌다.
게다가 큼직한 도에 내력을 전부 채워 내는 자유로운 기의 수발까지.
하나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저런 충만한 재능을 품었음에도 절정에 이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그녀의 도법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이상한 점을 하나 깨닫게 됐다.
‘왜 칼질에 살기가 하나도 없지?’
무공이 무엇인가? 도를 닦니, 스스로를 관조하니 미화하는 말이 많지만 결국 본질은 인간을 헤치고 살상하는 기술이다.
심상에 적의 모습을 담고 진검을 휘두르다 보면 아무리 억누르더라도 사람인 이상 미약한 살기가 담기기 마련이건만.
허공을 찢어발기는 그녀의 패도적인 도법에선 살기라고 할 만한 게 정말 ‘표백’된 것처럼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자세히 살펴보니 뭔가 있긴 있어.’
응어리진 시뻘건 무언가. 다만 그녀의 몸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갇혀 있는 모습이었다. 강박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듯한 모습.
그녀는 분명 악인을 베는 데 주저함이 없었지. 그러면서 선한 행위, 선업을 쌓는 일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듯했다.
아니면 본능적으로 상대방을 미워하고 헤치려는 마음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걸까.
그 또한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품고 있는 오욕칠정(五慾七情) 중의 하나이건만.
심신(心身)이 똑바로 서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마음속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흐리고 있으니 스스로를 깨부수고 절정으로 각성할 턱이 있나.
‘저것만 손봐 주면 어떻게든 될 것 같기도. 그치 살성아?’
‘살(殺)!’
맞다고 하는 것 같다.
대충 자각만 시켜 주면 되겠지. 나는 찌푸둥한 몸을 일으켰다.
후웅!
무아지경에 빠졌는지 내가 발소리를 내고 다가갔음에도 코앞을 스쳐 지나가는 대도.
거센 풍압에 머리가 단숨에 거지 시절처럼 산발로 변했다.
“뭐야, 언제 왔어? 깜짝 놀랐네.”
“……나만큼 놀랐겠니.”
얘가 천살성을 때려잡아 세상을 지키겠다 그러더니, 그 꿈을 벌써 이루려고 그러나.
나는 놀란 가슴을 한 차례 쓸어내려 봤다.
“근데 무슨 용건인데?”
둥근 달 아래, 하얀 목덜미의 땀을 천으로 닦아 내며 묻는 조하랑.
“별건 아니고, 저번에 너가 날 도와줬잖아? 그거 갚으려고.”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보다 강해야 한다며,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아낌없이 베풀었던 그녀.
나중에 쌓을 선업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빚을 청산하는 성미였다.
“야, 뭘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래. 동료끼리 돕고 사는 거지.”
머쓱한지 볼을 긁적이며 말하는 조하랑.
낭인이 언제부터 그렇게 전우애가 끈끈한 조직이었단 말인가.
내가 그래도 낭인 노릇 한 지가 좀 됐는데 ‘동료 의식’이란 것을 가진 건 지금껏 그녀가 처음이었다.
“근데 무진, 뭘 어떻게 갚겠다는 거야?”
나는 그 질문에 내력이 실린 타구봉을 어깨에 턱 걸쳐 봤다.
“한판 붙자.”
인간이 본디 가져야 할 그 감정, 분노와 악심.
무슨 연유로 욱여넣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천살성인 내가 봉을 맞대며 끄집어 내 주겠다.
조금만 자극해 줘도 둑이 터지겠지. 왠지 어떻게 해야 될지 본능적으로 알 것 같다.
“좋아, 마침 혼자 수련하기 적적했는데.”
씩 웃으며 나를 향해 빙글 도는 조하랑.
거대한 도가 내 앞에 드리워졌다.
***
깡! 까강!
서로의 병장기가 부딪혔다 떨어지는 소음.
아른한 달밤에 두 남녀가 숨을 몰아쉬며 살벌한 초식을 교환하고 있었다.
“야, 조하랑. 너한테 무공이란 뭐냐?”
거듭된 연전에 턱까지 차오른 숨. 단무진은 달뜬 숨을 삼키며 그리 물었다.
“선을 행하는 도구.”
답이 바로 튀어나오는 걸 보니 평소에도 세뇌하듯 되뇌이고 있었던 모양.
“어떻게 행하는 건데 그거.”
“나쁜놈들 족쳐서!”
답변과 함께 대도가 정수리를 쪼갤 듯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까각!
내력이 실린 타구봉이 널찍한 날을 타고 들어가 공격의 궤도를 비스듬히 비틀어 냈다. 어깨 너머로 아슬아슬하게 빗겨 가는 공격.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붉은 궤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에 눈썹을 꿈틀이는 단무진.
“근데 왜 사람을 족치면서도 살심의 존재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거야?”
사람을 베면서도 살기는 품지 않는다? 기계적으로 무감정하게 악인들만 썬다고?
부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런 부자연스러움은 심신의 합일에 걸림돌이 되지.
“그야… 불필요한 감정이잖아?”
그럴 리가 있나.
사람이 밥을 먹고 똥도 싸고 잠을 자는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더럽고 마음에 안 든다고 똥 싸는 걸 생략해 봐라. 온몸에 노폐물을 가득 채운 채 죽는 거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 중 하나를 아예 없는 존재처럼 배제해선 안 된다.
“끓어오르는 분노도, 타인을 헤치고자 하는 살심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받아들여.”
그림자가 있기에 햇빛이 도드라지는 법이며, 악한 마음이 있기에 그걸 딛고 일어선 선한 행동이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다.
“뭐가 자연스러워 그게!”
이를 악물며 대답하는 조하랑.
그녀는 혼란스러운 생각을 뿌리치듯 대도를 더욱 힘차게 휘둘렀다.
아직도 눈에 선한 과거의 어떤 기억.
불타는 전각 아래, 어머니와 아버지는 피를 토하며 그녀더러 도망치라고 외쳐 댔었다.
살점을 푹푹 찔러 대는 날붙이의 소음. 인간의 악의와 살심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던 끔찍한 시간들.
다행히도 그녀는 별의 반짝임을 보고 찾아온 사람에게 구함을 받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세상에 홀로 남고 말았다.
그리하여 빗속에서 온 세상의 악을 참하겠다며 복수를 천명했던 조하랑.
“……나는 그런 놈들과 달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에겐 그를 행할 만한 힘과 재능이 있었고, 가르침을 베풀어 줄 스승 또한 존재했다.
그래서 그녀는 악인을 베는 낭인이 되었다. 복수를 행하며 선업을 쌓고 돈을 버는 무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현재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가슴에 품고 있는 말.
‘악을 대하다 악에 삼켜지지 말거라’
그녀의 마음이 표류하고 있는 것을 깨달은 스승님이 중심을 잡으라며 해 준 조언이었다.
이후론 그 말이 이정표가 되어 그녀를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야, 그거 받아들인다고 네가 딱히 악인이 되는 건 아니야. 그냥 자기 감정을 인정한 사람 되는 거지.”
조하랑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만악의 근원이자 감정의 불순물 같은 것들이다.
해악밖에 끼치지 않기에 모조리 칼같이 잘라 내야 한다 여겼고 말이다.
까가각! 타탁!
하지만 왜일까.
단무진과 합을 겨루고 봉을 맞댈 때마다 그녀의 안속에서 무언가가 건드려지는 기분을 받았다.
꺼림직하면서도 친숙하고, 무척 동질감이 느껴지는 무언가.
“네가 나한테 말했었지? 기는 흐르는 성질이 있으니, 무식하게 담아 두려 하지 말고, 흐르게 놔두라고.”
단무진은 인간의 감정 또한 그와 매한가지라며 억지로 흐름을 막지 말라고 조언해 왔다.
그래야 자신이 이류의 경지를 넘어섰듯 그녀 또한 일류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며.
“그렇지만…….”
“그리고 또 말했었잖아. 사람은 순간순간의 감정 따위가 아니라, 그간 쌓아 온 행동과 걸어온 길로서 증명되는 법이라고.”
“…….”
이 또한 단무진의 성품을 인정할 때 내뱉은 말이었다.
동작을 우뚝 멈추고 그를 바라보는 조하랑. 머릿속이 무척 복잡한지 그녀의 입이 연신 달싹거렸다.
“그러니 너도 받아들이고 흘러가게 놔둬.”
따앙.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청명한 소리를 내며 그녀의 대도를 후려치는 타구봉.
그 순간 조하랑은 손끝을 통해 이유를 알 수 없는 공명을 느끼기 시작했다. 속절없이 흔들리는 칼끝.
‘……!’
그와 동시에 둑이 터지듯 와르르 쏟아지는 감정.
악인을 볼 때마다 치솟았던 살기가, 그리고 정의감으로 둔갑했던 복수심이 그녀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부러지지 말고 휘어져. 사람은 원래 완벽하지가 않아.”
그녀가 스승으로부터 배운 심법에서도 비슷한 구결이 있었다.
‘유이불절(柔而不折) 용기불전(容己不全).’
유연할수록 부러지지 않고, 불완전한 스스로를 받아들일수록 강해진다고.
“……그런 거였나.”
묵힌 감정들과의 해후. 그리고 문뜩 찾아온 깨달음.
단무진이 내뱉어 준 말이 그녀의 가슴 깊은 곳을 두들겨 왔다.
눈을 천천히 감는 조하랑. 그녀는 단전과 세맥에 쌓아 둔 내공을 모조리 개방했다.
츠츠츳-!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무형의 기파. 봉인이 풀린 듯 미친 듯이 들썩이는 감정.
항상 칼 속에 갇혀 뻗어 나가질 못했던 내력이 그녀의 감정과 함께 외부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바람 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통제하지 않고 흐르게 놔둔다.
조하랑은 심상 속에 베고 싶은 원수를 떠올리며 칼춤을 췄다.
본능에 맡겨 대도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그녀.
스거억-!
그러자 나무가 갈라지며 바위와 땅이 쪼개지더라.
일도에 양단되어 ‘쿠궁!’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커다란 바위 두 쪽.
가빠진 호흡 속에서 눈을 뜨자 검 날에서 세 치가량 솟아난 백색의 검기가 보였다.
무엇이든 잘라 낼 듯 흉포한 기세를 머금은 그것.
바로 바라고 바라던 검기의 발현이었다.
“축하해, 절정 무인.”
별빛이 반짝이는 밤하늘. 생긋 웃으며 눈앞에서 축하해 주는 제법 잘생긴 청년.
그걸 보니 마침내 자신이 절정에 도달했음을 깨달은 조하랑이었다.
“나, 나…….”
“나, 뭐?”
간만에 깨어난 감정이 가라앉질 않는다. 본능에 더없이 솔직해진 그녀.
그리고 방금 얼굴을 보고 든 간질거리는 생각에 그녀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더 휘두를래.”
그래서 그녀는 몸을 혹사하기로 했다. 지쳐서 아무 생각이 안 들 때까지.
쿵! 콰자작!
숲을 찢어발기는 절정 무인의 화려한 검기쇼.
불침번만 믿고 단잠에 빠져 있던 모두가 경악하며 일어나기에 충분한 소란이었다.
“야이! 진정해, 미친년아!”
그녀의 난도질은 단무진의 그만하란 비명이 들릴 때까지 계속됐다.
***
다음 날 아침.
쑥대밭으로 변한 숲을 앞에 두고 마중천 소협이 내 옆에서 한마디 했다.
“……소협, 밤새 유성이라도 떨어진 거요?”
저게 무려 인간 한 명이 빚어낸 광경이다.
묵직한 질량의 대도에 검기까지 더해지니 뿌리조차 남기지 못하고 뽑혀 나간 나무들.
갈라지고 쪼개진 땅덩이와 바위는 무슨 자연재해를 맞이한 상황을 보는 듯했다.
“허어, 이제 소호도가 아니라 대(大)호도라 불러야겠소.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그 호랑이 같은 기세가 느껴지는구려.”
조하랑이 밤새 절정 무인으로 거듭났음을 알려 주자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리는 마중천.
“그런데 조하랑 소저는 꽤나 오랫동안 일류에 머무른 걸로 아는데, 계기가 있었던 거요?”
“그냥 뭐, 비무하면서 조언 몇 마디 던져 주니까 알아서 깨닫더라고요.”
“……!”
나는 옆머리를 벅벅 긁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이걸로 나는 일류, 그리고 그녀는 절정에 이르렀으니 우리 둘 다 비무대회에서 높은 성적을 거둘 확률이 늘었군.
혹시 그녀가 우승이라도 하게 된다면 조금 나눠 달라고 해 볼까? 지분을 얘기하면서 말이다.
“소협.”
그런데 내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와중, 진중한 얼굴로 내게 말을 걸어오는 마중천.
“왜요.”
“나도 한동안 일류에서 경지가 막혀 있는데……. 혹시 몇 마디 조언해 줄 것 없으시오?”
“없는데요.”
그의 표정이 단숨에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 표정 변화가 너무나도 재빨라 살짝 웃음이 나올 정도.
“그쪽도 사문 있잖아요. 스승한테 가르쳐 달라 하세요.”
“……그걸 가르쳐 줄 큰 어르신이 현재 가출 상태라서 말이오.”
아, 맞다.
뭐라 해 줄 말이 없군.
뭐 돌려보내려 노력은 한다만, 그 인간이 어디 다른 사람 말을 들을 위인이던가?
내가 간 버린다고 술 좀 그만 처먹으라고 해도 술통을 끼고 사는 노인네다.
“그래도 요즘, 대신할 희망을 찾은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라오.”
“…….”
예의 그 눈이었다. 보기만 해도 엄청 부담스러워지는 기대의 눈길.
“아, 예.”
뭔가 붙잡혀서 어딘가로 끌려갈 느낌이라 나는 그 자리를 호다닥 도망쳐 나왔다.
64화 가족 상봉
섬서(陕西) 지역은 중원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다.
정파의 거두인 화산파(華山派)와 종남파(終南派)가 뿌리 내린 이곳엔 수많은 군소 문파가 융성했고, 무림의 질서를 수호하는 무림맹까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가히 정도(正道) 무림의 중심지라 불릴 만했다.
그리고 이 섬서의 정수를 고스란히 담아낸 도시가 있으니, 바로 옛 장안(長安)의 영화를 이어받은 성도 시안(西安)이었다.
우리 일행은 지금 그 시안의 성문 앞에 서 있었다.
높게 솟은 성벽과 그 아래로 흐르는 엄청난 용봉지회 인파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이다.
“대장, 뭐 해요? 몽둥이 만지작거리면서.”
길게 줄을 서고 기다리는 와중, 내가 타구봉을 만지작 대고 있자 일홍이가 의아한 눈으로 물어왔다.
“혹시라도 휘두르면 안 돼요. 사람 많은 데서 소란 피웠다고 잡혀가요.”
“넌 날 뭐로 보고 있는 거니.”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 차례 눈을 흘겨 줬다.
다만 어젯밤부터 몸이 근질거리는 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누군가가 절정 무인으로 거듭나는 장면을 코앞에서 봐 버려서 말이다.
그런 걸 목격해 버리면 무인이란 존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거든.
빈 공터라도 찾아서 봉을 휘둘러 보고 싶은데, 사람으로 가득 차서 마땅한 장소가 없다.
그때 조하랑의 깨달음에 조력하며, 나도 작게나마 심득을 얻어서 말이다. 그걸 하루 빨리 갈무리하고 싶었건만.
“무진아!”
단아한 흑발을 찰랑이며 내 어깨를 친근하게 툭 쳐 오는 조하랑.
언제 봐도 은은한 자줏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뒤편 상단 행렬에서 닭구이를 팔고 있대! 먹으러 가자!”
행렬이 길어지면 좌판을 깔고 장사를 시작하는 이들도 생기는 법이다. 노릇한 고기 냄새를 맡았는지 내 팔을 쭉쭉 당기는 그녀.
“혼자 가.”
“왜에? 같이 가자.”
“나 지금 생각할 게 많아.”
어떤 일로 선업이 필요 이상으로 쌓인 데다가, 절정의 실마리도 드디어 잡아냈다.
행렬이 이렇게 긴데도 내가 지루해하지 않고 생각에 심취해 있을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러니 한가하게 닭다리나 뜯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씀.
“야, 가자아아~”
혼자 가면 되는데 자꾸만 내 팔을 당기면서 질척이는 조하랑.
그리고 그러한 불필요한 접촉에 미친 듯이 발작하는 놈이 하나 있었다.
‘살(殺)! 살(殺)! 살(殺)!’
마치 천적을 만난 들고양이처럼 ‘샤악!’거리며 경계하는 살성이.
참고로 얘가 평소보다 더 지랄하는 데는 모종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어젯밤. 경지 상승을 이룬 조하랑이 조심스레 밝힌 어떤 비밀 때문이었다.
그때 뭐라고 서두를 꺼냈었더라?
“……무진아, 나 너한테 감춘 비밀이 하나 있어.”
그래, 갑자기 그런 말로 사람을 당혹시켰었지.
지금까지의 재능을 보아, 그녀는 미래의 용봉지회 우승자가 될 확률이 높았기에 나는 열과 성을 다해 샤바샤바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능을 칭찬하는 내 금칠에 갑자기 복잡한 얼굴로 말을 꺼내던 그녀.
“은인(恩人)인 너한테는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내 무공 성취가 이토록 빠른 데는 사실 다른 이유가 있어.”
“뭔 이유?”
마치 실력으로 얻은 것보다는 요행에 가까웠다는 말투였기에, 나는 찻물을 호로록 들이켜며 계속 말해 보라 하였다.
그러자 ‘특출난 체질’ 때문에 이런 무재를 지녔을 뿐, 내가 생각한 무의 천재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해 오는 그녀.
“나, 사실 자미성(紫微星)이란 흉성을 타고 태어난 아이야.”
“……푸흡!”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마시던 찻물을 그대로 뿜었다.
“이씨, 또 이럴래?”
이번이 두 번째 물벼락. 그녀는 천으로 찻물을 닦아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자미성이라고……?”
“그래, 너도 소문으로 천살성이나 흉성 얘기는 들어 봤을 거 아냐. 저기 북두칠성 중에 가장 반짝이는 게 나야.”
거무죽죽한 천살성과는 다르게 성스럽게 타오르는 별 하나를 가리키는 그녀.
자미성, 당연히 들어 보기야 했었다.
낭아봉 괴인 사건 이후, 황걸개가 다른 흉성의 존재를 언급하며 가장 조심하라며 경고했던 게 바로 그 자미성이었으니까.
천살성이 지상에 천벌을 내리는 흉성이라면, 자미성은 이에 맞서 지상의 것들을 지키는 존재라 그랬었지.
세대를 거듭해 싸워 온 천살성의 대적자이자, 천적(天敵).
기나긴 중원의 역사 속에서 이미 몇 번이나 천살성을 살해해 왔단다.
그리고 나는 어제 그런 숙명의 상대를 절정 무인으로 각성시켜 버린 것이다.
‘……흠, 좆됐는데?’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
일이 꼬여도 이리 꼬일 수가 있나?
‘등신(傻瓜)’
‘멍청이(笨蛋)’
당연히 머릿속 흉성은 이러한 상황에 격렬히 발작해 댔다.
‘닥쳐 좀.’
저쪽이 먼저 날 일류 무인으로 만들어 주며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았나.
그래서 나도 사람된 도리로서 똑같이 되갚아 줬을 뿐인데,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아무튼 고마워, 이대로 절정의 벽에 가로막혀 심마라도 찾아오는가 싶었는데……. 이 빚은 내가 꼭 갚을게!”
절정의 벽을 넘게 해 준 건, 이류를 일류로 이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은혜라며 조하랑의 두 눈에 감사의 빛이 어렸다.
내가 이제 사람을 돕다 못해 미래의 적수까지 돕는구나. 제정신의 나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짓.
그것을 증명하듯 이제껏 보지 못한 양의 선업이 가슴속에서 마구 차오르기 시작했다.
“야, 그럼 빚 대신 소원이나 하나 들어주라.”
일은 벌어졌고, 어차피 되돌릴 수도 없다. 그렇다면 추후를 생각해 피신할 구멍을 파놔야지.
“응응, 무슨 소원?”
“혹시라도 있잖아, 내가 나중에 아주 나쁜 놈인 게 밝혀져서 네가 날 죽여야 할 상황이 온다면…….”
“으음? 넌 그런 사람 아닌데?”
생긋 웃으며 아주 확언하는 조하랑이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아, 말 안 했구나? 나는 그 사람이 쌓아 온 선업을 볼 수 있거든. 그리고 강호 출도 이래로, 너처럼 정의로운 사람은 지금껏 본 적이 없어.”
“…….”
내가 살업을 볼 수 있듯, 자미성은 인간의 선함을 꿰뚫어 볼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아이러니하군. 수명 연장을 위해 쌓아 온 선업이 또 한 차례 날 구하는 순간이었다.
“그래, 어쨌든 그런 상황이 오면 한 번만 눈 감아 달라 그 말이지.”
선업을 읽는 능력을 믿는 건지, 날더러 걱정도 참 팔자라며 어깨를 턱턱 내리치는 그녀.
“물론이지. 그게 뭐 어렵다고.”
지금 자신이 무슨 상황에 처해 있는 건지도 모르고 쉽사리 턱턱 약조해 주는 그녀였다.
한번 두고 보자고. 그 말이 지켜질지 아닐지 말이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밤 내내 살길을 뚫어 두었다고 해야 할까.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룻밤이었다.
“야, 너희들 뭐 해?”
귓가를 파고드는 또랑또랑한 목소리.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키는 작지만, 존재감 하나만큼은 대단한 당여혜가 우뚝 서 있었다.
“……뭔가 실례되는 생각했지 너?”
“아뇨, 그럴 리가요.”
순간 뜨끔했다. 설마 그녀도 사람의 속마음을 읽는 뭐시기 흉성 같은 건가.
“흠……. 뭐 아무튼 따라와. 조 장주가 길을 뚫었으니까 말이야.”
조 장주가 문지기에게 돈을 찔러 주고 샛길을 튼 모양이다. 거기로 가면 줄 설 필요 없이 바로 통과라는 당여혜의 설명.
역시 중원이라니까.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다.
“근데 무림맹에 들어가서가 문제네. 무진, 너 혹시 내부 지리에 대해 아는 사람 있어?”
“거지 출신 낭인이 무림맹에 대해 어떻게 알겠어?”
우리 둘 다 뒷배나 인맥 없이 비무첩만 한 장 달랑 들고 방문하는 입장이라서 말이다.
다른 정파 무인들처럼 무림맹을 들락거린 경험이 없었다.
게다가 각 문파의 내로라하는 후기지수들이 죄다 모이는 곳인데 실수라도 하면 이상한 낙인이 찍혀 의뢰인 구하기가 힘들어질 것 아닌가.
“야, 그런 거라면 걱정 마. 이 누나가 무림맹엔 빠삭하니까 말이야.”
누나 노릇을 할 기회가 생기자 자신만 믿으라며 잽싸게 생색을 내는 사천당문의 당여혜.
그러고 보니 우리에겐 오대세가에 둘째 여식이며, 절정 고수이기까지 한 정파 주류층에 속하는 인물이 있었지.
그렇게 생각하니 짤막한 그녀가 무척 든든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와, 그럼 안에 아는 사람도 많이 계시겠네요?”
옆에서 얘기를 듣던 일홍이의 순수한 호기심.
“……그으럼.”
당여혜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용봉지회에 앞서 성대한 연회가 열린다고 들었는데, 당여혜와 함께 입장하면 최소한 쪽팔릴 일은 없는 거겠군.
“가시죠, 그럼.”
누님 한 명을 잘 두니 정파의 중심지에서도 운신의 폭이 넓어지는군.
그렇게 우리는 당여혜를 믿고 용봉지회 연회장이라는 미지의 장소에 몸을 던지기로 결정하였다.
***
우리는 조 장주와 이별을 고하고 곧바로 무림맹으로 향했다.
비무첩을 받아 용봉지회에 참가할 수 있게 된 나를 살짝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조 장주와 자식들.
혹시 동행할 수 있냐고 묻던데 나는 허튼짓 하지 말고 비무나 구경하다 가시라고 말한 뒤 보수금을 챙겨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성대한 연회가 펼쳐지고 있는 장원으로 당당하게 입성한 우리.
나와 조하랑은 차례차례 문지기에게 칠지문과 이름 모를 사문이 쓰인 비무첩을 내밀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아무도 찾지 않는 연회장 구석탱이에 자리를 배정받게 되었다.
“…….”
뭐,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했다.
수많은 가문과 문파, 세가가 한곳에 모이는 자리니 중심지와 좋은 장소는 그들에게 넘겨줘야 하겠지.
고로 끗발이 약한 누군가는 외곽으로 밀려나야 한다는 뜻. 나는 애가 아니니 어쩔 수 없는 부분에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나름 믿고 있는 구석도 하나 있어서 말이다.
바로 구파일방의 핵심 계층이자, 믿음직한 후기지수들의 실세, 당여혜였다.
“……그 뭐시냐. 음, 그렇게 됐다.”
그런데 아무도 그 유명한 독조산혈 당여혜를 찾아오질 않았다.
그래도 사천당문인데, 거기에 절정무인인데 말이다.
너도나도 찾아와 인사하는 것까진 바라지 않았어도 이토록 무관심이라니.
“누나만 믿으라면서요.”
“크흠, 그러니까 길 안내를 믿으란 거였지.”
확실히 무림맹 내부 지리는 확 꿰뚫고 있더라. 하지만 우리가 그걸 바란 건 아니었지 않나.
나는 말없이 능삼 아저씨 쪽을 슬쩍 쳐다봤다.
“저희 아가씨 성격을 아시잖습니까. 동년배 무림인들 사이에선 독견(毒犬)으로 불리며 이미 기피 대상입니다.”
“야이, 주둥이 안 닥쳐?”
과거 뭣 모르던 시절엔 인형 같은 외모와 맞물려 독봉(毒鳳)이라 불리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 지랄 맞은 성격이 모든 걸 다 망쳐 놓았단다.
“흠, 과연, 과연…….”
“너도 납득하지 마 새꺄.”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발끈하는 당여혜.
하지만 납득이 절로 되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에게, 그럼 우린 여기서 연회 구경만 하는 거예요 대장?”
햇살이 들어오는 대청마루, 화려한 비단옷을 차려입은 무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곳엔 마땅한 운송수단도, 통신기기도 없으니 이런 큰 행사가 열려야만 서로 얼굴도 트고 그간의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는 거겠지.
그래서인지 애어른 할 것 없이 정파의 어르신들도 모두 모여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
조 장주가 왜 오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야말로 인맥의 보고이자 교류의 중심지로군.
“왜? 너도 정파 주류 사회에 끼고 싶어?”
살짝 부러운 듯 저쪽을 쳐다보다가 내 질문에 고심하더니 이내 고개를 흔드는 일홍이.
“음, 생각해 보니 우선 사항은 아니긴 해요.”
그녀의 최우선 사항은 아마 상하 뭐시기를 찾아 복수를 감행하는 거였지 아마.
“무진아, 이 춘권 먹어 봐. 바삭하니 정말 맛있어.”
조하랑은 현 상황에 이미 적응을 끝낸 듯했다. 나도 저 자세는 좀 본받아야겠군.
“흥, 무인은 비무로 증명하면 돼.”
그리고 코웃음을 치며 비무로 두고 보자고 다짐하는 당여혜의 모습까지.
뭐 나야 현상금을 받으러 가는 길에 겸사겸사 참가하는 거니까 크게 개의치는 않는다만.
아무튼 인맥 쌓기는 글렀으니 무림맹의 식량이나 축내잔 생각에 음식을 신나게 흡입하고 있었는데, 내게로 다가와 말을 걸어오는 누군가.
“단무진 소협, 왜 이런 구석진 곳에 외로이 계시오?”
바로 정체를 숨긴 개방도, 신풍협 마중천 소협이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흔치 않은 사교의 장인데, 고기나 뜯고 있어선 아니 되지. 나가서 사람을 사귀셔야 하오. 소협.”
“거 말씀은 고마운데, 좀 귀찮네요.”
나가서 운칠삼협이라 소개하며 친목을 도모해 봤자 돌아오는 건 이상한 별호에 대한 웃음밖에 더 있겠나.
“소협, 정신 차리시오. 그런 부분에서까지 그분을 닮아가선 아니되오.”
누구를 닮아 가면 안된다는 건지. 설마 황걸개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그래도 그 양반보단 정상이었다.
“그러면 소협, 내 인맥을 소개해 드리리다. 지금은 귀찮다 여길지 몰라도 나중에 가면 큰 힘이 되는 것이 바로 이런 연줄과 인연인 법이오.”
일련의 사건들로 나를 이미 반쯤 후개라고 점찍은 듯 유독 나만 보면 친절해지는 개방도 청년이었다.
나중에 내가 황걸개처럼 불성실하고 게으른 용두방주로 거듭날까 봐 제법 우려하는 모습.
그렇게 나는 마중천의 소개 아래, 무림의 후기지수들과 때아닌 교류의 장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내 깨닫게 됐다. 그들의 관심은 나보다는 옆에서 닭뼈를 우적우적 씹어 대는 조하랑에게 쏠려 있었다.
아무래도 마중천이 이 자리로 사람을 꾀어 내기 위해 절정에 들어선 신예 고수, 조하랑을 미끼로 삼은 모양이었다.
‘결국 난 덤이란 거군.’
하긴 나라도 젊고 아름다우며 무위까지 뛰어난 여고수가 옆에 있으면 나한테 눈길조차 안 줬을 거다.
“허, 저 나이에 저런 무위를.”
“저런 무재라면 장차 천하제일인의 구도에 변화가 있을지도…….”
방년한 나이도 아닌 여인이 벌써 절정 무위에 들었단 소식에 연거푸 놀라워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러한 소문은 급기야 명문세가의 한 거물까지 움직이게 만들었다.
저벅. 저벅.
저 멀리서 단단한 고목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절도 있게 걸어오는 중년인.
마중천 소협은 마지막으로 가장 모시기 힘든 분을 데려왔다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어 댔다.
그리고 나는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눈이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저 양반이 왜 여기에……?’
나를 죽이라고 모용청혜를 보냈던 사람.
요녕성에 있어야 할 가주 모용천이 심드렁한 눈길로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네가 조하랑인가?”
65화 가정사
무림맹으로 향하는 긴 여정 동안, 이래저래 들은 소문이 있다.
이번 용봉지회 우승자는 어차피 남궁세가의 청운검이 될 거란 이야기였다.
천하십대고수라는 천검(天劍)의 적자이자, 동년배에서 적수가 없다는 검의 천재.
남궁세가는 그 찬란한 영화를 계속해서 이어 나가겠다며 모두가 칭찬 일색이었지.
오대세가 중에서도 더 독보적으로 치고 나가는 거 아니냐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만년 콩라인이라는 모용세가의 오명을 자기 아들 대에서 벗고 싶어 했던 모용천은 청운검 소리만 들으면 진저리를 치곤 했었는데.
“그 청운검이 모종의 이유로 용봉지회에 불참한다네요.”
흑점에 들락거리던 일홍이가 물어다 준 최신 정보였다.
어째서 가주실에 있어야 할 저 양반이 이 먼 섬서에서 나타났나 싶었었지.
아무래도 청운검 다음으로 재능이 뛰어나다 알려진 자신의 아들, 모용휘(慕容彙)가 우승자가 될 것 같자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인 듯했다.
가문의 영광과 존속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인간. 내 안에 모용청진의 기억이 있으니 그의 행동과 의도는 훤히 읽혔다.
“제가 아는 분 중에 가장 대단한 분이십니다.”
자기 딴엔 호의랍시고 정파의 거물 중 한 명을 내게 소개해 주는 개방도 마중천.
확실히 그의 인맥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긴 했다.
“반갑네, 모용세가의 가주인 모용천일세. 소싯적엔 강호 동도들에게 뇌전검(雷電劒)이라 불렸었지.”
그가 먼저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를 건네 왔다.
이에 당황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황급히 포권지례를 올리는 우리 일행.
인자함을 가장한 모용천의 냉담한 눈빛이 우리를 한 차례 슥 훑고 지나갔다.
“그 거대한 도를 보아 자네가 말로만 듣던 소호도 조하랑이겠고, 그쪽은 당문의 독…… 조산혈인 모양이군.”
독견이라고 꺼내려다가 황급히 말을 선회하는 모습.
그리고 그의 시선이 이내 인피면구를 만지작거리는 내게로 향했다.
“그런데 그쪽의 소형제는 누구인가?”
무림의 유명인들과 아주 자연스레 어울리고 있자, 이름 모를 내게도 관심을 가져오는 모용천.
“얘 몰라요? 탈혼마군의 숨통을 끊고 저독마를 붙잡은 데다 식혈귀까지 저랑 같이 때려잡은 놈인데.”
예의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당여혜가 내 행적에 대해 짧게 설명을 해 줬다.
“아, 그 운오오협인가?”
“……아직 운칠삼협입니다.”
남의 별호를 마음대로 넘겨짚으시네, 이 양반.
“그런가? 별호가 인상적이라 아무튼 기억하고 있었지. 예상과는 다르게 훤칠한 청년이었군.”
별호만 보고 변변찮은 모습을 예상했었나 보다.
그러자 옆에서 나에 대한 설명을 거드는 조하랑.
“훤칠하기만 한 건 아닙니다. 무에 대한 재능도 뛰어나고 의협심도 대단한 사내이지요.”
쟤는 날 너무 좋게 보고 있어서 문제다. 저러다 나중에 내 정체가 드러나면 어떻게 하려나 몰라.
“저 녀석은 뭐……. 제가 동생처럼 여기는 놈인데, 끈기랑 독기 하나는 인정할 만해요.”
갓 절정에 올랐다는 신진 고수와 당문의 여인이 동시에 날 인정해 오자, 무관심에서 아주 살짝 관심이 가는 듯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모용천.
다른 이들이었다면 저런 눈빛에 실망했을 수도 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발탄을 바라보는 눈빛만 겪어 왔던 나는 오히려 저런 시선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결국, 그런 건가.’
살아서는 도저히 불가능했고, 한번 죽어야만 이 몸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건가.
기분이 무척 씁쓸하면서도 오묘했다.
“그래, 뭐. 열심히 해 보게. 사문의 부흥을 위해서라도 좋은 성적을 거둬야지.”
그 이후로도 몇 차례 대화를 나눠 봤지만, 조하랑의 사문이 별로 유명하지 않은 소문파인 것을 알게 되자 금세 흥미를 잃고 자리를 걸어 나가는 모용천이었다.
평소에 시간은 유한하며 금처럼 다뤄야 한다 그랬었지. 하여간 언제 봐도 극한의 이득충 같은 사람이다.
가문에 누가 된다면 자기 자식마저도 잘라낼 수 있는 그러한 인간.
“아, 물론. 우승자는 우리 둘째, 모용휘로 정해졌으니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말일세.”
가던 와중에 슥 뒤돌더니, 어차피 우승은 자기 아들이란 발언을 툭 던지고 다시 가 버리는 모용천이었다.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모양이군.
하지만 그거 아는가? 나 또한 한때 당신의 아들이었음을.
어릴 때만 해도 자랑스런 그대의 셋째 녀석은 나였단 말이다.
“후우.”
복잡함과 답답함이 섞인 깊은 한숨.
겁나게 불편한 자리였다. 딱히 뭔갈 한 것도 아닌데, 한번 얼굴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진이 빠지는군.
나는 지끈거리는 미간을 연신 주물러 봤다.
“허헛, 다들 예상치 못한 거물의 등장에 넋이 나간 것 같구려.”
그리고 모용천이 사라지자 슬그머니 다가와 뿌듯해하는 얼굴로 묻는 마중천.
“어떻소? 내 범상치 않은 인맥이.”
그냥 어처구니가 없는 기분이군.
저기서 칭찬해 달라는 듯 생색을 내는 개방도도 어이가 없었고 말이다.
옛말에 웃는 얼굴엔 욕을 못 뱉는다던데, 지금은 좀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그냥 저리로 가 버리시오.”
나는 아주 질색했다는 얼굴로 연회장 출구를 가리켰다.
“아니, 우째서……?”
그러자 자기가 무슨 만남을 성사한 건지도 모른 채, 무척 억울한 표정을 짓는 마중천이었다.
***
다음 날 정오.
우리는 소금에 절인 머리통, 꽁꽁 묶인 수배범, 그리고 기품 있는 단도 한 자루를 들고 무림맹 멸마대 건물에 방문했다.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단도를 들이밀자 곧바로 알아채던 모습.
“이건…… 악살신녀의 단도! 당신은 그분이 말씀했던 바로 그 소협이신 거군요!”
“예, 제가 바로 그놈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미리 언질을 해 놓았던 모양이다. 차를 마시며 돈을 가져올 때까지 잠시 기다려 달라 말해 오는 직원.
우리는 그래서 무림맹의 풍부한 지원을 받는 멸마대 본부에서 햇살을 피해 잠시 다례 시간을 가져 봤다.
“안락하구만.”
비싸다는 솜을 마구 썼는지 제법 푹신한 의자와 어디선가 풍기는 기분 좋은 꽃향기. 거기에 은은한 차향까지.
약간 은행에서 돈을 찾아 놓고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제완 다르게 기분이 살짝 좋다는 뜻.
“야, 근데 저독마 저놈. 여기다 넘기게?”
그런데 당여혜가 ‘읍읍’ 소리를 내며 끌려가는 산송장을 하나 바라보더니,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져 왔다.
“왜요?”
“무림맹 말고, 사파련에 가져다주면 돈 더 쳐줄걸?”
저놈이 사파 구역에서 몇 번 사고를 친 적이 있단다. 그래서 그쪽의 수배금이 두 배는 된다는 이야기.
낭인은 정사를 안 가리는 존재. 굳이 따지자면 돈만 주면 뭐든 하니 사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돈 아까운 짓을 했다는 건데.
“……왜 그걸 넘기고 난 다음 말해 주는 건데요?”
“킥킥, 네가 안 물어봤으니까?”
거 성격 진짜 곤란한 여인이네. 아무리 봐도 다 큰 처자보다는 소악동 같은 면모가 있었다.
“후우.”
이 여자랑 있으면 이렇게 가끔 빡이 친다. 하지만 무공이 세니 뭐라 따질 수도 없다.
고로 난 성난 속을 달래려 찻물이나 들이켜기로 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향해 반각 넘게 휘저어지는 손부채질.
나는 손을 댔을 때 적당한 온도가 되자 만족한 얼굴로 차를 호로록 들이켰다.
“……너 뭐 하냐?”
“뭐 하긴요. 차 식혀 마시잖아요.”
“정말 이상한 놈이네 이거…….”
그녀는 마치 스파게티면을 부수는 것을 본 이태리 사람처럼 민감하게 반응했다.
일홍이와 조하랑도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거, 취향 존중 좀요.”
하여간 시원한 음료의 풍미를 모르는 중원 놈들 같으니.
마, 너희들은 육각수도 모르나 육각수?
“나도 별종이지만 너도 참 특이해.”
아예 턱을 괴고 내 차 마시는 모습을 가만히 관찰하는 당여혜.
나는 그런 시선에 개의치 않고 차를 꿋꿋하게 다 마셨다.
그런데 다 들이켜고 나자 혀끝에 도는 의미 모를 얼얼함.
그러고 보니 저 여자는 왜 차 마시는 모습을 저리 집중해서 관찰하고 있던 거지?
“……혹시 차에 뭐 탔어요?”
“응.”
아 진짜, 그러니까 왜 당당하냐고 이 미친 인간아.
나는 질색한 얼굴로 찻잔을 던지듯 내려놨다.
“언제 봐도 신기해. 아무리 약한 독이라지만, 아예 반응조차 없다니?”
독을 버텨 내는 천살성의 육체라 정말 다행이었다. 아니었음 저번에 말해 준 대로 하루 종일 변소를 들락거렸을 것 아닌가?
그러다가 변소와 관련된 별호를 얻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나는 못마땅한 얼굴로 당여혜를 한 차례 흘겼다.
“하아, 단 공자가 이해해 주십시오, 저게 아가씨만의 관심 표현 방식입니다. 마음에 드는 이들을 가끔 저렇게 괴롭히시곤 하지요.”
자기도 많이 당해 봤다며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드는 몸종 능삼이었다.
“뭐, 뭔 개소리야? 내가 언제 얘한테 관심을 표했다고!”
정곡이었는지 귓끝을 붉힌 채 벌떡 일어나 부정하는 당여혜.
하여간 좋아하는 여자애를 괴롭히는 초딩 남자애도 아니고. 가히 뒤틀린 관심 표현 방식이었다.
몇 번 더 받았다간 사람 잡을 정도.
저러니까 사람이 이렇게 모인 이런 자리에서도 친구가 없지.
“이 시발! 나 친구 있거든?!”
이런, 혼잣말인데 들렸나 보다.
아예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당여혜.
“누나, 능삼 아저씨는 친구가 아니에요.”
“아니, 진짜로 있다고 썅……! 근데 넌 자꾸 뒤질라고 이게!”
그녀는 내게로 달려들어 아니라는 듯 멱살을 흔들어 재꼈다.
많이 흥분한 모양이군.
의표를 찔린 사람들은 대개 저런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다.
“……단무진 소협?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요?”
귓가를 간질이는 부드럽고도 그리운 목소리.
오늘은 죽립 없이 까만 말총머리를 그대로 늘어뜨린 여인이 보였다.
허리춤에 모용가의 검을 차고 있는 단아한 분위기의 미인, 모용청혜.
“늘상 있는 일입니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어 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리의 시선은 그녀가 들고 온 묵직한 전낭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찌나 많은 양의 돈을 담았는지, 담기다 못해 위로 수북히 솟은 번쩍이는 금전과 은전들.
“헛.”
“와.”
이게 바로 금융 치료라는 건가. 자잘한 동료 간의 다툼은 순식간에 잊게 해 버릴 정도로 폭력적인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걸 내게로 불쑥 내미는 모용청혜.
“어이쿠, 뭐 이런 걸 다.”
나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그 대사를 날리며 전낭을 품속 깊은 곳에 쑥 집어넣었다.
“새꺄, 정산은 해야지.”
그러자 눈썹을 찡그리며 내 등을 쿡쿡 찌르는 당여혜.
“칫.”
식혈귀 같은 경우엔 그녀가 8할에 내가 2할이었었나. 뭔가 나눌 게 많아 보이는군.
“아무튼 이 돈은 감사합니다. 좋은 곳에 쓰겠습니다.”
나는 포권지례를 절도 있게 취하며 그리 말했다.
돈 많이 주는 쩐주에겐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배인 공손한 자세가 나온단 말이지.
“아니에요, 저희가 더 감사하죠. 멸마대를 대신해 이 세상에서 악을 지워 내셨으니, 앞으로도 계속해 달라고 응원하고 싶을 정도예요.”
더없이 훈훈한 미소. 가식이 아니라 악이 하나 더 사라졌음에 진실로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
정체를 감춘 천살성으로서 사명감에 불타는 저 장면은 약간 복잡미묘하군.
저도 모르게 잘못된 곳은 없나 싶어 얼굴을 덮은 거죽을 한 차례 더 만져 볼 정도였다.
“근데 두 분, 이 돈 가지고 뭐 할 거예요?”
우리가 올린 대량의 수입을 쳐다보며 궁금한 듯 묻는 일홍이.
이거는 고급 객잔에 묵는다든가 값비싼 요리를 주문해도 한동안 사라지기가 힘든 그런 금액이었다.
“글쎄다, 난 아마 용봉지회 우승자에게 이 돈 다 걸어 볼 것 같은데?”
용봉지회가 열리면 이에 맞춰 같이 진행되는 돈내기 판이 하나 있다.
바로 누가 우승을 하고 누가 몇 위를 할지, 돈을 걸고 승부를 보는 사설 무림 토토.
아, 무림맹 주최로 열리는 판이니 사설은 빼도 되겠군.
아무튼 참가자들이 스스로에게 돈을 걸기도 하는 등, 경마장처럼 잘만 하면 돈을 몇 배로 불릴 수 있는 기회였다.
“오, 누구한테 걸 건데요?”
혹시 내부 정보가 있을까 싶어 묻는 질문.
“당연히 나지 짜샤.”
오, 저 자신감.
내 질문에 그녀는 당연히 자신이 우승이라는 듯 가슴을 텅텅 두들겨 댔다.
“대장은요?”
“나도 좀 돈을 걸어 볼까?”
참가자 중에 머릿속에 흉성을 박아 넣은 사기 캐릭터가 있단 사실을 알게 되었잖나.
그러니 적당한 금액을 둘로 쪼개 조하랑에게 8할, 그리고 당여혜에게 2할 정도를 걸어 볼 생각이었다.
“참고로 우승 확률은 모용휘란 사람이 제일 높긴 해요. 배당은 낮아도 가장 안전하죠.”
아무리 확률이 높아도 모용세가 놈들한텐 걸기가 싫단 말이지.
돈을 무척 좋아하는 나라도 그건 좀 아니었다.
“어디서 내 이름이 들리는군.”
그런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몸을 움찔 떠는 일홍이.
뒤를 돌아보니 멸마대 건물 입구에 냉막한 인상의 청년 하나가 서 있었다. 자신을 언급한 일홍이를 지그시 쳐다보는 남자.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과 분위기였다.
“뭐냐 넌, 왜 내 이름을 꺼내지?”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리며 내 등 뒤로 샤샥 숨어드는 일홍이.
정파 무인이 죄다 모여드는 시기가 맞기는 한가 보다. 아주 그냥 다 보는구나, 다 봐.
모용휘. 나를 버리는 데 가장 적극적으로 동참한 둘째 형님까지 여기서 뵙게 될 줄이야.
“흥.”
시덥잖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우릴 지나치는 모용휘.
처음부터 목적은 우리가 아니었는지 그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모용청혜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곤 척 봐도 복잡한 가정사가 느껴지는 대사를 내뱉기 시작했다.
“청혜 누이, 멸마대는 놔두고 이제 그만 모용가로 돌아오시오. 이렇게 악인을 벤다 해서 그 녀석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잖소?”
66화 다 된 밥에 재 뿌리기
요녕성을 호령하는 대(大)모용세가의 둘째 공자, 모용휘.
제 아비를 닮아 매사에 냉담하며 가문과 관련된 일이라면 어떠한 수단도 가리지 않는 인물이기도 했다.
다만 오랜 가주 노릇으로 인자한 척이라도 하는 모용천과는 다르게 힘과 권력을 지닌 데다 혈기왕성한 나이까지 맞물려 여느 명문자제들처럼 오만한 성정도 품고 있는 녀석.
“그 망할 녀석이 뭐라고 누이가 이런 곳에서 이러고 있단 말이오.”
놈이 모용청혜를 향해 정신 차리라는 듯 말을 꺼내 들었다.
근데 저놈이 말하는 망할 녀석이 누구일까. 설마 나는 아니겠지?
“망할 녀석이라니. 말조심하거라, 그래도 너의 동생이었다. 모용휘.”
염병, 역시 나였구나.
그런데 모용청혜가 멸마대에 입대한 것이 나 때문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 걸까.
“죄책감 때문에 이러는 거요? 악인을 참하면 그게 조금 나아지기라도 한단 말이오?”
“……그만하거라.”
이미 여러 차례 해 본 언쟁인지 질린다는 얼굴로 이 주제를 피하려 하는 모용청혜.
하지만 그녀를 어떻게든 다시 세가의 일원으로 들이고 싶은 모용휘는 상당히 집요했다.
“애초에 일을 받아들인 것도 청혜 누이고, 행한 것도 누이인데. 어째서 이런 의미없는 짓을…….”
“그만하래도……!”
모용청혜는 결국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 감정의 폭발에 쥐 죽은 듯 고요해지는 건물 내부.
평소 악인만 아니라면 온화하기 그지없었던 그녀였기에, 다른 대원들도 때아닌 고성에 놀란 얼굴이었다.
“……항상 이렇지. 누이는 매번 내게만 이리 박했소. 그 녀석한텐 소리 한번 안 지르더니.”
그리고 묵은 원망이 맺혀 있는 듯한 모용휘의 눈빛.
그 눈빛을 정면에서 직시한 모용청혜는 잠시 가슴 아린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후우, 되었다. 일이 바쁘니 이만 가 보마. 쫓아오지 말거라.”
무척 복잡하고 할 말 많은 표정이었지만, 애써 삼키고 사라지는 모용청혜였다.
차갑게 굳어지는 표정. 남겨진 모용휘는 분한 듯 주먹을 빠드득 소리가 나게 쥐었다.
“……하!”
그렇게 한차례 감정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간 멸마대 내부.
“저건 무슨 사정인 걸까요, 대장?”
옆에 바짝 붙은 일홍이가 속닥거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별다른 기대를 하고 물어본 것은 아니고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던진 질문 같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일의 전말을 알고 있는 당사자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했다.
“…….”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복잡한 감정. 몸이 달싹이고 입이 근질거렸지만 여기선 철저한 외면이 옳다.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사라지려 했는데, 분통을 해소하지 못해 짜증을 부리던 모용휘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뭐냐 너희들은? 왜 남의 가정사를 그리 뚫어져라 구경하는 것이지?”
남의 가정사라니. 밝힐 순 없지만 이건 내 가정사이기도 했다.
그리고 엿듣는 게 아니라 먼저 대화하고 있었는데 네가 중간에 난입하지 않았나.
“먼저 대화를 하고 있던 건 우리였소만?”
“누구지 너는?”
놈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정체를 물어왔다.
그 매서운 눈빛에 항상 잡혀 살던 내 안의 모용청진이 쭈굴거리려 했으나 산전수전 다 겪은 나 단원준이 있는 한 어림도 없지.
“운칠삼협 단무진이오.”
나는 두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 그러자 내 이름을 되뇌이며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코웃음을 터트리는 모용휘.
“흥, 누이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그 같잖은 낭인 녀석이로군.”
그런데 나를 아는가 보다. 약간의 질투가 담겨 있는 말투. 그리고 무척 아니꼽다는 눈빛까지.
초면에 참 무례하고 실례가 많은 녀석이군. 하긴 이 새끼는 원래 저랬었지.
“하여간 누이는 사람이 좋아서 탈이야. 자신의 명예를 훔치는 좀도둑을 오히려 칭찬하고 나서질 않나.”
누가 봐도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는 혼잣말이었다. 이 자식은 여전히 자기 가족만 중요하고 남들은 쥐뿔도 신경 안 쓰는 구나.
그런데 그런 행패를 참지 못하는 성질 더러운 여인이 내 옆에 있었으니.
“이 씨방새가 듣자 듣자 하니까 계속 지랄이네. 싸가지는 어따 처박아 두고 왔냐. 아앙?”
당여혜가 암녹색 눈동자를 흉악하게 부라리며 앞으로 저벅저벅 나섰다.
내 큰 키에 가려져 있었던 터라 그제야 그녀를 발견하고 눈썹을 흠칫 떠는 모용휘.
“……독조산혈 소저?”
“소저는 씨발아. 여협이라고 불러. 네가 내 친구냐?”
역시 세간의 평판을 1도 신경 쓰지 않는 독견다웠다.
나이도 많은 강호 선배에다 가문도 꿇리지 않으며 똑같은 절정 무인인 당여혜가 꾸짖고 나서자 입술을 잘근 씹는 모용휘였다.
“크흠, 선배도 여기 계셨습니까?”
“그래, 쭉 계셨어 새꺄. 그리고 엿듣기는 지랄. 우리가 먼저 와서 대화하고 있었는데 등신이.”
역시 패악질엔 더 큰 패악질로 보답하는 정파의 미친개다웠다.
그리고 그런 미친 사람이 우리 편일 때만큼 든든한 일이 또 없지.
“아까 한 말은 그대에게 한 것이 아니오. 그리고 욕 좀 그만하시오. 정파의 여협이라는 인간이 저질스럽기는…….”
“저질스럽기는 염병, 먼저 시비를 처걸지 말던가. 이 개젓버러지 같은 새끼가.”
“……허어.”
와, 나하고 대화할 때는 그래도 자제하고 있었던 거구나.
어떻게 정파 무인이 저렇지? 마치 뒷골목에서 마주친 사파 잡배의 걸걸한 주둥이를 보는 듯했다.
아마 나 말고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리 생각하고 있겠지.
“하, 뭘 믿고 나대나 했더니. 네놈.”
그리고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고.
대화가 안 통하는 당여혜를 무시하고 뒤편의 나를 지그시 노려보는 모용휘.
저 노여운 눈빛을 이렇게 보니 감회가 또 새롭군. 모용청진 시절에 얼굴만 마주쳐도 보던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네놈은 꼭……. 비무대회에서 만났으면 좋겠군. 운으로 포장된 그 실력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까발려 줄 수 있게 말이야.”
이를 으드득 갈며 별호를 운구일협보다 더 못한 것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선언해 오는 모용가의 둘째 녀석이었다.
“뭔 소리야. 이놈이 얼마나 잘 싸우는데. 잘하면 네가 발릴 수도 있어. 새꺄.”
싸우는 걸 몇 번이고 봐왔다며, 내 어깨를 툭툭 내리치면서 녀석을 도발하는 당여혜.
“……으드득, 두고 보자고, 낭인놈.”
놈은 이를 갈면서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이내 등을 돌려 멸마대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고요가 찾아오고 제 업무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
“부자(父子)가 아주 돌아가면서 지랄이구만.”
어제는 모용천이 속을 뒤집어 놓더만 오늘은 그 아들놈이 내 부아를 치밀어 오르게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이걸 악운이라고 해야 할지. 신분과 얼굴을 완전히 바꿨음에도 결국 다시 엮이게 된 인간들.
‘살성아, 너 때문은 아니겠지?’
‘몰살(沒殺)!’
열받지 않냐며 죄다 죽여 버리자고 제안하는 천살성이었다. 그래,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절그럭.
손안을 가득 채우는 묵직한 전낭의 무게.
돈을 챙기러 온 대가가 제법 크군.
참으로 다사다난한 하루였다.
***
용봉지회의 열기가 섬서를 뒤덮은 가운데, 나는 비무장 못지않게 사람이 몰린 어떤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발을 들이자마자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소음이 쏟아지는 무림맹의 한 건물.
이곳이 바로 몇 년마다 한 번씩 엄청난 양의 돈이 오가면서, 믿기 힘든 수수료를 거둬들인다는 중원의 합법 도박판이었다.
“모용세가의 모용휘에게 금전 열 닢 걸겠소!”
“그럼 나는 독조산혈 당여혜에게 금전 다섯 닢!”
“뭐? 남궁세가의 청운검은 불참이라고? 이런 썅!”
분위기는 흡사 경기가 열리기 전의 경마장과도 같은 이곳.
나는 현판에 내걸린 각 무인들의 배당을 확인하며 전낭 속 금액의 액수를 확인해 봤다.
단도와 바꿔준 돈과 조금은 짜잘한 저독마의 현상금, 거기에 나눠 먹은 식혈귀의 금액까지 합하면 총 서른다섯 닢 정도 되는 금전이었다.
내가 손안에 금을 이만큼이나 쥐고 있다니. 지금껏 만져 본 적이 없는 액수였다.
하지만 가만히 놔두면 금이 새끼를 치는 것도 아니고, 투자를 통해 불려야 하지 않겠나.
“대장, 누구한테 거시게요?”
“글쎄다, 배당을 확인 중이긴 한데.”
명판 중에서 가장 승률이 높은 건 맨 위에 있는 소뇌검(小雷劍) 모용휘란 자였다.
조하랑도 최근에 절정으로 각성하긴 했으나, 일반인들에겐 알려지지 않아 아는 사람만 아는 분위기.
“청운검이 빠졌으니, 다들 어차피 우승은 모용휘라는 분위기네요. 대장도 안전하게 저 사람한테 걸 거예요?”
“하, 스벌…….”
압도적인 승률을 기록하고 있는 모용세가의 둘째 놈.
물론 당여혜도 있지만 독을 쓰는 무인은 비무대회에서 항상 불리하기 마련이라서 말이다.
사람을 죽일 수가 없으니 사용할 수 있는 독이 한정되는 데다, 약한 독은 고수들이 다 쳐내기 마련이지.
그래서 그녀는 자랑하는 당문의 암기와 몇몇 무기들을 봉인한 채 싸우게 될 예정이었다.
“거기의 소형제, 전낭이 제법 묵직하구만! 누구한테 얼마를 걸 건가?”
내가 돈을 걸 차례가 다가오자 주판알을 탁탁 튕기며 다가오는 중년인.
그는 내가 고민에 빠져 있는 듯하자 명판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모르겠다 싶으면 그냥 소뇌검에게 걸게나. 발걸음이 무거운 가주 모용천까지 무림맹에 왔다고 하니, 그쪽은 아주 승리를 확신하는 분위기인 듯하거든.”
그러게 말이다. 직접 마주쳐 보니 자기 아들의 승리를 아주 확신하고 있는 듯했지.
모용세가의 명예를 드높여 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듯했다.
‘그리고 그게 왜 이렇게 배알이 꼴리는 걸까?’
제 가족이라도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인간들이 우승을 거머쥐고 기뻐한다고 생각하니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느낌.
나도 한때는 당신 아들이었는데 말이다.
“흠, 많이 고민되는가?”
그리고 내 무복과 길쭉한 봉을 번갈아 보더니 내게 다른 선택지를 던지는 내기판의 중년인.
“뭣하면 자기 자신에게 걸어도 된다네, 16강까지 올라간 다음, 등수만 맞춰 내면 일확천금을 얻을 수도 있지!”
16강이라. 나는 그 낮은 목표에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좀 더 위.
모용천과 모용휘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지는 것을 직접 보고 싶었다.
조하랑도, 당여혜도 아니고 냉혹하게 버려진 자식, 바로 나 모용청진에 의해서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가당키는 한가?
절정에 대한 실마리를 얻긴 했지만서도, 그리고 절정에 맞먹는 내공을 몸에 품고 있지만.
그래도 내 경지는 결국 일류. 무기에 기를 덧씌우지 못하니 검기와 맞닿는 즉시 이 후개용 타구봉은 두쪽으로 썰려 나가겠지.
나는 고민에 빠져 턱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내 질문에 글자를 슥슥 그어 답을 해 주는 녀석이 있었다.
‘가(可).’
바로 붉은 기운을 스멀거리고 있는 살성이.
혹시 앞에 불(不) 자가 있나 싶어 더 기다렸지만 그게 전부였다.
한마디로 가능하다는 것.
다름 아닌 천살성이 점지해 준 승리의 가능성이었다.
“대장, 고민되시면 처음 생각한 대로 조하랑 여협에게 거는 게 어떠세요.”
도박판에선 절대 도박을 하면 안 된다며 승률이 높은 이에게 걸자고 말해 오는 일홍이.
하지만 난 방금 일생일대의 도박을 하기로 이미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안 그럼 분통이 터져 밤에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말이다.
나는 금전 서른다섯 닢이 담긴 묵직한 전낭을 책상 위로 ‘쿵’ 올려놨다.
그러자 적지 않은 금액에 내가 무슨 선택을 하나 싶어 예의주시하는 주변 사람들.
“이 중 절반은 소호도 조하랑에게 걸겠습니다.”
내가 일류 무인으로 알려진 조하랑에게 과감하게 돈을 걸자 주변 사람들이 살짝 놀라 웅성거려 댔다.
혹시 아는 사람 있냐며, 그녀에 대한 정보를 뒤늦게 찾아다니는 모습.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나 자신, 운칠삼협 단무진에게 걸겠습니다.”
나는 그 말과 함께 전낭에서 금전을 꺼내 중년인 앞으로 촤르륵 내던졌다.
“뭐? 운칠삼협? 누구 들어 본 사람 있어?”
“명판에도 없는데, 뭐 하는 놈이지 저건?”
“왜 그 있잖아, 운 좋게 탈혼마군의 마무리를 지었다던 일류 낭인.”
“아, 그놈이 저놈이었어?”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내기꾼이 있었는지 정보를 술술 부는 모습.
일류라는 경지에 그래도 16강의 말석 정도를 점쳐 보는 내기꾼도 그나마 있었다.
“몇 강을 예상하나?”
그리 물으며 받아 적을 준비를 하고 있는 중년인.
나는 그 종이에서 가장 높이 있는 칸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우승.”
그러자 잠시 벙쪘다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코웃음과 비웃음.
“허! 미친놈이었구먼!”
“그것도 돈많은 미친놈이었어, 아무리 실력에 자신이 있어도 그렇지.”
“난다 긴다 하는 고수가 전부 모이는 용봉지회에서 일류 따위가 우승을? 크허헛!”
곳곳에서 조롱과 무시가 날아들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그에게 이어서 질문했다.
“저, 배당률 높죠?”
“……높은 정도가 아니지. 아주 하늘을 뚫고 있네만.”
이걸 기뻐해야 할지. 아무도 나한테 돈을 걸고 있지 않았나 보다.
“대장, 괜찮겠어요……? 저야 대장이 뛰어난 무인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모용휘는 어렵지 않겠냐는 뜻이겠지 저건. 하지만 난 믿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누구인가. 바로 ‘모용’청진이다.
모용세가의 보법, 검법, 심법. 매번 천살성 앞에서 무공을 펼쳐 준 모용청혜 덕에 전부 다 꿰뚫고 있지.
게다가 난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그 검법에 직접 당해 보기까지 하지 않았나.
그야 몸속에 깊숙이 베여 있을 것이다.
“어차피 인생 한 방이야.”
거기에 천살성까지 무언가 방법이 있다고 말해 오지 않았나.
더불어 조하랑의 깨달음을 이끌며 얻어낸 절정을 향한 작은 실마리까지. 나는 크진 않지만 적지 않은 가능성을 점쳐 보고 있었다.
“이틀에 걸쳐 부자가 쌍으로 도발을 해 줬겠다?”
돈만 받고 나대지 않으려는 나를 굳이 콕 집어서 말이다.
이렇게까지 도발해 줬는데, 꽁무니를 빼서야 남자가 아니지.
놈들이 내다 버렸던 자식 때문에 격분하는 꼴을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러니 어디 한번 들이대 보자.
“어이, 저 멍청한 놈, 진짜로 거는 모양인데?”
“농이 아니었다고? 아까워라. 차라리 저 돈 나한테 빌려주지.”
소뇌검 모용휘을 믿고 내기를 건 놈들, 그 돈 내가 아주 쪽쪽 빨아 가주지.
그리고 모용천, 이 판에서 뭐를 계획했든 간에…….
자미성과 천살성, 우리 둘이서 아주 개판을 내주도록 하겠다.
67화 절차탁마
천살성은 제 목숨을 걸고 싸울 때 가장 빨리 강해졌다.
그야 등장하는 즉시 무림 공적이 되어 온갖 놈과 다 싸우게 될 운명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천살성의 성취를 말도 안 되게 끌어올리는 숙명 같은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이 몸과 같은 흉성이자 숙적, 자미성이었다.
“……조하랑과 치고받으라고?”
나는 바닥에 슥슥 적히는 글자를 보며 폭풍처럼 쇄도해 오는 조하랑의 대검 세례를 떠올려봤다.
살성이가 제안한 것은 바로 자(紫)와 살(殺)이 서로 칼을 맞대는 것, 즉 실전과 같은 대련을 원하고 있었다.
자미성의 조력을 받는 느낌이 몹시 마음에 안 들지만, 내 무공의 성취가 늘수록 천살성의 생존률도 덩달아 올라가니 잠시 참는 듯한 모습이었다.
‘소중도(笑中刀)’
아니, 안 참나?
조력을 받더라도 품속에 칼을 품고 있다가 언제든지 기회가 보이면 치라고 말해 오는 천살성.
하여간 보면 볼수록 싸이코패스 같은 흉성이었다. 도와주는 사람이라도 아주 가차 없구나.
나는 놈이 써낸 글자를 발끝으로 벅벅 지웠다. 그러자 시뻘겋게 기운을 피워올리게 거세게 항의하는 살성이.
‘살(殺)!’
“안 할 거고, 설사 한다 해도 내가 발려 이 미친놈아.”
이놈 구밀복검 같은 짓 좋아하네.
상대는 절정 무인이다. 그것도 자미성의 무재를 듬뿍 받은 재능 넘치는 무림인.
아무튼 자미성에게 도움을 받으라는 그 조언만큼은 괜찮다 싶어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용봉지회 숙소 근처 공터로 찾아가자 어김없이 별빛 아래에서 땀을 흘리며 수련 중인 조하랑의 모습.
거대한 도와 혼연일체가 되었는지 도가 가는 곳에 신체 또한 물 흐르듯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패도적인 도기를 흩뿌리며 밤공기를 거칠게 찢어발기는 도신.
후웅!
초식을 펼치고 있을 뿐이지만, 도신에 실린 위력으로 인해 가히 폭력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저 대도 앞에 대책도 없이 섰다가는 뼈도 못 추리고 몸뚱어리가 썰려 나가겠지.
“음? 무진, 이 밤에 무슨 일이야?”
불침번도 없는데 이 야밤에 나타나 칼춤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자,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떠고 물어오는 조하랑.
나는 홀로 수련하면서 느낀 벽의 존재와 정체된 현재 상황을 그녀에게 가감없이 털어놔 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허공에 초식만 펼쳐 대는 수련 방식은 천살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수련에 어울려 달려고? 대련 상대로서?”
이 주 동안 치러지는 비무대회. 그사이에 나는 절정으로 향할 이 실마리를 어떻게든 풀고 싶었다.
“응, 가능할까?”
“물론이지! 언제 그 말 하나 했다!”
조하랑은 오히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왔다.
그녀는 어깨에 대도를 걸치더니 온종일 어울려 줄 수 있으니 자신만 믿으라며 가슴팍을 퉁퉁 쳐 댔다.
일말의 악의도, 그리고 이해타산도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호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킬각을 한번 봐보라던 어떤 시뻘건 놈과는 다르게 환한 햇살처럼 반짝이는 여인이었다.
“근데 갑자기 의욕이 넘치는 것 같네. 이전에는 돈만 챙기고 나머지는 겸사겸사 참가하는 느낌이더니.”
확실히 이전에는 현상금을 수금하러 가는 길이니, 명성이나 쌓을 겸 한번 참가나 해 볼까란 생각 정도였었지.
하지만 지금은 임하는 자세가 완전히 바뀌어서 말이다.
“때려눕히고 싶어진 놈이 하나 생겨서.”
이틀 동안 돌아가면서 사람을 자극해 댄 두 인간.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날 팽(烹)한 그놈들이 우승을 거머쥐는 꼴만큼은 못 보겠다.
그러니 순탄해 보이는 놈들의 계획에 어떻게든 잿가루를 뿌리고야 말겠다. 그를 위한 것이 바로 지금의 진심모드였다.
목표는 오직 잔뜩 일그러진 모용휘와 모용천의 얼굴을 보는 것.
“아, 혹시 그때 그 싸가지? 한번 붙어 보려고?”
그때 그 싸가지. 모용휘에 대한 아주 정확한 표현이었다.
“근데 그 사람, 절정 무인에 우승 후보인데, 가능할까?”
“그러니까 네 도움이 필요하단 거지.”
“응, 그래. 그것도 맞네.”
우리는 이미 한 차례 서로의 경지를 끌어올려 주지 않았나. 두 번이라고 못 할 것 없지.
쿵.
그녀는 본인의 수련을 멈추고 날 위해 시간을 내주겠다는 듯 대도를 땅바닥에 내리찍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 참고로 난 건곤파섬검 같은 쾌검은 못 펼쳐.”
묵직하고 패도적인 도법을 구사하기에 그 부분에선 적응하는 데 도움이 안될 거라 말해 오는 조하랑.
“아, 그건 괜찮아.”
그 검법은 내가 제일 잘 안다. 평상시에도 많이 봐왔고, 쫓겨 다닐 때도 몇 번이나 찔리면서 견식해 왔으니 말이다.
“너 이제 칼에 살심을 담을 수 있게 됐지?”
내 조언 덕에 내면의 악한 마음, 그리고 살심 또한 자신의 일부분으로서 받아들였던 그녀.
“응, 물론이지.”
“그러면 지금부터 날 죽일 놈이라 생각하고, 살심을 담아 대도를 휘둘러 줘.”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살기를 품고 날아오는 살초. 그것에 본능적으로 번뜩 반응하는 천살성.
그렇게 무아지경에 빠져 정신없이 싸움을 벌이는 게 지금까지 가장 효율이 좋았던 수련 방식이었다.
“에엑, 세상에 그런 무식한 수련 방식이 어딨어?”
“놀랍게도 있더라고 그게.”
이 머나먼 섬서에 와서도 떠오르는 어떤 괴팍한 노인네.
나는 얼른 고개를 흔들어 그 주름진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아무튼 살기를 담아 죽일 듯이 덤벼 줘. 난 그게 가장 효율적이더라.”
조하랑은 내 부탁에 ‘이게 맞나?’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단 부탁을 받았으니 커다란 대도를 이쪽으로 겨눠 왔다.
나는 곧이어 폭풍처럼 쏟아질 묵직한 궤적들을 의식하며 봉을 꺼내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기수식만 취한 채 좀처럼 들어오질 않는 그녀.
“뭐 해? 안 들어와?”
휘황찬란한 도기가 뿜어지길래, 곧 온몸을 옥죄는 패도적인 살기가 쏟아지리라 예상했건만, 그녀의 칼끝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붉은 궤적을 그리는 천살안 또한 잠잠하며, 전투에 앞서 붉게 피워 올랐던 살성이 또한 다시 가라앉는 모습.
“살심을 품어 보려 했는데, 으음, 뭔가 잘 안되네…….”
“저번에 절정으로 각성하며 극복한 부분 아니었어?”
“응, 극복했었지. 근데 너 앞에 서니까 왜 이러지?”
눈앞의 상대를 베어 죽이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한데, 그게 잘 안 품어진다며 난색을 표하는 그녀였다.
“이상하군, 무슨 차이지?”
“음, 혹시 내가 널 마음에 두고 있어서 그런가?”
볼을 긁적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내뱉는 조하랑.
“…….”
‘…….’
반면 그 흘려듣기 힘든 발언에 나와 살성은 동시에 동작을 우뚝 멈췄다.
“아, 그런 의미는 아니야. 넌 내가 귀감(龜鑑)으로 삼고 있는 인물이거든. 일종의 내 본보기랄까.”
자미성의 롤모델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다 설명하는 그녀였다.
‘……식겁했다, 이 여자야.’
사람 진짜 오해하게 만드네. 아주 그냥 남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구만.
그리고 이건 살성이 또한 식겁했는지 있을 수 없는 조합이라며 바닥에 ‘불가(不可)!’를 격하게 적는 모습.
가끔 보면 이 여자, 나보다 더 종잡을 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나를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생각해 봐.”
“그치만 넌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쌓은 선업이 눈으로 보이는데 쉽사리 그럴 수가 없다나?
“……그럼 그냥 네가 제일 증오하는 그런 존재를 떠올려 봐.”
그게 안 되면 이 수련은 나가리다. 고로 나는 그렇게 조언하며 일류 무인이 품을 만한 살기를 살짝 흘려줬다.
“제일 증오하는 존재……. 천살성!”
아무래도 이건 먹히는 모양이다. 자줏빛 두 눈을 번쩍 뜨며 서슬퍼런 살기를 뿜어내는 그녀.
정체를 감춘 천살성으로서 기분이 약간 복잡해지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감이 잡혔어……! 넌 아주 좋은 사람이지만, 오늘만큼은 끔찍한 천살성이라 생각하고 상대할게!”
살기와 도기를 잔뜩 머금은 도신이 내 앞으로 드리워졌다.
그 폭풍 같은 기세와 크기가 맞물리자 보는 것만으로도 압박이 되는 느낌.
“하랑아, 저번에 나랑 한 약속 기억하지?”
“어떤 거?”
“내가 추후에 악인이 되어 나타나도, 한번 정도는 눈감아 달라는 거.”
“물론이지. 난 약속은 꼭 지켜!”
신용이 있는 을급 낭인이라며 자신감을 표출해 보이는 조하랑이었다.
“그래, 그 말 나중에 꼭 지켜다오……!”
만사불여(萬事不如) 튼튼이다. 온몸으로 뻗어 나가는 정순한 내력.
나는 안전띠의 존재를 거듭 확인한 후 살기 가득한 그녀의 대도와 공수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따다닥-!
***
자미성과 겨뤄 보라던 살성이의 조언은 마냥 헛된 것이 아니었다.
며칠간의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수련 기간.
나는 조하랑이 내뿜는 살기와 도기를 정신없이 상대하다 무언가 작은 깨달음을 얻게 된 상태였다.
정확히는 원래 닿았던 실마리를 조금 더 잡아당긴 듯한 느낌.
“마지막에 도기와 부딪혔음에도 타구봉이 버텨 냈었지 아마?”
날 후개라며 인정하면서 준 것이 이 타구봉이기에, 그동안은 공방을 교환하며 행여 싹둑 썰릴까 온 신경이 쏠렸었는데.
복부를 노려오는 마지막 한 수를 어떻게든 막아 내려 발버둥 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절정의 무인의 공격을 정면에서 쳐내고 있었다.
마치 뭔가에 홀린 듯이 말이다.
“……대체 어떻게 했던 거지 그거.”
손끝에 남는 묘한 감각. 신체의 기를 무기로 순환시키는 것을 넘어 무언가 더 손을 뻗었던 감각이었는데.
조하랑은 이런 내 모습을 골똘히 보더니 몇 가지 추측을 내어놓았다.
‘깨달음 부족 아니야?’
‘깨달음?’
배움이 너무 빨라서 일어난 일이란다.
턱없이 부족한 내 수련 기간을 지적하며, 내공은 많은데 몸과 정신은 그를 따라오지 못하는 부조화를 언급하던 그녀.
생각해 보니 나는 무공 입문 2년 차가 아니던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신생아도 걸음마를 뗄 때까지 보통 15개월이 걸리곤 하는데.
나는 그보다 더 복잡하고 심오한 무공을 속성으로 압축해서 배운 상태였으니 뭐.
‘무진, 너한테 무공은 뭔데?’
‘줘패는 거.’
‘하아, 이러니까 벽에 부딪히지. 스승님은 널 어떻게 가르치셨는데?’
‘줘패면서.’
‘…….’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다. 다른 정파 문파들처럼 세심하게 보살피며 이끌고 당겨주는 그런 건 없었다.
못 깨우치면 깨우칠 때까지 해당 무공으로 죽어라 두들겨 패는 게 일상이었지.
‘미안한데, 그거 스승 맞아……?’
‘내 말이.’
이래서 내가 그 노인네를 좀처럼 스승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것이다.
어디 제자 취급을 받아 봤어야지.
아무튼 그리하여 나는 불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상태로 용봉지회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와아아아아-!”
대기실에서도 귀를 뚫고 들려오는 사람들의 우렁찬 함성 소리.
밖은 여러 무인이 펼쳐 내는 화려한 무공과 비무로 인해 열광의 도가니였다.
반면 지금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어떤 진한 아쉬움.
“스읍, 뭔가 실전 딱 한번이면 깨달을 것 같기도 한데.”
천살성은 피와 살심을 먹고 자라는 존재. 마지막으로 부족한 한 조각, 그건 바로 살초를 섞은 대련이 아니라 서로 죽고 죽이려 드는 진짜배기 실전이었다.
그거면 감이 딱 올 것 같기도 한데 말이다.
하지만 여기는 용봉지회. 실전이 아니라 비무를 치르는 곳. 고의성을 가지고 살초를 휘두르고 사람을 죽이면 실격이기에 그런 일은 좀처럼 없겠지.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예선전을 모두 치르고 올라온 내 16강 비무 상대는 하필이면 머리를 빡빡 민 소림사의 무인이었다.
“후후, 나무아미타불.”
***
멸마대의 부대주실.
모용청혜는 용봉지회를 구경할 새도 없이 대주가 처리하지 않고 떠난 서류 업무를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게 싫어서 대주직을 마다하고 부대주직을 고수한 건데, 기어이 서류 다발을 밀어넣고 가 버린 대주 적운엽.
“하아, 그 의기 있는 청년의 무대를 보고 싶었는데 말이죠.”
아마 대주직을 그냥 좀 넘겨받으란 뜻으로 이러는 거겠지.
그는 자신의 배경과 무공에 상당한 부담을 지닌 듯했으니까 말이다.
“어림도 없죠.”
하지만 그녀는 지금 주어진 운신의 자유와 폭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난 이후, 모용청혜에게 부와 명예, 권력 같은 것은 이제 허망한 것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멸마대 내에서 대주와 기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그녀.
“부대주님!”
그런데 무림맹에서 현상수배범의 목을 도맡아 관리하는 검시관이 부리나케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이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모용청혜.
“무슨 일인가요, 검시관?”
“식혈귀, 그놈 시체가 이상합니다.”
“뭐가요? 소금에 절인 머리통이 이상해 봐야…….”
“머리를 부검해 봤는데 그 ‘집단’의 혈술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식혈귀는 이전부터 피의 역사를 써내려 온 모 문파와 연관되었다는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던 마인.
그는 특수 제작된 장침을 머리통에 푹 찔러넣었다가 꺼내 확인해 봤다며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지어 왔다.
“잠깐, 식혈귀라면 그걸 가져온 사람들이 분명…….”
조하랑이라는 낭인과 그녀가 단도를 건네줬었던 단무진이란 청년.
“지금이라도 가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상세히 물어봐야 합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놈들은 꼬리가 잡히는 걸 극도로 싫어하니…….”
“입을 막으려 들 수도 있겠군요.”
“예, 그렇습니다.”
마침 비무대회는 사고사를 가장해 사람을 죽이기에 가장 좋은 무대.
모용청혜는 눈썹을 꿈틀이며 16강을 치르고 있을 어떤 청년이 있는 방향을 불안하게 쳐다봤다.
“설마…….”
68화 천살성의 시야
용봉지회 판정관의 손에 들린 붉은 깃발이 허공을 가르며 힘차게 펄럭였다.
이는 비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두 명의 무인이 거리를 좁혀 가자 관중석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금강권(金剛拳)! 혜승(慧僧)!”
“믿는다고 소림사!”
주먹을 불끈 쥐는 사람들. 무대 위로 쏟아지는 흥분으로 달아오른 고함과 함성.
그 소란 속에서도 한 여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대장! 대자아아앙!”
일홍이가 목청껏 나를 응원하고 있는 듯했다.
그 모습에 뿌듯하고 기특해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였으나, 이어지는 대사에 그 미소는 다시 스르륵 가라앉게 됐다.
“저도 대장한테 전 재산 걸었어요! 그러니 꼭! 반드시! 이기셔야 해요오오!”
토쟁이가 되어 버리고 만 일홍이.
별호에 가려진 내 무공 실력을 제일 잘 아는 데다가, 말도 안 되는 고배당에 눈이 돌아가 버린 모양이다.
“참나,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봉 끝을 민머리가 반짝이는 소림사 무인에게 겨눴다.
그러자 고개 숙인 합장으로 이에 답하는 스님.
“나무아미타불. 멋진 비무를 기대하겠소이다.”
실전에 목마른 상태. 투지를 확 끌어올려도 부족할 판에, 불도를 지향하는 스님이라니.
실전 같은 비무는 틀려 먹었구만. 나는 김이 팍 새려 했다.
“한데 기묘하게 생긴 봉이구려,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소?”
외양은 평범하나 내실은 심상치 않은 이 무기의 진가를 알아본 모양.
타구봉이라 말하는 순간 내가 개방의 후개요라고 광고하는 꼴이니, 임시로 지은 이름이 있었다.
“지옥참마봉이요.”
“……기이한 이름이구려.”
내가 보기엔 멋있기만 한데 사람들은 자꾸만 기이하고 괴상하단다.
하여간 중원 놈들, 낭만을 모르는 족속들이라니까.
“소승은 금강권 혜승이라 하오. 시주는 식혈귀를 포획해 왔다던 운칠삼협 단무진 소협이 맞소이까?”
예선전을 치러 보니 간단한 자기소개만 하고 치고받던데, 이 스님은 이상하게 싸우기 전에 자꾸만 주둥이를 털어오려 했다.
“맞는데요. 왜 물으시는지?”
“별건 아니고, 소승이 쫓던 악인이라서 말이오.”
“아하.”
그놈은 무림인만이 아니라 평범한 양민들에게도 크나큰 해악을 끼친 놈이니, 소림사의 스님이 쫓고 있을 만도 했다.
“사술을 부리는 데다 절정의 무위라 잡는 데 애를 먹었는데, 어떻게 놈을 굴복시킨 것이오?”
“정의의 편답게 셋이서 다구리를 쳤죠.”
“…….”
사술이고 뭐고, 물량 앞에 장사 없더라.
사람 눈이 등에도 달려 있을 리는 만무하니, 고수를 잡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지.
“좀 비겁하지 않소? 절정 무인까지 껴서 셋이서 합격하다니.”
“딱히? 힘없는 양민을 도륙한 놈을 왜 정당하게 상대해야 합니까?”
“허어.”
그리고 이건 진심이었다.
해결사 일을 하면서 나쁜 놈을 하도 많이 상대하다 보니, 그 와중에 세워진 일종의 철칙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혹시 그놈이 죽기 전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소? 이상한 말이라던가.”
“예, 뭐. 혈술이니 대업이니 뭐라 지껄이긴 하던데.”
꼭 흑막이나 흘릴 법한 대사라서 기억하고 있었다.
피를 탄지공처럼 뿌려 대는 괴이한 사술도 그렇고, 단순한 마인이라기엔 여러모로 심상치 않아 보였던 녀석.
“혹 그것을 어딘가에 알리셨소?”
“예, 시체 넘기면서 멸마대에 곧바로 알렸는데요.”
그런데 반응이 시큰둥하더라. 접수원도 그게 뭔 소리인가 싶었던 거겠지.
나도 뭐 돈만 챙기면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었고 말이다.
“……호오, 그렇소?”
그런데 그렇게 대답하자 갑자기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는 스님.
그는 양손에 희끄무레한 기운을 잔뜩 두르기 시작했다.
“소협은 입이 참으로 싸시구려.”
푹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며 내뱉는 대사.
“거, 말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신고 정신이 투철하다 해 주십쇼.”
뭔가 이상하다 이 새끼.
내가 사람을 파헤치는 일을 하다 보니, 이런 싸한 느낌 하나는 잘 파악했다.
“그리고 본 소승은 입이 싼 사람을 무척 싫어하오. 죽일 정도로 증오하지.”
그래서 난 곧바로 천살안을 번쩍 떠봤다.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인간의 본성을 알려 주는 천살성만의 시야.
“……그쪽, 스님 맞아요?”
그러자 나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되었다. 눈앞에서 얼굴은 웃고 있지만, 가슴속에선 엄청난 살심이 휘몰아치고 있는 어떤 민머리 스님을 말이다.
“그렇소만, 소승은 혜승이라 불리는 소림사의 스님이오.”
게다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온 건지, 살업까지 어마어마하게 쌓아 온 듯한 모습.
끔찍한 악취가 코를 마비시킬 정도로 진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스스로를 금강권이라 소개하면서 양손에 선명한 강기를 맺는 혜승이라는 스님.
일홍에게 전해 듣기로는 분명 그 경지가 일류밖에 안 된다고 들었는데.
“다만… 오늘 그대를 상대로는 살승(殺僧)이 되겠구려.”
잔인하게 비틀어지는 입매. 아무리 봐도 친선 비무를 걸어올 느낌은 아닌데.
놈은 권기가 잔뜩 맺힌 양 주먹을 불끈 쥐더니 대뜸 스님답지 않은 살초부터 펼쳐오기 시작했다.
“죽어엇-!”
***
무림의 고수들은 오랜 수련을 통해 기를 다루는 능력이 절정에 이르곤 한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체내의 기를 체외에서도 자유자재로 다루곤 했는데, 이를 검에 불어넣으면 강철도 두부처럼 써는 검기가 됐으며.
몸을 방어하는 데 사용하면 호신기(護身氣), 주먹에 불어넣으면 바위를 깨트리고 무쇠 방패를 부수는 권기(拳氣)가 되곤 했다.
빠각!
고로 절정 무인의 권기를 막아 낸 타구봉의 끝부분이 유리처럼 터져 나가는 것도 어쩌면 정상적인 현상이라 할수 있겠지.
지금껏 그 어떤 날붙이도 베어 내지 못했지만, 기라는 것을 무기처럼 휘둘러 대는 상대 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후욱, 후욱.”
이마 위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핏방울. 비산하는 나무 파편이 만들어 낸 생채기였다.
“지옥참마봉이 벌써 반쪽이 됐구려.”
불쌍한 내 후개용 타구봉.
단도로 지옥참마봉이란 글자를 파 놨는데, 지옥참이 방금 날아가 그냥 마봉이가 되어 버렸다.
“시발, 내 마봉이가!”
비릿하게 웃더니 또다시 바닥을 박차 권초를 펼쳐 오는 혜승.
눈앞에 붉은 궤적이 쉼 없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하나하나가 나를 진짜로 죽이기 위한 살초들.
“허업!”
나는 모든 공격을 간발의 차로 피해 냈다. 바닥을 구르는 나려타곤도 마다하지 않고 그야말로 온몸을 비틀어서 말이다.
그때마다 사정을 모르는 관중들이 ‘와하하!’하고 웃어 댔지만 거기에 대응할 여력도 없었다.
그렇게 내가 살기가 뻗어오는 궤적을 읽고 경지에 어울리지 않게 회피기동을 실시하자 바닥을 진각으로 내리찍으며 분통을 터트리는 혜승이라는 놈.
“이런 쥐새끼 같은……! 계속 피하기만 할 거요? 맞서 싸우시오!”
맞서 싸우라고 말해도 말이지.
무공이란 것은 본디 첫 초식을 나누고 그 수가 안 통하면 다음 수를 펼치는 것인데. 이쪽은 닿는 순간 무기도 신체도 뻥뻥 터져 나가는 신세니 맞붙을 수가 있나.
“개좆같네 절정!”
그리고 이놈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란 말인가.
내가 놈의 공적을 먼저 가로채서? 아니면 그 마인이 알고 보니 피가 이어진 숨겨진 혈육이었다던가.
“컥!”
그때, 머릿속이 어지러워진 틈을 타 섬전 같은 각법이 내 옆구리에 작렬했다.
처맞는 즉시 정신이 아득해지는 일격. 양손에만 집중하느라 쾌검처럼 밑에서 빠르게 쏘아져 오는 공격을 놓치고 말았다.
“숨통을 끊어 주마!”
그리고 마지막 일격이라는 듯 복부를 두들기는 장법.
나는 전신을 관통하는 엄청난 충격에 비무장 끝자락까지 데굴데굴 굴러가 피를 울컥 토해 냈다.
바위도 산산조각 낼 폭력적인 기운이 몸을 두 차례나 타격한 순간.
“흐, 드디어 뒤졌…….”
“끄어어, 시발.”
사경을 헤맨다는 게 이런 뜻일까.
나는 턱하고 막혔던 숨이 수십 초를 지나서야 겨우 한 모금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존나…… 아프네, 새끼가.”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비무대 끝자락에서 몸을 다시 일으켰다.
그러자 내심 이건 끝났다고 여기던 관중들과 함께 입을 떠억 벌리는 자칭 살승 녀석.
“뭐냐 너……. 어떻게 일어선 거냐? 방금 건 곰도 한 방에 죽일 침투경(浸透勁)이었는데.”
오장육부가 으스러지며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을 텐데, 살아 있는 건 말이 안 된단다.
하지만 난 비슷한 거에 당해 봤고, 그 상태로 절벽에 떨어져서도 살아남았다만.
물론 그 사실을 놈에게 솔직히 대답해 줄 생각은 없었다.
“야, 느그 부처가 이래 가르치더냐? 비무대 위에서 사람 죽어라 패라고?”
내 도발에 반짝이는 민머리 위로 굵은 혈관을 드리우는 살승.
근데 방금 건 진짜 저승에 살짝 발을 담갔다가 돌아온 듯한 일격이긴 했다.
서너 번쯤 더 맞았다간 아무리 나라고 해도 다시는 못 일어설 그런 권초.
그리고 그런 위기감이 잠들어 있던 천살성의 본성을 일깨운 것일까.
새하얗게 일렁이는 성운신공의 기운 위로 천살성의 기운도 함께 피워오르기 시작했다.
붉은 궤적 따위가 아니라 시야 전체가 붉은 물감에 물들어가는 듯한 이 감각이란.
“뭐지, 이것들은.”
이 세상에서 기(氣)란 것은 무엇인가.
생명의 본원이자, 천지만물에 감응하는 매개체였다.
그러나 눈으로 보이지도 않으며, 손으로 만질 수도 없으며, 귀로 들을 수도 없기에 모두가 그것을 갈구하면서도 이해하려 평생을 바치곤 했다.
그런데 오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천살성과 시야가 겹쳐지자 어째서인지.
나는 보여선 안 될 그 기의 존재와 흐름이 어렴풋이나마 눈에 비치기 시작했다.
조하랑을 절정으로 각성시키며 얻었던 작은 깨달음의 실마리가, 이제 정말 코앞까지 다가온 느낌.
확실한 건 난 정말 죽어라 싸워야만 강해질 수 있는 운명인가 보다.
“야, 아까 그거. 침투 뭐시기 한 대만 더 때려 봐라.”
내 도발에 놈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흉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날 노려보는 모습.
“대련 도중에 발생한 사고사 정도로 위장하려 했는데……. 안되겠구나. 본좌가 오늘 살계를 열겠노라.”
갑작스런 본좌의 등장이었다. 탈혼마군 때 느낀 거지만 저 말 쓰는 놈치고 정상인 놈이 하나도 없던데.
“죽여 주마!”
놈이 양 주먹에 핏물처럼 시뻘건 기운을 씌우더니 내게로 달려들었다.
그러자 확연하게 보이는 기의 움직임. 나는 단전을 타고 흘러와 주먹을 덧씌우는 기의 움직임을 전부 눈으로 읽어 냈다.
매번 황걸개한테 두들겨 맞다 보면 무공이 본능적으로 익혀지길래 원리가 뭐인가 싶었는데.
천살성은 매번 이런 시야를 들여다보고 있었던 거였나.
‘나와 다르다.’
절정 무인은 민낯 그대로 보여 주는 기의 움직임.
나는 그 움직임을 관조하고 곱씹고 그리고 역으로 해석하여 내 몸으로 펼쳐 내 봤다.
그리고 그 결과.
따악-!
반쪽짜리 타구봉이 무시무시한 기세의 권기를 정면으로 막아 세워 버렸다.
“뭣이……?!”
***
“어, 저거 달밤에 봤던 그거다.”
물 흐르듯 부드럽게 흘러가 패도적인 기세의 공격을 딱 막아 세우는 한 수.
조하랑은 보자마자 별빛 아래에서 봤던 그 수법임을 깨닫고 짧은 감탄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수세에 몰려 있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절정 무인을 휘몰아치기 시작하는 단무진.
관중석에선 그러한 반전 상황과 역습에 흥분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그거예요 대장! 믿고 있었다고요! 난 이제 부자다아!”
아까 전만 해도 불안해서 손톱을 물어뜯더니만, 처음부터 믿고 있었다는 양 환호하는 일홍이의 모습.
“허헛! 일홍 낭자의 말이 맞았군! 저거 아주 물건일세!”
그리고 그 옆에서 그래도 아는 사람에게 돈을 걸었다가 대박을 치게 된 조 장주와 그 일행이 기쁨의 함성을 질러 대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돈도 걸지 않았음에도 그 누구보다 환호하는 이가 따로 있었으니.
“크흡! 역시 용두방주는 우리 개방을 버리지 않았던 거구나. 저런 천금 같은 인재를 발굴해 보내 주실 줄이야!”
호위 내내 단무진을 쫓아다니며 수상한 행적을 보였던 사람.
급기야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기뻐하는 모습에 조하랑은 흠칫했다.
“저 아저씬 대체 뭐지…….”
69화 무림맹 회의
모용청혜는 검시관의 수상쩍은 얘기를 들은 후, 멸마대에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바로 용봉지회 본선 참가자들을 전부 한 번씩 전수 조사하는 것.
그리자 조사 결과, 매우 수상한 인물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금강권, 혜승이랬었나.’
젊은 나이임에도 벌써 절정을 바라보는 일류의 경지, 소림사에서도 촉망받던 기재였으나, 얼마 전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무림맹으로 접수되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수배 전단을 꾸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용봉지회에 떡하니 나타나 비무에 참가하고 있다니?
‘하필 이런 시기에, 그것도 그 집단에게 노려지는 단무진 소협과 맞붙고 있다니……!’
무언가 조짐이 좋지 않다. 악인을 숱하게 베어 오며 체득한 그녀의 직감이 경고를 보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보고에 의하면 직전의 예선전에서 권기를 뿜어낸 것 같다는 증언까지 곁들여진 상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류였던 사람이 그리 쉽게 절정에 도달할 수는 없는 법이다.
고로 지금 비무에 출전한 혜승은, 모두가 아는 그 혜승이 아닐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차오르는 불안감에 발걸음을 재촉했던 그녀.
“아, 조하랑 소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누나라 불러 줬던 그 소협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비무대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 대기실에서 그와 단짝처럼 지내던 대도의 여인을 만나게 됐다.
“어? 모용청혜 부대주님?”
멸마대 부대주가 비무 대기실에서 튀어나오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는 조하랑.
“무진 소협은 어딨나요! 그는 무사합니까?!”
그 질문에 잠시 아리송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지금 한창 비무 중인데요.”
“아, 다행이군요. 그럼 지금이라도 난입해서 소협을 구해야…….”
“엥? 뭔 일인지는 몰라도, 구할 필요는 없을걸요?”
조하랑은 그렇게 말하면서 대기실의 입구 천막을 들쳐 줬다.
그러자 한눈에 들어오는 비무대 위의 풍경.
“……응?”
영문은 모르겠지만, 정급 낭인 단무진이 절정 무인이라 기록된 혜승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고 있었다.
퍽! 퍽! 퍽!
“무릎! 정강이! 오금!”
“끄악!”
혜승이 도주하는 것을 막기 위함인지 하체 위주로 몽둥이를 신명나게 휘두르고 있는 단무진.
그는 흡사 개를 두들겨 패는 듯한 찰진 타격음을 자아내며 무언가를 캐묻고 있었다.
“너 이 새끼! 정체가 뭐야! 빨리 불어!”
혜승은 대답할 수 없다는 듯 권기가 실린 살벌한 살초를 뿌렸지만 단무진은 이를 반토막 난 몽둥이로 모조리 쳐내며 반격을 가했다.
말을 안 하면 그 정수리를 오목하게 해 주겠다며 이번엔 번쩍이는 민머리만 집요하게 노리는 모습.
“대가리! 대가리! 대가리!”
따다닥-!
“크아악!”
무슨 묘리가 실린 건지, 정신이 아득해지는 고통에 혜승은 민머리를 부여잡은 채 무대 위를 나뒹굴기 시작했다.
비무가 아니라 일방적인 구타가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이게 대체…….”
예상을 완벽히 뒤덮은 비무 결과에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모용청혜.
그리고 이는 소림사의 무인이 권기를 뿜어내자 승리를 자신했었던 관중들도 매한가지였다.
“아니, 이게 말이 돼?”
“소림사의 기재를 개처럼 두들겨 팬다고? 운칠삼협이?”
황당함과 어이없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내기꾼들의 허탈한 한숨.
그러거나 단무진은 ‘마봉’이란 글자만 남은 몽둥이의 원한을 풀어 주겠다며 폭행을 이어 나갔다.
“고간! 고간! 고간!”
“허, 허어억!”
도저히 정파 무인들의 시합이라 보기 어려운 광경. 모두가 저도 모르게 사타구니를 움켜쥐었다.
혜승으로 위장한 무언가는 남자의 무언가를 건드리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깨갱!’거리며 비명만 토해 내기 바빴다.
“알이 터져 뒤지기 싫으면 뭐 하는 놈인지 말해!”
흡사 멸마대 대원이라도 된 듯 집요하게 캐묻는 단무진.
피가 몰린 두 눈에선 번뜩이는 정광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하, 항복! 기권이오! 기궈어어언!”
그러나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자칭 소림사 무인은 후다닥 나려타곤을 시전해 판정관의 다리를 부여잡고 항복을 외쳐 왔다.
그 눈물, 콧물을 질질 흘려 대는 추한 항복 선언에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한동안 말을 잇지 판정관.
“너 이 새끼가……. 누구 맘대로!”
그러나 성난 단무진이 쪼개진 몽둥이를 앞세운 채 날아오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항복을 접수해 주는 판정관이었다.
무대 위로 펄럭 흔들리는 하얀 깃발. 기이했던 이번 경기의 종료를 알리는 신호였다.
“항복 아니오! 무효요, 무효!”
“뭔 말도 안 되는……. 물러서시오!”
그러거나 말거나 기권의 무효를 선언하며 미친놈처럼 몽둥이를 휘둘러 오는 단무진.
판정관들이 기겁을 하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비무는 끝났소! 정파 무인이라면 예의와 인의를 지키시오!”
“아니, 저놈이 정파가 아닌 것 같다니까요!”
“소림사의 기재에게 그 무슨 망발을……! 큰일 날 소리 마시오!”
“아씨! 그럼 한 대만 더 패게 해 줘! 지금 딱 깨달음이 반쯤……!”
안 되겠다 싶어 여기저기서 우르르 달려드는 판정관들.
결국 양팔을 붙잡혀 질질 끌려가며 퇴장을 당하는 단무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승자의 모습에 잠시 침묵에 빠지는 무대 위.
“그, 엄……. 무사하니 다행이네요.”
정말 유별난 청년이다.
모용청혜는 살짝 웃음 지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 봤다.
***
일홍은 현재 기분이 무척 좋았다.
큰맘 먹고 걸었던 내기 돈이 무려 일곱 배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축하하네, 돈은 여기 있네.”
한쪽은 괴상한 별호의 낭인, 다른 한쪽은 소림사의 기재. 그리고 16강 승자를 가린 내기판.
주판알을 다 튕긴 중년인이 무척 씁쓸한 얼굴로 전낭을 ‘쿵’ 소리와 함께 책상 위로 올려놨다.
“에헤헤.”
그 묵직함에 헤벌쭉 웃어 보는 일홍.
뭐든 알아서 챙겨주는 하오문주 후계자 시절엔 그저 숫자로만 보였는데, 한번 거지 생활을 겪어 보니 이 돈이란 게 참 귀한 것이었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부러움과 질시의 시선을 뿌듯하게 받아 내는 그녀.
“그 돈으로 뭐 할 건가?”
중년인의 질문에 일홍의 머릿속엔 곧바로 사치와 향략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며 그것들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는 그녀.
그 대신 그녀는 머릿속에 ‘흑진조’와 ‘복수’란 단어를 떠올렸다.
“무기나 하나 더 장만하려고요.”
“음, 무기? 그쪽도 무인인가?”
날붙이도 안 보이고, 몸도 권법가처럼 단단하지 않아 보여 몰랐다며 중얼거리는 중년인.
“그렇게 보이는 무인이 가장 위험한 법이에요.”
유명한 무림의 격언.
사람의 방심을 파고드는 짧은 칼날이 가장 아픈 법이다. 이미 하오문에서 한번 당해 보지 않았나.
“그럼 이만.”
손에서 느껴지는 전낭의 기분 좋은 무게감.
일홍은 품속의 암기를 만지작거리며 곧바로 섬서의 흑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당과 하나쯤의 사치는 괜찮겠지라며, 길거리에서 구입한 달달한 것을 핥으면서 말이다.
“음? 어서오게.”
볼품없는 객잔에서 그녀를 맞이해 주는 평범해 보이는 노인네.
일홍은 곧바로 철전 세 닢, 은전 다섯 닢, 금전 여덟 닢을 순서대로 던지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백판(白板)을 사러 왔는데요.”
두부의 또 다른 별칭 백판.
“이미 네 번째 방문인데, 암호는 됐으니 그냥 원하는 걸 말하게.”
노인은 뭔 시덥잖은 짓이냐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은밀하고 비밀스런 분위기를 연출하다 말고 김이 팍 샌 표정을 짓는 일홍.
“그거는 완성됐나요?”
어쩌면 당문의 둘째 여식이 또 한 번 기함을 터트릴 그녀만의 두 번째 암기.
항상 한 발로는 아쉬운 상황이 많았다. 그래서 그녀는 온 사방으로 독탄과 암기를 뿌려 대던 누군가처럼 여러 가지를 준비해 볼 생각이었다.
“못 했네.”
“……예?”
한데 오늘따라 실망스런 발언을 내뱉는 흑점의 노인네였다.
돈을 이미 냈는데,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묻는 일홍.
“사정이 있었네, 독이고 흑약이고 전부 거덜나 버려서 말일세.”
“왜 그게 갑자기 거덜 나죠?”
그녀는 객잔의 탁상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대답 대신 조용히 손바닥을 내미는 노인.
이곳에서 정보는 곧 돈이다. 알고 싶으면 돈을 내란 의미였다.
짧은 한숨을 토해 내며 그녀는 은전 다섯 닢을 노인의 손 위에 올려 줬다.
“누군가가 이곳 섬서의 분량을 싹 쓸어갔네. 독탄과 소벽력탄 같은 것으로 제작해 갔다더군.”
척 들어도 위험한 것들. 뭐 나라라도 뒤엎으려고 그러나.
“그 누군가가 누군데요?”
그러자 노인은 또 손바닥을 내밀었다.
“…….”
일홍은 부들부들거리는 손으로 또다시 은전을 꺼내 손바닥 위로 쥐어 줬다. 그러자 튀어나오는 대답.
“나도 모른다네.”
“아니, 그럼 돈을 왜 받아요?”
“흑점이 모르는 수상한 놈들이란 것도 일종의 정보니까.”
“아니, 무슨…….”
하오문도 장사를 이따구로 했을까? 일홍은 몸 안에서 열이 뻗쳐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만, 생각 이상으로 은전을 챙겼으니 보답으로 해 주는 말인데.”
“……뭐죠?”
“우리 흑점 측에 사람 말을 잘 엿듣는 고수가 있어서 말일세.”
참고로 하오문에도 저런 무인이 있다. 청각을 극도로 발달시키는 무공을 익힌 고수.
“그놈들 입에서 용봉지회와 대업이 몇 차례나 언급되더군. 그리고 낭인 몇 명과 당문 고수도 말일세.”
앞의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뒤의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정보.
일홍은 살짝 굳어진 얼굴로 은전을 다시 꺼내며 뒤에서 언급된 낭인들의 이름을 물었다.
“그건 말일세…….”
그리고 그 이름들을 듣게 되는 순간 깨닫게 됐다.
아, 이거 남 일이 아니구나. 라고 말이다.
***
소림사의 떠오르는 기재, 금강권 혜승.
그리고 그의 사칭범으로 추정되는 놈이 살초를 뿌리다 내게 무참히 깨졌고, 모용청혜의 추적을 피해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이를 곧바로 무림맹에 알려 회의를 소집한 멸마대 부대주.
포획하지 못해 증거는 변색된 특수제작 장침 하나뿐이었기에, 모용청혜는 이를 메꾸고자 나를 증인으로서 이번 회의에 데려온 참이었다.
아, 정확히는 그때 식혈귀를 상대했던 나와 조하랑, 일홍, 당여혜도 함께 늙은이들이 가득한 이번 회의에 끌려오게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서류 작업을 맡겨 놨더니 갑자기 대형 사고를 쳐 버린 부대주의 행위에 머리를 질끈 싸매고 있는 적운엽.
저 양반도 볼 때마다 막 나가는 부대주 때문에 참 고통받는다 싶었다.
“대장, 저분이 소림사의 방장(方丈), 공륜대사이세요.”
심상치 않은 기도를 품은 민머리들이 무림맹 회의 한구석에 뭉쳐 있었다.
그리고 소림의 미래라고 믿고 있던 혜승이 사라진 데다, 어떤 불도한 놈이 그로 위장하여 살초까지 뿌려 댔다고 하니.
“크흠흠!”
현재 이 대화 주제와 심기가 매우매우 불편한 표정이었다.
저 사람들과는 눈 마주치면 안 되겠군.
“저쪽은 화산파 장문인이시고요.”
호랑이를 닮은 듯한 부리부리한 눈썹, 척 봐도 강골을 지녔으면서도 도복을 입고 있는 중년 무림인.
고수라는 느낌이 풀풀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저분은…….”
어딘가를 가리키는 일홍이.
파뿌리처럼 허옇게 샌 머리, 키가 멀대같이 크고 곧 죽을 것처럼 검버섯이 잔뜩 핀 노인네가 보였다.
“바로 현 무림맹주, 남궁세가의 청운검이세요.”
다시 보니 허름해 보이는 외모 뒤엔 위엄이 숨겨져 있는 듯했고, 구부정한 자세는 사실 언제든 폭발할 준비가 된 호랑이의 자세 같았다.
‘무림에선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겠군.’
몇 번이나 겪었으면서도 항상 이 꼴이다.
이게 다 겉모습이 거의 대부분인 현대 지구를 살아와서 그렇다.
그 누가 믿겠나, 저런 힘없어 보이는 노인이 사실은 수천, 수만 명도 학살할 수 있는 고수란 것을 말이다.
70화 느그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