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

10화 철저히 개발시켜주마(2)

잿빛 성의 접객실.

그대로 타닥타닥, 루비아의 귓가를 따라 장작이 타들어가는 모닥불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보인 풍경은.

“너, 납치 된 거야.”

“......?”

맞은 편 의자에 앉아 있는 북부대공과 그 옆에 서있는 호위 기사였다.

이에 그녀가 흠칫, 몸을 떨며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했다. 허나.

-덜컥..!

어찌된 영문인지 몸을 움직일 수 없었으니.

머지않아 그녀는 자신이 의자에 단단히 결박된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허나 그도 잠시.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하! 기가 찬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어차피 제게 난폭한 짓을 할 생각이죠? 에로 소설처럼!"

“......”

그와 동시에 정적이 흐르는 접객실.

곧이어 발터가 꾸깃, 미간을 좁힌 채 의자에 결박된 루비아를 가리키며 레닌에게 물었다.

“이 새끼 뭐래니?”

“글쎄요. 머리는 다치지 않았을 텐데 유감이군요.”

그 말에 발터가 머리를 긁적이며 쯧, 작게 혀를 찼다.

이거 벌써부터 머리가 다치면 곤란한데. 아직 쓸데가 많단 말이지.

그가 그리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억.

이어서 발터가 우득, 목을 풀며 지그시 그녀를 내려 보았다.

“......”

덕분에 안 그래도 큰 체격 차이가 더더욱 도드라져보였다.

그리고 그 위압감에 재차 움찔거리는 루비아.

그대로 그가 고개를 까닥이며 물었다.

“야.”

“......예?”

“다시 한 번 읊어봐.”

그 말에 루비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허나 도와줄 사람은커녕 손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상황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아니 그게....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스, 스승님이 시켰습니까?”

어느새 존댓말로 바뀐 공손한 어투.

이에 발터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짐작 가는 게 그 이유밖에 없으니까.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그도 그럴게 자신이 하는 거라고는 허구한 날 마탑 구석탱이에 박혀 밥을 축내는 게 전부.

그러니 제 스승이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라고 이러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도 잠시.

-꾸국...!

“그, 그래도 연구주제는 바꿀 생각 없어요.”

그녀가 주먹을 움켜쥐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벌써 논문 불합격만 8번째.

이에 그녀의 스승은 제발 그놈의 연구주제 좀 바꾸라고 설득했지만 그녀의 의지는 굳건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절대 양보 못해.’

설사 때려 팬다 해도 그 의지만큼은 꺾을 수 없으리라.

그와 동시에 발터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스윽...

이에 그녀가 질끈 눈을 감았다.

역시 무력으로라도 해결할 셈이로구나.

하지만 그 순간. 제 머리 위로 느껴지는 따스한 손길.

-터업.

그대로 발터가 루비아의 붉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히죽 웃었다.

그래, 앞으로 같이 일하려면 이정도 깡은 있어야지.

“합격.”

“......예?”

“합격이라고.”

그렇게 잿빛 성의 접객실.

타닥타닥, 장작이 타오르는 모닥불 불빛 옆.

그녀가 멍하니 발터를 바라본 채 두 눈을 깜빡였다.

***

루비아 페일.

남부 외곽의 작은 귀족가, 페일가문에서 태어난 그녀는 일찍이 마법의 재능을 개화한 천재 중의 천재였다.

불과 5살에 마나를 느끼고, 6살에 첫 마법을 구사했으니, 그 재능은 가히 왕도의 마법명가와 견주어도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덕분에 그녀는 최연소로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으나, 이후 그녀의 삶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문제는 바로 그녀의 출신.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으나, 변방 귀족에 불과한 그녀의 출신이 발목을 잡았다.

특히 당시의 아카데미를 비롯한 마법계는 흔히 왕도파라 불리는 파벌이 휘어잡고 있었으니, 아카데미부터 이어져온 차별은 학기 내내 그녀의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그러다 졸업 직전, 마법 대련에서 그녀가 왕도파의 리더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그녀의 차별은 말끔히 사라졌.

‘......겠냐?’

그날 이후로 차별은 사라지기는커녕. 더더욱 심해졌다.

그도 그럴게 무려 왕도파의 리더가 겨우 이름 모를 변방의 귀족 나부랭이에게 모욕을 당한 셈이었으니.

그때부터 루비아의 출세길을 말 그대로 꽉 막혔다.

본디 그녀의 주 전공은 화염마법과 공학계.

그에 따라 그녀는 붉은 마탑으로 원서를 넣어두고, 예비발령까지 확정 난 상태였으나 돌연 발령이 취소되었다.

이에 그녀는 그 이유를 요구했으나, 돌아오는 답변은 그저 내부사정이라는 대답이 전부.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전공과는 완전히 반대인 북부에 위치한 푸른 마탑으로 발령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정을 아는 라파엘이 그녀의 재능과 별개인 상황을 안타깝게 여겨 수제자로 삼았다.

하지만 제 아무리 마탑주의 도움이 있다 한들.

상황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북부는 예로부터 눈 밖에 난 마법사들의 좌천지요, 권력싸움에 밀려난 패배자들의 종착지였으니.

차라리 화염마법이 주를 이루는 붉은 마탑이라면 모를까.

푸른 마탑에서 그녀의 전공을 살린 연구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계속해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논물 불합격만 8번.

이 과정에서 스승과 여러 번 마찰까지 빚었으니, 그녀는 점차 제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푸른 마탑의 귀신의 탄생 비화.

헌데 대뜸 북부대공이라는 자가 그녀를 납치(?)하더니 다짜고짜 합격이라고 하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도저히 이해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정말로 스승님의 부탁 때문에 온 게 아니라고요?”

“그래.”

“그럼 연구주제를 바꿀 생각도 없고요?”

“그래. 니 연구지. 내 연구냐? 그건 알아서 해.”

“......”

심드렁하기 그지없는 내 대답.

이에 루비아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왜......”

여기까지 끌고 온 건지.

그러자 내가 피식 웃으며 맞은편에 결박되어 있는 루비아를 향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너, 나랑 일하나 같이 하자.”

“......일이요?”

“그래. 가져와.”

그와 함께 옆에 대기하고 있던 레닌이 서류하나를 가져오니.

그대로 내가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펼쳐봐.”

“......”

“뭐해. 펼쳐보라니까?”

이에 루비아가 제 앞에 놓인 서류와 나를 번갈아보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그럼 일단 손이라도 좀 풀어주고......”

“아. 맞다.”

이때 아차 싶더라고.

그러고 보니 얘 지금 묶여있었지.

그와 함께 내가 레닌에게 손을 풀어주라 손짓했다.

-스르륵...

그렇게 곧 그녀의 결박에 풀리자, 루비아가 눈치를 보며 천천히 서류를 펼쳐들었다.

이는 다름 아닌 ‘무언가’의 설계도.

그리고 도면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확장되기 시작하는 그녀의 동공.

“이걸...진짜로 만들겠다고요?”

그대로 루비아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엇보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는 미처 숨기지 못한 쾌감이 섞여있었으니.

이유는 간단했다.

설계도면에 그려진 기계는 마치 커다란 대공포를 연상케 하였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마력으로 구동하는 자동포탑.

그리고 이는 화염마법과 공학계를 접목한 완벽한 그녀의 주 전공.

북부에 오고 나서는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은, 심지어는 제 스승마저도 반대한 분야였다. 이어서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왜? 안 될 거라도 있나?”

“그, 그건 아니지만...아니 그전에 왜 하필 저를......”

루비아가 말끝을 흐리며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녀의 연구 분야는 자원도, 인력도 모자란 북부에서는 도저히 쓸모가 없는 분야였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히죽 웃으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너 밖에 없거든.”

루비아 페일.

과거 철혈의 여제라 불린 공학계의 천재마법사.

이것이 내가 그녀를 찾아온 이유였다.

알다시피 북부는 상시전시상황.

노스메디로 자본은 마련한다 해도 가장 큰 문제가 하나 남아있었다.

바로 봄이면 꽃가루처럼 몰려오는 마수무리와 야만족들.

‘하여간 꽃, 아니 좆같은 새기들.’

그래서 봄이 오기 전.

그에 대한 대책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눈앞의 대공포 설계도와 이를 만들 기술자.

“그래서 만들 수 있겠나?”

내가 그녀에게 건넨 대공포 설계도면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기억을 살려 만든 모조품.

그리고 그 제작자인 루비아라면 그 용도와 제작법을 생각해내는 것쯤은 간단한 일일 테니.

곧 흐음, 하고 턱을 매만지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상으로는 문제없어요.”

아니 오히려 놀랄 정도였다.

제 아무리 스케치에 불과하지만 이토록 완벽하게 제 전공과 연구 분야와 맞아 떨어질 줄이야.

그대로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멋져요. 이런 방식으로도 제 전공을 결합시킬 수 있을 줄이야.”

동시에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내가 작게 웃었다.

‘그 철혈의 여제에게도 이토록 순수한 학구열에 불타오르는 시절이 있었다니. 의외군.’

앞서 말했듯 회귀 전, 1회차에서 불리던 그녀의 이명은 철혈의 여제.

그리고 당시의 그녀는 무기에 광적으로 미친 전쟁광이었다.

아마 북부가 좆망하고 왕국 이곳저곳에서 전쟁이 일어날 시기.

이때가 바로 그간의 차별과 무관심에 찌든 푸른 마탑의 미치광이 귀신이 본격적으로 조명 받은 때였다.

그 당시 악에 바친 그녀는 기어코 단신으로 왕국으로 찾아가 그간의 연구 설계 도면을 내보이고, 이를 계기로 왕도의 지원을 받아 미친 듯이 무기제작에 몰두했으니.

그 결과, 그녀는 말 그대로 전쟁의 주역이자 화력에 미친 광기의 무기제작자로 등극했다.

과거 그녀는 이 말을 버릇처럼 달고 다니며 전쟁터를 휩쓸었다.

그야말로 딸깍, 하면 지축을 흔드는 마력포탄이 쏘아졌으니 그때마다 그녀는 우람한 포신이 뿜는 연기에 취해 황홀경에 빠지고는 하였다.

이에 왕도의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그녀의 광기는 그녀의 유년시절, 그러니까 아카데미부터 푸른 마탑까지 이어져온 차별과 핍박이 만들어낸 폭력의 산물이라 평가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어요.”

줄곧 설계도면을 살펴보던 루비아가 말했다.

“인력이랑 기술력은 어떻게든 해결한다 해도 가장 큰 문제는 재료. 이만한 기계를 만들 만한 재료가 모자라요.”

그 말에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동포탑의 주 재료는 마광석과 철광석.

허나 그만한 광석을 수입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이는 제 아무리 노스메디로 많은 후원금을 받았다 해도 턱없이 모자란 정도.

더군다난 노스메디는 이제 막 제작에 착수한 상태.

안정적인 수익원으로 자리 잡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내가 루비아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부분이라면 걱정 말거라. 충분히 해결 가능하니 말이다.”

“네? 하지만 북부는......”

돈 없잖아요.

라는 말이 그녀의 턱 밑까지 차올랐다.

북부가 가난한건 세상 모두가, 아니 심지어는 지나가는 아이를 붙잡고 물어봐도 다 아는 사실.

최근에는 뭐 이상한 약품개발로 마탑이 한창 난리긴 하지만, 대외적으로 북부는 여전히 가난하고 척박한 땅이었다.

근데 이걸 어떻게 해결한다는 건지.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내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루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처음부터 철저히 개발할 생각이다.”

“네, 넷!?”

그와 함께 루비아가 흠칫거리며 제 몸을 감쌌다.

느닷없이 왜 대공께서 이런 소리를 하시는 거지.

그와 함께 그녀의 머릿속을 타고 저번에 방에 틀어 박혀 탐닉한 모 소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북부대공의 50가지 그림자.

그 내용은 다름 아닌 북부대공과 주인공의 은밀한 성벽과 관계를 다룬 소설이었으니.

그대로 그녀의 양 볼이 급속도로 빠르게 물들기 시작했다.

‘역시 설계도면은 핑계였구나!’

그럼 그렇지. 설계도는 핑계고 진짜 목적은 내 몸이렸다!

루비아가 확신하며 맞은편의 북부대공을 바라보았다.

떡 벌어진 어깨와 짙은 흑발.

그 아래 황금빛 눈동자는 탐욕스러우면서도 어딘가 신비로웠으니.

이 음탕하기 그지없는 북부대공 같으니.

설계도면을 빌미로 나와 그렇고 그런 관계를 가지고 싶었구나!

그렇게 그녀의 망상이 가속되던 그때.

내가 처억,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처음은 역시......”

“위, 위로 시작할건가요. 아래로 시작할건가요?”

“당연한 소리를. 당연히 아래부터 시작해야지.”

“흐응, 생각보다 매니악......”

그와 함께 내가 저 멀리 설산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광산을 개발하려면 응당 아래부터 파야하지 않겠는가?”

“......네?”

“광산. 개발할거라고.”

그대로 내가 잿빛 성 뒤로 펼쳐진 눈 쌓인 산맥을 흘깃 바라보니.

그 이름은 바로 바로 북부의 숨겨진 또 다른 보물.

애쉬폴 산맥이었다.

11화 악! 광질이 너무 좋아 대공님!

북부에 위치한 애쉬폴 산맥.

사시사철 만년설이 소복이 쌓여있는 이곳은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산이 모여 북부 전체를 길게 둘러싼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

그만큼 그 산세가 높고 험하여, 평소에도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조금 달랐으니.

-처억.

애쉬폴 산맥, 이름 모를 어느 산 중턱.

오와 열을 맞춰 서있는 서른 명의 장정들.

그들은 저마다 손에 곡괭이와 삽을 들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어디서 주워온 건지 모를 노란 안전모.

북부의 장정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안전모를 착용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대로 그 끝에 서있던 사내가 우렁차게 외쳤다.

“30. 번호 끝!”

그리고 그들의 맨 앞에 서있던 검은 모피를 걸친 거구의 남성.

세간에서는 북부대공이라 불리는 발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쉬어.”

이거 생각보다 많이 모였구만.

말한 대로 다들 안전모도 제대로 쓰고 왔고.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처억, 앞으로 나섰다.

“다들 알고 모였겠지만 오늘은 광산개발에 착수한다.”

광산개발. 이것이 바로 그들이 대낮부터 애쉬폴 산맥에 모인 이유였으니.

그러나 발터를 제외한 북부의 사나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몇몇은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광산개발에 착수한다는 공고를 본 게 불과 이틀 전.

광산개발에 필요한 인력 모집. 주급 30실버.

그리하여 일단 돈을 준다고 하니 와이프의 등쌀에 못 이겨 나온 녀석들이 대부분.

그만큼 정확히 무슨 목적으로 나온 건지 아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저 그들의 귓가에는 아직도 집에서 밥이나 축낼거면 나가서 돈이라도 벌고 오라는 와이프의 외침이 아른거릴 뿐.

아무튼 그렇게 모인 그들의 앞에서 발터가 말했다.

“우선 여기서 대기하다가 작업감독이 오면 그 즉시 작업에 착수할 예정이니 모두 그렇게 알고 있도록. 그럼 작업에 들어가기 전 질문 있나?”

그러자 연신 눈치를 보던 한 녀석이 손을 들고 물었다.

“저...대공님, 원래 광산개발이라는 게 아무 산이나 판다고 되는 겁니까?”

제 아무리 자신이 평민 출신에다 못 배웠다 한들.

본디 광산개발이란 철저한 사전조사를 통해 이뤄지는 대충 그런 작업이 아닌가.

이렇게 마구잡이로 아무 산이나 판다 한들 마광석은커녕 철광석이라도 나올까.

“좋은 질문이다. 실제로 아무 산이나 판다고 광석이 나오는 건 아니지.”

동시에 발터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뒤에 있는 산은 ‘아무 산’이 아니므로 걱정하지 말라. 다음.”

“......?”

그리고 그런 단호한 발터의 말에 녀석이 물음표를 띄우며 눈을 좁혔다.

존나 아무리 봐도 뒷산에 널려있는 아무 산 중 하나인데요.

이에 북부의 사내들이 술렁거리며 속닥거렸다.

“거 아무래도 대공님께서 과로로 쪼까 맛이 간 거 같은 디 어뗘?”

“아이고...얼마나 힘드셨으면 저랬을까잉......”

“저번에 레닌님도 그랬잖소잉. 최근에 고놈의 빚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라고.”

그와 함께 그들이 측은한 눈빛으로 발터를 바라보았다.

그야 대공님께서 북부의 빚을 갚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은 북부의 모든 이가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거기다 하다못해 이젠 맨 땅, 아니 맨 산이라도 파보려는 모습에 몇몇은 눈물을 감추기까지 하였으니.

북부의 사나이들, 그들은 주군의 노고를 이해하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진정한 사나이들이었다.

“대공님. 힘들면 언제나 저희 집에 들리십쇼. 다른 건 몰라도 제 와이프가 콜하임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우리지 않습니까?”

이어서 북부의 청년이장. 발더스가 대공님을 격려하며 따스한 말 한마디를 건넸다.

그러자 발터가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존나게 고맙다. 내 새끼들아.

너희들의 걱정에 눈물이 눈앞을 가리는구나.

내 그 마음을 갸륵히 여겨 친히 보듬어 주리다.

그대로 발터가 싱긋 웃으며 까닥, 고갯짓하며 말했다.

“전원. 대가리 박아.”

“예? 아니 저희는 그냥......”

“대가리 박으라고.”

“씨이......”

그러니까 내가 콜하임티 이야기는 말하자고 했잖아.

그들이 그렇게 궁시렁 거리며 눈 바닥에 대가리를 박았다.

그와 함께 발터가 처억, 뒷짐을 지며 구령했다.

“하나에 까라면, 둘 까자. 하나!”

“까라면!”

“둘.”

“까자아아!”

옳지. 잘한다. 내 새끼들.

그냥 까라면 깔 것이지.

어디서 내 말에 토를 달아.

거기다 뭐?

과로로 맛이 가?

이 새끼들이 대공을 앞에 두고 못하는 말이 없어.

하여간 이래서 오냐오냐하면 안 된다니까.

물론 말은 그렇게 해도 그들이 발터 앞에서 이리 말하는 것부터 평소에 발터가 그들과 얼마나 서슴없이 친하게 지냈는지 짐작케끔 하였다.

“어? 팔 제대로 안 굽혀? 고립, 새끼야! 승모 고립!”

“고리이이입!”

뭐 아닐 수도 있고.

아무튼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가벼운(?) 몸 풀기를 마치고 발터가 뒷짐을 진 채 말했다.

“그래, 딱 이렇게 몸 푸니까 안 춥고 좋지?”

“......”

“대답.”

“좋습니다아아악!!”

그와 함께 터져 나오는 우렁찬 대답.

이에 발터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한다. 내 새끼들.

“좋아. 그럼 다른 질문 있는 녀석 있나?”

“......”

그대로 침묵이 흐르는 산 중턱.

하지만 그도 잠시.

그들이 누군가. 불굴의 의지를 가진 북부의 사나이들 아니겠는가.

-처억!

한 녀석이 용기 있게 손을 들었다.

그 모습에 호오, 발터가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읊어봐. 또 개소리하면 이번엔 상의 탈의하고 설산구보 조진다.”

“......!”

그 말에 다른 녀석들이 일제히 눈을 부라리며 손을 든 녀석을 째려보았다.

하지만 이미 손을 든 이상 어쩔 수 없는 노릇.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작업반장은 대공님께서 직접 하십니까?”

“......”

이에 다른 녀석들까지 전부 긴장한 채 발터의 대답을 기다렸다.

만약 자칫 잘못하면 작업하기도 전에 설산을 달려야할 판.

그러자 그대로 침묵을 지키던 발터가 저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그래. 마침 저기 오는군.”

그와 함께 사박사박, 그들의 뒤에서 한 무리의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니.

시린 은발을 자랑하는 대공의 비서, 레닌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그녀의 옆에는 웬 훤칠한 미청년과 숨을 헐떡이는 적발의 마법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헥...헥헥...이제...다...도착했나요?”

“예, 도착했습니다.”

적발의 마법사의 정체는 루비아.

이번에 광산개발을 한다기에 견학 차 들렸던 것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녀는 갯지렁이만도 못한 자신의 체력을 간과한 모양이었는지.

“흐아아악...하악...학!”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은 채.

도착했다는 레닌의 말과 동시에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쯧, 혀를 차며 말하는 미청년.

“에잉, 쯧쯔. 젊은 것이 벌써부터 빌빌 거리기는.”

물론 그리 말하는 그 역시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나이였지만, 그 말에 발터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허이고, 늙으셔서 좋겠습니다.”

“뭐, 임마?”

“아무튼 간만입니다. 거 영감 용케 안 뒤지고 살아있었네.”

이에 영감이라 불린 그가 와락 미간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저, 저저 말뽄새봐라.”

“꼬우면 대공하시든가요. 북부에 노역하는 주제에 말이 많아.”

“에라이, 써글 놈아!”

동시에 그가 허공에 지팡이를 휘두르며 긴 머리칼이 흩날렸으니.

줄곧 숨겨져 있던 그의 길쭉한 귀가 눈에 들어왔다.

“그럴 거면 내가 만든 선글라스인가 뭔가 내놔!”

“에이씨, 영감탱이가 치사하게 왜 이래! 노망났어?”

그의 이름은 루시엘 프레지아.

북부에 노역하는 엘프이자, 발터가 애용하는 선글라스를 만들어준 명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숱한 광산개발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기에.

오늘 광산개발의 감독을 맡을 작업반장으로 발탁되었다.

뭐 사실은 반쯤 그냥 끌고 온 것에 가깝긴 하지만.

그대로 휙, 발터가 그를 향해 광산 지도를 던지며 말했다.

“선글라스 대신 이거나 받으쇼.”

“떼잉, 하여간 저거 저거 대공만 아니었으면 콱...!”

하지만 그 역시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익숙한 듯 지도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잠시 뒤.

흐음, 그가 발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확실해?”

지도에 적힌 대로라면 눈앞에 보이는 산은 다름 아닌 다량의 마광석이 매장된 광산.

근데 마광석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그리 흔히 발견되는 게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터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노안이라도 왔수? 거 적혀 있잖아. 마.광.석이라고.”

“저노무 새끼가 꼭 말을 해도......”

이에 발터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하여간 그건 확실한 정보니까 믿어도 돼. 근처에 광산지네 둥지가 있긴 한데 아마 지금쯤은 여왕 데리고 이사했을거야.”

“그걸 니가 어떻게 아냐?”

그야 회귀했으니까.

발터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제 뒤에 있던 설산을 바라보았다.

설마하니 이리도 가까운 북부 근처에 마광석 매장지가 있을 줄이야.

‘그러니까 용사라는 녀석이 알케인의 무덤을 발견한 직후.’

왕도는 추가적으로 다른 유물이 있을 가능성을 고려.

주변의 설산을 싹 다 갈아엎을 것을 명했다.

무려 대연금술사 알케인이 터를 잡은 곳이었다.

그만큼 왕국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주변에는 다른 무언가 있을 거라고 예상하였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적중했으니.

놀랍게도 알케인의 주변에 있는 설산에는 다량의 마광석이 매장되어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연금술 연구를 위해서는 마광석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북부에, 그것도 만년설이 소복이 쌓인 설산에 매장되어 있을 줄이야.

그간의 북부는 그 험난한 환경 덕에 대부분은 미개척지 혹은 인적이 발길이 드문 곳이었으며, 당시의 발터는 빚을 갚고 마수와 야만족들을 막아내느라 바빴으니 아무도 이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마광석이 발견되고 나서 그나마 숨통이 좀 트였었지.’

물론 그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왕국에 있었기에 모든 수익을 받지는 못했지만, 나름 광석을 개발하고 마광석을 캐면서 입에 풀칠 정도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용사는커녕 알케인의 무덤조차 발견하기 전.’

그만큼 이곳에 마광석이 묻혀있는 사실을 아는 것은 오직 발터, 그 하나 뿐.

즉, 앞으로 광산의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북부, 그러니까 그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씨발. 할렐루야.

‘무엇보다 지금 마광석의 시세를 고려했을 때. 산 하나만 각 잡고 개발해도.....’

된다. 이건 무조건 된다.

거기다 노스메디까지 자리 잡으면?

“흐흐흐...!”

이만한 대박도 없었다.

덕분에 벌써부터 생각만 해도 짜릿한 게 손이 다 떨려올 지경.

그대로 발터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터억, 루시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됐고 그냥 나만 믿어. 무조건 있다니까.”

그리고는 발터가 짝, 박수를 치며 본격적으로 작업시작을 알렸다.

“자, 그럼 말한 대로 바로 작업 시작한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그와 함께 북부의 사내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대로 녀석들이 오와 열을 맞춰 광산으로 들어가고.

머지않아 루시엘 역시 영 미심쩍지만 어쩔 수 없이 지도를 펼쳐들고 안으로 걸어갔다.

***

그렇게 입구에 남은 것은 오직 레닌과 발터.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루비아 뿐.

이에 레닌이 고꾸라진 채 미동도 하지 않는 루비아를 흘깃 바라보았다.

“대공님, 그럼 이건 어떻게 처리할까요?”

아니면 차라리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레닌이 말했다.

그러나 발터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휘휘 손을 저으며 말했다.

“됐다. 내가 안고가지.”

“......!”

그 말에 줄곧 바닥을 기던 루비아가 움찔거렸다.

이 전개대로라면 설마 하던 공주님 안기?

하, 이거 어쩔 수 없네.

“흐흐......”

그대로 루비아의 입가 사이, 차마 참지 못한 음흉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새초롬하게 발터를 향해 제 양팔을 벌렸다.

“이, 이번만 어쩔 수 없이 허락해주는 거예요?”

그리 말하는 루비아의 볼은 추운 날씨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적발처럼 다소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러자 발터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잠시 실례하지.”

-터업.

그와 함께 발터가 거침없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어맛, 이 박력 있는 야성미.

‘캬, 대공님의 테스토스테론에 취한다!’

이에 루비아가 헤실헤실 거리며 곧 있을 공주님 안기를 기대하기 무섭게.

-처억...!

발터가 그녀의 허리를 잡은 채 번쩍 들어 제 어깨에 걸쳤으니.

그 모습이 마치 소설 속에 나오는 아름다운 공주님 안기.

라기 보다는 쌀 포대 하나를 짊어진 꼴이었다.

“.....?”

“불편하면 말하게나.”

“아니 잠깐. 아니.”

그러나 그녀가 뭐라 반박하기도 전.

쌀 포대, 아니 루비아를 짊어진 발터가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갔다.

“들어가지. 레닌.”

“예, 발터님.”

그리고 레닌이 그 뒤를 따르며 그녀의 표정이 잠시 스쳐지나갔으니.

줄곧 무표정이던 레닌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러면서 레닌이 루비아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쉽지 않을 거예요.”

“......네?”

“광산개발이요. 그게 아니면.”

그대로 레닌이 제 주군과 루비아를 흘깃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다른 거 일수도 있구요.”

그리 말하는 레닌은 묘하게 기분좋아보였으니.

그렇게 그녀는 가벼운 걸음으로 루비아를 지나쳐 앞으로 향했다.

12화 북부인은 마수를 찢어(1)

그렇게 광산에 들어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깡! 까앙...깡!

곡괭이를 내려치는 소리가 일정하게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푹, 푸욱.

삽으로 흙을 퍼 올리는 소리까지.

그러다 돌연 뚝.

연신 들려오던 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찾았쇼잉!!”

동굴 안쪽에서 우렁찬 외침이 삐져나왔다.

이에 줄곧 뒤에서 작업을 살피던 루시엘이 후다닥 달려갔다.

그러자 방금 전 인부가 파던 곳에 보이는 푸르스름한 돌.

“그래, 어디 한번 살펴볼까.”

그리고는 처억, 제 품안에서 안경을 꺼내 미간을 좁히니.

흐음, 그의 입을 따라 의중을 알 수 없는 묘한 소리가 삐져나왔다.

그대로 이리저리 푸르스름한 돌을 살펴보던 그가 조심스레 안경을 올려썼다.

“긍까 일단 판다고 파봤는디 이게 그 마광석 맞는겨?”

동시에 옆에 땅을 파던 인부가 곡괭이를 어깨에 걸친 채 물었다.

그러자 루시엘은 별다른 대답 대신.

“허어.”

하고 짧은 감탄사를 토해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마광석 맞다.”

특유의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원석.

거기다 각도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지는 색까지.

마광석이 확실했다.

그와 함께 오오, 하고 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감탄사.

“웜메, 그럼 우리 대공님께서 맞았단 소리네.”

“햐, 여윾시 우리 대공님이여~”

“근디 대공님은 이걸 우째 알았다냐. 하여튼 참 능력도 좋아잉.”

그대로 북부의 사내들이 저마나 한마디씩 거들며 수근 거렸다.

설마하니 정말 마광석이 나올 줄이야.

그리고 그 반응은 작업반장이자, 수많은 광산을 다녀본 루시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게 진짜 나온다고?”

물론 산맥의 평균적인 높이와 깊이. 주변 조건을 따져봤을 때.

마광석이 못나올 확률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마광석이 매장될 확률이 꽤나 높은 환경.

하지만 왕도의 기술자들도 수십 번 조사해야 알 수 있는 걸 북부대공이 한 번에 알아맞히다니.

두 눈으로 직접 봐도 놀라울 다름이었다.

거기다 가장 놀라운 점은 그 중에서도 특히 개발이 쉬운 산을 골라잡았다는 사실이었다.

-스윽.

그대로 루시엘이 제 앞으로 쭉 나있는 길을 바라보았다.

현재 그들이 있는 동굴의 대부분은 북부의 사내들이 파낸 게 아니었다.

물론 마광석을 채굴하기 위해 땅을 파낸 건 사실이었으나, 안쪽으로 난 길은 손도 대지 않았다.

‘즉, 그전부터 이미 나있던 길이라는 것.’

그리고 그 길을 낸 장본인은 당연히 광석지네.

광석지네. 보통 광산지대에서 거주하는 마수로, 주로 강력한 턱을 이용하여 동굴을 파내 굴을 만드는 생태를 가진 녀석들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광산개발 직전.

발터가 자신에게 설계도를 건네주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근처에 광산지네 둥지가 있긴 한데 아마 지금쯤은 여왕 데리고 이사했을거야.

실제로 그의 말처럼.

동굴 내부는 이미 광석지네의 굴로 추정되는 길이 군데군데 나있었으며, 이에 그들이 한 거라고는 적당히 길을 따라 들어와 조금 땅을 판 것에 불과했다.

덕분에 작업의 속도는 생각보다 훨씬 수월했으니.

루시엘이 재차 허어, 헛웃음을 터트리며 마광석을 만지작거렸다.

역시 될 놈은 될 놈이라는 건가.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깝쇼?”

그의 옆에 있던 인부가 물었다.

그러자 루시엘이 피식, 웃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뭘 어쩌긴 어째. 싹 다 털어야지.

“자, 모두 잘 들어라! 지금부터 인부들은 양쪽으로 갈라져 50m 간격으로 채굴을 시작한다! 파다보면 유독 푸르스름한 돌이 있을 텐데 그게 우리의 목적 마광석이다!”

그 말에 청년이장 발더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 뒤에 있는 다른 사내들을 향해 외쳤다.

“야들아~잘들 들었지라? 그짝저짝 보이는 데로 싹 다 담아부러라잉!!”

“예, 성님!!”

그와 함께 주변의 녀석들이 일제히 흩어져 저마다 곡괭이질에 박차를 가하니.

머지않아 동굴 안은 시끄러운 곡괭이 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

그렇게 한창 마광석 채광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어느새 한 쪽에 자리 잡은 루비아가 눈매를 좁히며 채광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와씨, 전완근 폼 미쳤다.”

밖은 여전히 하얀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지만, 동굴 안으로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더워지는 내부에 북부의 사내들은 저마다 웃통을 벗은 채.

힘차게 곡괭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깡! 까앙!

그리고 그때마다 불끈, 그들의 터질 듯한 근육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니.

지금의 풍경은 그야말로.

@유명북부인 근육빵빵 레전작 궁금한 오빠들@

$설산도 못 막는 뜨거운 분위기. 앗 뜨거뜨거 핫$

@터질듯한 근육 폼 미쳤다ㄷㄷ@

덕분에 루비아는 마탑의 말라깽이들과 사뭇 대조되는 북부인의 신체에 대해 심도 있게 고찰하기 시작했다.

분명 같은 인류일 텐데 이렇게 달라도 되나.

하지만 그도 잠시.

“분명 광산 체험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돌연 제 옆에서 들리는 레닌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황급히 아무렇지 않은 듯 헛기침을 했다.

크흠, 아니 그게 아니라.

“다, 당연히 그렇죠. 근데 대공님은 어디......”

“말 돌리지 마십쇼. 대공님은 잠시 옆 산에 확인할 게 있다며 곡괭이 들고 산책 가셨습니다.”

“그래요? 아, 아니 아무튼 저도 나름대로 마광석 공급에 차질이 없는지 확인하러 온 겁니다.”

그녀가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비록 방금 전까지는 다른데 정신이 팔렸지만 일단 그녀의 말은 거짓은 아니었다.

‘마광석 공급이 원활해야 설계도대로 만들 수 있으니까.’

그리고 직접 지켜본 결과.

이대로라면 마광석 공급은 문제없었다.

그렇다면 그녀 역시 곧바로 제작에 착수할 수 있을 터.

-두근두근!

그와 동시에 루비아가 연구욕에 불타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드디어 제 전공을 살릴 개발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만큼 그녀는 가슴이 설렐 수밖에 없었으며,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광산개발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흐......”

마광석만, 마광석만 있으면 드디어 크고 아름다운 대공포를!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투둑, 돌연 동굴 천장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음?”

루비아는 단순히 제 자리만 그런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곧이어 동굴 곳곳에서 드드득, 크고 작은 진동과 함께 후두둑 떨어지는 파편들.

이에 한창 작업하고 있던 다른 인부들도 하던 작업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잉? 이게 뭐시여?”

“아, 그러니까 내가 쫌 살살 치라고 했잖소잉.”

“하여간 성님은 밤에 힘도 못 쓰는 게 밖에만 나오면 뭐가 그리 신난다고 막무가내로 힘을 쓰고 고런당께.”

“웜메, 이 새끼 말뽄새 보소? 거 어디 숨구멍 하나 더 뚫어줄까잉?”

그대로 인부들이 별 대수롭지 않게 낄낄거리며 저마다 농담을 주고받았다.

기껏해야 돌 부스러기가 떨어진 게 아닌가.

이 정도로 동굴이 무너질 리도 없고.

하지만 그때였다.

-콰앙!!

꽉 막혀있던 벽을 따라 커다란 폭음이 울려 퍼졌다.

단순히 한 군데만 그런 게 아니었다.

쾅! 콰앙!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폭음.

-푸스스...!

그대로 동굴 내부는 단숨에 흙먼지가 잔뜩 피어올라 눈앞을 가렸다.

그리고 그 사이. 차르륵, 마치 매끄러운 금속이 마주치는 거 같은 불쾌한 소리가 삐져나왔다.

동시에 푸확! 흙먼지를 뚫고 튀어나온 것은 다름 아닌.

-키르르르륵!!

몸길이가 족히 2~3m는 되어 보이는 붉은 지네였다.

그 모습에 레닌이 귀찮게 됐다는 듯 작게 미간을 좁히며 처억, 루비아를 보호했다.

“조심하십쇼. 광산지네입니다.”

“네? 광산지네라면 분명......”

광산에 들어가기 전 발터가 말했던 마수의 이름 아닌가.

하지만 분명 여왕을 데리고 이사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근데 왜 지금 녀석들이 여기 출몰한 건지.

“떼잉, 하여간 고놈이 그렇지. 내 이럴 줄 알았어!”

동시에 언제 온 건지 모를 루시엘이 뒷짐을 진 채, 그녀의 옆에 서 끌끌 혀를 찼다.

당장 그 숫자만 해도 한두 마리가 아닌 한 군집.

그 모습에 루비아가 레닌과 루시엘 둘을 번갈아보며 다급히 말했다.

“지, 지금이라도 빨리 대피를 해야...!”

그러나 다급한 그녀와는 달리.

레닌과 루시엘은 어딘가 느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니 심지어 루시엘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에이씨, 한창 좋았는데 이게 뭐람.”

이에 루비아가 재차 그의 옷깃을 잡고 흔들었다.

“아, 아니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요?”

“뭐를.”

“뭐라니요. 마수가 나타났으니까 더 위험해지기 전에 다들 작업 중단시키고 대피시켜야죠!”

작업반장이라는 자가 이래도 되는 건가.

루비아가 덜덜 떨면서도 강단 있게 말했다.

그러자 루시엘이 푸핫,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위험? 누가 위험한데?”

“그야 당연히 다른 사람들......”

그대로 루비아가 북부의 사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말하려 한 순간.

그녀의 앞에 펼쳐진 풍경은 다름 아닌.

“워메! 씨부럴! 깜짝이야!”

튀어나온 광산지네의 대가리를 덥썩 붙잡고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는 북부의 사내였다.

“......?”

-콰아앙!!

아니 그 뿐만이 아니었다.

“얼레? 이거 그...지네 아니여? 광산지네! 이거 정력에 좋잖아!!”

“뭐, 뭣?! 아따, 그러네잉. 크하! 딱 대라!”

정력에 좋다는 말에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맨 손으로 지네를 잡아 말 그대로 ‘찢어버리는’ 인부들.

심지어 그 중 몇몇은 이미 눈이 돌아간 채 광산지네의 뚝배기에 곡괭이를 내려치며 그 뒤를 쫒아가고 있었다.

“햐! 이건 성님 아들내미 장난감으로 줘도 되것소잉!!”

“에헤이, 지네는 6살 때 졸업했지. 이 정도는 하루이틀가면 다 망가지지!”

“아, 벌써 그리 컸는감? 으하하하!”

그렇게 서로 담소를 나누며 지네의 턱을 꺾고, 부수고, 몸통을 역으로 접어버리는 북부의 사내들.

이에 루비아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구겼다.

“......???”

뭐지. 아니 진짜 뭐지.

그녀가 세차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들을 가리킨 채 레닌과 루시엘을 번갈아보았다.

그러자 루시엘이 터억,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광산지네 위험하지. 근데 말이야.”

“......”

“북부인은 마수를 찢어.”

광산지네. 군집을 모여 생활하며 그만큼 높은 위험도를 자랑하는 마수들이다.

그러나 장담한다.

루시엘 그가 본 가장 무서운 무리생활동물은 다름 아닌 북부인들이었으니.

“저, 저저 미친 북부인 새끼들 봐라. 아주 신났네그려.”

루시엘이 팔짱을 낀 채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역시 처음 북부에 왔을 때는 몰랐다.

왜 북부인들이 살육에 미친 전쟁광이라 불리는지.

그들은 어떻게 이 척박한 환경에 살아남았는지.

어째서 마수무리와 야만족들이 북부를 넘지 못하는지.

하지만 그 의문이 해결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크하하! 고놈 참 실하네!! 넌 담금주행이다!!”

“아, 성님! 혼자 그리 많이 잡으면 우짜요!”

보다시피 함박웃음을 지으며 천진난만하게 지네를 분해하는 녀석들부터.

“야들아~물리지 않게 조심하그라.”

“엥? 지네정도는 침 바르면 낫던디?”

“이잉. 그렇긴 하지라.”

팔뚝을 문 지네의 턱을 억지로 벌려 꺾고는 콰직, 그대로 대가리를 으깨버리는 녀석들까지.

루시엘이 그런 북부인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북부 꼴 잘~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자랑스러운 북부인들 이었으니.

대륙의 북부.

그곳은 마수보다 더 한 놈들이 살고 있는 땅이었다.

13화 북부인은 마수를 찢어(2)

동굴 안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그저 제 보금자리에 침범한 불청객을 쫒으려 했던 무고한 광산지네들은 이미 눈이 돌아간 북부인들에게 무참히 인권을, 아니 충권을 유린당하고 있었다.

그들의 연약한 독니는 북부인들의 가죽을 뚫지 못했으며, 얇은 외골격은 북부인들의 손아귀에 뜯겨 바닥을 뒹굴었다.

심지어 그 속살은 나중에 술을 담가먹겠다며 뭉텅이로 잘라 짐 속으로 들어갔으니.

-키, 키르르륵!!

광산지네가 몸을 비틀며 뒤로 물러났다.

아니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휘리릭...콰악!

“성님, 나이스!!”

북부인이 날린 곡괭이가 정확히 허리에 박히니.

키에에엑! 광산지네가 얼마 가지 못해 바닥을 뒹굴었다.

이에 눈앞의 풍경으로 바라보고 있던 루비아가 제 미간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뭔가...뭔가 뒤바뀐 거 같은데......”

분명 광산지네 정도면 위험한 마수 아니었나.

아닌가. 그냥 별 거 아닌 마수였나.

그렇게 실시간으로 루비아의 상식이 개변되고 있을 때.

“근데 확실히 좀 이상하긴 하구만.”

줄곧 루비아의 옆에 서있던 루시엘이 제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애초에 광산지네는 군집을 이루어 다니는 마수들이니 한꺼번에 여러 마리가 등장한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동굴에 난 길들은 얼핏 봐도 완전히 이소를 마친 상태.

그리 자주 오고 갔을 만큼 활발히 사용하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야 흔적이 보였으면 그가 먼저 알아차렸을 게 분명했으니까.

‘......한데 왜 하필 지금 와서?’

광산지네가 제 아무리 빡통이라 해도 기본적인 본능은 탑재한 생물이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인간이라 얕봤을지도 몰라도, 북부인이라는 엄연한 상위개체가 등장했을 때.

광산지네들은 진즉에 꼬리를 말고 도망쳐야함이 옳았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모습을 보아라.

제 동족들이 담금주가 되어가는 저 꼴에도 불구하고, 녀석들은 끝까지 맞서 싸우고 있었다.

‘마치 이곳이 마지막이라는 것처럼 말이지.’

보통 이런 경우에 세울 수 있는 가설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 버린 둥지로 돌아올 만큼 세력이 약해졌던가.

그리고 두 번째, 보다 강한 천적의 등장으로 본래 서식지에서 밀려났던가.

‘......무엇보다 여왕이 안보여.’

광산지네는 여왕을 중심으로 군집을 형성하는 마수.

그만큼 우두머리를 우선시 하는 놈들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왕으로 추정되는 개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뭐가요? 그냥 저대로 두면 될 거 같은데.”

이에 루비아가 신나게 지네를 가지고 줄넘기를 하는 북부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루시엘이 쯧, 혀를 차며 대답했다.

“조무래기들은 문제없어. 진짜 문제는 여왕이지.”

“여왕이요?”

“그래, 여왕이 등장하면 제 아무리 저놈들이라고 해도 위험해. 왕국기사단 1대대가 있어도 쉬이 못 잡는 게 고 괴물 놈이여.”

무려 한 군집의 우두머리다.

그만큼 왕도에서는 광산지네를 토벌할 때.

여왕의 유무에 따라 그 위험도를 조정했다.

여왕이 없을 경우에는 평균적으로 B~C급.

하지만 여왕이 있을 경우에는 그 위험등급이 A급이나 그 이상으로 훌쩍 뛰기 마련.

그 중 5m를 훌쩍 넘는 개체도 있었으니, 앞서 말한 대로 여왕토벌에는 최소 왕국기사단 1대대가 달려들어야 할 정도.

“그래서 광산지네를 토벌할 때는 여왕의 유무가 가장 중요한데......”

동시에 그때였다.

쿠르릉, 동굴을 따라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이에 심상치 않음을 자각한 루시엘이 재빨리 외쳤다.

“전부 고개 숙여!!”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콰아아앙!! 한쪽 벽면이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그리고 그 사이 들려오는 거대한 흉성.

[키르르르륵!!]

방금 전 다른 광산지네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커다란 울음소리였다.

그 소리가 동굴전체를 울릴 정도였으니 귀가 저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시끄러!! 이 새끼야!!”

쩌렁쩌렁한 목소리.

동시에 어딘가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에 루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뭐지. 분명 어디서 들어봤는데.

그와 함께 자욱한 흙먼지 사이.

푸확! 검고 커다란 그림자가 흙먼지를 뚫고 모습을 드러내니.

-펄럭...!

그건 다름 아닌 검은 모피코트를 걸친 채 한 손에 곡괭이를 들고 있는 흑발의 거구.

북부대공 발터 레비오르였다.

그 모습에 루비아가 재차 미간을 좁히며 황당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

대공님이 왜 거기서 나와?

분명 레닌의 말대로라면 잠시 볼일이 있다며 옆 산에 다녀온다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잠시 뒤.

“설마 볼 일이라는 게......”

에이, 아니겠지.

왕국 기사단 1대대가 달려들어도 쉽지 않을 여왕을 미쳤다고 단신으로 끌고 올까.

그러나 그러기 무섭게 이어지는 발터의 외침.

“야야! 그 여왕새끼 더 못 가게 막아!!”

“워메, 이게 여왕이여?”

“아따 대공님 여까지 몰이하느라 욕 봤소잉!!”

그 말에 허, 루비아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이해하는 걸 포기했다.

그래, 원래 북부는 다 그런갑다.

루비아가 잔뜩 신난 표정으로 여왕을 포위하는 북부인과 그 위에서 로데오를 조지는 북부대공을 보고 중얼거렸다.

“난...난 이제 모르겠다......”

***

그러니까 시간을 잠시 돌려 이제 막 동굴에 들어온 시점.

동굴에 난 길을 따라가던 내가 돌연 발걸음을 멈췄다.

흐음, 그대로 내가 주변을 살펴보며 미간을 좁혔다.

역시 예상한 대로 지금쯤 광산지네들은 벌써 둥지를 비우고 다른 곳으로 이사한 게 분명했다.

그 시기를 고려해본다면 이제 막 이소를 마무리한 정도.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광산 개발하다가 광산지네 때문에 골치 아픈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다행히 지금 들어온 광산은 이미 빈집이었지만, 광산지네는 보통 온갖 길을 다 이어두는 개 같은 생태 때문에 광산 작업 중인 동굴에 광산지네가 출몰하는 경우는 상당히 잦았다.

때문에 광산지네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는 여왕을 족쳐야 하는데 하필 여왕은 또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그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광산개발을 시작하면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데.’

이제 막 이소를 마쳤다면 다른 둥지는 기껏해야 요 근처의 산일게 분명했다.

그만큼 깊게 파지도 못했을 테고 말이지.

잠깐.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새 둥지를 찾아 깽판 한 번 치고 여왕을 조져버리는 게 낫지 않나?

-처억.

내가 그리 생각하며 멈춰 섰다.

그와 함께 내가 앞서가던 레닌을 향해 말했다.

“레닌.”

“예, 발터님.”

“잠시 옆 산에 다녀오도록 하지.”

“예? 무슨 용무라도 있으십니까?”

이에 내가 곡괭이 하나를 잡아들며 히죽 웃었다.

“그래. 이참에 술래잡기 한 타임 조지고 올란다.”

“......예?”

“그냥 가벼운 산책 정도라고 생각해.”

그 말에 레닌이 뭔 개소리냐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대공님이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인가.

그대로 레닌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오냐.”

이에 내가 손을 휘적거리며 등을 돌리고.

그 다음에는 뭐 예상한 대로였다.

잠시 옆길로 빠져 다른 산으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가 대충 여기저기 쑤시다보니까 역시나.

“찾았다. 이 앙큼한 새끼들.”

여왕과 호위로 추정되는 병정지네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더라.

그래서 나는 곧바로 곡괭이로 지네들의 뚝배기를 깨며 신나는 술래잡기를 시작했고.

그 결과 여왕을 포함한 다른 지네들은 혼비백산하며 자신들이 버린 옛 둥지까지 도망쳐온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

[키르르륵...!]

막다른 곳에 몰린 여왕이 그 거대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주춤거렸다.

이미 그 주변에는 제 부하들의 사체와 더불어.

곡괭이와 삽 따위를 든 북부인들이 제 주의를 포위하고 있었다.

곧바로 내가 말했다.

“괜히 나설 필요 없으니까 도망만 못 치게 그대로 서있어.”

“예, 알겠습니다!”

괜히 다른 녀석들이 끼어들었다가는 사상자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엔 내가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버리는 게 낫지.

내가 그리 중얼거리며 뚜둑, 고개를 꺾었다.

그러자 그 모습에 청년이장 발더스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대공님께서 친히 그리 말씀하신다면......”

“이짝도 응당 어울려드려야지.”

-쿠웅!

그리고 그가 돌연 들고 있던 삽 머리를 바닥에 내리쳤다.

이어서 자연스럽게 다른 녀석 역시 들고 있던 곡괭이나 삽 따위로 바닥과 벽을 때리기 시작했으니.

-쿠웅! 깡! 까앙! 쿵!

그와 함께 후! 마치 전사의 외침을 연상케 하는 우렁찬 외침까지.

그렇게 동굴 안은 어느새 북부의 투기장으로 변해갔다.

일명 르겐박투라.

이는 북부전통어로 ‘고귀한 전투’를 뜻하는 말이자, 그들만의 유서 깊은 전통이었다.

르겐박투라 중에는 그 누구라도 해도 제 3자의 방해가 허락되지 않는다.

오로지 투기장 안의 자들만 결투를 벌이는 신성한 막고라.

그것이 북부의 전사들이 가지는 긍지이자, 예우였으니.

발터가 히죽 웃으며 꾸국, 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 어디 한 번 간만에 몸 좀 풀어보자.

“야차 룰로 대가리들끼리 다이다이 함 까자고.”

-쿠웅...파앗!

그대로 내가 땅을 박차고 여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간만의 르겐박투라에 넘치는 도파민을 주체하지 못하고 희번득 눈깔이 뒤집혀 광소(狂笑)를 터트리니.

“크하하하하!!”

그 기세가 마치 거대한 황소와도 같았다.

이에 여왕지네가 움찔거리며 제 주변을 둘러싼 북부인들을 뚫고 피하려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마! 개쉐이야!!”

이 새끼가 감히 신성한 결투의 규칙을 어겨?

내가 꾸득, 주먹을 움켜쥔 채 있는 힘껏 여왕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그와 함께.

-콰아아아앙!!

동굴 전체를 울리는 폭음이 터지며 5m에 다다르는 거대한 여왕이 날아가 바닥에 꽂혔다.

그 모습에 쿵쿵, 북부인들이 더욱 더 열광하며 미친 듯이 동굴을 울리며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투아레 박토르!!””

북부어로 용맹한 전사들이여!

이에 잔뜩 약이 오른 여왕지네가 크게 입을 벌리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캬아아아악!!]

그러자 내가 콰악, 오른팔을 내밀어 독니를 막아냈다.

그와 함께 치이익, 살이 타는 역겨운 악취와 함께 화끈한 열감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여왕지네의 독니는 피부 겉만 찢을 뿐.

차마 두꺼운 근육까지는 뚫지 못했으니.

그대로 터업, 내가 왼손에 들고 있는 곡괭이로 쥐고 가차 없이 놈의 머리통을 찍어 내렸다.

“아가리 해!!”

동시에 콰직! 정확히 지네의 왼쪽 눈에 박힌 곡괭이.

그 공격에 녀석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이리저리 몸통을 비틀었다.

[키익, 키, 키에에에엑!!]

북부의 사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를 포함한 그들은,

전부 맨 몸으로 설산의 곰을 잡아 성인식을 치른 야생의 전사들이었으니.

그리고 그 피를 가장 진하게 물려받은, 겨울의 심장을 타고난 북부대공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연신 몸통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그때마다 쩌적, 여왕의 외골격에 금이 가기 시작했으니. 마침내.

-쩌적....카앙!

날붙이마저 막아내는 여왕의 갑옷이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이에 내가 콰드득, 여왕의 몸통과 다리를 단단히 움켜쥐고 하나씩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콱! 콰득! 우직...콰앙! 우득! 콰드득!

연이어 들려오는 파열음 사이.

[키이이이익......]

어느새 몸통 곳곳이 찢기고 그 많던 다리가 3개를 남기고 전부 바닥을 나뒹구니.

쿠웅, 여왕지네의 거대한 몸통이 무너졌다.

동시에 그 아래에는 여왕의 체액과 붉은 피가 잔뜩 뒤섞여있었다.

-저벅, 저벅.

이에 내가 천천히 여왕의 머리 앞으로 걸어갔다.

결판은 났다. 그렇다면 이제 종언을 고할 차례.

곧이어 내가 입을 열었다.

“레닌.”

그러자 레닌이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차고 있던 검을 양 손으로 건네니.

터업, 내가 검을 쥐고는 천천히 검 끝을 여왕의 아가리에 겨누었다.

그와 함께 츠츠츳, 검신을 따라 푸르스름한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르겐박투라는 전사들의 신성한 전투.

그만큼 그 마무리 또한 예우를 갖춰 단번에 상대의 숨통을 끊는 게 전통.

그대로 내가 낮게 읊조렸다.

“잘 가라.”

그와 함께 콰직. 푸르스름한 오러가 정확하게 여왕의 숨통을 끊었다.

동시에 끼이익, 여왕이 단발마의 비명을 남긴 채 부르르 몸을 떨더니.

그 말미에는 툭, 힘없이 머리를 바닥에 떨구었다.

-처억...!

그리고 내가 검을 높이 치켜들기 무섭게.

이를 지켜보던 북부인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이 동굴을 울렸으니.

바로 르겐박투라의 종료를 알리는 소리였다.

-반짝...

무엇보다 여왕의 몸통 사이 영롱하게 빛나는 무언가.

마치 진주를 연상케 하는 단(團).

그것은 다름 아닌 광산지네의 여왕 중에서도 소수의 개체들에게서만 발견된다는 내단이었다.

14화 북부의 기술력은 세계 제일(1)

본격적으로 광산개발에 착수하고 난 뒤.

대략 한 달하고도 보름 정도가 지난 지금.

항상 칙칙하기 그지없던 잿빛 성의 집무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게 감옥인지 유배지인지 당최 구별이 안 가던 그곳에서는.

최근 발터의 콧노래가 끊이지 않았다.

“돈돈돈돈~돈이 왔어요~”

당장 지금도 그랬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를 ASMR삼아 그가 의자에 편히 몸을 기댔다.

동시에 그런 발터의 탁자에는 여기저기서 온 편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편지들은 저마다 조금씩은 달랐지만, 하나도 빠짐없이 고급스런 인장과 장식이 박혀있었으니.

그 출처는 대부분 각지의 마탑 혹은 첫 노스메디 설명회 때 모인 귀족들이었다.

이 새끼들, 역시 약발 한 번 받으니까 정신을 못 차리는구만.

“자, 보자보자. 어디 보자.”

이에 발터가 연신 콧노래를 부르며 손에 집히는 대로 편지를 펼쳐들었다.

아아, 손에 집히는 게 독촉장이 아닌 편지라니.

그야말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탁자에 있는 서류는 전부 독촉장 아니면 업무 서류였던 걸 고려하면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스윽.

편지의 내용은 온갖 미사어구가 붙어있긴 했지만 대충 이번 노스메디는 잘 받았으니 다음에도 모쪼록 기다리고 있겠다는 글이었다.

거기다 다른 귀족들을 비롯한 상류층에도 추천을 해두었으니 잘 봐달라는 내용까지.

그리고 다른 편지들도 그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이대로라면 2차 주문은 물론이고 3차, 아니 5차 주문까지 받아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만큼 노스메디로 들어오는 돈은 북부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상태.

“스으으읍~”

그대로 발터가 편지를 코에 밀착한 채.

종이의 향취를 깊게 흡입했다.

어, 쒸발. 취한다. 그래그래. 이 맛이지.

거기다 그의 탁자 위에 놓여있는 목함.

그 안에는 얼마 전, 여왕 광산지네를 잡고 얻은 내단이 있지 않은가.

여왕지네의 내단.

이는 검사나 마법사를 막론하고 경지의 벽을 깰 때 유용하게 쓰이는 그야말로 정순한 기운의 집합체였다.

아무튼 운이 좋았다.

여왕지네가 몸 안에 단을 품고 있었을 줄이야.

그야말로 예상 밖의 큰 수확.

-달칵...!

그대로 발터가 한 손에는 편지를, 한 손에는 여왕지네의 내단을 든 채 재차 숨을 크게 들이쉬었으니.

그 모습이 다소 기괴해보였다.

“발터님. 마약은 안 됩니다.”

이에 줄곧 집무실에 서있던 레닌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발터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응. 나한테는 이게 마약이야.”

그러고는 그가 레닌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현재 노스메디 판매량은?”

동시에 레닌이 기다렸다는 듯.

꾸벅 고개를 숙이며 서류를 펼쳤다.

“말씀하신대로 1차 주문은 판매까지 완료되었으며, 대금은 전부 차질 없이 받았습니다. 현재는 2차 주문에 맞춰 생산량을 조절하고 있으며, 마탑의 공급설비와 작업도 이젠 완전히 자리 잡아 상당히 안정적입니다.”

“......”

“그리고 그에 대한 총 대금은 대략.”

그대로 처억, 레닌이 제 손가락 다섯 개를 펼치자, 발터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박수쳤다.

아주 좋아. 완벽해.

당장 1차 판매액이 그 정도면 예상보다 더 좋은 결과였다.

애초에 고객들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이 정도임을 감안하면 처음 발터가 계획한 대로 고급화 전략은 제대로 먹혀든 셈.

“주문량은 앞으로도 더 늘어날 거야. 그러니까 최대한 여유 있게 공급해.”

발터의 말대로 지금은 이제 막 판매를 시작함으로써 왕도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할 시기.

여기서 마탑의 인맥과 영향력을 고려하면 소문이 퍼지는 건 금방일 테니.

언제 주문량이 폭증할지 몰랐다.

그만큼 중간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쪽도 최대한 변수에 대비해두는 게 좋았다.

자칫하면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두 마리 토끼를 전부 놓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만간 왕도에도 한 번 들리는 게 좋겠군.

‘노스메디가 얼마나, 어디까지 퍼졌는지 대략적으로라도 직접 확인하는 게 좋을 테니까.’

그대로 발터가 편지를 내려놓으며 뒤에 있는 애쉬폴 산맥을 흘깃 바라보며 물었다.

“광산개발도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했지?”

“예, 현재 작업반장 루시엘님의 견해로는 제 1광산은 반 정도 개발이 끝난 상태이며, 그에 따라 철광석과 마광석은 채광 즉시 마을에 모아두고 있습니다. 그 중 일부는 루비아 양의 요청으로 마탑으로 보냈고요.”

이어서 발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다른 광산지네나 마수의 습격은 없었나?”

“있을 리가요. 대공님께서 친히 여왕의 허리를 꺾어버린 이후로는 마수는 코빼기도 안보입니다.”

아니 오히려 담금주를 좀 더 담고 싶다며 다른 광산지네는 없느냐 물어보더군요.

레닌이 담담하게 말했다.

거기다 푸른 마탑에서는 마광석을 가져오니 아주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않았는가.

라파엘이 말하기로는 애쉬폴 산맥은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데다가 원체 환경이 좋다보니 마광석의 순도가 왕도나 서부 쪽의 광산에서 나오는 것보다 높다던가.

그 말에 발터가 작게 조소했다.

‘무려 대연금술사 알케인이 터를 잡은 곳이다. 그만큼 그 품질이 좋을 수밖에.’

괜히 회귀 전에 자신을 포함한 북부인들이 땅파기에 집중한 게 아니었다.

북부의 마광석.

회귀 전에도 그 이름하나만큼은 꽤 알아주는 고품질이지 않았던가.

‘......물론 그게 왕국소유라는 게 문제였지.’

하여간 지금도 생각하면 아주 배알이 꼴리는걸 넘어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였다.

하루는 좆빠지게 콜하임을 채취하고, 하루는 허리가 꺾일 정도로 마광석을 채취했다.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수확물은 마을에 옮겨두면?

‘왕도에서 덜렁 빈 마차만 들고 오고 전부 쓸어 담아갔지.’

약초를 채취하고 광석을 모으는 데는 한 달이요.

사라지는 건 한 순간이니.

그때마다 금지옥엽키운 내 새끼들을 눈물 흘리며 보내는 기분이었다.

-아이고! 씨발, 저걸 다 팔면 얼마야!

그 돈이었으면 잿빛 성에 도금을 씌워 금빛 성으로 바꾸고도 남았을 텐데.

덕분에 매일 밤마다 악몽까지 꿀 지경이니 말 다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 내꺼.’

콜하임도 마광석도 전부 다 북부의 것.

젠장, 북부 또 너야?

아빠, 난 커서 북부대공이 될래요.

“크하하하하!!”

동시에 발터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젖혔다.

아, 이 넘치는 능력을 어찌할꼬.

그대로 발터가 뚝,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레닌, 난 돈이 좋다.”

“예. 그래 보입니다.”

레닌이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즉답했다.

과거 매일매일 다크써클 달고 살면서 죽은 눈으로 서류를 처리하던 그때와는 달랐다.

이제는 매일매일 창고에 들러 쌓인 금화를 바라보며 온화한 미소를 짓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그렇기에 난 북부가 좋다.”

“......”

그 말에 레닌이 잠시 멍하니 발터를 바라보았다.

그리 말하는 주군의 입가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었기에.

그런 황금빛 눈동자에는 진한 애정이 묻어나왔기에.

“저도 좋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북부가, 대공님이 있는 북부가 좋습니다.

레닌이 아주 작게,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도 잠시.

“아, 참. 발터님. 그러고 보니 오늘 루비아 양께서 잠시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 하던데요.”

레닌이 얼마 전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잿빛 성을 찾아온 루비아를 떠올리며 말했다.

일전에 건네준 설계도의 시제품을 만들었다고 했던가.

무엇보다 당시 루비아의 눈가 아래 짙게 내려앉은 다크써클을 보면 밤샘까지 하면서 꽤나 시간과 공을 들인 거 같던데.

“그래? 마침 잘됐군.”

예상보다 더 빠르지만 뭐 상관없나.

그대로 발터가 처억, 자리에서 일어나 레닌과 함께 방을 나서니.

그 다음 행선지는 자연스레 푸른 마탑으로 정해졌다.

***

그렇게 그들이 도착한 곳은 푸른 마탑.

이 아닌 애쉬폴 산맥 근처 설산 어딘가.

그리고 그 주변에는.

-처억...

거대한 무언가가 검은 천에 뒤덮여 자리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루비아가 말한 마도병기의 시제품.

그리고 굳이 설산까지 온 이유는 차마 마탑에서는 그 위력을 실험할 수 없었기 때문.

-야, 이눔아! 저번에 박살낸 대리석 탁자가 아직도 그대로다!

-아 거 실수였다니까!

-아무튼 무조건 나가서해! 나가서!

아직도 눈에 불을 켜고 발터와 그들을 밖으로 몰아내던 라파엘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그래도 보다시피 마도병기를 어떻게든 설산까지 옮기는데 성공했으니 이제 그 모습을 당당히 세상에 알릴 차례.

“크흠, 그럼 소개하겠습니다! 바로......!”

그와 함께 펄럭, 루비아가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은 치웠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건 검은색과 은색이 적절히 섞인 몸체와 길게 뻗은 포신.

말 그대로 대공포 그 자체였다.

그대로 루비아가 제 가슴을 피며 씩씩하게 말했다.

“북부의 자랑스러운 마도병기! 히틀러 MK-2입니다!!”

“......잠깐 뭐라고?”

3초간의 정적.

그 이후에 발터가 황급히 미간을 움켜쥐며 루비아를 만류했다.

어어, 그 이름은 안 된다.

아니 왜 하필 이름이 그건데.

“네? 목표를 타격하는 HIT, 그리고 생긴 게 꼭 딱정벌레를 닮아서 BEETLE. 합쳐서 히틀...!”

“아냐. 그거 아냐. 말하지 마. 제발 바꿔.”

그대로 발터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르며 극구 반대했다.

그런 그의 반응에 여전히 뭐가 문젠지 모르겠다는 루비아의 표정.

하지만 그도 잠시.

“아쉽지만 대공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 2안으로 바꾸죠.”

“좋은 생각이야.”

“......제 2안은 안 들어봐도 돼요?”

그런 루비아의 말에 발터가 휘휘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뭐든 히틀...그것만 아니면 상관없어.”

“그러죠. 뭐.”

그러자 루비아가 재차 크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처억, 뒤에 있는 대공포를 가리키며 외쳤다.

“그럼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발터 MK-2!!”

“......”

“탁월한 센스십니다.”

그와 함께 이제 모르겠다는 듯 반쯤 체념한 발터.

그리고 그와는 다르게 짝짝, 박수를 치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레닌.

그래, 니들 맘대로 해라.

“어때요? 멋있지 않아요?”

그대로 루비아가 볼에 홍조를 띤 채, 대공포의 포신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특히 이 크고 아름다운 포신! 설계도를 볼 때부터 생각했어요. 보기만 해도 가슴이 큥큥거리는 이 우람한 발터는 북부에, 아니 세계에 혁명을 이끌고 올 거라구요.”

“......”

“생각해보세요! 크고 아름다운 발터가! 이 발터가! 적들을 가차 없이 유린하는 모습을!”

루비아가 연신 발터를 연발하며 열변을 토해냈다.

이에 발터가 이유모를 수치심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알겠으니까. 제발 그만 좀 쓰다듬어.

설마 내가 깨워서 안 될 루비아 내면의 무언가를 깨워버린 게 아닐까.

발터가 회귀 전 그녀의 이명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사실 늦든 빠르든 북부의 전쟁광은 태어날게 아니었을까.

“혁명이라......”

그 와중에 레닌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울림이 참 좋습니다. 세계에 혁명을 가져온다니.”

무엇보다 그런 그녀의 양손에는 곡괭이와 삽이 들려있었으니.

방금 전 대공포를 고정하면서 땅을 평탄화 하는 과정에서 썼던 물건이었다.

그 모습에 발터가 허허, 헛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레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혁명이란 단어는 꼭 자제해라. 특히 곡괭이와 삽을 들고는 더더욱 말이지.”

“예?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

그 말에 발터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아니 수상하게 붉은 색을 좋아할 거 같아서 그래.

하지만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에.

“아니다...그냥 니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씨발,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발터가 이미 체념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와중, 루비아가 대공포를 발사할 준비를 마쳤으니.

“보다시피 이렇게 마광석을 통해 연료를 충전하고, 각도를 조정하면......됐다! 이제 발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서 루비아가 발터의 손을 꼬옥 잡으며 싱긋 웃었다.

“대공님. 같이 해주실래요?”

“음, 나 말인가?”

“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대공님과 같이 하고 싶었거든요.”

그대로 루비아가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참 이럴 때만 보면 얘가 커서 그 전쟁광이 된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데 말이지.

이에 발터가 그녀와 같이 대공포의 몸체에 손을 올리고.

“그럼 갑니다!”

둘이 동시에 발사 장치를 누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앙!!!

말 그대로 지축을 울리는 폭음과 함께 푸른 마력포가 쏘아졌다.

당장 그 소리만하더라도 귀가 먹먹할 정도.

그리고 그 모습에 루비아가 부끄러운 듯 발터의 손을 꽉 잡은 채 질끈 눈을 감으며 외쳤다.

“대, 대공님과 같이 가버렷!!”

“루비아. 아가리 해라.”

이 미친년이 기어코.

그 모습에 발터가 짜게 식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루비아의 눈은 이미 반쯤 돌아간 지 오래였다.

“하악, 드, 드디어...! 내 전공이....하악!!”

그대로 머지않아.

-쿠웅...콰과과과광!!!

푸른 마력탄이 저 멀리 설산에 직격하면서 그 메아리가 여기까지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우르릉, 허연 눈이 폭포처럼 쏟아져 산사태를 일으키니.

그 모습이 마치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

그야말로 인재(人災) 그 자체였다.

참으로 가공할 위력.

그렇게 중세에 일어난 오버테크놀로지급 화력에 루비아가 후욱후욱,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속사포로 중얼거렸다.

“단일구조의 우선회 32조, 회전율은 1/40 to 1/35의 포신에서 구경 88mm의 구멍을 따라 수평 반자동 슬라이딩 블록 방식의 폐쇄기가 작동. 그대로 상하각도 –3°에서 +85°로 조정된 포구초속 450m/s를 자랑하는 마력탄이 분당 15발씩 발사되다니. 이건 그야말로 신의 축복이자, 기적이니. 오오, 자애로운 북부의 여신이여. 정녕 이것이 제가 만든 발명품입니까아아아아!!”

어어, 저 미친년 막아라.

북부의 여신님이여, 아무래도 제가 도저히 깨워서는 안 될 무언가를 깨워버린 것 같습니다만.

그 모습에 발터가 그녀를 말렸다.

아니 말리려는 순간.

이미 말 그대로 황홀경에 빠진 루비아가 털썩, 자신의 두 무릎을 설원에 꿇었다.

동시에 그녀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며 외쳤다.

“북부의 기술력은 세계제이이이이일!!”

일...일...이일...

그렇게 애쉬폴 산맥을 따라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쳤으니.

과거 철혈의 여제라 불린 공학계의 천재마법사.

루비아의 첫 마도병기가 화려하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15화 북부의 기술력은 세계 제일(2)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설산 한 가운데서 한 바탕 소동이 지나간 뒤.

레닌이 발터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소감은 어떠십니까?”

그런 그녀의 말은 단순히 대공포의 위력을 지켜본 소감을 묻는 듯 했으나, 어쩐지 발터가 느끼기에는 제 손으로 깨우지 말아야할 전쟁광을 느낀 소감을 묻는 말과도 같았으니.

발터가 애써 모른 척. 짝짝, 박수를 치며 대답했다.

“훌륭하군.”

“......근데 박수는 왜 그렇게 치십니까?”

그와 함께 레닌이 평소와는 다르게 꼿꼿이 허리를 핀 채, 위 아래로 손을 마주치며 박수를 치는 주군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발터가 연신 위 아래로 박수를 치며 말했다.

“왠지 이래야 할 거 같아서.”

무기개발을 명령한 북부의 대공.

뭐가 수상하리만큼 한국의 누군가가, 정확히는 북쪽의 누군가가 연상되는 상황에 발터가 박수를 치던 손을 내리며 대답했다.

“미리 말하지만 우리의 주적은 간부기도 하지만 우선은 그 새끼들이다.”

“예? 갑자기 무슨 소리십니까?”

“있어. 그런 거.”

밥도 없어서 굶는 놈들이 뭔 놈의 풍선은 그렇게 많아서 허구한 날 처 날리고 지랄인지.

발터가 전생, 정확히는 전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와중.

“하아, 하아......”

한참동안 황홀경에 빠져있던 루비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스윽...

그런 그녀는 마치 거사를 치르기라도 한 듯, 한결 후련한 표정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그러고는 발터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좋았죠?”

그 말에 발터가 미간을 구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좋긴 뭐가 좋아. 임마.

얜 그동안 이 성향을 어떻게 숨기고 살았대.

“글쎄. 일단 넌 과하게 좋아 보인다만.”

덕분에 새삼 지금까지 그녀를 케어하던 라파엘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역시 마탑주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그리고 그런 발터의 대답에 루비아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덥썩,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네? 설마 지금 저만 좋았다는 건가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솔직히 대공님도 좋았잖아요! 같이 갈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아닌 척 하세요?”

내가 언제 너랑 같이 갔어. 이 미친년아.

그대로 발터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아니 뿌리치려 했다.

-꽈악...!

하지만 그럴수록 루비아는 더더욱 광기어린 눈을 부라리며 제 손아귀에 힘을 주었으니.

놔라. 옷깃 늘어난다.

이에 발터가 쯧, 혀를 차고는 한 손으로 번쩍 그녀를 허리를 안아들었다.

“어맛! 설마 여기서 한 번 더...”

동시에 루비아가 부끄러운 듯, 양 볼을 붉게 물들었지만.

그러기 무섭게.

푸샥, 발터가 소복이 쌓인 설원에 그녀를 메다꽂았다.

“역시 대공님도 내심 좋았....쿠확!”

“아가리하고 머리나 식혀라.”

마치 한 편의 wwe를 연상케 하는 깔끔한 기술.

그대로 탁탁, 발터가 제 손을 털었다.

이어서 그가 눈 속에 박혀 허우적대는 루비아를 뒤로 하며 대공포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인정할 수밖에 없군.”

솔직히 설계도를 건네줄 때만 해도 이렇게 빨리 시제품을 만들 줄은 몰랐다.

못해도 보름 정도는 더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점은 뭐니 뭐니 해도.

‘......그 위력.’

그러니까 단일구조가 머시기, 구경이 어쩌고 반자동이 거시기하는 부분까지는 그냥 넘어간다 치지만 방금 전 그 화력을 직접 두 눈으로 목도했지 않는가.

마력탄 한 발에 멀쩡하던 산에 산사태를 일으킬 정도였다.

<화력! 오직 더 큰 화력!>

그야말로 회귀 전 철혈의 여제라 불린 그녀의 말버릇처럼.

화력만큼은 상상이상으로 끝내줬으니.

이 정도면 마수무리와 야만족들에 대한 걱정은 잠시 내려둬도 될 거 같았다.

‘안 그래도 시기상 슬슬 골치 아플 때인데 잘됐어.’

이제 슬슬 봄이 다가온다.

봄, 온갖 생명이 태동하는 생명의 계절로, 그건 북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 말은 즉.

‘......겨울 내내 얼어 뒤지기 싫어 제 둥지에 꽁 박혀있던 녀석들이 기어 나올 시간이라는 거지.’

발터가 이맘때 쯤.

국경 근처에 질리도록 어슬렁거리던 마수무리와 야만족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구겼다.

애초에 루비아를 찾아간 것도 이 이유.

그녀의 무서운 재능이라면 북부의 국방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전이라면 잿빛 성에서 밀린 서류를 처리하다 말고 뛰쳐나가 칼질을 해야 했다 하면 지금은?

‘딸깍하면 끝.’

압도적인 무력. 그것이 유일한 해결법이었으니.

상상해보아라.

당장 지금은 시제품에 불과하지만, 장차 수많은 대공포가 국경 지대에 일렬로 쫙 깔리는 그 모습을 말이다.

거기다 루비아의 말로는 애초에 본 마도병기는 완전 자동화를 목적으로 개발하고 있으니.

추가적으로 인력을 배치할 필요도 없었다.

덕분에 마도병기의 양산화만 마무리된다면 상시 전시상황인 북부도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부분은 구태여 내가 건들지 않아도 루비아가 나서서 할 터.’

당장 대공포 한 번 쐈다고 저러는 꼴을 보아라.

오히려 내가 하지 말라고 말려도 이 악물고 만들 기세였다.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군.

발터가 그리 중얼거리며 허허,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됐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자고.

“그럼 이대로 진행해도 되나요?”

동시에 언제 일어난 건지.

루비아가 초롱초롱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러자 발터가 대공포와 그녀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하게?”

“음. 일단은 오늘 결과를 토대로 개선점 좀 뽑고, 좀 더 보완해서 최종적으로는 양산화에 맞게 수정할 부분을 수정하고, 유지할 부분은 유지해야죠. 그 과정에서 위력이 조금 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스럽게도 마광석 공급은 원활히 되고 있으니 큰 차이는 없을 거예요.”

미리 준비라도 해온 것처럼 막힘없이 술술 이야기하는 루비아.

그 모습에 내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리도 좋냐?”

“그야......!”

당연하죠! 루비아가 말을 이어나가려다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와 함께 그간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맨 처음 가문에서 천재라고 불리던 그때를 시작으로 아카데미에서 온갖 차별을 받았던 때까지.

-도대체 갑자기 왜요? 분명 저번에는 붉은 마탑에서도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잖아요!

-어허,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지. 확정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는가.

-아니. 그럼 그 이유라도 말씀해주면 안됩니까?

-아, 글쎄 내부사정 때문에 안 된다니까.

-그러니까 그 내부사정이라는 게 도대체 뭔데요!

그래, 이는 과거 아카데미의 졸업을 앞두고 돌연 붉은 마탑 발령이 취소되던 그때의 기억이었다.

그러다 결국 푸른 마탑으로 쫓겨나고, 라파엘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다시 도약하나 싶었더니만.

-이번에도 또 불합격이래요?

-그래, 미안하구나.

-아뇨. 스승님이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다 제가 모자란 탓이죠.

논문을 준비하는 족족 이상하리만큼 윗선에서 잘리던 그때.

라파엘의 서재에서 루비아가 애써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전부 다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녀석의 집안이 마법부 학장인 것도.

졸업심사관도 녀석의 파벌에 속했던 것도.

그래서 논문이 최종심사까지 올라갔음에도 매번 떨어지던 것도.

-그냥...그냥...다 제 잘못이죠.

-미안하다. 내가 힘이 없어서 내 제자까지 고생하게 만드는구나.

-사과하지 마시라니까요!

그래서 홧김에 스승님에게 화를 내버린 자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주제 하나 바꾸지 못하는 제 아집이 너무 미워서.

방구석에 틀어 박혀 폐만 끼쳤다. 병신같이.

그러다 대공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런 그의 금색 눈동자는 강렬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과거의 제 자신처럼.

-합격.

-......예?

-합격이라고.

북부의 주인이, 겨울의 심장을 이어받은 후계자가 단호하게 말해주었다.

-너 밖에 없거든.

나 밖에 없다고.

그간의 인생을 통틀어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북부대공 발터 레비오르.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인정해준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간 모두가 부정하던 자신을 받아준 사람이었다.

방구석에 틀어 박혀있던 나를 세상 밖으로 꺼내준.

“유일한 사람이잖아요.”

루비아가 고개를 숙인 채 작게 중얼거렸다.

그대로 결국 후두둑, 그녀의 눈망울을 따라 그렁그렁 맺혀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발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에헤이, 갑자기 왜 또 울고 그래.”

그러면서 그가 툭툭, 그녀의 붉은 머리칼에 묻은 눈을 털어주었다.

이에 루비아가 꾹, 입을 앙 다문 채.

슥슥, 씩씩하게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무튼 그러니까...맡겨주세요!”

절대 싱망시키지 않게 해줄텡닝깡.

그녀가 퉁퉁 부르튼 눈을 크게 뜨고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아내며 말했으니.

그 모습이 여간 귀여웠다.

“그래,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그대로 발터가 재차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에 레닌이 어쩔 수 없지만 영 불만스럽다는 눈빛으로 둘을 지켜봤지만, 우선은 넘어가도록 하자.

***

아무튼 그렇게 대망의 마도병기 발터 MK-2의 첫 시연식이 성황리에 마무리되고.

나와 레닌이 함께 설산을 내려가는 길.

줄곧 나를 뒤따라오던 레닌이 물었다.

“발터님, 그럼 이제 바로 잿빛 성으로 돌아가실 예정이십니까?”

“......”

이에 그러지. 하고 대답하려던 내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제 턱을 매만졌다.

그러고는 머지않아.

“아니. 온 김에 마을이나 잠시 들리도록 하지. 괜찮나?”

“주군님의 뜻이라면 뭐든지 따르겠습니다.”

“고맙군.”

그러면서 내가 마을 쪽으로 발길을 돌린 순간.

레닌이 이때다 싶은 눈으로 처억, 내 앞을 가로막으며 나를 마주보았다.

“고마우면 저도 머리 한 번만 쓰다듬어 주시죠.”

“......음?”

그 말에 내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안 그래도 방금 전 루비아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진다 싶었더니.

그대로 내가 아무 말 없이 레닌을 바라보았다.

시린 은발과 차갑게 내려앉는 눈동자.

그리고 한 치의 미동도 없는 무표정.

전생을 통틀어 항상 보던 그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내가 이름을 부를 때면 잠깐 동안 옅은 미소를 짓는다는 걸.

그러다 잠시 한 눈을 팔 때면 아주 미세하게, 뾰로통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는 걸.

세간에서는 그녀를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냉혈한으로 알고 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소문보다 훨씬 다채롭고 변덕스러운 여자라는 걸.

게다가 은근히 질투도 심했다.

하여간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는 부하였다.

그러면서도 애써 내색하지 않는 꼴이 보통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래, 그날 유독 차가운 겨울의 전쟁터에서도.

제 몸을 던져 대신 검에 맞아 죽어가던 그 순간에도 그랬다.

-발...터님...하마터면, 얼굴...이 상하실 뻔 하셨습니다.

-말하지 말거라.

-제가...대신 맞...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쿨럭!

-닥쳐라. 난 그딴 명령 한 적 없다.

-그럼 까짓 거...명령 불복종 한 셈 치죠?

-아무 말도 하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레닌이 한 번 입을 달싹거릴 때마다.

시린 눈발 아래. 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내렸다.

제발,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거라.

-레닌, 내 말이 들리느냐.

-예. 대공님.

-정신 차려라. 반드시 살아서 같이 돌아간다. 반드시.

-......

-레닌?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공허한 바람뿐이니.

호위 기사 레닌이 내 곁을 떠나간 마지막 순간.

그녀는 그저 내게 이름이 불렸단 사실에.

-으드득...

항상 그랬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유독 차가웠던 겨울.

그 해의 전쟁은 승리로 끝났지만, 마지막 약속은 지키지 못했으니.

-사박, 사박...

싸늘하게 굳은 그녀의 시체를 품에 안고 홀로 걸어가던 그날의 기억.

그것이 나의 수많은 후회 중 하나이라.

“됐고. 앞에 보고 걸어라. 그러다 넘어진다.”

“한 번 쓰다듬어 준다고 닳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앞에 보고 걸으래도.”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눈감고 걸어도 안 넘어집......”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

푸확, 발이 걸린 레닌이 그대로 설원에 처박혔다.

내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뭐라 했냐.”

“......”

그대로 내가 자연스럽게 레닌의 허리를 안아 올렸다.

덕분에 포옥, 그녀가 내 품에 안긴 꼴이 되었으니.

내가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신 이대로 마을까지 데려다주마. 어때?”

그와 함께 급속도로 붉게 물들어가는 레닌의 뺨.

이에 그녀가 푹 고개를 숙인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게 주군님의 뜻이라면.”

“뜻이라면?”

“따르겠...습니다.”

그녀가 애써 붉어진 뺨을 감추며 말했다.

그 모습에 내가 피식 웃으며 읏차, 그녀를 안아 올렸다.

하여간 이런 부분은 그대로라니까.

-사박, 사박...

그렇게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산길 위로.

내 발걸음 소리만이 고요히 울려 퍼지니.

회귀 전, 레닌을 품에 안고 돌아가던 그때와 같으면서도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16화 오늘도 북부는 평화롭다(1)

북부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 날이 거의 없다.

그리고 그건 오늘 역시도 마찬가지.

꺄르르, 마을의 입구를 따라 북부의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받아라!”

“야, 그건 반칙이지!”

아이들은 매일 지치지도 않는지.

서로 소복이 쌓인 눈을 뭉쳐 던지며 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어? 대공님이다!”

얼마나 뛰어논 건지.

코끝이 새빨갛게 물든 아이 하나가 저 멀리 걸어오는 발터를 가리키고 외쳤다.

이에 다른 아이들 역시 하나도 빠짐없이 그를 향해 달려갔다.

“와아아아!”

북부대공. 그가 마을에 오는 날이면 아이들은 하나같이 발터에게 달라붙은 채.

뭐가 그리 신나는지 앞 다투어 별 이야기를 다 하곤 했다.

오늘은 엄마가 스튜를 해줬다던가.

이웃집 루필과 뒷산에 놀러갔다가 걸려서 혼났다던가.

대부분은 소소한 일상이나 실없는 이야기들이지만, 발터는 그런 녀석들의 이야기에 하나하나 반응해주며 대답해주었다.

“이야, 스튜 맛있었겠네.”

“네! 엄마가 아빠한테 또 일 안가고 농땡이 치면 다음번에는 솥에 아빠를 넣어버리겠대요!”

그 말에 순간 발터가 흠칫거렸다.

이거 광산개발을 그만두면 한 가정이 박살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도 잠시.

“저런. 그럼 우리 같이 아빠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해볼까?”

“명복이 뭐예요?”

“가는 길에 곱게 가라고 빌어주는 축복 같은 거란다.”

“좋아요!”

그대로 발터가 자연스럽게(?) 제 앞을 막는 아이들을 넘어갔다.

그리고 그때.

빤히 발터를 바라보고 있던 아이가 그를 향해 물었다.

“대공님, 근데 왜 레닌 언니는 안겨있어요?”

조그마한 소녀가 줄곧 발터의 품안에 안긴 레닌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움찔, 애써 고개를 돌리고 있던 레닌의 귓가가 빨개졌다.

그러면서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이제 슬슬 내려주는 게 좋다고 말했지 않습니까.”

“거절하도록 하지.”

그러나 발터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대답했다.

“언니가 오늘따라 나랑 같이 있고 싶대.”

“아니 제가 언제...!”

“언니, 괜찮아! 나도 대공님 좋아해!”

이에 레닌이 황급히 말하려 했으나, 정작 아이들은 별 상관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주변의 다른 아이들까지.

저마다 발터의 다리아래 모여 팔을 벌리며 말했다.

“저도 대공님 좋아하는데 안아주세요!”

“그럼 나도!”

그대로 제자리에서 폴짝 뛰는 아이들.

그 모습에 발터가 피식 웃으며 제 품에 안긴 레닌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다 안으려면 손이 모자랄 거 같은데 어떻게 할래?”

“......오늘따라 짓궂으십니다.”

“그래서 싫어?”

“......”

그러면서도 싫냐는 발터의 물음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작게 고개를 젓는 레닌.

하여간 귀여운 부하라니까.

-처억.

그대로 발터가 부드럽게 레닌을 내려주며 터억, 가볍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걸로 다 해줬다?

그가 그렇게 레닌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제 발 아래 모여든 아이들을 향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래! 다 안아주마!”

“와아아아!!”

그와 함께 발터의 양 팔 가득 아이들이 매달리니.

그 모습에 레닌이 자기도 모르게 옅게 미소 지었다.

제 주군은 항상 그랬다.

밤새워 업무할 때는 웃음기 하나 없이 그렇게 진중하던 분이 마을만 내려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흔쾌히 아이들과 어울려 놀아주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할 다름이었다.

그렇게 마을의 아이들과 놀아준 게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지.

이에 마을의 어른들은 일부러 아이들과 놀아주실 필요 없다며 발터를 말리고는 했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그의 대답은 똑같았다.

“됐어. 뭐가 그리 힘들다고.”

무엇보다 마을의 아이들이 북부의 미래아닌가.

그 말에 결국 어른들도 한 발 물러서니.

제 주군은 예나 지금이나 북부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대공님?”

그리고 머지않아.

입구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익숙한 얼굴이 나왔으니.

다름 아닌 북부의 떠오르는 일꾼. 청년이장 발더스였다.

“아이고, 대공님 언제 오셨습니까.”

“별로 안 됐어. 방금?”

그대로 읏차, 발터가 제 양팔 가득 매달린 아이들은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러자 발더스가 못 말린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유, 참 올 때마다 안 놀아주셔도 된다니까...너거들도 대공님 괴롭히지 말라 그랬제!”

발더스가 아이들을 향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여전히 뭐가 그리 재미나는지.

“와아아악! 도망가자!”

재차 꺄르륵, 웃으며 흩어졌다.

그 모습에 발터와 레닌, 발더스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으니.

북부의 아이들은 오늘도 활기찼다.

“그래서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냥. 근처 지나가다 생각나서 들렀지. 불편해?”

“크하하, 불편하긴요. 온 김에 저희 집에 가서 콜하임 티나 한 잔 들고 가시죠?”

발더스가 첫 광산개발 날.

발터에게 했던 말처럼 그를 흔쾌히 초대하며 말했다.

이에 발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갔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러지.”

“거 우리 사이에 실례는 무슨! 따라오기만 하쇼!”

그러면서 그가 마을 안쪽, 따스한 분위기의 통나무집으로 안내하니.

이곳이 바로 청년이장 발더스의 집이었다.

“여보! 잠깐 나와 보쇼. 대공님 왔서라!!”

그리고 그런 그의 외침에 잠시 뒤.

달칵, 문이 열리며 단아한 차림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그녀의 옷차림은 수수했으나, 차마 그 외모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어머, 대공님? 그리고 레닌까지. 어서 와요.”

곧 그녀가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불구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둘은 집 안으로 안내했다.

동시에 발터와 레닌이 꾸벅, 작게 고개를 숙이며 들어왔다.

그와 함께 발더스 역시 집 안으로 들어오려 한 순간.

“당신은 가서 장작이라도 패고와요.”

-콰앙.

부인이 싱긋 웃으며 가차 없이 문을 닫아버리니.

“......?”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

현관에 덩그러니 남겨진 발더스가 애처롭게 문고리를 붙잡으며 그녀를 불렀다.

“헨젤? 헨젤? 아니 잠깐만...일단 나도 좀...”

그러나 돌아오는 건 싸늘한 정적 뿐.

그대로 휘이잉, 북부의 찬바람이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춥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타닥타닥, 장작불이 타오르는 따스한 내부.

헨젤이 식탁에 따뜻한 콜하임 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기껏 와주셨는데 대접할 게 이거밖에 없네요.”

“됐네. 콜하임 티라면 충분하네.”

이에 발터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달칵, 찻잔을 들었다.

그와 함께 코끝을 스치는 향긋한 냄새.

그대로 그가 차를 한 입 마시자, 입 안에 퍼지는 쌉싸름한 풍미.

그래, 이 맛이지.

곧 발터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부인이 콜하임 티 하나는 기가 막히게 내린다는 발더스의 말은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엣취!”

동시에 밖에서 장작을 패다 이제 막 자리에 앉은 발더스가 재채기를 했다.

그 모습에 발터가 콜하임 티를 들며 말했다.

“자네도 한 잔 들게나.”

“아, 예. 감사합니다.”

그대로 발더스가 호록, 제 앞에 놓인 차를 마시며 얼어붙은 몸을 녹이니.

발터가 작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요즘 마을은 어떠한가?”

“예? 요즘 말입니까?”

그 말에 발더스가 히죽 웃으며 호탕하게 대답했다.

“그야 아주 좋습니다!”

“......그래?”

그런 그의 답변에 발터가 영 미심쩍다는 듯.

눈을 좁히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발더스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이의 말대로입니다.”

그러자 헨젤이 자연스럽게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최근 마을에는 활기가 넘치고 있어요.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죠. 듣자하니 이번에 대공님께서 광산개발을 시작했다 하셨죠? 안 그래도 이 시기에는 유독 춥기도 하고 뭘 하기가 힘들거든요. 그런 와중에 대공님께서 직접 나서 일자리를 만들어주니 다들 안심하는 모양이에요. 저희도 그렇고요.”

평소라면 지금 시기에는 섣불리 사냥도 나가기는커녕.

밖에 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아 이래저래 힘든 때였다.

애초에 나간다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리하여 마을 전체가 추욱 가라앉아 조용하기 그지없었으니.

그게 이 시기 북부의 흔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주급 30실버라고 하셨죠? 다른 왕도의 귀한 분들이라면 모를까. 저희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대로 헨젤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주급 30실버.

아이들에게 허여멀건한 죽 대신 고기가 들어간 따뜻한 스튜를.

밤마다 추위에 벌벌 떠는 대신 따뜻한 난로를 틀고, 두꺼운 이불을 덮을 수 있는 돈이었다.

무엇보다 이제 곧 봄이 오면 날씨가 조금이나마 풀리고 모든 게 더 나아지지 않는가.

그러니 딱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아이들의 미소를 위해서, 한 가정에게 따스함을 선사하기에는.

따스한 봄이 오기 전, 기나긴 북부의 겨울을 버티기에는.

30실버면 충분했다.

“전부 대공님 덕분입니다.”

헨젤이 꾸벅, 발터를 향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처음 광산을 개발한다고 했을 때는 마을사람들도 내심 많이 걱정했다.

괜히 대공님께서 무리하는 게 아닌지.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남편의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비록 몸은 다소 고될 지더라도.

이 시기에 일을 하고 돈을 받는 게 어디냐면서.

남편이 씩씩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게 다 대공님 덕분이지!

그렇게 마을의 분위기는 바뀌기 시작했다.

이 시기쯤 저마다 꽁꽁 닫고 있던 창문이 열렸다.

마을 어귀에서는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맘때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워 고개를 숙이던 사내들은 당당하게 어깨를 피고 아침부터 광산으로 향했다.

오늘 하루 어떻게 버텨야 할지 고민하던 북부의 여인들은 이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시장으로 나섰다.

“전부 다 대공님 덕분입니다.”

헨젤이 재차 말하며 발터를 바라보았다.

겨울의 심장을 이어받은 명실상부한 북부의 주인.

그리고 그 누구보다 북부를 아끼는 사람.

그런 그가 있기에 북부는 오늘도 평화로울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있기에 북부는 오늘도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북부의 사람들은.

“다들 대공님을 좋아합니다.”

헨젤이 싱긋 웃으며 두 손을 모았다.

그대로 그녀가 호호, 입을 가리고 말했다.

“저희 딸내미는 벌써부터 자기가 크면 대공님이랑 결혼한다며 난리입니다.”

“뭐, 뭣? 내가 아니란 말이야?”

그 말에 발더스가 여간 충격 먹은 모양인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헨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어머, 몰랐어요? 당신이랑 결혼하고 싶다는 말은 4살 이후로 한 번도 안했어요.”

“그, 그런......”

이에 발더스가 쿠웅, 제 머리를 싸매며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난 크면 아빠랑 결혼할거야!

눈에 넣어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제 딸, 레나가 하던 말이 아직까지도 귓가에 생생한데.

이게 정녕 현실이란 말인가.

그대로 발더스가 애써 허허, 웃으며 발터를 바라보았다.

“이게 다...대공님 덕분입니다!”

분명 얼굴은 웃고 있지만 어째서 그 손아귀는 그렇게 꽉 쥐고 있을까.

뭔가 방금 전에 말했던 말이랑 느낌이 상당히 다른 거 같은데.

이에 발터가 콜하임 티를 마저 마시며 피식 웃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그와 함께 차 잘 마셨네. 발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게요? 더 있으셔도 되는데.”

“물론...입니다. 더 있으셔도..됩니다.”

표정 풀어라. 새끼야.

잘하면 한 대 치겠다?

발터가 뿌드득, 이를 악물고 말하는 발더스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아니다. 이 정도면 됐다.”

헨젤의 말대로 북부는 변하고 있었다.

느리지만 천천히 변하고 있었다.

그거면 됐다. 지금은 딱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앞으로 북부는 더더욱 변할 테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발터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등을 돌렸다.

그럼 이만 가보겠네.

그와 함께 펄럭, 그가 검은 모피코트를 입으며 밖으로 나섰다.

***

북부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 날이 거의 없다.

그리하여 언제나 그렇듯.

밖에는 새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북부는 달라졌다.

거리에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찍혀있었으며,

마을 입구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발터는 그런 북부가 좋았다.

제 아버지가 남긴 북부가,

그 어릴 적부터 자신이 나고 자란 북부가 좋았다.

“레닌, 잿빛 성으로 돌아간다.”

“예, 알겠습니다.”

그대로 레닌이 처억, 고개를 숙이며 그 뒤를 따랐다.

아니 따르려는 순간이었다.

저 멀리 마을 어귀에서 한 무리의 기사들이 걸어왔다.

“대공님, 저들은......!”

사박사박, 새하얀 설원을 가로질러오는 은빛 갑주의 기사단.

무엇보다 그런 그들의 갑옷 곳곳에는 말라붙은 피와 시린 얼음이 다닥다닥 붙어있었으니.

그들은 북부의 유일한 기사단이자, 겨울의 심장을 이어받은 자의 뜻을 따르는 병사들.

-철컥...

그대로 기사단의 선봉에 있던 검은 갑주의 기사가 발터의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처억, 그를 향해 무릎을 꿇은 채.

줄곧 쓰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기사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백발의 노기사.

곧이어 그가 고개를 숙이며 발터에게 인사했다.

“기사 폰 바이에른. 북부의 주인을 뵙습니다.”

세월의 풍파를 짐작하게 하는 새하얀 머리칼과 눈가의 깊은 주름.

그러나 그 강직한 눈빛만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으니.

그의 이름은 폰 바이에른.

수달 간의 기나긴 마수토벌을 마치고.

마침내 북부로 돌아온 기사 단장이었다.

17화 오늘도 북부는 평화롭다(2)

잿빛 성의 연회장.

그곳은 간만에 많은 이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웅성웅성.

그들은 전부 북부의 기사들.

그만큼 오늘 연회장에서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봄이 오기 전, 외부로 나가 마수의 동향을 파악하고 토벌을 나갔던 자들을 축하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그 내부는 일전의 노스메디 설명회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장작불의 온기를 벗 삼아 옹기종기 둘러앉은 그들에게서는 감탄이 끊이지 않았다.

“대, 대공님. 이거 진짜입니까?”

“이 시기에 식탁에...고기가 올라왔다고?”

그리고 감탄의 원인은 다름 아닌 제 앞에 놓인 음식들에 있었으니.

무려, 식탁에 고기가 올라와 있었다.

평소라면 콜하임 티에다 콜하임 스프, 콜하임 샐러드만 주구장창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식탁에 고기라니.

이에 기사들이 저마다 제 두 눈을 의심하며 식탁 위의 고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양만 해도 서로 한 입씩 먹고도 충분히 남을 정도가 아닌가.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에 기사들이 작게 중얼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그야 북부가 가난한건 누구보다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

그런데 이 시기에 고기가 올라왔다는 건 결국.

“......저희 결국 잿빛 성 팔았습니까?”

“아무래도 그런 거 같은데.”

“그러니까 최후의 만찬 그런 거지?”

곧 기사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주고받으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수근거렸다.

그래. 드디어 올게 왔구나.

솔직히 이 정도면 많이 버텼지.

“대공님, 그간 즐거웠습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겸허히 받아들여야죠.”

“예, 맞습니다. 게다가 누구보다 힘든 건 대공님일 텐데. 이해합니다.”

그대로 기사들이 애써 침울한 표정을 숨기고 나를 향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심지어 그 중 몇 명은 제 미간을 부여잡고 눈물을 훔치니.

그 꼴이 그야말로 모 노래의 가사처럼.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들어.

흐르지 못하게 더 활짝 웃어.

내게 왜 이러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오늘 했던 모든 말 저 하늘 위로.

한 번도 못했던 말, 울면서 할 줄은 나 몰랐던 말.

나는요. 대공님이 좋은걸.

“아아! 대공님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네!”

그와 함께 몇몇 기사들이 탕탕, 제 가슴을 치며 우렁차게 외치니.

그 모습에 내가 허허. 실소를 터트리며 이를 지켜보았다.

애들아. 제발 곱게 처먹으면 안 되겠니.

애초에 북부에서 살아남은 놈들은 전부 하나씩 나사가 빠진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어째 이놈들은 못 본 사이에 더더욱 맛이 간 모양이었다.

젊은 놈들이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동시에 한편으로는 가슴 한 구석이 짠해왔다.

녀석들, 얼마나 못 먹었으면 이럴까.

못난 대공이라 미안하다.

“그런 거 아니니까 맘 편히 처먹어라.”

그대로 내가 피식 웃으며 식탁 위에 놓인 고기를 향해 손을 까닥이며 말했다.

이번에 돈 좀 벌었다.

그래서 이거 전부 니들 먹으라고 사온거야.

“......진짜요?”

“성 파신 게 아니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내 말에 녀석들이 연신 미심쩍은 눈빛으로 고기와 나를 번갈아보았다.

이에 내가 어쩔 수 없이 먼저 푸욱.

앞에 놓인 고기 한 덩이를 나이프로 찍어들며 말했다.

“니들이 안 먹으면 내가 다 먹는다.”

“......!”

그와 동시에 세차게 흔들리는 녀석들의 눈.

무려 수달 간의 마수토벌을 마치고 북부로 돌아온 그들이었다.

얼어 뒤질 것 같은 추위 속에 살아보겠다고 굴을 파고 잠들었으며.

어떻게든 먹고 살아보겠다고 풀뿌리를 씹으며 버텨왔다.

그러다 몇 달 만에 드디어 실내에서 음식다운 음식을 마주한 것.

그대로 연회장을 따라 숨 막힐 듯 한 정적이 흘렀다.

“......”

그리고 머지않아.

우당탕탕, 녀석들이 투지를 불태우며 눈앞의 고기를 도륙내기 시작하니.

그 풍경이 말 그대로 전투식사 그 자체였다.

-콰직! 으적으적! 달그락...콰앙!

살아야한다. 살기위해 먹어야한다.

단백질. 더욱 더 많은 단백질!

곧바로 녀석들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고기를 밀어 넣었다.

“그래, 훨씬 보기 좋네.”

그런 녀석들의 모습에 내가 히죽 웃으며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다른 건 몰라도 마수토벌을 마치고 돌아온 녀석들에게 거하게 한 끼 정도는 대접하고 싶었다.

이는 내 오랜 염원이자 회귀 전에는 한 번도 지키지 못한 약속이었으니.

“모자라면 말해라. 더 줄 테니까.”

“저, 정말입니까?”

오냐. 정말이다.

그렇게 입 안 잔뜩 고기를 넣으며 눈을 반짝이는 기사들의 모습에 찌잉.

또 다시 가슴 한 쪽이 아려왔다.

에효. 얼마나 굶었으면 이럴꼬.

하여간 돈 없는 게 죄지.

동시에 내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그러니까 눈치 보지 말고 양껏 먹어.”

어차피 남겨도 쓸데없어.

이에 녀석들이 예! 우렁차게 대답하며 무참히 고기를 도륙 내니.

이거 남을 걱정은 안 해도 됐었나.

“하긴 생고기라도 씹어 먹을 놈들이니......”

그러면서 연신 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를 않으니.

그야말로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른 기분이었다.

하여간 역시 돈은 많이 벌고 봐야한다.

그와 함께 내가 옆에 앉아있던 레닌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넌 왜 안 먹냐?”

저 속도면 안 먹으면 곧 다 뺏길 거 같은데.

이에 레닌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직 대공님이 안 드셨지 않습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먹어.”

그와 함께 내가 접시에 놓인 고기를 썰어 그대로 레닌의 입에 들이밀었다.

동시에 그녀가 순간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맛있지?”

그 말에 레닌이 멋쩍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우물거렸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먹어.

이에 레닌 역시 마지못해 나이프를 들고 식사를 시작하니.

-스윽.

그제야 내가 맞은편에 앉아있는 노기사 폰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고 많았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에 폰이 싱긋, 부드럽게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폰 바이에른.

그는 내 아버지 때부터 레비오르 가와 함께한 기사로 이제 60세를 넘긴 북부의 기사 단장이었다.

“그나저나 놀랐습니다. 못 본 사이 북부가 이리도 많이 달라졌을 줄이야.”

폰이 여전히 고기와 전투를 벌이는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달그락, 차분하게 고기를 썰며 말했다.

식탁 위에 고기가 올라온 것은 당연하며, 마을은 물론 성과 마탑의 분위기까지.

모든 게 그가 기억하고 있는 북부와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 변화의 물결은 당연히 제 앞에 있는 북부의 주인, 대공이 만들어낸 게 분명했다.

그와 함께 폰이 작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다비드 님께서 보셨다면 참 좋아하셨을 겁니다.”

“그렇겠지.”

다비드 레비오르.

전대 가주이자, 내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그대로 내가 씁쓸하게 웃으며 와인 잔을 매만졌다.

-미안하구나. 발터. 내게 너무 많은 짐을 남겨두고 가는 거 같구나.

-아닙니다. 아버지. 그런 말씀 마십쇼.

-지금도 어릴 적 버릇은 여전하구나.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제 감정을 숨길 때면 오른손을 움켜쥐는 버릇 말이다.

다비드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넌 예전부터 혼자서 많은 짐을 짊어지려 했지. 그만큼 꼭 기억해줬으면 좋겠구나.

네 주변에는 혼자가 아니라고.

언제나 네 곁에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러니,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질 필요 없다고.

-명심하겠습니다.

이에 스륵, 다비드가 제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 발터의 손에 쥐어주었다.

금색문양이 새겨진 반지.

이는 레비오르 가문의 가주임을 뜻하는 증표였으니.

-그래. 앞으로는 발터, 네가 레비오르 가의 가주다.

-그럼 북부를 잘 부탁한다.

어느 깊은 겨울 밤.

그것이 나의 아버지, 다비드 레비오르가 병사(病死)하기 전.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었으니.

-꾸구국...

그대로 내가 아무 말 없이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무엇보다 그런 내 오른손에는 금색문양의 반지가 자리했으니.

머지않아 폰이 그런 나를 보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이번 원정에 대해 궁금하신 건 없습니까?”

그 말에 아. 내가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곧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를 향해 물었다.

“그래. 자네가 본 마수들의 동향은 전년도와 비교하여 어떠한가.”

마수들의 동향.

이는 봄에 마을 쪽으로 내려오는 녀석들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정보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파악하고, 그 무리가 마을에 위험이 된다고 판단할 경우.

그 수를 줄이는 게 기사단의 역할.

그만큼 정보를 파악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며, 이것이 그들의 귀환이 몇 달씩이나 걸린 이유였다.

“북쪽평원과 북서쪽 설산의 마수들은 전년도와 그 세력이나 동향은 큰 차이 없습니다.”

“다행이군.”

“한데 남쪽의 절벽지대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런 폰의 말에 내가 미간을 좁혔다.

남쪽의 절벽지대.

이는 과거 왕도와 이어지는 길목이자, 와이번들의 주 서식지였다.

“......그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그대로 폰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현재 남쪽 절벽지대 와이번들의 파벌이 나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마 우두머리의 교체가 일어난 거 같지만 몇몇 무리가 단독으로 움직이는 등 제대로 융화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정권교체가 제대로 된 거 같지는 않다?”

“예, 정확합니다.”

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보통 와이번 무리는 자신들이 인정한 강자만을 우두머리로 추앙하며 따르는 녀석들.

그런데 무리가 제대로 융화되지 않는 것으로 모아 아무래도 그 승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기존의 우두머리가 밀려난 건가?”

“그리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를 따르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따로 숨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와이번 무리의 성향은?”

내가 폰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그가 대답하길.

“그 외형으로 보아, 상당히 젊은 만큼 주변의 다른 마수들과도 힘겨루기를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먼저 공격하는 모습도 관찰되었습니다.”

“그럼 새로운 무리가 주 서식지를 벗어나 마을 근처까지 올 가능성은?”

“......상당히 높습니다.”

그 말에 흐음, 내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기존의 와이번 무리의 성향은 굳이 말하자면 보수파에 가까웠다.

딱히 마을에 큰 위험을 미치지도 않고, 제 서식지인 절벽에서 잘 나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무리는 달랐다.

아무래도 꽤나 급진적인 성향의 녀석이 우두머리로 나온 모양.

이에 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 이번 원정을 마지막으로 은퇴하겠다고 했었나?”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원체 제 나이가 나이인지라.

폰이 허허, 웃으며 새하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머지않아.

“폰 바이에른 경.”

“예, 대공님.”

“미안하지만 자네의 은퇴는 잠시 보류해야겠네.”

내가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자네가 마지막으로 할 일이 생긴 거 같아서 말이지.”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노련한 그가 꼭 필요했다.

동시에 그런 내 말에 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예? 소신이 할 일이라니 그게 무슨......”

“별 거 아냐.”

그대로 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새 와이번 놈들 기강 좀 잡자 이거지.”

남쪽 절벽 지대.

오래 전, 왕도와 북부를 잇는 유통로였지만, 지금은 와이번이 점거하고 있는 그곳. 노스로드.

이제는 그곳을 되찾을 때가 왔다.

18화 노스로드 탈환전(1)

현재 북부에서 왕도로 가는 길은 단 하나.

하지만 그마저도 산맥을 빙 돌아서 가야하기에 상당히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그리고 이는 안 그래도 척박한 북부를 더욱 더 고립시키는 큰 원인이었다.

때문에 전 북부대공, 그러니까 아버지 때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이에 대한 고민이 끊이지 않았다.

당장 회귀 전,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당시의 북부는 한창 콜하임과 마광석 등으로 왕도와 교류가 활발해지던 시기.

사실 교류라기보다는 수탈이라는 말에 가까웠지만, 어찌됐든 나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추진한 게 일명 노스로드 계획.’

노스로드(north road).

말 그대로 북부와 왕도사이에 유통로를 잇는 계획으로.

나는 앞서 말한 콜하임과 마광석 유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음 이유를 삼아, 왕도에게 정식으로 공문을 보냈다.

하지만 왕도가 내 말을 넙죽 받아줄 리가 없으니.

북부로 들리는 왕도의 상인 녀석들에게 제발 좀 잘 봐달라고 돈 좀 먹이고, 다른 귀족 놈들까지 찾아가면서 온갖 발품을 팔았다.

‘개 같은 새끼들. 말 한 번 전해주는데 뭘 그리 뜯어 가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주 날강도새끼들이 따로 없었다.

아무튼 그 결과, 다섯 번째로 공문을 보냈을 때.

처음으로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하여간 제갈량도 세 번 설득했는데 난 무려 다섯 번을 설득했다.

그야말로 오고초려(五顧草廬).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제안한 게 바로.

‘남쪽 절벽지대의 개발.’

오래 전, 북부의 기록에 따르면 북부는 대륙과 교류하기 위해 남쪽 절벽지대의 길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게 불가능 했으니.

바로 와이번 무리가 그곳이 터를 잡은 게 화근이었다.

그나마 다른 마수라면 모를까.

공중형 마수인 와이번을 상대로 길목을 유지하는 건 큰 피해가 발생했으며, 그 결과 남쪽 절벽지대는 암묵적으로 봉쇄.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었다.

그런데 만약 남쪽 절벽지대만 다시 활용할 수 있다면.

이는 아버지 때부터 이어져 온 북부의 커다란 숙원이었다.

그리고 이 숙원이 드디어 행해졌으니.

왕도에서는 내 말을 듣고 무려 ‘용사’와 군대를 파견해주었다.

그리하여 북부에는 용사를 필두로 한 와이번 토벌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는 뭐 두말 할 필요도 없지.’

왕도의 전폭적인 지원과 용사라는 최강의 창.

이로 인해 북부는 노스로드를 탈환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아,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씨발, 그 와중에 사용료를 챙겨갈 줄이야.’

그때 느꼈다.

아. 장사는 이렇게 하는구나.

웬일로 용사라는 거물을 지원해주나 싶었더니, 그걸 빌미삼아 돈을 뜯어갈 줄이야.

‘하여간 용사 그 새끼가 북부에 올 때 마다 꼭 하나씩 일이 터진다니까.’

알케인의 무덤부터 노스로드까지.

녀석으로 인해 북부가 입에 풀칠이라도 한 것도 사실이지만, 녀석으로 인해 북부는 온갖 데 돈을 뜯겼으니.

용사. 그 존재는 내게 있어 그야말로 애증의 존재가 따로 없었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회귀 전과 달리 지금은 노스메디와 마광석이 전부 내 손에 있는 이상.

‘노스로드 개발 사업은 늦든 빠르든 어차피 무조건 진행시켜야 했을 일이다.’

추후 노스메디와 마광석의 유통을 생각하면, 노스로드는 무조건 뚫어야한다.

아니 오히려 빨리 뚫으면 뚫을수록 그만큼 북부는 살기 좋아진다.

“그래서 그 시기를 언제로 잡느냐가 가장 큰 문제였는데......”

마침 이리도 좋은 건수가 들어왔을 줄이야.

내가 어제 연회장에서 폰이 했던 이야기를 상기했다.

-현재 남쪽 절벽지대 와이번들의 파벌이 나뉜 것으로 추정됩니다.

와이번 무리가 단단히 결속되어 있던 때라면 모를까.

파벌이 나눠 혼란스러운 시기라면 현재 북부의 전력만으로도 가능성 있다.

그대로 내가 히죽 웃으며 옆에 있는 레닌을 바라보았다.

“레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

그리고 그런 레닌은 웬 양털 가죽을 뒤집어쓴 채.

차갑게 내려앉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그녀가 이미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메에-”

그 모습에 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니, 그런 내 주변에는 레닌은 물론이며 다른 기사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양털 가죽을 뒤집어쓰고 설원에 엎드려있었다.

아,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대공님. 이거 진짜 맞습니까?”

이에 양털 가죽을 뒤집어쓰고 엎드려있던 기사 하나가 물었다.

그러자 내가 양머리를 단단히 고정하며 대답했다.

“다른 좋은 방법 있으면 말해봐.”

“......”

“없잖아.”

느닷없이 북부의 기사단이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전부 와이번 무리에 숨어들어 기습하기 위함.

여기서 와이번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는 설원지대에 서식하는 양이었으니.

이를 통해 남쪽 절벽지대에 위치한 와이번의 둥지까지 잠입할 계획이었다.

얼핏 들으면 개소리 같지만 놀랍게도 이는 회귀 전에도 사용했던 유의미한 전략.

왕도가 놀라고 용사가 경악한 전략!

그게 바로 일명 ‘아기 양’ 작전.

줄여서 쉽(sheep)새끼였다.

“그래도 이건 좀......”

“앞으로 대답은 메-로 한다. 알겠나?”

“......메에.”

이에 녀석 또한 한숨을 푹 내쉬며 메에-대답하니 그야말로 양 때가 따로 없었다.

니들이 먹인 고기가 얼만데 밥값은 해야지 않겠냐.

그대로 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무작정 들어가서 전멸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잖아.”

그건 맞는 말이지.

근데 와이번이 들고 날아가다가 눈치 까고 놓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기사하나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했다.

새끼. 좋은 질문이다.

이에 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쩔 수 없다. 실족사 하는 거지.”

“......”

“그러니까 뒤지기 싫으면 안 들키게 처신 잘하라고.”

그러자 설원을 따라 잠깐의 정적이 흐르더니.

녀석들이 앞 다투어 메에-메에-.

말 그대로 살기위해서 필사적으로 양 울음소리를 흉내 냈다.

봐봐. 하면 잘 할 수 있잖아.

그 모습에 내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거 성공하면 양, 실패하면 송장 아닙니까.

그렇게 북부의 기사단들이 혼신을 다해 양 무리를 연기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설원의 기류가 바뀌지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펄럭...!

저 위에서 날개를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크르륵, 낮은 흉성이 울려 퍼지니.

와이번 무리의 등장이었다.

동시에 내가 다른 녀석들을 향해 재빨리 신호했다.

“메에, 메, 메에에, 매.”

레닌을 포함한 1소대와 2소대는 좌우로.

나머지는 나를 따라 중앙으로 흩어진다.

그러자 메에-. 다른 기사들 역시 샤샤삭, 양 가죽을 뒤집어쓰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파앗!

그리고 그 모습이 마치 와이번에 놀란 양 무리가 혼비백산하며 도망치는 꼴과 같았으니.

키에에엑! 와이번들이 하나 둘 씩 궤도를 틀며 양, 아니 양인 척하는 기사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메에에우워워워어-!”

그와 함께 구슬프게 우는 한 녀석.

그야말로 심금을 울리는 처량한 소몰이창법.

아니 이 경우에는 양몰이 창법인가.

그 목소리에 드디어 와이번 하나가 콰악, 그를 집어 날아드니.

완벽하기 그지없는 첫 쾌거였다.

너? 재능 있어.

그리고 그를 시작으로 기사들이 하나 둘씩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곧이어 덥썩, 레닌에 이어 나 역시 와이번의 발톱에 붙들려 하늘을 날았다.

-부웅...!

그렇게 북부의 설원.

휘이잉,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양 때가 가득했던 그곳에는 황량한 바람만이 불어오니.

메에에-저 멀리 하늘을 따라, 어딘가 슬퍼 보이는 양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펄럭, 한참동안 상공을 날던 와이번들의 날개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그러고는 와이번들이 하나 둘씩 잡고 있던 양들을 바닥에 내던졌다.

-휘익..,털썩!

그곳은 다름 아닌 일종의 식량저장고.

양의 경우, 발톱으로 낚아채 날아오는 과정에서 기절하기 때문에 따로 죽이지 않고 한 곳에 모아두는 와이번의 습성을 이용한 전략이었다.

-펄럭, 펄럭...

그렇게 다시 멀어지는 와이번의 날갯짓 소리.

그리고 그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때가 돼서야.

으어어, 양 무리 사이에서 기괴한 신음소리가 삐져나왔다.

-우득, 우드득! 빠득...

그대로 마치 좀비무리를 연상케 하듯.

이리저리 온 몸을 비틀며 일어나는 북부의 기사들.

곧 그들이 저마다 벽을 붙잡고 팔과 허리를 토닥였다.

“아이구, 삭신이야.”

“빨간 와이번 그 새끼 얼굴 기억해뒀다. 이 새끼 날아가면서 뭔 놈의 곡예비행을...!”

“허리가...허리가 안 펴져...”

마치 작은 동굴을 연상케 하는 와이번들의 식량저장고 속.

녀석들이 한 마디씩 하며 잔뜩 굳어있던 몸을 풀었다.

그리고 그 중 유독 큰 양 가죽.

-퍼억...콰앙!

내가 뒤집어쓰고 있던 양 가죽을 내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이어서 우득, 내가 고개를 꺾으며 크게 기지개를 폈다.

“다들 괜찮나.”

회귀 전에도 한 번 겪어봤지만 역시 두 번 할 짓은 안 되는군.

내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굳은 팔을 휘둘렀다.

이에 레닌을 포함한 다른 기사들이 처억,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예, 모두 문제없이 도착했습니다.”

다행히 중간에 들켜서 떨어진 놈은 없는 모양이다.

역시 쉽새끼 작전이야.

성능 하나는 확실하단 말이지.

동시에 내가 다른 양 가죽을 가리키며 물었다.

“준비해 온 물건은?”

“문제없습니다. 바로 준비할까요?”

“그래.”

그와 함께 기사들이 자신들이 뒤집어 쓴 양 가죽 사이에서 투웅, 하나 둘 씩 뭔가를 꺼내드니.

이는 다름 아닌 통나무폭탄.

술 따위를 담을 때 쓰는 오크통에 화약을 채운 뒤, 푸른 마탑의 기술력을 융합해 폭탄으로 개조한 마탑 특제 폭탄이었다.

그대로 이곳저곳에 배치되는 마탑제 폭탄.

둥지에 잠입한 후 작전은 간단했다.

미리 준비한 폭탄을 설치.

그대로 잠입조가 폭탄을 터트려 와이번들이 혼란에 빠지면?

미리 절벽 위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단이 철제그물을 펼쳐 와이번을 퇴로를 막은 후.

나와 다른 기사단은 본대와 합류에 우두머리를 토벌한다.

곧 폭탄설치를 마친 기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무장을 확인하고, 레닌이 내게 보고했다.

“폭탄의 숫자는 총 20개. 이 정도 양이라면 혼란을 야기하기에는 충분합니다.”

“좋아. 그럼 이대로 신호가 올 때까지 대기한다.”

“예, 알겠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예정대로 폰이 이끄는 기사단이 남쪽 절벽지대로 오고 있을 터.

이제 남은 일은 이곳에서 대기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대략 1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삐이이이-!

절벽을 가득 울리는 소리.

폰 경이 부리는 하얀 매의 울음소리가 확실했다.

그대로 삐이이이, 다시 한 번 울리는 울음소리.

총 두 번의 매 울음소리.

폰이 이끄는 기사단이 도착했음과 동시에 작전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분명했다.

이에 처억, 내가 다른 기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치이익...

그와 함께 폭탄에 불을 붙으며 심지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마침내 폭탄이 터지기 직전.

모든 준비를 마친 내가 크게 외쳤다.

“전원, 충격에 대비하라!!”

동시에 콰아아앙, 미리 설치해둔 폭탄이 터지며 커다란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 충격에 우르릉, 절벽 안쪽에 위치한 동굴이 무너져 내렸다.

그대로 곧 절벽 전체가 크게 울리며 지진을 연상케 하는 진동이 와이번의 둥지를 강타했으니.

-크르라라락!!

느닷없이 둥지를 강타한 폭탄에 놀란 와이번들이 혼란에 빠져 이리저리 날아올랐다.

하지만 폭발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콰광! 콰아앙! 연신 터지는 폭발음 사이.

-처억.

나와 레닌이 언제 챙겨왔는지 모를 선글라스를 내려쓰며 당당히 걸어 나왔다.

상남자는 폭발에 뒤돌아보지 않아.

그대로 충격에 대비하고 있던 기사단들이 무장을 마치고 말했다.

“대공님. 기사단 전원 준비 완료했습니다.”

“좋아.”

이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선글라스 대신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들며 외쳤다.

“전원, 돌격하라!!”

그와 함께 무장한 기사단들이 앞을 가로막는 와이번들을 향해 돌격하니.

본격적인 노스로드 탈환전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19화 노스로드 탈환전(2)

-크롸라라락!

그대로 북부의 남쪽 절벽지대를 따라 와이번들의 흉성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계곡사이에서는 계속해서 검은 연기와 흙먼지가 피어올랐으며, 그 사이 와이번들이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상황은 절벽 아래를 내달리는 발터와 기사단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방에 와이번 출현! 숫자는 총 셋!”

선봉에 선 발터가 크게 외치며 경고했다.

동시에 뒤에 있던 기사단들이 일제히 방패를 들어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곧이어 발터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꾸구국, 주먹을 움켜쥐고는.

-콰아앙!!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와이번의 얼굴을 있는 힘껏 가격했다.

이에 우드득, 녀석의 턱이 돌아가며 균형을 잃은 와이번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그대로 와이번이 몸을 비틀며 버둥거렸으나, 곧바로 뒤에 있던 기사단들이 방패를 밀어 신속히 녀석을 떨어트렸다.

“허어, 볼 때마다 말이 안 나온다니까.”

“내 말이.”

그 모습에 몇몇 기사들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본디 선봉에 서는 것은 방패병이오.

맨 뒤에는 대장이 위치하는 게 일반적인 진형이었다.

하지만 북부의 기사단은 조금 달랐다.

선봉에 서는 것은 언제나 발터.

그리고 그 옆에는 항상 그의 호위기사 레닌이 자리했다.

“레닌! 전방에 둘, 왼쪽에 하나!”

“알겠습니다. 왼쪽은 제가 맡겠습니다.”

그대로 발터가 터업, 맨 손으로 날아드는 와이번의 목덜미를 잡아채고 양쪽 절벽에 처박아버렸다.

-콰드드득...콰아앙!!

동시에 채앵, 레닌이 검을 뽑기 무섭게 은빛 섬광이 번쩍이니.

서걱, 날개가 잘린 와이번이 휘청거리며 맥없이 떨어졌다.

덕분에 뒤에 있는 기사단들은 방패를 들고 선봉에서 격추시킨 와이번을 마무리 하는 게 대부분.

원래대로라면 비효율적이기 그지없는 전략일 테지만, 발터와 레닌.

단 둘만의 압도적인 무력만으로도 북부의 기사단은 대륙의 그 어느 진형보다도 빠르게 절벽을 돌파하고 있었다.

하긴 대공님은 항상 그래왔다.

전쟁터에서는 단 한 번도 뒤로 물러난 적 없었으며, 항상 그 선봉에 서 기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그야말로 타고난 무재의 재능.

그 무력과 카리스마에는 언제나 좌중을 압도하는 마성과도 같은 힘이 있었다.

당장 지금도 마찬가지.

“제 1열 방패병 산개!”

“예! 알겠습니다!”

발터의 명령에 후열에 있던 기사단들이 재빨리 방패를 치켜들며 좌우로 갈라졌다.

그대로 철커덩, 절벽 한 가운데를 가로막은 장벽.

곧바로 타이밍을 가늠하던 발터가 방패를 들며 외쳤다.

“제 2열. 공격!”

그와 함께 푹! 푸욱! 푹! 2열에 있던 기사단들이 일제히 앞으로 창을 뻗었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팔랑크스를 연상케 하는 대형.

이에 절벽 아래, 저공비행하던 와이번들이 날카로운 창끝에 꿰뚫려 단숨에 길이 열렸다.

“계속해서 진격하라!”

곧 발터를 선두로 한 기사단들이 열린 길을 따라 달려 나가니.

그들의 기세는 파죽지세와도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발터와 기사단들이 거의 절벽의 끝까지 다다른 순간.

-처억.

그대로 발터가 절벽 위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런 절벽 위에는 이미 철제그물이 펼쳐져 와이번들이 한데 엉켜있었으니.

폰이 이끄는 기사단이 해낸 모양이었다.

덕분에 대부분의 와이번은 위쪽에 묶여있었고, 발터가 있는 아래쪽에는 비교적 소수의 와이번만 남아있었으니.

이대로만 간다면 절벽을 돌파해 본대와 합류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키에에엑, 그의 머리 바로 위.

혼란에 빠진 와이번들이 제멋대로 날아들던 중, 서로 부딪혀 균형을 잃고 떨어졌다.

그 수만 해도 당장 대 여섯 마리.

거기다 그 충격에 주변의 절벽이 무너지며, 그들의 머리 위로 커다란 돌무더기가 쏟아져 내렸다.

-쿠구궁...!

이에 쯧, 발터가 미간을 구기고 혀를 차며 외쳤다.

“전원, 속도를 올려라!”

길을 내가 뚫는다.

그와 함께 츠츠츳, 발터의 검신을 따라 푸른 아지랑이가 일렁이니.

흔히 검기라 불리는 기운이었다.

그대로 점차 진해지는 푸른 아지랑이.

그리고 돌무더기가 쏟아지기 직전.

꾸드득, 발터가 양손으로 힘껏 검 손잡이를 부여잡으며 휘둘렀다.

‘레비오르 검식 제 1식. 설파.’

-콰아앙...!

그와 함께 발터의 검로(劍路)를 따라, 넘실거리는 푸른 기운이 단번에 방출되니.

마치 커다란 파도를 연상케 하는 검기가 펼쳐졌다.

그 공격에 쏟아지던 돌무더기는 물론이며, 균형을 잃고 떨어지는 와이번까지.

-쿵! 쿠웅...콰앙! 쿠웅!

궤도가 뒤틀려 아슬아슬하게 기사단들의 옆으로 떨어졌다.

덕분에 발터를 제외한 기사단들은 무사히 절벽을 돌파하는데 성공.

하지만 아직 한 명, 발터가 남았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크르르륵, 돌무더기와 와이번 무리에 가려져있던 유독 덩치가 큰 검은 녀석 하나가 맹렬한 기세로 발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발터님!!”

이에 레닌이 황급히 발터를 향해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려 했으나, 이미 한 발 늦은 타이밍.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절벽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

“당장 대공님께 떨어지지 못할까!”

그대로 두두두두, 검은 산양을 탄 흑갑의 기사가 레닌을 지나쳐 와이번을 향해 돌진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는 용감한 기개.

그 기세에 흠칫, 발터를 향해 날아들던 와이번이 주춤거리니.

“걸렸다. 이 새끼야!”

-철컥...!

발터가 히죽 웃으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두 손에 쥔 검을 들어 와이번을 향해 올려 베었다.

이에 피잇, 날카로운 검이 달려들던 와이번의 오른쪽 눈가에 긴 검상을 남겼다.

그와 함께 펄럭, 상처를 입은 검은 와이번이 급하게 날갯짓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대공님, 잡으십쇼!”

동시에 흑갑의 기사가 산양을 몰아, 발터를 향해 손을 뻗으니.

터업. 발터가 그 손을 잡은 그때.

-휘익!

흑갑의 기사가 제 손을 끌어당겨 무사히 발터를 태운 채 절벽을 벗어났다.

그러기 무섭게 와르르르, 돌무더기가 쏟아지며 뒤를 막으니.

하마터면 조금만 늦었으면 꼼짝없이 절벽에 갇힐 뻔 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워워, 기사가 산양을 진정시키며 발터를 바라보았다.

“대공님, 괜찮으십니까.”

그러면서 그가 투구를 벗으니.

그 정체는 바로 폰 바이에른 경.

본대를 이끌고 온 북부의 기사 단장이었다.

“그래. 덕분에 무사하네.”

그대로 발터가 피식 웃으며 제 검을 집어넣었다.

역시 믿고 있었다.

그와 함께 펄럭, 발터가 폰이 건넨 북부대공의 상징, 검은 모피코트를 걸치며 말했다.

“그래서 현재 전황은?”

그 말에 폰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즉시 대답했다.

“예, 대공님의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었습니다. 보다시피 대부분의 와이번은 꼼짝없이 절벽에 갇혀 제 진형을 갖추지 못한 상태. 이제 우두머리만 찾아 해치우면 나머지 와이번 무리는 손쉽게 제압 가능합니다.”

“우두머리라면 혹시 방금 전 녀석인가?”

발터가 절벽에서 빠져나오기 직전.

제 자신이 오른쪽 눈가에 검상을 남긴 검은 녀석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유독 다른 와이번들에 비해 덩치가 큰 녀석이었지. 아마.

“예, 정확합니다.”

“그럼 기존의 우두머리는?”

기존 세력의 우두머리.

지금의 소란에도 별다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로 보아, 아직도 어딘가 숨어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

이에 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남쪽 절벽지대에 조금 떨어진 계곡에 있을 것으로 추정, 그쪽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둥지에 잠입한 발터가 폭탄을 터트린 직후.

몇몇 와이번이 즉시 절벽을 벗어나 계곡 쪽으로 빠지는 걸 확인했으니.

아마 그쪽이 세력다툼에서 밀려난 예전 우두머리의 무리일 터.

“좋아, 그럼 우선 그쪽은 보류하고, 현 우두머리 토벌을 목적으로 한다.”

“예, 알겠습니다.”

그대로 발터와 폰을 포함한 나머지 기사단이 재빨리 걸음을 옮기니.

그곳은 본대가 자리한 절벽 위쪽이었다.

***

남쪽 절벽 지대 위쪽.

그곳에는 한창 본대의 기사들이 저마다 철제그물을 붙잡고 와이번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힘을 내고 있었다.

“어이! 오른쪽으로 좀 더 세게 끌어당겨!”

“젠장, 안 그래도 이미 힘쓰고 있어!”

다행히 와이번들이 절벽지대를 벗어나기 전에 철제그물을 치는 데 성공했으나, 더 큰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와이번과 기사단들의 팽팽한 줄다리기.

-꾸구국...!

당장 지금도 와이번들은 이리저리 온 몸을 들이박고 발톱과 이빨 따위로 철제그물을 물어뜯으며, 그물을 벗어나려했다.

-카드득, 카득! 콰앙! 쾅!

그때마다 움찔, 철제그물이 크게 철렁이니.

만약 마탑에서 특수 제작한 그물이 아니었으면, 진즉에 끊어지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대로 제기랄, 이미 기사 몇몇의 손아귀는 잔뜩 터져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붙잡고 있어야 하는 건지.

뿌드득,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던 기사단들이 절벽아래를 흘깃 바라보았다.

다행히 대공님께서는 기사단장 폰님과 함께 빠져나온데 성공한 모양.

아무리 못해도 연회장에서 먹은 고기 값은 해야지.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며 꾸욱, 손아귀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콰앙!

저 앞에서 커다란 충격이 전해져왔다.

이에 그물을 붙잡고 있던 녀석들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콰아앙!!

유독 덩치가 커다란 와이번이 연신 제 몸을 부딪치고 있었다.

무엇보다 녀석의 오른쪽 눈가에 난 기다란 검상.

와이번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이런 망할! 좀 더 강하게 잡아!”

“씨발, 누가 그걸 몰라?”

이미 기사들은 있는 힘을 다해 그물을 붙잡고 있었다.

다만 와이번 무리의 저항이 너무 거셀 뿐.

그리고 일순간.

-뚝.

녀석들의 저항이 멎었다.

이에 끝났나. 기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무섭게.

크롸라라. 우두머리의 흉성과 동시에 다른 와이번들이 일제히 그 몸을 부딪쳤다.

-쿠쿠쿵!

제기랄! 그 충격에 몇몇 기사들이 그물을 놓치고 뒤로 넘어갔다.

곧이어 우두머리가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으니.

그대로 쉬이이익, 저 아래서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우두머리. 그리고 머지않아.

-콰아아앙!!

마치 커다란 미사일이 쏘아지듯.

폭음이 울려 퍼지며 철제그물이 크게 울렁거렸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커다란 충격.

“크아아아악!”

이에 앞에서 그물을 붙잡고 있던 기사들이 그물 통째로 날아갔다.

그와 함께 기어코 우두머리가 포위망을 뚫고 날아올랐다.

-펄럭..!

그대로 녀석이 빠른 속도로 절벽 지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두두두두, 저 뒤에서 누군가 검은 산양을 타고 절벽 위를 질주했다.

그리고 그는 다름 아닌.

“대, 대공님?!”

북부대공, 발터였다.

곧바로 이럇, 발터가 점점 속도에 박차를 가하며 맹렬하게 우두머리의 뒤를 따라갔다.

검은 산양. 북부에서는 그 척박한 환경 상, 군마를 들여오는 것 대신 산양을 택했으니.

특히 절벽 지대에 한해서는 검은 산양의 속도를 따라올 마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와이번과 차이를 좁혀가는 발터.

그러나 이대로 가다가는 절벽의 끝은 낭떠러지.

날개가 있는 와이번은 문제없었지만, 발터는 말이 달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지 않고 오히려 속도를 올리는 발터.

절벽이 끝나기 전에 결판을 낼 작정이었다.

-두두두두두!

그리고 돌연, 뒤에서 발터를 부르는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으니.

“발터님!”

그 정체는 그의 호위기사, 레닌.

그대로 그녀가 발터를 향해 하얀 천에 쌓인 뭔가를 던졌다.

“바이에른 경이 이걸...!”

이는 바이에른 경이 대공께 전해 달라 했던 물건.

이건 설마.

그와 함께 터업, 발터가 물건을 받아들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예상이 맞다면 이건 그야말로 지금 상황에 딱 들어맞는 물건.

동시에 절벽 끝에 다다르기 직전.

발터가 검은 산양의 등을 박차고 와이번을 향해 몸을 던졌다.

-파앗...!

그대로 차르륵, 줄곧 물건을 감싸고 있던 하얀 천이 흩날렸다.

그리고 그 사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시리도록 하얀 검.

무엇보다 그 검신에는 레비오르가의 문양과 북부고대어가 새겨져 있었으니.

<끝없는 겨울에 비로소 종언을 고한다.>

더 윈터(The Winter).

레비오르 가에 내려져 오는 명검이자, 반지에 이은 가주의 두 번째 상징.

콰아아, 그대로 발터가 제 마나하트에 남은 마나를 전부 끌어올렸다.

-사아아...

그와 함께 검신에 새겨져 있던 문자가 빛나며,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겨울의 심장을 이어받은 자.

이는 단순히 북부대공을 비유하는 말이 아니었으니.

말 그대로 레비오르 가(家)에서 전해져 오는 비전심법이자.

레비오르를 위한, 레비오르만이 사용할 수 있는 비기.

곧이어 발터의 마나하트에 반응해 더 윈터의 검신이 새하얗게 빛났다.

-츠츠츳...콰아아아!

마치 북부의 만년설처럼 새하얗기 그지없는 검기.

동시에 콰직, 발터가 검이 정확히 우두머리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쩌적...콰드드득!!

단번에 와이번의 심장을 꿰뚫고, 그 뒤에 절벽까지 박힌 검.

무엇보다 놀라운 건 새하얀 검신을 따라, 날카롭게 솟아오른 수십 개의 얼음가시였으니.

그 모습이 그야말로 겨울에 피는 얼음 꽃. 그 자체.

끝없는 겨울에 비로소 종언을 고하고, 그 말미에는 봄이 찾아와 꽃을 피우리라.

이것이 레비오르 가에 전해지는 비기, 얼음가시 꽃.

곧이어 발터의 주변으로 새하얀 얼음결정이 흩날리니.

“다비드님 보고 계십니까......”

그 풍경은 그야말로 겨울의 심장을 이어받은, 북부의 주인.

이에 발터의 아버지 때부터 레비오르 가를 모시던 가신(家臣).

폰 바이에른 경이 작게 미소 지으며 읊조렸다.

“비로소 북부의 진정한 주인이 탄생했습니다.”

그렇게 남쪽 절벽지대의 끝.

발터의 검이 마침내 우두머리의 숨통을 끊었으니.

노스로드 탈환전의 마무리를 알리는 신호였다.

20화 그 날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