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북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1)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카인의 죽음으로 몬스터웨이브를 비롯한 일련의 사건은 완전히 마무리.
머지않아 북부는 다시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았다.
애초에 몬스터웨이브에 인한 피해는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나마 있는 피해라고는 알케인에 있는 뼈 무덤과 전장에서 정신을 잃은 엘리시아가 휩쓸고 간 여파를 치우는 일정도 뿐이었다.
이에 북부의 기사단들은 그 빌어먹을 뼈 무덤을 다시 치우고, 드래곤이 갈아엎은 땅을 다시 평탄화 시켜야 한다는 사실에 현실을 부정하였다.
하나 이게 무슨 일인가.
녀석들이 손에 삽을 들기도 전.
엘리시아가 미안하다며 일처리를 도와주니.
그녀의 손짓 한 번에 뼈 무덤의 정리는 물론이고, 군데군데 움푹 파여진 설원지대까지.
완벽하게 원상복구 되었다.
아니 심지어 이 정도면 그 전보다 훨씬 나은 상태.
덕분에 북부의 기사단들은 한동안 그녀를 숭배하였으니 그 모습이 꽤나 재미있었다.
-엘리시아님 행차하신다!
-오오, 북부의 수호룡이시여!
-당장 길을 마련하거라!
그렇게 한동안 엘리시아가 보일 때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를 북부의 기사단들이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으니.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던 엘리시아도 나중에는 반쯤 체념한 건지.
이따금씩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는 등.
나름대로 팬서비스(?)를 선사해주었다.
아무튼 북부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으니.
그에 따라 발터 역시 평소의 제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렇게 잿빛 성의 집무실.
발터가 서신을 비롯하여 다른 이들이 올린 보고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팔락...
그도 그럴게 북부는 그간 몬스터웨이브로 인해 문을 닫았지 않는가.
그리고 모든 일이 해결된 지금.
다시 북부의 문을 열고 기다리는 손님들을 맞이해야 했으니, 그에 따라 문제 있는 곳은 없는지 검토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노스스파는 문제없고, 알케인의 무덤도 이 정도면 양호하군.’
그대로 발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려있던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다행히 북부의 관광 상품 쪽은 지금 당장 가동해도 될 정도로 양호했다.
무엇보다 전장이 설원지대였던 만큼.
혹여나 저번에 확장해둔 공장과 창고부지 쪽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쪽도 멀쩡한 모양이었다.
이에 발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다행인건 지금 발터, 그가 있는 잿빛 성이 멀쩡하단 사실.
만약 그때 막아내지 못했다면 성은 꼼짝없이 아작 났을 테니.
발터는 지금처럼 제 집무실에 있지도 못할 터였다.
‘......회귀 전의 경험을 반복하지 않아서 다행이군.’
당장 회귀 전에는 빚을 갚지 못해 잿빛 성에서 쫓겨났었지 아마.
발터가 잿빛 성 이곳저곳에 붙어 있던 빨간 딱지를 떠올리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당시에는 성 내의 조각상은 물론이며 장판부터 벽돌까지.
잿빛 성에 있는 돈 될 만한 물건이라고는 전부 다 차압에 들어갔다.
새끼들 존나 꼼꼼하더라.
덕분에 발터는 제 집무실 대신 허구한 날 여기저기 전전하며 모포를 뒤집어 쓴 채, 꿀꿀이죽을 처먹으며 공무를 처리하지 않았던가.
정말이지 팔자에도 없는 거지체험이 따로 없었다.
이게 대공인지. 부랑자인지.
그런 면에서 지금은 참으로 감격스럽기 그지없었다.
노스메디부터 마광석 광산에다 노스스파와 알케인의 무덤을 비롯한 그 외 여럿까지.
빚을 못 갚아 하루하루 허덕이던 북부가 이제는 이토록 성장했다.
그야말로 격세지감.
거기다 머지않아 해상교역로와 크루즈 사업까지 병행하면 북부의 위상은 더더욱 높아질 터.
생각만 해도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래. 이게 영지 키우는 맛이지.
발터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 과정에서 분명 온갖 개잡놈들이 낄 게 분명했다.
당장 이번의 블랙 썬의 잔당도 그러하지 않았는가.
하여간 새끼들 망하려면 곱게 망할 것이지.
끝까지 지랄이야.
그와 함께 발터가 제 손에 끼워져 있는 황금색의 반지를 흘깃 바라보았다.
‘물론 이번에는 결과적으로 이쪽도 이득이긴 하다만......’
무려 미다스의 손을 얻은 것도 모자라, 드래곤 엘리시아의 답례까지 약속받았다.
그 중 후자는 말할 것도 없었으며.
미다스의 손은 무려 신화급 마법을 포함한 모든 마법을 무효화하는 아티팩트가 아닌가.
이 정도면 거의 왕도의 보물고 급.
아니 왕도의 보물고에서도 이만한 아티팩트는 찾지 못할 정도였다.
하긴 그러니까 카인 그 놈이 마지막까지 눈이 뒤집혀 덤볐던 거겠지.
발터가 설산에서 최후를 맞이한 카인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여전히 신경 쓰이는 한 가지.
그건 다름 아닌 카인의 손목에 새겨져있던 검은 그리핀 문양.
그의 시체를 치우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동시에 발터가 유독 그 문양에 신경 쓰는 이유는 간단했다.
‘......분명 다이크 때와 같은 문양이었다.’
다이크 마헬. 전직 국왕의 호위기사이자, 소드마스터로.
왕성에서 테러를 감행한 자였다.
한데 카인의 손목에서 같은 문양이 발견되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둘이 엮어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중 가장 가능성이 큰 건 역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가설이었다.
그리고 다이크,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지금의 기반을 무너트리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내는 것.
거기다 결정적으로 그때 당시 다이크의 태도와 대화로 미루어 보았을 때.
필시 그 위에 그가 모시는 우두머리가 따로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블랙 썬의 잔당, 그러니까 카인 또한 그를 따르고 있다는 거겠지.’
아무래도 이와 관련해서는 조만간 왕도 측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어차피 지금 고민해봤자 당장 답이 나올만한 건 아닌 거 같으니 말이다.
결국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건 단 한 가지.
그 잡놈의 새끼가 어떤 새끼가 됐든.
북부를 노린다면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골통을 깨부술 것이라는 사실.
내 힐링을 방해하는 놈이라면 그게 누구든 그 배경과 인종,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지옥 끝까지 쫓아가 족쳐주마.
발터가 그리 다짐하며 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동시에 그때였다.
잿빛 성의 집무실을 따라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그와 함께 울려 퍼지는 목소리.
“잠시 들어가도 되겠나.”
짧은 한마디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공기가 가라앉는 듯했다.
이에 발터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들어오십쇼.”
그렇게 끼익, 문을 열고 긴 은발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을 연상케 하는 찬란한 은발과 루비를 세공한 듯한 붉은 눈동자.
그런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부터 분위기까지.
한 눈에 시선을 빼앗는 마성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시아.
과거 한 소녀를 연모했던 드래곤이었다.
***
그렇게 잿빛 성의 집무실.
나와 엘리시아가 대리석 탁자를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아, 참고로 대리석 탁자는 새로 산거다.
저번에 크루거 때도 그렇고 대충 서너 번째 갈아 치운 거 같은데.
이 정도면 아예 대리석 말고 더 튼튼한 걸로 바꿔야하나.
내가 탁자를 흘깃 바라보며 고민했다.
하나 그도 잠시.
내가 스윽, 그녀를 향해 찻잔을 들이밀었다.
북부의 명물 콜하임 티였다.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드셔보시죠.”
“그럼 내 사양하지 않겠네.”
이에 엘리시아가 찻잔을 들어 제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향이 뛰어나구나.”
“북부의 특산품입니다.”
콜하임 티는 그 특유의 쓴 맛 때문에 호불호가 제법 많이 갈리는 모양이었으나, 다행히 드래곤의 입맛에는 잘 맞는 모양이었다.
륜은 아예 설탕을 쏟아 붇던데 말이지.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어찌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대로 내가 엘리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는 안 그래도 반쪽짜리 드래곤하트를 가지고 있는 와중에 그간 블랙 썬의 잔당에게 붙잡혀 조종당하고 있던 상태였던 만큼.
몸 상태가 그리 온전한 편은 아니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문제없어 보이지만 사람으로 따지자면 반쪽짜리 심장인 상태로 혼수상태에 빠져 인공호흡기에 의지하다 이제 깨어난 상황.
아니 사람이면 반쪽짜리 심장인 것부터 이미 죽었을라나.
아무튼 아직 안정이 필요한 몸인 관계로 그동안 북부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이에 엘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아, 그대를 포함한 다른 이들의 배려 덕분에 전보다 괜찮아졌네.”
“다행이군요. 보아하니 이제는 기사단 녀석들도 제법 익숙해지신 거 같군요.”
“......그런 편이지. 덕분에 옛날 생각도 나고 나쁘지 않다네.”
그러자 엘리시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녀가 살아온 세월이 몇인데 이 정도는 당연히 겪어봤겠지.
뭐 물론 뼈와 땅을 치워줬다고 숭배 받은 적은 이번이 처음일 테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노스스파라고 했던가? 그게 상당히 괜찮더군. 특히 입욕 후에 마시는 싱그레라는 게 일품이더구나.”
노스스파와 싱그레.
북부가 자랑하는 인기상품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효과는 국왕부부와 더불어 드래곤조차 만족할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국왕부부가 경악하고 드래곤이 놀란 아이템.
하긴 뜨신 물에 목욕 조지고 먹는 바나나 우유는 못 참긴 해.
그대로 엘리시아가 창 너머 보이는 애쉬폴산맥을 바라보며 말했다.
“북부라, 여러모로 참 마음에 드는 곳일세.”
“영광이군요.”
내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과거 최악의 땅이라 불리던 북부가 이제는 드래곤조차 마음에 들어 하는 땅이 됐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래서 따로 자리 잡을 곳은 정하셨습니까?”
내가 엘리시아를 향해 물었다.
앞서 말했듯 그녀는 현재 북부에서 요양 중.
그만큼 요양이 끝난 뒤 어찌할지에 대해 그녀와 종종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글쎄. 딱히 생각나는 곳이 없구나.”
“......”
어딘가 공허함이 느껴지는 엘리시아의 대답.
그대로 잿빛 성의 집무실을 따라 정적이 흘렀다.
듣기로는 과거 엘리시아는 엘피다의 죽음 이후로 식음을 전폐하고 제 레어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하였다.
어차피 드래곤인 이상. 그대로 수십 년을 버틸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수십의 계절이 바뀌고, 관리되지 않은 레어에는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 지금 와서 돌아간다 해도 딱히 바뀌는 것은 없을 터.
그녀에게는 엘피다가 전부였으니 전부를 잃은 세상에는 더 이상 그녀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느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 말미에는 영혼의 맹약마저 카인의 손에 넘어가 그의 꼭두각시로 살아온 셈.
그만큼 그녀의 인생도 상당히 기구하였다.
아무튼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긴 정적을 깨고 입을 떼었다.
“엘리시아님.”
“......”
“원하신다면 이대로 계속 북부에 계셔도 됩니다.”
그대로 내가 품속에서 목걸이를 꺼내 그녀에게 들이밀었다.
이는 다름 아닌 영혼의 맹약.
그녀가 제 심장 반쪽을 떼어내 연모하던 이에게 준 증표였다.
“이건......”
탁자에 놓인 붉은 목걸이.
그 모습에 엘리시아가 한참동안 멍하니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 과거 엘피다와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엘리시아님. 나중에는 바다 말고 다른 곳도 가볼까요?
-그래. 그것도 괜찮겠구나. 따로 가보고 싶은 장소가 있느냐.
-음......
그녀의 물음에 흑발의 소녀 엘피다가 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머지않아.
엘피다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북부는 어때요?
-......북부?
-네! 북부는 사시사철 눈이 내린데요! 그곳에서 엘리시아님과 같이 눈사람도 만들고, 발자국도 남겨보고...
엘피다가 잔뜩 신난 듯.
황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은 채.
쉴 새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 그 미소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대로 엘리시아가 북부의 애쉬폴 산맥과 붉은 목걸이를 번갈아보았다.
이어서 그녀가 천천히 영혼의 맹약을 손에 쥐었다.
-꼬옥...
그래. 엘피다, 정말 네 말대로 이곳에는 눈이 내리고 있구나.
이에 엘리시아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나마 그녀와 같이 있는 거 같은, 그립고도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그래도 되겠느냐?”
엘리시아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내가 작게 웃으며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엘리시아, 그러니까 드래곤이 북부에 자리를 잡다니.
무려 드래곤이다.
제 아무리 그녀가 온전치 못한 몸이라 해도 당장 그 어떤 마법사보다도 뛰어난 존재였다.
그만큼 그녀가 북부에 있어준다면 오히려 이쪽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할 판.
이에 엘리시아가 붉은 목걸이를 매만지며 미소 지었다.
“고맙네. 아직 자네에게 빚을 갚지도 못했는데.”
“뭐 그거야.”
그대로 내가 장난스럽게 히죽 웃으며 말했다.
“북부에 계시면서 천천히 갚으시지요.”
“그러도록 하지.”
그 말에 엘리시아 역시 피식 웃으며 대답하니.
그렇게 잿빛 성의 집무실을 따라.
내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엘리시아님.”
“......”
“북부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91화 북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2)
그렇게 엘리시아가 북부에 합류하고 나서 얼마나 지났을까.
북부에 위치한 해안가.
그곳에는 벌써부터 발터와 폰, 레닌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앞에는 다름 아닌 대형 크루즈 선박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향후 북부의 해상 사업을 책임질 선박, 일명 발터호였다.
여담으로 작명은 발터를 제외한 나머지 이들의 적극적인 의견으로 결정되었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그대로 처억, 발터의 옆에 서있던 레닌이 크루즈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에 발터가 제 앞에 자리한 크루즈를 바라보았다.
검은색과 황금색이 적절히 섞인 크루즈. 거기다 그 크기와 위용은 어떠한가.
“......아주 마음에 드는군.”
발터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작명은 영 별로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 디자인 하나는 그야말로 끝내줬다.
역시 북부의 영원한 작업반장 루시엘과 북부의 인부들부터 백작가의 선박설계사들까지.
그 많은 인력들이 전부 달라붙은 보람이 있었다.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할까요?”
그와 함께 레닌이 크루즈 바로 앞에 처져있는 리본 줄과 발터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그러자 발터가 흔쾌히 앞으로 나서며 스릉, 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그리고 그의 검이 깔끔하게 리본 줄을 가른 순간.
-퍼어어엉!
그의 뒤에 있던 폰과 기사단이 들고 있던 샴페인을 시원하게 터트렸다.
“크루즈 완공을 축하드립니다. 대공님!”
곧이어 터져 나오는 함성과 박수소리.
이에 발터가 피식 웃으며 크루즈와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크루즈도 완성했겠다.
남은 순서는.
“자, 지금부터 다들 제대로 즐겨보도록 하지.”
대망의 크루즈 시승식.
그렇게 북부의 해안가를 따라.
발터를 필두로 하나 둘씩 크루즈에 올라탔다.
그리고 머지않아.
-뿌우우우!!
머지않아 우렁찬 뱃고동 소리가 해안가를 따라 울려 퍼지니.
오늘은 본격적인 크루즈 사업을 시작하기 전.
그 시범운행을 함과 동시에 그간의 회포를 푸는 축하파티를 겸하는 날이었다.
***
-촤아아악...!
그렇게 힘차게 물결을 가르며 뻗어나가는 발터호.
무엇보다 그 위로는 밝은 햇살이 비춰 내리고 있었으며, 그 아래로는 드넓게 펼쳐진 바다가 눈부신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축하연에 어울리는 화창한 날씨.
그리고 그런 크루즈의 내부에는 이미 여러 이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으니.
천장에 달린 화려한 샹들리에부터 고풍스런 장식품과 연회용 테이블까지.
마치 왕성의 연회장을 자그마하게 옮겨놓은 풍경이었다.
이곳이 바로 크루즈를 개장하면 귀족들을 포함한 손님들이 상주하게 될 연회장.
동시에 그 중앙에는 한 여성이 쉴 새 없이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치는 샹들리에 바로 아래로 옮기도록 하세요. 조명은 지금보다 더 밝게, 조각상은 통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양쪽으로 배치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녀의 야심만큼이나 붉게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케 하는 머리칼.
그녀의 이름은 바로 앨리스 셀비로트.
왕도의 공작가의 차녀이자, 발터의 비즈니스 파트너였다.
“간만이군. 앨리스.”
그대로 발터가 그녀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이에 발터를 발견한 앨리스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대공님을 뵙습니다.”
“어찌 내부 준비는 잘되어가는가.”
이번 크루즈 관광은 귀족들을 겨냥하여 벌인 사업.
그만큼 왕도의 환락가를 주무르는 앨리스보다 더 제격인 사람은 찾기 힘들었으니.
발터는 크루즈 관광을 준비하며 그녀에게 그와 관련한 인력과 전체적인 인테리어를 요청하였다.
“예, 대공님의 요청대로 주 고객층이 귀족들인 만큼. 최근 왕도에서 귀족들이 선호하는 분위기로 꾸며보았습니다.”
지금 왕도의 트렌드는 과하지 않은 화려함과 그 사이 숨어있는 기품.
그어 따라 기존 장인들의 화려한 장신구보다는 새로운 무언가에 집착하는 경향이 컸으니.
조각상과 테이블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촛대까지.
앨리스는 모든 것 하나하나 그 컨셉에 맞게 고려하여 연회장을 꾸몄다.
그 결과, 크루즈의 내부는 웬만한 연회장보다 더 아름다웠으니 실로 그녀의 안목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최종완성까지 가면 주 고객층인 귀족들의 시선을 제대로 사로잡을 터.
“더 원하시는 게 있다면 그에 맞춰 준비하겠습니다.”
“됐다. 그에 대한 부분은 나보다는 자네가 더 잘 알 테니 맡기지. 오히려 더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주게나.”
이에 앨리스가 싱긋 웃으며 제 드레스 양 끝단을 잡으며 인사했다.
“믿고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능력을 믿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리 기쁠 줄이야.
그간 무능한 제 오빠의 그늘에 가려 발버둥 치던 때와는 사뭇 다른 기분이었다.
거기다 발터가 왕도의 노스메디 판매권을 넘겨준 덕분에 그녀는 왕도 내에서 알게 모르게 점점 그 입지를 넓히고 있었으니 그녀에게 있어 발터는 여러모로 고마운 사람임은 틀림없었다.
“별 말씀을. 자네가 보기에 크루즈는 어떠한가?”
“검은색과 황금색이 조화를 이룬 부분이 인상적이더군요. 특히 균형 잡힌 선체와 커다란 규모가 주는 웅장함은 발터호라는 그 이름에 어울리는 위용이라 생각합니다.”
그 말에 크흠, 발터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앨리스가 재미있다는 듯.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발터호, 참으로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자네 진심인가?”
“네, 진심입니다.”
그대로 앨리스가 작게 웃으며 발터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크루즈라.
그 크기나 디자인 같은 외견도 외견이지만 그녀가 가장 놀란 건 다름 아닌 이번 사업을 시작하게 된 배경과 그 아이디어.
설마하니 아이덴발트해를 정복한 것도 모자라 해상교역로를 뚫는 과정에서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호화 관광 사업까지 계획하다니.
정말이지 노스메디부터 노스로드, 노스스파까지.
그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거침없는 추진력.
그리고 이를 받춰 주는 능력이 합쳐지니.
그는 실로 놀라운 성과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대륙, 아니 왕도에서도 충분히 대성할 만한 능력.
실제로 왕도의 노스메디는 아직도 인기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으니 그는 그 수완을 제대로 증명해낸 셈이었다.
그만큼 본격적으로 해상로가 열리고 크루즈 사업을 시작하면 얼마나 큰 파급력을 이끌고 올지 기대되는 게 당연했다.
그대로 발터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알겠네. 그럼 모쪼록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물론입니다.”
“아, 그리고 조만간 사업 확장차 왕도에 한 번 찾아가도록 하지. 자네와 의견을 나누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지”
“......!”
사업 확장이라니.
그 말에 앨리스의 눈동자가 흥미로운 듯 반짝였다.
“혹 크루즈말고도 생각 중이신 게 있으십니까?”
크루즈에 이어 이번에는 과연 어떤 사업인걸까.
이에 발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그때 가서 알려주도록 하지.”
“좋습니다. 부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이에 앨리스 또한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위에서 보지.”
“알겠습니다. 대공님.”
그대로 그녀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어서 발터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연회장을 벗어났다.
아니 벗어나려는 찰나였다.
“아, 대공님.”
돌연 앨리스가 발터를 불러 세우니.
발터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그러자 앨리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연미복, 잘 어울리십니다.”
곧이어 발터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고맙군.”
그대로 발터가 손을 가볍게 휘저으며 연회장을 벗어났다.
그런 그가 향하는 곳은 크루즈 앞쪽에 마련된 발코니.
오늘의 연회를 즐길 장소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발코니로 가던 중 복도에서 누군가를 마주쳤다.
동시에 멈칫, 발터가 제 앞을 바라보았다.
“......레닌?”
그녀는 바로 제 호위기사 레닌.
하나 그녀는 오늘만큼은 줄곧 입고 있던 복장대신.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사아아...
한쪽으로 묶여 올린 시린 은발.
그리고 그와는 대비되는 검은 드레스는 그녀의 우아한 실루엣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대로 화려한 조명 아래, 곧게 뻗은 새하얀 다리가 반짝였다.
거기다 그녀 특유의 차가운 눈빛까지 어우러지니.
눈앞의 레닌을 따라, 일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고혹적인 매력이 흘러나왔다.
“......”
그 모습에 발터가 멍하니 레닌을 바라보았다.
이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대공님?”
그와 함께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발터가 입을 떼었다.
“드레스, 잘 어울리는군.”
그대로 흠칫, 레닌이 조금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대공님도...잘 어울리십니다.”
그 말에 발터가 작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럼 같이 올라가도록 할까?”
그러자 레닌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하여간 이러나 저러니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호위기사였다.
발터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레닌과 손을 잡은 채, 발코니로 올라왔다.
그 와중에도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니.
아마 다른 녀석들은 이미 제 나름대로 축제를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발터와 레닌이 발코니로 올라온 순간이었다.
“아, 대공님 오셨습......”
가장 먼저 그 둘을 발견한 기사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아니 단순히 그 뿐만이 아니었다.
발코니에 있던 모든 이들이 말문을 잃고 발터와 레닌을 바라보았다.
“......”
연미복을 입은 발터와 검은 드레스를 입은 레닌.
거기다 그 뒤로 보이는 푸른 바다까지.
그런 둘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야말로 최고의 한 쌍.
방금 전까지 왁자지껄하던 발코니가 한순간에 조용해진 것도 이해가 될 법 했다.
하나 그도 잠시.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로군요.”
깔끔하게 차려입은 폰이 싱긋 웃으며 와인 잔을 건넸다.
이에 발터가 붉은 와인이 담긴 잔을 받아들며 말했다.
“그러는 자네도 제법 잘 어울리는군.”
“대공님만 하겠습니까.”
그와 함께 채앵, 발터와 폰이 와인 잔을 맞부딪치니.
크루즈의 발코니를 따라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대로 발터가 발코니에 있는 다른 이들을 향해 와인 잔을 까닥이며 말했다.
“뭐하는가? 자네들도 즐기지 않고.”
그러자 북부의 기사단과 푸른 마탑의 마법사는 물론이며 연금술사들까지.
북부의 모든 이들이 잔을 높이 치켜들며 다시 축제를 즐기기 시작했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덧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하나 북부의 축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크하하! 자네도 한 잔 하게나!”
“그래. 어디 한 번 달려보자고!”
발코니에는 어느새 모든 이들이 한 데 모여 잔을 나누고 있었다.
오히려 밤이 되니 더욱 더 무르익은 분위기.
그곳에는 어느새 앨리스와 발레시오를 비롯하여 라파엘까지 한데 모여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륜과 리버가 손을 잡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번에 자리를 마련한 이후로.
둘이 꽤나 친해진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저기로 가볼래?”
“조, 좋아요!”
곧이어 륜이 리버의 손을 잡으며 사이좋게 나서니.
그래도 역시 륜이 언니이긴 언니긴 한가보다.
발터가 그런 둘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발코니의 끝자락.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자리에 은발의 여성이 홀로 서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시아, 이제 막 북부에 들어온 신입이었다.
이에 발터가 레닌과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어찌 축제는 충분히 즐기고 계십니까?”
그대로 발터가 와인 한 잔을 건네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자 흠칫, 엘리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그녀가 발터와 레닌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그래. 다들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이쪽도 제법 흥이 오르는구나.”
엘리시아가 한창 축제를 즐기는 다른 이들을 흘깃 바라보았다.
이어서 그녀의 눈을 따라 천진난만하게 웃는 리버의 모습이 들어오니.
엘리시아가 자기도 모르게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엘피다와 바다를 보러갔을 때도 딱 저만한 나이였지.
그녀가 과거를 회상하며 추억에 잠겼다.
이에 발터가 말했다.
“장래가 기대되는 아이입니다.”
“그래. 내가 보기에도 그런 편이구나.”
엘리시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특히 리버가 블랙 썬의 유산이 담긴 상자를 열어낼 때는 그녀도 적잖이 놀랐지 않는가.
상자를 열어낸 것부터 그녀는 일단 선택받은 자, 즉 용사의 재목이었다.
거기다 그녀의 주위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
하얀 성흔의 기운이었다.
그대로 발터가 입을 떼었다.
“하나 아직은 어립니다. 그만큼 좋은 선생이 있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와 함께 발터가 흘깃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움찔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 설마 나보고......”
“아마 리버도 좋아할 겁니다.”
리버도 한창 검술훈련에 박차를 가하며 검술을 비롯한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거기다 드래곤인 그녀라면 그 누구보다 리버의 재능을 빛나게 도와줄 수 있을 터.
무엇보다 발터는 알고 있었다.
북부에 있는 내내 엘리시아의 시선이 리버를 향해 있던 것을.
아마 엘피다가 생각나서 그럴 테지.
“관심 있으시면 나중에라도 말해주십쇼.”
그대로 발터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라파엘을 비롯한 푸른 마탑의 마법사들이 분주하게 뭔가를 준비하니.
그건 다름 아닌 축포.
그리고 머지않아.
라파엘을 필두로 루비아를 포함한 푸른 마탑의 마법사들이 마법을 펼치자, 밤바다 위를 따라 축포가 쏘아졌다.
-퍼어엉! 펑! 퍼엉! 퍼어어엉!!
그대로 바다 위를 수놓는 형형색색의 축포.
이에 발터가 화려한 불빛을 배경으로 와인 잔을 치켜들며 싱긋 웃었다.
“꽤나 야심차게 준비한 축제의 피날레입니다. 어떠십니까?”
오늘만큼은 북부의 모두가 즐거웠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오늘만큼은 북부의 모두가 행복한 추억을 남겼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발터와 푸른 마탑의 마법사들이 준비한 피날레였다.
“......”
그대로 엘리시아가 발터와 형형색색으로 물드는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은하수가 내리는 듯한 바다.
그리고 엘피다를 쏙 빼닮은 검은 머리칼과 찬란한 황금색 눈동자의 발터.
-사아아...
곧이어 시원한 바닷바람이 그녀를 훑고 지나갔다.
마치 아스라한 달빛 아래, 별과 은하수가 내리던 그 날.
엘피다와 끝없는 황혼의 바다를 유영하던 때를 연상케 하는 풍경이었다.
이에 엘리시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래. 참으로 아름답구나.]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그날의 대답.
그와 함께 엘리시아가 드넓게 펼쳐진 지평선을 바라보니.
그 너머로 엘피다와 함께했던 바다가 아른거렸다.
92화 대륙의 명장을 찾아서(1)
크루즈에서의 밤이 있고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한 달 전 크루즈는 정말이지 간만에 힐링다운 힐링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명목은 어디까지나 사업 확인 차 진행한 이벤트지만, 다른 녀석들도 전부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당장 시간이 지난 지금도 크루즈를 보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들이 그 증거.
덕분에 발터 또한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연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기사단을 비롯한 다른 녀석들을 바라보곤 하였다.
본디 좋은 능률은 좋은 복지에서 나오는 법.
오히려 그간 북부의 사정 때문에 이렇다 할 복지를 베풀지 못했으니.
북부의 주인으로서 이제야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진 기분이었다.
‘......종종 이런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대로 잿빛 성의 집무실.
자리에 앉아있던 발터의 입 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그도 잠시.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욱 더 북부를 발전시켜야하지 않겠는가.
곧이어 발터가 다시 펜을 잡고 작업에 몰두하였다.
-사각, 사각...
그렇게 집무실을 따라 언제나 들려오던 익숙한 소리가 새어나오니.
이는 평화로운 북부의 풍경이리라.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타악.
마침내 발터가 펜을 내려놓았다.
그대로 그가 줄곧 붙잡고 있던 서신과 서류를 훑어보았다.
-팔락...
이는 기존의 북부사업은 물론이며, 이제 곧 오픈할 크루즈와 더불어 다음 사업까지 정리한 일종의 계획표.
그와 함께 발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대략적인 윤곽은 잡힌 셈이군.’
우선 크루즈 사업은 내부 인테리어부터 그 코스까지.
어느 하나 모자란 구석 없이 훌륭했으니 이대로 진행해도 무방할 터였다.
실제로 시범 운행도 아무런 문제없이 양호하게 끝냈지 않는가.
특히 이 부분에 관해서는 왕도의 큰 손, 앨리스가 직접 나선 만큼.
귀족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동시에 귀족들이 크루즈에 쏠리는 관심이 커질수록, 해상교역로 역시 자연스레 이목이 쏠릴 테니 그야말로 일석이조.
‘그렇다면 이제 슬슬 다음 사업을 준비할 타이밍.’
이와 관련해서는 혹 선상파티 당시.
조만간 사업 확장 차 왕도에 들린다는 그의 말을 기억하는가.
그리고 그때 말했던 사업이 바로 현재 발터, 그의 손에 들린 서류였으니.
그 이름도 무려하여 백화점.
여기서 발터는 두 가지 사업을 주력으로 운영할 생각이었다.
‘......바로 액세서리를 비롯한 귀금속과 의류.’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흔히 말하는 명품 샵.
발터는 왕도에 현대의 루x비똥이나 샤x에 버금가는 고급 명품 샵을 만들 생각이었다.
만약 다른 이들이 들었다면 갑자기 웬 뜬금없이 명품 샵이냐 할 수도 있었지만 사실 이는 꽤 전부터 생각해오던 사업의 일환이었다.
그렇지만 그동안은 이렇다 할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망설였을 뿐.
하나 최근에 들어서 점차 그 윤곽이 잡혔으니.
우선 그 첫 번째는 이번 크루즈 인테리어와 컨셉을 담당한 앨리스였다.
그녀가 말하기를 요새 왕도에서 유행하는 트렌드는 과하지 않은 화려함과 그 사이 숨어있는 기품.
그에 따라 기존 장인들의 화려한 장신구보다는 새로운 무언가에 집착하는 경향이 크다 하였다.
즉, 이제 슬슬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물결을 일으킬 때가 됐다는 것.
동시에 마침 북부에 딱 맞는 기회가 찾아왔으니.
그게 바로 두 번째, 드래곤의 존재였다.
본디 판타지 세계관에서 드래곤하면 떠오르는 게 무엇인가.
덩치 큰 도마뱀? 압도적인 무력? 마법의 달인?
물론 위의 것들도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어마어마한 금은보화를 쌓아둔 레어가 아닌가.
그리고 이는 지금의 세계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으니.
당장 온갖 보석부터 보구까지.
실제로 트레져헌터나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드래곤의 레어를 한 번 털면 3대가 떵떵거리고 먹고 논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야말로 현대에 로또가 존재한다면 중세에는 드래곤의 레어가 존재할 정도.
그렇다면 드래곤의 레어에 쌓여있는 온갖 보석과 보구들의 출처는 어떻게 되는가.
제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한들.
그 콧대 높은 놈들이 그걸 하나하나 수집하여 자수성가를 이뤘겠는가?
하이고, 택도 없는 소리.
드래곤의 레어에 있는 물건들은 대부분 다 뜯어온 것이었다.
어디서? 바로 드워프들에게서 말이다.
그리고 드워프가 누구인가.
온갖 귀금속부터 무기까지.
무엇이든 만들어낸다는 신의 손을 가진 대가의 종족.
다른 건 몰라도 온 대륙을 통틀어 그 어떤 종족조차 이와 관해서는 그들의 솜씨를 따라올 녀석들이 없었다.
그러니까 드래곤이 눈이 돌아가 드워프 제 물건을 다 뜯어가겠지.
그러나 엘프 때도 그랬지만 드워프 역시 보통 제 영역에 틀어박혀 외부로 잘 나오지 않는 녀석들이었다.
그만큼 대부분의 인간은 그 마을은커녕.
드워프를 직접 접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나마 노예시장에서 드물게 발견하는 게 전부일 터.
하지만 수백 년을 산 드래곤이라면 사정이 달랐다.
앞서 말했듯 드래곤과 드워프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건 엘리시아도 마찬가지.
그래서 혹시나 엘리시아에게 아는 드워프 마을이 있냐고 넌지시 물어보니.
-드워프? 물론 알고 있지. 과거 내가 구해준 아이들이 있다네.
역시나. 옳다구나!
드워프 마을의 위치까지 알고 있단다.
아, 물론 그녀는 드래곤 중에서도 인간을 연모했다는 점부터 다소 특이한 부류에 속한만큼.
다른 드래곤처럼 레어에 산더미 같은 보물을 쌓아두지도, 드워프에게 상납을 받아 보구를 뜯어내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드워프에게 의뢰를 요구한 게 전부.
당장 영혼의 맹약도 드워프들에게 제련을 맡겼다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중요한 건 엘리시아, 그녀 또한 드워프들과 연줄이 있다는 사실.
그렇다면 그 소재는 파악됐으니 남은 건 이제 직접 찾아가는 것 뿐.
그리고 무엇보다 당장 사업 확장이 아니더라도.
현재 발터에게는 반드시 드워프를 찾아가야 할 이유가 존재했다.
그대로 발터가 제 집무실 한편에서 하얀 천에 쌓여있던 물건을 꺼내들었다.
-처억...
대리석 탁자를 전부 채울 정도로 기다란 물건.
그와 함께 스륵, 발터가 하얀 천을 치우자 그 안에 있던 새하얀 검신이 빛을 발했다.
이는 다름 아닌 더 윈터.
레비오르 가에 내려져 오는 명검이자, 가주의 상징이었다.
하나 자세히 보니 그 검신에는 군데군데 금이 가있었으니.
저번에 잿빛 성을 지키겠답시고 정신을 잃은 엘리시아의 공격을 받아낸 게 화근이었던 모양이었다.
“......”
이에 발터는 더 윈터의 수리를 맡길 대장장이를 수소문했으나 그게 영 쉽지 않았다.
그야 단순한 수리라면 모를까.
수리는 물론이며, 발터 특유의 힘과 마나를 온전히 받아내야 하니.
대부분의 대장장이들은 그 과정에서 포기하였다.
이해는 한다.
잘못하면 대공의 눈에 잘못 나는 셈이니 말이다.
거기다 더 윈터를 만들어낸 명장은 이미 수년 전에 대가 끊겼다 하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그에 버금가는 명장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는 건데.
그만한 명장을 구하는 데는 드워프가 제 격이었다.
다른 녀석들이라면 모를까.
드워프 마을이라면 더 윈터를 수리할만한 명장 하나쯤은 분명 존재할 터였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똑똑.
“대공님,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노크소리와 함께 레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발터가 고개를 돌렸다.
“들어와라.”
곧이어 끼익, 레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어서 그런 그녀의 뒤로 보이는 찬란한 은발의 여성.
엘리시아였다.
아무래도 드워프 마을과 관련하여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도 잠시.
“......”
그녀가 대리석 탁자 위에 놓인 더 윈터를 발견하고 흠칫거렸다.
여기저기 금이 가있는 새하얀 검신.
이에 집무실을 따라 어색한 공기가 흐르니.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실까요?”
발터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
그렇게 잿빛 성의 집무실.
저번과 똑같이 발터와 엘리시아가 대리석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있었다.
그대로 머지않아.
“......검과 관련한 건 미안하게 됐네.”
엘리시아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드래곤이 인간에게 사과를 하다니.
여러모로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겠는가.”
하나 그간 봐왔던 그녀는 여타 드래곤과는 달리.
인간을 대하는데 있어 그 태도가 사뭇 달랐으니.
아무래도 엘피다의 영향인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발터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레닌 역시 자연스레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맞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지 않습니까. 만약 그때 공격을 막아내지 않았다면 검 대신 성이 날아갔을 테니까요.”
“그렇지. 성보다는 검 하나 날리는 게 낫지.”
-움찔...!
그 말에 엘리시아의 어깨가 작게 요동쳤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화를 이어가는 발터와 레닌.
“물론 그 검이 발터님의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품이자, 레비오르 가의 상징이지만 말입니다.”
“아아, 그렇지. 제 아무리 이게 아버지의 유품이자, 내 가문의 상징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던 사고였지.”
그대로 발터와 레닌이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와 함께 레닌이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찻잔을 가리키며 엘리시아를 향해 말했다.
“드시지요.”
“......고, 고맙네.”
이에 엘리시아가 찻잔을 받아들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리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와 더불어 눈동자는 떨리고 있었으니.
결국 엘리시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떼었다.
“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군.”
과거 그녀가 엘피다에게 실수를 할 때.
자주 했던 말이었다.
한데 그 말을 여기서 또 하게 될 줄이야.
아무튼 집무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엘리시아가 묘하게 협조적이었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게 저주를 풀어준 은인에게 은혜를 갚기는커녕.
제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더라도 유품을 박살낼 뻔했으니.
엘리시아는 참으로 면목이 없었다.
그리고 이처럼 다른 드래곤이라면 몰라도 그녀는 그리 염치없는 드래곤은 아니었기에.
그녀가 제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들이밀었다.
“대신이라 하기에는 모자라지만 받아주게.”
드워프의 마을에 대한 위치가 표시된 지도였다.
이에 발터가 자연스레 지도를 챙겼다.
“하하, 뭘 이런 걸 다.”
“아닐세. 받아주게나.”
이어서 엘리시아가 발터를 향해 말했다.
“......그럼 잠시 손을 좀 내밀어주겠나?”
“손 말입니까?”
이에 발터가 손을 내밀자, 엘리시아가 그의 손등에 손을 포갰다.
곧이어 파아아, 발터의 손등을 따라 은색의 신비한 문양이 새겨지니.
엘리시아가 새겨진 문양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문양일세. 이를 보여주면 다른 드워프들도 별 말없이 자네를 들여보내줄 테지.”
“감사합니다.”
“이걸로 자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
물론 은혜를 다 갚기에는 아직도 모자랄 테지만 말이네.
엘리시아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발터가 재차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
“북부에 계시면서 천천히 갚으시라고.”
발터가 북부에 온 그녀를 맞이하며 했던 말이었다.
하나 그때와는 다소 그 무게가 달랐으니.
엘리시아가 반쯤 초연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모쪼록 잘 부탁하네.”
이에 발터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저야말로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엘리시아님.”
그렇게 발터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니.
엘리시아, 이는 과거 인간을 사랑했던 드래곤의 이름이자.
앞서 말했듯 염치를 아는 드래곤의 이름이리라.
93화 대륙의 명장을 찾아서(2)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대륙의 카이론 산맥.
이곳은 북부에서 꽤 거리가 있는 산맥으로, 크고 작은 산들이 빽빽히 모여 있는 곳이었다.
동시에 그 산세가 워낙 험하고 외진 곳에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산으로도 유명하였다.
하나 그런 카이론 산맥의 창공을 따라.
-쉬이익...!
하얀 비늘을 가진 와이번을 비롯하여 다른 와이번이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을 갈랐다.
순서대로 페라리와 람보르기니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발터와 레닌이 올라타 있었으니.
“레닌, 이쯤인가?”
“예, 지도대로라면 이제 슬슬 협곡이 보일 겁니다.”
레닌이 손에 들고 있던 지도와 발터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엘리시아의 말대로라면 이 근처가 바로 드워프들의 마을.
그대로 머지않아.
-처억...
그들의 발아래를 따라 길게 이어진 협곡이 눈에 들어왔다.
이에 발터와 레닌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서서히 고도를 낮춰 협곡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협곡의 안은 겉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깊고 복잡한 구조였다.
마치 과거 노스로드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와이번들이 둥지를 튼 협곡과 같은 기분.
아니 그보다 더 큰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깊숙이 들어왔다는 확신이 들 때 즈음.
발터가 제 품속에서 푸른 종이하나를 꺼내들었다.
북부를 떠나기 전.
엘리시아가 지도와 함께 건네준 물건이었다.
-협곡에서부터는 길을 찾기 어려울 테니 이걸 가져가거라.
그대로 발터가 엘리시아가 해준 말을 떠올리며 푸른 종이를 허공에 날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푸른 종이가 서서히 제 스스로 접히더니.
어느새 종이 새 한 마리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팔락팔락...!
곧이어 오른쪽을 향해 날아가는 파란 종이 새.
그와 함께 발터와 레닌이 이를 쫒아갔다.
그렇게 구불구불한 협곡을 지나, 그 아래 계곡을 따라 한참동안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계곡이 끝나는 지점.
그 끝에는 폭포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콰아아아아!
동시에 앞서 가던 푸른 새가 우렁찬 소리를 내는 폭포 안으로 들어갔다.
이에 발터와 레닌 역시 폭포 너머로 와이번을 몰고 들어간 순간이었다.
“여긴......”
폭포 너머 숨겨진 커다란 동굴을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런 동굴의 반대편을 따라 희미한 빛 무리가 반짝였다.
그대로 발터와 레닌이 희미한 빛에 의지하며 나아갔다.
-파아앗...!
곧이어 둘이 동굴의 끝에 다다르기 무섭게.
환한 빛 무리가 터져 나오며 앞서가던 푸른 새가 흩어졌다.
그와 함께 점차 환한 빛이 걷히며 그 아래 풍경이 발터를 맞이했다.
한 눈에 봐도 상당히 커다란 규모의 광산.
거기다 그 곳곳에는 크고 작은 등불이 줄지어 있었다.
마치 광산 지하 도시를 연상케 하는 광경.
그리고 그때였다.
돌연 발터와 레닌이 서있는 절벽 양 끝에서 한 무리의 그림자가 등장하더니.
-처억...!
녀석들이 발터와 레닌을 향해 창을 내밀며 외쳤다.
“웬 놈들이냐!”
무엇보다 그런 녀석들은 하나같이 그 신장이 발터는커녕.
레닌을 넘지 못했다.
하나 그 근육을 포함한 다부진 체격과 길게 자라난 수염까지.
소문대로의 드워프의 모습과 다를게 없었다.
이에 발터와 레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인간 놈들이 여긴 무슨 일이지.”
그대로 드워프 중 하나가 발터를 향해 물었다.
그런 그들은 여전히 창끝을 치켜세우고 있었으니.
녀석들의 눈동자를 따라 진한 경계심이 묻어나왔다.
그도 그럴게 이곳은 명실상부한 드워프의 영역.
한데 자신들의 마을에 인간들이, 그것도 웬 와이번을 몰고 온 셈이 아닌가.
덕분에 마을의 경계심은 최고조.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발터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당장 창끝이 제 자신을 향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기 그지없는 발걸음.
“대답하지 않으면 침입자로 간주. 공격하겠다.”
이에 가장 선두에 선 드워프가 발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녀석이 마을의 경비대를 이끄는 대장으로 추정되었다.
하나 그의 경고에도 멈추지 않는 발터.
“멈추라 하지 않았느냐!”
곧이어 그가 발터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아니 내지르려는 찰나였다.
발터가 제 손등에 새겨진 문양을 보여주었다.
그대로 파아앗, 은색의 문양을 따라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선두에 있던 녀석이 미간을 좁혔다.
“......!”
은색의 문양.
무엇보다도 그 특유의 각인은 다른 아닌 과거 그들을 구해준 드래곤.
엘리시아의 문양이었으니.
“이, 인간이 어찌 엘리시아님의 문양을......!”
녀석이 주춤거리며 발터와 그의 손등에 있는 문양을 번갈아보았다.
그리고 그도 잠시.
녀석이 발터를 빤히 바라보았다.
“......”
짙은 흑발과 황금색 눈동자.
그 모습이 꼭 과거 엘리시아가 데리고 다니던 엘피다라는 소녀와 비슷했다.
거기다 그녀의 문양까지.
다른 건 몰라도 눈앞의 인간이 엘리시아와 연관이 되어 있음은 확실했다.
이에 그가 다른 드워프들을 향해 명령했다.
“전원! 창을 내려라!”
“예? 하지만......”
“창을 내리라 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결국 녀석들이 하나 둘씩 창을 내리고.
마침내 모두가 창을 내리고 나서야.
그가 발터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
“실례가 안 된다면 일족의 은인님과 어떤 관계이신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발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엘리시아님의 소개로 왔다.”
그대로 그의 황금색 눈동자를 따라 찬란한 빛이 흘러나왔다.
무엇보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
그런 발터의 말에 녀석이 작게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역시 엘리시아님께서......”
“그럼 마을의 지도자를 만나 이야기 하고 싶네만.”
발터가 녀석을 내려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런 발터의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절 따라오시죠.”
그대로 녀석이 제 뒤에 보이는 마을을 가리키니.
발터가 본격적으로 드워프 마을에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
그렇게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대장간.
그곳에는 입구에서부터 뜨거운 열기와 더불어 망치로 철 따위를 두들기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땅! 땅! 땅!
그대로 한 번 망치를 내려칠 때마다.
화르륵, 화로의 불이 넘실거리며 붉은 불씨가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아버지!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방금 전 경비대의 대장이 외쳤다.
이에 뚝, 줄곧 망치를 두들기던 한 드워프의 손이 멈추었다.
그와 함께 풍성한 수염을 가진 그가 고개를 돌리고 걸어 나왔다.
-처억...
당장 그의 팔뚝에 자리 잡은 탄탄한 근육과 흉터.
그리고 투박한 손바닥에 자리 잡은 굳은살은 아름답지는 않았을지언정.
결코 고결하지 아니하다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세월의 흔적과 더불어 연륜이 느껴지는 곧은 눈동자.
그런 그의 눈빛은 마치 수십 년간 전장을 헤쳐 온 백전노장의 것과도 같았으니.
그가 바로 드워프 마을의 지도자, 이반이었다.
머지않아 그가 뒤에 서있는 발터를 발견하고 미간을 좁혔다.
“......인간?”
이에 이반의 아들이자, 경비대의 대장.
코른이 제 아버지에게 다가가 속닥거렸다.
동시에 그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
이반이 미간을 좁히며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엘리시아님이 소개라니.
그와 함께 이반이 발터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리 먼 길까지 와주셔서 감사할 다름입니다.”
“......”
“그럼 바로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대장간의 안쪽에 마련된 응접실.
그곳에 이반과 발터가 마주앉아 있었다.
“......그리하여 장신구를 비롯한 제작과 검의 수리를 맡기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이반이 탁자 위에 올려둔 장검, 더 윈터와 발터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발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하네. 가능하겠는가?”
“흐음......”
이에 이반이 미간을 좁히며 장검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그가 새하얀 검신을 매만지며 금이 간 부분을 살펴보았다.
겉보기에도 그랬지만 직접 살펴보니 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상당히 잘 만든 검이군요.”
인간 중에서도 이만한 실력을 가진 명장이 있었다니.
거기다 그 소재하며 균형까지.
드워프인 이반, 그조차 인정하는 뛰어난 명검이었다.
“한데 어쩌다 이렇게 된 겁니까?”
이에 발터가 흘깃 더 윈터를 바라보았다.
니들이 좋아하시는 엘리시아님께서 제정신이 아닐 때 그랬단다.
하나 차마 그리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치열한 전투가 있었네.”
발터가 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건물주라는 꿈을 지키기 위한 신념의 싸움이었다.
그만큼 치열하다면 치열한 전투였지.
“그렇군요.”
그대로 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한 검이 이렇게 될 정도라면 보통 치열한 전투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와 함께 이반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우선 수리라면 다소 힘이 들겠지만 가능합니다.”
“......!”
그의 대답에 발터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게 정말인가.”
“예, 그리고 말씀하신 장신구들도 딱히 어렵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엘리시아님의 소개로 왔다면 선뜻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그가 사뭇 가라앉은 목소리라 말했다.
“하나 지금 당장은 불가능합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도와주고 싶어도 그럴 만한 여력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반이 발터를 바라보며 푹 고개를 숙였다.
이에 발터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는가.”
곧이어 그가 하아,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게 전부 다 헬리오스, 그 망할 드래곤 때문입니다.”
헬리오스, 그러니까 드워프 마을 근처에 둥지를 튼 드래곤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일명 상납일.
그에게 귀금속과 보구를 바칠 날이 당장 코앞이었다.
그만큼 그를 비롯한 마을의 드워프들은 있는 금속과 없는 보석을 전부 다 끌어 모아 밤낮으로 작업 중.
그리하여 지금 당장은 수리를 할 인력도, 시간도, 재료도 없었다.
아니 설령 어찌어찌 오늘 상납을 넘긴다고 하더라도.
다음 상납은커녕. 이만한 의뢰를 받을 여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대로 이반이 다시 한 번 꾸벅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마음 같아서는 엘리시아님을 생각해서라도 응당 도와드리고 싶지만...상황이 여의치 않습니다.”
이반이 힘겹게 입을 떼며 말했다.
그렇게 응접실을 따라 무거운 정적이 맴돌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그 헬리오스인가 하는 드래곤에게 바칠 상납 때문에 여력이 안 된다는 것 아닌가?”
발터가 이반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
이에 발터가 제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의 시선에 제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에 머무르니.
동시에 그때였다.
발터가 이반을 향해 말했다.
“그럼 내가 그 상납을 해결해주면 가능하겠는가?”
“......예?”
그와 함께 발터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조소가 맴도니.
그렇게 드워프 마을의 응접실을 따라.
발터의 황금색 눈동자가 심상치 않은 이채를 발하고 있었다.
94화 상납하셔야지(1)
그대로 응접실을 따라 정적이 흘렀다.
상납을 해결해준다니.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이는 이반, 그는 물론이며 드워프 마을 전체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일이었다.
“......”
하나 그와는 달리 이반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으니.
그 이유는 간단했다.
당연히 그들도 상납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으면 당장에라도 해결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드래곤이었다.
잘못 덤볐다가는 오히려 상납을 해결하기는커녕.
마을전체가 몰살당할 위기가 아닌가.
그리하여 울며 겨자 먹기로 보호비라는 명목상.
꼬박꼬박 온갖 장신구와 보구를 만들어 바쳐왔던 게 어연 수년이었다.
한데 그걸 눈앞의 인간 하나가 해결하겠다고?
‘......물론 이 자가 엘리시아님의 인정을 받은 자임은 알고 있다.’
당장 발터의 손등에 새겨진 은색의 문양이 그 증거.
거기다 단순히 그 외형을 떠나, 다듬어진 기세라거나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까지.
그가 인간 중에서도 제법 걸출하고 특출 난 인물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홀로 나서 드래곤의 상납문제를 해결한다?
이는 결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나 그 순간이었다.
발터가 이반의 속마음을 꿰뚫기라도 한 듯.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네.”
“......”
“하니 우선은 들어보고 결정해도 좋네.”
그러니까 일단 들어나보고 결정하라는 뜻.
이에 이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발터의 말이 맞았다.
기왕 이리 자리까지 마련한 거.
그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는가.
당장은 딱히 손해 보는 것도 없으니 말이다.
그와 함께 이반이 눈앞의 발터와 그의 손등을 번갈아보니.
머지않아 무언가 발견한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
그건 다름 아닌 발터의 손등에 자리한 또 다른 문양.
그러니까 일전에 엘프마을에서 밀레피르를 격퇴하고 세실리아에게 받은 세계수의 문양이었다.
그리고 세계수의 문양이란 무엇인가.
무려 폐쇄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드워프와 더불어 둘째가라면 서러운 엘프 녀석들이 제 3자를 자신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표식이 아닌가.
한데 그 깐깐하기 그지없는 귀쟁이 놈들이 그 중에서도 심지어 인간을 제 일원으로 받아들였다니.
이는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전례임은 물론.
엘프마을의 지도자의 목숨이라도 구해준 정도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호, 혹시 그건 세계수의 문양이십니까?”
그대로 이반이 발터의 손등에 새겨진 문양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가 별 거 아니라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 이 문양 말인가? 과거 엘프마을에서 그들의 세계수를 구해내고 받은 증표라네.”
“......그렇군요.”
그런 발터의 대답에 이반이 자기도 모르게 작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말했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때만큼은 그의 주변에 있던 다른 드워프들도 저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 세계수를 구해냈다고?”
“확실히...그 정도면 제 아무리 인간이라도 인정을 받을만하군.”
“역시 엘리시아님의 인정을 받은 자야. 심상치 않구먼.”
무려 엘리시아, 그러니까 드래곤의 인정을 받은 것도 모자라서 엘프들의 일원으로까지 인정받은 인간이었다.
이는 아마 전 대륙을 통틀어도 그가 최초일 터.
그만큼 그 파급력은 결코 가볍지 않았으니.
하나 둘씩 다른 드워프들을 따라 묘한 분위기가 일기 시작했다.
혹시, 정말 혹시나 그라면 가능하지도 않을까.
그런 일말의 희망 혹은 기대를 품고 있는 눈빛이었다.
이에 줄곧 발터의 옆에 서있던 레닌이 제 주군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발터 레비오르. 북부의 주인이자, 겨울의 심장을 이어받은 자.
예전부터 지금까지.
제 주군에게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대를 일으키는 묘한 마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드워프들의 수장, 이반도 다르지 않았으니.
“......”
그가 제 눈앞에 자리한 발터를 빤히 바라보았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금색의 눈동자.
거기다 입가에 자리한 작은 미소까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지언정.
이반, 그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내뱉은 말이 결코 허황된 것만은 아님을.
“......그렇다면 그 계획을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다.”
그대로 발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대답하니.
그가 제 손가락에 껴있는 황금색의 반지를 이반에게 보여주며 히죽 웃었다.
“그 전에 우선 자네 미다스의 손이라고 알고 있는가?”
미다스의 손.
과거 세상을 지배할 ‘뻔’ 했던 블랙 썬의 유산으로.
무려 신화급 마법을 비롯한 모든 마법의 무효화시키는 효과를 지닌 아티팩트이자, 이번 계획의 주축이 될 반지의 이름이었다.
***
그렇게 카이론 산맥 깊은 곳에 자리한 커다란 동굴.
그리고 그런 동굴 안을 따라.
-차르륵, 차르륵...
정체불명의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마치 금화로 이루어진 폭포가 쏟아지는 듯한 소리.
그리고 그곳에는 금색의 드래곤이 산더미 같은 금화더미에 앉아 연신 제 손으로 금화를 퍼 올리고 있었으니.
-차르륵...!
그의 커다란 손을 따라 금화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그와 함께 시끄러운 마찰음과 더불어 금화는 물론이며, 제 아래 쌓여있는 온갖 보석들과 무구가 반짝이며 찬란한 빛을 발했다.
[흐흐......]
그런 그의 이름은 바로 헬리오스.
최근 카이론 산맥에 자리 잡은 어린 드래곤이자, 이반이 말한 드래곤이었다.
그만큼 지금 그의 레어에 쌓여있는 재화들은 전부 드워프에게서 뜯어낸 물건.
이에 금색의 드래곤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행복하기 그지없는 미소.
헬리오스, 그는 금화가 너무나도 좋았다.
아니 금화뿐이랴.
찬란한 빛을 내는 보석들이 좋았다.
특히 그 중에서도 드워프들이 세공한 보석과 장신구는 아무리 봐도 전혀 질리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그 보구는 또 어떠한가.
날카롭게 버려진 창끝을 볼 때면 심금이 찌르르 울렸으며.
스르릉, 검집에서 검이 뽑혀 나오는 소리는 그야말로 전율이 돋을 정도로 짜릿했다.
[짜릿해. 늘 새로워. 역시 드워프제 명품이 최고야.]
그대로 헬리오스가 제 레어에 쌓인 금화와 장신구를 비롯한 보구를 한 가득 껴안으며 말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난 참으로 운이 좋은 드래곤이다.
그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렸다.
‘헤츨링 시절을 지나, 이제 갓 독립하여 자리 잡을 곳이 필요했는데 마침 이리 좋은 조건의 땅을 찾을 줄이야.’
지금 다시 생각해도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었다.
그야 그동안 돌아다녔던 땅들은 전부 하나씩 하자가 있지 않았던가.
디자인이 괜찮다 싶으면 누수가 있었으며, 주변 입지가 괜찮다 싶으면 내부가 너무 협소하였다.
그러다 디자인도 좋고 내부도 넓다 싶었으면.
그 주변에 모험가 길드가 모여 있어, 트레져 헌터 혹은 드래곤 슬레이어를 자칭하는 놈들이 시도 때도 없이 기어들어왔다.
때문에 결국 드래곤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황금지역을 포기하고 반쯤 체념한 마음으로 외곽으로 눈을 돌렸더니 웬 걸.
조용하고, 넓고, 인적도 드문 산이 있는 게 아니던가.
심지어는 그 주변에 드워프 마을까지 있었다.
이에 헬리오스는 ‘옳다구나! 바로 여기다!’ 라는 심정으로 재빨리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흔히 말하는 알박기.
그리고 그 와중에 드워프 마을에도 찾아가 보호를 핑계로 온갖 장신구와 보구를 뜯어내니.
노른자 땅도 이런 노른자 땅이 따로 없었다.
[듣자하니 예전에는 엘...뭐라는 드래곤이 자리 잡은 곳이라 했던가.]
그대로 헬리오스가 이 산의 전 주인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이런 좋은 곳을 왜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갔대.
그가 중얼거리며 금화더미 위에서 뒹굴 거렸다.
하나 사실 그간 카이론 산맥이 비어있던 이유는 바로 이 탓이었다.
산맥의 전 주인, 엘리시아.
당시 그녀는 드래곤 중에서도 꽤나 나이가 찬만큼.
연륜이 있는 축에 속하였다.
그리고 드래곤의 강함은 보통 나이에 비례하기에.
주변의 다른 드래곤은 굳이 그녀가 있는 영역 근처에 자리를 잡아 마찰을 일으키기 싫었던 것.
무엇보다 이는 그녀가 다른 곳으로 떠났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제 아무리 지금은 그녀가 다른 곳에 둥지를 만들었다한들.
한 번 둥지를 튼 곳에 괜히 기웃거렸다가 그녀에게 걸리면 꽤나 골치 아파졌다.
그야 당시의 그녀는 지금처럼 반쪽짜리 드래곤하트도 아니었으며, 세뇌를 당하기도 전이었으니.
웬만큼 실력에 자신 있는 드래곤이 아닌 이상.
그녀에게 덤볐다가는 역으로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굳이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는 것.
그리하여 그간의 드래곤들은 의도적으로 이 산맥을 피해왔으며,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온 셈이었다.
하나 이제 갓 헤츨링을 벗어난 사회초년생, 헬리오스는 이 사실을 알 턱이 없었으니.
그저 좋다며 이곳에 자리를 틀고 말았다.
그리고 보다시피 이 일련의 사정을 모르는 그의 입장에서는 제 자신이 운이 좋다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을 기점으로.
운이 좋다는 그의 생각은 이제 곧 산산조각 날 것이니.
그는 앞으로 반드시 기억하는 게 좋았다.
이토록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다른 드래곤들이 건드리지 않았다면 이는 그만한 이유가 있음을.
안 팔리는 매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음을 말이다.
하지만 이는 언제까지나 미래의 일.
당장 지금 레어에서 뒹굴고 있는 그는 앞으로 닥쳐올 제 운명을 예견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번에 상납 받으면 밖으로 유희라도 나가볼까.]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는 헬리오스는 그저 제 레어에서 행복한 상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나 그 순간이었다.
-그그극...콰앙!
동굴을 따라 커다란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흔들리는 동굴.
이에 헬리오스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두리번거렸다.
[뭐, 뭐야!]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지.
동시에 다시 한 번 콰앙, 폭음이 울려 퍼지니.
그 근원지는 다름 아닌 동굴의 입구방향.
[......!]
그대로 헬리오스가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곳의 위치를 아는 것은 오직 드워프들 뿐.
무엇보다 카이론 산맥은 인전이 드문 만큼.
드워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제 레어에 찾아올 불청객은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설마 드워프 녀석들인가?
하지만 아직 상납일까지는 많이 남았는데.
곧이어 인생, 아니 용생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헬리오스의 머릿속을 따라 온갖 상상이 휘몰아쳤다.
설마하니 드래곤 슬레이어인가? 그게 아니면 트레져 헌터?
종종 녀석들에게 당해 레어를 뺏기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는데 자신이 그 꼴을 당하게 되는 건가.
만약 다른 드래곤, 즉 당장 어느 정도 나이가 찬 드래곤이라면 이처럼 당황하지도 않았을 터이다.
레어에 침입자가 들어오는 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며, 설령 들어온다고 한들.
드래곤 특유의 무력으로 해결하면 될 일이니 말이다.
하나 이제 갓 독립한 사회초년생 헬리오스에게 있어 지금은 그야말로 비상사태가 따로 없었다.
동시에 그때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폭음.
그리고 마침내.
-콰아아아앙!!
레어와 이어져있던 입구마저 박살났다.
그러자 헬리오스가 화들짝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흉성을 내질렀다.
[크, 크워어어어!!]
이에 방금 전의 폭발에 이어 그의 흉성까지 섞이니 레어 안을 따라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서서히 걷히는 흙먼지 사이.
-사아아...!
웬 인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런 그는 선글라스를 낀 채.
검은 모피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발터 레비오르.
이어서 발터가 검은 모피 코트를 털어내며 선글라스를 올려 썼다.
“이야, 새끼. 많이도 쌓아놨네.”
곧이어 발터가 헬리오스와 그의 레어에 쌓인 금화더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대로 발터가 헬리오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이, 근데 거 누구 허락 맡고 자리 깔았나?”
[......뭐, 뭣?]
이에 헬리오스가 멍하니 제 발아래 발터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게 다 무슨 상황이지.
하나 그 의문이 끝나기도 전.
-콰아앙...!
발터가 발 한 짝을 바위 위에 올려놓은 채.
더 윈터를 제 어깨에 걸치며 히죽 웃었으니.
“아무튼 허락도 없이 자리를 깔았으면 집세를 내야지?”
그렇게 카이론 산맥 깊은 곳에 자리한 동굴.
발터가 제 손등에 있는 엘리시아의 문양을 보여주며 고개를 까닥였다.
“야, 돈 내놔.”
95화 상납하셔야지(2)
박살난 레어의 입구.
그리고 그 앞에 서있는 인간.
이에 헬리오스가 상황을 파악하려 애를 썼다.
[......]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을 파악해내기는커녕.
오히려 이유모를 두통이 제 머리를 강타했으니.
그가 미간을 좁히며 머리를 쥐어 잡았다.
뭐지. 진짜 뭐하는 놈이지.
하지만 그도 잠시.
눈앞의 인간의 뒤를 따라 작은 그림자 여럿이 일렁거렸다.
이에 헬리오스가 눈을 좁혔다.
가만. 저 작달막한 그림자는?
그 정체는 다름 아닌 드워프.
방금 전에는 눈앞의 인간에게 시선이 쏠려 몰랐지만, 이제 보니 드워프들은 전부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분명 레어 근처 마을에 사는 드워프들이었다.
-스윽...
그리고 그런 녀석들의 손에 창과 방패를 비롯한 병장기가 들려있었다.
평소 상납 때 들고 오던 금은보화는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그와 함께 헬리오스가 뭔가 눈치 챈 듯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이건......’
무엇보다 눈앞의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그의 손등을 따라 흘러나오는 기운이었다.
이는 바로 동족, 그러니까 드래곤의 흔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었다.
드래곤의 문양을 지닌 인간이 이를 앞세워 무리를 이끄는 경우가 있다고.
그럼 지금의 상황을 미루어보았을 때.
눈앞의 인간이 어찌 드래곤의 문양을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양을 이용해 드워프를 끌고 온 모양이었다.
동시에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순간.
[무엄하구나!!]
헬리오스가 쿠웅, 양 팔로 바닥을 찍어 내리며 아가리를 벌렸다.
그와 함께 레어를 따라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에 뒤에 있던 드워프들이 주춤거리며 움츠려들었다.
그러자 헬리오스가 속으로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게 옳게 된 모습이지.
비록 방금 전에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제는 다를 것이다.
감히 인간 따위가 고작 드래곤의 문양을 앞세워 덤비다니.
거기다 그 말에 홀딱 넘어간 드워프들까지.
이 기회에 누가 우위에 있는지 그 사실을 명확히 일깨워주마.
하지만 그도 잠시.
드워프와는 달리 여전히 그 자리에 당당히 서있는 인간.
[놈! 당장 고개를 조아리지 못할까!]
이에 헬리오스가 다시 한 번 쩌억 아가리를 벌리며 외쳤다.
그와 함께 한층 더욱 커진 목소리가 레어 안을 가득 채웠다.
주눅이 든 드워프들을 보고 잔뜩 자신감이 붙은 게 분명했다.
하나 그때였다.
발터가 와락, 제 미간을 구기며 발을 굴렀다.
무엇보다 그런 그의 다리에는 푸르스름한 오러가 일렁거리고 있었으니.
-콰아아아앙...우르릉!!
그대로 그의 발이 지면을 강타하기 무섭게.
바닥이 움푹 파이며 그 충격에 동굴이 울리며 파편이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
이에 헬리오스가 기선제압은 커녕.
오히려 그의 기세에 눌려 주춤거렸다
그와 함께 발터가 뚜둑, 목을 꺾으며 말했다.
“어딜 집세도 안내는 새끼가 언성을 높이고 지랄이야.”
애초에 발터, 그가 누구인가.
무려 단신으로 엘리시아의 공격을 막아낸 자였다.
그리고 당시 그녀가 정신을 잃은 상태라고 해도.
엘리시아는 눈앞의 헬리오스보다 훨씬 오래 산 드래곤이었다.
그만큼 엘리시아의 공격도 막아낸 마당에 그보다 어린 드래곤의 외침 따위에 주눅들 그가 아니었다.
당장 역으로 헬리오스가 밀린 게 그 증거.
-움찔...!
그리고 머지않아.
뒤늦게 정신을 차린 헬리오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야 일순간이라고 한들. 인간 하나한테 겁을 먹어 주춤거린 꼴이 아닌가.
곧이어 밀려드는 감정은 다름 아닌 수치심이었으니.
헬리오스가 으득, 제 이를 악물었다.
이어서 밝은 빛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대로 잠시 뒤.
빛 무리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금발과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미소년.
무엇보다 그 외모는 조각으로 빚은 듯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니.
폴리모프를 한 헬리오스였다.
그와 함께 처억, 그가 손을 치켜들었다.
[감히 인간주제에 건방지기 그지없구나!]
곧이어 허공을 따라 수십에 다다르는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발터의 뒤에 있던 드워프들이 흠칫거렸다.
드래곤, 그가 어떤 존재인가.
마나의 지배자라는 이명을 가질 정도로 마법에 능통한 종족.
아무리 헬리오스가 어리다고 하나, 지금 이 자리에서 마법에 한해서는 그를 따라올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웬만한 고위급 마법사라 하더라도 드래곤을 상대로 마법으로 우위를 점한다는 것은 불가능.
그대로 사납게 넘실거리는 화염구부터 푸른 뇌전까지.
금발의 소년의 뒤를 따라 수십, 아니 수백의 마법진이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에 헬리오스가 제 뒤에 자리한 마법진과 발터를 번갈아보며 히죽 웃었다.
이것이 드래곤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마도의 경지다.
하나 레어 안에서, 그것도 커다란 본체로 이만한 마법을 썼다가는 역으로 제 자신도 그 피해에 휩쓸릴 수도 있어 인간화가 필수였지만 상관없었다.
그야 인간화한다고 위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무엇보다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같은 인간이 해낼 수 없는 경지를 보여주는 쪽이 더 압도되지 않는가.
어디 이만한 마법을 처맞고도 그럴 수 있는지 확인해주지.
그와 함께 헬리오스가 발터를 내려다보며 손을 내리쳤다.
[제 분수를 깨닫게 만들어주마! 인간!]
동시에 허공에 자리하고 있던 수십의 마법이 일제히 발터를 향해 내리꽂혔다.
당장 그 하나하나만 하더라도 고위급 마법사의 마법 하나에 필적하는 위력이었다.
그만큼 하나라도 정통으로 맞으면 발터라 한들 상당히 타격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런 마법이 하나도 아니고 수십 개가 내리꽂혔다.
이에 헬리오스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그를 바라보았다.
고작 인간주제에 드래곤을 심기를 건드린 대가다. 어리석은 놈.
[자, 똑똑히 보아라! 이것이 바로 감히 나, 헬리오스에게 덤빈 미물의 최후일.....!]
하나 그 순간이었다.
수십 개의 마법이 발터를 덮치기 직전.
발터가 히죽 웃으며 제 앞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조까."
-피잇...!
그대로 날카로운 파공성이 바람을 갈랐다.
이어서 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황금색의 반지가 빛을 발하니.
그 이름은 바로 미다스의 손.
신화급 마법마저 지워버리는 대마법전용 아티팩트였다.
-파아앗!
동시에 눈부신 황금빛이 레어 안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머지않아.
찬란한 황금빛 사이, 수십에 달하는 마법들이 한순간에 바스러져 사라졌다.
-푸스스...
그렇게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재가 되어 흩날리는 마법‘이었던’ 것.
그와 함께 챙그랑! 허공에 남아있던 마법진까지 산산조각 나며 그 파편이 우수수 쏟아 내렸다.
[......무, 무슨!]
허무하게 바스러지는 마법.
그것도 모자라 산산조각 난 수백의 마법진까지.
이에 금발의 소년, 헬리오스의 눈동자가 혼란으로 물들어갔다.
설마하니 제 마법이 실패하다니.
가히 드래곤으로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충격이었다.
그러나 아직 놀라기는 일렀으니.
그가 충격에 빠져 멍하니 흩어지는 재를 제 손으로 훑고 있을 때였다.
발터가 제 앞으로 달려 나갔다.
곧이어 고오오, 그의 주변을 따라 몰아치는 매서운 바람.
-타앗!
그대로 발터가 허공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헤르메스의 팔찌의 효과였다.
무엇보다 그런 그의 손에는 여전히 미다스의 손이 반짝이고 있었으니.
“왜? 이런 건 처음 보나보지?”
단숨에 헬리오스의 바로 앞까지 다다른 발터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크, 크읏!]
그 모습에 헬리오스가 화들짝 놀라며 도망치려 했지만 그보다 발터가 한 발자국 더 빨랐다.
동시에 철컥, 돌연 헬리오스의 손을 따라 묵직한 감각이 전해져왔다.
[......!]
그건 다름 아닌 묵빛의 수갑.
그의 레어로 가기 전, 발터가 이반에게 주문하여 제작한 특제 수갑이었다.
그러자 헬리오스가 황급히 수갑을 떨쳐내려 했지만 이미 그 반대쪽은 발터의 손목에 연결된 지 오래.
당연히 풀릴 리가 없었다.
[이, 이깟 것쯤은!]
이에 헬리오스가 수갑을 박살내려는 심산으로 마나를 끌어올리며 거칠게 팔을 당겼다.
하나 그때였다.
푸스스, 마나를 끌어올리기 무섭게 푸른 마나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미다스의 손의 효과였다.
그에 따라 제 아무리 팔을 당겨도 들려오는 건 그저 수갑의 마찰음뿐.
도저히 팔이 빠질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철컹...!
오히려 그 사이, 발터가 역으로 수갑을 당기며 헬리오스의 머리를 붙잡았다.
“어금니 악물어라.”
“......뭐?”
“골통 쪼개지기 싫으면 말이지.”
“자, 잠깐....!”
그와 함께 헬리오스가 다급하게 외쳤으나 이미 한 발 늦었다.
그대로 발터의 팔을 따라 성난 오러가 넘실거리더니.
그가 헬리오스의 골통을 붙잡은 채 바닥에 내리꽂았다.
-콰아아아앙!!
곧이어 레어를 따라 커다란 충격음이 울려 퍼지며 자욱한 흙먼지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머지않아 레어에 쌓인 금화더미 위.
그곳에는 발터와 헬리오스가 사이좋게 수갑을 차고 있었으니.
“끄어어......”
헬리오스가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며 휘청거렸다.
아니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발터가 팔 한쪽을 들어 올리자, 그의 팔은 물론이며 몸까지 딸려 올라왔다.
-처억...
그렇게 저항 한 번 못해 본 채.
발터의 팔 끝에 데롱데롱 매달린 꼴이 된 헬리오스.
그 와중에 그는 어떻게는 힘을 줘 수갑을 풀어내려 들었지만 그의 힘으로는 역부족.
이에 그가 차라리 본체로 헌신하여 수갑을 박살내면 되겠다 싶어 폴리모프를 해제하려 들었다.
하지만 뚝, 폴리모프가 풀리기는커녕 인간화 상태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 아니 이게 왜......!”
제 아무리 용을 써도 마법은 발동하지 않았다.
거기다 폴리모프까지 풀리지 않는다.
물론 드래곤들은 폴리모프 상태에서도 신체를 뛰어넘는 무력을 낼 수 있었다.
하나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폴리모트 상태에서 신체강화마법을 걸어 힘을 내는 구조.
즉 마법을 발동시키지 못하는 한.
헬리오스는 지금 제 겉모습처럼 끽해봐야 소년의 완력을 내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는 그가 인간병기 급 발터의 완력을 이겨내는 것은 당연하며, 수갑을 푸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야말로 꼼짝없이 붙잡힌 셈.
그대로 발터가 작게 조소하며 헬리오스를 내려 보았다.
“잡았다.”
이에 헬리오스가 흠칫거리며 발터를 올려다보았다.
어라, 이 인간이 이렇게 컸던가.
본체일 때라면 모르겠지만 현재 그의 체격은 딱 15세 정도의 소년.
한데 제 앞에 있는 상대가 누구인가.
안 그래도 다부진 체격에 무려 190cm에 육박하는 발터였다.
그대로 차갑게 가라앉은 황금색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니 그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야.”
곧이어 발터가 그를 향해 말했다.
“대답.”
동시에 오소소, 헬리오스의 목 뒤를 따라 소름이 솟아오르니.
그가 자기도 모르게 존댓말을 하며 대답했다.
“......네, 넷?”
하지만 그도 잠시.
헬리오스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재빨리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인간에게 존댓말이라니.
드래곤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크흠. 그, 그러고 보니 집세를 받으러 왔다했느냐.”
그대로 헬리오스가 헛기침을 하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좋다. 그럼 가져가거라.”
곧이어 헬리오스가 아량을 베풀기라도 하는 듯.
레어에 쌓인 금화더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발터가 흘깃 그와 금화더미를 번갈아보았다.
“......”
동시에 그때였다.
발터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생각이 바뀌었다.”
“......뭐?”
그와 함께 발터가 제 품 속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계약서.
그의 레어에 오기 전 미리 챙겨온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쉽게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았다.
1. 레어에 있는 모든 물건 압수.
2. 앞으로 발터의 명령에 따를 것.
그러니까 사실상 노예 계약서과 다름이 없었으니.
그대로 발터가 헬리오스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더 내놔.”
“......”
“아니 다 내놔.”
새끼가 어디서 날로 처 먹을라고해.
아주 그냥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뜯어먹어주마.
96화 상납하셔야지(3)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드워프의 마을에 위치한 응접실.
그곳에는 발터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금발의 미소년이 자리했으니.
그의 이름은 헬리오스.
방금 전만 해도 카이론 산맥에 군림하던 드래곤이었다.
그대로 발터가 제 아래 공손히 무릎을 꿇은 헬리오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헬리오스.”
“......”
“이름을 부르면 대답해야지?”
동시에 발터가 제 오른손을 꺾자 그의 손을 따라 뚜뚝, 소리가 삐져나왔다.
그와 함께 헬리오스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예, 예! 형님!”
“옳지.”
그런 헬리오스 대답에 발터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금색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실시간으로 썩어가는 헬리오스의 표정.
‘......씨발.’
그대로 헬리오스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발터를 째려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발터가 쯧, 혀를 차며 그를 향해 말하니.
“눈에 힘 풀어라. 골통 쪼개지기 전에.”
“예! 형님!”
헬리오스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눈을 깔았다.
이에 내가 왜 이런 꼴이 된 걸까.
헬리오스가 제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을 삼켰다.
***
그러니까 방금 전 헬리오스의 레어.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그의 레어였던 장소.
발터가 계약서와 그를 번갈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찍어.”
“......예?”
“지장 찍으라고.”
그런 발터의 말에 헬리오스, 그가 발버둥 치며 거부의사를 표했다.
“내, 내가 왜!!”
그야 계약서의 내용은 순 엉터리.
그간 레어에 자신이 차곡차곡 모아둔 재화를 전부 넘기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그 안에 있는 재화는 전부 드워프들에게서 수탈한 물건이었으나, 헬리오스는 이를 순순히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니 넘기는 쪽이 호구 병신이었다.
“......”
이에 발터가 아무 말 없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처음부터 이리 쉽게 협조할 리가 없지.
그와 함께 발터가 저 뒤에 있는 레닌과 드워프들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가져오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대로 드워프들이 기다렸다는 듯.
웬 의자와 밧줄, 그리고 길쭉한 막대기 두 개를 들고 왔다.
그러자 헬리오스가 눈동자를 좁히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저게 뭐지.
그리고 머지않아 금화더미 위.
발터가 헬리오스를 의자에 앉히고 두 발목을 꽁꽁 묶었으니.
그때까지만 해도 헬리오스는 다가올 제 운명을 직감하지 못한 듯.
발터를 바라보며 조소했다.
“하! 긍지 높은 드래곤인 이 몸이 겨우 이깟 거에 굴할 거 같으냐!”
하나 그 외침에도 불구하고 발터는 어디서 개가 짖나 싶은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의자 뒤로 가 그의 두 팔을 단단히 붙잡으며 말했다.
“그래. 계약하고 싶으면 말해.”
“흥! 어차피 시간낭비......”
“준비.”
동시에 그때였다.
레닌과 이반이 헬리오스의 허벅지 사이에 길쭉한 막대기를 집어넣었다.
그렇게 X자 모양으로 꽂힌 막대기 두 개.
“시작해.”
그리고 발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레닌과 이반이 일제히 막대기를 붙잡은 채.
양쪽으로 있는 힘껏 잡아당겼으니.
“어차피 다 시간낭비라고 말했...크아아아악!”
의자에 묶인 헬리오스가 몸부림치며 냅다 비명을 내질렀다.
이것이 바로 우리네 조상들의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고문법.
aka. 주리틀기.
“에헤이, 거 가만있으라니까.”
“아, 아니. 잠깐...크아아아악!”
이에 헬리오스가 기운차게 온 몸을 비틀었다.
그야말로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었다.
그야 지금껏 드래곤으로 태어나 풍파를 겪어본 적도 없었으며, 웬만한 것쯤은 전부 마법으로 딸깍하면 해결했지 않았던가.
한데 마법도 못 써, 그 와중에 허벅지가 찢기는 듯한 고통이 뇌리를 때렸으니.
그동안 편안함에 잔뜩 절여져 있던 그의 뇌에게 있어.
주리틀기는 실로 인생 최고의 고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나 발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며 더욱 더 단단히 그의 양팔을 다잡았다.
“새끼. 엄살은.”
“뭐? 네놈이 직접 당해봤....!”
그런 발터의 말에 헬리오스가 울컥한 모양인지.
재빨리 반박하려 들었지만 그보다 한 발 먼저 이반이 재차 막대기를 잡아당겼다.
그와 함께 불끈, 수년간의 망치질로 단련된 그의 탄탄한 근육이 빛을 발했다.
“끄아아아악!!”
그대로 헬리오스가 재차 비명을 지르며 그의 허리가 활처럼 휘였다.
이야, 새끼 유연하네.
얼마나 좋으면 이리 기뻐할까.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보는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네.”
발터가 행복에 겨워 고개를 휘젓는 헬리오스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너, 너...!”
“자, 드가자.”
그 모습에 발터가 허허, 웃으며 그를 입을 틀어막으며 의자에 앉혔다.
“자, 잠깐...읍읍!”
그렇게 이반과 레닌을 시작으로.
다른 드워프들까지 순서대로 돌아가며 헬리오스의 주리를 틀었다.
“끄으으읍!! 읍! 끄으읍!!”
그와 함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왠지 모르게 드워프들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후우......”
“간만에 운동 좀 했구먼.”
드워프들이 한결 상쾌한 표정으로 이마에 땀을 닦을 즈음.
헬리오스는 이미 하얗게 불타 쓰러진 채 반쯤 의자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끄어어......”
이에 발터가 그의 눈앞에 계약서를 흔들거리며 이죽거렸다.
“어때? 그새 생각이 좀 바뀌었나?”
나랑 지장 찍을래 죽을래.
그러면서 발터가 슬쩍 막대기에 손을 올렸다.
이에 헬리오스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찌, 찍겠습니다! 아니 찍게만 해주십쇼!!”
그대로 레어를 따라 헬리오스의 다급한 외침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순순히 물건을 넘기는 쪽이 호구 병신이었으니.
마침내 헬리오스, 그가 호구 병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발터가 히죽 웃었다.
예절주입기 성능확실하구만.
“오케이. 풀어줘.”
발터가 레닌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와 함께 레닌이 헬리오스의 포박을 푼 순간이었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스윽...
헬리오스의 머리 위를 따라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니.
그가 고개를 들기 무섭게.
그 위에는 발터가 계약서를 든 채 활짝 웃고 있었다.
“자, 그럼 지장찍어야지?”
“흐어어억.....”
그렇게 화려한 금은보화가 쌓여있는 레어를 따라.
헬리오스가 울며 겨자 먹기로 계약서에 꾸욱, 붉은 지장을 찍어내리니.
여기까지가 과거 카이론 산맥에 군림하던 드래곤, 헬리오스가 발터의 노예로 거듭난 과정이었다.
***
그대로 다시 마을의 응접실.
끼익,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드워프들과 더불어 마을의 우두머리 이반과 레닌이 들어왔다.
그와 함께 응접실로 들어오자마자.
이반의 눈앞에 보인 모습은 발터와 그 아래 공손히 무릎을 꿇고 있는 헬리오스였으니.
-흠칫.
그가 움찔거리며 둘을 번갈아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발터가 이반을 맞이하며 물었다.
“어찌 그간의 장신구와 보구는 무사히 회수했나?”
“예, 이게 다 발터님의 덕분입니다.”
그러자 이반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간 헬리오스에게 바쳐온 금화와 장신구부터 온갖 보구를 비롯한 귀중품까지.
그의 레어 안에 있던 물건을 전부 회수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건 전부 발터의 덕분.
이에 이반을 비롯한 다른 드워프들 역시 발터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마을의 은인이시여.”
“발터님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상납을 맞추느라 쉬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대로 머지않아.
이반이 발터와 헬리오스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일단 발터의 덕분에 상납문제는 해결됐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평생 수갑을 채운 채 헬리오스를 끌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
그렇지만 만약 여기서 수갑을 풀어버린다면 헬리오스가 언제 어떻게 다시 덤빌지 몰랐다.
아니 어쩌면 수갑을 풀자마자 그럴 지도 모르고, 발터가 떠나기라도 한다면 그 사이를 틈 타 다시 상납을 강요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자 발터가 걱정 말라는 듯 제 팔뚝을 걷었다.
“자네, 이거 한 번 봐보겠나?”
아무것도 없는 발터의 팔뚝.
하나 그 순간이었다.
돌연 발터의 팔뚝을 따라 서서히 문양이 떠올랐다.
-스르륵...!
엘리시아의 문양과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금색의 문양이었다.
무엇보다 발터가 수갑을 차고 있는 제 팔을 스윽 들어 올리자 헬리오스의 팔이 딸려 올라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헬리오스의 손목에도 발터의 것과 똑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으니.
이에 이반이 미간을 좁히며 발터와 헬리오스의 문양을 바라보았다.
“이건......”
“계약자의 증표일세.”
그대로 발터가 단호하게 말했다.
계약자의 증표.
드래곤과 그의 힘을 빌리는 계약자 사이를 증명하는 증표로.
먼 과거, 하이엘프 혹은 악마와 같은 이들이 드래곤과 계약을 맺던 시절에 쓰이던 표식이었다.
그만큼 긴 역사를 자랑하는 용족 특유의 맹약.
그리고 그 조건은 계약내용에 따라 달라지는데 발터와 헬리오스의 경우.
사실상 주종계약에 가까운 조건이었다.
이에 헬리오스가 제 손목에 새겨진 문양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인간은 어떻게 계약자의 증표까지 알고 있는 거야.’
원래대로라면 계약서고 뭐고 틈을 타 찢어버리던 태워버리던 무슨 수를 써서든 무용지물로 만들고 적당히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나 발터가 계약자의 증표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이는 드래곤에게 있어 제 이름과 명예를 건 맹약.
그에 따라 만약에라도 약속을 어길 경우 제 자신에게도 큰 피해가 가는 일종의 속박이었다.
이 때문에 일부러 입 꾹 닫고 모른 척 했건만.
-그래. 지장 찍는 김에 계약자의 증표도 같이 새기도록 하지.
오히려 발터 쪽에서 먼저 나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가.
-하, 하지만......
-왜? 꼽냐?
-아니 그게......
-아, 글쎄 나중에 다 해지해준다니까?
이게 다 고객님한테 차암 좋은 거라니까 그러네.
어디 가서 이런 조건 못찾아요.
그와 함께 발터가 주리를 틀던 막대기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게 아니면 함 오붓한 시간 더 보내든가.
-아, 아닙니다! 해요! 하면 되잖아요!
그런 발터의 협박에 헬리오스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계약자의 증표를 새기니.
이걸로 계약을 해지하기 전까지는 꼼짝없이 발터에게 덜미를 잡힌 셈이었다.
그대로 헬리오스가 눈물을 감추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엄마보고 싶다.’
얼마 전만 해도 자신만큼 운이 좋은 드래곤은 없다고 자부했건만.
이제는 운이 좋기는커녕.
이만큼 팔자가 꼬인 드래곤도 없었다.
아무튼 이걸로 이반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터.
이에 이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이거라면 문제없겠군요.”
“그래.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발터가 제 옆에 놓인 검, 그러니까 더 윈터를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저번에 말한 건 가능하겠는가?”
그렇다. 애초에 발터가 드워프 마을에 찾아온 목적은 총 두 가지.
첫 번째는 왕도의 백화점 유치를 위한 귀금속 제작 거래.
두 번째는 더 윈터의 수리.
이에 이반이 제 뒤에 있는 다른 드워프들과 시선을 교환하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반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 있게 말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맡겨만 주십쇼.”
앞서 말했듯 그에게 있어 발터는 마을 전체의 골칫덩이를 해결해 준 셈.
거기다 엘리시아님의 문양까지 가지고 있는 자 아닌가.
그만큼 엘리시아님에 이어, 또 다시 마을을 도와준 거나 마찬가지.
“그럼 검의 수리는 곧바로 착수하겠습니다. 그리고 전에 말한 귀금속 제작 건은 검의 수리가 끝나기 전까지 시제품을 준비할 테니 그때 이야기 나눠보심이 어떠십니까?”
“아주 마음에 드는군.”
그렇게 드워프 마을의 응접실.
발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반과 함께 악수를 나누니.
이는 북부가 왕도의 부디끄 계에 있어 혁명을 일으키는 첫 발걸음이었다.
97화 마법사들의 악몽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까.
아니 좀 더 정확히는 2주 정도 지났을 시점.
드워프 마을에 위치한 응접실.
그곳에는 발터와 이반이 탁자를 두고 마주 앉아 있었으니.
그런 탁자 위에는 팔찌와 반지부터 목걸이까지.
온갖 장신구가 줄지어 자리하고 있었다.
“자, 한 번 둘러보시지요.”
그대로 이반을 포함한 다른 드워프들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장신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에 발터가 발터가 제 바로 앞에 있는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그와 함께 차르륵, 자그마한 마찰음이 울려 퍼지며 목걸이 중앙에 걸린 보석이 빛을 발했다.
세련된 황금 줄 끝에 매달려 있는 고운 자줏빛을 띠는 자수정.
마치 보기만 해도 밤하늘의 별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오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목걸이였다.
그렇다면 그 옆에 있는 사파이어 반지는 또 어떠한가.
사파이어는 깊고 푸른 바다처럼 고요하게 빛나며, 보는 각도에 따라서 그 속에 담긴 신비한 파장이 일렁였다.
이어서 루비가 박힌 브로치는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게 빛나니.
그 불꽃에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이끄는 묘한 마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발터의 옆에 있던 레닌의 입술을 따라 작은 감탄사가 새어나왔다.
“......대단하군요.”
당장 목걸이부터 브로치까지.
전부 한눈에 봐도 상등품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수준이었다.
그야말로 지금 바로 왕국에 진상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
하나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건 이 모든 걸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었다.
그대로 이반이 발터와 레닌을 바라보며 말했다.
“천천히 살펴보시고 최종적으로 납품할 물건을 골라주신다면 곧바로 제작에 착수하겠습니다.”
“글쎄. 전부 다 마음에 들어서 쉬이 고르기가 힘들군.”
그 말에 발터가 들고 있던 목걸이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이반 역시 미소로 화답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과찬입니다.”
“그리 겸손할 필요는 없네. 내 그만큼 자네의 물건이 마음에 들었다는 소리니 말이다.”
그대로 발터가 탁자에 놓인 장신구와 이반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다시 봐도 대단하군. 제 아무리 시제품이라 한들. 이만한 장신구를 만드는데 고작 한 달도 채 걸리지 않다니.”
발터가 흡족스러운 미소를 띄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게 실제로 더 윈터의 수리와 끝날 동안.
그는 드워프 마을에서 지내며, 수시로 이반과 만나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장신구의 종류와 더불어 그 디자인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정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후에는 시제품을 직접 확인하며 수정과정도 거쳐야하는 만큼.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터였다.
아니 소요되는 게 당연했다.
왕도의 숙련된 기술자들이라 해도 아무리 못해도 수달을 걸릴 터.
하나 그 과정에서 드워프들의 실력이 빛을 발했으니.
당장 보다시피 그들을 불과 2주 안에 모든 시제품을 만들어내는 기염을 토해냈다.
그야말로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속도.
그대로 발터가 얼마 전, 이반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럼 우선 일차적으로 추린 건 이 정도인가.
-예, 그렇습니다.
동시에 그리 말하는 발터와 이반의 탁자에는 온갖 종이가 널브러져 있었다.
전부 장신구의 대략적인 디자인과 아이디어가 적힌 일종의 설계 스케치였다.
그리고 그 수만 하더라도 벌써 수십이 훌쩍 넘어갈 정도.
하나 이걸 전부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국에는 더 추려내야 하는데 당장 스케치만 보고는 그게 영 쉽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장신구는 그 갭이 더욱 심하여 실물 혹은 그 비슷한 시제품이라도 봐야 결정을 내릴 수 있을 터.
-자네가 보기엔 어떤 게 제일 괜찮아 보이나?
발터가 이반에게 물었다.
-글쎄요. 직접 실물을 봐야 알 거 같은데 말입니다.
-......
그 후 돌아온 이반의 대답 역시 발터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제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던 이반이 입을 열었다.
-그럼 까짓 거 전부 만들어보죠.
-......잠깐. 뭐?
-시제품, 전부 만들어 오겠습니다.
이반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후로 2주가 지난 게 지금이었다.
그대로 발터가 탁자를 가득 수놓은 장신구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설마하니 그 사이 정말로 모든 시제품을 전부 다 만들어낼 줄이야.’
온갖 귀금속부터 무기까지.
무엇이든 만들어낸다는 신의 손을 가진 대가의 종족이자, 그 솜씨에 관해서는 어느 종족도 따라올 수 없는 녀석들이었다.
그만큼 솜씨도 솜씨지만, 그들의 진가는 바로 무시무시한 속도와 추진력.
특히 녀석들은 그동안은 헬리오스 때문에 상납에만 몰두하여 쉬지 않고 망치질을 해왔다.
하나 이제는 누군가의 협박이나 강요가 아닌, 부탁을 받아 제 의지로 망치를 든 셈.
아무리 같은 망치질이라 해도 그 안에 담긴 동기가 사뭇 달랐다.
그리고 그 결과, 간만에 창작욕을 불태우는 작업에 이반을 포함한 드워프들은 전부 눈이 돌아가 망치를 두들기기 시작했으며.
덕분에 드워프 마을의 대장간에는 한동안 망치질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드워프들의 표정은 힘들기는커녕 즐겁기 그지없어 보였다.
오히려 작업 도중 그들이 직접 의견을 표출하며 작업을 주도할 정도.
-에헤이! 겉에 장식은 금보다는 은을 쓰는 게 더 낫지!
-그게 뭔 소리여? 그간 상납만 맞추다보니 보는 눈이 다 뒤졌는가? 당연히 금이지!
-은이라니까?
-어허, 금이 클래식이라니까!
그런 그들은 아웅다웅하면서도 두 손은 누구보다 재빠르게 움직이며 뚝딱뚝딱 장식을 새기고 있었으니.
그 모습이 여간 신기하면서도 가히 대가라 불릴 법했다.
아무튼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 시제품 제작이 끝나고, 이제 남은 건 이 중 마음에 드는 걸 고르는 것 뿐.
이에 발터가 줄곧 제 옆에 있는 레닌을 향해 물었다.
“레닌, 왕도의 귀족들이라면 어떤 걸 가장 탐낼 거 같나?”
“......흐음.”
발터의 물음에 레닌이 작게 미간을 좁혔다.
검이라면 모르겠지만, 장신구를 고르라니.
영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거기다 앞서 말했듯 탁자에 놓인 장신구들은 하나같이 전부 다 최상품.
그러다보니 오히려 선택에 있어 어려움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수십 자루의 명검 중에 꼭 하나만 골라야하는 상황.
‘자수정 목걸이? 그게 아니면 루비나 사파이어 쪽이 더 나으려나.’
레닌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탁자 위의 장신구를 주시하였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돌연 그녀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호오, 사파이어와 루비인가. 둘 다 아름답지만 루비 쪽은 화려함을 더욱 돋보여주고, 사파이어는 반대로 유려함이 강조되는 디자인이군. 마치 날카로운 가시를 숨기고 있는 장미와도 같은 매력이랄까. 아니 이 경우에는 고요한 물결 속에 숨어있는 파도가 더 어울리겠군.”
“......?”
그 목소리에 레닌은 물론이거니.
발터와 다른 드워프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웬 금발의 미소년이 앉아있었다.
그 이름은 헬리오스. 콰거 카이론 산맥을 지배하던 드래곤이자, 지금은 발터의 노예로 전락한 드래곤이었다.
이에 발터가 눈을 좁히며 그와 장신구를 번갈아보았다.
“헬리오스.”
그대로 발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와 함께 움찔, 헬리오스가 주춤거리며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발터를 바라보았다.
“예? 부, 부르셨습니까?”
주리의 효과가 여간 뛰어난 게 아닌지.
이름만 불러도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이었다.
곧이어 발터가 차르륵, 금색의 반지와 목걸이를 들고 물었다.
“그럼 이건 어떻지?”
“......예?”
“네가 보기에는 어떠하냐는 말이다.”
그런 발터의 말에 처음에는 경계하던 헬리오스의 눈동자가 사뭇 풀어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크흠, 그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떼었다.
“금색의 반지는 햇살을 가득 담은 듯 부드럽고 따스한 빛이 인상적이군요. 특히 그 표면은 세월의 흐름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미세한 결이 마치 손길을 부드럽게 따라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듯합니다. 거기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중앙의 다이아몬드라.....마치 한 점의 별처럼 빛을 발하는 다이아몬드의 차가운 반짝임과 황금의 따뜻한 색감과 다이아몬드의 균형을 이루는 부분이 눈여겨 볼만 합니다.”
청산유수로 쏟아져 나오는 헬리오스의 감상평.
하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고요함과 안정감. 반지의 키워드를 정리하자면 그 두 가지를 뽑을 수 있겠군요. 하나 이 작은 황금 반지를 손에 거머쥠으로서 소유자의 격이 달라지니, 반지가 가져올 파급력은 결코 고요하지 않을 터! 반지의 무게는 가벼울지언정 그 안에 담긴 의미와 힘은 분명히 가볍지 않을 겁니다.”
“......”
그 말에 발터와 레닌을 더불어 이반과 다른 드워프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저 새끼 좀 치는데?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좀 치는 정도가 아니었다.
야부리 터는 솜씨가 아주 그냥 일품이다.
거기다 가장 놀라운 건 그저 단순히 입만 터는 게 아니란 것.
헬리오스가 말하는 부분은 처음 기획 당시에 이반이 강조한 포인트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저 아부가 아닌, 진심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리고 있다는 점.
당장 수군거리는 이반과 드워프들이 그 증거였다.
설마하니 저 몸만 큰 도마뱀이 저런 심미안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레닌.”
“예.”
“이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지?”
그대로 발터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자, 헬리오스. 일 할 시간이다.
“물론입니다.”
동시에 눈치 빠른 레닌이 양 손에 각자 팔찌와 반지를 들어 그의 앞에 들이미니.
“좋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이 둘 중 골라볼까요?”
“오오, 사파이어에 이어서 아쿠아마린과 토파즈인가? 개인적으로는 오팔도 좋다 생각하지만 토파즈 특유의 색감 또한 이목을 집중시키는 매력을 가지고 있는 편이지. 어디보자......”
그 즉시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헬리오스가 잔뜩 신나 이빨에 시동을 걸었다.
그래. 그렇게 다 추릴 때까지만 뺑이쳐라.
그리고 그 모습에 이반이 응접실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장신구는 맡기고 그 동안 이쪽을 한 번 확인해보시죠. 마침 주문하신 물건의 수리가 끝났으니 말입니다.”
그 말에 발터의 황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주문한 물건의 수리.
이는 다름 아닌 더 윈터에 관한 건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기다리던 바로군. 안내하게.”
“알겠습니다.”
그대로 발터가 장신구와 헬리오스를 뒤로 하고.
이반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어서 끼익, 응접실 안쪽의 문이 열렸다.
-처억...
그와 함께 발터가 안쪽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그의 눈앞을 따라 펼쳐진 모습은 방패부터 크고 작은 검까지.
방 안을 가득 메운 무구의 향연이었다.
이에 발터가 찬찬히 방 안의 무구들을 훑어보았다.
하나 그도 잠시.
발터의 시선이 어느 한 쪽에 정지했으니.
그 끝에는 시리도록 하얀 검신을 가진 익숙한 장검이 자리하였다.
그 이름은 더 윈터, 레비오르 가에 전해져 내려져오는 검이자, 발터의 무기.
곧바로 이반이 더 윈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직접 살펴보시겠습니까?”
그러자 발터가 아무 말 없이 걸어가 더 윈터를 뽑아들었다.
그대로 스으으, 그가 손끝으로 하얀 검신을 매만졌다.
수리를 맡기기 전 검신 곳곳에 새겨진 균열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저 날이 선 시린 금속의 감촉만이 전해질 뿐.
그대로 이반이 더 윈터와 발터를 번갈아보며 입을 열었다.
“가능한 기존의 원형을 헤치지 않고 복원을 진행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엘드라이트 광석을 사용하여 오러감응도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렸습니다. 한 번 시험해보시겠습니까.”
“......그러지.”
그 말에 발터가 천천히 더 윈터에 제 오러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이에 반응하듯 검신이 새하얗게 물들며 한기를 내뿜었다.
그와 동시에 발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오직 레비오르 가를 위한, 레비오르 가의 비전식을 위해 만들어진 검.
그만큼 그 어떠한 검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검.
그게 바로 더 윈터였다.
당장 발터의 오러에 동조하여 한기를 내뿜는 게 그 증거.
하나 그가 놀란 점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러감응도.
더 윈터는 그 전보다 더욱 빠르고, 강하게 발터의 오러를 담고 있었다.
그에 따라 예전과 같은 출력을 낸다 가정했을 때.
예전에는 4할 정도의 힘을 내야 했다면 이제는 불과 2할, 아니 1할만 내더라도 충분할 정도.
“......대단하군.”
이에 발터가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보다 적은 힘으로 보다 뛰어난 효율을 내는 게 가능했다.
하나 놀라운 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발터님, 이번에는 미다스의 손을 써보시겠습니까?”
“미다스의 손을 말인가?”
그대로 한 손으로만 검을 들고 있던 발터가 제 양손을 손잡이에 가져다대었다.
미다스의 손. 모든 마법을 무효화하는 힘을 가진 아티팩트로.
그 효과는 어디까지나 반지를 낀 손에 접촉한 대상에 한하여 발동하였다.
즉, 제 아무리 미다스의 손을 꼈다 한들.
검이나 다른 무기를 든 상태로 사용할 경우, 그러니까 그 손이 닿지 않는 한 효과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더 윈터의 검신을 따라 금색의 이채가 맴돌았다.
-고오오...!
새하얀 오러와 금색의 이채가 한데 어우러져 신비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체는 바로 마도를 부정하고 깨트리는 저주, 미다스의 손의 힘.
그 광경에 발터가 더 윈터와 검신을 번갈아보며 물었다.
“자네, 이건 설마......”
“예, 맞습니다.”
이에 이반이 한 치의 망설임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제 이걸로 발터님은 마법을 ‘벨 수’ 있습니다.”
엘드라이트 광석을 통해 극한까지 끌어올린 마나감응도.
이로 인해 더 윈터는 기존보다 발터의 오러를 잘 받아들임은 물론이며, 더 나아가 미다스의 손의 힘을 검신에 담을 수 있었다.
이것이 이반이 만들어낸 또 다른 역작, 매직이터.
그와 함께 발터가 제 손에 들린 더 윈터를 꾹 움켜쥐며 히죽 웃었으니.
이는 훗날 발터, 그가 마법사들의 악몽이라 불리는 계기였다.
98화 성능 확실하구만
드워프 마을에서의 일이 있고나서 얼마나 지났을까.
부디끄 사업은 드워프들의 솜씨와 헬리오스의 안목으로 생각보다 더 쉽게 해결되었으며, 더 윈터의 수리까지 완벽하게 끝냈다.
그리하여 맨 처음 계획했던 볼 일은 전부 끝.
이에 발터는 후일 본격적으로 사업을 열고, 연락할 것을 기약하며 드워프 마을을 떠나 마침내 제 영지로 돌아왔다.
그렇게 대륙의 북부.
그리고 북부에 위치한 연무장.
그곳에는 은발의 여성과 흑발의 남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준비되셨습니까. 엘리시아님.”
발터가 제 앞에 있는 은발의 여성, 그러니까 엘리시아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엘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자네야말로 준비됐는가?”
“언제든지 오십쇼.”
발터가 흔쾌히 대답하며 자세를 잡았다.
무엇보다 그리 말하는 그의 손에는 새하얀 장검이 들려 있었으니.
이는 다름 아닌 더 윈터.
-사아아...
그대로 발터가 제 마나하트에서 천천히 기운을 끌어올리자, 검신을 따라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드워프들의 우두머리, 명장 이반의 손길이 닿은 만큼.
검은 전보다 더욱 섬세하고, 더 빠르게 발터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대련의 목적은 바로
'......강화된 더 윈터의 성능을 시험해보기 위함.'
곧이어 발터가 검을 부여잡으며 엘리시아를 향해 달려갔다.
-쉬익...!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히는 발터.
하나 엘리시아 또한 방심하지 않았다.
이에 그녀가 발터를 주시하며 손을 휘저은 순간이었다.
-드드득...콰아앙!!
돌연 연무장 바닥이 거세게 흔들리며 수십 개의 기암괴석이 가시처럼 솟아났다.
그러자 철컥, 발터가 손아귀에 힘을 주며 검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깔끔하기 그지없는 일검.
-피잇...서걱!
그대로 허공을 따라 파공성이 들려오며 은빛 궤적이 그려졌다.
동시에 발터의 검이 차마 바위를 베어냈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매끄러운 단면을 자랑하며 바위를 양분했다.
하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바위를 베어나가는 발터.
그럴 때마다 더 윈터의 검신은 전혀 예기를 잃지 않으며 제 주인의 뜻을 행하니.
그 기세가 그야말로 파죽지세와도 같았다.
이에 엘리시아가 재차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주변의 바위와 돌조각들이 한데 모여들며 커다란 손아귀의 형상을 이루었다.
-콰악...!
곧이어 엘리시아가 제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바위로 이루어진 손아귀가 우악스럽게 발터를 덮쳤다.
아니 덮치려는 순간이었다.
-츠츠츳...파앗!
발터의 주변을 따라 몰아치는 서리.
그리고 그가 검을 고쳐 잡고 위로 올려 베기 무섭게.
눈처럼 시린 오러가 깔끔하게 손아귀를 베고 지나갔다.
그와 함께 반짝이는 새하얀 검신을 따라.
쿠르릉, 산산 조각난 파편이 흩날리니.
발터가 처억, 가볍게 검을 털어내며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더 강하게 하셔도 됩니다.”
아직 여유가 느껴지는 발터의 한 마디.
그와 함께 엘리시아의 눈동자가 흥미로운 듯.
묘한 이채를 발하며 반짝였다.
“......호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발터나 엘리시아나 둘 다 본 실력을 전부 다 내보인 건 아니었다.
그도 그럴게 어디까지나 대련 아닌가.
하나 그렇다고 엘리시아가 일부러 져줄 생각으로 임한 것 역시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다른 건 몰라도 방금 전 발터의 오러 컨트롤과 검 자체의 성능은 제 아무리 그녀라도 꽤 놀랄 수준이었다.
더도 덜도 말고 정확히 바위를 벨 정도로만 미세하게 오러를 주입하여 검기를 조절하는 발터.
그리고 이에 응하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온전히 발터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더 윈터.
그야말로 숙련된 검사와 명검의 완벽한 조화였다.
물론 그간 발터가 보여준 무위를 고려해봤을 때.
그 정도 수준에 다다른 검사라면 제 아무리 녹슨 검이라도 한들.
오러를 강하게 주입하면 바위 정도는 쉽게 가를 수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바위를 가르는 것을 넘어 이를 미세하게 조절하는 건 다른 경지.
즉 바꿔 말하자면 현재 발터는 온전히 제 자신의 의도한 대로.
최소한의 오러로, 최대한의 효율을 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
그리고 발터의 검, 더 윈터라고 했나.
그대로 엘리시아가 그가 들고 있는 하얀 장검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를 따라 푸른 안광이 흘러나왔다.
-스으으...
그와 함께 그녀의 시야가 역전되며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발터의 몸에서부터 검신까지.
원활하게 전달되는 오러의 흐름.
확실히 전보다 오러감응력이 올라간 게 한 눈에 보였다.
드워프 마을의 우두머리이자, 명장 이반에게 수리를 맡긴 결과였다.
하나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그 짧은 시간 내에 바뀐 더 윈터에 완벽하게 적응한 발터였다.
‘......이는 순수한 감각의 영역.’
그 미세한 정도를 조절하여 위력을 정하는 것은 제 아무리 실력 있는 마법사라 한다고 한들.
드래곤인 그녀처럼 직접 오러의 흐름을 확인하지 않는 이상.
오직 사용자 본인의 감각에 따라 체득해야 했다.
아니 설령 오러의 흐름을 보고 조절한다고 해도 뛰어난 센스가 요구되었다.
그야말로 여기서부터는 순수한 실력의 영역.
그런데 이토록 짧은 시간에 이를 완벽히 다루다니.
세간에서 어찌하여 발터, 그를 무재의 운명을 타고났다 부르는지 짐작할 법 했다.
아무튼 지금 발터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건 바뀐 더 윈터의 성능을 직접 확인하는 것.
그만큼 이를 위해서는 이쪽도 더 어울려줘야겠지.
모쪼록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
엘리시아가 그리 생각하며 양 손을 펼쳤다.
“알겠네. 그럼 그대의 바람대로 이제부터는.”
“......”
“조금 더 박차를 가해보도록 하지.”
그렇게 북부의 연무장을 따라.
고오오, 엘리시아의 주위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어서 그녀의 양 손을 타고 폭풍과 화염이 몰아쳤다.
그리고 엘리시아가 양 손을 모은 그때.
폭풍이 화염이 뒤덮고, 그 화염이 폭풍을 집어삼켜 제 몸집을 키우니.
거대한 화염폭풍이 발터를 향해 쏘아졌다.
-콰가가가각!!
그대로 마치 한 마리의 거센 사자처럼.
화염을 두른 갈기를 휘날리며 발터를 향해 쩌억 아가리를 벌리는 폭풍.
이에 발터가 꾸국, 더 윈터를 부여잡았다.
-사아아...!
그러자 더 윈터의 하얀 검신을 따라 모여드는 금빛 입자.
그와 함께 발터가 거센 폭풍과 마주하며 검을 뻗었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앙!!
발터의 검 끝에 응축되어 있던 오러가 쏘아지며 폭풍을 갈랐다.
마치 레일건을 연상케 하는 금빛 섬광.
그리고 그런 입자에 닿자마자, 폭풍은 물론이며 화염이 바스러지며 소멸되었다.
그 힘의 정체는 바로 미다스의 손.
하나 그동안은 맨 손으로만 발동이 가능하던 그 권능을 이제는 검을 든 채로 사용가능 했으니.
그 사정거리나 활용도가 무지막지하게 올라간 셈이었다.
당장 원거리에서 쏘아낸 금빛 섬광이 그 증거.
이 모습에 엘리시아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역시 자네라면 막아낼 줄 알았네.”
“......”
“그럼 이것도 막아보게나.”
바로 그때였다.
발터의 바로 위와 뒤를 따라 생성되는 전이 마법진.
그리고 머지않아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금발의 미소년과 잿빛 머리칼의 소녀.
그 정체는 다름 아닌 헬리오스와 리버였다.
무엇보다 그런 헬리오스의 양 옆에는 수십의 마법진이 펼쳐져 있었으며, 리버의 검 끝에는 푸른 전격이 몰아치고 있었다.
“죽어라!”
“대공님, 미안해요!”
그대로 머리 위에 있던 헬리오스가 냅다 마법을 내리꽂기 무섭게.
발터의 등 뒤에 있던 리버가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그런 그녀는 이미 양 발에 헤이스트를 걸고, 엘프 특유의 보법까지 적용한 상태.
그만큼 그 순간적인 속도는 차마 인간의 눈으로 좆을 수도 없을 정도로 민첩했다.
거기다 검 끝에 맺힌 푸른 전격까지.
그간 발터가 북부에 자리를 비운 사이, 엘리시아의 지도 아래 마검사의 재능을 깨우친 결과였다.
“하아아압!”
동시에 리버가 검을 내질렀다.
그 와중에 헬리오스는 물론이며, 엘리시아까지 가세하여 마법을 펼쳤으니.
그야말로 빠져나갈 틈 없는 연계였다.
하나 그 순간이었다.
발터가 히죽 웃으며 제 검을 고쳐 잡아 발아래 힘껏 내리꽂았다.
안 그래도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는 데 잘됐군.
-콰아아앙...파아앗!
그러자 주변의 땅이 움푹 파이며 환한 금빛이 주변을 전부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사이, 리버의 검과 두 드래곤의 마법이 발터의 반경에 들어온 찰나였다.
-챙그랑...!
리버의 검 끝에 맺힌 뇌전은 물론이며, 발터를 향해 쇄도하던 마법과 마법진까지.
무참히 박살난 채 사방으로 그 파편이 흩날리니.
그 충격파에 발터의 근처에 있던 리버와 헬리오스가 저 멀리 날아갔다.
이것이 바로 발터가 고안해낸 대마법전용 범위기.
여명의 침묵.
그만큼 발터의 반경 안에 들어온 이상.
마법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가히 침묵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위력.
그렇게 황금의 물결이 휩쓸고 간 연무장을 따라.
-푸스스...
박살난 마법진의 파편이 어지럽게 내리며, 소멸된 마법이 잿불처럼 흩날렸다.
그와 함께 황금색 빛 무리가 일렁이니.
그 풍경이 마치 새벽에 밝아오는 희미한 여명을 연상케 하였다.
-스르릉...철컥.
그대로 발터가 천천히 더 윈터를 제 검집에 집어넣었다.
이에 엘리시아가 그를 향해 걸어오며 싱긋 웃었다.
“놀랍군. 마지막은 미다스의 힘을 검에 담은 겐가?”
“예, 이반이 더 윈터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힘 좀 써준 셈이지요.”
발터가 제 허리춤에 찬 더 윈터를 흘깃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무튼 이게 다 엘리시아의 소개가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했던 일.
그만큼 발터가 그녀를 향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엘리시아님 덕분입니다.”
“과찬이로군.”
그리 말하는 엘리시아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있었으니.
조금이나마 발터에게 진 빚을 갚았다는 마음덕분이리라.
그와 함께 발터가 제 뒤에 머뭇거리고 있는 리버에게 다가갔다.
“리버.”
“.....네, 넷?”
“그간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구나.”
발터가 리버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실제로 저번에 검을 봐줬을 때보다 더욱 다듬어졌다.
거기다 그 사이 이만한 마법까지 배워 검술에 접목시킬 줄이야.
역시 엘리시아를 스승으로 둔 건 옳은 선택이었다.
발터가 그리 생각하며 엘리시아와 리버를 번갈아보았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엘리시아가 아무 말 없이 미소지어보였다.
“정말요?!”
동시에 발터의 칭찬을 들은 리버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대로 배시시 웃으며 발터를 바라보는 리버.
그 모습에 발터 역시 피식 웃으며 재차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럼 앞으로도 정진하거라.”
“네!”
그런 발터의 말에 리버가 씩씩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발터가 처억, 헬리오스의 바로 앞에 섰다.
“헬리오스?”
“예, 예?”
이에 쿨럭, 마법진이 강제로 캔슬 된 여파인지.
연신 골골거리던 헬리오스가 발터를 올려다보았다.
곧이어 그가 헛기침을 하며 쭈뼛거렸다.
그도 그럴게 분위기상 이 다음은 자기를 칭찬할 차례가 아닌가.
“크흠, 감사의 말이라면 됐.......”
하나 그 순간이었다.
발터가 단호하게 말했다.
“대가리 박아.”
“......예?”
“감히 뭐? 죽으라고? 내가 못 들을 줄 알았냐.”
그와 함께 헬리오스가 아차하는 표정으로 주춤거렸다.
그러고 보니 홧김에 너무 신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그랬었지.
이야, 형님 귀도 좋으셔라.
“아, 아니 그게......”
곧바로 헬리오스가 뒷걸음질 치며 손사래 쳤다.
도망칠까. 도망치는 게 정배인가.
그러나 머지않아.
‘......씨발.’
어차피 도망쳐도 북부 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헬리오스가 연무장에 대가리를 박았다.
왜 나만 이런 꼴이야.
그러자 발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옳지. 다음부터는 처신 잘하라고.”
“예, 형님......”
그렇게 대가리를 박은 헬리오스를 뒤로하고.
발터와 엘리시아, 리버가 한데 모여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이곳은 북부. 드래곤 두 마리와 용사가 모여 있는 땅이었다.
99화 디 아라크네(1)
그렇게 발터와 엘리시아가 대화를 나누던 도중.
엘리시아가 발터를 향해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당분간 다시 자리를 비울 예정이라 했느냐?”
“예. 맞습니다.”
발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발터의 옆에 있던 리버의 눈이 아쉬움으로 물들었다.
그렇다면 헬리오스는?
“......!”
발터가 자리를 비운다는 말에 대가리를 박고 있는 헬리오스의 눈빛이 반짝였다.
하나 그도 잠시.
“그래도 이번에는 그리 길지는 않을 겁니다.”
이어진 발터의 말에 따라.
이번에는 헬리오스의 눈이 아쉬움으로 물들며, 리버가 눈을 반짝였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상반된 반응.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이번에 발터, 그가 자리를 비우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본격적인 부디끄 사업을 위함.
마침 더 윈터도 성공적으로 수리했으며, 그 위력도 확인했으니.
이제는 최종 결정된 장신구 샘플을 들고 왕도로 가 앨리스와 이야기를 나눠볼 심산이었다.
그대로 발터가 엘리시아와 리버를 흘깃 바라보며 물었다.
“한데 엘리시아님이야말로 당분간 리버와 자리를 비운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아, 분명 그랬지.”
안 그래도 엘리시아, 그녀 또한 발터가 자리를 비우는 사이.
당분간 리버와 북부를 떠나 있을 예정이었다.
리버의 성장을 도와줄 겸 견문을 넓힐 셈이라 했던가.
상당히 잘된 일이었다.
그도 그럴게 방금 전 대련에서 성장한 리버의 모습을 미루어 보았을 때.
그녀와 함께 다닌다면 더욱 더 실력이 상승할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이 정도 속도라면 미래에 발터가 봤던 리버의 모습, 그니까 용사의 재능을 개화하는 것도 꽤나 앞당길 수도 있을 터.
그나마 유일하게 걱정되는 거라면 그 과정에서 리버가 힘들어하지 않을까 하는 정도.
하나 그 걱정도 오래가지 않았으니.
그야 이 부분에 관해서 오히려 리버가 먼저 나서 말을 꺼냈지 않는가.
그대로 발터가 드워프 마을에서 일을 마치고 북부로 돌아온 직후.
리버가 집무실에 찾아온 일을 떠올렸다.
다른 이도 아니고 그녀가 먼저 집무실에 찾아온 건 드문 일이기에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엘리시아님과 당분간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네, 저번 몬스터웨이브 이후로 생각했어요.
-......
-앞으로 북부에 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잿빛 성의 집무실.
리버가 큰 다짐을 한 듯.
굳은 눈동자로 발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번 몬스터웨이브, 그러니까 흑마법사들의 습격이 있었을 당시에는 발터는 물론이며 북부의 기사단과 푸른 마탑의 마법사.
그리고 용의 아이들과 북부의 연금술사들까지.
북부의 전력이 한 자리에 모여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였다.
하나 리버는 그 당시에도 아무것도 못했던 자신이 계속해서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이에 발터가 입을 열었다.
-리버, 이미 넌 충분히 도움을 주고 있다.
-......네?
-블랙 썬의 유산이 담긴 상자를 열 때도 그랬지 않느냐.
발터가 제 손가락에 있는 황금색 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실제로 리버, 그녀가 없었다면 상자를 열지도, 지금처럼 미다스의 손을 입수하지도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리버가 제 손을 꼭 쥐며 말끝을 흐렸다.
발터가 무슨 말 하는지는 충분히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보다 더욱 도움이 되고 싶었다.
줄곧 혼자였던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어준 발터를 위해.
흔쾌히 자신들의 가족이 되어준 북부를 위해.
좀 더 노력하고 싶었다.
-......안 될까요?
그대로 리버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터를 올려다보았다.
이에 발터가 윽, 곤란한 듯 흠칫거렸다.
본디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여기서 이 말을 이렇게 몸소 느끼게 될 줄이야.
발터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리버를 내려다보았다.
그와 함께 발터가 나지막이 말했다.
-리버.
-네?
-앞서 말했든 넌 지금도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다. 그리고 네 말대로 엘리시아님과 함께라면 더더욱 성장하여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아니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미래에 용사가 될 인재였으니까.
곧이어 줄곧 가만히 있던 발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엘리시아님과 여행을 떠나고 싶다 했느냐?
-......네.
-좋다. 그것이 네 의사라면 허락하마.
그리고 발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으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리버를 향해 걸어갔다.
-하나 이거 하나만큼은 꼭 기억해줬으면 좋겠구나.
-......
-리버, 넌 그 자체로도 이미 내게 있어, 북부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이다.
발터가 부드럽게 리버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옅게 웃었다.
그 말에 리버가 잠시 멍하니 발터를 바라보았다.
이어서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리며, 마음속에서 따스한 울림이 차올랐다.
-소중한 사람......
리버가 방금 전 발터가 했던 말을 속으로 되새기자, 그녀의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 가득 차오르는 듯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금세 얼굴로 드러났다.
그대로 리버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그녀의 입가를 따라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그 감정의 이름은 다름 아닌 애정이리라.
그와 함께 리버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대공님.
리버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럽고 진심이 담겨 있었으니.
그녀가 입술을 살짝 떼는 순간.
그 안에서 고마움과 감동이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여기까지가 잿빛 성의 집무실에서 발터와 리버가 나눈 대화.
그렇게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
발터가 리버를 바라보며 말했다.
“리버, 잘 다녀오거라. 모쪼록 엘리시아님 말 잘 듣고.”
“네! 대공님도 잘 다녀오세요.”
그런 리버의 모습에 발터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발터가 엘리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그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일세. 맡겨두게.”
“아, 그리고 혹시나 잡일거리 맡길 녀석이 필요하다면......”
그대로 발터가 대가리를 박고 있는 헬리오스를 흘깃 바라보았다.
“저 놈을 데려가십쇼. 저래 뵈도 나름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런가?”
“그게 아니면 엘리시아님이 데리고 다니면서 여러 가지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발터가 ‘여러 가지’를 강조하며 말했다.
그와 함께 엘리시아가 뭔가 눈치 챈 듯.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내 힘 좀 써보지.”
“......?”
이에 흠칫, 헬리오스가 황급히 고개를 들어 발터와 엘리시아를 번갈아보았다.
“예? 아니 잠깐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그러자 발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싫어?”
“아니 그게...그러니까......”
그 말에 헬리오스가 말끝을 흐리며 웅얼거렸다.
북부에 오고 나서 엘리시아, 그녀의 존재에 대해서 충분히 들었다.
무려 제 레어의 전 주인.
거기다 자신보다 배는 더 산 드래곤.
한데 그녀의 영역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그녀가 구해준 드워프들에게 보호를 핑계로 수탈을 일삼아 왔으니 눈치가 보이는 게 당연했다.
물론 다행히 발터의 쉴드와 유순한 그녀의 성격 덕에 별 일 없이 넘어갔지만, 그에게 있어서 엘리시아가 어려운 상대임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나 그도 잠시.
“......아닙니다. 아무것도.”
머지않아 헬리오스가 초연한 표정으로 대답하니.
본인이 아무리 저항해도 변하지 않는 운명을 자각했음이라.
그렇게 헬리오스는 어느새 하나씩 현실을 받아들이며 순응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제 자신밖에 모르던 시절에 비해 장족의 발전.
그 모습에 발터가 피식 웃으며 엘리시아를 향해 말했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그래, 그러지.”
***
그리고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왕도에 위치한 앨리스의 상회.
그곳에는 발터와 레닌, 앨리스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으니.
“백화점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과연. 이게 크루즈에서 말했던 새로운 사업이군요.”
그와 함께 앨리스가 탁자 위에 놓인 장신구와 대략적인 사업계획서를 번갈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왕도에 일종의 고급 샵을 세운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주력 상품은 당장 보는 대로.
그대로 앨리스가 탁자 위에 놓인 장신구를 흘깃 바라보았다.
듣자하니 무려 드워프제 장신구라고 했었나.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감정사와 함께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네.”
“좋습니다. 들어오도록.”
이에 머지않아 네다섯 명의 한 무리가 들어왔다.
이들은 전부 왕도에서 꽤나 인지도 있는 보석감정사들.
현재 누구보다도 보석과 장신구를 많이 접하는 자들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얼마나 경쟁력이 있는지.
그렇다면 과연 어떤 판매방식이 사용하여 밀고갈지.
직접 보고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럼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보석감정사들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곧이어 보석감정사들이 하나 둘씩 돋보기를 손에 쥐고 탁자 위의 장신구를 살펴보았다.
-처억...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그들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한 사람씩 장신구에 대한 집중도가 깊어졌다.
“이건......”
그런 그들의 손끝은 마치 그 속에 감춰진 비밀을 풀어내기라도 하는 듯.
잔뜩 숨을 죽인 채.
때로는 조심스레 팔찌의 세공을 따라가며, 때로는 목걸이의 금속을 살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먼저 한 명의 보석감정사가 눈을 크게 뜨며 말을 꺼냈다.
“이 사파이어 반지는...대단하군요. 무척이나 깊은 파란색을 띄고 있습니다. 이 정도 색상은 왕도에서도 정말 드물 정도입니다.”
그가 조심스럽게 사파이어가 세공된 팔찌를 들어 올리며, 그 빛깔에 넋을 잃은 듯 감탄을 내뱉었으니.
그의 눈동자를 따라 사파이어의 심연처럼 깊고 고요한 파란빛이 반짝였다.
하물며 그 뿐이랴.
그 옆에서 또 다른 보석감정사가 토파즈가 세팅된 목걸이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토파즈, 빛의 각도에 따라 색이 달라지네요. 특히 푸른빛이 도는 황금색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가 세밀한 문양이 새겨진 목걸이를 손끝으로 살폈다.
그러자 은은한 황금빛 토파즈가 미세하게 빛을 반사하며, 그 속에서 따뜻한 빛이 스며 나왔다.
“이 루비는 색상에서부터 다릅니다. 마치 불꽃처럼 타오르는 빨간색이라니. 이런 루비는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싶네요.”
그 중 다른 보석감정사 하나는 루비가 박힌 고급스러운 브로치를 집어 들며 말했다.
그런 브로치에 박힌 루비는 그 어느 보석보다 강렬하게 빛을 뿜어내며, 마치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경외심 담긴 그의 목소리가 작게 떨려왔다.
그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감탄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커져갔다.
곧이어 한 명의 감정사가 입을 열며 고백했다.
“이건...그야말로 예술입니다. 현재 왕도에 유통되는 그 어떤 보석도 이런 완성도를 자랑하지 못할 겁니다. 도대체 어디서 이만한 물건을 구한 겁니까? 마치 드래곤의 레어에 있는 보석과 드워프들이 세공한 장신구를 보는 듯합니다.”
이야, 방금 누구냐.
눈치 존나 빠르네.
발터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감정사들을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도 탁자 위의 보석들은 찬란한 빛을 내며 반짝이고, 그에 새져진 패턴과 장식은 쉴 새 없이 그들의 시선을 홀리니.
방 안은 점점 더 그들의 놀라움과 경외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그렇게 접객실은 단순한 감정의 공간을 넘어, 한 점의 예술을 경배하는 성스러운 분위기 속으로 변해갔다.
그와 함께 발터가 싱긋 웃으며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우선은 여기까지. 이 정도면 충분한가?”
“......”
그 말에 앨리스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발터를 바라보았다.
왕도의 보석 감정사들이 이리 정신이 팔린 모습은 처음.
정말이지 발터, 그와 만나 사업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도 잠시.
앨리스가 애써 놀라움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합니다. 아니 차고도 넘칩니다.”
보석 감정사들이 이만한 반응을 보이는 것부터 그 품질은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마침 왕도의 귀족들은 슬슬 기존의 장신구에 질려가던 찰나.
한데 이때 감정사들이 놀랄 정도로 고품질의 새로운 장신구가 풀린다면?
장담한다. 귀족들의 이목이 쏠리는 것을 넘어 제 2의 노스메디 사태까지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럼 바로 판매를 준비할까요?”
앨리스, 그녀는 왕도의 환락가를 주무르는 주인이자.
노스메디 판매 상회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
그만큼 그녀에게 있어 왕도에 백화점으로 쓸 건물을 구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하나 그 순간이었다.
발터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답변이었으니.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지금 당장 백화점을 열지는 않을 것이다.”
“네? 그렇다면......”
동시에 그때였다.
발터가 스윽, 제 품속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들었다.
이는 과거 그가 집무실에서 작성하던 계획서.
“백화점의 주력 상품은 총 두 가지.”
“......”
“그 중 하나가 지금 보는 장신구이며, 그 나머지는 바로 의류사업이다.”
그렇다. 처음 백화점을 구상하며 발터가 주력으로 판매할 상품은 장신구와 의류.
그 중 장신구는 마련되었다.
그것도 무려 드워프제로 말이다.
‘......한데 그렇다면 의류는?’
앨리스가 발터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제 품속에서 또 다른 종이를 하나 꺼내 들이밀었다.
“그리하여 앨리스, 왕도에서 사람 하나 찾아줄 걸 도와줄 수 있겠는가.”
동시에 그런 발터가 내민 종이에는 간단한 인적사항이 적혀있었으니.
그 이름은 다프네 비스타리아. 일명, 디 아라크네(The Arachne)라는 이명으로 불리며.
회귀 전, 대륙 전체를 주무르던 최고의 의류 디자이너였다.
100화 디 아라크네(2)
아라크네 신화.
이는 머나먼 과거, 뛰어난 직조기술을 지닌 인간의 이야기로.
그녀의 직조기술을 가히 신과 직접 자웅을 겨룰 정도라 전해졌다.
하나 그 끝에는 신의 저주로 평생 실을 짜야하는 거미가 되는 저주를 받았으니.
신에 버금가는 손을 가진 그녀는 거미의 모습으로 영원히 실을 짜며 살아야한다는 결말을 맞이했다.
이처럼 아라크네는 겸손의 중요성, 오만이 가져오는 대가.
그리고 자기 능력을 넘어서서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프네 비스타리아.
그러니까 회귀 전, 디 아라크네라 불린 그녀에게 있어 이러한 이명은 오히려 비극적인 저주보다는 경외가 담긴 칭호에 가까웠다.
왕도의 패션계에 신성처럼 등장한 그녀는 손대는 족족 제 모델을 왕도의 유명인사로 만들어냈으며, 명실상부한 왕도, 아니 대륙의 패션계를 이끄는 선구자였다.
그만큼 그녀는 제 손끝에서 하나의 마법과 같은 세련된 옷들을 창조했으며, 그녀의 디자인은 단순히 옷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작품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프네, 그녀에게 있어 귀족들의 몸은 단순히 모델이 아닌, 제 상상력과 솜씨를 펼쳐내는 캔버스였으며 그녀가 만든 의상은 왕실뿐만 아니라 왕국 전역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찬사를 받았다.
그런 그녀의 옷을 입은 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축복을 받은 듯.
범상치 않은 위엄과 품격을 뽐내었고, 그녀의 작품은 단순히 사람의 이목을 잡아끄는 마성의 매력을 넘어, 신비한 마법의 힘이 자리하는 착각마저 들게끔 하였다.
그야말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신에 버금가는 능력의 소유자이자.
비단 축복을 넘어, 경외마저 느끼게 하는 솜씨.
이에 사람들은 오히려 그녀를 인간의 몸에 갇힌 신이라 일컬으며, 디 아라크네라 불렀다.
겸손? 오만?
다프네에게 있어 그런 건 사치에 가까웠으니.
설령 그녀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한들.
세간의 사람들은 이를 보고 오만이 가져온 대가가 아닌, 인간의 몸에 갇힌 가여운 신, 혹은 비운의 천재라 여길 정도였다.
그리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현재 상회의 접객실.
“......그러니까 다프네 비스타리아라고 하셨습니까?”
앨리스가 발터가 내민 서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발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요.”
다프네라는 이름에 앨리스가 제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녀는 의류사업에 있어 완전히 문외한은 아니었다.
당장 앨리스가 운영하는 환락가만 하더라도 왕도의 트렌드는 물론이며, 귀족들의 취향을 훤히 꿰고 있어야 하는 만큼.
오히려 그녀는 왕도의 유명 디자이너의 이름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애초에 앨리스, 그녀부터 공작가의 차녀가 아닌가.
그리하여 처음 발터가 의류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를 맡길만한 디자이너라던가.
그와 관련한 리스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한데 다프네라니.
왕도는커녕 여태껏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이에 발터가 작게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당장 앨리스가 이리 반응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도 그럴게 시기 상.
대륙에 그녀의 이름이 알려지는 건 지금보다 조금 더 뒤의 일.
그녀는 지금쯤 왕도 어딘가의 골목에서 작은 의류점을 운영하고 있을 터였다.
아니 오히려 벌써부터 그녀가 다프네의 이름을 알고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다.
이는 곧 발터가 한 발 늦었음을 의미하는 바였으니 말이다.
하나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적절한 때에 왕도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지금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왕도의 장인이다. 하나 그 솜씨만큼은 내 보장하지.”
“......그렇습니까?”
발터 말에 앨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그 북부대공이 직접 자신할 정도라니.
그 말만 들어도 흥미가 돋았다.
그야 당장 그가 손 댄 사업만 해도 북부의 축복이라 불리는 노스메디와 더불어 마광석, 노스스파, 알케인의 무덤.
거기다 이제 곧 열릴 크루즈까지.
전부 큼직하기 그지없는 사업들이었다.
그 중 노스메디의 영향력은 두말하기도 입 아플 정도.
무엇보다 오늘 선보인 드워프제 장신구도 놀라운데 여기서 의류사업까지 확장한다니.
그야말로 흥미를 넘어, 기대를 가지는 게 당연했다.
그대로 발터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이와 관련하여 더 궁금한 건 없느냐?”
그러자 앨리스가 싱긋 웃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대공님의 안목이라면 믿고 맡기겠습니다.”
무려 다른 이도 아니고 북부대공이었다.
그와 함께 앨리스가 처음 발터를 만났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간 그 어떤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무시만 했던 제 야망을 첫 눈에 꿰뚫어본 남자였다.
그런 그의 안목을 믿지 않으면 과연 이 대륙에서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만큼 어느새 앨리스는 발터라는 남자에게 단단히 스며들어 있었다.
방금 전 한 치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던 단호한 대답이 그 증거.
만약 그녀의 눈앞에 있는 상대가 발터가 아닌 다른 자였다면 오히려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제 불꽃을 태우기는커녕.
차갑게 식은 눈으로 등을 돌렸을 게 분명했다.
이에 발터가 옅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 말해주니 고마울 다름이군.”
“오히려 저야말로.”
앨리스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발터를 향해 인사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녀가 발터와 서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바로 사람을 풀어 찾아보겠습니다. 아마 왕도에 있다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왕도라면 그녀의 손바닥 안.
지금 당장 사람을 푼다면 금방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러자 발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부탁하지.”
“얼마든지요.”
동시에 따악, 앨리스가 손가락을 퉁기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그녀의 시종들이 다가왔다.
그대로 그녀가 시종들을 향해 명했다.
“사람 하나 찾아오거라. 이름은 다프네 비스타리아. 현재 왕도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호하면서도 사람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목소리.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접객실을 따라 울려 퍼졌다.
“예, 알겠습니다.”
그에 따라 처억, 시종들이 고개를 숙이며 일사분란하게 흩어졌다.
그렇게 상회에 위치한 접객실.
앨리스가 발터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럼 그동안 사업이야기나 마저 하시겠습니까?”
“그러도록 하지.”
이에 발터 역시 작게 웃으며 탁자 위의 종이를 들이미니.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백화점이 입점할 위치로는 이곳을 눈여겨보고 있네만.”
“아, 여기라면 꽤 괜찮은 선택이군요. 특히 이 주변의 상권 같은 경우는......”
그대로 접객실을 따라.
발터와 앨리스가 열띤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왕도의 중심가에 벗어난 외곽의 골목.
그곳은 어딘가 어둡고 무거운 침묵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아아...
왕도의 중심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물론 당장 지금도 이곳을 벗어나 중심가로 향한다면.
잘 닦인 길거리와 분주한 마차들, 화려한 건물과 상인들이 왕도의 손님을 맞이할 터였다.
하나 언제나 그렇듯.
빛이 있으면 그만큼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
왕도의 중심가에서 벗어나, 점점 더 외곽으로 향할수록.
거리에는 밝은 햇살대신 어두운 그늘이 자리했으며, 화려한 건물은 점점 색이 바란 건물로 변해갔다.
그리고 이런 외곽 끄트머리에 자리한 작은 의류점.
-와장창!
그곳을 따라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연신 크고 작은 언성이 오갔다.
그대로 다시 한 번 챙그랑, 진열장의 창이 부셔져 내리며 그 파편이 길거리에 흩날리니.
의류점 안을 따라 날카로운 외침이 삐져나왔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냐!”
단호하면서도 강단이 느껴지는 일갈.
그 주인은 다름 아닌 백금발의 여성.
그리 외치는 그녀의 눈동자는 한 치의 물러섬도 느껴지지 않았으며,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칼은 경계와 분노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이름은 바로 다프네 비스타리아.
현재 왕도 외각에서 의류점을 운영하는 주인이자, 발터가 찾는 자의 이름이었다.
이에 가게는 물론이며, 그 앞에 있던 대여섯 명의 무리가 대답했다.
“그러니 처음부터 협조했으면 이럴 일 없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어투는 제법 예의를 갖춘 듯 하였으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로브로 감추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움직일 때마다 드문드문 보이는 정돈된 소매로 미루어 보았을 때.
녀석들읏 왕도의 뒷골목에서 흔히 보이는 그런 이들로 보이지는 않았다.
당장 레이커스와 같이 왕도의 그림자를 차지한 세력은 아니라는 소리.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다프네의 가게에 쳐들어온 불청객임은 변하지 않았다.
“협조는 무슨. 당장 나가지 못할까!”
그대로 다프네가 녀석들을 향해 외쳤다.
잔뜩 날 선 그녀의 외침에 녀석들이 주춤거리며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그도 잠시.
“최대한 얌전히 데려오라고 했건만 자꾸 이러면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무리의 맨 뒤에 있던 녀석이 천천히 걸어 나오며 제 품속에서 길쭉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푸른 장식이 달린 완드.
한 눈에 보기에도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물건이었다.
“할 수 없이 다소 거친 방법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곧이어 다른 녀석들도 하나 둘씩 지팡이나 완드 따위를 꺼내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완드 끝을 따라 파지직, 푸른 스파크가 일렁였다.
그 모습에 다프네가 흠칫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크읏......”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는 재빨리 제 뒤의 선반에 손을 뻗어 재봉용 가위를 움켜쥐었다.
동시에 그런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대로 순순히 끌려갈 생각은 결코 없다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이에 녀석들이 쯧, 혀를 차며 다프네를 제압했다.
“다른 데는 몰라도 얼굴과 팔은 피하여 제압하......!”
아니 제압하려는 찰나였다.
끼익, 누군가 의류점의 문을 열고 들어왔으니.
곧이어 여유로운 발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벅, 저벅...까드득!
그대로 한 번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 파편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삐져나왔다.
하나 그 살벌한 소리와는 달리 그 발걸음은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느긋한 여유가 느껴졌다.
그 미묘한 불협화음이 자아내는 괴리감.
이에 녀석들은 물론이며, 다프네가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웬 흑발의 남성과 더불어 은발의 여성이 자리하였다.
그런 이들은 로브를 뒤집어쓴 터라 그 얼굴을 확인하기는커녕. 쉬이 정체를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그나마 짐작할 수 있는 건 그들의 머리색이 전부.
“......”
그 모습에 일순간, 의류점을 따라 정적이 맴돌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정적을 깬 것은 로브를 뒤집어쓴 흑발의 남성 쪽이었으니.
“실례하지. 내 잠시 볼 일이 있어서 말이다.”
“......”
“이 중 다프네라는 자 있느냐?”
그가 태연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녀석들 중 하나가 미간을 구기며 대답했다.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당장 물러나거......”
하나 그 순간이었다.
돌연 피잇,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려 퍼지더니.
어느새 은발의 여성이 뽑은 시린 검 끝이 녀석의 목 바로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주군께서 말씀하시고 있지 않느냐.”
“......!”
눈 깜짝할 사이 그의 목 아래 자리한 검.
녀석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에 남은 녀석들이 빠르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곧이어 먼저 움직인 쪽은 당연히 그들.
그대로 녀석들이 표적을 바꿔 은발의 여성과 흑발의 남성을 향해 완드를 뻗었다.
동시에 완드 끝에 맺혀있던 스파크가 일며 푸른 전격이 쏘아졌다.
“감히 이쪽이 누군 줄 알고 끼어드느냐!”
-파지지직!!
그렇게 둘을 향해 쏘아지는 푸른 전격.
그 위력은 당장 사람을 죽일 정도는 아니라고 하나, 상대를 제압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그때였다.
“유감이군.”
철컥, 흑발의 남성이 제 검집에 손을 올렸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러자 그의 주변을 따라 황금색 물결이 요동치니.
-파아앗...챙그랑!
그를 향하던 전격은 물론이며, 완드 끝에 달려있던 푸른 보석까지.
산산이 박살나며 바스러졌다.
오히려 그 충격에 역으로 녀석들이 피해를 입을 정도.
“쿨럭!”
그 중 몇몇은 마법이 강제로 취소된 여파인지.
붉은 피를 토하며 휘청거렸다.
하나 그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쉬익...!
순간 흑발의 남성의 모습이 흩어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터업, 그가 손을 뻗어 로브를 뒤집어쓴 녀석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곧바로.
-콰아아아앙!!
그가 녀석을 무참히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에 따라 커다란 충격음과 함께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그 후로 머지않아.
-푸스스...
서서히 걷히는 흙먼지 사이.
흑발의 남성이 뚜둑, 고개를 꺾으며 미동도 하지 않는 녀석을 휙 던져버렸다.
이어서 그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남은 녀석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말이 그리 이해하기 어려웠나? 그럼 내 좀 더 알기 쉽게 말해주지.”
“......”
“내 눈앞에서 꺼져라. 지금 당장.”
그렇게 왕도 외곽에 위치한 의류점을 따라.
좌중을 압도하는 황금색 눈동자가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