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용사도 전문직이다 (1)
준일의 꿈은 평범했다.
서울에 중형 평수 아파트가 있고.
아름다운 아내와 결혼한 뒤,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잘 사는 것이다.
“흠······”
대학교 강의실.
준일은 이 꿈을 위해서 앞으로의 미래 계획을 생각하며 연필을 굴려본다.
휘릭.
‘아무래도 힘들단 말이지.’
준일이 점찍어놓은 아파트는 가격이 20억까지 올랐다.
분명히 군대 갔다오기 전엔 9억이었는데.
‘20억이라니. 그런 걸 평범한 샐러리맨이 얻을 수 있을까?’
준일은 멍하니 지금 진행되는 강의를 바라본다.
하나마나한 지루한 얘기가 교수 입에서 흘러나온다.
이대로있다간 평범한 샐러리맨 직행이다.
휘릭.
준일은 다시 연필을 굴리며 생각해본다.
‘성공하려면 사업을 하거나, 사짜 직업을 갖는건데······’
범부가 하기에 사업은 리스크가 너무 크고.
결국 답은 사짜 직업인 것 같다.
의사, 판사, 검사, 변호사······ 이런 거 있잖은가?
의사는 물 건너 갔고.
세무사, 회계사, 변호사······ 이런거.
그 중에서 노려볼만한 건 변호사.
‘변호사 좋네.’
이유?
간단하다.
숫자 공부를 싫어해서.
반면에 영어와 학점은 자신이 있었다.
그럼 로스쿨이지 뭐.
‘생각보다 경우의 수가 확 주네.’
대학교 3학년.
이제 미래를 걱정할 나이.
이렇게 준일은 꽤나 간단하게 자신의 진로를 정해가는 듯 했다.
이 녀석만 등장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부웅~
“······?”
웬 큰 벌레가 그의 코 언저리를 왔다갔다하는 게 아닌가?
준일은 빠르게 손을 휘둘러버렸다.
결과는 명중.
퍽!
“꺅!”
그것이 책상 위로 내다 꽂혔다.
‘꺅?’
분명 그런 소리를 내었다.
“무슨 벌레가 이렇게······”
떨어진 곳을 보니 이건 벌레 수준의 크기가 아니었다.
“벌레라니! 이야기 요정이거든!?”
조그마한 여자 아이(?) 같은 녀석이 날개를 펄럭이며 성질을 낸다.
날개 달린 여자 아이.
그랬다.
말 그대로 요정, 페어리(Fairy)다.
파르르!
녀석이 날개를 퍼덕이며 다시 준일 앞으로 날아오른다.
그리고 손을 내밀며 자기 소개를 한다.
“이야기 요정. 팸이라고 해.”
준일은 너무 놀라 두리번거렸다.
다른 학생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강의를 열심히 듣고 있다.
“뭐야. 내가 강의 듣다가 잠에 들었나?”
“맞아.”
맞댄다.
“응? 맞다고?”
“응. 넌 꿈 꾸는 중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랑 대화를 하겠어?”
그럼 그렇지. 준일은 안심하고 팸의 작은 손에 손가락을 대었다.
“그렇구나. 난 문준일.”
꿈이라면 요정과 인사 정도 할 수 있지. 암 그렇고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용사’해볼 생각 없어?”
“······용사?”
“마침 너한테 딱인 직업 같아서.”
“너 취업상담 요정 같은거야?”
“아니, 난 이야기 요정이라니까?”
이야기 요정이 대체 뭔데.
“사람들을 즐겁게 할 이야기를 만들어서 수많은 차원에 널리 알리는거야.”
설명을 들어도 더 모르겠다.
차원? 무슨 그렇게 거창한지.
“뭐 쉽게 말해 널 용사로 선택했단 말이야.”
선택? 누구 맘대로?
“내가 이야기 판을 하나 샀는데. 거기에 용사로 널 보내고 싶어. 용사 하자. 응?”
난 변호사가 될 건데?
“아니. 무슨 용사야. 난 변호사가 될거야. 사짜 직업이 되야한다고.”
“사짜 직업?”
“응 끝이 사로 끝나는 직업. 전문직.”
“용사도 사인데?”
“······꺼져.”
그때였다.
척!
팸의 손가락이 올라간게.
“1억.”
“······뭐?”
“1억 줄게. 용사하면.”
1억?
갑자기 나온 억소리에 준일이 관심을 보인다.
“용사라는게 정확히 뭘 하는건데?”
“뭐긴? 이세계로 가서 동료들과 함께 마왕을 죽이는거지. 뻔하잖아?”
에라이.
마왕을 죽인다고?
그게 말이 쉽지.
더우나 추우나 밖에서 칼만 휘둘러야하는 엄청난 3D 직종 아닌가?
“안해. 1억은 무슨. 5억은 줘라.”
어차피 꿈인거 막 질러보는 준일.
“3억.”
“······?”
“3억 줄게.”
‘뭐야. 진짜 올려준다고?’
준일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마왕이라는 거······ 정말 그렇게 죽이기 힘든가?
팸은 마음을 읽었다는 듯 말해준다.
“별로 어렵지 않아. 주인공 버프 빠방하게 넣으면, ‘평범한 고등학생’도 다 한다니까?! 그냥 하겠다고 말만하면 된다구! 곧바로 착수금 1억 5천이 들어갈거야.”
팸이 계속 유혹한다.
1억 5천이라니.
“그냥 약속해보라니까? 어차피 꿈인데? 만약 돈이 들어와있으면 기분이 좋지 않겠어? 꺄루루!”
어차피 꿈.
그 말이 컸다.
그냥 개꿈일 텐데.
돈 주면 땡큐지.
준일은 그렇게 생각하며 팸에게 끄덕였다.
“그래.”
“꺄루루! 좋아.”
팸은 신나서 공중을 한바퀴 돌더니.
이름을 짓는다.
“이름도 멋진 걸로 지어줄게. 어디보자······ 율리안? 이게 좋겠어.”
그리고는 손가락을 튕기는데.
탕!
그대로 준일의 세계는 흔들려 무너져내렸다.
* * *
“오빠? 꿈 꿔요?”
“······!”
눈을 뜨니 동그란 눈동자가 코앞에 와있다.
수연이다.
“무슨 1억······ 3억······ 하던데.”
그녀가 웃음을 참고 있다.
준일은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본다.
“어? 강의 끝났어?”
강의실은 텅 비어 아무도 없다.
혼자 남아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빠 강의는 한참 전에 끝났어요. 웬일로 이렇게 자요?”
와. 끝나고도 잤구나.
준일은 창피함에 얼굴이 벌개졌다.
하필 수연이한테 들키다니.
“와. 학점 귀신 문준일도 잠은 자는구나.”
수연이 옆에 동갑내기 친구가 놀린다.
‘아, 쪽팔리게.’
준일은 부스스한 머리를 긁으며 급하게 강의실을 나선다.
“그래. 깨워줘서 고맙다. 난 빨리 갈게.”
그래서 알지 못했다.
지이잉.
주머니에 든 그의 휴대폰에 알림이 왔다는 걸.
[나라 은행]
[입금 알림]
[’페어리 주식회사’로부터 150,000,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
* * *
어떻게든 잘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미친······ 이거 진짜인가?’
준일은 걸어가는 내내 휴대폰 은행 어플을 보고 있었다.
강의 들으면서도 보고, 밥 먹으면서도 보고, 지금 걸어가는 길에도 보고 있는데.
[’페어리 주식회사’로부터 150,000,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
가난한 대학생 계좌에 1억 5천이라는 돈이 꽂혀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 꿈이 진짜라고?’
지금 이 돈이 왔다는 건, 용사 어쩌구 하던것도 진짜라는 말이 된다.
‘그럼 용사가 되는 것도 진—’
빠아아아아아앙!
엄청난 크기의 경적이 울렸다.
휴대폰만 보던 준일에게 눈부신 헤드라이트가 쏘아진다.
‘아.’
트럭이었다.
쾅!
준일은 그렇게 용사가되었다.
‘5억 달라 할 걸.’
* * *
쾅!
준일의 검이 마왕의 목을 내리쳤다.
“허억······ 헉······”
끈적한 녹색 피가 흘러나온다.
이 진절머리 나는 새끼.
“드, 드디어! 마왕을 죽였다아아아!!”
준일이 외친다.
“십년 만에!”
그랬다. 10년.
용사 파티가 결성되고 마왕을 토벌하기 위해 출발한지 10년이 흘렀다.
마왕을 죽이는데 무려 10년이 흐른 것이다.
“와아아아아!”
“율리안! 율리안!”
그의 동료들이 무기를 내던지고 달려온다.
이곳에서 불리는 준일의 이름, 율리안을 연호하며.
모두는 서로를 끌어안았다.
“젠장! 얘들아······!”
율리안의 눈에선 하염 없이 눈물이 흘렀다.
허약한 현대인으로 넘어와 겪어야했던 수많은 개고생이 스쳐간다.
동료들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여정.
“흐으윽······ 메이린! 토우! 세이!”
고생은 끝났어.
이제 즐거운 일만 가득할 거야.
그렇게 말하려했으나.
팅.
[The End]
‘어?’
준일의 시야에 이런 메시지가 뜨면서, 마치 잘 보고 있던 드라마가 갑자기 꺼진 것처럼 모든 세상이 암전했다.
‘뭐······ 뭐야.’
모든게 시커먼 세상.
한 군데로 빛이 쏘아진다.
무대 위 조명처럼.
스폿라이트다.
펑.
그곳에서 팸이 나타났다.
처음 자신을 인도해줬던 요정.
“수고했어.”
“······뭐, 뭐야. 끝이야?”
“돌아가면 3억 입금될거야.”
“3억?”
“꺄루루? 뭐야. 잊은거야? 너 3억 벌겠다고 10년간 이 고생 한 거잖아?”
“······”
맞다. 그랬었지.
젠장.
10년 구르고 3억.
이거 맞는거냐.
‘아니, 그건 차치하고서······’
준일은 그냥 이렇게 끝낼 수 없었다.
“인사도 못해?”
“인사는 충분히 했잖아.”
“그건 마왕을 잡아서 한거고! 내가 간다는 건 모르잖아!”
“응?”
팸은 의외라는 듯 그를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트린다.
“꺄루루! 율리안. 따뜻한 남자였네? 요즘 그런 용사 인기 없는데. 그러니까 망했지.”
“······뭐? 망해?”
율리안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10년간 처굴러서 세계를 구해놨더니.
망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망했다니.”
“말 그대로야. 별로 좋지 않아. 반응이.”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었다.
10년의 고생을 부정당하면, 누군들 받아들일까?
“누구 반응? 백성들은 마왕 잡았다고 신나할텐데! 다 날 좋아하던데?!”
“성좌님들.”
“응······?”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팸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좋아. 넌 대학생이니까. 성적표로 좀 볼까?”
팸이 손가락을 튕기자, 거대한 알파벳이 나타난다.
펑.
[평가: C+]
씨플러스.
비록 10년 전이지만, 학점의 괴물이었던 율리안.
“씨프······ 씨팔!? 대체 내가 뭘 잘못한건데?”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동료가 셋 정도 죽긴했지만! 10년 동안 굴러서 마왕 잡고, 나라도 구하고, 어려운 백성도 구제했잖아! 씨발 다 해줬잖아!?”
“꺄루루? 화낼 필요가 없어. 씨플은 씨플이어도 돈은 제대로 입금 된다구?”
율리안은 듣지 않았다.
슬슬 10년간 쌓인 설움이 폭발했다.
“내 10년! 10년이 지금 씨플이라고! 장난하냐?!”
“돈은 준다니까? 너 돈 때문에 한 거 아니야? 3억이 생긴다고? 평가는 내가 아니라 성좌님들이 하는 거야.”
“10년 동안 3억 번게 대수야?! 나 이제 돌아가면 뭐하라—”
“야 율리안!”
탕!
팸이 손가락을 튕기자, 순간 율리안의 숨통이 조여졌다.
“컥······ 헉······!”
“적당히 하고 진정하도록?”
율리안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숨통이 조이는게 조금 풀어진다.
“커헉······ 헉······”
율리안은 숨을 거칠게 내쉬며 진정한다.
방금 그건 10년간 마왕에 맞서면서도 느껴보지 못한 공포다.
‘뭐냐고. 방금.’
단순히 숨통을 조인게 아니라, 꼭 존재가 위협받는 듯한 느낌이다.
‘젠장.’
율리안은 결국 포기한다.
저 놈에겐 대항할 수 없다는 걸 순식간에 깨달은 것이다.
10년간 이세계에서 구른 직감이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아, 알겠으니까······ 인사만 하고 가게 해줘. 마지막 부탁이야.”
“안돼. 이야기가 끝나면 절대 다시 시작될 수 없어.”
동료들한테 인사는 끝까지 허락해주지 않는다.
‘하 씨······’
적어도 마왕 토벌 기념 축제 정도는 참가하게 해줘야할 거 아냐.
‘다른 애들은 몰라도 메이린한텐······ 할 말이 있는데.’
물론 이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또 숨통을 조일까봐.
“네 이야기는 에필로그도 없냐?”
“이번 건 없어. 망했잖아?”
이것도 성적 때문인건가.
“그것 참 매정하네.”
“꺄루루. 꼬우면 A 이상을 받았어야지~”
응? 잠깐.
그녀의 말 중에 정말 이상한 단어가 있었다.
“이번 건 없······?”
“잘 가!”
뭐라 따져보려했지만.
팸은 이미 손가락을 튕겨버렸다.
펑!
세상이 일그러진다.
‘아······ 안돼. 나 이제 가면 뭐하냐?’
용사질만 10년했는데.
겨우 3억 들고 이제 사회에서 뭐하냐고!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얻지 못한 채.
율리안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슝!
* * *
“오빠? 꿈 꿔요?”
눈을 뜨니 동그란 눈동자가 코앞에 와있다.
‘메이린?’
아니다.
수연이다.
“무슨 1억······ 3억······ 하던데.”
‘어?’
준일은 멍한 눈으로 그녀의 동그란 눈을 빤히 쳐다봤다.
그녀가 수연이라는 걸 인지했다.
그리고 이 상황도 순식간에 이해됐다.
그의 뇌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정보를 쏟아내고 있다.
이게 언젠지, 어떤 상황인지.
‘이거······’
덕분에 10년 전의 일이지만 정확히 기억한다.
이건 ‘그때’다.
‘강의실에서 자고 있던 때.’
준일은 시험삼아 그때와 똑같이 묻는다.
“어······ 강의 끝났어?”
준일이 이렇게 물으면.
강의는 한참 전에 끝났죠. 웬일로 이렇게 자요? 라고 대답했었다.
“오빠 강의는 한참 전에 끝났죠. 웬일로 이렇게 자요?”
이럴수가 똑같다.
거기에 더해 친구놈이 옆에서 놀리기도 했었지.
이야. 학점 귀신 문준일이 잠도 자네? 였나?
“와. 학점 귀신 문준일도 잠은 자는구나.”
준일의 동공이 흔들린다.
‘뭐야, 이거.’
그는 얼른 휴대폰을 켜본다.
2025년 4월 17일.
목요일.
오전 10시 55분.
‘미친······’
그랬다.
팸이 나오는 꿈을 꿨던 그 날이다.
그 후로부터 하루조차 흐르지 않았다.
전혀 바뀐게 없다.
아, 아니다.
바뀐거 딱 하나 있다.
지이잉.
휴대폰 메시지가 울린다.
[나라 은행]
[입금 알림]
[’페어리 주식회사’으로부터 300,000,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
1억 5천이 아닌, 3억이 입금됐다.
2화
용사도 전문직이다 (2)
준일은 은행 어플을 켜서 다시 숫자를 세어본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억.’
3억!
3억이다.
일개 대학생에겐 엄청난 금액.
‘미쳤다.’
심장이 막 두근댔다.
당장 사고 싶던 옷을 살까?
아니지, 옷 따위가 대수인가?
외제차 사서 등교하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준일은 심장이 마구 두근댔다.
그러나 그런 망상도 잠시.
-율리안! 도, 도와줘.
-고맙군. 율리안!
-네 덕분이다. 율리안!
10년간 동고동락한 동료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쳐간다.
-나······ 나는 여기까지인 거 같아······
-너희들 먼저가! 내가! 내가 막을게!
-수고했어. 난······ 끝인 듯하군.
몇 명은 심지어 명을 달리했었다.
준일은 고개를 떨군다.
‘뭐하는거냐. 난······’
3억.
이건 그들의 숭고한 희생과 기여로 빚어진 돈이다.
절대 함부로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좋은 곳에 써야지.’
준일은 부동산 어플을 켠다.
[인생 한방]
원하는 매물을 살펴봤다.
[매매 21억]
용사 파티를 떠올릴 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머리가 식는다.
‘부족해.’
3억은 절대 인생이 바뀔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저 아파트가 9억이던 시절이면 모를까.
지금은 아니었다.
‘투자를 해야될 것 같은데.’
그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노트북으로 열심히 투자 계획을 세웠고.
잠에 들 때면 여전히 메이린 꿈을 꿨다.
‘가······ 가지마! 율리안!’
‘메이린? 내 말이 안 들려!? 나, 나는 어쩔 수 없어!’
메이린은 늘 가지 말라며 손을 휘저었다.
그녀는 율리안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가지 말라고! 율리안! 어디로 간다는 거야!? 아직 끝맺지 못한 게 많은데!’
‘메이린! 이건 어쩔 수 없다니까?!’
‘야! 율리안 이 개자식아!’
메이린은 결국 늘 그에게 욕을 박고.
‘아아아아아악······!’
율리안은 검은 마수에 잡혀 어딘가로 끌려가면서 사라졌다.
“아아아악?!”
이런 악몽과 함께 그는 늘 아침 7시에 기상했다.
“헉! 허억······ 헉······ 메이린······”
땀으로 젖은 침대보를 보고서야 다시 현실임을 깨닫는다.
그야 10년이다.
용사 생활을 10년 동안 했다.
‘적응이 안 돼.’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했다.
‘한 달 정도 지나면 괜찮으려나.’
* * *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예상대로 그는 점점 현실에 적응해나갔고.
10년동안 용사로 굳은 머리로, 중간 고사까지 어떻게든 치뤘다.
용사질로 받은 3억은 모두 포트폴리오를 짜서 투자했다.
그리고 성적이 나왔다.
[학점 평균 3.2]
“······씨······ 씨발.”
준일은 절망했다.
학점 때문에?
아니.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총 순이익 평균] [-51%]
투자금이 절반이 되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쿵!
준일은 침대 위로 몸을 던져 괴성을 지른다.
“젠장! 젠장!”
세상에 쉬운 게 없었다.
욕심을 부려서 포트폴리오의 절반 이상을 가상 화폐로 꾸려놓은 게 패착이었다.
그다음은 한국 주식을 믿었던 게 패착이었다.
“공부하자. 공부하는 게 살 길이야. 투자는 무슨······!”
비록 잠시 학점이 많이 내려갔지만.
역시 유일한 답은 공부였나?
준일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유튜브를 켠다.
투자 강의를 클릭한다.
“······뭐하는거야. 문준일?”
멍하니 투자 강의를 보다가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아니, 해야하는 공부가······ 투자 공부였어? 준일아?”
로스쿨을 노리는 대학생이 투자 강의라니.
이 무슨 미친짓인가?
‘하긴······ 이미 로스쿨은 끝인가.’
그렇다.
사실 이미 느끼고 있었다.
학점 같은 거, 이제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10년의 용사 생활로 준일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도저히 마음이 안생겨.’
차라리 투자를 하면 했지.
평범한 대학생처럼 펜 잡고 공부하고 시험 치는 인생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머리도 안 돌아가고.’
중세의 그 야만과 낭만의 시대에서 남 패죽이는 짓만 10년 했는데.
공부 머리가 돌아가겠나?
‘그때가 더 좋았던 것 같기도······’
그때 느꼈던 희열, 우정, 감동······
전부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도 손만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동료들.
세이, 토우······
‘메이린.’
메이린의 갈색 머리칼이 아른거린다.
‘난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건가?’
준일은 혼란스러웠다.
이제 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지?
분명 팸은 아무런 시간 손해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게 되돌려줬을 텐데.
세상은 바뀌지 않았어도, 준일이 바뀌어 버렸다.
‘뭘 해야되냐고. 젠장.’
그때였다.
부웅—
벌레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곧 여름이라 조금 큰 나방 같은 거라 여겼다.
“전기 파리채가 어딨더라······”
준일은 전기 파리채를 집고 그대로 지져버렸다.
“꺄루루루르르르륽!!”
나방이 희한한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
준일은 깜짝 놀랐다.
이 익숙한 목소리는······
“팸?”
“꺄루루······ 기, 기억하는구나?”
팸은 감전돼서 부스스해진 머리로 위로 날아올랐다.
“나야. 이야기 요정. 팸.”
“이것도 꿈이야?”
“아니.”
“······아니라고?”
“응. 넌 이제 굳이 날 꿈에서 볼 필요가 없어. 이미 한 번 용사였던 사람이니까.”
“아······”
예전의 준일이었다면 이게 현실이라는 거에 위화감을 느꼈겠지만.
이세계 경력 10년에 빛나는 용사 율리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설마.’
그는 팸이 등장한 이유도 금새 추측했다.
“또 용사를 제안하러 온거야?”
“그래.”
“아니, 근데······ 한 번 했던 놈이 또 해도 되는 거야?”
“음······ 날카로운 질문이야.”
팸은 조금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인다.
“사실 안되지. 일종의 불문율이랄까? 용사는 늘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고등학생······ 아니, 요즘엔 평균 연령이 올라서 대학생인데. 하여간 아무것도 모르고 평범해야 하거든. 근데 넌 아무것도 모르진 않잖아.”
“근데 왜 날?”
“땜빵.”
“······뭐?”
“이전 후보가 트럭에 치여서 이세계로 간 게 아니라, 진짜 죽어버렸어. 꺄루루!”
이세계가 아닌 저세계로 간 용사 후보.
준일은 소름이 돋는다.
“아니, 미친. 그런 일도 생기는 거였어?”
“우리 실수는 아니야. 우리가 운영하는 트럭이 다른 트럭을 치는 바람에 그 트럭이 용사 후보를 쳐버린, 정말 재수없게 된 사건이지.”
너네 실수 맞잖아?
“그런데, 율리안. 어때?”
부웅~
팸이 다리를 꼬며 책상 위로 날아가 앉으며 씩 웃는다.
“현대 생활은 재밌었어? 돈도 펑펑 쓰고?”
“······”
준일은 대답하지 못한다.
팸이 씩 웃는다.
“용사만 한 게 없지?”
공감한다.
용사만 한 게 없다.
현실 시간 기준 거의 몇 초 만에 몇억을 버는 직업인 셈 아닌가?
이런 게 또 있을 리가 없다.
그 몇 초를 10년으로 늘려 쓰는 준일의 정신만 버틴다면 말이다.
“그래서 이번엔 얼만데?”
준일은 인정하고 그냥 가격부터 물었다.
팸은 꺄루루 웃으며 좋아 죽는다.
“3억.”
“또?”
“저번에 완전 망쳐놓고. 오르길 바랬어? 이것도 많이 쳐준 거야.”
그건 그랬다.
몇 초에 3억이라니.
말이 되나?
하지만 준일도 억울한 건 있다.
“아니, 난 아직도 그게 이해가 안 가는데. 뭘 망쳤다는 거야?”
말이 몇 초지, 10년간의 고생이었다.
근데 뭘 계속 망쳤다는 건지.
뭐가 문제라고 알려주기라도 하던가.
“음. 그건 성좌님들이 결정하시는 거야. 나랑은 상관이 없다구?”
안알려줄 생각인 모양이다.
준일은 질문을 바꿔본다.
“후. 좋아. 그럼 성적에 따라 인센티브를 주는 건 어때?”
“······뭐?”
“인센티브. 성적이 높으면 돈을 더 달라고.”
“꺄루루! 씨뿌리기 당한 주제에. 기고만장하구나?”
“두 번째 하는 거야. 잘할 수 있어.”
“음······ 그럼 C+이하일 경우엔?”
“······낮춰.”
준일은 과감하게 그렇게 선언했다.
어차피 그렇게 안 하면 딜이 안 될 테니까.
“좋아. 아주 마음에 드는데?”
“이번엔 메이린을 가장 먼저 파티에······”
“푸핫! 뭐? 메이린?”
요정은 갑자기 폭소했다.
“무슨 소리야? 율리안? 설마 같은 곳으로 가는 줄 알았던 거야?”
“······응?”
“그건 철저한 금기 사항이야. 이야기의 성질이 완전히 바뀌어 버리니까.”
이럴수가.
똑같은 걸 하는 게 아니었나?
“왜? 이젠 하기 싫어져? 응?”
척.
팸이 손가락 두 개를 펼친다.
“A를 받으면 2배. 6억. B는 그대로 3억, C는 절반. 어때?”
미친. 6억?
“콜.”
역시 돈은 돈이다.
준일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꺄루루! 잘 생각했어!”
팸은 끄덕이며 손가락을 튕긴다.
탕!
“가자고. 이세계로.”
“아, 근데 이번엔 트럭에 치이는 식으로는······”
준일은 말을 하다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미친.”
우우우우웅······!
창 밖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소음.
비행기다.
비행기가 이 원룸 오피스텔로 그대로 직행하고 있다.
‘하?’
콰아아아아앙!
그는 다시 용사가 되었다.
* * *
콰아아아앙!
율리안의 검에서 검기가 폭발하며 마왕의 육신을 향해 날아간다.
“죽어 개자식아아아아!!”
이번엔 7년.
7년이 걸렸다.
저번에 왔던 곳과 다른 곳인데도, 저번보다 훨씬 발전했다.
‘어쨌든 중세 판타지니까.’
다른 나라, 다른 배경, 다른 인물.
분명 많은 게 다르긴 했어도, 기본적인 골자는 비슷했다.
마나를 힘으로 쓰며, 몬스터의 약점도 똑같다.
무엇보다, 율리안은 이제 확실히 알고 있다.
용사의 힘을.
‘끝까지 하면, 이긴다.’
그냥 끝까지 하면 본인이 이긴다는 거.
용사는 끝없이 성장하며, 그 성장엔 한계가 없다.
오로지 용사의 인내심만이 한계치다.
인내심 하나만큼은 율리안은 자신 있었으니.
그는 7년간 끈질기게 마왕을 추격했고.
7년의 설움을 담은 일격은 마왕뿐 아니라 그 주변의 모든 것들을 가루로 만들었다.
콰과광!
“으, 으아아아아아악!”
마왕은 그렇게 하얗게 타서 사라졌다.
“하아······ 하······”
율리안은 잿더미가 날리는 공터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유, 율리안! 율리안! 대박이다아!”
아름다운 금발의 엘프 정령사가 와서 그를 끌어안았다.
그 외에도 드워프 전사, 하플링 도적, 리자드맨 성직자 등의 해괴한 동료들이 다가온다.
“굉장한 일격이었다.”
“이게 율리안이지.”
“칫. 인정하지. 마지막은 멋졌어.”
율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그들의 면면을 쳐다본다.
‘곧······ 헤어지나.’
이제 곧 이들을 보지 못하게 된다.
‘뭐 알고 있었으니까.’
이미 1회차 때 겪은 이별이다.
더 마음 쓰지 않기로 한다.
그때만큼 정을 붙이진 않았다.
그런데—
‘응?’
치지지직!
갑자기 세상이 일그러지더니.
율리안의 눈에 뭔가 희한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
-아. 진짜 하차할 뻔했는데. 마지막은 괜찮네.
-이딴 걸 여기까지 본 내 인생이 레전드
-공주한테 들이대다가 나중엔 마을 여자랑 엮이다가 ㅋㅋㅋ 어휴.
수도 없이 튀어나오는 글자들.
율리안은 당황스러웠다.
‘이게 뭐야.’
-대놓고 스파이인데 눈치 못채는 건 개연성 망한 거 아님? 답답해 뒤지는 줄
-주인공이 너무 감정적이고 뇌절이라 보기 힘들었음
-배신자 처리 못 하고 술 마시고 또 임무 망친 거에서 하차함. 마지막은 쫌 낫네.
-소피가 아니라 율리안이 죽어야한다고 생각함.
-뜬금 공주 손 덥석 잡는 씬에서 하차하고 완결로 바로 넘어옴ㅋㅋㅋ 역시 망작이네
-공주 캐릭터 진짜 별로······ 주인공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어장치는 느낌ㅋㅋㅋㅋ
.
.
.
너무나 적나라한 표현들.
‘아니 씨······ 뭔 개같은 말을 이렇게나 많이······?’
마치 누군가 자신의 삶을 일일이 다 들여다보고 평가내리는 듯했다.
다수에게 벌거벗겨진 듯한 기분.
치지지직!
다시 노이즈가 끼더니 그 글들은 전부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팸이 나타났다.
펑!
“꺄루루! 드디어 끝냈네! 축하해 율리안!”
그녀가 나타나자 주변 모든 것들이 멈췄다.
“방금 그건 뭐야?”
율리안이 물었다.
그 질문에 팸도 의아한 듯 고개를 까닥인다.
“응? 방금 뭐?”
“바, 방금······ 이상한 게 보였는데.”
“으응? 너무 고생한 거 아냐? 아무것도 없는데?”
뭐지.
팸도 모른다.
율리안은 의아했지만.
너무 빨리지나갔던 거라, 진짜 그냥 환각일 수도 있다.
“하. 알았어. 그냥 성적이나 알려줘.”
“호오? 이제 7년간 정을 쌓은 친구들 얘기는 안 하는 거야?”
“어차피 성적이 좋아야 볼 수 있는 거 아냐?”
성적이 좋으면 에필로그도 나온다고 했다.
그러면 제대로 인사를 하고 떠날 수 있다.
“적응이 빨라. 좋아.”
팸은 웃으며 성적을 공개했다.
촤르르르르!
알파벳 팻말이 카지노 게임처럼 마구 회전한다.
꿀꺽.
율리안은 마른침을 삼킨다.
‘이번에는 동료도 한 명밖에 안 죽고, 3년이나 더 빠르게 클리어했어.’
분명 저번보다 훨씬 능숙하게 헤쳐나갔다.
당연히 더 높은 성적이 나와야한다.
‘제발 A 나와라.’
A가 나오면 금액이 무려 2배로 뻥튀기 된다.
6억을 버는 거다.
‘제발!’
팅!
슬롯이 멈췄다.
3화
용사도 전문직이다 (3)
준일은 잠시 생각했다.
이거 혹시 데자뷰인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평가: C+]
“······?”
왜 저번과 똑같은 평가가 나온 걸까.
“꺄, 꺄루루!”
팸은 웃음을 참기 위해 주먹을 입에 처넣고 배를 붙잡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새어나온다.
“꺄꺄꺄꺄루루~!”
준일은 만약 자신에게 이 요정을 줘팰 힘이 있었다면 반드시 주먹을 내질렀을 테지만.
저번에 이미 느꼈다. 이 요정을 건드려선 안된다고.
그는 비교적 침착하게 따진다.
“뭐야. 대체? 왜 똑같은 씨플인데? 이번에 저번보다 더 잘했잖아?!”
“말했잖아? 그건 성좌님들 마음이라고.”
무슨 그딴 기준이 다 있는 거지.
“그럼 난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 7년 동안 고생한 보수를 절반 깎여서 받으란 말이야? 이런 식이면 다시는 용사 못하지.”
“······흐음.”
다시는 용사 못한다는 말이 팸을 조금 설득시킨 걸까?
“좋아. 그럼······ 다음에도 용사를 하겠다고 약속해. 그럼 ‘절대 공개해선 안 되는 걸’ 보여줄게.”
절대 공개해선 안 되는 거?
그게 대체 뭘까.
준일은 잠시 고민했지만.
“좋아. 한 번 정도는 더 할 수 있어.”
“꺄루루. 아니. 한 번이 아니야. 난 널 ‘전문 용사’로 키우는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
“전문······ 용사?”
“응. 전문직이지. 네가 좋아하는 사짜 직업. 넌 전문 용사가 돼서 내 의뢰를 받고 어느 이야기든 들어갈 거야.”
전문직 용사.
준일은 그 말을 듣고 머리가 멍해졌다.
‘하긴. 돈만 벌면 직업이긴 하지.’
그간 용사를 직업으로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봤는데.
이렇게 직접 들으니 왠지 가능한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용사도 용‘사’잖아?’
의뢰가 들어오면 사실상 몇 초 만에 수억을 버는 직업이 아닌가?
‘괜찮은 거 같은데.’
준일은 흔들린다.
“이거 아무한테나 하는 제안이 아니라고? 난 네게 가능성을 봐서 하는 말이야.”
“2연속 C+인데 대체 무슨 가능성?”
준일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팸은 아니었다.
‘흠? 역시 모르는구나?’
사실 일반인이 갑자기 이세계로 가서 두 번 연속 마왕을 깔끔하게 잡아내는 거?
심지어 10년, 7년에 걸쳐서?
이거 전혀 쉽지 않은 일이었다.
‘90%는 실패하거든.’
어지간한 끈기로는 못한다.
아무리 요정이 주인공 버프를 넣어줬다고 해도 실패하는 이들이 대부분.
그럼 그 이야기는 중간에 ‘연재 종료’ 처분을 받는다.
즉, F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며, 이거야말로 이야기 요정에겐 최악이다.
반면 성적에 상관없이 연재를 완료만 하더라도 그들에겐 큰 이득이다.
즉, 두 번이나 연속으로 끝까지 완주해 낸 준일은 팸으로선 탐나는 인재인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굳이 해주지 않았다.
스스로 가치를 높게 평가하기 시작하면 곤란해지니까.
“네가 가능성이 있고 없고는 상관없어. 네가 승낙하면, 난 어떤 ‘데이터’를 보여줄 거야.”
“데이터······?”
“그래. 앞으로 네가 용사를 하는 데 참고가 될 데이터. 이걸 알게 되면 넌 평가 성적이 좋아질 거고. 돈도 더, 더 많이 벌게 되겠지. 일종의······”
요정은 준일이 알만한 용어로 바꿔 설명하기 위해 잠시 고민했다.
“시험 족보 같은 거랄까?”
시험 족보?
그게 뭔데?
준일은 한참 고민했다.
그도 그럴 게 그는 용사로 17년을 살았던 반면 대학생으로는 3년밖에 살지 않았던 것이다.
“아······ 그거. 그······ 그거 말하는 거구나. 오케이. 알았어.”
한참 후에야 겨우 기억나서 대답하는 준일.
“그럼 한다는 거야?”
“그래.”
그는 그냥 승낙해 버렸다.
‘까짓거 해보자.’
그야 이미 깨달았던 것이다.
‘난 더 이상 평범하게는 못 살아.’
용사로 너무 오래 살았다.
원래의 삶으로는 못 돌아간다.
용사의 삶은 그 자체가 도파민 덩어리일 뿐더러, 따라오는 보상도 엄청나다.
몇 초 만에 수억이 벌리잖은가?
이제 다른 일을 하면 보상 때문에 답답해서 못 견딜 수도 있다.
“꺄루루! 쿨한데? 좋아 보여주지.”
탕.
팸이 손가락을 튕기더니, 숫자를 보여준다.
[110,237]
[110,002]
[109,245]
[87,372]
“이거 봐. 거덜났지?”
“이게 뭔데?”
대충 숫자가 빠지는 게 안 좋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근데 그 외에는 알 수가 없다.
돈인가?
“네가 마을 여자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오지랖을 부리다가 네 동료가 죽었을 때 일어난 일이야.”
“그거랑 저 숫자랑 무슨 상관이지?”
팸은 무시한 채 혼자 말했다.
“또 여기 봐. 괜히 파티에서 공주 한 번 더 만나고 가려다가 사건 의뢰가 늦어졌을 때.”
[84,102]
[83,012]
[52,112]
“훅~ 빠졌지?”
저 숫자가 뭔진 몰라도, 중요한 거 같은데.
정말 크게 훅 빠졌다.
“설마 저게 성좌들이 평가하는 거야?”
“음. 비슷하지.”
팸이 간단히 설명해줬다.
“그냥 성좌들이 너의 이야기를 얼마나 보는지에 대한 수치야. 이게 마지막까지 1만이 유지되어야 A를 받는 거야.”
“아니······ 동료가 죽으면 이야기 보기가 싫어지는 건 알겠는데······ 대체 공주 만난 건 왜 빠지는데?”
“연애질은 반응이 좋은 적이 별로 없어. 게다가 공주의 호감도가 충분하지 않았거든.”
준일은 억울했다.
공주 나한테 호감 있는 거 아니었어?
나······ 용사인데?
“공주 호감도가 몇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꺄루루! 몰라? 모르면 맞아야지!”
딱콩!
팸이 준일의 이마에 딱밤을 한 대 때렸다.
물론 아프진 않았는데.
기분이 더러웠다.
“아, 그리고 넌 심지어 다른 여자들한테도 들이댔잖아? 이것도 완전 불호 불호~”
들이댔다니.
표현이 심하네.
그냥 밥이나 좀 먹은 걸로.
“아니, 만나봐야 누가 좋은지 알지! 뭐 용사는 연애도 하지 말라는 거야?”
“왜? 이상한가? 인간들은 이런 것도 있잖아. ‘사내 연애 금지’ 같은 거.”
뜨끔.
사내 연애 금지.
이 말에 준일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너도 이제 전문 용사면, 프로야. 프로. ‘전문직’이라고. 비즈니스 중일 때 연애하면 쓰겠어? 꺄루루!”
할 말이 없다.
맞는 말이었다.
전문직이라면, 반드시 그 전문성이 높아야 하는데.
임무 중에 연애를 하려 했으니.
어쩌면 밉보이는 게 당연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지.”
탁, 탁 팸이 다시 숫자들을 치며 보여준다.
[84,102]
[83,012]
[52,112]
8만 3천에서 5만 2천으로 사라지는 숫자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쓰리다.
연애 외에도 문제는 많았다.
“오······ 오케이. 납득. 다음은?”
준일은 끄덕인다.
“또 바보같이 배신당하고도 몰랐을 때.”
이때 수치가 3만대로 떡락했다.
‘저 배신······ 1회차 때도 당했는데.’
용사 파티에 배신자가 있는 게 클리셰인가?
두 번이나 당했다.
준일 스스로 봐도 이건 문제다.
이뿐이 아니다.
“또 멍청하게 뒤통수 맞아놓고 힘들다고 질질 짤 때. 그래 놓고 다음 날 술 마시고 마을 여자한테 작업 걸고······ 이야~ 3연 콤보! 너무 감정적이야.”
마치 인생 전체가 벌거벗겨지는 듯한 느낌에 준일은 그냥 고개를 숙였다.
‘왜 수치심은 내 몫인가······ 아. 당연한 건가?’
팸은 스크롤을 휙휙 넘겼고.
숫자는 점점 하락했다.
팸이 마지막 숫자를 보여준다.
“그래서 마지막은 이렇지.”
[1,933]
[1,601]
[1,383]
[1,520]
맨 밑이 마지막이다.
“마지막이라고 좀 더 보러와서 겨우 1,520이네. 꺄루루!”
1,520.
A의 기준이라는 1만에는 한참 모자랐다.
절망적일 정도로.
‘좋아. 다음엔 할 수 있을 거 같아.’
준일은 모범생답게 그래도 팸이 하는 말을 다시 되새김질한다.
마치 교수님 강의 필기하듯이.
다음엔 A를 받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연애 안 하고, 감정적으로 안 굴고, 배신자 색출하······ 응?’
이때 준일의 머릿속으로 어떤 기억이 스쳐간다.
-공주한테 들이대다가 나중엔 마을 여자랑 엮이다가 ㅋㅋㅋ 어휴.
-대놓고 스파이인데 눈치 못 채는 건 개연성 망한 거 아님? 답답해 뒤지는 줄
-주인공이 너무 감정적이고 뇌절이라 보기 힘들었음
-배신자 처리 못 하고 술 마시고 또 임무 망친 거에서 하차함. 마지막은 쫌 낫네.
-뜬금 공주 손 덥석 잡는 씬에서 하차하고 완결로 바로 넘어옴ㅋㅋㅋ 역시 망작이네
마왕을 죽인 순간 잠시 그래픽이 깨지면서 등장한 이 글들.
‘잠깐.’
준일은 이것들의 정체를 왠지 알 것 같았다.
‘설마 이거 성좌들이야?’
성좌들이 남긴 것 같았다.
지금 팸이 추측하는 이유와 거의 일치하고 있잖은가?
“질문 있나?”
“아······ 아니. 없어.”
준일은 자신이 본 걸 말하지 않았다.
이젠 용사 생활 도합 17년.
예전의 순진했던 준일이 아니다.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야기 요정에게 이걸 알려주면 안 된다.
이건 준일만의 무기가 될 것이다.
그는 화제를 돌린다.
“아, 다음 용사 활동은 언제야?”
팸은 손가락을 튕기며 대답한다.
“그건 곧 알려줄게. 돌아가 계셔!”
탕!
동시에 준일은 현실로 돌아갔다.
그의 방 침대였다.
‘이대로 자면 되겠네.’
저번과는 다르게 편하게 한숨 자고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마왕을 죽이고 온 피곤함이 온몸을 잡아당긴다.
준일은 그대로 침대로 뻗어 한참동안 자버렸다.
* * *
다음 날.
준일은 7년만(?)에 다시 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다행히 2회차 용사 직전에 방학 중이었기 때문에 지루해 죽겠는 강의를 들으러 갈 필요는 없었다.
“어. 형 왔네요. 그럼 11명 다 됐으니까. 가죠?”
축구를 하러 모였다.
나름대로 22명을 풀로 모아서 제대로 한 판 붙는 방식이었다.
상대는 기계과 남학생들.
“기계과 애들 축구 존나 잘한다고 하는데. 다들 쫄지 말고. 하던 대로. 오케이?”
“오케이!”
그렇게 친구들과 화이팅 넘치게 필드로 들어간 준일.
“흐아아암.”
그는 잠이 덜 깨서 피곤했다.
필드에서 긴박하게 축구공이 움직이고 있는데.
딱히 긴장감이 들지도 않았다.
‘음.’
툭—
준일은 그냥 너무 느리게 오는 공을 발로 톡 건드렸고.
“어!?”
“하씨! 쫓아!”
상대 팀은 우당탕탕 흙을 튀기며 그를 쫓아오는데.
‘뭐하는 거야. 어차피 다 왔는데.’
준일은 하프라인 쯤에서 가볍게 발을 휘둘렀다.
뻐엉!
“에라이 뻥 축구하지 말라니까!”
과 선배가 그를 타박하는데.
“골! 고, 고오오오오오올!!!”
전방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에 모두가 입을 떡 벌리고야 말았다.
엄청난 속도로 쏘아진 슛이 그대로 골대로 들어간 것이다.
“야 문준······ 어?”
그에게 한마디 하려던 선배는 멍하니 골문을 쳐다봤다.
그 이후로도 전개는 비슷했다.
퍼엉!
“고오오오오올!”
펑!
“골! 또 고오오오올!”
“미쳤다! 문준일!”
차는 족족 골이 들어갔다.
아예 게임이 성립이 안 됐다.
그나마 준일이 힘을 조절해서 전반전이 8대 1로 끝났지.
마음만 먹었다면 15대 1까지 갈 뻔했다.
‘뭐야. 이거······’
준일은 자신도 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힘들다며 교체를 요청하고 응원석 쪽으로 돌아와 앉았다.
‘뭐지. 몸이 되게 가볍네. 애들이 느린 거 같기도 하고.’
용사 생활의 경험이 뇌에 쌓인 게 아닐까?
‘하긴 중세 망나니로 살아서 학점이 박살 났으니, 이런 거라도 얻어야지.’
준일은 이래야 대충 밸런스가 맞다고 느끼며 딱히 의구심을 갖진 않았다.
하지만 오늘 그의 축구 실력이 굉장하긴 했나 보다.
“와······ 오빠. 대박이다. 언제 축구를 이렇게 잘해졌어요?”
“맞아. 맞아. 오늘 대박.”
응원 와있던 과 여자애들이 다가와 묻는다.
“진짜 메시였어. 완전.”
“호날두 스타일 아니야?”
“어쨌든!”
“뭐야 준일 오빠. 어디서 축구 연습했어요?”
그중에 수연이도 있었다.
수연이 참 오랜만에 본다.
그녀 입장에선 기말고사 때 보고 며칠 만에 또 보는 거겠지만.
준일 입장에선 7년만.
‘여전히 예쁘긴 하네.’
이젠 그녀를 보면 메이린이 떠오른다.
그는 시선을 돌리며 툭 내뱉는다.
“그냥 유튜브 보고 연습했어.”
말도 안 되는 핑계였지만.
어쩔 거야?
이세계 가서 축구 연습이라도 하다 왔어? 라고 물을 건 아니잖은가?
수연은 그냥 납득한다.
“어? 으음······ 그렇구나.”
동시에 그녀의 시선이 그의 팔뚝과 가슴팍을 훑는다.
준일이 뭔가 변했다고 느낀다.
‘요즘 운동하나?’
원래 체격이 저렇게 다부졌나?
반팔을 입어서 더 잘보이는 걸까?
온몸이 단단한 근육으로 바뀐 듯했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좀 사색적이 된 거 같기도 하고.
‘무슨 생각을 저렇게 하는 거지?’
그야 준일은 허공을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며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잖은가?
수연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이다.
‘연애 금지, 감정 금지, 동료들 살리고, 쓸데없이 누구 돕지 말고······’
그는 다음 회차를 어떻게 플레이 할 지 복기 중이었다.
‘연애 금지, 썸도 금지. 난 감정이 없다. 난 감정이 없다.’
그야말로 독기가 바짝 오른 모습.
이는 아무래도 오늘 아침 확인한 코인 차트 때문이다.
4화
양산형 율리안 (1)
문준일.
사실 그는 특별할 게 없는 인간이다.
특별한 점이 하나 있다면, 자신이 특별할 게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는 게 조금 특별하달까?
그렇게 자신에 대해 냉혹한 준일이 하나 자신의 장점으로 인정하는 게 있다면 바로 ‘끈기’였다.
‘잘하는 게 없으니까. 끝까지라도 해야지.’
그는 자신이 특별할 게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뭐든지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과정은 고통의 연속이었을지언정, 결과는 항상 좋았다.
원하는 대학에 왔고, 대학에서 학점도 고공행진했다.
준일은 이게 다 자신의 어떤 재능이 아닌, ‘끈기’ 하나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일까?
‘연애 금지, 감정 금지, 동료들 살리고, 쓸데없이 누구 돕지 말고······’
무려 17년 동안의 용사 짓에도 질리지 않고 그는 이번에야말로 A를 받아내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초월적인 수준의 집념이다.
아무리 현대에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해도, 체감 시간은 10년 단위.
그게 고스란히 그의 정신에 데미지를 줄 텐데.
준일은 개의치 않고 계속 용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꺄루루······! 독종이라니까?”
다른 차원 어딘가.
모니터를 통해 지켜보는 팸이 감탄한다.
“어이. 팸. 2연속 완결 냈다며? 축하한다? 성적도 나쁘지 않던데.”
지나가는 다른 이야기 요정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낸다.
“응. 뭐 운이 좋았지.”
팸은 간단히 대답하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 20개째 빠그라졌는데. 젠장······ 용사를 고르는 노하우라도 있는 건가?”
“2연속 가지고 무슨 호들갑이야? 그냥 운이 좋은 거라니까?”
용사를 고르면 대체로 중간에 죽거나 그만두고 이야기가 파기 처리되는 게 대다수.
그러니 2연속으로 준수한 성적을 내며 완결을 쳐낸 팸을 부러워하는 게 당연하다.
아, 물론—
“야 팸!”
이러면 질투하는 이들도 생긴다.
“너······ 똑같은 용사를 두 번 썼다며!?”
양머리를 하고 바락바락 소리치는 이 요정은 ‘램’이다.
“어떻게 그딴 파렴치한 짓을?!”
“왜? 그러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꺄루루.
팸은 오히려 뻔뻔하게 받아친다.
“꼬우면 너도 똑같은 사람 두 번 써. 아······ 네 용사들은 너랑 한 번 하고 나면 정나미가 떨어져서 안 한다지?”
꺄루루!
팸의 약 올리는 듯한 날갯짓에 램의 얼굴이 시뻘게진다.
“내, 내가 상부에 보고했어. 곧 캡이 널 부를걸?”
캡.
페어리 주식회사 3지부의 지점장이다.
직속상관이자 이 지부의 실권자.
“그러든가 말든가~ 캡은 성과만 나오면 그만이야~”
그럼에도 팸은 여유롭다.
페어리 주식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성과주의!
성좌들이 좋아하면 모든 게 장땡이다.
성좌들만 좋아한다면 한 살 애기를 주인공으로 하든 90살 노인네를 주인공을 하든 알 바가 아닌 것이다.
“씨······”
램은 씩씩대며 어딘가로 사라진다.
그 다음 찾아온 건 통통한 체형의 요정 ‘햄’이다.
“팸님!”
순하고 귀여운 성격의 소유자.
“대단하세요······! 어떻게 2연속 히트를!”
팸의 조수다.
“히트라니. 이게 무슨 히트야. 내 고점은 끝까지 1만을 유지하는 거였는데.”
“하지만 이 정도 수작을 연속으로 뽑는 게 더 힘들다고 들었거든요! 역시 팸님이랄까······!”
들러붙어 볼을 부비는 햄.
“어, 으응······”
“저는 역시 팸님의 제자를 하기 잘했어요!”
“으응.”
다만 팸은 햄이 너무 들러붙는 게 부담스럽다.
그녀가 통통한 볼살을 밀어낸다.
“그래. 그래. 햄. 고마워. 으······! 고맙다니까? 그만 붙어!”
“히이잉 팸니이이임~”
“알았으니까. 나 일해야 되니까 저리로 좀 갈래?”
쭈우욱.
일한다는 말에 뒤로 밀려나는 햄.
“헉, 팸님? 또 새로운 이야기 시작하시는 건가요?”
얼굴이 찌부된 햄이 묻는다.
“그래. 바로 갈 거야. 용사도 오케이했거든.”
“또······!? 저, 정말 대단하세요! 이러다가······ ‘현대 판타지’까지 구매하실 수 있게 되는 거 아니에요?!”
척.
햄이 페어리 주식회사의 중앙 쪽 세계수에 달린 가장 큰 전광판을 가리키며 흥분한다.
그곳엔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 판’ 가격이 적혀있었다.
==== ====
[이야기 판]
-중세: 700 마음(HT)
-근대: 550 마음(HT)
-현대: 5 여운(YN)
-근미래: 210 마음(HT)
-SF: 250 마음(HT)
-사이버펑크: 380 마음(HT)
-구석기 시대: 310 느낌 (FL)
.
.
.
==== ====
이야기에서 쓰이는 화폐 단위.
느낌(FL)-> 마음(HT) -> 여운(YN) 순으로 커진다.
1000 느낌은 1 마음, 1000 마음은 1 여운인 식이다.
그러니까 현대 판타지의 가격은 마음으로 환산하면 무려 5000 마음.
다른 모든 이야기 판의 가격을 합친 것보다도 높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이들의 선망.’
가장 인기가 좋기 때문이다.
많은 성좌들이 선호하고, 그만큼 많은 요정들이 사고 싶어해서다.
준일이 좋아하는 서울 부동산 가격이 늘 고공행진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준일은 서울 부동산, 팸은 현대 판타지.
서로의 목표는 꽤 결이 비슷해 보였다.
“현대 판타지 구하시면 저도 꼭 초대 해주세······ 으으어!”
햄의 얼굴이 더 밀려난다.
“알았으니까. 가. 가라고. 현판 사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탁.
그와 동시에 팸은 어떤 버튼을 누른다.
[용사 전송]
* * *
준일은 축구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응?”
빠아아아앙!
거대한 트럭이 갑자기 덮쳐오는 것이다.
“미친.”
휙!
준일은 빠르게 몸을 던지며 피해냈다.
콰광!
트럭은 버스 정류장에 그대로 처박히며 수많은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아!!”
“뭐, 뭐야!?”
다친 사람은 없지만 버스 정류장이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어떻게 이런 황당한 사고가?
‘이거 설마? 그건가?’
준일은 이게 뭔지 왠지 알 것 같았다.
그때였다.
부아앙!
시속 180킬로미터로 돌진해오는 오토바이······ 라는 걸 인지한 순간 이미 준일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퍼어어엉!
“컥!”
그가 트럭을 피해버리자 아예 절대 피할 수 없는 무언가로 돌진해 박아버린 것이다.
‘그냥 좀 점잖게 보내주지.’
슝!
준일은 그렇게 또 다시 율리안이 되었다.
* * *
팸은 깜작 놀랐다.
“뭐······ 뭐야. 트럭을 피한 거야?”
트럭 운전수가 실수한 것도 아닌데, 환생 트럭을 피하는 용사 후보자를 본 건 처음이다.
“분명히······ 보고 반응했지?”
이게 말이 되는 걸까?
한 번 살펴보자.
용사 선정 가이드북 1장.
현대인의 스펙.
==== ====
최대 속력: 44.72km/h
최대로 견딜 수 있는 하중: 수직으로는 1800kg, 수평으로는 5000kg
최대 펀치력: 6000N
최대 시각 반응 속도: 0.1초.
==== ====
이런 걸 고려했을 때 방금 준일이 트럭을 피해낸 건······
‘너무 어려운 일인데?
불가능은 아니다.
아슬아슬하게 말은 되는 수준이었다.
F1드라이버 수준의 반응 속도와 인류 최대 속도를 뽑아낸다면 가능하다.
‘경영학과 대학생 문준일이?’
물론 문준일이라는 인간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운동이라고는 취미로 하는 축구 정도가 다인 걸로 나오는데.
“뭐, 운이 좋았던거야. 어쨌든 보냈으니 된거지.”
꺄루루!
팸은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넘겼다.
* * *
하얀 침대에서 눈을 뜬 율리안.
1, 2회차와 똑같이 아름다운 공주가 맞이해준다.
공주들은 너무 예쁜 데다가 용사에 호의적이어서 늘 착각했는데.
“눈을 떴군요? 용사—”
“비켜.”
이번엔 다르다.
쾅!
그는 일어나자마자 곧장 근처에 있는 검과 자신의 것으로 보이는 가죽 갑옷을 챙겨 입었다.
처음엔 갑옷 입는 것도 힘들어했는데.
이젠 츄리닝 입듯이 순식간이다.
“요, 용사님? 율리안 맞으시죠?”
“어. 맞아.”
“근데 왜······”
공주는 자신에게 말도 안 될 정도로 무관심한 용사를 보고 놀라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게 율리안은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얼굴 보면 혹한다.’
두 번 속지 세 번 속냐?
율리안은 옆에 쌓여있는 물약이나 잔뜩 챙길 뿐이었다.
‘노 연애. 노 감정. 오직 마왕 죽이기.’
그는 1, 2차의 경험을 통해 훨씬 더 확고해졌다.
‘난 프로다. 전문직이다.’
용사로서의 직업 의식이.
“버, 벌써 가세요? 그 전에 국왕께서 당신께 남긴 편지가 있어요. 듣고 가세요.”
“마왕 잡아달라. 이거잖아.”
어차피 별 내용도 없다.
“어······ 네. 그렇긴 한데—”
“간다.”
“저, 저기요!?”
쾅!
곧바로 문을 박차고 나가는 율리안의 뒷모습.
공주는 자신의 입을 가리며 한동안 그가 떠나간 문을 응시했다.
“······마왕 잡고 돌아오면 저랑 결혼한다는 말도 있는데.”
공주는 아쉽다는 듯 한참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놀랍게도 율리안의 이런 모습이 오히려 취향이었던 것!
물론 율리안은 이런 건 추호도 모른 채 급하게 말을 타고 왕성을 나선다.
그런 그의 앞에 갑자기 나타나는 글자들.
치지지직.
-오. 주인공 좀 마음에 드네 ㅋㅋㅋ
-박력 뭐임 ㅋㅋㅋㅋㅋ
-얘 2회차냐? 척척 알아서 하네
-캬 이게 용사지
-공주 반한 거 아님?ㅋㅋㅋ
‘어?’
이거 이야기가 끝날 때만 보이는 게 아니었나?
글자는 금새 사라졌다.
‘······뭐지.’
율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출발한다.
이랴!
‘일단 잘하고 있는 거겠지.’
다그닥! 다그닥!
그의 말은 태양이 뜨는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 * *
이후 율리안은 일사천리로 동료들을 구했고, 본격적인 마왕 추격전에 나설 전력을 만든다.
‘역시 반복 학습이 최고인가.’
확실히 1, 2회보다 수월했다.
겹치는 설정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버, 벌써 검에 마나를 두르시는군요?”
“역시 선택받은 용사······”
마나를 다루는 법, 검에 그것을 불어넣는 방식 등.
기본적인 전투 원리가 비슷했다.
이게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오다 보니 체화돼버렸다.
‘난 이 게임을 해봤어요. 이것들아.’
심지어는 어떤 관상이 배신을 하는지도 알게 됐다.
스릉!
용사 파티와 야영 중, 그는 한 성직자의 목에 칼을 들이댄다.
“······야.”
“왜, 왜 그러시죠? 율리안?”
“네가 불었지?”
“예?”
“마왕 끄나풀한테 우리 위치를 계속 알려주고 있잖아. 응?”
사실 실증은 거의 없었지만, 수많은 정황 증거가 있었다.
절대 관상만 보고 이러는 게 아니다.
절대!
“뭣보다, 보름달만 뜨면 어디로 그렇게 사라지는 건데?”
“이, 이런 개새—”
성직자의 눈이 시뻘개지더니 늑대 인간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늑대 인간처럼 생겼더라니!”
——촤아아아악!
마나가 깃든 검으로 원거리서부터 베어버린지 오래다.
배신자의 목이 바닥을 뒹군다.
툭.
자신의 발치까지 굴러온 늑대 인간 머리통을 보며 율리안은 확신했다.
‘이번엔 훨씬 빠르겠어.’
이번에는 5년이 안 걸릴 것이다.
그때—
치지지지직.
또 그래픽이 깨지며 글자들이 튀어나왔다.
-개사이다 ㅋㅋㅋㅋ
-어케 알았지? 미쳤다
-크
-이게 율리안이지
-율리안! 율리안!
율리안은 자신이 잘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엔 다르다. 율리안!’
6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5화
양산형 율리안 (2)
그야말로 폭풍같이 마왕성을 향해 몰아치는 용사 파티.
1, 2회차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 비교도 되지 않는 쾌적한 방식이었다.
“역시 선택받은 용사라 다르구만.”
“이렇게 뛰어난 인재는 처음 봐.”
“괜히 전설이겠어요?”
1, 2회차 때는 거의 이야기 중반부까지 잘 인정해주지 않던 동료들도 빠르게 인정해줬다.
그렇게 약 4년이 흘렀고.
“죽어어어어어!!”
콰아아앙!
폭풍 같은 마나를 뿜어내는 검격이 마왕을 집어삼켰다.
“허억······ 헉······.”
세 번째지만 여전히 마왕전은 힘들다.
율리안은 숨을 헐떡이며 외친다.
“이겼다아아아!”
척!
용사의 검이 빛나며 승리를 뽐내었다.
“와아아아아! 율리안! 율리안!”
동료들이 달려와 기쁨을 나눈다.
모두가 활짝 웃고 있었다.
그야 4년이나 고생해서 겨우 달성했으니, 기쁠 만하다.
그러나 그 중 율리안만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모두가 서로를 쳐다볼 때, 율리안은 입술을 깨물며 하늘을 응시했다.
‘젠장. 그래······’
그는 정해진 미래를 알기 때문이다.
‘어차피 다 만들어진 애들이야.’
그는 이들이 실존하는 자들이 아니라 생각해버렸다.
그저 팸이 만든 이야기 속의 배우들일 뿐이다.
율리안 자신이 그러하듯.
그리고 이제 그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쿵!
세상이 암전하고.
치지지지직—
그래픽이 깨지며 또 글자들이 떠올랐다.
-수고 많았습니다.
-율리안의 여정······ 재밌었다.
-음 좀 속전속결이긴했지만 무난하네
-완결 ㅊㅋㅊㅋ
-마지막 전투가 제일 재미없네
-대단한 감동은 없지만 볼만했음.
엄청 좋은 평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저번보다는 훨씬 나아진 평가.
이 글자들은 금새 사라지고, 새로운 글자가 떠오른다.
[The End]
이야기의 끝을 알리는 글자다.
펑!
글자를 등지고 팸이 나타난다.
“꺄루루! 수고했어 율리안!”
그녀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보였다.
율리안의 발전 때문이다.
‘이걸 4년만에 해내다니.’
그는 겨우 3회차 만에 괴물이 되었다.
“축하해 율리안. 이번에는 한 명도 안 죽고 완수했네?”
동료가 하나도 죽지 않은 것에 대해 칭찬했지만.
율리안은 이제 동료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니 에필로그가 있냐고 묻지도 않았다.
“점수는?”
점수를 묻는다.
“응? 이젠 에필로그 같은 건 상관 없는 거야? 이번엔 공주와 만나기로 하지 않았던가?”
처음으로 공주 캐릭터가 그에게 호감을 보였지만.
막상 율리안은 이젠 관심이 없다.
“점수나 알려줘.”
뭐가 더 중요한지 정확히 알고있다.
“뭐, 좋아.”
팸이 씩 웃으며 점수를 공개한다.
촤르르르륵!
알파벳이 슬롯머신처럼 회전하더니.
어느 순간에 멈춰선다.
띵!
[평가: B+]
B+ 였다.
A에서 딱 한발짝 떨어져있었다.
이번에도 1만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율리안은 아쉬워는 했지만, 크게 흔들리진 않았다.
‘엄청난 성장이야.’
어차피 용사로 살아가기로 마음 먹은 거.
앞으로 잘 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나아졌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자세한 데이터를 보여줘.”
숫자를 보고 체크하면 된다.
어느 부분에서 뭐 때문에 또 깎여나간 건지.
“어머머. 그건 극비사항인데. 막 보여달라고하면 어떡해?”
“웃기지마. 전문 용사로 키운다면서.”
“꺄루루! 정말 1, 2회차 때랑은 완전 다르네?”
팸은 마음에 든다는 듯 손가락을 튕긴다.
탕!
그러자 이번 회차의 데이터가 주르륵 나온다.
율리안은 그 숫자를 주욱 내려보다가 마지막에 시선이 멈춘다.
[6,790]
1만으로부터는 상당히 모자르지만, 저번에 받았던 1,520이란 숫자와 비교해 보면 엄청난 발전이다.
‘방향은 맞았어.’
큰 그림에서는 맞았지만, 결국 1만에 도달하지 못했다.
분석해야 한다.
줌을 당겨서 깊게 파고든다.
뭐가 문제였지?
“어디서 훅 빠진 구간 없어?”
“여기, 여기, 여기.”
백 단위로 숫자가 사라지다가 갑자기 천 단위가 꺼지는 구간들이 있다.
[34,281]
[34,112]
[34,003]
[31,890]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3만 4천대에서 갑자기 3만 1천으로 푹 꺼졌다.
이런 구간이 2만 대에도 존재하고 1만 대에도 존재했다.
“뭐 때문이야?”
율리안은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여겼는데.
“흐······”
팸은 말이 없다.
“뭐 때문이냐고?”
“꺄루루······! 몰라.”
“몰라?”
“B+ 등급부터는 추측만 가능해.”
“추측은 뭔데?”
팸은 잠시 고민한다.
그야 어쩌면 이건 알려줘도 이뤄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이렇게 추측하지. ‘특별함’이라고.”
“특별함?”
“A등급 이상의 성적이 나오는 이야기들은 다 특별함을 갖고 있다고 해.”
“있다고 해? 너 A 등급 만든 적 없어?”
팸의 확신 없는 말투에 율리안이 묻자.
그녀는 화들짝 놀란다.
“무, 무슨 그런 소리를! 나는 우리 지부의 에이스거든? 당연히 있지!”
“근데 왜 그렇게 말해?”
그야 길고 긴 이야기 요정 커리어 내내 딱 한 번 밖에 없으니까.
그것도 A 등급 턱걸이.
“엠바고야. 엠바고. 전문 용사라고 해서 다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 부끄러운 커리어를 감추기 위해 팸은 엠바고라 둘러댄다.
“어쨌든. B+는 괄목할 성과야! 율리안! 축하해! 보너스로 1억 더 얹어줄게!”
“······1억?!”
율리안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팸은 손가락을 튕겼다.
펑!
* * *
빵빵~
버스 경적 소리가 들린다.
‘엇 또 버스!’
4년 만이지만, 생생한 기억 탓에 준일이 깜짝 놀라 뒤로 몸을 날리려는데.
“학생. 버스 안 타요?”
“······에?”
자세히보니 버스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저번처럼 들이박으려는 게 아니라.
‘아······ 돌아왔구나.’
준일은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본다.
축구 유니폼 차림이다.
‘애들이랑 축구 끝나고 집 가는 길이었지.’
걸어가도 좋지만, 더워서 그냥 버스를 타려고 했다.
“아, 탑니다!”
후다닥!
엄청난 속도로 버스에 올라타는 준일.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그를 맞이한다.
‘후아. 현대가 좋긴 하네.’
갑옷 입고 쪄 죽는 용광로 던전에서 싸우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 메이린이 냉기 마법을 걸어줬었는데······’
준일은 버스 창문에 기대어 1회차 때를 잠시 돌이켜본다.
여러모로 참 모자랐던 시절.
그런데 유독 기억에 많이 남는다.
특별해서일까?
‘특별함?’
새삼 떠오르는 질문.
특별함이란 게 뭘까?
팸은 그게 A를 받는 길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전의 코칭과는 다르게 너무 모호하다.
‘음······ 뭐라도 찾아볼까?’
검색해보려 휴대폰을 켜는데.
지잉.
[나라 은행]
[입금 알림]
[400,000,000원]
4억이 입금됐다.
두근—
준일의 심장이 뛰었다.
‘A를 굳이 안 받아도······ 괜찮은 거 아냐?’
인간은 참 숫자에 약하다.
막상 엄청난 숫자를 보자 준일은 생각이 좀 바뀐다.
율리안이 아닌 문준일의 뇌로 돌아와서일까?
경제학적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B+와 A의 노력 대비 보상 차이는 사실상 거의 없어.’
A는 6억.
B+는 4억.
C+는 1.5억.
정리해보면 이런 식인데.
무리해서 A로 갈 이유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
‘2억 차이지만······’
B+까지 도달하는 법은 상당히 체화시켰다.
괜히 특별함을 위해 A를 도전할 필요가 있을까?
특별함이라는 건 준일이 아는 개념상 양날의 검이다.
아인슈타인은 특별한 사람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 괴짜 취급당했다.
스티브 잡스 역시 특별한 사람이다.
그는 인생 내내 싸이코패스 소리를 들었다.
‘그런 사람이랑은 거리가 먼데.’
준일은 그냥 학점이나 잘받는, 장점이라고는 끈기 하나만 내세울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B+를 유지하는 걸 생각하자.’
일단 B+만 받아내면서 체급을 키운다.
‘코인 투자도 줄이고, 용사 쪽에 힘을 쓰자고.’
그는 도박성보다 안정성으로 전환한다.
투자 포트폴리오도 코인 비중을 줄이고 미국 채권 및 주식을 늘린다.
처음엔 시드 머니가 3억이 끝인 줄 알고 20억을 위해 도박수를 뒀지만.
이젠 계속 생길 테니,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
아주 아주 안전한 미국 주식에 박아놓으면 알아서 돈이 불어나서 20억에 도달한다.
‘이렇게 몇 번 더 하면······’
B+를 유지하는 실력으로 4, 5회 용사질을 반복한다면?
분명 B+ 이야기 완수까지 시간이 줄어들 거다.
처음엔 10년, 후엔 7년 지금은 4년.
앞으로 더 줄어들 것이다.
어쩌면 2년까지.
그러면 아주 빠르게 B+로 클리어해서, 용사질 10년 정도 안에 대출 없이 20억짜리 집을 살 수있다.
‘미쳤다.’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20억이라니.
그러고 불릴 돈 10억 정도만 더 벌고 용사를 은퇴하면?
완벽한 경제적 자유를 누릴 것이다.
‘굳이 A가 필요 없구나.’
명쾌해졌다.
이제 빠른 B+로 가는 전략이다.
* * *
3회차 이후 준일의 삶은 간단했다.
방학에 아르바이트 할 일도 없으니, 모든 시간이 자유로웠고.
취업을 준비할 것도 아니니 미래에 대한 스트레스도 없었다.
마치 휴가를 온 것 같았다.
20년을 중세에서 보내고, 가끔 몇 달 현대로 오는 휴가.
그는 새로 산 헤드셋을 끼고 교내 공원 벤치에 누웠다.
‘연결이······ 이렇게 하는 건가?’
이젠 휴대폰을 다루는 것도 낯설다.
오죽하면 원룸에 있는 푹신한 침대에서 자는 것도 어색하다고 느낀다.
‘밤에 하도 울렁거려서. 원······.’
풀잎이나 깔고 바닥에서 자던 세월이 21년이니.
침대는 오히려 울렁거린다.
‘이게 더 편하네. 제길.’
나무 벤치에 누워 이파리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바라본다.
1회차 때 생각이 난다.
메이린이랑 잔디밭에 누워서 밤에 별이 뜰 때까지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잠시 그렇게 눈을 붙이고 여유를 만끽하는데.
“오? 오빠. 헤드셋 샀어요?”
눈을 슬며시 뜨니, 갈색 머리칼이 시야를 방해한다.
누군가 그를 내려보고 있다.
‘메이린?’
메이린은 아니다.
수연이다.
“여기서 뭐해요?”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긴다.
“아······ 그냥 좀 쉬는 중.”
“오빠 요즘 엄청 특이해진 거 알아요?”
뜨끔.
준일은 깜작 놀라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다.
‘뭐야. 미친.’
여자의 직감이란 건 대체 뭐길래.
어떻게 알았지?
“왜 갑자기 일어나요?”
“아, 그냥 허리가 아파서.”
“말도 안 돼. 갑자기?”
푸핫.
수연이 웃으며 좋아라 한다.
“너, 넌 왜 여기 있는데? 방학인데.”
“저요? 당연히 도서관 왔죠.”
아. 그랬지.
수연이는 학점이니 취준이니 뭐든 착실한 편이었다.
‘원래 나도 그랬는데.’
생각해보니 준일도 그런 사람이었다.
둘이 동선이 많이 겹쳐서 친해졌던 건데.
‘나보고 특이해졌다고 하는 게 말이 되네.’
수연이 입장에선 갑자기 한량이 되어버린 준일이 어이없을 거다.
“아, 오빠 혹시 점심 안 먹었으면······”
지이이잉.
갑자기 준일의 휴대폰이 울린다.
“어?”
“아, 아니에요. 그거 받아요.”
지이잉. 지이잉.
휴대폰이 계속 울린다.
“전화가 아닌데.”
“?”
전화가 아니었다.
[준일아. 한 번 만 나와서 전반만 뛰어주라.]
[준일아 15분만 뛰어라]
[준일아 5분······ 아니 그냥 와서 서있어. 애들이 너 무서워한다니까?]
[준일아 제발 후반에라도 와서 다섯 골만 넣어줘!]
에라이.
준일은 어이가 없어서 휴대폰 알림을 꺼버린다.
‘골키퍼나 하라고 할 땐 언제고.’
갑자기 너무 인싸가 되어버린 준일.
그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예전처럼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수연이랑 밥이나 먹자.
“밥 먹자고?”
“어? 네.”
“가자. 사줄게.”
“저, 정말요?”
그럼. 통장에 8억이 있는데.
후배한테 얻어먹겠냐?
* * *
준일은 자신의 단골 식당으로 향했다.
예전엔 일주일에 한 번만 겨우 갔었는데.
이젠 매일 간다.
“이모. 여기······”
“제육 백반 곱배기지?”
“넵.”
늘 먹던 걸로.
자동으로 주문이 들어간다.
“오······”
수연은 신기하다는 듯 보더니 그냥 제육 백반을 시킨다.
잠시 후.
“······?
수연은 기인 열전을 보는 듯한 눈이 된다.
와다다다다다!
“오, 오빠······ 제가 웬만하면 이런 말 안 하는데. 체하지 않을까요?”
거의 30초 만에 한 공기를 다 먹어가는 준일.
“우응?”
준일은 고기를 씹으며 고개를 갸웃한다.
엄청 여유있게 먹은 건데.
“너 이거 안 먹을거야?”
“아뇨. 먹을 건데요. ‘아직’ 안 먹은 건데요. 아까도 제거 뺏어갔잖아요.”
“아. 그랬나?”
휙!
준일은 금세 또 다른 반찬을 뺏어간다.
“악! 왜 가져가!”
“안 먹으니까.”
중세에선 먼저 먹지 않으면 빼앗긴다.
그렇게 20여 년을 살았으니.
현대인의 식사와는 비교할 수 없이 전투적이다.
아무도 그의 식사를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치지지지지직!
‘응?’
준일이 유일하게 식사를 멈추게 된 순간이 있었으니.
‘뭐야. 이건.’
-응?ㅋㅋ 여긴 ㅇㄷ?
-이런데도 접속이 되네?
-ㅎㅇㅎㅇ
허공에 글자가 보인 순간이다.
‘이게 왜 여기서 나와?’
6화
양산형 율리안 (3)
정말 잠깐이었다.
노이즈 소리가 들리고, 1초 정도의 시간 동안.
-응?ㅋㅋ여긴 ㅇㄷ?
-이런데도 접속이 되네?
-ㅎㅇㅎㅇ
글자가 보였다.
그것도 아주 소량이다.
‘뭐야?’
준일이 뭔지 인지했을 때 쯤엔 이미 글자는 사라졌다.
팟!
잠시 준일이 멍때리는 사이.
수연이 준일의 반찬 하나를 집어드는데.
탕!
준일은 엄청난 반응 속도로 젓가락을 휘둘렀다.
“어딜.”
“!?”
쏙.
다시 준일의 입속으로 직행.
수연은 어이가 없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와······ 개빨라.’
* * *
한편 페어리 주식회사.
“와! 팸님! 3연 히트! 심지어 이번 건 대히트작!!”
햄이 팡파레를 불며 3지부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녔다.
“이제 정말 현판 요정이 되시는 게 꿈은 아니세요!”
팸이 현재 보유한 자산은 2여운하고도 300 마음.
앞으로 3여운 700마음을 벌어낸다면 현대 이야기 판 가격인 5여운을 얻을 수 있다.
“햄. 호들갑 떨지마렴.”
꺄루루.
팸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오늘만큼은 햄이 달라붙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햄뿐 아니라, 다른 요정들도 와서 축하해줬다.
“이야 팸. 대단한데. 난 괜히 사이버펑크를 건드려서 아직 1여운도 못 모았는데······”
“젠장. 나도 중세 하나만 팔 걸.”
“중세 존버가 답이다~ 팸이 맞았다~ 난 이번 시즌은 망했어.”
그녀는 오로지 중세 하나만 팠다.
비용도 아끼고, 전문성은 점점 올라간다.
그것이 성공 포인트······ 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사실 같은 주인공이 핵심이지.’
남의 프로젝트를 깊이 있게 들여다 보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대부분 요정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3연속 주인공이 같은 인물인 게 핵심 전략이었다.
아, 물론 지나치게 남의 프로젝트에 관심 많은 요정은 이를 알고 있다.
“흥. 똑같은 주인공을 세 번 연속 쓰는 게 무슨 이야기 요정이야?”
질투심 많은 램.
“그딴 식으로는 언젠가 큰 화를 당하게 될 거야. 키리리!”
램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사라졌다.
“와. 쟤 완전 심술이 잔뜩났네요.”
순둥순둥한 햄마저 그렇게 말할 정도로 램은 독기가 바짝 올랐다.
“지가 그래봤자지.”
팸은 그렇게 말하며 버튼을 누른다.
[용사 전송]
네 번째 이야기 판이 준비된 것이다.
늘 중세만 다루다보니 셋팅 짜는 시간도 아주 적었다.
용사를 고르는 시간도 없었으니, 이는 정말 엄청난 효율이다.
‘또 가보자고. 율리안.’
씨익.
그녀는 탐욕스런 웃음을 지었다.
* * *
제육 백반을 먹고 나오는 길.
“어후. 맛있었다.”
“참내. 그럴 거면 곱빼기 2개 시켜요 다음부터.”
“그건 또 너무 많아.”
“저는 다 뺏겨서 모자랐—”
수연이 뭐라 하는데.
요란한 소리를 듣게 된다.
부아아아아아앙!
‘어?’
오토바이였다.
그것도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2차선 도로에서 대체 저게 시속 몇 킬로야!?
‘미친놈!’
준일은 속으로 그렇게 욕하며 몸을 움직였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타다닥!
층도 없는 매끈한 벽을 발로 딛고 올라간 것이다.
마치 고양이처럼 날랜 움직임으로 그는 벽에 달라붙었고.
콰아아앙······!
오토바이는 저 혼자 건물 벽에 꼴아박아 버렸다.
엄청난 사고였다.
“야 이 새끼야! 술 처먹었냐!? 사람 죽일······”
그는 오토바이 운전자에게 한바탕 욕을 퍼부어주려 했는데.
“아.”
그제야 준일은 깨달았다.
자기 옆구리에 버둥거리는 누군가 있다는 걸.
“오, 오빠······ 저, 저 토할 것 같은······”
‘어?’
수연을 옆구리에 낀 채 달려서 벽에 매달렸던 것이다.
수연 입장에선 밥 먹자마자 갑자기 롤러코스터를 타버린 셈이다.
“우, 우에에에엑!”
“!?”
수연은 제육을 다 토해내버렸다.
“그럴 거면 왜 뺏어 먹었어!”
치지지직.
그때 준일의 시야에 다시 이런 게 보였다.
-ㅋㅋㅋㅋㅋ뭐야 ㅋㅋㅈㄴ웃기네
-와 개빨라 ㅋㅋㅋ
-응?ㅋㅋㅋㅋ
-우욱
‘허······ 또 보이네?’
그때였다.
건물 위에서 누가 소리지른다.
“조, 조심하세요! 화분이—”
——펑!
건물에서 떨어진 45킬로그램짜리 화분이 준일의 머리를 강타했다.
* * *
늘 그렇듯 낯선 천장을 보며 침대에서 눈을 뜬 율리안.
‘미친······ 얌전히 보내라고.’
그제야 알았다.
이 모든 게 이세계로 가기 위함이었다는 걸.
“용사님. 눈을—”
“비켜.”
“네?”
그는 3회차와 똑같이 행동했다.
공주랑 대화는 최소화하며 갑옷과 물약을 챙겼다.
‘여기까진 늘 비슷해.’
저번에 점수가 높았어서 혹시나 많은 변수가 생겼을까봐 걱정했는데.
이야기 시작은 거의 비슷했다. 아예 똑같은 수준이라 해도 괜찮을 정도다.
이러면 준일에게는 최상의 컨디션이다.
‘목표는 3회차와 같은 수준의 퍼포먼스.’
그의 목표는 A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플이다.’
B+를 빨리, 여러 번 받는 것이다.
밀쳐진 공주가 다가와 말한다.
“용사님. 국왕 폐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마왕 잡아야 돼. 시간 없어.”
“······마, 마왕을 토벌해야 한다는 걸 어찌?”
“어······ 그야······”
디테일한 대사와 세계관은 다르지만.
율리안은 이제 베테랑이다.
조금 엇나가도 그냥 뻔뻔하게 연기했다.
척.
자신을 가리키며 웃어 보인다.
“그게 용사니까.”
“아앗······”
공주가 입을 가리며 얼굴을 붉힌다.
이후 율리안은 순식간에 채비를 마치고 왕성을 나섰다.
치지지지직.
-얘 뭔데 ㅋㅋㅋ
-병맛인데 재밌는데?
-적응력보소
-그것이 용사니까······
-뭔 ㅋㅋㅋㅋ
-시원시원하네
반응은 좋다.
3회차와 비슷했다.
조금 더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이젠 좀 더 빨리 보이네.’
현대에서도 몇 번 봐서일까?
뭔가 성좌들을 자주 보게 된 거 같았다.
* * *
율리안의 의도대로, 4회차는 3회차와 거의 유사하게 진행됐다.
동료들 생김새와 이름을 가린다면 같은 이야기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중간에 그에게 다가와 유혹하는 이성들이 너무 많이 생겨버렸다는 것이다.
‘이건 3회차랑 좀 다른데······’
왜인지는 몰라도 그의 여유있어 보이는 태도가 마음에 든다고 한다.
‘이건 함정인가?’
그가 보기엔 함정 같았다.
성좌들이 연애를 좋아할 리가 없다는 건.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율리안은 가차 없이 그들을 전부 밀어냈다.
“다들 좀 꺼져.”
연애는커녕, 감정마저 지우려 하는 율리안이다.
흔들릴 리가 없다.
‘노연애. 노감정.’
이 모든 건 오로지 한강뷰 아파트를 위한 여정일 뿐이었다.
-ㅋㅋㅋㅋㅋㅋ철벽이네
-강철 팬티 율리안 ㄷㄷ
-아 왤케 웃기냐 벽치는거 ㅋㅋ
-주인공 마음에 드네
이렇게 밀어낼 때마다 코멘트는 점점 좋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죽어어어어어!”
율리안의 시그니쳐 무브.
마나 폭풍 검격으로 마왕은 새하얗게 불타 죽었다.
이번엔 딱히 숨이 차지도 않았다.
“캬!”
“율리안! 율리안!”
이젠 거의 응원단이나 다름 없게된 동료들이 달려오며 축하해주고.
[The End]
이야기의 막이 내렸다.
“꺄루루······”
“성적 뭐야?”
탁, 검을 수납하며 기계적으로 묻는 율리안.
오히려 팸이 서운해한다.
“이, 인사 좀 하자. 율리안.”
“일단 성적 먼저.”
“꺄, 꺄루루······! 성격 급하긴. 알았어!”
뾰로롱!
[평가: B+]
똑같은 성적이 나왔다.
‘됐어.’
율리안은 만족했다.
정확히 목표한 대로 나왔다.
‘그것도 더 빠르게.’
목표한 성적을 더 빠르게 내고 있다.
완전 공장 효율화 수준이다.
‘A도 노리긴 해야지.’
물론 그렇다고 분석을 안 하는 건 아니다.
예습 복습은 학점 관리의 기본.
“데이터 보여줘.”
“오, 오케이.”
팸은 스프레드 시트처럼 펼쳐 숫자들을 보여줬고.
‘마지막이······’
[7,234]
마지막 성적은 저번보다 약간 상승.
사실상 거의 차이가 없었지만, 율리안은 만족했다.
‘음. 좋아.’
이걸 이룩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달랐으니까.
“이걸 고작 1년 만에 해버리다니. 꺄루루······ 나도 놀랐어. 율리안.”
단, 1년.
팸이 놀랄 정도의 속도였다.
“뭐, 했던 거 또 하는 건 내 전문이거든.”
그랬다.
준일이 잘난 건 없어도, 끈기 하나는 최고다.
그 끈기를 발휘하는 방식이 어떤 식이냐?
그건 바로 반복, 숙달이다.
이는 K 주입식 교육 시스템의 산물인데.
‘여기선 아주 잘 먹히는군.’
비슷한 걸 반복하는 전문 용사가 되는 데 있어서, 이만한 조기 교육이 없었던 것이다.
율리안은 데이터를 슥 훑어보며 머릿속으로 메모하고는 묻는다.
“다음은 언제야? 한 달씩 현대에 있는 거 적응 안 돼.”
이젠 오히려 현대가 적응이 안 된다는 율리안.
“으음······ 이젠 슬슬 빨라질 거야. 진짜 빠르면 아마 일주일?”
“오케이. 근데 다음엔 미리 싸인이라도 주고 들이박아. 맨날 피하잖아.”
“그걸 피하는 네가 문제가 있는 건데······”
“그럼 비행기라도 쓰던가.”
이렇게 율리안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고.
일주일 뒤.
휘이이이이이잉!
정말 비행기가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구분이 쉬워서 좋네.’
이세계로 가는 게 아니고서야 원룸 오피스텔에 비행기가 박을 리가 없다.
율리안은 그냥 눈을 감고 비행기를 받아들였고.
콰아앙!
그는 5회차 용사가 되었으며.
이때부터는 거의 숙련된 전문가 포스!
1년에서 더 깎을 것도 없었던 것 같은 루트를 깎고 또 깍아서, 단 8개월 뒤.
콰앙!
“죽어어어어!”
루트 깎는 고인물 율리안.
그는 마왕을 썰어낸다.
서걱!
“꺄······ 꺄루루?”
이젠 팸도 쳐다보지 않고 검을 수납하며 묻는다.
“성적?”
“비······ 비플.”
[평가: B+]
팸은 당황하고.
다시 비행기가 꽂히고.
6회차.
콰광!
“죽어!”
또 마왕이 죽었다.
놀랍게도 한 달을 더 줄여서 7개월 걸렸다.
“꺄루? 대, 대체 어디까지 빨라지는거야?”
“성적?”
[평가: B+]
다시 비행기, 7회차, 마왕······
“죽어.”
콰과과과과앙!!!
6개월 걸렸다.
이러다 3개월 마왕 속성 코스 책이 발간되는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
동료들은 그의 호쾌한 검격에 환호하지만.
“와아아아! 율리안! 율리안!”
“어. 어. 그래. 그래.”
율리안은 전혀 감흥이 없는 말투다.
“우리가 이겼다~ 해냈다~ 와~”
-영혼 ㅇㄷ?
-율리안 이 새키 말투 왜이럼?ㅋㅋㅋ
-감정 표현이 서툰 율리안 ㅠㅠ
-애써 감동 참는 게 더 감동이네요······
-율리안의 이 절제된 감정이 참······ 여운이 남네요.
-이게 진짜 우정이지 ㅠㅠ ㅆㅂ
웃긴 건 성좌들은 이걸 또 오히려 좋아해준다는 것이다.
꿈보다 해몽이다.
‘세상 참······’
공주한테 혹했을 때는 공주를 싫어하다가 그냥 쳐내듯이 대할 땐 좋아하고.
동료들에 진짜 우정을 느꼈던 1회차에선 감정적인 찐따네 뭐네 욕하더니.
이번엔 진짜 우정을 본 것 같단다.
‘우정은 무슨. 차라리 성좌들이랑 내가 진짜 우정이지.’
성좌들과의 우정?
이는 반쯤 진심이다.
율리안은 동료들보다 이젠 성좌들이 더 친숙한 것 같다.
‘언젠가부터 거의 실시간으로 보이는 수준이니, 뭐.’
마왕이 목이 날아가는 속도만큼, 성좌들의 코멘트가 보이는 속도도 남달라졌다.
7회차 땐 사실상 무슨 사건마다 한 번 보인다.
-걍 무난하게 읽을 만했네
-잘 봤습니다. 마지막 좋네.
-재밌어요!
-이걸 왜 빠는지 모르겠는데. 다 보긴 함.
-걍 평작.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님.
이런 까탈스런 평가도 이제 익숙하다.
그야 성적은 정확하니까.
“성적?”
“꺄······ 루?”
[평가: B+]
평가는 귀신 같이 똑같은 등급.
B+를 유지했다.
“4억 입금해.”
“예썰!”
* * *
7회차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귀환한 용사 율리안······ 아니, 문준일.
“후아. 피곤하네.”
그는 집에 돌아와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피곤함이 싹 가신다.
[2,340,000,000 원]
“드디어!”
23억 4천만원.
생활비를 제외하고 깔끔하게 만들어놓은 돈이 보였다.
‘이 정도면 등취세까지 문제가 없어.’
세금까지 정확히 낼 수 있었다.
꿈에 그리던 아파트를 일시불로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렇다.
꿈이 이뤄진 것이다.
“해냈드아아아!”
마왕 목을 썰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도파민!
그는 함성을 지르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내질렀다.
그런데, 하필 그것이 잘못하여 오피스텔 벽에 맞았다.
콰앙!
여기까지는 그냥 주먹이 좀 아프고 마는 수준으로 끝나야 하는데.
엄청난 굉음과 울린다.
우당탕······!
‘어?’
설마.
준일은 자신이 착각한 줄 알았다.
‘뭔데?’
벽에 구멍이 뚫렸다.
주먹에 의해서.
‘······’
이때 머리에 먼저 떠오른 생각.
‘이거 얼마지?’
집 사는 데 차질이 생길 정도는 아니길······ 라고 생각하던 중.
준일은 머리를 휘젓는다.
‘아, 아니지. 미친놈아.’
이거 해봐야 몇백 수준이다.
중요한 건 수리비가 아니다.
이 사태의 심각성을 보라!
주먹으로 건물 벽을 부쉈다고!
‘이건 도저히 정상이 아니잖아?’
몇 번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평소엔 정상이고 어떨 때만 비정상이어서, 그냥 살아왔었는데.
이젠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용사 시절 힘이 점점 전이되는 건가?’
7화
현대 판타지 (1)
그래, 살다 보면 운이 좋아서 그럴 수 있다.
시속 180킬로로 질주하는 오토바이를 피하고, 축구만 하면 15골씩 넣고, 헬스 한 번 없이 배에 왕 자가 생기며, 버스를 놓쳐서 버스보다 빨리 다음 정류장까지 달릴 수도 있다.
근데······
주먹으로 건물 벽을 깨부수는 놈은?
‘이건 인간이 아닌데?’
이건 운이 좋고 말고의 영역을 벗어난 것 아닌가?
인간계를 벗어난 힘이다.
‘대강 느끼고는 있었는데······’
준일도 알고는 있었다.
그의 운동 능력이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는 걸.
다만 준일은 그게 자신의 오랜 용사생활로 인해 뇌의 신경망이 -대충 문과적인 상상력으로- 근육을 제대로 활성화시켜서 그런 줄 알았다.
근데 지금 보니 그 정도 수준으로 설명될 현상이 아니다.
준일은 다가가 외벽이 뚫린 부분을 만져본다.
아주 조금 밖이 보일 정도다.
‘망할.’
한여름의 더운 바람이 솔솔 들어온다.
‘······어디서 자냐?’
이제 그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당장 집의 단열 성능이 망해버렸다는 것이다.
* * *
준일은 급하게 전화를 하며 집을 나섰다.
“예. 갑자기 벽이 뚫렸어요. 아······ 그러니까요. 저도 놀랬어요. 운동기구를 옮기다가 그만······ 예 하하.”
월세방의 주인 아저씨다.
딱히 전화해 본 적은 몇 번 없는데. 다행히 말이 잘 통한다.
애초에 본인이 배상하겠다는데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게 당연하다.
물론······
“어휴. 이건······ 하루 갖고는 안 되겠는데요? 이거 좀 심각한 거예요. 학생. 대체 뭘 한 거예요?”
기술자가 와서 상태를 점검하고는 혀를 내두르며 말하듯,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게요. 이게 왜 뚫렸지······ 하하.”
“3D 프린터로 무슨 폭발물 만들고 그러는 거 아니죠? 요즘 그런 거 하는 애들도 있다던데.”
폭발물이라니.
기술자의 눈에는 저게 그 정도 파괴력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준일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주먹을 내려봤다.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하다.
다른 인간이라면 이 부분에서 놀랐겠다만, 준일은 추측되는 게 있었다.
‘마나······ 라도 쓴 건가?’
주먹에 마나를 둘러서 후려친 것이다.
애초에 주먹으로 친 게 아니라, 주먹은 매개체일 뿐이다.
덕분에 아주 짧은 거리에서 내질러도 폭발적인 힘이 난다.
어려운 말로 일종의 발경(發勁)이다.
물론 준일 아니······ 율리안은 아주 간단하게 그냥 ‘마나 펀치’라고 부른다.
「이봐. 율리안. 너는 좀처럼 재능이 없군」
1회차엔 익히는 데 그렇게 애를 먹어서 무투가 토우에게 극딜을 당했었다.
‘토우······ 내가 이렇게나 발전했다.’
준일은 쓴웃음을 지으며 뚫려버린 벽을 바라본다.
기술자가 한숨을 내쉬며 자로 이곳저곳을 재면서 사진을 찍고 있다.
아무래도 사장에게 보고해야 하는 모양이다.
“여기 일단 스티로폼이랑 덕테이프로 막아드릴게요. 단열은 장담 못 하지만 벌레나 바람은 못들어올 겁니다.”
찌익.
구멍이 은빛 테이프로 막혀나간다.
“본격적인 공사는 내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텅.
기술자가 나간 후.
준일은 멍하니 테이브로 때워진 벽을 쳐다본다.
‘이사할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사할까?
‘어차피 집 살 거 잖아?’
그랬다.
준일은 집을 살 수 있었다.
외벽에 구멍이 뚫려서 잠시 심란했는데. 사실 잘된 일이었다. 집을 사면 되잖아!?
‘럭키비키잖아?’
준일은 매물을 확인한 뒤.
급히 필요한 서류만 챙겨서 집을 나섰다.
* * *
“그건 지금 24억이에요.”
부동산 중개소에 도착한 준일.
그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된다.
“······네?”
뭐래는 거야.
분명 22억이었는데?
이게 말이 되냐고.
“그마저도 방금 가계약을 걸어놓고 나가부렸네.”
“방금요?”
“저기 방금 나가신 분.”
준일은 멍하니 부동산 중개소의 유리문 너머에 보이는 부부를 바라본다.
행복해 보이는 미소로 자신들의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사기 아니야?’
용사 생활 거의 30년 차.
준일은 어지간한 사기행각은 다 당해봤다.
늘 꼼꼼히 체크하는 게 습관이었다.
그는 휴대폰을 켜 부동산 앱에 들어가본다.
[계약 중]
망할.
진짜였다.
심지어 진짜 가격이 올라있다.
24억이었다.
‘씨발······ 서울 부동산이 마왕보다 세네.’
부동산 중개소 사장은 준일을 위로하듯 말한다.
“그래도 매물은 더 찾아보면 있어요. 비슷한 거라도 좀 추천해드려요?”
“······아, 네.”
“근데 부모님은 같이 안 오셔요?”
“제 집이에요.”
“아······ 너무 젊어 보여서. 보통 이렇게 비싼 집은 잘 안 사니까.”
툭.
사장은 믹스커피 한 잔을 앞에 가져다 놓으며 묻는다.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
“저······”
용사입니다.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전문직입니다. 투자도 좀 하고요.”
“코인 같은 거?”
“아, 네.”
“요즘 젊은 분들이 그걸로 돈 많이 버신다더니. 하이고~ 대단하시네. 이런 집까지 보러오시고. 잠시만요······”
탁, 타다다닥.
사장은 컴퓨터로 뭘 검색하더니 묻는다.
“남향은 아닌데. 괜찮아요?”
“남향······ 남향이 좋은데······”
준일이 꿈에 그리던 집은 늘 남향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는 집.
“그러면 24억이에요. 22억짜리 보고 오셨다면서.”
“그래도 남향 주세요.”
준일은 눈을 질끈 감고 그냥 달라했다.
‘까짓거 용사짓 한 번 더 하자. 어차피 얼마 차이 안난다.’
지금 안 사면 안 될 거 같은 느낌이었다.
“한강뷰, 남향······ 이러면 24억 5천이 하나 있는데. 보러 가실래요?”
* * *
띠디디디.
사장이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간다.
집은 비워져 있었다.
신축에 어느 정도 인테리어 작업도 되어있는 깔끔한 내츄럴 톤의 집.
34평형. 남향. 한강뷰.
신혼 부부들이 꿈에 그리는 아파트였다.
‘와······’
커튼이 걷혀지면서 드러나는 아름다운 뷰에 준일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용사 생활 30년을 했다지만, 거기에 한강뷰 아파트는 없으니까.
그는 인생 처음 보는 것이다.
한강뷰 아파트라는 걸.
“······계약할게요.”
“여기가 거실이고, 이제 일로 오면 주방인데 옵션······ 응? 뭐라구요?”
“계약할게요.”
“버, 벌써요?”
볼 것도 없었다.
어차피 신축이라 하자 신청이나 하면 될 것이고.
이 아파트의 입지는 알아볼 만큼 알아봤다.
“뭐, 요즘 소위 불장이라, 와서 보지도 않고 인터넷으로만 계약하는 손님들도 많긴 해요. 그래도 첫 집인데 한 번 천천히 보세요. 저는 전화로 홀딩 좀 해놓을게.”
“예.”
준일은 마치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은 감정으로 집 안을 걸어봤다.
거실 바닥에 깔린 대리석의 촉감, 말끔하게 빠진 아일랜드, 세련된 톤의 간접 조명들.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없었다.
‘이제······ 결혼만 하면 되는 건가?’
한강이 보이는 신축 아파트에서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
그의 꿈을 이룰 첫번째 발판을 마련한 것 같았다.
“진짜 바로 하실 거면 여기에서 그냥 작성하실래요?”
“아, 네. 그렇게 할게요. 근데 24억 3천······ 안될까요?”
“아, 아휴. 기다려봐.”
사장님은 몇 분 정도 더 통화하더니 24억 4천을 불렀다.
“어휴. 이것도 그냥 억지로 깎는 거야 억지로. 지금 사겠다는 사람이 몇인데······”
준일은 그래도 천만 원 깎았다는 생각에 싸인을 했다.
스스슥.
“계약금은 여기로. 2억 4천 4백.”
“예······.”
앱을 만지는 그의 손이 덜덜 떨린다.
‘뭔 이체금이······’
억 단위를 이체한다니.
미친 거 아니야?
마왕이랑 싸울 때도 이렇게 떨린 적은 없었다.
“후아······.”
“천천히 해요. 긴장되는 게 당연하지.”
“네, 네.”
사장은 다 안다는 듯 그를 다독인다.
그리고 마침내 계약금이 쏘아진다.
띠링.
“오. 확인됐다네요. 그럼······.”
“잠시만요.”
준일은 휴대폰으로 뭘 확인하더니 갑자기 손을 든다.
“왜 그러세요?”
“잔금까지 치를게요. 내일 이사오겠습니다.”
“······?”
* * *
쿵.
집주인이 도착해 서로 마지막 도장까지 찍은 후.
“감사합니다.”
“아이고, 제가 감사하죠.”
서로 악수까지 마쳤다.
원래 금액이 모자랐는데.
준일은 세금까지 싹 다 치뤄냈다.
어떻게?
‘마침 기적처럼 코인이 올라있다니.’
꼭 신의 계시인 것마냥, 그렇게 지지부진하던 코인이 떡상해 있었다.
원금 3억에서 현재 5억이 되어있었다.
‘손절 안 하고 그냥 물려있길 잘했다.’
이게 성직자 ‘세이’가 말하던 계시가 아니면 뭐겠나?
「신께선 늘 우리를 보고계세요. 우리의 믿음에 ‘계시’로서 답해주세요. 귀를 기울여보세요. 율리안. 마음 깊이 귀를 기울여주세요.」
정말 마음 깊이 원하긴 했었다.
그래서 계시를 받은 것이다.
“아이고. 축하해요. 한강뷰 아파트 오너 되셨네.”
한강뷰 아파트 오너가 되라는 계시.
* * *
잠시 후, 지하철 승강장.
준일은 헤드셋을 낀 채 자신이 받은 계약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아파트 이름이 적힌 곳을 손으로 만지며 믿기지 않는듯 한참 쳐다봤다.
[매크로센트럴리버빌라디움그랑시아]
“이게 내 집이라니······ 빚도 없는 완전한 내 집······”
남들이 보기엔 수저 잘 물고 태어났거나 코인 대박난 영앤리치겠지만.
이는 사실 30년의 노력으로 얻어낸 집이었다.
준일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내만 있으면 완벽하겠구나.’
이 좋은 신혼집에 들여올 짝만 찾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거다.
「율리안? 율리안. 보고 있는거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이럴 때마다 그의 머릿속에 스쳐가는 갈색 머리칼.
햇볓이 쨍하고 내리쬐면 붉은빛이 도는 신비한 색.
“하아.”
준일은 한숨을 내쉰다.
“갑자기 뭔 아내여.”
분명 오랜기간 그의 꿈이었는데.
왠지 하등 의미 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러는 사이 지하철이 다가온다.
쿠구구구구!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스크린도어가 열릴 때까지 안전선 뒤에서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준일은 계약서를 다시 가방에 넣고, 몇 번이나 지퍼를 확인한 후.
지하철에 올라타 가방을 꼭 끌어안고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아직 퇴근 시간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 많은 사람은 없었는데.
‘어우 사람 너무 많아.’
몇 개 역을 지날 때마다 점점 사람들이 많이 들어찼다.
중세에서만 지내던 준일에겐 너무 높은 인간 밀도.
‘좀만 버티자.’
준일은 그냥 헤드셋 볼륨을 높여서 음악이나 들었다.
정거장에 멈추면 사람들이 타고, 또 다시 출발하고.
지루한 광경이 펼쳐지던 중.
‘음?’
근데 그는 누군가를 발견한다.
‘수연이인가?’
수연이다.
그녀는 옆에 어떤 남자와 함께다.
둘이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다.
‘저 사람······’
준일도 아는 사람이다.
학교 선배, 이창훈.
이미 직장을 다니고 있다 들었는데.
수연이와 만나고 있었구나.
준일은 그렇게 생각하며, 굳이 아는 척하지 않고 시선을 거두었다.
‘학교에 안 알린 거 보면 들키고 싶지 않은 거 같으니.’
수연이가 남자가 있다는 내색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준일도 그냥 못 본 걸로 치려 했던 것.
그런데, 수연이 이쪽을 본다.
“······? ······!?”
노이즈 캔슬링으로 인해 그녀의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손을 흔든다.
인파가 많아서 이쪽으로 오는 게 무리인데.
비집고 다가온다.
“준일 오빠! 와! 여기서 다 만나네요?”
수연이가 앞에 서서 반가워한다.
“어······ 신기하네.”
“안드래도 창훈 오빠한테 준일 오빠가 저 구해준 얘기하려 했는데.”
“구해준 건 아니지. 뭐.”
준일은 표정이 굳는다.
‘굳이 이창훈한테?’
아무리 중세에서 오래 살았어도, 이창훈에 대해선 기억한다.
사이가 별로 안좋았다.
“둘이 친한가보네.”
옆에서 이창훈이 한마디 한다.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 자주 봐서요.”
“그렇구나. 문준일. 간만이야?”
“예. 뭐.”
준일은 그를 개무시하며 다시 헤드셋을 낀 채 볼륨을 높여버린다.
치지지지지직······!
노이즈가 들려온다.
‘아 씨, 이 헤드쉑······ 어?’
순간 헤드셋 고장인 줄 알 뻔했으나.
글자가 보인다.
띠딩.
[스토리 보드 3.0]
이번엔 성좌들의 코멘트가 아니다.
‘뭐야. 이건.’
글자는 더 이어진다.
띠딩.
띠디딩.
[최신 오픈 월드 스트리밍 시스템이 적용됩니다.]
[해당 차원에 설정 다운로드 중······ 4%]
[장르: 현대 판타지]
8화
현대 판타지 (2)
페어리 주식회사 사내 중앙.
이야기 세계수가 자리한 이곳에 거대한 플래카드가 걸린다.
아마 캡의 승진 때 이후 처음이었다.
빠밤~!
[7연속 히트작! 출간!]
[팸은 전설적입니다!]
그녀의 7연속 히트를 축하하는 문구였다.
화려한 폭죽이 곳곳에 펑펑 터져나가며, 모든 요정들이 그녀 주변을 돌며 축하의 노래를 불렀다.
팸은 그녀들의 축하에 미소로 응답하며 한 명씩 다 악수를 한 후.
자신의 사무실로 출근했다.
그녀는 승진을 거듭해 세계수의 가지 한켠에 자신의 개인 사무실을 갖게 됐다.
“꺄루루. 뷰가 참 좋구나!”
그녀의 시야 아래 수많은 요정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페어리 주식회사의 풍경이 다 보였다.
[3지부 1팀장 - 팸]
멋들어진 나무 팻말도 하나 세워뒀다.
그녀는 자신의 위습 워치를 바라본다.
팀장들만 가질 수 있는 물건이다.
계약된 정령이 요정들이 원하는 대로 정보를 전달해 주는 스마트 페어리 기기.
“잔고.”
팸이 이렇게 말하자, 시계 속 동그란 위습이 튀어나와 눈을 껌벅이더니, 글자를 띄워준다.
우웅!
‘드디어······.’
[현재 보유: 5여운(YN) 143마음(HT)]
이야기 화폐의 보유량이다.
5.1 여운을 갖고 있다.
현대 판타지 이야기 판의 가격은 5여운.
그녀는 현대 판타지를 구매할 금액을 갖춘 것이다.
파르르르!
누군가 팸의 나뭇가지 쪽으로 날아올랐다.
햄이다.
“팸님! 이제 진짜 현대 판타지로 가시는 거져!?”
신나게 날개짓하며 통통한 몸을 흔들어대는 햄.
자기 일도 아닌데 팸보다 더 신나보인다.
“그래.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있어.”
팸은 오늘만큼은 햄을 밀어내지 않는다.
아주 기쁜 날이다.
대신 자신이 작성해놓은 시나리오를 꺼내들며 씩 웃었다.
툭—
[설정집]
[스토리보드 3.0ver]
[장르: 현대 판타지]
“오오? 스토리 보드 3.0 버전?!”
햄이 놀란다.
“이건······ 성좌님들이 직접 체험하듯 구경하는 오픈월드 형식의 스토리보드 잖아여!? 이거까지 구매하셨어여?”
“물론.”
팸이 무려 7연 히트를 치는 동안 고작 5여운만 벌었던게 아니다.
3연 히트도 기적인데 7연이다. 7연.
당연히 더 벌었다.
나머지는 자신의 이야기 판을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는데 투자했다.
“캡님이 쓰는 것과 동일한 버전······ 와······.”
이곳의 지점장, 캡.
그가 쓰는 것과 똑같은 버전의 이야기 판을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이야기판을 사고, 차원 구매만 하면 되는 거야.”
“그쵸. 이번에도 주인공은 율리안인가여?”
“물론이지.”
팸이 주먹을 움켜쥐며 웃는다.
그간 그녀도 율리안과 많은 작업을 해오며 정이 들었다.
그녀의 기념비적인 현대 판타지 데뷔도 당연히 율리안과 함께 하려한다.
“자······ 구매 한다?”
팸은 자신의 위습 워치를 조작하여 이야기판을 구매한다.
띠링.
[이야기 판 - 현대]
[구매 완료]
촤르르르르!
잔고가 빠져나가면서 구매됐다.
[이제 ‘현대’ 시간대의 접근 권한이 부여되었습니다.]
“와아아!”
팸은 그대로 그 이야기판을 가동시켰다.
[원하는 차원 좌표를 입력하세요.]
[그곳으로 설정을 다운로드시킵니다.]
팸은 수많은 우주의 지구들을 살펴본다. 중세 어딘가의 모습만 보이던 이전과 달리 현대적 기술을 가진 차원들이 주르륵 나열디어있다.
팸은 미리 점찍어둔 곳이 있었다.
[차원 좌표: LmV - x 8348]
[설정되었습니다.]
[주인공을 선택하세요]
주인공 선택에는 여러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해당 차원에서 선택]
[다른 차원에서 전송]
크게 두 가지.
그 차원의 인간을 쓰느냐 아니면 전송해 오느냐.
그다음은 이런 아이템을 쓸 것이냐 말 것이냐.
[회귀 아이템 사용]
[환생 아이템 사용]
[빙의 아이템 사용]
[재능 부여 아이템 사용]
[특전 부여 아이템 사용]
.
.
.
여러가지로 주인공을 주인공답게 만들어주는 아이템들이다.
‘애석하게도 난 아이템이 하나도 없어.’
팸은 이런 아이템을 발라서 주인공 버프를 주는 대신, 같은 주인공을 여러번 써서 훈련시키는 방식을 택했고.
[다른 차원에서 전송]
[사용 아이템 없음]
당연히 이 선택지를 고른다.
“이제 시작이다.”
이제 그 빛을 볼 때가왔다.
현대 판타지마저 성공시킨다면 최연소 지점장 자리도 꿈은 아니다.
팸은 씩 웃으며 율리안이 있는 차원 쪽으로 줌인한다.
‘전송을······’
그렇게 용사 전송 버튼을 누르는데.
‘어?’
팅!
[전송 불가]
[해당 차원은 다른 이야기 요정의 소유입니다.]
[소유권 이전 날짜: XXX력 X월 XX일]
“······뭐?”
율리안이 거주하는 차원이 팔렸단다.
대체 언제?
* * *
[스토리 보드 3.0]
[최신 오픈 월드 스트리밍 시스템이 적용됩니다.]
준일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뭐야 이건 또?’
이건 그때 봤던 거랑 다르다.
심지어 이세계에서 보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착각이 아니라는 건데.
[해당 차원에 설정 다운로드 중······ 4%]
[장르: 현대 판타지]
글자들은 끝없이 계속 튀어나온다.
[해당 차원에 설정 다운로드 중······ 24%]
[에너지원: 마나]
치지지지직!
다운로드가 진행될 때마다, 노이즈가 강해졌고.
[해당 차원에 설정 다운로드 중······ 37%]
[개입 유형: 게이트 오픈]
쿠구구구구구구!
지하철이 요동친다.
조금 노면이 거친 터널을 지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법했지만.
“어, 어어어!”
사람들이 이리저리로 기울어진다.
“뭐야!?”
“아, 미, 밀지 마요!”
우르르.
한 쪽으로 쏟아지는 사람들.
“컥!”
“깔려요! 사람 깔려요!”
지하철이 기우는 건가?
점점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오, 오빠! 뭐예요 이거!?”
수연은 준일의 다리 위로 넘어지며 그의 어깨를 꽉 잡는다.
아무래도 저번에 그가 구해줬던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준일도 뭔지 모른다.
‘뭐지.’
쿵, 쿵······!
준일의 심장이 세게 뛴다.
[해당 차원에 설정 다운로드 중······ 58%]
[지원 요소: 상태창, 각성자, 퀘스트]
불안한 다운로드 수치가 늘어날 때마다, 지하철의 휘청임은 더 심해졌다.
덜컹—
“뭐······ 뭐야!? 수연아 자, 잡아!”
이창훈이 봉의 손잡이를 부여잡고 수연에게 손을 뻗는데.
수연은 이미 넘어져 준일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그 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무너져온다.
“깔려요! 깔린다구요!”
수연이 애원하듯 비명을 지른다.
그녀 뿐이 아니다.
“아니, 아니 누가 계속 민다고! 지금 누가!”
“야! 씨발 밀지 말라고!”
흥분한 시민들의 고함소리.
“이러다 다 깔려 죽는다고! 씨발!”
거친 욕을 쏟아내는 사람들.
“밀어! 반대로 밀어!”
기어코 그들은 반대로 밀기로 한다.
살기 위해서.
가운데 낀 이들만 곤란해졌다.
“끄아아아아악! 아, 안돼! 안돼!”
혼돈이다.
모두가 실성에 가까운 표정.
‘대체 뭐야.’
준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좌석을 밟고 올라가 저 너머를 살펴본다.
“끼액! 끼익!”
아까부터 이 수많은 고성과 비명을 뚫고, 익숙한 소음이 들리는 것 같아서다.
[해당 차원에 설정 다운로드 중······ 79%]
[몬스터 타입: 중세, 설화, 현지화······]
그리고 신경쓰이는 이 메시지.
준일은 짐칸을 철봉처럼 잡고 매달려 더 위로 올라가 제대로 다른 칸을 살펴본다.
“······하?”
그는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
“끼애애애애액! 끼액!”
왜 사람들이 이쪽으로 밀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고블린이잖아. 미친.’
고블린 떼가 바로 다음 칸에서 밀고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 가득찬 퇴근길 지하철 안에, 고블린 떼가 난입을 했으니.
난리가 나는 것도 이해가 된다.
드디어 승객들 사이에서도 그 말이 퍼져나갔다.
“저, 저기 앞칸에! 이상한 괴물이! 괴물이 있어요!”
“뭐래는 거야! 씨발 조현병이야!?”
“지, 진짜라니까!”
물론 믿지는 않는다.
아마 두 눈으로 봐도 쉽게 믿기진 않을거다.
갑자기 지하철에 괴물이 튀어나왔다니.
“오, 오빠. 뭐가 보여요?”
수연이 어느새 준일이 앉아있던 자리까지 올라와서 묻는다.
“어······ 그······”
준일은 말하기 좀 곤란해한다.
‘뭐라하냐. 이걸.’
그는 그냥 이렇게 말한다.
“좀 있어 보면 알 거야.”
“네?”
황당한 소리.
지금 사람들이 밀려서 깔려 죽네마네하는데.
좀 있어 보라니.
“야! 뭐가 보이면 말을 해!”
이창훈이 열받아서 한 소리한다.
“어. 고블린들이 앞 칸에서 진격해 오고 있어. 한 10마리는 되는 거 같은데?”
“뭐라고! 이 새끼야! 지금 장난칠 생각이 드냐!?”
“장난 아닌데.”
“?”
[설정 다운로드 완료]
[스토리보드 3.0]
그때였다.
드디어 모든 다운로드가 끝났다.
[튜토리얼 시작합니다.]
튜토리얼이 시작된다.
대체 이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팸 이 새끼······ 뭔 짓을 한 거야.’
준일은 곧장 팸을 의심했다.
그녀가 현대 판타지를 갖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으니까.
왠지 그 녀석의 짓거리 같았다.
‘이제 겨우 집 샀더니. 여기를 어떻게 만들려는 거냐고.’
하아.
준일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끼애애애액!”
그러는 사이, 고블린들이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다른 칸에서 밀고 들어오는 놈들 말고.
바로 여기 칸에서 그냥 허공에서 펑펑 터져 나오는 것이다.
무슨 팝콘처럼!
“미, 미친 뭐야!?”
“끼액!”
고블린 한 마리가 천장에서 튀어나오며 단검을 쑤셔넣는다.
넥타이 맨 남자의 정수리가 꿰뚫렸다.
푸욱!
남자는 비명도 못지른 채, 그대로 즉사.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 비명은 옆에 있던 사람들의 것이다.
우르르르—
순식간에 사람들이 고블린 주변으로 물결처럼 도망쳐 퍼져나가는데.
“미, 밀지마요!”
아쉽게도 퇴근길 지하철 아니던가?
자리가 없다.
[다음 역은 동작, 동작역—]
문이 열리지 않는 한, 사람들은 선 채로 고블린 단검에 꿰뚫려 죽을 신세다.
퍼억! 퍽!
“끼애애애애액!!”
고블린들이 사람들 머리 위에 올라 타 단검으로 마구 파운딩을 찍어댄다.
피가 사방으로 튀고, 사람들이 하나 둘 쓰러져나간다.
“오빠······ 저, 저게 대체 뭐예요?”
수연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
“고블린이라니까.”
탁.
준일은 다시 좌석으로 내려와 수연 옆에 섰다.
“가방에 펜 있어?”
“······네?”
“펜. 볼펜 같은 거. 그 정도면 될 거 같아. 숫자가 별로 안 돼서.”
척.
준일이 손을 내민다.
그러자 수연은 손들 덜덜 떨면서도 가방에서 펜 하나를 꺼내줬다.
그녀에겐 그때의 기억이 있었다.
‘그때 오토바이 피할 때도······ 보통이 아니었어.’
비록 먹은 걸 다 토해내는 쪽팔린 기억이지만.
그때 준일의 움직임은 탈인간이다.
그녀가 계속 준일에게 말을 거는 이유도 그때의 경험 때문이다.
“여기 그대로 있어.”
타악!
준일이 좌석에서 점프하듯 시체들 위로 올라가더니.
“끼액?!”
푹!
뒤돌아본 고블린 하나의 목을 손쉽게 꿰뚫어버렸다.
‘된다.’
준일은 이때 확신했다.
외벽을 뚫은 펀치가 우연이 아님을.
수연은 놀라 입을 가린다.
‘페······ 펜으로?’
볼펜 따위로 괴물을 죽이고 있으니.
“다음.”
“끼애애애액!”
날렵하게 뛰어드는 작은 초록 괴물이 준일의 볼펜만 스쳐가면 핏덩이로 변했다.
푸슛······!
“키액······!”
털썩.
힘없이 쓰러지는 고블린.
“키, 키액?!”
“키액! 끼익!”
“끼익! 끽!”
각자 퍼져서 사람을 신나게 학살하던 고블린들끼리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어. 그래. 나부터 죽여.”
정말 준일의 말대로 동시에 그에게 다 뛰어들었다.
‘너희 습성이야 너무 잘알지.’
씨익.
준일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눈이 번뜩였다.
‘맨날 방방 뛰어서 달려드니.’
볼펜이 한바퀴 휘저으며, 푸른 궤적을 만들어내더니.
촤아아악!
‘빈틈이 많아.’
털썩!
그에게 달려들었던 대여섯의 고블린들이 일제히 피를 흩 뿌리며 바닥에 널부러진다.
“키······ 키륵······!?”
치명상을 입고 꿈틀거리는 고블린들.
-와
-ㄷㄷ
-뭐야 다 죽은 거?
죽은 건 아니다.
‘이제 죽었지.’
준일은 그들에게 하나 하나 다가가 볼펜으로 숨통을 끊어놓는다.
푹. 푹. 푹······
마치 뾱뾱이 포장지 터트리듯, 간단하고 느긋하게 괴물들을 죽이는 광경.
일순간 모든 승객들이 침묵했다.
“미친······”
이창훈조차 떨떠름한 목소리로 잠시 읊조릴 뿐.
이내 쥐 죽은 듯 조용해진다.
-얘 뭐냐?
-좀 치는 놈인가?ㅋㅋ
-엑스트라인 줄 알았는데 지리네
-볼펜 살인마 ㄷㄷ
9화
현대 판타지 (3)
순식간에 고블린들을 차례차례 도륙해버린 한 남자.
지하철엔 정적이 흐르고.
“거기 칸막이 문은 계속 막고 계세요.”
그가 말을 꺼내자, 모두가 경청했다.
“아······ 예, 예.”
그가 제일 먼저 부탁한 건 문을 틀어막으라는 것.
“지금 열면 더 죽어요. 여기 있는 사람 중 절반은 죽습니다.”
사람 목숨을 저울질하는 건 현대인들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훨씬 더 많은 목숨을 잃게 된다.
1회차, 2회차에 준일은 이미 그런 실수를 너무 많이 해봤다.
“무거운 물건 같은 걸로 틀어막으세요. 서류 가방, 소화기, 백팩······ 지금 가릴 때가 아닙니다.”
3회차부터 그는 이 저울질을 빠르게 납득했으니.
7회차가 지난 지금은?
“동작역까지 막으면 저희 칸은 사는 겁니다.”
저울질의 신이다.
그는 순식간에 다른 칸의 승객들은 손절하고, 이 칸의 목숨을 선택했다.
-판단력 ㄷㄷ
-오 얘 뭐임?
-이야 다른 칸 다 뒤지는데 ㅋㅋㅋ 여기가 산다고?
-이걸 살려?
“네! 마, 막고있습니다!”
“여기 좀 도와줘요! 캐리어 같은 거 없습니까!?”
쿵쿠궁!
쿵쿵······
쿵······
살려달라며 울부짖으면서 칸막이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점점 줄어든다.
준일은 가운데 서서 양쪽 문을 살펴보며 되뇌인다.
‘다 와간다.’
[이번 정거장은 동작, 동작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지하철의 속도가 점차 줄어든다.
승객들의 눈이 전부 문만 쳐다보고있었다.
빠르게 이 지옥에서 탈출하고 싶을 것이다.
코인 차트가 급 하락할 때와 같았다.
한시라도 빨리 그 지옥에서 나가고자 패닉셀을 한다.
준일은 그래서 외친다.
“우리는 이번 역에 안 내립니다!”
“예······?”
“안 내려요! 내리면 다 죽어요!”
“아, 아까는 동작역까지 버티라면서요!?”
반박이 나온다.
방금 준일이 고블린을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다 처죽인 걸 보고도.
어쩔 수 없다.
본능을 거스르기란 그렇게나 어렵다.
‘그래서 내가 돈을 다 잃었지.’
준일도 이해한다.
“동작역까지 버티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내려야 돼서죠. 걔네가 고블린 끌고 전부 내릴 거예요. 우리 칸은 안전합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문이 열려도 내리지 마세요.”
“!”
물흐르듯 나오는 명령.
‘준일 오빠······ 뭐야?’
수연은 아까부터 놀라서 그냥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
모든 판단이 합리적이다.
무엇보다—
‘어떻게 저렇게······ 여유가 있는 거지?’
어떻게 된 게 제육백반을 먹을 때보다 갑자기 괴물이 튀어나왔을 때 더 여유가 있다.
‘제육은 그렇게 급박하게 뺏어먹더니.’
지금은 그냥 캠퍼스 벤치에 누워있을 때와 차이가 없는 모습.
반면 옆의 이창훈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레고레 고함친다.
“뭐래는 거야! 지금 여기서 또 뭐가 나올 줄 알고! 난 내릴 거야!”
다급하고, 불안해 보인다.
수연은 저도 모르게 슬며시 움직여 창훈과 거리를 둔다.
-어우 병신 ㅋㅋ
-고구마 새끼
-쟤 안 죽냐?
성좌들의 아우성이 흘러나온다.
준일은 예상한 반응이다.
‘응. 그런 놈 항상 있더라.’
준일은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나가셔도 말리진 않습니다. 단, 여기 계시는 분들?”
“예?”
“내렸다가 다시 들어오는 사람들은 반드시 발로 차서 밀어내세요.”
“!”
-발로 차서 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ㅅㅂㅋㅋㅋ
-앜ㅋㅋㅋㅋㅋ 이러면 되네
-도랏누 ㅋㅋㅋㅋ
“바, 발로 차라구요?”
“예! 꼭 발로 차셔야 합니다! 걔네들이 고블린을 다시 끌고 오면 최소 몇 명은 더 죽어요. 절대 다시 못 타게 하세요.”
너무 잔인한(?) 처사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는데.
“이 사람 말 들읍시다! 저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군복 입은 한 남성이 외친다.
“저, 저도요!”
“저게 맞는 거 같음.”
그 옆의 몇몇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준일의 말에 호기롭게 대답하자.
해당 칸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내리는 건 자유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닌 걸로.
치이이이!
지하철 문이 열렸다.
“나갈 분은 나가세요!”
준일이 외쳤으나.
“······.”
이창훈은 그저 초조하게 창 밖을 내다볼 뿐.
발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대신—
투두두두두두!
옆의 수많은 칸에서 비명과 함께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온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
“사, 살려줘! 살려줘어어어어!”
파앗!
칸에 있던 고블린들이 그들을 뒤따라 튀어나온다.
이 고블린들은 꼭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끼애애애애액!”
“끽끼끽~!”
사냥 파티가 개최됐다.
도망치는 이들을 죽이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으니까.
푸욱!
푹!
머리 위로 뛰어올라 경동맥을 찔러버리는 고블린들.
준일이 고블린 잡는 방식에 도가 튼 것처럼, 고블린들은 인간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걸음마와 함께 익힌다.
퍽! 퍽!
“끄아아아악!”
“크헉! 놔, 놔! 살려줘! 살려줘어!”
승강장이 순식간에 피바다가 되었다.
[승강장 틈이 넓으니 내리실 때······]
퉁······!
그 넓은 승강장 틈으로 사람들 시체가 낀다.
눈이 시뻘개진 고블린들은 그것들을 밟고 튀어나가 더 많은 이들을 죽였다.
“이창훈. 안내려?”
준일이 물어보자, 창훈은 그냥 고개를 떨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
-캬
-이걸 또 굳이 물어보네 ㅋㅋㅋ
성좌들이 좋아라 한다.
‘얘네들······’
준일은 이들 반응을 보며 분석해 본다.
‘비슷하군.’
확실히 중세로 갔을 때의 성좌들과 성향이 비슷하다.
그때도 까불던 놈에게 이렇게 한마디 해주면 좋아 죽었다.
‘그럼······ 이거 팸이 저지른 일 맞구나. 개자식······’
준일의 팸에 대한 분노는 더 커졌다.
대체 그 녀석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전문 용사로 잘 지내보자더니.
‘이제 겨우 아파트 샀더니 고블린을 보내?’
이대로 정말 무슨 무슨 소설 만화처럼 곳곳에 게이트가 열린다면?
‘집값이 유지될까?’
절대 그럴리가 없다.
다른 건 몰라도, 집 사자마자 집값 내려가는 건 정말 참을 수가 없다.
코인으로 당한 걸로 족하다.
치이이이이—
다시 지하철 문이 닫히고, 다음 역으로 향한다.
“후아······ 하······”
“사, 살았다.”
털썩.
그제야 승객들은 긴장을 풀고, 지하철 바닥, 좌석에 주저앉는다.
다들 고블린이 혹시 들어올까봐 잔뜩 긴장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준일에게 감사를 전한다.
“저······ 학생. 감사해요. 학생 아니었으면······ 엄청 죽었을 거야.”
“맞아. 정말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팸에 대한 분노로 얼굴이 굳어있던 준일.
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간다.
용사 시절이 생각나서다.
‘뭐······ 간만에 운동하니 좋긴 하네.’
* * *
준일의 일행은 안전하게 학교 앞 역에 무사히 내릴 수 있었다.
“고블린 덕분에 지하철 앉아서 왔네.”
준일은 아무 생각 없이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사람들이 동작역 다음 역에서 모두 다 내렸기 때문에 진짜 텅 빈 지하철에서 앉아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혹시라도 또 고블린이 튀어나올까 걱정했던 모양이지만.
준일이 그냥 가도 된다 말하니 안심하고 내렸다. 수연과 창훈만 준일을 따라 대학교 앞 역까지 왔다.
“······뭐야? 이 자식아? 고블린이 나와서 잘됐다는 거야?”
창훈이 시비를 건다.
“오빠······ 그, 그건 말이 좀 심해요. 사람들이 죽었는데······”
수연도 괜히 동조하는데.
준일에게 사람이 죽었네 뭐네 따위의 동정 여론 협박 같은 건 먹힐 리가 없었다.
그야 용사질 약 30년.
이제 그는 안다.
‘사람은 원래 죽어.’
사람은 그냥 태어나면 죽는다.
용사될 사람이 여기에 일일이 진지해지다간, 더 많은 사람이 죽는다.
1회차가 그랬다.
여기 사람이 죽었어요! 하며 울부짖다가 정말 다 죽을 뻔했다.
“아니. 창훈아. 여기서 뭐해? 동작역에서 안 내렸어?”
그리하여 그냥 이렇게 맞받아치며 가볍게 넘기는 준일.
푸······ 훕!
수연도 웃음을 겨우 참아냈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ㅅㅂ
-캬
-할 말은 한다! 준카콜라!
-속이 뻥~
-와 본겜 시작하면 구독 박아야겠다 ㅋㅋ
성좌들도 신났다.
창훈이 표정도 볼만해졌지만.
준일은 그놈 얼굴보단 성좌들 말을 유심히 살핀다.
‘본겜? 구독?’
본겜이 있다는 건, 지금까진 튜토리얼이고 진짜는 아직이라는 말이다.
구독이라는 건 유튜브 구독 같은 걸 말하는 건가?
‘이전이랑 뭔가 달라.’
예전에 만났던 성좌들과 성격은 비슷한데.
시스템이 좀 다른 듯했다.
처음 나왔던 말을 떠올려본다.
[스토리 보드 3.0]
[최신 오픈 월드 스트리밍 시스템이 적용됩니다.]
‘스트리밍······’
어쩌면 이들은 이제 이야기로서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방송을 보고 있는 것처럼 구경 중인 것 같았다.
‘별 지랄을 다 하네.’
준일은 현재 팸에게 굉장히 감정이 안 좋기 때문에 속으로 욕을 하며 투덜댔다.
* * *
준일은 일행과 헤어진 후 자신의 원룸 오피스텔로 왔다.
그가 집에 오자마자 누군가로부터 연락이 계속 온다.
지이잉.
지잉.
[수연: 오빠 방학 때도 자취하시는 거죠?]
[수연: 오늘 진짜 고마웠어요. ㅠㅠ 담엔 제가 밥 살게요.]
[수연: 근데 오늘 그거 뭐였을까요? 진짜 고블린?ㅋㅋㅋ]
수연의 메시지들이었다.
‘불안한가보네.’
사실 그녀가 메시지를 보내는 이유는 뻔했다.
오늘 겪은 일의 충격을 얘기할 사람이 준일뿐인 것이다.
이창훈도 있지만, 마지막쯤에 정신이 거의 나갔었고.
유일하게 온전한 상태로 자기를 구해주기까지 한 준일에게 의지하고 싶은 건 당연했다.
오늘 겪은 일을 생각한다면, 자기 집 앞 좀 지켜달라고 부탁 안 하는 게 다행이다.
[수연: 와. 우리 뉴스 나왔어요ㅋㅋ]
그녀는 또 메시지를 보내온다.
뉴스에 나왔다고 한다.
“뉴스?”
준일은 뉴스 포털로 가봤다.
찾을 것도 없었다.
메인에 온통 오늘 벌어진 사건 이야기다.
[속보) 서울 지하철에 “괴생명체” 출현? 인명피해 다수, 조사 중······]
[동작구 고블린 현재 사상자 79명······]
[북한산 등산객 “도깨비 습격” 주장 등산객 20여 명 사망 확인돼]
그중에서 조회수가 조금 높은 뉴스가 하나 있는데.
[참사 중 “4호선 히어로” 등장 “우리 칸만 전부 살아” 목격자들 증언 잇따라]
아마 수연이 말한 뉴스가 이거 같았다.
그들이 탔던 지하철이니까.
준일은 사진만 보고 바로 댓글로 스크롤을 내려버린다.
-ㄷㄷ 판단력 미쳤네. 무슨 특수부대 출신인가?
-근데 쟤가 다른 칸은 다 죽인 거 아냐?
└뭘 다 죽임? 쟤가 다 죽인 건 고블린뿐인데······ㅋㅋㅋ
└ㄹㅇㅋㅋ 고블린 슬레이어
└고블린 ㅇㅈㄹ 하네 ㅂㅅ 겜돌이들ㅋㅋㅋ
└저게 고블린이 아니면 뭐가 고블린인데 대체 ㅋㅋㅋㅋㅋㅋ
└눈앞에 고블린이 나와도 ‘ㅋㅋ겜돌이들ㅋㅋ’하고 죽으셈 ㅋㅋㅋㅋ
-와 ㅈㄴ멋있다
-옆에 친구들 과잠 보니까 명문대생 같네요. 정말 대견합니다.
-아니 근데 고블린들 뭐로 죽이는 거죠? 주먹으로?
└고블린들 칼 주워서 싸우는 거 아닐까요?
└잘 안 보임
댓글은 준일에 대한 감탄과 칭찬이 대부분이었다.
[수연: 우리 학교 커뮤니티에서도 알아본 거 같은데요?]
[수연: (링크)]
링크를 타고 가보니 진짜 준일에 대한 글이 있다.
[4호선 고블린 슬레이어 우리 학교 아님? 같이 있는 사람이 우리 과잠이던데]
-그냥 친구 아님?
-방향이 우리 학교 가는 방향이긴 함
-아는 사람 없나?
└얼굴 잘 안 보임.
└왠지 훈남 재질
└망상 자제 좀;
-와 우리 학교인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무빙 ㅈ간지네
└ㄹㅇ······
└통솔력도 ㅈ됨 rotc 같은 거 아님?
여기서도 다들 준일을 궁금해하고, 그를 칭찬하고 있다.
용사 시절, 정말 많은 마을의 영웅이 되어봤다.
찬양받는 것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과는 또 다른 기분이다.
‘나쁘지 않네.’
준일은 씩 웃으며 턱을 쓰다듬는데.
띠링.
[튜토리얼 통과를 축하합니다!]
갑자기 이런 메시지가 보인다.
[여러분은 각성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준일은 눈을 껌벅인다.
‘뭐야. 이거.’
말투로 미뤄보건대, 왠지 준일 혼자서만 보이는 게 아닌 것 같아서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 커뮤니티에 이런 글들이 나온다.
[미친 각성자? 상태창 뭔데?ㅋㅋㅋㅋ]
[고블린에 이어 상태창······?ㅋㅋㅋ 이날만 기다려왔다.]
[상태창 실화임? ㅅㅂ 개강 안 해도 되는 거?]
[상태창! ㅆㅂㅋㅋㅋ 인싸쉑들 다 뒤졌닼ㅋㅋㅋㅋ]
마치 이 충격을 즐기라는 듯 한동안 창이 뜨지 않더니.
약 5분 후.
띠딩.
[각성자 여러분에게 ‘랜덤 룰렛’을 제공해 드립니다.]
펑!
실제로 눈앞에 뭔 룰렛이 튀어나왔다.
그 위엔 S, A, B, C 등의 등급이 써있다.
[룰렛을 통해 각성자 여러분의 잠재력에 등급을 부여합니다.]
촤르르르륵!
룰렛이 알아서 돌아간다.
10화
여덟번째 의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