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짐꾼입니다만? (3)
‘히든 퀘스트?’
노이즈가 꼈던 이유는 히든 퀘스트 때문이었다.
‘이건······ 해결하면 성좌가 후원을 해주던데.’
뭘 후원해줄 지는 모르겠으나.
저번 후원은 대량의 경험치였다.
그 후원이 아니었다면 준일은 밤새서 고블린만 잡고 있었어도 레벨 10이 될까말까였을 터.
‘이번에도 깨보자.’
보상이 상당하다는 건 확인한 바이기에, 준일은 꼭 깨고 싶었는데.
[히든 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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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강*@$*친*도#*
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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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뭔 다 모자이크야?’
제대로 보이는 게 없다.
저번엔 VIP구출이라는 목표는 제대로 보였는데.
* * *
고블린 습격에서 벗어난 후.
“와, 와아아아!”
김채영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살았다!”
그녀는 바닥에 벌러덩 누워서 숨을 헐떡였다.
후방을 뚫고, 전방에서 오는 고블린들은 바닥을 꺼트려 못 오게 해 완전히 포위를 풀어낸 것이다.
“후아······ 겨우 살았습니다.”
성기사 전인수가 식은땀을 훔치며 바위에 걸터앉고.
그 옆에 앳된 얼굴의 한 남자도 바닥에 주저앉는다. 김채영과 같은 마법사, 김성우다.
“아휴······ 진짜 오줌 지릴 뻔했네. 아까 그 이상한 고블린은 뭐예요. 젠장.”
김성우는 강해일 쪽을 보고 물었다.
모두가 탈진 직전처럼 헐떡일 때 혼자서 꽤나 여유로운 모습으로 바위에 등을 기대는 강해일.
그 대답은 허무했다.
“글쎄.”
-ㅋㅋㅋㅋㅋㅋ
-킹쎼여
-모르지 해일이도 ㅋㅋ
-얘가 뭘 알겠음 ㅋㅋㅋㅋㅋ
강해일은 사실 방금 이상한 고블린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의 시선이 저 멀찍이 서 있는 남자를 훑는다.
짐꾼으로 들어온 문준일.
‘어떻게 알았지?’
뒤로 뚫고 가자는 준일의 제안.
그 난리통에 판단이 꽤 괜찮았다.
F등급이지만 말이다.
“하아. 해일이 형. 저희 여기 깰 수 있는 거겠죠?”
옆에서 김성우가 조금 무서운 듯 묻는다.
“나가려면 지금 나가. 아까 우리가 구출해 준 사람도 나갔잖아.”
처음 커뮤니티에 사진을 올렸던 사람.
그 사람도 던전 도전보다는 그냥 나가는 걸 택했다.
“하······”
벌러덩.
김성우도 김채영을 따라 뒤로 눕더니 고개를 젓는다.
“그냥 할게요. 이왕 온 거 그 거대 고블린 새끼 얼굴은 봐야지.”
“오~ 애기인 줄 알았더니. 너 남자다?”
김채영이 장난스레 말하자, 김성우가 자존심이 상한듯 대답했다.
“애라뇨. 저도 성인인데.”
“그래? 고딩 아녔어?”
“아닌데요. 스물하나예요.”
“그럼 이거 끝나고 누나랑 치맥이나 먹자. 완전 배고파.”
“······지, 진짜요? 좋죠!”
* * *
한 편 준일은 성좌들 채팅을 응시하고 있다.
혹시나 바닥에 마나펀치 쓴 걸 들켰나해서 확인하는 거다.
-얘가 한거 맞음?
-방금게 짐꾼이 한거라길래 와봄
-이 사람 짐꾼 아님
-F등급이 짐꾼이 아니면 뭐임
-마나펀치 지렸다
물론 몇몇 예리한 놈들은 확신 중이지만.
대체로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다’라는 스탠스.
성좌들조차 긴가민가하는 중이니, 완벽하게 사용한 셈이다.
‘실력 여전하구만. 율리안.’
지반이 약한 곳을 골라 마나를 흘려 폭발시키는 방식.
그냥 일반적인 싱크홀과 겉으로 봐선 큰 차이가 없게 된다.
이걸 현대에서도 완벽하게 구현하니 괜히 뿌듯한 준일.
‘근데······’
그 와중에 특이한 현상이 하나 일어나고 있었다.
‘얘네 왜 싸우냐?’
-방금 그게 얘가 쓴 거라고???
-F등급이 어케 사고슬임?? 진짜 분탕들 존나 많네
-이 새끼가 사고슬이라는 애들 왤케 많냐
-지랄들 좀 하지 말고 나가
-그냥 싱크홀 같은데?ㅋㅋ
-음모론자들임ㅋㅋㅋㅋ
-그냥 짐꾼인데?
이런 건 그전엔 전혀 겪어보지 못했던 건데.
아마 강해일 채널에서 건너온 성좌들과 준일의 채널을 보던 성좌들이 싸우는 거 같다.
-이걸 못알아보네 ㅉㅉ
-니들이 여기서 더 보고 말해
-대충 보니까 모르지 복선 다 깔아줘도 ㅋㅋㅋ
-이런 빡대가리 새끼들 때문에 맨날 양산형만 나오는 거임
-어휴 ㅅㅂ 모르면 걍 강해일 방으로 꺼져 ㅋㅋㅋ
준일을 사고슬이라 주장하는 성좌들이 음모론자 취급을 당하고 있다.
-걍 700명 보는 하꼬인데 ㅋㅋ한줌단 새끼들이 왤케 시끄러운지 매번
-얘네들은 그냥 노답임 ㅋㅋㅋㅋ
-엑스트라에 과몰입 너무 심해 ㅠ 벌써 2차 파지 말고 1차라도 제대로 봐 좀ㅠㅠ
-분탕력 GOAT
-그림체를 봐라 대충 그린 거 ㅋㅋㅋ
‘아직 잘 모르는구나.’
준일은 엑스트라다.
그에게 관심이 있는 건 여기 들어온 700명 뿐.
성좌들 대부분은 주인공을 통해 편집된 정보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주인공이 준일을 사고슬로 인정하지 않으니 저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다.
‘언젠간 조금씩 알겠지.’
강해일 근처에서 활약한다면, 점점 다른 성좌들도 여기 짐꾼이 그 사고슬이라는 걸 알게 될 거다.
‘성좌들이 충분히 알게 되면. 그때부턴 오히려 강해일이 답답해질거야.’
이걸 강해일이 눈치채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성좌들은 결국 강해일에게 답답함을 느낄 것이고.
그의 성좌들이 줄어들 거다.
마치 율리안 시절 파티 안에 배신자를 색출하지 못해서 수도 없이 성좌들이 털려나갔던 것처럼.
* * *
“그럼 재정비하고 다시 출발할까요?”
성기사 전인수가 제안하며 일어난다.
“그러죠.”
강해일도 끄덕이며 앞장섰다.
“근데. 그쪽.”
그런데 강해일이 갑자기 준일을 쳐다본다.
“······저요?”
“그래. 스웜 고블린을 본 적이 있는 건가?”
“예? 왜요?”
“아까 왠지 그런 반응이어서.”
준일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한다.
말이 꼬일바엔 제대로 말하는게 낫다.
“아······ 네. 제가 올라온 방향에선 그 현상이 일어났거든요.”
“그렇군. 앞으로도 잘 부탁해.”
“아, 네. 맡겨만 주세요.”
-?
-뭘요?
-뭘 맡겨 이 F등급아 ㅋㅋㅋ
-짐을 맡기라는거지
진짜 짐을 맡기라는 말이었다.
“템들 제가 챙기겠습니다!”
슝. 슝.
준일은 고블린들이 떨어트린 물건들을 주워 인벤토리로 전부 넣었다.
-이 새끼가 사고슬이라고? 자석펫이 아니라?
이런 채팅이 올라온다.
자석펫.
어떤 유명 게임에서 몬스터 죽이고 잔돈 줍기 귀찮아서 달고 다니는 펫이다.
알아서 자석처럼 아이템이나 잔돈을 주워줘서 유용한 녀석.
근데 그게 지금 문준일이란 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ㅅㅂ
-ㅋㅋㅋㅋㅋ자석펫 ㅇㅈㄹㅋㅋ
-미친ㅋㅋㅋ
-강해일 방 행님들 씨다씨 ㅋㅋㅋ
-자석펫ㅋㅋㅋㅋㅁㅊㅋㅋ
성좌들이 좋아 죽고있다.
‘참내.’
준일은 굳이 성좌들의 말을 신경 쓰지 않고, 파티원들을 따라 걸었다.
지금은 여론이 시끄럽지만, 이런 거에 흔들려선 안 된다.
‘어차피 중요한 순간에 한 번.’
사소한 건 내주고, 중요한 걸 취하면 그만이다.
중요한 게 뭔가?
던전의 존재 이유가 뭔가?
-그래서 챔피언 고블린은 누가 잡냐?
-얘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아시는 분? 진짜 막타 스틸하러 온 거?
-문준일 이거 막타 치러 온 거지?
눈치 빠른 몇은 이미 알고 있었다.
준일이 이런 수모를 겪으면서도 왜 그냥 이들을 따라다니고 있는지.
바로 보스 몬스터.
‘챔피언 고블린 경험치는 가져가야지.’
이 던전의 보스가 나올 때.
준일은 본색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근데 준일의 시선은 어느 채팅들에 유독 오래 머물렀다.
-사고슬 = 럭키 자석펫 ㅋㅋㅋㅋㅋ
-자석펫 잘줍누
-ㅅㅂㅋㅋㅋㅋㅋㅋF등급이면 자석펫도 감지덕지긴 해
‘자석펫은 좀······.’
아무리 7회차 용사라지만.
성좌들의 지속적인 폭격엔 긁힐 때도 있는 법이다.
* * *
“또 왔다!”
파티원들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고블린들과 마주했다.
“크르르르르······!”
“크르아아아!”
모두 눈이 시뻘개진 채 네 발로 뛰는 스웜 고블린들.
콰광!
강해일의 불길이 그들을 한 번 격파해냈지만.
이번엔 숫자가 더 많았다.
촤악!
강해일의 상체에 고블린들의 검격이 그어졌다.
“윽.”
“해일씨! 제 보호막 뒤로!”
성기사 전인수가 앞으로 나가면서 시간을 버는데.
“키애애애액!”
“크르르륵!”
쩌적—
보호막이 금새 갈라진다.
앞의 탱커들이 흔들리자, 마법사들이 불안해한다.
“제, 젠장 왜 이렇게 많아!?”
“트······ 틀렸어요. 그, 그냥 나가면 안 될까요? 누님?”
마법사들이 약한 소리를 하자, 준일이 옆에서 다독인다.
“아까처럼 사방이 포위된 건 아니니까. 진형 잡고 싸우면 이길 거예요.”
“······그래요?”
“네. 큰 마법 쓰세요. 그게 잘 먹히더라구요. 스웜한텐.”
“크, 큰 마법이요? 쟤네 마법만 쓰면 다 달려들던데.”
김성우가 준일을 믿기 힘들다는 듯 쳐다본다.
“일단 그냥 쏴! 그 사람 말 신경 쓰지 말고!
김채영은 아예 돌아보지도 않고 마법을 쏜다.
그녀는 마음이 급한지 작고 연사로 나가는 마법만 구사한다.
투두둥!
투두둥!
‘그런 건 다 피해 이 사람아.’
스웜 고블린들은 이성이 완전히 마비된 대신, 반응 속도가 상당하다.
속도로 승부하려 하면 택도 없다.
범위가 넓은 상위 마법을 써서 못 피하게 하는 게 상책이다.
“큰 마법······”
준일이 다시 훈수하려는데.
집중에 방해되나보다.
“아악! 닥쳐요! 좀!”
피유웅!
피융!
마법사들은 죽어라 작은 마법만 날린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참다 터지네 ㅋㅋㅋㅋ
-훈수질 ㅋㅋㅋ
-옆에서 뭐하냐고 ㅋㅋ
-ㅅㅂ 나같아도 빡침ㅋㅋ
집중하는데 말 걸면 짜증나는 건 공부할 때나 마법쏠 때나 똑같다.
‘답답하네.’
다만 준일은 답답했다.
스웜 고블린은 이성이 마비돼서 큰 마법 캐스팅을 견제할 줄 모른다.
그래서 큰 마법이 몇 배는 효율적이다.
그때였다.
“마법사들.”
강해일이 자신의 상처를 붕대로 감으면서 팀원들에게 말한다.
“네?”
“이 사람이 스웜 고블린을 상대해봤어. 말 들어.”
김성우가 참다 못해 묻는다.
“아니 씨, 씨발 해일이 형! F등급 판단을 어떻게 믿어요!?”
-ㅆㅂ해일이 형!ㅋㅋㅋㅋ
-ㄹㅇㅋㅋ
-그렇긴 해;
“······흠.”
우두둑.
강해일은 목을 한 번 꺾더니.
다시 싸우기 위해 보호막 밖으로 나가며 말한다.
“그냥.”
“네?”
“그냥 믿어. 별 수 있어? 우린 만나본 적 없잖아.”
“······”
무논리지만, 결과적으로 맞는 판단이었다.
강해일이 저렇게까지 말하자, 김채영은 수용하겠다는 태도.
“큰 마법 쓰라는 거죠?”
“누나!? 진짜 쓰게요?”
김성우가 왜 그러냐는 듯 돌아본다.
그야 캐스팅 길게 하다가 고블린한테 죽어버리는 마법사들을 수도 없이 봤었으니까.
그녀는 으쓱해보일 뿐이다.
“성우는 물 마법 준비해. 큰 마법은 내가 쓸게.”
“하······ 예.”
파지지직!
김채영, 김성우가 캐스팅을 시작한다.
푸른 마법진이 몇 개씩 겹쳐진다.
큰 마법은 캐스팅도 오래 걸리고, 빛도 휘황찬란한 게 마치 자기 좀 때려달라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스웜 상태의 고블린들은 그런 거 모른다.
“크르르륵! 크륵!”
그냥 무조건 앞에 있는 놈을 공격.
강해일과 전인수가 버티는 동안, 김채영, 김성우의 캐스팅이 완료됐고.
“나가요오!”
[아쿠아 밤]
김성우의 물 속성 마법이 쏘아졌다.
강한 수압을 응축한 물폭탄이 전방으로 수십 개 쏘아지며 고블린들을 벌집으로 만들고.
“여기도!”
김채영의 전격 마법.
[체인 라이트닝]
벼락을 여러 번 튕기게 하는, 꽤 강력한 마법이 더해지고.
파지지지지지——!
고블린들이 바싹 구워지며 쓰러져나간다.
콰광!
폭발까지 일어났다.
“······와.”
김채영은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린다.
김성우도 괜히 준일 쪽 눈치를 보며 중얼거린다.
“지, 진짜 큰 마법이 잘 먹히네. 죄송해요. 짐꾼 형. 아까 괜히—”
“쉿.”
준일이 검지를 치켜든다.
“?”
쿵.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왔나.’
준일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잊고 있는 게 하나 있었다.
이 세계가 게임처럼 보인다고 하지만, 진짜 게임은 아니라는 거다.
게임처럼 보스가 경고하고 들어오거나, 아니면 얌전히 보스 방에서 기다리지 않는다.
특히 챔피언 고블린?
안 그래도 영악한 고블린들인데, 그 중의 최강.
“크아아아아아아아!”
쿵! 쿵! 쿵!
발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 녀석이 그냥 정직하게 등장할 리가 없지. 어디지?’
“뭐야? 여, 옆?!”
“옆? 벽인—”
콰과광!
“—데?”
벽이 무너지면서, 순식간에 거대한 신형이 등장했고.
뻑!
“!”
파티원 하나가 챔피언 고블린의 철퇴에 타격당한다.
배트에 맞은 야구공처럼 날아가는 신형.
그것이 반대편 벽에 부딪히며 굉음이 울렸다.
쿵—
‘이런.’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야말로 눈 한 번 깜작할 새.
“서, 성우야······?”
김채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다가가려 했으나.
“안돼.”
턱.
준일이 그녀의 뒤를 잡았다.
“이, 이거 놔! 이거 안 놔?!”
“안돼. 마법사 하나를 더 잃을 순 없어.”
“뭐?”
띠링.
그때, 선고되듯이 이런 알림이 뜬다.
[김성우 (C+) 퇴장]
채영의 눈이 파르르 떨린다.
-ㄷㄷ
-헐
-이게 챔피언 고블린이지~
-와 ㅅㅂ 개무섭다
-ㄷㄷㄷㄷ
-지석진 아웃!
-오우······ 쉣
-엑스트라 퇴장~
김성우는 죽었다.
‘나가면 치맥 먹자고 하니까 죽지.’
수백 번도 더 본 플래그.
준일은 그리 놀랍진 않았지만.
“이, 이럴 수가!”
“흐으윽······! 성우야아아!”
파티원들의 멘탈이 무너지고 있다.
“죽었······어?”
심지어 강해일까지 눈이 흔들린다.
‘이거······.’
우드득.
준일은 잠시 손목을 풀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나서야 할 수도 있어 보였다.
‘막타만 치는 건 안 되겠는데.’
[현재 시청 성좌: 712명]
-시작하냐
-사고슬 보여주는 거?
-진짜 얘가 이걸 잡는다고?
-오 몸 푸는데?
-그냥 막타만 치겠짘ㅋㅋ
31화
짐꾼이 힘을 들킴 (1)
과거 1회차는 물론이고, 2회차 3회차······ 심지어는 7회차까지.
아무리 능숙해져도 율리안이 컨트롤할 수 없는 것들은 늘 존재했고.
“나······ 이 전쟁이 끝나면 돌아가서 여자친구에게 청혼할 거야.”
슥삭!
이런 말을 남긴 자의 목이 어느새 전장의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것은 그에겐 너무나 익숙한 일이 되었다.
‘아내랑 애도 있는 새끼가. 뭔 여자친구한테 청혼을 한다는 거야.’
탁.
율리안은 죽은 전우의 목에 걸려있던 처자식의 그림이 들어간 펜던트를 수거하며 조의를 표했다.
‘또 못 막았네.’
이야기를 진행하다 보면, 죽을 운명을 타고난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마치 어디서 오더를 받은 것처럼 미래에 대한 허무맹랑한 다짐과 희망을 입 밖으로 외치고.
그날 혹은 빠른 시일 내에 생을 마감한다.
하도 이런 걸 많이 보다보니, 율리안은 나중엔 얼굴 생김새만으로도 대충 윤곽을 잡을 수 있었는데.
“안녕하십니까! 율리안 님 파티에 끼게 되어 영광입니다!”
“보아하니. 너 한 3일 가겠다.”
“예?”
“일이 고되거든.”
“아, 아닙니다! 저는 이미 숱한 전쟁도 치렀고······ 이 여정이 끝나면 반드시 돌아가서 사랑하는 제 약혼자 세실리아에게······ 우웁!”
“됐고. 나가. 임마.”
“!?”
입을 틀어막고, 나가라고 윽박질러봐도.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엔 끝끝내 파티로 합류했고, 율리안이 거절한다 해도 따라오다가 화를 당했다.
촤아악!
“커헉! 세실리아······ 겨, 결혼해줘······.”
결국 이 책임은 율리안의 어깨 위로 얹어졌고.
‘에라이.’
이럴 바엔 그냥 흘러오는 운명을 순응하자고 다짐한다.
‘어차피 갈 놈은 가는구나.’
이야기판 안엔 그냥 이런 역할을 하는 녀석들이 존재한다고 납득해버린다.
주인공이 아닌, 조연도 아닌.
이 세상의 곁다리.
엑스트라.
단순히 중심이 아닐 뿐 아니라, 그 중심을 빛내주기 위해 연소되어 재가 되어버리는 존재들.
“서, 성우야아아아!”
흐느끼는 소리로 채영이 아무리 성우를 불러도, 그는 돌아올 수 없다.
판타지 세계라고 하지만, 죽은 인간이 다시 살아 돌아오는 판타지는 없었다.
아니, 있다고 해도 엑스트라가 살아 돌아올 리가 없다.
어차피 모든 게 성좌들의 즐거움을 위한 롤러코스터 같은 거다.
엑스트라의 죽음은 그저 이들의 롤러코스터가 아래로 내리꽂히는 것과 같다.
스릴과 쾌감을 느끼기 위한 장치일 뿐.
그 엄청난 속도의 하강 앞에, 어떤 무게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그냥 유희였다.
무중력, 무책임의 유희.
-지석진 아웃!
-결국 가버리셨네
-사고슬 무시하더니 ㅋㅋㅋㅋ 젤 먼저 가네
-김종국 고블린 존나 쎄네
-치맥 플래그였어? ㄷㄷ
-캬 챔피언 햄 씨다씨
뼈가 서리도록 냉혹한 세계지만.
준일은 이게 익숙했다.
‘오케이. 챔피언 고블린 등장.’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그저 챔피언 고블린과의 전투를 준비할 뿐이다. 그야 이 짓거리도 이미 7번이나 했으니까.
하지만—
“이 개자식이!”
강해일은 아니었다.
그는 무턱대고 챔피언 고블린에 달려들었다.
타다다다닥—
불길이 온몸을 휘감으며 그 자신이 불새가 되어 날아간다.
‘저러면 안 되는데.’
준일은 챔피언 고블린의 위험성을 잘 안다.
고블린답지 않은 엄청난 덩치, 근력, 거기에 고블린스러운 민첩성과 영악함.
스슥!
챔피언 고블린이 뒤로 스텝을 밟았고.
‘피했다.’
콰광!
불주먹이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지만, 아무 타격도 없다.
너무나 가볍게 피해졌다.
이어지는 챔피언 고블린의 반격.
훙!
부릅떠진 해일의 동공 위로 거대한 철퇴가 비친다.
‘설마 저거 맞냐??’
그래도 설마하니 주인공인데 저런 뻔한 반격을 맞을까?
······라는 생각으로 일단은 지켜본 준일은 생각을 고쳐먹어야 했다.
뻐억!
제대로 맞았다.
“커헉!”
강해일이 아니라, 전인수가.
‘이런.’
전인수의 팔이 꺾여나가며 벽에 처박힌다.
쿵!
-ㄷㄷㄷ
-인수좌 ㅠㅠ
-헐
-ㅁㅊ
-설마 전멸 엔딩?
-하······ 또 연중이냐?
‘저걸 왜 맞아줘?’
준일은 이해할 수 없는 전투.
‘내 1회차보다 못한 거 같은데.’
당연했다.
팸이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 않았던가?
완결까지 진행한 것만으로도 넌 이미 상위 1%라고.
준일은 이미 시작부터 상위 1%의 용사적 재능을 갖고 있었으니.
저런 놈들을 보면 이해할 리가 없다.
“인수 님······?!”
강해일의 눈이 초점이 잠시 나갔다.
당황한 게 보인다.
‘상황에 너무 흔들려.’
말수가 별로 없어서 그리 티 나는 성격은 아니지만, 강해일이 전인수한테 상당한 의지를 하고 있었단 걸 준일은 알 수 있었다.
늘 그와 함께 전위를 서니까.
강해일은 크게 숨을 내뱉더니.
“하아······ 하······.”
다시 바닥을 박찬다.
타닥!
철퇴가 꽤 무식하게 큰 무기여서, 그 리치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이다.
이건 좋은 시도였다.
그러나—
‘오. 이런.’
[순보]
슉!
챔피언 고블린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거의 순간 이동에 가까운 속도로 뒤로 신형이 날아갔다.
민첩류 상위 몬스터들이 갖고 있는 이동기다.
‘속도 차이가 너무 나는군.’
강해일의 불주먹은 또 애꿎은 허공에 폭발했다.
펑~!
‘전투 센스 차이가 너무 심해.’
챔피언 고블린은 같은 고블린을 수십 마리 이상 먹어 치우면서 탄생한다.
고블린 전사들 중에 고르고 고른 정예, 그중에서도 고블린 킹의 대전사로 임명된 그야말로 챔피언.
전투에 도가 튼 녀석들이다.
반면 강해일은?
‘주인공을 얼굴로 쳐뽑았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재능이란 없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
방해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죽지 않게 하는 게 우선으로 보인다.
-얜 대체 언제 움직임?ㅋㅋ
-응원단장이냐? 아니, 응원도 안 하네
-사고슬이라며~ 사고슬이라며~
-이게 뭔 사고슬임ㅋㅋㅋㅋ
-자석펫한테 많은 걸 바라지 마
성좌들도 강해일이 죽게 생겼다고 생각한 건지 준일을 은근슬쩍 긁어대고 있다.
‘아직 아니야. 힐이 있으니까.’
개입은 아직이다.
아까 자신의 오른 팔을 회복한 전인수가 강해일에게 힐을 넣어주고.
둘은 다시 자세를 잡는다.
“다시.”
해일은 또 무턱대고 먼저 들어간다.
콰광!
강해일이 달라붙어서 챔피언 고블린과 혈투를 벌인다.
‘철퇴에 몇 번이나 맞았는데. 깡 하나는 미쳤군.’
하나 인정하는 건 강해일의 용기.
아무리 뒤에서 팔라딘이 힐러 역할을 한다지만.
챔피언 고블린의 철퇴에 처맞으면서도 주먹을 내지를 수 있는 놈이 현대인 중 몇이나 될까.
-와 해일이 잘 싸운다
-캬
-상남자 파이팅
-지리네 ㄹㅇ
-이걸 또 파고 들어 ㅋㅋㅋ
-이게 존잘 알파메일 ㄷㄷ
준일은 1회차 때 실수로 너무 빨리 트롤을 마주치고 우당탕 넘어지면서 도망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뭐, 나보다 깡 하나는 더 좋네. 딱 그것만.’
사실 외모도 더 우월하다.
그 점이 제일 눈에 들어오는데.
준일은 애써 무시한다.
열받으니까.
‘아이고 또 맞네?’
뻐억!
강해일이 이번에 철퇴에 제대로 한 대 맞았다.
“해, 해일 오빠!”
뒤에서 마법 시전하던 김채영이 빽 소리친다.
진짜 큰일 났다 싶은 모양이다.
“그만해요!”
강해일은 다시 일어났다.
거의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그의 몸이 불길로 활활 타오른다.
“아직······ 아직 더 할 수 있어······.”
강해일의 모습에 성좌들도 더 격해졌다.
위험하다고 여기는 거다.
-근데 문준일 이 새낀 뭐함?
-얘가 사고슬이라고 믿는 애들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임???
-사고슬 왜 안 움직임?
-통나무 좀 들어라 짐꾼 새끼야
-사고슬이면 이러고 있겠냐고 ㅋㅋㅋㅋ 걍 짐꾼이라니까?
-짐꾼 새끼 채널을 뭐 이리 많이 보는 거야 ㅋㅋㅋㅋ 진짜 다 선동당한 거???
-하ㅠㅠ 사고슬 맞다니까 유입들아?
콰광!
강해일이 다시 챔피언 고블린에게 한 방 먹였고.
‘그래도······ 거의 다 잡아간다.’
챔피언 고블린의 다리가 한 번씩 휘청거린다.
‘이제 슬슬······.’
준일은 이제 때가 왔다고 여겼다.
“후우.”
준일이 심호흡한다.
눈을 감고, 내면의 마나에 집중한다.
[화신 ‘용사 - 율리안’의 전승]
[7.71% 진행 중]
우웅······!
마나의 양.
율리안 시절보다 턱없이 부족하다만.
‘그래도 7%야.’
처음 시작할 때에 비하면 이것도 감지덕지다.
이 정도면 사실 챔피언 고블린 정도는 당연히 상대할 수 있지만.
‘안 들키고, 한 방에.’
지금은 조건이 많이 붙는다.
준일은 여기서 F등급 각성자이며 짐꾼이다.
그 상태로 강해일의 신뢰를 얻어가야 한다.
갑자기 이상할 정도의 힘을 쓸 순 없다.
그러니깐 누구에게도 안 들키고, 순식간에 챔피언 고블린을 처치해야 하는 거다.
‘마족 사이에 숨어들어서 암살할 때 말고는 거의 해본 적 없긴 한데.’
이런 건 경험이 그렇게 많은 준일도 7회차 동안 딱 두 번 진행해 본 방식이다.
암살은 용사의 주특기가 아니니까.
‘구현······ 되겠지?’
다시 떠올려본다.
무투가 토우 역시 자주 쓰던 체술의 기본 이동기.
율리안 시절에는 밥 먹듯 쓰던 기술인데.
막상 이 몸으로 실현하려니 고려할 게 많다.
통, 통—
조금씩 점프를 해보는 준일.
“후.”
아까 챔피언 고블린의 움직임을 떠올린다.
-뭐함?
-애들 죽는데 줄넘기 하냐?
-지금 애들 다 죽겠다 뭐라도 해라 짐꾼 새끼야 ㅠ
-얘가 사고슬일 리가 있냐고 ㅂㅅ들아 ㅋㅋㅋ
-짐꾼한테 뭘 바라누? ㅋㅋ 아직도 사고슬이라고 믿는 호구 없제?
-챔피언 고블린 피 3분의 1정도 남음 ㅠㅠ 제발!
성좌들의 말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호흡과 리듬만 가다듬는 준일.
통, 통—
눈을 감고 자신의 마나를 끌어올리더니.
‘지금.’
어느 순간 눈을 번쩍 뜬다.
“으아아아아아!”
그것이 강해일이 거의 마지막 힘을 짜서 주먹을 내지른 시점.
‘순보.’
쉭!
준일의 신형이 잠시 흩어졌다.
-?
-······?
-응?
-에?
-이거 화면 오류임?
-????
‘마나 펀치.’
쿵.
챔피언 고블린 쪽에서 짧고 묵직한 굉음이 울렸고.
‘순보.’
팟!
준일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바닥에 거칠게 휘저어진 모래 자국만이 흔적으로 남았을 뿐.
“······어?”
“응?”
현장의 누구도 그 속도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잠시 후—
“크르륵?!”
챔피언 고블린이 휘청거린다.
“죽어!”
빈틈을 캐치한 강해일의 불주먹.
콰광!
붉은 불길이 화려하게 터져 나오고.
챔피언 고블린의 육신 균형이 급격히 무너지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쿠웅······!
-?
-응?
-오?!
-엥?
뿌연 분진 사이로 이런 메시지가 보인다.
[보스 처치!]
파티원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주, 죽었어······?!”
“해, 해냈어! 해일 오빠가! 해일 오빠가 결국······!”
혈투 끝에 강해일이 드디어 챔피언 고블린을 잡았다. 그들에겐 그렇게 보였다.
띠링.
[던전 클리어!]
던전이 클리어됐다는 메시지도 떴으니. 이는 완벽하게 끝났다는 선언이다.
“와아아아아아!”
모두가 던전 클리어로 기뻐할 때.
오로지 준일을 시청하고 있던 성좌들만 매우 의아해했다.
-······?
-ㄷㄷㄷ
-봤음?
-헐
-그냥 화면 에러구만 호들갑은ㅋㅋ
-이거 뭐야
-진짜 실화야???
-내가 뭘 본 거지?
-걍 버퍼링임
-난 아예 못 봤는데;
그야 방금의 그 움직임은 준일의 시점에서 밖에 읽히지 않았을 정도로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준일은 성좌들 반응을 보고 오히려 뿌듯해한다.
‘좋았다.’
스틸은 성공적이었다.
손끝의 감각은 확실했다.
챔피언 고블린은 이미 준일의 주먹을 맞은 시점에 죽었다.
즉, 준일이 죽인 거다.
아무도 모르는 완벽한 암살.
띠링.
[기여도에 따라 경험치와 보상이 제공됩니다!]
[기여도 산정중······]
‘응?’
아마 이 메시지만 아니었다면, 완벽한 암살이 맞았을 터.
‘뭐야 이건.’
촤르르르······!
룰렛 돌아가는 소리가 나면서, 기여도를 책정한다.
“당연히 해일 오빠가 1등이겠죠?”
아니었다.
띠링!
[기여도 순위]
==== ====
1. 문준일 (F)
2. 강해일 (S)
3. 전인수 (B+)
4. 김채영 (C+)
5. 탈락
==== ====
1등은 문준일이었다.
‘이······ 이런 기능이 있었어?’
이렇게 다 노출되다니.
이러면 몰래 죽인 의미가 없지않은가?
준일은 당황했지만.
[익명의 성좌님이 30느낌(FL)을 후원했습니다!]
[익명의 성좌님이 5느낌(FL)을 후원했습니다!]
[익명의 성좌님이 10느낌(FL)을 후원했습니다!]
[익명의 성좌님이 10느낌(FL)을 후원했습니다!]
.
.
.
성좌들은 그냥 신났다.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 맞네 이 새끼가 한 거 맞네!!
-뭐지······?
-4호선 고블린 슬레이어라고 하면 답이 됐으려나!? <(_ _)/ 4호선 고블린 슬레이어라고 하면 답이 됐으려나!? <(_ _)/
-헐
-벌레 컽<(_ _)/
-ㅋㅋㅋㅋㅋㅋ짐꾼이 1등ㅋㅋㅋ
-레전드ㅋㅋㅋㅋ
-진짜 그걸 한 거였다고???
-대박······ 내가 뭘 본거지?
-짐꾼이 힘을 숨김ㄷㄷ
-누가 사고슬이 아니라고? 누가 사고슬이 아니라고? 누가 사고슬이 아니라고?
-나여! 사고슬! <(_ _)/
32화
짐꾼이 힘을 들킴 (2)
“헉!? 패, 팸 님! 이거 괜찮은 걸까여?”
햄이 불안에 떨었다.
기여도 계산이 어떤 식으로 되는지는 몰라도.
짐꾼으로 알려진 F등급 문준일이 1등이 되는 계산 방식 따위는 존재하기 어려웠다.
옆에선 팸이 대답 대신 욕을 난사한다.
“이 씨발!? 꺄루루?! 설정을 아주 제멋대로 바꾸는구나!?”
램이 문준일의 신분을 노출하기 위해 이렇게 설정했다는 게 베테랑 요정인 팸의 눈에는 너무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왜 강해일 옆에 붙은 거져!? 이거 너무 위험하지 않나여······.”
햄은 이마를 턱 짚으며 아쉬워한다.
애초에 강해일 파티에 합류한 것 자체가 너무 리스크가 컸다고 여긴 것이다.
“아니. 그건 최고의 전략이야.”
“네?”
그런데 팸은 합류 자체는 최고의 전략이라 평했다.
“햄. 이야기에서 주인공 제외하고 성좌들의 관심을 받기 가장 좋은 포지션이 어디일 거 같은데?”
“그야 메인 조연? 메인 빌런?”
“정확해.”
햄은 갸우뚱했다.
정확해.
그게 끝?
대체 그거랑 지금 율리안의 판단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둘 다라고.”
“잉?”
“못 알아들어? 강해일 입장에서 메인 빌런은 사고슬 사칭하는 가면남. 그리고 조연은 F등급의 짐꾼.”
“앗!”
그랬다.
준일은 주인공 외에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두 가지 포지션 모두를 점유할 생각인 거다.
“율리안은 이 두 포지션에서 강해일의 활약을 다 방해하려는 거야.”
문준일은 내부에서, 사고슬은 외부에서 강해일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무, 무서운 사람.”
햄은 놀랐다.
율리안의 계획이 이렇게 치밀할 줄은.
과연 무려 일곱 번이나 세계의 멸망을 막은 용사다웠다.
차원이 달랐다.
“이건 진짜 강해일 입장에서는 돌아버리겠는데여?”
“응? 아니지.”
“네?”
“강해일이 왜 돌아? 뭘 당하는지도 모를 텐데.”
“그, 그럼······!”
“강해일을 보는 성좌들이 돌아버리지.”
“헉!”
다시 한 번 까무러치는 햄.
강해일은 영원히 뭘 당하는지도 모르고 계속 성좌들만 떨어져나간다니.
“너, 너무 잔인해여······ 어, 어디까지······.”
“잔인?”
꺄루루.
팸은 조소한다.
“잔인한 건 램이지. 율리안이 그동안 개고생하면서 겨우 구매한 아파트를 저렇게 처참하게 깨부쉈잖아?”
그랬다.
율리안이 이토록 잔인한(?) 수법을 쓰면서도 하등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이유.
그건 그가 당한 게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아, 아파트라는 게 그 정도의 진귀한 아티팩트인가여?”
햄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음······ 나도 잘 모르지만, 그 앞에 서울, 한강 같은 게 붙으면 그 가치는 공간을 넘어 시간축까지 초월한다고 해. 그러면 아티팩트가 맞지 않을까?”
“그렇군여? 마나 프리인 블루존에도 아티팩트가 존재한다니······.”
요정들의 머리로 나름 이해해보는 준일의 분노.
물론 그들은 실제 그의 분노의 2할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럴 시간에 이미 아파트 가격은 2할 더 상승했을 테니까.
“어쨌거나 계획이 첫 스텝부터 꼬였네. 이걸 어떻게 해결한담?”
팸은 화면을 다시 집중했다.
율리안이 대놓고 1등을 해버린 상황.
던전 안에 있는 멤버들 모두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글쎄여······ 주, 주인공 버프가 있다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사실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말을 잘하면 넘어갈 수도 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램이 행운 수치를 워낙에 떨어트려놔서··· 가능할까여?”
햄은 불안하다.
팸도 불안한 건 매한가지다.
애초에 깜빵에 갇힌 것도 팸이지 햄이 아니잖은가?
하지만—
“나······ 난 믿어.”
“네?”
“율리안은 해결할 거야. 이 정도는 해결할 수 있는 용사의 능력이거든.”
“용사의 능력으로······ 되나여 이게?”
“용사의 능력이 비단 마왕 목을 치는데 국한된 게 아니야. 거기까지 가려면 꽤 다양한 능력이 필요해. 예를 들면······.”
“?”
“말빨이라던가.”
* * *
[기여도 순위]
==== ====
1. 문준일 (F)
2. 강해일 (S)
3. 전인수 (B+)
4. 김채영 (C+)
5. 탈락
==== ====
기여도 순위가 공개된 후.
준일의 성좌들은 좋아죽었다.
-ㅋㅋㅋㅋㅋ문준일 짐꾼이라던 새끼들 다 어디감???
-해일견들아 정신이 들어!? 해일견들아 정신이 들어!? 해일견들아 정신이 들어!?
-ㅅㅂㅋㅋㅋㅋㅋ 강해일 2등ㅋㅋㅋ
-이게 문준일이고 이게 사고슬이지!
-이래도 사고슬이 아님? 그럼 강해일이 짐꾼한테 진 거임?ㅋㅋㅋㅋ
-속이 뻥~
성좌들이 이렇게까지 신나는 걸 처음 본다 싶을 정도로 신나있지만.
준일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미친. 다 들켰잖아?’
1등이 공개되는 시스템이라니.
“······지, 짐꾼 씨가? 1등?”
“으음? 준일 님이 1등이군요······?”
“······.”
김채영, 전인수, 강해일.
세 명 모두 지금 준일을 보고 있다.
‘뭐라고 하지?’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까?
실수로 막타를 쳤다고 할까?
‘말이 안 되지. 멀리 있었던 걸로 봤을 텐데.’
준일이 순보를 두 번 사용하여 왔다갔지만.
저들이 보기에 준일은 그냥 멀찍이 떨어진 채 서있었다.
그 거리에서 막타를 실수로 쳤다는 건 말이 안 되는 변명.
‘그럼······’
남은 건 일단 이것 뿐이다.
“아, 아니······?! 이, 이거 버그 아니에요? 이럴 리가 없는데······.”
그냥 모르는 척.
준일이 영화 배우 같은 연기는 못할지라도, 실전 사기극은 최상급 실력이다.
용사니까.
대체 왜 용사가 그런 능력을 탑재해야 됐는지는······ 너무 길고 어두운 이야기니까 패스.
‘버그라는 말이 먹히려나?’
하여간 연기하는 건 자신이 있다만.
문제는 논리다.
이 ‘버그’라는 주장이 받아들여질까?
지금까지 인간들에게 이 상태창의 말들은 전부 절대적이었는데.
이제와서 버그?
말이 안 될 거다.
“버그······요? 그, 그럴 리가요. 짐꾼 씨가 뭔가······ 하신 거 아니에요?”
김채영이 마법사답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런 녀석이 하나 섞여 있으면 그냥 어물쩍 넘어가긴 어렵다.
그래서 논리를 하나 준비해놨다.
“기여도.”
일단 지른다.
“네? 기여도?”
이 순간 모두의 반응은 일단 물음표다.
이때 스킬도 가동한다.
[마나 함성]
설득력을 높여주는 마나 함성!
“챔피언 고블린을 누가 죽였냐가 아니라, 기여도라고 쓰여 있잖아요.”
“······그게 그거 아니에요?”
“아니죠. 사실 기여도라는 게 어떻게 책정되는 건지 알 수 없잖아요? 만약 그런 거라면 왜 강해일 씨가 1등이 아닌 거죠?”
“그······ 그렇긴 한데······.”
“그럼 기여도라는 건 더 복합적으로 책정될 겁니다. 예를 들어······ 전략.”
“전략?”
“누가 어떤 전략적 제안을 해서 일이 잘 풀렸다던가.”
“!”
그렇다.
준일은 아예 자신의 기여도에 정당성을 부여해버리려는 것이다.
이게 앞으로 활동하기도 더 편할 것 같아서다.
“준일 씨가 제안을 한 게 기여도에 들어간다구요?”
“그쵸. 제가 아까 스웜 고블린 대처법을 알려드렸고······ 그래서 저희가 한번 다 살지 않았습니까? 어쩌면 그때 바닥이 무너져서 떨어져 죽은 고블린들이 다 제가 죽인 걸로 된 걸 수도 있죠······.”
거짓과 진실을 교묘히 섞으면, 연기하기도 한층 수월하다.
맞는 말이 80이면 거짓이 20.
거기에 더해지는 마나 함성의 설득력 버프까지.
다시 예전 그 용사의 기세가 준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으음······.”
김채영은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이지만, 옆에서 전인수가 끄덕인다.
“일리 있습니다. 무너지면서 죽은 고블린이 상당한 숫자긴 했습니다. 갑자기 무너지면서 다 죽었죠. 앞뒤 진형을 바꾸자고 한 것도 준일 씨였구요.”
“흐으으음.”
채영은 조금 설득된 듯했으나, 여전히 의아함을 떨치진 못한다.
‘진짜는 챔피언 고블린이었는데. 그땐 아무것도 안 했잖아?’
그녀에게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온 시련은 사실 고블린 스웜이 아니라 챔피언 고블린의 등장이었다.
‘그때 성우도······.’
팀원 김성우도 죽었잖은가?
“제 생각엔······.”
이 논쟁이 좀 더 길어지려 할 때.
강해일이 끼어든다.
“맞는 말 같다.”
“······네?”
채영이 놀라서 되묻는다.
눈앞에서 1등을 뺏긴 강해일 만큼은 못 받아들일 줄 알았던 것이다.
“그쪽이 스웜 고블린들 습성을 몰랐으면 마법사들이 큰 마법도 안 썼을 거고, 진형 안 바꿨으면 숫자에 밀려 다 죽었을 거야. 기여도가 높은 게 맞다.”
큰 마법 언급에 채영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러고 보니 그때 짐꾼의 말에 따르지 않으려 했는데, 알고 보니 짐꾼 말이 맞지 않았던가?
“그, 그렇네요.”
자신이 잘못한 부분이 지적당하자, 채영도 결국 납득한다.
강해일이 결국 논란을 정리한 것.
-ㅁㅊ 강해일 ㅋㅋㅋ 개트롤이네
-강해일 방 오열 ㅋㅋㅋ
-해일견들 또 답답해서 넘어올듯ㅋㅋㅋ
-근데 ㄹㅇ인데? 사고슬 오더만으로도 기여도 높긴 함. 얘 없었으면 다 뒤짐.
-근데 저쪽 방 애들 얘가 막타친 거 애초에 모를듯?ㅋㅋㅋ 오열할 거도 없음
‘휴.’
준일은 가슴을 쓸어내린다.
‘됐다.’
이정도면 잘 넘어간 것 같다.
기여도로 설득해서 앞으로 문제가 또 생겨도 비슷하게 넘어갈 수 있을 거다.
띠링.
[기여도에 따라 보상을 지급합니다.]
마치 던전 참가자들이 서로의 성적에 납득하길 기다렸다는 듯.
이제야 이런 메시지가 떠오른다.
보상은 랭킹이 낮은 순으로 지급되었는데.
“어?”
펑!
우선 김채영 머리 위에서 축포 같은 게 쏘아졌다.
“와. 경험치예요. 저 드디어 레벨 10이네요.”
4등인 그녀는 대량의 경험치만을 받았고.
다음은 3등 전인수.
퍼엉!
“저도 레벨 10됐네요. 그리고······ 이게 뭐지?”
3등은 대량의 경험치와 소량의 보석 같은 게 손에 떨어졌다.
‘마정석이네.’
준일은 뭔지 알아봤지만 이들은 알 수 없었다.
“보석을 주네요?”
나중에 쓸 데가 생기면 알게 될 터다.
펑!
다음은 강해일.
그에게도 경험치, 마정석이 부여됐고 추가로 아이템이 하나 떨어졌다.
찰랑.
목걸이다.
‘저건······’
준일은 아는 물건이었다.
‘챔피언의 심장.’
목걸이의 이름은 챔피언의 심장.
‘참내. 아이템 같은 것도 똑같이 돌려 쓰는 거냐?’
챔피언의 심장.
착용자의 스태미나, 지구력을 꽤 많이 높여준다.
쉽게 말해서 유산소를 잘하게 된다는 거다.
실전에선 지구력 싸움으로 가는 경우가 많으니, 꽤 도움이 될 거다.
이로써 강해일은 더 강해진 셈.
‘뭐, 상관없지.’
준일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네가 어느 정도 강해야 나도 사니까.’
강해일은 강해지는 것보다 약해지는게 더 문제였다.
전세계의 문제.
‘나도 온다.’
이제 준일에게도 보상이 들어온다.
펑!
[레벨업!]
일단 대량의 경험치.
-와 드디어
-ㅠㅠㅠ
-이제 레벨 10이구나 ㅠㅠ
-캬
-와······
-자수성가의 아이콘 사고슬
-드디어 ㅅㅂ ㅋㅋㅋ
[Lv.9 —> Lv.10]
드디어 레벨 10을 달성했고.
이어서 마정석이 떨어졌다.
전인수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마정석이 주머니로 떨어졌으니까.
쿵.
“와······ 대박.”
옆에서 보던 채영마저 감탄했으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준일에게도 아이템 보상이 주어졌다.
팅!
그의 손에 검보라빛의 반지가 하나 떨어진다.
“!”
준일은 이 반지를 알아봤다.
[그래비티 링]
‘램······ 이 미친놈······’
입꼬리가 절로 씰룩인다.
‘이렇게 좋은 걸 주려 했어?’
==== =====
등급: 영웅
유형: 액세서리
설명: 착용자가 중력 마법을 배울 수 있게 해주는 반지다. 고대의 리치가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래비티 필드: 지정한 지역에 강력한 중력장을 생성하여 적들을 한곳에 모아 무겁게 짓누른다. 재사용 대기 시간 2시간.
==== ====
영웅 등급의 아이템이었다.
-캬
-영웅 등급 ㄷㄷ
-와 지리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
-중력 마법 저거 좋은데?
-크
-영웅? ㅋㅋㅋ 헐 ㅋㅋ
까탈스런 성좌들도 만족하는 보상.
그런데 아이템 보상은 2등도 받지 않았던가?
다음 등수는 전 등수가 받지 못한 종류의 보상이 하나씩 추가됐었다.
1등도 마찬가지다.
펑!
무언가 하나 더 떨어진다.
‘어?’
33화
짐꾼이 힘을 들킴 (3)
마지막으로 떨어진 보상.
그건 스크롤이었다.
[무투가의 비전서]
==== ====
등급: 영웅
종류: 스크롤
설명: 이 스크롤을 찢은 자에게 스킬 ‘순보’가 습득됩니다.
*순보: 이는 무투가들의 체술로, 순식간에 짧은 거리를 빠르게 이동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15초.
==== ====
‘뭐야. 이거.’
준일의 표정이 굳었다.
‘나한텐 아무 의미도 없는 거네.’
이로써 확실하게 알게 됐다.
여기서 스킬이라고 부여해주는 것.
전부 본래는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기술들을, 손쉽게 탑재시켜주는 것에 불과했다.
‘심지어 뭔 쿨타임도 있네.’
준일이 스스로 몸의 마나를 배열하여 쓰는 순보는 쿨타임이고 뭐고 그런 제약 같은 게 없는 데 반해, 이 스크롤엔 쿨타임도 표기되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냥 머리에 든 게 아무것도 없어도 쓰고 싶다고 생각만 하면 써지니, 일종의 게임처럼 패널티를 부여하는 것이다.
‘설마 이걸 쓰면 멀쩡히 쓸 수 있는 순보에 15초 대기 시간 패널티가 붙나?’
이걸 습득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준일은 심각히 고민되었다.
잘못하다간 그가 자유롭게 쓰는 기술마저 이상해질지도 모르잖은가?
-표정 왜이럼?ㅋㅋ
-ㄹㅇㅋㅋㅋㅋㅋ
-순보 좋은데???
-ㅈ사기 같은데
-근데 준일이 이미 이거 쓴 거 아니냐?
“뭐예요······? 별로 안 좋은 거예요?”
준일의 표정이 굳은 걸 눈치 챈 채영이 옆에서 묻는다.
“아, 아뇨. 하하······ 스킬 스크롤인데. 짐꾼한테 이런 게 있어 봐야 뭐하나요.”
“네? 왜요? 짐꾼이니까 오히려 스킬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짐칸 스킬 말고는 아무것도······.”
-ㅋㅋㅋㅋㅋㅋㅋㄹㅇ
-해석) 짐꾼 주제에 뭘 가리냐고~
-짐칸 ㅇㅈㄹ ㅁㅊㅋㅋㅋ
-짐칸이 아니라 인벤토리라고 ㅋㅋㅋ
-엌ㅋㅋㅋ
-ㅈ도 없는 놈이 뭘 따져
“저기······.”
전인수가 채영의 말을 끊었다.
“저희 모두 얼른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성우 군 시신도 잘 보내줘야 하니까요······.”
“······!”
그랬다.
사상자가 있었다.
채영의 표정이 순식간에 다시 어두워진다.
* * *
시체 수거.
이는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대학원 조교를 하거나 교회 목사를 하던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 맙소사······.”
전인수는 자기가 힘이 제일 셀 거라며 앞서 김성우의 시신을 들려 했지만.
힘의 문제가 아니었다.
“흐으.”
고블린의 시체를 보는 것과 인간의 시체를 보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이건 S급인 강해일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아니, 그는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죽은 사람을 쉽게 쳐다보지도 못한다.
-해일이 멘탈 괜찮냐?
-쟤 약간 이런 거 민감하던데
-ㅉㅉ 이래서 이거 얼마나 갈까 싶네
성좌들도 강해일에 대해 걱정한다.
멘탈이 그리 단단한 편은 아닌 모양이라고.
-근데 이 새키는 ㄹㅇ 뭐하는놈임?
-얘는 이 와중에 파밍 중ㅋㅋㅋㅋㅅㅂㅋㅋㅋ
-진짜 또라이네 이거 ㅋㅋㅋㅋ
-사고슬 = 사이코 고블린 슬레이어
한편 준일은 성우의 시체가 아니라 챔피언 고블린 시체로 가 있었는데.
챔피언 고블린이 들고 있던 무거운 철퇴, 투구, 갑옷, 심지어는 장식품까지 전부 인벤토리로 넣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너.”
강해일이 보다 못해 한마디 하는데.
“아니, 이게 제 일이지 않습니까? 나중에 이거 다 환전해서 나눠드릴게요.”
“······그게 정말 돈이 될 거라 생각하는 건가.”
“게임에선 그렇잖아요? 지금 다 게임처럼 된 거 안 보여요?”
문준일은 램의 세계관은 처음임에도, 상당히 빠른 적응력을 보였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이런 짓거리를 한 번이라도 겪어본 사람과 아닌 사람 차이도 엄청날 텐데.
준일은 무려 일곱 번이나 겪지 않았던가?
“하······.”
강해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이 흘끔 김성우의 시신 쪽으로 향한다.
‘강해일 이 자식, 설마 나더러 해달라는 거야?’
왠지 강해일은 준일에게 저걸 좀 도우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준일은 그제야 시신 처리하겠다고 쩔쩔매는 두 사람을 돌아봤는데.
‘하. 가관이네.’
거의 뭐 건드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저것도 제가 할까요?”
“······!”
강해일의 눈이 번쩍 뜨인다.
표정이 참 알기 쉬운 놈이다.
이런 점이 소년 같은 거다.
“할 수 있겠어?”
“어차피 제가 짐꾼이니까······ 시신도 제 인벤토리로 넣어보죠.”
“······인벤토리로?”
-ㅁㅊㅋㅋㅋㅋ
-시신 인벤토리행ㅋㅋㅋ
-경악 ㅋㅋㅋ
-표정 ㅋㅋ
“별 수 있어요?”
“······그, 그래.”
던전 몬스터들 상대로는 그리 용기백배에 깡패 같다고까지 생각되던 사람이 시신 앞에서는 말도 더듬는다.
‘뭐가 있긴 있군.’
준일은 그렇게 생각하며 챔피언 고블린이 남긴 마지막 아이템을 인벤토리로 넣고 전인수와 김채영에게 다가간다.
“자, 비켜보세요. 여러분. 제가 할게요.”
“······네? 아니에요. 제, 제가 할게요.”
“지금 거의······ 15분째 가만히 두고 있잖아요.”
준일이 시계를 체크하며 말한다.
“그, 그야······.”
김채영이 시선을 떨군다.
김성우의 시신은 그냥 깔끔하게 죽은 게 아니다.
철퇴에 얻어맞아 죽었다.
그 상태를 차마 입으로조차 설명하기 어렵다.
“흐이차.”
그런데 준일은 가볍게 그 시신을 들어올리더니.
인벤토리로 처넣어버린다.
퉁.
“!?”
“!”
그 충격적인 광경에 두 사람이 모두 얼어붙었다.
“······아, 이거 이미 강해일 씨하고 얘기 끝났어요. 한 번 넣어봤는데. 들어가네요? 원래 살아있는 건 안 들어가던데.”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존나 킬러같잖아 이새키야 ㅋㅋㅋㅋ
-이 미친ㅋㅋㅋㅋ
-아니 어디서 무슨 사람 몇 백은 죽여본 사람 같네······
-ㄷㄷㄷㄷ
준일은 미쳐 의식하지 못했지만, 방금 그의 행동은 일반인들의 눈에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뭐야. 좀 이상했나?’
그가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고 해도, 이런 문화적 괴리까지 채울 순 없었다.
이런 건 의도한 게 아니니까.
‘중세에선 당연한 건데.’
이쪽은 현대인, 준일은 사실상 중세인.
그것도 전장터만 누벼온 중세인이니.
겉으로만 똑같은 한국인이지, 사실 속은 이미 완전히 다른 존재다.
“저······ 다시 꺼낼 수 있는 건 맞죠?”
“아, 그럼요. 다른 아이템에 피 안 묻으니까. 걱정 마시고. 나가죠.”
“그,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
김채영이 참다못해 목소리를 높였다만.
“아······ 아니······ 죄송해요.”
그녀는 이내 사과한다.
뭐가 문제냐는 듯 돌아보는 준일의 눈에서 이미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차피 난 손도 못 댔잖아.’
그녀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피 안 묻는데 ㅁㅊㅋㅋㅋㅋㅋㅋ
-앜ㅋㅋㅋㅋㅋ
-피 안 붙어요~ 거의 뭐 중고차 딜러급인데?ㅋㅋ
-얘는 어디 나사 하나 빠진 놈이네 ㄹㅇ
-강해일 당황 중ㅋㅋ
-짐꾼······ 있어야겠지?
* * *
던전 밖.
놀랍게도 사람들 몇몇이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기자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S등급의 강해일 씨죠? 혹시 여기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오시는 겁니까?”
곧장 마이크를 들이대는 한 사람.
“어떻게······.”
강해일은 자신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는데.
“던전 밖에서도 참여자 명단을 볼 수 있었거든요!”
다른 각성자들이 던전에 들어오려다가, 꽉 찼다는 걸 알게 됐고.
목록을 보고 S등급이 던전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퍼졌던 모양이다.
“와 S급이래.”
“미쳤다.”
“저 사람이야? 헐······ 딱 봐도 뭔가 달라보여.”
웅성거리는 사람들.
‘허······ 망할.’
준일은 이런 식으로 또 사람들에게 노출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다행히 사람들은 F등급 문준일이라는 인간에게는 단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강해일 씨? 정부에서 국가 통제하에 헌터 시스템을 만들 거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던전 안에는 뭐가 있었나요? 커뮤니티에 올라왔던 사진이 진짜였습니까?”
전부 강해일.
그 하나만을 향해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처음으로 발견된 S등급 각성자니까.
아, 물론 F등급도 처음 발견된 것일 텐데.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혹시 어떤 각성 스킬을 받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고블린을 몇 마리나 잡으셨나요!?”
“사고슬이라는 분과 만난 적 있으신가요? 둘이 싸우면 누가 더 센가요?!”
-누가 더 센가요 ㅇㅈㄹㅋㅋ
-ㅁㅊ 기레기들ㅋㅋㅋㅋ
-엌ㅋㅋㅋㅋㅋ
터억—
강해일이 카메라를 밀어낸다.
“대답할 상황이 아닙니다. 이 안에서 같이 싸우던 사람 하나가 죽었어요.”
그의 한 마디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주, 죽었다고?”
“진짜?”
“S급이 있는데도?”
“죽은 거 F급인가?”
“F급은 솔직히 죽어도 돼.”
웅성웅성.
던전 안에서 사상자가 있었다는 건 생각지 못했는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한다.
S등급 잠재력이라면 압도적인 힘으로 쉽게 클리어할 거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나 현실은 잠재력은 잠재력일 뿐.
“시신을 인도해야 하니까. 비켜주시죠.”
“시신은 어디 있습니까? 누구입니까?”
“······.”
기어코 또 질문을 하는 기자를 강해일이 무섭도록 노려본다.
“그건 우리 파티 짐꾼에게 있고. 누군지는 안 알려줄 거니까. 길이나 비켜.”
“지, 짐꾼?”
다들 짐꾼이라는 말에 두리번거린다.
어디에도 엄청난 양의 짐을 들고 다니는 사람 같은 건 없었으니까.
-우리 파티?
-우리······ 라고 해줬다······
-ㅋㅋㅋㅋㅋ짐꾼ㅋㅋ
-우리래 ㅠㅠ
* * *
김성우의 시신은 장례식장 측에서 파견된 인원이 와 수거해갔다.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은 김성우의 시신 상태를 보고는 대성통곡했다.
그중 어머니가 다가왔다.
“고······ 고마워요. 하, 학생이 그래도 시신을 끌고 와줬다고 들었어요······ 그런 능력이 있다고······ 참 고마워요.”
준일의 두 손을 잡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아, 네······.”
준일은 별말을 하지 못했다.
「율리안님. 저, 정말 감사합니다.」
「요······ 용사님. 덕분에! 덕분에 마을이 다시 살아났어요 흐으윽······! 감사합니다!」
과거 시절이 생각났다.
그래, 이런 일 꽤나 흔했다.
별 감흥 없다.
분명 그래야 할 텐데.
‘참내.’
준일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죽음 자체는 익숙하지만, 그 뒤의 일은 아닌 걸까?
‘얼른 가자. 졸리다.’
준일은 이제 자리를 떠야겠다 느낀다.
이런 자리 불편하기도 하고, 슬슬 피곤이 몰려와 졸린다.
인사를 위해 강해일 쪽으로 다가갔다.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이템 처리 방법은 알아보고 연락드릴게요.”
“······그거 그냥 가져.”
“예?”
강해일이 귀찮다는 듯 손짓한다.
“가지라고. 기여도도 1등이잖아. 당신.”
강해일 말고 다른 팀원들도 모두 동의하는 듯 끄덕인다.
“예. 오늘 준일 님 아니었으면 다 죽었을 겁니다.”
“네. 가지세요. 짐꾼 씨.”
준일은 조금 당황했다.
그냥 가지라고 할 줄은 몰랐다.
‘이거 마정석으로 환산하면 꽤 될 텐데.’
아마 가치를 몰라서 저렇게 말하는 것이다.
강해일의 성좌들 아우성치는 소리가 벌써 여기까지 들린다.
-아오 ㅅㅂ 해일이 형!
-호구짓하네 또 ㅋㅋㅋ
-이새키 쓰레기라고 ㅠㅠㅠ
-야 병신아!
‘아마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겠지.’
1회차 때 율리안도 이랬을까?
이렇게 호구 같았나?
‘근데······’
그 호구 같은 거.
받는 사람 입장에선 별로 나쁘지 않았다.
이런 느낌이었나.
그때의 동료들은.
‘이걸 그냥 받긴 좀 그런데.’
준일은 잠시 고민하다가 인벤토리로 손을 넣는다.
“알겠어요.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시죠.”
스크롤이었다.
“이건······ 1등 보상이잖아. 왜 날 줘? 안 가져.”
“에이. 짐꾼이 이런 거 있어 봐야 뭐하겠습니까? 넣어 두시죠.”
강해일에게 다시 쥐여주는 스크롤.
-뭔 뇌물이냐곸ㅋㅋ
-대인배 ㄷㄷ
-이걸?
-팩트) 원래 강해일이 가졌어야 하는 걸 주는 거다.
-이걸 왜 줌?
-보스 막타 쳐서 스틸하고 세탁기 돌리누 ㅋㅋㅋ
-엥?
-훈훈하네여ㅠㅠ
-도둑질한 물건으로 생색 ㅋㅋㅋ
“안 갖는다니까.”
“아오! 씨······ 해일이 형! 전 필요 없다니까요!?”
“깜짝이야······ 소, 소리는 왜 질러?”
이 스크롤은 진짜 필요 없었다.
순보 스킬 이미 쓸 줄 아는 거, 스크롤로 배워봐야 쿨타임만 생기게 되는 거다.
그럴 바엔 강해일과 신뢰를 쌓는 게 더 중요했다.
기브 앤 테이크는 인간 관계의 기본.
그것조차 안 된다면 신뢰를 얻는 건 어림도 없다.
무엇보다—
‘어디서 갑자기 뒤지지 말고 그냥 좀 쓰라고.’
강해일의 오늘 상태를 보니 도주기 하나는 있어야 될 것 같았다.
그러니 준일은 그에게 억지로 떠넘기듯 주고 자리를 떠났다.
“그럼 전 갑니다!”
우다다다!
준일이 도망치듯이 자리를 떠난 후.
강해일은 스크롤을 펼쳐봤다.
“순보······.”
확실히 무투가 스타일로 싸우는 그에게 엄청나게 도움 될 만한 스킬이다.
“괜찮은데.”
찌익.
그는 스크롤을 찢으며 떠나는 짐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짐꾼 클래스 말이야, 생각보다 좋지않아?”
역시 F등급 같은 건 숫자에 불과하다니까.
강해일이 덧붙인다.
“하, 하하하······.”
“으음······ 그 정도인가······.”
나머지 파티원들은 그리 공감하는 눈치는 아니다.
어찌 됐든 해일은 조금은 준일을 신뢰하게 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런 메시지가 준일에게 뜨는 거다.
빠밤!
[히든 퀘스트 완료!]
34화
프리 챕터 (1)
준일은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순보 스크롤을 넘기는 결정을 내렸다.
첫 번째는 강해일의 생존.
강해일은 현재 준일보다 화력이 몇 배는 센 것 같지만 전투 스타일이 너무 투박했다.
이러다간 언제 죽어서 이야기가 반으로 접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도망칠 때 쓰라고 내준 것.
둘째로는 강해일과 신뢰를 쌓기 위해서다.
그래야 성좌 수도 상승시키고, 붙어서 강해일도 방해할 수 있지 않겠나?
셋째로는 그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어서.
이렇게 분명한 근거로 움직였으나.
“후우.”
준일은 스크롤을 주고 돌아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욕 좀 처먹겠네.’
그는 성좌들의 채팅이 폭발할 거라고 생각했다.
성좌들의 대부분이 남에게 베풀었다가 배신당하는 걸 절대 참지 못한다.
하지만 배신당할지 안 당할지는 성좌들도 모르고.
그렇기에 애초에 쓸데없이 베푸는 걸 혐오해버린다.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그런데—
-그래도 하나는 해일이 주네 ㅋㅋㅋ 양심은 있네
-지가 스틸한 걸로 생색내기 레전드 ㅋㅋ
-이게 사고슬!? 이게 사고슬!?
-정의의 사도 사고슬 ㄷㄷ
이상하게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빠밤!
[히든 퀘스트 완료!]
==== ====
목표: 강해일 친밀도 상승
보상: 500느낌(FL), 랜덤 아이템 박스.
==== ====
히든 퀘스트가 완료되었다.
그러니까······ 히든 퀘스트가 애초에 강해일과 친해지기였던 거고.
강해일에게 스크롤을 주는 걸 보고 좋아서 누군가 후원까지 해준 것이다.
‘뭐야 이게?’
말이 되나?
내가 알던 그 자식들이 맞는 건가?
그 사이 가치관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준일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와
-ㅊㅊㅊㅊ
-와 미쳤다
-크
-행님~
-해일이랑 친해지기 ㅋㅋㅋ
-해일이 방에서 오셨나보네
-캬
-사고슬이 사실 진정한 강해일 충신임 ㄹㅇㅋㅋ
지금까지 겪어온 성좌들의 반응과는 너무 달랐다.
‘그건가······’
채팅을 쭉 읽던 중 준일은 이유를 깨닫는다.
-솔직히 얘만큼 도움 되는 애가 어딨냐고 ㅋㅋㅋ 흑마법사 치워줘, 챔피언 고블린 치워줘, 스킬 스크롤도 주고 ㅋㅋ 짐도 들어줘 ㅅㅂ 걍 고트임.
율리안이던 시절과 현재의 상황은 전혀 반대였던 거다.
‘그렇구나. 난 조연이고······ 주인공은 강해일.’
지금 성좌들이 보는 상황은 주인공인 강해일에게 이득이 되는 조연의 등장이지.
주인공이 누구에게 퍼주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가 된 거야.’
이 세계의 중심은 주인공.
강해일이다.
그가 받으면 ‘+’고.
그가 잃으면 ‘-’다.
그런 게 바로 이야기 판이다.
역설적으로 준일은 오히려 방금 스크롤을 줌으로써 이득이 된 셈이다.
‘흠······ 이거 뭔가 열받네.’
일이 나름 잘 풀린 것이지만, 준일은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자리를 빼앗긴 것 같은 서운함이 가슴 한켠을 때렸다.
‘이제 내가 주인공 아니라 이거지?’
약 30년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살아왔던 인생이 마냥 고달프지만은 않았기에.
시원섭섭한 것이다.
‘됐어.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길을 걷는데.
퉁!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선물 박스.
이게 아마 그 히든 퀘스트 보상이다.
“와. 뭐지? 좋은 일을 하니 복이 오나?”
준일은 최대한 열심히 연기한다.
히든 퀘스트의 존재는 성좌들이 알아선 안 되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깜놀
-놀라겠다 ㅋㅋㅋ
-주는 방식 레전듴ㅋㅋ
-좋은 일 = 보스 막타 스틸
-이걸 이렇게 그냥 주는 거야?ㅋㅋㅋ
-돈 좀 쓰셨겠는데 ㄷㄷ
다행히 준일이 놀란 거로 생각해주는 성좌들.
‘열어볼까.’
준일은 상자를 주워 연다.
[랜덤 박스를 개봉합니다!]
촤르르르르!
랜덤 박스에서 룰렛이 나와 돌아가기 시작하는데.
S, A, B, C 등······
등급이 보인다.
‘아······ 근데 이거면······’
펑.
시커먼 연기가 퍼지더니.
[꽝]
꽝이 나와버렸다.
-?
-???
-······?
-ㅔ?
-뭐야 이게
어이없을 정도의 악운.
그러나 준일은 예상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 마주친 똥 변기의 개수를 생각해보라.
이 정도의 작위적인 악연은 분명 무슨 조작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했다.
-헐 돈 날렸네ㅠㅠ 미친 ㅠㅠ
후원한 성좌의 말 같았다.
준일도 참 안타깝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램한테 따지세요.’
준일은 그렇게 생각하며 상자를 발로 뻥 찬다.
“에라이. 그냥 길 가다 주운 게 뭐 그렇지.”
-얘는 그렇게 생각하겠네
-ㅋㅋㅋㅋㅋ그건 그래
-아니 얘한테 유독 억까가 심함 ㅠ
-뭐지······ 저거 꽝은 확률 개낮은데
-F인데 박스도 꽝이냐 ㅠ
-코인도 있어 ㅠㅠㅠㅠ
-근데 코인은 얘가 아니라 그냥 회사한테 가는 거 아님?ㅋㅋㅋ
하지만 후원은 랜덤 박스가 끝이 아니었다.
띠링.
[500 느낌(FL)을 얻었습니다!]
이야기 화폐도 얻었다.
이건 본래 준일에게 쓸모가 없는 돈이지만, 햄이 만들어준 상점에서 쓸 수 있었다.
띠링.
마침 알림이 뜬다.
[어디서든 언제든지 상점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습니다!]
[비용: 500느낌(FL)]
[진행하시겠습니까?]
‘업그레이드?’
후원 덕에 돈이 좀 생겨서 상점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모양이다.
‘보류.’
준일은 일단 사용을 보류한다.
-코인 후원은 준일이 보이지도 않을 텐데 ㅠㅠ
이 채팅에 따르면, 이야기 화폐는 준일에게 보이면 안 되는 거다.
성좌들이 보고 있는데 저 화폐에 반응할 수도, 사용할 수도 없었다.
* * *
집으로 돌아온 준일.
그는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침대에 앉아 주문을 외웠다.
“짜루루 짜루루 짜파구리.”
펑!
그러자 정말 그 라면처럼 오동통한 녀석이 등장했다.
“부르셨나여?”
“응. 왜냐면 상점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는데. 혼자하면 티 날까봐.”
“아······! 현명하세여! 그나저나 벌써 업그레이드 비용이 모이셨어여!? 500느낌이 그렇게 쉽게 모일 수 없는데······.”
느낌이란 성좌들이 지켜보는 것만으로 조금씩 모이게 되는 화폐이긴 하지만.
그래도 1천도 안되는 성좌로 벌써 500느낌을 넘게 모으기는 무리였다.
“히익!? 모, 모으셨네여!? 무려 700느낌 이상을!”
“어. 뭐, 어쩌다 보니까.”
준일은 누군가 후원해줬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야기 요정들에게도 그가 성좌들의 반응을 볼 수 있다는 건 비밀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거 업그레이드하는 게 좋은 거 맞지?”
“그, 그럼여! 애초에 저희 선에서 사용하지 않으면 이거 다~! 램한테 가는 거예여!”
“그렇군.”
결국 이야기판의 주인은 램.
여기서 만들어진 이야기 코인은 전부 그 녀석이 가져가게 되어있다.
그래서 햄과 팸이 중간에 이렇게 가로채는 시스템을 만들어낸 거다.
“그럼 할게.”
짤랑!
[상점이 Lv.2로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Lv.2 아이템에 접근 가능해졌습니다.]
온통 음악 파일만 있던 목록이 바뀌었다.
==== ====
우스꽝스런 BGM: 10 느낌(FL)
으스스한 BGM: 10 느낌(FL)
신나는 BGM: 10 느낌(FL)
.
.
.
봄 꽃 샤랄라 이팩트: 10 느낌(FL)
첫사랑 필터 이팩트: 10 느낌(FL)
스포트라이트 이팩트: 10 느낌(FL)
뮤직뱅크 카메라 이팩트: 15 느낌(FL)
.
.
.
[1/2]
==== ====
“······미친. 이게 뭐야. 뭔 카메라 감독이냐? 어?”
준일은 곧장 햄의 멱살을 잡았다.
“아, 아니 왜여!? 잘 쓰시면 성좌들의 반응이 엄청 좋아여! 트, 특히 뮤직뱅크 카메라 이팩트는 이 차원을 시청하시는 성좌님들의 수요에 맞게 특별히 제작된 이펙트인데여! 진짜 개못싸워도 엄청 잘 싸우는 것처럼······ 우웁!”
준일은 햄을 붙잡아 그대로 인벤토리에 넣어버렸다.
“우우웁!? 우웁!!”
퉤!
인벤토리는 당연히 햄을 다시 뱉어냈지만.
“아, 아니! 말을 끝까지 들어주세여! 그리구! 이펙트가 다가 아니에여! 다음 페이지를 넘기시라구여!”
“페이지?”
그러고 보니 페이지가 있었다.
[1/2]
이렇게.
준일이 거기로 손을 대자.
[2/2]
2페이지로 넘어갔다.
==== ====
서술 트릭 방탄 코트: 550 느낌(FL)
서술 트릭 야간투시경: 200 느낌(FL)
서술 트릭 환도: 1 마음(HT)
.
.
.
[2/2]
==== ====
“서술 트릭······?”
BGM 이펙트 시리즈에서 서술 트릭 시리즈로 넘어갔다.
“네. 서술 트릭. 말 그대로 현재 일어나는 일 대신 다르게 서술되는 걸 말하죠. 저 아이템들은 성좌님들에게도 안 보이구여. 적에게도 인지되지 않아여. 율리안 님이 착용한 줄도 모를 거예여! 꽤 인기 있는 시리즈입니다!”
이런 게 있었다니.
진작 말하지!
“그럼 저기 환도? 저거 칼이지?”
준일의 호기심은 곧장 무기로 향했다.
“네. 동양식 칼이에여. 본토 특색에 맞게 나온 거 같아여.”
“저것도 남한테 안 보인다고?”
“네 그런 능력이 있을 거예여.”
혼자서 1 마음이길래 뭔가 했더니.
비싼 이유가 있었다.
안 보이는 검이라니.
심지어 성좌한테도 안 보인다니.
‘최고잖아?’
이건 용사 시절에도 없던 아이템 아닌가.
준일은 처음으로 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 이제야 좀 치트 같네.”
왜 햄이 이 상점 연결이 치트라고 한 건지 알겠다.
사실상 등장인물이 써서는 안 되는 것들이 들어있는 것이다.
“헤헤······ 그쳐? 저는 방탄 코트부터 추천드려여. 무게도 안 나가고 말 그대로 그냥 목숨 하나 더 있는······ 우웁!”
얌전히 머리를 쓰다듬던 준일은 갑자기 그녀의 얼굴을 쥐어버리더니.
슝.
인벤토리 속으로 내던져버렸다.
물론 인벤토리는 그녀를 다시 뱉는다.
퉤!
“아, 아니 대체 왜 그러세여!”
햄은 억울하다는 듯 소리치는데.
푸하핫.
준일이 햄의 표정을 보고 빵 터져 웃는다.
“그냥 인벤토리 테스트해봤어. 잘 되네. 이만 가보라고.”
“참내! 그렇게 살지 마세여! 용사님!”
햄은 하나도 안 무서운 성질을 박박내며 사라졌다.
펑!
-?
-아 버퍼링 머임
-어 된다
-약간 버퍼링 있네······
성좌들은 햄이 왔다 간 것을 약간의 버퍼링으로 인지했고.
‘아······ 졸려.’
오늘 너무 오래 활동한 준일은 잠에 들어버렸다.
털썩.
-아니 잔다고?
-아······ 방종이네
-잘 때 되긴 했어~
-잘 자라
-수고요~
-ㅂㅂ
* * *
한 편, 페어리 주식회사.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늘 그렇듯 거기선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야 램이 자신의 양 볼을 잡고 절규하고 있으니까.
“왜! 왜······!? 어째서!?”
램은 몇 번이고 챔피언 고블린 스틸 장면을 돌려보고 있었다.
거의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챔피언 고블린을 타격하고 뒤로 빠지다니.
이야기 요정이 아닌, 그저 이제 막 각성자가 됐을 뿐인 범부들은 눈 뜨고 보고도 인지조차 못 할 만했다.
“아, 아무리 봐도 모르겠어. 이거 순보······ 아냐?”
촤르르륵.
램은 페어리 주식회사의 설정 메뉴얼집을 살펴본다.
거기에 체술 파트에 나오는 순보와 정확히 일치하는 기술.
“말도 안 돼.”
이해할 수 없었다.
순보는 스킬 시스템 없이 순수하게 익히려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서 수련해야 하는 체술 보법인데.
“쟤······ 그냥 율리안인 거 아니야?”
“율리안 맞습니다. 램 님.”
“아니 빡통 새끼야! 진짜 용사 율리안 그대로인 거 아니냐고!!”
“그, 그런 거 치곤 너무 약한데요? 챔피언 고블린도 고작 체력의 14% 정도를 뺐을 뿐이에요. 마지막에 친 거죠. 해일이가 그냥······ 조, 좀 정직한 친구라 당한······.”
“아니! 왜 그딴 정직한 놈으로 뽑은 거야!?”
“그, 그건 램 님이 낭만이 있는 놈으로 가자면서요!?”
망할.
기억났다.
그랬었지.
멱살이 풀린 샘은 옷매무새를 다시 가다듬으며 램을 위로한다.
“그래도 율리안이 아주 나쁜 놈은 아닌 게. 스킬 스크롤을 줬는데요?”
“하?”
램은 어이가 없었다.
“그딴 걸 말이라고 해!? 반지 능력도 설명 안 해주고, 지한텐 쓸모도 없는 걸 준거잖아!”
“그래도 준 게 어디예요? 그냥 폐기 처분했으면 해일이 순보도 없이 진짜 들이받으면서 싸웠······ 억!”
뻐억!
결국 화를 돋운 샘은 한 대 맞고야 말았다.
“율리안이 그렇게 좋으면······.”
턱.
램은 샘의 멱살을 잡고 빙빙 돌리더니 모니터로 쑤셔박았다.
펑!
“들어가! 이 새끼야!”
치이이······!
모니터 하나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샘의 다리가 버둥거린다.
“후아······ 하······ 아. 좀 후련하네.”
이제야 분이 좀 풀리는 램.
뿅!
샘이 모니터에 박힌 머리를 빼고 다시 날아온다.
“래, 램 님······ 끄으······ 너무하시네요. 그래도 제가 이런 거도 준비해놨는데요······.”
척.
샘이 모니터 하나를 가리킨다.
몇몇 사람들이 던전 입구에 표시된 S등급 강해일을 발견하고 소문을 퍼트렸고.
기자들이 찾아온 것이다.
“온 나라가 주목하는! S급 각성자! 성좌들도 반응도 좋아요!”
강해일에게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관심, 찬사······
성좌들이 아주 좋아할 만한 상황이다.
샘이 그래도 이런 거도 다 준비해놨던 거다.
램은 그걸 보니 끄덕이며 인정했다.
“잘했네. 그건. 근데······.”
그러나 이게 끝은 아니다.
“이건 어떡할 거야?”
“!”
척.
램이 들어 올린 모니터에 떠오른 건 한 유튜브 영상이었다.
[북한산 고블린 학살쇼ㄷㄷ]
북한산에서 고블린 스웜을 처치하는 사고슬의 영상이었다.
[1시간 전]
[조회수 28만]
1시간밖에 안 된 영상이 30만 가까운 조회수가 나왔고.
#인기 급상승 동영상 10위
인기 급상승 동영상에까지 들었다.
-사고슬에 이은 북고슬ㅋㅋㅋㅋ
-캬
-저거 사고슬임??ㄷㄷㄷ
-뭐? 고블린? 그럼 걍 이 새끼임 ㅋㅋ <(_ _)/
35화
프리 챕터 (2)
상점을 업그레이드하자 떠오른 서술 트릭 시리즈.
‘안 보이는 검이라니.’
준일은 꽤나 마음에 들었다.
지난 용사 시절 보지 못했던 아이템이란 것만으로도 그에겐 흥미로웠다.
페어리 주식회사가 만들어놓은 설정의 어지간한 아티팩트는 다 구경해봤으니까.
‘좀 더 구경해볼······’
그는 햄이 떠난 이후에도 상점을 좀 더 보고 싶었는데.
‘어라?’
털썩.
갑자기 기절하듯 쓰러져 세상 모르고 자기 시작한다.
“흠냐······ 흠냐······.”
그는 꿈을 꿨다.
투명한 검을 휘두르고 다는 꿈.
그 검은 스치기만 해도 모두 베여나갔다.
왜냐?
투명하니까.
“크아아 투명드래검이다.”
이런 잠꼬대를 중얼거리며 몸을 뒤척인다.
-엌ㅋㅋㅋㅋㅋㅋㅋㅋ
-투명드래검 뭔데 ㅋㅋ
-대체 뭔 꿈을······
-잠방 대기조 포상 ㄷㄷ해
-준일이 커여워 ㅠㅠ
잠을 자는 그를 보고 있는, 굉장히 소수의 매니악한 성좌들은 즐거워했다.
-흐흐 등짝을 보자 등짝······
-좀만 돌아봐 ㅎㅎㅎ
-오늘 팬티는 파란색이네
좀 불쾌할 수는 있지만, 이들이 있기에 준일은 깊이 잠에 들어도 램이 손을 쓰지 못 했다.
이 성좌들의 가호 아래 깊이 잠든 사이.
세상의 시간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었고.
[남은 시간 00:00:00]
메인 퀘스트의 남은 시간이 종료됐다.
온 세상에 호루라기 소리가 퍼져나갔다.
삐이이이—
[축하합니다!]
[첫 번째 퀘스트를 통과하셨습니다!]
준일은 레벨 10을 달성했으므로, 첫 번째 퀘스트를 무사히 통과했다.
그러나 나머지는?
[레벨 10 미만의 각성자들은 모두 각성의 힘을 잃게 됩니다.]
모두 각성자의 힘을 잃게 된다.
램의 전문이 게임판타지라서 다행이었다.
아포칼립스였다면 모두가 갑자기 머리가 터져 죽는다거나 하는 극악무도한 전개가 나올 법도 했는데.
그냥 각성의 힘을 잃는 것에 그치는 인도적인 조치가 취해진다.
[서버 기준 총 53,445,138 명의 각성자들 중······]
촤르르르륵!
팅!
[9,620,124 명이 통과했습니다.]
약 5,000만 중 약 900만이 각성자로 남았다.
준일처럼 F등급이 아닌 이상, 레벨 10 달성은 그리 어려운 퀘스트는 아니었다.
E등급들은 생산직인지라 애초에 다른 방식으로 레벨업하고, 나머지는 고블린을 꾸준히 잡았다면 충분히 달성할 만한데.
[생존률 약 18%]
통과한 건 고작 18%의 인원이다.
아무래도 어린아이들, 노인들, 겁이 많은 사람들 등등.
애초에 활동할 수 없는 각성자가 많았던 탓이다.
그것이 현대인들이다.
그들에게 갑자기 힘이 주어진다고 해서, 고블린을 때려잡을 순 없었다.
벌레 하나 못 잡는 사람들이 태반이며 자신이 먹을 먹이조차 도축하길 꺼려한다.
그들 중 각성자로 남은 이들은 뭐가 달라도 다른 인간들이었다.
적응력이 무섭도록 빠르거나, 잔인하거나, 도덕성이 결여됐다거나, 혹은 용기가 넘친다거나.
[각성자들이 최소한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어찌됐든 그들은 새로운 세상의 중요한 존재로 거듭날 것이다.
[랜덤 아이템 박스가 지급됩니다.]
퍼벙!
마치 그것을 축하하듯, 각성자들의 머리 위에 상자가 생겨났다.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아마 아침에 눈을 뜨면 설레는 마음으로 다들 열어볼 것이다.
물론 준일은 예외다.
어차피 꽝일 테니까.
[게이트 레벨이 상향됩니다.]
[Lv.1 —> Lv.2]
[통과할 수 있는 마력의 양이 늘어납니다.]
쿵—
도시 곳곳에 레벨 2 게이트가 생기기 시작했고.
띠링.
[프리 챕터]
==== ====
메인 퀘스트가 없는 프리 챕터입니다.
각성자 여러분의 적응을 고려하여 차원간 간섭도 최소화됩니다.
다음 퀘스트가 올 때까지 심신을 수련하여 대비하십시오.
==== ====
이때부터 세상은 큰 격변의 시기를 맞이했다.
* * *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난 준일.
“흐아아아암.”
그는 기지개를 켜며 습관처럼 퀘스트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아.”
그런데 시간이 보이지 않았다.
“끝났구나.”
대신 쌓여 있는 알림창들.
“······프리 챕터?”
설명을 읽어 보니, 퀘스트가 없는 기간을 말하는 거 같다.
다음 퀘스트가 올 때까지 대비하는 기간.
‘음······ 뭐지?’
준일은 조금 의아했다.
쉬어가는 구간을 준다니.
‘뭐가 있을 거 같은데.’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다.
-상자 오픈 ㄱㄱ
-일어났냐?
-얘 잠을 왤케 자냐? 미인도 아닌것이
-언박싱 해줘
성좌들의 채팅이 스쳐간다.
‘뭔 상자?’
둘러보니 그의 침대 머리맡엔 어제 봤던 것 같은 포장 박스가 놓여 있었다.
“퀘스트 보상이구나. 노란색에 핑크색······ 취향 참······.”
샛노란 박스에 핑크색 리본.
너무 눈에 띄어서 발견 못 하기도 힘든 색감이다.
스륵.
준일은 별 기대도 안 하고 그냥 대충 풀어버린다.
펑.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글자가 나온다.
[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성좌들이 열심히 웃고있다.
‘그래 웃기면 됐다.’
이젠 실망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그냥 웃긴 수준으로 넘어간 거 같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앞으로 계속 이딴 식일 텐데.
미리 적응하는 게 좋지 않나?
일단 준일부터가 별다른 내색 없이 그냥 상자를 쓰레기통에 처박고는 욕실로 향한다.
‘어차피 내 상점에서 나오는 템이 더 좋아 보이거든.’
서술트릭 환도.
현재 그 아이템보다 좋은 게 나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단순히 투명한 검이 무슨 소용이냐 할 수 있겠지만.
‘뭔가 감이 온다고. 그거.’
준일은 페어리 주식회사 세계관을 무려 7번이나 경험했다.
디자인만 봐도 전투력이 보인다.
거무튀튀하고 살기가 흐르는 심플한 디자인.
딱 봐도 성능이 느껴진달까.
‘오죽하면 꿈까지 꿨겠어.’
쏴아아아아······
그는 샤워기 물을 틀며 가격을 계산해본다.
‘근데 1마음이면······ 1000느낌인데······ 젠장. 너무 비싼데. 언제 사지?’
이야기 화폐의 개념은 준일도 처음 보는 것이라 감이 안 잡힌다.
욕심이 나는데 말이다.
‘칼······ 갖고 싶다.’
뿌옇게 올라오는 뜨거운 수증기 속, 예전 기억이 스쳐간다.
매일 같이 생과 사의 고비를 넘던 나날.
그렇게 목숨이 오가는 전투를 반복하는 이들.
용병이나 기사들은 미신을 강하게 믿거나, 기벽을 갖고 있었다.
율리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멋져 보이는 칼을 수집하는 게 그 기벽 중 하나였다.
전투에서 이기면 마족의 저주 받은 물건일지라도 꼭 칼을 수집하여 한동안 들고 다녔다.
‘좋은 거 많았는데.’
* * *
샤워를 마친 후.
대충 몸을 털고 나온 준일.
그는 별 생각 없이 휴대폰을 집는데.
지잉.
[자동 이체 안내]
문자가 온다.
자동 이체 안내문이다.
‘55만원?’
현재 지내고 있는 원룸의 월세다.
‘······아. 망할.’
준일은 이제야 떠오른다.
자신의 돈 대부분이 아파트에 투자되었고 이젠 돈이 얼마 없다는 걸.
그의 시선이 절로 쥐고 있는 칼로 향한다.
‘이걸······ 얼른 처분해야겠는데?’
고블린 레이드에서 얻은 아이템들을 돈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런 시장이 언제 생길려나.
‘아니면 성좌들이 나한테 돈 못 주나?’
슬쩍 성좌들 쪽으로 시선을 옮기는데.
[현재 시청 성좌: 801명]
우연찮게 본 성좌 숫자가 너무 높다.
깜짝 놀랐다.
‘뭐야?’
분명 챔피언 고블린을 잡을 때만 해도 700명 넘었다고 좋아했는데.
이젠 800명을 넘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그냥 자고 일어나기만 했다는 걸 감안하면 이상할 정도의 수치다.
‘이 칼이 좋은 건가?’
그럴 리가.
그냥 고블린들이 쓰는 싸구려 곡도다.
준일은 채팅을 유심히 쳐다본다.
-얘 맞음?
-사고슬 사고슬
-얘가 사고슬 맞음
사고슬 맞냐며 물어보는 성좌들이 늘었다. 아무래도 유입된 것이다.
근데 어디서?
-북한산 영상 보고 옴 ㅋㅋㅋ 여기 살았구나 ㅋㅋㅋ
-오오······
-근데 얘가 사고슬인 걸 어케암? 가면 써서 모르겠는데
-유튜브에 나왔던 무기나 옷이 없는데;
이게 무슨 소리지.
준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유튜브?’
그는 유튜브에 뭘 올린 기억이 없다.
사실 그거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
반쯤 중세인이기 때문에 이런 기기랑 별로 친하지 않았다.
* * *
잠시 후.
컴퓨터에 앉아 유튜브로 들어가는 준일.
어떻게 우연히 발견한 척할까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냥 알고리즘에 떠버리잖아?’
안그래도 각성자 관련으로 많은 검색을 했었던 차, 그의 알고리즘 최상단에 정확히 영상이 떠있었다.
[북한산 고블린 학살쇼ㄷㄷ]
[18시간 전]
[조회수 134.8만]
올린 시간에 비해 엄청난 조회수다.
반 중세인인 준일도 그건 파악할 수 있었다.
왜냐?
#인기 급상승 동영상 4위
여기 떡하니 적혀 있잖은가?
‘4위?’
유명 유튜버가 올린 게 아니면 저 순위에 들기 쉽지 않은데.
이 영상 하나 올리기 위해 어제 막 개설한 채널이 4위를 찍었다.
이는 엄청난 화제성이다.
BEST) 얘 사고슬이네 ㅁㅊ 가면이랑 체형이랑 다 똑같음 무기도 ㅇㅇ
뭣보다 베스트 댓글이 사고슬이라는 댓글이었다.
그래서 성좌들이 알음알음 찾아온 모양.
“이걸 대체 언제 찍은 거야?”
영상도 확실히 잘 찍혔다.
브금도 굉장히 잘 어울린다.
댓글에서도 언급된다.
-와 ㄷㄷ 브금 찰떡
-어케 브금하고 딱 맞췄냐 ㅋㅋㅋ
-편집이 아니고 진짜 그냥 브금하고 딱 맞는 거임?? ㅈㄴ 쾌감 지리네
-고블린 새끼들 때문에 장사 망해서 머리에 쥐가 났는데 진짜 속이 뻥 뚫리네요ㅠㅠ
‘어?’
가만히 영상을 보던 준일은 뭔가 눈치챈다.
‘진짜 박자가 딱딱 맞네.’
그의 움직임이 노래 박자와 딱 맞는다.
그렇다고 준일이 재생했던 그 ‘멋진BGM’ 음악이 나오고 있는 건 아닌데.
제작자가 쓴 소개글을 본다.
[그냥 음악을 한 번 넣어봤는데 신기하게 특정 BPM이랑 딱 맞네요;]
그랬다.
노래가 만들어진 박자만 같으면 딱딱 맞는 걸로 보이는 것이다.
-얘 이어폰 꼽고 학살하는 거 아닐까요? 어케 딱 맞음?
-이거 편집한 거지 백퍼 ㅋㅋㅋ 무슨 어케 이렇게 잘맞음?
-귀에 에어팟 꽂고 학살하는 거임. 얘는 그럴 수도 있음.
음악을 들으면서 고블린을 학살한다는 -놀랍게도 반쯤 사실인- 추론이 나오지만.
└사고슬 북고슬 이러니까 고블린이 진짜 ㅈ으로보임?ㅋㅋㅋㅋ
└에어팟 꽂고 고블린 학살 ㅋㅋㅋㅋㅋ
└MZ하네요
뭐, 댓글 상에선 그냥 놀림거리가 되고 있었다.
당연했다.
노래 들으면서 고블린 스웜 학살이라니.
완전 미친놈 아닌가?
“크흠. 신기하네.”
준일은 유튜브는 이쯤보고 ‘각살법’ 커뮤니티로 향했다.
메인 스트림이 또 어디로 갈지 알아내야 하기도 하고.
“물건이나 팔자.”
무엇보다 고블린 레이드에서 얻은 아이템들을 팔고 싶었다.
커뮤니티에 있는 연금술사들이나 대장장이들과 연결되면 아마 팔 수 있지 않을까?
[혹시 몬스터한테 얻은 물건들 살 사람? 없나요?]
-그걸 누가 사ㅋㅋㅋㅋ
-?
-고철아저씨한테나 파세요 ㅅㅂㅋㅋㅋ
-이게 진짜 게임인 줄 아냐?
아직 이런 거까지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없는 거 같다.
“······하아. 돈 어쩌냐. 월세도 못내게 생겼네.”
그는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한숨을 쉬는데.
-준일이 돈 없누 ㅋㅋㅋ
-아이템 못파나보네 아직
-곧 팔 수 있게될 텐데
-사고슬이 돈이 없다니······
‘다른 정보를 찾아봐야겠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준일은 커뮤니티 인기글을 둘러본다.
무슨 의뢰라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돈이 될 법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20위까지 쭉 내려도 없다.
그런데 시선을 사로잡는 글은 있다.
20위) 실시간 등산하는 엘프녀 후방 주의
쯔쯧.
7회차나 성좌들의 용사로서 단련된 율리안.
그에겐 감정도 성욕도 없거늘.
딸깍!
저도 모르게 마우스가 가버린다.
‘뭐야. 마법인가?’
-ㅋㅋㅋㅋㅋㅋ
-반속 보소 ㅋㅋㅋ
-마우스 속도 뭔데 ㅋㅋ
정신계 마법이 분명하다 의심하던 중.
약간 실망하는 준일.
‘에?’
아쉽게도 딱히 후방을 주의해야 하는 사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게시물 내용이 낚시인 것도 아니었다.
진짜 제목 그대로다.
실시간 등산하는 엘프.
숲속의 엘프.
‘이거······’
준일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진짜 엘프잖아?’
진짜 엘프가 나타났다.
그리고 곧장 드는 생각.
‘엘프들······ 마기를 정화해서 마정석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었어.’
페어리 주식회사의 세계관에서 엘프들은 마기가 깃든 물건들을 정화하여 마정석으로 만들 줄 알았다.
그들은 이 정화 작업을 좋아해서, 그냥 고블린이 들고 있던 물건들을 주면 돈으로 바꿔줄지도 몰랐다.
‘이게 어디지?’
지도를 올려놓지 않았다.
댓글로 물어봐도 대답이 없다.
‘성좌들은?’
이럴 땐 성좌들의 정보력이 강하다.
현시점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선 공간을 초월한 정보를 갖고 있으니.
-저거 진짜 엘프 맞음 ㅇㅇ
-npc들이 나오는건가? ㄷㄷ
-포천에 그린 게이트 열렸네
‘포천······? 그린 게이트?’
준일은 인터넷에 더 검색해봤다.
게이트, 녹색······
그러자 기사 하나가 나왔다.
[포천 공동묘지 근처 ‘귀신’ 소문, 몬스터일까?]
포천 이름 덕에 바로 알았다.
이게 그 엘프와 관련된 괴담이란 걸.
여기엔 꽤 정확한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여기구나.’
36화
프리 챕터 (3)
준일은 대체로 각살법 커뮤니티를 위주로 살펴볼 뿐, 다른 인터넷 여론은 보지 않았다.
그야 그는 이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뉴스를 볼 이유는 자신의 집값 때문이겠으나.
이미 무너진 마당에 그런 거에 관심 가질 리가 없고.
현재로선 그냥 어떻게 메인 스트림에 계속 편입되느냐, 각성자로서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전부다.
반면, 강해일의 경우는 달랐다.
‘오늘도······ 대책은 없군.’
그는 늘 포털 뉴스 ‘사회면’을 주시한다.
[사실상 무정부 상태, 게이트의 대책은?]
[이번 프리 챕터가 나라의 국운을 결정할 것]
[해외 수입 막힌 “식량난” 물자 비상 해결 가능성은?]
흘러나오는 기사들 하나하나 심상치 않았다.
너무 많은 피해가 나라에, 아니 이 세상에 누적되고 있다.
사람들은 불안에 떨고, 뉴스 댓글에선 늘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라 외치고 있었다.
BEST) 세금은 뒀다 뭐에 쓰나요? 이런 거 대책도 대응도 없고, 그냥 아무 소식도 없네요.
BEST) 지들 월급 올리는 법안은 ㅈㄴ 빨리 통과시키는 새끼들 다 어디서 뭐함?
정부라든가 군, 경찰 등······ 이런 사태를 대비해 줘야 할 존재들.
이들이 책임져야 한다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해일은 알고 있었다.
그들도 지금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쪽도 피해가 만만치 않아.’
고블린들은 고위직이라고, 나랏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가려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떻게 보면 국가 주요 기관 쪽으로 집요하게 게이트가 발생하기도 했다. 시스템을 망가트릴 의도가 있는 것처럼.
‘공직들이라고 별수가 있는 건 아니지.’
해일의 시선이 방 한구석 어떤 사진으로 향한다.
얼마 전 장례를 치렀던 누군가의 사진.
제복을 입고 늠름한 표정을 짓는 남자의 모습.
“하아.”
해일은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옷을 챙겨 입고 어딘가로 나선다.
‘어차피 이제 프리 챕터라 했어.’
뉴스를 쭉 살펴본 결론.
‘전보단 낫다.’
세상이 혼란스러운 건 맞으나, 몬스터가 막 창궐했을 때보단 낫다.
프리 챕터라는 말이 정말로 쉬어가는 구간이었던 모양이다.
고블린이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던 게 멈췄고.
도시들도 어느 정도 안정화되었다.
‘이럴 때나 가봐야지.’
해일은 이렇게 틈이 났을 때 한 번 산소에 들르려 한다.
차에 올라 타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한다.
‘포천시······.’
포천으로.
* * *
페어리 주식회사의 모니터링실.
“이번 프리 챕터에선 해일이가 더 큰 주목을 받을 겁니다.”
“그래?”
램은 의구심을 품으며 묻는다.
그야 그간 샘이 말한 대로 이뤄진 건 거의 없었으니까.
“네. 일단 잠시 몬스터들이 마구 튀어나오지 않게 된 이 시간에 국가기관에서 해일이를 찾게 될 겁니다. 현재까지 유일한 S등급이니까요.”
“음. 그치.”
램은 끄덕인다.
맞는 말이다.
강해일은 강한 힘과 신념까지 있다.
나라에서 바라는 인재 그 자체다.
“국가가 원하는 인재! 강해일! 국가 권력급! 그런 키워드로 성좌님들이 꽤나 만족하실 겁니다.”
“그게 다야?”
그런 건 프리 챕터가 없어도 충분히 일어날 일이다.
“아, 아뇨. 진짜는 이겁니다. 램 님이 기획하신 것들.”
척.
샘이 어떤 주머니를 가리킨다.
“서브 퀘스트.”
“······오.”
서브 퀘스트들이 담긴 주머니였다.
“프리 챕터는 메인 퀘스트는 없지만, 수많은 서브 퀘스트가 존재하는 챕터로 구성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저는 이 서브 퀘스트에 일종의 효율적인 흐름을 만들어봤어요. 강해일의 개인사와 연결되는······.”
이어지는 설명을 듣고는 램은 박수를 쳤다.
“키리리! 간만에 마음에 드네?”
“감사합니다!”
샘은 울먹이며 경례를 올린다.
이번 시리즈를 시작하고 거의 처음 듣는 칭찬이다.
“강해일의 개인사를 따라서 펼쳐지는 서브퀘스트. 좋아. 이런 식으로 엮어내는 데 고생 좀 했겠어. 그래서 첫 번째 서브 퀘스트는 뭐지?”
“그건 강해일 부친이 묻힌 곳에 나타난 한 엘프로부터 시작됩······”
* * *
서울 시내 한 버스 터미널.
준일은 갑자기 이런 말이 떠올랐다.
‘누구나 계획은 있지. 처맞기 전까진.’
그가 좋아하는 명언이다.
너무 해당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예? 버스가 안 가요?”
“아이고. 지금 나라가 난리잖아요. 고속버스가 많이 망가지고······ 저······ 많이 죽기도 했어요.”
어플 상에서는 분명히 간다고 나와서 왔더니 안 된다고 한다.
“하······.”
그랬다.
램은 대중 교통 쪽에 고블린들을 집중 투입시켰다.
그게 가장 충격적인 장면을 연출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덕분에 이동이 굉장히 어려워졌다.
물론 준일의 행운 수치가 상당히 내려가 있는 것도 한몫할 것이다.
다른 지역으로 가는 버스들은 꽤 운행을 하고 있었으니까.
‘망할······’
준일은 심각하게 고민한다.
어쩌지······ 그냥 좀 돌더라도 다른 버스를 알아볼까?
그런데, 성좌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한다.
-한참 걸리겠네
-다른 데 좀 돌아보고 올게요^^
-에이 뭔 여기서 막히냐 ㅉㅉ
인내심 없는 놈들.
하기사 그냥 이동하고 있는 걸 누가 오래 봐주겠나.
800명 넘던 성좌들이 슬슬 빠져서 다시 700명 대로 내려온다.
[현재 시청 성좌: 735명]
순간의 호기심으로 들어왔던 성좌들은 이렇게나 매정하다.
‘망할······ 이동에 너무 지체되면 안 되겠는데.’
준일은 결국 피눈물을 흘리며 큰 결정을 내린다.
“택시!”
포천까지 택시를 타버리기로.
‘진짜 엘프들 쥐어짜서라도 돈 벌어온다.’
그의 눈에 상당한 독기가 서렸다.
* * *
신명나게 달리는 말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준일은.
‘아니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이럴 시간에 정보나 더 찾기로한다.
커뮤니티를 찾아봤다.
여기에 엘프에 대한 이야기가 더 올라오고 있었다.
[엘프 짤 저거 진짜래 ㄷㄷ]
[나 정확한 위치 알아냄 ㅁㅊ]
[포천 주민인데 진짜 맞음 어른신들도 산속에서 봤다는 사람 한둘이 아님 ㅇㅇ]
[속보) 포천에 있는 공동묘지 근처! 엘프 진짜 발견!]
아무래도 근처에 사는 사람인 건지, 아예 엘프 바로 앞까지 왔던 사람도 있었다.
==== ====
근데 말 거니까 갑자기 그냥 경악하며 사라짐 ㅠㅠ
==== ====
-ㄹㅇ?
-뭐야 ㅈㄴ 신기하네
-헐
-위험한 거 아니냐?
-엘프가 몬스터면 어떡하려고???ㄷㄷ
-어? 나도 아까 말 걸었는데 사라지더라 ㅇㅇ 그냥 냅둬 딱히 공격 의사도 없던데.
└그걸 어케 암 갑자기 돌변할지
└걍 보면 알아
└뭔 소리여······
막상 발견해도, 말을 걸면 사라진다고 한다.
‘왜지?’
준일도 이 이유는 추측하기 힘들었다.
엘프들은 딱히 낯을 가리는 이들이 아니다.
영생을 누리는 만큼 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
이곳의 모든 것에 흥미를 보일 텐데.
말 거는 걸 거부한다니.
“다 왔어요.”
정보를 찾는 사이 택시는 도착했고.
경악스러운 금액을 결제해야 했다.
‘하아. 젠장.’
준일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일단 엘프한테 물건만 팔면 다 해결되리라 여겼다.
‘어쨌든 엘프나 찾아보자.’
산속에 만들어진 공동 묘지.
성좌들의 정보를 기반으로 검색한 결과, 준일은 한번에 목적지로 도착했다.
-오 왔네
-여기 맞을 듯?
-맞게 왔네
준일은 자신있게 공동묘지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더 깊은 숲속을 향해 걸었고.
거의 공동묘지 끝자락에 닿았을 때.
‘어.’
정말로 있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맨발로 돌아다니는 한 여자.
화사한 금발과 에메랄드 같은 녹색 옷.
새하얀 피부에 길고 뾰족한 귀.
준일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러면서 성좌들 반응을 힐끔거린다.
-오오오 왔다
-존예
-말 걸면 도망가지 않아?
-사고슬은 될 지도?
-엘프가 얼굴을 본다는 소문이 있음
-안돼
-가면 쓰면 또 모름 ㅋㅋㅋㅋㅋ
‘말 걸면 도망간다는 건 완전 사실인가 보네······’
이로써 도망간다는 건 확정 같은데.
-잘생긴 애가 말 걸면 도망 안 간다는 말이 있음 ㅇㅇ
-얼굴임 걍
-못생긴 남자가 말 거니까 도망가지 ㅉㅉ
성좌들이 이런 말을 해댄다.
‘아니······ 진짜로?’
준일은 괜히 휴대폰을 꺼내서 얼굴을 확인한다.
‘흠······’
슥, 슥.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머리도 조금 만져보는데.
한 채팅을 보게 된다.
-존잘남 해일이도 실패했는데 얘가 될리가 ㅋㅋㅋ
강해일도 실패했다고 한다.
그 말은······
‘강해일이 왔었어?’
강해일이 이 근처였던 모양이다.
‘대체 왜 온 거지?’
준일이야 엘프가 마정석을 만들어 준다는 걸 알고 왔지만, 강해일은 뭐란 말인가?
그 녀석도 뭘 알고 온 걸까?
하여간 강해일 언급이 나오자 또 성좌들이 싸운다.
-강해일도 안 되면 ㅅㅂ 얼굴 때문이 아니잖아
-아니 애초에 얼굴을 보는 거겠냐곸ㅋㅋ
-얘 얼굴로 되겠냐?ㅋㅋㅋ
-진짜 억까지리네 강해일빠 새끼들 ㅋㅋㅋ
-해일이 얼굴로도 안 되는데 얜 안 됨
-잠재력 F급이라 걍 근처만 가도 도망갈 듯ㅋㅋㅋㅋ
-걍 너무 엑스트라 얼굴인디
‘하?’
준일은 약간 오기가 생겼다.
‘이 자식들이 계속 사람 얼굴을······’
강해일 쪽 채널에서 넘어온 놈들이 생긴 후로, 계속 강해일과 얼굴을 비교하는 세력이 생겼다.
용사 7회차 고인물이라지만, 문준일도 사람인데 계속 대충 생겼니 뭐니 하면 열받는다.
‘좋아. 강해일이 실패한 걸 내가 하면······ 성좌들이 반응이 있겠지. 망해도 본전이고.’
준일은 그렇게 용기를 내서 그녀의 뒤로 다가가 말을 건다.
“저기요.”
그는 한편으로는 당장 100미터 고속 주파를 할 자세를 잡았다.
‘도망가면 쫓아가서 잡아야지.’
-육상 선수임?ㅋㅋㅋㅋㅋ
-납치하려고?ㅋㅋㅋ
-자세는 왜 이러는 건데 ㅋㅋㅋ
-뛸 준비 ㅋㅋㅋ
* * *
“······이, 이거 뭐야!? 왜 사라져!?”
몇 분 전.
페어리 주식 회사.
램이 샘의 멱살을 잡았다.
“여기서 뭐가 시작된다며!”
강해일이 엘프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는데 엘프가 사라져버린 거다.
[응?]
모니터 속 강해일이 어리둥절해 두리번거리고.
-뭐여
-엘프 놓쳤네
-아
-이거 뭔가 히든 퀘 같은데?
-왜 사라짐??
-쫓아가봐 좀
성좌들이 조급해한다.
엘프가 뭔가 좋은 걸 들고 있을 거라는 추측이 성좌들 사이에 퍼진 것이다.
그야 엘프가 그냥 뜬금없이 등장할 리가 없잖은가?
딱 봐도 중요해 보이는데, 강해일이 어이없게 놓치니 답답해했다.
이뿐이 아니다.
“야.”
설상가상.
“네?”
“······쟤 왜 여깄어?”
램이 가리킨 다른 모니터.
그곳에선 준일이 떡하니 엘프와 대면하고 있었다.
“어······”
샘은 당황했다.
여기 올 이유가 없는데?
아무 정보도 없잖은가?
“뭐지? 커뮤니티 보고 왔나? 아니 엘프녀에 환장했나 참······ 여튼 걱정 마세요. 또 도망가겠죠.”
“그렇지?”
“지금까지 계속 그랬잖아요? 미친 엘프 자식.”
그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으······ 왜?]
조금 싫어하는 눈치지만, 일단 대답을 했다!
“······!?”
“!”
왜?
왜는 이쪽에서 하고 싶은 말이다.
엘프는 그간 강해일뿐 아니라 모두에게 도망갔었는데.
“대, 대체 왜!!”
왜 율리안에게만 대답하는 거지?
성좌들도 똑같은 의문을 품었다.
-오?
-뭐야 얘한텐 대답하는데?
-헐 목소리 첨 나오네
-뭔데 이거
이들도 엘프가 대답할 줄 몰랐던 거다.
이미 강해일 쪽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간 수많은 다른 각성자들이 말을 걸었던 것도 아니까.
그리고 율리안의 팬에 가까운 골수 성좌들은 아예 열광하기 시작한다.
-사고슬! 사고슬! 사고슬!
-강해일보다 못생겼다고 얼굴 억까하던 새끼들 어딨냐?ㅋㅋㅋㅋㅋㅋ
-FACE GAP
-사고슬 >>>>> 강해일
-이 자식 여자 알러지 아니었음? 엘프는 괜찮은 거냐?ㅋㅋㅋ
-남자는 능력이지~
-F등급인데 엘프녀를 꼬심 ㄷㄷ
-엘프들이 보기엔 쟤가 더 잘생겼나?ㅋㅋㅋ
-F급이라 불쌍해서 말 받아주는 거 아님?ㅋㅋ
37화
서브 퀘스트 (1)
아마 엘프들에 대해서 이 지구에서 가장 잘 아는 건 분명 여기 있는 준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추측할 수가 없었다.
‘왜 말을 걸면 도망간다는 거지.’
엘프들은 수명이 매우 긴 만큼, 마음의 여유도 크다.
낯선 존재가 말을 건다고 해서 딱히 배척하지 않는다.
아주 반겨주지도 않지만, 도망간다거나 밀어내지도 않는다.
그저 한발 물러나 시간을 두고 상대를 관찰하고 싶어 한다.
만약 엘프가 갑자기 도망친다거나 하는 반응을 보였다면.
뭔가 큰 이유가 있는 것일 터다.
‘일단 말을 걸어봐야 알겠는데.’
그들의 행동 양식은 준일조차 완벽히 파악하지 못해서, 그냥 말을 걸어보는 게 최선이었다.
“저기요.”
아마 도망가겠지.
‘정 안 되면 순보로 따라잡아서 패대기치면······’
준일은 그렇게 생각하고, 도망가는 엘프를 따라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ㅋㅋㅋㅋ100미터 달리기하냐?
-도망간다는 거 보고 잡으려나봄ㅋㅋㅋㅋ 무친ㅋㅋㅋ
-자세 살벌하네
-달려가서 납치하시려고?
성좌들은 그를 비웃었다.
뭐, 어쩔 수 없었다.
이건 진짜 먹고 사는 문제가 달려 있으니까.
“으······”
역시 약간 싫다는 듯한 반응.
그런데—
"왜?"
엘프가 뒤돌아 고개를 갸웃하는 게 아닌가?
"???"
뭐야. 왜 안도망가?
“네가 부른 거야? 왜 그렇게 자세를 숙이고 있지?”
-?
-헉
-뭐야
-뻘쭘ㅋㅋㅋㅋㅋ
-대박ㅋㅋㅋ
-오?
-뭔데 이거
-자세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
‘뭐야?’
왜 대답하지?
하여간 준일은 얼른 다시 차렷 자세로 일어나며 끄덕였다.
척!
“아, 네. 그······.”
뭐라 말하려는데.
“으.”
엘프가 갑자기 오만상을 찌푸리며 뒷걸음친다.
‘어?’
-?
-??
-헉
-도망친다
-숙일 땐 대답하더니 얼굴 보니 도망가네
-얼굴 컽ㅋㅋㅋㅋㅋ
-경멸 표정 ㄷㄷ
성좌들의 바램(?)과는 다르게 다행히 엘프가 우다다다 뛰어서 도망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점점 거리를 벌리려 하는 건 맞았다.
“왜······ 왜 그러시죠?”
“당신이 나한테 뾰족하고 따가운 걸 쏘고 있어.”
“······?”
“여기 인간들 모두가 그런 걸 쏘고 있어. 아파······.”
-?
-??
-뭐지???
-왜 얘만 대화가 되냐? 뭐야?
-F등급이라 불쌍해서 말해주는 거임
-뭘 말하는 거여
성좌들도 답을 알지 못한다.
“어떤 걸 말하시는 거죠?”
“빛나는 네모.”
“······!”
준일은 곧장 뭔지 알아챘다.
슝.
그는 인벤토리를 열어 곧장 휴대폰을 던져넣어 버렸다.
그러자 엘프의 표정이 다시 온화하게 돌아왔다.
“하아······ 그래. 그거. 그 이상한 물건.”
-ㄷㄷ
-전자파 알러지 ㅋㅋㅋㅋ
-앗
-엘프가 민감하네
-서울 가면 죽는 거 아님?
“그래서 계속 도망다닌 겁니까?”
“그래.”
엘프는 준일의 눈을 보며 끄덕인다.
그녀의 하늘거리는 옷과 똑같은 색의 에메랄드빛 눈이다.
눈부실 정도의 하얀 피부와 햇살 같은 금발.
엘프다운 미모였다.
“이건 여기 차원의 인간들이라면 다 갖고 다닐 거예요.”
“그런가? 으. 하여튼 난 싫어.”
엘프는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다.
‘근데 왜 나한텐 대답한거지.’
곧이어 이 의문에 대한 답이 나왔다.
“근데 넌 뭔가 달라.”
“······?”
“뭔가 따스하고. 그리워. 어디서 본 적이 있던가? 익숙한 향기······.”
엘프가 코를 가까이 들이댄다.
금발이 화사하게 나풀거리며 숲내음이 풍겨온다.
채팅창이 폭발한다.
-헉
-ㄷㄷ
-와 ㅅㅂ
-알파메일 문준일! 알파메일 문준일! 알파메일 문준일!
-F급이 엘프를 꼬심 ㄷㄷ
-뭐지?
-이거 그린라이트냐?
-아니 ㅅㅂ 강해일도 안 되는데 얘가 된다고????
-사고슬! 사고슬! 사고슬!
-엘프녀가 다 뿌리치고 사고슬하고만 말한다? 이거 얼굴 차이쥬?
-강해일보다 못생겼다고 준일이 얼굴 억까하던 새끼들 어딨냐?ㅋㅋㅋㅋㅋㅋ
-사고슬 >>>>> 강해일
.
.
.
성좌들이 마구 흥분했다.
‘미친.’
준일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7회차 내내 외우던 주문을 외운다.
‘난 감정이 없다. 난 감정이 없다. 난 마왕을 죽이는 기계다······.’
* * *
“뭔 씨발······.”
램의 표정이 가히 악마와 비슷하게 변했다.
“야!”
샘의 멱살을 휘어잡고 마구 샤우팅한다.
“저 새끼가 주인공이냐!? 어!? 대체 뭔 전개인데 이건!!! 뭐야 저 편애는!? 행운 수치 조작됐냐!?”
“아아, 아아뇨오오······!?”
샘이 흔들리면서 열심히 설명한다.
“케, 켁! 행운 수치는 그, 그대로 쓰레기 상태입니다! 지금도 화장실만 가면 최소 다섯 번은 똥변기랑 마주친다구요! 진짜예요!”
그러나 이건 전혀 도움이 되는 설명이 아니다.
“그럼 저건 뭔데! 그리운 느낌? 따스해? F등급이 이딴 말을 어떻게 존예엘프한테 들을 수 있는 건데!? 이런 건 하렘 코인 때려 박아서 만드는 특수 장르에서나 나오는 현상이잖아!?”
아무 매력도 능력도 없는 주인공에게 엄청난 외모의 여자들이 달려드는 전개.
“씨발 왜 야사시이까라 전개냐고!”
그야말로 엄청난 양의 특수 장르 코인 ‘상냥하니까’를 소비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그 대상이 주인공일 때 얘기인데.
어떻게 저딴 F등급 엑스트라한테?
근데 문제는 램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는 거다.
당연히 성좌도 마찬가지.
삐이이이!
-아니 시발 주인공이 F급 문준일보다 나은 게 뭐임? 엘프도 뺏겨 1등도 뺏겨 ㅅㅂ 흑마법사한테 애들도 먼저 구출해 ㅋㅋ S급은 왜 있냐? 이딴 병신 개연성 난 하차함.
하차벨이 눌린다.
“으윽······!”
샘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한 줄 한 줄 다 맞는 말이다.
비수처럼 파고든다.
“하······ 하하······ 누, 눈치 빠른 성좌네요. 하하. 차, 참 싫다니까······.”
샘은 어떻게든 분위기를 전환시켜 보려했지만.
삐이이이이!
다시 울리는 하차벨
-이게 개연성이 맞는 건가 모르겠네요. 강해일한텐 도망가던 엘프가 문준일?한텐 거의 들이대고 있고······ 기획한 분 취향이 의심됨······
조곤조곤한 말투로 아주 즈려밟는 코멘트.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삐이이!
-하차 ㅅㄱ
삐이이이!
-병신 밸런스 때문에 하차함
삐이이이이이이!
-알파벳부터 다시 배우길.
램의 얼굴이 시뻘게지다 못해 흙빛으로 변하고 있다.
눈이 핑핑 돌기 시작한다.
“으······ 으어으······.”
그녀의 몸이 점점 새까매져간다.
흑화 현상이다.
“래, 램 님! 정신 차리세요!”
램의 눈동자마저 검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으······ 망해버려.”
그녀가 무엇에 홀린듯이 중얼거린다.
“망해버려. 페어리 주식회사 다 망해버려. 나도 망했으니까······! 그냥 다 불 타버렸으면!”
그녀는 눈을 모니터에서 떼지 못했다.
정확히는 성좌들의 코멘트들.
그 글자들이 계속해서 그녀의 눈에 파고들며 검붉은 안광이 타오르게 장작이 되어줬다.
“램 님! 코, 코멘트를 그만 보세요!!”
짝!
샘이 결국 램의 뺨을 때린다.
“헉?”
“크, 큰일 날 뻔했어요! 그러다가 추천 부서로 좌천된다구요!!”
완전히 흑화하여 다크 페어리가 되면, 기획 부서에서 일할 수 없다.
그런 요정은 추천 부서로 좌천되고 만다.
램은 갑자기 벌벌 떨었다.
“······추, 추천······ 거, 거기만큼은 안돼.”
추천 부서가 사내에서 기획한 것 중 좋은 것들을 추천하고 홍보하는 거라, 일은 더 쉽다.
다만 매일 같이 세계수의 망령들과 싸워야 하는 곳이다.
정신적 타격이 엄청난 곳.
사실상 페어리 주식회사의 최전방 격전지.
“그쵸······ 지, 지금 저희 이야기 전체 성적은 우상향 중입니다. 그냥 별 사태 아니에요! 다시 잘해보면 되는겁니다! 아직 수많은 서브 퀘스트가 남아 있다구요!”
“흐윽······ 흑······.”
램이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램 님?”
“나······ 난······ 그, 그냥 팸 그 썅년이 미웠어······.”
“······.”
“씨, 씨발 같은 주인공을 일곱 번 쓰는 게 무슨 이야기 요정이라는 거야. 그, 근데 왜······ 왜!!”
대체 왜 저 율리안이라는 녀석은······ 왜 저렇게 질긴 걸까.
“왜 계속 방해하는 거냐고! 날!”
이젠 죽이는 건 포기했다.
그냥 방해만 안 해도 좋겠건만.
“방해라뇨. 그, 그냥 우연이에요. 저새낀 그냥 엘프녀 후방주의 보고 발정 나서 달려온 거라구요. 지금도 보세요 헤벌레하면서 홀려가지고 이제 성좌들 다 하차할······.”
샘이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하는데.
‘응?’
그는 안경을 고쳐쓰며 다시 확인한다.
엘프녀 보고 혹해서 달려온 건 줄 알았더니.
[저는 사실 거래를 하러 왔습니다.]
너무나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거래를 하러 왔다고 말하는 율리안.
“거래를······ 하러 온 거였어?”
-?
-쟤는 뭔데 엘프랑 거래를 하냐
-응?
-특이한 놈이네
중립 스트림을 돌아다니는 성좌들도 그 말에 관심을 보인다.
‘이······ 이건······.’
샘은 위기감을 느꼈다.
점점 율리안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이렇게 그냥 아무 곳이나 돌아다니던 성좌들도 관심을 갖게 된다는 건, SNS 등을 통해 알게 돼서 오는 것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성좌들이 SNS에서 나오는 사고슬의 모습이나 그의 지위와 상관없이 지금 ‘문준일’이라는 남자 자체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는 거다.
“뭐? 엘프녀 보려고 헤벌레해서 왔다며?”
“······그, 그건.”
램이 다시 정신이 들었는지 또 샘을 구박한다.
“하. 됐어. 서브 퀘스트만 해일이한테 가면 되잖아. 맞지?”
“그, 그쵸!”
램은 그래도 아까 샘이 흑화로부터 구해준 게 고마웠는지 넘어간다.
“서, 서브 퀘스트는 해일이가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려면 해일이가 이 엘프를 좀 찾긴 해야 하는데······.”
강해일은 현재 그냥 어느 묘지 앞에 가만히 주저앉아 하늘을 쳐다볼 뿐.
엘프를 찾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 * *
“거래?”
엘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준일은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시작한다.
“네. 혹시 이거······.”
슝.
인벤토리에서 꺼내오는 고블린의 무기들.
우당탕!
“으. 마기에 찌들었어.”
전자파를 대할 때만큼은 아니었다만, 엘프는 조금 불쾌한 기색을 내비춘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일이 말한다.
“이거 좀 팔 수 있을까요?”
-그게 되겠냐고 ㅋㅋㅋ
-저걸 사달라는 거?
-와 얘는 ㄹㅇ 머리가 남다르네 ㅋㅋㅋㅋ 이걸 사주겠냐?
-얜 장님임?
-사고슬은 보법이 다릅니다······!
“팔아? 나한테?”
“네.”
엘프는 차분히 물건들을 내려다본다.
그녀의 시선이 챔피언 고블린이 쓰던 철퇴에서 조금 오래 머물렀지만.
스윽.
이내 준일을 바라본다.
“난 이것보다 너의 ‘주머니’가 더 탐나.”
“주머니요?”
“아공간.”
“아······ 그, 그건 못 파는데요?”
“떼어낼 수 있어.”
“아 말실수. 안 팔아요.”
“음.”
-안팔아요 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걸?
-그게 밥줄인데 어케 파냐고 ㅁㅊ
-눈치 없냐고 엘프야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 ㅠㅠ F급 짐꾼인데 ㅅㅂ
“이것만 팔 거예요. 팔 수 있을까요?”
준일은 알고 있다.
팔 수 있다.
엘프들은 아닌 척해도 마기에 찌든 물건에 관심이 많고.
그것을 정화하여 마력 결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 본능 같은 자들이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조화, 평화, 정화를 열망한다.
개체에 따라 셋 중 경중은 있겠으나 이렇게 눈앞에 물건이 있다면, 분명 구매해서 정화하고 싶을 것이다.
‘좀 사라. 그냥.’
물론 구매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덜 구매하고 싶거나.
운의 문제인데.
알다시피 준일은 운 수치가 쓰레기.
당연히 안 구매하는 쪽이 나온다.
그런데, 이는 뜻밖에 전개로 치닫는다.
“음. 근데 내 부탁을 들어주면 거래할게.”
“예? 얼마에 사신다구요?”
“내 부탁을 들어줘. 그럼 구매할게.”
“······?”
-먼 부탁?
-아니 ㅋㅋㅋ 대답이 왜저래 ㅋㅋ
-얼마에 사신다구요 ㅇㅈㄹㅋㅋㅋ
-응?
-오 그래도 구매해준다는데??
띠링.
[서브 퀘스트를 발견했습니다!]
‘어?’
이건 예상치 못했던 전개.
‘퀘스트를 주는구나?’
-오오오
-와
-엥???
-뭐야
-서브 퀘스트?
-이걸 F등급이?
-이런 게 있누
-캬
-미쳤따~
-사고슬 월클 맞습니다!
강해일이 받을 서브 퀘스트를 가로채버렸다.
38화
< 서브 퀘스트 (2) [유료 시작] >
[서브 퀘스트를 발견했습니다!]
어쩌다보니 서브 퀘스트를 얻은 준일.
‘이거······.’
용사질만 7회차였을 뿐 게임 같은 건 많이 해본 적이 없지만.
‘좋은 거 같네?’
-와 ㄷㄷ
-이걸?
-ㅋㅋㅋㅋㅋ
-캬
-F등급이 이걸?ㅋㅋㅋ
성좌들 반응을 보니 꽤 중요한 것 같았다.
아무래 프리 챕터의 비밀이 이것인 모양이다.
‘프리 챕터는 쉬는 게 아니라 서브 퀘스트를 하는 기간이었어.’
프리 챕터는 오히려 격차를 벌리는 시간이었다.
몬스터 안 나온다고 가만히 있는 소극적 각성자들과 그래도 뭐라도 해보려는 적극적 각성자들의 격차.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참여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바로 이 서브 퀘스트였다.
‘근데 왜 내가?’
준일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물론 적극적 참여자이긴 한데.
‘운이 분명 엄청 안 좋았는데.’
여태 운이 굉장히 안 좋지 않았는가?
운으로 뭔가 해결된 적이 없었다.
그의 전재산인 아파트가 비행기에 직격으로 무너진 것을 보라.
이 세계는 준일을 증오한다.
그럼에도 이게 갑자기 행운처럼 떨어졌다.
“어때. 부탁을 들어줄래?”
엘프가 재차 묻는다.
준일은 잠시 고민했다.
지난 30년 용사 생활 동안 당한 게 하도 많아서.
이런 행운이 오면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게 함정일 확률······ 어느 정도일까.’
엘프들은 사기꾼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거짓말을 너무 못해서 동료로 두면 골치 아픈 녀석들.
그때 스쳐가는 말.
「넌······ 뭔가 따스하고. 그리워. 어디서 본 적이 있던가? 익숙한 향기······.」
엘프가 가까이 다가오며 했던 말이다.
그때 조금 당황해서 깊이 생각지 못했으나.
‘이게 설마······.’
그의 시선이 한 시스템 창으로 향한다.
[화신 ‘용사 - 율리안’의 전승]
[8.09% 진행 중]
용사 율리안의 전승.
8% 정도 진행됐다.
1% 모아서 마나 펀치 겨우 쓰던 때를 생각하면 굉장한 발전이다.
‘이거구나.’
준일은 깨달았다.
지금 악운을 받고 있는 건 인간 문준일이다.
이 세계가 싫어하는 것도 인간 문준일.
그러나 율리안은?
예외였다.
준일의 안에 있는 8%의 율리안.
그가 엘프를 움직인 거다.
‘율리안을 느낀다라.’
엘프는 율리안에게 ‘그리운 느낌’이라했다.
그렇다면 혹시 율리안이 있던 차원에서 온 녀석일까?
그럼······
‘메이린을 알까.’
1회차에서 온 걸까?
메이린은 엘프들과 교류를 많이 했었는데.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성좌들 있으니 물어보면 안 되겠지.’
준일은 생각이 많아졌으나 이만 정리한다.
‘일단 의뢰부터 수행하자.’
지금 그는 또 다른 의뢰를 수행 중일 뿐이다.
“좋습니다. 근데 무슨 부탁이죠?”
퀘스트를 수락하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대단한 건 아니야. 뭔가를 찾아줘.”
찾아달라······.
가끔 이런 부탁이 누굴 죽여줘보다 더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뭘요?”
“이곳에 짙은 마기가 있어. 그 원흉을 찾아줘. 정화하고 싶어.”
마기? 엘프가 마기라고 할 정도면 단순한 몬스터는 아닐 거 같은데.
“······아니 마기를 그렇게 잘 느끼면 본인이 찾으시죠?”
-?
-??
-ㅋㅋㅋㅋㅋㅋㅁㅊ
-퀘스트 주겠다잖아 새끼야 ㅋㅋㅋ
-그냥 받아 먹어~
-줘도 시비네 ㅋㅋㅋㅋ
“여긴 너무 뾰족하고 짜증 나는 것들이 많은걸. 난 돌아다니기 힘들어.”
“알겠습니다. 제가 찾아볼게요.”
띠링.
[서브 퀘스트 #1]
==== ====
목적: 어디선가 강한 마기가 흘러나온다. 그 원인을 알아보자.
보상: 알 수 없음.
==== ====
보상은 안 보인다.
하지만 준일에겐 어차피 확정적인 보상이 하나 있었다.
“이걸 해결해주면 저랑 거래하는 거죠?”
엘프와의 거래다.
“물론. 약속은 지켜.”
엘프는 끄덕이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탕.
“얘를 가져가. 마기를 알려줄 거야.”
자그마한 정령이었다.
딱히 말이 통한다거나 할 정돈 아니고, 마기 근처에 가면 오도방정을 떨어줄 녀석.
피유웅~!
-오
-커엽
-ㅋㅋ
-귀엽다
“예. 갈게요.”
“어떻게 쓰는지 안 물어봐?”
“뭘요?”
“정령.”
“아, 괜찮아요. 그냥 보면 알겠죠.”
-ㅋㅋㅋㅋ뭔 자신감이여 ㅋㅋ
-설명서를 누가 읽냐고 ㅋㅋ
-ㅉㅉ 이러다 뭐 당한다
-응~ 알파메일은 설명서 안 읽어~
준일의 황당한 자신감에도 엘프는 끄덕였다.
“······음. 그래.”
엘프는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특이해.’
그녀의 눈에 준일은 이곳의 인간들과 너무나 달랐다.
‘알고 있어.’
정령을 봤을 때 반응.
자연스레 손을 올려 어깨 위로 흘려보냈다.
정령을 알고 있는 자의 움직임이다.
‘난 분명 세계수의 부름에 이끌려 왔는데.’
결국 그녀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수가 보여준 자가······ 저 사람?’
* * *
“거 참 그냥 네이버 지도에 찍어주지.”
준일은 엘프와 멀어지자 투덜거리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ㄹㅇㅋㅋ
-이게 뭐냐고 ㅋㅋ
-ㄹㅇ이거 개노가다 퀘스트 느낌인데
-보상 좋아야 할 텐데
-ㅇㅈ
이 묘지 근처엔 마을이 있다.
어떻게 길을 따라 돌아야 다 돌 수 있는지 체크해보는 준일.
근데 엘프가 붙여준 정령이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낸다.
“끼이잉! 낑!”
“······너도 이게 싫어?”
동그란 정령이 끄덕인다.
휴대폰이 싫단다.
“하. 좀만 참아.”
준일은 최대한 빠르게 이곳 지도를 살펴보며 지형을 외운다.
현대인들이 보면 깜작 놀랄 만한 지리 암기력이지만.
‘중세에선 기본이지.’
중세에서 30년 동안 모험가로 살아온 준일에겐 너무 익숙한 일.
슝.
그는 다시 휴대폰을 집어넣고 정령에게 손을 내민다.
“가자. 외웠어.”
“피잉~!”
-오오
-역시 명문대 ㄷㄷ
-몸이 안 좋으면 머리라도······
-이걸 외워???
-뭐냐 암기력 ㄷㄷ
* * *
지도를 외우긴 했어도, 찾는 과정은 조금 지루했다.
‘이럴 줄 알았다.’
성좌들 숫자를 확인해보니 서브 퀘스트고 나발이고 도파민 좀 줄어드니까 슬슬 빠져나가고 있었다.
[현재 시청 성좌: 789 명]
850명까지 갔던 성좌가 이제 789명.
-언제까지 찾아다니냐
-전 ㅈㄴ 굽네
-난 잠깐 다른 곳 보고 옴~
-사장님 다른 데 둘러보고 올게요 ^^
-찾으면 말해라
그도 그럴 게 누가 이런 지루한 수색 과정을 보고 싶겠나.
준일도 이해한다만.
‘그냥은 못 보내지.’
성좌들의 관심은 준일의 힘이다.
그들이 몇 명이나 보고 있냐에 따라 율리안의 전승 퍼센티지가 바뀐단 말이다.
지금은 전승이 워낙 적어서 1%도 아쉬운 마당이다.
‘상점.’
준일은 그래서 상점을 연다.
짤랑!
[으스스한 BGM]
[재생]
공포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
-······?
-어? 뭐야. 뭐 있나?
-응?
-뭐 나오나??
일명 ‘큰 거 온다’ 작전.
이런 브금이 깔리면 당장 뭐가 시작될 거라 생각해서 못 나갈 거다.
준일은 이 상태로 마을의 둘레길을 따라 한 바퀴 걸었다.
“크흠······ 뭔가 나올 거 같기도 하고.”
괜히 한 마디 중얼거리면서.
* * *
얼마나 걸었을까?
-대체 뭔데
-큰 거 언제 오냐ㅂㄷㅂㄷ
-브금은 계속 나오는데?
-큰 거 언제 옴? 내가 큰 거 마려운데 ㅅㅂ 못 가고 있음
-ㅅㅂ 브금 버그 아님?
성좌들이 사기당한 걸 슬슬 눈치챌 때쯤.
“부우우우!”
정령이 갑자기 사방팔방으로 움직여댄다.
이 근처에 마기가 흐른다는 뜻이다.
-오오 ㅅㅂ
-브금은 과학이라니까 걍ㅋㅋㅋ
-근데 얘 정령 볼 줄 아냐?ㅋㅋㅋ
-ㄷㄷㄷ
-큰 거 온다······!
-???: 설명서를 잘 읽을걸!
정령들은 특유의 소통 방법이 있다.
성좌들은 그가 그걸 제대로 이해 못 할 거라 여겼으나.
“이쪽?”
“피잉!”
금세 방향을 잡는다.
2회차 때 동료 하나가 엘프 마법사였다.
그녀 역시 던전 따위에 들어갈 때 이 정령을 활용했기에, 준일도 보는 법을 알았다.
“음. 뭔가 여기 같아.”
괜히 우연인 척 중얼거려준 뒤.
정령이 알려주는 방향대로 향한다.
으스스한 브금은 계속해서 공포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있고.
“여긴······ 다시 산인데?”
마을 쪽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산이었다.
“이럴 거면 엘프가 직접 오지. 전자파도 없는데.”
점점 해가 져가는 산속은 분위기가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험한 것이 나올 것 같구만.”
우연하게도 이때 으스스한 음악이 클라이막스로 치달았다.
빠암~ 빠밤!
-ㄷㄷㄷ
-ㄷㄷ
-ㄷㄷㄷㄷ
-ㄷㄱㄷㄱㄷㄱ
-헉
-뭔데 ㅅㅂ
다급해지는 성좌들.
‘응. 그냥 우연이야.’
준일은 속으로 웃으며 고소해한다.
그런데—
-온다.
-여기
-으으
-헉
바스락.
수풀이 흔들린다.
‘있다.’
슝.
준일은 인벤토리에서 고블린 칼을 빼든다.
‘뭘까. 엘프가 정화하고 싶은 마기라면······.’
수풀에서 어떤 형상이 드러났는데.
“뭐, 뭐야!?”
그냥 조금 초췌한 인상의 남자였다.
“카, 칼은 왜 들고 그러고 계세요!?”
준일은 저도 모르게 칼을 내밀고 있었는데.
얼른 집어넣었다.
“아······ 뭘 착각하고······ 고블린인 줄 알았죠.”
-ㅁㅊㅋㅋㅋ
-사람이었어?
-응?
-걍 닝겐이네
“각성자예요?”
“예······ 뭐······.”
F등급이라, 각성자라고 하기도 좀 뭐하다.
“아하하. 그렇군요. 저도 각성자입니다.”
“······그래요?”
“예. 저는 마법사예요 하하. 운이 좋죠.”
띵~!
[B]
자신 있게 B등급을 띄우는 마법사.
“오······ B등급······ 운이 존나 좋네요.”
괜히 기분이 조금 나빠지는 준일.
-‘존나’ 좋네욬ㅋㅋㅋㅋ
-열등감······
-초면에 “존나” 좋네욬ㅋㅋㅋ
-준일이 표정ㅋㅋㅋㅋ
-이 새끼 수상한 놈 아님? 브금 안 꺼지는데?
-뭔들 F보다야 ㅋㅋ
-아니 브금 계속 왜 이래 이상한 애 아니냐?
성좌들은 브금 때문에 이 남자를 의심하지만, 그건 그냥 준일이 끄는 걸 깜박했을 뿐이다.
그 수상한 브금 속,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쪽 등급은?”
두둥!
우연일까?
음악이 심상치 않아지기 시작한다.
“여기 분이 아니신 거 같은데. 등급 좀 봅시다.”
갑자기 태도가 바뀌는 남자.
왜 이래? 이 자식?
“멀리서 왔습니다. 서울에서요.”
“그러니까, 당신. 이상한 짓 하러 온 거 아냐? 등급 보자고.”
남자는 이제 아예 살벌한 기색을 풍긴다.
-???: 등급······ 등급을 보자······!
-헉
-ㄷㄷ
-이 질문 때문에 브금이 있었나?
-ㅋㅋㅋㅋㅋㅋ브금 ㅅㅂㅋㅋ
“아니, 무슨 이상한 짓을 해요?”
“여기 산에 모여서 작당을 꾸미는 듯한 남자들이 돌아다닌다고······ 마을에 소문이 흉흉해. 귀신도 돌아다닌다고!”
“그건 엘프예요. 방금 만나고 왔는데.”
“뭐? 하?”
남자는 비웃는다.
“그러니까 당신 등급이 뭐냐고.”
띠링.
결국 등급을 보여주는 준일.
[F]
-헉
-엪밍아웃?
-앗······
-ㅠㅠㅠㅠ
-노약자석 입장권ㄷㄷ
“······!?”
남자는 놀란다.
표정이 오묘하다.
웃긴 거 같은데, 웃지 못하는 듯한.
“아, 에, 에프······ 다, 다행이네. 허튼 짓은 못하겠어.”
그는 안도하는 듯했다.
이에 준일이 묻는다.
“근데 아까 말씀하신······ 그 작당 꾸미는 남자들? 어디서 목격됐답니까?”
왠지 그놈들이 엘프가 말한 이들 같았다.
“이 산 근처, 묘지 쪽 근처 이렇게 대충만 알지 뭐······.”
“그 사람들 찾아다니는 거예요?”
슥.
준일의 눈이 정령 쪽을 흘끔거리며 묻는다.
“응? 그 사람들? 아니야. 내가 찾는 건······.”
남자가 씩 웃더니.
훅!
희한하게 꺾인 단검을 복부에 찔러넣었다.
“시체야.”
-???
-헐
-헉
-말했잖아! 씨발 브금 과학이라고 ㅠㅠㅠ
-이 ㅆㅂ
-아······
-ㅁㅊ??
분명 찔러 넣었다고 생각했다.
“아. 근데 그건 시체가 아니라, 제 잔상입니다만?”
“!?”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준일이다.
-캬 <(_ _)/
-헉
-ㄷㄷ
-잔상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엌ㅋㅋㅋ
-뒤다 애송이 <(_ _)/
-이걸 살아?
-헠ㅋㅋ
-사고슬! 사고슬! 사고슬!
“너······ 너 F등급 아냐?”
“맞는데? 봤잖아?”
“근데 어떻게······.
남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의 움직임 누가 봐도 F등급이 아니잖아.
E등급만 해도 그냥 전투랑은 아무 상관 없는 그냥 생산직인데.
“그야······.”
척.
준일은 강해일처럼 폼을 잡으며 말한다.
“등급은 숫자에 불과하니까.”
여기에 아이템까지.
[봄 꽃 샤랄라 이팩트]
[10느낌(FL)]
화사한 조명과 함께 꽃잎이 흩날린다.
-??ㅋㅋㅋㅋㅋ
-응?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효과 뭔데 ㅁㅊ
-해일이 대사잖아 ㅅㅂ
-엌ㅋㅋㅋㅋ
-챔피언 고블린에 이어서 대사까지 뺏어가냐!?
-갑자기 잘 생겨짐ㅋㅋㅋ
-이것도 뺏어가야 속이 시원했냐!?
-성대모사 뭔뎈ㅋㅋ
남자는 해골이 달린 지팡이를 치켜들며 외쳤다.
“지, 지랄하네!? F등급인 새끼가 그딴 말을 하면 누가 믿냐!?”
-글킨 해
-놀랍게도 S등급 새끼가 한 말이다.
-S등급이 하는 게 더 빡침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ㅇㅈ
우드득.
준일은 손목을 풀어준다.
“그래. 그래. 누구나 믿지 못하더라.”
남자의 해골 지팡이가 스산한 녹색 빛을 내는 순간.
순식간에 준일의 신형이 날아든다.
“처맞기 전까진!!!”
흩날리는 꽃잎과 함께 남자의 턱이 돌아갔다.
뻐억!
-캬
-속이 뻥~!
-ㅅㅂㅋㅋㅋㅋㅋㅋㅋ
-뭔데 이 화사한 화면은ㅋㅋㅋㅋ
-???: 내 턱을 돌린 건 네가 처음이야.
-뭐야 이 이펙틐ㅋㅋㅋㅋ
-처맞고 믿는 거면 그게 믿는 거임?ㅋㅋㅋ 진짜 모름.
39화
< 서브 퀘스트 (3) >
준일이 서브 퀘스트를 받고 난 후.
“야······.”
페어리 주식회사의 모니터링실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
꿀꺽.
샘은 식은땀만 흘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뭐지? 왜······ 어째서······?’
왜 엘프의 서브 퀘스트가 율리안에게 반응한 걸까?
강해일의 사연을 듣고, 그가 마침 적격자여서 시켜야 하는데!
“서브 퀘스트는 절대 안 뺏긴다며.”
“이, 이거 하나가 아니거든요······?”
“절~대 안 뺏긴다며?”
“하, 하나도 안 뺏긴다는 소리는 아닌데······.”
하?
“키, 키리리리!?”
램은 웃었다.
너무 화가 나면 웃음이 나온다.
만약 샘이 그녀를 흑화에서 두 번이나 구해주지 않았다면, 이미 샘을 해고시켜버렸을 거다.
“램 님, 그러니까 계획의 큰 틀은 아직 유지가 되고 있는 거고요······.”
“우리가 사들인 차원에는 이런 격언이 있대.”
“?”
슥.
램이 무언가를 꺼내든다.
은빛의 기다란 막대기였다.
“그게 격언인가요?”
“아니 이건 골프채라는 거야.”
“그럼 격언은······.”
“누구나 계획은 있다.”
“에이. 누구나 있진 않죠. 램 님은 계획 잘 안 짜시잖—”
후웅!
램의 골프채가 활처럼 휘었다.
“처맞기 전까진!!!”
뻐억!!
* * *
뻐억!
준일의 주먹이 남자의 턱주가리에 꽂힌다.
“!?”
남자의 목이 훽 돌아가고 그를 따라 상체까지 회전했다.
그야말로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 정도의 충격.
“컥······!”
헛숨 토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봄 꽃 샤랄라 이팩트]
여기에 아름다운 빛, 흩날리는 꽃잎과 함께.
털썩—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듯 쓰러진다.
-ㅁㅊㅋㅋㅋㅋㅋ효과 뭔뎈ㅋ
-속이 뻥~!
-앜ㅋㅋㅋㅋㅋ 너무 아름답게 맞는데?
-왘ㅋㅋㅋㅋㅋ
-상황은 살벌한데 효과는 로코여?
-좀 봐줬네 ㅋㅋㅋ 머리에 구멍 나야 하는데
-마나 안 썼네ㅋㅋ
성좌들의 말대로다.
좀 봐줬다.
이대로 죽으면 안 되니까.
턱.
준일이 남자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린다.
“너.”
“느에······ 예!?”
매우 공손해진 남자.
한 대 맞아보니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이제 등급이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믿어? 안 믿어?”
“미, 믿습이다아!”
-아까 뭐 F급이니 뭐니 하더닠ㅋㅋ
-예절 주입 펀치 ㄷㄷㄷ
-이게 그렇게 중요한 거냐곸ㅋㅋㅋ
-바로 믿어버리기~ㅋㅋㅋㅋ
남자는 확실히 교육이 되었다.
다만 발음이 좀 샌다. 턱이 심하게 깨져서 그렇다.
“네크로맨서지?”
“아, 아히여······.”
“뭘 아니야. 이 새끼야. 관상이 딱 네크로맨서구만.”
“아, 아히 그런 게 어디이나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관상이 ㅋㅋㅋㅋ
-관상 추리 ㄷㄷ
-ㅁㅊㅋㅋㅋㅋㅋ
-좀 해골 같이 생기긴 함.
“너 그럼 지금 이게 뭔지 알겠어?”
준일이 손가락으로 정령을 가리킨다.
“······?”
남자는 대답하지 못한다.
안 보이는 것이다.
부우우우웅!
정령이 사력을 다해 움직이고 있는데도.
“안 보이지?”
“······.”
엘프가 빌려준 정령은 빛의 정령 중 가장 하급. 루미온.
이 녀석들은 사실 자신이 허락한 존재들에게만 모습이 보인다.
네크로맨서라고 안 보이는 게 아니다.
그런데 준일은 그냥 성좌들을 위해서 말하는 거다.
이래야 얼추 추리한 것처럼 보일 테니까.
“그러니까 이거 딱 봐도 이상한 놈 아니야? 왜 이게 안 보이는데? 어?”
“그······ 그헐 제하 어흐케······.”
“나쁜 새끼니까 안 보이지!”
퍼억!
바로 정강이를 걷어차버리는 준일.
남자의 다리가 다소곳이 꺾여버린다.
왠지 부러진 것 같았다.
꽤 심한 고통을 호소한다.
“아아아아아악! 마, 마쟈여!”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앜ㅋㅋㅋㅋㅋㅋ
-인어공주 킥 ㅋㅋㅋㅋㅋ
-ㅇㅈ 네크로맨서 맞는 듯 생긴 게 해골이잖아?
“너 친구들 더 있지? 어? 어딨어?”
“에? 아, 아히에여······.”
“10.”
“시, 십?”
“9.”
“!”
갑자기 숫자를 세는 준일.
그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이 녀석이 네크로맨서라는 걸 확신하는 걸 넘어, 한 명이 아니라고.
‘아까 언급했던 이상한 남자들이 있다는 거.’
그거 본인 이야기다.
그는 용사 시절 나쁜 놈들을 워낙 쳐 죽여 봐서 알고 있다.
그들이 불안하거나, 능청 떨 때 하는 말 습관.
자신들의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어버린다.
역으로 가장 숨겨야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말한다.
인간은 불안하면 원래 그렇다.
계속 상대한테 자기 얘기를 하며 확인받고 싶은 심리.
‘다 보인다고.’
사실 추리도 필요 없다.
얼굴만 대충 봐도 척척이다.
명탐정 코난을 200권 읽으면 트릭은 몰라도 범죄자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용사짓거리 7번, 30년의 인생은 만화책으로 치면 수천 권 분량.
‘나쁜 놈들은 그림체부터 다르다니까?’
그들이 어떻게 뭘 했는지는 몰라도, 페어리 주식회사 세계관에서 설정된 빌런들의 얼굴은 대충 알게 되는 거다.
코난은 증거가 필요하지만, 율리안은 범인만 알면 그만이다.
“6.”
“저, 저 혀, 형임? 수, 수짜는 왜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냅다 숫자 ㅋㅋㅋㅋ
-???: 진실은 숫자에 불과해.
-뭔 카운트 다운인 거냐고 ㅋㅋㅋ
-개무서엌ㅋㅋ
-아니 심지어 아직도 브금이 으스스한 브금이라 ㅈㄴ 무섭넼ㅋㅋ
남자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그는 브금도 안 들리는데.
그냥 왠지 자기 인생 마지막 카운트인 거 같아서다.
“5.”
“마, 마하께여어어! 그, 근데!”
남자가 두 손을 올리며 애원했다.
말한다고.
“아, 아하서······. 아파······ 마, 마흘 모태여!”
아파서 말을 못한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4.”
“저, 저으어! 저으히! 저히!”
“3.”
벌떡!
다리가 부러진 남자가 기적처럼 일어났다.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
-지져스 크라이스트!
-이걸 일어날 수 있다니;
“저, 저으······ 저으히!”
“2.”
두둑!
그는 스스로 턱까지 돌려 교정하더니. 정확한 발음으로 외친다.
“저, 저기! 저기예요! 저기로 가시면 저희 애들이 지내는 동굴이······ 이, 있습니다! 거기가 아지트입니다! 형님!”
“음. 안내해.”
준일은 끄덕인다.
“예!”
-아니 ㅋㅋㅋㅋㅋㅋ
-숫자만 세는데 치료가 되는 마술ㄷㄷ
-캬
-아니 턱까짘ㅋㅋㅋㅋ
-통솔력 지리네;
-이 새끼가 그냥 대학생이라고······?
* * *
“저······ 여, 여깁니다.”
“그래?”
한 동굴을 가리키는 남자.
‘저건 원래 고블린 굴인데.’
보아하니 저 동굴은 고블린들이 파놓은 거다.
고블린들을 죽이고 네크로맨서가 여기서 생활하고 있는 거 같다.
‘대충 흔적을 보아하니······ 한 열다섯?’
준일도 이 정도로 가까이 오면 마기를 꽤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바로 옆에 있는 요정이 열심히 움직이며 무슨 문양을 그리고 있었으니.
피잉~ 피이잉~!
더 추측하기가 쉽다.
음습하고 축축한 분위기에 성좌들이 불쾌해한다.
-와 뭐야 여기???
-흑마법사 새끼들은 왜 맨날 이러냐
-별 놈이 다 있네
-근데 지금 레벨 10 찍고 살아남은 애들이면 보통 인간들 아닐 듯
-ㅅㅂ 얘네 열 명 넘는데???
이곳의 음침한 기운은 성좌들도 뭔가 불쾌하다고 생각했는지, 각자 마구 추측을 말하고 있었다.
준일이 여기서 제일 신기한 점은 ‘숫자’다.
해일이 말하는 그런 숫자 말고 진짜 숫자.
‘열 명이 넘는다고 성좌들도 말하는 거 보면 진짜인데.’
왜 이렇게 많은 거지?
준일은 옆의 남자에게 묻는다.
“근데 네크로맨서가 그렇게 흔한 클래스가 아닐 텐데. 어떻게 여기 모인 거지?”
“그······ 오픈 채팅방 같은 게 있었습니다. 네크로맨서들은······ 그······ 저, 저희만의 사정이 있거든요.”
-ㅅㅂㅋㅋㅋㅋㅋㅋ
-오픈 채팅방 네크로맨서 ㅁㅊㅋㅋㅋ
-엌ㅋㅋㅋㅋㅋ
-생각보다 ㅈㄴ 귀엽게 모였네 ㅋㅋㅋ
불쾌한 마법에 관련된 놈들은 늘 자기들끼리 모여서 일을 도모하곤 했다.
여기서도 그건 똑같은 모양이다.
다만 현대식으로 오픈 채팅방에서 모인 것뿐.
‘아니. 이거 더 위험하잖아?’
자기들끼리 동굴에서 편지 날려 주고받던 거에 비해 너무 첨단이다.
“너희 사정이란 게 사람 죽여서 시체 만드는 거냐?”
“그······ 저,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처음엔 그냥 네크로맨서끼리 뭉쳐서! 그, 그러면 우, 우린 군단이다······ 이 말에 혹해서 모였는데. 여기 수장은 미, 미친놈이······.”
그때였다.
그가 뭔가 발설하려 해서였을까?
화르륵!
갑자기 몸에 불이 붙었다.
“끄, 끄아아아아아악!”
-헉
-ㄷㄷ
-엥?
-헉
-엥???
-헐
성좌들은 매우 놀라는 눈치였으나.
준일은 그저 한걸음 멀어질 뿐.
주변을 더 빠르게 관찰한다.
이게 뭔지 아니까.
‘표식까지 새겼어.’
함구의 표식.
특정한 내용을 외부인에게 말하려 하면 발동된다.
“뭐, 뭐야아아악! 끄, 끄아아아악! 나, 나한테 뭘 한 거냐아!?”
근데 남자의 반응으로 보아 본인이 그런 표식을 새긴 줄도 모르는 거 같다.
‘패션 문신인 줄 알고 새겼냐?’
준일은 한심하다는 듯 비웃는다.
이런 동굴까지 파고 들어와서 군단을 만든다는 헛된 망상을 갖고, 서로 표식을 새기며 소속감을 느꼈을 게 뻔히 보여서다.
‘근데 누구지? 벌써 이렇게 체계적인 게?’
당한 놈들은 한심하지만, 설계자는 보통 놈이 아니다.
이 정도면 현대 인간의 적응력이 맞나 싶다.
대한민국에 사람 한 번 못 죽여 본 놈들이 태반일 텐데.
네크로맨서들끼리 조직을 이뤄서, 이런 표식까지 새기고, 시체를 조달한다?
‘여기 놈이 아닌가?’
이 네크로맨서의 수장이란 녀석.
엘프처럼 어디서 건너 온 건가?
그때였다.
“감히 금단의 구역에 발을 들여놓은 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목소리로, 검은 로브를 쓴 이들이 사방에서 하나둘 나타났다.
“심지어 우리 형제 중 하나를 불태워!? 뭐 하는 놈이지?”
달그락.
그들의 옆엔 꽤 많은 숫자의 해골들이 서있었다.
전부 양손에 무기와 방패를 든, 해골 병사들이다.
준일은 숫자를 파악해본다.
‘이건 너무 많은데?’
정면 돌파로 이길 숫자는 아니다.
이쪽도 손실이 클 거다.
‘게다가 아직 퀘스트도 못했어.’
마기의 원인을 알아내야 하는데.
근처도 못 갔다.
좀 더 영리하게 접근해야 했다.
가끔 바보 -1회차 율리안- 같은 놈들이 힘이 생기면 힘으로만 돌파하려는데.
전쟁의 기본은 기만과 계략.
“아, 아닙니다! 전 아닙니다!? 저, 저건 제가 불태운 게 아니라······ 갑자기 지 혼자 불 탔어요! 꼭 악플러들처럼······.”
-?
-??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ㅅㅂㅋㅋㅋㅋㅋ
-아니 근데 진짜긴 함ㅋㅋㅋ
-팩트) 다.
“뭐?! 뭐라는 거야 이 새끼야! 사람 혼자 불타는 게 말이 되냐!?”
준일은 흥분하여 허공에 지팡이를 휘두르는 남자의 팔목을 슬쩍 쳐다봤다.
표식이 보인다.
‘표식······’
수장은 아닌 거 같다.
수장은 아직 어딨는지 모습이 감추고 있다.
‘잠입해야 된다. 일단 이 위기부터 벗어나야······’
준일이 불태워 죽인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한다.
그런 걸 어떻게 하냐고?
이럴 때만큼은 치트키에 가까운 능력이 하나 있다.
“아니 저, 저는 이런 능력이 없습니다!”
준일은 이 세상에게 부여받은 유일한 스킬을 발동한다.
띵!
[F]
엪밍아웃!
“······?”
“에, 에프?”
“응······?”
“헐. 어떻게 에프가······.”
“이런 쯔쯧.”
“나무관세음보살.”
F라는 알파벳을 보고 모두 숙연해지는 분위기.
-앗
-헉
-ㅋㅋㅋㅋㅋㅋ
-ㅁㅊㅋㅋㅋ
-네크로맨서들도 숙연해지는 등급······
-ㅅㅂㅋㅋㅋㅋ
-탈모급이네 취급이
F등급의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 더 이상 준일을 의심할 순 없었다.
“뭐······ 그럼 좋다. 무슨 일로 온 거지?”
“저는 짐꾼입니다. 여기 형님이 물건을 좀 실어 날아달라 해서 왔지요. 근데 갑자기 이렇게 불타 버리셔서 놀랐습니다.”
용사 5회차부터였나?
싸우기 전에 사기부터 치는 게 기본이었던 율리안.
그의 연기력은 수준급이었다.
이제 막 이 상황을 맞이한 자들이 간파할 수 있는 정도가 못된다.
순진무구한 눈동자와 두려움에 떠는 목소리.
너무나 진실로 보인다.
“옮길 거?”
이들은 이미 그의 말을 믿고 있다.
“아마······ 그······ 시, 시체 같았습니다.”
네크로맨서들은 시체를 운반할 일이 많았다.
다만 그걸 옮길 힘이 부족해서 늘 대신 일해줄 좀비형 소환수를 부리는데.
지금 여기에 보이지 않는다.
‘아마 필요하겠지.’
네크로맨서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끄덕인다.
“음······.”
“어때?”
“말 되는데.”
“그렇군.”
여기서 리더로 보이는 이가 불타 죽은 남자의 시체를 가리켰다.
“그래? 그럼 저 시체부터 들어라. 얼마나 잘드냐 보자. F등급인데.”
준일은 끄덕이며 남자의 시체를 들어 인벤토리로 넣어버린다.
슝.
“저는 힘이 좋은 스타일이 아니라······ 이런 스킬이 있습니다. 그냥 이렇게 보관해서 필요할 때 꺼낼 수 있죠.”
네크로맨서들에게 딱 필요한 스킬일 거다.
“······오?”
“이, 이건······.”
“뭐야. 우리한테 딱이잖아?”
“그럼 좀비 만들지 말고 그냥 쓸까요?”
“그래야겠어.”
힘이 좋은 형식의 짐꾼이면 죽여서 좀비로 만들려 했던 네크로맨서들.
그들은 서로 모여 잠시 끄덕이더니.
준일에게 말한다.
“좋다. 왜 데려왔는지 알겠군. 따라 들어와라. 짐꾼. 네가 할 일이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