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 네크로맨서 부장님 (1) >
준일이 떠나간 공동묘지.
본래 적적하고 한가하던 이곳에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엘프가 여기 있는 게 맞아?”
“응. 분명하다니까?”
“아니 전혀 없잖아?”
각살법에서 엘프 사진을 보고 찾아온 이들이 서로 휴대폰으로 위치를 비교해가며 두리번거린다.
이들이 그리 큰 소란을 일으키는 건 아니었다만, 엘프 입장에선 거슬린다.
‘보내야겠어.’
우우웅······!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에 이채가 스치더니.
그녀를 중심으로 거대한 돔형의 막이 펼쳐진다.
팟!
그 돔은 묘지 전체를 덮고도 남을 만큼이었으니.
“어······?”
“여, 여기 아닌가봐.”
면역력이 없는 자들에게 인식 저하를 일으키는 마법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찾아온 이유조차 희미하게 기억하게 됐으며.
“뭐지. 왜, 왜 왔더라?”
“막국수 맛집 간다며.”
“아.”
저들도 모르는 사이 이 묘지를 벗어났다.
‘어차피 세계수가 날 부른 이유는 해결될 것 같으니.’
엘프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들의 태초의 어머니, 세계수와 인식이 연결되어있다. 그러니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미 그녀가 적절한 사람을 보냈다는 걸.
그런데 이는 사실 반만 맞는 깨달음이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낸 건 맞았으나, 본래 점지되었던 이를 보낸 게 아니었다.
“······음?”
엘프는 시력이 상당히 좋다.
저 멀리 고원 쪽 묘지 앞.
아직도 그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비석에 기대어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내 마법이······ 안 먹히네.’
희한했다.
이곳의 인간 정도라면, 모두 어리둥절해하며 그냥 발걸음을 옮겨야 하거늘.
‘상심이 큰가.’
아마도 그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이 인지 저해를 이기고 있는 것이다.
‘뭐. 상관 없지.’
엘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을 피곤하게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으니 되었다.
* * *
“아니! 이 뾰족귀 새끼야! 쟤라고! 쟤한테 퀘스트를 주라고 불렀더니! 뭐하는 거야아!”
램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나.
당연히 저기까지 들릴 리가 없다.
“지······ 진정하시죠. 램 님. 서브 퀘스트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만 날도 아닙니다.”
“샘. 푸시업 더 하고 싶어?”
“아, 아뇨······.”
샘은 현재 엎드려 뻗친 채로 말하고 있었다.
굴욕적이긴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첫 번째 서브 퀘스트가 율리안에게 날아간 건 진짜 치명적이니까.
“너 아까 푸쉬업할 때 날갯짓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어?”
헉. 들켰나?
샘은 필사적으로 이 사태의 변명을 찾아본다.
“그, 그······ 여튼! 율리안의 격이 아직 엑스트라입니다. F등급에 비해 성좌 수가 많은 것이지······ 천 명을 넘기진 못할 거예요.”
스토리보드 설정상 율리안은 엑스트라였다.
그러니 성좌들에게도 그는 확연히 엑스트라적으로 보인다.
대충 그려진 듯한 필터가 씌워진 것이다.
그가 언제 죽을지 배팅하는 성좌들도 있다.
엑스트라치고 좀 나대는 걸 보니 금세 죽을 거라면서.
즉, 율리안이 아무리 활약해도 성좌들은 그를 엑스트라로 인지한다.
그만큼 이야기 판이 정해놓은 격을 뚫기란 매우 어려우니.
율리안의 성좌가 900명 언저리에서 왔다 갔다 하며 횡보하는 것이다.
“야······ 애초에 900명까지 간 게 미친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어? 어디서 궤변이야!”
램이 샘에게 다가가 얼굴을 발로 톡톡 건드렸다.
“그, 그래도 더 이상 최악은 없다는 거니까요······ 히······ 히리리······.”
“······하. 됐다. 일어나.”
“예!”
부웅~
샘이 날갯짓하며 위로 날아올랐다.
램은 그를 보며 온갖 애증을 느꼈으나, 더 이상 말하는 걸 그만두었다.
“그래 샘. 인정할게. 너 할 만큼 해줬어. 네 잘못 아닌 거 알아.”
“······가,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것도 인정할게. 율리안? 너 재능 있어.”
율리안까지 인정해주는 램.
이 정도면 많이 양보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야. 엑스트라치곤 많이 왔어.”
“마, 맞습니다. 이 이상 영향력을 넓히기는 힘들 거예요.”
“응.”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다.
이 생각이 램을 오히려 안정시켰다.
‘이제부터 잘 해나가면 되는 거야.’
약간의 소동이 있었지만 최신 스토리보드 3.0을 탑재한 현대판타지 기획은 본사의 자원까지 지원받아 만들어진 엄청난 블록버스터였고.
모여든 성좌들의 수도 굉장했다.
현재 페어리 주식회사 지부 내의 차트에서 엄청난 기세로 질주하고 있다.
이대로 완결까지 성적을 잘 뽑아낸다면······
팸?
그딴 양산형 이야기 요정 녀석은 바로 관짝에 처박아버릴 수 있을 거다.
‘응? 관짝?’
램은 갑자기 떠오른 게 있었다.
“근데 샘?”
“네?”
“해일이 아버지 시체······ 어떻게 되는 거야?”
강해일 아버지의 시체.
이 묘지에 있었다.
“네?”
“아니, 그거······ 네크로맨서들이 가져갔잖아.”
그리고 네크로맨서들은 이 묘지에서 시체를 털어 공급해왔다.
“그래서 해일이가 저기로 가야 되는 거잖아? 맞지? 내 기획은 그랬는데?”
“······그, 그쵸.”
“기획대로 했어?”
“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
* * *
“자, 여기 시체들을 네가 쓰는 그 창고로 넣어봐.”
네크로맨서들 중 하나가 준일에게 명령했다.
그가 무심하게 가리킨 땅굴의 통로엔 수도 없이 많은 시체가 줄지어 있었다.
-ㄷㄷㄷ
-헐
-헉
-뭐야??
-와······ ㅁㅊ새끼들
-설마 다 죽인 거야?
-ㄷㄷㄷ
-뭐야
-인체신비전이 왜 여기에?
-이게 다 묘지에서 가져온 거??
‘아니 무슨 시체가······ 이렇게 많아?’
성좌들은 물론 준일조차 깜짝 놀랄 정도의 양이다.
용사질 할 때도 이런 흑마법사 계열 놈들의 본거지를 수도 없이 털었지만, 대충 예상치라는 게 나오기 마련이다.
이 근방에는 이 정도 시체가 있겠구나.
이런 적정치가 있는데.
‘뭐지. 이 숫자는?’
여긴 지금 그 예상치를 상회하고 있다.
뼈만 남은 시체도 아니고, 살도 다 붙어 있는 시체들이 즐비하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느낌이다.
심지어 애들도 있다.
‘이런 씨······.’
이런 걸 현대인들이 이렇게 늘어놓고 태연하게 있을 수 있다니.
네크로맨서가 되면 기본 특성으로 양심이라는 게 사라지는 걸까?
“이거 다 넣을 수 있는 거지? 네 능력이라면 말이야.”
“아······ 예. 딱히 한계를 느낀 적은 없습니다.”
턱.
네크로맨서가 준일의 어깨를 짚으며 좋아한다.
“하하. 마침 묘지 다 털었을 때 딱~ 이런 인재가 왔네? 어?”
그랬다. 공동묘지.
그곳이 이들의 시체 수급처였다.
물론 준일도 그 정도는 예상했다.
애초에 아지트 위치가 그러니까.
‘근데 묘지의 시체들은 대체로 뼈뿐인데.’
묘지에 묻혀 있던 시체들을 가져온 경우, 하얀 백골인 경우가 태반이다.
근데 여기 시체는?
최근에 죽은 자들이다.
준일은 이게 의아했는데.
네크로맨서들끼리 떠드는 이야기에 답이 있었다.
웅성웅성.
‘응?’
준일은 귀에 마나를 집중시키며 최대한 자세히 듣는다.
“······4호선 사태 때 죽은 사람들 일부가 여기서 합동 매장했다더니. 상급 시체가 엄청나군······.”
준일은 멈칫했다.
‘4호선?’
-헐
-ㄷㄷ
-앗······
-얘 칸 빼고 다 죽은 그 사건이네 ㅋㅋ
-ㅠㅠ
-창훈이는 여기 있을 뻔했는데 ㅎ
4호선 사태.
준일의 칸은 살아남았지만, 최초의 고블린 난동 중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합동 장례를 치른 시체를 이 묘지에서 받아준 것 같다.
그래서 비교적 최근에 죽은 시체들이 많은 거다.
네크로맨서들은 좋다고 웃는다.
“으흐흐. 이제 우리도 뼈다귀 놈들한테 의지할 필요가 없겠어.”
“근처 보육원 애들 몇만 더 제단에 바치면 이제 끝이군.”
“그럼. 이런 질 좋은 시체와 붉은 마나라면 더 상위 종속도 만들 수 있지.”
“옮기는 게 너무 힘들어서 큰일이었는데. 오진이가 이렇게 짐꾼도 데려왔으니. 우리 인생도 피겠어.”
오진이는 아마 불타서 죽은 그 남자일 것이다.
그들은 오진을 언급하다가 숙덕인다.
“근데, 그······ 오진이 불탄 거 말이야. 소문 들었어?”
“뭐?”
“우리 보스에 대해서 언급하려다가 그렇게 됐다는데.”
“······응?”
“그런 저주가 있다더라고.”
“······.”
그들은 그 말에 갑자기 입을 꼭 다물었다.
허튼 소리했다가 본인들도 갑자기 불타 사라질 수 있으니까.
“아니, F급! 멍때리고 뭐해?! 어?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넣으라고. 넣을 수 있다며? 왜? 시체라서 못 만지겠냐?!”
탁. 탁.
한 네크로맨서가 해골 지팡이를 몽둥이처럼 자신의 손에 치면서 윽박지른다.
‘근데 아직 마기의 원인이 파악 안 됐는데.’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이런 허접 네크로맨서들이 모여있는 정도로는, 엘프도 정화를 운운하지 않는다.
뭔가 더 있을 거다.
준일은 일단 어리숙한 척이라도 해본다.
“아······ 그게······ 아, 아무래도 이렇게 시체를 옮기는 거라고는 못 들었는데······ 우, 우우욱······!”
헛구역질하며 시간 끌어서, 하다못해 누가 여기 수장인지라도 알아야 했다.
진짜 보스는 어딨는지 몰라도, 이 현장에서라도 누가 직급이 제일 높은 건지.
“뭐? 이거 F급이 아니라 Fㅖ급아냐? 어? 으하하하?!”
부장님 개그.
거기에 웃어주는 네크로맨서들.
준일은 곧바로 계급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 아하하하하하!”
“으, 으아하하하! 아, 아이고 Fㅖ급이라니! 폐급의 ‘ㅍ’을 ‘F’와 교차시켜서 만든 화려한 언어유희잖아!?”
-ㄷㄷㄷ
-여기 군기 빡세네
-얘네도 힘들구나
-네크로맨서 부장님 ㄷㄷ
그때였다.
이 부장님 개그에 성좌들 중 하나도 충격을 받은 걸까?
띠링.
[히든 퀘스트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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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네크로맨서 몰살
보상: 300느낌(F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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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진 글자 하나 없이 명확한 오더.
‘오?’
300느낌이라는 보상에 준일은 순간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300느낌?’
서술트릭 환도의 가격이 1 마음이었으니까.
30%나 되는 돈이다.
‘······어쩌지.’
서브 퀘스트를 위해 정보를 알아낼까?
아니면 이 히든 퀘스트가 먼저일까?
씨익.
준일은 허튼 고민이라는 걸 깨달았다.
‘율리안의 방식대로.’
사실 히든 퀘스트와 서브 퀘스트는 서로 다르지 않았다.
“왜. 신입. 웃기냐? 너도 웃어 임마. 눈치 보지 말고. 으하하하.”
준일의 표정이 밝아진 게 본인의 위트 때문인 줄 아는 네크로맨서 부장.
턱, 턱.
그가 준일의 어깨를 두들기며 다독인다.
“자, 이제 우리 한바탕 다 기분도 좋아졌으니까 할 수 있겠지? 시체 옮겨. 별 거 아니야. 그냥 고깃덩어리라니까, 인간이란 건? 나이마다 육질도 다르잖아?”
“그······ 근데요. 형님께서 보수도 약속하셨거든요.”
“뭐? 보수?”
부장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네크로맨서들끼리 시선이 마주친다.
‘그래. 그냥 좀 주, 주죠?’
‘우린 마법사라 힘이 없어서······ 몇 푼 얹어 주는 게······.’
이런 속마음을 주고받는 듯하더니.
“좋아. 얼만데.”
“하······ 그, 그게······ 30억이요.”
-?
-???
-?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
-뭔데 ㅋㅋㅋ
-ㅅㅂ 30억ㅋㅋㅋㅋㅋ
“뭐? 이 새끼가 좀 놀아주니까 장난하나? 야······.”
터억—
부장이 무서운 척하며 어깨에 손을 얹는다.
“너 납치된 거야. 이 새끼야.”
살벌해진 분위기.
“헉······.”
“보수 얼만지 똑바로 다시 말해. 국물도 없기 전에.”
“30억이요.”
“······뭐?”
“한강뷰 아파트요! 개새끼야!”
푸욱!
어느새 튀어나온 고블린의 단검이 네크로맨서 부장의 턱을 뚫고, 뒤통수 밖으로 튀어나왔다.
“!?”
“······!”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질러버렸다······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드디어
-언제하나했닼ㅋㅋㅋㅋ
-ㅅㅂㅋㅋㅋㅋㅋ
-사고슬! 사고슬! 사고슬!
그리고 네크로맨서들에겐 죽음이나 다름없는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멋진 BGM]
[재생]
“너희들이야 말로······.”
준일이 무심하게 칼이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한다.
후두둑.
“납치된 거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
-리버스 납치 ㅋㅋㅋ
-캬
-크
-“멋진 음악”
-참교육 가즈아~
-이 씹새끼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와 ㅠㅠㅠ 드디어!
-시체박이 새끼들 참교육 드가자~
41화
< 네크로맨서 부장님 (2) >
흑마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미신이나 주술에 가까운 저주 계열부터, 악마와 직접적으로 계약하는 빙의 계열까지.
흑마법의 방식은 너무도 각양각색이라 하나로 싸잡아 말하기 어렵지만.
‘징글징글한 새끼들.’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토악질이 나온다는 것이다.
굳이 정의감이 넘치는 동물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눈앞에서 약한 고양이를 괴롭히는 인간을 보면 거부감이 드는 것처럼.
별의별 일 다 겪었던 용사조차, 흑마법을 쓰는 자들을 보면 늘 거부감이 들었다.
그야 흑마법의 결과는 다양해도 그 근원이 늘 하나였기 때문이다.
‘가장 약한 자의 고통.’
그들이 가장 선호하는 제물이 어린이다.
가장 약한 이들.
그들에게서만 나오는 정순한 마나를 뽑아내는데.
그 과정에서 고통은 필히 동반된다.
그들의 고통이 곧 붉은 마나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이들의 동력원.
그건 네크로맨서든 리치든 악마와 계약한 놈이든.
흑마법이라고 하면 늘 비슷했다.
그래서 준일은 이때 내심 통쾌했다.
[히든 퀘스트 발견!]
성좌와 그의 마음이 통했을 때.
==== ====
목적: 네크로맨서 몰살
보상: 300느낌(FL)
==== ====
‘너구나, 제일 높은 놈이.’
푸욱!
고블린 단검으로 순식간에 네크로맨서 부장의 턱을 뚫어버린 것도 그 때문이다.
네크로맨서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무, 무슨······!?”
“저 새끼 뭐야!? F급 아니었어!?”
“짐꾼이라며!”
당황한 네크로맨서들.
그들이 부랴부랴 지팡이를 꺼내 휘두르려 하지만.
너무 느렸다.
전문 용사 율리안을 앞에 두고 당황하여 주절주절 떠든 순간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준일의 신형이 쏜살같이 튀어나와 그들의 코앞에 당도해 있었고.
푸른빛의 검격이 날아들었다.
촤아악!
촤악!
지팡이를 든 팔 여럿이 거의 동시에 잘려나간다.
‘미친?’
‘헉.’
자신들의 팔이 날아가는 걸 보며,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못한 채.
‘아······ 안돼.’
다시 한 번 횡으로 그어지는 검격에 셋의 상반이 동시에 고꾸라진다.
촤아악!
-ㄷㄷㄷ
-헉
-셋을 한 번에 와 ㅋㅋ
-이야
-걍 이 브금 나오면 다 뒤지는 거야ㅋㅋ
‘셋은 아웃.’
이곳에 있는 네크로맨서 숫자는 이미 세어뒀다.
열여섯이었다.
‘남은 거 열셋.’
복병이 있는 게 아니라면 열셋 남았다.
지금부터가 약간 문제다.
셋의 캐스팅은 성공적으로 막았지만.
우웅!
“이, 일어나라!”
다른 네크로맨서들이 마법을 시전하며, 녹색의 마법진이 바닥에서 빛을 낸다.
준일의 눈이 빠르게 움직인다.
‘캐스팅하는 건 넷.’
넷이 동시에 여러 곳에서 캐스팅한다.
주위에 널린 뼈들이 파르르 떨며 공중에 뜨기 시작한다.
‘너부터.’
훙—
준일이 곧장 그쪽으로 칼을 내던진다.
거리가 꽤 있어서 이게 맞겠어? 라고 생각하는 안일한 자의 동공.
——푸욱!
단검은 그 눈을 관통해 정확히 뇌까지 찌르고 들어간다.
“!”
역시나 비명조차 못 지르고 자신이 일으키려던 스켈레톤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네크로맨서.
“미, 미친?”
“뭐야 무슨 마법이야!?”
그들이 보기에 이 단검 투척은 마법에 가까웠다.
-ㅋㅋㅋㅋㅋㅋ마법 ㅇㅈㄹ
-충분히 강한 물리력은 마법과 구분이 안 된다······
-마법 수준이긴 함ㅋㅋㅋ
-뭐냐 ㄹㅇ
-ㅈ간지
이제 캐스팅 하던 놈은 셋 남았고.
통—
준일이 발을 튕겨 몸을 가벼게 띄우더니.
‘순보.’
신형이 흩어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팟!
캐스팅하는 다른 네크로맨서들 바로 앞.
“어, 언제!?”
“뭐야!”
“저 새끼 이제 무기 없어! 계속 캐스팅 해!”
분명 말 그대로 맨손이었으나.
슝.
허공에서 칼이 나타나고.
“칼이 없다뇨? 저 짐꾼입니다만?”
곧바로 휘둘러진다.
촤아악!
붉은 피가 동굴 벽에 흩뿌려진다.
“미친, 이게 무슨 짐꾼······ 커헉!”
푹!
그사이 한 놈의 복부로 칼이 꽂힌다.
다르게 죽은 네크로맨서 둘이 동시에 쓰러진다.
털썩!
‘한 놈은 피했네.’
그러나 하나 남았다.
“캐스팅 끝났다! 넌 뒤졌어!”
결국 캐스팅 성공.
시체가 꿈틀거리며 일어난다.
살이 붙어있는 시체로 만들 수 있는 종속.
[구울 Lv.12]
구울.
그것도 두 마리, 레벨이 12나 된다.
챔피언 고블린이 레벨 15였던 걸 고려하면 상당한 편.
“크어어어어······!”
타닥!
그 녀석이 네 발로 뛰다시피 달려든다.
네크로맨서가 웃으며 외친다.
“가라! 몸통 박치기!”
그런데, 구울이 몸통을 박기 전에 다른 게 먼저 박혔다.
푸욱!
“어······ 라?”
어느새 눈에 단검이 박힌 것이다.
그는 웃던 그대로 뒤로 넘어간다.
쿵.
“또 당하냐?”
-크 <(_ _)/
-정확도 뭔데 ㄹㅇ??
-응 고블린 단검 개많아~ 던지면 그만이야~
-이게 짐꾼? 이게 짐꾼? 이게 짐꾼?
-엌ㅋㅋㅋ
-캬
그가 애써 소환한 구울 두 마리도 넘어지며 쓰러져 다시 시체로 돌아간다.
‘이래도 많이 남았네.’
그러나 결국 다른 방향에 있던 놈들은 소환에 성공했다.
심지어 이들은 전략을 바꿨다.
“불 꺼!”
“저 새끼한테 보이지 마!”
“젠장 F급 아니잖아 저거! 뭐냐고!”
그들은 이제 준일의 강함을 인정했다.
일제히 흩어져 도망치며 코너나 기둥 뒤에 숨어, 그 상태로 캐스팅만 한다.
우우웅!
“하. 이 귀찮은 새끼들.”
달그락.
우측에선 스켈레톤이 두 마리씩 일어서고.
“크르르르······!”
“크르르······!”
“큭륵!? 큭······.”
좌측에선 수많은 구울들이 천천히 다가오며 압박해온다.
무지성의 고블린 스웜을 상대할 때와는 다르다.
적은 전술을 구사하며, 심리전까지 사용하는 인간.
생각보다 많은 양에 성좌들도 당황한다.
-너무 많은데?
-으
-한 명당 두 마리씩만 만들어도 ㅁㅊ 몇 마리야?
-준일이 숫자 많으면 좀 못잡던데
-사고슬 설마 지냐?
-뭐야 밀려??
-ㅠㅠㅠF급 치곤 잘해왔다······
-아직 브금 나오는데
‘피곤한데.’
준일의 전투 방식은 숫자가 많아지면 불리하다.
이는 율리안 시절에도 비슷했다.
그는 아주 강한 적 하나를 상대하는 걸 중심으로 훈련해왔다.
용사란 결국 마왕을 잡는 존재니까.
이렇게 다수를 한 번에 처리하는 건 용사 파티에 늘 존재하던 마법사가 할 일.
물론 지금의 Fㅖ급 짐꾼 준일에게 그런 파티원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게 있지.’
다행히 그에겐 비슷한 게 하나 있다.
척.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반짝이는 검보라빛 반지.
[그래비티 링]
챔피언 고블린 던전에서 얻은 아이템이다.
무려 영웅 등급의 반지였고.
이 반지는 중력 마법을 하나 쓸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어떻게 써야 한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적혀 있었지만.
‘마법의 기본은 이미징.’
율리안의 파티엔 늘 마법사가 하나씩 있었고.
그는 마법을 쓰진 않아도, 그 지식만큼은 수도 없이 습득했다.
슥.
그가 상상으로 영역을 지정하며 마법을 발동시킨다.
[그래비티 필드]
[지정한 지역에 강력한 중력장을 생성하여 적들을 한곳에 모아 무겁게 짓누른다. 재사용 대기 시간 2시간.]
쿠웅—
푸른 마나가 진동하더니, 검보라빛으로 산화하며 대지와 공기를 짓눌렀다.
말 그대로 공간 전체가 찌그러진다.
콰드드드드득!
바위가 무너져 돌이 되고, 또 그것이 바스러져 모래가 되었으니.
그 안에 있는 것들은 말할 것도 없다.
“크아아악?!”
“칵······!”
푸직!
시체로 만들어진 조악한 종속들은 그저 빨갛게 짓뭉개진 핏덩이가 되어버렸다.
소환된 전력의 절반 이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뭐?”
“미······ 미친. 저건 뭐야?”
“대체 저 새끼 클래스가 뭔데? 마법도 쓰는데?”
“마법은 아까부터 쓰고 있었어. 뭘 쏘잖아. 계속.”
네크로맨서들은 이제 당황함을 넘어 공포를 느꼈다.
이는 준일이 의도한 바다.
‘이젠 싸울 필요도 없겠군.’
숱하게 마왕을 상대하며 배운 게 있다면.
전쟁은 단순히 적을 얼마나 많이 죽이냐의 게임이 아니었다.
이들을 하나하나 다 죽이는 건 너무나 비효율적이다.
진짜로 조준해야 하는 건 적들의 정신.
싸우고자 하는 의지.
전의(戰意).
그것을 뒤흔든다면, 적들은 생각보다 쉽게 와해된다.
[멋진 BGM]
[중지]
일단 브금을 끄고.
“크흠.”
준일이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크게 외친다.
[마나 함성]
“여기 있는 새끼들 다 잘 들어!”
쩌렁쩌렁.
마나가 담긴 그의 함성은 아군에겐 원기를 북돋아 줄 테지만.
“으으윽······!?”
“커헉······!”
적에겐 공포다.
아까의 중력 마법처럼 심장이 짓눌리는 듯한 느낌에 네크로맨서들은 당황하였다.
이런 스킬은 처음 당해보는 것이다.
“너네들은 어차피 나 못 이겨.”
-ㅋㅋㅋㅋㅋㅋㅋ말투뭔뎈ㅋ
-???: 킹~ 너네 나 못이겨
-정신 공격 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또 뭘 하려고 ㅋㅋ
-yo 퇴물 용사 어땠어
마나 함성 스킬에 붙어있는 능력 중 ‘설득력이 증가한다’라는 문구가 있다.
공포심에 약간의 설득력이 곁들여지면 어떤 인간도 흔들 수 있다.
고작 얼마 전까지 현대인들이었던 네크로맨서들은 말할 것도 없다.
‘마, 맞아. 못 이겨.’
‘젠장······ 괴물 짐꾼! 우린 못 이겨!’
‘아까 한 방에 다 죽었어.’
‘눈으로 따라가지도 못했다.’
그들이 힘을 합친다면 준일을 곤란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머릿속엔 절망감만이 차오르고 있다.
중력 마법 한 방에 죽은 수많은 종속들을 보지 않았던가?
곧 자신들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온몸을 적셔온다.
이렇게 절망감이 가득 차오를 때 약간의 희망이라도 보인다면?
“하지만 괜찮다!”
-?
-?
-뭐가 괜찬은데 ㅋㅋㅋ
-넌 괜찮겠지 새끼야 ㅋㅋㅋ
-응 못 이겨도 돼~ 죽으면 그만이야~
“난 너희들한테 궁금한 게 있을 뿐이다! 이렇게 싸울 생각이 아니었다! 이상한 말을 듣지 않았다면 말이야!”
썩은 동앗줄.
그러나 절망 속에 갇힌 인간은 그거라도 잡는다.
아무리 개소리일지라도, 인간은 필사적으로 믿어버릴지도 모른다.
살기 위해, 죽음에 이르는 문장을 믿어버린다.
네크로맨서들이 숙덕인다.
“뭐야. 그런 거였어?”
“젠장. 처음부터 말로 하시지······.”
“하아······ 덕호 형이 문제야. 아재 개그로 신경을 긁으신 거지.”
“씨발 그 Fㅖ급 개그 하지 말라니까 덕호형!”
-그럼 첨부터 말로 하지 ㅁㅊㅋㅋㅋ
-궁금한 게 있는데 죽이고 시작하냐고 ㅋㅋㅋ
-아닠ㅋㅋㅋㅋㅋㅋ
-엌ㅋㅋㅋ
-네크로맨서들 부장님 탓하네
-저걸 믿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응?
-구라잖아 이거 ㅋㅋㅋㅋ
왜 저런 사기를 당하지?
왜 저런 거짓말에 속아?
멀쩡한 정신 상태일 땐 모른다.
그야 사기를 치는 말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기를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몰린 게 문제다.
준일은 그게 어느 지점인지 너무나 잘 안다.
바로 지금.
“지금부터 선착순으로! 협력하는 놈 다섯 살려주겠다!”
후다다다닥!
네크로맨서들이 죄다 기어나왔다.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퀴벌레 역재생ㄷㄷ
-마법사가 이렇게 빠른 직업이었다니······ㅋㅋㅋ
-리버스 바퀴벌레 뭔데 ㅅㅂ
-ㅅㅂㅋㅋㅋㅋ ㅁㅊㅋㅋㅋㅋ
-와 ㅋㅋㅋ 다 속아?
사이 좋게 한군데 다 모여든 네크로맨서들.
“미······ 미친 제, 제가 먼저왔습니다!”
“저, 저예요! 저가 먼저입니다!”
선착순 다섯.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엔 함정이 있었다.
“협력하는 선착순 다섯이야.”
모이는 순서가 아니라, 협력하는 순이다.
“무, 무엇을 협력하면 됩니까!?”
“형님! 제가! 제가 다 할 수 있습니다!”
준일이 그들을 내려보며 묻는다.
“좋아. 먼저 답한 놈들부터 살려줄게. 손 들고 대답해.”
“······예!”
방금 대답한 자에겐 곧바로 단검이 날아가 꽂혔다.
푹!
“어······ 어째서······?”
의문을 품은 얼굴 그대로 뒤로 쓰러지는 네크로맨서.
털썩.
그는 죽었다.
“어째서긴. 손 들고 대답하라고.”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앜ㅋㅋㅋㅋ
-아 마지막 구호는 외치지 말라고!
-손 안 들어서 이런 거임?ㅋㅋㅋㅁㅊ
“질문 하나. 너네들 제물 바치지?”
척!
모두가 손을 일제히 높이 든다.
“아니, 질문 안 끝났어. 이 새끼들아. 다시. 너네 제물 말이야. 어떤 제물이지?”
척!
가장 먼저 손을 든 남자.
준일이 그를 가리키며 끄덕였다.
“오케이. 너.”
“예! 살아있는 사람을 바칩니다!”
순간 네크로맨서들의 눈이 흔들린다.
아니 미친 그런 걸 말해도 되는 거냐?
그런데 되는 거였다.
“좋아. 넌 여기 서 있어.”
“예!”
준일은 자기 우측에 그를 세워둔다.
살아남은 자는 웃으며 옆에 섰다.
‘짜식들. 난 살았다.’
다른 네크로맨서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러나 그 당혹감은 이내 투지로 변했다.
‘씨발 다음 건 반드시 말한다.’
‘꼭 맞힌다······!’
여기서 퀴즈를 맞혀서 살아남는다.
그렇게 시작된 죽음의 골든벨.
“다음 질문.”
준일이 입을 떼자, 네크로맨서들의 눈에서 빛이 나기 시작한다.
“그 제물로 바쳐지는 사람은 대체 어디서 수급해오는 걸까?”
척!
수많은 손들이 올라온다.
저 초롱초롱한 눈을 보라!
얼마나 의미 없는가?
그야 그들의 아무리 눈을 반짝여도, 그들에겐 보이지 않았다.
이미 정해진 자신들의 운명이.
[히든 퀘스트]
==== ====
==== ====
“너. 대답해봐.”
“예!”
42화
< 네크로맨서 부장님 (3) >
[한강뷰 아파트요! 개새끼야!]
푹!
처음 준일이 네크로맨서 부장님에게 칼을 꽂았을 때.
“이걸!?”
파르르~!
램은 날개를 퍼덕이며 좋아했다.
“저딴 개그를 했으면 죽어야지!”
“래, 램 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참······ 이제 어떡하지!?”
저도 모르게 갑자기 율리안을 응원하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온 램.
“설마 여기 있는 놈들 다 죽이는 거야!? 어? 아니 엘프 퀘스트랑은 좃도 상관없잖아! 왜 죽이는데?! 썰렁한 개그 좀 한 게 죄냐!?”
그녀의 입장에선 왜 율리안이 갑자기 날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짐꾼인 척하고 그냥 마기의 원인만 알아내고 가는 거 아니었나?
“이런 식이면 스토리가 꼬이는데······.”
네크로맨서를 죽이는 걸로 율리안이 크게 이득보는 건 없었다.
대부분의 성좌들은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으니까.
다만 이쪽 입장이 곤란해진다.
강해일을 위해 준비한 이벤트들이 손상될 우려가 막심해진 것이다.
근데 그때 샘이 신박한 말을 한다.
“아뇨. 이건 오히려 좋습니다.”
“뭐?”
“율리안.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할 확률이 높습니다.”
“왜?”
“죽는다는 겁니다. 제 전투력과 전술 분석상 이번엔 아주 확률이 높습니다.”
“!”
띠디—
실제로 샘은 자신의 한쪽 눈에 쓰는 외알 안경으로 뭔가를 측정하고 있었다.
“율리안이 불리한 싸움이에요. 그걸 스스로 시작한 겁니다.”
“오!”
램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진짜야!?”
그렇게 눈엣가시 같던 율리안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에 희망을 품는 램.
“예. 네크로맨서 소굴에 들어와서 네크로맨서를 죽였다? 이건 벌집 안에 들어가서 벌을 건드린 거나 다름없어요.”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이 적임을 드러냈다.
아무리 율리안이 강해도, 이런 짓을 벌이고 살아남는 건 힘들었다.
“율리안이 실수했습니다. 얘네들이 고블린인 줄 아나 본데. 얘네들도 다 하나하나 생각이 있는 인간들이고.”
그렇다.
이 네크로맨서들은 다 인간들이다.
심지어 전부 B급 잠재력을 가진 네크로맨서들 아닌가?
이들은 이 동굴 내 지리에 밝고, 숫자도 훨씬 많다.
심지어 숫자는 더 많아질 것이다.
“이 동굴 안에서 종속들로 압박하기 시작하면 율리안의 전투 스타일상 매우 불리해져요.”
그 엄청난 숫자로 이 좁은 동굴에서 몰아붙이기 시작하면?
율리안은 결국 밀릴 수밖에 없었다.
“키리리! 제 무덤 팠구나!? 너무 자신감에 넘치던 게 패착이야.”
“맞습니다.”
푸욱!
푹!
율리안이 열심히 네크로맨서들을 썰어 넘길 때조차 샘은 승리를 점쳤다.
“율리안의 전투 방식은 다수를 상대하는 데에는 영 효과가 떨어집니다. 굉장히 피곤하게 싸워야 할 거예요.”
쿵!
심지어 중간에 중력 마법으로 한 무리의 종속들을 전부 제거했을 때도.
“여기는 시체가 널려 있고, 아직 마나가 많이 남아있어요. 더 일으켜서 계속 반복하면 됩니다. 오히려 중력 마법을 지금 뺀 건 호재죠.”
“키리리! 좋아! 그냥 더 일으켜서! 몰아붙여! 이 등신들아!”
샘의 말이 틀린 건 없었다.
네크로맨서들이 실제로 더 유리한 싸움이었다.
여긴 챔피언 고블린 던전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난이도다.
하지만 샘이 딱 한 가지 착각한 게 있는데.
그의 말대로 이들은 하나 하나가 지능을 가진 인간들이란 거다.
[미친······ 마법까지?]
[너무 세잖아? 뭐야 저 자식은?]
[이길 수가 없어······ 괴물이야.]
흑마법에 물들었다고 해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대인들.
남들을 죽일 땐 아무렇지 않았지만, 자기들이 죽을 위기가 되자 판단이 흐려진다.
아니, 어쩌면 이 비겁하고 치졸한 생존 욕구야말로 흑마법사들의 본모습.
“뭐······ 뭐 하는 거야!? 왜 다들 쫄아서 아무것도 안 하는데!?”
램은 황당했다.
아니 여기 널린 게 시체인데.
왜 더 일으키지 않는 거지?
[여기 있는 새끼들 다 잘 들어!]
율리안이 외치는 순간.
“전의를 상실했어?”
네크로맨서들의 머리 위에 뜬 상태 메시지가 답변해준다.
[공포]
[공포]
[공포]
.
.
.
그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단 하나의 적을 앞에 두고, 매우 유리한 지형, 매우 유리한 숫자를 보유했음에도.
당장 자신이 먼저 희생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짓눌린 것이다.
사냥만 하던 이들이 처음으로 사냥감이 되었으니까.
[너네들은 어차피 나 못 이겨]
율리안은 이들의 이런 특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지금부터 선착순으로! 협력하는 놈 다섯 살려주겠다!]
동료를 버리고 각자도생할 길을 열어줘버린다.
“키리리!? 그걸 누가 나가겠······.”
파앗!
그러자 순식간에 기어나오는 네크로맨서들.
“······뭐?”
“!”
램과 샘의 눈이 서로 마주친다.
“야.”
그리고 슬슬 램의 한쪽 손이 골프채로 향하고 있었다.
샘이 재빨리 머리를 굴린다.
“어, 음······ 네크로맨서들의 작전일 겁니다.”
“작전?”
골프채로 향하던 손이 멈칫한다.
“예. 그······ 일단 다섯이 살아남아서, 율리안이 방심했을 때 뒤에서 찌르자는 거죠. 그게 전면전보다 피해가 적지 않습니까? 율리안이 강하긴 하니까요.”
“······.”
“역시 네크로맨서들이라서 머리가 좋네요. 이게 훨씬 더 안전한 방식이죠.”
램은 곰곰이 생각해봤다.
얼추 맞는 말 같긴 한데.
“그렇네? 근데 다섯만 살아남는 건 너무 적은데? 그걸 벌써 선택한다고?”
“다섯이 결정됐을 때. 율리안을 다 같이 찌른다면? 전쟁의 기본은 기만 아니겠습니까?”
“······아?”
램은 손뼉을 짝 친다.
“그렇네!?”
그녀가 이내 갸웃한다.
“그런데 이런 걸 블루존 차원 용어로 뭐라고 하더라. 네 글자로······.”
“제갈공명?”
“희망회로 이 새끼야!”
후웅!
오늘도 램의 골프채는 활처럼 휘었다.
“흐에에엥!”
“장난해!? 쟤네들 상태를 봐! 공포 뜬 거 안 보여!? 잘도 찌르겠다!?”
퍼억! 퍽!
“끄, 끄에! 아, 아니! 램 님! 지, 진정하세요!”
사실 램의 주먹은 솜주먹이고, 골프채조차 그냥 모양만 단단해 보이는 풍선이다.
하지만 샘은 비위를 맞추기 위해 손을 휘저으며 애원했다.
“그, 그래도 다섯은 살잖아요!?”
“······.”
“걔네들이 후일을 도모하면 되잖아요! 아직 보스는 여기 있지도 않구요! 이렇게 되면 충분히 스토리 전개가 됩니다!?”
“······.”
후우.
램은 이만 골프채를 내린다.
‘하······ 다섯이라.’
다섯은 살려준다.
그나마 이게 변수였다.
그렇게 된다면 네크로맨서들은 후일을 도모할 수도 있다.
왜냐면 이들의 보스는 이곳에 없고, 보스만 살아있다면 다시 뭉칠 테니까.
“근데······ 쟤가 살려줄 거 같아?”
문제는 율리안이 저들을 정말 살려둘 거냐는 거다.
“에이. 그런 약속을 안 지키면 용사도 아니죠.”
“······그, 그런가?”
“그럼요.”
* * *
“자, 다음 질문.”
준일은 퀴즈를 내며 옆을 힐끔거렸다.
[현재 시청 성좌 847명]
700명대로 떨어졌던 성좌 숫자가 다시 슬슬 오르기 시작했다.
-뭔 꿀잼 상황이냐 여긴 ㅋㅋㅋ
-얘네 모여서 수업 듣고 있음?
-네크로맨서들이 오징어게임 한다고 해서 들어왔습니다~
-뭐야 이게 ㅋㅋㅋㅋ
근처를 배회하던 성좌들이 흥미로운 음악에 한 번 고개를 들이밀었다가, 상황이 신기해서 정착한 것이다.
이들은 네크로맨서들이 서로 모여서 준일의 질문에 대답하겠다고 손을 드는 꼴이 웃기다 여겼으나.
기존의 성좌들은 불만을 품은 자들도 꽤 보였다.
-어휴 씹새끼들 이거 그냥 다 죽였으면 좋겠는데
-근데 이런 새끼들 왜 굳이 살려주냐? 걍 다 죽이지
-다 못 죽임 솔직히 불리해서
-설마 이거 살려줌? ㅈㄴ 고구마인데
-네크 농가도 살리시는 사고슬
준일이 다섯은 살려준다고 말한 것에 분노하는 것이다.
“너 대답해 봐.”
“예! 제물은 이 근처 마을에서 수급해 옵니다!”
제단에 바치는 제물을 어디서 수급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뭐? 마을에서 애들이 사라지는데 이상하게 생각 안해?”
‘애, 애들인 건 어떻게 알았지?’
네크로맨서는 당황했다.
“그건······.”
척!
그사이 다른 놈들이 손을 든다.
“네가 말 안 하면 기회는 다른 놈에게 넘어간다?”
“주민들은! 애들이 몬스터 때문에 실종됐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종속한테! 당한 거니까! 사실 맞는 말입니닷!”
또박또박 재빠르게 대답하는 모습.
-이등병이냐
-애들 ㅠㅠ ㅅㅂ
-이 새끼들 때문에 애들이 귀신 나온다고 한 거네 ㅅㅂ
-어휴 저렇게 살고 싶냐?
-ㅅㅂ 쓰레기들
준일은 대답을 듣고 일견 납득했다.
‘공권력도 말이 아니니까. 그냥 수사도 없겠지.’
어떻게 사회의 틀이 겨우겨우 유지되고 있긴 하지만, 이전과는 많이 달랐다.
애들 몇몇 사라지는 정도로는 별 사건도 아닌 셈이다.
그런 시대가 오면, 약자들은 보호받지 못하고 이런 녀석들이 틈새를 노려 득세하는 거다.
“좋아. 통과.”
“감사합니다앗!”
척!
이등병 네크로맨서는 각잡힌 걸음으로 생존자 조에 합류했다.
그들은 서로 눈인사를 하며 악수를 한다.
“수고했어.”
“예. 선배님.”
“잘했어. 임마.”
“예.”
서로 격려까지 해주는 모습.
이제 총 셋이 살아남았다.
-아 얘네 너무 추하다 ㅋㅋ
-오징어 게임 통과했는데 이 정돈 해야지
-ㅁㅊㅋㅋㅋㅋㅋㅋ
-선배님 ㅇㅈㄹㅋㅋㅋ
“다음. 질문. 제단의 위치는?”
전원이 손을 들고.
그를 가리키자 신나서 대답한다.
위치를 들어본 후.
몇 가지 확인 질문을 한 뒤 준일은 납득했다.
“오케이. 통과.”
“와아아아!”
생존자들이 함께 환호성을 지른다.
“잘했어 임마!”
“넌 산 거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거 아입니까? 으하하!”
이제 넷 모였고, 마지막 하나 남은 시점.
점점 신나하는 생존자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준일의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어이. 거기.”
“예······?”
“놀러 왔어?”
휘이잉······.
얼어붙는 공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
-표정 ㅋㅋㅋㅋㅋ
-살벌하네 ㅋㅋㅋ
-씹새들 ㅈㄴ 빠져가지고
문준일, 그는 전쟁을 30년간 치른 베테랑.
용사 파티를 이끈다는 게 사실 매체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 낭만적이지가 않았다.
사실상 하나하나가 대대급 전투력인 인원들을 통솔하는 것이니.
당연히 리더는 멤버들에게 기본적인 군기를 주입해야 했다.
1회차엔 친구로 지냈고, 2회차엔 동료로 여겼다만.
3회차부터 율리안에게 용사 파티란 그냥 병사들일 뿐이었고, 그때부터 파티의 효율은 급상승했다.
즉, 군기는 준일의 전문.
“놀러 왔냐고. 여기 수련회인 줄 알아? 뭘 잘했다고 격려야?”
그런 그에게 있어 적군 포로나 다름없는 이들의 저런 행동은 딱 좋은 건수였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우러나오는 죄송함.
-캬
-아 개패고 싶다
-ㅅㅂㅋㅋㅋㅋㅋㅋㅋ
-개빡쳤네 ㅋㅋ
-화날 만하지 ㅋㅋㅋ 시체박이 새끼들이 저러고 있으니
분노?
아니었다.
말 그대로 그냥 건수를 잡은 거다.
“수련회 온 거 같으면 내가 딱 수련회처럼 해줄게.”
“예······?”
준일은 현재 살아남기로 되어있던 넷을 가리킨다.
“쟤네들 넷. 그리고 여기 너희들. 모든 게 바뀔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생존하지 못한 다수의 네크로맨서들이 고개를 든다.
웅성웅성.
“대, 대박.”
“미친······ 제발······!”
“가, 감사합니다!”
반면 생존자들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버린다.
옆에 시체들과 비슷해 보일 정도로.
‘이제와서 바꿔?’
‘이런 게 어딨냐고.’
‘망할 수련회 메타!’
‘씨발 떠들지 말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준일은 진행한다.
“지금부터 내가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할 건데. 이번엔 손 들고 말할 필요 없이 그냥 외친다. 알겠나?”
“······예!”
“이것만 제대로 대답하면 대답한 모든 놈들이 생존. 대답 못 하거나 조금이라도 늦으면······.”
슥.
준일이 손으로 목을 그었다.
“바로 죽는다.”
“!”
꿀꺽.
모두가 준일의 입만 바라본다.
“자. 질문은 딱 하나. 먼저 대답하면 산다. 동시에 대답한 놈들도 산다. 늦게 대답하면 죽는다.”
끄덕끄덕.
모두의 심장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아니 이걸 다 살려준다고?
-이게 뭐야 ㅋㅋㅋㅋㅋ
-다 살겠네 ㅅㅂ
-엥?
-시발 다 살려주면 진짜 안 본다 ㅡㅡ
-ㅅㅂ하차각인가;
-고구마네 ㄹㅇ
성좌들이 불평해댄다.
말 그대로 수련회 메타.
이 역겨운 네크로맨서 새끼들 최소 생존자 제외 다 죽는 줄 알았더니.
그냥 다 살려준다는 거나 다름없는 거 아닌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다음 순간 벌어진 일은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너희들 보스는 어디있지?”
이 질문을 하는 순간.
준일은 BGM을 재생했다.
[멋진 BGM]
그의 활약을 상징하는 음악.
[재생]
이때부터 뭔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
앞다투어 일어나며 침을 튀며 무언가를 외치는 네크로맨서들.
살기 위해 몸을 비틀고, 목에 핏대를 세우는 모습.
수축된 동공, 충혈된 눈, 마치 경마장 어딘가의 한 풍경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단 1초라도 늦게 말하면 죽는다.
이 생각이 그들을 미치게 했으며.
화르르륵!
“!”
모두를 불 태웠다.
-?
-???
-엥?
-헉???
모두의 몸에 불길이 치솟으며 순식간에 온몸을 화마가 집어삼켰다.
한두 명이 아닌, 그야말로 모든 네크로맨서들이 일제히 불타기 시작한 것이다.
“으, 으아으아아아악!”
그들은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비명을 내질렀고.
“어? 난 약속 지키려 했는데. 왜들 불타고 그래?”
네크로맨서들은 이게 개소리라는 걸 너무 잘 알았다.
그야—
준일은 불타오르는 풍경을 바라보며 자세를 취한 것이다.
척!
사고슬의 자세.
‘네가······?’
‘사, 사고슬?’
‘이 개새—’
네크로맨서들 전부 그것을 보고 분노로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이미 늦었다.
그들의 안구는 뜨거운 열로 녹고 있었고.
동굴 안은 오븐처럼 달궈져 갔으며, 모두는 타서 재가 되었다.
-노랰ㅋㅋㅋㅋ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
-표식ㄷㄷㄷㄷㄷ
-ㅋㅋㅋㅋㅋ<(_ _)/
-빌런의 탄생······
-와 ㅋㅋㅋㅋㅋㅋ
-ㅅㅂ
-캬
-한 번에 다죽였네???
-속이 뻥~!
-사고슬! 사고슬! 사고슬! 사고슬! 사고슬! 사고슬!
-4호선 고블린 슬레이어라고 하면 대답이 됐으려나!? <(_ _)/ 4호선 고블린 슬레이어라고 하면 대답이 됐으려나!? <(_ _)/ 4호선 고블린 슬레이어라고 하면 대답이 됐으려나!? <(_ _)/
.
.
띠링.
[히든 퀘스트 완료!]
43화
< 버섯과 추억 (1) >
준일은 여기 있는 네크로맨서들을 손수 하나하나 죽일 수도 있었다.
‘근데 내가 뭐 하러?’
그러나, 문준일이 누구인가?
학점 괴물.
효율의 악마.
3개월 단기 용사 과정을 창시할 뻔한 자.
그는 비효율을 끔찍이 싫어한다.
어쩌면 마왕보다도 비효율을 더 싫어한다.
그렇다.
그에게 효율은 살인이다.
“끄, 끄아아아아악!”
화르르륵!
지금 타오르는 수많은 네크로맨서들을 보라.
어두운 동굴이 악인들이 타오르는 불길로 밝아지고, 그들이 고통 속에 춤을 춘다.
거기에 [멋진 BGM]까지 곁들여지니.
거의 아름답다 할 수 있었다.
효율이란 건 분명 미적인 것과는 동떨어진 개념이지만, 그 또한 극한에 이르면 예술의 경지.
이에 성좌들이 경외를 표한다.
-캬ㅋㅋㅋㅋㅋㅋ
-크
-<(_ _)/
-사고슬! 사고슬! 사고슬!
-크ㅠㅠ
-속이 뻥~
-<(_ _)/
-<(_ _)/
-<(_ _)/
띠링.
[히든 퀘스트 완료!]
히든 퀘스트 역시 완료되었다.
[보상: 300 느낌(FL)]
히든 퀘스트로 300 느낌을 얻었다.
여기서 1,200 느낌을 더 모으면 서술 트릭 환도를 살 수 있었다.
너무 먼 얘기 아니냐고?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띠링!
[익명의 성좌가 10 느낌(FL)을 후원했습니다!]
이야기 코인을 쌓는 방법이 꼭 히든 퀘스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성좌들은 크게 재밌다고 느끼면, 후원을 한다.
그게 곧 느낌이 되고, 모이면 마음이 되며 더 모이면 여운이 되는 것.
[익명의 성좌가 20 느낌(FL)을 후원했습니다!]
[익명의 성좌가 10 느낌(FL)을 후원했습니다!]
[익명의 성좌가 20 느낌(FL)을 후원했습니다!]
.
.
.
지금처럼 완벽하게 그들이 원하는 바를 수행했을 땐 당연히 더 많은 보상이 잇따른다.
‘좋군.’
준일은 쌓여가는 이야기 코인을 보며 만족스러워했다.
-너무 재밌다 여기 ㅋㅋㅋ
-이걸 이렇게 다 죽일 줄이야 ㅋㅋㅋㅋ
-꿀잼ㅋㅋㅋㅋㅋ
-병맛 골든벨 한다고 해서 왔다가 깜짝 놀랐네요······
새로 들어온 성좌들도 만족해한다.
[현재 시청 성좌: 882명]
성좌 수가 다시 900명대를 향해서 가고 있다.
별다른 사건이 없어야 할 프리 챕터에서도 이 정도로 성장했다는 건 의미가 있었다.
‘좋아. 좋긴 한데······’
준일은 주변에 널린 시체들을 바라본다.
‘역시 보스는 여기 없었고.’
보스가 혹시 숨어있었다면 딱 그놈만 남을 거라 여겼는데.
그건 아니었다.
여기 있는 건 타다 남은 네크로맨서들과 이들이 훔친 누군가들의 시신.
죽은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아까 들은 말이 좀 거슬리네.’
그는 언뜻 듣고 말았다.
4호선 사태의 희생자들이었다고.
그때 준일은 분명 용사로서 생명의 저울질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판단에 후회는 없다.
용사로서의 판단이었다.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지운다.
‘됐고. 일단 서브 퀘스트부터.’
이미 끝난 일이다.
그는 앞으로 나아간다.
이 또한 용사로서의 판단.
‘마기의 원인이라 했나.’
엘프가 그에게 부탁한 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옥의 골든벨로 입수한 정보를 따라 이들의 제단을 찾았다.
터벅. 터벅.
사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어두운 동굴을 걸어 다니니 제법 스산한 느낌이었다.
-ㄷㄷ
-어딨냐 대체
-여기 좀 무섭네
물론 그런 느낌은 성좌들이나 느끼는 것이지.
준일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그는 리치의 공동묘지에서도 전투를 벌여 본 사람이다.
귀신이라던가 유령 따위는 그에겐 조금 더 괴상하게 생긴 고블린일 뿐이다.
“여긴가.”
제단으로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피로 그려진 마법진과 기괴하게 타오르고 있는 촛불, 몇몇 시체들이 처참한 형태로 올라간 돌판.
-헉
-ㄷㄷ
-이런 ㅁㅊ
-어우······
-얘는 이런 거 보고 놀라지도 않네;
-씨바
-얘 어디 특수부대 출신임?
성좌들은 혀를 내두른다.
흑마법 계열이 요구하는 잔인함은 사실 어지간한 인간들은 버티지 못하는 수준이다.
준일은 그 어지간한 인간과 거리가 멀기에 놀라지 않을 뿐.
그래도 불쾌한 건 매한가지였다.
‘태워죽이길 잘했다. 개새끼들.’
그는 불쾌함을 무릅쓰고 제단 앞으로 더 다가갔다.
마기의 원인을 찾아야 서브 퀘스트 충족 조건이 채워지지 않나?
제단은 그 자체로 마기를 내뿜지 않는다.
‘그거 어딨지.’
여기 희생제에서 발생하는 붉은 마나를 담기 위해 쓰인 ‘그릇’이 있을 것이다.
‘이거다.’
준일은 동그랗고 빨간 크리스마스 장식 같은 물체를 향해 다가간다.
“음? 저게 뭐지?”
알면서 성좌들 들으라고 중얼거리는 준일.
“딱 봐도 수상한데?”
-ㄹㅇ
-저게 그건가?
-만지면 죽는 거 아냐? ㅠㅠㅠ
-어우······
척.
준일은 거침없이 그 구체 위로 손을 올린다.
만진다고 죽는 그런 대단한 물건은 아니다.
이는 그냥 고위 흑마법사들이 쓰는 ‘붉은 마나’를 저장하는 장치.
‘피의 오브.’
일종의 외장 하드인 셈이다.
‘이런 거까지 벌써 현대인이 만들어냈다······?’
준일은 조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런 수준 높은 흑마법을 A+등급 잠재력 같은 걸로 구현했다 쳐도, 일반적인 현대인이 이 정도의 잔인함을 끌어올렸다는 건 좀 이상하잖은가?
띠링.
어쨌든 퀘스트 조건은 충족되었다.
[마기의 근원을 발견했습니다!]
[엘프에게 돌아가 보고하세요!]
준일은 피의 오브를 인벤토리에 넣고, 엘프에게 돌아갔다.
* * *
뒤적뒤적.
램은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저······ 래, 램 님? 골프채라면 저기 있습니다.”
샘은 괜히 혼자 찔려서 골프채 위치를 알렸다.
그야 네크로맨서들이 율리안을 이길 거라 호언장담하던 게 보기 좋게 뒤집어졌으니.
처맞을 준비는 이미 되어있었다.
‘어차피 아프지도 않고······’
그런데 램이 때리기는커녕 말조차 하지 않고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를 한참 뒤지고 있었다.
“아. 여깄다.”
철컥.
램이 꺼내든 건 총이었다.
“!?”
샘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무래도 그냥 체벌로는 네가 정신을 못차리는 것 같다. 샘. 난 선배로서 널 꼭 참교육시키기 위해······ 이걸 꺼내들 수밖에 없구나.”
“차, 참교육 뜻이 뭔지 모르시죠?”
“알아. 참된 교육.”
말 그대로 사전적 의미.
“참교육이란 거 어떻게 시키는지, 저기 차원에서 한 번 알아봤더니 이게 최고래.”
철컥.
시커먼 총구가 샘에게 겨눠진다.
“사랑의 매. 맞자. 샘.”
“래, 램 님! 진정하세요! 그, 그건 매가 아니에요! 맞으면 죽는다구요!”
“그럼 죽어 이 자식아아!”
총구를 더 가까이 들이밀며 소리치는 램.
히익.
샘은 놀라며 뒷걸음질 친다.
“저기 우리 피 같은 네크로맨서 형제들은 다 죽었는데! 넌 살려고 해!?”
‘대체 언제부터······ 형제들?’
부장 개그 좀 쳤다고 죽어도 싸다고 할 땐 언제고.
“샘. 죽자. 아니, 죽기 전까지만 가자. 죽으면 조수가 없으니까. 넌 총을 맞고 살아남는 거야. 이것도 살살 맞으면 살 수도 있어.”
“램 님. 들어보세요. 일단 이 거리에서 총을 맞으면 즉사구요. 저, 저는 억울합니다. 대체 그 표식을 왜 새겨놔서는······!”
그랬다.
원흉은 표식이다.
함구의 표식을 남겨놔서, 너무나 손쉽게 네크로맨서들이 몰살당했다.
물론 율리안이 그들이 그 대답을 필사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판을 깐 것이 더 주요했지만.
샘은 마냥 표식이 미웠다.
“하? 이젠 표식 탓? 어디 총 맞고는 누구 탓 하나 보자.”
“래, 램 니이이이임!”
다시 진정시키는 샘.
“그, 그래도 아직 1천 명이 안 넘었습니다. 그냥 엑스트라에요. 존재감이 조금 큰 엑스트라! 성좌들이 율리안을 보는 필터를 보세요.”
척.
샘은 모니터 한 켠을 가리킨다.
이건 성좌들의 시각으로 보는 세상이었다.
율리안은 유독 얼굴이 단순하게 표현되어있었다.
그야 엑스트라 따위, 구현하는 그래픽이 아깝다고 시스템이 판단하는 것이다.
“저, 저런 놈이 서브 퀘스트 하나 했다고. 그리 대단한게 될 리가 없습니다. 성좌 숫자도 900명에서 막히지 않았습니까!? 이것도 제가 치밀하게 짜둔 스토리보드 3.0 시스템의 결과라구요! 저도 할 건 다 했다구요!”
“어. 그래. 잘들었고.”
샘의 엄청난 열변에 램은 끄덕이더니,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타앙!
“까아아아아악!”
머리에 혹이 난다.
“죽어! 나 죽는다아아아! 아이고오오!”
그랬다.
총 안에 들어있던 건 아주 연한 고무탄이었다.
이야기 요정들의 전투란 게 이런 식이다.
연극 같은 거다.
지금 샘이 호들갑 떠는 것처럼.
“나, 난 죽을 거야! 난 총에 맞았어!”
“야 호들갑 떨지마. 다음부턴 경고를 날릴지도 몰라.”
“······래, 램 님!”
흐으애애애앵!
샘은 총구보다 ‘경고’라는 말에 더 놀란다.
“죄송해요! 램 님! 저, 저는······!”
“하아. 됐어.”
램은 한숨을 내쉬며 달라붙는 샘을 밀어낸다.
“나도 알아. 저 자식이······ 교활하기 짝이 없다는 거.”
“마, 맞습니다! 미친놈이에요! 그냥 엮이지 말 걸 그랬어요!”
“설마하니 표식을 이용해서 죽일 줄이야. 하지만 난 거기서 오히려 희망을 봤어.”
“네?”
이게 뭔 소리야.
샘의 희망회로가 램에게 옮겨간 걸까?
“녀석이 그런 교활한 수까지 썼다는 건, 역으로 네크로맨서들이 힘을 합쳤으면 분명 졌다는 얘기잖아?”
“······!”
그건 그랬다.
율리안이 이런 수고를 들인 거?
본인이 전면전을 하면 지기 때문 아니겠는가?
확실히 보통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법했다.
‘그렇긴 한데······.’
샘은 영 불안했다.
율리안이 사고슬 자세를 취하면서 기쁨을 만끽하는 듯한 그 느낌이, 너무 여유로워 보였달까?
꼭 일일이 찔러 죽이기 귀찮아서 그렇게 처리한 것 같았다.
그리고 또······.
‘그냥 존나 멋있어 보이려고?’
대체 누가 본다고?
근데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분명히 쇼맨십 같았다.
“우리에겐 아직 하나의 카드가 남았어.”
“무, 무슨······.”
샘은 두려웠다.
여기서 또 율리안을 자극하자고?
솔직히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았다.
“네크로맨서 보스.”
“그, 그건······!”
그건 사실 해일이를 위해 있는 건데요?
하지만 지금 램의 눈엔 광기가 휘몰아쳤다.
“샘. 처음이야. 처음이라고. 저 녀석이 약한 모습을 보인 건 말이야.”
“야, 약한 모습이요?”
네크로맨서를 불태워 죽이면서 사고슬 자세를 잡는 게 약한 모습?
약 한 모습 아닌가?
“운도 무리해서 깎아놨잖아. 이거 충분히 가능해. 피의 오브를 가져갔으니 그 녀석도 꽤나 화가 나겠지. 지금의 풀파워 전투력으로 엑스트라 하나 정도 처리한다? 솔직히 어느 성좌가 신경 쓸까?”
지금 램은 인과관계를 말하고있다.
이게 자연스러울수록, 이야기를 끌어가는 코인이 적게 든다.
짤랑!
“보스 보내. 강화해서.”
“!”
램은 결국 명령했다.
네크로맨서들의 보스를 이 시점에 미리 내보내라고.
너무 강한 보스가 등장하는 건 당연히 성좌들에게 위화감을 줄 수도 있지만.
“보스 전투력 측정기였구나~ 라고 생각할 거야.”
그 척살 대상이 엑스트라라면, 이야기는 좀 달랐다.
받아들이기 훨씬 수월해진다.
“근데. 샘.”
“네?”
“서브 퀘스트 보상 뭐냐?”
“아······.”
“혹시 전투에 도움 되는 거야?”
여기서 갑자기 율리안이 더 강해지면 곤란해서 물어본 것인데.
“그······.”
곤란하기로는 샘이 대답하기가 더 곤란해 보인다.
“그러니까 이게 원래 해일이한테 가야 되잖아요······? 그래서 전설 등급으로 준비······ 으아아아악!”
타아앙!
타앙!
램의 총구가 연신 연기를 뿜어댔다.
* * *
준일과 눈이 마주친 엘프가 눈을 멀뚱히 껌벅인다.
“왜 왔어?”
황당한 질문이었다.
“아니. 마기의 원인을 알아달라 부탁하셨잖아요?”
“그랬어. 근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안 가고?”
-응?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아니 시간 개념이 ㅋㅋ
-오래 사셨잖아~ 한잔해~
-버퍼링임?ㅋㅋ
“갔다왔어요.”
“그럴 리가.”
엘프가 놀란다.
이는 보기 쉽지 않은 장면이다.
오래 산 만큼 별의별 상황 다 겪어봤으니.
“마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무엇보다 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날 속이려 하는 거야? 너도 우리가 시간을 허투루 잰다고 생각해?”
“······.”
시간 개념이 없어서 인간한테 몇 번 당한 적이 있는 엘프인 모양이다.
슝.
백문이 불여일견.
준일이 피의 오브를 꺼내 보여주자, 그녀가 뒷걸음질 친다.
“벌써······ 그걸 가져왔단 말이야?”
-표정 ㅋㅋㅋ
-캬
-엘프가 보기에도 대단한가 봐
엘프는 눈을 껌벅인다.
“넌······ 대체 뭐지?”
-<(_ _)/
-얜 ㄹㅇ 정체가 뭐임?
-나여! 사고슬!
준일은 순간적으로 사고슬 자세를 취하고 싶었으나.
가면을 안 쓴 상태라 아쉽게도 관뒀다.
“전 그냥 짐꾼이에요. 운이 좀 좋은.”
“짐꾼?”
엘프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자신이 모르는 인간들의 은어라 여기고는 넘어간다.
“하여간 잘했어.”
그녀는 피의 오브와 자신이 빌려줬던 빛의 정령을 받는다.
이후 옆 짐꾸러미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어 내미는 엘프.
“보상이야.”
“이건······.”
“바람 정령의 펜던트.”
엘프가 펜던트를 살짝 흔들자, 바람 정령이 나와 눈을 찡긋거린다.
씨익.
준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쳐 간다.
‘아는 얼굴이군.’
그는 이 아이템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44화
< 버섯과 추억 (2) >
목걸이를 보니 떠오른다.
1회차 때의 기억.
“우욱······!”
아마 그때도 마침 네크로맨서들과 한 판 붙고 나서였다.
메이린은 네크로맨서들이 숨겨놓은 수많은 시체들을 부양 마법으로 나르면서 헛구역질을 해댔고.
“자비로우신 햇살의 솔리아시여······.”
성직자 세이는 죽은 이들을 추모하는 기도를 올리며 악귀들을 쫓아내는 의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토우는 그냥 무심하게 시체들을 집어 수레에 실었다.
율리안은 구역질만 하다가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거의 시체와 비슷한 안색으로 바닥에 누워있었다.
“참내.”
시체를 옮기다 오물 범벅이 된 메이린이 깔보는 눈으로 다가와 발로 툭툭 건든다.
“어이. 용사 나부랭이. 도대체 언제 익숙해지실 건가요?”
그녀가 일부러 발로 명치 부근을 눌러버리자.
“우······ 우욱!”
당시 스물넷.
현대인 티를 한참 못 벗은 율리안은 분수토를 쏘아버린다.
“끄, 끄아아악!”
메이린이 경멸의 눈으로 발을 뗀다.
“커, 커거걱! 그러러게 왜 거거건드려려!”
사실 좀 맞아보라고 토해버린 것도 있었다.
‘망할 중세 놈들.’
본인들이야 시체를 만들고 치우는 게 일상이겠지.
문명의 문자도 모르는 놈들.
‘맞아봐라!’
우웨에에에엑!
“미, 미친 저리 가!”
“어머 조, 좀비다! 용사가 좀비가 됐어!”
“어디냐. 내가 처리하지. 그놈을 처리하고 다음 용사를 받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그랬잖아.”
* * *
하여간 그렇게 시체 치우기 대소동이 끝난 후.
근처 산등성이에서 야영할 때.
“하아. 정말.”
메이린이 율리안 옆에 걸터앉자.
율리안이 갑자기 속사포 변명을 쏟아낸다.
“그게. 나도 이제 죽이는 건 괜찮거든? 진짜야. 근데 시체들 상태가 너무······ 지, 지저분하고······ 너, 너무 너무 너무 많아! 너무 많아! 망할 네크로맨서 개자식들! 다음에 만나면 내가······!”
메이린은 딱히 반응 없다가 싱긋 웃을 뿐이다.
“······나도 비슷했어.”
“?”
자신도 비슷했다고 한다.
“그럴 땐 이게 좀 도움이 되지.”
그녀가 속을 진정시키라며 무언가 건넸다.
피 같은 색의 와인.
이걸 피범벅의 시체를 치우고 먹는다라.
“······.”
비슷하긴 개뿔.
전혀 비슷한 비위가 아니었다.
중세인은 뭘까?
아니, 이쯤 되면 현대인은 뭘까?
어찌 그리 나약해 빠졌을까?
별생각이 다 드는 와중.
툭—
메이린이 그의 턱으로 잔을 가져다 댔다.
“마시면 좀 나아.”
밤 하늘엔 달이 꽉꽉 들어차 하얀 달빛이 낮처럼 포근했고.
그 아래 율리안의 의심 어린 눈초리와 메이린의 장난인지 뭔지 모를 반짝이는 눈이 마주쳤다.
“아······ 알았어.”
율리안은 시선을 더 마주치지 못하고, 하는 수없이 홀짝이며 와인을 마신다.
술이 강한 편은 아니다.
아마 술에 취해 그의 얼굴이 붉어진 것이리라.
싸구려 단맛이 혀에 감긴다.
“마······ 맛있네.”
“응? 맛은 없을걸. 뭐 하여간 스승님이랑 다닐 때 그거 없인 못 다녔지.”
어쩐지 술을 잘 먹더라.
“크흠. 스승님이 뭐 드워프라도 되나?”
“푸후하핫!? 드워프가 무슨 마법을?”
웃기라고 한 소리다.
“엘프야.”
“······그래?”
율리안의 눈이 호기심에 물든다.
그는 당시 엘프를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때였다.
“심지어 여자 엘프지.”
“······!”
“왜. 관심 생겨?”
메이린의 눈초리가 뭔가 묘했던 건 아마 술기운 탓일 거다.
“관심 거두는 게 좋을걸.”
그녀는 이내 달을 바라보며 턱을 괴고는 스승님에 대해 말해줬다.
“왜······?”
“스승님이 내가 15년 만에 마왕에 대적하기 위해 떠날 때 뭐라 하셨는 줄 알아?”
“······잘 다녀와?”
“오는 길에 버섯 좀 가져다 달래. 먹고 싶다고.”
“······?”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르는 여정인데. 마치 내일 돌아오는 것처럼 말씀하시더라.”
“어······.”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뭐라 했게?”
“으음······.”
이건 잘못 말하면 너무 위험해 보였다.
“너도 곧이네.”
“······크, 크흠.”
엘프식 블랙코미디인가?
율리안은 헛웃음이 나올 뻔한 걸 겨우 참았다.
“하여간. 그 사람은 내가 안중에도 없을 거야. 그냥 스쳐 가는 하루살이······ 아니 그래도 이 반딧불은 되려나.”
메이린이 손가락을 뻗자.
부웅~
주변을 날아다니는 반딧불이 하얀 그녀의 손가락에 내려앉았다.
“있음 좋고. 아님 말고. 아니······ 있으면 좋긴 한가?”
뭔가 씁쓸해 보였다.
마법사들은 스승에게 받는 인정이 마지막 목적지라고 한 걸 들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널 아꼈을 거야.”
그래서 그냥 무턱대고 말해버렸다.
“······응? 네가 어떻게 알아. 넌 시체도 못 치우면서.”
아니, 씨······
“그냥. 보면 알아. 난 용사니까.”
메이린이 씩 웃는다.
“진짜 그 말만큼 믿음이 안 가는 말이 없다.”
“······.”
율리안은 머리를 더 굴려봤다.
“그······ 그 목걸이!”
“······?”
“그거 스승님이 줬다며.”
“아, 이거······?”
반짝이는 펜던트였다.
“응. 그렇긴 한데. 그냥 쓸모없는 거 하나 준 거 같아. 무슨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게 있으면 버섯을 더 잘 찾을 거라나?”
“······그런 마법이 있는 거야?”
“아니. 막상 아무 기능도 없어. 이상해. 진짜.”
메이린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버섯이나 사 가야지.”
* * *
“그놈의 버섯.”
피식.
율리안······ 아니, 준일은 엘프가 건네준 펜던트를 보며 중얼거렸다.
나중에 알게 된 건 펜던트에는 버섯이나 찾는 기능 말고도 훨씬 좋은 기능들이 더 붙어있었다.
엘프들만 다룰 수 있는 상급 바람 정령의 힘을 빌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막상 떠오르는 건 버섯이라니.
“응? 버섯?”
엘프는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게······.”
준일은 헛말이 나간 걸 알고는 수습하려는데.
뭐라 수습하겠나?
하필 버섯이라니. 혹시 다른 걸로 오해하는 거 아니야?
짝!
박수를 치는 엘프.
“어떻게 알았지?”
늘상 무표정에 별로 액션이 크지 않더니 갑자기 흥분한 듯한 느낌.
“정령이 식용 버섯을 구분할 수 있어. 내가 훈련시켰거든.”
“······?”
뭐야. 엘프들은 다 이런 건가.
“물론 대지 정령만은 못 하지만. 바람 정령도 꽤 좋지.”
아니면, 설마······.
“혹시 엘프님의 이름을 여쭤봐도 될까요?”
“이름?”
-?
-이름은 왜 ㅋㅋㅋ
-엘프 번따 ㄷㄷ
-여자 알러지는 인간한테만임???
-ㄷㄷㄷㄷ
-픽업 아티스트 문준일 ㄷㄷ
성좌들의 헛소리 연타석.
그러나 준일은 재차 끄덕였다.
“예.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좀 더 말투에 예의가 담겼다.
아니, 어쩌면 예의가 담긴 게 아니라 간절함일 수도.
‘혹시······ 설마······!’
혹시 닿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떻게든, 그녀와 연결될 수 있다면······
“이실엔옐레. 달빛과 추억이라는 뜻.”
“······아.”
아니었다.
전혀 다른 이름이다.
메이린의 스승이 아니었다.
그냥 엘프들 중엔 버섯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표정이 왜 그러지? 의미가 별로?”
“아, 아니에요. 의미가 좋네요.”
의미가 좋다는 건 진심이다.
달빛과 추억······
그때의 향수가 더 짙어지는 느낌이다.
“이실렌. 그냥 그렇게 불러.”
“알았어요. 이실렌.”
준일은 과거의 기억은 잠시 치우고, 이제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하려 했다.
“제가 처음에 말했던 거 기억나죠?”
“응. 거래를 하고 싶다고.”
엘프들이 기억력은 좋다.
“물건을 꺼내봐. 버섯이면 더 좋고.”
“그, 그런 말은 좀 위험······.”
“응? 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ㅁㅊ
-미친놈인갘ㅋㅋㅋ
-엌ㅋㅋㅋㅋㅋㅋ
-울어봐, 빌어도 좋고 vs 꺼내봐, 버섯도 좋고 ㄷㄷ
-ㅅㅂㅋㅋㅋㅋㅋ
-물건······ 버섯?
-꺼버좋ㅋㅋㅋㅋㅋㅋㅋㅋ
성좌들의 수많은 낯 뜨거운 말들을 애써 무시한 채, 준일은 인벤토리에서 물건들을 건넸다.
우르르.
고블린에게 얻은 수많은 아이템들이 쏟아져나온다.
“음.”
엘프는 슥 들여다보더니 입맛을 다신다.
“정화할 맛이 나겠어.”
“그쵸?”
“어떻게 팔 예정이지?”
정화된 마정석을 받을까 했지만.
‘당장 현금이 없으니.’
지금 월세도 못 내는데 마정석은 또 언제 현금화한단 말인가?
‘매크로센트럴리버빌라디움그랑시아’ 아파트 재건축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돈이 먼저였다.
“돈으로 줘요.”
“어떤?”
“금화.”
엘프들은 금화를 쓴다.
“응······ 근데 너네 세상에서도 가치가 있어?”
“물론.”
금화가 갖는 화폐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그냥 금이 가치가 있다.
‘세계수에게 듣기로는 비트코인이란 게 최고라던데.’
이실렌은 이 녀석의 취향이 금화인가 보다 생각하고 별로 토를 달진 않았다.
“좋아.”
짤랑!
이실렌이 돈을 계산하여 금화를 몇 개 건넸다.
여기서 흥정을 하는 건 하수였다.
엘프 상대로 흥정에 들어갔다간 뼈도 못 추리고 다 발라 먹힌다.
이들의 연륜을 생각해 보라.
그냥 귀엽게 봐줄 때 잘 받아먹는 게 엘프들과 거래하는 최선.
‘나이스.’
어차피 이렇게 쿨거래해도 충분히 이득이었다.
왜냐?
‘지금 세상이 거의 망하기 직전이니까.’
해외와 소통이 안 된다.
서버가 나뉘었다.
달러도 없고, 미국 주식도, 코인도 없는 세상이 열렸다.
국내 주식?
(늘 그렇듯이) 쓰레기 휴지 조각이다.
이럴 때 늘 떠오르는 게 있다.
금.
세상이 암울해지고 불안정하면 항상 고고히 혼자 가치를 갖는 녀석이다.
금의 시세가 미친 듯이 오른 걸 이미 오는 길에 체크하고 온 준일.
‘이걸로 거의 6개월 치 생활비에 이동 수단도 살 수 있을 거야.’
사실 정말 월세와 식비만 따지면 2년도 쓰겠지만.
세상이 한 번 이렇게 뒤집어졌으니, 아마 돈 나갈 곳이 많을 거라 예상된다.
-오오 금
-금화 ㄷㄷ
-금화 좋네
-금화 묵직한 거 보소 ㅋㅋㅋㅋㅋ
-이럴 땐 금이지 ㄹㅇ
“감사합니다. 혹시 계속 여기 있어요?”
“글쎄.”
이실렌은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만.
‘왠지 NPC처럼 있을 거 같은데.’
이실렌이 있는 동안은 여기에 아이템을 팔면 될 것 같았다.
준일에겐 솔직히 서브 퀘스트 보상보다 이게 더 달콤해 보였다.
‘그 보상은 사실 강해일이 먹으면 더 좋을 거라.’
바람의 정령이 깃든 펜던트.
딱 봐도 화염 계열 놈이 쓰게 만들어진 게, 너무 의도가 적나라하지 않은가?
‘참내.’
안 그래도 세상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이렇게까지 금수저로 키우다니.
‘애 버릇 나빠지게. 뭐냐고 이게.’
팸하고는 좀 다른 스타일인 모양이다.
‘나도 램한테 갈 걸. 강해일 이 운빨만 타고난 새끼······.
그런데 그때였다.
“뭐야. 짐꾼?”
“!?”
그 ‘버릇 나빠진’ 강해일이 떡하니 서 있는 거 아닌가.
“······아. 간만이네요.”
-ㄷㄷ
-강해일 등장 ㅋㅋㅋ
-오
-만났네 ㅋㅋㅋ
-짐꾼? ㅇㅈㄹㅋㅋㅋㅋ
“왜 연락 안 받아? 파티 맺을 때 부르려 했는데.”
“연락이요? 저 번호 준 적 없는데.”
“그랬나?”
강해일은 머리를 긁적인다.
‘미친놈인가.’
이 자식 무심한 성격인 건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지금이라도 드려요?”
그래도 주인공인데.
문준일로서는 번호 정도 교환해둬야 유리하지 않을까?
“아니.”
“?”
-?
-??
-아니 ㅋㅋㅋㅋㅋ
-번호 사실 필요 없냐고 ㅋㅋㅋ
-ㄹㅇ 미친놈이네 ㅋㅋㅋ
-와 여기서 보니까 강해일 또라이구나 ㅠㅠ
-해일이가 좋아 난 그래도
-애는 착해······
강해일이 또 머리를 긁적인다.
“번호 못 받아. 휴대폰······ 잃어버렸어. 분명 아까만 해도 있었는데.”
그래서 가까이 와도 엘프가 별 반응이 없었던 거였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상남자는 그냥 폰 버려
-아니 어쩌다 잃어버린 거야 이새킨ㅋㅋㅋㅋ
“근데 넌 저 엘프랑 어떻게 얘기한 거지?”
“저 엘프가 아니라, 이실렌이에요.”
“이름도 아네?”
“네. 이름도 알고 아이템도 거래하고 다 했죠.”
준일을 일부러 자랑질했다.
왜냐?
강해일 성좌들 보라고.
‘난 엘프랑 말했지~’
-캬
-마! 내가 엘프햄이랑! 마! 술도 마시고! 버섯도 꺼내고!
-ㅋㅋㅋㅋ농락ㅋㅋㅋ
-엘프랑 아는 사이 ㄷㄷ
-강해일방 난리 났겠네
-아직도 사고슬 코인 탑승 못한 흑우들 없제?
-쟤네 대다수는 얘가 사고슬인 것도 몰라요 ㅋㅋㅋㅋㅋㅋ 걍 메인 스토리만 보는 애들임ㅋㅋㅋ
-크ㅠㅠㅠ F등급이어도 엘프랑 말했다고!! ㅠㅠ 젠장 ㅠㅠㅠ
준일 방 성좌들은 신이 났다.
아무래도 성좌들 사이에서 F 등급 엑스트라나 쫓아다니는 놈들이라며 타박받는 모양.
여기서 준일이 쐐기를 박는다.
“서브 퀘스트도 주던데요.”
“!”
강해일은 그런 게 있었냐는 듯 순수하게 놀란 표정이었고.
-뭐 씨발?
-와 ㅅㅂ 쟨 다했다고???
-뭔데 이거 ㅅㅂ
-하차요
-해일아 하차할게 그냥 상하차나 해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거 맞냐???
-짐꾼 새끼도 하는 섭퀘를 왜????
-아니 아까 엘프 도망갔잖아?? 뭐지? 지금은 왜 말 걸림? 설마 짐꾼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임?
-뭐 이딴 병신 전개가 있냐
강해일은 성좌들이 미친 듯이 뱉어대는 말도 모른 채.
‘역시 이 녀석 꽤 능력 있잖아?’
역시 등급은 숫자일 뿐이다.
······라고 생각 중이었다.
45화
< 버섯과 추억 (3) >
쾅.
램이 책상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야 속마음 돋보기로 해일의 마음을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역시 등급은 숫자에 불과해]
“해일아······ 그게 아니야······.”
“래, 램 님······.”
“샘. 내가 주인공을 잘못 고른 걸까?”
“아닙니다? 신념도 넘치고 인격도 올바른데다가 용모도 멋진데요? 이보다 잘 고를 수가 없습니다?”
“아냐. 난 어쩌면 팸보다······ 그냥 이야기를 더 못 만드는 거야.”
“그, 그럴 리가요!? 그딴 양산형 공장장 같은 요정보다야! 램 님이 훨씬 낫습니다! 비교조차 불가라구요! 해일이도 율리안보다 훨씬 낫구요!”
꿀꺽.
샘은 긴장했다.
‘이런. 내 주인공 구려 병이 도지고 있어.’
이야기판이 흔들리면 처음엔 남들을 탓한다.
그러나 아무리 탓해도 바뀌지 않는 흐름에 결국 그 화살이 자기의 분신, 주인공에게 향한다.
주인공을 모욕하는 건 사실상 이야기 요정 자신에 대한 모욕.
그러니까 램은 지금 자책하고 있는 거다.
“해일이 다 좋은데 머리가 좀······.”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은 페어리 주식회사 주인공 선별 메뉴얼의 결격 사유 1번입니다. 램 님.”
그랬다.
뭘 얻으면 뭔가를 포기해야 했다.
나머지는 코인이나 약간의 개입으로 커버해야 하는 방식이다.
“뭣보다 해일이도 머리가 엄~ 청 나쁜 건 아닙니다. 챔피언 고블린 때 보셨잖아요?”
강해일은 준일의 오더가 맞다는 걸 느끼고 작전을 바꿨었다.
덕분에 파티는 한 명만 희생된 채로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었다.
“그럼 뭐하냐고! 율리안 저 새끼가 1등 먹었잖아!”
램이 갑자기 버럭 소리친다.
“게다가! 휴대폰이 문제라는 거 몰라서 우리가 일부러 잃어버리게 해줬더니! 아직도 엘프한테 말을 안 걸어! 대체 뭐야!?”
“그······ 그건······.”
그랬다.
강해일이 갑자기 휴대폰을 어이없게 잃어버린 이유.
코인을 써서 개입해버렸기 때문이다.
엘프를 따라온 정령들이 근처에 있는 휴대폰을 어디론가 숨겨버리게끔 만들었다.
지나치게 흐름을 침해하는 개입은 아니라서, 큰 코인 소모는 없었는데.
문제는 그만큼 강해일도 크게 행동에 바뀐 게 없었다.
그냥 휴대폰을 찾으러 조금 돌아다닌 게 전부.
“아니! 그리고 저 뾰족귀 새끼는 왜 말을 안 거는데!? 그러라고 불렀는데!”
강해일이 말을 안 걸면 엘프라도 말을 걸어야 했는데.
그녀도 아무런 기색이 없고.
“티배깅까지 당했잖아!”
오히려 율리안이 ‘난 엘프랑 말했지롱~’식으로 말하며 놀리고 있다.
특히 단순히 말만 나눈 게 아니라.
[서브 퀘스트도 주던데요.]
저 한마디에 얼마나 긁혔던지.
삐이이이이—
하차벨이 눌렸다.
-S등급이 SUCK의 약자인지 몰랐네요. 하차.
눈치 빠른 성좌들은 S등급의 약자가 뭔지를 매번 새롭게 해석해주며 하차하고 있다.
“······망할 엘프.”
램은 어깨가 축 쳐져서는 중얼거렸다.
“이럴 때 도움이 되라고 있는 건데.”
엘프들은 같은 세계수의 핏줄로서, 이야기 요정의 차원과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야기 차원에 거주하지만, 상위 차원과도 어느 정도 닿아있는 존재들.
그래서 베테랑 이야기 요정들은 엘프들을 잘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큰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대리인으로 내세울 수 있으니.
다만 그만큼 리스크도 있는데.
이들은 설득이 잘 되지 않아서 요정들의 요청을 잘못 해석하면 흐름이 더 크게 꼬여버린다는 것이고.
현재 상황이 그러하다.
“엘프는 양날의 검입니다. 램 님. 그래도요 엘프와 가까이 붙었으니까······ 어, 어떻게든 될 거예요.”
“보스는 어디쯤이지?”
램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네, 네크 보스요?”
“그래.”
사실 율리안의 티배깅에 제대로 긁힌 건 성좌들뿐이 아니었던 것.
램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세팅했는데. 저놈이 다 먹고 일부러 자랑질까지 해?’
율리안이 일부러 말한 게 너무 티가 났다.
마치 알아달라는 듯이.
‘심지어 저 자식, 희미하게 앉았다 일어났다 하고 있어. 스쿼트도 아니고.’
빠드득.
램은 이가 갈렸다.
고작 양산형 용사 주제에.
팸이 공장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에나 들어간 주제에!
“보스 강화는 충분히 했지?”
“예. 그렇긴 한데······.”
네크로맨서 보스는 안 그래도 강한 편인데. 이제 강화까지 완료.
이대로 율리안을 박살낸다.
“좋아. 가자고.”
“아······ 예. 근데 저는 그냥 율리안은 안 건드리는 걸 추천하는데······.”
“뭐? 왜.”
그야 건드려서 좋은 꼴 본 적이 없잖아요.
······라는 말은 차마 뱉지 못하고 돌려서 설명하는 샘.
“그야 그냥 엑스트라인 상태라서요. 엑스트라가 수용할 수 있는 성좌 수는 정해져 있고요. 필터링도 제대로 적용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강해일을 중심으로 편집된 정보만 보기 때문에 성좌들 대부분은 율리안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냥 매니아 픽일 뿐이죠.”
숨도 안 쉬고 뱉어대는 설명.
“······그래?”
램은 조금 설득됐다.
“예. 그러니까 율리안이 무대에서 사라지게끔 부드럽게 진행하는 게 좋죠.”
완벽한 조언이었다.
샘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며 안경을 고쳐 쓰고는 번뜩인다.
“그냥 천천히 말려 죽이는 겁니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건 매서운 바람이 아닌, 따스한 햇살이었던 것처럼요.”
나그네 이야기에 램이 끄덕인다.
“······후. 알았어.”
드디어 샘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이다!
“저, 정말요!?”
“그래. 일단 두고 보자고.”
“오오!”
그렇게 만족스러워하고 있을 때.
램이 뭔가 불안한 듯 모니터를 보며 묻는다.
“근데 샘. 만약 저 녀석이 엑스트라의 벽을 부수면······?”
“네?”
샘이 손사래를 치며 웃는다.
“에이~ 그런 건 쉽게 부숴지는 게 아닙니다. 지금 강해일과 엮인 지도 얼마 안 됐고 비중 있는 조연들도 충분히 많은데요. 왜 저 녀석이 엑스트라에서 벗어나지겠어요?”
“근데 이거······ 이거 봐.”
파르르르······!
램이 가리킨 화면 속.
준일의 주변 화면이 흔들리고 있다.
대충 펜 몇 번 끄적여서 만든 것 같은 캐릭터의 모습이 점점······ 왠지 모르게 디테일해져가고 있는 듯한 느낌.
‘뭐야. 진짜 뭔가 이상한데?’
왜일까?
설마 강해일이 능력이 있다고 인정해서?
단순히 그런 걸로는 이 격을 뛰어넘을 수 없다.
‘격이란 건 능력으로 뚫는 게 아니야.’
능력이 있어도, 그냥 전투력 측정기로 쓰이는 엑스트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율리안도 그런 취급일 뿐이다.
‘격이란 건······ 부여된 서사와 관계 중요도······ 복합적 이야기 구조 속 대체 불가능성······.’
이 모든 게 충족되어야 한다.
심지어 격이 원래 낮은 인물이 그걸 뛰어넘으려면 이 모든 것들이 훨씬 더 뛰어나야 한다.
그러니 율리안은 절대 조연이 될 수 없었다.
‘근데······ 왜지?’
샘은 뭔가 불안했다.
램이 부여한 강해일의 설정 속.
어딘가 미스가 있는 것 같은 느낌.
촤르르륵.
그는 다시 설정집을 뒤진다.
강해일의 태초라 할 수 있는 가족 관계부터, 그의 생애까지.
「해일이 아버지 시체······ 어떻게 되는 거야?」
램이 아까 했던 말이 왠지 모르게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아버지는 그냥 진행 편의와 목적성을 위해 죽는 걸로 설정······ 방법은 정확히 적혀있지 않고······.’
사라락.
다시 설정을 뒤져보는 샘.
그렇잖은가?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니고 램이 기획했던 것들.
그걸 여러 조수들이 머리를 모아서 현실성을 끌어올려 이야기판에 적용시킨다.
그것도 새로운 모델.
스토리보드 3.0이라는 변수가 가득한 곳에 흩뿌린다.
여기서 뭔가 사고가 안 날 수가 있을까?
심지어 여기엔 율리안이라는 말도 안 되는 변수 덩어리까지······.
‘이런. 미친.’
샘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설마?’
* * *
“휴대폰을 이 근처에서 잃어버렸다구요?”
한편 준일은 잃어버린 강해일의 휴대폰을 찾고 있었다.
강해일이랑 같이 있으면 성좌들이 팍팍 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그에게 번호를 오늘 주고 가야 앞으로 관계가 유지될 거라는 생각에서다.
[우스꽝스런 BGM]
[재생]
무엇보다 이렇게 멍청해 보이게끔 음악을 깔아서, 강해일의 성좌들에게 정신적 타격을 입히고 있었다.
-ㅅㅂ 이거 개그물이냐?ㅋㅋㅋ
-진짜 이걸 왜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강구는 못 말려~
-휴대폰 그냥 하나 더 사 ㅅㅂ
여기에 더해 은근슬쩍 계속 엘프 얘기하면서 티배깅을 해준다.
“저는 엘프가 그냥 말 먼저 걸던데요.”
구라까지 섞어서.
-말 먼저 걸긴 미친ㅋㅋㅋㅋ
-?
-ㅋㅋㅋㅋㅋㅋ허세 작렬이네 이새낔ㅋㅋㅋ
-앜ㅋㅋㅋ
-엘프 만난 게 인생 업적 ㄷㄷ
“그래? 내가 말 거니까 도망가더라고. 근데 확실히 너랑 같이 있으니까 가만히 있네.”
강해일은 저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는 이실렌을 슬쩍 확인하며 말한다.
“등급이 높을수록 경계하나?”
긁적거리리는 해일.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지만.
“······?”
준일의 표정이 순간 굳는다.
‘아니. 이 자식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딜교 쌉손해 ㅋㅋㅋ
-앜ㅋㅋㅋㅋ
-F등급이라 그냥 된 걸로~
-아무것도 못하는 애라 받아준 거였음ㅋㅋㅋㅋㅋ
“크, 크흠. 아니 등급은 숫자에 불과하다면서요.”
다시 시비를 걸어보는 준일.
“맞아. S등급이어도 별 거 없어. 왜들 그렇게 요란인지 모르겠어. F등급도 잘 사는데.”
해일이 수풀들 사이를 뒤져보며 무심히 대답한다.
-ㅅㅂㅋㅋㅋㅋㅋㅋ
-뭔 말을 해도 치명타 ㅋㅋㅋ
-이게 기싸움인가 뭔가 그건가요?
-비틱 vs 티배깅 ㅋㅋㅋㅋ
-짐꾼도 사는데!ㅋㅋㅋㅋ
-아닠ㅋㅋㅋㅋㅋㅋㅋㅋㅋ
후우······
준일은 잠시 심호흡을 했다.
‘으······ 확 바람의 정령 자랑해버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말싸움하다가 수익 인증까지 해버리는 못난 놈들의 행태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낸데!’
바람의 정령 한 번 자랑하면 성좌들 쫙 떨어져 나갈 텐데.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지만, 그만두었다.
‘이건 사고슬로서 써야 되니까.’
이런 좋은 아이템은 문준일 상태에서 노출시키면 사고슬이 쓸 때 제약이 생기잖은가?
“어. 뭐야. 원래 있던 자리에 있었네.”
그때였다.
강해일이 휴대폰을 찾았다.
‘원래 있던 자리?’
준일은 눈을 껌벅였다.
‘묘지······ 술······.’
강해일이 ‘원래 있던 자리’라고 표현한 곳은 어떤 이의 묘지 앞 비석.
그 앞엔 소주 한 병과 잔이 놓여있었다.
본인이 마신 것 같진 않았다.
잘 정돈된 잔디 위 한구석만 축축한 걸 보면 말이다.
[강정호]
비석에는 이런 이름이 쓰여있다.
똑같은 강 씨.
[타인을 위해 사회를 위해 숭고한 길을 걸은 자, 그 끝조차 누군가를 위하여 승화하다.]
옆에는 놓인 지 좀 된 것 같은 꽃바구니가 하나 있었는데.
[서울 동작 소방서 일동]
소방서에서 온 바구니다.
준일은 본능적으로 비석 위의 날짜를 다시 확인한다.
‘그날이다.’
그도 기억하는 날짜였다.
기억 못 할 수가 없었다.
준일이 아파트를 구매한 날.
세상이 이야기판으로 팔려버린 날.
‘고블린들이 처음 튀어나온 날.’
4호선에 수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한 날.
“아······ 난 엘프를 보러 온 건 아니었어. 아버지 생신이거든.”
강해일은 준일의 시선을 느꼈는지 설명한다.
그리고 잔을 준일에게 건넨다.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한 잔 드려.”
“제, 제가······ 그래도 될까요.”
해일이 별말 없이 그냥 끄덕인다.
준일은 세 번에 걸쳐 잔에 술을 따른 뒤, 무덤 앞으로 다가간다.
‘젠장······.’
그의 눈에 보였다.
아주 작은 흔적이지만, 전말을 아는 사람에겐 보일 법했다.
무덤 옆에 잔디가 고쳐져 있다.
해일은 아마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여기엔 안 계시잖아.’
여기엔 강해일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시체 같은 건 없었다.
그리고 그때 강해일이 뒤에서 말했다.
“아버지는 4호선 사태 때 돌아가셨어.”
“!”
턱.
술을 뿌리려던 준일의 손이 멈칫한다.
“아버지는 ‘그 칸’에 안 계셨거든.”
동시에 준일 주변의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쿠구구구······!
‘뭐야. 이건.’
팅!
[경고! 격에 비해 너무 많은 성좌들이 당신을 주목합니다!]
고막이 띵할 정도로 소음이 심했다.
세상 전체가 흔들리는 것만 같은······
‘망할! 성좌들이랑 마주 본 거마냥 왜 이래!?’
이런 현상은 성좌들과 등장인물이 직접 마주할 위험에서나 발동된다.
7회차 내내 딱 한 번 겪어본 현상.
‘이게 왜 엑스트라한테?’
엑스트라 따위는 겪을 일이 없는 현상.
띠이이!
다시 한 번 경고음이 울려 퍼진다.
[주의! 강력한 회상 에너지 발생!]
[당장 자리를 벗어나십시오!]
벗어나라고?
그럴 수 없었다.
발이 꿈쩍도 안 한다.
공간은 이미 전부 일그러져 있었고.
‘이건······ 이야기의 제약이야.’
율리안의 힘으로도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강력한 이야기의 흐름.
주인공이라는 존재가 만들어내는 블랙홀 같은 것에 빠져버린 거다.
그 블랙홀의 이름은 ‘회상’이다.
‘으윽······!’
준일은 머리를 움켜쥔다.
고통에 버틸 수 없었다.
이 정도 고통은 그때뿐이었다.
팸에게 덤볐다가 제압당했을 때.
존재 자체가 으스러질 것 같은 공포, 절망, 무력감.
대지가 흔들린다.
쿠구구구구······!
주변의 풍경이 일그러지고, 어질러진 물감처럼 흐려지더니.
바뀌었다.
익숙한 장소로.
[다음 역은 동작, 동작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지하철이다.
그날의 지하철.
46화
< 모래알들 (1) >
페어리 주식회사에 마련된 유치장.
그곳에선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불타오르네~!”
“빠이어어어어으어어으어~~”
팸과 햄이 네크로맨서들이 불 타 죽는 걸 돌려보면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꺄루루! 내가 키웠지만 율리안은 정말 인재야!”
“예. 진짜 인재(人災)예여. 이 정도면 재앙이져.”
“아, 아니 그 인재가 아니라! 여튼······ 뭐 비슷한가? 꺄루루.”
팸이 키운 인재(人材)는 원수인 램의 이야기판에 들어간 순간 인재(人災)가 되었다.
이보다 신날 수 없는 상황.
“근데······.”
“넵?”
신난 와중에 팸이 뭔가를 가리킨다.
[현재 시청 성좌: 899명]
900명 앞에서 좌절된 시청 성좌 수.
“엑스트라의 벽을 넘기가 역시 힘드네.”
등장인물들은 격에 따라 시청 성좌의 제한이 존재한다.
엑스트라는 1000명이다.
격을 초월한 숫자의 시선은 인물이 견디지 못하기에, 10% 정도의 쿠션을 갖는다.
즉, 1000명이 제한이라면 900명부터 오르기 어렵게 여러 장애물이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장애물은 여러가지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필터.
“아무래도 필터 탓이 커여. 성좌님들 대부분은 율리안 님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계세여. 그야말로 대충 생긴 상태로 보고 계세여.”
등장인물들의 격에 따라 성좌들의 시각이 완전히 달라진다.
만화에서 그냥 지나가는 1명을 굳이 심도 있게 그리지 않는 것처럼.
성좌들에게 율리안은 그냥 대충 그린 군중 중 하나 정도로 보인다.
“스트림 분량 할당과 알고리즘 선호도까지 낮춰서 완전히 쐐기가 박혀버리져.”
800여 명 이상의 성좌들이 율리안을 보고 있으면 추천 알고리즘에서 제외되기 시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리안 쪽에 900명 이상이 모이려 하면?
-아 이 방 하꼬라서 렉 걸리네
-뭐 보이는 게 없냐;
-나가라 새끼들아
-이 좁아터진 데에 900명이 ㅋㅋㅋ
-우리 준일이 아직 월클 아입니다!
용량 제한으로 아예 스트리밍이 끊기기 시작한다.
이것이 스토리보드 3.0 시스템이 제공하는 안전장치이자 제약이다.
율리안이 아무리 대단하다해도 이 제약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아무리 좋은 스포츠카를 뽑아도 법적으로 시속 몇 킬로미터 이상으로 질주하지 못하게 락이 걸려 있는 것과 같다.
“으음······.”
팸은 턱을 매만진다.
확실히 스토리보드 3.0 시스템은 이전의 것보다 훨씬 선진적이다.
“이걸 무슨 수로 극복한담?”
“저희가 해킹해서 만든 아이템 상점을 최대한 활용해볼까여? 내 멋대로 시리즈를 좀 더 공급하면······.”
“아니, 그걸로는 부족해. 어차피 모든 건 기승전 주인공. 차라리 강해일과 더 단단히 엮일 수 있는 장치를······.”
팸과 햄은 둘이서 이런저런 토의를 해본다.
아무래도 이들은 이야기 요정이기에, 어떤 개입을 통해서 해결해보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모든 토론이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어!?”
“······뭐, 뭐져? 왜······ 갑자기 화면이······?”
율리안 쪽 스트림을 보고 있는데.
화면이 까맣게 페이드아웃 된다.
치지지직!
그러더니 지하철 내부가 나왔다.
정확히는 지하철 내부의 풍경을 누군가 폰 카메라로 찍은 것.
“이······ 이건?”
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급히 다른 채널로 가본다.
강해일 쪽.
“······.”
똑같다.
둘이 똑같은 화면이 나오고 있다.
“유, 율리안이 강해일의 회상에 휘말렸어!”
“네!?”
“이······ 이건 큰일인데?”
팸이 벌떡 일어난다.
“엑스트라의 격으로 이런 거에 휘말려버리면······ 완전히 캐릭터가 붕괴해버릴 수도 있어!”
회상.
이는 이야기가 시간 축을 비틀어 성좌들을 과거로 끌어들이는, 이야기 판에 현현한 블랙홀.
성좌들이야 이 정도 회상을 견딜 수 있다만.
경우에 따라선 크게 이탈하며, 그에 휘말린 주변 인물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주인공에 관련된 회상도 떠나는 마당에, 그와 관련도 없는 엑스트라가 회상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나?
“어, 어떡해여!? 제가 당장 갈까여!?”
햄이 날아오르는데.
팸이 그녀를 가로막는다.
“패, 팸님?”
“아······ 아냐.”
꿀꺽.
팸은 마른침을 삼킨다.
“네?”
“이 회상······ 뭔가 심상치 않아. 율리안과 아예 관계없는 게 아니야!”
“······네?”
그러고 보니 이 지하철.
4호선이다.
[다음 역은 동작, 동작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 * *
누군가가 찍은 영상.
그 안에 비친 ‘그날’의 4호선 풍경은 지옥도였다.
“사, 살려줘!”
“으아아악!”
“밀지 마! 밀지 말라고!”
순전히 우연이었다.
이 와중에도 누군가는 이것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있었던 것 말이다.
영상의 주인은 그저 소란이 나길래 신기해하며 카메라를 켰던 것이다.
그런데 그 소란에서 자신이 예외가 아니란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어어어······!?”
영상의 주인은 헛숨을 들이키며 이리저리 밀려나고 있었다.
쿵! 쿵!
“미, 밀지 마요! 밀지 마!”
앳된 여자의 목소리다.
아마 영상의 주인은 여성이다.
“수, 숨 막······ 숨 막혀······!”
그녀와 다수의 성인 남녀들이 아주 좁은 공간에 몰려있었다.
다음 칸으로 넘어가는 문 바로 앞.
“다음 칸 문 열어요! 다음 칸 문 열라고요!!”
근방에선 젊은 남자들이 항의하며 외치지만.
그녀라고 별 수가 있는게 아니다.
“안 열려요! 아무리 해도 안 열려요! 살려주세요! 여, 열어주세요!”
쾅. 쾅. 쾅.
카메라의 주인은 거의 울며 빌어보지만, 다음 칸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때—
“제가 여는 법을 압니다! 소방대원 출신입니다! 길 좀······ 길 좀 비켜주십시오!”
체격 좋은 중년의 남자가 사람들 사이의 압박을 비집고 들어온다.
“금방 됩니다. 밀지 마세요! 여, 여기 더 밀면 크게 다칩니다!”
그 남자는 어디서 구한 건지 쇠막대기를 지렛대처럼 꽂아, 무게를 실어 누른다.
끼이이이!
금세 열릴 것만 같았는데.
“아······ 안돼?”
설마하니 건너편의 어떤 이들이 이걸 죽어라 막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
기계적 오류라고 여겼다.
“단단히 고장 났군.”
뒤에서 아우성거리는 소리가 다시 울려퍼진다.
“얼른 열라고! 씨발! 진짜 깔려 죽겠다고!”
“꺄아아아아아아! 괴, 괴물! 괴물!”
대체 무슨 상황인 건지, 이 영상에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지만.
“괴물이야아아아!!”
반대편 쪽에서 고블린들이 몰려와 한쪽으로 시민들이 쏠리는 현상이 난 것은 확실했고.
유일한 돌파구는 다음 칸 문을 여는 거였다.
“열어! 열라고!”
물론 그걸 열면 고블린들에게 고속도로를 뚫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여기 있는 누구도 이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고, 반대편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당연히 알지 못했다.
애초에 이들은 고블린 같은 건 게임에서나 봤지, 실제로 퇴근 시간 지하철에 그딴 게 튀어나오는 건 처음이니까.
모든 게 혼란이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에 보이는 유일한 탈출구인 ‘다음 칸’에 집착하는 것 외 방법이 없다.
그런데—
“마, 막고 있어.”
이제야 깨닫는 소방대원 출신의 남자.
그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린다.
수증기로 뿌연 유리창으로 비친 풍경.
캐리어, 무거운 가방 등을 배치하고 체격 좋은 성인 남자들이 온 힘을 다해 문을 막고 있다.
“왜······?”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애초에 여기 있는 누구도, 이 땅의 누구도 이 상황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었다.
저 건너편 칸에 있는 남자 하나만을 제외하고.
“······!”
“······! ······!”
잘 들리진 않지만, 문을 틀어막은 남성들은 저기 여유롭게 선 남자의 명령을 듣고 있는 듯했고.
그들의 충성심은 군대를 방불케 했으며, 남자의 주변은 피범벅.
협박이라도 당하는 걸까.
금방 열릴 줄 알았던 다음 칸 문이 굳건하자, 혼란의 여파는 가중됐다.
“마, 막고 있다고요!?”
믿을 수 없어 되묻는 사내.
“아니 씨발! 야 이 씨발 새끼들아! 너네가 사람 새끼들이야!?”
쿵! 쿵!
화풀이하며 벽에 구둣발을 차는 노년.
“뭐, 뭐야······ 어, 어떡해······ 어떡해요 아저씨!?”
소녀는 점점 깔려오는 압박에 울음을 터트리고.
문을 열던 남자는 그녀를 다독였다.
“아저씨가 소방대원 출신이거든. 열 수 있을 거다. 아니, 열어야······.”
그는 다시 한 번 온 힘을 다해 체중을 실어본다.
“끄으으으아아아아아!”
눈에 핏줄이 튀어나오며, 괴성까지 내질러보지만.
치지지직.
이내 영상의 오디오는 고성의 비명으로 뒤덮인다.
이들은 이 문 앞에서 모두 고블린에 살해당했다.
[해당 영상은 인스타그램 라이브로 송출되었던 원본의 편집입니다. 너무 잔인한 장면은 전부 제거되었습니다.]
자막이 뜨고, 영상은 끝났다.
하얀 마우스 포인트가 갈 곳을 잃은 채, 덜덜 떨린다.
털썩.
멍하니 영상을 보고 있던 해일은 온 몸을 덜덜 떨며 의자에서 떨어져 주저앉았다.
“······.”
그는 입만 뻥긋거릴 뿐,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지만.
그 고통은 전해졌다.
회상은 여기까지였다.
짹짹—
다시 풍경은 평화로운 산속의 공동묘지.
비명 소리 대신 지저귀는 새 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들의 합창만이 귀를 채운다.
‘아······’
그러나 준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강해일이 주저앉으며 마지막에 뱉으려 했던 말이, 차마 공기를 타고 퍼져 나오지 못했던 말이, 그의 머릿속에서 완성되어 울려 퍼졌다.
‘······아빠?’
이 단어가 완성되는 순간.
무언가 끊어지면서 다리에 힘이 풀린다.
털썩—
준일의 무릎이 누군가의 묘지에 닿는다.
‘제, 젠장······ 이런 거였어?’
방금 회상의 여파는 강력했다.
존재가 위협받는 듯한 감각, 몸 안의 모든 힘이 다 빠져나버리는 경험.
어쨌거나 준일은 살아남았다.
정신도 유지되어 있다.
격을 초월하는 시선을 견딘 것이다.
“하아······ 하······.”
숨을 헐떡이며 눈을 깜박여 겨우 초점을 잡는다.
떨리는 손이 보인다.
준일의 떨리는 손엔 여전히 강해일이 건네줬던 소주잔이 들려있다.
해일은 의아하게 준일을 내려보며 말한다.
“굳이 무릎까지 꿇고 뿌릴 건 없는데.”
다행이었다.
핑계댈 게 있었으니.
잠겨있는 목소리로 준일이 대답한다.
“아······ 예, 예의죠. 그래도.”
쪼르륵.
알코올 내음이 코를 찌른다.
기억을 잊게 해버리는 물이 빈 묘지에 뿌려진다.
향기만으로 취한 걸까, 아니면 아까의 여파인가.
준일의 시야가 잠시 흐릿해졌다.
“남의 얘기에 뭘 울먹이고 그래? 괜히 얘기했나.”
툭.
강해일이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괜스레 씩 웃는다.
“······.”
준일은 그의 입가만 겨우 쳐다봤을 뿐.
시선을 보진 못했다.
어떤 눈을 했을지 그 눈에 비친 자신은 어떤지.
알고 싶지 않았다.
용사들은 때론 모르는 게 더 나은 것들도 많았다.
모두에게 좋은 선택을 할 수 없으니까.
-ㄷㄷㄷ
-이런 거였어???
-헐 저게 아빠였던 거임???
-이거 처음 나온 거 아님??
-헉······
-이 새끼 싫어하던 이유가 있었네
-얘가 사고슬 맞긴 함???
[현재 시청 성좌: 983명]
성좌가 1천을 향해 치솟는다.
치지지지직!
[경고! 현재 격으로 견딜 수 없는 시선입니다!]
[격의 경계가 흔들립니다!]
다시 시야가 흔들거리며 경고가 울린다.
두통이 일었다.
‘어지러워. 젠장.’
-얘가 원흉이구나 ㅅㅂ
-사고슬은 악마다
-ㅅㅂ 이 새끼였어???
-죽어 개새끼야
-얘가 사고슬 아니라니까 ㅋㅋㅋ
-애꿎은 짐꾼한테 왜 그래 ㅠ
-근데 어쩔 수 없었던 거 아님??
-다들 강해일 입장에서만 보네 ㅅㅂ
-하여간 요주의 인물은 맞잖아?
적어도 문준일이 사고슬인 걸 아는 성좌들은 다 비집고 들어오려는 거 같았다.
성좌들조차 이 내막은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그 판에 속한 이들은 모르지만, 모든 이야기판이 시간 순서대로만 진행되진 않는다.
당연히 이 모든 것들이 이야기 요정의 뜻대로만 진행되는 것도 아니었고.
때로는 뜻대로 됐던 것조차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야기란 백사장의 고운 모래와 같다.
아무리 손에 쥐려 해도 빠져나간다.
어떤 존재도 이를 완벽하게 붙잡을 수 없다.
어떤 노력도 의미가 없다.
정말이지 야속하지 않은가?
수많은 이들은 이 백사장 앞에 좌절한다.
허나 납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래가 햇살을 받으며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때.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버리는 것을.
띠링.
[화신 ‘용사 - 율리안’의 격이 상승합니다!]
[엑스트라 → 조연]
편의상 단순히 사고로 죽은 설정으로 되어 있던 해일의 아버지가 하필 4호선 사건의 희생자로 된 것도.
[시청 성좌 제한 1천 → 5천]
[조금 더 명확한 묘사로 표현됩니다.]
[서브 스트림을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성좌들이 당신을 더 많이 인지할 수 있습니다.]
엑스트라의 모든 장벽을 뚫고, 성좌들이 그를 조연으로 인정하게 된 것도.
빠져나간 모래와 같았다.
[현재 시청 성좌: 1,037명]
그 어느 누구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이 순간, 이곳에서 빛나고 있다.
-얘 조연이네
-ㄷㄷㄷㄷ와 반전 ㅋㅋ
-헐 그림체 바뀌는 거 뭐냐???ㅋㅋㅋㅋ
-ㅅㅂ ㅁㅊㅋㅋㅋㅋㅋ
-이새끼 엑스트라 아니었어?
-와 소름 ㅅㅂㅋㅋㅋㅋㅋ
-어쩐지
-그럼 사고슬 맞네 ㅅㅂ
-헐
-캬
-드디어 방 뚫렸네 와
-자수성가의 아이콘 문준일 ㄷㄷ
[화신 ‘용사 - 율리안’의 전승]
[10.37% 진행중]
47화
< 모래알들 (2) >
페어리 주식회사에서는 주인공을 선별할 때 메뉴얼을 참고한다.
메뉴얼 중 어떤 것은 필수적인 적용 사항이며, 어떤 것은 권고 사항이다.
대체로 필수뿐 아니라, 권고 사항도 모두 지킨다.
그야 이 권고 사항이야말로 메뉴얼의 꽃이기 때문이다.
“······데, 데이터상 이게 유리하다고 했잖아.”
그간 출시된 수많은 요정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만든 일종의 ‘법칙’들이 존재한다.
어떻게 해야 좋은 성적을 얻는지.
어떻게 하면 성좌들을 만족시키기 쉬운지.
예를 들면 못생긴 게 주제가 아니면 못생긴 놈은 피하라거나, 가족이 포커싱 되는 게 아닌 한 가족 관계는 모두 제거하라던가.
빠른 이야기 시작을 위해 특정 시점까지 개인사는 모두 ‘블라인드’ 처리한다던가.
“다······ 다 지켰을 뿐이야. 그거대로······.”
털썩.
램이 힘 없이 주저앉아 외친다.
그녀는 이 매뉴얼을 철저히 지켰다.
강해일은 키도 크고 용모도 뛰어나며, 정의감 넘치고 신념이 있고, 부모님은 모종의 사유로 돌아가셨고, 그의 개인사는 일단 성좌들에겐 블라인드.
성좌들에겐 강해일의 아버지는 그냥 사고로 돌아가셨고, 소방관이었던 그의 유지를 이어 S급 각성자로서 성장하는 모습 위주로 보여질 뿐.
자세한 내막은 가려져 있었다.
여기까진 이야기 요정이 해낼 수 있는 기획이었다.
다만—
[경고! 강력한 회상 에너지 발생!]
묘지를 방문한 후, 강해일의 감정이 지나치게 깊어지면서 그가 램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사실 이 정도는 늘 있는 일었다.
갑자기 멋대로 주인공의 과거 회상으로 넘어가져버린다거나 하는 일.
램도 몇 번 겪어봤었다.
그런데 공개된 정보의 내용이 문제였다.
4호선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그걸 라이브 영상 녹화본으로 봐버린 강해일.
거기에 건너편에서 문을 막으라 통솔했던 율리안.
“그냥 설정에 한 줄 ‘어머니는 출산과 동시에, 아버지는 사고로 돌아가심’이라고 적은 게 다라고!”
램이 고래고래 소리친다.
억울할 만도 했다.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래, 램 님······.”
이야기 요정들은 이야기판에 대한 주도권을 갖고 있지만.
전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등장인물들을 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는 있지만, 그들을 칼군무처럼 딱딱 맞춰 움직여낼 수는 없다.
이야기판은 살아있는 인물들로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어쩌면 그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
예기치 못한 관계가 만들어지고, 예기치 못한 서사가 되며, 예기치 못한 등장인물이 중요해져버린다.
[성좌들이 등장인물 ‘문준일’을 주요 인물로 인지합니다!]
“어······ 어째서!”
램이 아무리 소리쳐도 어쩔 수 없다.
-아니 뭐야 이런 거였어???
-헐······
-이게 이 타이밍에 회상으로······
-헉
-ㅁㅊ······
성좌들은 이제 ‘사고슬’ 문준일을 주요 인물로 인지할 수밖에 없다.
강해일의 가장 강한 원한이 향하는 존재니까.
당연히 엑스트라 급일 수가 없다.
용사 이야기에서 마왕이 엑스트라일 수 없듯이.
[등장인물 ‘문준일’의 격이 상승되었습니다!]
[엑스트라 → 조연]
“이, 이건 너무 하잖아? 운명의 장난이 너무하잖아!”
램이 거의 울먹이며 호소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림은 계속 뜬다.
[시청 성좌 제한 1천 → 5천]
[조금 더 명확한 묘사로 표현됩니다.]
[서브 스트림을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쿵!
램이 책상에 머리를 처박는다.
“내 잘못이야······ 내가 4호선에 고블린을 더 많이 넣어서······! 율리안을 죽이려고 더 많이 넣는 바람에 강해일 아버지가 죽은 거야!?”
하필 강해일의 아버지가 4호선, 그것도 율리안이 탔던 칸 바로 옆에서 죽다니.
초반부에 4호선에 코인을 너무 많이 쓴 부작용일까?
“그, 그건 아닐 거예요! 어차피 죽은 걸로 되어 있었잖아요! 무조건 어떻게든 죽는 거였어요!”
깨진 개연성엔 언제나 구멍이 생긴다.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선 엄청난 희생이 필요하다.
그걸 대신 해주는 것이 이야기 코인.
성좌들이 만족할 때마다 쌓여가는 이야기판의 화폐.
충분한 이야기 화폐만 있다면 그런 구멍은 다 막아낼 수 있었지만.
구멍을 아무리 막아도, 막은 흔적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아무 생각 없는 한 줄.
「주인공의 아버지는 사고로 돌아가심.」
시점도 과정도 없는 무성의하며 전개 편의적인 이 설정.
이 한 줄로 강해일은 모든 걸 잃었다.
이 단순한 한 줄이 누군가의 삶으로 구체화 되어버렸을 때.
어떤 파장을 일으키게 되는 건지 램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 솔직히 어떤 파장을 일으켜도 알 바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슬픔과 모순은 강해일이 견딜 몫이지, 이야기 요정의 몫이 아니니까.
그녀에게 이들은 그냥 이야기판 속에서 놀아나는 미물들일 뿐이니까.
그저 진행의 편의상 부모가 없길 바랐을 뿐이다.
기왕 죽는 거, 목적성을 위해 사고로 돌아가신 은퇴한 소방관이길 바랐을 뿐이다.
그러나 마치 그런 그녀의 안일함을 이야기판이 눈치챘다는 듯, 비수를 찔러왔다.
“으으으······!”
“래, 램 님?”
램은 고통스러워한다.
“안 돼에에에에에!”
[현재 시청 성좌: 1,037명]
엑스트라의 격을 벗어난 율리안의 시청 성좌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1천을 넘었다.
이제 이전의 율리안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 * *
순식간에 지나가는 수많은 텍스트들의 홍수 속에서.
준일은 겨우 정신을 부여잡았다.
‘조연? 내가 엑스트라에선 조연이 된 건가?’
늘 주인공으로만 지냈으니 이게 어느 정도의 효과를 불러일으킬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현재 시청 성좌: 1,037명]
덕분에 시청 성좌가 드디어 1천의 벽을 뚫어냈으며.
[화신 ‘용사 - 율리안’의 전승]
[10.37% 진행 중]
율리안의 힘 중 10분의 1을 얻어냈다.
그러자 세상이 멈췄다.
치지지지지직!
주변이 노이즈로 가득 차면서 모든 시간이 멈춰버렸다.
성좌들의 채팅도 강해일의 표정도 하늘을 날아가던 새도 모두 멈췄다.
그리고 단 하나만이 움직였다.
-너······
글자.
성좌들이 쓰는 글자.
타다다다닥.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 같은 게 나면서, 그것이 완성되었다.
-너 율리안······
준일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너 율리안 맞지?
미친.
준일은 욕이 나올 뻔한 걸 꾹 참아야 했다.
여기서 대답해야 하는 건가?
아니다.
팸이 몇 번이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절대 성좌와 대화해선 안 된다.
그들을 인지한 티를 내선 안 된다.
제4의 벽을 허무는 순간, 모든 게 끝.
“······.”
준일은 그저 침묵을 유지했다.
-와 너 율리안 맞지?? 또 율리안이었어! 진짜 아무리 못 알아보게 바꿔놔도 하는 짓이 비슷해서 알겠다니까?
준일은 자신도 시간이 멈춘 것마냥 가만히 있었는데. 성좌는 혼자서 떠들고 있다.
-아니 왜 이제 공주들 개무시하는 거냐? 진짜 답답하다
어라?
여기서부터 준일은 조금 이상하다고 느낀다.
‘공주?’
이게 무슨 말이야.
여기 공주 같은 건 없어.
재수 없는 S등급 강해일과 버섯을 좋아하는 엘프뿐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말들을 보며 준일은 사태를 파악한다.
-솔직히 율리안 시리즈는 첫 작이 명작이지ㅋㅋ 다음 작부턴 다 양산이네.
-그래도 뭐 율리안이니까 따라가요 ㅎㅎ
-이번엔 뭐야 망나니 용사의 탄생? 진짜 ㅋㅋㅋ 닉값하네
꿀꺽.
준일은 뭔지 알 것 같았다.
이전에 봤던 문장들.
‘이······ 이건······.’
그가 용사 시절에 받은 성좌들의 코멘트.
그렇다.
이건 기억이었다.
늘 일정 이상 전승이 되면 기억을 보지 않았던가?
이 현상도 마찬가지다.
약간 형태가 다를 뿐이다.
어떤 장면을 보는 게 아니라, 성좌의 코멘트를 보고 있다.
-아 율리안 너무 웃겨 ㅋㅋㅋ
-율리안 귀엽다ㅋㅋ
-왜 갑자기 여자 보면 도망가지? 막 들이대는 게 개웃겼는데 ㅋㅋ
단 한 명이 쓰고 있다.
여태 그 한 명이 쓴 걸 계속 보여주는 거다.
이 성좌는 율리안을 기억하며, 늘 다른 작품에서도 시작부터 그를 알아봤고.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
‘너······ 그 녀석이구나.’
준일은 이 성좌를 기억하고 있었다.
‘1회차 빌런.’
-잘 봤음~ 근데 암만 봐도 1회차가 명작 아님?ㅋㅋ 반박 시 네 말이 맞음ㅋㅋ
늘 1회차가 명작이라고 해주던 녀석이다.
성좌들의 코멘트에는 아이디니 뭐니 구별할 수 있는 장치는 하나도 없음에도.
왠지 모르게 저 녀석은 구분이 갔다.
나중엔 단순히 이런 글자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안녕^^
특유의 해맑은 말투가 다른 녀석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1회차가 명작 그다음은 2회차 ㅋㅋ
말투도 그렇고 주장하는 바도 정말 특이한 녀석이다.
‘지금 대체 왜 이 기억이?’
이상한 건 대체 왜 이 기억이 흘러나오냐는 것이다.
대체로 전승의 기억은 직전 사건과 관련 있는 것들이 주로 나왔었다.
-1회차 때 마나 블레이드 깨우칠 때 펑펑 울었는데······ 그때가 그립네.
이 말을 마지막으로 기억의 전승은 끝났다.
띠링.
[새로운 스킬을 익혔습니다!]
늘 그렇듯이 전승이 끝나면 스킬을 얻었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어?’
그 전엔 이미 익히거나 쓰고 있는 스킬을 확정받는 식이었는데.
[마나 블레이드]
새로운 스킬이다.
물론 1회차 때 익혀봤던 스킬이긴 해도, 아직 문준일의 몸으로는 써본 적 없는 스킬.
==== ====
성취: ★
잠재력: A+
설명: 누군가 크게 감명 받았던 스킬이다. 검에 마나를 응축하여 날로 벼려낸 뒤 베어낸다. 순간적인 사거리 증가와 엄청난 절삭력을 자랑한다.
==== ====
‘아니 갑자기?’
이렇게 뜬금없이 익혀진 스킬을 본 성좌들의 반응은 어떨까?
-뭐야 ㅋㅋㅋㅋㅋ
-이 새끼 왜 갑자기 이거 깨달음???
-응?
-강해일 말에 너무 찔려서?ㅋㅋㅋ
-강해일 죽이려고 깨달았니?
-죽어 사고슬 쓰레기 새끼야
-진짜 정체가 뭐임?
-얘 사고슬 아니라고 그냥 강해일 친구라고 ㅅㅂ
-걍 서 있는 데도 스킬을 배워 ㅋㅋㅋ
-강해일 아버지 죽이고 만화경 각성 ㄷㄷ
그냥 알아서들 해석하고 있었다.
사실 스킬을 깨우치는 타이밍은 그야말로 자기 마음인 거나 마찬가지.
그 유명한 ‘유레카!’도 수학 문제 풀 때가 아니라, 목욕하다가 깨닫지 않았던가?
‘어쨌든 확실히 감각이 달라졌다.’
준일은 자신의 주먹을 쥐었다 펴보며 느껴본다.
마나를 느끼는 감각과 끓어오르는 순도와 양.
모두 달라졌다.
신체의 가벼움도 아까와는 완전히 다르다.
[현재 시청 성좌 1,037명]
[화신 ‘용사 - 율리안’의 전승]
[10.37% 진행 중]
율리안의 힘 10%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거다.
흔히 말하는 1할.
0.1 율리안이 된 것이다.
‘이 정도 느낌이라면 진짜 마나 블레이드를 써도 되겠어.’
마나 블레이드는 1회차 율리안도 상당한 고생을 거쳐서 후반에 익힌 능력이다.
이 스킬은 마왕과의 대결 때까지도 쓰이는 그야말로 국밥 스킬.
그간 준일도 커터칼과 고블린 단검에 마나를 둘러 칼날 강화 효과를 부여하긴 했지만.
마나를 더 확장시켜 칼날처럼 벼려내서 베어버리는 건 완전 다른 얘기다.
마나 블레이드는 분명 자랑스럽고도 강력한 스킬.
‘그런데······ 뭔가 불길한데.’
다만 이 스킬을 익히게 된 과정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이 스킬이 이 시점에 부여된 이유를 의심하게 될 정도로, 준일에게 그때의 기억은 예민한 무언가다.
트라우마나 다름없다.
1회차 빌런이 그때를 인상 깊게 봤다며 언급한 이유가 있다.
‘설마.’
준일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1회차 빌런이······ 지금도 보고 있나?
혹시 근시일 내에 또 비슷한 일이 벌어질까?
준일의 머리가 복잡해져 갈 때.
“담배 피우나?”
그 의식을 헤집고 들어오는 해일의 목소리.
“아······ 아뇨.”
“그래? 의외네.”
‘의외는 뭔데.’
치익.
강해일은 손가락에서 불을 일으켜 담배를 태운다.
-캬
-가오 ㅈ되네 ㅋㅋㅋㅋ
-와 저건 ㄹㅇ 간지닼ㅋㅋㅋ
-크
-겉멋 MAX
강해일은 더 이상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그냥 하늘로 연기만 뱉어 댔다.
“아. 그러고 보니 엘프한테 받은 서브 퀘스트는 뭐였어?”
“아······ 그건······.”
말하면 또 티배깅 밖에 안 되겠지만.
‘시발. 할 건 해야지.’
준일은 그래도 여덟 번째 의뢰가 뭔지 잊지 않았다.
“대박이었—”
“너희들인가?”
그때였다.
스산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온 것이.
“너희들이 내 아지트를 턴 쥐새끼들인가?”
-헉
-ㄷㄷ
-왔다
-네크 보스 ㄷㄷ
-강해일까지 범인으로 묶였어 ㅅㅂㅋㅋㅋㅋ
-드디어 죽냐 사고슬
-사고슬 좀 죽여주세요 ㅅㅂ
-보스???
-해일이는 아닌데 ㅋㅋㅋ 쾌락 없는 책임 뭔데 ㅋㅋㅋ
-오오
-네크로맨서 보스구나 ㅅㅂ
48화
< 모래알들 (3) >
“헉······!”
네크로맨서 보스의 등장에 가장 놀란 건 준일도 해일도 아니었다.
“씨······ 씨발 맞다.”
램이었다.
그래, 이야기란 게 고운 모래 같아 손으로 아무리 잘 쥐어도 흘러내리는 건 맞다.
하지만 이건 손을 쥔 모양부터 잘못됐다.
발로 쥔 것이나 마찬가지 아냐?
“이게 지금 나와?”
율리안이 네크로맨서들을 다 죽이고 엘프의 퀘스트를 완료했을 때.
너무 화가 나서 네크로맨서 보스를 불러들였다.
보스에게 누가 부하들을 죽였고, 범인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단서를 정확하게 넘겨줬다.
네크로맨서 보스는 아직 그리 주목받는 인물이 아닌지라, 그 정도 개입은 식은 죽 먹기였다.
“이, 이렇게 행동력이 좋을 줄이야······.”
램이 당황하여 중얼거린다.
네크로맨서 보스 녀석이 아지트가 털린 걸 알아채자마자, 바로 율리안을 추적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그가 맞닥뜨린 순간이 강해일과 함께 있을 때라는 건.
전혀 의도되지 않은 설계다.
“어떠하죠, 램 님? ‘저 녀석’ 분명 죽이려 할 텐데······.”
그래, 죽이려 하겠지.
그러라고 불렀으니까.
율리안을 죽이라고!
“아니 저 새끼는 근데 왜! 강해일까지 엮는 거야!?”
분명 한 명의 소행이라고 전달됐을 텐데.
“한 명이라는 정보를 보고는 못 믿는 눈치였어요······ 한 명이 했다기엔 너무 파격적이라······ 둘이 같이 있으니까 둘이서 했구나 생각하는 거 아닐까요?”
“제, 젠장! 젠장!”
이게 다 회상 에너지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율리안이 강해일과 너무 오래 있었고.
너무 많이 엮여버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율리안도 메인 스트림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오오 등장
-보스 등장인가?
-ㄷㄷㄷ
-재밌겠다
메인 스트림만을 보는 성좌들도 수도 없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저 녀석 현재 레벨 몇이지?”
“지금은 레벨 37입니다.”
“해일이는?”
“21이요.”
엄청난 차이다.
아무리 S급이라고 해도 이 정도 레벨 차이는 극복하기엔 무리였다.
“이거······ 자, 잘못하다가······.”
램은 차마 ‘죽는 거 아니야?’라는 말은 입에 담지도 못했다.
그랬다간 모든 게 끝이다.
강해일이 죽으면 이야기판도 접힐 테니까.
본사에서 이렇게나 투자해줬는데 연중?
절필 처분까지 당할 수도 있다.
“레벨 차가 좀 나지만, 잘못될 일은 없을 겁니다. 보스가 직접 나서진 않을 테니까요.”
“응?”
“당연하잖아요? 저 보스가 누군지 잊으셨어요? 다음 메인 퀘스트에 역할이 있잖아요?”
“아!”
램은 손뼉을 짝 쳤다.
“쟤는 지금 모습을 드러내진 않을 거예요. 율리안도 아마 그렇게 처리하려 했을 거구요. 종속들만 보낼 겁니다. 그 정도는 강해일이 오히려 전문이죠. 대체로 불에 약하니까요.”
시체로 만들어낸 종속들은 불에 약하다. 또한 율리안과 다르게 해일은 일대다수 싸움에 강한 편이다.
율리안에게나 이게 곤란한 상황이지.
“오히려 경험치 이벤트가 될 거예요!”
강해일은 좋을 수도 있다.
“오오?”
램은 샘의 희망회로에 한 발 얹어본다.
“그렇네?”
들으면 들을수록 말이 되지 않는가?
강해일이 아무리 그래도 S등급이고, 적들은 죄다 지능도 없는 소환물인데.
“강해일이 지능이 없어도 적도 지능이 없으니까!”
“램 님!? 해일이는 지능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경험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
하여간 희망을 갖게 된 램.
“그래. 율리안 죽여서 뭐 하냐! 우리 해일이 경험치 이벤트다! 키리리!”
* * *
“너희들이 내 아지트를 턴 쥐새끼들인가?”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휙!
강해일과 문준일은 동시에 경계 태세를 취하며 뒤를 돌았다.
둘 다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이건 적이다.’
‘보스 새끼다.’
새로운 적의 등장, 혹은 네크로맨서 보스의 등장을.
“어······?”
그런데 빠르게 뒤돌며 자세를 잡은 것이 무색하게 뒤엔 아무도 없었다.
흐릿하게 사라지는 영혼만이 있었다.
“너희들이 맞나보군······.”
영혼은 이런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묘지엔 아무도 없었다.
-?
-이게 끝?
-응?
-뭐야 영혼 보내기였어?ㅋㅋㅋ
-응??
성좌들은 잔뜩 긴장했다가 허무해진 듯했다.
그건 강해일도 마찬가지.
“뭐야. 헛것인가? 유령 같은 걸 본 거 같은데······.”
사방에서 고블린이 튀어나오는 시대지만.
그래도 귀신, 유령 같은 건 믿기 어렵다.
그러나 준일은 달랐다.
‘이건 정찰용 고스트잖아.’
고위직 네크로맨서들은 ‘령’도 다룬다는 걸 익히 알고 있다.
방금 영혼은 공격 능력이 없고, 정찰 능력이 뛰어난 ‘고스트(Ghost)’ 부류다.
고위 네크로맨서들은 절대 본체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
‘종속들만 보내면 되니까.’
투두둑······!
묘지 몇 개가 갈라지며 시체들이 일어선다.
“그어어······.”
“그으으으······.”
[구울 Lv.11]
구울들이다.
일단 현장에 남은 시체들부터 활용하려는 듯한 느낌.
‘아직도 여기에 이렇게나 많았나?’
여기 있는 시체는 다 가져간 줄 알았더니.
아직 남은 시체들이 꽤 있다.
적어도 해일과 준일 이 둘을 포위시킬 정도는 되었다.
“미친. 이게 뭐지?”
강해일은 시체들이 일어나 슬슬 다가오니 조금 머뭇거린다.
‘쟤 시체 무서워했었는데.’
챔피언 고블린 공략 때도 시체를 못 옮겼다.
이거 난감하게 됐다.
여기서 실력 발휘를 할 수도 없는데.
그런데—
“크어어어!”
시체들이 본격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하자, 강해일도 결단을 내린다.
“뒤로 숨어. 짐꾼.”
“?”
화르륵!
그의 상체가 불타오르더니 순식간에 전면으로 불기둥이 치솟는다.
콰광!
시체들이 시뻘겋게 타오르며 하나둘 쓰러진다.
“끄어······!”
“커허······!”
수십 마리는 될 것 같았던 구울들이 순식간에 정리된다.
준일이었다면 일일이 목을 땄어야 할 텐데.
‘시체 공포는 극복한 건가?’
그때 반응을 생각해보면 쉽지 않았을 텐데.
역시 주인공이라 성장이 빠른 거 같다.
‘게다가 이건 새로 익힌 스킬?’
지금 강해일은 주먹을 뻗지 않고도 지상으로부터 불기둥을 일으키고 있다.
원거리 스킬이 있는 거다.
콰광!
“크억······!”
“크아아!”
한 번 치솟을 때마다 근처에 있는 구울들이 전부 재가 된다.
거의 광역 화염 마법이나 다를 바가 없는데, 캐스팅 시간이 적거나 없다.
준일이 마나의 흐름을 읽어봤지만.
원리를 알아내기 어려웠다.
‘S등급은 꽤나 신경 썼나보군.’
어쩌면 이건 램이 만든 오리지널일지도 몰랐다.
‘구울 따위로는 어림도 없겠는데.’
지금의 강해일에게 이 정도는 쉽다 생각할 때였다.
스으으으······!
다시 고스트가 등장했다.
“네 놈이군?”
그 고스트가 강해일을 보며 말한다.
“네가 내 부하들을 다 태워죽였구나.”
“······?”
강해일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 갸웃거린다.
“뭔 헛소리냐.”
“말싸움할 필요는 없지. 어차피 널 죽이면 오브도 되찾을 테니.”
흐흐흐.
음흉한 웃음소리와 함께 고스트는 다시 유유히 사라졌다.
강해일도 어이없어했지만, 준일도 마찬가지다.
‘불태운 건 네가 새긴 표식이잖아······.’
준일이 마지막에 네크로맨서들을 태워죽이는 바람에 강해일이 범인이라고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ㅁㅊㅋㅋㅋ
-이게 이렇게?ㅋㅋㅋㅋㅋ
-와 근데 강해일 스킬 보고도 ㅈㄴ 여유롭네? 그냥 테스트 용이었나봄
-엌ㅋㅋㅋㅋㅋㅋㅋ
-미친 사고슬 새끼 ㅋㅋㅋㅋ
-와 입 싹 닫고 가만히 있네 ㅋㅋㅋㅋㅋ
상대는 강해일의 능력을 파악해서인지, 전략을 바꿨다.
덜그럭—
공동묘지 위쪽 납골당.
거기서부터 이런 소리가 마구 울려 퍼지기 시작하더니.
[해골 병사 Lv.17]
해골 병사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언덕에서부터 마구 달려오는 해골 병사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쟁 영화를 연상케 했다.
‘이건······.’
해골 병사의 속성은 대체로 냉기다.
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배어 있다.
이들에게 불속성 데미지는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어딨냐! 나와!”
강해일이 그렇게 외치며 아까와 같은 불기둥을 솟게 하는데.
콰광!
해골 병사들은 잠시 넘어질 뿐, 다시 일어나 마구 달려든다.
그러자 강해일은 이제 직접 주먹을 내질렀다.
퍼엉!
주먹 한 방에 해골이 산산조각 나며 터져나간다.
-캬
-ㅈㄴ 세네
-이게 주인공이지
-크
-???: 해골 원위치.
퍼어엉!
강해일의 주먹은 굳이 불길이 묻지 않아도 상당한 파괴력이었다.
해골 병사들이 꽤 매섭게 칼을 휘둘렀지만.
쉬익!
이전의 강해일과는 달랐다.
[순보]
파앗!
준일이 건네줬던 순보를 사용하며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뒤를 잡더니.
“죽어.”
콰광!!!
대지를 내리쳐 사방으로 불길을 쏘아냈다.
아까의 불기둥은 견디던 해골 병사들이 이건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이야~”
짝짝.
준일은 그냥 뒤로 물러서서 박수를 쳐준다.
“해일이 햄! 씨다 씨!”
도와주다가 힘을 들킬 가능성이 높거니와, 네크로맨서의 종속들은 딱히 경험치도 많이 안 준다.
이미 죽은 시체니까.
-무친 새킼ㅋㅋㅋㅋ
-뭐하냐고 이새끼 ㅋㅋㅋㅋ
-또 이러네
-일부러네 이 정도면ㅋㅋㅋㅋ
-진짜 못났다······
-양심이 있으면 도와라 살인자 사고슬 새끼야
-어휴 이 새끼가 죽어야 하는데
강해일의 성좌들이 잔뜩 건너와 온갖 욕설을 퍼붓지만.
“어휴. 이런 건 짐꾼한테는 무리지. 무리야.”
준일은 더 열받으라는 듯 이런 말을 중얼거린다.
“S등급이 세금 더 내야지~”
-그치 ㅋㅋㅋㅋㅋ
-짐꾼인데 어쩌라고 ㅋㅋㅋㄹㅇ ㅋㅋㅋ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ㅁㅊㅋㅋㅋㅋㅋㅋ
-아 약올라 ㅋㅋㅋㅋ
-강해일 방 행님들 뚜껑 오픈ㅋㅋㅋㅋ
-씨발 새끼
파격적인 반응들이 쏟아지는 걸 무시하며, 준일은 마기의 흐름을 최대한 관찰해본다.
‘어딨는 거야. 애초에 여기서 한참 먼 건가?’
마기는 여러 줄기로 나뉘어져 흐르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 여러 절차를 거치는 방식이다.
‘이 새끼가 진짜 현대인이라고?’
얼마 전까지 현대인이었던 놈이라기엔 너무 능숙하다.
아마 보스는 아까의 그 엘프처럼 ‘건너온 존재’일 확률이 높다.
‘저긴가?’
준일이 어딘가에 마기가 상당수 모이고 있다는 걸 간파한 후.
그쪽을 관찰한다.
우웅!
눈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줌까지 당기려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어?’
쿠웅!
그 숲속에서 묵직한 발걸음이 울려 퍼졌다.
새들이 놀라며 위로 치솟고, 거대한 무언가가 몸을 일으킨다.
나무들보다 몇 배는 더 높은, 왕릉보다도 더 넓은—
[누더기 시체 골렘]
[Lv.30]
시체들을 합쳐서 만들어낸 거대한 골렘.
무려 레벨 30으로 책정되어 있다.
“······.”
그제야 깨달았다.
아지트에 모아놨던 시체가 다 저기 있다는 걸.
-ㄷㄷㄷㄷ
-헉
-미친
-개무서워
-진짜 ㅈ같게 생겼다 ㅠㅠ
-와
-저걸 어케 이김???
-뭐야??
-헐
기이이익······!
누더기 골렘이 소름 끼치는 소리로 삐걱거리며 다가온다.
“저건······ 뭐야?”
강해일이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한다.
“누더기 골렘이라네요.”
“그건 나도 보여.”
-ㅅㅂ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
-아오 그냥 저기로 꺼져라 안 도와줄 거면
-이 ㅅㅂㅋㅋㅋ 놀리냐?
후우웅!
시체로 이뤄진 거대한 팔이 휘둘러진다.
“그래봐야 시체지.”
강해일이 전혀 피하지 않은 채, 주먹을 맞서 내지른다.
강해일의 주먹과 누더기 골렘의 주먹이 맞붙는다.
콰광!
불길과 마기가 충돌한다.
엄청난 파장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살아있던 해골 병사들이 전부 무너져 내리고, 구경하던 준일도 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일 정도.
-ㄷㄷㄷ
-와 ㅅㅂ
-이게 그 찐따 같던 강해일이 맞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헉
-이거 보여주려고 여태 어그로 끌었구나 해일이 형 ㅠㅠ
-ㅈ된다
실로 대단한 전투다.
강해진 강해일을 보여주기에 딱 맞는 전개 같아 보였다.
‘언제 막타 칠지 계산 좀 해보자.’
사고슬은 그냥 언제 스틸할 지만 고민하면 되는 아주 심플한 상황처럼 보였다.
그런데—
“!”
강해일이 갑자기 멈췄다.
렉 걸린 것처럼 ‘뚝’ 멈춘 것이다.
그 상태로 누더기 골렘은 당연히 주먹을 내질렀고.
강해일은 전혀 피하지 못했다.
콰아아앙!
강해일이 거의 20미터 이상 멀리 날아가 쓰러진다.
“뭐?”
준일은 진짜 황당해하며 이마를 짚었다.
저걸 왜 맞은 거지?
방금 타격은 좀 위험해보였다.
“아니 씨발. 해일이 형! 못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런 말을 중얼거리며 근처로 달려간다.
-ㅁㅊㅋㅋㅋㅋㅋㅋ
-뭔뎈ㅋㅋㅋㅋㅋ
-ㅅㅂ 해일이 형!!
-여기서도 티배깅을 ㄷㄷ
-니가 해라 그럼 새끼야
-사고슬 가자
-“임시 동맹이다” << 이거 가냐?
강해일이 이러다 죽기라도 하면 끝 아닌가?
가로막는 해골 병사들을 전부 마나 펀치로 알게 모르게 처리하며 달려간다.
펑, 펑······!
“하씨······.”
준일은 입술을 짓씹는다.
대체 1회차 용사란 뭘까?
어찌 이렇게 무능력한가?
‘위험해.’
처억—
쓰러진 강해일에게 파운딩을 날리려는 누더기 골렘.
“피해! 뭐해! 피하라고!!”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왜 누워서 멍하니 뭐라 중얼거리고 있는 거야?
진짜 렉이라도 걸린 거냐?
이런 생각이 드는데.
가까이 달려가니, 그 원인이 들리고야 말았다.
“······아버지.”
“!”
-?
-헐
-???
-응?
-헉
-ㄷㄷ
그랬다.
누더기 골렘의 가장 중앙.
마치 운명인 듯 박혀있는 한 남자의 얼굴.
분노하는 표정으로 강해일을 죽이려 하는 남자의 얼굴.
“아······ 아버지······.”
그건 해일의 아버지였다.
49화
< 전문가의 방식 (1) >
초등학교 교실.
한 아이가 일어서 발표한다.
“제 꿈은 아빠처럼 훌륭한 소방관이 되는 것입니다.”
와아아아.
아이들과 선생님이 웃으며 박수 쳐준다.
발표하는 아이의 얼굴에도 자부심이 가득하다.
시간이 흘러 중학교 교실.
아이는 같은 말을 한다.
“난 소방관이 꿈이야.”
“응? 그······ 그래? 왜?”
같은 말이지만, 같은 반응이 돌아오진 않았다.
그러나 아이는 크게 신경 쓰지 못한다.
원체 그리 예민한 편이 아니다.
“아빠가 소방관이시거든. 하핫!”
“그렇구나······.”
고등학교.
같은 말을 한다.
“소방관? 그걸 왜 해? 돈도 안 되는 거.”
이번엔 아무리 무던한 아이라도 눈치챌 수 있다.
아빠의 직업.
어쩌면 그렇게 좋은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거.
대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말한다.
“나 소방 공무원 시험 쳐 볼까 하는데.”
이미 그의 말엔 예전만큼의 자신감이 없다.
“응? 구······ 굳이? 야. 몸 쓰고 싶으면 차라리 군인을 해.”
“웬 소방관? 오빠 혹시 학점 안 좋아요?”
이미 해일도 알고 있다.
그 스스로도 더 이상 소방관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아마 확인 받고 싶었던 것 같다.
어릴 적 꿈, 아버지의 모습······
그거 혹시 훌륭한 게 아니었던 건지, 현실은 어떤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거대 산불 속 “아기를 구한 영웅” 강정호 표창장 수여]
이런 기사에 달린 그 순간뿐인 반응들 말고.
-와 훌륭하신 분이 아직도 계시네요
-크 이게 소방관이지
-이런 분이 아직도 있기에 우리나라가 그래도 돌아가나 봅니다.
-진짜 저기를 들어가서 구하다니 ㄷㄷ
-저 애는 평생 고마워할 겁니다 ㅠㅠ
진짜 사람들의 생각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결론은 늘 비슷했다.
“취업 준비하다가 안 되면 그거라도 해보려는 거지. 뭐.”
해일은 그냥 이렇게 말을 돌렸고.
“아~ 어쩐지. 뭘 그런 거부터 걱정해요? 대기업들 공채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푸하하. 너 그런 성격이었냐? 뭔 걱정을 벌써 해?”
그제서야 주변 사람들은 마음이 편해졌다.
우연이었는지, 이날 저녁 식사에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아무래도 은퇴해야 할 것 같구나.”
“······예? 왜요?”
“건강 검진을 했는데. 더 이상은 일하지 않는 게 좋댄다. 연금도 나올 거고. 경비 업체에서도 나름 쳐준다고 하니까. 그 일이나 좀 해볼까봐.”
“······.”
이날 해일은 식사를 다 마치지 못했다.
아버지가 가장 빛나던 순간을 분명 봤었는데.
그게 사실 없었던 일이 된 거 같았다.
그리고 얼마 후 해일이 물었다.
“새로 하시는 일은 어떠세요?”
“응. 좋은데? 뭐 출퇴근도 딱딱 확실하고. 일도 뭐 그냥 산보나 하는 게 전부니까.”
“아버지.”
“응?”
“소방관은 왜 하셨던 거예요?”
아버지는 잠시 당황하셨으나.
이내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냥 먹고 살려고 했지.”
거짓말.
해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먹고 살 거였으면 더 좋은 직업 많았는데.”
“······그래. 미련했다. 아빠가.”
“······.”
그런 말이 아니었다.
꼬여버린 실타래는 풀려고 할수록, 점점 조여져버렸다.
매듭이 지어져버렸다.
“내가 좀 더 배운 게 있었다면, 달랐을 텐데.”
턱.
아버지는 접시를 들고 싱크대로 향하며 아들의 어깨를 짚으셨다.
그의 큰 손등엔 화상 자국이 보인다.
“아들은 공부를 열심히 했으니까. 더 좋은 직업을 찾을 거다. 취업 준비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
그때 당신은 쓰게 웃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냥 무표정?
차마 얼굴을 보지 못했다.
“예······.”
해일은 후에 나름대로 괜찮은 기업에 들어갔고, 아버지와는 따로 나와 살게 됐다.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을 때나 뵙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유튜브에 올라온 한 영상을 봤을 때.
[상황 기록을 위한 4호선 사태 라이브 편집본]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소방관이었다는 걸.
-문 열려던 아저씨 어떡해 ㅠㅠㅠ
-전직 소방관님 ㅠㅠ 헐······
-와 씨발 이걸 틀어막아버린 거야?
-하······ 근데 막은 사람들도 이해가 된다······
-그냥 재앙이다. 그 말밖에 할 말이 없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소방관님······ 기억하겠습니다.
그 마지막 순간의 아버지의 얼굴.
시민들에게 소리치며 앞장서는 그 얼굴.
강해일은 눈에 깊이 각인시켰다.
두 번 다시는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두 번 다시는 남들에게 평가를 맡기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정답은 자신 안에 있었다.
그리고—
[각성하셨습니다!]
[등급: S]
계시가 내려왔다.
척.
해일은 제복을 입고 찍은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꺼내들었다.
그 자랑스러운 얼굴을 다시 한 번 각인한다.
언젠가 이 얼굴 앞에 부끄럽지 않기를 바랬다.
그런데—
[누더기 골렘 Lv.30]
그 얼굴이 다시 한 번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어?’
콰아앙!
갑자기 풍경이 흐려지고, 몸이 붕 떴다.
‘왜?’
해일은 이해할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쿵!
흙바닥에 내리꽂혀 쓰러진 순간에도, 머릿속은 그저 새하얗게 지워져 있었다.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아······ 아버지.”
아버지의 얼굴이 있다.
영정 사진이 아닌 현실에.
그가 구하지 못한 수많은 시체들 사이에 묻혀 있다.
-뭐야 ㅅㅂ
-왜 이래???
-헐
-아버지???
-ㅁㅊ
-ㄴㅇㄱ
-엥???
-진짜임??
해일을 응원하던 성좌들은 패닉한다.
지금 드리운 시련이 갖는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아, 아빠······!”
강해일은 정신을 잃었다.
방금 맞은 충격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도저히 맞설 수 없는 것과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얼굴이 중앙에 박힌 저 시체 더미 조합.
남들이 보기엔 당장 태워버려야 하는 그냥 썩은 고깃덩어리일지라도.
그로서는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신성이다.
대항할 수 없다.
“컥!”
콰아아앙!
“아, 아······.”
알고 있다.
아버지는 이미 죽었다.
저건 치워야 한다. 그저 조종받고 있을 뿐이다.
머리로는 아는데.
“아아······ 아······.”
눈앞의 얼굴을 스스로 불길로 지진다는 건, 그가 평생 싸워온 것에 패배하게 만든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건 신성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이 인간에게 그렇듯.
신성은 해일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저 죽이기 위해 거대한 팔을 휘두를 뿐이었고.
대항할 의지를 잃은 나약한 인간은 심판을 받을 뿐이었다.
콰아아앙!
-아 ㅅㅂ
-미친······
-쌉고구마
-하차하라는 거지?
-진짜 심한데?
-나가라고 등을 떠밀어라 씨발 아주 ㅋㅋㅋ
이 나약한 인간을 응원하던 자들은 실망했다.
-진짜 병신 같네
-하 ㅈ 같은 전개 나오네 또
-ㅆㅂ 이렇게 쥐어 터진다고?
-개고구마네 ㄹㅇ
-아버지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님???
-기획 누가 함? 리버샷 마렵네 ㅋㅋ
이들에겐 당연한 반응이었다.
성좌들의 응원을 받는다는 건, 그들과 일부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강해일이 느끼는 감정은 성좌들에게 그대로 전이되고 있다.
비록 그것이 몇 단계의 필터를 거친다 해도, 이 고통의 농도가 너무나 높았다.
그러니까, 성좌들은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거다.
-ㅅㅂ ㅈ같다 진짜
-이게 뭔데?
-이걸 보라고 만든 거죠 그러니까??
-왜 날 고문하는 거임?ㅋㅋ
그들은 바라고 또 바랬다.
콰아아앙!
강해일이 다시 누더기 골렘에게 얻어 맞아 쓰러질 때마다.
-아 제발 좀 그만 ㅠㅠ
-빨랑 끝내라 ㅅㅂ 좋은 말로 할 때
-누가 이거 빨리 해결 좀
이 사태가 얼른 끝나기를.
-이게 해결날 각이 있나?
-그냥 죽겠는데?
-하······ ㅅㅂ
그렇게 바라는 건 성좌들뿐이 아니었다.
“씨······ 씨발 왜 하필! 왜 하필!! 저 많은 시체 중에 강해일 아빠가 센터냐고!? 아이돌이냐!?”
램은 침을 튀기며 울분을 토한다.
대체 이 불운은 뭐란 말인가?
주인공답지 않았다.
“그, 그게요······.”
샘이 키보드를 두들기며 데이터를 뽑아본다.
“이 지역의 운 수치가 너무 하락해 있습니다. 흑마법의 일종일까요······ 아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자식이 영향을 주고 있어요!”
“그 자식?”
척!
샘이 사고슬 자세를 잡는다.
“율리안이요!”
“······!?”
망할.
그럼······
“또 우리 탓이라는 거야?”
“그, 그건 아니죠? 율리안 탓이죠!”
“아니 그 자식은 지금 또 어디 갔어!? 왜 같이 안 싸워!!”
“아까는 그래도 강해일 근처로 가더니. 어디로 갑자기 튀었습니다.”
죽이겠다고 선포할 땐 언제고, 문제가 심각해지니까 사고슬을 찾는 램.
그야 지금 성좌들 반응이 심상치가 않기 때문이다.
-난 여기서 이만 하차요
-그렇게 쓸 거면 S등급 사고슬 줘라 ㅂㅅ아
-주인공 진짜 개 ㅂㅅ 같네
그런데다가 강해일로서는 안그래도 누더기 골렘을 상대하기 어려운데.
이런 정신 상태로는 더더욱이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 그럼 어떡해?”
램의 눈이 흔들린다.
‘설마······.’
설마 여기서 주인공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연중 당한다면?
본사에서 그 많은 투자를 해줬는데 그르친다?
세라핌이 직접 심판하러 올 것이다.
절필을 당할 수도 있다.
“하, 하나 가능성이 있어요.”
“뭐······ 뭔데?”
“각성.”
“!”
주인공이 위기에 닥치면 쓸 수 있는 돌파구다.
“만약 해일이가 여기서 제대로 대항할 의지만 갖춘다면······! 저희가 각성 코인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그거 외에는 지금 이 많은 성좌들이 보는 와중에 개입하는 건 불가능해요!”
각성.
수많은 성좌들의 염원을 에너지로 치환하여 등장인물이 한 차원 더 성장하는 현상.
그런데 이는 회상 에너지처럼 요정들의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충분한 위기, 충분한 의지, 충분한 응원.
이 세 가지가 합쳐져야 했다.
“의지······ 강해일의 의지만 있다면!”
지금 부족한 건 의지.
강해일은 지금 눈앞의 대상에 대항할 의지를 상실하고 있었다.
이것만 어떻게 해결된다면······!
강해일은 오히려 이걸 계기로 각성할 것이다.
그때였다.
우우우웅······!
“어!?”
“미, 미친!”
죽으란 법은 없는 걸까?
띠이이이!
[성좌 에너지 이상 기류 발생]
“이, 이거 각성의 전조현상이에요! 무, 물론 연중 전 현상이기도 한데······! 각성일 겁니다!!”
스윽.
계속 처맞기만 하던 강해일이 몸을 일으킨다.
눈빛이 달라졌다.
“그래. 역시 거짓말이었어.”
쿨럭······!
그의 입에서 붉은 기침이 흘러나온다.
“먹고 살려고 라더니. 먹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심지어 죽지도 못하고······.”
그는 주먹을 쥔다.
화르르륵!
여태 났던 상처들이 전부 불길에 휘감긴다.
“된다! 된다아!”
램이 흥분하여 두 손을 꼭 쥔다.
이런 걸 더러 위기를 기회로 극복한다고 하는 거다.
“되는 것 같습니다! 램 님!!”
샘도 흥분하여 방방 뛴다.
“크어어어어······!”
누더기 골렘이 달려간다.
쿵, 쿵, 쿵······!
강해일의 온몸이 불길에 휩싸였다.
아까와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
입술을 짓씹으며 의지를 다졌다.
‘이번엔 내가 구해줄게. 아빠.’
치이이이······!
그의 눈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동공이 축소하며, 아버지의 마지막 얼굴을 비추었다.
눈을 질끈 감고 싶지만 피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랬듯.
정면으로 마주할 것이다.
아버지의 얼굴은 어떻게든 피해서, 골렘을 연소시킨다.
할 수 있다.
‘S라면.’
강해일은 전의를 끌어올린다.
그런데—
[마나 블레이드]
촤아아아아악!
누더기 골렘이 반으로 갈라졌다.
아버지의 얼굴이 반으로 갈라졌다.
“!?”
부릅떠진 강해일의 눈.
그 위로 비쳤다.
반으로 갈라져 양쪽으로 쓰러지는 아버지의 얼굴 뒤로.
익숙한 가면이.
-ㄴㅇㄱ
-헉
-???
-엥?
-ㅁㅊ
-ㅅㅂ?
-?
-나여 <(_ _)/
“사고슬······?”
4호선 고블린 슬레이어.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수다.
-이제 와서??
-ㅁㅊㅋㅋㅋㅋㅋㅋ
-아니 짐꾼 개새끼야 ㅋㅋㅋㅋ
-헉
-고구마 컽! <(_ _)/
-미친 하필?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면 쓰고 오느라 늦었냐고 ㅋㅋㅋㅋ
-레전드······
-아버지를 두 번 죽인 원수네 이제
-ㅈ됐다ㅋㅋㅋㅋㅋㅋㅋㅋ
-???: 악역은······ 익숙하니까. <(_ _)/
-개미친새끼네 ㄹ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