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54

50화

< 전문가의 방식 (2) >

“아······ 아버지.”

이 말을 듣고 준일은 몸이 굳어버렸다.

‘뭐?’

누더기 골렘의 정중앙.

보란 듯이 박혀있는 낯익은 중년의 얼굴.

그건 해일의 아버지였다.

‘이런 미친.’

준일은 빠르게 판단해야 했다.

여기서 강해일이 저걸 처리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빅데이터로 봐서는······.

‘아니.’

아니다.

그렇다면 저 누더기 골렘이 갑자기 아버지의 정신을 각성해서 ‘해······ 해일아······?’ 하며 공격을 멈출까?

‘아니.’

그럴 확률 같은 건 안 보인다.

애초에 누더기 골렘이라는 건 수많은 시체의 융합이다.

그중 강해일의 아버지 정신만 각성한다는 것도 웃긴 일이거니와 그렇다 해도 골렘 전체의 전권을 쥘 수 없다.

여기서 준일은 용사로서 판단을 내린 거다.

‘일단 튀자.’

타다다다다닥!

-?

-???

-짐꾼 새끼 도망간다~

-ㅅㅂㅋㅋㅋㅋ

-줄행랑ㅁㅊㅋㅋ

도망치긴 했으나 고작 해봐야 해일의 시야에서만 겨우 벗어나 멈춘다.

그리고 빠르게 겉옷을 벗어 인벤토리로 집어 던지고, 챙겨나온 옷가지를 꺼낸다.

검은 코트, 검은 워커, 장갑까지.

-?

-뭔 배트맨임?

-뭔데 이거

-환복 속도 뭔데 ㄷㄷ

-변신 세트 ㄷㄷ

-뾰로롱~ 마법소녀 사고슬 변신~

-군필의 환복 ㄷㄷ

눈치 빠른 몇몇 성좌들은 그가 뭘 하는지 알고 있었다.

사고슬로 변신 중인 거다.

마지막으로 가면을 착용하기 전.

준일은 자신의 차림을 내려본다.

이거······ 확실히 많이 달라 보이긴 하겠다.

평소라면 여기서도 안심했을 거다.

‘들키면 끝이야.’

그러나 아까 전 강해일의 회상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던가?

준일은 지금 아버지의 원수가 되어있다.

더군다나 준일은 방금 전까지 강해일과 함께 있었다.

목소리라던가 여러 요소로 알아낼 수도 있다.

‘상점.’

슝.

[언제든지 뭐든지 상점 Lv.2]

상점을 열었다.

카메라 워크 같은 걸 쓰려고 연 게 아니다.

‘있었어.’

그는 페이지를 넘겨 ‘서술트릭’ 시리즈로 향한다.

시간 날 때 목록을 뒤져보던 중 발견한 게 있었다.

웬만하면 바로 칼을 사고 싶어서 돈을 아끼려 했는데.

[서술 트릭 가면]

[가격: 500 느낌(FL)]

이걸 쓸 수 밖에 없었다.

가격도 착한 편이다.

왜냐면 방어력 따위의 스탯 같은 건 하나도 없고 말 그대로 트릭쇼뿐이니까.

==== ====

“오늘도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걸 허락해주세요.”

과거 숱한 이야기들에 안면인식 장애설을 설파한 가면입니다.

상대가 착용자를 알아보기 힘들게 만들고, 목소리조차 다르게 들립니다만.

성좌들에게만큼은 그대로 보입니다.

원하는 모양의 가면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 ====

성좌들에겐 그대로 보인다.

이 점이 매우 무서운 아이템이다.

목소리도 그대로인 놈을 옆에서 못 알아보면 얼마나 답답할까?

아예 옷차림도 똑같이 하고 가면 더 열받을 거다.

하지만 그건 관둔다.

‘방심은 안 된다.’

요정 놈들과 관련된 건 설명을 늘 자세히 읽어봐야 한다.

‘알아보기 힘들게.’

절대 못 알아본다는 말이 아니었다.

알아보기 힘든 것뿐이다.

선을 넘으면 알아볼 거다.

[구입]

짤랑.

준일은 남은 이야기 화폐를 다 털어 그것을 결제했고.

-오 후원

-딱 맞는 후원 ㄷㄷ

-캬 아이템 뭔데???

-오오오오

성좌들은 마침 딱 맞는 아이템 후원이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텅.

박스 하나가 그 앞에 떨어졌다.

“응? 가, 갑자기?”

준일은 시간이 없어도 연기할 건 해준다.

놀라워하면서 천천히 박스를 열고.

“이게 뭐지······.”

어리둥절한 척하면서 설명을 읽고는.

“운이 좋군.”

이렇게 한마디 해준다.

-캬

-운이 좋군 ㅋㅋㅋㅋ

-이제서야 운이 좋네 ㄹㅇ

-이게 똥변기 테러나 당하던 문준일이 맞냐?

-ㄹㅇ 이번 건 운 좋네

그간 너무 악운을 때려 맞아서 이 정도로 어이없이 운이 좋은(?) 장면에서도 성좌들은 기뻐한다.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도박사의 오류에 빠진 거다.

“그럼······.”

척.

준일은 가면을 쓴 후.

‘검은 고양이.’

자신이 원래 쓰던 고양이 가면 모양으로 변환한다.

디자인이 좀 더 세련되어지긴 했지만, 스파이더맨 2와 3의 가면 차이 정도.

그러니까 충분히 사고슬로 보일 정도는 된다.

-오오오

-개간지

-와 업그레이드됐어 ㅋㅋㅋㅋ

-이렇게 하고 싸우러 감?

-해일이 구하러 가는 거야? ㅠㅠ

-빨리 좀 가라 ㅠㅠ

사고슬이 된 이상, 힘을 감출 필요는 없었다.

곧장 강해일이 있던 곳으로 다시 뛰어간다.

타다다다닥—

저 멀리 거대한 골렘이 보인다.

‘레벨 보니까······ 좀 빡세던데.’

기존에 갖고 있던 기술로는 상대하기 힘들어 보인다.

누더기 골렘 같은 언데드는 준일이 상대하기 제일 꺼려하는 류다.

놈들은 약점이 딱히 없다.

그냥 코어를 파괴해야 한다.

코어는 당연히 정중앙.

‘문제는 너무 크기가 크다는 거지.’

준일은 고민한다.

강해일이 얻어맞고 있는 것만 아니라면 여유롭게 패 죽일 수 있지만.

지금은 곧장 코어를 갈라야만 한다.

안 그러면 이 세계가 끝장나니까.

‘그걸······ 써야 되나.’

마나 블레이드.

‘그 스킬을 왜 줬나 했더니.’

갑자기 1회차 빌런에 대한 기억이 회상되며 부여된 스킬.

준일은 그 스킬이 왔을 때, 마냥 기분이 좋진 않았다.

첫째로 어차피 준일은 율리안 시절의 힘을 전승하며 마음대로 스킬을 쓴다.

굳이 부여받아서 좋아지는 게 없다.

둘째로는 그냥 기분이 나쁘다.

‘꺼림칙한 기억이······’

이 스킬에 관련된 기억이 별로 좋지 않았다.

1회차 빌런이 언급하지 않았던가?

자신은 마나 블레이드 관련 에피소드가 가장 좋았다고.

준일의 입장은 전혀 반대였다.

그는 그때의 기억이 가장 끔찍했다.

‘하······ 젠장.’

그리고 아마 곧 강해일의 기억도 그렇게 될 것이다.

‘비슷한 상황이려나.’

슈웅.

준일은 인벤토리에서 고블린이 쓰던 검을 하나 꺼내며 누더기 골렘을 향해 달려간다.

‘단번에 끝낸다.

기왕 쓰는 거, 제대로 한다.

준일은 그렇게 다짐했다.

타다다닥—

빠르게 접근하며 눈을 감는다.

‘율리안의 힘 10%’

정확히 자신의 마나를 감지하며 끌어올린다.

‘확실히 달라.’

7%대와 10%대는 확연히 달랐다.

어떤 벽을 넘은 느낌.

번쩍!

그의 눈에 푸른 이채가 스친다.

[마나 블레이드]

스킬을 발동시킨 것이다.

우우웅!

푸른 검격이 앞으로 뻗어나가며, 날카롭게 벼려졌다.

모든 것들을 반으로 가르며.

공기마저 양분하며 나아간 칼날은 당연하다는 듯, 목표를 단숨에 베었다.

촤아아아악!

온갖 경직된 시체들이 덕지덕지 붙은 골렘의 몸이 둘로 나뉘었다.

햄이 잘리듯 깔끔하게.

쿵······!

매끈한 단면의 시체가 양쪽으로 쓰러진다.

완벽하게 죽었다.

시체가 가리고 있던 너머엔 강해일이 있었고.

둘의 눈이 마주친다.

* * *

“한다아아! 강해일! 드디어 각성한드아아아아!”

램이 파르르 날아오르며 괴성을 지른다.

강해일의 각성 전조 현상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이다.

“샘! 우리 떡상하는 거야!”

“네! 램 님! 저, 저희 드디어! 드디어 저희도 빛을 보는 건가요!?”

“그래! 장하다! 강해일!!”

다행히 강해일은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는 자기 손으로 아버지를 편하게 해준 뒤.

완전한 용사로 거듭날 것이다.

과거 많은 용사들이 그랬듯이.

그러나 이들은 또 순간적으로 망각했다.

그 과거의 용사 중 하나가 이곳에 있었다는 거.

“?”

촤아아아악!

누더기 골렘이 반으로 잘려나갔다.

램과 샘.

그들은 멍해진 영혼이 빠져나간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저······ 저, 저게 지금······.”

믿을 수 없었다.

지금 저기 강해일 아버지 시체를 반으로 갈라버린 놈.

저게 그놈인가?

옷도 신발도 다 달라서······ 알아보기 힘든데.

-나여 <(_ _)/

성좌들의 반응을 보고서야 믿게 됐다.

“유, 율리안?!”

“으어어어!?”

램과 샘의 눈이 튀어나갈 듯 커다래진다.

* * *

‘저 녀석은······?’

이글거리는 아지랑이와 매캐한 연기가 시야를 흐려도, 보인다.

“사고슬······?”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사지로 몰아넣었던 4호선 사태의 주범.

4호선 고블린 슬레이어.

각성 직전이었기에 온몸이 불로 타오르고 있는 강해일.

그 이글거리는 불꽃만큼 거대한 분노로 머리가 흐려져 있었다.

“너······.”

살의가 점차 전신을 물들인다.

그 분노가 어느 정도일지, 준일조차 헤아리기 어려웠다.

이 분노만으로도 각성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이지만.

각성이라는 건 단순히 분노만으로 이르지 못한다.

자신의 손으로 소중한 것을 죽여야 할 때, 용사로서의 책임과 개인의 감정이 충돌할 때, 그럼에도 용사로서의 길을 택하는 자에게 오는 축복이다.

성좌들의 염원, 자신의 투지, 절망의 극복.

이 세 가지가 맞물리며 찾아오는 ‘별의 순간’이 각성.

한 번 이 순간이 지나가면 한동안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

해일은 그럴 기회를 잃었다.

각성의 기회를 준일에게 박탈당한 것이다.

이러면 성좌들의 염원도 점점 식을 수밖에 없다.

김이 빠지는 거다.

-씹고구마네 ㄹㅇ

-짐꾼인 거 못 알아보는 거 실화임?

-이딴 병신 전개를??? 연속으로??? 제정신임???ㅋㅋㅋㅋ

-하차함

-아니 씨발아 문준일이잖아 이걸 못 알아보냐??

-이거 피폐물임?ㅋㅋㅋㅋㅋ

-숨 막혀 죽을 거 같다 ㄹㅇ

이건 준일이 의도한 건 아니었다.

‘휴. 살렸다.’

그는 그냥 강해일이 아무리 봐도 자기 아버지를 죽일 수는 없을 거 같아서 도와준 것뿐이다.

“왜 그렇게 쳐다보지? 내가 살려준 셈 아닌가?”

혹여나 들킬까 목소리를 쭉 깔고 말하는 준일.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건 그래

-ㄹㅇㅋㅋㅋㅋㅋ

-ㅅㅂㅋㅋㅋ 몰라서 묻냐??ㅋㅋㅋㅋ

그의 성좌들이 좋아라 한다.

슬슬 여기 성좌들은 강해일보다 준일을 더 좋아하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굳이 주인공이 아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엑스트라 취급이던 녀석을 찾아온 자들이다. 이미 특이 취향인 것이다.

진짜 문제는 강해일 방의 성좌들마저 방금의 말에 동요한다는 것.

-그래도 살긴 했네;

-솔직히 이 정도면 사고슬이 구해준 거 아님?

-이제야 깨달아요 사버지~

이는 준일이 확실히 의도한 바다.

해일의 심정에서나 사고슬이 밉지.

성좌들 입장에선 애매하다.

강해일의 감정을 일부 공유한다지만, 그것이 너무 과해지면?

‘감정 과잉 현상.’

준일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결국 완전히 공감받진 못할 거다.’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구구절절한 사연에 어떤 성좌들은 오히려 감정을 차단해버린다.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결국 살았으니 된 거 아님?

-솔직히 죽을 뻔했잖아

-신파 힘들다······ 그냥 힘들어······

그러니 이런 감정 과잉을 유발하는 혈육 관계는 애초에 주인공에게 잘 주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페어리 주식회사는 대체로 부모와 연이 없는 고아들을 위주로 주인공을 선별하곤 한다.

강해일의 경우도 그런 이유로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가 죽는 설정이 넣어진 것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범인이 이 이야기판 속에 살아있고.

“너······ 네가 왜 여깄어.”

지금 눈앞에 있으며.

그가 무려 7회차나 용사로서 활동하고 온 베테랑이라는 것.

“우연.”

모든 건 우연.

혹은 이야기의 거대한 흐름.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

-걍 속일 의지도 없누 ㅋㅋ

-이 새끼 일부러 긁냐?ㅋㅋㅋ

-ㄷㄷ

-간지 그 자체

“그딴 걸 믿으라고?”

믿을 수 없다.

녀석은 아버지를 산 채로, 죽은 채로 두 번이나 살해했다.

강해일에게 주어진 현실이란 오로지 이것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감정을 추스른다는 건, 인간으로서 불가능하다.

여기서 가만히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인간 실격일지도.

분노로 이성이 흐려진다.

“씨발······.”

타다다다다!

강해일이 달렸다.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기세로, 그의 몸이 몇 배로 더 타올랐다.

“죽어어어어어!!”

반드시 저놈을 죽인다는 생각으로.

‘음.’

가면 뒤 눈이 곤란해진다.

‘잘못하면 죽겠는데.’

이젠 율리안의 힘 10%다.

잘못 때리면 죽을 수도 있다.

-리매치?

-이번엔 누가 이기냐

-사고슬 vs 강해일 ㄷㄷ

-솔직히 F급은 이겨야 되는 거 아님??

-이거 이기면 각성할 듯

-강해일이 이겨야지 ㅅㅂ

51화

< 전문가의 방식 (3) >

끓어오르던 각성 에너지는 사고슬의 등장과 함께 식어버렸다.

성좌들의 반응도 싸늘하게 식었다.

삐이이이!

삐이이!

미친듯이 눌리는 하차벨.

그야 해일은 같은 놈에게 두 번이나 아버지를 살해당했고.

각성의 기회를 완전히 놓쳐버렸다.

눈에 닿을 듯한 순간에 빼앗는 게 가장 악질이지 않던가?

“으,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램이 괴성을 지른다.

그녀 역시 하차할 수 있으면 하차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망할 직장.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악!”

그냥 때려치고 싶다.

거래처에 이상한 놈이 있다구요!

“램 님! 진정하세요!”

“너, 넌 진정하게 생겼어!? 어? 마, 마지막 희망이었던 각성까지! 저 새끼가 막아버렸잖아아아악!!?”

쩌렁쩌렁.

샘은 램의 발성에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그, 그래도······!”

샘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상사를 위로할 만한 말을 찾으려 한다.

“그래도? 그래도 뭐? 할 말이 있나?”

“······그······ 해일이가 율리안을 잡아낼 수도 있어요! 지금 분노 상태를 보세요!”

“하?!”

램이 비웃는다.

“넌 아직도 그딴 생각을 하는 거냐!?”

척!

램이 갑자기 사고슬 자세를 잡는다.

“방금 전 그 칼질을 보고도 몰라!? 아까 강해일이 몇 발자국만 가까이 있었어도! 그냥 두 동강이었어!”

“해, 해일이가 아니더라도! 네크로맨서 보스! 그 녀석이라면······.”

그랬다.

네크로맨서 보스가 여기 와있었다.

애초에 그 녀석 때문에 이 모든 사건이 벌어진 건데.

“걔? 아까 도망쳤어!”

“!?”

도망쳤단다.

율리안을 죽이라고 설계해뒀더니.

마나 블레이드 한 번 보더니 내빼버렸다.

“예!? 이, 이 의리도 없는 새끼······!”

샘도 이건 예상을 못했던 모양.

“그 정도라는 거야. 방금 전 보여준 율리안의 위력.”

고작 10%의 힘이었으나, 현시점 너무나 압도적인 힘.

“지금 해일이가 덤빈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함부로 덤볐다간······.”

램이 율리안이 들고 있는 검을 쳐다봤다.

분명 그냥 고블린들이나 쓸법한 싸구려 검인데.

마나로 뻗어나온 칼날이 너무나 위협적이었다.

“저걸로 그냥 썰릴 거라고!”

마나 블레이드.

1회차에 각성한 율리안이 사용했던 기술.

이래봬도 각성 기술이다.

S등급이고 뭐고 상대가 될 리가 없다.

“어, 어떡하죠 그럼?!”

“어떡하긴! 강해일이 못 덤비게 어떻게든······!”

그러나 이미 늦었다.

눈앞에서 자기 아버지가 두 번 죽었다.

같은 놈에게.

-씨발 쟤 좀 꼭 죽여라

-아 진짜 씨발 해일이 형! ㅠㅠ 정신 좀 차려!!!

-아아아아아악!! 악!!

-아 ㅈㄴ 화가난다 진짜 꼭 보여줘라 ㅠ

성좌들도 머리끝까지 분노하고 있다.

강해일은 오죽할까?

[죽어어어어어어!]

타다다다닥!

전속력으로 율리안에게 달린다.

불나방처럼.

“아, 안돼······!”

램은 차마 못 보겠다는 듯, 눈을 가렸다.

이제 끝이야.

연중이야.

이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파르르 떨었는데.

그런데—

“어?”

콰아앙!

강해일의 공격을 피한 후, 율리안은 거리를 벌렸다.

“뭐······ 뭐야. 봐주는데요?”

왜 봐주는 거지?

샘은 온전히 이해하긴 힘들었다.

율리안의 입장에서 강해일은 그냥 미친놈이다.

자기를 계속 죽이려고만 하지 않나?

“나, 나 눈 떠도 되는 거야?”

“네. 다시 거리를 벌려서 소강상태입니다. 강해일도 탐색전 중이고요.”

“키, 키리리? 왜 바로 안 죽였지?”

램은 일단 살았다는 생각에 좋으면서도 기분이 찝찝했다.

저럴 놈이 아닌데.

“아까 사정을 알게 돼서 그런 게 아닐까요?”

율리안이 4호선 사태 때 아버지가 죽은 걸 알게 되긴 했는데.

“키리리. 그럴 리가 있어? 저놈이 어떤 놈인데!”

그걸로는 설명이 어렵다.

율리안은 무려 7회차나 용사 짓거리를 하고 온 극악무도한 놈.

웬만한 뒷세계 용병보다 잔인하고, 사람 목숨 알기를 파리만도 못하게 알 놈이라고 여겼다.

램은 그런 녀석의 비인간성이 싫었다.

그런 건 아무런 울림을 주지 못한다고 여겼다.

톱니처럼 착착 진행되는 극도의 효율성 앞엔, 어떤 ‘여운’도 없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왜 강해일만큼은 죽이려 하지 않는 걸까?

저렇게나 거슬리는데.

“그래도 사람 새끼인데. 봐주려나 보죠.”

샘이 어깨를 으쓱하는데.

램이 꿀밤을 한 대 쥐어박았다.

꽁!

“야! 아직도 모르냐고! 그냥 봐주려는 게 아닐 거라니까!?”

분명 뭔가 준비된 게 있을 거다.

“왜 때려요! 진짜로 검을 거두잖아요!?”

그런데 율리안은 검마저 다시 거둬들였다.

싸울 의지가 없다는 것.

그러자 강해일도 주춤한다.

“뭐······ 뭐지!?”

잠시 후.

이들은 그 속내를 알게 되었다.

* * *

준일은 거리를 벌리며 잠시 시간을 벌었다.

‘어쩌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어때 보일지 몰라도, 준일은 강해일과 싸우는 게 매우 곤란했다.

‘힘 조절 잘못했다간 끝장이다.’

죽일 수 없는 사람과 죽여야만 하는 사람의 싸움이다.

마나 블레이드에 함부로 강해일이 맞지 않게 오히려 조심해야 하는 상황.

얼마나 불편한가?

‘그냥 도망칠까?’

그냥 이 자리를 피해야 되는 게 아닌가도 생각했지만.

‘그건 사고슬의 존재감이 너무 약해질 거야.’

메인 빌런 자리를 꿰차야 하는데. 여기서 그냥 로켓단마냥 도망친다?

안 될 소리다.

‘역시 그건가.’

[악당 BGM]

햄이 제공한 목록에는 별의별 브금이 다 있었다.

-응?

-오 음악

-ㄷㄷ

-간지네

-크

탁—

준일은 전투 의사가 없다는 표현으로 검을 다시 수납했다.

준일은 목소리를 최대한 깔며 말한다.

“시시하군. 강해일.”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왜 좀 간지나냐?

-뭔데 ㅋㅋㅋㅋ

-진짜 미친놈이네

-브금 빨이냐? 왜 간지남?

-엌ㅋㅋㅋㅋ

“기대에 훨씬 못 미쳐.”

그는 주머니에서 어떤 칼을 꺼내든다.

“지금 너라면 이 정도가 좋겠군.”

드륵—

그 작디 작은 칼을 본 강해일의 눈이 꿈틀거린다.

“······뭐?”

반면 성좌들은 신난다.

-캬

-커터칼 ㅋㅋㅋㅋㅋ

-커터칼 선에서 컽!

-미호크냐고 ㅋㅋㅋ

-목소리 뭐야······

-커터칼 십ㅋㅋㅋㅋ

-넌 딱 고블린이다 이거임~

커터칼.

대충 마나로 강화하면 어차피 강성은 늘어나니, 작고 날이 가늘어서 편리해 갖고 다니던 무기다.

‘이거라면 설마 죽을 리는 없겠지.’

고블린이라면 모를까, 강해일 같은 괴물 수준을 상대로는 급소만 안 그으면 살상력이 없을 거다.

그래서 안심이다.

“유언은······.”

강해일이 으르렁거린다.

“그게 다냐!”

콰아앙!

불길과 함께 쏘아지듯 달려드는 강해일.

‘이젠 안 봐줘. 해일이 형~’

척.

마나 블레이드가 있을 때와는 준일의 자세부터가 달랐다.

‘순보.’

파앗!

신형이 흩어지고, 해일의 뒤로 나타난다.

촤악!

강해일의 무릎 뒤쪽에서 피가 솟구친다.

“컥!”

-???

-와 ㅈㄴ 빨라

-미쳤네

-엥?

-??

털썩.

강해일의 무릎이 저도 모르게 땅에 닿는다.

몇몇 힘줄이 끊어진 것이다.

강해일의 눈이 떨린다.

“이, 이게······.”

지금까지 본 적들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압도적인 스피드, 정확성, 완벽한 타겟팅.

그야말로 전문직의 솜씨.

하지만—

“크으으······!”

화르르르륵!

무릎 뒤쪽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회복된다.

강해일이 다시 일어선다.

“호오.”

준일은 가면을 고쳐 쓰며 묻는다.

“버티는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ㅅㅂ

-“커터칼 500배” 가죠?

-이 새끼 뭐 연극학과 나옴?ㅋㅋㅋ

-어디 극단 출신인가요?

화르르르륵!

강해일의 양 주먹에 엄청난 불길이 모여든다.

불길만으로 일어난 열풍이 밑의 잔디들을 까맣게 태울 정도.

“네 놈을 죽일 수 있는데. 못 버틸 일 같은 건 없어.”

제법 멋진 말과 함께 다시 달려드는 강해일.

‘순보.’

팟!

그는 순보까지 제대로 활용하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데.

“힘은 좋은데 말이야.”

강해일의 머리 위쪽에서 순보로 나타나는 준일.

“너무 뻔해.”

휘릭—

준일의 몸이 크게 회전하며, 강해일의 턱에 킥이 꽂힌다.

“!?”

——뻐억!

마나는 거의 담기지 않은 순수 체술의 뒤 돌려차기.

그럼에도 해일은 저 멀리로 나가떨어진다.

그렇게 거대하던 불길이 무색하게 꺼져버린다.

-ㄷㄷㄷ

-와

-ㅈ간지네

-걍 이 새끼임ㅋㅋ

-ㅅㅂ 이게 그 찐따 같던 짐꾼 문준일이 맞냐?

-와 뭐야

-<(_ _)/

준일의 성좌들은 신났지만.

대부분의 성좌들은 열불이 터지고 있다.

-ㅅㅂ

-와

-이렇게 발린다고???

-저 새끼 정체가 뭔데요 그래서

-아니 ㅡㅡ

-이딴 병신 같은 전개를 언제까지 봐야함????

성좌들은 어쩌면 지금 강해일만큼 불길에 휩싸여있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더 있다간 화병이 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준일은 이제 강해일의 맷집 파악을 마쳤다.

‘어디까지 버티는지 대충 알겠네.’

이제부터가 진짜다.

“강해일. 넌 너무 아마추어야.”

휘릭.

커터칼을 한바퀴 돌리며 천천히 걸어가는 준일.

“전문가의 방식을 잘 봐둬라.”

그는 보여주려 한다.

전문직 용사의 실력을.

-캬

-크

-캬

-캬

-크으

“닥—”

다시 벌떡 일어나며 대항하려는데.

——촤아악!

순식간에 지나친 신형, 준일의 코트자락이 휘날림과 동시에 피가 뿜어진다.

“!?”

이젠 봐주는 게 없었다.

다시 그의 코트가 휘날리며, 이번엔 뒤 쪽에 그어지는 검격.

촤아악!

힘줄이 연달아 끊어진다.

강해일의 어깨가 축 늘어진다.

억지로 팔을 휘두르지만.

훙!

‘없어······?’

이미 그곳에 준일은 없다.

“다 예상이 됩니다.”

-ㅅㅂ

-와······

-차이가 너무 심한데??

-F등급에 뭐 있냐???

-뭔데 시발

촤아아악!

다시 측면.

허리 쪽의 근육마저 끊어진다.

“큭······!”

엄청난 고통이 밀려온다.

마지막으로 다시, 준일의 자세가 숙여지더니.

하단을 마구 벤다.

촤아아아악!

커터칼의 잔상이 수십 개로 나뉘는 듯한 속도.

촤아악!

촤악!

-ㅠㅠㅠ

-해일이 형 ㅠㅠㅠ

-시발 못보겠다

-헐······

-ㅠㅠㅠㅠㅠ

털썩—

무릎이 끝내 땅에 닿는다.

오히려 너무 강인한 정신을 갖고 있어서, 더 볼 수 없게 처참하게 패배했다.

눈앞에 꼿꼿이 선 사고슬.

“젠장······! 젠장!!!”

분통하다.

그를 바로 앞에 두고도 강해일은 더이상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니.

그 분노를 앞에 마주하면서 가면의 남자는 차분히 강해일의 상태를 확인한다.

‘이 정도면 회복하는 데 하루 정도 걸리겠군.’

지금이야 움직이지도 못하지만.

활동에 지장은 없을 거다.

마지막 체크를 끝낸 후, 그는 마지막 대사를 날린다.

“강해져서 돌아와라.”

휘릭.

괜히 외투를 더 휘날리며 뒤돌아 퇴장.

[악당 BGM]

[재생 종료]

음악이 끝났다.

-캬

-크

-크ㅠㅠㅠ

-ㅅㅂ 제대로 빌런이넨

-얘가 흑막이었누

-이럴 줄 알았어 얘가 마왕인 거지?

-ㅋㅋㅋㅋㅋㅋㅁㅊ

-캬

충분히 거리가 멀어지자, 준일은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와······ 사고슬. 존나 카리스마 있어.”

나름 주인공이 아니어도 만족스러운 준일이다.

-?

-?

-??

-컨셉충이었냐고 ㅋㅋㅋㅋㅋㅋ

-뭔데 이 새끼 진짜로 ㅋㅋㅋㅋㅋ

-개오글거리더라 어쩐지 ㅅㅂㅋㅋㅋㅋ

-ㅅㅂㅋㅋㅋㅋ

-연기였누 ㅋㅋㅋㅋ

-이런 새끼한테 당해야 하는 거냐?

-사고슬 사살 기원 2일차

-죽어 이 새끼야

-ㅁㅊㅋㅋㅋㅋㅋㅋㅋ

-이게 사고슬이지~ <(_ _)/

-사고슬! <(_ _)/ 사고슬! <(_ _)/ 사고슬! <(_ _)/ 사고슬! <(_ _)/

-방금은 사고슬이 아니라 문준일입니다. 걍 F급 찐따예요.

.

.

.

[현재 시청 성좌: 1,239명]

52화

< 전문가의 방식 (4) >

한 편 멀리서 이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엘프, 이실렌.

‘뭐 하는 거지?’

그녀는 이런 의문을 거둘 수가 없었다.

인간들이 어리석은 싸움을 하는 거야 수도 없이 봐왔지만.

이건 도가 지나친 거 아닌가?

‘왜 갑자기 둘이 싸우는 거야?’

그녀의 눈엔 이상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연륜으로 서술트릭 가면의 기능이 그녀에게 먹히지 않았으니.

‘방금 전만 해도 친했잖아.’

바로 조금 전에 친구처럼 대화하던 이들이 갑자기 뭐가 문제가 됐는지 피까지 튀기며 싸우고 있다.

문제는 이 싸움 자체도 정말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는데.

‘싸우는 게 아니라······ 훈련일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한쪽이 압도적이며 오히려 봐주고 있었다.

만약 한쪽이 마음을 먹었다면 수십 번은 죽였을 것만 같았는데.

이건 봐주는 걸 넘어 거의 훈련시켜주는 셈이었다.

이실렌은 그 싸움을 끝까지 지켜본 후.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훈련이구나.’

이해했다.

이건 인간 사이에 행해지는 훈련이다.

이곳의 훈련이 자신이 있던 곳보다 조금 더 혹독하게 진행될 뿐 과정은 비슷했다.

압도적으로 강한 쪽이 약한 쪽을 패면서 알려주는 방식.

‘그럼 역시 세계수가 보여준 남자는······.’

본래 이실렌은 세계수의 계시에 대해 100% 확신은 아니었다.

계시라는 게 늘 그렇듯 모호한 구석들이 있어서.

혹여나 옆에 있는 저 남자를 말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실렌은 이제 확신한다.

‘계시의 남자는 짐꾼이었어.’

계시 속에 등장하는 이들.

인간들은 이들을 용사라고 부른다.

용사들은 마왕의 대적자로 매우 강하다.

그들은 세계의 편애를 받고 신께 수많은 선물을 하사받는다.

그들은 특별한 존재다.

저렇게 압도적인 힘, 알 수 없는 따스한 향기······.

‘분명해.’

저 남자가 용사였다.

그런데······.

‘뭐 하는 거지?’

용사가 불길에 휩싸인 남자를 무력화하고 멋지게 퇴장하는가 싶더니.

“강해져서 돌아와라.”

이 말을 하고 천천히 걷다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인간의 시력으로는 너무 멀어서 보이지 않겠지만.

엄청난 시력에 마나를 활용해 줌인까지 가능한 엘프의 눈으로는 보였다.

타다다다닥!

용사는 어디론가 부리나케 뛴다.

급한 일이 있는 걸까.

‘······음?’

근데 급한 일이 있으면 곧장 거기로 가야 하지 않나?

빙 돌아서 다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가면을 벗고 옷도 갈아입은 채였다.

“헉······ 허억······.”

용사는 숨을 헐떡이더니 손을 내밀었다.

“저, 저 엘프님? 그······ 포션 같은 거 있어요?”

“포션?”

이실렌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없습니까?”

준일은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없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치료······ 급히 좀 치료가 필요해서요.”

성좌들도 이해할 겸 편의상 포션이라 말했지만 준일이 말하는 건 다른 물건이다.

엘프들이 마력과 독성이 깃든 풀을 주기적으로 정화하여 만들어내는 물질.

엘릭서다.

-대뜸 포션 ㅋㅋㅋㅋㅋ

-진짜 엘프가 상점 주인인 줄 아냐?

-설마 이 새끼 짐꾼으로 가서 포션 줌? 진짜 악마 아님???

-웬 포션?

-본인 치료하려고 묻는 거다에 한 표 ㅋㅋㅋ

성좌들은 그가 그냥 게임에서나 보던 뭔가를 바란다고 여기고 있다만.

‘아. 치료.’

이실렌은 알아들었다.

‘엘릭서를 말하는 건가.’

그나저나 엘릭서를 달라 하다니, 이런 건방진 인간을 봤나.

그런 거 하나 만드는데 엘프들에게조차 ‘한 세월’이 들어간다.

그들이 체감하기에 한 세월이라면 인간에겐 수명이 다할 때까지도 하나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에게나 주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이 자는 용사였다.

세계수가 점지했으며 신의 편애를 받는 자다.

“금화로 이 정도······ 어?”

값을 치루려던 준일은 깜작 놀란다.

‘엘릭서?’

포션을 달랬더니 훨씬 상위의 물질인 엘릭서를 얻게 됐다.

“여기. 그냥 가져.”

“?”

심지어 그냥 준단다.

“그냥 준다구요?”

“그래.”

이실렌은 대답하며 꺼내든 엘릭서를 한 번 더 흔들었다.

찰랑—

액체 같으나 고체 같기도 한 빛나는 루비색의 결정들.

‘진짜잖아.’

이건 진짜 엘릭서가 맞았다.

“가······ 감사합니다.”

“종종 찾아와.”

무슨 집안의 어르신들 같은 말을 하는 이실렌.

그런데 그럴만 했다.

진짜 어르신이다.

“······아 물론이죠.”

준일도 예를 갖춰서 끄덕인다.

“와서 나랑 버섯도 같이······.”

“아아아아아!”

“?”

“저, 저는 급한 일이 있어서!”

-버섯 알러지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버섯 ㅋㅋㅋㅋㅋ

-???: 버섯······ 버섯을 보자!

준일이 우당탕 도망치듯 강해일에게 뛰어가고.

이실렌은 짧은 대화가 아쉬운지 물끄러미 그의 뒤를 지켜봤다.

* * *

뜨겁다.

눈을 뜨자마자 엄습하는 건 뜨겁다는 감각이었다.

온몸을 불로 활활 태우는 능력을 가진 자가 뜨겁다고 느낀다는 게 우습다만.

정말로 어린 시절 독감에 걸렸을 때처럼 온몸에 열이 올랐다.

분명 눈을 뜬 거 같은데 하늘이 시커멓다.

아니 온 세상이 다 암흑이다.

암흑.

그 녀석의 색.

온몸을 검은색으로 둘러싸고 검은 고양이 가면을 낀······.

‘전문가의 방식을 잘 봐둬라.’

사고슬.

그 놈의 형상이 아른거렸다.

“으으윽······! 윽······!”

사고슬 생각만 해도 몸이 발작을 하는 건지, 다시 온몸에 고통이 엄습해온다.

신경을 짓누르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다.

이건 어쩌면 몸의 통증이 아닐지도 몰랐다.

‘전혀······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어.’

S등급의 잠재력을 부여받았음에도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손끝도 대지 못했다.

‘강해일. 넌 너무 아마추어야.’

어쩌면 그의 말이 맞았다.

잠재력만 운 좋게 S등급일 뿐이다.

몬스터나 죽여봤지, 사람을 죽인다니.

솔직히 아버지 원수급의 원한 아니었다면 그런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상대는 어떤가?

사람 목숨을 파리의 그것보다도 못하게 여긴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4호선의 모든 칸 중 자신의 칸만 살리는 판단을 내렸고.

옥상에서 구조 요청을 보내던 남자를 죽였으며, 누더기 골렘을 벨 때도 망설임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근데······.’

그런데 희한했다.

‘왜 날 죽이지 않은 거야.’

강해일만큼은 살려뒀다.

다시 사고슬의 형상이 말한다.

‘강해져서 돌아와라.’

진짜 이상한 말이었다.

왜 강해져서 돌아오라는 거지?

죽고 싶나?

‘뭐지······.’

놈이 진짜 미친놈이라 자신을 농락하는 것이거나,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다.

무의식 세계 속 사고슬의 가면이 일그러지며 히죽 웃는다.

콰득.

강해일은 이를 악물었다.

‘사연은 무슨······.’

마음 약해지지 마.

반드시 죽일 거다.

그래, 네 말대로 강해져서 돌아가 준다.

“······돌아와······.”

그때 새까맣던 세상이 조금씩 빛을 찾아간다.

사실은 이제서야 진짜로 강해일의 눈이 떠진 것이다.

아직 하늘은 파랗고, 묘지의 잔디는 싱그럽다.

그런데 그를 내려보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

“······돌아······.”

‘강해져서 돌아와?’

그런 말로 알고 강해일이 몸을 벌떡 일으킨다.

훙!

“깜짝이야. 이제 정신이 돌아왔어요?”

상대는 머리를 부딪힐 뻔하여 급히 피하며 묻는다.

“······넌.”

사고슬이 아니었다.

“짐꾼?”

F등급의 짐꾼이다.

문준일.

-짐꾼ㅋㅋㅋㅋㅋㅋ

-이름은 안 부르고 맨날 짐꾼이래ㅋㅋㅋ

-짐꾼이 입에 붙었나봐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한다.

“예······ 짐꾼 맞아요. 형. 제가 싸움은 못 도와드렸는데.”

준일은 자신이 도망갔던 걸 변명하려 했는데.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강해일은 그가 도망갔던 건 당연한 거라고 여기는 듯했다.

“네?”

“너 F등급이잖아, 전투력이 없는. 도망치지 않고 뭐 하고 있는 거냐고.”

“도망쳤다가 돌아왔죠.”

“뭐? 왜? 위험한데. 아직 놈이······.”

강해일은 아직 사고슬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몸을 일으키는데.

당연히 없다.

지금 눈앞에 있는 놈이 사고슬이니까.

“······돌아갔나?”

“그 가면 쓴 미친놈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셀프 극딜 ㅋㅋㅋ

-와 이 새낀 진짜 악마다 ㅋㅋㅋ

“어······.”

“걔는 갔어요. 잔뜩 폼 잡으면서 사라지던데요.”

“도망쳤다면서 잘도 보고 있었군.”

“멀리서는 봐야죠.”

“하. 그럼 다 봤겠군.”

강해일은 짐꾼에게 처참한 모습을 보였다는 게 신경 쓰인 모양이다.

조금 씁쓸한 표정.

“근데 제가 그냥 도망만 친 건 아니고.”

찰랑—

준일이 엘릭서를 흔들어 보인다.

“이거 챙겨왔어요.”

“······?”

해일의 고개가 갸웃거린다.

“이게 뭐지?”

“포션이요.”

“포션······? 게임에서 나오는?”

“네.”

“그런 게 진짜 있다고?”

“진짜 치료되던데요.”

“!”

그 말에 뭔가 깨달은 해일은 자신의 몸을 내려봤다.

말끔하다.

옷만 찢어져 있을 뿐, 몸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너······?”

“맞습니다.”

준일은 자신이 했다며 끄덕인다.

“어디서 구한 거야?”

“제가 엘프랑 좀 친하다니까요. 친해지니까 그냥 하나 주더라구요.”

-ㅅㅂㅋㅋㅋ 또 티배깅ㅋㅋ

-마 내가 엘프랑! 술도 묵고! 사우나도 가고!

-ㅠㅠㅠ 그거 강해일 거라고 ㅅㅂㅠㅠ

“대단한데?”

강해일은 진심이었다.

이 녀석 싸움만 못하지, 엄청 능력이 좋았다.

‘괜히 기여도 1등을 한 게 아니구나.’

챔피언 고블린 던전에서도 인정한 남자.

문준일.

“역시 등급은······.”

“숫자에 불과하죠.”

“!”

강해일은 자신의 말에 맞장구쳐주는 놈을 처음 본 건지 눈이 휘둥그레진다.

“고맙다.”

맞장구쳐줘서 고맙다는 건지, 치료가 고맙다는 건지 구분이 안 가지만.

준일은 딱히 신경 안 쓰고 엘릭서를 건넸다.

“이거 챙겨가세요.”

“······내가? 귀한 거 아닌가?”

“S등급 몸이 더 귀하죠. 세상을 구해야 하니까.”

등급은 숫자에 불과하다더니 바로 몇 초만에 모순된 행동.

“······알았어.”

강해일은 끄덕이며 챙긴다.

“고맙다. 이 은혜는 꼭 갚을게.”

-귀하긴 해~

-아니 시발ㅋㅋㅋㅋ

-S는 등급이 아닙니다. 품격입니다.

-ㅋㅋㅋㅋㅋㅋ에라이

-ㅈㄴ 웃기네 ㅋㅋㅋㅋㅋ

성좌들은 그런 강해일의 행태에 깔깔거린다.

물론 이렇게 여유 있고 유쾌한 반응을 보이는 건 준일의 성좌들이다.

본 채널은 달랐다.

-아니 ㅅㅂ 저새끼가 사고슬이라고!

-와······ ㅁㅊ

-이게 뭔······ 십······.

-근데 짐꾼 착한데? 쟤가 왜 사고슬이라는 거야??

-짐꾼이 사고슬이라는 이론은 진짜 지독하네 ㅅㅂㅋㅋㅋㅋㅋ

-사고슬을 못 알아보는 게 말이 되냐?????

-이야기를 대충 보는 새끼들이 얼마나 많은 거야 ㅋㅋㅋ

-거 ㅅㅂ 똥 싸면서 보는 거에 과몰입들 하지 맙시다~

한바탕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나의 큰 경향성이라는 건 존재하나, 가까이 들여다보면 성좌들도 이야기를 관람하는 방식이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곁눈질로 보는 것처럼 대충 보는 이들도 있었다.

-걍 진행되는 대로 봐야지 관심법 쓰면서 피곤하게 하네 ㅋㅋㅋ

-야 니들이 만들어 ㅅㅂ

-애초에 짐꾼이 사고슬이 아니라고 ㅅㅂ 기획자가 싸이코냐?

-짐꾼이 사고슬이면 진짜 칼 들고 찾아감

그러다 보니 짐꾼 문준일이 사고슬이라는 연결도 안 되는 경우가 태반.

그도 그럴게 이야기 자체를 애초에 띄엄띄엄 보는 성좌들도 많았기 때문이며.

어떤 이들은 봤다고해도 구력이 낮아 서술트릭 가면에 속는 것이다.

분명 그 능력에 성좌들은 해당 사항이 없음에도, 그냥 겉보기에 다르니까 속는 것.

-옷도 다르고 체형도 비슷할 뿐 다름 심지어 신발까지 다른데?

-걍 망상증임

-머리 스타일만 좀 비슷함ㅋㅋㅋ

-짐꾼 불쌍해 ㅠㅠㅠ 애초에 F등급인데 ㅠㅠㅠ

이러니 성좌들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는 건 당연했다.

진실을 제대로 본 이들 입장에선 아버지의 원수이자 강해일을 무참히 두들겨 팬 놈이 옆에서 은인인 척 행세하는데.

같이 이야기를 보는 성좌란 놈들은 그걸 또 모르고 ‘짐꾼 불쌍해ㅠㅠ’하고 있으니 열이 뻗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거다.

-아 씨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건 하차로 안 됨 컴플레인 넣어야 함 ㅅㅂ

-진짜 미치겠네 하

-내가 이상한 거임?? 여기가 매트릭스 세계인 거임??

세상 모든 일이 의도대로 되리란 법은 없다.

이런 갈등이 준일의 의도대로 하차를 유발하기도 했지만.

의외로 어떤 이들에겐 끝까지 보게 만드는 힘을 발휘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 개씨발 끝까지 가보자 저 새끼 가면 깨지는 날만 기다린다 ㅋㅋㅋㅋ

사고슬이 죽는 그날까지 보겠다고 다짐하는 성좌들이 생긴 것이다.

즉, 이야기판 자체의 성좌 수는 오히려 증가하는 효과를 발휘했는데.

문제는 이들이 강해일 채널에서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너 언제 뒤지나 보러 왔다

-얘 언제 죽음?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현재 시청 성좌: 1,303명]

‘아오. 시끄러워.’

그들은 준일의 채널로 향했다.

53화

< 전문가의 방식 (5) >

쿵—

램이 책상에 머리를 부딪혔다.

“래, 램 님! 머리를 그렇게 박으시면 머리 나빠져요!”

“박은 게 아니야······ 부딪힌 거야.”

“예?”

스스로 박은 것처럼 보이지만, 허리에 그냥 힘이 풀리며 저도 모르게 박았으니 부딪혔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표현 하나하나에 민감한 이야기 요정답달까?

······는 헛소리였다.

쿵! 쿵! 쿵!

램이 계속 머리를 박기 시작한다.

“램 님!! 그러다 죽어요오오오!”

샘이 울고불고 매달리며 그녀를 틀어막았다.

램은 머리가 위로 강제로 추켜올려진 채 중얼거렸다.

“키리리? 죽으려는 게 아니야······ 살아있는지 확인하려는 거야.”

“아니! 충분히 살아계세요!”

“아니. 난 이야기 요정으로서 죽은 걸지도 몰라. 여긴 망자(亡者)의 세계고, 난 망생(亡生)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고!!”

램이 소리치며 가리킨 곳.

강해일의 성좌들 숫자가 표기되어 있었다.

여전히 엄청나게 많은 숫자다.

스토리보드 3.0 블록버스터의 힘이다.

다만 그 옆에 한가지 데이터가 있는데.

최근 빠져나간 성좌들.

[구독 해제: 108명]

스토리보드 3.0 시스템에는 정기적으로 찾아오고 싶어서 눌러 놓는 기능인 ‘구독’이 있다.

이걸 굳이 다시 삭제한 이들이 무려 108명이나 발생했다.

묘지 사건이 벌어진 효과였다.

반면—

“이······ 이 성좌들이! 다 여기로 가버렸어!”

[신규 구독: 110명]

너무나 비슷한 숫자로 늘어난 율리안의 성좌 구독.

누가 봐도 뻔했다.

이들은 강해일을 버리고 율리안 쪽으로 틀어버린 것이다.

“램 님······ 성좌들이 해일이가 싫고 율리안이 좋아서 간 게 아니라······ 이 새끼 언제 죽나 하고 간 거라구요.”

“나도 알아! 그런 성좌들도 있다는 거! 하지만! 어떤 성좌들은 아니거든?”

“······.”

그랬다.

샘이 애써 감추고 싶어 하던 진실.

-솔직히 사고슬이 더 멋있으면 개추ㅋㅋ

-얘가 더 주인공 같음

-인생의 쓴맛을 알면 사고슬임ㄹㅇ

-후······ 너넨 사고슬 피지 마라.

옮겨간 성좌들 중 최소 절반은 강해일보다 사고슬이 더 마음에 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미미한 숫자지만, 이런 현상이 시작됐다는 것이 의미가 있었다.

확실히 악당 BGM까지 틀고 강해일을 참교육한 보람이 있었던 거다.

심지어는 이런 성좌들까지 생겼으니.

-사고슬은 사실 강해일을 강하게 만들려는 거임. 낮엔 짐꾼으로 보좌하고 밤엔 사고슬로 훈련시키는 거지

낮짐밤사.

낮엔 짐꾼 밤엔 사고슬.

이런 개소리를 당당하게 흘리고 다니는 성좌들이 나타났다.

이런 말은 처음엔 별로 주목받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얘기가 다르다.

거짓말도 100번 반복하면 진실이 되는 마당에.

저건 그렇게까지 틀린 말도 아니잖은가?

헷갈려 하는 성좌들이 나올 법도 했다.

사실 저거 말고는 지금 준일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도 얼마 없다.

설마하니 그가 강해일의 성좌들을 뺏어오는 거 자체가 진짜 목적일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겠는가?

“지······ 진짜 저건가?”

심지어는 램도 혹하는 이론이었다.

“램 님!?”

* * *

한편, 감옥에서 지켜보던 팸과 햄.

[전문가의 방식을 잘 봐둬라]

이 말과 함께 강해일을 참교육시키는 율리안을 보며.

“꺄루루! 개찢었다!”

팸은 극강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자신들을 깜빵에 처박아 넣은 자식들을 대신 패주는 듯한 느낌까지 받았다.

이게 이야기지!

이게 용사지!

여기에 울려 퍼지는 악당 BGM까지.

“꺄루루루루루······ 룩!?”

뽕맛 치사량에 팸은 거의 졸도하려 했다.

“팸 님!”

누구는 책상에 머리 박다가 죽으려 하고, 누구는 행복사를 겪는 상황.

이번 사고슬의 등장은 둘의 희비를 완전히 교차시켰다.

* * *

‘아. 망할 차비.’

준일은 엘프에게 금화까지 받았지만, 사실 돈을 받은 건 아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갈 때 차비가 걱정됐으나.

“내가 태워줄게.”

다행히 강해일이 차가 있었다.

“운전할 수 있겠어요?”

“어. 완전 나았어.”

그렇게 해일은 자기가 두들겨 패놓은 강해일의 차까지 얻어 탄다.

-이 새낀 사람이 아니다

-???: 야 강해일! 빵 사오고 거스름돈 남겨와라?

-양심 어디?ㅋㅋㅋㅋㅋ

-아니 ㅋㅋㅋ 해일이 형 ㅠㅠ 차까지 태워주냐고! ㅠㅠㅠ

-모르니까 그럴 만해~ ㅋㅋㅋ

-해일이 입장에서는 차가 아니라 가마도 태워줄 수 있는 은인이지 ㅋㅋㅋ

-보스도 스틸해 차도 스틸해······

“오늘 구해줘서 고맙다. 은혜는 언젠가 갚을게.”

설상가상.

강해일은 정말 준일을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성좌들은 준일더러 양심이 없냐고 하지만.

‘뭐······ 살려준 게 몇 번인데. 은인 맞지.’

준일의 생각은 이러했고.

그와 생각을 함께하는 성좌들도 꽤 있었다.

-얘 아니었으면 강해일 이미 두 번 죽음

-애초에 사고슬이 몇 번을 살려줬는데 뭔 소리들임?

-그저 사버지인데ㅉㅉ

그렇다. 실제로 살려준 건 살려준 거다.

준일은 -철저히 본인 기준- 분명 해일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갚을 필요는 없어요.”

-?

-???

-ㄹㅇ?

-웬일?

은혜 갚을 필요 없다는 준일.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그 말을 어긴다.

“그냥 형 팀 만들 때 저 끼워줘요.”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받기 위해서다

-F급을 ㅋㅋㅋㅅㅂㅋㅋㅋ

-선물 말고 현금으로 줘요~

-갚을 필요 없다며 이 새끼야 ㅋㅋㅋㅋ

-낙하산 짐꾼ㄷㄷㄷ

-비리 채용 ㄷㄷ

“팀?”

강해일은 팀이라는 말에 무슨 소리냐는 듯 갸웃한다.

“네. 파티 맺고 한다면서요.”

“사냥할 때 임시로 맺는 거지. 팀이라는 개념은 아닌데.”

강해일은 기왕이면 혼자 다니는 걸 선호하는 건지.

팀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이런 데선 묘하게 거리를 두네.’

마냥 감정에 휘둘리는 스타일은 아닌 모양이다.

그냥 사고슬만 미워하는 거다.

“아마 이제 팀 짜려는 애들 많을 텐데요. 깡패 같은 새끼들도 몰려다닐 거고.”

“그렇긴 하겠네.”

팀으로 활동하는 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 같은 반응.

‘차라리 잘됐어.’

팀이 완전 굳어지기 전에 지금 말해둔다면?

우선순위가 올라갈 거다.

“혹시 팀 결성하게 되면 저 넣어주세요.”

“······근데 말이야.”

강해일이 말을 돌린다.

뭐지.

혹시 뭔가 의심하고 있나?

해일은 마치 면접을 보듯 묻는다.

“넌 왜 이 일을 하는 거지?”

‘아니 미친 목숨을 구해줬는데 팀에도 면접 보고 넣어줘?’

F등급 인생이 이렇게 서럽다.

“네? 무슨······.”

준일은 모른 척 다시 되묻지만.

꿋꿋이 질문하는 해일.

“이 일 말이야. 짐꾼······이라 해야 하나? 하여간 지금 각성자로서 계속 뭔가 하려고 하잖아.”

-걍 좀 넣어줘라 ㅅㅂ

-F등급 주제에 왜 계속 뭘 하려고 하는지 묻는 거잖앜ㅋㅋㅋ

-ㅋㅋㅋㅋㅋ이상할 만함ㅋㅋㅋ

-ㄹㅇ F등급이면 진작에 때려쳤을 텐데

-면접 드가네 ㅋㅋㅋㅋㅋ

-ㅅㅂ 생명의 은인인데 낙하산 좀 해줘 새끼야~

-맞네 ㅋㅋㅋㅋ

-의외로 예리함. 안면인식 장애만 있을 뿐.

실로 예리한 질문이다.

보통의 각성자라면 F등급의 억까를 견디고 굳이 이 일을 이어 나갈 필요가 없다.

그냥 평범한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E등급은 생산 클래스인지라 전투 위협을 안 받는 생산으로 경험치를 얻기라도 하지.

F등급은 클래스도 없어서 마냥 사냥을 해야 하는데.

이걸 굳이 이어 나가는 사람은 이상할 수밖에 없다.

‘대답 잘해야 될 텐데.’

하여간 강해일 옆에 붙어야 유리해지는 준일로서는 이 대답을 고심할 수밖에 없다.

‘아마 신념을 묻는 거야.’

이 일.

각성자로서의 일.

준일에겐 ‘용사로서의 일’로 겹쳐 들렸다.

그래서일까?

그는 차창 밖, 빠르게 스쳐가는 가로등으로 시선을 돌린다.

일곱 번의 용사 생활.

저 불빛만큼이나 많은 일이 있었다.

그 많은 일을 어떻게 해냈을까?

1회차는 메이린과 동료들 덕분에 해낼 수 있었다.

그럼 2회차는?

3회차는?

대체 어떻게 그딴 일을 계속한 거지?

‘아파트 사려고.’

가장 큰 이유는 내 집 마련이지만.

그건 강해일에겐 좋은 대답이 아니다.

‘그건가.’

갑자기 떠오르는 게 있다.

-마지막에 너무 감동했음! 결국 율리안은 해내는구나! ㅎㅎ 나도 언젠간 하는 일이 잘되기를~! 너무 재밌었당 율리안!ㅎㅎ

누군가 계속 응원을 남겨줬다.

1회차 빌런이다.

-1회차가 진짜 명작임! ㅋㅋㅋ 이것도 재밌긴 함ㅋㅋㅋ 율리안이니까~!

-잘 가 율리안 ㅠㅠㅠ

-1회차 때 마나 블레이드 깨우칠 때 펑펑 울었는데······ 그때가 그립네.

폐급 1회차 용사 율리안을 좋아해 준 성좌.

이런 이들도 있는 것이다.

“누가 계속 응원해주더라구요.”

이런 놈을 응원해주는 이들도 있던 것이다.

“······응원?”

“예. 희한하죠? 폐급인데.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이 계속 응원해주더라구요. 어쩌면 그래서 이 일을 하는 거죠.”

강해일은 머리를 긁적인다.

“F급을 응원해준다는 게 쉽진 않을 텐데.”

‘아니. 등급은 숫자에 불과하다며.’

-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새낀 ㅋㅋㅋ

-틈만 나면 극딜ㅋㅋㅋ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쉽지 않긴 해~

-사고슬 방 모두 화이팅 ㅠㅠ

“좋은 사람이네. 잘해줘.”

그는 여자친구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F등급 따위는 응원 못 할 테니까.

“예, 뭐······.”

“좋은 이유이기도 하고.”

“!”

좋은 이유.

강해일은 준일의 대답이 마음에 든 것이다.

“팀 결성하면 연락할게.”

* * *

털썩—

집에 돌아온 준일은 쓰러지듯 침대로 몸을 던졌다.

“어우. 돈 굳었다.”

서브 퀘스트도 수행했고.

택시도 안 탔고.

금화도 받아왔다.

‘다른 서브 퀘스트도 좀 찾아봐야 하나.’

서브 퀘스트라고 하면 비단 그 공동묘지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터다.

만약 수행해낸다면 특별한 아이템이나 보상을 받겠지만.

‘의미 없지.’

어차피 준일은 율리안의 힘을 전승받아 강해지고 있다.

강해지는 게 목적이라면 성좌를 더 모아야 한다.

[현재 시청 성좌: 1,380명]

오늘 집을 나서서 포천으로 갈 때까지만 해도 700명 언저리였는데.

이제 1,400명에 육박한다.

거의 2배가 불어났다.

‘좋았다.’

준일은 하루 일과를 만족스러워하며 잠에 들었다.

그리고 그가 잠에 들자 성좌들은 하나둘 빠져나갔다.

이상한 녀석들만 남는 시간.

-ㅎㅎ파란색을 자주 입네

-준일이랑 버섯 농사 지을 사람~

-개미친놈들 ㅋㅋㅋㅋ

-드디어 자는구나? 난 이때만 오는데 ㅎㅎ

-얜 잠을 왜 이리 많이 자냐

-죽어죽어죽어죽어

.

.

.

그가 잠에 든 사이.

세상에선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띠링.

[프리 챕터 종료]

일단 주어졌던 잠깐의 휴식 시간도 끝났다.

[서버 내 총 21명의 인원이 서브 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이들에게 ‘명예로운 각성자’ 훈장이 지급됩니다.]

[다음 챕터에도 노력해주세요.]

강해일이 달성했어야 하는 연계 서브 퀘스트가 준일로 인해 첫 단추부터 이상하게 끼워지는 바람에 다른 수많은 각성자들이 나눠서 클리어하게 됐다.

그 숫자가 무려 21명이다.

저 퀘스트들은 강해일에게 연계 퀘스트로 몰렸어야 했다.

물론 이는 전체 각성자에 비하면 극히 적은 숫자.

그야 굳이 쉬라고 만들어준 프리 챕터에 누가 목숨 걸고 활동에 나서서 서브 퀘스트까지 찾아내겠나?

일반적으로는 일어날 만한 일이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퀘스트가 있었다는 것도 방금의 알림이 오기 전엔 알지 못했다.

그런 채로 프리 챕터는 지나갔고, 이제 이야기판은 새로운 챕터로 들어선다.

띠딩.

[Chapter. 02]

이런 알림과 함께, 많은 것들이 조정된다.

[대기 중 마력 농도가 충분히 상승했습니다.]

[게이트 Lv.2 가 활성화됩니다.]

[월드 보스가 생성됩니다.]

쿠웅—

이 세상에 묵직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 울림에 준일도 눈을 떴는데.

‘뭐야?’

그를 반기는 건 새로운 퀘스트다.

[메인 퀘스트 #2]

===== =====

월드 보스 클리어 전까지 Lv.30에 도달하세요!

실패 시: 각성 해제

성공 시: 랜덤 아이템 제공

===== =====

“씨발 또 레벨이야?”

이놈의 레벨 제한은 매 챕터마다 걸리는 방식 같다.

심지어 이번엔 레벨 30이다.

20레벨이나 올려야 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바로 욕

-ㅋㅋㅋㅋㅋ욕 나오지 ㅅㅂ

-보상 맨날 꽝 떠서 의미도 없음 얘한테 ㅋㅋㅋ

-“쾌락 없는 책임”

-아 눈치 있으면 F등급은 죽으라고~ㅋㅋㅋ

-ㅅㅂ 또 레벨ㅋㅋㅋㅋ

‘망할 72시간 안에 20레벨을 어떻게 올려?’

그러나 이번엔 그렇게 단순하게만 가진 않았다.

‘어? 잠깐.’

시간제한이 아니었다.

‘보스를 잡을 때까지?’

조건이 시간이 아니었다.

보스가 죽지만 않으면, 주어진 시간은 무한.

‘보스를······ 못 잡게 해야 하나?’

54화

< 강남역 게이트 (1) >

행복사에 이를 뻔한 팸.

“꺄루루루루룩······ 칵칵!”

탕탕!

잠시 바닥에 쓰러져 구르다가, 겨우 일어나 식은땀을 닦는다.

“어, 어휴······ 겨우 살았다.”

“괜찮으세여? 너무 몰입하셨어여! 팸 님 같은 고위급 이야기 요정이 이야기에 과몰입하는 건 건강에 좋지 않아여.”

“마, 맞아······ 실수했어.”

이야기 요정들은 이야기를 기획해야 하는 존재.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이야기에 너무 몰입하면 안 됐다.

그건 등장인물이나 성좌들이 해야 할 일이다.

이야기 요정이 그랬다간 자신의 존재가 위협받는다.

“햄. 네가 좀 대신 봐줄래. 난 못 보겠어.”

“네. 짐꾼으로 돌아와서 치료까지 해주고 있어여. 팸 님이 말씀하신 대로예여!”

“그렇구나? 좋아. 아주 좋아.”

팸은 끄덕였다.

그녀의 예상대로 율리안은 양 포지션을 동시에 꿰차려는 거였다.

“심지어 차까지 얻어 타서 돈도 아끼고 있어여! 이거 완전 미친 새······ 용사예여! 강해일 성좌들이 폭주하고 있어여!”

“꺄루루루! 그럴 만도 하지. 이거만큼 열받는 게 별로 없거든!”

팸도 잘 알고 있었다.

율리안이 주인공으로 활약할 때 비슷한 걸 초반에 많이 당했으니.

팸도 골머리를 썩였다.

마왕이 기획하는 이런 흑막 배신자 시나리오.

성좌들에게는 배신자인 게 빤히 보이는 상황이 되면 정말 최악이다.

‘잠깐.’

팸은 깨달았다.

지금 율리안이 행동하는 원리.

‘자기가 당하던 걸 그대로 돌려주는 거야?’

율리안은 성좌들이 뭘 싫어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걸로 많은 피해를 입은 적도 있다.

그리고 그걸 정확히 강해일에게······ 아니, 램에게 돌려주고 있다.

이게 말이 쉽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막상 저 상황에 가면 이렇게 기획대로 행동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이야기 요정들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다.

‘무서운 녀석······.’

팸은 왜 율리안이 전문 용사라는 전대미문의 직업을 수행할 수 있었는지 다시금 깨닫는다.

‘역시 넌 내가 본 용사 중에 제일이야.’

용사들 중 수행 능력은 탑급임이 분명하다.

물론 ‘특별함’을 얻지 못해 A랭크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뭐 어때?’

페어리 주식회사 본사까지 통틀어서 A랭크 이야기가 한 번 나올 때, 율리안은 B+를 세 번 만들어냈다.

이 또한 재능인 것이다.

“근데 팸 님!?”

이때 다급하게 햄이 부른다.

“메인 퀘스트가 나왔어여! 근데······ 이번엔 레벨을 20이나 올리라는데여!?”

“뭐? 망할! 20레벨을 올리라고?”

확실히 어렵다.

저번처럼 기적같이 거액의 후원이 오지 않는 이상, 이번에도 고난의 길로 보인다.

F등급은 경험치 오르는 속도가 너무 느리니까.

“후원으로 뚫을 가능성은?”

“이제 후원으로 이걸 뚫어주려면······ 어, 엄청난 큰손이 와서 엄청난 후원을 해야······.”

무엇보다 후원으로 주는 보상은 같은 방식을 반복할수록 점점 값이 비싸진다.

그것이 이야기에 영향력이 큰 보상일수록, 천문학적으로 올라간다.

“지금 강해일 레벨은?”

언제나 기준은 주인공.

주인공이 레벨이 낮으면 시간이 많을 텐데.

“22레벨이에여. 네크로맨서 보스와 전투할 때 21이었고. 전투 중에 또 1레벨 올랐어여.”

“씨발.”

S등급의 경험치 오르는 속도는 무서울 지경이다.

겨우 레벨 8만 올리면 바로 조건 탈출이다.

“그까짓 시체 좀 죽였다고 1레벨이 올라? 숨만 쉬어도 오르는 거 아냐?”

“잠재력이라는 게 그런 설정이니까여······.”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잠재력이 높다는 건 배우는 게 빠르고, 뭘 경험해도 금세 깨닫는다는 말 아닌가?

하나를 봐도 열을 아는 것.

이게 잠재력이고, 재능이다.

반대로 잠재력이 없다는 건, 뭘 경험해도 깨닫지 못하며 배우는 게 느리다.

시스템적으로는 ‘레벨이 오르지 않는다’라는 것.

“이건 완전 의도된 거져?”

램이 의도적으로 율리안을 견제하는 것이냐고 묻는 햄.

“그럴 수도 있지만. 이런 시스템은 애초에 요정의 개입력을 높이는 게 목적이야. 스토리 보드가 제멋대로 굴러가는 걸 통제하기 위한 최소한의 억제력을 쥐고 있고 싶은 거지.”

원래 이야기 판이라는 게, 주인공과 설정된 조연들 말고는 억울한 일이 수도 없이 많다.

율리안은 유독 더 심하긴 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어, 어떡하져······.”

“걱정 마.”

“네?”

“이야기라는 건, 아무리 쥐고 흔들려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마음대로 되지 않거든.”

팸은 작은 주먹을 꽉 쥐며 율리안을 바라봤다.

“방법을 찾아낼 거야.”

웃긴 이야기지만, 이야기 요정이 이야기의 주도권을 100% 쥐고 있는 건 오로지 이야기판이 펼쳐지기 전 뿐이다.

이야기판이 펼쳐진 순간, 이미 주도권은 조금씩 넘어간다.

등장인물들과 그걸 지켜보는 성좌들에게.

“어어어?!”

갑자기 햄이 비명을 지른다.

“?”

“소, 소환당했어여!”

* * *

펑.

햄이 나타난 곳은 화장실.

“퉤.”

준일은 양칫물을 뱉었는데.

“으, 으아아아아!?”

햄이 하필 그곳에 딱 나타나 뒤집어썼다.

“······왜 거기로 나와?”

“왜, 왜 이럴 때 저를 불러여!”

“그야 겸사겸사.”

20레벨이나 올려야 한다는 걸 알고 나서는 1분 1초가 아까워졌다.

솔직히 똥 쌀 때 부를까 하다가 아무리 그래도 용사의 체면이란 게 있어서 그러진 않은 건데.

“하여간. 왜 불렀냐면. 강해일 레벨 몇이냐?”

얼마나 급한지, 현실 시간과 상관이 없는 상황에서도 말을 이어서 해버리는 준일.

“아, 안 그래도 팸 님이랑 그 얘기하고 있었어여.”

“팸? 깜빵 갔다며?”

“이야기 요정은 깜빵에서도 관람은 돼여. 존재 이유가 이야기니까여!”

“우리가 깜빵에서도 밥은 먹여주는 거랑 같은 건가.”

“비, 비슷하져.”

“하여간 레벨 몇이야?”

“22레벨이여.”

“······씨발.”

“팸 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어여. 역시 오랜 콤비로 활약해오신 두 분은 통하는 게 있으신······ 꿰에에에엑!?”

슝.

햄은 갑자기 인벤토리로 직행됐다.

예전 율리안의 힘이 10% 이하로 전승됐을 땐 그래도 인벤토리로 밀어 넣어지는 걸 알 수는 있었는데.

퉤!

이젠 인벤토리가 뱉어주고 나서야 상황이 파악됐다.

“왜 그래여! 진짜!”

“허튼소리를 하니까. 여튼. 이걸로 샤워나 해.”

쏴아아아.

준일이 싱크대 수도를 틀어준다.

햄은 또 좋다고 그곳으로 가서 양칫물을 씻어낸다.

“월드 보스는 어딨어?”

햄이 씻는 동안 묻는다.

“그건 모르져! 저희도 그냥 성좌들 시점보다도 못한 시점으로 보는 거예여. 깜빵에서 보고 있다구여!”

“임마. 너 램이랑 같은 회사 아니야?”

“그렇져······.”

“그럼 임마. 책상이라도 뒤지든, 뭐라도 해보란 말이야!”

“흥! 지금 제가 이렇게 등장해서 시간 잘라먹는 것도 엄청난 일이거든여? 게다가 램한테 가야 되는 이야기 코인으로 율리안 님이 치트 아이템을 쓰게 해드렸잖아여! 더 이상 뭘 바래여!”

그건 그렇다.

그렇긴 한데. 이 자식 말하는 뽄새가 마음에 안 드니 다시 인벤토리 교육.

슝!

“아아아악!”

잠시의 투닥거림 후.

“히잉······ 워, 월드 보스는 굳이 어딨는지 알아내려 하실 필요가 없으세여. 월드 보스라는 개념은 말 그대로 세계를 파괴하는 보스예여. 활동을 시작하면 반드시 알게 되실 거예여······!”

“그래? 진작에 그렇게 말하지.”

“저, 저는 당장 어딨냐고 물으시는 줄 알았져!”

준일은 햄의 억울한 외침은 깔끔하게 무시한 채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강해일 성좌 수는 몇이야.”

“강해일의 성좌는 10만을 넘고 계속 성장 중이었다가, 이제 슬슬 정체기로 들어갔구여. 저번 율리안 님의 활약으로 9만대로 내려갔어여.”

“음.”

이야기 초반의 전형적인 흐름이다.

유달리 더 가파르게 꺾이는 느낌이긴 했지만.

‘아직 멀었군.’

준일이 따라잡는 걸 생각하면 한참 멀었다.

이건 결국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희한하게 율리안 님이 강해일을 줘패니까 조금 상승했는데······ 이건 우연이겠져? 그 외에는 잘하고 계세여.”

우연이 아닌 거 같다.

-이 개새끼 죽는 날까지 본다.

이런 말하는 성좌들이 유독 늘었으니.

“크흠, 알았다. 그럼 가봐.”

햄은 그래도 이것도 용사라고 예의를 갖춰 인사한다.

“넵. 가보겠습니다. 용사님.”

펑.

햄이 사라진 후, 준일은 자연스럽게 양치를 마치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이젠 너무 자연스러워서 버퍼링을 불평하는 성좌들조차 없었다.

‘점점 적응이 되는구나.’

* * *

준일의 기준에서 ‘적응이 되었다’라는 건 무서운 말이었다.

그가 용사 활동에 적응이 된 후 이뤄낸 최적화 수준을 생각해보라.

용사들 중 최초로 3개월 용사 최단기 학원이라도 차릴 기세였잖은가?

그런 그가 지금 ‘사고슬’로 사는것에 적응이 되었다고 판단했다는 건, 강해일을 비롯한 그를 지지하는 모든 세력에 적신호였다.

‘일단 돈부터 넉넉하게.’

월드 보스의 행방을 알기 전까지, 준일의 일상은 매우 단순화되었다.

산속에 숨은 고블린들을 다 찾아내서 전부 쓸어버리고, 거기서 나온 아이템을 이실렌에게 팔았다.

“또······ 왔네?”

“네.”

“내가 이 근처에 버섯 농가를 만들었어.”

“농장이겠죠.”

“그런가. 하여간.”

-버섯 농가 ㅋㅋㅋㅋ

-버섯 농가 살려야쥬~ㅋㅋㅋㅋ

-이실렌도 살려주시는 국산 버섯 농가 ㅠㅠ

“가끔 버섯도 보러와. 마법이 걸려있어서 아무도 안 와.”

“마법을 푸세요.”

“그러면 너무 아무나 오잖아.”

이실렌의 마법 때문에 직접적으로 묘지에 볼일이 있는 조문객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게 됐다.

사실상 준일만 이실렌과 연을 이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너더러 오라는 거잖아 준일아

-그린라이트인가요?

-괜히 엮이려 하네

-대체 몇 살 차이냐 이실렌이랑 만나려면?

-그린라이트는 무슨 ㅋㅋㅋ 친척 어르신이 자주 보러 오라고 하는 거 같은뎈ㅋㅋㅋ

-이실렌단 모집 중~ (0/10,000)

이실렌과의 연은 가끔 버섯 농가(?)에 방문해 감탄해주는 척하는 것과 고블린에게서 받은 싸구려 아이템을 금화로 바꾸는 것으로만 이어졌을 뿐.

‘한시가 급하다.’

무려 30레벨을 달성해야 하는 준일은 다른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실렌과 거래하고 나면, 금화를 조금씩 환전해 생활비를 마련했다.

이때 모자와 마스크로 신원을 가리고 들어갔으니.

“아니······ 이건 어디서 나오는 금이에요?”

“알 거 없어요.”

“······아, 예.”

불특정한 신원, 특이한 문양, 말도 안되는 순도의 금.

이에 당연히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준일은 나름의 방식대로 의문을 불식시킬 줄 알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ㅁㅊ

-알 거 없어요 ㅋㅋㅋㅋ

-은근히 칼을 만지작 거리는게 리빙 포인트임 ㅋㅋㅋ

“이 정도면 한······ 330만원 정도······.”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르신.”

“뭔가요?”

“거래는 금으로 협상은 강철로.”

스륵.

그는 즐겨 사용하는 고블린들의 숏소드를 꺼내든다.

“450만원!”

“예.”

-캬

-ㅋㅋㅋㅋㅋㅋㅋㅋ

-명언 기계 ㄷㄷ

-사기 공화국 ㅅㅂㅋㅋㅋ

-근데 신원도 몰라서 값 후려칠 만해 ㅋㅋㅋ

-이 새끼가 어떻게 대학생이었다는거임?

-ㅁㅊㅋㅋㅋㅋㅋ

-그저······ <(_ _)/

그렇게 그는 최소 자신의 생활 정도는 이끌어나갈 수 있는 생활비를 벌며 레벨도 ‘무려’ 11레벨로 올렸다.

전국 산속의 고블린 박멸, 아이템 거래, 금 환전.

오로지 이 세가지 루틴.

-기계냐?

-캬

-고블린? 걍 이 새끼임ㅋㅋ

-이걸 레벨업을 해?

-고블린계의 세스코 ㄷㄷ

-이건 뭐······ 사냥 머신이네 ㅋㅋㅋ

-와 ㅋㅋㅋ

-어제 봤던 거 같은데······

-고블린이 씨가 마르네 ㅅㅂㅋㅋㅋ

물론 이런 반복된 일상을 지루해하는 성좌들도 있었다.

-이 방은 고블린이 주인공임? 고블린만 나오네

-별명이 사고슬인 이유가 있네 ㅅㅂ

-아니 그저께도 본 거 같은데······

[현재 시청 성좌: 1,089명]

1,400명대까지 올라갔던 성좌들 중 1천가량만 남았다.

그러나 준일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강해일과 메인스트림으로 엮이는 순간 성좌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그나저나 강해일 이 자식. 또 연락 없네.’

연락하는 걸 까먹은 건지, 아니면 결국 짐꾼 같은 건 필요 없는 건지.

연락은 없었다.

그렇다고 준일이 먼저 연락할 수는 없었다.

조연이 주인공에게 먼저 다가가는 행위는 위험하다.

성좌들도 꺼려할 뿐 아니라, 괜히 강해일에게 의심을 살 것이다.

‘팀에 넣어달라고 하는 게 진짜 최선이었어.’

이 이상 들이댔다간 수상해보일 거다.

어차피 언젠간 연락 온다.

‘어디 보자······.’

딸깍.

여느 날처럼 아침에 일어나 컴퓨터를 켜서 확인해본다.

[각성자로 살아가는 법]

그가 기대하던 글을 두 가지인데.

하나는 월드 보스의 활동.

그런데 이건 좀 시간이 걸릴 것 같고.

다른 하나는······.

[긴급 속보!) 결국 게이트 폭발함 ㅅㅂ 하필 강남역임ㄷㄷㄷ]

게이트 폭발로 인한 위기.

‘오.’

준일은 꽤 큰 사건이라 여겼다.

어쩌면 이거 메인 스트림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지이이잉······!

[해일이 햄]

강해일에게 전화가 온다.

-캬

-해일이 햄ㅋㅋㅋㅋㅋ

-ㅅㅂ 해일이 햄ㅋㅋㅋ

-너 임마 인생 핀 거야! 문준일!

-와 ㅎㅎ 학교에서 일진이 말 걸어줬을 때 기분ㅎ

-오 온다!!

-ㅅㅂㅋㅋㅋ 이게 이렇게 반가울 일이냐고 ㅋㅋㅋ

-이제서야 ㅅㅂ

-폰 잃어버린 게 아니었어? ㄲㅂ

‘좋아.’

월드 보스를 굳이 찾을 이유가 없다.

‘얘만 못 잡으면 되지.’

강해일이 못 잡으면 어차피 아무도 못 잡을 테니.

옆에 붙어있으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