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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

제11화

11. 미친놈들 

밖으로 나온 나와 로버트는 악마의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

“아저씨! 빨리 비켜! 비키라고!”

“앞차가 안 간다고!”

“얼른 비켜! 안 비키면 밀고 간다!”

도로에는 차들이 빵빵댔고, 사람들이 비키라고 소리쳤다. 방송을 본 사람들이 모두 짐을 싸 들고 나와 대피 길에 오른 것이었다.

김포가 그리 멀지 않은 걸 고려한다면 이런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끼이에에에엑!”

어둠 속에서 듣기 싫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티격태격하며 싸우던 사람들도 모두 입을 다물었다. 아주 잠시 정적이 흘렀다.

“으아아아아!”

“도, 도망쳐!”

“빨리 가라고!”

겁에 질린 사람들은 연신 소리쳤고, 심지어 차를 버리고 도망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도로는 더 엉망이 됐다.

그 와중에 우리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이게 어떤 악마의 소리인지 알아?”

“혈비둘기지.”

지구에 차원문이 열렸던 적도 없을 텐데 로버트는 악마를 정확하게 구분했다.

마법사도 아니고, 전생자도 아닌데 어떻게 악마에 대해 이렇게 잘 알 수 있는 걸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떻게 알아?”

“잡아 봤으니까.”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로버트의 대답은 그 정도로 놀랄 만한 대답이었다. 혈비둘기를 아는 것도 모자라 잡아 봤다니.

용병 생활을 하면서 혈비둘기를 만나 봤던 걸까. 그렇다면 지구에도 사실 악마가 존재하는데 매번 사냥을 해 왔던 것인가. 그게 아니면 로버트도 환생자였나.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설마 악마를 직접 보게 될 줄이야. 내가 미쳤나.”

로버트가 아리송한 말을 했다.

악마를 아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나는 의구심을 가지며 자세히 물었다.

“어디서 잡아 봤는데? 중동? 아니면 미국?”

“거실이다.”

“거실…?”

진짜로 미친 건가. 정신력이 뛰어난 줄 알았는데 설마 악마의 울음소리를 듣고, 거실에서 악마를 보았다고 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 버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정신 차려. 거실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너도 본 적 있다.”

“나도?”

거실에서 혈비둘기가 등장했다면 모를 수가 없다.

혈비둘기는 트럭만 한 덩치를 가진 악마다. 그런 녀석이 날뛰는데 누가 모를 수가.

그때 느낌이 싸했다.

로버트는 거실에 설치된 모니터로 게임을 많이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설마 그가 하던 게임을 말하는 건가?

“설마 게임을 말하는 거야?”

“맞다.”

로버트는 정신이 나간 게 아니었다. 내가 약간의 오해를 한 것이었다. 그는 악마를 진짜로 본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본 것이었다. 게임 속에서.

“게임이 아마 데드랜드였지?”

“맞다.”

“그 게임에서 혈비둘기가 나온다고?”

“외눈박이도 나온다.”

데드랜드라는 게임이 도대체 뭐길래. 악마가 게임 속에 구현이 되어 있는 걸까. 우연의 일치인지 누군가의 의도인지는 아직 알 수는 없었다.

궁금증이 피어올랐지만, 지금은 게임보다는 현실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어찌 됐든 간에 우리는 혈비둘기를 잡아야만 했으니까.

“혈비둘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아?”

“머리가 나쁘지. 대신 아주 빠르고 날렵하고.”

혈비둘기의 특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 정도면 로버트와 악마 사냥이 가능할 것 같다는 견적이 나왔다.

“끼에에에에엑!”

놈의 괴성이 가까워졌다. 로버트가 적외선 망원경을 들고 살폈다. 손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있다.”

나도 마법을 사용해 시야를 확보했다. 세상은 선팅한 차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다.

로버트가 가리킨 곳은 마트 옥상. 그곳에는 혈비둘기가 내려앉아 도망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울고 있었다.

혈비둘기는 사람을 잡아먹는 거대 비둘기로 날개 하나의 크기만 1미터에 달할 정도로 컸다. 몸집에서 나오는 파괴력으로 건물을 막 부수고 다닐 정도였는데 그 속도도 상당한 녀석이었다.

김포에서 벌써 이곳까지 날아온 걸 보면 그중에서도 유달리 날쌘 녀석인 모양.

녀석이 흔적을 남겨 다른 악마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녀석을 치워 버리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저거 잡아야 해.”

“저 녀석 똥 싸기 전에 말이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똥이 악마를 유인하기에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망원경을 내리며 로버트가 물었다.

“너는 악마를 어떻게 알아?”

나는 데드랜드라는 게임을 한 적도 없었지만, 마치 안다는 듯이 로버트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로버트는 그 사실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이제 지옥문도 열리고, 악마도 쏟아지고 있겠다 싶어 나는 약간의 경험담을 말해 주기로 했다.

“난 잡아 본 적 있어. 실제로.”

“…….”

로버트는 내게 더 많은 설명을 요구하듯이 쳐다봤다.

“차원문이 존재한다는 건 알지?”

“거기서 악마가 쏟아진 것도 봤지. 저 괴물도 진짜잖아.”

“그럼 환생자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도 믿을 수 있어?”

로버트가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나는 정확히 말해 주었다.

“난 환생자야. 악마에게 죽었지.”

“…….”

꽤 충격적인 이야기였는지 로버트가 말을 잇지 못했다.

“믿지 못해도 상관없어. 차근차근 증명해 보일 테니까.”

“혈비둘기는 어떻게 잡았는데?”

나는 단검을 들어 보였다.

“이걸로 잡았어.”

“미쳤군.”

로버트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정말이었다. 혈비둘기 정도는 단검과 마법을 몇 번 사용하면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그런 걸 들고 다가갔다가는 날개에 치여 죽을 거다.”

“나 환생자라니까.”

“그래. 그렇다 치자. 그래도 겨우 그런 검으로 저걸 죽인다는 건 말이 안 돼.”

로버트는 날 미친놈으로 보는 것 같았다. 음모론자가 미친다면 딱 나처럼 이야기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적어도 총은 있어야지.”

로버트가 조립한 권총을 들어 보였다.

어이가 없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

혈비둘기를 죽이기에는 권총의 화력으로는 부족하다.

“머리에 구멍이 나면 죽을 거다.”

처음 한 발은 모르겠지만, 혈비둘기도 바보가 아닌 이상 계속 맞아 주지는 않을 거다. 날개로 급소를 막으면 사실상 권총도 무의미해진다.

하긴 총을 들고, 실제로 잡아 본 적이 없으니 하는 이야기겠지. 차라리 총보다 이 단검이 더 낫다.

“총은 날개에 막히면 쓸모없어.”

“그 짧은 검을 들고 들이받는 건 괜찮고?”

“머리에 구멍을 내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

“날개를 자르는 것보다 쉬울 거 같은데.”

우리는 서로의 입장 차를 좁히지 못했다.

로버트에게 악마와 싸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경험시켜 주는 것이 중요하기도 했고, 마음이 넓은 내가 협조하기로 했다.

“내가 녀석의 날개를 찢을게. 니가 머리를 쏴.”

“장난치지 마라.”

내가 날개를 잘라 주면 로버트가 혈비둘기의 머리를 쏘면 된다. 이보다 쉬운 작전이 없어서 제안한 건데 로버트는 별로라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저었다.

‘나였어도 그랬겠지.’

서로 진짜 실력을 보인 적 없기도 했고, 목숨을 걸 정도로 신뢰 관계가 엄청 깊지도 않았다. 이건 시간이 필요한 부분이니 좀 감수하는 수밖에.

“끼에엑! 끼엑!”

혈비둘기를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하는 사이 악마가 마트 옥상에서 내려와 도망치는 인간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콕. 콕. 콕. 콕.

혈비둘기는 도망가는 사람들을 쫓아가 부리로 몸을 꿰뚫었다. 머리가 터졌고, 몸에 구멍이 나 내장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놈은 인간을 잡아먹지 않았다.

“끽끽끽.”

놈은 사냥 놀이를 하고 있었다. 재미있는지 여기저기 바삐 움직이며 사람을 죽였다.

“빨리 결정해야 해. 할지 말 건지.”

“진심으로 그 작전을 하자고?”

“응.”

“진짜 미쳤어.”

지옥으로 변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친놈이 되는 것 정도는 당연한 일 아닌가.

나였으면 고민도 하지 않았을 텐데 로버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아이의 비명이 들렸다.

“살려 주세요!”

혈비둘기의 시선이 아이를 향했다. 놈은 재밌는 장난감을 찾은 것처럼 아이를 쫓았다. 아이가 악마를 피해 건물로 도망쳤다.

“끽끽.”

“으아악! 살려 줘!”

녀석이 숨바꼭질을 하듯 건물을 쪼아 댔다. 창문과 벽이 부서졌다. 아이도 파편에 맞아 다쳤는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로버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악마를 향해 뛰었다.

“으아아아아!”

“끽끽!”

아이가 절뚝거리며 건물에서 나와 도망쳤다. 하지만 도망치기는 역부족이었는지 혈비둘기에 금방 잡혔다.

악마가 날개를 펄럭이며 아이의 앞을 막았다. 아이가 악마와 부딪쳐 넘어졌다.

“끽끽.”

“으아아….”

혈비둘기가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아이의 정수리를 부리로 쪼았다.

그대로 둔다면 머리가 터져 버리는 상황.

그때 탕 하고 총소리가 났다.

“끼에에에엑!”

거대 혈비둘기의 한쪽 눈이 터져 피가 흘렀다.

놈이 날개를 펼치며 총을 쏜 로버트를 찾았다.

“여기다. 비둘기 새X야.”

“끼에에에엑!”

로버트가 악마의 시선을 끄는 사이 나는 아이를 데리고 피했다. 내가 피하며 신호를 주자 로버트가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죽어!”

로버트가 연달아 권총을 쏘았다. 총알은 혈비둘기의 날개에 처박힐 뿐 뚫지를 못했다.

탄창을 다 사용했는지 사격이 멈췄다. 소리가 멈추자 혈비둘기가 날개를 내리고 로버트를 쫓았다.

“잠깐!”

“끼에에엑!”

로버트가 도망치며 탄창을 갈아끼우며 쏘아 댔다.

권총 하나로 악마에게 덤비다니.

로버트가 미친 게 분명했다.

쾅! 쾅! 쾅!

화가 난 혈비둘기가 로버트를 쫓아 연신 부리를 쪼아 댔다. 애꿎은 자동차들만 구멍이 났다.

하지만 점점 로버트와 혈비둘기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마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에 나도 움직였다.

나는 로버트가 벌어 준 시간에 두꺼운 밧줄을 구해 마법으로 끊어지지 않도록 한 뒤, 함정을 설치했다.

“이쪽으로.”

로버트에게 신호를 보내자 로버트가 혈비둘기를 유인했다. 눈이 뒤집힌 혈비둘기는 함정을 발견하지 못하고, 밧줄에 걸려 넘어졌다.

쿵.

나는 손을 휘저으며 마법으로 밧줄을 조종했다. 밧줄이 곧 녀석의 발을 꽁꽁 묶었다. 놈은 발버둥 치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덩치가 큰 녀석은 밧줄까지 부리가 닿지 않았다.

그사이 나는 빠르게 녀석의 몸에 올라탔다. 단검을 힘 있게 잡고, 거기에 잘 잘리도록 단검에 불길을 더해서 날개가 시작되는 부분에 찔러 넣었다.

“끼에에엑!”

녀석이 고통에 날개를 휘두르며 발악했다.

이 또한, 익숙한 일이었기에 나는 그대로 힘을 주어 날개를 도려냈다.

“끼에에에엑!”

녀석의 날개가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잘린 날개의 단면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녀석의 반대쪽 날개도 잘라 내어 양쪽을 보기 좋게 맞춰 줬다. 악마가 찢어져라 소리를 질러 댔다.

탕-!

순식간에 거리가 고요해졌다. 머리가 뚫린 악마가 뜬 눈으로 몸을 움찔움찔하다 축 늘어졌다.

나는 총을 쏜 로버트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이 정도면 첫 호흡치고는 만족스러웠다.

“진짜로 잘랐잖아.”

“할 수 있다고 했잖아.”

혈비둘기를 잡았으면 당장 처리해서 마법을 준비해야 했는데 로버트가 이상하게 눈을 감았다.

“뭐 해?”

“쉿. 기다려 봐.”

로버트를 기다릴 시간이 없어 나는 다리가 묶인 밧줄을 잡아 악마의 배에 단검을 찔러 넣고 갈랐다. 그리고 손을 집어넣고, 뒤적거리자 로버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하나?”

“너는 눈 감고 뭐 하는데?”

“혹시 레벨업이라도 하나 싶어서.”

“레벨업? 네가 무슨 캐릭터도 아니고.”

“게임이 현실이 되었으면 그럴 만도 하잖아.”

“그런 일 없어.”

전생을 경험한 내 입장에서는 반대였다. 현실이 게임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현실이 게임이 된 것이 아니었다. 이건 차차 더 알아봐야겠지만, 우선 할 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악마의 배 속을 뒤적거리다가 내가 찾던 것이 잡혔다. 그것을 그대로 쭈욱 잡아당겼다. 기다란 창자 같은 것이 딸려 나왔다.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이런 건 게임에서 없었나 보네. 아이템 받아라.”

로버트가 인상을 쓰며 내가 꺼낸 악마의 내장을 받았다.

“이게 뭔데?”

“이놈의 대장.”

“그걸 왜….”

“똥 치워야지. 썩어서 악마들이 냄새 맡고 몰려오면 곤란하니까. 멀리 가서 파묻고 와.”

“…….”

로버트는 어디서 검은 봉투를 가져와 혈비둘기의 내장을 담아 들고는 동네를 나섰다. 그 꼴이 꼭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네 아저씨 같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제 남은 걸 처리해 볼까.”

나는 집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석찬에게 메시지를 보내 사람들을 불렀다.

제12화

12. 둘째 날

“저희 왔습니다.”

고석찬과 팀원들이 메시지를 받고 내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저거 치워야 돼.”

내가 가리킨 혈비둘기를 보고, 팀원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고석찬이 대표로 나서서 내게 물었다.

“저게 뭡니까?”

“뉴스 봤지? 거기서 나온 괴물이야.”

“…….”

“내가 로버트랑 죽였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들고 따라와.”

처음 보는 악마에 팀원들이 잠시 머뭇거렸다. 가장 먼저 고석찬이 나서서 혈비둘기 사체를 들었다. 당연히 혼자 들 수 없는 무게였다. 들리지 않자 그제야 눈치를 보던 팀원 모두가 달라붙어 사체를 들었다.

“잘 따라와.”

나는 뚝뚝 떨어지는 혈비둘기의 피를 보며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고석찬과 팀원들은 죽을 듯한 표정이었지만, 곧 노하우가 생겼는지 서로 교대해 가며 그것을 들고 따라왔다.

“저기다 내려놔.”

“허억허억. 저걸로 뭘 하시려는 겁니까?”

“세스코 설치할 거야.”

고석찬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관은 없었다. 이해를 바라고 말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냥 좀 떨어져서 쉬어.”

내 말에 곧 고석찬과 팀원들이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사이 나는 혈비둘기 사체에 양손을 가져다 대고 감각 왜곡 마법을 사용했다. 혈비둘기의 피 위로 푸른 빛이 빠르게 쭈욱 따라 움직였다. 범위가 넓은 만큼 마력을 상당히 사용하고 나서야 동네 한 바퀴를 완전히 두를 수 있었다.

‘이거면 일단 됐다.’

이제 혈비둘기의 피는 결계가 되어 악마의 접근을 막아 줄 것이다. 정확히는 악마가 접근하면 놈들의 감각을 왜곡시켜 동네를 찾을 수 없게 해 줄 것이다. 다만, 결계보다 수준이 낮은 마법이다 보니 유지에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휴식을 취하고 있는 고석찬과 팀원들 쪽으로 다가가 말했다.

“이거 지워지지 않게 잘 관리하고 돌아가면서 정찰해.”

“이 정도 핏자국이면 그냥 발로 지워지는 거 아닙니까?”

발로 핏자국을 밟아 문질렀다. 마법으로 한 번 코팅해 둔 것이라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커다란 장애물이 핏자국을 막지 않도록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걸 맡기시는 걸 보면 어디 가십니까?”

“사람 좀 구하러 가야 돼서.”

고석찬은 내가 자리를 비운다는 이야기에 잠시 뭔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동네는 내가 왜곡 마법을 걸어 둔 탓에 안전하기 때문인 듯했다.

그러면 고석찬을 데리고 동네를 나서면 어떨까.

내가 한 번 물어보려고 하는데 고석찬이 당황하듯 말했다.

“저는 동네가 참 좋습니다. 이런 동네는 역시 제가 지켜야….”

나는 무시하고 말했다.

“너도 같이 갈래?”

“저는 맡기신 일이 있으니 갈 수 없습니다.”

눈을 피하며 적극적으로 가지 않겠다고 하는 거 보면 좀 위험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동네는 안전하니 고석찬을 데려가 활용하면 위험한 상황은 미리 대비할 수 있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이번 외출의 목적은 용병 구출이었으니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나는 고석찬을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너도 따라와.”

“나름 팀장인데 제가 자리를 비우면 팀원들이 불안해할 겁니다.”

“부팀장 세워 둘 테니까 걱정 마.”

아주 간단히 고석찬의 고민을 해결해 주자 그가 울상을 지었다. 그래도 좋은 소식 한 가지를 들려주면 표정이 풀릴까 싶어 이야기를 해 줬다.

“걱정하지 마. 로버트도 같이 갈 거니까.”

고석찬의 표정이 더 크게 일그러졌다.

나름 최고 전력이 함께 가는 것인데 좋아하지 않다니. 역시 훈련이 부족해 그 실력을 가늠하지 못한 모양이다. 이건 나중에 로버트에게 따로 말해 줘야겠다 싶었다.

“짐 싸러 가자.”

로버트가 돌아오면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나와 고석찬은 짐을 챙기고 거점으로 향했다.

* * *

자리를 비울 동안에 혹여나 있을지 모르는 비상시를 예상해 비상 행동 강령을 정했다.

악마의 피가 마르지 않도록 확인하는 것을 가장 주의하도록 했다.

혹 악마를 만나면 거점에 숨어 있으라고 했다. 당장 악마와 싸울 전력이 되지 못하니 어쩔 수 없이 내가 올 때까지 숨어서 버티는 전략이었다.

“괴물, 저희가 잡겠습니다.”

이런 녀석들도 있었다. 나는 직접 나서서 악마의 전투력을 체감시켜 주었다. 일격에 다섯 사람이 기절하자 더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역시 종말에는 나서지 않는 것이 정답은 아니어도 꽤 훌륭한 대처였다.

그리 속성 비상 대책법을 주입시킬 무렵 로버트가 돌아왔다.

그때쯤 인터넷과 전화가 끊어졌다. 마지막으로 본 뉴스는 전 세계의 차원문에서 악마가 쏟아져 난리가 났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이라 판단한 우리는 결단을 내리고, 출발하기로 했다.

“빨리 가자.”

로버트도 자기 팀 용병들을 구하러 가는 일이다 보니 재촉했고, 나도 용병들을 한시라도 빠르게 찾는 게 중요했기에 잔뜩 긴장한 고석찬을 끌고 밖으로 나섰다.

해가 떨어질 무렵에도 수많은 사람이 악마를 피해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쪽 또한 차원문이 있었기에 사실 도망칠 곳은 없다고 봐야 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악마가 넘어오지 못하도록 차원문을 닫아야 한다. 하지만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핵이라도 떨어뜨리면 가능할지도.’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그때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복면을 쓴 이들이 편의점에 들어가 먹을 것을 쓸어 담고 있었다. 앵앵 하고 사이렌이 울렸지만, 경찰은 오지 않았다.

“하루 만에 도둑이 활개를 치고 다닙니다.”

“저 사람들도 모두 살려고 그러는 거야.”

세 사람의 구성만 봐도 아빠와 엄마 그리고 아들이다.

종말에는 저런 광경을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그때 혹여나 눈이 마주치면 그대로 뒷걸음질 치며 멀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나중에는 눈에 드는 모든 것을 사냥하기 때문이다.

“가자. 가야 할 길이 멀어.”

고석찬은 동네에 도둑이 돌아다니는 게 싫었는지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왜 그리 쳐다봐. 아는 사람이야?”

“아닙니다. 혹시 나중에 저희 걸 훔치려고 할까 봐 걱정돼서 그럽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게?”

“혼쭐을 내주고 내쫓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찾아와서 복수하면?”

“그때에는….”

고석찬이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것을 바로잡아 줬다.

“다 죽여야지.”

“그렇게까지 합니까.”

“그렇게 안 하면 너랑 팀원이 죽어.”

고석찬은 눈썹이 내려가며 고민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언젠간 분명 마주하게 될 터. 그때 가서 고민하면 늦었기에 나는 답을 알려 줬다. 물론 선택은 고석찬의 몫이지만, 아무튼 답을 알고 있으니 도움은 될 것이다.

고석찬이 말을 돌렸다.

“그런데 저희 어디 갑니까?”

“인천.”

“꽤 먼데 걸어가는 겁니까? 차도 있지 않습니까.”

“차 타고 가면 안 돼. 악마의 눈에 띄어 위험해.”

“사람들은 다 타고 가지 않습니까?”

“저들이 우리의 가림막이야.”

고석찬의 또 눈이 살짝 떨렸다.

“저 많은 사람들을 모두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모든 판단은 자신들이 한 것이다. 우리가 뭐라고 할 권리는 없다. 나는 그저 그 상황을 이용할 뿐이었다.

빠르게 인천에 가려면 악마와 엮이지 않아야 하는 걸 로버트도 잘 알았기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 너무 오래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린 저걸 탈 거다.”

내가 자전거를 가리켰다. 걸어가는 건 너무 오래 걸린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이동수단은 자전거였다.

걷는 것보다 몇 배는 빠를 테고 엔진 소리도 없어 차보다는 악마들의 시선을 덜 끌 것이다. 이동수단을 구했음에도 고석찬의 표정이 어두웠다.

“혹시 자전거 못 타는 건 아니지?”

“그건 아닙니다만 진짜로 자전거만 타고 인천까지 가야 하는 겁니까?”

“운이 좋으면 그럴 수 있겠지.”

“운이 좋으면?”

“그전에 악마를 만나면 자전거도 버려야 해.”

“…….”

“악마를 무시하고 그냥 쭉 타고 가도 되긴 하는데 놈이 다른 녀석을 또 불러오면 복잡해져.”

나는 마법을 사용해 자전거 락을 해제했다. 거점에서 챙겨 온 가방은 앞 바구니에 넣고 자전거에 올라타고 페달을 밟았다.

동네를 벗어날 무렵 고석찬이 자전거를 멈췄다.

“이게 도대체 뭡… 우욱!”

고석찬이 자전거에서 내려 한쪽에서 속을 게워 냈고, 로버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동네를 벗어난 우리가 마주한 광경은 악마가 휩쓸고 간 뒤의 풍경이었다.

부서진 자동차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사람이었던 것들이 도로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머리를 잃은 몸뚱어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박살 난 머리에서 피와 뇌수가 흘러 도로를 적셨다. 배경만 바뀌었지 내가 보아 왔던 종말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악마들의 진격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다.’

정찰용 악마를 잡은 지 12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벌써 옆 동네를 악마들이 쓸고 지나갔다면 인천은 더 위험하다고 할 수 있었다.

“미안하지만, 당장 움직여야 해.”

로버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전거에 올라탔다. 고석찬도 입을 닦으며 자전거에 올랐다.

나는 조금 더 강하게 페달을 밟았다.

이제부터는 좀 더 속도를 더 높여야 할 때였다.

* * *

쉬지 않고 페달을 밟아 서울을 벗어났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고 움직였음에도 인천에 도착하지 못했다.

“끼에에에엑!”

이따금씩 하늘을 지나가는 혈비둘기 때문이었다. 놈의 울음을 들으면 자전거를 내버려 두고 몸부터 숨겼다.

악마가 우리를 발견하면 상당히 피곤해지기 때문이었다. 전투는 당연했고, 누군가가 부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당연하게 시간을 소모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 자체가 오지 않도록 조심하다 보니 인천항으로 향하는 길이 상당히 늦어져 어느덧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머물 곳부터 찾아보자.”

어두울 때 움직이는 건 악마에게 습격을 받기 쉬우면서 대응이 쉽지가 않다. 게다가 로버트와 고석찬이 긴장한 채로 이동한 탓에 피로도도 높을 터.

내일 다시 이동할 것을 생각한다면 당장 무리해서 한 발짝 가는 것보다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여기도 똑같습니다.”

여기저기 둘러보던 고석찬이 한쪽 건물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몸에 구멍이 뚫린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런 광경을 몇 차례 본 고석찬도 어느덧 적응이 되었는지 작게 인상을 쓸 뿐 더는 속을 게우지 않았다.

“이쪽도 마찬가지다.”

로버트가 다른 건물의 망가진 문을 열자 몸에 크게 구멍이 난 시신들이 있었다.

시신들의 상태를 보면 분명 그 악마의 짓이란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악마 토벌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우선은 쉴 곳을 찾는 데 집중했다.

“그나마 시신이 적은 곳을 찾아봐.”

안전한 방법으로 땅굴을 파서 휴식을 취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빈집이 쉬는 데는 더 좋기에 빈집을 찾았다.

“여기가 좋을 거 같습니다.”

고석찬이 오래된 빌라를 하나 찾았다. 비어 있는 방이 많은 걸 보면 재건축을 준비하던 집인 듯했다. 또 고석찬이 찾아냈다는 점에서 그의 감각을 믿고 이곳을 휴식처로 정했다.

“밥부터 먹자.”

가방에서 컵라면과 컵밥을 하나씩 꺼냈다. 빌라에는 아직 물과 전기를 쓸 수 있어 조리하는 데 어렵지 않았다. 셋이 거실에 앉아 식사를 했다. 유난히 고석찬의 식사 속도가 느렸다.

“잘 먹어 둬. 내일은 더 바쁠 테니까.”

“그런데 정말로 세상이 이렇게 망한 겁니까?”

“그렇다고 봐야 하지.”

“설마 이렇게 망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고석찬을 보니 전생의 나를 보는 듯했다. 종말이 처음이었던 그때가. 그러고 보면 나는 되게 특별하다고 해야 하나. 벌써 종말을 두 번째 경험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거 받아.”

로버트가 권총 한 자루를 고석찬에게 건넸다.

“이건 왜 주십니까?”

“오늘은 피했지만, 내일은 악마들과 싸울 수도 있잖아. 겁나면 자결용으로 쓰든지.”

“…그, 그럼 로버트 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난 이거 쓰려고.”

로버트가 구석에 놓여 있던 경찰 방패와 야구 배트를 들어 보였다. 해가 지기 전 머물 곳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경찰서에서 주워 온 것이었다.

‘탱커와 원거리 딜러라….’

어찌 보면 둘은 꽤 괜찮은 조합이었으나 당장 악마와 싸울 만한 전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족한 부분을 채울 만한 방법이 있었다.

실력이 부족하면 장비가 좋으면 됐다.

제13화

13. 인천항

전생의 기억을 훑어보면 오래 살아남은 파티에는 대부분 뛰어난 기사들이 존재했다.

그 역할로 경찰 방패와 야구 배트를 들고 있는 로버트가 제격이었다.

하지만 방패와 야구 배트 상태가 좋지 못했다. 방패는 일부 깨져 로버트의 몸을 완전히 가리지 못했고, 야구 배트는 조금 찌그러져 있었다.

저런 장비로는 악마의 공격을 한 합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파티가 전멸하는 것도 당연할 테고.

명색에 대마법사가 있는 파티의 탱커가 일격에 죽는 꼴을 용납할 수 없었던 난 전생에 갈고닦은 특기를 조금 선보였다.

“그거 줘 봐.”

로버트에게 상태가 불량한 방패와 배트를 건네받고는 밖으로 나섰다.

주변을 살펴보자 도로에 세워진 자동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보닛을 열어 보니 망가진 엔진이 드러났다.

엔진을 뜯어 방패에 올려 두고 손을 뻗어 마력을 움직였다. 딱딱한 엔진이 점점 찰흙처럼 점성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방패의 깨진 곳을 메우고, 겉을 뒤덮었다. 방패가 새것처럼 반짝였다.

남은 엔진으로 야구 배트의 속을 채웠다. 조금 남은 걸로는 군데군데 돌기를 만들어 주자 야구 배트는 메이스가 됐다.

“이 정도면 하급 악마 머리 정도는 가볍게 부술 수 있겠지.”

엔진이 자동차 부품 중에서 가장 튼튼하다. 그것을 입혔으니 파괴력과 내구성은 테스트해 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너무 무겁나.”

철을 덧대고, 속을 채워 넣어서인지 방패와 메이스는 상당한 무게가 나갔다.

“가볍게 만들면 그만이지.”

무게를 줄여 주는 마법을 사용하고 여러 번 휘둘러 봤다. 묵직함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업그레이드한 장비들과 함께 빌라로 돌아왔다.

“이거 받아.”

“뭐야?”

“그거 고쳐 놨어.”

“깨끗해지긴 했는데 달라진 건 모르겠는데.”

“휘둘러 봐.”

메이스와 방패를 받은 로버트가 휘둘러 보고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생각해 보니 아무런 장비도 없이 뚝딱 고쳐 왔으니 놀라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상당히 가볍네. 어떻게 고친 거야?”

“내가 수리 쪽에 특기가 좀 있어서.”

로버트가 방패를 든 채 메이스를 가볍게 몇 번 휘두르더니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속을 채웠어? 휘두르는 데 생각보다 더 밀리는데.”

“좀 채우긴 했어.”

“속을 채웠는데도 더 가벼워졌다고?”

“마법이면 그런 건 어렵지 않아.”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석찬은 실소했다.

“마법을 쓰실 수 있다고요? 그럼 하늘도 날고 그러실 수 있으십니까?”

“그건 어렵고, 쉬운 건 가능해.”

“하하. 농담도 잘하십니다.”

나는 고석찬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고석찬이 착용하고 있던 권총이 휭 하고 내 손으로 날아왔다.

“예를 들면 요런 건 쉽지.”

고석찬은 내가 자신의 총을 들고 있는 걸 보고, 눈을 몇 번 비비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마법? 미치겠네.”

우리는 간단히 초콜릿 바로 아침을 해결하고, 해가 뜰 무렵에 출발했다. 이동 방식은 전과 같았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쉬는 시간마다 고석찬이 내게 들러붙는다는 것이었다.

“혹시 마법 다시 보여 줄 수 있습니까?”

눈을 반짝이는 것이 전생에 마법을 본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는 쉬이 마법을 보여 줄 생각이 없었다. 한번 보여 주면 또 보여 달라고 하며 귀찮게 할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거절하려는데 로버트의 낮은 목소리가 먼저 고석찬에게 향했다.

“지금 놀러 온 줄 알아?”

“아, 아닙니다.”

“그럴 시간에 쉬어. 나중에 실수하면 안 되니까.”

짧은 말이었지만, 많은 메시지가 담긴 말이었다.

우리가 인천으로 향하는 상황을 고석찬도 알았기에 더는 내게 마법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못했다.

“막 쓰면 정작 필요할 때 사용하지 못할 수 있어서 말이야.”

“죄송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자꾸 보다 보니 들뜬 모양입니다.”

“그럴 수 있지. 돌아가면 구경시켜 줄게.”

“알겠습니다!”

고석찬은 금세 얌전해졌지만, 이번에는 로버트가 난리였다.

“속도를 조금 더 올려야 한다.”

“지금 페이스도 빨라.”

“차라도 타는 건 어때? 버려진 차 많잖아.”

“안 되는 거 알잖아.”

우리는 계속해서 몸이 뚫린 시신을 발견해 왔다. 그 말은 우리의 목적지와 악마가 움직이는 동선이 겹친다는 의미였다. 그 상황에서 차를 타고 이동하면 녀석이 우리를 발견할지 몰랐다.

“꼬리꼬치 때문이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뚫려 죽은 사람들은 모두 꼬리꼬치라는 악마의 짓이었다. 녀석의 몸은 아래는 전갈이고, 위는 인간의 형상을 한 악마로 승용차와 비슷한 몸집으로 날카로운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녀석과 싸우다가 시간이 끌리면 더 손해야.”

“마법으로 어떻게 안 돼?”

“가능했으면 이 고생을 안 하고 있겠지.”

악마가 위험한 것은 한 마리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다른 악마가 꼬이고 또 꼬여 우리 발길을 지체시킬 것이다. 그런 상황은 발길이 급한 우리에게는 최악이다.

“오늘 안에는 도착할 테니 너무 걱정 마.”

로버트의 조바심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용병들은 나에게도 중요한 전력이다. 그들은 핵심 병력이자 동시에 총기 보급을 맡고 있는 만큼 생존과 전력 강화의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마음은 급하다. 하지만 종말에 급해서 좋을 건 없다. 늘 안전이 최우선이다. 일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저기 바다가 보입니다!”

표지판에 인천항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이쯤이면 조금 더 속도를 내더라도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그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전투 준비.”

로버트가 한 손에는 방패를, 다른 한 손에는 메이스를 들었다. 고석찬이 로버트의 뒤에 숨어 권총을 꺼내 들었다.

조금 더 기다리자 골목에서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멈춰.”

“저, 저희는 평범한 시민입니다.”

세상이 망하면 마피아 게임이라도 하듯 모두가 평범한 마을 주민이 된다. 전생에도 다르지 않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평범한 마을 주민이라는 자기를 소개하던 사람들이 제일 위험했다.

저들 또한, 숨어 있다가 우리를 발견하고 먼저 다가온 것이지 않나. 어떤 목적이 있다는 이야기다.

“할 말은 거기서 해. 더 다가오면 쏜다.”

고석찬이 권총을 들어 사람들을 겨누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무리는 잠시 숙덕거리더니 한 남자가 대표로 말을 꺼냈다.

“호, 혹시 먹을 것 좀 있습니까?”

“먹을 것은 근처 편의점만 털어도 되잖아.”

“그러고 싶은데 괴물들이 돌아다녀서 구하지 못했습니다. 먹을 게 있다면 조금만 나눠 주십쇼.”

주위를 둘러보면 부서진 건물들이 많았다. 들여다보지 않아도 썩어 가는 시신들이 있을 것이다.

악마들이 돌아다닌다는 것이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먹을 게 부족하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로버트가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줄 거야?”

“좀 그렇지 않습니까. 먹을 게 있다는 걸 알면 뒤를 밟고 저희를 노릴지 모릅니다.”

고석찬의 의견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보통 거절했을 때 앞뒤 가리지 않고 덤비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그나마 무난한 결정을 하기로 했다.

“내 걸 나눠 줄게.”

“괜히 저희 뒤를 밟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쉽게 당할 사람들은 아니잖아.”

2m에 달하는 로버트와 총을 든 고석찬, 그리고 나의 마법까지.

대규모로 악마가 몰려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파티는 쉬이 당할 전력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괜한 부스럼을 만들지 않기 위해 나는 가방에서 컵라면과 컵밥 그리고 통조림 몇 개를 꺼내 바닥에 내려 두었다.

“두고 갈 테니 가져가.”

“감사합니다!”

“하나만 묻지. 거리에서 봤다던 괴물들은 어떻게 생겼지?”

“붉은 피부와 눈을 가지고 키가 작은 괴물들이었습니다.”

“혹시 지팡이를 든 놈도 있었나?”

“네. 있었습니다.”

붉은 고블린 무리가 동네를 돌아다닌다는 정보는 꽤 유용했다. 게다가 그들을 이끄는 추종자까지 확인했다. 이건 먹을 것 이상의 값어치가 있었다. 그래서 한 가지 팁을 알려 주었다.

“다음엔 지나가는 사람에게 도움 요청하지 마. 죽기 싫으면.”

“…아,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는 인천항 방향으로 향했다. 멀어진 무리는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막 나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직은 그렇지.”

“네? 아직이라는 말씀은….”

“그냥 혼잣말이야. 신경 쓰지 마.”

다음에 만났을 때 저들은 사람을 죽이고 먹을 것을 빼앗는 약탈자가 되어 있을까, 아니면 악마 추종자가 되어 있을까.

죽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종말에 평범한 시민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기에 잡생각은 고개를 흔들어 떨쳐 버리고, 당장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빨리 가자.”

발걸음을 서두르자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인천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행을 베풀면 돌아온다는 말이 있지 않았나.’

그것이 종말에는 통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인천항에 와 있는 걸 보니 말이다.

“저거 어떻게 합니까?”

인천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용병이 아니라 악마였다.

* * *

차라락.

꼬리꼬치가 움직이는 그 발소리는 듣기만 해도 닭살이 돋았다. 고석찬은 몸을 작게 떨었고, 로버트의 손이 메이스로 향했다.

물론 내게는 죽여야 할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숨어서 꼬리꼬치를 지켜보던 고석찬이 날 보며 물었다.

“저거 잡아야 하는 겁니까?”

“잡아야지.”

용병들을 만나려면 꼬리꼬치를 항구에서 치워야 한다.

그래야 숨어 있던 용병들도 나타날 테니까.

설령 용병들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용병들이 머물렀을 곳으로 추정되는 항구를 뒤져 보기 위해서는 악마는 치우는 것이 낫다.

“저런 괴물을 잡을 만한 무기는 권총 한 자루뿐인데 잡을 수 있는 겁니까?”

“메이스도 있고, 단검도 있잖아.”

“예? 하하. 농담이 재미있으십니다.”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석찬을 바라보았다. 고석찬은 그제야 내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울상을 지었다.

“그런 걸 들고 접근했다가는 꼬리에 매달린 사람들처럼 될 겁니다.”

“네 옆에 있는 사람도 혈비둘기 잡을 때 그렇게 말했는데.”

고석찬의 시선이 로버트에게 향했다.

“그걸 총 없이 잡았습니까?”

“나는 총을 썼고, 조이는 단검을 썼지.”

“단검으로 저런 괴물을 상대했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고석찬이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흠칫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뒤에 있을 일을 알려 줬다.

“너희도 이렇게 될 거야.”

“제가 그런 위험한 일에 뛰어들 리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무식하게 싸우는 건 별로야.”

두 사람은 날 부정하고 있지만, 언젠간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싸우고 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어찌 됐든 간에 우리의 목표는 저 꼬리꼬치를 죽이는 것.

로버트에게 꼬리꼬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물었다.

“꼬리꼬치는 빠른 다리와 저 날카로운 꼬리가 무기야. 하체는 보다시피 단단한 외피질로 되어 있고, 상체를 노려야 잡을 수 있어.”

“잡아 봤어?”

“응.”

“어떻게 잡았어?”

“다리와 꼬리를 다 부수고 머리를 깼지.”

로버트의 꼬리꼬치 공략은 정공법이었으나 그러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 현실이 게임이 아닌 이상 전투 시간이 길어서 좋을 건 없다.

“권총으로 머리 맞히면 되지 않습니까?”

“쉽지 않아.”

로버트가 바깥을 가리켰다. 꼬리꼬치는 지금도 컨테이너들을 부수고, 오르락내리락하며 난리도 아니었다.

‘마법을 쓰면 간단하긴 한데.’

함정에 빠뜨리고 머리를 베면 끝이다. 하지만 그렇게 놈을 처리하기에는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가 단독 행동하는 지금이 로버트와 고석찬의 경험치를 쌓기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둘이서 잡아 봐.”

“예?”

“뭐?”

두 사람이 동시에 날 쳐다봤다. 미친 소리 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이어서 내가 설명을 해 줬다.

“공략법도 알고 있기도 하니 총으로 머리만 맞히면 돼.”

“로버트 님이 쉽지 않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로버트가 전에 보니까 시선 끄는 거 하나만큼은 잘하더라고.”

큰 키로 눈에 띄는 외형과 먼저 공격하는 습관.

참으로 파티의 1선을 책임지는 탱커로서 적절한 재능이다.

“그럼 너는 뭘 할 건데?”

“나는 보조해야지.”

“어디서?”

“저 뒤에서.”

“…….”

원래 마법사는 맨 뒤에 있는 법인 거 모르나.

몰랐다면 이번 기회에 배우는 것도 좋겠지.

전생의 파티플레이를 말이다.

“어서 준비해. 해가 떨어지기 전에 잡아야 용병들이라도 찾아볼 수 있으니까.”

로버트는 메이스와 방패를 들었다. 고석찬은 권총을 챙기며 창밖을 보더니 어디론가 뛰었다. 손가락을 튕겨 문을 닫았다.

“어딜 가려고?”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권총도 들고, 문 앞에 가 있는 걸 보면 준비를 마친 모양이다.

“그럼 가자.”

고석찬은 나와 로버트 사이에 껴서 잘 따라왔다.

점점 꼬리꼬치와 가까워질수록 컨테이너가 부서지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 소리를 들은 고석찬은 식은땀을 훔치며 안절부절못했다.

“저는 좀 빼 주시면 안 됩니까?”

“빼 줄까?”

“정말입니까?”

“그래.”

나는 맨 앞에서 로버트의 뒤로 자리를 비켜 줬다.

“하하. 감사…….”

“크르르르!”

꼬리꼬치가 우리 파티의 맨 앞에 있던 고석찬을 노려봤다.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최우선 타깃이 될 텐데.

얼어붙은 고석찬에게 로버트가 한마디 했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완료!”

고석찬이 기계적으로 로버트의 뒷자리를 찾아가 권총을 들었다. 산에 들어가 받은 훈련 때문인가. 명령을 들은 고석찬은 생각보다 떨지 않았다.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 궁금했으나 악마가 다가오는 바람에 내 호기심은 거기까지였다.

“옵니다!”

“간다!”

꼬리꼬치가 파티를 향해 달려왔다. 로버트도 방패를 들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쾅-!

로버트와 꼬리꼬치의 충돌과 함께 전투가 시작됐다.

제14화

14. 잡히다

로버트와 꼬리꼬치의 충돌로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는 내가 고쳐 준 로버트의 방패가 상당히 튼튼하다는 것이다. 악마와 정면으로 부딪쳤음에도 방패는 부서지지 않았고, 흠집만 조금 났다. 방패를 수리할 때 평소와 다르게 마력이 더 빠져나간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만큼 마법 실력이 받쳐 줬다는 것도 두말할 것도 없다.

또 다른 하나는 로버트가 악마에게 힘에서 밀린다는 사실이다. 체급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꼬리꼬치의 덩치가 승용차만 한 걸 고려하면 오히려 로버트가 힘이 상당히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밀리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지.’

이번 전투에 내가 맡은 역할은 파티원을 서포트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악마에게 밀리지 않도록 근력을 조금 상승시켜 주는 마법을 로버트에게 사용했다.

“로버트! 어때?”

“오케이! 확인했다.”

몸에 변화가 느껴졌는지 로버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다시 방패를 고쳐 잡고, 악마에게 달려들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충돌.

로버트는 이번에는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꼬리꼬치가 살짝 밀려났다. 놈은 화가 났는지 전속력으로 다시 달려왔다.

연이어지는 세 번째 충돌.

이번에 로버트는 그 육중한 몸체가 부딪치기 직전에 방패로 충격을 흘려 냈다. 동시에 메이스를 휘둘러 녀석의 다리 하나를 날려 버렸다.

남들과 다른 크기의 육각형 능력치를 가진 로버트였다. 기술을 보면 기사를 닮았고, 기세는 북부 전사를 닮았다. 둘을 반반 섞은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

“크아아아!”

한쪽 다리를 잃은 꼬리꼬치는 꼬리를 휘둘러 로버트를 떼어 냈다. 꼬리 휘두르기는 얼마나 강력했는지 방패를 들어 막았음에도 로버트가 붕 떠서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크아!”

쓰러진 로버트를 향해 꼬리꼬치가 꼬리를 찔렀다. 단번에 꿰뚫어 죽이기 위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놈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리 파티는 로버트만 있는 게 아니거든.

탕-!

궁수역을 맡은 고석찬이 방아쇠를 당겼다. 꼬리꼬치의 어깨가 휘청였다. 어깨에 총알 구멍이 생긴 녀석은 공격을 끝마치지 못했다.

“쩝. 머리를 노린 건데.”

머리가 맞지 않아 고석찬이 아쉬워했지만, 나는 꽤 높은 점수를 주었다. 타이밍이 좋았기 때문이다. 꼬리꼬치의 공격을 멈추는 동시에 악마의 시선을 빼앗아 아군을 보호했으니 자신의 역할을 분명하게 했다.

“괴물 녀석! 왜 이쪽을 봐! 하던 일 마저 하라고!”

놈의 시선을 끄는 것은 의도하지 않은 모양. 꼬리꼬치가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싫었던 고석찬은 서둘러 총을 갈겼다. 하지만 꼬리꼬치는 다시 총에 맞지 않으려는 듯이 꼬리로 상체를 감쌌다. 그 상황에서 총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착. 착.

탄창이 비었는지 총은 더 나가지 않았다. 고석찬이 서둘러 재장전했지만, 꼬리꼬치도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크아아아!”

꼬리꼬치가 고석찬을 향해 달려왔다. 고석찬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따돌리기에는 꼬리꼬치는 다리도 많고 빠르다. 고석찬의 등을 꿰뚫기 위해 놈의 꼬리가 날아갔다.

“으아아! 어떻게 안 됩니까!”

“잘 피해 봐. 피할 수 있을 거야.”

“아니, 말로만 하지 마시고… 어어?”

말로만 하지 않았다. 마법을 사용해 민첩성을 조금 늘려 줬다.

꼬리꼬치의 꼬리가 고석찬의 등을 꿰뚫기 직전 고석찬이 땅을 박차며 몸을 옆으로 굴렀다. 악마의 꼬리는 허공을 갈랐다.

탕탕탕탕!

이어지는 사격에 악마는 꼬리를 상체를 감싸 지켰다. 그 틈을 타 로버트가 메이스를 휘둘렀다.

으직!

녀석의 다리가 또 하나 부서졌다. 다리 둘을 잃은 전갈의 형상을 한 악마는 균형을 잃었다.

“크아악!”

균형을 잃은 녀석을 공략하는 일은 순탄하게 진행됐다.

마법으로 몸놀림이 민첩해진 고석찬은 자신감 있게 이제 머리를 겨누고 총을 쏘았다. 꼬리꼬치의 꼬리가 총을 막기 위해 몸을 감싸고, 로버트가 그 틈을 타 다리를 부쉈다. 이따금 일격이 날아오면 방패를 들어 막았다.

두 사람은 차근차근 악마를 갉아먹었고, 마지막 총소리에 꼬리꼬치의 머리에 구멍이 나며 결판이 났다.

“잘 싸우네.”

로버트는 능력을 의심할 여지 없이 잘 싸웠고, 고석찬은 마법을 받은 이후로는 침착하게 싸웠다.

“이런 일 다시는 못 합니다.”

마법 효과가 사라지고, 악마가 죽어 긴장이 풀렸는지 다리가 풀린 고석찬이 주저앉았다.

좀 더 굴리면 아주 쓸 만한 전력이 될 듯싶다.

“넌 뭐 하다 이제 나와?”

악마의 피를 뒤집어쓴 로버트가 피를 닦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보조했지. 주변에 악마가 더 꼬이나 살펴보고, 마법도 걸어 주고 말이야.”

오해할 수 있겠지만, 나는 구경만 하고 있지 않았다. 마법을 써서 확실하게 보조해 주었다. 내 보조가 있었기 때문에 악마와 수월하게 싸울 수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 이것 좀 어떻게 해 봐.”

악마의 피를 뒤집어쓴 로버트가 찝찝한 표정으로 피를 여기저기 문대며 닦아 내다가 짜증이 났는지 내게 도움을 구했다.

“어렵지 않지.”

내가 손가락을 튕겼다. 물 덩어리가 로버트 위에서 떨어지며 한 번에 악마의 피를 씻겨 냈다.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기자 바람이 불어와 물을 날렸다. 로버트가 말끔해졌다.

“이게 마법! 아까 제게도 마법을 걸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정말 대단했습니다! 몸이 막 깃털처럼 가벼워지더니 날아가는 줄 알았습니다!”

다리가 풀렸다고 생각한 고석찬은 어느새 일어나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걱정 마. 마법은 자주 걸어 줄 테니까.”

“정말입니까?”

“물론이야.”

마법에 빠진 고석찬은 내 말의 의미를 곧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좋아했지만, 로버트는 속뜻을 이해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좋아하지 마. 또 악마를 잡아 오라는 말이니까.”

“예? 또 악마와 싸우는 겁니까?”

“이동 중에 마법 한번 쓰지 않았다. 싸울 때와 다르게 말이야.”

고석찬이 울상이 되어 물었다.

“…저, 정말입니까?”

“익숙해질 때까지 그럴 생각이야.”

“아아….”

고석찬이 좌절했지만, 어쩔 수 없다. 종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악마와 싸우는 건 이제 숨 쉬듯 자연스러워야 하니 말이다.

“서둘러 이제 항구를 뒤져 보자. 곧 해가 떨어진다.”

“그러지 않아도 돼. 슬슬 나올 때가 됐거든.”

소란스럽게 악마를 해치웠기에 분명히 전투를 지켜봤을 것이다. 그렇다면 로버트를 발견했을 것이고, 전투의 결과를 보고 모습을 드러낼지 말지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악마가 죽은 지금이 모습을 드러내기 좋은 때다. 그리고 기다렸던 인기척이 뒤에서 느껴졌다. 발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총을 든 남자가 나타났다.

“존! 무사할 줄 알았어.”

로버트가 경계 없이 다가가려는 걸 내가 막았다.

“왜 막아? 우리가 찾던 팀원이야.”

“아직도 같은 팀인지는 확인이 필요해서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저 사람 우리 앞에 무장하고 나타났잖아.”

망한 세상에 무기를 가진 사람은 조심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세상이 갑자기 망한 것처럼 그들의 무기가 갑자기 날 향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의심해서 나쁠 건 없다.

“로버트. 이야기 좀 할까.”

때마침 저쪽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대화를 하자면서 총구가 우리를 향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 * *

“존. 지금 뭐 하는 거야?”

“로버트. 다가오지 말고 거기서 이야기해.”

“그게 무슨 소리야. 일단 빌어먹을 총부터 치워 봐.”

“로버트. 멈춰.”

“지금 장난치는 거지? 난 너희를 구하러 여기까지….”

탕!

로버트가 한 발짝 내밀자 존이 다른 바닥에 총을 쏘았다.

“다음은 빗나가지 않아.”

“…….”

로버트는 굳은 표정으로 멈춰 섰다. 나야 이런 상황이 놀랍지도 않았다. 동료끼리 서로 협박하는 경우를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하겠지만, 같은 팀원이었던 로버트에게 총을 쏠 수 있을 정도라면 상황이 상당히 급변한 모양이다.

결국, 로버트가 먼저 답하는 것으로 둘 사이에 이야기가 시작됐다.

“저러다 갑자기 저희한테 총 쏘는 거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총은 내렸으니까 그러지는 않을 거야.”

“오해가 있다면 잘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좋을 텐데 쉽지는 않을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릴 기다렸다면 모습을 드러낼 때도 총을 겨누지 않았을 거고, 위협 사격을 하지도 않았겠지.”

“그러면 저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 않은 거 아닙니까?”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그렇기에 존이 우리 쪽으로 돌아서기를 바라는 작은 기대를 해 보는 것이다. 하지만 로버트와 존의 말에서 F로 시작하는 단어들이 점점 많아지고 목소리가 커지는 걸 보니 뜻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다.

“저, 저기서 다시 총으로 로버트를 겨누었습니다.”

“뭐 해. 얼른 손 안 들고.”

“예? 한 명 정도는 제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누가 한 명이래?”

내가 턱을 들어 존이 왔던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에서 총을 든 사람들이 나타났다. 고석찬은 어느새 총을 내려 두고, 양손을 번쩍 들었다.

“존. 해 떨어진다.”

무리 중 한 남자가 그리 말하자 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총을 든 이들이 우리를 포위하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로버트도 우리 쪽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되는 겁니까?”

“따라오래.”

“괜찮아?”

“별수 있나. 저렇게 총을 들고 따라오라면 가야지.”

“내 일에 말리게 해서 미안하다.”

“괜찮아. 나도 용병들이 필요했고, 구하려고 한 거니까.”

“그럼 저는 돌아가도 됩니까?”

“할 수 있으면.”

고석찬이 우리와 떨어지려고 하자 남자들이 총을 들이밀었다. 허튼짓하면 쏘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고석찬은 도망치는 걸 포기했다.

‘흐음. 뭘 노리고 있는 걸까.’

종말에 외부인을 만나면 보통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죽이고 모든 것을 빼앗으려고 했거나 꽁무니 빠지게 도망치거나.

아무리 로버트라는 연결 고리가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 데려간다는 것은 조금 특이한 경우다. 분명 이야기도 잘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우리를 데려간다는 것은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건데.

그 힌트를 얻기 위해 로버트에게 했던 이야기를 물었다.

“평소에 팀원과 사이가 좋지 않았나 봐. 말싸움하는 거 같던데.”

“자기들을 버리고 새로운 팀을 꾸리고 오느라고 늦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구하러 왔는데도?”

“무기를 가지러 왔다고 보이기도 하지.”

그렇게 보일 여지가 있었다. 우리는 무기가 없어서 급조한 방패와 메이스 그리고 권총 하나를 사용한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그 정도면 그냥 서로 갈 길 가면 되는 거 아니야? 왜 우리를 데려가는 건데?”

“팀원 하나가 붙잡혔다.”

내 물음에 로버트가 전혀 다른 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 한마디는 모든 상황을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니까 이 녀석들은 우리를 악마 추종자에게 넘겨줄 생각이다.

제15화

15. 제물

“저게 뭐야?”

존은 피오나가 하늘을 가리킨 것을 보았다. 하늘에 새처럼 보이는 것이 날아오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덩치가 큰 것을 보면 조금 뚱뚱한 새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가까워지자 뭔가 이상했다. 비둘기를 닮은 그 새는 커도 너무 컸다.

콰직.

그것이 항구로 내려와 피오나를 뭉개 버렸다. 피와 살점이 존의 얼굴에 튀었다. 능숙한 용병은 슬픔보다 몸이 먼저 반응해 자리를 피했다.

“끄아아악! 사, 살려 줘!”

혈비둘기가 콕콕 사람을 쪼아 먹었다. 사람의 몸이 아주 쉽게 꿰뚫리며 내장을 쏟는 장면은 현실감이 없었다.

인천항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그사이 존과 용병들은 서둘러 총기를 실은 컨테이너를 찾았다.

“총이다! 서둘러 챙겨!”

콕.

그리 말한 용병 톰의 정수리에 구멍이 뚫렸다. 용병들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고, 몇이 더 죽고 나서야 괴물이 멀어졌다. 괴물이 멀어지고 나서야 용병들은 무장을 마칠 수 있었다.

“저 괴물을 잡자.”

당장의 안전과 복수를 위해서 용병들은 괴물을 죽이는 것이 목표로 했다. 사람을 잡아먹는 새를 한쪽 구석으로 유인했다. 포위망을 구축하고, 용병들이 혈비둘기에 일제 사격을 가했다.

“키에에에엑!”

날개로 총알을 막으며 용병을 향해 몸을 갖다 박았다. 사람이 뭉개져 터졌고, 몇이 부리에 머리에 구멍이 났다. 그럼에도 용병들은 총 쏘는 걸 멈추지 않았다. 결국, 괴물이 쓰러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살아남은 용병들이 시신을 수습했다. 하지만 안 좋은 일은 몰려온다고 했던가. 전갈을 닮은 괴물이 나타나 다시 한번 혼란스러워졌다.

연이어 붉은 피부와 눈을 가진 작은 괴물들이 나타났다. 놈들은 숨은 사람들을 찾아내 단검으로 마구 찌르며 킬킬댔다.

“개자식들! 죽어!”

용병들이 붉은 괴물들에게 총을 난사했다. 케륵 하고 붉은 괴물들이 쓰러졌지만, 놈들은 영악하게 사방에서 용병을 덮쳤다. 용병들이 쓰러지고, 이제 남은 용병은 존과 이사벨뿐이었다.

“끄흡! 존!”

“이사벨!”

존의 연인 이사벨이 붉은 고블린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그가 소총을 들고 골목으로 도망치는 놈들을 뒤쫓았다. 놈들이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그곳에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해골처럼 비쩍 마른 사람이 서 있었다. 괴물들의 그의 뒤에 멈춰 섰다.

“이사벨을 내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음흉한 인간이 중얼거렸다. 난생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그 메시지가 존에게 전해졌다.

‘더 많은 사람을 데려와라. 그럼 풀어 줄 테니.’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존은 지금 이사벨을 놓치면 안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총을 장전하며 다시 말했다.

“이사벨을 두고 가. 안 그러면 다 죽여 버리겠다!”

존은 죽일 듯이 검은 로브와 괴물들을 노려봤다. 그 모습을 본 검은 로브가 피식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마치 죽여 보란 듯이.

존이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손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다시 총을 보니 웬 뱀이 그의 팔을 휘감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팔을 더 휘감으며 몸을 타고 올라왔다. 떨쳐 내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크으으윽!”

“내 말을 잊지 말거라. 클클클클.”

검은 로브의 한마디에 존의 팔을 휘감은 커다란 뱀이 쉬이익 혀를 날름거리더니 이내 입을 쩍 벌리고 그를 덮쳤다.

“허억!”

존이 잠에서 깨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침대 위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렇다고 방금 전 꾸던 악몽이 떨쳐지는 건 아니었다. 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끝났어.”

넘겨줄 사람을 충분히 모았으니 거래를 할 수 있다. 끔찍한 꿈도 오늘로 끝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거슬리는 것은 넘겨줄 사람에 로버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신경 쓰지 말자.’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 동안 또 다른 이들과 팀을 꾸려 살길을 도모한 팀장. 존은 로버트가 팀장으로서의 속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했다. 로버트 또한, 도망치지 않았으니 동의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둑한 밤하늘에 구름이 달빛을 가렸다. 존의 얼굴이 어둠에 잠겼다. 구름이 지나갈 무렵에 그는 이미 방을 나선 뒤였다.

그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회의실에서 나타났다. 앉아서 쉬던 사람들이 눈을 뜨고 존을 쳐다봤다. 그들의 낯빛과 눈빛이 존을 닮아 있었다.

“오늘 밤 거래를 할 겁니다.”

사람들이 존에게 받은 총을 굳게 잡았다. 오늘 밤이 지나면 가족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에 사람들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악마들을 닮아 있었다.

* * *

사람들을 따라 들어간 우리는 감옥에 갇혔다. 경찰서의 유치장이었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살면서 처음이라 그런 모양이다. 그런 반면 로버트와 고석찬은 익숙한 듯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세상이 망했는데 감옥에 또 갇힐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언제 갇혔는데?”

“예전에 조직끼리 싸움이 났는데 누가 경찰에 신고를 해서 붙잡혀 들어온 적이 딱 한 번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가 다 이긴 건데 경찰이 와서….”

한번 갇혀서 익숙한 것이 자랑거리라도 되는지 고석찬은 입을 쉬지 않았다. 나는 대충 흘려들으며 로버트에게 물었다.

“로버트도 감옥에 갇힌 적 있어?”

“어릴 때 사고를 친 적이 있다.”

“로버트 님이라면 어렸을 때라면 치고받고 좀 싸우셨을 것 같습니다. 한 주먹 하셨겠습니다. 하하.”

“갱단에서 활동했었어.”

“…갱단 말입니까?”

“그래. 마약을 파는 갱단 말이야. 갱단에 있다 보니 쉽게 총을 쥘 수 있었어. 그리고 갱단끼리 전쟁도 자주 일어났고.”

“설마 사고라는 것이….”

“사람을 죽였다.”

“…….”

고석찬이 입을 다물었다. 패싸움으로 유치장에 갇힌 이야기가 나올 자리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꽤 무거운 것 같아 조금은 가볍게 하기 위해서 내 이야기도 하나 꺼냈다.

“어릴 땐 그럴 수 있지. 나도 사람을 죽인 게 열 살쯤이었거든. 아닌가, 더 어렸으려나.”

“예에?”

“도대체 어떤 삶을….”

다들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하길래 나도 조금 했는데 고석찬의 눈이 커졌고, 로버트도 말끝을 흐리며 조금 거리를 두었다. 어찌 됐든 간에 분위기를 바꾸는 데 성공했기에 나는 다른 걸 물을 수 있었다.

“그런데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로버트는 간략하게 나눈 이야기를 해 주었다. 용병들이 겪은 일들과 현재 존의 상황까지.

“그러니까 가족을 구하자고 저희를 괴물에게 던져 주겠다는 말 아닙니까?”

“괴물이 아니고 사람이다.”

“괴물을 다루는 사람에게 던져 주나 괴물에게 던져 주나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만.”

“혹시 모르지.”

로버트는 조금 긍정적으로 보았고, 고석찬은 부정적으로 보았다. 나는 고석찬의 생각에 동의했다.

“추종자는 인간의 탈을 쓴 악마라고 봐도 무방해.”

“괴물들은 저희를 잡아먹는다고 하지만, 그 인간은 저희를 어디다가 쓰려는 건 줄 아십니까? 설마 인간을 잡아먹지는 않을 테고.”

“그런 녀석들도 있긴 한데 보통 제물로 써.”

“…무엇을 위한 제물이란 말입니까?”

“악마에게 바치고 힘을 받거나 악마를 불러오거나 보통 두 가지 중 하나야. 가둬 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소환을 준비하는 것 같은데.”

우리가 조금 떨어진 쇠창살 뒤로 다른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거래로 악마 추종자의 손에 넘어갈 예정이라는 것이다.

“그럼 꼼짝없이 악마의 제물로 바쳐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죽으면 분명 천국도 못 갈 겁니다.”

이때까지 그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고석찬의 말에 답하지 못했다. 신이 자비롭다면 그 정도는 조금 봐주지 않을까. 안타깝게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겨우 제물이 될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로버트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탈출할 수 있지?”

“물론.”

“그러면 어서 탈출하는 게 어떻습니까. 악마에게 제물이 되는 것보다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고석찬이 유치장의 문 쪽으로 향했다. 로버트는 발길을 떼지 않았기에 나도 떼지 않았다.

“나갈 생각은 있어?”

“당연히 있으실 겁니다. 그렇죠? 로버트 님?”

“……미안하다.”

로버트가 제자리에 앉았다. 그는 나갈 수 있어도 나가지 않는 선택을 했다.

요즘 시대에 인간관계가 고민인 사람들이 많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로버트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도움을 주긴 해야겠지.’

팀원의 인간관계가 이리 복잡해서는 앞으로 걸림돌이 될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애초에 용병들이 함께하지 못하게 된 것은 순전히 악마란 재앙을 먼저 만났을 뿐이지 그가 잘못한 건 없다. 그래서 나는 그의 편을 들어주기 위해 바닥에 앉았다.

“마스터. 왜 자리에 앉으십니까. 이럴 때는 탈출하자고 설득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로버트를 버리고 어떻게 가? 네가 로버트보다 잘 싸워?”

“아니,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옵니까.”

“아니면 앉아.”

고석찬은 싫은 표정으로 기어코 앉았다.

“이대로라면 둘 다 곤란하다.”

“아니야. 어차피 정리해야 할 일이라면 겸사겸사 다른 것도 같이 치우는 게 좋지.”

“네 녀석 설마….”

로버트가 말을 마치기 전에 경찰서 입구에서 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갈 시간인가 봐.”

발소리와 함께 무장한 사람들이 몰려왔다. 감옥을 열고 사람들을 데려갔다. 우리도 곧 그들과 함께 어디론가 데려갔다. 겁도 없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걸 보며 존의 다급함이 느껴졌다.

‘악마와 연관된 모든 것은 믿어서는 안 된다.’

아주 단순한 규칙이었지만, 이 세상의 사람들은 아직 그 사실을 잘 몰랐다. 오늘 밤 살아남는다면 그들 또한, 뼈에 이 교훈을 새기게 될 것이다.

“저기 괴물입니다!”

붉은 눈의 고블린이 골목에서 나왔다. 악마의 등장으로 사람들이 소란스러워지자 존이 나섰다.

“잘 봐! 우릴 노리는 게 아니야.”

존이 나서서 붉은 고블린 가까이에 다가갔다. 붉은 고블린은 존을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장서서 가야 할 길을 안내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조금 주춤하더니 존이 고블린을 따라가는 걸 보고 조심스럽게 뒤따르기 시작했다.

“이거 괜찮은 거 맞습… 지금 상황에 웃음이 나오십니까?”

긴장하던 고석찬이 상황을 내게 상황을 물어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던 모양이다.

“괜찮을 테니 걱정하지 마.”

“아니, 그래도 지금 타이밍에 웃는 건 조금 그렇지 않습니까.”

“힘들 때 웃는 사람이 진짜야.”

“그나저나 저놈은 왜 자꾸 우릴 쳐다보는 겁니까?”

“우리를 죽이고 싶어서 그럴 거야. 저놈들은 살인광이거든.”

살인 충동에 사로잡힌 듯, 고블린은 사람들을 힐끔거리며 노려봤다.

‘저 악마를 길잡이로 보낼 정도로 들떠 있단 말이지.’

녀석이 기대한 것을 짓밟아 줄 생각에 나도 살짝 들떴다. 그래서인지 아까부터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놈의 면상이 궁금해질 무렵, 사람들이 멈춰 섰다. 어느 체육관 앞이었다. 이곳에 짓밟아 줘야 할 놈이 있다.

제16화

16. 악마 사냥꾼 

체육관 건물 같은 곳으로 들어서자 넓은 축구장이 펼쳐졌다. 우리는 선수들이 입장하듯 축구장 한가운데로 향했다.

‘이놈들 봐라.’

마법을 사용해 어둠을 조금 옅어지자 관중석에서 돌아다니는 붉은 고블린들이 보였다. 피가 떨어지는 단검을 든 놈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켈켈거리며 웃었다.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었으나 첫 번째 목적은 악마들이 아니었기에 아주 조금만 더 살려 두기로 했다.

“누가 온다.”

로버트의 말에 곧 인기척이 느껴졌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악마 추종자가 붉은 고블린과 붙잡은 포로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대부분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저기 갈색 머리가 이사벨이다.”

로버트가 용병 이사벨을 가리켰다. 유일한 외국인인 아시벨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법으로 어둠이 옅어진 나는 그녀와 다른 포로들이 눈동자가 흐릿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껍데기가 되어 버린 것을.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반면 우리와 같이 붙잡혀 온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비, 비켜!”

공포심이 극에 달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무리에서 벗어나 도망쳤다. 어둠 속으로 달리니 존의 무리가 총을 쏘기도 잡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러한 대처를 하지 않아도 됐다. 관객석에 있던 붉은 눈동자의 악마들이 직접 움직였으니까.

“저, 저리 가!”

“켈켈켈!”

“크아아악! 사, 살려 줘!”

그 어둠을 뚫고 구해 주러 움직일 사람은 없었다. 착착 하는 소리와 함께 악마들의 웃음소리가 커졌고, 어둠 속의 비명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사람들이 몸을 떨었다.

“저희도 저렇게 되는 겁니까?”

작게 몸을 떨던 고석찬이 물었다.

“탈출 경로는 들어오면서 짜 뒀다. 걱정 마라.”

“역시 로버트 님! 그럴 줄 알았습니다.”

로버트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내가 끼어들었다.

“로버트, 한 가지 알아야 할 게 있어.”

“뭐지?”

“거래로 끝나지 않을 거야.”

“나도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다.”

악마 추종자는 악마를 숭배하는 자들. 그들의 방식은 악마를 상당히 닮아 있다. 늘 모든 것을 앗아 가기 위한 거래만 존재한다.

“인질을 받자마자 탈출만 하면 돼. 그러니 잘 따라올 준비 하라고.”

어둠이 눈을 가리기 때문일까, 로버트는 모든 일이 좋게 풀릴 것처럼 말을 했다. 악마와 연관된 순간 그럴 수 없는데도 말이다.

“악마 추종자들은 우리 모두를 노리고 있어.”

“그 정도는 예상했어.”

“포로가 모두 죽었다는 것도 예상했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저기 포로가 멀쩡히 서 있잖아.”

“모두 껍데기에 불과해.”

“그럴 리가….”

한순간 달빛이 운동장을 비췄다. 포로로 잡힌 여자와 아이들의 눈빛에 탁한 빛이 맴돌았다. 그리고 한 손에는 단검을 쥐고, 붉은 고블린과 같이 웃고 있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움찔하게 하는 그런 광경이었다.

“아아….”

로버트도 말문이 막혔는지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반면 존은 그 광경이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는지 악마 추종자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했다. 갑자기 검은 로브가 손을 들었다. 아이와 여자들이 존과 무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존! 안 돼!”

“늦었어. 로버트.”

존이 로버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이사벨이 섰다. 존이 반갑게 그녀를 안았다. 존이 미소를 지었다.

푹.

존의 배에서 피가 흘렀다. 그가 고개를 들자 단검으로 자신을 찌른 이사벨이 눈에 들어왔다.

“이사벨… 어째서….”

이사벨의 탈을 쓴 악마가 존을 보며 씨익 웃었다. 존이 기억하는 이사벨의 미소가 아니었다. 어딘가 뒤틀린 기이한 미소였다. 그것은 인간이라고 보기에 어려웠다. 이사벨이 존을 향해 단검을 찔렀다.

푹. 푹. 푹. 푹.

존은 들고 있는 총을 놓치며 쓰러졌다. 그는 권총을 차고 있음에도 이사벨의 껍질을 입은 악마를 쏘지 못했다.

“존!”

로버트가 울부짖으며 존을 향해 달려갔다. 존을 찌르고 있던 이사벨의 껍데기를 입은 악마를 밀쳐 내고, 쓰러지는 존을 잡았다.

“아…아… 로버트… 이사벨… 어디로 간 걸까.”

“존. 입 닥쳐! 살 수 있으니까.”

로버트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조이! 치료할 수 있지? 그 마법을 사용하면 되잖아.”

“내 마법으로는 치료가 어려워.”

칼에 찔린 상처가 너무 많아 피가 흘러나오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다. 회복력을 올리는 건 어렵지 않지만, 피를 이렇게 흘리면 내 마법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 정도의 치명상을 치료하려면 상급 마법인 상급 치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상급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조이!”

“로버트. 이건 내 능력 밖이야.”

“…….”

존의 피 묻은 손이 로버트의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로버트. 널 이용해서 미안해. 난 네가 우리를 버렸다고 생각했… 콜록.”

존의 입가에 피가 넘어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고, 로버트가 서둘러 답했다.

“날 팔아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몇 번이라도 그렇게 해도 괜찮아.”

“큭. 넌 역시 우리의 팀장이야. 그런 널 믿지 못하다니.”

“그만해. 존. 일어나서 사과하지 않으면 받아 주지 않을 거야.”

“미안하지만… 그러지 못할 거 같아.”

존이 피를 한 번 토하더니, 이내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이 비명들, 모두 내 잘못인 거지….”

“아니야. 아니라고. 그러니 이제 말을 아껴.”

“로버트. 마지막 부탁이야… 내가 저지른 일 좀 치워 줘.”

“내가 네 엄마냐! 네가 싼 똥은 네가 치우라고!”

“하…하… 그거 재미없는 거 알…….”

존은 더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분노와 울분으로 가득 찬 로버트의 시선이 날 향했다.

“지금의 넌 뭘 할 수 있지?”

“그의 마지막 부탁, 내가 들어줄 수 있어.”

여자와 아이의 껍데기를 쓴 악마들이 무장한 사람들을 공격하고, 관객석에 있던 붉은 고블린들이 단검을 들고 내려와 함께 살육을 벌였다. 밤하늘에 비명과 악마의 웃음소리가 섞여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전멸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적을 일으킨다는 마법사가 있지 않다면 말이다. 그리고 공교롭게 이곳에는 한 명의 마법사가 존재했다.

“부탁해.”

로버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쓰러진 존의 소총을 바닥에서 주워 들었다. 그리고 마력을 움직이며 탄창이 영원히 비지 않도록 생각했다. 푸른 빛이 총을 한 차례 머금고 사라졌다. 나는 그 총을 고석찬에게 건넸다.

“여기 지킬 수 있지?”

“이걸로는 총알이 부족합니다.”

“총알 부족하지 않도록 마법 걸어 뒀어. 그리고 총소리도 지워 뒀고.”

“오! 그럼 충분합니다!”

물론 탄창은 무한하지 않다. 시간이 지나 마법이 풀리면 더 총을 쏘지 못하겠지만, 고석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소식이었기에 굳이 그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 전에 모든 일을 처리하면 문제가 없을 테니까.

케륵!

고석찬은 소리 나지 않는 소총을 쏘며 악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도 하나의 무기를 장만할 필요가 있었다. 바닥을 충분히 적시고 있는 존의 피가 눈에 들어왔다.

“친구의 피 좀 빌릴게.”

“악마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나는 존의 피에 손을 뻗었다. 핏방울들이 모여들어 검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대마법사의 검이란 마법이었다. 내가 만든 마법이었는데 무기가 급히 필요할 때 전장에 흔한 피로 검을 만들 때 사용하던 마법이었다.

“켈켈켈!”

대마법사의 검을 만든 때, 마침 단검을 든 인간의 껍데기를 입은 악마 하나가 다가왔다. 공교롭게도 로버트가 날려 버린 이사벨의 껍데기를 쓴 놈이었다. 껍데기가 어쨌든 내게는 별 의미가 없다. 나는 그냥 악마를 죽일 뿐이니까.

휙.

놈의 머리를 한 번에 베었다. 이사벨의 머리가 굴러 존의 발에 걸려 멈췄다. 때마침 존의 눈꺼풀이 떨어지며 감겼다.

로버트가 있는 방향에서 시선을 뗐다. 당장 죽여야 할 게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내 발걸음이 향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바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악마 추종자가 있는 방향이었다.

케륵-!

내 앞을 막는 악마의 머리를 베어 내며 나는 녀석을 향해 발걸음을 뗐다.

* * *

샨카르가 붉은 고블린의 영혼을 심은 여자와 아이들이 무장한 인간들을 쉽게 처리하는 것을 보며 만족했다.

“으아아아.”

그 틈을 타 그들이 잡아 온 인간들이 도망쳤다. 샨카르는 기다리고 있던 악마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 죽여라.”

관람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붉은 고블린들이 도망치는 사람들을 덮쳤다.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칼에 난자당했다. 사람들의 피가 운동장을 적셨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샨카르가 미소를 지었다. 죽은 사람은 패자고, 산 자신은 승자다. 그것이 그가 봐 온 세상의 이치였다.

악마를 섬기기 전의 그 또한,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탐욕의 군주 그리마스를 섬기면서 죽음을 피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 방법은 완벽하지 않았다 죽음을 완벽히 피하기 위해서는 더 큰 힘이 필요했다. 그것이 그가 앞장서서 차원문을 넘은 이유였다.

‘이대로라면 탐욕의 사제를 불러낼 수 있겠군.’

탐욕의 사제를 소환할 수만 있다면 탐욕의 군주를 소환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큰 힘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만큼 더 큰 힘을 말이다.

탕! 탕!

여기저기서 들리는 벼락 떨어지는 소리에 샨카르가 인상을 썼다. 벼락을 내뿜는 쇳덩이. 그것은 마법도 아닌데 아주 쉽게 악마를 죽였다. 일이 엉망이 되기 전에 그는 더 많은 고블린을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보냈다. 그 소리는 금방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일이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어둠 속에서 고블린들이 픽픽 쓰러졌다. 그가 고개를 돌려 보니 벼락을 뿜는 쇳덩이를 든 인간이 하나 서 있었다. 그의 쇳덩이는 벼락을 뿜지 않았음에도 악마를 죽였다.

“귀찮게 하기는.”

그가 옆에 있던 고블린의 머리를 잡아 들었다. 그러고는 단검을 꺼내 고블린의 목을 그었다. 켁켁거리며 고블린이 쓰러졌다. 목에서 꿀렁꿀렁 피가 넘어와 바닥에 떨어졌다.

“피에 굶주린 개야. 일어나 저것을 먹어 치워라.”

뚝뚝 떨어져 고인 핏덩이는 곧 개의 형상으로 변했다. 개의 형상은 완벽하지 않았다. 피부는 모두 벗겨져 피가 흘렀고, 눈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 개가 주인의 명령을 따라 인간을 물어뜯기 위해서 내달렸다.

“컹컹!”

샨카르는 피에 굶주린 개에 남자가 목이 물어 뜯겨 죽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때 개가 달려가는 경로에 뭔가를 든 인간이 나타났다.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명령을 수행하는 데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앞을 막는 인간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그의 바람대로 개는 눈앞의 인간부터 물어뜯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리며 달려들었다.

사악-!

달려들었던 개의 몸이 바닥에 착지했다. 붙어 있던 머리는 몸과 떨어져 멀리 떨어졌다. 머리가 떨어진 개는 더는 달리지 못했다.

기사의 등장에 샨카르의 눈이 살짝 흔들렸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고 사람들의 흘린 피의 양을 보았다.

‘조금 피의 양이 적긴 하지만, 피의 사제를 불러낼 정도는 된다.’

악마들로 시간을 끌고, 피의 사제를 불러낼 수 있다면 기사 한 명 정도는 처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러니 고블린을 던져 줘서 시간만 벌면 되리라고 판단한 그가 악마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놈을 죽여라.”

체육관의 모든 고블린들이 한 인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샨카르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고블린들의 머리가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고블린은 많고, 소환 주문을 마칠 때까지 시간은 충분하다고 여긴 그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때 펑 하는 폭발음과 함께 고블린의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주변에 있는 고블린들도 뼈에 꿰뚫려 죽었다.

‘시체 폭발?’

샨카르는 갑작스러운 흑마법의 등장에 깜짝 놀라 눈이 커졌다. 흑마법을 사용한 것을 보면 이곳에 다른 악마 추종자가 있다는 말이었다. 자신의 제물을 빼앗기기 전에 다른 악마 추종자보다 먼저 마법을 끝내려 했다.

펑. 펑. 펑.

연이은 폭발에 고블린의 수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그 사이에서 피를 뒤집어쓴 검을 든 남자가 기어코 마지막 고블린의 머리를 베어 내며 샨카르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어떤 주인을 섬기는 놈이길래 이렇게까지 방해하는 거야?’

샨카르가 이를 악물며 마기를 흘렸다. 마기에서 진한 탐욕의 향을 맡고 자신이 어떤 주인을 섬기는지 눈치채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이었다.

마기를 감지한 붉은 검을 들고 다가오는 젊은 남자가 잔뜩 인상을 쓴 채로 샨카르 앞에 섰다.

“어디 악마 사냥꾼 앞에서 그 더러운 그리마스의 마기를 내뿜고 있어?”

악마 사냥꾼이라는 단어를 들은 샨카르는 크게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17화

17. 탐욕의 사제

악마 사냥꾼이라는 단어에 악마 추종자의 눈이 커졌다. 얼마나 놀랐으면 외우던 주문도 느리게 읊을 정도였다.

‘하긴 악마 추종자면 악마 사냥꾼을 모를 리가 없지.’

세상이 망한 이후로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싸울 수 있는 주민들은 악마 사냥꾼이 되어 악마와 싸웠다. 악마의 약점을 연구했고, 나누었고, 힘을 합쳐 악마를 죽였다.

그런 악마 사냥꾼은 악마 추종자들에게는 죽여야 할 존재이자 동시에 두려운 존재였다. 마기만 감지해도 어떤 악마를 섬기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인데 그런 마기를 흘리다니, 이건 그냥 죽여 달라고 소리치는 꼴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녀석이 연신 눈동자를 굴렸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녀석의 한쪽 팔을 잘랐다. 놈이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주문 외워라.”

고통에 인상을 쓰던 녀석이 천천히 주문을 외우면서도 눈빛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죽일 것 같으면서도 소환 주문을 완성하라고 하니 이상하게 보인 탓이었다. 그래도 녀석은 내 마음이 바뀔까 봐 서둘러 주문을 외웠다. 그사이 나는 마법이 작동하는 곳을 찾았다.

‘저기 있다.’

체육관 한가운데 사람들의 피가 모여들어 거대한 피 웅덩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이 꽤 있었고, 고석찬이 버티고 있어 피 웅덩이는 크지 않았다.

내가 등장함으로 다급히 소환한 탓에 생각보다 제물이 부실했다. 그렇다면 소환될 녀석 또한 정상이 아닐 터.

‘조금 더 더해 주면 되겠네.’

나는 검날에 손바닥을 살짝 그어 피를 흘려냈다. 그리고 주먹을 쥐어 핏방울을 떨어뜨렸다. 동시에 마력을 움직여 간단한 저주 마법을 사용했다.

이건 전생에 증명한 방법인데 악마에게도 저주가 꽤 잘 먹힌다는 것이다. 나는 저주로 검게 변한 핏방울을 피 웅덩이에 떨어뜨리고, 악마 추종자에게 돌아갔다.

녀석이 조금 더 주문을 외우다 멈췄다. 소환 의식이 끝난 것이었다. 피 웅덩이는 거칠게 기포가 올라왔다. 곧 악마가 소환이 될 것이다. 악마 추종자는 마기로 출혈을 막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째서 소환을 막지 않았지?”

아마 소환이 되기 위해 시간을 벌 목적 같았으나 나도 그와 같이 소환을 기다리는 입장이었기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저거 탐욕의 사제지?”

악마 추종자가 흠칫한 것을 보니 맞는 모양이다. 그리마스 추종자 놈들의 레퍼토리는 뻔하다. 탐욕의 사제를 소환하고, 탐욕의 군주를 소환한다.

어떻게 보면 탐욕의 사제 소환만 막으면 된다고 볼 수 있지만, 반대로 탐욕의 사제를 막지 못한다면 일대는 그리마스가 모두 먹어 치운다. 하나를 가지면 모든 것을 가지겠다는 걸 보면 탐욕의 군주답다고도 할 수 있지만, 이 녀석은 아직도 그 방법을 고수하는 걸 보면 유연성이 좀 떨어지는 녀석 같기도 하다.

“탐욕의 군주 그리마스 추종자야. 대가로 뭘 받기로 했냐? 마기 아니면 영생?”

“알 거 없다. 네놈은 곧 죽을 테니까.”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이건 궁금하지 않아? 내가 왜 네 녀석이 소환하는 걸 막지 않았는지 말이야.”

“…….”

“나는 아주 쉽게 악마를 죽이는 방법을 알고 있거든.”

악마 추종자를 이용해 악마를 죽일 수 있는 기회. 이 얼마나 놓치기 싫은 기회인가. 나는 이 기회를 내다 버릴 수가 없었다.

“한번 보면 이해가 빠를 거다.”

나는 검을 들어 녀석의 어깨를 찔렀다. 녀석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리마스 추종자이니 마기를 당연히 다루겠지.”

“…….”

“그걸 조금 만져 주면 어떻게 될까?”

마력을 움직여 검을 타고 추종자 녀석의 몸에 마력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녀석의 피에 저주를 걸었다. 저주가 발동하자 녀석의 온몸에서 지독한 마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당혹스러운 녀석이 눈이 커졌다. 마기를 다시 끌어모으려고 할수록 마기는 더 빠르게 흩어졌다.

“도대체 무슨 짓을!”

“마력 흩어 버리는 마법을 응용하면 마기도 가능해. 그리고 이건 악마에게도 써먹었는데 통하더라고.”

나는 부글거리는 피 웅덩이를 가리켰다. 악마 추종자의 눈이 더욱 커졌다.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악독한 놈! 그런 짓을 하고 살아남을 것 같으냐!”

악마 추종자에게 악독한 놈이라고 하다니. 그건 악마 사냥꾼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이다.

“내 걱정이 아니라 네 녀석 몸간수나 잘해야 할 것 같은데.”

녀석은 이제 평범한 인간과 다르지 않다. 그걸 깨달은 녀석이 서둘러 도망쳤다. 나는 굳이 쫓지 않았다. 마기를 다루지 못하는 놈도 이제 악마의 먹잇감에 불과했으니까.

“저기 주동자를 잡아라!”

그러지 않아도 사람들의 미움을 많이 산 녀석은 사람들에게 쫓겼다. 녀석이 오늘 밤을 넘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악마들이 죽고, 사람들이 악마 추종자를 쫓으며 체육관의 상황이 정리가 되자 로버트와 고석찬이 찾아왔다. 로버트가 뭔가를 망설이더니 작게 속삭였다.

“고맙다.”

작았지만, 분명히 들린 말에 나는 로버트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로버트의 눈빛은 아직 완벽하게 예전처럼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용병으로서의 눈빛이 조금 돌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직 안 끝났어.”

“저게 도대체 뭡니까?”

고석찬이 부글거리는 피 웅덩이를 가리켰다.

“악마가 나올 거야.”

“헤엑! 그러면 서둘러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거 잡을 거야.”

“제가 봐 온 악마들은 모두 괴물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괴물이 나올 줄 알고 그러십니까. 우선 자리를 피하고, 해가 뜨면 다시 오는 것이 어떠십니까.”

웃기는 녀석이다. 해가 뜨고 다시 온다고 뭐가 달라진다고. 악마는 여전히 악마였고, 죽여야 할 대상이라는 점은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까지 꽤 기다리지 않았나.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었다.

“이미 늦었어.”

“제가 머리를 쏴 죽이겠습니다!”

고석찬이 피 웅덩이에서 올라오는 악마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착착거릴 뿐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이거 고장 난 것 같습니다. 총알이 나가지 않습니다.”

“마법 효과가 끝나서 그래.”

“네? 마법이면 계속 가능한 거 아닙니까?”

“그런 마법은 없는데.”

“그럼 고블린과 싸울 때 마법이 끝났다면 어떻게 되는 것…….”

“저 녀석 죽이고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아니, 마스터. 제 이야기에 대답 좀….”

지난 이야기를 괜히 꺼내서 뭐 하나 싶다. 고석찬은 뭐라고 하는 듯싶었지만, 악마가 있는 곳까지는 따라오지는 않았다.

‘좀 작네.’

핏물에서 솟아오른 괴상한 살덩어리가 나타났다. 살덩어리에는 금속과 보석 그리고 신체의 일부 그리고 썩은 음식과 같은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놈은 덩치는 3미터가 넘었지만, 내가 본 탐욕의 사제 중 가장 작은 사이즈였다. 놈이 눈을 번뜩이더니 인상을 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작 이따위 제물로 이 자라크 님을 소환하다니! 노예 놈! 어디 있느냐! 네 녀석을 먹어 마기라도 좀 채워야겠다!”

악마 추종자를 찾는 자라크와 눈이 마주쳤다. 날 보며 침을 삼키는 걸 보면 배가 고픈 모양이다. 녀석이 나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느릿느릿한 그 손길을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례하구나! 이 몸의 손길을 피하다니!”

“잡아먹으려고 한 거잖아.”

“이 몸의 일부가 되는 영광을 주려는 것이다!”

그게 잡아먹겠다는 소리 아닌가. 녀석이 다시 날 향해 손을 뻗었다. 손길을 피했으나 녀석에게 흘러나오는 역겨운 냄새는 피하지 못했다.

“이놈! 어서 영광스럽게 죽거라!”

불량품의 손길이 내게 향하자 나는 냄새에 짜증이 나 검을 휘둘렀다. 녀석의 팔이 툭 하고 떨어졌다.

“감히! 이 몸의 손을 거부하다니! 네 녀석은 잘게 찢어 먹어 주마!”

녀석의 거대한 살덩어리에서 팔들이 뻗어 나왔다. 인간의 손처럼 생긴 것도 있었고, 아닌 것도 있었다. 그게 누구의 손이었든지 간에 상관없이 나는 다 잘라 냈다.

“꽤 싱싱한 재료는 역시 거칠구나. 제대로 요리해 주지!”

가장 먼저 잘라 낸 녀석의 팔은 기사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건틀릿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건틀릿과 녀석의 손이 합장했다.

“일어나라. 불사의 군대여.”

녀석의 주문에 피 웅덩이에서 붉은 액체로 만들어진 괴물들이 일어났다. 인간의 형상을 본뜬 것도 있었고, 몬스터인 늑대인간, 트롤 같은 것들도 있었다.

“저놈을 잡아 와라.”

마기까지 써서 날 잡으려고 하는 건 손해가 아닌가 싶었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녀석에게는 그런 것이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수십이 넘는 불사의 군대가 날 향해 달려왔다. 나는 검도 겨누지 않고, 가만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으어어어어.”

불사의 군대가 피의 파도처럼 내게 덮쳐 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내게 가까워질수록 군대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었다.

“으어….”

코앞까지 왔을 때에는 멀쩡한 건 날벌레 같은 형상의 녀석뿐이었다. 나는 녀석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튕겼다. 팍 하고 녀석이 터지며 사라졌다. 이제 남은 불사의 군대는 없었다.

“마기가 어째서….”

자라크의 표정이 악마 추종자의 표정과 똑 닮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흐뭇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녀석의 앞에 다가가 물었다.

“기분이 어때?”

“네 녀석 짓이구나! 감히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녀석이 날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건틀릿으로 손이 바뀐 쪽이었는데 느린 것은 매한가지였다. 내가 가볍게 피하자 건틀릿이 바닥을 때렸다. 쿵 하고 흙먼지가 튀며 땅이 움푹 패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녀석의 옆구리를 베었다. 살덩이에 붙어 있던 보석이 떨어지며 피가 흘렀다.

“크아아악! 이노오오옴!”

탐욕의 사제라고 할지라도 마기를 쓰지 못하면 덩치만 큰 악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저 큰 살덩어리도 베다 보면 결국은 죽는다. 놈도 그것을 알았기에 더욱 발악했다. 하지만 발악한다고 해서 몸놀림이 빨라지는 건 아니었다.

녀석을 벨 때마다 놈의 일부가 여기저기 떨어졌다. 썩은 내가 진동을 해 서둘러 마무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과 다리를 잘랐다. 놈이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마무리하기 위해 녀석의 배를 밟고 올라갔다. 죽어가는 녀석은 아직도 탐욕스럽게 날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크에엑… 배만 찼어도 네 녀석쯤은 한 입 거리….”

쓸데없는 말을 굳이 듣지는 않고 목을 베었다. 목에서 피가 콸콸 쏟아지며 몸이 천천히 작아졌다. 나는 녀석의 배에서 뛰어 내려 로버트와 고석찬에게 돌아갔다.

“보고도 믿기지가 않네.”

“여기서 봐도 몸이 덜덜 떨릴 정도인데 도대체 어떻게 그 괴물을 잡으신 겁니까.”

“운이 좋았어.”

소환 의식에 쓰인 피의 양이 적은 것도 있었지만, 악마가 소환되기 전에 저주를 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미 승리를 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내가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다음부터는 어려울 게 없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전부 태우고 움직이자.”

고석찬과 로버트에게 칼을 만들어 준 뒤, 악마의 목을 전부 베도록 했다. 시신 사이에 숨어 있던 고블린이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몸에 총구멍이 난 녀석들이 일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사람들과 악마를 가운데 모았다. 로버트가 천으로 감아 둔 두 시신을 두고 망설였다.

“꼭 태워야 해?”

“인간의 껍데기를 다른 악마가 사용해도 괜찮다면 묻어도 돼.”

로버트가 인상을 구기며 두 시신을 들쳐 멨다. 그리고 가장 꼭대기에 올려 두었다. 그것을 끝으로 나는 마법을 사용했다.

화르륵.

악마와 싸울 때보다 더 많은 마력을 사용해 불을 붙였다. 빠르게 불타는 만큼 슬픔도 짧기 때문이다. 종말의 장례는 늘 그런 식이었다.

“가자.”

모든 것이 불타 재로 변할 무렵 새벽이 밝았다. 나는 주변에 챙길 수 있는 총기들을 챙겨 체육관을 나섰다. 내 뒤에 고석찬이 뒤따랐다. 조금 더 멀리서 로버트가 뒤따라왔다.

제18화

18. 생존자

내 계획이었던 용병들의 합류는 무산됐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체육관의 소총을 몇 자루 챙겼으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존이 나눠 준 총이 더 있으리라고 예상하고 존의 숙소를 마법으로 찾았다.

“이미 털렸네.”

존의 숙소로 들어서자 도둑이라도 든 듯 엉망이었다. 로버트가 가까운 캐비닛을 열어 보자 텅 비어 있었다.

“뭐가 있나 뒤져 보자.”

우리는 나누어져 사람들이 묵었던 방을 뒤졌다. 한차례 누군가에게 털린 방을 또 뒤지는 상황이다 보니 총기 한 자루도 찾을 수 없었다.

“찾았다!”

다른 층에 있던 고석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로버트가 고석찬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으로 향했다.

혹시 숨겨 둔 총기함을 찾았나 싶었으나 고석찬은 기대한 것과 전혀 다른 것을 낑낑대며 들고 있었다. 그가 찾은 것은 로버트의 방패와 메이스였다.

“이건 왜 안 가져갔지?”

로버트가 고석찬에게 다가가 가볍게 그것을 받아 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무거운 것을 들고 갔다간 건물도 벗어나지 못하고 근육이 찢어졌을 겁니다.”

“별로 무겁지 않은데.”

로버트가 가볍게 메이스를 휘두르며 잃어버린 장난감을 찾은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석찬은 메이스를 피해 멀찌감치 떨어졌다.

‘하긴 나였어도 병장기보다는 총이지.’

현대인에게는 병장기보다 총이 익숙하다. 손이 두 개면 총을 두 자루를 들지, 메이스와 방패를 들 현대인은 없었다.

“조금만 더 찾아보자.”

혹시 두고 간 것이 있을까 싶어 마저 방들을 뒤졌다. 조금 깔끔한 방이었다. 서랍을 뒤지다가 웬 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존과 로버트 그리고 용병들이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존의 방이었나 보네.’

혹시 중요한 뭔가가 더 있을까 싶어 열심히 뒤졌으나 사진 말고 나온 것은 없었다. 방에서 나와 내려가는 길에 로버트에게 사진을 건넸다.

“뭐야?”

“챙기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로버트가 사진을 받아 들고는 멈춰 빤히 사진을 쳐다봤다. 뭔가 눈에 차오르는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려 자리를 피했다.

한참 뒤에 로버트가 밖으로 나왔다. 평소에 보던 로버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소총 다섯 자루를 얻었다. 물론 내게는 악마를 죽였다는 점이 더 크게 와닿았지만.

한동안 이 동네를 또 다른 악마들이 찾지는 않을 것이고, 그 틈을 타 서둘러 거점으로 복귀하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로버트가 이상한 제안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인천항 좀 들르자.”

“거긴 왜?”

“항구에 존이 챙기지 못한 것이 있는 것 같아.”

로버트가 존과 찍은 사진 뒷면을 보여 줬다.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걸 봐.”

“그게 뭔데?”

“우리끼리 쓰는 암호인데 항구와 숫자가 적혀 있어.”

“뭐가 있는데?”

“적혀 있지는 않아. 아마 존이라면 챙기지 못한 폭탄들을 표시해 두었을 거야.”

생각해 보니 존의 무리 중에 폭탄을 사용한 사람이 없었다. 폭탄을 악마에게 전부 사용했다면 그럴 수 있었겠지만, 인천항이 폭발로 망가진 흔적도 없었다.

“가 볼 만한 거 같은데.”

폭탄이 가득 실은 컨테이너만 찾으면 그야말로 대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시간을 조금 들여서라도 찾아보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찾기만 하면 악마를 쓸어 버릴 화력이 되어 줄 테니 말이다.

“없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괜히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니, 분명히 있어.”

인천항으로 다시 가기 싫었는지 고석찬은 돌아가자고 했지만, 로버트는 확신했다.

장소가 적혀 있기도 했고, 놓치면 아까울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로버트의 손을 들어 줬다.

“가서 확인해 보자.”

고석찬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고, 로버트는 그런 고석찬의 등을 때리면서 미소 지었다.

이제는 확실히 용병의 눈으로 돌아온 로버트를 보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인천항으로 향했다.

* * *

“이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쯤인데.”

로버트가 사진의 뒷면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말했다. 우리 일행은 로버트가 말한 지점의 컨테이너를 모두 열었다. 하지만 폭탄이 실린 컨테이너는 없었다.

“암호로 장난친 거 아니지?”

“종종 그러긴 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잖아.”

로버트의 말이 맞다. 용병들이 다 죽은 상황에서 장난치자고 암호를 적어 사진을 남겨 둔 것도 말이 안 된다. 짧은 시간 동안 내가 본 존은 진중한 인물이었다.

‘악마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무엇을 숨겨 뒀을까.’

여기저기 사람들에게 털렸는지 활짝 열려 있는 화물들. 생각해 보면 사람들도 화물부터 뒤져서 필요한 물자를 찾았을 것이다. 폭탄 같은 물건이 담겨 있었다면 사람들의 손이 쉽게 닿는 컨테이너에 실려 있지는 않을 터였다.

“에이! 땅으로 꺼진 것도 아니고, 하늘로 솟은 것도 아닌데 왜 안 보이는 거지.”

한탄하는 고석찬의 말에 뭔가가 번뜩였다.

“지금 뭐라고 했어?”

“예? 땅으로 꺼진 것도 아니고, 하늘로 솟은 것도 아닌데 왜 안 보이냐고 했습니다.”

나는 혹시나 하고 고개를 들었다. 컨테이너 크레인에 매달려 아직 내려오지 못한 컨테이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저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닐 이유는 없지.”

붕 떠서 아직 지상에 내려오지 못한 컨테이너에 시선이 갔다.

“저게 맞는 거 같아.”

로버트도 나와 같았는지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쩌면 사진 뒷면에 쓰인 암호로 남긴 장소는 우리를 위해 남겨 둔 선물이라기보다는 미처 챙기지 못한 컨테이너 장소를 기록해 둔 것이라면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내려 보자.”

“컨테이너 크레인 조종할 줄 아십니까?”

“그건 모르는데 나르는 건 좀 잘하거든.”

전생에 얼마나 많은 건축 자재들을 날랐었던가. 저 정도 컨테이너는 마법으로 내리는 데 어렵지 않다.

나는 하늘에 떠 있는 컨테이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력에 컨테이너를 내리고 싶다는 의지를 담자 컨테이너가 천천히 내려왔다.

컨테이너가 지상으로 내려오자 로버트와 고석찬이 크레인에 달라붙어 있던 컨테이너를 끊어 냈다. 이제 문을 열어 확인만 해 보면 된다. 나는 잠겨 있는 자물쇠에 손을 뻗었다. 철컹거리며 자물쇠가 바닥에 떨어졌다.

고석찬이 열린 컨테이너의 문을 열었다. 컨테이너 안에는 차곡차곡 쌓여 있는 박스들이 있었다. 로버트가 들어가 박스를 하나 열었다. 거기에는 노란 망고가 가득했다. 단내가 풍겨 왔다.

“꽝인 모양입니다.”

과일이 담긴 컨테이너였던 건가. 쩝 하고 혀를 찼다. 그때 로버트가 망고를 빼며 뒤적거렸다. 망고가 꽤 가득 담겨 손이 잘 안 들어가자 그가 망고를 바닥에 쏟았다.

탁.

망고가 데굴데굴 구르며 쏟아졌고, 비닐에 싸인 뭔가가 하나 떨어졌다. 로버트가 그것을 주워 들어 비닐을 깠다. 거기에서 소총이 나왔다.

“찾았다.”

“대박입니다! 다른 것도 얼른 까 보겠습니다.”

흥분한 고석찬이 다른 상자들도 깠다. 과일을 하나씩 빼기가 힘들었는지 로버트와 같이 상자를 뒤집어엎었다. 과일과 함께 뭔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비닐에 든 것은 수류탄이었다.

“…….”

컨테이너 안에서 침묵이 맴돌았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반응하지 못했다. 설령 반응했더라도 수십 개의 수류탄이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터지면 방어막을 두른다고 해도 무사하지 못했을 터였다.

다행히 수류탄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우리 셋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총기와 폭탄들을 찾아 빼내자 꽤 양이 되었다. 총기는 스무 정이었고, 총알도 육천 발이 넘을 정도로 넉넉했다. 수류탄도 많았지만, 지뢰, RPG, 수류탄, 연막탄, 섬광탄도 넉넉했다.

‘여기 없나.’

컨테이너 곳곳을 뒤져 보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부탁한 권총은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찾으려고 붙잡고 있을 순 없었으니까.

이것저것 뒤적거리던 고석찬이 물었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 가져갑니까.”

“마법이 있잖아.”

로버트는 당연하게 날 쳐다봤다. 내가 무슨 램프의 요정도 아니고, 뭐 해 달라 하면 다 가능한 줄 아는데 안타깝게도 기초에 가까운 마법이 주전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쉽지 않아.”

컨테이너에서 나온 총기와 폭탄을 보아도 그 수와 양이 꽤 된다. 돈을 비비탄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그리 부피와 질량이 크지 않아 마력이 많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 덩어리들을 그렇게 하는 건 쉽지 않다.

“마법이 어렵다면 차에 싣고 가는 건 어떻습니까?”

“그러면 가는 길에 모든 악마를 만나 볼 수 있겠지.”

“그건 좀 그렇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그 방법밖에.”

“오! 또 다른 방법이 있는 겁니까.”

나는 가방을 벗은 뒤, 마법으로 크기를 키웠다. 더 많은 물건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직접 들고 가는 수밖에 없어.”

“…….”

“가방 내놔.”

마법으로 가방을 늘려 줬다. 고석찬이 울상을 지으며 가방에 쇳덩어리를 넣었다. 로버트는 아무런 불만 없이 착착 해냈다.

“빨리 넣어.”

먼저 가방을 다 싼 로버트가 수류탄을 집어다가 고석찬의 가방에 넣었다.

“아니, 그거 말고 다른 걸로….”

“다 똑같아.”

고석찬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지만, 로버트는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고 가방에 무기를 넣었다. 마지막으로 내 가방까지 채워 넣으니 어찌어찌 다 들어갔다.

“흐잇챠! 허억!”

가방을 들어 보던 고석찬이 한 뼘도 들지 못하고 그대로 가방을 놓았다.

“그거 바닥에 수류탄 들어 있다.”

“……빨리도 말씀해 주십니다.”

“조심하라고.”

나도 가방을 한 번 들었다. 묵직을 넘어선 무게가 느껴졌으나 못 들 정도는 아니었다. 로버트도 마찬가지였는지 가방을 멨다.

“로버트 님은 그렇다 치더라도 마스터는 도대체 어떻게 들 수 있는 겁니까.”

“나도 힘이 좀 세거든.”

“그 몸으로 말이 안 되는 거 같은데….”

“가방 들어 봐.”

“아니, 이거 들리지가 않습니다.”

나는 고석찬의 가방에 마법을 걸어 줬다.

“다시 들어 봐.”

“어? 가벼워졌습니다.”

철 덩어리를 다른 물건으로 물질을 바꾸는 것보다 가볍게 하는 마력 소모가 더 적다. 물론 무게만큼 소모량이 큰 건 당연했지만. 나는 내 가방과 로버트의 가방까지도 조금 가볍게 만들었다.

“그런데 너무 눈에 띄지 않아?”

우리의 가방은 여행객의 가방보다 훨씬 크기가 크다. 멀리서 보아도 커다란 짐보따리가 움직이는 것은 눈에 띄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나는 추가로 투명 마법을 걸어 줬다.

“아까는 안 된다며.”

“아까랑은 좀 달라.”

미묘한 차이였지만, 마법의 난도에 확연히 차이가 있다. 마법사가 아니라 설명한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기에 대충 얼버무렸다. 그 와중에 고석찬은 투명한 가방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진짜 대단한 것 같습니다!”

“아공간도 못 여는데 대단하기는.”

고석찬이 상급 마법을 보면 기절할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그런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몰랐기에 대화 주제를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자.”

“조금만 더 보여 주시면 안 됩니까.”

끈질기게 달라붙는 고석찬을 떼어 내며 인천항을 나섰다.

* * *

거리를 걷던 중 인기척이 느껴졌다. 우리는 약속한 것처럼 가방부터 건물 안에 넣었다. 그리고 열리지 않도록 마법을 걸어 두고 다시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빨리 털어!”

“빨리 하고 있다고!”

자세히 보니 사람들이 아직 털리지 않은 편의점에서 먹을 것을 쓸어 담고 있었다. 누군가 다가오는지 망을 보는 사람도 있었고, 야구 배트와 칼을 든 사람들도 보였다.

“돌아가자.”

종말에는 쉬이 볼 수 있는 광경 중 하나였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무엇보다 악마가 아니었기에 죽여야 할 이유도 없었다.

“누가 온다!”

망을 보던 사람이 소리를 치자 편의점을 털던 사람들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들도 가방을 한쪽으로 치우고 야구 배트를 들었다.

잠시 뒤, 나온 것은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식칼로 만든 창을 들고 있었다.

“여긴 우리가 먼저 왔어. 저리 꺼져!”

“먹고 살기도 힘든데 조금만 나눠 주쇼.”

“우리도 부족해! 꺼지라고!”

“우리도 먹을 게 떨어지고 있어서 그냥은 못 보내. 먹을 걸 내놔.”

창을 든 무리가 먼저 온 무리를 둘러싸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졌다.

“저러다가 일 나는 거 아닙니까.”

서로 흉흉한 안광을 비치며 대치를 이어 가는 중이었다. 저러면 결국, 일이 터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꼭 누군가가 죽어야 끝이 나곤 했다.

“시X! 못 줘! 이 개X끼야!”

“뺏어!”

칼을 든 사람들이 빼앗기기 싫은지 먼저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건 결과가 정해져 있었다. 기사가 아니고서는 단검을 든 사람이 창을 든 사람을 이길 수는 없었다.

“컥!”

창을 든 무리가 열심히 손을 움직이며 창을 찔렀고, 검을 든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편의점을 턴 사람들이 가방을 포기하고 도망쳤다. 그리고 창을 든 무리는 음식을 챙겼다.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대로 두고 봅니까?”

“돌아가자. 괜히 충돌할 필요 없어.”

종말에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저들의 잘못을 묻고, 처벌할 수 없다. 우리도 저들과 같은 생존자였다. 생존에 위협을 받는다면 우리의 총구와 폭탄이 언제든지 저들을 향할 수 있는 생존자 말이다.

그것이 종말을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을 나는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몸을 돌렸다. 입안에서 쓴맛이 났다.

제19화

19. 적응

악마 추종자가 일대 악마를 죄다 끌어다 쓴 탓인지 거점으로 향하는 동안 악마와 마주치지 않았다. 대신 소수로 무리를 이룬 사람들을 이따금 마주쳤다.

큰 부상을 입은 무리도 있었고, 굶주려 상태가 좋지 않은 무리도 있었다. 또 무장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살려 주세요!”

도로 한복판에서 피를 흘리는 아이가 소리치며 도움을 구했다.

“구해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고석찬은 당장이라도 나서려고 가방을 내려놓으려고 했다. 내가 손을 들어 막았다.

“미끼일 수 있어.”

“하지만 모르는 거 아닙니까.”

“전생에 열에 아홉은 함정이었어.”

“하지만….”

고석찬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미끼로 던져진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구했던가. 그 때문에 마법사들을 곤란하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고석찬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누가 온다.”

로버트의 말에 우리가 몸을 숨겼다. 피를 흘리는 아이를 구하러 남자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꼬마야. 일로 와.”

다친 아이는 눈물을 훔치며 남자들에게 다가갔다. 남자들은 아이의 상태를 살핀 뒤, 찢어진 옷으로 상처를 감아 줬다. 그러고는 아이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저희가 도와줄 수 있지 않았습니까.”

“저길 봐.”

잠시 후, 도로 위로 무장한 남자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정확히 아이가 사라진 방향을 향했다. 고석찬은 그 광경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제 누구를 도와줘야 할까.”

“…….”

“적응해야 해.”

고석찬이 입을 꽉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다시 앞장서자 로버트가 바로 옆에 따라붙었다.

“괜찮을까?”

“내가 가 볼게.”

“로버트. 네가 잘 설명해 줘.”

죽음에 익숙한 로버트는 종말에 쉬이 적응했지만, 고석찬은 진짜 죽음을 마주한 경험이 적었던 탓인지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쉽게 약해지는 부분이 있다. 이건 훈련으로 단련되는 부분이 아니었다. 경험과 시간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로버트가 발걸음 속도를 늦추며 고석찬에게 다가갔다.

“지금 상황이 조금 위험하잖아. 팀을 이끄는 리더는 원래 예민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우리가 이해해야지. 생각해 봐. 몇 번이나 조이가 우리를 살렸는지 알잖아.”

“알지만….”

로버트의 설명에 고석찬도 이해가 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표정이 풀렸다.

빨리 적응하는 것이 좋다. 종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말이다.

걷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시신이 없을 것 같은 공사 중인 건물을 찾아 들어갔다. 사람과 악마의 흔적이 없었다.

“여기서 하루 머물고 가자.”

고석찬과 로버트도 짐을 내렸다. 나는 적당한 곳에 불을 피우고, 비상식량을 꺼냈다. 고석찬과 로버트도 나를 따라 식량을 꺼내며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그때 우리 말고 또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마력을 운용할 준비를 하며 자리에 일어나 계단 쪽을 바라봤다. 로버트도 곧 인기척을 느꼈는지 방패와 메이스를 들었다. 고석찬도 권총을 꺼내 들었다.

저벅거리는 소리의 끝에 회색 후드를 뒤집어쓴 셋이 나타났다.

“멈춰.”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역시 좋은 말로 해서 들어 먹는 인간은 없었다. 그래서 협박을 곁들여 말했다.

“더 다가오면 죽이겠다.”

내 경고에 그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원하는 게 뭔지 말해.”

회색 후드를 뒤집어쓴 이들 중 한 사람이 후드를 벗었다. 나랑 비슷한 또래의 여자애 얼굴이 나타났다. 뒤이어 그녀를 따라 두 사람이 후드를 뒤집자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저들도 우리를 상당히 경계하는 분위기였다.

“먹을 것 좀 구하고 있어요. 알다시피 밖이 흉흉해서.”

“어떻게 우리를 발견했지?”

“불을 보고 찾아왔어요.”

멀리서 불을 보고 왔다고는 하지만, 계단에서 발소리가 나기 전까지 나와 로버트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마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마력 탐지를 하자 여자애 주위에 남은 마력의 잔향이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마법을 사용한 흔적이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여자에게 물었다.

“마법사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단검을 쥔 손을 숨기고, 투명화하여 천천히 날려 보냈다. 여자의 목을 겨누고 여자의 반응을 살폈다. 마법사라면 이 정도 거리에서 마법을 사용하면 마력의 움직임을 쉬이 감지할 수 있다. 목숨을 위협받는다고 한다면 당연히 당황하는 티가 날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모르는 척하는 건가, 그게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건가.’

마력 탐지로 여자의 몸을 훑었다. 여자에게는 마도구도 없을뿐더러 마력도 없었다. 마력 없이 마력을 컨트롤하는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마법사는 아니라는 결론이 났다. 나는 보이지 않는 단검을 다시 회수했다.

“정말 마법사입니까?”

“아니야. 진짜 우리를 발견하고 찾아온 거 같아.”

기척을 죽이는 마법을 어떻게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우리를 우연히 발견하고 찾아온 게 맞았다.

“이거 먹어.”

고석찬은 그들에게 겁도 없이 다가가 자신의 비상식량을 건넸다. 그러다가 칼이라도 맞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생각했으나 내가 걱정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감사해요! 감사해요!”

“별것 아닌데 뭐.”

여자는 비상식량을 아이들에게 건네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별일 아니라고 판단을 했는지 로버트도 모닥불로 돌아가 앉아 다시 식사를 했다. 고석찬도 돌아가 가방에서 다른 비상식량을 꺼냈다.

“추워서 그러는데, 저희도 앉아도 될까요?”

“이러다 집도 내달라고 하겠네.”

“죄송해요. 당장 떠날게요.”

여자는 그래도 염치가 있었는지 죄송하다며 발길을 물렸다. 그때 로버트와 고석찬이 아이들을 불렀다.

“여기 앉아서 먹어.”

“어린애들 정도야 문제 될 거 없지.”

아니, 애들이 마음이 바뀌어서 언제 기습을 할지 어떻게 알고 자리를 내줘.

다들 저렇게 허술하기는. 몸에 무기라도 지니고 있는지 확인을 해야지.

“얘들아, 어서 앉자.”

“응!”

내가 몸수색을 하기도 전에 아이들이 모닥불에 앉아 몸을 녹였다. 고석찬이 날 흘겨보며 말했다.

“설마 몸수색이라도 하려고 한 건 아니라고 믿습니다.”

“이미 마법으로 다 확인했을 텐데 그럴 리 없지.”

로버트까지 합세하자 나는 몸수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들이, 진짜 큰일 나면 어쩌려고 하는 거야.

마법으로 철이 있는지 확인했으나 나온 건 없었다. 나도 모닥불 앞에 앉았다. 맞은편 여자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지?”

“이소연이에요.”

“둘은 동생인가?”

“네. 현우랑 현지라고 해요.”

“세상이 망한 건 알고 있지?”

이소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네가 엉망이 되고, 괴물들을 봤으면 모를 리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그것은 이소연이 자신도 모르게 마법을 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척을 숨기는 마법이라면 충분히 외부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을 테니까.

“뭘 먹으면서 버텼지?”

“처음에는 집에 있는 걸 먹었고, 다음에는 빈집을 털었어요.”

“부모님은 안 계시나?”

“괴물들이 등장한 이후로 소식이 끊겨서….”

이소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도 부모의 상황을 얼추 직감한 듯했다. 고석찬이 나서서 분위기를 풀었다.

“마스터. 취조하십니까?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인데.”

“알아낼 수 있는 건 알아야지.”

이렇게 우리와 함께 밥을 먹고 있다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그러니 이소연이 누군지 알 수 있는 건 다 알아야만 했다. 이소연 옆에 있는 아이들이 내 눈치를 보고, 시선을 피했다.

“저희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저희가 자리를 비킬게요.”

“어. 그러면 좋….”

“그런 거 아니야. 원래 저분이 좀 까탈스러워.”

“원래 저러니까 신경 꺼.”

고석찬과 로버트가 내 옆으로 딱 붙어서 내 입을 막았다. 이소연과 아이들은 다시 편한 표정으로 불을 쬐며 식사를 했다.

우리 셋은 몸을 돌려 이야기를 했다.

“둘이 뭐 하는 거야?”

“안전하다는 거 확인했지 않습니까. 왜 자꾸 애들을 심문하는 겁니까.”

“내가 당할까 봐 그래?”

“너희 언제부터 이렇게 호의적이었냐?”

“마스터가 예민하신 것 같습니다.”

“힘 좀 풀어. 바짝 긴장하고 다닐 필요 없잖아.”

최악의 경우 아이 셋 정도는 처리할 수 있기도 하고, 바깥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일단은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이번만이야.”

내 허락이 떨어지자 고석찬과 로버트가 손바닥을 마주쳤다.

언제부터 죽이 저렇게 잘 맞았다고.

몸을 돌리자 이소연과 두 아이들이 허겁지겁 식사를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저녁을 계속 먹지 못한 탓에 배에서 밥을 달라고 꼬르륵 소리쳤다.

‘밥 먹고 물어보지 뭐.’

예상하지 못한 손님들이 와 있었지만, 밥은 잘 넘어갔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정리하고, 몇 가지 마법을 걸기 위해서 잠깐 밖으로 향했다.

우리가 자리를 잡은 곳은 시멘트로 건물 뼈대만 있는 곳이었다. 우선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법을 걸고, 바깥에서 우리를 발견할 수 없도록 왜곡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돌아오는데 두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두 아이는 모닥불에서 조금 떨어져서 자리를 잡더니 누웠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싶어 애들에게 물었다.

“너희 밥 먹고 가는 거 아니었어?”

“아저씨들이 여기 있어도 괜찮대요.”

때마침 세 사람이 구석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즉시 그곳으로 향했다.

“밥 먹고 가는 거 아니었어?”

“불침번을 설게요. 오늘 하루만 자게 해 주세요.”

이소연이 무릎을 꿇었다. 로버트와 고석찬이 어찌할 바 모르겠는지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나오는데 어떻게 합니까.”

“위협이 되지는 않잖아.”

“어디까지 봐주려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도 다 넘겨주지 그러냐?”

“죄송해요. 제가 민폐라는 걸 알고도 부탁을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예요. 떠날 테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그래. 그러면 바로 떠나면 되겠네.”

그때 고석찬이 내 다리를 붙들며 무릎을 꿇었다.

“마스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 감도 막 위험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오는 길에 많은 사람이 죽어도 못 본 척했지만, 도울 수 있을 때는 돕는 게 좋지 않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위험하지는 않으니까.”

나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매번 이럴 수는 없는 법. 단호할 때는 단호해야만 한다.

“언제까지… 그럴 건데….”

전생에 마법사들이 내게 물었던 질문을 내가 고석찬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말을 흐렸다.

‘언제까지 사람들을 구할 건데?’

‘힘닿을 데까지는 해 보려고.’

‘그래. 너만은 조금 천천히 적응해도 괜찮겠지.’

마법사들은 내게 시간을 주었었다. 그 덕에 나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종말에 완벽히 적응할 수 있었다.

‘내 욕심이었나.’

돌이켜 보면 종말을 처음 맞이한 이들에게 서둘러 종말에 익숙해지라고 한 것과 같았다. 이들에게도 세상이 망하는 경험은 처음이었을 텐데 말이다.

“에휴. 마지막으로 허락하는 거야.”

“정말입니까?”

“그래. 그러니까 어서 가서 잘 준비나 해.”

“감사합니다. 마스터.”

고석찬이 일어나서 고개를 푹 숙였다. 로버트도 엄지를 들어 보였다.

“대신 넌 나랑 불침번 서야 돼.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네. 얼마든지요.”

그녀가 촉촉한 눈망울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살짝 붕 뜬 기분에 오늘 잠은 다 잔 것 같다.

오랜만에 드는 기분이었다.

제20화

20. 누구세요

로버트와 고석찬 이외의 다른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이소연은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서 불침번을 섰다. 그러나 고개가 연신 앞뒤로 크게 흔들렸다.

‘불침번은 무슨.’

자신 있게 불침번을 자원했으나 해가 뜨기도 전에 졸고 있었다. 나는 이소연 옆으로 조금 다가갔다. 그녀가 인기척에 놀라 깼다.

“졸리면 가서 자라.”

“아, 아니에요!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이에요.”

“잠깐치고는 꽤 긴 시간인걸.”

내 말에 이소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큼큼 헛기침을 했다. 잠도 깰 겸 저녁 식사 후 묻지 못한 것을 물었다.

“너 몇 살이냐?”

“스물하나요.”

“……좀 있네.”

“그쪽은요? 저랑 비슷할 거 같은데.”

“보기보다 많아.”

지금은 열아홉이었지만, 전생까지도 합치면 오십 년이 넘게 살아왔다. 그러니까 내가 어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소연이 동생들을 챙기는 모습을 보면 꽤 열심이었다. 그녀를 그렇게 어린애 취급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잘 숨어다니면서 먹을 걸 잘 구해야죠. 제가 생각보다 운이 좋아서 한 번도 남의 눈에 걸리지 않았거든요.”

이소연은 자신이 기척을 지우는 마법을 쓴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하긴 술식도 없이 마법을 쓰는 마법사도 이 세상에서 나도 처음 봤으니 그럴 수밖에.

숨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인간을 찾는 데 특화된 악마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였고, 마법을 컨트롤하지 못하니 실수로 마법이 풀리면 사람들에게 붙잡힐 가능성도 높았다.

그런 암울한 미래의 가능성도 펼쳐지지만, 이소연은 그렇게까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오늘도 운이 좋아서 아저씨들을 만났잖아요.”

“오빠.”

“네?”

“난 오빠라고.”

“아. 네. 오빠와 아저씨들을 만났죠.”

그녀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보기에는 대책 없이 행동하고 있었다.

“한 번이라도 재수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그건….”

그녀가 말을 잇지 못했다. 바람이 불지 않음에도 그녀가 몸을 떨었다. 악마가 벌인 학살로 죽은 사람들을 떠올랐기 때문이란 걸 쉬이 짐작이 가능했다. 이소연의 표정이 상당히 어두워졌다. 분위기를 바꿀 겸 나는 화제를 돌렸다.

“한번 숨어 볼래?”

“네? 지금요?”

“응.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애들이랑 같이 있다고 생각하고 숨어 봐.”

“네.”

이소연은 잠을 깨기 위해 양손으로 볼을 한 번 짝 소리 나게 때린 뒤, 기둥 뒤로 숨었다. 처음 봤을 때처럼 기척이 지워지지 않았다.

“날 괴물이라고 생각하고 숨어. 잡히면 죽는다고 생각해.”

“네!”

내가 이소연이 숨은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래도 좀 현실감이 없어서 그런지 기척이 사라지지 않았다. 기둥에 손바닥을 대고 마력을 움직였다. 그리고 악마와 비슷한 살의를 기둥 너머로 전달했다. 순식간에 이소연의 기척이 사라졌다. 그 틈을 타 나는 마력을 탐지했다.

마력도 가지지 않았고, 술식도 그릴 줄 모르는데 마법을 사용한다. 나 또한, 마법사로서 그녀의 방식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방식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공기 중에 흩어진 아주 옅은 마력들이 한순간에 그녀에게 모여들었다. 주변 환경에 흩어진 마력의 양이라 그 양은 적었지만, 그것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마력들은 자신의 자리가 있는 것처럼 자리를 스스로 찾아갔다.

그 모습이 마치 찢어진 원형 술식을 무분별하게 복원하는 것과 같았다. 끝내 마력들은 작은 술식을 그렸고, 마법이 발동됐다. 그렇게 그녀의 기척이 사라졌다.

내가 멍하니 그 광경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잠깐 나가 있는 사이, 이소연이 기둥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혹시 됐나요?”

“어? 어….”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마법은 기적을 일으키는 신비이기 때문에 무궁무진하다는 것은 인정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예상치도 못한 방법으로 마법이 발동되는 건 수많은 전장을 경험한 내게도 조금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한 번 더 해야 되나요?”

“아. 아니야. 됐으니까 나와.”

이소윤은 머리를 긁적이며 기둥 뒤에서 나왔다.

“그런데 방금 어떻게 하신 거예요? 저는 진짜 괴물이 쫓아오는 줄 알고 심장이 터질 뻔했거든요.”

급박하다고 본인이 생각이 되어야지만 저렇게 발동이 되는 건가. 그게 아니면 더 큰 의지를 따라서 마력이 움직이는 건가.

수많은 가설들이 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이 신선한 충격이 내게 어떤 깨달음을 주는 게 아닐까. 그러면 상급 마법도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해 보자.’

이소윤의 방식은 위험해 보이지도 않았으니 해봄 직해 보였다. 그래서 곧바로 시도를 해 보았다.

주변의 환경으로부터 아주 옅은 마력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깨진 술식을 그리듯 마력을 배치했다.

‘피어올라라!’

내가 그린 술식은 불꽃을 만드는 술식이었다. 간단한 만큼 빠르게 그려 낼 수 있었다. 술식이 완성되자 마력이 하나로 뭉치며 불꽃을 만들어 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파박!

불꽃은 유지되지 못하고, 터져 사라졌다.

‘더럽게 어렵잖아.’

그녀의 마법을 쓰는 방식은 쉬운 방법이 아니었다. 그리고 단점도 너무 많았다.

우선 자연적인 마력을 내 것으로 만들지 않고, 운용하다 보니 컨트롤이 쉽지 않았고, 그 상태에서 술식을 그려야 하는 건 더 어려웠다. 오죽하면 마력이 균등하지 않아 간단한 불꽃을 일으키는 것도 이렇게 실패했다.

이소연의 방식은 기초를 닦는 것도, 성장하는 것도 쉽지 않은 방법이었다. 가장 큰 단점은 주변 환경을 너무 탄다는 것이었다.

‘꽝이네.’

새로운 발견이 깨달음을 주기를 기대했지만, 그것은 수많은 실패 실험 중 한 줄로 기록이 되었다.

허공에 불꽃이 나타났다 사라진 것을 보고 이소윤이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어어! 바, 방금 도깨비불 봤어요?”

“아니, 못 봤는데.”

마법의 마 자도 모르고, 마법을 무서워하는 마법사를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긴 자기가 어떻게 마법을 쓰는지도 자각하지 못하지. 그런데 마법사라고 봐도 되나.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갈 무렵 하늘에 어둠이 조금 가신 것이 눈에 들어왔다. 로버트도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정말요? 방금 뭔가 파박 한 거 같은데.”

“졸려서 그런가 보네. 불침번도 끝났으니까 가서 자라.”

“이상하다. 분명히 불꽃이 튄 거 같은데.”

로버트가 일어나 나와 교대했다. 나는 모닥불 근처 내 침낭 속으로 들어가 누우며 눈을 감았다.

‘실패했네.’

어둠 속에서 불꽃이 파박 하고 튀었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빌어먹을 실패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 * *

두 시간 뒤에 일어났다. 정확히 뜬눈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 덕에 실패를 털어 낼 수 있었기에 시간 낭비는 아니었다.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자리를 정리하고 우리는 다시 떠날 채비를 했다. 일어나 있던 고석찬이 다가왔다.

“마스터. 얘네들은 어떻게 합니까.”

고석찬이 우물쭈물하는 이소연과 두 아이를 가리켰다.

내 답은 명료했다. 이것도 잠을 자지 않으면서 생각한 부분이었으니까.

“데리고 가야지.”

“아무리 그래도 애들을 버리기에는… 예?”

“지금 뭐라고 했어?”

내 대답이 예상하지 못했던 탓인지 로버트와 고석찬이 날 빤히 쳐다보더니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란 표정으로 인상을 썼다. 그래서 확실하게 한 번 더 말해 줬다.

“거점으로 데려갈 거야.”

“정말입니까? 로버트 님이 어제 상의한 부분을 미리 말씀하신 겁니까?”

“아니. 속마음을 읽은 마법을 쓴 거 같은데.”

“그런 거 아니거든.”

이유는 간단했다. 어찌 됐든 간에 이소연이 마법을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법을 쓰는 것 자체가 재능의 영역이다.

잘 못 성장해도 1인분이고, 잘 성장하면 백 명 천 명이 할 일을 거뜬히 해낸다. 그런 재능을 가진 인간을 버리고 가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본인이 마법을 쓰는지도 인지하지 못하긴 하지만, 곁에 두고 차근차근 마법에 익숙하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깨달을 날이 올 것이다. 아님 어쩔 수 없고.

‘스승님도 이러셨으려나.’

문득 전쟁터에서 날 데려다 가르치신 스승님이 떠올랐다. 이상하게 죄송스러운 감정이 올라오는 것 같아 고개를 흔들어 떨쳐 냈다.

“정말 따라가도 돼요?”

“응.”

“정말요?”

“그렇다니까.”

이소연이 신나 양팔에 아이들을 껴안아 들어 올리려 했다. 그러나 힘에 부쳐 그러지 못했다. 대신 손을 잡고 흔들며 방방 뛰었다. 아이들도 까르르거리며 좋아했다. 종말 같지 않은 풍경이었다.

“출발하자.”

우리는 다시 서울 거점을 향해 걸었다. 출발할 때는 셋이었는데 지금은 여섯이 됐다. 조금 북적이는 것 같았지만, 나쁘지만은 않았다.

“고블린이다.”

“내가 처리할게.”

“제가 하겠습니다.”

이따금 악마가 나타나면 로버트와 고석찬이 나서서 악마를 처리했다.

로버트는 메이스로 고블린의 머리를 깨부쉈고, 고석찬은 소리 없는 소총으로 머리에 구멍을 냈다. 이제 하급 악마는 거뜬히 처리하는 전력이 된 두 사람이었다.

그 덕에 편하게 동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혈비둘기의 피가 마르지 않아 동네는 왜곡 마법이 잘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동네에 들어서고 한참을 걸어도 동네가 조용했다.

“왜 정찰조가 보이지 않지?”

“지금쯤이면 누구 하나는 튀어나와야 하는데 이상합니다.”

분명 로테이션 정찰을 하도록 지침을 내려 두었다. 그런데 이것들이 그 명령을 지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살길을 도모하고 도망쳤나. 그건 가장 최악이다. 여긴 악마가 찾지 못하는데 바깥은 악마가 득실거리니 말이다.

그렇게 의아해하며 거리를 걷는데 큰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이 뭔데! 우리를 감시하냐고!”

“이게 다 동네를 지키기 위한 일입니다.”

“뭐! 네놈이 뭔데 동네를 지키고 말고야! 네 윗사람 나오라고 그래!”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가 보니 빌라 근처에서 노인들이 모여 덩치가 좋은 우리 애들에게 소리를 치고 있었다.

“마스터! 오셨습니까!”

덩치들이 돌아온 우리를 발견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자연히 노인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무슨 일인데 정찰을 빼먹고 있어?”

“그게, 노인들이 저희가 뭔데 동네 흉흉하게 돌아다니냐고 길을 막고 있어서….”

2팀장 박대호가 내게 속삭이는데 노인의 무리 중 한 사람이 다가왔다.

“네가 여기 양아치들 대장이냐?”

“그렇다면 어쩔래.”

“뭐, 뭣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에게 반말이나 찍찍 해 대고 말이야!”

노인이 나보다 모인 사람들을 향해 기가 찬다는 듯이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날 보고 할 것이지 왜 저러는 건지. 그런데 이상하게 이 할아버지 어디서 본 기억이 있었는데, 어딘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이, 이놈이! 아직도 반말이냐!”

“본인도 반말하면 되잖아.”

“이이…! 이놈이! 이 몸이 누군지 알고!”

“누구세요?”

“이 동네 구청장 한중일이다!”

그때야 벽에 덕지덕지 붙었던 구청장 후보 1번의 사진과 오버랩이 되었다. 사진에서는 힘이 넘치는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완전 노인이었다.

“벽에 걸린 사진이 낫네.”

내 말에 한중일이 다시 한번 고함쳤다. 안타깝게 목청은 세월을 비껴 나간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