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30화 최면 검귀

* * *

크라놀은 긴 기장의 코트를 챙겨 입었다.

자기 머리 빛깔과 같은 잿빛 색상의 외투.

대연금술사의 육신을 해치우고 획득한 특수 장비였다.

“크랴아앙!”

토실이는 새 복장이 마음에 드는지 꼬리를 살랑였다.

오동이도 그를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와! 아저씨! 정말로 잘 어울려요! 키가 커서 그런지 멋있어요!”

“…….”

반면 크라놀은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대연금술사의 코트.

이것은 바로 원작 주인공이 애착했던 옷이니까.

[명칭: 대연금술사의 코트.]

[등급: 성장]

[성능: 대연금술사 라닉스가 즐겨 입던 잿빛 코트. 본인이 직접 제작했다고 전해진다. 전 주인이 사망해 지금은 옛 힘을 잃었지만, 소유자와 함께 성장할수록 초월적인 위상을 되찾으리라.

+모든 분야의 연금술 위력이 한 단계 상향된다.

+시가를 더 오래 태울 수 있다. 악취나 담배 자국도 남지 않는다.]

단순히 담배 자국만 남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싸웠던 핏자국도 알아서 지워져 있는 정갈한 긴 코트.

시가 중독자인 원작 주인공 아니랄까 봐, 희한한 옵션이 붙은 장비였다.

‘이건 괜찮은 방어구지. 현자의 돌과도 궁합이 좋고, 잘 성장하면 괴물 같은 장비가 되니까.’

성장 아이템은 후반을 바라보는 부류였다.

초반 성능은 보잘것없더라도, 함께 커나가면 강력해졌다.

그런데도 이 대연금술사의 코트는 극초반 성능마저 대단했다.

모든 연금술을 상향시키는 옵션은 쉽사리 찾아볼 수 없으니까.

‘물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

사실 원작 주인공의 애장품을 입자니 조금 껄끄럽긴 했다.

만약 그 녀석이 이 옷을 보면 어떻게 반응할진 뻔했으니까.

‘분명 씩 웃고는, 그대로 빼앗아서 자기가 입으려고 하겠지.’

그러나 크라놀은 무시해 버리기로 했다.

고작 그런 것이 무서워서 애써 얻은 장비를 썩혀둘 순 없었다.

‘아무튼 최면 검귀. 이곳에서 그녀를 만나야 한다.’

지하 세계에서의 전투에서 꼭 필요한 조력자.

아직은 대륙 전체까지 명성이 알려져 있진 않았다.

그러나 엄청난 역량을 보유한 등장인물이었다.

‘훗날 거물까지 될 수 있는 인재니까.’

검귀라는 이명답게 그녀는 단순히 칼을 휘두르지 않는다.

압도적인 최면술을 걸고 검에다가 진한 감정을 실어서 싸우니까.

어중간한 각오로는, 죽기 살기로 칼을 휘두르는 최면 검귀한테서 이길 수 없다.

“오동아. 넌 언제 제일 감정적으로 변하나.”

“으잉?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요?”

돌돌이를 가지고 놀던 오동이가 고개를 갸웃댔다.

아이는 조그만 골렘한테 손수 만든 화관(花冠)을 씌어주고 있었다.

“음, 내 달콤한 간식을 누가 뺏어 먹으면 아주 괘씸할 것 같아요!”

“넌 아직 어려서 좋겠군.”

“히야아아! 갑자기 왜 놀려요!”

“토실이 너는 어떻지?”

반면 토실이는 진지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괜히 울상을 짓고는 크라놀을 올려다봤다.

“크량. 크랴아앙.”

“토실이는 아저씨가 죽으면 되게 슬플 것 같대요!”

“그럼 날 죽인 인간이 눈앞에 있다면 어떻게 할 건가?”

“크량? 크랴아아앙!”

토실이는 금세 눈꼬리를 사납게 들어 올렸다.

상상만 해도 화가 나는지 덜 자란 황금빛 비늘까지 곤두세웠다.

크라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우리가 만날 인간은, 늘 그런 복수심으로 칼을 휘두른다.”

“크랴아앙?”

“네? 도대체 어떻게요?”

그가 요약해서 대답해 줬다.

“그 여자는 자기 부모님이 자주 죽거든. 그러니 강력할 수밖에 없지.”

“……크량?”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난 하나도 이해가 안 가요!”

“아주 위험한 광인을 만나러 간다는 것만 알아두면 된다.”

크라놀 일행은 낯선 교역 도시에 도착했다.

지금 이곳에 최면 검귀가 머물고 있었으니까.

이전번 사냥으로 얻은 전리품 일부를 처분했다.

앞으로 필요한 약초와 물품들도 미리 구매했다.

‘그 최면으로 일군 힘은 지하 세계의 여정에서 도움이 될 거다.’

크라놀은 현재 목적을 다시금 정리했다.

광증을 치유하기 위해선 기적을 모아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일찍 깨어난 흑금룡을 저지하는 일이기도 했다.

‘기적을 모을수록, 강력한 힘을 독점할 수 있으니까.’

1막 최종보스 흑금룡을 저지하고, 대륙의 궤멸을 막는 것.

최후에는, 광증까지 치유해 안락한 여생을 보내는 삶.

그것이 바로 크라놀 위자르의 목표였다.

그러니 기적을 모으기 위해, 지하 세계부터 도달해야 했다.

“아.”

그때였다.

크라놀은 여관에 들어가는 웬 여자를 발견했다.

키가 훤칠하고 팔뚝에 흉터가 난잡한 적색 머리칼 미인.

곧장 고개가 끄덕여졌다.

“의외로 빨리 찾았군.”

“크랴아앙?”

투명화한 토실이가 크게 의아해했다.

저런 얌전한 인상의 미인이, 정말로 그 무시무시한 최면 검귀가 맞냐는 듯이.

크라놀은 결론을 내렸다.

“확실하다. 그러니 우린 지금부터 저 여자를 납치할 거다.”

1막 최종보스가 일찍 깨어났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여유는 없었다.

* * *

그렇게 다음 날 아침 무렵.

니벨은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깨어나 보니 웬 이상한 마차 안이었다.

게다가 처음 보는 아이들이 자길 쳐다보고 있었다.

험악하게 앞발을 들이민 꼬마용과 입가에 손가락을 올린 여자애였다.

“크량! 크랴아앙!”

“쉿! 조용히 하면 목숨만은 살려줄 거예요!”

때아닌 깜찍한 협박에 니벨은 황당해졌다.

마부석엔 웬 처음 보는 남자가 등 돌리고 앉아 있었다.

그제야 자기 몸에 밧줄이 묶여 있단 것을 깨달았다.

“……당신 누구야?”

“내가 널 납치했다. 지하 세계로 가야 하니까.”

니벨은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마차 안은 좁고 덜컹거리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 마차는 또 어디로 가고 있는 거고?”

“지금 도시 밖으로 나가고 있다. 그래야 지하 세계로 갈 수 있으니까.”

“뭐가 목적이야? 왜 날 납치한 건데? 내 돈? 아니면 내 몸?”

“아까부터 말했잖나. 우린 지하 세계로 갈 거다. 네 힘이 필요하다.”

니벨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놈의 지하 세계, 지하 세계. 그게 도대체 뭔 소리야?”

“거기엔 아주 끔찍한 괴물이 있다. 그걸 주워야 한다.”

“뭔 개소리야? 그래서 날 납치했다고? 진짜 뒈질래?”

아이들이 신기해하며 이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서로 열심히 떠드는데, 대화란 것이 이뤄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양측 모두 고집스러운 눈으로 양보가 없었다.

“내 조력자가 되어라, 최면 검귀. 네 힘을 더 높은 단계로 이끌어주겠다.”

그 제안에, 니벨은 코웃음을 치며 빈정댔다.

“아, 그렇게 친절한 분께서 날 납치까지 하셨어?”

“넌 그냥 설득해서는 말을 들을 부류가 아니니까.”

“어머, 잘 아시네? 그런데 어쩌지. 납치당했어도 순순해질 성격도 아닌데.”

납치당한 상황임에도 니벨은 의외로 능청스러웠다.

나름 거칠게 산 터라 이것보다 험악한 일도 겪어봤다.

그녀가 막 자고 일어나서 뻐근한 목을 까닥이며 물었다.

“그쪽 납치범 이름은? 나랑 협업할 생각이면 당연히 대답해 주시겠지?”

“크라놀 위자르다.”

“니벨 휘네트. 안타깝지만 나는 당신 제안을 받을 수 없어. 약자 따위랑은 동업 안 해주거든.”

비록 시골에서 올라왔지만, 그녀도 용병 업계에선 나름 한가락 하는 년이었다.

각 지방을 떠돌며 흉악한 현상 수배범을 처리했던 일도 부지기수였다.

오죽하면 최면 검귀라는 이명까지 붙었겠는가?

니벨은 어느 정도 자신과 수준이 맞는 이가 아니면 함께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납치라는 거친 방식을 쓴 타인은 더더욱 신뢰할 수는 없었다.

“뭐, 솔직히 돈으로만 날 고용하려 드는 의뢰인들보다는 훨씬 인상적이긴 하네. 거칠긴 해도 이렇게 참신한 영입 제안은 처음이야. 하지만 유쾌한 건, 실력이 뒷받침됐을 때 한정이지.”

“내 자격이 의심된다면 시험해 봐도 좋다. 내 제안을 승낙할지 말지는, 네 자유니까.”

“후회할 짓을 하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니벨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진지하게 선언했다.

“크라놀 위자르. 나는 지금부터 널 미친 듯이 집착하고 사랑할 거야.”

“크랴아앙?!”

가만히 듣던 토실이가 화들짝 놀라서 반색했다.

“토실이가 드디어 엄마가 생기는 거냐고 좋아하고 있어요! 우리한테 새로운 동생이 생긴다는 게 이런 뜻인 줄은 몰랐대요!”

반면 크라놀은 소름이 끼쳤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저 고백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으니까.

“감금과 폭행엔 이 최면이 최고지. 10분. 딱 10분간 널 마음껏 집착해 줄게. 알아서 버텨봐.”

“…….”

크라놀은 조용히 고개를 휘젓고 말의 고삐를 놨다.

그러더니 어리둥절해하는 어린 것들을 껴안았다.

니벨은 눈을 떴다.

“지금까지 내가 집착하고 사랑한 것들은, 온몸이 멀쩡한 경우가 전혀 없었거든.”

모든 것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니벨을 묶은 밧줄이 끊어지고.

강력한 힘이 마차 안을 휘몰아쳤다.

콰가가강!

이윽고, 굉음이 울렸다.

마차가 박살 나서 넘어졌다.

크라놀 위자르는 아이들을 껴안고 뛰어내렸다.

곧바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발 빠르게 내달렸다.

원작 주인공 뺨치는 광인이 자신을 쫓아오고 있었다.

* * *

혹자는 말했다.

사랑은 가장 위대한 감정이라고.

최면 검귀를 보며, 크라놀은 그 격언에 공감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대화가 안 통할 줄은 몰랐군.’

그래도 묶어놓으면 마차는 부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눈앞의 여자를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자기를 뒤쫓아오는 니벨은 뛰고 있지도 않았다.

“……크라놀. 아까 험악하게 굴었던 건 미안해. 하지만 이젠 달라. 미처 당황해서 나도 몰랐던 거야. 첫 만남에 네가 날 납치해 줘서 정말로 기뻐.”

저 여자의 양 뺨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것이 최면 검귀가 가진 독자적인 힘이었다.

‘고양검법(高揚劍法). 감정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칼의 힘과 속도를 더한다.’

슬프거나, 화나거나, 각종 격한 동요를 자기 힘으로 뒤바꾸는 기예.

일반인은 감히 따라 하지도 못할, 괴짜 같고 독창적인 검술이었다.

그러나 자기한테만 최면술을 걸 수 있는 기인에게는 딱 안성맞춤이었다.

‘정신 나간 싸움법이지. 고작 나 하나 잡겠다고 의도적으로 광적인 사랑을 부풀리다니.’

하지만, 그만큼 위력적인 전투 방식이기도 했다.

집착이 실린 검은 그만큼 절박하고 절실하니까.

크라놀은 아이들을 놓아주며 다급하게 말했다.

“아공간 쉼터로 들어가 있어라. 여기는 내가 알아서…….”

“찾았다.”

분명 상대는 뛰지 않고 있었다.

단순히 걷고만 있었을 뿐이었는데.

어느새 크라놀의 목 뒤에서 속삭이고 있었다.

말도 안 되게 폭증한 육체 능력이었다.

“왜 자꾸 날 피해? 나보다 저 애들이 더 좋아? 그건 싫은데. 너무 미워.”

니벨의 날 선 눈꼬리가 올라갔다.

그 시선은 크라놀보다도 아이들을 먼저 향하고 있었다.

흉터 많은 팔을 뻗어서 어린 것들을 붙잡으려고 할 때.

“어?”

문득 그녀의 몸이 멈췄다.

이윽고,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주 빠르게, 바닥으로.

콰아아앙!

아찔한 충격과 함께 얼굴이 바닥에 처박혔다.

바위가 찍어 누르는 것처럼 압력이 극심했다.

아무리 움직이려고 해도 몸이 말을 듣지를 않았다.

“그대로 있어라. 얌전하게.”

그때 크라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과는 달리 나른한 어조였다.

“어, 어? 흐어? 왜애? 어어?”

당황한 니벨은 대응할 수가 없었다.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갑자기 움직일 수가 없는 건가?

이렇게까지 무력하게 제압당한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정이 고양한 자신이?

“날 사랑해 줘서 진심으로 고맙다. 니벨.”

크라놀은 피폐하게 코피를 쏟았다.

한 손에는 사과주 술병이 들려 있었다.

교역 도시에서 샀던 가장 연한 술이었다.

“그러니, 나도 이제 베풀어준 사랑을 돌려주도록 하지.”

니벨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

31화 광인들의 협업

* * *

크라놀 위자르는 포기했다.

광증 발작을 미련하게 아끼는 것을.

어차피 최후의 순간에 쓰겠다고 미뤄봤자 소용없었다.

방금 같은 경우처럼 위급할 때면 곧바로 쓰게 되니까.

‘제 살 깎아 먹기라도 압도적인 효율이라서 어쩔 수가 없군.’

그나마 이번처럼 잠깐만 마법적 힘을 발휘하는 경우는 나았다.

격통을 느끼더라도 약초만 씹어먹으면 금방 누그러지니까.

하지만 지나친 강적과 오래도록 맞붙을 때면 늘 기절해 버려서 문제였다.

‘격통 자체는 어쩔 수 없다 쳐도, 수명 단축과 기절하는 문제점을 어떻게든 고쳐야 하는데.’

광증 발작은 아주 강력하지만, 페널티 또한 끔찍했다.

기절과 출혈을 반복할수록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지고 있으니까.

지하 세계에서 이 단점들을 보완할 방법도 한번 찾아봐야겠다고 느꼈다.

한편 니벨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그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방금까지 무시했던 태도와는 사뭇 다른 눈빛이었다.

“괴물.”

“네가 할 소리인가.”

“…….”

“아까는 아이들까지 죽이려고 하던데.”

“야, 그건 그냥 밀어서 너한테서 떼어놓으려고만 했던 거야. 내가 그 정도로 미쳤는지 알아?”

니벨의 최면술은 모든 제약, 내용, 시간을 자유롭게 암시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극단적인 감정에 취하더라도 일말의 선만큼은 넘지 않도록 절제했다.

가령 방금처럼 집착이 심해졌던 경우에도, 최고 수위는 ‘감금’과 ‘폭행’뿐이었을 것이다.

물론 부동산 사기꾼처럼 죽여 마땅한 악인들에겐 좀 예외인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 정도의 제약조차 없었더라면, 그녀는 진작 체포되어 가둬졌으리라.

‘자제력까지 잃은 최면은 제재 대상이지. 결국 강철 수도원 같은 곳에 갇혀버리고 말 테니까.’

강철 수도원은 대륙의 온갖 위험한 광인들을 수용하는 끔찍한 영역이었다.

크라놀 위자르에 막 빙의했던 순간, 그가 갇혀 있었던 장소이기도 했다.

수개월 전의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끔찍했다.

‘뭐, 아무튼.’

크라놀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 여자가 검만 쥐고 있었어도 그리 쉽게 제압할 순 없었겠지. 물론 결국엔 내가 이겼겠지만.’

고양검법은 당연히도 칼을 쥐어야 진가가 발휘되니까.

그때 니벨이 고개를 휘젓더니 일어났다.

“크라놀 위자르. 인정할게. 넌 나한테서 10분이나 버텼어.”

“버틴 게 아니라, 널 그냥 찍어 눌렀지.”

“…….”

담담한 반박에, 그녀는 얼굴을 확 구겼다.

하지만 일절 말대꾸를 하지 못한 채 괜히 우물거렸다.

“뭐, 납치라는 방식은 거칠지만, 네가 보통내기가 아니란 건 확실히 깨달았어. 나도 떠돌이 칼잡이고, 용병을 겸하고 있어. 강자라면 협업 얘기를 나눠볼 이유가 충분하지. 이제 방금처럼 거칠게 다투는 일은 없을 거야.”

크라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하 세계로 가자는 건 단순한 강요가 아니다. 거기선 너도 이득을 취할 수 있으니까.”

“도대체 무슨 이익이 있다는 거야? 애당초 굳이 나를 왜 데려가려는 건지도 모르겠어. 지하 세계라면 실력 있는 탐험가나 경험 많은 광부를 고용해야 하는 거 아니야?”

당연히 들 수 있는 의문이었다.

니벨은 자기 능력이 지하 세계에서 쓰이기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검술 자체는 위협적이라도, 어둡고 위험한 땅 밑에서는 좀 더 나은 직업군이 많았다.

그러나 크라놀은 확언했다.

“아니, 네가 가장 효과적인 조력자다. 그곳에서 네 최면을 압도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니까.”

실은 기적 이외에도, 지하 세계에서 또 들러야만 할 장소가 있었다.

‘환혹의 안개’가 둘러싸여 있는 협곡.

그 재앙 속에서 니벨은 가장 중요한 조력자가 될 터였다.

크라놀은 코피 자국이 남은 인중을 쓸었다.

“무엇보다 나와 지하 세계로 가면 너는 월등히 성장할 거다. 훗날 고위 기사도 잡을 만큼.”

“……!”

니벨의 눈썹이 순간 확 찌푸려졌다.

그녀는 기사들에게 열등감이 있었으니까.

왜 굳이 시골 고향을 나와서 떠돌겠는가.

그녀는 더 높은 검의 경지를 이룩하고 싶었다.

‘니벨이 싸우는 방식은 기사들과는 정반대나 다름없지.’

평정심과 기사도를 중시하는 기사들의 검술과 달리.

니벨은 광적인 감정에만 치중한 막싸움을 구사하니까.

게다가 기사들은 대부분 귀족이 많았고, 대접도 좋았다.

시골뜨기 출신인 니벨은 내심 질투가 날 법도 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이 원인은 아니었다.

‘꽤 유명했지. 최면 검귀가 ‘한 고위 기사’에게 패배했던 그 사건은.’

니벨에게 짙은 열등감이 밴 것은 그 패배가 결정적이었다.

팔뚝에 있는 수많은 흉터도 그 대결의 흔적이었다.

지금 그녀가 대륙을 떠돌며 검술을 단련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자존심이 건드려진 니벨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믿는데? 심지어 날 납치까지 한 너를?”

“신뢰는 지금부터 쌓겠다. 잠깐 날 따라와서 손해 볼 건 없겠지.”

니벨은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러자 토실이가 기특하게도 지원 사격을 해줬다.

그녀의 다리에 꼭 매달려서는 앙증맞게 칭얼거렸다.

“크량! 크랴아앙!”

“토실이가 니벨 언니한테 부디 우리 엄마가 되어달래요!”

“아니. 그건 너무 싫어. 날 납치하는 악당을 어떻게 좋아해?”

“크랴아앙?!”

단호한 거절에 충격받은 토실이가 크게 울먹였다.

오동이는 얼른 곁에서 토닥이며 위로해 줬다.

“토실아! 슬퍼하지 마요! 이 세상엔 아저씨처럼 나쁜 악당도 좋아해 줄 여자가 분명히 있을 거예요!”

“난 결혼 안 한다. 불행해지기 싫으니까.”

“크랴아아앙!”

눈물이 그렁그렁한 토실이가 발끈하며 옷자락을 깨물었다.

그러나 고집스러운 크라놀은 자기 의견을 철회하지 않았다.

니벨은 셋의 대화를 듣다가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졌다.

“그 새끼용이랑 날개 달린 여자애는 뭐야? 네가 키우는 애들이야?”

“함께 지하 세계로 데리고 갈 거다. 강한 힘을 가진 씨앗들이니까.”

니벨은 고민하다가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그건 그렇고, 나한테 보수는 얼마나 줄 거야?”

“그건 지하 세계에서의 볼일이 끝나고 계산하지.”

“아하, 날 맨입으로 부려 먹으시겠다?”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지. 미덥지 않다고 판단이 들면, 중간에 돌아가도 좋다.”

과한 자신감을 지닌 남자였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최근 자신보다 강한 인간에 목말라 있기도 했었다.

‘마법 같은 힘을 쓰는 걸 보니, 검이랑은 다른 부류의 강자 같지만.’

함께 다니면 뭐라도 얻는 게 있지 않을까.

최근엔 맞붙는 사람마다 족족 다 이겨서 재미가 없었다.

그러나 저 남자는 그만한 흥미와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니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일단은 널 따라가 볼게. 솔직히 혼자서 떠도는 것이 지루하기도 했고, 검술 수련에도 한계를 느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만약에 날 배신하면, 나한테 끔찍한 최면을 걸 거야.”

그것은 썩 참신한 발언이었다.

본인한테 최면을 건다는 것이 협박이 되다니.

“내가 널 배반하면, 뭐라고 암시할 건가?”

“네가 우리 아버지를 겁탈하고 죽였다고. 아마 대륙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죽이겠지.”

“…….”

최면 검귀답게 싸늘하고 끔찍한 복수였다.

역시나 조력자로 두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어때, 배신 안 할 거야?”

“약속하지.”

광증 질환자와 최면 검귀.

이윽고, 둘이 악수했다.

두 광인의 협업이었다.

* * *

지하 세계.

그곳은 미지의 괴물과 용암, 광석, 보물이 가득한 지역이었다.

대륙만큼이나 광활했기에, 현재 미발견된 영역도 널려 있었다.

그만큼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 모르니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크라놀 일행은 부서졌던 마차로 돌아갔다.

납치하며 압수했던 검을 니벨에게 돌려줬다.

허리춤에 칼자루를 찬 그녀가 이제야 편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빨리 움직이자. 아직 말들이 멀리 가진 못했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지?”

크라놀의 물음에, 그녀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지하 세계로 간다며? 일단 드워프들을 만나러 갈 거 아니야? 그러려면 아까 도망친 말부터 다시 가져와야지.”

지하 세계로 내려가려면 응당 드워프들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 관례였다.

풍토와 지반, 보석에 관해서 인간보다 월등히 우월한 땅의 종족.

지하 세계까지 통하는 정식 터널은 그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드워프들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땅 아래로 출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숙련된 모험가들도 손해를 감수하고 드워프제 장비를 바가지 써서 사주거나, 맥주 통을 바쳐서 지하 세계를 쏘다녔다.

하지만 크라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린 전혀 다른 루트로 지하 세계에 갈 거니까.”

이곳에서 드워프들이 머무는 지역까지 가려면 너무 오래 걸렸다.

더군다나 장비를 사주고 맥주 통을 바치는 과정과 금액도 아까웠다.

크라놀은 그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이동 루트를 개척하려 했다.

그가 잔뜩 심통이 나 있는 토실이를 바라봤다.

“토실아. 검은색 꼬마 폭룡을 소환해라.”

“크량!”

토실이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엄마를 만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아직도 삐친 모양이었다.

크라놀은 교역 도시에서 사 온 육포를 내밀었다.

“이거 먹고 기분 풀어라. 맛나다.”

“크량! 크랴아앙!”

“훈제 소시지도 있다. 아직 네가 먹어 보지 못한 치즈가 들어있다.”

“크랴아앙……!”

군침 도는 훈제 소시지까지 내밀자, 토실이는 살짝 고민하는 눈치였다.

결국은 못 이기는 체하며 그가 주는 간식을 먹어 치웠다.

크라놀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네 기분은 이해한다. 사랑해 줄 부모가 늘어나는 건 기쁜 일이지. 널 버렸던 친엄마를 대체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거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게 네가 원하는 대로만 이뤄질 수는 없다.”

토실이가 큰 눈망울로 올려다보며 경청했다.

그는 조금 생각에 잠겼다가 차분히 말했다.

“당장 네게 엄마를 만들어 줄 순 없다. 하지만 그만큼 더 널 신경 쓰고 보살피겠다. 난 딱히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네가 바라는 부모가 될 수도 없겠지. 그렇지만, 그래도 해보겠다. 그게 앞으로 널 키우는 데 필요한 태도니까.”

“크랴아앙…….”

감격한 토실이가 뒤늦게 미안해하며 아까 깨물었던 옷자락을 핥아줬다.

확연히 삐친 태도가 누그러졌다.

기분이 풀린 아이가 마력을 모아서 힘차게 울부짖었다.

“크랴아아앙!”

토실이가 폭룡 부르기를 사용했다.

그러자 검은색 꼬마 폭룡이 소환됐다.

환한 햇빛을 바라보며 그 어린것이 뛸 듯이 기뻐했다.

“우와! 설마 이렇게 빨리 또 지상에 불러주실 줄은 몰랐어요! 고맙습니다!”

지하왕의 아들.

이 어린 용은 마경 지하 일대를 지배하는 폭룡의 혈통이었다.

그만큼 지하 관련해서는 소환해 부려 먹기 좋은 녀석이었다.

“우린 지하 세계로 가려고 한다. 네 힘으로 그곳에 가는 길을 열어줬으면 좋겠군.”

“어, 정말요? 하지만 우리 아버지 허락 없이 그런 짓을 하면 혼날 텐데.”

“만약 내 부탁을 들어주면 앞으로 더 많이 지상으로 소환해 줄…….”

“끝났어요!”

땅이 격하게 울리며 열리더니, 지하로 가는 굴이 마법으로 파헤쳐졌다.

기나긴 토굴의 입구처럼 간이 계단으로 곱게 다져져 있는 길.

니벨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너,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왜 저 어린 폭룡까지 네 말을 듣는 건데?”

“시간 아껴야 하니까 빨리 내려가지.”

검은색 꼬마 폭룡이 새로운 커다랗고 긴 터널을 파주었다.

이제 훨씬 빠르게 지하 세계에 당도할 수 있을 터였다.

일행은 랜턴을 들고서 지하로 내려갔다.

어째 내려갈수록 공간이 점점 넓어졌다.

‘예전에 공략했던 소용돌이 토굴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깊이로군.’

하도 광활하고 어두워서, 랜턴으로도 앞길을 다 밝힐 수 없었다.

저 어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걸으면서도 괜스레 두려움이 커질 지경이었다.

“어! 잠깐만요, 무슨 소리 안 들려요?”

오동이가 의아해했다.

처음에는 아주 작디작았다.

그러다가 점점 무언가가 기어 오는 소리로 변했다.

벽과 천장에서, 그리고 발밑의 어둠에서 울려오는 끔찍한 소음.

“크랴아아앙!”

암시야를 가진 토실이가 백색 화염 숨결을 내뱉었다.

아주 잠깐, 주위가 환하게 밝아지며 사방이 보였다.

무려 수백 마리가 넘어가는 크고 작은 거미 떼가 이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니벨이 이를 악물고 칼을 뽑았다.

“지하 거미들이야!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러게 드워프들이 뚫어놓은 안전한 터널로 가자니까!”

땅 밑에서 살아가는 지하 거미는 침입자들을 가리지 않고서 먹어 치웠다.

일행을 둘러싼 거미 떼 중에서는 성인 장정보다 육중한 개체들마저 보였다.

이 어둠 속에서 이것들을 상대하려고 했다가는 금세 모조리 뜯어먹히고 말리라.

‘내가 잠깐 미쳤었지. 돈도 안 받고 왜 이런 곳에까지 따라와서는!’

니벨은 곧바로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이제 도망칠 기로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허무하게 죽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

일순간, 뺨에 피가 튀었다.

일행의 것이 아니었다.

지하 거미들의 녹색 체액이었다.

“키이이에에엑!”

암석의 폭풍이 일어났다.

수많은 자갈과 바위가 휘몰아치며 적들을 몰아붙였다.

수백 마리가 넘는 거미 떼가 순식간에 전멸하고 말았다.

이런 막대한 마법을 부린 존재는 너무나도 작은 이였다.

날개를 고이 접고 얌전히 발톱을 핥는 검은색 꼬마 폭룡.

“다 해치웠어요. 이제 더 내려가면 돼요.”

니벨은 눈을 크게 떴다.

상황 판단이 제대로 서질 않았다.

기껏 뽑은 칼을 휘두를 기회조차 없었다.

“이, 이게 뭐야? 도대체?”

크라놀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자동사냥.”

32화 지하로 향하는 길

* * *

니벨은 어려서부터 칼을 휘두르는 게 좋았다.

특히나 그녀는 용맹스러운 기사들을 동경했다.

굳건한 의지로 약자를 구원하며, 악을 처단하는 직종.

그런 그녀가 칼잡이가 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최면으로 강력한 동기를 만들어 수련하니 남들보다 배는 앞서 나갔다.

한창 최면 검귀라는 이명이 날리기 시작했을 때도, 부끄러웠지만 내심 기뻤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 대단하신 고위 기사님이라고요?’

그런데 술집에서 뜻하지 않게 웬 기연을 만났다.

제국 수도에서도 보기 힘들다는 고위 기사를 대면한 것이다.

듣자니 휴가를 받아서 이곳저곳을 유랑하는 중이라고 했다.

잔뜩 흥분한 그녀는 호기롭게 요청했다.

‘나를 당신 제자로 받아줄 수 있나요? 시종이라도 좋아요. 고위 기사가 되고 싶거든요!’

그러나 그 고위 기사는 니벨을 거부했다.

아직 자기가 보기에는 한참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니벨은 자존심이 상해서 자기도 검이라면 꽤 다룬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상대방이 도리어 빙그레 웃었다.

‘젊은 친구. 자네는 칼 실력은 기본이고, 그 밖에 다른 것들도 아주 부족해.’

‘아니, 도대체 나한테서 뭐가 그렇게 부족한데요? 내 소문도 못 들어봤어요?’

‘글쎄, 그걸 나한테 묻는다는 것 자체가 모자라단 증거 아닐까?’

흥미진진하게 엿듣던 취객들은 떠들썩한 비웃음을 터뜨렸고, 니벨은 확 기분이 나빠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검술로는 누구한테도 져본 적이 없던 그녀였다.

그런 자신이 도대체 뭐가 부족하단 말인가?

‘좋아요. 그렇게 내가 부족한 것 같다면, 어디 한 수 가르쳐 주시죠. 설마 거절하진 않겠죠?’

그녀의 연무 요청을 상대 기사는 순순히 승낙했다.

그 고위 기사의 별명은 ‘용기사’였다.

과거 용을 타고서 전쟁터를 주름잡았다던 천공의 칼잡이.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술집에선, 매서운 용 따윈 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니벨은 자신한테도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작 연무에 내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달려들 거라곤 생각 못 하겠지. 부모님의 원수라고 최면을 걸면, 제아무리 고위 기사라도 한 방 먹여줄 수 있을 거야.’

물론 수위 높은 최면일수록 니벨의 행동은 난폭하고 거칠어졌다.

당연히 상대를 죽이진 않도록 그에 맞는 제약도 따로 걸어뒀다.

그리고, 마침내 연무가 시작되었을 때.

니벨은 곧바로 후회했다.

그딴 제약 따윈 단 하나도 걸지 말 걸 그랬다고.

타악!

연무를 시작하고서 단 몇 합을 겨뤘던가?

사실 겨뤘다는 말조차도 어불성설이었다.

상대가 봐주는 기색이 역력했는데도, 완벽하게 니벨의 패배였다.

그러나 최면에 걸린 그녀는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결국 팔에 흉터가 남을 만큼 자상이 깊게 남고서야 암시가 풀렸다.

연무가 끝나고, 땅에 쓰러진 그녀가 자괴감에 망연자실했을 때였다.

‘자네가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영원히 그 자리에만 머무를 걸세.’

용을 타지 않은 용기사는, 그렇게 알 수 없는 말만 남기고 떠나가 버렸다.

승부욕이 강한 그녀는 그 이후로 몇 날 며칠을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치욕을 맛본 뒤, 세상을 떠돌며 매일 피나는 훈련에만 매진해 온 그녀였다.

악인을 처단할 때조차도 가차 없이 최면을 걸어 늘 최선을 다해왔다.

그래서 지금 이 남자의 방식은 실로 낯설기에 그지없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 우리 너무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은데.”

“쓸데없는 싸움은 자동사냥 돌리는 게 효율적이니까.”

정해진 정규 터널 이외로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루트는 끔찍했다.

시도 때도 없이 위협적인 지하 생명체들과 마주쳐야만 했으니까.

땅벌레 군단, 흙 바위 점토 두꺼비 떼, 피 발톱 두더지 무리 등등.

그러나 어떤 괴물이 나오더라도 검은색 꼬마 폭룡이 전멸시켜 줬다.

“네 덕에 편하게 가서 좋군.”

“헤헤. 이런 학살은 아무리 해도 어렵지 않아요. 그보다 소시지란 음식 좀 더 줄 수 있어요?”

어느새 둥지 밖에만 있는 간식에 빠져버린 검은색 꼬마 폭룡.

지하에서의 이 꼬마 폭룡의 힘은 지상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이건 뭐, 여정을 떠나는 게 아니라 편하게 산책이라도 하는 기분.

심지어 크라놀은 틈틈이 전리품을 주우면서도, 중간중간 아이들과 놀아주기까지 했다.

“아저씨! 이것 봐요! 아주 맛있어 보이는 빨간 버섯을 찾았어요!”

“그냥 버려라. 그건 독버섯이다.”

“크랴아아앙?!”

“앗, 이미 토실이는 한 입 먹었다는데요?”

“괜찮다. 용이라서 저항력이 강하니까. 죽진 않을 거다. 아마도.”

“크랴아앙!”

분명 더 잘 챙겨준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토실이가 울먹였다.

그러자 크라놀이 볼을 부풀린 아이를 쓰다듬어줬다.

“일단 경과를 봤다가 정 안 되면 구토라도 유도하겠다. 네가 예전에 내 배를 쳐서 독초를 토해내게 했던 것처럼.”

“크랴아아앙……!”

다행히도 토실이는 시간이 지나도 무사했다.

위기감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이런 상황이 익숙한 것일까.

저 셋은 참 잘도 태평하게 떠들고 놀았다.

“…….”

반면 니벨은 오히려 몸이 편하니까 불안했다.

늘 뭐든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성이 안 차는 성격이었으니까.

그냥 자기한테 심경 안정용 최면이나 걸까 고민했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때 오동이가 날개를 파닥이며 다가왔다.

“언니! 언니는 어떤 사람이에요? 우리 아저씨는 최면 검귀가 되게 무서운 광인이라고 했는데, 의외로 지금 당장은 꽤 얌전한 것 같아요!”

평상시 니벨은 꽤 이성적이고 합리를 추구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본인한테 최면만 걸면 또라이로 돌변하고는 했다.

그야 그렇게 유도해야만 전투력이 확실하게 오르니까.

“최면이 걸려 있진 않을 땐 원래 이런 성격이야. 그런데 너희는 이름이 뭐니?”

“나는 오동이고, 얘는 토실이에요!”

“어머, 너희 오래 살겠다. 되게 못생긴 이름이네.”

“크량! 크랴아앙!”

“히야아아! 너무해요! 우리 이름 가지고 놀리면 못 써요!”

니벨은 자기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거의 혼자만 다녔는데, 시끌벅적한 느낌도 의외로 좋았다.

“크라놀. 넌 좋겠다. 늘 이렇게 귀여운 꼬마들하고 함께 다닐 수 있다니.”

“말도 마라. 잠깐 어울리는 것은 좋을지 몰라도 책임지고 키우는 건 쉽지 않다.”

“오, 되게 피곤한 아빠 같네? 괜히 얘네가 엄마가 되어달라고 하는 게 아닌가 봐?”

그렇게 어쩌다 보니 니벨도 자연스럽게 담소에 참여해 버렸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귀여운 아이들과 떠들면서 한참을 내려갔다.

그렇게 어느새 꽤 깊은 지하까지 내려왔을 무렵.

앞장섰던 검은색 꼬마 폭룡이 멈춰 섰다.

“자,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이후부터는 불러도 도와주러 올 수가 없어요.”

“어째서지?”

“그, 사실 요 근처에서 우리 누나가 자취하거든요. 용들끼리는 함부로 서로의 지배 영역을 침범하면 안 돼요. 특히나 폭룡들은 규율이 엄격해서, 자칫하면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어요.”

모든 용이 마경에서만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대륙 여러 험지에서 자기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용들도 존재했다.

검은색 꼬마 폭룡이 괜스레 염려하며 경고했다.

“제발 조심해요. 우리 누나는 아주 크고 난폭하거든요.”

“그건 모든 친누나의 공통점이 아닌가.”

“아뇨, 우리 누나는 좀 심각해요. 자기 땅에 누가 침범하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냥 이것 하나만 기억하세요. 살고 싶다면, 절대로 우리 누나가 지배하는 영역에 발을 들여선 안 돼요.”

자동사냥을 끝내는 것이 아쉽긴 했다.

그래도 이만하면 본전은 뽑았다.

“이 길로 쭉 내려가면 지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을 거예요. 나중에 지상에서 또 불러줘요!”

그렇게 꼬마 폭룡이 돌아가고, 크라놀 일행은 계속 걸었다.

갈수록 점점 공간이 광활해지며 처음 보는 형형색색 광석들과 암반이 늘어났다.

이젠 지하 세계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조였다.

오동이가 돌돌이를 품에 껴안은 채로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저씨. 이대로 지하 세계로 가면 정말 새로운 동생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 그곳에서 얻어야 할 이득이니까.”

지하 세계에서 그가 얻을 두 번째 기적.

이번 기적은 현자의 돌과는 조금 달랐다.

단순한 아이템이 아니라 생명체였으니까.

오동이는 신이 나서 기뻐했다.

“히! 난 엄청나게 멋진 언니가 될 거예요! 아, 남동생일 수도 있으니까 누나일까요? 아무튼 동생이 생기면 아주 귀여워해 줄 거예요!”

그런데 신이 난 오동이와는 달리, 토실이는 조금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크랴아앙…….”

“토실이는 어린 동생이 생기면 관심과 사랑을 뺏길까 봐 걱정된대요!”

새 막냇동생의 등장은 기쁘지만, 때론 질투나 경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크라놀도 새로운 녀석과 이 둘이 잘 어울릴지 궁금하긴 했다.

어쨌든 그건 그때 가서 만나 보면 알게 될 일.

그런데 문득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히히히히……!

니벨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누가 웃었어?”

“난 아니에요! 아저씨예요?”

“나도 아니다.”

“크랴아앙!”

그때 암시야 특성을 가진 토실이가 저편을 경계하며 노려봤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희끄무레하고 투명한 것들이 움직였다.

갑자기 주변이 추워져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랜만의 침입자네? 이제는 다들 이쪽으론 안 오던데……!

―정말 심심했는데 너무 잘됐어……!

―너희도 우리랑 놀자……! 히히히히……!

지하 악귀.

땅 밑으로 온 탐험가나 드워프들을 홀리는 존재.

딱히 공격 기술은 없지만, 여러 생명체를 미치게 해버리는 혼령들이었다.

주위에서 싸늘하고 희끄무레한 영혼들이 일행 근처를 배회하며 괴롭혔다.

―너흰 뭘 원하기에 이런 지하까지 왔다니……?

―무엇을 가지려고 왔든 넌 실패할 거야…….

―불쌍한 것들, 저 어둠이 널 삼킬지니…….

거슬리는 목소리를 듣자니 기분이 울적하고 예민해졌다.

귀를 막아도 그 끔찍한 소리는 고막을 파고들었다.

이대로 있다간 결국엔 미쳐버려서 날뛰고 말 터.

니벨은 재빠르게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아무런 피해도 입힐 수 없었다.

―히히히……!

―우리한테 칼이 먹힐 리가……!

―푸흐흐흐흐. 너흰 우리한테 안 돼. 순순히 친구가 되어줘……!

그때 크라놀도 검을 꺼냈다.

지난 교역 도시에서 구매해 온 철검.

니벨의 것보다는 훨씬 더 값싸고 초라했다.

―바보들이야, 바보들……!

―학습도 못 하나 봐, 또 칼로 베어 보려고……?

―너희 같은 것들은 이 광활한 지하에서 살아남지 못해……!

―이대로 우리와 하나가 되자…….

그런데 그때였다.

크라놀의 검에 흑백 에테르가 휘감겼다.

그러고는 가장 가까운 악귀를 향해 휘둘렀다.

―어? 끼아아아아악!

이변이 벌어졌다.

본래는 베일 리가 없는 악귀가 찢겨서 소멸당했다.

―뭐, 뭐야……?

―어, 어떻게……? 우린 악귀인데……!

―저, 저 검에 둘러싸인 힘은 도대체……!

악귀들이 당혹스러운 눈동자로 경악했다.

크라놀은 담담히 칼을 휘저었다.

흑백 에테르.

지난번 광증으로 길들인 이후부터는, ‘재생’과 ‘참격 면역’을 무시할 수 있게 됐다.

당연히 악령처럼 물리적 타격을 무시하는 것들도 베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크량.”

토실이가 곧장 두 발로 우뚝 섰다.

엉거주춤 쓰러질 듯했지만, 겨우 중심을 잡았다.

그러더니 비장한 표정을 짓고는 아가리를 활짝 벌렸다.

“크랴아아앙―!”

드래곤 피어!

대연금술사의 육신을 해치운 뒤로 새로 배운 스킬이었다.

조그만 덩치라곤 믿기지 않는 엄청난 포효에 악귀들이 몸부림쳤다.

―끼아아악……!

―뭐야, 뭐냐고……!

―저, 저 울음소리를 들으니까, 힘이 약해져. 벼, 벽도 통과하지 못하겠어……!

용의 울음은 귀신을 내쫓고 적들을 겁먹게 했다.

한편 오동이는 두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있었다.

곧 흑백 날개의 하얀 쪽이 환하게 빛이 차올랐다.

“지금부터 심판을 내릴 거예요! 나쁜 유령들은 용서치 않아요!”

천상의 심판!

환한 장판이 깔리자, 크라놀 일행은 기력이 보충되는 것을 느꼈다.

반면에 저 악귀들은 유황불에 휩싸이며 소멸하기 시작했다.

정해진 범위 내에 있는 아군에게 축복을 걸고, 적들은 유황불로 휘감는 신기술.

악령들은 하필이면 하나같이 천적 기술을 익히고 있는 셋과 마주해버렸다.

그래서 당연지사 표적은 나머지 한 명에게로 전부 몰릴 수밖에 없었다.

―저, 저 여자를 노리자……!

―맞아! 그나마 제일 만만해……!

―우릴 베지도 못하잖아. 그나마 한 놈이라도……!

그때 니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지금부터 내게 악령들 목소리가, 제일 좋아하는 음유시인의 노랫소리로 들린다.”

남은 악령들이 모조리 니벨에게로 몰려선 목소리를 모아 속삭였다.

그런데도 그녀를 조금도 미치게 만들 수 없었다.

도리어 니벨은 여유롭게 바위에 앉아서 콧노래까지 흥얼댔다.

따로 공격 기술이 없는 악령들에겐 그야말로 최악의 적이었다.

―저, 저 여자는 왜 우리 목소리가 안 통하는 거야……!

―마, 말도 안 돼. 이미 미쳐 있는 여자인가 봐……!

―끼야아아악!

결국 크라놀 일행에게 지하 악귀들은 초토화하고 말았다.

다른 침입자였다면 전혀 결과가 달랐겠지만, 상대가 너무 나빴다.

그렇게 마침내 이들은 무사히 지하의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거기엔 얇게 파인 굴의 끄트머리로 아주 넓어지는 길이 보였다.

검은색 꼬마 폭룡의 힘으로 파인 토굴의 끝자락이었다.

“크량! 크랴아앙!”

“저기를 넘으면 이제부터 진정한 지하 세계인 거네요? 어떤 곳일지 너무 궁금해요!”

다들 기대감을 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이변이 벌어졌다. 저 뒤에 펼쳐진 것은 상상도 못 한 광경이었다.

“어?”

다들 눈을 깜빡였다.

상상했던 광활한 지하 세계의 풍경이 아니었다.

천장과 벽에 신비로운 발광석(發光石)들이 박힌 넓은 공동.

어딘가의 공간으로 이어지는 여러 가지 샛길 통로들.

사방 곳곳에 징그럽도록 쌓여 있는 수많은 해골까지.

“아.”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은 목표로 했던 지하 세계가 아니었다.

오직 크라놀만이 이곳이 어딘지 깨달았다.

“용의 레어로군. 이 근방을 지배하고 있다는.”

“뭐? 그렇다면……!”

나머지 일행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절대로 만나지 말라고 경고했던 검은색 꼬마 폭룡의 친누나.

하필 지하 세계에 오자마자 그 괴물의 본거지에 떨어졌다.

33화 지하낙원

* * *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오게 됐을까.

니벨은 현실감각이 무너진 기분이었다.

분명 어젯밤까지만 해도 푹신한 여관 침대에서 잠을 청했었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납치당하고, 마법에 짓눌린 데다, 지하에 와버렸다.

심지어 현재는 말도 못 하게 위험한 용의 레어까지 떨어져 버린 신세.

“…….”

이 사건들이 고작 하루도 안 되어서 벌어진 일이란 게 믿기지 않았다.

이게 전부 저 크라놀이라는 괴악한 미친놈 때문이었다.

물론 이곳은 둥지이니만큼, 용이 숨겨둔 보물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니벨은 현명하게도 본인 목숨이 하나란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곧장 등을 돌려서 거침없이 걷기 시작했다.

“어딜 가나?”

“지상으로 돌아갈 거야. 내가 미쳤어? 이런 데에 조금이라도 더 있다간 목숨이 위험해.”

“못 갈 거다.”

“흥. 그렇게 붙잡는다고 내가 곁에 있어 줄 것 같아?”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떠나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크라놀이 옳았다.

미래를 예견한 그는 미리 귀를 막았다.

“어?”

콰르르르!

뜻하지 않은 굉음에 모두의 눈이 돌아갔다.

분명 잘 지나왔던 통로가 무너져 버렸다.

이제는 돌아갈 길이 없어지고 만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이게 무슨!”

니벨은 크라놀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가 키가 더 커서 모양새가 이상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야, 이젠 어쩔 거야! 이런 얘기는 없었잖아! 내 목숨 책임져!”

“나중에 계산할 보수에 청구해라. 그리고 놔라. 머리 아프다.”

니벨은 험악했고, 크라놀은 담담했다.

반면 토실이와 오동이는 의문을 표했다.

“크랴아앙!”

“뭔가 이상해요! 설마 그 검은색 꼬마 폭룡 오빠가 우릴 배신한 걸까요?”

검은색 꼬마 폭룡이 파둔 터널을 지나왔더니, 용의 레어에 갇혀버렸다.

당연히 일부러 함정에 빠뜨린 것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크라놀은 멱살이 잡힌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만약 그랬다면 친누나를 조심하라는 경고 따윈 안 했겠지.”

“그러면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우리가 왜 하필 여기에 갇히게 된 건데?”

“일단은 놔라. 머리 아프다.”

“…….”

이래서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니벨이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놔줬다.

겨우 이성을 되찾고는 상황을 살폈다.

“돌아갈 길이 막혔으니 어쩔 수가 없네. 일단은 이곳을 빠져나갈 출구부터 찾아보는 게…….”

“쉿! 잠깐만요! 지금 어떤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오동이의 말에, 다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저편으로부터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공동 저편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라놀 일행은 긴장하며 전투태세를 갖췄다.

그런데 상대방은 상상치도 못한 외견이었다.

“어?”

이들이 우려했던 포악하고 커다란 용이 아니었다.

고작 열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갈색 피부의 소년이었으니까.

척 봐도 귀족 자제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급스러운 복장과 관리를 잘한 피부였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가는 목에 애완견 목줄처럼 굵은 금속 고리를 차고 있었다.

그 소년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팔짱을 꼈다.

“아니, 당신들 뭐예요? 처형장에는 왜 와 있는 거예요?”

“……어, 처형장이라고요?”

니벨은 생각도 못 한 단어에 자기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갈색 피부의 소년은 경계하며 쌍심지가 올라가 있었다.

“설마 외부인들이에요? 아니, 이제 보니까 다들 금속 고리도 안 채여 있네? 이런 외진 곳까진 어떻게 들어왔지? 역시 수상해! 당장 우리 레어의 전투 담당들한테 신고부터 넣어야…….”

“자, 잠깐만요! 우리는, 그게, 그러니까……!”

당황한 니벨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했다.

뭔가 둘러대긴 해야겠는데, 변명 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최면이 없는 언변까지 높여주진 못했으니까.

반면 크라놀은 훨씬 더 행동이 빨랐다.

“아, 다행입니다. 드디어 찾았군요. 사람을 못 만나면 어쩌나 싶었습니다.”

그는 크게 안도했다는 표정까지 지으며 가슴을 쓸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외부인이 이곳까지 들어오는 일은 없었는데. 여긴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온 거죠?”

크라놀은 곧바로 토실이를 양손으로 들어 올려서 보여줬다.

“저희는 위대하신 이 레어의 주인께 이 새끼용을 바치러 왔습니다.”

“크랴아아앙?!”

당황한 토실이는 크라놀의 배신에 또 눈물이 고여버렸다.

갈색 피부 소년은 의심이 짙은 눈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만져봐도 돼요?”

“물론입니다.”

그 소년은 가까이서 토실이를 살펴봤다.

토실토실한 뱃살도 쿡 눌러보고, 황금빛 비늘까지 만져본 뒤엔 눈이 확 커졌다.

“어? 날개도 있고 비늘도 제대로네? 뭔 퉁퉁한 왕도마뱀이나 가지고 와서 거짓말로 둘러대는 줄 알았는데, 진짜 용이잖아?”

“크랴아아앙!”

퉁퉁하단 소리에 성난 토실이가 앞발을 들이밀었다.

그 반응에 갈색 피부 소년은 화들짝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살아있는 용을 눈앞에서 보자, 태도가 완전히 조심스럽게 바뀌었다.

“다, 당신들 도대체 정체가 뭔가요? 어떻게 진짜 새끼용을 포획해서 가져온 거예요?”

“저희는 외부에서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지상에서 내전이 벌어져서 삶의 터전을 잃었거든요. 그래서 이 레어의 주인분께 잘 보이기 위해서 새끼용을 잡아 온 겁니다. 진귀한 스크롤을 여러 장 뜯으며 지하로 순간 이동했는데, 하필 도착하니 여기더군요.”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려고 왔다고요? 지금 그 말을 나 보고 믿으란 거예요?”

“우연히 ‘지하낙원’이 존재한다는 소문을 접했으니까요. 저희도 이곳이 실존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반쯤은 도박이란 심정으로 스크롤들을 뜯었던 겁니다. 만일 이곳이 아니라 다른 지하 도시에 떨어졌다면 새끼용은 그냥 생계를 위해서나 팔아넘겼겠죠. 정말로 다행입니다.”

크라놀은 한 마디도 더듬지 않고 청산유수로 말했다.

그의 어투에서는 평상시 건조한 감성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로 겨우 목적지에 도달한 사람처럼 기뻐하고 있었으니까.

갈색 피부 소년은 살짝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요. 일단은 알겠어요. 하지만 순전히 그 말만 믿고 외부인들을 신뢰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 우리가 사는 거주 구역으로 가서 확실히 조사를 받도록 해요. 아, 참고로 제 이름은 위샤예요. 이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노예예요.”

이 위샤라는 소년은 앞장서서 이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니벨은 눈살을 찌푸린 채 속삭였다.

“야, 도시라니? 여기는 용의 레어라며?”

“둘 다 맞는 소리다.”

“뭐?”

크라놀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여긴 용한테 잡혀 온 노예들이 건설한 지하 도시니까.”

* * *

이 드넓은 둥지에 꾸려진 지하 도시는 말도 못 하게 생기가 흘러넘쳤다.

바위로 깎아 만든 도로가 길게 이어졌고, 줄지은 발광석은 별빛처럼 도시를 감싸 안았다.

수천 년간 형성된 석주가 천장을 떠받쳤으며, 석조 건물 곳곳에 야광 이끼들이 피어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복장과 활기였다.

지상에선 흔한 빈민층도 보이질 않고, 다들 화려하고 곱디고운 옷들을 입고 있었다.

여러 인종이 섞여 있는 그들은 자연스럽게 섞이고 어울리며 웃음소리를 내뿜었다.

“크랴아앙!”

“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화려하고 멋진 도시예요! 설마 그런 무서운 공동 너머에 이렇게 아름다운 거주 구역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토실이와 오동이는 둘 다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그야 추레하고 끔찍할 거라고 여겼던 지하 도시와는 완전히 상반된 풍경이었으니까.

그러나 생생하고 온건한 분위기와 달리,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구석도 있었다.

이곳 시민들은 하나같이 굵은 금속 고리를 목에 차고 있었으니까.

니벨이 위샤에게 물었다.

“그러면 여기가 용에게 잡혀 온 노예들이 건설한 도시란 말인가요?”

“네, 맞아요. 저희는 모두 지상에서 노예로 일하거나 핍박당하던 천민들이었거든요. 하지만 우릴 이곳에 납치해 주신 주인님 덕에 은혜를 입었죠.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일상에 만족하면서 살아요. 이곳에서 저희는 신분의 격차도 없고, 지상에선 없던 인권도 받았거든요.”

지하낙원.

그것이 이 지하 도시의 이름이었다.

용의 레어에 건설된 이곳은, 사실상 지상의 중소도시와 비슷한 규모였다.

시장터에선 지상에서 구해 온 물품을 팔기도 했고, 용암 열기에 구운 고기를 내놓기도 했다.

금속 고리를 찬 아이들은 뛰어다니면서 서로 신분 격차도 없이 어울리고 놀았다.

정말로 부족한 것 없이 행복해 보이는 일상 그 자체.

그러나 니벨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하지만 좀 이상한데요? 아까 우리가 봤던 그 처형장엔 해골이 꽤 많던데요. 정말 다들 행복한 게 맞나요? 그런 것치고는 너무 많은 사람이 처형당했던 것 같던데.”

“그 넘치는 해골들은 탐욕스러운 노예들의 말로예요. 왜냐하면 주인님의 보물을 탐냈거든요.”

“보물이요?”

“네. 이곳은 저희의 거주 지역이지만, 주인님의 레어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엄청난 보물들이 쌓여 있어요. 우리 노예들은 주인님을 위해 레어를 보강하거나, 사냥해 공헌도를 쌓아 올리죠. 그걸 쓰면 보물들을 빌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멋대로 강탈하는 것은 절대 허락되지 않아요.”

위샤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흉악범에게 사형은 마땅한 처벌이에요. 그 해골들은 이 지하낙원을 위한 밑거름인 셈이죠.”

이 소년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지상보다 훨씬 살기 좋은 복지를 지닌 주거 지역이었다.

물론 자기도 처음 용한테 잡혀 왔을 땐 너무 무서워서 어떻게 탈출할지만 궁리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모두가 평등하게 취급받았고, 누구나 좋은 옷과 여가 시간, 숙식을 보장받았다.

지상에서 핍박받고 차별당했던 이들에게, 이곳은 말 그대로 낙원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번에도 또 ‘해방군’이 레어 외곽으로 쳐들어오고 있답니다!”

“허, 그 빌어먹을 새끼들. 질리지도 않고 또 왔단 말인가?”

“이번에는 좀 더 본격적으로 방어대를 구성하자고. 놈들 움직임이 어째 심상찮아.”

“하필 주인님께서 몸 상태가 안 좋을 때를 노리다니. 하여간 흉악한 외부 놈들 같으니라고.”

저편에서 진지하게 떠드는 적잖은 노예들.

니벨이 이상해하면서 물었다.

“분위기가 좀 심각해 보이는데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아, 이따금 노예들을 구출하겠다면서 해방군이 이 레어를 급습하러 올 때가 있어요. 이럴 때면 우리가 이 낙원을 몸 바쳐서 지키죠. 계속 주인님의 밑에서 노예로 살아가기 위해서.”

그녀가 진심으로 황당해했다.

“아니, 자유를 얻지 않기 위해서 싸운다고요?”

“네. 다들 진심으로 용의 노예로 사는 것이 행복하거든요. 우릴 한심하게 보는 시선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는 어차피 과거에 지상에서도 노예였어요. 이 레어에서 해방되더라도 행복한 결말은 없어요. 결국은 또다시 우리가 그토록 벗어나려 했던 하층민 생활로 돌아갈 테니까.”

니벨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용의 노예로 살아가기 위해서 해방을 거부하고 싸운다니.

참 기괴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어이없어하며 속삭였다.

“그 꼬마 폭룡한테서 들었던 얘기랑 지나칠 정도로 다른데? 여기 용은 꽤 좋은 주인인가 봐.”

“난폭하다고 해서 현명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지. 자기 노예들을 챙기는 것도 능력이니까.”

한편 위샤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사실 자유로운 평민이어도 별다를 게 없잖아요? 애써 취업해도 사실상 돈 버는 노예나 다름없어요. 그럴 거면 강력하고 위대한 상위종을 주인님으로 모시는 게 훨씬 더 낫다구요. 오히려 해방군 격퇴는, 우리의 자유 의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원하는 주인을 선택하겠다는.”

이 소년은 나이답지 않게 세상을 보는 관점이 신랄했다.

어쨌든 노예들은 자기 주인에게 굉장히 만족하는 듯했다.

크라놀은 새롭게 도착한 지하 도시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제대로 왔군.’

그는 용의 레어에 떨어졌을 때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올바른 목적지에 도달한 셈이었으니까.

용의 레어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노예들의 지하 도시.

바로 이곳에 크라놀이 찾고 있는 두 번째 기적이 있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난폭한 용의 보물부터 노려야 한다.

“주인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얼른 이 새끼용을 바쳐서 드높은 공헌도를 쌓고 싶습니다.”

“크랴아아앙!”

34화 친누나

* * *

눈물이 그렁그렁한 토실이가 크라놀의 옷자락을 콱 깨물었다.

이 착한 것은 제아무리 화가 나도 그의 살결을 물진 않았다.

오동이가 아이의 작은 등을 두드려주며 몰래 속삭였다.

“토실아! 아저씨도 다 생각이 있을 거예요! 이렇게 거짓말이라도 내뱉지 않으면 우리는 이 지하에서 금세 처형당하고 말 거예요! 모두가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어요!”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이 주변에서 금속 고리를 차고 있지 않은 것은 크라놀 일행이 유일했다.

만일 새끼용을 바치러 왔다는 명분이 아니었다면, 진작 처형장의 해골 중 하나가 되었으리라.

“아저씨랑 나만 믿어요! 절대로 난폭한 용이 토실이를 해칠 수 없도록 지켜줄게요!”

“크량. 크랴앙.”

결국 토실이는 눈물을 꾹 참으며 의젓하게 대가리를 끄덕였다.

그 광경을 본 니벨은 크라놀의 어깨를 쿡 찔렀다.

“저 착한 애들 보고 배우는 것 좀 없어?”

“지금은 이 레어의 주인을 만나는 게 더 중요하다. 다들 무사하기 위해서라도.”

크라놀은 새로운 노예로서 토실이를 바치기로 했다.

이 레어의 주인은 지하낙원 건너편에 서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걸을수록 다른 노예들의 시선이 이들에게 따라붙었다.

“어, 저것들 좀 봐. 금속 고리가 없네? 이번에 새로 잡혀 온 노예들인가?”

“아니. 그보다 뭐야, 저거? 새끼용 아니야?”

“그러게? 저 비늘 좀 봐. 주인님보다는 훨씬 색은 밝지만, 결이 좀 비슷한데? 날개도 있어.”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지하에서 처음 보는 생명체가 어디 한둘이야? 그냥 토실토실한 돌연변이 왕도마뱀 하나 주워 온 거겠지.”

토실이는 걸어 다닐 때마다 노예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용을 신처럼 모시는 이곳에서는 존재 자체로 시선을 끌었으니까.

주목받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 토실이는 크라놀 곁에만 꼭 달라붙었다.

니벨은 그런 새끼용의 태도가 의아했다.

“아까는 싫어한다는 듯이 깨물어놓고는 지금은 또 먼저 달라붙네? 왜 그러는 거야?”

“크량! 크랴아앙!”

“토실이는 아저씨가 아무리 미워도 손절할 수는 없대요! 진짜 가족은 그런 거래요!”

그 말을 증명하듯 토실이는 그의 긴 다리에 친딸처럼 매달렸다.

크라놀은 진지하게 아이를 쓰다듬어줬다.

“놔라. 발톱 때문에 다리 아프다.”

“크랴아아앙?!”

도시의 건너편은 대형 석굴과 이어져 있었다.

위샤가 그 앞에 있는 자줏빛 석조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서 조사를 받고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원래 우리 주인님은 아무나 만나주지 않지만, 막대한 공물을 바치러 온 인간만큼은 특별하게 면담을 허용해 줘요. 부디 행운을 빌어요.”

위샤가 손을 흔들어서 작별 인사를 해줬다.

크라놀 일행은 조사를 받고, 다들 목에 금속 고리를 찼다.

그리고 성채들보다도 크고 웅장한 석굴로 입장했다.

“세상에! 이 굴은 정말 크네요!”

오동이가 그렇게 말하자, 석굴에 메아리가 쳤다.

세상에! 이 굴은 정말 크네요!

세상에! 이 굴은 정말 크네요!

세상에! 이 굴은 정말 크네요……!

“우와! 이게 뭐예요? 내 목소리가 여러 번 들려요! 더 해봐야지!”

그걸 신기해한 오동이가 또 여러 번 소리치려고 할 때였다.

석굴 저편으로부터 무지막지하게 우람한 그림자가 움직였다.

“아.”

일행은 엄청난 위용에 얼어붙고 말았다.

꼬리를 틀고 앉아 있는 덩치 큰 흑룡.

그는 저 용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아히일란느.’

지하왕의 핏줄이자, 지하 세계의 권력자.

크라놀은 이 지하낙원의 주인을 대면했다.

압도적인 존재감의 흑룡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아가리를 열었다.

“너흰 좆같다. 내 남동생 냄새가 나는군.”

“…….”

그것은 지나치게 친누나다운 발언이었다.

* * *

본래 폭룡은 성인식 이후에나 자기 이름을 짓는다.

그러나 그것은 마경에서 살아가는 용들에게만 한정한 것이었다.

그 이외의 지역에서 서식하는 개체들은 스스로 이름을 짓기도 했다.

‘아히일란느도 그런 경우지. 아주 어릴 때 잡종이라고 천대받으며 마경에서 쫓겨난 용이니까.’

지하왕의 사생아.

검은색 꼬마 폭룡과 달리, 그녀는 순수한 폭룡의 혈통이 아니었다.

모든 폭룡들이 잡룡이라며 비웃던, 작고 병약한 혼혈 용의 피가 섞여 버렸으니까.

인간으로 따지자면 첩의 자식이라서 후계 싸움에 밀려나 변방으로 쫓겨난 셈이었다.

‘하지만 결코, 만만한 생물체는 아니지. 쫓겨났는데도 이런 자기만의 낙원을 이뤄냈으니까.’

아히일란느는 낙오된 지하에서조차 자신만의 본거지를 설립했다.

기본 성미가 잔혹하나, 결코 제 노예를 의미 없이 해치는 일은 없었다.

단순히 그녀가 착해서는 아니었고 효율성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인간 노예들은 일도 잘하고, 조금만 대접해 줘도 쉽게 감격하니까.’

아히일란느는 그러한 인간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잘 이해했다.

그래서 일부러 오직 노예들만을 납치해 자기 레어를 발전시킨 것이다.

오만하고 탐욕스럽기만 한 일부 몰지각한 용들과는 격이 달랐다.

눈앞의 흑룡은 자기 사업체를 굴릴 줄 아는 영민한 기업 총수였다.

그러한 이 레어의 주인이 일행을 내려다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보물 내놔.”

“세상에! 어쩌면 좋아요! 우리 귀여운 돌돌이를 뺏어갈 작정인가 봐요!”

오동이가 경악하며 벌벌 떨었다.

아이는 조그만 골렘을 어떻게든 지키겠다는 듯이 품에 꼭 안았다.

그러자 아히일란느가 하찮다는 눈초리로 지적했다.

“쓰레기를 수거하는 봉사 정신은 없다. 보물 내놔.”

“히야아아! 너무해요! 돌돌이는 쓰레기가 아니에요!”

반면 크라놀은 침착하게 흑룡의 생김새를 살피고 있었다.

언뜻 보면 검은색 꼬마 폭룡과 굉장히 닮아 있었다.

하지만 군데군데 연녹색 비늘이 섞여 있어서 조금은 다른 외견.

‘아직 성체가 아니란 것이 믿기지 않는 덩치군. 여기서 한 번 더 진화하면 얼마나 더 커질지.’

아히일란느는 점잖은 어투와 달리 인간으로 따지면 열일곱 살쯤 되었다.

그런데도 이 큰 석굴을 거의 다 채우고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거구였다.

확실히 지하왕의 핏줄은 어디 가질 않는지, 참으로 강력한 위용이었다.

크라놀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 둥지에 오게 된 것은, 당신이 꾸민 일입니까?”

“배다른 남동생이 쓸데없는 외부인들을 지하 세계로 불러오고 있더군. 그걸 두고만 볼 순 없었지. 그러니, 토굴을 이곳에 잇게 하고 돌아갈 수 없도록 무너뜨렸다. 어쨌든, 보물 내놔.”

“죄송합니다. 지금 저희에게는 그만큼 가치 있는 보물이 없습니다.”

아히일란느는 곧장 큰 발톱을 들어 누군가를 가리켰다.

바로 토실이였다.

“말을 돌리는군. 그 새끼용을 바치러 온 것이 아닌가. 그 몸속에 든 보주는 쓸 만해 보이는데.”

재생 보주.

그것은 흑금룡이 보유한 여러 보주 중 하나였다.

당연히 모든 용이 엄청나게 탐내고 있는 보물.

그러나 크라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재생 보주 말고 다른 보물을 드리겠습니다.”

“왜 갑자기 말을 바꾸는 거지? 너희에게 저 새끼용 이외에는 볼일이 없다. 내가 지금 너희를 해치지 않는 것은 이 둥지에 쓸데없는 피를 묻히기가 귀찮기 때문이다.”

“이 새끼용보다도 더 굉장한 보물을 바칠 생각이니까요. 그러니 주인님께서는 이 아이는 살려두는 것이 이득입니다. 제가 더 많은 보물을 제공해 드리기 위해서 필요한 녀석이니까요.”

아히일란느의 큰 동공에 아주 살짝 관심이 깃들었다.

“도대체 그게 뭐지? 더 굉장한 보물이 있다고?”

“제가 주인님께 만들어드릴 보물은 ‘술’입니다.”

곧바로 그녀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술이라고? 고작 그딴 게 보물이란 말인가?”

“예. 지하왕 폐하께서 사족을 못 쓰시는 와인입니다. 당신 아버님께서는 지독한 주당이자, 애주가이시죠. 어쩌면 주인님께서 마경에서 쫓겨났던 흑역사를 청산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아히일란느가 처음으로 오래도록 침묵했다.

그러더니 살짝 격앙된 목소리를 냈다.

“네놈이 내 지우고 싶은 과거를 어떻게 알지?”

“저는 주인님의 배다른 남동생과 친밀합니다. 그게 답이 될지요.”

“역시 모든 남동생은 쳐 죽여야 한다! 그것이 옳아!”

압도적인 포효에 석굴이 쩌렁쩌렁 울렸다.

토실이가 내뱉었던 드래곤 피어보다도 훨씬 강력했다.

“큭!”

광증 발작이 벌어진 크라놀은 다급하게 약초를 입에 쑤셔 넣었다.

간신히 격통을 견뎌내고, 거친 숨을 몰아쉰 뒤에야 다시 대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다 떠나서 네 말은 개소리다! 아직 이 지하에는 진귀한 술을 만들 만한 재료가 전혀 없다. 지상에서 수입해 오더라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거야 대체해서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제게는 그런 재주가 있어서요.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맡겨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아히일란느는 큰 발톱으로 석굴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그 모습이 마치 전설 속의 용보다는, 자기 손익을 계산하는 사업가 같았다.

그러더니 곧 대가리를 끄덕였다.

“그러면 한번 해봐라.”

“그러면 괜찮은 식재료들이 필요합니다. 혹시 이 레어에서 내어주실 수 있으신지요?”

“귀찮군. 왼쪽 세 번째 샛길로 가면 식재료 창고가 나온다. 재료 너무 많이 쓰지 마라.”

아히일란느는 똬리를 튼 꼬리에 대가리를 파묻었다.

“난 인내심이 없다. 딱 반나절 주겠다. 만약 어설픈 술을 양조한다면 너희 모두를 안주 삼아서 잡아먹겠다. 물론 도망치려고 해도 소용없다. 그 금속 고리가 조여져 목이 으깨질 테니까.”

반나절의 여유 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 안에 용도 감동할 만한 명주를 만들어야만 했으니까.

니벨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야? 네가 그런 대단한 술을 만들 수 있다고? 숙성까지 하려면 오래 걸릴 텐데?”

“괜찮다. 다 방법이 있으니까.”

“크랴앙!”

역시 믿고 있었다며 토실이가 크라놀한테 매달렸다.

한편 오동이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치였다.

“그런 대단한 술이라니! 나도 궁금해요! 한번 마셔보고 싶어요!”

“다 크면 마셔라.”

크라놀은 어린것의 호기심을 단칼에 차단하고, 식자재 창고로 갔다.

식재료 창고는 레어라는 장소에 어울리게 각기 지하 생물들의 고기가 쌓여 있었다.

냉장 보존 마법이 걸려 있는지 강렬한 피 냄새와 혼합된 찬 공기가 느껴졌다.

엄청난 규모의 식재료 창고는 그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수준이었다.

그러나 토실이는 이곳저곳을 바라보며 군침을 흘렸다.

“크량! 크랴아앙!”

“으아! 되게 신기해요! 꼭 커다란 정육점 같네요!”

크라놀은 찬찬히 식재료들을 살폈다.

개중에선 매머드와 비슷하거나 커다란 늑대 같은 맹수들의 대형 마수 고기가 널려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주목한 것은, 개중에서도 눈에 띄게 흉악하고 포악한 마수의 신체 부위였다.

[명칭: 히드라의 여섯 번째 머리통]

[등급: 유니크(―)]

[성능: 지하 세계를 포악하게 점령하려고 들었던 히드라의 머리통. 아직 완전히 성체로 자라나진 못했지만, 그 흉포함은 지하 세계 주민들을 공포로 떨게 했다. 생전 과실주의자였기에, 피에서 미묘한 과일 향이 우러나온다. 잘 찌거나 물약을 제조하면 대단한 효능을 빚어내리라.]

[특이점: 냉장 보관된 지 너무 오래되어서, 막 잘렸을 때보다는 섭취 효과가 미진하다.]

유니크 등급의 식재료.

부패하진 않았으나, 오래 보관된 탓에 등급 판정에 ‘마이너스’가 붙었다.

이러면 효력이나 성능이 한 단계 이상 떨어졌지만, 이만하면 충분했다.

“이게 딱 좋겠군.”

“뭐? 너, 미쳤어? 이런 괴물 대가리로 술을 빚겠다고?”

니벨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하기야 저 반응이 당연했다.

갑작스레 마수 대가리로 술을 빚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양조에는 적절한 숙성이 필요했고, 그 외에도 다양한 준비물도 필수였다.

그러니 지금 당장 술을 만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내 손에 있지. 그런 놀라운 기적이.’

크라놀은 무지갯빛 조약돌을 꺼냈다.

바로 이전번에 얻었던 기적, 현자의 돌이었다.

이것을 쓰면 대가를 내고 연금술 스킬을 빌려올 수 있었다.

[현자의 돌로 연금술 스킬을 대여합니다.]

[종합 전투력에 따라 스킬 레벨이 결정됩니다.]

[대연금술사의 코트 덕에 스킬 레벨이 한 단계 오릅니다.]

대연금술사의 코트의 효과.

덕분에 지금 상황에 맞는 스킬을 가져올 수 있었다.

크라놀이 대여하기로 한 연금술은 다른 게 아니었다.

[‘초고속 포션 제조(Lv3)’를 빌려왔습니다.]

[너무 질이 낮은 스킬이라서 아무런 대가가 없습니다.]

[상위 연금술을 빌릴수록 드높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뜻밖에도 기적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스킬을 대여해줬다.

현자의 돌은 세상천지의 다양한 연금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이 콧대 높은 돌의 눈에는 ‘상위’의 기준이 꽤 높았다.

‘괜히 기적이 아니군. 덕분에 꿀 좀 빨겠어.’

대가 없이 스킬을 빌렸으니 기뻐할 일이었다.

크라놀은 머릿속에 새로운 지식이 들어온 것이 느껴졌다.

“토실아. 오동아. 날 도와라.”

“크랴아앙!”

“네, 아저씨!”

“니벨, 너도 히드라의 비늘을 잘라내라. 아이들이 분해할 수 있게.”

“……정말 우리 살아남을 수 있는 거 맞지? 내가 어쩌다가 이런 일까지 하게 된 건지.”

니벨은 한숨부터 내쉬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결국 일손을 돕게 되었다.

크라놀은 아공간 창고로부터, 대도시에서 샀던 여러 가지 연금술 도구를 꺼냈다.

커다란 철 솥에 아이들이 곱게 잘라준 히드라의 대가리를 넣어서 잘 끓였다.

그러고는 한 플라스크 병을 토실이한테 가져갔다.

“토실아. 여기다가 네 숨결을 내뱉어라.”

“크랴아앙!”

병은 새하얀 신성력의 불길을 견디지 못하고 깨졌다.

크라놀은 그 깨진 유리들을 한데 모아서 솥에다가 집어넣었다.

그 모습에 니벨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 정말 제대로 만드는 거 맞아? 뭔 먹는 거에 유리까지 집어넣어?”

“불안해할 필요 없다. 일반적인 제조법으로는 용을 만족시킬 수 없으니까.”

크라놀은 커다란 철 솥을 여섯 시간이나 펄펄 끓였다.

아이들이 꾸벅꾸벅 졸 때도 절대로 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곤 마침내 한데 담아 정성스럽게 물약을 만들어냈다.

[처참하게 실패했습니다!]

[수준급 재료에 비해, 비웃음이 터지는 실패작입니다.]

[완성된 액체가 ‘포션의 본질’에서 완벽히 벗어납니다.]

35화 보물 석굴

* * *

“이게 뭐야! 잔뜩 개고생만 하고 결국 실패했잖아!”

절망한 니벨이 따졌지만, 크라놀은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다. 일부러 의도한 거니까.”

실패한 포션은 그야말로 생피처럼 새빨갰다.

크라놀은 그것을 플라스크에 담아 내어줬다.

“마셔봐라.”

“……너나 먹어. 유리 조각도 넣었으면서.”

“난 도수가 약한 술만 먹어도 코피 흘리고 발작한다.”

“술 약한 게 자랑이다. 그러면 잠깐 혀만 담가볼 거야.”

니벨은 꺼리면서 그 벌건 액체에 혀끝만 살짝 담갔다.

“어? 뭐야!”

반신반의하던 그녀의 눈이 확 커졌다.

생각보다 향과 맛이 너무나도 훌륭했으니까.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내어준 술을 전부 들이켰다.

다행히 유리 파편 같은 잔여물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지나치게 품질 좋은 과실주의 향취가 났다.

“마, 말도 안 돼! 마수 대가리를 넣고 끓였는데, 이렇게나 좋은 풍미가 느껴진다고?”

“실패했다고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건 아니지. 포션은 아니어도, 명주(銘酒)는 될 수 있으니까.”

포션으로서의 효력은 전혀 없지만, 엄청난 중독성과 풍미를 지닌 명주.

오히려 제대로 실패하기 위해서 연금술 스킬을 빌려온 것이었다.

가치 있는 실패작에는 그만큼 탄탄한 기본기가 필요했으니까.

“크랴아앙. 크량!”

“흐아암! 이게 무슨 향기예요? 아주 달콤한 냄새가 나요!”

오죽하면 졸던 아이들이 향기에 이끌려 잠이 깰 정도였다.

마침내 크라놀은 ‘히드라 주’를 완성했다.

그것을 빈 오크통에 가득히 담아서 용한테 가져갔다.

“흐음.”

아히일란느는 앉은 채로 그 적색 술의 향을 맡고 한 모금 마셨다.

사실상 단 한 입에 술 한 통을 비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스읍.”

그러나 한 모금을 바로 삼키지는 않았다.

입에서 굴리기도 하고, 음미하기도 했다.

이윽고.

“퉤.”

뜻밖에도 갑자기 전부 내뱉었다.

“어, 어떡해요! 입맛에 잘 안 맞나 봐요!”

깜짝 놀란 오동이가 불안해했다.

아히일란느는 술을 마셨던 혀를 날름거렸다.

석굴에 흐르는 지하수로 아가리를 깔끔히 헹궜다.

그러더니 이윽고 빤히 크라놀을 바라봤다.

“괜찮은 술이로군. 이 비슷한 걸 더 만들 수 있나?”

“물론입니다. 다만 새끼용은 곁에 있어야 합니다. 이미 맛에서도 느끼셨을 거라 생각하지만, 이 아이의 신성력이 담긴 숨결이 주재료입니다.”

“재생 보주는 탐나는 물건이야. 하지만 내 아버지와 재회했을 때 올릴 만한 명주라니. 이건 고민해볼 만하군.”

그녀는 가만히 사업 가치를 계산했다.

한참을 말이 없다가 판단이 내려졌다.

“난 가치 있는 내 노예는 죽이지 않는다. 이 레어의 주인으로서, 너희가 앞으로 편히 일하고 숙식할 수 있는 곳을 제공하겠다. 그 대가로 매주 한 병씩, 향기로운 술들을 빚어서 바쳐라.”

[아히일란느가 당신들을 새로운 노예로서 거둬들입니다.]

[공헌도 500포인트가 적립됐습니다.]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저찌 용에게 먹히는 신세는 면할 수 있었다.

놀란 오동이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심장이 철렁했어요! 그런데 술이 맛 좋다고 느낀 것 같은데, 왜 전부 뱉었을까요?”

“글쎄, 저 용도 크라놀처럼 술이 약한 게 아닐까? 용이라고 다 주당인 건 아닐 테니까.”

니벨도 추측만 제기할 뿐이었다.

사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현재 아히일란느는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어쨌거나 생각보다 무난하게 풀리는군. 이대로만 가면 된다.’

처음부터 크라놀은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가족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그녀에겐 가장 큰 이득이니까.

어쨌든 명주를 바치고 공헌도를 획득했다.

이제는 용의 보물을 가지러 갈 순간이었다.

“어? 새끼용 안 넘겨줬어요?”

그런데 근처에서 노닥거리던 위샤가 다가왔다.

내심 이들이 살아서 돌아올지 궁금했던 모양.

“더 대단한 보물을 바쳐서 넘어갔습니다. 우리도 이제 이곳의 노예로서 지내기로 했고요.”

“오, 다행히 잘 풀렸나 보네요. 가끔 잔꾀를 부리려다가 주인님한테 잡아먹히는 사람들도 많던데. 어쨌든 다들 목에 찬 금속 고리가 잘 어울려요. 지하낙원의 일원이 된 걸 환영합니다! 안내가 필요하다면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이 친절한 소년은 도우미 역할을 자처해 줬다.

크라놀 일행은 레어에 있는 보물 구역으로 걸어갔다.

가장 처음 봤던 처형장과 유사한 구조였는데, 분위기는 영 딴판이었다.

“크랴앙! 크량!”

“와아……, 이쁘고 반짝이는 것들이 잔뜩 쌓여 있어요!”

보물 석굴에는 그야말로 번뜩이는 재물의 산이 널려 있었다.

막대한 양의 재화가 가득했고, 종종 빛나는 보석과 장비도 보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보물 창고와는 다른 특이점이 존재했다.

‘대부분 지하 세계 왕국 주화나, 이곳 전용 아이템들이군. 지상에선 구할 수 없는 것들이야.’

지하 세계에서만 발행된 화폐나 보석, 장비, 전리품 따위가 수없이 많았다.

몇몇은 지상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더욱 가치가 높았다.

반면 멸망한 지하 세계 왕국의 주화들은 정규 화폐로 쓸 수가 없었다.

이런 것들은 잘 녹여서 금속만 정제하는 것 외엔 용도가 없어 보였다.

‘어쨌든 오직 지하 세계에서만 볼 수 있는 보물들이 넘치는군. 역시 이곳에 오길 잘했어.’

이 보물들은 언뜻 방치된 듯 보이지만 용의 마법이 걸려 있다고 했다.

함부로 가지고 나가려고 했다가는 아히일란느의 저주를 받게 된다고.

“굉장한데? 이중 몇몇은 내가 평생 일해도 사지 못할 것 같아.”

니벨도 놀라워하며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위샤가 갑자기 그녀를 제지했다.

“아, 잠깐만요. 거기서부터는 출입 금지예요.”

이 보물 석굴은 깊숙이 갈수록 더 대단한 보물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가장 깊숙한 구역만큼은 누구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가장 깊숙한 구역에는 이 레어에서 가장 대단한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해요. 하지만 거긴 노예들에겐 허락되지 않았어요. 오직 주인님만이 들어갈 수 있거든요.”

니벨은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과연 이 레어에서 가장 훌륭한 보물이 뭘지 궁금했으니까.

그러나 지정된 구역만 걸어 다녀도 꽤 신기한 지하 보물들이 넘쳤다.

파멸된 리자드맨 왕정의 은화나 뭔지 모를 뼈 화석, 번뜩이는 순금 삽이나 곡괭이도 보였다.

“가치가 높은 보물일수록 공헌도를 많이 바쳐야 해요. 대출 기간을 지키지 않으면 처음 두 번은 경고성 저주, 세 번째에는 사형이 집행되죠.”

위샤는 자기 금속 고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무엇보다 이 금속 고리에는 주인님의 마법이 걸려 있어요. 만약 정해진 기간 안에 보물을 되돌려놓지 않고 이 레어 밖으로 도망가면, 처형당할 거예요.”

이곳에서의 공헌도는 노동량과 사냥 활약도, 바친 제물의 가치로 환산됐다.

그뿐만 아니라 이 도시에서 별개의 사치품을 구매할 때도 공헌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수많은 노예가 공헌도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었다.

위샤가 살짝 궁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아직 이름도 모르네요. 이제 같이 사는 식구니까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크라놀 위자르다.”

“그, 혹시 공헌도를 얼마나 받았는지 물어봐도 돼요?”

“500포인트 받았는데.”

500포인트가 얼마나 대단한 수치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깜짝 놀란 위샤의 두 눈이 곧장 휘둥그레졌으니까.

“우와! 500포인트요?! 미쳤다! 처음부터 이만한 공헌도를 쌓고 시작하는 노예는 이제까지 없었거든요! 나도 1년 넘게 이곳에서 살았지만, 겨우 70포인트밖에는 못 쌓았는데…….”

공헌도 500포인트는 상당한 수준이었고, 이것은 희소식이었다.

사실 용의 레어에 오면서부터 고르려 했던 보물이 있었으니까.

‘앞으로 내가 쓸 검부터 구해야겠군.’

예전부터 애용했던 독니검이 부서진 참이었다.

지금은 대충 사 온 값싼 철검을 쓰고 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광증 발작으로 마법적 힘을 더하면, 웬만한 칼은 부서져 버릴 테니까.

그러니 이번에는 아주 튼튼하고 좋은 검을 구해야만 했다.

화려하고 어여쁜 것을 좋아하는 오동이는 입을 헤벌쭉 벌렸다.

“아저씨, 아저씨! 난 저 황금 장식 드레스가 엄청 예뻐 보여요! 나, 저것 좀 사주면 안 돼요?”

“그건 안 된다. 어차피 사도 너한테 안 맞고.”

“히야아아……. 너무 아쉬워요!”

크라놀은 보물 석굴을 둘러보았다.

이곳 지하 세계에는 별의별 검들이 널려 있었다.

석화 마법을 부여하거나 흙을 원격으로 다루는 마법검들도 보였다.

그러나 크라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수수한 석검이었다.

[명칭: 끔찍하게 단단한 암석검]

[등급: ★]

[성능: 민간인을 학살했던 고대 골렘의 파편을 개조한 무기. 아직 세간에 밝혀지지 않은 암석으로 이뤄져 있으며, 상당히 무겁다. 그다지 날카롭지 않아서 베는 것보다는 둔기처럼 두들겨 패는 용도로 더 적합하다. 코끼리가 밟아도 부서지지 않는 압도적인 내구도를 자랑한다.]

[특이점: 검신에 보석을 박아 넣으면 특별한 성능이 부여된다. 총 세 개까지 박을 수 있다.]

‘이게 괜찮겠군. 광증 발작할 때 함부로 깨질 걱정도 없겠고.’

간만에 별이 붙은 새 아이템을 얻었다.

일반적인 물품들과 달리 수호성이 굽어살피는 귀중품.

보물은 석굴 밖으로 가져갈 순 없었지만, 한 번 들어볼 순 있었다.

[현재 힘으로는 활용하기 버거운 무기입니다.]

[개미 외피 투구(★)가 발동합니다.]

[근력이 50% 증가했습니다.]

크라놀이 착용하고 있는 1성급 투구.

무거운 물체를 들 때 근력을 보강해 줬다.

‘딱 좋군.’

칼을 쥐어본 크라놀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헌도를 써서 이 보물을 구매하겠다.”

“어, 별 한두 개 등급의 보물이라면 구매도 가능하기는 해요. 하지만 대여할 때보다 공헌도를 훨씬 많이 바쳐야만 하는데. 괜찮겠어요?”

“그래.”

크라놀은 200포인트나 써서 암석검을 구매했다.

그러고는 곧장 주위에 있는 다른 보물을 찾았다.

새빨갛고 반짝이는 보석이었다.

[명칭: 불의 루비]

[등급: ★★]

[성능: 용암 강 근처에서 어느 만취한 드워프가 캐낸 보석. 숙련된 대장장이의 솜씨로 세공되어 강력한 화염의 힘을 지녔다. 자칫 잘못 다루다가는 사용자마저 활활 불타버릴 수도 있다.]

[특이점: 화염의 정령들에게 선물하면 사족을 못 쓰고 좋아하리라.]

크라놀은 그것도 300포인트나 주고 구매했다.

이제는 모든 공헌도를 모조리 써버린 상황.

방금 샀던 석검의 파인 홈에 루비를 박아 넣었다.

[암석검의 홈에 루비를 장착했습니다.]

[해당 장비의 등급이 3성(★★★)으로 올랐습니다!.]

[무기 공격력이 300% 증가했습니다.]

[착용 시, 전용 스킬 ‘불구덩이’를 쓸 수 있게 됐습니다.]

“와, 뭐예요?! 이런 식으로도 보물을 가져갈 수도 있구나! 나도 이런 건 몰랐는데!”

위샤가 입을 떡 벌리며 감탄했다.

저급 보물끼리 합성하니 3성짜리 무기가 탄생했다.

말했다시피 3성급 보물부터는 오직 대여만이 가능했다.

하지만 크라놀은 수칙을 어기지도 않고 가장 가성비 좋은 보물을 영구 획득했다.

이제 새로운 검을 장만한 크라놀은 다음 목표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있는 수천 명의 노예 중에서도 가장 드높은 공헌도를 쌓아야 한다. 그것이 두 번째 기적에 접근하는 가장 빠른 길이니까.’

그러나 순전히 공헌도를 내고, 보물을 빌리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런 순진무구하고 정직한 방식은 크라놀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애당초 빌릴 바엔 훔치는 게 낫고, 노예로 복종하는 것보단 뒤통수 때리는 것이 당겼다.

‘공헌도를 최대한 많이 쌓아 용과 신뢰 관계를 이뤄야 한다. 그래야 배신하기 쉬우니까.’

지하낙원의 주인, 아히일란느.

괜히 노예로 들어와서 주인님 취급해 주는 것이 아니었다.

크라놀은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최단 루트만 노리고 있었다.

‘석굴 가장 안쪽에 보관되어 있는 최고의 보물. 그게 내가 가져야 할 두 번째 기적이니까.’

이제는 제일 큰 공헌도를 쌓기 위해 사냥해야만 했다.

처음으로 얻은 3성급 무기의 힘을 맛볼 시간이었다.

과연 광증 발작까지 더하면 얼마만큼 학살을 벌일 수 있을지 기대됐다.

36화 재등장

* * *

“크랴아앙……!”

“흐아암! 구경하다 보니까 이젠 너무 졸려요……!”

토실이와 오동이가 앙증맞은 입을 쩍 벌리며 하품했다.

크라놀은 어린것들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 사냥까지 하러 가기에는 일이 너무 많았군.’

술까지 빚느라고 반나절이 넘도록 쉬지를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은 계속 졸린 눈이었다.

크라놀을 뒤따라오면서도 고개를 꾸벅꾸벅 숙여댔으니까.

“오늘은 이만하고 쉬지. 내일도 할 일이 있으니까.”

“그러면 숙소로 안내해 줄게요. 새로운 노예들한테는 서쪽 휴식처가 배정돼요.”

크라놀 일행은 지하낙원의 어느 한 건물의 실내로 안내받았다.

그곳엔 각종 생활용품부터 돌침대까지 있을 것은 다 있었다.

무엇보다 놀랍게도 특이한 것은 기이한 하인들의 존재였다.

“킥! 키이익!”

바로 아히일란느의 용아병들이었다.

무시무시했던 흑금룡의 용아병에 비하면 훨씬 열등한 난쟁이 스켈레톤들.

그러나 이 쪼끄만 해골들은 하나같이 집안일에 능했고 지하수로 목욕물까지 받아줬다.

알아서 하인들이 잡일을 다 해주니, 니벨은 간만에 세상 안락한 기분을 느꼈다.

“왜 이 레어가 낙원이라고 그랬는지 알겠네. 나도 이렇게 편한데, 노예들은 어떻겠어?”

이들이 배정받은 휴식처는 두 개의 방이었다.

크라놀과 니벨은 각자 배정받은 방에 들어가서 쉬기로 했다.

이곳은 해가 저물 시간이 되니 알아서 발광석들이 꺼졌다.

지하낙원에도 어둠이 찾아들었다.

“이제 너희도 돌아가서 쉬어라.”

크라놀이 쉬기 위해 휴식처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아이들이 별안간 그를 붙잡고선 떼를 썼다.

“크량! 크랴아앙!”

“아공간 쉼터로 돌아가긴 싫어요! 거긴 외롭고 침대도 없단 말이에요! 아저씨랑 같이 잘래요!”

“어째 그 쉼터는 잘 두고도 정작 별로 쓰는 일이 없군.”

하는 수 없었다.

이 어린것들은 크라놀과 늘 함께 있고 싶어 했다.

둘 다 어찌나 피곤했는지 지하수로 씻자마자 금세 잠들었다.

반면 불면증이 있어 쉬이 잠들지 못하는 그는 어린것들에게 이불을 덮어줬다.

“후우.”

크라놀은 욕실에 들어가서 옷을 벗었다.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반신욕을 즐겼다.

푹 잠들지는 못해도, 그나마 피로가 풀렸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발광석들이 다시금 켜졌다.

아침 시간이 되면 마력 공급이 들어온다고 했다.

“크랴아아앙!”

“흐아아암! 푹 잤더니 아주 상쾌해요!”

두 어린것이 기지개를 켰다.

“키익! 키이익!”

땅딸막한 용아병들은 앞치마를 하고선 아침 식사를 차려줬다.

식용 버섯과 이끼를 넣고 조리한 수프였는데, 맛이 썩 괜찮았다.

크라놀은 코트를 챙겨 입으며 검을 들었다.

“가자. 오늘도 할 일이 많다.”

“잘 쉬고 배가 부르니 힘이 나요! 오늘은 뭘 해야 하는데요?”

“술 재료를 구하러 갈 거다.”

“흐잉? 니벨 언니한테서 술은 과일로 만든다고 들었어요! 이런 지하에도 과일이 열려요?”

“지하 세계에도 햇빛 없이 자라는 과일나무들이 있긴 하지. 하지만 너무 넓은 범위에 분포되어 있어서, 필요한 만큼 채집하려면 한세월이 걸린다. 그러니, 과실주의 마수들을 사냥하러 갈 거다.”

과실주의는 오롯이 새콤달콤한 과일만 먹는 것을 일컬었다.

당연히 인간은 체질상 불가하고, 요정이나 엘프들에게서 발견되는 식습관.

그러나 이따금 드물게도 특정한 마수들이 과실주의를 실천하는 일도 있었다.

‘먼젓번의 히드라처럼 과실주의 마수들로 술을 담가 바치면, 높은 공헌도를 얻을 수 있겠지.’

바야흐로 노가다를 반복할 시간이었다.

매주 술을 한 통씩 담그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으니까.

건물을 나서니 이미 준비를 끝마친 니벨이 서 있었다.

“안 도망쳤군.”

“도망갈 방법은 있고?”

니벨은 목에 찬 족쇄를 두드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나도 석굴의 보물들이 꽤 탐나더라고. 여기서 활약만 잘하면 한몫 단단히 챙기겠던데?”

“그래봤자 노예 신세라서 함부로 레어 밖으로 나가진 못할 텐데.”

“아니, 딱 보니까 알겠어. 넌 아무 생각도 없이 여기 올 녀석이 절대로 아닌 것 같거든. 분명 탈출할 방법도 마련해 놓은 거지? 그때 꼽사리 껴서 나도 같이 나가지, 뭐.”

태연히 말한 그녀가 자연스럽게 빗을 꺼냈다.

그러곤 오동이의 산발한 금발 머리칼을 곱게 빗겨줬다.

“히! 니벨 언니는 섬세해요! 우리 아저씨는 이런 건 잘 몰라서 안 해줬는데!”

“앞으로 뭐든지 열심히 도울게. 그래야 네가 탈출할 때 나까지 챙길 테니까.”

니벨은 눈치가 빨랐다.

역시나 조력자로 안성맞춤인 최면 검귀였다.

크라놀 일행은 공헌도 쌓기를 위해 사냥터로 향했다.

그런데 어제와는 다르게 지하낙원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활발한 웃음소리는커녕 불안한 웅성거림이 커져 있었으니까.

곳곳에서 노예들이 심각하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 소식 들었어? 어제 쳐들어온 해방군한테 우리 방어대 2군이 싹 털렸다더라고!”

“아니, 그게 말이 돼? 전투용 보물을 빌려 간 노예들까지 있었잖아? 그런데도 전멸당했다고?”

“허, 그러니까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고. 이제껏 무능한 해방군 녀석들이 그렇게까지 활약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잖아. 항상 레어를 쳐들어올 듯이 간만 보다가, 주인님이 나설 참이면 지상으로 도망치기나 일쑤였는데. 갑자기 대단한 지원군이라도 온 건가?”

“글쎄. 생존자가 없으니, 누군들 알겠냐고. 아, 탐색대가 특이한 흔적을 찾긴 했다더라. 전사자들 사이에 시가가 널려 있었대. 시체 곁에서 연초 태우는 망나니 놈이라도 있는 모양이야.”

문득.

크라놀은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어? 아저씨, 왜 그래요?”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등골이 오싹할 수밖에 없었다.

시체 곁에 다 태운 시가를 버렸다는 패턴이 익숙했으니까.

‘아니겠지. 설마, 아닐 거야.’

크라놀이 착각이라고 부정하며 외면하려고 할 때였다.

대뜸 웬 잔혹하게 죽은 노예 시신이 들것에 들려왔다.

“이것 좀 봐! 전장에서 가져온 거야! 혹시 이 시체를 살펴보면 뭔가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어젯밤, 해방군에게 당한 시체는 실로 참혹했다.

목에 달린 족쇄 빼고는 모든 부위가 상처투성이였다.

살점이 너덜거리고 피는 쭉 빠져서 창백한 미라 같았다.

오죽하면 다들 비위를 참기가 어렵다는 눈치였다.

“아니, 해방군한테 당한 것 맞아? 뭔 괴물한테 뜯어먹힌 게 아니고?”

“진짜라니까! 어젯밤에 싸움이 벌어졌던 전장에서 겨우 시체 하나만 빼 온 거라고!”

“잔인하게 당했다는 것까진 알겠어. 하지만 이것만 보고는 도통 상황을 추측하기가…….”

노예들이 시체의 흔적을 살피며 옥신각신 토론할 때였다.

크라놀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아.”

뭉개진 살결, 훼손된 상흔, 시가를 지진 몇몇 자국까지.

저 시체의 모든 것이 지나치게 익숙해서 소름이 끼쳤다.

이런 습관을 지닌 것은 원작에서 딱 한 명뿐이었다.

‘무한 빙의자의 오래된 사냥 버릇 중 하나.’

단순한 착각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하룻밤 만에 지하낙원 방어대를 터는 몰살 행위부터.

구태여 시가를 시체들 곁에다 버리는 개망나니 짓까지.

원작에서 항상 읽어왔던 주인공의 행적 그 자체였으니까.

‘빌어먹을.’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얼얼했다.

지금 원작 주인공이 지하 세계에 와 있다고?

그것으로 지금 알 수 있는 진실은 명료했다.

‘원작 주인공의 진행 속도가 원작보다 빨라졌다. 아직은 지하까지 올 시기가 아닌데.’

흑금룡이 일찍 깨어났다는 변수.

그 위기에 발 빠르게 대처하는 것은 크라놀만이 아니었다.

이 대륙에서 손꼽히는 강자 역시 자신처럼 미래를 대비하고 있었다.

원작 주인공이 해방군 편에 붙었다면 그 이유야 뻔했다.

‘본격적으로 아히일란느를 토벌하기 위해서겠지.’

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그것은 굉장히 곤란했다.

크라놀의 계획이 굉장히 꼬이고 말 테니까.

이대로라면 두 번째 기적을 얻는 루트가 엉키고 만다.

“……아.”

잠깐만.

크라놀의 머릿속에 어떤 발상이 스쳤다.

만일 놈이 무언가에 빙의해 이곳을 공략하러 왔다면.

엄연히 아히일란느의 지하낙원을 위협하는 ‘적’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기회일지도 몰랐다.

‘분명 강력한 적을 사냥할수록 획득 공헌도가 높아졌지.’

불현듯 크라놀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한동안은 이곳에 머물며 지겹게 노가다만 할 계획이었는데.

어쩌면 그 과정을 순식간에 단축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고 공헌도를 쌓을 사냥감이 제 발로 찾아왔으니까.’

극도로 위험하겠지만, 큰 이득을 볼 기회.

멈춰 섰던 크라놀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냥터 쪽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니벨이 의아해했다.

“뭐야. 왜 갑자기 다른 곳으로 가는 건데?”

“계획이 바뀌었다. 과실주의 마수들 말고, 다른 것을 사냥해야 할 테니까.”

지금부터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광증 발작이 있더라도 안심할 수 없었다.

상대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었으니까.

* * *

모두가 염려했던 일이 발생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날 저녁, 적군의 대대적인 급습이 펼쳐졌다.

레어에 인접한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가차 없이 전열을 뚫어라! 지금 저것들은 용한테 세뇌당한 게 틀림없다!”

“이대로 레어 내부까지 진격하면 노예들을 해방할 수 있다!”

지하에서 살아가는 ‘노예군’과 지상으로부터 온 ‘해방군’.

양측 간의 전쟁이 열띠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싸우면 싸울수록 노예군 측이 밀리는 전황이었다.

어젯밤의 2군 전멸이 너무나도 뼈아픈 손실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아군만 줄어든 것이 아니라, 전투용 보물마저 적들에게 넘어갔다.

해방군의 상관들은 빼앗은 지하 세계 보물들을 곧바로 전쟁에 활용했다.

창을 꽂으니 소규모 모래폭풍들이 불고, 고깔모자를 비틀면 중형 암석이 폭발해 버렸다.

크나큰 열세에 노예군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나갔다.

“제기랄! 우리 주인님께서 브레스 한 번만 내뱉으셔도 저딴 것들쯤은 간단히……!”

“지금 몸 상태가 나쁘신 거 알잖아! 우리끼리 해결을 봐야 해!”

“방어대 1군마저 뚫리면 진짜 끝장이야! 무조건 막아!”

“그래도 어젯밤처럼 순식간에 전멸할 상황은 아니야! 밀어붙여!”

방어대 1군은 노예군의 최후 전력이었다.

이들마저 무너진다면 해방군은 레어에 침입하리라.

아히일란느가 몸을 쓰지 못하는 지금, 전세는 최악이었다.

저 빌어먹을 것들은 해방이랍시고 철창 마차까지 가져와 있었다.

이대로라면 무력하게 레어에 있는 모든 노예가 무력하게 잡혀갈 판국.

“저 빌어먹을 새끼들! 우리 자유 의지는 다 무시하면서 그게 뭔 해방이야!”

“어떻게든 피나도록 이 악물고 버텨!”

“씨발, 지상 가서 또 하층민으로 살 바엔 여기서 뒈지고 말지!”

노예군은 악바리 감성으로 어떻게든 버티려 했다.

그러나 한계가 명확했다.

이들은 칼보다는 농기구가 익숙했고, 군사 전투보다는 험궂은 일이 몸에 익었다.

레어에서 전투 훈련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전문적인 병사들을 꺾지는 못했다.

노예들이 피에 젖어서 울부짖었다.

“아아악! 내, 내 눈! 아, 앞이! 흐윽! 안 보여!”

“가지 마! 레어로 가지 말라고! 세뇌가 아니야! 정말 이런 해방은 원하지 않는단 말이야!”

“이 개 같은 새끼들아! 너흰 자식들도 없냐! 레어에 있는 내 아들딸도 하층민이고, 노예였다! 별다른 것은 바라지도 않아! 제발 내 자식들이라도 평등한 세상에서 살게 해달란 말이다!”

결국, 장기전 끝에 대열이 뚫리고 말았다.

그대로 해방군이 노예군을 밟고 진영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적군이 레어로 진입하는 것이 확정된 가운데.

화르르륵!

패배로 기울어 가는 전세 속에서.

갑작스럽게 전장에 불타는 원이 그려졌다.

활활 타오르는 그것 위에 선 병사들은 갑자기 바닥이 쑥 내려앉는 경험을 했다.

[전용 스킬, 불구덩이를 발동합니다.]

[마법적 힘과 비례해 타오르는 구덩이가 파입니다.]

[불구덩이의 면적이 15배(최대 한계치)로 늘어났습니다.]

“어, 어?”

“이게 뭐야? 아아아악!”

불구덩이에 빠진 해방군 병사들 수백 명이 그대로 불탔다.

심각하게 깊숙한 깊이는 아니었지만, 불길이 꽤 사나웠다.

몇몇은 겨우 올라왔지만, 갑옷과 살갗이 타버려서 무력화됐다.

수천 명이 놀라선 빈틈을 보인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콰아아아앙!

흑백 광원이 휘감긴 석검을 휘두르며, 돌격해 오는 코피 터진 사내.

그의 칼부림 한 번에 수십 명씩 해방군 병사들이 터져 나갔다.

코피 한 방울 떨어질 때마다, 적들의 핏물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뭐, 뭐야, 저 새끼는!”

“당황하지 말아라, 대열을 지켜!”

“아, 안 됩니다! 저 자식이 혼자서 진형을 다 무너뜨리고 있습니…… 끄아악!”

크라놀 위자르는 퀭한 시선으로 저들을 훑었다.

지나친 격통 속에서 무뎌져만 가는 새빨간 눈동자.

경악한 해방군들은 감히 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도 두려워했다.

‘이 중에서, 원작 주인공이 있다.’

피와 살점, 비명이 혼재되어 있는 가혹한 전장.

과연 무한 빙의자는 누구에게 빙의했을 것인가.

이제부터 크라놀이 추리극을 펼칠 차례였다.

물론, 눈앞에 보이는 용의자들을 죄다 죽이면서.

37화 추리극

* * *

“우리의 목적은?”

“용에게 납치당한 인류의 해방입니다!”

“우리의 구호는?”

“구원을 위한 투쟁!”

해방군 지휘관 멜톨슨은 병사들 앞에서 결의를 다졌다.

지하 세계 서북쪽 일부를 지배하는 용, 아히일란느.

이 괴물의 레어를 급습하기 위해 무려 2천 명이 모였다.

이들, 해방군의 목표는 납치당한 노예들을 구하는 것이었다.

“후우.”

암반 위에 지어진 임시 막사.

결의를 다지고 온 지휘관은 홀로 이곳에 앉았다.

멜톨슨은 혀를 차곤 시가를 깨물었다.

‘싹 다 개소리 선전이지.’

이번 출정의 명분은 말했다시피 노예 해방이었다.

그러나 실상 눈치 빠른 자라면 누구라도 알았다.

아랫것들의 구원이 아닌, 오로지 ‘이익’만을 위한 전쟁이라는 것을.

‘납치당했던 노예들을 재배치하거나 매매만 해도 그게 다 얼마겠나. 하여간 노예상 놈들이란.’

설마 이만한 숫자의 병사들이 무일푼으로 모였겠는가.

해방군의 후원자는 지상의 탐욕스러운 거물 노예상들이었다.

납치당한 노예들로 어떻게 사업을 굴릴지 혈안이 된 악인들이었다.

‘원래 전쟁이란 건 자기 잇속만 챙기려는 녀석들투성이인 법이지.’

멜톨슨은 용의 레어로 입성하기 위해 해방군의 지휘관을 맡았다.

당연히 인간들끼리 모여서 용을 사냥하러 간다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그러나 지금 이들이 목표로 하는 용은 몸 상태가 현저히 나빴다.

‘마수사냥꾼들의 자료를 몰래 입수했으니, 보증은 확실하다. 무슨 이유에선지 최근 자기가 몸을 뉜 석굴 밖으로도 나오지 못하고 있다지.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 아니겠나.’

당연하지만 해방군은 용과 직접적으로 싸울 생각이 없었다.

제아무리 2천 명의 병사들이라도 신화적인 괴물은 못 죽이니까.

특히나 저만한 레어를 운용하는 영악한 개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레어에 입성해 노예들을 붙잡고 퇴각하는 것. 그에 맞는 준비도 해왔지.’

이번 분기의 해방군은 역대 최고 전력이 투입됐다.

물론 아이러니한 일이기는 했다.

용이 나오지 않는다면, 싸우는 것은 당연히 일부 전투 노예들.

노예 해방을 위해 노예들과 싸우고 있는 판국이었다.

‘멍청한 것들. 노예들답게 그냥 항복하면 피도 흘리지 않고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멜톨슨은 지휘관임에도 불구하고, 노예들의 안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해방군이 목적을 달성하면 그는 성 한 채를 구매할 수준의 수입을 얻는다.

어디 그뿐이랴, 용의 레어를 입성한 지휘관으로서 얻게 될 압도적인 명성과 명예는 덤이었다.

‘나는 괴물이 멋대로 훔쳐 간 물건들을 제자리로 돌려두는 것이다. 단지 그뿐이지.’

멜톨슨은 자신이 파렴치한 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도리어 어디에나 있을 법한 소시민이라고 여겼다.

누구나 고결한 명분보다는 수입과 명성에 끌리는 법이잖은가?

‘단지 예상 못 했던 것은, 노예 녀석들이 의외로 만만찮았다는 점이랄까.’

용만 나서지 않으면 하층민 놈들 따윈 쉽게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노예 중에서 가끔 강력한 보물을 가진 이들이 튀어나왔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지휘관으로서 어찌나 경악했는지 몰랐다.

오만한 용이 자기 노예한테 보물을 빌려주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니까.

개개인의 전투력이 뛰어난 해방군의 진격이 지지부진하게 미뤄졌던 이유였다.

‘그런 의미에서, 어젯밤은 참 기이했단 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어젯밤은 뜻밖에도 사상자도 없이 승리를 거뒀다.

우습게도 멜톨슨은 딱히 별로 한 것조차 없었다.

‘예상 밖의 변수’가 노예들의 방어대를 궤멸시켰으니까.

이번에도 그런 길조(吉兆)가 벌어지길 바랐다.

그때 막사에 들어오는 한 병사가 있었다.

“지휘관님. 오늘도 출격이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예정대로 진행합니까?”

전투대장 그란드였다.

그는 평상시답지 않게 얼굴이 무심했다.

멜톨슨은 타들어 간 시가를 톡톡 털며 놀랐다.

“그란드, 자네 성격이 좀 바뀌었군. 원래라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을 텐데.”

“코앞이 용의 레어인데 정신 바짝 차려야지요. 여기까지 진군하느라 갖은 고생을 겪었잖습니까. 담이 커지지 않고는 못 배기겠더군요.”

“뭐, 그것도 그렇겠군. 최전방에는 꼭 핀발을 세워라. 녀석이 요즘 실적이 썩 괜찮으니까.”

핀발은 요즘 제일 기세가 좋은 신인 창병이었다.

돈에 혹해 모인 사병들은 기본 그 이상의 실력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핀발은 드물게도 세련된 창술을 구사할 줄 아는 유일한 인재였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군. 고작 하루아침에 그토록 뛰어나게 급변하다니. 분명 입대 직전에는 그만한 실력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제아무리 용이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이들의 전쟁은 무모하게 비칠 수 있었다.

지하 세계의 낯선 환경과, 레어로 입성하는 임무는 절대로 쉽지 않으니까.

그러한 위기감이 신인 병사의 잠재력을 개화시킨 것이 틀림없었다.

또한, 그란드가 특이 사항을 보고했다.

“아, 신관 벨리아노도 이번 전투에 참전하겠다고 하더군요. 아군 부상자들을 본격적으로 치유하려면, 본 싸움에 자기도 소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치유는 개뿔. 그 종교쟁이 양반이 기어코 나서는군. 노예 해방에 그렇게도 숟가락을 얹고 싶은 건가. 분명 자기 종교에서 입지를 드높여 헌금이나 더 받을 작정이겠지.”

지휘관 멜톨슨은 다 태운 시가를 던지고 천막을 나섰다.

“자, 가지. 그 종교쟁이 양반은 후방에나 서 있으라고 해. 괜히 싸우는 데 방해하지 말고.”

밖으로 나오니, 횃불로 밝혀진 지하 세계에서의 군중이 보였다.

오와 열을 맞춰선 병사들이 군기 잡혀 서 있었다.

멜톨슨은 별 준비 없이도 능숙하게 소리쳤다.

“오늘이야말로 우린 붙잡힌 인류를 자유 해방한다! 설령 신화적인 용일지라도 인류를 속박할 권리는 없노니! 만인 구원에는 신분의 귀천이 없노라. 노예들을 구해내기 위해서 진군하라!”

“와아아아아!”

지휘관의 선언 이후, 병사들이 돌격하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해방군 쪽이 전세가 유리했다.

먼젓번 밤에 약탈한 용의 보물들까지 아낌없이 무장시켰으니까.

물론 남몰래 빼돌려 자기가 챙길 수도 있었지만, 멜톨슨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은 이기적일지언정, 모자란 지휘관은 아니었기에.

“어차피 이번에 노예들을 데려가면, 약탈품 횡령보다 훨씬 더 호화로운 보상이 따라오겠지.”

그랬기에 더더욱 승리가 기대됐다.

그가 전황을 지켜보며 입을 열었다.

“상황이 어때 보이는가?”

“아주 훌륭하군요. 모든 측면의 전투에서, 우리 해방군이 훨씬 앞서고 있습니다. 어제 전멸이 타격이 컸는지, 노예 놈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군요.”

그란드의 평가까지 듣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이야말로 용의 레어에 입성해 노예들을 데려갈 수 있으리라.

그렇게 무난하게 해방군이 노예군의 대열마저 뚫고 진격할 즈음이었다.

“어?”

별안간, 전장에 큰 핏물이 튀었다.

뜻밖에도 아군 병사들의 것이었다.

“뭐, 뭐야?! 어억!”

“끄아아아!”

지하 세계에는 흙과 암석이 많았다.

그런데 그것들이 죄다 뭉개지며, 엄청난 흙먼지를 풍기고 비명이 울렸다.

압도적인 힘을 지닌 무엇인가가 수많은 병사를 뚫고 진격해 오고 있었다.

추풍낙엽처럼 박살 나고 으깨지는 부하들을 본 멜톨슨은 경악하고 말았다.

“뭐, 뭐야? 저건! 분명 용은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나올 수 없다고 했잖나!”

“아, 아닙니다! 용이 아닙니다! 지휘관님!”

곁에서 지켜보던 그란드 역시 얼굴이 새하얘졌다.

눈이 좋은 그가 경악하며 저편을 가리켰다.

“저건 인간입니다! 그것도 고작 단 한 명입니다!”

흙먼지 속에서 튀어나온 금속 걸이를 찬 잿빛 머리칼의 노예.

흑백 광원의 석검을 휘두를 때마다 참격에 열댓 명이 죽어 나갔다.

난데없이 참전한 신인이 수많은 해방군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 * *

무한 빙의자를 추리하는 방식은 간단했다.

첫째, 일단 무작정 살해한다.

둘째, 상대가 기상천외하게 살아남으면 무한 빙의자다.

‘이놈도 무고하고, 저놈도 무고하군.’

크라놀은 용의자들을 사정없이 학살했다.

어차피 레어를 지키려면 죽여야 하는 것들이었다.

[해방군 방패병을 방패째로 터뜨려, 공헌도가 15 올랐습니다.]

[해방군 궁병의 허리를 칼로 갈라내어, 공헌도가 10 올랐습니다.]

[해방군 저격수를 마법적 힘으로 저격해, 공헌도가 20 올랐습니다.]

해방군을 학살할 때마다 공헌도가 쭉쭉 올라갔다.

화살 비가 쏟아져도 온몸에 마법적 힘이 몰아치니 다 떨어져 나갔다.

피에 젖은 노예들은 크라놀의 독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뭐야?! 우리 레어에 저렇게 괴물 같은 노예가 있었던가?”

“그, 금속 고리를 찬 걸 보니 일단 아군이긴 한데……!”

“어제 처음 들어온 신참이야! 왜, 있잖아! 노랗고 퉁퉁한 왕도마뱀을 데리고 왔던!”

적진에 뛰어든 크라놀은 죽이고 또 죽였다.

광증 발작이 일고 있었으나, 이성은 아슬아슬하게 지켜졌다.

미약한 용혼 덕에 각종 정신 질환과 저주로부터 버텼으니까.

‘하지만 30분이라는 제한 시간이 있다. 그러니, 유력한 용의자들부터 처단해야 해.’

최대한 빨리 적진에서 원작 주인공을 찾아야 했다.

크라놀은 한번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봤다.

만약 자신이 무한 빙의자라면 누구한테 빙의했겠는가.

‘당연히 목숨줄이 질기고 자질이 강력한 육신에 붙었겠지.’

그러니 일단 강해 보이는 적군부터 노려야 했다.

하지만 그때 지휘관 멜톨슨이 이를 악물었다.

“전부 최우선 척살 대상을 저 코피 흘리는 노예로 바꾼다! 대열을 망치는 저놈을 없애라!”

노예군과 대적하던 해방군들마저도 전부 크라놀 단 한 명을 노렸다.

마법적 힘을 몰아치는 크라놀은 압도적으로 강력했다.

그러나 체계화된 2천 명의 군대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지하 세계의 보물을 약탈한 해방군 병사들이 전열에 나섰다.

암석이 터지며 예리한 자갈이 튀고, 모래폭풍이 일어나 눈앞을 흐렸다.

“큭!”

크라놀은 어디까지나 혼자였고, 지쳐가고 있었다.

제아무리 광증 발작이 터졌어도, 적군 숫자가 너무 많았다.

점차 진해지는 격통 속에서 홀로 이 군병들을 다 상대하긴 힘겨웠다.

그 혼자에게만 몰리는 공격을 방어하느라, 코피가 우수수 쏟아졌다.

“저 괴물 노예 놈이 지치고 있다! 공격하는 기세도 느려지고 있어!”

“딱 봐도 체력 소모가 심한 것 같다! 장기전으로 가면 우리가 이겨! 이대로 집중포화해!”

그렇게 점차 크라놀이 수세에 몰리고 있었던 그때.

“크랴아아앙―!”

웬 웅장한 포효가 적진에 울렸다.

크라놀이 지친 눈길로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다.

‘이제야 온 건가.’

저 멀리, 이들이 열띠게 싸우는 전장보다 높은 절벽의 바위.

그곳엔 두 발로 씩씩하게 우뚝 서 있는 토실이가 보였다.

아가리를 활짝 벌리자 또다시 용맹스러운 포효가 울려 퍼졌다.

“크랴아아앙―!”

“크흑!”

“뭐, 뭐야! 왜 갑자기 오금이 저리는……!”

전장에 쏟아지는 가공할 만한 드래곤 피어.

아직 어린 새끼였기에 적들을 오래 경직시킬 순 없었다.

용의 포효에 다들 깜짝 놀라서 잠시 멈칫했을 뿐이니까.

그러나 그것은 작지만, 커다란 빈틈이었다.

누구도 하늘에서 날아든 흑백 날개의 여자애를 막지 못했으니까.

“맛나게 먹어요! 아주 힘들게 구한 지하 세계의 과일이에요!”

오동이가 웬 큼지막한 석류 열매들을 해방군 위에 던지고는, 흑뢰로 전부 쏘았다.

그것이 터지니, 시퍼런 석류알 알갱이가 흩날리며 불꽃놀이처럼 퍼졌다.

해방군 전체에 분무기처럼 옅게 적셔지는 광범위한 수분 입자.

“으아악! 이, 이게 뭐야?!”

“……어? 도, 독이나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아주 달콤하고 끈적이는 과즙이잖아? 심지어 맛있는데?”

독극물이나 폭탄 따위를 예상했던 해방군이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저 진득한 과일 향만이 온 사방에 풀풀 풍길 뿐이었으니까.

어이가 없어진 지휘관 멜톨슨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

“괜히 이목을 끌고 우리를 교란하려는 허튼수작이다! 한눈팔지 말고 공격에 집중해라!”

또다시 퍼부어지는 집중 공격.

크라놀은 힘겨워하며 가쁜 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이때, 그의 곁에 당당히 합류하는 조력자가 있었다.

“…….”

바로 최면 검귀 니벨.

그러나 그녀는 힘겨워하는 크라놀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퍼부어지는 화살비를 고작 칼 한 자루로 뚫고서 돌진해 갔다.

그러더니 가장 처음 맞닿은 적군 병사를 혐오스러운 눈길로 쏘아봤다.

“내 어머니는 왜 독살했어? 여기 노예들하고 연관도 없었는데.”

“뭐? 내가 네년 부모를 어떻게 알…… 끄어어억!”

“입 닥쳐. 그렇게 잡아뗄 줄 알았어. 이 파렴치한 것들. 너흴 몰살해야 해. 그게 내 복수야.”

크라놀은 겨우 한시름 덜고서 코피를 닦았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곧이어 적진의 뒤편에서도 어마어마한 비명이 터졌다.

“뭐, 뭐야?! 어……. 내, 내 허리가! 끄아악!”

“미, 미친! 저것들은 또 뭐야?!”

“왜 자꾸 미친 괴물들이 튀어나오는 거냐고!”

지하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과실주의 마수들.

무려 10미터가 넘는 데스웜과, 주둥이가 긴 살육 나방 떼, 대형 도롱뇽까지!

과즙에 눈이 먼 저것들이 후방에서부터 해방군들을 짓씹고 박살 냈다.

반면 크라놀은 목표를 놓치지 않고 눈을 번뜩였다.

‘일단, 첫 번째 유력 용의자.’

힘겨운 와중에도 한 병사를 점찍어두고 있었다.

가장 위력적인 창술을 구사하는 신입 창병 핀발.

지금 지원군들에 의해 생겨난 빈틈이 기회였다.

크라놀이 둔기 같은 석검으로 놈을 내리쳤다.

38화 밝혀진 범인

“어억!”

최근 승승장구했던 창병 핀발은 머리가 으깨져서 사망했다.

당연히도 원작 주인공이라면 이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었다.

크라놀의 두 눈에 절로 실망감이 맴돌았다.

‘이놈은 아니었군. 꽤 기대가 컸었는데.’

크라놀은 이어서 계속 유력 용의자 검문에 나섰다.

이번에는 조금 더 발상의 범위를 넓혀보기로 했다.

강한 이들 이외에도 조금 특이한 직업군한테 빙의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어어? 아니야! 난 싸우는 병사가 아니라고! 어억!”

뒤돌아서 도망치던 신관 벨리아노도 사망했으며.

“피, 피하십시오! 지휘관님! 끄아아악!”

전투대장 그란드 역시 죽어 버렸다.

최후까지 오래 살아남아 있던 것은 지휘관 멜톨슨이었다.

원래라면 수많은 병사에 둘러싸여 있어서 노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주위를 몰살하는 최면 검귀와 사방으로 날뛰어대는 과실주의 마수들.

혼란에 빠진 적진 속에서 흑백 에테르가 휘감긴 참격을 날려대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크라놀은 눈을 한껏 번뜩였다.

온 곳에서 과일 향이 퍼지고 있지만, 분명 진득하게 풍겼으니까.

“시가 냄새.”

“어, 어어?”

“네놈한테서 시가 냄새가 난다.”

그는 집착적인 눈길로 피에 젖은 석검을 높이 들었다.

원작 주인공 역시 지독한 시가 중독자였으니까.

온몸에서 시가 냄새가 풀풀 풍기는 멜톨슨에게 큰 기대를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끄아아아악!”

그러나 고작 일 합에 허무하게 팔이 으깨진 멜톨슨.

크라놀은 무릎 꿇은 적장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결국 이놈마저도 주인공이 아니었단 건가.’

서걱!

석검으로 후려쳐서 면상을 박살 내고 마무리.

2천 명이 넘게 활동하는 적진 속에서, 크라놀은 적군 강자들을 모조리 전멸시켰다.

당연히 지휘관마저 잃은 적군 병사들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밀리던 노예군들도 뒤늦게 함성을 내지르며 합세했다.

“이야아아아아! 맛이 어떠냐, 이 괘씸한 자식들아!”

“도무지 믿기지 않아! 우리가 막판에 와서 이걸 이긴다고?”

“우리 신참 잘한다! 완전히 괴물이 따로 없잖아!”

우레와 같은 환호가 쏟아지며 선봉의 크라놀을 떠받들었다.

그러나 막상 그는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죽였는데도 원작 주인공이 없다고? 왜지? 내 예상이 틀린 건가?’

원작 주인공은 결코 방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쉽게 승기를 양보할 인물도 더더욱 아니었다.

크라놀은 광증 발작으로 날뛸수록 빠르게 지쳐가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극도로 찝찝한 기분 속에서, 흐르는 코피를 닦지도 못했다.

미약한 용혼의 한계 시간인 30분이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그전까지 원작 주인공을 찾지 못하면 계획이 틀어지고 만다.

‘도대체, 도대체 어딨는 거지? 설마 그냥 도망친 건가? 아니야. 이렇게 자기 목표를 쉽게 포기할 녀석이, 절대로 아닌데.’

혼란함 속에서 크라놀은 시선이 거칠어졌다.

어떻게든 원작 주인공을 찾아야만 했다.

지금 그 녀석을 막지 못하면 분명 아히일란느를 토벌할 테니까.

그러면 자신이 원하는 두 번째 기적을 쟁취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아.”

그때 비교도 할 수 없이 많은 코피가 후두둑 쏟아졌다. 눈앞의 시선이 갑자기 크게 흔들렸다.

이젠 제한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성을 잃기 직전, 약초를 입에 다 털어 넣었다.

그러나 도무지 두 발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안 되는데…….’

버티려고 했지만, 어쩌지 못했다.

가까스로 승기를 잡은 전장.

크라놀은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 * *

“……키익! 키이익!”

이제는 몇 번째 기절인지 세는 것조차 싫었다.

크라놀은 익숙하게 눈을 떴다.

예상한 대로, 지하낙원의 휴식처였다.

앞치마를 맨 땅딸막한 용아병들이 그를 열심히 간호하고 있었다.

“……이게 뭔가.”

“키익! 키익!”

지하수로 축축하게 적신 수건이었다.

상냥한 용아병들이 그걸 크라놀의 머리 위에 올려줬다.

그는 한숨 쉬고서 고개를 내저었다.

“이젠 괜찮다. 가라.”

“키익!”

순종적인 용아병들이 얌전히 물러갔다.

역시나 잡일에 특화된 일꾼들다웠다.

곧 방문이 열리며 두 아이가 품에 날아들어 안겼다.

“크량! 크랴아앙!”

“아저씨! 깨어났네요! 자꾸 매번 기절해서 걱정시키면 미워요!”

“이번에 내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나?”

“벌써 하룻밤이 지났어요! 이젠 아침이에요!”

광증으로 인한 기절은 쓰러지는 시간도 매번 달랐다.

크라놀은 이젠 실신도 지겨워서 구역질이 났다.

광증 발작은 엄청난 위력을 보장하는 대신, 페널티 또한 극심했다.

‘수명 단축과 기절 유발. 이 두 단점은 어떻게든 극복하고 만다.’

크라놀은 고개를 내젓고는 헐어버린 코를 쓸었다.

“싸움은 어떻게 됐지?”

“우리가 대승했어요! 해방군은 거의 다 죽고, 남은 병사들은 지상으로 도망쳐 버렸구요!”

“과실주의 마수들은?”

“용의 보물을 다시 빼앗은 노예들하고, 니벨 언니가 전부 해치웠어요! 잘 몰랐는데, 니벨 언니는 눈빛이 바뀌면 엄청나게 강해져요! 아저씨도 활약상을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무난히 종결됐다니 다행이었다.

그러나 크라놀은 아직도 찜찜했다.

결국 원작 주인공이 무엇에 빙의했는지 밝혀내지 못했으니까.

용을 토벌하려는 주체를 막지 못한 이상, 또다시 언제든 전쟁이 터질 수 있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일단 아히일란느한테도 경고를 해두는 편이 좋겠어.’

크라놀은 자기 몸 상태를 살폈다.

제아무리 승기를 잡았어도 전장 한복판에서 쓰러졌다.

그대로 짓밟혀서 어디 몇 군데는 부러졌을 줄 알았다.

그러나 큰 전투를 치렀던 것치고는 그다지 상처가 없었다.

곧장 오동이가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는 턱을 쳐들었다.

“히! 쓰러진 아저씨는 토실이가 날아들어 구해줬고, 아저씨 부상은 내 별빛 치유로 거의 아물었어요! 하지만 아직 완치는 아니에요! 상처들이 따끔거리니까 함부로 거칠게 움직이지 마요!”

“고맙다. 토실아, 오동아.”

크라놀은 두 아이를 쓰다듬어 주고는 일어났다.

비록 승전했으나, 아직 잠재된 위험은 여전했다.

방심은 금물이라고 생각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일단은 상처 없는 부위만 씻고, 코트를 챙겨 입은 뒤 나갈 작정이었다.

“아.”

그런데 그때 갑자기 인중 근처가 간질댔다.

코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일까.

깊은 지하라는 특성과 맞물려 대뜸 잡것이 꼬였다.

웬 거머리가 혈향에 이끌렸는지 인중에 붙어있었다.

거슬린 크라놀은 그것을 손가락으로 떼어놓으려고 했다.

“어.”

크라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안 떼어진다.

심지어 한 손에 힘을 꽉 줘도.

약간 당황해서 고개를 휘젓기도 해보고, 손가락으로 꼬집기도 했다.

그러나 그 거머리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코피만 빨아먹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크라놀은 순간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크라놀은 씻는 와중에도 무기를 절대 품에서 멀리 두지 않았다.

암석검으로부터 조금 뾰족한 자갈을 뽑아내 인중에다 확 그었다.

그러자 그 거머리가 쏜살같이 튀어 오르며 회피했다.

덕분에 크라놀은 자기 인중에만 상처 낸 꼴이 되었다.

“큭.”

피가 나는 인중을 손으로 감싸고 눈매를 좁혔다.

손에 쥐었던 자갈을 화나서 확 버렸다.

욕실 밖에서 두 어린것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크량! 크랴앙?”

“아저씨! 왜 그래요? 목욕하다가 넘어졌어요? 환자가 무리하면 안 돼요!”

그러나 크라놀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오직 저 젖은 바닥에 있는 거머리만 노려봤다.

“하아.”

단숨에 처치하려고 했으나, 한낱 거머리는 회피해 살아남았다.

이건 절대로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가 없었다.

천무지체로 몸놀림을 파악할 수 있는 크라놀이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보인 현상이 증명하는 진실은 분명했다.

“……말해.”

그가 낮게, 범인을 향해서 윽박질렀다.

“다 알고 있으니까, 말하라고.”

크라놀은 새삼 증오스러운 사실을 되새겨야 했다.

상대방 처지에서 생각해 줬던 것은 무용지물이었다.

원작 주인공이 생또라이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웬 낯선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실망이야.”

그 목소리는 다른 어디서 들린 게 아니었다.

눈앞의 작디작고 미천하기 짝이 없는 미물.

저 조그만 거머리가 살며시 꿈틀댔다.

표정이랄 게 없지만, 참 나긋한 목소리였다.

“네 몸을 그렇게 막 쓰면 안 되지, 크라놀.”

“…….”

“그게 누구 건데.”

이 빌어먹을 추리극의 막이 내릴 순간이 왔다.

크라놀은 이 세계에 떨어진 이래로 가장 심경이 복잡했다.

원작 주인공은 다름 아닌 하찮은 거머리에 빙의해 있었다.

* * *

지금의 크라놀 위자르는 원작 주인공을 이길 수 있는가?

그것은 이미 명확한 대답이 정해져 있는 논제였다.

‘못 이긴다. 아직은.’

설령 광증 발작까지 터진 크라놀일지라도, 현재의 경지로는 이길 수 없었다.

무한 빙의자가 긴 생애에 걸쳐 쌓아 올린 지식과 경험은 독보적인 수준이었으니까.

상당히 재능 있는 연금술사에게 빙의하고도 흑금룡의 용아병을 산산이 태워버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 세상엔 수많은 생물이 살아갔고, 개중엔 보잘것없는 미물들 또한 많았다.

‘가령 지금 같은 경우가 그렇지.’

놀랍게도 원작 주인공은 이름조차 없는 거머리에 빙의했다.

그러니 혹자는 오히려 유리한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상대가 고작 거머리 따위에 빙의했으니, 간단히 꺾을 수 있지 않겠냐고.

그러나 그는 심상찮은 공포심마저 느꼈다.

‘지금 소통 마법으로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건가. 한낱 미물의 몸으로도 마력을 키웠다니.’

고작 한낱 거머리일 뿐이었지만, 감히 무시할 수준은 못 됐다.

저 조그만 것이 엄청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크라놀은 소름이 다 끼쳤다.

‘혈마법.’

욕실 수증기와 함께 핏방울이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함부로 사냥하려고 했다가는 핏빛 마법이 자신을 봉쇄할 터.

비록 평범한 거머리처럼 보이지만, 이미 몇 번이나 진화를 거듭했는지 알 수 없었다.

환골탈태를 수없이 거듭해 강력해지는 것은, 놈이 미물로 빙의했을 때의 흔한 레퍼토리였다.

“놀랍네. 설마 내 정체까지 밝혀낼 줄이야. 내 능력마저 아는 것 같은데? 어쩐지 저번 병실에서 봤을 때부터 심상찮다 싶었지. 그 정체 모를 미친 힘도 그렇고. 크라놀, 넌 도대체 뭐야?”

“닥쳐라.”

그러나 크라놀은 짓씹듯 대답을 거부했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그러고는 욕실에 세워둔 석검을 거머쥐었다.

투구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라서 조금 더 무거웠다.

“왜 이 지하 세계에 왜 왔는지 대답해라. 어째서 거머리 따위에 빙의했지?”

“이야, 죽이네? 네 알몸은 밑에서 보니까 진짜 웅장하다.”

“…….”

“역시 내가 탐내는 몸이야. 아아, 너같이 훌륭한 몸에 빙의하면 어찌나 좋을까. 벌써 기대돼.”

저 자식의 감탄하는 목소리가 역겨워서 견딜 수 없었다.

눈살 찌푸린 크라놀은 곧장 석검을 세차게 내리쳤다.

거머리가 아니라, 자기 손등에다가.

콰앙!

육중한 검에 뼈와 살점이 박살 나고 피가 튀었다.

격통과 함께, 크라놀의 한쪽 손이 뭉개져 버렸다.

얄밉기 짝이 없던 거머리가 몸을 펴며 경악했다.

“뭐야! 너, 갑자기 미치기라도 한 거야? 왜 대뜸 자해해?”

“지금 날 무시하면, 이 자리에서 자살하겠다. 네놈이 원하는 훌륭한 몸은 물 건너가겠지.”

원작 주인공은 크라놀의 강력한 몸을 탐내고 있었다.

광증 발작의 힘에, 그에게서 커다란 가능성을 본 것이리라.

‘그러나 놈은 지금 나한테 빙의하지 못한다. 영혼 자원이 한참이나 부족할 테니까.’

주인공이 빙의하려면, ‘영혼 자원’이 필요했다.

오직 마수를 죽여야지만 얻을 수 있는 에너지원.

하나 잠재력 큰 존재에 빙의하려면 소모해야 할 대가가 커졌다.

하물며 ‘크라놀 위자르’는 작중 최고의 잠재력을 지닌 등장인물.

설령 막 죽은 시체에 깃들더라도, 필요한 수치는 상상을 초월할 터.

‘그런데 드높은 영혼 자원도 쌓아놓지 못한 지금.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죽어 버린다면?’

놈이 빙의할 수 있는 시체는 막 죽은 경우뿐이었다.

즉, 크라놀 위자르로 빙의할 기회가 영영 사라지는 것.

원작 주인공은 절대로 그런 상황을 원치 않을 것이다.

강력한 육신에 빙의해 마수들을 궤멸하고 싶어 하니까.

“…….”

손이 뭉개진 격통 탓에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크라놀은 무심하게 거머리를 내려다봤다.

“네놈이 그렇게나 내 몸을 갖고 싶다면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나와 거래해라.”

“……!”

원작 주인공이 처음으로 당황했다.

크라놀은 자기 몸으로 협박하고 있었다.

39화 다가오는 재앙

자해하는 광증 질환자와, 거머리가 된 무한 빙의자.

둘은 수증기가 넘치는 욕실에서 서로를 미친놈 보듯 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꿈틀대는 거머리 쪽이었다.

녀석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크라놀의 뭉개진 손을 보며 어이없어했다.

“……너, 흑금룡의 재생 보주 흡수했잖아. 그런데 왜 다친 손이 하나도 회복이 안 돼?”

“뽑아서 딴 애 줬다.”

“아니, 이 답답한 자식아. 그냥 너 혼자 독점했어야지, 주긴 뭘 줘?”

“네 알 바가 아니다. 내 질문에 대답해라. 왜 지하 세계에 온 거지? 도대체 목적이 뭔가?”

크라놀은 원작 주인공의 행태가 의심스러웠다.

용의 토벌이 목적이었다면 전쟁에서 활약했어야 했으니까.

그러나 놈은 싸우기는커녕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거기다 구태여 지금 거머리 따위에 빙의한 이유도 알 수 없었다.

“하.”

한편 거머리는 크라놀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기가 찬 듯 웃었다.

“어이가 없네. 이거 완전히 미친 새끼잖아. 재생 보주도 없는데 스스로 자기 손을 박살 내?”

거머리는 뭘 생각하는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곧 저 혼자서 픽 실소했다.

소통 마법의 변조된 음성은 기계음처럼 무정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조금 애틋해진 것 같이 들렸다.

“의외네, 크라놀. 너는 내 과구나.”

“욕하지 마라.”

“그건 서운한걸? 우린 방금 피도 함께 나눈 사이잖아?”

콰직!

크라놀은 또다시 석검을 내리쳤다.

이번엔 자기 팔뚝 뼈가 결딴났다.

거머리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몸을 휘저었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이건 그냥 두면 진짜 자살할 놈이잖아? 가르쳐 주면 될 거 아냐!”

결국 녀석이 이실직고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간단해. 크라놀 위자르. 너와 대화하고, 네 몸을 지키기 위해서야.”

“날 지키려고 왔다고? 용을 토벌하려던 게 아니라?”

“그래. 내가 미리 경고해야 살 수 있을 테니까.”

그러더니 예상치 못한 소리가 내뱉어졌다.

“환혹의 안개. 그 재앙이 이 레어를 곧 덮칠 거야. 넌 도망쳐야만 해.”

* * *

환혹의 안개.

그것은 크라놀이 이미 알고 있는 재앙이었다.

사실상 이 지하 세계에 왔던 이유 중 하나였으니까.

그러나 설마 그것이 이 레어를 덮치러 올 줄은 몰랐다.

만약 그 재앙이 들이닥치면, 이 지하낙원은 풍비박산이 날 것이다.

“……흑금룡이 깨어난 탓에 재앙이 퍼지고 있군.”

“아니, 그런 것까지 안다고? 내 무한 빙의를 알고 협박했던 것도 그렇고, 넌 진짜 뭐냐?”

“말했을 텐데. 그건 네가 알 바가 아니다.”

크라놀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막 전쟁을 끝낸 참이었는데.

하여간 1막 최종 보스가 일찍 깨어나니 위기가 끝도 없었다.

“어쨌든 아는 게 많으니 편하네. 뭐, 그 재앙을 피하는 방법은 내가 차차 알려주는 걸로 하고. 방금 나하고 거래하자고 했지? 난 그 얘기가 꽤 흥미로운데.”

자기 몸을 빼앗으려는 빙의자와 거래한다는 것은 상식 외의 일이었다.

그러나 크라놀은 이미 광증에 걸린 순간부터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었다.

지금도 말하는 거머리와 대화까지 하는 판국이잖은가.

“내가 자살하지 않고 장차 몸을 제공한다면, 넌 나에게 뭘 해줄 수 있지?”

“음, 너랑 같이 다니던 칼 든 미인이 있지? 당장 걔한테 빙의해서 뭐든지 다 해줄게.”

“너야말로 완전히 미쳤군.”

“내가 그 여자보다 검을 더 잘 써. 무엇보다 네 안전을 위해서도 훨씬 나을걸?”

거머리가 오만하게 꿈틀댔다.

“하여간 난 재생 보주가 있어서 괜찮을 줄 알았지. 설마 그걸 다른 놈한테 넘겼을 줄이야. 이러면 네 신변이 보장되지 않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널 지켜줄게.”

뭐, 썩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이 세계의 주인공이 조력자로서 합류한다면 든든할 테니까.

게다가 저 말대로 놈의 검술이 최면 검귀보다 훌륭한 것도 맞았다.

과거에 칼로 정점을 이뤘던 고수로서도 살아봤던 녀석이니까.

그러나 이 자식한테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하지만 내가 너한테 합류하려면, 조건이 있어.”

“뭐지?”

“저 시끄러운 애들부터 일단 좀 죽이자.”

일순, 둥둥 떠 있던 핏방울들이 욕실 문으로 쇄도했다.

크라놀은 눈을 크게 떴다.

그 핏방울들을 다급하게 석검으로 받아쳐서 휘둘렀다.

분명 액체인데도, 쇠구슬을 쳐내는 것 같은 소음이 울렸다.

“크랴아앙?!”

“아, 아저씨! 무슨 일이에요? 그냥 문 부수고 들어가도 돼요?!”

욕실 문에 달라붙어 있는 아이들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괜스레 식은땀이 등에서 흘렀다.

무거운 석검을 한 손으로만 쓴 탓에, 완벽하게 쳐내진 못했다.

그러나 흑백 에테르를 퍼뜨려 타격 범위를 넓힌 덕에 겨우 막아냈다.

이곳저곳에 튄 핏방울들은 살벌하게 욕실 벽에 구멍을 냈다.

“……꺼져라.”

크라놀이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거머리는 의아해할 뿐이었다.

“왜? 저것들은 새끼여도 마수들인걸. 죽이는 게 네 신변을 위해서 옳아. 내가 널 지켜줄게.”

상대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태도.

크라놀은 그것이 불쾌했다.

“꺼지라고 했다. 네놈과의 거래는 결렬이다. 앞으로 다신 저 어린것들을 해치려 하지 마라.”

역시 이 무한 빙의자 놈이랑은 도무지 대화가 안 통했다.

여러 몸으로 지나치게 오래 살아온 터라 광기가 넘쳐흐르니까.

극단적인 행태 탓에, 일행으로서 뒀다간 크라놀도 통제할 수 없으리라.

“너는 나한테는 참 차갑구나, 크라놀. 하지만 괜찮아. 거래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어.”

그러나 원작 주인공은 싫어하기는커녕 웃었다.

통신 마법의 변조된 목소리가 집착하듯 끈적댔다.

“오롯이 내가 전적으로 손해를 보면서 베풀어줄게. 난 네가 반드시 살아남았으면 해, 크라놀.”

이 집착하는 무한 빙의자가 팔뚝에 기어오르며 달라붙었다.

이 악물고 떼어놓으려고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허공에 뜬 핏방울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뭘 하려는 거지?”

“치료야. 잠시 가만히 있어. 날 떼어놓으려고 하면, 죽지만 않게 만신창이로 만들 거야.”

“…….”

하는 수 없었다.

결국 크라놀은 가운을 입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토실이와 오동이는 기겁하고 말았다.

그의 한쪽 팔이 완전히 망가져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으아아앙! 그렇게 자주 코피 흘리고 기절하더니, 결국 우리 아저씨가 미쳤나 봐요! 목욕하면서 혼잣말하더니 자기 팔마저 박살 내버렸어요! 일찍 노망이 와버린 거예요!”

원작 주인공의 소통 마법은 오직 크라놀에게만 들렸다.

그래서 두 아이의 눈에는 그가 미친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오죽하면 잘 울지 않는 오동이마저도 눈물을 뚝뚝 흘릴 정도였다.

마침내 다가온 끔찍한 현실에 토실이도 울먹이며 그에게 매달렸다.

“크량! 크랴앙!”

“토실이가…… 훌쩍! 자기한테 있는 재생 보주를 넘겨주고 싶대요! 그러면 아저씨의 망가진 팔도 금방 다 회복할 수 있을 거래요! 훌쩍!”

크라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멀쩡한 손으로 토실이를 쓰다듬어줬다.

“됐다. 그 보주는 이미 너만의 것이다. 함부로 남한테 넘겨주지 마라, 토실아.”

내심 묘하게 기쁘고 안도가 되었다.

그나마 이 어린것들이 자신 곁에 있기에 정말 다행이었다.

방금 자기 팔을 작살 내고, 정신 나간 주인공까지 상대해 주자니 심상이 극도로 피폐해진 참이었다.

그러나 지금 오직 자기만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아이들을 보자니 겨우 좀 힐링이 됐다.

“우와. 크라놀. 넌 병신이구나! 저 뭣도 모르는 새끼 마수가 호구처럼 귀한 보주를 바친다는 걸 왜 마다해? 이런 녀석이 이렇게 훌륭한 몸뚱이의 주인이라니. 진짜 몸이 아까워 죽겠네.”

“…….”

주인공의 감탄스러운 비아냥을 듣자니 절로 따스해지던 마음이 얼어붙었다.

크라놀은 짜증을 내며 물었다.

“아직도 의문이 널렸다. 토벌이 목적이 아니었다면, 넌 왜 굳이 노예들을 죽인 거지?”

“아, 실은 너랑 또 이렇게 직접 대화해 보고 싶었어. 그러려면 진화해서 여러 마법부터 배워야 했거든. 지하 세계의 거머리로 빙의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주 많은 피를 먹어야 마력을 부풀릴 수 있었어. 해방군 병사들은 갑옷이 두꺼워서 피 빨기가 귀찮더라. 그래서 그나마 헐거운 옷을 입고 있는 놈들한테만 피를 빨았는데, 공교롭게도 다 여기 노예 녀석들이더라고.”

“……그러면 노예들의 시체에 흩뿌려져 있던 시가는?”

“그거야 이런 몸으로 직접 피울 수는 없으니, 연기 냄새라도 맡으려고 했지.”

“가장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있다. 굳이 이렇게까지 큰 깽판을 쳐야만 했던 건가? 순전히 경고가 목적이라면, 그냥 아무 생물이나 빙의해서 나한테 접근하면 그만이었을 텐데.”

“그야 너와의 대화도 좋지만, 솔직히 그것만 하고 떠나긴 아쉽잖아? 사실 흡혈 생물에 빙의한 건 꽤 오랜만이거든. 간만에 인간들 피 좀 빨면서 내가 고안했던 혈마법 체계를 다시 정립하는 시간을 가졌지. 그러려면 무차별 학살이 가장 효율적이었고. 전쟁은 상관하지 않았어. 재앙이라면 몰라도, 흑금룡의 용아병도 죽인 네가 그깟 싸움에서 못 살아남을 리는 없을 테니까.”

그러더니 거머리가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통신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어제부터였어. 네가 전쟁에서 학살한 덕에 피를 아주 많이 먹었거든. 아, 그리고 이 지하 세계에 네가 있다는 건 내 수호성이 알려줬고.”

……그랬던 건가.

사실상 원작 주인공은 제삼자로서 깽판 쳤던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절묘하게 해방군의 행적에 큰 도움이 되어서, 용을 토벌하러 왔다고 오해했던 것.

“지금 네가 거머리에 빙의한 것은 자원을 절약하기 위해서인가?”

“그래, 미물의 몸에 깃드는 게 가장 비용이 싸니까. 당분간은 절약 생활을 할 거야. 너 같은 거물급 육신에 빙의하려면, 나도 그만큼 허리띠 졸라서 영혼 자원을 비축해야만 하거든.”

크라놀은 이제야 사건의 전말을 이해했다.

‘시체 흔적만 봤을 때는 고작 거머리라고 추리할 수 없었는데, 이유가 있었군.’

피가 쫙 빨려서 미라처럼 변했다는 걸 제외하면 상흔들이 흉측했으니까.

하기야 마법적인 힘을 더해 살해했을 테니, 예상하지 못했을 법도 했다.

그런데 그때, 거머리가 살짝 꿈틀했다.

저 멀리서 땅딸막한 용아병들이 벽면에 걸어둔 잿빛 코트를 본 것이다.

“오, 저건 내가 전생에 제작했던 방어구인데? 설마 내가 설립한 연구실까지 다녀왔던 거야?”

“거긴 얻을 게 많으니까.”

“지금 내 몸뚱이가 이런 것이 아쉽네. 안 그랬다면 당장 빼앗아 입었을 텐데.”

“…….”

그때였다.

크라놀의 망가진 팔로부터 떨어진 피가 두둥실 떠올랐다.

그러더니 핏방울들이 잿빛 코트에 스며들어 잠시 붉은빛을 자아냈다.

[코트의 제작자가 본인의 방어구를 마력으로 개조합니다.]

[대연금술사의 코트에 ‘핏방울 부식’ 스킬이 추가됐습니다!]

“이젠 그 금속 고리도 이 힘이면 파괴할 수 있을 거야. 이곳에 재앙이 오기 전에 도망쳐.”

“……!”

크라놀은 자기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아니, 원격 혈마법으로 방어구를 개조했다고?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크라놀의 무참히 박살이 난 팔.

그것이 아주 조금씩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머리가 직접 붙어서 혈마법으로 새 피를 공급해 줬기 때문이다.

“일단 당장 뼈는 붙여놨어. 신선한 새 피에 내가 고안한 마력 체계도 담아 넣어놨고. 아마도 일주일이면 깔끔하게 회복될 거야. 이 막 나가는 자식아. 다시는 걱정 끼치지 마. 알았지?”

부러진 팔의 감각 없던 손가락을 쥐었다가 폈다.

벌써 아주 조금씩 힘이 돌아오고 있었다.

크라놀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고작 거머리의 몸으로 이만큼 기막힌 재주를 부리다니.

‘대부분 공격 계열에 불과한 혈마법으로 이런 응용이 가능하다니. 무한 빙의자답게 못 하는 게 없군.’

뜻밖에도 이 지하 세계에서 원작 주인공과 싸우게 될 일은 없었다.

오히려 무한 빙의자는 ‘크라놀에게만’ 너무나 상냥하고 우호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방심하는 것은 금물이었다.

자신에게 엄청난 이득을 제공해 줬다곤 해도, 몸을 빼앗으려는 놈이니까.

‘절대 착각해선 안 된다. 이 녀석은 자기의 이득만을 위해 날 돕는 거다.’

거머리가 피를 주입한 팔뚝으로부터 폴짝 뛰어올랐다.

“내가 곁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널 도와줘도 되겠지. 하지만 그러기엔 나도 바빠. 계속해서 영혼 자원을 모아야 하니까. 그러니 잘 살아남아 봐. 앞으로 매번 이렇게 경고할 순 없을 거야.”

원작 주인공은 크라놀을 살리기 위해서 다가올 재앙을 경고했다.

개망나니이긴 했지만, 그가 죽지 않길 바라는 것은 분명했다.

거머리가 현관 바닥에 서서는 자신을 돌아봤다.

나긋하고 부드럽게 인사말을 전했다.

“반드시 살아남아, 크라놀. 다음번에는 다른 몸으로 널 만날 거야.”

콰직.

웬 신발 밑창이 거머리를 짓뭉갰다.

막 문을 열고 들어온 니벨이었다.

“어. 뭐야, 이 거머리는? 죽었네?”

“…….”

무한 빙의자는 죽지 않는다.

계속 또 다른 생물로 빙의할 뿐이니까.

지금도 대륙 어딘가에서 새 삶을 시작했을 터.

“하아.”

뭐, 어쨌든 간에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개망나니임은 변함이 없었다.

“토실아, 오동아. 내가 갑자기 시가를 태우면서 성격이 바뀌면, 그땐 너희가 날 바로 죽여라.”

“크랴아앙?!”

“으아아앙! 우리 아저씨 이젠 어떡해요! 노망이 나버렸으니 이젠 혼자서 화장실도 못 갈 거예요! 훌쩍! 그래도 염려 마요! 내가 열심히 수발을 들어줄게요!”

“아니. 도대체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대화를 한 거야? 얘네들이 왜 이렇게 널 걱정해? 네 한쪽 팔은 또 왜 피떡이 됐고?”

니벨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캐물었지만, 무시했다.

‘일단 영혼 자원이 쌓일 때까지는, 원작 주인공이 내 편이긴 하겠군. 직접 와서 죽지 말라고 친절하게 경고도 해주고, 코트를 개조해서 새 혈마법 스킬까지 얹어줬으니.’

거기다 전쟁에서의 개고생도 무의미하지 않았다.

바닥이 났던 공헌도가 산처럼 쌓여 있었으니까.

크라놀은 우는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일어섰다.

“가자. 이 레어의 주인과 다시 만나야 한다.”

곧 이곳에는 ‘환혹의 안개’가 불어닥칠 것이다.

이 레어를 초토화할 수도 있는 고위험의 재앙.

그러나 딱히 지금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이었다.

크라놀 위자르에게 재앙은 미친 이득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