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타미두스는 마병의 저주에서 깨어난 뒤 먹는 음식의 양이 수십 배로 늘어났다.
마병이 소모한 잠재력을 그런 식으로 채우는 것 같았다.
트리거도 금종육신갑을 익힌 후 음식의 양이 수십 배로 늘었다.
금종육신갑으로 육신을 구성하는 데는 그만큼 많은 음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음식을 무한히 주면 정말 무한히 먹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생각 외로 두 사람의 식량 조달엔 돈이 많이 안 들었다.
타미두스는 사냥의 달인이다.
잠깐 자리를 비운다 싶으면 일행이 먹을 사냥감을 순식간에 조달해 왔다.
반면 들어오는 돈은 많았다.
붉은 달의 영향 때문인지 이동을 하면서 몬스터의 습격이 점점 잦아졌다.
하지만 현재 일행의 실력으로 몬스터의 습격에 대처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다.
일행은 무난히 몬스터를 무찔렀고.
그렇게 몬스터를 처리하고 남은 부산물은 상당한 액수의 돈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나가는 돈은 적은데 들어오는 돈은 많으면 일행은 부유해야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경비 이외에 거의 모든 돈이 푸코에게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푸코의 내력을 늘리고, 뼈와 근육을 튼튼하게 하는 각종 영약을 사는 데에 그 돈이 소비되었다.
그것도 부족해 모르는 매일 신성력으로 푸코의 몸을 관리하고 있었다.
“네가 가장 약하니까.”
트리거가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푸코가 일행의 구멍이니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푸코는 일행의 그런 배려에 자존심이 상했다.
일행의 그런 배려가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푸코가 그런 감정을 품거나 말거나 일방적인(?) 대우는 계속 이어졌다.
어쨌건 그런 대접을 받았으니 성과를 보여주어야만 했다.
* * *
몸을 날리는 푸코의 등으로 오크의 몽둥이가 날아왔다.
푸코의 손가락이 그 오크의 하체를 가리켰다.
“캬악!”
오크는 비명을 지르며 마구 몸을 뒤틀었다.
냉기의 화살이 오크의 항문을 뚫고 체내로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푸코는 벌떡 일어나 쓰러지는 오크에게서 몽둥이를 빼앗아 들었다.
다른 오크가 그에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 몽둥이에 맞서 푸코도 몽둥이를 휘둘렀다.
두 몽둥이가 부딪쳤다.
푸코는 타미두스나 트리거 같은 완력이 없었다.
그의 완력은 딱 그 나이 때 소년의 완력이었다.
오크의 완력은 인간보다 강하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선 오크의 몽둥이가 푸코의 몽둥이를 튕겨 내고 푸코의 머리를 뭉개야 했다.
하지만 일은 반대로 돌아갔다.
오크의 몽둥이가 손에서 날아갔다.
몽둥이가 부딪치는 순간 푸코는 자신의 정신을 쐐기꼴로 만들어 오크의 정신에 박아 버렸다.
그래서 오크는 강펀치에 제대로 맞은 것처럼 눈이 풀려 있었다.
정신탐색 스킬의 응용이었다.
인간의 근육은 쓰면 쓸수록 발달한다.
그것처럼 인간의 정신력도 쓸수록 발달한다.
푸코는 각성을 한 이후 정신탐색 스킬을 밥 먹듯이 써왔다.
그래서 이런 식의 응용도 가능해졌다.
푸코의 몽둥이가 오크의 머리를 후려쳤다.
오크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크아악!”
그러자 다른 오크가 그에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실드!”
푸코는 실드를 캐스팅했다.
캐스팅하자마자 바로 그의 앞에 실드가 형성되었다.
다른 마법사라면 주문을 막 절반가량 진행했을 시간이었다.
푸코는 상단전이 발달했다.
그 상단전의 염력으로 정신탐색이나 냉기화살 같은 능력을 쓰는 것이다.
마법을 쓸 때는 그 상단전의 염력으로 마나를 주문에 맞춰 배열해 버렸다.
그러면 마법이 발현하기까지의 시간을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다.
쾅!
오크의 몽둥이와 실드가 부딪쳤다.
실드가 박살나 흩어졌다.
염력으로 짜 넣은 마력의 배열은 캐스팅으로 짜 넣은 마력처럼 섬세하지가 못하다.
그만큼 위력도 약했다.
캐스팅한 실드로는 버틸 정도의 외부 충격도 염력으로 만든 실드는 버티지 못하고 박살났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주어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파이어 애로우!”
그 잠깐의 시간동안 파이어 애로우가 완성되었다.
불의 화살이 오크의 눈을 뚫어 버렸다.
그 순간 뒤에서 몽둥이가 날아왔다.
푸코는 앞으로 몸을 날렸다.
몽둥이는 그가 있던 공간을 스치고 지나갔다.
* * *
트리거는 말없이 육포를 먹으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트리거의 금종육신갑은 금종조와 육신갑의 장점을 융합해 새롭게 진화 중이었다.
음식을 먹으면 그게 지기(地氣)로 화해 금종조의 이치대로 신체장기와 피부에 촘촘하게 얽혔다.
그렇게 몸에 형성된 얽힌 기운이 육신갑의 이치대로 근육과 뼈, 피부를 자극하고 강화했다.
금종조나 육신갑 어느 무술에도 음식물로 흡수한 기운을 이런 식으로 운용하는 능력은 없다.
둘이 합쳐지며 이런 새로운 운용능력이 생겼다.
음식물을 먹으면 금종육신갑으로 강화되며 경험치도 조금씩 올라갔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한 번에 오르는 건 소수점 한참 아래의 작은 단위이긴 했다.
하지만 굳이 몬스터를 잡지 않아도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 경험치가 채워진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가 영약을 먹지 않은 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건 타미두스도 마찬가지.
마병은 죽인 상대의 잠재력을 흡수해 기생체에게 전해준다.
그러니 타미두스도 굳이 영약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
모르는 사제니까 영약이 필요 없고.
그래서 일행 중 가장 약하면서 성장잠재력이 큰 푸코에게 영약이 모두 돌아가고 있었다.
푸코에겐 심리적으로 채찍질을 가하기 위해 그런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 않았다.
“저희 상단주님을 어떻게 아십니까?”
호위무사가 다시 트리거를 보고 물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지.”
트리거가 대답했다.
물론 명성만 들은 게 아니었다.
지투스의 기억에선 안면도 있었다.
인류군이 결성되고 마왕군과 싸울 때, 베르타가 인류군의 재상이었다.
인류군과 마왕군의 싸움이 중반으로 접어들며 베르타는 입버릇처럼 딸을 아쉬워했다.
싸움이 중반으로 접어들며 보급이 꼬여 버렸다.
갑옷을 보내야 할 지역에 엉뚱하게도 무기가 가고, 무기가 갈 지역에 식량이 가는 일이 발생했다.
전쟁의 와중에 자기 몸을 지킬 능력이 없던 문관들이 계속 죽어 나가며 일어난 일이었다.
문관이 적으니 서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졌다.
그러니 보급이 꼬이고, 그런 보급 때문에 이길 싸움도 지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 아니라 사람과 몬스터의 싸움이다.
사람간의 전쟁은 한쪽이 항복하면 그걸로 전쟁이 끝난다.
하지만 사람과 몬스터와의 전쟁은 그런 게 없다.
사람이 항복하면 받아주는 게 아니라 가축처럼 도축당해 식량으로 전락한다.
이런 싸움에서 보급이 꼬인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싸움의 중반부터 일어났다.
“루이즈가 살아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그럴 때마다 베르타는 입버릇처럼 딸을 말하며 아쉬워했다.
딸은 숫자의 천재라서 어떤 장부든 잠깐만 들여다봐도 그 허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니 딸이 살아있었다면 최소한 보급문제로 전쟁에서 패하는 일은 없을 거라면서 너무도 딸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루이즈가 이때 죽었나?’
루이즈는 어릴 때부터 자기 상단을 직접 꾸릴 정도로 야무진 아이라고 했다.
하지만 만일에 대비해 실력자를 호위무사로 배치했는데도 붉은 달 초기에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고 했다.
시기를 보면 대략 이때 같았다.
루이즈도 살려두면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인재이긴 하다.
하지만 그녀 때문에 하누스에 온건 아니었다.
그를 여기서 구한 건 순전히 우연의 일치였다.
‘잘된 일이군.’
우연이라도 인간의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인간을 구했으니 잘된 일이다.
넝쿨 담장 안에서의 싸움은 점점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다 오크의 몽둥이에 설맞은 푸코의 왼팔이 부러졌다.
트리거를 처음 만났을 때 푸코는 2서클.
그 후 트리거의 강제적인 배려(?)로 영약을 독식하며 6서클까지 올랐다.
시스템의 기준으로는 대략 15레벨.
거기에 염력으로 냉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정신탐색의 초능으로 타인의 정신에 간섭한다.
이렇게 보면 푸코도 그 나이 때 평균적인 마법사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근본적으로 옆에 탱커가 있어야 제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는 족속이다.
탱커 한 명 없이 진퇴도 불가능한 결계 속에서.
붉은 달 현상으로 인해 기사들을 맨손으로 찢어버리는 오크 20여 마리를 푸코는 혼자서 상대하고 있었다.
이건 푸코가 이기기는커녕 살아남는 게 기적일 정도다.
모르가 그런 푸코의 부상을 보고 신성주문으로 고치려 했다.
“모르, 아직은 안 됩니다.”
트리거가 그런 모르를 보며 말했다.
“자네는 저 아이에게 너무 엄격해!”
모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트리거도 그 말에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타인이 볼 때는 자신이 지나치게 엄격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지투스의 기억에 있는 푸코는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푸코는 당시 결사대의 공격으로 궁지에 빠지자, 자신의 사지를 미끼로 내걸고 반격을 할 정도로 독한 위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푸코에겐 그런 정도의 독기가 없다.
당시 푸코는 사형과 사매에게 당한 수모로 그런 독기를 품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의 푸코는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투스의 시간선 때와 같은 독기가 없는 것이다.
과거의 푸코가 성장한 데에는 재능도 재능이지만 그 독기가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이런 극단적인 환경에 푸코를 집어넣어 독기를 키우려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푸코는 정강이가 몽둥이에 맞고 부러져 덜렁거렸다.
모르가 그걸 보고 트리거를 바라보았다.
트리거는 모르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모르는 신성력으로 푸코를 치료했다.
그리고 트리거에게 다시 나무라듯 말했다.
“자네게 저 아이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네. 하지만 저 아이는 너무 어려. 좀 살살하게.”
그 말에 트리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합니다. 아트론에 이어 하누스에서도 큰 일이 벌어질 겁니다. 다가오는 재앙에 맞서려면 살살할 여유가 없어요.”
그 말에 모르는 한숨을 쉬었다.
루이즈는 모르의 옆에서 반짝이는 눈으로 푸코를 바라보았다.
루이즈의 호위무사들은 개개인의 무력이 푸코보다 훨씬 높았다.
그들이 조금만 침착하게 대응했어도 몬스터 무리에게 전멸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력이 위임에도 몬스터 무리에게 당한 건 몬스터 무리의 광기에 압도당했기 때문이었다.
세상 모든 생명체에게는 자기 보존 본능이 있다.
몬스터들도 예외는 아니다.
몽둥이로 상대를 때릴 때에도, 그 반발력에 의해 자기 팔이 부러질 정도로는 세게 후려치지 않는다.
그런데 광기에 휩싸인 오크들에겐 그런 자기 보호 본능이 없었다.
상대의 검이 자기 목을 베건 말건, 반발력으로 팔이 부러지건 말건, 무작정 상대를 공격하고 봤다.
그 광기에 호위무사들은 압도되었다.
그래서 초반에 호위무사 몇 명이 쓰러지자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듯 다른 호위무사들도 전멸 당했다.
그런데 푸코는 전혀 압도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몬스터처럼 광기로 부상을 잊은 것도 아니었다.
자기 몸을 하나의 자원으로 냉정하게 보고, 팔 다리가 망가지면 그대로 침착하게 상대와 싸우고 있었다.
지투스의 시간선에서 푸코가 독기를 품고 싸운 것은, 푸코에게 어떤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과거가 바뀌어 독기는 사라졌어도, 그 불굴의 정신은 여전히 남아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불굴의 정신이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푸코를 성장시키는 중이었다.
푸코는 그림으로 그린 듯이 아름다운 소년이다.
그 아름다운 소년이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팔 다리가 부러지건 말건 냉정하게 싸우는 모습은, 몬스터의 광기로 패닉에 빠져 죽어가던 호위무사의 모습과 대비되어 더욱 멋지게 보였다.
루이즈는 홀린 듯이 그런 푸코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호위무사는 그런 루이즈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즈가 엉뚱한 사람에게 반한 것 같았다.
상단주 베르타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
31화
일행은 목적지인 하누스에 도착했다.
호위무사는 루이즈를 데리고 상단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베르타에게 자신이 목격한 것을 보고했다.
“루이즈가 몬스터에게 습격을 당했는데, 지나가던 나그네들이 구해줬다?”
“예. 그런데 그 구해준 사람들이 상단주님을 아는 것 같았습니다.”
일행 중에 베르타를 아는 척 한 사람은 트리거밖에 없었다.
하지만 호위무사의 입장에선 다른 사람도 베르타를 아는지 그 여부를 모르니, 구해준 사람들이라고 뭉뚱그려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하누스에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트리거는 모르에게, 아트론에 이어 베르타가 지금 머물고 있는 도시인 하누스에서도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처럼 이야기했다.
호위무사는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사실도 잊지 않고 베르타에게 전했다.
“그리고… 루이즈님이 그 일행 중 한 명에게 반한 것 같습니다.”
“뭐라고?”
마지막 말에 베르타는 얼굴이 굳어졌다.
* * *
“그러니까, 미래에 마왕이 강림하다는 거지요?”
“그렇소.”
트리거는 우아하게 포크를 놀리며 말했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는 질린 얼굴로 새로운 음식을 내왔다.
베르타는 트리거 일행을 초대했다.
그리고 딸을 구한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했고, 트리거는 점잖은 태도로 그 인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함께 음식을 먹으며 일행에게 도시에 온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언제나처럼 트리거의 레퍼토리가 나왔다.
하도 같은 이야기를 하니 일행은 그러려니 하고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듣는 베르타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당신은 그 미래의 마왕과 싸울 준비를 하는 것이고?”
“그렇소,”
트리거가 다시 말했다.
트리거는 자신의 행보를 한 번도 숨긴 적이 없다.
듣는 사람들의 태도도 비슷했다.
농담거리로 치부하거나 비웃는 것이다.
“흐흠.”
그런데 베르타는 달랐다.
당혹스런 표정만을 지을 뿐, 농담거리로 치부하거나 비웃지 못했다.
단지 딸을 구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일행이 여기 오기 전에 몬스터 웨이브에서 아트론을 구했기 때문이었다.
베르타는 호위무사의 말이 심상치 않아 사전에 그들의 신원을 조사했었다.
딸이 엄한 놈한테 반한 것 같다는 말이 조사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했다.
조사하자마자 트리거 일행의 정체가 밝혀졌다.
그들이 아트론을 구한 일로 유명인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일행을 보는 사람들의 태도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아트론이 멸망 직전까지 간 일은 주변도시에 모두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한 도시가 몬스터의 습격으로 초토화된 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피난민들에 의해 거기에 얽힌 여러 내막들도 차츰 알려졌다.
아트론에서 가장 많이 살아남은 부류는 빈민층이었다.
사전에 트리거의 경고를 듣고 성을 빠져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성의 멸망 소식을 나중에야 전해 듣고는 트리거를 모르 못지않게 성자처럼 추앙했다.
그 다음은 트리거가 타미두스를 하피들에게 유인한 덕분에 살아남은 부류들.
트리거가 아니었으면 죽었을 사람들이 그 활약으로 살아남았으니, 당연히 트리거에 대한 칭송이 잇따랐다.
원래 역사에선 아트론의 생존자는 50명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바뀐 역사에선 생존자가 1,000여 명을 넘어갔다.
그 생존자에게서 이구동성으로 성자와 용사(?)에 대한 증언이 뒤따랐다.
그런 증언들이 없었다면 베르타는 아무리 딸을 구해주었다고 해도 트리거를 미친 놈 취급을 했을 것이다.
“하누스에 오신 이유는 뭐요?”
“여기도 보름 전후로 아트론과 같은 일이 발생할 테니까.”
트리거가 말했다.
한참 음식을 내오던 시녀들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잠깐!”
베르타는 손을 들어 트리거의 말을 제지했다.
그리고 시녀들을 보고 엄격한 태도로 이야기했다.
“행여 여기에서 나온 이야기가 밖으로 퍼진다면, 너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알겠느냐?”
“예.”
“그럼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당분간 방에 들어오지 마라.”
“알겠습니다.”
시녀들은 공손히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시녀들을 다시 들여보내 음식을 가져다주시오. 보안을 염려할 필요는 없소. 나는 도시에 머물며 누가 묻건 같은 이야기를 할 테니까.”
트리거는 빈 접시를 아쉬운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베르타와 짧은 인사를 나누고 음식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눈 게 30분밖에 되지 않았다.
겨우 그 정도 시간에 트리거는 들소 고기로 만든 두툼한 스테이크 일곱 장, 해물 파이 일곱 그릇, 공작새 요리 세 그릇을 먹었다.
이렇게 많은 요리를 이 짧은 시간에 해치우면서도 음식에 아예 손도 대지 않은 것처럼 평온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맞은편에 있던 타미두스도 트리거와 경쟁하듯 음식을 먹고 있었다.
베르타의 옆에는 루이즈가 드레스를 입고 우아한 태도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우아한 태도로 음식을 먹으며 트리거 옆에 있던 푸코를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평소의 베르타라면 진작 루이즈의 태도를 알아차리고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베르타는 루이즈의 그런 태도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트리거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베르타는 한숨을 내쉬며 종을 울렸다.
문이 열리며 시녀가 들어와 공손한 태도로 무슨 일로 불렀냐고 물었다.
“음식을 계속 내와라. 저 분들이 만족할 때까지.”
베르타가 말했다.
트리거의 말이 너무 충격적이라 보안을 유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트리거 본인이 그 이야기를 사방에 하고 다니면 자신이 보안을 유지하는 의미가 없다.
“이번에도 하피와 오크의 습격이오?”
베르타가 물었다.
“아니. 오크 대전사가 오크 전사들을 이끌고 도시를 습격할 것이오. 하누스에도 소드 마스터가 한 명 있다고 들었소. 그 소드 마스터는 오크 대전사를 만만히 보고 달려들었다가 몇 합 버티지 못하고 목이 날아가오. 그러니 나머지는 보나 마나지.”
그 말에 베르타의 얼굴색이 변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몬스터도 오러를 쓴다.
오러를 쓰는 몬스터는 대전사라 부른다.
하누스에는 소드 마스터가 있었다.
오크 대전사가 도시를 침범하면 당연히 소드 마스터가 맞서 싸울 것이다.
그런데 진다고?
그러면 결과는 보나 마나다.
17레벨부터 트리거의 레벨업은 정체 상태였다.
레벨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너무 늘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타미두스와 마병의 주도권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타미두스가 마병을 쓰면 마병은 역으로 타미두스의 정신을 장악하려 할 것이다.
마병을 제대로 통제하려면 수준에 걸맞은 강적과 싸워야 한다.
그래서 일행이 오크 대전사와 싸우기 위해 하누스로 온 것이었다.
* * *
석세스는 거울을 보고 자신의 외모를 정리했다.
넓은 어깨, 기름을 발라 빗은 머리카락.
각진 얼굴, 짙은 눈썹, 균형 잡힌 이목구비.
석세스는 상당한 미남자였다.
본인도 자기가 미남자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옆에서 시중을 들던 시녀는 그를 보고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철이 들기 전부터도 주변의 여자들은 그를 보면 이런 반응을 보였다.
그런 반응을 보면서도 자기가 미남인 걸 모르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다.
그는 그런 반응을 즐겼다.
사춘기 이후 성욕이 왕성할 때는 호감을 표시하는 여자를 기꺼이 안아주었다.
지금 옆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도 그가 안은 여자 중에 한 명이었다.
그가 여자를 안는 건 잠을 자고 식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정확히 한 달 전부터 여자를 안지 않았다.
루이즈를 보고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사창가의 여자를 만나러 길을 걷는 중이었다.
그때 마차의 창문으로 무심히 밖을 쳐다보던 여자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는 그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여자도 자기를 보고 사랑에 빠졌으리라고 확신했다.
여자가 자기의 외모에 눈길 한 번 안 줬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세상에 어떤 여자도 자기의 외모를 보고 무심히 지나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무심히 지나쳤다.
관심이 없는 건 아닐 것이다.
관심은 있는데 쑥스러운 나머지 일부러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 뿐.
석세스는 사람을 동원해 여자의 신원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마차에 있는 문장을 통해 쉽게 신원을 알아냈다.
탈레든 상단의 상단주, 베르타의 딸 루이즈라고 했다.
머리가 좋고 야무진 데가 있어 어릴 때부터 상행을 다닌다고 했다.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건 맘에 안 들었다.
여자는 자고로 조신해야 한다.
하지만 상단주의 딸이라는 건 맘에 들었다.
그는 화려한 걸 좋아했다.
그만큼 생활하는 데에 많은 돈이 들어갔다.
상단주의 딸이라면 그 돈을 충분히 벌충해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외유를 나갔다가 오늘 돌아왔다.
그는 돌아온 날에 맞춰 꽃다발을 준비했다.
그녀가 마차에서 자신을 보고 수줍어하는 걸 분명히 보았다.
자신이 청혼하면 그녀는 기꺼이 수락할 것이다.
그는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베르타의 집으로 갔다.
상단주의 집답게 베르타의 집은 아주 화려했다.
“루이즈 아가씨를 만나러 왔다.”
그는 입구를 지키던 무사에게 말했다.
무사가 그를 보고 되물었다.
“누구라고 전해 드릴까요?”
“소드 마스터 아쿠마의 아들, 석세스다.”
그는 당당히 말했다.
사실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먼저 내세우는 것부터가 당당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명예를 자신의 명예와 동일시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조차 몰랐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무사가 정중히 말했다.
잠시 후 그는 무사의 안내를 받아 저택으로 들어갔다.
문 앞으로 루이즈가 나왔다.
루이즈를 보는 석세스의 표정이 몽롱하게 변했다.
한 달 전이나 지금이나 루이즈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석세스는 루이즈를 보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꽃다발을 내밀며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레이디. 그대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습니다. 부디 저와 결혼해주십시오.”
그의 말에 루이즈의 얼굴에는 얼떨떨한 빛이 떠올랐다.
아쿠마는 소드 마스터다.
소드 마스터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유명인사다.
그 아들이 접견을 신청하니 아버지의 얼굴을 봐서 일단은 만나주었다.
그런데 만나자마자 느닷없이 청혼을 한다.
“당황스럽군요. 전 공자님을 처음 보는데요.”
“아니요. 한 달 전에 레이디는 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와 같은 감정으로 심장이 떨리고 세상이 분홍빛으로 보였다는 걸 잘 압니다. 레이디라는 입장 때문에 그걸 외부에 표현하지 못하셨겠지요. 그래서 제가 왔습니다. 레이디, 부디 저와 결혼해주십시오.”
시녀들은 ‘어머, 세상에…….’ ‘낭만적이야.’ 어쩌고저쩌고 하며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저택을 지키던 무사들도 흥미진진한 얼굴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루이즈는 그런 주변을 의식하며 난처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느닷없는 청혼에 당황스럽군요. 보름까지만 시간을 주시겠어요? 그 후에 공자님의 청혼에 답하겠습니다.”
“예, 기다리겠습니다.”
석세스는 꽃다발을 건네며 흔쾌히 대답했다.
석세스는 집으로 돌아와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하루하루가 1년 같았다.
그의 머릿속은 루이즈와 함께 어디로 신혼여행을 갈지, 자식은 몇 명이나 나을지 등의 계획으로 가득 찼다.
루이즈가 자신의 청혼을 거절할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없었다.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게 지루해 저녁에는 술집에 나가 술을 마셨다.
평소라면 사창가에서 여자를 사서 몸을 풀어 초조함을 달랬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즈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런 행위를 하는 건 실례 같았다.
사창가는 루이즈와 결혼을 하고 아이도 두셋 정도 나은 후에 드나들 생각이었다.
어쨌건 그렇게 술집에서 방 하나를 잡고 술을 마시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32화
“보름 전후로 도시가 멸망한다는 소문이 돈다는 건 알고 있나?”
“도시가 멸망한다니?”
“이번 달 보름 전후로 몬스터 웨이브가 하누스를 덮친다고 하네. 하누스가 그 몬스터 웨이브를 못 이기고 멸망한다는 거야.”
“몬스터 웨이브가 보름 전후로 온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지? 온다고 해도 그 몬스터 웨이브를 하누스가 못 막아낸다는 근거는 뭐야?”
“이번 몬스터 웨이브엔 오크 대전사가 같이 한다고 하네. 그 오크 대전사를 하누스가 막아내지 못해서 멸망한다네.”
“우리 하누스에는 소드 마스터가 있지 않나? 왜 우리 소드 마스터가 오크 대전사를 못 막아낸다는 거지?”
“그 소드 마스터는 오크 대전사에게 목이 달아날 거라고 하더군.”
“하지만 몬스터가 쳐들어오는 시기. 거기에 오크 대전사가 있다는 것. 그걸 우리 소드 마스터가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 모든 것이 다 가정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런 엉터리 소문을 믿는 게 이상하군.”
“엉터리라고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게, 그 소문을 퍼트린 자들이 아트론의 멸망도 예언했네. 아트론은 그 예언을 귀담아듣지 않아서 결국 멸망했고. 그래서 다들 이 소문을 심상치 않게 생각하는 거야.”
“……좀 자세히 이야기해보게.”
“성자님과 함께 다니는 트리거라는 인간이 있네. 그 인간에게 예언의 능력이 있나봐.”
“…….”
“며칠 전에 탈레든 상단의 루이즈 아가씨가 도시로 오는 길에 오크들의 습격을 받았네. 그 습격에서 루이즈 아가씨를 구한 사람이 바로 그 트리거야. 당시 루이즈 아가씨를 습격한 오크들의 상태도 심상치가 않았어. 최소한 무기는 손질을 해두는 게 좋겠네.”
탁!
석세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트리거란 놈팡이가 오크가 쳐들어온다고 사기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감히 그 사기에 아버지를 끌어들이고 있다.
아버지가 오크 대전사를 당해내지 못하고 놈의 공격에 목이 달아난다니!
거기에 그런 말을 한 놈이 몬스터의 습격에서 루이즈를 구했다고 한다.
그는 이제야 루이즈가 자신의 청혼을 미룬 이유를 알았다.
처음엔 그게 자신의 청혼을 단번에 수락하기가 부끄러워 보름의 말미를 달라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루이즈는 그 놈팡이에게 속아 넘어갔다.
그래서 거절의 구실로 청혼을 미룬 것이다.
한낱 사기꾼이 아버지를 모욕하고, 사랑하는 여자까지 홀려서 청혼을 거절하게 만들다니!
이건 말도 안 되지 않나?
* * *
트리거 일행은 여관에 머물고 있었다.
여관의 후원엔 정원이 있었다.
정원의 한쪽엔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연못 중심엔 분수가 있었다.
분수에선 물이 뿜어져 올라와 무지개를 만들어냈다.
연못 안에선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유영을 하고 있었다.
정원 여기저기에선 다양한 크기의 조각상들이 그 모습을 뽐냈다.
일행은 느긋한 태도로 정원이나 조각상을 구경하고 있었다.
정원과 연못이 있는 것으로 봐서 이 여관은 보통 여관이 아니다.
하룻밤 자는데 20골드 이상이 드는, 하누스에서도 최상급의 고급 여관이다.
베르타는 딸을 구해준 보답으로 하누스에서 가장 시설이 좋은 숙소를 잡아주었다.
그리고 하누스에 머무르는 동안 들어가는 모든 숙식비를 부담하기로 했다.
거기에 딸을 구한 보답으로 물질적 보상을 따로 했다.
일행으로서는 그런 보답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일행은 오랜만에 시설이 좋은 여관에서 마음껏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쿵쾅 거리며 무언가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거친 소리와 함께 후원으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누가 트리거냐!”
젊은 청년, 석세스가 들어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데?”
트리거가 그런 석세스에게 대답했다.
트리거는 대답을 하며 하품을 했다. 하품을 하니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자신이 얼마나 우습게 보이면 저렇게 태연하게 하품을 하나 생각하니, 석세스는 분노가 더욱 치밀어 올랐다.
“네 놈이 감히 아버님을 모욕해?”
석세스가 분노한 어조로 소리쳤다.
“네 아버지가 누군데?”
트리거가 물었다.
“이익! 아쿠마 님이시다!”
“난 아쿠마가 누군지 모르는데?”
“하누스의 유일한 소드 마스터라고 하면 알겠느냐?”
트리거는 처음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석세스의 표정을 보고는 알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게 결과적으로는 자네 아버지를 모욕하는 내용이 되었군. 그렇다고 그게 아침부터 찾아와 이렇게 화를 낼 정도는 아니지 않나?”
트리거가 물었다.
트리거는 몬스터 중에 오크 대전사가 있고, 하누스는 그 오크 대전사를 막지 못해 도시가 멸망한다고 했다.
하누스에 소드 마스터가 들으면 기분이 나쁠 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게 자신들에게 찾아와 이렇게 화를 낼 일은 아니지 않나?
지금 석세스의 반응은 너무 과했다.
그런데 석세스는 더욱 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칼을 뽑아라. 아버님을 모욕한 책임을 묻겠다.”
석세스가 트리거를 보고 노한 어조로 소리친 것이다.
“아, 다시 말하지. 듣는 자네 아버님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어. 정말 미안하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이번 달 중순, 보름까지만 기다리는 거야. 그러면 내 말의 진위 여부가 가려질 게 아닌가? 보름 전후로 아무 일도 없으면 그때 다시 찾아오게. 그러면 내가 정중하게 사과를 하지. 어떤가?”
트리거가 말했다.
트리거의 입장에선 나름대로 온유한 대응이었다.
하지만 석세스는 트리거의 대응에 만족하지 않았다.
“검을 뽑아. 뽑지 않으면 그냥 목을 칠 테니.”
“어휴.”
트리거는 그런 석세스의 화난 모습을 보고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석세스의 꼴을 보니 말로 해선 이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았다.
“푸코.”
“예.”
“이분을 상대해드려라.”
푸코와 타미두스는 각기 다른 방에서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석세스가 소란을 피우자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냥 나와서 이를 보고 있었다.
사실 재밌는 구경거리가 맞기도 했다.
그런데 트리거가 그 구경거리를 푸코에게 미루어 버렸다.
“아, 제가 왜요?”
푸코는 얼굴을 찡그리며 반문했다.
“그럼 타미두스가 나서야 할까? 이 인간을 끝장낼 텐데?”
“트리거가 원인 제공을 했잖아요. 그러니 트리거가 마무리를 하세요.”
“간밤에 마신 술로 숙취가 너무 심해서 살살할 자신이 없어. 네가 좀 해결해라. 나중에 한 번 식사 당번 면제해줄게.”
“에휴…….”
푸코는 한숨을 내쉬더니 석세스 앞에 섰다.
“사정이 이러니 내가 먼저 그대를 상대하게 되었다. 잘 부탁한다.”
푸코가 석세스를 보며 말했다.
석세스는 그런 푸코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푸코는 머리를 다듬지도 않고 나와서 그에게 느슨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놈들은 나를 얼마나 얕잡아 보고 있는 걸까?
푸코는 그런 주제에 자신보다 잘생겨 보였다.
그게 더 그의 분노를 치밀어 오르게 만들었다.
“이놈이고 저년이고…….”
석세스는 이를 부득 갈며 중얼 거렸다.
헛소문을 퍼트린 이 사기꾼 놈들이나 루이즈나 다 맘에 들지 않았다.
“다 죽여주마.”
푸코를 보는 석세스의 눈에 푸른 살기가 도깨비불처럼 일렁였다.
“죽어라!”
이런 류의 대결은 보통 서로 통성명을 하고는 자세를 갖춘 뒤에 시작을 한다.
하지만 석세스는 그러지 않고 바로 검을 날렸다.
그의 검이 푸코의 머리를 향해 쾌속으로 날아들었다.
“어엇!”
푸코는 다급히 땅으로 몸을 날렸다.
간발의 차이로 석세스의 검이 푸코의 머리를 스쳤다.
머리카락이 석세스의 검에 잘려 땅에 떨어졌다.
조금만 움직임이 늦었어도 머리카락이 아니라 목이 잘렸을 것이다.
푸코는 등에서 식은땀이 솟아났다.
방심을 하지는 않았다.
방심하기엔 그간 트리거의 단련이 너무도 혹독했다.
푸코는 태도는 느긋했지만 석세스의 앞에 선 순간, 마음은 이미 임전태세를 다 갖추었다.
그런데도 정말 간발의 차이로 피할 정도로 석세스의 검법은 매서웠다.
석세스는 여자관계가 복잡했다.
그 여자들의 주변인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석세스에게 대결을 신청했다.
여자가 얽힌 치정싸움이라 대결의 강도는 정말 목숨이 오고갈 정도로 치열했다.
하지만 석세스는 그런 싸움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지저분한 사생활과는 별개로 그의 검술 실력은 꽤나 고절했다.
“뒈져!”
석세스는 땅을 구르는 푸코의 등을 향해 검을 내리찍었다.
평소라면 푸코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대결을 이어갔을 것이다.
그게 신사적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싸워도 상대를 이길 정도로 자신의 검술은 뛰어 났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그런 생각을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이 괘씸한 놈을 빨리 치워버리고 다음엔 저 트리거란 놈의 목을 쳐버릴 생각이었다.
푸코는 석세스의 발치로 몸을 굴렸다.
간발의 차이로 그의 검이 푸코가 있던 땅을 찍었다.
“잘도 피하는구나!”
석세스는 푸코의 몸을 발로 걷어찼다.
푸코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빨리 뒈져라!”
석세스는 또다시 검으로 푸코의 몸을 내리쳤다.
그러다 석세스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푸코가 얼음화살을 자신을 걷어차려던 석세스의 발에 박아 넣었기 때문이다.
그 냉기로 인해 발의 신경이 마비되어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푸코는 벌떡 일어나며 석세스를 향해 검을 올려쳤다.
석세스는 몸이 기우는 와중에도 푸코에게 검을 휘둘렀다.
두 개의 검이 중간에서 교차했다.
“커억!”
석세스는 비명을 내질렀다.
* * *
“사정을 좀 봐주지 그랬어.”
트리거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고요.”
푸코가 화를 내며 말했다.
푸코의 검은 석세스의 코를 잘라 버렸다.
일부러 노린 건 아니었다.
상대의 검술이 워낙 고절하다 보니 그렇게 상대의 사정을 봐줄 여유가 없었다.
먼저 시비를 건 것도 상대.
먼저 살수를 쓴 것도 상대지만 코를 날린 순간 전후사정을 따질 단계는 넘어섰다.
놈의 아버지는 소드 마스터라고 했다.
보통의 아버지라도 자식의 코가 잘리면 눈이 뒤집힐 것이다.
그러니 소드 마스터라면 그 꼴을 보고 어떻게 나올까?
“타미두스, 짐을 꾸려라. 여기서 도망친다.”
트리거가 타미두스를 보고 소리쳤다.
사실 자신들이 힘을 합치면 소드 마스터라도 능히 이길 수 있다.
그러나 보름 후에 몬스터 웨이브가 닥친다.
인간끼리 싸워서 전력을 소모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몸을 피해야지.
타미두스는 투덜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도 일어난 소란을 직접 봤기에 다른 말을 더 하지는 않았다.
일행은 그렇게 짐을 꾸려 여관을 떠났다.
* * *
하누스. 대지교의 신전.
“성자님, 저희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성자님, 저희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대지교의 신전엔 입구부터 도시의 중앙까지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차례로 안으로 들어와 모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축복을 요청했다.
“그대에게 여신의 은혜가 머물기를.”
모르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 사람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을 했다.
모르의 손엔 푸른 신성력이 어려 있었다.
축복을 할 때마다 그 손에 일어난 신성력이 사람들의 머리로 스며들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황홀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대지교의 사제들은 굳은 얼굴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신과 직접 교통하는 성자가 나타나면, 성자를 추종하는 신도들이 넘쳐난다.
당연히 그 성자가 속한 종파의 교세도 폭발적으로 부흥한다.
그러니 대지교 사제들의 얼굴에도 기쁜 기색이 넘쳐나야 했다.
그런데 지금 대지교의 사제들은 하나같이 굳은 표정들이었다.
33화
사제들의 얼굴이 굳어 있었던 건 신전을 둘러싸고 있는 병사와 기사들 때문이었다.
푸코가 석세스의 코를 잘라 버린 후, 트리거 일행은 그대로 잠적해 버렸다.
분노한 소드 마스터 아쿠마는 시내를 발칵 뒤집으며 일행의 행방을 찾았다.
하지만 일행은 어디에 숨었는지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아쿠마는 모르에게 일행의 행방을 추궁했다.
모르는 도시에 온 뒤 일행과 헤어져 대지교의 신전에 머무르며 몰려오는 신도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일행은 신전의 엄숙한 분위기에 질려서 따로 행동했다.
그러니 모르로서도 일행의 행방을 알 리가 없었다.
모른다고 하자 그때부터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신전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배치되는 병력의 수가 늘어났다.
명목은 몰려드는 신도들로 인해 불안해진 치안을 확립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 숨은 뜻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름이 되었다.
트리거의 예언대로라면 오크 대전사가 오크들을 이끌고 하누스 성을 침범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3일째 되는 날에 아쿠마가 기사를 이끌고 나타났다.
“성자님께 묻겠소. 당신 일행은 보름이면 오크 대전사가 나타나 나를 죽이고 성을 허물 것이라며 사람들을 현혹하였소.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트리거는 보름이라고 날짜를 확정하지는 않았소. 보름 전후라고 했지.”
비데르가 앞서서 말했다.
비데르는 성기사라 트리거, 타미두스, 푸코와는 달리 항상 모르의 주변에 있었다.
즉, 비데르도 이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래서 사흘을 더 기다려주지 않았나? 그런데 몬스터의 그림자조차도 비치지 않았잖소?”
아쿠마는 그들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모두 체포해라!”
아쿠마가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아쿠마는 기사단장이라 기사들을 지휘할 권한이 있었다.
그의 명령에 기사들이 앞으로 나서서 모르를 체포하려고 했다.
“멈추시오. 그 말은 성자님을 따라온 일행이 한 말이지, 성자님과는 관련이 없지 않소. 있다고 해도 그게 성자님을 체포할 명분이 되지는 않소!”
사제 중에 한 명이 아쿠마에게 항변했다.
“흥! 그걸로 불안감을 조성해 백성들에게서 돈을 갈취했지. 자칭 성자라고 하는 저 위인은 그런 행위를 한번도 제지 하지 않았고. 모두 한패라는 거지!”
아쿠마가 말했다.
트리거는 아트론에서 축복을 받으러 온 신도들에게서 돈을 거두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하누스에서는 그 일을 비데르가 대신하고 있었다.
순수한 선의로 하는 일이지만 보기에 따라선 축복을 핑계로 신도들의 돈을 갈취한다고도 할 수 있다.
비데르 뒤로 다른 성기사 두 명이 나와 모르의 앞을 막았다.
신전에 본래 거주하던 성기사들이었다.
그들이 앞으로 나오며 모르를 넘겨줄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이후로 벌어질 일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거요?”
사제 중에 한 명이 아쿠마에게 굳은 어조로 물었다.
성기사는 이단사교와 싸우는 게 주 업무다.
그래서 성기사들은 그런 전장에 주로 배치가 되는지라 막상 신전엔 성기사가 별로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성기사는 세 명 뿐.
기사는 50명이 넘었다.
수에서 이리 차이가 나니 싸우면 당연히 기사들이 이긴다.
하지만 이 세계는 신이 신성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세계다.
종교가 정말 심각할 정도로 부패해 문제를 일으킨다고 해도, 정치는 함부로 종교의 영역을 침범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건은 아쿠마가 개인적인 원한으로 죄 없는 성자를 체포하려는 모양새였다.
대지교에 이 일이 알려지면 그 파장이 가볍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쿠마는 조금도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두 집단 간에 대치가 길어지며 긴장감이 점점 올라갔다.
“그만. 내가 당신들을 따라가면 되지 않겠소.”
그때 모르가 담담한 얼굴로 양 진형 사이를 가로막았다.
“하지만 성자님.”
“그만. 세 명으로 오십 명을 이길 수 있는가?”
비데르는 뭐라 항변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모르가 곧바로 비데르의 말을 막았다.
“…….”
비데르는 그녀의 행동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정해진 터. 굳이 피를 볼 필요가 없다. 날 데려가시오.”
모르가 담담한 얼굴로 아쿠마에게 말했다.
기사들의 분위기는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담담한 모르의 모습은 말 그대로 성스러운 성자의 모습이었다.
기사들 중에서 일부는 그런 모르의 모습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아쿠마는 살기가 어린 얼굴로 모르를 노려 보았다.
“끌고 가. 놈이 언제까지 안 나타나나 보자!”
아쿠마가 기사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기사들은 모르를 끌고 기사단으로 데려갔다.
* * *
“성주는 그걸 안 말리고 뭘 한 겁니까?”
트리거가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트리거 일행은 일이 벌어진 뒤 처음엔 빈민가에 몸을 숨겼다.
빈민가는 치안이 발달하지 않아 기사단의 수색에도 일행은 발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빈민가에도 수색의 손길이 점차 미치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싶었던 일행은 베르타에게 도움을 청했고.
결국 베르타가 마련한 안가에 몸을 숨기게 되었다.
그리고 베르타가 정기적으로 성내의 동정을 말해주었다.
그 베르타를 통해 아쿠마가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성주가 제정신이라면 아쿠마가 모르를 끌고 가는 걸 허락할 리가 없었다.
모르는 이 사태와 전혀 관련이 없다.
아쿠마도 그걸 알고 있다.
아쿠마는 자신 일행을 끌어내기 위해 모르를 인질로 삼아 데려간 것이었다.
여기서 트리거 일행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쿠마는 모르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었다.
성주의 입장에선 이건 그야말로 미친 짓이다.
자기 아들의 복수를 위해 대지교에 싸움을 거는 일이 아니던가.
대지교는 교세가 작은 종교가 아니었다.
인간의 생활에 전반적으로 깊은 영향을 미치는 거대종교다.
그 거대종교에서 보호하는 성자를 이런 식으로 잡아가면 그 파장이 만만치 않다.
“말리지 않은 게 아니라 말리지 못한 겁니다.”
베르타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성주야 당연히 이 미친 짓을 말리고 싶었다.
그런데 성의 무력은 아쿠마가 장악하고 있었다.
아쿠마는 소드 마스터이기 때문이었다.
군권을 장악한 소드 마스터가 이런 식으로 미쳐 날뛰면 현실적으로 성주가 그걸 제어할 방법이 없었다.
“아쿠마란 작자가 미쳤군요.”
트리거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수중에서 통제를 받아야 할 칼이 자기 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권력자에게 있어 이보다 위험한 게 어디에 있으랴,
이 일이 좋게 풀려도 성주는 아쿠마를 경계할 것이다.
“이러다가 아무래도 아쿠마가 성자님을 해치려 하지는 않을지 걱정스럽습니다. 헌데 몬스터는 언제쯤 쳐들어올까요?”
베르타가 트리거에게 물었다.
“글쎄요. 원래라면 이맘때쯤 쳐들어왔으니 얼마 안 남았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지요.”
트리거가 말했다.
트리거는 지투스에게서 미래의 기억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이 미래의 기억이란 게 사안에 따라 명확하기도 하고 흐릿하기도 했다.
지투스 본인이 직접 겪은 일은 기억이 선명하고, 소문으로 들은 건 기억도 흐릿했다.
또한 근자에 겪은 일은 기억이 선명하고, 과거에 겪은 일은 기억이 흐릿했다.
아트론이나 하누스 성의 멸망 소식은 지투스가 수십여 년 전 과거에 소문으로 접한 일이다.
그만큼 기억이 흐릿하고 부정확했다.
그래서 성의 습격 날짜를 정확하게 말을 못하고 대략 보름 전후라고 한 것이다.
아트론 성에서는 예고한 날짜에 정확하게 몬스터가 쳐들어왔다.
하지만 그건 우연의 일치였다.
지금은 그 우연의 일치가 통하지 않아서 날짜가 어긋난 것이다.
물론 제일 좋은 것은 하누스 성에 몬스터가 쳐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트리거가 계속 미래를 이야기한 탓에 나비효과도 점점 커져가니,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 나비효과로 하누스 성에 몬스터가 쳐들어오지 않으면, 트리거는 사기꾼 소리를 듣더라도 그걸 기뻐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쿠마가 미친 짓을 해대서 일이 워낙 꼬이다 보니, 오히려 몬스터의 침입을 기다리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 미친놈이 더는 미친 짓을 안 했으면 좋겠는데…….”
트리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석세스는 가만히 있던 일행에게 도전을 해서 코가 잘려나갔다.
원인 제공을 먼저 했으니, 아쿠마가 화가 난다고 해서 날뛰는 건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사태를 논리적으로 볼 때의 이야기다.
자식의 코가 잘려나갔는데 원인 제공을 이쪽이 했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아버지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 아버지가 상당한 권력자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감안해도 지금 아쿠마가 하는 행동은 상궤를 벗어난 미친 짓이었다.
트리거는 아쿠마가 더는 미친 짓을 벌이지 않기를 기대했다.
* * *
아쿠마는 상당한 미남자였다.
남녀 모두 상당한 호감을 가질 만한 호남형 스타일이었다.
코를 빼고는.
아쿠마는 들창코였다.
코가 심하게 들려서 정면에서도 콧구멍이 보일 정도였다.
그게 아쿠마의 외모를 망쳤다.
그의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같이 자란 또래들은 그를 놀렸다.
여자들은 그를 아예 상대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자신의 외모에 대한 열등감을 수련으로 풀었다.
그리고 그걸 원동력으로 끝내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
그런 그가 낳은 자식이 석세스였다.
석세스는 외모가 그를 빼다 박았다.
거기에 코도 정상이었다.
그런 석세스의 외모는 그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외모에 대한 열등감을 치유해주었다.
그런 석세스의 코가 잘렸다.
석세스는 지금 자신의 방에서 물건을 집어 던지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쿠마의 눈을 뒤집히게 만들었다.
아쿠마는 일이 벌어지자마자 병사들을 성문에 배치했다.
그리고 성을 오가는 행인들을 일일이 검문했다.
행여 트리거 일행이 변장을 하고 성을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검문 과정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 성문을 오가는 줄이 예전의 몇 배로 길어졌다.
그로 인해 불평불만이 늘어났다.
그래서 그걸로 불평하는 상인들 몇 놈의 목을 쳐버리자 더 이상은 불평이 나오지 않았다.
성엔 입구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 뚫린 개구멍도 있었다.
아쿠마는 하누스 성의 기사단장이 된 지 30년째였다.
성에 개구멍이 있고.
온갖 잡놈들이 감시의 눈을 피해 개구멍을 오가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개구멍 주변에 수하들을 잠복시켰다.
그리고 개구멍을 출입하는 놈들을 감시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온갖 잡놈들이 개구멍을 드나들었다.
하지만 놈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놈들은 성안에 있다.
이놈들은 반드시 잡아야 한다.
그래서 같은 일행인 모르를 인질로 삼아 트리거 일행이 나올 것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었다.
* * *
분노는 인간의 시야를 좁게 만든다.
지금의 아쿠마가 그랬다.
성자를 이렇게 대하면 대지교와의 사이가 최악으로 치닫는다는 것을 아쿠마는 무시했다.
성주와의 관계가 금이 가는 것도 모른 척 했다.
거기에 그는 모르가 트리거와 결탁해 재앙을 핑계 삼아 사람들을 현혹하고, 축복으로 돈을 긁어대는 사기꾼이라고 확신했다.
그 확신이 그의 분노에 정당성을 더해주었다.
하지만 일행이 정말 그런 사기꾼 집단이라면 모르를 잡아간다고 해서 숨은 데에서 나올까?
아쿠마는 성자를 잡아갈 정도로 분노하고 있는데?
그는 그런 기본적인 사실도 무시했다.
아니, 무시해야 했다.
현재 놈들을 잡을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모르를 감옥에 가둔 지 3일이 지났다.
트리거가 예언한 몬스터 침입 날짜로부터는 정확히 6일째 되는 날이었다.
하지만 6일이 지나도 몬스터는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34화
“성자님을 풀어주어라!”
“성자님을 계속 가두면 여신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몬스터 대신 신도들이 모르를 가둔 감옥에 몰려들어 성자님을 풀어주라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기사들이 나서서 신도 무리를 몽둥이로 두들겨 패며 해산을 유도했다.
하지만 종교란 건 핍박을 받을수록 더욱 강해진다.
기사들이 핍박할수록 신도들은 더 많은 숫자가 모여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아쿠마는 그런 군중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몬스터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만 봐도 이놈들은 사기꾼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런 사기꾼들에게 열광할까?
‘그 사기꾼들이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닐까?’
문득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사람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까지 모여서 소란을 피울 이유가 없었다.
그 사기꾼들이 모르를 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군중 속에 사기꾼도 있을 것이다!
아쿠마의 분노는 이미 광기로 발전되어 정상적인 판단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는 그런 자신을 의식치 못하고 있었다.
“그 성자라는 노인네를 광장으로 끌고 와라!”
아쿠마가 명령했다.
보란 듯이 성자를 광장으로 끌고 가 채찍질을 가할 생각이었다.
그럼 더 많은 군중들이 그걸 보기 위해 광장으로 몰려들 것이다.
그리고 그 군중들 속에 트리거 일행도 있을 것이다.
그는 기사들과 병사들을 광장 곳곳에 배치해 트리거 일행을 반드시 잡을 계획을 세웠다.
선임 기사는 그런 아쿠마의 명령을 듣고 잠깐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선임 기사도 바보는 아닌지라 일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쯤은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쿠마의 명령에 반할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아쿠마 본인은 의식치 못하고 있지만, 그의 얼굴은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의 얼굴이 광기로 번들거린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상황인가?
까딱 처신을 잘못했다간 그 자리에서 목이 잘릴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이 기사로 하여금 찍소리도 못하고 명령을 따르게 만들었다.
* * *
병사들은 모르를 광장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성자님!”
“이럴 수는 없습니다.”
뒤에선 군중들이 비명을 지르며 그런 모르의 뒤를 따랐다.
“비켜!”
“떨어져!”
병사들은 모르와 군중 사이에 서서 몽둥이로 군중들을 두들겨 패며 거리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 군중들의 중간쯤에서 비데르와 성기사 두 명이 걷고 있었다.
군중들은 감히 그들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수로 옆에 접근하기라도 하면 움찔하며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지려고 했다.
무술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무의식중에 인지할 정도로 그들의 몸에는 살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광신자 중에 광신자가 성기사다.
그런 성기사들이니 성자로 추앙받는 모르가 수모를 당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만 볼 리는 없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건, 이 사태를 대지교의 본부에 보고하고 성기사들을 지원받기 위해서였다.
그 보고로 인해 대지교에선 본부에 있던 모든 성기사를 급히 하누스로 파견 보낸 상황이었다.
길어도 하루 이내에는 그 성기사들이 하누스에 도착한다.
성기사와 기사 사이에 피바람이 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아쿠마가 성기사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일을 저지르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지교의 성자가 속인에게 모욕을 당하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아쿠마가 일을 저지르면 그들은 목숨을 다해 싸울 생각이었다.
그런 군중 속엔 트리거 일행도 섞여 있었다.
트리거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아쿠마가 이렇게까지 미친 짓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얼굴이 굳은 건 푸코도 마찬가지.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잘못은 없었다.
상대가 먼저 덤볐고.
자신은 거기에 대응한 것뿐이었다.
상대가 죽이려고 드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걸로 인해 일이 이렇게까지 커져 버렸다.
그러니 자신의 잘못은 없더라도 책임감을 느끼긴 했다.
하지만 어떻게 일을 수습해야 할지를 몰랐다.
* * *
어느새 아쿠마가 모르를 데리고 광장에 도착했다.
군중들도 모르를 따라 광장을 가득 메웠다.
광장의 사방을 기사들과 병사들이 둘러쌌다.
그리고 군중들의 얼굴을 하나씩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도적 길드의 길드원 수십 명도 군중들 사이를 쉴 새 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평소와는 달리 군중들의 주머니를 노리지 않았다.
대신 군중들의 얼굴을 진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쿠마가 따로 군중 속에서 일행을 찾아달라고 고용한 상태였다.
아쿠마는 모르를 데리고 광장에 마련된 연단 위에 올라왔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사람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 자는 몬스터가 쳐들어온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려 민심을 흉흉하게 하고, 그걸로 축복을 팔아 사익을 도모했다. 그러니 채찍형을 선고한다!”
비데르와 성기사들은 일제히 허리로 손을 가져가 무기를 잡았다.
“거짓말!”
“거짓말!”
군중들은 그런 아쿠마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집행관이 모르에게 다가갔다.
아쿠마는 계속 군중들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혹여 있을지도 모르는 트리거 일행을 살펴보고 있었다.
“준비해라. 집행관이 형을 집행하려는 순간, 곧바로 치고 들어간다.”
트리거는 푸코와 타미두스에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자신들 때문에 모르가 피해를 입게 놔둘 수는 없었다.
사실 타미두스를 군중 속에 푸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타미두스의 살기가 발동하면 일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 * *
성의 입구는 오가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경비병들은 출입객들의 짐을 일일이 검사하고 있다.
기사들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러다 경비병의 수색이 미진하다 싶으면 기사들이 직접 나서서 짐을 수색했다.
이렇게 철저하게 수색하다 보니, 줄은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게 늘어져 도무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사람들의 입에선 불평이 쉼 없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경비병이나 기사들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아쿠마가 트리거를 잡기 위해 미쳐 날뛰고 있기 때문이었다.
석세스의 상처를 보고 아쿠마가 미쳐 날뛰는 걸 휘하의 기사들은 모두 목격했다.
행여 트리거 일행이 자신들의 감시를 뚫고 성을 탈출하기라도 한다면… 그 후환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이 불평을 하건 말건 아랑곳 하지 않고 일일이 마차와 수레를 뒤지고.
방문객들의 인상착의를 주의 깊게 보는 등 검문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니 줄이 길어질 수밖에.
“빨리 빨리 합시다.”
“이러다 길바닥에서 자겠습니다.”
“오늘 나가지 않으면 물건이 다 상해요. 상하면 책임질 겁니까?”
“여기 출입증이 있습니다. 출입증에 문제가 없으면 보내줘도 되는 것 아닙니까?”
줄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불평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어어?”
“저, 저게 뭐야?”
그때 입구 쪽 후미의 줄에서 의문에 찬 목소리들이 튀어 나왔다.
저 멀리 지평선에서부터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먼지구름은 성 쪽으로 급격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몬, 몬스터다!”
“오크다. 오크 무리가 쳐들어왔어!”
먼지구름이 가까워지며 그 속에 있던 것들의 정체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오크들이었다.
“오크 라이더다!”
간격이 더욱 좁아지며 오크들이 집채만 한 늑대들을 타고 달려오는 게 보였다.
늑대의 속도가 워낙 빨라 오크와 사람들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도망쳐!”
사람들은 우르르 성문 안으로 도망쳤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다 보니 성문은 순식간에 사람들로 가득 차버렸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경비병들은 다급히 성문을 닫으려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성문을 가득 메워서 성문을 닫는 게 불가능했다.
늑대들은 그 무리 속으로 달려들어 사람들을 물어뜯었다.
늑대의 덩치가 워낙에 커서 한 입에 사람들의 상반신이 날아갔다.
뒤를 이어 오크들이 일제히 몽둥이나 도검을 휘둘렀다.
“아악!”
“으아악!”
사람들 사이에서 피보라가 일어났다.
* * *
집행관이 채찍을 들고 모르 앞에 섰다.
모르는 굳은 얼굴로 그런 집행관을 바라보았다.
채찍을 든 집행관은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분은 진짜다.’
모르의 눈을 본 순간 집행관은 직감적으로 그걸 알았다.
그동안 집행관은 수많은 죄수에게 채찍질을 가해왔다.
그렇게 집행관으로서의 경험이 쌓이다 보니, 형벌을 집행하는 순간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그가 정말로 죄를 지었는지 여부를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런 데에 신경을 쓰기에는 그의 감성이 너무 메말랐으니까.
그러니 모르가 죄가 있건 없건 늙은이건 세 살 먹은 어린아이건, 일단 명령이 떨어지면 형을 집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이분은 진정한 성자였다.
이런 분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건 신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것과 같았다.
채찍을 든 집행관의 손이 벌벌 떨리는 것을 본 아쿠마는 짜증 어린 어조로 소리쳤다.
“어서 시행하지 않고 뭐하나!”
집행관은 그 말을 듣고도 여전히 미적거렸다.
그걸 보고 아쿠마는 집행관의 손에서 채찍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모르를 향해 내리치려 할 때였다.
“단장님! 오크들의 습격입니다!”
기사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와 급히 소리를 쳤다.
기사의 금속갑옷은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고.
그 찢겨진 부위에선 피가 뭉클뭉클 흐르고 있었다.
아쿠마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뒤를 이어 오크들이 집채만 한 늑대들을 타고 광장 안으로 뛰어 들었다.
“오, 오크다!”
“오크들의 습격이다!”
“그자의 예언에 맞았어!”
군중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쳤다.
“예언이 맞았다!”
“예언대로 오크가 쳐들어왔다!”
예언이란 말에 아쿠마는 이를 악물었다.
이게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모르는 사이비가 아닌 진짜 성자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자신이 오크의 습격을 막지 못하고 죽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오크 라이더들은 군중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 군중 속에서 병사들과 기사들은 오크 라이더들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아쿠마는 트리거 일행을 군중 속에서 잡아내기 위해 모든 가용병력을 광장에 집중시켰다.
이게 습격에 대비해 미리 병력을 집중시킨 모양새가 되었다.
쓸데없이 시간을 소모하지 않고 방어태세를 갖춘 것은 행운이었다.
그런데 쓰러지는 게 일방적으로 인간들이란 게 문제였다.
기사의 기마돌격을 지상에서 대응하려면 그에 맞는 대 기마전술을 짜야 한다.
그런 전술도 없이 맨 몸으로 기사들의 기마돌격을 막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오크 라이더의 돌격은 기사의 기마돌격보다 대응이 더 까다로웠다.
말은 일직선으로 돌진하지만, 늑대들은 거기서 좌우의 변화를 주고 발톱과 이빨로 오크처럼 공격하기 때문이다.
기사와 병사들은 허겁지겁 오크 라이더의 습격을 막다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어디 있느냐? 오크 대전사가 어디에 있어?”
아쿠마는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에 자극받은 오크 라이더가 늑대를 타고 그에게 돌진했다.
늑대의 강력한 이빨이 그의 상반신을 통째로 물어뜯으려고 했다.
그 순간 아쿠마의 손이 허리로 향했다.
그리고는 검을 뽑는가 싶더니, 푸른 손이 기다란 궤적을 그리며 오크 라이더의 몸을 갈랐다.
촤악!
오크 라이더와 늑대의 몸은 단번에 오러에 의해 갈라졌다.
그는 사방을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오크 대전사를 발견했다.
오크 대전사는 늑대를 탄 채 철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휘두르는 철봉엔 붉은 오러가 어려 있었다.
앞을 막은 기사는 방패를 내밀어 그 몽둥이를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철봉과 방패가 부딪치는 순간 방패는 박살이 났다.
철봉은 이어서 기사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기사는 황급히 검을 뽑아 철봉을 향해 휘둘렀다.
하지만 검도 철봉과 부딪치자마자 중간에서부터 부러져 날아갔다.
이어서 철봉이 기사의 투구를 내리쳤다.
기사의 투구가 우그러졌다.
투구 속에 있던 머리가 박살나며 뼈와 살점이 투구 밖으로 튀어 나왔다.
아쿠마는 그걸 보고 이를 부득 갈며 오크 대전사에게 돌진했다.
35화
비데르는 성기사들과 함께 연단 위로 달려가 모르의 주변을 지켰다.
트리거와 푸코, 타미두스도 거의 동시에 연단 위로 몰려왔다.
“아악!”
“으아악!”
사방에서 쉴 새 없이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연단을 향해 밀려들기 시작했다.
성기사 세 명은 방패로 접근하는 사람들을 밀어냈다.
하지만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성기사들의 몸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몰리는 사람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었다.
성기사들이 뒤로 밀리면서 사람들이 그들이 있던 곳까지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군중들에 의해 일행이 압사당할 판이었다.
그 순간,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르가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여신이여. 이들에게 당신의 축복을 내리소서.”
모르의 몸에서 파란 신성력이 일어나 세 성기사에게 스며들었다.
그러자 성기사들의 몸에 힘이 붙으며 사람들의 압력을 버티기 시작했다.
“여신이여. 이들에게 당신의 은혜를 내리소서!”
모르는 다시 기도를 했다.
하늘에서 푸른빛이 모르의 몸으로 내려왔다.
그 빛이 모르의 몸에서 압축되더니 폭발하듯 광장 전체로 퍼졌다.
그러자 광장을 넝쿨들이 담처럼 둘러싸기 시작했다.
광장으로는 오크 라이더들이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그러다 담을 형성한 넝쿨들에 막혀 더 이상은 들어오지 못했다.
시내 곳곳에서는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아악!”
“살려줘!”
성 전체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일부 시민들은 오크 라이더들에게 쫓기다 하필이면 광장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광장은 모르가 넝쿨 담장을 둘러쳐서 안으로의 진입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오크 라이더들은 담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을 장난감처럼 죽여대기 시작했다.
넝쿨 담장이 보호하고 있던 광장 안의 사정도 바깥보다 좋지는 않았다.
이미 수십 마리의 오크 라이더가 모르가 주문을 펼치기 전에 광장 안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넝쿨 담장 안에서 사람들을 상대로 마구 날뛰었다.
오크들이 탄 늑대는 사람들을 물어뜯었고, 오크의 몽둥이가 사람들의 머리를 부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광장은 바늘 하나 꽂을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오크 라이더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늑대에게 물려 죽거나 오크의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넝쿨 담장을 치우지 못했다.
광장 밖에서 더 많은 오크 라이더들이 광장 안으로 계속해 모여 들었기 때문이었다.
트리거는 그 광경을 바라보다 군중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 비좁은 사람들의 틈을 트리거는 무인지경으로 돌아다녔다.
신행백변!
신행백변(神行百變)은 이런 좁은 장소에서 최적의 위력을 발휘한다.
군중 속을 돌아다니며 트리거는 대지교의 신관들을 무를 뽑듯이 뽑아 연단 위로 던졌다.
대지교의 성자인 모르가 광장으로 끌려오자, 대지교의 신관들도 그걸 항의하기 위해 모두 광장으로 뛰쳐나와 있었다.
그러다 군중들이 움직이는 대로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었다.
건장한 신관은 그 휩쓸림에 그럭저럭 버티고 있었지만, 몸이 약한 신관은 압사당하기 일보직전까지 몰려 있었다.
트리거는 그런 신관들을 모두 군중 속에서 골라내 연단으로 집어던졌다.
그런 신관들이 약 20여 명.
모르가 아무리 성자라 해도 육체를 가진 이상 발현하는 신성력엔 한계가 있다.
그러니 지속적인 신성력의 발현을 위해선 신관들의 보조가 필요했다.
그 다음으론 타미두스를 업고서 아쿠마가 오크 대전사와 싸우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아쿠마와 오크 대전사는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싸우던 장소는 광장 안, 사람들 속이었다.
그들은 주변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싸우고 있었다.
군중들은 서로에게 부대껴서 오크 대전사의 몽둥이와 아쿠마의 검을 피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오크 대전사의 몽둥이와 아쿠마의 검에 의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머리가 터지거나 신체가 잘려나갔다.
아쿠마는 늑대에 물려 왼쪽 팔이 팔꿈치 아래부터 잘려 나간 상태였다.
아쿠마와 오크 대전사는 똑같은 20레벨이었다.
그들의 실력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비슷했다.
하지만 오크 대전사는 늑대를 타고 있었다.
기사가 말을 타면 역량이 몇 배나 강해지듯, 오크 라이더도 늑대를 타면 그 역량이 몇 배나 강해진다.
말을 탄 기사와 말을 안 탄 기사가 정면에서 부딪치면 당연히 말을 탄 기사가 이긴다.
그것처럼 늑대를 탄 오크 대전사가 평지의 소드 마스터를 맞아 싸우니, 당연히 오크 대전사가 싸움에 있어 우세를 점하는 것이었다.
* * *
트리거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자신보다 덩치가 크고 무거운 근육질의 전사를 업고 군중들을 뚫고서 여기까지 오는 건, 트리거의 경지에서도 쉽지 않았다는 의미다.
하지만 타미두스에게는 신행백변 같은 보법이 없다.
물론 힘을 앞세워 밀고 들어가면 길을 열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군중의 혼란은 더욱 커지고, 타미두스의 흉성도 폭발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덩치에 안 맞게 트리거가 타미두스를 업고 이동한 것이었다.
트리거는 아쿠마와 오크 대전사가 싸우던 현장에 가까이 접근했다.
그러자 타미두스가 트리거의 등을 박차고 오크 대전사를 향해 날아갔다.
타미두스의 거대한 몸집이 붕새처럼 오크 대전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타미두스는 오크 대전사의 머리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오크 대전사는 쇠몽둥이로 타미두스의 도끼를 받아쳤다.
꽈앙!
폭발음이 울렸다.
타미두스가 자신에게서 떨어지자마자, 트리거는 신행백변으로 아쿠마의 뒤로 이동했다.
거기서 아쿠마의 등을 발로 걷어찼다.
그 공격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쿠마는 몸이 앞으로 밀려갔다.
늑대가 그런 아쿠마의 상반신을 물어뜯었다.
트리거는 이곳까지 달려오며 아쿠마가 오크 대전사와 싸우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쿠마는 열세에 처한다 싶으면 사람들을 오크 대전사에게 집어던져 활로를 찾았다.
그와의 원한은 둘째 치더라도 이런 놈을 살려둘 수는 없었다.
트리거는 상체가 사라진 아쿠마의 발 사이를 지나 늑대의 배 아래로 몸을 날렸다.
늑대는 아쿠마의 몸에 시야가 가려 트리거가 자기 배 아래로 들어오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
트리거는 늑대의 배에 검을 찔러 넣고는 앞으로 그었다.
늑대의 피와 장기가 트리거의 몸으로 쏟아졌다.
그때 또다시 타미두스의 도끼와 오크 대전사의 철몽둥이가 충돌했다.
쾅!
배가 찢어진 늑대는 그 충돌을 견디지 못하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오크 대전사는 두 눈을 부릅떴다.
트리거의 검이 늑대의 몸을 관통하고 계속 올라가 오크 대전사의 항문에 박힌 것이다.
거기서 트리거는 검을 앞으로 그었다.
오크 대전사의 항문을 관통한 검은 오크 대전사의 아랫배로 빠져 나왔다.
레벨업!
트리거의 레벨은 17레벨에서 18레벨이 되었다.
타미두스는 땅에 착지했다.
그녀의 도끼는 실금이 가고, 팔은 팔꿈치가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오러가 가한 충격을 도끼와 그녀의 육체, 둘 다 감당하지 못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에서는 혈광이 번뜩였다.
마병의 마기였다.
혜광심어는 그녀의 정신에 댐을 만들었다.
그 댐 밖에는 마병의 마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댐의 문을 열면 마기가 그녀의 정신을 가득 채웠다.
그러면 그녀는 외부의 적을 상대로 그 가득 채운 마기를 폭발 시켰다.
그래서 마기가 어느 정도 해소되면 정신의 댐을 닫았다.
이게 마병을 다루는 그녀의 수련이었다.
그녀는 주변에 있던 다른 오크 라이더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도끼를 왼손으로 바꿔 쥐고 전투에 돌입했다.
몇 합 지나지도 않아 오크 라이더와 늑대가 그녀의 도끼에 차례로 죽어나갔다.
그러자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죽은 오크와 늑대의 몸에서 붉은 혈기가 일어나 타미두스의 도끼에 흡수되었다.
그 순간 도끼에 붉은 혈기가 어리며 도끼 전체에 난 금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혈기는 타미두스의 손을 통해 몸으로 흡수되었다.
그러자 타미두스의 꺾인 팔꿈치가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타미두스는 혈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오크 라이더를 찾아 달려갔다.
워낙 사람들이 몰려 있어서 헤치고 가는 게 힘들었다.
그러자 타미두스는 힘으로 사람들을 밀어붙여 길을 만들며 이동했다.
“아악!”
“밀지 마!”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타미두스는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 하지 않고 길을 만들며 달려갔다.
그러면서 오크 라이더들이 보이면 곧바로 돌진했다.
마병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오크 라이더들의 몸은 순식간에 쪼개졌다.
* * *
트리거는 신행백변 신법으로 오크 라이더들 사이를 누비며 검을 휘둘렀다.
오크들은 트리거의 공격에 몇 합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실력 차도 실력 차지만 지형 자체가 오크 라이더들에게 불리했다.
오크 라이더는 늑대를 타고 다닌다.
늑대를 타고 다니니 공간이 넓어야 제 힘을 발휘한다.
밀집된 공간은 환경 자체가 늑대에게 운신의 제약을 준다.
반면 트리거는 신행백변으로 좁은 공간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니 오크 라이더들이 트리거의 검술에 맥을 못 추는 것이다.
푸코는 연단에서 모르를 호위하고 있었다.
간혹 가다 군중을 뚫고 들어온 오크 라이더가 모르를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엔 푸코가 마법으로 오크 라이더를 물리쳤다.
일행은 힘을 합쳐 반나절 만에 넝쿨 담장 안에 있던 오크 라이더들을 간신히 처리했다.
하지만 그래도 일은 끝나지 않았다.
시내를 초토화 시킨 오크 라이더들이 계속 광장 쪽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쉬지 않고 넝쿨 담장을 도끼나 칼로 찍어댔다.
처음엔 그런 오크 라이더들의 타격을 견디던 넝쿨 담장도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흔들림이 심해진다 싶으면 트리거와 타미두스가 차례로 밖에 나가 오크 라이더들의 어그로를 끌고 넝쿨 담장에 가해지는 압력을 분산 시켰다.
넝쿨 담장 안에서는 타미두스보다 트리거의 활약이 컸다.
트리거는 신행백변으로 군중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였지만, 타미두스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바깥에 나오면 타미두스는 트리거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압도적인 활약을 했다.
트리거는 오크 라이더들이 공격하면 신법을 사용해 적절하게 수비를 하고 반격을 가했다.
하지만 타미두스는 자기 몸이 상하건 말건 아랑곳 하지 않고 오크 라이더 무리 가운데 정면으로 뛰어 들었다.
오크 라이더들은 붉은 달의 광기에 젖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싸웠다.
그런데 타미두스도 마병의 광기에 젖어 자기 몸의 안위 따위는 개한테나 줘버려라 하고 싸웠다.
서로의 무기가 쉴 새 없이 서로의 몸에 박혔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나가떨어지는 건 오크 라이더였다.
마병엔 흡혈의 공능이 있어 죽인 상대방의 잠재력을 흡수해 자신의 내공으로 만든다.
그러나 오크 라이더들에겐 그런 능력이 없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싸우며 오크 라이더의 잠재력을 계속 흡수한 타미두스의 도끼에는 검붉은 광채가 어리기 시작했다.
오러였다.
상대방의 잠재력을 계속 흡수하며 타미두스는 시스템 기준으로 20레벨에 올라 있었다.
시스템의 효율성은 마병보다 뛰어나다.
하지만 싸움에 임하는 자세에 차이가 있었다.
트리거는 적절히 자기 몸을 돌보며 싸웠다.
하지만 타미두스는 광전사 상태가 되어 자기 안위는 전혀 돌보지 않았다.
그러니 타미두스의 발전 속도가 트리거보다 훨씬 빠른 것이다.
* * *
모르는 밤이 새도록 결계를 펼쳤다.
푸코는 그 옆에서 밤새 모르를 보호했다.
비데르와 다른 성기사들 두 명도 마찬가지.
타미두스와 트리거는 밤이 새도록 오크들과 싸웠다.
모두들 몸이 녹초가 되었다.
트리거는 손아귀에 힘이 풀려 검을 제대로 쥐지도 못할 정도였다.
36화
전투 초기엔 타미두스의 눈동자만 마병의 마기에 의해 붉은 색으로 변했다.
그런데 계속 싸우며 타미두스의 눈은 흰자위마저 붉게 변했다.
하지만 밤새 싸우며 붉게 변한 흰자위는 조금씩 제 색으로 돌아왔다.
마기를 밤새 마음껏 발산하며 마기를 통제하는 요령을 조금씩 터득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르가 펼친 넝쿨 담장은 하룻밤 동안 무너지지 않고 오크 라이더들의 공격을 버티어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대지교의 성기사 수백여 명이 하누스 성으로 내려왔다.
트리거 일행은 그들과 힘을 합쳐 오크 라이더들을 하누스 성에서 몰아냈다.
하지만 광장에서 모르의 신성력에 보호를 받고 있던 군중을 제외한 성의 모든 사람들은 오크 라이더들의 습격에 거의 전멸한 상황이었다.
광장의 군중들도 서로 밀고 밀리며 세 자릿수가 넘는 사람들이 밟혀 죽었다.
광장의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200여 명.
성 전체 인구와 비교하면 트리거의 예언대로 전멸 당했다고 해도 무방한 수의 생존자였다.
하지만 트리거의 기억에 의하면, 원래 하누스의 성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서너 명에 불과했다.
본래 역사에 비하면 나름대로 선방한 셈이었다.
“성자님, 그만 교단으로 돌아오시지요. 계속 여행을 하시면 성자님의 안전을 담보할 수가 없습니다.”
지원을 나온 성기사단장이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성자를 존경한다.
하지만 대부분이지 전부는 아니다.
아쿠마 같은 인간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
모르는 신성력은 뛰어나지만 자신을 보호하는 무력은 없다.
그런 놈이 다시 나타나 겁박하면 성자의 신변이 위험해진다.
거기에 지금 모르는 트리거와 같이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트리거는 위험한 곳만 골라서 다니고 있었다.
지금도 트리거가 머무는 곳에 우연찮게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트리거가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는 장소를 찾아온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모르의 신변이 위험해진다.
그러기 전에 모르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야 했다.
“안 돼. 나는 다른 할 일이 있네.”
모르는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그게 모르님의 안전보다 중요한 일입니까?”
“신의 뜻일세.”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도 따르겠습니다.”
성기사단장이 바로 말했다.
상황을 남의 일처럼 지켜보던 트리거는 그 말을 듣고 기겁을 했다.
현재 파견 나온 성기사들은 무려 500여 명이다.
벽돌처럼 꽉 막힌 광신자 500여 명과 함께 여행을 하라고?
거기서 일어나는 온갖 말썽거리. 귀찮음은 누가 다 감당하고?
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하면, 미래에 대한 대비는커녕 이들 뒤치다꺼리를 하는 데에 심력을 다 소모해 버릴 터였다.
“모르님. 잠깐 저와 이야기를 좀 하시지요.”
트리거가 모르를 따로 데려와서 물었다.
“혹시 여신께서 저와 동행하라고 하신 겁니까?”
모르는 트리거와 동행하며 그 목적을 한 번도 그에게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그건 동행 자체가 모르의 목적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래.”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여신께선 그대가 소명의 어려움에 매몰되지 않도록 도우라고 하셨네.”
성직자가 성직을 택할 때는 소명(召命)을 받았다고 이야기 한다.
신, 혹은 운명.
어떤 초월적인 존재의 부름을 받아 그 직업을 택했다는 의미다.
정말 그럴 수도 있고, 해당 직업을 선택한 사람의 단순한 느낌일 수도 있다.
하지만 트리거의 경우에 그건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모르는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룩한 불꽃이 트리거의 몸과 영혼을 휘감고 있는 걸 보고 있었다.
그 거룩한 불꽃은 트리거의 귀에 대고 너의 임무를 잊지 말라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인간이 이런 일을 당하면 그 압박감에 미치고 만다.
트리거에게 심적인 휴식을 제공해 그 압박감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게 모르의 임무였다.
“모르님. 제가 그런 압박감에 짓눌리는 것처럼 보입니까?”
트리거가 웃으며 반문했다.
“아니.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네.”
모르가 말했다.
트리거는 소명에 짓눌리지 않고 건강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트리거가 이렇게 건강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 건 그만큼 그의 정신력이 대단해서라면 좋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트리거도 정신력은 인간이라는 범주 안에 있었다.
그 범주를 벗어나는 압박감은 트리거도 버티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한계를 벗어난 압박감을 버티고 있었다.
그건 트리거가 익힌 무술 중에 양의신공과 금강부동심법 덕분이었다.
양의신공은 마음을 나눈다.
즉, 아무리 마음이 동요되는 상황일지라도 분리된 마음은 평정심을 유지한다.
거기에 더해 익힌 심법이 금강부동심법이다.
이 심법은 수련자의 마음속에 하늘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을 부동심을 만들어준다.
이 두 심법이 어우러져 트리거가 사명의 무거움에 짓눌리지 않는 것이었다.
거기에 이 두 무공은 대표적인 정파의 무술이다.
그래서 수련자의 본성에 잠재된 선한 면을 자극했다.
트리거는 가문에서 소외되고 배척받으며 자랐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자신의 아픔은 크게 생각하고, 타인의 아픔은 작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람이 힘을 가지면, 그 힘을 타인이 입을 피해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독선적으로 휘두른다.
그런데 이 두 무술이 본성의 선한 면을 계속 자극해 트리거로 하여금 용사다운 행보를 이어가게 했다.
시스템은 인격이 없는 운영체제다.
후계자가 선택하는 것을 충실히 제공할 뿐이다.
그 시스템이 제공하는 무술 중엔 사공(邪功), 마공(魔功) 류의 무술도 한 가득이었다.
만일 트리거가 그런 무술을 익혔다면 상황은 전혀 반대로 돌아갔을 것이다.
“저는 결코 사명의 무거움에 짓눌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따라가세요. 모르님은 저를 보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셔야 합니다.”
“그게 뭔가?”
“제가 지금까지 한 말. 마왕의 강림과 세상의 멸망을 믿으십니까?”
“믿네.”
“그렇다면 곧바로 대지교의 본산으로 가지는 마세요. 최대한 먼 거리를 경유하며 병자들을 치료하세요. 도시의 유력자가 만나자고 하면 만나세요. 같이 음식을 먹고 환담을 나누세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여신의 축복을 내려주세요. 그러면서 미래의 예언을 계속 말씀하세요. 한 명이라도 많이 이 일을 알게 하세요.”
“…….”
“대지교로 돌아가셔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자님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에게 미래의 일을 계속 말씀하세요. 듣는 사람이 많을수록 미래에 끼치는 영향도 커집니다. 그게 이후에 종말을 막는 데에 큰 힘이 될 겁니다.”
모르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마음은 언제나 내면으로 향한다.
그 내면엔 여신의 신성이 빛나는 불꽃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여신이여, 제가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모르는 내면의 신성에게 물었다.
“너의 뜻대로 행하거라.”
신성이 대답했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모르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리고 성기사들과 함께 도시를 떠날 준비를 했다.
트리거는 모르와 성기사들이 짐을 꾸리는 사이, 은밀히 비데르를 불렀다.
“무슨 일로 나를 불렀나?”
비데르가 의이한 얼굴로 물었다.
“앞으로 반년 내에 현 대지교의 교황인 아우레스 3세가 소천 하신다.”
“뭐라고?”
“내 예언이 시기에 차이만 있지 다 들어맞는 건 알고 있지? 그걸 감안해 최대한 늦게 잡아도 반년이야.”
트리거의 예언에 비데르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졌다.
“그 후에 교황위에 오를 인물은 대지교 역사상 가장 부패한 교황이 될 거야. 붉은 달 현상이 누적되고 몬스터의 침입은 날로 심해지는데, 차기 교황은 그걸 신의 심판이라 선언하지. 면죄부를 사면 신의 심판을 면제받는다고 말하면서. 그걸 핑계로 평민이고 귀족이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돈을 뜯어내지.”
“…….”
“교황이 부패하니 사제들도 다 같이 부패해. 성기사들은 부패한 사제의 도구가 되어 버리고. 결국 대지교는 인류연합의 암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다. 종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고, 마지막까지 인류연합의 발목을 잡게 되지. 그런 사태를 막아야 해.”
“그걸 어떻게 막지?”
비데르는 흔들리는 어조로 말했다.
“모르님을 차기 교황으로 추대해.”
“뭐라고?”
“모르님은 진정한 의미의 성자다. 그 분이 대지교로 들어가면 추종자가 많아지겠지. 그들을 결집시켜서 조직을 결성해. 그래서 발원권을 강화하는 거지. 후에 있을 콘클라베에서 모르님이 후보에 오르고 선출이 될 정도로 그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거야.”
“나, 난 못해.”
비데르의 목소리는 심히 떨리고 있었다.
트리거가 말하는 건 정치였다.
하지만 비데르는 전형적인 성기사.
흑마법사, 이단사교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은 잘해도 그런 정치는 서툴렀다.
아니, 서툰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생각도 안 해봤다.
“해! 해야만 해!”
트리거는 비데르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바짝 붙였다.
그리고는 그의 팔꿈치를 으스러져라 잡으며 말했다.
“성기사는 사제의 명령을 받들지. 넌 사제의 명을 받아 죄 없는 농부를, 농부의 아내를, 아이들을 죽일 텐가? 단지 농부가 헌금을 적게 냈다는 이유로? 사제가 그 농부의 토지를 압수하고 그 돈으로 처첩을 두는 것을 두고만 볼 텐가? 사방에선 몬스터가 날뛰고 도시가 불타고, 사람들이 공포로 울부짖는 시기에?”
“…….”
“그럴 때 누구보다 인류의 힘이 되어야 할 성기사가 사제의 명이라면서 헌금을 못낸 사람들을 화형대에 올리고 불태우는 꼴을 보기만 할 거야? 정말 그런 꼴을 보고 싶어? 거기에 참가하고 싶냐고!”
비데르는 이를 악물었다.
트리거가 손에 얼마나 힘을 주는 지 팔꿈치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통증보다 트리거의 말이 주는 정신적인 충격이 더 컸다.
“그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해. 넌 선택의 여지가 없어!”
“놔!”
비데르는 트리거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트리거를 노려보며 거칠게 말했다.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차기 교황의 이름은 마르켈 3세다. 그가 콘클라베에 참가하고 당선이 유력시되면 내 말을 믿겠지. 그런데 그때 가선 늦어! 지금부터 움직여야 해. 모르님을 교황위에 올릴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마르켈 3세를 죽여. 누가 교황으로 선출이 되든 그보단 나을 테니까.”
“빌어먹을!”
비데르는 욕설을 내뱉고 잔뜩 굳은 얼굴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모르와 함께 대지교로 돌아갔다.
* * *
손님들이 왔다.
하녀들은 손님을 맞이하고 음식을 내왔다.
방의 한가운데에 있는 탁자는 대리석 탁자다.
사기그릇에 담긴 음식이 그 테이블 위에 차례로 놓였다.
“저 아이를 팔라고요?”
그러다 주인이 한 아이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예.”
손님이 대답했다.
지목받은 하녀의 손길이 움찔했다.
하마터면 그릇이 깨질 뻔했다.
하녀는 입술을 깨물고 떨리는 손으로 계속 그릇을 배치했다.
사기그릇은 그녀의 몸값보다 비쌌다.
깨지면 채찍질이다.
“저 아이는 왜 사시려는 거요?”
주인이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손님, 트리거가 지목한 아이는 10대 중반의 소녀였다.
파릇파릇한 새순 같은 건강한 미모가 돋보였다.
하지만 그런 미모도 다른 하녀들 틈에 있으면 평범해 보였다.
다른 하녀들 또한 지목한 하녀 못지않게 건강하고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이 저택의 주인, 필로소스는 심미안이 뛰어나서 예쁘고 건강한 여자만 노예로 구입했다.
그런데 굳이 저 하녀, 마리를 콕 집어 사겠다는 이유가 궁금한 것이다.
“묘하게 제 마음에 끌려서 그렇습니다.”
트리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품으시지요. 어차피 저 아이도 남자를 알 때가 되었으니, 손님이 안는 것도 괜찮을 듯싶습니다.”
필로소스가 웃으며 말했다.
“한 번 안고 끝내는 것보다는 계속 데리고 다니며 즐기고 싶은데, 안 되겠습니까?”
트리거도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그건 안 되겠습니다.”
필로소스는 점잖은 태도로 거절을 했다.
37화
“저는 근본이 상인이라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는 뭐든지 팔 용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노예는 살아있는 생명입니다. 팔린 뒤의 상황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군요. 노예는 최소한의 안정적인 상황을 제공할 사람에게 팔고 싶습니다.”
“제가 저 아이를 산 뒤에 학대라도 하실 거라 생각하십니까?”
트리거가 물었다.
“아니요. 하지만 손님 일행은 모험가 아니십니까? 모험가시니 저 아이에게 안정적인 음식, 좋은 잠자리, 안정적인 거처를 제공할 수 없겠지요. 그런 험한 환경에 저 아이를 내몰 수는 없습니다.”
트리거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푸코는 들어왔을 때부터 내내 무표정했다.
타미두스는 걸신들린 사람처럼 음식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음식을 쓸어먹던 타미두스의 손가락은 계속 꿈틀거리고 있었다.
‘참아!’
트리거가 전음으로 타미두스에게 말했다.
그들은 베르타의 소개장을 들고 필로소스를 만나러 왔다.
저 하녀 또한 지투스의 동료였다.
그래서 트리거도 동료로 영입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문제였는데, 마침 하녀의 주인인 필로소스가 베르타와 안면이 있었다.
아니, 안면이 있는 정도를 넘어 필로소스가 파산의 위기에 처한 걸 베르타가 구해주었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부탁하는 건 뭐든지 들어줄 거라고 자신했다.
그래서 베르타의 소개장을 들고 왔는데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소개장을 들고 오자 필로소스는 한 상 거하게 차려 일행을 대접했다.
타미두스는 긴 여행길에 배가 주려 있었고, 타인의 눈은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라 손을 써서 마음껏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대화가 본론에 들어가자 입맛이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뭐든지 들어줄 것처럼 알랑 거리던 필로소스가 마리를 구매하려는 이유를 캐묻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트리거는 적당히 말을 흐리며 연막을 쳤다.
타미두스는 이런 대화가 맘에 들지 않았다.
느닷없이 손님이 찾아와 인연을 들먹이며 하녀 한 명을 달라고 했다.
그 이유를 궁금해 하는 심정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베르타는 필로소스가 자신의 부탁은 뭐든지 들어줄 것이라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런 자신감이 있을 정도로 은혜를 입힌 것이다.
그런 은혜를 입었다면 호기심을 접고 하녀 한 명쯤은 내어줄 만하지 않나?
그런데 필로소스는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녀 마리를 데려가려는 이유를 캐묻고 있었다.
뭔가 마리에게 자신이 모르는 가치가 있는데, 자신이 그걸 몰라 봐서 손해를 보는 게 싫은 것이었다.
그게 은혜를 입은 자의 태도인가?
타미두스는 속에서 불끈 성질이 치솟아 올랐다.
본래 성격도 이런 일에 분노를 참지 못하는데, 마병의 주인이 되면서 더욱 충동적이 되었다.
‘참으라고!’
그 충동을 참게 만든 건 트리거의 전음이었다.
트리거는 전음을 혜광심어로 익혔다.
그러니 혜광심어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났다.
단지 말뿐만이 아니라 본인의 심정까지 고스란히 전음을 통해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
그런데 트리거의 전음엔 짜증이 잔뜩 어려 있었다.
트리거도 베르타의 말을 믿었기에 복잡하게 일을 꾸미지 않고 바로 주인을 만나 본론을 말한 것이었다.
그런데 필로소스가 변죽만 올리고 있었다.
베르타는 친구를 잘못 사귀었다.
“……특히 저 아이는 딸처럼 아끼는 마음이 있어서 아이의 미래에 더욱 신경이 쓰입니다. 그냥 하룻밤 품는 것으로 만족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도저히 못 참겠다.’
타미두스는 도끼를 잡았다.
딸처럼 아낀다면서 하룻밤 품는 것으로 만족하란다.
이게 말이냐, 방귀냐?
참지 못한 타미두스는 도끼를 잡고 일어나려 했다.
그때 갑자기 왼쪽 뺨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깜짝 놀란 타미두스는 옆을 바라보았다.
왼쪽에는 푸코가 앉아 있었다.
푸코가 염력으로 냉기화살을 소환해 타미두스의 왼쪽 뺨에 살짝 갖다 댄 것이었다.
냉정을 찾으라는 의미.
냉기가 그녀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푸코는 태연한 얼굴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외모가 워낙 뛰어나서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조차도 격조가 있고 우아해 보였다.
시녀들은 그런 푸코를 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속이야 어떻든 겉으로 보이는 일행의 분위기는 무척 화기애애했다.
‘그래.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타미두스는 한숨을 내쉬며 음식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신이라면 벌써 도끼를 들고 끝장을 봤다.
도시인, 소위 문명인들은 야만인들이 단순하고 무식하다고 비웃는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속마음을 감추고 사는 삶이 정상적인 삶인가?
타미두스는 사람들의 저런 꼴을 보니 새삼 모든 것이 명확했던 숲이 그리웠다.
* * *
일행은 환담을 마치고 잡아놓았던 여관으로 돌아왔다.
여관으로 간다고 하자 필로소스는 그냥 자신의 거처에 머물라고 강력하게 권유했다.
귀한 손님을 허름한 여관에 머물게 할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트리거는 그런 필로소스의 권유를 거절했다.
앞뒤가 다른 필로소스의 행동에 오만정이 다 떨어져서 그와 같은 자리에 있고 싶지가 않아서였다.
“이제 어떻게 하지?”
타미두스가 물었다.
“기다리는 수밖에.”
트리거가 말했다.
일행은 하누스에서 모르와 헤어진 후, 그 옆 도시인 카베일로 왔다.
마리는 트리거의 미래의 동료였다.
그녀는 미래에 분노의 정령사가 된다.
마리는 필로소스의 아들인 라클레타와 사랑에 빠져 사랑의 도주를 한다.
그 후에 마리의 삶은 온통 불행으로 점철 된다.
그런 삶을 살다 십여 년 후에 정령사로 각성을 한다.
그녀가 다루는 정령은 분노의 정령.
그 정령으로 인간을 분노로 물들여 광전사로 만들었다.
평화 시라면 모두가 기피하는 존재가 분노의 정령사다.
하지만 미래는 붉은 달 현상이 심화되며 몬스터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이 넘쳐나는 시대다.
그런 이들은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몬스터에게 보복하기를 원했다.
그럴 때 분노의 정령사는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정령사가 되기 전에도, 된 후에도 그녀는 불행했다.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자신이 죽더라도 몬스터에게 보복하고 싶을 정도로 한(恨)이 넘치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마리를 찾아온 이유는 광전사가 되어서라도 몬스터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도 한이 넘치니 그런 사람들과 자연히 깊은 공감대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찾아오는 이들을 기꺼이 광전사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광전사의 종말은 잠재력의 폭발로 인한 죽음이다.
즉, 자신과 공감대를 가진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죽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불행이 계속될 수밖에.
트리거는 그 불행에 빠지기 전에 마리를 구할 방법을 깊이 고민했다.
분노의 정령은 인간이 미칠 정도로 불행을 체험해야 접촉이 가능하다.
그런데 그녀를 그 불행에서 구한다?
그렇다면 분노의 정령을 다루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인간 세상 자체를 깊이 혐오했다.
감정으로만 따지면 몬스터 편에 서서 인간들을 공격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실제 미래에선 인간들에게 한이 맺혀 몬스터의 편에 선 인간도 많았다.
그런데 마리는 마지막까지 인간의 편에서 싸우다 지투스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인간의 편을 든 건 오직 지투스와의 우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능력이 탐난다고 일부러 불행의 늪에 빠트려?
트리거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그녀가 예전 같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래서 평범한 삶을 산다 해도 그녀를 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경로로 마리를 양도받는 건 틀렸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투스의 기억대로 마리의 운명이 흘러가기를 기다린다.
마리는 라클레타가 자신을 데리고 도망친 날이 15세 생일이라고 했다.
그녀의 생일은 10일밖에 남지 않았다.
라클레타가 마리를 데리고 나오면 중간에 가로채면 된다.
* * *
“마리. 더 늦기 전에 나와 함께 도망치자.”
10일 후, 라클레타가 마리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예.”
마리는 굳은 결심이 어린 얼굴로 대답했다.
라클레타는 필로소스의 둘째 아들이다.
그녀보다 한 살 더 많은 열여섯 살이었다.
라클레타는 그녀에게 짓궂은 행동도 많이 했다.
가장 많이 한 행동은 물동이를 지고 가던 그녀를 놀래게 해서 물동이를 깨트려 버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감히 도련님이 놀려서 그랬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하녀장은 칠칠치 못하다면서 그녀를 꾸중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계속 같은 실수가 반복되자, 꾸중이 체벌로 바뀌며 나중에는 채찍질까지 당했다.
라클레타는 언제나처럼 그녀를 놀래게 해서 물동이를 깨트렸다.
거기서 흐른 물이 그녀의 몸을 흠뻑 적셨다.
그리고 그때야 비로소 그녀의 등에 있는 피멍을 보게 되었다.
라클레타는 그때부터 그녀를 놀리는 걸 그만두었다.
가끔가다 먹다 남은 음식물이나 꽃을 그녀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슬쩍 손을 잡으며 호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마리는 처음엔 그런 라클레타의 행동이 어색하고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가 주는 선물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라클레타가 자신과 함께 도망치자고 했다.
하지만 겁이 나고 무서워서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다 오늘 손님과 주인의 대화를 듣고는 새삼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노예다.
주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녀 외에도 많은 여자 노예가 있었다.
그녀들은 주인의 뜻대로 손님을 시중들었다.
그렇게 시중을 들다 보면 애를 가졌다.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면 결국 노예가 된다.
그녀의 어미도 그런 식으로 자신을 낳았다.
노예가 꽃다운 나이를 넘어 사십대가 되면, 저택에선 더 이상 쓸모가 없어져 다른 데에 팔아버린다.
손님을 섬기다 이상한 병에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미모가 뛰어나면 그런 병에 걸려도 치료를 해줬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그런 병에 걸리면?
적당한 곳에 팔아넘겼다.
미모의 여자가 팔려가는 적당한 곳은 어디일까?
그녀는 죽어도 그런 꼴은 당하기 싫었다.
그럴 때 라클레타가 같은 제안을 한 것이다.
“좋아요.”
그녀는 라클레타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깊은 밤에 라클레타의 손을 잡고 저택을 빠져나왔다.
둘은 손을 잡고 계속 도망을 치다가 야산을 만났다.
야산을 올라가다 보니 밤이 되었다.
모닥불을 지피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라클레타는 말없이 그녀를 안아 땅에 눕히고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마리는 라클레타와 지금껏 손만 잡았다.
그 이상의 행위는 아무리 라클레타가 원해도 무서워서 파하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말없이 라클레타의 행위에 호응했다.
그녀는 필로소스의 저택에서 나고 자랐다.
다른 곳에서의 삶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 삶을 온전히 라클레타에 의지해 일구어 나가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라클레타만 믿고 맡겨야 한다.
라클레타는 침을 삼키며 마리의 옷을 벗겼다.
그녀의 하얀 피부가 모닥불의 열기에 붉은색으로 물들어 갔다.
라클레타의 손이 상반신의 겉옷을 벗기고 속옷까지 벗기려 할 때였다.
휘익!
“분위기 좋은데?”
휘파람 소리와 함께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퍼졌다.
놀란 마리는 다급히 옷을 걸쳐 입었다.
라클레타는 옆에 두었던 검을 들고 벌떡 일어났다.
모닥불로 한 무리의 사내들이 다가왔다.
그중 두목으로 보이는 털보가 라클레타를 보고 말했다.
“애송이, 저 계집을 두고 꺼져라. 목숨은 살려주마.”
“어림도 없는 소리.”
라클레타는 굳은 얼굴로 검을 들었다.
두목과 라클레타 간에 싸움이 붙었다.
“제법인데?”
두목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라클레타는 이제 겨우 열여섯이었다.
두목은 서른 살이 넘어 보였다.
완력으로나 스피드로나 서른 살의 육체가 열여섯의 육체를 능가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라클레타가 두목보다 더 빠르고 강했다.
몇 합 지나기도 전에 두목은 라클레타에게 몰려 궁지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