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나도!"
"보물은 지, 지랄, 목숨이 먼저지."
놈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눈치를 보던 놈들도 냅다 도망가기 시작했다. 도적들 따위에게 의리가 있을 리 없으니 당연한 결과.
알렌은 개미 떼처럼 흩어지는 놈들을 보고 피식 웃었다.
"도망칠 수 있으면…."
도망쳐 보라지.
알렌은 신체의 활력을 담아 강하게 땅을 박찼다.
쾅!
"어? 아?"
제일 먼저 도망치던 도적은 순식간에 알렌이 자신의 앞에 다다르자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자신이 본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는 표정.
그러나 알렌은 도적놈이 어떤 표정을 짓던 상관하지 않고 붙잡아서 바닥에 메다꽂았다.
-뿌드득!
사람이 땅에 박혀 한 그루의 나무로 변하는 걸 본 도적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머리부터 떨어진 도적의 머리는 사과처럼 터져 나가며 하얀 속살을 내보였다. 머리를 잃은 몸은 잘게 경련했다.
도적의 몸이 천천히 옆으로 무너져 내리자, 상반신이 으깨져 누군지 알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으아아아아아! 살려 줘!"
"두목! 제발, 제발 두목 살려 줘!"
그들이 두목을 부르며 소리쳤으나, 이미 그는 어디로 갔는지 꽁무니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
'이놈들도 밖에서는 어느 정도 악명이 있을 텐데….'
그에게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 못했다.
이제 어느 정도 강해졌는지 슬슬 자각했으니 더는 끌 필요 없었다.
'하나 잊은 게 있던 것 같은데….'
「당신, 검술 연습 안 해요? 나한테 검술 배우기로 약속했잖아!」
"아."
그랬었지.
「언제 하나 쭉 보고 있었는데, 무식하게 움직이기나 하고! 빨리 움직여 봐요! 봐줄 테니까.」
"그래, 이제 도적놈들도 찾았으니…."
노력해 보지.
쓰레기 청소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 * *
"이제 얼추 다 정리했나…."
알렌은 칼날에 묻은 핏물을 털어 내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주위에 살아 있는 도적은 두세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들도 최소한 어느 한군데가 짓이겨져 끔찍한 신음을 흘렸다.
「아직 세심한 힘 조절은 힘들죠? 그러게, 내가 뭐랬어요. 검술 좀 빡시게 하자니까?」
알렌이 검을 놓자, 베스틀라는 혼자서 공중에 두둥실 떠올라 알렌의 곁을 맴돌았다.
"나 정도면 방금 괜찮지 않았나? 제법 깔끔한 베기였던 것 같은데…."
「누가 그렇게 큰 동작을 한다고 해요! 그 사이에 누가 들어왔으면 어쩔 거야!」
"아니, 제법 괜찮은 공격이었는…."
「절대 아니거든요? 당신 검을 배우고 싶은 거 맞아요? 무식하게 힘으로 토막 냈잖아!」
알렌은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조용히 수긍했다.
"…그래, 다음부터는 참고해 보지."
「참고만으로는 부족해요. 이제 할 일도 없죠? 그럼 하루 종일 연습이나 해요!」
베스틀라는 젠체하는 목소리로 그의 눈앞에서 촐랑거렸다.
알렌은 그녀의 목소리를 반쯤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감지력이 퍼져 나가며 수백 미터의 범위가 세세하게 머릿속에 박혀 들었다.
'도적 두목은 벌써 저 멀리까지 갔나? 평범한 마법사였으면 여기에서 그만뒀겠지만….'
자신의 한계는 고작 이 정도가 아니었다.
감지력이 빠르게 확장되며 더 멀리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1km, 2km, 3km…
머리가 홍수처럼 밀려들어 오는 정보량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두통이 일 때쯤, 감지 범위의 끝에서 놈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앗! 당신 코피 나요!」
"아…."
입가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알렌이 얼른 감지력을 회수하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던 두통이 사라졌다.
'사용할 수 있는 마력과 감지 범위가 늘어난 건 좋은데….'
몸이 버티질 못하는군.
용의 노심을 거인의 육체를 이용해 버틸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정작 그 몸의 주인의 역량이 떨어져 잠재력을 모두 발휘할 수 없다니, 이 얼마나 웃긴 말이란 말인가.
'이래서 위계를 차근차근 높이는 건데.'
실력은 그대론데 경지만 널뛰듯 올라갔으니.
얼른 지식과 실력을 더 쌓아 신체와의 불균형을 해소 해야 될 필요성이 있었다.
언제까지 보물을 썩힌 채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
「괜찮아요?」
"안 괜찮을 것도 없지. 이 정도면 과분한 힘의 대가로 가벼운 편인데."
알렌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하고는 얼른 마지막 흔적이 느껴지던 곳으로 달렸다.
「어디 가는 거예요?」
"쥐새끼 한 마리가 도망쳐서 말이야. 비겁하게 부하까지 다 버리고 가더라고."
그 덕분에 쉽게 각개격파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대장 노릇을 한 주제에 도망쳤단 사실에 혐오감이 들었다.
「당신 조금 쉬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아니, 괜찮아.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하면 놈을 놓칠 수도 있으니…."
더 빠르게 가야겠군.
'도적 몇 명보다 대장을 붙잡는 게 낫겠지.'
놈은 저택을 습격하려 했다는 증언을 위해 붙잡아 둘 생각이었으니까.
알렌은 속도를 더 높였다.
* * *
크로겐은 심장에 박아 넣은 광폭화 장치까지 과부하 시키며 몸을 날렸다.
내딛는 걸음에 바닥이 부서지며 돌조각이 흩날렸고, 그의 몸 주위로 옅은 흰색 막이 빛을 내며 감싸 안았다.
"제기랄, 제기랄."
이럴 수는 없었다.
한 번 망했던 도적단을 재건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나.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찬란했던 그 시절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그딴 괴물이 와서는…!"
크로겐은 알았다.
한 명의 초인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그렇기에 알렌이 자신의 반응 속도를 넘어서 부하의 골통을 깨부쉈을 때, 곧바로 단념하고 도망쳤다.
자신의 도적단이 한 번 그렇게 망했는데.
또 그렇게 망하다니.
"으아아아아아!!!"
성질에 못 이겨 내지른 소리에 놀라 멈칫했지만, 이미 흔적을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왔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그렇게 나아가던 중, 사람이 없어야 할 지하수로의 길 위로 한 노인이 보였다.
짙은 흰머리와 자글자글한 주름을 가지고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노인.
노인의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감이 들 만한 모습이었으나, 분노로 눈앞이 물든 그에게는 알아차릴 정신이 없었다.
그저 분풀이 대상이 필요할 뿐.
생각은 죽인 후에 해도 늦지 않다.
판단을 마친 크로겐은 잠시 후에 들릴 비명을 기대하며 뾰족한 가시가 박힌 몽둥이를 내려쳤다.
아니, 내려치려고 했다.
"…아? 이게 무…크엑."
푸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도 못한 채, 목이 떨어져 내렸다.
그제서야 눈앞의 노인 또한 알렌과 같은 초인임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늦은 상황.
"…끄르륵."
-쿵
악명 높은 도적단을 이끌었던 두목이라는 명성과는 다르게 허무한 최후였다.
노인은 그가 쓰러지던 그때까지도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알렌은 마지막으로 도적단을 이끌던 대장의 흔적을 찾았던 장소에 도착했다.
「여기예요?」
"그래, 분명 이곳인데…."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래, 그렇지."
찍찍거리는 쥐와 천장에서 노려보는 박쥐. 어디선가 샌 하수관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통로를 울렸다.
분명히 누군가가 지나간 흔적은 있었지만, 그 흔적은 어느 순간부터 뚝 끊겨 있었다.
한순간에 갑자기 증발해 버린 것 같이.
기묘할 정도로 아무런 전조도 없이 자취를 감춘 도적.
몇 번이나 보았던 지하수로의 광경만이 그를 반겨줬다.
'게다가 이 방향은….'
도적들이 원래 향하려던 장소가 아니었나?
알렌이 눈을 감고 다시 감지력을 뻗었다. 알렌을 중심으로 수백 미터의 범위가 세밀하게 감지되며 정보의 홍수가 밀려들어 왔다.
'이 정도는 버틸 만하군. 조금만 더….'
그렇게 조금씩 감지 범위를 넓히던 때.
"…!!"
무언가, 아니 누군가를 발견했다.
타닥-
앞으로 달렸다. 인기척은 그대로였다. 왜 도망가지 않지? 놈이 아닌가? 그럼 또 누가….
'직접 알아내면 되겠지.'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한 번만 꺾어서 가면….
"저, 적이닷!"
"…랫맨?"
감지력을 다시 퍼트렸으나, 그가 느꼈던 인기척의 정체는 지하수로에서 흔히 서식하는 랫맨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왜 갑자기 뛰어가요? 여기에 뭐가 있어요?」
그의 뒤를 따라 날아온 베스틀라가 묻자 알렌은 놓친 게 없는지 다시 세밀하게 살펴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잘못 느낀 모양이군."
하지만, 순간적으로 느꼈던 그건 분명 인간이었는데….
「당신이 착각한 거 아니에요?」
그의 이상한 기색에 베스틀라까지 그렇게 소리치자 알렌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잘못 느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누가?
"우선, 돌아가지. 안타깝지만 도적 두목은 운 좋게 도망가는 데 성공한 모양이군."
「당신 괜찮아요? 그 도적 대장 없어도 돼요?」
"사건의 주동자를 잡는 게 제일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증언할 놈들은 살려 뒀으니 아버지도 수긍하겠지."
알렌은 천천히 물러나면서도 감지력을 집중시켜 이상이 있는지 살폈다.
그러나.
"착각이었나."
끝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돌아가지. 기껏 살려 둔 놈들이 죽으면 이도 저도 안 될 테니."
알렌의 어조에 일말의 아쉬움이 묻어난 탓일까, 그녀는 활기차게 소리쳤다.
「그럼, 빨리 가요! 저도 추수 감사절인가 뭔가 한번 보고 싶으니까요!」
알렌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일부로 목소리를 높이는 그녀를 보고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고맙다."
「당신 때문에 그렇게 한 거 아니거든요!」
통로를 돌아섰다.
가까운 하수도의 입구가 가까이에 있었다.
-스르륵
지상으로 향하는 그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잠시 꿈틀거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잠잠히 변했다.
하수도는, 언제나처럼 잔잔한 적막함만이 감돌았다.
* * *
섬광이 떨어져 내린다.
쿠르르르릉-
뒤늦게 소리가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를 뒤쫓아 굉음을 울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건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 터.
율리우스가 검을 휘두르자 하늘에서 두 갈래의 번개가 용병대장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용병대장은 급히 몸을 움직였지만, 떨어지는 낙뢰를 피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고.
"끄아아아아!!"
쿠웅-
검은 숯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와아아아아-!"
"율리우스! 율리우스! 율리우스!"
환호 소리가 몰아치며 결투의 승자가 결정되었다.
율리우스의 승리였다.
제34화
-율리우스! 율리우스! 율리우스!
-와아아아아아!!!
-라인하르트 가문 만세!!
알렌이 지하수로를 빠져나왔을 때는 율리우스와 용병의 결투가 다 끝난 시점이었다.
거리에는 벌써 결투 소식이 파다하게 퍼졌는지 사람들은 연신 율리우스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상당히 볼 만한 볼거리였는지 다들 흥분한 기색.
「어후, 시끄러워라.」
베스틀라는 축제를 돌아보자고 말한 것과는 다르게 시끄러운 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작게 투덜거렸다.
'…정작 자신이 시끄럽다는 자각은 있을까.'
알렌은 평소에 그녀도 만만치 않다고 대꾸하려는 것을 참고, 곧바로 붙잡아 둔 도적들을 근처에 있던 병사에게 인계했다.
"죽지 않을 정도만 신경 써 주게."
"옙! 알겠습니다!"
"수로에 놈들의 흔적이 있으니 모두 수거해 오도록 하고."
"그런데 어디에 있는지는…."
"이 약도를 보고 찾아가면 될 걸세."
"아! 알겠습니다!"
알렌은 지하수로를 빠져나오며 그려 둔 약도를 병사에게 건넸다. 병사는 경례를 마치고 곧장 상처에 신음하던 도적들을 끌고 갔다.
그들은 최소한의 치료를 받고 심문을 받게 되리라.
「당신, 이번 일 끝마치면 당분간은 시간 있다고 했죠?」
"아마… 그럴 거야. 그런데 왜?"
「흠흠, 아무것도 아니에요.」
"싱겁기는."
알렌은 빠르게 저택으로 향했다.
율리우스, 놈이 낯짝을 환하게 빛내며 공로를 자랑할 테니 자신도 그에 걸맞은 공적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 * *
며칠 후 사건의 전말이 모두 드러났다.
용병대장은 율리우스의 협박에 의해 광장의 단상 위에서 모든 진실을 실토했다.
그는 대중의 앞에서 굴욕감이 넘치는 얼굴로 자신이 비밀리에 받은 의뢰가 있음을 자백했다.
"그럼 그, 뭐야. 율리우스 도련님께 가족을 잃었다는 놈들은 뭐지?"
"그것도 거짓말이다."
그가 데려온 피해자들은 악의적인 날조와 선동으로 데려왔다고, 실제로 율리우스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거기에 더해서 일부로 도시의 이목을 끈 사이 지하수로를 통해 도적 떼가 저택을 습격할 예정이었다고 털어놓자, 어마어마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거, 괜찮나?
-우리도 위험한 거 아냐?
영지민들도 혼란스러워하며, 갑작스러운 고백에 불안감이 싹트던 그때.
"알렌 공자님께서 도적 떼를 토벌하셨다!"
미리 불온한 분위기를 감지한 알렌이 직접 도적단을 토벌했다고 공표하자, 들끓던 소란이 일시에 가라앉으며 영지민들은 안도했다.
-역시 알렌 공자님…. 그분이라면 그럴 줄 알았지.
-두 공자님 모두 훌륭하시니, 백작님께서는 좋으시겠군.
-축제를 망치기 싫다는 마음으로 알렌 공자님 홀로 도적을 토벌하시다니….
그 사실에 억지로 진실을 고백하던 용병대장의 얼굴도 허탈하게 변했다.
계획했던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더 이상 빠져나갈 틈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리라.
허망한 얼굴을 한 그에게 마지막으로 사건의 주동자가 누군지 묻자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의뢰를 내린 귀족의 이름을 내뱉었다.
가이엘은 용병대장이 대중 앞에서 진실을 토해 내기 무섭게 곧바로 병사와 함께 기사를 출격시켰다.
주동자는 허무하리만큼 쉽게 잡혀 왔다.
"놓, 놓아라! 내가 누구인지 알고 이러는 것이냐!"
그의 정체는 몇 해 전 몰락 귀족으로 강등된 이였다.
그는 보고에 있는 특별한 물건을 훔쳐 온다면 천문학적인 금액을 보상으로 받기로 약속받았다고 했다.
"너에게 그런 의뢰를 한 사람은 누구지?"
"그, 그건 얼굴은 보지 못했…."
가이엘은 그가 붙잡혀 오기 무섭게 그를 처형했다.
처형할 이유야 충분했다.
축제에 소란을 일으키고, 평판을 떨어트리기 위해 모략을 꾸몄다는 명분이었으니.
그리고 그는 왕국법으로 보호되는 귀족이 아닌 몰락 귀족.
백작령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배, 백작님. 실수하시는 겁니다. 저를 처형하신다면 후회하…."
-서걱
용병대장을 비롯한 용병들도 그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제발, 제발!"
"대, 대장. 이번 건만 터트리면 된다고 했잖아!"
애원과 절망 그리고 원망을 쏟아 내며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은 정의가 승리했다며, 가문을 칭송하며 축제를 즐겼으며.
생각이 있는 자들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을 주위로 떠벌렸고.
깊게 생각하는 자들은 백작가의 보고를 습격한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에 입을 다물었다.
수확제는 다시 재개되었고, 이번 습격을 통해 백작가가 아직 건재함을 주위로 보여 줄 수 있게 되었다.
거리에는 연신 율리우스와 알렌의 이름이 울려 퍼졌고, 영지민과 여행자들은 즐겁게 축제를 즐겼다.
그리고 그 와중에.
끼익-
잊힌 자들이 있었다.
기름칠 되지 않은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열린다.
간수는 문을 열었던 열쇠를 회수하고는 어둠 속을 바라보며 말했다.
"에라이, 멍청한 놈들, 그걸 속으면 어떡하나? 쯧쯧."
"에혀, 그만해. 속인 놈들이 나쁜 거지."
다른 간수가 그만하라고 말리자, 한참을 작게 구시렁거리던 그는 짜증 난 얼굴로 외쳤다.
"그것도 그렇긴 한데…. 쯧, 됐다. 얼른 나오기나 해!"
저벅저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죽은 가족들의 복수를, 정당한 죗값을 받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자신은 계략에 속아 넘어간 멍청한 얼간이가 되었고, 기껏 저지른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라 손가락질 받았다.
결국엔 율리우스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그나마 율리우스 공자님께서 선처해 주셔서 다행이지. 다른 귀족이었으면 모두 사형이야, 알아?"
"그만해, 그만. 이놈들이 뭘 알겠나."
"쯧."
혀 차는 소리에 몸이 움츠러든다.
칼론은 작은 고개를 들어 같이 있던 어른들의 표정을 살폈다.
같은 아픔을 공유했으니 동지라고, 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던 그들의 표정이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아칸 형이 분명히 잘 될 거라고 했는데….'
춥고 어두운 쇠창살 속에 있었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희망이 있다고 말해 주던 어른들이었다.
그런 어른들의 얼굴이 잘못이라도 한 듯 겁에 질려 있었다.
"빨리빨리 걸어!"
주춤대던 이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칼론은 그들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끼익-
앞장서던 간수가 육중한 문의 잠금쇠를 돌렸다.
쿵-
육중한 문을 열고 나니 신선한 공기와 따뜻한 햇볕이 그를 맞이했다.
"앞으로 거짓말하지 말고, 조용히 살도록 해. 괜히 이번처럼 나대지 말고. 어?"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이뤄진 게 없었다.
거리로 내몰린 그들은 해산시킬 필요도 없이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칼론은 거리에 가득한 활력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허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형에게 돌아가야지."
힘없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그의 뒤로, 조용히 발걸음이 따라붙었다.
* * *
라인하르트 가문에는 여타의 다른 가문처럼 집사를 배양하는 가문을 대대로 가신으로 삼아 데리고 있다.
어릴 적부터 시킨 체계적인 교육.
세뇌하다시피 주입하는 충성심.
가문 대대로 쌓아 온 노하우.
가문에서 여러 업무를 맡는 집사는 이렇게 지속해서 만들어져 왔다.
그러나 간혹, 한 번씩 외부인을 집사로 채용하기도 했다.
총집사 가델.
그도 그렇게 외부에서 들어온 집사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수십 년을 가문에 바치면서 단 한 번의 문제도 일으킨 적이 없는 우수한 집사였다.
지금은 늙어 직접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총집사의 직책을 맡아 한 발자국 물러난 위치에 있지만,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않았다.
심지어 외부에서 왔다고 무시하는 이보다 공경하는 인물이 더 많았다.
"히야넬, 몸가짐이 더 좋아진 것 같군요. 이제 신입 티는 벗어난 것 같습니다."
"비든, 아프다던 형은 괜찮습니까? 제가 준 약초는 잘 사용했고요? 다행입니다."
"티냐. 오늘따라 더 아름답군요. 카인과는 관계는 잘 되고 있나요?"
가델은 인자하게 웃으며 복도를 걷다 마주치는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의 친절한 성격과 자애로운 성품은 저택의 하인들에게 있어 친조부나 마찬가지였다.
저택에서 그를 나쁘게 말하는 이가 한 명도 없을 정도였다.
그는 그렇게 천천히 걸어 어느 방으로 따듯하게 웃으며 걸어 들어갔고.
-철컥.
문이 닫힘과 동시에 그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방에는 선객이 먼저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늦었네?"
허리까지 내려온 와인색 머리와 아름다운 미소. 나이를 먹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충분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의 질책에 가델은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엘리자 님. 알렌 공자님께서 그렇게 성장하셨을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알렌이? 흐음, 수련하러 돌아왔다더니 그렇게 컸다고?"
그가 늦게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그녀의 눈은 알렌의 이야기가 나오기 무섭게 살짝 풀어졌다.
"예, 한순간이나마 제 비전을 뚫고 저를 감지하는 데 성공했지요. 제가 아닌 다른 아이들이었다면 필히 들켰을 겁니다."
알렌의 압도적인 성장에 한순간이나마 긴장이 풀어졌다. 그러나 그 찰나의 틈에 그를 발견할 거라고는 가델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옛날에 암왕 중 한 명이었던 그를 찾아냈다니.
"…그래?"
엘리자는 놀라운 얼굴을 하다가, 한 달 전에 만났던 그를 떠올리고는 입술을 삐죽였다.
"일주일에 네 번은 만나러 온다더니, 결국 찾아오지도 않고."
"외람되오나, 엘리자 님."
"응?"
"알렌 공자님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의심스럽습니다. 혹시 공자님도…."
"아니야."
그녀는 곧바로 가델의 의견을 부정했다.
'알렌이? 글쎄…. 처음에는 조금 의심했는데….'
엘리자는 알렌과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알렌은 율리우스 같은 경우가 아닐 거야."
그걸 확인하고자 알렌을 불러들였고, 모든 걸 확인했다.
그의 버릇, 말투, 어조, 가치관, 성격까지. 그녀가 알던 것과 조금씩은 달랐으나, 그건 알렌이 확실했다.
그것도 확실하지 않아 린벨과 이넬리아를 가르친다는 핑계로 곁에 두며 많은 것을 알아낸 상태였다.
순진한 그녀들은 자신들이 알렌의 정보를 내뱉었다는 것도 모를 터.
설사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엄마가 자식 이야기 좀 듣는 게 어때서.'
그녀의 확답에 가델은 아무런 반론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확고한 증거가 있었을 테니.
"알렌은 됐고, 율리우스 쪽은…?"
"율리우스 공자님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몇 달 전과 비교해서 모든 게 달라진 상태입니다."
미묘한 발걸음의 변화, 음운의 높낮이, 무의식적인 버릇, 그의 취향까지.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단서일지 몰라도, 그와 같은 암살자들에게는 커다란 증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확실히 단언할 수 있었다.
"율리우스 공자님은… 다른 사람입니다."
가델의 높낮이 없는 보고에 엘리자는 눈을 감았다. 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쳤으나, 그걸 내색하지 않았다. 아직은,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럼…, 율리우스, 아니 놈에게 이번에 수작을 부린 놈들은 찾았어?"
"…죄송합니다. 아이들을 총동원해서 뒤를 추적했으나, 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이는 덜떨어진 귀족 하나밖에 찾을 수 없었습니다."
"너희들이라도?"
"동조한 걸로 보이는 인물 몇을 찾아냈으나, 그들도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였습니다."
"일을 꾸민 주동자는 찾아낼 수 없다고? 가델, 내게 네 가치를 낮추게 하지 말아 주렴."
그 말에 가델은 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단서를 찾아 뒤늦게 추적에 나섰습니다만…."
"다만?"
"대사막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입가에 헛웃음이 나왔다.
"대사막이라, 대사막… 그렇다면 그들은."
갈슈딘 아카데미와 관계된 자들이겠지.
엘리자는 왜 추적을 그만둔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는 인류 기술의 총채가 담긴 곳.
심지어 상시 팔강 중 두 명이 상주하는 장소였으니 그가 멈춘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목숨이 아까운데 누가 그곳에 침입할 생각을 할 수 있겠나.
"그리고…."
"응?"
그녀가 그를 바라보자, 가델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도적 떼의 실력이 제 예상을 상회했습니다. 아마, 습격이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제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가델은 자신의 예상을 과장 없이 고했다.
엘리자는 그가 멈춘 뒷말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행동을 이해했다. 이게 본래 그의 성격이었으니. 확신이 없으면 나서지 않는다.
그것이 암왕 가델의 본질적인 성격이자 그것이 그와 그녀의 약속이었다.
의아한 사실은 따로 있었다.
"네가 한 번에 처리하지 못할 만큼 강했다고?"
"아닙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는 수십 명을 동시에 죽일 수 없었습니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엘리자 님께서 저와 하신 약속이었으니 말입니다."
가델의 냉정한 말에도 엘리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저런 조건 덕에 암왕 중 한 명을 수십 년간 보이지 않는 검으로 활용할 수 있었으니, 그의 말은 옳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번에는 사건의 흑막을 추적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빠졌으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알렌이 나설 필요도 없이 도적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모두 예상한 존재가 있다는 걸까….'
엘리자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아들도 변하고, 남편도 변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누구도 모르게 자신의 주변을 이용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가만히 있을 필요가 있을까.
"가델, 초대장을 보내.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야겠어."
돈은 '새 아들'이 많이 벌어 뒀으니, 꾸미는 데 부족하지는 않겠지.
새엄마 역할을 해 줬으니 이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겠니?
"사교계라… 얼마 만이야."
홀로 무언가를 할 수 없다면,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그녀가 손을 휘젓자, 가델은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엘리자는 조용히 팔걸이를 쓸었다.
머릿속에는 여러 광경이 떠올랐다.
행복했던 일상, 안온한 하루, 반복되는 매일. 이제 그런 일상은 무너졌다.
'…율리우스.'
이제부터 바쁘게 움직여야겠지.
사교계를 들락거리고, 사치를 보이며, 은밀히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러니 오늘은.
도시 전역에서 벌어지는 소란과 관계없이 그녀 주위는 고요하게 물들었다.
마치 폭풍이 몰아치기 전의 밤처럼.
제35화
라인하르트 가문은 역사가 깊은 가문이다
고대 제국의 멸망 직후에서부터 존립했다는 3대 가문과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나름대로 긴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보고에는 쇠락하는 가문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보물이 자리했다.
"와…, 신기한 게 엄청 많아…."
린벨은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며 보물들을 살폈다. 한 달 만에 본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몸에 배인 동작이….'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유적지로 떠나기 전에 시녀 교육과 여기사에게 그녀의 훈련을 맡겼지만, 무의식적으로 버리지 못한 습관 정도는 남아 있을 법한데, 그런 것이 하나도 안 보였다.
'역시 팔강이 될 법한 재능…, 이라는 건가.'
아쉽게도 프라나는 각성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이 정도 성장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율리우스, 알렌 같은 이들과 비교해도 순수한 재능으로는 뛰어날 터.
'시녀로 만들기 잘했군.'
마차에서 잠시 보였던 어두운 모습도 지금은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과장되게 행동하는 것 같기는 한데….'
이런 물건들을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알렌은 고개를 돌렸다.
보고에는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신기한 것들이 많이 있었다.
4개의 색으로 반짝이는 보석이나 옅은 안개에 휩싸인 지팡이, 그리고 푸른 전류가 맴도는 수정까지.
가문의 비전이 마법이니만큼, 마법과 관련된 물건들이 많았다.
린벨은 그런 것들이 신기한지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폈다. 이넬리아는 그런 그녀가 불안한지 슬쩍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린벨, 아무거나 건들면 안 되는 거 알고 있지? 응?"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엄마."
린벨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보고를 돌아다니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이넬리아는 그녀가 불안한 듯 안절부절못하며,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던 알렌을 계속 힐끔거렸다.
알렌은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이넬리아의 눈빛에 살짝 웃으며, 같이 보폭을 맞춰 걷던 노집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렇게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상관없나?"
"예, 상관없습니다. 처음 보고에 왔으니 신기할 만하겠지요."
보고의 안내를 자처한 노집사, 가델은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런데 저 모습은…."
가델이 린벨을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알렌이 되물었다.
"왜, 내 시녀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
"아니, 아닙니다. 린벨 양이… 오랜만에 알렌 공자님을 만나 기쁜 모양이군요."
가델은 고개를 흔들며 심중에 떠오른 생각을 흩어 내며, 알렌의 물음에 답했다.
"…휴."
줄곧 린벨에게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이넬리아는 가델의 대답에 안심하는 기색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가델은 거기까지 말을 끊고는, 익살스럽게 웃으며 이넬리아에게 들으라는 듯 입을 열었다.
"한 번이라도 물건을 만진다면, 그걸로 끝입니다. 다른 물건은 가져갈 수 없습니다."
"…힉!"
"다시 교환할 수도 없으니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
그의 말이 끝나자 이넬리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보고를 바쁘게 돌아다니던 린벨을 향해 움직였다.
"앗! 공자님! 공자님! 저 불타는 얼음은 뭐예… 꺄악! 엄마! 뭐 하는 짓이야!"
"린벨! 공자님의 시녀면서 뭐 하는 짓이야! 얼른 멈추지 못해?"
"아! 엄마가 무슨 상관이야! 공자님도 가만히 계시는데!"
"그럼 엘리자 님께 다시 교육 받을 거야?"
그녀가 엘리자의 이름을 언급하기 무섭게 린벨의 몸이 굳었다.
"지금 이렇게 행동한 것들, 모두 엘리자 님께 보고해도 상관없어?"
"…아니."
"그럼 얌전히 이리 오렴."
"…힝, 알았어."
린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풀죽은 얼굴로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다.
알렌은 일련의 행동을 보고 헛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녀를 놀리면 좋나?"
"하하…, 늙어갈수록 삶에 약간의 자극이 필요해지더군요."
특히, 저 겉과 속이 다른 여우 같은 꼬마한테 장난을 칠 기회는 적을 테니.
'…공자님은 모르시는 모양인데.'
가델은 그들의 관계에 아무런 첨언 하지 않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능청스럽게 웃었다.
"한 번 만지는 것이 아니라, 고른 물건을 가지고 나가야 하는 거지 않나."
"그것도 결국 처음 물건을 골라 드는 거니, 만지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알렌을 고개를 내젓고는, 천천히 보고의 물건들을 둘러봤다.
'어느 것을 가져가든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런 물건이라면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구할 수 있었다.
수확제가 끝난 지 벌써 이틀이 지나갔다.
알렌은 수확제의 뒷정리가 마무리되기 무섭게 보고의 열쇠를 사용해 저택의 지하로 내려왔다.
의외인 점은 총집사인 가델이 직접 그의 안내를 자처했다는 것.
그 덕분에 이넬리아와 린벨이 보고에 따라 들어올 수 있었지만, 친분이 깊지 않은 그가 그런 호의를 베푼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감지력을 퍼트렸지만….'
그는 아무런 힘도 없는 노인에 불과했다.
발걸음에도 아무런 규칙이 없었고, 호흡과 표정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알렌은 그에 대한 의문을 미뤄 두고, 빠르게 물건을 훑었다. 되도록이면 율리우스, 놈이 오기 전에 물건을 골라야 했으니.
며칠 전 책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렸다.
『──율리우스는 보고의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가문에서 수 대에 걸쳐 모아 온 보물들이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언제 보고로 들어갈 기회가 있을지 모르니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그렇게 물건들을 살펴보던 중 율리우스는 '그것'을 발견했다.』
'여기서 특별한 물건을 발견했다고 했지.'
『──보고 오른쪽 끝에 자리한 진열장.』
걸음을 옮겼다.
막힘없이 나아가는 그의 뒤로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일행이 뒤따라왔다.
『──그 진열장에서 왼쪽으로 다섯 걸음 옆으로 움직이니….』
무기, 마법서, 보석, 영약, 고대 유물.
알렌이 그 모든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움직이자 일행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저, 공자님. 다른 물건도 살펴보시는 것이…."
"아니. 생각해 둔 것이 있다."
이넬리아가 슬쩍 입을 열었지만, 알렌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어차피 이곳에 있는 것과 비슷한 물건은 차고 넘친다.'
굳이 밖에서도 구할 수 있는 물건을 고를 필요는 없었다.
『──보고에 있는 다른 보물들과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한 곳에 쌓여 있었다. 그 위로….』
타닥-
알렌의 걸음이 멈췄다.
『──'그것'은 지닌 가치와 다르게 볼품없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가 멈춘 장소에 다다른 이넬리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게.
"…잡동사니 아니에요? 공자님?"
그가 걸음을 멈춘 장소는 용도를 알지 못하는 것들을 쌓아 놓은 곳이었으니까.
유적에서 출토되었거나, 비싼 가격에 경매장에서 구매했지만 용도를 알지 못해 보고에 먼지만 쌓여 있던 물건들.
그녀의 말대로 잡동사니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잘도 여기까지 와서 물건을 찾아냈군.'
보고에 깨끗하게 진열된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먼지까지 풀풀 날리는 이곳까지 와서 확인을 한다고?
'신중하게 물건을 고른다는 이유 하나로?'
그걸 꼼꼼히 살피는 놈도 놈이었지만, 실제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 있다는 게 더 어이가 없었다.
알렌은 고개를 내젓고 쌓여 있는 물건 중 회색 구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걸로 하겠다."
"네?"
린벨이 잘못 들은 듯 다시 한번 그를 올려다봤지만, 그의 결정은 변함없었다.
"정말 그걸로 하시겠습니까? 공자님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한 번 만진 물건이 아니라 들고 나가셔야…."
"알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것을 고르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알렌의 대답에 떨떠름한 얼굴을 한 가델은 몇 번이나 되물었지만, 알렌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이 구슬로 하겠다."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그에게 가델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알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구슬의 본래 이름은 [천상의 눈].』
"물건을 골랐으니 어서 돌아가지."
"…예. 공자님께서 만족하신다면 그걸로 괜찮겠지요."
『──초대 용사가 사용했다는 5가지의 신기 중 하나였다.』
* * *
빛의 화신. 악룡 참살자. 검신.
신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그에게 붙는 칭호는 여럿이지만, 그중 가장 대표적인 호칭은 이것이었다.
용사.
고대 제국을 침공해 왔다는 마왕을 살해한 초대 용사.
그는 세상을 파괴하는 마왕에 맞서기 위해 8명의 동료를 모았고, 결국 마왕을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용사도 고대 제국의 멸망에서 피하지 못한 것 같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그가 죽은 뒤에도 세상에 영향을 끼칠 정도인데.
대륙의 최강을 나타내는 8강도 용사의 여덟 동료에서 따온 것이며, 심지어 갈슈딘 아카데미가 세워진 장소는 용사의 마지막 흔적이 자리한 곳이다.
인간으로서 마왕을 살해한 업적은 이다지도 엄청난 업적이었으니.
'그런 용사가 사용했다는 5가지 신기 중 하나를 이렇게 얻게 되다니….'
분명 기뻐해야 할 만한 일이었음에도 얼떨떨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성검은 아카데미에 있고, 반지는 엘프 대수림에, 투구는 3대 가문 중 하나에 있지.'
남은 두 가지 중 갑옷은 부서졌으며, 구슬은 행방불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구슬이 가문의 보고에 있다는 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작위적이기까지 한 우연에 알렌은 불합리하고 항거할 수 없는 흐름을 느꼈다.
'만약, 내가 검은 책을 통해 알지 못했다면….'
예정대로 율리우스의 손에 이것이 들어갔겠지.
"형님."
이것도 놈의 기이한 능력, 혹은 행운과 관계되어 있나?
"알렌 형님?"
우연이라고 한들, 보고 구석에 있던 구슬을 찾아내는 건….
탁-
"아."
율리우스의 얼굴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자 야외 테라스의 풍광이 그를 맞이했다.
'티타임 중이었지.'
알렌은 어깨에 올라온 율리우스의 손을 자연스럽게 물리치며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미안하구나, 율리우스. 그래서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형님, 괜찮으십니까? 쉬셔야 되는 것이…."
알렌은 어깨에 남은 온기에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답했다.
"요즘 고심하던 마법의 연구가 잘되다 보니 밤을 새우게 되더구나. 걱정할 필요 없다."
"아, 형님 수련에 진전이 있으셨다고 했지요?"
"그래."
그 말에 율리우스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웃었다.
"축하드립니다. 아차, 저번에 유적지를 다녀오면 선물을 드린다고 했었는데…, 기억하고 있습니까?"
율리우스는 으스대듯 웃으며,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이건."
"제가 이번에 호언장담한 대로 유적지를 발굴하는 데 성공해서 말입니다. 이건 그 성과 중 하나입니다."
상자는 얼핏 보기에 평범했다.
그러나 알렌은 상자의 틈에서 옅게 흘러나오는 청량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형님께서 수련에서 성과를 얻으셨다고 했으니, 그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아니,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가 받을 수 없다는 듯 난처한 표정을 짓자, 율리우스는 괜찮다는 듯 웃으며 상자를 그에게로 밀었다.
"약속은 약속이니 받으십시오. 형제인데 뭘 그러십니까."
"…율리우스."
알렌이 부담스럽다는 듯 고맙다는 얼굴을 하며 그를 바라보자, 율리우스는 그 눈빛이 겸연쩍은지 화제를 돌렸다.
"이번에 성취가 조금 있었다는데, 그러면 얼마나 강해지신 겁니까?"
율리우스의 물음에 알렌은 고민했다.
'어디까지 드러내야 할까….'
우선 거인의 육체나 용의 노심을 얻은 것을 밝히는 것은 제외다.
너무 강한 힘을 드러낸다면 불필요한 경계심을 살 수 있다. 어차피 지하수로의 흔적을 통해 마법이 아닌 검으로 도적을 상대한 것을 알았겠지.
'그렇다면….'
알렌은 잠시 고심한 것처럼 침음을 흘리다 슬그머니 대답했다.
"…으음, 잘 모르겠구나."
"이번에 지하수로를 통해 습격한 도적들을 상대로 승리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확실히 강해졌기는 한데…."
알렌이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고 어물쩍거리자 율리우스는 답답한 듯 물었다.
"그럼 서클이 하나 더 늘어난 게 아닙니까?"
"그건… 아니다. 내가 수련한 건 서클 체계가 아닌 다른 체계의 마법이니까."
"…다른 체계 말씀입니까?"
"그래 서클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보조적으로 익혔지."
그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알렌은 그가 그런 표정을 짓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서클 마법 체계는 현시대에 대부분의 마법사가 사용하는 가장 효율적인 체계다.
옛 시대의 마법 체계는 극히 소수를 제외한다면 현시대보다 떨어지는 게 대부분.
물론 몇 가지 마법 체계를 동시에 익히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하나에 집중하는 것만 못했기에 추천되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둘러대는 것이 나아.'
검을 사용할 것이라는 사실은 숨길 수 없다.
차라리 육체와 관련된 마법 체계를 익혔다고 변명하는 것이 앞으로 검을 익히는 것에 불편함이 없으리라.
"그러니 내가 얼마만큼 강해졌는지 가늠하기 힘들구나."
"아…."
그의 대답에 율리우스는 눈치를 보듯 고민하는 얼굴로 알렌을 보았다.
'구슬의 건으로 확신했다. 놈에게 어떤 불합리한, 세계에서 비호하는 것 같은 흐름을 타고 있다는 것을.'
퀘스트? 시스템?
근본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놈의 행동을 보조해 주는,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검은 책을 통해 놈의 모든 행동이 퀘스트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항상 하는 일에 운이 따른다.
'그래, 이름 붙이자면 세계의 가호. 그게 적당하겠군.'
이번에 율리우스와 티타임을 가진 목적도 놈의 기이한 가호의 한계와 실력을 알아보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던가.
"도적 떼는 상대가 되지 않았지. 그렇다고 지금과 같은 시기에 바쁜 기사한테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더냐."
그의 힘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해.
"아, 그래. 너도 용병과 결투해서 승리했다고 했지?"
율리우스의 호승심을 은근히 자극하는 선에서.
"그놈들은 어땠느냐. 강했느냐? 들어 보니 활약이 엄청났다고 하던데."
알렌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그의 대답을 유도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구나."
율리우스는 그의 말이 끝나자 결심했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럼…, 저랑 한 번 대련해 보시겠습니까?"
'걸렸다.' 알렌은 입가에 피어오르는 진한 미소를 숨기며 당황한 듯 물었다.
"너랑 말이냐?"
"예. 형님께서 자신의 힘을 시험할 겸 오랜만에 대련을 해 보는 건 어떨지…."
율리우스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자 알렌은 잠시 생각한 후에 입을 열었다.
"나로 괜찮겠느냐?"
"예. 마침 저도 이번에 꽤 많이 성장한 걸 느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래."
알렌은 동생의 부탁을 얼마든지 들어주겠다는 듯, 활짝 웃으며 답했다.
"얼마든지."
계획대로였다.
"잘 부탁한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알렌과 율리우스는 서로 마주 본 채 해맑게 웃었다.
제36화
알렌이 기억하는 율리우스는 영웅담의 주인공에 가까웠다.
인격, 성격, 품행.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놈의 성향은 영웅과는 동떨어져 있으면 동떨어져 있지, 결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악마를 죽이고, 고대의 괴물을 해치우며, 흑마법사의 음모를 저지하는 그의 모험담은.
'정말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영웅과도 같았으니.'
위기에 빠지면 어디선가 나타난 강자가 도와준다. 함정에 빠져도 기적같이 빠져나오며,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건도 가뿐히 해결한다.
어디선가 귀한 영약을 끝도 없이 구해 오며, 벽을 마주하지도 않고 끝없이 성장한다.
알렌은 그런 거짓말과도 같은 모습에 의문을 느꼈다.
'어떻게.'
어째서 놈이 하는 모든 행동은 잘 풀릴까.
모든 일이 잘 풀릴 수는 없다.
성공 신화를 세운 상인도 작은 실수를 할 때가 있고, 큰 실패만 반복하던 사람도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요컨대, 아무런 실패 없는 삶을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율리우스는 왜 실패하지 않지?'
알렌의 고민은 그런 의문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결론을 낸 상태였다.
'놈은 세계의 가호, 혹은 비슷한 초월적인 누군가의 비호를 받고 있다.'
그게 놈에게 시스템이란 기물을 내려 준 이와 같은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검은 책을 읽을수록, 회귀 전의 그의 행보를 떠올릴수록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율리우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놈을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인다.'
놈은 행동하는데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짧게, 이렇게 행동하면 될 것이라고 깊이 고민하지 않고 행동한다.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성공적이지.'
비고를 꼼꼼히 살폈다고 초대 용사의 신기를 발견한다?
오랜 시간동안 아무도 정체를 알지 못하고?
그것도 비고의 한구석에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알렌은 놈과 대련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유도했다.
"준비는 됐느냐?"
임시적으로 이름 붙인, 세계의 가호의 한계와 정확한 발동 조건을 알기 위해.
그리고.
"예, 형님."
율리우스의 실력을 파악하고 습관과 버릇을 알아내기 위해.
알렌의 눈이 상대를 향한다.
자신보다 작은 키, 겨우 몇 개월 수련했다고 믿기지 않게 틈이 보이지 않는다.
틈이 없나? 아니 있겠지.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어차피 검술로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잖아.'
그가 미래에 가질 수식어는 다양했다.
대수림의 은인. 수인의 친구. 마족 학살자. 뇌신.
그에 비해 자신은 어떤가? 명성은? 능력은?
동생을 찾을 방법을 몰라 자포자기한 채 악마와 계약한 얼간이. 그것밖에 더 있나?
'애초에 이렇게 대등하게 설 수 있었던 것 모두….'
회귀와 책 덕분이다.
그게 전부.
그것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다시 놈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겠지. 그런데 부끄러울 게 있나?
'없다.'
따라잡으면 될 일이다.
"형님, 제가 이길 것 같으니 살살 하겠습니다."
율리우스가 자신만만한 태도로 진청색의 기운을 손에 둘렀다. 뇌기가 그의 팔을 감싸며 검을 뒤덮었다.
"그래?"
알렌은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실타래를 뿜어냈다. 심장이 거칠게 박동하며 낮게 울린다.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적당히 3위계 정도의 마력을 사용한다. 신체 능력도 놈보다 살짝 약하게. 훈련용 검의 뭉툭한 날이 상대를 향했다.
'베스틀라를 사용했으면 좋았을텐데.'
하지만 대련이니 어쩔 수 없지.
"아니오, 오늘은 제가 이길겁니다."
잡생각이 사라진다.
시야에 율리우스, 놈만이 가득 찼다. 몸을 돌아다니는 마력이 기이한 파동을 뿜어내며 가속하기 시작했다.
놈은 앞으로도 어마어마한 속도로 성장하겠지. 그래서 뭐?
알렌은 놈과 마주보는 이 순간.
"그럼, 간다."
도저히 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알렌의 실타래가 검을 옅게 감싸며 반투명한 막을 형성한다. 검기를 사용할 수 없으니, 놈의 전격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알렌의 발이 땅을 딛고 강하게 가속한다.
순식간에 접힌 거리. 반투명한 기운은 뾰족하게 뭉쳐 율리우스의 얼굴을 찔렀다.
율리우스는 형의 진지한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뾰족한 끝이 얼굴을 금방이라도 꿰뚫을 것 같았지만, 율리우스의 미소는 가라앉지 않았다.
-후우웅!
검끝은 허공을 꿰뚫었다. 알렌의 고개가 곧바로 아래를 향한다. 율리우스는 그곳에 있었다. 튕겨질 듯 수그린 몸.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알렌은 남은 한 손으로 공간을 두드렸다. 충격파가 일었다.
팡!
유효타를 기대하지 않는다. 이 정도를 막아 내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작은 폭음이 일며, 몸이 뒤로 밀려났다.
날리는 흙먼지 사이로 율리우스가 빠르게 파고들어 왔다.
'견제도 안 됐나.'
감지력을 극대화시킨다. 대련장 안의 모든 곳이 느껴진다. 어디냐.
-피슝!
뺨에 피가 흐른다. 반응이 살짝 느렸다. 주변 공간을 모두 장악해 공격을 감지했지만, 율리우스의 검격은 전보다 더욱 빨라졌다.
등골이 오싹했다. 3위계로 감당이 안 된다고 벌써 어디까지 성장한 거지? 이대로는-.
지지직!
생각이 끊어졌다.
진청색의 전격이 몸을 타고 올랐다. 알렌은 즉시 발을 허공으로 쭉 뻗었다. 율리우스가 놀란 표정으로 몸을 굽혔다.
알렌의 발에 실린 힘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렌의 몸을 밀어내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도약한 몸이 빠르게 멀어진다.
멀어지기 무섭게 몸에 붙어 있던 전격을 떨쳐 냈다. 마력량을 조절해서. 다시.
'예상보다 빠르게 성장했다니. 징글징글하군.'
땅에 떨어진 그는 즉시 몸을 낮추고 달려들었다. 율리우스가 즉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보였다. 알렌은 곧바로 검을 던졌다.
후웅-
"뭐?"
율리우스의 당황한 표정. 알렌의 장기는 검이 아니라 마법이었다. 섬세하고 정밀한 손놀림으로 알렌은 즉시 수인을 맺는다.
무수히 뻗어 나오는 실타래는 곧 알렌의 두 손에 엮이며 하나의 심벌즈로 변했다.
알렌은 율리우스가 대응하는 걸 기다리지 않고 심벌즈를 맞부딪쳤다.
쾅!
'구름 속 우뢰.'
터져나간 충격파는 회색의 창이 되어 공간을 꿰뚫는다.
율리우스는 급히 날아온 검을 튕겨 냈다. 그러나 이미 마법은 그의 거리 안으로 들어간 상태.
날카로운 창이 소음을 발하며 다가오자 율리우스는 급히 마력을 끌어올려 검기를 날렸다.
쾅!
마법과 검기가 흩어진다.
알렌은 율리우스의 대응을 예측하며, 그의 거리 안으로 들어갔다. 한 손으로 날아간 훈련용 검을 붙잡고, 허리를 숙였다.
스릉-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칼날에 알렌은 남은 한 손의 실타래를 뭉쳐 공중으로 집어 던졌다.
'망치.'
실타래는 무채색의 망치로 변해 떨어져 내렸고, 율리우스는 어쩔 수 없이 공격을 막아 내며 다시 후퇴했다.
알렌은 급히 검을 찔러 추적했지만, 율리우스가 크로스 가드로 막아 내자 어쩔 수 없이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하하. 형님 실력이 너무 늘어나신 것 아닙니까."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율리우스. 분명 몇 개월 전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다 노력한 덕분이지요."
"그런가?"
"예."
누구도 믿지 않을 변명이었지만 어쩌겠나.
'자기가 그렇다는데.'
알렌은 픽- 웃고는 자세를 잡았다.
아직 엉성했지만, 베스틀라의 교육 덕분일까 그런대로 기본기는 잡혀 있었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먼저 들어온 것은 율리우스였다. 전보다 더 속도가 빨라졌다. 율리우스의 검에 날은 없다. 하지만 날이 없다 하여 날붙이가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전격이 흐른다. 푸른 전격은 훈련용 검을 날카로운 명검보다 더 위협적인 무기로 만들었다.
'놈의 모든 걸 알아야 한다. 버릇, 습관, 반응. 그 모든 걸.'
받아 낼 수 있나?
"하기 나름이겠지."
혼잣말에 율리우스의 표정에 의문이 떠오른다.
굳이 대답해 줄 필요는 없다.
알렌의 검 위로 실타래가 휘감기며 검을 감싸 안는다. 놈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들 알렌은 '따라잡을 수' 있다.
'전력을 끌어내기 위해서 어느 정도는.'
맞춰 줄 필요는 있단 거다.
율리우스는 몸에 전격을 두르며 쇄도해 왔고, 알렌은 그에 맞춰 앞으로 달려 나갔다. 평범한 걸음에 거인의 활력이 깃든다.
놈이 전력을 낼 수 있도록.
검이 움직였다. 율리우스의 검격은 마치 낙뢰를 닮아 있었다. 그에 반해 알렌의 검은 우직했다.
쾅!
"이게 끝이냐?"
전격이 흩어진다. 율리우스의 검기는 꺾였고, 알렌의 검막은 부서져 내렸다.
"아니요, 이제 시작입니다."
율리우스는 눈에서 전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랫배에서 시작된 마력은 뇌전으로 변해 그를 뇌신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래? 나도…."
실타래가 뿜어진다. 전후좌우. 전격을 막아 내며 실타래는 날카로운 날붙이로 얽히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다."
대련이 다시 재개되었다.
* * *
대련의 심판을 맡은 수습 기사, 판은 멍한 얼굴로 대련을 구경했다.
전격이 떨어지며, 훈련장이 파헤쳐진다. 율리우스의 공격은 신속하고, 예측하기 힘들다면, 알렌의 공격은 둔중하고 무거웠다.
전체적으로 볼 때 율리우스가 알렌을 밀어붙이는 구조였다.
"알렌 공자님은 본래 마법사라고 하셨지."
다른 사람이라면 이미 감전되고도 남을 전격을 마법으로 밀어내며, 눈으로 좇기 힘든 공격을 방어한다.
아직 몸을 쓰는 것에 익숙지 않아 보였지만, 율리우스와 저렇게 대련하는 것만으로도 판은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 그의 시선이 진청색의 전격을 두른 율리우스를 향했다.
"…저런 분을."
주군으로 섬기게 되었다니.
그는 몇 달 전, 율리우스에게 사죄를 내기로 대련했던 것을 떠올렸다.
'처참하게 패배했지.'
그때만 해도 운이 없다. 조금 더 성장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한눈판 사이 율리우스는 그가 따라잡을 수도 없는 곳으로 나아간 지 오래였다.
그날 이후로 수하가 되었다고 했지만 한 번도 자신을 부른 적은 없었다.
'언제 불러 주실지.'
고개를 저었다.
기사는 주군의 부름에 언제나 대기해야 하는 법. 이번에도 자신을 심판으로 불러 주셨지 않나.
'아직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율리우스 님은 나를 잊지 않으셨어.'
모두 자신이 부족한 탓이다.
실력을 기른다면 찾아 주시리라.
판은 생각을 그만두고, 함부로 보기 힘든 강자의 대련에 집중했다. 이런 기회는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 * *
알렌은 수십 번을 반복한 공방을 이어 나갔다.
'이다음은…, 오른쪽 아래던가?'
감지력이 감지하는 것보다 한층 빠르게 검을 내린다. 검을 내리기 무섭게 하단을 노리는 검격을 막아 냈다.
캉!
'이다음 공격은, 좌측 어깨. 아니, 좌측 상체 아래?'
알렌은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에 따라 몸을 틀었지만, 날카로운 예기가 뒷목을 훑었다.
간신히 고개를 숙였으나, 뒷목의 솜털을 스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이번 건 5번째 패턴인가.'
알렌은 그와 합을 맞추면 맞출수록 그의 버릇과 습관 그리고 공격 양식을 파악할 수 있었다.
율리우스는 하단보단 상단에서, 왼쪽보다 오른쪽을 공격하는 것을 선호했고, 공격이 막힌다면 무의식적으로 전격의 양을 늘리는 버릇이 있다.
'총 37번의 정형화된 양식.'
아직 수련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은 탓인지 공격하는 장소도 한정되어 있으며, 강한 공격은 무조건 머리를 노리는 습관이 있다.
'이제 슬슬 다 파악한 것 같은데….'
이것으로 자신이 율리우스보다 강하다는 사실도 확인했으며, 놈의 버릇과 습관을 비롯한 정보를 수집했다.
물론 놈이 강해질수록 필요 없는 습관과 버릇은 없어지겠지만, 이 모든 정보가 쌓인다면 놈을 찌를 한 수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놈을 보호해 주는 가호가 지금도 그를 지켜 줄까.
'확인해야지.'
율리우스가 다시 돌진해 온다. 그는 이번 대련이 즐거운 듯 연신 미소 지으며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알렌은 적당히 공격을 막아 내며,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율리우스는 끈질기게 알렌을 추적해 오며 그를 몰아붙였다. 겉으로 보기에 지친 알렌이 그의 공격을 힘겹게 버티는 상태.
"형님, 이게 끝입니까? 저한테 이기신다고 하신 말씀은 어떻게 된 겁니까!"
알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기도 힘들다는 듯. 더 이상은 벅차다는 듯.
"아까 같은 기세는 더 이상…."
훈련장의 중앙으로. 조금만, 조금만 더.
"형님, 솔직히 이 정도로 강해졌을지 몰랐…."
이제 거의 다 왔어. 한 걸음 옆으로.
쾅!
율리우스의 검격이 내지르자, 알렌은 힘이 빠진 듯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시전하던 마법도 취소된 채 무방비한 상태.
"콜록, 케엑."
그 여파일까 바닥에 피를 토해 낸 알렌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지만, 더 이상 검을 잡기 어려운 상태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마지막 남은 마력을 짜내 마법을 날렸다.
몇 가닥의 실타래가 겨우 엮이며 작은 송곳으로 사출된다.
그 때문에 얼굴이 하얗게 변했지만, 율리우스는 그 마지막 발버둥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렇게.
"저의 승리…."
율리우스가 승리를 확신한 채 마법을 피하려던 순간.
"입니… 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어?"
율리우스가 얼른 알렌을 바라보자, 알렌도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팔다리가 쥐가 난 듯, 움직이지 못했으며, 날카로운 송곳이 그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절체절명의 상태.
형제끼리 대련을 하던 중 '우연'히 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 상황.
율리우스가 멍하니 심장으로 날아오는 송곳을 응시하던 그때.
콰앙!
갑작스럽게 송곳이 지나가던 공간이 폭발을 일으켰다.
여러 가지 마력이 섞이면 극히 희박한 확률로 일어난다는 마력 중첩 폭발이 '우연히' 송곳이 지나가던 그때 일어난 것이다.
"대, 대련 정지!"
알렌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가운데, 판은 크게 놀라 대련을 중지하고 율리우스에게로 달려갔다.
율리우스도 방금 일어난 사태에 많이 놀란 듯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도, 도련님. 괘, 괜찮으세요?"
그는 급히 바닥에 쓰러진 율리우스의 팔과 다리를 주물렀다. 그러고는 확실치 않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아마… 물을 마시지 않고, 격렬한 대련을 하느라 쥐가 난 것 같습니다."
그의 답에 정신을 차린 율리우스는 판에게 되물었다.
"쥐가 났다고…?"
"예, 도, 도련 아니, 주군. 훈련할 때도 몇 번 이런 적이 있어서…. 그런데 팔, 다리 모두 쥐가 나다니…."
알렌은 그가 의문을 토해 내기 전,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는 듯 급히 율리우스에게로 향했다.
"율리우스! 율리우스, 괜찮느냐!"
"아, 예. 예. 괜찮습니다. 형님."
"내가, 내가 미안하구나. 율리우스. 아니, 이럴 게 아니지."
알렌의 낯이 매우 놀란 듯 창백하게 변하자, 율리우스는 혹시 알렌이 이런 일을 꾸몄을까 하던 의심이 사라졌다.
'형님이 일부러 저랬을 리가 없겠지.'
마지막 공격을 했을 때부터, 그를 몰아넣기까지.
모두 자신의 공격을 막기 급급했던 알렌이 그런 일을 꾸미리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럴만한 동기도 없었고.
"아니, 이럴 게 아니지. 판, 판이라고 했나? 얼른 사제를 부르게."
"예, 예. 알겠습니다."
"아니, 형님… 고작 쥐가 난 것 가지고…."
"고작이 아니다! 방금 얼마나 위험했는지 아느냐!"
알렌이 호통을 치며 걱정을 하자, 율리우스는 미세하게 남아 있던 의심까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부축해 주마."
"예."
판은 급히 사제를 부르러 훈련장을 나섰다.
"정말 괜찮느냐?"
"예. 지금은 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율리우스는 그의 걱정이 기꺼운지 싱글벙글 웃었다.
"뭐가 좋다고 그렇게 웃느냐."
알렌의 말투는 불퉁했지만, 율리우스를 향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하하, 그냥 형님의 이런 면도 있나 싶어서 말입니다."
"형을 놀리면 기분이 좋으냐?"
알렌의 목소리는 따뜻한 감정이 묻어 나왔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형님을 놀려 보겠습니까."
"입만 살아서는…, 쯧."
하지만.
"아버지께는 내가 말해 두마. 며칠 쉬는 게 좋겠다."
"그러면 저야 좋지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무감정하게 그를 응시했다.
언제나처럼.
제37화
새삼 생각해 보면 백작령에는 귀한 물건이 꽤나 많이 있었다.
히벨로 향하기 전, 마력을 늘리기 위해 도시에서 찾은 영약.
백작령 남서쪽, 거인의 유적지에서 찾은 베스틀라와 거인과 용의 유해.
가문의 보고에 먼지만 쌓여 가던 용사의 5대 신기.
율리우스가 발굴한 수많은 유적지에서 발견된 고대 유물들.
세상에 보물이 많이 있음에도 그저 찾아내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유독 라인하르트 백작령에 귀한 물건이 넘치는 걸까.
분명한 건 율리우스는 회귀 전에 많은 보물을 영지에서 찾아냈다는 것이고.
덜컹-
"아얏!"
그것을 그대로 놔둔다면 율리우스가 이번에도 그 물건들을 챙겨갈 것이란 사실이다.
덜커덩-
"흐앗!"
알렌이 마차를 타고 있는 이유도 그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율리우스가 가졌던 물건들을 먼저 선점하기 위해. 또, 일행의 전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그 때문에 알렌은 이넬리아와 린벨만을 데리고 은밀하게 저택을 빠져나와 허름한 마차를 타고 위장까지 했다.
행적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덜컥-
"아흐…, 엉덩이야…."
마차가 불편한지 자꾸 자세를 바꾸던 린벨은, 어디선가 느껴지는 눈빛에 고개를 돌렸다.
"앗! 공자님?"
"왜 그러느냐, 평소 타던 마차가 아니라서?"
"그게…, 헤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린벨은 평소에 타던 마차가 아닌 딱딱한 감촉에 엉덩이가 너무 아팠다. 아니, 아픈 모습을 보였다.
몇 달 전만 해도 마차는 딱딱하고 불편한 게 당연한 시골 소녀가, 오랜만에 느끼게 된 감촉에 놀란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이 나온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프라나를 쓸 줄 몰랐으니까.
공자님께서 재능이 있다고 해 주셨는데.
프라나는 고귀한 힘이라고, 나는 분명할 수 있다고 말해 주셨는데.
이넬리아는 가끔씩 공자님의 명령이라며 어딘가로 사라진다.
고귀한 힘인 프라나를 자신은 분명히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해 주셨는데.
오히려 천천히 하려며 과분한 배려를 해 주시는데.
엄마는 가끔씩 공자님의 명령으로 자리를 비운다. 능력을 인정받았으니까.
'힘을 얻어야 하는데.'
다시는 전과 같은 일을 겪지 않으려면 힘이 필요했다. 충분한 힘이.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손에 물집이 터져라 검을 휘둘러도.
여기사가 더는 가르칠 것이 없다고 말했음에도.
그녀는 검 좀 휘두를 줄 아는 시녀밖에 되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린벨은 자연스럽게 애교를 부리게 되었다.
이렇게라도 존재 가치를 어필하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너무 편하게 지냈나 봐요. 헤헤."
사실 별로 아프지는 않았다.
그만큼 단련을 했으니, 이 정도 고통은 버틸 만한 게 당연했다.
쓸모를 입증하기 위해서.
대가 없는 호의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려면.
그녀의 동공이 어둡게 일렁거리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알렌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우스운지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다음에도 이렇게 허름한 마차를 탈 때가 있을 텐데, 그때는 어쩌려고?"
"그때는… 어떻게든 적응해야죠? 헤헤."
린벨이 어설프게 웃으며 얼버무렸지만, 알렌은 어림도 없다는 듯 답했다.
"다음에는 반드시 적응할 수 있도록 해라."
"…히잉. 알겠어요."
꼼지락꼼지락.
그녀는 알렌한테 한 번 주의를 들은 후에도 낑낑거리며 얌전히 있지 못했다.
알렌은 마차 창문으로 보이는 울창한 숲과 저 멀리 보이는 산을 바라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흠…, 이 정도 속도면 30분은 더 걸릴 텐데.'
알렌은 거인의 신체로 뒤바뀐 후로 웬만한 자극에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회귀 전에는 단련하지 않은 허약한 몸이었으니.
'단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힘들겠지.'
알렌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렇게 불편하느냐?"
그녀는 알렌이 바랐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노심이 요동치며 수십 가락의 실타래가 풀려나왔다.
"이번만이다."
"네? 꺄악!"
린벨의 몸 위로 실 자락이 연결되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와아…."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공중에서 몸을 조심스럽게 보고는 감탄했다.
"헤헤… 감사합니다. 공자님."
"다음에는 스스로 참아 낼 수 있도록 노력하거라."
"네에-"
알렌은 스스로도 느낄 정도로, 유독 린벨에게 관대하게 변했다.
그것이 회귀 전에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탓인지, 그녀를 시녀로 끌어들였다는 책임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면.
'그녀의 존재가 하나의 증거가 되기 때문일까.'
미래가 바뀌었다는,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 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든.'
그러나 그 태도를 굳이 고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의 시녀인데, 특별히 대한다고 해서 뭐가 문제일까.
"음, 으음-"
알렌은 콧노래를 부르는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다, 문득 생각난 걸 물었다.
"린벨. 프란시스카 양은 아직 안 돌아왔나?"
"프란시스카 님은… 네. 아직 돌아오시지 않으셨어요."
아직도 프란시스카 양이 돌아오지 않았다라….
"아무런 소식도 없이?"
"네. 저택에 돌아가면 다시 확인해 볼까요?"
"그래, 부탁하지."
"넵!"
알렌은 그녀와 만날 필요가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에게 선물해 준 키메라의 혼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한 달이 넘게 지나가도록 소식이 없다니.'
알렌은 과거의 기억을 되살피며, 검은 책을 뒤져 봤으나 아쉽게도 그녀가 마탑의 소집을 받아 프린달과 함께 떠났다는 것밖에 알 수 없었다.
'아카데미로 떠나기 전까지는 만나 봤으면 좋겠는데.'
수확제 전에 떠나간 그녀는 수확제가 다 끝난 후에도 소식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똑똑-
"공자님, 잠시 멈추었다가…."
"다들 내려와!"
"시발, 빨리 안에 있는 놈 나오라고!"
"…!!"
이넬리아의 목소리 뒤로 걸걸한 목소리들이 들려오자 알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인적이 없는 곳까지 도적이 나타나다니.'
아니, 이런 장소기 때문에 도적이 있던 걸까.
"빨리 나오지 못해? 다 죽고 싶어? 가진 거 갖고 다 나와!"
"공자님?"
"그래, 나가지."
-끼익
녹슨 경첩이 삐걱거리며 마차의 문이 열렸다.
마차에서 내려가자, 가을의 시원한 바람이 그를 맞이했다. 주위를 둘러보자 벌거벗어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 아래로 알록달록한 단풍잎이 세상을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고개를 위로 돌리자 지저분한 복장의 도적 열댓 명이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그를 바라봤다.
"형님, 형님. 이거 대박 아닙니까?"
"와…, 귀족을 털다니. 형님의 혜안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래 자식들아! 내가 여기 숨어 있자고 했잖아!"
알렌은 이미 도적질에 성공한 것처럼 떠드는 저들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공자님, 제가 처리할 수 있습니다. 괜히 나오신 건 아니신지…"
"아니, 어차피 여기서부터는 마차로는 가기 힘들 테니 슬슬 내리려던 참이었어."
"그렇다면 제가 빠르게 끝내겠…."
"제가!"
이넬리아가 나서려던 차에 린벨이 소리쳤다.
"제가 할게요."
이넬리아는 말리려고 했다. 아직 이르다고, 자신이 하면 된다고.
"저도 훈련한 성과를 보여 드리고 싶어요."
그러나 뒤를 이른 그녀의 말에 나오려던 말이 턱 막혔다.
"공자님을 계속 따를 텐데, 전투를 피할 수 없잖아요? 이번 전투는 경험을 쌓기에 괜찮을 거예요."
이넬리아는 그녀가 평소에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마음으로 저 말을 하는지 알았기에 침묵했다.
알렌은 그녀가 말하는 것을 빤히 응시하다가 허락했다.
"그래, 경험을 쌓기에는 괜찮겠지."
"네! 그러니까…"
"하지만."
알렌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서는 간절함만이 소용돌이쳤다.
"너는 사람을 죽일 거다. 처음에는 사람이 아닌 것부터 죽여도 늦지 않다. 그래도 하겠느냐."
그녀는 주저 없이 답했다.
"네. 할게요."
"그렇다면…, 허락하지. 너의 성과를 보여다오."
린벨이 검을 들고 앞으로 나오자, 도적들이 크게 웃으며 비웃었다.
"아가야, 왜 혼자 왔냐? 잘난 저 공자가 너를 버리신다고 했…."
서걱-
"어?"
순식간에 일이었다.
맨 앞에 있던 도적의 목이 공중에 떠오른다. 핏물을 터트린 몸뚱어리는 옆으로 넘어지기 시작했다.
린벨의 검격에 망설임은 없었다. 배웠던 대로. 훈련받았던 움직임대로.
'움직임은 최소한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제이크! 감히 제이크를…"
검이 움직였다.
"죽…, 케르륵."
뼈와 살을 가르는 끔찍한 감촉을 무시한다. 최대한 마음을 비웠다.
'이 행위는 선행이니까.'
이것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다. 앞의 사람은 도적. 이들로 인해 사람이 피눈물을 흘렸으리라. 그러니 정당하고, 필요한 행위다.
"다들 뭐 해! 죽여!"
"이 새끼가!!"
린벨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하며, 작게 읆조리기 시작했다.
"프라나는 고귀한 힘…."
그러니까 이 전투는.
푹-
"끄아아아아!"
죄악을 씻어 내는 고귀한 행위다.
조잡한 도끼가 날아온다. 그녀는 살짝 허리를 비틀어 피하고, 몸을 낮춤과 동시에 위로 검을 찔렀다.
턱을 꿰뚫은 검이 머리로 빠져나온다.
"네 명."
고귀한 힘을 사용할 자격을 증명하는.
"죽어──!"
옆에서 자세를 낮추고 들어오는 적의 어깨를 찔렀다. 내려찍는 검격을 피함과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후웅-
앞머리가 나풀거린다.
큰 공격에 빈틈이 드러난 도적의 목을 그었다. 피거품을 내뿜으며 쓰러지는 도적. 린벨은 옆에서 겁에 질린 듯 당황한 도적의 손목을 베고 빠르게 가슴을 찔렀다.
"자. 잠시 항복, 항복할…"
푹-
"일곱."
그다음은 도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반절에 달하는 인원이 순식간에 살해당하자, 나머지 잔당은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목을 내놓았다.
"하아, 하아."
"린벨, 괜찮니?"
이넬리아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전투가 끝난 즉시 린벨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 이 정도는. 갑자기 움직여서 그래.'
린벨은 부들거리는 손을 애써 그러쥐며 무거운 물건을 들고난 후랑 다를 게 없다고 주워섬겼다.
아직은 부족하다.
마력도, 프라나도 없이. 고작 이 정도로는.
"괜찮느냐. 힘들지는 않고?"
알렌은 그녀의 손이 떨리는 것을 모른척하며 물었다. 이런 결과를 선택한 것은 그녀였기에.
그 결과마저도 존중해 줄 필요가 있었다.
"네."
린벨은 흔들리려는 표정을 다잡고,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처럼, 언제나 보이는 모습대로.
"헤헤-, 조금 힘들기는 한데,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조금 쉬다가 이동하도록 하지."
"저 때문이라면…."
린벨이 급히 이넬리아 품에서 나와 입을 열었으나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저 근처에 다른 이들이 있는지 확인해 보려고 그런 거니, 신경 쓸 필요 없다."
"…아."
이넬리아에게 눈치를 주자 그녀는 아- 하고 입 모양으로 감사를 표했다.
알렌은 감지력을 펼치며, 잠시 근처를 돌았다.
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알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제38화
얼마간의 시간 후 알렌 일행은 니케아 산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마차가 이동할 수 없기에 걸어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율리우스는 또 무슨 퀘스트라는 것을 하려나.'
알렌은 현재 2주일간 근신 처분을 받은 몸이었다.
정확히는 대련을 주관하던 수습 기사 판과 당사자인 알렌, 율리우스까지.
이유는 간단했다.
부주의한 실수와 돌발적인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마련된 주관 역할을 일개 수습 기사가 담당하였으며, 그 원인으로 큰 사고가 날 뻔했으니, 주관자이든 대련 당사자이든 누구도 백작의 화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아버지는 드물게 분노를 내비치며 각자에게 벌을 내렸다.
'그게 정말 마음대로 대련을 벌였기 때문인지 빙의자인 율리우스가 죽을 뻔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말이지.'
그렇기에 알렌과 율리우스는 각 별채에서 2주간 근신을.
같이 휘말렸을 뿐인 판은 완전 무장 한 채로 야간 성벽 근무 500시간과 강도 높은 훈련을 받게 되었다.
알렌은 이 시간을 빌려 몰래 뒷산에서 율리우스가 얻었다는 영약을 가져가기 위해 저택을 나섰다.
움직였다는 걸 숨기기 위해 수련을 한다는 핑계로 별관의 출입을 막아 두었고, 추적을 피하기 위해 허름한 마차를 타고 샛길로 빙 돌아서 움직였다.
이제 그 결실을 맛볼 차례.
"여기서부터는 처음에 설명했던 대로 갈라지지."
"알겠습니다. 공자님."
"내가 준 지도 가지고 있지? 이넬리아와 린벨, 두 명은 남동쪽에서 시작해서 북서쪽까지. 할 수 있겠지?"
이넬리아와 린벨은 의욕 어린 얼굴로 힘차게 대답했다.
'이제 진정됐나 보군.'
린벨은 평소에 알렌이 보았던 그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넵!"
엘 라운드 뒷산에 놈이 얻을 영약을 모조리 가져간다.
'나중에 율리우스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 싶은데….'
직접 보기는 무리겠지.
알렌은 그 사실에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상상으로나마 만족감을 느꼈다.
"그럼, 6시간 후에 보는 걸로 하지."
"공자님, 무운을 빕니다."
"그래 이넬리아, 이곳에서 너에게 해를 끼칠만한 것은 없을 테지만…, 방심은 말도록."
"걱정 마시길 바랍니다."
"그래. 간다."
알렌은 뒤통수에 따라붙은 두 쌍의 시선을 느끼며 몸을 날렸다.
산에 있을 영약을 모두 가져가기 위해서는 시간이 모자랐다.
* * *
넓은 공동.
새하얀 대리석으로 타일이 깔려 있는 공동의 중앙, 작은 원탁에는 9명의 인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로 족히 수백 명이 앉아도 부족함이 없을 수많은 좌석이 오페라의 관람석처럼 원탁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는 대부분 비어 있을 좌석이, 지금은 무슨 일이라도 생긴 듯, 빈자리 하나 없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심지어 거대한 마탑의 마탑주, 작은 학파의 수장 등 영향력 있는 마법사들을 비롯해서 4위계 이상의, 중견 마법사라 불리기에 충분한 인물들이었다.
술렁술렁-
"자네, 왜 긴급 소집령이 왜 떨어졌는지 알고 있나?"
"글쎄…, 뭐 또 어디 원시 회랑이 열렸다는 게 아니겠나."
"흠…, 그럴 듯한데? 근데 그랬다면 지금까지 소집령을 내린 이유를 감출 이유가 있겠나?"
"그것도 그렇군."
대부분은 어떤 일로 강제 소집됐는지도 모르는 상태.
그들은 각기 친한 마법사끼리 안부를 물으며 각자 소집령을 내린 이유를 추측했다.
그 자리의 구석에서 프란시스카는 거대란 로브를 꾹 눌러쓴 채, 애써 지루함을 참아 내고 있었다.
'이 자리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마탑 중 한 곳과 척을 졌다고 해도, 마법사라면 응당 의무에 따라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고집 탓에 강제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예언에서 들었던 사람을 찾았는데.'
어렸을 적부터 그것 하나만을 보고 살아왔다.
그 때문에 할아버지도 그녀의 청에 따라 라인하르트 가문의 전속 마법사가 되었고, 자신 역시 끊임없이 노력해 4위계의 마법사가 되었다.
그런 인고의 시간 끝에 드디어 예언의 주인공을 찾았는데.
'왜 한 달째 이딴 곳에 붙잡혀서는.'
프란시스카의 분노 어린 눈이 원탁 가까이에 앉아 있는 청년에게 닿았다. 그녀는 더욱 로브를 깊게 눌러쓰며, 자신을 감추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도 참기 힘들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쾅!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냐. 바르덴!"
불의 마탑주, 7명밖에 없는 마스터 중 한 명인 파르델은 원탁의 중앙에서 이 회의의 소집령을 내렸다고 할 수 있는 빛의 마탑주에게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그래, 바르덴. 이제 말해 줄 때가 되지 않았어? 설마 아무 이유 없이 부른 거라면 재미 없을 거야~"
"마, 맞아요. 여, 연구까지 다, 다 밀렸는, 는데. 어, 언제까지 기, 기다려야 돼요, 요?"
뒤를 이어 변화 학파의 스카이나와 연금 학파의 마르골이 입을 열었다.
그 뒤를 이어 기다리다 지친 마법사들이 따라 바르덴에게 불평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침묵할 생각이오! 바르덴!"
"긴급 소집령에는 마땅한 이유가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바르덴 님."
"초대 빛의 마탑주가 초대 용사와 인연이 있다고 해서 자신도 같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일세."
"당신을 존중하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마탑주."
한동안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바르덴은 충분히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자 입을 열었다.
"예, 그 말이 맞습니다."
그의 대답에 시끄러웠던 공동은 오히려 조용하게 변했다.
그들은 마법사.
익히던 학파를 떠나서 그들은 충분한 지식과 침착함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긴급 소집령을 내리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으면 안 되지요."
"그걸 알면서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나? 무려 한 달! 아니, 이제는 2주가 더 지나갔다. 그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 근거가 있어야 할 거야."
파르델은 난폭한 성격답게 험악한 눈으로 바르덴을 노려봤다.
"예, 당연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유를 숨긴 채 긴급 소집령을 내릴 만한 이유가."
그러나 바르덴은 파르델의 협박에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파르델은 콧김을 한 번 내쉬고는 입을 다물었다. 성격이 폭급하다고 해도 그는 마법사.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는 바르덴의 말을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이유가 정말 '정당'할 때 이야기였지만.
"여러분은 다들 초대 빛의 마탑주가 어떤 분이신지 아시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음에도 긴급 소집령에 응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초대 용사에게 빛의 지식을 알려 준 여러 스승 중 한 명이자, 고대 제국의 멸망 직전 스스로의 목숨을 희생해 수많은 마법이 끊어지지 않게 만든 분이지요."
모두 초대 빛의 마탑주를 겉으로나마 존중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현대 마법이 이토록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초대 빛의 마탑주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가 아닌 난폭한 성격으로 유명한 파르델이 긴급 소집령을 내렸다면 이 자리의 인원에 반이나 왔을까.
사분지 일의 인물이 왔다 해도 많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유지에 따라 저희 학파는 빛을 다루며, 연구하고, 평생 빛이 무엇인지 탐구합니다. 그와 관련된 아티팩트도 많이 있지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의 말을 끊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저 말을 꺼내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어둠에 민감합니다. 정확히는, '마기'에 민감하지요."
-쿵!
"설마…."
파르델은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를 보았다.
"예, 맞습니다."
그들의 명석한 두뇌는 그가 말을 다 끝마치지 않았음에도 결론을 도출한 상태였다.
"저는 몇 달 전 대륙의 두 곳에서 마기를 감지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수많은 사람이 경악하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
"...!!!"
바르덴은 그들의 반응을 예상했기에 놀라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들은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못 박았다.
"초대 마왕이 토벌된 이후로 사라졌다는, 마기를 말입니다."
소리 없는 경악이 공동을 뒤덮었다.
* * *
"다섯 그루의 오동나무의 중앙 아래에 묻힌 목갑…, 찾았다."
알렌은 목갑 위로 자리한 흙을 털어 내며, 뚜껑을 열었다.
목갑 안에는 진한 푸른빛의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부드러운 천에 감싸여 놓여 있었다.
"이 비약 효과가 뭐였지?"
-촤르르
알렌이 검은 책을 펼치자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가며 그가 읽었던 부분이 나타났다.
『──율리우스는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지도를 따라….』
"여기는 아니고."
몇 페이지를 더 넘기자 알렌이 찾던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목갑 안에는 [푸른 유성우(A)]라는 비약이 담겨 있었다. 이 비약은 57년 전….』
비약에 대한 세세한 내용을 건너뛰자, 자신이 알고자 한 정보가 나왔다.
『──비약의 효과는 간단했다. 주변 공간의 마력을 복용자의 몸으로 흡수시키며, 마력 회로를 넓혀 주고 안정시켜주는 역할을…. 』
"…흠, 나한테는 별 효과가 없겠군."
이미 거인의 신체로 탈바꿈한 알렌에게 마력 회로의 넓이나 마력의 양을 늘리는 건 별 쓸모가 없었다.
"차라리, 친화력이나 감응력을 상승시키는 종류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쓸모없다고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
자신이 필요 없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필요 없지는 않을 테니까.
"몇 개는 린벨과 이넬리아에게 넘기고, 나머지는 일단 보관하…."
알렌이 품에 목갑을 챙겨 넣으려던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찾았어요! 찾았다고요! 야호! 제가 뭐랬어요!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
하이톤의 잘난 체하는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고풍스러운 검 한 자루가 공중을 날아오고 있었다.
"베스틀라."
「지도 따위는 읽을 줄 안다고 했잖아요! 왜 의심해요? 나 잘 찾는다니까? 빨리 사과해요! 얼른!」
알렌은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의심해서 미안하군."
「엣헴! 다음부터 좀 더 주의해요! 누가 지도를 못 읽어요?」
베스틀라는 알렌의 사과에 기분이 좋은 듯 검날을 파르르 떨며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검 자루에는 영약의 위치가 그려진 지도가 끈에 매달려 나풀거렸다.
한참을 그의 주위를 맴돌던 그녀의 시선이 검은 책을 향했다.
「당신은 또 그 책을 봐요? 아무것도 없는 백지 아닌가? 뭔가 내용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글쎄. 잘 모르겠는데."
「흐음…. 뭐 됐어요. 나 그렇게 집착하는 여자 아니니까 더 묻지는 않을게요. 고맙죠?」
"배려 참 고맙군."
베스틀라는 책의 내용을 읽을 수 없었다.
정확히는, 모든 책의 내용이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는 백지로 보인다고 했다.
'나는 내용을 읽을 수 있지만, 제목을 읽을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제목을 읽을 수 있으나 내용을 읽을 수 없다.
알렌은 이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검은 책과 일정 부분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게 정확히 어떤 부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녀 자신도 모른다고 했으니 스스로 알아내는 수밖에 없겠지.
알렌은 목갑을 찾느라 파낸 구덩이를 자연스럽게 메우며 물었다.
"그래서 뭘 찾아 냈지? 월망초? 부서진 독수리 조각상? 그것도 아니면 동굴이라도 찾았나?"
알렌은 검은 책을 통해 율리우스가 회귀 전 이 시기에 얻었던 물건들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글로 설명되어 있었기에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영약이 위치한 곳의 특징이 묘사되어 있었기에 다행이지.'
그 덕분에 가문에 보관되어 있던 지도와 결합시켜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수색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졌다는 것.
이넬리아와 린벨과 헤어진 것도 그러한 연유였다.
'같이 몰려다니며 수거하기엔 시간이 모자라니.'
함께 돌아다니기에는 돌아봐야 할 곳이 너무 많았다.
이넬리아는 빠르게 이동할 수 있고, 사냥꾼으로 활동한 전적이 있으니 수월하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알렌은 그녀들과 헤어지자마자 참기 힘들었다는 듯 떽떽거리는 베스틀라와 함께 산을 뒤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그녀가 날 수 있었기에 공중에서 수색하기에도 용이했다.
그 와중에 알렌은 검은 책을 눈치 보지 않고 사용할 수 있었다.
그녀는 검은 책의 존재를 알고 있기에 허공을 응시하는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한들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렌의 물음에 그녀는 셋 다 아니라는 듯 검체를 흔들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지도 위쪽에 엑스 표시한 곳 있잖아요.」
"…엑스 표시?"
지도에는 영약의 추정 위치에 맞춰서 수색 지역만 붉게 표시해 놨을 텐데?
"아니, 설마…."
내심 포기했던 곳이었다.
대부분의 장소가 특정할 수 있는 묘사가 있던 것과 다르게, 놈이 퀘스트 보상으로 공간 이동을 통해 이동한 장소.
그렇기에 이름과 함께 엑스자 표시만 해 뒀던 장소.
"정령의 샘을 찾았다고…?"
「네! 맞아요!」
"…제대로 위치조차 표시 안 되어 있었는데?"
「찾았다니까요? 어후, 역시 저밖에 없죠?」
"아까는 지도를 읽어 찾아냈다고 하지 않았나?"
「에? 어, 어쨌든 찾았으니 된 거 아니에요? 빨리 가기나 해요! 안 갈 거예요?」
알렌은 빠르게 안내하겠다는 둥, 어서 가자고 시끄럽게 소리치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 답했다.
"…그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정말 정령의 샘을 찾았다면.
"그럼 안내를 부탁하지."
그녀의 작은 거짓말 정도는 넘어갈 용의가 있었다.
「놓치지 않게 잘 따라와요! 놓치면 두고 갈 거니까!」
알렌은 급히 날아가는 베스틀라의 뒤를 따라 산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엘 라운드의 가까이에 위치한 니케아 산에는 별달리 위험한 것이 없기에 알렌의 발을 막을 수 있는 건 없었고, 둘은 순조롭게 안쪽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쫓아가는 중, 알렌은 문득 떠오르는 궁금증에 그녀에게 물었다.
"정령의 샘은 어떻게 발견했지? 솔직히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제39화
「아, 그거요? 돌아다니다 보니 익숙한 냄새가 나는 거 있죠?」
"익숙한 냄새?"
「빌어먹을 귀쟁, 크흠. 하이 엘프의 냄새가 나길래 가 보니까 결계가 있더라구요!」
검이 냄새를 맡을 수 있나?
알렌은 마음속 깊이 떠오르는 의문을 묻어 둔 채 결계에 대해 질문했다.
"결계?"
「네! 뭐 정령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를 막는 것 같던데. 하지만!」
-쑤욱
「짜잔! 이 초초초 천재 미소녀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알렌은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진 베스틀라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발을 멈췄다.
'…이게 결계라고?'
감지력을 넓게 펼쳐 눈앞의 공간을 면밀히 탐색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마력도, 결계의 흔적도. 그 어떤 이상도 없는 평범한 숲의 모습.
'베스틀라가 아니었다면 찾아낼 수조차 없었겠군.'
그녀는 알렌이 뒤를 따라오지 않자, 망설이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크게 외쳤다.
「당신도 들어와요! 당신의 육체 정도면 저처럼 강제로 들어오는 게 가능할걸요?」
알렌은 주변의 지형을 기억해 두고는,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무언가 몸을 부드럽게 밀어내는 것을 저항하며 얼마나 걸었을까.
「왜 이리 늦어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베스틀라가 저 멀리서 검체를 펄떡거리며 소리치고 있었다.
알렌은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쌀쌀하게 밖과 달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
싱그러운 생명력을 머금은 푸른 새싹이 땅을 뚫고 나왔고, 숲 저편으로 작은 폭포가 흐르며 시원한 경관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여기가 정령의 샘인가?"
「네! 정확히는 결계 입구 쪽이죠! 정령의 샘은 결계의 중앙에 있어요!」
베스틀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획-하고 빠르게 날아갔다.
알렌은 그녀를 따라 숲의 중앙을 향할수록 이상함을 느꼈다.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것 같은….
'지금까지 이곳에 오면서 생명체를 봤었나?'
문득 든 생각에 감지력을 펼쳐 살펴봤지만, 기이하게도 이곳에는 한 마리의 생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숲에 흔히 서식하는 놀이나 곰은 물론, 나무를 뛰어다니는 청설모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까지.
기본적으로 숲에 존재해야 할 생물들이 일체 없는 상황.
'결계는 결계라는 건가.'
알렌은 생각을 뒤로 하고, 결계의 중앙으로 향했다.
결계를 연구하는 마법사라면 흥미가 있었겠지만, 자신의 전공이 아니었기에 관심이 가지 않았다.
물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조금만 더 걸으니 정령의 샘을 곧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정령의 샘인가."
한순간에도 수십 가지의 색깔로 반짝이는 수면과 바닥까지 다 보일 만큼 맑은 샘은 보는 것만으로 갈증을 일으켰다.
알렌은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샘물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조심해요! 그거 한 번 마시면 효과 사라지니까.」
멈칫-
"뭐라고?"
홀린 듯 샘물을 마시려던 알렌의 행동이 멈췄다.
「하이 엘프, 그 귀쟁이들이 결계를 친 이유가 뭐겠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알렌이 말릴 새도 없이 샘물로 뛰어들었다.
퐁당-
「어후, 시원해. 정령 같은 영체나 정신체가 아닌 생명체가 닿으면 샘이 오염돼요. 그러니까 신중하게 결정해요!」
"그럼, 베스틀라 너는…."
「검이 생명체는 아니잖아요?」
알렌은 경솔하게 움직이려던 자신을 반성하고 뒤로 물러났다.
내심 포기하고 있어, 대충 훑어보기만 했던 내용을 다시 살펴보고자 책을 펼쳤다.
『──율리우스는 망나니의 평판을 되돌리는 퀘스트를 완수하고 정령의 샘으로 이동하는 공간 이동 스크롤을 보상으로 받았….』
'퀘스트 보상, 생명체가 못 들어오는 결계, 공간 이동 스크롤, 한 번 마시면 끝인 정령의 샘.' 알렌 자신의 감지력으로도 결계의 편린조차 발견할 수 없었고, 검은 책이 아니었다면 이곳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것들도 그랬지만, 특히 이번 건….'
알렌이 읽었던 책의 내용과 베스틀라가 했던 말이 합쳐지자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율리우스를 위한 준비된 보상.'
확실했다.
언제부터 있었을지 모르는 정령의 샘은, 율리우스만을 위한 보상으로 내정되었다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발견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지 않겠지.
자신이 발견할 수 있었던 이유도 검은 책과 베스틀라의 안내, 그리고 바뀐 몸까지 복합적인 이유가 합쳐진 덕분이었다.
놈의 비정상적인 강함도 이런 것들의 도움을 받았다면 이해가 가능했다.
'이런 것들을 끝임없이 제공받는데.'
고개를 털었다.
이곳을 차지한 것은 놈이 아닌 자신이었다.
앞으로 기회가 많다. 이런 식으로 차근차근 준비하면 될 것이다.
알렌은 망설임 없이 샘물을 들이켰다.
그 순간.
『■■■■과(와) 이어진 책이 ■■을(를) 감지합니다! ■■■■이(가) ■■에 반응합니다! 』
『■■■■과(와) 이어진 책이 ■■을(를) 감지합니다! ■■■■이(가) ■■에 반응합니다!! 』
『■■■■과(와) 이어진 책이 ■■을(를) 감지합니다! ■■■■이(가) ■■에 반응합니다!!! 』
...
회귀 직후부터 별다른 능력이 없었던 하얀 책의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가며 미친 듯이 펄럭거렸다.
알렌은 샘물의 맛을 느낄 새도 없이 벌떡 일어섰다.
"…이건?"
그러나 알렌이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하얀 책은 언제 그랬냐는 듯 진정되었다.
-촤르륵
『■■■■과(와) 이어진 책이 ■■을(를) 감지합니다! ■■■■이(가)…』
알렌이 급히 하얀 책을 펼치자 순간적으로 나타나던 글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하였고.
『■■■■과(와) 이…』
「당신 거기서 뭐 해요?」
베스틀라가 입을 열었을 때는.
『알렌 레인하르트,
정령의 샘물을 마시고, 갑작스럽게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
이미 평소의 책으로 돌아온 지 오래였다.
알렌은 깊은 눈으로 하얀 책을 바라보았다.
'하얀 책의 능력이 평소의 나를 기록하는 것 외에 더 있었나?'
방금 나타난 건 무엇을 뜻하지?
알렌은 한동안 하얀 책을 바라봤다. 그러나 하얀 책은 평소처럼 그의 행동을 기록할 뿐이었다.
* * *
샘물의 맛은 의외로 아무 맛이 없었다.
그냥 맹물을 들이켰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수준.
그러나 효과는 확실했다.
-휘옹?
알렌의 눈앞에서 돌아다니는 반투명한 정령들.
전생에도 현재에도 정령과 별 인연이 없던 알렌은 샘물 주위로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는 여러 정령의 존재를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정령과 계약을 맺기에도 무리가 없을 만큼 친화력이 상승해 있다는 방증이었다.
평소라면 새롭게 상승한 정령 친화력에 대해 고찰해 봤겠지만, 알렌은 방금 갑작스럽게 겪은 일을 생각하느라 그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아. 정령의 샘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령의 샘을 바라보자 형형색색으로 반짝이던 수면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샘으로 변해 있었다.
"…아."
「제가 말했죠? 한 번 마시면 끝이라니까? 아쉬워서 그래요?」
"아니, 그건 아니야."
지금 정령의 샘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알렌에게는 자신을 회귀시켜 준 자와 연관이 있을, 책이 반응한 것이 더욱 중요했다.
"이제 다시 나가도록 하지. 나가는 것도 그냥 나가면 되나?"
「맞아요!」
알렌은 정령의 샘을 빠져나온 후 빠른 속도로 남은 영약을 수거했다.
부서진 독수리 조각상 안에 있던 정령옥.
절벽 아래 구덩이에 피어 있던 월망초.
6번째로 발견한 동굴에 숨겨져 있던 비약까지.
그것 외에도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영약이란 영약은 모조리 챙겨 마차가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린벨과 이넬리아가 먼저 돌아와 있었다.
베스틀라는 알렌이 그녀들과 합류하자마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공자님!"
"지도에 표시되어 있던 물건은 모두 수거했습니다."
알렌은 이넬리아가 건네주는 물품을 받아 들고는, 제일 걱정하고 있던 부분을 물었다.
"혹시 흔적은?"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니 차후에 누가 발견한다고 해도 저희가 이곳에 왔다는 걸 알아낼 수 없을 겁니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그녀의 반응에 알렌은 안심했다.
"수고 많았다."
"이 정도는…."
"아니, 이건 차후에 따로 시간을 만들지."
알렌이 그녀에게 느끼는 고마움은 컸다.
남몰래 시키는 일을 아무런 의문도 없이 행하며, 아무런 불평도 가지지 않는다. 수하를 둔 입장에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랐다.
'그러니 보상은 확실히 해야지.'
마침, 그녀와 이야기 나눌 필요도 있었으니 이번에 얻은 정령옥과 같이 건네주면 되겠지.
"시간이 나면 부를 테니, 기대하도록."
"아…."
그 말에 그녀는 올 것이 왔다는 듯 비장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녀의 반응에 두 명이서 만나는 것에 긴장을 하나 싶어 따로 물었으나.
"정 긴장이 되면 린벨과 같이…."
"저, 저 혼자 가겠습니다!"
얼굴을 붉히며 괜찮다는 듯 급히 고개를 흔드는 그녀의 반응에 알렌도 수긍했다.
'괜찮다니까, 괜찮겠지.'
일행은 산에서 얻은 물품들을 모조리 마차에 집어넣고 저택으로 향했다.
몇 시간이 지나 저택의 별관으로 몰래 돌아오는 것에 성공하자, 알렌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 놈의 성장을 막을 수 없겠지만, 잠시나마 늦출 수 있겠지.'
알렌은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근신이 끝났을 때.
"그래, 율리우스. 조심히 다녀오너라."
"형님도 같이 가시는 게…."
"나는 괜찮으니, 왕도 구경을 실컷 하거라. 도에 신기한 물품이 많으니 둘러봐도 좋을 것이다."
율리우스 일행은 왕도로 향했다.
* * *
율리우스 일행은 백작령에서 다 처리하지 못한 고대 유물을, 이맘때쯤 왕도에서 열리는 경매장에 내놓기 위해 왕도로 향했다.
"공자님, 제가 정말 같은 마차를 타도 괜찮을까요?"
"그래, 나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니까."
율리우스는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보는 아냐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그것도 상관없어."
오히려 완전히 율리우스의 사람으로 인식된다면 더 이득이었다.
"레이나."
"예, 공자님."
"니케아 산에서 하루 머물 거라고 말해 뒀지?"
"예, 아마도 잠시 후면 산의 초입으로 진입…."
똑똑-
마차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레이나의 입이 멈췄다.
"공자님, 산에 도착했습니다."
"알았어. 나가지."
문을 열자 가비아에서 그를 따르기로 했던 기사, 바이론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그를 맞이했다.
"말씀하신 대로 뒷산에 도착했습니다."
"율리우스 님. 혹시 뒷산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으시다면 제가…."
"아니, 됐어."
이 일은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잠시 혼자 산책 좀 하고 올게."
"제가 호위를…."
"됐다니까."
율리우스는 조용히 따라붙던 레이나까지 제지한 채 홀로 인적이 없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가 혼자 움직인 이유는 간단했다.
'이번에 슬슬 쌓인 퀘스트 보상이나 챙겨가야지.'
지금까지 유적지 투어와 수확제 그리고 대련까지 일이 겹쳐서 보상을 가지러 갈 수 없었다.
그러니 마침 왕도로 향하는 길에 보상도 챙겨 가면 괜찮을 것이다.
'우선….'
[푸른 유성우(A)]라는 영약이 묻혀 있다는 오동나무가 아래.
지도도 있으니 찾아가는 건 쉬웠다.
율리우스는 지도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오동나무의 밑을 파냈다.
그런데….
"어?"
보상이 없다.
"자, 잠시만 이럴 리가 없는데? 여기가 아닌가?"
율리우스는 지도를 확인했다. 그러나 지도는 정확히 이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율리우스는 주변 땅을 모두 헤집어 봤지만, 마치 그런 물건은 없었다는 듯 아무런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이럴 리가 없잖아."
이것만 그러겠지. 설마 다른 것도 없겠어?
초조한 마음을 숨기며 다른 보상이 있다는 장소로 향했지만….
"하하…, 거짓말이지?"
부서진 독수리 조각상 안에 있다던 정령옥도.
"이것도 없다고?"
절벽 밑 구덩이에 홀로 피어 있다던 월망초도.
"미친, 이건 아니잖아. 없어? 없다고?"
도망친 마법사가 끝내 완성했다는 비약들도.
"…설마, 설마 이것도 없겠어."
아무것도 없었다.
눈이 벌게진 율리우스는 그 후로도 미친 듯이 지도에 따라 뒷산을 뒤지며 보상을 찾았지만….
"지랄하지 마, 지랄하지 말라고! 빌어먹을!"
찾을 수 없던 건 마찬가지.
남는 시간을 쪼개 가며 퀘스트를 완료해서 받을 예정인 보상이었다. 보상이 적힌 지도가 대부분 니케아 산에 묻혀 있었기에 한꺼번에 가져가려고 한 것인데….
"시발."
율리우스는 급히 품에서 한 장의 공간 이동 스크롤을 꺼냈다.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아버지의 시험'을 끝내고 얻은 지도.
특별한 보상을 받는다는 생각에 아껴 뒀던 보상이었다.
-지익
스크롤을 찢자 율리우스의 몸이 부웅 뜨며 순식간에 정령의 샘이 위치한 결계 안으로 이동했다.
"아니지? 설마, 공간 이동 스크롤로 겨우 오는 곳인데. 제발, 제발."
한순간에 저택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산에서 돌아오면 수상하게 여길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지금까지 찾지 않았었는데.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시발, 시발."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율리우스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게 정령의 샘에 도착한 순간.
"…후. 다행이야."
정령의 샘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잔잔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것도 잠시, 그는 이것도 갑자기 사라질까 곧장 샘물을 삼켰다.
-꿀꺽꿀꺽
"…시원하네."
율리우스는 편히 마음먹고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특별한 보상이라고 했으니 이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번 영약은 효과가 조금 늦네."
10분이 지나도.
"이건 좀 다른 건가? 역시 특별한 보상."
30분이 지나도.
"잠시만, 뭔, 뭔가 이상한데…."
1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자, 율리우스는 거칠어지는 숨을 억지로 가다듬으며 샘으로 다가섰다.
"하하, 마시는 양이 모자랐던 모양이구나."
그게 아니라면 아무런 일이 없을 리가 없지.
율리우스는 샘물을 들이켰다.
-꿀꺽꿀꺽
"아직 부족한 거? 더?"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아직, 끄윽, 부족한 거구나. 더, 더 먹어야 돼."
그게 열 모금이 마시고, 스무 모금이 지났을 때.
"아니, 아니야. 이럴 리가 없잖아. 이래서는 안 돼. 안된다고!"
그는 샘물에 머리를 처박고 샘물을 흡입했다.
그러나 배가 터질 것 같이 샘물을 마셨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우웁…."
너무 많이 마신 탓일까.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을 간신이 진정시킨 율리우스의 눈이 멍한 시선이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닿았다.
곳곳에 찢어진 옷과 산발된 머리.
붉게 변한 눈과 거칠어진 숨.
심장은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 쳤고, 눈동자는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단 하나도 없다고?"
율리우스는 그때가 되어서야 정령의 샘의 보상도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도?"
그걸 깨닫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자신이 바라던 결과는 이것이 아니었다.
시발, 시발, 시발, 시발!
"으아아아아아!!"
숲 깊은 곳에서 율리우스의 비명이 한참을 울려 퍼졌다.
제40화
율리우스가 영지를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나갔다.
알렌은 그가 왕도로 향한 후에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이 행동했다.
아침 시간에는 베스틀라에게 검을 배우고, 오전 시간에는 취미로 악기를 연습한다.
오후에는 가문의 후계자로서 배워야 할 지식을 교육받고, 저택에 마련한 작은 공방에서 마법을 연구한다.
중간에는 어머니와 티타임도 가지고, 이넬리아에게 비밀스럽게 시킨 일의 경과를 확인한다.
알렌의 일상은 충실했고, 누가 봐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를 조용히 주시하던 가이엘조차 일주일이 지나도록 알렌이 움직임을 내비치지 않아 관심을 거두었다.
그렇게 시작된 8일째의 아침.
「당신은 모든 일에 철두철미할 것 같은데 의외로 기본기가 허술해요. 그건 아마도 제대로 검을 배운 적 없기 때문이겠죠.」
지금은 베스틀라에게 검술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저는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잘됐다고 보니까.」
그가 의문을 표하자, 베스틀라는 기본적인 것을 가르치듯 간단하게 말했다.
「검술의 대전제는 '안 맞고 공격을 하는 것'에 있어요.」
그녀와 알렌은 직계 전용으로 사용되는 훈련장에 자리하고 있었다.
「검은 창보다 짧잖아요? 서로 원거리에서 공격을 휘두른다고 하면 절대적으로 불리해지는 게 당연하죠.」
알렌이 집중해서 그녀의 말을 경청하자, 베스틀라도 적극적으로 그의 지도에 나섰다.
「그렇기 때문에 검의 길이가 닿는 거리 안에서 잘 피하고 공격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언급한 대전제를 부정했다.
「'우리'는 아니에요.」
쉬익! 베스틀라의 검날이 알렌의 피부를 얇게 스쳤다.
「검을 피하는 이유가 뭐죠? 당연히 부상을 입기 때문이죠. 피부가 날에 베이니까. 그런데 저희는요?」
알렌의 살갗에 몽글몽글 피어나던 피 봉우리가 순식간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없어졌다.
「봐요. 빠르게 재생하고, 일반적인 날붙이는 통하지도 않잖아요. 당신도 제가 아니었으면 상처조차 나지 않았을걸요?」
그 말에는 알렌도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육체가 변한 이후로 작은 생채기가 하나 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웬만한 공격은 맞아도 상관없다는 거죠.」
베스틀라는 단정 짓듯 알렌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기교에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그래도 기교는 중요하지 않나?"
알렌은 가문의 기사들이 대련하던 것을 떠올리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반문했다. 그러나 그녀는 코웃음 치며 반론했다.
「당신은 오우거의 주먹을 흘릴 수 있어요?」
"검술을 배우다 보면 언젠가는…."
「그럴 바에 주먹을 피하고 빈틈을 노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건…."
「당신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 그냥 맞고 반격해도 되겠죠?」
알렌의 말문이 막혔다.
베스틀라는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차근차근 설명했다.
「알렌, 기교는 같은 엇비슷한 힘을 가진 상대에게나 통하는 거예요.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다 소용없다니까요?」
베스틀라는 알렌에게 일부러 보이듯 검의 크기를 키웠다.
거대하게 변한 검이 휘둘러지자 기둥이 날아오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시야 전면을 가릴 정도로 거대해진 크기에 기교 따위는 무용해 보였다.
「인간 사이에도 힘이 나뉘고, 종족마다 가진 힘이 다른데. 당신이 일반적인 기사였으면, 오우거의 팔을 흘리다 몸이 먼저 뭉개질걸요?」
베스틀라는 공격을 멈추고 검체를 작게 되돌렸다.
「모든 생명체가 같은 신체 조건을 가진다면 기술 위주로 검술이 발전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알렌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몇 바퀴인가 알렌의 몸 주변을 돌던 그녀가 다시 그의 앞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당신이 생각할 건 하나, '힘'이에요.」
"힘…."
알렌은 몇 번이고 그 말을 다시 되뇌었다.
베스틀라에게 배우기 시작한 검술은 그가 막연히 생각하던 것과 달랐다.
더욱 단순했고, 더욱 간결했다.
「당신의 육체는 월등히 뛰어나니 공격을 피할 필요도 없어요. 웬만한 공격 따위 무시하고, 정확한 자세로 강한 공격을 돌려주면 되니까.」
자잘한 상처는 무시한다. 회복할 수 있으니까.
공격도 마찬가지. 버텨 낼 수 있다면 신경 쓰지 않는다.
'오직 압도적인 힘 하나로 모든 걸 분쇄하는 검.'
「그게 바로 당신이 저에게 배울 거인의 검이에요.」
알렌은 그녀에게 검을 배우면서 확신했다. 베스틀라를 데려오기 잘했다고.
'두고 왔다면, 이렇게 바뀐 육체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겠지.'
짧은 시간 동안 그녀에게 검을 배웠지만, 그녀가 검에 대해 어마어마한 조예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설명을 듣던 중 떠오른 의문을 알렌은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러면…, 제대로 된 기술은 하나도 없나?"
시중에 떠도는 검술서만 수백 가지다.
그런 것들이야 별다른 특성이 없겠지만, 귀족가의 검술은 궤를 달리했으니까.
"칼질 한 번에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고 뭐, 그런 건 아니더라도 검기 정도는 뿜어낼 수 있는, 그런 비전 말이다."
귀족가의 비전도 돌풍을 일으키고, 화염을 불 싸지르는.
그야말로 마법에 못지않은 비의 들이 넘쳐나는데, 명색이 거인족의 검술에는 그런 것이 없을까?
그의 물음에 베스틀라는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사실, 제대로 된 비전을 가르쳐 주고 싶기는 한데….」
그녀는 머뭇거리듯 말꼬리를 흐리다, 계속 쳐다보는 알렌의 눈길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당신 혹시 기억나요? 하수구에서 빠져나왔을 때.」
"하수구? 그때라면…."
도시로 돌아오기 무섭게 지하수로에서 도적 떼의 기습을 물리친 날이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그때 시간 있냐고 물었잖아요.」
"그랬지."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도 대충 얼버무렸었나?
「사실 그때부터 제 비전을 당신이 쓸 수 있게 당신 전용으로 개조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이게 너무 어렵더라고요. 당신은 신체 크기부터가 본래 우리랑 다르니까. 미안하지만 제대로 쓸 수 있게 고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요.」
그녀는 미안한 듯 말했지만, 알렌은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미 육체를 어떻게 활용할지 깨닫게 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이상은 그녀의 선의일 뿐 강요할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원래 있던 기술을 필요에 따라 뜯어고치는 게 가능한가?'
검술에 대해 잘 모르는 알렌이 봐도 그녀가 하는 일이 얼마나 까다롭고 난해한 일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으스대듯 천재라고 말한 게 사실이었나?'
그녀가 아무리 천재라고 한들, 며칠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내로 알렌 전용으로 뜯어고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정녕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짧은 시간 안에 해결될 일이 아닐 테니.
"괜찮다."
그렇기에 알렌은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어차피 급할 건 없으니까."
율리우스가 왕도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전투를 벌일 일은 없을 테니까.
'놈은 지금 도망치는 영애를 구해냈으려나?'
놈이 왕도로 향하던 중 우연히 위험한 상황의 궁중 귀족의 영애를 구하게 된다.
그 이후에 왕도로 돌아가 귀족가에 얽힌 후계 문제에 끼어들게 되며, 그녀를 도와 그녀를 후계자로 세워 주고.
'그 후에는 경매장에 침입한 적과 싸우고, 암시장의 알력 다툼에 휘말리며 정체를 숨긴 공주님과 만나고….'
그러니 놈이 영지에 돌아오려면 적어도 한 달은 더 있어야 했다.
"재촉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편하게 부탁하지."
「와! 뜯어고친다고 힘들었는데 고마워요!」
그녀가 활짝 웃으며 고마움을 내비치자, 알렌은 희미하게 웃으며 땅에 눕혀 뒀던 훈련용 검을 들었다.
"그럼, 수련이나 시작하지."
그러다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아, 그런데 내가 배우게 될 비전의 이름은 뭐지?"
「비전의 이름은 요툰스베르드(J?tunnsverd). 총 아홉 개의 비의로 이루어져 있는 검술이에요.」
* * *
그런 식으로 알렌은 베스틀라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상대의 공격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자세를 취하게 되었고, 몸을 닿는 공격을 무시할 수 있는 담력을 길렀다. 행동하기 망설였던 과격한 공격들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던 중, 누군가 훈련장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공자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벌써?"
들어오라고 크게 소리치자 이넬리아가 이제는 그럴듯한 발걸음으로 알렌에게 다가왔다.
"수고하셨습니다. 공자님."
알렌은 그녀가 건네는 수통을 건네받으며, 익숙한 표정으로 얼굴과 목을 닦아 주는 그녀의 손길을 받았다.
베스틀라는 그녀가 문을 두드렸을 때부터 알렌의 손에 돌아와 얌전히 침묵했다.
"린벨은 뭐 하고 있지?"
이넬리아는 어두운 표정을 애써 지우며 답했다.
"…돌아온 이후부터 훈련에 힘쓰고 있습니다. 공자님께서 부르신다면 곧바로…."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다."
그녀에게 자유 시간을 준 것은 알렌이었다. 니케아 산에서 그녀의 훈련 성과를 확인했기에 빠르게 판단을 끝마칠 수 있었다.
'검술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순수하게 검술로만 대결한다면 알렌이 패배할 수도 있는 상태.
그렇기에 알렌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보다 그녀가 더 성장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첫 살인에 충격이 있어 보였지만.'
그 정도는 금방 극복하겠지.
그녀의 지금 모습과 별개로 그녀의 전생의 모습이 알렌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기에 그는 그녀보다 그를 더욱 믿었다.
그렇기에 그녀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그녀가 무너지리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렌이 걱정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이번 생에도 린벨이 프라나를 깨달을 수 있을까, 인데….'
프라나는 특별한 힘이다.
마력보다 희귀하며, 프라나를 지닌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기사라고 칭송받는 고결한 힘.
'일단 아카데미에 가기 전까지는 두고 봐야겠군.'
마음 같아서는 그녀가 홀로 프라나를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만, 그가 떠나야 할 때까지 아무런 진전이 없다면 마력이라도 쓸 수 있게 해야 했다.
알렌이 아카데미에서 노리는 것을 이루려면 그녀의 성장이 필수적이었으니까.
'여러 가지 방안을 준비하고 있지만….'
그녀가 직접 강해지는 것이 그림이 제일 좋았다.
"린벨은 스스로 극복할 테니,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럴까요? 공자님이 한 번만 자리를 가지는 건… 아니, 아닙니다. 주제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알렌은 지나치게 걱정하는 그녀를 격려하며 입을 열었다.
"괜찮을 거다. 린벨은 그 정도에 무너지지 않으니. 그래도… 걱정된다면 한 번 확인해 보지."
"…그러시다면, 부탁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는 건 당연하지. 그나저나…."
알렌은 딸에 대한 걱정이 눈 깊숙이 들어찬 그녀를 격려하며, 심장의 감지력을 넓게 펼쳤다.
'좋아, 아무도 없군.'
훈련장 주위로 인기척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알렌은 몸을 숙여 입을 열었다.
"그건 어떻게 됐나."
이넬리아는 알렌의 물음에 입가에 감돌던 웃음기를 지우고, 조용히 다가와 귓속말을 속삭였다.
"말씀하신 '목표'를 조사하는 것이 끝났습니다."
알렌은 그 말에 신중한 얼굴로 되물었다.
"놈들의 규모는 어떻지? 그는 지금 뭘 하고 있고, 어디에 있나."
이넬라아는 공자님이 왜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시녀가 주인의 말에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
그녀는 의문을 갖지 않고 그가 시킨 일을 완벽하게 완수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도시의 양아치를 모은 것에 불과했습니다만…, 뒤는 아니더군요. 자세한 건 보고서로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녀가 곱게 말린 양피지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또한, 그는 며칠째 같은 술집에 머물고 있으니, 지금 출발하신다면 3일 안으로 만나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아직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는 않았나.' 적당한 타이밍이군.
"마차를 준비할까요?"
알렌은 앞으로 만나게 될 한 인물을 떠올리고는 곧바로 답했다.
"지금 바로 준비하도록."
율리우스의 복수에 선봉장을 맡을 자.
전생에 그에게 대항했던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이자, 복수자들의 대변인.
현재 놈에게 모든 것을 잃고 또다시 복수를 꿈꾸는 남자.
'아칸더스 페른.'
그를 만날 시간이다.
제41화
전생의 율리우스는 그 유명세만큼 적이 많았다.
주변 영지의 귀족에서부터 흑마법사, 이교도 그리고 마족까지.
가지각색의 원한을 지닌 이들이 율리우스를 죽이기 위해 수많은 사건을 일으켰다.
아칸더스 페른.
그도 율리우스에게 원한을 가진 무수한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알렌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워낙 인상적이었으니까.'
그에게 원한과 복수심을 가진 이들은 많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이들 가운데서도 특별했다.
그의 아버지 페른 남작은 율리우스가 백작령의 후계자로 등극하는 것을 반대하다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 죽은 이후에 가문의 보고까지 율리우스에게 털려 버렸다.
아칸더스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그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던 이들을 품고 그들을 이끌었다.
그 끝에.
율리우스를 궁지로 모는 것에 성공했다.
'…아쉽게도 죽이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흑마법사와 이교도, 마족들도 실패한 일을 그가 궁지로나마 몰아붙이는 것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알렌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이번에 그를 만나려는 이유도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수확제 때 사람을 선동한 영주민들.'
그중 한 명에게 그의 손길이 닿아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이넬리아에게 부탁해서 그의 뒤를 추적했고, 엘 라운드와 3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카르빌에서 아칸더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현재.
알렌은 그의 위치와 그가 끌어들인 이들의 규모 그리고 그가 어떤 상황인지까지 일정 부분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겉으로는 뒷골목의 양아치와 어울리는 주정뱅이지만…."
뒤에서는 수확제의 사건에 한 발을 걸치며, 율리우스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니.
"상황은 달라졌지만, 그는 달라지지 않았구나."
전생과 달리 가문 자체가 풍비박산이 났으니, 그의 복수심은 전보다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지가 죽는 것으로 끝맺었던 전생과 다르게 세금을 탈세하고 재판 전 탈출했다고 알려져 가문 자체가 박살 났으니.
'그걸로 끝이 아니지.'
정작 가문을 몰락시킨 원흉인 율리우스는 그에게 비리를 척결했다는 이유로 칭송받았으며, 아버지는 생사조차 모르는 상태.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졌음에도 암암리에 사람을 모으는 건 그 복수의 준비일 것이다.
-덜컹
알렌은 그가 머물고 있다는 도시, 카르빌로 향하는 마차 위에서 눈을 떴다.
"끌어들일 만한 가치가 있다."
그가 직접 나설 만큼의 가치가, 미래의 그에게는 있었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없다.'
실력을 키우기에도 벅찬 상황이다. 여기서 사람을 끌어모으고 이끌어야 한다고?
'효율적이지 않지.'
초기에는 그렇게 기틀을 잡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카데미로 향한다면? 그것도 힘들어진다.
그렇기에 그를 대신해서 율리우스에게 원한을 가진 이를 끌어들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그와 손발을 맞출 만큼 유능한 인물.
'그만큼 적당한 인물도 드물지.'
원한도 있고, 능력도 있다.
"끌어들인다고 해도 나를 신뢰할지는 불분명하지만…."
신뢰는 차차 쌓아 나가면 될 일이지.
마차는 평소와는 다르게 조용히 카르빌로 나아갔다.
* * *
마차는 아무런 소란 없이 검문을 통과했다.
굳이 백작령의 후계자라는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조용히 통과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알렌은 적당한 여관에 마차를 맡긴 후, 이넬리아를 따라 그가 머물고 있다는 술집으로 향했다.
정체를 감추기 위해 가면과 로브를 눌러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빈민가를 거쳐 가는 길은 복잡하게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정오인데도 어두운 분위기가 가득했고, 제대로 된 건물보다 대충 지은 판잣집이 더 많았다. 길가에는 부랑민과 노숙자가 멍하니 앉아 있었으며, 창문의 틈 사이로는 경계의 눈빛이 모여들었다.
오물과 쓰레기, 악취가 가득한 거리를 그녀는 능숙하게 안내했다.
그 와중에 양아치 몇 명이 길을 막았으나, 그녀는 냉정한 얼굴로 그들을 처리했다.
-털썩
"…끄륵."
"…켁."
하반신이 피에 물들어 쓰러진 그들을 힐끔 바라보며 얼마나 더 걸어갔을까.
"저기가 맞나?"
"예, 저곳에 그가 있습니다."
빈민가 한구석에 있는 주점.
비스듬한 간판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고, 영업 중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이제부터는 내가 앞장서지."
알렌은 망설임 없이 걸어 주점의 문을 열었다. 이넬리아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하다가 그의 뒤에 빠르게 따라붙었다.
-끼익
오래된 나무 문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거침없는 발걸음 탓일까, 시선이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알렌의 감지력이 빠르게 술집을 훑어 나갔다.
썩은 나무가 간신히 천장을 지탱한다. 쥐와 벌레가 곳곳을 돌아다녔고, 싸구려 술과 약 냄새가 섞여 퀴퀴한 내음이 내부를 가득 채웠다.
'…이런 곳에서 잘도 일을 꾸밀 생각을 했군.'
-뚜벅뚜벅
알렌이 주점에 발을 들이밀자, 시끌벅적하던 주점이 조용히 변했다.
그의 시선이 한 남자에게 향했다.
주위 소란에 상관없다는 듯이 술을 들이켜는 남자.
갈색 머리에 초록색 눈.
'전에 기억하던 것보다 앳돼 보이는군.'
그의 주위로 얼마나 마셨는지 그의 주위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알렌은 자신에게 향한 찌를 듯한 시선을 무시하고, 가면을 벗고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여기 술 아무거나 두 병 부탁하지."
그가 입을 열었지만,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없나? 없으면 음식이라도 괜찮은데…."
알렌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지만, 아무도 그의 주문을 받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흠, 손님에 대한 대접이 좋지 않군. 이런…."
"알렌 라인하르트."
탁-
술병을 탁상에 내리친 아칸더스가 입을 열었다. 알렌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원수의 형인데 그깟 이름 하나 모를까.'
알렌은 그가 생각보다 격렬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의문이었다. 예상을 했나? 그렇다기에는 반응이 너무 미적지근한데….
"내 이름을 아나?"
"아냐고? 알지, 잘 알고 있지, 크흐…."
그가 흐릿해진 눈을 바로 뜨며 조소했다.
"내 인생을 시궁창에 처박은 놈의 형인데, 모를 리가 있나."
-드르륵
술집에 자리하고 있던 놈들이 그의 주위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몇 번이나 해 본 듯 익숙한 얼굴로 알렌의 주위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넬리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알렌은 그런 그들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친근하게 웃으며 물었다.
"무슨 목적인지는 궁금하지는 않고?"
"뻔하지. 수확제 때문이겠지."
"그런데 가만히 있나?"
아칸더스는 뭐가 그리 웃긴지 혼자 킥킥대더니 그의 질문에 답했다.
"그러면 뭐, 반항이라도 할까? 이리저리 도망쳐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이런 쓰레기들을 모아서? 아니면 지금 바로 도망이라도 쳐?"
"그래. 그렇게라도 살아야지."
"크흐흐… 조롱이라도 하고 싶은가 봐? 그런데…."
쾅!
"사람 잘못 봤어, 이 새끼야!"
그는 핼쑥해진 얼굴을 알렌의 면전에 들이밀며 으르렁거리며 짓씹듯 말했다.
그의 행동에 이넬리아가 움찔거렸다.
알렌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가 나서려는 것을 막았다.
"반항해 봤자 뭐가 달라지지? 덤벼 봤자 네놈의 저열한 욕구를 채울 뿐이지 않나? 죽일 거면 깔끔하게 죽여!"
"아니라면 믿을 생각은 있고?"
"아니라고? 아버지를 믿지 못한 너 따위가 믿음을 들먹여?"
아칸더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이넬리아는 그의 변덕스러운 감정변화에 흠칫했다.
"우리 아버지도 그런 분이 아니었다. 돈을 빼돌려? 영주민을 쥐어짜내? 푸흐…."
울다가 웃고, 다시 웃다가 운다. 이넬리아는 그의 기이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났다.
"몇 달 전부터 갑자기 바뀌기 시작했지, 그래. 망나니 놈이 달라졌다는 소문이 들릴 때쯤이었나?"
그는 눈을 희번덕이며 과거를 회상하듯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래서 수확제에 꼬마 하나를 끼워 놓고 군중을 선동했나?"
아칸더스는 조롱하듯 말하며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 그랬지. 잘나신 율리우스 님은 떠오르는 태양 같은데, 몰락한 뒷골목 쓰레기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더 있겠나?"
알렌은 그의 인정에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역시…. 페른 남작, 벨론 남작 모두 준비된 패였나….'
그렇다면 전생에 율리우스의 후계자 계승을 반대한 것 역시 계획적인 일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율리우스를 돋보이기 만들기 위한, 제물로써.
"쥐새끼처럼 할 수 있는 게 그게 다였으니, 그거라도 해야지. 나는 그에 비교하면 촛불만도 못하는데."
아칸더스의 얼굴은 분노와 후회, 죄책감과 자기혐오가 뒤섞여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흔한 복수자의 말로라고 보겠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가 미래에 어떤 짓을 할지 알고 있기에.
또, 그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이해했기에.
"연기는 그만하지.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나. 죽일 생각이 없다고."
"개소리는 그만하고, 빨리 죽여라. 아니면 고문이라고 하고 싶은 거냐?"
알렌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비웃음을 흘리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네가 그러는 이유가 뭐지? 의도는 이미 알았을 텐데? 아니면 정말 죽이기를 원하나?"
처음에는 의아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과장된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놈은 생각한 거다.'
정말 자신을 잡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닌지, 아니면 자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인지.
마침 알렌은 병사들이 아닌 시녀와 단 두 명이 찾아왔고, 한 번 대화를 시도해 보기에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거겠지.
'꼴을 보아하니 누군가 찾아오는 것 정도는 예상한 것 같고.'
그것이 알렌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겠지만, 그의 앞에서 당황을 드러내지 않은 것만으로 그의 유능함을 증명한다.
그러니 연기를 한 거다.
그의 의도를 알아보기 위해, 어떤 목적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설령 잡으려고 한들, 빠져나갈 틈 정도는 만들 자신도 있었을 테고.'
그게 아니라면 진작에 만들어 둔 경로로 탈출 시도를 했겠지.
놈에게 있어 기껏 끌어모은 세력은 아깝지만, 목숨과 저울질할 정도는 아니었을 테니.
"누가? 내가?"
그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알렌은 감지력을 통해 미세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 고동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나.
'그렇다면.'
"내가 미쳤다고 원수의 형과…."
"페른 남작."
그가 말에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이내 어쩌라는 듯 말을 이었다.
"대화를…."
"그는 아직 살아 있다."
알렌의 다음 한마디는 아칸더스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뭐?"
알렌은 진심으로 경악한 듯 눈을 크게 뜬 아칸더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차 한 얼굴로 곧바로 표정을 바꿨지만, 이미 늦었다는 것을 그도 알았다.
"이미 늦었다는 걸 알 텐데, 대화나 하지?"
알렌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그도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그래, 정말 대화를 원한다고 하니 다행이기는 한데…, 무엇을 원하지?"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천천히 이야기하지. 그런데…, 필요 없는 눈이 너무 많군."
알렌의 시선이 그들을 포위한 양아치들에게 향했다.
어차피 이 양아치들은 아칸더스가 위장하기 위해 끌어모은 놈들에 불과하니.
"이넬리아."
"네."
그녀가 움직였다.
"죽지 않을 정도만."
그가 신호하자 이넬리아는 참고 있었다는 듯 양아치들에게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