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칸더스 님…!"
"평소처럼 한탕 할 수 있다고…!"
"사, 살려…."
그들이 아칸더스의 이름을 부르짖었지만, 그는 무감정한 눈으로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게 진짜 모습인가?"
그의 물음에 아칸더스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처음부터 동료였던 적도 없다."
그렇게 몇 분이 더 지나자, 그들 세 명을 제외한 모든 인물이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렸다.
아칸더스는 그들을 바깥으로 던지려는 이넬리아를 잠시 제지하고 크게 소리쳤다.
"마빈!"
알렌의 감지력에 주점 근처에 쓰러져 있던 노숙자 한 명이 일어나 술집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예, 대장님."
"이놈들, 다 치워. 그리고 당분간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알겠습니다."
마빈이라 불린 노숙자가 바깥을 향해 손짓하자, 수십 명의 노숙자가 들어와 양아치를 데리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들이 진짜인가?"
"굳이 감출 필요도 없겠지. 맞아."
아칸더스는 알렌의 모든 말을 믿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연기를 그만둔 것이 옳은 선택인지 의심이 들었다.
'너무 성급했나? 이야기를 나누기 전부터 그냥 도망쳤다면….'
원래 계획은 말을 들어 보고 적당한 거래라면 받아들이고, 아니라면 해도 틈을 만들어 탈출하려고 했다.
그럴 자신도 있었고.
'그런데….'
생각보다 전력이 강해 보였다.
단순한 그의 시녀조차도 가볍게 보지 못할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는 건데… 쯧.'
가문이 몰락한 이후로, 평민의 삶을 살아가면서 인식이 변했다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귀족이었다.
'지금까지 들인 시간이 아깝지만, 다시 모으면 못할 것도 없긴 하지만.'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가진 것 없는 빈민가 부하놈들뿐.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까지 좁아져서는 안 됐었는데….
'욕심이 발목을 잡았군.'
아칸더스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할 이야기가 뭐지?"
알렌은 빙빙 돌릴 필요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놈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나?"
"뭐?"
알렌은 아칸더스의 얼굴이 혼란에 빠지든 말든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율리우스를 죽이려고 한다."
마치 당연한 것을 이야기하듯.
"그러니 내 밑으로 들어와라."
놈을 죽이고 싶다면.
제42화
아칸더스는 미친놈 보는 듯한 시선으로 알렌을 쳐다봤다.
"율리우스를… 죽인다?"
"그래."
그에게도 마찬가지로 빙의니, 회귀니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직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그의 목적은 율리우스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고, 자신의 목적은 그를 자신의 아래로 들이는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신뢰가 쌓이고 나도 해도 늦지 않다.
"그래."
알렌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하, 나 원 참, 내가 미친 줄 알았는데, 정작 진짜는 따로 있었군."
"듣기로 아버지의 행방을 찾는다고 하는데…."
알렌이 들으라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내가 그랬나?"
아칸더스는 겉으로는 헛웃음을 흘리고 있지만, 속으로는 어떤 것이 진실인지 분별하느라 상당히 복잡했다.
이넬리아도 말은 하지 않았으나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넬리아는 저택에 돌아가서 설명하면 되겠지.'
어차피 한 번쯤 부를 생각이었으니.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무엇을."
"뭐기는, 뻔하지 않나."
알렌의 물음에 헛웃음을 흘리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표정하게 뒤바뀌었다.
이넬리아는 그런 이질적인 변화가 싫은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래. 참 재밌는 이야기야. 형이 동생을 죽이려 한다?"
아칸더스는 알렌의 말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자신을 영입하기 위해 직접 온다?
아칸더스는 자신의 가치를 잘 알았다.
잘 쳐줘야 율리우스의 세력을 물어뜯는 사냥개의 역할 정도로 사용할 수 있을까.
'차라리 율리우스와 권력 투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는 말이 더 현실감 있겠군.'
최근 율리우스의 모습에 위기감을 느낀 알렌이 그를 견제하기 위해 그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을 끌어모은다.
이것이 그가 생각하기에 더욱 그럴듯한 이유였다.
누가 들을지도 모르는데 대놓고 율리우스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보다는.
이것은 미래의 모습을 기억하는 알렌과 현재의 자신의 가치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그와의 괴리감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이런 금방 들통날 개소리를 한 이유가 뭐지?'
그걸 직접적으로 이야기할 이유가 있나? 속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진짜 죽이려 한다고?
'어느 이유든.'
상관없었다.
'네가 나를 이용하기를 원한다면, 나도 너를 이용해 주마.'
이것이 설령 함정이라고 해도.
율리우스를 죽이려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거지 같은 생활을 벗어나 제대로 지원받을 수 있다면.
그리고….
'사라진 아버지의 행방을 알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그렇기에 그는 냉소를 지으며 가볍게 대답했다. 어차피 결과는 둘 중 하나다.
내가 죽거나.
"그래, 밑으로 들어가지."
놈이 죽거나.
그를 위해서라면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목숨 따위, 얼마든지 걸 수 있었다.
"좋은 선택이다. 아칸더스. 자세한 건 엘 라운드에서 이야기하지."
"기한은?"
"이번 달 안으로 도시 안으로 들어오면 된다.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당연히. 그런데 혹시…."
아칸더스는 이 말을 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얼굴로 머뭇거렸다.
"인제 와서 망설일 만한 게 있나?"
"…다른 사람들도 있다. 그놈들도 율리우스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으니 방해는 되지 않을…."
"그래, 모두 데려오도록. 아버지에 관련된 정보도 그때 주도록 하지."
알렌은 시답지 않은 일을 묻는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답했으나, 아칸더스가 느끼는 감정은 조금 달랐다.
'…적어도 한 번 쓰고 버려지지는 않겠군.'
그가 몰락 귀족으로서 명분으로 사용 가능한 자신만이 아닌, 다른 이들을 모두 챙긴다는 사실은 이 일을 꽤 길게 보고 있다는 것을 뜻했으니까.
"…고맙군."
"천만에. 이제 내 수하가 되었으니, 어느 정도 신경 써 줘야지."
이제 용건은 끝났나? 아.
알렌은 문득 아까 그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아까 네가 그랬지. 네가 율리우스와 비교하면 촛불만도 못하다고."
그래, 그로서는 율리우스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전생의 그는 아버지가 죽고 가주의 직위를 물려받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니 그가 자신을 그렇게 빗대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빛이 너무 밝을 필요는 없다."
몸을 일으켰다.
어두운 내부의 문틈으로 햇살이 비쳐 들어왔다. 실내를 좀먹은 그림자에 파묻힌 아칸더스의 초록색 눈이 빛났다.
"너무나 밝은 빛은 어둠과 다를 바가 없으니."
마치 촛불처럼.
"어두운 방 안을 밝히는 건, 촛불만으로 충분하다. 그 이상은 과할 뿐이지."
아칸더스는 멍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개소리는."
뒤에서 뒤늦게 그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그렇겠지.
"글쎄…, 좋을 대로 생각하도록."
알렌은 기껍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이날, 알렌은 유능한 인재와 그의 기반이 될 사람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 * *
엘 라운드로 돌아오는 길은 평탄했다.
도적이나 괴물 그 어느 것도 그들의 앞길을 방해하지 않았고, 알렌은 일주일 만에 자신의 보금자리로 되돌아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난 다음 날.
알렌은 습관이 된 아침 수련과 명상을 끝마치고, 개인 서재로 향했다.
비밀스럽게 대화를 나누기에는 서재만큼 조용한 곳이 드물었으니까.
알렌은 아카데미에서 도착한 레이첼과 카트린느의 편지의 답장을 마무리하고, 아카데미로 편지를 발송했다.
"카트린느는 시킨 일을 꽤 잘해 주는 모양이고…, 레이첼은 변함없구나."
알렌은 감정이 듬뿍 담겨 있던 편지를 떠올리고는, 눈앞에 어지러이 펼쳐진 마법 수식을 살폈다.
"…흠. 마법도 더 발전시켜야 하는데."
자신의 위치를 위계로 따지면 5위계쯤에 해당했다.
마력은 용의 노심으로 변한 심장에서 끝없이 생산된다. 마력은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마력을 이용할 마법적 지식이 부족했다.
마법의 위력은 마력의 양을 늘림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지."
마법사는 현상에 간섭하고, 현실을 뒤틀기 위해 자신이 전공으로 하는 마법 계통의 지식을 축적하고 연구한다.
그렇게 이해한 지식을 바탕으로 마법사는 마법을 사용한다.
그렇게 사용한 마법은 효율적이며, 군더더기가 없어야 했다.
다시 말해, 마력을 더해 마법의 위력을 늘리는 행위 자체가 마법사로서 미성숙한 행위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영지 근방에서 지식을 구하기는 요원하지."
그건 전생에 10년 동안 마법과 관련된 서적을 구했던 알렌이기에 더 잘 알았다.
이곳에서는 지금 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지식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수준을 더 높이기 위해서는….
'아카데미.'
그곳으로 가야 한다.
알렌은 생각을 끝마치고 눈을 감았다.
히벨에서 린벨과 이넬리아를 거두었을 때, 그의 영감을 자극하는 일이 있었다.
'그 이후로 딱히 진전은 없었지만….'
그때의 감각을 떠올리며 명상은 꾸준히 반복하고 있었다.
한 번에 성과를 얻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
그렇게 얼마나 명상에 잠겨 있었을까.
-똑똑
무의식과 의식의 사이. 몽롱했던 꿈결 같은 감각을 떨쳐 내니 이넬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자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벌써 시간이 됐나.
알렌은 오후의 시간대로 넘어가는 시곗바늘을 확인하고 곧바로 입실을 허락했다.
"그래."
-철컥
이넬리아는 왠지 긴장한 얼굴로 쭈뼛대며 서재로 걸어 들어왔다.
'이번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것도 아닐 텐데?'
무슨 질책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 이야기할 것도 있고…, 일단 앉지."
알렌이 먼저 서재에 마련된 소파에 앉자, 그녀가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공자님 부,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힐끔-
그녀는 알렌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한 채 눈동자를 자꾸 옆으로 돌렸다.
긴장과 굳은 결심으로 뒤섞인 자색 눈동자. 요정 인자가 섞인 아름다운 외모.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물기가 남아 있는 흑발은 촉촉했고, 향수라도 뿌렸는지 옅은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감돌았다.
"이넬리아."
알렌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네, 네!"
그가 입을 열자 이넬리아는 올 것이 왔다는 듯 옷자락을 꽉 잡았다.
'저번에도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가 본 알렌 공자는 이성적인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만약에 아니라면?
'사실 지금까지 안심을 시키기 위한….'
"…별다른 의문 없이 나를 따라 줘서 고맙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대로 알렌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표정이 이상하군.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알렌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품에서 고풍스러운 물결 무늬가 조각된 상자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게 아닌데….'
그녀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의 선물을 받아들였다.
"가, 감사합니다. 공자님…."
그녀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하자, 알렌은 궁금한 듯 물었다.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나?"
"아, 아닙니다. 갑작스러워서…."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시녀와 어울리지 않는 많은 일을 군말 없이 받아들이고, 지금껏 열심히 나를 보좌했지 않느냐?"
누군가의 뒤를 쫓거나.
뒷산에 묻힌 영약을 수거해 오거나.
사람 한 명을 콕 집어 조사해 오거나.
궁금증을 표할 법도 한데 아무 말 없이 따른 그녀에게 알렌은 보상을 해 주고 싶은 마음에 그녀를 부른 것이다.
'그와 더불어 키메라 술사와 율리우스에 관한 이야기도 할 겸.'
"안에 들어 있는 건 저번에 얻은 정령옥이다. 이넬리아 너는 요정 키메라…, 라고 했으니 그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지."
그녀는 정령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게 키메라이기 때문에 발생한 부작용인지, 아니면 아직 계약하지 못 한 건지 알 수 없으나, 그녀에게 정령옥은 어떤 방향에서든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일이 있어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으니, 이야기할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아."
여러 감정이 담긴 한숨을 토해 낸 그녀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럼… 우선 키메라 술사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
알렌은 자신의 행동에 감동한 것처럼 보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번에 키메라 술사를 쓰러트리고 얻은 돌검…."
그녀는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 모두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키메라 술사가 한 달에 한 번씩 어딘가로 외출을 했다든지, 재료는 그때 같이 가지고 왔다는지.
그가 외출한 날이면 음침한 기운이 산맥에 감돌았다는 것까지.
"키메라 술사와 관련된 뒷배는 역시 그쪽인가? 짐작은 했는데…."
알렌이 무언가 떠올린 듯 깊은 생각에 빠지자, 이넬리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렌 님, 질문은 이게 끝인가요?"
"아, 그래."
알렌은 그녀의 질문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답했다.
"율리우스에 대해 궁금한가 보지? 미리 말해 줬어야 했는데…, 미안하군."
"네, 네."
그녀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으나,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율리우스는 현재 '악마'에게 몸을 빼앗긴 상태다."
이넬리아에게는 말해 둘 필요가 있었다.
아직 신뢰가 쌓이지 않은 아칸더스와 달리 어느 정도 신뢰가 쌓였고, 또 그의 곁에 있다 보면 무언가 알 수밖에 없을 테니.
'이상한 추측을 하게 놔두느니, 직접 말해 두는 게 나을 테지.'
그렇게 된다면 나중에 아칸더스의 조사를 시킨 것과 같이 이상한 명령을 내리더라도 그녀가 알아서 넘어갈 확률이 높았다.
"악마… 말씀이십니까?"
"그래. 악마, 아주 끔찍한 악마에게 씐 상태지."
남의 몸을 빼앗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못 느끼는 그런 악마에게.
감지력을 펼친다.
근처 수십 미터 내의 정보가 뇌리로 밀려들어 왔다.
'듣는 사람은 없군. 하지만 만약을 위해서.'
그들의 주위로 투명한 실타래가 방 안을 둘러싸며 외부와 차단시켰다.
"그에 관해 설명을 하자면…."
이넬리아는 알렌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긴장했다. 그의 태도를 봐도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렌은 그녀가 이해할 수 있을 법한 범위 안에서 각색해서 이야기했다.
율리우스가 악마에게 몸을 빼앗겼다고.
놈에게 씐 악마를 물리쳐 동생을 구하고 싶다고.
아칸더스를 영입한 이유 역시 놈에게 대항할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너에게 했던 명령들도, 모두 그를 위한 준비의 일환이었다. 이제 이해가 되었나?"
"아…."
그녀는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놈은 세계를 위하는 척 행동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으니 겉으로 보이는 것에 속지 않게 조심하도록."
마지막으로 당부까지 끝마치자, 율리우스에 관한 이야기도 마무리됐다.
"궁금한 게 더 있나? 없다면 이제 식사나 하도록 하지."
알렌이 정말 자리에서 일어날 것처럼 보이자, 그녀는 망설이다 급히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이게 끝인가요? 이야기를 나누고…, 제게 이 물건을 주시고…."
"그래."
"정말로…?"
그녀가 왜 그리 묻는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알렌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문제가 있나?"
"…아닙니다."
"그럼 식당으로 가지. 시간도 됐으니…."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렌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공자님, 린벨이에요. 들어가도 될까요?"
알렌은 반쯤 들었던 허리를 다시 제자리에 되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 들어오도록."
그녀는 방 안에서 알렌과 함께 있는 이넬리아를 바라보며 몸을 멈칫했다.
"아…"
.
"린벨? 그래서 무슨 일이지?"
그러다 알렌과 눈을 마주치고 정신을 차린 듯 입을 열었다.
"아, 그, 공자님께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네, 카릭 상단주라는 사람이 공자님을 찾으신다고…."
벌써, 그 상단과 접촉하는 데 성공했나?
알렌은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느끼며 답했다.
"바로 만나 보지."
회귀한 직후부터 어렴풋이 구상했던 계획을 실행할 시간이다.
알렌은 앞으로의 일을 떠올리며 빠른 속도로 문을 나섰다. 그렇기에 그는 보지 못했다.
"...."
그녀의 표정이 어둡게 물든 것을.
제43화
"공자님, 초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 달 만에 다시 본 카릭의 얼굴은 전보다 통통해져 있었다.
얼굴에 은은한 붉은빛이 감도는 게, 어떻게 지내는지 묻지 않아도 답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변해 있었다.
"별말을. 우선 앉지."
알렌은 천천히 음식을 음미하며 고개를 저었다.
마침 식사 시간이었기에 초대했을 뿐 별다른 의도가 없었다.
"그나저나 요즘은 일이 어떻나. 잘 돼 가고 있나?"
"예, 공자님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의 한층 밝은 얼굴로 알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급해 보였던 전과 다르게 여유가 생긴 것 같군.'
알렌은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겸양을 떨며 부정했다.
"내가 한 게 무엇이 있다고 그러나. 모두 상단주 본인의 수완 덕분이지. 안 그런가?"
"공자님께서 제 얼굴에 금칠을 해 주시는군요. 하하하."
카릭은 자신이 얻은 이득이 알렌의 호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호의가 언제든지 수거당할 수도 있다는 것도.
"하지만, 호의를 잊고 등을 돌린다면 짐승만도 못한 법이지요."
지금 이렇게 식사 자리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알렌의 부탁을 들어줬기에 잡을 수 있었던 기회가 아니던가.
"그에 대한 감사 인사로 성의를 표하고자 하니, 나중에 확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알렌과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기를 바랐다.
'공자님은 앞으로 이 영지를 물려받으실 분이다.'
그런 그가 부족함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어쩌다 한 번씩 몰래 자금이 필요한 일이 있지 않겠는가. 그게 아니라면 은밀한 물건을 구하고 싶을 때가 있다든가.
카릭은 측근의 자리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줄 만한, 쓸 만하다고 인식하면 충분해.'
한 번씩 꺼내 쓰는 돈주머니 역할로 취급된다 해도, 앞으로 백작령의 주인이 될 사람에게 줄을 댈 수 있다면 이득이었다.
지금 쇠락하고 있다고 해도, 백작가는 백작가. 혹시 아는가? 알렌 공자님이 다음 대 가주가 된다면 다시 부흥하게 될지.
"나중에 직접 확인해 보도록 하지. …그런데 상단주는 이곳의 식사 예절이 능숙한 것 같군."
식사 예절은 지역마다 다르다.
그의 발음이 이곳의 토박이들과 조금 달랐기에, 알렌은 그가 식사 예절이 조금 어긋나더라도 납득하려 했었다.
식사 예절은 능숙한 것과 달리 카릭의 억양은 리브레 왕국인과 조금 달랐다.
발음할 때 바람이 약간 새는 건, 이웃 왕국인 카자크 왕국인 특유의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예, 앞으로 이곳에서 자리 잡을 생각인데. 미리 철저하게 준비해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 치곤 카자크 왕국의 억양이 섞여 있는데?"
"그게…, 하하."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렸을 때 상행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넘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억양이 어색해질 수밖에 없더군요. 물론, 고치려고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이미 버릇이 되어 버린지라 어렵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그렇게 알렌은 카릭과 시답지 않은 잡담을 하며 식사를 이어 나갔다.
"수확제가 끝나고 상행은 어디로 나갔나. 관문을 통과할 수 있으니, 어디든 괜찮았을 텐데."
"저는 이번에 백작령의 서부 도시를 중심으로 상행을 이어나갔지요."
"서부라면… 가비아 방면?"
"가비아보다 좀 더 남쪽에 치우쳐진 베르겐입니다."
가벼운 분위기와 서로의 안부로 시작된 식사는 30분이 넘게 이어졌고, 마지막으로 준비된 디저트까지 끝마치자 끝이 났다.
그렇게 대화가 자연스럽게 멈췄을 때, 알렌이 슬쩍 운을 뗐다.
"그런데, 카릭 상단주."
카릭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깨닫고, 자세를 바로 했다.
"예, 공자님."
"내가 마지막에 한 말, 기억하나?"
알렌의 말투는 변함이 없었다.
일상적인 것을 묻는 것처럼, 잔잔하기 그지없는 어조.
그러나 카릭은 어딘가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느꼈다.
말투, 표정, 어조의 변화 없이 작은 말 한마디로 분위기를 바꾸는 능력.
아버지에게서 크게 성공하기 위해서라면 필히 갖추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얘기하셨던 그 능력.
'…아직은 감도 잡을 수 없지만.'
카릭은 침을 삼키며, 숨을 골랐다. 처음부터 서부 도시를 향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공자님이 찾던 상단이 그곳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출신지인 카자크 왕국 쪽으로 교역을 이어 나갔겠지.
"예,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가 좋은 소식을 기대해도 되겠지?"
"예. 당연하지요."
"잘됐군."
알렌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카릭을 긴장하게 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씻은 듯 사라졌다.
"이제 와서 기한을 늘려달라고 말할 줄 알고 조금 실망할 뻔했지 뭔가."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공자님."
알렌은 웃으면서 농담조로 말했다. 그러나 카릭은 그것이 일종의 시험 혹은 경고하는 것으로 느껴져 간담이 서늘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그쪽에서 급히 공자님과 다리를 놓아줄 수 없냐고 묻더군요."
"다이크 상단이?"
"예, 이미 그쪽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인데…. 상단주의 큰아들이 저주에 걸렸다고 합니다."
"저주?"
알렌은 자신의 방 한구석에 박혀 있을 벤시의 눈물을 떠올리며 자세히 물었다.
"예. 그 때문에 저주와 관련된 물건을 계속해서 매입하고 있는데, 상황이 꽤 좋지 않습니다."
"…자세히 설명해 보게."
"그러니까 소문에서 말하기를, 상단주의 아들이-"
그는 누가 들을까 무섭다는 듯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마녀에게 당했다고 합니다."
* * *
다이크 상단.
이 상단은 백작령 내에서 제법 이름 있는 중견급 상단이었다.
백작령 서부와 북부를 둘러싼 미켈란트 산맥에서 매입한 가죽과 약초를 왕국 전역으로 공급하는 상단.
알렌이 기억하는 바로는 미래에 엘프들과 직접 거래를 트는 데 성공해, 다른 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대형 상단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상단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당연했다.
전생에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까.
기껏해야 돈을 빌리거나, 마법 서적을 구하기 위해 만났던 게 다였으니까.
하지만 듣고 싶지 않아도, 그의 아들이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은 알 수밖에 없었다.
'…다이크 상단주 소네드.'
회귀 전 알렌이 구매를 위해 방문한 소네드 저택의 응접실에는 청년의 나이로 보이는 한 사람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저주로 죽은 아들의 초상화라는 사실은 유명했기에 알렌도 몇 번을 방문하자 자연히 알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알렌은 그와 만남을 회귀 직후부터 준비해뒀다.
카릭 상단주를 이용해 의도적인 만남을 준비하고,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
'벤시의 눈물.'
그 비약을 챙긴 이유도 전생에 그에게 졌던 빚을 갚고자 하는 이유가 반, 그를 통해 몇 가지 계획을 실행시키기 위함이었다.
'율리우스가 가비아로 간다고 했을 때까지만 해도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가 흑마법사 토벌을 했음에도 저주가 재발했기에 계획이 한층 더 쉬워졌다.
"알렌 공자님. 혹시 차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소네드는 알렌이 차를 입에 머금은 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자 초조한 표정을 애써 드러내지 않은 채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알렌은 얼른 마시던 차를 들이켜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아닐세, 차향이 꽤 깊게 우러나서 잠시 음미했지."
"그렇습니까?"
소네드는 그의 대답에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렌은 카릭의 안내에 따라 다이칸 상단의 상단주 소네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알렌과 이렇게 빠르게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한 듯 격한 감정을 드러내며 그를 환영했다.
"그래서 나를 보고 싶다는 용건이 뭔가."
"공자님께서는 백작가의 후계자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또, 정당한 엘 라운드의 후계자이자, 미켈란트 산맥의 수호자이며, 모든 지식인의 대변인이자 땅굴…."
"결론만 말하게."
알렌은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저주를 해제할 물건.'
그것이 아니라면 손해 하나에 연연하는 상인이 다짜고짜 머리를 숙일 리가 없었다.
"저주를 해제할 물건이 필요합니다."
소네드는 알렌의 한 마디에 더 이상 말을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원하는 바를 말했다.
"그건 마녀의 저주에 당했다는 아들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소네드는 그의 질문에 얼굴이 어둡게 변하더니, 이내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백작가에는 저주 대부분을 해제할 수 있는 물건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가주에게 대대로 물려받는 고대 유물이 있지."
"그, 그렇다면…!"
소네드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자존심은 상관없다는 듯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
"제발 그 물건을 구입하고 싶습니다. 팔 수 없는 물건이라면 저주만 풀고 곧바로 돌려드리겠습니다.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그는 절박한 얼굴로 망설이지 않았다.
"단 한 번이면 됩니다. 제발,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흠…."
저 모습이 정말 아들을 위한 부성애일까, 아니면 동정심을 사기 위한 연기일까.
'전생을 생각해 본다면 전자에 가깝겠지만….'
알렌은 이내 상관없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대가 정당한 대가를 치른다면 거래를 하지 못할 것도 없지."
"그렇다면…!"
"하지만,"
"…!!"
"아쉽게도, 가주님의 물건은 내가 손댈 수 있는 것이 아니네."
알렌이 조용히 고개를 흔들자, 소네드의 얼굴이 검게 변했다.
"그, 그렇다면 백작님께 청을 드린다면…."
"그렇게 한다면 가능은 하겠지. 그런데 자네의 아들이 유물을 빌려 올 때까지 버틸 수 있겠나?"
"그건…."
소네드는 초조한 마음에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저것조차도 연기의 일환일 수도 있고.'
알렌은 깊게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소네드 상단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세."
"그, 그게 무슨 방법입니까."
그가 입을 열자 소네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듯 희망에 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넬리아."
이넬리아는 알렌의 신호에 약속대로 품에서 고급스러운 함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 상자는…?"
알렌이 말없이 상자를 열자, 보랏빛의 몽롱한 빛깔을 내뿜는 비약이 투명한 병에 담긴 채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설마…!"
그가 자신의 생각이 맞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그 비약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벤시의 눈물…이 맞습니까?"
"그래."
"모든 저주를 풀 수 있다는…?"
"그것도 맞네."
알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네드는 급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공자님, 저 비약을 제가 팔아 주십시오. 대가는 반드시 치르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알렌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알렌이 하는 행동의 뜻을 상인인 소네드가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는 지체하지 않고 알렌이 원할 것 같은 대답을 했다.
"값어치가 얼마나 되었든 두 배의 현물로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조차 안된다면 반 병, 아니, 한 모금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니 부디…."
벤시의 눈물은 대부분의 저주를 해주할 수 있는 비약이다.
한 모금의 양이라도 저주를 해주하는 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저주가 위험한 건 저주를 해주할 물건이 희소하다는 것과 빠른 속도로 사람을 죽음으로 몰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얼마가 걸리든 막대한 금액을 들여 저주를 해주할 물건을 구했을 것이다.
소네드의 답에 알렌은 그게 아니라는 듯 대답하지 않았다. 소네드는 이를 악물고 보상을 더 높였다.
"저 때문에 손해를 감수하신 공자님의 행동에 감동했습니다. 분명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테니, 도움이 되고자 소정의 보상을 매달…."
알렌이 이번에도 입을 열지 않자, 소네드는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저주했다.
'도대체 누가 상인인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상대가 갑이고 자신이 을인 것을. 그는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제 아들을 도와주시려는 깊은 마음가짐에 이 미천한 상인이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상단의 지분을…."
알렌이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들자 그는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물건에 대한 보상, 값진 보물, 매달 바칠 재화와 상단의 지분까지.
이 정도까지 했는데 무엇을 더 바란단 말인가!
알렌의 횡포 아닌 횡포에 소네드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들의 목숨이 달려 있지만 않았다면, 그는 치욕감에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것이다.
소문에 듣기에는 수확제를 망칠까 싶어 영지민을 위해 도적 떼의 습격을 혼자 막아섰다고 했는데, 역시 소문을 믿을 만한 것이 못 됐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이렇게 탐욕적일 수 있겠는가.
알렌은 소네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희미하게 웃다가, 그의 대답에 맞춰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수 대에 내려온 상단을 공자님께…."
"그냥 주겠네."
"…충성, 예?"
그가 어안이 벙벙해지자, 알렌은 우스운 꼴을 봤다는 듯 미소 지으며 다시 대답했다.
"어찌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데 값을 매길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지분이나 선물은…."
"필요 없네."
알렌의 산뜻한 대답에 그의 말문이 순간적으로 막혔다.
'품위에 어울리지 않게 행동할 수 없지.'
여기서 욕심을 부린다 한들 그의 평판만 추락하지, 좋을 게 없었다. 지금까지 모호한 태도를 보인 이유는 간단했다.
'장차 상단을 자신의 아래로 끌어들이기 위해.'
만약 처음부터 자신의 아래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했으면 받아들였을까?
장난치지 말라며 욕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아니면 강제로 받아들이고, 배신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호의적인 태도와 배포를 보여 줌으로써 알렌은 그를 감복시켰고, 그는 알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소네드는 그런 성격이었으니.'
그렇지 않다면 후계자 자리에서 박탈된 알렌이 돈을 갚을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몇 번씩 빌려줬겠는가.
그것도 쉽게 보지 못할 금액을.
'가문에서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해도.'
그는 상인답지 않게 순진한 면도 있었고, 의리를 지킬 줄도 알았다.
그렇기에 알렌은 그가 더 높은 조건을 부르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참지 못할 때가 되자 선의를 내비친 것이다.
'그를 아래로 들이기 위해.'
한순간의 탐욕으로 금화를 가지느니, 잠깐의 인내로 사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이득이었다.
"아들의 저주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아비를 상대로 어찌 욕심을 부릴 수 있겠나."
"…공자님."
소네드는 한순간 알렌을 오해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알렌의 뒤에 조용히 시립하고 있던 이넬리아와 린벨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알렌의 허리춤에 있던 베스틀라가 동의하는 듯 웅웅- 울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가격은 제가 제대로 쳐 드리겠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아니, 그래도."
"그렇다면 제 상단의 보고에서 원하는 물건을 고르십시오. 어떤 것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알렌이 대답을 미루자, 소네드는 다시 한번 부탁했다.
"…제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고맙게 받겠네."
그는 감동이 흘러넘치는 얼굴을 한 채 고개를 숙였다.
'…개인적으로 도움을 주시는 것도 있겠지만,'
몇십 년 상행을 하며 발달된 촉으로는, 그가 자신에게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음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도….'
앞으로 공자님과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도, 아니 조금 더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소네드는 생각을 멈추고 알렌이 더 필요한 게 없을까 싶어 얼른 입을 열었다.
"공자님 혹시 더 필요하신 것이 없으십니까?"
"아니, 없…, 아, 그래. 하나 있군."
"그게 무엇입니까?"
무엇이든지 허락할 것 같은 태도로 소네드가 입을 열자, 알렌이 입을 열었다.
"자네의 아들이 걸렸다는 저주를 직접 확인할 수 있겠나? 나도 마법의 조예가 있으니 확인이라도 해 보고 싶군."
소네드는 그 말의 진의를 생각했다.
'공자님은 정확히 무엇을 바라시는 거지?'
그를 배려하는 듯한 태도는, 일방적인 호의라고 보기에는 지나쳤다. 귀족가의 상단이라고 해도 이런 대우를 하지 않을 텐데….
그러나 그런 소네드의 복잡한 마음과는 관계없이 알렌은 선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의 도움이라도 될지 누가 아나?"
매번 연습했던 미소를 지으며.
제44화
"공자님, 직접 살펴보실 필요 없습니다. 저주가 옮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소네드 상단주는 불안한 얼굴로 알렌을 말렸다.
만약에 알렌 공자님에게 저주가 옮으면 어떻게 되는가. 공자에 대한 호감과 별개로 이것 상단의 존망이 걸린 일이었다.
"공자님의 관대하심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비약도 있으니 직접 살피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또 비슷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직접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나."
"아이고, 공자님!"
카릭은 방에 들어갈 때의 모습과 달라진 상단주의 반응에 놀랐으나, 그가 떠벌리듯 소리치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가 잘 끝난 모양이구나.'
공자님의 뜻으로 소네드와 만남을 주선했다고 하지만, 며칠 동안 친분을 다지며 그의 상황을 알았기에 카릭은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그랬던 소네드의 한결 나아진 표정을 보자 카릭은 괜히 자신이 뿌듯했다.
"알렌 공자님, 이야기는 잘 끝나셨습니까?"
"그래, 운이 좋았지. 혹시나 싶어 카릭 상단주의 이야기를 듣고 벤시의 눈물을 챙겨 뒀기에 다행이었지 뭔가."
"…설마 그 벤시의 눈물이라는 게."
카릭이 고개를 돌리자, 소네드는 품에서 조심스럽게 꺼내 보랏빛 비약을 그의 눈앞에 보여 주었다.
"왕도에서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 아닙니까, 이 귀한 걸…."
카릭은 놀란 얼굴로 알렌을 보았다.
벤시의 눈물이 제조하기 엄청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벤시를 찾기가 힘들기에 그렇지.
하지만 성공적으로 만들어진다고 해도 고위 귀족이나 왕실에서 웃돈을 주고 사들이기에 쉽사리 보기 힘든 물건에 속했다.
저주를 해주 하는 물건 중에는 가장 효과가 좋았으니 더욱.
알렌은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람의 가치는 저마다 다르지."
노예와 평민의 가치가 다르듯, 평민과 귀족의 가치가 다르다.
일개 상인의 아들과 고위 귀족이 큰돈을 주고 사들이는 비약의 가치를 비교하자면, 당연히 후자의 가치가 높다고 하겠지.
하지만.
"나에게 있어 소네드 상단주에게 베푸는 호의는 이 비약보다 더 가치 있다고 판단했을 뿐."
"그건…, 과분한 말씀입니다."
소네드는 그의 호의에 감사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걸로 더 큰 빚을 지게 됐구나.'
아들이 저주에 걸려 고통받고 있음에도 상대의 호의에 상인의 시선으로 가치를 계산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뿐이네."
인간은 평등하다느니, 모든 생명이 고귀하다는 것과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의미도 없고, 입바른 소리에 불과하니까.
그저, 소네드의 미래의 가치가 이 비약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치가 있었기에 투자한 것이다.
'전생에 빌렸던 빚도 갚고.'
이곳에서 구했던 악마 계약 서적도 찾아보며, 율리우스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여러 일을 동시에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해야지.'
지금밖에 기회가 없었다.
율리우스가 저택을 비운 시기가.
누구의 방해도 없이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해 둘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알렌은 소네드의 안내를 받아 그의 아들이 안정을 취하고 있다는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인가?"
"예, 여기입니다."
소네드는 먼저 들어가려고 했다. 지금까지 아무 일이 없었다지만 갑자기 저주가 폭주할 수도 있지 않은가.
"제가 먼저 들어가 볼 테니, 공자님께서는…."
그러나 먼저 입을 여는 순간, 그의 뒤에서 먼저 문을 여는 손길로 인해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철컥-
"고, 공자님!"
"괜찮네. 저런 저주 따위는 충분히 막을 수 있네."
직접적인 것도 아닌, 넓게 퍼트린 저주 따위는 강건한 거인의 육신을 뚫을 수 없었다.
알렌은 옆에서 만류하는 소네드를 제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고요했다.
상단주의 아들이 안정을 취하고 있다고 했으니 최선의 조치를 취했겠지.
알렌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곧바로 중앙에 있는 침상의 앞에 이르렀다.
'…어리군.'
이제 막 열다섯은 되었을까.
그러나 저주 때문에 파리해진 안색, 뼈가 보일 정도로 마른 몸뚱어리는 본래 나이보다 몇 살 어려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이렇게 변한 것이 저주 때문인지, 병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단순하게 병에 걸렸다면 다행이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알렌은 곧바로 감지력을 펼쳤다.
촘촘한 그물망이 넓게 퍼져 나가며 상단주 아들의 몸을 확인했다.
알렌의 노심에서 실타래가 뿜어져 나와 그의 의지에 따라 상단주 아들의 몸 곳곳에 달라붙었다.
자세히 집중하자, 신체의 활력이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듯 조금씩 쇠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은 상단주가 수많은 조치를 해 둔 덕분에 현상 유지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얼마나 버틸지 모르는 상태.
'생명력이 어디론가 빠져나가는군.'
역시 토벌당했다는 흑마법사들은 눈가리개용이었나.
율리우스가 가비아로 향한 것은 회귀 전에는 없었던 일이기에 짐작만 했지만, 상단주 아들의 상태를 보자 확신할 수 있었다.
'놈들은 역시 토벌당하지 않았구나.'
알렌은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속으로 계획했던 일을 다시 점검하는 한편, 이 일을 완전히 막아 낼 수 없다는 사실에 일말의 씁쓸함을 느꼈다.
"공자님!"
"…괘, 괜찮으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생기신 게…."
뒤에 있던 린벨과 소네드는 알렌이 침대 근처에 선 채, 조용히 서 있기만 하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지 급히 다가왔다.
"…아니, 잠시 저주의 상태를 확인했을 뿐이네."
"그, 그렇다면…."
소네드는 기대가 담긴 눈으로 알렌을 쳐다보자, 알렌은 그가 생각하는 게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주는 강하지만, 벤시의 눈물을 막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군."
"말씀대로라면 당장…!"
"소네드."
알렌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소네드는 괜히 그런 공자님의 모습에 긴장했으나, 다행히도 그가 생각하는 나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혹시 나를 도와줄 수 있겠나?"
"그게 무슨…."
"저주를 해주 하기 위해서는 한 모금의 양으로도 충분하네."
처음에는 고민했다.
남은 비약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서.
'후일을 위해서 보관할까 아니면 다른 이들을 위해 써야 하나?'
만약 그렇게 사용한다고 해서 다시 벤시의 비약과 같은 물건을 구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었고, 저주에 대한 방편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필요했다.
'이걸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계획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알렌의 생각이 거기까지 나아갔을 때.
[....]
어디선가 맡았던 지독한 악취가 코끝을 맴돌았다.
무정물 같은. 생기 없이 텅 비어 있던 시선과 함께 그를 찌르던 그 지독한 악취를.
'…저주에 걸린 이들을 외면한다고?'
그런 행동이 전생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알렌의 복수는, 누군가가 희생하는 것이 아니어야 했다.
반드시.
'그들은 이익을 저울질하기 전에 백작령의 주민이다.'
그래서는 상단주의 아들만 구할 수 있을 뿐이다.
'남은 비약을 모두 사용하더라도, 저주에 걸린 모두를 구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구하려는 노력은 해 봐야지 않을까.
"나는 이 저주의 피해자가 상단주의 아들, 한 명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네."
"그건…, 예. 그렇습니다."
어차피 이 저주도 앞으로 한 달이면 끝이 난다.
"무수한 피해자가 있을 걸세. 이미 늦은 사람도 있을지 모르고. 아니, 확실히 늦었겠지. 이미 저주가 퍼진지 시간이 지났을 테니. 하지만…."
율리우스가 영지에 도착하면.
어린 신수의 숲에서 엘프 한 명이 도망쳐올 때면.
'이 사태를 끝낼 수 있다.'
"적어도 구하려는 노력은 해 보고 싶군."
알렌은 안타깝다는 얼굴로 소네드에게 호소했다.
영지민을 위해.
저주에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그리고.
"모두 내 보호 아래 있지 않나?"
나를 위해서.
소네드는 그런 그의 모습을 갈팡질팡한 얼굴로 번갈아 보더니 눈을 질끈 감고 답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아니, 해 주십시오. 공자님."
"고맙네."
알렌은 여전히 선한 미소를 지었다.
전과 달리 한 줌의 거짓 없는 미소였다.
* * *
상단주의 아들에게는 곧바로 한 모금의 비약을 먹였다.
비약은 한 모금을 넘기기 무섭게 곧바로 효과가 나타났다.
"콜록-, 콜록-"
"에릭! 에릭! 괜찮느냐!"
"아, 아버지? 이게 무슨…."
"몸은 괜찮느냐? 어디 아픈 곳은 없고?"
"그러고 보니…."
알렌이 회수하지 않았던 감지력을 통해 다시 되살피자, 그의 몸 안에 잠복해 있던 저주가 대부분 약화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정도라면 몇 주 안정을 취한다면 나을 수 있겠군.'
소네드는 오랜만에 눈을 뜬 아들, 에릭과 함께 급히 알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천만에. 오히려 조금 늦었다고 생각돼서 안타까운 마음이군."
알렌이 쓴웃음을 지으며 사과하자, 소네드는 왜 그런 말씀을 하냐는 듯 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모두 공자님 덕분인데…."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군."
알렌은 부자간의 대화를 끝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소네드의 안내를 따라 응접실로 이동했다.
"정확한 현황을 먼저 파악하도록 하지."
알렌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저주가 퍼진 것은 언제부터지? 내가 알기로는, 율리우스가 저주를 퍼트리던 흑마법사를 토벌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건…."
"이건 제가 설명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소네드가 카릭의 말을 잠시 끊자, 카릭은 괜찮다는 듯 흔쾌히 수긍했다.
"저보다 여기 오래 계셨을 테니, 더 잘 아시겠지요.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아마 공자님께서 궁금하신 부분은 이 부분이겠지요. 율리우스 공자님이 흑마법사를 토벌하셨다고 공표했는데 왜 저주가 다시 퍼지는가."
소네드의 어조는 잔잔했다.
아들의 상태가 호전됨에 따라 평소에 보이던 침착함을 되찾은 것 같았다.
"결론만 말하자면, 흑마법사 토벌 이후 저주가 수그러든 건 맞습니다. 하지만… 사라진 건 아니었습니다."
알렌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앞으로 한 달 후에 영지에서 발생할 재앙을.
그걸 해결함으로써 떠올랐던 율리우스의 위상을.
"정확히는 수확제가 끝날 즈음일까요."
소네드의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율리우스가 가비아 인근에 있던 흑마법사 토벌을 끝마치고 사라진 줄 알았던 저주는, 며칠 전부터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자신도 처음에는 그 소문을 믿지 않았으나, 제 아들이 저주에 걸리자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얼굴로 웃음을 흘리더니 말을 이었다.
"흔히 도는 소문이라 넘겨짚는 게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알렌은 조용히 침묵했다.
하지만, 속은 빠른 속도로 벤시의 눈물을 얻었을 때부터 어렴풋이 세워 뒀던 계획을 재확인했다.
'처음에는 간단한 뼈대만 생각해 놨던 계획이었지만….'
율리우스가 흑마법사를 토벌했단 것과 서부지역에 재발하기 시작한 저주를 보며 생각을 고쳤다.
'이건 이용할 수 있다.'
소네드의 아들을 구해 호감을 쌓는다.
그의 협력을 얻어 저주에 걸린 사람을 돕고, 마녀를 해치운다.
은밀하게 율리우스의 평판을 깎아내리며, 자신에게 우호적으로 만든다.
'아직까지는 율리우스에 대한 반감이 생겨나지 않았을 테지만.'
저주가 사라지지 않았다고 해서 율리우스가 흑마법사를 토벌했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러나 율리우스가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일을 알렌이 해결하게 된다면?
'비교할 수밖에 없게 되겠지.'
사람이란 원래 그런 생물이니.
"공자님께서 선뜻 비약을 내주신 것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소네드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안정을 되찾음에 따라 숙련된 상인의 연륜이 그의 눈에 맺혔다.
"공자님께서 다른 이들을 돕겠다고 하셨으니, 저도 기꺼이 공자님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저, 저도 공자님을 돕겠습니다!"
소네드는 알렌의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그에 편승하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직 어수룩한 상인에 불과한 카릭은 분위기에 휩쓸려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지시를 내리겠네."
"마음껏 말씀해 주십시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알렌은 품에 남아 있는 비약을 꺼내며, 그들에게 내밀었다.
"우선, 근처 연금술사들을 소집해서 이 비약을 희석시키라고 하게. 비약의 효과가 사라지지 않을 정도까지. 몰래 빼돌리지 않게 조심하도록 하고."
소네드가 비약을 받아들자, 알렌을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근처에 머무르는 사제에게 내 이름으로 요청 드리게."
사제를 찾아보기 힘들다지만, 도시를 뒤져 본다면 한 명쯤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도 근처 지역에서 선교 행위에 대해 허락한다면, 기꺼이 이 일을 도울 테지.
"또, 상단의 약초를 통해 저주받은 자들이 회복할 수 있도록 돕게."
"그 말씀은…."
알렌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따른 부담은 모두 내가 처리하지."
다이크 상단은 약초를 주로 공급하는 상단이니 물량은 충분할 것이다.
"이넬리아와 린벨은 여기서 며칠 머물 테니 그렇게 알고."
알렌이 말하는 의미를 소네드가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소네드는 당연하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계산에 거짓은 없을 것입니다."
'밑 작업은 끝났군.' 이제 마녀를 해치우고, 소문을 흘릴 차례다.
알렌의 여러 부탁을 들은 소네드는 잠시 생각하듯 눈을 감더니 애매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공자님의 은혜는 많은 사람을 감동시킬 겁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다른 사람의 저주를 해체하기 힘들 겁니다."
"그렇겠지."
알렌 자신도 이 정도의 조치로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전부 보여 주기일 뿐이지.'
앞으로의 소문을 뒷받침해 줄 밑 작업에 불과했다.
자신이 책임을 지고 최선을 다했다는.
그럼으로 저주를 해결한다는.
역시 알렌 공자는 율리우스보다 더 뛰어나다는.
"…그렇다면 공자님께서는?"
소네드의 물음에 알렌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저주라는 건 저주를 건 당사자가 죽으면 극도로 약화된다.'
그녀만 죽인다면 알렌의 조치로도 모든 사태를 해결하기엔 충분했다.
"당연히-"
그러니.
"-저주의 주체를 죽이러 간다."
마녀를 사냥한다.
제45화
알렌은 떠나기 전, 이넬리아를 따로 불러 몇 가지 명령을 내렸다.
"…이건 중요한 일이니 각별히 주의해서 부탁하지."
"맡겨 주십시오. 공자님."
"그래, 믿지."
그녀에게는 은밀하게 율리우스의 평판을 서서히 덮어씌우는 소문을 흘리도록 했다.
언젠가 알렌이 율리우스보다 위라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껴지게끔.
저주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알렌 공자가 왔다는 것과, 그로도 모자라 병자들을 치료할 금액을 모두 부담한다라는 소문.
진실이었으나 교묘하게 알렌과 율리우스를 비교하게끔 만드는 소문.
'지금은 작은 조각일 뿐이지만, 나중에 이것이 모인다면.'
무시할 수 없는 큰 힘이 되리라.
그를 위해서라도 이넬리아는 이곳에 남아 있어야 했다.
"공자님, 저는 따라가면 안 될까요?"
"린벨, 공자님이 말씀하셨잖아. 그런데 또…."
이넬리아가 엄한 눈으로 손을 올리자, 그녀는 조급한 얼굴로 말했다.
"공자님, 저번에도 보셨다시피 짐은 되지 않을 거예요. 제가 재능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 이번에도…."
알렌은 그녀의 청에 잠시 고민을 해 보고, 감지력을 펼쳤다.
'벌써 근육이 자리 잡았나? 자세도 안정적이고, 균형도 마찬가지. 하지만….'
프라나는 아직인가.
감지력으로 더 깊게 파고들자, 아직 근육통이 남아 있는지 벌겋게 부은 부위가 느껴졌다.
'무리해서 수련했구나. 그것도 최근에 생긴 것이로군. 이것만 없었어도 데려갈지 고민을 해 봤을 텐데.'
마녀와의 전투도 자신이 있으면 충분히 보호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을 포션으로 강제로 회복시켜 가며 데려갈 필요는 없었다.
알렌은 긴장된 분위기가 감도는 모녀 사이에 끼어들어 입을 열었다.
"너에게는 따로 시킬 일이 있어 여기 둔 것이다. 다음에는 반드시 데려갈 테니. 이번에는 여기에 남아 있거라."
"…네?"
린벨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이넬리아는 린벨을 품에 다독이며, 알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린벨은 제가 데리고 있을 테니, 잘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짐꾼이라도."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지만, 알렌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넬리아가 진압했다.
딱!
"이상한 소리 하지 마렴, 린벨."
"윽, 머리야. …잘 다녀오세요. 공자님."
"그래."
알렌은 짧게 미소를 짓고는 그를 기다리는 소네드에게 다가갔다.
'…너무 가까이 대했나.'
마지막에 린벨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농담으로 한 말이 분명했다.
농담이라도 다른 사람 앞에서 그의 말에 토를 달다니. 이건 나중에 주의를 줘야 겠어.
소네드는 알렌에게 마녀의 위치를 추정한 지도를 건네주며 진중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공자님, 이번 일을 해결하고 나시면 식사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자네의 초대라…, 기대하겠네."
알렌은 가볍게 웃으며 초대를 받아들였다.
"정말 용병의 지원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마녀를 상대로 많은 숫자는 무의미할 뿐이지. 마차를 이끌 마부만으로 충분하네."
"그러시다면…, 무운을 빌겠습니다."
"자네도 마찬가지. 그럼, 며칠 후에 보지."
소네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멀어지는 마차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공자님은 무엇을 원하시는가….'
그가 조용히 입을 다물자, 옆에서 그를 같이 배웅하던 카릭이 입을 열었다.
"알렌 공자님께서 영지민을 이렇게 위하시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자네는 방금의 대화에서 그것밖에 못 알아차렸는가?"
"예? 그럼…?"
소네드는 아직 어리숙하고 경험이 부족한 젊은 상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부분은 뛰어난데, 다른 부분은 아직 미숙하군.
"후, 아니 이참에 자네한테도 말해 주는 게 났겠군."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그는 이제는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마차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라인하르트 가문의 안주인에 대해서 아나? 아니…."
소네드는 내리쬐는 햇빛을 막아 내며, 낮게 물었다.
"루피너스 가문에 관한 것을 알고 있나?"
* * *
"공자님, 이곳이 지도에 적힌 다섯 번째 장소입니다."
"잠시 확인해 보도록 하지."
"예, 예. 알겠습니다."
마부는 두려운 얼굴로 눈앞에 있는 깊은 협곡을 쳐다보며 몸을 떨었다.
협곡은 어두운 암녹색 이끼와 그림자로 인해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음의 마력도 감도는데, 과거에 학살이라도 있었나?'
뭐, 상관없는 일이지.
알렌은 감지력을 넓게 퍼트리며, 협곡 구석구석을 살폈다.
협곡 구석에 자리한 동굴에서부터 어둠으로 둘러싸인 협곡의 바닥까지.
잠시 머리에 정보의 홍수를 받아 내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협곡을 탐색했지만, 돌아온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여기도 아니군."
몇 년이 더 지나면 언데드라도 자연 발생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알렌은 몇 번이나 펼친 지도를 다시 펼쳐 확인했다.
'앞으로 열한 곳, 벌써 5일이 지났다. 남은 기한은….'
최대 2주.
그 사이에 마녀를 죽여야 했다.
'더 시간을 끌 수는 없다.'
사건의 뒷정리와 다시 영지로 돌아가는 시간까지 합치면 2주의 시간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그 안에 마녀를 죽이지 못하면 율리우스의 도착에 시간을 맞출 수 없다.
'지도의 표시된 모든 지역을 돌아볼 수는 없다.'
다섯 곳을 살피는데 벌써 3일이 지나갔다.
여기서 무작정 나열된 목적지를 살피는 건 시간 낭비에 가까웠다.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다른 장소를 살핀다. 잠깐, 살핀다…?'
"아."
알렌은 자신의 우둔함을 탓하며 곧바로 품에서 구슬 하나를 꺼냈다.
회색에서 백색의 반점이 섞이기 시작한 구슬.
[천상의 눈]
초대 용사의 5대 신기 중 하나이자, 가문의 보고에서 찾았던 물건.
'아직까지 사용할 일이 없어서 생각하지 못했는데….' 잘 생각해 보면 이 순간에서(순간에) 이것만큼 적합한 물건이 없었다.
'멍청하기는.'
처음 보고에서 꺼냈을 때만 해도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율리우스와 대련 그리고 산에서 회수한 영약과 하얀 책의 이상까지 겹쳐 조용히 보관만 하고 있었다.
구슬의 사용 방법은 쉬웠다.
용사의 신기인 만큼 간단한 정보야 널리 퍼져 있었고, 전생에서 율리우스가 사용하는 것도 보았으니까.
알렌은 곧바로 구슬을 붙잡고 정신을 집중했다.
구슬이 순식간에 흡입력을 발하더니 정신이 순식간에 구슬로 빨려들어 갔다.
'여기는…, 하늘인가?'
급히 정신을 차려 아래를 살피자 눈을 감은 채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게 신기의 힘인가….'
무슨 원리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군.
한동안 근처를 살피던 알렌은, 회백색 구슬의 백색 부분이 회색으로 변하기 시작하자 급히 집중했다.
'저주를 퍼트리는 마녀가 위치하는 장소.'
생각을 떠올리기 무섭게 전 세계 곳곳에서 수백 곳에 이르는 장소가 동시에 머리를 헤집었다.
이런 미친.
알렌은 감지력을 넓게 퍼트렸을 때보다 더한 두통에 급히 범위를 줄였다.
'범위는 서부 리브레 왕국.'
범위를 줄여도 열 곳이 넘는 장소가 동시에 떠올랐다.
'…왕국 전역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알렌은 시간만 충분했다면 더 살펴보고 싶었지만, 구슬의 백색 부분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자 관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 짓을 벌일 만한 놈들은 역시 '에스테도르' 소속의 흑마법사 놈들인가.'
이넬리아와 독대하며 짐작했지만, 저주를 퍼트리고, 신수를 타락시키려는 미친 계획을 실행하는 놈들은 그놈들밖에 없었다.
알렌 앞으로 그놈들이 미래에 벌일 사건만 해도 굵직한 것으로 세 가지나 알고 있었다.
그것들도 모두 율리우스와 관련된 것들.
알렌은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범위를 좁혔다.
라인하르트 백작령으로 범위를 줄이자 두 곳으로 줄어들었고, 백작령 서부 도시 인근으로 범위를 완전히 좁히자.
'…찾았다.'
서부 도시 베르겐의 인근, 도시로부터 사흘거리에 있는 이름 없는 숲.
머릿속에 떠오른 하나의 화면에는 고목처럼 늙은 마녀가 동물의 선혈로 장식한 마법진 사이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어디선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허공을 마주 보았고.
"마녀야."
마녀는 뭔가를 알아챈 듯 급히 손을 치켜들었다.
알렌은 그 모습을 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금방 가마."
"…!"
그와 동시에 구슬의 백색 부분이 전부 회색으로 변해 버렸고, 알렌의 의식은 곧장 본체로 되돌아갔다.
-번쩍
"으, 으아아!"
알렌이 가만히 서 있자, 걱정스러운 마음에 슬그머니 다가가던 마부는 알렌의 눈이 갑작스럽게 뜨이자 뒤로 넘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예, 예?"
"내가 눈을 감은 채로 얼마나 지났지?"
"그, 그게…."
알렌은 차분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부는 알렌이 재촉하지 않자, 더듬거리며 손가락을 세다 하늘을 바라보더니 확신하지 못하는 어조로 답했다.
"아마…, 5분 정도 지난 것 같습니다."
"5분이라…."
시간의 괴리는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렇다면 신기를 발동시킨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고맙군. 그럼 다음 장소로 가지."
"예, 그럼 지도에 적힌 장소로…."
"아니, 우리가 향할 장소는…."
알렌은 마녀의 놀란 표정을 떠올리며 서늘하게 웃었다.
"베르겐에서 사흘거리에 위치한 숲, 그곳으로 간다."
* * *
"이넬리아 님, 혹여 불편하신 곳이 없으십니까?"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입니다. 알렌 공자님께서도 신신당부하셨으니 무언가 시키실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철컥-
소네드가 붙여 준 하녀가 인사를 마치고 방을 나서자, 곁에서 조신하게 앉아 있던 린벨은 금세 불안한 얼굴을 했다.
"엄마, 나는 쓸모가 없는 걸까?"
알렌 공자님이 베르겐을 떠난 지 벌써 3일이 지났다.
그 와중에 이넬리아와 린벨이 한 일이라고는 아침, 저녁으로 불편함이 없는지 묻는 소네드와의 대화뿐.
무언가 일을 시킬 거라는 공자님의 말과는 다르게 그녀는 제공된 방에서 대기하는 것밖에 없었다.
린벨은 입술을 짓씹으며, 강박적으로 옷을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공자님이 나를 데려가지 않은 것도, 쓸모가 없어서가 아닐까?"
처음으로 공자님의 무력을 동경했다.
힘이 없음으로써 겪게 되는 불합리함을 깨달았고.
세상이 그리 좋은 쪽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왜, 왜 나는 프라나를 못 쓸까? 응? 엄마."
공자님의 선의에, 기대에 부응하려고 했다.
과분할 정도로 주어지는 호의 속에서, 확신하는 듯 주어지는 그의 믿음 앞에서.
"…사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닐까? 엄마는 요정이잖아…, 그런데 나는 왜, 왜…."
너는 길가의 잡초가 아니라 절벽에 피는 하얀 꽃이라고 말해 주는 그의 신뢰에, 보답하고 싶었다.
"그런데 왜, 나는, 응? 엄마는 요정이라며…, 제발, 제발, 답 좀 해 주면 안 돼?"
공자님은 자신이 남들과 다른 능력이 있을 것이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 스스로는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즐겁게 받아들이던 그의 기대는, 이제 스스로 무너지지 않게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엄마, 사실 나는 엄청 쓸모없는 게…."
"아니, 절대 아니야. 린벨."
이넬리아는 움츠려든 그녀를 재빨리 품에 안으며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린벨, 그건 아니야. 내가 알아. 넌 할 수 있어. 지금은 조금 힘들 뿐이야."
"정말로? 그냥 엄마의 착각이…."
"아니야."
이넬리아는 가슴이 아팠다.
본래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조금 맹하고, 귀여움도 있고, 장난기가 넘치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그 누구도 아닌 기대감에 스스로 무너져 버리다니.
'…이렇게 힘들다면.'
그녀는 눈을 결연히 뜨고, 다정한 어조로 속삭였다.
"그럼…, 그만할래?"
"...!!!"
이넬리아는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어딘가 아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몇 달간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하고…, 본래 삶으로 돌아갈래? 엄마는 사냥하고, 너는 약초를 캐고."
아무런 근심도 없고, 가끔 땔감이 부족하면 서로 붙어서 자고.
사냥에 성공하면 기쁜 얼굴로 요리를 하고, 실패하면 네가 좋아하는 버섯스튜를 하고.
"그런 반복되면서도 평온했던 삶으로, 돌아갈래?"
린벨은 한동안 침묵하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
"왜 그렇게 생각해? 너무 힘들다며."
이넬리아는 보채지 않고 부드럽게 물었다.
"…그건, 싫어."
"왜?"
린벨은 이렇게 노력하게 된 원인을 떠올렸다.
지금은 알렌의 넘치는 기대에 허덕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녀가 강함을 추구한 원인을.
"…더 이상 그런 경험은 하기 싫으니까."
나약한 자신 때문에 엄마가 스스로 납치되던 모습은, 아직도 악몽에 종종 나올 정도로 깊이 박혔다.
"그래, 포기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엄마는 네 편이니까."
이넬리아는 린벨을 침실로 옮겨 같이 침대에 눕혔다.
"일단 한숨 자면 나을 거야. 알았지?"
"…응."
그녀는 정신적으로 피곤했는지 금방 고른 숨을 내쉬며 곯아떨어졌다.
이넬리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진지한 표정으로 알렌이 당부한 일을 떠올렸다.
"그전에 잠시만…."
그녀는 곧바로 눈을 감았다.
정신을 집중하자 그녀의 주위로 바람이 불며 푸르스름한 소녀의 형상이 나타났다.
"실피."
꺄하하-
"쉿!"
꺄?
"딸이 자니까 조용히 해 줄래?"
-끄덕끄덕
이넬리아가 그녀를 쓰다듬으며 부탁하자, 실피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뺨에 달라붙었다.
"실피, 소리가 빠져나가지 않게 해 줄래?"
실피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람의 형태로 변해 그녀들 주위를 돌며 밖과 차단했다.
"잠시 나갔다 올 테니까, 잠깐만 그렇게 있어 줘, 부탁해."
이넬리아는 알겠다는 듯 자신을 쓰다듬는 바람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
고개를 숙이자 린벨이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뱉으며, 잠에 빠져 있었다.
이넬리아는 조심스럽게 요정의 본모습으로 몸을 되돌렸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자 잿빛 피부의 열네 쌍의 날개를 가진 아름다운 요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린벨, 미안해. 같이 있어 주고 싶은데. 금방 나갔다 올게."
그녀는 잠들어 있는 그녀에게 사과를 하고, 은밀하게 능력을 사용했다.
다른 생물로 변신할 수 있는 요정의 능력이었다.
스르르-
몸이 순식간에 그림자로 녹아내리며,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넬리아는 빠르게 문틈으로 빠져나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알렌 공자님께서 부탁하신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이넬리아가 사라지는 순간 린벨의 자색 눈이 뜨였다.
그녀의 시선이 이넬리아가 사라진 방문을 향했다.
"거짓말쟁이."
린벨은 공허한 눈으로 가슴속에 퍼져 나가는 추악한 감정을 내리누르며 읆조렸다.
"…역시 내 말이 맞았잖아."
그녀는 얼른 베개로 얼굴을 가렸다.
스스로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도저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알렌의 이름이 도시의 수면 아래 조용히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이면에 도사린 의도와 함께.
제46화
알렌은 협곡에서 3일 만에 마녀가 위치했던 숲 앞에 도착했다.
"도, 도착했습니다."
마부는 마을 하나 들리지 않고, 쉴 새 없이 마차를 모느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마차는 얼마나 험하게 달렸는지 프레임이 조금 휘어 있었고, 곳곳에 긁힌 자국이 가득했다.
"여기서는 혼자서 가지. 만약 하루를 기다려도 내가 나오지 않으면, 먼저 도시로 돌아가게."
마부는 마녀가 여기 있다는 걸 직감한 듯, 겁먹은 얼굴로 멀찍이 있는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아, 알겠습니다."
알렌은 그 모습을 보고 짧게 웃다가 자신의 앞에 자리 잡은 어둑한 숲을 바라봤다.
[숲의 이름이 따로 없다고 했나?]
[예, 약초나 버섯 같은 것도 없어서…, 그냥 주변 숲과 뭉뚱그려서 건너 숲이라고만….]
알렌은 마차에서 숲에 관해 몇 마디 물었던 것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앞으로 이 숲에 사람이 들어올 일은 없겠다고.
'근처에 다른 숲이 없는 것도 아니니, 이곳에 사람이 더 오지는 않겠군.'
마녀란 이름만으로도 불길한 존재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렇게 가만히 숲을 보고 있는 게 못마땅했던 걸까, 알렌의 허리춤에 있던 베스틀라가 꿍얼거렸다.
「당신, 시간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빨리 안 가요?」
"아니, 잠시 확인할 게 있다."
알렌은 눈을 가늘게 뜨며 숲의 안쪽을 노려봤다.
감지력이 뿜어져 나오며 숲의 안쪽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알렌은 숲 안에서 그 무엇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마녀가 있다는 게 거짓말인 듯.
'결계인가?'
마차에서 나온 직후부터 숲으로 감지력을 뻗었으나, 마녀가 무언가 대비를 한 듯 결계에 막혀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진짜 마녀와 전투를 벌이는 건 처음이군.'
전생에서부터 마녀와 전투를 벌인 적이 없었기에 조금 가슴이 뛰었다.
「왜요? 겁먹었어요? 아까는 '마녀야, 내가 간다!'며 폼이나 잡더니.」
"누가 그렇게 말했다고."
알렌은 피식 웃고는 베스틀라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저 조금 감회가 새로웠다. 마녀를 쫓으며, 영지를 좀먹는 저주의 근원을 해치운다. 이런 짓은 전생의 율리우스나 하던 짓이었는데.
스스로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한 묘한 감상이 들었을 뿐이다.
알렌은 감지 범위를 자신의 주위로 극도로 좁히고 앞으로 나섰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에 오래 묵은 잎사귀들이 바스락거리며 부서졌다.
그렇게 한 발자국 내디딘 순간.
-저벅
「오.」
보이던 환경이 바뀌었다.
알렌은 당황하지 않았다.
시야가 뒤바뀌는 순간 실타래를 전 방위로 퍼트렸고, 자세를 낮추었다.
"…환영 인사는 없나, 뻔히 들어온 걸 알 텐데."
「의외로 몰래 지켜보면서 준비하고 있을지 누가 알아요?」
"웃기는 소리."
알렌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숲 안은 조용했다.
벌레 우는소리 하나 없이 정적에 잠긴 숲은 마치 정령의 샘에 들어갔을 때를 연상시켰다.
다만 숲에 생기가 있었던 그때와 다르게 이곳은 생기를 빼앗긴 듯 전체적으로 우중충했다.
음산한 바람과 메마른 길.
죽어 있는 숲에는 살아 있는 생물이란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마녀가 죽은 후에도 이 땅은 틀렸군.'
알렌은 마녀가 있을 거라 추정되는 숲의 중심으로 나아가며 입을 열었다.
"마녀에 대해 알고 있나?"
「음…, 글쎄요? 직접 안 봐서 모르겠는데요.」
"요사하고, 사이한 놈들이지. 사람을 홀리고, 지금처럼 저주를 흩뿌린다. 모르나?"
「그런 게 한둘이에요?」
"그것도 그렇군."
알렌은 베스틀라와 대화를 나누면서 일부러 틈을 보이듯 행동했지만, 그를 습격하는 자는 없었다.
숲의 중반을 가로지를 때까지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자, 알렌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왜, 아무도 습격하지 않지?"
「…어, 글쎄요? 도망쳤나?」
괴물이나 언데드, 못해도 하수인들이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렌은 속도를 올렸다.
뭔가 이상했다.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고? 이상하다. 이상해. 이제 와서 도망쳤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함정을 파둔다는 게….
「…원래 이렇게 숲이 넓었나?」
"뭐?"
순간 알렌이 걸음을 멈추고 섰다.
"뭐라고?"
「…어, 초 치려던 건 아니었는데. 기분 나빴어요?」
"아니, 그게 아니다. 전에 뭐라고 했지?"
「원래 이렇게 숲이 넓었나?」
"보기 좋게 낚였군."
알렌은 입술을 깨물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 강하게 땅을 박찼다.
난폭한 걸음에 나무와 바위가 박살 나며, 흙먼지가 날린다. 베스틀라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의아한 듯 소리쳤다.
「갑자기 뭐 해요! 누가 덮쳐오면 어쩔 건데!」
거인의 튼튼한 육체가 숲 전체를 부술 듯이 전진하며 얼마나 나아갔을까, 어느 순간 알렌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당신 뭐 하는 거예요! 마법사라는 건 이성적인 사람이 하는 거라며!」
"주위를 둘러봐라."
「둘러보긴 뭘 둘러봐요! 어차피 다 박살 났을… 어라?」
한껏 잔소리를 퍼부으려던 베스틀라의 검체가 멈칫했다.
"본래 이 정도 속도면 벌써 숲을 빠져나가고도 남았겠지. 그런데 주변은 어떻지?"
주위는 아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알렌이 난리를 피운 적이 없던 듯.
부서진 나무는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왔고, 박살 난 바위는 처음부터 그런 적이 없다는 듯 그대로 있었다.
「어? 어? 이럴 리가 없는데?」
그녀는 알렌의 손에서 벗어나 주위를 몇 번이나 살펴보더니 어리둥절한 어조로 말했다.
「…이건 환각? 아니, 환각은 아닌데.」
"정확히는 환상으로 구성한 결계지."
알렌은 드물게도 인상을 찌푸렸다.
"결계를 통과했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는데, 방심했군."
마녀가 있는 숲이라면 '당연히' 이럴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에 그냥 넘기고 말았다.
정령의 샘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이 알렌이 숲의 모습을 의심하지 않는 것에 한몫했다.
'차라리 결계를 부수고 들어오는 게 더 현명했을까.'
알렌은 냉정하게 사고했다.
「…그럼 어떻게 할 거예요? 결계를 깰 방법은 있어요?」
베스틀라는 제법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알렌은 천천히 자신이 쓸 수 있는 수단을 확인했다.
'결계의 역산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결계 계통에 대해서는 기초적인 것밖에 아는 것이 없으니, 해주는 처음부터 논외.
'그렇다면 결계가 있는 공간을 통째로 부수는 수밖에 없나?'
숲의 초입에서 멀어졌으니 결계의 끝에 가서 부술 시기는 놓쳤다.
그렇다면?
'틈을 만든다.'
결계와 공간 계통은 직간접적인 접점이 있다. 결계 계통의 마법사보단 효율이 좋지 않을지언정, 몸을 빼는 정도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계의 중심축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 이 방법이 제일 현실성 있었다.
알렌은 즉시 주변에 흩어 놨던 실타래를 끌어모아 작은 충격파를 무수히 뿌렸다.
충격파가 공간을 미세하게 뒤흔들며 결계의 틈을 찾기 시작했다.
'이렇게 거대한 결계가 완벽할 수 없다.'
작은 취약점 하나만 찾아낸다면, 틈을 벌릴 수 있다.
알렌의 손길이 무언가를 더듬듯 분주하게 허공을 두드렸다. 결계의 축은 하나가 아니겠지. 작은 고정축을 하나 비튼다면….
"찾았다."
알렌의 수인에 따라 노심에서 광대한 마나가 끝없이 꿀렁이며 무수한 실타래로 알렌의 주변을 채웠다.
무수하게 늘어난 실타래가 허공의 한 지점을 푹- 찌르더니 무언가 비틀리듯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무언가 강제로 열리는 듯한 감각.
소비되는 마력이 심상치 않았다.
'…쯧, 결계에 대해서도 연구해 볼 걸 그랬나.'
-기기긱
그렇게 조금의 시간만 흐른다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 것 같던 때.
「빨리 저기 봐요!」
알렌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있던 베스틀라가 갑작스럽게 소리쳤다.
알렌의 시선이 베스틀라가 소리친 곳을 바라봤다.
-그아-아아-아아!
-게-에에에에에에!
-크르르르르르륵!
스켈레톤, 구울, 좀비, 듀라한, 벤시를 비롯한 언데드들.
저건 현실인가? 아니면 환상? 어찌 되었든 결계 안에서는 진짜나 다름없다.
알렌은 헛웃음을 흘리며 자세를 잡았다.
"베스틀라, 네 말이 맞았군."
「…아하하, 그렇네요?」
알렌이 노려보자 베스틀라는 급히 입을 다물고 알렌의 손으로 날아와 안착했다.
"다음부터는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도록 하지."
「…네.」
알렌이 손을 휘두르자, 실타래가 엮이며 수십의 송곳들이 시체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오늘 안에 끝마쳤으면 좋겠군."
쾅!
검은 시체의 물결이 그들을 덮쳤다.
* * *
알렌의 검이 머리 없는 녹슨 갑옷을 내려찍었다. 콰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듀라한은 한낮 고철 더미로 변해 목부터 사타구니까지 절반으로 쪼개져 버렸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쪼개진 듀라한의 틈을 채우듯 썩은 피부가 흘러내리는 좀비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곧바로 주먹을 휘두르자, 머리가 폭발하며 허연 뇌수가 허공을 적셨다.
수가 얼마나 남았지?
"베스틀라!"
「잠시만요!」
알렌이 소리치며 베스틀라를 허공에 던지자 그녀는 빠르게 상대의 수를 확인했다.
「아직도 많아요! 수가 안 줄어드는 거 아니에요?」
알렌은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저놈들은 실체가 아니라 환상인가?
'아니, 나무나 바위가 원래대로 돌아온 것처럼 결계의 특성일 수도 있지.'
어느 쪽이든 알렌에게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크르-륵!
흉측한 근육을 드러낸 구울은 톱날 같은 손톱을 반짝이며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알렌이 허공을 치자, 거대한 충격파에 구울의 허리가 꺾였다.
낮아진 머리를 발로 내려찍자, 뿌득하고 끔찍한 감촉과 함께 머리가 함몰되었다.
수많은 언데드가 파도처럼 알렌에게 몰아쳤다. 베스틀라의 시선으로 내려다봤음에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수였다.
알렌은 자신의 육체를 확실하게 활용했다.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도구로 시체의 골통을 부쉈고, 짓쳐 드는 공격도 강철 같은 피부를 방패 삼아 막아 냈다.
알렌은 시체의 파도를 깨부수며 생각했다. 이대로 가면 끝이 없다고.
마녀가 놈들을 조종하기 시작했는지, 어느 순간 놈들은 교묘하게 진형을 짜기 시작하더니 알렌의 체력을 앗아가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체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인의 특성을 띠는 육체가 이딴 일에 무너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공격이 지속된다면 육체보다 정신이 먼저 지칠 가능성이 높았다.
"베스틀라! 거대화!"
「알았어요! 얍!」
알렌은 육중한 무게로 추락하는 그녀를 잡고, 몸을 틀었다. 근육이 끊어질 듯 비명을 지른다. 공기가 마찰음을 울리며 놈들의 머리 위로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검격은, 그 무게만으로 압도적인 폭력이 된다.
쾅!
알렌의 주위로 수십 미터의 공백이 생기며, 바닥에는 잘게 흩어진 육편이 짓이겨져 뒹굴었다.
'이렇게 되더라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겠지.'
그러나 상관없었다.
이 틈을 노리기 위함이었으니.
곧바로 손을 놓고 수인을 맺는다.
언데드가 상대의 하수인이라면, 종속된 하수인이라면.
'빼앗을 수 있다.'
[계약] [영역] [강제] [탈취]
심상 속에서 벼려 낸 4개의 개념이 섞이며 하나의 술식으로 화한다. 실타래가 수천 가닥으로 분열되며 바닥에 쓰러진 시체로 향했다.
시체의 살점이 꿈틀거리며 다시 뭉치기 시작했다.
알렌은 실타래가 그 살덩이 사이로 섞여 들어가는 것을 보며 만족했다는 듯 웃었다.
"강제 계약."
심장의 노심이 미친 듯이 뛰자, 두 손을 인형을 조종하는 인형사처럼 섬세하게 움직였다.
"가라, 괴물들아."
서로 미친 듯이 물어뜯어라.
어느새 완전히 되돌아온 언데드들이 반대로 돌아 몰려오는 시체의 파도에 맞서기 시작했다.
알렌은 감지력으로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보조해 주며 움직이느라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몰려들었다.
'이런 편법으로는 얼마 버티지 못하는데….'
소환 계통에는 아는 게 없으니 직접 조종할 수밖에.
이미 죽은 언데드들이기에 요람의 부름도 통하지 않는다. 이렇게 시간을 벌 수 있을 때 탈출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알렌이 고민하던 때, 그의 곁에 떠다니던 베스틀라가 꺼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법이 하나 있어요.」
두통을 참아 내며 고개를 돌리자, 그저 장식이라 생각했던 베스틀라의 검면 위에 새겨진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점멸하며 백열하기 시작했다.
"베스틀라, 이건 무슨…."
「일단 이걸 한 번 사용하면, 저는 언제 깨어날지 몰라요. 한 달이 될 수도 있고, 일 년이 될 수도 있죠.」
"특별한 능력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알렌은 두통을 느끼는 와중에도 어처구니가 없어 내뱉자, 베스틀라는 당황한 어조로 답했다.
「저, 저도 며칠 전에 깨달은 거거든요! 됐고, 빨리 선택이나 해 봐요!」
그녀의 능력으로 이곳을 탈출해야 되나,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답은 금방 나왔다.
'지금 그녀의 능력을 사용하기는 아쉽다.'
어떤 능력인지는 몰라도 한 번 사용하는데 저 정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면, 이곳보다 더욱 중요한 전장, 위험한 순간에 사용하는 게 훨씬 유용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도 무슨 방법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상대가 먼저 나가떨어지지 않는 한, 준비된 결계를 빠져나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차라리 숲 전체를 폭격하듯이 공격해서 결계의 중심축을 부수는 건….'
알렌에게 조종되던 언데드들도 대부분 나가떨어지고, 시간은 그저 흘러간다.
「빨리 결정해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래. 나가야지.' 알렌이 감았던 눈을 뜨고, 결심을 굳힌 순간.
촤르르-
하얀 책이 갑작스럽게 펼쳐지며, 새하얀 백지에 글자가 쓰여지기 시작했다.
『■■■■과(와) 이어진 책이 조건을 확인합니다. ■■을(를) 인지하고 있습니다! ■■와(과) 연관된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을(를) 막아 내기를 원합니다!』
『조건을 충족합니다. ■■■ ■■(가칭)이 현현합니다!』
『?오른쪽으로 세 발자국. 뒤로 두 발자국. 8초 후에 400m 위로 충격파.』
"이건…."
새로운 변수가 나타났다.
제47화
알렌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하얀 책을 바라봤다.
'도대체 뭐지?'
처음부터 활용할 수 있었던 검은 책과 달리 몇 달이 지나서야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뭐냐.
『?오른쪽으로 세 발자국. 뒤로 두 발자국. 8초 후에 400m 위로 충격파.』
알렌의 의심스러운 눈길에도 하얀 책은 같은 페이지를 내보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8초』
「알렌?」
베스틀라는 하얀 책에 쓰여진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알렌을 재촉했다.
「어떻게 할 거예요. 해요?」
『7초』
"아니…, 잠시, 잠시만."
최대한 냉정하게.
알렌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고민할 시간 따위는 없었지만, 그는 최대한 생각해야 했다.
『6초』
'■■는 뭐지? 저번에 읽었던 것과 같은 건가?' 하얀 책이 갑작스럽게 반응하는 이유를.
『5초』
'뭐가 조건이 된 거지? 마녀? 언데드? 베스틀라? 그것도 아니면 상황 그 자체?' 이런 때에 나타난 의미 모를 도움의 의미를.
『4초』
「빨리 결정해요!」
'하얀 책이 원하는 건 뭐지?'
아니, 회귀를 시킨 자의 목적은….
「알렌!」
『3초』
알렌은 결국 움직였다.
오른쪽으로 세 발자국.
'어차피 어떤 수작이든 벗어날 수 있다.' 베스틀라가 준비한 비장의 무기가 아니더라도.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지만 이 상황이 벗어나지 못할 위기는 아니었다.
'그러니.'
『2초』
뒤로 두 발자국.
'저 지시가 뭘 의미하는지….' 알아낸다.
『1초』
팡!
알렌이 손을 비틀자, 그의 머리 위로 실타래가 양방향으로 회전하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정확히 알렌의 머리 위 400m 공간을.
「지금 뭐 하고 있…!」
그렇게 허공을 충격파가 할퀴며 목표 지점에 도달한 순간.
『0초』
-쨍그랑!
「…어요! …응?」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부서져 내렸다.
알렌의 충격파는 '우연히' 공중에 있던 중심축을 부숴 결계를 무너뜨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한 결과에 알렌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들은 어느새 숲속의 어딘가로 되돌아와 있었다.
베스틀라는 검 끝을 획획 돌리며, 주위를 살피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와,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성공했네요! 다행이네요! 만세! 방법이 있으면 빨리 사용하지 그랬어요?」
알렌은 쓴웃음을 지으며 하얀 책을 살폈다.
"…그러게, 방법이 있다는 걸 먼저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어찌 됐든 다행이네요!」
하얀 책은.
『결계 축을 파괴한 이후, 결계에서 벗어나게 됨.
막대한 마력을 소모했으나, 유사 용의 노심에서 생성되는 마력의 양은 곧바로 회복할 수….』
저번처럼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새하얀 백지로 변해 있었다.
언제나처럼.
* * *
3급 마녀, 나르크는 얼굴이 붉게 변하며 피를 토했다. 마법의 반작용에 늙은 몸뚱이가 잘게 떨렸으나 그녀는 그것보다 다른 것이 더 의문스러웠다.
'결계의 중심축을 어떻게 찾았지?'
3일 전에 누군가 이곳을 지켜보는 시선에 곧바로 습격을 대비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오늘 마검사가 나타났고, 그의 전력에 당황했으나 준비해 둔 함정에 가두는 것에 성공했다.
그렇게 가둬서 생명력만 빼내고 죽일 생각이었는데.
'그걸 찾아냈다고?'
나르크는 곧바로 알렌을 상대할 생각을 그만두었다. 하수인의 눈으로 본 그의 전력은 자신이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으니까.
결계가 완전히 부서지기 직전, 거리를 벌려 놔서 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결계의 중심축이 무너진 즉시 마주쳤을 것이다.
'당장 도망쳐야 해.'
그녀는 곧바로 마법진 중앙에 있던 제단을 박살 내고, 숲의 생명력을 끌어모아 만든 붉은 보석을 급히 챙겼다.
제발, 제발 늦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늙고, 주름진 몸뚱어리를 그대로 내버려 둔 것이 후회가 됐다. 썩을. 그녀는 곧바로 미리 만들어 둔 탈출로를 향해 달렸다.
숨을 헐떡이며 뛰어나온 그녀가 몇 발자국 내디딘 순간.
"어딜 그리 급히 가시나."
들리지 말아야 할 목소리가 들렸다.
"…결계에 침입한 마검사로구나."
"그래, 너는 영지의 저주를 뿌리는 마녀고."
"…혹시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나?"
알렌은 그녀의 대답이 웃긴지 피식 웃었다.
"왜, 대신 죽이기라도 하게?"
"그래, 난 쓸모가 많다. 이렇게…."
알렌의 발밑이 꿈틀대더니 순식간에 두꺼운 뿌리가 다리를 타고 올라와 온몸을 감싸 안았다.
"…꼬마 한 명 죽이는 건 일도 아니지!"
온몸을 뒤덮은 뿌리는 몸을 찌부러뜨릴 듯 억죄기 시작했다. 알렌은 그 모든 것을 재롱이라도 바라보는 듯 가만히 응시했다.
마녀는 쭈글쭈글한 얼굴에 추악한 미소를 드리우며, 이미 다 이겼다는 듯 입을 열었다.
"소용없을 거다. 만약을 위해서 백 그루의 물푸레나무로 엮었으니 아무리 너의 근력이…."
콰직-
"내가 뭐?"
"어, 어떻게…."
마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알렌은 그녀의 패가 다 떨어졌다는 걸 확신하자 곧바로 행동을 시작했다.
"혹시나 싶어 확인했는데, 이제 쓸 패는 없는 모양이야."
알렌이 몸을 틀자 강철이라도 찌그러뜨렸을 뿌리가 종이로 만들어진 듯 찢겨 나갔다.
"자, 잠시만 기다려! 방, 방금은 실수했을 뿐이다! 내 효용 가치를…."
"아니,"
털썩-
"마녀는 믿지 않는 주의라서."
반으로 갈라진 마녀의 몸이 옆으로 쓰러져 내렸다. 그 사이로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려 피 웅덩이를 만들어 냈다.
알렌은 베스틀라로 마녀의 목을 한 번 더 베어 내고, 심장을 터트렸다. 네 조각으로 쪼개진 시체가 살려 달라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경련했다.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낸 알렌은 충격파를 터트려 완전히 없애 버리고는, 천상의 눈으로 보았던 마법진을 확인했다.
"이걸로 신수의 숲에 모아 놓은 생명력을 보내는 건가…."
부서진 제단은 매개체의 역할을 하고, 피로 그려진 마법진은 생명력을 모아 두는 역할인가? 의식 마법 계통이라 잘 모르겠는데….
알렌이 그렇게 마법진을 이곳저곳 둘러보던 때, 주변을 뒤적거리던 베스틀라가 소리쳤다.
「당신, 이것 좀 봐요! 」
알렌이 고개를 들자, 그녀는 요령 좋게 주머니 하나를 검면에 걸치고 날아왔다.
"그건?"
「마녀의 물건이죠! 막 보물 같은 거 들어 있는 거 아니에요?」
그녀가 얼른 열어 보라며 호들갑을 떨자 알렌은 감지력을 뻗어 아무런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주머니를 열었다. 그곳에는 붉은 보석 하나가 영롱한 핏빛을 발했다.
「이게 뭔지 알아요?」
"…생명석인가, 그것도 상등품이군. 이 숲의 생명력을 모두 긁어모아 농축시켰나?"
꽤 심혈을 기울였나 본데. 알렌은 그것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아직 어디에 쓸지 모르겠지만, 사용할 수 있는 구석은 많았다.
"이제 돌아가지. 자칫하면 도시까지 걸어가야 할 수도 있으니까."
「전 날아다니니까 괜찮은데요?」
"…내가 괜찮지 않다."
탈 것이 없어서 도시까지 뛰어다녀야 했던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얼른 가지."
「네. 네. 알았어요.」
* * *
"율리우스 님! 감사드립니다."
"역시, 율리우스 님. 명성을 떨친 이유가 있으셨군요."
"덕분에 물건들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율리우스는 경매장을 침입한 적이 더 없는지 확인하고, 그들의 감사 인사를 받았다.
"아니야. 내 물건을 지키기 위해서는 당연하지."
경매의 마지막 날.
오늘은 영지에서부터 운반한 고대 유물들의 경매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마지막에 강도들이 침입해 오지만 않았다면, 이미 대금을 모두 받아서 머물던 곳으로 돌아갔겠지.
"율리우스 님, 괜찮으신가요?"
검에 묻은 혈흔을 털어 내고 뒤를 돌아보자, 청초한 얼굴의 미녀가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눈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아이린, 아니 이제는 가주님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뇨, 아뇨! 저희 사이에 가주님은 무슨, 그냥 아이린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녀는 황송하다는 듯 보랏빛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율리우스는 기쁘다는 듯 미소 짓는 그녀를 바라보며 무지개 마안을 사용했다.
'옅은 주황색이 섞인 노란색.'
아이린 블레스트.
왕도로 향하던 중 암살자에게 위협받던 그녀를 우연히 만나 구해 줄 수 있었다.
그 후에 억울하게 쫓기는 그녀의 사연을 듣고, 그녀를 도와 방해 세력을 물리치고 그녀를 후계자에 올리는 것에 성공했다.
그 이후로 그녀는 보답으로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고 말하고는 율리우스 일행은 자신의 저택에 묵게 했다.
'이 정도 재능이라면 충분히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지.'
원작에도 나오지 않은 사람이다.
아카데미까지 잘 키워 데려간다면 큰 전력이 되겠지.
"그럼…."
아이린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랑 저녁 식사를 하지 않…."
"아니, 그는 나랑 선약이 있어서 말이다."
아이린의 얼굴이 차갑게 식은 채 목소리가 들려오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갑옷이 장식된 만화에서나 볼 법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또각또각 걸으며 다가왔다.
"…제3 공주님께 인사드립니다."
"딱딱하게 그렇게 부르지 말래도? 헬레나라고 부르거라."
아이린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자, 헬레나는 털털하게 웃으며 율리우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율리우스 너도."
"오랜만입니다. 공주님."
"그래, 며칠 전에 '그곳'에서 보고 오랜만이구나."
율리우스는 난감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원작의 메인 히로인 중 한 명이랑 엮일 줄이야.'
그것도 암시장에서.
몰래 레이나만 데리고 참가한 암시장에서 갑작스럽게 세력ㅜ충돌이 일어났고, 그곳에 있던 헬레나와 힘을 합쳐 빠져나왔다.
'정확히는 도움을 받은 거지만….'
이 엉뚱한 공주님이 그를 동료로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와 친분을 쌓는다면 아카데미에 갔을 때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
'그리고….'
아름다운 여성이 그에게 다가오는데 거부할 남자는 없었다.
"예. 그때 마지막으로 뵈었지요."
"그럼, 그곳에서 한 약속도 잊지 않았겠지? 식사를 하자고 했지 않느냐."
"그런데…."
율리우스가 슬쩍 고개를 돌리자 아이린이 섬뜩한 눈으로 헬레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이린도 함께 할 수 없겠습니까?"
"흠…, 오붓하게 즐기고 싶었지만, 그대의 부탁이라면 어쩔 수 없지. 허락하마."
"감사드립니다."
아이린은 마지못하다는 그녀의 말투에 꿈틀거리는 검은 감정을 짓누르고는 고개를 숙였다.
"허락에 감사드립니다. 공주님."
"율리우스에게 고마워하거라."
"…예."
아이린은 이를 까득 깨물었다. 참아야 했다. 반드시. 화가 나도. 방해가 있어도. 독점하고 싶어도.
'평범하게.'
"고마워요. 율리우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공허하게 빛났다.
* * *
"카르넬, 계획은 어떻게 됐지?"
"계획은 언제나 순조롭지. 중간에 제물 하나가 저주에서 벗어나기는 했는데… 뭐, 그 정도는 운 아니겠어?"
"죽은 마녀 건은 어쩌고?"
"우연히 도시에 들른 귀족의 귀에 저주가 닿은 모양이겠지."
카르넬은 어깨를 으쓱이며, 몇 년간 정성을 기울여 만든 의식용 제단을 살폈다.
제단은 기괴했다. 제단을 중심으로 그려진 마법진에서 연신 붉은 연기를 토해 냈고, 다닥다닥 달라붙은 핏줄은 살아 있는 듯 박동했다.
그 주위로 수십 명의 흑마법사가 영창과 수인을 하며 끊임없이 술식을 조정했다.
"아니, 변수는 없어야 한다. 벌써 같은 영지에서만 두 번이나 토벌당했다. 만약 이 일이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만, 그만. 말록 너는 너무 걱정이 많아. 상식적으로 신수를 타락시킨다니, 누가 그런 상상을 하겠어?"
카르넬이 입술에 묻은 피를 소매로 훑으며 키득거리자, 말록은 우묵한 눈으로 신수를 떠올리며 수긍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귀족 가문에서 무언가 낌새를 눈치챌 수도 있지 않나."
"이 영지가 어디인지 잊은 거야?"
카르넬은 정말 모르냐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라인하르트…."
"알잖아, 말록. 불가능하다는 걸. 그래도 정 불안하면 제물이나 가져와. 인간이 들킬 것 같으면, 다른 것들로. 알지?"
"그것밖에 해결책이 없다면…, 알았다."
말록이 검게 물든 투구의 덮개를 내리며, 땅에 박혀 있던 대검을 뽑아 들었다.
"대계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심하는 거나 잊지 마."
"…조언은 받아들이지. 아."
일어나려던 말록은 잠시 잊어버린 것이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며칠 전 대부분의 지부에서 무언가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고 전해 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흐음…,"
눈을 굴리며 침음성을 내던 그는 간단하다는 듯 말했다.
"[천상의 눈]."
"뭐라고?"
"모든 지부가 동시에 시선을 느낄만한 물건은… 사라졌다는 용사의 5대 신기밖에 더 있겠어?"
"그건…, 그렇군."
"어차피 조만간 본부에서 조치한다니 우리는 신경 쓸 필요 없어. 알겠어?"
"알았다."
그는 육중한 갑옷을 위로 대검을 걸쳤다.
"최대한 많이 잡아 와."
"노력해 보지."
말록의 신형이 천천히 안개 속으로 사라지자, 카르넬은 손에 들고 있던 심장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킥, 얼른 그분의 말씀대로 때가 되기까지 얼마나 남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