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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할 일은 넘쳤다. 의식의 완성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도, 그 사이에 무슨 변수가 생긴다면 몇 년간 준비한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다.

카르넬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흐으음~"

그들은 알고 있을까,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 멀지 않았음을.

제48화

숲을 빠져나오자 태양이 서쪽 하늘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마부는 숲에서 태연히 걸어 나오는 알렌을 발견하고는 급히 바위 뒤에서 뛰쳐나왔다.

"공자님!"

"도시로 돌아가지."

"그 말씀은…."

마부의 눈이 빠르게 알렌이 걸어 나왔던 숲을 향했다.

"마녀는 죽었다."

"그, 그렇다면 저주는…."

알렌은 피식 웃었다. 마녀가 죽었는데, 저주가 멀쩡할 리가.

"저주가 더 이상 퍼질 리는 없겠지."

"…오오오오!"

저주에 걸린 자들 모두 몸조리만 잘한다면 금방 나을 것이다. 알렌이 다이크 상단을 통해 전한 자신의 '선의'가 담긴 지원을 통해서.

'이걸로 이곳의 일은 마무리됐군.'

이제 베르겐에 하루를 머물고 떠나면 될 것이다.

알렌은 눈이 큼지막하게 뜨여 입을 벌리는 그를 지나치며 말했다.

"얼른 출발하지. 도시에 들어가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됐군."

* * *

마차가 도시로 돌아온 것은 사흘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쪽빛 하늘은 그의 승리를 기념하듯 시원하게 트여 있었고, 밝은 태양 빛 아래로 수많은 사람이 도시로 몰려들어 시끄러운 소리를 자아냈다.

알렌은 도시로 돌아오기 무섭게 곧바로 소네드와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카릭은 처음에 그를 맞이하고는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대화를 경청했다.

"우선 무사히 마녀를 토벌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공자님."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알렌이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 겸양을 떨자, 소네드는 크게 웃으며 답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십니까. 저 밖에서 공자님을 칭송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소네드가 웃으며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자, 곳곳에서 알렌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알렌 공자님 만세!

-와아아아! 저주가 나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공자님께서 비약과 약초를 제공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더군요."

소네드는 무언가 짐작 가는 게 있는 듯 알렌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으나, 알렌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작게 웃었다.

그들의 칭송이 은근히 기쁘다는 것처럼.

'이넬리아가 잘해 줬군.'

율리우스에 관한 것들도 잘 되었으면 좋을 텐데.

소네드는 알렌이 아무런 틈을 보이지 않자 금방 표정을 풀고는, 방금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공자님. 이걸 여쭙는 걸 깜박했군요. 저희 상단과 만나려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표정 변화는 능숙했다. 정말 궁금해서 그렇다는 듯한 자연스러운 모습은, 누구라도 깜빡 속을 것 같았다.

그 상대가 알렌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이제 와서 의심하는 건가.'

그래, 이 모습이 본래 상인의 본모습이겠지.

처음 만났을 때는 아들의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겠지만, 며칠이 지나자 그는 의심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하는.

알렌이 찾아온 시기가 너무 맞아떨어진다는 의심이.

아들의 저주를 해결하며,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는 듯 일을 진행하는 그의 모습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아, 그거 말인가?"

알렌은 별것 아니라는 듯 답했다.

"아버지가 엘프가 재배한 찻잎을 쓰시기에 나도 구하려고 자네를 찾았지."

"찻잎… 말이십니까?"

알렌은 그렇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소네드. 자네가 엘프와 연이 있다는 건 꽤 유명하지 않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소네드는 무언가 걸린 듯 말끝을 흐렸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가문이… 엘프들과 그렇게 사이가 좋은 건 아니지 않나."

사이좋은 정도가 아니지.

만약 실수로라도 그들의 영토에 발을 들였다가는 곧바로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신수의 숲에 미리 찾아갈 수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지.'

인간족과의 대외적 관계를 위해서 더는 건드리지 않을 뿐, 관계는 최악에 가까웠다. 가문의 몰락도 그것과 상당 부분 관련되어 있으니.

"예, 그렇지요."

소네드도 그 정도 사정은 미리 조사한 듯 알렌의 대답에 수긍했다.

"그래서 상단주와 개인적으로 만나 찻잎을 구하려고 했네. 왜, 다른 목적이 있어 보였나?"

알렌의 말이 정답이건 아니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소네드는 이 대답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소네드는 더 이상의 의심을 지우고는, 곧바로 호의적인 미소를 지었다.

"하하, 설마 공자님을 의심하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저를 찾으셨나 궁금했을 뿐이지요. 찻잎은 떠나실 때 충분히 챙겨 드리겠습니다."

"그건 고맙게 받지."

알렌은 드물게 깊은 미소를 지었다.

찻잎을 구하러 왔다는 건 변명에 가까웠지만, 아버지와 티타임을 가지며 맛본 그 풍미를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알렌은 옅게 웃는 얼굴로 카릭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릭 상단주는 무슨 고민이 있기에 조용히 있나?"

"예?"

카릭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소네드로 향했다 돌아왔다. 그 시간은 극히 짧았지만, 알렌의 눈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이렇게 두 명이 함께 자리할 만한 이유라…. 기대한 게 맞다면 좋을 텐데.'

본래 소네드만을 원했는데, 카릭의 모습을 보니 그도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렌의 입장에서는 한 명의 상인보다 두 명의 상인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안전했다.

소네드의 인성은 믿을 만했지만, 그 한 명에게 상단에 관한 일을 모두 맡겼다가는 자칫해서 경제적 종속이 일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카릭은 알렌이 떠난 후 소네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목소리를 낮춘 채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던 그의 모습도.

'…설마 엘리자 님이 루피너스 가문 출신일 줄이야.'

전전대 대륙 8강을 배출해 낸 가문.

동부 협곡 지대의 주인이자, 가문의 혈족을 극히 아낀다는 별종들.

소네드 자신도 연이 있는 엘프가 흘리듯 이야기한 것을 기억해 두고 있는 것이라며, 절대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고 했다.

'이렇게 반강제적으로 선택하게 될 줄이야.'

원래 알렌 공자님의 줄을 잡고자 하긴 했다.

그러나 완전히 그의 아래로 들어가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낌새가 이상해 보였을 때 그냥 피하는 거였는데.'

카릭은 그가 입을 열었을 때 곧장 떠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는 백작령에 상행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엘리자 님의 출신에 관해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말은 그녀가 루피너스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감당하지 못할 비밀은 유대감을 키워 주는 것이 아닌 그를 묶는 족쇄밖에 되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소네드의 입장에서는 혼자 알렌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이득일 텐데.

굳이 알 필요도 없는 비밀까지 알려줘 가며 그를 끌어들이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알렌 공자님에게 은혜와 호의를 가지고 있다지만, 그것이 상인의 정체성까지 부정하면서 행동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였다면 알았을까.'

카릭은 고개를 저었다.

선택의 시간은 다가왔고, 인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카릭은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자님."

"그래."

알렌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공자님이 마녀를 토벌하러 가신 후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소네드의 눈 깊은 곳이 반짝이며 알렌을 응시했다.

"망설임 없이 에릭 님을 구하는 모습에서 공자님의 인품을 보았고, 저주받은 자들을 지체 없이 지원하는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알렌은 전처럼 그의 장황한 칭송을 끊지 않았다.

"그리고 수확제에서 본 공자님의 신실하신 모습과 끝내 마녀를 토벌하신 그 무력에 찬사를 표합니다. 그러니…."

카릭은 며칠 동안 끊임없이 고민하며 내린 결론을 공자님께 내비쳤다.

"공자님과 더 좋은 관계를 가지고 싶습니다."

"관계?"

"예."

알렌은 가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저희 상단은 크지 않지만, 다양한 물품을 취급하며 점점 영향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니…."

카릭은 결심이 선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희 상단은 공자님과 같은 미래를 향하고 싶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자님."

소네드는 카릭의 선언에 물 흐르듯이 편승해서 고개를 숙였다.

'이것으로 공자님께 도움이 되었겠지.'

카릭을 끌어들인 것에 다른 목적이 없었다고 할 수 없었지만, 소네드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의 기반에는 알렌을 향한 은혜와 호의에 있었다.

알렌의 밑에 상인이 한 명이 아닌 두 명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경쟁할 수밖에 없을 테니, 알렌에게는 더욱 좋은 상황이리라.

'독점을 막을 수 있으니.'

소네드의 그런 성격은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엘프조차도 연을 맺으며 거래를 틀 수 있게 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공자님 덕분에 저희 상단의 명성을 높일 수 있었고, 많은 이득을 얻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저도 공자님과 미래를 '함께'해 보고자 합니다."

알렌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상인에게서 진실한 충성을 받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 말은.

"그래, 내게 상단의 미래를 모두 '걸다니', 힘든 결정이었을 텐데.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지."

그의 휘하로 사실상 종속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알렌의 말이 교묘하게 바뀌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하겠다는 듯 소네드는 따로 첨언 하지 않았다. 그저 온화하게 미소 지을 뿐.

"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함께해서 영광입니다."

아칸더스와 소네드 그리고 카릭까지.

'드디어 다 모았군.'

미래를 헤쳐 나가기 위한 기초적인 조각이 다 모였다.

* * *

알렌은 그들에게 미리 생각했던 명령을 내렸다.

"소네드, 자네는 마법서 하나를 계속해서 수소문해 주게."

"마법 서적… 말씀이십니까?"

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넬리아를 통해 악마 계약서가 이곳에 없음을 알아낸 상태였다.

"계약 계통 마법의 서적이고, 표지는 붉은색이네."

"붉은색에, 계약 계통 마법서라…, 알겠습니다."

소네드는 비교적 자세한 알렌의 조건에 의아했지만, 따로 반문하지 않았다.

그저 공자님께서 그의 능력을 시험하는구나 짐작했을 뿐.

"그리고 앞으로 영지에서 본 적이 없는 상단이나 마차의 행렬을 본다면 보고해 주게."

"본 적 없는 상단 말씀이십니까?"

카릭의 의아한 얼굴에 알렌은 단호하게 답했다.

"그래."

이 생각은 아버지와 티타임을 가졌을 당시부터 담아 두었던 의문이었다.

'가문의 자금은 어디로 흐르는가.'

실행할 인력과 상황 모두가 부족했기에 묻어 두었을 뿐이지.

몰락해 간다는 소문에도 실체를 살펴보면 막상 자금이 부족한 곳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버지께서 고급스러운 찻잎을 구한 것처럼 사치도 가능하며, 사용인들의 주급도 밀리지 않고 지급된다.

알렌은 그런 비정상적인 자금의 흐름이 어디서 왔는지 추적해 볼 생각이었다.

'잘하면 아버지의 주위에 있는 놈들의 연결 고리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아칸더스의 아버지와도 관련된 일이니 그도 순순히 협조할 것이다.

"최근 영지에서 불법적인 경로를 통한 암거래가 있음을 눈치챈 상태다. 병사들로는 잡기 쉽지 않지만, 그대들이라면 다르겠지."

그러나 이 일은 급하게 진행할 생각은 없었다.

전생에서도 발각된 적 없는 이들인데, 쉽게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여러 상인과 연이 있지 않나. 그러니 영지에서 처음 보는 상단 혹은, 대규모의 짐마차 행렬을 발견한다면 보고해 주게."

그들은 영지를 생각하는 알렌의 말에 이해했다는 얼굴을 했다.

"마지막으로는…,"

알렌은 잠시 창문 밖을 바라봤다.

가을이 끝을 맞이함에 따라 앙상한 나무의 결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새로운 연도까지 얼마 남지 않았구나.'

"준비가 끝난다면 내년 1월에 엘 라운드에 오도록. 소개해 줄 사람이 있으니."

아칸더스와 얼굴을 자주 보게 될 테니 안면을 터 주면 좋을 것이다. 앞으로도 자주 만나게 될 테니까.

"늦지 않게 도착하도록 하겠습니다."

"약초의 잔금도 그때 치르도록 하지."

산에서 얻은 영약 중 별 효과 없는 것을 처리한다면 값을 치르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믿겠습니다."

"그럼 이제 일어나…, 아. 그래. 소네드."

알렌이 몸을 일으키던 중 멈칫하자, 소네드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 혹시 전에 말했던 보상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과는 별개의 이야기일세."

"그러시다면?"

"자네가 나와 함께한다는 사실은 대외적으로 알리지 말도록 하게."

소네드가 눈을 끔뻑거리자, 알렌이 한마디 더 추가했다.

"엘프."

"아!"

그의 진의를 깨닫자 소네드는 새삼스럽게 그의 세심한 통찰력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과의 관계는 대외적으로 찻잎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해 두겠습니다."

"알아서 하게."

알렌은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나 농담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럼 나는 자네가 자랑한 보고나 둘러보지."

알렌이 기억하는 것만큼 쓸모 있는 물건을 얻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으니.'

소네드는 먼저 응접실의 문을 나서며 말했다.

"안내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제49화

-알렌 공자님! 감사합니다!

-저주의 해방자! 위치 슬레이어!!

-와아아아아아아!!!

알렌 일행은 마차를 향해 떨어지는 무수한 꽃의 세례를 받으며, 베르겐을 떠날 수 있었다.

이제 겨울이 오는데도 어디서 그리 많은 꽃을 구했는지. 꽃바람이 마차를 감싸는 광경에, 순간적으로 봄을 맞이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를 배웅하는 사람들의 중앙에는 소네드와 카릭이 작전이 성공했다는 듯 서로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피식-

알렌은 그 호화스러운 마중을 기분 좋게 받으며 베르겐의 정문을 나섰다.

카릭은 이번 연도까지 도시에 머무르겠다고 했기에 돌아가는 인원은 한 명이 줄어들어 있었다.

그 대신 그 자리에는 소네드에게 한가득 받은 찻잎이 보관된 함이 마차의 구석에 자리했다.

"헤헤-."

기분 좋다는 듯 헤실거리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린벨이 새까만 검집에 꽂힌 검을 안은 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렇게 좋더냐?"

"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이게 있으면 더는 짐이 아니게 될 수 있으니까요!"

알렌은 그녀의 품 안에 있는 아무런 장식도 없이 검게 칠해진 장검을 바라봤다.

티끌 하나 없이 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순흑'.

'소유자가 지정한 재능을 빠르게 개화시켜 준다는 검이라….'

다이크 상단은 알렌이 기억하던 거대 상단으로 성장하기 전이었기에 진귀한 물건을 따로 보관하고 있다는 말에도 별다른 기대를 가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검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런 효과를 가지고 있다면, 왕도의 경매에서도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는 물건일 테니.'

그러나 자세히 설명을 들어 보자 왜 아직까지 보고에 박혀 있었던 건지 알 수 있었다.

이 물건을 사용하기 위한 조건이 난해했으니까.

첫 번째는 소유자가 지정한 재능이 정말로 소유자가 가지고 '있는' 재능일 것.

애초에 검으로 개화시킬 수 있는 재능이라고 해 봤자 얼마나 되겠는가.

마력, 프라나, 검술, 무투술을 비롯한 전투 계열에 치중되어 있을 테지.

그러나 소유자가 '검술'에 대한 재능을 지정했는데, 그에 대한 재능이 없다?

그렇다면 소유자는 재능이 개화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시간만 낭비해야 한다.

백날 검을 휘두르며 연습을 한다고 한들, 정말 재능이 없다면 아무런 성장도 하지 못한다는 것.

그 때문에 자신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을까 싶어 구매해 간 사람들도, 몇 주가 지나자 환불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재능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

두 번째 조건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재능을 개화하기 위해서는 소유자가 지정한 재능에 많은 시간을 바쳐야 했다.

한 마디로 자는 시간도 아끼며 노력해야 한다는 것.

아이러니한 점은 아무리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도 밤낮으로 노력한다면 실력이 향상된다. 재능이 있다면 더더욱 빠르게 성장하겠지.

그러니 검의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재능의 유무나 그 총량에 관한 기준점도 애매모호 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겠지.

이런 이유 때문에 발굴했을 때만 해도 많은 관심을 받던 검은, 여러 경로를 거쳐 다이크 상단에까지 흘러들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알렌이 이 검을 고를 때만 해도 소네드는 난색을 보이며 다른 물건을 권했다.

하지만 알렌은 완고하게 이 검을 고집했다.

왜냐하면,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걸로 린벨을 확실하게 성장시킬 수 있다.'

린벨의 전력을 끌어 올릴 수 있다는 확신이.

알렌은 그녀가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았고, 그녀가 안 보이는 곳에서 얼마만큼의 노력을 하는지 알았다.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검을 골랐다.

소네드는 알렌이 선택을 바꾸지 않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들였다.

'최근에는 너무 무리하는 것 같은데….'

알렌은 잠시 고민하는 얼굴로 린벨을 바라봤다. 그녀는 집착 어린 눈으로 연신 검집을 쓰다듬으며 한시도 놓지 않았다.

"불편하지 않느냐. 검을 내려놓아도 괜찮다만."

"아니에요, 공자님. 절대, 절대 안 놓을 거예요."

"잠시라도 내려…."

"제가, 제가 좋아서 이러는 거예요. 공자님… 제발, 부탁드려요."

그녀는 다급히 검을 품속에 가두며 소리쳤다. 불안한 듯 흔들리는 눈과 겁에 질린 듯 급변한 표정.

'내가 너무 많은 부담감을 줬나.'

알렌의 눈에 잠시 후회가 감돌다가 사라졌다. 그는 잠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과거에 꽃피웠던 그녀의 실력을 보고서 너무 과한 기대를 주고 말았다.

'같은 사람일 리가 없는데.'

죽었던 모친이 살았다.

맹목적이었던 복수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프라나를 사용함에 있어 감정은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그녀의 성장동력이었던 것이 없어졌으니 이번에도 같은 결과를 맞이하리라 생각해서는 안 됐었는데.

'그 와중에 이넬리아에게는 따로 일을 시켰으니.

알렌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그녀가 무슨 감정을 느꼈을지 알 수 없었다.

그가 괜찮을 거라며 신경 쓰지 않는 사이 그녀는 상태가 위험하게 변하고 말았다.

알렌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아니, 네가 편하다면 그렇게 하거라."

"네, 네! 감사합니다."

린벨은 다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내 탓이군.'

이넬리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알렌은 그녀의 어두운 얼굴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이번 신수의 숲이 기회가 된다면 좋을 텐데.'

그녀의 존재는 알렌이 미래를 바꿀 수 있으리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니 포기할 수 없었다.

늦가을을 지나는 길을 따라 나뭇잎이 부서져 바스락거렸고, 엘 라운드로 향하는 마차가 하얀 뭉게구름을 따라 빠르게 이동했다.

다시 율리우스를 만날 시간이 머지않았다.

* * *

알렌은 저택을 나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하게 도시로 들어왔다.

베르겐에서의 업적이 아직 엘 라운드까지 퍼져 나가지 않았기에 알렌이 도시로 들어왔음에도 소란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알렌은 마차를 타면서 작성해 놓았던 보고서를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잠시 개인적인 볼일로 베르겐에 들렀고, 그곳에서 저주가 횡횡하는 것을 확인하고 마녀를 토벌했다?"

베르겐에서 일어났던 일을 읽은 가이엘이 헛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사실이냐?"

"예."

몇 주 만에 다시 만난 아버지는 전에 봤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딱딱하고, 차가운 분위기.

마녀를 토벌했다는 소식에 걱정 한마디를 건네는 대신, 진실인지 진위를 먼저 확인하는 남자.

그것이 라인하르트 가문의 가주이자 그의 아버지였다.

"마녀가 다시 출몰해서 저주를 퍼트렸다니…. 네가 완전히 토벌했다고 하니 그건 의심하지 않으마. 그런데…."

가이엘은 유리알 같은 눈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왜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지? 그만한 사태였다면 혼자 행동할 필요는 없을 텐데…."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훤히 내다보이는 의심에 알렌은 준비해 두었던 답을 읊조렸다.

"이미 많은 영지민이 저주에 걸렸고, 시간을 늦출수록 위험하다고 판단했기에 먼저 행동했습니다."

"그것뿐이냐?"

"영지민의 안전과 목숨보다 더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알렌의 정론에 가이엘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원을 요청하는 사이에 저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을 것처럼 보였기에 행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부차적인 설명에도 말없이 알렌을 주시하던 가이엘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해서 미안하구나. 수고했다. 피곤할 텐데 이제 들어가 보거라."

"네, 들어가 보겠습니다."

알렌은 작게 그에게 묵례하고는 걸음을 돌렸다.

-철컥

그렇게 집무실의 문을 반쯤 여는 순간, 가이엘이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렌."

알렌이 멈칫하자, 그는 지나가듯이 물음을 던졌다.

"베르겐에 갔었던 이유가 무엇이냐? 그에 대한 건 듣지 못했구나."

겨우 그건가.

알렌은 그의 물음에 맞춰 나지막이 답했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엘프 차의 풍미를 잊을 수 없어서 말입니다. 그 찻잎을 구하기 위해 베르겐으로 향했습니다."

"그래? 마침 나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죄송합니다."

알렌은 단호하게 답하며 문을 완전히 열었다.

"저도 소량의 양밖에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뒤에서 작게 탄식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참 안타깝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버지.

정말로.

아버지와의 만남을 가진 뒤 알렌은 곧바로 엘리자에게 끌려갔다.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구나, 알렌. 응? 뭐 잊은 건 없니?"

그녀가 서운하다는 듯 삐진 얼굴로 알렌을 비난했다.

"서운하구나, 알렌. 어머니와의 약속은 약속도 아니니?"

"어머니,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

"정말 잠깐의 시간도 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니?"

그녀가 다 알고 있다는 듯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자, 알렌은 얌전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죄송합니다."

아칸더스의 일을 끝마치고 수련, 소네드와 마녀 토벌까지.

여러 가지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느라 솔직하게 말해서 그녀와의 약속을 챙기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앞으로는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뭐…, 그러지 않을게 보이지만… 솔직히 인정했으니 용서해 줄게."

알렌은 조용히 침묵으로 답했다.

엘리자는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구나. 마녀를 토벌했다는데, 위험하지는 않았니?"

"별다른 일 없이 끝났습니다."

"그래도 조심하도록 해. 이번에는 솔직히 무모했잖니."

알렌은 마녀의 전력을 맞이하고도 이겨 낼 확신이 있었기에 행동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걱정 어린 눈동자에 나오려던 말이 다시 목구멍에 걸려 들어갔다.

"…다음부터 유의하겠습니다."

"안 한다고는 말하지 않는구나."

한숨을 푹 내쉰 그녀의 모습에 알렌은 이넬리아에게 손짓했다.

원래는 조금 있다가 드리려고 했지만, 가만히 있다가는 언제까지 걱정을 들을지 몰랐다.

알렌의 뒤에서 오랜만에 만난 시녀장에게 눈인사를 건네던 이넬리아는, 알렌의 신호에 슬쩍 준비해 온 물건을 테이블 위로 올려 두었다.

"이건 뭐니?"

"상단에서 구한 찻잎입니다."

"찻잎은 나도 충분하니 마음만 받겠-"

알렌은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드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엘프가 직접 재배한 찻잎입니다."

"-지만 아들이 가져온 물건인데 거절할 수 없지. 선물은 고맙게 받도록 할게. 라우라."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를 가진 시녀장은 새삼스럽지도 않은지 쓴웃음을 지으며 찻잎이 든 상자를 챙겼다.

"그럼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벌써? 음…, 그래.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 많이 피곤하겠구나. 얼른 들어가서 쉬도록 하렴."

"알겠습니다."

알렌은 기쁜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저벅

그렇게 야외 테라스를 빠져나가던 때, 그의 귓가로 그녀의 목소리가 닿았다.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위험한 일은 하지 말렴."

-멈칫

"알렌, 나는 잃는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하단다."

알렌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녀도 그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듯, 다시 웃는 얼굴로 라우라와 함께 티타임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순간 느껴졌던 그녀의 한마디에 담긴 감정은.

'…어머니.'

지독히도 질척하고 깊은 늪처럼 어두웠다.

감히 짐작하지 못할 만큼.

* * *

알렌은 도착한 직후부터 율리우스의 소식을 기다리며 조용히 지냈다.

엘리자도 그날의 대화 이후로 그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알렌은 저택의 일상을 반복하며 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남은 계획을 점검하며, 카릭과 소네드에게 은밀한 명령을 전했다.

베스틀라에게 드디어 완성했다는 비기에 관해서 배우고, 신수의 숲에 대해 조사했다.

그리하여 사흘이 지났을 때.

"알렌 형님!"

율리우스가 도착했다.

"율리우스."

"형님,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그런데 저건…."

알렌은 그에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뒤를 가리키자, 율리우스는 애써 아무것도 아니라는 얼굴로 답했다.

"왕도에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건 그 덕분에 얻은 것들이죠."

저택의 정문에서는 도시의 성문에서부터 줄줄이 들어온 수십 대의 짐마차에서 꺼내는 물건들로 인해 북새통을 이루었다.

알렌은 직접 보지 않았어도, 무슨 일이 있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3황녀와 아이린 영애의 선물 그리고 경매장과 암시장을 통해 얻은 것들인가.'

검은 책을 통해 봤을 때는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았지만, 실제로 보니 어마어마했다.

'전생에는 방에 박혀 있었을 시점이니.'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끝없이 쏟아지는 선물의 향연에 하인들은 너도나도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율리우스 공자님, 역시…."

"엄청나시군. 왕도에서 저만한 것들을 얻으시다니…."

"역시 율리우스 님이시구나."

하인과 하녀들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율리우스의 모습에 완전히 안심한 것 같았다.

'…쯧.'

알렌은 조금의 표정 변화 없이 율리우스를 바라봤다.

"형님께서는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상상도 못 할 겁니다."

"하하, 그것참 흥미롭구나. 바로 듣고 싶긴 하지만… 아직 여독이 쌓였을 테니, 내일 듣도록 하자."

알렌의 배려에 율리우스는 친근하게 웃으며 답했다.

"저는 괜찮지만…, 형님이 안 된다고 하시니 예, 그럼 내일 이야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몸이 우선이니 여독을 잘 풀거라."

그 몸은 내 동생의 것이니.

"혹여라도 감기에 걸리면 손해가 아니더냐."

"하핫, 알겠습니다. 형님. 쉬겠습니다. 쉬면 되지 않습니까."

율리우스는 하인들에게 남은 짐 정리를 맡겨 두고, 레이나와 함께 저택으로 사라졌다.

알렌은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몸을 돌렸다.

'내일 이야기해 준다라…, 그럴 시간이 있을까.'

알렌은 냉소를 삼키고, 린벨과 이넬리아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아직 그는, 율리우스의 친근한 형이자 정의로운 사람으로 남아야 했다.

다행히 알렌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다음날, 오랜만에 모든 가족이 모여 식사 시간을 가지던 중 하인 한 명이 급한 얼굴로 식당의 문을 열어젖혔다.

쾅!

"가주님! 가주님!"

율리우스는 신나게 이야기를 늘어놓다 방해받아 기분이 나쁜지 곧장 소리쳤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야! 식사 도중에 방해를…."

그러나 얼굴이 하얗게 변한 하인은 그의 말을 들을 새도 없이 크게 외쳤다.

"엘프! 엘프 한 명이…."

그런 그의 태도를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처참한 상태로 저택에 도착했습니다!"

그의 말은 그의 무례 따위를 가볍게 무시할 만큼 중대한 사항이었으니까.

하인의 말에 가이엘과 엘리자는 안색이 변해 자리에서 급히 일어섰다.

"뭐라고?"

"…엘프?"

율리우스는 아직 하인이 한 말의 뜻을 파악하지 못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 사이에서.

'…드디어 왔구나.'

알렌만이 홀로 올 것이 왔다는 듯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전생에서 율리우스의 명성을 크게 높인 사건이자, 백작령의 재앙으로 불릴 뻔했던 사건이 시작되었다.

제50화

라인하르트 가문.

리브레 왕국 서부 지역에 있는 가문이며, 수십 대를 이어져 내려와 나름대로 큰 영향을 미치는 명문가라고 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지금은 아니다.

가문은 3대 전부터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영지로 향하는 상인의 수가 줄어들었고, 주변 귀족들과 교류가 뜸해졌다. 시종과 시녀로 지원하는 귀족이 거의 사라졌으며, 저택에 머무르던 식객이 어느 순간 없어졌다.

라인하르트 가문은 현재,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말라 죽어 간다는 말이 정확하겠지.'

비약적으로 말해서 이대로 몇 대를 더 내려간다면,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내려 이름밖에 남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악재가 겹친 것에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3대 전 가문에서 시행한 실험과 관계되어 있었다.

'신목을 이용하기 위한 실험.'

신목은 특별한 나무다.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주위 식물을 건강하게 생육시키며, 괴물들이 침입하지 못하는 일종의 안전지대를 형성한다.

엘프들은 신목과 소통해 주위에 있는 숲을 가꾸며 엄청난 양의 식량을 생산해 냈고, 그것을 바탕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라인하르트 영지는 미켈란트 산맥을 이웃 삼아 대수림과 가까이에 있었기에 그 모습을 모두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어리석은 선택을 했지.'

엘프들만 신목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은 거짓말이 아닐까.

자신들도 신목을 이용하면 저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모두 신목을 독점하기 위한 속임수가 아닐까.

수십 대를 걸쳐 쌓아 온 의문과 욕망은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섰고, 계획을 세운 즉시 제일 가까이에 있는 신목을 훔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신목을 타락시키려고 했다.

자신도 있었을 것이다.

수백 년에 걸쳐서 엘프를 관찰해 왔고, 또 비밀리에 연구한 결과가 있었으니 충분하다고 생각했겠지.

실험에 성공한다면 엘프들의 식량에 많은 의존을 하는 당금의 현상을 타파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눈앞에 성공이 들어오는데 그까짓 세간의 비난이 문제일까.

실제로도 라인하르트 가문은 신목을 조종하는 것에 성공했다면, 단숨에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엘프들의 항의나 위협도 마찬가지.

실험이 성공했다면 그 이득을 공유할 리브레 왕국에서 직접 막아 줄 것이 뻔했으니까.

엘프들도 인간들과 종족의 명운을 걸고 전쟁을 하지는 못할 테니 선조들의 예측은 꽤나 정확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 실험에 '성공'했다면.'

실험은 실패했다.

이러한 욕심에서 시작된 연구가 무사히 성공할 리가 있나.

같이 연구에 참여했던 마법사와 가주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실험 도중 사고로 몰살당했고, 신목은 후에 도착한 엘프들에 의해 회수당했다.

신목의 강탈과 실험을 계획한 주동자들이 모두 죽었기에, 엘프들은 굳이 인간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보복을 결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왕도를 비롯한 주위 귀족들은 가문에게서 등을 돌린 후였다.

그 이후로 가문의 가세가 점차 기울기 시작했다.

분명히 이것만이 아닌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숨기고 있으니.'

그것도 언젠가 밝혀낼 수 있겠지.

하지만 이 사건이 몰락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가문에서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어찌 보면 꽤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문제의 엘프는 '지원 요청'만을 남긴 채 기절한 상태다. 상태가 위급하니 의식을 회복하려면 못해도 일주일은 필요하겠지."

다른 가문이었으면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일 만한 일은 아니었을 텐데.

"너희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보느냐."

라인하르트 가문이었기에.

엘프가 도착했다는 소식 하나만으로 긴급히 자리를 옮길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가이엘의 진중한 눈빛이 알렌과 율리우스를 향했다.

현재 알렌은 저택의 회의실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그들의 주위로는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기사단장이 눈을 감고 있었고, 총집사 가델이 고개를 숙인 채 자리를 지켰다.

다른 가신들을 소집하기는 상황이 급박했기에 적은 인원으로 회의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알렌은 유심히 가이엘의 표정을 살폈다.

'미리 알고 있던 상황은 아니라는 건가.'

아버지의 방금 전 반응과 지금의 태도로 봤을 때 이번 일은 그도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버지 근처의 놈들도 모든 걸 아는 것은 아니라는 건가?'

아니, 아버지에게만 입을 다물었을 수도 있겠지. 중요한 정보는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가치를 발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런 사태를 가지고 미리 협조를 구하지 않았다고?'

미리 말을 맞춰 뒀다면 더 상황을 쉽게 풀어 나갈 텐데?

알렌은 그들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했기에 그들이 얼마나 거대한지, 어느 정도의 세력을 가졌는지 알 수 없어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그렇더라도.

'내가 상황을 이끌어 나가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몇 달 전, 검은 책에서 읽었던 신수의 능력을 읽었을 때부터 계획한 일이다.

저들에 대한 정보를 현재 알 수 없다고 해서, 미리 세워 둔 계획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알렌은 멍하니 허공을 아니, 퀘스트를 읽고 있는 율리우스보다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

"아버지, 우선 저희는 저들이 말하는 지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전에는 율리우스의 강력한 주장으로 일이 진행됐지만….' 이번에는 '알렌 라인하르트'가 먼저 발의하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지리라.

가이엘의 시선이 알렌을 향했다.

"그것이 어쨌다는 것이냐."

"그렇기에."

알렌은 뇌리로 그가 움직일 결심을 하게 만들던, 그가 계획을 세우게 했던 몇 줄의 문장을 떠올렸다.

『──어린 신수의 숲에는 소원을 들어주는 신수가 살고 있다.』

『──원하는 바람을 이뤄 주는, 찾아온 자에게 기회를 주는 신수가.』

『──그에 합당한 시련과 함께.』

'율리우스 놈이 히든 보스라고 칭하던 신수를.' 그 신수의 능력이 필요했다.

"이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기에 알렌은 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었다.

동생의 행방을 찾아낼 수 있다는 희망과 더불어 단서조차 없는 그의 종적을 추적할 수 있다.

그것과 더해.

"이번 사건은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율리우스 놈이 했던 일을 가로채 놈이 영향력을 넓히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회귀 전에 율리우스는 뭐라 했었지?'

그들을 먼저 도우면 엘프들이 은혜를 갚을 거라고 했던가?

결국, 놈이 하던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그는 웃음이 나왔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알렌의 확신 어린 답에 가이엘은 즉각적인 답을 내놓기보다는 알렌의 의중을 되물었다.

"엘프가 지원을 요청한 장소는 영지의 끝, 영토에 포함되어 있다기보다는 중립 지대에 가깝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받아들인다고?"

"예."

가이엘은 이상하다는 얼굴로 알렌을 응시했다. 원래 이런 허황된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을 텐데?

알렌은 그의 반응에 쓰게 웃었다.

'예전이었다면.'

회귀하지도 않고, 율리우스도 몸을 빼앗기지 않았을 시절의 그라면,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생각할 필요도 없이 거절했겠지.

이미 엘프와의 관계는 틀어졌으니, 쓸데없는 지원을 하기보다는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는 것을 택했을 것이다.

그것이 신중하고, 또 합리적인 선택이니까.

하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지원을 하는 겁니다."

지금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라."

기사단장은 어떤 말이든 따르겠다는 듯 침묵을 지켰고, 가델의 주름진 눈가 사이로 날카로운 시선이 알렌에게 향했다.

"이 말은 반대로 말하자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도 엘프들을 지원한다는 말이 되지요."

"그런 말장난이 의미가 있느냐?"

가이엘의 말이 맞았다.

그저 말장난, 어떻게 포장하든 이 일에 내포된 위험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면, 어떤 위험이 존재하는지 알고 있다면….

'승산이 확실한 도박이 된다.'

알렌은 가이엘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것이?"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를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엘프들이 저희를 다시 보기에는 충분한 일이 될 겁니다."

엘프들도 그들이 가문의 선조와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기에 불분명한 요청에도 위협을 감안하고 지원한 결정에 호감을 품은 엘프도 생겨날 것이다.

그럴듯하고, 몽상에 젖은 이야기다.

그야말로 현실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소리.

저 엘프의 신원조차 확실히 알 수 있나? 만약 지원을 했더라도 그 개인의 지원 요청이라면? 막상 지원을 갔는데 문전박대를 당하면 어쩌려고?

'그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또, 불확실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래를 안다면.

그곳에서 진짜 동생의 행방을 알아낼 희망이 존재한다면.

'나는.'

망설일 이유 따위는 없다.

알렌은 가이엘의 시선을 당당하게 마주 봤다.

"이번 일이 파급은 상당히 클 겁니다. 무려, 저희 가문을 혐오한다고 할 수 있는 엘프가 직접 지원을 요청했으니 말입니다."

지원 요청까지 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든, 대수림에서 병력을 끌어오는 데 시간이 걸리든.

그들이 현재 사이가 최악에 가까운 라인하르트 가문이라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이었으니.

그런데 가문에서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들의 위험에 나선다?

"이번 일은 엘프들에게 관계의 회복을 알리는 단초이자, 그들과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가이엘은 말없이 알렌의 주장을 경청했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데 무작정 병력을 지원한다. 이건 분명히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적인 강한지, 수는 몇 명인지, 무슨 상황인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 어느 것도 알지 못하는데, 무엇을 믿고 병력을 지원하나.

하지만, 가이엘은 영 신통치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엘프와의 관계를 개선할 '여지'만을 얻기 위해서, 멋모를 위험에 발을 들일만 한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느냐?"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가델도 기사단장도 알렌의 주장을 다소 꿈에 젖은, 허황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특히, 저희와 엘프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약화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알렌은 잠시 말을 끊었다.

'이 뒤에 근거를 뒷받침할 사실이 없다면, 억지를 써서 출정한 놈과 다를 바가 없겠지.'

하지만.

"만약, 어느 정도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다면 어쩌겠습니까."

알렌은 율리우스처럼 억지로 일을 밀어붙일 만큼 허술하지 않았다.

"적이 누군지 안다면, 어떤 상황인지 파악할 수 있다면."

알렌은 넋을 놓은 율리우스의 표정을 음미하며 시원하게 웃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51화

"네가 그걸 안다는 말이냐?"

알렌이 당당한 어조로 말하자, 내부에 자리한 모든 이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알렌은 지체할 필요 없이 곧바로 답했다.

"지금의 사건은 흑마법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느냐. 아니, 잠깐…."

가이엘의 무기질적인 눈에 이채가 깃들었다. 말없이 눈을 뜬 기사단장도, 인자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는 가델도.

그 모두에게서 갖가지 감정이 흘러나왔다.

기대, 의심, 놀람.

이 상황은, 확실하게 그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예, 일전에 베르겐에 갔을 때 상인에게서 우연히 듣게 되었지요."

실제로 소네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겠지만, 아니 안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그럴듯하게 보이기만 하면 되니.

"그가 말하기를 신수의 숲 근처에서 전부터 흑마법사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그대로 읊는다.

"그로 인해 신수의 숲에 경계가 크게 삼엄해졌다고 했죠."

"아니, 잠시… 그래. 다이크 상단이라고 했나? 그 상단주가 엘프와 연이 닿아있다는 건 유명하니…."

잠시 생각을 해 보던 그는 알렌의 말이 일리가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여기서부터는 제 생각입니다만…, 아마도 엘프들이 처음부터 저희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겠지. 사이가 나쁘다는 사실은 영지의 꼬마들도 아는 사실이니."

"그리고 만약 엘프들에게서 온 정식 요청이었다면, 한 명만 오지 않았을 겁니다. 정식 사절단을 보냈겠지요."

"잠깐, 그 말은…."

가이엘이 알렌의 말에 천천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원을 요청한 엘프는 처음부터 혼자가, 아니었다…?"

"예, 그것이 아니라면 혼자서 빠져나오는 것도 힘들 만큼 봉쇄되었다는 말이 옳겠지요."

가델은 알렌의 통찰력에 엘리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여자의 아들이라는 건가.'

다친 엘프 한 명이 도착했다는 사실로 여기까지 추측해 내다니.

물론 다이크 상단의 정보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추측할 수 없었겠지만, 그 인맥을 가지고 있다는 점까지도 그 여자를 닮아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말이 되는군."

"분명 여기까지 제 추측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알렌은 눈을 감고 정령의 샘에서 느꼈던 정령 친화력의 느낌을 되살려 주변에 정령을 실체화시켰다.

-후웅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알록달록한 여러 색의 구체가 상시로 색을 뒤바꾸며 그의 주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정령, 이더냐?"

가이엘의 표정이 처음으로 깨졌다.

알렌은 그 모습을 내심 유쾌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예, 아직 계약을 하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네가 어떻게…."

그는 알렌의 재능을 잘 알고 있었다. 마나 감응력이나 친화력은 어떨지 몰라도, 정령에 대한 재능은 없었을 텐데….

"지난번 마법에 진전을 얻었을 당시, 약간의 몸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가이엘은 그의 설명에 납득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정령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기에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놀랍기는 하다만…, 그게 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

"저는 계약을 하지 않았지만, 이 정령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어느 정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알렌은 가이엘의 표정이 어떤지 살폈지만, 그는 언제 표정이 깨졌냐는 듯 다시 무감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수많은 흑마법사, 전투, 후퇴, 패퇴, 화재, 괴물 그리고… 타락하는 숲? 신수? 이건 제가 아직 미숙해 알아들을 수 없더군요."

알렌이 친화력으로 실체화시킨 정령을 다시 되돌리며, 가이엘과 눈을 마주쳤다.

"결론을 내리자면, 엘프들은 위험에 빠져 있음이 확실하며, 저희는 그 점을 이용해 엘프들과의 관계 회복의 중대한 전환점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동안 누구도 그의 말을 끊지 못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흑마법사가 영지 근처에 있다는 점만으로도 저희가 그들을 토벌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의 논리정연한 주장과 그를 뒷받침하는 근거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이곳에 없었기 때문이다.

"저희가 실질적으로 얻는 게 없더라고 하더라도 저희는 가야 합니다."

알렌은 이걸로 끝이라는 듯 마지막 이점을 입에 담았다.

"엘프들과의 영토 경계에 영향력을 다시 확보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외부에서 보기에 가문의 부흥의 시작을 알리는 효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뒤에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걸로 끝이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율리우스와 알렌이 미래에 세울 업적을 생각한다면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무려 세계를 구하는 일인데.'

알렌은 냉소하며, 미래의 '영웅'이 될 놈을 힐끔 바라봤다. 율리우스는 멍한 눈으로 알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 내부는 정적으로 변했다.

가이엘은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보는 듯 눈을 감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적이 누군지 알고, 이용할 수 있다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하지."

가이엘은 벌써 엘프들의 태도와 흑마법사 그리고 신수의 숲이라는 단서를 조합해 적의 전력을 예측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기사단의 반과 일반 병사 300명을 붙여 줄 테니, 알렌 네가 율리우스가 함께 지원을…."

"자, 잠깐!"

회의가 무난히 끝나려던 그때, 뒤늦게 율리우스가 소리쳤다.

가이엘의 의아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이렇게 끼어들 새도 없이 끝난다고?'

그럴 수 없었다.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퀘스트의 지시대로만 진행한다면 지금 이렇게 흘러가는 게 유리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들러리밖에 되지 않는다.

율리우스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선택받은 '주인공'이니까.

"이렇게 출정을 결정하신다는 말씀입니까? 더 반대를 하거나 하지 않고…?"

율리우스, 놈의 눈에는 당혹감이 깃들어 있었다.

'왜, 퀘스트에서 먼저 나서라고 하더냐?'

아니면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엘프들을 도우라고?

하지만, 이미 늦었다.

출정을 반대했던 아버지는 현재 알렌의 주장에 동의를 표했고, 기사단장과 가델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상황은 알렌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율리우스 너는 지원을 반대하느냐?"

가이엘은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알렌이 말하던 내내 침묵을 지키다 회의를 파하기 직전 끼어들다니.

'혹시, 그쪽과 연관이 있는 건….'

가이엘이 은밀하게 레이나와 눈을 마주치자, 그녀도 모르는 일이라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건 아닙니다. 그저, 위험할 것이 분명할 텐데 한 번 더 숙고해 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율리우스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미칠 것 같았다.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원하게 하라며?'

분명히 [퀘스트 창]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엘프들과 관계를 회복하고, 더 나아가서 타락하기 직전의 신수를 구하라고 하지 않았나?

율리우스도 원작에서 히든 보스라 불리는 그 신수와 접촉할 생각이 있었기에 얌전히 따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

왜 기껏 준비한 의견을 말해 볼 틈도 없이 일이 진행되는 건가.

"알렌의 주장을 듣지 않았느냐, 흑마법사가 신수의 숲에 출몰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적들이 어느 정도 전력인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가 엘프들의 지원을 주장할 필요도 없이 이미 회의는 아무런 막힘없이 진행되었고, 말 한마디 할 새도 없이 어느새 끝나기 직전이 되었다.

"신수의 숲의 중요도와 엘프들의 태도, 그리고 적이 흑마법사라는 것으로 좁혀졌다면 전력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지."

"그곳에 엘프들의 전력이 없지는 않을 테니, 힘을 합친다면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그의 질문이 논파되자, 율리우스는 억지로 질문을 쥐어짜 냈다.

"그렇더라도 만약에 예상을 뛰어넘는 강적이 있으리라 어찌 장담하십니까. 예를 들어서 이교도들이라도 끼어든다면…."

그렇게 나오겠다?

알렌은 어림도 없다는 듯 머뭇거리는 얼굴로 물었다.

"율리우스, …너는 형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

알렌이 담담하지만, 서운하다는 기색을 연기하자, 율리우스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형님의 정보는 신뢰합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가 그렇게 말을 하던 때,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기사단장이 굵은 저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희 기사단은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출정할 테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혹시 공자님은 저를 신뢰하지 못하십니까?"

"그건…."

그의 굳건하면서도 단단한 눈빛이 율리우스를 향했다.

"바질 기사단장은 서부 왕국 내에서도 흔치 않은 강자니 괜찮을 겁니다. 율리우스 공자님."

그의 뒤를 이어 적절하게 가델 총집사까지 입을 열자, 어떻게든 이의를 제기하려던 율리우스는 입가를 씰룩거리며 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제가 너무 과민했습니다."

이렇게 상황이 끝나자, 가이엘은 아까 못다 했던 말을 이어서 결론을 내렸다.

"지원을 하는 것으로 결정 났으니, 병사 300명과 기사단장을 포함한 기사단 절반의 인원이 알렌과 율리우스와 함께 출전하는 것으로 알겠다."

"알겠습니다."

"율리우스 너는, 다른 의견이 있느냐?"

알렌은 무언가 불만스러운 얼굴의 율리우스를 바라보며 비웃음을 삼켰다.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이엘은 짧게 읊조렸다.

"출전이다."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던 회의의 끝을 알리는 신호였다.

* * *

회의를 마친 그들은 즉시 출정할 준비를 했다.

알렌은 야외 훈련장에서 질서정연하게 준비하고 있는 병사들을 바라봤다.

그 사이로 기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장비를 점검했다.

그들을 본 알렌의 표정이 잠시 찌푸려졌다.

'…쯧.'

알렌은 그들이 율리우스의 이상성에 대해 침묵했을 때부터 그들에 대한 기대는 접어 두었다.

언젠가 그에 대한 심판을 받기를 바랄 뿐.

잠시간 실망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발견했다.

다른 기사들과 조금 떨어져 있는 장소.

"잘 생각해 봐. 내 밑으로 들어오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니까?"

"공자님, 저는 따로 누군가를 지지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니까? 나는 네가 여기사라서 차별받는…."

율리우스가 여기사 한 명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율리우스가 질척대고 있다는 말이 더 맞겠지.

알렌의 시선이 여기사에게 향했다. 단정한 외모와 짙은 흑발.

'카밀라 카터.'

린벨의 기초 교육을 시켜 준 기사이자, 가문에 속한 기사단의 여기사.

그리고.

'기사 중 유일한 평민 출신.'

그녀의 아버지는 저택의 마차를 모는 마부 중 한 명이다.

우연히 그녀의 재능을 눈여겨본 선대 기사단장의 눈에 들어 기사단에 들어오게 되었고, 그 덕분에….

'차별받고 있지.'

모욕을 받거나, 구타를 당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다른 기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전생에는 결국 율리우스의 부하가 됐었나?

'기억이 잘 안 나는군.'

어느 순간부터 그의 여정에서 그녀의 모습은 사라졌기에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렇게 사라진 율리우스의 부하는 무수히 많았기에.

"아니, 나 달라졌다니까? 요즘 내 평판이 어떤지 몰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알렌은 잠시 그녀를 영입할까 생각했다가 금방 그만두었다.

'지금은 아니야.'

그녀의 영입하기엔 역할이 한정되어 있고, 그녀를 휘하로 들이기엔 적절한 시기는 아직 멀다고 판단했다.

'아직 건들 필요가 없지.'

조금 더 숙성시켜야 했다.

벌써부터 알맞게 물들어 가기 시작하는 '그'처럼.

'…그녀도 기대한 대로 움직여 준다면 좋겠는데.'

알렌은 그들이 정해진 미래를 맞이하도록 건들지 않았다.

이용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30분의 시간이 더 지났을 때, 병사가 크게 외쳤다.

"공자님! 기사단 전원! 준비가 끝났습니다."

고개를 돌리니 기사단장도 어느새 준비를 끝마치고 말에 올라타 있었다.

"형님! 어서 오십시오!"

알렌은 선선히 웃으며 말에 올라탔다.

"늦어서 미안하군."

아직 한낮의 햇빛이 대지를 달구었고, 준비를 끝마친 병사들에게서 엄정한 군기가 느껴졌다.

기사단장이 크게 외쳤다.

"그럼, 출전이다!"

"출전이다!"

기사들이 복창하는 것을 끝으로 병력이 저택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구나.'

알렌의 눈이 산맥 저 너머의 신수의 숲에 향했다.

동생에 대한 단서를 얻을 시간이 왔다.

제52화

신수는 특별한 존재다.

근처 숲으로만 가도 보이는 괴물과도 다르며, 보이지 않는 정령과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

말 그대로 환상의 동물.

어떤 개념, 기적, 현실에 있을 수 없는 것들이 형상화된 것들이 신수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는 능력도 많이 있다.

보통은 비를 내리거나, 천둥을 일으키는 등 자연현상을 일으키지만…, 어린 신수가 가지고 있다는 능력은 달랐다.

『──시련과 보상.』

상대에게 넘기 힘든 시련을 내리고, 이겨 낸다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되는 능력.

『──율리우스는 하이넬이 원작에서 겪었던 사건을 떠올렸다. 잠시 그가 대수림으로 가야 할 일이 생겨 반쯤 망한 라인…』

사람마다 시련은 각각 달라지며, 정신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각자 시련이 다르기에 시간의 흐름도 현실과 다르며, 난이도 또한 제각각이다.

『──그는 원작의 주인공답게 시련을 통과하고 새로운 능력을 얻었다. 게임과 같은 편의주의적 능력 때문에 독자들은 신수를 히든 보스라고 불렀…』

탁-

알렌은 몇 번이나 읽었던 신수에 관한 내용을 되뇌며 검은 책을 덮었다.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능력.'

이러한 기적과도 같은 능력이 알렌이 신수의 숲에 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이유였다.

전생에서도, 현재에도 신수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은 조금도 돌지 않는다.

'분명히 숨기고 있다는 뜻이겠지.'

하긴,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퍼진다면 신수의 노릴 세력이 한둘이 아닐 테니 당연하기는 했다.

알렌은 산맥의 을씨년스러운 바람을 맞으며 말의 고삐를 단단히 붙잡았다.

"다들 조금만 참도록 하라! 곧 있으면 도착이다!"

"알겠습니다-!"

"모두 앞사람을 놓치지 말고!"

"예!!"

기사단장의 외침에 기사들이 크게 소리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향하는 장소는 당연히 어린 신수의 숲.

어린 신수의 숲은 엘 라운드의 서쪽, 미켈란트 산맥의 침엽수림대를 지나는 고갯길의 중간에 있었다.

엘프의 대수림과 가문의 영지와도 이어지는 곳.

법적으로는 가문의 영토라 우길 수 있지만, 도시와 멀고 지리적으로 애매하기 때문에 중립 지대에 가까운 장소였다.

일행은 엘프가 영지까지 이동한 시간을 고려하며 최대한 빠르게 이동했다.

그 덕분에 2주나 걸리는 시간을 5일 만에 주파할 수 있었지만…, 상당히 고된 강행군 탓일까 병사들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겨울의 혹독한 바람과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느껴지는 음산한 분위기는, 병사들이 한시도 긴장을 풀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빠르게 도착한다고 하더라도 전투에 무리가 있을 정도.

기사단장도 그걸 느낀 걸까 도착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즈음, 그가 크게 소리쳤다.

"다들 여기서 잠깐 휴식한다!"

"휴식한다! 다들 멈춰!"

그의 휴식 선언에 병사들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수통을 열었다. 그 와중에 최소한 경계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형님, 힘들지는 않으십니까."

알렌은 반사적으로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나보다는 병사들이 걱정이지. 그보다 너는 어떻느냐?"

실제로 틈틈이 린벨과 이넬리아가 그의 시중을 들었고, 말을 탔으니 별 어려움은 없었다. 병사들이 훨씬 고생이었겠지.

"저도 괜찮습니다."

"저택에 나올 때까지만 해도 표정이 좋지 않던데, 그건 괜찮고?"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율리우스가 말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건, 예. 괜찮습니다."

율리우스의 눈동자가 허공을 빠르게 훑었다가 알렌을 향했다.

'눈동자에 반사되는 건 없군.'

역시 물리적으로 볼 수는 없나.

알렌은 그 사실에 작은 아쉬움을 뒤로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다른 불편함은 없느냐? 이번에 승마 실력이 몰라보게 늘었던데, 언제 그렇게 연습했느냐."

"씻지 못해서 힘들기는 한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요. 그리고 승마는…."

율리우스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당당히 답했다.

"틈틈이 연습했습니다. 몸에 익은 기억이 있어서인지 실력이 빨리 늘었지 뭡니까."

알렌은 그의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스킬…, 이라고 했나?'

[시스템]이라는 것의 도움을 받은 것을 알아서 그런가, 율리우스의 근본 없는 떳떳함에 오히려 알렌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승마(C)]라는, 알렌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었지만 저것이 율리우스의 급격한 성장을 뒷받침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전생에도 얻었을 테니, 지금도 가지고 있겠지. 그나저나….'

알렌은 신수의 숲이 위치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표정을 찌푸렸다.

"율리우스 너는 저 방향에서 무언가 느껴지느냐?"

분명히 엘프 혼자 영지까지 처참한 몰골로 도착할 정도인데, 이 곳까지 도달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알고 있던 것과 다르다.'

일행은 신수의 숲으로 향하면서 간간이 언데드나 괴물의 방해를 받아야 '했다.'

그게 원래 이루어져야 할 일이었고, 율리우스가 겪었던 미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알렌도 수시로 정찰대의 보고를 확인하는 한편, 감지력을 뻗어 주위 일대를 살피며 긴장을 유지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습격은?

괴물의 방해는?

함정은 어디 있고, 흑마법사들은 뭘 하고 있지?

"…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형님."

율리우스는 알렌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했다. 알렌은 차오르는 답답함을 내색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거라. 우리가 이곳까지 오면서 무엇을 만난 적이 있더냐?"

"예? 아무것도 없… 잠깐, 왜 아무것도 만나지 않…."

의아한 얼굴을 하던 율리우스가 이제야 깨달았다는 얼굴로 입을 연 그때.

"그 자리에서 멈춰라!"

"인간 놈들!!"

"설마, 이 기회를 틈타 침공을…!"

정찰대를 보냈던 방향에서 소란스러운 외침이 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알렌은 급히 감지력을 일으키며 그곳으로 향했다.

"형님!"

뒤에서 들려오는 율리우스의 외침을 무시하며 느끼며 향하니 그곳에는 그들이 있었다.

빛바래지지 않는 외모와 기다린 귀, 백옥 같은 피부와 더불어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젊음을 소유한 종족.

"말하라! 무슨 일로 이곳에 있는 것이냐!"

엘프가 그곳에 있었다.

* * *

소란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애초에 병사들도 엘프를 돕기 위해 지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툼이 일어나지 않았다.

엘프들만 반응이 극렬했을 뿐.

그렇기에 엘프들은 알렌이 지원하기 위해 왔다고 말을 했음에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러나 기사단장 바질과 율리우스까지 등장해 증언하자, 그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며 보고를 하겠다고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정말 오실 줄은 몰랐군요."

엘프 왕국의 1공주 나타샤 에르마노프.

대수림을 다스리는 여왕의 자녀가 이곳에 찾아왔다. 그것도 겨우 엘프 몇 명과 함께.

정식 이름은 더 길고 장황했지만, 그녀는 자신을 나타샤 에르마노프라고 밝혔다.

"우선 죄송하게 됐습니다. 지원 요청을 받아들일 거라고는… 정말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그녀는 지금도 믿기지는 않는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무기에서 손을 떼지 않는 게, 그녀는 그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놈의 여자 중 하나던가.'

율리우스 놈의 곁에는 무수히 많은 여자가 모였었으니, 그녀는 놈의 여자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래서 지원 요청을 하고도, 다른 엘프들에게는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겁니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네, 그렇습니다."

그녀의 놀라울 정도로 침착한 얼굴로 율리우스의 말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이곳에 있는 연유를 그들에게 설명했다.

"현재 왕국에서 중요한 일로 병력을 차출하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급한 대로 근처에 있었던 제가 움직이게 된 겁니다."

귀히 여기는 신수의 위험을 뒤로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

'무슨 일이지?'

율리우스의 행적을 알면서도 정작 그 안에 얽힌 중대한 비밀과 같은 것들을 알지 못하니 답답했다.

율리우스 놈도 지금 시기에는 몰랐던 모양이니, 알렌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대수림에서 보낸 정식 사절단도 아니었고, 숲에서 도망친 생존자들이 약식으로 사절단이라 칭했던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정말 감사드립니다."

나타샤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 누구도 그녀가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제까지 원수였던 자가 갑자기 도움을 주겠다는데,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일단 도움을 주시겠다고 하니 따라오시죠. 저희는 신수의 숲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때, 율리우스는 나타샤를 보면서 눈이 잠시 반짝거렸다.

'주황색?'

아냐의 재능을 보고 난 뒤로 오랜만에 발견한 주황색 재능에 율리우스는 급히 한 발자국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가는 길에 잠시 이야기라도…."

그러나 그가 그렇게 몇 발자국 내디딘 순간.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짐승, 망나니, 하프 고블린. 당신에 대한 평판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제게 사적으로 가까이 접근하지 말아 주세요."

애써 표정을 가다듬던 그녀가 신랄한 독설을 내뱉었다.

"…뭐?"

"공적인 일이 아닌 이상 제게 다가오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율리우스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기사들도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고, 알렌은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한심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항상 변하지 않는 놈이군.'

이런 놈에게 그렇게 휘둘렸다니.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시스템]의 힘과 세계의 가호가 율리우스의 단점을 가릴 만큼 대단하다는 말이겠지.

뒤늦게 기사들이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그것을 대놓고 표출할 수는 없었다.

관계 개선을 위해 행하는 일을 망칠 수 없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율리우스의 모욕에 마냥 침묵할 수도 없었다.

기사들은 어떻게 행동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때 침묵하고 있던 기사단장 바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타샤 님. 왜 먼저 숲에 진입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겁니까. 먼저 도착했으면 이미 숲에 들어가도 괜찮았을 텐데…, 말입니다."

혹시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니냐?

대놓고 추궁하는 듯한 질문에 율리우스가 놀란 눈으로 기사단장을 돌아봤지만, 기사들은 바질의 행동에 불만이 다소 해소된 기색이었다.

"그건…."

그녀도 그걸 알아차린 듯 그를 바라보더니, 묘한 미소를 지으며 질문에 답했다.

"직접 보시면 알 겁니다."

* * *

"나타샤 님!"

"나타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알렌 일행이 병사를 데리고 신수의 숲 근처에 도착하기 무섭게 근처에 있던 엘프들이 달려왔다.

엘프들은 명백하게 그들을 경계하는 눈으로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증오나 혐오의 감정도 옅게 섞여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의 평판이 엘프들 사이에서 어찌 퍼졌는지 알 수 있었다.

'엘프들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나섰다라….'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우스운 변명이었다.

몇 대를 걸쳐 쌓인 감정이다.

단순히 지원 왔다는 것 하나로 관계가 재정립될 수 있다는 말장난은 말 그대로 말장난일 뿐임을 깨달았다.

이런 상황인데, 전생에서 엘프가 은혜를 갚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한 율리우스의 모습이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죄다 어중이떠중이뿐이군.'

근처에 있던 병력을 급히 끌어모았다는 그녀의 말은 사실인가?

전력이 다소 부족했기에 나타샤도 그들의 지원을 거절하지 않을 테지.

기사단장을 제외한 기사들은 엘프들의 이런 대접에 어이가 없는지 은근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분위기가 나빠질 것으로 보이자 율리우스가 얼른 끼어들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이유가 뭡니까."

나타샤는 손가락으로 조용히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에 뭐가…."

우뚝-

율리우스는 떨리는 눈으로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어? 어? 저거 설마…."

"저희도 처음 왔을 때 이미 숲은 이렇게 변한 지 오래였습니다."

거대한 갈색의 절벽, 아니 거대한 나무가 얽히고 설켜 거대한 벽이 되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알렌도 그 모습에는 제법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절벽인 줄 알았는데….'

저게 본래 신수의 숲이라고? 보통 숲을 저렇게까지 강제로 생장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완전히….'

내용이 달라졌다.

미래가 변하는 건 두렵지 않았다.

이미 많은 일이 바뀌었는데, 미래가 그대로 진행되리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바뀐 미래를 자신에게 득이 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

'동생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알렌의 눈빛이 깊이 침잠되었다.

그때 율리우스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

"…저건?"

그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리니 나무 벽의 곳곳을 휘감은 검붉은 촉수가 보였다. 율리우스는 저도 모르게 생각난 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마경화."

"네, 맞아요. 신수의 숲이 마경화 되고 있는 중이죠."

그녀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에 곁에 있던 기사가 침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저 안에 있는 엘프들은…."

"저희들도 도망친 동포의 증언을 듣고 급히 이곳에 도착했지만…, 아마 이미 늦었겠죠."

그녀의 말에 알렌은 냉정한 눈으로 물었다.

"그럼, 이곳에 온 이유는 신수… 때문인가?"

"예, 신수를 타락시키려는 흑마법사를 토벌하고, 신수를 구출하기 위해서죠."

"그렇군."

"숲이 반쯤 마경화 되어 있어 저희끼리도 어떻게 행동할지 의견이 분분한 참이었습니다."

어떻게 할지 의논한 것이 아니라 후퇴할지 말지 고민해 봤던 거겠지.

임시로 모은 전력만으로 들어서기에 다소 꺼림칙한 것이 사실이니까.

알렌이 잠시 생각을 해 보며 나무 벽을 바라봤다.

그리고.

"공자님?"

린벨을 돌아봤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안한 듯 꿈틀거리는 손과 떨리는 눈동자. 알렌은 그녀가 애써 감추고 있는 감정이 보였다.

지금에서야, 제대로 보았다.

초조. 의심. 불안. 좌절. 절망. 집착.

알렌은 베스틀라를 강하게 붙잡았다. 이걸 말하기에는 조금 늦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더 늦지 않기 위해서는.'

알렌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기사단장의 이름을 불렀다.

"바질 경."

그녀의 미래가 달라졌다고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예."

사람이 변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으니.

"할 수 있겠나."

하나의 계기.

한 번의 전환점.

한마디의 조언만으로, 사람은 바뀔 수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알렌은 그녀가 이번 시련을 겪고 더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랬다.

기사단장은 알렌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만큼 눈치가 없지 않았다.

그는 두껍게 높이 뻗어진, 절벽을 연상시키는 나무 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럼 부탁하지."

-저벅저벅

"잠깐, 지금 무슨 이야기를…."

나타샤가 그들이 영문 모를 이야기를 나누고 앞으로 나가자 급히 입을 열었다.

"…!!"

그러나 바질이 몸에서 강력한 힘의 파동이 넘실거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정령을 소환하고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후우."

그는 멈춘 곳은 적당한 장소였다.

전사의 경지는 마법사처럼 통일되어 있지 않다. 마력을, 프라나를, 극히 드물지만 신성력을.

그런 이들을 마법사처럼 일원화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굳이 나누지 않더라도 보이는 것은 있었다.

'최소한 왕국 서부에서 적수는 없다.'

팔강에게는 비교할 수 없지만, 인간 전체를 기준으로 봐도 그는 꽤 강한 축에 속할 것이다.

'린벨에게 한 번 보여 줄 필요가 있지.'

그녀가 미래에 지나칠 도달점을.

얻어낼 힘의 다른 형태를.

제53화

지금까지는 그녀가 알아서 각성해내리라 생각했기에 신경 쓰지 않았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린벨, 잘 봐라."

바질의 웅크렸던 존재감이 확장된다.

그의 몸에서 순백의 프라나가 휘몰아치며 발밑에서부터 솟구쳤고, 검 위로 뿜어진 프라나가 원이 되어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알렌은 눈앞의 광경에 못 박힌 듯 멍한 눈을 하는 그녀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저것이 프라나다."

"…저게 바로."

"그래, 고귀하고, 고집스러우며…, 또 지독한 힘이지."

대검이 태양처럼 타올랐고, 갈수록 강해지는 힘의 파동에 기사들은 자랑스러운 눈빛을 했다.

"저런 강자가…."

"…놀랍군."

"아직도 저런 저력이 남아 있었나."

엘프들은 그의 강한 힘에 놀란 듯 웅성거렸지만, 바질은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거대한 벽에 집중했다.

일견 신성해 보이기까지 하는 하얀 빛이 명멸한다. 알렌은 그 모든 것을 무시했다.

"네가 얻어낼 힘의 형태 중 하나다."

그녀의 눈에는 집착이 서려 있었다. 또한, 탐욕이, 그리고 또.

"제가."

절망이.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음울한 절망이 내려앉아 있었다.

"할 수 있다."

"공자님께서는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녀는 바들거리는 손으로 억지로 순흑을 끌어안으며 작게 속삭였다.

"언제나 그러셨어요. 처음에도, 시간이 지나서도, 그리고…, 지금까지. 저는 제가…."

"프라나는."

말을 끊었다.

"프라나는 고귀한 힘이다."

"알고 있어요. 몇 번이나 말씀하셨…!"

"그렇기에 나는 믿는 거다."

그녀의 이해할 수 없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네가 할 수 있음을."

프라나는 맹목적인 감정 혹은 맹세에 반응하는 힘이다.

의지가 확고하다면 한없이 강해질 수도 있으나, 프라나의 근원이 되었던 맹세가 사그라든다면 없어질 수도 있는 힘.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단 것을."

그렇기에 누구보다 힘을 다루는 사용자가 중요하다.

"누구보다 고귀해질 수 있음을."

프라나가 고귀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 자체로 의지가 시들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니.

"그러니 구태여 집착할 필요 없다. 너는 언젠가 간단히 해낼 수 있을 테니."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저 계기가 부족한 것뿐이다.

프라나를 끌어낼 강력한 감정의 매개체가.

그녀의 성장을 앞당겼을 분노라는 연료가.

"하지만 네가 정 힘들다면."

"저는…!"

알렌은 그가 기억하던 전생과 다르게 과도하리만치 힘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생각을 바꿨다.

"그만둬도 좋다."

그녀가 한순간 할 말을 잃은 듯, 눈동자가 짙게 흔들렸다.

"…네?"

나의 기대가 압박이 되었다면.

그가 바라던 모습에 힘겨움을 느낀다면.

"프라나가 아니라도 괜찮다."

"네? 어째서… 아니, 그럼 지금까지의 행동은, 노력이…."

린벨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혼란스럽게 변한 표정을 보자 알렌은 그녀가 그만큼 깊게 얽매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가…, 공자님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해서인가요?"

"아니."

알렌은 무심한 듯 당연한 것을 이야기한다는 얼굴로 답했다.

"상관없기 때문이지."

"네?"

"너의 재능이라면 프라나가 아닌, 마력으로도 상관없을 테니."

아카데미에서의 계획이 조금 틀어지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가 아는 검의 천재라면.

조금 더 돌아갈지언정 같은 결과를 낼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니,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

얼굴을 비추는 밝은 빛에 고개를 들었다.

눈을 돌리니 기사단장의 검에서 광명이 터져 나오며 강력한 참격을 내지르는 것이 보였다.

"잠깐 쉬더라도, 앞으로 달리기 위한 시간은 충분하니."

"아…."

그녀가 무어라 입을 벌린 순간, 순백의 참격에 나무 벽이 그대로 박살 났다.

그 뒤로 커다란 환호성이 뒤따랐다.

"와아아아아!!!"

"역시, 바질 경이로군!"

"기사단장님이 힘을 쓰시는 걸 보는 것도 오랜만이군요."

린벨은 깨진 분위기에 한숨을 내쉬다 알렌의 물음에 조용히 침묵했다.

알렌은 린벨의 곁에 머물렀지만, 그녀의 대답은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역시, 말 한마디로 바꾸는 건 무리였나.'

이번 일이 지나고도 그녀가 그대로라면, 알렌은 강제로라도 그녀가 마력을 익히게 만들 것이다.

지금처럼 힘든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

알렌은 뒤에서 이넬리아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확인하고 기사단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기사단장의 힘에 놀란 표정을 짓던 율리우스는 카밀라를 잠시 바라보더니 빠르게 그의 앞으로 향했다.

"바질 경, 정말, 정말 대단했습니다. 혹시 어디 아픈 곳은 없습니까? 쉴 필요는?"

"전투에 지장은 없을 겁니다."

율리우스는 그의 든든한 말에 감탄하며 연신 칭찬했다.

"…바질 기사단장이라고 했습니까? 저 정도 실력이면 숲 지기 중에서도 상위권에 해당되겠군요."

그녀는 그의 힘에 놀랐지만, 대수림에 저것보다 강한 수준의 강자는 더 많았기에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나저나…."

나타샤는 모습을 드러낸 신수의 숲을 확인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가까이서 보니 더 역겹네요."

"완전히 뒤틀렸군."

그녀의 말대로 숲의 모습은 끔찍했다.

검게 물들고 있는 나무와 땅, 썩어 버린 동물의 사체와 마경으로 잠식되며 변이된 괴생물체까지.

본래의 숲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숲은 망가진 상태였다.

나타샤는 잠시 귀를 쫑긋거리더니 알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정도의 소란에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다니…, 너무 이상하지 않나요?"

알렌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오는 길에 습격이나 공격을 받지 않은 것은 억지로 이해할 수 있다. 이곳에 방어를 굳히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이미 숲을 감싸던 나무까지 없어졌는데, 확인해 보지도 않는다고?

'감지력은… 막혔나.'

모종의 조치를 취했는지 감지력으로도 시야가 닿는 범위까지밖에 나아가지 못했다.

잠시 고민을 해 본 그녀는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율리우스와 바질을 보고는 답했다.

"인원을 나누죠."

그녀는 뒤틀린 숲에서 뭉쳐 다니는 것은 너무 비효율적이라며 갈라질 것을 제안했다.

"숲에는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 정도의 대규모 인원이 한 덩어리로 다니는 것도 비효율적입니다. 그러니 적당히 인원을 나누도록 하는 게 어떻습니까."

저런 변명을 대고 있지만, 의도는 뻔했다.

'같이 다닐 정도는 아니라는 건가.'

엘프들의 수는 겨우 100명 남짓, 결국 인원을 나누자는 말은 따로 수색해 보자는 말을 우회적으로 한 것에 불과했다.

"저희는 수가 적으니, 알렌과 율리우스 공자께서 사람을 나누는 건…."

알렌의 예상대로 그녀는 엘프들과 함께 빠지며 그들에게 선택을 중용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율리우스는 기회라는 듯 곧바로 입을 열었다.

"형님, 저는 기사단장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알렌은 율리우스의 뻔한 의도를 알았지만, 이내 그러라는 듯 선선히 허락했다.

'기사단장은 오직 아버지에게만 충성하고 있으니.'

그는 아버지에게 어떠한 조건을 걸고 가문에 들어와 기사단장직을 맡았다. 그걸 모르는 율리우스의 행동은 모두 쓸모없는 짓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 그 대신 기사 8명을 내가 데려가도 상관없겠지?"

"그렇게 하십시오."

알렌은 15명의 기사 중 8명을 데려왔고, 병사들도 150명씩 정확히 나눴다.

'줏대가 너무 없군.'

그 와중에 율리우스는 알렌이 카밀라를 고를까 노심초사 하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알렌은 그를 방해할 생각이 없었기에 대충 아무나 인원을 골랐다.

어차피 그들의 역할은 수색과 방패 그 이상은 없었기에.

"다 끝나셨습니까?"

인원을 나누는 것이 마무리되자 나타샤가 입을 열었다.

"먼저 흑마법사 혹은 신수를 먼저 찾아내는 쪽이 신호를 보내도록 하죠."

"그렇다면 서로의 위치를 알 수 없지 않습니까?"

그녀가 손짓하자 옆에서 대기하던 엘프 한 명이 주머니를 그녀에게 건넸다.

"이걸 공중에 던지면 멀리서도 보일 겁니다."

"이건 무엇입니까."

바질이 작은 주머니를 보며 입을 열자, 율리우스가 입 모양으로 중얼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씨.앗.풍.선?'

"직접 보여 드리는 게 낫겠죠. 이걸 이렇게 위로 던지면…."

그녀가 가볍게 연두색의 씨앗을 위로 던졌다. 하늘 위로 일직선으로 올라가던 씨앗은, 점차 속도가 느려지더니 나무 벽의 높이마저 넘긴 순간.

-쾅!

화려한 폭음을 울리며 씨앗이 폭발했다.

-흠칫

기사들은 씨앗이 폭발하는, 생전 처음 본 모습에 당황했으나, 엘프들이 익숙한 일이라는 듯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금방 평정을 되찾았다.

"그냥 던지면 되니 사용 방법은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별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듯 사무적으로, 알렌과 율리우스를 비롯한 기사들에게 씨앗을 나눠 주었다.

"숲에는 어떤 위협이 있을지 모르니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즉시 신호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그녀의 몸에서 알렌의 친화력으로는 감히 계약할 수조차 없는 강대한 정령이 그녀를 감쌌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녀가 말을 마친 즉시 엘프들은 빠른 속도로 나무 벽이 박살이 나며 만들어진 구멍으로 사라졌다.

숲이 반쯤 마경화가 진행되었다고 해도 숲의 지리에 익숙한 그들이라면 수색에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겠지.

'신호를 정말 보낼지는 의문이지만.'

그들이 사라지자 율리우스도 알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형님, 그럼 저는 중앙으로 가 보겠습니다."

그의 시선은 허공의 한구석을 향해있었다.

'[시스템]의 지도 기능을 이용하는 건가?'

율리우스는 기사단장을 포함한 7명의 기사와 반절의 병사를 데리고 빠르게 떠나갔다.

놈에게는 '원작'이라는 지식도 있으니 흑마법사의 위치를 따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도 단서 같은 건 금방 찾아내겠지.

그런 놈이니까.

알렌의 옆에 있던 기사 한 명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어디로 향하시겠습니까?"

엘프들은 본래 숲의 지도를 기반으로 움직일 것이다.

율리우스는 시스템을 사용해서 흑마법사를 찾아 나서겠지.

'그렇다면.'

그들이 무언가 발견할 때까지 수색하는 시늉을 하느냐, 아니면 검은 책의 정보를 기반으로 숲을 탐색해보느냐.

"우리는…."

알렌이 내린 결정을 그들에게 말하려던 그때.

「잠깐, 잠깐만요. 저쪽! 저쪽으로 가 주세요.」

베스틀라가 갑작스럽게 끼어들었다.

암묵적인 불문율을 깨고.

* * *

"으아아아…!"

"제발, 제발 죽여 줘…."

"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

끝없는 비명 속 하나의 생명이 사그라든다.

"끄윽… 켁."

털석-

생명력이 모두 빨려 나간 시체가 바닥에 볼품없이 널브러진다. 또 한 명의 엘프를 제물로 바친 카르넬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침입자들이 결국 숲에 진입했습니다."

"벌써? 최소 하루는 뭉그적거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카르넬은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는 계획에 짜증을 느꼈다.

"라인하르트 놈들이 엘프들을 지원한다는 것도 못 믿기는데 뭐? 이렇게 빠르게 도착했다고?"

이상하다.

이것은 명백히 이상했다.

가뜩이나 사이가 안 좋은 놈들이 힘을 합친다는 것도 그랬으며, 이렇게 재빠르게 움직인 것도 그랬다. 그래, 마치 지금의 계획을 알기라도 하듯이.

"계획이 들켰나? 그럴 리가 없는데?"

며칠 전 감시당한 것에 경각심을 느낀 본부에서 시야를 차단할 아티펙트까지 건네주었다.

그가 알고 있는 천상의 눈이라면 이 정도의 아티펙트로 막아 낼 수 없겠지만, 시야를 흐릿하게 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곳을 정찰했다면 누군가의 시선은 느꼈을 텐데….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묵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우중충한 흑색 갑옷을 입은 인영이 다가왔다.

"아니…, 괜찮아. 아직까지는 말이야."

산맥에서 습격을 강행할 인원까지 모두 동원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제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신수는 완전히 타락하겠지.

그럼에도.

"뭐가 불안하지?"

그런데도 카르넬은 불길했다. 그래, 이건, 이건….

"불합리함."

무엇을 하더라도 정해진 결말을 맞이할 것 같은 불안감.

"불합리함…?"

"그래."

생각이 정리된다.

"말록, 처음 흑마법사가 토벌되었던 때가 언제지?"

"아마…, 넉 달이 되었나?"

"그래, 그게 문제였어."

그때부터 이상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뭔가 이상하지 않아?"

"무엇이."

"서부에서 치렀던 의식이 백작가에서 반응할 만큼 격정적이었나?"

"아니지."

도시가 아닌 마을 주민을 위주로.

건강한 청년보다는 노인이나 여성을 우선해서 납치했다.

저주라기보다는 지병으로.

인위적인 죽음이 아닌 자연적인 죽음으로 보이게.

"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백작가에서 나섰고, 흑마법사 하나를 대가로 벗어났지."

"그건 우연이지 않나?"

"그래, 거기까지는 우연이었지."

그럼 그 뒤에 저주에서 풀려난 여자는?

"그 여자도 우연이었나? 아니, 애초에 평민 하나가 저주를 벗어났다고? 운으로?"

"그건…."

말록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때는 카르넬도 운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러나 카르넬은 그의 대답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그다음에도 마찬가지."

저주가 퍼져 나간 지 얼마나 지났다고 다시 백작가에서 찾아와 마녀를 죽였다.

신수의 숲에서 대규모 의식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병력을 파견했다.

"다음에는 또 어떨까? 의식이 완성되기 직전에 막을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결계를 박살 낼까?"

카르넬이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자, 말록도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침묵하자 카르넬의 시선이 곁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흑마법사에게로 향했다.

"놈들은 어디까지 왔지?"

광기가 들어찬 눈이 향하자 흑마법사는 몸이 굳고 말았다.

"그, 그게…."

"빨리 말해."

"그들은 세 무리로 나누어져서…."

"당장."

카르넬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변하자, 흑마법사는 곧장 무릎을 꿇고 외쳤다.

"인간 한쪽은 다른 형제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엘프들은 숲의 중앙으로 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인간은 '그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곳?"

잠시 바닥에 널브러진 사체의 심장을 꺼내던 그의 눈이 흥미로 반짝였다.

"알고 가는 것처럼 보이던가?"

"그건 모르겠습니다!"

"흠…, 뭐. 스스로 죽음으로 기어들어 가다니 잘됐군."

신수의 타락을 계획하기 전 했던 실험의 부산물.

연구에 협력하던 키메라 술사가 사망하자 어쩔 수 없이 봉인해 둔 곳.

그들도 감당할 수 없어 봉인해 두었기에 알아서 찾아간다면 말릴 생각이 없었다.

"무엇을 할 생각이지?"

"그거야…."

카르넬이 조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작은 동산만 한 신수가 반쯤 검게 물들어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분을 위한 모든 일이지."

-쾅!

"당장 술식을 안정화시켜!"

"제물! 빨리 제물을 더 데려와!"

"제발 살려, 살려… 끄르륵."

신수는 그분이 데려왔다는 전설 속 마수가 되어 성전을 위한 선봉장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는 하수인들을 모두 풀어 그들이 상대하게 만들어라. 그리고 은밀히 상대를 각자의 목적지로 유인하도록 하고."

"아, 알겠습니다!"

흑마법사는 급히 두개골이 장식된 지팡이를 들고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뛰쳐나갔다.

"말록, 너는 형제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시간을 끌어. 최대한 끈질기게."

"알겠다."

말록은 그의 명령에 반론 없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록도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사라지자 카르넬은 고개를 돌렸다.

"만약 이 계획이 불합리함으로 끝난다면, 그렇다면…."

그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절대로.

그는 끈적이는 목소리로 동포들을 향해 외쳤다.

"의식을 위한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에게 전해라."

그분을 위해서라면 행함에 있어 미혹 한 점 없으리라.

"드디어 때가 왔노라고."

그 대가가 목숨이라고 해도.

"헬-크리티카."

찬미하는 그분을 위하여.

제54화

「빨리, 저쪽이요! 저쪽으로 가요!」

"…뭐?"

알렌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잊고 육성으로 답했다. 그만큼 의외였기 때문이다.

"공자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기사는 알렌이 갑자기 말을 끊자,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알렌은 고개를 흔들며 빠르게 답했다.

"마법으로 숲을 살펴보는 중이었네. 잠시 집중을 하게 조용히 있어 줄 수 있겠나?"

"아, 알겠습니다."

기사는 그 말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알렌은 그들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베스틀라 에게 집중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은 하나였다.

'왜?'

그녀의 말대로 움직이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닌, 왜 그녀가 말을 했을까에 대한 의문.

다른 사람이 있을 때나 누군가와 대화할 때,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베스틀라에게만 따로 말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으니까.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다 자칫 대화가 섞여 버린다면, 남들에게 정신병자로 몰리기에 딱 좋은 모습이었다.

그랬기에 알렌은 그녀와 약속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조용히 침묵을 지키기로.

「나중에 다 말해 드릴 테니까! 저기, 저쪽으로 가 주세요!」

그렇기에 지켜져 왔던 불문율이.

「빨리요!」

이 순간 깨져 버렸다.

「한 번만 제 말을 들어주시면 안 돼요?」

그녀는 알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혼자서라도 가겠다는 듯 손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알렌은 그녀가 정말 가 버리기 전에 덜컥거리는 손잡이를 두어 번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다들 나를 따라오게."

그의 말에 대기하던 기사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뭔가를 발견하셨습니까?"

"그래, 마법으로 살펴보니…, 걸리는 게 몇 가지가 있군."

"오오…!"

기사들은 마법에 대한 문외한이었기에 그의 말에 찬성했고, 베스틀라도 알렌이 움직일 기색을 보이자 얌전하게 변했다.

「나중에 다 말해 드릴게요. 그러니까 지금은 제 안내를 따라 주세요.」

아니, 검체는 가만히 있고 입은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는 말이 옳겠지.

「우선 저기, 뾰족한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 줘요.」

알렌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검 자루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기사들이 크게 소리치며 병사들이 뒤따랐다.

"모두 출발! 각자 경계를 늦추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숲의 탐색이 시작되었다.

* * *

알렌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괴물에 검을 내리찍었다. 거력이 담긴 검격은 머리가 두 개 달린 오크의 몸을 반으로 쪼개 버렸다.

수인을 맺자 가까이 달려오던 놀의 머리가 충격파에 터져 나가며 파편을 흩뿌렸다.

베스틀라의 안내에 따라 숲에 들어선 후, 알렌의 예상대로 괴물들이 습격해 오기 시작했다.

'역시 모두 이곳에 있었나.'

알렌은 핏물을 털며 전황을 살폈다.

"후방 막아!"

"대열을 흩트리지 마라!

"버텨라! 너희들의 뒤에는 기사단이 있다!"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병사들은 제자리를 지키며 침착하게 습격을 방어했고, 위험할 때마다 대기하던 기사들이 몰아치자 괴물들은 맥을 추리지 못했다.

생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괴물들은 모두 정리됐고, 사상자 또한 발생하지 않았다.

"부상자 4명! 사상자 전무! 모두 자잘한 부상이라 전투 속행 가능합니다!"

"빠르게 정리한다!"

그렇게 알렌은 다시 베스틀라의 안내에 따라 깊숙이 들어갔다.

「앞에 있는 구덩이에서 살짝 오른쪽!」

괴물들은 계속 공격해 왔다.

키메라, 언데드, 그린 스킨 그리고 기괴한 괴수까지.

「앞에 바위 더미는 무시하고, 그냥 올라가요!」

마경화 되기 시작한 숲에서는 옅은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를 정도로 짙어지기 시작했고, 다리가 늘어나거나, 촉수가 달리는 등 기괴하게 뒤틀린 괴수들도 나타났다.

알렌은 깊숙이 들어갈수록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괴물들이….'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습격의 빈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워낙 서서히 줄어들었기에 눈치채는 것이 늦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괴물들의 등장 빈도가 줄어들었다.

병사들도 그것을 느꼈는지 안심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알렌은 되려 긴장을 끌어 올렸다.

'고작 이 정도 뿐이라고?'

아니었다.

그가 기억하던 사건은, 타락한 신수를 제외하더라도 백작가를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아무런 사상자 없이 수월하게 해치울 만큼 만만한 일이 아니었단 말이다.

알렌이 점점 깊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신수를 제외한다면 지금 병력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약했나?'

그 사이에도 일행은 베스틀라의 안내에 따라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뒤틀린 나무 사이로 썩은 내가 진동한다.

바닥에서 버섯이 네 갈래로 갈라진 주둥이를 날름거렸고, 목적지로 향할수록 진해지는 질척한 사기(死氣)에 기사들도 몸서리쳤다.

'마치 유인하는 것 같은….'

알렌이 어렴풋이 적의 의도를 예측하던 그때, 베스틀라가 외쳤다.

「이 앞이에요!」

벌써 도착했나?

알렌은 그녀의 말에 생각을 끊고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무언가에 의해 강제로 파괴된 듯 쑥대밭으로 변해 버린 공터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주위로 명백히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리고 그 공터의 중앙에.

"그르륵-."

5m 크기의 거대한 크기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근육 그리고 여섯 개의 팔을 지닌 괴물, 아니.

"거, 거인이다!"

거인이 온몸이 실로 꿰매어진 끔찍한 몰골을 드러내며 크게 울부짖었다.

"그-아-아-아-아-아!"

숲이 울리며 새들이 날아올랐고, 거인이라 소리친 병사가 겁에 질린 얼굴로 입을 막았다. 기사들이 급히 거인에게 달려들자, 거인도 기사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어? 아?」

그 혼란 사이로.

「아.」

베스틀라가 있을 수 없는 것을 마주한 듯, 망연자실한 탄성을 내뱉었다.

* * *

율리우스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신수의 숲을 헤쳐 나갔다.

그의 걸음에 망설임은 없었고, 얼굴에는 자신감만이 자리했다.

"…공자님, 어디로 가시는지 아십니까?"

그의 권유에 강제로 옆에 자리하고 있던 카밀라는 불안감이 어린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다른 이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명확한 목적지를 아는 듯한 그의 모습에 궁금증이 가득했다.

"그래."

"적들이 어디 있는지 아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녀는 반신반의한 얼굴로 그를 살폈다.

[신수를 타락시키려는 흑마법사를 막고, 제한 시간 내로 신수를 구하세요! 제한 시간 : 0 : 4 : 11]

[보상 : 신수의 호의, ???]

당연했다. 퀘스트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답할 수는 없는 노릇.

율리우스는 항상 꺼내던 편리한 변명을 꺼내 들었다.

"그래, 저택의 서고에서 신수의 숲에 관한 정보를 얻었지."

"오오! 역시 공자님!"

"역시 철저하시군요, 율리우스 도련님!"

다른 기사들은 그의 대답에 한시름 놓은 표정이 되었고, 카밀라 역시 그의 망나니였을 적과 다른 모습에 이채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도록 해. 최소한 길을 잃을 일은 없을 테니까."

율리우스는 그들의 칭송을 들으며 속으로 읊조렸다.

'맵 오픈.'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자, 며칠 전에 새로 열린 시스템 [맵]이 보였다.

나침반 모양의 레이더에는 흑마법사의 위치로 추정되는 붉은 점들이 전방에 모여 있었다.

"괴물들이 앞을 막지만 않으면 30분 정도? 그래도 다들 긴장은 늦추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신기했던 걸까, 카밀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준비성이 철저하시군요."

"이제 밑으로 들어올 생각이 들어?"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율리우스는 그 틈을 타서 한 번 더 권유했지만, 카밀라는 칼같이 거절했다. 그러나 아까보다 대답하는 힘이 약해져 있었다.

'조금만 더 권유하면 되겠어.'

바이론이나 아냐가 있었으면 설득하기 더 쉬웠을 텐데.

그 두 명은 따로 시킨 일이 있었기에 데리고 올 수 없었다. 그의 시녀인 레이나만 그림자처럼 따라왔을 뿐, 그래도 율리우스는 긴장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간단하지.'

홀로 왔다면 모를까, 병사와 기사도 있겠다, 거기에 기사단장까지.

기사단장의 일격을 눈앞에서 목도한 율리우스는, 이번 일이 무난하게 끝날 거라는 사실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적들이 누군지 안다.

어떤 계략을 꾸밀지 알며, 무슨 일을 벌일지 알고 있다.

소설 속에서는 보지 못했으나, 충분히 강자 반열에 드는 기사단장도 있다.

마지막으로 정화(淨化)의 힘이 가득해 흑마법과 상극인 그의 뇌 속성 마력까지.

이쯤 되며 실패할 게 이상할 지경이다.

'히든 보스나 잡고 [무지개 마안(S)]이나 강화해야지.'

거리도 얼마 안 남았으니, 몬스터는 안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런 그의 생각이 씨가 되었던 걸까.

휘웅!

갑작스럽게 옆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본능에 따라 몸을 비틀었다.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는 놀의 주둥아리가 옆구리를 스쳤다. 곧바로 검을 내리치자 피할 새도 없이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도련님!"

기사의 외침에 고개를 숙이자 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강철 새가 떨어져 내렸다.

"습격이다! 다들 준비해!"

"공자님! 하늘에서 새들이…!"

하늘을 바라보자, 은회색의 새들이 눈을 붉게 물들이며 떨어져 내렸다.

"내가 처리할게!"

율리우스는 곧바로 마력을 일으켰다.

진청색의 뇌기가 검을 타고 흐른다. 떨어져 내리고 있는 새를 피하며 검기를 날리자, 파직거리는 전류가 하늘을 뒤덮었다.

끼에에에엑-

한동안 비명을 지르던 새무리는 잠시 버틸 새도 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후두둑-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지. 병사들은 어때?"

"공자님의 빠른 판단 덕분에 피해는 적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병사들이 침착한 얼굴로 좌우에서 몰려드는 괴물들을 막아 대고 있었다.

"공자님, 저는 그럼 지원을 하러 가겠…."

율리우스의 안전을 확인한 카밀라는 빠르게 다시 몸을 돌려 병사들을 노리는 괴물을 향해 나아가려고 했다.

탁-

그의 어깨를 잡는 손길이 아니었다면.

"뭐 하시는 겁니까!"

"더 지원이 필요할까?"

"당연히 더 필요…."

쾅!

"와아아아!!"

그녀가 급히 눈을 돌리니 그녀가 노리려던 괴물들은 이미 육편이 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이미 주변에 몰려온 괴물의 대부분은 기사단장의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빠르게 정리되는 중이었다.

"기사단장이 다 처리할 것 같은데?"

"…그래도 제 할 일이 있을 겁니다."

그녀는 율리우스의 만류를 무시하고 남은 괴물을 정리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게 자신이 할 일이었으니까.

"고지식하기는."

그래서 끌어들이고 싶은 거지만.

엑스트라의 목숨 따위, 그에게는 얼마가 사라지든 상관없지만, 그녀에게는 다른 문제겠지.

'그래도 동료라는 건가?'

율리우스는 어깨를 으쓱이다 맵을 확인했다.

흑마법사를 상대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맵이 이상했다.

"왜 붉은 점이 바로 옆에 있…."

"-죽어라."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갑작스러운 일에 반응이 살짝 늦었다. 왜 놈들이 여기에 있지? 갑자기 움직인 이유가 뭐야. 생각이 느리게 흘러갔다.

'이대로라면 먼저 맞는다.'

몸을 최대한 꺾었다. 진청색의 전류가 순식간에 몸을 뒤덮으며, 검을 비스듬히 올렸다. 그러나, 이대로는 늦는다. 먼저 발견했더라면 밀릴 일이 없었을 텐데.

'…너는 진짜 뒤진다.'

율리우스의 분노에 찬 시선이 습격한 자를 향했다.

그렇게 묵색의 대검이 그의 머리를 금방이라도 쪼개 버리려던 그때.

쾅!

횐색 빛의 신형이 묵색의 검 격을 받아쳤다.

"…뒤로 물러나십시오, 공자님."

"아깝군."

"씹…!"

율리우스는 식은땀을 닦아 내며 빠르게 기사단장의 뒤로 물러났다.

그가 습격당한 모습에 기사들이 급히 율리우스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몸에 혹시 부상은…."

율리우스는 그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뒷목이 서늘했다. 불안한 마음에 급히 맵을 다시 살피자 빠른 속도로 붉은 점들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시발!"

"공자님, 갑자기 무슨…!"

기사들이 그의 욕지거리에 놀란 찰나, 거친 땅 울음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검은 불구덩이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구구구구구-

"다들 대열 맞춰! 흑마법사 놈들이 온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머뭇거리던 병사와 기사들이 그의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놈들을 막아라!"

"다 죽여라! 흑마법사 놈들이다!"

사방에서 괴물들이 쏟아져 내렸고, 전방에 있던 붉은 점들이 모두 몰려왔다. 저주와 흑마법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고, 정체불명의 흑기사와 기사단장이 부딪쳤다.

"모든 걸 쏟아부어라!"

"그분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라!"

율리우스는 가까이 다가서던 듀라한의 몸을 반으로 가르며 뇌까렸다.

"시발."

일이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 * *

나타샤는 숲에서 들려오는 폭음을 들으며 작게 조소했다.

"공주님, 저들을 지원하는 건…."

"됐어요. 제인. 저들은 아직 씨앗을 사용하지도 않았는걸요?"

급박한 상황이라 사용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사용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인지는 몰라도 나타샤는 그들이 신호를 줄 때까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아니, 신호를 주더라도.'

전투 한 번을 이겨 내지 못할 전력이라면, 그들이 지원을 온 의미가 없지 않나.

"기억하세요. 제인. 우리의 목적은 어린 신수 님을 회수해 가는 것에 있어요."

"죄송합니다. 실언이었습니다."

"괜찮아요. 저들도 그만한 강자가 있었으니 저 정도의 위협은 알아서 해결하겠죠. 저희는…."

그녀가 눈을 돌리자 수십 명의 엘프가 앞 사람의 등을 대고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흑마법사 한 명을 처치하는 것보다, 신수님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해요."

엘프들의 머리 위로 하나의 작은 인간 형체가 무언가와 공명하며 소리 없이 울부짖더니, 곧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어찌 됐든 저들 덕분에 적의 전력이 줄어들었으니…."

나중에 감사는 표해야겠죠.

나타샤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율리우스의 얼굴을 지워 내며 나뭇가지를 밟았다.

"가요. 더 늦기 전에."

"예, 공주님."

그녀가 신수가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방향으로 향하자, 그녀의 뒤로 수십 명의 엘프가 소리 없이 나무 위를 거닐었다.

제55화

거인의 모습은 이상했다.

알렌은 거인의 유해를 본 적이 있었다. 뼈밖에 없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유골의 주인이 거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거인은 그가 생각하던 것과 달랐다.

눈, 코, 입 모두가 반쯤 헐거워진 실로 꿰어져 있다. 그 실의 틈으로 보이는 모습이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몸은 누더기처럼 기워진 흔적이 가득했고, 결정적으로 거인의 팔은 두 개가 아니었다.

총 여섯 개.

그가 봤던 유해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혹시 알렌이 알지 못한 변종일 가능성도 있으나, 그러한 가능성은 접어 두었다.

만약 그렇다면 베스틀라가 그렇게 반응할 리 없으니까.

알렌은 고개를 힐끔 내려 베스틀라를 확인했다.

「아.」

그녀는 거인의 모습을 본 이후로부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언제나 시끄럽던 그녀는 충격이라도 받은 듯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었구나. 그래…, 남아 있을 리 없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알렌은 그녀에게 나중에 이것에 관해 물을 것이라 다짐하며 시선을 돌렸다.

"으아아아아!"

거인의 공격에 기사 한 명이 하늘을 날았다.

콰과광-

날아간 기사는 나무 몇 그루를 부수고 난 뒤에야 땅에 처박혔다.

병사들이 신속하게 다가가니 기사는 다행히 숨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기까지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공격을 흘려라! 직접 맞으면 안 된다!"

"선배님! 리암이…!"

"리암은 살아 있으니까, 닥치고 집중이나 해!"

선임 기사는 동요하는 후배에게 소리치며 방패를 들었다.

쿵!

"…크윽."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했음에도 손목이 박살 날 뻔했다. 벌써부터 우그러지는 방패의 겉면에 기사는 식은땀이 흘렀다.

거인은 강했다.

영지의 온갖 문제를 해결하는 최상위 전력들이 고전을 면치 못할 정도로.

강철 같은 육체는 웬만한 공격으로는 상처도 나지 않았고, 기껏 상처를 내더라도 괴물 같은 재생력에 금방 회복해 버렸다.

거대한 덩치와 6개의 팔에서 나오는 빈틈없는 공격은 기사들의 움직임을 제한시켰다. 정예 병사는 이런 살벌한 공방 속에서 함부로 끼어들기 힘들었다.

잘못 끼어들었다가 동료와 자신 모두 다치기 십상이었으니.

하지만 이대로라면 거인을 쓰러트리더라도 많은 희생을 치를 게 분명한 상황.

아무리 기사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들 지금 그들이 죽는다면, 영지에 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그들은 아직까지는 버티고 있어야 했다.

'나와 율리우스의 세력이 크게 불어날 때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들 지금까지 영지를 위해 수고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니.

공과 사는 구분하되, 율리우스의 변화를 묵인한 것을 구분 지어 따질 것이다.

'그들의 행동에 자의가 없다 할 수 없으니.'

신체에 넘치는 활력이 거력으로 전환된다.

억누르고 있던 힘이 해방됨에 따라 느껴지는 전율감에 알렌은 강하게 땅을 박찼다.

쿵!

전력으로 내디딘 걸음에 바닥이 강하게 패였다.

마침 눈앞에 기사 한 명이 위태롭게 공격을 흘리고 있었다.

거인의 육중한 주먹은 요란스러운 굉음을 내며 떨어져 내렸다.

'받아 내기 어려울까?'

아니 저 정도라면.

알렌이 상대를 가늠하던 때, 거인의 공격을 버텨 내던 선임 기사는 이를 악물었다.

'미치겠네.'

벌써 기사 세 명이 한 방을 버티지 못하고 날아갔다. 방패는 몇 번을 막았다고 벌써 고철 덩어리로 변해 버린건지.

"…빌어먹을."

기사단장님이 있으면 달랐을 텐데.

오우거와 대등하게 겨루어 끝내 쓰러트리던 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아-아-아-아!"

거인은 몇 번이나 공격을 흘려 내는 그가 거슬렸는지 다른 기사들을 무시하며 그에게 돌진했다.

공격을 흘린다.

고철로 변한 방패는 삐걱대며 거친 신음을 흘렸고, 중첩된 공격에 손목은 아릿했다.

"크윽, 제길."

쏟아지는 공격에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기사들은 거친 거인의 기세에 함부로 끼어들지 못했다. 한걸음에 땅이 진동했고, 빗나간 공격에 바닥이 부서진다.

끝내 그의 방패가 버티지 못하고 부서지던 그때.

쾅!

바람이 일었다.

"내가 해결할 테니, 뒤로 물러나게."

어느새 다가온 알렌이 공격을 막아섰다. 선임 기사는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하지만…."

"자네들이 상대하기 벅차다는 걸 알지 않나."

그럼 공자님은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선임 기사는 목구멍까지 솟구쳐 오른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

쾅! 쾅!

알렌이 거인의 공격을 대등하게 받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인의 공격에 공기가 웅웅- 울렸다. 묵직한 주먹은 뼈마디를 박살 낼 만큼 강맹하며, 강철을 우그러뜨릴 만큼 패도적이다.

그런 공격을 알렌은 물러서지 않고 막아 내고 있었다.

"어서!"

"…알겠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선임 기사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그가 물러나자 알렌은 거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흩뿌린 감지력에 거인의 움직임이 머릿속에 그려졌고, 기사들과의 격전은 절로 거인의 강함을 상기시켜 주었다.

'최소 오우거 정도인가.'

기사라면 몰라도 마법사는 5위계는 되야 상대할 수 있겠지.

거인은 밀려나지 않고 맞서는 알렌이 짜증이 나는지 괴성을 내지르며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묵중한 폭력을 동반한 괴물이 명확한 의지를 갖추고 알렌을 노린다.

전생의 그였다면 단 한 방에 죽음을 면치 못했겠지.

과거에는, 그랬었다. 하지만 지금은?

유적지에서의 고행이 머릿속을 스쳤다. 멈추지 않고 펼쳤던 검의 움직임은 무의식에 스며든 지 오래였고, 베스틀라에게 배웠던 비기가 알렌의 검을 통해 펼쳐지기 시작한다.

지금의 알렌은 전생의 그가 아니었다.

요툰스베르드 일계(J?tunnsverd 一界)

인간의 가장 강한 공격은 분노에서 비롯된다.

마나그람(Manngram)

전신에서 끌어온 힘이 마력으로 증폭되며 분노에 벼려졌다.

맹렬하게 떨어지는 참격은 이름 그대로 분노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붉게 물든 검에 마력이 실리며 가속한다.

베스틀라는 순식간에 거인의 가슴으로 떨어져 내렸다.

푸슉-

거인의 단단한 피부도 베스틀라의 검을 막을 수 없었다.

거인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가슴이 쩌억하고 갈라지는 고통이 익숙하지 않은지 크게 괴성을 내질렀다. 실밥에 꿰매진 입술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겨우 이 정도가 아닐 텐데?

놈의 눈이 살의에 물들었다. 피가 빠르게 멎으며, 근육이 재생된다. 감지력은 거인의 근육이 크게 수축하는 것을 느꼈다. 네 개의 손이 움찔거렸다.

비슷하다. 그러나 다르다. 어디서 비슷한 크기의 손을 구했나? 아니면, 이런 거인이 더?

"공자님!"

일전을 지켜보던 선임 기사가 크게 소리쳤다. 알고 있다. 생각이 멎는다. 마법사의 이성은 어느 상황에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알렌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지저 세계의 그림자는 헤아릴 수 없기에 무한하다.

일계가 어느 상황이든 최적, 최선의 일격을 선보인다면, 이계는 언제든 공격할 수 있는 틈을 만드는 것을 추구한다.

요툰스베르드 이계(J?tunnsverd 二界)

이르파스카더스(Irfascadus)

그림자가 아롱거리며 춤을 췄다.

한걸음에 그림자가 솟구치며 그의 뒤를 따른다.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걸음이 늘어날수록 그림자는 늘어나며 춤을 춘다. 거인의 눈은 알렌을 쫓지 못했다.

알렌은 실타래를 퍼트리며 베스틀라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그냥 맞아도 상관없잖아요? 내 말 좀 믿어 보라니까요?]

지금은 입을 다물고 있었겠지만, 평소라면 저렇게 땍땍거렸겠지. 그녀는 많이 맞아야 잘 큰다며 피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아쉽게도 알렌의 취향은 반대였지만.

퍼트린 마력은 심상에서 정련된 의념을 따른다. 용의 노심이 뱃고동을 울리며 크게 울었고, 공간을 점유한 실타래는 하나로 얽히기 시작한다.

[공간] [소리] [진동] [충격] [영혼] [진천]

수천 가닥이 합쳐진 물체는 이윽고 하나의 종으로 화했다. 실타래는 종을 빚어 내고, 빚어진 종은 공간을 울린다.

뇌종 우레.

웅─────

천둥소리가 터져 나갔다.

정면으로 소음을 맞이한 놈의 고막이 파열되었다. 괴로운 듯 괴성을 지르는 휘두른 놈의 발작에 나무가 박살 났다.

금방 회복되겠지만, 알렌이 원하는 것은 거기까지의 틈이었다.

일계를 내지르며 놈과 자신의 차이를 분석했다.

놈은 거인이었다.

팔이 여섯 개든, 생각한 것보다 작다고 한들, 놈은 베스틀라와 같은 거인임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한다.

요툰스베르드 일계, 마나그람.

분노에 벼린 검날이 거인의 관절을 찢었다. 너울거리는 그림자가 알렌의 검을 모방한다. 수십 개의 검격이 사방에서 거인의 살가죽을 두드렸다.

거인은 박살 난 관절을 부여잡으며 연신 뒤로 물러났다.

알렌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거인이라면, 이 정도로 무너지리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세를 점하기에는 충분할 터.'

재생력을 확인했고, 시선을 분산시켰다. 고막을 터트려 혼란을 줬으며, 관절을 부숴 행동을 묶었다.

그런데도, 거인은 살아 있었다.

찢겨진 피륙을 끊임없이 재생하며, 일방적인 폭력에 대항하듯 고함을 내지르며.

그 모습에 병사들이 뒷걸음쳤다.

'저런 괴물을 저렇게 만든 공자는 대체….'

선임 기사는 멍한 얼굴로 전투를 보고 있었다.

사실 곧바로 공자님이 나선 직후 후퇴를 염두에 뒀지만, 거인을 압도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모든 병사가.

그들은 그렇게 자신은 끼어들 수 없는 전투를 직관했다.

'공자님도 율리우스 님께 밀리지 않는구나.'

선임 기사는 일전에 왕도에서 율리우스 도련님이 보였던 압도적인 위세와 지금의 알렌을 자연스럽게 비교했다.

사실 그의 안목이 그리 좋지 않았기에 누가 낫다고 할 수 없지만, 현재 알렌의 모습은 기사단장이 오우거를 쓰러트렸을 적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어느 쪽이든 괴물이군.'

자신이 닿을 수 없는 곳임을 깨달은 그의 얼굴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아-아-아-아!"

어느새 공터 뒤편의 건물까지 물려선 놈은 순간 두려운 표정을 짓더니 크게 포효했다.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

그 모습에 알렌의 움직임이 멈췄다.

포효에 담긴 피어 때문이 아니었다. 놈의 상처가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신이 피에 물들어 있어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벌써 재생이 안 된다고? 재생력을 다 쓴 건가? 이렇게 빠르게?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피부를 찌르는 살의의 사이로, 알렌은 움직였다. 이르파스카더스. 순간 노심에 무리가 갈 정도로 마력이 뭉텅 빠져나간다.

거인이 오싹한 살의를 발했다. 내려찍은 발에 바닥이 쩍 갈라졌고, 크게 젖힌 여섯 팔로 인해 거대한 바람소리가 들렸다.

느껴진다.

두려움 섞인, 일그러진 시선이.

강대한 기세 속에 가려진 놈의 발악이.

단순히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작은 영역 안의 모든 정보가 머릿속을 찌르듯 흘러들어 온다. 놈이 약한 게 아니다. 다만, 알렌의 능력이 거인에게 유리했을 뿐이다.

일정한 범위 안에서의 마법사는, 신이나 다름없다.

거인이 얼마나 강하던, 어떠한 능력을 갖췄든 어떻게 움직일지 안다면 의미가 없다.

거인의 용솟음치는 괴력이 난폭하게 부딪치며 땅을 분쇄한다. 흙더미가 사방을 비산했고, 불어온 바람이 알렌의 머릿결을 흩트렸다.

쇄도하는 팔의 사이를, 알렌은 천천히 거닐었다.

걸음에 느릿한 박자가 실린다.

흩어지는 발 구름에 검은 잔영이 너울거렸고, 분산된 시선 사이에서 하나의 인영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온다.

거인의 여섯 팔이 그림자를 뭉개며 그를 향해 떨어졌다.

터져 나가는 대지 사이로 그림자가 파편이 되어 산란하며 무질서하게 부유하기 시작했다.

마나그람.

무리 짓던 그림자가 날카로운 검이 된다. 전후좌우에서 떨어져 내리는 일격 모두가 분노에 정련된다. 최선, 최적의 일격이 호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럼에도 거인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팔을 휘둘렀다.

주먹 한 번에 땅이 요동치며 지형지물이 분쇄되었고, 스쳐 지나간 공격에 알렌의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닿지 않는다.

그림자 속의 알렌은 형체가 없었고, 그를 쫓는 거인의 손짓은 허공만을 맴돌았을 뿐이었다.

거인의 살점이 저며진다. 수십, 수백 번을 두드린 가죽이 떨어져 나갔다.

거인은 물러나지 않았다.

알렌도 그에 의문을 내비쳤을지언정, 멈추지 않았다.

검을 휘둘렀다.

강직하게, 간결하게 또 강하게. 그녀의 가르침에 따라서.

[기교를 익힐 필요 없다고 해서, 약점을 노리지 말라는 말은 아니에요.]

베스틀라의 가르침을 다시금 되새겼다. 매일 아침 배웠던 그녀의 검을, 알렌은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훤히 노리라고 있는 곳인데, 찌를 수 있을 땐 찔러야죠!]

처음은 발목을 노린다.

[애초에 약점이 있는데 노리지 않는 것도 웃기잖아요?]

다음은 맨 윗팔의 겨드랑이.

가장 위의 팔이 움직이지 못함에 따라 아랫팔의 움직임을 방해하게 만든다.

성급하게 행동하는 것은 독이다. 차근차근 때를 노려서.

거인을 맴도는 그림자 사이로, 시야를 벗어난 휘두름에 질긴 가죽을 뚫고 거인의 발목이 갈렸다.

균형을 잃은 거인이 팔을 뻗어 바닥을 다급히 짚자, 알렌이 아래에서부터 놈의 겨드랑이를 검으로 꿰뚫었다.

그다음은 머리, 완벽한 마무리를 짓기 위해.

거인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신음을 강제로 짓 삼켰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도 지키겠다는 듯.

알렌은 무심한 얼굴로 마지막을 준비했다.

완벽한 마무리를 짓기 위해.

땅을 내딛고 온 힘을 실었다. 근육이 수축하며 준비한다. 신체에 깃든 마력이 위력을 증폭시켰다.

감정을 제물로, 분노를 연료 삼아 최상의 일격을.

요툰스베르드 일계(J?tunnsverd 一界)

마나그람(Manngram)

알렌의 검격이 거인의 목을 수확하려던 그 때.

「잠깐만요!」

베스틀라가 소리쳤다.

제56화

알렌의 검로가 베스틀라의 통제에 따라 거인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다시 검을 휘둘렀으나 그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검은 거인의 목을 베어 낼 수 없었다.

거듭된 그의 공격이 실패하자 병사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무슨 뜻이 있어서 그랬을 거라는 생각에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아직 거인의 무력이 뇌리에 남아 있기도 했고 말이다.

「잠시, 잠시만 죽이지 말아 봐요!」

그녀의 외침에 알렌은 검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검을 획 들어 눈앞으로 끌어당겼다.

"왜지?"

낮은 저음에는 미약한 짜증이 실려 있었다.

이 거인은 그가 직접 상대하고, 쓰러트린 적이었다. 아무리 그녀에게 검을 배웠다고 한들, 그녀가 알렌에게 이래라저래라할 권리는 없었다.

혹여 그녀가 이 거인과 관련이 있다고 해도, 이 괴물은 너무나 위험했다.

"네가 무어라고 한들, 놈을 살려 줄 생각은 없…."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잠시, 잠시면 되니까….」

알렌은 베스틀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이 끝나고 들려 줄 변명이 충분하기를 바라지."

「그렇게 말 안 해도 말해 줄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래, 그래."

「그 반응은 또 뭐예요! 에휴…. 왜 이런 남자를 따라왔는지… 진짜. 그것만 아니었으면…」

알렌은 그녀가 검임에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시선을 느꼈다.

"왜, 무슨 문제가 있나?"

「됐네요. 됐어. 어쨌든 검으로 심장 좀 천천히 찔러 봐요.」

"뭐?"

공격을 그렇게 막아 놓고서 다시 찌르라고?

알렌의 의구심 섞인 시선이 향하자, 그녀는 빨리 찌르기나 하라며 다그쳤다. 알렌은 그녀의 말대로 일단 행동했다.

알렌은 검 끝을 거인의 심장에 향하게 두고 천천히 앞으로 찔러 나갔다.

베스틀라의 검 날 위에 새겨진 문자들이 희미하게 발광했다.

만약, 거인이 조금이라도 반항하거나 발광한다면 그녀가 다시금 반대한다고 해도 죽일 것이다.

이미 충분한 기회는 줬다.

이미 이 전투에 상당한 시간을 지체하여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거인은 반항하지 않았다.

푹-

거친 피부를 뚫고 검이 박혀 들어감에도, 거인은 일말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거친 피부를 뚫고 검이 박혀 들어감에도 거인은 일말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평안한 안식을 맞이하듯 보였다.

검날이 더욱 깊게 박힌다.

검날이 피부를 지나 근육과 뼈를 가르고 전진하며 더욱 깊이 박히기 시작했다.

알렌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알렌의 긴장이 무색하게 일말의 저항도 없이 베스틀라는 심장을 꿰뚫었고.

거인은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알렌은 조금 전까지 날뛰던 괴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선 모습에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베스틀라, 그녀는 알겠지.'

그녀는 알렌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 끝났다는 듯 크게 외쳤다.

「이제 끝! 다 했으니 이제 그만 뽑아도 돼요.」

"뭘 한 거지?"

보고 있었음에도 어떤 방법으로 쓴 건지 알 수 없었다. 베스틀라는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며 답했다.

「…어, 지금 설명하려면 너무 긴데, 나중에 말해 줘도 괜찮죠…?」

"…후, 대답을 들을 수 있다면."

그의 한숨 섞인 대답에 베스틀라는 과장되게 소리치며 말을 돌렸다.

「그럼, 저기 수색이나 좀 해 봐요. 뭐가 있는 게 확실하다니까요?」

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에 가득한 자르고 꿰맨 자국이나 순간적으로 보인 거인의 모습은, 이 뒤의 건물에 무언가가 있음을 암시했다.

알렌이 뒤편의 건물로 몸을 움직이려던 그때, 뒤늦은 환호성이 들렸다.

"와아아아, 알렌 공자님!"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언제 그렇게 성장하셨는지…!"

"마치 기사단장님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알렌은 그들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는 듯 발걸음을 멈췄다.

다행히 날아간 기사들도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기사들 모두 마력을 다루며 철갑을 입었으니 쉽게 죽지 않겠지.

린벨과 이넬리아를 살펴보자, 그녀들도 별다른 상처가 없어 보였다.

하긴, 그것이 당연하기는 했다.

이넬리아에게는 최대한 무력을 드러내지 말라고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녀의 무력 자체는 뛰어났다. 린벨도 그의 뒤에서 그가 일부러 흘린 괴물들만 상대했으니 다칠 턱이 없었다.

그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선임 기사가 급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공자님, …설마 마검사셨습니까?"

그는 놀람과 경외가 섞인 눈으로 알렌을 보았다.

"그래, 비밀로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지금 알리게 되었군"

"아닙니다! 하나만 해도 쉽지 않으실 텐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원래 조금 더 숨길 생각이었는데.

'어차피 아카데미에서 드러낼 수밖에 없으니, 사전 연습을 한 셈 쳐야겠군.'

이번에 자신의 전력이 어떤지에 알게 되었으니 다음에는 더욱 능숙하게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렌은 적당히 그의 칭송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필립 경. 내가 저곳을 수색해 보고자 하는데…."

베스틀라의 말대로 저곳에 거인과 관련된 흔적이 있다는 것이 확실했으니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려던 순간.

펑! 퍼펑!

퍼버버벙!

하늘 위로 폭음이 터졌다.

알렌의 시선이 곧장 하늘로 향했다.

하늘 위로는 멀리서도 보일 법한 거대한 표식이 있었다.

"공자님, 이건…."

사전에 나타샤 공주가 나눠 준 신호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 말은….'

알렌은 낯빛을 굳혔다.

거인과 관련된 저 건물도 궁금했지만, 알렌은 신수의 숲에 온 목적을 잊지 않았다.

"곧바로 움직인다!"

알렌은 병사들에게 급히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도 저 신호탄의 중요성을 아는지 급히 소리쳤다.

"어서 움직여! 빨리! 늦으면 안 된다!"

"중상자, 부상자는 일반 병사들과 함께 천천히 따라온다!"

알렌은 기사들이 움직이는 틈을 타 이넬리아에게 몇 가지 명령을 내렸다. 이넬리아는 은밀하게 거목의 그림자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린벨, 너도 따라오겠느냐?"

"…네, 따라가고 싶어요."

그녀는 망설이듯 이넬리아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할 텐데?"

"알고 있어요."

"뒤의 병력과 같이 오는 게 더 안전할 거다."

"…그래도 공자님과 함께 움직이고 싶어요."

알렌은 더는 그녀에게 묻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결심한 얼굴이었다. 그건 이미 집착의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그래…. 말하자면 광기, 일까.'

아직 그 정도의 영역까지 나아가진 않은 것 같지만, 알렌이 보기에 그녀는 그 정도로 불안정했다.

알렌는 내심 복잡한 심경을 감추며 짧게 답했다.

"…그래, 놓치지 않게 조심하거라."

빠르게 몸을 돌리자 미약한 대답이 뒤에서 들려왔다.

선임 기사가 미리 후퇴를 염두에 뒀기에 움직이는 건 금방이었다.

"부상을 입은 기사들은 병사들과 함께 움직이고, 나머지는 즉시 나를 따라온다!"

알렌은 기사들이 준비되는 즉시 폭음의 진원지를 향해 속도를 높였다.

'…신수.'

반드시 신수의 시련을 받아야 한다.

분명히 율리우스도 저 소리를 들었겠지.

놈이 이런 기회를 마다할 리 없으니 놈도 곧장 저곳으로 갈 것이다.

이번 사건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알렌이 신호탄이 터진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하늘 위로 서너 개의 폭음이 더 들린 후였다.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콰광-!

흑마법사들은 남은 언데드를 모두 끌어모아 공격하며, 한편으로는 수많은 흑마법을 퍼붓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세요! 지원이 곧 도착할 겁니다!"

"알겠, 크윽, 알겠습니다!"

"…하아, 실프! 최대한 막아 줘!"

공터의 중앙에는 엘프들이 힘겹게 흑마법사들의 공세를 막아 내고 있었다. 이미 상당수가 상처를 입고 있었고, 몇은 이미 죽었는지 바닥에 뉘어진 상태였다.

'주위의 마력 흐름은…, 역시 결계로 숨겼나.'

끔찍한 비명에 고개를 돌리자 공터의 저 너머에 거대한 덩치의 신수가 제단 위에서 힘겨운 신음을 흘리며 발악하고 있었다.

그 주위로 수십의 흑마법사들이 기이한 수인을 맺으며 마법진을 유지하고 있었다.

신수의 머리 위로는 상당히 젊은 남자 한 명이 빙그레 웃으며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

'…저놈이 주동자인가.'

알렌이 조금만 더 늦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는 상황, 그는 그 사실에 안도하며 크게 소리쳤다.

"전원-! 엘프들을 지원한다!"

"예! 알겠습니다!"

기사들은 철갑에 마력을 두르며, 거인에게 당한 울분을 풀겠다는 듯 거세게 땅을 박찼다.

그들의 돌진에 엘프들을 포위하던 언데드들이 순식간에 짓이겨졌고, 나타샤는 그들의 모습에 구원을 맞이한 듯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흑마법사들도 기사들의 등장에 잠시 멈칫했다.

알렌과 기사들은 그 틈을 파고들어 엘프들과 합류했다.

"알렌 공자!"

"제가 다소 늦은 건 아닌지 걱정되는군요."

"그럴 리가요!"

나타샤는 꽤나 극적인 상황에서 나타난 그의 모습에 감동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몇 명은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알렌이 전장에 흩어진 엘프들을 힐끔거리자, 나타샤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건, 예. 조금의 희생이 있었어요. 그러나 그건 공자가 신경 쓸 필요 없는 문제예요."

그녀는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들과 함께 움직이는 건데, 그들의 도움 없이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먼저 나섰다가 되려 큰 피해만 입은 상황이었다.

다른 엘프들도 그의 등장 한 번에 여태껏 쌓인 케케묵은 감정이 조금 희석될 만큼 깊은 인상을 받았다.

지원을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도 그들에 대한 기대감은 적었다.

그러나 이렇게 위험할 때 맞춰 도착한 모습에 호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우선 남은 흑마법사부터 해치우…."

알렌은 이곳으로 빠르게 쇄도하는 움직임에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검은 물체가 엄청난 속도로 이곳으로 돌진했다.

알렌이 움직이려던 찰나, 놈의 뒤로 하나의 인형이 더 튀어나왔다.

"이, 새끼야!"

푸른 청발에 사나운 눈빛.

진청색의 전격을 번뜩이며 소리치는 그는, 익히 알고 있는 남자였다.

"…율리우스 공자?"

율리우스 라인하르트.

나타샤가 눈을 깜빡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왔구나.'

율리우스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어떻든 욕지거리를 뱉으며 빠른 속도로 검은 물체의 뒤를 잡았다.

"습격을 했으면, 뒤지게, 맞아야지!"

뇌전이 폭발하듯 치솟으며 검은 물체를 강타했다.

뇌전에 직격한 검은 인형은 연기를 흩날리며 흑마법사들이 모여 있던 장소로 떨어져 내렸다.

쾅!

수인을 맺던 흑마법사 여럿이 육편으로 변하며, 순식간에 그에게로 시선이 모여들었다.

"…참, 화려한 등장이네요."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그렇군요."

알렌은 그녀의 말에 동의를 표하며 떨어진 검은 형체를 살폈다.

본래 어떤 차림새였는지 몰라도 입고 있던 흑갑은 박살이 나 있었고, 온몸에는 붉게 달아오른 화상 자국이 가득했다. 심지어 한쪽 팔은 어디 갔는지 사라진 상태.

만신창이로 변한 놈은 간신히 절뚝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 엑스트라조차 아닌 게 까불기는."

율리우스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상태에서 알 수 없을 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뒤로 뒤늦게 기사들을 이끈 기사단장이 도착했고, 저 멀리서 정예 병사들의 묵직한 발걸음이 울렸다.

율리우스는 흑기사를 바라보며 픽 웃다가 엘프 사이에 있던 알렌과 눈이 마주쳤다.

"알렌 형…."

"모두-!"

그가 반갑게 웃으며 입을 연 순간, 알렌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님!"

"흑마법사를 해치워라-!"

율리우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여기에는 율리우스와 기사단장, 그리고 내가 있다-! 두려워할 필요 없다-!"

그의 외침에 상황을 파악한 율리우스는 알렌이 하려는 짓을 눈치채고 함성을 내질렀다.

"나를 따르라-!!"

그는 연이은 난입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흑마법사들 사이로 몸을 날렸다. 그의 뒤로 기사들이 소리치며 남은 언데드를 뭉개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흑마법사들을 모두 죽여라!"

"모두 쳐 죽여라!"

쿵쿵 내리찍는 발자국이 사방을 울렸고, 그들의 외침에 용기를 얻은 엘프들도 뒤에서 그들을 지원했다.

"저들을 도와라!"

"동족의 복수를 위하여!"

알렌도 다시 검을 뽑아 들고, 이 분위기에서 홀로 동떨어진 분위기를 풍기는 곳으로 달렸다.

그의 뒤로 그가 향하는 방향을 눈치챈 기사단장과 율리우스가 따라붙었다.

신수가 위치한 제단을 향해.

'일이 커지기 전에 해결할 수 있으니 다행이구나.'

이번 일의 목적에는 신수의 능력을 빌리는 것도 있었지만, 이 정도의 전력을 미리 싹을 잘라 둘 수 있다는 이유도 한몫했다.

'검은 책에서 나온 것보다 전력이 적기는 한데….'

변수는 언제나 있는 법이지.

알렌의 행동이 나비 효과가 되어 전생에 있던 것보다 수가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산맥에서 습격하지 않은 것이나, 책에서 봤던 전력보다 약했던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가문과 일전을 치를 정도의 수준이라기에는 너무 부족하니.'

정황상 율리우스를 습격했던 적들의 수준을 감안하더라도, 적어도 반 배는 더 있어야 검은 책에 있던 전력과 비등할 듯 보였다.

알렌은 주동자로 보이는 놈을 끝내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알렌은 다가갈수록 이상함을 느꼈다.

'왜, 흑마법사들이 대비하지 않지?'

붉은 피로 점칠 된 마법진이 거세게 박동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인을 맺던 흑마법사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신수 위에 있던 젊은 흑마법사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머릿속을 울리는 경종에 알렌은 감지력을 날렸다.

썩어가는 엘프의 시신, 흩뿌려진 고문의 잔해 그리고, 수북하게 쌓인 흑마법사의 시체.

"이런 미친 새끼가…!"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드디어 이해했다. 전력이 줄어들었던 이유가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라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

"알렌 형님?"

알렌의 중얼거림에 신수의 위에 있던 놈이 칭찬이라는 듯 기쁘게 웃었다.

그리고.

짝-

커다란 박수 소리가 울렸고, 그와 동시에 전장에서 당혹스러운 외침이 들렸다.

"갑자기 이 새끼들이 왜 자살을…!"

"공자님, 이놈들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것 같습니…."

흑마법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자신의 심장을 향해 단검을 박아 넣었다.

한 명도 아닌 모두가 자살을 선택하는 기괴한 모습에 전장이 멈췄다.

흑마법사들이 단체로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발밑의 마법진은 전장에 웅덩이진 피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였다.

콰앙.

땅을 뒤흔드는 소리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 어어! 저, 저게 갑자기 왜!"

"신수, 신수 님이…!"

신수가 젊은 흑마법사의 말에 따르듯 일어나고 있었다. 붉어진 눈에 이성은 찾아볼 수 없었고, 순백을 상징하던 흰 털이 검게 변색됐다.

베스틀라가 급하게 소리쳤다.

「당신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위험한 거 알죠?」

"나도 알아!"

쾅!

알렌은 무언가 일어나기 전에 전력으로 움직였다. 율리우스 앞에서 힘을 드러내든, 말든 지금은 이것이 더 중요했다.

신수가 일어난 직후부터 본능이 미친 듯이 경고하기 시작했다.

이다음에 일어날 일은 알렌으로도 감당하기 힘들다.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거친 풍압이 얼굴을 때리며 더 빠르게 가속했다.

카르넬은 가까워지는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조급하게 된 원인이 뭐였지? 어디서부터 어긋나 버렸나.

왜?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해 봤자 늦었지.'

그의 입술이 비틀렸다.

이미 일은 진행되었고, 준비한 의식도 마무리되기 직전이 되었다.

'사실 이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으니.'

놈들의 당황한 모습을 보니 계획을 선회한 것도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르넬은 느긋한 손길이 심장에 닿았다.

알렌은 미친 듯이 전력으로 그를 저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놈의 행동을 막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고.

"…하아."

젊은 흑마법사의 손이 먼저 심장을 찌르는 것이 더 빨랐다.

-푹

그가 미소 지었다.

"부디 행복한 꿈을 꾸시길."

흘러내린 피가 신수의 눈가를 적셨다.

"영원히."

그와 동시에 빛이 폭사했다.

삐───────

알렌은 귓가에 맴도는 이명을 끝으로, 시야가 의식이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 * *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알렌 형?"

절대 들릴 리 없는.

들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형? 빨리 대답해 봐, 형."

…진짜 동생의 목소리가.

제57화

인생에서 세 번의 순간이 찾아온다.

삶을 뒤바꿀, 단 세 번의 기회가.

키메라에게 터전을 잃을 위기에 처한 린벨은, 성문을 담당하던 병사들에게 사기를 당했다.

빼앗긴 재산의 반절. 강제된 어머니와의 이별. 엄습하는 허기와 갈증.

평생 촌에서 났던 그녀에게 있어 처음 맞이한 세상은 차가웠다.

무엇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알량한 정의가 있다고 믿으며 병사들에게 따지는 것뿐.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힘이 부족했다.

'뭐? 약속을 지키라고?'

정의로워야 할 병사는 뿌리까지 썩어 있었고, 지나가는 행인 누구도 그녀를 돕지 않았다.

실질적인 위협 앞에 조그마한 힘조차 보태 주지 않았고, 아무런 힘이 없던 그녀는 병사들을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렇게 병사들에 자신에게 흑심을 드러내려던 그때.

그가 등장했다.

겉으로도 드러나는 고귀한 품격과 사방을 압도하는 강한 기세.

'알렌 라인하르트다.'

그는 가문을 모욕한 병사들의 혀를 뽑아 버림과 동시에 나락으로 향하던 그녀를 구했다.

"네 이름이 뭐지?"

"…린벨 입니다."

흘러가듯 찾아온 열다섯의 삶.

그녀에게 있어 그의 등장은 인생을 뒤바꿀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소문으로 들었던 여타 귀족들과 달랐다.

평민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준다.

어쩔 수 없이 행한 죄의 사정을 이해해 준다.

그렇다고 목적 있는 호의를 베푸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었다.

다음날 바깥을 떠돌던 이넬리아가 그의 명령 한 번에 성문으로 들어섰다.

매우 큰 벽처럼 느껴졌던 성문은, 말 한마디에 가볍게 열렸고, 무서웠던 병사들도 그의 위세에 감히 반항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시녀가 되라는 그의 말에 곧바로 수긍했다.

'공자님의 시녀가 될게요.'

힘이 어떤 건지 알았으니까.

힘이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느꼈으니까.

고작 하루에 불과했으나, 린벨이 겪었던 일은 그녀의 심경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하루가 더 지났을 때, 이넬리아가 납치되었다. 아니, 납치당해 주었다.

'나 때문에.'

악마 같은 괴물은 린벨을 노골적으로 노렸고, 이넬리아는 그녀를 위해 순순히 악마를 따라나섰다.

그녀는 그때가 되어서야 진정한 힘 앞에서 권력은 통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진정한 힘 앞에서 무형의 권위는 힘을 갖지 못했고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것은, 적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통용되었다.

'내가 구해 주마.'

공자님은 강했다.

그는 혼자의 힘으로 수십 마리의 괴물을 해치웠고, 어떤 함정도 그의 발을 붙들지 못했다.

그런 그를 동경하게 되었다.

'힘, 힘이 필요해.'

공자님만큼의 강한 힘을.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불합리한 일에 대항할 무력을.

그녀가 보기에 알렌이 가진 힘으로 해내지 못할 일은 없어 보였다.

그 뒤의 일은 그녀의 생각대로 흘러갔다.

알렌은 이넬리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무사히 구출하는 것에 성공했다.

린벨은 그가 키메라 술사를 상대하는 것을 보았고, 망설임 없이 그녀와 함께 공방을 빠져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렌은 동굴에서 걸어 나왔다.

키메라 술사의 죽음과 함께.

'역시, 힘을 길러야 해. 나를 위해서, 엄마를 위해서, 또.'

공자님께 은혜를 갚기 위해.

다행히 그녀에게는 재능이 있다고 했다.

"너는 천재다. 다른 이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진짜 천재지."

그는 그녀가 특별하다고 했다.

프라나라는, 고귀한 힘을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너는 남들과 다르기에 분명히 할 수 있다고.

그녀는 기뻤다.

그의 말대로 강해질 수 있다는 말에, 동경하는 그의 기대를 받는다는 것에.

그렇기에 검을 휘둘렀다.

밤에도, 낮에도.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강해지기 위해서.

처음 받은 훈련에 포기하고 싶어도, 엄격한 시녀의 일이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왜, 왜 안 되는 거야."

바뀌는 건 없었다.

'노력이 부족했던 거야, 절박하지 않아서 그래.'

밤잠을 줄였다.

훈련하는 시간을 두 배로 늘렸다.

일상생활 속에 훈련을 섞었다.

훈련을 맡았던 여기사는 엄청난 재능이라 극찬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갔고.

"혹시, 자리가 불편하느냐?"

그녀는 여전히 프라나를 다루지 못했다.

절박했다.

"…헤헤. 마차가 조금 불편해서요."

바보같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넬리아와 달리 아직 서툰 시녀의 일과 기대에 부흥하지 못한 무력은, 그녀에게 위기감을 주었다.

동경하는 그에게 방해가 될까 봐.

무한히 쏟아지는 신뢰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서.

귀여운 연기 뒤로 절박함을 숨겼다.

도적들이 마차를 습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나설게요!"

지금껏 배웠던 기술로 도적을 죽였다.

살인의 충격은 없었다. 없어야 했다.

고귀한 힘을 각성하기 위한 시련이라 애써 자위했고, 떨리는 손은 혹독한 훈련 탓이라 넘겼다.

최소한의 가치를 보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넬리아와 잠시 다녀오마."

린벨은 저택에 남겨졌다.

또다시 홀로.

다시금 절실히 깨닫는다.

"…쓸모를 입증해야 해."

다시 검을 휘둘렀다.

홀로 남겨진 소외감은 질투가 되었고,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절박함은 집착이 되었다.

고귀한 힘이라는 게 뭐지?

"고결한 기사도를 서약하고, 숭고한 맹세를 세우며, 못 이룬 다짐을 지킨다."

프라나의 기본을 가리키는 말이자, 고귀한 힘이라는 것에 대한 핵심을 꿰뚫고 있는 문구였다.

"무엇을 담아야 된다는 거지?"

프라나는 감정을 담는다.

약속을, 맹세를, 선언을, 다짐을, 복수를.

그러나.

"왜 나는 못 하지? 왜? 왜? 어째서…."

닿지 못한다.

엄마는 공자님의 명령을 받고 수행하는데.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자신만이 고여 있었다.

그렇기에 다른 것에 매달렸다.

자신이 변화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지만.

"제발, 저도 데려가 주세요. 공자님."

알렌은 그녀를 데려가지 않았다.

마녀사냥을 위한 여정에 그녀의 자리는 없었다.

도적을 처치했을 때처럼 가치를 입증할 수 없고, 가까이 지켜볼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미소 지었다.

"따로 시킬 일이 있으니 이넬리아와 함께 남아 있거라."

린벨은 절망했다.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에 잡아 먹힐 것 같았다.

무한히 쏟아져 내리는 그의 호의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리고.

'....'

엄마는 또다시, 은밀하게 움직인다.

공자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을 제외하고.

"…나는."

린벨의 눈이 어둡게 일렁였다.

채워지지 않는 갈망은, 집착을 넘어 광기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끝에.

"아."

눈이 뜨였다.

일어나자마자 눈에 닿은 것은, 익숙하지만 다른 방의 천장이었다.

"…왜 여기에?"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저택에 있는 많은 별실 중 한 곳이었다.

"공자님을 따라 신수의 숲에 가고…, 그리고…?"

조금 전까지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

향하는 곳은 익숙한 공자님의 개인 서재였다.

그곳에 가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 수 있을 테니.

그런데 주위 하인들의 태도가 이상했다.

"너, 너는…."

"…네가 어떻게!"

"히익…!"

마치 귀신을 봤다는 듯, 죽은 사람을 목격한 것 같은 태도.

무언가를 물어볼 새도 없이 멀어지는 뒷모습에 그녀는 물어볼 마음을 접었다. 공자님께 가는 게 먼저였으니까.

저택의 복도는 조금 낯설었다.

'저런 게 있었던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물건들이 복도의 양옆을 장식하고 있었고, 그녀가 익히 알던 장소도 무언가 이질감이 들었다.

거기에 평소보다 인적이 더 적었다.

마치 이곳으로 가는 길을 피해 다니는 것처럼.

'그럴 리가 없지.'

공자님이 누구신데.

라인하르트 가문에서 공자님을 피할 이유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린벨은 잡생각을 지우고 빠르게 공자님의 개인 서재에 도착했다.

똑똑-

"공자님, 린벨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방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문의 틈 사이로 종이가 펄럭거리는 미세한 소리가 났다.

'연구하시느라 못 들으셨나 보다.'

엄마는 또 알렌의 명령을 수행하는 중일까.

린벨은 속에서 꿈틀거리는 감정을 억누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자님, 린벨입니다."

그녀가 다시 한번 입을 열자 미세한 소리가 우뚝- 멎었다.

그리고 도저히 알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쇠약한, 날카로운 대답이 들려왔다.

"아직 식사 시간은 아닐 텐데 무슨 일이지? 별일 아니면 꺼져라."

이상했다.

공자님이 저런 대답을 할 리가 없을 텐데.

린벨은 자신을 보고 도망치던 하인들의 모습과 이질적으로 느껴진 저택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녀는 섬뜩한 감각이 발밑을 타고 오르는 느낌에 몸을 움직였다.

허락받지 않는 것에 대한 벌은 받겠지만, 그녀는 이상하게 떨리는 불안감을 해소하고 싶었다.

벌컥-

"내가 꺼지라고 하지 않았느냐! 네가 뭔…."

문을 열자 그곳에 있던 것은.

"…네가 어떻게! 너는, 너는! 네가 어떻게 살아있는 것이냐! 나를, 나를 데리러 왔느냐? 설마, 설마…."

깎지 않은 수염과 붉게 충혈된 눈.

백치가 가득한 머리와 기미가 가득한 얼굴.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미안하다, 미안해.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안 된단 말이다! 나는, 나는 동생을 구해야 한단 말이다! 제발, 제발…."

알렌 라인하르트.

모습은 조금 달랐지만, 분명히 그였다.

"공, 자님…?"

"물러가거라. 내가 이렇게 부탁하겠다. 제발, 제발…, 동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단 말이다. 고개를 숙이라면 숙이마, 빌라면 빌겠다. 그러니…."

그는 린벨이 다가오자 벽까지 뒷걸음칠 치더니, 곧바로 바닥에 엎드렸다.

"공자님, 이게 무슨…."

린벨은 당황스러웠다.

이게 무슨 일이지? 공자님이 갑자기 왜? 그녀는 뭐라도 말해 보고자 애써 입을 열었다.

"…공자님, 왜 그러세요? 갑자기 무슨…, 엄마는 어디 있어요?"

"네 어미를 죽게 만들어 미안하다. 그러니 제발…."

"이넬리아, 공자님의 시녀잖아요. 죽다니 그게 무슨…."

"제발, 나는 시녀 따위를 둔 적이 없다. 언젠가 죗값을 치르겠다. 그러니 그만 사라지거라."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 사이에는 서로 이해하지 못할 간극이 벌어져 있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다른 분들은요? 소네드 상단주님이나, 카릭 상단주님은…."

"소네드 그 상인 놈에게도 갔나? 아니 카릭은 누구…."

그제서야 무언가 이상하단 것을 눈치챈 걸까, 핼쑥한 얼굴을 들어 올린 그는 손을 들어 책상의 약통을 낚아채더니 한 움큼 집어 입 안에 들이밀었다.

으적-

순식간에 동공이 풀리며 흐리멍덩한 시선이 멍하게 공중을 향한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몇 분이나 지나갔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중얼거렸다.

"…환각이 아니라고?"

평소보다 환각이 더 생생한 느낌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발작이 일어나려면 며칠이 조금 더 남았을 테니까.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이상한 것은.

"아니 그것보다…."

저택에 시체가 되어 돌아왔던 네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어…, 글쎄요?"

저택에 죽었던 린벨이 되살아왔다는 소문이 크게 퍼졌다.

대부분의 사용인은 믿지 않았지만, 저택을 돌아다니는 그녀의 모습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울리려는 사람은 없었다.

평소 괴물을 죽이기 위해 돌아다니느라 친한 사람 하나 없었던 탓도 있었으나, 그녀의 뭉개진 시체를 봤던 이들은 감도는 불길함에 자리를 피하기 급급했으니까.

둘째 날, 린벨은 알렌과 다시 만났다.

"…그게 끝이냐?"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알려 주었다.

"네."

이곳에 어떻게 왔는지부터.

자신이 알던 그의 모습과 그의 행동을.

그리고.

율리우스와의 관계까지.

알렌은 담뱃대의 독한 연기를 들이켜며 허탈한 얼굴로 조소했다.

"프핫, 결국 실패했나? 그렇다면 내 행동은 모두…."

그는 그녀의 이야기에서 무언가를 알아챈 것 같았다.

자신과 다르게 그는 머리가 좋았으니 린벨의 말에서 무언가를 알아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쓸모가 없겠구나."

그는 독한 와인을 병째로 들이켰다.

호박빛 액체가 순식간에 목구멍을 태웠다.

"크핫, 율리우스 놈과 화해를 해? 키메라 술사를 해치워? 도적 떼의 습격을 막아? 하, 하하! 정말, 정말 나다운 생각이야."

쾅-!

남은 액체가 출렁거리며 병 안에서 소용돌이쳤고, 알렌은 다시 깊게 담뱃대를 물었다.

그녀는 그 모습이 조금 어색했다.

평소 담배는커녕 술에도 손을 대지 않았던 공자님이었는데.

"정말, 정말로 나다운 생각이야…. 한 번 겪은 실수를 다시 저지르지 않을 테니."

무슨 생각으로 행한 것인지는 뻔했다.

내부에서부터 파먹어 가겠다는 말이 아닌가.

미래의 '내'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도 유추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미 실패했구나."

"그게 무슨…."

미래의 '내'가 버젓이 존재하고 행동하고 있다.

그리고 린벨은 미래의 '나'와 함께 있었다.

그 말은 한 가지를 뜻했다.

"이곳이 가짜라는 거다."

"네?"

그녀는 놀란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여기가 가짜라니요…? 이렇게 진짜 같은데."

"그래도 가짜라는 건 변하지 않지."

그는 허탈한 듯, 자포자기한 얼굴로 냉소적으로 웃었다.

시간은 절대로 과거로 흘러갈 수 없다.

그러나 어떠한 속임수든 편법을 사용했든 간에 결국 '나'는 과거로 돌아갔고, 그렇게 자신의 미래는 확정되었다.

그건 알렌이 어떠한 발버둥을 치든 결코 '현재'를 바꿀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러니 이곳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거나… 그래, 환상에 불과하지. 네 이야기에 따르면 아마…."

그 말은 곧.

"신수… 마지막에 본 것이 신수라고 했지? 그 신수랑 관련이 있을 거다."

그가 여기서 어떠한 짓을 하든,

동생을 구할 수 없다는.

"그것에 대해서는 내가 알아봐 주마. '나'의 시녀라고 했으니. 도움을 줘야겠지."

사형 선고였다.

그가 처연하게 웃었다.

"...."

린벨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매사에 완벽을 추구하며, 강한 무력을 가졌던 공자님은 없었다.

하지만.

'아직 모든 것을 이해한 건 아니지만….'

그녀가 동경하던 알렌과 다르다고 해도.

"그럼, 이제 공자님의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뭐?"

그는 처음으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콧잔등을 찡그리며, 눈썹을 모은 그의 모습은, 어느 때든 담담하고 차분한 모습만 보여주던 알렌이라면 보여 주지 않을 모습이었다.

"제 이야기만 하니까 억울하잖아요?"

"…내가 말하기에 뭣한데, '나'는 네가 그렇게 행동하는 걸 용인했나?"

"네, 당연하죠!"

당돌한 대답에 그가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이야기해 주지 못할 것도 없지."

아마, 대략 15년도 전에.

멍청한 형의 화를 풀려다 동생이 병신이 되었을 때에.

그 동생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 맹세한 형이 하나 있었다.

뒤바뀐 동생을 구하겠다는, 얼간이 하나가.

그렇게 시작되는 이야기였다.

제58화

"…그랬던 거구나."

린벨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은, 다 알고 계셨던 거네요."

"무엇을."

"저를,"

이제야 이해했다.

그의 뜻 모를 기대와 부담스러울 정도로 주어졌던 호의의 정체를.

공자님은. 알렌은. 그는.

"저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겠네요."

"그렇겠지."

그녀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제가, 어떤 활약을 할지도 아셨겠구요."

"그래."

숨길 것이 무엇이 있는가?

여기까지 말한 이상 감출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경멸하나?"

알렌이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느꼈다면 대신 사과하지."

"아니, 아니 그게 아니에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딴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그녀를 구했으니까, 몇 번을 감사해도 모자랐다.

그런데 이렇게 속이 부글거리는 이유는.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까닭은.

"왜, 그런 표정을 지으세요?"

"뭐?"

그래. 저것 때문이다.

"왜 다 끝난 것 같은 표정을 하세요?"

다 끝난 듯한, 희망 하나 없는 지쳐 보이는 얼굴.

"동생을 구하신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살았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런데 왜…."

그의 저런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알렌은 언제나 계획적이고 여유로운 사람이었다.

이렇게 절망에 허우적대는 사람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렇게 쉽게 포기하시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할까."

계속하라고? 그 짓을, 기약 없이?

"포기하지 않으면 모르잖아요."

'알렌'은 빈정거리는 어조로 그녀의 무지함을 비웃었다.

"결과가 정해져 있는 일에 끝없이 매달리라고?"

이번에는 뭘 바쳐서?

알렌의 초췌한 얼굴이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레이첼은 자살했고, 후계자 자리는 박탈당했다. 마법을 위해 젊음을 바쳤고, 이제는 주기적으로 발작까지 일으킨다. 약에 의지해 눈을 붙이며, 술이 없는 하루를 못 버틴다. 명예는 땅에 처박혔고, 다들 미쳤다고 손가락질만 한다. 하인들은 자신을 기피하며, 가족과는 그 얄팍한 관계마저 무너졌다.

여기서, 무엇을 더?

"끄륵…."

무엇을 더 포기해야 하는데? 다음은?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목구멍에서 조여 오는 느낌에 겨우 손에 잡힌 약을 짓씹었다.

결과는 정해져 있다. 하지만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다.

놈이 버젓이 살아 있으니까.

그렇지만 동생을 구할 방법은 없다.

그는 골방에 갇힌 사형수였다.

"공자님, 괜찮으세…."

린벨이 발작하는 그의 모습에 급히 다가섰다.

잘 관리한 흑발이 찰랑이며 걱정 어린 목소리를 토했다.

알렌이 말을 쥐어짜 냈다.

"나는."

그녀의 손길을 쳐 냈다.

"네가 알던 그놈이 아니다."

그는 같잖다는 듯 비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그러니 애써 가까이 다가올 필요 없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골방 구석의 침대로 몸을 던졌다.

가능성이 없기에 포기하는 것이다.

차라리 실낱같은 희망이 보였다면 악마와 계약이라도 했겠지.

하지만 이미 실패한다는 것이 확정되었다면.

"…네가 돌아갈 수 있도록 도움은 줄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가올 공포를 마주할 필요가 없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방을 나가는 소리도.

시간은 흘러가기 시작했다.

알렌은 율리우스를 구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했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술과 담배 그리고.

"공자님, 이것 봐요! 오늘은 꽤 맛있게 만들어졌어요."

한 명의 시녀가 전부였다.

그녀는 직접 요리한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필요 없다."

알렌이 남은 술병을 마저 비웠다.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닌, 지금까지 회복했던 것으로 변명을 대고 저택의 일원이 되었다.

"누가 요리를 가져와 달라고 했지? 어차피 진짜 주인도 아닐 텐데."

"저는 공자님의 시녀니까요."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알렌은 비웃었다.

"개소리는. 마음대로 해."

율리우스가 살아 있는 한 스스로 삶을 마무리 할 수도 없다.

그는 살아 있는 시체나 다름없었다.

"네! 알겠어요!"

그녀는 구김살 없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의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왜 여기 있는 거지? 저번에 율리우스 놈이 왔을 텐데?"

여전히 그녀는 알렌의 곁에 있었다.

"돌아가기 위해서 놈의 곁에 따라가는 게 더 나을 텐데?"

"공자님이 원하시지 않을 테니까요."

그 정성은 따듯했다.

한순간 기대고 싶을 정도로.

"아, 공자님. 저번에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고 했죠?"

"…그래, 그랬지."

술김에 고개를 끄덕인 기억이 있었다.

"프라나를 익힌 사람들을 불러 주세요."

그녀는 눈이 확신에 찬 듯 별처럼 영롱히 반짝였다.

"최대한 많이."

별빛은 아늑했다.

어둠 속을 비출 만큼.

그녀가 이곳에 떨어진 지 2년이 흘렀다.

린벨의 일과는 이제 알렌의 방에서만 국한되지 않았다.

"수련을 하는 이유가 뭐지?"

그녀의 흔적이 훈련장 전역을 뒤덮었다.

이미 이 세상은 신수의 폭주로 인해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시련을 통과하지 못하는 이상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할 텐데."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이 정도니까요."

그녀는 찬연히 웃었다.

손에 쥐고 있던, 순흑의 검과는 반대되는 웃음이었다.

"쓸모없는 행동이다."

알렌은 그녀의 노력을 깎아내렸다.

어울려 주는 것도 잠깐의 유흥일 뿐이었다.

"넌, 실패할 거다."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제가, 공자님 대신 노력할게요. 몇 번이고."

알렌은 반응하지 않았다.

주저앉은 그의 앞에서 검은 궤적이 그림을 그렸다.

그녀는 프라나는 여전히 다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어느 순간 사람을 불러 달라는 부탁이 줄었다.

가끔씩 눈을 돌릴 때면 명상을 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린벨, 뭐 하는 거지."

"고결한 기사도를 서약하고, 숭고한 맹세를 세우며, 못 이룬 다짐을 지킨다."

그녀는 알렌의 말을 듣지 못했다.

"프라나는 왜 감정을 담는 거지?"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을까.

마력도, 신성력도, 오러도 다 근원이 있다.

"그런데 왜 프라나만 고귀하지? 다른 힘은 하찮은 걸까? 프라나는 왜 감정에 반응하지?"

그녀는 프라나라는 힘의 본질에 대해 파고들었다.

이러한 것을 담게 된 이유를.

"프라나는 감정의 영향을 받지. 왜?"

강렬하고, 맹목적인 감정을 통해 힘을 얻으며, 그 감정의 농도에 따라 힘의 크기가 변화한다.

"하지만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는다면?"

그녀는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검을.

"결핍되었기에 맹목적이고, 유한하기에 부족하다."

그림자가 검무를 췄다.

순흑이 동조하며 진동했다.

"평범한 상태로는 끌어낼 수 없기에."

담아라. 담겨라.

온전치 못하다면 차라리 잘라 내라.

"행동을 제약해라. 복수를 맹세하라. 염원을 붙들어라. 일생을 걸어라. 그리고…."

나락에 빠져라.

갈망하고, 또 갈구해라. 간절히, 더 절실하게.

"소망을, 기대를, 희망을, 염원을, 바람을."

여기에 있는 몇 년간 많은 것을 보았고 또 겪었다.

기사도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제약한 기사와,

다짐을 잊지 않기 위해 널리 선언한 왕과,

가족의 염원을 지키겠다 약속한 전사를.

"오로지 단 하나만의 감정만을 남길 때까지."

기사와 논담을 나누었다.

왕의 소문을 들었다.

전사와 겨루었다.

그리고.

"그리하여 온전한 몰입을 통해 열망하면, 그곳에는 영원이 깃든다."

어미를 잃고 복수를 맹세한 다른 '나'의 끝을 알게 되었다.

"이게 고귀한 힘이라고?"

그녀는 헛웃음을 흘렸다.

사용 조건도 까다로운 결핍투성이 힘 따위가?

"이걸 쓰지 못한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 따위는 없었는데."

그녀는 검을 놓았다.

아니, 스스로 옭아매던 집착을.

"…뭔가 진전이 있나?"

"아직은 아니에요, 그런데…, 기대하시나 봐요? 헤헤."

"하, 지랄 맞기는."

여전히 알렌은 린벨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넌 닿지 못할 거다."

"걱정하지 마세요.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요."

시간은 더 빠르게 흘러갔다.

율리우스의 이름은 나날이 높아졌고, 알렌의 명성은 갈수록 추락했다.

바닥으로, 더 바닥으로.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알렌과의 시간을 늘렸다.

무의미한 서로의 시간이 쌓여 간다.

알렌은 마지막을 준비했다.

덧없고, 무의미한 삶의 끝을.

"넌 어찌할 거냐."

율리우스가 산맥에 나타난 재앙의 전조를 조사하기 위해 홀로 찾아온다고 했다.

"여기에서의 죽음이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구할 수 없다면 죽인다.

살 수 없기에 죽는다.

"저도 따라갈게요."

"얼마 뒤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 텐데."

"공자님의 시녀니까요."

알렌이 황량한 미소로 답했다.

"…마음대로 해라."

율리우스를 향한 습격은 당연하게도 성공하지 못했다.

모든 공격은 가볍게 가로막혔고, 함정 대부분이 사용하기도 전에 부서져 내렸다.

놈은 얻었던 정보와 다르게 동료가 있었다.

떨어진 팔 한 짝과 끔찍한 전신 화상.

그것이 놈을 습격하고 얻은 것의 대가였다.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사실 알고 있었다.

습격이 실패할 것이라는 건.

그럼에도 움직였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으니까.'

삶의 이정표를 잃으니, 애써 유지하던 희망이 사라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율리우스, 내 동생. 곧 만나겠구나.'

환상 속에서도 저승은 있는가?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꺄아악! 라니엘! 어떻게!"

높은 비명 소리가 산자락을 울렸다.

율리우스가 데려온 부하 중 한 명의 목소리였다.

"린, 린벨,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라니엘이 전에 너에게 얼마나 잘해 줬는데!"

"공자님."

그녀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알렌을 불렀다.

"왜."

"아직도 그 생각은 여전하세요?"

"당연하지."

아직도 단념하지 않았는가.

"그만 포기하고 도망가라. 율리우스 놈의 발을 겨우 묶어 놨으니."

알렌이 저 멀리서 터져 나오는 폭음을 들으며 담담히 뇌까렸다.

"그래요?"

"그래, 도망가서. 누군가 시련을 끝마칠 때까지 숨어 지내라."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그럼, 보여 드릴게요."

그녀는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알렌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미련하기는.'

마지막까지 와서 이루지 못할 희망을 논하다니.

"저년은 놈에게 세뇌당했다. 그냥 죽여!"

"동료가 죽었다. 살려 둘 필요 없지."

"라니엘의 복수를!"

화염과 강철의 비가 떨어져 내린다.

육중한 갑옷의 전사가 화살처럼 쇄도했다.

"공자님께서 말씀하셨죠. 미래는 정해져 있다고. 여기는 과거를 투영하는 가짜일 뿐이라고."

그녀의 발이 가볍게 총총거렸다.

"하지만 그건 틀렸어요. 이곳은 신수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시련일 뿐이에요."

서늘한 눈바람이 달아오른 피부를 식혔다.

"얼마든지 깰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수많은 전투를 겪은 백전노장이 두꺼운 도끼를 치켜들었다.

그녀의 검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죽어라!!"

순흑의 검이 반원을 그렸다.

푸슛-

"…케이든!"

"어, 어떻게 방어 마법을 뚫고…!"

전사의 몸이 허물어진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그걸 보여 드릴게요."

하늘에서 수십 개의 마법이 쏟아져 내렸다.

"이 자리에서."

나아감에 정수를 희망에 본질을.

그녀의 걸음이 아지랑이 같이 흔들렸다.

'아.'

검이 흩날리면 하나의 생명이 사그라든다.

"마법이 왜 안 맞는 거냐!"

"빨리, 빨리 전사들 막아! 막으라고!"

값비싼 방패가 빛났고, 푸른 방어막 앞을 막아섰다.

그녀의 검에는 아무것도 맺혀 있지 않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그들과 대비되었다.

-쾅! 쾅!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이상함을 느낀 걸까, 놈을 묶어 둔 곳의 폭음이 더욱 강해졌다.

"알았다, 알았으니 이제 그만 도망쳐라."

"무언가 바칠 필요도, 희생할 필요도 없어요."

그녀의 일검이 도망치는 자들의 목을 베기 시작했다.

붉은 핏물이 흰 눈을 적셨다.

"네가 무슨 방법을 썼든, 놈에게는 닿지 못할 거다!"

"닿을 거예요."

그녀의 속삭임이 귓가에 박혀 들었다.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