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렌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어차피 나는 진짜'알렌'이 아닌데, 어째서."
"저도 아니까요."
식어가는 몸뚱이 위로 그녀의 목소리가 그를 비췄다.
"닿을 수 없던 것에 대한 간절함을."
-저벅저벅
"그 간절함만큼은 영원하기 때문이에요."
"린벨."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그가 보였다.
오만함과 패기가 섞인 기세.
이 시대에는 만들 수도 없는 유물이 그의 곳곳을 장식한다.
진청색의 전류가 그의 몸을 맴돌았고, 한걸음에 반경의 설원이 증발했다.
당당한 태도에는 다른 이를 이끄는 존재감이 드러났다.
그녀가 알던 것보다 몇 년은 나이 먹은 얼굴.
"…네가 했냐?"
짜증을 숨기지 않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율리우스가 나직이 말했다.
파지직-
"예, 도련님."
그녀의 확답에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알렌이 힘겹게 눈을 부릅떴다.
"그래?"
율리우스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개를 거뒀군."
율리우스가 검을 들어 올렸다.
하늘에 웅장한 먹구름이 끼며 공간이 떨렸다.
기후를 조종하는 능력.
그는 일격에 모든 것을 끝내겠다는 듯 자신의 모든 것을 끌어냈다.
"저는 알렌 님께 가서 다행이라 생각해요."
엇갈린 대답.
그러나 율리우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볼 일은 없기에.
"…그래? 그럼 쓸모없겠구나."
하늘에서 떨어진 수백 개의 번개가 공간을 깨부수며 하늘의 심판을 내렸다.
검이 떨어져 내렸고, 세상이 백광으로 물들었다.
'늦었구나.'
시야를 가득 채우는 섬뢰가 낙하한다.
번개를 다루며 구름을 부리는 놈은, 마치 뇌신을 연상시켰다.
파지지지직-!
수증기가 폭발했다.
순식간에 눈이 녹아내리며 산 전체가 뿌옇게 물들었다.
털썩-
그녀의 몸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닿기는 무슨…."
단 일격에 그녀는 무너졌다.
한순간 차오른 기대를 애써 무너트렸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린벨은 시련에서 벗어날 테고, 자신은 동생을 만나러 가겠지.
평생을 좀먹던 환각이 스멀거리며 다가왔다.
"…공자님 아직 안 죽으셨죠?"
혼잡해지는 귀로, 린벨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렌이 눈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렁이는 수증기 사이로 하나의 인형이 일어서 있었다.
"살아, 있다고?"
율리우스도 놀란 얼굴을 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하, 애들을 죽일 만한 실력은 있다는 거지?"
"그러지 않았으면 습격할 리 없잖아요?"
다소 당돌한 대답.
그녀의 온몸이 번개 모양의 화상으로 짓눌렸다.
율리우스의 눈이 전광을 터트리며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지금이라도 내 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냐? 그 정도 실력이면 봐줄 수 있는데."
"죄송해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제 주인은 한 명뿐이라서."
제59화
"그래 어쩔 수 없네. 그렇다면-"
율리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죽어라."
"이제 그 공격은 파악했거든요."
린벨의 눈이 감겼다.
그녀의 발밑을 따라 검은 영역이 퍼지기 시작했다.
'아니 저건 검다기보다는.'
밤하늘.
저 하늘에 걸린 밤하늘처럼 맑았다.
그녀는 이곳에 처음 떨어졌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왜 이곳으로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신수의 시련은 당사자가 원하는 것과 관련된 시련을 보여 준다.
처음에는 프라나 때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쏟아지는 번개 사이로, 걸음을 내디뎠다.
한걸음에 간절함을 담았다.
두 걸음에 갈망을. 세 걸음에 기대를.
네 걸음에 바람을. 다섯 걸음에 희망을.
여섯 걸음에 소망을. 일곱 걸음에 열망을.
여덟 걸음에 다짐을.
"발버둥 치는구나!"
그녀가 마지막 발걸음을 남겨 두고 멈춰 섰다.
눈앞에서는 뇌기로 이루어진 용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웃긴 말이야. 자기 감정하나 통제하지 못하면서. 힘은 무슨."
그녀는 방금까지 읊조리던 모든 것을 잊었다.
"결국, 한계를 정하는 건 나 자신일 뿐."
린벨의 감정은 처음부터 단 한 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에 조금의 불순물도 첨가될 수 없다.
밤하늘에 은하수가 펼쳐지며, 그녀가 마지막 걸음을 내디뎠다.
마지막에는 맹세를.
이 아홉 걸음에 그녀가 깨달은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노력과 순흑의 능력이.
이 시련을 끝내기 위한 결말이.
수십 개의 감정이 올곧이 하나를 향한다.
발걸음에 밤하늘이 생기고, 그 위로 별이 반짝였다.
"아니, 어떻게 피했…!"
"잘 가요. 공자님."
별빛이 점멸했다.
밤하늘이 일어나 빙의자를 덮쳤다.
'정말, 해냈구나.'
전광을 뿜어내던 율리우스의 몸 위로 수십 개의 구멍이 뚫렸다.
하늘을 뒤덮던 뇌운이 흩어지고, 고귀한 몸뚱이가 바닥을 굴렀다.
"공자님, 봤어요? 할 수 있잖아요."
그녀의 눈에 멍청히 입을 벌리고 있는 그가 보였다.
알렌 라인하르트.
자신이 모시던 그분같이 완벽하지도 않고, 여유롭지도 않았다.
약이 없으면 자지 못한다.
몸이 망가지면서도 술과 담배를 놓지 못하고.
말로는 포기하라며 면박을 주면서도 속으론 걱정이 가득하다.
"왜요, 안 믿겨요?"
그녀가 절뚝이며 알렌을 내려다봤다.
"어떻게…, 어떻게 네가 율리우스를…."
붉은 진물로 가득한 그녀의 몸이 보였다.
"그거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큭, 그래."
알렌의 눈에 더 이상 혼란은 없었다.
그는 숨이 차도록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쉽게도 진짜 율리우스 님은 구하지 못했지만요."
"그건, 이제 됐다."
"왜요?"
"네가 닿지 않았느냐. 네가 닿았다면, 나도 할 수 있을 거다."
"과거는 못 바꾼다면서요."
린벨의 툴툴거림에 알렌이 우습다는 듯 답했다.
"그럴 줄 알았지. 아, 마지막의 기술에 이름이 있나?"
"아니요. 아직은 없어요."
"그럼 내가 정해도 괜찮겠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테스카틀리포카(Tezcatlipoca.)"
"무슨 뜻인데요?"
알렌은 웃으며 답했다.
"연기 나는 거울이란 뜻이다."
"엑, 그게 뭐예요."
"뭐, 그런 뜻보다는 고대에 몰락한 신의 이름을 뜻하는 게 더 대중적이지."
"무슨 신인데요?"
"전쟁의 신이자 밤의 신 그리고 사신."
검은 하늘 위에서 목을 수확하는 그녀의 모습과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뭐, 나쁘지 않네요."
"애매하기는."
알렌이 웃음을 터트리자 그녀도 따라 웃었다.
"그러니까…."
린벨은 차분한 어조로 속삭였다.
"이제 포기하지 않으실 거죠?"
"그래."
포기한다는 말이 사치일 정도로.
알렌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게 되었다.
"혼자서 우는 일도 없으실 거고요."
"그래."
"밥도 잘 챙겨 먹어야 해요."
"그래."
세상이 조각나 흩어지기 시작했다.
시련의 끝이 다가왔다.
"술과 담배도 안 하실 거죠?"
"그건…."
이번엔 조금 대답이 늦었다.
"빨리요."
"노력해 보도록 하지."
그녀를 처음 봤을 적이 떠올랐다.
처음에 시끄럽게 굴 때는 쫓아낼까 생각이 들었는데.
"그리고…,"
세계가 끝에서부터 아스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제 시중은,"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음에 드셨나요?"
알렌은 자신의 표정이 웃고 있기를 빌었다.
"그래, 내가 받아 본 최고의 대접이었다."
"얼마나요?"
"나 따위가 받기에 과분할 만큼."
그녀가 안도했다.
"다행이에요. 도움이 돼서.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알렌이 진심을 담아 답했다.
"정말 고마웠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진짜 '알렌'에게 안부를 부탁하지."
"꼭 전해 드릴게요."
"…너라서."
그녀의 모습이 멀게 보였다.
옅은 빛무리가 시야에 가득 찼다.
"다행이었다."
정말로.
알렌의 얼굴 위로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그녀를 배웅했다.
린벨의 시련이 끝을 맞이했다.
* * *
꿈을 꿨다.
굉장히 긴 꿈을.
"───────."
하지만 잠에서 깬 순간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분명 뭔가 중요한 걸 봤었는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는데.
"반드─────!"
"저──!!"
생각나는 것은 깨어진 꿈의 파편 사이로 느꼈던 아득한 감정뿐.
수십 개의 감정이 뒤섞여 아스라이 곁으로 흩어졌다.
가장 먼저 스치는 감정은 기쁨이었다.
오래도록 헤어진 가족을 다시 만난 것 같은 충만한 행복.
"───스!"
그런 즐거움이 빠르게 흩어지며 슬픔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우울함, 고통, 낙담, 괴로움….
가슴을 바위가 짓누르는 듯한 감정에 잡아먹히려던 때, 희망이라도 발견한 건지 심장이 세차게 두방망이질 쳤다.
"──시 ─마! ────!!"
그렇게 환희와 함께 어떤 결의를 품었고, 동시에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며 눈이 뜨였다.
"아."
눈을 뜬 알렌이 주위를 둘러보자 다른 병사들도 하나같이 한바탕 꿈이라도 꾼 듯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머리가 어지러웠다.
해야 할 행동이 있었다.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동생아."
율리우스의 목소리를 들었다.
알렌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그때, 침착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공자님."
고개를 돌리자 언제 다가왔는지, 린벨이 침착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한층 깊어진 눈동자.
묘하게 침착한 분위기.
"…린벨?"
무언가 달라진 듯한 그녀의 모습에 알렌이 의아한 눈을 하기도 잠시, 그녀는 알렌에게 무엇을 하느냐는 듯 입을 열었다.
"뭐 하세요? 공자님?"
"…뭐?"
린벨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병사들을 가리켰다.
"공자님께서 병사를 다독이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무방비하게 널브러진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혼란스러워하며 혼잣말을 지껄이는 병사.
무언가를 본 듯 겁에 질려 몸을 떠는 병사.
아직도 환상을 벗어나지 못한 듯 멍한 눈을 한 병사.
그 모습을 본 알렌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야지."
힐끔-
린벨을 보았다.
그 전의 어리숙한 모습과는 다르게, 능숙한 자세로 자신의 뒤에 시립한 그녀.
'…무슨 일이 있었구나.'
알렌은 그것이 시련과 관련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혹시 율리우스와 관련이….
'아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것을 물어야 할 때가 아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들 정신 차리도록-!"
알렌이 꿈에서 깨어났다.
* * *
사건은 빠르게 마무리되기 시작했다.
"이번엔 같은 실수 따윈 없을 겁니다."
신수의 능력에 속절없이 당한 탓일까, 기사단장은 비장한 얼굴로 앞장서서 움직였다.
그 뒤로 기사들과 병사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남은 잔당을 처리하기 위해 숲으로 흩어졌다.
"신수 님의 상태는?"
"흑마법의 흔적이 남아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엘프들은 정신을 차린 즉시 신수를 향해 달려왔다.
능력을 무리하게 폭주시킨 여파인지, 혹은 강제로 타락한 부작용인지, 신수는 흑마법의 부정한 기운에 몸이 좀먹히고 있었다.
의식도 깊게 가라앉아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
그런 신수의 모습을 살피던 나타샤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급히 율리우스에게 다가갔다.
"율리우스 공자, 전의 일은 사과하죠.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예, 네?"
그때까지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율리우스는, 그녀의 요청에 따라 신수를 정화(淨化)하기 시작했다.
그의 뇌 속성 마력은 흑마법과 상극이었으니 이런 일에는 제격이리라.
그렇게 병사들과 기사, 엘프들의 정신이 모두 팔린 틈을 타, 알렌은 거인과 전투를 벌였던 공터의 너머로 향했다.
죽은 거인의 시체와 망가진 공터.
불과 몇 시간 전에 왔던 곳임에도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몇 년은 지난 것 같군."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해요? 갑자기 다들 쓰러져서는!」
알렌의 무딘 감상이 불만이었던 걸까, 그의 뒤로 몇 명의 병사가 따라오고 있음에도 그녀는 입을 열었다.
「한순간에 정신을 차려서 망정이지, 몇 년 동안 그대로였으면 어쩔 뻔했어요! 방심이나 하고!」
"…그건 미안하긴 한데, 정말 신수의 시련을 받지 않았나?"
「받지 않았다니까요? 누가 습격할까 봐 지켜 줬는데, 고맙다고 말은 못 할 망정!」
"…정말 고맙군."
「에헴. 역시 저밖에 없죠?」
알렌은 쓰게 웃으며 평소처럼 소리치는 베스틀라를 보았다.
'신수의 시련에 들어가지도 않다니.'
무생물은, 아니 에고 소드는 대상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 건가?
그렇다기에 폭주로 강해진 능력과 생명체의 정신을 끌어당기는 능력이라면 그녀도 피할 수 없었을 텐데….
'혹시 원하는 것이 없어서?'
신수의 능력이 시련과 보상이니, 처음부터 원하는 것이 없다면 신수의 능력을 회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생각이 들기 무섭게 알렌은 스스로 가설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지.'
「빨리빨리 와요! 아까부터 여기가 너무 궁금했다니까요?」
그녀가 아까 거인에게 보인 반응만 봐도 원하는 것이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그녀의 정신력이 신수보다 고등하기에 능력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그럴듯했다.
"알았으니 천천히 움직이지. 뭐가 있을지 모르지 않나."
알렌은 흑마법사의 함정에 빠져 신수의 시련에 휩쓸린 이후 부쩍 경계심을 끌어 올렸다.
그러나 그의 긴장이 무색하게도 건물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챙겨 갈 것도 없겠군."
허물어진 벽을 지나니 어질러진 실내의 모습이 보였다.
무더기로 쌓인 괴물의 시체와 여기저기 흩어진 자료들. 실내에는 썩은 냄새가 진동했고, 사방의 벽은 무너져 내려앉았다.
부서진 벽과 일직선으로 뚫린 통로의 흔적을 볼 때, 죽은 거인이 여기서 탈출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키메라였나.'
재생력과 힘 모두 뭔가 어설프더라니.
겉모습만 그럴듯하지 제대로 된 거인의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알렌은 곧바로 감지력으로 실내를 훑어보고는, 건물 외곽에 대기하던 병사들을 불러 수색을 지시했다.
그러나 쓸 만한 무언가를 얻어 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바닥과 벽면에 가득한 그을림과 무언가를 불태운 듯한 흔적은 중요한 정보가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했다.
"무언가 발견한 게 있나?"
알렌의 물음에 베스틀라는 실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안에 들어오면 뭔가 느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요.」
"유감이군."
「아니에요. 어차피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그녀는 홀가분한 어조로 중얼거리더니 다시 쾌활한 어조로 소리쳤다.
「이제 여긴 됐으니 저기나 가 봐요! 신수가 깨어난 것 같으니까요!」
알렌은 수색병들에게 혹시 모르니 남은 자료를 수거하라 명하고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저게 진짜 신수구나…."
"또 공격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멀쩡하게 대화하고 있는데."
병사들의 곁을 지나 도착하니 막 신수가 율리우스에게 사람 몸통만 한 알을 건네주는 모습이 보였다.
제60화
제대로 된 신수의 모습은 엄청났다.
전체적인 형태와 긴 주둥이는 늑대를 연상시켰지만, 동산만 한 덩치와 등을 가로지르는 갈기, 햇살에 반짝이는 순백의 털, 그리고 머리 위에 솟은 보랏빛 뿔은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신수 님! 어찌 외부인에게 알을!"
"나를 도와준 선인에게 맡기는 게 무엇이 문제가 되겠느냐."
베스틀라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느낌의 텔레파시.
"하지만…!"
"그만. 이번 일 탓에 나는 오래 잠들 수밖에 없고, 그것을 위한 수호자로 그를 선택했다."
"그럼 저희 엘프들은…."
"이번 일의 대처를 보면…, 엘프에게 수호를 맡겨도 될지 조금 회의적이구나."
"그건…."
신수의 대답에 나타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이번 일에 대한 엘프의 대처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으니까.
'만약, 라인하르트 쪽에서 지원을 해 주지 않았다면….'
뒤로 이어지는,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그녀는 황급히 상상을 지워 냈다.
"그는 나를 정화했고, 삿된 것들을 물리쳤으며, 숲을 지켜 냈다. 그러니 자격은 충분하다."
신수의 단호한 대답에 나타샤는 율리우스를 한 번 쳐다보고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알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잠드신 사이에는 저희가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신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맡기지."
그 대답에 나타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답을 마친 신수는 그녀를 무시한 채 율리우스에게 알을 건네주었다.
"그대 덕분에 타락하지 않을 수 있었다. 보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만약 이 아이의 수호자가 되어 준다면…."
"예, 하겠습니다! 반드시 어린 신수의 수호자가 되겠습니다."
율리우스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수를 타락시키려는 흑마법사를 막고, 제한 시간 내로 신수를 구하세요! (완료)]
[보상 : 신수의 호의, ???]
'미친, 물음표 보상이 신수의 알이라고?' 그는 원작에서 신수 해룡을 다루던 조연을 떠올렸다.
끔찍하리만큼 강력한 힘과 해일을 일으키던 능력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이것만 받아 낸다면, 신수의 능력을 통해 '무지개 마안'을 강화하지 못했어도 이득이었다.
"잘 부탁하지. 그리고…"
율리우스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던 신수는 알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베스틀라는 신수의 눈이 닿기 무섭게 제멋대로 움직여 알렌의 앞에 떠올랐다. 알렌은 누가 볼세라 얼른 검의 손잡이를 낚아챘다.
「누구를 넘봐요? 얘는 내가 먼저 찜했거든요?」
신수의 표정을 정확히 읽을 수 없었지만…, 아마 쓴웃음을 짓고 있지 않았을까.
"그대에게는…, 이미 걷는 길이 있으니 대신 이것을 주지."
"신수 님 그건…!"
뚝-
곁에 남은 엘프들이 놀라 소리쳤으나 신수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하나뿐인 뿔을 떼어 내서 후- 불었다.
"저항하지 말게. 악의는 없으니."
보랏빛의 뿔은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알렌에게로 날아왔다.
'피해야 되나?'
아니, 은혜를 원수로 갚지는 않겠지.
알렌은 긴장하며 숨결을 타고 들어오는 보랏빛 가루를 들이켰다.
호흡을 통해 가루가 몸에 흡수된 순간.
"…이건!"
감각이 확장된다.
노심 속의 요동치는 마력이 아닌, 외부의 마력이 물결치듯 몸을 맴돌기 시작했다.
퍼트린 감지력에 깃든 의지에 따라 외부의 마력이 자연스럽게 순응했다. 알렌은 언제든 내부의 마력과 동조해 자유자재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와…, 거인의 신체와 용의 심장. 이제는 환상종의 감응력까지? 키메라가 따로 없네요?」
새로운 감각이었고, 축복이었다.
그러나 그 감각을 맛보기도 잠시, 갑자기 오감이 증폭되며 거대한 통증이 그를 덮쳤다.
「알렌, 알렌? 뭐예요! 야! 이게 무슨…!」
시야가 미친 듯이 확장되며 머리가 어지럽게 변한다.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이 되어 귓가를 때렸고, 들이켠 숨에 온갖 냄새가 뒤섞여 구토를 유발했다.
스치는 바람에 칼에 베인 듯 피부가 따끔거렸고, 일정 이상의 예민함에 혀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읍…!"
몸을 지탱하는 오감의 이상에 알렌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이런, 아직 일렀구나."
신수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다시 한번 숨결을 불자, 알렌은 보랏빛과 다른 청록색을 숨결을 들이마셨다.
"크흡, 후…."
몇 번이나 숨을 들이켠 알렌은,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온 감각에 안도했다.
'일정 이상의 감각은 오히려 저주에 가깝군.'
신수는 미안하다는 듯 침울하게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고의는 없었으니 용서해 다오."
"괜찮습니다. 의도적이지 않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감응력은 막아 둔 상태란다. 네가 감당할 수 있게 된다면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했으니, 다음부터 이번과 같은 일은 없을 거란다."
신수의 말대로 천천히 감각을 떠올리자, 오감이 조금씩 예민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딱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선까지.
'그래도 평소 감각의 몇 배라니….'
잘 사용한다면 전력에 얼마나 보탬이 될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알렌은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전했다.
약간 미묘한 표정으로 기뻐하는 율리우스의 모습이 거슬렸으나,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당황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건 내 쪽인가….'
신수의 시련을 통해 동생의 흔적을 찾으려고만 했지, 이런 보상을 얻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신수는 그 후에 수색을 마치고 온 기사단장에게도 축복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단 하나의 불순물조차 섞이길 원치 않는다며 거절했다.
그 모습에 되려 엘프들이 놀라워했다.
"죄송합니다. 신수 님."
하지만 기사단장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엘프들도 원래라면 오만하다고 소리쳤겠지만, 그들의 도움 덕분인지 그의 선택을 존중했다.
어느새 알렌이 시킨 일을 마친 이넬리아가 그의 곁에 섰다.
"…감사했습니다. 공자님."
"아닙니다. 나타샤 공주님. 다만 저희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그 건에 대해서는 최대한 좋게 해결하겠습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알렌은 엘프들과 인사를 마지막으로 신수의 숲을 떠났다.
율리우스는 끝까지 미련 가득한 눈으로 나타샤의 뒷모습을 훔쳤고, 카밀라는 결심한 듯 율리우스를 응시했다.
"그럼…."
알렌은 달라진 분위기의 린벨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이넬리아의 모습을 지켜보며 소리쳤다.
"영지로 복귀한다!"
저택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리고.
'이제 몇 달 후면….'
드디어 아카데미로 향할 때가 왔다.
* * *
죽은 이를 위해 묘비를 세운다.
그러나 죽은 이에게 묘비는 필요 없다.
묘비는 산 사람을 위한 것이다.
죽은 이를 추모하기 위해, 산 사람이 추억하기 위해.
그렇다면, 살아 있는 이의 묘비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율리우스 공자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숲에서의 위업은 전해 들었습니다! 정말 엄청나셨다고…."
쏴아아-
알렌은 어두운 복도를 홀로 걸었다.
바깥에서는 질척한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검은 구름이 게걸스럽게 하늘의 빛을 집어삼켰다.
"공자님, 저희 영지에서 조각한 보석으로…."
"율리우스 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실지 알 수 없어, 200년 전 만든 와인을…."
연회장의 떠들썩한 소리가 멀게 들려왔다.
어두운 복도에는, 알렌을 제외한 그 누구도 없었다.
"호, 혹시 곁에 있는 알이 바로 그, 소문의…."
"율리우스 공자님께서 바뀌셨다는 이야기는 정말 놀랍고…."
그가 향하는 장소에도.
"하하하, 정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신수의 숲에서 돌아온 지 벌써 아흐레가 흘렀다.
그 사이에 소문은 흘러 숲에서의 일이 인근에 퍼져 나갔고, 많은 귀족이 관심을 가졌다.
"저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연회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전합니다."
그동안 외면했던 가문의 초대를 율리우스 생일을 구실삼아 참석할 정도로.
"이번 년의 마지막을 맞이함에 따라 새해의 안녕을 기리고, 언제나 좋은…."
저들의 목적이 순순히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함이 아니겠지만, 상관없다.
가문의 목적도 건재함을 알리는 것이 목적일 테니.
오랜만에 도착한 화원은 여전히 활짝 피어난 화초들로 가득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얼굴을 쓸었고, 익숙한 오솔길의 구석진 곳에는 그것이 있었다.
작은 돌탑.
회귀한 직후에 직접 쌓아 올렸고, 저택에 있을 때면 몇 번이고 찾아오는 장소.
그런데 세찬 바람 때문이었을까.
"…무너져 내렸군."
알렌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흙이 옷에 묻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
그리고 다시 돌탑을 천천히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옅은 흙더미에 잠긴 돌멩이에는 이끼가 껴 비릿한 냄새가 났다.
이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알렌은 쓰게 웃으며 속에서 떠오른 생각을 지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탑이 세워졌다.
"…이걸 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나."
삐뚤빼뚤. 아슬아슬하게 무너질 것 같은 그 돌탑을, 알렌은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이름도 없다.
시체도 없고, 유품도 없다.
유언마저도.
"율리우스."
뜻도, 의미도, 가치도 없는 그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그저 자신의 기억에 고인 그를 추억하기 위함일 뿐.
그 자기만족뿐인 행위임에도. 알렌은, 나는 정말 동생에게 말하듯이 입을 열었다.
"…내 동생아."
이건 진짜 동생의 무덤이 아니다.
잃어버린 동생을 죽었다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되찾는 것을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알렌은 입을 열었다. 말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잊어버린 꿈에서 너를 보았다.
"그동안 많은 일이 흘렀다. 새롭게 다짐한 것도 있었고, 다시금 깨달은 것도 있었지."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니면 시련의 환상인지 모른다.
"너는 잘 지내느냐? 잘 지내겠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너라면 그럴 테니."
어쩌면 지독한 망상일지도.
"이번에 많은 귀인이 찾아왔다."
그럼에도, 그렇더라도.
"오늘은 너의 생일이지 않느냐."
정말로 '너'에게 축하를 보낸 이가 하나도 없다면 조금 억울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선물이다."
들고 있던 와인의 마개를 땄다.
"좋아하는 술이다. 만족하길 바라마."
알렌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바깥에 오래 있어서일까, 얼굴에 떨어진 물방울이 조금 뜨겁게 느껴졌다.
"율리우스 님의 열여섯 번째 생일을 위하여!"
"위하여!"
꿀렁거리며 떨어지는 와인의 뒤로 연회장에서의 목소리가 파문처럼 번졌다.
흘러내린 술이 빗방울에 섞여 돌무덤의 사이로 스며들었다.
"와아아아!! 축하드립니다!"
알렌이 귓가에 스치는 환호 소리를 음미하며 입을 열었다.
"율리우스."
네가 살아 있을 거라고 믿는다. 언제나, 언제까지라도.
"열여섯 번째 생일, 진심으로…."
그러니, 부디….
"축하한다."
놈을 죽이기 전까지, 너를 찾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타닥
그때, 소리가 들렸다.
다급히 발걸음을 움직이는 소리. 알렌의 눈이 차갑게 소리가 들린 곳을 향했다.
저택의 2층 창가 복도.
알렌이 얼굴의 빗방울을 털어 내며 감지력을 일으켰다. 검은 인영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누구지? 기사단장? 이넬리아 아니면 린벨?'
어쩌면 이번에 가문으로 왔던 손님 중 한 명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누군가는 알렌의 감지력이 닿기도 전, 한 발짝 빠르게 연회장으로 사라져 버렸다.
알렌은 연회장 직전까지 뻗었던 감지력을 멈췄다.
"…한발 늦었군."
귀족들의 몸을 함부로 감지하는 것은 큰 무례에 속한다.
거기에 각자 데려온 호위들이 그들의 주인을 마음대로 살피도록 허락할 리도 없으니 여기서 끝내야 했다.
"후…."
알렌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평소의 그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언제나 완벽한 모습을 보이며, 여유가 가득했던 자신으로.
라인하르트 가문의 1공자로.
잿빛으로 덧칠된 하늘 아래, 회색 돌무더기가 세찬 비에 씻겨 내려갔다.
알렌을 위한 돌무덤이.
* * *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렀다.
하얗게 세상을 물들이던 겨울이 지나가고, 새로운 생명이 발돋움하는 봄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알렌은 조직 정비를 끝마치고 도시로 들어온 아칸더스와 만났다.
"…조직을 정리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만난 아칸더스는 전과 달라져 있었다.
술에 취했던 전번의 모습과는 다르게 깔끔한 정복을 입고, 이지적인 눈동자를 드러낸 채 절도 있는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전과는 태도가 많이 다르군."
"명목상으로 제 주인이 되셨으니, 공과 사는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도 그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미친개한테 물리기 싫다면 말입니다."
알렌은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같이 있던 이넬리아가 언짢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아칸더스는 어쩌라는 듯 콧방귀를 낀 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알렌은 확실히 이 모습이 더 그답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숙인 체 꿍꿍이를 숨기는 것보다야.'
"그래서…."
아칸더스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저희는 무슨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알렌은 그에게 소네드와 카릭에게 했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최근 영지에서 불법적인 암거래가 발생한다고, 워낙 은밀하게 진행되기에 잡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너와 같이 일하게 될 두 명에게 자세한 정보를 들으면 될 거다."
"알겠습니다."
아칸더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잡일은 맡게 될 거라고는 예상했다. 기껏 모은 인력을 내버려 두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그리고… 네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을 모으는 거다."
"사람을, 말입니까."
아칸더스가 의아함을 내비치자, 알렌은 가볍게 말했다.
"네가 평소에 하던 대로 하면 되는 일이지."
"그건…."
"율리우스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을 끌어모으는 건, 잘하지 않나?"
알렌의 말에서 무언가를 느낀 걸까, 아칸더스는 경직된 표정을 지었다.
"혹시 그들을 어디에 쓰실지는…."
혹여 그들이 또 율리우스와 같은 피해를 다시 입을까 걸렸던 걸까.
'아니면…, 그들의 처우에 따라 자신들을 어찌 사용할지 떠보는 걸 수도 있지.'
아칸더스는 그의 앞에서 당당하게 속일 생각을 한 만큼 영리했으니.
그러나 알렌은 그가 뭐라 생각하든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그냥 평소대로 하면 된다. 율리우스 때문에 피해를 본 이들을 발견하면 돕도록 하고."
적재적소로 사람을 배정하며, 그에 따른 훈련을 시키고.
"너희는 그저 때를 기다리면 된다."
"때를, 말입니까…?"
"그래."
그들을 전투를 위한 전력으로 사용할 생각은 없다.
"미래를 위한 준비, 그 정도로 생각해 주면 되겠군."
"…알겠습니다."
아칸더스는 아직 알렌의 의중을 모두 꿰뚫지 못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가 알려 줄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 그가 명령한 일을 해결하는 것이 나았다.
"그렇다면, 새롭게 만든 조직의 이름은 어떤 것으로…."
"그건 네가 알아…."
「잠깐만 기다려요!」
멈칫-
「이름은 제가 정할게요! 제가 정하게 해 줘요!」
알렌이 말을 멈추자 아칸더스는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무슨 일이라도…?"
"아니, 잠시 좋은 이름이 떠올라서."
알렌의 말에 아칸더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이름으로…."
「스콜(Sk?ll), 스콜로 해요!」
"스콜이 좋겠군."
"스콜(Squall), 갑자기 불다 멈추는 바람이라… 저희의 처지에 적당한 이름 같군요."
아칸더스는 알렌의, 정확히는 베스틀라의 작명 실력이 괜찮은지 곧바로 수긍했다.
"그 이름으로 하겠습니다."
"이번 주는 쉬고, 다음 주부터 일을 시작하는 걸로 하지. 같이 일하게 될 두 명도 금방 소개해 주겠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아칸더스와 대화를 끝마친 지 사흘이 지났을 때, 소네드와 카릭이 접선해 왔다.
알렌은 그들을 아칸더스와 대면시켜 준 뒤에 따로 불러내어 입을 열었다.
"요청한 건 어떻게 되었나, 준비는 끝났나?"
신수의 숲으로 가기 전, 그들에게 은밀하게 연락을 보냈었다.
"예, 물건은 보관하고 있던 것들이 있었기에 준비 자체는 수월하게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알렌은 웃음기 어린 얼굴로 율리우스가 머물고 있을 저택을 바라봤다.
"계획대로 행하게."
제61화
율리우스는 자신을 찾아왔다는 상인이 있다는 소식에 응접실로 향했다.
"공자님, 오늘 좋은 일이 있으신가요?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아, 레이나."
율리우스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뒤를 따르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꽤나 좋은 물건들을 괜찮은 가격에 살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러신가요?"
"그래, 이게 다 내 명성 덕분이지. 역시 사람은 유명해지고 볼 일이라니까?"
레이나는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가 있었는지 생각했다.
'당분간은 아무런 일이 없다고 했었지.'
아카데미로 가기 전까지는 율리우스를 수행하라는 명령밖에 없었다.
"축하드립니다."
"좋은 게 있으면 너한테도 나눠 줄게."
율리우스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응접실로 들어갔다.
철컥-
응접실에는 젊은 상인 한 명이 어리숙한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아, 안녕하십니까! 만나 뵈어서 반갑습니다!"
그는 상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레이나는 상단주라고 하기에는 젊은 그의 모습에 의구심이 들었지만, 조용히 입을 다물고 율리우스의 뒤로 시립했다.
지금까지 율리우스를 속인 사람의 끝은 대부분 좋지 않았으니.
무언가를 속였다면 기다리면 될 일이다.
"그래, 만나서 반가워. 율리우스 라인하르트다."
"예, 예. 알고 있습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그의 아부가 기분이 좋았던 걸까, 율리우스는 바로 거래를 하기보다는 조금 더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서…,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있었을 텐데 나와 거래를 하려는 이유가 뭐야?"
형도 있고, 아버지도 있다.
"크흠, 음음 그래? 뭐, 그렇다면야…. 그건 그렇고 물건 좀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미친 듯이 폭소가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상인은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미리 준비해 두었던 여러 가지 물건을 꺼내 들었다.
"예, 우선, 이 물건은 카렌의 햇살이라는 비약으로 몸의 마력을 정순하게 바꿔 주고…."
"오… 그렇다면…."
그렇게 율리우스는 상등품의 비약을 평균 시세보다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다.
거래를 끝마치자 율리우스는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앞으로도 이런 물건을 잘 구해 온다면…, 계속 신경 써 줄게."
그리하여 율리우스는 상등품의 물건을 구할 수 있는 구입처를, 상인은 자신을 비호해 줄 든든한 후원자를 구하게 되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고맙지."
율리우스가 물건을 챙기며 일어날 기미를 보이자, 젊은 상인이 공손하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젊은 상인, 아니 카릭이 진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나도 앞으로 잘 부탁해."
율리우스도 활짝 웃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 * *
시간은 몰아치는 파도와도 같다.
처음 사건의 경과가 퍼져 나갈 때만 해도 사람들은 연이은 크나큰 흥미를 보였다.
사람을 납치하던 키메라 술사.
축제에 침입한 도적.
저주를 흩뿌리던 마녀.
그리고 이제는 신수의 숲에 침입한 흑마법사들까지.
아무리 사건이 흔하다고 한들, 이렇게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과 그걸 보란 듯이 해결하는 가문의 행보는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변화에 익숙해졌다.
엘프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주변 영지에서도 실질적인 교류를 청해 오기 시작했다.
알렌은 저택을 떠날 시기가 다가오자 신수의 숲에서 얻은 것들을 정리했다.
"흠…, 발견한 게 이것밖에 없었나?"
그의 앞에는 불에 그슬린 자국이 가득한 몇 장의 지도가 있었다.
"예. 공자님의 말씀대로 몇 곳을 더 둘러봤습니다만…, 이미 남은 은신처들은 모두 정리된 후였습니다."
알렌은 거인을 처치한 직후 그녀에게 검은 책에 기록되었던 은신처 몇 곳을 살피라 명했다.
회귀 전과 같이 일이 진행되었더라면, 이 일의 배후와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테지만….
'놈들이 그렇게 행동할 줄이야.'
나비 효과에 대해 주의한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대비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바뀐 미래도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주도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알렌이 조금씩 바꿔 온 현재가 쌓여 그가 알던 미래를 바꾸었고, 끝내 흑마법사 모두가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 신수의 능력을 폭주시킨다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그 때문에 흑마법사들이 자신들의 흔적을 모두 정리해 버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넬리아는 도움이 못 되었다고 생각하는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놈들의 행동이 예상을 벗어났으니 어쩔 수 없지."
정보를 얻지 못한 건 뼈아팠지만, 어렴풋이 이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인이 탈출한 곳에서도 쓸 만한 정보는 얻지 못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다시 말하지만 네 탓이-"
「뭐 하고 있어요! 이쯤에서 얼른 괜찮다고 쓰다듬어 줘요! 안아 주면 더 좋구요!」
베스틀라가 놀리는 투로 소리쳤다.
"-아니니 책임질 필요 없다."
알렌은 머릿속에 울리는 베스틀라의 말을 무시했다.
「앗! 또 무시하기나 하고! 제 말 좀 믿어 보라니까요? 초초초 천재 미소녀인 제가 보증할게요!」
'검이 미소녀는 무슨.' 알렌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베스틀라를 쳐다봤다.
「뭐요! 제 말이 틀렸어요? 빨리 예쁘다고 해 줘요! 검날이 뽀얗단 말도 괜찮겠네요! 이렇게 예쁜 검을 봤어요?」
그녀는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이제는 알렌이 누구와 대화하고 있든 말을 걸어왔다.
그에 관한 이유를 물어도 말을 돌리고, 몇 번이나 반복되는 모습에 알렌은 그녀의 말을 반쯤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알겠습니다."
그의 위로에도 이넬리아는 마음에 걸리는지 표정이 흐려졌다.
「봐요! 제 말 좀 믿어 보라니까요?」
알렌은 정신 사나운 소리에 눈가를 꾹꾹 눌렀다.
'조만간 머릿속으로도 대화할 수 있는 아티펙트를 마련해야겠군.'
이러다 자신의 인내심이 먼저 바닥날 것 같았다.
알렌은 문득 그녀가 혼자 있는 것을 깨닫고, 화제를 바꿔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린벨은 지금 뭐 하고 있지?"
"아, 린벨은…."
이넬리아는 애매하게 웃는 얼굴로 답했다.
"…공자님께 디저트를 만들어 드릴 거라며 주방으로 향했습니다."
"또?"
알렌은 질린 얼굴이 되었다.
"예, 불편하시면 그만두라고 말하겠습니다."
"…아니 됐다. 맛이 없는 것도 아니니."
린벨은 달라졌다.
정확히는 어디가 달라졌는지 콕 찝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가장 큰 변화를 꼽자면 간단했다.
똑똑-
"공자님 들어갈게요-"
더 이상 조급해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
그녀는 신수의 시련에서 무언가를 얻은 것이 확실한 듯 조급했던 과거와 천양지차였다.
'시련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중요한 건, 그것에 관해서 그녀도 모른다는 것.
신수의 능력이 폭주했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각자 시련의 내용을 기억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백 명이 동시에 끌어들일 정도로 능력을 폭주시킨 능력의 대가일까, 시련을 통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린벨도 그 여파는 피하지 못했다.
"공자님, 드셔 보세요."
알렌이 그녀는 허락하자 집무실로 들어와 익숙한 손길로 책상 위로 차와 다과를 준비했다.
"그러지."
가까이 다가온 그녀에게서 마음이 진정되는, 평안한 수목향 내가 났다.
'이 냄새는…, 우디 쪽인가? 백단향이구나.'
"향수를 쓰기 시작했구나."
"네! 엘리자 님이 추천해 주셔서요."
"그렇구나…, 그렇다면 향기의 종류도 어머니께서 골라 준 것이냐?"
"아니요, 제가 직접 고른 향기에요."
"향이 좋구나."
그의 말에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다행이에요, 공자님."
꿈결 속 당신이 좋아했던 냄새니까요.
알렌은 전과 달리 능숙하게 차를 끓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모종의 이유로 태도가 달라진 이유가 있는 건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그녀도 몇 가지를 제외한다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말을 흐렸기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숨기는 건 있어 보이지만….'
율리우스에 관련된 건 알지 못한 낌새였기에 그 정도는 넘어갈 수 있었다.
"공자님?"
그는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린벨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를 직시하고 있었다.
알렌은 확실한 의미가 담긴 그 눈길을 이기지 못하고, 떨떠름한 얼굴로 쿠키를 하나 집었다.
"…오늘도 맛있군."
자신의 입맛에 특별히 맞춘 것 같은 맛.
차도 마찬가지로 그의 취향에 딱 맞았다.
몇 년이나 자신을 보좌한 것 같은 모습에는 그런 감상밖에 들지 않았다.
이넬리아는 자신보다 요리를 잘하는 린벨에게 충격받은 것 같았지만.
"입맛에 맞으셔서 다행이에요."
"저번에도 말했지만,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는 그 말에 무언가를 떠올린 듯 살포시 웃더니, 단호하게 답했다.
"저는 공자님의 시녀니까요."
"네가 그렇다면야…, 알아서 하거라."
"네!"
알렌은 저런 그녀의 태도가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별다른 언질은 주지 않았다.
'전의 모습보다는 낫지.'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알렌은 떠날 준비를 하는 와중에 아칸더스를 불러 몇 가지를 당부했다.
"반년 안으로 조직의 정비를 끝마치고, 아카데미로 올 수 있도록 해라."
"아카데미라면, 갈슈딘 대사막에 있는 그곳 말씀이십니까?"
"그래."
알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페른 남작의 행적을 정리한 서류를 넘겼다.
단, 그에게 율리우스를 돕는 세력이나, 그의 수상쩍은 모습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믿지 않을 테니.'
그와 같이 유능한 사람에게는 알려 주는 것 보다, 직접 알아내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아칸더스는 이렇게 쉽게 정보를 받을 수 있을지 몰랐는지 조금 의아한 눈을 했다.
'…기껏해야 가벼운 정보나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몇 년은 신뢰를 쌓으며 단서나 조금씩 모으려고 했다.
그런데 벌써부터 정보를 통째로 넘길 줄이야.
"제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저를 그렇게 믿으십니까? 제가 만약 배신을 한다면…."
그가 아버지에 관한 모든 정보를 처음부터 내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알렌은 말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를 믿는 것이 아니다. 네 간절함을 믿는 거지. 아버지를 찾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아칸더스는 복잡한 얼굴로 고개 숙였다.
"…감사합니다."
소네드와 카릭에게도 몇 가지 당부와 함께 정기적으로 정보를 보내라 지시했다.
그렇게 크고 작은 일을 처리하며 알렌은 모든 준비를 끝마쳤고.
"위험한 일이 생기면, 돌아와도 괜찮단다."
"명심하겠습니다."
떠날 시간이 되었다.
"…무모한 일은 하지 말고."
엘리자는 가이엘과 인사를 나누는 율리우스 쪽을 바라보며 알렌에게 말했다.
"네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말렴."
"알겠습니다."
충분히 주의하고, 계획을 세운 다음에 행동하겠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포기의 빛을 찾을 수 없었던 걸까,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알아서 잘하겠지."
알렌은 그녀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거라. '동생'이 기다리지 않니?"
그녀의 목소리 뒤로 율리우스가 소리쳤다.
"알렌 형님! 어서 오십시오!"
겨울에 잠든 새싹이 솟아오르고 찬바람마저 봄의 싱그러운 생명이 머금은 계절이 되었다.
"알았으니 재촉하지 말거라."
아카데미로 향할 시간이다.
* * *
『갈슈딘 아카데미에 입학해야 한다.
율리우스가 소설에 빙의했던 걸 깨닫고 나서부터 생각한 것이었다.』
펄럭-
『그 생각은 당연했다.
주인공의 성장을 보여 주는 초반을 조금 지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 아카데미였으니까.』
『그에 따라 도착한 아카데미는 굉장했다.
현재 인류의 모든 지식을 총망라한 정수가 가득한 곳.
대사막에 빼곡히 자리한 유적에서 얻어지는 유물과 새로운 지식으로 넘쳐나는 장소였으니.』
펄럭-
『현대와도 비교될 만한 것들도 많이 있었고, 엘프와 드워프 그리고 수인과 인간이 섞여 특별한 분위기를 빚어냈다.』
『하긴, 당연했다.
이곳은 초대 용사를 이을 차세대 용사와 그를 보좌할 영웅들을 육성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시간이 지나 그 목적성이 흐려졌다고 한들, 각국의 재능 있는 자들이 몰려든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
탁-
알렌은 검은 책을 덮었다.
읽은 페이지 뒤로 문자열이 까맣게 흐려져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 글자씩 명료하게 변하게 되겠지만, 이미 필요한 정보는 충분히 획득했다.
'갈슈딘 아카데미.'
알렌이 그에 대해 아는 건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그곳이 초대 용사가 사용하던 성검 위로 세워졌다는 것과 그 성검이 아직까지 주인을 찾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팔강 중 두 명이 순번에 따라 항시 상주한다는 것 정도.
그 이상의 정보는 워낙 가지각색의 소문이 많아 진위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동생을 찾을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아카데미 생도들에게 개방되는 대도서관이나, 소문에는 없는 것이 없다는 경매장 같은 것들에 그는 희망을 품었다.
알렌이 머릿속에서 아카데미에서 해야 할 것들을 정리할 때, 베스틀라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재밌는 이야기 좀 해 줘요! 기왕이면 용을 무찌르는 이야기가 괜찮겠네요! 저도 심심할까 봐 말 걸어 주잖아요! 서로서로 도움이 되니 얼마나 좋아요?」
알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사색을 즐겨 줄 수 없겠나?"
갈슈딘 대사막.
그러니까 가문을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건 이미 지겹도록 했거든요! 아니면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든가요!」
알렌 일행은 아카데미로 향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도시로 향하고 있었다.
라인하르트 가문은 대륙의 서쪽에 위치했기에 대륙 중앙에 위치한 대사막까지 도착하려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공자님, 진짜 검이랑 대화하고 있는 거예요?"
린벨은 몇 번이나 본 모습이었지만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이넬리아도 말은 안 했지만 신기한지 검이 혼자 공중을 떠다닐 때마다 긴 귀를 파닥거리며 훔쳐봤다.
「검이 말하는 거 처음 봐요? 너무 신기해하는 거 아냐?」
"지금은 뭐라고 말하고 있어요?"
「아아아! 너무 답답하다니까요! 당신, 빨리 방법 좀 찾아봐요!」
알렌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제62화
한 달이나 같이 지내며 베스틀라와 대화하는 것을 숨기는 것도 한계가 있었기에, 결국 그녀들에게 에고 소드라고 밝혔다.
그녀들도 처음에는 놀랐으나 혼자 공중을 팔딱거리는 모습에 다들 수긍했다.
베스틀라도 의외로 거부감 없이 밝히는 것을 허락했고.
그러나 문제는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것.
베스틀라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소통하기 위해서는 유일하게 두 명 모두 대화가 가능한 알렌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카데미로 향하면 방법을 찾아볼 테니 지금은 참도록."
「진짜 약속한 거예요!」
"그래…."
그녀의 수다쟁이 같은 성격은 정적인 것을 더 선호하는 알렌을 너무 지치게 만들었다.
진심으로.
그런 그의 진심을 알아서일까, 빠르게 움직였다.
소국도 벌써 서너 곳을 지나갔고, 서쪽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색적인 생태계도 볼 수 있었다.
"와, 공자님! 이거 먹을 수 있는 버섯이죠?"
"린벨, 그거 내려놓으렴. 독버섯이니까 손은 깨끗하게 씻고."
"아앗…, 알았어요…."
중간에 실수가 생길 뻔한 일만 제외한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
내륙으로 향할수록 기온이 더욱 온화해졌다.
제법 봄바람이 차갑던 영지와는 달리 갈슈딘 대사막으로 향할수록 날씨가 더워졌고, 두껍던 옷차림도 점점 얇게 변했다.
"형님, 잠시 이곳에 며칠만 머무르…."
"그렇게 하거라."
율리우스는 아카데미로 향하는 길에 뭐가 그렇게 챙길 것이 많은지 며칠에 한 번은 꼭 혼자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이것 보십시오, 형님. 저곳에서 희귀한 약초를 발견했습니다."
…돌아올 때는 항상 값진 무언가를 두 손에 챙겨 들고 왔고, 아냐와 바이론과 함께 사라질 때도 많았다.
시녀인 레이나는 당연했고.
알렌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운이 좋구나."
"예, 제가 좀 운이 좋습니다. 하하하!"
그의 행동으로 미래가 달라지면서, 검은 책에 기록되지 않은 '퀘스트 보상'이나 '히든 피스'들도 생긴 것을 알았기에 그렇게 조급하진 않았다.
그가 얻는 물건들의 값어치가 엄청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금 풀어 줄 필요가 있지.'
저번에 니케아 산에서 한 번 털어간 만큼, 당분간은 자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의 보상을 족족 빼앗는다면 결국 그는 '시스템'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릴 게 분명하니까.
율리우스의 행동 원리는 '시스템'에 직간접적 영향을 받는 만큼, 그가 완전히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게 되면 곤란했다.
그의 행동은 예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어야 한다.
'반드시.'
그렇게 일행은 자잘한 사건을 지나 제법 편안한 여로를 지났다.
그리하여 한 달의 시간이 더 지나갔을 때.
"…드디어."
「와! 드디어 도착했네요! 진짜!」
아카데미가 위치한 대사막으로 진입할 수 있는 여러 도시 중 하나, 모험의 도시 카이란에 도착했다.
대륙에는 갖가지 마경이 존재한다.
작게는 독물로 이루어진 늪에서부터, 크게는 영원한 전쟁을 치르는 나스트론드 평야까지.
마경의 의미는 다양하지만, 함축적으로 말하자면 간단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인위적인 요인이든 자연적인 요인이든 사람이 개척할 수 없는 지역은 크게 마경으로 분류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경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흑마법사들이 공적 취급받는 거지.'
갈슈딘 대사막도 마경 중 하나였다.
그것도 그냥 마경이 아닌 대륙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초대형 마경.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불모지와 어디선가 끊임없이 나타나는 몬스터로 인해 횡단하는 것만으로 업적 취급받는 곳.
「그런 장소에 아카데미가 왜 세워졌어요?」
"여러 가지 목적이 있지, 하지만 널리 알려진 이유를 뽑자면…."
성검.
초대 용사가 사용했다는 성검이 그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성검을 옮기면 되지 왜 거기에 건물을 세워요?」
그 이유도 간단했다.
"성검이 안 뽑혔거든."
「네?」
처음에야 성검을 발견한 이들도 성검을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주인이 아닌 자는 옮기는 것조차 할 수 없다는 듯 성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아카데미를 그곳에 지을 필요는 없지 않아요?」
"그건 그런데…, 시기가 좋았지."
지금이라면 그런 판단이 당연할 때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시기요?」
"그래."
대몰락 이후 황폐해진 세상은 영웅을 원하고 있었고, 그 이름에 걸맞은 영웅은 용사밖에 없었다.
하지만 용사는 대몰락을 기점으로 홀연히 사라진 상황.
때마침 발견된 성검은 희망의 상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카데미를 세운 거예요? 들고 갈 수 없으니, 차라리 이곳에 오겠다고?」
"그렇지."
성검의 능력 중 하나인 성역화로 인해 일대 지역에 몬스터 한 마리 침입할 수 없었으니 그 상황에는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터.
더해서 대사막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유적이 잠들어 있다는 것이 밝혀지자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모험가.
용병.
상인.
귀족과 기사까지.
많은 이들이 각자의 이득을 위해 몸을 움직였고, 새 시대를 열 영웅을 키우자는 그럴듯한 명분 아래 그곳에 아카데미가 생기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러나 도시가 확장할수록 그와 반대로 성역화로 보호받는 지역은 갈수록 줄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와! 공자님! 이것 좀 보세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도시가 이곳.
마경에 최소한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대사막과 인접해 사막으로 진입하기에 용이한 도시.
"유물이 엄청 많아요!"
모험의 도시 카이란은 그렇게 생겨난 도시 중 하나였다.
"…말로만 들었는데 엄청나긴 하군."
알렌은 린벨과 이넬리아와 함께 카이란의 상점가를 둘러보고 있었다.
율리우스는 할 일이 있다며 바이론과 아냐를 여관에 놔두고 레이나만 대동한 채 사라졌다.
알렌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 본 이국적인 광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봐, 이번에 소식 들었나? 팀의 용병대가 새 유적 하나 땄다는데?"
"뭐? 또? 그 새끼들은 진짜 뭐 있는 거 아니야?"
얼굴이 도마뱀인 리자드맨 남성들이 대화한다.
거대한 몸집의 왕도마뱀과 물건을 옮기는 골렘, 한쪽 팔이 기계로 이루어진 수인, 흥정을 하는 엘프들과 몸에 두꺼운 갑각이 자라난 요람의 아인까지.
온갖 종족들이 거리를 걸어 다녔고, 본 적도 없는 수많은 유물이 거리를 가득 채웠다.
"이놈이 뭐라고?"
옆을 쳐다보자, 한 용병이 상인과 흥정하는 모습이 비쳤다.
"이거 몰라? 최근에 발굴된 물건인데, 자동으로 물을 채워 주는 물병이지."
"정말 그런 게 있다고?"
리브레 왕국이 위치한 서쪽과는 조금 다른, 부드러운 발음.
억양의 고저와 강세의 차이가 확연했다.
"마법사 말로는 공기 중에 물을 모은다나 뭐라나…, 그래서 살 거야 말 거야?"
"그래도 금화 두 개는 좀…."
용병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일 때, 알렌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그 물건, 사지 않을 거라면 내가 구입해도 되겠나?"
상인은 그의 차림새와 옆에 자리한 이넬리아를 보더니 곧바로 용병을 내팽개치고 알렌 쪽으로 허리를 굽실거렸다.
"예, 예 가능합니다! 가능하고말고요. 공자님."
"그럼 내가 사지."
알렌이 한 번의 흥정도 없이 금화를 내밀었다.
상인은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져 놓칠세라 금화를 받아들였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공자님!"
용병은 입맛을 한 번 쩍 다시고는 물러났다.
"그런데…."
알렌이 상인이 건네주는 유물을 받아들며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로 향하는 길잡이가, 원래 이렇게 적었나?"
대사막 안에 위치한 아카데미로 향하기 위해서는 길잡이가 필요하다.
알렌 일행은 도시에 들어온 즉시 모험가 길드를 찾았으나, 현재 의뢰 가능한 길잡이가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길잡이 말입니까?"
할 수 없이 일행은 어쩔 수 없이 도시에 머무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의 말에 상인은 슬쩍 그의 일행을 살피더니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공자께서는 여기 출신이 아니신가 봅니다?"
"그래."
"그럼 모르실 만도 합니다. 그 이유가 있기는 한데…."
상인이 말을 끌며 망설이자, 알렌은 피식 웃으며 물건 몇 개를 더 구매했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감사합니다! 또 오십시오!"
「또 오기는 무슨! 순 사기꾼 같으니!」
알렌은 씩씩거리는 베스틀라를 진정시키며, 천천히 상점가를 빠져나왔다.
「조금만 돌아다녀도 알 수 있는 정보잖아요!」
상인에게서 들었던 이유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래 폭풍 탓이라….'
대사막에서 주기적으로 모래 폭풍이 들이닥치는데, 며칠 전에 전조가 보였다는 것.
그 탓에 정말로 금전적인 여유가 없지 않은 이상, 모래 폭풍이 불어올 시기에 길잡이들은 몸을 사렸다.
회귀 전 지금 시기에 율리우스는 이미 아카데미가 세워진 도시로 들어갔기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여기서 더 늦으면 안 되잖아요?」
"그건 그렇지."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은 반년에 한 번씩 치를 수 있다.
지금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반년의 시간을 허비한다는 것을 뜻했다.
"정 안 된다면 웃돈을 주고 구할 수밖에 없겠지."
적지 않은 금액이 깨질 테지만,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다.
알렌은 한숨이 나왔다.
'…역시 미래를 모두 알 수는 없군.'
알렌은 자신이 아는, 검은 책에 적힌 미래는 미래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겼다.
그렇게 일행이 다시 모험가 길드로 돌아가던 그때, 린벨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앗! 공자님, 그런데 종족이 다른데 모두 말이 다 통하네요?"
그걸 이제야 깨달은 걸까.
"엘프들이 있을 때는 왜 안 물어보고?"
"그게…, 헤헤."
하긴, 그땐 그걸 신경 쓸 정신이 아니기는 했지.
알렌은 불안정했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설명했다.
"모두 고대 제국의 잔재다."
"고대 제국이요?"
이넬리아도 궁금했던 내용인지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그래."
가깝게는 지금 쓰는 언어와 문자 그리고 건물 양식에서부터 멀게는 법의 기초까지.
실생활의 다양한 부분에서 고대 제국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지금에서야 시간이 흘러 언어의 역사성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말이다."
단어가 짧게 변하거나, 새로운 개념이 생기거나.
잘 쓰이지 않는 단어는 사장되기도 하며, 완전히 다른 뜻으로 바뀌기도 했다.
"…분명 라우라 시녀장이 이 정도는 교육시켰을 텐데."
알렌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그녀를 바라보자, 린벨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더니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아, 앗, 그게… 공자님! 저기 봐요! 저 종족은 뭐예요?"
알렌은 뻔한 그녀의 태도에 순순히 고개를 돌리자, 한 무리의 이종족들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모습은 특이했다.
아니, 이질적이라고 봐도 될 정도.
남자들은 흰색의 천을 두르고 있었는데, 엉덩이 부근에 거대한 전갈의 꼬리가 솟아 있었다.
반대로 여성들은 검은 천을 두르고 있었는데, 등에 구멍 뚫린 공간 사이로 두 쌍의 거미 다리가 흔들거렸다.
'저건 설마….'
알렌은 오직 대사막에서만 머문다는 두 종족에 대해서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특이한 능력도.
『──대사막에는 한 명, 한 명이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 두 개의 부족이 있다.』
결정적으로 검은 책에서 스쳐 읽었던 글귀가 떠오르자 행동은 빨랐다.
「당신 어디 가요!」
"공자님!"
아카데미로 향할 방법을 찾았다.
* * *
율리우스는 머릿속에서 원작에서 읽었던 전개를 되짚으며 빈민가로 향했다.
다행인지 몇 개월이 지나도 원작의 중요한 부분은 잊어버리지 않았기에 떠올리는 건 쉬웠다.
그의 뒤로는 레이나만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음…, 여기던가?"
그는 나비 문양이 그려진 낡은 간판을 바라보며 긴가민가한 얼굴을 했다.
원작을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그건 글이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지. 퀘스트니까.
퀘스트 창을 켜자, 여러 개의 서브 퀘스트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모래 폭풍이 불어온다! 입학시험 전까지 아카데미로 향할 방법을 찾으십시오! 제한 시간 : 13 : 12 : 55]
[보상 : 풍 속성 친화력 소폭 상승]
[사막의 지배자로 불리는 데스윔을 죽이고 자신을 증명하십시오! 0/1 제한 시간 : 172 : 59 : 02]
[보상 : 확정 B급 스킬 뽑기권 1장]
[여행자를 괴롭히는 약탈자, 마적들을 해치우고 평화를 지키십시오! 0/20 제한 시간 : 34 : 07 : 26]
[보상 : 랜덤 검술서 뽑기권 3장]
몇 달간 서브 퀘스트를 깨면서 괜찮은 보상을 얻었기 때문에 반드시 완료할 필요가 있었다.
'퀘스트도 깨면서 아카데미로 향할 방법도 찾고.' 일석이조네.
-끼익
나무 문을 밀자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존재감을 알렸다.
의외로 술집의 내부는 깨끗했다.
온갖 토사물과 쉰내가 가득하리란 예상과 다르게 청결한 모습.
고개를 돌리자 바에 늙은 남성이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유리잔을 닦고 있었다.
율리우스는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 바텐더가 입을 열었다.
"손님,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벌꿀 주 있으면 한 잔 주고 그리고 안주로는… 뱀독에 담근 나비 구이로."
율리우스의 말에 멈칫한 그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그런 음식은 없습니다."
"아니, 너희 그런 음식 있잖아. 안 그래? 아니면, 파란 사과파이도 괜찮은데?"
율리우스는 그 말을 하면서 제법 자신감에 차 있었다.
'원작에서도 주인공이 분명 이렇게 했었지?'
대륙 중부에 퍼져 있는 정보 조직, 프시케를 이용하기 위해서 주인공이 몇 번 이용하는 장면이 나왔으니 확실했다.
그가 이 정보를 얻기 위해 뭘 했는지는 잊어버렸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암호만 알면 되는 거 아닌가?'
그가 그렇게 희희낙락할 동안, 바텐더는 무감정한 눈으로 허리춤에서 슬며시 단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뱀독에 담근 나비는 같은 조직원임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을 구분하기 위한 특유의 향취가 없다.
"빨리 안 가져올 거야?"
파란 사과파이는 원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는 신호며.
"독 사과도 없어? 그러면 언덕마루의 양 뒷다리나 어두운 꽃밭의 꽃봉오리는?"
독 사과는 알아서는 안 될 정보를 얻었다는 것을.
언덕마루의 양 뒷다리는 보스의 직속 명령이 내려왔다는 것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어두운 꽃밭의 꽃봉오리는.'
그분께서.
"다 알고 있으니까 빨리 가져와! 아니면, 네 윗사람이라도 데려오든가!"
강림했다는 것을 말한다.
"빨리 안 움직여?"
그의 눈동자가 무기질적으로 율리우스를 훑었다.
정보가 유출된 적은 없다.
길드에서는 이용하는 고객의 정보는 모두 기록해 뒀기에 그건 확실했다.
'그렇다면 같은 조직원인가?'
그것도 아니지.
그런데, 내부의 암호를 그가 알고 있다?
가능성은 둘 중 하나였다.
누군가 배신을 했거나, 고객 중 한 명이 암호를 발설한 것.
그것도 아니라면….
"진짜 읽었던 거랑 왜 이렇게 다르지?"
바텐더가 움직이려던 그때, 그의 눈동자와 레이나의 시선이 부딪쳤다.
-멈칫
"하, 정보 사러 왔다. 이제 알아듣겠냐?"
그는 그녀의 눈동자에 떠오른 문양을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뜨고 이내 상황을 이해한 듯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아하, '그쪽' 손님이셨군요. 꽤나 오랜만이라 대답이 늦은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율리우스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암호가 안 통해서 아쉽기는 한데…, 괜찮아. 그래서 정보를 사고 싶은데…."
"안내하겠습니다."
그가 술집의 내부로 그들을 데리고 가자, 율리우스는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술집 비워 놔도 되나? 누가 안 훔쳐 가?"
"그건 문제없습니다. 이미 왔으니 말입니다."
율리우스가 다시 뒤를 돌아보자, 언제 왔는지 중년 남자 한 명이 태연한 얼굴로 술집으로 들어와 바에 앉았다.
그 모습에 율리우스는 원작에서 본 내용과 겹치는지 즐겁게 웃었다.
"그래? 그럼 어서 가자. 형님이 기다리고 있거든."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들은 술집의 지하로 향했다.
통로의 천장에서 하얀빛이 점멸하며 복도를 비췄다.
"불이 왜 자꾸 깜빡여? 너희들 돈 없어?"
"하하, 정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다음에 방문하시기 전까지는 고쳐 놓겠습니다."
마치 눈동자처럼.
제63화
율리우스는 만족스러운 발걸음으로 여관으로 향했다.
'일이 생각보다 잘 풀렸네.'
소설 속 지식을 이용해 생각보다 쉽게 정보를 얻었다.
자칫하면 강제로 정보를 뽑을 생각까지 했었는데.
'원작의 내용이랑 바뀌지 않아서 다행이다.'
거래로 정보를 사는 것이 강제로 빼앗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잘못하면 시체의 뒤처리까지 하느라 제법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프시케의 정보망에 걸릴 수도 있는 일이기도 했고.
'정보의 가격도 꽤 저렴했지.'
미니마 부족과 아라흐니 부족.
오직 대사막에서만 볼 수 있는 이종족들이자 선천적인 사막의 길잡이들.
그들의 위치가 적힌 지도를 받았으니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도시 근처에 있다고 했으니.'
여관에 들러 일행들과 곧바로 출발하면 되겠지.
이 소식을 듣고 그들이 내보일 반응을 기대한 율리우스는 힘차게 웃으며 여관의 나무 문을 밀었다.
"형님, 제가 방법을 알아냈…"
그리고.
"…습니, 어?"
"율리우스 이제 왔구나."
알렌과 같이 앉아 있는 이종족들을 보았다.
"어서 앉거라."
두꺼운 갑각으로 둘러싸인 전갈 꼬리를 단 남성과 두 쌍의 거미 다리가 달린 여성.
"손님들이 기다리시지 않느냐?"
율리우스는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 * *
멍청한 얼굴로 서 있던 율리우스는 알렌이 한 번 더 부르자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인사하거라. 우리를 아카데미까지 길을 인도해 줄 분들이다."
율리우스는 얼떨떨한 얼굴로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빠진 인사에도 남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살벌해 보이는 꼬리와 다르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방랑하는 별들을 섬기는 사제이자 그분들의 후예인, 알렉시우스입니다."
"그와는 다른 별을 따르는 자이자, 그분들의 자녀인 에리니입니다."
그의 뒤를 이어 그녀까지 인사를 마치자, 율리우스는 잠시 알렌의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 이런 말 하기는 그런데 형님은 어떻게 이분들과 같이…?"
알렌은 당황한 그의 꼴을 보더니 별일 아니라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에게 길잡이가 필요하지 않더냐. 그 일로 고민하던 중에 길에서 마주쳤지."
"상점가에서 말입니까…?"
"그래, 상인에게 이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해서 찾아보려고 했는데…, 마침 눈앞에서 걸어오시더구나."
율리우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리고 슬쩍 그들의 얼굴을 다시 확인하기까지.
"왜 무슨 문제가 있느냐?"
"아,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알렌의 말에 율리우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지만, 자신이 구해 온 정보가 쓸모없어지자 속이 꽤나 쓰려 보였다.
"그래서 곧바로 초대했지. 다행히 이분들은 초대를 수락했고, 내 목적을 이야기하자 조건 하나를 내걸고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그의 말이 사실인 듯 알렉시우스와 에리니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 조건은 무엇입니까?"
율리우스의 물음에 알렌이 대답하려는 찰나, 알렉시우스가 탁한 금발을 쓸어내리며 끼어들었다.
"여기서부터는 저희가 이야기해도 괜찮겠습니까?"
"원한다면."
알렌이 허락하자 알렉시우스는 작게 고개를 숙이고는 답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저희가 원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가 그녀에게 눈짓하자 에리니가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만약 두 공자께서 아카데미를 입학하는 것에 성공한다면, 단 한 번. 저희 요청에 따라 저희가 지정한 유적의 발굴을 지원해 주시는 것."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율리우스의 눈이 잠시 갈색 피부와 잘 어울리는 적발의 미녀인 에리니에게 닿았다.
"이 정도의 조건은 공자들에게 그리 부담이 되지 않을 겁니다."
아카데미에 들어갔다는 것 하나만으로 인맥 혹은 재능을 입증했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그들의 실력이라면 유적 발굴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 자명했다.
"모래 폭풍의 시기에 움직이는 것은 저희로서도 많은 위험 부담을 짊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저희의 조건이 과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알렉시우스는 시종일관 차분한 얼굴로 설명을 마쳤다.
그들의 말이 옳았다.
도움 한 번을 대가로 그들을 움직일 수 있다면 합리적인 대가일 터.
'나와 율리우스의 힘을 합치면 어지간한 것이 아닌 이상 수월히 처리할 테니.'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였다.
율리우스도 그 정도 계산은 마쳤는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율리우스가 조건을 받아들이자 그들은 긴장을 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행동이 의외였던 걸까, 율리우스는 의문 어린 얼굴로 알렌에게 물었다.
"그런데 형님이 거래 조건을 받아들였다면 저에게 묻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왜 저에게 물었던 겁니까?"
"네가 동의하지 않았는데 어찌 나 혼자 결정하겠느냐."
"…저도 말입니까?"
율리우스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너도 나와 같은 일행의 대표인데, 나 혼자 일을 진행할 수야 없지."
율리우스는 쓸모없어진 정보로 인해 쓰라렸던 마음이 단숨에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베스틀라는 작게 속삭였다.
「당신, 은근 음험한 거 알죠?」
'시끄럽다.' 알렌은 조용히 하라는 듯 손잡이를 두드렸고, 베스틀라는 끝까지 꿍얼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알렌과 율리우스의 대화에 알렉시우스와 에리니는 훈훈한 눈으로 형제간의 우애를 지켜봤다.
"알렌 공자께서 동생도 일행의 대표니 혼자 결정하지 않겠다고 하시지 뭡니까."
"정말 보기 드문 우애입니다."
그들의 따듯한 말에 율리우스는 가슴속에서 스멀거리던 지독한 생각을 떨쳐 냈다.
'이런 이들을 프시케처럼 강제로 협박할 수는 없지.'
형님도 보고 있으니.
혼자였다면 어떻게 행동했을지는 모르겠다.
"자, 그럼 거래도 받아들였고 시간도 없으니 어서 움직이도록 하지."
"준비는 끝났습니다."
알렌이 다른 일행들에게 짐을 챙길 것을 지시하자, 이넬리아가 이야기하는 사이에 미리 챙겨놨다는 듯 철저한 준비성을 선보였다.
"부족이 가까이에 있으니 금방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알렉시우스가 에리니와 같이 일어서자, 알렌이 율리우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율리우스 너는 다른 볼일이 없느냐?"
"다 마쳤으니 지금 움직이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래?"
이곳에서 얻어야 할 것들을 다 얻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도 될 수 있으면 쉬지 않고 갈 수 있도록 하지."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이 시작되기까지 대략 2주일이 남았다.
* * *
일행은 도시를 빠져나와 근처에 진을 치고 있다는 부족들에게 향했다.
그들이 넓은 천막들이 펼쳐진 곳으로 향하자 알렉시우스나 에리니와 같은, 전갈의 꼬리와 거미의 다리가 갈린 이종족들이 달려왔다.
알렉시우스와 에리니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미리 이곳에 소식을 전했는지 일행을 경계하지 않았다.
"알렉시우스 님!"
"에리니 님!"
그들은 순식간에 다른 이종족들 사이에 둘러싸였다.
알렌은 그들 사이에서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한 종족에 하나의 성별밖에 없다니…."
검은 책을 통해 여러 가지 지식을 보았던 알렌도 신기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미나미 부족, 그러니까 전갈의 꼬리를 가진 이종족들은 남자들밖에 없었고, 반대로 아라흐니 부족에서 거미 다리를 가진 자들은 여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머리 색.
'처음 다른 이들과 있을 때는 몰랐는데.'
그러나 두 부족에 있는 부족원들을 모두 살펴보니 그들 대부분이 흑발이었다. 알렉시우스나 애리니 처럼 금발이나 적발의 머리 색을 가진 이는 적었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도 상관없을 정도.
'흠, 하긴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릴 만한 이가 평범할 리 없지.'
이쯤에 와서는 모를 수가 없다.
「당신 일부로 알고 접근한 거예요?」
그들의 지위가 특별하다는 사실을.
'설마.'
단순히 아귀가 맞아떨어진 것일 뿐이다.
길을 가다가 만났을 뿐인데 그들이 우연히 아카데미로 가는데 필요한 길잡이였고, 거래를 청한 상대가 우연히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만한 지위를 가진 이들이었을 뿐.
이 모든 건 '우연'이다.
'우연이고 말고.'
알렌의 눈이 잠시 표표히 공중을 맴돌던 하얀 책에 닿았다.
그때, 율리우스가 그를 불렀다.
"형님, 뭘 그렇게 보십니까?"
알렌은 자연스럽게 책에서 눈을 떼 주위를 둘러싼 이종족들을 가리켰다.
"이런 광경은 처음 보니 말이다."
"확실히… 이곳에서만 사는 이들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알렌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속으로는 꽤나 놀란 상태였다.
'너무 부주의했군.'
율리우스가 하던 실수를 그대로 답습할 뻔했다.
알렌은 조심성을 더 끌어 올렸다. 때마침 이야기가 끝났는지 알렉시우스가 미안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손님들을 너무 오래 세워 두었군요. 죄송합니다. 부족장님께서 기다리시니 따라오십시오."
부족장은 옅은 금발을 가진 단단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이야기는 이미 들었소. 의뢰는 받아들일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약속은 반드시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알렌이 대표로 대답을 하자, 노인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걱정하지 않는다오. 운명의 안배란 그런 것이니."
"운명을 아직도 믿으십니까?"
알렌의 물음에 노인은 당연하다는 듯 얼굴로 나지막이 답했다.
"사제니 말이오."
"…그렇습니까."
그 말에 알렌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별들의 사제니, 후예를 자칭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 사이에는 종교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알렌은 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건 그들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기에 따로 첨언하지 않았다.
'운명하니 프란시스카 양은 어찌 됐을지 모르겠군.'
분명 무언가 있다는 말투였는데, 키메라 술사의 사건 이후 마탑으로 갔기에 소식을 접할 길이 없었다.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아침부터 이동하도록 하겠소. 손님이 머물 장소는 알렉시우스가 안내할 것이오."
그렇게 알렌이 천막을 나가려던 때, 문득 그의 시선이 노인의 옆에 자리한 석판으로 향했다.
"…저건?"
태양을 주위로 아홉 개의 천체가 회전하는 그림.
흔히 볼 수 없는 석판의 그림에 알렉시우스가 흔쾌히 설명했다.
"아, 저 석판 말씀하시는 겁니까? 방랑하는 별들께서 고대에 내려 주셨다는 석판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생소할 만한 그림이었으나, 알렌에게는 아니었다.
'키메라 술사를 죽이고 얻은 단검.'
그곳에도 저것과 같은 문양이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학회에서는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것은 우리밖에 없다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그렇네."
알렉시우스는 알렌의 물음이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별들의 진의를 이해하기 힘든 건 당연하지요. 분명 저희가 이해하지 못할 뜻이 있을 겁니다."
알렌은 별다른 대답 없이 그의 말에 수긍했다.
"어서 움직이시지요. 아라흐니 족장께서 기다리십니다."
일행은 천막을 빠져나와 에리니를 따라 아라흐니 부족장에게서 거래의 확약을 받았다. 알렌은 그들을 안내하는 알렉시우스에게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흑마법사 집단, 에스테도르와의 연관성에 대해 알기 위해서였다.
"혹시, 아까 석판에서 보았던 그림에 관해 이야기해 줄 수 있나? 혹시나 이 질문이 무례했다면 미리 용서를 구하지."
"가끔 저희 부족에 들리는 마법사들도 그런 질문을 하지요, 괜찮습니다."
"마법사로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주제라 어쩔 수 없군."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 역시 많은 것을 알고 있지 못했다.
대몰락 이전 그들이 섬기는 성령이 처음 나타나던 날 석판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 추가로 현재도 수십 년에 한 번씩 '예언'이 내려온다는 것까지.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 알려 준 것만으로도 고맙네."
그 이후 그들은 하루를 부족에서 제공한 천막에서 보내며 모래 폭풍이 불어오기 전 마지막 정비를 끝마쳤다.
"아마, 모래 폭풍에 시간이 지체되더라도 열흘이면 충분할 겁니다."
"그 안에 도착하기를 간절히 바라지."
그리고 텁텁한 모래바람을 거쳐 추운 밤과 더운 낮을 지나 아흐레가 흘렀고.
"알렌 공자님! 드디어 아카데미에 도착했어요!"
"…그래, 이제야 겨우 도착했구나."
갈슈딘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제64화
도시의 성문은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아카데미 제복을 입은 학생들과 유적의 공략을 끝마친 용병들, 그리고 전리품을 매입하려는 상인들과 호객 행위를 하는 어린아이들까지.
모래 폭풍을 피한다며 몸을 사리던 주변 도시와는 정반대의 모습.
그것은 그만큼 그들이 도시를, 성검을 믿는다는 믿음의 방증이기도 했다.
"저희는 이만 가겠습니다."
알렌이 고개를 돌리자 며칠간 같이 지내며 익숙해진 이들이 벌써부터 몸을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벌써 떠나는 건가? 도시에 같이 들어가는 게 어떤가. 그 동안 많은 노고에 사례라도 하고 싶은데…."
"저희는 의뢰의 내용에 최선을 다한 것뿐입니다."
알렌이 몇 번이 권했으나 알렉시우스는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이미 카이란에서 물품을 보충했기 때문에 도시에 들어갈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라도 받아 주게."
알렌은 손을 뻗어 이넬리아에게 미리 준비해 놓으라고 했던 작은 주머니를 그에게 주었다.
"이건…."
"내 성의일세. 이것까지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믿지."
묵직하게 들어찬 금화의 무게에 알렉시우스는 곤란한 얼굴을 했으나, 알렌의 강권에 결국 받아들였다.
"부족을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아니 나야말로 너무 헐값에 부려 먹은 게 아닌가 싶었네."
앞으로 얼마나 이곳에 머물지 모르겠지만, 아카데미에 다닐 동안은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언제 도움을 구할 일이 있을지 모르니.'
그들은 그렇게 알렌 일행을 도시까지 데려다준 후, 바람에 휩쓸리듯 순식간에 떠나 버렸다.
「떠났네요.」
"그래, 떠났군."
고개를 돌렸다.
"알렌 형님, 저곳에 귀족들 전용의 문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다시 쉴 새 없이 달릴 차례다.
* * *
검문은 가문의 문양이 찍힌 인증서를 보여 주자 손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도시의 이름은 엘피스(?λπ??),
고대 제국어로 뜻은 희망.
현재 그 이름의 유래에 맞게 도시의 분위기는 활발했다.
「오…, 이 정도면 기술이 그렇게 밀리지 않을지도…?」
"...와아."
"공자님, 철, 철갑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넬리아와 린벨의 입이 벌어진다.
율리우스도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이건 놀라운데…, 저건 기차인가? 아니 지하철?"
도시의 내부는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거대한 도시의 내부를 달리는 철마와 흔히 보지 못하는 고층 건물이 흔하게 자리했다. 그것과 더불어 온갖 유적에서 발견한 다양한 물건들이 섞여 바깥과 전혀 다른 세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과연 인류 기술의 정수가 담겨 있다고 말할 만하군.'
풍문으로만 들었던 것부터 상상도 해 보지 못한 것까지.
온갖 것들이 섞여 기묘한 조화를 만들어 냈다.
이곳, 엘피스가 아니면 어디서라도 보지 못할 것들이 거리에 가득했다.
'그나마 비견될 만한 곳을 꼽자면 마탑들이 모인 자유도시 페르타일까.'
그곳도 이곳과 다른 방향으로 발전을 이뤘으니 실상 비교하는 건 의미 없었다.
도시는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듯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알렌이 들어온 서쪽은 주요 여관들이 밀집된 주거 지구.
밀집된 주거 지구에 타지에서 온 용병들과 모험가로 인해 시끄러운 활기가 넘쳐났다.
알렌은 안내 책자에서 눈을 돌려 활짝 열린 내성 문의 안쪽을 보았다.
수많은 학생과 백색의 화려한 건물들.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장소이자 이 도시를 건설한 목적이자 팔강 두 명이 상시 상주하는 곳.
"저기가 갈슈딘 아카데미군."
안내 책자는 입학시험을 신청한 후에 받았다.
다행히 입학시험까지 나흘의 시간이 남았기에 아슬아슬하게 신청을 끝낼 수 있었다.
입학시험의 신청도 간단했다.
내성의 성문 근처에 자리한 입학처에 간단한 정보를 기재하고 금화 다섯 개를 내면 끝.
'아카데미의 목적은 새로운 용사와 그를 도울 영웅의 육성에 있었으니.'
재능이 있다면 누구든지, 30살 아래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금화 다섯은 그 기준이었다.
재능이 있는 평민이라면 금화 다섯 정도는 모으고자 한다면 모으지 못할 돈은 아니었으니까.
"린벨, 잃어버리지 않도록 잘 간수하거라."
그리고 그 말은, 반대로 말하자면 재능만 있다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네, 알았어요. 그런데 정말 제가 입학을 해도 될까요?"
알렌은 그녀에게 임시로 발급된 증명서를 건네주며 당부했다.
"그래. 재능을 썩히기에는, 네 재능이 너무 아깝지 않느냐."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공자님을 시중드는 시간이…."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원칙상 아카데미의 내부에 외부인은 들어갈 수 없다."
귀족 학생을 시중드는 시종이나 시녀라고 해도 기숙사를 벗어날 수 없다.
"네가 아카데미 내부까지 따라오기 위해서는 어차피 입학해야 된다는 말이다."
"아!"
흔히 귀족들이 쓰는 꼼수 중 하나였다.
평생을 받들어지는 삶을 살았는데 갑작스럽게 혼자 행동하는 게 쉬울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재능 있는 기사 한 명을 같이 입학시키는 등 아카데미에서 제법 흔하게 벌어지는 일 중 하나였다.
알렌도 카트린느와 레이첼의 편지를 통해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덕에 린벨을 아카데미에 입학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지.
"이넬리아는…, 나이 때문에 불가능하지만 너는 올해 열여섯이 되었으니 입학할 수 있지 않느냐."
그의 말에 린벨의 눈이 미묘하게 변해 이넬리아를 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이넬리아가 욱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니 린벨? 할 말이라도 있니? 응?"
"아무것도 아니야."
린벨은 아무것도 아니라 했지만, 이넬리아는 그녀의 입가에 순간적으로 미소가 어리는 모습을 분명히 봤다.
"…린벨."
알렌은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투닥거림에 곧바로 손을 뻗었다.
"그만, 이넬리아 너는 따로 할 일이 있으니 신경 쓰지 말도록. 린벨 너도 마찬가지다. 네가 입학하는 이유도 아카데미에서 시킬 일이 있기 때문이니. 그러니 일부러 시비 걸지 말거라."
그의 말에 이넬리아는 입술을 삐죽였고, 린벨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알겠습니다. 공자님."
알렌은 신수의 숲 이후 반대로 바뀐 듯한 그녀들의 모습에 머리가 아파 왔다.
「쌤통이에요. 당신.」
키득거리는 베스틀라의 목소리를 무시한 그는, 율리우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최선을 다해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열심히 할게요!"
당장이라도 무릎 꿇을 것 같은 모습의 바이론과 순수하게 눈을 빛내는 아냐.
레이나는 언제나처럼 율리우스의 그림자처럼 그의 뒤에 자리했다.
"그래, 너희들이 내 첫 수하라서 이렇게 해 주는 거야. 알고 있지?"
"옙! 감사합니다!"
"네!"
율리우스는 기뻐하는 그들의 모습에 방긋 미소 지었다.
"레이나 너도 마찬가지야."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려요, 공자님."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는 레이나를 바라보는 율리우스의 얼굴은 흡족해 보였다.
'첫 수하라….'
자각이 없는 모양이군.
알렌은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는, 떠나는 율리우스를 보며 울적한 눈을 하던 어떤 수습 기사를 떠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카밀라도 지금 데려오고 싶었는데…. 그럼 인원이 너무 많아져서 너무 눈에 띄니까, 다음 학기에 데려와야지."
"와! 카밀라 언니도 오는 거예요?"
"그래."
계획은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열매는 무르익기 시작했다.
"걔도 이제 내 수하인데 챙겨줘야지."
그 누구도 모르게.
* * *
나흘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알렌은 나흘간 여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입학시험에 떨어질 거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선의 상태로 준비해 둘 필요성은 있었다.
율리우스도 그 점에는 동감했는지 온전히 몸 상태를 최상으로 되돌리는 것에 집중했다.
알렌은 잡생각을 멈추고, 새벽빛을 발하는 엘피스의 거리를 둘러봤다.
세상에 그림자를 드리우던 어둠이 가로등의 불빛에 부서져 내렸다. 눈을 가로막던 어둠이 물러나니 새벽녘의 거리도 낮과 다름없었다.
도시는 일 년에 두 번밖에 볼 수 없는 입학시험에 기대감으로 들끓었다.
외부인이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는 몇 없는 날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야, 이번 입학시험에 누가 수석으로 입학할 것 같냐?"
"당연히 용사의 후예겠지. 용사의 후예가 아니면 또 누가 있겠어?"
"대수림의 1공주나 3대 가문 중 드라기아스 쪽에도 한 명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도 그 용사의 혈통인데? 믿기는 힘들긴 한데 만약 사실이면?"
"그럼 당연히 걔가 수석이겠지?"
아카데미 학생들은 누가 입학시험 때 수석이 될지 이야기했고, 아침부터 북적거리는 인파는 조금 있으면 볼 수 있을 볼거리에 기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용사의 후예라.'
그 누가 알고 있을까.
3대 가문이든, 엘프 왕족의 공주든 심지어 용사의 후예도 아닌 제3자가 수석 입학을 차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 검은 책에서 나오지 않은 내용이지만….'
그 정도는 율리우스의 독백을 통해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입학시험의 의의가 실력이 아닌 잠재력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들, 그 가치마저 퇴색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보다 미래의 잠재력을 더욱 크게 쳐주기도 하니까.
'그래도 너무 과한 관심은 독이지.'
알렌은 실력을 무작정 숨길 생각은 없었다.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서 어느 정도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바라는 위치는 차석 입학.
수석에게 가려지면서도 이득을 취하기에 충분한 위치.
차석도 충분히 많은 관심을 받는다고 할 수 있겠으나, 미래의 위협을 대비하기 위해서 이 정도의 이름값은 필요했다.
율리우스라는 변수가 있었지만, 그것도 상관없었다.
『──율리우스는 최대한 실력을 감추기로 했다.
기왕이면 입학시험의 최저점으로 통과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으로.』
놈이 바라는 것이 자신과 다르다.
『──하위 10%의 성적으로 입학한다면, 보충 반에 들어갈 수 있다.
율리우스는 그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기연과 후반에 각성하는 조연이 모두 필요했다.』
'그놈의 기연이 뭔지….' 실력이 아닌 운으로 얻은 실력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놈은 보란 듯이 시스템과 세계의 가호를 통해 정점을 찍었으니, 알렌은 그 사실이 우스웠다.
결국, 노력이 가지는 가치는 의미가 없어질 뿐이니.
고개를 흔들었다.
쓸데없는 것으로 괜한 심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었다.
쿠구궁-
아카데미로 향하는 내성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자! 아카데미 입학시험 예정자 중 1번부터 500번은 모두 제1 시험장으로 오시길 바랍니다!"
"입학시험을 구경하실 분들께서는 시험선 바깥으로 물러나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입학시험을 구경하실…."
"임시로 발급된 증명서를 잃어버리셨을 경우, 30분 내로 입학처에서 다시 발급받으시길 바랍니다."
"증명서에 적힌 숫자는 금일 새벽을 기준으로 무작위로 바뀌었으니 착각하지 않게 주의해 주십시오!"
알렌은 증명서에 적힌 숫자를 확인했다.
[572]
어제와는 자릿수가 달라진 숫자.
분명 1483이라 적혀 있던 숫자가 다른 숫자로 바뀌어 있었다.
'부정을 저지를 것을 염려한 건가….' 의외로 이런 곳에서는 철저하군.
린벨은 숫자를 확인하더니 곧바로 알렌에게 다가왔다.
"공자님."
"너는 몇 번이지?"
"133번이에요."
"어쩔 수 없지. 입학시험을 끝마치고 이곳에 다시 모이는 것으로 하자꾸나."
"네…, 알겠습니다."
혼자 보내기를 망설이는 이넬리아를 린벨과 함께 보낸 후에 고개를 돌리니 율리우스가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몇 번이냐."
"저는 928번입니다. 형님은?"
"572번. 너는 나랑 같은 시험장으로 가겠군."
율리우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서로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결과라….
'보충 반을 노리는 주제에 무슨.'
알렌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구나."
"예."
그들은 501번부터 1,000번이 시험을 치는 제2 시험장으로 향했다.
제2 시험장은 수천 개의 수정구가 촘촘한 간격으로 땅에 박혀 있는 곳이었다.
그 근처로 수백 명의 아카데미 학생과 주민들이 시험선 밖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곳은 마력에 대한 재능을 판별하는 장소다! 한 명씩 앞으로 나오거라! 우선 501번!"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이 시작되었다.
제65화
카트린느는 자신 앞에 자리한 여성을 바라봤다.
"언니 아직까지 연락이 없어요?"
"…응. 분명히 도시에 들어오면 연락한다고 했는데…."
호수 같은 하늘색 눈동자와 여러 종족과 인종으로 넘치는, 아카데미에서도 보기 드문 상아색 머리카락.
"먼저 시험장에 들어간 게 아닐까요?"
사람이 적은 카페 내에서 유독 그녀들의 미모는 눈에 띄었다. 카트린느도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레이첼보다 낫다는 건 아니었다.
레이첼이 자연적인 미인이라면, 자신은 몇 개월간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얻은 것이었으니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공자님이 그런 부분에서 조금 무심한 부분이 있죠. 안 그래요?"
"아니 그건 좀…."
"설마 공자님께서 잊으셨을 리는 없잖아요?"
"아냐, 알렌이 그럴 리가…."
그럼 어쩌라는 거야. 카트린느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알렌이 도와준 건 고마웠다.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와 함께 희망도 줬으니.
레이첼도 마찬가지. 자신이 아카데미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운 그녀에게는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카트린느, 정말 알렌이 도착하지 않은 건 아닐까? 아니면 무슨 문제라도 생겨서 연락을 못 하는 걸 수도…."
"아니, 언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설마 편지를 너무 보내서 정이 떨어진 건…!"
"언니 제발…."
이렇게 두 명의 사이에 끼어 있을 때는 너무 난감했다.
'누구는 하고 싶어도 못 하는데.'
그녀를 흘겨보던 카트린느는 레이첼의 눈동자가 요동치는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그래, 언니가 무슨 죄야. 다 알렌 공자 탓이지.
자기 약혼자면 직접 챙길 것이지. 카트린느는 평소에 하던 것처럼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자, 언니. 조금 진정하고 다시 생각해 보는…."
그렇게 그녀를 말리려던 그때, 다른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는 건 어떨까요."
"야, 이번에 신입생 수준 봤냐? 진짜 미쳤다니까?"
"마법 쪽? 아니면 무투 쪽?"
평소였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텐데.
레이첼의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는 것이 보였다.
"양쪽 다 돌았다니까? 지금 2학년이랑 붙여도 이길걸?"
"그 정도라고? 이름은?"
"잠시만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도 아…."
카트린느는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
'제발, 제발 이 순간에 맞춰서 나올 리가 없잖아.'
그녀는 설마 하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고.
"알? 아, 아니다. 하이젤, 그래 하이젤이었을걸?"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언니 잠시 기다렸다가…."
"걔가 지금 수석 확정이고, 그 밑에 경쟁하고 있는 게 유명한 용사의 후예랑… 또 다른 한 명이 앨런? 알렌? 아마 그런 이름이었을 거야."
쾅!
황색의 빛이 점멸했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예, 예. 그, 선배님 제가 뭘…."
이야기하던 남학생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레이첼의 모습에 몸이 굳었다.
"알렌."
"예?"
"방금 말한 신입생 이름이 알렌, 알렌 라인하르트 맞아요?"
"그, 그게…."
그녀가 싸늘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푸른 청발에 무표정한 얼굴,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남자가 맞냐고요. 후배님."
남학생은 기억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 맞는 것 같은데… 요?"
"고마워요."
레이첼은 그 대답을 들은 즉시 시험장으로 전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아! 언니 어디 가요!"
"미안! 조금 이따 봐!"
"아니, 하, 아니…."
그럼 이 난리는 누가 정리하냐고….
레이첼의 텔레포트 여파로, 책상과 의자들이 어지럽혀진 내부를 보며 카트린느는 찌푸려지려는 눈살을 꾹꾹 피며, 한숨을 쉬었다.
'진정하자, 진정해. 주름이라도 생기면 큰일이야.'
그녀는 아직도 기억했다.
알렌과 방에서 독대하던 날, 그가 마지막에 그녀에게 했던 말을.
[카트린느 공녀,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간단합니다.]
"그, 카트린느 공녀… 님이 맞습니까? 저희와 같은 1학년이신…."
"네, 맞아요."
그녀가 없는 재능을 끌어모아 실력을 올리고, 이렇게 노력하게 만들었던 원인을.
[그 누구보다 아름다워지십시오.]
"곤란해 보이시는데…, 저희가 도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예, 힘쓰는 일 같은 건 저희가 하겠습니다."
카트린느는 매번 거울에 연습하던 청아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그 어떤 이가 보기에도 매력적일 만큼. 외적인 면뿐만 아닌, 내적인 면마저도.]
"어머, 곤란했는데 정말 감사해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희 탓도 반쯤 있는데, 괜찮습니다."
그녀의 칭찬에 남학생들의 얼굴이 붉게 변해 빠르게 카페 내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덕분에 빠르게 정리할 수 있었네요."
"그, 그런데 혹시 시간이…."
"벌써 갈 시간이 되었네요. 그런데 방금은 뭐라고 하셨는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녀는 방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 드십시오.]
"네-, 당신들도요."
그녀도 움직였다.
알렌이 왔다면, 분명 '그'도 왔을 테니까.
[그의 여자 중 하나가 되어.]
* * *
나타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제7 시험장을 응시했다.
이곳의 시험에서 확인하는 것은 정신력.
환각 마법을 통해 본연의 정신력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들의 그릇이 얼마나 '완성'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곳.
그 시험장의 한 곳에 그녀가 알던 남자가 앉아 있었다.
"928번 율리우스 라인하르트, 형과 다르게 그 정도밖에 하지 못하나! 같은 가문이 맞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생각했던 것과 다른 모습으로.
시험관의 외침에 율리우스는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나 자신 있게 소리친 것 치고는 별다른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식은땀이 뻘뻘 흘러내린다.
그의 정신을 시험하던 공격도 간신히 방어해 내며, 온몸을 옥죄는 결계를 건드릴 엄두조차 낼 수 없다.
그녀가 알던 그가 맞나 의심이 될 정도로 율리우스는 달라져 있었다.
율리우스의 강대했던 마력은 어디 갔는지 쥐꼬리만 한 양의 마력밖에 느껴지지 않았고, 흑마법사를 박살 냈던 기세도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이건…, 이상해요.'
신수의 몸을 좀먹던 흑마력을 정화해 내던 번개를 꺼내 든다면, 저깟 저급한 마법 따위 단 한 방에 박살 낼 수 있을 텐데.
마치 지금의 율리우스는 일부러 실력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어째서?'
모른다.
이미 같은 시험장에 있었던 알렌 공자는 가까스로 두 번째로 끝마치며, 그들만의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태.
그녀가 알던 그의 성격이라면 율리우스도 그 경쟁에 끼어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저런 연기를 하는 이유는.'
실력을 숨겨야 될 만한 이유가, 있다?
알렌의 태도 역시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알던 이상적인 형의 모습을 하던 그였다면, 율리우스의 부진함에 당장이라도 달려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율리우스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자기 시험에 집중하느라 바빠 보였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여유롭던 그의 인상과는 맞지 않는 모습.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한다.
율리우스가 힘을 숨겨야 될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알렌도 알고 있으나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럴 만한 게 있던가요?'
충분한 무력과 권력을 지닌 저들을 저렇게 행동하게 만들 원인이?
퍼즐의 윤곽은 확인했으나, 그 사이의 공간이 뚫려 있어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타샤는 그들의 행동 이면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문제는 그것을 그녀만 눈치챈 것이 아니라는 것.
"흠, 우리가 알던 그의 모습과 너무나 달라진 것 같은데…."
리브레 왕국의 제3 공주이자 율리우스와 만난 적이 있었던 헬레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공주님의 뜻에 동의합니다."
그녀의 물음에 아이린은 무엇을 담고 있는지 모를 눈으로 율리우스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헬레나라고 불러도 된데도? 너는 그가 없으니 너무 딱딱하구나."
"…죄송합니다."
"그의 형 또한, 그가 말해 준 성격과도 일치하지 않고…."
그녀는 율리우스가 아카데미로 향한다는 소식에 대리인을 통해 가문을 관리하기로 하고, 이곳으로 왔다.
"어찌 되었든 그에게 무언가 일이 생긴 것 같으니… 도와주러 가야 하겠구나."
헬레나는 자신을 쳐다보던 엘프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쳤다.
"이미 경쟁자도 있는 것 같으니, 빠를수록 좋겠고."
그녀는 낮게 웃으며 아이린에게 속삭였다.
"당연히 너도 가겠지?"
"예, 반드시."
그 대답에 헬레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그럼 가보자꾸나. 그도 이번 시험을 통과한 모양이니."
끈적한 땀으로 범벅이 된 그의 곁으로 세 명의 여성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 * *
입학시험은 예상과 다르게 가까스로 차석을 차지했다.
경쟁이 생각보다 매우 치열했기 때문이다.
수석을 할 것이라고 이름이 자자하던 용사의 후예와 3대 가문 중 하나인 드라기아스 가문의 자제까지.
그도 마음대로 힘을 아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본래 감춰 둘 예정이었던 것보다 더욱 많은 패를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용의 노심은 감춰 두고 싶었는데.'
전투를 한다면 필연적으로 감춰 둘 수 없는 육체와는 다르게, 용의 노심은 당분간 공개할 생각이 없었다.
무한에 가까운 마력과 감지력이라니.
이론상 체내의 마력과 체외의 마력, 모두를 무한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매력적인가.
아직 자신의 정신과 신체가 과부하를 버티지 못하기에 오래 사용하지 못하지만, 순간적인 출력만큼은 6 위계 최상위 마법사 정도는 되리라 짐작했다.
그것도 알렌이 비교적 전투와 관련이 없는 계통이기에 이 정도에 그쳤지, 원소 속성에 발을 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몰랐다.
'…아직 용의 노심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들키지 않은 것 같다만.'
자신의 심장이 보통 서클 체계로 만들어진 고리와 다르다는 사실은 눈치챘을 터.
피부를 찌르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낯빛이 어두운 음침한 분위기의 청년 한 명이 알렌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엘닉스 드라기아스
3대 가문 중 드라기아스 가문의 막내 공자.
그와 차석을 경쟁했던 경쟁자 중 한 명이자, 용사 후예의 뒤를 이어 4등으로 밀려난 남자.
그의 동공은 단 한 번의 떨림도 없이 알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마 저렇게 하는 이유가 무얼지 짐작이 갔다.
「더러운 도마뱀의 냄새가 나요.」
'용의 혈통.'
「그것도 잡종의 피가.」
정신을 집중하자 어렴풋이 그에게서 이끌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런 같은 느낌을 받고 있기에 알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거겠지.
엘닉스 드라기아스, 아니 그뿐만 아니라 드라기아스 가문의 모든 이들은 용의 피를 이은 이들이 분명할 것이다.
'3대 가문은 대몰락 이후에도 생존했다고 했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용의 피를 이었다니.
자의인지 타의인지 모르겠으나 완전히 몸에 정착시켰다면 그 재난에서 살아남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거인의 몸으로 탈변한 알렌도 엄청난 변화를 겪었는데.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눈꽃처럼 티 없는 순백의 백발과 그에 어울리는 무표정한 외모.
검은 책에서도 가끔 언급된 주연 중 한 명이자, 자신이 진짜 용사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여자.
'마리아 카리타스.'
그녀는 자신의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세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알렌은 미래를 위해, 혹시 마왕을 견제할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서 그녀와 친분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지금은 대화를 나누기에 별로 좋은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알렌은 그녀가 자신의 시선을 눈치채기 전, 제일 앞에 자리한 남자에게 시선을 향했다.
율리우스가 무수히 언급한 '원작'의 '주인공'이자, 초대 용사와 다투었다는 초대 마왕의 환생이며, 끝내는 미래에 홀로 나라를 무너뜨릴 힘을 가진 사내.
드디어 그를 만나게 되었다.
'하이젤 카일루스.'
율리우스가 행동하는 원인이자, 알렌이 가진 마지막 회색 책의 주인으로 의심되는 자.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귀찮음이 가득한 얼굴에는 이 상황 자체에 대한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고, 입고 있는 옷에는 깔끔함이 돋보인다.
'딱히 겉으로 보이는 마왕이라 부를 만한 특징은 없나?'
얼굴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편이나, 귀족들 기준으로 잘생겼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증거가 될 수는….
'카일루스라는 가문이 존재했었나?'
어디서 들어 봤던 것 같은데. 자세한 조사가 필요해 보였다.
알렌이 그를 관찰한 지 한 호흡도 되지 않을 시점.
"…음?"
하이젤이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알렌의 눈을 바라보며.
알렌은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감응력까지 동원해 은밀하게 관찰했는데.'
시선 한 번에 그를 잡아내다니.
알렌은 어쩌면, 자신이 최선을 다했어도 그에게서 수석의 자리를 빼앗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하이젤은 그의 속내를 눈치챘다는 듯 히죽 웃었다.
"내가 시선에 조금 민감해서 말이야."
"…불쾌했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아니, 불쾌했다기보다는… 조금, 신기해서 그래."
입학시험의 합격자들이 속속히 중앙 광장으로 몰려든다. 시험을 주관하던 시험관들이 그들을 줄 세웠고, 이제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통과 의례만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살아있나 싶어서."
"그게 무슨 말인지…?"
"그도 그럴 게, 꼭두각시 주제에 잘도 따르잖아?"
알렌은 순간적으로 당혹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하이젤의 목소리에 의아함이 여렸다.
"자기 처지도 모른다고? 그 새끼들의 방식이 바뀌었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 새끼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잠깐!"
알렌이 급히 입을 여는 순간, 입학시험을 총괄하던 남자가 하이젤의 이름을 불렀다.
"1102번, 하이젤 카일루스! 아카데미의 전통이자, 통과 의례로써 성검의 주인이 될 수 있는지 확인하겠다! 앞으로 걸어 나가, 성검의 손잡이를 만지도록!"
"뭐, 이제 내 알 바는 아니니까."
하이젤은 그렇게 말하며 붉은 카펫이 깔린 광장의 위를 천천히 걸었다.
"정 궁금하면 나중에 오던가, 안 와도 상관은 없고."
가볍게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은 일견 경박해 보이기도 했지만, 알렌은 그런 모습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내가, 꼭두각시라고?'
무엇에?
아니면 누구의?
그냥 자신을 흔들기 위한 함정인가?
'그럴 이유가 있나?'
아니면 저 말의 진의가 무엇인가.
자신이 주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던 알렌은, 그의 말에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와아아아!"
"미친, 성검이 반응한 거 봤냐? 이게 몇 년 만이지? 와…."
"17년 만이던가? 이번 신입생은 진짜…."
그러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572번 알렌 라인하르트! 이제 네 차례다! 시간이 없으니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도록 하겠다!"
알렌은 붉게 변한 광장의 중앙, 투박한 바위의 위로 이 도시의 근간이자 기둥인 성검이 박혀 있었다.
이처럼 성검을 가까이할 기회가 언제 있을지 모른다.
'다른 5대 신기를 이렇게 볼 기회가 다시는 없을지도 모르는데….'
알렌은 더 이상 입학시험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시선의 끝에는 하이젤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으며, 아카데미의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이럴 시간이 없다.'
성검을 가까이할 기회가 더 없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아는 것이 더 중요했다.
알렌이 곧바로 성검의 손잡이를 잡자 성검의 검날이 빛을 뿜어내며 반짝였다.
"아니, 미친 쟤도 저런다고?"
"이번 신입생 수준, 진짜 가슴이 웅장해진다."
"용사의 후예까지 성검 반응하면 연속 3번 아니냐?"
가슴 속에서 그가 가지고 있던 5대 신기중 하나인 구슬이 잘게 떨었다.
그는 광장을 빠져나왔다.
다른 사람들의 환호와 5대 신기의 반응, 시선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하이젤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몸을 돌린 그때.
"아."
황색의 빛이 점멸하며, 하늘색 눈동자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알렌, 여기서 지금 뭐 해요."
춘봄의 꽃바람에 옅은 뮤게 향기가 섞여 왔다.
"연락은 어디 가고, 여기서 뭐 하냐고요. 내가 묻고 있잖아."
그리운 목소리와 함께.
"…레이첼."
제66화
팔강.
초대 용사의 동료였던 여덟 명 이후로 생겨난 칭호.
팔강의 일원은 강해야 하며 누구의 도전이든 거부하지 않는다.
그것이 팔강이라는, 짊어진 명예를 더럽히지 말자는 최소한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강이 최강이라고 말할 수 있냐고 한다면, 그렇진 않았다.
당연히 그들과 비슷한 실력을 갖춘 이들도 분명히 존재하며, 인류에게 적대적이거나 중립적인 이들도 몇 명이나 있다.
그중에는 갈슈딘 아카데미의 이사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카데미가 설립되었을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사장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여자.
겉으로는 호의를 내비치면서도 중립을 표방하는 강자.
아카데미에는 공식적으로 두 명의 팔강이 상주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보자면 그녀를 포함하여 총 세 명의 강자가 아카데미 내부에 상주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건 그대로 내버려 둘 생각인가요?"
"어린애 장난일 뿐인데, 이 어르신이 신경 써야 할 일이냐?"
짐승왕 가이온, 팔강의 일익이자 수인의 몸으로 오랜 시간 팔강의 자리를 지킨 그는 비싼 양주를 물처럼 들이켜며 답했다.
하얗게 센 귀가 까딱였고, 얼굴에는 명백히 귀찮음이 묻어 나왔다.
"기껏해야 그 정도로 뭘 호들갑인지… 쯧."
그의 대답에 짜증 어린 표정을 지은 자크니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 지금 저렇게 수상한 모습을 보고도…."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자, 커다란 화면 위로 율리우스가 붉은 가루를 흡입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후에 입학시험에 참여하는 모습도.
"일부러 실력을 낮추기 위해 약을 사용하는 모습이 정상이라는 겁니까!"
그가 소리쳤음에도 가이온의 태도는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목소리가 시끄러웠던지 복슬복슬한 귀를 손으로 덮었다.
"아이들끼리의 싸움에 어른은 끼어들지 않는다. 그로 인해 설령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필요한 일이다."
그의 무심한 말에 자크니르의 목에 핏대가 솟았다.
"팔강이라는 자가!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방관하겠다는 말입니까!"
"애송이."
"…지금 무슨 말을!"
가이온은 그가 분노하는 모습에 비웃음을 흘렸다.
"팔강이라고 불리니, 네가 뭐라도 된 것 같나?"
자크니르.
세상에 알려진 그의 명칭은, 하늘의 방패.
현재의 팔강 중 가장 어린 나이임과 동시에, 팔강의 자리를 받은 지 3년이 채 되지 않은 자였다.
그러나 그런 그의 명성도 가이온의 눈에 차지 않았다.
"어거지로 자리를 이어받은 주제에 낯짝이 두껍구나."
"뭐?"
"비겁한 방법으로 전대 늙은이를 이긴 주제에 말이 많다는 말이다."
그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 나가자, 지크니르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쾅!
"이 미친 늙은이가…!"
자크니르의 주위로 수백, 수천 개의 광구가 생겨나며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그의 위협에도 가이온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왜, 내 말이 틀렸냐?"
가이온이 언급한 일은 그의 역린이었다.
아직까지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그건 이미 끝난 일이 아닙니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의 외침에도 가이온은 시큰둥한 얼굴로 답했다.
"이미 다른 이들도 찬성한 일이란 말입니다!"
팔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업적과 팔강 과반수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 업적 가운데 가장 간단한 것이 현재 팔강의 자리에 앉은 자를 이기는 것.
그는 팔강과 다툴 만한 실력이 있었으나, 그의 진면목은 공격하는 것보다 방어하는 것에 있었다.
전대 팔강과 싸우던 그는 마지막 한 수가 부족한 것을 깨닫고 한정적인 지역에 상대를 가둬 버렸다.
하루가 지났을 때, 상대는 그를 무시했고,
일주일이 지나자, 그는 온갖 방법으로 탈출하려고 했다.
한 달이 지났을 때는 자크니르와 협상을 시도했으며.
석 달이 지났을 때는 미친 듯이 발광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섯 달이 지났을 때, 상대는 패배를 인정했다.
패인의 요소는 무력의 차이가 아닌, 그저 몇 달간의 지속된 격리로 인한 굶주림이었다.
"과정이 어찌 됐든 과반수의 동의를 받았고, 저는 당신과 같은 팔강의 일원입니다! 언행에 주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네가?"
그 말에 이제야 그와 눈을 마주친 가이온은 기다란 어금니를 드러내며 물었다.
"예, 그러니 당장 사과를…."
자크니르는 말하다 말고 본능적으로 광구를 넓게 펼쳤다.
쾅!
"오호라, 짖는 실력은 있다는 거냐?"
어느새 가이온의 손에는 거대한 대검이 들려 있었다.
투박한 대검의 뒤로 강대한 기파가 몰아쳤다. 성질에 걸맞은 검붉은 오라가 타올랐다.
까득-
얼굴이 눈에 띄게 굳은 자크니르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하, 이건 당신이 먼저 시작한 겁니다. 후회하지 마십시오."
막 팔강이 된 후 맞이하는 차례에 부푼 가슴으로 아카데미로 왔건만, 저런 늙은이가 있을 줄 알았다면 분명 다음으로 미뤘을 것이다.
"그래, 팔강 안에서도 위아래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줘야겠구나."
가이온은 기껍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강자존을 지향하는 그로서는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승리한 자크니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이 부딪치려던 순간, 그들의 사이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그만하시지요."
"…아나스타샤."
"할망구."
그와 함께 순식간에 좌중을 압도하는 마력에 자크니르는 한숨을 내쉬며 광구를 거두었다.
"…하아. 이번에는 당신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그가 물러나자, 가이온도 김이 팍 샜다는 얼굴로 대검을 집어넣었다.
"쯧, 남자가 기개가 없기는."
그 말에 욱한 자크니르가 대답하려던 찰나, 그들의 사이로 묘령의 여인이 끼어들었다.
"그만, 그만! 당신들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의무를 다하기 위함이에요. 더 이상의 다툼은 좌시할 수 없어요!"
"…애초에 그가 아니었다면 싸울 의향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가이온은 자신의 앞에 자리한 그녀의 실력을 가늠했다.
'한번 싸워 보고 싶기는 한데….'
수백 년간 직접 설계하며 가꾼 이곳에서 싸우는 건 그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이 도시는, 이미 그녀만의 영지나 다름없다.
거기에 용과 비견될 마력에 아카데미의 모든 지식이 그녀의 손을 거쳤으니…, 가이온도 그녀가 얼마만큼 강한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 모두를 감수할 가치가 있나?'
한동안 고민하던 그는 결국 알겠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알았다, 알았어. 이 어르신이 그만두면 될 거 아니냐."
그가 명백히 토라진 투로 소리쳤지만, 이 자리에서 그걸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떤 일로 다투신 겁니까."
갈슈딘 아카데미의 이사장인 그녀는 매번 갈등을 일으키는 그들의 모습에 한숨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그건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자크니르의 말에도 가이온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다시 자리에 누워 술병을 기울였다.
"입학시험에서 한 명이, 아니 그를 포함한 몇 명의 학생들이 실력을 감춘 채 들어왔습니다. 그가 무슨 의도로, 어떤 목적으로 이곳에 들어왔는지 모르니 조사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그를 제외하고도 아카데미의 시스템에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아니, 애초에 당신의 실력이라면 이따위 문제들쯤 처음부터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가 의구심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아나스타샤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우리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건…."
"그걸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한들, 그 사고는 학생들이 해결할 문제지 우리가 끼어들 문제가 아닙니다."
그녀의 답에 자크니르가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잠깐,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문제들도 일부로…?"
"저희가 키우는 것은 전사지, 온실 속 화초가 아닙니다."
그녀가 말한 의미를 모를 정도로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학생들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단련시키기 위해 놔두는 것이었다니…."
문제의 해결책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던 그는 다소 허탈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 간의 암투나 아카데미의 습격 같은 위협은 성장하는데 충분한 원동력이 되지요."
"내부의 첩자도 마찬가지입니까?"
"적절한 시련은 이겨 낸다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 거름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런 이유로 갈슈딘 아카데미는 세계 최고의 교육 시설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1년에 몇 번이나 사건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너무 커다란 일은…."
"아이의 다툼에 끼어드는 어른을 어르신이 봐줄 이유는 없지."
가이온의 말이 맞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가 있었다니…."
가이온은 선반에서 새로운 술을 꺼내며 답했다.
"그러니까 네가 애송이라는 거다."
"처음부터 설명해 줬다면, 내 꼴이 이렇게 우스워질 일이 없었지 않습니까…."
"내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자크니르는 조금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니 이번 일도 알아서 흘러가게 놔두세요. 너무 크게 흘러간다면 막으면 될 일이고, 수상한 자들은 미리 파악해 두고 있으니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예,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화가 일단락되자, 아나스타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 참, 만약 여기 학생 중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다면 제자로 삼아도 됩니다. 필요하다면 시간도 조정할 수 있으니 한 번 확인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흥."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가이온은 생각이 없다는 듯 코웃음 쳤으나, 자크니르의 눈은 순간적으로 화면의 한 곳으로 향했다.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해 주세요.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은 이 도시 안에 있는 것으로 끝이 아닐 테니."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방에서 사라졌다.
가이온은 힐끔 화면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몇 놈이 괜찮아 보이기는 하는데….'
아직 그의 눈에 찰 만한 놈은 없었다.
그가 원하는 특별한 조건에 부합된다면 모를까.
* * *
"…저기가 당신이 지낼 필로소피아 관이고, 그 반대쪽에 있는 게 트라소스 관이에요."
맑은 하늘은 따뜻한 햇살 아래 구름 한 점 없었고, 아카데미는 다음 주부터 시작될 새 학기로 인해 한산했다.
"트라소스 관은 근접 전투 쪽과 관련된 이들이, 필로소피아 관은 당신 같은 마법사 위주의 학생들로 배정돼요."
입학시험은 어제 마무리되었다.
알렌은 레이첼을 따라 그녀에게 아카데미를 안내받고 있었다.
"필로소피아 관의 뒷길을 이용하면 빠르게 연구 단지나 도서관으로 이동할 수 있구요."
기숙사 뒤쪽의 동쪽으로는 고대 유물이나 문헌 그리고 마법을 연구하는 연구 지구가 자리해 있었고, 남쪽으로는 거대한 상업 지구가 형성되어 있었다.
"아카데미 동쪽에 있는 지하철을 타면 어느 지역이든 쉽게 갈 수 있어요."
북쪽은 여러 생필품과 무기가 생산되는 공업 지구였고, 서쪽은 알렌이 들어왔던 여관이 가득한 주거 지역이었다.
"알렌, 왜 말이 없어요?"
"잠시, 생각 좀 하느라 그랬…."
"왜요, 연락도 없더니. 이제 말도 무시하려고?"
"…사과하겠다."
알렌은 난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레이첼은 어제 알렌을 만나자마자 바로 다음 날 약속을 잡았다.
'약속이 겹쳤군.'
오늘은 그녀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와도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다.
또한, 마음 같아서는 하이젤과도 만남을 가져 보고 싶었지만, 레이첼의 불같은 기세에 알렌은 그녀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말도 무시하고. 다음에는 뭐, 아는 척도 않을 거죠? 흥."
"아니,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그걸 어떻게 믿어요."
레이첼이 몸을 돌려 알렌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당장 어떻게든 그걸 증명하라는 단호함이 돋보였다.
'연락할 생각은 했었다.'
그는 입학시험을 마친 후 그녀와 만날 생각이었다.
아카데미에서 만나자는 말이,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연락하라는 말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요컨대, 그녀와 그가 생각했던 시기의 차이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알렌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네가 원하는 증명을 하겠…."
"…흐."
그때,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눈이 반달처럼 곱게 휘었다.
"흐훟. 장난이에요. 장난!"
"…장난이라고?"
그녀의 웃음에 알렌이 얼굴을 굳히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 기분 나빴어요? 나빴으면 미안하긴 한데, 저도 마음 졸였단 말이에요…."
그녀는 알렌의 눈치를 보더니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고개가 아래를 향했다.
"알렌, 당신이 제 기분을 알아줬으면 했어요…."
"...."
"…미안해요."
"...."
"알렌? 알렌?"
그녀가 답이 없는 그의 모습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뭐라 말이라도 해 봐요. 화라도 낼 거면 내…."
그곳에는.
"아니, 나도 장난이다."
언제 화냈냐는 듯 어색하게 웃고 있는 알렌이 보였다.
"…알렌."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크게 뜨인 눈과 작게 벌린 입이 귀여웠다.
"나도 장난을 한 번 해 보고자…."
"몰라요!"
그녀는 화가 났다는 걸 일부러 보여 주듯 쿵쿵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섰다.
"잠깐…!"
알렌이 소리치자, 잠깐 고개를 돌리더니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미안하면 빨리 와서 손이나 잡아 주던가요!"
"다른 건 필요 없나?"
"다, 다른 거요…?"
그녀의 볼에 작은 홍조가 피어올랐다.
레이첼은 알렌이 손을 잡아당기자 멍하니 그의 쪽으로 몸이 이끌렸다.
"그래, 이를테면…,"
알렌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녀는 안도하는 얼굴이 되었다.
"남사스럽잖아요…. 갑자기 여기서."
"글쎄…, 아카데미에 오면 이것보다 심한 걸 하자고 한 사람은 누군지 모르겠군."
그가 낮게 웃으며 말하자, 그녀는 얼굴이 사과처럼 붉어졌다.
"아, 아악! 악! 말하지 마요! 말하지 말라고!"
알렌이 도망가려는 그녀의 뺨을 붙잡았다. 레이첼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쪽.
"이걸로 만족하나?"
뭐라고 말하고 싶은지 입을 몇 번이나 우물거리던 그녀는,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속닥였다.
"…네."
"다행이다."
"사실, 조금 부족한 것 같기도 해요."
알렌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아무런 근심 없는 웃음이 걸렸다.
스륵-
그때, 그들의 뒤로 한 쌍의 눈길이 그림자 속에서 조용히 아롱졌다.
잠시 후 시선이 사라진 자리에는 은은한 수목향이 감돌았다.
"알렌 뭐 해요. 빨리 안 가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어서 가지."
알렌은 그녀와 빠르게 상업 지구로 몸을 움직였다.
자신도 그녀도, 오늘 함께할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인재를 수집한다라.'
그런 행동은 율리우스가 자주 하던 것이었는데.
알렌의 눈이 공업 지구의 한 곳을 향했다.
뿌려 둔 씨앗을 수확할 때가 되었다.
제67화
율리우스는 공업 지구로 향하는 내성 문을 넘었다.
슬슬 괜찮은 무기를 갖출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지금 무기로는 안 돼.'
지금 쓰는 것도 왕도의 대장간에서 구한 괜찮은 검이었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 무기로는 모자랐다.
원작에선 아카데미에서 많은 사고가 일어나기에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시끄럽게 울리는 망치질 사이로 드문드문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 입학시험 봤나? 카일루스 가문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만한 천재를 배출했으면 지금쯤 축제겠군."
"나는 하이젤보다 알렌이 괜찮았어. 조금 여력을 남겨 둔 것 같다고 해야 되나?"
"그것치고는 차석도 아슬아슬 한 것 같았네만…, 역시 나는 마리아 님이 더욱 돋보이더군. 소문보다 더 아름다우신 분이야."
"드라기아스 가문은 아쉽겠어. 막내라 해도 제 형만 못한 놈이 왔으니."
장사꾼의 소리였다.
지나가던 용병의 대화였고, 하릴없는 도제의 시간 때우기였다.
어제로 끝난 입학시험의 열기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길게 뻗어 나온 가로등이 땅거미를 몰아내며, 저 너머로 사라진 주홍빛 노을을 대신했다.
아깝다. 율리우스의 표정이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이런 씨, 기연만 아니었으면….'
보충 반에서만 얻을 수 있는 기연을 위해 마력을 흩트리는 약을 썼다.
자신이 좋은 성적을 거둬 주인공과 같은 반이 되면 원작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었기에 그렇게 행동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지금 와서는 조금 아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잘못해서 원작이 어긋나면? 원작과 흐름이 달라진다면?
그럴 수 없다.
그렇게 해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원작의 기연들이 아까웠고, 원작대로 사건이 진행되는 것이 훨씬 편했다.
'내가 움직이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처음부터 날뛰었다간 어떤 어긋남이 발생할지 모른다.
알렌 형님이 차석을 했다는 사실은 놀랐다. 하지만 자신이 전력을 다했다면, 그 자리는 자신의 것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기에 자신의 담을 그렇게 크지 못했다.
율리우스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발걸음을 높였다.
오늘 그는 찾을 사람이 있었다.
원작에서 봤던 불쌍한 대장장이.
실력은 나이에 맞지 않게 월등하지만, 단 하나의 요소로 인해 제대로 꽃피지 못하고 있는 자.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빌런이 되어 버린 이들.
신드리 남매.
'지금쯤 낡은 대장간을 팔아야 될지 고민하고 있을 시기겠지.'
나중에는 지금껏 겪은 차별과 차오른 울분으로 인해 아카데미를 테러하는 이교도의 일원이 된다.
오전부터 만나고 싶었으나 다른 이들의 방문 때문에 시간이 늦춰졌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빨리 수거해야지.
몇 개월 전에 영입할 수도 있었지만, 이곳까지 손을 뻗치기에 품이 너무 많이 들었기에 포기했다.
그 대신에 다른 작업을 했다.
'적당히 힘겨운 기억은 있어야지.'
그들에게 너무 빠르게 손을 뻗는다면 그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있다.
율리우스는 그들이 자신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가지기를 바랐다. 원래 고생해 봐야 소중한 것을 안다. 그렇기에 율리우스는 초창기에 사람을 보냈다.
악의적인 소문을 흘리기 위해.
'어차피 망할 인생이라면 상관없잖아?'
그렇다면 조금 더 빨리 망한다고 해서 상관없으리라.
그 후 몇 달이 지나 결과를 알아보니 신드리 남매가 원작에 있던 것보다 더 처참한 실패를 경험했다 한다.
이제 그간의 노고를 보상받을 시간이다.
율리우스는 그들을 수집할 생각에 입가에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만약을 대비한 보험도 준비해 놨고.'
귀에 달린 귀걸이 감촉이 어색했다.
착용자에게 약간의 호감을 가지게 만들고, 끝내는 정신적 속박을 당하게 만드는 유물.
멀쩡한 이들에게는 쉽게 떨쳐 낼 수 있는 미미한 효과밖에 내지 못하지만….
힘든 삶 속에서 만난 온기에, 쉽게 현혹당할 것이다.
"또 방문해 주세요! 발홀(Valh?ll)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런데 대장간을 찾기가 어려웠다.
공업 지구의 구석, 연구 지구와 가까이 위치한 낡은 대장간이라고 했는데.
아무리 글귀로 위치를 읽었다 한들 몇 시간째 찾지 못하는 건 이상했다.
"대장간 이름이 뭐라고 했지? 발, 발…."
"발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래, 발홀!"
율리우스가 눈을 크게 뜨고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희 대장간의 무기는 엘피스 최고의 품질을 자랑합니다!"
그가 찾던 곳이라고 생각하지 못해 몇 번이나 지나쳤던 장소.
그곳에는 주변의 낡은 건물과 비교되지 않는 3층짜리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스름한 하늘임에도 북적거리는 인파와 지은 지 얼마 안 된 듯한 깨끗한 외면.
소녀 한 명이 입구에서 명랑하게 인사했다.
율리우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한 표정으로 내부로 들어섰다.
실내도 겉과 마찬가지로 깨끗했다.
1층에는 수많은 무기가 깔끔하게 분류되어 있었고, 2층에는 1층보다 더욱 좋은 품질의 무기가 벽면에 걸려 있었다.
"이건…."
검 한쪽을 유심히 살펴보던 그는 확신했다.
이건 그들이 만든 무기다.
손잡이 아래에 작게 새겨진 특유의 망치 문양이 있었다.
율리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이게 왜…."
원작의 내용이 왜 달라졌지?
이렇게 된다면 그들을 거두려 했던 그의 계획이 어긋난다.
그는 가까이 있던 점원에게 다가섰다.
"이 대장간의 주인을 만나고 싶다."
"예?"
"이곳의 주인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처음 그가 말했을 때까지만 해도 의아한 표정을 하던 점원은, 그가 내뱉은 말에 익숙한 일인 듯 한숨을 내쉬었다.
"손님, 죄송하지만 신드리 님께서는 현재 접견 요청을 받지 않으십니다."
신드리. 그가 찾던 이름에 그의 마음이 더 급해졌다.
"나는 율리우스 라인하르트다! 여기 주인을 만나고 싶으니…."
"경비원, 손님이 나가신다고 합니다."
점원이 외치자, 내부를 지키던 용병 2명이 율리우스의 팔을 잡았다.
"내가 누군지 아냐! 나는 라인하르트 가문의…."
"예예, 그러시겠지요. 저는 빌이라고 합니다."
억세게 잡힌 팔이 아렸다.
점원의 귀찮은 듯한 표정에 마력을 끌어 올렸지만, 마력은 요지부동이었다. 아.
"이런 씹…."
약의 기운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카데미의 학생이다. 학생이라고! 이거 당장 풀고, 안내해!"
"하아."
그의 얼굴이 붉게 변해 소리쳤다. 팔, 다리를 휘두르며 발광하는 그의 모습에 빌은 말없이 손을 저었다.
율리우스는 질질 끌려 나가면서까지 입을 멈추지 않았고.
"안녕히 가십시오."
쿵-
그건 건물 밖으로 내쫓겨날 때까지 이어졌다.
"시발──!"
* * *
밤의 소리는 낮보다 더 크게 울린다. 방음을 신경 쓴 방임에도 아래층에서 들린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밖이 많이 시끄럽네요."
"제, 제가 빠르게 말해 두겠습니다!!"
"됐어요. 몇 번이나 있었던 일인데."
카트린느는 여상히 고개를 저었다. 대장간의 정비를 마치고 나서 몇 번이나 있었던 일이 있을 따름이다.
"자신이 어디 상단의 누구니, 귀족의 자식이니. 자신의 권세만 믿는 자일 게 뻔하잖아요?"
탁-
완전히 펼친 부채가 입가를 가린다.
"안 그래요? 알렌 공자?"
"그래, 그렇겠지."
알렌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밖에서 소리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저러는 걸까.
『──율리우스는 자신을 경계하는 신드리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아직 사람을 믿지 못하는 걸까. 낡은 대장간의 벽면에는 다양한 크기의 구멍이 뚫…』
알렌은 현재와 다른 미래를 그리고 있는 검은 책을 흘깃했다.
"분명 교양이 없고, 예의가 없는 사람이겠지. 지금 시간에 찾아온 것만 해도 알 수 있지 않나."
"맞아요. 졸부의 아들이지 않을까요?"
"마, 맞습니다! 분명히 막, 막돼먹은 나쁜 녀석일 겁니다!!"
더듬거리는 목소리. 목소리의 주인은 작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성량을 가지고 있었다.
알렌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게 막아 놓은 창문을 살피며 말했다.
"그보다 대장간은 잘되고 있나?"
"예,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놀랄 정도로요. 처음 공자가 이들을 도우라 했을 때만 해도 저의가 의심스러웠는데…."
카트린느가 부채를 다시 접었다.
완연히 드러난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지금은 공자님의 안목을 믿지 않을 수가 없네요."
"도와주셔서 정말, 정말 가, 감사합니다!!"
말할 때마다 말을 더듬지 않을 수는 없는 걸까.
알렌은 카트린느의 옆에 앉은 그녀를 살폈다.
그의 가슴께에도 오지 않는 작은 키. 붉은 단발과 갈색빛의 피부.
작은 손은 굳은살로 가득 찼고, 눈동자는 그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요동친다.
"고, 공자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부, 분명히 죽었을 겁니다."
그녀는 인간과 드워프의 사생아, 하프 드워프였다
양쪽에게 차별받는.
"말한 것은 나였어도 직접 움직인 건 카트린느 공녀다. 나보다는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게."
"어머, 감사하여라."
하프 드워프는 하프 엘프와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선하다고 알려진 엘프와 다르게 치졸하고 마음이 좁다는 드워프의 핏줄.
"무, 물론 카트린느 님에게도 펴, 평생을 갚지 모,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 하지만 공자님이 아니었다면 바, 바뀌지 않았을 거, 겁니다!!"
손재주가 좋다는 장점이 있으나 작은 일에도 원한을 가지며, 그 탁월한 손재주로 만드는 것은 원한을 해결하기 위한 저주받은 무기다.
햇빛을 쬐지 못하고, 항상 어둡고 음침한 지하에서 사는 드워프는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종족이었다.
쉽게 말해서. 인간보다 믿을 수 없는 이들.
"그, 그러니 저희의 으, 은인이 맞습니다!!"
그런 이들이었기에 하프 드워프인 그녀는 인간에게도, 드워프에게도 속하지 못했다.
"햑!"
신드리는 자기가 소리치고도 놀랐는지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눈치를 살폈다.
"어때요. 괜찮죠?"
"…확실히 그렇군."
전생에서 주워들었던 소문과는 확연히 달랐다.
율리우스에게 충성하며 노예처럼 수많은 무기를 공급했다는 내용과도 달랐다.
검은 책의 내용에는 원작의 신드리 남매도 이교도에 빠졌다고 했는데.
'거둔 이를 맹목적으로 따를 만큼 몇 달간 겪은 일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건가?'
이른 시기에 거둔 게 옳은 선택이었군.
마지막에 카트린느와 독대했을 때, 알렌은 그녀에게 해야 할 일을 전하며 그녀의 행방을 부탁했다.
이교도의 전력을 세 배는 끌어 올렸다는, 그녀를 끌어들일 수 없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 분명 동생도 제 말에 도, 동의할 겁니다!"
"동생이라…. 크게 다쳤다는데, 지금은 괜찮나?"
"예, 예. 다, 다시는 못 거, 걷는 줄 알았는데…, 고, 공자님이 지원해 주, 주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녀는 그때를 회상하는지, 안색이 어두웠다. 힘이 들어간 작은 팔뚝이 선명하게 굽이쳤다.
"다행이군."
그녀와의 만남은 처음이었으나 카트린느와 편지를 통해 몇 번 연락했기에 완전히 초면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늘이 완전히 흑색으로 물들었을 무렵, 불현듯 침묵이 찾아왔다.
약속된 정적.
"그래서…."
그 침묵의 사이를 카트린느가 무심히 꿰뚫었다.
"슬슬 공자가 저희를 부른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왜, 다 큰 남녀가 함께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그런가?"
그녀는 그 말에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미인에게 수면은 필수라서 말이에요. 공자가 특별히 관리하라 했잖아요?"
잘 관리한 금발을 넘기는 손짓이 사뭇 우아하다.
"'그'를 위해서."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기는 하지. 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는 나가 있을까요?"
무언가를 느낀 걸까. 나가라고 말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비켜 줄 생각인지 신드리는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래 주면 고맙겠군."
"네, 넵!"
"너에게도 부탁할 것이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겠나?"
"시, 시키신 게 무엇이든 하, 하겠습니다!!"
알렌은 고맙다고 말하며 미소 지었다. 작은 신형이 순식간에 방을 빠져나갔다.
쿵-
알렌은 그녀를 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입학식이 끝나고, 다음 주부터 해야 할 일을 말해 주지."
내일부터는 원래의 목적이었던 대도서관에 가서 영혼 추적에 대한 마법을 조사할 예정이다.
린벨과 이넬리아도 그에 관련된 정보를 구하느라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율리우스, 그의 마음을 얻어 내는 건 쉽지 않을 거다. 너도 느꼈지 않나. 그의 성격을, 그리고…."
"주위에 여자가 참 많더라구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얼굴만은 출중해서인지 관심을 가지는 이가 많더군. 벌써 몇 명이지? 셋? 넷?"
"...."
"견제도 많겠지. 게다가 네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한들, 한번 너를 내친 그가 다시 돌아보기 힘들 거다. 그는 다른 것을 먼저 보는 것 같으니."
재능, 이라는.
불가사의한 능력으로 그는 사람의 가치를 판단한다.
"그러니 다른 쪽을 노려야 한다는 거다."
"무엇을?"
"사람을 원한다면 사람을, 무기를 원한다면 무기를, 기회를 원한다면 기회를. 만약 그가 원하는 것이 설령…."
막혀 있는 커튼의 너머, 보이지 않는 하늘의 모습을 상상한다.
언제나와 같은 달이 뜨고, 언제나처럼 별이 돈다. 다음 날이 되면 날이 지고, 다시 해가 뜬다.
계속해서.
"사랑일지라도."
알렌의 입술이 비틀렸다.
마음속에 날카로운 날을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