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에 못 미치더라도 돌아볼 수 있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좋은 형님을 원한다면 형님이 되어 주겠다.
평범한 가족을 연기하고자 한다면 그에 어울려 주겠다.
그 대신.
"모든 것을 주고 신뢰를 얻도록 하라. 내가 그것을 도와주도록 하지."
언젠가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반드시.
제68화
아카데미의 수업은 각자의 수준에 맞춰 이루어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재능에 맞춰진 양질의 강의를]
이제는 누구나 알게 된 구호.
이런 아카데미의 기풍에 따라 여러 학년이 한 교실에 있는 모습이 비교적 흔했다.
학생들은 각자의 이해와 지식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수업을 선택할 수 있고, 실력을 증명한다면 선배들과 같은 과목을 수강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마법의 습득은 3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처음은 자신이 인식하는 마력의 형태를 구분하는 것. 두 번째는 구분한 마력의 성질과 비슷한 마법 계통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
물론 1학년은 제외다.
"마지막 단계는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있나요? 흠… 어디 보자, 거기 창가 근처에 앉은 청발 학생?"
교수의 눈이 알렌을 가리켰다.
알렌은 지루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일어섰다. 그런 알렌의 모습에 베스틀라가 말을 걸었다.
「왜요, 너무 어려워서 그래요?」
겨우 이런 문제를? 설마.
「그럼요?」
단지, 너무 쉬워서.
"마법 습득의 마지막 단계에 대해서 말해 주실 수 있나요?"
"두 번째 단계에서 쌓은 지식은 술자의 염상에 쌓이게 됩니다. 술자는 자신의 창의력과 이해에 따라 그 지식을 비틀어 현실에 풀어냄으로써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너무 낮은 수업의 수준에 제대로 임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맞습니다. 맞아요! 그렇기 때문에 마법사마다 수인과 주문이 달라지는 원인이 되지요. 좋습니다! 다음 옆자리 학생?"
알렌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 왜 여기 있어요? 더 수준 높은 수업은요? 당신, 여기에 이러려고 온 게 아니라면서요.」
마음만은 이런 수준의 수업을 듣느니, 도서관에 박혀 서적을 뒤적거리는 것이 더 유용하겠다 싶었다.
그러나 알렌은 그럴 수 없었다.
"예, 옙! 제 이름은 루이스라고 합…."
"그래요, 옆자리 학생. 그렇게 마법사에 따라 마법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마탑이나 학파가 있는 이유가 뭔지 아나요?"
"그게…."
학생들 개개인의 수준을 측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건 왜요?」
생각이 전해질 때마다 팔목에 찬 둥근 팔찌가 작게 진동했다.
'입학시험에서 확인한 것은 실력보다 잠재력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에게 알맞은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학생들 개인의 수준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수업이 그 일환이었고.
"흠… 모르시나요? 모른다면 모르겠다고 해도 됩니다. 학생은 배우기 위해 이곳에 있습니다. 전혀 부끄러울 일이 아니지요."
"…예,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측정한 성적은 학생 개개인의 평가를 통해 그들은 다음 달부터 수강할 과목을 직접 선택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도서 때문이지요. 위계와 관계없이 마스터의 호칭으로 불리는 기준이자, 하나의 학파를 세울 수 있는 기준점이 되는…."
그 이후로도 기초적인 마법 이론에 관한 수업이 이어졌다.
위계에 따른 감지력의 범위, 각 속성의 상성, 마법의 속성에 따른 분류….
무려 두 시간에 걸친 수업이 끝나 종이 울렸다.
"다음 수업에 평가 시험이 있을 예정이니 복습해 두길 바랍니다."
기초 마법 이론을 담당한 노교수가 담담히 교재를 정리하고 교실을 떠나갔다.
"…아, 진짜 이걸 한 달 동안 해야 된다고? 수업 빠지면 안 되나?"
"그러다 평민들이랑 같이 보충 반 가겠다? 방금 저놈처럼"
"개소리하지 마."
교수가 나가자마자 학생들이 서로 모여들었다. 귀족은 귀족들끼리, 평민은 평민들끼리.
그곳에서도 종족이 나누어진다. 엘프들은 고고하게 같은 씨족들끼리 움직이고, 수인들도 무리를 짓는다.
인간들은 더 복잡했다.
각 나라의 귀족들 사이에도 서열이 나뉘었고, 그 안에서도 파벌이 갈렸다.
'첫날부터 이런 데 다음날은 어떨지….'
아카데미 측에서 이로 인해 발생할 문제를 모를까?
알렌은 그들을 한 번 살피고 관심을 접었다. 지금 그의 관심사는 그들이 아니었다.
계단식 자리의 맨 구석.
흑발의 머리가 책상과 맞닿아 있었다.
자고 있다고?
'간 한 번 크군. 걸리면 벌점이 적지 않을 텐데.'
뭐, 그건 내 상관이 아니지. 알렌은 그를 향해 움직였다.
그때.
"알렌 라인하르트."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청년이 보였다. 하얀 얼굴 위로 다크서클이 더욱 도드라졌다.
3대 가문인 드라기아스 가문의 막내 공자.
"엘닉스 드라기아스."
"입학시험 때 보고 처음 뵙는군요.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드라기아스 가문의 엘닉스 드라기아스입니다. 엘닉스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겉보기와 다르게 정중했다.
그래서 더욱 수상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반갑습니다. 엘닉스 공자. 라인하르트 가문의 알렌 라인하르트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그는 하얀 이가 보이도록 환히 웃었다.
"알렌 공자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겨우 그런 이유로? 알렌은 자신을 뚫어질 듯 바라보던 그의 시선을 잊지 않았다.
공명하듯 울리던 용의 노심도.
'꺼림칙하나, 지금 바로 적대하기엔 무리다.'
엘닉스가 말을 걸었을 때부터, 아니 움직였을 때부터 그들에게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3대 가문의 막내 공자인 만큼 그 정도의 관심은 당연했다.
알렌도 입학시험 때 차석의 위치를 따냈지만, 아직 그에게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적어도 지금은 그들에게 있어 아카데미 밖의 권세가 더 와 닿았다.
"감사한 일입니다만… 부르신 이유가?"
"이번 점심 식사에 제가 초대해도 되겠습니까?"
그는 적극적으로 알렌에게 다가섰다.
그의 곁에는 심복인지 추종자인지 알렌을 대우하는 엘닉스의 행동에 불만인 듯 표정을 찌푸리는 자가 있었다.
"죄송하지만, 선약이 있군요."
알렌은 단칼에 거절했다.
그들에 대한 정보를 더 얻기 전에 접촉할 마음은 없었다.
"선약? 상대가 괜찮다면…."
"아니, 괜찮지 않은데?"
나른하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일어났는지 하이젤이 재밌는 걸 본다는 듯한 얼굴로 턱을 괴고 있었다.
"당신은…, 이번 입학시험의 수석이었던…."
"하이젤."
"…하이젤 님이셨군요. 알렌 공자와 함께 식사에 초대하고자 하는데 오시겠습니까?"
그 말에 능글맞게 미소지은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싫어."
"초대를 받아 주셔서 감사…, 네?"
"싫다고. 너랑 같이 밥 먹는 거."
그의 말에 엘닉스의 말이 끊겼을 때부터 참고 있던 추종자 하나가 크게 소리쳤다.
"네가 상대하고 계신 분이 누군지 아느냐?! 지금 당장 수석을 했다고 네가 뭐라도 된 것처럼…!"
"이미 죽은 망령이 달라붙고 지랄이야."
그 말에 엘닉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주제를 알란 말이다! 사리분별…."
"그만."
"…하지도 못…."
"그만하라고 했다. 마티아스."
"…예."
낮아진 그의 목소리에 마티아스라 불린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엘닉스는 소리치는 추종자를 제지하고서 작게 묵례했다.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군요. 다음에라도 식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떠오른 고개에는 가까스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이젤의 대답은 간단했다.
"싫은데?"
그의 미소가 다시 사라졌다.
* * *
탁-
"그렇게 거절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어? 음…. 너는 알 줄 알았는데. 아직 아니구나."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알렌의 말에 하이젤은 의뭉스럽게 웃었다.
"그건 미안하지만 못 말해 주겠는데?"
알렌은 어이가 없는 듯 실소를 지었으나, 하이젤의 눈가는 진지했다.
"나는 이 이상 그 새끼들이랑 관계되기 싫어서 말이야."
"궁금하면 오라고 한 건 당신이 아닙니까."
"진짜 올 줄 몰라서 그랬지. 아, 말은 놓아도 돼. 나도 말을 놓았으니."
알렌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아는 걸 모두 토해 내라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실력을 가늠할 수 없다.'
지금 눈앞에 있음에도 그의 곁으로 아주 미세한 힘의 파동조차 흘러나오지 않는다. 힘을 모두 통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조금의 집중 없이, 일상인 듯 자연스럽게.
"그럼. 그러도록 하지. 그래서… '그 새끼들'은 누굴 뜻하는지, 방금의 말은 무엇을 말하는지 답해 줄 수 있나?"
"아마 네 옆에 있는 그 친구도 알 것 같은데…."
그가 명백하게 베스틀라를 눈짓하며 이야기를 꺼냈지만, 그녀는 하이젤의 근처에 다가선 이후부터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냥 평범한 검이라는 듯.
그 모습에 하이젤도 어깨를 으쓱이며, 두꺼운 크기의 스테이크를 잘라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괜찮네?"
말을 돌리려는 그 모습에 알렌도 장단을 맞췄다.
"이곳에 재학하는 학생들의 신분이 범상치 않으니 신경 쓰는 게 맞지 않나."
아카데미 내의 식당은 웬만한 식당을 발아래에 둘 정도로 괜찮았다.
식사 시간마다 수천 명은 족히 이용함에도 양질의 품질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요리사들의 우수함을 나타냈다.
"그리고 명목이 제2의 용사를 키워 내겠다는 곳인데, 이 정도는 당연하겠지."
"…용사."
하이젤은 잠시 아련한 얼굴을 하더니, 곧장 그 기색을 지웠다.
알렌은 묵묵히 그 모습을 응시했다.
'환생이라….'
수백 년 전, 자신을 죽인 호적수가 사라지고 그 검만 덩그러니 자리한 가운데 다시 살아난 기분은 어떨까.
기쁨? 슬픔? 만족? 공허?
세상이 바뀌었다.
용사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졌고, 초대 용사라는 빛바랜 칭호만이 남아 있을 뿐.
그런 세상에서 그는 무엇을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아는 건 율리우스의 독백을 통한 [원작]뿐이니.'
그 한 단면으로 하이젤이란 인물을 모두 파악하기에는 모자랐다.
알렌이 그에 대해 무언가 안다는 것도 결국 검은 책을 통해 알아낸 정보밖에 없지 않나.
"그러고 보니 너는 이곳에 어떤 이유로 왔냐? 아, 이것도 모르려나?"
하이젤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순전히 궁금증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흔히 다른 귀족처럼 인맥을 쌓으러 왔다는 말은 믿지도 않겠군.'
허나, 상관없다.
"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만약 네가 어느날 갑자기 휩쓸리듯 이곳에 왔다고 느껴진다면…."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으니.
"동생 때문에."
"동생?"
"그래. 내 동생 '율리우스'를 위해서 왔지."
"흠…."
그의 대답에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듯 손가락으로 두어 번 탁자를 두드린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직 준비가 안 됐나? 아니, 몸을 보면 그건 아닌 듯한데…. 그렇다면 이곳에 목적이?"
한동안 혼잣말을 하던 그는 몇 번이나 고민하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
"…하. 내가 진짜 이것만 알려 줄게. 눈을 믿지 마. 그리고 한 가지 더 하자면 하■…."
하이젤이 말을 이으려던 그 순간.
펄럭-
『■■■■과(와) 이어진 책이 ■■의 위험성을 감지합니다! ■■■■이(가) ■■에 반응합니다!』
『■■■■과(와) 이어진 책이 ■■의 위험성을 감지합니다! ■■■■이(가) ■■에 반응합니다!!』
『■■■■과(와) 이어진 책이 ■■의 위험성을 감지합니다! ■■■■이(가) ■■에 반응합니다!!!』
하얀 책이 미친 듯이 펼쳐지며 같은 말을 경고했다.
그와 동시에 땅이 울리는 굉음과 함께 잠시간 요란하게 바닥이 진동했다.
쿵-
"미친, 뭐야!"
"지, 지진인가?"
"아니, 무슨 일인데!"
소란은 몇 분도 되지 않아 잦아들기 시작했다.
진동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닫자, 선배들은 소란에 상관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오직 1학년들만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하얀 책의 반응을 일으킬 만한 것이, 나타났다?
알렌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너희가 현재 신입생 수석과 차석이냐?"
묘한 울림을 담은 시비와 함께.
제69화
고개를 돌리자 둥근 안경을 녹발의 남자가 야비하게 웃고 있었다.
"어쭈, 선배를 보고도 인사 안 하냐?"
알렌은 차분히 그를 살폈다.
녹발에 둥근 안경, 황색 눈동자. 눈가를 가리는 더벅머리와 표준어에 가까운 발음.
웃는 인상은 밉살맞아 보였고, 피부로 맞닿는 기도가 안정되어 있다.
알렌의 기준으로 봐도 괜찮은 실력.
'2학년 10위 벤자민.'
이넬리아가 정리해 준 정보에서 봤던 이름 중 하나.
그리고 율리우스가 첫 사건을 터트리게 되는 당사자.
"왜, 내가 평민이라 꼽냐? 평민한테 먼저 인사 못 하겠어? 응? 아니면 뭐, 고오-귀하신 귀족님의 예법에는 하찮은 피랑 말을 섞지 못하는 걸로 되어있나?"
하이젤의 양옆에도 다른 선배들이 앉아 그를 압박했다.
그는 움직일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알렌은 손목에 찬 팔찌에 마력을 집중했다.
반경 1m도 안 되는 범위에 텔레파시를 전하는 유물.
[이 일은 내가 해결하지.]
음? 고개를 돌린 하이젤이 알렌을 보았다.
[알아서 해결할 테니, 나서지 않아도 된다.]
그의 말에 금방이라도 엎어 버릴 것 같았던 하이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 무시해? 선배 말이 말 같지가 않지? 하, 참."
벤자민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팔에 힘을 주었다.
거친 말과 다른 섬세한 마력 운용.
꾸욱-
놀랄 만큼 정제된 힘이 그가 일어설 수 없도록 막았다.
"니네들이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여기는 너희들 영지가 아니에요. 알아? 바깥에서 통하던 위세가 여기서는 안 통한다고."
냉철하게 주변을 살피니 그들 주변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적었다.
오직 2, 3학년의 학생들만이 드문드문 있을 뿐.
알렌은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다.
"빡치지? 응? 밖에서는 가문의 권위로 쓸어버리면 되는데, 여기서는 안 되니까."
보통 갑작스럽게 폭언과 모욕을 듣는다면 둘 중 한 가지 행동을 할 것이다.
모멸감에 분노하거나, 기가 죽어 순응하거나.
그것도 상대가 자신보다 더 강한 힘을 가졌다면 후자로 기울겠지.
"그런데 이곳, 갈슈딘 아카데미에서는 실력이 전부라…."
"선배님 그만하시죠."
그러나 알렌은 아니었다.
"…는 말, 뭐?"
"선배님의 의도는 알겠으니 그만하셔도 된다는 말입니다."
"아니, 뭔 개소리-, 어…."
흠칫-
상대를 비웃어 줄 요량으로 고개를 돌린 벤자민은, 생각보다 평안한 알렌의 안색에 말을 멈췄다.
"그렇게 경고하지 않아도 마음대로 날뛰려는 생각은 없으니 연기는 그만하셔도 된다는 겁니다."
"아니, 너는 뭘 아는 척을…."
"현재 신입생들을 억누르려는 목적이 아닙니까."
이유야 뻔했다.
'아직 아카데미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이들에게 보여 주려는 거지.'
이곳은 다르다고.
너희가 마음대로 날뛰어야 될 장소가 아니라고.
슬쩍 근처를 흘깃하자 1학년 신입생 몇 명이 당황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저희는 규칙에 맞게 행동할 테니, 선배도 그렇게 행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렌은 그의 몸이 굳은 틈을 타 어깨에 올린 팔을 치웠다.
'이 정도 마력량이면…, 4위계 중간 정도일까.'
마법사가 아닐 테니 실력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선배도 저희랑 피차 쓸데없는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을 것 아닙니까."
"어, 어, 아니…, 그건 그렇긴 한데."
그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순간, 하이젤의 옆에 있던 이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미친놈아. 거기서 고개를 끄덕이면 어떡해…."
"아, 미안하긴 한데…, 얘들이 이럴 줄 알았냐."
벤자민은 언제 날 선 말을 했냐는 듯 난처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눈꼬리가 내려가니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유순한 인상으로 바뀌었다.
"이미 뭘 할지 잘 아는 애들한테 뭘 더 이야기해."
수석이나 차석이라고 한들 상대는 2학년 10위.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그들보다 1년 더 노력한 천재를 이기는 것은 힘들겠지.
물론 알렌과 하이젤은 보통의 학생이 아니었으니 그대로 대항해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만들어 나갈 평판이 중요하니.'
알렌은 현재보다 미래를 봤다.
"아마 며칠 후에 있는 대련도 그 일환인 것 같은데, 아닙니까?"
덤벼든다면 1학년들에게 차이를 보여 줄 수 있으니 이득이고, 순응한다고 해도 후에 있을 대련에서 분탕 종자를 걸러 낼 수 있다.
알렌의 확신 어린 말에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다가왔다.
남자 2명과 여자 1명.
"야, 텄다 텄어. 이번에는 안 되겠다. 보충 반 애들도 이러는 건 아니겠지?"
"와…, 역시 차석인가. 똑똑하당."
"부회장님, 그냥 선후배 화합 때 확실히 하는 게 낫겠는데요?"
갈슈딘 아카데미의 학생회 일원들.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맞아서 다행이군.'
그들의 뒤로 알렌이 여태껏 기다리고 있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쩔 수 없구나."
말 한마디에도 감출 수 없는 품격이 드러난다.
"보충 반을 상대할 때는 더 조심스럽게 접근하도록 하자."
회색빛 머리의 미남자가 산뜻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는 알렌과 하이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반갑다. 내 이름은 일라이자 하뷔에론, 알드니아 제국의 2황자이자…."
회귀 전.
자신의 형을 잃고, 아버지를 잃고,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이자.
"지금은 부회장을 맡고 있지."
율리우스에게 파멸을 맞이한 남자.
"우수한 인재를 만날 수 있어서 기쁘구나."
"예,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일라이자 저하."
드디어 그를 만났다.
* * *
모든 정규 수업을 끝마친 오후.
알렌은 필로소피아 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작전이 실패한 것을 깨닫자 빠르게 사과하고 자리를 떠났다.
벤자민은 미안하다며 나중에 따로 만나자고 했다.
알렌은 일라이자와 성공적으로 안면을 텄다는 것에 만족했다.
하이젤은 알렌이 그들과 대화할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흥미롭게 지켜보다 대화가 끝나자 교실로 돌아갔다.
그 이상 관계되고 싶지 않다는 듯.
"야, 들었냐? 아까 싸움 났다는데."
"뭐? 어디서."
"보충 반에서. 이번 신입생이 선배랑 싸웠다더라. 듣기로는 3일 후에 제한 없는 조건으로 대련한다는데?"
"아, 왜 나만 못 봤지. 아깝다."
본관을 빠져나오는 학생들 사이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여러 학년이 같은 수업을 듣는 것이 흔한 만큼, 소문이 각 계층으로 도는 것도 빠를 수밖에 없었다.
알렌은 기숙사에 가까워졌을 무렵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알렌은 베스틀라를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하이젤이 말한 것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
「그, 그게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베스틀라는 약속대로 신수의 숲에서 돌아온 후 자신의 사정을 알려 줬었다.
"분명히 용족과 전쟁을 하던 중, 죽고 나서 눈을 떠 보니 검 안에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
알렌도 그녀에게 동생에게 악마가 깃들었기에 구하려 한다는 말을 알려 주었고.
"그런데, 하이젤이 말하는 걸 들어보면 뭔가 더 있어 보이는데…."
베스틀라의 검체가 그녀의 동요를 증명하듯 떨렸다.
"정말 아는 게 없나?"
「하, 하하. 그 남자가 잘못 알았던 게…, 아닐까요?」
알렌은 아무 말 없이 검을 응시했다.
베스틀라는 침묵으로 그의 질문을 회피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가까이 다른 사람의 발소리가 들릴 무렵, 알렌이 어느덧 멈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신뢰에는 신뢰로 답할 수밖에 없지. 언젠가 내 비밀을 알고도 침묵할 수 있나 보도록 하지."
「...알았어요.」
필로소피아 관의 4층, 오른쪽 끝에서 3번째가 그의 방이었다.
방 3개와 거실, 부엌으로 나누어진 기숙사.
본래 저택보다 좁았으나, 혼자 지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이넬리아가 차를 준비해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렌은 자리에 앉은 즉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어땠지?"
"새벽부터 총 11곳의 경매를 확인했지만, 영혼 혹은 공간 추적과 관련된 물품은 없었습니다."
"…그런가."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런 단서도 없는 것이 아쉬웠다.
"그에 관한 소문이라도 발견한다면 곧바로 보고를 부탁하지."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악마 퇴치에 관련된 물품에 대해서는…."
"그것도 구할 수 있으면 구하도록."
그녀는 동생이 악마에 빙의된 것으로 알고 있으니, 저렇게 말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아 그래, 린벨은 어떻게 됐지?"
"공자님께서 시키신 일은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음?"
"…명색이 시녀인데 시중들 시간이 없다고…."
알렌은 쓴웃음을 지으며 투덜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에 관해서는 이번 주말에 다시 이야기하지. 우선할 일이 있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다시 수색을 위해 나가 보겠습니다."
"조심하도록 하고."
그녀의 실력에 위험한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지.
이넬리아는 한순간 기쁜 미소를 짓더니 그림자로 변해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그럼 나는…."
촤르르-
책을 넘긴다.
『동생을 찾을 단서가 없다는 것에 낙담함. 이넬리아가 사라지자 ■■■■과(와) 이어진 책을….』
한 장 뒤로, 다시 한 장.
하이젤과 대화했을 당시 나타났던 그 알람들은.
『■■■■과(와) 이어진 책이 ■■의 위험성을 감지합니다! ■■■■이(가) ■■에 반응합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 * *
하이젤은 내성 문을 빠져나와 거리를 돌아다녔다.
거리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엘프, 수인, 인간을 비롯한 주 종족들과 가끔 보이는 리자드맨을 비롯한 아인들까지.
하루에 한 번, 도시를 돌아다니며 사람을 구경하는 것이 그의 취미였다.
그가 기억하던 것에 비해 다소 낙후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다시 이만큼 문명을 일궈 냈다는 사실에는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대몰락이라고 했나.'
진실 일부분을 아는 그에게도 꽤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죽고, 용사도 사라지고, 세상은 무너지고.
성검이 이곳에 있다는 소리만 듣지 않았다면, 저 멀리 바다의 너머로 향해봤을 텐데.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냐?"
의표를 찌르는 목소리에 숨어 있는 상대가 굳었다.
소리가 막다른 벽을 타고 울렸다.
"숨어 있는 거 아니까 빨리 나와."
평소처럼 가볍게 웃으며 말하자, 그가 들어온 골목으로 한 명이 걸어 나왔다.
푸른 청발과 자신감 넘치는 얼굴.
점심까지 같이 있었던 자와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
"분명 잘 숨은 것 같았는데…."
율리우스가 조금 흥분한 듯한 얼굴로 나타났다.
"내가 시선에 조금 민감해서 그래."
아주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역시 주인공인가…."
주인공이라…. 하이젤은 히죽 웃었다. 작은 속닥거림이 목구멍을 비집고 나왔다.
"주인공은 너희들이지."
"어? 뭐라고?"
"그래서, 너는 무슨 일로 따라왔지?"
어떤 이유든, 무슨 볼일이 있든, 얼마나 좋은 제안을 하든, 하이젤은, 마왕은, 나는.
"내 이야기에 관심이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나는 재미없을 것 같은데."
관계되고 싶지 않다. 누구든. 즐길 시간도 부족하니까.
"나도 알아. 그런데 들어 보면 다를 거야."
율리우스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마기를 탐색할 능력이 있거든."
"그래서."
그 새끼들이랑 관계되어 있다면 그 정도 능력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그래서?
"마기를 느끼는데, 그게 나랑 상관있나?"
하이젤로 살면서 마기를 격발한 건 몇 개월 전 단 한 번뿐.
그것도 자신의 존재를 느낀 성검의 반응으로 인해 일으킨 무의식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상관없지. 그런데 내가 찾아냈거든."
알렌의 때처럼 거리를 둔다.
"뭘 찾았든 나랑 관계 없…."
"마계랑 이어진 게이트를 발견했어."
"뭐?"
그러나 그 생각이 깨어지는 것에 얼마 걸리지 않았다.
율리우스는 흥분을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하이젤이 자신의 말에 반응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은 숨길 수 없었다.
"마족들이 나오는 게이트를 찾아냈다고."
그 말에, 하이젤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율리우스는 원작의 내용을 되뇌었다.
'게이트가 나오는 건 지금부터 반년은 있어야 하지만….'
막을 수 있다면 지금부터 막는 게 좋지 않나?
어차피 놔둬 봤자 마기가 쌓여서 게이트 브레이크 밖에 더 될 텐데.
'발암 걸리는 그년은…, 지금쯤 마탑에 들어갔을까?'
상관없다. 이번 엔딩은 그년이 와도 그렇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딴 엔딩은 한 번으로 족하지.'
앞으로 나도 살아갈 세상이니, 망하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하이젤이 고개를 숙였다. 율리우스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섰다. 아마 하이젤도 기쁠 게 분명하리라.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남은 건 안에서 할까?"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내 기숙사로 가자."
율리우스가 웃었다.
"그래, 한 번 들어 보자. 무슨 이야기인지."
하이젤 역시, 웃었다.
진심으로.
제70화
대륙의 남단.
여러 국가와 종족이 어우러지는 동쪽과 서쪽 그리고 아인을 지배하는 여왕이 자리한 북쪽과 달리 남쪽은 인류의 흔적이 옅었다.
북쪽과의 길목을 막는 나스트론드 평야.
우거진 밀림과 가득한 몬스터.
온갖 미신과 이교가 활개 치는 곳.
그곳에서 살아가는 것은 리자드맨과 나가, 세이렌 그리고 하피 같은 희귀 종족들과 소수의 인간뿐.
몇 개의 도시밖에 존재하지 않는 이곳으로 일단의 일행이 수풀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쪽이 맞아? 이번에도 틀리면, 조금 화가 날지도 모르겠네~?"
"마, 맞을 겁니다. 스카이나 님."
은근한 짜증이 서린 그녀의 압박에 길잡이를 자처하던 마법사는 몸을 떨었다.
"얌전히 연구나 할 걸, 괜히 지원했어. 그놈의 꼬드김만 아니었어도…, 하아."
눈앞에서 마기의 변화를 관찰할 기회라고 하더니.
'코빼기도 안 보이잖아.'
대륙에 나타난 마기의 흔적을 쫓은 지 몇 달이나 지났다.
처음에는 마왕이 나타날 징조가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이곳에 마기의 잔향이 남아 있습니다."
급히 파견 나온 조사단의 책임자로서 그녀는 바르덴에게 속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번에도 틀리면, 그 망할 마도구 부숴 버릴 줄 알아."
"…반드시 제대로 안내하겠습니다."
베리트는 유물을 움켜쥐며 결연히 대답했다.
그를 동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빛의 마탑의 제자라며 거들먹거리던 그의 성격도 있거니와 일행 대부분이 몇 달간의 일정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까.'
프란시스카는 피로한 눈가를 문질렀다.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예언의 실현을 기다렸던 그녀는 라인하르트 영지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여기로 오게 만든 인물이 떠올라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바람의 마탑주, 그란델의 손자 휘스 아로나.
'그 쓰레기가 그때 다가오지만 않았어도.'
어렸을 때 그딴 짓을 저질러 놓고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다가오다니.
그와 같이 있다가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느낌에 자리를 피하다 조사단에 지원하게 되고 말았다.
그 결과로 몇 달간 온갖 고생을 하게 됐으니, 그에 대한 증오는 더 커질 수밖에.
'하지만, 그래도….'
스르륵-
품 안에 손을 넣자 몇 번이고 읽어 구깃구깃해진 종이의 감촉이 선명했다.
'그가 예언의 주인공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키메라 연구의 성과로 5위계로 올라서기도 했고, 변화 학파의 수장인 스카이나에게 틈틈이 가르침도 받았다.
그녀가 상념을 이어 가려는 순간, 앞서가던 남자가 소리쳤다.
"찾았습니다! 여깁니다! 이곳에 마기가 짙게 퍼져 있…, 웬 여자가…?"
정신을 차려 앞을 살펴보니 검게 변색된 지반과 초토화된 지형 사이로 여인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여기에 민간인이…?"
"잠깐 기다려!"
마법사들은 마치 홀린 듯 다가가기 시작했다. 스카이나가 소리쳐도 소용없었다. 자리를 유지하는 것은 스카이나와 프란시스카 두 명밖에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스카이나 님!"
"여기에 민간인 따위가 있을 리 없잖…!"
"으…, 으음?"
여자는 마치 그들을 기다렸다는 듯, 그들이 다가온 즉시 눈을 떴다.
즉각적인 변화에 스카이나가 즉시 경계했다.
여인은 처량한 얼굴로 두려운 듯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는…?"
"몸은 어떠십니까! 혹시 다치신 곳은…."
가련한 몸짓과 청초한 얼굴.
무언가에 당한 듯 찢어진 옷자락과 어딘지 모를 애틋한 분위기가 합쳐져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저희는 마탑에서 온 조사…."
"베리트! 이 개놈아!"
스카이나가 베리트의 섣부른 행동에 분노한 얼굴로 다가서자, 그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우리의 정체를 밝혀? 정말 미친 걸까~?"
"하, 하지만 정말 민간인이 맞…."
"닥치고 뒤로 빠져. 여기서부터 내가 심문하려니까."
"예, 아, 알겠습니다."
그녀를 보호하려던 그는 가라앉은 그녀의 눈동자에 급히 정신을 차렸다.
자신은 겨우 빛의 마탑의 제자일 뿐이지만, 상대는 변화 학파의 수장.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그래서…, 네 이름은 뭘까~? 출신은? 아니면, 조금 전까지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니~?"
"저는…."
그들의 다툼에 겁먹은 듯 지켜보던 여인은, 스카이나의 물음에 겨우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릴리트, 릴리트였…을 거예요."
"릴리트였다?"
여인, 릴리트는 모여든 시선에 급히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
그런 그녀의 모습에 프란시스카는 위화감을 느꼈다.
"예…, 그것 말고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래, 그건… 평소에 다른 모든 이들에게 맞춰 주는 그녀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미약한, 조금의 느낌에 불과했지만….
"…아는 게 없어서 정말 죄송해요."
프란시스카는 그녀의 눈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히.
* * *
와아아아-!
커다란 환호 소리에 시선을 내리니, 넓은 연무장에서 두 개의 인영이 거센 마찰음을 내며 검을 부딪치고 있었다.
정확히는, 어느 한쪽이 밀려나고 있다.
"벤자민, 그거밖에 못 하냐!"
"이 새끼 평민 주제에 잘난 체 하더니 꼴좋네?"
"부회장 뒤만 믿고 나댔으니…, 끝났네."
아카데미에 소문이 퍼져 나가고 3일이 지나 예고한 대로 대련이 일어났다.
장소는 본관에 자리한 공식 대련장.
검은 책에 적힌 대로, 그가 알던 미래를 이어 나가고 있다.
제한 조건 없음. 타자의 개입 금지.
말 그대로 생사까지 주관할 수 있는 살벌한 대련.
…그렇기에 대부분의 이들은 치열한 접전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벤자민은 이를 악물고 공격을 가로막았다.
"선배, 그러게 왜 시비 걸어서, 응?"
"큽…."
예상과 정반대의 결과가 돌아왔다.
전격을 머금은 검격이 빠르게 몰아친다.
위에서 대각선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왼쪽 상단으로.
언제나 연습해 왔던 검의 감촉이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 줄 몰랐다.
"선배라고 지랄하더니, 잘됐네."
"그러게, 적당히 나댔어야지."
"근데 쟤 보충 반이라 하지 않았냐? 실력만 보면…, 최상위권인데."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선배로서 실력을 내보이고, 아직 외부의 물이 덜 빠진 신입생들에게 경고해 주려 했다.
"선배님, 이것밖에 안 되면서 왜 거들먹거리며 보충 반까지 왔는지, 참."
아카데미 내의 다른 평민 학생들에게 너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 했을 뿐인데.
"보충 반이라고 만만히 보셨나? 아니면, 귀족을 누를 기회라고 보셨어? 응?"
"…그런 생각 아니었다."
"사실대로 말해 봐요. 그럼 지금이라도 봐줄 수 있는데."
"아니 진짜로 그런…."
우우──
뭐라 말을 하려던 그의 입에 닫혔다.
짓쳐 드는 비난.
연무장을 덮은 불투명한 막 뒤로 무수한 익명의 비난이 고막을 가득 채웠다.
"이런데요? 선배 유명하던데. 걸핏하면 시비 걸고 다니는 걸로."
"...."
벤자민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뜻이 있었다고 하나 벤자민의 행동은 내막을 모르는 이들에게 있어 등수를 믿고 나대는 오만한 평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럼 그냥 오든가, 새끼야."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네. 그럼 이제 진심으로…."
벤자민의 실토 아닌 실토에 웃음을 드러낸 율리우스는 압축했던 전격을 풀어냈다.
"간다."
쾅-
푸른 뇌전이 번쩍였다.
그에 맞서 핏빛의 마력이 터져 나갔다.
* * *
대련이 끝났다.
승리는 시종일관 우세를 점하던 율리우스의 승리.
벤자민은 대련이 끝난 즉시 바로 옆에 자리한 의무실로 이동했다.
'이번 사건을 통해 놈은 학생회랑 본격적으로 적대하게 되겠지.'
결과만 보면 알렌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아니, 그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도 이렇게 될 예정이었다.
과거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지 않나.
하지만….
"...이렇게, 이런 결과는 아니다."
흘깃-
낮게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일그러진 표정의 2황자가 보였다.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이냐…!"
"부회장님, 아니 황자 저하…."
벤자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이런 결과를 원했던 것이 아니었지만…."
"모두 아카데미를 위한 일이었다."
"제 사심도 섞여 있었지요."
알렌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그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
그의 몰골은 좋지 않았다.
온몸에 가득한 상처와 창백한 안색.
결정적으로 마력 회로의 상태가 너무 심각했다.
"이건 낫는다 하더라도 반이나 회복될 수 있을지…. 아마…."
곁에서 그를 진찰하던 치료사가 말을 흐렸다.
영구적인 부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 그의 전사로의 인생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평생 검을 잡을 수 없을지 모르지.
"그 아이도 진심으로 이러려는 생각은 아니었을 겁니다, 하하…."
벤자민이 떨리는 손을 담요 깊숙이 숨겼다.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가 의무실 내부에 감돌았다.
알렌은 한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이 모든 것을 보았다.
'…이 대련을 막아 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의 부상이라도 막을 수 있지 않았나.
그와 벤자민은 친분이 없다.
대화한 것도 3일 전이 처음이자 마지막.
논리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알렌이 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 이야기해도 같은 미래를 맞이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가 아니었어도 다른 이가 겪었을 일이겠지.
'정말 그런가?'
그들이 율리우스의 적이 되면 편하니 방치한 것이 아닌가?
이것 말고 다른 결과를 내는 것이, 정말 어려웠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어지럽게 겹쳤다.
자신과 아무런 친분이 없는 벤자민이었지만, 사람의 인생을 망가지는 걸 두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율리우스와의 대적하기 위해서 그의 희생은 필수불가결이다.
자신 혼자서 그의 모든 것을 상대할 수 있단 생각은 오만이 아니었던가?
아군이 필요했고, 명분이 필요했다.
죄책감, 회피, 맹목, 자기변명 그리고 위선.
그런 감정의 흔들림이 아니었다.
'일찍이 각오했던 일이다.'
중요한 건 그 후의 어떻게 대처하는가이다.
회귀 전 홀로 대적한 것에 대한 한계를, 그 결과를 온전히 겪어 봤다. 어떻게 행동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에 고민했다.
그렇게 일이 벌어졌으니….
'이제 움직여야 할 때.'
모처럼 만들어진 기회다.
알렌이 모종의 결심을 품은 채 의무실을 뒤로 했다.
통로의 안으로 쏟아져 내리는 빛이 극명히 갈렸다.
-와아아아
어둠이 내려앉은 통로의 반대편에서 환호 소리가 파도쳤다.
"율리우스, 괜찮느냐? 혹시 다친 곳이라도…."
"수고하셨어요! 선배라고 걱정했는데, 역시 율…."
"정말 이길 줄은 몰랐습니다. 당신 같은 망나니가…."
『──율리우스는 소설에 흔히 나오는 주인공과 달리 통쾌하게 후환을 잘랐다는 것에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저벅저벅-
『──이게 사이다지. 제대로 속을 망가뜨렸으니 다시 덤벼들 일은 없겠지. 호구처럼 봐줄 생각은 없으니까.』
대련장 밖으로 율리우스가 여러 여자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아, 형님! 여깁니다! 어디에 계셨습니까!"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잘 싸우더구나."
알렌은 한 사람의 인생을 무너트렸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들고 있는 그가.
"하하, 보고 계셨습니까."
혐오스러웠다.
"그래, 승리를 축하한다."
"형님이 있는 걸 알았다면, 더 열심히 싸울 걸 그랬습니다. 하하하."
참을 수 없을 만큼.
* * *
알렌은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기숙사로 돌아가도 상관없었지만…, 오늘은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알렌은 인적이 적은 골목을 걷던 중, 문득 입을 열었다.
"내 방법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나?"
「그건 모르죠?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요.」
"…이미 지나갔다라."
「미래는 알 수 없어요. 정말 현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우중충한 얼굴 하지 말고 앞으로 할 일이나 생각해 봐요. 과거가 후회스러우면 앞으로 잘하면 되구요.」
베스틀라는 웬일인지 말이 많았다.
「맞다. 저 검집! 이제 아카데미 생활도 안정됐으면 제 검집이나 새로 맞춰 주는 건 어때요? 원래 선물을 하면 받는 사람이나 주는 사람 모두 기분 좋아진다구요! 아까 신드리라고 했나? 실력이 괜찮던데 저한테 맞는 검집이나 찾아 줘요. 당신도 좋죠? 그쵸?」
"위로해 줘서 고맙군."
「예?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요?」
흠-
알렌의 굳었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면 그런 걸로 하지."
「...저기요, 진짜 그런 의도가 아니었거든요? 제가 누구 좋으라고. 진짜.」
무겁던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모든 일을 손아귀에 쥘 수는 없는 법이지.'
어떻게 행동할지 이미 결심했지 않나.
"그럼 돌아가도록 할까…, 오랜만에 최상급 어도유로 닦아 주지. 상이다."
「…상은 무슨.」
베스틀라가 괜히 툴툴거렸다.
그렇게 발걸음을 돌리려던 때.
애옹-
갈색 털 뭉치가 옆 골목에서 튀어나왔다.
"이런 곳에도 길고양이가 사나…."
학생 중 한 명이 키우다 버린 건가?
잠시 고양이를 살피던 그가 멈춘 걸음을 재개한 그때.
"...?"
"…이곳에서 만날 줄이야."
용사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여자.
하얀 눈 같은 백발과 무슨 생각인지 모를 멍한 무표정의 미인.
"…안녕하십니까."
마리아 카리타스.
그녀가 골목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안녕."
제71화
마리아는 알렌과 인사를 마치고 곧바로 고개를 내렸다.
알렌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
그 모습에 알렌이 의아한 눈초리로 그녀를 보았다.
'여기 있는 이유가 뭐지?'
그냥 산책인가? 아니면 다른 목적?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살펴보니, 그곳에는 골목에서 튀어나온 고양이가 있었다.
설마….
알렌은 말없이 손을 내렸다.
애옹-
고양이는 알렌의 접근에 경계심 없이 달라붙었다.
신수에게서 감응력을 개화하고 얻은 소소한 변화 중 하나였다.
마리아의 눈이 잠시나마 부러운 듯 알렌의 곁에 달라붙은 고양이를 향했다.
그 모습에 알렌이 입을 열었다.
"…만져보시겠습니까?"
"...응."
어째 초면에서부터 말이 짧군.
엘닉스의 추종자에서부터 하이젤, 벤자민 그리고 마리아까지.
'분명 예절 교육은 받았을 터인데….'
알렌은 어느덧 가까이 느껴진 그녀의 기척에 상념을 멈췄다.
그녀의 눈은 줄곧 고양이를 향해있었다. 그녀가 고양이에게 가까워진 순간, 고양이가 털을 곤두세우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하악-
"…아."
그녀의 손이 허공을 맴돌았다.
마리아는 안타까운 얼굴로 알렌과 고양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런 애처로운 모습에 알렌은 고양이를 진정시키며 생각했다.
'동물을 좋아하나? 그런데…,'
일방적으로 배척받는 군.
선천적으로 동물과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데, 그녀가 그런 경우 중 하나로 보였다.
'이런 사실은 몰랐는데.'
그녀와 자연스럽게 친분을 만들 기회임을 직감했다.
알렌은 두 손으로 고양이를 들어 올렸다.
그의 품에 안긴 고양이가 진정한 듯 얌전히 머리를 파묻었다. 작게 박동하는 생명체에 알렌의 손의 위치를 잠시 조정했다.
"이러면 괜찮을 겁니다."
그의 행동을 예상하지 못한 걸까.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
그녀가 멈칫하며, 고민하는 듯 보이자 알렌이 슬며시 읊조렸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텐데…."
그 말에 그녀가 결심한 듯, 결연한 눈빛을 했다.
"고마워."
그녀의 손이 천천히 다가왔다. 이전보다 느릿하지만, 망설임 없는 손길이었다.
애옹애옹-
그녀가 다가오자 하악질을 해대던 놈은, 알렌이 쓰다듬자 겨우 진정했다.
마리아는 그 모습에 용기를 얻었는지 허공에 돌던 손을 내렸다.
스륵-
스르륵-
조심스럽게 몇 번이고 쓰다듬었을까.
"이제 그만."
"아…."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을까 우려한 알렌이 고양이를 내려놓자 그녀는 아쉬운 탄식을 흘렸다.
고양이는 순식간에 바닥을 박차 담벼락을 뛰어넘어 사라졌다.
그 모습에 알렌이 별일 아닌 듯 지나가듯이 말했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테니 그렇게 아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음에도?"
"예, 원하신다면."
알렌이 어깨를 작게 으쓱이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답했다.
"…그럼 내일도."
"예?"
"내일도 도와줘."
일이 이렇게 잘 풀리다니…. 멍하던 그녀의 눈동자에 확고한 감정이 실렸다.
'…검은 책에도 이런 내용이 있었…?, 아니.'
알렌은 불현듯 검은 책 자체에만 의존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처음 책의 능력을 알아냈을 때만 해도, 이 능력을 내려준 존재에 대한 경각심을 곤두세웠는데.
정신을 차리니 자신의 기억, 경험보다 책의 내용을 더 중요시하는 그가 있었다.
'…요즘 너무 지나치게 의존하기는 했군.'
새로운 장소, 겪어보지 못한 경험에 자연스럽게 책에 의지하게 되었다.
처음 악마를 의심하던 자세는 뒷전이 되고 말았다.
"…싫어?"
대답이 늦는 이유가 부탁의 거절이라 생각하는 걸까.
알렌은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표정이 흐려진 그녀를 보며, 온전히 자신만의 판단으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아니요, 얼마든지 도와드리지요."
"정말?"
천천히.
하이젤을 견제할만한 패로 그녀를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가 현재 아무런 짓을 벌이지 않았다고 하나, 회귀 전에 그는 율리우스의 동료로서 함께 행동했다.
"예, 저도 용사의 후예라 불리는 당신에게 관심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마왕' 이었던 하이젤을 견제하기에 '용사의 후예'라는 칭호는 부족함이 없었으니.
'물론 하이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렸다.'
아직 시간은 남아있다.
책의 능력을 내려준 자의 정체에 고민해볼 시간도.
그녀와 친분을 쌓기 위한 시간도.
하이젤을 살펴볼 시간도.
"마리아."
"네?"
"마리아라고 불러."
그러니.
"…예, 마리아 님."
"말도 놔."
"…그래, 마리아."
"응."
지금은 잠시 그녀와의 대화에 집중해도 괜찮겠지.
마리아는 고양이가 사라진 방향을 살펴보더니, 몸을 획 돌렸다. 용건만을 말하고 돌아서는 모습에 알렌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그럼 내일 같은 시간에…, 본관 앞에서 보도록 하지."
"응."
알렌은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소문에 떠돌던 그녀의 최후를 회상했다.
용사의 후예를 자칭하는 순수하고 가련하며 불쌍한 여자.
"아."
그녀는 5년 후에 목숨을 잃는다.
"왜 그러지?"
"이름."
"내 이름 말인가?"
"응."
사인은 의살(縊殺).
경동맥 압박으로 인한 산소차단으로 뇌조직의 괴사.
"알렌 라인하르트. 서부에 위치한 리브레 왕국 라인하르트 가문의 적자다."
"마리아 카리타스."
"앞으로 잘 부탁하지."
"잘 부탁해."
즉, 자살이었다.
* * *
일라이자 하뷔에론.
알드니아 제국, 여러 소국과 왕국이 난립한 대륙 서쪽과 다르게 대륙 동쪽의 반을 통일한 제국의 2황자.
하지만 그의 인생은 기구하기 짝이 없다.
사실 황태자는 혈통 부분에서 정통성이 부족했다.
황후의 아래에서 태어난 것이 일라이자였고, 그의 형님은 황제가 황태자일 적 실수로 태어난 아이였다.
만약 황태자의 능력이 부족했다면, 혹 그의 외척이 감히 야망을 품었다면.
그것도 아니라 제국의 풍습이 실력 지상주의를 표방하지 않았다면.
일라이자는 황태자의 자리를 노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혈통이란 것은, 생각보다 많은 걸림돌이 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황제는 그러지 않았다.
사생아라도 능력을 입증했기에 황태자의 지위를 보장해주었고, 제국의 신하들조차 그 결정을 반대하지 않았다.
제국을 세운 초대 황제가 내세웠던 가치관은 신분의 따른 제약에 관대했기 때문이었고, 황비들의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는 납득했다.
황제의 말에 복종했고, 뒤로 일을 꾸미지도 않았다.
황태자와 사이도 좋았기에 그가 세력을 일으킬 위험이 있음에도 아카데미에 오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만약 아무런 사건이 없었다면 그는 유유히 제국으로 돌아와 제법 넓은 지역의 성주가 되어 잘 먹고 잘 살았겠지.
'율리우스 놈만 아니었다면.'
알렌이 진정으로 놈을 증오하게 된 계기.
그 처음이 일라이자 황자와 관련되어 있었다.
한 때는, 놈을 이해하려고 했었다.
'놈이 진정으로 동생의 몸을 빼앗으려고 한 것은 아닐 테니까.'
어쩌면 우연일지도 모른다.
그의 잘못은 없지 않을까.
그 사건만 아니었다면 알렌은 어쩌면 복수를 포기했을 것이다.
복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적당히 타협했을지도 모르지.
아버지처럼.
그를 제외한 다른 이들처럼.
그러나 사건의 전말을 깨달은 후 알렌은 귀족으로서, 한 명의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진한 역겨움을 느꼈다.
5개월 후, 새 학기가 시작될 즈음 한 학생이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마하 하뷔에론.
황제의 막내딸이자, 천고의 재능을 가진 여자.
그녀는 그곳에서 운명을 만났다고 소문에서는 말한다.
'세간에서는 그녀가 첫눈에 반했다고 하지만….'
혹 모르지 않는가.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율리우스가 먼저 접근했을지.
율리우스의 능력을 알게 된 알렌은 그들의 만남을 다른 시각에서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내막을 알 수 없는 이 만남은,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그때는 알 수 없었던.
1년이 지났을 때, 황태자가 급사했다.
정체불명의 저주였다.
다시 1년이 지났을 때, 황태자의 자리를 노리던 3황자가 원정을 나갔다 사망했다.
갑작스레 나타난 몬스터의 습격이었다.
두 명의 죽음을 조사하던 일라이자는, 갑작스레 군사를 일으켜 마하 황녀를 습격했다 도리어 패퇴했다.
그리고 자살했다.
누구도 그가 군사를 일으킨 이유를 몰랐다.
그러나 다음 황제의 경쟁 후보로 유력한 그녀에게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어디선가 퍼져나갔고, 이윽고 걷잡을 새도 없이 대륙 전체에 진실인 양 알려졌다.
짧은 시간에 3명의 자식을 잃은 늙은 황제는 이때를 기점으로 건강이 크게 쇠약해졌다.
다른 황족들은 족족 사망하는 형제들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껴 한 발을 뺐고, 그 사이에 그녀는 다른 형제를 제치고 황태녀의 자리를 차지했다.
알렌이 이 사건의 전말을 깨닫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언제나처럼 놈의 약점을 파헤치던 중, '우연히' 놈의 아공간을 탐색할 기회가 있었다.
평소에 알렌의 실력으로는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어떤 틈이라도 생긴 것인지, 알렌이 접근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그런 틈이 있었다는 사실에 의심을 해봤겠지만….'
그때의 알렌은 조급함에 사로잡혀 두 눈이 가려졌다.
그곳에서.
알렌은 그곳에서 하나의 일지를 발견했다.
[/////// 일지]
이름이 지워진 일지에는 우연처럼 보였던 모든 사건의 자초지종이 적혀있었다.
황태자의 죽음부터 일라이자의 내란까지.
글의 시점으로 짐작해 봤을 때, 일지의 주인은 제 2황자 일라이자가 분명했고, 그런 일지는 사건의 배후로 율리우스를 가리키고 있었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군.' 알렌은 분노했다.
놈은, 율리우스는 귀족의 의무를 저버렸다.
이득을 위해서 황족 암살과 내란의 배후가 되어 수많은 사상자를 만들었다.
이득을 위해 그 무엇도 거리낌 없이 저지른다.
심지어 놈이 선조끼리 했던 '맹약'을 깨버린 순간 알렌은 깨달았다.
자신과 놈이 양립할 수 없음을.
동시에 놈을 이해하려던 생각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붕어한 황제의 장례식에서 황비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위로를 전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알렌은 놈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놈은 쓰레기였다.
동생의 명예를 더럽히고.
귀족의 의무를 내던지는, 그런 쓰레기.
지금 되짚어 생각해본다면 그 행동에 [시스템] 혹은 [퀘스트]의 영향도 적잖이 있을 것이라고 보지만….
'상관없지. 그걸 행하는 건 놈의 의지일 테니.'
갑작스럽게 일지가 사라지지만 않았어도 뭔가를 해봤을 텐데.
잠깐 눈을 뗀 사이 사라진 일지의 행방은 지금 생각해도 뼈아팠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알렌은 벤자민과 율리우스의 대련을 막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일라이자는 율리우스와 적대관계를 형성할 테니까.
벤자민의 희생이 없다면 일라이자는 온화한 성격답게 율리우스를 쉽게 용서할 테니.
알렌은 그가 필요했다.
그의 세력이. 그의 이름이. 그의 위치가. 그의 협력이.
그와 연결된 황태자의 협력과 장차 율리우스 주위로 끌어모을 세력을 상대할 힘이 필요했다.
그 탓에 벤자민이 불구가 되었다고 해도.
알렌은 미래를 위해, 동생을 위해서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몇 번이고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 대신.'
그 책임을 져야지.
피할 생각도 없고, 외면하지도 않겠다.
오롯이 또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알렌은 고개를 들었다. 뜨거운 사막의 바람이 도시 전역을 뒤덮은 결계를 거쳐 봄바람으로 변해 그를 스쳤다.
자신이 머무는 4층의 창가에서는 성검이 박혀있는 광장의 정경이 눈에 들어온다.
비록 엘피스의 전경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으나 만족했다.
"공자님, 공자님께서 각 연금술사에게 의뢰했던 물건을 모두 수거했습니다."
이제는 익숙해진 라일락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지금은 사라진 요정을 떠오르게 만드는 청량한 목소리와 요정 수십의 능력을 담은 특별한 존재.
"수고 많았다. 이넬리아."
알렌이 고개를 돌리자, 이넬리아가 정갈한 몸짓으로 허리를 숙였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어디에 쓰실지…."
그녀의 품에는 여러 가지 물건이 있었다.
붉은 꾀꼬리의 꽁지깃.
세이렌의 눈물.
죽은 사형수의 메아리와 낮에 피는 나팔꽃의 꽃술.
알렌이 마녀에게서 얻었던 생명석까지.
그를 비롯한 수십 가지의 재료가 작은 주머니에서 쏟아져 나왔다.
마치 마술과도 같은 광경.
알렌은 서적에서만 읽던 여러 요정의 능력에, 놀랐던 처음과 다르게 꽤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그 능력들은 언제 봐도 신기하군."
"…그런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시지만요."
그녀의 아쉬움이 목소리에 드러났던 걸까, 알렌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아공간 포켓에 재료를 담았다.
"여러 번 봤는데 매번 놀랄 수야 있겠나."
공간 계통의 마법사로서 마법이 아닌 수단으로 공간을 이용하는 게 신기했을 뿐이다.
"이제 준비가 된 것 같으니…, 슬슬 만나러 가보도록 하지."
한 명이 아닌 수십의 연금술사에게 따로 의뢰한다고 시간이 꽤 걸렸다.
'휘하에 연금술사가 있었으면 시간을 배는 단축했을 것을.'
보안을 위해서라도 연금술사를 자신의 밑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알렌은 잠시 이넬리아를 보았다.
키메라이긴 하지만 요정왕의 피를 이었고, 손재주도 뛰어난 편이다.
'예로부터 요정이 만들었다는 물건은 효과가 좋았지.'
알렌은 나중에 그녀에게 이것에 대해 논의하도록 생각하며 이넬리아의 곁을 지나쳤다.
그의 뒤를 따라 이넬리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누구를 만나시겠습니까."
"당연히 한 명밖에 없지 않나."
알렌은 자신을 목 놓아 기다리고 있을 이를 떠올렸다.
'일라이자 2황자.'
그를 만날 시간이다.
제72화
도착한 장소는 아카데미 야외에 있는 정원 중 하나였다.
티타임을 즐길 수 있는 자리 근처로 활짝 피어난 꽃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뽐냈다. 그 화려함 뒷면에는 매일 노력하는 정원사의 노고가 숨어있으리라.
일라이자는 그곳에 있었다.
정원의 중앙.
정오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음에도 주변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다른 이들은 데려오지 않았군.'
정원에는 그를 제외한 다른 인물은 없었다.
일라이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알렌이 정원으로 들어오는 기척을 느꼈음에도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그건 알렌이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이어졌고, 그가 맞은편에 앉은 순간 감던 눈을 조용히 떴다.
"제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라이자 저하."
"요즘은 초대한 주인이 객보다 늦게 오나?"
일라이자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의 심기는 매우 불편해 보였다.
"잠시 준비할 게 있어서 그랬습니다."
이상할 것도 없다.
그의 태도를 본다면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에도 벤자민을 제국으로 데려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처럼 보였으니.
"리브레 왕국의 관습은 이 정도는 허용해주나 보군."
"일의 경중에 따라서는 그렇지요."
"그 정도는 미리 준비해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만큼 중요한 준비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 잘났군. 그래."
알렌이 그의 비아냥을 가벼이 넘기자, 일라이자는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감정적이군.'
그러나 그의 태도는 벤자민 사건을 감안하더라도 생각한 것보다 조금 감정적인 부분이 있었다. 그의 이상함을 느낀 알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헌데, 저의 어떠한 부분이 저하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까?"
알렌의 물음에 일라이자는 차가우리만큼 단호하게 답했다.
"늦지 않았나."
"약속 시각에 맞춰 온 거로 압니다."
"최소 삼십 분 전에 왔어야 하지 않았나. 너에게 이번 만남의 가치는 그것밖에 되지 않았나 보지?"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더욱 맞춰서…, 아."
알렌은 그의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분노가 서로 관습의 차이에 대한 것임을 깨달았다.
리브레 왕국에서는 중요한 만남일수록 더욱 시간에 칼같이 맞춰온다. 그것이 이 만남을 위해 최대한 많은 준비를 했다는 성의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알드니아 제국은 달랐다. 준비는 모자란 자들이나 하는 것.
그들은 최대한 일찍 나옴으로써 자신의 여유로움을 과시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남일수록 모든 준비를 철저히 끝내 자신의 진실함을 드러냈다.
일라이자 황자의 관점에서는 알렌이 이번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착각할 수 있었다.
알렌이 먼저 한발 물러섰다.
"진심으로 사죄하겠습니다. 제국과의 관습 차이를 양지하지 못한 점은 제 불찰입니다. 만약 이 일로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자리를 파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일라이자도 서로의 인식이 달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편하시더라도 잠시 이야기만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라이자가 무의식적으로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생각에 잠겼다.
몇 분인지 모를 침묵이 지나 그의 입이 열렸다.
"…그래 한번 들어는 보겠다. 알렌 라인하르트, 무슨 이유로 나를 보고자 했지?"
한결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벤자민 선배의 일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입니다."
"뭐라?"
그는 무언가 할 말이 많은 듯 눈썹을 꿈틀거렸으나, 방금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벤자민 선배가 제 동생 때문에 깊은 부상을 입으신 것으로 압니다."
"…그렇지."
"그런 부상을 치료한 물건은 흔히 구하기 힘들겠지요."
"그래서."
공적치든, 돈이든 황자인 그에게 부족함이 있을 리 없다.
설령 부족하다고 한들, 제국에 지원을 요청하면 될 테니 벤자민의 회복은 당연하겠지.
하지만.
"선배의 부상은 시간이 늦어질수록 완전히 회복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알렌이 무의식적으로 턱을 뒤로 당겼다.
신체는 재생할 수 있다.
문제는 마력 회로.
"이제 일주일이 지났으니…, 마력 회로를 완전히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나흘 안에 조치해야 될 텐데…."
"...."
평온히 이어나가는 그의 어조에 일라이자가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회복시킬 방도를 찾으셨습니까?"
알렌의 눈이 곧게 그를 찔렀다.
일라이자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그를 치료할 방법이 있다는 거냐?"
그의 어조는 차분했지만, 들끓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조롱하고자 이 자리를 마련했느냐? 라인하르트 가문의 수준을 알겠구나."
일라이자가 입가를 비틀었다.
"괜히 이 자리에 왔어. 이럴 줄 알았다면, 오지 않은 것만 못했을 것을."
알렌은 화를 토해내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가 일어나려던 때, 변함없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 일은 내가 잊지 않…."
"있습니다."
그가 한 박자 늦게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듯 눈을 크게 떴다.
"…뭐?"
감정이란 모호한 법이다.
호감을 쌓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부정적인 감정일지라도 조금의 계기만 주어진다면.
'단숨에 다른 감정으로 변모시킬 수 있다.'
이를 위해 그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못난 동생의 잘못은, 형이 책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렌은 느긋하게 웃으며, 품에서 아공간 포켓을 꺼냈다.
"하급 엘릭서,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요."
알렌이 웃었다.
티 하나 없이 순수한, 선의로 가득한 미소였다.
***
일라이자는 곧바로 움질일 수 없었다. 알렌이 잠시 그를 붙잡아두었기 때문이다.
"…아직 공개되지 않는 엘릭서라고?"
"예, 연금 학파에 검증을 거쳐 몇 달 후 공개될 예정이지만 말입니다."
하급 엘릭서의 조제법.
이 레시피는 알렌이 회귀 전에 직접 유적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이 조제법이 묻힌 유적이 어디 있는지도 그만이 알고 있었고, 효과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레시피가 공개되는 건 아깝지만….'
그 대신 부족한 재화를 보충할 수 있으니.
알렌은 연금 학파에 하급 엘릭서의 조제법을 제공한 대가로 어마어마한 대가를 받음과 동시에 조제법이 공개된 이후부터 매달 일정한 로열티를 받게 되었다.
이제부터 경매장에 물건을 구할 때 금액이 부족할 일은 없겠지.
그 모든 일을 처리하느라 일라이자와의 만남까지 일주일의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검증되지도 않은 의심스러운 물품을 일라이자가 받으리라 생각하기 힘들었으니까.
"엘릭서의 출처에 의심이 든다면, 따로 확인해 보면 될 겁니다."
"…아니, 여기까지 와서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지."
일라이자는 아직 세간에 공개되지 하급 엘릭서를 준다는 것이 놀라웠다.
'…충분히 숨길 수 있을 텐데.'
이것의 가치를 안다면, 아는 사람일수록 숨기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동생이 했던 일을 책임진다는 마음으로 엘릭서를 공개했다니….
"혹시 바라는 것이 있나?"
"이것으로 황자님의 마음이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친 것은 내가 아니다."
"물론 벤자민 선배에게도 따로 만나 뵐 생각입니다."
질문을 회피하는 알렌의 모습에 일라이자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그의 행동이 의심스럽다라도 어떤 도움이든 받아들여야 할 때였다.
"네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군."
처음에는 그저 그런 인재 중 하나로 생각했다. 그런 인물은 제국에 수도 없이 많으니까. 그의 행동을 보고 조금 더 노련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한다는 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 그것이 궁금했다. 벤자민에게 엘릭서를 전해야만 하지 않았다면 조금 더 대화를 해봤을 텐데.
'제국의 권력을 탐하려는가? 그것도 아니면 아카데미에서 무언가를 꾸미기 위해? 정말 단순한 호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라이자는 넘쳐흐르는 상념을 접었다.
아직도 고통에 신음하는 벤자민을 생각한다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만…, 이 엘릭서가 정말로 벤자민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에 성공한다면…."
일라이자는 진중한 눈으로 알렌에게 감사를 표했다.
"사례하지. 반드시."
알렌은 겸양 어린 미소로 손을 저었다.
"동생이 벌인 짓인데 형이 책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알렌은 잠시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얼굴로 입을 우물거리다,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가?"
일라이자는 무언가를 떠올리듯 알렌을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답했다.
"이 일은 기억해두지."
알렌은 약간 피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일어나도록 하겠다."
알렌이 대답을 하기 무섭게 일라이자는 그에게 받은 아공간 포켓을 챙겨 자리를 떠났다.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엘릭서의 진위도 판별해야 될 테고, 연금 마탑의 움직임을 파악해보기도 해야 할 테니 며칠은 바쁘게 움직일 터.
'이걸로 준비는 끝냈다.'
그의 성격상 알렌의 고민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호의와 마지막의 머뭇거림 그리고 그의 온화한 성품까지 더해진다면 어느 정도 어려운 일이어도 손을 내밀겠지.
알렌은 멀어지는 그의 등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눈이 멀 정도로 밝은 햇빛이 눈가를 찔렀다.
'엘릭서를 통해 마탑 도시에 연줄을 하나 만들어놨고….'
동생의 서클을 부순 그란델, 놈에게도 갚아줘야 할 빚이 있다.
7대 마탑 중, 바람의 마탑의 마탑주.
추정 8위계의 현존하는 괴물 중 한 명.
'그것 말고도 흑마법사, 율리우스를 돕는 세력, 수확제에 도시를 노렸던 흑막, 책의 능력을 내린 누군가, 전 마왕 하이젤, 가문에 숨겨진 비밀….'
세계의 가호는 왜 율리우스와 자신을 돕는가.
시스템은 무엇이고, 김우신의 정체는 뭐지?
해야 할 일은 무수히 많았고, 알 수 없는 것들도 곳곳에 널려 있다.
이렇게 한가로이 있을 시간은 없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빌어먹게도, 심란한 제 속과는 다르게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
알렌이 일라이자 황자와 만남을 가진지 일주일이 흘렀다.
율리우스와 벤자민의 대련이 끝난 지도 2주가 흐른 시점.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이지만, 율리우스와 벤자민의 대련 결과에 대해 잊혀 가고 있었다.
그 사이의 기간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이미 지난 일보다 흥미로운 사건이 더 많았다.
"하이젤, 기록 1등 갈아치운 거 봤지?"
"…진짜, 아무리 중급 유적이라지만 신입생이 역대 기록 갈아치운 건 진짜 미쳤는데…."
"그 제국 최강, 피에르의 기록을 깼다는 거 아니야, 와."
첫 번째는 하이젤의 기록 갱신.
아카데미의 지하에는 유적들이 넘쳐나는 대사막에 자리 잡은 것답게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인공 유적이 존재한다.
최하급,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
총 다섯 가지 등급으로 나눠진 유적은 실제 같은 함정과 몬스터로 이루어져 있었고, 유적을 성공적으로 끝마칠 때마다 시간을 측정한다.
그걸 통해 암암리에 내기가 벌어질 정도.
본래 유적 하위권의 순위는 잘 갱신되는 편이기에 그리 화제 될 것이 없었으나, 하이젤이 중급 유적의 기록을 갱신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역대 최고의 기록을 차지했던 주인이 현재 팔강의 일원 중 하나인 제국 최강 피에르 베르나프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하이젤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느 의미로 미래의 팔강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했다.
두 번째는 신수의 부화.
이쪽은 첫 사건에 비해 그다지 화제 되지 않았다.
그러나 부화한 신수의 주인이 며칠 전 선배를 꺾은 것으로 유명세를 탄 율리우스라는 점과 알에서 부화한 존재가 보기 극히 드문 신수라는 것이 밝혀지자 달라졌다.
신수를 보기 위해 다른 학년에서 찾아오는 것이 빈번해졌고, 그의 이름이 더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선배 한 명이 퇴원했다는 소리는 이야깃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심지어 그 선배의 평판이 그리 좋은 것도 아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그러나 벤자민은 만족했다.
"네 덕분에 나을 수 있었다. 진짜…, 진짜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평생 불구로 살아가야 했을지도 모르는데.
아무리 아카데미를 위해 그렇게 행동했다고 한들 달가운 결과일 리 없었다.
'그리고….'
남쪽의 작은 도시에서 그를 이곳에 보내기 위해 노력한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그러니 자칫하면 발생했을 끔찍한 미래를 막아준 알렌에게 크나큰 은혜를 느꼈다.
"제 동생의 과오니 제가 해결해야 마땅하겠지요. 저는 당연한 일을 한 겁니다."
벤자민은 일라이자와 함께 알렌을 찾아왔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일라이자는 바쁜 시간을 쪼개서 왔기에 금방 돌아갔다. 그렇기에 이곳에는 그와 알렌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라니."
담담한 듯이 말하는 알렌의 모습에 벤자민은 그때의 감정이 북받치는지 콧등을 한 번 문질렀다.
"그건 절대 당연한 일이 아니지. 황자님께 들었다. 내게 사용한 것이 하급 엘릭서라고 했지? 그 귀한 걸 조금의 망설임 없이 줬는데. 뭐가 아니란 거야."
"아니 그건…."
변명을 내뱉으려던 알렌의 말문이 막혔다.
황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당신을 이용했다.
이런 변명은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알렌은 상투적인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결국, 제 가족이 벌인 일이지 않습니까."
"너는…."
그 모습이 겸손을 떠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진지한 눈으로 말하고는 허리를 숙였다.
"솔직히 귀족인 너에게 내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알렌의 손을 강하게 잡으며 자신에게 맹세하듯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힘을 주었다.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반드시 도와주마. 그 어떤 것이든."
알렌이 할 수 있는 일은 난감한 표정으로 빨리 쫓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언제든지 불러라! 어? 부르라고!"
"…예, 알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가기나 하십시오. 선배님."
"하하하, 그래!"
아무리 알렌의 얼굴이 두껍다고 해도, 그 상황에서까지 철면피처럼 있기는 힘들었다.
그를 쫓아 보낸 알렌은 해의 반쪽을 잡아먹은 지평선을 바라보며 기숙사를 나섰다.
지금의 시간은 몇 주간 이어져 하나의 습관으로 굳어질 지경이었다.
미라아 카리타스.
그녀와의 시간이 다가왔다.
제73화
해질녘의 거리에는 낮에는 찾아볼 수 없는 활기가 있었다. 학생들은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최대한 남은 감정을 털어냈고, 하루의 연구를 끝마친 마법사들이 로브를 여몄다.
그들의 뒤로 조수가 퀭한 얼굴을 한 채 발걸음을 질질 끌었다.
알렌은 이제 익숙해지는 풍경을 배경 삼아 걸음을 옮겼다.
깔끔한 회색 타일의 바닥 위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알렌은 몸을 숨기듯 그림자의 숲을 지나쳤다.
마리아에게 향하는 길에는 많은 이야기가 들렸다.
"아, 진짜 정령학 기초 수강하는데 엘프 이 정신 나간…."
"너도 봤지? 물 계통 마법 교수 얼굴이 개구리같이 생겼…."
"보충반에 있던 신입생이 중급반에 있던 학생을 이겼다네?"
어느 교수가 짜증나는지, 누가 개구리같이 생겼는지.
누가 대련을 했고, 승자는 누구인지까지.
"그러고 보니, 오늘 중급 유적 기록 2위 갱신된 거 알고 있냐?"
"어? 진짜? 누구?"
"걔, 유명한 애 있잖아. 용사의 후예라고."
"아… 그 기록 깨려고 미친 듯이 유적 들어간다는…?"
오늘 있었던 이야기에서 부터 요즘 한창 유명한 유적의 이야기까지, 가지각색의 이야기들이 낮게 불어오는 바람 사이를 옮겨 다녔다.
그러던 중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리우스라는.
감응력으로 귀를 집중하자 온갖 소음 사이로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어왔다.
"율리우스라고 했나요? 그 남자 너무 손속이 심하지 않나요?"
고상하고, 예의를 차리는 듯한 어투.
귀족 출신의 재학생 중 한 명임이 틀림없었다.
"맞아요. 귀족으로서 도전에 응하는 건 옳은 일이에요.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대련이란 명목에 걸맞게 손속을 조절해야 했을 텐데요."
"그도 불쌍하게 됐죠. 황자 저하의 도움인지 무사히 회복된 것 같지만…, 역시 품위는 없…."
피식-
알렌은 감응력을 끄고 느려진 발걸음을 재촉했다.
'역시 불만이 없을 리가 없지.'
어떤 일을 하던 불만을 가지는 것이 인간이다.
율리우스와 벤자민의 대련은 율리우스의 이름을 확실하게 알렸지만, 평판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영지에서 했던 것처럼 소문을 흘리는 건 불가능하겠지.'
그런 어설픈 움직임은 보일 수 없다.
알렌은 그에 대해 신경을 접어두고, 몇 주간 만났던 마리아에 대해 떠올렸다.
무뚝뚝한 표정에 감정 표현이 희박한, 아니 결여된 여자.
용사의 후예라 불리지만, 실제 후손인지 확인할 수 없다.
확인 할 수 없지만, 성검이 반응한 것으로 봐서는 실제일 가능성이 높았다.
성검이 알렌에게 반응한 이유가 외적인 이유, 용사의 신기로 인해 반응했다면 그녀는 다른 무언가일 가능성이 컸다.
그것이 혈통과 관련된 것일지는 알렌도 확실치 않았다.
회귀 전, 성검의 주인은 그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용사의 5대 신기, 성검의 주인은,'
전대 마왕이자 '원작'의 주인공이라는 남자.
하이젤이었다.
* * *
좁아지는 길목과 머리 위를 뒤덮는 담벼락의 그림자. 순식간에 멀어지는 소음은 다른 세계로 들어온 기분을 들게 한다.
살갗을 쓸어내리는 햇빛 사이로 알렌이 이리저리 골목길을 꺾어 지나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느릿한 걸음을 옮겼을 즈음,
삭막한 풍경과 어울리는 고저 없이 딱딱한 목소리가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
고개를 돌리자 처음 만났던 골목길 위로 그녀가 있었다.
…구석에서 앉아 고양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최대한 경계심을 풀기 위해 구석에 최대한 몸을 구겨놓은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였다.
알렌이 그 모습을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심정으로 바라보다,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고양이를 그렇게나 좋아하는 이유가 따로 있나?"
그녀를 경계하고 있던 고양이는 알렌이 다가오자 곧바로 품으로 달려들었다. 팔 위로 전보다 무거워진 무게감이 느껴졌다.
애옹-
"…아니, 없어."
반응이 조금 느렸군.
'개인 사정인가?'
그녀와 지속적인 만남을 가진지도 벌써 열 번이 넘어섰다.
알렌은 몇 번이나 만났어도 그녀와 거리감이 줄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한 번도 자신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으니.'
그녀의 행동이 어떤 의미를 담았는지 알렌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그것이 몇 주간 그녀를 만나며 내린 결론이었다.
그 행동이 무의식적인지 의식적인지는 몰라도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그녀와 그 이상 가까워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뭐, 그렇다면야."
그녀는 평소처럼 알렌이 고양이를 품 안에 가둬두자, 마리아가 언제 일어섰는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스윽- 슥-
"이제 이 녀석도 많이 익숙해졌군."
"응."
"벌써 만난 지 한 달이나 지났고."
고양이는 이제 귀찮은 듯 몸을 돌릴 뿐, 격렬한 반응은 하지 않았다.
처음과 비교한다면 장족의 발전.
그녀는 그 행동이 기쁜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바로 사라지긴 했지만.
"이제 초저녁인데도 덥군. 하긴, 사막 한가운데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조금 담담한 듯, 더위에 짜증이 난 것처럼.
"익숙하지는 않군."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알렌을 쳐다봤다.
"우리 영지는 리브레 왕국의 서쪽에 있다. 서쪽 대륙의 서쪽 끝. 사시사철 푸른 미켈란트 산맥과 맞닿아 있고, 그 근처에는 엘프 대수림이 있지."
마리아의 순백으로 가득한 눈이 약간의 흥미가 담겼다.
"가을이 되면 노랗게 물든 평야가 지평선을 가득 채우고, 알록달록한 단풍들이 뒷산을 물들이지. 추수제가 어떤지는 아나?"
농부들이 흥겹게 부르는 유행가가 박자를 타고 도시를 가득 채우고, 때를 맞춰 찾아온 상인이 흥정하며 자리다툼을 벌인다.
"겨울은 어떻고. 하얗게 센 눈자락을 바라보며 즐기는 운치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지."
그녀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알렌의 말에 깊이 집중해 있었다.
알렌은 이야기를 이어가다 적당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쯤 말을 끊었다.
알렌은 심중에 담겨 있던 의문을 꺼내기 시작했다.
"근데 너는 꽤나 괜찮아 보이는데…, 더위는 익숙한가?"
이넬리아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고향, 가족 관계, 살아온 환경과 성격, 심지어 용사의 후예라 불리게 된 계기까지.
마치 그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용사의 후예라는 칭호와 함께 나타났다.
"...."
그녀는 아무 말 없었다.
알렌이 그녀의 침묵에 의아함이 들 때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더위는 익숙해."
"그러면 너는 남부나 중부에서 왔겠군."
"알 필요 있어?"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렇지는 않지."
"알렌, 너는 귀족이라고 했어."
평소보다 조금 굳은 표정과 평소보다 박자가 빠른 말투.
알렌은 평소와 조금 다른 듯한 그녀의 분위기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귀족은 사생활에 특히 민감하게 군다고 들었어."
"그래, 네 말이 옳다."
"나도 마찬가지야."
마리아는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그렇기에 알렌은 더욱 잘못 찔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외로 눈치가 있다는 사실도.
곰의 행태를 하는 여우나 마찬가지.
'…자기 이야기를 숨기는 것을 알았지만, 이 정도 사소한 일로도 민감하게 반응할 줄이야.'
거기에 무언가 있다는 건가.
알렌은 실수를 인정했다.
"…실례했군. 사과하지."
"괜찮아."
"…고맙군. 사과의 의미로 내가 가끔 들리는 곳으로 안내하지. 그곳의 차향이 제법이다."
알렌이 자연스럽게 다음 약속을 잡자 그녀는 겉으로는 의심 어린 기색 없이 받아들였다.
"응."
알렌은 눈을 깜빡이며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온 마리아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흠…."
"응?"
"오늘 무슨 일 있었나?"
그녀의 동공이 빠르기 수축되었다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니?"
그녀의 부정에 알렌은 평소보다 유달리 예민해 보였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퍼즐의 조각을 맞추기 시작했다.
기록 갱신, 도전, 2위, 달라진 태도 그리고 인공 유적.
"혹시 인공 유적의 일로…?"
"아."
정답이구나.
그녀의 손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하아악-
고양이가 급히 몸을 버둥거렸다.
그녀는 곧바로 잘못을 깨닫고 힘을 풀었지만, 털이 몇 가닥이나 빠진 고양이는 금세 모퉁이를 돌아 사라져버렸다.
"아…."
"이런, 오늘은 더는 힘들겠군."
"너 때문이야."
마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자 알렌이 점잖게 뒤로 물러섰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알렌의 밉살스러운 태도에 마리아는 그를 지긋이 바라봤다.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인지 말해줄 생각 있나?"
"…몰라."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으로 모자란 지 몸을 획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나 갈게."
알렌은 깔끔하게 물러섰다.
'강제로 선을 넘어봤자 지금의 관계만 망가질 뿐이지.'
그녀가 찰나의 시간 머뭇거렸던 것 하나만으로 알렌은 만족했다.
그녀에게 틈이 있다는 것을 뜻했으니까.
'방금은 너무 조급하게 움직였다.'
결국, 느긋하게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없다.
알렌은 화났다는 걸 표현하는 듯 크게 걷는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
"참고로 기숙사는 반대쪽 길이다."
마리아의 몸이 우뚝 멈췄다.
그녀의 귓불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기숙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고마워."
대답은 작게 들려왔다.
"별말씀을."
* * *
그렇게 신입생들이 아카데미 생활에 적응했을 무렵,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다.
학생 스스로 과목을 선택할 시간.
신입생들은 지금까지 보충반과 일반반, 단 두 개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러나 한 달의 평가가 끝나자 포괄적으로 구분된 반에서 보충반, 하급반, 중급반, 상급반, 고급반으로 세밀하게 나눠졌다.
알렌은 당연히 고급반으로 배정되었다.
그 안에서 다시 자신이 원하는 과목을 직접 선택해서 수강하겠지.
같이 묶어놓았음에도 같은 과목을 수강하지 않는다.
단지 같은 반에 있다는, 수준이 동등하다는 우월감을 부여할 뿐.
무한한 경쟁.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끝임 없이 스스로 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지금은 아직 어색한 모양이지만, 곧 깨닫겠지.'
신입생들은 각자 친해진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수업 들을 거야?"
"너는? 나는 정규 기사 수업을 받은 적이 있어서, 아마 근접 무기 심화 들을 것 같은데."
"다른 건? 네 가문에서 뭐 들으라 한 거 없었어? 아, 평민이라 그런 거 없냐?"
"아니 있는데?"
"어?"
"기초 정령학 들어야 돼. 아버지가 얼마 전에 새 부인으로 노예 엘프를 사들였거든."
"…엘프를 노예로?"
다만, 그 모습은 종족과 신분이 파벌이 갈렸던 처음과 다르게 조금은 자유분방해져 있었다.
알렌은 그 모습에 조금의 감탄마저 흘렸다.
'확실히 교묘한 수법이긴 하군.'
첫 주에 실력을 확인한다는 핑계로 상급생과 대련을 하며 동질감과 협동심을 심고, 부회장을 비롯한 고귀한 혈통의 이들이 지속적으로 사상을 동조시킨다.
그 외 짐작만 하는 몇 가지 수단이 더 첨가되자, 학생들이 서로 무시하지 않고 어울릴 수 있을 정도의 사이로 변하는 건 금방이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이곳에 입학한 이들 대부분이 재능이 있는 기재라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알렌은 신분차이와 종족간 차별에 미세할지라도 조금의 틈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융화될 것 같지 않은 이들은 초기에 정리했으니, 이상할 것도 없나.'
알렌은 생각과 함께 과목 선택을 끝냈다.
앞으로 1년 동안 수강할 과목인 만큼, 미리 조사를 해놨었다.
그렇게 해서 고르고 고른 8개의 과목.
공간의 이해?상
영혼 다변론
소환수 계약과 조련
기초 다중차원학
천연결계의 정석
오케스트라(Ⅰ)
던전 실습훈련 - 1
몬스터 생태학 - 1
필수 과목으로 선정된 던전 실습 훈련과 몬스터 생태학까지 합쳐져 8개 과목이 되었다.
최대 10 과목까지 신청할 수 있었지만, 알렌은 따로 검을 훈련할 시간까지 고려해야 했다.
'검술은 베스틀라에게 배우면 되니.'
당초, 이곳에 왔던 목적대로 마법의 향상을 목표로만 해도 충분하리라.
마력의 양은 전생과 비교할 수도 없지만, 마법의 수준은 정체된 상태였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 상황은 빠르게 타파할 필요가 있었다.
"과목에 관해서는 미리 고지한대로 작성 후에, 그대로 찢으면 신청이 완료됩니다."
교탁에 선 교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교실 여기저기서 종이가 반으로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반으로 찢긴 종이는 푸른빛으로 점멸하더니 서서히 공기 중으로 녹아들었다.
'저건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의 마법일까.'
공간, 분류, 추적, 소멸…
안에 내제된 개념의 가짓수만 해도 7위계 마법사가 부리는 마법의 수준과 비교해 떨어지지 않는다.
알렌은 은근히 드러난 아카데미의 저력에 감탄을 흘리며 종이를 찢었다.
치익-
종이가 허공에서 잘게 변해 녹아들었다.
"그리고 공적치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 도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화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있는 깊은 지식을 탐독하거나.
엘피스 거리에 있는 상가를 이용할 수도 있고, 아카데미의 보고에 보관된 물건을 대여하거나 교환할 수도 있다.
"공적치는 많은 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나눠준 소식지 뒷면에 있으니 찾아보시면 될 겁니다."
유적을 탐사하거나, 새로운 논문을 제출하거나, 사람을 구하거나, 일정한 수의 몬스터를 처치하거나.
"이렇게 모은 공적치는 여러 곳에 사용 가능합니다. 이것도 뒷면에 있으니 읽어보세요."
알렌은 살짝 시선을 돌렸다.
하이젤은 관심이 없는지 하품을 했고, 마리아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했다.
"심지어 아카데미에 상주한 가이온 님이나 자크니르 님에게 일일 교습을 받을 수도 있으니 열심히 활동하시길 바랍니다."
그 말이 끝나자 무섭게 학생들이 놀라운 얼굴로 수군거렸다.
"와, 미친 팔강과의 개인 교습?"
"…이건 제대로 해봐야겠는데."
"흠, 가문의 병사들을 써야 하나? 아니면 용병이라도…."
"빌하임! 당장 자세히 알아보세요. 이번 기회에 팔강의 눈에 띌…."
급히 옆에 같이 입학했던 가신과 대화하는 이, 둘도 없는 기회라는 듯 눈을 빛내는 자, 어떤 게 이득인지 셈하는 사람까지.
교실이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평민들도 자신의 색다른 미래를 꿈꾸는 듯 상기된 얼굴로 떠들었다.
알렌은 그들과 다르게 교수의 말에 휩쓸리지 않았다.
공적치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개인 교습 한 번에 10,000점이라니.'
하급 몬스터 기준 0.5점.
유적 탐사의 수준에 따라 10-100점.
인명구조 한 명당 5점. - 단, 신분에 따라 별도의 공적치 추가.
아카데미의 보고에 물건을 교환하는 것도 3,000점이 들어가는데, 팔강과 일일 교습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야 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평생 공적치만 쌓을 수 없고, 아카데미의 수업도 따라가야 하니….'
따져보면 거의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없다.
다른 학생 몇 명도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자자, 그만. 그럼 이대로 수업을 끝마치겠… 아 그래. 이걸 잊고 있었군요."
교실의 소란을 잠재운 교수는 손가락을 튕겼다.
탁-
그러나 각자 학생들의 앞으로 한 장의 종이가 나타났다.
"거기 읽어보면 아시다시피, 시간표에 따라 2주 후에 1학년 전체가 던전 실습을 나갈 예정입니다."
던전 실습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한동안 기억을 뒤져보던 그는, 별다른 것이 떠오르지 않자 신경을 끊었다.
'그것보다는 다른 일에 신경 써야지.'
얼마 후에 벌어질 사건.
"1학년끼리 조를 짜서 진행할 예정이며 2학년 선배가 한 명씩 배정되어 인솔하게 될 겁니다. 예외적으로 공적치도 얻을 수 있으니 사전에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는 침입자에 의해 습격당한다.
'내 주변과도 관련 있는 일이니, 신경 써야겠지.'
부하의 일이라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이미 회귀 전에 일어났던 일, 더욱 특별하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그럼 수업을 끝마치겠습니다."
교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종소리가 울리며 수업이 끝났다.
알렌은 몸을 일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날 사건인 만큼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교실을 나서려던 찰나,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알렌, 나 왔어요."
그가 목소리의 주인에게 고개를 돌리기 전, 그의 부르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있었다.
"알렌."
딱딱하고, 고저 없이 그를 부르는 목소리.
"나 당분간 밤에 못 만날 것 같아."
"불렀는데 왜 대답 안해… 어?"
마리아의 목소리에 걸어오던 레이첼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잠깐 일이 생겼어."
마리아의 표정은 변화 없었다.
"그러니까 며칠 후에 다시 만나."
"…다시?"
"장소도 바꿔서. 뒷골목은 이제 지겨워."
"뒷골목? 지겹?"
묘하게 특정한 단어를 레이첼이 따라 말했다.
"잠깐…."
알렌은 직감적으로 그녀가 잘못 이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갈게."
그러나 마리아는 알렌이 말을 정정하기도 전, 자신의 할 말만을 끝낸 체 그대로 교실 밖을 나섰다.
"아…."
알렌은 탄식했다.
그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던 레이첼은 곧장 달려와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알렌은 얌전히 그녀의 손길에 끌렸다.
"알렌, 당장 설명해요. 당장."
"…내가 다 설명하지, 잠깐…."
「인기 많아서 좋겠네요? 바람둥이!」
'그 입 좀 다물면 좋겠군.'
「검한테 입이 어딨어요? 그러게 저한테 평소에 잘 좀 하지 그랬어요?」
재밌는 구경거리인 양 베스틀라만이 신나게 소리쳤다.
알렌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은 걸 참으며 고개를 내렸다.
레이첼의 호수 같은 푸른 눈동자로 투명하게 자신을 비췄다.
"사실대로 말해요, 무슨 관계야."
제74화
"…아니, 아무 사이가 아니면 아니라고 말을 하지 그랬어요."
레이첼은 조금 전의 행동이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말할 기회도 없었지 않았나."
알렌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되묻자, 그녀는 괜히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누, 누가 와도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잖아요?"
그녀는 자신이 말을 더듬은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마나의 맹세도 했을 텐데."
"…으, 그건 그렇긴 한데…."
알렌은 시선이 몰리기 시작하자 그녀를 데리고 급히 교실을 빠져나왔다.
'목소리가 그리 크지는 않았으니, 들은 사람도 적겠지.'
치정 소문에 휩싸인 것만큼 피곤한 일은 없었다.
그녀는 알렌과 마리아가 자신이 상상한 것 같은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얼버무리는 중이었다.
"상대는 마리아 카리타스, 용사의 후예로 소문이 자자한데 그런 관계가 될 리 없잖나."
"…그것도 그렇죠."
알렌은 적당히 인적이 드문 곳으로 빠져나왔다 생각이 들 때쯤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걸음도 덩달아 멈춰 섰다.
"날 믿지 못했나?"
"다, 당연히 믿었죠!"
"진심으로?"
"…네."
「그런 것치고 표정이 심상치 않았지만요.」
알렌은 좌우로 빠르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내심 베스틀라의 말에 동의했다.
"그, 그 얘기는 그만하고…, 아! 2주 후에 던전 실습하는 거 알죠? 그거 저희랑 하는 거 알아요?"
그녀는 급히 생각났다는 듯 화제를 전환했다.
알렌은 그녀의 장단에 얌전히 넘어가 주었다.
"너희와?"
"네, 저번에 한 번 커다란 진동 느낀 적 있죠?' 그때라면, 하얀 책이 반응했을 때인가.
"그래."
"그 진동이 이번에 초대형 유적이 나타난 전조였다고 하더라구요."
초대형 유적이라….
'그게 하얀 책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책의 능력을 준 초월자와 관련되어 있나?
아니면, 검게 가려진 이름의 주인과?
우연이라고 보기엔 타이밍이 절묘했다.
어찌 되었든 한 번 살펴볼 필요는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접근하기에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이번 던전 실습은 나눠서 진행할 필요도 없이, 신입생 전체가 함께 진행할 거예요."
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1학년을 인솔하는 역할로 2학년 일부가 맡게 되었고…, 그중 한 명이 저에요."
"정석적이군."
2학년은 1학년을 이끌 기회를 얻고, 1학년은 2학년에게서 앞선 실전 경험을 배운다.
"경험을 쌓기에도 좋고. 다만, 자칫 부상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인데…."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기본적인 방호 아티펙트나 구명에 관련된 장비는 지원하니까요."
"그 정도면 괜찮겠지."
경험을 쌓으려는 목적이니 너무 과한 준비는 필요 없다.
"그럼 그 기간 동안 따로 준비할 건 없나?"
"네, 당신은 영지에서 유적을 탐색한 경험이 있을 테니까…, 딱히 더 준비할 건 없어요."
그녀는 완전히 화제를 바꾸는 데 성공하자 제법 안심한 눈치였다.
"아, 맞다. 알렌, 혹시 가문에서 후원하는 학생들은 만나봤어요?"
"후원 학생 제도?"
"네,"
알렌은 라인하르트 가문에서 학생들 몇 명을 후원한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그것이 누구인지 몰랐다.
"아니…, 잘 모르겠군. 가주님께서 결정하신 사항이라."
학생을 후원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영지로 끌어들이기 위함이지.'
아카데미에 입학한 학생들은 평민이라도 어지간한 재능은 다 있었으니, 그들이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 풍족한 생활을 보낼 수 있게 후원한다.
그럼 후원을 받은 평민들은 차후에 지원해주었던 가문의 영지로 가는 것이다.
"저는 만나봤거든요, 저랑 같은 동아리에 있던 선배인데 정말 괜찮은…."
그렇게 그녀는 며칠간 만나지 못했던 것을 다 풀겠다는 듯 여러 가지 이야기를 꺼냈다.
"아, 알렌 그러고 보니 그거 들었어요?"
그녀는 뭔가 은밀한 것을 말하려는 듯 주위를 획획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이번 신입생 중에, 짐승왕 가이온의 손자가 입학했데요."
그녀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는 듯 말했지만, 알렌은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이렇게 즐겁게 말하는 데 초칠 필요는 없겠지.'
그녀는 알렌이 무어라 생각하든지 빠르게 말을 쏟아내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는데…, 짐승왕의 손자라니까 당연히 수인이겠죠? 막, 옷을 입고있어도 몸이 우락부락하고."
그녀는 알렌과의 대화를 나눈 것보다 소문 자체에 흥분한 것 같았다.
'글쎄, 내가 알기에 그녀는 수인보다 인간에 더 가까울 텐데.'
인간과 겉으로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당연히 학기 초니까 일부러 실력을 감추는 것일 거예요. 제가 예상하기에는 아마 이번 던전 실습에서 두각을 드러낼 가능성이…."
알렌은 그녀의 예상에 쓴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짐승왕의 손주라고 하니 전사일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아쉽게도 그녀는 전사가 아니다.
피가 옅어 수인만의 능력인 오러도 사용하기 힘들고, 그렇다고 마력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흉폭한 성격도 아니며, 오히려 정반대라고 보는게 옳았다.
'린벨이 잘해줘야 할 텐데.'
알렌은 잠시 본관과 떨어진 연구 지구 쪽을 쳐다봤다.
"알렌, 왜요? 거기에 뭐 있어요? 응?"
"아니, 짐승왕의 손자라고 해도 모두 전사라는 법은 없지 않나 싶어서. 의외로 특별 입학을 했을 수도 있지 않나?"
"그 괴물의 손주가요?"
레이첼은 입을 가리고 눈웃음 지었다.
"당신도 귀여운 구석이 있네요."
그녀는 말도 안 된다는 어투로 단언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다른 팔강이라면 모를까, 그 사건을 겪은 짐승왕이 자기 손주가 책상에 앉는 걸 허락한다구요? 절대 불가능해요."
알렌은 그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자신도 회귀하지 않았다면 그녀와 같은 반응이었을 테니까.
"차라리 율리우스, 그놈처럼 보충반에서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게 더 그럴듯할걸요?"
"…그런가."
"네. 아, 그러고 보니, 갑자기 그 율리우스, 그 자식이 카트린느랑 같이 어울리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그녀는 알렌의 눈치를 보듯 슬쩍 표정을 확인하더니 말을 이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율리우스와 카트린느가 어떻게 됐는지 알잖아요. …그렇게 차였으면서 뭐가 좋다고 다시 달라붙는지."
레이첼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그런 그녀의 기분과는 별개로 알렌은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느꼈다.
'카트린느가 무사히 그에게 다가섰나.'
그녀를 받아들인 이유로 대장간 발 홀의 실질적인 주인이 그녀라고 밝힌 것이 클 터.
이 상태로 그녀가 그놈의 마음속 큰 부분을 차지하면 좋을 텐데….
'상대들이 너무 쟁쟁하니, 그건 힘들려나.'
차라리 서로의 관계를 조율해주는 역할이 낫겠어.
"어떻게 생각해요? 혹시 아는 게 있어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으음, 그래요?"
한동안 카트린느가 걱정되는 듯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녀는 남은 수업이 있다며 알렌과 헤어졌다.
'린벨 쪽은 조만간 소식이 있겠고, 일라이자 황자와 관계도 정립했고…,'
마리아와 최소한의 친분을 만들었다.
다만 하이젤과는 몇 주 전 대화를 기점으로 별다른 만남이 없었으니 다른 조치를 할 필요가 있었다.
최근 율리우스랑 부쩍 가까워져 보이기도 했으니.
'적어도 회색 책과의 관계성이나, 현재 그의 목적이 뭔지 풀어내야 한다.'
그는 겉보기보다 더욱 많은 비밀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금 생각해야 할 건….'
알렌은 그녀가 떠나고도 조금 더 자리에 머물다 기숙사로 돌아왔다.
"공자님, 미니마 부족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미니마? 알렉시오스에게서?"
"네."
이넬리아는 알렌이 기숙사에 들어온 즉시, 그에게 한 장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생각보다 늦게 연락했군."
적어도 입학식이 끝난 후 바로 연락을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이제 약속을 지킬 때가 왔다.]
미사여구나 장황한 추임새 없이 필요한 내용만을 담은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편지 말고 따로 건네준 건 없던가?"
"유적의 위치는 가까울 시일 내로 다시 전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다른 건?"
"제가 따로 조사해본 바로는…, 그들이 향하는 방향이 먼젓번의 진동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예상 밖에…. 조금 더 조사한 후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이번에도 초대형 유적이라….
'우연인가?'
아직 확신하기에는 이르니 신경 써두는 것이 좋겠군.
혹시 모르지 않는가.
아카데미에서 실습할 던전의 예정지가 우연히 미나미 부족이 원하던 곳이 겹칠지.
검은 책에서도 이와 관련된 특별한 사건에 관해 서술하고 있지 않은 만큼 변수를 대비해둘 필요는 있었다.
"다른 소식은 더 없겠지? 혹시 경매장에서 구한 물건은…."
"없습니다."
"아쉽군."
알렌은 조급함을 가라앉혔다.
여기서 안달 내봤자 무언가 달라지는 건 없다.
중요한 건 실낱같은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은 것, 그것이면 충분했다.
"나는 다시 나가 볼 테니, 수고해주게."
"네, 알겠습니다."
"저번에 말했던 연금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시 고민해보고."
이넬리아는 자신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제 남은 일은, 그것밖에 없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데미는 내부 협력자의 도움으로 습격당한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탈출한 이단의 성녀.
신수 해룡을 몰래 데려갔으며, 지금은 보충반에서 몰래 신분을 숨기고 있는 여자.
그리고 아카데미를 습격한 습격자들에게 복수심에 무기를 공급했던 이들이 존재했다.
'정확히는, 존재했었다.'
심지어 회귀 전의 삶에도 경험한 일이 아니었다.
'회귀 전의 일도 아닌 검은 책에 쓰여있던 [원작]의 일이다. 하지만, 상관없지.'
신드리 남매.
그들이 아카데미를 습격한 이단, 순환교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저번에 방문했을 때 확인했다.
그럼으로써 원작에 적혀있었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 신빙성이 증명된 상태.
'그들의 통해서 순환교와 접촉한다.'
그 후에 그들과 거래를, 아니 아주 약간 위험한 도박을 할 예정이다.
성녀는 율리우스의 여자 중 한 명이 될 예정이기에 율리우스는 그들과 계속 부딪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들을 이용할 수 있는 패가 될 수도 있다.'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알렌은 멀리 뻗어 나가는 상념을 끊었다.
아직 제대로 실현된 건 아무것도 없다.
괜히 설레발 치고 싶지 않았다.
걸음이 약간 빨라졌다.
오늘따라 공업 지구로 가는 길이 더 길어 보였다.
* * *
엘피스에 자리한 비밀스러운 장소.
새하얀 대리석으로 세워진 기둥과 화려하게 양각된 무늬는 절로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고풍스러웠다.
그런 장소에 흐르는 엄숙한 분위기는 장소를 더욱 무게감 있게 만들어, 작은 숨소리조차 조심스럽게 내뱉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천장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모여드는 중심에, 마리아가 있었다.
미동도 없이 감은 두 눈은 고요했고, 하얀 얼굴과 그에 어울리는 순백의 백발이 가지런했다.
그녀가 정좌한 바닥에는 거대한 나무가 한 그루 그려져 있었다.
열 개의 원으로 이루어진 나무, 그 나무의 위로 뱀 한 마리가 휘감아 오르는 그림.
그녀는 그 뿌리에 해당하는 열 번째 원에 앉아있었다.
"후우-."
순간, 그녀의 몸 위로 찬란한 황금빛이 반짝였다.
그녀가 앉아있던 원이 고르게 빛나며 다른 아홉 번째 원으로 뻗어 나갔다.
그렇게 뻗어나간 원은 여덟 번째 원, 일곱 번째를 거쳐 올라가기 시작했다.
황금빛 마력은 원을 거칠수록 백색이 섞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완전한 백색으로 변하려던 순간 빛의 형체가 흐트러졌다.
흔들리기 시작한 빛은, 멈출 새도 없이 출렁거리더니 순식간에 부서져 내렸다.
"집중이 흐트러졌습니다."
나긋한 목소리가 침묵을 깨트렸다. 또각거리는 발소리, 경쾌한 걸음이 시선을 붙잡았다. 그녀의 눈앞으로 다가온 여인은 매우 아름다웠다.
"오늘만 문제가 아니라, 어제도, 그제도. 지난 한 달간 계속 흔들리네요."
아나스타샤.
갈슈딘 아카데미의 이사장인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아나스타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수석의 자리를 빼앗긴 것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나스타샤는 한 걸음 다가왔다.
"아니면, 성검을 사용하지 못해서? 요즘 인공유적에 틀어박혀 있다고 들었어요."
한 걸음 더.
"그것도 아니면…, 매일 밤 만나는 차석 때문일까요?"
마리아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아무런 감정 변화 없이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고, 아나스타샤는 미소를 지으며 마주 봤다.
아나스타샤는 알았다.
저만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저 무표정 안에 무슨 감정이 담겨있는지.
어떤 것을 억누르고 있을지.
"한 그루의 나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래서는 안 돼요.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든, 껍데기를 깨기 위해서라도 말이에요."
그녀의 미소가 진해지기 시작했다.
"'용사의 후예'라는 칭호에 맞게 행동하려면, 강해져야 해요. 그 누구보다도. 지금의 자리에 머문다면…, 그건 힘들지 않을까요?"
"알고 있어."
입을 다물고 있던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아나스타샤가 활짝 웃었다.
"알고 있으면 됐어요. 원래 계산대로 라면, '운명'에 따르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추락했다고 해도 신이다. 강제로 닫았던 하늘이 열린 순간부터 예언의 의미가 없어졌다고 해도, 운명은 있었다.
벌어질 일은 벌어지고, 이뤄질 일은 이뤄지는 게 운명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간신히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고 해도 언제 완전히 뒤틀릴지 몰라요."
그러니 완전히 뒤집히기 전에, 흐름을 주도할 필요가 있었다.
"저를 위해서도…,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도."
그녀는 과거를 떠올렸다. 이 시대가 영원히 계속되리라 상상했던 시절. 커다란 궁전에서 만인의 경배를 받던 시기.
그러나 그 시대는 저버렸다.
철저하게 몰락했고, 역사에 파묻혔다.
"뭐, 그래도 원래 영웅의 곁에는 경쟁자가 있어야 더 빛나는 법이니."
그녀는 고상하게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부터 세웠던 비원을 이륙하기 위해서는, 마리아가 더 성장해야 했다.
지금보다 더.
어떤 행동을 해도 용인될 만큼.
그렇기에 지금의 기회는 적절하다고 볼 수 있었다.
"이번 던전 실습에서 두각을 나타내세요."
그녀는 발걸음을 획 돌려 마리아를 등졌다. 내뱉은 말에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성검의 권역을 벗어날 수 없으니 확인은 못 했지만…, 아마 그곳에는 고대의 괴물 중 하나가 있을 거예요."
또각또각-
"학생들이 상대하기에 버거울 테니,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을 때…, 나타나서 죽이세요."
"…응."
"이미 준비도 다 해놨으니 방해받을 일도 없을테고요."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나스타샤는 그녀의 대답으로 걸음을 옮기다, 잊은 말이 있다는 듯 고개만 돌려 마리아를 보았다.
"그대는 '우리'의 희망이니까요."
순간적으로 특정할 수 어려운 남녀노소 수십 개의 목소리가 겹쳐 공동을 울렸다. 그런 기괴한 목소리를 낸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애로운 얼굴로 마리아를 바라봤다.
"그러니 잘 부탁해요."
마리아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만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제75화
학생회의 서기, 로렌은 평민 출신의 학생이다.
열아홉에 아카데미에 들어와 올해로 스물셋이 된 학생.
그는 아카데미가 제시한 기준에서 턱걸이로 겨우 들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재능의 기준선이 높은 곳이 이곳, 갈슈딘 아카데미다.
그의 재능은 아카데미 기준으로 봤을 때는 낮은 편에 속하더라도, 다른 어느 곳으로 파견을 나가든 기본 이상의 직책을 맡을 수 있는 인재라는 뜻이었다.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성격.
특출나지 않지만, 어디에도 모난 곳 없는 성품.
그는 학생회에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학생 중 하나였다.
"선배, 선배의 이름으로 편지가 도착했어요."
"그래? 고마워."
특별할 것 없는 일정을 마무리하던 중에 그에게로 편지가 도착했다.
하얀 편지지.
그 위로 특색 없이 로렌의 이름밖에 적혀 있지 않은 편지를 로렌은 의아한 얼굴로 보았다.
'음…, 나한테 편지가 올 사람이 있던가? 성교의 일정은 모두 전달 받았을 텐데?'
올해로 사 년째.
작은 정보 전달하기. 특정한 명단 작성하기. 특정한 물건 경매장에서 구하기.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아카데미의 첩자로 활동한다는 것에 밤잠을 이루기 힘들었던 그는, 생각보다 안온한 생활에 마음을 놓게 되었다.
이번에 성교의 배신자만 붙잡는 일만 끝난다면, 그도 완전히 임무를 끝마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해이해졌다.
'첩자'라는 자가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었음에도.
그렇기에 로렌은 아무런 의심 없이 편지를 펼쳤고.
"…어."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대들에게 순환의 제전을 요청한다.]
[그곳에서 상실, 순환, 현현 세 단계 중 현현의 증명을 하기 원한다.]
하얀 바탕의 위로 충격적인 선언이 적혀 있었다.
로렌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가 자기와 부딪쳤다는 사실도 몰랐다.
"아, 아얏."
"미안하다."
"로렌!"
그는 급히 사과하고는 밖으로 달렸다.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른 소리가 들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 것에 신경 쓰기에는 한시가 급했다.
'사제, 사제님한테 가야 해.'
이 사안은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을 일이 아니었다.
로렌은 급히 엘피스의 비밀 거점 중 하나로 이동했다. 최대한 돌아서 이동했지만, 그를 쫓아온 사람이 있다면 들켰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로렌은 이 편지를 전하는 게 더 중요했다.
공업 지구의 외곽에 있는 창고.
평소 인적이 드문 이곳에 로렌이 급히 창고로 뛰쳐 들었다.
"사제님!"
쾅!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가벼운 식사를 하던 밀란 사제는, 그 상대가 로렌이라는 것을 알자 한숨을 내쉬었다.
"…놀랬잖나. 로렌 형제.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심호흡하고…."
그의 말에 크게 고개를 내저은 로렌은 숨도 고르지 않고 외쳤다.
"제전을!"
"뭐?"
"순환의 제전을 요청받았습니다!"
툭-
밀란 사제가 들고 있던 수저를 떨어트렸다. 그가 매우 놀란 얼굴로 입을 벌렸다.
"바, 방금 뭐라고 했나?"
"드디어, 드디어 때가 왔다는 말입니다. 사제님!"
로렌이 환희에 젖은 눈으로 무릎을 꿇었다.
황홀하게 치켜뜬 그의 눈동자가 소름 끼친 빛을 발했다.
"예언의 사도가 등장했습니다."
* * *
던전 실습까지 열흘 남았을 시점.
드디어 그날이 되었다.
원작에서 하이젤과 다퉜던 세력 중 하나이자, 수많은 이교들 중 가장 큰 세력인 '이름'의 성녀 아벨린을 노리는 순환교의 습격이 이뤄지는 날.
'원래는 이 습격에 신드리 남매가 합류하겠지만….'
카트린느가 운영하던 대장간에 그들이 일하고 있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본래는 자신이 그들을 거둘 생각이었는데.
'나비 효과인지 뭔지….'
하필 자신에게 차인 그녀가 아카데미로 향했고, 그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지원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가 자신에게 미련이 남아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그만한 재능을 가진 다른(추가) 대장장이를 찾는데 골치 아팠을 것이다. 혹은, 전 약혼녀가 우연히 사고로 불우한 일을 겪거나.
"…여기가 맞나?"
본관에서 조금 떨어진 구역에 있는 별관. 학생들끼리 서류를 제출한다면 동아리를 만들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율리우스는 약속을 잡았다.
'아벨린을 지켜야 하니까.'
그녀에게 호감도 쌓을 수 있고, 신수를 키우기 위해선 그녀가 필요했다. 이교라고 해도 그녀는 성녀, 그녀의 쓸모는 무궁무진했다.
앞으로 잘만 키운다면 힐러 걱정은 없을 정도로.
율리우스는 별관 1층 구석의 교실 앞에 도착했다.
약속 장소가 맞나 고민하던 그때, 누가 문을 벌컥 열었다.
"율리우스 님!"
"왁! 놀래라. …아이린?"
율리우스가 놀란 얼굴로 한 발짝 물러나자, 아이린이 웃으며 그의 손목을 덥석 집었다.
"헤헤, 여기서 뭐하시고 계세요. 얼른 들어와요."
"잠깐…."
교실로 들어가자 미리 도착해있던 6명이 율리우스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율리우스가 천천히 교실로 들어서며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아냐, 아벨린, 카트린느, 나타샤, 헬레나, 아이린, 바이론.
자신이 여태까지 모은 인재들.
이들이 모두 자신의 편이라고 하니 가슴이 든든했다.
아직 애매한 사람도 있는 것 같지만 어떤가, 시간을 들인다면 '올바른' 결말을 위해 다 같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리 늦었느냐, 지각이노라."
헬레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시계를 가리켰다. 율리우스는 10시가 넘어가는 시곗바늘을 보고 변명을 댔다.
"왕국에서는 중요한 약속일수록 늦게 오니까…."
"그렇다고 지각을 하지는 않느니라."
그녀의 핀잔에 율리우스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
"다음부터 조심하거라."
그녀는 율리우스의 사과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구석을 바라보니 바이론이 굳은 얼굴로 석상처럼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바이론은 여성들만 가득한 공간에 있는 게 고욕인지 소리 없이 도움을 요청했다.
'도와주십시오, 주군….'
'미안하다.'
가볍게 그의 눈길을 외면한 율리우스는 특이한 울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갸호-, 갸호-
둥글둥글한 하얀 털 뭉치와 머리 위로 솟은 조그마한 보라색 뿔.
며칠 전 드디어 부화한 신수가 힘차게 울며 어느 여성의 품에 안겨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온 갈색 단발과 장난기 넘치는 얼굴.
신분을 숨긴 이단의 성녀이자 지금은 다른 곳에 있을 신수 해룡의 주인.
아벨린이 아냐와 함께 신수를 돌보고 있었다.
"얍! 얍! 자, 이거 성공하면 상 줄게. 응? 빨리해봐."
갸호! 갸호!
"아벨린 언니. 그래도 신수인데, 나뭇가지 물어오라는 건 좀…."
"에이, 신수는 원래 이렇게 키워야 해. 너 신수 키워봤어?"
"아, 아뇨…."
"어허, 그럼 내 말 들어. 언니는 이미 한 번 키워봤단다."
"…어, 그게… 언니 거짓말은 좀…."
아냐는 그녀의 말을 믿어야 될지 믿지 말아야 될지 고민했다. 그 사이 아벨린이 정말로 나뭇가지를 던지려는지 신수를 바닥에 내려놨다.
율리우스는 신수가 정말 움직이기 전, 자신이 지어준 자랑스러운 이름을 불렀다.
"동동아, 이리 온."
갸호?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신수, 동동이는 고개를 돌렸다.
"율리우스, 제발 신수 님을 그렇게 부르지 마시죠."
관심 없는 척 조용히 귀를 쫑긋대던 나타샤가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맞아, 동동이가 뭐야. 동동이가."
아벨린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동동이가 어때서."
율리우스는 억울했다.
동동이가 자신의 이름을 만족하는데 뭐가 문젠가.
"그치? 동동아."
갸호-
"원래 애완동물 이름은 정감 있게 짓는 거랬어."
"애완동물이 아니라, 신수 님입니다."
"크흠, 그래 신수."
"신수 님."
율리우스가 대충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나타샤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려던 때, 그가 들어올 때부터 천천히 상황을 관망하면 카트린느가 끼어들었다.
"저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녀의 말에 한 박자 늦은 나타샤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선택은 신수 님의 몫, 신수 님이 선택했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요?"
"…그래도."
"만약 다른 이름을 줬을 때 받아들이지 않으면요?"
"...."
"이미 결정한 이상 더 이상의 언급은 무용하다고 생각돼요."
그녀의 반박에 나타샤는 안타까운 얼굴로 신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저도, 저도 율리우스 님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요!"
대화의 끼어들 틈을 찾던 아이린은 얼른 입을 열었다. 그녀는 검게 물든 눈에 조급함이 깃들었다.
"맞…."
"솔직히 처음에는 이상했지만…, 계속 들으니까 나름대로 괜찮아졌어요!"
아이린은 율리우스의 전 약혼자인 카트린느를 아닌 척 견제하며 말을 끊었다.
'…왕도에 왔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는데.'
갑자기 율리우스 님이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무척이나, 무척이나 불쾌했지만 참았다.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빼앗길까 초조한 기분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카트린느는 그런 아이린의 모습을 보며 온화하게 웃고는, 한발 물러섰다.
아이린은 카트린느의 대응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정말이지.'
그 모든 광경을 헬레나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지었다.
이렇게 많은 여자들이 그의 어떤 점으로 하여금, 그에게 매달리게 만들까.
그녀는 암시장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더없이 차갑고, 폭력적이던 그 모습. 그러나 겉으로는 예의를 차리기도 하고, 비굴한 모습도 가끔 보였다.
그녀는 그 간격이 정말 재밌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눈치를 보던 바이론이 작게 거수했다.
"공자님, 이렇게 저희를 불러모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말에 대화하고 있던 모든 이들의 눈이 모였다. 바이론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꼴사나운 모습이지만, 여태껏 여자와 별 접점이 없던 그에게 여자들의 시선은 가혹했다.
갸호-?
율리우스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동이를 쓰다듬으며 표정을 진지하게 바꿨다.
"아, 별거 아니야."
율리우스는 표정에 주의했다. 지금 여기 모여 있는 이유를 들키면 안 되니까.
"다들 새로 만든 여행 동아리에 가입했으니, 첫 목적지를 정하려고."
[조금 있으면 아카데미가 습격당하거든? 그래서 대비하려고 모였지.]
"알다시피 처음이 제일 중요한 법이잖아. 이런 건 통보하는 것 보다 다 같이 정하는 게 좋지 않겠어?"
[아벨린이 목표인 게 알려지면 노려질 게 뻔하잖아. 막으려면 서로 모여 있어야지.]
그의 말에 카트린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런 일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런데 모두 부를 필요가 있었어요?"
"서로 가기 꺼리는 장소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미리 불렀지."
[다른 학생들이 희생될 수도 있지만….]
"나타샤는 엘프, 아벨린은 남부 출신이랬지? 다른 쪽은 다 인간이자 리브레 왕국 출신."
[시간을 끌다보면 지원도 올테고, 공적으로 인정될 테고. 공적치가 엄청 쌓일 거라고.]
"각자 출신이 같아도 가고 싶은 곳은 다를 수도 있잖아. 이런 건 한 번에 끝내는 게 좋다고 생각해."
[습격을 공론화시키는 것 보다, 이게 더 개이득이라고. 아 참, 순환교는 현상금도 있댔지?]
"뭐, 괜찮네. 응. 너희들끼리 밀어붙이면 나는 말도 못 하는데 불러줬고."
"같은 보충반인데 챙겨야 하지 않겠어?"
그의 말에 아벨린은 어이가 없는 듯 웃었다.
"선배 이기는 보충반 학생이 어딨다고, 참…."
그 말에 나타샤는 무언가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
"아, 대련하니까 생각난 건데…. 당신의 상대가 된 선배는 어떻게 됐죠?"
"모르겠는데. 아마, 병실에 있지 않을까?"
아벨린은 율리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율리우스, 네가 원하면 치료해 줄 수도 있는데. 해줘?"
"됐어. 평판도 안 좋던데. 그런 놈은 치료해 줄 필요 없어."
"맞다. 해줄 필요 없느니라. 어차피 그 남자는 치료가 됐으니."
헬레나의 대답에 눈썹을 꿈틀거린 율리우스는 그의 뒤에 누가 있는지를 깨닫고 이해했다.
'부회장, 2 황자라면 그런 부상이라도 치료할 수 있겠지.'
다음에는 완전히 끝내버려야지.
상념을 끝낸 그는 시계를 힐끔 보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럼, 우선 여행 동아리의 첫 여행지로 각자 원하는 곳을…."
습격의 예상시간은 아마 11시.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율리우스는 몸의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며 준비했다.
'레이나한테 알렸으니, 알렌 형님 쪽은 알아서 하겠지.'
만약을 위한 준비까지 마친 율리우스는 자신만을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에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잠깐만."
하루가 끝날 때까지.
* * *
첫 번째 선지자, '식어버린 불꽃'이 말했다.
"사도 후보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두 번째 선지자, '메마른 물결'이 답했다.
"무슨 문제? 더 이상 여력 없다. 시체의 물결, 막아야 한다."
세 번째 선지자, '썩어버린 뿌리'가 속삭였다.
"키히힉, 헤헥, 사, 사아도 후보가아 두, 두 명이다아!"
네 번째 선지자, '바스러진 쇠붙이'가 비웃었다.
"하나는 거짓이고, 하나는 참이겠군."
마지막 다섯 번째 선지자, '빈곤한 토양'이 물었다.
"검증이 필요하나? 마침 순환의 제전을 요청받았다."
다섯이 말하고, 다섯이 답했다.
넷이 토의하고, 하나가 기록했다.
셋이 제안하고, 둘이 검증했다.
둘이 고민하고, 셋이 확인했다.
하나가 동의했고, 넷이 거절했다.
다섯의 토론이 끝났다.
"하나가 움직인다. 그리고 검증한다. 후에 판단한다."
불이 꺼졌고, 물이 메말랐으며, 쇠붙이가 바스러졌고, 토양이 빈곤해졌다.
그리고 뿌리가 남았다.
"사도, 사도오, 크힉, 크헥."
제76화
별이 비처럼 쏟아지던 맑은 밤.
하나의 유성우가 떨어져 내렸다.
그 별은 별이되 별이 아니었다.
긴꼬리를 그리며 날아온 그것은 밤을 지새우던 족장의 머리로 떨어져 하나의 문장을 만들어내었다.
[별의 곶을 찾아 유배된 화신을 구하라.]
그들이 바라던 별의 계시에 미니마 족장과 아라흐니 족장은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부족원들을 소집했다.
별들이 계시를 내렸다는 족장의 말에 그들은 환희했다.
그리고 날이 밝은 즉시 계시를 이행하기 위해 대사막 곳곳으로 움직였다.
별들의 사제이자 자녀인 그들은, 반드시 신의 말씀을 이뤄야 했다.
모래바람에 깎인 계곡을 샅샅이 뒤졌고, 개미지옥으로 손수 몸을 던졌으며, 그 과정에서 몬스터가 촌락을 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별의 곶이 발견되는 일은 없었다.
모래로 가득한 사막에 물로 둘러싸인 곶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들은 아직도 별의 곶을 찾아내지 못했지만, 여러 진척이 있었다.
별의 곶은 실제 지형이 아닌 어딘가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장소라는 것.
그리고 그 장소는 이 땅에 가득한 유적일 확률이 높다는 사실까지.
화신이라는 것도 실제 초월자의 분신 같은 것이 아닌, 분신이라 표현할만한 성물이 아니냐는 의견이 분분했다.
대사막의 곳곳을 탐색했음에도 별의 곶을 찾아내지 못하자 그들은 진로를 바꿨다.
식량을 얻기 위해 최소한으로 하던 길잡이 일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과 인연을 쌓아 유적을 발굴했다.
그 상황에서 몇 부족민들의 희생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만두지 않았다.
신들이 몰락한 시대, 아직까지 별들과 소통한다는 그들의 신앙심은 대단했다.
그렇게 다시 30년이 흘러 일개 소년에 불과했던 아이가 부족장의 자리에 올랐을 때, 다시 하나의 계시가 더 떨어졌다.
아니,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계시가.
[서쪽으로 가서, 선택받은 자를 찾아라.]
[가서 그를 도우라. 그리한다면 바람을 이룰 수 있으리니.]
[바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루지 못함을 근심하라.]
드물게도 여러 개씩 내려온 계시는 기록에서만 볼 수 있었기에 놀랍기 그지없었다.
'마지막으로 이런 형태의 계시가 137년 전이던가….'
그것도 한 남자를 도우라는 계시였다.
보통 수년에서 수십 년 사이를 가리키는 예언과 다르게 며칠도 되지 않아 계시의 당사자를 찾았었다.
'그때 그 남자도 석판을 보면서 무언가에 놀란 눈치였어.'
놀란 얼굴로 석판을 바라보던 이국적인 모습이 인상적이라 기억이 선명하게 남았다.
그들은 별의 계시에 따라 남자를 성심껏 보살폈고, 99일이 지났을 때 계시에 따라 부족에서 쫓아냈다.
그러니 이번 계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실현될 확률이 높았다.
부족들은 모래 폭풍을 두려워하지 않고 서쪽 대사막의 끝, 모험의 도시 카이란의 인근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서 두 명의 남자를 만났다.
알렌과 율리우스.
처음에는 누가 선택받은 자일지 혼동이 왔으나, 이내 고민을 그만두었다.
'두 명 모두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지.'
같은 가문이라고 했으니, 한 남자가 정말 한 명을 뜻하는 것이 아닐지 누가 알겠는가.
족장은 신의 말씀을 자신의 마음대로 단정 짓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들의 바람대로 그들을 모래 폭풍을 뚫고 엘피스로 데려다주었고, 마침내 연을 잇는 것에 성공했다.
"정말 다행이지 않습니까, 족장님."
"별들의 인도에 따른 덕이지."
알렉시우스의 말에도 족장의 주름진 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선택받은 자를 찾으란 것이 이런 뜻일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알렉시우스의 눈이 전방을 향하자, 모래 위로 우뚝 솟아오른 뾰족한 첨탑의 모습이 보였다.
네 개로 이루어진 첨탑의 모습은, 넓은 모래 아래 거대한 성이 있음을 짐작케 했다.
"첨탑의 크기만 해도 일반적인 유적을 상회할 정도인데, 본체인 성은 얼마나 거대한 규모일지…."
며칠 전 거대한 진동과 함께 유적이 나타났을 때까지만 해도 드물게 나타나는 초대형 유적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평소대로 길잡이 노릇을 하며 유적을 탐색하려고만 했었다.
그러나 아카데미에서 왔다는 조사대가 유적을 통제하기 시작하자 생각이 달라졌다.
"분명히 이곳이 맞을 겁니다. 족장님, 아니 아버지."
"저희 부족장께서도 이곳임을 확신하고 계십니다."
얼마 전에 내려왔던 계시.
그 계시의 주인 중 하나라 예상되는 알렌과 율리우스.
통제받는 유적과 아카데미가 먼저 선점권을 사용했다는 후문까지.
"알고 있다."
"그럼 어째서 망설이시는 겁니까. 지금 선발대로 진입을 허락해줄 때 들어가지 않는다면 늦을 겁니다."
알렉시우스는 애가 탔다.
아카데미가 선점권을 사용했다는 건, 당분간 저 유적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유일한 기회는 유적 내부의 정보를 공유하는 조건으로 예외적으로 출입할 수 있는 선발대밖에 없었다.
"이미 그분께 편지까지 보내시지 않으셨습니까."
"얼마 전 이곳으로 던전 실습을 나온다고 답장을 받았습니다."
족장은 자신을 재촉하는 알렉시우스와 에리니를 탓하지 않았다. 젊은 피란 그런 법이지 않은가, 자신도 한때 그랬으니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섬기는 별들의 계시를 이룰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어찌 모를 수 있을까.
"흠…."
"이미 길드가 움직였습니다. 그 이리 같은 용병들도 말입니다! 얼른 움직이지 않는다면, 기회가 없을 거란 말입니다!"
알렉시우스가 열변을 토했다.
에리니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의견을 지지했다.
젊은 후계자들의 성토에도 미니마 족장은 조용히 고민에 잠겼다.
그가 이렇게 갈등하는 이유는 갈등하는 이유는 다가올 위험 때문이 아니였다. 별들의 바람인데, 어찌 자신의 희생을 따질까.
단지, 하나가 걸릴 뿐이었다.
'…선택받은 자를 도우라는 계시가, 고작 던전행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뿐일까.'
고작 그런 이유라면 다른 아카데미 학생 누구라도 상관없지 않나.
족장은 별들께서 저들을 콕 짚어 언급한 이유가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대로 무작정 대기할 수만도 없는 노릇.
"아버지!"
밖의 소리를 들어보니 다른 젊은이들을 진정시키러 간 아라흐니 족장도 한계에 다다른 것이 분명했다.
"…족장께서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시겠다면! 저라도 가겠…."
"그래, 허락하겠다."
"!!"
알렉시우스가 급히 고개를 들었다.
"밖의 부족원들에게 전하거라. 모든 이들에게 계시를 이룰 기회를 주겠노라고."
"…역시! 알겠습니다."
성령의 뜻을 마음대로 재단할 수 없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두 할 수밖에 없다.
"저는 준비하러 나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족장은 천막을 들썩이며 나간 알렉시우스와 에리니를 바라보며 조용히 비석을 쓸어내렸다.
"…만반에 준비해야겠군."
짙은 음영이 내려앉은 주름진 눈동자가 옅게 빛났다.
* * *
보충반, 하급반, 중급반, 상급반, 고급반.
총 다섯 개의 반으로 분류가 되어있다고 하지만, 생도들은 반의 명칭 그대로 부르는 경우는 없었다.
간략하게 알파벳 순서에 따라 A반에서 E반으로.
낮은 반에 소속되었다는 사실이 귀족들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노골적인 단어 대신 알파벳을 사용함으로서, 치부를 조금이나마 가리려고 발버둥친 결과였다.
"저는 C반의 에반 바로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 에반 님이시군요. 저는 D반의 에리엘 하일이에요. 당신은?"
당당한 풍채를 드러낸 에반이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그의 앞에 있던 에리엘은 조신한 몸짓으로 인사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저, 저는 B반 윌리엄입니다. …성은 없습니다."
귀족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윌리엄은 짐짓 몸을 떨며 눈을 피했다.
"흐응, B반이라… 윌리엄 님은 뛰어나시네요?"
그가 B반이라고 했을 때부터 눈을 빛낸 그녀는 칭찬을 건네며 슬며시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윌리엄 님이라니…, 말 낮춰주십시오, 에리엘 님. 저는 그저 운이 좋게…."
"에리엘이라고 불러요."
그녀가 다가서자 윌리엄은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섰다. 에리엘이 윌리엄에게 관심을 보이자, 에반은 슬쩍 그들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크흠, 정말 운이 좋았나 보군. 나도 다음 학기에는 B반에 올라갈 테니 같은 반에서 봤으면 좋겠군."
"어머나, 에반 님은 반드시 그럴 거예요."
언제 봤다고 반드시 그럴 거라 말하는 건지.
에리엘이 방긋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섰고, 윌리엄은 귀족들의 관심이 그렇게 나쁘지 않은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저도 에반 공자님께서 당연히 그러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그런가?"
에반은 그의 아부에 크게 대소했다.
당당하게 C반이라 밝히는 에반과 D반이라 답하는 에리엘.
거기에 그들의 심기에 거슬릴까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B반 윌리엄까지.
현재 그들은 일주일 후에 있을 던전 실습을 위한 예행연습 중이었다.
그들 말고도 수십 명의 학생이 던전 실습을 대비해 인공 유적의 앞에 모여 있었다.
각 반에서 한 명씩 무작위로 짜여진 조원들은 어색하게나마 인사하며 안면을 트고 있었다.
목적은 인공 유적을 무사히 통과하는 것.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이 조가 던전 실습 때까지 그대로 유지될 것이 분명하기에 서로 신중히 조원들을 살폈다.
"와! 윌리엄 님이 그렇게 희귀한 치유 술사라구요? 다치는 건 정말 무서웠는데…, 다행이네요!"
"다치시면 제, 제가 치료해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윌리엄."
"적들의 공격은 내가 다 막지."
"에반 공자님도 든든하네요."
알렌은 저들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봤다.
「당신은 저기 안 끼어들어요?」
'굳이 먼저 다가갈 필요는 없지.' 알렌은 목적이 있기에 아카데미에 온 것도 맞고 인맥도 그 중 하나였지만, 노골적으로 다가기 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다가가기로 결심했다.
'친근하게 먼저 다가가는 것도 좋겠지만….'
그건 자신의 성정과 어울리지 않았다.
"윌리엄 자네는 내가 아는 평민답게 무능하지 않아서 좋군."
"에반 공자님, 그건 윌리엄 님을 너무 무시하는 게 아닐까요?"
"저는 괘, 괜찮습니다."
"윌리엄 님은 역시 인성도 괜찮네요. 이래서 B반인가? 그래서 저희끼리는 인사를 끝냈는데 다른 분은…."
그녀의 시선이 조용히 대화를 경청하던 알렌에게 향했다.
알렌은 언제 무표정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너무 즐겁게 대화를 나누시기에 끼어들 수 없었습니다. 인사하겠습니다. A반의 알렌 라인하르트입니다."
"그, 차석이라는…."
"예, 제가 맞습니다."
알렌은 겸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언제 그 두꺼운 낯짝 때문에 벌 받을 거예요.」
'시끄럽다.' 알렌의 이름을 내심 짐작하던 그들은 안색이 밝게 변했다.
예행연습이라고 하지만 던전은 던전. 알렌으로 인해 안전하게 통과하리라 생각되자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라인하르트 가문의 위명은 많이 들었습니다!"
"알렌 공자님의 이름이 저희 영지까지 퍼져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라인하르트 가문에 대해 뭘 안다고 떠드는가.
알렌은 일상적인 겉치레를 가볍게 받아주며 그들에게 답했다.
미래의 계획을 위해 언제나 공정하고 선한 이미지를 유지해야 한다.
누구도 그의 행동을 의심하지 않도록.
"저도 바로크 가문에 대해 들었습니다. 바로크 언덕의 호수가 그렇게 아름답다고 하더군요."
"영지의 언덕의 호수를 아시다니! 근처에 지나신다면 반드시 들르시기 바랍니다."
"하일 가문은 포도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어머나…. 원하신다면 언젠가 시음회에 초대하고 싶네요."
알렌은 그들의 호감을 이끌어내며, 혼자 동그라니 남겨진 윌리엄에게 다가섰다.
"거기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오게. 희귀한 회복 술사에 관해 관심이 많아. 내 궁금증을 풀어줬으면 좋겠군."
"그, 그러십니까?"
그는 알렌의 배려가 반가운지 급히 다가섰다.
그렇게 서로 대화를 나누며 긴장을 푼 그때, 교관이 소리쳤다.
"자자, 조용! 이제 시간이 되었으니, 각 조는 순서에 따라 인공 유적으로 입장해주십시오! 지금부터 이름을 호명하겠습니다! 1조 알렌 라인하르트와 에반 바로크, 에리엘 하일 그리고 윌리엄."
첫 조로 지명된 그들은 서로 얼굴을 돌아봤다.
긴장되지는 않는지 각자의 자리를 잡은 그들은 회색빛이 소용돌이치는 포탈로 향했다.
「얼른 끝내고 빨리 돌아가자구요! 저 당신이 그러는 거 보고 속이 좀 안 좋아졌어요.」
"...."
알렌은 말없이 베스틀라를 노려보곤 마력의 실타래를 풀어헤쳤다.
오랜만에 해방된 마력에 공기가 은은히 떨려왔다.
포탈로 이동된 유적의 서늘한 공기에 입김이 흘러나왔다.
"필요한 명령은 사전에 정한 대로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믿겠습니다."
감지력이 어둠으로 나아가며 지리를 밝혔다.
인공 유적 공략이 시작되었다.
* * *
"보충반은 진짜 왜 있는 거지?"
"덜떨어진 것들끼리 모여있는 거 아닌가?"
"아니 율리우스는 A반도 충분히 노려볼만하지 않나?"
"그러게…?"
아벨린은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에 진절머리 난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자기 일이나 신경 쓸 것이지. 왜 우리 일에 오지랖이야?"
"뭐, 어쩔 수 있나."
"율리우스, 너는 쟤들이 말하는 거 신경도 안 쓰여?"
"…음."
율리우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이해되기도 했으니까.
율리우스가 대답하려던 때, 목소리가 들렸다.
"저들의 반응도 이해가 가지요. 저들은 골고루 조를 짜는데, 저희는 반 안에서 원하는 이들끼리 조를 짤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 말대로였다.
보충반은 정말 그 이름에 맞게 정말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그게 좋다는 뜻은 아니지만.'
이거라도 없으면 안 된다 싶어 적선하듯 받은 건데, 다른 이들에게는 불합리하게만 보일 것이다.
"우리야 좋지만 말입니다."
허스키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기다란 콧수염을 기른 소년이 폼이 넓은 정장을 입고 다가섰다.
"마테우스."
"율리우스, 준비는 끝났습니까? 계약대로 저희 가문의 비원의 단서를 알고 있다면…."
"그래, 그래. 이미 준비해놨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제대로 준비나 해."
"뭐, 그렇다면야."
마테우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이 아이가 억지로 어른 흉내를 낸 것 같아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그는 그렇게 한 번 웃더니 뒤돌아서 다른 곳으로 향했다.
율리우스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마테우스는 선조의 비원을 미끼로 끌어들이기 쉬웠어.'
그를 통해서 막대한 보물을 얻을 수도 있고.
보충반은 대부분 재능이 극히 떨어지거나, 율리우스처럼 모종의 이유로 인해 힘을 숨긴 이들이 들어오는 곳이다.
율리우스는 원작을 통해 쓸 만한 조연들이 대거 보충반에 들어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부러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보충반으로 들어왔다.
겸사겸사 히든피스들도 회수하기 위해서.
방금 대화한 마테우스 말고도 벌써 몇 명이나 접촉했다.
원래는 조금 시간을 둘 예정이었지만, 원작이 비틀리는 바람에 빠르게 행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적에 봉인된 고대의 괴물을 '직접' 죽이고 재앙을 막아내십시오! 제한시간 : 687 : 52 : 55]
[보상 : 진실의 파편(???)]
원작에 나타나지 않은 유적이 등장했으니까.
'진실의 파편이 정확히 뭘 뜻하는지 모르겠지만, 획득할 필요는 있어.'
어쩌면 자신이 이곳에 들어오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입장하시길 바랍니다! 지금부터 이름을 호명하…."
율리우스는 굵은 글씨로 강조된 부분을 살펴보며, 포탈로 당당히 걸음을 옮기는 알렌을 바라봤다.
'만약을 위해 하이젤을 조치해두긴 했는데….'
알렌 형님은 어떻게 할까.
퀘스트 조건도 조건이니, 실수로라도 알렌 형님이 유적에 봉인된 고대 괴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
'형님에게 부탁해서 이번 실습에 빠져달라고…. 아니, 아니지.'
형님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니 명성을 양보해달라고 한다면 양보해줄 것이다.
동생을 끔찍하게 위하는 악마 계약자 빌런.
'알렌'은 그렇게 설정된 조연이었으니까.
눈앞에 뻔히 보이는 결과에 율리우스는 웃었다.
진실의 파편이 뭘 보여줄지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제77화
"수고하셨습니다!"
"알렌 공자님, 역시 수석이라는 말은 헛되지 않았네요."
"저, 정말 엄청났습니다!!"
알렌은 겸손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저도 여러분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럼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원들은 아쉬운 얼굴이 되었지만, 던전에서 직접 확인한 그의 실력에 차마 붙잡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다음 기회에 뵙겠습니다."
"알렌과 함께할 시음회를 기대할게요."
"회복 술식이 궁금하다면 저, 저를 찾아주세요!"
"다음에 보도록 하지요."
알렌은 조원들과 충분히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자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가진 재능에 비해 실력은 미숙하군."
정확하게 말하자면, 활용을 하지 못한다고 봐야겠지.
기회만 되면 말도 없이 활을 쏘는 에리엘.
자신의 실력에 과신하여 연신 돌격하는 에반.
한 번 회복 술식을 사용하면 헥헥되는 윌리엄.
그 모든 걸 통제하면서 무사히 공략을 마친 알렌의 정신은 지쳐있었다.
「그럼 앞에서 말하지, 어떻게 참았데요?」
'그럴 수 없으니 그렇지 않나.' 알렌은 쓴웃음 지었다.
각자의 실력은 나쁘지 않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경험이 부족하다는 말이 옳겠지.
윌리엄을 제외하고는 귀족이니 평소 많은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당연히 그에 따른 경험도 쌓았을 테고.
다만, 항상 남들이 자신에게 맞춰준 것이 움직임에 베여버렸다. 그 덕에 서로가 행동에 제약이 되어버렸다.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저들이랑 같이 던전 실습을 돌게 되는 만큼 신경 쓸 필요는 있었다.
알렌은 빠른 걸음으로 인공 유적이 위치한 아카데미의 지하를 벗어났다. 하늘을 바라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이제 어디 갈 거예요? 검술이라도 연습하러 갈래요?」
'그것도 좋겠지만…, 요즘 너무 마법에 신경 쓰지 못했어.' 마법을 정리하고 수련하기 위해서는 따로 훈련장에 가는 게 옳지만, 먼저 들를 곳이 있었다.
「여긴 또 왜요?」
'혹시 모르잖나.' 그가 도착한 곳은 도서관이었다.
아카데미 내부에 따로 위치한 도서관은 12층 높이의 거대한 건물이었다. 알렌은 지체 없이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내부로 들어가자 둥근 안경을 쓴 사서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알렌은 인사를 받으며 처음 왔던 때와 달리 익숙한 얼굴로 도서관을 둘러봤다.
공간을 가득 채운 책장과 그 안에 가득 들어찬 서적들.
인문학, 자연학, 정령학, 공학, 마법학을 비롯한 학문들과 그 밑으로 세부적으로 나누어 진열된 책장.
층층이 쌓인 책들은 유적에서 발굴해 복원한 지식이자, 지금까지 밟아온 아카데미 역사를 나타냈다.
도서관에는 고요한 분위기와 어울리는 오래된 종이의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마법 서적을 비롯한 여러 이론서와 깊숙한 곳에는 공적치를 사용해 마도서까지 빌릴 수 있는 장소.
'동생'을 찾을 수 있는 마법 혹은 그에 준하는 실마리라도 있으리라 생각하는 곳이었다.
알렌은 곧장 마법과 관련된 서적이 가득한 7층으로 이동했다. 각 계통에 따라 분류된 수많은 책. 알렌은 주위를 둘러보다 책을 정리하는 익숙한 얼굴의 사서를 발견하곤 다가섰다.
"새로 들어온 책이 없습니까?"
"예? 아, 알렌 님이시군요."
그의 물음에 뒤를 들어본 남자 사서는 곤란한 얼굴로 웃으며 답했다.
"찾으시는 책이 혹시 이번에도…."
"예, 저번에 말했던 영혼이나 추적에 관련된 서적이 혹시 들어왔습니까?"
알렌의 대답에 사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영혼 계통은 희귀하고 특히 연구가 덜 되었기도 해서…, 드문드문 들어온 책 중에 그와 관련된 책은 없었습니다."
알렌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지자, 사서는 미안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정말 그에 관련된 책을 찾으신다면…, 경매에서 구하거나 다음 분기에 들어올 책을 기다리는 것이 빠를 겁니다. 아시다시피 도서관의 책들은 사본에 불과하니까요."
"…그렇습니까."
"아, 물론 공적치를 이용해서 그와 관련된 마도서를 찾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그는 목소리가 클까 봐 주변의 학생들 눈치를 보더니 작게 줄여 답했다.
"아시다시피 마도서를 열람하는데 1,000점이 필요하니…, 지금은 힘들 겁니다."
공적치 1,000점.
아카데미의 보고에서 물건을 교환하거나 팔강과 개인 교습하는 것만큼 허황된 목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달성할 수 있는 점수도 아니었다.
"그렇군요….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만약 책이 들어온다면 즉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알렌이 그의 배려에 고개를 살짝 숙이자, 사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사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책 정리를 이어나갔다. 대화가 끝나자마자 베스틀라가 냉큼 입을 열었다.
「그냥 기다리지. 어제도 왔었잖아요.」
'오늘 책이 들어왔을 수도 있지.'
「그렇게 쉽게 발견된 책이었으면 진작 찾았겠죠. 애초에 악마가 몸을 빼앗은 거면 지옥에 있는 거 아니에요?」
'지옥이 어디 있는지 알곤 있고?' 베스틀라에게는 악마에게 몸을 빼앗겨 원래 영혼은 사라졌다고 말해놨다. 사실 악마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인간이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별 다를 게 없기도 했다.
「…그래도 이런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지는 않잖아요.」
'그러게 말이다.' 알렌은 쓴웃음을 지었을 지으며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입학한 후 몇 번이나 도서관에 왔었다. 이곳에 있는 지식은 여타 다른 곳보다는 확률이 높았으니까.
그렇기에 며칠을 밤을 새워가며 영혼, 공간, 추적과 같은 관련된 키워드에 따라 조사했는데….
'별다른 소득이 없었지.'
정확히는 마법에는 소득이 있었다.
공간, 영혼, 계약에 관한 몰랐던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고, 린벨 모녀를 구했을 때부터 조금씩 연구하던 새로운 계통 마법에 대한 토대를 세웠다.
그러나 영혼을 추적하는 마법 따위는 없었다.
아니 그와 관련된 이론도 찾기 힘들었다.
영혼 계통이 사령 마법과 연관된 만큼 적은 수의 서적밖에 없었고, 그렇다고 금서로 지정된 흑마법사의 지식을 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
조급해한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답답했다.
차라리 놈의 몸에 율리우스의 영혼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율리우스의 몸 안에 동생의 영혼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놈을 껍데기에서 끄집어냈을 텐데.
그렇게 상념을 이어나가던 때, 베스틀라의 평상시와 다른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알렌, 그 이런 말하기 미안한데… 만약, 정말 만약에요.」
그녀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 머뭇거리는 모습.
알렌이 고개를 내려 베스틀라를 보자, 그녀의 검신이 살짝 떨렸다.
「그…, 영혼이 어디로 사라진 게 아닌 거라면요?」
그녀는 알렌이 말을 하지 않자 용기를 얻었는지 멈추지 않고 입을 열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조금 오래 살았잖아요,」
몇 만 년 전이면 조금이 아닌데.
「…그런데 그때도 악마가 몸을 빼앗으면 영혼을 삼키면 삼켰지, 어디론가 따로 빼돌리는 일은 거의 없었어요.」
"...."
「그리고… 그렇게 빼돌리는 영혼도 그 시대에 영웅이라 불리는 엄청 특별한 존재였는데, 알렌의 동생은 그….」
귀족이라고 해도, 평범한 인간 중 한 명인 것뿐이잖아요. 베스틀라는 그의 침묵에 급히 변명을 덧붙였다.
「…당신의 동생이 뛰어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그… 영웅이라 불릴만한 재능은 적고, 또 악마들도 눈이 까다롭기도 하고 해서 이미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다는…, 무조건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적어도 마음의 준비는 해야….」
"아니."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알렌은 눈치를 보며 주저리주저리 이어나가는 말을 잘라내었다.
"어딘가에 있을 거다. 분명히."
그의 단호한 음성에 베스틀라는 어딘가 복잡한 감정을 담아 답했다.
「…네, 그래요.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동생은 살아있다.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회귀 직전 들었던 동생의 목소리는 뭔가.
아니면 신수의 시련에 들었던 아련한 기시감의 정체는?
회귀 전에 있었던 영혼이 후에 없는 건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다, 있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알렌의 발밑에서 뒤따르던 그림자가 넓은 그늘에 먹히듯 사라졌다.
언제나 발밑을 맴돌고 있음에도.
알렌은 괜히 발걸음을 빨리했다. 던전 실습을 할 때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됐다.
* * *
아카데미 서쪽의 숨겨진 유적.
몇 번이나 탐사에 실패해, 갓 용병을 시작한 얼뜨기도 오지 않을 장소는 현재 비릿한 피 냄새로 가득했다.
황톳빛의 바닥은 먼지와 피가 뒤엉겨 지저분하게 변했고, 시체 사이사이엔 부서진 벽이 조각이 있어 장내를 어지럽혔다.
그 난장판의 한복판에 하이젤이 작게 중얼거렸다.
"걔는 어떻게 이런 정보를 알고 있었을까."
"어떻게 대계를 알고서…, 켁."
"유난은."
깔끔하게 목을 베어 생존자를 마무리한 그는 핏물을 털어냈다.
주위에는 시체가 가득했다.
얼굴에 기이한 검은 문신을 한 흑마법사와 고목 같은 주름을 보이는 마녀들.
그들 말고도 흑마법사와 손이라도 잡았는지 무장한 용병들이 빛을 잃은 눈으로 바닥에 널브러져있었다.
하나의 도시를 전복시킬만한 전력은, 그전에 얼마나 악명을 떨쳤든 간에 모두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바닥을 붉게 칠했다.
그 주위로 마법이 발동되기 직전의 제단이 애처로운 빛을 발하며 피를 조금씩 흡수하기 시작했다.
"마기가 전혀 새어 나오지 않으니까…, 내가 눈치 못 챌 만 했어. 그런데 율리우스는 어떻게 알아낸 거지?"
하이젤은 감흥 없는 얼굴로 검을 내리쳤다. 그와 어울리지 않는 백색의 마력은 한 층의 검기를 이루어 제단으로 떨어졌다.
쾅!
순식간에 제단이 조각 나며 발동되려던 마법진이 천천히 그 빛을 잃어갔다.
"이런 게 수십 곳에 생겨난다고? 이미 몇 활성화됐고?"
하이젤은 헛웃음이 나왔다.
마계와 연결된 게이트.
율리우스와 대화할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깊게 연관될 생각은 없었다.
이미 생(生) 한 번을 꼭두각시로써 져버렸는데, 그 새끼들이랑 다시 연결될 생각은 없었으니까.
더 이상의 열정을 불태우기에는 자신은 이미 지쳐 메말라 버렸다.
이번 생은 적당히 살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아카데미에 온 이유도 용사의 후예가 있다는 작은 궁금증을 풀기 위한 여흥,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쿵-
하이젤은 제단이 자리한 방을 넘어 다른 밀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이딴 감성팔이는 좋아하지 않는데 말이지."
어두운 실내로 밖의 빛이 흘러들었다.
뒤에서 흘러나온 빛으로 인한 역광 때문일까 눈가에 짙은 그림자가 졌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도발인가? 아니면 그냥 우연?
그곳에는 마족들이 실험대에 묶여 깔끔하게 해체되어 있었다. 흑마법사와 마족들 모두 마냥 협력하는 관계인 것은 아닌 모양.
하이젤은 눈에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이런 현장을 본 것은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저벅저벅-
걸음 사이로 바싹 마른 혈흔이 부서져 내렸다.
"만약 여기 보낸 것도 그 새끼들의 의도라면 그냥 무시하는 게 옳은데…."
괜히 끼어들었다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는 없다. 죽기 전까지 얼마나 고생했는가. 끝까지 이용만 당했다.
그걸 이번 생에도 반복할 필요가 있나?
유유자적한 삶을 살려고 했다.
전생에 들었던 보물이나 찾아보고, 신기한 소문이면 찾아가기도 하면서.
그러다 질리면 바다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겠지.
"알렌을 칼 같이 밀어냈으면서, 망설이는 꼴이라니. 참."
하이젤은 떠오르는 상념을 멈추고 빙글 몸을 돌렸다.
멈칫-
하이젤은 바닥을 한참 굴러다니던 머리와 눈이 마주쳤다.
죽은지 시간이 꽤 지났는지 혹은 흑마법사 때문인지는 몰라도 머리의 주인은 많은 고난을 겪은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남은 머리마저도 온전치 않았다.
말라비틀어지고, 수많은 자상이 가득한 모습.
하이젤은 멈췄던 걸음을 옮겨 머리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음…."
잠시 눈을 감으니 여러 장면이 떠올랐다. 별 것 없는 기억들. 마왕일 적의 모습들. 전쟁을 하고, 용사랑 다투고.
하이젤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 또 왜 걔가 생각나서는."
괜히 심통 난 기분에 삐딱하게 턱을 괴고 있다 툭 내뱉었다.
"얼굴 예쁘네."
하이젤은 그렇게 말하고는 히죽 웃었다.
지금은 죽어서 그렇지, 생전에는 눈길을 줄 만한 미녀였을 것이다.
"골격도 나쁘지 않고. 살아있었으면 인기 많았겠다."
그의 말이 의외였던 걸까 이미 죽었을 머리가 어이없는 눈으로 보는 것 같았다.
하이젤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이제 가야지."
이번에는 멈추지 않고 출구로 향했다.
다시 돌아본 실내는 몸을 스치는 옅은 불빛으로 머리의 모습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곳을 감추던 결계는 이미 없어졌다. 주먹을 높이 들었다. 마기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건 진짜 사용하기 싫었는데….'
어쩔 수 없지. 마기를 사용하지 않고 건물을 부수기에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주먹을 들어올리자, 유적 위로 거대한 무채색의 주먹이 떠올랐다.
"이런 어두운 장소에서 미녀는 빛이 바래는 법이니. 미녀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가치가 있지 않겠어?"
애초에 그가 살아있을 적 알던 이들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관계없는 이들이겠지만…, 죽었는데 무슨 상관인가.
"만약 다시 태어나면 재밌게 살아. 나처럼 뻘짓하지는 말고. 그럼…."
하이젤은 잠시 말을 멈췄다. 몇 번 입을 오물거리던 그는, 이내 무슨 상관이냐는 듯 픽 웃었다.
"안녕."
주먹을 내렸다.
형태 변형 - 신의 징벌Flagellum Del
하늘의 천벌이 떨어져 내렸다. 유성처럼 거대한 주먹이 유적을 강타했다.
잠시 버티던 유적은 몇 초가 되지 않아 박살 나며 모래 구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모래바람이 그의 얼굴을 쓸었다. 하이젤은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 율리우스가 줬던 정보를 떠올렸다.
"…조금 있다가 가까운 곳에 하나 더 나타난댔지."
그때가 던전 실습이 있는 날이었던가.
실습은 참가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할 일이 생겼으니까.
제78화
알렌은 세 권의 책을 가지고 있다.
검은 책 - 빙의자
하얀 책 - 회귀자
회색 책 - 환생자
회귀 직후부터 가지고 있던 세 권의 책은 읽지 못하는 회색 책을 제외하고는 분명히 유용했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지.'
회색 책은 현재로서 아무런 내용도 알 수 없다.
그 책이 누구와 관련돼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불분명하다.
'정황상 인간의 몸으로 전생한 하이젤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반응은? 없었다.
회색 책은 알렌의 예상이 빗나갔다는 듯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별다른 방도가 생길 때까지 놔둘 수밖에 없었다.
검은 책은 회귀 전의 율리우스의 시점에서 과거를 보여준다.
현재 시점 그 이상의 미래를 볼 수 없다는 단점이 있으나, 그런 단점을 눌러버릴 정도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알렌은 고개를 돌려 남은 하나의 책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인상을 찌푸리고 하얀 책에 대한 정보를 천천히 떠올렸다.
하얀 책.
하얀 책은 알렌의 시점에서 현재의 사건을 서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