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불안전한 과거의 기억을 보안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을 제외한다면 이렇다 할 능력은 없었다. 정확히는, 없는 줄 알았다.
'처음은 니케아 산에 있던 정령의 샘이었지.'
율리우스가 얻을 보상을 취하던 중 갑자기 하얀 책이 미친 듯이 펄럭이며 글귀가 떠올랐다.
『■■■■과(와) 이어진 책이 ■■을(를) 감지합니다! ■■■■이(가) ■■에 반응합니다! 』
하얀 책에서는 이미 사라져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알렌은 저 문장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은 마녀의 숲에서 결계에 갇혔을 당시.'
결계의 핵을 찾기 전까지 지루한 소모전을 벌일 뻔했을 때 글자가 떠올랐다.
하얀 책이 핵을 찾게 도와준 덕분에 수월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과(와) 이어진 책이 조건을 확인합니다. ■■을(를) 인지하고 있습니다! ■■와(과) 연관된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을(를) 막아내기를 원합니다!』
『조건을 충족합니다. ■■■ ■■(가칭)이 현현합니다!』
『?오른쪽으로 세 발자국. 뒤로 두 발자국. 8초 후에 400m 위로 충격파.』
이것도 마찬가지로 지워졌기에 알렌의 기억 속에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마지막은 하이젤과 식사를 하던 중 지진이 일어남과 동시에 나타났다.
『■■■■과(와) 이어진 책이 ■■의 위험성을 감지합니다! ■■■■이(가) ■■에 반응합니다!』
그리고 이 문장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하얀 책에 남아있다.
'이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알렌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지진이 일어난 당시부터 알렌은 줄곧 저 가려진 단어의 뜻과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추측했다.
이 책은 평범하지 않다. 알렌은 상상력의 지평을 넓혔다. 마법은 세상의 조화를 비트는 이물질이다.
마법사의 상상은 현실에 있을 수 없는 것을 끌어내는 원동력이었다.
알렌은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가장 그럴듯한 상상을 끄집어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이유가 뭐지?
'이 하얀 책을 비롯한 책의 능력을 준 누군가가 원하는 것이 있다.'
그렇게 생각의 방향성이 잡히자, 뒤를 이어 잔가지처럼 마디마디 근거가 떠올랐다.
하얀 책에서는 항상 '■■■■과(와) 이어진 책이….' 라는 말이 서두에 붙는다.
알렌은 저 ■■■■가 일종의 악마 혹은 그와 비슷한 힘이나 지식을 가진 무언가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회귀를 시켜준 당사자가 그냥 회귀 시켜줬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저 알림 자체가 일종의 지시가 아닐까 하는 가설이었다.
'차라리 저런 식이 아닌 직접적인 지시를 하는 게 더 합리적이라 생각되지만….'
악마의 의중을 짐작할 수는 없다. 아니, 애초에 악마가 맞는지도 의문이었지만 그건 생각하지 않았다.
악마의 도움이면 어떻고, 추락한 신의 긍휼이면 어떤가. 회귀는 이미 일어났고, 되돌릴 수 없다.
그렇다면 이용할 뿐이다.
회귀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전까지.
알렌은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하얀 책의 현상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당연하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앞으로 다가올 위험에 대해 경고하려는 것. 아니, 대비하길 원한다는 것.'
그리고 그 위험은 아마도…, 흑마법사 혹은 마족과 관련돼 있을 거란 것까지.
서두를 지나 항상 문장의 중간에는 무언가를 감지했다는 말이 나온다.
…■■의 위험성을 감지합니다!
…■■을(를) 인지하고 있습니다!
…■■을(를) 감지합니다!
그를 제외하고도 결계의 핵을 찾았을 당시에는 이런 문장까지 덧붙여서 있었다.
…■■와(과) 연관된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을(를) 막아내기를 원합니다!
그 당시 '■■와(과) 연관된 대상'으로 생각되는 것은 마녀밖에 없었고, 그 마녀는 흑마법사 단체 에스테도르에 소속되어 있다.
그 흑마법사들의 목표는 재앙을 일으키고 그 끝에….
'마왕을 소환하려 하지.'
그렇다면 ■■은 마왕으로 가정할 수 있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기에 마왕을 소환하려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걸 이루려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과격한 행동 탓에 항상 율리우스랑 부딪쳤으니.
그렇게 생각하자 하얀 책이 알렌에게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하얀 책은 알렌이 마왕과 그의 세력을 무찌르기를 원한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애초에 각 문장마다 나오는 '■■'의 의미가 서로 다를 수도 있고, 지금 생각해낸 모든 추측도 가설의 일환일 수도 있다.
'처음 정령의 샘에서 문장이 나타난 이유도 모르니까.'
마녀의 숲에서도 그랬다.
마왕과 관련된 마녀가 근처에 있다고 해서 하얀 책이 굳이 그를 도울 이유가 있는가?
그랬다면 처음 에스테도르와 관련된 인물인 키메라 술사 사건 때 먼저 도움을 줘야 되지 않나?
그 후에 신수의 숲에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는 것도 의심스럽다.
분명히 신수는 흑마법사에 의해 타락했는데, 왜 아무런 현상이 없었지?
혹시 율리우스와 관련되어 있나? 만약 회귀 전에 율리우스와 관련되어 있다면 이 모든 상황의 공통점은….
'단서가 너무 부족하다.'
끝없이 뻗쳐나가던 생각을 멈춰 세웠다. 여기까지였다.
아무런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섣부른 판단은 생각을 편향되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이번의 실습이 중요했다.
한 번 문장이 나타나면 곧바로 사라졌던 앞선 두 번과 다르게 이번에는 문장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으니까.
'만약 이번 던전 실습에서 마왕 혹은 흑마법사와 관련된 무언가를 발견해 낸다면….'
조각조각 나누어진 단서의 틈을 메꿀 수 있을 것이다.
* * *
"윌리엄, 눈은 좀 붙이지 그래요…?"
에리엘이 염려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던전으로 출발하는 아침, 윌리엄은 한숨도 자지 못했는지 충혈된 눈으로 유적 도감을 읽어 내렸다.
"긴장이 되어 잠이 오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차라리 그럴 시간에 책이라도 읽을까 싶어…."
고개를 돌리자 거뭇한 기미가 가득한 눈을 한 윌리엄이 보였다. 유적의 위험성에 대해 지겹게 들어 그 탓에 더 불안한 모양이었다.
'가는데 며칠은 걸릴 테니, 그 안에 자면 되겠지.'
최대한 실전과 같이하고자 용병들이 쓸법한 마차를 타는 상황이다. 지겨운 모래바람을 맞다 보면 알아서 눈을 붙이게 되겠지.
"에반은 어때요? 에반도 윌리엄처럼 긴장돼요?"
"나, 나는 하나도 긴장되지 않는군. 오, 오히려 기대될 정도다."
"…정말이요?"
"그래!"
알렌은 피식 웃었다. 보통의 유적이었으면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을 텐데. 이들이 이렇게 변한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초대형 유적.
보통 유적보다 몇 배는 커다란 규모를 가지고 있고, 그 이름에 걸맞은 흉흉한 괴담이 가득한 곳이었다.
고대인의 망령이 떠돈다거나, 유적의 깊은 곳에 괴물이 잠들어있다거나, 잠시 눈을 돌린 사이에 옆에 있던 동료들이 사라진다거나.
대부분은 용병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소문 혹은 유적의 함정이 입소문을 타 퍼진 미신에 불과했지만 실제로 믿는 이들도 많았다.
"알렌은 어떠세요?"
"저 말입니까."
"네. 다른 분들에 비해 알렌은 침착해 보여서요."
알렌은 무언가 비밀이 있나 눈을 반짝이는 그녀를 보며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어차피 실습은 실습. 정말로 위험하다면 아카데미에서 조치를 할 겁니다."
"…아."
"그리고 조금 있으면 선배도 합류할 텐데. 정 걱정스러우면 물어보면 될 테지요."
"정말 그럴까요?"
모여드는 시선에 슬쩍 눈을 돌리니 안 그런 척 그를 힐끔거리는 에반과 윌리엄이 보였다. 알렌은 밤새워 뒤척였을 그들을 위해 레이첼에게 들었던 정보를 풀기 시작했다.
"듣기론… 들어가기 직전에 유적에서 탈출할 수 있는 아티펙트를 지급한다고 들었습니다."
"오오…!"
에반이 벌떡 일어서며 환호성을 질렀다. 주변에서 떨떠름한 시선으로 그를 보자 에반은 무안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크흠, 그따위 것이 없어도 괜찮긴 한데, 큼, 아카데미에서 학생을 위한다니…, 거부할 수는 없겠군."
거부할 수 없다는 말과 달리 그의 입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윌리엄도 알렌의 말에 긴장감이 조금 풀렸는지 크게 하품을 했다.
"하암…, 다행입니다…. 그런데 알렌은 어떻게 그런 정보를…?"
"저야, 약혼자 덕분에."
"아."
알렌의 담백한 답에 윌리엄은 그제야 소문을 떠올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되었든 방법이 있다면 다행입니다…. 동아리에서는 선배들이 절대로 안 알려줬는데…."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언니도 알아서 하라고 은근히 비웃기나 하고."
"한 번 골탕먹어보라는 심보 아니겠나."
윌리엄의 침울한 말에 에리엘도 동감한다는 듯 맞장구쳤다. 에반의 말이 그럴듯했는지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면 선배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기분입니다."
"사람 사는 곳이니 다른 곳과 그리 다른 것도 없겠지."
에리엘은 서로 긴장감이 풀린 것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알렌을 향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저희 조에 알렌이 있는 게 행운이네요?"
"…그건 동감이군."
"차석이기도 하시니…, 오히려 동료로써 저희가 짐이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에반이 무게를 잡으며 동의했고, 윌리엄은 괜히 긴장된다는 듯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냈다.
"연습한 대로만 한다면 문제없지 않겠지요. 저야말로 차석이란 이름 탓에 부담되었을까 걱정이었습니다."
"에이, 알렌 님 덕분에 얼마나 도움을 받았는데요."
"맞습니다! 평민 출신이라고 업신거리지도 않으셨고…,"
"크흠."
에반이 윌리엄의 말에 신경 쓰이는 것이 있는지 헛기침하자, 윌리엄이 급히 말을 정정했다.
"아 그, 그렇다고 다른 분들이 그렇게 한다는 건 아닙니다."
"알고 있다면 됐다."
"후흣…."
연신 사과하는 윌리엄의 모습에 에리엘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일개 평민과 귀족의 대화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그래, 괜찮다면 다행입니다. 이번 실습도 좋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노력하도록 하지요."
그 자신마저도.
'원래 이들과 이렇게까지 편하게 지낼 생각은 없었는데.'
던전 실습을 계기로 몇 번 모이게 되다, 결국 사적인 질문까지 허용하게 될 정도로 관계가 변했다. 말도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게 편하게 바뀌었고.
알렌은 다른 조원들과 달리 그들과의 인연에 완전한 진심이 담을 수 없다.
그렇지만.
'동료라….'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 *
2, 3학년 상급반, 고급반 학생 지원자 36명, 1학년 신입생 141명. 함께 가는 교수와 조교를 합쳐 15명. 마차를 이끌 낙타와 말, 왕도마뱀과 그를 이끌 마부, 짐꾼들까지 수백의 인원이 가득한 행렬.
길게 늘어진 행렬의 끝에 율리우스가 서 있었다.
노란색, 노란색으로 물든 초록색, 주황색이 섞인 노란색, 노란색, 노란색, 초록색….
율리우스는 오랜만에 무지개 마안을 혹사시키며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는 없었다.
'역시, 원작에 나올 정도의 재능 있는 조연은 없구나.'
당연하다면 당연했지만, 그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쓸모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니. 노란색 재능은 따지자면 수재 정도는 된다. 처음 빙의했을 시점이라면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받아들였겠지.
하지만….
'차라리 소수 정예가 나아.'
이쯤 되면 원작의 인물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에게는 기대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카데미의 피해를 줄인다고 더 신경 쓸 필요도 없겠고.
원작의 결말에서 맞이해야 할 적은 마왕이다. 적당한 재능 수십을 끌고 가느니 천재 몇 명이 더욱 효율이 높았다.
'…그 개년만 없었어도 결말이 똥통에 처박히진 않았을 텐데.'
당연히 원작대로 흘러가는 것은 막을 생각이지만, 미래가 어찌 될지 모르니 마왕을 상대할 전력은 미리미리 준비해둬야지.
이렇게 전력을 모아두면 하이젤이 사실 필요가 없게 돼….
"아니아니, 그건 아니지."
"뭐가 아닌데?"
율리우스는 나쁜 생각을 하다 들킨 것처럼 화들짝 놀란 얼굴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왜 이렇게 놀라, 무슨 나쁜 생각 했어? 예를 들어서…, 우리 동동이를 버린다거나?"
갸호!? 갸호갸호!
동동이가 놀랐는지 버둥거리며 그를 바라봤다. 율리우스는 장난스러운 얼굴의 아벨린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동동아, 나쁜 누나는 버려두고 나랑 놀자."
갸호- 갸호-
율리우스는 그녀가 품에 안고 있던 털 뭉치를 획- 뺏어 자신의 품에 안았다. 복슬복슬한 털의 감촉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걸로 목도리만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괜히 불길한 기분을 느꼈는지 몸을 떠는 동동이를 쓰다듬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학생들이 배정된 조에 따라 마차로 몸을 구겨 넣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마테우스의 목소리에 정신 차렸다.
"빨리 안타고 뭐합니까, 율리우스. 이제 당신이 들어갈 차례입니다."
"아, 미안."
율리우스는 얼른 마차에 들어서며 천천히 계획을 점검했다.
'어떻게든 이번 실습에 많은 공적치를 얻어내야 해.'
기한은 이번 1학년이 끝나기 전까지.
어떤 이유에선지 몰라도 순환교의 습격이 이뤄지지 않았다.
나비 효과 탓인지, 다른 이유에선지 몰라도 원작의 스토리가 바뀌었다. 그 탓에 순조롭게 공적치를 모을 예정이었던 계획이 망가져 버렸다.
그렇다면 뭐, 어쩌겠나, 몸으로 때워야지.
아카데미의 보고에서 얻을 물건은 가문의 것과는 달리 비범하게 보이는 물건이니, 다른 누구가 채가기 전에 하루 빨리 움직여야 했다.
그러니까.
'반드시 눈에 띄어야 한다.'
적어도 이번 한 번에 공적치 수백, 아니 천 점 정도는 족히 얻을 정도로.
반드시 학생회장보다 먼저 보고에 들어가야만 했다.
어느 정도 희생이 동반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1학년 중에 쓸만한 사람은 더 이상 없으니까.
율리우스는 보고에서 얻을 물건에 대한 생각에 싱글벙글 웃었다.
그 웃음에, 자신의 행동으로 인한 죄책감 따위는 단 한 톨도 존재하지 않았다.
제79화
기나 긴 행렬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아카데미를 떠나 이동하는 동안 큰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행렬을 습격하려는 몬스터들은 교수들의 손속에 눈 깜짝할 새 죽음을 맞이했다. 수많은 인원수 때문인지 아카데미의 이름값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적 떼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카데미를 떠난 첫날 밤 조원을 추가한 것 빼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
"안뇽안뇽. 다들 반가워."
밀레드 프세우도스.
2황자를 처음 만났을 당시 봤던 학생회의 일원 중 하나이자 던전 실습 때 알렌의 조를 맡게 된 3학년 선배.
"나랑은 정식으로 처음 인사하지? 이번 실습 때 잘 부탁해."
자홍색 머리의 느긋한 표정, 그리고 엄청난 친화력까지.
알렌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조원들을 쳐다봤다.
"다들 아카데미의 역사에 대해서 알고 있어?"
갈슈딘 아카데미의 위치는 절묘한 구석이 있다.
비단 성검이 도시에 있다는 것이나, 유적의 유물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직접적인 것, 성검의 영역을 벗어나면 맞닿는 가혹한 환경에 있다.
사막의 환경은 혹독하다.
특히 초대형 마경 중 하나인 갈슈딘 대사막은 평범한 사막보다 더욱 악랄하다는 말이 어울렸다.
내리쬐는 따가운 한낮의 햇빛과 밤에 모래에 올라오는 서늘한 밤의 한기.
거기에 어디선가 나타나는 수많은 몬스터와 모래 속에 파묻힌 유적의 함정까지.
특정한 간격을 두고 불어오는 모래 폭풍은 덤이었다.
수십 도씩 차이나는 밤낮의 온도는 일반 병사는 버티기 힘들며, 그곳에서 활동하는 용병이라면 몇 골드를 호가하는 아티펙트를 반드시 구매한다.
그 정도로 대사막을 탐험하기 위해서는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 환경에 둘러싸인 엘피스는 천혜의 요새를 등에 업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멍청이는 있는 거 알지?"
과거, 아카데미를 공격하기 위한 움직임은 몇 번이나 있었다.
"유물을 독점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상인 연합도 있었고…, 자식이 받은 대우에 불만을 품은 귀족, 그리고 욕심에 눈이 돌아간 망국의 왕까지."
그러나 공격이 성공하는 일은 없었다.
단 한 번도.
"내가 알기론, 아카데미 측에서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대응한 적도 없었을 걸?"
공식적인 성명문은커녕 병사를 모으는 움직임조차 없었지.
"그러면 아카데미를 공격하려던 적은 어떻게…."
이야기에 집중하던 에반의 물음에, 그의 앞에 있던 밀레드는 묘하게 웃었다.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엘피스가 공격받았단 이야기는 한 번 도 들은 적이 없으니…."
다 실패했다.
엘피스.
희망이라는 뜻에 걸맞게 욕망을 품고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이들은, 그 끝도 마찬가지로 불에 타 허무하게 스러졌다.
"지금의 아카데미는 그렇게 만들어진 거야."
"대사막의 환경 자체가 천혜의 성벽이 되어 그들을 가로막은 거로군요…. 계급과 종족에 상관치 않고 섞일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진 이유기도 하고 말이죠."
제국도 침략할 수 없고, 어느 귀족이든 위세를 부릴 수 없다.
하지만 아카데미는 발굴한 유물을 통해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다.
어느 나라, 어느 종족에게든 휘둘리지 않는 아카데미의 특별한 지위의 반은 그런 지리적인 도움과 성검 덕분에 형성되었다고 봐도 옳았다.
"맞아, 너 똑똑하구나. 윌리엄 후배."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일행에 자연스럽게 섞여든 그녀는 잘했다는 듯 윌리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그게 감사합니다!"
윌리엄은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 그의 옆에서 에리엘이 확신이 서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학생회장이 평민인 것도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진짜 실력이라는 건가요?"
"그것도 맞아! 회장은 진짜 괴물이거든? 너는 머리를 쓰다듬으면 기껏 꾸민 게 망가지니까…, 과자 줄까?"
밀레드는 에리엘이 사양하기도 전에 바삭한 쿠기를 입에 물렸다. 에리엘은 미묘한 표정으로 입에 들어간 과자를 오물거렸다.
"크흠, 저는…."
"아, 에반 후배도 과자 먹고 싶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에반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그보다 빠른 속도로 과자가 획 날아들었다.
"맛있지?"
"…예."
에반의 얼굴에 서린 희미한 만족감을 보면 싫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한순간에 에반을 조용하게 만든 밀레드는 유일하게 상황에 끼어들지 않고 있던 알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알렌 후배는 필요 없어?"
"저는 괜찮습니다."
"부회장님한테 듣기로 도움 줬다면서. 후배는 내가 특별히 사과까지 깎아줄게."
그녀는 아공간에서 사과를 꺼내며 사정을 안다는 듯 헤프게 웃었다. 알렌은 사양한다는 의미로 손을 저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 대신에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그녀는 아쉽다는 의미로 시무룩해지더니 사과를 다시 집어넣었다.
"싫으면 어쩔 수 없지…, 그래 물어봐! 설명해 줄 수 있는 건 다 설명해줄게!"
알렌은 단번에 다시 활기차게 변한 그녀의 성격에 종잡을 수 없단 생각을 품으며 심중에 담고 있던 의문을 물었다.
"그럼…, 밀레드 선배가 저희 조에 합류하는 게 정말 맞습니까?"
"맞아!"
"실습에 지원할 수 있는 건 2학년만 가능한 게 아니었습니까?"
그녀는 검지를 까딱이며 고개를 저었다.
"노노, 이번 초대형 유적의 난도를 고려해서 예외적으로 3학년도 지원할 수 있게 바뀌었어. 몰랐어?"
그녀가 다른 이들에게도 시선을 돌리자, 다들 들은 적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언니도 말해주지 않았어요."
"동아리 선배들도 별말이 없었는데…."
"응? 그래? 학생회에서 분명히 이사장님께 결재를 요청 드렸는데, 음…,"
입술을 검지로 톡톡 두들기던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지원 신청서가 2학년 것밖에 없었구나. 난 또 내년 교류회 때문인 줄 알았는데."
"교류회요?"
"아. 1학년은 아직 모르겠구나. 아카데미는 매년 마다 마탑과 교류회를 하거든."
"…언니한테 들었던 것 같아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에리엘은 교류회 이야기로 빠져들려던 이야기를 되돌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면 지금 지원한 3학년 선배는 밀레드 님…."
"밀레드 언니라고 불러!"
"네, 밀레드 언니밖에 없나요?"
"그건 아니라도… 학생회에서 지원한 몇 명밖에 없을 거야."
그녀의 답에 윌리엄은 다시 불안증이 도졌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러면 위험한 게 아닌가요?"
"아마도…."
그녀는 마차의 창밖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절대로."
"네!? 따로 학생회에 언질 받은 정보라도…."
"여자의 감이야~"
밀레드는 다시 헤픈 미소를 흘리며 답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윌리엄의 힘 빠진 목소리에도 그녀는 싱글벙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나도 초대형 유적에 들어간 건 처음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안심해도 돼!"
"…그것참 의지가 되네요."
"그렇지?"
일행은 그녀의 쾌활함에 조여진 긴장이 풀렸다.
알렌은 그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다른 사람은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으나, 알렌은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행렬의 마차중 하나에 닿았다는 사실을.
알렌의 감응력은 전보다 세심하게 오감을 발달시켰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에게 찰나의 시간에 불과할지라도 알렌에겐 시선에 닿는 곳을 확인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안전장치는 충분하겠군.'
일대를 뒤덮는 파동을 느낀 알렌은 아카데미에 왔을 당시부터 팽팽하던 조았던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풀었다.
목적지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 * *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습니까?"
"괜찮습니다."
"혹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신다면…."
"먹을만하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따로 시키실 분부라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이만 나가보십시오."
자크니르는 황송한 얼굴로 마차를 빠져나가는 이들을 쳐다봤다.
저들 모두가 아카데미에서는 수십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교수 중 하나일 텐데, 자신의 앞에서는 대화라도 한 번 나눠볼 수 있지 않을까 난리였다.
"생각만큼 높은 자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말이야."
자크니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세계에서 단 여덟 개밖에 없는 자리.
듣기에는 엄청난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겉치레에 불과했다.
자크니르는 여덟 명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강자가 세상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실력이 그들에 비해 한 수 뒤처진다는 것도.
팔강의 자리에 오른 것 역시 그의 상대였던 전(前) 팔강이 장기전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년 단위의 전투를 벌였을 것이고, 먼저 뻗는 것도 그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얌전히 아카데미에 있을 생각도 아니었는데."
자크니르는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맡기며 상념에 잠겨 들었다.
하늘의 방패.
최연소 팔강.
지금은 소실된 신성 마법의 유일한 계승자.
그리고.
"…망국의 후계자."
이 신분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벌써 백 년도 전에 망한 나라의 후계자를 기억할 정도로 세상은 한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팔강이 된 지금에도 그의 다른 신분을 아는 이들은 적었다.
당연하긴 당연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바뀌다는데, 무려 백 년이다.
소년이었던 이들도 죽어 흙으로 돌아갈 정도의 시간.
그럼에도 잊혀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있었다. 그것이 쓸모없는 망념이라 할지라도.
자크니르는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반드시 복수를 해야 한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당연히 그 망할 아카데미의 놈들에게.'
'…왜?'
'우리나라를, 왕가를 무너트렸지 않느냐?!'
정작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도 그 시절을 겪어본 적도 없었다.
겪어본 적도 없는 시절을 그리워하고, 손에 쥔 적이 없었던 나라가 무너졌다며 복수에 집착한다.
자크니르는 그러한 가르침을 받았고, 가문의 혼신의 지원과 본인의 재능과 운이 겹쳐 팔강에 올라갔다.
그 후에 아카데미의 초대를 받고 도시의 수호를 맡게 되면서….
'가문과 연을 끊었다.'
견문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평생을 가문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그는, 아카데미에 와서야 그것이 무용함을 깨달았다.
그렇게 아카데미에서 몇 달을 어영부영 지내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
"에휴, 내 할 일이나 해야지."
오랜만에 도시에서 나왔기 때문일까 상념이 많아졌다.
자크니르는 눈을 감고 천천히 감지력을 끌어올렸다.
학생들의 수준으로는 자신의 감지력을 눈치 채지 못할 터.
그중에서 몇 명은 그도 주의해야 할 정도의 실력이었지만….
'아직 학생 수준이지.'
100m, 200m, 300m….
점점 범위를 넓혀 일대를 완전히 탐색한 그는 눈썹을 까딱였다.
"음?"
감지범위의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착각인가…?"
* * *
마차의 행렬에서부터 몇 킬로미터는 떨어진 거리.
묘령의 여성이 웃음기 띤 얼굴로 자크니르가 자리하고 있을 마차를 응시했다.
"비욘나 님, 더 이상 접근하지 않으시는 게…."
그녀의 옆에 자리한 남자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녀의 눈치를 봤다.
"이 이상 가까워진다면, 그가 눈치 챌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그녀의 태도에 남자는 조심스럽게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저희의 계획을 따르지 않으신다면, 비욘나님의 일도 차질이 생길… 켁."
"알아, 아는데… 왜 이렇게 잔소리가 넘칠까?"
"죄, 죄송합…."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닥쳐."
순간적으로 솟아오른 살기에 오줌을 찔끔 지린 그는 창백한 낯빛으로 뒤로 물러났다.
"이미 망한 놈들이 자존심만 저렇게 드세서는…, 쯧."
그녀도 알았다.
지금 물러나야 한다는 것쯤은.
저들이 아카데미에 빼낸 정보에 따르면 초대형 유적이 곧 변화한다고 한다.
어디서 이런 정보를 알아냈는지 신기할 따름.
이미 다 망한 가문이라고 한들 가문의 저력을 동원하면 그 정도는 가능한가 싶었다.
"하지만…, 아깝네."
3년간 쌓인 원한이다.
며칠만 참는다면 곧 원한을 해결할 수 있더라도, 그게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곧이니."
얼마 남지 않았다.
유적에 관한 것은 밝혀진 부분보다 밝혀지지 않은 것이 훨씬 많다.
그러니 그 안에서 팔강이라도 위험한 '함정'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겠는가.
그녀는 저 멀리서 파도치는 무형의 파동을 피해 몸을 숨겼다. 곧 감지력이 일대를 휩쓸며 지나갔다.
유적까지 이틀 거리 남았을 적의 일이었다.
제80화
닷새가 지나 도착하게 된 유적의 앞에는 용병들과 상인들로 득실거렸다. 학생들의 시선은 유적에 가까워졌을 때부터 대지를 뚫고 나온 첨탑에 향하고 있었다.
교수들은 임시로 차려진 캠프로 들어가는 대신 그 옆에 준비된 새 캠프 안에 자리 잡게 하고는 미리 계약된 길잡이들을 배정했다.
대부분 무작위로 길잡이를 선택했지만, 몇몇 이들은 미리 이야기해 놓은 듯 안면이 있는 이들과 함께하기도 했다.
알렌도 그런 경우 중 하나였다.
"알렌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알렉시우스. 만나서 반갑군."
알렌은 편지에 주고받은 대로 자신을 기다리던 알렉시우스와 합류했다.
율리우스 쪽을 돌아보니 그곳에는 에리니가 거미 다리를 까딱이며 다른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길잡이를 다 배정한 후 유적의 대략적인 설명을 듣게 되었다.
익히 수업에서 들었던 주의 사항과 목표를 다시 설명 들은 그들은 비상 탈출용 아티펙트와 유적의 일부가 그려진 지도를 받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유적을 탐색한 지 몇 시간이 흘렀다.
"에반! 너무 들어갔습니다. 뒤로 빠지십시오!"
"크흡! 아, 알았다!"
알렌의 명령에 무작정 돌격하려던 에반은 몸을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잠깐 그의 몸이 멈춘 틈을 타 창이 날아들었지만, 에반은 능숙하게 창을 쳐 내고는 다시 정면을 가로막았다. 그때 알렌이 외쳤다.
"에리엘, 지금입니다!"
"알고 있어요!"
에리엘의 눈이 녹색으로 물들더니 빠르게 화살을 쏘아 냈다. 연속으로 날아간 세 발의 화살은 머리 위를 지나치더니 있을 수 없는 각도로 꺾여 떨어져 내렸다.
-퓨퓨퓩!
화살은 에반이 막던 리빙데드를 거쳐 틈을 노리던 샌드맨의 머리에 박혀 들었다.
그아아아────!
그 모습에 리빙데드가 분노했는지 괴성을 내지르며 밀어붙였다. 한 마리가 아닌 총 세 마리의 돌격. 좁은 통로를 가로막았기에 당장은막아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에반이 위험했다.
"끄으읍! 아, 알렌 아직 마법은 멀었…! 윽!"
에반은 소리치다 말고 머리를 틀었다. 푸른 마력이 그를 감싸며 순간적으로 그의 속도가 몇 배는 빨라졌다. 후웅! 창날이 머리를 스쳤다.
에반은 흥분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에 휩싸인 얼굴로 강하게 방패를 위로 올렸다.
깡!
투구의 맑은 울림과 함께 리빙데드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리빙데드가 멈칫거리는 틈을 타 에반은 거세게 한손검을 휘둘렀다.
콰직! 리빙데드가 휘청거리며 몇 걸음 물러섰다. 좁은 통로 탓에 세 마리 모두 움직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리빙데드는 생명체가 아니었기에 핵을 파괴하지 못하면 처리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에반!"
에반의 목적은 처음부터 리빙데드를 처리하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에반은 인공 유적에서 지긋지긋하게 연습한 전술에 따라 뒤로 물러났다.
알렌이 손짓하자 실타래가 얽히며 황청색의 호른이 나타났다. 알렌이 호른을 붙잡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리빙데드의 투구 사이로 녹색의 화염이 타오르며 괴성을 내질렀다.
그아아아아────!
세 마리의 텅 빈 갑옷이 돌격하면서, 마침내 물러난 에반의 앞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부패의 비명.'
뿌────!
묵직한 저음의 파동이 회오리를 그리며 리빙데드와 부딪쳤다.
거센 바람이 리빙데드를 스쳐 지나갔다. 강력한 파괴음은 없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푸스스-
살아 움직이는 갑옷들은 한순간에 산화되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부서져 내렸다.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후, 끝났네요."
에리엘은 손마디가 저린지 손을 풀며 화살을 회수하러 움직였다. 아공간에 더 있다고 해도 화살은 소모품, 아껴 쓸 수 있다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 옳았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윌리엄이 에반을 향해 뛰어갔다. 에반은 주저앉으려던 몸을 급히 멈추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몸 풀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하, 하.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윌리엄은 애써 웃으며 그의 몸을 살폈고, 아무런 상처가 없자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스틀라가 검신을 떨며 물었다.
「당신이 힘을 쓰면 이렇게 번거롭게 처리할 필요도 없지 않아요?」
'그러면 조를 짜서 행동할 이유도 없지.'
「…으, 그래도 저도 좀 움직이고 싶단 말이에요. 요즘 제대로 검을 쓴 적도 없는데.」
'어쩔 수 없지 않나.' 베스틀라는 몸이 쑤시는지 허리춤에서 자꾸 꼼지락거렸다. 아카데미에 박혀서 제대로 검을 쓸 일이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그러나 알렌은 이번 실습에서는 철저히 팀으로서 움직일 계획이었다.
이 유적에 흑마법사, 혹은 마왕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다는 자신의 가설을 입증하기 전까지.
"와! 이번에도 내가 말해야 할 건 없겠는데?"
짝짝짝-
손뼉을 치며 다가온 밀레드는 눈을 반짝이며 칭찬했다.
"에반은 너무 저돌적인 경향이 있기는 한데 지시는 잘 따랐으니까… 응응, 괜찮아. 에리엘도 빈틈을 찌르면서 보조 잘해 줬고. 윌리엄도 정석에 맞게 잘 움직였어. 그리고 알렌은 더 말할 것도 없는데…."
그녀는 궁금증과 기대가 가득 찬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마법, 시간 계통의 마법 아니지?"
"아닙니다."
알렌은 딱 잘라서 말했다.
시간 계통의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도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기는 하다.
그러나 알렌은 시간은 물질의 변화에 따른 가정에 불과하다는 가설에 마음이 더 기울었다.
젊음과 늙음, 새것과 헌것, 탄생과 죽음까지.
아이가 영원히 자라지 않는다면, 물건이 영원히 낡지 않는다면 그것이 시간이 멈춘 것과 무엇이 다른가.
시간은 변화를 동반한다.
반대로 말해서, 변화하지 않는다면 시간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알렌이 처음에 회귀를 믿지 않았던 것도 이런 맥락의 일환이었다.
물건이 낡을 수는 있어도, 새것으로 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냥 철을 산화시킨 것에 불과하지요."
"역시 그렇지…?"
그녀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마법은 도서관에 들르면서 얻은 성과의 하나였다.
일어날 일을 일어나게 만드는 것.
이넬리아와 린벨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머리에 맴돌던 영감을 정리해 낸 것이었다.
다만, 이 마법을 사용하기엔 수많은 전제조건이 붙었다. 미래가 거의 확정적이어야 되고, 유기체에게 사용할 수 없으며, 계통을 완전히 정립하지 못했기에 어마어마한 마력이 소모된다. 뿐만 아니라 사용처도 한정된다.
하지만 알렌은, 이 마법이 시간 계통 마법이었다면 이런 형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게 이름 붙이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이제 이야기는 끝나셨습니까."
"아, 알렉시우스. 혼자 다 하셨습니까?"
알렉시우스가 부산물을 담은 가죽 주머니를 들고 다가왔다. 그의 전갈 꼬리가 움직임에 맞춰 흔들거렸다.
"저 혼자 한 것이 아니라 에리엘 님이 도와주셨습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그녀는 짧게 미소 짓고는 진지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
"그래서…, 알렌 어떻게 할래요?"
에리엘은 유적에 출입하기 직전에 나눠 준 지도를 모두가 볼 수 있게 들어 올렸다.
검게 물든 지도의 위로는 일행이 움직인 거리만큼 밝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밝혀진 부분은 지도의 채 1할도 채 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이 유적의 초입에 머물러 있을 뿐이에요. 중요한 건 아직 1층에 있을 뿐인데 말이에요. 그런데 에반은 벌써 지쳤고…."
"아니, 나는 지치지 않…."
"에반."
"크흠, 조금 쉴 필요는 있을 것 같군."
"제 마력도 간당간당해요. 체력이 부족한 윌리엄은 말한 것도 없고요."
윌리엄은 그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얼굴이 붉게 변했지만, 일행의 치료를 담당하는 그에게 뭐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선택을 해야 해요."
"후퇴할지, 더 나아갈지."
"네, 맞아요. 지도의 더 많은 부분을 밝히는 게 점수가 더 클 테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더 나아가고 싶지만, 첫날이기도 하고 또,"
그녀의 시선이 한 발 떨어진 거리에서 헤헤 웃고 있던 밀레드에게 향했다.
"…언니에게 도움을 받으면 실습 평가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요."
"맞아! 그러니까 신중하게 선택해. 이런저런 지식 같은 건 도움을 줄 수 있어도, 직접적인 개입을 하면 감점이니 주의하고!"
알렌은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할까. 이미 전투는 수십 번이나 치렀다. 경험은 충분하다는 이야기다.
아직 초입이기에 강한 함정이나 수호자의 존재를 볼 수 없다고 해도, 이미 여독을 풀 새도 없이 들어왔기에 체력적 손실이 컸다.
밀레드는 여전히 물러난 상태에서 개입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이것도 다 평가에 들어갈 것이다.
'더 무리해서 이동하는 것보다 휴식이 더 필요하겠지.'
알렌은 결정을 내리고는 입을 열었다.
"돌아가겠습니다."
"…휴."
에리엘은 내심 휴식이 간절했는지 안도했다.
밀레드는 활짝 웃으며 그의 결정을 지지했다.
"잘했어! 알렌 후배, 확신이 안서면 차라리 숨을 돌리는 게 더 좋은 선택이야!"
"그럼 가장 가까운 경로를 통해 돌아가겠습니다."
알렉시우스는 잠시 지도를 살피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을 찾았는지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로 일행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윌리엄이 돌아간다는 말에 화색이 되어 힘을 짜냈다.
"헥, 헥…, 돌아가면 체력 훈련에 더 신경 써야겠습니다…. 하하."
"그때는 내가 도와주지."
"괘, 괜찮습니다."
"사양하지 말게."
에반의 말에 윌리엄의 얼굴이 살짝 파래졌다.
그렇게 일행은 처음 유적에 돌아왔을 때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유적을 빠져나왔다.
* * *
해가 저물어 주홍빛 노을과 옅은 달 모두 하늘에 떠 있는 시간.
유적의 입구 근처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책임질 생각인가! 너를 따라갔다 첫날에 탈락했다. 가문에서 알면 무슨 말을 할지…, 진짜 미치겠군."
"아니, 공자님께서 먼저 선발대의 정보를 제공하라 하셨지 않습니까!"
"이 미천한 모험가 새끼가…."
"지금 길드를 무시하시는 겁니까?"
모험가는 길드 출신의 길잡이였던 건지 그는 나름 억울한 티를 내며 항의했고, 귀족 출신 학생은 이런 대접이 처음인지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 지금 나한테 말대답을 한 것이냐? 감히…!"
"그럼 공자님은 제가 길드를 통해 계약을 맺었는데 거짓을 말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길잡이가 저렇게 행동하는 것에는 대사막으로 군대를 데리고 올 수 없다는 것이 컸으리라.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진짜 억울해 보이기도 한 것 같았고.
"이 새끼가 내 가문을 무시하…."
"공자님은 가문의 떼쓰기밖에 못 하십니까? 할 말이 있으시다면 직접 길드에 항의하십쇼. 이미 영상 기록 저장 구슬은 길드와 아카데미에 제출했으니 말입니다."
"이, 이…!"
중부 바깥을 벗어나면 통할 권위가 여기서는 먹히지 않으니 남학생은 얼굴이 터질 듯 붉게 변했다.
길잡이는 주위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다는 걸 느끼고는 급히 인파를 빠져나갔다.
"알렌, 뭘 보고 있으십니까."
뒤를 돌아보니 윌리엄이 아직도 이름으로 부르는 게 어색한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저건…."
"벌써 탈락한 자들이 생긴 모양입니다."
윌리엄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는 그 사실이 퍽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벌써 탈락했다는 말입니까?"
알렌은 어깨를 으쓱이며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윌리엄이 옆에서 그와 걸음을 맞췄다.
"항상 욕심이 있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길잡이가 먼저 유적을 한 번 살폈던 선발대 출신이었던 모양입니다. 말하는 거로 보아 학생이 욕심을 부렸든, 길잡이가 먼저 정보를 흘렸든 깊은 곳으로 무작정 갔다가 당한 것 같네요."
"아…."
윌리엄은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첫날인데 어째서…."
"능력과 욕심은 비례하지 않는 법이지요."
그냥 유적도 아닌 초대형 유적.
나오는 유물의 질이 달라지니 욕심이 날 법도 했다. 더해서 실습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고.
그러나 일반 유적과 초대형 유적은 다르다.
보통 수호자를 해치우거나 요구하는 지식을 증명하기만 하면 되는 일반 유적과 달리 초대형 유적은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 거대한 크기에 흘러들어 온 몬스터와 유적을 돌아다니는 수호자 그리고 곳곳에 깔린 함정, 거기서 그치지 않고 특정 방이나 구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식도 증명해야 한다.
지금은 원리조차 모르는 함정에 당하면 행간에 떠도는 미신처럼 동료가 사라지기도 하고.
"…참, 갈수록 뭔가 허무한 기분이네요. 귀족은 다 엄청난 건 줄 알았는데."
윌리엄이 뭔가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그래도 알렌과 에반, 에리엘은 다 좋은 쪽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윌리엄이 다급히 변명을 내뱉으며 알렌의 눈치를 봤다.
무언가 사연이 있을 것이다.
원래 귀족에 관해 온갖 말이 나도는 것이 당연하니까.
그렇기에 알렌은 뭐라 대답하지 않고 픽 웃으며 그저 앞으로 걸었다.
윌리엄은 알렌이 기분이 별로 상한 것처럼 보이지 않자 혼자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노을이 마지막 빛을 힘겹게 토해 내며 서쪽 끝자락을 붉게 물들였다.
유적에 도착한 지 첫날의 하루가 끝나고 있었다.
제81화
2주간의 던전 실습일 중, 둘째 날의 아침이 밝았다.
유적의 입구로 이어지는 네 개의 첨탑 근처에는 수백의 학생들과 고용된 길잡이, 그리고 부산물을 얻을 수 있을까 눈치 보는 상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알렌의 조는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모여들었다.
모인 이들의 얼굴에는 조금씩 피곤함이 엿보였다.
당연히 하룻밤 만에 여독이 다 풀리지 않았다.
잠자리도 익숙하지 않았고, 씻지 못하는 불편함과 밋밋한 식사까지.
몸 상태를 완전히 회복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러나 이것도 극복해야 할 문제였다.
마왕이 다시 나타난다면 어쩌겠는가, 아니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과 같이 유적을 공략해야 할 때도 불평만 할 수 없을 것이다.
던전 실습은 미래에 겪을 실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했다.
그게 아니라면 아카데미는 이미 상위 계층이 모여드는 거대한 사교계와 다름없을 것이다.
…지금도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만은.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조원들은 입장할 차례가 되자 뾰족한 첨탑의 중간에 있는 입구로 들어갔다.
말이 입구지 사실 첨탑의 창문을 부셔 만든 거나 다름없는 구멍을 넘어가자, 나선형 계단이 위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에는 먼저 들어간 학생들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고, 중간중간에는 빛을 내는 광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첨탑을 다 내려갈 때까지는 위험이 없다.
알렌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브리핑을 위해 일행의 주목을 모았다.
"잠시, 집중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시선이 알렌에게 집중되자, 알렌은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던 알렉시우스에게 입을 열었다.
"알렉시우스, 선발대에 참여해서 얻은 정보를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예, 어차피 숨길 생각은 없었으니 말해드리겠습니다."
알렉시우스는 처음부터 알렌을 도울 생각이었기에 기꺼이 응했다. 그는 눈 깊은 곳에 기대감을 숨긴 채 입을 열었다.
"우선, 이 초대형 유적은 7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7층이라고…?"
"…생각보다 더 깊은데요?"
에반은 상상도 못 했다는 듯 침음성을 흘렸다.
에리엘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 커다란 규모에 걱정이 든 것 같았다.
"…뭐, 뭔가 잘못된 저, 정보일 리는…."
윌리엄이 긴장했는지 다시 말을 더듬으며 묻자, 알렉시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유적은 7층, 아니 지하 7층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 게 맞겠군요. 제가 직접 확인하지 못했지만, 아카데미가 자체적으로 파견한 조사대에서 직접 확언을 했습니다."
그의 확답에 일행의 입이 다물어졌다.
당연했다.
아카데미에서 직접 확언했다면 거짓말이 아닐 테니까.
던전 실습 기간은 고작 2주.
그 안에 보통 유적도 아닌, 더 어려운 초대형 유적을 공략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래서 정보를 가르쳐 주지 않았던 거네요…."
에리엘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하, 하… 골탕 먹으라는 뜻만 있는 줄 알았더니 알아도 소용없을 거라 생각한 거로구나."
"…그래서 어제 무리를 한 것이었군요. 규모가 규모인 만큼 조급해할 만했습니다."
에반은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터트렸고, 윌리엄은 어제 탈락자가 발생한 이유를 깨달은 듯 작게 중얼거렸다. 심지어 선배들의 참여가 저조한 이유도.
선배들은, 던전 실습 때 신입생들은 공략하지도 못할 어려운 유적으로 간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윌리엄이 힘 빠진 목소리로 말하던 그때,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밀레드가 끼어들었다.
"자자! 다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렇게 포기할 거야? 지금 포기하면 성적이 나락으로 처박힐 텐데?"
"하지만…."
"하지만이고 자시고! 교수들이 너희한테 공략하라고 했어?"
"그건…."
에리엘이 말끝을 흐리자, 밀레드는 그것 보라는 듯 소리쳤다.
"아니잖아. 너희는 너희 최선을 다하면 돼! 그걸 위해서 내가 있는 거고, 아니면…."
밀레드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정곡을 찔렀다.
"너희들의 힘으로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움찔-
에반은 내심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 몸을 떨었다.
"그럴 거면 선배가 왜 필요하고, 아카데미가 왜 필요하겠어. 여러 가지 위험을 헤쳐나갈 지혜와 경험을 선물하고 훈련시키기 위해 아카데미가 존재하는 거야."
그녀의 원론적인 이야기에 일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언제나처럼 헤픈 웃음을 흘리며 한 발짝 물러서 지켜보고 있던 알렌에게 눈웃음 지었다.
"자! 이제 우리 조장은 무슨 방법을 생각해 냈는지 들어볼까?"
밀레드가 다 알고 있다는 듯 알렌을 바라보자, 남은 조원들의 시선도 알렌을 향했다.
"우리 조장 후배님은 무언가 수가 있어서 지켜보고 있던 거 아냐?"
"…그건, 예."
알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맞습니다."
알렌의 시선은 첨탑의 계단을 넘어, 그 지하로 향해있었다.
"충분한 점수를 얻을 수 있을 만한 방법이."
* * *
아카데미에서 던전 실습에 사용할 유적을 선정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신입생들이 공략할 수 없을 정도의 난도일 것.
앞으로 미래를 위한 유의미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장소일 것.
이 두 가지를 고려해 유적을 선정한다면, 아카데미에서는 조사대를 파견해 유적의 심부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어떤 위험이 있는지 그리고 몇 층까지 존재하는지까지 조사한다.
그 후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면 용병과 모험가로 이루어진 선발대를 지원받아 내부의 지도를 작성한다.
선점권을 사용했기에 누구의 방해도 없이 유적의 정보를 수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보통 그렇게 선발대를 지원한 용병은 공략할 때 얻은 유물을 얻고 떠나지만…, 길잡이는 남습니다."
그들을 통해 학생들이 유적의 정보를 얻을 수도 있고, 유적의 함정을 피해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시우스는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멈추고는 전갈 꼬리로 벽 몇 군데를 찔렀다.
세 명이 함께 걷기에 부족한 복도, 회백색 바닥에서는 옅은 한기가 올라왔고 벽은 삭막하고 단단하기만 할 뿐 별다른 함정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알렉시우스가 찌르기가 무섭게 아무런 소리도 없이 빛무리로 이루어진 그물망이 나타나 앞 공간을 감싸 안았다.
화르륵-
닿지도 않았으나 앞쪽에서 느껴지는 열기만으로 에반은 목덜미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저는, 5층까지 내려가는 통로를 알고 있는 길잡이지요."
"그 말은…."
윌리엄이 무언가를 떠오른 듯 놀란 얼굴로 되묻자, 알렌이 그의 의문에 태연하게 대답했다.
"예, 저희는 공략보다 어떤 조보다 빠르게 유적을 가로지르는 최단 돌파를 시도할 계획입니다. 최대한 낮은 층으로 향해서."
"확실히 그것이라면 점수를 얻기에는 충분하겠군."
"공략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포기하고 실리를 취한 다라… 좋은 생각이네요."
그들은 그 생각은 하지 못했다는 듯 감탄한 기색이었다.
"고대 유물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점만 빼면 말이지."
밀레드는 이 작전의 마지막 단점을 이야기했지만, 일행은 흔쾌히 유물을 포기했다.
고대 유물은 나중에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만, 점수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의외인 점은 윌리엄도 기꺼이 찬성했다는 것.
"저도…,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점수도 상당히 중요하니 이게 더 옳은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심사가 복잡해 보였지만, 곧 평소의 그로 돌아왔다.
밀레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그들에게 주의를 환기했다.
"하지만 이 방법을 생각해 낸 게 알렌 혼자만은 아닐 거야. 어제 탈락한 자들도 따지고 보면 비슷한 방법은 선택한 거 아니겠어?"
"그렇다면…."
"서둘러야 한다는 거지."
일행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고, 서둘러 지도를 확인했다.
지도가 밝게 변한 곳은 지하 1층의 3분의 1지점.
이 주일 모두 같은 속도로 이동한다면 5층의 중간에 도달하고 끝날 것이다.
아니, 내려갈수록 더 강한 수호자와 함정이 존재할 테니 4층에서 발걸음이 멈출지도 모른다.
"안정적인 선택을 한다면 지금 속도로도 충분할지 몰라요. 하지만, 커다란 보상을 얻기 위해서는 당연히 위험을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에리엘의 눈빛은 명확했다.
"어떻게 하고 싶어요?"
나아가야 한다는 것.
비상 탈출 아티펙트가 있으니 목숨까지 걸지 않아도 된다.
잃는 것은 그저 한 번의 수업에서 얻을 점수. 수업 하나라고 하기에는 점수의 비중이 컸지만, 이 정도를 걸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렇기에 이들의 선택은 그녀와 다르지 않았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크흠, 힘 좀 써야겠군."
"찬성하지요."
다들 찬성을 하자, 알렉시우스는 선발대로 들어왔던 경험을 떠올리며 지도를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그럼, 속도를 올리겠습니다."
알렌 조의 심층까지 향하는 최단 돌파가 시작되었다.
* * *
일행은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지금까지는 최대한 안전한 방향으로 조금씩 움직여 지도를 밝혔지만, 빠르게 하층을 향하는게 목표인 이상 그렇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
"알렌, 전방에 방이 하나 있습니다!"
"계획대로 무시하겠습니다!"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요구하는 지식을 증명해야 한다.
아카데미에서 그러한 상황에 대비한 교육도 받았지만, 시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빠르게 하층으로 가려는 알렌 일행과 맞지 않았다.
윌리엄은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망설이지 않고 방을 지나쳤다.
"전방에 샌드맨 둘! 리빙데드 하나!"
"리빙데드는 내가 상대하지."
"그럼, 샌드맨은 제가 해치우도록 할게요."
에반의 몸이 푸른 마력에 휩싸이며 전보다 몇 배는 빨라졌다. 그 상태로 검을 휘두르자 리빙데드기 저항할 틈도 없이 박살 났다.
에리엘은 그 사이로 녹빛으로 빛나는 단 하나의 화살만 발사했다.
획-
순식간에 날아간 화살은 순간 펑하고 터져나가더니 샌드맨 두 마리 모두를 벌집으로 만들었다.
"속도 늦추지 않고 그대로 가겠습니다!"
"부산물도 무시합니까?"
부산물을 회수하려고 다가가던 알렉시우스가 알렌의 말에 멈칫했다.
"그걸 회수하며 얻을 이득보다 빠르게 내려가는 게 더 중요합니다."
알렌의 단호한 대답에 밀레드가 시원하게 미소지었다.
"역시, 알렌 후배. 잘 알고 있잖아!"
"그럼, 알겠습니다."
알렉시우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일행은 주변을 탐색하지 않고, 최대한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나아갔다.
"앞에 함정이 있습니다!"
"어떤 종류입니까!"
"단발형, 공격용인 것 같습니다."
한눈에 함정을 탐지한 알렉시우스가 소리치자, 감지력으로 먼저 함정을 발견했던 알렌이 벽면 전체에 충격파를 흩뿌렸다.
파바방!
공기가 터져나가며 벽을 두들기자, 양쪽 벽면이 수축하더니 이내 쾅 하고 부딪쳤다.
일행은 벽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며 날리는 돌가루 사이를 통과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악! 깜짝이야."
"뭐, 뭐야."
"쟤들은…?"
중간중간 먼저 출발한 조들과 마주쳤지만, 깜짝 놀라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볼 뿐 선뜻 다가오는 이들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중간에 환영함정으로 인해 혼자 다른 곳으로 향하던 에반을 데려오고, 커다란 소음에 몰려든 수호자들에 부상을 입은 에리엘을 치료하고.
사제의 힘을 보여준다는 알렉시우스의 강함에 의외로 놀라기도 하고.
마침내 윌리엄이 꺼멓게 죽은 얼굴로 흐느적거리며 달려갈 때쯤, 알렉시우스의 발걸음이 어두운 통로 앞에서 멈춰 섰다.
"헤엑, 헥… 다, 다 왔습니까?"
"잠시 확인 좀 해 보겠습니다."
윌리엄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묻자 알렉시우스가 지도를 펼쳤다. 3분의 1쯤 밝아져 있던 지도는, 그 이후부터 삐뚤빼둘한 선을 그리며 밝게 빛나고 있었다.
"예, 여기가 제가 통과했던 통로가 맞습니다."
"드디어…!"
알렉시우스의 확언에 일행의 표정이 밝아지자, 알렌이 전력을 재확인했다.
"에반,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좋지는 않군."
"에리엘은 어떻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예요."
마력을 아끼지 않고 사용하며 마력이 떨어질 때면 포션으로 강제로 회복시키며 달렸던 만큼 일행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윌리엄은…, 말할 것도 없겠군."
알렌은 쓴웃음 지었다. 진작에 체력이 떨어져 자가치료를 하며 달렸던 윌리엄은 반쯤 저세상에 갔다 온 표정이었다.
알렉시우스는 마경에서 살아왔던 것답게 체력이 괜찮아 보였고, 밀레드는 3학년이니만큼 이 정도 움직임도 문제없어 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2층까지 진입하는 것으로 멈추겠습니다."
일행의 상태를 확인한 알렌이 말하자, 에리엘이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
"알렌, 하지만 여기서 멈춘다면 최단 돌파를…."
"저, 저를, 헤엑! 생각해주지 않으셔도, 헤엑! 됩니다."
윌리엄은 다리가 갓 태어난 새끼 양처럼 부들거렸지만, 짐이 되지 않으려는 듯 억지로 걸음을 몸을 움직였다.
그들의 태도에도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2층에 제일 먼저 도착한 조는 우리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돌아가 재정비한 후 다시 움직이는 것이 나을 겁니다. 한 번 경험해봤으니 다음에는 3층에도 내려갈 수 있을 테니 말이지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일행의 망설이는 태도에 알렌이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그럼 곧바로 2층으로 내려가도 되겠습니까? 다들 찬성하는 거 같으니 말입니다."
알렌이 정말 움직일 듯 선수로 나아가자 망설이던 에리엘이 한숨을 쉬며 답했다.
"…제가 조급했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으흠, 큼, 쓸모없는 과욕은 금물이지."
"알렌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알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통로 앞에서 몸을 돌렸다.
"그럼, 2층으로 진입만 한 후 돌아가도록 하겠…?"
일행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알렌이 말하던 중 의문 어린 소리를 냈다. 알렌이 바라본 벽면에는 고대문자로 적힌 문장이 쓰여 있었다.
"알렌 님, 무슨 일이라도…, 아."
알렌이 눈길이 향한 벽을 쳐다본 알렉시우스는 알겠다는 듯 의아한 눈을 한 일행에게 설명했다.
"이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출입구마다 적혀있는 글귀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예, 지금은 쓰이지 않는 사어지요. 그 뜻은 해석하기 어렵…"
"그건 내가 설명해줄게!"
밀레드는 자신의 차례라는 듯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나섰다.
그녀는 지금까지 알아서 잘하던 조원들 때문에 나설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언니는 해석할 줄 아세요?"
"응응. 2학년부터는 고대어를 교양 수업으로 선택할 수 있거든."
"그렇다면 해석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문장을 읽어내렸다.
?λο? ο κ?σμο? ε?ναι βαμμ?νο? ασπρ?μαυρο? και γκρι.
"온 세상이 흑색과 백색, 회색으로 칠해졌네."
알렌이 그 글귀를 응시하고 있던 이유는 그 뜻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회귀 전에 지식을 얻기 위해 많은 연구를 했던 게 자신인데, 고대어 하나 익히지 못할 리 있겠는가.
다만, 앨런이 조용히 입은 다문 이유는 하나였다.
Τ?τε το φεγγ?ρι ?γινε κ?κκινο και πολλ? αστ?ρια ?πεσαν.
"그러자 달이 붉게 변하며 수많은 별들이 떨어져 내리니."
그의 눈이 첫 번째 문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Ακ?μα και ο υψηλ?τερο? αστ?ρι απ? αυτο?? δεν ?ντεχε.
"그중에서…."
"으뜸의 별도 버티지 못했네."
알렌이 뒷말을 이어서 말하자 밀레드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후배도 고대어 읽을 줄 알아!?"
"예, 마법 서적은 번역본을 읽다 보면 본문과 다른 뜻이 나올 가능성도 있어 최대한 원서로 읽으려고 공부했습니다."
"…으음, 그렇구나."
밀레드는 자신이 자신감 있게 나선 분야마저 알렌이 알고 있자 아쉬운 얼굴이 되었다.
알렌도 그녀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앞으로도 이런 문장이 나오면 해석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후배도 할 줄 알지 않아?"
"저도 많이 아는 것도 아니다 보니 해석에 오랜 시간이 걸렸잖습니까. 더 잘 아는 사람이 맡는 게 더 효율적입니다."
"흐흥, 그래?"
"예."
그녀는 올라간 입꼬리를 가릴 생각도 없이 웃으며 답했다.
"그럼, 앞으로 고대어나 벽화 같은 게 나오면 내가 해석할게!"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알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 2층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하나의 문장만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흑색과 백색, 회색빛으로 칠해졌더라….'
그의 생각에 따라 세 권의 책들이 그의 눈앞을 떠올랐다.
하얀 책의 단서를 찾던 도중에, 생각지도 않은 단서를 얻었다.
'저 문장이 세 권의 책과 관련이 없을 수도 있지만….'
하얀 책과 유적의 연관성, 그리고 세 개의 색만 콕 짚은 이유가 그냥 일리는 없지 않은가.
그의 눈이 깊게 침잠되었다.
제82화
알렌의 조는 하루가 다르게 유적에 익숙해졌다.
하루 대부분을 소비해 1층을 통과했었던 둘째 날과 다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기록이 단축되기 시작했다.
셋째 날 그들은 2층에 내려간 것에 그치지 않고 3할가량을 통과했고.
넷째 날에는 2층을 거의 가로지르는 것에 성공했다.
만약 윌리엄이 며칠 이어진 강행군에 탈진하지 않았더라면 3층까지 내려갔을지도 몰랐다.
넷째 날과 다섯째 날은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휴식을 취했다.
여섯째 날, 완전히 회복된 상태로 유적에 진입할 일행은 2층을 무난하게 통과해 3층까지 내려갔다.
3층에서는 리빙데드 뿐만이 아니라 골렘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행은 3층도 2층처럼 빠르게 돌파하려고 했으나 생각보다 강한 골렘과 은밀해진 함정 탓에 초반을 맴돌며 적응하는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곱째 날에 3층에 완전히 적응하고 하루가 지난 여덟째 날, 실습한 날짜의 반이 지나서야 4층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하룻밤 만에 고된 여정을 끝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의 아침.
에리엘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대로는 안 돼요."
"무슨 말이지? 잘하고 있는 게 아니었나?"
에반이 의아한 얼굴로 대답하며 모닥불을 조정했다.
불 위로 고정된 냄비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밋밋한 스프를 먹던 첫날과 다르게 에반은 나름 이 요리를 괜찮게 만들 만큼 익숙해졌다.
뭐, 그것도 상인에게서 구한 소금 덕분이었지만.
"절대 아니에요. 에반, 우리가 4층까지 내려오는데, 얼마나 걸렸죠?"
"…음, 쉬었던 날을 제외하면, 6일?"
"그래요! 6일! 4층까지 내려가는데 벌써 실습일의 반이나 소모했다고요!"
그녀의 열변에도 에반은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7층까지 이제 3층밖에 남지 않았나. 남은 기간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내려갈수록 수준이 더 높아지잖아요! 남은 6일 동안 최선을 다한다 해도 제 예상에는 5층이 한계일거에요. 물리적으로 거리가 너무 멀어요."
"그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나?"
에리엘은 그의 태도가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렸다.
"아니, 소식 못 들었어요? 마리아가 속해있는 조가 벌써 2층까지 지도를 완성한 후에 3층에 진입했다잖아요!"
그녀의 모습은 전과 달라졌다.
최소한의 옅은 화장과 아카데미 교복 위의 단출한 가죽 장비.
아카데미에 입학했던 도도한 공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그곳에는 어떻게든 앞서나가기 위해 생각하는 궁수만이 존재했다.
"…뭐? 우리가 완전 공략을 포기했던 이유가 너무 어려워서 아니었나? 그런데 2층을 공략을 다 끝내고 3층까지 내려왔다고?"
"녜. 심지어 덜떨어졌다고 무시했던…."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다 알렌의 표정을 살핀 후 말을 이어나갔다.
"보충반으로 이루어진 조도 발견하는 방마다 수많은 유물이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적은 점수지만 유물의 수가 만만치 않다 보니 최소한 상위권은 갈 거라고 봐요."
변한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에반은 그간 유적을 오가며 쓸데없는 예절이나 허세 그리고 오만함을 일부 내려놓았다.
"지금 앞서나가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라는 소리예요."
"…그럼 곤란한데."
"그, 그럼 어떻게 하죠? 지금이라도 최단 돌파가 아니라 완전 공략으로 목표로 바꿔야 되는 게 아닌지…."
스프를 한 그릇 비운 윌리엄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에리엘이 그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늦었어요. 지금부터 지도를 다 밝혀봐야 오래 걸릴 뿐이구요."
"…그러면."
"목표를 조금 수정해야겠죠."
처음과 똑같이 변하지 않은 건 알렌 밖에 없었다.
"일단 생각해놓은 게 있긴 한데…, 알렌은 어때요? 먼저 생각해놓은 게 있으면 말해줘요."
만약 그들의 행동 곳곳에 조금의 품위가 묻어나오지만 않았다면 영락없이 젊은 용병 혹은 모험가처럼 보일 모습이었다.
아니면, 평범한 동료나 겉보기 그대로의, 학생처럼 보일지도.
자신도 저들과 다를 것 없는….
"알렌?"
"아."
에리엘의 의아한 시선에 알렌은 정신을 차렸다. 조원들의 곧은 시선이 알렌을 찔렀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혹시 아프다면 제가 치료를…."
"에리엘의 말대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방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은근한 기대감이 묻어나오는 시선에 알렌은 미리 생각해두었던 답변을 입에 담았다.
"방책이라 할 건 못됩니다. 그저, 어떻게든 쥐어 짜낸 대책에 불과하지요."
"그래도 빨리 말해봐요."
그래도 괜찮다는 조원들의 성화에 알렌은 짧게 답했다.
"행방불명 된 미신, 7층 수호자."
"오!"
뭔가 짐작한 듯한 에반의 감탄사에 에리엘의 시선이 획 돌아가자, 에반은 겸연쩍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크흠, 그냥 감탄해볼 것뿐이네."
"…에휴."
에리엘의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모르면 윌리엄처럼 그냥 조용히 있기나 해요, 에반!"
"…아, 알았다. 그런데 윌리엄은 언제나 조용하지 않나…?"
"반이라도 닮으라는 거에요."
"제, 제가 그렇게 조용하지는 않….'
"명심하겠다."
에반이 조용히 침몰하고 윌리엄마저 풀이 죽자, 알렌이 다시 설명을 이어나갔다.
"원래는 최대한 빠르게 7층에 도달하려는 계획이었지만…, 하루의 시간으로 어떻게 움직이든 물리적인 거리의 한계로 5층까지가 최선입니다."
"하루의 시간이 문제라면, 강행군을 해서라도…."
"그럼, 하루 동안 쉬지 못한 상태로 5층보다 더 아래인 6층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렇게 통과하더라도 더욱 강할 거라 생각되는 최하층 수호자를 잡을 수 없겠지요."
알렌의 논리정연한 설명에 에반은 답하지 못했다.
"그럴만한 체력도 되지 않고 말입니다."
이번에는 윌리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물론, 적당히 점수에 만족한다면 상관없지만… 노릴 거면 1등을 노려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마, 맞습니다."
에반과 윌리엄이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본래는 7층까지 최단 돌파에 성공하기만 해도 1등을 노려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현재 다른 방법으로 저희와 격차를 좁히고 있으니 확실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알렌이 말하는 다른 방법은 설마…."
에리엘은 알렌이 말했던 미신과 수호자의 뜻을 이해한 것인지 연신 미쳤다고 중얼거리다 결국 직접 물었다.
"알렌, 이런 말하기 싫은데…, 진짜 미쳤어요?"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거 아니라니까요?」
알렌은 키득거리는 베스틀라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 검신을 두드렸다.
"그래도…."
그녀는 첫 만남 때와는 생각할 수도 없는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마음에 드네요. 엄청."
윌리엄과 에반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에 멀뚱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베스틀라만 혹은 마음에 든다는 소리에 웃음을 터트렸다.
* * *
초대형 유적에는, 아니 다른 유적에서도 많은 미신이 존재한다.
뒤를 돌아보니 뒤따라오던 동료가 사라졌다거나, 잠든 고대인의 망령이 돌아다닌다거나, 사실 유적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멸망을 대비하기 위한 준비라든가.
그 수많은 미신의 대부분은 증명할 수도 없는 거짓이지만…, 진짜도 가끔 존재하는 법이다.
뒤돌아봤더니 동료가 사라졌다는 이야기의 실체는 가까운 곳에 있다.
마법으로 이동시키거나, 커다란 식물이 통째로 삼키거나, 알 수 없는 기계가 한순간에 지워버리거나.
그만큼 자주 등장하는 함정이며, 유적의 종류가 달라도 이동 함정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함정 중 하나였다.
방법은 유적마다 달랐지만, 눈을 뗀 사이에 동료가 사라졌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그렇게 흔한 함정인 만큼, 이번 초대형 유적에서도 순식간에 동료가 사라지는 함정은 분명히 존재했다.
아직 알렌의 조는 겪어본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이걸 이용해야 하지 않겠나.'
「....」
'다들 의욕이 넘치니.' 현재 다른 조원들은 흩어진 상황이었다.
윌리엄은 친분이 있는 평민에게 향했고, 에반과 에리엘은 다른 귀족들에게 접근했다.
뒤늦게 도착한 알렉시우스와 밀레드도 다른 선배와 길잡이들에게 알아보겠다며 걸음을 옮겼다.
'베스틀라.'
「....」
'…베스틀라?'
「아, 아, 네. 왜요?」
그녀는 이제야 알렌의 말을 들은 듯 멍청한 소리를 냈다.
'무슨 일 있나? 요즘 말 수가 부쩍 없지 않나.'
「아뇨, 잠깐 다른 생각 좀 하고 있었어요. 미안해요.」
그녀는 알렌이 검을 사용하지 않은 것 때문인지, 유적에 들어간 이후 말수가 줄어들었다.
「아까 식사 때 이야기한 거 말하는 거죠?」
'그래.'
「위험한 것만 빼면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것도 아티펙트 덕분에 안전하니 사실상 위험은 없다고 볼 수 있죠.」
'그래. 여러 함정 중, 하층으로 이동시키는 함정을 이용한다면 층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 테니까.' 그 후 7층의 유적 수호자를 잡는다면 다른 이들이 어떻게 하더라도 격차를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다.
「참 잘났어요. 아아. 얼른 검을 사용할 상황이 오면 좋겠다.」
베스틀라는 괜히 과장된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아마…, 조만간 올지도 모르겠어.'
「진짜, 진짜죠?」
'그래.'
「야호!」
알렌의 시선이 무슨 사건이 벌어진 듯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유적의 입구로 향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래?"
"야, 지금 난리가 난 거 몰라? 탈출용 아티펙트라고 받은 거, 그거 작동을 하지 않는다는데?"
"뭐? 그게 진짜라고? 아니, 설마…."
들리는 이야기를 정리해보니 2층을 탐험하던 조가 돌아오던 중 1층에서 기절한 채 쓰러진 학생들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탈출용 아티펙트는 소지자의 위험을 감지하면 강제로 학생을 탈출시킨다.
혼절이나 기절도 마찬가지.
의식이 없어진다면, 어떤 이유에서든 아티펙트가 발동되어야 했다.
그런데 쓰러진 학생 모두 탈출하지 못했다?
"현재 유적에 입장하지 않는 모든 학생에게 알립니다! 사고가 발생하여, 잠시 일정을 중단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알립…."
"아니, 교수님. 그게 무슨 말입…."
유적에 있는 무언가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리다.
3층과 4층으로 내려가는 출입구에서는 2층과 다르게 검은 책이나 하얀 책과 같은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 같은 정보가 없어서 아쉬운 마음이었다.
그러던 차에 사건이 벌어지니 알렌으로서는 다행이었다.
'…옛 신화시대를 조사해봐야 하나.'
알렌은 3층과 4층으로 내려오는 출입구에 쓰여있던 글을 떠올렸다.
Το ιερ? δ?ντρο δεν ?χει καν φυτρ?σει.
Ο Σο?ρι, που υποτ?θεται ?τι ?ταν στην κορυφ? στ?χτη?, ?χασε ?ναν φ?λο του.
Μ?νο ο γελοιοποιημ?νο? που κουβαλο?σε το πτ?μα κρ?φτηκε μ?νο? του σε ?να υπ?γειο.
μεγ?λο? βασιλι??, πατ?ρα? των σοφ?ν, Το Evil Thorns βρυχ?ται.
?χω κρ?ψει κρυφ? ?ναν πολ?τιμο θησαυρ?.
?ποιο? κι αν, θα αποκτ?σετε καλ?τερο? σ?ντροφο? για το υπ?λοιπο τη? ζω??.
신성한 나무는 채 싹도 틔우지 못하였고.
재의 꼭대기 자리에 예정되었던 수리는 친우를 잃었네.
시체 멘 조소하는 자만이 홀로 땅굴로 숨어들었도다.
위대한 왕, 현명한 자의 아버지, 악한 손이 소리를 지르매.
내가 소중한 보물 하나를 몰래 숨겨두었으니.
누구든 평생을 함께할 최고의 동반자를 얻으리라.
* * *
유적에 진입했던 선발대 그리고 학생들 모두 진입한 적 없는 7층의 지하.
유적의 최하층에 있는 홀.
아카데미의 조사대만이 초기에 확인하고 떠나간 장소.
그런 장소에 인형 하나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심부를 지키고 있는 동산만 한 골렘은 그를 인지하지도 못한 듯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간단했다.
탁- 탁- 탁-
"이건 지우고…, 이건 남겨두고."
지워야 할 벽화와 문장들은 없애버리고, 남겨둬야 할 것만 남기는 것.
"혜성이 떨어지기 전에 끝내서 다행이구나."
갈색 머리의 녹안.
배가 불쑥 나온 중년의 남자는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작업을 마무리했다.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위층도 마무리 했을 텐데…."
그는 아쉽다는 듯 표정을 흐리더니, 품속에서 작은 거울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경건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는 입을 열었다.
"카샤님, 작업을 모두 끝마쳤습니다."
"수고했다."
거울에서는 미려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잠시간 몸을 움찔거리더니,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아, 아닙니다. 모두 그분의 안배가 아니겠습니까!"
"그래, 너의 노고는 모두 보상받을 것이다…."
거울의 표면이 검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페른."
"아아…."
검게 변한 거울은 잠시간 하얀빛을 뿜어내더니, 순식간에 불어나 남자를 삼켰다.
웅웅-
골렘이 뒤늦게 그 자리를 확인했지만, 언제 사람이 있었냐는 듯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공간은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제83화
학생들이 시끄러운 가운데 교수들은 한곳에 모여들었다.
갈슈딘 아카데미의 기재들을 가르친다고 할 수 있는 교수들답게 그들은 냉정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아티펙트는 이미 출발하기 전에 모두 점검이 끝났습니다."
"사전 탐사 또한 조사대에서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확인이 끝났잖습니까."
그들도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유적에 아무리 아직 발견하지 못한 비밀이 많다지만, 벌써 수백 년이다.
아카데미에서는 수백 년간 대사막의 유적을 탐색했고, 기록했으며, 문서로 남겼다.
그렇기에 순조롭게 진행되어야 할 실습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 일반 유적도 아닌 초대형 유적이니 의외의 일이 발생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이대로 지지부진한 이야기를 할 수만은 없기에 그들은 이야기를 돌렸다.
"우선 쓰러진 학생들은 어떻습니까?"
"조금 전에 깨어나서 확인했지만, 당시의 기억이 모호하다는 걸 제외한다면 문제없습니다."
"학생들의 영상 기록구는 확인하셨습니까?"
"그건 제가 먼저 확인했습니다만…."
다른 이들의 물음에 기록 장치를 보관하던 교수는 침음성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교수 몇이 직접 현장을 조사했기에 확실합니다."
"예? 그게 무슨…."
그는 말하는 것보다 보는 게 낫다는 듯 아티펙트를 작동시켰다.
그러자 네모난 화면이 공중에 떠오르며 당시의 현장을 상영했다.
"보시다시피, 이번 학생들은 비교적 안전한 1층에서 유물을 얻으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흠, 1층이라."
학생들은 아카데미의 인공유적에서 미리 연습했던 대로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를 보십시오."
그가 말하기 무섭게 화면이 갑작스럽게 검게 변하더니 털썩하고 쓰러지는 소리만 울렸다.
비명, 저항, 위협.
그 어떤 징조도 없이 학생들이 쓰러졌다.
그 기이한 광경에 창술을 가르치는 교수, 밀튼이 인상을 썼다.
"독은 아닌 것 같은데…. 정신계 함정이 유력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학생들에게 특유의 저항 반응이 없지 않소. 다이악스의 교차 검증에서 인간은 정신을 건드리는 그 모든 것에 대해 저항을 가진다는 사실이 증명되지 않았소?"
"맞는 말이지요, 그렇다고 저 영상에서처럼 한순간에 저항을 없애려면 압도적인 실력 차가 존재해야 할 텐데…."
그는 그 말까지 하고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존재를 조사대에서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면 일주일이 넘게 생도들이 유적을 휘젓게 놔둘 이유는 뭐란 말인가.
조사대가 유적의 심층부까지 들어올 때도, 선발대가 수색할 때도 조용히 있다가, 학생들이 일주일 동안 유적을 뒤지고 나서야 나선다?
"웃기는 소리지. 차라리 새로운 종류의 함정이 발견되었다는 게 더 그럴듯하겠소."
"으음…, 하긴, 그쪽은 이사장님이 직속으로 주관하시는데 그런 실수를 할 이유가 없지."
"정신이 아닌 영혼 쪽이라고 해도 마찬가지. 영혼 쪽이라 해 봐야 강령술 계통일 텐데, 가만히 기절시켜 둔다는 건 또 무슨 소리요? 그 미치광이들이."
교수들은 별 표정 변화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정도 사고쯤은 일 년에 몇 번이나 마주치는 종류의 것이었다.
어느 세력에서 테러를 저지르거나, 유적에서 고대의 괴물이 튀어나오거나, 갑자기 잘 작동되던 아티펙트가 멈추거나.
돌발적인 상황은 그들에게 있어 이제 일상의 한 부분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별 동요 없이 이야기하기보다는 다른 부분을 꼬집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지만…, 한 사람도 제대로 대처를 못 했으니 이건 감점 요인이군."
"누군가 반응이라도 했다면 그래도 감안하겠는데, 쯧. 요즘 학생들은 너무 물러졌군.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말이야."
"맞아요, 맞아. 내가 괜히 이러는 게 아니라니까? 이게 실전이면 어찌할 거야, 어? 적어도 주위 동료들을 위해 신호탄을 쏠 시간은 벌어야 하지 않겠소?"
한 교수가 말한 것에 이어 다른 교수들도 요즘 학생은 경계심이 낮아졌다느니, 재능만 믿고 나태해졌다느니 이야기를 나눴다.
그 광경에 자크니르는 공감이 가면서도 공감이 가지 않았다.
'저 나이 때 대처를 잘하는 아이들이 어디 있다고 참….'
한편으로는 몇천 명의 경쟁을 뚫고 들어온 갈슈딘 아카데미의 학생이라면 당연히 이 정도 고난은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언젠가 마왕 같은 적이 나타날 때를 대비해 용사의 동료로 키우기 위함이 목적인데. 이겨 내는 건 불가능하더라도 일말의 저항 정도는 해야 했다.
설령, 그 저항이 발악에 불가할지라도.
짝짝-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요. 이미 이야기가 퍼져 학생들이 불안해하는 모양입니다."
"아니, 위험한 건 다들 알고 온 게 아니오? 실전이 소풍도 아니고, 이 정도 사고는 예상하지 않았겠소?"
"그게…, 이미 실습을 포기하겠다는 조도 몇 나온지라…."
교수들은 벌써 그럴 줄 몰랐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아니 그게 무슨…."
"또 아티펙트에 문제가 있으니 항의하겠다고 합니다. 그 의견에 동조하는 학생들의 수가 꽤 많습니다."
"아니, 하…."
실전이 장난인가. 나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시간이 흘렀군, 흘렀어…."
"에잉, 쯧. 삼십 년 전만 해도 포기하는 놈이 병신 취급당하는 게 당연했건만…."
교수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던전 실습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유적의 수준이 높아서 학생들이 꽁무니를 뺐다?
"벌써부터 무슨 소리를 들을지 두려워지는군."
"몇백 년간 커다란 일이 벌어진 적이 몇 없다지만 참…."
"절대 그럴 수 없소, 절대로! 아카데미의 위신 때문이 아니더라도 여기서 그만두는 게 말이나 되오?"
실제 전투는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며, 벗어나고 싶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걸 알려 주기 위한 실전이오, 실습이었다.
"어쨌든 실습은 강행되어야겠지요. 하지만, 이대로 강행한다면 많은 학생이 지레 겁먹고 포기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학생들의 의욕을 고취시키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도록 독려할 수 있을까.
평생 교수 일을 하면서 해 본 적도 없고, 해 볼 거라고 생각지도 않은 사태에 그들의 표정이 어두워질 무렵, 회의를 조용히 지켜보던 자크니르가 입을 열었다.
"제가 유적에 진입하겠습니다."
"아니, 자크니르 님 그게 무슨…?"
처음 입을 열었던 환영 계통 교수, 클라이크의 질문에 자크니르는 별것 아니라는 얼굴로 답했다.
"제가 유적에 직접 들어가 지켜보겠다고 학생들에게 알리십시오."
"아!"
그들은 그 한마디만으로 자크니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했다.
"저들의 불안감을 실체가 없습니다. 가감 없이 말하자면, 미신과 다를 게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안심할 수 있는, 기댈 거리가 있다면…."
"유적에 들어가겠군요…."
"해결된 것이 그 무엇도 없음에도."
팔강이 직접 유적으로 들어가 안전을 지키겠다고 하면 누가 못 믿겠는가.
"실제로 저런 일이 다시 한번 생긴다면 보호해 줄 수도 있으니, 거짓도 아니지 않습니까?"
교수들은 그럴듯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은 일단 동의하지 않고 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유적에 출입하는 날짜는 6일, 아니 오늘이 지난다면 5일밖에 남지 않는다.
그 5일 동안 자크니르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유적에 있어야 한다. 딱 봐도 고생길이 험한데 누가 직접 해 달라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은 원래 교수들이 해결해야 될 일이다.
그걸 만약을 대비해 따라온 팔강이 맡게 된다면….
그러나 그들은 일단 나쁠 것 없었기에, 용기를 낸 교수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자크니르 님께 무척 감사한 일입니다. 학생들을 위해 직접 움직이는 그 열정에 감사를…."
"음?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자크니르는 입에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 저 혼자 학생들을 위해 봉사할 수 없잖습니까."
"그 말은…."
"다 같이 가시지요. 다 같이."
그 말에 교수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 고행을 예상했는지 이 자리에 최고령에 해당하는 수류 계통 교수, 말베른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하, 하지만 저는 올해로 육순이 넘은 나이고, 이제 손자까지 볼 차례입니다만…."
"그렇다면 저 혼자 저 어둡고, 위험한 유적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입니까?"
그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자, 말베른은 급하게 말을 정정했다.
"아, 아닙니다. 제 말뜻은 노인이라고 놔두고 가시면 섭섭하다는 뜻이었습니다. 하, 하…."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속에서는 욕지거리가 차올랐다.
팔강에게 위험한 것이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하하하, 제가 착각했습니다. 아직 나이가 어려 사회 경험이 적어서 그런 거니 다 이해해 주시지요."
"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노익장의 힘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다른 교수들도 모두 학생들을 위해 함께하시겠지요?"
그가 웃는 얼굴로 묻자 모두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 울적했다.
"가겠소. 가야지요. 어흠, 학생들을 위한 일인데."
"크흠, 오랜만에 유적에 들어가니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하하하…, 이 나이에 학생들과 함께하려니 젊어진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그들의 대답에 자크니르가 만족했는지 힘차게 대답했다.
"다들 동의하니 기분이 좋습니다. 아참, 이렇게 가시는데 이야깃거리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들 6위계나 7위계에서 막혀 있는 것 같은데…."
자크니르의 말에 교수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다 늙은 중년 남자들의 시선이 그렇게 좋지 않았지만, 자크니르는 감내했다.
이렇게 끌고 가 봤자 감정밖에 더 상할 테니 당근도 쥐여 줘야 했다.
"어두운 곳에 있으면 심심할 테니 돌아가면서 위계를 주제로 토론이나 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저, 저야 찬성입니다!"
"아이참, 제가 어두운 곳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아합니다!"
"어흠…, 늙어서 그런지 요즘은 어둡고 적막한 곳이 좋더군요."
자크니르는 아이처럼 떠들어대는 그들을 바라보며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회의가 성황리에 종료되었다.
* * *
"윌리엄, 들었어요?"
"…다들 그 얘기만 하고 있더군요."
"이렇게 시끄러운데 누가 모르겠나."
"그럼 어떻게 할래요…?"
에리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주위를 살폈다.
주위에는 아침에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하느라 시끄러웠다.
"어떻게 하기는 어떻게 해, 여기서 포기할 수야 없지."
"그래도…, 아티펙트가 작동을 하지 않는다는데…."
"나는 자크니르 님을 믿네, 무려 최연소 팔강이 아닌가? 그리고 교수님들도 새로운 함정의 한 종류라고 공표했지 않나."
"그건 그런데요…."
"교수님들도 만약을 대비해 유적 곳곳에서 대기하고 계신다는데 걱정할 게 무엇이 있나."
에리엘은 여전히 인상을 펴지 못한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속으로 열심히 새로운 함정과 그로 인한 위험 그리고 그로 얻을 보상을 열심히 저울질해 보고 있겠지.
알렌은 그들을 바라보며 유적에 있는 게 무엇일지 생각하고 있었다.
'마왕의 수하일까? 아니면 흑마법사? 그것도 아니면 고대의 마수?'
하늘의 노을은 이미 저물어 주황빛 한 뼘도 보이지 않았고, 검은 밤 자락 사이로 반짝거리는 별들만이 고요하게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모두 생각에 잠겨 분위기가 가라앉자, 윌리엄이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그, 다,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말고 별이라도 보는 게 어떻습니까. 제 친구 중 한 명이 중부 출신인데, 이 지역에 몇십 년에 한 번씩 유성우가 떨어진다고…."
"...."
"그, 그 별들이 어찌나 많던지 그 모습이 별의 바다 같다고 하더군요…, 그, 제가 따로 조사해 봤는데 82년 주기로 혜성 하나가 지나가는데 이게 바로 유성우의 원, 인이… 되는데… 곧 시기가 된다고…."
윌리엄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는지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다,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
정적으로 변한 분위기.
시끌벅적한 주위와 유리된 것 같은 적막함에 알렌이라도 입을 열어야 하나 고민할 때쯤, 웃음소리가 들렸다.
"푸흐… 뭐예요, 윌리엄. 지금 분위기 바꿔 보려고 한 거예요? 저 때문에?"
"그, 그게 아니라,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그게 그거 아니에요? 윌리엄도 참, 저한테 반했어요? 에반도 아니고서야 그렇게 노골적으로…."
"케엑, 자, 잠깐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나!"
윌리엄은 당황하고, 에리얼은 은근슬쩍 눈웃음쳤다. 에반은 그 나름대로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후, 그래도 덕분에 기분이 나아졌네요. 고마워요. 그리고 유적은…."
에리엘은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는 리스크를 안 졌다고…. 한 번 해 봐요. 적어도 시도는 해 봐야 나중에 후회는 하지 않을 거 아니에요?"
"음, 맞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자크니르 님과 대화도 나눠 봤으면 좋겠다만…."
"만나면 해 보죠, 뭐. 우리가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세 명이 웃음을 터트리며 대화를 나눌 때, 베스틀라가 갑작스럽게 불쑥 물었다.
「알렌, 당신이 이번 실습 기간 동안 고생한 걸 저들이 알까요?」
'뭐?' 알렌의 시선이 세 명의 학생들에게 향했다.
그 나이대의 청춘을 즐기며, 그에 걸맞은 고민과 향상심을 갖춘 존재들.
「당신이 몇 주 동안 최대한 맞춰 주고, 정보도 구해 줄 정도로 노력한 게 의미가 있냐고요.」
'글쎄, 모르지 않을까.'
「그런데 왜 그렇게 열심히 어울려요? 대충 호감만 살 생각이라면서. 당신답지 않아서 조금 놀랐다니까요?」
베스틀라의 물음에 알렌은 조금 고민했다.
'그건….'
「그새 정이라도 든 거예요?」
알렌은 샛노랗게 타오르는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쑤시며 조금 늦게 답을 내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그저… 조금 장단을 맞춰 줬을 뿐이지.'
에리엘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에는 처음에 앉았을 때와 다르게 고민 하나 없이 맑았다.
제84화
"저는 먼저 들어갈게요. 오늘 불침번 초번은 알렌이죠? 내일 봐요."
"나도 이만 일어나 보지. 이동 함정이 있는 곳은 대충 유추했으니, 내일이 기대되는군."
에반도 오만한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느슨한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천막 안으로 사라졌다.
'나답지 않아서 놀랍다니.'
알렌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베스틀라 안에서 자신이 어떤 이미지인지 짐작도 가 쓴웃음을 지었다.
알렌은 알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결국, 어떤 변명을 대든 자신은 저들과 진심으로 어울릴 수 없다.
자신은 동생을 위해 그 어떤 것이든 할 것이고, 그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율리우스를 찾을 방법을 찾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인데, 다른 곳에 빠지면 뭐가 되겠는가.
즐기면 안 되었고, 진심이 되어서도 안 되었다.
"알렌."
"...."
"알렌?"
"…아, 아. 생각에 잠겨 못 들었습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윌리엄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알렌을 향해 조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 고민이 있으신가요? 얼굴에 수심이 깊어 보이길래…."
알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동 함정을 이용할 수 있을지, 이용한다면 다시 돌아오는 게 가능할지 생각 중이었습니다."
알렌의 대답에 윌리엄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냐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내일 생각하셔도 될 일 아닙니까."
"제가 조장인데 미리 생각해 둬야지요."
알렌이 작게 웃으며 답하자, 윌리엄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도 알렌, 아니 조장님답군요."
"그런데, 불침번은 저 혼자인데 이제 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저, 저도 생각할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야."
자연스러운 침묵이 둘 사이를 감돌았다. 모닥불은 자신을 봐 달라는 듯 화려하게 타오르며 생의 마지막을 끊임없이 불태웠다.
타닥- 탁-
"그거 아십니까?"
윌리엄의 눈은 모닥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저는 처음에 모든 귀족이 괴물인 줄 알았습니다. 푸른 피가 흐르고, 가족에게도 무자비한 냉혈한에, 이득을 위해서라면 변이라도 먹는답니다."
처음에 자신을 낮춘 것도, 중간중간에 이들의 행동에 복잡한 심경이 들었던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틀린 것도 아니지요."
실제로 그런 귀족들이 많았다.
귀족임에도, 상인처럼, 이리떼처럼 구는 놈들.
알렌의 머릿속에도 한 명이 떠올랐다.
가문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제 아들이라도 버렸던 이가.
"하지만 맞다고 할 수도 없습, 아니, 없었습니다."
윌리엄이 고개를 저었다.
그 편견이 깨지는 건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고작해야 몇 주 전, 아카데미에 왔을 때는 모든 것이 두려웠다. 고아로 자라 계급의 밑바닥을 전전할 뻔했던 게 윌리엄이다.
만약, 그 재능을 알아본 근처 마법사 한 명이 아니었다면 살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에반은 겉으로는 오만하지만 속은 여린 사람입니다. 자신 때문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항상 완벽함을 연기하려고 합니다."
그게 지나쳐 오만함으로 비쳐 보일 뿐이다.
처음에는 말하는 것도 떨렸지만, 지금은 그의 오만한 모습에도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 않았다.
"에리엘은 자존심이 높지만, 장난을 무척 좋아하십니다. 그거 아십니까? 일부러 저와 에반님의 반응을 보기 위해 오해할 만한 말을 하시는 것을."
귀족의 공녀라니. 실수로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뺨이라도 맞을까 얼마나 움츠렸는가.
그녀가 자신의 태도를 이용해 계속 장난을 치며 다가왔기에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알렌님은… 공정했습니다. 차석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덕에 처음에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모두 정말… 좋은 분입니다. 제가 어울리기 주저할 만큼."
말더듬이에 평민이라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던 학생은, 이곳에 없었다.
그의 진지한 말에 알렌은 고개를 깊이 숙여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냥, 그냥 말하고 싶었습니다. 감사도 드리고 싶었고요."
윌리엄은 그렇게, 흐릿하게 웃었다.
"다른 분들의 평가만 말하면 조금 그러니 저도 말하자면… 저는 여동생을 찾고 있습니다. 제가 고아라고 말씀드렸던가요?"
"…아니요,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옛날 노예로 팔려 나갔던 여동생을 찾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무작정 아카데미로 왔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조금 헤맸습니다만…."
그는 자신의 아카데미 생활을 떠올린 듯 미소짓더니, 이내 확신이 찬 눈으로 답했다.
"지금은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름 하나 밖에 생각이 안 나고, 저랑 같은 구불거리는 흑발이라는 것밖에 기억이 안 나지만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모습은 희망과 결단에 차 있었다.
알렌은 그 모습에 다소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한쪽에서는 그가 이 이야기를 퍼트려 봤자 별 영향력이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저도…, 찾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린벨과 이넬리아, 베스틀라 그리고 카트린느만 아는 비밀. 레이첼에게도 아직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누구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윌리엄의 물음에 알렌은 침묵했다. 자신의 태도가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던 걸까. 윌리엄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젠가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반드시라…."
알렌은 그의 말을 곱씹으며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에, 평소와 같은 근심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예!"
알렌은 자신의 사정도 모르면서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모습이 우스웠지만…, 정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쓰,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습니다! 저, 저는 인제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윌리엄의 귓가를 보니 붉게 물들어 부끄러움을 겨우 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고개만 뒤로 돌렸다.
"앞으로도…, 이런 생활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알렌도 너무 혼자만 힘쓰지 마십시오."
그가, 아까와는 달리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희도 동료지 않습니까. 물론… 저희가 미덥지 않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좋은 의견이라도 나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
그리고는 재빨리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내일 아침에 보겠습니다."
알렌은 그가 떠나가는 가운데, 그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풀어진 건가? 아니면….'
「…괜찮아요?」
모닥불의 빛은 고개 숙인 얼굴까지는 닿지 못했다. 베스틀라의 물음에도 알렌은 답하지 않았다.
그 어떤 말도.
* * *
[팔강 중 한 명인 자크니르가 사고를 방지하고자 유적에 들어간다.]
사고가 일어난 지 몇 시간이 지나 공표된 소식에 교수들의 예상대로 굉장한 호응이 뒤따랐다.
-자크니르 님이 오셨다고!?
-언제? 어떻게? 아니, 그보다 유적에 들어간다는 거 진짜야?
-우리 조는 들어간다. 내일, 그리고 그분과 꼭 만날 거야.
처음에 불안한 마음에 유적에 들어가길 주저하던 학생들도 대번에 마음을 바꿨을 정도. 그 정도로 팔강이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커다랬다.
공식적인 여덟 명의 강자 중 하나.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그의 존재 하나만으로 든든했으니까.
다만, 그 의욕이 너무 앞선 나머지 무작정 유적으로 들어갔다가 탈락해버리고 마는 웃지 못한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교수들은 그 소식에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뭐 어쩔 수 있을까.
돌아간다면 다음 학기에 정신 훈련을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고 마음먹을 뿐.
"알렉시우스, 여기가 맞습니까?"
"예, 이곳이 맞을 겁니다."
알렌 일행은 아침에 다른 학생이 몰려들 것을 예상해 조금 일찍 유적으로 진입했다.
몇 번이고 내려온 나선형 계단을 거쳐 눈에 익은 회색빛 통로를 지나 안쪽으로. 그러나 오늘은 최대한 빠르게 내려가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틀리면 어쩌죠?"
"흠… 솔직히 이쯤 되면 다른 학생들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닐까 싶다만…."
알렌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다독였다.
"탈락할 때의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들은 어제 하루 동안 탈락자들을 중심으로 공간 이동 함정이 어디에 있는지 정보를 모았다.
실제로 윌리엄을 비롯해 에반, 에리엘 그리고 밀레드와 알렉시우스까지 다양한 정보를 모아왔지만….
쿠구궁-
알렉시우스가 함정을 발동시키자 바닥이 열렸다가 순식간에 닫혔다.
"…이번에도 꽝입니다."
벌써 다섯 번째다.
아쉽게도 이른 아침부터 대낮이 될 때까지 열심히 수색했음에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눈앞에 있는 함정만 하더라도 그저 단순한 함정일 뿐 공간 이동의 함정은 아니었다.
"애들아 걱정하지 마! 오늘이 못 찾더라도 괜찮아. 내가 다른 얘들한테 더 자세히 알아볼 테니까. 그러니…."
"안됩니다."
알렌이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밀레드는 기분이 나쁠 만한데도 오히려 알렌이 그렇게 한 이유가 궁금하다는 듯 의문을 물었다.
"왜?"
"어제 저희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목적을 눈치채는 사람이 존재할 겁니다."
"하지만 눈치 채더라도 이미 우리가 먼저 알아낼 다음일 텐데 괜찮지 않아?"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정보를 얻기 쉽지 않을 겁니다. 어제 저희가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우연찮게도 사고의 덕이 컸지요."
그게 아니었다면 앞으로의 경쟁자가 될 텐데 쉽게 정보를 알려줄 리가 없었다.
사고로 인해 유적의 입장이 금지되고 불안감이 조성되었기에 그나마 쉽게 정보를 얻게 된 것이다.
"공간 이동 함정을 수소문 하는 것을 알았을 테니, 저희 조가 최단 돌파를 목표로 움직인다고 다들 파악했을 겁니다."
먼저 함정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었다.
사람들은 1등, 최초에만 시선을 둘 뿐이니까. 2등이 얼마나 노력을 했든, 어떤 과정을 거쳤든 다른 이들에게는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어쩌면, 그 정보를 인질로 다른 걸 요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령, 고대 유물이나 돈 같은 것들이 있겠지요."
"화,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윌리엄은 알렌의 말에 공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부끄러운 말을 한 기억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지 눈이 마주치자 목덜미가 붉게 변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무작정 모든 장소를 확인하려 든다면 시간이 엄청 소모할 텐데…, 어쩌려고 그러나."
"알렌의 말을 토대로 생각한다면…, 지금쯤 공간 이동 함정을 팔려는 자들도 밖에 있을 텐데."
에반은 쉽게 해결되리라 생각했던 일의 진행이 막히자 난감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일행은 세 곳을 더 이동했다.
다음 함정은 바람 칼날이 스쳐 지나갔고, 두 번째는 강력한 인력이 뻗어왔다.
마지막 세 번째까지 화염이 넘실거리며 공기를 굴절시켰다.
점점 의욕을 잃어가는 일행을 보며 알렌은 앞으로 나섰다.
'여기서는 내가 도움을 줘야겠군.'
본래 조원들이 찾을 수 있게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생각을 바꿨다.
앞으로 어떤 괴물이 이 유적에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차라리 빨리 목표를 끝마치고 내보내는 게 더 옳은 선택일 수 있었다.
"알렉시우스, 지도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당연히 드릴 수 있습니다만…."
알렉시우스는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그에게 지도를 넘겼다.
일주일간 유적을 돌아다니며 지도는 하얀 선이 가득했다. 알렌은 조원들이 얻은 정보 중 가능성이 없다 생각한 건 전부 배제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여기, 이 부분은 완전히 제외하겠습니다."
"에? 아, 알렌? 갑자기 왜요…?"
그의 행동에 놀란 에리엘의 질문에 알렌은 조원들 모두 납득할 수 있게 간단히 설명했다.
"공간이 이동될 때는 그 전조로 공간이 물결치며 단절됩니다. 방금 제외한 곳들은 설명을 들었을 때, 공간 이동의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알렌 만약의 가능성이라도…."
"설령 그곳에 공간 이동 함정이 있더라도, 확실한 곳부터 먼저 간 후에 확인해도 늦지 않습니다."
알렌이 묘한 박력으로 말을 잇자,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북서쪽의 네 곳과 동남쪽의 두 곳도 마찬가지. 공간 이동 시 느꼈던 묘한 어지러움은 이동했을 시의 멀미가 아니라 환영에 저항하는 무의식의 반응이지요."
알렌의 손가락이 지도를 따라 움직였다. 조원들의 시선도 그 손가락을 따라갔다.
"동서의 한 곳과 남쪽의 두 곳은 공간이 물결치며 이동했다고 했기에 얼핏 보면 공간 이동 같아 보이나, 사실 공간 자체를 압축시키는 함정입니다."
"…그 이유는 뭐지?"
"공간 이동했을 때 물결의 파동이 벽처럼 밀려왔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공간 이동할 때의 파동은 아래위로 쭉 뻗어진 타원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군…."
"질문 더 있습니까?"
알렌의 막힘없는 대답에 질문한 에반은 괜히 자신이 잘못한 건가 싶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네…."
"그렇다면 설명을 계속하겠습니다."
알렌은 그 뒤로도 십 여 곳을 각자 다른 이유로 함정을 제외했다.
"이 장소는 제단이라고 했지요. 제단으로 공간을 이동시켰다는 말은, 유적 내의 이동보다 다른 차원의 존재에게 의식을 치…."
"정방형의 마법진과 방 네 면을 장식한 거울. 그건 공간 이동이라기보다 거울의 이면 세계로 봉인하기 위한 술식…."
"세 개의 입방형 상자와 중앙의 검이라…, 무척 희귀하고 어려운 술식이지요. 가까이 다가가면 입방형의 상자로 이동되는 고위…."
그들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에 틈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의 이론이니, 어디서 검증된 논문인지 그런 어려운 설명을 제외하고도 알렌의 설명은 마법사가 아닌 이들도 알아듣기 쉽고 조리 있었다.
"…알렌도 역시 마법사가 맞았네요."
에반도 열정적인 어조로 설명을 하는 알렌을 보며 동의했다.
"필요할 때만 마법을 쓰면서 낭비하지 않기에, 역시 차석쯤 되면 다른가 싶었다."
"마, 마법사가 마법에 미치지 않으면 마법사가 아니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윌리엄이 유명한 속담을 중얼거리며 내심 알렌도 사람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이해했다고 생각하는데…, 더 질문할 사람 있습니까?"
그렇게 무수한 이유로 제외된 곳을 제외하고, 단 두 곳의 장소만 남아있었다.
"없어요…."
"크흠, 어서 가지 않고 뭐하나. 늦으면 안 되지."
"알렌 후배가 공간 계통에 조예가 있는 건 알았는데, 이 정도 일 줄은…."
알렌은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낮게 속삭였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초대형 유적 탐험, 던전 실습을 끝낼 시간이 다가왔다.
* * *
율리우스의 조는 며칠 동안 큰 성과를 얻고 다시 유적을 내려왔다.
"잠시 휴식하도록 하시죠, 저는 잠시 길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해."
율리우스가 허락하자, 애리니가 잠시 정찰하고 오겠다며 골목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조원들은 각자 잠시간의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모두 앉아있는 가운데, 어중간한 키의 소년 혼자만 왕성한 호기심을 채우겠다는 듯 주변을 살폈다.
"음…, 이 유적의 구조나 양식을 살펴보면 이곳은 성이나 종교적 건축물은 아니겠군요."
가늘고 허스키한 목소리.
마테우스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여유롭게 결론을 내렸다.
"…성이 아니라고?"
아벨린의 의아한 목소리에 마테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관찰한 바로는 예, 성이 아닙니다."
"왜? 첨탑도 네 개나 있고 구조도 얼추 맞는 것 같은데?"
"알다시피, 유적은 멸망한 고대 제국의 유산입니다."
대륙 전체를 지배했다던,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워냈다는 고대 제국의 유산.
뚜벅뚜벅-
"그렇기 때문에 고대 제국은 여러 방면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뤘지요."
마법, 정령, 기계, 무술 같은 것에서부터 대륙의 식량을 책임질 수 있게 만든 기술까지.
"유적에는 갖가지 유물과 함께 그런 잃어버렸던 기술도 잠들어 있습니다."
"누가 그걸 몰라? 뻔한 말 하지 말고 본론을 말해."
아벨린의 코웃음 소리에 마테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서 유적의 형식도 다양하게 나뉘고요. 그런데 여기는…, 건축의 목적을 모르겠습니다."
"뭐?"
"건축물에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거주, 학업, 훈련… 심지어 보관까지. 그건 유적에도 마찬가지고 말이죠."
마법이 주로 발견되는 건 누군가의 연구실이나 지금은 없어진 학파의 본탑이며, 엘프들이 기를 쓰고 찾아내는 유적은 식물을 주로 연구했다는 세계식물원의 분원이다.
"그런데 여기는 그 무엇도 아니다?"
"음…, 예. 저는 그…."
율리우스의 물음에 마테우스는 생각하는 듯 잠시 어린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대답하려는 찰나,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잠시,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그렇다면 이곳은 무슨 역할을 한다는 거지?"
율리우스랑은 다른 특징적인 진한 바다 빛 머리카락, 남쪽의 끝에 있는 작은 해양 왕국의 공주 비엘리 카자나프였다.
그와 동시에 조에 합류한 2학년 선배이기도 했고.
"그건… 제 생각에는 아마 감옥? 아니, 그것보다는 무언가를 봉인하기 위한…, 그 비슷한 장소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감옥?"
제85화
"선배님은 공주라고 하셨으니 성에 구조에 잘 알고 있겠지요."
"그건…, 그렇지."
"성에 있을 때 필수적인 적인 구조물이 뭐가 있습니까?"
"…뭐? 잠시 기다려봐."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손가락을 접어가며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우선…, 아바마마, 아니 왕과 그 가족들이 머물 방과 손님들을 위한 객실과 응접실, 그리고 알현실을 비롯한 회의실과 연회를 위한 거대한 홀과 식당, 도서관도 필요하고 또, 보물을 보관하는 보고랑 그리고…."
집무실, 병참 창고, 무기 보관실, 경비초소, 병사 숙소, 각종 정부 기관을 위한 기본 시설, 마구간, 연병장, 첨탑, 성벽, 욕탕, 주방, 만찬실, 왕족 전용 각종 편의 시설, 하인들 숙소, 생활공간, 전용 정원과 사냥터, 식량 창고, 간이 마탑….
마테우스는 그녀의 입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구조물에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그만, 그만! 하나 있지 않습니까. 제일 필수적인 것 말입니다."
그의 말에 비엘리가 곰곰이 생각에 잠기자, 아벨린이 입을 열었다.
"필수적인 거? 내가 성에서 산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대부분은 나온 것 같은데?"
성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곳이겠지.
율리우스는 근질거리는 입을 다물었다. 아직 신뢰가 깊지 않기에 그녀의 과거에 대해서는 모른척해야 했다.
"매일 하루 세 번은 들리는 장소 말입니다."
"세 번…?"
다들 고개를 갸웃거리자 마테우스가 한숨을 내쉬며 정답을 말했다.
"화장실 말입니다. 화장실."
"아, 맞아!"
"그게 있었지."
다른 쪽으로 생각하느라 고려하지 못했다.
마테우스의 말에 잊고 있었다는 듯 아벨린과 비엘리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뭐, 요즘은 미관을 망친다고 없애는 추세가 있는 모양입니다만…. 그런 예를 제외하면 반드시 있는 장소지요."
"그런데, 그게 왜?"
"이곳을 돌아다니면서 화장실 같은 장소, 아니 객실이라도 하나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러고 보니…."
무기고나 창고를 비롯한 많은 방을 파헤쳤지만, 그곳에 누군가 생활했던 흔적은 없었다.
"함정이나 수호자가 있다고 해도 유적에 원래 있던 구역이 없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지."
비엘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본다면, 저희가 들어간 방이나 공동에 객실처럼 쓰일만한 곳이 있었습니까?"
"아니…."
"이걸 이제야 깨닫다니."
두 명 모두 이제야 그걸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누가 성의 복도가 창문 하나 없이 저런 칙칙한 회색빛으로 장식하겠습니까? 그러니 종교적 건축물로도 탈락입니다."
미관을 중시하는 종교적 건축물의 특징상 이곳은 성도, 신전도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곳이 감옥이란 말도 이상하지 않나? 아니면 무언가 중요한 걸 보관하기 위해서라든지, 아니면 악마 같은 흉악범을 가두기 위해 지은 것일 수도 있지 않나."
전방을 경계하던 마력을 쓰지 못하는 전사, 벨제크가 묵직한 목소리로 처음 입을 떼자, 마테우스는 매끈한 턱을 쓰다듬었다.
"흠… 흥미로운 견해입니다만…, 그 말은 단지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 이만한 크기의 건축물을 지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
"차라리 왕성의 지하에 보관해두면 될 걸 왜 다른 건물을 짓습니까? 그리고 흉악범은 그냥 죽이면 될 것을 이만한 장소를 지어가며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까? 굳이?"
"그것도 그렇군."
"그러므로 감옥 혹은, 그 비슷한 건축물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정확한 역할을 모르니 말입니다."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미안하군."
그가 여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사과하자, 마테우스는 어린아이 특유의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지만 벨제크 씨의 의견도 괜찮았습니다. 혹시 모르잖습니까. 사실, 이 지하에는 고대의 망령이 갇혀 있고, 지금껏 기회만 노려왔을지, 하하하하."
"그렇다면 우리가 이 유적에 들어올 리도 없었겠지."
"그 말이 맞습니다."
무언가 감당치 못할 것이 있었다면 조사단에서 먼저 걸러냈을 것이다.
"뭐, 우리가 모르는 어떤 용도가 있지 않겠습니까. 무려 고대 제국의 유적인데. 어디든 쓸모가 있었겠지요."
"그건 나중에 올 다른 학자들의 몫이지 않을까?"
"예, 저희는 이대로 유물이나 얻고 점수만 잘 얻고 떠나면 됩니다. 자세한 건 그네들이 잘 찾지 않겠습니까?"
"하핫, 맞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다가오는 익숙한 기척을 느껴졌기 때문이다.
애리니가 붉은 적발이 살랑거리며 가벼운 몸놀림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나오는 갈림길이 하나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가면 약간 위험한 함정이…."
애리니의 설명을 들으며 움직이는 조원을 살피며 율리우스는 만족스러운 눈으로 마테우스를 쳐다봤다.
'역시 앞으로 유적 탐험하는 데는 마테우스가 필수야.'
건축과 설계를 업으로 삼는 가문의 차남 마테우스.
가문의 시조가 평생을 거쳐 만들었다는 설계도를 위해 아카데미에 온 만큼, 유적을 탐험할 때는 필수 인력이었다.
때문에 원작에서도 유적을 탐험할 때는 마테우스의 도움이 컸다.
'설계도의 행방은 알고 있어. 그걸 미끼로 마테우스의 가문을 우리 영지로 끌어들인다면….'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아이디어를 통해 자동차나 비행기 같은 현대 물건들을 재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세한 원리는 모르지만 대충 말해준다면 알아서 잘 만들겠지.
그게 공돌이의 역할 아니겠는가.
이미 지하철이나 열차도 나오는 시대니 누가 물어보면 유적에서 설계도를 얻었다 둘러댈 수도 있으니 걱정은 없었다.
'앞으로 얼마 안 남았다.'
율리우스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퀘스트창을 열었다.
[유적에 봉인된 고대의 괴물을 '직접' 죽이고 재앙을 막아내십시오! 제한시간 : 4 : 17 : 34]
[보상 : 진실의 파편(???)]
오후가 넘어가고, 노을이 짙게 물든 저녁 시간도 떠나간 어스름한 시간의 일이었다.
* * *
일행은 빠른 속도로 가까운 함정을 향해 이동했다.
3층의 서북쪽, 알렉시우스의 빠른 인도에 따라 도착한 그들은 함정을 발동시켰다.
우우웅-
도착하기 직전까지 긴가민가하던 그들은 공간이 울리며 주변 공간이 긴 타원형의 모형으로 물결치자 안심했다.
"최대한 멀리 이동하면 좋겠는데…."
에리엘의 바람 어린 말을 마지막으로 눈앞이 순간적으로 흐려졌다, 쿵!
"에반!"
"알겠다!"
에반은 이동했다는 확신이 든 즉시 몸을 움직였다. 기척이 느껴진 곳으로 방패를 들자마자 묵직한 반탄력이 몸을 흔들었다.
"하나!"
그의 대답에 에리엘이 화살을 걸었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끝내기 위해 마력을 쏟아부었다. 녹색의 마력이 넘실거리며 바람을 휘감았다.
"머리 숙여요, 에반!"
후웅!
에반이 급히 방패로 골렘의 몸통을 강하게 밀치며 몸을 옆으로 날렸다. 날카로운 화살이 회전하며 바람을 품고 골렘의 몸체에 꽂혔다.
쾅!
먼지가 흩어지고 골렘의 모습이 드러나자, 에반은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단번에 핵을 꿰뚫었나. 운이 좋…."
"에반!"
윌리엄이 크게 소리쳤다. 에반은 그의 외침에 망설임 하나 없이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쾅-
에반이 다급해진 얼굴로 확인하자, 골렘의 중추를 이루는 핵이 박살났음에도 골렘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핵이 두 개인 건가?"
에반은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그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공격할 기회는 한 번. 소리를 듣고 주위에 있던 수호자들이 다가올 것이다.
수월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번 일격으로 끝내야 했다.
'그렇다면 어디를?'
몸의 중앙에 핵이 있었으니, 심장을? 아니면 등의 중추에?
"에반, 머리! 머리 중앙 아래를 노리십시오!"
윌리엄은 에반의 고민을 알아챘다는 듯 곧바로 외쳤다. 에반은 윌리엄의 말을 신뢰했다.
'윌리엄은 나보다 머리가 좋다.'
옛날이라면 인정 대신 외면했을 사실이었다.
그러나 족히 한 달 이상을 함께하며 그는 인정했다. 윌리엄은 평민이라고 무시할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알았다!"
이제는 신뢰하는 자신의 동료였다.
두 다리에서 푸른 마력이 용솟음치듯 올라오며 움직임을 가속했다.
바로크식 비전(Baroque式 ?傳) - 랑아(WolfFang) 몸이 길쭉하게 늘어나며 송곳처럼 검을 올려쳤다. 푸르게 물든 검은 짐승의 송곳니처럼 거칠게 파고들며 퍼석하고 무언가를 파괴했다.
손에 감촉을 느낀 에반은 바로 방패로 거칠게 골렘의 몸을 치는 힘을 반탄력 삼아 뒤로 물러났다.
타닥-
그는 긴장을 풀지 않고 골렘을 응시했지만, 골렘은 몸을 휘청이더니 곧바로 바닥에 쓰러졌다.
한동안 더 지켜보고 나서야 그는 긴장을 풀었다.
방패는 여전히 전방을 향한 채였다.
"…진짜 끝났군."
"에반 괜찮으십니까!"
윌리엄이 상태를 살피기 위해 다가서자 에반은 크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윌리엄은 그의 상태가 괜찮다는 걸 확인하자,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도 손을 들어 올렸다.
짝-
경쾌한 손뼉 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야…, 조금 살살치시지 그랬습니까."
"하하하! 남자가 뭘 이것 가지고 그러나! 잘했다!"
"…동료니 이 정도는 당연한 일입니다."
상황이 정리되자 주변을 감지력으로 훑은 알렌은, 더 이상 위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알렉시우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알렉시우스, 지금이 몇 층입니까."
"기다려주십시오, 지금 확인을…."
지도를 살펴보던 그의 표정이 변하자, 윌리엄이 불안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무, 무슨 일이 있습니까? 혹시 잘못 이동했다면…."
"7층."
"예?"
"7층입니다…."
일행은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서서히 이해했는지 환호를 내질렀다.
"바, 방금 여기가 7층이라고…!"
"알렌! 후배가 맞았어! 와! 나도 이런 거 처음이야."
"7층이라고…? 흠, 그래서 반탄력이…."
"이거 꿈은 아니죠…?"
그들은 그렇게 소리를 듣고 달려온 골렘의 무리를 몇 번이나 상대하고 나서야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목소리를 낮추더라도 기쁨만큼은 감출 수 없는지 눈이 밝게 빛났다.
"이제 7층의 제일 깊은 곳에 있는 유적 수호자를 쓰러트리고 복귀에만 성공한다면…!"
"1등은 따놓은 당상입니다. 이건 분명히 공적치도 상당히 얻게 될 테니 정말…."
알렌은 조원들이 기쁨을 느끼도록 잠시 기다려주었다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입을 열었다.
"더는 시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저희처럼 정보를 모아서 이곳에 도달하는 학생이 있다면…."
알렌이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리자 그들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어서 가요, 어서!"
"여기서 따라 잡힐 수 없지."
"후배들, 가자아아앗!"
7층을 가로지르는 건 쉽지 않았다.
전보다 더욱 강력해진 수호자와 함정들.
심지어 선발대가 먼저 진입하지도 않았기에 상대해야 할 적은 배로 많이 늘어났다.
그러나, 발목을 잡힐 정도는 아니었다.
알렌이 어느 정도 진심을 다했기 때문이다.
한 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실타래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안에 심상을 담을 필요는 없다. 빈틈만 만든다면 충분하다.
'다중 변이의 창.'
실타래를 도구 삼아 손가락을 움직였다. 섬세하게, 마치 악기를 연주하듯이. 너무 힘이 담기지 않도록, 오히려 조금 힘을 빼고서.
댕-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댕댕댕-
열두 개의 둥근 금속관으로 이루어진 튜블러 벨이 다채로운 종소리를 내며 점차 맑은 파동을 흩뿌렸다.
점차 크기를 키워가던 골렘들은 몸의 부위가 산화되기 시작했고, 그 틈을 타 녹빛으로 물든 화살과 청색 마력을 휘감은 에반이 마무리 지었다.
"몰려들기 전에 7층의 중심, 심부로!"
"알렉시우스, 함정 처리 부탁하겠습니다!"
일행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
B반. C반. D반.
1학년. 3학년.
학생. 길잡이.
그들은 그 무엇도 상관치 않고 나아갔다.
"회복, 회복하겠습니다!"
윌리엄은 마음의 짐, 달리 말해 벽이라고 할 만한 것을 넘어섰다.
이제 그의 실력은 A반은 가뿐히 들어오고도 남을 것이다.
"에반, 5초, 아니 3초만 발 묶어줘요! 큰 걸로 갈게요!"
"크흡, 알았다!"
에리엘과 에반은 이번에 엄청나게 성장했다.
이들은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노력한다면, 다음 학기에 B반까지 올라오겠지.
"에반, 앞에 발 조심! 에리엘 마력 조절하고 북서쪽 30° 간격으로 화살 쏴!"
밀레드는 정말 최선을 다해 도와줬다.
지나친 개입에 감점을 먹을 수도 있음에도.
알렌이 처음부터 빈틈없도록 계획을 짰기에 할 일이 줄어들었으나, 그녀는 그 안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찾아냈다.
"뒤에서 몰려오는 적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두 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십시오!"
알렉시우스 역시 묵묵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알렌이 공략을 도와주기로 약속을 했지만, 알렉시우스는 약속을 이행하라 채근하지 않았다.
알렌은 그 광경 속에 함께 속해있었다.
비록 완전히 녹아들지는 못했더라도, 그 안에 함께하고 있었다.
꽤 즐거웠다.
실제 모험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은 일상을 벗어난 느낌마저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한계에 맞닿았지만, 그래도 그 이상은 넘지 않은 난도 속에서 몇 시간에 걸쳐 7층의 심부를 향해 나아갔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아공간에 보관한 물약을 다 마시고, 윌리엄이 탈진하기 직전까지 회복을 퍼부었다.
그렇게 해서 각자 잠재력을 폭발시키며 마침내 중앙을 지키던 골렘까지 무찌를 수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
"이제 다시 돌아가기만 하면…."
쿠구구궁-!
지진이라도 난 듯 유적이 크게 뒤흔들리며, 지금을 기다린 것처럼 하얀 책이 허공에서 펄럭였다.
『■■■■과(와) 이어진 책이 조건을 확인합니다. ■■을(를) 인지하고 있습니다! ■■와(과) 연관된 대상이… 수정! 지식의 화신, 베드■■니르의 존재를 인지합니다!』
『■■와(과) 연관된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타■했을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락한 ■■을(를) 말살하기를 원합니다!』
『조건을 임시로 충족합니다. ■■의 ■■(가칭)이 현현합니다!』
『?3초 안에 반경 300m 이탈. 불충족시 정신방벽 강화와 공간 이동 저항. 17분 18초 내로 유적 탈출 요망.』
그와 동시에 거대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한 울음소리가.
"아────────────"
유배된 화신이 잠에서 깨어났다.
* * *
자크니르는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천천히 유적을 살폈다.
"흐음…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는데."
그가 펼친 감지력은 234,375m, 대충 234㎞의 범위를 가진다.
가히 작은 섬 하나를 통째로 살필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범위.
머릿속에 들어오는 정보량이 압도적인 탓에 세세히 살피지는 않지만, 웬만한 존재는 그의 눈을 피할 수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우웅-
가슴속의 여덟개의 고리가 서로 공명하며 언제라도 튀어나올 듯 준비했다.
학생들이 쓰러졌던 부근을 중심으로 세세히 감지력을 집중시켰지만,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했다.
"새로운 함정이 있긴 한건가?"
8 위계의 초기.
대부분의 팔강의 실력이 8위계의 끝 혹은 9위계 정도에 닿아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자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가 약하다고 할 수 없었다.
세계로 무대를 넓혀도 그의 실력은 여전히 두 손… 아니 네 손 안에는 들것이다.
그런 그가 아무리 비밀이 많다고 한들 유적의 함정하나 파악하지 못한다고?
"…이상한데, 유적에 비밀이 많다지만 이건 특히 그렇군."
자크니르는 이상을 느끼면서도 별다른 걱정은 들지 않았다.
그야 그건 당연했다.
자신은 팔강.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자이니까.
누구에게 습격당할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닌, 그가 누구를 습격할지 걱정하게 하는 위치.
"다음 차례가 델른 교수였나? 어찌 됐든, 슬슬 시간도 됐으니 약속대로 그를 불러서…."
그렇기에 그의 긴장은 조금 느슨해져 있었고.
"…대충 위계에 관해 이야기나…."
"─정말, 기다렸어. 꼬맹아."
푸슉-
습격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 늦었다.
"큽, 누구냐!"
"어머, 조금 얕았네?"
광구가 폭발하듯이 확산하며 광명의 벽을 만들어냈다.
묘령의 여성은 여유롭게 광막을 피해 물러났다. 그녀는 자크니르를 찌른 칼날을 핥으며 야릇하게 웃었다.
"이런 얼굴이니 누구인가 싶지? 나야 나, 너 때문에 말년을 똥통에 처박혔는데 말이야. 기억하니?"
쿠구구구궁-
뒤늦게 유적이 울리기 시작했다.
자크니르가 여전히 얼굴을 굳힌 채로 경계하자 그녀의 미소가 점차 사라졌다.
"벌써 잊었나 보네? 그래도 괜찮아. 이제 알 테니까. 고요한 비수, 음지의 왕, 발밑의 숨겨진 독사─."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자크니르의 표정이 점점 변했다.
"비욘나. 너 때문에 모든 기반을 잃은 여자이자, 이제는 복수 밖에 안 남은 늙은 암사자란다. 어흥."
"…뭐?"
시끄러운 진동이 들림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그의 귓가에 명확히 박혀 들었다.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분명히 그녀는 다 늙은 여자였…,"
"너 때문에 노력했지?"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자크니르는 웃을 수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나이에 한계를 넘었다는 것이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모종의 수단으로 젊음을 되찾았다는 말일 테니까.
"이제 믿겠니? 의심하는 성향은 그대로구나. 그렇다면 이제 인사도 끝마쳤으니, 이제 그만-,"
그녀의 몸이 홀연 듯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아니, 그림자가 물웅덩이처럼 고이기 시작했다.
감지력이 그녀의 존재를 놓쳤다.
"-죽어주겠니?"
자크니르에게 패배한 전(前) 팔강.
3년 전 전투에서 물러난 패자.
그늘진 여왕 (Queen Of Dunscaith).
그녀가 되돌아왔다.
* * *
미니마 부족과 아라흐니 부족의 주둔지.
하늘이 검게 물들고 달이 푸르게 차오르는 가운데, 캠프와 조금은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그들의 주둔지는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길잡이 일을 나갈 수 있는 대부분의 젊은 부족원과 특별한 '준비'를 위해 며칠 전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족원들.
그들을 제외하고 주둔지 내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은, 미니마 족장인 그를 제외하고서 거동이 불편한 몇 명밖에 없었다.
아라흐니 부족장도 의식을 준비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따로 대기하고 있었기에 넓은 천막에는 사람이 적었다.
"…때문에 아마도 오늘 밤, 혹은 얼마 지나지 않은 새벽에 때가 될 것으로 파악됩니다."
"수고했다."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방랑하는 별들께 영광이 되기를!"
"그래, 이만 준비하러 가보거라."
젊은 부족원이 천막을 나서자, 부족장은 주름진 눈이 하늘을 향했다.
그의 눈은 천막의 천장이 아닌 그 너머의 밤하늘을 바라보는 듯했다.
"유성이 떨어진다는 말인가…."
제86화
이곳이 계시의 장소라는 것을 파악하자마자 백방을 조사하며 정보를 파악했다.
그리고서 그들은 별의 곶이라는, 부족민들이 찾고자 매달렸었던 지명의 뜻을 이해하는 데 성공했다.
"별의 곶이라, 별의 곶… 참 어울리는 말이로구나."
곶은 보통 삼면이 바다로 이루어진 툭 튀어나온 장소를 말한다.
그런데 사막에 그런 장소가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그들도 무언가를 비유하는 장소를 뜻하는 곳일 거라고 파악했다.
그런 특이한 이름에 어울리는 장소는 유적일 거라는 예상도 했었고.
그러나 설마 별의 곶이 말 그대로의 뜻일 줄 전혀 생각지 못했다.
"와, 별똥별이다!"
"유성이다! 유성이 떨어져 내린다! 빨리 와봐!"
"내가 말했잖아! 오늘이라고! 혜성의 주기 같은 건 계산이 끝났다니까?"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카데미 생도들의 감탄성이 들려왔다.
밤하늘에서 위로 커다란 혜성의 뒤로 긴꼬리를 그리며 수천 개의 유성우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뭐, 뭐야!"
"지진이라고? 가, 갑자기?"
"도망쳐! 교, 교수님은! 자크니르 님은 어디 있어!"
늙은 몸을 거세게 뒤흔드는 진동의 안에서 부족장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시작되었구나."
조금 있으면 별의 바람과 부족의 염원을 모두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깊숙이 묻힌 유적의 모습은 지면에 툭 튀어나온 섬과 같았다.
땅이 울리고, 수많은 비명이 합주를 이루는 가운데.
하늘에서 별의 바다가 쏟아졌다.
──유적의 주위로 별이 파도치기 시작했다.
* * *
바닥이, 벽이, 천장이.
주위를 가로 덮은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3초 안에 반경 300m 이탈. 불충족 시 정신 방벽 강화와 공간 이동 저항. 17분 18초 내로 유적 탈출 요망.』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다.
알렌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소리쳤다. 망설일 시간 따위 없었다.
『3초』
"여기서 벗어나십시오!"
"알렌, 그게 무슨…."
"무슨 일인지 잠시 이야기부터…."
조원들의 당황스러운 표정이 시야를 스쳤다. 알렌은 직접 몸을 날렸다. 설득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육신의 힘을 끌어 올렸다. 먼저 허리춤의 탈출 아티펙트를 붙잡았다.
'역시 중간에 발동이 멈추는군.'
알렌은 긴급 사태에 입술을 깨물고, 가까이 있던 밀레드의 몸을 붙잡았다.
『2초』
"알렌, 갑자기 무슨 일인지 말…."
"사과부터 하겠습니다."
"꺄아악!"
그녀는 뭔가 해 볼 틈도 없이 멀리 통로를 향해 날아갔다.
다음은 알렉시우스, 알렌은 뭔가를 기다렸다는 듯 하늘을 쳐다보는 그를 던졌다.
"나중에, 자세한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알겠습…."
그는 말을 다 끝마치지도 못한 채 몸이 떠올라 밀레드처럼 날아갔다.
『1초』
에반과 에리엘은 함께 조금 떨어진 상태, 윌리엄도 체력 유지를 위해 잠시 멀어진 상태였다.
'어차피 세 명 모두 보내는 게 불가능하다면…!' 쾅-
금강석처럼 단단한 바닥에 발자국이 새겨진다. 극도로 가속화된 몸이 윌리엄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당황한 표정의 그가 뭐라 입을 열었다. 무시했다. 나중에 설명해도 늦지 않다.
그의 몸을 잡아 던졌다. 방향은 통로의 반대편, 에리엘과 에반이 위치한 방향이었다.
"으아아아아-!"
윌리엄이 괴성이 길게 늘어졌고, 그의 몸을 에반과 에리엘이 무사히 그를 받아 낸 순간.
『0초』
공간이 물결쳤다.
시야가 잠시 점멸할 듯 깜박이며 정신을 뒤흔들었다.
알렌의 몸에서 수천의 실타래가 풀려나오며 공간 이동에 저항했다.
팟-!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눈을 뜨자, 통로에서 몇 번 구른 밀레드가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에리엘과 윌리엄, 에반은 어딘가로 사라진 후였다.
그녀가 뭐라 말하려던 때, 아티펙트가 언제 발동하지 않았냐는 듯 하얀 전송의 빛이 그녀를 휘감았다.
그녀는 전송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조심해…!"
그녀의 몸이 사라졌다.
알렉시우스 쪽을 바라보니 그는 일어설 틈도 없이 쓰러진 상태로 전송된 듯싶었다.
'이번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하얀 책을 살펴보니, 마녀의 숲 때와 다르게 문장은 흐려질 기미 없이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창백한 폭풍』
『바람을 시들게 하는 자』
『바람에 맞아 하얗게 세어 버린 매』
재의 꼭대기에 설 이름 없는 자의 친우이자, 한 쌍의 도래까마귀에 비견될 지혜의 화신.
『베드르폴니르(Veðrf?lnir)가 깨어납니다.』
새로운 문장과 함께.
* * *
유적을 뒤흔드는 진동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잠, 잠깐 이게 뭐…."
"무슨 일이 일어난 거…."
"아티펙트가 제멋대로 발동…!"
팟-
조원들은 무언가 깨달을 새도 없이 하얀 빛에 휩싸여 전송된 후였다.
율리우스는 조원들이 다 사라진 것을 깨닫자, 얼른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유적에 봉인된 고대의 괴물을 '직접' 죽이고 재앙을 막아 내십시오! 제한 시간 : 2 : 17 : 18]
[보상 : 진실의 파편(???)]
"거의 두 시간이라… 시간은 충분한데."
초대형 유적에는 그 유적과 관련된 귀한 보물이 존재한다.
초대형 유적은 잘 나타나지 않기에 아는 사람이 적다.
그러나 원작에서 하이젤이 이 사실을 통해 얼마나 많은 이득을 봤는지 알고 있었기에 조원들과 떨어질 틈을 노리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가지러 갈 기회가 없어.'
율리우스는 반드시 히든 피스를 얻어야 했다.
'이번 유적이 보통 유적과 조금 다르지만…."
보물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게 유적의 규칙이니까.
원작에서 이 사실이 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당연했다.
"원래는 찾는 게 제일 문제가 될 테지만…."
이제는 그렇지만도 않았다.
"동동아, 이제 나와."
그가 팔꿈치에 메고 있던 가방을 툭툭 쳤다. 그러자 하얀 털 뭉치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힘차게 가방에서 뛰어내렸다.
갸오! 갸오!
"동동아, 이곳에서 제일 귀한 물건으로 가자. 가치가 제일 높은 게 있는 장소로."
갸오?
"음… 금화 말고, 물건인데 음…, 잠시만 알려 줄게."
율리우스는 동동이가 알아듣지 못하는 모습에 털 뭉치를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고는 이마를 맞대었다.
초대형 유적.
유적의 규칙.
높은 가치의 보물.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
마도서일 수도 있고, 살아 움직이는 인형일 수도 있으며, 비밀 무기의 설계도일 수도 있다.
율리우스의 생각이 그대로 동동이에게 전해졌다.
"이제 알겠어?"
동동이도 신수였다.
아직 어리지만, 특별한 능력을 갖춘 신수.
신수의 숲에 있던 신수는 바라는 능력을 얻게 해 준다.
그렇다면 동동이는?
'보물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
지금은 주변에 있는 보물밖에 탐색하지 못하지만, 점차 성장한다면 전설에나 등장하는 보물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원작에 이름만 언급되었던 무구조차도.
갸오! 갸오!
"좋았어! 가자!"
동동이가 힘차게 털 뭉치를 움직이며 통통 뛰기 시작했다.
'보스는 일단 히든 피스 먼저 얻고, 그 후에… 잡든가 해야지.'
빨리 잡아 봤자 보상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쓸만한 주·조연들은 알아서 살아남을 것이다.
허무하게 죽을 이들이 아니었으니까.
"남은 놈들은 알아서 하라지."
내 알 바인가.
* * *
에리엘은 쓰라린 손끝의 통증을 무시하며 활을 당겼다.
슝-
"그아아아아-!"
"가르르르륵-"
"케르륵, 켁, 켁."
미친 듯이 수호자들이 몰려들었다. 아니, 중간에 합류하는 괴물까지 합치면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공간 이동으로 유적의 어딘가에 떨어졌다.
다행히 같이 있던 덕분에 함께 이동했지만,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탈출 아티펙트가 작동하지 않았다.
"에반! 조금만 버텨 봐요!"
"크흡, 알았다! 얼마든지 버틸 수 있으니 안심해라!"
에반은 좁은 갈림길의 한 곳에서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바로크식 비전(Baroque式 ?傳) - 랑조(Dewclaw) 늑대는 홀로 사냥한다. 비정상적으로 몸이 빨라졌다. 몸놀림이 점점 빨라져 잔영마저 보일 정도였다.
푸르게 빛나는 선이 통로를 틀어막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평소에 아끼던 마력을 미친 듯이 쏟아부었다. 녹빛의 마력이 눈에 모였다. 눈에서 모여든 마력이 화살과 이어졌다.
하일 가문의 화살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린다.
하일식 비전(Hail 式 ?傳) - 폭우(Downpour) 그렇기에 하일이다.
"에반 이제 물러나요─!"
눈 끝이 향한 곳 위로 화살이 날아들었다.
수호자와 괴물의 물결 위로 한 자루의 화살 한 발이 터져 나갔다.
팡-!
우박과 같은 파편이 몬스터의 온몸에 구멍을 만들었다.
"크아아아악-"
그건 생명이 없는 수호자들마저 마찬가지였다.
해일의 중앙에 구멍이 생겼다.
"에리엘 무리할 필요 없…."
"좀 조용히 해 봐요!"
그녀의 외침에 윌리엄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처음 이동했을 때, 바로 옆에 있던 수호자의 습격으로 중상을 입어 파리해진 안색이었다.
"지금 무리하지 않으면 언제 한다고요!"
한 발 더, 다시 한 발 더.
하나의 화살로 해치울 수 있는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버티기 위해서는 무리해서라도 숫자를 줄여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한 발 더…, 푸웁."
지나치게 마력 회로를 혹사한 탓에 몸이 피를 토해 냈다. 윌리엄이 급히 그녀를 치유했다.
그녀는 지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 버틴 지 얼마나 지났어요?"
"그게…."
윌리엄은 망설이다가 겨우 답했다.
"10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밖에 안 지났다고요?"
이대로는 얼마 버티지 못한다.
전방을 살피니 지원이 없어진 에반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마지막 일격으로 뒤로 물러서고는 거친 손놀림으로 걸고 있던 목걸이를 뜯었다.
"바로크(Baroque)!"
그가 소리치자 목걸이에서 커다란 조개가 소환되더니 몸을 세워 통로를 틀어막았다.
"에반 그건…?"
"가문에서 지원받은 고대 유물이다. 원래는 저 조개 속으로 숨어드는 용도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애써 웃었다.
"세 명 모두 들어갈 수 없으니 어쩌겠나. 이렇게라도 쓸 수밖에."
그 덕분에 한숨 덜게 된 에리엘은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저희 같은 경우도 있으니 곧 구조대가 오지 않겠습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유적에 들어온 교수님들도 있었으니 곧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유적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는데, 곧바로 구조대를 보낼 여력이 있을까?
교수들이 그들이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윌리엄은 그 모든 불안감을 억누르며 답했다.
"아카데미에서 이런 일이 몇 번밖에 없었겠습니까. 괜찮을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에리엘의 여러 의문이 담긴 물음에 윌리엄이 답했다.
"예, 반드시."
윌리엄의 진지한 모습에 에리엘은 이내 힘이 빠진 듯 픽 웃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윌리엄, 나한테 관심 있어요? 자꾸 그러니 저도 조금 신경 쓰이는데…, 네?"
"자, 장난은 그만두십시오. 비상시지 않습니까…."
윌리엄이 얼굴을 붉혔다. 에리엘은 귀엽다는 듯 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 끝나면 만나요."
"그…."
"단둘이서요."
그녀의 말에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던 윌리엄은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위험에 처한 현실과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졌을 때, 지금까지 침묵하던 에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윌리엄."
"에반, 딱히 상황을 모른 게 아니라요. 그, 잠시 숨을 고르려고…."
에리엘의 다급한 변명에 에반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온다."
"한 거… 네?"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그가 보고 있던 통로의 끝, 유적 수호자와 몬스터가 끝없이 몰려오는 곳에서 하얀 털 뭉치와 그 뒤의 인형이 어둠 속에서 빠져나왔다.
눈에 익은 밝은 청발과 이제는 어린 티를 벗어난 얼굴.
"어, 사람이 있네?"
갸오-?
희망이 생겼다.
* * *
"거점 세워!"
"교수님은 어디 있냐고!
"그것보다 부상자나 받아! 지금 상처 안 보여!?"
학생들의 고성이 솟구친다.
수천의 유성우가 내리는 장관은 천하의 절경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현재 그 모습을 구경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지는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일대를 울리는 지진이 끝나자 모든 일이 끝난 줄 알았지만, 그건 희망찬 상상이나 다름없었다.
지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적 안에 있던 모든 수호자와 괴물들이 입구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유적에 내려간 교수들은 소식이 없고, 남아 있던 교수의 행적은 묘연하다.
그렇기에 지금 이곳을 지휘하는 건 여러 실전을 거듭한 3학년이었다.
그들은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첨탑의 네 입구를 중심으로 공격을 막고 있었다.
다행히 발 빠르게 대처했기에 피해는 줄어들고 있었지만, 수호자들의 수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선배님, 저기에도 학생들이…!"
"알겠으니 진정해요."
레이첼의 역할은 아티펙트로 탈출한 학생들을 무사히 데려오는 것.
가문의 전승 마법으로 공간 이동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그녀만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이었다.
"점멸."
황색의 빛이 깜박였다.
알렌도 시도하기 힘든 공간 이동을 그녀는 자유자재로 다루며 막 탈출한 학생들에게 다가섰다.
"도대체 무슨 일이…."
"율리우스, 율리우스! 야, 어디 있어!"
"너희는…."
묵묵히 제 일을 하려던 그녀의 몸이 멈칫했다.
어둠 때문에 그들의 얼굴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들은 율리우스의 조원들이었다.
"보충반…?"
레이첼의 중얼거림에 아벨린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 선배님! 율리우스가, 아니, 율리우스라는 애가 있는데 어디 있는지 모르겠…."
"조금 있다 다시 이야기하죠."
그녀는 근처에 있는 괴물을 확인하고는 마법을 사용했다.
황색의 안개가 그들의 몸을 감싸는가 싶더니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점멸."
깜박-
시야가 순식간에 뒤집히며 장소가 바뀌었다.
레이첼은 잠시 마력을 많이 사용한 듯 이마를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나요."
"그…, 저희 조에 율리우스라고 조원이 한 명 있는데, 아직 유적에 있는 것 같아요."
아벨린은 선배한테까지 반말할 용기는 없는 듯 다소 다급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그녀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구조대를 차출하자고 이야기해 볼 테니, 일단 쉬세요."
레이첼은 그들이 뭐라 말하든 치료가 먼저라며 그들을 힐러들이 자리한 후방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상태를 확인하고는 전방으로 보내든지 다른 역할을 주든지 할 것이다.
'…알렌, 무사해야 할 텐데.'
실습 때 방해가 될까 싶어 몇 번 만나지도 않았다.
사건이 발생하고 급히 지원까지 해서 그를 찾았지만, 그의 조원들만 몇 명 만났을 뿐이지 그를 볼 수 없었다.
'아티펙트를 발동하기 전에 7층, 최하층에 있었다고 했지.'
구출대, 구조대. 뭐든 좋다.
밑으로 내려갈 명분만 있으면 되니까.
그녀는 빠르게 3학년이 자리한 곳으로 향했다.
그녀가 그를 도울 방법은 이런 것밖에 없었다.
제87화
초대형 유적의 7층, 최하층의 공동.
거대한 홀에는 황량하리만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차가운 회색 벽과 공동을 비추는 음울하게 느껴지는 빛 거기에 다 부서진 골렘의 잔해까지.
동산만 한 크기의 골렘은 세 개의 핵 모두가 파괴되어 바닥을 굴러다녔다.
알렌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마왕과 관련된 무언가가 등장할 줄 예상했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 규모가 커다랗게 벌어지리라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 그저 그뿐인 일이다.
그렇다면 당황할 필요가 있나?
'우선 눈앞의 일부터.'
조원에 대한 걱정은 억지로 눌러 두었다. 지금 무언가 걱정한다고 뭐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알렌이 어느 정도 주위를 살피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먼저, 이 공간이 진동과 연관이 있을까?'
그들이 공동에 들어섰기에 지진이 발생했는지, 시간이 우연히 맞아떨어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뭔가를 아는 듯한 알렉시우스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후자로 생각하는 것이 옳았다.
'그렇다고 전자가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얀 책에서 굳이 공동을 벗어나라고 말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알렌은 생각에서 벗어나 공동의 벽과 천장을 살폈다. 그곳에는 무언가에 긁어낸 듯한 흔적과 함께 벽화가 새겨져 있었다.
아쉽게도 긁어낸 듯한 흔적에서 별다른 정보를 얻어 낼 수 없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벽화를 살피며 알렌이 고개를 돌렸다.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나?"
「음…, 아마 대몰락 이전, 제가 살았을 때 있었던 괴물일 거예요.」
그녀는 보는 눈이 없자 곧바로 공중에 떠올랐다. 오랜만에 움직여서 기쁜지 검 자루의 끝이 살랑거렸다.
"고대 제국이 아니라, 더 전이라고?"
「네. 정체도…, 어느 정도 짐작도 되구요.」
남아 있는 벽화의 그림은 다소 알아보기 쉬운 모습이었다.
커다란 성채의 지하에 있는 괴물. 성채 위에 서 있는 병사들.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우.
그 후에, 지하의 괴물이 난폭하게 난동을 부리는 모습까지.
괴물의 그림은 다소 기괴하게 그려져 있었다.
누군가 실수로라도 괴물을 풀어 주는 것을 경고하는 것처럼.
그를 제외한 벽화들은 심하게 훼손되어 알아볼 수 없었다.
「이름은….」
"베드르폴니르."
그녀가 깜짝 놀란 듯 칼날을 부르르 떨면 날아왔다.
「베드…, 아니 알고 있었어요!?」
알렌은 그녀의 반응에 유의하며 한 발 물러섰다. 아직 하얀 책의 비밀을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변명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따로 도서관에서 살펴본 책에서 읽어 본 기억이 있다."
「아…, 도서관. 그럼…, 다른 것에 대해 아는 건 더 없어요?」
그가 대답하자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빠진 것이 느껴졌다.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름만 언급되어 있어서 잘 모르겠군. 고대의 괴물이라기에 이름만 말해 본 것이다."
「하긴…, 가까운 곳에 있으니 정보가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녀는 이해했다는 듯 다시 느릿하게 떠올랐다. 진정된 듯 목소리도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할래요?」
"글쎄…."
시간은 아직 더 남았다.
이제 십 분이 조금 넘어갔을까?
「진짜 울음소리 들렸을 때까지만 해도 놀랐다니까요? 간 떨어질 뻔했다니까. 엄청 오랜만에 들었거든요.」
유적은 계속해서 진동했고, 멀리서부터는 무슨 일인지 폭음까지 간간이 들렸다.
그러나 알렌이 자리한 장소에 무언가 오는 일은 없었다.
「어쨌든 빨리 빠져나가는 건 어때요? 진동이 점점 커져 가는 게 좋은 징조 같지는 않거든요.」
"당연히 그래야겠…."
알렌이 말을 멈췄다.
순식간에 자세를 낮추고, 베스틀라를 틀어쥐었다.
「알렌?」
펼쳐 둔 감지력의 범위 안으로, 누군가 발을 들이밀었다.
'인원은 하나? 아니 둘이군. 사람, 아니 인간형인가? 다른 하나는 뭐지?'
강대한 활력이 전신을 돌았고, 요동치는 심장에서 실타래가 풀려나왔다.
오랜만에 제대로 쥔 검의 감촉에 감각이 낯설 정도로 예민해졌다.
감응력에 따른 감각의 농도를 스스로 조절해야 할 정도로 피부가 따끔거리는 감각.
'상대의 마력이 엄청나다.'
자신의 비할 정도는 아니나, 웬만한 아카데미 학생의 몇 배에 달할 정도.
상대가 알렌의 존재감을 느낀 듯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실타래를 엮었다. 처음 견제로 시선을 잠깐 붙둘 정도면 족하다. 실타래가 순식간에 녹청색의 날붙이들로 엮여 통로를 꿰뚫었다.
그 순간 뇌전이 번쩍였다.
꽈릉!
통로의 어둠을 뚫고 간 날붙이들이 순식간에 분쇄되었다.
진청색의 뇌전을 머금은 검기가 파편을 흩뿌렸다. 단단한 바닥을 부수고 나아가던 육체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뇌전? 설마….'
이곳 같은 특수한 장소가 아닌 이상 탈출 아티펙트가 발동했을 것이다. 놈이 이 상황을 예견하지 않은 이상 있을 리가 없다.
알렌은 어디서나 머리를 들이미는 놈의 모습에 한순간 현실을 부정하고픈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시야 가까이로 상대의 모습이 보인 순간, 그는 달려가려는 걸음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율리우스."
상대도 순간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검을 내렸다.
"형님!"
갸오!
그들의 밑으로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 동동이가 울었다.
* * *
가까이 다가온 율리우스의 모습을 살폈다.
아카데미 교복 위로 가벼운 경장비, 아공간 아티펙트 대신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다. 가방에는 무언가를 챙긴 듯 크게 부풀어 있었다.
"네가 어떻게…, 아니 묻지 않으마. 무언가 사정이 있겠지?"
보나 마나 뻔했다.
이것과 관련된 퀘스트가 있는 것이다.
알렌은 그 사실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막았다.
'…검은 책에 이것과 관련된 내용이 없었다.'
검은 책의 1회차의 율리우스는 현재 다른 유적에서 혼자 승승장구하는 모습만 적혀 있다.
말할 것도 없었다.
미래는 달라졌고, 율리우스는 1회차에 없던 퀘스트를 받아 냈다는 말이다.
'…이제 율리우스의 행보를 더 예측하기 힘들어졌다.'
알렌은 그 사실에 불안감, 내지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움직이는지, 목표가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대략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대략적인 것과 정확하게 아는 것은 달랐다.
당연했다. 그만큼 검은 책을 통한 정보의 이점은 알렌에게 커다란 이득을 건네주었으니까.
누군가 어떤 행동을 할지 먼저 알 수 있다는 건 그보다 한 발짝 빠르게 행동할 수 있는 걸 의미한다.
검은 책의 의존을 깨닫고 이를 막고자 회귀 전, 1회 차의 기억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얻었으나 알렌은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검은 책에 의지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 그… 예. 맞습니다. 형님."
율리우스는 준비한 변명이 무색하게 알렌의 배려에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준다면 조잡한 변명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형님은 어쩐 일로 여기 계시는 겁니까."
"최단 돌파를 목표로 7층까지 움직이다가 이변이 생겼다."
알렌은 이곳에서 있던 일을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알렉시우스와 밀레드를 만나면 들통 날 거짓이었으니까.
"유적이 흔들렸고, 그와 동시에 갑작스럽게 공간 이동의 전조가 발생했다. 아티펙트도 발동하지 않았고. 그 상태에서 겨우 몇 명이 탈출했지. 다른 조원들의 생사는 모르겠군. 나는… 보다시피 저항했고."
율리우스는 알렌의 실력을 조금이나마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탈출해야지. 이 진동을 느끼고 여기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지 않나."
유적의 진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도를 더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궁-
"그럼 어떻게…."
알렌은 난감한 얼굴로 답을 하지 못했다.
그의 탈출용 아티펙트는 강제적인 공간 이동을 겪을 뻔한 뒤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지상에서부터 이곳까지 내려오는 데 수십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남은 시간은 고작 십여 분.
대충 가늠했기에 그 정도지 사실 정확히 얼마나 남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율리우스, 너는 탈출 아티펙트를 가지고 있느냐?"
율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대충 보스가 나타나면 처리할 생각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혼란을 틈타 히든 피스를 챙길 생각뿐.
그의 아티펙트는 지금쯤 지상에 있는 자신의 침상 위에 굴러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저도 아티펙트가 작동하지 않아서…, 하하."
"그렇다면…."
유적의 층계를 부숴야 하나?
알렌은 몸속에서 들끓는 거력과 아까 느꼈던 바닥의 강도를 비교했다.
유적의 벽과 천장은 완전하지 않더라도 거인의 힘을 가진 알렌의 힘도 버텨 내는 곳이다.
수천 년의 시간도 유적을 풍화시킬 수 없었다.
'물론 불완전한 시간 마법과 전력을 다한 공격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통제 불가능한 무력은 율리우스에게 경각심을 줄 것이고, 지금까지의 태도와 달라질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건 알렌과의 관계에서 실낱같은 틈을 낼 것이다. 그건 알렌이 가장 원하지 않는 사태였다.
'일말의 경계조차 하지 않는 관계.'
지극히 이상적이고, 이타적이며, 인위적이다.
동화에서나 볼 법한, 콩 한 쪽을 얻더라도 반쪽으로 나누려는 형제.
그것이 알렌이 율리우스에게 구축하려는 인상이었으며, 아카데미에서 보여 줄 모습이었다.
"형님, 차라리 방법이 없다면 천장을 부수고 올라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곳에 가만히 있다가 유적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율리우스는 상상조차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그렇지만, 너무 위험하다. 차라리 다른 길로 가서 방법을 찾는 것도 괜찮지 않겠느냐."
"음, 그래도…."
"예를 들어 그래, 네가 들어온 통로에는 뭐가 없었느냐?"
율리우스는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이 들어온 쪽을 살피더니,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얼굴색이 변해 고개를 홱 저었다.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알렌이 들어왔던 통로를 가리켰다.
"제가 온 방향에는 몬스터랑 유적 수호자들끼리 섞여 길이 없습니다. 차라리 형님이 왔던 쪽으로 가는 게 나을 겁니다."
그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알렌이 감지력이 잠시 쭉 뻗으며 율리우스가 들어온 방향을 훑었다. 율리우스는 그 모습을 조마조마한 얼굴로 지켜봤다.
그곳에는 다른 몬스터와 유적 수호자들이 올라간 흔적이 거칠게 남아 있었다.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데 저 모습은 뭔가.
알렌은 이내 고개를 젓고는 현재 상황에 집중했다.
"그래도 만약 유적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갇히는 건 마찬가지다."
"역시 천장을 부수고 탈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자신은 있고?"
"그건 해 봐야…."
율리우스는 알렌의 물음에 괜히 동동이를 쓰다듬었다. 동동이가 얌전히 손길을 즐겼다.
알렌은 심적으로 갈등했다.
'패를 더 드러내는 게 옳은가? 아니면, 이곳에 도달했을 때처럼 함정을 역이용하는 방법은? 왜 이에 대해 대비를 하지 않았지?'
아카데미를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팔강이 두 명이나 있고, 수백 년의 역사가 있다. 그렇기에 알렌은 실전임에도, 아카데미가 제공한 안전에 이상이 없을 것이라 방심했다.
'순환교에 의해 타격을 받았던 일이 있음에도.'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그런 일이 있을 뻔했다. 그것 말고도 아카데미에 매년 벌어지는 사건·사고는 만만치 않았다.
그저, 아카데미의 빠른 대응과 적절한 보상에 수습되었을 뿐이다.
알렌은 잠시간 고뇌하다가,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다. 불완전한 시간 마법을 공개한다.'
육체 능력은 조정해서 기사 수준으로 하향. 그마저도 엄청났지만, 율리우스의 눈에는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시선은 원작 소설을 기준으로 초점을 잡고 있으니.
알렌이 그렇게 결심하고 입을 열려던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수십 개의 발소리가 들렸다. 소설에서나 볼법한 타이밍이었다.
"알렌, 거기 있어요?"
"야! 율리우스!"
익숙한 목소리에 알렌의 고개가 돌아갔다. 율리우스도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레이첼…?"
"어? 아벨린?"
난감한 상황을 짐작하듯 순식간에 해결책이 마련되었다.
마치 운명처럼 그들을, 아니.
'율리우스.'
행운이 율리우스를 따랐다. 마치 소설처럼.
율리우스는 이런 기막힌 우연에 그저 기뻐하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오…, 아벨린, 왔네?"
"이 나쁜 놈아! 왜 여기 있어!"
알렌은 그저 그 모습을 조용히 응시했다.
기회를 노리는 사냥꾼처럼.
제88화
"이딴 미친 짓을 저지르는 놈들이 있나!"
수(水)계통 마법 교수, 말베른은 분노를 터트리며 미친 듯이 손을 휘저었다.
그의 의지에 따라 파도가 몰아치며 바닥에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내더니 공간을 격리하던 백색의 결계에 부딪혔다.
6 위계 끝에 달한 마법사의 진심을 다한 공격.
쾅!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한차례 밝은 빛을 반짝인 벽은 이내 끄떡도 없다는 듯 마법을 막아섰다.
"이런 제기랄!"
그렇게 병사 수백은 짓이길 위력의 마법은, 아무런 결과도 없이 하얀 물거품을 터트리며 흩어졌다.
"성유물을 여기에 쓴다고? 진짜 돈이 썩어나는 건가?"
몇 번이나 공격을 막아내는 결계에 그가 분노를 터트리자, 곁에 있던 환영 계통 교수 클라이크가 점잖게 입을 열었다.
"그만, 그만하시오. 말베른. 더 이상은 힘의 낭비일 뿐이오."
"클라이크 교수, 당신은 화도 나지 않습니까?"
그가 분노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클라이크는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되물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시오? 방법도 없는데? 대책 없이 분노를 터트린다고 다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니잖소."
그는 결계를 분석하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성유물은 마법이 아닌 힘 그 자체였기에 무언가를 알아낼 수 없었다.
"그건 그렇지만…."
"지금은 진정하고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할 때요."
그의 차분한 음색에 말베른은 금방이라도 터트리려던 마력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사과했다.
"하…, 흥분해서 미안합니다."
"나도 이해하니 괜찮소."
그들은 현재 유적의 한구석에 갇혀있었다.
유적에 진동이 일어나기 전, 그들은 눈치 채지도 못한 사이 공간 채로 격리되어버렸다.
그 탓에 밖에 어떤 혼란이 일어났는지도 알지 못한 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이 너무 심각하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사고가 흔하지는 않다고 해도 2, 3년에 한 번씩은…."
"아니 내 말은, 그 정도가 아닐 것 같다는 말이오."
클라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일개 교수… 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대단한 성유물을, 겨우 우리 두 명을 배제하기 위해 사용했소."
대몰락 이후 신전은 빠르게 힘을 잃었다.
사제와 성기사들은 신성력을 잃었고, 신과의 연결은 끊겼다.
신전이 몰락하는 와중에 성유물의 존재는 특별했다.
고대 유물보다 더 강력한 성능에 치유, 방어, 공격 등 여러 가지로 나누어진 능력까지.
비록 신전이 몰락해서 일회용으로밖에 사용할 수 없다지만, 그 준수한 성능 탓에 많은 세력이 눈독 들였다.
"그런 이들이 다른 교수들이라고 가만히 뒀겠소?"
그 말에 말베른은 단숨에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했다.
"자크니르 님을 상대할 비책도 준비했겠군요…."
"벌써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지. 저 멀리서 여기까지 들려오는 폭음이 뭘 뜻하겠소?"
"하…."
말베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상황은 늦었고, 일은 벌어졌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겠지.
그가 굳은 얼굴로 아공간에서 커다란 청동으로 만든 잔을 꺼냈다.
"그럼 더 이상 미룰 수 없겠군요."
"…대마법."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절대 멍청하지 않다. 그들이 가르치는 건 세계의 기재들이다. 무능한 사람이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으며 다음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이걸로 몇 주 앓아눕겠지만, 해결책을 부르는 게 나을 테니까."
"말베른, 정말 후회하지 않겠소? 대마법을 준비하면 교수 모두가 동참해야 하오. 지상의 학생들을 신경 쓸 수 없을 텐데…."
"이대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위의 학생들을 걱정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바에 먼저 움직이는 것이 낫다.
말베른의 결단에 클라이크도 똑같은 잔을 꺼내 들었다.
"그럼 먼저 다른 교수들에게도 신호를 보내겠소."
클라이크가 손바닥을 옅게 베자 핏방울이 청동잔의 바닥을 채웠다. 그와 동시에 주입한 마력이 잔의 표면을 타고 푸르게 물들였다.
우우웅-
잔의 위로 반투명한 늑대 한 마리가 앉아서 떠올라 크게 울부짖었다.
말베른은 쓴웃음을 지으며 공간을 가로막은 하얀 벽 너머를 응시했다.
"…피해가 적기를 바래야겠지."
최대한 빠르게 상대가 이곳에 오기를 바라며.
청동잔이 클라이크의 준비에 따라 공명하듯 울리기 시작했다.
유적 곳곳에 그들처럼 붙잡혀 있던 교수들도 청동잔이 공명하자 대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 *
쿠구구구궁-
무너질 듯이 진동하는 유적과 멀리서 들려오는 폭음.
천장의 먼지가 떨어져 내렸고, 흔들리는 바닥에 균형 잡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알렌과 율리우스는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구조대와 함께 통로를 내달렸다.
알렌은 구조대가 어떻게 이렇게 빠른 속도로 7층까지 내려왔는지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답은 간단했다.
"저건… 마법진?"
공동을 빠져나와 얼마나 달렸을까, 통로가 막혀있는 구석에 마법진이 옅은 빛을 내며 발광하고 있었다.
"공간 이동 마법진이에요."
레이첼이 알렌 곁에 붙어서 대답했다.
"학생회에 소속된 선배가 알고 있더라고요."
구조대에 있던 학생회 소속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마법진을 발동시키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이런 것도 준비해뒀었나…."
아카데미 측에서 만약을 대비해 층마다 지상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공간 이동 마법진을 설치해 놓았다는 것.
구조대는 그 덕분에 시간을 얼마 들이지 않고 내려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럼, 여기에 내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밖에서 당신이 있었던 조의 조원들을 만났어요."
알렌은 그녀의 대답에 안도했다.
'조원들은 탈출했나 보군.'
구조대와 먼저 나갔거나, 공동에서 사라진 후에 무사히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런데 교수들은 어디 가고 학생끼리만 온 거지?"
"그게…, 상황이 별로 안 좋아요."
구조대는 알렌과 율리우스를 구조하는 것도 목적에 있었지만, 주목적은 행방이 묘연한 교수들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교수님들이 있을 장소를 찾았는데…, 하얀 막으로 둘러싸여서 들어갈 수가 없더라고요. 유적은 무너질 것 같아서 곧장 여기로 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럼 자크니르 님은 어디 있지?"
"너무 시간이 촉박해서…."
알렌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곧 유적에서 봉인해놓은 괴물이 등장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교수든, 팔강이든 때마침 각자의 이유로 합류할 수 없게 되다니.
누군가 괴물을 막는다면 단숨에 눈에 띄게 될 것이 뻔했다.
마치 누군가를 띄워줄 목적처럼 준비된 무대처럼.
"…이제 됐습니다! 마법진을 발동할 테니 모…."
쿠구궁-
유적이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닥에도 잔금이 가며 무언가 빠져나오려는 지 몸부림을 쳤다.
"빨리 모여!"
학생들은 빠른 속도로 마법진에 모여들었다.
마법진의 빛이 강렬하게 빛나는 동시에 바닥의 잔금이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릿해지며 잠시 머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공간이 물결쳤다.
-팟!
밖으로 탈출한 학생들이 목격한 건 무너져 내리는 첨탑의 모습이었다.
비명과 고함, 옅은 피 냄새와 건조한 바람의 감촉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거대한 네 개의 첨탑이 장난감처럼 쓰러지는 모습은 그만큼 비현실적이었다.
"어, 어! 무너진다!"
"끄, 끝난 건가…?"
유적이 무너졌으니 더 이상 수호자들이 나올 수 없다.
힘을 합쳐 전장을 정리하기만 하면 되는 셈이다. 학생들이 희망을 품고 그 모습을 지켜봤지만, 유적의 진동은 줄어들지 않았다.
"자, 잠시만 바닥이…!"
오히려 균형을 잡기 힘들 정도로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율리우스의 기대하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학생들의 틈 사이로 하얗고 검은 옷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진동이 점점 커지며 임계점이 이른 순간.
'놈이 온다.'
알렌이 몸을 낮췄다.
콰과과광-!
땅을 무수며 거대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커다랗게 펼친 날개에 의해 모래바람이 거칠게 불어닥쳤다. 고개를 들었다. 쏟아지는 별 아래 괴물이 보였다.
그림자처럼 칠흑 같은 색의 매 한 마리가.
고고히.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돌개바람이 새의 몸을 휘감았다. 거대한 침묵이 지상에 들이닥쳤다.
"────────────"
고대의 괴물이 수천 년의 시간을 지나 다시 풀려났다.
* * *
대기하고 있던 알렌이 땅을 박찼다. 율리우스의 몸이 뇌전을 두르며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그들보다 먼저 나선 이들이 있었다.
"의식을 펼쳐라!"
미니마 족장이 크게 소리쳤다.
알렌이 주위를 살피자 어느새 미니마 부족과 아라흐니 부족이 학생들의 앞에 있었다.
하얗고 검은 옷의 그들이 깃발을 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괴물의 눈에 별자리를 그리고 있었다.
하얀 옷의 남자들은 전갈 자리가 되었고.
검은 옷의 여자들은 거미 자리가 되었다.
그들이 들고 있던 깃발 위의 별자리가 밝게 빛나더니 연청색의 쇠사슬이 나타나 하늘로 솟구쳤다.
수백 개의 쇠사슬이 하늘로 날아가더니 지상을 내려다보던 괴물의 몸체를 휘감았다.
"당겨라!"
부족장의 외침에 맞춰 하늘의 지배자가 땅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베드르폴니르가 소리를 지르며 거칠게 몸부림쳤다.
"────────────"
몸을 감싸던 하얀 돌개바람이 거칠게 몰아쳤고, 수백의 쇠사슬이 움직임에 맞춰 흔들렸다.
팽팽하게 상태가 고착화 되었던 그때, 부족장이 소리쳤다.
"지금이오!"
부족장이 학생들에게 소리쳤다. 알렌의 고개가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했다. 일순간이나마 뒤돌아본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알렌은 그의 외침이 다른 학생들이 아닌 자신과 율리우스에게 하는 말 같았다.
[걱정하지 않는다오. 운명의 안배란 그런 것이니.]
순간적으로 과거의 만남이 떠올랐다. 입꼬리가 비틀렸다.
'운명이라….'
개소리하는군.
알렌은 운명을 믿지 않는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그러나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율리우스!"
"먼저 갑니다!"
알렌의 외침에 율리우스가 뇌전을 폭발시켰다. 하늘의 작은 먹구름이 끼었다. 진청색의 뇌전이 응축되어 허공을 갈랐다.
하늘에서 낙뢰가 검기의 뇌전을 증폭시켰다.
꽈르릉!
뇌전의 검기가 흑색의 날개에 맞부딪쳤다. 맞닿기 전 돌풍이 터지며 위력을 반감시켰다. 그러나 완전히 상쇄하는 건 불가능했다.
베드르폴니르가 소리 질렀다.
"────────────"
높은 음대의 소리가 귓가를 찔렀다. 수십 개의 마법이 학생들의 손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두두두두-
"무슨 소리지?"
전방에서 남아있던 유적 수호자를 막던 학생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표정이 굳었다.
어둡게 내리 앉은 지평선의 너머, 모래 먼지가 휘날렸다.
"키에에에에에-"
"크하하, 크흐헤-"
"그르르륵-"
유적 주위에 있던 모든 괴물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절반은 앞에 유적 수호자 막고 공격하도록 합니다! 나머지 절반은 저를 따라오십시오!"
한창 학생들을 지휘하던 3학년 선배가 입술을 깨물고 학생들을 데려갔다.
"────────────"
이제 슬슬 정신을 차리는지 베드르폴니르의 반격이 더욱 거세졌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거대한 매는, 고대의 괴물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괴물의 머리 위로 번개가 떨어져 내렸다.
꽈릉!
「알렌, 빨리 안가고 뭐해요?」
급변하는 상황에 베스틀라가 뭐하냐며 보챘다. 알렌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저 괴물을 떨어트리려면 마법과 검, 뭐가 나을지 생각 중이었다."
「검이요! 검! 이번에 새로 배운 거 있잖아요! 그거 쓰라니까? 그럼 한 방이라니까요!」
알렌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바람대로 자세를 잡았다.
요툰스베르드는 총 아홉 개의 비의로 이루어져 있다. 알렌은 검에 대한 재능이 부족했기에 익힌 건 겨우 두 개뿐이었다.
마나그람, 이르파스카더스.
그녀가 알려준 검술은 검술이라는 틀에 벗어나는 동시에 난해했기에 익히기 쉽지 않았다.
마법사만의 방식으로 그녀의 검에 이해를 더할 수 있었지, 일반 검사였다면 자신의 재능에 익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적으로 출발하기 전, 시간에 맞춰 하나 더 익히는 것에 성공했다.
알렌의 용의 노심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실타래를 뽑아낼 것도 없이 어마어마한 마력이 검으로 빨려들어갔다.
순간적으로 노심이 비었다.
거대한 마력의 흐름을 눈치 챈 괴물이 몸부림치기 시작했지만,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
마나그람은 분노라는 감정을 연료삼아 어느 순간이든 최적의 일격을 선물한다.
이르파스카더스는 그림자를 통한 시선의 분산과 한 번에 수많은 공격을 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럼 세 번째는?
"후읍-."
알렌의 검이 움직였다.
아래에서 위로, 검이 닿지 않아도 상관없다. 빛은 닿지 못하는 곳이 없으니까.
요툰스베르드J?tunnsverd 삼계三界 료스솔Ljossol 빛으로 이루어진 태양이 검의 방향을 타고 하늘로 뻗어갔다. 용의 노심이 한순간이나마 마력의 생성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정말 거인 정도가 아니라면 사용 못 할 기술.
"그래도…."
부족하지 않았다.
알렌이 고개를 들었다.
별이 떨어지는 하늘 아래.
지상에서 빛의 태양이 떠올랐다.
* * *
언제 같은 일상이 유지되는 갈슈딘 아카데미.
그 아카데미의 누구도 올라가지 못하는 대도서관의 지붕, 그곳에 한 명이 달을 바라보며 누워있었다.
꿀꺽꿀꺽-
"언제쯤 그 모기 새끼들을 찾을 수 있을까…."
짐승왕 가이온.
그는 오늘도 하얀 달을 노려보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게 하루이틀 일은 아니였는지 널브러진 술병들 사이로 술 냄새가 진동했다. 그럼에도 가이온의 정신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이 짓거리도 슬슬 그만둘 때가 됐는데. 준다는 정보만 아니었으면…."
그는 찰랑대는 술의 양을 가늠하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가 슬슬 새 술을 가져올까 생각하던 그때.
우우웅-
자신에게만 들릴 공명음과 함께 시선이 획 돌아갔다.
"저 방향은…, 흠 일이 생겼나."
가이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술을 모두 들이켜도 역시, 취기가 들지 않았다.
쓰기만 할 뿐.
"어르신이나 귀찮게 하고… 에잉, 쯧."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
그는 재수 없는 이사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발을 굴렀다.
쾅!
대도서관의 지붕이 일부분 부서져 내리며 그의 몸이 빠르게 가속했다. 밑에서 놀란 듯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흥, 어르신의 시간을 방해했으니."
이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이사장이 들으면 기가 찰 소리를 하며 그의 신형이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제89화
한순간에 지상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빛으로 이루어진 태양이 하늘에 떠있는 매의 날개를 노렸다. 빛이 폭사하며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태양이 검은 그림자를 집어삼켰다.
콰과과광-
빛이 폭사하며 괴물의 신형이 일순간 사라졌다. 알렌이 본능에 따라 감긴 눈을 부릅떴다. 공격의 잔해가 가라앉으며 드러낸 고대의 괴물은.
멀쩡하게 날고 있었다.
마치 알렌의 공격에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는 듯, 하늘의 제왕으로서의 풍모를 당당히 드러내며.
아니, 완전히 소용없지는 않다.
알렌이 눈을 가늘게 떴다. 괴물의 몸이 일순간 비틀거렸다. 놈도 피해를 입은 것이다.
놈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체였다. 단지 적들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공격이 소용없는 척 연기하는 것일 뿐.
수천 년간 봉인되어 있었으니 놈도 온전치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상대조차 할 수 없었을 테니.
고대의 괴물은 거인과 용에 비견되는 놈들뿐이니.
그렇다면 해답은 간단하다.
요툰스베르드 삼계 료스솔.
연거푸 빛의 태양이 떠올랐다. 용의 노심이 비명을 질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심장을 손으로 쥐어짜는 감각. 익숙한 고통이었다.
"베스틀라, 저 괴물을 안다고 했지. 승률은?"
베스틀라의 목소리는 시끄러운 전장에도 또렷이 박혀 들었다.
「이제 막 풀려났으니까. 알렌 혼자 싸운다면…, 삼 할이요.」
"율리우스랑 힘을 합친다면?"
베스틀라가 눈치를 보더니 작게 답했다.
「…당신 동생이랑 힘을 합친다면 반반, …아마도요.」
알렌은 그걸로 만족했다. 율리우스랑 싸운다는 말에 싫다고 고집 피울 것 같은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할 뿐이지.
"진짜, 짜증나게 하네. 아아아아아!"
율리우스가 고함을 내질렀다. 아랫배에 박힌 뇌신의 각인이 뜨겁게 작열했다. 진청색의 뇌기가 얽혀 하나의 창이 되었다.
"좀, 내려와! 이 새끼야!"
[아스트라페αστραπ?(A)]
번개가 하나의 선이 되었다.
꽈르릉!
몇 번이나 직격당한 베드르폴니르의 날개가 넝마가 되면서 검은 피가 뿜어졌다.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닿아 모래를 녹였다.
베드르폴니르가 땅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그 순간마저도 놈은 반격했다. 신체를 감싸던 하얀 폭풍이 결국 몸을 묶던 쇠사슬을 떨쳐냈다.
힘겹게 버티던 미니마 부족과 아라흐니 부족이 나가떨어졌다.
고고하게 땅에 착지한 놈은 날개를 크게 펼치며 비웃음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하얀 돌개바람이 사방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
몰아치는 광풍 속으로 알렌의 발이 미끄러졌다. 이계 이르파스카더스. 걸음마다 눈을 현혹시키는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검은 밤의 장막 사이로 알렌이 파고들었다.
율리우스가 시퍼런 뇌전을 뿜어내며 괴물의 시선을 끌었다.
그 사이를 그림자가 파고들었다. 그림자에 녹아든 신형이 괴물의 사각을 찔렀다.
분노를 연료 삼는 최적의 일격을.
일계. 마나그람.
붉게 물든 검이 가속하며 날개의 아래를 노렸다.
투훅-
그러나 실패했다. 알렌의 일격은 괴물의 살갗을 찢어내지 못했다.
단단한 깃털에 의해 미끄러지듯 빗겨버린 일격.
베드르폴니르의 눈에 흉포함이 깃들며 칼바람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칼바람이 그림자를 찢었다. 알렌은 어느새 공격 범위의 밖에 자리해있었다.
일반적인 공격은 통하지도 않는다고?
알렌은 헛웃음이 나왔다. 실험체라고 한들 거인의 피부마저 갈라낸 기술이다. 그런데 깃털조차 베어내지 못하다니.
"저런 괴물이 넘치던 시대가 왜 멸망한 거지?"
「…글쎄요. 아마 거인이랑 용이랑 공멸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