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틀라는 모호하게 말했다. 용의 노심에서 뽑아낸 마력이 실타래가 되어 공간을 점유해나갔다.
근접전이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 없었다.
자신의 장기는 마법이었으니.
실타래가 점차 늘어나며 얼기설기 엮여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 천둥번개가 떨어졌다.
꽈릉!
"시바아알!"
자잘한 공격이 통하지 않자 율리우스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어이가 없었다. 이딴 걸 죽이는 게 퀘스트라고?
알렌이 양보하고 말 것도 없었다. 어떻게든 도움을 받아서 죽이는 게 먼저였다.
뇌신의 각인에서 마력이 모여들었다. 뇌전이 몰아쳤다. 강하게 대지를 박차자, 고열에 녹은 모래가 박살나며 파편을 뿌렸다.
쾅!
시야 사이로 알렌이 마법을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율리우스는 손에서 뇌전을 모여들게 만들어 길게 늘렸다.
[케라우노스κεραυν??(A)]
기다란 채찍이 소리보다 빠른 속도로 공기를 꿰뚫고 괴물의 몸을 휘감았다. 순간적으로 놈의 움직임이 굳었다. 하늘에서 번개의 장대비가 쏘아졌다.
쿠르르르릉-
공기층이 울렁이며 우레가 울렸다.
"알렌-!"
"형님을 붙이거라. 그 잠깐 사이에 우리가 같은 나이가 되었구나."
율리우스의 부름에 알렌은 냉정한 눈으로 수인을 맺었다. 손가락 사이로 반절의 실타래가 흘러내렸다. 바닥에 떨어진 실타래는 사슬로 엮여 땅속을 파고들었다.
남은 반절의 실타래는 흑색의 검이 되어 괴물의 몸으로 쏘아졌다.
"형님, 좀 더 강력한 마법을…."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틈을 만들어주마."
알렌이 손끝을 튕기자 모래 바닥에서 사슬이 튀어나와 괴물의 다리를 묶었다. 퍼덕이는 날개를 보니 당황한 것이 분명했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흑색의 검이 괴물의 몸을 두드렸다.
"────────────"
상처를 줄 수 없어도, 물리적으로 밀어낼 수는 있다.
베드르폴니르의 몸이 공격에 따라 흔들리며 괴성을 내질렀다.
이미 베드르폴니르에 대한 대강의 분석은 끝마쳤다.
바람을 다루는 고대의 괴물.
본능적으로 바람을 다루며, 현재는 이성적이지 않은 상태.
신체는 웬만한 공격으로 뚫지 못하며, 피에는 강한 산성이 있다.
하늘을 날 수도 있으며, 회복능력을 갖추고 있을 가능성도 유력했다.
'어떤 능력을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모습만 본다면 내가 상대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직접 육체를 맞대며 상대하지 않는 이상 알렌의 마법으로 커다란 피해를 주기 힘들었다.
자신의 마법 중 한 개체를 상대하기 위한 마법은 모자라니.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율리우스의 눈에 순간적으로 탐욕이 떠올랐다.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퀘스트는 완료하면 좋다. 그것도 진실의 파편이라니, 당연히 궁금하지 않은가.
그런 차에 강력한 한 방을 꽂아 넣을 기회를 준다는데 마다할 리 없었다.
"형님, 잠시만 버텨주십시오!"
"알았…."
알렌이 대답하다 멈칫했다. 압도적인 마력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마력은 율리우스의 가방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율리우스는 바닥에 떨어트렸던 가방에서 커다란 항아리를 꺼내 들었다.
'…저걸 얻기 위해서 유적에 있었던 거였나.'
알렌은 놈의 욕심에 정말 질린 얼굴이 되었다. 아무리 보물이 중요하다지만, 목숨까지 걸고 구하다니.
심지어 놈은 유적을 따로 빠져나갈 방법도 생각해두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 진짜. 나중에 조용히 쓸려 했는데. 정령친화력도 부족하고."
그는 몇 마디 더 구시렁거리더니 뇌전을 항아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항아리는 뇌전을 주입할수록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잔금이 가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진짜 정령의 샘에만 갔어도 완전히 계약하는 건데, 시발."
율리우스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얼굴을 찡그렸다가, 항아리가 완전히 부서질 듯 보이자 뇌전을 더욱 강하게 집중했다.
그렇게 시야가 전광으로 가득 차게 되는 순간.
쾅!
항아리가 박살났다.
항아리가 부서지며 나타난 것은 상체만 있는 거인이었다. 반투명한 몸에, 이목구비도 불분명한 거인.
거인의 몸 중앙에는 율리우스가 항아리에 주입한 뇌전이 공처럼 모여 있었다.
베드르폴니르는 거인이 나타나자 무언가를 느꼈는지 크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칼바람이 주위에 몰아쳤고, 자신을 묶어둔 알렌에게 공격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형님, 조금만 더 버텨주십시오!"
율리우스가 거인에게 뇌전을 더욱 집중시켰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베드르폴니르를 가리키자 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인의 머리 위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쿠릉-
낙뢰가 떨어질 듯 공기를 진동시켰고, 거인의 팔로 번개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알렌은 한 손으로는 끊임없이 실타래를 엮어 녹청색의 검을 날리고, 한 손으로는 충격파를 터트렸다.
공간 자체를 밀어내는 공격에 바람이 맞부딪치며 알렌을 몇 번이고 비껴갔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다.
알렌은 마력을 미친 듯이 소모하며 괴물을 견제했다. 사슬이 끊임없이 발밑에서 나타나 괴물을 묶고, 움직임을 막았다.
"아직이더냐!"
"일 분! 아니, 삼십 초면 됩니다!"
욕심을 너무 부리는군. 알렌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상자는 늘어만 가고 있다.
알렌과 율리우스가 쉽게 상대한다고 해서, 다른 학생들도 그러리라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거기에 근처에서 몰려드는 몬스터까지 합치면 상황이 결코 좋다고 볼 수 없었다.
'할 거면 확실하게 해야지.'
율리우스는 괴물을 죽이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었다.
실수로 알렌이 죽이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그렇게 약속한 삼십 초가 지나갔을 때, 율리우스가 외쳤다.
"이제 됐습니다!"
모였던 뇌전이 거인의 손 위로 모여들었다. 모여든 뇌전은 하나의 거대한 망치로 변했다. 거인의 상체의 반만 한 크기.
그렇게 만들어진 망치를 거인이 휘둘렀다. 아니, 날렸다.
몇 분간 율리우스의 전력을 다한 마력이 인공 정령의 손을 빌려 펼쳐졌다.
[뮬니르Mj?llnir(A)](임시)
정령은 공격한 직후 형체가 흐트러지더니, 뇌신의 각인이 자리한 곳으로 흡수되었다.
소리가 터져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삭제한 망치가 매의 가슴을 때렸다.
쾅!
번갯불이 튀며 윤기 나던 흑색의 깃털을 불태웠고, 망치가 가슴팍을 움푹 파고들고 나서야 전진을 멈추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마무리도 해야지."
율리우스가 히죽 웃으며 손을 내리자, 지금껏 기다렸다는 듯 수많은 번개가 매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콰릉!
번개가 다시 떨어져 내렸다.
콰르릉-!
수많은 번개 줄기를 무방비하게 맞고 있는 괴물은 숨이 끊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왜….'
무언가 이상했다. 증폭된 오감이 끊임없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베스틀라가 급하게 소리쳤다.
「알렌 빨리 물러나요! 어서!」
알렌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즉시 땅을 박차고 뒤로 물러났다.
율리우스는 퀘스트창을 켰다. 이제 보상이나 얻고 돌아가면 될 것이다.
[유적에 봉인된 고대의 괴물을 '직접' 죽이고 재앙을 막아내십시오! 제한시간 : 3 : 31 : 18]
[보상 : 진실의 파편(???)]
"자, 형님! 이제 돌아갑시…."
어?
"왜 퀘스트창이 그대로…."
율리우스는 의문을 풀고자 고개를 돌렸고.
검은 그림자가 그를 덮쳤다.
콰가가강-
그 모습이 그가 기절하기 전 확인한 마지막 모습이었다.
* * *
율리우스의 몸뚱어리가 장난감처럼 허공을 날았다.
한 번에 장비까지 다 박살 난 그의 모습은 일순간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알렌의 시선은 율리우스를 덮친 괴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놈은 허공에 있었다.
율리우스를 날린 그 자리 바로 위에.
곰곰이, 자신의 공격한 것이 저놈이 맞느냐는 의문에 가득찬 채.
고작 새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의 거대한 매가 의구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은 현실과 동떨어져 보였다.
상처 따위는 모두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렇게 잠시 율리우스를 바라보고 있던 괴물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알렌은 순간적으로 놈과 눈이 마주쳤다. 놈의 노란 눈에서는, 전과 같은 흉포함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한순간.
움직임을 놓쳤다.
─쾅!
"큭…."
베스틀라가 움직임을 보조해줬기에 막을 수 있었다.
알렌은 급히 일어섰다. 시야 앞으로 긴 고랑이 밀려난 거리에 따라 그려졌다.
베드르폴니르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이럴 리가 없다는 듯, 의문 어린 눈으로 알렌을 바라본 놈은 다시 날개를 세웠고.
시야가 흑색으로 가득 찼다.
─쾅!
봤기에 막을 수 있던 게 아니었다.
거인의 동체 시력, 감응력으로 증폭된 오감,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을 도와주는 감지력.
그 모든 것도 베드르폴니르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없었다.
알렌은 단 한 번이라도 스스로 공격에 반응하지 못했다. 모두 베스틀라가 먼저 움직여 주었기에 가까스로 막아내는 것이 가능했다.
반격은 여전히 불가능했지만.
몇 번이나 알렌에게 부딪친 괴물의 눈에 일순간 슬픔이 드러났다.
놈은 그리운 얼굴로 지금까지도 지상과 상관없다는 듯 쏟아지는 별을 바라봤다.
"─────이미 끝난 과거의 영광이로구나. 뇌신의 가호를 받은 놈도 그렇고…, 너도 마찬가지."
알렌의 얼굴에 경악의 감정이 드러났다.
순식간에 감정을 지운 괴물이 고개를 돌려 알렌을 향했다.
"─────거인의 피를 이었기에 기대했건만…, 실망스럽군. 필시 검술도 우연히 얻은 것이겠지."
실망감이 가득한 어조.
베스틀라의 검날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볼 것도 없겠어. 나를 깨워준 건 고맙지만…,"
지성이 깃든 노란 눈동자가 주위를 둘러봤다.
"─────강제로 깨웠으니, 그 대가도 치르도록."
다시 괴물이 움직였다.
활짝 펼친 날개가 반짝이는 밤하늘의 아래에서 가속했다.
그가 아닌, 다른 이들을 향해.
제90화
활짝 펼친 날개가 괴물의 크기를 더욱 키웠다.
날카롭게 구부러진 부리가 지상을 향했고, 허공에 짤막하게 멈춘 몸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백색 폭풍이 들이닥쳤다.
"도망…."
쾅!
도망가려던 학생의 상체가 붕 떠올랐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하던 학생은 바닥에 쓰러진 자신의 하반신을 보았다.
"으아아…!"
콰과과광!
소리를 다 지를 새도 없이 괴물의 뒤에 따라온 돌개바람에 온몸이 찢겨나갔다.
근처의 학생들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직격을 피했다고는 하지만 몰아치는 칼바람에 신체 한 곳이 덜렁거렸고, 겨우 막은 이들도 그 한 번만으로 고대 유물이 망가졌다.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을 알아챈 학생들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나, 나는 도망갈 거야. 시발, 갈 거라고!"
"가문으로 간다! 카밀! 따라와! 가자!"
"시바, 아카데미 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냥 내정관이나 하는…."
남은 유적 수호자를 처리하던 이들도, 멀리서 달려오던 몬스터를 막아내던 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채 떠나기도 전에 다시, 그림자가 쏘아졌다.
그리고, 바람이 멎었다.
쾅!
"사, 살려줘!"
"교수님, 교수님은 어딨어!"
"자크니르 님-! 제발, 제발."
그걸 기점으로 학생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괴물을 상대해보겠다는 의지는 없었다. 저걸 보고도 상대하겠다고?
"후배님들! 조금만 버티면 됩니다! 조금 있으면 아카데미에서 이상을 알아채고…!"
현장을 지휘하던 3학년 선배가 이탈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압도적인 공포에 사로잡힌 학생들에게 남은 건 생존본능밖에 없었다.
"닥치세요! 선배나 남으십시오!"
"희망을 가진다면 이겨낼…!"
쾅!
"꺄아아아악-!"
3학년 선배의 몸뚱이가 고깃덩이가 되어 날아갔다.
거대한 크기의 괴물이 바람의 도움까지 받아 공중에서 내려치는 공격은, 일개 학생이 받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학생들을 모아두었던 구심점이 사라지니 제각각 살기 위해 도망쳤다.
"도, 도와주십시오! 다리가 안 움직입니다!"
"제발, 포션 좀 나눠주세요! 사례할게요, 제발."
그 사이로 도와달라는 목소리가 들렸고, 여기저기서 유물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든 알렌이 놈을 가로막고자 움직였지만, 괴물은 그를 피해 다니며 남은 학생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알렌이 거인의 힘을 숨기지 않아도, 어떤 마법을 퍼부어도 놈은 알렌을 무시했다.
알렌의 튼튼한 몸을 베드르폴니르는 짧은 시간 내에 뚫을 수 없고, 알렌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매의 기동력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 혼란의 사이에서 괴물을 노리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괴물이 공격한 이들을 먼저 처리하기 시작하자 그마저도 사라졌다.
율리우스는 기절한 상태였기에 도울 수 없었다.
피와 혼란, 비명과 죽음.
그런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백발의 여인이 천천히 움직였다.
[이번 던전 실습에서 두각을 나타내세요.]
마리아 카리타스, 그녀는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괴물을 응시했다.
[성검의 권역을 벗어날 수 없으니 확인은 못 했지만…, 아마 그곳에는 고대의 괴물 중 하나가 있을 거예요.]
그림자 같은 검은 몸에 두른 백색의 바람.
한 번 시야에서 사라질 때면 비명이 울렸고, 흩날리는 바람 사이로 피 냄새가 났다.
[학생들이 상대하기에 버거울 테니,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을 때… 나타나서 죽이세요.]
그녀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옅은 파문을 애써 무시하며 마력을 일으켰다.
지금은 사라진 신성력을 닮은 빛깔의 마력이 그녀의 명치로 모여들었다.
눈을 감자, 그곳에는 문이 있었다.
인간과 무언가를 나누는 문이.
그녀는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거부감을 억누르며 문을 열어젖혔다.
스위치를 누르든 정신이 전환된다.
생명의 나무 (The Tree of Sephiroth)
뱀의 길 (Way of the Serpent)
열 번째 세피라 : 말쿠트 (Tenth Sephirah : Malkhut) 옅은 감정이 완전히 무감각하게 변한다. 한계를 가로막는 벽이 사라진다. 인간에서 벗어난 무언가에 올라선다.
몸에서 후광이 피어나며 검은 어둠을 몰아내었다.
인간이 아닌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만한 지성이 필요하다.
여덟 번째 세피라 : 호드 (Eighth Sephirah : Hod) 그런 머리 위로 무결하고, 무정하며, 완벽한 정신이 자리 잡았다.
검은 동공에 불필요한 감정이 사라졌다.
하얀 백광의 마력이 타오르며 등 뒤로 한 쌍의 날개가 펼쳐졌다.
그녀가 걸음을 옮겼다.
사박-
피와 엉킨 모래를 밟던 걸음의 뒤로.
조용히.
에메랄드 색의 장미가 필어올랐다.
일곱 번째 세피라 : 네차흐 (Seventh Sephirah : Netzach) 그녀의 주위로 소란스러움이 진정되며 정신이 맑아졌다.
"도, 도와… 아."
"살려, 살려… 아니, 잠시만…."
공황에 빠졌던 이들이 제정신을 차린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이들에 이성이 깃들었다. 패닉상태의 감정이 잦아들며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가슴 위로 육각성이 빛났다.
여섯 번째 세피라 : 티페레트 (Sixth Sephirah : Tipheret)
"포, 포션좀… 어? 회, 회복 되…."
"사, 살았다아…."
후광에 닿은 학생들의 상처가 서서히 회복되었다.
사박-
전장의 이목이 집중된다.
그녀의 뒤로 많은 학생이 질서정연하게 물러났다. 맑아진 이성은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고, 급한 부상자들을 후방으로 옮겼다.
마침내, 고대의 괴물도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괴물의 잠시 놀란듯한 감정이 느껴졌다.
"─────너는 뭐지?"
마리아는 괴물의 말을 무시하고, 놈을 죽일 방법을 탐색했다.
첫 번째 세피라 : 케테르 (First Sephirah : Kether) 빛으로 된 왕관이 머리에 씌워지며 세상이 톱니바퀴로 이루어진 기계처럼 시야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해준다.
"─────정체가 뭐지? 그 기묘한 힘은 흠…."
무게, 길이, 시야각, 반응 속도, 근력, 속도, 바람의 세기….
시시각각 바뀌는 정보의 모든 것이 그녀의 머리로 흘러들었다. 완전하게 변한 지성은 이 모든 것을 감당했다.
아홉 번째 세피라 : 예소드 (Ninth Sephirah : Yesod) 그 모든 정보를 바탕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한다.
"─────수 만 년 동안 보았던 그 무엇과도 비교하기 힘들군. 내 '눈'에도 잘 보이지 않고 말이지."
지금까지 움직인 행동을 바탕으로 한 예측,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의 근육과 힘의 총량으로 인한 움직임의 예지.
다섯 번째 세피라 : 게부라 (Fifth Sephirah : Geburah) 정보의 이해와 예측을 바탕으로 한 극한의 전투 보조.
힘이 강해지며, 반응 속도가 빨라진다. 전투와 관련된 움직임과 본능이 극대화되었다.
무감정한 눈에 명확한 목적이 새겨지며 오른손에 빛의 검이 나타났다.
"─────새 지배자인가?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육체는 그대로인데 영혼의 격만 올리다니."
괴물에 대한 이해.
움직임의 예측.
전투의 보조.
그리고 수십 개의 선택지 중 올바른 정답만을 고르게 만드는 판단력.
세 번째 세피라 : 비나 (Third Sephirah : Binah) 뇌리로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바탕으로 적절한 판단을 끝마쳤다.
"─────너를 태어나게 한 자는 누구지? 아니 누가 만들…."
"계산 완료."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열 개의 빛으로 된 검이 그녀를 맴돌기 시작했다. 동공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움직임을 정보를 받아들였다.
그녀가 무감정하게 내뱉었다.
"7182합 후 개체 소멸이 가능하다고 판단."
빛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하늘을 날았다. 고대의 괴물이 흥미로운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는 능력이군. 아니, 본래의 것보다 열화된 건가? 추측해보자면 천…"
"추락한 화신 '베드르폴니르'에 대한 사살 시작."
빛으로 이루어진 검이 창공을 뻗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괴물이 거대한 날개를 드리우며 천공을 갈랐다.
백색의 천사와 흑색의 괴물이 전투를 시작했다.
* * *
알렌은 차가운 얼굴로 마리아와 베드르폴니르가 부딪치는 모습을 지켜봤다.
콰앙!
베드르폴니르는 몸이 길게 늘어질 정도로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공격했다. 마리아는 그 모든 공격을 한 박자, 아니 몇 박자 더 빠르게 움직이며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상대에 비해 훨씬 작은 몸을 움직이며 모든 공격을 회피하는 그녀에게 화가 났는지 수백, 수천 개의 칼바람이 날아왔다.
그녀는 바람의 사이를 누비고, 때론 힘으로 뚫어가며 모든 공격을 회피했다.
아니, 회피의 사이에 빛의 검을 던지며 공격도 동시에 이어나가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에 대항하는 완벽한 예측.
마리아의 눈에는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의외나 예측 외의 상황에 대한 당황은 없었다.
모든 그녀의 계산 안에서 이루어졌다.
알렌은 그녀가 전투하는 사이 다른 이들의 피해가 줄어들자, 조용히 마력을 모으며 몸을 낮췄다.
「당신 어떻게 할 거예요? 저는 다음을 노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틈을 보였을 때, 곧바로 끼어든다.'
알렌도 맞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투하면서 저 속도에 대한 대처 방법을 생각해뒀다.
늘어난 의식에 감응력이 끼어들었다. 증폭된 오감은 육체에 동화되며 세상을 응시했고, 그 모든 것이 감지력에 깊숙이 박혔다.
느려진 시야 사이로 생각이 이어졌다.
'원래는 마리아처럼 움직임을 예측하려 했지만….'
알렌은 그녀의 전투를 보며 그것이 곧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보다 먼저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수, 알렌은 전투에서 몇 수 앞을 본다는 건 가능했다. 그러나 그녀처럼 수십 수를 내다보는 건 불가능했다.
정확히는 비슷하게 따라 할 수는 있어도, 알렌의 뇌가 버틸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포기한다?'
그럴 수 없다.
도망칠 수 있을지 의문이고, 아직 진짜 율리우스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했다.
알렌은 저 고대의 괴물에 대한 사실을 모았다.
웬만한 공격은 무시하는 깃털.
자신조차 반응하지 못할 속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바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성을 깨달았다는 것이 제일 암울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저 괴물이 도망칠만한 상대인가?
'계획을 모두 내버릴 정도로?'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괴물은 알렌에게 고난을 선물할 수 있을지언정 절망케 하는 상대는 아니었다.
1회차의 놈이, 율리우스가 죽인 괴물은 무수히 많았다.
고대의 괴물, 베드르폴니르 따위 그렇게 죽어간 많은 적보다 못하면 못했지 절대 낫다고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생각과 동시에 결론이 나왔다.
부족한 공격력의 부재.
알렌의 마법 계통은 기형적으로 공격 마법에 대한 가짓수가 적었다. 1회차에 율리우스를 구하기 위해 힘썼기 때문이다.
레이첼이 쓰는 공간 이동이나 공간을 자체를 건드리는 것과 같은 마법도 알렌은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마력의 실을 엮어 물체를 만들거나, 공간 자체를 건드리는 방식으로 메꿔왔지만, 이제는 부족했다.
마법의 형상이 악기인 것도 알렌의 장점을 최대한 극대화하기 위해 연구한 형태였다.
'마법을 지금 더 변형할 수는 없다.'
아쉬웠다. 불안정하지만 시간 마법을 생명체에게 사용할 수 있었더라면 큰 도움이 됐을 텐데.
그러나 지금은 할 수 없는 일.
알렌은 아카데미에 돌아가면 마법의 공격성을 더 높일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고, 베스틀라를 강하게 쥐었다.
할 일은 간단하다.
'마법이 안 된다면….'
검으로 할 수밖에.
이번에 새로 배운 세 번째 비의.
요툰스베르드 삼계 료스솔.
이게 통한다는 사실은 아까 드러났으니 지상에서 끊임없이 노린다면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빈틈을 만든다면 마리아가 그걸 놓치지 않을 테니.
용노심에서 웅웅 울리며 마력을 쥐어짜려던 순간, 커다란 웃음소리랑 함께 한동안 사라졌던 목소리가 들렸다.
"시바아알!! 다 비켜라! 형 파워업 했다. 부릉부릉 형님 들어간다!"
꽈르릉-
알렌이 놀란 얼굴로 하늘을 보자, 율리우스가 별빛으로 빛나는 거미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었다.
등에는 거미 모양 문신이 별자리 모양으로 반짝였고, 율리우스는 뭐가 좋은지 함박웃음으로 번개를 내리꽂았다.
「아니 저게 뭐예요.」
알렌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공격을 맞고 날아간 후에 안 보이나 싶었더니, 갑작스럽게 새로운 힘까지 얻어서 나타난다고?
'역시 율리우스인가….'
놈다운 행보였고, 놈에게 일어날 만한 일이었다.
알렌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렌이 보았던 율리우스의 생애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위기의 상황에 힘을 얻고, 절체절명에 처하면 누군가 도와주고, 발걸음이 닿는 곳에서는 사건과 함께 보상을 얻는다.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놀랐을 뿐이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저렇게 된다면, 일이 더 쉬워진다.'
알렌이 틈을 만들어준다면, 나머지는 두 명이 해결할 것이다.
방향을 정한 알렌이 다시 마력을 사용하려던 순간, 누군가 그를 불렀다.
"알렌 공자님."
본래는 무시했을 부름이었다.
그러나 그다음 사람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알렌, 당신 여기서 뭐해요."
"…레이첼?"
뒤에서는 레이첼이 지친 기색으로 알렉시우스와 함께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레이첼, 왜 여기에…."
"당신이 먼저 위험한 전투를 하는데, 나만 가만히 있으라구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뭔데요! 갑작스럽게 돌격이나 하고! 지금 나한테 그런 말 할 처지에요?"
레이첼이 화난 얼굴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알렌이 난감한 얼굴로 물러섰다.
"당신, 지금…."
레이첼이 나서려던 때, 시기 좋게 알렉시우스가 끼어들었다.
"자자, 이 다음 건 전투 후에 하십시오. 제가 자리도 마련해드리겠습니다."
그의 행동에 레이첼은 지금의 상황을 떠올린 듯 입을 꾹 닫았다. 그러나 알렌을 쳐다보는 눈길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나중에 고생하겠네요? 흐흥.」
베스틀라가 즐거운 어조로 웃었다.
레이첼이 물러나자, 알렉시우스가 맑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공자님, 족장님께서 부르십니다."
"저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알렌이 저 하늘에서 제집처럼 날뛰는 율리우스를 가리키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공자님에게도 좋은 일일 겁니다."
레이첼이 알렌의 손을 아프게 잡았다. 알렌의 표정에 변화가 없자, 자신이 더 아픈지 곧장 힘을 뺐다.
알렌의 노려보는 눈매가 더욱 사나워졌다.
"얼른 가시지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밤 자락의 끝이 옅어지고 있었다.
제91화
레이첼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여러 번 공간을 이동했다.
그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알렌을 찾은 것도 이런 식으로 무식하게 전장을 이동하며 찾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도움을 받고 도착한 곳은 미니마 부족의 주둔지였다.
주둔지에는 수많은 학생이 신음을 흘리며 치료를 받고 있었다.
'…흠, 안 보인다 싶었더니 후방에서 돕고 있었나.'
생각보다 사상자의 수가 적을 수도 있겠군.
아카데미에서 중상자가 발생하는 건 흔하다. 그러나 학생이 죽는 경우까지 가는 것은 드물었다.
이유는 아카데미의 치료 시설이 뛰어났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세계에서 재능이 뛰어난 자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 학생들은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단을 각자 하나씩은 갖고 있었다.
단지 지금 같은 상황이 예외일 뿐이지.
"이쪽으로 따라오십시오."
"알렌, 조금 이따 봐요."
레이첼은 다른 할 일이 더 있는 듯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알렉시우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주둔지의 중심에 있는, 주변의 것보다 한층 더 큰 천막이었다.
"족장님! 알렌 공자님을 모셔 왔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거라."
족장의 허락에 천막으로 들어섰다.
멈칫-
한 발자국 천막에 발을 들여놓던 알렌은 천막 안의 광경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천막의 중심, 둥근 금속 띠들이 허공의 제자리에서 돌아가며 뻥 뚫린 천막의 하늘에서부터 별빛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천막 안은 횃불 하나 없었는데도 밝았다.
"천문 기구요. 몇 세대 전에, 수인과 드워프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지."
"그렇습니까."
부족장은 그 천문 기구의 뒤에 있었다.
그의 평온한 음색에 알렌은 천막 안에 완전히 몸을 들이밀었다. 알렉시우스도 그를 따라 들어왔다.
"잘 오셨소."
"혹시 저 천문 기구가 지금 율리우스가 사용한 힘과 연관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를 부른 이유도…."
부족장은 부정을 표하지 않으며 물음에 대답하기에 앞서 고개를 숙였다.
"먼저 기대를 품었을 알렌 공자께 사죄를 청해야 할 것 같소."
알렌이 그의 대답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아직 말을 다 끝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리우스 공자와 같은 힘을 드리는 건 어렵게 됐소."
"이유가 무엇입니까."
알렌은 말도 안 된다느니, 아까 한 말과 다르다느니 그런 억지는 부리지 않았다. 그저, 이유를 물었다.
"시간이 늦었기 때문이오."
알렉시우스는 그들이 대화하는 사이 잡다한 준비를 시작했다.
"방랑하는 별들께서는 밤이든 낮이든 하늘에 자신을 드러내시지만, 아둔한 우리는 밤에만 그분의 은은한 빛을 볼 수 있을 뿐이오. 그리고 지금과 같은 별들이 쏟아지는 날은 그분과 매우 가까워지기에 별의 성흔도 새길 수 있을 만큼 엄청난 기회이…."
알렌은 그의 말이 점차 길어지기 시작하자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한 마디로 아침이 다가와 율리우스만큼의 힘을 줄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까."
밖에서는 아직도 전투를 하고 있다. 쓸데없는 소리로 시간을 낭비하기는 아까웠다.
"…맞는 말이오."
그는 말을 다 끝내지 못해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내 준비를 끝마친 알렉시우스가 다가왔다.
"그래서 저희가 줄 수 있는 건 이것입니다."
알렉시우스는 알렌에게 천문 기구라 소개했던 금속 띠의 아래를 가리켰다.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어느새 둥근 금속 띠들은 회전을 멈춘 상태였다. 그러나 기구가 멈춰 있음에도 기구의 한 가운데 모인 빛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날아와 정확하게 의식의 시간을 맞출 수 있었던, 율리우스 공자가 얻은 별의 성흔 만큼은 아니지만…."
알렌이 그 천문 기구의 아래에 앉자, 모여 있던 빛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공자께 가장 필요한 것을 줄 수 있을 것이오. 알렌 공자와 같은 마법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의식이 천천히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럼 시작하겠소."
아침이 다가오는 여명의 때에, 별의 세례가 시작되었다.
* * *
「알렌 일어나요! 알렌! 일어나 보라니까요?」
누군가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어후, 빨리 일어나요! 지금 잠잘 때가 아니라니까!」
많이 들어 본 소리였다. 매사 시끄럽고, 불만도 많은. 마치, 베스틀라 같은… 아.
「저 분명히 깨웠어요? 깨웠다니까요? 나중에 뭐라 하지 말….」
"그만."
알렌은 허리춤에서 덜렁이는 손잡이를 강하게 부여잡았다.
짧은 어지러움이 느껴졌지만, 어지러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히려 전보다 정신이 더 맑게 변한 것 같았다.
「와! 깨어났다! 의식이 끝나도 정신 못 차리길래 놀랐다니까? 저 나쁜 녀석들이 거짓말을 한….」
베스틀라는 안도가 서린 목소리로 시끄럽게 쫑알거렸다. 여전히 활기가 넘쳐 났다.
알렌은 우선 그녀의 다 듣지 않고 천막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았나."
근처에는 여전히 많은 학생이 부상에 신음하고 있었고,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래서 제가 일부러 깨우기 위해 계속 말을 걸었다는 거….」
알렌은 베드르폴니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며 베스틀라에게 물었다.
"알았다. 알았으니…, 설명 좀 부탁하지. 무슨 일이 있었지?"
알렌이 검게 의식이 흐려진 이후로 기억이 단절되어 있었다.
「저 나쁜 녀석들이 말한 별의 세례라는 걸 받고 알렌이 정신을 잃었어요.」
"그래서?"
「네? 그게 끝인데요?」
"뭐?"
「알렌이 깨어나지 않으니 걱정한 거죠! 당신에게 위해를 가했으면 제가 가만히 있었겠어요?」
"하…."
알렌은 괜히 물었다는 생각에 발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육체의 활력이 거칠게 대지를 밟으며 몸을 가속했다.
「그래도 제가 알렌을 지켰으니까 무사한 거라고요!」
알렌은 대답하지 않고, 감지력을 펼쳤다.
십 미터, 이십 미터, 삼십 미터….
넓은 전장의 정보가 홍수처럼 밀려 들어오는 가운데, 알렌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두통이 없다?'
[공자께 가장 필요한 것을 줄 수 있을 것이오. 알렌 공자와 같은 마법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부족장이 했던 말이 생각에 미치자 곧바로 감지력을 더 넓게 퍼트렸다.
1㎞를 넘어서 2㎞, 한계에 가까웠던 3㎞를 넘어서도 두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본래는 코피까지 흘리며 심한 두통을 느꼈을 텐데.
그렇게 뻗어 가던 감지력은 10㎞가 되어서야 전과 같은 두통이 느껴졌다.
'한계가 넓어졌군.'
전장까지 가며 실험해 보자 세밀하게 감지하는 것도 300m 내라면 두통이 없었다. 무리한다면 1㎞까지 범위를 넓히는 것도 가능했다.
아마 실험해 보지 않아도 정신과 관련된 저항력도 훨씬 올랐으리라.
확실히 부족장의 말대로였다.
별의 세례는 율리우스만큼 특별한 능력을 주지는 않았으나, 마법사에게 제일 중요한 정신력을 영구적으로 상승시켰다.
'감지력을 넓게 펼칠 수 있는 마법사는 적다.'
위계가 오르며 감지력을 넓혔다고 해서, 그것을 한계까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의 수는 적었다.
범위 내에서 몰려오는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건 힘든 일이었고, 아직 정신력이 강하지 않는 어린 나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봤을 때 별의 가호는 알렌에게 장래적으로 훨씬 좋았다.
감지 범위는 자신이 마법을 정확히 맞출 수 있는 마법사의 영역을 뜻하니까.
'오히려 별의 성흔을 가진 율리우스보다 낫다.'
알렌은 몸에 성흔을 박아 넣어 '신'이라는 초월자와 연결점이 생기는 것이 불안했다.
그와 관련된 초월적인 능력은 검은 책과 하얀 책으로 족했다.
통제할 수 없는 변수는 자기 자신마저 위험에 빠트릴 여지가 있으니까.
그가 지금껏 책들로부터 도움만 받아 왔다고 한들 당연했다.
알렌은 속도를 높였다.
중간쯤 도달했을 때부터, 전투의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 * *
콰르르릉-
그렇게 멀리 있던 괴물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쯤, 천둥소리 사이로 율리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새끼 아까부터 뭐라도 있는 것처럼 별 폼을 다 잡더니 없잖아?"
알렌은 시야를 높여 괴물의 상태를 보고,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까 기습만 아니었어도, 팍 씨…."
베드르폴니르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던 전과 다르게 중상을 입은 듯 처참했다.
양 날갯죽지는 구멍이 뚫려 있었고, 검은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윤기가 흘렀던 검은 깃털은 숭숭 빠져 흉한 모습을 드러냈고, 곳곳에 그슬림이 가득했다.
눈도 한쪽에 빛의 검이 박혀 재생을 막고 있었다.
"…아까 얼마 안 걸렸다고 하지 않았나?"
「네, 한 십분? 그 정도밖에 안 지났는데요….」
'십 분이라 십 분….' 그 정도 시간도 그녀에게는 한순간인가.
알렌과 몇 달을 지냈음에도 그녀와는 아직 인식의 차이가 존재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 한 영원히 사는 게 용과 거인이니 오죽할까.
'그래서 천막에 부족장과 알렉시우스가 없었던 거였군.'
베드르폴니르는 그런 부상을 입고 있음에도 바람으로 겨우 몸을 띄우고 있었다.
"─────무지한 가축아. 아니, 이제는 문명을 이뤘으니 이게 더 낫겠군. 무지한 인간아. 너는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아느냐?"
괴물의 눈동자에 무수한 것이 비쳤다 사라지며 흡수되었다.
그렇기에 알았다. 알게 되었다. 저놈의 존재가 무엇을 뜻하는지. 뇌신의 가호를 받았다고?
"─────네 존재 자체가 무엇을 반증하는지 아느냐? 때가 되어 간다는 것이다. 묵시의 때가. 그 말은 다시…."
검고, 하얗다. 그를 지혜의 화신으로 만든 눈이 그 두 가지의 색을 보았다.
그렇게 괴물이 분노에 물든 눈으로 말을 이으려 했을 때.
알렌의 뒤에서.
하얀 책이.
스르륵-
소리 없이 펼쳐졌다.
『다른 학생들의 죽음에 미약한 감정의 동요를 느낌. 별의 세례를 끝마치고, 약간의 어지러움이 지나 정신력의 향상을 이룸. 후에 베스틀라에게 시간….』
『■른 학■들의 죽■■ 미■한 ■정의 ■■■ 느낌. 별■ ■■를 끝■■고, ■■의 ■■러움■ 지■ ■■력■ ■상■ 이■. ■에 베스■■■■ 시■….』
『■■ ■■■■ 죽■■ ■■■ ■■■ ■■■ ■■. ■■ ■■■ ■■■■, ■■■ 어■■■■ ■■ ■■■■ ■■■ ■■. ■■ ■■라■■ ■■….』
그 순간 짧은 파공음이 들리며 괴물이 고개를 들었고.
쾅-
작은 운석이 괴물의 몸을 꿰뚫었다. 괴물의 눈에 경악의 감정이 떠올랐다. 베드르폴니르의 몸이 경련했고, 그 잠시의 틈을 놓치지 않은 마리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푸슉-
하얀빛의 검이 몸통에 파고들기 무섭게, 율리우스가 초조한 표정으로 소리 질렀다.
"다 비켜-!"
꽈릉!
낙뢰가 떨어졌다. 율리우스는 남은 여력은 생각하지 않고 수십 번이나 번개를 쏟아부었다. 괴물의 눈이 마지막으로 알렌을 향했다.
그걸로 괴물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듯, 지상으로 추락했다.
알렌은 뒤를 돌아봤지만, 괴물이 마지막으로 무엇을 본 건지 알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하얀 책을 살펴도 마찬가지였다.
『괴물이 우연히 떨어진 운석 덕분에 죽였다는 사실에 허망함을 느낌. 그러나 더 이상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
마리아는 괴물이 죽은 즉시 남은 몬스터를 처리하기 위해 날아갔다.
율리우스는 눈을 질끈 감은 채 허공을 응시하다가, 입이 귀에 걸리나 싶더니 곧 괴성을 질렀다.
"막타쳤다아아아아아아!"
그는 한동안 몸을 방방 뛰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알렌은 그 모습에 허탈감을 집어삼키며 검을 집어넣었다.
"…길었던 던전 실습도 이제 끝인가."
이번 실습에 알렌은 많은 걸 알았고, 괜찮은 수확도 거둘 수 있었다.
이제 향상된 정신력의 한계를 정확히 알아보고, 하얀 책의 가설에 대해 다시 생각하며, 레이첼과도 할 일이 있을 테지만….
"조원들을 찾아볼까."
알렌은 우선 다시 미니마 부족의 주둔지로 돌아가서 알렉시우스를 찾았다.
조원들이 다쳤다면 그곳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것이고, 한동안 함께 지냈으니 지상에 있다면 그가 조원들의 위치를 알 것이다.
그러나 알렌이 그를 만나고 들은 말은, 그들의 위치가 아니었다.
"…못 만났다고?"
"예, 다른 분들이 이곳에 왔었다면 저한테 찾아오시지 않은 듯합니다. 밀레드 님은 후방에 계시니 그분의 위치라도 드리겠습니다."
알렌은 대략적인 위치를 듣고 움직였다. 밀레드는 환자들이 자리한 천막 내에 누워 있었다.
밀레드는 알렌의 얼굴을 보더니, 헤실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반겨 줬다.
"알렌 후배!"
그녀는 학생회 인원들과 같이 움직이다가 괴물이 습격했을 때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괴물이 죽었다는 알렌의 말에 환한 미소를 짓더니, 아공간에서 사과를 한가득 꺼내 주며 외쳤다.
"후배, 잘했어! 엄청 잘했어! 자! 상으로 사과받아가!"
"그런데…."
알렌은 받은 사과를 챙겨 들며 물었다.
"다른 조원들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응? 다른 애들? 후배랑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전투를 하다 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그녀는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을 알았는지, 다급한 어조로 답했다.
"어…, 내가, 내가 학생회 친구한테 물어서 찾아볼게! 다들 잘 있을 거야!"
"…이만 쉬십시오."
알렌은 다급히 레이첼을 찾아갔다.
'레이첼이라면 알 거다. 조원들에게 내 위치를 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는 애써 만들어지는 상상을 뭉개며 그녀를 찾았다.
그리고.
"…네? 알렌 당신 조원이요? 밀레드 선배님이랑 길잡이 알렉시우스는 그쪽 주둔지에 있…."
"그들 말고…."
알렌의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들 말고, 다른 조원들이 없었나…?"
"알렌, 잠시만요. 지금…."
그녀는 알렌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다가왔지만, 알렌은 고개를 저으며 물러났다.
"조금 이따 보지. 얼마 안 걸릴 거다."
"알렌!"
알렌의 발이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첨탑이었다.
장난감처럼 쓰러진 네 개의 첨탑 중 한 곳. 그곳에서 알렌은 품에서 구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용사의 5대 신기 중 하나.
[천상의 눈]
알렌은 미약한 희망을 부여잡으며 구슬을 사용했다.
구슬이 순식간에 흡입력을 발하더니 정신을 빨아들였다. 눈을 떠 보니 아래에 자신의 몸이 보였다.
'에반 바로크, 바로크 가문의 남자.' 정보가 떠오르지 않았다.
'에리엘 하일, 하일 가문의 여자.'
정보가 떠오르지 않았다.
'갈슈딘 아카데미의 재학생, 윌리엄.'
정보가 떠오르지 않았다.
구슬의 백색 부분이 잿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알렌은 멍한 얼굴로 서 있다 정신을 차렸다.
아니, 아직 희망이 있었다.
무려 용사의 신기(神器)였다.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세상 모든 보물을 모아 만들었다는 다섯 가지의 보물.
세상의 존재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지보에 속하는 보물이라 할 수 있었지만, 신기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있었다.
그렇기에 천상의 눈에는 하나의 기능이 더 있었다.
'원하는 과거를 보는 것.'
정확히는 보고 싶어 하는 과거를 찾게 해 준다.
과거라고 해도 사흘 전 이상으로 볼 수는 없으며, 그 장소와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제한이 있었지만 다른 조원들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만으로 찾고 넘쳤다.
'몇 시간 전으로, 이곳 유적에 있던 조원들'
백색의 구슬이 엄청난 속도로 잿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반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흑색의 괴물이 다시 유적으로 빨려 들어간다. 날아갔던 첨탑들이 제자리를 찾았고, 유적에서 흘러나오던 유적 수호자들이 다시 돌아갔다.
알렌의 몸은 거부할 틈도 없이 자동으로 유적을 내려갔다.
'역시, 유적에 있었나.'
유적이었기에 신기의 힘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천상의 눈은 범위가 넓은 대신 스스로를 숨기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숨을 수 있었으니.
1층을 지나 2층, 3층, 4층….
빠른 속도로 몸이 지하를 꿰뚫었고.
5층을 넘어 6층에 다다랐을 때 몸이 멈추었다.
'여기 갇혀 있었…,'
알렌은 위치를 기억해 두고자 고개를 돌렸고, 구석진 갈림길의 앞에.
"아."
두 구의 시체가 있었다.
제92화
유적 입구에서부터 수 킬로미터는 떨어진 대사막의 작은 협곡.
수십 년 전에도, 수백 년 전에도 변화 없이 정체되어 버린 그곳에 작은 진동이 일었다.
쾅-
그 직후 지면이 박살나며 두 개의 인영이 뒤섞였다.
"이제 그만 죽어 주련-?"
비욘나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모래가 흩날리며 유적의 돌조각이 뿌려지는 가운데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크니르의 몸이 찬란한 광휘로 뒤덮이며 그림자를 밀어냈다.
길게 늘어진 빛 위에서 먹물처럼 발밑이 물들며 인영이 솟아났다.
"아가, 3년 전과 달리 실력이 많이 약해졌네?"
"당신도 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자크니르는 홱 몸을 비틀었다. 그가 펼친 광구의 벽을 뚫고 칼날 하나가 튀어나왔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스릉-
섬뜩한 칼날이 그의 뺨을 스쳐 지났다.
턱 아래의 그림자서부터 솟아난 칼날에 핏방울이 대롱거렸다.
자크니르는 가까스로 턱을 비틀어 공격을 피해 내고는 전방위로 수천 개의 광구를 흩뿌렸다.
파앙-
공기가 터져 나가며 반경 안에 있던 모든 것이 가루가 되었다. 비욘나는 어느 순간 사라지더니 절벽의 그늘 아래에서 여유롭게 걸어 나왔다.
"아가, 나 여기 있단다. 어디를 노리는 거니?"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자크니르는 입술을 깨물고 그녀를 노려봤다.
또다, 또 저 공격이었다.
자신의 방어를 꿰뚫은 수단이.
하늘의 방패.
물리적이든, 마법적이든, 심지어 정신적인 종류의 공격이든, 어떤 종류의 공격이든 막아 낼 수 있기에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주변에 모기가 자꾸 달라붙어서 말입니다."
"어머, 그러니? 그럼 내가 도와줄까?"
그런데 그녀의 공격은 달랐다.
"아뇨, 필요 없습니다. 일은 스스로 처리하는 성격인지라."
그림자만 있다면 그림자의 크기가 얼마나 작든지 간에 그곳에서 칼날이 솟아 왔다.
공간과 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림자의 칼날.
그 공격은 어디서 들어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도 겨우 반응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가 시종일관 굳은 얼굴로 답하자, 그녀는 사뿐사뿐 우아한 걸음으로 주위를 걸었다.
"왜 그런 표정이니? 누가 보면 내가 괴롭히는 줄 알겠다, 얘."
비욘나의 눈꼬리가 보기 좋게 휘었다. 그녀의 태도에는 승자의 여유가 한껏 묻어 나왔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들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시종일관 그녀가 우세를 점했으니까.
자크니르는 방어의 대가였기에 지금껏 버텼지만, 그 기다림이 승리로 이어질 가능성은 적었다.
"…그럼 아니라고 말씀하실 셈입니까?"
"내가? 설마."
그녀는 잘못 들었다는 듯 과장스럽게 입을 가리더니, 정말 무고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잠시 오해가 있던 게 아닐까?"
그 가증스러운 태도에 자크니르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당신과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 데 아니라고 말씀하실 생각입니까."
"음? 기껏해야 한 두 살 차이 아니니?"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팔강의 자리에 자리한 게 수십 년이다. 음지의 여왕으로 군림한 게 얼마인데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그런 말을 직접 하면 부끄럽지 않습니까?"
"부끄럽기는, 이렇게 젊은 몸을 되찾-."
"─할망구가 지랄을 하는군."
순간적으로 솜털이 곤두섰다. 비욘나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녀의 몸이 그림자로 녹아들었다.
쿠드득-
커다란 대검이 검붉은 오러를 머금고 공간을 깨부쉈다. 그녀가 있던 자리가 순식간에 박살나며 작은 구덩이가 생겼다.
그러나 그녀가 한발 늦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나타난 비욘나의 어깨 등위로 짐승이 물어뜯은 듯한 거친 상처가 생겼다.
"짐승왕!"
그녀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해 협곡의 위를 올려다보았다.
협곡 위로는 거대한 체구의 인영이 밤하늘을 등지고 서 있었다. 가이온의 얼굴에 진한 경멸이 여렸다.
그는 협곡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대검의 옆으로 작은 모래바람이 흩어지며 하얗게 센 귀가 드러났다.
"할망구, 정신이 나갔나? 그 나이 처먹고 그러고 싶나? 노망이 들어 가지고… 쯧."
짐승왕 가이온.
그는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대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의 등장에 자크니르의 눈이 크게 변했다.
"당신이 어떻게…."
"애송아, 노망난 할망구한테 밀리기나 하고 참 잘하는 짓이다."
자크니르는 그의 비아냥에 얼굴이 붉게 변했다. 그러나 억울한 마음도 있었다. 그녀가 3년 만에 복수심을 품고 나타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잠시 방심했을 뿐입니다. 다시 한 번 붙는다면 결과는 다를…."
"그걸 실력이라고 한다."
가이온이 말을 잘랐지만, 자크니르는 그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단단해진 눈으로 다음에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리라 다짐할 뿐.
"짐승왕, 어떻게 여기에 왔지? 내 움직임이 들켰을 리가 없을 텐…."
그녀는 무언가를 알아냈는지 순식간에 표정이 변해 그림자로 변한 칼날을 근처 바위에 던졌다.
바위가 깔끔하게 두 쪽으로 깨지며 그 안에서 작은 늑대 환영이 나타났다.
"…추적 마법?"
그녀의 혼잣말에 가이온이 시원하게 웃으며 답했다.
"대마법이다. 이름은 늑대의 몰이사냥이지. 어때, 잘 지었지 않나? 이 어르신이 직접 이름 붙였지."
가이온이 으스대는 얼굴로 입을 열자, 그녀는 지하 밑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교수들 먼저 처리하는 건데."
괜히 아카데미의 보복을 신경 쓴다고, 봉인만 해 두자는 의견에 동의한 게 문제였다.
자크니르 같은 놈들.
같은 가문 원들 아니랄까 봐 처음부터 끝까지 맘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그래서 할망구 인사는 됐으니, 끝까지 해 보기나 하자고. 오랜만인데."
가이온의 입 안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흉악한 모습을 드러냈다.
"...."
그녀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변했다. 언제든 감정을 조절해야 하는 게 암살자다. 그 정점에 서 있는 그녀에게 가이온의 도발은 하찮았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상황을 가늠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물러나기는 아까운데….'
적어도 중상, 좀 더 바란다면 치명상.
죽이는 게 힘들다면 자크니르에게 자신이 받은 굴욕 정도는 주고 싶었다. 그러나 가이온을 뚫고 부상을 입힐 수 있을까?
'목숨을 건다면 팔 하나. 그 이상은 불가능.'
만전의 그녀라면 모를까 한바탕 자크니르와 싸우며 체력을 소모한 그녀로서는, 팔강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그를 상대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아. 아가한테 운이 따라 주네?"
삼 년의 굴욕이다.
자신이 부상으로 행방이 묘연한 틈을 타 기껏 일궈 놓은 세력이 조각나고, 부하란 것들은 그 틈을 타 그녀의 재산을 훔쳤다. 이제는 온갖 잡놈들이 자신이 새로운 음지의 지배자라며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녀가 평생 일궈 온 것들이 한 번의 패배로 사라져 버렸다.
그 때문에 복귀를 알리는 신호탄이자 복수를 할 겸 기습을 노렸던 건데….
"오늘은 날이 아닌가 봐. 어쩔 수 없네. 아가는 나중에 보자?"
"할망구, 먼저 시비를 틀고 어딜 간다고?"
가이온의 기세가 사납게 폭발했다.
지난 몇 년간 전투다운 전투를 못 해 본 그는 전투를 원했다. 삶과 죽음을 나눌 정도의 아찔한 싸움을. 그 희열을 느끼고 싶었다.
그녀는 호락호락하게 보내 주지 않을 듯한 그의 모습에 방긋 웃었다.
"어머, 그래도 괜찮아? 아가들이 위험할 텐데?"
그녀의 손가락이 하늘에서 추락하는 베드르폴니르를 가리켰다. 그 모습은 때마침 괴물이 하늘에서 습격하는 장면처럼 보였다.
"상관없다. 아이의 다툼이다. 그 정도는 알아서…."
"가이온."
자크니르가 가이온의 어깨를 잡았다.
"가야 합니다. 저 괴물은 아직 학생들에게 이른 수준입니다. 이미 많은 학생이 죽었을 겁니다."
"죽을 놈은 죽고, 살 놈은 산다."
"가이온."
그가 흐린 표정을 짓자, 가이온은 한숨을 내쉬더니 기세를 가라앉혔다.
"쯧, 오랜만에 싸움다운 싸움을 줄 알았건만…."
그도 알고는 있었다.
저 괴물이 자신에게는 별 것 아닐지 몰라도 아직 학생들에게 이르다는 것을.
그저 오랜만에 전투라고 할 만한 싸움에 억지를 한 번 부려 본 것뿐이었다.
"가라. 다음은 없다."
"흥, 그건 내 마음이지. 아가는 안녕. 아참, 선물은 저-기 준비해 뒀으니까─."
스윽-
그녀의 몸이 절벽의 그림자에 스며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알아서 챙겨 가도록 해."
그녀의 목소리를 끝으로 존재감이 완전히 없어졌다. 긴장을 풀 수는 없겠지만, 당장의 위협은 사라졌다 해도 좋으리라.
그녀가 가리킨 방향의 끝에는, 자크니르의 전 가문 원들이 노심초사한 얼굴로 전투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크니르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애송아, 손이 더 필요하냐?"
"괜찮습니다. 제 일은 제가 직접 처리하는 성격인지라…."
그의 어조에는 비욘나와 싸울 때도 드러내지 않았던 살기가 묻어 나왔다.
"혼자서 충분합니다."
"그럼 나는 아이들이나 도우러 가보지."
자크니르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협곡을 빠져나갔다.
가이온은 그가 가는 방향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집안 정리를 다 끝내지 않으니 저런 문제가 발생하는거 아니겠냐고.
"…이 몸이 할 말은 아닌가."
잠시 하늘에서 내리는 별을 힐끔 본 그는 대지를 박찼다.
길고 길었던 사건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처참한 상태의 시신들. 알렌이 그들과 같이 다니기 전이였다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심지어 한 명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유적은 베드르폴니르가 튀어나오면서 부서졌는지 통로에는 떨어진 파편이 가득했다.
시간이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부서졌던 유적의 조각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몬스터와 유적 수호자들이 뒤로 걸어온다.
시체에 있던 상처들이 회복하고, 망가졌던 장비가 원래대로 되돌아온다.
숨 한번 내쉴 시간 만에 따뜻한 온기를 품은 사람으로 변한 그들의 모습을, 알렌은 멍하게 바라봤다.
그렇게 거꾸로 돌아간 시곗바늘이 다시 정방향으로 돌아가며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처음은 공간 이동이었다.
[까, 깜짝이야….]
[다들 조심… 큽.]
[윌리엄!]
갑작스러운 이동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들은, 곁에 있던 유적 수호자의 습격에 한 박자 늦게 반응하고 말았다.
[윌리엄, 괜찮느냐!]
뒤늦게 수호자를 해치웠으나, 이미 윌리엄은 중상을 입은 상태.
그들은 급히 포션으로 상처를 치유했다. 그러나 수십 시간 동안 유적을 돌아다니며 쌓인 피로가 중첩된 윌리엄의 안색은 이미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저는 괘, 괜찮습니다. 우선 사태 파악을….]
그러나 사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쿠구구궁-
유적이 지속적으로 흔들리며 통로의 저편에서 몬스터와 유적 수호자들이 세찬 물줄기처럼 쏟아져 나왔다.
안색이 변한 에반과 에리엘이 최대한 통로를 틀어막고 버텼다.
[에반! 조금만 버텨 봐요!]
[크흡, 알았다! 얼마든지 버틸 수 있으니 안심해라!]
에반이 가문의 비전을 선보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기술이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지금 무리하지 않으며 언제 한다고요!]
에리엘도 자신의 역량 이상을 선보였지만, 끝도 없이 쏟아지는 놈들을 다 죽일 정도는 아니었다.
[바로크(Baroque)!]
결국, 에반이 가문의 유물까지 동원하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암울했고, 나아질 기미마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 되자, 알렌은 씁쓸한 마음으로 이해했다.
'…운이 나쁘군.'
그 말 그대로였다.
7층 지하의 공동.
그 시간 그 자리에 도달한 것도 우연이었고, 그때 공간 이동이 발생한 것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렇게 공간 이동 된 장소로 몬스터와 유적 수호자들이 몰려온 것도 마찬가지.
그저, 악운이 겹치고 겹쳐 일어난 사고였을 뿐이었다.
[윌리엄, 나한테 관심 있어요? 자꾸 그러니 저도 조금 신경 쓰이는데…, 네?]
[자, 장난은 그만두십시오. 비상시지 않습니까….]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자, 알렌은 묵묵히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봤다.
[이번 일 끝나면 만나요.]
[그….]
[단둘이서요.]
힘든 상황에도 그들이 평소의 모습을 보이자, 알렌은 희미하게 미소가 나왔다.
그렇게 그들의 끝을 준비하던 그때, 에반이 입을 열었다.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알렌이 의아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어, 사람이 있네?]
저 통로의 꺾인 골목에서 특징적인 청발의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사, 사람이다!]
[저 머리색은… 라인하르트?]
[알렌말고 다른 라인하르트라면… 율리우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율리우스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신기하게도 그가 몬스터 사이에 있었음에도 아무도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아카데미에서 얻은 히든 피스인 망가진 은신자의 망토였다.
[…나를 알아?]
[예, 압니다. 알렌의 동생이 아니십니까.]
[그보다 도움 좀 주실 수 있나요? 사례는 반드시 할게요.]
그들의 요청에 율리우스는 눈알을 굴렸다. 율리우스는 그들의 모습을 힐끔 보더니 눈앞의 허공을 바라봤다.
[…음, 시간 아까운데.]
[예?]
[아니, 무슨 소리인….]
율리우스는 귀찮은 얼굴로 그들을 응시했다. 알렌의 조원들인 것 같은데, 그가 같이 있다면 모를까 없다면 그리 신경 쓸 대상이 아니었다.
[딱히 챙겨 줄 만한 조연도 없고.]
무지개 마안으로 그들을 살핀 그는 결정을 내렸다.
[너희들끼리 잘 해결해 봐~ 아니 잠깐만….]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가려던 율리우스는 동동이가 향하려던 방향을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히든 피스를 챙기다가 몬스터나 수호자의 신경을 끌 수 있으니까….]
율리우스는 떠올렸다. 보충반에서 귀족들에게 당했던 수모를.
'뭐? 품위가 없어? 귀족 같지 않아? 형과 비교되는 망나니?'
시원하게 승리했던 결투 이후로 나온 소리들. 야만적이었다느니, 심했다느니. 결투인데 무슨 상관인가.
그 후에 좋은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해도 마찬가지였다.
'정식으로 사과도 했고, 화해까지 했는데도 마찬가지.'
한 번 씌워진 굴레를 벗기란 어려웠다. 만약 동동이가 없었다면 망나니란 이미지를 벗기도 어려웠을 터.
그는 경매장에서 구한 작은 아공간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전투에서 사용되는 물건 중 하나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서 시선을 끌어 주는 도구였다.
[시선이나 끌어 줘.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아니, 그게 무슨!]
[…당신의 형이 이 짓을 한 걸 안다면 어찌 될지…!]
콰과과광-!
커다란 폭죽 소리가 통로를 울리며 몬스터를 끌어들였다.
[시끄러워, 어차피 알려질 일도 없을 텐데 무슨 상관이야.]
몬스터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에반이 소환한 거대 조개의 소환 시간이 끝난 듯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럼 끝까지 발버둥 쳐 줘, 바이바이~]
율리우스는 비웃음 어린 목소리로 갈림길의 다른 통로를 향해 걸어갔다.
고대 유물의 지속 시간이 끝났다.
[에반, 어떻게 해야…!]
[윌리엄 당신이라도 살아 봐요. 내가 잠시 동안 막을-]
[아니 내가 막겠다. 너희 두 명이 도망-]
에반은 자신의 장담대로 끝까지 저항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만큼 그 저항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팔이 붙잡히는가 싶더니 한순간에 찢어졌다. 그 틈을 타고 몬스터들이 몰려들었다.
콰득-
소설에서 봤던 것 같은 유언은 없었다. 몸 곳곳이 찢어발겨 형상도 알아볼 수 없게 변했다.
그다음은 에리엘이었다.
[윌리엄, 만나지는 못할 것 같네요.]
[에리엘, 자, 잠깐, 안 돼, 안-]
그녀는 아공간에서 화살 더미를 들고, 마력을 폭주시키며 돌진했다. 그녀의 몸이 폭발하며 수만 개의 화살 파편이 전방으로 쏘아졌다.
윌리엄이 일그러진 얼굴로 도망쳤다.
그러나 누군가 나타나 도와주는 것 같은 기적은 없었다. 현실은 냉담했다.
우두둑-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날아온 둔기에 그의 척추가 박살났다.
[나, 난 반드시 살아야….]
쿠직-
기어서라도 움직이던 그의 몸에 얼마 지나지도 않아 수십 개의 날붙이가 꽂혔다.
[카를 님, 제니, 에반, 에리엘, 알….]
반짝이던 빛의 동공이 어두워졌다.
윌리엄의 숨이 끊어졌다.
마지막에 알렌의 이름이 끝까지 불리는 일은 없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알렌의 의식이 다시 몸으로 되돌아왔다.
구슬은 처음과 다르게 잿빛으로 변해 빛을 잃었다.
소리가 들렸다.
[에반은 겉으로는 오만하지만 속은 여린 사람입니다. 자신 때문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항상 완벽함을 연기하려고 합니다.]
"알렌, 찾았잖아요. 당신을 찾은 분이 있…."
[에리엘은 자존심이 높지만, 장난을 무척 좋아하십니다. 그거 아십니까? 일부러 저와 에반 님의 반응을 보기 위해 오해할 만한 말을 하시는 것을.]
소리가 들렸다.
[알렌 님은… 공정했습니다. 차석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덕에 처음에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모두 정말… 좋은 분입니다. 제가 어울리기 주저할 만큼.]
"당신 괜찮아요? 상태가 너무 이상…."
[다른 분들의 평가만 말하면 조금 그러니 저도 말하자면… 저는 여동생을 찾고 있습니다. 제가 고아라고 말씀드렸던가요?]
소리가 들렸다.
[저는 옛날 노예로 팔려나갔던 여동생을 찾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무작정 아카데미로 왔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조금 헤맸습니다만….]
"애송아, 네가 사용했다는 기술이…."
[지금은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름밖에 생각이 안 나고, 저랑 같은 구불거리는 흑발이라는 것밖에 기억이 안 나지만요.]
소리가, 들렸다.
[언젠가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어두운 밤. 모닥불. 동료. 비밀. 서로의 꿈. 그리고 죽음.
소리가 멎었다.
"─아."
더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시는, 들을 수 없었다.
제93화
사건의 뒷정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짐승왕 가이온의 등장에 따라 현장은 빠르게 수습되었고, 교수들도 자크니르가 직접 구출해 왔다.
그들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해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다행히도 죽은 사람은 없었다.
교수진들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아카데미에 구원 요청을 했다.
아카데미에서도 발 빠르게 이번 사건에 대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데미에서 의료진들이 대거 공간 이동을 통해 이동해 왔고, 엘릭서를 비롯한 귀한 물약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그렇게 해서 총 집계된 사상자는 72명.
그중에 사망한 사람은 23명이었다.
초대형 유적에 실습을 왔던 141명 중 반절이 넘는 사상자에 놀랄 만도 했으나, 죽은 괴물의 시체의 크기에 다들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귀족 가문들은 이번 사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번 사건에 대해 제대로 된 해명을 해야 할 겁니다!"
"아무리 사상자가 생기는 게 일상이라지만, 이건 심했지 않소?"
원칙적으로 아카데미에 들어올 때, 각종 안전사고와 뜻밖의 우연으로 인해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음을 명시해 두고 있다.
하지만 던전 실습 전 유적의 난이도와 각종 위험을 조사하는 건 아카데미의 몫이다.
그들은 이번 사태가 아카데미의 책임이라며 제대로 된 답변을 요구했다.
그러한 거센 반발에 대한 아카데미의 응답은 간단했다.
"이번 사건은 저희 아카데미에서도 충분히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비밀리에 이번 사태를 조사해 본 결과, 사건의 진범은 따로 있었습니다."
아카데미에서 지목한 범인은 하늘의 방패, 자크니르의 전 가문이었다.
"자크니르 님의 협조를 통해 알아낸 사실에 따르면, 그들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자크니르 님을 손에 넣고자 전 팔강이었던 그늘진 여왕을 끌어들였으며 수많은 성유물을 사용해 교수들을 공간과 격리시켰다는 정황적 증거를 확보…."
아카데미에서 발표한 소식에 작은 이권이나 얻어 볼까 찔러봤던 귀족들을 기함하게 만들었다.
"뭐? 그늘진 여왕이 되돌아왔다고?"
"미치겠군. 부상을 입고 은퇴한 줄 알았더니…."
"…이러다 노려지는 거 아니오?"
그늘진 여왕.
삼 년 전까지 음지의 여왕으로 군림하며 수많은 이들을 벌벌 떨게 만들던 인물.
그녀의 복귀 소식은 아카데미 학생의 죽음 따위는 작은 일로 치부될 정도로 소란스러움을 자아냈다.
그렇게 학생들의 죽음으로부터 시야가 멀어졌을 때, 아카데미가 다시 한 번 충격적인 소식을 발표했다.
"그들이 부린 행패에 저희 아카데미는 이 일을 잊지 않을 것이며, 하늘의 방패 자크니르 님께서 그들을 직접 징치하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카데미는 자크니르 님을 도울 것이며, 어떠한 형태의 이득도 얻지 않을 것이라 확언…."
팔강이 직접 나서 그들을 징치하겠다는 것.
다시 말해 완전히 쓸어버리겠다고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소 이와 같은 일이 발생했다면 제국 혹은 다른 팔강이 끼어들어 중재했겠지만, 이번엔 그들이 벌인 짓이 너무 컸기에 나서는 이도 없었다.
또, 망국의 왕가라고 해도 왕가.
내심 그들을 분란 요소로 바라봤던 이들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자크니르의 전 가문은 사흘도 되지 않아 자신들이 만든 최고의 작품과 마주했고, 한나절도 되지 않아 전투가 끝났다. 전투랄 것도 없었다.
그의 선포대로 그들은 징치되었을 뿐.
그들이 가졌던 이권은 죽은 학생들의 가문에게로 돌아갔고, 평민인 학생들에게는 그 부모에게 만족할 만한 액수가 전달되었다.
남은 가문원들은 자크니르의 손에 모두 처형되었다.
"또한, 제대로 된 조사를 끝마치지 못한 조사대의 단장은 서클을 부순 뒤 지하 감옥에 수감할 예정이며, 남은 조사대의 단원들은 그 자리를 경질하고, 그동안 누렸던 권리를 박탈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아카데미에서 공표한 내용에 대해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한 번의 조사로 유적의 모든 것을 살피지 못 한 건 어찌 보면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건은, 그들의 처벌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학생들의 죽음이란, 그 정도 가치에 불과했다.
다른 신입생들은 몇 주간 임시로 휴식기를 가지게 되었다.
대마법을 사용한 영향으로 교수들이 도저히 수업을 진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훌륭한 학생이었으며, 아카데미에 어울리는 재기 넘치는 인재상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하며, 언제나 먼저 떠난 그들을 잊지 않겠…."
죽은 학생은 아카데미 내부에 위치한 공원처럼 조성된 묘지에 묻혔다.
아카데미 학생이 누릴 수 있는 혜택 중 하나였다.
초대형 유적이 아닌 다른 유적으로 실습을 떠났던 학생들은 자신들이 그곳에 가지 않은 사실에 안도했고, 죽은 학생의 친구들은 슬픔에 빠졌다.
알렌은 그들의 무덤을 한동안 쳐다보다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없었다.
발 닿는 곳이라면 걸음을 옮길 뿐.
그렇게 걸음을 옮기다 문득, 공원의 한구석에 눈길이 닿았다.
길게 늘어진 상아색 머리카락.
레이첼이 공원 구석에 쭈그려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렌도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뭘 하나."
그녀의 곁에 알렌도 같이 앉았다. 레이첼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우울한 일이 있어서 여기 있어요."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에는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우울하면 여기 있는 것보다 다른 곳에 있는 게 더 낫지 않나?"
"우울할 때는 웃긴 것을 보며 기분을 푸는 것보다, 그냥 더 우울해지고 싶거든요. 당신은 어때요?"
그녀의 고요한 하늘색 눈동자가 그를 비췄다.
"당신 상태도 별로 안 좋았잖아요. 지금은 괜찮아요?"
"…나는, 그래. 지금도 그렇게 좋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그러면…."
"하지만."
알렌은 자신에게 다짐하듯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다."
"알렌, 당신 탓이 아니에요. 그냥 운이 안 좋은 사고였잖아요. 갑작스러운 공간 이동으로…."
"나도 안다. 나도, 알고 있단 말이다."
그 사고가 자신 때문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그렇다고 쉽게 잊을 수는 없는 일이지 않으냐."
"…그건 그렇죠."
그녀는 그 감정까지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듯 풀죽은 얼굴로 그의 몸에 기댔다.
"그래도, 이겨 낼 수 있겠죠? 당신이니까."
그녀가 달래는 듯한 어조로 그를 올려다봤다. 하늘색 눈에는 그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알렌은 괜한 걱정이라는 듯 작게 웃으며 평소처럼 대답했다.
"그래, 얼마 걸리지 않을 거다. 그럼 난 일이 있으니…."
레이첼은 일어나는 그의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번 주말에 만나요. 북문에서."
"그래."
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겨 낼 수 있나?'
잊을 수는 있고?
알렌은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느 것도 쉽게 그러기는 힘들었다.
그럴 수도 없었고.
뒤돌아 걷는 그의 마음에 다시금 불길이 더해졌다. 불꽃은 전보다 더 크게 타올랐다.
* * *
쏴아아-
머리 위에서 뜨거운 물이 머릿결을 적시며 몸을 씻겨 냈다. 알렌은 우두커니 물을 맞으며 감정을 정리했다.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거운 물을 맞으며 생각에 잠기는 것은 그의 오랜 버릇 중의 하나였다.
피부의 결을 타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알렌은 아카데미에서 지금까지 했던 행동을 되돌아보았다.
검은 책을 통해 벤자민과 율리우스의 대련을 알아채고, 그를 이용해 미래에 율리우스와 적이 될 2황자와 관계를 다졌다.
회귀 전에는 폐인으로 끝났을 벤자민을 치료해 줬고, 연금 마탑에 엘릭서의 제조법을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입학하기 전부터 카트린느를 통해 힘겨운 삶을 살았을 신드리 남매를 지원했고, 그들을 통해 순환교와 은밀하게 접촉했다.
아카데미의 대도서관에 가지 않는 날이 드물었고, 이넬리아를 통해 소규모의 경매마저 놓치지 않았다.
'내가 했던 행동들이 부족했나?'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족했다.
알렌은 자신의 자리에서 대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 증거로 아칸더스와 카릭은 이제 조직의 정비를 끝마치고 며칠 내로 엘피스에 도착해 활동을 개시할 것이고, 린벨에게 맡겨 놨던 일도 해결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알렌이 한 행동으로는 미래의 율리우스를 상대로 철저할 뿐이었다. 현재의 그를 상정하지 않았다.
'그럼? 현재 율리우스의 행동을 막아서 뭘 할 수 있다고. 지금 막는다고 진짜 율리우스가 돌아오나?'
아니었다.
자신이 노리는 것도 율리우스에게 당해 복수심을 가진 이들을 모으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피해자들이 생기는 것을 감수하자고, 키메라 술사의 공방에서 다짐했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이들이라면 벤자민처럼 외면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애초에 율리우스를 되찾기 위해서는 뭐든지 하겠다고 결의하지 않았었나?
끼익-
수도꼭지가 돌아가며 물의 온도가 높아졌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너무 가까워진 게 문제였다.
'그래, 율리우스가 그들을 죽인 게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너무 그들과 가까워진 게 문제다.
가족이나 부하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동등한 관계였기에 정을 주고 말았다. 너무 깊이 빠져들고 말았다.
한순간의 일탈이라고 느낄 만큼.
율리우스의 손에 모르는 이가 죽었다고 해서 알렌이 이처럼 동요했을까?
지금과 같은 분노를 느꼈을까?
'아니지. 냉정하게 오히려 살아남은 생존자에게 접촉해 끌어들였겠지.'
어차피 놈은 과거에도, 지금도 행동이 바뀐 적이 없었다. 놈의 곁에 죽은 이들이 산처럼 많다는 건 회귀하기 전에도 알던 사실이 아니었나.
이런 광경은 문서로 수도 없이 접했다.
단지, 직접 느끼고 경험해 본 것이 처음이었을 뿐이다.
끼익-
수도꼭지를 비틀었다. 전보다 더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그래, 이건 기회로 활용할 수도 있다.'
율리우스에게 복수심을 가진 이들을 끌어들일 때, 그들을 공감시킬 수 있고 같은 경험을 공유했다는 동질감을 심어 줄 수도 있다.
끼익-
수도꼭지를 다시 비틀었다. 거인의 육체는 이 정도의 온도로 화상을 입지 않는다.
'애초에 한 달 남짓 함께할 사이일 뿐이잖나.'
오히려 한 달의 시간을 통해 다른 이들을 끌어들일 명분을 얻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앞으로 다시 조심하면 될 뿐이다.
다시는 이번과 같은 사태가 생기지 않도록.
철저하게.
끼익-
판돈의 크기가 더 커졌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물릴 수 있나? 아니면 새 게임을 하자고?
'그럴 수 없지.'
이미 용의 등에 탄 신세다.
결말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어느 누가 그렇듯 용에게 잡아먹히던지, 아니면 용을 길들여 용기사가 되던지.
"…자님!"
끼익-
시야가 흐려졌다. 아무래도 너무 더운 공간에 있는 영향인 것 같았다.
"…렌 공자님!"
끼익-
그래도 오늘은 더 온도를 높이고 싶었다. 그러나 시설 문제인지 오늘따라 온도가 너무 낮게 올랐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덜컥-
"알렌 공자님!"
욕실 문이 덜컥 열리며 흑발이 찰랑거렸다. 백단향이 가까워지며 자색 눈이 알렌의 눈과 마주 봤다.
"…린벨? 갑자기 왜…."
"세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으시길래 걱정이 되어서요. 근데 왜 이리 온도가… 앗, 뜨거라!"
그녀는 급히 몸을 움직여 수도꼭지를 반대로 돌렸다.
수도꼭지는 작은 소리 하나 없이 매끈하게 돌아갔다.
그녀는 그 후에 익숙한 듯 커다란 수건을 가져와 그의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알렌도 처음엔 놀랐지만, 익숙하게 그녀의 시중을 받았다.
옷까지 모두 갈아입은 알렌은 그제야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무슨 일이지?"
그녀는 근 세 달간 알렌이 시킨 일을 처리하느라 거의 보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가까운 시일 내로 몇 달 전부터 계획했던 일을 실행하기 위해 부를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헤헤. 공자님이 걱정되기도 했고, 엄마가 경매 일정 때문에 못 온다고 대신 가라고 해서요."
그녀가 잘못을 숨기고 싶은 아이처럼 어설프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흠…, 뭐 때가 됐으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가 잘못을 언급하지 않자, 그녀는 환한 표정으로 가위를 천천히 움직였다.
"제가 없는 사이에 길게 자라셨네요. 공자님은 여기까지 맞죠?"
"그래, 거기까지면 충분하다."
"공자님에 대한 건 저도 다 알고 있거든요~"
그녀가 우쭐한 얼굴로 머리를 손질했다. 그녀는 몇 달간 만나지 못했음에도 실력이 더 능숙해져 있었다.
"실력이 더 늘어난 것 같은데, 따로 연습했나?"
"네! 곁에 너무 지저분하게 사는… 아."
그녀는 말하다 무언가 생각난 듯 잠시 굳었다. 그리고 다시 손을 움직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자님께 제가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게 누구… 설마."
알렌의 짐작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문을 향해 소리쳤다.
"저도 까먹고 있었으니 곧바로 부를게요! 일리아나!"
그녀의 말이 끝나자 기숙사의 문이 열리며 한 소녀가 보였다.
쫑긋거리는 세모 귀와 입술 밖으로 드러나는 송곳니, 다소 창백한 인상의 잿빛 머리 소녀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공학부 소속 일리아나라고 합니다."
제94화
귀족은 하나의 일을 행함에 앞서 여러 가지를 고려한다.
당장의 이득과 행동함으로써 얻을 결과, 그로 인한 영향과 미래에 어떤 결과로 찾아올지까지.
그 모든 것을 어릴 적부터 생각할 수 있도록 교육하며, 일상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도록 훈련받는다.
이것이 귀족의 제왕학이다.
세대가 지날수록 평민과 귀족의 격차를 벌리며, 어떤 후계자든 완숙의 나이로 접어들었을 때 가주의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
점차 기술이 발전하며 시대가 변함에 있어 평민들의 중요도가 높아지고 좀 더 다른 일에 쓰일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목소리를 높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알렌도 라인하르트 가문의 후계자로서 제왕학을 교육받았다.
그렇기에 항상 한 가지 일을 계획해 둠에 있어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건 2회차, 회귀를 한 직후부터 그 경향은 심해졌다.
몇 달 후 벌어질 일, 몇 년 후 이뤄질 일.
하루, 몇 주 단위가 아닌 몇 월, 몇 년 단위로 계획을 세우며 현재가 아닌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
알렌은 아카데미에 오는 것을 계획한 시점부터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까지 율리우스와 격차가 그리 크지 않았다. 오히려 알렌이 확실한 우위를 점하는 수준이지.
하지만 몇 년이 더 지난다면?
'밀린다.'
그건 확언할 수 있었다.
알렌은 자신의 재능을 잘 알았다. 마법 하나에만 몰두해 수명, 끝에는 제물까지 바치며 얻은 결과가 여덟 개의 고리다.
그것도 한쪽에만 기형적으로 치우쳐진 반쪽짜리도 못 되는 8위계.
하나 혹은 두 개 아래의 위계에도 정면 승부를 한다면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미 한 번 재능의 한계까지, 아니 한계를 넘어서 몸부림쳐 봤기에 알았다.
반면 율리우스는?
'끝없이 성장한다.'
이번에 던전 실습에서도 그랬다.
상정하지도 못한 별의 성흔이라는 능력을 얻고 날뛰었다.
알렌은 놈의 성장을 막고자 최대한 보상을 빼앗고, 베스틀라를 비롯한 각종 기연을 빼앗아 용의 노심과 거인의 신체를 얻었다.
지금도 전력을 다한다면 7위계에 도달한 지 얼마 안 되는 이들까지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7위계라면?'
어떻게든 가까이 접근한다면 승률은 반반, 접근하지 못했을 때는 무승부를 노리는 게 최선이다.
7위계부터는 진정한 초인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니까.
그건 한낱 생물로서 태어나 그 생명체 본연의 한계를 깨트리는 자들의 세상이다.
같은 7위계의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한 그 세상에 발을 들이미는 것은 힘들었다.
물론 미래는 모른다.
거인의 신체가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도 있고, 베스틀라가 가르쳐 주는 요툰스베르드의 후반 비기(?技)가 얼마나 강할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알렌은 만약을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진정한 목적은 율리우스를 죽이는 것과 더불어 진짜 율리우스의 영혼을 찾아내는 데 있었으니까.
후자가 진척을 보이지 않는 만큼, 그 시간을 벌기 위해 율리우스와의 격차를 벌려 놔야 했다.
그래서 영지에 있을 때부터 계획한 것이, 이것이었다.
'린벨을 짐승왕의 손녀와 친분을 쌓게 한다.'
그녀는 과거의 사건 때문에 허약한 상태인데다가, 오러와 마력 모두 소질이 없다.
그런 그녀에게 린벨을 접근시켜 친분을 다져 두고, 순환교와 접촉해 그들의 능력을 이용해 그녀의 체질을 치료해 준다면?
그렇게 짐승왕과 연이 맺어져도 좋지만, 더 나아가 제자가 된다면 제일 좋은 결과였다.
그와 동시에 순환교의 사도 자격을 획득해 그들의 세력을 일부 손에 넣는다.
'성공한다면 격차를 더 벌리고 그만큼의 시간을 더 벌 수 있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적이 더 늘어난다.'
그렇기에 도박이었다.
일리아나는 린벨이 알렌의 머리 손질을 끝마치고, 다과를 내올 때까지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따로 할 말이 있나?"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 말이에요."
한동안 관찰하는 듯한 시선으로 알렌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린벨을 저에게 보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어서요."
덜컥-
그 소리에 차를 준비하던 린벨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놀란 표정을 짓다 곧바로 되돌렸지만, 이미 그 반응만으로 일리아나는 자신의 말이 옳음을 알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알렌은 린벨과 달리 그녀의 말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가 알아챌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안 들킨다면 좋겠지만, 들켜도 상관없다.
애초에 린벨의 덤벙대는 성격을 알고 있기에 절대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간단해요. 이득이 없거든요."
"이득이 없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나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첫 번째로 당신은 아니, 공자는…."
"편하게 부르게."
"공자는 저를 짐승왕의 손녀인 걸 알고 린벨을 접근시켰을 거예요. 틀렸나요?"
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를 제외하고도 부회장을 비롯한 진짜 고위 세력들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불쾌했다면 미안하군."
"아니, 별로 불쾌하지는 않아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기도 하고, …같이 있으면서 나름 친하게 지냈거든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슬쩍 린벨을 보았다. 린벨은 표정을 들킨 후로 알렌의 눈치를 살피고 있느라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의외로 진짜 친해졌나.'
이건 그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왜 이득이 아니라는 거지?"
"할아버지, 아니 짐승왕은 저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진한 자조의 기색이 여려 있었다.
"수인과 인간의 혼혈, 그런 주제에 마력과 오러 모두 자질이 없고 신체 능력도 좋지 못한 반쪽짜리. 거기에 정반대의 사상을 가지고 있기까지."
그녀는 금방 표정을 되돌리며 설명을 계속했다.
"짐승왕은 저와 가까이 지낸다고 해서 부탁을 들어줄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무엇을 하고 지내든 아무런 관심도 없을 걸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에는 무언가에 대한 미약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수인 연합 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더니, 가족끼리도 마찬가지인가.'
아니면 기대받지 못하는 처지에 대한 반발인가.
한쪽은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며 초원의 삶을 살자는 쪽이며, 반대는 이제는 변화의 물결에 따라 도구를 쓰며 발전하자는 쪽.
보통 후자를 따르는 이들은 오러를 사용하거나 강한 힘을 가진 이들이 아닌 약자들이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저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도 불가능하죠. 저를 인질로 잡으려 했다가 박살 난 가문도 있는 거 알아요?"
일리아나는 그 때문에 그나마 접근하는 이들도 완전히 사라졌다며 조소했다.
"그러니까 공자가 저에게 아니, 짐승왕에게 원하는 게 있다고 해서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접는 게 좋아요."
일리아나는 그 말을 끝으로 목이 타는 듯 찻잔을 들었다. 알렌은 그녀가 충분히 갈증을 해결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상관없다. 나는 공녀에게 관심이 있거든."
공녀라 공녀…, 그녀는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라 생각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저요?"
"그래."
그녀는 그 말의 진의를 살피듯 쳐다보다가 툭 내뱉었다.
"저한테 이성적인 관심이 있어요?"
"아니."
"장난이 아닌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난 약혼자가 있다."
"그건 알고 있어요."
그녀는 이상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생각에 잠기더니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서 접근했고, 관계를 맺는 것이 요원해지니까 이제는 나에게 관심이 생겼다? 근데 또 이성적인 관심은 없고?"
"아니, 처음부터 짐승왕보다는 너에게 관심이 더 있었다. 정확히는 공학자로서의 네 재능에."
알렌의 말에도 일리아나는 미심쩍은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흠…, 그게 더 이상한데요. 결국, 짐승왕의 관심을 받지 못할 걸 아는데도 저에게 접근한다고요? 저의 공학적 재능 때문에?"
그녀는 입가에 옅은 비웃음을 드러내며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저와의 결혼을 통해 할아버지와 인척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라는 게 더 그럴듯해 보이는걸요?"
알렌의 체면을 생각하지도 않는 무례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도발적인 말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가 일부러 알렌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한 말임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알렌은 한 치의 변화 없이 그녀를 마주 봤다.
"그건 어떨지 모르겠군. 정말 짐승왕께서 너에게 관심이 없을까?"
"장담할 수 있을걸요?"
"글쎄, 그건 모르지. 아무리 관심이 없다고 한들, 손녀의 체질을 치료해 줬다면 반응이 없지는 않을텐데?"
"…네?"
알렌은 이 말을 듣고 있을 누군가에게도 들으라는 듯 입을 열었다.
"하나뿐인 손녀의 몸이 치료됐는데도 가만히 있을지는 모르겠군."
알렌의 말을 이해했는지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그녀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각설탕을 옮기던 집게에서도 힘이 빠졌다.
알렌은 떨어지던 각설탕을 마력의 실타래로 잡아채 그녀의 찻잔에 넣어 주었다.
퐁당-
노란 동공에 여유롭게 미소 짓는 자신의 얼굴이 반사되었다.
"그럼 다시 한 번 물어보지."
알렌은 그녀의 경악 어린 표정을 천천히 음미하며 입을 열었다.
"정말 장담할 수 있나?"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걸로 대답이 되었다.
* * *
알렌은 늦은 시간이라며 다음에 약속을 잡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린벨과 일리아나 각자 다른 이유로 떠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알렌도 어쩔 수 없었다.
「…알렌 진짜 나가려는 거 아니죠?」
'직접 도발했는데 나가지 않을 수야 있나.' 알렌은 베스틀라를 허리춤에 메고 겉옷을 챙겼다.
일리아나가 들어왔을 때부터 느껴지던 존재감은, 그녀가 방을 나가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고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난폭하군.'
역시 짐승왕답다고 해야 하나.
차라리 부르면 편했을 것을, 이런 식으로 불러내다니.
알렌은 기숙사를 빠져나와 그를 이끄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는…."
그렇게 해서 도착한 장소는 우연하게도 낮에도 들렀던 공원묘지였다. 잠시 발을 멈칫한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흑색으로 변한 하늘에는 전에 보았던 것과 같은 광경은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별빛이 반짝일 뿐.
평소와 같은 모습에도 누군가의 시선을 잡아끌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알렌은 그러한 광경에 집중할 수 없었다.
공원묘지의 중앙, 은하수의 아래.
밤하늘보다 더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남자가 눈길을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알렌이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무렵, 그가 입을 열었다.
"재밌는 말을 하더군."
광폭한 노란 동공이 알렌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듣고 있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그에게서 지독할 정도로 술 냄새가 나오고 있음에도 알렌은 전혀 방심할 수 없었다.
그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세계에서 단 여덟 명밖에 없는 팔강의 자리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이자, 일신의 무력 하나만으로 산을 부수고 나라를 상대하는 것이 가능한 존재.
물리적인 것을 넘어 개념적인 영역에까지 도달하는 살아 있는 신화.
짐승왕 가이온.
그가 알렌을 불러낸 존재이자, 일리아나와의 대화를 엿듣던 존재였다.
"짐승왕의 마음을 어지럽힐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심려를 끼쳐 드려…."
"아니, 그딴 건 됐다. 그보다 자신 있나?"
그는 다짜고짜 손을 저으며 알렌의 말을 끊었다.
그가 무엇을 물어보는지 알았으나 알렌은 쉽게 대답하기 힘들었다. 무슨 일이든 십 할의 확률로 장담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런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짐승왕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난폭하게 스며드는 살기도 함께였다.
가이온의 얼굴이 사납게 변했다.
「알렌, 이건 제가 도와줘도 못 이겨요.」
그와 마주쳤을 때부터 침묵하던 베스틀라가 단언했다.
알렌은 즉시 판단을 내렸다.
"예. 자신 있습니다."
"그럼 됐다. 나중에 실패하면 다시금 보면 될 일이지. 지금 이야기할 계제는 아니다."
그 말과 동시에 알렌을 압박하던 존재감이 가라앉았다. 가이온의 안색도 언제 사나웠냐는 듯 평온하게 변했다.
알렌은 그가 일부러 그렇게 행동했음을 알게 되었다.
'술 냄새를 풍긴 것도 일부러인가? 아니면 진짜 취미일까.'
알렌은 세간에 도는 그의 소문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지금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검."
"예?"
가이온은 두 번 묻지 말라는 듯 허리춤을 두들겼다.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검을 들어라, 실력이나 한번 보자."
"아니 그게 무슨…."
알렌은 입을 열려 했지만 가이온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목소리가 들렸다.
"참고로 오 분 이상 버티지 못한다면, 만남은 그걸로 끝이다."
순간적으로 섬찟한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검을 뽑을 새도 없이 옆구리에 팔을 둘렀다.
쾅-
알렌의 몸이 몇 걸음이나 밀려 섰다.
거인의 신체를 가진 후 오랜만에 느껴 보는 고통에 알렌의 눈에 경악이 실렸다.
"흠, 생각보다 단단한데? 그렇다면…."
알렌은 이를 악물고 검을 뽑았다. 그에게 따질 시간 따위는 없었다.
무슨 할 말이 있든 우선 눈앞의 전투가 먼저였다.
"좀 더 강하게 다시."
콰앙-
의식이 잠시 날아갔다.
몸을 돌볼 새도 없이 본능적으로 어깨를 비틀었다. 어깨에 주먹이 스치며 몸이 빙그레 돌며 충격량을 해소했다.
"반응 속도도 꽤 괜찮군."
다시 공격이 날아들었다.
이런 몸을 가지게 된 후, 처음으로 맞이한 진정한 위기의 순간이었다.
제95화
포악하기 짝이 없는 기세가 일대를 짓눌렀다.
가이온의 체격은 객관적으로 봐도 알렌보다 머리 두 개는 컸다. 하지만, 정말 고작 그의 눈높이가 그곳에 있는 게 맞을까? 그보다 더 위에 있지는 않은가?
혹시 그의 눈이 하늘에 달려 있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마저 들었다.
불과 얼마 전에 상대했던 고대의 괴물보다 더한 존재감.
사람의 모습을 한 괴물인가, 괴물의 모습을 한 사람인가.
알렌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의 존재감이 시야를 가득 채우며 조금의 움직임마저 주저할 정도의 긴장감이 피부 끝을 타고 올라왔다.
「정신 차려요!」
베스틀라의 외침에 알렌이 눈을 강제로 질끈 감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시 본 그의 모습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처음의 공방 이후로 그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이온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맺혔다.
"오, 벗어났네?"
그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생각보다 더 괜찮군. 단순히 알렌이 사용했다는 빛의 태양 때문에 불렀으나, 생각보다 자질이 더 괜찮았다.
"눈 감은 건, 뭐 처음이니 어쩔 수 없다 쳐도."
짐승왕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아까 때렸던 주먹의 감촉을 상기하는 듯했다.
"담력이 꽤 괜찮아. 몸도 튼튼하고."
알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을 하지 못했다는 게 맞았다. 그의 압박에 대항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그러나 가이온은 그런 알렌의 상태를 개의치 않는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알렌의 감각이 곤두서며 그의 일거수일투족, 그 모든 것을 담았다.
"음, 그래. 원래는 대충 치고받고 한 수 재간이나 봐주려 했는데…, 안 되겠다."
그가 걸음을 멈춰 섰다.
"오 분."
시간이 모자라지는 않나? 짧게 고민해 봤던 가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 분을 버티면 어르신의 제자로 받아 주마."
"...진심이십니까?"
"처음부터 그럴 목적이 아니었나?"
위압감에 간신히 적응해 가던 알렌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서 뭘 봤다고 벌써. 이렇게 되면 일리아나에게 접근한 의미가 있었나?
'아니, 그렇기에 더욱 그녀를 치료해야 한다.'
연결 고리를 더욱 긴밀하게 엮을 수 있으니까.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경청하겠습니다."
경청까지 할 정도야. 기분 좋다는 듯 웃음소리를 흘린 가이온이 말을 이었다.
"삼 년 후, 넌 무조건 어르신을 따라 한 가지 일을 해야겠다. 동의하나?"
그 말을 하는 가이온의 모습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입가와 눈에 서려 있던 미소까지 모두 사라진 상태. 그 물음에 오히려 알렌이 의심스러웠다.
"…그게 전부입니까?"
"그래 전부다.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단 한 번이지. 뭘 고민하는 거냐?"
솔직히…, 고민까지 해야 할 정도의 일인가?
너무 후한 조건이다. 팔강의 제자가 된다. 그럼으로써 얻을 이득은 명확하다. 전력의 증강과 높아지는 명성, 율리우스의 성장세에 따라잡히지 않고 격차를 유지할 수 있다.
「안 돼요!」
잃는 건? 삼 년 후에 있을 일 하나만을 처리하면 된다.
그 고민은 그때가 돼서 해도 늦지 않다. 이미 그때 율리우스랑 한 판하고 있을지 누가 아나?
「당신은 내 제자예요. 당장 거절하라니까요? 지금 고민하는 거예요?」
그 일이 너무 어렵거나 위험했다면 자신과 함께하지도 않았을 터.
「물론, 저 남자가 생전의 저와 비슷 아니, 더 약하기는 해도 많은 걸 가르쳐 줄 수 있겠지만, …그건 저도 해 줄 수 있어요.」
알렌은 결정을 내렸다.
"하겠습니다."
「알렌!」
베스틀라가 소리를 질렀다. 평소의 그녀의 가벼운 성정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진지한 음색.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나랑 상의도 하지 않고!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제가 가르친 사람을 누구 마음대로 제자로…!」
'미안하다. 하지만… 너는 몸이 없지 않나.' 그녀가 목소리가 뚝 끊겼다.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알렌이 하는 말은 명확했다.
가르침의 한계.
알렌과 베스틀라는 종족이 달랐다. 거인과 인간. 그녀가 알렌에게 거인의 몸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에 맞는 기술을 가르쳐 줬지만, 근본적으로 이해하기는 힘들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녀에게 나날이 검술을 배울수록, 자신의 한계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범재(凡才)와 천재(天才).
알렌은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가르침을 따라오지 못했다.
그것을 해결하려면 압도적인 시간의 훈련으로 체득하거나, 그걸 옆에서 풀어 줄 선생이 필요했다.
그러나 홀로 날아다니는 그녀의 모습은 함부로 보일 수 없었고, 정작 알렌도 해야 할 일이 수두룩했기에 검 하나에만 시간을 쏟지 못했다.
「…그래도, 그래도!」
그녀의 말에 알렌이 대답하려던 때, 가이온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야기는 아직도 안 끝났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이기는."
그는 손가락으로 알렌의 검을 가리키며
"그 검, 에고 소드가 아니냐."
알렌이 뭐라 부정할 새도 없이 그는 다 안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여기까지 올라오면 어느 정도 다 트이게 되지. 보아하니 제자가 된다니까 에고 소드가 말리려는 게 아니냐?"
"...예."
"뭐, 흔한 일이기는 하지. 자기가 가진 구닥다리 기술이 밀릴까 봐 그러는 거다."
「뭐라고요? 이 늙은이가! 감히 거인족의 검을…!」
"자신의 기술에 더 우월하다면 괜히 빼겠느냐? 자신 있으면 허락했겠지."
「그건….」
"진짜 스승이라면 신경도 안 썼을 거다. 아니면… 어르신에게 제자를 빼앗길까 봐 겁난다든지."
물론, 어르신은 자신 있지만 말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크게 웃었다.
「하! 그래, 마음대로 해요! 알렌! 당장 저 노친네의 기술이나 배워요! 진짜 어이가 없어서 뭐? 겁나? 당장 콧대를 눌러 줄 거라고요!」
베스틀라는 시끄럽게 발광하면서, 검 전체를 부르르 떨었다.
그것만으로 상황을 다 파악한 가이온은 짓궂게 웃으며 물었다.
"어때, 허락했겠지?"
"…예, 허락했습니다."
"그럴 거다. 이미 몇 번이나 써먹었던 적이 있거든."
"에고 소드에 대해 잘 아십니까?"
가이온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오는 아이들이 어떤 신분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밖에서라면 에고 소드라는게 희귀했겠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만도 않지. 물론… 그것 때문에 아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가이온은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말끝을 흐렸다.
알렌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사정을 묻지 않았다. 그건 아직 뚜렷한 관계도 없는 알렌의 입장에서 선을 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눈치 챈 가이온이 씨익 웃었다.
"훌륭하군."
그가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알렌과 거리를 벌렸다.
"거기서 선을 넘었다면, 그걸로 끝이었을 거다. 서로 간의 거리를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하거든."
그게 무인의 거리든, 마법사의 영역이든, 아니면 서로의 관계든.
짐승왕의 웃음소리가 짙어졌다. 인제 와서는 킬킬거리는 노인네 특유의 웃음소리까지 섞였다.
"삼 분으로 봐주마."
별의 세례.
그로 인해 확장된 감지력이 작은 영역의 모든 정보를 흡수한다.
"모처럼 괜찮은 놈을 봤으니…."
한계까지 확장된 오감이 무의식적인 움직임을 강제했고, 모인 정보는 예측을 넘어 일시적인 예지의 영역에 이르렀다.
"최대한 버텨라."
알렌은 대답하지 못했다. 가이온의 신형이 길게 늘어졌기 때문이다. 현재의 움직임과 미래의 예측이 뒤섞였다.
알렌은 뒤로 물러서기보다 간격을 좁혔다. 가이온의 속도와 힘은 전번의 공격으로 눈치 챘다. 상대가 봐주고 있다면, 차라리 모든 것을 보이는 게 옳다.
검이 우직하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쳤다. 베스틀라의 가르침에 따른 기교 없는 일격. 하지만, 역동적인 근육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무시할 수 없다.
그에 대한 가이온의 대응은 간단했다.
"하하, 힘 싸움이라니, 좋구나!"
가이온의 대검을 연거푸 휘두르며 알렌의 공격을 막았다. 손자의 재롱이라도 받아 주는 듯 장난스러운 모습에 알렌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알았다. 그러나 아무런 영향이 없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알렌의 대응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베스틀라는 강대한 힘 앞에 기교는 의미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틈을 노리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알렌의 그림자가 솟아오른다. 한 걸음마다 그림자가 밤의 어둠에 녹아들어 무수한 잔상을 만들었다.
그림자는 순식간에 알렌과 뒤섞이며 가이온의 눈을 어지럽혔다.
가이온은, 단 한 번 대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파앙-
공기가 터져 나가며 그림자가 바람처럼 흩어졌다.
"이런 거 말고 다른 거 없느냐? 예를 들면, 전에 썼다는 빛의 태양이라든가."
틈을 놀리려던 알렌의 움직임이 단번에 꿰뚫렸다. 그런 미래를 봤다. 정해진 예측에 알렌의 몸을 강제로 멈췄다.
알렌의 미간이 꿈틀거리며 그 자세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분노에 벼려진 검이 몸을 비튼 자세에서 기묘하게 떨어져 내렸다.
가이온은 알렌보다 한 박자나 늦게 대응했다. 그러나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눈이 트였나? 아니, 아니야. 편법이군. 그것도 나쁘지 않지."
"큽…!"
배를 파고든 주먹에 알렌의 몸이 경련했다.
"실제보다 못하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내장을 다 울리는 충격에 알렌의 몸이 굽어졌다. 거기서 가이온이 몸을 걷어찼다. 알렌은 피하지 못했다.
쾅-
알렌의 몸이 땅에 물수제비뜨듯 두어 번 부딪치다 겨우 균형을 잡았다. 몸이 순간적으로 어지러웠다.
알렌이 다리에 힘이 풀릴 뻔한 것을 겨우 참아 내자, 가이온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자, 어떠냐. 좌우 몸의 균형을 흩트린 거다. 굉장하지 않느냐."
고개를 드니 여유롭게 대검을 돌리며 가이온이 걸어왔다.
알렌은 이를 악물었다. 상대는 오러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차이가 난다고?
차이가 난다는 것도 알았고, 당연히 진다는 것도 알았다. 삼 분을 버티라는 말 역시, 자신이 제자로 받아 주기 위한 명분일 뿐이라는 것도.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라고?
거인의 육체, 베스틀라의 검 모두를 사용했음에도 손끝 하나 닿지 못했다.
지금도 증폭된 오감과 감지력이 그의 움직임을 예측했다. 그러나, 알 수 없었다. 알렌은 지금 보고 있는 게 맞는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예측으로 보이는 미래의 그는, 알렌에게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그와 달리.
"왜, 잘 안 보여서 억울하냐?"
가이온은 알렌이 무엇 때문에 당황했는지 아는 듯 껄껄 웃어 댔다.
알렌은 망설임을 버렸다. 검만으로 상대한다는 말은 오만이었다. 그도 검사이기에 자신도, 적어도 그의 앞에서는 검만을 고집해야 한다고 착각했다.
그는 그저 버티라는 한마디만을 했음에도.
실타래가 풀려 나왔다. 마법을 사용할 시간은 없다. 수인을 맺으려 드는 순간 끝날 것이다.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하는 틈을 줄 전사는 없을 테니.
그러니, 틈만 만든다면.
'한 번의 기회를 노린다.'
알렌이 달려들었다. 격돌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알렌의 검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속도를 보고 피할 수 없다, 힘에도 밀린다. 그렇다면?
'뼈를 주고 살을 취한다.'
실타래가 흑녹색의 기다란 창이 되어 가이온에게 쏘아졌다. 그는 위협도 안 된다는 듯 제자리에서 몸만 비틀어 공격을 피해 냈다.
알렌이 몸을 낮추고 오른발을 대지에 깊숙하게 박아 넣었다. 사선으로 올려 친 검격. 전력을 다한 공격에 그의 대검이 살짝 떠올랐다.
그 사이를 두고 수십 개의 흑녹색 창이 파고들며 움직임을 제한했고, 알렌이 바짝 몸을 붙였다.
대검의 거리가 나오지 않는 영역.
그 안에 들어온 알렌을 보며 가이온은 어림도 없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크흐, 좋다. 좋아!"
가이온의 거구가 제자리에서 가속했다. 손목이 비틀리며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알렌이 고함을 내지르며 손목을 잡았다.
"아아아아!"
고통을 감내한다. 부여잡은 손에 믿기지 않는 거력이 실리며 일순간 가이온의 몸이 멈췄다.
용의 노심을 비운다.
마력이 모두 빨려 들어가며 검이 빛으로 뒤덮였다. 가이온이 몸을 반응할 새도 없이 빛이 동그랗게 뭉쳤다.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같이 가자고?"
빛의 태양이 폭발했다. 대답은 없었다. 알렌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조금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의아함에 눈을 뜨자, 검붉은 빛이 알렌의 검을 감싸고 있었다.
빛의 태양은 그 아래에서 몸부림치다가 작게 사그라들었다.
"제정신 차렸으면 어르신에게서 떨어져라."
알렌이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서자, 그가 그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마지막에 무모하기는 했어도 괜찮았다. 암, 실력이 안 되면 같이 죽을 각오 정도는 해야지."
죽을 각오 정도는 아니었다. 그 정도의 공격은 버틸 수 있으리라 자신하기도 했고, 자신이 부상을 대가로 팔강에게 한 방 먹인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그걸 보통 멍청하다고 하거든요? 진짜! 위험하게 뭐 하는 거예요!」
'뭐라도 보여 줘야 하지 않겠나.'
「버티다가 정 안 되면 항복하면 되잖아요! 누가 반드시 이기라고 했어요?」
알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합격이다. 너는 오늘부터 이 어르신의 제자다."
가이온만 만족스러운 듯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마지막의 공격을 떠올렸다.
'순수한 빛과 태양이라는 속성. 이거라면 충분하겠어.'
자크니르와 같은 신성이 섞여서도 안 되고, 이사장, 그녀나 그녀의 제자 마리아와 같은 인공적인 힘이어서도 안 된다.
'적합자는 찾았다.'
그의 가늘게 뜬 눈이 하늘에 반달을 그리는 달에 닿았다.
알렌은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던 한밤의 산책이 끝이 났다.
제96화
세상에는 수많은 이교(異?)가 존재한다.
신전이 몰락하고 고대 제국이 멸망한 후부터, 종교를 믿는 사람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줄어들었다는 말은 사라졌다는 말이 아니다.
일부의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하며, 삶의 방향을 정해 줄 절대자를 원한다.
누구는 그 절대자의 존재를 가까이는 아버지에서부터 촌장, 멀리 보자면 영주 혹은 황제에게 향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힘없는 약자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초월자를 원했다.
설령, 그 신이 몰락했다는 걸 안다고 한들.
그렇기에 이교가 흥하는 것이다.
고단한 삶의 버팀목이 되어서, 단순히 이교도가 되어 얻는 이득 때문에, 아니면 그 신앙을 진실하게 믿는 것일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며, 그에 따른 사정이 있겠지.
그런 수많은 이교 중 '순환교'라는 종교가 있었다.
순환교의 교리는 간단하다.
세상은 태어나고 멸망하는 것을 반복하며 이를 순환이라 칭한다.
그들이 말하기를 대몰락 이후로 세상은 멸망했다고 한다.
현재의 세상은 새로운 세상이 태어나기 전의 시간대며, 새로운 세상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지금의 세상이 완전히 멸망해야 한다는 거다.
그러므로 멸망에 이바지하는 자들은 새로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다소 정신 나간 교리.
그들의 과격한 사상만 보면 곧바로 낙인찍혀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단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기도 하고.
그러나 그들은 몇 가지 쓸모 때문에 일부 영역에서는 용인되는 때도 있었다.
일례로 일부 분쟁지역에서는 그들의 활동을 묵인한다. 왜냐하면, 순환교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을 배척하기 때문이다.
사령술사, 네크로맨서, 악마 계약자, 악마, 마왕, 마족, 외신… 등등.
새롭게 태어난 세상에 이물질이 끼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또 의외로 민간인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끼치는 경우도 드물었다.
순환교는 세상을 인위적인 멸망보다 자연스러운 멸망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열 명, 백 명의 민간인을 직접 죽이는 것 보다 하나의 권력자를 이간질하게 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이유였다.
그렇기에 그들이 있는 곳에서는 늘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그 교리에 심취한 종족들도 다양했다.
'회귀 전에도 아카데미를 습격했다는 것만 아니었다면 멀쩡하게 존재했겠지.'
아카데미의 습격에 실패한 직후, 짐승왕이 직접 나서서 그들의 본단을 타격했고 그들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끝에는 율리우스 곁에 있던 여자, 이단의 성녀 아벨린에게 흡수되어 그의 세력으로 전락했다.
알렌이 하는 행동도 아벨린이 한 행동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사도는 무엇인가?
각 종교마다 사도의 역할은 다양하겠지만, 순환교에서 사도의 역할은 하나였다.
'세상이 멸망한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자.'
다시 말해, 미래에 세상이 망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입증할 수 있는 존재.
알렌이 사도의 자리를 연기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회귀자라…, 이러니 진짜 예언의 사도가 된 것 같군.'
실제로 사도가 곧 등장했던가?
상관없었다. 알렌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이상 다른 이가 사도로 발탁될 일은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의 정리를 끝마쳤을 시점,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예비 사도님. 도착했습니다."
정신을 차리니 눈앞에 커다란 바위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카데미에서 몇 시간 이동하면 도착하는 장소. 황량한 황톳빛 절벽은 오랜 시간 바람에 깎여 나간 듯 각진 모습을 보였다.
사막의 모래 위로 덩그러니 솟아난 바위는 사막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곳이리라.
"여기인가?"
"예. 예비 사도님."
알렌은 가이온의 제자가 된 다음 날, 길게 끌 것도 없이 전번에 편지를 보냈던 학생회 서기 로렌을 통해 다른 순환교 사제와 만나 안내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마치 알렌이 언제 올지 기다렸다는 듯 최대한 신속하게 이동했다.
그는 그렇게 행동하면서도 어떤 지령을 내려 받은 듯 사소한 질문이라도 절대 하지 않으며 시종일관 거리를 유지했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선지자 중 한 분께서 며칠 전부터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쿠르릉-
먼저 바위에 다가갔던 밀란이라는 이름의 사제가 바위 앞에서 무언가를 누르자 작은 진동과 함께 벽이 열리며 통로가 생겨났다.
'순환교의 비밀 거점인가….'
알렌은 담담한 듯 놀란 모습 하나 보이지 않으며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사도의 증명을 받을 예비 사도였다.
증명이 이런 모습과 상관없다 한들 어리숙한 얼굴을 보이는 것보다 나으리라.
그 생각을 증명하듯 그를 안내하던 밀란 사제는 변함없는 그의 태도에 그가 아직 증명하지 못했음에도 일말의 기대감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통로는 어두웠으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통로의 끝에는 거대한 대전도 없었고, 웅장한 벽화가 자리한 것도 아니었다.
소박한 방.
돌을 깎아 파내어 만든 작은 방 하나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심지어 나무 문을 달 여력도 없었는지 두꺼운 천으로 안과 밖의 경계를 나누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알렌이 두꺼운 천을 밀고 들어가자, 전형 상상하지도 못한 것이 그를 반겨줬다.
알렌은 걸음을 멈추고 급히 뒤를 뒤돌아봤다. 그러나 그가 들어왔던 두꺼운 천은 어느새 사라진 상태이었다.
틈새 하나 없는 완전한 암흑,
거친 석벽으로 이루어졌으리라 생각한 공간은 없었다.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긴 어디지?"
그곳에, 하품하는 심연이 그를 집어삼켰다.
* * *
순환의 제전은, 순환교 내부에 있는 비밀스러운 의식이었다.
상실?순환?현현.
상실하였기에 바라고.
순환하기에 기다리며.
끝내 현현할 것을 믿는다.
순환의 제전은 여러 제전 중에서 소제전으로 분류되는 작은 의식이었지만, 그 중요도는 대제전에 못지않았다.
무려 선지자 중 한 명이 주관해야 할 수 있는 의식이며, 참관할 수 있는 직급도 대사제 이상만 허용된다.
지금 알렌의 의식을 주관하고 참관하는 자도 다섯 손가락을 넘지 못했다.
의식의 주관자 세 번째 선지자 썩어 버린 뿌리가 입을 열었다.
"키헤, 헥! 사아도! 진행!"
고블린 특유의 초록 피부와 작달막한 키.
밖에서는 괴물로 사냥당할 만한 괴물이 고급스러운 법복을 입고 있는 것은 꽤나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으나,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를 비웃지 않았다.
그의 옆에서 세 번째 선지자를 보좌하기 위해 파견된 대주교가 입을 열었다.
"현재 사도의 증명을 위한 제전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묻고 계십니다."
"거짓! 켁! 참! 키헤헥!"
"거짓일 경우 죽음으로 죄를 갚게 하며, 진실한 자격을 가졌을 때는 다른 형제님들에게도 알리시라고 하십니다."
대주교는 눈 깜짝 안 하고 그의 말을 차분하게 번역했다. 그의 눈에 장식된 외눈 안경이 반짝였다.
세 번째 선지자, 썩어 버린 뿌리는 연신 그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기이한 눈으로 잠시 바라보던 대사제가 의식의 진행 상황을 파악하며 답했다.
"현재…, 태초의 공허 속으로 들어간 예비 사도의 기본적인 증명은 끝난 상태입니다."
"진짜입니까? 아니면 거짓입니까."
"다행스럽게도 진짜입니다."
그의 말에 그곳에 자리한 이들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현재는…."
"미래의 확정적인 멸망이 예정돼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세부적인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봐! 나! 카하학! 질문!"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대주교가 대사제에게 질문했다.
"혹시 제전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 조심스럽게 질문하고 계십니다."
잠시 떨떠름한 얼굴로 대주교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는 손을 장치를 발동시켰다.
바로 앞의 벽이 투명하게 변하며 알렌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온 천지가 검게 물든 가운데서도 평정을 잃지 않고 바닥에 앉아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참관하고 있던 이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제 제일 궁금해하시는 것부터 듣도록 하겠습니다."
썩어 버린 뿌리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검은 공간 안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멀리서 들리는 것 같기도, 귓가에서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얼핏 듣기에 여자 같기도, 남자 같기도, 아이 같기도 했고 늙수그레한 노인의 단말마 같기도 했다.
"시작을 위한 끝은 언제 일어나는가?"
알렌이 고요한 눈으로 천천히 답했다.
"늦어도 10년 안에 일어난다."
다시 목소리가 물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는가?"
"수많은 변수에 따라 내일일 수도, 일주일 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일어난다."
그 대답에 참관하고 있던 대사제들은 믿음이 가는 걸 느꼈다.
오히려 정확한 날짜를 말했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모호하지만, 확실한 실체가 있는 것 같은 그의 대답에 그들은 안심했다.
지금까지 했던 일이 헛되지 않다는 말이었으니까.
"누구에 의해 끝이 나는가?"
"마왕."
그 말에 대사제는 숨을 들이켰다. 서로의 다툼이 아닌 외세의 침입으로 멸망한다고?
"그리고… 그때 하얗고, 검은 그리고 잿빛의 빛이 세상을 가득 채울 것이다."
"하얗고, 검으며 또 잿빛이라…."
무언가에 대한 암시인가? 곁에 있던 대사제가 급히 대화를 받아 적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묻겠다. 그 멸망의 최대의 변수는 무엇인가."
"최대의 변수는…."
알렌은 다소 끓어오르는 감정을 조정하며, 한 글자 또박또박 입에 담았다.
"세계의 침탈자이자 외계에서 온 악령 그리고 세상을 주무르는 악마."
동생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이계인.
"빙의자."
* * *
순환의 제전이 끝이 났다.
알렌은 마지막 질문을 끝으로 방을 나올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다시 생긴 두꺼운 천을 밀자, 밖에서 밀란이 들어왔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자세로 서 있었다.
그는 알렌을 본 즉시 고개를 숙였다.
"사도님을 뵙습니다! 현재 선지자께서 사도님을 기다리고 계시니 곧바로 안내하겠습니다."
알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렌이 들어갔던 방의 옆에는, 어느새 처음에 보지 못했던 하나의 방이 더 생겨나 있었다.
알렌은 두꺼운 천을 밀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밀란 사제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스윽-
방에 들어오고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첫 번째 방과 같이 방이 암흑으로 물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거, 걱정. 케헥. 너!"
고개를 돌리자, 고블린 한 마리가 갈색의 고풍스러운 법복을 입은 채 소리를 질렀다.
알렌은 무례를 범하는 일 없이 고개를 숙였다.
"세 번째, 선지자 썩어 버린 뿌리를 뵙습니다."
"크헤헤헤!"
"자신도 만나서 반갑다고 하십니다."
"당신은…."
알렌이 고개를 들자, 외눈 안경을 낀 젊은 남자가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저는 선지자님을 보좌하게 된 대주교 하멜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저의 역할은 선지자님의 말을 전하는 데에 있기에 신경 쓰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알렌은 그의 칼 같은 태도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의하겠습니다."
세 번째 선지자 썩어 버린 뿌리는, 그들이 대화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입을 열었다.
"며, 멸망! 예지! 사도! 더! 보상! 대화! 크핫"
"선지자께서 혹시 아까 말한 예지에 대해 아는 것이 더 있냐고 물으십니다. 또, 원하시는 게 있느냐고 하시는군요."
알렌은 잠시 계산해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그 이상 알지는 못합니다. 새로운 것이 떠오른다면 즉시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들도 그 이상을 알 거라는 의심은 없는 듯 금방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사양! 나! 선! 크, 흣, 카하학! 순환!"
"보상은 사양하지 않고 말해도 된다고 하시며, 자신은 통이 크다고 합니다. 순환의 축복을 받은 것을 축하한다고 하십니다."
알렌은 다소 기괴해 보일 수 있는 모습에 신경 쓰지 않았다.
저런 선지자의 모습은 미리 조사해서 알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다만, 보상이라면 역시….
"뿌리시여. 혹시 외세의 악에 의해 근본이 비틀린 이를 고쳐 줄 수 있으십니까?"
알렌이 순환교와 접촉하려 했던 원인이자 이유, 그게 눈앞에 있었다.
"케헥?"
"당연히 가능한데…, 그건 왜 물으시냐고 묻습니다."
세 번째 선지자, 썩어 버린 뿌리.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블린 중 유일하게 요정의 피를 일깨웠으며, 고블린이 먼 고대에 요정이었다가 타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였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썩어 버린 뿌리였다.
근본부터 비틀리고 타락했기에.
그렇기에 그는 모순적으로 비틀린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렇다면, 제 친우를 고쳐 주십시오. 그녀는 어려서 밤의 일족에게 물렸다가 간신히 치유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몸의 체질이 완전히 비틀렸습니다."
무려 짐승왕의 피를 이었음에도 신체가 허약하고.
인간과 수인 모두의 피를 이었지만, 그 어떤 것에도 소질이 없다.
일리아나의 신체에는 그런 사정이 있었다.
"그런 그녀를 치료해 주십시오."
"더!"
"그걸로 충분하냐고 하십니다."
"예, 그걸로 충분합니다."
알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물러섰다. 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욕심을 부리는 건 좋지 않았다.
아직 자신의 자리를 확고하게 다진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자중할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자신이 그들을 완전히 동화시키기 전까지는.
"내일! 캭! 문!"
"그렇다면 내일 이곳의 문 앞에서 보는 건 어떠냐고 하시는군요."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대주교는 알렌과 대화를 하는 내내 사적인 감정을 단 하나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욕심을 부리지 않자, 눈꼬리에서 힘이 살짝 빠지며 흡족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얼른 이 소식을 전하고 싶군요."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렌은 여전히 예의를 지키며 인사를 한 후에 통로를 빠져나왔다.
쿵-
바위의 문이 닫히며 자세히 보지 않으면 감쪽같아 보이는 광경이 보였다.
그렇게 도시로 돌아가는 시간 동안 알렌은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그가 생각하는 건 첫 번째 방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개념을 강제하는 방이라….'
알렌은 방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을 속박하는 어떠한 힘을 느꼈다.
그 힘은 자신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으나 특정한 조건 내에서 자신을 강제하고 있었다.
그 영향력을 강하게 느낀 것은 거짓을 입에 담으려 할 때였다.
알렌이 질문의 답에 거짓을 말하려는 순간, 그 행동을 막으려고 강제하는 힘을 느꼈다.
그러나 알렌이 그때 느낀 감정은 당황함 따위가 아니었다.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알렌은 자신을 강제하는 힘을 완전히 벗어 낼 수는 없어도, 최대한 빗겨 낼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최대한 이용했다.
멸망이 10년 내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과장했고, 마왕이 세상을 멸망시키리라 꾸몄다.
하얗고 검은, 잿빛의 세상 역시 유적에서 나왔던 문장을 인용한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마지막 답변이자, 자신이 하는 일에 순환교를 끌어들일 미끼.
'빙의자.'
그걸 뿌려 뒀으니 알렌이 하는 일에 당분간 그들은 신경 쓰지도 못할 것이다.
마왕을 막아야 할지 아니면 멸망을 방관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할 것이고, 알렌이 말했던 모호한 말에 대해서 해석하느라 바쁠 테니까.
순환교 안에서 사도의 자리가 특수하다고 한들, 위험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니 처음부터 신경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나았다.
'이제 조금씩 증거를 뿌려 순환교에서 율리우스의 정체를 완전히 알려지는 그때….'
'진짜' 계획이 시작될 것이다.
끼익-
알렌은 낡은 등자를 조정하며 도시로 돌아갔다.
끼익- 끼익-
등자는 알렌이 도시로 돌아가는 내내 삐걱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제97화
모험의 도시 카이란에 있는 작은 술집.
그곳은 여느 술집처럼 쉰내와 썩은 나무의 위태로운 비명도 없어 깔끔한 구석이 돋보였다.
하지만 장사도 하지 않는 듯 열려 있는 날도 많지 않고, 특이하게 누구의 도움 없이 노인 혼자 술집을 경영하는 다소 특이한 장소였다.
하지만 작은 술집답지 않게 술의 종류도 많았고, 한 번씩 고풍스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해 은근히 인기가 많았다.
심지어 나비 모양이 그려진 낡은 간판조차 고풍스럽다고 칭찬이 자자할 만큼.
자릿세라도 거둘까 나서려던 양아치들이 어느 순간 사라진다는 소문만 빼면, 여느 도시에나 있을 법한 숨겨진 맛집이었다.
그렇기에 도시의 평범한 주민들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곳이 중부의 이름난 정보 길드인 프시케의 지부 중 하나이며, 가게에 가끔 찾아오는 고급진 차림의 손님은 정보를 사러 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심지어 도시에 자자한 호평조차 그들의 공작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 프시케의 지하 밀실 중 한 곳에, 늙은 남자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대외적으로 알려진 술집의 주인이자 바텐더였고, 한 명은 하얗게 센 수염과 허리가 완전히 펴져 강건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는 약간 때가 탄 붉은 천을 몸에 두르고 있었고, 한 손엔 오래 사용한 듯한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뭔가 사명감에 찬 표정은 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절로 느끼게 했다.
"이제 어느 정도 준비가 다 된 것 같군요."
새롭게 생긴 카이란의 지부장이자,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정보원인 그는 인자하게 웃었다.
"물론…, 아직 미진한 부분도 몇 보이지만 그들을 속이려면 어쩔 수 없겠지요."
그의 만족스러운 표정에 지부장 옆에 있던 노인, 코피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탐욕스러운 얼굴과 비렁뱅이처럼 굽어진 등, 두 손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수전노처럼 비비기 시작했다.
"그, 그럼 약속한 보상을 주는 건가? 벌써 3년이네! 3년! 이교도 놈들을 속이기만 한다면 금화를…!"
"표정."
뒤바뀐 그의 태도에 지부장은 여전히 인자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표정을 신경 쓰십시오. 코피스, 이제부터 연기해야 할 건 무려 예언의 사도가 아닙니까."
"…그, 그렇지. 잠시 내 입장을 착각했으이…. 하지만 역시 돈은, 돈은 받아야지 않겠나…."
"하아."
지부장이 경멸 어린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 모습에 주눅이 들 법도 하건만, 코피스는 여전히 입을 멈추지 않았다.
"계, 계약이었잖나! 며, 몇 년 동안만 이교도 틈에서 가짜 예언자 행세나 하면서 알려 준 것들을 말하면 될 거라고…."
"...."
"그, 그러면 원하는 만큼의 금화를 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 탓에 몇 년 동안 생고생을 해야 했는데! 나, 나는 금화가 필요해, 금화가…!"
그는 분위기가 가라앉든 말든 절실하게 물든 눈으로 금화를 요구했다.
그 모습은, 방금 전까지 경건하며 무언가 숭고한 목적을 위한다는 분위기를 보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고독한 예언가가 아니라 흔히 뒷골목에 널브러진 도박 중독자나 다름없는 모습.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고! 말투를 교정하고! 표정과 몸짓도 연습했네! 심지어 이 나이에 근육을 기르라는 말에 얼마나…!"
"브라이나."
지부장은 그의 말을 더는 듣지 못하겠다는 듯 수하를 불렀다.
벌컥-
그와 동시에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여성 한 명이 성인만 한 거대한 금화 자루를 들고 들어왔다.
"금화…, 내 금화!"
자루에서 금화가 반짝이자, 코피스는 상체 전체를 자루 안에 넣으며 얼굴을 비벼댔다.
그런 추악한 모습에 지부장은 그를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은 충동을 참아 내야만 했다.
'…정말, 이리도 추악할 수 있구나.'
하지만 이런 조건이 아니었다면 순환교에 잠입시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순환교는 배교자를 반드시 찾아낼 수 있었으니.
지부장과 같은 이들 중에는 '우리'의 대의에 따르지 않고, 그분의 예언을 믿지 않는 자들은 있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저런 금수 같은 이라도 사용해야 했다.
종교와 대의에 귀의하지 않는 자는 도박과 색에 미친, 저런 자들밖에 없었으니까.
겉모습이라도 세간의 떠도는 예언자 같은 모습을 만드는 데 3년이나 걸렸다.
'저런 자에게 순환교를 분열시키고, 선택받은 자를 위하는 역할을 맡겨야 한다니.'
지부장은 몇 달 전, 이곳에 찾아왔던 예언의 주인공을 떠올리며 아쉬움을 삼켰다.
간접적으로 그를 지원한다고 한들, 직접적으로 그를 도울 수 없는 처지가 안타까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분의 뜻을 직접 받는 카샤 님께서 친히 명하신 일인 것을.
"그럼 저는 다른 손님이 있어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내일 순환교와 접촉할 테니, 미리 준비해 두시길 바랍니다."
"금화, 하하하하!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아…!"
코피스는 이미 다른 소리는 안중에도 없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지부장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 손님이 기다린다는 소리에 자리를 비웠다.
그렇게 지부장이 나가고 얼마나 지났을까.
젊은 청년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며 급히 방문을 열어젖혔다.
벌컥-!
"코피스 님!"
코피스와 함께 순환교에 함께 갈 이들 중 하나였다.
"무, 무슨 일이냐!"
갑작스럽게 들린 커다란 소리에 놀란 걸까, 어느새 몸 전체를 자루에 쑤셔 넣던 코피스가 급히 뒤를 돌아봤다.
"카딘, 너, 내 소중한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죄, 죄송합니다. 아니! 그게 급한 게 아닙니다!"
"그럼 뭐가 급한 일이라는…!"
"순환교에!"
코피스는 순환교라는 말에 잠시 멈칫했다. 왠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야 보장받았던 보상 일부분을 받고 기뻐했건만, 도대체 무슨…?
"순환교에 예언의 사도가 등장했답니다!"
"…뭐?"
순간적으로 그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금화와 관련된 일인지, 순식간에 머리 회전이 빨라진 그는 창백한 얼굴로 변했다.
"사도가? 그럼 나는? 내 금화는?"
그의 머리가 빠르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시일이 지나면 금화를 더 받지 못한다. 그럼 방법은? 그는 빠르게 방법을 생각해 냈다.
"얼마나 지났나."
"예?"
"사도가 새로 뽑혔다는 말이 돈 지 얼마나 지났냐고!"
그가 크게 소리 지르자, 청년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빠르게 답했다.
"하루! 아니, 열일곱 시간밖에 안 됐습니다!"
"그래…?"
사도가 나타난 지 그 정도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면, 새로운 사도로 바뀌더라도 그리 혼란이 크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사도가 되려면 원래 자리에 있는 사도를 어찌해야 되겠는가.
"가자!"
"…예? 어디로?"
"아니다 다 데려와!"
그가 어벙한 표정을 짓자 금화가 날아가는 환상에 얼굴이 굳은 코피스가 크게 외쳤다.
"나랑 같이 가는 놈들, 다 무장시켜서 데려오라고!"
"아, 알겠습니다!"
코피스는 청년이 다른 이들을 데려올 틈을 타, 정보를 보관해 두는 곳으로 달렸다.
"코피스 님 이게 무슨…!"
"비켜라! 지부장에게도 다 허락받은 일이다! 막으면 네가 책임질 거냐?"
그가 윽박지르며 당당히 새롭게 나왔다는 사도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
다행히 방금 들어온 정보였던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정보를 찾은 그는 지부장이 눈치채기 전에 얼른 서류를 들고 떠났다.
새로운 사도가 나타났다는 장소로.
그렇게 프시케의 지부가 소란스러워지기 조금 전, 지부장은 한 남자의 의뢰를 받던 도중이었다.
"그래서, 원하시는 정보가 세간에 돌고 있는 마족의 소문을 말씀하시는 것이 맞습니까?"
"그래."
"의뢰비는 얼마가 들어가든지 상관치 않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만큼 추가 수당을 챙겨 주지."
오랜만에 거물급 의뢰에 지부장은 어떻게 행동할지 고민했다.
'아카데미의 주의할 인물, 미래가 기대되는 유망주, 현재 아카데미 수석이라….'
지금 연을 맺어 두고 조금만 그의 움직임을 비튼다면, 선택받은 자를 도울 수 있게 된다.
코피스의 일로 아쉬움을 느끼고 있던 그가 긍정의 말로 답하려던 그때,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비켜라! 지부장이….
-무슨 일인….
듣고 싶지 않았던 소리에 얼굴이 굳은 그는 상대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지부에 무슨 일이 발생한 것 같으니 먼저 알아본 후에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상대와 연을 잘 맺어 둬야만 나중에 움직임에 관여할 수도 있을 테니까.
"물론, 이걸로 끝은 아니겠지?"
"…예, 사죄의 의미로 이번 의뢰는 무료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계획에도 없었던 무료 의뢰에 지부장과 흑발의 남자, 하이젤은 기쁘게 웃었다.
"그럼 며칠 뒤에 다시 찾아오지."
* * *
순환의 제전을 끝낸 다음 날, 알렌은 아침 일찍부터 자신을 찾아온 일리아나를 데리고 도시를 나섰다.
그와 만났을 때부터 몸을 고칠 수 있는지 묻고 싶었던 그녀는 도시를 나가자 당황했지만, 그 방법이 도시의 근처에 있다고 하자 억지로 이해했다.
적어도 그는 할아버지인 짐승왕의 제자였으니까.
이미 그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녀를 해코지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알렌은 그녀를 데리고 어제 향했던 커다란 바위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곳에 뭐가 있다고 자신을 데려왔지? 그녀가 몸을 돌렸다.
그러나 알렌에게 입을 열려던 그때, 갑자기 엄청난 졸음이 쏟아졌다.
"…공자, 여기 아무것도 없는, 데… 잠시 졸려…아."
털썩-
알렌은 그녀의 몸이 땅바닥에 앉기 전 받아 내고는 입을 열었다.
"이제 나오십시오."
그가 입을 열기 무섭게 바위의 틈이 벌어지며 일행이 걸어 나왔다.
"크힛, 사도! 과격! 흐힛흐, 납치!"
"사도의 방식이 참으로 과격하고, 강렬해 마치 납치 같다고 하시는군요."
썩어 버린 뿌리 뒤로 하멜이 밉살맞게 웃으며 그를 쳐다봤다.
"순환교의 모습을 보일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알렌도 일리아나를 강제로 기절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치료하는 것이 이교로 불리는 순환교며, 그곳을 이끄는 다섯 선지자 중 하나라고 어찌 말할 수 있을까.
일단 그녀가 치료를 믿을지도 의문이며, 알렌과 그들의 관계까지 밝혀내려 할 것이다.
그렇기에 알렌은 다소 거친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납치범 같다는 말은 부정할 수 없지만요.」
'…나중에 따로 정중하게 사과는 할 생각이다.' 베스틀라의 말을 알렌은 부정하지 못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소녀 하나를 도시에서 데리고 와 기절시킨 것이 그렇게 좋게 보일 수 없었으니까.
"그럼 부탁드립니다."
"크헤헤헤!"
"맡기시랍니다."
알렌은 그녀가 하늘을 바라보게 눕히고는 만일을 대비해 그녀의 곁에 자리했다.
그들이 자신을 사도의 자리에 받아들였다고 해도 아직은 완전히 신뢰하기는 힘들었으니까.
그들도 그것을 이해한 듯 알렌의 행동에 뭐라고 하지 않았다. 물론 썩어 버린 뿌리는 그의 행동을 신경 쓰지도 않았다.
"카하학!"
썩어 버린 뿌리가 손끝을 단검으로 찌르자, 핏방울이 떨어졌다.
대부분의 고블린은 이능을 사용하지 못한다.
주술을 사용하는 고블린이 몇 있지만, 극소수의 주술사들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 고블린 중 유일하게 요정의 피를 일깨웠다는 그의 능력은 신기했다.
「…요정의 피를 일깨웠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었네요?」
베스틀라의 놀란 음색이 느껴졌다. 알렌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회귀 전에도, 후에도 소문으로만 무성했으나 직접 본 것에 비교할 수 없었다.
세 번째 선지자의 피는, 우윳빛 같은 백색이었다.
절대로 고블린의 몸에서 나왔다고 믿을 수 없는 피의 색.
그렇게 나온 하얀 피는 그녀의 명치 위로 떨어지더니, 저항 없이 흡수되었다.
그 후에 일리아나의 안색이 변했다. 다소 창백한 인상의 얼굴은 무언가 괴로운 듯 연신 앓는 소리를 뱉었고, 몸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얼마나 그렇게 지났을까.
더는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그의 초록색 피부가 백지장으로 변해 뒤로 물러섰다.
"키헤, 헥…."
"신체의 치료는 성공했다고 하십니다."
다시 확인한 그녀의 얼굴은 평온했다.
이제 놔둔다면 자연스럽게 깨어나게 되리라.
알렌은 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무리 약속이라고 한들, 그의 안색으로 보아 쉬운 일이었을 것 같지 않았으니.
"감사드립니다."
"케헷…."
"보상이었으니 당연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썩어 버린 뿌리는 말하기도 귀찮은 듯 하멜과 눈을 맞추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멜도 그의 신호를 알아들은 듯 입을 열었다.
"자신도 감당하기 힘든 저주였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남은 저주의 힘이 강했다면 힘들었을 거라고 하시는군요."
"켁!"
"물론, 이미 자신이 해결했기에 별것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미 한 번 저주를 받았다가 회복한 후의 잔여물이 이 정도라면….
'그녀는 도대체 무엇에 당한 거지?'
알렌은 그녀에 대해 많은 걸 알지 못했다. 그저 세간에서 떠드는 정보 정도만 알 뿐.
짐승왕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흡혈귀들에게 그의 부족이 습격을 당했고, 일리아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 그리고 그에 분노한 짐승왕이 복수의 원흉을 찾아 한동안 대륙을 떠돌았다는 것까지.
알렌은 짐승왕이 말했던 삼 년 후가 어렴풋이 이 일과도 연관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케헥, 이제! 가! 크흐흡! 먼저! 크, 우리! 사도!"
고개를 돌리니 남은 순환교 대사제와 일행들은 떠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그럼, 저희는 일이 있어 먼저 떠나가니 사도께서도 평안하시길 바란다고 하십니다."
"앞으로 떠오르는 일이 있다면 곧바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에 썩어 버린 뿌리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도시여, 안녕히 계십시오."
"남은 여정도 편안하기를, 순환의 축복에 강건하기를 빌겠습니다."
"다음에 대 총회 때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빠르게 떠나갔다.
알렌은 그들의 모습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렸다.
"…잘 자는군."
알렌은 그녀의 몸을 그늘로 옮겨 둔 후,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세상을 투명하게 비추던 빛이 주홍빛으로 물들고, 다른 하늘의 끝에서 희미하게 달이 모습을 드러냈을 시점에 소리가 들렸다.
"으음…, 흠, 음?"
알렌이 고개를 돌리자, 일리아나가 당황한 손짓으로 주변의 땅을 짚는 것이 보였다.
"아? 여기는 어디…, 분명."
"일리아나 공녀."
"아이, 진짜 공녀라고 부르지… 알렌 공자님?"
그녀는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홱 하고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렸다.
"공자님이 왜… 아니, 잠깐만, 아까 갑자기 졸려서…."
그녀는 점점 기억을 되찾는 듯 눈빛이 매섭게 변하기 시작했다.
"공자님, 분명히 설명하셔야 할 거예요. 왜 제가 여기 있는지."
그녀는 그렇게 소리치며 자신의 옷차림을 점검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 우선 사과를 표하고, 그렇게 한 이유를 설명하자면…."
알렌은 얌전히 먼저 그녀의 몸 상태를 알려 줄 생각이었다. 아까 그 행동이 그녀를 위협하려던 게 아니라 그녀를 치료하기 위함이었다고.
그녀의 낯빛이 험악해진 걸 보면 다른 오해를 하는 게 분명했으니까.
-구구구구
그러나 곧바로 말을 잇기 전, 알렌의 고개가 돌아가며 지평선의 끝을 응시했다.
"저건…."
먼지구름과 땅을 흔드는 진동, 그리고 목이 터져라 지르는 고함.
"저기 있다! 저기! 잡아라! 잡아! 아니 죽이라고!"
마적 떼가 나타났다.
제98화
먼지구름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진다. 알렌은 감지력으로 일대를 훑어보고는 천천히 말했다.
"우선 저것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군."
"…알겠어요."
그녀도 마적 떼를 처리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일리아나는 여전히 알렌을 의심하는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였다.
알렌은 그런 그녀에게 단 한 마디만 내뱉었다.
"내가 저들을 처리하는 사이, 몸이나 살펴보는 게 어떻나."
"예?"
"평소와 뭔가 다른 것이 느껴지지 않나?"
그녀가 잠시 눈을 감는가 싶더니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잠깐, 공자님 설마…!"
"조금 있다 이야기하지."
알렌은 대답을 요구하는 그녀의 부름을 뿌리치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당신, 너무 약아빠진 거 아니에요? 일부러 지금 알려 줬죠?」
'그렇게 느껴졌나? 우연이겠지.'
「잘도 그렇겠네요.」
'오해는 빨리 푸는 것이 더 좋지 않나.' 단지, 화를 푸는 데는 다른 곳으로 감정을 돌리는 것이 가장 상책이었을 뿐이다.
알렌이 이렇게 베스틀라와 잡담을 할 여유가 있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저, 상대가 눈에 차지 않기 때문이었다.
키메라 술사, 거인 실험체, 타락한 신수, 흑마법사, 고대의 괴수….
지금껏 상대했던 적들에 비하면, 마적들은 알렌이 이렇게 움직일 필요도 없는 상대였다.
알렌이 움직인 이유도 그저 잠시 일리아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함일 뿐.
알렌은 마적들이 적당히 가까워졌을 시점에 멈춰 섰다.
'요람의 부름은 일리아나 역시 위험할 수 있으니….'
알렌은 눈을 감았다. 이번에 사용하는 마법은, 새로 시험할 마법이다.
노심에서 실타래가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사용하는 순수한 마법이다. 그런 감상을 느꼈다. 요즘에는 검을 사용했으니.
실타래는 고요히 알렌의 통제에 모여들었다.
'괜찮은 느낌이 드는군.'
매번 새로운 악기를 배우고, 그 악기를 마법으로 재현하는 위해 알아야 하는 것이 많다.
악기를 대충 아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가, 얼마나 손에 익었는가, 눈을 감고도 그려 낼 수 있느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회귀 전에 지겹게도 했었던 일이고, 여러 번 했던 일인 만큼 어느 정도 요령도 있었다.
중요한 건 하나였다.
'얼마나, 악기를 이해했는가.'
품에 안긴 실타래는 첼로와 비슷하나 두 배는 작고, 끝은 네모난 흙색의 악기로 엮였다.
마두금은 초원의 악기였다.
넓은 지평선의 끝없는 장대함과 그 안의 살아 숨 쉬는 섬세함을 담는 악기.
그렇기에 말의 말발굽처럼 휘몰아쳤다가도, 짧은 풀을 스치는 바람처럼 흘러가는 것도 있었다.
그를 이해한다면 진짜 연주가들 같은 완벽함은 없더라도, 박동치는 심장처럼 생명이 담겨진다. 살아 있게 되는 것이다.
"이름은…,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