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들을 손끝에 담았다.
오케스트라(Ⅰ) 수업에서 처음 배웠던, 그 감각을 담아서.
"자유의 광기."
두 개의 현이 울리며, 하나의 마법이 어느덧 맨눈으로 보일 정도로 다가온 이들에게 길게 뻗어 나갔다.
공기가 바람처럼 그들을 휩쓸며,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처럼 스쳐 지나갔다.
"마, 마법의 효과가 없다! 얼른 접근해! 얼른!"
"접근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른 가라고-!"
소리는 계속 그들을 스쳤다. 그들의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달려오던 마적 중 한 명이 쓰러졌다.
낙마한 이는 목이 꺾여 죽었다. 아무도 그를 보지 않았다.
"조금 더! 조금 더 빠르게 가자아아!"
"금화, 내 금화를 찾아야 돼! 더, 더!"
"내가, 내가 1등이다!"
어느새 그들의 눈이 붉게 변해 있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타고 있던 말조차도 눈이 벌겋게 변해 콧김을 뿜었다.
마적들 모두 체력을 신경 쓰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리던 중, 마지막에 있던 마적이 앞의 동료를 향해 검을 던졌다.
푸슉-
"비켜, 비키란 말이야! 내가 먼저 가야 해, 가야 한다고!"
한 명이 더 죽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다들 서로 먼저 앞을 가기 위해 칼을 휘둘렀다. 알렌은 뒷전이 된 상황이었다.
"이 미천한 놈들아! 비켜라! 내 금화가 저기에 있다!"
"노인네나 비키시오! 이 금화에 미친 노…크악!"
두 명이 죽었고, 세 명이 죽었다.
현을 튕길수록 그들의 행동은 더욱 과감해졌고, 거리낌이 없어졌다.
서로 동료의 등을 찌르며 엎으려 달려 나갔고, 낙마한 상태에서도 발목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알렌의 마법이 끝났을 때, 그의 앞까지 도달한 이는 한 명밖에 없었다.
"죽어라! 죽어! 이제 금화, 내 금화를 위해서 죽으란 말이다!"
마적단에게 명령을 내리던 노인.
노인치고 유난히 몸이 좋아 눈여겨보고 있던 남자는, 허벅지가 뚫린 채 악을 쓰며 그에게 기어 왔다.
'늙어서 마적질까지 하다니, 이유가 있나?'
알렌은 그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노인이 무슨 사정이 있든, 어떤 이유가 있든 그를 습격하고 목숨을 노린 건 사실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알렌이 그를 죽이고 돌아가려던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올 리 없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사도의 자리는! 내 것이었단 말이다!"
"뭐?"
"이제 조금이면 됐었는데! 원래 계획대로라면…!"
알렌은 급히 노인의 앞에 꿇어앉아 멱살을 틀어 올렸다.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
그 순간 노인에게서 강대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알렌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노인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가 환한 빛을 뿜어냈다.
"살려…"
쾅!
노인의 머리가 박살 나며 피와 살점이 쏟아져 내렸다.
노인은 제대로 된 문장 한 마디를 내뱉지 못하고 죽었다.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
알렌이 급히 시체에서라도 정보를 건져 내기 위해 다가섰다. 그러나 한 걸음도 떼기 전, 알렌의 앞으로 공간이 물결쳤다.
팟-
시체의 앞에 나타난 건 노인이었다.
방금 죽은 노인과 다른 깡마른 몸의 노인에게서는 옅은 술향이 배여 있었다.
상황이 이상했다.
죽은 노인의 정체는 뭐지? 방금 나타난 노인은 누구고. 죽은 노인이 말하는 사도가 순환교의 사도인가?
'사도의 자리가 예정되어 있었다?'
알렌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갑자기 나타난 마적과 그 마적에 있던, 원래 사도의 자리가 예정되었다 주장하는 노인. 그가 정보를 내뱉으려 하자 머리가 터지며, 다른 노인이 나타나기까지.
상황이 너무 공교로웠다.
알렌이 모르는 무언가가 이곳에 끼어들었다.
심지어 알렌이 이 사도의 자리에 올라서기 전부터.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게 맞다고 확신할 수 있나?'
이들은 누구고, 원래 계획은 무엇을 말하는 건가.
알렌은 지나치게 깊어지려는 생각을 끊고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깡마른 노인이 죽은 노인을 보며 굳은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노인의 고개를 돌렸다.
"넌 누구지?"
노인은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듯 입고 있던 단출한 정장의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선, 의외의 사고에 놀라셨을 공자님께 사죄를 구하고 싶습니다."
"누구냐고 물었다."
알렌이 흔들림 없이 그를 바라보며 묻자, 그는 지체 없이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중부의 정보 길드, 프시케의 카이란 지부장 블레임이라고 합니다."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설명할 수 있나?"
"예, 당연히 해 드려야지요."
그는 알렌이 경계심을 품은 것과 다르게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죽은 노인을 가리켰다.
"우선, 이자는 저희 길드에서 탈출한 정보 창고입니다."
"정보 창고…?"
인간이 아닌 물건을 칭하는 듯한 그의 어조는 방금과 같이 평탄하기 짝이 없었다.
"예. 정보 길드에 들어오는 정보는 막대합니다. 하지만 지부마다 들여놓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되지요. 그걸 해결하기 위한 방책이 바로 정보 창고입니다."
알렌이 들어 보겠다는 듯 대답하지 않자, 그는 설명을 계속했다.
"정보를 물리적으로 전하고 옮길 수 있는 양이 한정되니, 그 정보를 한 사람에게 집약시켜 지부마다 정보를 갱신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이 자는 몇십 년째 저희가 키운 정보 창고의 하나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날 습격한 것과 무슨 상관이지?"
그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표정을 흐렸다.
"유통 기한이 다 된 것이지요."
"...유통 기한이 다 됐다. 사람에게 칭할 말은 아닌 것 같군."
"하지만, 그 말 밖에 이 일을 제대로 설명할 단어가 없으니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설명해 드리자면…."
죽은 노인, 코피스는 몇십 년간 정보 창고의 역할을 하며 대륙을 떠돌았고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이 새로 지부가 설치된 카이란 지부다.
그러나 그는 오랜 시간에 걸친 머리의 혹사와 나이로 인한 노쇠로 미쳐 버렸다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상상이 가십니까? 그 몇십 년간 도서관 하나가 통째로 들어갈 만한 정보를 머리에 품고 대륙을 떠돈다는 것을."
"그럼 내가 들은 말은 뭐지? 원래 사도의 자리가 내 것이라고 하던데…."
"그것도 마찬가지지요."
그가 마지막으로 외운 정보가 순환교의 새 사도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코피스가 알렌이 사도인 것을 알고 이곳으로 찾아올 수 있었다고.
"마지막에 머리가 터진 것은 정보를 스스로 발설하려 했기 때문이고…, 제가 이곳으로 이동된 것도 같은 맥락의 일입니다."
원래는 스스로 머리가 터질 것을 알기에 정보를 발설하지 않지만, 미쳐 버렸기에 그것을 잊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의 설명은 정말, 그럴듯했다.
회귀를 했던 알렌이 아니었다면 진심으로 그의 말을 믿었을 정도로.
그 정도로 노인의 말에는 논리정연함과 진실이 섞여 있었다.
그렇기에 알렌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정보 창고라는 존재 자체는 사실이겠지. 그러나 그 외는 모두 거짓이다.'
암암리에 도는 정보 창고의 존재는 권력이 있는 이라면 소문 정도는 들어 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는 아니었다.
알렌은 곧 진짜 예언의 사도가 등장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황상 그 사도의 정체는 죽은 노인일 확률이 높았다.
그의 존재는 1회차의 상황과 더불어 그들이 무엇을 획책하려고 했는지 짐작하게 해 주었다.
'순환교의 분열.'
다른 이유는 공간 이동의 존재.
아카데미에서나 고대의 유적 그리고 레이첼의 존재 때문에 공간 이동이 흔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아티펙트로서 공간 이동은 매우 희귀한 측에 속했다.
알렌도 10년간 공간 계통의 마법을 다루며 공간 이동을 깨우치지 못했는데, 그걸 일개 지부장이 사용한다?
아티펙트로?
'말이 안 되지.'
프시케의 주인이라면 모를까, 일개 지부장 따위가 사용할 물건은 아니었다.
차라리 금제로 머리만 터지고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알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알렌이 죽은 노인, 코피스의 몸을 탐색하는 걸 막듯 나타난 블레임의 존재는 오히려 알렌의 추측을 더욱 뒷받침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를 붙잡고 싶었다.
심문하고, 저 사도의 존재가 뭐냐고 프시케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래서 내 앞에 막아선 이유가 뭐지? 내 전리품에 손대는 이유는 못 들은 것 같은데."
알렌은 그러지 못했다.
그들의 저력을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순환교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미래를 알아야 한다.
알렌은 회귀자이기에 사도인 척 꾸며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저들은. 어떻게 사도의 자리에 노인을 앉혔지?
'…프란시스카 양이 있었다면 상담해 볼 수 있었을 것을.'
알렌은 그녀가 예언에 대해 믿는다고 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렇다면 그 이유도 있을 터. 알렌은 과거에 그 이유를 묻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현실적인 문제로는 지금은 저 노인 하나만 있다지만, 알렌이 적대적인 모습을 보일 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타날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체는 저희 길드의 비밀이 담겨 있기 때문에 회수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이것의 정당한 전리품은 공자님이기도 하니…, 대신 다른 걸 드리지요."
알렌은 팔강 같이 대부분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을 갖추지 않았고, 적들의 저력을 봐서 자신보다 더 강한 강자를 데려올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럼 무엇을 줄 수 있지?"
그렇기에 알렌은 한 걸음 물러났다.
"원하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아니, 생각해 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희 프시케의 어느 지부에서든 단 한 번, 어떤 정보 의뢰든 받아들이겠다고 약조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흠…."
알렌은 잠시 생각을 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지."
"그렇다면 저희는 이만…,"
"단."
시체를 수습하려던 블레임이 멈칫했다. 알렌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금 의뢰를 하겠다."
"지금 말씀입니까…?"
"왜, 불가능하나?"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직접 어느 지부든 받아들이겠다고 했으니. 그건 카이란 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인은 알렌의 태도에 의아해하면서도 자신의 말에 따라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지금부터 몇 개월 전, 서부 리브레 왕국에 있는 라인하르트 영지에서 수확제가 열렸을 때 도적들이 지하수로를 통해 습격해 왔다."
알렌이 꺼낸 것은 그가 지금껏 알아볼 곳이 없어 심중에만 담아 뒀던 것이었다.
"아버지, 백작님은 도적 떼에게 의뢰한 범인을 몰락 귀족으로 공표한 후 처형하셨으나… 나는 그게 다가 아니란 것을 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간단하다."
원래 정보 길드는 그 지역의 유지들과 유착 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닌 이상 귀족 간의 다툼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괜히 잘못 끼어들었다가는 비밀이 까발려진 귀족과 자신의 정보도 팔릴 수 있음을 깨달은 다른 권력자에 의해 밉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알렌이 침입자들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지금까지 알아낼 수 없었던 이유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그 몰락 귀족의 배후에 있던 진짜 흑막이 누군지 알고 싶다."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했음에도 거절할 수 있을까?
"우리 영지에 침입했던 침입자와 그 침입자의 진정한 주인까지, 모두."
알렌은 제법 곤란한 듯 안색이 어두워진 그를 보며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제99화
블레임은 제법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귀족들의 다툼에 끼어들었을 때의 위험과 이번 일을 덮음으로써 얻는 이득. 그리고 알렌과 충돌했을 시의 피해까지.
그는 제법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기에 곧바로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었다.
'보고받은 정보로 살펴본다면 전투력만 6 위계, 차후 팔강의 자리까지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나….'
지원을 요청한다면 해결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그의 주변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절대 먼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부득이한 충돌이 있지 않은 한은.
'다른 쪽도 제법 협업을 오래 이어 오기도 했으니.'
여기서는 알렌의 의뢰를 받아들이는 편이 올바른 선택이었다. 판단을 끝마친 블레임은 고개를 숙였다.
"본래 귀족 간의 다툼은 끼어들지 않습니다만…, 이번 일은 예외로 봐야겠지요. 알겠습니다. 받아들이지요."
그 말에 알렌도 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다른 요구를 한다 해서 그들이 더 들어줄지도 의문이고, 우선 그들을 믿을 수 없었다.
이번 정보를 의뢰하는 것도 그가 생각하기에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의 선이었다.
"정보는… 조사가 다 끝난다면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다시 한번 피해를 끼쳐 죄송합니다."
블레임이 깡마른 몸으로 시체를 짊어지고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팟-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건드리지 않는 판단이 옳았군.'
단방향이 아닌 양방향 공간 이동. 그것도 제대로 된 좌표까지 가지고 있으니…. 알렌은 내심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남은 마적들의 시체와 옅은 혈향이 풍기는 가운데, 알렌은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자, 제대로 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그곳에는 블레임과 그의 대화를 엿들은 일리아나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엿들을 의도는 아니었지만…, 제 상황과 연관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에요. 그러니, 전부 알려 주실 거죠?"
그녀는 방긋 웃으며 말했지만, 눈에는 힘이 가득 들어 있어 그리 좋은 의미로 보이지 않았다.
알렌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면 기절시킨 의미가 없어졌군.'
알렌은 헛수고로 인해 한층 힘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말해 줄 수 있는 것까지만.
* * *
알렌이 아카데미에 돌아온 지 이 주가 흘렀다.
아카데미 생활도 점점 평소와 같은 활기를 되찾았다.
죽은 이들을 잊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건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 이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들은 이번 사건을 아카데미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는 사람은 일 년에 몇 명이나 나온다.
이번과 같이 많은 수의 사상자가 나온 것은 예외였지만, 아카데미의 역사상 없었던 일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아카데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대로 돌아갔다. 아카데미의 교수들도 부상을 털고 일어났고, 다른 학생들은 각자의 일에 매달렸다.
빈자리는 그대로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다시 채워질 것이다.
아카데미에서는 반년에 한 번 입학시험을 치르니까.
그 사이 알렌이 짐승왕의 눈에 들어 제자가 되었다는 소식이 공표되었다. 몇 년간 없었던 팔강의 제자 소식에 한동안 아카데미가 떠들썩하게 변했다.
그 와중에 율리우스도 무슨 사건을 벌인 모양이었다. 따돌림을 당하던 여자애를 구했다느니, 가해자들을 박살내고 퇴학시켰다느니 말이 많았다.
심지어 신입생도 아닌 한 학년 위 선배의 일인 모양이었다.
알렌은 그가 한 행동에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율리우스, 그놈이 또 무슨 짓을 했구나 정도의 감상만 들 뿐.
그러나 알렌의 일상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제출한 시간표에 따라 수업을 받고, 저녁에는 짐승왕에 불려가 대련을 한다. 남는 시간에는 베스틀라에게 검을 배웠고, 도서관도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들렀다.
주말에는 봉사도 빼먹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성실하고 친절한 모습만을 보였다.
알렌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듯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렇게 바쁜 일상을 보내는 주말 아침, 알렌은 차 향을 즐기며 티타임을 즐겼다.
"…흠, 저번보다 향이 더 깊어졌군. 어떻게 한 거지?"
"공자님의 권유대로 연금술을 시작한 이래로 손재주가 좋아진 덕분입니다."
"그런가? 아무리 연금술을 시작했다고 해도 이렇게 차 맛이 바뀔 수 있나?"
연금술사들이 양조업이나 포션 개발, 찻잎의 개조와 같이 여러 일에 종사한다지만, 몇 주 배운다고 해서 이렇게 맛이 깊어질 수 있나?
알렌이 의문을 표하자, 그녀는 머뭇거리는 어조로 답했다.
"그게…, 사실 특별한 재료를 더 첨가했습니다."
"어떤 재료지?"
"…요정의 가루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왠지 모르게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요정의 가루는 어디서 나오는 거지?'
알렌은 들어 본 적 없는 재료에 잠시 생각했지만, 떠오르는 게 없자 그만두었다.
그가 알지 못한다면 연금술의 재료 중 하나이리라.
"수량이 충분하다면 앞으로도 종종 넣어 주게. 향이 깊어지니 더 좋군."
"…어, 그게…."
"구하기 어려운 재료인가? 아니면 가격 때문에?"
"아, 아닙니다. 그, 예…, 알겠습니다. 준비해 두겠습니다."
알렌은 그녀의 긍정에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그의 맞은편에 있던 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일리아나 공녀. 언제까지 내 시간을 방해할 생각이지?"
그의 맞은편에서 과자를 조금씩 갉아먹던 일리아나는 알렌과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과자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얼굴로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공자도 여럿이서 함께 티타임을 즐기는 게 낫지 않아요?"
"아니, 나는 홀로 사색하는 걸 좋아하는지라."
"저랑 사이가 좋아지신다면, 할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예요."
"언제는 관심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알렌이 일말의 틈도 없이 받아치자, 그녀는 입을 앙다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할아버지랑은 화해했어요. 화해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요."
일리아나의 허약한 체질이 치료된 지도 이 주가 흘렀다.
짐승왕에게도 그녀의 체질이 완전히 치료된 것을 밝혔다.
그는 겉으로는 잘했다고 한마디밖에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 매우 흡족해 보이는 게 눈에 보였다.
린벨이 여기 없는 이유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렇다면 린벨과 같이 훈련이라도 받지 왜 여기까지 왔나. 체질이 바뀌었다고 좋아하더니, 이제는 그렇지도 않나?"
짐승왕은 일리아나를 옆에서 돌봐 주던 그녀에게도 가르침을 내려 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 덕에 그녀는 매주 주말마다 그와 대련을 하며 부족한 점을 가르침 받게 되었다. 제자는 아니었다. 그거 가르침만 내려 줄 뿐.
그걸로 실력이 늘어날지 말지는 그녀에게 달려 있었지만, 알렌이 믿는 그녀의 재능이라면 반드시 성장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한창 오러 혹은 마력을 다루며 훈련에 매진해야 할 그녀는 왜 여기 있나.
"전에는 몸만 나으면 팔강이라도 노릴 것 같더니. 왜, 전과는 느낌이 다르나?"
"그게…."
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착잡한 얼굴로 답했다.
"하…, 네, 맞아요."
그녀는 전의 당당했던 태도마저 없어진 채, 회색 귀가 축 눕혀졌다.
"…처음에는 열심히 했어요. 훈련하는 대로 실력이 쑥쑥 늘어나는 게 눈에 보이니까, 의욕이 안 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렇잖아요. 명색이 팔강의 피를 이어서인지 혼혈의 한계로 떠오르는 어중간한 오러와 마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벌써 웬만한 용병 정도는 이길 만한 자신감도 생겼고, 근데, 그런데…."
체질이 낫기 전에는, 변명할 수 있었다.
몸이 약하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기대를 채우지 못했다고. 마력과 오러, 둘 중 어느 것도 못 다루는 건 내 탓이 아니라고.
하지만 알렌 덕분에 체질이 다 낫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렇게 즐겁지는 않더라고요. 갈수록 훈련도 고되고,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도 별로고요."
설령 건강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전투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차라리 지금 배우는 공학이 저한테 훨씬 흥미롭기도 하고 말이죠."
공학은 아니었다.
약한 체력으로 억지로 밤을 새우느라 몸살이 나면서도 즐거웠고, 새로운 발명품을 개발했을 때는 얼른 시험해 보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렇다고 훈련을 그만두겠다는 게 아니라…, 우선순위가 바뀌었다는 거죠. 이제는."
그녀의 눈에는 전과 같은 일렁임은 보이지 않았다.
전에 없던 무력이 생기고 나서야 그녀는 과거의 그림자를, 열등감과 같은 감정을 벗어났다.
알렌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그녀에게 변화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처음에 만났을 때 말하지 않았나. 공녀의 공학적 재능에 관심이 있어 만나고 싶었다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해 빠져들었나, 본래 성정이 전투에 맞지 않았나.
알렌은 그 모든 것이 상관없었다. 처음에 생각했듯, 알렌은 하나의 일에 많은 것을 고려하며 계획을 세운다.
그녀를 끌어들인 건 짐승왕에게 연결되는 징검다리라는 점도 있었지만, 그녀 본인의 재능이 뛰어나서이기도 했다.
'미래에 수인들의 패러다임이 그녀 때문에 바뀌던가.'
몇 년 후의 일인지, 언제 그녀가 그런 발명을 하는지 모른다. 그때 그녀에게 관심도 없었고.
하지만, 그녀가 그런 발명을 한다는 사실만 알면 충분했다.
"그건…, 전에 말했던 것과 같은 의미인가요?"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알렌의 움직임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노란 동공이 날카롭게 변했다.
"어떤 것을 말하는 거지?"
"저를 치료하기 위해 순환교와 거래했다는 것이요."
알렌은 침음을 삼키며 말을 골랐다.
그녀가 지부장과 알렌의 대화를 듣고 해명을 요구했을 때, 알렌은 교묘하게 말을 바꿔 순환교의 연줄을 통해 그들과 접촉했다고 설명했다.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순환교의 고위 인물과 거래를 했다고.
사도의 이야기는 단순히 순환교의 새로운 사도가 있었던 장소가 겹친 것뿐이라면서.
기절시킨 이유 역시 이교의 도움에 믿지 못하겠다며 거부할까 그렇게 한 거라고 설명했다.
절대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고 사과하자, 그녀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알렌의 행동을 받아들이고는 용서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알렌 덕분에 평생의 약한 체질이 고쳐졌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는…, 같은 의미겠지?"
짐승왕과 접점을 갖지 못하더라도 그녀의 뛰어난 재능 때문에 찾아갔다.
짐승왕과 연결 고리를 강화하고자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순환교와 거래했다.
둘 다 같은 이유라고 봐도 무방했기에 알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일생일대의 고민을 하는 듯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녀는 결단을 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말 그러시다면, 알겠어요. 이렇게 저한테 정성을 쏟아 주는 사람은 처음이네요. 그러니까."
그녀는 숨을 한 번 삼키고 결심을 드러냈다.
"준비가 되실 때 불러 주신다면, 공자의 영지로 바로 찾아갈게요."
"…정말인가?"
아직 영입 의사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휘하로 들어오겠다고?
"네, 공자도 그만큼의 정성을 보였는데 제가 답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요?"
그녀의 눈은, 그만큼 확고했다.
이미 결정을 되돌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
알렌은 내심 마음 한 곳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미소 지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미래를 그렸다.
신드리 남매가 가진 양질의 대장 기술과 일리아나의 뛰어난 개발 능력.
거기에 소네드의 상업 능력과 아칸더스가 끌어온 인력 그리고 순환교의 사도 자리에 따라온 종교 세력까지.
'또 아카데미에서 이어질 인맥까지 합한다면….'
그 미래에는 지금처럼 단순한 개인과의 전투 같은 양상이 되지 않으리라.
"그럼, 잘 부탁하지."
"저도 잘 부탁해요. 앞으로도."
그들은 밝고 환하게 웃었다.
서로 다른 상상을 하고 있음은 모른 체(채).
* * *
아카데미가 위치한 도시 엘피스는 수상한 이들이 함부로 넘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일 년에 몇 번이고 일어나는 각종 사고와 습격, 그리고 첩자와 같은 것들도 이사장의 묵인이 있기에 가능한 것일 뿐.
진정으로 그녀의 눈을 피해 숨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이사장의 실력은 도시 안에서라면 짐승왕도 상대하기 꺼려질 정도로 하나의 준비된 전장에 준한다.
그런 그녀의 영역을 몰래 침입할 수 있는 건 누구라도 힘들었다.
그렇다면 같은 팔강의 실력자가 침입한다면 어떨까.
그 침입자가 은신과 암살의 영역에서는 그 누구보다 독보적으로 뛰어나다고 한다면, 과연 알아챌 수 있을까?
"…흐음, 여기 들어오는 건 오랜만이네."
등대는 자기 밑을 비추지 않는다.
그늘과 어둠에 가장 가까운 여왕이 그 누구도 모르게 도시로 숨어들었다.
그건 그 누구도, 심지어 이사장마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이 자신의 존재를 알았기에, 잠시 쉬며 정보를 모으며 상처를 치료할 공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그녀가 점차 사라지려는 그때, 눈에 익은 움직임이 보였다.
"아칸더스, 저녁에 도착했으니, 오늘은 도착을 알리고 내일 만나는 것으로 하도록 하지요."
"여독도 풀어야 하니, 그러도록 하는 게 났겠소. 소네드, 그럼 어디의 여관이 낫…."
"제 경험에 따르면…."
상인들의 무리로 보이는 곳에, 어설펐지만 주인의 목을 물려다 도망친 사냥개의 움직임이 보였다.
"…어머, 여기에 있었구나?"
그녀는 계획을 바꿨다.
자신의 사냥개를 먼저 찾아보기로.
혼자 행동하기보다는, 누구라도 밑에 있으면 훨씬 편하게 일을 행할 수 있을 테니.
저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다 보면 찾을 수 있으리라.
검은 그림자가 은밀하게, 그들의 근처로 녹아들었다.
제100화
아칸더스와 소네드가 드디어 엘피스에 도착했다.
알렌은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다음 날 아침, 곧바로 그들과 만날 수 있었다.
아카데미 내부로 외부인을 함부로 들일 수 없다는 교칙이 있기에, 알렌은 서쪽의 여관 중 괜찮은 곳의 최상층의 방들을 층째로 빌렸다.
"공자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공자님의 위명이 이 근방에 자자하더군요."
소네드는 여전히 푸근한 얼굴로 옅은 미소를 드러낸 채 그와 해후를 나누었다.
"나도 다시 만나서 매우 반갑군. 슬슬 자네들이 올라왔으면 했을 시점이라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군."
"하하, 그렇습니까?"
"그래, 이 일은 조금 있다 이야기하도록 하고… 자네 아들은 어떤가? 저주는 다 나았을 텐데."
소네드는 알렌이 중요한 이야기를 뒤로 미루고 싶어 하자, 부드럽게 그와 근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건강을 되찾고 나서는 제 밑에서 상단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쯤은 일어났을지 모르겠습니다."
"그쪽은 새벽일 텐데 벌써?"
"지금이니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다. 조금 있으면 카릭의 일을 도와 상단 일을 배울 시간이 될 겁니다."
"아, 참 그래. 원래 도시에 오기로 한 것은 카릭이 아니었나."
알렌의 물음에 소네드는 원숙한 상인의 얼굴로 당당히 입을 열었다.
"처음이니 당연히 제가 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모를까, 첫 상행은 젊음의 과감함이 아닌 중년의 신중함이 필요한 법입니다."
마치, 자고 일어난 뒤의 머리카락이 더 빠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저처럼 말입니다. 소네드는 그렇게 말하며 쾌활하게 웃었다.
전보다 표정이 더 좋아진 게 상당의 사정이 괜찮은 것 같았다.
「무려 당신과 같은 권력자가 봐주는 데 당연한 거 아니에요? 흐흥, 추천장 하나를 그렇게 생색낼 때는 언제고요.」
알렌은 그녀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답할 필요가 없는 물음에는 답하지 않으면 될 뿐이다.
"자네는 잘 지내는 것 같고… 그럼 아칸더스, 자네는 어떤가."
"제가 말할 것이야 있겠습니까. 술에 절어 살 때보다는 더 낫지요. 비록… 아버지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지만 말입니다."
아칸더스는 전보다 겉으로 보이는 날카로움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알렌은 그 날카로움을 뱃속에 숨겼다는 사실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가? 그 이야기도 조금 있다 하도록 하지. 추측이지만 단서를 발견한 것 같기도 하니 말이네."
[누군가 듣고 있다.]
아칸더스의 머리로 알렌의 목소리가 울렸다. 알렌의 실타래가 조용히 빠져나와 발밑을 점유하며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습니까?"
아칸더스는 일말의 표정 없이 알렌의 의도에 따라 말을 맞추었다.
"그래, 그런 재미 없는 이야기는 괜히 피곤해질 뿐이지 않나."
"맞는 말씀입니다."
소네드까지 분위기를 파악하고 능청스럽게 맞장구치자 알렌은 린벨과 이넬리아에게 각각 명령을 내렸다.
"이넬리아, 혹시 정령 차를 만들어 줄 수 있나? 저번에 맡았던 그 향기가 잊히지 않는군."
[정령으로 목소리가 빠져나가지 않게 소리를 차단해라.]
"그리고 린벨, 너는 혹시 주방으로 내려가서 괜찮은 다과를 받아 오도록 하고… 만약 없다면 근방의 다과점을 확인해도 좋다."
[이곳 주위로 수상한 자가 없는지 확인하고, 최대한 엿듣는 이가 없도록 둘러보도록 하거라.]
이넬리아의 표정은 스스로 꾸며 내는 것에 가까웠기에 언제 그런 명령을 들었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금방 준비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네, 공자님. 최대한 괜찮은 다과를 구해 오겠습니다."
그러나, 린벨마저도 평소의 모습이 거짓말이라는 듯 순식간에 차분해지는 모습에 알렌이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린벨과 이넬리아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럼 우리는 이야기나 더 하지. 그래, 아칸더스 자네가 귀한 술을 구했다고 들었는데…."
"예, 소네드 님도 그때 계셨으니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는 엘프에게서 얻은 약주로…."
"아! 그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도 설마 약초를 섞어 그런 술을 만들었을 거라고는…."
알렌의 실타래가 바닥을 채우는 것으로 모자라 벽을 타고 방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넬리아가 돌아와 차를 내오고, 십 분이 넘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어느새 몇 달 동안 스콜을 꾸리며 겪었던 고단함을 토로하기 시작했을 때.
"그래서 공자님, 서로 무기나 잡겠다고 뻗대는 놈들을 설득하느라 얼마나 힘이 들…."
덜컥-
린벨이 돌아왔다.
그 순간 실타래가 들어온 문을 둘러쌌고, 방 전체가 알렌의 실타래로 뒤덮였다.
"방을 도청하는 이들은 없었나? 주위에도 마찬가지고?"
"네, 아래층과 밖의 벽면. 그리고 주위 100m 내의 사람들을 전부 확인했는데, 없었어요."
소리가 멎었다.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 방 안은 정적으로 물들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 이넬리아를 바라본 알렌은 그녀도 고개를 끄덕이자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말해도 된다."
"공자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알렌에게 아무런 말 없이 그저 분위기만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맞추었던 소네드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가 도청당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노려지기라도…."
"우선, 몇 가지 먼저 물어봐도 되겠나?"
알렌이 진지한 얼굴로 묻자, 소네드는 불평 한마디를 입에 담지 않고 물러섰다.
"하십시오."
"내가 수소문해 달라고 했던 붉은 표지의 마법서는 찾았나?"
"…찾지 못했습니다."
"영지에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마차의 행렬이나, 표식 없이 움직이는 인물들은?"
"공자님의 말씀대로 최대한 인맥을 동원해 확인했지만…, 대부분 부랑민이나 도적 떼였지. 상단 같은 곳은 없었습니다."
알렌은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생각에 잠긴 아칸더스에게도 물었다.
"아칸더스, 너는 백작령 주도에 있는 저택에 몰래 들어가는 이들을 본 적이 있나?"
"예, 몇 번 부하들이 발견했었습니다."
"그들이 저택에 나온 후 어디로 갔는지는 추적해 봤고?"
"예, 하지만… 어느 순간 감쪽같이 사라져 허탕을 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나머지는 그냥 주민이었고 말입니다."
알렌은 저택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어느 순간 아버지의 곁에 나타난 이들과 자신이 본 적 없던 하인과 하녀들.
그리고 예산이 부족할 것이 분명함에도 많은 군비를 소모하면서 유지되는 행정.
어디를 가든 마치 소설처럼 생겨나는 사건들과 그걸 적절히 해결하는 율리우스.
그리고, 일개 지부장 주제에 공간 이동 아티펙트를 다루며 순환교에 사도까지 꽂아 넣을 수 있는 이들.
블레임은 알렌이 많은 정보를 얻지 못했으리라 판단하고 그냥 넘어갔지만….
'꼬리를 잡았다.'
그게 놈의 실수였다.
회귀 전부터 실체조차 파악하지 못한 단체.
아버지의 곁에서 율리우스를 돕는 은밀한 세력.
그놈들의 실마리를 이곳에서 잡아냈다.
"그래서 공자님, 이제 생각을 끝마치셨다면 설명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의 의견입니다."
알렌은 조금의 재촉 없이 자신이 생각을 정리하기까지 기다리던 그들을 바라보며 웃음을 흘렸다.
"그래, 당연히 해 줘야겠지. 이제 알아야 할 때도 됐지."
그들은 알렌이 없는 몇 개월간 그를 배신하지 않고 착실하게 보고를 끝마치며 세력을 부풀렸다.
그 정도라면 적어도 서로 간 최소한의 신뢰는 쌓았다고 해도 무방했다.
'아니, 이 정도 비밀도 못 지키고 끝날 거라면 이번에도 실패할 뿐이다.'
알렌은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이것 하나 말해 주지 못해 전전긍긍할 뿐이라면 복수 따윈 다 집어치우고 율리우스 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먹는 것이 더 낫다.
"혹시 내 명령에 의구심을 느낀 적이 없었나?"
알렌의 물음에 소네드는 잠시 고민했지만, 아칸더스는 아니었다.
"예, 있었습니다. 단지, 양측의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꺼낼 이야기는 아니라고 판단했지요."
아무리 동생과의 후계 다툼이라고 한들, 그간 보인 알렌과 율리우스의 관계는 양호했다.
양호한 것뿐일까, 아카데미 근처에서 그들의 형제 사이가 매우 좋다고 소문이 자자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알렌이 율리우스에게 원한이 있는 이들을 긁어모으고, 마치 가족을 경계하는 것처럼 저택을 감시한다?
"솔직하게 이용만 당하는 게 아닐까 노심초사한 마음이었습니다."
아칸더스는 알렌이 말을 꺼낸 이유가 진심을 내보이기 위함이라 판단하고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아칸더스의 태도에 소네드는 한숨을 내쉬며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솔직히 마법 서적은 그렇다고 쳐도, 소문에 민감한 상인들도 들어본 적도 없는 암거래가 있다고 하니 의구심은 들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다 진심을 내보이는데, 혼자 내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후계자의 자리는 확정일 텐데, 굳이 개인 세력을 만들기 위함이라 한들 그들이 아니라 저희를 모은 이유도 짐작하기 어려웠고 말입니다."
알렌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내심 경계심을 더 끌어 올렸다.
회귀했다고 앞서 있으리라는 착각은 완전히 버려야 했다.
'사도가 되었다는 장소도 하루가 되지 않아 알려졌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내 행적은 모두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까발려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알렌은 도시를 은밀하게 빠져나왔으니, 그들이 알렌의 행적을 알아낸 것은 순환교도들의 행적을 쫓은 것이 분명했다.
그 말은 순환교 안에 내통자가 있거나, 항상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아차렸을 확률이 높았다.
'다행히 모든 것을 들킨 것은 아니라지만….'
이 정도의 정보라도 율리우스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를 의심할 것이 뻔했다.
'…이럴 때 휘하의 정보 조직이 없는 게 아쉽군.'
그들의 정확한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그 정도만 알더라도 훨씬 대처 방안을 짜기가 한층 쉬웠을 텐데.
알렌은 블레임에게 수확제의 진범을 의뢰하게 되었을 때부터 느꼈던 필요성을 더 절실히 느꼈다.
이넬리아가 홀로 열 명, 그 이상의 일을 처리하고 있기도 했고, 아칸더스 휘하의 부하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알았다.
그러나 그사이의 기간 동안 손 놓고 당해 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얼마를 들이든, 그늘진 여왕을 고용하고 싶군.'
이미 그녀는 어딘가로 도망쳤을 테니 불가능하지만 말이었다.
"다 설명을 하기 전에, 먼저 해 줘야 할 이야기가 있네."
알렌이, 내가 왜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된 근본적인 까닭을.
"어디서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 그래. 그게 좋겠군. 율리우스가 아직 망나니가 되기 전이 좋겠어."
이넬리아와 린벨은 이미 이야기를 끝냈고, 베스틀라도 들었던 이야기였다.
"라인하르트 가문에는 형 노릇 못하던 형과 동생답지 않던 동생이 있었네."
악마에게 몸을 빼앗긴 동생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 *
"잘 생각해 보고 답을 주게. 시간은 넉넉히 주지."
철컥-
늦은 밤이 되어서야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알렌은 생각에 빠진 소네드와 아칸더스를 내버려 둔 채 다른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넬리아와 린벨은 오늘 밤만큼은 그의 시중을 들지 않고 옆 방에서 자리하기로 했다.
오늘은 혼자서 사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베스틀라와 함께 텔레파시 기능이 담긴 팔찌 유물도 함께 맡겼으니, 서로 대화할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한 번 자리를 만들어 주려 했으니 적절한 시기이기도 했다.
저벅저벅-
어둡고 내려앉은 복도는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알렌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악마니 뭐니, 잘도 모르면서 떠들고 있다고.
"이것도 자꾸 말하니 익숙해지는군."
그만큼 많은 사람이 자신과 동생의 일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제는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을 만큼.
알렌은 배려하듯 두 명을 쉬게 놔두고 나온 자신의 모습에 비웃음이 나왔다.
"뭘 생각해 보라는 건지."
알렌은 그들 스스로가 끝내는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것을 알았다.
아칸더스와 소네드가 생각에 잠겨 있다는 말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고려할 것이 많아졌다는 그 증거.
지금까지 알렌과의 관계를 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업을 비롯한 주변 인물에 대한 관계도 지금 와서 발을 빼기에 너무 늦어 버렸고.
그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선심 쓰듯 배려하는 것처럼 말하다니.
알렌은 문득 자신이 전과는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을 터.
'…에반, 에리엘, 윌리엄.'
잘하고 있는 짓인가, 내가 하는 일이 옳은가. 답을 낼 수도 없고, 누군가 답을 내줄 수도 없는 쓸데없는 철학적 논쟁이다.
그러나 시간을 멍하게 보내기에는 답이 없는 문제를 고민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을 터.
알렌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문고리를 돌렸다.
철컥-
오늘 밤만큼은 철학적 수렁에 몸을 담그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렇게 어두운 방으로 몸을 모두 구겨 넣은 순간, 방의 한구석이 유난히 어두웠다.
마치 빛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달빛 하나 없이 이렇게나 어둡다고? 알렌의 근육이 순식간에 태세를 정비했다.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간다. 아니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알렌의 목덜미에서 소름이 오소소 돋으며 숨결이 닿는 것이 먼저였다.
"아가는 감이 많이 좋구나?"
제101화
상대의 숨결이 목 뒤를 스쳤다. 알렌은 그럼에도 상대의 존재를 느낄 수 없었다. 아득할 정도의 격차. 알렌은 그런 상대를 이미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되니 더욱 생각이 차분해졌다.
그렇게 행동하니 의아한 것은 오히려 그녀였다.
"응? 아가, 왜 멈추니? 겁먹었어?"
"저항이 무의미하다면 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늘진 여왕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그냥 죽을 뿐일 텐데?"
그 목소리는 장난스러웠다. 그러나 솜털을 간질이는 살기는 언제라도 그를 노릴 듯 목을 조여 왔다.
"그늘진 여왕께서 원하신다면 안 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차석이라는 말이 괜한 게 아니구나?"
그러한 그녀의 협박에도 알렌이 동요 없이 답하자, 목을 옭아매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 무난히 협조해 준다면 나도 험악하게 갈 필요 없어서 좋잖니."
목 뒤의 숨결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알렌이 어색하게 굳은 목을 돌리며, 한구석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그녀가 있었다.
흑색에 가까운 짙은 자주색 머리카락과 단출한 검은 의복을 입은 묘령의 여자.
언제 그곳에 이동했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나. 알렌의 실력으로 어느 쪽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사실, 지금도 방 전체에 감지력을 집중시켰지만 눈앞에 있음에도 그녀의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알렌이 무엇을 하는지 다 봤음에도 위협조차 안 된다는 듯 느긋하게 물었다.
"다 살펴봤니? 그럼 이제 내가 물어봐도 될까?"
그녀는 눈웃음치며 천천히 방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걸음에 따라 어두운 영역이 늘어났다.
"…예, 그러십시오."
알렌은 속으로 무수한 가정을 떠올렸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뭐지? 돈이나 물건? 아니, 그런 것이 필요했다면 달라고 했을 거다. 그러면 정보? 그녀가 원할 만한 정보가 있나?
'그것보다, 다 들었나?'
알렌이 얼마나 보안을 철저히 하든 팔강의 실력 앞에는 없는 것만 못했다.
우선 그녀의 말을 따르며 슬며시 떠보는 게 낫겠지.
"생각이 너무 많은 것도 별로 좋지 못한데… 뭐, 그 이야기를 하러 온 것도 아니니까."
그녀의 걸음이 멈춘 곳은 방의 각진 모서리였다. 짙은 그림자와 어둠으로 조금도 꿰뚫어 볼 수 없는 곳.
그녀는 그곳에 손을 쑤욱- 집어넣었다. 그녀의 손은 벽에 닿았을 것이 분명함에도 팔은 멈추지 않았다.
"알렌 라인하르트. 아가는 라인하르트 가문의 일원이지?"
"예. 맞습니다."
"거기다 첫째기도 하고, 정실에게서 태어났으니까 웬만한 건 다 알겠다. 그렇지?"
"…예."
알렌의 대답에 그녀는 만족했다는 듯 웃으며 팔을 잡아당겼다.
"그럼, 물어볼게. 라인하르트 가문에, 왜."
쿠당탕-
검은 인영이 획하고 바닥에 던져지며 알렌의 앞까지 굴러왔다.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것은 알렌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암왕의 흔적이 있는지 알 수 있을까?"
아칸더스 일행을 따라온 가문의 예비 집사. 그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기절해 있었다.
"그 아이는 말할 수 없게 조치가 된 모양이었거든."
그녀의 웃음이 서늘하게 변했다.
"응? 아가, 말해 주겠니?"
* * *
팔강은 언제나 도전받는다.
처음 팔강이란 존재의 전신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 본다면 그건 당연했다.
마왕과 맞서 싸우던 용사의 여덟 동료.
전 대륙에서 제일 강하다던 여덟 명의 동료가 팔강의 전신이었으니 팔강은 언제나 도전받고, 시험받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다면 팔강은 언제 어느 때나 도전을 받아들여야 하나?
조금의 시간도 없이?
그건 아니었다.
팔강들도 사람이었다. 피로를 느끼고, 숨 쉬며 살아가는 존재.
비록 인간을 반쯤 벗어나 그 한계가 보통 사람과 비교하면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지만, 그들도 살아 있는 생명체였다.
하지만 팔강이 팔강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도전을 거부해서도 안 되는 상황.
그렇기에 그들은 각자 도전자들에게 도전할 수 있는 기간을 정해 두었다.
일 년에 단 한 번, 어느 때라도 팔강에게 도전할 수 있는 날을.
그 기간에는 무엇을 동원해도 좋았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도전하든, 독, 유물, 마법 그리고 함정을 비롯한 어떠한 무기를 사용하든 허락된다.
심지어 도전자들끼리 담합을 하고 차륜전을 펼쳐도 좋았고, 자신 있다면 홀로 도전해도 상관없었다.
물론, 그 기간을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다.
하지만…, 팔강이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도전할 수 있을까?
가령, 제국 최강 피에르 베르나프의 경우.
그의 제일 큰 업무는 황제를 호위하는 것이며 황제의 명령에 따라 제국의 각종 재해를 해결하는 데 있다.
그런 그를 평범한 이들이 만날 수라도 있나?
위치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황궁의 삼엄한 경계와 경비를 모조리 뚫고 황제가 기거하는 곳의 정면까지 쳐들어갈 용기가 있다고?
그렇다고 다른 이들이 만만한 건 아니었다.
인류의 창으로 불리는 베르세르크 기사단의 단장 더글라스 아벨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악한 것들을 무찌른다.
마탑 도시를 뒤에서 주무른다는 마도여황 베네사 사브리나는 소문만 무성할 뿐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다.
엘프의 이단 요귀 살바토르는 몇십 년 전부터 자신을 스스로 대수해의 깊은 지하에 봉인했다.
그들을 찾아가는 것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었고, 그렇게 힘이 빠진 상태에서 만전의 팔강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팔강에 도전하고자 하는 이들은 그날을 노릴 수밖에 없었다.
제국에서는 이를 이용하고 국력을 과시하고자 아예 거대한 축제로 만들기도 했고.
전 팔강, 그늘진 여왕 역시 삼 년 전까지는 팔강에 자리해 있었기에 그녀에게 도전할 수 있는 날이 있었다.
일 년 중, 시월 마지막 주의 칠 일.
음지를 지배하는 여왕을 유일하게 고꾸라뜨릴 수 있는 날.
아는 사람들을 이를 암월제(暗月祭)라 칭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그녀의 제자이자 비공식적으로 사냥개로 불리는 암왕(暗王)들마저도 서슴없이 그녀의 등을 찌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날.
그녀는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기 때문에 도전자 모두를 죽였다.
그건 그녀를 지금껏 따랐던 암왕들 역시 비껴가지 못한 일이었지만…, 예외는 언제나 있었다.
"자, 왜 암왕의 흔적이 저 아이의 몸에 있는지 알려 주겠니?"
처음부터 그녀에게 벗어날 준비를 하던 이들. 그들은 그녀가 함정에 빠진 틈을 타 도망쳤다.
그 도망쳤던 암왕 중 하나의 움직임이 예비 집사의 몸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녀가 직접 암왕들을 가르쳤기에 예비 집사의 움직임만을 보고 알아채는 것이 가능했다.
"아가, 왜 말이 없니?"
"...."
알렌은 대답하지 못했다. 말해 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말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암왕의 흔적이 있다고? 가문에서 보내온 예비 집사의 몸에?'
그녀는 알렌의 굳은 표정을 보고 오해를 했는지, 천천히 재촉하며 다가왔다. 어둠이 깊어진다. 발밑을 물들이는 그림자는 알렌을 휩쓸 것처럼 퍼져 나갔다.
"어떤 암왕과 관련이 있을까 …라비? 나비드? 뮬란?"
알렌은 그녀의 오해가 더 깊어지기 전에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모른다고?"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는가 싶더니 눈앞에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목소리는 귓가에서 들렸다.
"아가, 나는 거짓말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날카로운 예기가 목 끝에 닿았다.
음지의 진득한 살기가 그를 휘감았다. 알렌은 그녀 쪽으로는 조금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침착하게 답했다.
"…하지만, 짐작 가는 게 없지는 않습니다."
"말해 보렴."
그녀의 목소리는 알렌의 답에도 변함없었다. 부드럽고, 웃음기 여린 목소리. 그녀는 일말의 감정까지도 조절할 수 있었다.
알렌은 뜸 들일 필요 없이 곧바로 답했다.
"총집사 가델."
"가델? 가델, 가델…. 아."
저택에 있을 당시, 알렌은 그에게서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발걸음과 호흡도 평범했고, 마력도 없는 일반인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게 더 수상했다.
'웬만한 가문쯤 된다면, 가문의 소속원들도 수련하게 된다.'
정확히는, 가문에서 그들에게 일종의 하사 형식으로 내어 준다고 할 수 있었다.
가문에서 작은 비전 하나를 내려 줌으로써 수행원들은 강한 충성심을 가지게 되고, 그걸 증명하고자 열심히 수련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알렌은 가델에게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조금의 마력도, 무술을 배우며 생겨나는 버릇조차 없다.
'어머니를 따라서 가문으로 왔을 때부터 가문에서 일했다고 전해지는 게 가델이다.'
그런 그가 총집사로 일하며 많은 것을 얻었을 텐데, 몸 상태가 일반인 같이 보일 리가 없지 않은가.
너무나도 철저했기에, 알렌은 반대로 그의 이상을 이제야 깨달았다.
알렌은 이러한 의심을 가감 없이 그녀에게 설명했다.
나중에 확고한 답으로 그녀가 가델을 찾아갔을 때, 만약 그가 암왕이 아니라면 그 분노가 자신에게 되돌아올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리고 이자 역시 총집사 가델 밑에서 배우는 예비 집사 중 하나이니…, 그러니 암왕으로 제일 유력한 자는 그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알렌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게 알고 있는 걸 말해 주면 얼마나 좋니?"
그녀의 모습은 어느새 다시 알렌의 앞에 있었다.
방 안의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진흙탕에 빠질 것 같이 보이던 바닥도, 벽과 천장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들던 어둠도.
"이제 대답도 들었고, 아가도 피곤할 테니 나는 그만 갈게?"
그녀는 언제라도 사라질 것처럼 몸을 돌렸다. 아니, 이미 반쯤은 그녀의 몸이 어둠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평소대로의 알렌이라면 그녀를 붙잡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는 사전에 계획한 것과 통제할 수 있는 변수 내에서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도 가능성이 있는지 계산하며 움직이는게 그였다.
그런데 팔강?
이번 그늘진 여왕을 만난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히 벌어진 사건이다.
그러니 알렌은, 이대로 그녀를 보내는 게 옳은 선택이었을─.
촤르르르-
『알렌은 이대로 그녀를 보내는 것이 맞냐는 의문이 들었다.』
─것이다.
『그녀의 몸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정말 보내야 된다고? 정보 길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늘진 여왕을 고용할 수 있다면 얼마가 들든지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왜 가만히 있는 거지?』
하얀 책이 펼쳐졌다.
알렌은 평소의 자신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임에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조금."
그의 행동에 그늘진 여왕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봤다.
"응?"
"조금 더 머무시는 게 더 어떻습니까."
"아가는 내가 무섭지 않나 보구나?"
"실례지만 지금 상태가 그리 좋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녀는 시종일관 알렌과 대화로 해결했다. 그 모습이 그녀의 원래 성정일 수 있지만, 그녀의 본래 정체는 음지의 지배자다.
『그런 그녀가 압도적인 힘이 아닌 대화로 일을 진행했다고? 예비 집사를 저렇게 기절시켜 놓고서?』
저 모습 자체가 그늘진 여왕이 부상을 입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사사했다.
『소란이 일어난다면 자신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조심하는 것이다.』
"흐응-"
그녀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마치 가소로운 것을 보는 듯한 얼굴. 누가 누구를 걱정한다고?
"아가는 내가 만만하니? 이렇게 대화로 하고, 그러니 자신감이 막 생기고 응?"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늘진 여왕의 몸이 다시 그림자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혼을 내주고 싶은데…, 기분도 좋겠다. 오늘은 그냥 넘어갈게. 그러니 앞으로는 말은 조심하고."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무엇을 하려는지는 알고?"
"홀로 거대한 음지를 다시 찾아오기에는 시간도 걸리고 힘드니, 쓸 만한 사냥개를 구하려는 게 아니십니까."
그림자로 녹아들던 몸이 멈췄다.
그녀는 전과 다르게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갑게 그를 바라봤다.
"아가, 조금 전에 입을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니?"
"부상에 도움이 되는 것들도 모두 구해 드리겠습니다."
"말이 안 통하는, 아이구나."
그녀의 표정이 무표정해졌다.
알렌의 머리에서 경종이 울렸다. 그녀가 손을 휘두르자 어둠 속에서 칼날이 솟구쳤다.
"한 번으로 봐줄게. 일어나면 반성해야 한다?"
베스틀라도 없고, 마법을 쓰기에도 늦었다.
그렇더라도.
"제 이야기를!"
그녀를 반드시 붙잡아야 했다.
"제 이야기를, 들었지 않습니까…."
후웅-
칼날은 머리카락 하나 통과할 거리만 놔두고 멈춰 있었다. 아직 닿지 않았음에도 날카로운 예기에 피부가 따끔거렸다.
"제 이야기를 몰래 훔쳐 들었으니, 이야기 값으로 쳐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녀는 미동 없이 알렌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느릿하게, 질문을 던졌다.
"이야기 값으로?"
"예, 이야기 값으로."
『알렌은 지금에서야, 율리우스를 돕는 세력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보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의 영지에도 참견할 수 있고.
순환교을 분할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몇 개일지 모를 정보 조직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 외에도 공간 이동을 사용할 수 있으며, 라인하르트 가문에 자금을 전달하고, 영지의 영주조차 그들을 따른다.』
미래에는 팔강에 비견되는 강자들조차 율리우스를 돕게 되겠지.
『운이 따르는 것처럼.』
알렌이 회귀 전의 기억과 합쳐 그들을 파악하게 될수록 조급함이 차올랐다.
『정말 가능한가? 성공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하며, 일정 부분 희생해야 할 부분마저 용납했다.
『그런데도 정말로 진짜 율리우스를 되찾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차올랐다.』
되찾는 걸 포기하고 죽이더라도 의외의 상황이 되지 않을까?
『우연히 공격이 빗나가거나, 지나가던 이가 돕거나, 지면이 갑자기 무너져서 공격이 실패하거나.』
알렌은 그런 상황이 되어 복수와 율리우스를 되찾는 것 모두를 실패할까 두려웠다.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다음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 더 많은 패가 필요했다.
『상대가 자신을 짓누르더라도, 일말의 역적을 노릴 수 있는 그런 패가.』
미래도 좋고, 한 번의 기회를 노리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도 현재의 기반을 잘 다져 줘야 가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다.
『현재 조직의 주먹구구식 체계를 바로 세우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전력을 늘리기 위해서.』
"...흐음, 그래. 이야기 값이라면… 들어줘야지."
한동안 침묵하던 그녀의 대답은 다행히 긍정이었다.
"그럼 나는 여기 머물 테니, 이곳으로 내가 말한 이름의 약을 보내면 돼. 아가, 아니 너는 참 위험하게 사는구나."
"…들으셨다면 아시겠지만, 어쩔 수 없으니 말입니다."
알렌이 쓴웃음을 짓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침대로 향했다.
"그렇다고 내가 도와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단다. 이건 거래니까 말이야."
"예, 분명한 거래지요. 하지만 충분합니다."
알렌은 그녀가 다시 음지의 여왕으로 설 수 있게 그녀가 일일이 나설 필요 없는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고, 그녀는 알렌의 부탁을 몇 번 들어준다.
그들의 행동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저도 그늘진 여왕을 함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나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지금은 이 정도의 관계로도 충분했다.
오히려 자신답지 않게 계산보다 감정적인 부분이 앞서 행동했음에도 괜찮은 결과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방금까지 대들어 놓고 그런 말이나 하고 말이야, 참."
그녀는 눈을 흘기더니 완전히 어둠을 흩뜨렸다.
밝게 차오른 달빛이 창문 밖에서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알렌을 향해 등을 돌리더니, 창밖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나가 주겠니? 아니면 더 할 말이 있다든가… 그래, 예를 들어 나와 같이 방에 있고 싶다든가 말이야?"
끝에서 간드러지게 웃는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듬뿍 담겨 있어 그를 곤란하게 만들 의도가 충만했다.
알렌은 방금 전의 모습과 다르게 완전히 감정을 조절하는 모습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넬리아와 같은 종족도 아닌데 이 정도라니.'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알렌은 바닥에 쓰러진 예비 집사를 어깨에 메고 방을 나섰다.
그가 나가기 직전 스치듯 확인한 하얀 책은, 언제나처럼 유유히 공중을 떠다닐 뿐이었다.
언제 펼쳐진 적이 있었냐는 듯.
"그늘진 여왕의 휴식을 방해할 생각은 없으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그녀는 알렌이 나가는 순간까지 작게 손을 흔들었다.
철컥-
방문이 닫기고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그녀는 방금의 일을 떠올리며 작게 속삭였다.
"…이야기 값이 너무 비싼걸."
아니면, 너무 값을 후하게 쳐줬던가.
그녀가 알렌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간단했다.
가델 대신 저 알렌이라는 꼬마도 뒤처리를 맡기에는 충분한 실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내가 왜 자크니르를 공격했을까.'
어떤 감정이든 조절할 수 있어야 하며, 오랜 인내를 가지고 틈을 노려야 되는 게 암살자다.
그녀는 그런 암살자의 여왕이자 음지의 지배자였다.
그런 자신이 앞뒤 재지 않고 복수심에 미쳐 자크니르를 습격했다고?
'차라리 도시로 몰래 숨어들어 엄습하는 게 더 좋은 계획이야.'
그것도 아니라면 음지의 세력을 조금씩 넓혀 원래 세력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세력전을 벌일 수도 있었다.
자크니르의 전 가문 따위와 손을 잡을 게 아니라.
그게 훨씬 자신다웠다. 고작 삼 년의 굴욕을 겪었다고 해서 그런 조잡한 계획을 세우는 건 평소의 그늘진 여왕답지 못한 일이었다.
그녀만큼 자기 객관화를 잘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이상함을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만한 소란을 떨어 놓고서 짐승왕이 나타나자마자 발을 뺀 걸지도 모른다.
'…무언가 있기는 할 텐데.'
그게 무엇 때문일까.
그를 알고자, 그의 곁에 머물며 조사해 보기로 한 것이다.
상처를 치료할 필요도 있었지만…,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볼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이 더 컸다.
그녀도 알렌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율리우스를 돕는 그 세력이 매우 이상해 보였으니까.
"흐응, 괜찮은 게 나왔으면 좋겠네."
만약 그때의 그녀를 조종한 것이 그들이라면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리라.
그녀는 눈을 감았다.
깊은 밤이 흘러가는 가운데, 커다란 달만이 존재감을 뿌리며 지상을 밝게 비췄다.
제102화
아침이 되자 알렌은 아칸더스와 소네드를 불러 다시 만남을 가졌다.
"하루의 시간으로는 너무 모자랐나? 내가 너무 부담을 준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군."
그들은 밤사이 생각을 모두 정리한 듯, 잠시의 휴식 없이 알렌과 마주 보았다.
"아닙니다. 이런 문제를 너무 끄는 것도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가 아닙니까?"
아칸더스의 얼굴은 기미 하나 없이 멀쩡하였지만, 소네드의 얼굴에는 검은 기미가 껴 있어서 오랫동안 고민한 흔적이 엿보였다.
"다들 피곤할 테니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따르겠습니다."
아칸더스의 말이었다. 그는 알렌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알렌은 그의 반응을 얼추 예상했으면서도, 확인차 다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공자님과 목적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초록 눈동자는 망설임 없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죄송하지만, 율리우스 공자님이 악마에게 몸을 빼앗긴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데려간 놈들이 그와 관련되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잘못한다면 알렌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는 발언이었지만, 알렌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다운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공자님이 율리우스 공자님의 몸을 되돌리려고 한다면, 결국 아버지를 데려간 그 조직…, 임시로 제3세력이라 칭하겠습니다. 그들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는 냉혹한 얼굴로 담담히 사실을 나열했다.
"남작령도 아닌 백작령 크기의 영토에 지속적인 자금 조달, 중부 정보 조직과도 연계되어 있으며, 남작령의 영주인… 아버지마저 영지를 버릴 정도의 충성심."
심지어 공간 이동 아티펙트를 물 쓰듯이 사용하며, 세력의 크기마저 짐작할 수 없다.
"그런 이들이 율리우스 공자님의 몸을 차지한 악마를 몰아내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겠습니까?"
"그러니 나를 계속 따르겠다? 그들과 부딪치다 보면 페른 영주를 찾을 수도 있을 테니?"
"예."
"좋다."
알렌은 만족스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아칸더스는 능력 있는 사내다. 그의 능력을 온전히 사용하기 위해서는 억압할 목줄이 아닌, 길들일 먹이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소네드, 자네는 어떤가."
"저는…."
따를 것인가, 따르지 않을 것인가.
애초부터 하나의 선택지밖에 없는 부조리함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상인은 신뢰를 제일 중요시하지요. 따르겠습니다. 다만…."
그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고민을 하더니, 이내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공자님께서 약조 하나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드리는 부탁을 한 번 고려해 주시는 것으로. 물론 거창한 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래. 약조하지."
알렌은 소네드가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알렌에게 합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미 충분히 자리를 잡은 중견 상단의 상단주가 위험을 무릅쓰고 알렌의 편에 완전히 합류한다?
'그럴 리가 없지.'
상인은 신뢰를 중요시한다.
허나, 그 말의 앞에는 충분한 이득이 보장될 시라는 말이 전제되어야 했다.
아직 율리우스가 후계자의 자리에 관심을 두지 않아 후계 분쟁의 갈등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인이 어느 한쪽의 편을 드는 것은 위험했다.
"소네드, 자네의 부탁이 내 목적과 어긋나지 않는 한 어떤 부탁이든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네."
"공자님께 폐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소네드의 목소리는 단호해졌다. 알렌의 약속을 믿는 얼굴이었다. 물론, 알렌도 그냥 그들을 믿는 게 아니었다.
안전장치는 필요한 법.
[린벨, 이넬리아.]
알렌이 눈짓하자 그녀들이 차를 준비한 후 조용히 그의 뒤에 시립했다.
'은혜를 베풀고, 같은 목적을 가졌다고 해서 완전히 믿는다?'
알렌은 그 정도로 세상일이 좋게 돌아간다고 믿지 않았다.
은혜와 같은 목적을 가졌기 때문에 따른다는 말은 은혜를 갚고 그와 목적이 갈라지거나, 다른 이와 목적이 맞는다면 떠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알렌은 만일의 상황이라도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있어 이번 생은, 다시 한번 주어진 기회이기에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린벨과 이넬리아 같이 알렌에게 '완전히' 속한 인물이 아닌 이상 사람을 완벽하게 믿기란 힘든 법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들이 알렌의 다른 부하들을 살필 것이다.
처음의 다짐대로 행동한다면 알렌도 언제까지고 그들을 믿겠지만, 만약 어떤 계기 혹은 배신으로 인해 나가려고 한다면.
"그럼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지. 카릭에게는 따로 자리를 가질 테니 비밀로 했으면 좋겠네."
어쩔 수 없이 잘라 내야 할 것이다. 그로 인해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당연하지요."
"일의 방향만 전하겠습니다."
소네드와 아칸더스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카릭은 몇 개월을 함께한 동료였지만, 신뢰할 수 있을지는 다른 문제였다.
이 정보가 밖으로 샐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네드, 자네는 이곳에 상단 지부를 하나 만들게. 기본 자금은 내가 대줄 테니 빠르게 진행했으면 좋겠군. 그리고 이곳에 약초를 비롯한 치료 물품의 가격이 높으니 이곳으로 운송해 온다면 되겠군."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곳의 제법 이름난 대장장이와 연결이 되어 있으니 충분한 양을 납품받을 수 있게 하겠네. 그렇게 해서 이곳과 영지 간의 유통망을 만든 후에…."
알렌은 아칸더스와 눈을 마주쳤다. 아칸더스는 알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는 듯 빠르게 말했다.
"제가 율리우스 공자님께 당한 이들을 모으면 되겠군요. 영지에서처럼."
"그래."
상단은 눈속임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실제로 사막인 이곳에서 물약을 비롯한 약초의 가격은 높았고, 신드리 남매가 만든 무기는 어느 지역에서든 환영받을 테니.
"상단의 움직임에 섞어 그들을 영지로 보냅니까? 아니면 이곳에서 활동하게 만듭니까?"
"우선 영지에서 교육한 후, 이곳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하지."
"활동한다면 어디까지 허용하시겠습니까. 예를 들어 용병대를 조직하거나 하는…."
"그건 자네 재량에 맡기지."
"알겠습니다."
아칸더스의 눈이 깊어졌다. 알렌이 말한 정보를 바탕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는 것이리라.
"자네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하네. 기본적으로 구조, 포섭, 잠입이지만… 후에는 잠입과 선동, 그리고 요인 보호와 같은 일을 하게 되겠지. 그러니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행동하도록 하게."
아칸더스는 이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율리우스를 궁지로 모는 것에 성공했으니까.
저 모든 것에 대해 완벽히 훈련시킬 수는 없겠지만, 기본을 다지는 것에 그를 따라올 사람은 없었다.
아칸더스는 계산을 끝마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알아야 하는 것들이 더 있습니까?"
알렌은 잠시 고민을 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없지는 않지만…, 아직 거기까지 이야기하기에는 이른 것 같군."
아칸더스의 눈이 반짝였다. 알렌의 은근한 암시에 그는, 그들 말고도 다른 조력자가 더 있다는 뜻으로 알아차렸다.
'신드리 남매와는 거래를 조정해야 할 테니 조금 있다 대면을 시켜 주고, 카트린느나 일리아나는 몇 년 후에 합류할 예정이니 미리 자리를 한 번 마련해 줘야겠군.'
그와 동시에 알렌의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해 끌어들일 것이다. 그들도 몇 년을 보면서 완전히 정보를 공개할지 결정해야겠지.
하지만 알렌은 그것을 제외한 순환교와 그늘진 여왕과의 관계는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우선 순환교의 외부 인식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공개적으로 쓰기에 좋지 않았고 알렌이 세상에 만들려는 모습과 맞지 않았다.
'그리고 그늘진 여왕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음지의 세력을 정리하는 일을 맡으려면 알렌의 세력이 조금 더 커야 했다.
적어도 하나의 가문은 상대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지.
그녀도 그걸 알고 있을 테니 짧으면 1년 길면 3년 정도는 기다려 줄 터.
"그럼 슬슬 이야기도 끝나고 시간도 적당하니, 식사나 하고 헤어지는 것이 어떻겠나."
"하하, 저도 마침 허기가 지던 참이니 찬성입니다."
소네드는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방에 틀어박혀 계획을 짜고 싶지만…, 여기서 빠질 수는 없겠지요."
"당연하지요, 아칸더스. 여기서 혼자만 가지 않을 생각이었습니까?"
"그러니까 같이 가겠다고 하지 않았소, 소네드. 자꾸 그렇게 먹으니 배가 나오는 것이오."
"아니, 그건 너무 심한 말이 아닙니까!"
알렌은 제법 친해진 듯 농담까지 오가는 두 사람을 보다,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시에 불어치는 훈풍에 열기가 더해지고, 거리 곳곳에 심어진 나무에 울창한 녹색 잎이 우거졌다.
회귀를 한 지 어느덧 열 달이 되어가는 날의 오후.
이름만 있었던 조직인 스콜(Sk?ll)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작년보다 더운, 여름이었다.
* * *
아칸더스 일행이 오고 난 이후에도 아카데미의 생활은 변함없이 흘러갔다.
사고 이후 실전 훈련의 수업은 위축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만큼 실내에서의 훈련과 교육이 더욱 철저하게 변했다.
그리고 유적 실습 사건의 뒷정리가 완전히 끝날 무렵, 눈에 띄게 활약한 알렌과 율리우스 그리고 마리아는 상과 함께 많은 공적치를 받게 되었다.
율리우스는 그걸 받고 알렌과 인사할 새도 없이 급히 아카데미의 보고로 향했다.
아마, 유명한 전설 속 마검인 스톰브링거의 모조품을 가지러 가는 거겠지.
원본의 능력과 다르게 모조품은 폭풍을 부르는 검인 만큼, 율리우스에게 어울리는 물건이기도 했다.
알렌이 먼저 차지해 봤자 쓰지도 못하고, 사이좋은 형제를 연기하고자 검을 그에게 줘야 했기에 포기한 물건이었다.
마리아는 자신이 받은 보상은 상관없다는 듯 알렌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말없이 알렌을 이끌고 사람이 없는 장소로 이동했다. 알렌은 의아해하면서도 그녀를 따랐다.
인적이 드물어지며 사람들의 목소리가 잦아들 무렵, 그녀가 알렌을 마주 보았다.
"알렌."
그녀와는 유적 실습 이후 만남이 없었다.
검은 책에 나왔던 원작의 주연이자 회귀 전 돌연 목숨을 끊은 여인.
처음에는 일말의 동정심과 함께 율리우스가 포섭하기 전에 끌어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접근했다.
그 후에는 그녀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과 하이젤을 견제하기 위해 만남을 이어 왔고.
그러나 검은 책에 대한 의존을 깨닫고 나서, 회귀 전의 기억을 바탕으로 움직였기에 실질적으로 마주하는 건 한 달만이었다.
"할 말이 있나?"
"왜 안 나와?"
그녀는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알렌은 단번에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았다.
"실습 후에 서로 할 일이 많지 않았나."
"그래도 약속이었어."
그녀의 표정에는 미약하지만, 불만이 어려 있었다. 알렌은 변명을 그만두고 사과했다.
"미안하군, 그렇게 신경 쓸 줄 몰랐다."
"받아 줄게."
"그럼 그걸로 끝인가?"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알렌을 응시했다. 순백의 눈이 그의 움직임을 붙잡았다.
"할 말이 더 없다면…."
"중부."
알렌이 말을 멈췄다. 중부? 갑자기 중부를 왜….
'설마.'
알렌이 떠오른 기억에 몸을 멈칫했다. 그녀는 알렌과 여전히 눈을 마주 봤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감정을 읽어 낼 수 없었다.
"나는 중부에서 왔어."
한 달도 전, 그녀의 정보를 알아내려 했던 일이 있었다.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었는데, 왜.
"…그래서 그게 어떻다는 거지?"
"저번의 답."
마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녀의 눈은 시종일관 알렌을 담고 있어 알렌 그 자신조차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번에는 사생활에 민감하다고 하지 않았나? 갑자기 그러는 이유가…."
또각-
그녀의 구두 소리가 멈췄다. 그녀와 알렌의 거리는 주먹 하나 들어가지 못할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정보, 더 알려 줄게."
"...."
"그러니까 나와."
그녀에게서 화려하지는 않지만, 은은한 달맞이꽃 향기가 났다.
"부탁이야."
마리아의 표정에서 읽히는 감정은 하나밖에 느낄 수 없었다.
순수할 정도로 지독한 열망.
알렌이 이것을 원하기 때문에 자신이 주는 것이라는 듯.
그녀에게서 그 이상의 무언가를 찾기 힘들었다.
알렌은 침묵했다.
그녀의 태도에 당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생각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이러는 의도는…, 아니 우선 답을 먼저.'
침묵의 뜻을 부정으로 알아들은 걸까. 그녀의 눈에 실망감이 깃들기 시작했을 때, 알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알았다."
그녀는 알렌의 진심인지 확인하겠다는 듯 잠시 눈을 바라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물러섰다.
"이제 만족하나?"
"응."
"…그럼 자리를 옮기지. 여기서 계속 대화할 필요도 없고."
율리우스 뒤에 있는 자들의 세력이 보통이 아닌 것을 확인했기에, 하이젤이나 마리아를 신경 쓰기 힘들어 포기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행동한다면….
-이번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까.
알렌은 걸음을 옮기다 말고 잠시 우뚝 멈췄다.
그 모습에 앞서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알렌,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알렌은 떠올랐던 생각을 급히 부정했다.
"표정, 이상해."
알렌은 그녀의 말에 확인이라도 하듯, 두 손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얼굴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굳어 딱딱한 표정이었다.
알렌은 두 손으로 표정을 억지로 풀고는 표정을 꾸몄다.
"무슨 일 있어?"
"잠시… 생각 난 게 있어서 그렇다. 별 건 아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알렌은 무거운 발을 억지로 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니…, 전과 같은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자신이 조심히 행동할 테니까.
너무 깊어지지도 않을 것이고, 적당히 감정을 조절할 것이다.
그게 옳은 선택이니까.
끼익- 끼익-
인적이 드문 곳이라서 그런 걸까, 녹슨 쇠가 움직이는 불쾌한 소리가 귀를 찔렀다.
알렌은 소리를 무시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끼익-
장소에서 멀어져도 소리는 여전히 귓가를 박혀 들었다.
어딘가 불편한 기분이었다.
제103화
여름이 다가오며 1학기의 끝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아카데미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방학을 맞이하기 전, 마지막 고비인 중간고사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의 시험 중 각각 학기 말에 치르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는 특별했다.
일 년 중 단 두 번, 등수를 바꿀 기회였으니까.
하급반 학생은 더 위 등급의 반으로 올라설 수 있고, 상급반 학생은 성적을 내지 못한다면 강등당할 수 있다.
앞으로 반년 동안 정해질 자신의 등급을 결정짓는 시험.
그렇기 때문에 시험 기간이 앞으로 다가올수록 아카데미의 분위기는 전투를 앞둔 듯 긴장감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건 어느 학년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신입생의 경우에는 그것이 더 심했다.
"저번에는 제대로 안 해서 낮은 점수를 받은 거지, 내가 못 한 게 아니야."
"등수나 반에 대해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가볍게 했지만…, 이번에는 다르겠지."
처음 받은 등급의 반에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급반 학생들까지는 자신의 등급에 수긍했지만, 하급반과 중급반의 학생들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자신들의 수준이 그곳에 있음을.
단지,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낮은 반에 온 것뿐이라며 이번 시험에 증명하기를 원했다.
그렇게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분위기가 지속되던 중, 드디어 중간고사의 첫걸음인 필기시험이 끝이 났다.
그러나 아카데미의 분위기는 여전히 긴장감이 가라앉지 않았다.
중간고사의 점수를 차지하는 비율은 이렇다.
필기시험 3할.
실기 시험 5할.
학기 말의 대련 2할.
그런데 두 번째 시험이자, 전체 점수의 5할이나 차지하는 실기 시험의 종류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눈이 벌게져 학교의 공지만을 기다리고 있을 무렵, 드디어 아카데미의 실습 시험의 장소가 공개되었다.
고급반, 보통 A반이라 부르는 반의 담임 말베른 교수는 메마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번 실기를 치를 장소는 남부 해안가에 있는 무인도로 결정되었습니다. 시험의 주제는 생존과 조난 그리고 난전이며, 2주 동안 진행될 예정입니다. 아공간은 사용하지 못하며, 식량은 3㎏ 이상 챙길 수 없으니 이점을 염두에 두기를 바라며…."
실기 시험을 3일 앞두고 공개된 내용에 신입생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카를! 뭘 챙겨야 하나요! 아니, 지금 당장 준비를 해야…!"
"생존에 필요한 걸 챙겨야 한다고? 미친, 선배들이 이야기 한 목록에 없었는데…."
"나는 남부 출신이라 오히려 쉬우려나? 아니, 거기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면…."
급히 상업 지구로 향하는 이들은 그나마 나았다. 그러나 선배들의 말만 믿고 실기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이들은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그와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온 이들은 미소 지었으나, 그건 소수에 불과했다.
아카데미가 시끄럽게 변하는 가운데, 알렌은 홀로 유유히 움직였다.
「당신은 왜 혼자 여유롭게 있어요? 준비 안 할 거예요?」
"나와 상관없는 일이거든."
「미리 준비했어요? 응? 준비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알렌은 그녀의 의아한 물음에 짧게 답했다.
"나는 참가하지 않을 생각이다."
「왜요? 성적, 중요한 거 아니에요? 에이, 준비 못 해서 포기하는 거죠? 그러지 말라니까요? 나중에 후회할걸요?」
"그건 본인의 경험담인가?"
「공무원에게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알렌은 베스틀라의 우스갯소리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실기 시험의 준비는 진즉 해 두었다. 단지…."
율리우스와 잠시 떨어질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지.
알렌은 혀끝까지 튀어나오려던 답을 집어삼켰다.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도망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검은 책을 펼쳤다.
그곳에는 별다른 사건 없이 유적 실습을 끝마친 과거의 율리우스가 보였다.
『──율리우스는 실기 시험이 어디서 벌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무인도 서바이벌. 원작에서 나왔기에 그는 미리 대비를 해 뒀….』
지금은 1회차 때와 다르게 사고가 일어났기에 실습 장소가 달라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같다.
실기 시험 무대는 남해에 있는 무인도며, 그는 일찌감치 그곳에 갈 준비를 해 두었다.
그러나 일 전의 사건 이후 알렌은 심적 부담이 커졌고, 잠시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정말 그 이유뿐인가? 그렇게 묻는다면 이 말밖에 없었다.
'모른다.'
아니, 사실 알렌도 자신의 감정을 잘 알 수 없었다.
"실력을 더 드러내기 위해서는 계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니까."
그렇기에 변명했다.
평소와 같이 계산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갑자기 왜요? 대개 혼잡한 상황이 아니면 검 쓰는 것도 자제했으면서.」
"주제…, 그래 주제를 알았기 때문이지."
알렌은 자신의 실력이라면 적어도 팔강의 발끝 정도는 닿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결과는?'
팔강은 격이 달랐다. 힘겹게 얻은 용의 노심도, 대다수는 압살할 만한 거인의 신체도, 그들에게는 한 가지 특성일 뿐이었지, 위협이 될 수는 없었다.
마력이 많으면 뭐 하나? 마법을 쓸 시간조차 없는데.
감지 범위 안의 예측된 움직임조차 속이는 기술의 원리는 알렌이 들어 본 적조차 없었다.
그는, 팔강을 너무 얕잡아 보고 있었다.
"내 실력이 동년배 사이에서, 아니 웬만한 이들에게는 독보적인 수준일지 몰라도, 진짜 강자들에게는 별것 아니지 않나. 그렇다면 전부 숨길 필요가 없다는 거다."
지금까지 거인의 신체를 숨기려고 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율리우스가 알렌의 실력에 경계심을 느낄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실력은 어떤가.
고대의 괴물과 싸울 때의 마리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율리우스는 예상했더라도, 마리아의 실력은 예상외였다. 그렇다면 하이젤도 마냥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게 실기 시험에 참가하지 않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어요?」
"팔강의 제자, 그 자리에 학생 대부분은 환상을 품고 있기 때문이지."
예측할 수 있는 강함과 예측할 수 없는 강함은 다르다 알렌의 성장 속도는 빠른 편이지만 예측할 수 있는 강함의 범위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걸 이용하겠다는 거다. 팔강의 제자는 시험에 빠질 수 있는 특혜가 있으니."
그들이 무인도에서 실기 평가를 끝내고 돌아온다면, 알렌은 전과 달리 육체적 능력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들은 내가 단기간에 성장했더라도 의심하지 않겠지. 왜냐면 팔강의 제자가 되었으니, 무언가 방법이 있다고 스스로 납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귀족이 도둑질하더라도 아무도 믿지 않듯, 그들은 내심 바라는 환상에 알렌을 끼워 맞출 것이다.
알렌은 할 일은 그저 본래 실력을 보여 줄 뿐.
「…참 당신다운 발상이네요.」
그녀는 알렌의 방식에 매우 익숙해진 듯 한숨만 내쉬었다.
'하지만…, 정말 실력을 더 키울 필요가 있기도 하지.'
격차를 더 벌려, 실력을 더 끌어올려야 했다. 이번에 짐승왕과 그늘진 여왕에게 농락을 당하며 그것을 느꼈다.
짐승왕에게 2주간의 특훈을 받는다면, 쓸 만한 수준까지 실력이 향상되지 않겠나.
알렌은 그런 희망을 품으며 어두운 지하실의 계단을 밟았다.
저벅저벅-
아카데미로 오는 팔강을 위해 준비된 훈련장.
일반적으로는 구하지도 못하는 오레이칼코스 합금으로 지어진 벽과 천장이 시야 전체를 황금빛으로 반짝였고, 지하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넓이의 훈련장이 그를 맞이했다.
그 훈련장의 중심에, 한 남자가 눈을 떴다.
"제자야, 왜 이리 늦었느냐. 어르신이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
짐승왕이었다.
* * *
화창한 하늘이 지상을 굽어살폈다.
사막에서 비가 내리는 날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학생들은 저 쨍쨍한 태양이 자신들의 여정을 배웅해 주는 것이라 여겼다.
그 정도로 하늘은 맑고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
"율리우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나타샤의 목소리가 율리우스의 정신을 일깨웠다.
"아니…, 형님이 시험에 빠진다고 하니 조금 믿기지 않아서."
"하긴, 저도 아직도 그가 짐승왕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음…."
그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긴 한데.
"그것도 그렇지."
율리우스는 알렌이 짐승왕의 제자가 된 것보다 시험에 빠진다는 소식이 더욱 믿기지 않았다.
다른 활동이라면 몰라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는 학생 전체가 강제로 참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강의 제자로서 특혜로 빠진다는 소식에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원작에서 그런 설정이 있었지.'
정작 자크니르든 가이온이든 아무도 제자로 두지 않아 작중에서 한 번도 사용된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제자가 된 것도 좀 놀랍기는 한데….'
그렇게 신기한 건 아니었다. 기연과 빙의된 몸의 재능으로 성장하는 그를 알렌이 꾸역꾸역 따라올 때부터 그의 재능을 깨달았다.
'만난 사람 중에 유일하게 스스로 재능이 변한 사람이기도 하고.'
율리우스는 알렌의 재능이 검은색으로 변했던 그 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율리우스는 사람의 재능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알렌처럼 검은색 재능으로 변한 이는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이 율리우스가 알렌이 원작의 주연이 아님에도 챙기는 이유기도 했다.
'새로 생긴 가족인 점도 있으려나.'
이번 무인도에 따라왔다면 그곳에 있는 기연 한두 개를 챙겨 줄 의향이 있었지만….
"못 간다면 어쩔 수 없지."
"율리우스? 누가 못 가면 어쩔 수 없다고요?"
고개를 돌리자, 아이린이 웃으며 다가왔다.
"한참 그의 형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알렌 님이요?"
나타샤는 그녀가 끼어드는 게 지겹다는 듯 한숨을 내쉬면서도 아이린의 물음에 답해 주었다.
"그가 이번에 빠지게 되었으니 말이죠."
"대단하기는 하네요. 그 나이에 벌…."
"율리우스! 이 나쁜 놈아!"
"깜작이야!"
아이린은 자신의 말이 끊긴 것에 대해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봤다. 그곳에는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여자가 율리우스의 뒤에 붙어 있었다.
노출이 많은 헐벗은 몸으로 율리우스에게 붙어 있는 여자.
아벨린.
"같이 가자고 정문에서 보자며!"
"아니, 동동이가 배가 고프다는데…."
율리우스는 궁색한 변명을 내보이며 팔꿈치로 가방을 찔렀다. 그러나, 동동이는 이미 눈치가 생겼는지 이미 아냐에게 도망친 상태였다.
"동동아, 왜 또 왔어? 응? 공자님이 또 혼나고 있어?"
율리우스가 배신감 넘치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려 했지만, 아벨린이 험악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기에 등을 돌릴 수도 없는 상황.
"또, 또 동동이 핑계나 대고."
"그… 미안?"
그 모습을 질투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아이린은 무심코 평소 생각하던 명칭을 입 밖에 내었다.
"창…."
"말버릇이 너무 험하군."
"…꺄악!"
아이린은 귀에 느껴지는 숨결에 진저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공주님!"
"헬레나라고 부르래도?"
"제가 그건 하지 말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신하의 말버릇을 챙기는 것도 주군의 역할이지 않으냐."
헬레나는 뭐가 문제냐는 듯 코웃음 치며 도도하게 고개를 틀었다. 그런 그녀에게 아이린은 분하게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건 그녀 덕분이니까.
적어도, 아카데미에서 그녀를 거슬러서는 안 되었다.
"그래도…."
그저 울적함과 분노, 초조감, 원망 등의 감정을 담아 작게 한마디 하는 게 전부였다.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헬레나가 그렇게 말했음에도 아이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헬레나가 한 마디 더하려는 그때, 적절하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지금부터 미리 힘 뺄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옛 약혼녀."
"카트린느!"
헬레나는 또 끼어드냐는 듯 뚱한 얼굴로 물러섰지만, 아이린은 유일한 지원군이라도 만난 듯 기쁜 얼굴로 그녀의 뒤로 숨었다.
"군신 관계인데 적당히 사이가 좋으면 얼마나 좋아요?"
"나는 항상 진심이었다."
"그게 문제라고요."
"아아, 시끄럽다. 나는 갈 테니 더 이상 그만 말하거라."
헬레나는 그녀가 잔소리를 시작할까 봐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 정신 산만한 광경을 보고 있던 마테우스는 질린 얼굴로 옆에서 같이 그 광경을 보던 남자에게 입을 열었다.
"…참 정신 산만한 광경이지 않습니까, 벨제크 씨."
"나는 그저 부럽기만 하군…."
마테우스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벨제크의 험상궂은 얼굴에 짙은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
"저렇게 여자가 많이 붙다니… 역시 답은 얼굴인가? 내 얼굴은 너무 부족하군."
"…벨제크 씨 어머니가 듣는다면 슬퍼할 만한 발언인데요?"
"내 어머니는 나를 버렸다."
"...어, 그게…."
그를 위로하고자 그의 어머니를 욕해도 되는가? 잠시 고민해 보던 마테우스는 화장실을 핑계로 급히 그의 곁에서 도망쳤다.
그렇게 벨제크가 홀로 남겨졌을 때, 울적한 눈의 남자가 율리우스 일행을 보는 것이 보였다.
"…공자님."
벨제크가 슬쩍 눈짓해서 보니, 영지에서부터 율리우스를 보필했다는 바이론이었다.
여자를 무서워한다던.
"크흑… 주군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니."
그는 차마 그들의 곁에 다가가지 못하겠다는 듯 멀찍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래도 내가 바이론 보다는 낫겠지.'
벨제크는 내심 그렇게 생각하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 곁에 다가온 여인들과 이야기를 다 끝낸 율리우스가 벨제크와 바이론을 보았다.
"아, 쟤들은 왜 자꾸 떨어져 있냐. 여기 안 오고."
"스스로 자기 객관화가 잘된 게 아닐까?"
"아니 그건 너무… 심한 말인데."
율리우스는 그렇게 말했음에도 아벨린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눈에는 벨제크와 바이론, 둘 다 똑같았기 때문이다.
"대규모 공간이동 마법진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남부에서도 준비가 끝났다고 하니 각 학생은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드디어 준비가 끝났구나…."
율리우스는 진지한 눈으로 학생들에게 소리치는 교수를 보며, 무인도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우선 얻어야 하는 건…, 섬 중앙으로 가서 제일 중요한 건 내가 먹고.'
그 후에 곳곳에 있는 히든 피스들을 수거하면서 점수를 얻으면 되겠지.
원작의 기억은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 잊어버리지 않으니 이때만큼 편리한 게 없었다.
"자, 출발합니다!"
넓은 범위의 공간이 물결치며 그들을 길게 늘어진 타원형에 가두었다.
무인도로 향하는 대규모 공간 이동이 시작되었다.
제104화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내일도 알아서 오고."
"늦지 않겠습니다."
가이온은 알렌의 인사에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렌은 지붕을 밟고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다가 걸음을 돌렸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나."
「뭘요.」
베스틀라의 뚱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알렌은 훈련 내내 빈틈을 찾아보겠다는 듯 소리치던 그녀를 떠올리고는 쓴웃음 지었다.
"가르침에 부족함이 있어 보이나?"
줄어든 생도들에 조용해진 아카데미는 평소보다 횅해 보였다. 훈련장에서 열의를 다지는 기합도 평소보다 작게 들렸고, 지나다니는 학생들의 빈 공간이 느껴졌다.
「…솔직히, 그렇지는 않아요. 네. 저랑 방향성은 다르지만…, 확실히 거창한 이름값은 하네요.」
그녀는 거기까지 솔직하게 말하고는 더 칭찬하기 싫다는 듯 우물거리다…, 끝내 말을 끝마쳤다.
"가르치는 것에 익숙해 보이기도 했고."
「확실히 그건 의외긴 했어요. 노친네 성격답지 않게 섬세하더라고요.」
"너보다도?"
「그건 제가 더 낫거든요!」
농담인데 뭘 그렇게 열을 내나. 알렌이 사과를 했음에도 그녀는 자신이 더 낫다느니, 그래도 어떻게 첫 스승을 비교할 수 있냐며 소리 질렀다.
알렌은 그녀의 잔소리를 배경음 삼아 걸음을 옮겼다.
저녁이 되자 학생들의 숫자가 줄어든 게 퍽 체감이 되었다.
무인도로 떠난 신입생도 신입생이었지만, 다른 학년들도 차례에 따라 시험을 치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평소보다 사람이 줄어든 거리는 알렌에게 꽤나 낯선 감상을 선물했다.
그렇게 기숙사로 돌아가던 도중, 누군가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주제도 모르고 나한테….
평소 같았으면 무시했을 텐데.
사람이 적어서일까, 아니면 이 시간에 시험 준비가 아니라 다른 일을 하는 것에 대한 궁금증일까.
알렌은 기숙사로 향하던 걸음을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돌렸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뭐라고 소리치는지 명확히 들렸다.
-…원이 없어졌다고 나한테 대들어?
-…레기 같은 새끼들
-…꼴좋다! 지금 그렇게 있는 게 어울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뭐라고 소리치는지 명확히 들렸다.
그렇게 알렌이 소리의 진원지로 보이는 장소에 도달했을 때, 보인 것은 의외의 광경이었다.
"네가 먼저 우리를 건드렸잖아. 그래 놓고 뭐? 피해자?"
"우리도, 우리도 네가 먼저 이상한 소문을 내지 않았으면 넘어갔을 거라고!"
"제발…, 퇴학당하고 너무 힘들다. 지금까지 선동했던 것들 다 넘어가 줄 테니까 퇴학만은…."
온몸에 붕대를 감싼 세 명의 남학생이 여학생 하나를 상대로 말싸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렌이 의외라고 생각한 점은, 밀리고 있는 것은 여학생이 아닌 남학생들이라는 점이었다.
"제발 퇴학만은? 지랄하지 마! 후원이 끊기자 득달같이 물려 했던 주제에."
"그건 네가 먼저 자크니르 님의 가문에서 후원받는 사실을 이용해서 선동했잖아!"
그녀의 말에 격분했는지, 덩치가 큰 남학생이 소리쳤다.
"선동? 하."
그러나 여학생의 반응은 간단했다.
짝-
여학생보다 두 배는 클 법한 남학생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래, 내 영향력을 높이고자 선동했지. 그래서, 뭐?"
짝-
남학생의 고개가 다시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어쩔 거냐고."
남학생은 분노했는지 몸을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녀가 한 번 노려보자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대신 곁에 있던 작은 키의 남학생이 떨리는 어조로 답했다.
"…그래도 퇴학은 심하잖아. 우리가, 도대체 뭘 했다고…."
"너희가 뭘 해? 나한테 강제로 요구했잖아."
"우리는 그저 네가 한 짓의 사과를 요구…!"
그녀는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며칠 전에 일어난 사건을 언급했다.
"정말 그럴까? 여학생 하나를 따돌린 가해범 씨."
"그건 네가 소문낸 거잖아!"
"이미 그렇게 아카데미에 퍼졌으면 그게 진실이지. 안 그래?"
알렌은 저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며칠 전, 아칸더스와 소네드가 이곳에 올라왔을 적 벌어진 사건을 떠올렸다.
'율리우스가 또 무슨 저질렀나 싶었는데….'
직접 확인해 보니 가해자가 완전히 뒤바뀌었지 않은가.
여학생을 따돌렸다는 주동범들은 으슥한 장소에서 주먹 하나 못 드는 순둥이들뿐이었고, 그들에게 피해자라고 공표 받은 여학생이야말로 오히려 저들을 괴롭힌 것처럼 보였다.
'율리우스한테 퇴학당하고, 원한도 있어 보이니….'
스콜에 끌어들일 만한 인재로군. 알렌은 사건이 며칠이 지났음에도 아칸더스가 접근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에 의아했다.
우선 알렌은 상황에 직접 끼어들지 말지 추이를 지켜봤다.
"그러게, 내가 후원이 끊어졌을 때 그냥 있지, 왜 건드렸어?"
"그냥 사과 한마디, 그 한마디를 들으려고 한 게 죄야?"
"죄는 아니지, 그런데…."
그녀는 유일하게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노려보던 남학생의 멱살을 틀어쥐며 배시시 웃었다.
"그 상황에 마침 율리우스 님이 나타나셨잖아?"
알렌은 여학생이 멱살을 튼 남학생에 자꾸 눈이 가는 걸 느꼈다.
'…왜 이렇게 익숙하지?'
그러나 아무리 쳐다봐도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 봐야겠군.
"우리도 다 생각이 있어. 네가 퇴학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네가 한 짓들 다 폭로할 거야."
"너희가? 푸후…."
알렌은 슬슬 끼어들 준비를 했다. 상황은 충분히 알았다. 이제 그들을 아칸더스에게 맡긴다.
그렇게 알렌이 나서려던 순간.
"율리우스 님이 직접 이 상황을 신경 쓴다 했거든?"
멈칫-
알렌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율리우스가 직접 이들을 신경 쓴다고? 그럼 만약 저들을 여기서 데리고 갔다가 그들의 행색이 달라지거나 사라진다면….
'꼬리가 밟힐 수도 있다.'
알렌은 결국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어이가 없는지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희가 폭로? 하. 너희들은 이제 이곳에서 발붙일 수도 없을 거야."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 우리는 같은 도시에서 왔잖아…."
그녀는 그들의 절절한 물음에 딱히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내뱉었다.
"그냥."
"뭐?"
"그냥 그랬다고."
그녀는 발끝으로 땅을 툭툭 치며, 그들을 응시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남학생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평민이라고 무시당하니까, 나도 뭐라도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운이 좋게 후원자가 자크니르 님의 가문이니 이용하지 않을 수 없잖아?"
"…그럼 우리는, 왜 건든 건데. 그런 이유라면 우리일 필요는 없지 않았어…?"
홀로 조용히 있던 남학생이 입을 열자, 그녀는 한심한 것을 바라보듯 그들을 내려 봤다.
"가까우니까 이 정도는 용서해 주지 않겠어?"
알렌은 거기까지만 듣고 몸을 돌렸다.
지금 당장, 저런 이들이 얼마나 있는지 더 알아야 했다.
* * *
알렌은 급히 아칸더스를 찾았다.
아칸더스가 자리한 장소는 상업 지구에 있는 건물이었다.
아직 내부를 다 꾸미지 못한 듯 건축 자재들이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었고,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인부들은 다 퇴근한 모양이었다.
그는 최상층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아칸더스."
"알렌 공자님, 갑자기 무슨 일로…?"
"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미안하군."
알렌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거친 발걸음과 살짝 굳은 표정은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암시했다.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랬네. 혹시 내가 전에 명령했던 것을 기억하나?"
"예,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율리우스 공자에게 피해를 입은 이들을 포섭하고, 다른 지역까지 이송하는 것 아닙니까?"
아칸더스는 알렌의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막힘없이 대답했다. 알렌은 그의 차분한 말투에 흔들리던 감정을 가라앉혔다.
"…후, 그래. 그렇다면 이번에 아카데미의 남학생 세 명이 퇴학당한 건에 대해서도 알겠군."
"예, 스콜에 끌어들일 수도 있는 인재였으니 철저히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왜…."
자신은 그에게 탓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함이었지.
"혹시, 영입되었나? 아니면 이미 진행 중인 사안인가."
"그들은 스콜에 영입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이미 결정까지 내려져 접근도 그만뒀습니다."
"왜, 그들에게 아직 접근하지 않았지? 그들에게 스콜에 투신할 동기가 충분할 텐데?"
"그게…."
아칸더스는 한숨을 내쉬며 뒤에 있던 서류 봉투를 꺼내 들었다.
수십 장이나 되는 종이는 내용이 적힌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손에 닿으면 잉크가 묻어나올 것 같았다.
"이걸 봐주십시오, 공자님."
"…여기 있는 인물들은 뭐지?"
"스콜에 투신할 동기는 충분하나, 끝내 제외한 인물들의 목록입니다."
알렌은 종이를 넘겼다.
사륵-
"루이, 마크, 노아…."
알렌이 봤던 남학생들의 이름을 제외하고도 수십 명이나 되는 인물의 간단한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다.
"…이들이 왜 제외된 거지?"
아칸더스는 그 말에 자칫 냉정하게 느껴질 만큼 차갑게 답했다.
"그게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효율적이다?"
"예, 이분들은 포섭하자면 할 수 있지만… 그들을 포섭함으로써 얻을 이득보다 위험성이 더 큽니다."
알렌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당장 자신만 해도, 율리우스가 직접 신경 쓰고 있다는 말에 결국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그가 아칸더스에게 뭐라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이들을 모두 데려온다면 율리우스 님께 확정적으로 이곳의 존재를 들킬 겁니다. 꼬리가 붙잡히는 건 물론이고요."
그는 그것을 시험하듯, 걱정하는 얼굴로 물었다.
"그렇게 되더라도 이들을 데려오시겠습니까?"
알렌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
"모두를 구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도와주는 것도, 지키는 것도.
사람이 있어야 가능했다.
복수를 위해서 율리우스의 행동을 일정 부분 방관함으로써 복수자들을 모으는 게 자신의 목적이었다.
아칸더스는 자신의 목적에 충실한 것뿐이었다.
그러니 알렌이 그를 뭐라고 할 수 있나?
'아니지.'
남겨진 자들은 안타깝지만, 알렉이 보기에도 그의 행동은 매우 적절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심적인 무언가가 가슴에 쌓여 가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찜찜했다.
구할 수 없는 것을 구하지 않는다.
정말로?
끼익-
* * *
무인도 서바이벌 에피소드는 율리우스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에피소드 중 하나였다.
수많은 사람의 시점으로 나뉘는 분량과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조연의 과거 설정.
그 모든 게 뒤섞여 주인공, 하이젤의 시점은 요만큼 밖에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소설 속에 빙의하게 된 이후, 이번 에피소드만큼 꿀인 곳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식량! 식량 내놔!"
"꺼져, 나도 이거 아껴 먹는 중이라고! 첫날인데 네 건 어디 있는데!"
"당연히, 아직 안 먹었지!"
고개를 내려서 보니 첫날임에도 식량의 심각성을 아는지 곧바로 전투를 벌이는 학생들이 보였다.
"쯧쯧, 품위 없게 뭐 하는 짓인지. 우리는 저러지 말자, 레이나."
"그러고 싶지만…, 공자님 저희가 가진 식량이 더 있나요?"
레이나의 불안한 물음에 율리우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없지만… 곧 생길 거야."
율리우스는 웃으면서 뒤를 돌아봤다.
그들이 있는 곳은 무인도 중앙에 있는 거대한 산의 동굴이었다. 그는 운 좋게 근처에 같이 무작위로 이동된 레이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와 합류하고, 율리우스는 곧바로 히든 피스 중 한 곳에 자리 잡는 데 성공했다 일명 곰의 쉼터.
무인도 곳곳에 있는 이런 히든 피스들은 쓸 만한 아티펙트뿐만 아니라 식량, 의류와 같은 여러 가지를 제공했다.
"하루 한 끼는 먹을 수 있을 것 같거든."
그 이상은 조금 발품을 팔아야 얻을 수 있었다.
쉼터 하나를 찾았다고 해서 무한정 머무른다면 생존과 난전이라는 주제에 맞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율리우스에게는 무인도 에피소드에서 봤던 수많은 히든 피스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여러 명의 주연의 시점으로 전개된 사건과 히든 피스.
율리우스는 그 모든 곳의 정보를 알고 있었기에 날로 먹는 것에 가까웠다.
"그럼 어떻게 하실래요, 공자님? 저 밑의 학생들을 기습할까요? 아니면…."
레이나는 율리우스의 도움으로 주황색 재능까지 끌어올려졌다. 그 덕분에 지금 실력은 B반에 확정적으로 들어갈 정도.
그런 그녀의 자신감은 맘에 들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마, 오늘은."
"네?"
레이나가 의아한 얼굴로 율리우스를 돌아봤지만, 그는 말해 줄 수 없었다.
지금 모습을 아카데미에서 지켜볼 수도 있는데, 무턱대고 첫날에 상대를 탈락시키면 협동심 점수가 깎인다고 어찌 말해 주겠는가.
그래서 율리우스는 다르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체력을 빼는 것보다 하루 푹 쉬고 지친 다른 학생들을 공격하는 게 더 낫잖아."
"아…."
그녀는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그만두고, 저는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응, 부탁해."
율리우스는 느긋하게 휴가를 즐기듯 천천히 행동할 것이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제105화
알렌은 새벽녘부터 일찍 기숙사를 나섰다.
기숙사 주위에 조성된 화원에서는 어슴푸레한 시간에서만 맡을 수 있는 촉촉한 냄새가 났다.
가이온이 기다리는 훈련실은 아카데미를 가로지르는 북쪽의 입구를 지나 얼마 더 가야 나왔다.
엘피스에 높은 고층과 기상천외한 물건이 많은 만큼, 지하에 훈련실을 짓는 것쯤은 비교적 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만한 양의 오레이칼코스를 사용한 건 믿기지 않지만.'
오직 팔강을 위해.
연금술과 대장술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오레이칼토스 합금으로 벽과 천장 모두를 틀어막은 훈련실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동쪽에 있는 기숙사에서 아카데미를 빠져나가는 북쪽의 큰 대로까지.
한참 아침 준비로 바쁠 서쪽의 주거 지역과 남쪽의 상업 지구와 다르게 활기참이 덜 했다.
많은 이들이 아침을 준비하는 가운데, 아카데미를 가로지르던 도중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퇴학으로 정신적 충격을 버티지 못했다고…."
"한 명은 그래도 살았는데, 두 명은 곧바로 목이 부러져…."
"쯧, 가해자라며. 그럼 잘 된 거 아니야?"
알렌은 어제 보던 광경이 떠올랐다.
여학생 한 명에게 쩔쩔매던 세 명의 남학생들.
알렌의 걸음은 어느새 저도 모르게, 인파를 파고들고 있었다. 왜인지는 몰랐다. 그저, 봐야 한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 재능은 있을 텐데, 자살이… 앗, 누구야."
"물러나시기 바랍니다. 잠시 후면 아카데미 측에서 정리할… 학생!"
사람들의 틈을 지나가고, 어떨 때는 강제로 파고들며, 접근을 막는 경비까지 비켜섰다.
그리해서 나온 인파의 끝에는, 두 구의 시체가 있었다.
구할 수 없는 것은 구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아."
의미 모를 탄성이 새어 나왔다. 동공이 짙게 흔들렸다.
작은 몸집의 남학생과 커다란 체격의 남학생 두 명이 죽었다.
알렌은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선택받지 못했다.
그게 전부였다.
* * *
"오늘은 어제보다 집중력이 떨어지는데, 할 마음이 있나?"
"…죄송합니다."
"네가 하고 싶다던 특훈이다. 내가 아니라. 다음에도 다른 데 정신을 파는 것이 걸린다면…."
가이온의 노란 동공이 날카롭게 변해 알렌을 내려다보았다.
"그때는 후회하지 마라."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흥, 말로는 누가 못하냐. 어르신의 말을 괜히 헛듣지 말고."
"예."
알렌은 가이온이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는 것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 두 명의 죽음을 본 이후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어제 그들의 사정을 알게 되어서일까?
아니면, 그들을 영입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사실 그 어느 것도 명확히 할 수 없었다.
그저 조금…, 그래. 조금 어지러운 기분이었다. 분노나, 슬픔 그런 감정 같은 게 아니었다.
그저, 무언가 가슴속으로 쌓였다.
끼익-
쌓여 가는 기분이었다.
알렌은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발이 닿는 곳은 기숙사가 아닌, 어제 한 번 갔었던 장소였다.
"조심, 조심하고! 천천히 옮겨라!"
"내부 구조는… 고칠 것 없이 그대로 다듬기만 하면 돼!"
평소보다 훈련을 일찍 끝마친 덕분인지 인부들이 아직까지 작업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소네드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상단의 지부를 꾸몄다.
"소네드."
"아, 공자님!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아칸더스가 위에 있나?"
"예, 있습니다. 부르시겠습니까?"
알렌은 고개를 저으며 계단을 향해 걸었다.
"아니,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니 내가 올라가지."
"…혹시, 저도 필요하다면…."
"개인적인 일이니 신경 쓸 필요 없네. 아, 저번에 말했던 장소로 물건을 계속 보내고 있겠지?"
"아, 예, 예. 확실히 신경 써서 확인했습니다."
그늘진 여왕과의 약속은 지켜지고 있다.
알렌은 간단한 몇 가지를 더 점검하고, 최상층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가도 되겠나?"
"예, 들어오십시오."
알렌은 들어간 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스스로도 왜 이곳에 왔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죽은 이들에 대한 동정심인가?
아니면 어제의 결정이 그들의 죽음을 만들었다 느낀 것에?
알렌은 복잡한 생각을 그만두고 입을 열었다.
"…후. 기다려 줘서 고맙군."
"아닙니다. 여기에 오신 이유가 혹시…."
"그래."
여러모로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아칸더스가 이미 한나절이나 지난 뒤의 소식을 모르지 않을 터.
"영입할 수, 없겠나?"
알렌의 물음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정말 되느냐고 묻는 것이 아닌, 일종의 한탄에 가까운 물음.
그러나 뜻밖에도 아칸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공자님께서 만약에 물으실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들 중에서 율리우스 님의 눈에 걸리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인물은 분류해 놓았습니다."
그가 건넨 것은 어제와는 다른 단 한 장의 종이였다.
"이건… 살아남은 한 명인가?"
"예, 이름은 노아. 평민 출신의 2학년입니다. 그리고…."
아칸더스는 한 장의 종이를 더 꺼냈다. 그곳에는 알렌의 눈에도 익숙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포효하는 청사자.
"…라인하르트."
"라인하르트 가문에서 후원하는 학생 중 한 명입니다."
* * *
[정말 제가 가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내가 가도록 하지.]
[후원하는 학생을 가문 사람이 보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알렌은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말하는 아칸더스를 뿌리치고 직접 걸음을 옮겼다.
비단, 남학생 두 명의 죽음으로 인한 것 때문이 아니라, 정말 한 번 더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레이첼의 권유를 따르는 건데.'
학기 초, 그녀가 가문에서 후원하는 이들을 만나 보겠냐고 권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넘겼었는데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이야.
'그럼 얼굴이 익숙한 것도, 그 때문인가?'
아버지의 집무실에서 그에 관한 서류를 스치듯이 본 적이 있을지도 몰랐다.
알렌은 목적지에 도착하자 걸음을 멈췄다.
「여기가 맞아요…?」
베스틀라가 의심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알렌도 눈앞의 건물이 진정 사람이 머물 수 있는 곳인지 의심스러웠다.
낡은 나무로 만들어진 벽은 곳곳에 진흙으로 덧칠을 해 두었고, 높이가 다른 건물과 비교해 낮은 오 층이었지만 그마저도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아칸더스에게 받은 정보에 따르면 그는 기숙사에서 쫓겨난 이후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이제는 없는, 남은 두 남학생과 함께.
아침에 그 혼자 살아남은 후, 아카데미의 치료를 받고 다시 이곳에 보내졌다고 했다.
알렌은 나무 문을 밀며 안쪽을 살폈다. 안쪽에는 통나무로 보강을 해 두었는지 밖과 비교해 튼튼해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이곳은 130년 된 전통의…."
"이곳에 노아라는 학생이 있나?"
알렌은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여관 주인의 말을 막고 질문을 던졌다. 그는 잠시 알렌의 복장을 살피더니 금방 사근사근해진 얼굴로 답했다.
"어유, 잘 찾아오셨습니다! 그 학생이라면 아침에 무슨 일이 있던지 친구들과 같이 나가더만, 오후에는 혼자 들어오더라고요."
"몇 호에 머물고 있지?"
"그것이…."
그의 눈알에 데굴데굴 굴러갔다. 알렌은 그 모습에 다른 귀족들이 이곳에서 날뛰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곳의 주민들은 아카데미가 절대적으로 지킨다는 것 때문인지 겁이 없었다.
"쯧."
알렌은 말씨름을 하기도 귀찮았기에 은화 두어 개를 던졌다. 여관 주인은 귀신같이 은화를 받아 내더니 함박웃음을 지었다.
"바로 위층인 201호에 머물고 있습니다."
알렌은 말없이 계단을 올랐다.
저벅저벅-
사람이 그렇게 많이 머무는 곳은 아닌지 인기척이 없었다.
다 낡은 계단과 복도를 지나 도착한 201호실의 앞.
알렌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알렌은 감지력을 은밀히 펼쳤다. 알렌의 뇌리로 201호실에 자리한 생명체의 모습이 그려졌다.
-똑똑
"들어가도 되겠나?"
그렇게 몇 번이나 두드렸을까. 이러다 낡은 문짝이 먼저 박살 나지 않을까 싶을 때, 목소리가 들렸다.
"...예, 마음대로 하십시오."
-철컥
낡은 침대 하나와 서랍장, 그리고 작은 옷장이 자리한 방.
그 침대의 위로 어제 봤던 무뚝뚝한 인상의 남학생이 알렌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흡사 살아 있는 시체나 다름없는 모습.
"그래서, 뭐 하러 오셨습니까."
"도움을 주고 싶어서."
알렌의 말에 어이라도 없는지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들어온 사람 얼굴이나 보자는 기색으로 고개를 들었고.
"도와준다고요? 그게 무… 슨…."
눈이 크게 뜨였다.
알렌의 얼굴에 의문이 새겨졌다.
"무슨 문제가 있…."
"라인하르트? 이제 와서?"
그의 얼굴이 지옥의 마귀라도 되는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것이 알렌의 기억을 자극했다. 분명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흐릿하면서도 기억에 박힌 얼굴.
'조금 더 늙고, 억세게 변한다면….'
그가 분노와 슬픔에 젖은 얼굴로 외쳤다.
"왜! 이제서야 온 겁니까! 내가 찾아갈 때는, 단 한 번도 보이지 않더니, 왜!"
피로 물들인 바닥, 해골이 쌓인 제단, 육편으로 장식된 오망성의 마법진. 피맺힌 절규와 반항.
"어째서…!"
그리고 죽음, 얼굴이 겹쳐진다.
"아."
기억이 떠올랐다.
* * *
알렌이 악몽을 꾸지 않게 된 건 언제부터일까.
회귀한 직후, 그는 악몽을 안 꾸는 날이 없을 정도로 악몽은 일상에 가까웠다.
악마 소환의 제물로 바쳐진 이들.
율리우스라 다투느라 모친을 잃은 린벨.
자신이 진짜 율리우스인 척 다가오는 김우진.
그런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게 된 건, 키메라 술사의 토벌 이후부터였다.
그들의 희생은 1회차, 없어진 과거에 묻혔지만, 자신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때부터 악몽은 꾸지 않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린벨은 알렌에게 다소 특별한 존재였다.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녀와 이넬리아는 죽지 않았고, 알렌의 시녀로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다.
율리우스 안의 김우진 역시 마찬가지다.
1회차를 통째로 바쳤음에도 대적할 수 없었던 존재. 반드시 죽이고 싶은 존재인 동시에 진짜 율리우스의 영혼과 접점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단서.
알렌이 행동을 하는 모든 근본적인 이유에 그가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은?
악마 소환을 위해 수십, 수백, 얼마나 많은 인간을 바쳤는지 기억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희생을 기억한다고 해서, 현생의 자신이 무언가 해 줄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같은 상황은 알렌은 전혀 상정하지 않았다.
"왜, 왜 이제야 온 겁니까! 이미 다 끝났는데! 왜!"
그는 알렌의 얼굴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발작했다.
알렌은 동요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억지로 평점심을 유지했다.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를 가리지 못했다.
"…무슨 말이지?"
"당신네 라인하르트가 만나 주지 않았으니까! 얼굴조차 보여 주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의 정신이 온전해 보이지는 않았다. 눈물과 억울함, 분노와 같은 여러 감정이 섞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
"공자에게 있어 우리는 무엇입니까?"
"거래다."
알렌은 짧게 답했다. 그에게 있어 후원은 주고받는 거래 관계에 가까웠으니까.
"저는, 저희에게는 희망이었습니다! 많고 많은 평민 중 저를 선택했다는 희망! 그렇게 투자를 하실 거라면, 더 해 주실 수는 없었습니까?"
그는 모든 책임을 그에게 돌리듯 분노를 터트렸다.
그래, 그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듯 억울함을 보였다.
"저희가 그년한테 고통받을 때, 도움을 요청하러 몇 번이나 가신 줄 아십니까?"
전혀 몰랐다. 애초에 알렌은 후원이라는 것을 레이첼에게 처음 들었다.
"항상 그 빌어먹을 어린 시녀한테 막혔단 말입니다!"
어린 시녀라…, 린벨? 본래라면 믿을 필요도 없는 말이었지만, 린벨의 진지한 모습을 본 그는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오셨습니다. 마크도, 루이도 다 죽었는데…."
그는 그러고서 혐오 어린 눈으로 물었다.
"결국, 당신도… 율리우스랑 다를 게 무엇입니까?"
알렌의 입이 닫혔다.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제106화
세상은 한 가지를 선택한다면, 한 가지를 버릴 수밖에 없다.
모두를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일 때는 투정이라도 부려볼 수 있다.
다 가지고 싶으니, 다 가질 수 없냐고.
하지만 점점 자랄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알게 되는 것이다.
전부를 가질 수는 없다고.
그렇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정하게 된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을지.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버릴 수밖에 없다.
그게 세상의 이치였다.
무언가를 사기 위해서는, 재화를 소모할 수밖에 없고.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니 알렌은 자신이 선택할 때, 최소한의 손해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미래의 지식을 그대로 이용하고자, 키메라로 인한 피해를 감수했다.
2황자와 접점을 만들고자, 벤자민과 율리우스의 대련을 방관했다.
율리우스의 관계를 깨트리지 않기 위해, 같은 조원들의 죽음을 외면했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율리우스랑 무엇이 다른가.'
또, 이 질문이었다.
알렌에게 있어 언제나 원점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물음이었다.
저렇게 행동한 그가 결국, 율리우스랑 무엇이 다른가?
알렌은 여기서 무엇을 바꿔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방법밖에 몰랐으니까.
그렇게 교육받아 왔고, 그렇게 행동하도록 강요받았다.
지금에 와서 다른 방법으로 가는 방법 따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겉으로는, 진정한 귀족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주민들을 위하겠지.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하며, 항상 고귀하고 명예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뭐?'
이런다고 해서 율리우스랑 근본적으로 다를 게 있나?
자신의 이득을 위해 상대가 칼을 찔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선심 쓰듯 다가가 포션을 주는 것이 정말 옳다고?
모순적이다.
지독히도 모순적이었다.
자신은.
율리우스를 극도로 혐오하면서도 그와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면서도, 뭐?
'율리우스를 되찾겠다?'
희생자 하나에 마음 쏟는 주제에.
율리우스는 칼로 찌르고 갈 뿐이고, 자신은 방관하고 있다 치료까지 해 주니 율리우스랑 다르다는 생각은 너무, 너무도 추악하지 않은가.
처음에는 그들의 희생을 잊지 않으려 했다.
그 후에는 손이 닿는 곳까지는 도우려고 했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방관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면에 그들의 희생을 당연히 전제하고 있었다.
율리우스를 치기 위해서는 율리우스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이 필요했으니까.
그러니 며칠간 보인 자신의 행동은 우습기 짝이 없었다.
막상 그렇게 정했으면 그대로 밀고 가면 될 텐데, 정 하나 깊게 줬다고 흔들리기나 하다니.
정작 그러면서 행동은 바뀌지도 않는다.
그래서 가지 않았다.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평소대로의 알렌으로서, 정해진 계획에 따라 행동하던 그로 돌아가기 위해.
율리우스를 건드릴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없다.
분노에 몸을 맡겨 지금 그를 건드리면 무언가 바뀌는 게 있나?
'없다.'
그저 1회차의 일을 재현할 뿐이었다.
자신은 실패하고, 동생은 돌아오지 않겠지.
그러니 그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하니 원래 세웠던 계획대로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그렇게 해서 실력을 키우고, 영혼을 되찾을 방법을 찾은 후, 율리우스의 틈을 노려 기습한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최선의 계획이었고, 이미 그 계획을 순조롭게 이어 나가고 있으니 자신만 정신을 차리면 된다.
생각을 거기까지 마쳤을 때.
"어르신이,"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거리를 뛰어넘으며 길게 늘어졌고.
"네 장난에 맞춰 주려고 온 줄 아느냐?"
쾅-
한순간 의식이 끊어졌다 다시 이어졌다. 머리가 뒤로 날아가며 벽과 거세게 부딪쳤다. 알렌은 뒤늦게 자신이 공격당했음을 인지했다.
"커억…."
"네놈이 하자고 한 것이다."
다시 주먹이 날아온다. 알렌은 고개를 비틀었다. 그러나 그 행동만으로 짐승왕의 주먹을 피할 수는 없었다.
쾅-
"네가!"
쾅-
"내가 제자로 받아들인 네가!"
쾅-
"특훈을 하겠다고 말한 거란 말이다!"
쾅-
"이따위 장난질이 아니라!"
쾅-
순식간에 몇 번이나 가격당한 머리가 오레이하르콘 합금으로 만들어진 벽에 얼굴 자국을 만들었다. 멍하게 울리는 머리 위로 그가 멱살을 틀어쥐었다.
"제대로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왜 어르신의 시간을 빼앗았느냐."
알렌을 덮는 그림자 위로 거대한 압력이 쏟아졌다.
"...."
알렌은 말을 하지 못했다.
거인의 신체가 머리가 박살 나는 것을 막았다고 해도, 충격까지는 없애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빙글거리는 세상의 모습은 구역질이 날 만큼 어지러웠다.
"쯧, 보나 마나 그 생각 많은 성격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것이겠지."
그러나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너를 얼마 보지 않았지만, 확신하는 건 하나 있다. 넌 그 성격을 고치지 않는다면, 언젠가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알렌을 내던졌다.
쿵-
"에잉…, 쯧. 실력을 키우고 싶다기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왔더니."
실망감이 담긴 눈으로 알렌을 한 번 보던 그가 몸을 돌렸다.
터벅터벅-
발소리가 멀어진다.
"무슨…."
알렌이 이를 악물었다. 억눌린 목소리에는 짙은 분노가 담겨져 있었다.
"무슨 일인지…."
"허? 뭐라고?"
가이온이 걸음을 멈췄다.
꿈틀-
알렌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평소라면 그냥 내보냈을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상대는 팔강의 짐승왕이며, 알렌의 스승이고, 이번 일은 분명한 알렌의 잘못이 맞았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도 모르잖습니까!"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왜 확신하십니까."
알렌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머리는 욱신거렸고, 눈가에는 피가 터졌다가 회복됐는지 시야가 붉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른다고? 하."
짐승왕은 어이가 없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은 명백한 분노를 머금고 있었다.
"다시 말해 보거라. 뭐라고? 어르신이 뭘 어째?"
"알지도 못하면서, 뭘 아는 듯 지껄이냐는 말입니다."
"뭐? 크하하하하하하!"
그의 웃음이 점점 진해지며 광폭하게 변해 갔다. 짐승왕이 진정으로 분노한다. 그 모습에 알렌도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행태가 웃겨서 그랬다.
율리우스에게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해 이곳에 있는 주제에 팔강을 도발하는 자신이 웃겨서.
"하하하, 그래. 짐승의 방식이 먼저인데 어르신이 요즘 물렀지."
"왜, 자기 말을 증명할 수는 없으니 주먹이 먼저 나가는 겁니까?"
알렉의 이죽거림에 짐승왕의 얼굴이 굳었다.
율리우스가 아카데미에 없는 탓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의 말이 의외로 정곡을 찌른 것 때문일지도 몰랐고.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이 오갈 데 없는 감정을 풀 곳이 필요했다.
그게 설령 팔강이라고 한들.
"그럼 말해 보십시오, 제 말이 무엇…."
쾅-
알렌의 시야가 일그러졌다. 단숨에 몸이 벽면에 처박혔다. 이번에는 대비했기에 팔을 갖다 대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덜렁거리는 팔의 모습은 무슨 일이 생겼는지 능히 짐작하게 했다.
"그걸 말하기 전에 우선 예의를 주입시켜야겠구나."
"큽…."
짐승왕의 웃음이 진해졌다.
그의 몸이 전보다 더 빨라졌다. 알렌이 상체를 숙이며 발을 차올렸다. 아니, 차올리려고 했다.
"서열정리는 부족의 전통이니…, 그래 끝까지 가 보자꾸나."
알렌의 몸이 기역 자로 꺾이며 하늘을 날았다.
스승과 제자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무인도에 도착한 지 벌써 사흘이 흘렀다.
그 사이 율리우스는 섬의 중심으로 나아가며 벌써 몇 개나 되는 히든 피스를 얻은 상태였다.
잠자는 동안 대신 보초를 서 주는 인형, 맑은 물을 생성하는 항아리, 하루 한 번 근처에 있는 생존자의 위치를 알려주는 나침반까지.
물론 이것들은 실기 시험 때만 사용되는 히든 피스고 진짜 히든 피스는 하루 정도 더 들어가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레이나, 식사는 멀었어?"
"음…, 조금만 더 있으면 될 것 같아요."
율리우스는 코끝에 느껴지는 스프의 냄새를 맡으며 나침반을 발동시켰다. 나침반의 하나밖에 없는 바늘이 빠르게 돌아가며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동쪽? 여기면 절벽 지대 쪽이구나."
강한 흉수들만 득실득실한 절벽 지대에 떨어지다니, 누군지는 몰라도 불행한 것 같았다.
거리는 어느 정도 가깝겠지. 나침반의 바늘은 가장 가까운 곳의 생존자를 찾으니까.
만약을 대비해서 율리우스가 대기하고 있던 그때, 수풀을 스치는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레이나 내가 처리할게!"
율리우스는 그렇게 말하며 스톰브링거를 뽑았다.
이미 몇 번이고 이곳에서 사용해 본 감각이었지만, 새로 얻은 스톰브링거는 원본의 모조품이라고 해도 명검의 반열에 들 정도로 좋은 검이었다.
"그럼 나서 볼… 어?"
검을 들고 나서려던 율리우스의 몸이 멈춰 섰다. 수풀에서 튀어나온 것은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 게,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같이 있었던 여자였으니까.
"음식 냄새!"
갈색 단발은 산발로 변해 여기저기 뻗쳐 있었고,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는지 볼이 훌쩍해져 있었다.
"아벨린…?"
"음식 좀 나눠 주시면 안 될까요…? 율리우스?"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잠시 그를 보던 아벨린은 금방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 구세주를 만난 것 같은 얼굴로 율리우스를 껴안았다.
"율리우스…. 나 배고파, 제발 밥 좀 줘…!"
"알았어, 알았으니까 비켜 봐!"
며칠간 씻지도 못했는지 정수리에서 올라온 냄새에 율리우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냄새 난다고!"
"뭐?"
배가 고픈 와중에도 그 말만은 알아들었는지, 그녀의 행동이 멈췄다. 그리고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지며 급히 율리우스의 곁에서 떨어졌다.
"이, 이 나쁜 놈. 개놈아, 어떻게 여자한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어."
"아니… 그, 미안하긴 한데 진짜 참을 수가 없어서…."
아벨린이 다시 입을 열려던 그때, 그녀의 코앞으로 향긋한 냄새가 덮쳐 왔다.
"우선 이것부터 먹고 이야기하시지요. 식사 후에 씻을 곳으로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레이나! 넌 이제부터 내 은인이야!"
"모두 율리우스 공자님의 덕입니다."
그녀는 그릇을 통째로 마시듯이 들이켰다. 입천장에 데일 법했지만, 그녀는 허기를 채우는 게 먼저인지 신경 쓰지도 않는 기색이었다.
율리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처음 얻어야 할 건 삭풍의 가호인데….'
스톰브레이커랑 상성이 맞으니 자신이 쓰는 게 나을 것이다. 다음에 얻는 수중 신발은 아벨린한테 주는 게 나을 것이고.
그녀는 신수 해룡의 주인이니까.
계획을 세운 율리우스도 아벨린을 따라 스프를 먹었다.
역시 레이나가 만든 음식이어서일까.
맛있었다.
* * *
가이온의 팔이 알렌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당신도 모르지 않습니까!"
"뭘 모른다는 말이냐!"
그리고, 시야가 추락했다.
쾅-
알렌은 자신의 머리가 바닥에 박히는 와중에 그의 팔을 강하게 부여잡았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이제는 알았다.
악력은 자신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내가 뭘 느꼈는지! 어떤 선택을 해야 했는지! 뭘 포기해야 하는지!"
꽉 쥔 팔을 잡아당겼다. 가이온이 공격을 회피하기 위해 고개를 비튼다. 그러나 알렌은 그의 머리를 맞출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다.
쿠웅-
주먹이 가이온의 가슴에 꽂혔다. 가이온의 몸은 무슨 돌덩이로 되어 있는지 알렌의 주먹에도 강한 반탄력이 느껴졌다.
"크읍… 힘 하나는 장난 아니구나. 저번에 괜히 강한 척을 했어."
알렌도 원래 그렇게 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버려야 했다.
알렌이 얻으려는 건 율리우스였고, 그를 얻기 위해 버린 건 남은 모두였다.
"나라고 괜찮은 줄 아십니까! 아무 감정이 없는 것 같냐는 말입니다!"
강제로 당겨진 가이온의 얼굴에 알렌이 턱주가리를 날렸다.
후웅!
아. 주먹이 턱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빗나갔다. 가이온의 머리가 알렌의 안면을 들이박았다.
쿵!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단 한 번에 코뼈가 박살났다. 알렌이 가이온의 팔을 놓으려 했지만, 이제 그가 알렌을 놓아주지 않았다.
"네 사정 따위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다시 머리가 알렌의 안면을 두드렸다.
쾅!
"웁… 푸!"
박살 난 이빨의 파편이 흩어졌다. 알렌은 핏물을 머금어 그의 안면에 뱉어 냈다. 흠칫한 가이온이 공격을 멈춘 틈을 타, 알렌이 팔을 뽑아내 물러섰다.
가이온은 그런 알렌을 쫓아가지 않았다.
"저는 철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알렌은 그렇게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하며 뼛조각들을 털어 냈다. 알렌의 상처는 빠르게 치유되기 시작했다.
"괴물 같은 몸이군. 힘에, 반응속도에, 체력까지…. 정말 마법사가 맞냐? 그러니 마음껏 팰 수 있는 거지만…."
그는 알렌에게 맞은 곳이 살짝 부은 것을 발견하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알렌을 바라봤다.
잠깐 사이에 알렌은 모든 상처를 회복한 상태였다. 알렌은 거친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 모르면 닥치고 계십시오."
"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어르신은 네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려는 것뿐이다."
그 말에 알렌이 입을 악물었다.
"그리고 말도 웃기는구나. 뭐? 닥치고 있어? 감히 어르신에게?"
그의 팔찌가 빛나더니 거대한 대검으로 변했고, 가이온은 이를 땅에 깊게 박아 넣었다.
쿠웅-
"네가 포기할 때까지 나는 그만둘 생각이 없다. 그리고, 왜 그렇게 집착하느냐. 혹시, 찔린 구석이라도 있느냐?"
가이온은 수제 도발까지 해 가며 알렌을 비웃었다.
"네가 그러는 것도 평소 가슴에 쌓아 두니까 그런 거다. 생각이 많으니 계속 참다가 터지는 거지."
알렌은 베스틀라가 있는 방향으로 손을 향했다. 베스틀라는 그의 신호에 따라 그의 손에 착지했다.
"입을 막고 싶으면, 직접 막아 보거라. 물론…."
알렌의 눈이 깊게 가라앉음과 동시에 그에게 돌진했다. 가이온은 대검을 뽑아 들며 크게 웃어젖혔다.
"네가 그럴 만한 실력이 있다면 말이다. 하하하하하하!"
쾅!
베스틀라가 거대하게 변해 가이온을 내려찍었다.
2차전이 시작되었다.
제107화
한때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처음 회귀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린벨에 대한 악몽과 잊지 못할 기억들이 밤새 자신을 괴롭히던 때.
스스로 저지른 죄악에 대한 악몽이 먹물처럼 정신을 물들이던 시간에.
감정이 사라지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된다면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해야 할 일만을 하며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쓸데없는 동정심이나 기타 감정에 정신력을 낭비하지 않을 거라고.
'나'라는 인간이 이상에 가까운 철인처럼 하나의 길을 쭉 달릴 수 있을 거라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멍청했지.'
감정이 없다면 인형이나 다름없다.
욕구가 없다면, 움직일 동기가 없어지고, 움직일 동기가 없어진다면, 율리우스를 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건 알렌인가, 알렌이 아닌가.
설령 나약한 인간에서 벗어난 철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고 한들,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
다시 알렌이 바랐던, 그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알렌은 철인이 될 수 없기에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끔 후회가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범인은 늘 실수하고, 늘 후회를 반복하니까.
그러나 자신은 동화 속 영웅도, 이상 속 철인이 아니었기에 담아 둘 수밖에 없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지만 않으면 될 뿐이니까.
"이렇게 싸우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하하하!"
머리에 열이 차오른다. 전투를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지?
다섯? 열? 아니 하루는 지났나?
"어디에 정신을 파는 거냐!"
거대한 대검이 떨어져 내린다. 알렌은 베스틀라의 크기를 키웠다. 기둥만 한 검이 가이온의 공격을 막아 냈다. 거대한 검의 무게에 더해 가이온의 일격에 알렌의 무릎이 굽혀졌다.
"다시 한번 받아라."
가이온이 다시 한번 대검을 휘두른다. 알렌은 급히 베스틀라를 작게 되돌렸다.
쾅-
가이온의 대검이 바닥을 박살 내며 파편을 흩뿌렸다. 알렌은 온몸을 때리는 파편을 무시하고 몸을 강하게 틀었다. 귀가 잘리며 피를 흩뿌렸다.
"이제는 얼추 피하는구나!"
알렌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귀가 바닥에 떨어지며 피를 뿌리는데, 뭐? 얼추 피한다고?
"어딜 봐서 피했다는 겁니까!"
알렌의 몸이 앞쪽으로 기우는가 싶더니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한 바퀴를 회전한 칼날이 등을 노리던 대검과 맞부딪쳤다.
"아직 힘이 남아도는군."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분노가 사라진 상태였다. 이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 같은 모습. 그 모습에 알렌의 팔에 핏줄이 돋았다.
강하게 받아친 검을 가이온이 여유롭게 회수했다.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일을 이렇게…."
"아직도 모르겠나?"
가이온이 알렌의 말을 끊었다. 알렌이 그의 말에 담긴 진의를 파악하려 했다. 무차별적인 공격에 뜻이 있었다고?
"무엇을 말입니까."
"아직 멀었군."
알렌이 인상을 찌푸리자, 가이온은 한마디를 중얼거리더니 다시 쇄도했다. 이번에는 검붉은 오러가 맺힌 공격이 공간을 분쇄하며 다가왔다.
쾅!
순식간에 알렌을 강타한 오러가 몸을 상처투성이로 만들었다.
거인의 거친 피부 따위는 그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없었다.
뼈까지 끊고 나온 대검이 알렌의 반신을 으깼다.
알렌은 베스틀라의 크기를 키웠다.
그의 몸이 밀려 나가며 검째로 바닥에 갈렸다.
"어서 일어나라, 알렌. 내 입을 막고 싶다 하지 않았느냐?"
몸이 다시 회복된다.
끊어진 뼈가 붙으며, 망가진 반신이 회복되었다.
알렌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몇 번이고.
* * *
무인도에 머문 지 엿새가 흘렀다.
율리우스가 아벨린을 만나고 사흘의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지나갔다.
먼저 식량이 급격히 부족해지며 갈수록 전투가 심화되었다. 이제 식량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습격하던 학생들은 모두 탈락했고, 어느 정도 실력자밖에 남지 않았다.
이때, 율리우스도 기회를 잡아 많은 이들을 탈락시킬 수 있었고 이대로 간다면 순위권에 드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보충반에서 빼 올 주·조연들은 이미 다 뺐으니, 더 있을 필요는 없다.'
이제 마지막 학기 말의 대결만 잘 끝낸다면 무사히 A반에 안착할 수 있으리라.
율리우스는 무인도의 가장 큰 히든 피스이자, 가장 큰 점수를 얻을 수 있는 보스를 잡고 얻을 수 있는 일각수의 뿔이 필요했다.
'그것만 있으면 내 번개에 신성 속성도 추가할 수 있다.'
이미 번개에는 정화 속성이 있지만, 신성 속성까지 추가한다면 신성력이 사라진 이래 악마와 마왕에 가장 큰 천적이 될 것이다.
'…진실의 파편에서 봤던 내용이 진짜인지 대비할 필요도 있고.'
율리우스는 잠시 복잡한 얼굴로 원작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사태가 진짜일 때를 대비해 두기만 하면 된다.
진짜라면…, 각오를 해야겠지만, 거짓이라면 그냥 전력을 끌어 올릴 뿐이니까.
그렇게 섬의 중앙으로 가던 중 도망치던 야나를 구하거나, 깊은 구덩이에 빠져 사흘을 굶고 있었던 벨제크를 찾아내기도 했다.
나타샤와 헬레나와 만나기도 했지만, 그들은 각자 자신들이 이끄는 파벌과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보만 교환했다.
그들은 섬을 탐험하는 곳보다 서서히 영역을 넓혀 가며 몬스터를 잡으며 점수를 벌고 있는 것 같았다.
부상을 입고 있던 카트린느를 탈락하기 직전 만난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
율리우스는 막 마녀의 쉼터를 두고 다투던 학생들과의 전투를 끝내고 오두막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 아래에 있었을 텐데…. 이미 가져갔나? 시기가 아슬아슬한데….'
그러나 희망을 품고 다시 오두막을 탐색했고, 포기하려던 그때.
-덜커덕
서랍장의 가장 아래, 빈 것 같았던 서랍장이 열리며 나비 모양의 머리 장식이 나왔다.
"찾았다."
원작의 B반인가 C반의 학생이 찾았던 히든 피스.
일주일이나 지났으니 없어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율리우스가 오두막에서 기분 좋은 얼굴로 나오자, 카트린느가 단아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율리우스, 무슨 일 있어요?"
"아, 이것 봐 봐. 저기 안에서 찾았거든."
율리우스는 그녀에게 나비 모양의 머리 장식을 보여 주다가 잠시 고민했다.
'필요 없는데 줄까?'
수중 신발은 아벨린한테 줬고, 중간에 찾은 땅의 보주는 아냐한테 줬다.
나비 머리 장식의 효과라고 해 봐야 머리를 맑게 해 주고 정신력의 강화 효과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마법사에게 주는 것이 더 좋을 터.
마침, 그녀한테 선물을 준 적도 없으니….
"그거 줄까?"
"와, 정말요?"
"어차피 마법사만 쓸 수 있거든. 우리 중에 마법사라고 해 봐야 너하고 아냐 밖에 없…."
와락-
카트린느는 그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율리우스를 끌어안았다. 그녀에게서는 옅은 꽃향기가 났다. 무슨 냄새인지는 몰라도.
"고마워요, 율리우스. 당신이 저와 약혼을 파기했을 때는 정말 슬펐지만…."
그 후에 믿을 수 없는 소식도 들었지만.
"전 여전히 당신을 포기할 수 없어요. 고마워요."
난 당신을 포기할 수 없어요. 율리우스.
그녀의 소리에 율리우스는 승천하려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하며 뒤돌았다. 잘못하다가 다른 이들이 이 모습을 보면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크흠, 그, 고마우면 됐어. 그, 그럼 나는 벨제크가 잘 있나 좀 볼게!"
율리우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카트린느는 웃고 있었다.
평소처럼 환하게.
* * *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나흘? 닷새? 그 기간 동안 알렌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알렌의 신체는 그 정도의 허기 정도는 버틸 수 있다는 듯 굳건히 그의 의지에 따랐다. 원래라면 신체 대신 정신이 위험했을 상황이었지만….
'아직은, 괜찮군.'
정신의 피로가 조금 남아 있었지만…, 그래. 버틸 수 있느냐 없느냐고 묻는다면, 버틸 수 있었다.
모두 저번에 별의 세례 덕분이었다.
본의 아니게 육체와 정신의 한계 모두 시험하게 되었다.
후웅-
대검이 검붉은 오러를 머금고 떨어져 내렸다. 알렌은 이제는 기계적으로 공격의 범위를 계산했다. 짐승왕의 공격을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알렌이 익숙해질 때마다 단계적으로 위력을 끌어 올리는 모습을 보면 알지 않은가.
'흘려 낼 수 있을 만큼 흘려 내고, 왼쪽 어깨는 내준다.'
베스틀라를 비스듬히 땅에 받치며 크기를 키웠다. 알렌과 피격 직전, 한 박자 빠르게 부딪친 대검의 타점을 흩트렸다.
그 즉시 검의 크기를 죽이며 느려진 대검을 받아 냈다.
쾅!
강한 힘이 베스틀라를 밀어내며 알렌의 어깨를 꿰뚫었다.
그 상태로 알렌이 검을 내질렀고, 검 끝은 가이온의 목을 스쳐 허공을 지나갔다.
가이온이 다시 알렌의 눈을 마주 보며 물었다.
"아직도 모르겠냐?"
"뭘 말입니까."
가이온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알렌이 닷새가 지났음에도 여전한 것에 어이가 없었다.
3일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봤는데, 알렌은 너무 질겼다.
마치 한 번 이것과 비슷한 일을 해 본 적이 있다는 듯.
"너는 너무 생각이 많다. 내가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나?"
"…처음부터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멀었군."
가이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신체 능력을 한 단계 더 높였다. 며칠간 전투를 벌이며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알렌의 귀로 무엇이 잘리는 소리가 들렸다.
팔이 허전했다.
"다시 간다."
알렌이 이를 악물었다.
'언제까지 가능한가.'
언제까지라도 가능해야 될 것이다.
적어도, 짐승왕의 뜻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알렌이 검을 들었다.
* * *
"후우…, 다들 수고했어."
율리우스는 가볍게 운동을 끝낸 것 같은 느낌에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근처의 땅은 온통 검게 그슬린 자국이 넘쳐 났고, 말발굽 자국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 말발굽 자국의 끝에는 보통 말보다 몇 배는 커다란 횐 말이 목이 잘려 움찔거렸다.
무인도의 중심에 있던 보스, 유니콘이었다.
'본래 이렇게 쉽게 잡히는 몬스터가 아니긴 한데….'
율리우스의 눈이 주위 여성들에게 향했다.
아냐, 카트린느, 아벨린, 나타샤, 헬레나, 아이린, 레이나….
화려한 여성진 라인업.
'나 같아도 궁금해서 한 번은 와 보겠다.'
원작에서 하이젤이 이 보스를 잡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렇게 강하지 않은 주제에 속도는 얼마나 빠른지. 근처 남성이 수 킬로미터 내로 접근하면 알아채고 도망가는 게 말이 되나?
그러나 율리우스는 남성보다 여성의 비율이 훨씬 높았기에 긴가민가하고 접근하는 유니콘을 유인해 사살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럼 뿔은 약속대로 내가 가져간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렇게 하거라."
율리우스의 말에 대답한 것은 나타샤와 헬레나였다.
그녀들은 아흐레까지는 파벌을 이끌며 행동했지만, 두 파벌 간의 사소한 갈등으로 인해 전투가 일어났고 결국 공멸했다.
두 명도 끝까지 싸우던 걸 율리우스가 발견하고 데려온 참.
무인도 중앙의 보스를 죽인다는 말에 그들은 유니콘 뿔을 양보하는 대신, 전투에 도움을 주기로 약속하고 중재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래요? 아직 실기 시험이 끝나기까지 하루 남았는데. 계속 몬스터 잡을 생각이에요?"
"글쎄…."
카트린느의 의견은 특별한 게 없었지만, 정석적이었다.
그가 만약 평범한 학생 중 하나였다면 그래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율리우스는 자신이 독보적인 점수를 기록했으리라 확신했다.
13일간 발견한 히든 피스 18개.
도움이 되는 이런저런 영약 5개.
유니콘 뿔 같은 전투 후의 부산물 4개.
여기서 가치가 낮은 것은 제외했다. 만나면 만나는 대로 죽였기에 점수가 얼마나 쌓였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더해서 학생들 간의 다툼에 끼어들어 탈락시키기도 하고, 땅굴이나 지하에 숨겨 둔 보상을 찾아내기도 했다.
거기에 다른 학생을 구출하며 이끌기까지.
그야말로 생존과 조난 그리고 난전이라는 주제에 걸맞은 활동을 했으니 누구도 그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본래 지금쯤 유니콘을 잡았을 하이젤은 어디 갔을까.'
마리아랑 은근히 자주 부딪쳤으니까 지금쯤 바다 아래에 있는 히든 보스를 잡으러 갔나?
율리우스도 거기까지는 차마 갈 엄두가 나지 않은 곳이지만 그 두 명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하…. 그럼 이제 쉴까? 남은 시간도 있고, 점수도 얻었겠다."
캠핑을 해도 괜찮겠지.
아니면 남은 히든 피스를 회수하러 가도 되고.
율리우스는 괜히 학창 시절에도 못 느꼈던 두근거림을 느끼며 웃었다.
제108화
한참의 시간이 더 지나갔다.
어느 순간부터, 알렌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아흐레였던가? 아니면 열흘? 잘 모르겠다. 알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저 검을 쥐고 상대를 응시했다.
알렌의 정신은 생각보다 또렷했다. 아니면 내성이 생긴 걸지도 모르겠다. 이번 한 번 비슷한 일을 해 본 적이 있지 않나. 버티는 것은, 버티는 것쯤은 그가 제일 자신 있는 분야였다.
버티고, 버텨서, 일발 역전의 한 번을 기다리는 것.
그게 지금껏 한 일이었으니까.
"왜, 더 안 하시렵니까."
목에 먼지가 꼈나? 물 한 모금 안 마신 탓인지, 목구멍을 통과해 나오는 소리가 굵직했다.
"…너는."
다시 움직이려나?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한다. 이미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해서 봤으니 이제는 예측할 수 있다. 있어야 했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군."
가이온의 어조에서 느껴진 건 의외의 감정이었다.
찬탄.
"애송아, 네 그 고집스러운 정신력은 인정해야겠다는 것을."
수면과 식욕 모두를 억제한 채, 휴식 하나 없이 열흘간 전투를 이어 갈 수 있다고?
가이온은 광기에 가까운 그 정신머리 하나만큼은, 인정했다.
"칭찬입니까?"
"칭찬? 크흐, 칭찬은 칭찬이지."
이제껏 알렌을 몰아붙였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가이온의 목소리에 알렌은 경계심을 끌어 올렸다.
"네 고집이 어르신의 예상을 뛰어넘었다는 의미니까."
베스틀라를 잡는다. 언제든지 반응을 할 수 있도록.
몸의 상태는 좋은가? 좋지 않다. 그러나 신이 빚은 것 같은 육체는 최소한의 휴식으로도 상태를 회복했다.
그러니 전투를 이어 나갈 수 있다.
"본래는 항복할 때까지 실력이나 봐줄 생각이었다. 그 후에 그 신념에 가까운 고집을 뜯어고치려 했지. 그런데…."
목덜미의 가는 솜털이 그가 말을 이어 나갈수록 곤두섰다.
순간적으로 손이 떨렸다. 알렌의 동공에 다른 사물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바닥이 사라지고, 벽이 없어진다. 천장이 사라지고, 주위 공간이 지워졌다.
최종적으로 남은 것은 하나였다.
짐승왕 가이온.
그 혼자만이 알렌의 동공에 자리했다. 짐승이 흉악한 미소를 지었다.
"모르겠다. 네 상태를 보니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단 말이다. 이주? 한 달? 어쩌면 그 이상도 우습게 버틸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가이온의 주위로 공간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말 그대로의 광경이었다. 그의 존재감에, 주위의 공간이 일렁이며 굴절되었다.
소름이 돋았다.
지금의 가이온은 지난 열흘간 상대했던 그와 비교할 수 없었다.
그게 실력 전부를 내보인 게 아니었다고? 그가 봐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만큼의 힘을 남겨 두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제대로 박살 내주마.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하루는 갈까? 버텨도 이틀이 최대겠지.
"그 전에 다시 묻자, 내가 왜 이러는지 알겠냐?"
알렌은 이를 악물고 검을 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제 실력을 봐주기 위해서입니까?"
가이온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웃었다.
"이번에도 틀렸다."
쾅-
알렌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 * *
"야, 바이론! 제대로 잡아!"
"주군, 네 알겠습니다!"
바이론은 달려가는 세 머리 토끼를 붙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율리우스 일행은 몇 개로 나뉘어 추가적인 보상과 히든 피스를 얻기 위해 흩어진 상태였다.
제비뽑기의 결과로 율리우스는 오랜만에 바이론이랑 단둘이서 행동하게 되었다.
"어때, 뭐 뱉은 거 없어?"
"확인해 보겠습니다."
바이론은 가지고 다니던 단검으로 세 머리 토끼의 배를 갈랐다. 배 안에는 작은 상자가 들어 있었다.
"제가 열어 보겠습니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주군!"
바이론은 오랜만에 율리우스와 같이 다니게 되자 신난 기색이었다.
페른 영지에서 그의 모습을 보게 된 후, 그는 율리우스를 주군으로 섬기게 되었다.
비록 마력을 사용하고, 프라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기사였지만 그는 율리우스를 따르며 더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은 상태였다.
"안 그래도 되는데…."
율리우스는 저 상자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았다.
[행운의 토끼 반지(C)]
하루에 한 번! 기분 좋은 행운을!
길을 가다가 돈을 줍거나, 실수로 복권을 샀더니 4등이 당첨되거나 같은 사소한 행운을 하루에 한 번씩 일으키는 반지.
개인적으로 율리우스는 행운 같은 불확실한 변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만큼, 저런 행운 관련 능력치를 올려 주는 물건은 최대한 많이 얻어야 했다.
바이론이 상자를 열었다.
순간적으로 환한 빛이 나며 눈앞이 빛났다.
"제가 막겠습니다! 물러서십시오!"
그는 그렇게 외치며 상자를 자신의 배 아래에 놔두고 엎드렸다.
율리우스는 그 우스운 장면을 멍하게 바라봤다. 아니, 수류탄도 아니잖아….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듬직한 기사인 줄 알았는데.
'원작에서도 유명했고.'
무려 마나 기사의 몸으로 인류의 창 더글라스 아벨이 이끄는 베르세르크 기사단에 입단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런데 여자들에게 약하고, 과잉 충성으로 저러는 모습을 보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바이론 됐으니까 상자나 줘."
"아, 옙! 알겠습니다."
율리우스는 그가 내미는 상자를 받고 안에 있는 반지를 꺼냈다.
세 마리의 토끼 머리 장식이 되어 있는 반지.
개인적으로 이런 기괴한 디자인을 상상한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케르베로스도 아니고 토끼 머리 셋이라니.
"빨리 다른 곳으로 가자, 실기 시험 끝나기 전까지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해."
"따르겠습니다."
바이론의 충성은 부담스럽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만큼 자신을 믿는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렇게 총 14일이 걸린 실기 시험의 끝이 다가왔다.
* * *
알렌은 정신이 몽롱했다.
아니, 정신뿐만이 아니었다.
몸과 정신 그 모든 곳이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같은 꼴은 거인의 유적지에서 용의 노심을 만들기 위해 고행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알렌이 힘없이 무릎 꿇었다.
손에 든 검은 힘이 풀려 놓쳤다. 베스틀라는 이미 무릎 근처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온몸의 근육에 돌던 활력은 어디로 사라진 듯 찾을 수 없었고, 거칠게 뛰던 노심도 언제 그랬냐는 듯 허약했다.
정신력은 아마, 처음으로 마법이 아닌 다른 행동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움직임의 예측.
팔강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쫓기 위해 감지력을 뻗었지만, 결국 단 한 번도 예측할 수 없었다.
오히려 감지 범위를 속이는 그 기술의 요체를 확인했다.
'감지력은 감지 범위 상대의 근육의 움직임을 정보로 보낸다. 그러니 감지력이 몸에 닿는 그때 근육에 순간적인 힘을 줘 잘못된 정보를 보낸다.'
그야말로 미치광이 같은 기술.
저번에 그가 가만히 서 있었음에도 알렌이 달려온다고 예측한 이유는 그가 그 서 있는 순간마저도 달릴 때 쓰는 근육에 힘을 가한 것이다.
가이온이 보였다. 팔강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 짐승왕. 살아 있는 신화.
그에게서 답을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몽롱해진 정신은 꿈결 같은 현실 속에서 눈앞의 것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런 존재를 거쳐, 다시 자신에게로, 그리고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밖에서, 가이온에게서 해답을 찾을 수 없으니 답은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다.
'자신은 왜, 이런 꼴이 되었나.'
처음에는 그저 감정을 정리하기만 할 생각이었다.
율리우스와의 관계를 저버릴 수는 없다. 그러니 자신이 참으면 모든 게 겉으로 보이는 갈등은 생기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왜.'
율리우스가 사라지고, 감정을 정리하려던 때.
너희들이 나타났지?
마크, 루이, 노아.
그래, 알렌이 이렇게 가이온과 다투게 된 계기에는 그들이 있었다.
알렌은 그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게 되고, 사정을 알게 됨으로써 알렌은 자기 자신의 모순을 직시하게 되었다.
자신이 구하지 않음으로써 죽은 그들을 보며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고.
도움을 주지 않았기에 자신을 원망하는 노아를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를 기억한다고 했다. 기억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와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 나는 그가 악마의 제물로 죽었다는 것을 몰랐다.'
그야말로 우스웠다.
자신의 다짐도 우스웠고.
그러면서도 율리우스에게 복수심을 가진 자들을 모은다는 것도 우스웠다.
결국, 자신의 모순을 찌른 가이온에게 화풀이를 한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은 순식간에 죽었을 것임에도.
그렇게 생각의 정리를 끝마칠 무렵, 가이온이 입을 열었다.
"내가 왜 그랬는지 알겠느냐?"
"…그냥, 입니까?"
알렌의 대답에 가이온은 만족스럽다는 듯 흉악한 미소를 짓더니 답했다.
"그래, 아무런 이유가 없다."
겨우 정답에 다다른 그의 앞에 가이온이 철퍽 주저앉았다.
"너는 너무 생각이 많다. 그냥 행동하면 될 것을, 그 행동 하나를 하는데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하지."
"그게 귀족입니다."
항상 고뇌하고, 선택에 대한 결과를 예상하며, 행동 하나 말 하나에 의미를 담는 것.
지금까지 그렇게 배워 왔고, 그렇게 실천하며 살아 온 삶이었다.
"아니, 그건 그냥 겁쟁이일 뿐이다. 미래의 일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범위 안에서만 일을 처리할 뿐이지."
알렌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럼 생각 없이 행동하라는 말입니까? 그렇게 해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지…."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
그럼 뭐가 중요하다는 건가. 최소한의 행동으로 최대한의 이득을 얻고, 잠깐의 인내로 달콤한 과실을 얻는 게 무엇이 나쁜가.
"그럼, 이번에 그렇게 생각을 많이 해서 뭘 얻었느냐."
그 말에 알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모습에 가이온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일어난 자살 사건, 그것 때문에 네가 이렇게 된 거겠지."
그 말에 알렌은 정곡이 찔린 듯 멈칫했다.
"네가 집중하지 못한 게 그 시기니 그것밖에 없어서 그렇다. 난 네가 그놈들과 무슨 관계인지 신경 쓰지 않는다. 알고 싶지도 않고, 단지 네 행동이 마음 들지 않을 뿐이지."
가이온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왜, 고민하는 거냐?"
"…무엇을 말입니까."
"뭐 그런 이유가 아니냐. 막을 수 있었는데, 막지 못했다느니, 그들이 죽은 건 내 책임이라느니."
알렌은 정확히 분석한 그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생각만 하다가 아무것도 못 하지 않았냐."
가이온은 한마디도 못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살아가는 건 의외로 단순하다."
"그게 무슨…"
"내가 처음에 너를 공격한 이유가 뭔지 아느냐?"
"아무 이유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알렌의 대답에 가이온은 짓궂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처음엔 화가 났다. 감히 애송이 주제에 어르신에게 화풀이를 하니 화가 안 날 수 있겠느냐. 하지만…."
그는 웃음을 터트리며 곧바로 자신의 말을 부정했다.
"그것도 3일이라도 갔나? 어르신이 애송이한테 진심으로 분노할 것 같으냐? 그저 오랜만에 몸풀기 정도 되는 상대라서 싸우고 싶었던 거다."
알렌은 태연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때로는 생각이 아닌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는 것도 필요하다."
"…그게 무슨 결과를 불러올지 몰라도 그렇습니까?"
"그럼 준비가 부족했단 뜻이지. 너는 그 정도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허술하게 계획했나?"
아니었다. 알렌이 지금까지 쌓아 온 건 그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다.
"그럼 그걸로 된 거지 뭘 그렇게 따지느냐. 세상에 완벽한 것이 어디 있다고."
"결국, 그 말은 상황마다 임기응변으로 행동하라는 것 말이랑 뭐가 다른 겁니까…."
"그게 또 그런가? 크하하하."
알렌은 웃는 그를 바라보다 맥락 없이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럼 하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그러면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흘러가게 둬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지."
그는 그렇게 웃으며 알렌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네 선택이다. 네 마음대로 해라."
알렌은 일어나려는 그에게 짧게 물었다.
"왜 그런 삶을 사는 겁니까."
알렌의 물음에 그의 답은 간단했다.
"환하게 뜨거웠다가 지려 한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널찍한 등이 알렌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불꽃처럼."
가이온은 알렌을 한차례 돌아보며 씨익 웃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게 초원의 삶이거든."
제109화
신입생들이 실기 시험을 끝마치고 돌아왔다.
먼저 탈락한 학생들은 남은 2주 동안 실기 시험이 끝마칠 때까지 있다 같이 돌아오게 되었다.
율리우스는 그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점수를 기록했다.
사람들을 이끌고 무인도 중앙에 있는 보스를 쓰러트렸고, 조교들이 여름날 땀을 흘리며 준비한 히든 피스 대부분을 수거하기도 했으니까.
거기에 학생들과 전투를 벌이며 탈락시키고, 많은 몬스터까지 죽인 그는 이번 시험의 주역이었다.
비록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아 필기시험이 아슬아슬했지만, 그 정도는 세 번째 학기 말 대련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계산도 섰다.
알렌은 그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멀찍이 바라보고 있다가 기숙사로 돌아왔다.
원래의 그였다면 돌아오는 율리우스를 기쁘게 맞아 주었을 것이다.
그게 알렌이 세상에 만들어 둔 자신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생각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순, 생각, 계획. 그리고….'
[네 선택이다. 네 마음대로 해라.]
가이온의 마지막 말이 알렌의 행동에 제동을 걸었다.
그는 방에 박혀 오랜만에 명상을 시작했다.
용의 노심을 얻은 이후로 마력을 모을 필요가 없어졌고, 강대한 신체 덕분에 명상으로 잠을 줄일 필요도 없었기에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명상을 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는 그사이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아칸더스, 소네드, 율리우스, 심지어 레이첼까지.
같은 기숙사에 지내는 이넬리아조차 알렌이 들어간 방의 문을 열 수 없었다.
그렇게 알렌이 틀어박힌 사이, 예정대로 중간고사의 마지막 꽃이자 구경거리인 학기 말 대련이 다가왔다.
학기 말 대련은 일주일 동안 진행된다.
대련의 규칙은 간단했다.
학생 한 명당 총 다섯 번의 대련을 시작한다.
대련의 상대는 고급반, 상급반, 중급반, 하급반, 보충반 총 다섯 개로 나누어지는 만큼 한 반의 한 명씩 상대하게 된다.
거기서 높은 반의 학생에게 승리를 한다면, 등수가 올라가고 자신보다 낮은 반 학생에게 패배한다면 등수가 내려간다.
이러한 규칙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어떻게든 지지 않기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껏 중급반 학생이 상급반 학생을 이겼는데 체력 관리를 못 해서 하급반에 패배하면 어쩌겠는가.
잘하면 상급반에 올라갈 수 있겠지만, 아쉬운 결과로 중급반에 잔류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번 대결의 묘미는 얼마나 전략을 잘 짜고 체력 안배를 잘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학기 말 대련이 준비되면서 축제의 준비도 같이 준비되었다.
학기 말 대련 자체가 아카데미에서 외부에 공개되는 몇 없는 행사인 만큼 외부인도 참가할 수 있게끔 축제를 열게 되었다.
실기 시험이 지난 지 3일이 지났을 때쯤, 드디어 아카데미 본당에서 무작위로 대결 상대가 정해졌다.
이사장이 공개적으로 마법을 발동했으며, 수천 명에 달하는 아카데미생 모두의 앞으로 대련 상대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배달되었다.
두려울 정도의 공간 제어 능력.
알렌도 같은 공간 계통이라지만 그녀가 공간을 다루는 능력은 추종을 불허했다.
'마치 선천적인 것 같은….'
후천적으로 공간 계통의 마법 능력을 익혔다고는 상상조차 되지 않을 만큼 그녀의 마법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알렌은 대전 상대가 적힌 종이를 펼쳤다.
A - 길레이 드림턴
B - 보얀 카틀
C - 루카
D - 메힐 다즈
누군가 일부러 조정했는가, 아니면 우연인가. 그의 눈이 한순간 마지막 보충반 학생의 이름에 닿았다.
E - 율리우스 라인하르트
알렌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어떤 선택을 할지 정했다. 알렌은 눈을 감았다. 결심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 * *
"자, 이번 신입생의 학기 말 대련을 시작합니다아아아아!!!"
거대하게 나눠진 여러 경기장 곁에 수많은 관중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
-빨리 시작해라아아!
-드디어!
대부분의 관중이 아카데미를 떠나라 환호성을 질렀다.
일 학년의 대결은 첫날, 이 학년의 대결은 둘째 날, 삼학년의 대결은 셋째 날부터 시작되는 만큼 대련이 아닌 축제를 즐기는 사람도 많았지만, 관중석은 거의 만석에 가까웠다.
"율리우스, 이제 힘을 숨기지 않을 생각입니까?"
율리우스는 눈을 빛내며 다가오는 나타샤에게 답했다.
"…숨긴 적도 없는데?"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무인도에서 그만한 실력을 보유해 놓고선, 보충반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녀의 정상적인 물음에 율리우스는 잠시 생각했다.
'…보충반의 기연을 얻으러 일부러 갔다고 하면 미친놈 취급당하겠지?'
그렇다면 그녀의 착각에 어울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맞아. 이제 숨길 이유가 없어졌거든."
"…혹시 그 이유가 당신 형님과의 후계 다툼 때문입니까?"
율리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장단에 맞춰 주는 거지만, 쓸데없는 오해를 불어넣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역시 그랬나."
그러나 그녀는 그런 율리우스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속삭였다.
"당신은 자신의 편이 되어줄 이들을 모으고 있는 것이군요."
보충반 학생 주제에 선배를 이기거나, 신수를 부활시켜 이목을 집중시키거나, 유적 실습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하거나.
"모두 알렌 공자와 같은 반에서 경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아니, 그게…."
그렇게 되나?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묘하게 설득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제 힘을 드러내는 이유는, 같은 반에 있더라도 세력에 밀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어서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뒤쪽을 눈짓했다.
그곳에는 바이론, 벨제크, 마테우스를 비롯한 그가 모집한 조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디에서나 빛날 법한 재능을 가진 이들을 모으고 또…."
그녀가 다른 곳을 눈짓하자, 율리우스도 그녀의 고개에 따라 시선을 돌렸다.
여성들이 있는 곳에는 헬레나, 아이린, 아냐, 카트린느, 아벨린, 레이나.
"그리고 저까지 일부러 여성들을 모으고 있잖습니까. 심지어 연정을 가진 게 뻔히 보이는 분도 보이는데 말입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녀의 눈은 율리우스가 반드시 그렇게 했으리라는 확고함이 여려 있었다.
"원래는 조용히 관찰만 할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녀는 라인하르트 옆의 영지에 있기에 정보를 모두 구해 왔다면서 속삭였다.
"당신은 어린 나이를 기점으로 망나니로 행동하더군요. 아마, 그때가 후계에 대한 첫 다툼이었을 겁니다. 그 후 당신은 망나니라는 악명을 통해 알렌 공자에게 안전을 보장받겠지요. 흔한 일입니다."
율리우스는 뒷걸음칠 치기 시작했다.
뭐? 망나니인 척 연기를 해? 알렌 형님에게 안전을 보장받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자신이 아는 원작 속 알렌의 설정은 서클이 부서진 동생의 몸을 치료하기 위해 악마 계약자로 활동했었다.
그러다 하이젤에게 당했지만, 그런 그의 우애를 율리우스가 의심할 이유는 없었다.
"나, 나는 잠시…."
[다음 선수! 보충반, 율리우스 라인하르트 학생 대기실로 오시기 바랍니다.]
"이제 내 차례네, 그럼 나중에 이야기하자!"
율리우스는 동아줄을 발견한 얼굴로 급히 경기장으로 이어진 대기실로 향했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미소짓고 있던 나타샤는 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무표정하게 변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뒤로 다가온 레이나를 향해 물었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레이나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수긍하자, 나타샤는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나요?"
그녀의 기억에는 아직도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신수의 숲이 흑마법사들에게 점거되어 마경으로 변해 버렸을 때.
그때 대수림에서 강자들을 보냈다면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돌아가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요귀 살바토르가 일부러 날뛰어 엘프 왕국이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신수의 숲을 정화하는 공을 세우게 하고, 이제는 그의 형과 일부러 갈등을 일으키게 만드는 게 소용이…."
"그만."
레이나는 차가운 얼굴로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잘 기억하세요, 나타샤 제1 공주. 저희는 거래 관계입니다. 선을 지켜 주시길 바랄게요."
한동안 눈싸움이라도 하듯 서로를 응시하던 그녀들은, 나타샤가 한 발자국 물러남으로써 상황을 끝마쳤다.
"...유의하겠습니다."
"자꾸 그런 식으로 알아보시려 든다면, 거래 상대를 바꾸면 될 일이에요. 저희와 거래를 원하시는 분들은 많으니까요."
그녀의 협박 비스무리한 말에 순간적으로 나타샤의 눈에 감정이 깃들었으나, 이내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어마마마나 팔강인 살바토르 마저 거래 상대로 받아들이는 이들이다.'
그렇다면 자식은 아직 그 거래에 끼어들 자격이 되지 못했다.
엘프 왕국의 다음 여왕인 제1 공주 일지라도.
"다음부터 조심하겠습니다."
그녀가 리브레 왕국의 예절에 맞춰 고개를 숙였다. 레이나는 언제 냉혹한 표정을 보였냐는 듯 평소에 율리우스에게 보이던 미소를 지었다.
"따지고 보면 저희는 같은 처지라 할 수 있으니, 오래 갈 수 있기를 바랄게요."
"저도 그러기를 바랄게요."
레이나는 대화가 끝나자 미리 차갑게 식혀 둔 수건을 들고 몇 분 되지도 않아 첫 경기를 끝마친 율리우스에게 향했다.
"공자님!"
"아, 레이나. 고마워."
"저는 공자님의 시녀잖아요."
나타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최대한 연기를 한다지만, 레이나의 모습은 어느 쪽이 진짜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 * *
알렌의 첫 번째 경기 상대는 A반의 길레이 드림턴이라는 학생이었다.
거대한 도끼로 유명한 그의 가문은 처형자라는 이름이 대대손손 내려올 정도로 유명한 가문이었지만, 아쉽게도 그의 상대가 좋지 않았다.
"아니, 내가 힘에서 밀…."
쾅!
자신감 있게 선조에게 물려받은 선천적인 힘과 비전으로 상대를 끝장내려던 길레이는, 자신보다 더 강한 완력의 알렌에게 저항할 새도 없이 날아갔다.
[A반의 길레이 드림턴! 장외패!]
-와아아아아!
-저 학생이 팔강의 제자라고?
-이 주 만에 저렇게 변했다는데?
알렌은 상대에게 어떤 틈을 보여 줄 생각이 없었다.
다음 상대인 B반 보얀 카틀도, C반 루카도, D반의 메힐 다즈도.
알렌은 그들이 뭘 준비할 틈도 없이 단 한 방에 끝내 버렸다.
원래 마법 강의를 들으며 보조적으로 검을 익힌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팔강의 제자가 된 후 육체적으로도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 보이자 술렁거리는 건 당연했다.
-역시 팔강인가….
-무슨 방법을 썼을까요?
-짐승왕의 특별한 비전이겠지.
그러나 그 모든 의심과 성장 속도 역시 팔강의 제자란 신분 하나로 쉽게 넘어갔다.
다른 이들이 보는 팔강의 제자란, 그런 의미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신기할 것이 없는 존재.
이렇게 순식간에 네 번의 경기를 연승하며, 알렌은 마지막 상대와 대련하러 가는 통로에서 생각했다.
원래의 알렌이라면, 며칠 전의 자신이라면 이곳에서 어떻게 했을까.
막상막하의 실력을 보여 주다, 결국 안타깝게 패배했을 것이다.
그것이 외부의 시선에 보여 주려던 알렌의 계획이었다.
그 후 율리우스와 앙금이 없다는 걸 과시하며, 함께 경기장을 내려가고.
비록 E반에는 졌다고 하지만, 네 번의 연승 그리고 팔강의 제자란 신분이 있으니 A반에서의 자리도 쉽게 따낼 수 있었다.
[E반 율리우스 라인하르트의 상대는! 이건 운명의 장난인가요!]
그래, 본래의 알렌이었다면.
[A반 알렌 라인하르트! 서로의 실력이 비등하다 생각되는 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