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정치의 기틀 마련
세종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즉,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양성되었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이 이루어졌다. 또한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貢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해 민족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이 많은 일들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세종이었다. 세종은 태종이 이룩한 왕권과 정치적 안정 기반을 이어받아 이를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리고 세종 4년까지는 태종이 상왕으로 생존해 영향을 주었다. 태종은 1414년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해 의정부 대신의 정치적 권한을 크게 제한하고 왕권의 강화를 이룩하였다.
세종은 이러한 정치체제를 이어받아 태종대에 이룩한 왕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소신 있는 정치를 추진할 수 있었다. 세종대는 개국공신 세력은 이미 사라지고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유자적(儒者的) 관료와 유자적 소양을 지닌 국왕이 서로 만나 유교정치를 펼 수 있었던 시기였다.
세종대의 권력구조나 정치적인 분위기는 세종 18년을 전후로 해 양분된다. 즉, 세종 18년에는 육조직계제가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로 바뀌면서 정치체제상의 변혁이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는 세자(世子: 뒤의 문종)로 하여금 서무(庶務)를 재결(裁決)하도록 하였다. 또한 정치적 분위기는 더욱 안정되고 유연해졌다.
따라서, 언관(言官)과 언론에 대한 왕의 태도도 그 이전과 달리 훨씬 자유롭고 부드러워져서 이들에 대한 탄압이나 징계는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치적 분위기가 변한 원인은 유교정치의 진전에서 찾을 수도 있다.
즉, 세종 전반기에 집현전을 통해 많은 학자가 양성되었고, 그 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유교적 의례·제도의 정리와 수많은 편찬사업을 펼쳤다. 따라서 유교정치 기반이 다져졌다. 세종 18년에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의 이행도 유교정치의 진전으로 볼 수 있다.
세종 후반기에는 왕의 건강이 극히 악화되었으나, 의정부서사제 아래에서 군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가운데 성세를 구가한 시대였다. 황희(黃喜)를 비롯한 최윤덕(崔潤德)·신개(申槪)·하연(河演) 등 의정부 대신들은 중후하고 온건한 자세로 왕을 보좌하였다.
그리고 관료들의 정치 기강도 그 전후에 비해 건전했으며, 언관의 언론도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구현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이러한 정치체제와 정치적 분위기도 세종시대를 이룩하는 데 작용한 요소였다. 한편, 집현전은 세종과 세종대를 운위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기관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종 [世宗]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