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현전은 중국과 고려시대에도 있었고, 조선 초 정종대에도 설치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집현전이라고 하면 조선시대의 세종 2년 3월에 설치한 것을 의미한다. 이 때에 집현전을 설치하게 된 목적은 조선이 표방한 유교정치와 대명(對明) 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에 있었다.
이에 따라, 집현전에서 유망한 소장학자들을 채용해 여러 가지 특전을 주었다. 특히,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내려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곳에 소속된 관원은 경연관·서연관·시관(試官)·사관(史官)·지제교의 직책을 겸하였다.
그들의 직무는 중국의 옛 제도를 연구하거나 각종 서적의 편찬사업에 동원되는 등 주로 학술적인 것이었다. 왕은 이들이 학술로써 종신할 것을 희망했으므로 다른 관부에는 전직도 시키지 않고 집현전에만 10년에서 20년 가까이 있게 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쟁쟁한 인재를 배출했는데, 이러한 인적 자원이 바로 세종대의 찬란한 문화와 유교정치의 발전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유교적인 의례·제도의 정리는 유교정치의 기본이 되는 작업으로서, 이를 위해 중국의 옛 제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였다.
중국의 옛 제도에 대한 관심은 개국 초부터 있어 왔으나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바로 세종이 즉위한 이후부터였다. 그 중심이 된 기관도 예조·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집현전 등이었다.
이러한 기관에서 국가의 유교적 의례인 오례(五禮: 吉禮·嘉禮·賓禮·軍禮·凶禮)와 사서(士庶)의 유교적 의례인 사례(四禮: 冠禮·婚禮·喪禮·祭禮) 등 유교적인 제반 제도가 정리되었다. 실제로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의례·제도의 틀은 세종대에 짜여져서 유교정치의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이 때에 정리된 의례·제도의 틀은 중국의 옛 제도에 따른 것이었으나, 왕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이를 비판·연구해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주체성을 견지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종 [世宗]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