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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 @갸올

프롤로그

"이제 하루 남았나······."

익숙한 로그인창에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며 가볍게 혀를 찼다.

게임의 서비스 종료.

공지가 뜬 건 몇 달도 전이었지만, 오늘로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유독 마음이 허해지는 느낌이었다.

라키로니아 사가, 약칭 라사는 내가 학창 시절부터 푹 빠져 장장 8년을 넘게 플레이해온 RPG 게임이다.

뛰어난 그래픽과 몰입감 높은 스토리, 광활한 맵과 세계관, 비교적 참신한 시스템들로 한때는 제법 인기를 끌었던 게임.

현재는 퇴물 게임으로 낙인 찍힌 지 오래고 골수 중의 골수 유저들만 남아있는 상황이지만, 인생의 3분의 1 가까이를 쏟아부은 이 게임은 뭐가 어쩌든 내 일상과도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런 게임이 끝내 서비스 종료를 알려온 것이다.

전조가 없던 것도 아니고, 솔직히 언제 종료를 해도 이상할 건 없었지만 허무함과 배신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캐릭터를 움직여 창고를 찾아가 보관된 아이템들을 화면에 띄웠다. 옆쪽에는 인벤토리도 띄웠다.

10년 가까운 시간을 플레이하면서 쌓인 수많은 아이템들.

그냥 평범하게 좋은 것들도 있었고, 엄청나게 좋은 것들도 있었고, 게임에서도 손에 꼽을 보물들도 있었다. 새삼 모아서 보니까 많기는 더럽게 많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캐릭터 정보창과 스킬창도 켰다.

[Lv. 99]

라사의 레벨 시스템은 레벨이 높아질수록 레벨업이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워지는 방식이다.

더군다나 80레벨부터는 단순히 경험치뿐 아니라 온갖 까다로운 업적들까지 필요했기에 고인물의 상징이기도 했다.

99레벨이면 아직 그 위에 도달한 유저가 없는 라사의 비공식 만렙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1레벨이 아쉬울 뿐이었다.

'100레벨은 찍어보고 싶었는데.'

하늘을 찌르는 스탯 수치와, 온갖 스킬들,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한 장비들까지 줄줄이 나열되어 화면에 떠올랐다.

웬만큼 고인 유저들도 명함을 못 내밀 화려한 캐릭터 스펙이었으나 이제 와서는 다 부질없을 뿐이었다.

이깟 데이터 쪼가리들이 뭐라고 뭐 그리 모으고 강화하는 데 애를 써온 건지.

"시작해볼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흥미와 기대감이 솟아오르는 걸 느끼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이것들을 전부 화면에 띄운 건 내 마지막 호기심을 위해서였다.

마우스 커서가 향한 곳은 창고 구석 칸에 박혀있던 한 상자 형태의 아이템이었다.

[혼돈의 상자]

세상 만물을 융합할 수 있는 혼돈의 상자.

아이템, 골드, 스킬, 스탯 등 캐릭터가 소유하고 있거나 캐릭터를 구성하는 무엇이든 재료로 설정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등급: ★★★★★★★★★(9성)

라사는 보통의 다른 RPG 게임들에 비해 굉장히 자유도가 높고 개성이 강한 편이다.

그래서 월드 곳곳에 숨겨진 히든 피스 같은 것들도 상당히 많았는데, 이 '혼돈의 상자' 역시 우연히 발견한 한 던전에서 얻었던 아이템이었다.

일단 설명에서 알 수 있듯 효과부터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온갖 특이한 스킬과 아이템들이 넘쳐나는 라사에서도 이보다 특이한 건 본 적 없었다.

단순한 아이템 합성이라면 특별할 것도 없지만, 이 혼돈의 상자는 아이템뿐 아니라 캐릭터의 스킬이나 스탯까지도 합성이 가능했다.

한마디로 설정할 수 있는 재료의 종류나 개수에 아예 제한이 존재하지 않았다.

'신기한 거 빼면 허울만 좋은 아이템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 아이템을 사용한 건 얻었을 당시에나 재미 삼아 좀 써본 게 전부였다.

게임에서도 얼마 존재하지 않는 9성 아이템을 창고에만 박아놓고 있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효율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졌지.'

아니, 떨어지다 못해 아예 없다시피했다.

보통 무언가를 합성하면 그보다 더 높은 가치의 무언가가 나와야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건 가치가 향상되긴 커녕 오히려 하락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융합을 시도하면 그런 경우가 열에 아홉인 양심 나간 아이템을 어디에 좋다고 써먹으란 말인가.

물론 뭐든 재료로 삼을 수 있고, 결과로 뭐가 튀어나올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가지고 놀기는 좋았지만······ 딱 그 정도 가치뿐이었다. 여태까지는.

하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플레이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이만큼 훌륭한 아이템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융합의 재료를 설정하십시오.]

나는 혼돈의 상자를 활성화한 뒤 커서를 움직였다.

아이템, 골드, 스탯, 스킬,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클릭했다.

수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겨우겨우 만들어냈던 아이템들도, 그야말로 천운이 따라 얻을 수 있었던 스킬들도, 전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재료로 설정했다.

이래서야 융합이 끝나면 방금 막 생성한 1레벨 캐릭터나 다름없게 되겠지만, 뭐 어떻단 말인가? 어차피 마지막인데.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다 합성해버리면 과연 뭐가 튀어나올지.'

[재료 설정이 끝났습니다.]

[정말로 융합하시겠습니까?]

이윽고 준비가 끝났다.

"아."

망설임 없이 '예'를 클릭한 나는 그와 동시에 아차 싶었다.

다 선택한 줄 알았더니 스킬 하나가 재료로 설정되지 않았다.

[제왕의 혼]

영혼에 지고한 제왕의 격이 서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정신 계열 디버프에 완전 면역됩니다.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지배자의 품격과 위압감이 깃듭니다. NPC와의 대화에서 우위를 점할 확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등급: ★★★★★★★★★(9성)

유형: 패시브

레벨: 1(Max)

라사의 비공식 최고 등급인 9성의 스킬이나 아이템은 극도로 희귀하고 그 효과가 하나같이 사기적이다.

'제왕의 혼' 역시도 그런 9성급 스킬 중 하나였다.

[융합을 시작합니다.]

뭐, 됐나.

하나를 실수로 빠뜨린 건 조금 김이 샜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두운 오라를 뿜어내며 화면 너머에서 격하게 진동하는 혼돈의 상자를 바라봤다.

어째 원래보다 이펙트가 훨씬 요란스러운 것 같은데, 전부 다 때려넣어서 그런가?

몇 초 뒤 상자를 감싼 어둠을 뚫고 찬란한 빛이 터지더니, 알림이 떠올랐다.

[융합이 완료되었습니다.]

[즉살(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즉살]

모든 종류의 효과를 무시하고 대상을 즉사시킵니다. 대상과 접촉한 상태에서 발동이 가능하며, 적용 대상에 제한은 없습니다.

등급: ★★★★★★★★★★(10성)

유형: 액티브

레벨: 1(Max)

쿨타임: 없음

나는 눈을 깜빡이며 융합 결과로 튀어나온 스킬을 바라봤다.

그리고 곧 나지막이 경악성을 내뱉었다.

"와, 씨발."

뭐야, 이건?

등급이 9성도 아니고 10성이라고?

라사에 10성의 등급이 존재했었다니, 지금껏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이다.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완전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튀어나와버렸다.

거기에 스킬의 설명을 읽으니 더욱 충격이었다.

'모든 종류의 효과를 무시하고 즉사? 거기다 쿨타임이나 대상 제한도 없어?'

대상 제한이 없는 즉사기라니, 그 말은 설마 일반몹뿐 아니라 보스몹에게도 사용이 가능하다는 뜻인가?

몇 시간은 붙어서 고생해야 겨우 잡는 극악한 보스들에게도 즉사 판정이 들어간다고?

'설마 그럴 리가······ 아니, 그래도 지금껏 없었던 등급의 스킬이잖아?'

나는 완전히 황당해진 얼굴로 헛웃음을 내뱉으며 캐릭터를 움직였다.

생각만 하고 있을 것 없이 직접 확인해보면 그만이었다.

설마 섭종 하루를 남기고 이런 터무니없는 스킬을 얻게 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만 더 빨리 융합해볼 걸 그랬······.

울렁!

"······?"

순간 시야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더니 세상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깜짝 놀라서 비명을 내질렀지만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귓가를 찌르는 기이한 이명과, 천지가 뒤집어지는 듯한 어지러움 속에서······.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서서히 의식이 아득해져 갔다.

탈출 (1)

거무칙칙한 바닥. 퀴퀴한 먼지 냄새.

나는 두 눈을 깜박거리다 푹 떨구어진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 어디서 술이라도 한 모금 안 떨어지나, 씨팔."

바로 옆에서 험악한 인상으로 뭐라 중얼거리고 있는, 웬 대머리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는 비슷한 복장의 이들이 줄줄이 늘어진 채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그 복장이 죄수복이고 이곳이 감옥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그들의 손발목에는 하나같이 두꺼운 사슬이 묶여 있었고, 전방에는 촘촘히 박힌 쇠창살까지 보였으니까.

거기다 창살 너머에서 일렁이는 저 반투명한 푸른 장막은 또 뭘까. 어디 판타지에나 나올 법한······ 진짜 뭐야, 저거?

절그럭.

그보다 내 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손발에 차인 묵직한 철갑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뭐야, 대체······.'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에 기억을 더듬었다.

난 분명 방금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라사를 플레이하고 있었을 터인데.

혼돈의 상자를 융합했더니 개쩌는 10성 스킬이 튀어나왔고, 다음엔······ 아, 그래.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지더니, 정신을 잃은 건가?

그리고 다시 눈을 떴더니 이 꼴이다.

전후 기억은 뚜렷했지만 상황이 정리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미간을 좁힌 채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봤다.

"뭘 꼬라봐, 새끼야."

눈을 마주친 옆의 대머리 사내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 서늘한 음성에 내가 말하고서 스스로 놀랐다.

이건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한국어도 아닌 언어가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뭐? 이 미친 새끼가 뭐라는 거······."

황당하다는 얼굴로 욕을 지껄이는 사내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자 놈이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마지못한 기색으로 순순히 대답했다.

"어디긴 어디야, 빌어먹을 호송선 안이지."

"호송선?"

"······깜빡 졸기라도 한 거냐? 아체몬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잖냐. 죄수들의 무덤인 그 빌어먹을 곳!"

아체몬? 죄수들의 무덤?

어딘가 익숙한 명칭의 그것을 이내 떠올린 나는 반사적으로 '뭐?'라고 되물을 뻔했다.

그도 그럴 게, 그건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장소의 이름이었으니까.

내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게임 속 세계에 말이다.

"이봐."

"또 뭐?"

"아체몬이 설마 로그나르 왕국에서 관리하는 중죄수 수용소를 말하는 건가?"

"뭘 자꾸 당연한 걸 처묻는 거야?"

"······여기는, 이 세계는 지구가 아니라 라키로니아 대륙이고?"

사내는 이제 완전히 미친놈 바라보듯 나를 쳐다봤다.

"별 미친······ 진짜 갑자기 돌아버렸나?"

그렇게 중얼거린 놈이 슬그머니 옆으로 멀어졌다.

나도 도로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더 물어볼 것도 없이 이제야 뭐가 뭔지 이해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야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옆의 사내를 포함해 죄수들의 머리 바로 위에 떠오른 숫자들을 포함해서.

[Lv. 48]

[Lv. 51]

[Lv. 45]

레벨 표시.

믿기지 않지만 나는 게임 속에, 내가 방금까지 플레이하던 라키로니아 사가의 세계에 들어온 모양이다.

그것 말고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생생하기 그지없는 감각이 현재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것쯤은 확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게다가 이건······ 내 몸도 아니잖아?'

거울이라도 있으면 좋았겠지만 굳이 얼굴을 살피지 않더라도 내 몸이 아니라는 건 깨달을 수 있었다.

피부색이고 목소리고 체형이고 죄다 다른 데다가, 몸 자체에 평소와 다른 이질감이 들었으니까.

빙의? 게임 속 캐릭터에 빙의하기라도 한 건가?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

빠르게 혼란감을 가라앉히고 우선 이 몸의 처지부터 정리해보기로 했다.

방금의 짧은 대화에서 필요한 정보는 충분히 얻었으니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호송선, 그리고 아체몬 수용소.

그곳은 사내의 말대로 죄수들의 무덤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며 거치게 되는 수많은 과정 중 하나이기에 나도 잘 알고 있는 장소였다.

'석방이나 탈출은 꿈도 못 꾸고, 평생을 가혹한 노역과 생체실험 속에 살다가 피가 다 빨려 죽는 곳.'

아무래도 나는 그 험지로 호송되고 있는 죄수들 중 하나에 빙의된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왜 들어와도 이딴 몸뚱이에······ 그보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날 이런 개 같은 상황에 빠뜨렸단 말인가?

고민해봤자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보다도 당장의 생존 문제부터 어떻게든 해야 할 판이었다.

그 순간 문득 떠오른 정신적인 괴리감.

'······나 왜 이렇게 침착하지?'

갑자기 게임 속에 들어왔고, 갑자기 구속된 채 수용소로 끌려가는 죄수 신세가 됐다.

아예 정신을 못 차리고 패닉에 빠져있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보통은 그게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하고 바로 닥친 위기부터 해결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동요도 잠시뿐, 현재 느껴지는 감정은 공포나 두려움 등이 아닌 약간의 혼란스러움과 의문뿐이었다.

평소 그럭저럭 이성적인 편에 속한다고 스스로도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에 이렇게까지 냉정할 수 있는 놈이었던가?

콰아앙!

그때 갑자기 울려퍼진 육중한 폭발음.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연달아 울리는 폭발에 공간이 크게 흔들거렸다. 이번엔 또 뭐야?

당황한 죄수들이 웅성거리며 바닥에 늘어뜨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씨발, 뭐야? 뭔 일이야?"

"위쪽에서 뭐가 터진 것 같은데."

선체의 진동이 한참을 이어지던 중 죄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창살 너머로 향했다. 하나같이 놀란 토끼 눈으로.

감옥의 바깥을 둘러싸고 있던 푸른 장막이 서서히 빛을 잃으며 흐릿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장막이 완전히 소멸함과 동시에 누군가 소리쳤다.

"······억제장이 사라졌다!"

그 외침이 신호라도 된 듯 곳곳에서 우두둑 소리가 울렸다.

죄수들이 손발에 묶인 구속구를 부숴버리는 소리였다.

"크하핫! 뭐야, 이거! 진짜로 마력이 돌아왔잖아!"

"자유다! 싹 다 뒤집어엎자!"

그렇게 순식간에 몸의 자유를 찾은 죄수들이 환희에 차서 날뛰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열린 난장판을 나는 멍하니 바라봤다. 상식을 벗어난 괴력이었다.

'쇠를 뭔 종이 찢어버리듯······.'

콰드득!

이내 쇠창살까지 뜯어버린 죄수들이 하나둘씩 감옥 밖으로 나섰다.

그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홀로 주저앉은 채 그 모습을 황망히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폭발음과 흔들리는 배,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건 알았으나 내게는 탈옥이라는 선택지가 없었다.

'썩을.'

아무리 힘을 줘도 꼼짝도 않는 구속구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이 몸뚱이의 근력은 본래의 내 몸과 별반 다르지 않게 평범한 수준인 듯 싶었다.

그래서 다른 죄수들처럼 자력으로 구속을 끊을 수도 없었다.

퍼어엉!

그 순간 또다시 폭음이 터졌다. 이번엔 굉장히 가까이서.

가장 앞장서서 출구로 나서던 죄수 하나가 도로 포탄처럼 날아와 벽에 처박힌 것이었다.

가슴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채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찌그러져 즉사한 모습에 다른 죄수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벌레 놈들이 신나서 팔짝거리기는. 감히 어딜 기어나오는 거냐?"

흉흉한 음성과 함께 안으로 들어온 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우락부락한 죄수들이 전부 어린아이처럼 보일 정도로 거대한 덩치의, 태산과 같은 위압감을 뿜어내는 노인.

"뒈지······!"

멋모르고 덤벼들려던 몇몇 죄수가 앞서 벽에 처박힌 죄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신세가 됐다.

파리라도 쫓아내듯 노인이 가볍게 휘저은 주먹에 튕겨나가 으깨진 고깃덩이가 되었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남은 죄수들까지 모조리 학살하기 시작했다.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속도와 파괴력.

차마 움직임을 눈으로 쫓을 수도 없어, 내 시야에는 그저 시뻘건 피분수와 함께 죄수들의 몸이 줄줄이 터져나가는 광경만이 비칠 뿐이었다.

한없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인간의 육체가 과일 터지듯 저리 쉽게 산산조각날 수 있는 거였나.

콰앙!

와중에 한 놈이 내가 앉아있는 근처로 날아와 처박혔다. 얼굴에 핏물이 튀었다.

죄수들은 저항도 도망도 시도하지 못한 채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전멸했다.

사실 노인이 등장한 순간부터 그 결과를 어렵지 않게 짐작했었다. 왜냐면······.

[Lv. 91]

······머리 위에 표시된 레벨에서부터 알 수 있었으니까.

그는 애초에 다른 차원의 괴물이었다.

기껏해야 40, 50레벨대의 죄수들이 얼마나 몰려들든 결코 범접할 수 없는.

보통 RPG가 다 그렇지만 라사에서는 특히 레벨 격차가 클수록 전투 자체가 성립되기 힘들다. 머릿수 따위는 무의미했다. 하물며 수십 레벨의 아득한 차이여서야······.

'씨발.'

끔직한 참상, 진득한 피비린내.

볼에 튄 핏물을 닦아내며 나는 다시 한 번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난데없이 게임 속에 들어오고, 호송선의 죄수가 되고, 무언가 터지는가 싶더니 개판이 나고, 갑자기 나타난 괴물 노인네가 다른 죄수들을 싹 학살하고.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단지 확실한 것 하나는, 지금 내 목숨이 절벽의 썩은 동아줄에 매달린 것보다도 위태로워졌다는 사실뿐이었다.

"허, 그래도 얌전히 있던 놈도 있었나?"

신기하다는 듯 이쪽을 바라본 노인이 주먹을 한가득 적신 핏물을 털어내며 가까이 접근해왔다.

부서진 철창을 넘어 감옥으로 들어온 그가 나를 내려다봤다. 나도 말없이 그를 올려다봤다.

사실은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뿐이었지만, 어쨌든 도망치지 않고 얌전히 있었으니 살려주지는 않을까 아주 작은 기대를 품어봤다.

그러나 아무래도 부질없는 희망인 듯했다.

노인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눈빛이 묘한 녀석이군. 굳이 죽이고 싶진 않다만······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구나."

손두껑만 한 거대한 손이 내 머리 위에 올려졌다.

단지 그뿐임에도 금방이라도 머리가 찌그러질 것만 같은 압력이 느껴졌다.

여기서 노인이 조금이라도 손아귀에 힘을 주면 내 머리통은 산산히 터져나갈 것이었으며, 그건 이제 곧 일어날 미래였다.

죽는 건가? 이대로?

'······이딴 식으로 허무하게?'

이 와중에도 내 머리는 정말 어떻게 되먹은 건지 냉정하게 사고를 이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대로 죽어버리면 다시 원래의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아닐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형편 좋게만 생각하고 지금의 목숨을 게임처럼 쉽게 내던져버릴 수는 없었다.

'······!'

찰나, 필사적으로 활로를 찾던 나는 무언가를 번뜩 떠올렸다.

게임 속에 들어오기 전 마지막 순간.

혼돈의 상자, 캐릭터의 모든 걸 융합해버리자 결과로 튀어나왔던 스킬.

[즉살]

모든 종류의 효과를 무시하고 대상을 즉사시킵니다. 대상과 접촉한 상태에서 발동이 가능하며, 적용 대상에 제한은 없습니다.

설마, 라는 생각이 스친다.

내가 게임에 빙의된 건 융합이 끝난 다음 곧바로였으니까.

확신 따위는 없었다. 다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나는 권성 가르톤이다.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특별히 들어주마."

나는 노인과 눈을 마주치고서 나지막이 입을 뗐다.

"죽어."

그와 동시에 머리에 올려져 있던 손이 스르륵 미끌어졌다.

쿠웅.

노인의 거구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탈출 (2)

"······."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은 채 쓰러진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말 된 건가?'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 조금의 미동도 없는 모습은 영락없이 죽은 자의 모습이었다.

즉살, 접촉한 대상을 즉사시킬 수 있는 10성 등급의 스킬.

설마 싶었지만 정말로 스킬의 효과가 성공적으로 발동한 것 같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갑자기 이 괴물이 쓰러질 이유가 또 뭐가 있을까.

이것으로 확신이 들었다.

나는 융합의 결과로 나왔던 즉살 스킬을 보유한 채 이 몸에 빙의한 것이 확실했다.

'그럼 즉살 외에 다른 스킬들은?'

생각은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흘러갔다.

나는 라사에서도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수준의 고인물 유저였다.

만약 내 캐릭터가 가지고 있던 다른 스킬들도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라고 잠시 행복회로를 돌려봤지만, 아무래도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보유하고 있던 스킬 중에는 캐릭터의 기본 스탯을 증폭시키는 패시브 스킬들도 수두룩했다.

그러니 스킬들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지금의 육체가 이따위로 허약한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딱히 액티브 스킬들 역시 떠올려봐도 사용이 되는 건 없는 것 같았다.

'다른 스킬들은 없고 왜 즉살만······ 아.'

이유는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왜긴 왜겠나, 다른 스킬이나 스탯은 모조리 융합 재료로 갈아버렸었잖아?

만약 융합이 완료된 시점을 기준으로 캐릭터의 능력이 그대로 전이된 거라면······ 전부 말이 된다.

이 허약하기 그지없는 육체 능력도, 즉살 외의 다른 스킬들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허."

설마 진짜 그런 건가? 진짜로?

순간 뒷골이 확 땡기는 느낌이었다.

그럼 만약 융합 따위를 하지 않았다면 캐릭터의 모든 능력이 그대로 유지될 수도 있었다는 게 아닌가?

아니, 애초에 지금의 상황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캐릭터의 모든 능력치를 혼돈의 상자에 융합시킨 게 게임 속에 빙의된 원인이라면 말이다.

상관관계는 알 수 없으나, 빙의가 이루어진 건 융합이 끝난 바로 직후였으니 솔직히 후자의 확률이 더 높아보였다.

'어느 쪽이든 결국 그 빌어먹을 융합은 하지 말았어야 했군.'

후회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려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순식간에 냉정을 되찾았다.

'······아, 그런 거였나?'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까부터 내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이토록 비상식적인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을 수 있는 이유를.

[제왕의 혼]

영혼에 제왕의 지고한 격이 서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정신 계열 디버프에 완전 면역됩니다.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지배자의 품격과 위압감이 깃듭니다. NPC와의 대화에서 우위를 점할 확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융합 재료에 그만 실수로 빠뜨렸었던 9성 스킬 하나, 제왕의 혼.

아무래도 그것의 효과가 내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덕분에 정신없는 상황 전개에도, 방금 막 죽을 뻔하고 주위가 시체 조각들로 피바다가 된 이 수라장에서도 계속해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게 가능한 것일 터.

'아니면 진작 정신줄을 놔버렸어도 이상할 게 없지.'

지독한 혈향이 코를 찌른다.

나는 싸늘한 주검이 된 노인에게로 재차 시선을 옮겼다.

그나저나 권성 가르톤이라고 했나?

세인테아의 다섯 별 중 하나, 라사의 세계관에서도 능히 대륙급 강자의 반열에 드는 인물.

앞의 '권성'이라는 이명은 더없이 잘 알고 있었지만 뒤에 붙은 이름이 낯설다.

내가 라사를 플레이하며 등장한 권성은 가르톤이 아니라 다른 이름이었었으니까.

'잘못 기억한 건 아닐 텐데······ 설마 시간대가 다른가?'

또 이 정도의 거물이 아체몬의 호송선에는 왜 타고 있던 건지 모르겠다.

아니, 그런 것들이야 일단 제쳐두고.

이제 뭘 어떻게 해야 되지?

당장 목숨을 건진 건 좋지만 상황은 여전히 위기였다.

손발은 아직 구속구에 묶인 채였고, 폭발음은 끊겼지만 선박의 불안정한 흔들림도 더욱 심해지는 것 같았다.

대체 이 호송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계속 지금처럼 묶여만 있다간 아주 높은 확률로 다시 생존을 위협받을 것이었다.

"······?"

그 순간 내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의식적인 게 아니라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창살 너머, 시야 한구석에 무언가 이상한 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Lv. 89]

빈 허공에 둥둥 떠있는 레벨 표시.

저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나 잠시 고민하다가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렸다.

'은신 계열 스킬······.'

아무도 없는데 레벨이 떠올라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저곳에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언제부터 숨어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방금의 권성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거의 준하는 레벨의 괴물.

저 정체 모를 상대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당장 적절한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근데 그러기도 전에 나도 모르게 입이 먼저 반사적으로 열렸다.

그것도 더없이 무심하고 오만한 말투로.

"쥐새끼처럼 굴지 말고 나와라."

······나는 뒈지고 싶어서 환장한 건가?

왜 갑자기 이런 말이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다.

단지 본능 같은 무언가가 한순간 이성을 앞질렀다. 그것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는 곧바로 깨달았다.

현재 내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제왕의 혼 스킬 말고 달리 또 뭐가 있을까. 아, 씨발······.

'엿 됐다.'

뭐가 됐든 완전히 조졌다.

즉사기가 있다고 한들 대상과 접촉하지 않으면 발동할 수 없다.

방금의 도발에 욱한 저 정체 모를 상대가 공격부터 날리면 내 목숨은 그걸로 끝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스르륵.

잠시 뒤 허공에 어둠이 넘실거리더니, 그 사이에서 로브를 걸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

데이폰은 호송관과 선원들의 시체를 가로질러 선내 복도를 걸었다.

상황은 예정대로 순조로웠다.

목표 요인은 처단했고, 선박의 장치들도 크게 파괴됐으니 호송선은 머지 않아 침몰할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권성을 살해한 뒤 확실히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고 복귀하는 일만 남았다.

로그나르 왕국 측에서 나름 대비를 할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무려 오성의 일인을 끌어들인 건 의외였다.

세인테아의 다섯 별. 권성 정도의 강자라면 아무리 데이폰이라 해도 홀로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그는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이런 변수에 대비하여 준비된 카드는 있었으니까.

'저쪽인가.'

아래층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에 데이폰은 곧바로 권성임을 확신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죄수 감금 공간 중 하나로 보이는 선실 내부는 이미 죄수들의 시체로 처참한 풍경이었다.

호송선이 습격받은 상황에 날뛰는 죄수들까지 제어하기는 힘드니 전부 처리해버린 것이리라.

은신한 채 선실 안쪽으로 유유히 이동한 그는 예상했던 대로 권성 가르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권성 가르톤이다.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특별히 들어주마."

권성은 홀로 살아있는 한 죄수의 머리에 손을 올린 채 있었다.

데이폰은 거리를 두고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마지막 죄수는 유언이라도 들어준 뒤 처리하려는 모양이었다.

'죽이는 순간 공격해야겠군.'

이왕이면 가장 적절한 때 기습해서 전투를 개시해는 편이 좋을 터.

판단을 마친 데이폰은 권성이 죄수의 머리를 터뜨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곧 죄수의 입이 열렸다.

"죽어."

이어진 광경에 데이폰의 두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

죄수의 한마디에 권성의 몸이 풀썩 바닥에 쓰러진 것이다.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는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죽었······ 어?'

숨도 쉬지 않고, 심장도 뛰지 않는다.

쓰러진 권성에게선 생명의 기척이 완전히 끊겨 더 이상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죽어버린 것이다.

전 대륙적으로 명망 높은 무인, 세인테아의 오성 중 하나가 한순간에.

데이폰은 반사적으로 호흡조차 멈추고 기척을 최대로 죽였다.

손발에 구속구를 찬 채 숨이 끊어진 권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죄수 사내.

믿기지 않지만 그가 권성 가르톤을 죽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사내가 한 행동이라고는 단지 '죽어.'라고 짧은 말을 내뱉은 게 전부였다.

'······언령? 언령의 일종인가?'

하지만 권성쯤 되는 강자를 단번에 죽일 수 있는 언령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정체가 뭐지?

데이폰은 더없이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사내를 응시했다.

상정을 아득히 벗어난 변수의 등장. 이 터무니없는 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기습? 권성을 단번에 죽여버린 정체불명의 괴인과 전투를 벌이는 건 미친 짓이다.

4군주 망자왕으로부터 제공받은, 본래 권성을 죽이는 데 사용하려고 했던 전력을 사용해도 승산은 미지수였다.

그럼 이대로 퇴각해야 하나? 하지만 저 미지의 인물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한 채로 그냥 돌아가기엔······.

'······!'

순간 데이폰은 전신에 소름이 쭈뼛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시선을 돌린 사내가 이쪽을 빤히 응시했기 때문이다.

"쥐새끼처럼 굴지 말고 나와라."

······들켰다. 대체 언제부터?

은신을 이토록 쉽게 간파당했다는 사실에 데이폰은 더없이 큰 충격과 낭패감을 느꼈다.

은신 능력 하나만큼은 전 대륙에서도 최고 수준인 그였으니까.

지금이라도 도주를 시도할까 고민이 스쳤으나 이내 접었다.

그러기도 전에 방금의 권성처럼 한순간에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다. 리스크가 너무 큰 시도였다.

스르륵.

모습을 드러낸 데이폰은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어떠한 감정도 내비치고 있지 않은 공허한 눈빛에선 차마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진다.

데이폰은 그저 어렴풋이 직감할 뿐이었다.

눈앞의 사내가 어쩌면 군주들과 동등한 격의 강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당신은 누구입니까?"

잠깐의 정적 뒤 데이폰이 물었다.

사내는 답할 생각이 없다는 듯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이쪽을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무언의 압박. 데이폰은 그 시선의 의미를 짐작하고 할 말을 궁리했다.

정체는 전혀 짐작할 수 없지만, 죄수의 신분으로 아체몬에 호송되고 있으며 권성을 거리낌 없이 살해한 인물.

적어도 그쪽에 우호적인 관계일 리는 없으니 신분은 밝혀도 상관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확실히 해두는 편이 좋을 터.

"저는 데이폰, 로그나르 왕국이나 세인테아 제국 연합과는 관계없는, 칼데릭 군주회 소속의 인물입니다."

그 말에,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사내의 표정에 미세한 변화가 일어났다.

"······칼데릭 군주회?"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한 차례 뜸을 들이고는 물어온다.

"배에는 무슨 짓을 벌인 거지?"

"······선체의 상태를 알고 싶으신 거라면, 호송선은 아체몬에 도달하지 못하고 곧 침몰할 겁니다."

그 말에 순간 사내의 표정이 미세하게 찌푸려지더니 곧 도로 펴졌다.

다시금 대화가 끊겼다.

단지 궁금한 건 그뿐이었다는 듯 사내는 다른 것들은 물어오지 않았다.

칼데릭에서 일개 호송선을 습격한 목적이라든가 자세한 사정 따윈 관심도 없어보였다.

'일단은 다행인가.'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 태도에 데이폰은 조금 안심했다.

아니, 적의가 없다기보다······ 그저 궁금한 게 해결됐으니 이쪽의 존재에 대해 더는 관심이 없는 것에 가까워 보였지만.

공격만 하지 않는다면야, 탈출을 하든 뭘 하든 사내는 더 이상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데이폰은 복귀를 망설였다.

이대로 그냥 돌아가기엔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 역시 이 기묘하기 그지없는 사내에 대해 더욱 의문과 호기심이 커진 상태였으니까.

"당신 정도의 인물이 어째서 호송선의 죄수로 있는 것입니까?"

찰나에 권성을 살해해버리고 이쪽의 은신을 간파한, 그 능력과 전력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괴물.

데이폰에게 있어서는 이 상황이 마치, 고블린들을 가둬둔 우리 구석에서 빈약하기 그지없는 족쇄를 찬 채 얌전히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던 드래곤을 발견한 것처럼 우습게 느껴졌다.

쿠웅!

선체가 크게 흔들리며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사내는 여전히 아무런 행동도 없었고, 질문에 대한 답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빤히 그를 바라보던 데이폰은 무언가를 퍼뜩 깨달았다.

'······알 것 같군.'

감정이 식은 공허한 눈. 주변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 특유의 권태로운 분위기.

비슷한 인물을 겪어본 적이 있었기에 알 수 있다.

저건 분명 삶에 더 이상 별다른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의 태도였다.

아마 저 사내에게는 모든 것이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이다.

이제 곧 배가 침몰하는 상황에서도 탈출할 생각조차 없어보였다. 죽든 말든 목숨도 대수롭지 않다는 것이리라.

권성을 죽이고, 이쪽에게 말을 건 것도 그저 순간의 자그마한 변덕과 흥미가 전부였을 터.

쿠우웅!

다시 한 번 선체가 진동했다.

데이폰은 크나큰 아쉬움을 느꼈다.

이만한 거인이 더 이상 세상에 어떠한 흥미도, 미련도 가지고 않고 차가운 해저로 가라앉아 사라지기를 자처함에.

그 아쉬움이 그로서 제법 충동적인,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뜬금없는 제안을 내뱉게 만들었다.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단지 이 사내의 마음에 아주 자그마한 흥미의 불씨라도 지필 수 있기를 바라며.

"칼데릭의 대군주성으로."

탈출 (3)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정체불명의 남자.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태도는 한눈에 봐도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상대가 이 상황에 대해 무언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설마 권성 때문인가?'

내가 권성을 죽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그래서 이쪽을 뭐 권성 이상의 엄청나게 위험한 인물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거나?

······확실히 오해할 만도 하군. 그렇다면 저 반응도 대충 이해가 됐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권성에 버금가는 수준의 강자가 죄수 나부랭이 따위를 경계할 이유가 또 뭐가 있겠는가.

어쨌든 지금의 내게 있어선 더없이 고마운 착각이었기에 장단에 맞춰주기 위해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누구냐고 질문을 해오긴 했지만 뭐라 딱히 대답할 말도 궁색했다. 그냥 닥치고 있는 게 낫겠지.

괜히 감정의 동요라도 내비쳤다간 더욱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리라.

"저는 데이폰, 로그나르 왕국이나 세인테아 제국 연합과는 관계없는, 칼데릭 군주회 소속의 인물입니다."

사내가 멋대로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칼데릭 군주회?"

그런데 칼데릭이라고?

세인테아와 더불어 대륙을 사분하고 있는 라사의 4대 세력 중 하나, 칼데릭 군주회?

'지금 상황도 이놈이 벌인 짓인가?'

권성에 더해 칼데릭까지, 이만한 거물들이 고작 호송선 한 척에 모여선 대체 뭘 하고 있던 걸까.

뭔가 심상치 않은 세력 싸움이 얽혔을 거라고만 그저 짐작해볼 뿐이었다.

그보다 지금 내게 있어 중요한 건 이들의 목적이나 뒷사정이 아니라 당장의 생존이었다.

나는 슬쩍 놈의 눈치를 보고서 물었다.

"배에는 무슨 짓을 벌인 거지?"

아까부터 흔들림이 멎지를 않는데, 설마 침몰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

"선체의 상태를 알고 싶으신 거라면, 호송선은 아체몬에 도달하지 못하고 곧 침몰할 겁니다."

뭐, 이 새끼야?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포커페이스가 깨졌다.

곧 바다 한가운데서 수장당할 걸 선고받았는데 인상이 안 구겨질 수가 없었다.

"당신 정도의 인물이 어째서 호송선의 죄수로 있는 것입니까?"

나도 나 게임에 처넣은 놈 멱살 잡고 묻고 싶은 심정이니까 닥쳐봐라.

이제 어쩌지?

손발은 여전히 묶여있고, 그 와중에 배는 곧 침몰한다 하고, 앞에는 90레벨에 가까운 괴물이 이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고.

그야말로 설상가상. 상황은 나아지긴 커녕 더욱 답 없게만 흘러가고 있었다.

냉정이 유지되면 뭐 하나. 이 상황에 어떻게 살아날 길이 있기는 한가?

쿠웅!

더욱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한 선체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경고한다.

'근데 저놈은 뭐가 저렇게 여유로워?'

아무리 레벨이 저만큼 높다고 해도 맨몸으로 해상 한가운데를 탈출할 수가 있나? 육지가 가까운가?

하기야, 놈은 일을 벌인 장본인일 테니 뭐라도 탈출로가 있을 것이다.

'다른 선박을 준비했든, 아니면 텔레포트든······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깨달았다.

이 상황에 그나마 기대볼 만한 유일한 구명줄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저 로브 놈한테 도움을 받는다면.'

그렇다면 적어도 호송선과 함께 수장되는 신세만큼은 면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당연한 문제는······.

'순순히 도와줄 리가 없잖아.'

놈에게 그럴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현재 나에 대한 놈의 스탠스는 명백히 '경계'다.

이쪽의 전력을 알 수가 없으니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고 조심스런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뿐일 터였다.

그런 상황에 배를 못 탈출하고 구속구 하나 풀지 못하겠으니 도움을 요청한다?

사실은 별 볼 일 없는 떨거지에 불과했단 걸 들켜 곧바로 목이 날아갈 확률이 훨씬 높아보였다.

그러나 뭐가 됐든 남은 활로가 놈뿐인 것도 현실.

목숨을 연명하고 싶다면 방법을 쥐어짜야만 한다.

놈이 내게 품고 있는 착각을 이용하든 뭘 하든, 어떻게든 탈출할 방법을...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칼데릭의 대군주성으로."

······뭐?

나는 벙찐 기색을 숨긴 채 놈을 다시 바라봤다.

"대군주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능력을 중시하시는 분입니다. 종족, 출신, 과거 따위는 칼데릭에서 조금도 중요치 않습니다. 경과 같은 분이라면 대군주께서도 필시 반기실 것입니다."

"······."

"칼데릭은 세인테아와 많은 것들이 다릅니다. 적어도 인간만들의 땅보다는 경의 흥미를 이끌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호칭까지 어느새 경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얘가 지금 뭐라는 거냐?

예상을 한참 벗어난 말이었기에 그 의미를 이해하기까진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이거 설마 스카웃인가?'

저놈이 지금 나한테 자기네 세력으로 영입을 제안하고 있는 건가?

아무리 내 존재를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한들 정체도 불분명한 죄수한테?

나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놈이 뭔가를 깊이 착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물론 이건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내가 필사적으로 쇼를 부릴 것도 없이 놈이 먼저 자처하고 나선 상황.

제안을 수락하면 이 침몰 직전의 배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 뒤의 일인데.'

실상은 별 능력도 없는 허접 새끼에 불과한 내가 칼데릭으로 가서 뭘 어쩌겠단 건가?

그리고 뭐? 대군주성? 칼데릭의 대군주한테 직접 나를 데려가겠다고?

차라리 호랑이 아가리로 머리를 들이미는 편이 나을 것이다.

쿠우웅!

······하지만 별다른 길이 없었다.

무너지는 선박의 파편에 깔려 뒈지든, 아니면 바다에 빠져 익사를 하든.

놈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으면 나는 이 자리에서 분명히 죽을 것이다.

'최악보다야 차악이지.'

뒷감당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당장 살고 보는 게 우선이었다.

꽤 긴 침묵 뒤에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건 영입 제안인가?"

"물론입니다."

냉큼 대답이 돌아왔다.

"칼데릭이라······."

괜히 한 번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이내 말을 이었다.

"조금 흥미가 이는군."

아, 이건 좀 아닌가.

말하고 바로 후회했다. 흥미는 지랄. 그냥 수락한다고 하면 될 걸 분위기 잡겠답시고 너무 갔다.

그래도 세이프였는지 놈의 무표정했던 얼굴이 한순간 조금 환해진 듯했다.

'근데 구속구 좀.'

알아서 센스 있게 이거부터 좀 풀어주면 안 되나?

다행히 그런 내 간절함이 전해졌는지 놈이 감옥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들어왔다.

캉!

구속구들이 알 수 없는 무형의 힘에 간단히 박살나 바닥에 널부러졌다.

그제야 나는 몸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힐끗 눈치를 살피자 놈은 별달리 이상하게 여기진 않는 기색이었다.

그래, 설마 권성도 죽인 놈이 이깟 쇳조각 하나 못 부수는 약골이라고 상상이나 하겠나.

"정식으로 다시 인사드립니다. 칼데릭 군주회 대군주성 소속, 대군주 직속 참모장 데이폰 클라디넬입니다."

대군주 직속 참모장?

'어쩐지 레벨이 더럽게 높더라니.'

나는 그제야 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라사의 수많은 NPC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 외우고 있진 않았기에 이름만 들었을 때는 곧장 못 떠올렸다.

칼데릭의 대군주 참모장. 대군주의 최측근이자, 실질적인 영향력은 아홉 군주에도 못지않은 거물.

말을 마친 놈이 빤히 나를 바라봤다.

이쪽의 대답을 기다리는 시선이었다.

나는 약간의 곤란함을 느꼈다.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자기소개 따위를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잠깐의 침묵 뒤에 결국 짧은 한마디만 내뱉었다.

"론."

의미는 없다. 순간적으로 아무렇게나 떠오른 적당한 이름을 뱉은 것이었다.

서양풍 판타지 세계에서 내 진짜 이름 석자를 말할 수도 없었으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했는지 다행히도 데이폰은 더 자세히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실례하지만 권성의 시체를 제가 회수해도 되겠습니까?"

"······?"

"따로 이걸 원하실 만한 분이 계셔서 말입니다. 물론 시체에 대한 소유권은 분명히 론 경께 있습니다."

아니, 그런 거 전혀 필요 없는데.

뭔 시체를 두고 소유권까지 튀어나온단 말인가. 이걸 원하는 사람이 있다고?

'아······ 설마 망자왕 말하는 건가?'

어쨌든 내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기에 알아서 하라고 답했다.

짧게 감사를 전한 데이폰이 권성의 시체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어두운 기운이 솟아나더니 순식간에 시체를 흔적도 없이 삼켜버렸다.

"그럼 론 경, 지금 바로 대군주성으로 모시겠습니다. 텔레포트를 펼칠 테니 마력에 저항하지 말아주십시오."

데이폰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뭘 어떻게 탈출하나 했더니 역시 텔레포트였나?

그러고 보니 분명 참모장의 능력 중 하나가 초장거리 텔레포트였었지······ 근데 잠깐.

'······지금 바로 대군주성으로?'

나는 놈이 내민 손을 떨떠름한 속내로 쳐다보다가 맞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웅.

곧 은은한 푸른빛과 함께 주위의 공간이 서서히 일그러지더니, 한순간 몸이 부유하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속이 울렁거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10초는 지났나?

시야가 다시 선명해졌을 때, 내가 서있는 곳은 더 이상 호송선의 감옥이 아니었다.

한순간 달라진 풍경에 나는 놀라움을 숨긴 채 두 눈을 깜박거렸다.

사아아.

어둡고 넓은 공동 같은 공간.

사방의 벽면에는 푸른빛으로 발광하는 거대한 돌들이 수없이 박혀있었고, 거기서부터 뿜어져나온 빛들이 바로 발밑에 뭉쳐져 기하학적인 도형을 구성하고 있었다.

'······마법진?'

서서히 사라져가는 그것을 내려다보던 나는 도로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봤다.

마법진은 둘째치고 주위에는 로브를 걸친 괴인들이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

이동하자마자 뭔데, 이 분위기.

"데이폰 님."

홀로 집사처럼 보이는 복장을 하고 있던 여인이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먼 타지에서 수고 많으셨습니다. 무사 귀환하셔서 다행입니다."

자연스레 그녀의 뾰족하게 솟은 귀에 눈이 갔다. 엘프?

"대군주께서는?"

"자리하고 계십니다. 이제 조금 뒤면 군주 회의가 시작됩니다."

"상당히 절묘한 때에 복귀하게 됐군."

그렇게 중얼거린 데이폰이, 의문에 찬 시선으로 내 쪽을 힐끔거리는 여인에게 말을 이었다.

"그분께 직접 소개드릴 귀인이다. 최선의 예를 다해서 모시도록."

"······!"

그 말에 흠칫 놀란 기색을 띤 그녀가 빠르게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한쪽 팔을 접은 채 더없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왔다.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케일런이라고 합니다."

······뭔가 휙휙 진행되는군.

호송선을 탈출했음에도 상황은 여전히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러니까······ 여기가 칼데릭의 대군주성이라는 거지?'

정말 세인테아의 영역에서 칼데릭까지 그 먼 거리를 한 번에 이동해온 건가?

그리고 이제부터 난 칼데릭의 대군주와 대면을 해야 되는 거고?

물론 전부 말했던 대로이긴 한데······ 이렇게나 곧바로?

'환장하겠네.'

지금이라도 수락을 물리겠다 말을 바꾸면 과연 데이폰에게서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궁금하다.

좀 전의 호송선에서와 달리 이곳은 놈의 본진이자 칼데릭 전력의 최중심부였다.

허허 웃으며 순순히 보내주기를 기대한다면 그건 너무 낙천적인 생각일까.

"칼데릭의 대군주성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론 경."

이쪽의 심정을 알 리 없는 데이폰은 그런 한숨 나오는 소리나 지껄일 뿐이었다.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한 대가는 호랑이 굴 입성이었다.

칼데릭의 대군주 라샤테인.

그것도 라사 세계관에서도 한 손에 꼽는 초거물이 수장으로 자리하고 있는.

아······ 이젠 진짜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될 대로 되라.

군주 회의 (1)

공동은 상당히 깊은 지하에 있었는지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한참을 이어졌다.

지상에 도착하자 데이폰은 양해를 구한 뒤 먼저 어디론가 떠나갔고, 나는 케일런에게 안내받아 그녀를 따라 이동했다.

"식사, 목욕, 혹은 그 외의 무엇이든 말씀해주시면 원하시는 것부터 곧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목욕부터 하겠다 답했다.

좀 전까지 죄수 신세였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현재 내 꼴은 더럽기 그지없었다.

케일런도 그럴 거라 예상했는지 즉시 하인들을 시켜서 준비를 마쳤다.

목욕 수발을 든답시고 하녀들이 우르를 붙었지만 전부 물리게 했다.

불과 한 시간도 안된 시간 전까지 지극히 평범한 현대인에 불과했던 입장에서 남이 몸을 씻겨주는 건 그냥 수치플이었다.

"목욕하시는 동안 따로 식사 준비를······."

"필요 없다."

일단 개운하게 씻고 싶을 뿐이지 식사는 딱히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어찌저찌 목욕을 마친 후에는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방으로 안내받았다. 굉장히 넓고 화려한 방이었다.

나는 거울 앞에 다가가 섰다.

거울 저편에는 낯설기 그지없는 사내가 빤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

칠흑색 머리칼, 창백하도록 새하얀 피부, 선명한 금빛을 띠고 있는 두 눈동자와, 뚜렷한 이목구비.

'더럽게 잘생기긴 했네.'

현재 처지는 다 제쳐두고 빙의된 몸에 대한 순수한 감상이었다.

목욕하면서 이미 확인은 했지만 도저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외모였다.

그보다 나는 내 캐릭터도 아니고 대체 어떤 몸뚱이에 들어와버린 건지 모르겠다.

내 캐릭터는 이런 외형이 아니라 금발에 청안이었으니까.

걸음을 옮겨 이번엔 창가에 섰다.

높은 층에 위치한 방이었기에 창밖으로는 성내의 풍경이 제법 잘 보였다.

외곽을 둘러싼 거대한 성벽도, 높고 장엄한 건물들도, 곳곳에 삼엄한 기세로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와 기사들도.

'칼데릭 군주회.'

대군주 라샤테인과 그 휘하의 아홉 군주가 정점에 있는, 대륙의 4대 세력 중 하나.

거의 인류만이 존재하는 세인테아와는 달리 인간 외에도 다양한 종족들이 섞여있는 땅.

그러한 특징에서 알 수 있듯 4대 세력 중에서도 가장 자유롭고 개방적인 성격의 세력.

현재 내가 있는 곳은 그런 칼데릭의 대군주성이었다.

대군주성은 대군주령 드라고어의 수도, 워본의 정중앙에 위치한 성이다.

드라고어는 내가 라사를 플레이하며 밥 먹듯 드나들던 익숙한 지역이기도 했다.

'저 성벽 바깥엔 워본 시가 펼쳐져 있는 건가.'

컴퓨터 화면 너머, 그저 게임의 그래픽으로 봐왔던 장소를 현실에서 직접 생생히 마주한다.

만약 지금 처지가 이렇지만 않았다면 눈앞의 압도적인 풍경을 순수히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후우······."

창틀에 턱을 괸 채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진짜 어쩌다 이렇게 됐지?

대체 왜 내가 이제부터 칼데릭의 대군주와 대면을 해야 되는 거냐고.

오해 하나로 판이 커져도 너무 커졌다.

지금이라면 종을 초월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문득 아까 케일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군주 회의가 곧 시작된다고 했었는데······.'

나는 라사에서도 한 손에 꼽을 정도의 고인물이었다.

당연히 칼데릭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칼데릭 소속의 주요 NPC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지배층이 돌아가는 방식이나 체계 등에 대해서도 제법 자세하게.

보통 스토리 진행과는 별 관계없는 세세한 설정들까지 알고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는 드물지만, 그 게임이 라사라면 경우가 조금 달랐다.

라사는 숨겨진 히든 피스가 굉장히 많은 게임이었고, 때로는 게임의 설정 내에서 그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나뿐만 아니라 라사의 고인물이라면 대부분이 사소하기 그지없는 설정들까지 줄줄이 꿰고 있는 게 보통이었다.

군주 회의.

그것은 이름 그대로 대군주와 아홉 군주가 전부 모여 참석하는 정기적인 대회의다.

그리고 회의가 열리는 장소는 당연히 대군주가 위치한 이곳, 대군주성이었다.

'그럼 지금 여기에 다른 군주들도 대부분 모여있다는 거 아니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왠지 모를 불안함이 솟아올랐다.

어쩐지······ 타이밍이 굉장히 좋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충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군주 라샤테인이 꽤나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인물이라는 것을.

똑똑.

한참을 고뇌에 빠져 있자니 노크 소리가 울렸다.

"편히 쉬고 계셨습니까, 론 경."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케일런이 아니라 데이폰이었다.

나는 때가 왔음을 알았다.

이어진 말에 불길한 예감이 정확히 들어맞았다는 것까지도.

"대군주님과 다른 군주님들이 모이는 회의가 이제 곧 시작됩니다만, 대군주께서 그곳에 론 경도 함께 참석하길 바라십니다."

"······."

아.

빌어먹을 예지력이 상승했다.

***

짧은 이야기를 마친 뒤 나는 곧장 데이폰을 따라서 이동하게 되었다.

넓고 고요한 복도에 일정한 간격의 두 발걸음 소리만이 나지막이 울려퍼진다.

향하는 목적지는 앞서 들었던 대로 군주 회의장.

앞으로의 흐름에 따라 내게는 회의장이 아니라 공개 처형장이 될 수도 있을 장소였다.

'갈수록 태산이네.'

아니, 군주들이 모이는 정상 회의에 생판 외부인인 나를 대체 왜?

지금은 그저 앞장서서 걷는 데이폰의 뒤통수를 한 대라도 후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쨌든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은 이놈이었으니까.

놈 덕분에 호송선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건 맞지만 애당초 호송선을 습격한 것도 놈이었다.

아니었으면 지금쯤 배는 침몰하는 일 없이 바다를 가로질러 순항하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다다를 목적지가 수용소이긴 했지만, 이제부터 칼데릭의 지배자들과 대면해야 하는 지금 상황과 비교하면 차라리 그쪽이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쓸데없는 가정이지.'

나는 초연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까지 온 이상 피하지도 못한다.

어느 쪽이 더 나은 길이었는지는 이제 곧 알게 될 것이었다.

과연 칼데릭의 정점인 군주들의 앞에서도 하찮은 실체를 들키지 않은 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

'만약 정말 일이 최악으로 흘러가서 들키게 되면······.'

그나마 하나 유일하게 있는 즉살 스킬이라 해봐야 신변을 보호할 수단은 전혀 못 된다.

권성에게도 통했으니 효과는 확실하겠지만 접촉 시에만 발동이 가능하다는 치명적인 조건이 있으니까.

뭐, 그렇다고 해도 그 외의 방법이 아예 없진 않을 것이다.

입을 잘 털기만 하면 내 방대한 게임 지식은 대군주와도 충분히 협상을 할 수 있는 카드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최선은 들키지 않고 어떻게든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는 거겠지만.

이동할수록 점점 어두워진다 싶었더니 어느새 복도의 창들이 완전히 사라진 채였다.

대신 천장에 박힌 발광석이 어둠을 밝혔다.

이윽고 검붉은 카펫이 깔린 통로로 들어서자 초입에 몇몇 기사들이 엄숙한 기세로 정렬한 채 서있었다.

처억.

일제히 검을 치켜들며 경례를 올리는 기사들.

"도착했습니다."

데이폰은 그렇게 말하며 그들 사이를 지나쳐 걸었고, 나도 태연함을 가장한 채 뒤따랐다.

길게 이어진 복도를 한참 걷자 그 끝에 있던 거대한 문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쪽처럼 방금 도착한 듯 좀 떨어진 앞쪽에 서있던 누군가의 모습도.

타오르는 화염을 연상시키는 시뻘건 머리칼의 여인이었다.

그 양쪽에 솟아있는 짐승의 귀. 이마부터 턱까지 사선으로 길게 이어진 자상. 그리고 등 뒤에 메인 거대한 대검.

"여, 참모장."

이쪽을 돌아보고 있던 그녀가 가벼운 투로 말을 걸어왔다.

그와 상반되게 데이폰은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5군주님."

그녀의 정체는 굳이 이름을 듣지 않아도 본 순간부터 곧바로 깨달았다.

[Lv.95]

권성보다도 높은 저 어마무시한 레벨에, 저 외관.

떠오르는 이는 한 명밖에 없었다.

'5군주 광랑, 이그넬.'

회의장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오나.

나는 조금 묘한 기분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봤다.

단지 서있는 것뿐임에도 그녀의 존재감이 공간 전체를 짓누르는 듯했다.

권성이야 모르는 놈이었고, 참모장 데이폰은 게임에서도 거의 얽힌 적이 없는 캐릭터였으나, 광랑은 아니다.

한때 수십 번도 넘게 공략에 도전하며 애를 먹었었던, 더없이 익숙한 네임드 중의 네임드 보스 캐릭터.

새삼 이곳이 게임 속 세계라는 사실이 다시금 선명히 실감되었다.

"네가 직전에 맞춰 도착하고 별일이네. 그런데 저건 뭐야?"

광랑이 나를 향해 턱짓을 하며 물었다.

"대군주께서 직접 회의의 참석을 허가하신 분입니다."

"······허?"

그 말에 그녀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군주 기행이야 하루이틀도 아니니 그렇다 치고, 그래서 누군데?"

"이번에 외부에서 우연히 모셔오게 된······."

"아아, 그러고 보니 너 세인테아로 갔었다고 했나. 어디 얼마나 대단한 놈을 데려왔길래······ 흐음."

그녀의 시선이 다시 내 쪽으로 향했다.

세로로 쭉 찢어진 맹수의 동공이 전신을 한 차례 훑고는 섬뜩하게 눈을 마주쳐왔다.

"별 것 없어 보이는데."

콰우웅!

공기를 산산히 찢는 파공음.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돌풍과 함께 머리카락이 나풀거렸고, 목 바로 앞에는 검날이 멈춰있었다.

"······."

나는 그저 석상처럼 굳어서 검을 쥐고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뭘 한 거야, 지금? 검을 휘두른 건가? 대체 언제?

저 거대한 검을 등에서 뽑는 것조차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중간 과정이 아예 생략된 듯한 비상식적인 속도.

"뭐, 그렇지도 않은가?"

광랑이 씩 웃으며 검을 거두었다.

"아무리 살기가 없어도 아예 반응도 안 할 줄이야. 생긴 거랑 다르게 터프하네."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다.

방금 요단강 한 번 왕복하고 온 기분인데 뭔 놈의 살기 타령이냐.

제왕의 혼만 아니었으면 아마 다리에 힘이 다 풀려서 주저앉았을 것이다.

"5군주님."

고맙게도 데이폰이 굳은 목소리로 제지하듯 나섰다.

"가볍게 인사 좀 한 걸로 정색하기는."

킥킥 웃으며 검을 도로 회수한 광랑이 몸을 돌렸다.

"너, 나중에 기회가 되면 붙어보자고. 아무리 봐도 마력은 전혀 안 느껴지는데 뭔 능력을 쓸지 궁금하네."

무슨 끔찍한 소리를.

의도치 않게 오해 스택이 더 쌓인 것 같다.

마저 걸음을 옮겨 문으로 다가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떨떠름한 심정으로 보고 있자니, 데이폰이 꾸벅 고개를 숙여왔다.

방금의 행동에 대해서 대신 사과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기왕이면 검을 휘두르기 전에 먼저 나서줬으면 좋았을 텐데... 뭐, 목이 멀쩡히 붙어있다는 거에나 감사하자.

쿠구구.

묵직한 울림과 함께 거대한 문이 활짝 열린다.

광랑이 먼저 문을 열고 회의장 내부로 들어간 것이었다.

저 안에 그녀뿐 아니라 다른 군주들도 전부 모여있는 거겠지.

"그럼 들어가시죠."

마치 괴물의 아가리로 나아가는 기분을 느끼며, 데이폰과 함께 회의장으로 입장했다.

군주 회의 (2)

공기가 무겁다.

비유 따위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표현이었다. 회의장에 들어서자 받은 느낌은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그리고 조금 어스름한 공간.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중앙의 거대한 원탁과, 그를 둘러싸고 앉아있는 다섯 명의 사람······ 아니, 존재였다.

"어서 오게, 5군주. 그리고 참모장."

정적을 깨고서 인자한 노인의 음성이 울려퍼진다.

원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난쟁이에게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작달막한 체구, 구릿빛 피부, 턱 밑으로 수북히 뻗은 수염.

무엇보다 떨어진 거리에서 봐도 너무도 선명히 보이는, 암석 같은 근육질의 전신.

나는 그 모든 특징을 하나로 압축하는 명칭을 알고 있었다. 드워프.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 또한.

'1군주 신퇴, 아고르.'

그를 포함해 원탁의 군주들의 시선은 일제히 이쪽을 향해있었다.

"어, 아고르 영감도 오랜만."

광랑이 비어있는 자리 중 하나에 다가가 털썩 기대앉았다.

그 외에 더 오고 가는 인사는 없었다.

그저 의문에 찬 시선들이 여전히 나와 데이폰을 향해 머물러있을 뿐.

3군주 천궁, 2군주 뇌후, 6군주 폭왕, 8군주 흑해 여제······ 나 또한 그들의 면면을 살피며 기억 속 이름을 하나씩 매칭시켰다.

칼데릭의 군주들은 종족도, 특색도 완벽히 제각각이니 누가 누구인지는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대군주는······ 없나?'

아직 회의장에 안 도착한 건가?

대군주 외에 4, 7, 9군주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 또한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지 아예 불참인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데, 옆의 인간은 누구인가?"

1군주 신퇴가 데이폰을 향해서 물었다.

앞서 광랑에게 설명했던 것처럼 데이폰이 다시 나를 소개했다.

"외부에서 모셔온 귀빈입니다. 대군주께서 회의의 참석을 직접 허가하셨습니다."

그 말에 군주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참석 허가라니······ 대군주가?"

질문을 던진 신퇴는 의문과 놀라움이 섞인 투로 중얼거렸고.

"흐응,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래?"

8군주 흑해 여제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서 흥미롭다는 기색을 표했으며.

"하여간 우리 대군주님은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 이번 회의는 시작부터 따분하지 않아서 좋네."

6군주 폭왕도 마찬가지로 재밌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

3군주 천궁은 별 관심 없다는 듯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는 처음부터 이쪽에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었다.

"대군주께서 어찌하여 외부자를 군주 회의에 참석시키셨단 말인가?"

유일하게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낸 이는 2군주 뇌후였다.

하늘색의 장발, 길고 뾰족한 귀를 지닌 엘프가 노골적인 언짢음이 서린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도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으니 그렇게 안 노려봤으면 좋겠는데.

그때 광랑이 킥킥 웃으며 끼어들었다.

"대군주가 허락했다는데 그냥 그런가 보다 하지, 왜 엄한 데에 따지고 있어? 꼬맹이 더러운 성질은 여전하네."

뇌후가 시선을 홱 돌려 그녀를 노려봤다.

"날 꼬맹이라 부르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요, 5군주."

"그랬었나? 뭐 어쩌라고. 꼬우면 너도 나 개새끼라고 부르든가."

놀리듯 귀를 쫑긋거리는 광랑의 행동에 뇌후는 상대를 말자는 듯 혀를 찰 뿐이었다.

나는 그저 우두커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계속 이러고 서있어야 되나 생각이 들 즈음 데이폰이 나를 자리로 안내했다.

"이쪽에 앉아주시길."

그렇게 나는 원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게 되었다.

물론 군주들의 관심은 여전히 거두어지지 않은 채였다.

아, 정말 싫다. 이 분위기.

무엇보다 8군주 흑해 여제······ 하필 정면 자리에 앉은 그녀는 존재 자체만으로 나를 상당히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이마의 나방 같은 더듬이와, 등 뒤에 달린 거대한 막 날개, 그리고 인간의 피부와 곤충의 외골격이 섞인 듯한 외형은 충분히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그로테스크했으니까.

'나한테 말 걸지 마라, 제발.'

이 괴물들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허공에 시선을 두고, 무표정을 유지한 채 닥치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회의장의 문이 다시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뭔가 했더니 그냥 하녀였다.

"······?"

아니······ 하녀?

회의장에 홀로 들어온 여인이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원탁에 다가와 찻잔을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한다.

어쩐지 군주들 사이에 한층 묘한 분위기가 내려앉은 듯했다.

굳이 신경 쓸 것도 없이, 회의 시작 전 미리 마실 것을 세팅하는 평범한 시종의 모습.

하지만 난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Lv.98]

그야, 고작 하녀가 군주들조차 압도하는 정신 나간 레벨을 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대체 뭐 하자는 거지, 이건.

"흐흥, 대군주께선 대체 언제 도착하시려나? 이제 시간도 다 됐는데."

흑해 여제가 나를 향해 눈웃음 지으며 능청스레 중얼거렸다.

"곧 오겠지. 차나 들면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말이야."

말과는 정반대로 김이 펄펄 나는 차를 단숨에 들이킨 폭왕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광랑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5군주, 번헬에 갔었다고 들었는데 뭐 재미난 이야기라도 들려줄 건 없나?"

"은근슬쩍 말 걸지 마라, 흡혈귀 새끼야."

하지만 그녀는 좀 전까지와 다른 서늘한 목소리로 그 물음을 무참히 뭉개버릴 뿐이었다.

말도 섞기 싫다는 듯한 매몰찬 태도에 폭왕은 익숙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거 쌀쌀맞기는. 왜 항상 나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건지 모르겠다니까. 안 그래, 2군주?"

"당신처럼 천박한 이를 어느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몇 번이나 말했지만 제게 쓸데없이 말 걸지 마십시오."

"크큭! 정말 너무들 하는구만. 좀 전에 싸워놓고도 내 편을 안 들어주네."

그 쓰잘데기없는 대화들을 들으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 어이없는 연극을 언제까지 보고 있어야 되는 건지.

'시험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달그락.

마지막으로 내 곁으로 다가와 찻잔을 내려놓은 하녀를 바라보며, 나는 굳게 닫고 있던 입을 뗐다.

"대군주."

하녀의 동작이 멈칫 굳는다.

"쓸데없는 장난은 언제 끝낼 거지?"

다른 군주들이 하나같이 놀란 기색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여태껏 내게 시선 한 번 보내지 않았던 3군주 천궁까지도.

"······하핫!"

그제야 가면을 벗어던진 하녀가 한 발짝 물러서며 웃음을 터뜨렸다.

"데이폰의 은신도 단번에 꿰뚫었다더니, 간만에 정말 재밌는 손님이 찾아왔네?"

······대군주 라샤테인.

칼데릭 전체의 주인이자, 아홉 군주들의 수장.

그리고 이 라사 세계관의 최강자에 가까운 인물 중 하나.

사르륵.

순간 그녀의 전신이 시커먼 기운에 휘감기더니 눈 깜짝할 사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뒤바뀌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칠흑색의 장발과 눈동자, 그리고 입고 있던 옷까지도 하녀복에서 화사한 드레스 복장으로.

원탁의 상석으로 걸어간 그녀가 드레스 자락을 나풀거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금까지 회의장의 입구 부근에 서있던 데이폰은 어느새 그 뒤로 다가가서 선 채였다.

"어디 보자, 4군주하고 9군주는 각자 일이 있으니 불참이고."

원탁을 둘러보던 대군주의 시선이 신퇴에게로 향했다.

"1군주도 여러모로 바쁠 텐데 수고해서 참여해줬네."

그 말에 신퇴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별 말씀이오, 대군주. 불가피한 일이 아니고서야 군주 회의에 참석하는 건 군주로서 당연한 의무이니."

대군주가 옅은 미소를 띤 채 이번엔 뇌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2군주는 아까부터 할 말이 굉장히 많아 보이는 얼굴인데?"

"······강녕하셨습니까, 대군주."

고개를 꾸벅인 그녀가 나를 힐끗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저 회의에 외부자를 참석시킨 대군주의 의중을 짐작하기가 어려울 뿐입니다."

"하하, 뭘 의중씩이나."

대군주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마침 다들 모이니까 적당한 자리겠다 싶었을 뿐이야."

······적당해? 뭐가?

이어 그녀가 분위기를 환기하듯 짝짝 손뼉을 쳤다.

"자, 그럼 회의 시작! 첫 번째 안건은 보시다시피 새 인재 영입 건인데, 참모장한테 얘기는 대충 들었지?"

군주들의 이목이 다시금 집중되었고, 대군주 또한 싱긋 웃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우선 경의 이름부터 직접 다시 알려줬으면 하는데."

"······론."

이제 시작이군.

아직까지 특별한 위기는 없었으나 조금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진짜는 대군주가 등장한 바로 지금부터였으니까.

뇌후의 말마따나 생판 외부자인 나를 군주 회의에까지 불러와서 이 자리에 앉힌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설마 능력을 시험한답시고 군주들이랑 싸움이라도 붙이려는 건 아니겠······.

"좋아. 그럼 론 경, 칼데릭으로 온 목적이 뭐야?"

······무슨 면접이냐?

생각보다 평범한 질문이 날아와서 꽤 긴장하고 있다가 맥이 빠졌다.

나는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고 빤히 그녀를 바라봤다.

"아아, 물론 먼저 제안한 쪽이 우리 참모장이라는 건 알아. 궁금한 건 어째서 마음이 동했냐는 거야."

"······."

"솔직히 지금 엄청 놀란 상태거든. 경 정도 되는 인물이 이렇게 불쑥 성에 찾아오고. 단순히 부귀영화가 목적이면 어디서든 원하는 대로 누릴 수 있는 실력이잖아? 그런데도 칼데릭으로 온 건 달리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냐?"

특별한 이유는 개뿔.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치다 내몰린 막다른 길이 이곳이었을 뿐이다. 그딴 게 있을 리 있나?

나는 대군주의 능력을 전부 알고 있다.

어차피 적당히 꾸며 대답하는 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답하기로 했다.

"딱히 목적은 없다."

그에 대군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말의 진의를 가늠하는 듯이.

"······데이폰에게 들은 대로네. 그럼 정말 단순한 흥미뿐이라는 거구나?"

입꼬리를 올리며 도로 웃음을 지은 그녀가 좋아, 좋아라고 흥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말괄량이 소녀와 같은 모습이었으나 전혀 귀엽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 내면에 숨겨진 실체는 천 살 가까이 먹은 괴물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 보이는 모습도 본체가 아닌 폴리모프 껍데기에 불과하고.

'그래서 본론은 뭐냐.'

어쨌든 고작 그거 하나 묻자고 이 자리에 앉힌 건 아니겠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나는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다시 대군주의 입이 열렸다.

"론 경, 군주 할 생각 없어?"

군주 회의 (3)

"······."

뭐?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순간 의미를 잘못 이해했나 싶어 그녀가 한 말을 되짚어봤다.

하지만 어떻게 해석해도 말한 그대로의 의미였다.

지금 저 여자가, 대군주 라샤테인이 나에게 칼데릭의 군주가 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진심?'

아니, 그럴 리가 있나.

당연히 조크 같은 거겠지.

신경에 날이 바짝 선 상태이다 보니 농담까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 모양······.

"아, 오해하지 마.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할 생각 없냐고 물어보는 거야."

"······."

"지금 7군주 자리가 몇 년째 비어있는 상황이거든. 계속 비워둘 수도 없는데 영 마음에 차는 놈도 없고. 그러던 와중에 마침 론 경이 찾아온 거야. 나는 경이 7군주좌를 맡아줬으면 좋겠는데."

······이 여자가 대체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걸까.

7군주 자리를 맡아? 누가? 내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농담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나는 황당함과 당혹스러움을 숨긴 채 간신히 표정만 유지했다.

'그런데 7군주 자리가 왜 비어있지?'

내가 알고 있는 7군주 살귀 리프리곤은 어디로 증발하고?

권성이 다른 놈이었던 것도 그렇고, 역시 내가 플레이했던 라사의 배경과 시간대 차이가 있는 건가?

'다른 군주들은 전부 그대로인 걸 보니 미래는 아닐 테고, 그럼 과거의 시점이라는 건데······ 아.'

2군주 뇌후의 존재를 고려하면 아마 그리 멀진 않은 몇 년 전의 과거가 아닐까 싶다.

뭐, 지금은 그런 거나 따져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지만······.

"대군주······ 진심이십니까?"

짧게 이어진 정적을 깨고 가장 먼저 뇌후가 말을 뗐다.

"뜬금없이 외부자는 왜 참석시켰나 했더니 이럴 생각이셨구만. 전부 모인 자리에서 바로 결정하려고?"

폭왕도 헛웃음을 흘리며 의자에 등을 파묻었다.

다른 군주들도 입을 열진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황당하다는 기색들이었다. 아까부터 계속 멍만 때리고 있는 천궁 빼고.

그야 그렇다.

아홉 군주는 대군주 라샤테인을 제외하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을 지닌 존재이자, 칼데릭의 상징 그 자체.

그런 지고한 자리에 앉을 인물을 뭔 점심 메뉴 고르듯 가볍게 정하려 하고 있으니.

나도 이렇게 어이가 없는데 다른 군주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대군주가 홀로 태연하게 웃었다.

"좀 갑작스럽긴 하겠지만, 다들 잘 알잖아? 군좌에 필요한 자격은 능력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뇌후가 곧바로 항의했다.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저 자가 대체 무엇으로 본신의 능력을 증명했단 말입니까?"

"충분히 증명했지. 세인테아의 권성을 일격에 죽였다고 하니까."

"······!"

"그렇지, 참모장?"

"그렇습니다."

대군주의 물음에 데이폰이 긍정했다.

당연하게도 호송선에서 있었던 일은 그녀도 모두 전해들은 모양이었다.

"허, 권성을 죽였다고?"

군주들은 상당히 놀란 기색이었다.

물론 칼데릭의 군주 전원은 권성보다 높은 격의 강자들이다.

단순 수치상으로는 몇 레벨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만 고레벨대, 특히 80, 90레벨대에서는 레벨 하나하나가 큰 격차니까.

이들이 놀란 포인트는 단순히 권성을 죽였다는 사실이 아니라, 아마 '일격'에 죽였다는 부분이겠지.

"게다가 내 정체까지 단번에 간파했고 말이야. 지금까지 그랬던 군주가 누구 또 있었던가?"

그 말에 군주들이 모두 침묵했다.

이제 보니 다른 군주들도 한 번씩은 대군주에게 비슷한 장난을 겪었던 모양이다.

와중에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천궁이 뜬금없이 손을 슥 들어올렸다.

"그래, 3군주는 빼고."

손을 내린 천궁이 다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다른 군주들은 그런 그를 딱히 신경 쓰지도 않았다. 기행이 한두 번도 아니라는 듯 익숙한 분위기.

신퇴가 나와 데이폰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한데 대군주, 이번에 참모장이 어떤 임무로 세인테아에 갔던 것인지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오만."

"그렇지 않아도 회의 안건 중 하나였으니까 그건 잠시 미뤄두고."

대군주가 원탁을 둘러봤다.

"어쨌든 나는 론 경이 군주 자리에 앉아도 별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때? 또 반대 의견은?"

그때 뇌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직접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확인?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이어진 말에 바로 알 수 있었다.

"저 론이라는 인간의 역량을, 제가 이 자리에서 말입니다. 가벼운 결투 정도는 대군주께서도 허락해주시겠지요."

······순간 가슴이 싸늘히 식어내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냉정함이 억지로 붙들었다.

'기어코.'

기어코 발생하고야 말았다.

회의장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 군주라는 이름의 괴물들 사이에 끼어앉게 됐을 때부터 내내 우려했던 경우의 위기가.

"진심이야, 2군주? 대군주성을 다 날려버리기라도 하려고?"

폭왕이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괴고선 실실 웃었다.

"대군주께서 계시는데 별 문제가 있을 리 있나요. 흐흥,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네요."

흑해 여제도 더듬이를 살랑거리며 한마디 거든다.

다른 군주들도 모두 흥미진진하다는 눈길을 보내왔다.

"흐음, 글쎄······."

대군주가 빤히 이쪽을 바라본다.

그 웃음기 띤 표정을 보니, 그녀는 처음부터 이런 흐름쯤은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경의 생각은 어떠려나?"

······생각이 어떠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2군주 뇌후, 엘리서스.

전력을 발휘하면 일대 전체에 벼락 폭풍도 일으킬 수 있는 저 괴물하고 싸우라고?

개미와 코끼리의 대결도 그보다는 훨씬 합리적일 것이다.

그녀의 손짓 한 번에 내 전신은 시커먼 재가 되어 흩날릴 터였다.

즉살 하나를 제외하면 내게는 정말 아무런 능력도 없었으니까.

'빠져나갈 구멍이······.'

모두의 관심이 내 대답으로 몰렸다.

별다른 명분 없이 싸움을 회피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상황이 내게 있어 좋은 방향으로 흐르지는 않겠지.

순간 머릿속에 꽤 그럴듯한 허장성세가 떠올렸다.

먹힐지는 전혀 알 수 없었으나, 여기서 더 침묵하고 있다간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나는 슬쩍 뇌후를 바라보고서 입을 뗐다.

"상대를 죽여도 상관없다면."

그리고 이어서 덧붙였다.

"적당히 제압만 하는 것에는 별 소질이 없다."

"······."

단 두 마디 말에 회의장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무시무시한 압력이 확 퍼지며 공간을 채운 건 그 다음이었다.

"뚫린 입이라고 감히······."

쿠구구구.

뇌후가 전신에 스파크까지 튀겨대며 살의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내 방금 발언은 받아들이기에 따라 그녀 따위야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무시였으니까.

'······이게 살기인가?'

온몸이 찌릿거리는 소름 끼치는 감각.

나는 그런 뇌후의 살기를 태연하게 받아내며 무표정을 유지했다.

압력은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제왕의 혼 덕분인지 정신이나 감정적인 동요는 전혀 없었다.

싸움을 피하긴 커녕 오히려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든 데는 이유가 있었다.

노린 건 대군주의 중재였다.

나는 상대를 죽여도 괜찮은 조건이라면 결투를 받아들이겠다 했고, 그 도발에 뇌후 역시 완전히 격노했다. 생각보다 훨씬 격한 반응이었지만.

이렇게 어느 쪽도 적당히 끝나지 않을 판이 만들어지면 대군주가 싸움을 허용할 리 없을 것이었다······ 없겠지?

'빨리 쟤 좀 말려줘.'

금방이라도 내가 앉아있는 자리로 전격이 몰아칠 듯 분위기는 살벌했다.

너무 섣불렀나 살짝 후회가 들 즈음 대군주가 입을 열었다.

"그만."

방금까지와 달리 조금은 엄중한 음성.

그에 뇌후는 순순히 기운을 가라앉혔다. 여전히 나를 노려보는 채였지만.

"이러면 어쩔 수 없겠네. 전혀 가벼운 결투가 아니게 되잖아?"

도로 천진한 목소리로 돌아온 대군주가 분위기를 풀듯 싱긋 웃었다.

나는 속으로 깊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생각대로 무사히 넘어가서 다행이었다.

남의 속을 알 리 없는 다른 군주들은 좋은 볼거리를 놓쳐서 아쉽다는 기색들이었지만.

"뭐, 어쨌든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광랑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딱히 저 흡혈귀처럼 천박한 놈인 것 같지도 않고. 군주 임명이야 어차피 대군주 권한인데 우리 의견을 들을 게 있나."

"가만히 있는 나는 왜 또 걸고 넘어져?"

혈왕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신퇴도 나를 힐끗 바라보고는 나서서 거들었다.

"갑작스럽긴 하나 대군주의 안목을 의심하진 않소. 또 말마따나 7군주좌를 언제까지고 비워둘 수도 없는 노릇. 본장 역시 결정에 불만은 없소이다."

뇌후를 제외하면 딱히 불평을 드러내는 군주는 없어 보였다.

동의한다기보다도 그냥 관심이 없거나, 대군주의 뜻이 확실하니 별말 없이 수용하는 기색들에 가까웠지만.

그런데 난 아직 수락하겠다고 안 했는데 왜 이미 다 확정된 분위기인 거냐?

'······하기야 그런가.'

무려 칼데릭의 군주다.

대륙의 4대 세력 중 하나인 칼데릭 권력의 정점이었다. 그런 자리를 보통 어느 누가 마다할까.

문제는 내게 군주의 자리에 걸맞는 능력이 실제로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상황이 착착 맞아떨어진 덕분에 내 능력에 대해서 모두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지만, 진실은 성문을 지키는 말단 경비병도 못할 실력이었다.

이 행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

대군주의 제안을 받아들여 정말 7군주가 되면 그때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거절을 하면······.'

그 또한 위태로운 선택지였다.

무엇 하나 내 의지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칼데릭에 적을 두겠답시고 대군주성에 와서 군주 회의에까지 참석한 입장.

그리고 대군주는 자신이 내걸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제시했다.

이런 마당에 이제 와서 발을 빼겠다고 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까.

어쩌면 대군주의 저 친근한 태도가 순식간에 적의로 돌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감히 자신을 기만한 거냐며.

과연 그것을 직접 확인해보는 것이 멍청한 만용일지, 아니면 최악을 피하는 올바른 선택일지는 알 수 없었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해야 되나.'

머릿속이 혼잡하다.

차라리 결정을 조금이라도 유예하는 게 그나마 낫지 않을까?

그때 광랑이 날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아쉽네. 언제든 한번 붙어보기로 아까 회의장 앞에서 약속했었는데 말이야. 이대로 군주가 되면 그러기도 글렀네."

······대체 언제 그런 약속을 했는데?

그리고 군주가 되면 그러기도 글렀다니, 저건 또 뭔 말인가 싶다가 이내 이해했다.

그러고 보니 칼데릭에선 군주들 간의 전투만큼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다는 설정이 있었던가.

개별적인 성향이 무척이나 강한 군주들이 큰 충돌 없이 공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율이라고.

"나도 적당히 끝내는 거 엄청 싫어하거든. 최소한 어느 한쪽이 뒈지기 직전까지 가야 그게 제대로 된 결투지, 안 그래? 너랑은 그럭저럭 마음이 맞을 것 같았는데 아깝게 됐어."

"······."

희희낙락 웃으며 하는 그 살벌한 소리에 문득 끔찍한 가능성이 떠올랐다.

만약 군주 자리를 거절하면, 당장 회의가 끝난 후에라도 저 미친 괴물이 신나서 싸움을 걸어올지도 모르겠다고.

첫 대면에도 다짜고짜 목에 검부터 들이댔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넘치는 일이다.

그뿐인가? 지금도 옆에선 뇌후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저쪽은 훨씬 더 위험하다.

거절의 선택지를 고르면 당장 회의가 끝난 다음 일부터 걱정해야 할 판인 것이었다.

수락과 거절.

어느 쪽이든 글러먹은 최악과 차악의 선택지. 호송선에서와 비슷하다.

새삼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와선 안 됐다는 후회가 솟았다.

역시 대군주와 마주하기 전에 어떻게든 이 빌어먹을 성에서 탈출했어야 했던 건가.

······하지만 후회는 부질없고, 시간은 나를 조금도 기다려주지 않은 채 선택을 강요했다.

"자, 이제 론 경의 대답만 남았네."

대군주의 최종 선언.

"칼데릭의 대군주로서 경에게 정식으로 제안할게. 7군주좌를 맡아주겠어?"

회의장에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고, 원탁의 모든 군주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끝내 마음을 정한 나는 반쯤 체념한 채 입을 열었다.

"······받아들이지."

정리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된 후에도 난 계속해서 회의장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물론 뭔지도 모를 내용들을 떠드는데 거기 끼어들어 입을 열 일은 없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난 뒤, 저녁에 있을 만찬이라든가 앞으로의 예정이라든가 등의 이야기를 나누고 방으로 돌아온 것이 현재.

"하."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칼데릭의 7군주.

이제부터 그게 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평범 그 자체인 삶을 살다가 갑자기 군주가 되다니, 출세도 이런 출세가 없었다.

비록 남은 명줄이 얼마나 되는지는 이 순간부로 조금도 알 수 없게 됐다지만 말이다.

칼데릭의 영역은 크게 나누면 중앙의 대군주령과 그를 둘러싼 1~9군주령, 총 열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군주들은 명칭만 괜히 군주인 게 아니라 각각이 하나의 왕국과도 같은 그 거대한 땅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존재였다.

이제 7군주가 된 나 역시 7군주령인 '엔록'에 대한 모든 권력을 손에 쥐게 된 입장이었다.

칼데릭의 군좌가 혈육의 계승 따위는 없이 오로지 오로지 대군주의 임명 아래 정해지는 자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홉 군주가 대군주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대군주가 군주들의 수장이자 구심점이긴 하나, 회의에서도 봤듯이 이들 사이의 관계는 수직이 아닌 수평적인 계약관계에 가까웠다.

몇몇 정해진 조건만 제외하면 군주들은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이런 기이한 구조가 이뤄지고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칼데릭의 유래와 관련된 설정집에서 읽은 기억이 있었다.

설명이 꽤 상세히 적혀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떠오르는 핵심만 말하자면 이거다.

대군주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고, 그러한 역량 아래 오랜 세월이 흐르며 자연스레 세력 자체가 단단히 굳혀졌기 때문에.

현 군주들 중 몇몇은 이미 백 년이 넘는 아득한 시간을 대군주와 함께하였고, 특히나 1군주 신퇴는 칼데릭의 설립부터 수백 년을 군주로서 군림해온 존재였다.

그러한 긴 유대 아래 이어져온 체계는 어떤 면에선 전형적인 왕정인 세인테아 제국 연합보다도 견고한 것이었다.

'······그딴 것들이야 아무래도 좋고.'

대체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여버린 거지?

잠시 이런저런 후회를 줄줄이 이어가다가 문득 우스움을 느꼈다.

어디부터 꼬여버렸냐니.

내가 뭘 어떻게 했고 자시고, 애당초 게임 속에 들어온 이 상황부터가 무언가 꼬여도 제대로 꼬여버린 것 아니겠는가.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테이블 위의 바구니에 담긴 사과처럼 생긴 과일을 하나 집어들었다.

한입 크게 베어 무니 달콤한 과즙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평소 알던 사과 맛이랑 미묘하게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맛은 좋았다.

상황이 이러니 뭘 먹을 생각이 안 들었을 뿐이지 아까부터 공복이었다.

확 몰려온 허기에 과일 몇 개를 순식간에 해치운 뒤에야 의자에 털썩 등을 기대고 앉았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잖아.'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쓸데없이 하나하나에 후회하고, 처지를 한탄할 필요가 있나.

그보다는 앞으로의 일들을 대비하고 준비하는 게 말할 필요도 없이 훨씬 생산적이다.

그렇게 마음을 잡자 축 처지는 맥없는 감정들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제왕의 혼 덕분에, 내 마음의 가장 근간에는 차가운 냉정이 언제든 내가 흔들리지 않도록 굳게 자리를 잡게 된 듯했다.

이곳은 지구가 아니다.

21세기처럼 현대적인 배경의 세계도 아니었다.

몬스터, 강도, 전쟁, 마족······ 온갖 위험들이 득실거리고 생명의 가치가 하찮은, 거칠고 흉흉한 땅.

결국 본래 현실로 돌아갈 근본적인 방법을 찾지 못하는 한, 이 연약한 목숨이야 앞으로도 얼마든지 위협받을 수 있다.

더군다나 이 세계에 어떤 어두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좌절할 것만도 없었다.

라사에서도 손에 꼽는 고인물이었던 내 머릿속에는 이 세계에 대한 온갖 수많은 지식과 정보가 들어있으니까.

또 가진 능력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즉살과 제왕의 혼,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즉사기와 멘탈 유지기를 하나씩 가지고 있지 않은가.

물론 본 캐릭터의 능력이 완전히 다 전이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아무튼 좋게 보면 나쁘지만도 않은 상황이다.

칼데릭의 7군주라는 직위.

이것은 나에게 엄청난 위험부담이지만 동시에 힘이 될 수도 있었다.

적어도 칼데릭의 영역 내에선 절대적인 권력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

앞으로 하기 나름이겠지만, 가진 바 정보를 활용해 다가올 위험들에 대비하기엔 분명 굉장한 어드밴티지가 될 터였다.

'그나저나 대군주는······.'

생각의 흐름이 대군주 라샤테인에게로 이어졌다.

대군주는 상상 이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녀가 정확히 무슨 의도로 내게 군주 자리를 내어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예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도 괜히 물어본 건 아니었겠지.'

칼데릭으로 온 이유.

그것이 대군주가 내게 가장 먼저 던졌던 질문이다.

짐작하건데 아마 그건 최소한의 확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녀에게는 상대방의 말의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딱히 아무 목적도 없다는 내 대답은 진실로 판명났을 테니, 적어도 내게 어떤 불순한 목적이 있지 않다는 건 알았겠지.

'아, 론이 가명이라는 것도 알아챘으려나.'

언뜻 보면 대군주가 굉장히 대충 결정을 내린 것 같지만 그렇지만도 않았다.

뭐가 됐든 그녀는 칼데릭이라는 거대 세력을 아득한 세월 동안 다스려온 역량을 지닌 인물이었으니까.

일단 군주 자리에 앉혀두고 자세한 능력이야 앞으로 천천히 지켜보겠다는 생각인지도 모르지.

뭐, 어쨌든.

'일단은 할 수 있는 걸 한다.'

여러가지로 복잡했던 생각을 얼추 정리한 나는 몸을 일으켰다.

당장 시작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머릿속에 든 정보들의 정리와 앞으로의 계획 수립. 우선은 그것부터다.

***

"역시 어중간한 놈 안 앉히고 비워두고 있길 잘했다니까. 안 그래, 데이폰?"

라샤테인의 말에 데이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굳이 답을 원하고 묻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새 군주를 임명하는 건 오로지 대군주의 권한이지만, 한 번 임명한 군주를 파명하는 건 아무리 그녀라도 멋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빈 군좌가 없었다면 오늘에서야 비로소 나타난 새 주인에게 다른 직위는 무엇도 내어주기가 마땅치 않았으리라.

"그래도 조금 의외였습니다."

"흐응, 뭐가? 곧바로 군주위를 내어준 게?"

"론 경······ 이제 7군주님이라고 불러야겠군요. 아무튼 그분을 회의에 참석시키셨을 때부터 예상은 했습니다만."

라샤테인이 씩 웃었다.

"한 번 본 걸로 충분할 정도였거든."

론.

새삼 생각하지만 참으로 묘한 인간이었다.

특히나 폴리모프를 간파당했을 때는 그녀도 진심으로 놀랐었다.

반쯤 장난 섞인 시험이긴 하나, 역대 군주들 중 그녀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렸던 이는 현 3군주 천궁을 제외하고 누구도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그녀 정도의 격에 오르면 대상의 단순한 외적 요소뿐만 아니라 훨씬 본질적인 부분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제왕을 연상케 했던 지고한 영혼.

아직 제대로 된 능력은 무엇 하나 알지 못했으나, 최소한 그가 다른 군주들에 못지않은 강자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못 봤어? 그 따분해 죽겠다는 표정."

"······."

"쓸데없이 더 간만 봤으면 아마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지도 모를걸, 하하! 그런 식으로 허무하게 놓치긴 절대 싫었거든."

데이폰 또한 회의 내내 론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워낙 표정 변화가 없어서 내심 군주 자리를 거절할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였는데,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7군주는 바로 이동할 예정이래?"

"아마 조금 더 성에서 머무실 듯합니다. 엔록으로 전령은 보내두었습니다."

"그래. 아무튼 수고 많았어. 이번 출성은 본 목적보다도 훨씬 큰 성과가 있었네."

참모장 데이폰이 직접 움직여 세인테아로 향했던 것 또한 중요한 목적이 있었으나, 지금 라샤테인의 머릿속에는 론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아체몬 호송선에 죄수로 타고 있다고 했었지."

호송선에서 있었던 일, 론을 처음으로 접한 당시의 상황은 회의가 시작하기 전 그녀도 전부 전해들었다.

그가 어떤 식으로 권성 가르톤을 살해했는지까지도 전부.

"정말 권성을 죽일 때 별다른 기운은 못 느꼈어?"

"예, 말씀드렸다시피 전혀. 단순히 제가 인지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열 걸음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던지라..."

"흐음, 그럼 역시 마법 쪽은 아니려나."

시종인 척 회의장에 입장해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라샤테인은 신경을 기울여 론을 살폈었다.

하지만 그에게선 명백히 어떠한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내 감각까지 속였다는 건 말도 안 되고, 아무래도 '신비'일 확률이 높겠네."

"······."

"아니면 내가 아예 모르는 종족 특질일지도. 외형만 그렇지 인간이 아닐 수 있으니까. 대체 어떤 종류의 능력일까 궁금한걸."

입가에 흥미롭다는 미소를 만연하게 띤 채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데이폰이 넌지시 물었다.

"어째서 더 자세히 알아보진 않으셨는지."

"말했잖아. 쓸데없이 간볼만한 상대가 아니었다니까. 그리고 론도 진짜 이름도 아니었고."

"아······ 역시 그렇습니까?"

"그래. 그런데 다른 것들이야 물어본다고 순순히 알려줄 리가 있나."

론이 스스로의 본명을 밝히지 않았다는 걸 라샤테인은 알고 있었다.

상대의 말에 섞인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건 그녀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뭐, 확인할 건 확인했으니 나머지야 아무래도 좋지만······ 한번 직접 정체를 알아보고 싶긴 하네. 간만에 재밌는 거리잖아?"

"······설마 세인테아로 향하신다는 건?"

"하하, 놀라지 마. 당장이 아니라 나중에 시간 날 때 하겠다는 거니까. 데이폰 너는 언제나 걱정이 과하다고."

손을 휘저은 라샤테인이 씩 웃었다.

"아무튼 천천히 지켜볼까. 우리 새로운 7군주가 앞으로 과연 어떤 행보를 보여줄지 기대되는걸."

***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대군주성에서의 생활은 더할 나위 없이 안락했다. 식사는 훌륭했고, 잠자리는 편안했다.

언제든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시종들이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즉시 대령하니 불편할 것이 있을 리 없었다.

"······."

나는 멍하니 창가에 서서 바람을 쐬고 있는 중이었다.

성내 한편의 광장처럼 넓은 공간에 기사들이 모여 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7군주령 엔록으로 이동하지 않고 아직까지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정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며칠간 거의 방에만 틀어박혀 나름대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우선 이 세계가 예상했던 대로 내가 플레이했던 라사의 배경과 시간대 차이가 있다는 건 확인했다.

라키로니아 대륙력 759년, 정확히 5년 정도의 과거 시점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포함해서, 중요하거나 조금이라도 쓸만한 정보들은 기억에서 끄집어내 모조리 메모해두었다. 혹시나 잊어버리지 않도록.

한국어로 적은 필기를 혹시라도 누가 알아볼 일은 없었기에 메모에 부담을 느낄 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상기한 정보들을 토대로 앞으로의 대략적인 계획 또한 세웠다.

'가장 필요한 건 무력.'

최우선 순위는 당연하지만 내 일신의 스펙 강화였다.

지금의 나는 약해도 너무 약했다.

신변의 안전 문제를 포함해서, 고작 1레벨 수준의 무력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즉살 스킬은 상대가 누구든 닿기만 하면 죽일 수 있는 비장의 수는 되지만, 단지 그뿐이었으니까.

게임을 플레이할 때처럼 상대를 죽이고 경험치를 얻어 레벨을 올릴 수 있다면 스펙업이야 걱정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하지만 게임이 현실이 된 지금은 안타깝게도 그런 건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경험치 시스템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내가 권성을 죽였을 때 뭐라도 변화가 있었어야 할 테니까.

더해서 스탯, 스킬 정보창이나 인벤토리 등등 다른 시스템들도 전부 없었다. 혹시나 싶어 허공에 대고 중얼거려봤지만 뭐가 나타나진 않았다.

그저 가지고 있는 두 스킬과 내 시야에 보이는 레벨 표시만 제외하면, 이곳은 배경만 게임이지 완벽한 현실이었다.

현실에서 강해지는 방법.

당연히 직접 고생하며 수련을 하면 된다. 지금 아래에 보이는 저 기사들처럼.

하지만 내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만에 하나, 알고 보니 내가 뭐 검술이나 마법 같은 것에 엄청난 재능이 있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완전히 입문부터 시작해 충분히 강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또 배우는 건 누구에게 배우고?

몇 년 정도 지나면 간신히 30레벨 수준까진 강해질 수 있으려나?

대군주성의 최말단 기사도 그것보단 레벨이 훨씬 높을 것이었다.

······때문에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노력 하나 들이지 않고 순식간에 강해질 수 있는 종류의 능력을 얻으면 된다.

대륙 곳곳에 숨어있는 신비나, 혹은 유적 등의 히든 피스들.

당장 이곳 대군주성에서 7군주령으로 향하는 길만 해도 얻을 수 있는 신비가 하나 있었다.

그것들이 내 본질적인 전투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단기간 내에 순식간에 스펙을 증폭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역시 쉽지 않겠지.'

여느 판타지가 그렇듯, 기연이 숨어있는 곳은 대체로 험지다. 이 세계도 그러했다.

몬스터라든지 함정이라든지, 내게는 그 과정의 위험을 전부 뚫고 목표가 있는 곳까지 도달할 능력이 없었다.

군주의 권력을 이용해 그럴 능력이 되는 사람에게 구해오도록 시킨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정말 그렇게라도 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확실하지도 않고 영 불안한 방법이었다.

또 신비처럼 대신 구해오는 게 불가능한, 반드시 내가 직접 가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도 많았고.

애초에 히든 피스들을 찾으러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는 일부터가 나 혼자서는 못할 일이다.

때문에 뛰어난 조력자가 필요했다.

언제 어디서든 곁에서 내 안전을 확실히 책임질 수 있는 조력자······ 그래, 즉 호위가.

아셸 그론힐트 (1)

70레벨.

이것저것 고려해보면 적어도 70레벨 이상의 호위가 필요했다.

군주들과 비교하면 초라한 레벨이지만 애초에 그들은 규격 외의 괴물들이고, 70레벨만 되어도 사실 굉장한 수준의 강자였다.

30레벨이 홀로 일반 병사 백 명도 거뜬히 학살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70레벨은 그런 30레벨이 얼마나 몰려들든 무더기로 학살할 수 있었다.

'호위 자체를 구하는 건 문제없겠지만······.'

당장 7군주령의 군주성으로만 가도 조건에 맞는 실력자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터.

다만 문제는 내가 그들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였다.

원하는 건 정말 항상 곁에 붙어서 나를 호위할 조력자인데, 당연히 능력 이전에 신뢰가 더욱 큰 문제였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그럭저럭 믿을 수 있는 이를 호위로 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애매하군."

능력에 맞지 않는 자리가 이토록 버거운 것이다.

아직 뭘 한 것도 없는데 앞일을 생각한 것만으로 벌써부터 막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파묻었다.

그러다 갑자기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방 바깥에 있는 케일런을 불렀다.

"책을 읽고 싶은데, 성에 도서관 같은 곳도 있나?"

"예, 존재합니다."

혹시나 싶어 물어본 건데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몇 곳이 있고, 심지어 중앙 도서관까지 따로 존재한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성내에 도서관이 있는 게 이상할 것도 없긴 했다.

대군주성은 세인테아 제국으로 따지면 황궁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명칭이 군주성이니 어감이 좀 다를 뿐이지.

"원하시는 종류의 서적을 말씀해주시면 즉시 대령하겠······."

"됐다. 직접 갈 생각이니 안내해라."

"바로 모시겠습니다."

케일런이 주변의 시종에게 뭐라 말을 전했다.

그에 화들짝 놀란 시종들이 서둘러 어디론가 총총 달려갔다. 그냥 안내나 해달라니까 뭘 하는 건지.

어쨌든 그렇게 그녀를 따라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복도를 걸으며 누군가를 마주칠 때마다 몇몇은 흠칫 놀라며 묵례를 해왔다. 중간중간 시선도 느껴졌다.

뭘 하기는 커녕 얼굴도 거의 내비친 적 없는데 나에 대한 소문이 성내에 벌써 꽤나 퍼진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참.'

엘프에, 수인에, 드워프에, 거인족에, 그리고 몇몇 희소 종족들까지.

기본적으로 인간이 많긴 하지만 이곳 칼데릭엔 정말 다양한 종족들이 존재했다.

여전히 이질감이 느껴지는 풍경이었지만 이것도 시간이 더 지나면 익숙해지겠지.

중앙 도서관은 내 방이 위치해있는 건물의 몇 건물 너머에 있었다.

좀 전에 창가에서 내려다봤던 기사들이 훈련 중인 광장이 경로 근처에 있었기에 지나치며 힐끔 눈이 갔다.

도서관에 도착해 들어서자마자 입구에 한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정중히 서있는 것이 보였다.

자그마한 체구나 뒤에 달린 꼬리 형태를 보니 수인 중에서도 쥐에 속하는 서족인 듯했다.

"어서오십시오, 7군주님. 중앙 도서관을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뭘 그리 서두르나 했더니 여까지 내 행차 소식이나 전한 거였나?

자신을 관장이라고 소개한 서족 노인이 직접 도서관 안내를 하겠다며 나섰지만, 굳이 필요 없었기에 거절했다.

나는 두 사람은 놔둔 채 천천히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서관 내부는 아무도 없이 텅 비어있었기에 잡음 하나 없이 고요했다.

원래부터 비어있던 건지, 아니면 내가 오기 전에 전부 퇴출시킨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엄청 넓네.'

대충 둘러보다 보니 관장이 왜 안내를 하겠다고 한 건지 알 것 같았다.

책장별로 서적의 분류가 그렇게 세세히 된 것도 아니었기에 원하는 책을 찾으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듯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딱히 특정한 내용의 책을 찾는 게 아니라 검법서나 마법서 같은 거라면 아무거나 괜찮았으니까.

'이쪽이군.'

곧 마법서들이 한가득 모인 책장을 찾은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무런 책이나 하나 뽑아든 뒤 대충 훑기 시작했다.

내용을 읽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라키로니아 대륙 공용어, 그러니까 생전 처음 접한 이 세계의 언어는 어째서인지 처음 빙의됐던 순간부터 평생을 써온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됐으니까.

"······."

물론 그와 별개로 지금 읽고 있는 책의 내용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마법 이론······ 뭔가 수학적인 원리와 관련 있어 보이기는 한데 뭐라는 건지 전혀 못 알아먹겠다.

'그나저나 역시 안 되나.'

페이지를 좌르륵 끝까지 넘긴 나는 작게 혀를 차며 책을 덮었다.

여유롭게 마법이나 배워보자고 마법서를 찾은 건 아니었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는 가끔씩 마법서처럼 책 형태의 아이템에서 스킬을 익힐 수 있는 경우도 있었기에, 혹시나 싶었을 뿐.

하지만 역시 너무 날로 먹으려는 기대였던 모양이다. 하긴, 이게 되면 완전히 사기지.

몇 권 더 살펴보다가 깔끔하게 미련을 버렸다.

이왕 온 거 다른 책들도 이것저것 살펴보며 시간을 보낸 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케일런과 함께 도서관을 나섰다.

'출출한데 간식이나 만들어달라고 할까.'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사들의 모습이 다시 눈에 띄었다.

아까부터 해서 상당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여전히 열띤 훈련이 한창인 광경이었다.

"······?"

별 생각 없이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순간 시선을 한 곳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문득 기사들 사이에 이질적인 것을 하나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Lv.81]

대련을 하는 듯 다른 기사와 검을 부딪히고 있는 한 백발의 여기사.

이질적인 존재는 바로 그녀였다.

그도 그럴 게, 기껏해야 40레벨대인 기사들 틈에서 혼자 완전히 동떨어진 레벨을 하고 있었으니까.

상관인가 싶었지만 그렇게 보이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무엇보다 저 얼굴, 어디선가 본 듯한······.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가만히 서있자 케일런이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나는 기사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들은 뭐지?"

"성의 백린 기사단 소속의 견습기사들입니다. 정오 훈련을 진행 중인 모양입니다."

백린 기사단이라면 대군주성 직속의 정예 전력이었다.

그나저나 일반적인 귀족 가문의 평기사가 30레벨 정도인데, 대군주성에서는 40레벨이 넘어도 견습기사인······.

"······!"

아, 떠올랐다.

저 새하얀 백발에, 칼데릭 소속의 기사.

게임 그래픽과 현실의 외관에는 당연히 큰 차이가 있지만, 묘한 낯익음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저 남자가 기사들의 상관인가?"

나는 기사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기사들을 지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예, 백린 5기사단의 부단장인······."

"잠시 이리로 불러올 수 있겠나?"

내가 생각해도 굉장히 뜬금없는 요구였기에 케일런은 순간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곧장 알겠다 대답하고 기사들을 향해서 다가갔다.

그리곤 남자와 뭐라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더니, 금세 그를 데리고서 내 앞으로 데려왔다. 이게 권력이군.

[Lv.63]

"7군주님을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백린 제5기사단 소속의 부기사단장, 캄슨이라고 합니다."

완전히 긴장으로 굳은 남자가 뻣뻣하게 경례를 해왔다.

네 이름이야 아무래도 좋고.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예! 뭐든 최선을 다해서 답해드리겠습니다!"

"저기 보이는 저 백발의 여자."

나는 그녀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름이 뭐지?"

예상 못한 질문이었는지, 부단장 캄슨은 한순간 당혹스러운 표정이 됐다가 재빨리 답했다.

"견습기사인 아셸입니다. 세 달 전에 입단하여 현재 견습 과정을 거치고 있는 신입입니다."

······역시.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등골에 미약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설마 싶었지만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나?

'아셸 그론힐트.'

라샤 메인 스토리의 최대 주역 중 하나.

처음에는 적으로 등장하나, 서서히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아군 진영으로 편입되어 큰 도움을 주는 강력한 선역.

'지금 시점엔 대군주성에 견습기사로 있었구나.'

하나 자연스러운 의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어째서 견습기사 따위로 있는 것인지.

80이 넘는 레벨이면 백린의 기사단장을 넘어서 대군주성의 최정예인 흑린의 단원도 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게임에서도 첫 등장 때 그러했고.

'······대충 예상이 되긴 하는데.'

그러나 나는 그녀가 지닌 배경과 사정을 알고 있다.

때문에 금세 그럴듯한 짐작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은 아직 주위 환경을 경계 중인 건가? 그래서 힘을 숨긴 채 입단한 거고?

'이걸 어쩐다.'

대련이 끝난 뒤 아셸은 별 지친 기색 없이 검을 거두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기며 이쪽을 힐끗 바라보는 모습.

나는 짧은 고뇌에 빠졌다.

이건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나는 믿을 수 있는 호위를 구해야만 하는 상황. 그리고 그녀라면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성격의 인물이었다.

게다가 지금도 충분히 강한데, 미래에는 군주급 레벨까지 성장할 포텐이 있는 인물을 여기서 조력자로 삼을 수 있다면······.

'문제는 어떻게 설득하냐는 건데.'

현재 아셸은 대군주성에 소속된 기사다.

물론 군주의 권력이면 아무리 대군주성 소속이라도 견습기사 하나를 데려가는 것쯤은 어렵지 않겠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셸은 분명한 목적이 있어 대군주성의 기사가 된 것이다.

그것을 무시하고 억지로 호위로 데려가버리면 그녀가 내게 호감은 커녕 적의를 품게 될지도 몰랐다.

"······."

한번 해보자.

못 봤다면 모를까, 이렇게 발견한 이상 그냥 포기하고 지나가기엔 너무 아까운 인물이다.

결정을 마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훈련이 언제 끝나지?"

"앞으로 한 시간 정도 더 진행할 예정입니다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끝나면 데려가도 되겠나?"

내 말에 부단장은 벙찐 얼굴이 되었다. 예상한 반응이다.

칼데릭에서 군주는 하늘.

그런 군주가 일개 견습기사에게 볼일이 있어 직접 데려가겠다는 상황이었으니까.

"무, 물론입니다! 당장 데려가셔도······."

"아니, 한 시간 뒤다."

나는 못박듯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먼저 돌아갈 테니, 훈련이 끝나면 천천히 방으로 데려오도록 해라."

내 말에 케일런의 시선이 조금 묘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뒤늦게 아차 싶었다. 쓸데없는 오해를 살 수도 있겠다는 것을.

"그저 대화를 원할 뿐이다."

구태여 덧붙여 말하자 그녀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아셸을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어떻게 해야 그녀를 호위로 꼬드길 수 있을지.

***

아셸이 방으로 찾아온 건 한 시간 정도가 지난 뒤였다.

"7군주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백린 제5기사단 소속의 견습기사, 아셸이라고 합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경례를 하는 그녀는 훈련할 때의 경갑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앉아라."

나는 반대편 자리로 손을 뻗었다.

잠시 침묵한 채 서있던 아셸은 이내 자리에 앉았다.

단둘이 마주앉은 테이블. 방에는 적막함이 감돈다.

후룩.

말없이 차를 마시며 반대편을 힐끔 바라봤다.

앞에 놓인 찻잔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던 아셸은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올렸다.

선명한 주홍빛의 눈동자에 담긴 여러 감정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긴장, 경계, 그리고 의문. 자신이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눈.

······솔직히 긴장은 이쪽이 더 됐다.

지금 눈앞에 앉아있는 여자는 80레벨이 넘는 괴물이고, 지금부터 할 말은 분명 그녀를 크게 자극할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설득을 위해서는 이게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힘을 감추고 있는 건가?"

질질 끌 것 없이 곧바로 본론으로.

"······."

아셸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그만한 실력에 견습기사로 있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 어째서 힘을 감추고 있는 건지 궁금하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미약하게 날이 선, 명백히 경계심이 깃든 목소리.

"부정할 생각이라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이어진 내 말에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백월족."

"······!"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들었는데 생존자가 있었을 줄이야. 대군주성으로 온 이유가 무엇이지?"

날카롭게 벼려진 적의가 곧바로 전신을 찔러온다.

군주 회의 때 겪어봤던 뇌후의 기운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졌으나,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이지 굉장한 압력이었다.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은 관둬라. 네 힘으로는 무리니."

물론 허세였다.

여기서 그녀가 검을 뽑아 휘두르면 나는 내가 죽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일단 아셸은 살생을 함부로 하는 성격이 아니다. 비록 지금이 과거라도 고작 몇 년인데 그 본성이 다르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보다 훨씬 강한 자에게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들 만큼 막무가내이지 않았다.

아무리 스스로의 실력을 자부한다 한들 칼데릭의 군주는 격이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터.

"······."

허세가 잘 먹혔는지 아셸은 입술을 꽉 깨물며 기운을 거두었다.

깨문 입술에서 피까지 주륵 흘려내렸기에 좀 미안할 정도였다.

아마 지금 그녀는 더없이 혼란스러울 것이었다.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알았는지, 또 내 목적이 무엇인지 완전히 혼란스러울 터.

설득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자, 한번 제대로 입을 털어볼까.

아셸 그론힐트 (2)

훈련을 마친 뒤에는 자유 휴식이었지만, 아셸은 땀을 씻어내고 옷만 갈아입은 채 곧바로 어딘가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케일런의 뒤를 따라 걸으며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그자가 바로 그 7군주였던 건가.'

아까 훈련 중 묘한 시선을 보내왔던 남자.

근래 성에서 새로이 즉위한 7군주에 대한 소문이 무성히 들끓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길었던 방랑을 마치고 대군주성의 기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셸은 칼데릭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부하들에게는 악독하기 그지없던 부단장 캄슨이 그렇게나 바짝 얼었던 걸 보니, 군주라는 존재의 위상이 조금은 실감이 되었다.

그런 자가 자신과 무슨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부르는 것인지 그녀로서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설마 무언가를 눈치챈 건가, 마음 한편에 미약한 불안감을 느낄 뿐.

"지금부터 뵙게 될 분이 7군주좌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걸 깊이 명심하길 바랍니다. 부디 언행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

케일런에게 마지막 주의를 들은 뒤, 길게 이어진 복도를 따라서 도착한 넓은 방에는 그가 앉아있었다.

철컥.

문이 닫히고 홀로 7군주를 마주하게 된 아셸은 일단 예를 차려 인사했다.

"7군주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백린 제5기사단 소속의 견습기사, 아셸이라고 합니다."

형형한 황금색의 눈동자가 빤히 이쪽을 응시한다.

"앉아라."

7군주가 반대편 자리로 손을 뻗었다.

아셸은 어색함과 불편함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잠시 방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7군주는 아무런 말도 없이 차를 음미하기만 했고, 시선 둘 곳이 마땅치 않았던 아셸은 찻잔만 빤히 내려다봤다.

머지 않아 예상 못한 말이 대화의 시작을 끊었다.

"힘을 감추고 있는 건가?"

"······."

"그만한 실력으로 견습기사로 있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 어째서 힘을 감추고 있는 건지 궁금하군."

적잖은 당혹감과 함께 아셸의 머리에 떠오른 건 두 가지 의문이었다.

어떻게 그것을 알았는지, 그리고 어째서 그것을 묻는 것인지.

만일 아까 훈련을 보고 지켜보고 있던 때부터 눈치챈 거라면 실로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그만큼 떨어진 거리에서, 대체 무엇을 인지하고 그 사실을 눈치챘단 말인가? 마력? 아니면 다른 이질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부정이었다.

아셸은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며 7군주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부정할 생각이라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본론?

바로 이때까지도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

앞선 이야기 따위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백월족."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들었는데 생존자가 있었을 줄이야. 대군주성으로 온 이유가 무엇이지?"

한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물든 아셸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본 실력을 감춘 것을 눈치챈 것까지는 어떻게든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백월족이라는 사실은 대체 어떻게 알아차렸단 말인가?

그것은 더 이상 누구도 알지 못하는, 또한 앞으로도 알 수 없어야 할······ 그녀가 품고 있는 가장 깊은 비밀이었다.

그런 비밀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버린 눈앞의 존재에게 적의를 쏘아낸 건 반사적이며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관둬라. 네 힘으로는 무리니."

귓가에 들려온 무심한 음성에 아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7군주의 시선은 한없이 깊고 고요했다.

그 정적인 위압감에 압도되는 기분을 느끼며, 그녀는 천천히 적의를 거두었다.

"······."

그래······ 무리다.

지금 눈앞에 앉아있는 존재는 칼데릭의 군주.

전 대륙에서도 정상급의 강자. 세인테아의 그 괴물 같은 오성보다도 강하다고 알려진 존재.

감추고 있는 힘을 단번에 간파당했다는 사실만 봐도 격의 차이는 아득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습이든 탈출이든 무엇을 시도한들 부질없을 것이 명백했다.

그 사실에 무력함을 느끼며 아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흘러나온 피에서 비린 맛이 느껴졌다.

어떻게든 나아갈 길을 찾기 위해 절망과 허탈함을 딛고 이곳까지 왔는데, 뭘 해보기도 전부터 이런 꼴이란 말인가?

"내게 무엇을 원하는 겁니까."

분함에 떨며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자 7군주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군. 나는 널 겁박하려는 것이 아니다."

"······."

"정체를 들킨 게 무엇이 그리 두려운 거지? 이곳은 세인테아가 아니라 칼데릭이다. 종족 차등이 없는 이 땅에서 백월족이라고 다를 게 있을 것 같나."

그 말에 아셸은 이를 까득 깨물었다.

말로는 얼마든 쉽게 떠들 수 있다.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일족도 고향도 모두 잃은 비애를, 홀로 살아남아 세상에 내던져진 고독과 불안을, 무엇이라도 해야만 한다는 압박을.

이곳은 세인테아가 아닌 칼데릭.

오직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에 합당한 영화를 쥘 수 있는 힘과 기회의 땅.

머리로는, 이성으로는 아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족이 멸망한 그날부터 마음 한편에 깊이 각인된 경계심은 그녀를 무엇도 쉬이 믿을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한데, 당신 따위가 대체 무엇을 안다고······.

"하지만 이해한다."

아셸은 흠칫했다.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네가 마음 깊숙이 품고 있을 한과 비애를, 그 불안과 고독을. 지금 나에게 보이는 과한 경계심은 모두 거기서부터 비롯된 것이겠지. 안 그런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이 자는?

아셸은 조금 멍한 표정으로 7군주를 바라봤다.

다시 그의 입이 열렸다.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

라사의 세계관에는 다양한 종족이 존재한다.

마족은 논외로 두고 가장 그 개체수와 세력이 우세한 인간, 엘프, 수인부터 시작해 그 밖의 많은 약소, 희소 종족들까지.

백월족은 그 개체수가 무척이나 적은 희소 종족이었다.

외형은 인간과 별다를 게 없으나, 마력을 그들만의 고유한 성질로 변환시킬 수 있는 특질을 지닌 종족.

세가 약한 종족들은 세간에 섞이지 않고 야생의 땅에서 부족 단위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백월족 또한 세인테아 극서부에 위치한 알텐 대산맥에서 그들만의 터전을 이루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존재였다.

하지만 몰락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현시점으로부터 바로 몇 년 전, 백월족은 어떠한 이유로 세인테아에 의해 단 한 명의 생존자만을 남기고 완전히 멸족당했다.

지금 내 눈앞에 앉아있는 아셸이 바로 그 유일한 생존자였다.

'살아남은 다른 동족을 찾기 위해 긴 시간을 방랑했다고 했지.'

하지만 아셸은 찾지 못했다.

몇 년의 긴 세월간 갖은 위험을 감수하고 대륙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수소문했음에도, 결국 단 한 명도.

기나긴 방랑 끝에 그녀가 정착한 장소는 바로 이곳 칼데릭이었다.

끝내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 말고 또 살아남은 동족이 분명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칼데릭은 무엇보다도 능력을 중시하는 땅.

만약 이곳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고 자리를 잡는다면, 그리고 백월족 전사로서 전 대륙에 널리 명성을 떨칠 수 있다면.

어쩌면 살아남은 동족이 그 소식을 듣고 자신을 찾아올지도 모른다.

만약 끝내 찾아오지 않더라도, 하다못해 힘과 권력을 쌓아 세인테아에 복수할 최소한의 기회라도 노릴 수 있을지 모른다.

······아셸은 그런 생각으로 이곳 칼데릭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힘과 정체를 숨기고 견습기사로 있는 이유는, 아직 칼데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심스레 분위기를 살피고 있던 거였겠지.

백월족은 평소엔 인간과 구분할 수 없지만, 고유 특질로 본신의 힘을 내면 전신의 피부가 하얗게 변하는 종족이었으니까.

결국 가까운 미래에 그녀는 스스로를 완전히 드러내고 대군주성의 흑린이 된다. 하지만······.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지금은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내 편으로 끌어들인다.

나는 이어서 입을 뗐다.

"네가 칼데릭으로 온 목적은 대충 짐작이 된다."

"······."

"명성을 퍼뜨려 살아있는 동족을 찾아오게 만들기 위함이거나, 세인테아에 복수를 위함이거나, 혹은 둘 다거나······ 표정을 보아하니 정답인 모양이군."

아셸의 얼굴은 이제 경악으로 만연했다.

속마음을 완벽히 간파당했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슬슬 이야기의 본 목적을 꺼낼 때가 되었다.

"네 목적이 그렇다면, 내 호위 기사가 될 것을 제안하마."

아셸이 한순간 벙찐 기색이 됐다.

갑자기 이건 또 뭔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겠지.

"그게 무슨······."

"나는 지금부터 많은 일들을 할 것이다. 그러니 호위가 되어 곁을 따라다녀라. 칼데릭 7군주의 검으로서, 최측근으로서, 그리고 백월족의 전사로서 대륙에 네 명성을 널리 퍼뜨릴 좋은 기회가 되겠지."

"······!"

"스스로의 힘에만 기대기보다는, 내 이름을 빌리는 것이 목적을 이루기에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야말로 완벽한 구실이었다.

내 제안은 대륙에 최대한 널리 명성을 퍼뜨리겠다는 목표를 이루기에 굉장히 효과적일 방법일 테니까.

아셸이 말없이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이내 이해할 수 없다는, 재차 경계심이 깃든 얼굴로 내게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그래, 당연히 그렇게 묻겠지.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녀로서는 내 제안이 이유 없는 일방적인 호의로 느껴질 것이다.

군주씩이나 되는 존재가 정말로 호위가 필요해서 이러는 건 아니라고 여길 테니까.

물론 난 진심으로 호위가, 그녀의 무력이 필요한 것뿐이었지만 그것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나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굳이 말하자면 이미 앞서 이야기한 것들이지. 내가 네 처지를 이해하기에. 그리고 우연히 네 능력이 눈에 띄었기에. 그래서 자연스레 관심이 끌렸을 뿐."

"······."

아셸은 여전히 불신이 섞인 기색이었다.

역시 이런 애매한 대답으로는 납득시킬 수 없나.

합당한 이유.

그에 대해선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한 시간 동안 열심히 고민했지만 결국 달리 마땅한 핑계를 찾지 못했다.

그녀의 일족인 백월족과 어떠한 인연이 있어서······ 라는 전형적인 시나리오도 생각해봤지만, 썩 좋게 느껴지진 않았다.

산맥 깊은 곳에서 지들끼리 잘 살던 소수 종족과 인간인 내가 엮일 일부터가 뭐가 있겠는가.

또 어떻게든 이야기를 짜낸다 해도 괜히 어설프게 거짓말을 하는 건 당장이든 나중이든 들킬 위험이 컸다.

내가 백월족에 대해 뭘 엄청나게 잘 아는 것도 아니었기에.

때문에 끝내 나온 결론은 믿음을 주지 못하더라도 그냥 적당히 둘러대는 것이었다.

당장은 아셸이 어떻게든 내 제안을 수락하게만 만들면 충분했으니까.

애초에 첫 대면부터 상대의 사정과 비밀을 죄다 까발려놓고서 신뢰를 얻겠다는 건 오만이었다.

그녀와의 우호적인 관계는 일단 호위로 끌어들인 다음에 천천히 쌓아도 됐다.

"대답이 되지 않은 모양이군. 하지만 이유 같은 게 중요한가?"

나는 다시 한 번 핵심을 강조했다.

"나는 네가 호위 기사가 되길 원하고, 너는 그로써 목적을 보다 수월하게 이룰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단지 그뿐이다."

이유야 뭐가 됐든 내 제안은 아셸에게 있어 더없이 좋은 기회다.

지금의 그녀에게 이 이상의, 무려 군주의 위명을 빌릴 수 있는 것 이상의 좋은 방안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아셸의 미간이 좁아졌다. 고민이 깊어진 기색이었다.

더 이상의 말은 사족일 것 같았기에 나는 대답을 기다리며 조용히 찻물을 홀짝였다.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를 수하로 삼기를 원하시면 뜻대로 하시면 될 텐데, 어째서 이런 제안을 하고 수락을 구하시는 겁니까?"

군주라면 견습기사 하나를 데려가는 것쯤이야 얼마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텐데, 왜 그러지 않느냐는 물음이었다.

"네 의사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비밀을 빌미로 널 겁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달리 세워둔 더 좋은 계획이 있다면 제안을 거절하면 된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솔직히 거절하면 곤란하다.

조금은 그녀를 압박할 의도로 '비밀'과 '더 좋은 계획'이라는 말을 은근히 끼워넣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여쭙겠습니다만, 제가 백월족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 능력의 일부다."

나는 의문을 간결하게 일축해버렸다.

마법에 신비에 온갖 능력이 존재하는 세계이니 어물쩡 넘기면 그만이었다.

조금 불만 섞인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던 아셸이, 끝내 결심한 듯 말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7군주님의 호위 기사가 되겠습니다."

······됐다!

나는 속으로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름이 아셸이라고 했던가. 성은 있나?"

"······그론힐트."

아셸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자신의 완전한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셸 그론힐트입니다."

아셸 그론힐트.

백월족의 유일한 생존자.

게임에선 플레이어의 강력한 조력자 역할을 했던 선역. 그리고 군주들만큼이나 강해질 잠재력이 있는 인물.

당장 그녀는 나를 완전히 믿지 않고 경계하겠지만, 앞으로 쭉 붙어다니게 될 테니 신뢰를 쌓을 시간은 많다.

어쨌든 이로써 든든한 호위는 구했다.

슬슬 7군주령으로 향할 때가 됐다.

초재생 (1)

아셸을 호위로 데려가는 일은 예상했던 대로 어렵지 않았다.

케일런에게 이야기하니 언제나 그랬듯 자세히 묻는 일 없이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걸 뭐 인사 이동이라고 해야 될진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녀가 알아서 문제없도록 처리해줄 것이었다.

그 뒤에는 지체할 것 없이 7군주령 엔록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계획 정리가 끝났음에도 여태 이동하지 않았던 이유는 가는 길에 얻을 수 있는 히든 피스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몬스터가 많은 험지라 일단은 넘겨야 되나 고민 중이었는데, 이제 아셸이 호위가 됐으니 해결이었다.

'뭐 이리 많이 모였냐.'

성의 입구에 세워진 화려한 사륜마차를 바라봤다.

내가 엔록까지 타고 갈 것이었다.

주위에는 기사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미 말에 오른 채 대기하고 있었다. 대군주성의 인력이었다.

준비를 어떻게 할까 묻기에 알아서 하라고 했더니 이건 뭐 상상했던 것 이상의 행렬을 차려놨다.

"그럼 살펴가십시오, 7군주님."

참모장 데이폰이 작별 인사를 건넸다.

대군주는 마침 자리를 비웠기에 대신 배웅을 나온 것이었다.

'타이밍이 좋았네.'

나는 옆에 선 아셸을 힐끗 바라봤다.

아셸이 대군주의 눈에 띌 걸 은근히 염려했었기에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라면 아셸을 보자마자 수준을 단번에 알아채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어쨌든 성의 인재를 빼돌리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데 솔직히 좀 찔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대군주 성격을 생각하면 딱히 신경도 안 쓸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나중에 귀에 들어가더라도 당장은 조용히 데려가는 게 최고였다.

"즉위식은 혹여 마음이 바뀌신다면 언제든 말씀을 전해주십시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다음 군주 회의 때 뵙겠습니다."

즉위식.

공식으로 즉위식을 올릴 생각은 없다고 진작 뜻을 전했었다.

쓸데없이 번거로웠고, 괜히 다시 군주들 틈바구니에 끼게 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아마 다음 군주 회의까지 대군주나 다른 군주들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있어도 가능하면 피할 생각이었다.

'그때까지 충분히 스펙을 올려야 한다.'

다음 회의 때는 내 능력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피하기 힘든 과업을 맡게 될 확률이 높았다.

주어진 시간은 일 년.

적어도 그때까지는 최대한 내 스펙을 끌어올리는 일에만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었다.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차에 오르고 소란스레 행렬이 움직였다.

본격적인 고생길의 시작이었다.

***

대군주령 드라고어의 수도에서 7군주령 엔록의 수도까지.

따지면 한 국가의 중심에서 다른 국가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길이다.

당연히 굉장히 먼 거리였기에 도착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예정이었고, 중간중간 지나는 도시도 많았다.

호송선 때처럼 텔레포트로 한 번에 이동할 수 있으면 편하고 좋겠지만, 이 세계에서의 텔레포트는 원하는 곳은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편리한 마법이 아니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기에 마차의 생소함도 처음 얼마뿐이었다.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이세계의 거친 자연 도로에 승차감은 썩 좋지 않았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 밖에는 식사든 잠자리든 하인들이 척척 완벽하게 준비하니 크게 불편할 건 없었다.

금세 익숙해진 나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나름의 방법으로 따분함을 죽이며 시간을 보냈다.

멍하니 바깥 풍경을 구경하거나, 챙겨온 책이나 정보를 정리해둔 수첩을 읽거나, 계획을 점검하고 다듬거나 하면서.

대화라도 나눌 상대가 있었으면 훨씬 덜 지루했을 테지만 아쉽게도 없었다.

정확히는 없는 게 아니라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텁.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반대편 자리를 쳐다봤다.

아셸이 한 손은 검자루에 가까이 둔 채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아있었다.

그나마 이것저것 하는 나와 달리, 아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차에서 온종일을 거의 저 상태로만 보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지루하지는 않나?"

내가 이런 질문을 한 게 의외인지 아셸이 묘한 표정으로 답했다.

"지루하지 않습니다."

"책을 빌려줄 테니 읽어보지 그러나."

"괜찮습니다."

호위 임무에 충실하겠다는 듯 단호한 거절이 돌아왔다.

그리고 대화는 끝이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마차 바깥을 바라봤다.

'차라리 벽 보고 말을 걸지.'

아셸과 함께 마차에 탄 건 대화를 좀 나누고자 하는 생각도 있었다. 어차피 호위 병력은 바깥에도 넘치도록 많으니까.

결과는 보시다시피 이 꼴이었다.

뭘 묻든 죄다 단답만 돌아오니 대화를 잇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 호위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는 고맙다만 이건 뭐 석상을 곁에 둔 기분이었다.

원래 이런 성격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녀와 친밀도를 쌓는 건 앞으로 상당한 난관이 예상되었다.

"······."

생각의 흐름이 문득 다른 데로 이어졌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내가 챙겨야 할 히든 피스에 대해서.

성검이라는 단 하나의 예외를 두고, 이 세계에는 크게 세 종류의 힘이 존재한다.

마력, 종족 특질, 그리고 신비.

실제 게임 플레이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두지 않고 전부 스킬 시스템으로 통일되지만, 일단 설정상으로는 이렇게 나뉘었다.

마력은 이 세계의 바탕과 다름없는, 가장 일반적이고 광범위한 영역에 걸친 힘이다.

기본적으로 노력하면 누구나 다룰 수 있는 힘이지만, 타고난 재능이나 종족에 따른 차이는 당연히 존재했다. 마족 등의 일부 종족을 제외하고 마력에 가장 친화적인 종족은 인간이었다.

종족 특질은 명칭 그대로 그 종족이 지니는 특질이다.

인간은 굳이 따지면 마력에 대한 친화력이고, 수인은 육체 능력, 드워프는 손재주 등을 꼽을 수 있다.

또 단순히 특정 분야가 뛰어난 게 아니라 오로지 그 종족만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질들도 존재했는데, 엘프가 다루는 정령의 힘이나, 뱀파이어의 혈술, 그리고 지금 앞에 앉아있는 백월족의 백마력 등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신비.

신비는 그 근원이 밝혀지지 않은 정체불명의 힘이다.

몹시 희소하기에 지니고 있는 사람 자체가 극히 드물고, 일부 신비는 이치에 맞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기도 했다.

지구에서는 마력이나 종족 특질이나 죄다 상식을 벗어난 초능력이지만, 이 세계의 관념에서는 신비의 존재가 바로 초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 점이다.

신비는 찾아내기가 몹시 어려울 뿐이지, 일단 찾아서 얻으면 누구든 조건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

한마디로 내 능력을 단기간에 향상시키기에는 가장 적합하면서도 유일하다시피 한 방안이라는 것이었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찾아서 챙길 계획인 히든 피스 역시 신비였다.

'초재생.'

육체의 재생력을 증폭시키는 회복 계열의 신비.

초재생의 신비는 대군주령의 변경, 제닉스 시가 위치한 루터스 산맥의 깊은 곳에 위치해있다.

지금은 아직 첫 번째 도시에도 안 도착했으니 제닉스 시까지는 한참 멀었다.

사실 제닉스를 지나는 건 조금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신비를 얻을 수 있으면 도착이 좀 늦어지는 건 대수도 아니었다.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다시 한 번 아셸을 슬쩍 바라봤다.

초재생이 숨겨진 장소를 찾아내기까지, 산맥의 몬스터들이 내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는 게 호위인 그녀의 몫이었다.

그녀의 레벨을 생각하면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런 느슨해질 법한 상황에서도 호위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태도 역시 걱정할 필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완벽한 안전을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 위험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감수해야 할 것이었다.

'그래도 초재생부터 얻고 시작하면 목숨은 좀 질겨지려나.'

이왕 방어 계열의 능력이었으면 훨씬 좋았겠지만 뭐, 먼저 챙길 수 있는 것부터 챙겨야지.

나는 창문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광활한 평야 저멀리 그림처럼 줄지은 산맥이 보였다. 멋진 대자연의 경관이었다.

***

꽤 많은 시간이 흐르고, 여러 도시를 지나온 마차는 마침내 제닉스 시에 도착했다.

산맥의 자락에 위치한 제닉스는 다른 도시들보다 요새의 느낌이 강한 도시였다.

"제닉스에 방문해주셔서 영광입니다, 7군주님."

제닉스의 시장은 중년의 인간 남성이었다.

온갖 찬양사를 내뱉으며 굽신거리던 이전 도시의 시장들보다는 훨씬 점잖고 차분해 보이는 자였다.

나는 그와 함께 걸으며 물었다.

"이 도시에서 루터스 산맥의 지리에 가장 밝은 자가 누구지?"

시장이 의문 섞인 기색으로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답했다.

"송구하게도 가장 밝은 자는 모르겠으나······ 산맥의 지리라면 모험가 길드의 모험가들이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산맥 깊은 곳까지 함께 들어갈 길잡이가 필요하다. 모험가든 다른 누구든 적합한 인물을 찾아와라."

나는 초재생의 신비가 어디에 숨겨져있는지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곳까지 헤매지 않고 제대로 찾아갈 자신이 있냐면 그건 아니었다.

컴퓨터 모니터 너머로 보던 맵과 현실 세계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 세계는 게임이지만 현실이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와는 필드의 규격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게임의 전체 맵 크기는 현실과 비교하면 비현실적으로 작다.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걸어서도 금세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이는 플레이어가 이동하는 데만 한세월이 걸리게 할 수 없으니 당연한 게임적 허용이자 설정이었다.

나는 이 차이를 언제나 염두에 둘 필요가 있었다.

대군주성에서 이곳 제닉스까지 오는 데도 한참이 걸렸듯, 실제 이 대륙의 크기는 게임에 비하면 몇천 배는 가볍게 넘어갈 것이다.

그 사이의 공백을 어떤 지형과 오브젝트들이 채우고 있을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기에 길잡이는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도 설마 히든 피스가 숨어있는 장소까지 다르진 않겠지.'

그건 단순히 지형이 아니라 게임의 설정과 관련된 문제였으니까.

나는 시장에게 덧붙여 말했다.

"혹여 도시 북쪽 방향의 산맥 깊은 곳에 위치한 '모래시계 형태의 거대한 바위'를 알고 있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데려와라."

모래시계 바위는 초재생이 숨겨진 장소를 찾을 확실한 이정표였다.

상당히 눈에 띄는 형태니 만약 아는 자가 있다면 훨씬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없으면 고생 좀 해야겠지만.

다음날, 시장은 내 요구대로 한 모험가를 데려왔다. 아침 일찍부터.

[Lv.23]

한눈에 봐도 모험가 분위기가 풍기는 칸이라는 이름의 남자였는데, 놀랍게도 모래시계 바위에 대해 알고 있다고 했다.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했는데 하루만에 조건에 맞는 자를 뚝딱 찾아온 것이었다.

바위 주변의 환경에 대해 묻자 그가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더듬더듬 답했다.

"흑목이 무성해서 어두운 분위기의 삼림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호라.

그 설명에 나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안내할 완벽한 안내자를 찾았음을 확신했다. 운이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위치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나?"

"예, 찾아가려면 찾아갈 수는 있습니다."

"이동하는 데 시간은 얼마나 걸리지?"

대답을 머뭇거리는 모습에 나는 질문이 애매했음을 깨닫고 덧붙였다.

"평범한 걸음 속도를 기준으로."

"그러면 적어도 하루는 꼬박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꼬박 하루라.

왕복이면 넉넉하게 사흘 정도 걸리려나.

'졸지에 산에서 야영하게 생겼네.'

훌륭한 길잡이를 구했으니 더 지체하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나는 큰 보수를 약속한 뒤, 곧장 칸을 데리고 도시를 나서서 북쪽의 산맥으로 향했다.

초재생 (2)

대자연의 산맥은 거대하고 광활했다.

산자락을 가로질러 본격적으로 수풀이 무성한 지대에 들어서자, 역시 길잡이를 데려온 게 최고의 선택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런 복잡한 장소에서 길찾기라니.

만약 기억에만 의존해서 나섰으면 신비가 숨겨진 곳을 찾긴 커녕 돌아갈 길조차 금세 잃어버렸을 것이다.

'히든 피스들 찾는 게 생각보다 더 어려워지겠네.'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 없다.

짧은 잡념을 마친 나는 흐르고 있는 계곡물에서 시선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계속 가지."

"예, 군주님."

주변 땅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던 칸이 다시 앞장서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와 아셸이 그 뒤를 따랐다.

아셸은 말할 것도 없고 칸도 낮은 레벨은 아니기에 이 정도 산행으로는 지칠 리 없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래서 체력이 달릴 때마다 여유로이 주변 풍경을 감상하는 척하며 이렇게 쉬어갈 수밖에 없었다.

꼴사납게 헥헥거리는 모습이라도 보였다간 군주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질 테니까. 참으로 짠한 발버둥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망할 몸뚱이는 평균이 좀 넘는 정도만 되도 참 좋았을 텐데······.'

그래도 나만 고생 중인 건 아니었기에 불평은 적당히 그치기로 했다.

열심히 길잡이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칸은 아까부터 한눈에 봐도 경직된 기색이었다.

내 존재가 어지간히도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는데, 저것도 출발할 때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상태였다.

이해는 됐다. 자신의 모험가 인생에 난데없이 군주의 길 안내를 하게 될 일이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산맥의 얼마나 깊은 곳까지 들어가봤나?"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칸에게 물었다.

루터스 산맥 깊은 곳에는 제법 강력한 몬스터들도 서식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주 깊은 곳까지 들어가본 적은 몇 번 없습니다. 생각보다 흉포한 몬스터들이 많아서 제게는 위험한 곳입니다."

"어떤 몬스터를 마주쳐봤지?"

"가장 기억에 남는 놈이라고 하면 거대한 곰이었습니다. 한데 보통 곰이 아니라 전신에 뾰족하게 가시 같은 게 솟아있어서······."

스파이크 베어를 말하는 거군.

이것저것 묻자 좀 긴장이 풀렸는지 칸은 술술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원래는 말이 많은 성격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또 최근에는 황당한 소문이 하나 나돌고 있습니다. 한 모험가가 북쪽 산맥에서 터무니없을 정도로 거대한 뱀을 봤다고 하더군요."

거대한 뱀?

그보다 북쪽 산맥이면 여기잖아.

"그런 괴물이 도시까지 내려오면 아무도 못 막는다느니, 순식간에 쑥대밭이 될 거라느니, 완전히 하얗게 질려서는 대군주성에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며 난리를 피운 적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일단 시장님이 귀를 기울이셔서 모험가 길드 측과 연계해 조사단이 구성될 예정이라곤 합니다만, 당연히 대부분이 믿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도시 성벽보다도 훨씬 큰 뱀이라는데, 루터스 산맥이 마경도 아니고 그런 괴물이 있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

요새 같던 제닉스 시의 성벽보다도 큰 뱀이라.

머릿속에 뱀 형태의 몬스터들에 대한 목록이 휙휙 지나갔다.

그중에 칸의 말만큼 거대한 놈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벨르바고라?'

그놈은 이런 푸르른 산맥이 아니라 진짜로 마경에 서식하는 네임드 보스인데.

과장해서 말한 거겠거니 싶어 다른 놈을 떠올려봤다. 그럼 그냥 평범한 자이언트 스네이크 종인가?

'자이언트 스네이크가 루터스 산맥에서도 출몰했었나.'

뭐, 현실은 정해진 지역에 정해진 몬스터만 출몰하진 않을 것이다.

자이언트 스네이크는 숲 지대에서 서식하니 어디서 흘러들어왔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완전한 성체면 기본이 50레벨은 넘는 놈이기에 일반적인 기준에선 충분히 재앙적인 몬스터다.

하지만 실제로 맞닥뜨린다고 해도 별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쪽에는 그보다 훨씬 더한 괴물인 아셸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 넓은 산맥에서 설마 마주칠 리도 없······.

부스럭.

그때 근처의 수풀이 흔들리더니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Lv.22]

늑대.

보통보다 배는 더 거대하고, 길쭉한 꼬리 끝에는 마치 철퇴처럼 두껍고 뾰족한 무언가가 달려있었다. 플레일 울프다.

칸이 긴장한 얼굴로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이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꼬리를 붕붕 돌리며 낮은 울음소리를 흘리던 놈이 기습적으로 몸을 날려 돌진해왔다.

서걱!

동시에 번쩍인 푸른 빛이 놈을 반으로 쪼개버렸다.

흩뿌리는 선혈.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난 고깃덩이가 바닥을 구르며 요란스레 널부러진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시체를 바라보다가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표정한 얼굴로 어느새 뽑아든 검을 도로 집어넣고 있는 아셸의 모습이 보였다.

칸도 반쯤 넋을 놓고서 반토막이 난 시체와 아셸을 번갈아봤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가지."

"아, 예······."

역시 몬스터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좀 살벌하지만 든든한 호위가 함께하고 있었다.

***

산맥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몬스터를 마주치는 일이 꽤 잦아졌다.

칸이 이야기했던 스파이크 베어를 포함해서 여러 맹수형 몬스터들에, 상당히 강력한 몬스터인 트롤도 만났다.

밤중의 습격은 없었지만, 날이 밝고 아침 식사를 하던 와중에는 어디서 갑자기 사람만 한 괴조들이 날아들기도 했다.

크르륵.

다시 이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지금은 멧돼지 떼에게 둘러싸였다.

이놈들도 보통 짐승이 아니라, 전신이 갑옷처럼 단단한 아머 보어라는 몬스터였지만······.

촤아악!

아셸이 검을 휘두르자 횡으로 퍼져나간 거대한 검기가 놈들을 일격에 모조리 토막내버렸다. 숲이 피로 물들었다.

그녀는 정말 완벽하게 호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며 마주한 몬스터들 중 내 5미터 반경 내로 들어온 놈이 한 놈도 없었을 정도로.

나는 칸에게 물었다.

"산맥에 오를 때마다 이렇게 빈번히 몬스터를 마주치나?"

"이 정도로 자주 맞닥뜨리진 않습니다. 보통은 마주칠 일 자체가 없도록 경계를 철저히 하고 다니는지라······."

조금이라도 불길한 흔적을 발견하면 그대로 후퇴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는 식이라고 칸은 설명했다.

바꿔 말해서 지금은 흔적을 발견하든 말든 직진만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조심할 이유가 없는데 시간 낭비일 뿐이니까.

계속해서 나아가며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즈음 우리는 한 절벽 아래에 다다르게 됐다.

족히 수십 미터는 될 법한 까마득한 높의 절벽이었는데, 칸이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었다.

"이 위로 올라가서 조금만 더 이동하면 도착입니다."

뭐?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어 쳐다보니 칸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 저는 괜찮습니다. 디딜 곳도 많은 지형이고, 이 정도 높이는 한두 번 올라본 것도 아니라 익숙합니다."

"······."

아니, 너 말고 내가 안 괜찮다고.

나는 아득한 위쪽을 올려다봤다.

너무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말하길래 잠시 깜빡했다.

이 세계의 초인들에게 맨몸으로 절벽을 등반하는 것쯤이야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절벽을 막힌 길이 아니라 그냥 올라가면 될 뿐인 길목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길은 이것뿐인가?"

"예? 찾아보면 다른 길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다 한참 돌아가는 길일 겁니다. 그럼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칸은 그렇게 말하고는 먼저 움직였다.

설마 내가 이 정도도 오르지 못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듯했다.

'마법사도 한 명 데려왔어야 됐나······.'

칸이 벽면에 도마뱀처럼 붙어 절벽을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황망히 바라보다 아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렇게 된 이상 별 수 없지.

"아셸."

"예."

"나를 업고 올라가라."

"······예?"

아셸이 방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돌아봤다.

나는 최대한 뻔뻔하게 말했다.

"나를 업고 올라가라고 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대체 무슨 의도의 명령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복잡한 얼굴이었으나, 이내 순순히 등을 내주었다.

쿠웅!

그리고 올라가는 건 한순간이었다.

단 한 번의 발 구름에 몸이 폭발하듯 솟아오르더니, 벽면은 딛지도 않고 바로 절벽 위까지 다다랐기 때문이다.

웬만한 놀이기구는 비교도 안될 아찔한 속도와 체공감이었으나 어떻게든 비명은 참을 수 있었다.

'······어우.'

두 번 하기는 싫네.

찌릿거리는 여운을 진정시키며 아셸의 등에서 내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칸은 3분의 1쯤 올라와서 금세 올라올 듯 싶었다.

아셸이 다시 나서면 칸도 편하게 올라올 수 있겠지만, 잘 올라오고 있는데 굳이 도와주라고 시키는 것도 그랬기에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

그때 아셸이 어딘가를 빤히 응시했다.

반사적으로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쳐다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순간 비릿한 향이 코를 찔러왔다.

'피비린내······?'

나도 어렵지 않게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진한 혈향이었다.

이내 위로 올라온 칸도 냄새를 맡았는지 옷의 흙먼지를 털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곤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근처에 몬스터의 사체라도 있는 모양입니다."

이동은 계속되었다.

숲 안쪽으로 나아갈수록 혈향은 점점 진해졌다. 근원지와 가까워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어느 지점에 다다랐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모두가 순간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

사체의 정체는 거대한 뱀이었다.

회색 외피의, 머리 크기만 족히 사람의 몸길이만큼 거대한 뱀. 의심의 여지없이 자이언트 스네이크였다.

눈에 띄는 건 놈이 죽어있는 상태였다.

놈은 몸통의 중간이 끊어져······ 아니, 끊어진 게 아니라 몸통의 중간부가 아예 사라진 채 죽어있었다.

그건 마치 자신보다도 훨씬 더 거대한 무언가에게 한입에 뜯어먹힌 듯한 그런 흔적이었다.

"이, 이놈이 설마 소문의······?"

칸이 입을 열고 중얼거렸다.

북쪽 산맥에서 목격됐다는 거대한 뱀.

하지만 이놈이 그 소문의 주인공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죽었으니까.

'······대체 뭐한테?'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근처 바닥이 황량하게 쓸린 흔적을 따라 나무들이 죄다 쓰러진 요상한 풍경이 비쳤다.

이내 칸도 상황을 깨달았는지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아셸은 이미 경계를 하고 있었다.

취릭.

순간 귓가에 울려온 희미한 소리.

생명의 본능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듯한 그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땅에 진동이 일었다.

한쪽에 무성했던 수풀이 우수수 무너지며 거대한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럼에도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다.

쿠구구구.

이윽고 압도적인 거체가 몸을 일으키며 대지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셸도 칸도 넋을 잃은 얼굴로 '그것'을 바라봤다.

[Lv.90]

······거대하고 시커먼 뱀이었다.

뱀이 아니라 용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눈앞에 죽어있는 놈이 갓 태어난 새끼뱀처럼 보일 정도로 한없이 거대한 뱀.

나는 놈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벨르바고라······.'

마경의 네임드 보스 중 하나.

거대한 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렸던, 하지만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놈.

'도대체 왜 여기에?'

의문에 대한 답은 바로 나왔다.

지금이 과거의 시점.

놈이 이 시기에는 아직 마경에 자리를 틀지 않은 상태라면 다른 어디에 있더라도 말이 안 될 건 없는 것이다.

그래······ 말이 안 될 건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거대한 뱀이라는 게 정말로 이놈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취릭.

쭉 찢어진 거대한 동공이 나와 다른 두 사람을 훑는다.

마치 어떤 먹이를 먼저 맛봐야 할지 고민이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칸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얼굴이었고, 아셸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전투를 준비하긴 커녕 하얗게 질려서 검자루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뱀 앞의 개구리와 다름없이.

'이건······ 피어인가?'

이전에 느껴본 살기와는 묘하게 다른 이 불쾌한 감각.

일부 몬스터 중에는 자신보다 약한 대상에 대한 공포와 패닉을 극도로 유발시키는, 일종의 피어 능력을 지닌 놈들이 있다. 벨르바고라도 그에 속했다.

아무리 아셸이라도 훨씬 레벨의 높은 상대의 피어에는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만전 상태로 전투를 해도 승산이 전혀 없는 상황에 도주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제왕의 혼이 있기에 피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그래도 상황이 최악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어떻게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는 거지?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하겠다고 다짐은 했지만, 그렇다고 벌써부터 이런 위기라니.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올 것 같다.

'······어떻게든 닿기만 하면.'

이 상황에 살아남으려면 내가 어떻게든 하는 수밖에 없다는 건 알고 있다.

단 한 번의 접촉이면 됐다.

스킬을 발동할 새도 없이 저 거대한 몸에 깔려 죽기라도 하면 끝이지만, 여기서는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나는 놈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

할 말을 잃을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

바로 가까운 곳에 있었음에도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게 황당할 정도였다.

아셸은 세상에 이렇게나 거대한 생물도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이 순간 처음으로 알았다.

또한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전력을 다해 싸워도 이 괴물에게는 결코 대적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니, 지금으로서는 싸우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일 수가······.'

그저 마주한 것만으로 숨이 턱 막혀오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다.

그녀는 부서져라 이를 갈며 피어에 저항했다. 꺾이려는 투지를 바로세우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하지만 여전히 검조차 뽑을 수가 없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스물스물 온몸을 잠식하는 공포는 어떻게 해도 떨쳐지지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절망과 무력감을 느끼며,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뿐.

그때였다.

저벅.

정적을 깨고 울린 발걸음 소리.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7군주가 괴물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이 지독한 압력이 그에게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듯, 산보라도 하는 것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괴물이 고개를 갸웃거리듯 뒤틀며 천천히 머리를 아래로 내렸다.

그 자그마한 움직임에 풍압이 일고 땅이 울렸다.

마치, 어째서 아무렇지 않게 움직일 수 있는 먹이가 있는 건지 궁금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괴물의 바로 앞에 선 7군주는 놈이 아가리를 벌려 숨을 들이키기만 해도 빨려들어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7군주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아셸이 보기엔 어떤 살의도 기운도 담기지 않은 평온한 손짓이었다. 그리고 손끝이 괴물에게 닿은 순간.

그가 하찮기 그지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네 먹이로 보였더냐?"

······쿠우우웅!!

거대한 진동과 함께 괴물의 거체가 무너져내렸다.

초재생 (3)

벨르바고라의 몸체가 허물어지며 지면을 강타했다.

그 충격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으나 가까스로 중심을 되찾았다.

나는 그야말로 지옥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돌아온 기분을 느끼며 쓰러진 놈을 바라봤다.

눈을 똑바로 뜬 채 즉사해 미동도 하지 않는 게, 마치 거대한 껍데기를 두고 영혼만 그대로 소멸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이건 진짜 아슬아슬했어······.'

좀 과장해서 사람과 개미에 빗대어도 될 정도의 크기 차이였다.

만약 놈이 혀만 한 번 할짝거렸어도 난 어디론가 튕겨나가 꼴사납게 죽었을 것이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끝내 무사히 접촉에 성공했을 때는 희열이 차올라서 별 헛소리까지 튀어나왔다.

뒈지기 일보직전의 상황에서도 그런 여유라니, 제왕의 혼 때문에 내 정신은 어딘가 살짝 맛이 가버린 게 틀림없었다.

"으아······ 어······."

맥빠진 신음에 나는 두 사람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혼이 다 빠져나간 듯한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칸이 보였다.

아셸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서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제야 피어에서 벗어난 모습이었다.

분위기가 정적에 휩싸였기에 나는 아무런 말이나 내뱉었다.

"이런 곳에 있을 만한 몬스터는 아니군."

"······."

딱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피어의 충격이 컸는지 칸이 거의 탈진 상태였기에,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이동을 계속하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바위에 앉아 벨르바고라의 시체를 구경하고 있는데 아셸이 뜬금없는 말을 해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