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으로 무표정한 얼굴이라 평소에는 감정을 읽기 힘든 아셸이었으나, 이번에는 어딘가 시무룩한 기색이 섞여있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갑자기 왜 사과를 하는 건가 잠시 고민하다가 깨달았다.
'호위를 제대로 못했다고 이러나?'
이번 건 완전히 상정 밖의 재해였다.
그녀의 능력을 한참 벗어난 일이었으니 탓하는 마음이 있을 리 없었다.
군주가 직접 나서야나 처리할 수 있는 괴물을 그녀가 무슨 수로 상대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주어진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에 본인 스스로가 용납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런 성격이기는 했지.
매사에 진중하며 스스로에게 한없이 엄격한, 그런 고지식함을 그대로 그려낸 듯한 인물이 바로 아셸이었다.
'아······ 아니면 그건가?'
어쩌면 벨르바고라의 앞에서 조금의 저항조차 하지 못한 게 충격이 컸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입을 열었다.
"일부 몬스터나 종족 중에는 피어를 내뿜는 것들이 드물게 있다."
아셸이 눈을 깜박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하는 반응. 역시 잘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피어는 지니고 있는 몬스터 자체가 드물고 명확한 형체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종류의 능력이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레벨이면 피어를 내뿜는 다른 몬스터를 만난 적이 있더라도 웬만해선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을 터.
그러니 이번의 생소한 경험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어도 무리는 아니었다.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게 공포를 특히 크게 유발시키는 능력이다. 보통은 싸울 의지를 완전히 상실하고 패닉에 빠지지."
"······아."
그제야 아셸은 놀란 듯 벨르바고라의 시체를 돌아봤다.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군."
"예."
"저 미물은 마경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강력한 놈이었다. 네 정신이 나약한 탓이 아니었으니 신경 쓸 것 없다."
위로의 뜻으로 한 말에 아셸은 왜인지 조금 당황한 눈빛이었다.
대답 없이 고개를 꾸벅인 그녀가 다시 입을 다물고 침묵 상태로 돌아갔다. 하여튼 말 섞기 힘들구만.
이윽고 칸도 얼추 정신을 차렸다.
"상태가 좋지 않다면 더 쉬어라."
"아, 아닙니다. 폐를 끼쳐 정말 죄송합니다."
칸은 진이 다 빠진 기색이긴 했으나 몸을 움직일 만큼은 회복한 듯 싶었다.
90레벨 몬스터의 피어에 그대로 노출됐으니 기절하지 않은 것만 해도 용했다.
아마 이번 산행은 그의 모험가 인생에 짧지만 여러모로 가장 기억에 남는 모험담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정말 저런 게 도시로 내려왔으면 폐허가 됐겠군..."
여전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듯 칸이 벨르바고라의 시체를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곤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나랑 눈이 마주쳤는데, 왜인지 과하게 움찔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방금 어째 벨르바고라 쳐다볼 때랑 비슷한 눈빛이지 않았나?
'나까지 괴물 취급이냐.'
이해 못할 반응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눈으로는 내가 놈을 툭 건드리기만 해서 죽여버린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아셸도 아닌 척 하지만 은근히 시체를 힐끔거리며 살펴보고 있고.
어쨌든 위기도 무사히 넘겼으니 본 목적을 마저 완수할 때였다.
"이동하지."
주위에는 어느새 무성한 흑목들이 숲을 어둡게 물들이고 있었다.
신비가 숨겨진 곳이 가까웠다.
***
칸이 말했던 대로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르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숲 한가운데 홀로 덩그러니 놓여있는 거대한 바위.
뚱뚱한 위아래에 비해 중간 부분만 잘록하게 들어간 형태는 누가 봐도 모래시계나 다름없었다.
'드디어 도착했네.'
모래시계 바위를 찾았으니, 이제 남은 건 입구를 찾는 일뿐이다.
바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절벽이 있었다. 아까 올라왔던 것보다는 낮은 절벽이었다.
'대충 저쯤이었던 것 같은······ 아닌가? 저쪽인가?'
주변을 살피며 방향을 가늠해봤다.
하지만 기억도 애매하고 실제로 보니 헷갈려서 그냥 좀 고생하기로 했다. 여기까지 충분히 편하게 왔다.
나는 절벽 아래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절벽면을 유심히 살폈다.
두 사람은 대체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없이 내 뒤만 졸졸 쫓았다.
몇십 분쯤 지났을까, 벽면 한쪽에 내 키높이만큼 세로로 갈라져 있는 미세한 틈을 발견할 수 있었다.
틈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냉기에 나는 반쯤 확신하고서 말했다.
"아셸."
"예."
"이 틈을 적당히 넓게 부숴라."
아셸은 내가 가리킨 틈을 바라보고는 별말 없이 손을 들어올렸다.
나는 슬쩍 뒤로 물러섰다.
콰아앙!
그녀가 벽면에 손바닥을 붙인 채 기운을 터뜨리자 벽이 우르르 무너졌다.
틈 안쪽은 동굴처럼 텅 비어있어서 한두 명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입구가 만들어졌다. 역시 여기가 맞군.
숨겨진 통로의 등장에 아셸과 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나는 두 사람을 입구에 남겨둔 채 안쪽으로 홀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공기가 서늘하다.
통로는 완만하게 경사진 내리막으로 이어져있었는데, 좀 내려가자 더 이상 바깥의 빛이 들어오지 않아 금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타이밍에 챙겨왔던 발광석을 품에서 꺼내들었다.
꽁꽁 싸매둔 보자기를 풀자 밝은 백색광이 퍼지며 순식간에 내부가 밝아졌다.
"······어우."
동시에 굴 벽면 곳곳에 붙어있던 벌레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바퀴벌레나 지네 같은 것들이 꽤나 한가득.
한 차례 작게 혀를 차고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갈수록 내리막의 경사가 서서히 기울어졌기에 걸음을 떼는 것이 좀 더 신중해졌다.
끝내 손으로 바닥을 짚지 않고는 내려갈 수 없는 지경이 됐을 땐 슬슬 식은땀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까딱 미끄러지면 엿 되겠는데.'
여기 경사가 원래 이 모양이었었나? 얼마나 더 깊이 들어가야 나오는 거야?
나는 들고 있던 발광석을 입에 물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나마 바닥이 거칠고 울퉁불퉁해서 발을 디딜 공간이 많은 건 다행이었다.
여기서 더 가팔라지지만 않는다면야, 멍청하게 발이라도 헛디디지 않는 이상 넘어질 일은 없······.
투둑.
"아."
순간 바닥을 짚은 발이 미끄러지며 몸의 중심이 무너졌다.
이 씨발, 뭔 플래그도 아니고 생각하자마자······.
필사적으로 바닥을 손으로 짚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손바닥만 거하게 갈리며 내 몸은 비탈 아래 어둠으로 바퀴처럼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쿠웅!
머리와 팔에 아찔한 충격이 울리고 나서야 추락이 멈추었다.
나는 잠시 정신을 못 차리고 꿈틀거리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욱씬거리고 입 안에 비린 맛이 느껴졌다.
"윽······."
볼을 타고 무언가 줄줄 흘러내린다.
설마 하며 닦았더니 손이 시뻘건 색으로 적셔졌다. 피였다.
인상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 턱에 맺힌 핏물도 닦아내고 왼팔을 내려다봤다.
마찬가지로 피칠갑이 되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너덜너덜한 게, 부러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돌겠네, 진짜."
이렇게까지 심하게 다쳐본 적은 처음이었기에 순간 당혹스러움이 몰려왔으나, 이내 차갑게 가라앉았다.
팔을 찌르는 격통이 더럽게 아팠지만 이성은 언제나처럼 흐트러지지 않았다.
잠시 거칠어진 숨을 고른 뒤,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내리막이 끝나고 옆쪽으로 자그마한 통로가 꺾여서 이어진 것이 보였다. 모퉁이 벽에 부딪혀서 멈춘 거였나.
몸이 만신창이가 된 것치고는 한참 부족한 보상이긴 했으나, 어쨌든 비탈을 순식간에 내려오긴 했다.
나는 멀쩡한 팔로 발광석을 주워든 뒤 통로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와중에 발목도 접질렀는지 오른쪽 발을 디딜 때마다 찌릿한 고통이 올라왔으나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아갈수록 통로가 점점 넓어지더니 안쪽에서부터 희미한 녹색 빛이 새어나왔다.
"오."
마침내 끝에 도달하자 펼쳐진 풍경에 짧은 감탄을 뱉었다.
넓고 휑한 공동, 그 정중앙의 바닥에 새겨져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녹색 문양.
나는 고통도 잊고 환하게 웃으며 문양을 향해 절뚝거리며 다가갔다.
저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기에 경계는 없었다.
드디어 찾았다. 초재생 신비.
'생각보다 꽤 크네.'
신비의 문양은 마법진처럼 원형에 가까웠는데, 직경이 몇 미터는 될 정도로 컸다.
바로 앞까지 접근한 나는 잠시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일단 찾기는 찾았는데, 어떻게 해야 이 신비를 얻을 수 있는 건지 몰랐기 때문이다.
게임에서는 일단 발견한 다음 가까이 접근만 하면 알아서 신비를 획득했다고 메시지가 떴었으니까.
'그냥 건드리면 되려나?'
달리 방법도 없었기에 한쪽 무릎을 꿇고 문양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화아악!
그러자 문양의 빛이 한순간 환하게 터졌다.
나는 당황해서 손을 뗄 뻔했다가 멈췄다.
빛이 맞닿은 손을 타고 올라 내 몸에 흡수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내 빛이 전부 흡수되고 문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공동이 어둠에 가라앉았다.
"······."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바닥에 대고 있던 손을 떼고, 왼팔을 내려다봤다.
부러진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며 재생되고 있었다.
초재생 (4)
드드득.
부러진 뼈가 붙고, 찢어진 피부가 아물며 새살이 돋아난다.
너덜너덜했던 팔이 완전히 재생되기까지는 고작 몇십 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피며 상태를 확인했다.
겉으로 보는 것과 다름없이 정말로 완벽하게 회복되었다. 머리의 찢어진 상처와 접지른 발목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방금까지 만신창이었던 몸이 시간이라도 거스른 듯 순식간에 멀쩡한 상태로 돌아왔다.
"개쩌네."
과연 초재생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능력이다.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이 정도 회복력이면 절단된 신체 부위도 재생이 될까?
게임에서의 초재생은 그저 생명력의 회복을 증폭시키는 패시브 스킬이었다. 잘린 신체까지도 재생되는지 아닌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확인하자고 멀쩡한 몸 어디를 잘라버릴 수도 없었기에 당장은 호기심으로 그쳤다.
어쨌든 이로써 첫 번째 신비는 성공적으로 얻었다.
나는 개운한 기분으로 발광석을 주워들고 몸을 일으켰다.
"음."
그나저나 꼴이 말이 아니군.
상처는 깔끔하게 회복됐어도 핏물이 굳어 들러붙은 자국은 그대로였다.
이 상태 그대로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기에 수통의 물로 핏자국들을 씻어냈다. 옷에 스며든 것까진 별 수 없었지만.
공동 벽과 바닥에는 여기까지 지나온 통로처럼 벌레들이 가득했다.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하나의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
나는 미간을 좁힌 채 바닥에 떨어진 핏물과 벌레들을 번갈아 봤다.
즉살.
내가 지니고 있는 유일한 공격 스킬.
일단 접촉만 하면 어떤 대상이든 즉사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즉사기라고 스킬의 설명에선 서술되어 있었다.
떠오른 의문은 이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접촉'이란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금까지는 당연히 육체를 통한 접촉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 '육체'의 기준이 대체 어디까지인지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었다.
예컨대 혈액도 육체의 일부다.
그러면 내 혈액에 접촉한 대상도 즉살이 작용하는 범위 내에 있는 것인가?
'······확실히 실험해볼 필요가 있겠는데.'
나는 발밑을 기어다니고 있던 벌레 한 마리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내 핏물이 떨어진 곳에 벌레를 도로 내려놓은 뒤 즉살을 발동했다.
하지만 벌레는 죽지 않고 멀쩡히 살아있었다.
기대에서 빗나간 결과에 조금 실망하며 다른 가정을 떠올려봤다.
혹시 체외로 배출된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피라서 그런 건 아닐까, 하고.
"음······."
바닥에서 날카로운 돌조각 하나를 찾아 주워들었다.
부러진 뼈도 순식간에 회복시키는 능력을 얻었는데 베인 상처쯤은 대수도 아니었다.
투박한 날로 손바닥을 꾹 누르고 긋자 살이 찢어지며 피가 흘러내렸다. 상처는 곧바로 재생됐다.
바닥을 기고 있는 벌레에게 손바닥의 핏물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다시 즉살을 발동하자 놀랍게도······.
"허."
진짜 죽었다.
벌레는 더 이상 꿈틀거리며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봐도 마찬가지.
이번엔 정말로 즉살이 통한 것이었다.
확실한 확인을 위해 다른 벌레들로 몇 차례 더 시도해봤다. 결과는 모두 같았다.
그제야 나는 추측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피부를 통한 접촉뿐 아니라, 혈액을 통해서도 즉살을 발동할 수 있다.'
다만, 출혈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피는 아무 효과가 없던 것으로 보아 시간적인 제한이 있는 것으로 추측됐다.
그 시간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이건 꽤 굉장한 발견이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활용이 가능했을 줄이야······.'
혈액을 즉살의 매개로 삼을 수 있다면 그 활용법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해진다.
엔록에 도착하면 마저 정확한 실험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몸을 돌렸다. 이제 슬슬 나가야겠다.
지나왔던 통로를 그대로 돌아가 굴 바깥으로 나서자, 입구에 아셸과 칸이 나란히 서있는 게 보였다.
내 모습을 두 사람이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옷도 찢어지고, 핏자국에 흙먼지에, 꼴이 엉망이라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에 좀 민망한 기분이었다.
나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그만 돌아가지."
***
7군주를 뒤따라 걷는 아셸은 그 뒷모습을 힐끔거리며 살폈다. 특히나 왼쪽 팔을.
찢어진 소매를 붉게 적신 핏물.
눈에 띄는 외상은 없으나 심상치 않은 흔적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전설상의 고룡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거대했던 괴물조차 격전은 커녕 일순간 싸늘한 주검으로 만들어버린 7군주였다.
그야말로 이치를 벗어났던 압도적인 강함.
한데 그 굴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또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그런 그가 저만한 여파를 입은 것일까.
쓸데없는 호기심이라 생각하면서도 신경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7군주는 무엇 하나 종잡을 수가 없는 자였다.
이번 산행으로 그가 어떤 목적을 지니고 행동하는 건지 파악하긴 커녕 더더욱 알 수 없게 됐다.
그나마 조금 알게 된 건 성격 정도일까.
길잡이로 동행한 이와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선 그가 딱히 신분이나 격을 따지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몸을 거칠게 움직이는 것도 굉장히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틈만 나면 이동을 멈추고 한가롭게 경치 구경을 했던 걸 생각하면 그랬다.
특히 절벽을 오를 때 굳이 자신의 등을 빌렸던 것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것만큼은 여전히 의도를 모르겠지만.
'알 수 없는 사람이야.'
아까 올라왔던 절벽에 다다르자 7군주가 다시 이쪽을 돌아봤다.
"아셸."
"예."
"업고 내려가라."
"······."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아셸은 그의 기행에 대해서 앞으로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도시로 돌아가는 데는 올라올 때보다 훨씬 적은 시간이 소모됐다.
내리막이 더 빠른 건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것 말고도 내가 초재생을 얻은 효과도 있었다.
초재생은 단순히 육체의 재생력뿐 아니라 체력까지도 크게 증폭시켜줬기에 좀처럼 지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지 않게 체력 문제까지도 해결된 것이었다.
도시로 귀환한 뒤 칸은 약속한 대로 큰 보수를 받았고, 시장에게 괴물에 대한 것도 전했다.
"북쪽 산맥에 출몰했다는 거대한 뱀 말이야."
"아, 예. 그런 소문이 있어서 조사단을 파견할 예정입니다만..."
"죽었으니 사체는 알아서 처리해라."
"······예?"
그 뒤로는 더 볼일도 없었기에 곧장 제닉스 시를 떠났다.
머지 않아 7군주령 엔록의 영역으로 진입한 마차는 다시 여러 도시들을 경유하며 빠르게 수도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이군.'
나는 저멀리 보이기 시작한 거대한 도시 성벽을 응시했다.
대군주성을 제외하고 이제껏 지나왔던 어떤 도시들보다도 높고 거대한 성벽이었다.
7군주령 엔록의 수도, 버크혼.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알키마스 공방 (1)
대도시는 혼잡함과 다채로움의 상징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탄 마차가 나아가고 있는 대로에는 오로지 고요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행로 양옆에 검을 치겨든 채 간격을 두고 정렬해있는 수많은 병사와 기사들. 그리고 지켜보는 시민들.
스쳐가는 얼굴들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엿보였지만 대체로 긴장과 두려움이었다.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에 나는 스스로 굉장한 폭군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군주 자리가 쭉 비어있던 탓인가.'
몇 년 만에 새로운 지배자를 맞이하게 된 상황이니 불안할 만도 하겠다 싶었다.
군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절대자이고, 그런 군좌에 미친놈이 앉으면 그야말로 산지옥이나 다름없게 되니까.
대표적인 예로 폭왕의 6군주령이나 흑해 여제의 8군주령이 그러했다.
하지만 이들의 걱정은 전부 쓸데없는 것이었다.
내 목숨줄 챙기기도 바쁜데 군주성에 눌러앉아 여유롭게 황제 놀음이나 할 시간이 있겠나?
나는 이 땅을 직접 간섭해서 다스릴 생각 따윈 없었다. 지금껏 돌아가던 대로 알아서 돌아가게 놔둘 요량이었다.
'해결할 것만 해결하면 말이지.'
이곳 버크혼 시에 위치한 알키마스 공방.
그곳의 주인인 연금술사 스칼릿.
그녀가 바로 다시 히든 피스를 찾아 군주성을 떠나기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다.
정확히는 내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인 인재였다. 아셸처럼.
최우선 문제는 스펙업이지만, 지나는 경로에 있어 챙길 수 있는 인재들도 틈틈히 챙길 생각이었다.
'지금 시기면······ 아마 밸리아 상단 때문에 애먹고 있을 때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마차는 이내 도시의 중앙에 있는 거대한 성에 도착했다.
군사들의 행렬은 더럽게 길어서 도시 입구에서부터 군주성 정문까지 쭉 이어져있었다. 이 무슨 쓸데없는 인력 낭비일까.
정문을 통과한 뒤 마차에서 내렸다.
가장 앞에서 날 맞이한 두 사람은 고급스런 의복을 입고 있는 엘프와, 한눈에 봐도 집사로 보이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엘프가 공손하게 인사를 해왔다.
"엔록의 새로운 주인께 인사 올립니다. 7군주령의 군주 대행을 맡고 있던 바슬란이라고 합니다."
대행? 그런 것도 있었나.
군주 자리를 마냥 비워두고만 있었을 리도 없으니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가 성 안내를 하며 이것저것 설명하겠구나 싶었는데 이어진 말은 의외였다.
"대군주성으로 복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7군주님을 뵙고 인사드리고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복귀?"
"예, 저는 본래 대군주성 소속의 행정관입니다. 대군주님의 명을 받고 이곳에 파견되어 섭정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아, 그런 거냐.
군주 자리를 대신 맡을 정도면 어지간히도 고위 관리였던 모양이다.
옆에 있던 노인도 나서서 자신을 소개했다.
"성의 집사장인 플로토라고 합니다."
진짜 안내인은 이쪽이었다.
대행은 곧바로 성을 떠나갔고, 나는 플로토의 안내에 따라 성의 중앙홀로 들어섰다.
내부는 딱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였다.
판타지 세계의 성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풍경. 넓고, 화려하고, 장엄하다.
"연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군주님."
그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풀어져서 놀고 먹을 시간 따윈 없었다. 하지만······.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어차피 당장 성을 떠날 것도 아니고, 이미 다 준비해둔 것 같은데 파해버리면 하인들만 개고생 시킨 게 된다.
그리고 성의 신하들의 얼굴도 한 번은 살펴봐야 하니 연회도 어느 정도는 할 일의 연장이었다.
······솔직히 다 핑계고 나도 사람인지라 잠깐 정도는 쉬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도 했으니까.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하자는 마음가짐으로 오늘 하루는 편히 휴식을 즐기기로 했다.
***
버크혼 시의 내곽에 위치한 거대한 저택.
엔록의 북부 변경부터 시작해 버크혼까지의 상로를 완전히 틀어잡아 독점하고 있는, 밸리아 대상단의 건물이었다.
상단주실에 두 남자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새 7군주에 대한 정보는 어떻소, 형님?"
안대를 낀 사내의 말에 중후한 풍채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바로 상단의 주인인 대상인 밸리아였다.
"별 수확은 없다. 그나마 듣기로는 완전히 출신 분명의 외부자라더군. 그리고 인간이고. 행차에서 얼굴을 봤느냐?"
"멀리서 살짝 보긴 봤소. 꽤나 창백하게 생겨먹었던 것 같은데."
"바크, 듣는 귀가 없어도 항상 입을 조심하라고 했다."
"거 참, 아무리 그래도 둘밖에 없는데 좀 편하게 말해도 되잖소."
안대 사내가 가볍게 투덜거렸다.
"뭐, 어쨌든 우리한테는 좋은 상황이 된 게 아니오? 그 끈질긴 연금쟁이 놈들도 이제 바람막이가 사라진 셈이니. 큭큭."
알키마스 공방.
버크혼 시에 자리하고 있는 유서 깊은 연금술사 집단.
그 비전을 빼내기 위해 오래 전부터 많은 공작을 벌여왔었지만, 7군좌의 공백과 함께 한동안 무산이 됐었다.
요 몇 년간 새로 파견된 군주 대행은 철저히 원칙에 따라서만 도시를 관리했으니까.
당연히 뇌물 따윈 통하지 않았고, 군주 대행이 엔록의 섭정을 행하는 동안은 공방에 뻗치던 암수도 전부 거두고 눈치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군주의 등장으로 상황은 달라졌다.
그들은 가장 높은 곳에서 군림하는 자.
아랫것들의 세력과 이권 경쟁은 그들에게 있어 벌레들의 다툼에 지나지 않아서 별 관심이 없다. 전 7군주가 그러했듯이.
새로운 7군주가 폭왕이나 흑해 여제 같은 미치광이만 아니라면야 상황은 다시 상단에 유리하게 돌아갈 것이었다.
"내일 공방을 방문해야겠다."
"바로 압박에 나설 생각이오?"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해진 건 맞지만 아직 7군주가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 모른다. 최대한 빠르게 그들 스스로 백기를 들게 만드는 게 최선이지."
"그건 그렇군. 공방주 년하고 원로 영감탱이들이 지금쯤 아주 똥줄이 타고 있겠어, 큭큭."
밸리아와 안대 사내가 마주 보고서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
연회를 즐긴 뒤 다음날.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해야 할 일들을 시작했다.
'많이도 가져왔네.'
통에 한가득 담겨 꿈틀거리는 애벌레들을 내려다봤다.
내 명령을 받고 집사장이 가져온 것이었다.
이 애벌레들은 즉살의 정밀한 탐구를 위해서 쓰일 실험 재료였다.
"시작해볼까."
나는 나이프를 집어들었다.
실험의 목적은 체외로 배출된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난 혈액까지 즉살의 효과가 유효한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방식은 단순했다.
애벌레에게 핏물을 떨어뜨리고 즉살을 발동한다. 그리고 성공할 때마다 발동 시간을 5초씩 지연시킨다.
그렇게 수십 마리의 애벌레를 희생시키고 나서야 실험을 마칠 수 있었다.
'대충 3분 정도인가.'
실험 결과, 즉살이 유효한 시간은 약 3분 정도였다.
몸 밖으로 흐른 지 3분 이상이 지난 피로는 즉살을 발동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뭐가 됐든 핵심은 혈액으로도 즉살을 발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활용법을 고민하며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뱀파이어의 혈술이었다.
혈액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라면 즉살과의 시너지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해질 테니까.
'문제는 그렇다고 내 종족을 바꿀 수도 없다는 거지.'
타고난 태생인 종족을 바꿀 방법은 보통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바꿀 수 있더라도 웬만하면 계속 인간이고 싶기도 했고.
뱀파이어가 아니더라도 혈술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
하나 떠오르는 게 있긴 했지만 그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할 방법이었다.
'일단 뒤로 미뤄두고.'
어쨌든 새로운 정보를 얻었지만 여전히 모르는 게 많았다.
예를 들어서 즉살이 통하는 대상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라거나. 언데드나 영체 등에도 과연 즉살이 통할까?
이것들도 기회가 되면 차차 확인을 해봐야 할 것이었다.
이제 다음으로 처리할 일은 알키마스 공방 문제.
나는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셸에게 말했다.
"잠시 외출해야겠다."
한번 공방에 직접 찾아가봐야겠다.
이 세계의 포션이란 게 얼마나 효능이 뛰어난지 궁금하기도 하고, 구경도 할 겸.
***
아리아는 알키마스 공방의 견습 연금술사였다.
그녀의 오전 업무는 상점 건물의 카운터를 맡는 것.
공방의 주 수입원은 버크혼을 포함한 인근 도시들의 시의회나, 모험가들이다.
시의회 쪽은 대체로 대량 구매를 하기에 직접 상점에 찾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모험가들은 아직 활발히 활동할 시간대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찾아오는 손님이 별로 없었기에 아리아는 썩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함······ 흡."
쩍 하품을 하던 아리아의 눈에 상점으로 막 들어온 손님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는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손님은 젊은 남성과, 호위 기사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특히 남자 쪽의 용모가 굉장히 미려했다.
아리아는 아침부터 눈호강을 했다고 생각하며 밝게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열된 포션들을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다른 도시에서 온 도련님인가?'
본 적 없는 얼굴이기도 했고, 태도가 구매보다도 구경을 목적으로 온 것처럼 보였기에 아리아는 그렇게 짐작했다.
꽤 한참 포션들을 구경하던 남자가 카운터로 가까이 다가왔다.
"포션들은 진열된 게 전부인가?"
"아, 진열된 건 전부 중품 이하의 포션들입니다. 상품의 포션은 미리 만들어둘 수 없으니 전부 주문 제작으로만 받거든요."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다시 물어왔다.
"공방에서 가장 품질이 뛰어난 힐링 포션을 구매하고 싶은데."
그 말에 아리아는 속으로 슬쩍 웃었다.
아무래도 이 물정 모르는 도련님은 상품의, 그것도 알키마스제 포션이 얼마나 비싼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가장 품질이 뛰어난 최상품의 힐링 포션이라면 '스칼릿'이 있습니다만."
"공방주의 이름 아닌가?"
"예, 공방주님의 비전이 담긴 포션이니 이름도 그렇게 지어졌죠."
"얼마지?"
아리아는 조금 골려줄 생각으로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백금화 3닢입니다!"
금화로 따지면 무려 300닢.
웬만한 부호도 가벼운 마음으로 선뜻 구매할 수 없는 액수다.
아리아는 흠칫 기겁할 반응을 기대하며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그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구매하겠다."
"······예?"
"주문 제작이라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지? 금액은 선불로 모두 지불하면 되나?"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품에서 꺼내든 건 금화와 백금화가 뒤섞여 한가득 담긴 돈주머니였다.
아리아는 경악으로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더듬더듬 말했다.
"자, 잠시만요! 바로 공방주님을 모셔오겠습니다아!"
알키마스 공방 (2)
포션 상점.
플라스크에 담겨 코르크 마개로 밀봉된 가지각색의 물약들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연구실 같은 분위기도 느껴졌다.
밖으로 급하게 빠져나갔던 점원이 두 명의 인물과 함께 돌아온 건 얼마 뒤였다.
푸석푸석한 머리칼에 칙칙한 로브를 입고 있는 여인과, 호위로 보이는 사내였다.
여인 쪽이 누구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스칼릿.'
딱히 그녀를 만날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무려 백금화 3닢의 상품을 구매하겠다는 손님이니 주인이 직접 나서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지만.
[Lv.41]
그리고 남자 쪽은······ 동생이겠지?
스칼릿에게 동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는 스칼릿과 다르게 연금술이 아니라 검술 쪽의 길을 걸어 공방의 무력에 보탬하고 있는 설정이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저 정도 레벨이면 상당한 실력자였다.
나를 발견한 스칼릿이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대뜸 인사를 건네왔다.
"공방주인 스칼릿 아티마예요."
초췌한 눈에 피곤에 찌든 목소리였다.
게임에서도 연금술 연구에 반쯤 미쳐있던 설정의 인물로 기억하기에 의외는 아니었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귀하께선 정말로 스칼릿을 구매할 의향이 있으신 건가요?"
포션의 이름이라는 건 알지만 어째 괜히 이상하게 들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액은 모두 선불인가?"
"아니요, 가격의 절반만 선지불해주시면 됩니다. 그보다 포션의 효능 설명을 해드리려고 왔는데..."
이것저것 묻지도 않고 구매하려는 내 태도가 이상했는지 그녀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디서 오신 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꼭 말해야 되나?"
"그런 건 아니지만 신원이 확실한 편이 마음 편해서 좋으니까요. 일단 제 비전의 정수가 담긴 물건인지라."
그렇긴 하겠네.
위험한 조직과 연관됐거나, 아니면 다른 공방에서 왔다거나, 대충 이런 경우들을 염려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백금화 3닢의 거금을 선뜻 지불하겠다는 자가 보통의 손님일 리는 없으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물건을 찾을 때 이야기하지."
"알겠습니다. 차라도 대접해드릴 테니 잠시 앉았다 가시죠."
별로 개의치 않고 화제를 넘긴 그녀가 공방 본 건물의 객실로 날 안내했다.
구경만 할 생각으로 온 건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나는 차를 마시며 포션에 대한 설명을 스칼릿에게 들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힐링 포션이라 재생 효과가 매우 뛰어납니다. 절단된 부위도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았으면 이어붙이는 게 가능할 정도죠. 또 내장의 손상도 마시는 것으로 어느 정도까진 수복할 수 있어요. 물론 직접 부으면 효과가 훨씬 뛰어나고요."
"잘린 부위를 아예 새로 재생시키는 건 불가능한가?"
내 질문에 스칼릿이 조금 황당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런 건 엘릭서쯤은 되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
엘릭서는 대륙에서도 손에 꼽는 영약들을 통틀어 칭하는 명칭이다. 한마디로 헛소리 말라는 뜻이었다.
"부러진 뼈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데에는 얼마나 시간이 걸리지?"
이건 내 초재생과 최상급 포션의 효과를 비교하고 싶어서 한 질문이었다.
스칼릿이 대답했다.
"부위와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골절상은 손가락의 경우 보통 1분 내로 완치됩니다. 팔이나 다리는 적어도 몇 분이 소요되고요. 물론 뼈가 뒤틀리지 않게 제대로 맞춘 상태에서 사용하셔야 돼요."
역시 내 초재생 쪽이 훨씬 뛰어났다.
"그 밖의 부수적인 효과들로는······."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며 잠깐 딴생각에 잠겼다.
스칼릿은 뛰어난 연금술사다.
지금 실력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게임 스토리에서 그녀는 자신의 비전으로 엘릭서까지는 아니어도 그에 버금갈 정도의 영약을 만들어냈었으니까.
당장은 그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어쨌든 미래에는 그만큼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인재란 뜻이었다. 연을 이어둬서 나쁠 게 전혀 없는.
게임에서 스칼릿의 첫 등장은 무너져가는 알키마스 공방과 함께였다.
공방의 포션 제작 능력과 스칼릿의 비전을 탐한 밸리아 상단이 여러 더러운 술수를 부렸기 때문이다.
'엔록의 북부 상로는 전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고 했던가.'
집사장인 플로토에게 물어서 보다 자세한 정황도 전부 전해들었다.
아무리 알키마스가 수도의 유서 깊은 공방이라 해도, 자본이나 인맥 등 여러 면에서 밸리아 상단엔 크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는 미래대로라면 이 뒤로 알키마스는 상단에 반쯤 흡수되어 완전히 발목을 묶이게 된다.
그리고 본래라면 스토리 진행에 따라 플레이어의 활약으로 무사히 정체성을 되찾게 되지만······.
'지금은 그냥 내가 해결하면 그만이지.'
그것은 현재의 내 권력으로는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었다.
상세 사용법과 주의사항까지 듣고 나서야 포션에 대한 설명은 끝났다.
대화를 매듭지으며 스칼릿에게 물었다.
"제작에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적어도 한 달은 소요됩니다. 그런데······."
스칼릿이 망설이는가 싶더니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미 완성된 스칼릿이 한 병 있어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품의 포션은 미리 만들어두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녀가 담담히 사정을 설명했다.
"바로 얼마 전에 다트마드 시의 시장에게 주문 제작을 받았다가, 직전에 거래가 무산됐거든요."
"어째서?"
"비리가 걸려서 직위 박탈에 재산까지 군주성에 싹 몰수당했다더군요. 하필 거래 중에 터져서 받았던 선금도 자금 조사 과정에서 회수당하고, 재고만 생겨 곤란하던 참이었죠."
저런.
"그래서 당장이라도 완성된 포션을 드릴 수는 있지만, 미리 만들어둔 걸 원하지 않으시면 새로 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포션의 효능이 떨어지나?"
"몇 년이라도 지난 게 아닌 이상에야 효능의 저하는 조금도 없다고 장담드릴 수 있어요. 저와 제 공방의 명예를 걸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걸로 받겠다."
내가 너무 순순히 수락하자 오히려 스칼릿이 놀란 기색이었다.
"저야 감사하지만 정말로 괜찮으시겠어요?"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이야기까지 꺼내면서 내 의사를 묻지 않았나. 신뢰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정말 어떻게든 재고를 처리할 생각이었으면 굳이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 달 뒤에 새로 제작한 완성품이라 속이고 건네줬으면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거래는 자리에서 바로 이루어졌다.
잠시 뒤 스칼릿이 포션을 가져왔다. 포션은 병째로 고급스런 목함에 밀봉되어 있었다.
나는 백금화 3닢을 지불하고 포션을 챙긴 뒤,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공방을 나섰다.
"그런데 물건을 받으면 어디서 오신 분인지 알려주겠다 말씀하셨는데."
아, 그랬었지.
나는 스칼릿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조만간 또 만날 테니 미뤄두지."
내 말에 스칼릿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를 떠나 대로를 걸으며 포션을 다시 상자에서 꺼내 살펴봤다.
유리병 속에서 찰랑거리는 붉은빛의 액체.
어차피 이제 나는 포션이 필요없는 몸이기에 쓸 일은 없는 물건이었다.
그럼에도 어마무시한 거금을 지불해가며 이걸 구매한 건 그저 호기심이었다. 어차피 돈 따위야 썩어넘치도록 있었으니까.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나중에 아셸이 쓰게 될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비상약으로 사둔 셈 치면 됐다.
'효과를 한번 직접 보고 싶긴 한데······.'
그렇게 생각하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다급한 비명이 들려왔다.
"도와주세요! 누가 제발 좀!"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쳐다보니 꼬질꼬질한 두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힘겹게 부축하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는데, 칼에라도 찔렸는지 배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런 둘을 보며 무시하거나 혀를 찰 뿐이었다.
"저건 또 뭔 난리야? 시끄럽게."
"아침부터 신나게 치고받았나 보네, 뒷골목 기생충 새끼들이."
······아, 그런 건가?
사람들이 무심하게 내뱉는 말을 들으며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부축하는 쪽도 성한 몸은 아니었기에 힘이 부쳤는지 곧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면서도 남은 힘으로 목소리를 쥐어짜내 도움을 요청했다.
"제 동생이에요! 포션이 있는 분이 있다면 제발 베풀어주세요! 도와주시면 평생 은혜를 잊지 않을 테니, 제발······!"
누군가 비웃듯이 말했다.
"저 애새끼가 미쳤나? 다 뒈져가는 거지 새끼한테 귀한 포션을 쓰는 병신이 어딨다고."
간절한 외침에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아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드물게도 무표정이 깨져있었다. 안타깝다는 듯이 소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셸도 동생이 있었지.'
세인테아의 침공, 오성 중 일인인 창성에 의해 바로 눈앞에서 죽어나간 동생이 말이다. 그런 설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그녀에게 있어선 더욱 안타깝게 비치는 광경일 것이었다.
아셸이 내 손에 들린 포션을 힐끔 바라봤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 움찔했다.
그녀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우물거리는가 싶더니,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만 깨물었다.
'더럽게 답답하네.'
나는 작게 혀를 차고서 소년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셸과는 상관없이 어차피 도와줄 생각이었다. 이게 아무리 귀한 포션인들 사람 목숨보다 귀하겠나?
가까이 다가가자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질러대던 녀석이 이쪽을 쳐다봤다.
"이리 내려놔라. 치료해줄 테니."
나는 마개를 열고 다친 부위에 포션을 천천히 부었다.
형인 소년이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어느새 주위도 조용해져있었다.
곧 살이 순식간에 아무는가 싶더니 출혈이 멈추고, 깊어 보였던 자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병에 든 양의 10분의 1도 쓰지 않은 것 같은데, 스칼릿이 설명했던 대로 과연 대단한 효과였다.
"으, 으음······."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동생이 눈을 깜박이며 떴다.
다급히 동생의 상태를 살피던 녀석이 그제야 울먹이며 외쳤다.
"가, 감사합니다! 나으리! 정말로 감사합니다······!"
감사를 부르짖는 소년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아셸과 함께 다시 가던 길을 가며 말했다.
"아셸."
"예."
"내가 이깟 포션을 아까워하기라도 할 것 같았더냐. 아니면 저들의 목숨을 구할 가치도 없다고 여길 것 같았더냐."
"······."
"앞으로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라. 네 생각과 의사를 말하라는 거다. 내가 바라는 건 명령에만 따르는 인형이 아니니."
아셸이 이제껏 본 적 없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예, 그러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저들을 도와주셔서."
어색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스스로도 그걸 아는지 아셸은 자기가 말하고서 작게 헛기침을 했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아주 조금은 멀었던 거리감이 좁혀진 기분이었다.
***
"대체 누구였을까요, 누님?"
사내, 테인의 말에 스칼릿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나도 모르지."
"솔직히 좀 우려스럽습니다. 그런 엄청난 거금을 앉은 자리에서 바로 지불한 사람인데..."
"뭐, 말하는 걸 보면 머지 않아 다시 찾아올 모양이니 그때 알게 되겠지."
물론 스칼릿도 그의 정체가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다.
백금화 3닢을 계약서조차 쓰지 않고 푼돈처럼 취급하던 태도.
어지간한 대부호나 고위 귀족도 그러기는 힘들 것이다.
사업 이야기를 꺼내기 전 밑밥으로 금적인 허세를 부리는 이들이 간혹 있긴 했으나, 그렇다고 무려 백금화 단위로 허세를 부리던 미친놈은 없었다. 그쯤 되면 애초에 허세라고 할 수도 없었다.
'흑발에, 금안의 인간 남성······.'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자일까?
어쩌면 칼데릭이 아닌 다른 진영의 인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인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도시에 도착한 7군주도 흑발의 인간 남자라는 소문이 있던데······."
순간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서로를 쳐다봤다.
이내 스칼릿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렴."
"하하, 역시 그렇죠?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해본 말이었습니다."
군주가 직접 공방을 방문하다니.
차라리 어디 중립국의 왕족이라는 게 훨씬 현실성 있을 것이었다.
생각의 흐름이 자연스레 7군주에게로 이어졌다.
스칼릿의 표정에 조금 그늘이 졌다.
새로운 7군주가 어떤 인물일지는 둘째치고, 밸리아 상단 쪽의 문제가 더 컸기 때문이다.
지금껏 상단 측에서 큰 수작을 부리지 못했던 이유는 군주 대행의 철저한 섭정 덕이라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새 7군주의 즉위로 끝이었다.
상단 측에서 서서히 다시 공방에 이빨을 드러낼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군주성의 중재는 기대할 수 없겠지.'
군주가 일개 공방과 상단의 다툼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질 가능성.
그럴 일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군주가 무관심하다면야, 성의 고위 관리들이 편들어줄 쪽은 당연히 그들의 배를 더욱 크게 불려줄 수 있는 밸리아 상단이었다.
스칼릿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몇 년 전까지 상단에 시달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공방의 주인이자 아티마 가문의 가주로서의 책임은 무겁고 막중했다.
"아무것도 신경 쓸 일 없이 연금술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푸념하듯 내뱉는 말에 테인도 착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 역시 가문의 일원이기에 돌아가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누님. 상단 쪽에서도 당장은 눈치 보기 바쁠 테니 바로 뭔 수작을 부리지는 못하지 않겠······."
그때였다.
똑똑.
"들어오세요."
한 가신이 어두운 표정으로 방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예요?"
"밸리아 상단주가 바크까지 대동하고 공방에 직접 방문했습니다."
"······!"
"서로의 의견 조율을 위해 지금 당장 정식으로 대담을 나누고 싶다고 합니다."
스칼릿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기별도 없이 찾아와놓고 정식으로 대담은 무슨..."
"어찌할까요, 가주님?"
"원로님들 전부 불러모으세요. 또 무슨 헛소리를 할지 들어는 봐야겠죠."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었기에 무시할 수도 없었다.
말은 담담하게 했지만 스칼릿의 안면에는 더욱 깊은 수심이 드리운 채였다.
상단 쪽에서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빨리 행동에 나서고 있었다.
알키마스 공방 (3)
군주성으로 돌아와서 바쁘게 앞으로의 계획을 검토하던 중.
나는 집사장 플로토에게서 보고를 들었다.
"벌써 정리가 끝났나?"
바로 오늘 아침에 시킨 일인데 빨리도 끝났군.
나는 그가 넘긴 종이 몇 장을 훑어봤다.
밸리아 상단에서 지금껏 저질러온 구린 짓들, 그러니까 위법행위의 대략적인 목록이었다.
크게는 상단 차원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자잘하게는 상단주나 가신들 개인의 행실까지.
그래도 선은 또 나름 아슬아슬하게 잘 탔는지 상단의 존속이 위험할 정도의 큰 건덕지는 없는 듯했으나, 이 정도면 충분했다.
사실 애초에 조사할 필요 자체가 없었다.
칼데릭에서는 군주가 곧 법이다.
밸리아가 법을 어겼든 말든 그저 내가 원하면 당장 상단을 공중분해시키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참고로 플로토가 군주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내게 할 때도, 웃기게도 군주가 지니는 권한이 아니라 몇 가지 제약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이다. 대군주가 제정한 대헌령, 또 군주령 간의 비간섭 철칙과, 타국으로의 독자적인 군사권 발휘 불가 등의.
군주령의 기본 구조를 파괴할 정도의 독재만 아니라면 정말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으니까.
어쨌든 그럼에도 굳이 이런 조사를 행한 이유는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밸리아가 빌런에 가까운 인물이라는 건 게임을 플레이했으니 알고 있지만, 나만 아는 일일 뿐이다.
아무 명분도 없이 내 꼴리는 대로 상단 하나를 짓밟아버리기는 좀 그렇지 않은가.
"집사장."
"예, 7군주님."
"상단주 밸리아와 알키마스의 공방주인 스칼릿을 성으로 데려와라. 공방주 쪽은 예의를 지켜서 정중히."
"즉시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플로토는 조금의 놀라움이나 의문스런 기색도 표하지 않았다. 그저 대답과 함께 신속히 떠나갔다.
일련의 명령들로 내 의도가 어떤지는 그도 당연히 파악했을 것이었다.
나는 다시 지도로 눈을 돌렸다. 하던 일을 마저 하며 여유롭게 두 사람을 기다리기로 했다.
조만간 또 보자고 했었는데, 바로 다시 보게 되겠네.
***
알키마스 공방의 대객실.
싸늘한 분위기 속에 상단주 밸리아가 차를 음미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역시 포션의 장인들이 모인 곳이라 그런지 차 맛도 훌륭하오. 비법을 배우고 싶을 정도군."
마주 앉은 자리의 스칼릿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넉살은 적당히 그쯤 해줬으면 좋겠는데요, 상단주."
"허, 넉살이라니. 나야말로 진심 어린 칭찬을 그렇게 곡해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죠. 바쁘신 상단주의 귀한 시간을 뺏기도 죄송스러우니."
밸리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겠소? 늘 해왔던 제안을 반복할 뿐이고, 공방주는 언제나 그랬듯 그것을 거절하겠지."
스칼릿이 덤덤히 대꾸했다.
"상단의 자본력으로 알키마스 비전 포션을 대량생산하겠다는, 공방의 기술만 쏙 뽑아먹겠다는 뻔한 수작 말이죠."
"누누이 말하지만 공방주는 상단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너무 가득 차있는 듯하오."
"그 선입견을 만들어준 게 대체 누구였을까요. 재료 유통을 막고, 공방의 거래처들을 하나둘 회유하고, 바로 몇 년 전까지 온갖 치졸한 짓거리들을 동원해 공방을 압박한 게?"
밸리아의 옆에 앉은 안대의 사내, 바크가 킥킥 웃었다.
"공방주, 말 조심하시오. 우리도 충분히 예의를 지키고 있지 않소. 그런 누명을 증거도 없이 뒤집어씌우면 억울하지."
"······하."
"원로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공방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우리 가주님의 고집을 충성스런 가신들이 꺾어줘야 하지 않겠소?"
스칼릿의 근처에 서있던 한 늙은 원로가 코웃음을 쳤다.
"공방의 미래를 위하기에 더욱이 받아들이면 아니 될 제안이지."
"하하,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군. 상단은 포션 제작에 필요한 모든 자원과 자금을 공방에 전격적으로 지원한다. 이 제안의 대체 어디가 어떻게 나쁘다는 거요? 수익의 정산은 받지도 않고, 공방의 운영에도 일체 간섭하지 않겠다는데?"
"그 대가가 공방과 가주님의 비전이지 않소. 인근의 플리케 시에 운영 중인 공방도 있겠다, 몇 년만 지나면 그쪽에서 우리 기술은 거의 흡수하고 상단의 비호 아래 공방의 거래처를 하나씩 좀먹겠지. 우리는 결국 천천히 몰락하거나, 아니면 반강제로 공방의 운영권을 상단에 넘기고 포션을 찍어내는 기계가 되겠군. 아니면 혹시 이보다 더 치밀하고 악랄한 수라도 있소이까?"
원로의 신랄한 말에 밸리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참으로 한마음으로 충성스런 가신들이라 부럽소, 공방주."
스칼릿은 인상을 구겼다.
이미 그가 주요 가신들의 회유를 시도한 전적이 여러 번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넘어간 이는 한 명도 없었지만.
"가문의 안위에 일평생을 바쳐온 자랑스런 분들이죠. 아무래도 늘 그랬듯, 의견이 조율될 일은 없을 것 같네요."
"그렇군. 늘 그랬듯."
"다음으로는 협박이 나올 차례인가요? 이제야 본론이라면 본론이군요."
"공방주."
밸리아가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지었다.
"애써 담담한 척 할 것 없소. 잘 알고 있지 않소? 상황이 바뀌었다는 걸."
"······."
"새로운 7군주께서 바로 어제 도시에 도착하셨고, 군주 대행은 더 이상 없소이다. 위대하신 군주께서 이런 사소한 다툼에 일말의 관심이라도 가지실 것 같소? 아니, 만에 하나라도 가지신다 한들 과연 누구의 편을 들어주실까? 혹시 가문에 가보로 숨겨둔 엘릭서라도 있는 것이오? 그걸 바치면 공방의 편을 들어주실 수도 있겠군."
바크가 끼어들어서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공방주의 미색이 뛰어나니 다른 쪽을 기대해봐도 되겠소. 군주께서 인간 남성이시라는 소문도 있으니."
"······말, 가려서 하시오."
지금껏 스칼릿의 뒤에 서서 입을 다물고 있던 테인이 씹어뱉듯 말했다.
대놓고 가주를 모욕하는 발언에 다른 원로들의 표정도 험악하게 변했다.
그러나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한 술 더 떠서 말하는 바크였다.
"아니면 혹시나 하는 이야기인데, 형님의 아들과 혼약이라도 맺어보는 건 어떻소? 공방주도 혼기가 가득 차다 못해 이미 지난 나이 아니오. 이런 칙칙한 곳에서 연금술에만 묻혀 살 게 아니라 여인의 즐거움도 알아야지. 서로 좋은 짝이라 생각되는데."
"이······!"
막 폭발하려는 테인을 스칼릿이 손을 들고 저지했다.
"설마 그깟 저열한 도발이나 하자고 온 건가요. 그나마의 점잖은 행세도 갖다 버리셨군요."
밸리아가 조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이 아마 마지막 경고가 될 것이오. 공방의 미래를 위해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길 기대하겠소, 스칼릿 공방주."
"······."
"그럼 이만 가보겠소이다. 배웅은 됐소."
그렇게 걸음을 옮겨 방 밖으로 나가는 두 사람을 원로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다짜고짜 찾아와 할 말만 하고 갔지만 상단주의 엄포에 틀린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앞으로의 상황은 공방에 너무도 불리하게 돌아갔다. 당장 내일부터라도 상단이 어떤 더러운 술수를 부릴지 알 수 없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원로들 모두가 상단이 공방에 어디까지 저열하고 치졸한 짓거리를 했는지 치가 떨리도록 겪어왔으니까.
"후우······."
스칼릿이 머리가 쑤신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저녁에 다시 모여서 회의를 여는 게 어떻겠소이까, 가주."
"예, 그래야겠네요. 그럼 일단은······."
스칼릿과 원로들이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테인은 그 대화를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슬며시 방 바깥으로 나섰다.
***
"상단주."
공방의 중앙홀을 지나 출입구로 향하고 있던 밸리아와 바크는 뒤를 돌아봤다.
그들을 불러세운 사람은 다름아닌 테인이었다.
"무슨 용건이라도 남았는가?"
테인이 두 사람을 번갈아보다가, 바크를 빤히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바크, 당신에게 결투를 신청하겠다."
그 뜬금없는 말에 바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헛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지금 결투라고 한 거냐? 나랑?"
밸리아가 나서서 말했다.
"밑도 끝도 없이 뭘 하자는 건지 모르겠군. 테인 아티마, 이건 공방주의 뜻인가?"
"아니, 내 단독적인 행동이오."
"갑자기 결투를 신청하는 이유는?"
"그가 누님을 모욕했으니까. 설마 외눈 참살자 바크가 나 같은 젊은 검사가 두려워 거절하진 않겠지."
바크가 하룻강아지를 바라보듯 같잖기 그지없다는 눈으로, 한편으론 재밌다는 듯 테인을 바라봤다.
서로 간 사소한 마찰이 있을 때 결투를 통해 해결하는 건 이 세계에서는 흔한 방식이다.
하지만 그것도 얼추 비슷한 상대끼리지, 바크는 상단 제일의 전력이자 외눈 참살자라는 이명으로 그 명성이 자자한 전사였다.
'여기서 바크를 꺾어 무력을 과시하면 상단도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테인은 충분히 할 만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행동이었다.
그 역시 나이에 비해 뛰어난 무인이었고, 최근에 큰 진전도 있었기에 나름의 자신이 있었으니까. 한마디로 젊은 치기였다.
바크가 밸리아를 슬쩍 쳐다봤다.
밸리아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뭐, 좋다. 원한다면 잠깐 어울려주마."
바크가 히죽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중앙홀은 넓어서 두 사람이 검을 맞대기엔 차고 넘칠 정도로 넓었다.
"테인 아티마, 근래 수도에서도 명성이 제법 있다지? 저번 다트마드 시의 검술 대회에서도 무려 본선에 올랐다던가. 젊고 재능 넘치는 무인이 도전은 언제나 환영할 일이지."
테인이 먼저 검을 뽑아들고 바크도 느리게 검을 뽑아들었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검을 든 반대손을 까닥거렸다.
"핸디캡이라도 줄까? 난 오른손잡이지만 왼손으로만 검을 휘두르마.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멋대로 하시오!"
테인은 그가 깜짝 놀라 바로 양손을 사용하게 할 요량으로 바로 전력으로 나섰다. 검날엔 푸른 검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카앙!
기세 좋게 휘둘러진 검이 맥없이 막혔다.
어느새 한 손은 뒷짐을 진 바크가 검격을 막은 것이었다. 그의 검날에서도 푸른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너무도 쉽게 막혀버린 일격.
조금도 밀리지 않고 미동도 없는 검에 테인은 조금 당황했으나, 이내 다시 공격을 이어갔다.
카앙! 캉! 카카캉!
허공에 교차하는 푸른 선. 연신 울려퍼지는 굉음.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는 쫓기도 힘들 정도의 공방이 번쩍이며 오고 간다.
테인의 검은 빠르고 정교했다. 그는 나이에 비하면 분명히 높은 수준의 검사였다.
그러나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들은 바크의 가볍게 휘젓는 검에 모조리 막히고 파훼되어버렸다.
"큭······!"
시간이 흐를수록 검을 휘두르는 테인의 얼굴에 어두움이 드리웠다.
설마 이 정도로 격차가 컸을 줄은 상상도 못한 것이었다.
째앵!!
그리고 어느 순간, 비산하는 쇳조각.
갑작스레 가속한 바크의 손이 테인의 검을 산산히 부숴버린 것이었다.
"컥······!"
그대로 충격을 받은 테인이 고통에 찬 신음을 뱉어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바크가 씩 웃었다.
그때 사람들이 몰려왔다. 아래층의 소란에 스칼릿과 원로들이 바로 나온 것이었다.
"······테인!"
스칼릿이 다급한 얼굴로 소리치며 달려왔다. 그리곤 밸리아를 죽일 듯 노려봤다.
"이게 지금 무슨······!"
"아아, 오해하지 마시오. 먼저 결투를 신청한 쪽은 순전히 공방주의 동생이니까."
테인이 스칼릿의 시선을 피하며 참혹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상황을 파악한 그녀는 침음을 흘렸다.
"······동생의 무례는 대신 사과드리겠어요. 승패는 이미 난 듯하니 결투를 그만 중단해주세요."
그에 바크가 사악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멋대로 먼저 덤볐으면 적어도 끝내는 건 내가 해야 이치에 맞지 않겠소?"
푸욱!
그가 바닥에 쓰러져있는 테인의 팔에 칼날을 꽂아넣었다.
"크아악······!"
그 광경에 스칼릿과 원로들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공방주의 동생이 넘치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듯하니 이번 기회에 배움의 기회를 줘야겠지."
"자, 잠깐······ 그만!"
"쯧쯧, 죽이겠다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놀라시나. 공방에 질 좋은 포션이 많으니 치료야 별 문제없을 텐데."
바크가 그렇게 말하며 팔에 박힌 칼날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테인이 견디지 못하고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그만! 이제 그만하라고요!"
스칼릿이 완전히 평정을 잃은 채로 애원하듯 소리쳤다.
바크가 즐겁다는 듯 킬킬 웃었다.
"하하! 필사적이시구만. 어디 무릎이라도 꿇고 좀 더 간절히 애원해보시오, 공방주. 그럼 이쯤에서 관둘······."
그때였다.
덜컹!
갑작스레 홀의 입구가 열리며 일련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밸리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방금까지 여유롭게 웃으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그가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철혈 기사단?"
7군주성 직속의 철혈 기사단.
웬만큼 중대한 일이 아니고서야 움직이지 않는 군주성의 최정예 전력이 갑자기 왜 이곳에 나타난 것인지, 밸리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스칼릿과 원로들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고, 바크도 천천히 테인의 팔에 박힌 검을 뽑았다.
기사들의 선두에 있던 금발의 사내가 주위를 슥 둘러보고는 저벅저벅 홀의 중앙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밸리아 상단의 주인인 밸리아."
"······."
"지금 당장 나를 따라오도록. 거부 권한은 없다. 질문 또한 받지 않겠다."
그리고 이번엔 스칼릿에게로 고개를 돌려, 훨씬 정중한 투로 말한다.
"알키마스 공방의 주인인 스칼릿 님 되십니까?"
"...예, 그런데."
"귀하도 동행해주시길 바랍니다. 위대하신 분께서 찾으십니다."
"······!"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차올랐다.
군주성의 기사가 위대하신 분이라고 표현할 인물이라면, 단 한 명 말고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가운데 바크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물었다.
"설마 군주성으로 이동한다는 것이오? 갑자기 형님을 왜 데려가는 건지 적어도 이유는······."
쩌어엉!
바크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경고도 없이 순식간에 검을 뽑아든 기사가 그에게 검격을 날렸기 때문이다.
바크도 다급히 검을 뽑고 방어했으나 그의 칼날이 산산히 부서졌다.
"커헉······!"
사선으로 갈라진 가슴팍에서 선혈을 쏟아내며 바크가 무릎을 꿇었다.
기사가 그런 그를 싸늘히 내려다보며 검을 거두었다.
"질문은 받지 않겠다 했을 텐데. 네가 감히 군주님의 천명에 의문을 품는 것이냐?"
알키마스 공방 (4)
바크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피가 쏟아져나오는 가슴팍을 붙잡았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밸리아가 겨우 침착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무례를 사죄드릴 테니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아킨 경."
숙이지 않았다간 누구 하나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아무리 북부 전체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대상인 밸리아라도 군주성의 권력 앞에선 아무 의미도 없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바크를 단번에 베어버린 기사는 철혈 기사단의 부단장인 아킨 크라델.
이만한 거물이 직접 모습을 비췄을 때부터 보통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은 직감했으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군주의 명령이라니, 어째서······.'
어째서 새로이 즉위한 7군주가 자신과 스칼릿 공방주를 찾는단 말인가? 심지어 바로 어제 도시에 도착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이해할 수 없는 건 부단장의 태도였다.
누가 봐도 그는 이쪽엔 고압적인 반면 스칼릿에게는 예의를 차리고 있었으니까.
밸리아는 혼란스러운 한편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불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검을 거둔 부단장이 쓰러진 바크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스칼릿의 옆으로 다가가서 섰다.
"그럼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마치 호위를 하는 모양새에 스칼릿도 당황해서 테인과 원로들을 돌아봤다.
"저, 가주를 어째서 데려가시는······."
원로 하나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가 화들짝 놀라 도로 다물었다.
바로 방금 바크가 항의 한마디 했다가 저런 꼴을 당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부단장은 이번엔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을 해주었다.
"염려치 마시오. 공방주를 예를 다해 모셔오라고 군주님께서 직접 언질을 내리셨다 하니, 필시 나쁜 일은 아닐 것이오."
"······."
그에 원로들은 잠자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역시 7군주가 어째서 가주를 찾는다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기사들의 앞을 가로막을 수도 없었으니까.
"누, 누님."
테인이 팔을 잡고 비척이며 일어났다.
스칼릿이 그걸 보고 부단장에게 말을 하려는데, 다른 원로가 나서서 말했다.
"가주, 걱정 마시고 일단 다녀오시오. 테인 공자의 팔은 바로 치료할 테니······."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칼릿의 양옆에 기사들이 붙고, 그리고 밸리아에게도 기사들이 다가갔다.
밸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바크를 돌아봤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를 향해 말했다.
"상처를 치료하고 있거라."
그렇게 두 사람은 기사들에게 이끌려 곧장 군주성으로 이동했다.
***
군주성의 정문을 지나 내성으로 들어간 스칼릿은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성 곳곳에서 경계를 서는 기사들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베일 듯한 삼엄함이 느껴졌고, 또한 생소했다.
외부인에 불과한 그녀가 이렇게 군주성 내부까지 들어가볼 일이 지금껏 있었을 리가 없었으니까.
중앙의 거대한 건물에 다다르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년의 집사가 있었다.
그가 스칼릿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집사장인 플로토라고 합니다. 군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바로 모시겠습니다."
그리곤 시선을 돌려 밸리아도 한 번 힐끗 바라보고는, 그대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넓고 긴 복도와 계단을 지나쳐 도착한 곳은 건물의 가장 높은 층.
꼭대기 층의 중앙홀에 도착하자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보고 있는 한 남자와, 그 뒤에 서있는 여기사의 모습이 비추었다.
"······?"
그 광경을 본 스칼릿의 얼굴에 순간 의문과 당혹스러움이 깃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낯이 익었으니까.
아침에 공방을 방문해 스칼릿 포션을 구매했던, 백금화 3닢을 푼돈 쓰듯 지불한 정체 모를 손님.
한데 그들이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군주님."
플로토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에 스칼릿도 멍해진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불현듯 테인과 나눴던 이야기가 머릿속에 스쳤다. 새로이 즉위한 7군주에 대해 농처럼 나눴던 대화.
"분부하신 대로 스칼릿 공방주와 밸리아 상단주를 데려왔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놓고, 천천히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가 스칼릿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금방 다시 만났군, 공방주."
그제야 모든 상황을 파악한 스칼릿은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7군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가 이번엔 그녀의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밸리아는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다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7군주님을 뵙게 되어 평생의 영광······."
"내가 널 부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말을 끊고 울려퍼진 음성.
그 무심하고 차가운 목소리에 밸리아는 심장이 꽁꽁 얼어붙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 역시 이제 어느 정도 눈치챘다. 7군주가 어째서 자신과 스칼릿을 불러온 것인지.
이쪽과 달리 그녀를 정중하게 대하던 기사들, 그리고 이미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인 듯한 지금의 반응······.
밸리아는 평생에 다시없을 위기감과 두려움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무엇이 최선의 대답인지.
곧 밸리아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군주님."
순간 장내가 조용해졌다.
밸리아는 바닥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돌아올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뒤 7군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엇을?"
"알키마스 공방의 비전들과 노동력을 탐내어 공방에 갖가지 더러운 공작들을 부렸습니다. 재료의 유통을 막거나, 공방의 거래처들을 하나둘 회유하거나, 오늘과 같이 공방주와 원로들을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밸리아는 물 흐르듯 자신의 죄를 술술 고백했다.
눈치와 금전적인 감각만으로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시작해 지금의 대상단을 일궈낸 그였다.
이곳에서 살아나갈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최선이었다. 어차피 군주는 모든 걸 알고 있을 테니까.
옆에 선 스칼릿이 조금 어이없다는 듯 그런 그를 내려다봤다.
7군주가 이번엔 그녀에게 물었다.
"그렇다는군, 공방주."
"아, 예······."
"상단에 무엇을 원하나?"
스칼릿과 밸리아의 눈이 마주쳤다.
밸리아가 더없이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공방주, 용서해주십시오.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정식으로 사죄하고 그에 대해 바라시는 대로 전부 철저히 배상하겠습니다. 그리고 더는 탐욕에 눈이 멀어 공방에 더러운 공작을 부리지 않겠다고 맹약하겠습니다."
스칼릿은 복잡한 표정으로 말까지 높여서 애원하는 그를 바라봤다.
그리곤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겠어요."
그녀 역시 지금 상황이 갑작스럽고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달리 대답할 말이 뭐가 있을까.
상단주가 치가 떨리도록 경멸스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목을 내놓으라고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이야기가 싱겁게 끝나버리고, 7군주가 밸리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다시 널 부를 일이 없어야 할 거다."
"······."
"그만 가봐라."
몸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난 밸리아가 고개를 숙이고는, 진이 다 빠진 얼굴로 플로토를 따라서 홀 밖으로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스칼릿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7군주가 그런 그녀를 보며 말했다.
"어째서 내가 공방을 돕는 것인지 궁금하겠지."
"······예, 그렇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골을 싸맸던 상단 문제가 군주의 한마디에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솔직히 조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더없이 고마운 일이었지만, 스칼릿은 그가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도움을 베푸는 것인지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연금술사로서의 네 자질이 눈에 띄었으니까."
"······?"
"비전으로 제작한 포션이 상당히 훌륭하더군. 나는 네가 연구에 더욱 매진해 그 자질을 지금보다 더욱 꽃피우길 바란다. 그렇기에 주위에 거슬리는 문제를 해결해준 거다."
그에 스칼릿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군주님의 말씀은······ 제게 별 바라시는 것도 없이 그저 능력을 높이 샀기에 호의를 베풀어주셨다는 건가요?"
"그래."
"······."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빚으로 생각해라. 언젠가 내게 있어 네 능력이 필요할 때가 올 수도 있겠지. 그때를 위한 도움이라고 여겨도 된다."
스칼릿에게 있어선 그 말이 훨씬 이상하게 들렸다.
무려 군주가 자신과 같은 일개 연금술사의 도움이 필요할 일이 생길 수가 있을까.
"더 궁금한 게 없다면 이만 가보도록."
축객령에 스칼릿은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정말로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뜻하신 대로 군주님께서 만약이라도 제 능력이 필요하실 때가 온다면······ 기꺼이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스칼릿은 인사를 마치고 다시 돌아온 플로토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생각했다. 새로운 7군주는 정말로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
두 사람을 돌려보낸 나는 마시고 있던 차를 마저 마셨다.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빠르네.'
다짜고짜 무릎부터 꿇고 보는 밸리아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바로 그렇게 저자세로 나와서 고해성사를 하니 기껏 상단에 대해 조사해놨던 것도 필요없어졌다. 대화도 몇 분 안 걸렸고.
어쨌든 이걸로 공방에 대한 문제는 끝났다.
내가 공방과 연관되었다는 걸 밸리아도 알았으니 이제 미쳤다고 더 야욕을 드러내진 못할 테고, 스칼릿과도 연을 쌓았다.
물론 내게 있어 당장 그녀의 능력이 필요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둘씩 게임에서 선역으로 등장했던 NPC들과 연을 맺어두면 언젠가 뜻하지 않은 때에 큰 도움으로 돌아올 수도 있겠지.
'그럼 이제 남은 건······.'
나는 책상에 내려놓은 지도를 다시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다음 군주회의까지 남은 시간이 그렇게 많지도 않다.
떠나는 건 빠를수록 좋으니 바로 다음 신비를 찾아서 군주성을 떠나야 되는데······.
'루트가 조금 고민된단 말이지.'
지금 내게 있어 최우선 목표는 칼데릭의 영역 내에 위치한 신비들부터 전부 모으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 이왕이면 가장 필요한 건 방어 계열의 능력이었다.
때문에 '부동 장막'을 가장 우선적으로 얻는 건 확정인데, 그 다음 경로를 아직 확실하게 정하지 못했다. 칼데릭 전체를 돌아다녀야 하는 일이니 신중할 필요가 있긴 했지만.
"군주님."
그렇게 다시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집사장인 플로토가 돌아와서 나를 불렀다.
공방이나 상단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남았나 싶었는데 튀어나온 건 뜬금없는 말이었다.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
"4군주님께서 지금 성에 방문하셨습니다. 잠시 군주님을 뵙고자 찾아오셨다고 하십니다."
나는 마시고 있던 차를 뿜을 뻔한 걸 간신히 참고 천천히 찻잔을 내려놨다.
······지금 누가 찾아왔다고?
망자왕 아스트라
4군주 망자왕, 아스트라.
사령술사이자 언데드 리치인 놈은 이명 그대로 죽은 자들의 왕이라는 호칭에 완벽히 부합하는 존재였다.
'근데 왜······.'
그놈이 갑자기 왜 날 찾아왔다는 건데?
"지금 군주성의 입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파묻었다. 그리고 짧은 고뇌에 잠겼다.
다음 회의까지는 다른 군주들과의 만남은 피하고 싶었는데, 왜 벌써부터 이런 이벤트가 발생하는 거냐······.
'이걸 그냥 무시할 수도 없고.'
다른 누구도 아니고 군주가 직접 본신을 이끌고 행차했다.
날 보자고 찾아왔다니까 당연히 같은 군주가 와야 격이 맞는 거긴 하지만, 그런 만큼 나도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여기야 내 본진이고 거절한다고 놈이 깽판을 부릴 순 없겠지만, 그렇게 개무시를 해버리면 확실히 비호감을 사겠지. 안 그래도 뇌후랑도 이미 사이가 좀 뒤틀렸는데.
놈은 폭왕과 정반대로 다른 군주들과도 모두 완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군주였기에 그건 웬만하면 피해야 할 일이었다.
사실 군주와의 만남이 뭐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건 아니다.
이제 나도 같은 군주인데 상대가 뭐 함부로 공격하기야 하겠나.
다만, 내가 너무 약하니까 뭐가 됐든 강자들과의 접촉이 아직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뿐이지.
'이유도 없이 찾아왔을 리는 없으니······.'
그래도 망자왕이면 군주들 중에 그나마 정상적인 편에 속하는 군주이긴 하다.
결정을 내린 나는 플로토에게 말했다.
"여기로 안내해라."
내가 직접 나가서 맞이해야 되나 싶었지만 저쪽에서도 다짜고짜 찾아온 거니 굳이 그렇게 할 것까진 없다 싶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간 플로토가 누군가와 함께 돌아온 건 잠시 뒤였다.
금테가 둘러진 검은 로브. 그리고 후드 사이로 보이는······ 해골.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서 귀기 어린 푸른 안광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존재가 홀 안으로 들어서자 한적했던 분위기가 음산함으로 대신 가득 채워지는 듯했다.
나는 여전히 앉아있는 채로 홀 입구에서 걸음을 멈춘 그와 가만히 눈을 마주쳤다.
[Lv.95]
······이 해골이 바로 4군주 망자왕.
게임에서 봤던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는 모습이다.
망자왕은 한 손에 키만큼 오는 거대한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저것 역시 게임에서도 놈이 들고 있던 스태프였다.
"반갑네, 7군주."
목으로 내는 것이 아닌 듯한 이질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러고 보니 해골인데 성대도 없는 놈이 말은 어떻게 하는 걸까. 저것도 다 마법인가?
"기별도 없이 이리 갑작스레 찾아와서 미안하군. 잠깐 대화를 나누고자 온 것인데, 앉아도 되겠는가?"
나는 반대편 자리로 손짓을 했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다가온 망자왕이 의자에 앉았다. 자리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가까이 마주하고 앉으니 그를 두르고 있는 기운이 훨씬 선명하게 느껴졌다.
광랑과 마주했을 때 느꼈던 게 온몸을 짓누를 듯한 압력이었다면, 망자왕에게서 느껴지는 건 으스스함이었다. 마치 죽음이라는 게 그대로 형체를 갖추고 현신한 듯한······.
'제왕의 혼을 실수로 빠뜨렸던 게 진짜 신의 한 수였네.'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 번 이 절대적인 정신 방벽 스킬에 감사함을 느꼈다.
"용건은?"
나는 무심함을 가장한 채 그렇게 물었다. 초면이기에 달리 나눌 말도 없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빨리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망자왕이 회의에서 봤던 흑해 여제보단 덜 징그럽긴 했지만, 해골 역시 길게 마주보고 있기 부담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푸른 안광을 빛내며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망자왕이 곧 웃음소리가 섞인 듯한 목소리를 뱉었다.
"대군주가 새 군주를 회의에서 바로 임명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놀랐었네. 지난 회의에 참석을 못했던 게 참으로 아쉬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놈은 찾아온 용건이 아닌 계속 쓸데없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7군주 그대는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나는 그렇지가 않군."
"······."
"참모장과 만났던 일이나 회의에서 있었던 일이나, 여러 이야기를 들어서 개인적으로 그대에 대해 관심이 많아. 칼데릭의 군좌에 인간이 앉은 것도 거의 반백 년······."
"망자왕."
그의 말을 끊었다.
"나는 쓸데없는 선문답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에 망자왕은 잠시 아무 말도 없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바로 용건을 말하지. 7군주 그대가 죽인 권성의 시체, 그것을 원해서 온 것이네."
그 말에 나는 깜빡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맞다, 그거······.'
호송선을 탈출하기 전에 데이폰이 권성의 시체를 챙기지 않았었던가? 원할 만한 자가 있다고.
이미 죽은 시체를 원할 놈이라면 망자왕밖에 없을 거라곤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그랬던 모양이다.
'하긴, 권성 정도 되는 강자의 시체면 탐을 낼 만하긴 하겠네.'
죽은 자를 되살려내 지배하는 사령 마법.
망자왕은 그런 사령 마법에 대해선 견줄 자가 없는 대륙 최강의 사령술사였다.
'게임에서 적으로 처음 등장했을 땐 끔찍했지.'
칼데릭의 군주들 중 군주령의 병력을 제외하고 홀로 독자적인 대군단을 지니고 있는 존재가 둘 있는데, 그게 바로 망자왕과 흑해 여제였다.
본신의 힘도 힘이지만, 망자왕이 거느리는 시체의 군세는 그야말로 일인 군단이라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근데 그것 때문에 찾아왔다는 게 무슨 말이야?'
시체는 데이폰이 가지고 있는데 그걸 왜 나한테 받으러 와?
······이렇게 생각했지만 이어진 말에 그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권성은 그대가 죽였으니 시체의 소유권도 그대에게 있지. 내가 권성의 시체를 가져도 되겠는가?"
"······."
아, 그래. 소유권······.
그러고 보니 데이폰도 시체 가지고 소유권이니 뭐니 했었던가.
그러니까 망자왕은 지금 시체의 권한을 양도받고 싶어 날 직접 찾아왔다는 거였다.
'그딴 거 필요도 없는데.'
아무 말도 안 하고 멋대로 사용했어도 신경도 안 썼을 것이다.
그래도 망자왕의 입장에서는 혹시나 내가 나중에 태클을 걸 수도 있으니 구태여 허락을 구하러 찾아온 게 아닌가 싶었다.
근데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렇게 허락을 구하고 있으니······ 그냥 가지라고 하기는 괜히 아까워지는 게 사람의 심리였다.
내가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망자왕이 말을 이었다.
"원한다면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합당한 대가라.
머릿속에 여러가지가 스쳤다.
예를 들어 마법 아이템이라든가. 망자왕은 마법사니까 지금 나한테 가장 필요한 방어 계열의 아이템도 있지 않으려나?
'그런데 이건 말하기가 좀······.'
마치 내가 방어적인 능력이 부족해서 아이템이 필요하다고 대놓고 고백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리고 생각해보니 마법의 '마'자도 모르는 내가 아이템을 제대로 다룰 수 있긴 한 건지도 몰랐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떠보듯 말했다.
"난 네게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자 망자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빚으로 남겨두는 건 어떤가. 후에 그대가 내게 원하는 것이 있을 때, 권성의 시체의 가치만큼의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지."
당장 뭘 요구하기도 애매하고,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더 찔러보지 말고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을 듯했다.
구두적인 약속이고 시체의 가치만큼의 도움이라는 기준도 불명확했지만, 군주끼리의 약속인데 뭐 알아서 양심껏 지키겠지. 안 지키면 별 수 없고.
"용건은 그걸로 끝인가?"
"그렇네. 담화를 즐길 생각은 없는 듯하니 바로 가보도록 하지."
망자왕은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유유히 홀 밖으로 떠나갔다.
염러했던 것치고는 굉장히 싱겁게 끝난 대화에 나는 괜히 허탈함을 느끼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하아······."
그때 뒤편에 서있던 아셸이 작게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나는 슬쩍 그녀의 표정을 봤다. 조금 창백하게 질려있는 게 망자왕과 대화하는 동안 계속 저랬던 모양이다.
나야 제왕의 혼 때문에 괜찮았지만 망자왕이 내뿜는 사기가 그녀에게는 상당한 부담이었던 듯했다.
'어휴······.'
나는 앞으로도 계속 저런 괴물들의 틈바구니에 껴있어야 되는 건가?
짧고 싱거웠던 망자왕과의 대화는 괜히 미래에 대한 막막함만 더 안겨주었다.
별 수 있나, 내가 선택한 길인 것을.
죽어라 구르면서 하루빨리 히든 피스들이나 모아야지.
***
군주성의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흑색 갑주를 입은 언데드 기사가 밖으로 나온 망자왕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금방 나오셨습니다.'
사령술사와 그 종속은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심상의 대화와 공유가 가능하다.
어째서인지 드물게 즐거움을 띄고 있는 망자왕의 감정에 언데드 기사는 의문을 띠었다.
망자왕은 정신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새로운 7군주는······ 정말로 재미있는 자더군.'
언데드의 육신으로 불멸을 영위한 지도 수백 년.
그에게 있어 죽음이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었기에, 역설적으로 누구보다도 '죽음'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한데 이런 감정을 느껴본 것이 대체 얼마만이던가?
'······설마 죽음의 두려움을 느낄 줄이야.'
7군주에게서는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력도, 육체적인 강함도, 무엇 하나 느낄 수 없기에 정말 능력 하나 없는 평범한 인간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에겐 분명히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리치가 된 후로 이런 감정을 느끼게 했던 인물은 세인테아의 용사가 유일했고, 대군주에게서조차 아주 희미하게만 느꼈을 뿐이다.
권성의 시체를 얻고 새로운 7군주가 어떤 인물인지도 살펴볼 겸 직접 온 것이었는데, 이건 생각한 것 이상의 즐거운 유희가 되었다.
'후에 어떤 요구를 해올지 기대되는군.'
때문에 빚이라는 방식으로 연결 고리를 하나 만들어둔 것조차 기꺼웠다.
망자왕은 정말로 오랜 세월만에 느낀 죽음의 실감을 곱씹으며, 7군주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했다.
떠나기 전
그러고 보니 나는 살면서 책이라는 걸 많이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럴 시간에 라사에 로그인해서 업적 하나를 더 깨고 템 하나를 더 강화했지.
만약 그렇게 게임에만 미쳐서 살지 않았다면 내게 이런 엿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생각이 잠시 딴 곳으로 샜는데, 어쨌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이유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때문이었다.
"흐음."
나는 읽고 있던 책을 덮어버렸다.
책상 한쪽엔 낡은 고서 같은 것들이 한무더기로 쌓여있었는데, 전부 뱀파이어에 관련된 책이었다.
현재 군주성에서의 내 하루 일과는 지도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것의 반복이었다.
대군주성에서 내 머릿속에 있는 정보들을 전부 옮기기 위해 펜만 놀렸던 것과는 정반대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할 수 있었다.
책을 읽는 건 다름이 아니라 뱀파이어에 관련된 정보를 좀 살펴볼까 싶어 그러는 것이었는데······.
'이놈들도 희소 종족이라 썩 정보가 많지는 않네.'
아셸의 백월족처럼 약소, 희소 종족들은 대자연 깊숙한 곳 어딘가에 자기들끼리 박혀 사는 게 대부분이다.
게다가 뱀파이어라면 이 세계의 수많은 종족들 중 이미지가 거의 손에 꼽을 정도로 나쁜 종족.
때문에 오래 전부터 세상에서 거의 배척되다시피 한 놈들이라 더더욱 정보를 찾기가 힘들었다.
게임 내에서도 뱀파이어와 관련된 스토리는 얼마 되지도 않았었다.
'신비도 신비지만, 혈술을 사용할 수만 있으면 즉살과 시너지가 엄청날 텐데······.'
내가 뱀파이어에 대해 이렇게 집착하고 있는 이유는 놈들의 종족 특질인 '혈술' 때문이었다.
개체에 따라 고유 능력은 다 따로 있지만, 혈액을 염동력 부리듯 자유자재로 다루는 건 모든 뱀파이어가 사용할 수 있는 혈술의 공통 능력이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내 즉살의 효율을 최대로 이끌어내기엔 혈술을 얻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그 방법이 없지는 않다.
문제는 그걸 실행하기 위해선 뱀파이어들이 숨어있는 터전 중 하나인 '엘로드 숲'으로 직접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완전히 자살 행위지.'
이 세계에선 뱀파이어가 다 피를 빨아먹고 사는 흡혈귀는 아니다.
뱀파이어도 그들 사이에서 부족이 나뉘는데, 다른 종족의 피를 안 빨아먹고 지들끼리 잘 사는 부족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놈들 때문에 온건한 부족들까지 똑같이 박해받고 배척받으면서 사는 것뿐이지.
때문에 억울하게 부당한 대우를 받은 온건 부족들도 다른 종족들에 대한 적의가 상당히 심하다.
엘로드 숲도 온건 뱀파이어 부족이 모여서 사는 곳이었지만, 인간인 내가 찾아갔다간 바로 공격부터 받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쉽지가 않아, 쉽지가.'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가 않다.
다른 신비들을 얻는 순서는 솔직히 대략 다 정해놨었다.
그런데 갑자기 즉살의 새로운 활용법을 발견하고 혈술이 고려 대상에 들어가니, 중간에 엘로드 숲을 껴서 들러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이게 고민인 것이었다.
거기에 나하고 아셸 단둘이서만 갔다간 아무리 생각해도 묫자리가 될 것 같았으니까.
'그렇다고 군주령 병력을 동원하면 일이 너무 커지고.'
그건 그냥 전쟁을 하자는 것밖에 안됐다.
아무리 온건 부족이라도 일단 뱀파이어 자체가 꽤나 호전적인 종족이고, 다른 종족에 대한 적의도 많다.
내가 군사를 이끌고 엘로드 숲으로 가면 무슨 협박을 받든 그들은 끝까지 저항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혈술 하나 얻자고 한 부족을 없애버린 대학살자가 되는 거지.'
그리고 엘로드 숲은 다른 군주령에 위치해있으니 군사를 끌고 가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일 것이었다.
애초에 아셸 같은 호위를 구한 이유가 우르르 병력을 이끌고 다른 군주령들을 돌아다닐 수가 없으니 그런 건데.
나는 의자에 몸을 파묻고 늘어지는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혈술 없이 즉살을 더 원거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
초재생을 얻기 위해 올랐던 루터스 산맥에서도 벨르바고라를 만나 죽을 뻔했었다.
다른 신비들을 찾으면서 칼데릭 전역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그런 예기치 못한 위험은 얼마든지 또 맞닥뜨릴 수 있었다. 아셸도 감당할 수 없는.
그때에 대비해서 조금이라도 더 즉살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방법을 마련해놔서 나쁠 건 없으니까.
'원거리 공격.'
일단 그냥 상처를 내서 피를 뿌리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이건 고작해야 몇 미터 날아갈 뿐이니 원거리 공격이라 하기도 애매했다.
온갖 괴물들이 넘쳐나는 이 세계에서 적이 날 공격하려고 몇 미터 반경에 들어왔으면 뭘 해보기도 전에 내가 먼저 죽을 확률이 훨씬 높지 않을까.
다른 방법으로는 무언가에 피를 묻혀 날리는 방법도 있었다.
예를 들어 화살촉에 피를 묻혀서 화살을 쏜다든가.
생각해보면 이게 그나마 가장 최선인 것 같기는 했다.
근데 당연히 나는 활을 쏠 줄 몰랐다.
'모르면 배우면 되긴 하지.'
어차피 내가 신비를 찾으며 맞닥뜨릴 확률이 높은 위험은 벨르바고라 같은 거대한 몬스터들이었다.
그런 더럽게 큰 놈들이야 어설픈 활솜씨로도 얼마든지 맞힐 수 있을 터.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지만 대충 쏘는 법만이라도 배워둬서 나쁠 건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초재생의 신비 때문에 체력도 넘쳐나니 쉴 필요도 없이 얼마든지 연습할 수 있겠지.
'그럼 좀 배워둘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주성의 다른 기사들한테 활을 가르쳐달라고 하긴 좀 그렇고.
적임자는 한 명밖에 없었다.
***
"활······ 말씀이십니까?"
문 앞에서 호위를 서고 있던 아셸은 방에서 나와 뜬금없는 말을 내뱉은 7군주에게 되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쏠 줄 모르나?"
"······아뇨, 압니다."
"그럼 바로 연무장으로 가지."
그녀는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태연하게 말하는 7군주를 바라봤다.
이 종잡을 수 없는 군주는 루터스 산맥에서도 그러더니 또 이상한 기행을 하려 들고 있었다.
활이라니······ 갑자기 자신한테 활을 쏘는 법을 가르쳐달라는 건 대체 무슨 요구란 말인가?
그 생각이 얼굴에 고스란히 들어났는지 7군주가 말했다.
"갑자기 흥미가 생겼을 뿐이다."
그에 아셸도 뭐라 더 묻지 못하고 7군주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지하에 위치한 넓은 개인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활과 화살, 과녁의 준비는 집사장 플로토가 모두 마쳤다.
7군주와 아셸은 각자 활을 하나씩 든 채 과녁에서 거리를 두고서 나란히 섰다.
"먼저 쏴보도록."
7군주의 말에 아셸이 바로 시위에 화살을 걸고 과녁을 향해 쐈다.
피잉!
기세 좋게 날아간 화살이 정확이 과녁의 정중앙에 명중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나를 가르쳐라."
"······."
아셸은 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안 와서 물었다.
"아예 쏘는 법을 모르십니까?"
"그래."
"······그럼 일단 자세부터."
그녀는 일단 시위에 화살을 걸고 당겨보라고 말했다.
그에 7군주가 시위에 화살을 걸고 살짝만 당겼다. 엉성하기 그지없는 폼이었다.
"오른쪽 어깨를 너무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화살을 쥔 손은······."
아셸의 요구에 따라 그가 조금씩 자세를 바꿨다.
"······목표를 조준하는 건 제가 방금 말한 대로 해서, 이제 쏴보십시오."
7군주가 시위를 놓았다.
엉성하게 날아간 화살이 과녁을 맞히긴 커녕 근처에 닿지도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아셸이 그것을 보며 말했다.
"쏘는 순간에 자세가 흐트러지셨습니다."
"다시 해보지."
그렇게 7군주가 계속 화살을 쏘고, 아셸은 옆에서 지켜보며 무엇이 잘못됐는지 짚어주었다.
약 반 시간이 흘렀다.
7군주는 여전히 서른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과녁에 화살을 한 발도 맞히지 못했다.
"······."
아셸은 조금 굳은 표정으로 바닥과 벽에 수북히 박힌 화살들을 훑어보다가, 7군주에게로 도로 시선을 돌렸다.
피잉!
날아간 화살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과녁 옆쪽의 벽면에 명중했다.
"쥐는 걸 또 잘못하셨습니다."
벌써 열 번 가까이 지적한 부분을 7군주는 계속해서 되풀이하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센스가 아예 없는 사람처럼.
7군주가 활을 내리고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화났나?"
"······아닙니다."
"목소리가 좀 굳었는데. 화난 게 맞군."
"나지 않았습니다."
7군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한번 직접 자세를 교정해주는 게 어떠냐."
직접 몸에 손을 대서 자세를 잡아달라는 뜻이었다.
아셸은 잠시 머뭇거리다 가까이 걸음을 옮겼다.
군주의 몸에 손을 대는 게 이제 와서 대수일까. 루터스 산맥에서는 업기까지 했는데.
"어깨를 이대로 고정하시고······."
7군주의 몸 이곳저곳에 손을 대며 아셸은 새삼 느꼈다.
겉으로 보기에도 그렇지만, 정말이지 단련이라고는 조금도 되지 않은 물렁한 육체였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부러질 것처럼.
······머릿속에 산맥에서 괴물 뱀을 쓰러뜨리던 7군주의 모습이 문득 스쳤다.
그가 보여줬던 그 비상식적인 힘의 근원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전에 뜻하지 않게 보게 됐던 4군주 망자왕에게선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스산함을 느꼈었다.
하지만 7군주는 반대로 무엇 하나 느껴지지 않기에, 아셸은 오히려 그 어떤 잣대로도 감히 그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형편없는 육체조차 그에겐 별 의미도 없는 껍데기가 아닐까······.
피잉!
자세를 교정한 대로 화살을 쏜 7군주가 드디어 처음으로 과녁에 명중시켰다.
그가 조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좀 감이 오는군."
그 말대로 이어서 몇 발을 더 쏜 7군주는 모두 화살을 과녁에 명중시키고, 그만 연습을 마쳤다.
부동 장막 (1)
군주성에서 지낸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언제까지고 시간만 잡아먹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아쉽게나마 계획 수립을 마치고 그만 떠날 준비를 했다.
"아마 다음 군주 회의가 가까워질 즈음에나 돌아올 것이다."
내가 없어도 군주령이야 돌아가던 대로 알아서 잘 돌아갈 테니 신경 쓸 건 없었다.
군주들 중에는 아예 영지는 버려놓다시피하고 바깥만 돌아다니는 군주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광랑이라든가.
플로토가 언제나와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말씀하신 대로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셸을 제외한 수행원은 한 명만 붙여서 가기로 했다.
칼데릭의 지리에 빠삭하면서 이것저것 잡다한 일을 맡을 사람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른 군주령들을 돌아다녀야 하니 인원을 우르르 끌고 다니는 건 안 되고, 번거롭게 몇 명 더 붙이는 건 의미도 없기에 한 명이면 충분하겠다 싶었다.
[Lv. 46]
"일등 집사인 바로스라고 합니다."
안경을 쓴 차가운 인상의 남성 엘프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종족이나 성별은 상관없으니 최대한 적합한 자를 준비하라는 명령에 플로토가 데려온 이였다.
레벨도 40이 훌쩍 넘어 상당히 높은 편.
"칼데릭 전역을 돌아다닐 예정인데, 헤매지 않고 방향을 잡을 수 있나?"
"예, 군주님."
"바로 떠날 채비를 하도록."
인원 구성은 끝이었고, 짐을 챙기는 것도 플로토가 알아서 마쳤다.
"마차는 평범하게 너무 눈에 띄지 않는 걸로 준비해라."
대군주성에서 이곳으로 올 때 탔던 것처럼 거대하고 문양 가득한 화려한 마차를 타고 다니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닐 듯했다.
내 위치와 루트가 다른 군주들한테 고스란히 노출될 수도 있었으니까.
때문에 다른 군주령들을 다니면서 웬만하면 내 신분도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 행방을 안다고 해서 딱히 이상한 짓을 할 군주는 없겠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모든 준비를 끝낸 뒤, 나와 아셸은 건물 입구에 서있는 마차에 오르며 플로토의 배웅을 받았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군주님."
성문에서 경례를 하고 있는 기사들을 지나쳐 마차가 힘차게 군주성의 정문을 빠져나갔다.
***
첫 번째로 목표로 할 신비는 방어 계열의 신비인 '부동 장막'이었다.
명칭이 다소 특이한 이 신비는 적어도 방어적인 능력만큼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뛰어난 신비였다.
'게임에서의 스킬 등급도 제왕의 혼과 같은 9성이었을 정도니까.'
물론 그만큼의 치명적인 패널티도 하나 존재하긴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 있어선 무엇보다도 뛰어난 방어 능력을 얻는 게 중요했기에 패널티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즉살이야 최고의 공격 능력이었지만 직접 닿아야먄 발동이 되기에 방어적인 능력은 전혀 없다.
한 20레벨의 주먹질에 한 대만 맞아도 그대로 머리통이 터져나갈 위태로운 처치부터 어떻게든 개선하고 봐야 하는 것이었다.
'티렐 산맥.'
부동 장막이 숨겨진 장소는 5군주령 살로갈의 북부 변경에 있는 티렐 산맥의 어딘가다.
초재생보다는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았는데, 부동 장막은 게임에서 본래 내가 찾아서 습득한 신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동 장막을 얻는 걸 녹화한 다른 유저의 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기에 그걸 본 것뿐이지.
'망가진 던전 같은 장소였었나.'
찾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어떻게든 찾아내서 얻을 생각이다.
5군주 광랑에게 양해를 구해 인력을 대동원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여러모로 꺼려지는 방법이었다.
광랑 자체가 대화가 잘 통할 만한 인물도 아니고, 이유를 설명하라고 하면 그걸 뭐라 설명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재생을 얻으면서 더욱 확신을 얻었다.
신비를 얻는 데에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는 게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걸.
신비의 문양에 손을 대기만 해도 신비는 그 사람에게 흡수된다.
누군가 먼저 신비를 발견해서 나한테 보고가 올라오기도 전에 냉큼 먹어버리면 그걸 도로 뱉어내게 할 방법은 없었다. 완전히 죽 쒀서 개 주는 꼴이나 다름없는 거였다.
'초재생을 찾을 때처럼 길잡이 정도만 고용해서 찾는 게 최선이겠지.'
현재 마차는 숲길을 지나고 있었다.
칼데릭은 중앙의 대군주령을 아홉 군주령이 원형으로 둘러싼 형태의 땅이다.
5군주령으로 향하기 위해 선택한 길은 6군주령의 외곽을 비스듬하게 지나쳐서 가는 것이었다. 가장 빠른 직선 경로였다.
가는 길이야 지금 마차를 몰고 있는 바로스가 알아서 잘 찾아갈 테고.
"······?"
나는 반대편의 아셸을 바라봤다.
언제나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있던 그녀가 창밖으로 슬쩍 시선을 던졌기 때문이다.
뭔가 일이 있나 싶을 때, 말의 투레질 소리와 함께 마차가 천천히 멈춰섰다.
- 하하! 겁도 없이 호위병 하나 달지 않고 이런 숲속을 지나고 있느냐!
마차 밖에서 울리듯 들려오는 걸걸한 음성.
나는 설마 싶었다.
'도적인가?'
이 중세풍의 판타지 세계에선 길을 가다가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게 도적이고 몬스터였다.
대군주성에서 엔록으로 향할 때야 호위 기사들이 한가득 붙었으니 도적 무리를 마주친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생각하지 않았던 상황은 아니지만 벌써 실제로 맞닥뜨린 모양이었다.
- 거기, 마차에 타고 있는 것들도 어서 내려라! 가진 걸 다 내놓고 꺼지······ 흐악!
그리고 비명이 이어졌다.
무언가 갈기갈기 찢기는 소리와 끔찍한 비명이 연신 울리더니 곧 바깥이 조용해졌다.
슬쩍 창을 열고 밖으로 머리를 내미니 널부러진 시체들과, 그 사이에서 안경에 튄 핏물을 닦아내고 있는 바로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주위엔 바람 같은 것이 형체를 갖추고 일렁이다가 사라지고 있었는데······ 저거 정령인가?
나와 눈을 마주친 바로스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쓰레기들 때문에 잠시 이동이 멈췄습니다."
"······그래."
바로스가 도로 마부석에 오르고 마차는 다시 출발했다.
잡도적들 처리에는 아셸이 나설 일도 없을 듯했다.
***
그 후로도 간간히 도적 떼와 몬스터들을 마주치며 이동은 계속되었다.
긴 시간이 흘러 마침내 목적지인 5군주령 살로갈에 도착했다.
북부 변경의 대도시인 코르웨헨 시.
고급 여관에서 하루 묵으며 피로를 씻어낸 뒤, 다음날 곧바로 찾아간 곳은 도시의 모험가 길드였다.
"그래서 말이야,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가 괴물 새끼의 뿔을 붙잡고 그대로······."
"실리아, 오늘 밤에야말로 단둘이 한 잔 어때? 응? 저번 의뢰에서 크게 한탕 벌어서 비싼 술도 사줄 수 있다고."
길드 건물 내부는 뭐라고 할까, 정말로 딱 상상했던 정도의 분위기였다.
벽면에 붙은 의뢰서들을 신중히 훑고 있는 사람, 허세를 떨며 무용담을 자랑하는 사람, 그리고 카운터의 직원에게 껄떡대는 사람······.
그 광경을 잠시 훑어보다가 카운터로 다가가자 업무를 보고 있던 수인족 여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공자님. 신청하고 싶으신 의뢰가 있으신가요?"
내 복장을 보고 의뢰를 신청하러 온 쪽이라고 판단한 건지 그녀가 그렇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되물었다.
"이 도시에서 티렐 산맥의 지리에 가장 밝은 모험가가 누구지?"
그녀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티렐 산맥의 지리에 밝은 모험가를 찾으시는군요. 길잡이를 원하시는 건가요?"
"그래."
"혹시 개인이 아니라 모험단도 상관이 없으신가요?"
"상관없다."
"그렇다면 푸른 여우 모험단을 추천드리겠습니다. 단장인 로딘 씨는 특급의 모험가로 이곳 코르웨헨에서 명성이 상당하신 분이죠. 지금 바로 저기 앉아계시는 분들인데, 만나보시겠어요?"
여인이 가리킨 곳, 2층의 난간 자리에 여러 명의 남녀가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계단을 올라서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의 의문에 찬 시선을 보냈다.
검, 창, 활 등으로 각자 다양한 무장을 하고 있는 다섯 명의 모험가 남녀.
[Lv. 36]
그중에 가장 레벨이 높은, 탁자 옆에 거대한 검을 세워두고 있는 사내에게 직원 여인이 말을 걸었다.
"로딘 씨, 의뢰 요청이에요. 여기 공자님께서 티렐 산맥의 지리에 밝은 길잡이를 구하신다고 하셔서요."
"······엉? 의뢰?"
그가 나와 여인을 번갈아보며 턱수염을 긁적이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첼시, 우리 이미 사흘 뒤에 폴립 시로 향하는 상행 호위 의뢰를 맡기로 했는데. 몰랐어?"
"······예? 그랬어요?"
"그래. 죄송하지만 의뢰는 맡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나으리. 다른 모험가를 찾아보시지요."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는지 여인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이 자들이 길드에서 티렐 산맥의 지리에는 가장 밝나?"
"예, 그렇긴 한데······ 죄송합니다, 공자님. 이미 맡으신 의뢰가 있다니 다른 분들을 소개해드릴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레벨들을 보니 실력은 확실해 보이고, 이왕이면 최고의 인력을 데려가고 싶었다.
"의뢰비라면 더 얹어줄 테니, 그쪽의 의뢰는 취소하고 내 의뢰를 맡을 생각은 없나?"
내 말에 로딘이라는 사내는 조금 헛웃음을 짓더니 대답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나으리. 맡은 의뢰를 취소하려면 이미 받은 선금의 몇 배를 위약금으로 물어줘야 해서요."
모험가 측에서 멋대로 의뢰를 취소해버리면 의뢰인 쪽에도 피해가 갈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위약금이 얼마나 되지?"
"받은 선금이 5골드이니 2배인 10골드를 물어줘야겠지요."
"그걸 내가 대신 모두 물어주고 20골드에 자네들을 고용하지. 이러면 어떻나?"
내 조건이 꽤 파격적으로 들렸는지 로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러나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위약금도 위약금이지만 의뢰주와의 신용이라는 게 있습니다. 다른 의뢰를 맡겠다고 먼저 맡은 의뢰를 멋대로 깨버리면 그쪽에서 저희 모험단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의뢰금을 2배인 40골드로 올리지."
로딘의 동공이 흔들렸다.
"죄송하지만 정말로 안 됩니다, 나으리. 의뢰주와의······."
"3배, 60골드."
"······신용······ 이라는 게 있는데······."
"5배, 100골드. 이게 마지막이다."
로딘의 말이 뚝 끊겼다.
다른 단원들도 꿀꺽 침을 삼키며 로딘을 바라봤다.
드르륵.
의자를 끌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허리를 숙였다.
"환영합니다, 의뢰주님."
부동 장막 (2)
돈으로 밀어붙여 체결된 계약 아래, 의뢰할 일에 대해 모험단과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눴다.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로딘이 당황한 투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티렐 산맥의 봉우리들을 죄다 뒤질 생각이시라는 겁니까?"
"그래."
내가 말하고도 굉장히 터무니없게 들리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초재생과 달리 부동 장막이 숨겨진 장소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지형적 특성이라고는 그게 전부였으니까.
산맥에 있는 봉우리들의 정상부 어딘가······ 그리고 아마도 협곡 같은 지형이었다는 것.
직접 가서 살피다 보면 감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당장 떠오르는 건 그거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이번 신비를 찾기 위해서는 초재생 때보다 훨씬 더 노가다를 할 각오를 다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하나 다행인 건 그래도 티렐 산맥이 루터스 산맥보다는 작은 산맥이라는 것일까.
"티렐 산맥의 봉우리에 있는 협곡들을 전부 돌아다닌다고 가정하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로딘이 침음을 흘리다가 답했다.
"너무 막연해서 영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만······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최소한 보름은 걸리지 않겠습니까?"
보름이라.
사실 그 말대로 너무 막연한 일이었기에 결국은 직접 해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로딘이 다시 입을 열고 물었다.
"한데 나으리께선 누구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다짜고짜 거금을 내며 산맥의 길잡이를 요청하는 의뢰인.
정체가 궁금한 건 당연할 것이기에 적당히 대답했다.
"인근의 다른 도시의 가문에서 나온 사람이다. 출신을 자세히 밝히기는 곤란하고."
"······그럼 티렐 산맥에는 어떤 이유로 오르시려는 겁니까?"
"찾고 있는 게 있거든."
"무엇을 말입니까?"
"그것도 말하기는 좀 어렵겠군."
"아, 예······."
잠깐 자리에 정적이 감돌았다.
길잡이라는 게 설마 이런 의뢰일 줄은 몰랐는지 로딘과 단원들의 표정은 꽤나 심란해 보였다.
나는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금화를 대여섯 닢씩 탁자에 내려놓았다.
탁자 위에 수북히 쌓이는 금화에 그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선금으로 지금 바로 30골드를 주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대가는 차고 넘치지 않나."
"······."
"그래도 의뢰를 맡을 수 없다면 별 수 없겠지만 말이야. 그래서, 하겠나?"
고민하던 로딘이 단원들과 시선을 주고받는 듯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산맥에 오를 건 두 분이 전부입니까?"
로딘이 나와 내 뒤에 서있는 아셸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과 단원들을 차례대로 간단히 소개했다.
"푸른 여우 모험단의 단장인 로딘입니다. 그리고 이쪽부터 차례대로 아르마, 루드, 벡스터, 시엔······."
검과 방패, 그리고 창으로 무장한 사내 둘, 활을 들고 있는 여인과,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아 마법사로 보이는 여인, 그리고 로딘까지 해서 총 다섯 명.
시엔이라 불린 활을 메고 있는 여인이 헤실헤실 웃으며 탁자에 쌓인 금화를 바라보고 있다가 웃으며 말했다.
"사실 저희만큼 티렐 산맥의 지리에 밝은 모험가가 근방에 또 없긴 하죠. 정말 제대로 찾아오신 거예요, 공자님."
"저저 미친년, 또 황금에 눈 돌아간 거 봐라······."
옆에 앉은 루드라는 사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가 그대로 등짝을 후려맞았다.
나도 간단히 이름만 밝혔다.
"론이다. 이쪽은 호위인 아셸."
"예, 아무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로딘의 푸른 여우 모험단은 결국 의뢰를 받아들였다.
***
나야 바로 출발해도 상관없었지만 그들도 준비가 필요했기에 하루의 여유를 더 가졌다.
다음 날 이른 아침에 모험단과 도시의 동쪽 성문 앞에서 모이기로 했다.
바로스까지 굳이 있을 필요는 없었기에 그는 여관 숙소에서 자리를 지키고 아셸만 나와 동행했다.
"그럼 가지."
"······."
여관 방에서 나온 나를 아셸이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정확히는 내가 챙겨서 나온 활과 화살들을 쳐다보는 거겠지.
그녀의 눈빛에선 저걸 대체 왜 챙겨가나 싶은 의문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지만, 무시했다.
이번에도 벨르바고라처럼 또 어떤 상상도 못한 위험을 맞닥뜨릴 줄 누가 알겠는가?
아주 자그마한 안일함도 언제든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준비할 수 있는 건 모두 준비하는 게 이 험악한 세계에서의 생존을 위한 올바른 자세였다.
"오셨습니까."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모험단과 만나 곧바로 티렐 산맥으로 향했다.
티렐 산맥.
이 산맥의 특징을 하나 꼽자면 오크들이 굉장이 많다는 점이었다.
오크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몬스터지만, 티렐 산맥에는 특히 많이 서식했다.
하지만 높아봐야 20레벨대에 불과한 놈들이니 안전을 걱정할 건 없었다.
산맥에 오르기 시작한 지도 몇 시간, 이제 초재생을 얻은 나는 더 이상 체력이 달릴 일 없이 얼마든지 모험단의 걸음에 맞출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오크 무리와도 마주쳤다.
퀴이익.
수풀에서 튀어나온 녹색 피부의 덩치 큰 괴물들이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게임에서 봤던 생김새 그대로다.
총 여덟 마리. 손에 녹슨 철검이나 창 따위를 들고 있는 놈들도 있었다.
"이 새끼들이 미쳐서 여기까지 내려와 사냥을 하고 있네?"
로딘과 단원들이 주저하지도 않고 앞으로 나서서 오크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창칼을 든 이들이 앞에서 싸우고, 뒤에선 화살과 마법을 날리며 전투를 보조했다. 나와 아셸은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
특히나 30레벨이 넘는 로딘이 있었기에 전투는 간단히 끝나버렸다.
잠시 자리를 잡고 쉬어가며 모험가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오크라는 게 생각보다 영리한 놈들이라 노련한 모험가들도 까딱 잘못했다간 몰이 사냥을 당해서 죽기도 합니다. 아까 만났던 그 오크들이 들고 있던 무기도 원래는 다 다른 모험가들의 무기를 뺏어서 사용하는 것이죠."
"그렇군."
물론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오크도 부족 단위로 공동체 생활을 하는 놈들이기에 몬스터치고 지능은 뛰어난 편에 속했다.
내가 대화를 잘 받아주자 모험가들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더 늘어놓았다.
"혹시 오크의 몬스터 웨이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선 아십니까?"
"드물게 돌연변이인 왕이 나타나면 발생하는 게 아닌가."
"예, 알고 계셨군요. 본래라면 포악한 성질 탓에 대단위로 뭉치지도 못하는 놈들이 왕이 탄생하면 그 아래 모조리 연합해서 완전히 끔찍한 재앙이 되어버리죠."
몬스터 웨이브.
그것은 명칭대로 거대한 몬스터 무리가 파도처럼 몰려오는 현상을 의미한다.
원인이야 여러가지인데, 그중 하나가 바로 바로 몬스터들 사이에 아주 드물게 탄생하는 돌연변이인 '왕'의 존재였다.
왕이 탄생하는 몬스터로는 대표적으로 오크나 리자드맨 등이 있는데, 왕이 탄생하면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까지, 압도적인 몬스터 대군이 형성되어 인간들의 영역을 침공하기도 했다.
'오크킹이면 높게는 한 70레벨이 넘는 놈까지도 출현했던가.'
아무튼 그런 몬스터 웨이브들은 게임의 스토리에서도 종종 발생했던 주요 이벤트이긴 했다.
휴식을 마치고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
티렐 산맥을 뒤지기 시작한 지도 이제 일주일이 다 되었다.
모험단은 자신했던 대로 길을 헤매지 않고 목적지들로 훌륭히 안내했다.
하지만 벌써 여러 봉우리와 협곡들을 뒤졌지만 여전히 신비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나는 걸음을 옮기는 중에도 계속해서 기억을 열심히 더듬었다.
'일단 협곡 지형이었던 건 확실한데.'
폭이 좁은 게 아니라 상당히 넓고 양옆의 절벽의 경사가 완만했던 편으로 기억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지금까지 지나쳤던 협곡들 중에 기억과 매치되는 건 없었다.
그리고 대체 또 뭐가 있었더라······.
"협곡입니다."
앞쪽에 보이기 시작한 광경을 보며 로딘이 말했다.
이제 다섯 번째로 마주한 협곡이었다.
"······."
어? 잠깐만······.
어쩐지 흐릿한 기억과 대충 일치하는 것 같은 협곡의 형태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바쁘게 시선을 옮기며 협곡을 훑어보고 있는데 주변에서 소란이 일었다. 또 오크들이었다.
이번엔 몇 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 단위로 튀어나온 오크 떼에 로딘과 단원들이 인상을 구겼다.
"······이번엔 좀 많은데?"
"많아봐야 오크 새끼들이지, 뭐. 큰 마법 하나 부탁한다, 아르마."
언제나처럼 로딘과 단원들이 전투를 준비했다. 그래도 이번엔 숫자가 좀 많아서 긴장한 얼굴들이었다.
그래도 받은 의뢰금 값은 하겠다는 건지 항상 먼저 전투에 나서는 그들이었지만······.
"아셸."
"예."
"전부 처리해라."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이 상황에 오크 놈들은 굉장한 방해였다.
내 말에 아셸이 검을 뽑아들고 서서히 다가오는 오크 무리를 향해 휘둘렀다.
촤아악!
그녀의 검에서부터 뿜어져나온 푸르고 거대한 검기에 오크들의 몸이 일제히 양단되었다.
그 광경에 막 전투에 나서려고 하고 있던 로딘과 단원들은 순간 넋을 놓은 얼굴이 되었다.
"어, 어어······."
다시 협곡이 조용해진 사이, 나는 계속해서 주위를 둘러보며 기억을 끄집어냈다.
곧 퍼뜩 떠오른 무언가에 서둘러 한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셸이 내 뒤를 따랐다.
'······그래.'
분명히 이쯤이었다.
나는 초재생을 찾을 때처럼 절벽면을 살피며 움직이다가 어느 지점에서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머리 위로 높이 보이는 볼록한 절벽면, 그리고 끄트머리에 홀로 서있는 나무.
부동 장막을 얻은 유저의 영상에 분명히 이런 구도의 시야가 있었다.
"아셸, 이 벽을 부숴봐라."
콰아앙!
아셸이 벽을 부수자 돌조각이 우르르 무너지더니 안쪽에 통로가 나타났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낡은 돌계단.
그걸 보며 나는 환희에 찬 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찾았다.'
이곳이 바로 부동 장막의 신비가 숨겨져있는 던전.
로딘과 다른 단원들도 다가와서 그 입구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그들을 뒤로한 채, 나는 아셸과 함께 계단을 내려가 안쪽으로 향했다.
***
챙겨온 발광석을 들고 빛에 의존해 어두운 통로를 나아갔다.
일자로 이어진 낡고 넓은 복도의 양옆엔 거대한 석상들이 서있었고, 아셸이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그것들을 둘러봤다.
던전은 기본적으로 고대의 마법사들이 만든 인공적인 공간이었다.
함정이 있고 그것을 지키는 가디언들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왜냐면 분명 플레이 영상을 봤을 때도 이 던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미 망가져서 함정이나 가디언 따위는 없었으니까.
가장 안쪽에 숨겨져있는 부동 장막의 신비에 도달하기까지 아무런 위험은 없었다.
곧 복도의 끝에 도달하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음."
나는 잠시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췄다.
안으로 향하는 문 바로 앞을 가로막고 복도 양옆에 늘어져있던 것과 같은 거대한 석상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저것도 별 거 아니지.'
어차피 움직이지도 않을 석상일 것이기에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셸이 전부 부숴버리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그만인데······ 잠깐만.
[Lv. 85]
'······저놈 저거 왜 레벨이 보이냐?'
석상의 머리 위에 떠올라있는 레벨에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도로 걸음을 멈췄다.
돌연 석상의 눈에 푸른빛이 감돌더니 번쩍 뜨이더니, 놈이 들고 있던 창을 휘둘렀다.
콰콰콰쾅!
"······!"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간 푸른빛의 거대한 기운에 등골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이어서 석상에서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경고한다. 그 선을 넘으면 침입자로 간주하겠다. 자격이 없는 자들은 돌아가라.
······저게 뭐야, 미친?
'여기 가디언 같은 거 없는 던전 아니었어?'
당황하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바닥이 패여 선 같은 자국이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걸 넘으면 공격하겠다는 건가?
벨르바고라를 마주쳤을 때처럼 또다시 예상 못한 상황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기껏 여기까지 힘들게 왔는데 또 이딴 식이야, 또?
쿠구구구.
석상에서 뿜어져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는지 옆에 있는 아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레벨을 봐도 아셸보다 훨씬 높았기에 그녀가 저걸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골렘한테도 즉살이 통하나?'
저 가디언은 딱 봐도 마법으로 제작된 마법 골렘이었다.
따지자면 생물이라기보단 무생물에 가까운 놈인데, 과연 즉살이 통할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으니 시도라도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설마 유일무이한 10성급 스킬인데 골렘이라고 안 통하겠나?
나는 챙겨왔던 화살을 꺼내들고 손바닥을 긁어 피를 묻힌 뒤, 시위에 걸고서 놈을 조준했다.
***
아셸은 전방에서 거대한 마력을 뿜어내고 있는 석상을 바라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전력을 다하면 이길 수 있을까? 가늠해봤지만 자신은 없었다.
이 던전처럼 보이는 공간은 대체 뭘 하는 장소란 말인가? 저 괴물은 또 무엇이고?
스스로의 실력에 상당한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고 일족 사이에서도 항상 천재로 일컬어지던 그녀였지만, 어쩐지 7군주랑 다니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대들을 계속 마주치게 되었다.
"······?"
그녀는 퍼뜩 옆을 돌아봤다.
갑자기 7군주가 화살을 시위에 걸고 골렘을 조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잉!
7군주가 시위를 놓자 날아간 화살이 석상의 몸통을 때리고 맥없이 튕겨나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그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머리를 맞혀보려 했는데, 아직 많이 부족하군."
······대체 지금 뭘 하는 거지?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장난이라도 치는 듯한 행동에 의문이 피어오를 때.
7군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꺼져라, 돌덩이. 길 막지 말고."
그리고 그와 동시였다.
······쿠우웅!
석상이 그대로 중심을 잃고 무너지며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그 광경을 보며 아셸의 두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7군주가 활을 도로 등에 메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지."
"······."
아셸은 가벼운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걸음을 옮겼다.
부동 장막 (3)
콰아아앙!
아셸이 거대한 석문을 부숴버리고 우리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무너진 돌조각 잔해를 넘어 이동하자 나타난 건 거대한 공동.
'오······.'
속으로 조금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래 바닥과 벽면에 그려진 정체를 알 수 없는 기하학적인 문양들과, 구조물들, 공간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는 천장에 박힌 발광석까지.
상당히 오래 전에 지어졌을 텐데 저 발광석은 아직까지도 힘이 다하질 않은 건가?
어쨌든 지나쳐온 복도보다 더 신비스런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풍경이었다.
나는 마치 게임을 플레이하며 던전의 끝에 도달했을 때와 같은 즐거움을 느끼며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보상을 챙길 타임이었다.
'어디 보자.'
공동 한쪽에는 방금 부수고 들어온 석상보다 좀 더 작은 문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저쪽인 모양이었다.
플레이 영상에서 봤던 유저는 유물 같은 아이템 하나 없는 던전에 실망하다가, 분명 저 문으로 들어가서 신비를 발견하고 바로 장비를 다 벗은 다음에 기쁨의 빤스춤을 췄었던가.
생각해보면 이 던전에 왜 신비가 숨겨져있는 건지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신비라는 건 마력이나 마법 따위와 일절 관계없는, 출몰 장소도 완전히 무작위인 미지의 힘이라는 설정이었으니까.
그저 기가 막힌 우연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을 수도 있는 거고.
물론 그딴 거야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저 문 너머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부동 장막 신비의 존재였으니까.
'근데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문득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현재 세계의 시간대는 게임으로 플레이했던 세계에서 5년 전 과거의 시점.
······어쩌면 신비가 아직 생성되지 않아 저 안에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겠지?
"아셸, 이 문을 부숴라."
상상하기도 싫은 불길한 가정을 머릿속에서 털어내며 아셸에게 명령했다.
뒤에 서서 공동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던 그녀가 다가와서 문을 부숴버렸다.
그나저나 호위로 쓰려고 데려온 아셸인데 뭘 부수는 데에 더 알차게 써먹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그녀에게 그렇게 말한 뒤 혼자서 안쪽으로 입장했다.
복도보다 좁게 이어진 길을 따라서 쭉쭉 안쪽으로 들어가자 또다시 공동이 나왔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여기엔 사람이 생활했던 흔적 같은 것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
나는 다른 것들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고개를 들어 천장만을 빤히 응시했다.
정확히는 천장에 그려져서 백색으로 밝게 빛나고 있는 하나의 문양을.
내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안도감과 함께 희열이 솟아올랐다.
"부동 장막······."
신비는 보편적으로 문양의 크기가 클수록 더욱 강력한 신비다.
부동 장막의 문양은 초재생보다도 훨씬 거대해서 넓은 공동의 천장을 완전히 채우다 못해 아래 벽면에까지 이어져있었다.
나는 잠시 신비를 찾았다는 기쁨에 실실 웃고만 있다가, 곧 상황을 깨닫고 작게 탄식을 뱉었다.
"아."
그러고 보니 플레이 영상에서도 저게 천장에 그려져있었던가?
다른 것들에 집중하느라 생각을 못했다.
공동의 천장은 내 키의 몇 배는 가볍게 넘을 정도로 높았다. 대충 봐도 10미터는 되어 보였다.
······손에 닿아야 흡수가 될 텐데, 저걸 어떻게 흡수해야 되는 거지?
나는 닭 쫓던 개마냥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다시 돌아가서 아셸을 불러와야 되나?
하지만 아무리 아셸이라도 신비의 존재를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달리 방법이······.
"······."
공동의 벽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부분이 많아서 어떻게 잘만 하면 오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어휴, 썅······.'
하여간 뭐 하나 쉽게 얻는 법이 없네.
나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서 벽면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평생에 한 번 해본 적 없던 암벽 등반을 이런 식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차피 초재생이 있으니 떨어져도 다칠 염려는 없고 체력이 달릴 일도 없긴 했다.
터업.
어설프게 튀어나온 부분을 꽉 붙잡고서 더듬거리며 조금씩 발을 디디기 시작했다.
원래의 내 육체 능력이었으면 몇 미터 올라가서 팔이 부들거렸을 것 같은데, 초재생 덕분에 부족한 힘이 바로바로 채워졌다.
그렇게 조금씩 천천히 조금씩 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천장 바로 밑이었다.
발 한 번 삐끗했다가 떨어지면 다시 올라가야 했기에 나는 신중히 몸의 중심을 고정하고 한 손을 천천히 뗀 다음 뻗었다.
화아아악!
문양의 빛이 밝게 터지더니 내 몸에 천천히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에 한창 고양감을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발을 딛고 있던 부분이 부서지더니 중력이 날 아래로 잡아끌었다.
"엇······."
그대로 내 몸은 추락하여 지면과 거하게 충돌했다.
나는 억눌린 신음을 내며 바닥을 잠시 데굴데굴 굴렀다.
그렇게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자니 뼈가 부러진 듯 등과 허리에 치밀던 격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아으, 씨."
등을 싹싹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이걸로 부동 장막의 신비를 얻었다.
초재생을 얻었을 때도 그랬지만, 신비는 얻은 순간부터 대충 어떤 능력인지,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오는 감각이 있었다.
나는 괜히 앞으로 팔을 뻗으며 부동 장막을 발동했다.
"······!"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내 몸을 두르고 어떤 방어막이 펼쳐진 게 느껴졌다.
나는 순간 감탄했다가 곧 무언가를 깨닫고 바로 능력을 거두었다.
그리곤 조금 어이가 없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이거 숨도 못 쉬는 거였어?"
부동 장막.
어떤 강력한 공격이라도 웬만해선 다 막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방어 능력.
하지만 그 패널티는 시전자가 장막을 펼친 동안은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게임에서는 보스의 궁극기 같은 걸 씹는 무적기 정도의 용도로 사용됐었다.
근데 직접 사용해보니······ 이건 능력을 사용하는 동안 움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호흡도 할 수가 없었다.
'······크게 상관은 없으려나?'
나는 다시 한 번 능력을 사용해봤다.
몇 번 능력을 펼치고 거두며 곧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한 번 사용하면 계속 지속되는 게 아니라 내 의지로 얼마든지 취소할 수 있고, 쿨타임이나 발동 딜레이도 없었다.
게임에서와는 조금 다르게 자유자재로 장막을 키고 끌 수 있는 온오프 형식의 능력이 된 것이었다.
현실에 맞춰서 능력의 형식이 바뀐 건진 몰라도 어쨌든 게임보다 훨씬 상향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장막을 펼친 동안에는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으며, 호흡조차도 불가능하다는 것.
"대충 알겠네."
그럭저럭 적당한 패널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내게 있어선 그닥 큰 패널티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왜냐면 즉살 외에 아무런 능력도 없는 내가 이 능력을 사용해봤자 어떤 식으로 사용할까.
어차피 대부분 가만히 서서 상대의 공격을 막는 데에만 사용하지 않으려나?
'숨이야 잠깐 참으면 되는 거고, 계속 펼치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면 능력을 중간중간 껐다 키면서 컨트롤할 수도 있는 거고.'
나는 이런저런 상황을 가정해보며 부동 장막의 사용법을 생각해봤다.
게다가 써보니까 장막의 형태나 크기도 조종이 가능했다.
갑옷처럼 내 몸에 딱 달라붙게 장막을 펼칠 수도 있었고, 배리어 마법처럼 구 형태로 몸 주변에 펼칠 수도 있었다.
이건 굉장히 훌륭한 방어 능력이었다.
"좋네, 좋아."
초재생에 더해서 방어 능력까지, 이제 몸을 지킬 수단이 하나 더 늘어났다는 생각에 절로 마음이 든든해졌다.
나는 몸에 묻은 먼지들을 털어내고 주위를 둘러봤다.
신비를 얻고 나니 공동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이나 침상 등, 사람이 생활했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혹시나 뭐 더 얻을 만한 게 있으려나 이리저리 돌아나디며 뒤져봤지만, 별 건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공동을 둘러보고서 통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나왔던 통로를 지나 첫 번째 공동으로 나오니 주위를 경계하고 있던 아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나를 보고서 조금 안심한 듯한 기색을 내비쳤다.
또 아까 같은 석상이 튀어나올까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결국 이 던전은 뭐였던 건지 모르겠네.'
어쩌면 털어갈 건 이미 누가 털어간 던전인데, 그 뒤에 공교로운 우연으로 신비가 자리를 잡은 걸 수도 있겠다 싶었다.
뭐가 됐든 원하는 건 얻었으니 더 이상 알 바 아니었지만.
"그만 나가지."
나는 아셸과 함께 밖으로 나가는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부동 장막 (4)
모험단은 입구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지금이라도 튀어야 되는 거 아냐?"
단원인 루드가 말했다.
현재 그들 사이엔 미약한 불안감이 피어오른 상태였다.
지금 두 사람이 들어간 정체 모를 통로.
이건 아무리 봐도 던전처럼 보였는데, 뭔가 심상치 않은 일에 끼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던전은 오랜 고대의 유적들이 잠들어있는 보물 창고였다.
안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모험가들이 일확천금의 기회를 꿈꾸게 만드는 탐욕스런 덫이기도 했다.
설마 했는데 뭘 찾고 있다는 게 던전이었을 줄이야.
문제는 의뢰주인 론의 호위인 여인이 상상했던 것 이상의 엄청난 실력자였다는 것이었다.
검기를 거대하게 쏘아내어 오크들을 모조리 토막내버렸던 일격. 그들은 그런 진풍경을 평생에 처음 봤다.
던전에서 나와 입막음을 하겠다고 이쪽을 모조리 죽이려 들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었다.
귀족들 중에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미친 자들도 많았으니까.
돈에 눈이 멀어 불분명한 의뢰를 너무 섣불리 받았나 싶은 후회도 조금 들었다.
'그 도련님이 그런 인물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시엔이 나서서 말했다.
"야, 튀기는 미쳤다고 튀어? 아직 나머지 의뢰금은 받지도 못했는데 뭔 개소리야."
"그 여자 보통 실력자가 아닌 거 봤잖아? 입막음 하겠답시고 우릴 죽이려고 들면······."
"그럴 생각이었으면 들어가기도 전에 진작 죽였겠지, 이렇게 멀쩡히 남겨두고 들어갔겠어?"
"돌아갈 길을 모르니까 마저 안내시킨 다음에 죽이려는 걸 수도 있잖······ 악!"
"병신이 하여튼 겁은 더럽게 많아가지곤."
시엔이 활대로 부정적인 이야기만 하는 루드의 등짝을 후려쳤다.
물론 어디까지나 만약의 가정일 뿐이다.
아니라면 의뢰를 마치기도 전에 의뢰인을 버려두고 가는 쓰레기 짓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70골드도 못 받고.
일단 좀 더 기다려보기로 하는데, 퀴익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주위에서 오크들이 다시금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었다.
"아오, 저 오크 새끼들이 또."
이 협곡 인근에 자리를 잡은 부족이라도 있나?
질린다는 듯 전투를 준비하려던 로딘과 단원들의 표정이 서서히 멍하게 변했다.
시야에 보이는 오크들의 모습이 끊이지가 않고 계속해서 늘어났기 때문이다.
몇 마리에서 열 마리, 열 마리에서 몇십 마리, 그리고 몇십 마리에서······.
"······."
일대를 가득히 채운 오크 무리들.
수풀 사이에, 절벽 위쪽에, 그 와중에도 오크들은 끊이지 않고 나타나서 이젠 완전히 녹색의 파도처럼 보였다.
"미, 미친."
대체 지금 무슨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무기를 들 생각도 못한 채 뒤로 물러설 뿐이었다.
기이하게도 그 수많은 오크들 사이엔 질서정연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마치 잘 정돈된 대군처럼, 자신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의 명령을 기다리듯.
크르륵.
고요함 속에서 낮고 선명한 소리가 울렸다.
공포를 절로 자극하는 그 흉포한 울음소리에 로딘과 단원들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녹색 파도의 한쪽이 갈라지듯 길이 열리는가 싶더니, 그 사이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다른 오크들의 배는 되는 덩치의, 그리고 전신이 우락부락한 근육으로 뒤덮인 거대한 오크.
놈을 바라보며 로딘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왕이다."
왕.
연합이란 게 불가능한 몬스터들을 한 데 뭉치고 통솔할 수 있는 존재.
그들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나 많은 오크들이 한 곳에 뭉쳐있을 수 있는 건지.
이 티렐 산맥의 오크들 사이에 어느새인가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킬 최악의 돌연변이가 태어났던 것이었다.
시뻘건 핏빛으로 번들거리는 오크킹의 눈동자가 그들에게로 향했다.
금방이라도 찢어 죽이려 달려들 살의가 충만한 모양새였다.
저 괴물을 상대할 방법 따윈 없다.
그 사실은 싸워보지 않아도 모두가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주위를 오크들이 모두 둘러싸고 있었기에 도망칠 곳이라고는 하나뿐이었다.
로딘이 옆에 있는 던전의 입구를 바라보며 쥐어짜듯 간신히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르마, 마법······."
반쯤 넋을 놓고 있던 아르마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뭐라도 놈을 잠깐이라도 주춤하게 할 마법을 날린 다음에 안쪽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전력을 다해서 온 마력을 끌어올렸다.
주위에 넘실거리며 뭉쳐진 마력이 곧 불꽃으로 피어올랐다.
크허헝!
오크킹이 육중한 발구름과 함께 그들을 향해서 돌진했다.
그와 동시에 사람 정도의 크기는 될 거대한 불덩이가 허공을 가르고 놈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날아들었다.
퍼어어엉!
"······안으로 도망쳐!"
모두가 몸을 돌려 던전의 입구를 향해서 달렸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아르마가 날린 화염구는 오크킹에게 타격을 주기는 커녕 잠깐의 저지조차 하지 못했다.
불꽃과 연기를 가르고 튀어나온 놈이 모두가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순식간에 지척까지 도달했다.
오크킹이 가장 먼저 노린 대상은 마법을 날린 아르마였다.
바로 옆쪽에 있던 로딘이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으나 그대로 들이받혀 절벽 면으로 튕겨나가 처박혔다.
"······아."
방어 마법을 펼칠 틈도 없었다.
이어서 몸을 터뜨려버릴 듯 휘둘러오는 거대한 주먹을 보며 그녀는 죽음을 직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이었다.
던전의 입구 안에서부터 날아든 거대한 검기가 오크킹을 베어버렸다.
······크어어!
놈이 고통에 찬 괴성을 터뜨리며 피가 흘러나오는 팔을 붙잡고 뒤로 물러섰다.
아르마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다른 단원들도 검기가 날아든 입구를 바라봤다.
안쪽에서 론과 아셸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
'······이게 다 뭔 꼴이야?'
가벼운 걸음으로 던전에서 나온 나는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봤다.
협곡을 뒤덮고 있는 수많은 오크들.
던전에 들어간 지 반 시간도 안 된 것 같은데 그 사이에 바깥에선 개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저건······ 오크킹인가.'
아셸이 날린 검기에 팔을 베여 울부짖고 있는 거대한 오크를 바라보며, 곧 상황을 이해했다.
[Lv. 72]
놈의 레벨은 72.
아무리 왕이라도 굉장히 높은 편에 속하는 레벨이었다.
정말로 드물게 발생하는 오크킹을 또 이렇게 마주치다니, 이번 신비 찾기는 끝까지 다사다난인가.
하지만 아셸이 문제 없이 상대할 수 있을 수준이었기에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처리해라."
"예."
내 말에 아셸이 곧바로 오크킹을 향해서 다가갔다.
어쩐지 던전에서 석상 가디언을 상대하지 못한 걸 만회라도 하겠다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나는 시선을 돌려 옆쪽의 벽면에 처박힌 로딘을 바라봤다.
울컥거리며 온몸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는 게 간신히 숨만 붙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단장!"
넋을 놓고 있던 단원들이 뒤늦게 이쪽을 향해서 달려왔다.
벽면에 박힌 로딘을 빼내고서 바닥에 눕혔다.
아르마가 황급히 만신창이가 된 몸에 손을 뻗었다. 초록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치료 마법을 퍼붓는 듯했으나 로딘의 초점은 이제 곧 죽을 사람처럼 서서히 풀리기만 할 뿐이었다.
"아, 안돼······! 안돼!"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마법을 퍼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함부로 호의를 베풀지 않고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앞에서 죽는 사람들까지 무시하며 살 생각은 없었다.
"비켜봐라."
나는 스칼릿 비전 포션을 꺼내들고서 로딘의 상태를 살폈다.
가슴이 움푹 파인 게 여기가 치명상인 모양이었다. 거기에 대고 포션을 들이부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상처가 천천히 재생되더니 안쪽에 뼈에서도 두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근데 뼈가 부러졌으면 제대로 맞추고 사용했어야 된다 했는데, 이렇게 막 해도 되나?
잠시 그런 걱정이 들었지만 곧 로딘의 안색이 편해지더니 호흡이 정상적으로 고르게 돌아왔다.
그 광경을 다른 단원들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다급히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정말로 감사······!"
"됐으니 상태를 더 살펴봐라."
할 일을 마친 나는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쪽에서 아셸과 오크킹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콰콰콰쾅!
······너무 빨라서 오고가는 공방을 보기도 힘든 전투였다.
내가 그걸 보며 할 수 있는 표현은, 그저 아셸과 오크킹이 격돌할 때마다 주변의 지면이 뒤집어지고 나무들이 죄다 쓸려나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꽤 멀리 떨어져있는 여기까지 풍압이 밀려올 정도.
처음으로 아셸이 제대로 싸우는 모습을 보니 새삼 그녀도 괴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벨르바고라에, 80레벨이 훌쩍 넘는 가디언에, 만난 놈들이 놈들이다 보니 여태 제대로 활약을 못했을 뿐이지.
폭풍처럼 몰아치는 아셸의 검에 오크킹은 맥을 추리지 못하고 피를 쏟아내기만 했다.
사실 아셸이 정말로 전력을 내면 지금쯤 놈은 벌써 죽었을 것이다.
70, 80레벨대에서 9레벨의 차이는 그만큼 거대한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종족 특질을 사용하지 않았으니 전력이 아닌 상태.
전투가 생각보다 길어지는 듯했지만 이제 곧 끝나겠지 싶어 나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싸움을 응시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크어어어!
마치 마지막 격돌을 준비하듯 쩌렁쩌렁한 포효를 터뜨린 오크킹이, 갑작스레 방향을 선회하더니 이쪽을 향해 돌진했다.
그에 아셸도 당황해서 한 박자 늦게 놈의 뒤로 붙었으나······ 놈은 이미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
'이런 미······.'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까지 다가온 놈을 보며 바로 신비를 사용했다.
부동 장막.
나와 놈 사이를 두고 보이지 않는 투명한 장막이 펼쳐졌다.
놈의 주먹이 앞에서 우뚝 멈추었고, 그 충격에 내가 서있는 옆쪽의 바닥이 터지듯 폭발했다.
"······."
거대한 바위도 단숨에 산산조각냈을 놈의 공격은 내게 조금의 충격도 주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팔짱을 끼고 선 채 무심한 눈으로, 속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당황하고 있는 오크킹을 바라봤다.
그게 놈의 마지막이었다.
촤아아악!
순식간에 뒤따라온 아셸의 검이 오크킹의 목을 베어버렸다.
테이르 바몬 (1)
선혈이 쏟아지며 오크킹의 머리가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머리를 잃고 쓰러지는 몸을 보며 나는 그제야 장막을 거두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던 아셸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면목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됐다."
좀 놀라긴 했지만 덕분에 부동 장막의 방어력은 확실하게 확인했다.
주위를 둘러보자 우두머리를 잃은 오크들이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거리는 게 보였다.
굳이 아셸에게 정리하라고 할 것도 없이 놈들은 곧 도망치듯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덤볐다간 싹 몰살당할 상대를 구분하는 지성 정도는 오크들에게도 있을 것이었다.
"휴우······."
옆쪽에 서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모험가들이 안도한 얼굴이 되었다.
로딘도 몸을 추스렀는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내려가지."
이번 신비 찾기도 여러모로 다사다난했다.
***
산맥을 내려와 도시로 돌아온 뒤, 모험단에 나머지 의뢰금을 지급했다.
그들은 오히려 은혜를 입은 마당에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한사코 거절했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억지로 주었다.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공자님. 부디 나아가시는 앞길에 영광만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정말로 진심 어린 존경이 깃든 눈빛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귀한 포션을 사용해 목숨을 구해준 데다가 이런 거액의 의뢰금까지 퍼줬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그들 덕분에 중요한 방어 계열의 신비를 성공적으로 얻었기에 아깝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몇백 골드 정도야 정말로 푼돈에 불과했다.
군주성에서 챙겨나온 자금이 지금 내 품 안에 있는 것만 백금화 수십 닢은 족히 됐으니까.
우리는 하루 뒤에 곧바로 도시를 떠났다.
따분한 마차 여행이 다시 시작되고, 다음으로 향할 목적지는 신퇴가 다스리는 1군주령.
그곳에서 얻을 신비에 대해 떠올리며 나는 마차 밖 풍경을 멍하니 구경했다.
그러다 버릇적으로 반대편에 앉은 아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표정에 어째서인지 미약하게 그늘이 진 듯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군."
내 말에 아셸이 이쪽을 쳐다봤다.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있었나?"
"아닙니다. 그저······."
그녀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조금 더 어두운 기색이 되서 말했다.
"론 님께선 저를 호위로 임명하셨습니다. 하나 제가 호위로서 책무를 계속해서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아 그렇습니다."
"······."
"이전에 오크들의 왕을 상대할 때도 제대로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실책을 저질렀습니다."
또 그 이야기인가?
전에 벨르바고라와 마주쳤을 때도 잠시 나눴던 이야기다.
잡몹들을 처리하거나, 벽을 부수거나, 실제로 그녀는 나에게 없으면 안 될 정도로 굉장히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정말로 강력한 놈들에게는 맞서지 못하니 그게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에 대해서 뭐라 한 것도 아닌데 그녀의 고지식한 성격은 정말로 어지간했다.
'진짜 성격 귀찮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껍기도 했다.
마치 벽을 상대하던 것 같던 처음의 아셸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으니까.
이런 이야기를 꺼내며 나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마음의 거리가 그만큼 좁혀졌다는 뜻 아니겠는가. 아님 말고.
나는 할 말을 고르다가 곧 입을 열었다.
"처음에 너와 만났을 때 말했었지, 너의 능력이 우연히 눈에 띄었다고."
"예."
"그건 지금의 네 능력이 아닌 잠재력에 대해 이야기한 것에 가까웠다. 나는 현재의 네 한계를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일과 없는 일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경청하는 아셸에게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루터스 산맥의 뱀, 그리고 던전에서 만났던 골렘, 모두 네가 전력을 다해도 감당할 수 없는 상대였지. 그렇기에 나는 아직 네게 실망한 적이 없다. 너는 아직 훨씬 강해질 수 있으니 자책이 아닌 성장을 갈망해라.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나?"
"······."
"물론 오크를 놓쳤던 건 실책이 맞다. 앞으로는 방심하지 말도록."
그녀는 내가 한 말을 곱씹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도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지나가는 풍경을 감상했다.
***
꽤 긴 시간이 흘러 5군주령의 남동부에 위치한 도시인 빌페크에 도착했다.
마차를 타고 대로를 지나고 있는데 문득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여기 도시에 그 식당이 있었던가?'
게임을 플레이할 때 빌페크 시에는 설정상 굉장히 유명한 레스토랑이 하나 있었다. 식당 이름이 골드 치킨이었나.
그냥 있는 맥거핀 설정은 아니고 신메뉴로 고민하는 셰프에게 재료를 구해주는 서브 퀘스트도 존재했다.
무엇보다 이 식당이 기억에 남아있는 이유는 이름대로 치킨을 파는 식당이었기 때문이다.
이 중세풍의 판타지 세계의 관념상 튀긴 닭이라는 요리는 상당히 생소하기에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한번 들러볼까.'
좀 마음이 동했다.
도시의 고급 여관에 숙소를 잡고서 나는 바로스에게 말했다.
"이 도시에 골드 치킨이라는 레스토랑이 있는지 알아봐라."
5년 전 시점이니까 어쩌면 아직 개점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바로스가 식당이 존재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얼마 전에 개점하여 도시에서 조금씩 유명해지고 있는 레스토랑인데, 닭을 튀긴 요리를 메인으로 판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바로 여관을 나섰다.
레스토랑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자 꽤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적당히 소란스러운 분위기.
홀을 돌아다니던 종업원이 우릴 보고 밝게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세 분이서 식사를 하려고 오신 건가요?"
창가의 자리를 안내받아 내가 먼저 앉아 아셸과 바로스가 반대편에 앉았다.
이 자리 배치도 처음엔 좀 어색했지만 슬슬 익숙해졌다.
군주성을 떠나 처음 도착한 도시의 여관에서 식사를 했을 땐 바로스가 감히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없다느니, 옆에 서서 시중을 들겠다느니 귀찮게 굴었었지.
그는 이 여정의 모든 잡무를 맡고 있는 훌륭한 인재였지만, 하나 좀 그런 게 있다면 충성심이 너무 과하다는 것이었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내밀며 물었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혹시 저희 레스토랑에 대해 잘 모르신다면 설명을······."
"아니, 괜찮다. 치킨 두 마리로 시키지."
"옙, 알겠습니다. 요리에 조금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이니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중세풍 세계엔, 특히 이런 대도시에는 이런 레스토랑처럼 묘하게 현대적인 구석들도 많이 섞여있었다.
애초에 현대인들의 손에서 만들어진 게임 세계이니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거였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건 그 게임 세계에 들어온 내 처지지.'
아셸은 본래 말이 없고, 바로스야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가 없는 상대였기에 음식을 기다리며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나는 어째서 이 세계에 들어왔을까?
그 답을 찾는 일은 현재로서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는 실제로 신이 존재했다.
세인테아의 용사에게 성검을 내려준 라사 세계관의 유일신.
어쩌면, 신이라면 내게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줄 수도 있지 않을까?
"······."
뭐가 됐든 당장은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했기에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다.
계속해서 살아남다 보면 언젠간 용사도 만나볼 수 있겠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였다.
왜인지 기분이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때 가게 문이 열리며 한 손님이 들어왔다.
어디 가문의 영애로 보이는 고급스러운 복장의 여인과 호위 기사였는데, 그녀가 홀을 슥 둘러보고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배인! 빨리 손님 안 받아?!"
안쪽에 있던 지배인이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곤 화들짝 놀라더니, 서둘러 다가갔다.
"어서오십시오, 덴브리 영애님. 저희 가게에 방문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쯧, 더럽게 굼떠가지고는."
여인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요새 이 레스토랑의 요리가 그렇게 유명하대서 나들이 나온 김에 손수 맛 좀 보러 왔더니, 내부는 구질구질하니 촌스럽네."
"하하······ 죄송합니다. 고귀하신 영애님을 맞이하기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뭔 당연한 말을 지껄이고 있어? 빨리 제일 좋은 자리로 안내나 해."
······저 망나니는 뭐야?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가게 내부의 분위기가 조용해져있었다.
다른 손님들이 전부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 도시에서 꽤나 유명인이었던 모양이다. 덴브리 영애?
'뭐 여기 시장의 딸이라도 되나?'
칼데릭은 전형적인 왕정제인 세인테아처럼 귀족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
군주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절대 중앙집권의 구조인데 그를 견제할 귀족 계급 자체가 애초에 의미가 없기도 했다.
다만, 일정 지역마다 도시나 요새를 관리하는 시장이나 사령관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세인테아의 귀족가처럼 가문을 이루고 직위를 세습한다.
형식적인 귀족 계급은 없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들이 바로 칼데릭의 귀족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럼 주문해주신 대로 곧 요리를 내오겠습니다."
자리에 앉은 여인이 다시 한 번 주위를 슥 둘러봤다.
황급히 눈을 내리까는 다른 손님들을 보며 그녀가 조소를 지으며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툭툭 두드렸다.
우월감에 찬 얼굴을 보니 대놓고 그런 반응들을 즐기는 기색이었다.
'꼴보기 싫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녀에게서 관심을 껐다.
진상한테 신경 쓸 것 없이 조용히 이세계의 치킨 맛이나 보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쨍그랑!
그렇게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다시금 소란이 일었다.
이번에도 근원지는 그녀가 있는 쪽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마실 걸 나르던 종업원이 잔을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근데 하필 그게 진상 여인의 근처였다.
입고 있던 드레스에 음료가 튄 건지 그녀가 드레스 자락을 내려다봤다.
그리곤 곧 짜증과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이 되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사과하는 종업원의 얼굴을 우악스레 후려쳤다.
"악······!"
"이 빌어먹을 년이, 미쳤어? 니깟 게 감히 내 드레스를 더럽혀?!"
뺨 한 대로 만족이 안 됐는지 아예 머리채를 붙잡고 쓰러뜨려서 사정없이 발로 짓밟기 시작한다.
그걸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란에 도로 나온 지배인도 안절부절한 표정으로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
진짜 미친년이 따로없다 생각하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데, 앞자리에 앉은 아셸의 표정이 점점 굳는 게 보였다.
기본적으로 선한 성향을 지닌 그녀는 저런 불의를 좀처럼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저 일방적인 폭력이 눈에 거슬리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전에 말했었지, 네 생각과 의사를 표현하라고."
아셸이 움찔 놀라며 이쪽을 돌아봤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저 종업원을 도와주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해라."
내 대답에 아셸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저, 영애님."
다른 곳에서 먼저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석 자리에 앉아있던 한 젊은 남자였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 그가 쓰러진 종업원의 앞을 슬쩍 가로막고서 비굴하게 웃으며 말했다.
"감히 끼어들어 송구스럽습니다만, 이쯤에서 용서해주시면 이 종업원도 영애님의 관용에 크게 감복할 겁니다. 그러니······."
"넌 뭐야? 안 꺼져?"
여인이 남자를 밀치고 아예 테이블 위에 있던 유리병을 집어들었다. 그걸로 종업원의 머리를 내려치려는 듯.
그에 남자가 깜짝 놀라서 다급히 팔목을 붙잡았다.
터억.
동시에 그녀의 옆에 서있던 호위 기사도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얼마나 세게 쥔 건지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허?"
자신의 팔목을 붙잡은 손을 기가 막힌다는 듯 바라보던 여인이, 곧 서늘한 시선을 남자에게로 옮겼다.
"내 팔을 잡았어? 감히?"
"저, 일단 고정하시고·····."
"제롤드, 이놈 손목 잘라버려."
남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사는 정말로 명령을 수행하려는 듯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검자루로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이었다.
덥썩!
어느새 기사에게 다가간 아셸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팔을 붙잡힌 기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아셸을 돌아봤다.
그리곤 뿌리치려는 듯 힘을 주는 듯이 보였으나······ 그게 될 리가 없었다.
팔이 전혀 미동도 하지 않자 기사는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되었다.
"이건 또 뭐야? 이 천한 것들이 미쳤다고 자꾸 끼어들어?"
"······."
"넌 뭐 하고 있는데, 제롤드! 이 정신 나간 년부터 베어버려!"
그러나 기사의 팔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피가 쏠려 완전히 붉게 된 그의 얼굴을 보고 여인도 상황을 파악했는지 당황하는 듯 싶다가, 시선을 돌려 내가 있는 쪽을 쳐다봤다.
"야, 거기 검은 머리! 이거 네 호위 기사잖아! 빨리 안 말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검은 머리가 지금 날 부른 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가 않는데, 바로스의 표정이 오히려 험악해졌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그가 당장이라도 정령을 소환해 공격을 날릴 것 같았기에 나는 가만히 있으라는 듯 손짓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천박하군."
"······뭐? 뭐? 천박?"
"꽁지에 불 붙은 망아지마냥 날뛰는 꼴이 참 천박하다는 거다. 그만 소란 피우고 꺼져라."
그제야 아셸이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기사가 팔을 쥐고서 뒤로 물러났다.
부들부들 떨고 있던 여인이 비명을 한 번 지르더니 날 죽일 듯 노려보며 소리쳤다.
"죽여! 병신처럼 가만히 있지 말고 저놈 당장 죽여버리라고!"
그에 기사가 머뭇거리다가 결국 검자루로 손을 가져갔다.
나는 아셸에게 말했다.
"검을 뽑으면 둘 다 베어버려라."
테이르 바몬 (2)
내 말에 기사의 동작이 그대로 멈췄다.
금방이라도 식은땀이 흘러내릴 것 같은 표정으로 나와 아셸을 번갈아보다가, 슬쩍 여인을 다시 바라봤다.
"뭐 해! 저 잡놈이 나더러 천박하다고 했다고! 빨리 죽여버리라니까!"
빽빽대며 소리치는 그녀는 상황 파악이고 자시고 반쯤 이성을 잃은 듯 보였다. 마치 떼를 쓰는 애새끼나 다름없는 모습.
'어지간하네, 진짜.'
나는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빈말로 들렸다면 검을 뽑아라. 아니면 그 시끄러운 걸 데리고 어서 꺼지고."
기사는 나를 지그시 노려보다가 결국 검자루에서 손을 뗐다.
직접 아셸과 힘을 겨루고서 실력의 차이는 확실히 깨달은 듯했다.
대신에 입을 열고서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지금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오. 이분께서는 이 도시의 시장님의······."
나는 대꾸하지 대신 아셸에게 손짓을 했다.
그녀가 검자루로 손을 가져가자 기사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도로 입을 다물었다.
"이······!"
그 모습에 난리치던 여인이 분을 못 이기는 듯 부들부들 떨다가, 기사의 뺨을 후려쳤다.
몇 번이고 거세게 뺨을 때리는 손을 기사는 묵묵히 맞기만 했다.
그렇게 화풀이를 한 여인이 다시 시선을 홱 돌려 나를 표독스럽게 노려봤다.
"너, 진짜로 죽여버릴 거야.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 이 도시의 시장이야. 이 도시 전체가 우리 가문의 것이라고."
"······."
"그 천한 혓바닥을 될 대로 놀린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해줄게. 내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면서 빌지 않고는 다시는 두 다리로 못 걷게 만들어버릴 거라고."
그러고는 몸을 확 돌려 가게 밖으로 성큼성큼 나간다.
호위 기사도 그녀를 뒤쫓아서 나가고 가게는 조용해졌다. 주위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몰렸다.
'와······.'
저건 진짜 대단하네.
한편으로는 감탄하며 나는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바로스도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가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내게 조심스레 말했다.
"말씀만 내려주시면 제가 직접 이 도시의 시장을 만나보겠습니다. 저 건방진 계집을······."
"됐다."
엔록도 아니고 다른 군주령에서는 웬만해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내 행방이 다른 군주들한테 드러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쓸데없이 내게 관심을 가지는 놈이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근데 이렇게 됐으니 별 수 있나?
끼어들 때부터 일이 귀찮아질 거라는 건 알았다.
저 대단한 망나니를 키워낸 시장이 누군지 내일 직접 얼굴이나 봐볼까 생각하며, 이내 신경을 꺼버렸다.
"괜찮습니까?"
아셸이 쓰러진 종업원을 일으켜주었다.
지켜보고만 있던 지배인과 다른 종업원들이 뒤늦게 미안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들에게 넘기고 자리로 돌아온 아셸이 조금 멋쩍은 기색으로 고개를 숙이고서 앉았다.
그때 어정쩡하게 서있던 남자도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셸이 나서기 전에 먼저 앞서 끼어들었다가 손목이 잘릴 뻔한 남자였다.
"이야, 감사합니다. 공자님하고 경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하마터면 평생 외수로 살 뻔했네요."
넉살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감사 인사를 전하는 그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장을 보면 평범한 나그네처럼 보이는 남자였다.
그래도 그 미친년의 만행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사람들 중 유일하게 나선 이였기에 성격은 꽤나 선해 보였다. 나서지 않은 사람을 탓하는 건 아니지만.
'······?'
근데, 잠깐만······.
순간 희미하게 느껴진 익숙함에 나는 남자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봤다.
마치 아셸을 처음 발견했을 때와 같은 그 느낌이다.
내가 뚫어지게 쳐다보자 남자도 의아하다는 눈으로 나를 마주봤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지?"
"예?"
그가 순간 당황한 듯하다가 곧 다시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리안이라고 합니다, 공자님."
리안.
그제야 내 기억 속에서 한 NPC 캐릭터의 모습이 떠올랐다.
금발의 녹색의 눈동자를 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과 똑같은 생김새의 젊은 남자.
'허.'
나는 속으로 놀라며, 한편으로는 이 기묘하기 그지없는 우연의 만남에 신기함을 느끼며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방금 말한 가명이 아닌 숨기고 있는 진짜 본명을.
'테이르 바몬.'
중립국 어스힐의 버림받은 막내 왕자.
그는 라사 세계관에서 주연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조연 중에선 가장 주연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와 관련된 어스힐 중립국의 에피소드는 게임의 메인 스토리 중 내가 꽤나 좋아하는 스토리였으니까.
그래, 지금은 5년 전 시점이니까 아직 왕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칼데릭을 떠돌고 있었나······.
"저······ 요리 나왔습니다."
그때 종업원이 완성된 요리를 직접 들고 쭈뼛쭈뼛 테이블로 다가왔다.
먹음직스럽게 튀겨진 치킨 조각들이 바구니 같은 것에 한가득 담겨서 나왔다.
나는 치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리안이 앉아있던 테이블을 바라봤다가,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물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함께 식사하겠나?"
"······예?"
이건 또 뭔 뜬금없는 소리인가 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앞자리에 앉은 아셸과 바로스도 내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은지 의문에 찬 눈으로 날 쳐다봤다.
하지만 맥락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우연히 마주한 이 인연에서 어쩌면 얻을 수 있는 게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케인스 가문은 빌페크 시의 시장직을 9대째 연임하고 있는 5군주령의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시장인 콜튼 케인스는 오랜만에 저택을 찾은 귀빈과 함께 조금 늦은 저녁 만찬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즉위하신 7군주께서 곧바로 상단 하나를 뭉개버리셨다는 소문이 있던데······."
콜튼이 넌지시 묻자 중년의 수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상단이 수작을 부리고 있던 공방의 주인이 군주님과 어떤 연관이 있었던 모양이야. 자세한 사정은 나도 잘 모르네. 뭐가 됐든 상단은 군주성에 완전히 찍혔지만."
"······오싹하군.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 분이신던가? 듣기로는 아예 외부자인 인간이라고 하시던데."
"일개 행정관에 불과한 내가 뭘 알겠나. 나라고 해서 자네보다 뭘 특별히 잘 아는 게 있지도 않네."
그는 업무차 잠시 이곳에 들른 7군주성 소속의 행정관, 라이카였다.
또한 보이듯 콜튼 시장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친우 사이기도 했다.
"상단 일 빼고는 달리 나서서 뭘 하신 적은 없었네. 내가 성을 떠나기 전까지는 무슨 지도를 하루종일 보고 계셨다고 하더군."
"응? 지도라니, 웬······."
"요즘 세인테아와 중립국들 쪽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으니 그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지. 이것저것 다 말하기는 조심스러우니 너무 묻지는 말게."
현재 자리에 그들밖에 없더라도 군주에 대한 건 가벼운 잡담처럼 함부로 떠들 수 없는 이야기였다.
두 사람은 이내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때 식당 입구에서 소란이 일었다.
콜튼은 씩씩거리며 식당으로 들어오는 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찍 돌아왔구나, 얘야. 야시장을 구경하고 오겠다더니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아들만 셋에 아내가 마지막으로 낳고 세상을 떠난 막내딸은 그에게 있어 귀중한 보물과 다름없었다.
딸, 덴브리가 라이카에게 먼저 인사부터 건넸다.
"두 분의 식사를 방해해서 죄송해요."
라이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조금 불쾌했으나 콜튼이 막내딸을 끔찍이 아낀다는 걸 알기에 적당히 넘어갔다.
그녀가 콜튼에게 말했다.
"제가 방금 밖에서 무슨 모욕을 겪고 왔는지 아세요, 아버지?"
"······음?"
"주제도 모르는 천것이 나한테 감히 천박하다는 말을 지껄였다고요! 이 머저리는 검도 못 뽑고 그걸 가만히 보고나 있고!"
콜튼이 표정을 굳히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라이카도 흥미진진하게 변한 표정으로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였다.
덴브리 영애가 상종 못할 망나니인 건 이 도시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사실이었다. 한데 그런 그녀가 누군가에게 망신을 당하고 돌아왔다니?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해보거라."
그에 덴브리는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을 주르륵 설명했다.
드레스에 마실 걸 쏟은 종업원, 그 종업원을 교육하고 있는데 한 호위 기사가 끼어든 것, 그 기사의 주인이 퍼부은 폭언까지.
설명이 이어질수록 라이카는 조금 황당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고작 그까짓 일로 그런 심한 폭력을 행했다는 걸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콜튼의 표정은 더욱 심각하게 굳은 채였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건 그녀의 행실이 아닌 그녀가 당한 모욕이었으니까.
"그 놈팽이가 누구인지는 아느냐?"
"몰라요. 끽해봐야 어디 구질구질한 가문의 놈이겠죠."
"음······."
"너무 치욕스러워서 죽을 것 같아요, 아버지. 그놈한테 바닥에 머리를 조아려 사과받지 않고서야 살 수가 없어요."
콜튼이 옆에 서있는 호위 기사 제롤드에게 물었다.
"그 기사의 실력이 어떻더냐? 솔직하게 말해서."
"······저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자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콜튼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턱을 쓰다듬었다.
제롤드는 충분히 뛰어난 실력을 지닌 기사였다. 그렇기에 막내딸의 호위로 붙여준 것이었고.
그런 그보다 훨씬 뛰어난 기사를 호위로 데리고 다니는 자라면 당연히 평범한 신분은 아닐 것이었다.
이 인근 가문의 귀족은 아닐 테고, 다른 군주령이나 어디 먼 도시에서 온 귀족인가?
"알겠다. 기다리고 있거라."
콜튼의 말에 덴브리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느 가문의 놈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 도시 안에서는 바로 그가 왕이나 다름없었다.
한데 감히 딸을 모욕한 것도 모자라 베어버리라고 명령까지 했단 말인가?
"어쩔 생각인가?"
"어쩌긴, 내 앞으로 데려와야지."
라이카의 물음에 콜튼은 간단히 대답했다.
일단 저택으로 데려와 직접 얼굴을 보고서 어느 가문의 놈팽인지부터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완만하게 해결해야겠다 싶은 상대면 그리 하고, 아니면 제가 한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그자들의 인상 착의가 어땠느냐?"
"흑발의 사내와 호위 기사 쪽은 백발의 여인이었습니다."
콜튼은 곧바로 기사들을 불러 그 두 사람을 찾아서 데려오도록 명령했다.
한편 옆에서 듣고 있던 라이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흑발의 남자와 백발의 여기사? 그거 어째······.
'내가 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곧 터무니없는 상상으로 치부하고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꽤 신기한 우연이다 싶었다.
말이 되는 소리여야지, 군주성에 계실 7군주께서 뜬금없이 이곳 5군주령에 왜 계신단 말인가.
어쨌든 라이카는 꽤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하며 기사들이 어서 그 겁없는 자들을 데리고 오기를 기다렸다.
테이르 바몬 (3)
"그럼 잘 먹겠습니다!"
리안이 입맛을 다시며 눈앞의 치킨을 바라봤다.
식사 계산은 모두 내가 하겠다는 말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서 앉은 그였다.
"튀긴 닭 요리라는 게 신기해서 들어와봤다가 너무 비싸서 딴 걸 시키려던 참이었는데 말입니다, 하하. 이거 공자님 덕분에 감사하게도 얻어먹게 됐네요."
닭다리 하나를 손으로 집어 앞접시로 가져가는 모습에 아셸과 바로스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원래 손으로 들고 뜯는 거 맞는데······.'
나도 편하게 먹고 싶었지만 품위의 문제로 별 수 없이 포크를 사용했다.
내가 다리 하나를 가져가자 다른 둘도 자신들의 몫을 덜어갔다.
생긴 게 생소한지 아셸은 선뜻 입에 대지 못하고 덜어간 허벅지 부위를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곧 나이프로 끝부분을 조금 잘라서 먹기 시작했다.
그리곤 조금 놀란 기색을 띠더니 먹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게 보였다.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맛은 있네.'
본래 알고 있는 익숙한 맛과 다른 나름대로의 특색이 있는 치킨이었다.
고기를 튀긴 요리가 웬만해서야 맛이 없을 수가 있겠냐만.
그렇게 잠시 말없이 식사를 하고 있자니 지배인이 직접 시키지도 않은 음료들을 내왔다.
"종업원을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음식의 값은 모두 받지 않을 테니 맛있게 드셔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그가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날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 공자님. 한데 아까 전에 시비가 붙으신 덴브리 영애는······."
"됐으니 일 보게."
그녀에 대해 나한테 주의를 주려는 듯 보였지만 쓸데없는 참견이었다.
지배인이 쭈뼛쭈뼛 물러가고, 어느새 앞접시에 뼈가 수북히 쌓인 리안이 내게 물었다.
"한데 공자님께선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시장이라면 이 도시의 왕이나 다름없는 사람 아닙니까."
"자네야말로 그럼 왜 나섰나?"
"그야 뭐······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그렇게 패는 걸 보고만 있을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그 여자가 시장의 딸이었는지는 저도 몰랐습니다. 저는 이 도시 사람이 아닌지라."
"알았으면 안 나섰을 건가?"
"아뇨, 그래도 나서긴 나섰겠죠. 물론 손까지 잘릴 뻔할 줄은 몰랐지만요, 하하."
실없이 웃으며 얘기하는 게 마치 자신이 아닌 남 얘기를 하는 듯했다.
이 남자는 보시다시피 이렇게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게임에서도 끝내 최후를 맞이하기 직전까지도 이렇게 웃으면서 갔었지, 아마.
"그런데 정말 보통 성질이 아닌 것 같은 여자였는데 말입니다. 주제가 넘는 말인 건 압니다만, 공자님께서도 서둘러서 도시를 떠나시는 편이 좋지 않을지······."
나는 화제를 다른 걸로 돌렸다.
"자네는 행색을 보니 떠돌이인 듯한데."
"아, 예. 지금은 칼데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는 중입니다."
"어째서?"
"어째서라고 물으신다면야······ 나그네의 방랑에 어디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저 정착하고 있을 곳이 없으니 발이 닿는 대로 가는 것이죠, 하하."
입가엔 웃음이 걸려있었으나 어쩐지 조금 공허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나는 현재 그의 처지가 어떤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가도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그렇다고 혈육의 연을 차마 완전히 끊어버릴 수도 없는.
물론 지금 내가 신경을 쓰고 있는 건 그의 그런 뒷배경이 아니라 따로 있었다.
굳이 지금 그를 붙잡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음? 아무 기척도 없었는데 어떻게 적의 매복을 알아챘냐고? 하하, 내가 감이 좀 좋은 편이라 말이지.]
[좋아, 자네에겐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특별히 자네에게만 알려주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부디 비밀로 해주게나. 사실 나는 신비를 하나 가지고 있다네.]
어스힐 왕국 에피소드에서 적국과의 전쟁이 진행되는 중 리안, 그러니까 테이르 바몬이 유저에게 했던 대사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느낌의 대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이 대륙에서 극히 드문 신비 사용자였다.
한마디로 나처럼 지니고 있는 신비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름은 뭔지 안 나왔었지만, 감각과 반사 신경을 아득히 증폭시켜주는 신비라고 했었지.'
그 신비의 능력 덕분에 그는 전쟁 중 한 번도 적의 기습과 매복에 당했던 적이 없었다.
또한 그리 뛰어나지 않은 육체 능력으로도 자신보다 훨씬 강한 적장들을 무찌르기도 했다.
내가 확인하고 싶은 건 하나였다.
지금의 시점이 과연 그가 그 신비를 얻기 이전인가, 이후인가?
[신비를 어떻게 얻게 된 거냐고? 그야 그냥 우연이었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륙 이곳저곳을 떠돌던 때가 있었네. 모험가 일을 하기도 했고, 인적 드문 험지를 탐험하기도 했지.]
[어쩌다 한 골동품점에서 보물 지도랍시고 다 찢어진 지도 하나를 강매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정말로 던전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였지 뭔가? 그리고 거기서 신비를 얻게 된 거라네.]
기억하기로 분명 그는 지도에 표시된 한 던전에서 신비를 얻었다고 했었다.
그 위치가 어디인지도 대사에 대충 나왔던 것 같기는 한데 아쉽게도 거기까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만약 아직 신비를 얻기 전이라면?'
내게도 그 신비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었다.
감각과 반사 신경을 증폭시켜주는 신비.
그건 내게 있어서 상당히 유용할 능력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어차피 육체가 전혀 따라주지를 않으니 쓸모도 없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부동 장막을 얻었다.
상대의 공격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으니 그걸 빠릿빠릿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감각과 반사 신경도 중요해진 것이었다.
'······생각해보니까 진짜 필요한 능력이긴 하겠는데.'
이전에 오크킹에게 기습을 당했을 때를 생각해도 그랬다.
거리가 상당히 멀리 떨어져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놈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까지 접근해왔다.
장막을 펼치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나는 그 육중한 주먹에 몸이 산산조각 터져나갔을 것이다.
고작해야 70레벨이 그 정도인데 그보다 훨씬 높은 레벨의 괴물들은? 다른 군주들은?
만약 그들이 나에게 적의를 가지고 공격한다면, 웬만큼 멀리 떨어진 게 아니고서야 그에 반응해서 장막을 펼치기도 전에 죽게 될 것이다.
아니면 어디에 숨었거나 아주 멀리 있는 상대에게 기습이나 저격을 당하는 경우의 위험도 있고.
절대적인 방어기를 가졌으면 뭐 하나? 사용하기도 전에 목이 따이면 끝인데.
이 세계의 초인들의 속도와 내 인지력 사이엔 분명 그만큼의 거대한 격차가 있었다.
물론 아직은 리안이 신비를 얻은 상태인지 아닌지는 모르기에 설레발이었다.
그걸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기에 나는 넌지시 다른 질문을 했다.
"대륙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면 던전 같은 걸 발견한 적이 있나? 아니면 유적이 숨겨진 장소라거나."
"던전이나 유적 말입니까. 찾아보려고 한 적은 있지만 아쉽게도 아직 한 번도 발견해본 적은 아직 없습니다. 아, 이야기가 나와 생각난 건데······."
그때 뭔가 생각난 듯한 표정으로 리안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돌돌 말린 낡아 보이는 양피지.
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게 전전 도시에서 들렀던 골동품점에서 산 지도입니다만, 주인장 말로는 유적이 숨겨진 곳을 가리키는 보물 지도일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
나는 놀란 기색을 숨기고서 지도를 바라봤다. 설마?
마침 딱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에 뭐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싶을 정도였다.
"참 어이가 없죠. 괜히 살짝 펼쳐봤다가 조금 찢어먹어서 은화 몇 닢에 강매당했습니다. 그래도 이왕 산 김에 한번 지도에 있는 대로 찾아가볼까 생각해서 그리로 향하고 있는 길이었습니다."
"한번 봐도 되겠나?"
"얼마든지요. 열 번 보셔도 됩니다."
리안은 순순히 내게 양피지를 건네주고서 다시 치킨으로 관심을 돌렸다.
나는 그것을 천천히 펼쳐서 살펴봤다.
도저히 내용이 진짜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조잡하고 엉성한 지도.
지도가 표시하고 있는 위치는 5군주령과 4군주령의 사이에 있는 장소였는데, 무슨 괴상한 암호 같은 문자도 쓰여있었다.
'······이게 진짜 맞나?'
아무리 봐도 그냥 누가 낙서해놓은 쓰레기처럼 보이긴 하는데······
지도를 살펴보다가 다시 리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튼 이게 내 기억대로 진짜 신비가 숨겨진 장소로 안내할 지도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신비를 얻는다면.
나는 미래에 그가 얻을 신비를 낼름 꿀꺽해버리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 지도를 내가 다시 살 테니, 팔 생각이 없는가?"
"······예에?"
리안이 깜짝 놀라서 날 쳐다봤다.
그러다가 곧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아유, 아닙니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그냥 가지십시오. 제가 은혜도 입었는데요, 뭘."
"······이게 진짜 고대의 유물이 숨겨진 지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진 않나?"
"그러면야 별 수 없죠. 혹시나 정말로 고대의 마법 유물이라도 찾으신다면 공자님께서 좋게 써주십시오, 하하."
그는 이게 정말 보물 지도라고는 생각하지도 않는 듯했다.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사람 좋게 말하니 솔직히 좀 양심이 찔린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런 거나 따지고 있을 처지도 아니었다.
애초에 그렇게 하나하나 따질 거면 미래의 지식을 활용하고 있는 것부터가 못할 짓이지.
그렇게 지도를 얻고 식사를 마친 뒤, 가게 앞에서 그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럼 감사했습니다, 공자님. 저는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나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 만남을 그냥 이렇게 끝내도 될까?
미래에 일어날 중립국 간의 전쟁은 칼데릭과 세인테아의 세력 구도에도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었다.
내가 지금 당장 거기에 간섭해서 뭘 어쩔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애초에 내 코가 석자인데 신경 쓸 시간도 없지만······.
"······."
나는 끝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내가 이 게임에 빙의했던 순간부터, 칼데릭의 군주가 된 순간부터 미래에 대한 무질서는 계속해서 쌓이고 있었다.
그러니 게임의 스토리에 얽매여야만 할 게 아니다. 결국 판단은 내 몫이었다.
"테이르 바몬."
내 말에 리안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굉장히 당황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언제까지고 도망만 쳐봐야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루라도 빨리 왕국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다."
"······잠깐만, 그걸 어떻게."
"나는 칼데릭의 7군주 론이다."
갑작스러운 정체 공개에 옆쪽에 있던 아셸과 바로스가 흠칫 놀라서 날 돌아봤다.
리안, 테이르는 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표정이 다채롭게 변하다가 결국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
"중립국들 사이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건 알고 있을 거다. 더 늦기 전에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라."
"······."
"그리고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이 왔다 싶으면, 7군주령으로 전령을 보내도록. 상황에 따라 어쩌면 내가 어스힐을 도울 수도 있겠지."
나는 그 말만을 남기고 멍하니 굳어서 서있는 그를 뒤로 한 채 몸을 돌렸다.
아셸과 바로스가 내 뒤를 따랐다.
'고작 이걸로 저 녀석이 바로 왕국으로 돌아갈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의 연결 고리는 만들어뒀으니 나머지는 그의 선택에 달린 것이었다.
***
여관으로 돌아와서 나는 지도를 다시 살폈다.
위치는 5군주령과 4군주령 사이에 있는 숲 지대니까 경로가 꼬이지는 않는다.
'이것도 찾는 데 오래 걸리려나······.'
얻을 수 있는 신비가 하나 늘어난 건 좋은 일이었지만, 고생도 그만큼 늘어날 걸 생각하니 벌써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만 자려고 자리를 정리하고 침대에 누우려는데 바깥쪽에 소란이 일었다.
똑똑.
곧 노크가 울렸다.
"들어와라."
조심스럽게 방문을 연 바로스가 굳은 표정으로 바깥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홀에 시장의 기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말에 나는 바로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울리더니 일련의 기사들이 뒤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셸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가장 선두에 서있던 기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아셸을 바라보더니, 내게로 시선을 옮겨 말했다.
"공자가 덴브리 아가씨를 모욕했다는 그 사람이 맞소?"
"······."
"맞는 모양이군. 시장님께서 공자를 데려오라는 명을 내리셨소. 부디 얌전히 따라주길 바라겠소."
나는 상황을 바로 파악하고서 헛웃음을 흘렸다.
안 그래도 날이 밝으면 찾아가려 했는데 이렇게 바로 나섰단 말이지.
"안내해라."
한번 어디까지 가나 보자.
나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까닥였다.
***
"지금 저택의 홀에 있다고 합니다, 시장님."
"알겠다."
딸을 모욕한 무뢰한을 데려왔다는 보고를 받은 콜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앉아있던 덴브리도 신나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행정관 라이카는 속으로 혀를 차며 콜튼을 돌아봤다.
"나도 함께 가서 구경해도 되겠나?"
"좋을대로 하게."
저택의 홀로 이동하자 그 한가운데 서있는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덴브리는 중간에 서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남자도 그녀를 발견하고 눈을 마주쳤다.
그녀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금방 다시 만났네?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 말했지, 내가?"
콜튼도 남자와 그 양옆에 서있는 두 사람을 둘러보며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네가 내 딸을······."
옆에서 돌연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