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카가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그들 일행을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오한이라도 들린 듯 몸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그러다가 곧 무릎을 바닥에 부서져라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군주님을 뵙습니다!"
······뭐?
방금 그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콜튼은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저 빌어먹을 놈에게 어떤 지옥을 보여줄까 즐거운 고민을 이어가고 있던 덴브리도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에?"
홀에 지독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엘프가 인상을 찌푸리며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라이카를 바라보다가, 남자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7군주성의 행정관인 라이카입니다. 이 도시에 출장을 왔었던 모양입니다."
남자, 7군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홀에 놓여있던 의자 중 하나로 다가가서 앉았다.
"할 말이 있으니 불렀겠지."
그가 선 채로 굳은 콜튼과 다른 사람들을 주욱 훑어보고는 말했다.
"불러서 왔으니 해보도록."
초감각 (1)
머릿속이 하얗게 물든다.
콜튼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옆에서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채 미동도 없이 엎드려있는 라이카.
방금 그가 대체 뭐라고 한 거지?
'······군주?'
대체 누가? 저 남자가?
잘못 들은 거리라 믿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명백히 그것을 부정했다.
의자에 앉은 7군주가 다리를 꼬고서 홀에 있는 사람들을 슥 둘러봤다.
그를 데리고 와서 당당하게 서있던 기사들도 얼어붙은 채 숨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이윽고 콜튼도 서서히 사색이 되었다.
숨 막히는 고요함 속에서,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받아들이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최근에 칼데릭 전역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7군주좌의 새로운 주인.
······그 7군주가 눈앞에 있는 바로 저 남자였던 것이다.
바로스가 조심스레 7군주의 눈치를 보고서 물었다.
"한데, 행정관께선 어째서 빌페크의 시장과 이 자리에 함께 있으신 겁니까?"
마치 너의 결백을 증명하라는 듯 압력이 가득한 어투였다.
그러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바로 목이 떨어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라이카는 전신을 휘감아오는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며,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관련된 행정 문제로 5군주령의 도시들을 차례로 들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시장과 함께 있던 건 그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기 때문인데······ 딸을 모욕한 이들을 저택으로 불러오겠다고 하기에 상황을 지켜보고자 호기심에 그를 따라서 나왔습니다. 군주님께서 이 도시에 계실 줄은 감히 상상도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실제로도 라이카는 정말로 억울했다. 그 역시 상황이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빌페크에서 잠시 휴양을 즐기고 있던 그에게 있어 이 상황은 날벼락이었다. 아니, 날벼락도 아닌 재앙이었다.
단지 7군주의 얼굴을 알기에 보자마자 그나마 생존 본능으로 빠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 뿐이다.
뜬금없이 7군주가 군주성을 떠나 이 도시에 있었을 줄을, 그리고 덴브리의 영애와 시비가 붙었다는 상대가 그였을 줄을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는가?
물론 그 의문을 7군주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기에 라이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도록 바짝 엎드리는 것.
바로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찌 됐든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며 유희로 즐기려 했다는 게 아닙니까."
"그, 그것이······."
라이카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 이게······ 어······?"
한편 여전히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덴브리가 콜튼을 돌아봤다.
바로스가 시선이 이번엔 그런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군주께서 자비롭게도 그냥 넘어가셨기에 덴브리의 망발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데 이미 한 번의 관용을 베풀어주셨는데도 감히 기사들을 시켜 이곳까지 불러왔단 말인가?
"시장, 계속 그렇게 서있을 것이오?"
퍼뜩 정신을 차린 콜튼이 덴브리의 어깨를 잡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20년이 넘도록 별 탈 없었던 시장 인생에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억지로 함께 무릎을 꿇린 덴브리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태어나서 한 번도 무릎이라는 걸 꿇어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하지만 완전히 혼이 빠져나간 콜튼의 표정을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죄송······ 합니다, 7군주님."
7군주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할 말을 해보라고 했을 텐데, 무릎을 꿇고 뭘 하는 건지."
"죄송합니다. 감히 위대하신 분을 몰라뵙고 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시장."
7군주의 목소리가 한층 서늘해졌다.
"부른 용건을 말하라고 했다. 계속 앵무새처럼 그러고 있을 건가?"
콜튼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찌 말할 있겠는가? 감히 딸아이를 능멸한 건방진 놈에게 죗값을 치루게 할 생각이었다고.
이미 다 알면서 제 입으로 내뱉도록 물어보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죽는다.'
정말로 죽는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가문이 멸문할 수도 있었다. 7군주가 그렇게 하려 한다 해도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후에 소식을 들은 5군주는? 멋대로 자신의 군주령에서 난리를 치고 시장을 죽였다고 격노할까?
아니, 사정을 들으면 그렇구나 하며 신경도 쓰지 않겠지.
칼데릭에서 군주란 그런 존재였다.
같은 군주 외에는 누구도 감히 눈높이를 같이 할 수 없는, 기어오르려 들었다가는 얼마나 높은 직위를 지녔든 벌레처럼 짓밟혀 죽는.
콜튼은 대답하는 대신 바닥에 머리를 쾅 처박았다.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모두 딸아이를 잘못 키운 제 잘못입니다! 그러니 죗값은 부디 저만으로······!"
쾅쾅쾅!
미친 사람처럼 이마가 다 깨져서 피가 흘러도 연신 머리를 처박는 콜튼의 모습을 보며, 옆에 있던 덴브리도 덜덜 떨었다.
빌페크에서 황제와 다름없던 아버지가 이러는 모습을 보니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천둥벌거숭이처럼 살아온 그녀라도 군주라는 존재의 위상이 칼데릭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모르진 않았다.
"시장, 멈추시오. 감히 군주님 앞에서······."
미간을 좁힌 채 말하던 바로스가 바로 말을 끊고 뒤로 물러났다.
7군주가 이제 가만히 있으라는 듯 손짓을 했기 때문이다.
"시장."
"······."
"세 번째 말하는 것이다. 날 왜 이곳에 불렀는지 이유를 설명해."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듯, 7군주의 목소리는 무심하면서도 공포스러웠다.
그제야 콜튼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든 이 괴물에게는 어떠한 감흥도 줄 수 없음을. 최선은 그저 시키는 대로 하고, 그나마 편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뿐임을.
"······딸아이를, 모욕한 이가 있다고 들어서 데려와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7군주가 말했다.
"자세한 상황은 제대로 전해들었나?"
"······예."
"말해봐라."
"딸아이의 드레스에 종업원이 마실 것을 쏟았고, 그래서 딸아이가 종업원을 교육하는 중······."
"교육이라. 고작 옷에 얼룩이 진 것 따위로 그리 사정없이 폭력을 휘두른 게 교육이란 말이지."
"······."
"심지어 말리는 사람의 손목까지 베어버리려 들더군. 그게 교육이라면, 지금 상황에선 내가 무엇을 해야 적절한 교육이라고 생각하나? 변경 도시의 시장이 기사들을 시켜 반강제로 군주를 끌어온 이 경우에 말이야."
콜튼이 몸을 움찔 떨었다.
7군주의 시선이 덴브리에게로 향했다.
"가랑이 사이를 기지 않고는 두 다리로 못 걷게 만들겠다고 했던가. 평생에 처음 들어본 말이라 재밌긴 했어."
엎드려있는 콜튼과 라이카의 안색이 더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그런 말까지 지껄였단 말인가?
덴브리가 공포를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자, 잘못했습니다. 군주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7군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른 군주의 영역에서 소란을 피우기 싫어 넘어간 일을 여기까지 잘도 키웠군."
"정말, 정말로 죽을 죄를······."
"생각에 변함은 없다. 이런 우습지도 않은 일에 소란을 키우기도 귀찮아."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콜튼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자기 군주령에서 벌어진 일이니 나중에 5군주가 알아서 처리하든가 하겠지."
······그 역시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이 소식이 5군주의 귓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7군주가 5군주와의 사이가 어떤지 그런 건 관계없었다.
감히 시장 따위가 군주를 조금이라도 모욕했다는 것 자체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당장 7군주가 손을 쓰지 않아도 5군주가 직접 대가를 물어올 건 정해진 미래였다.
7군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말은 전부 끝났다는 듯 홀의 입구로 몸을 돌렸다.
바로스가 슥 주위를 둘러보자, 주위에 멍하니 서있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7군주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 같잖은 권력으로 남을 짓밟으며 살았으면 언젠가 이리 짓밟힐 각오도 했어야지. 안 그런가?"
7군주의 말에 콜튼이 대답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7군주와 다른 두 사람의 모습이 서서히 홀에서 출구로 멀어져갔다.
***
저택을 빠져나오는 것으로 나는 시장에게서 완전히 신경을 꺼버렸다.
그들에게 뭘 처벌을 내리거나 할 생각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자비를 베푸는 게 아니라, 고작 이딴 일에 내 손에 피를 묻히기도 찝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뭘 할 것도 없이, 어차피 이번 일이 5군주의 귀에 들어가면 시장과 덴브리는······ 뭐가 됐든 아주 안 좋게 되겠지. 내가 굳이 그녀에게 말을 전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 시간 동안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게 이번 일의 응보라면 응보겠다.
"음······."
어느새 깊은 밤이 다 된 시간.
여관으로 돌아온 나는 테이르에게 받았던 지도를 다시 살펴봤다.
그리고 5군주령 지도와 비교해서 맞춰보며 지도의 위치를 좀 더 자세히 특정해봤다. 바로스의 도움을 받아서.
"5군주령과 4군주령의 북서부 경계에 있는 숲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곳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경로에서 살짝 돌아가기는 하지만 신비를 얻을 수만 있다면야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다시 테이르의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근데 이 문자는 뭐지.'
지도의 한편에 써있는 알 수 없는 괴상한 문자들. 암호인가?
이것도 뭔가 목적지와 관련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아, 테이르는 알고 있었을 수 있으니 한번 물어봤어야 됐는데. 지도에 정신이 팔려서 미처 신경을 못 썼다.
문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바로스가 다시 말했다.
"숲, 가장 거대한 나무, 황혼마저 완전히 가라앉은 때 생명 없는 가지가 모험자들을 인도하리라, 라고 써져있습니다."
"······?!"
나는 속으로 놀라며 그를 돌아봤다.
"이걸 읽을 수 있나?"
"예. 고대에 사용했던 암호 문자 중 하나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냐는 눈빛으로 바라보니 대답이 돌아왔다.
"예전에 모험가로 활동하며 유적 탐사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어 고대의 문자에 대해선 조금 압니다. 부족한 재주입니다."
"······그렇군."
얘는 진짜 못하는 게 없네.
칼데릭의 지리에 밝은 이유가 저런 과거가 있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가장 거대한 나무?'
잠시 생각에 잠겨서 문장의 의미를 해석해봤다.
가장 거대한 나무는 숲에서 가장 거대한 나무라는 거겠고, 황혼이 완전히 가라앉은 때면 밤을 말하는 건가?
근데 마지막의 생명 없는 가지는 뭐야.
"생명 없는 가지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송구하지만 그것까진 잘······."
바로스에게 다시 물었지만 의미에 대해선 그도 감이 오지 않는 듯했다.
아셸에게 시선을 돌리자 조금 멍하니 서있던 그녀가 급히 생각하는 척을 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직접 가서 봐야 알려나.'
그럼 일단 그럼 당장의 목표는 정해졌다.
지도에 표시된 숲으로 이동해서 가장 거대한 나무를 찾는 것으로.
초감각 (2)
날이 밝고 우리는 빌페크 시를 떠났다.
5군주령과 4군주령의 북서부 경계에 있는 이름 없는 숲으로.
'이번에도 던전인가.'
마차에서 생각에 잠긴 채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이번에도 신비가 숨겨져있는 장소는 아마 던전일 것이었다. 테이르가 그리 말했으니까.
유적과 던전의 차이는 위험 요소가 있냐 없냐의 차이였다.
얌전히 보물만 숨겨져있으면 유적이고, 가디언이나 함정 같은 위험도 있으면 던전이었다. 저번 부동 장막을 찾을 때처럼.
이번에 찾아야 할 던전은 내게 있어 아예 정보가 없는 장소였기에 위험이 미지수이기도 했다.
'테이르도 결국 던전을 돌파하고 신비를 찾았다는 소리니까, 그리 위험한 던전은 아닐 것 같지만······.'
전에 봤을 때 테이르는 고작 20레벨대에 불과했으니 던전의 수준도 그 정도일 확률이 높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고 결국은 직접 겪어보지 않는 이상 확실한 건 없었지만 말이다.
'그보다 아직 찾지도 못했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네.'
위험도는 둘째치고, 일단 암호를 해석해서 던전을 찾는 것부터가 문제인데 말이다.
시간이 흘러 5군주령의 북서부 변경에 위치한 오론 시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꽤 이른 낮에 도착했기에 숙소를 잡고 바로 모험가 길드로 이동했다. 길잡이 고용을 위해서.
숲에서 가장 큰 나무라고 표현했으면 그만큼 눈에 띌 정도로 크다는 소리니까, 알고 있는 이들이 많지 않을까 싶었다.
길드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홀은 넘쳐나는 모험가들로 소란스러웠다.
나는 그들을 한번 슥 둘러본 다음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조건에 맞는 가장 실력 좋은 길잡이를 10골드에 고용하겠다."
뚝.
거짓말처럼 소란이 멎고 시선들이 일제히 이쪽으로 향했다.
모두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나는 다시 말했다.
"10골드에 길잡이를 고용하겠다. 북서부 경계의 숲에서 가장 거대한 나무를 알고 있는 자가 있나?"
어째 길잡이를 고용할 때마다 돈지랄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뭐, 돈이야 넘치도록 있고 제일 효과적인 방법인데 아무렴 어떤가.
모험가들이 서로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말소리가 하나둘씩 흘러나왔다.
"······멘그로디 나무 말하는 거 아냐?"
"맞는 것 같은데. 북서부 숲에서 가장 큰 나무가 그거 말고 또 뭐가 있겠어."
반응들을 보니 알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나무였던 모양.
잘 된 일이었다. 적어도 나무를 찾는 데는 애먹지 않겠네.
"······절 고용해주십시오! 멘그로디 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제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곧 한 모험가가 손을 들고 외쳤다.
그를 시작으로 다른 모험가들도 하나둘씩 끼어들었다.
"지랄하고 있네, 이 도시 모험가들 중에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제가 저 녀석보다는 실력이 훨씬 뛰어납니다! 최대한 신속하고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안내해드릴 수 있습니다!"
순식간에 고용 경매장이라도 열린 분위기가 되서 카운터의 직원들이 당황한 게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속으로 약간의 미안함을 전했다. 이거 너무 개판을 벌였나.
그때 위쪽에서 쩌렁쩌렁한 외침이 들려왔다.
"다들 닥쳐! 가장 실력 좋은 모험가를 고용하겠다고 하셨잖냐!"
마치 짐승이 포효하는 듯한 걸걸한 목소리에 난리를 피우던 모험가들의 입이 일제히 다물어졌다.
나는 위층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시에 누군가 난간을 훌쩍 뛰어내려 밑으로 내려왔다.
[Lv. 41]
허리춤에 여러 자루의 숏소드를 메고 있는, 드러난 맨살 이곳저곳에 상처 자국이 가득한 수인족 여인.
"나으리, 제가 여기선 가장 실력이 뛰어나니 절 고용하시죠."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그녀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험가 중에서 40레벨이 넘는 수준의 인재는 상당히 드무니까. 특급의 모험가인가?
"아니, 레일로 씨······ 지명 의뢰 받을 것도 넘쳐나면서 이런 의뢰까지 가져가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한 모험가가 불만 어린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녀가 홱 시선을 돌려 노려보자 곧바로 깨갱하며 수그러들었다.
"뭐, 병신들아. 불만이면 나보다 실력이 좋던가. 그딴 실력들로 길 안내 한 번 하고 10골드나 받겠다고? 양심이 다 뒈졌냐?"
그에 더 나서서 불만을 내뱉는 모험가들은 없었다. 인상을 찌푸리거나 한숨을 내쉬며 포기한 듯 돌아설 뿐.
거친 언사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받는 의뢰금이야 다 실력이랑 비례하는 거지.
내게로 다시 시선을 돌린 그녀가 조금 영업적인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특급 모험가인 레일로입니다. 이 오론 시에서 저보다 실력이 뛰어난 모험가는 없으니 고용해도 후회는 없으실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돈을 꺼내들었다.
"선금은 일단 절반이면 되겠지?"
금화 다섯 닢을 건네받은 레일로가 씩 웃었다.
"화끈하시네요. 출발은 언제 하실 생각입니까?"
"가능하면 지금 바로."
"좋습니다. 그럼 바로 가시죠."
그렇게 꽤 실력이 좋은 길잡이를 빠르게 고용했다.
***
숲은 도시에서 꽤나 거리가 떨어져있었기에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레일로 한 명만 태우면 됐기에 별 문제는 없었다.
"이야, 겉보기엔 평범하던데 이거 상당히 고급 마차네요? 흔들림이 이 정도로 적은 마차는 처음 타봅니다."
반대편 자리에 앉은 레일로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말했다.
옆자리에는 아셸이 언제나처럼 묵묵히 앉아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항상 무표정인 아셸이었지만 계속 보다 보니 저것도 약간의 미약한 차이가 있다는 게 구분이 됐다.
지금은 시끄럽게 구는 레일로가 거슬리는지 별로 좋지 않은 기분인 게 느껴졌다.
"아, 너무 소란을 피웠네요. 죄송합니다."
그녀도 눈치는 있는지 곧 얌전해져서 창밖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잠시 뒤에 내게 물었다.
"한데 멘그로디 나무는 왜 찾으시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그걸 이제야 묻는 건가.
의뢰인의 누구인지, 또 의뢰의 목적은 뭔지, 그런 걸 확인할 거면 보통 의뢰를 받기 전에 확인하는 게 보통일 것이었다.
아니면 어떤 위험한 일에 휘말릴 줄 알고 아무 의뢰나 덥썩덥썩 받겠나.
이 레일로라는 모험가는 그만큼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레벨을 보면 그럴 만했지만.
나는 적당히 둘러대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생각해보니 이번에는 굳이 숨길 이유가 있나?
어쩌면 던전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딴 마음을 품어봤자 아셸이 있고.
"던전을 탐험해본 적이 있나?"
내 뜬금없는 물음에 레일로가 대답했다.
"몇 번 있죠. 그건 왜 물으십니까?"
"멘그로디 나무로 향하는 것도 던전을 찾기 위함이니까."
"아······ 역시 그러셨습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대충 감이 오긴 했습니다. 좀 뜬금없는 장소로 길 안내를 의뢰하는 나으리들이면 유적을 찾는 게 대부분이죠."
이런 종류의 의뢰도 꽤 많이 맡아본 듯한 어투였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 멘그로디라는 나무와 관련해서 생명 없는 가지라 불리는 무언가가 있나?"
"······생명 없는 가지요? 글쎄요, 그런 건 처음 들어봅니다만."
레일로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곧 흥미롭다는 기색이 되었다.
"근데 그게 던전으로 향하는 암호인 모양이군요? 암호가 있는 던전이 찾는 재미가 쏠쏠하긴 하죠."
그렇게 말하고는 생명 없는 가지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휙휙 머리를 털어버렸다.
"아무튼 던전 찾기라면야 일이 훨씬 재밌어지네요. 나무까지 안내한 다음에 저도 계속 껴서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 의뢰금을 더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상관없지만 던전을 찾으면 내부 탐사까지 함께할 생각은 없다."
그 말에 레일로가 킥킥 웃었다.
"제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 만큼 추가 수당이나 얹어주십쇼. 그리고 솔직히 별로 기대도 안 합니다. 백에 아흔아홉은 꽝인 게 유적 찾기인데요, 뭘."
그건 그렇지.
신비 찾기에 연신 성공해서 그런지 나도 좀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던전이라는 게 사실 그리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다.
***
숲에 도착한 뒤에는 마차에서 내려 이동을 시작했다.
바로스는 마차를 지켜야 했기에 숲에 초입에 두고 나와 아셸만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레일로가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근데 생각해보면 웃기지 않습니까?"
"······?"
"던전이라는 게 고대의 마법사들이 자기들 유산을 남겨둔 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근데 그럼 그냥 자기들 제자한테나 멀쩡히 넘겨서 계승하지, 던전 같은 걸 만들어서 찾아오는 불나방들을 죄다 죽이는 건 무슨 더러운 심보인지 원."
글쎄, 그럼 유지를 이을 제자가 없는 마법사들이 만든 게 아니려나.
아니면 괴팍한 마법사들이 그냥 심심해서 만들었거나.
애초에 게임의 설정일 뿐이니 깊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뒷배경이야 적당히 붙이면 그만이고, 오히려 RPG에 던전이 없으면 그게 이상하잖아.
숲 안쪽으로 더욱 깊게 들어가자 슬슬 몬스터들이 출현했다.
덩치가 사람보다도 더 큰 거대 쥐가 앞길을 막아서고 나타났다. 자이언트 랫인가.
이 숲에선 어떤 종류의 몬스터들이 출현하는지는 나도 잘 몰랐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이름도 없는 평범한 숲에 어떤 몬스터들이 출현하는지까지 다 꿰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아으, 안 그래도 찌뿌둥했는데."
레일로가 목을 뚜둑거리며 자이언트 랫에게 다가갔다.
찌직!
놈이 듣기 거슬리는 울음소리를 내며 덤벼들었다.
동시에 발을 박찬 레일로가 검을 뽑지도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펑.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멀찍이 튕겨나간 자이언트 랫은 머리가 그대로 박살나서 죽어버렸다.
조금 상쾌해진 얼굴로 주먹을 털어낸 레일로가 말했다.
"계속 가시죠."
그 뒤로 다른 몬스터는 거의 마주치지도 않았다. 마주친다고 해도 고작해야 자이언트 랫처럼 10레벨 정도의 잡몹들뿐.
'애초에 몬스터가 많이 서식하지 않는 모양이네.'
해가 저물 즈음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애초에 그리 큰 숲이 아니었기에 별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자, 이게 멘그로디 나무입니다."
나는 눈앞의 거대한 나무를 올려다보며 조금 감탄했다.
숲에서 가장 큰 나무라니 클 줄은 알았는데,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컸기 때문이었다.
키는 수십 미터는 되겠고 둘레도 열 사람이 손에 손 잡고 서야 겨우 두를 정도로 넓었다.
잠시 나무의 겉면을 만져보다가 하늘에 저물고 있는 해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해가 지고 있긴 한데······.'
가장 거대한 나무, 황혼이 완전히 가라앉은 때, 생명 없는 가지.
이번 던전 찾기의 세 가지 키워드였다.
가장 거대한 나무는 완전히 확실치는 않지만 찾았고, 시간도 이제 곧 밤이고, 남은 건 '생명 없는 가지'뿐인데······.
'생명 없는 가지라는 게 대체 뭐냐고.'
시선을 올려 멘그로디 나무에서 어지럽게 뻗어있는 가지들을 바라봤다.
내가 그러고 있자 아셸과 레일로도 가지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문득 아셸이 입을 열었다.
"저기, 저걸 보십시오."
그녀가 어딘가를 빤히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별 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저기에 뭐가 있다는 거······.
"······!"
나는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성한 나뭇가지들 속에 섞여있는 나뭇가지 하나.
하지만 자세히 보니 달랐다. 왜냐면 그 나뭇가지에만 나뭇잎이 하나도 열려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명 없는 가지라는 게 설마?
초감각 (3)
"어? 저 나뭇가지에만 잎사귀가 하나도 없네요. 신기하네."
레일로도 이마에 손바닥을 붙이고 휑한 가지를 바라봤다.
나는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잠겼다.
'생명 없는 가지.'
그게 의미했던 건 바로 저 나뭇가지였던 모양이다.
아니고서야 달리 뭐가 있겠나? 저건 우연이라기엔 아무리 봐도 부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
'근데 저런 게 어떻게 가능하지?'
그저 나무의 유전적 특성인지, 아니면 암호를 남긴 던전의 제작자가 이 나무에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건지.
딱히 중요한 건 아니었기에 넘어갔다.
그보다 저게 생명 없는 가지라면, 던전을 찾는 가장 결정적인 힌트라는 뜻이었다.
암호에 생명 없는 가지가 모험하는 자들을 인도하리라, 라고 써져있다고 했으니까.
"······."
나는 빤히 나뭇가지를 올려다봤다.
가만히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뭘 어떻게 인도해준다는 거야?
혹시 저걸 자르면 가지가 훨훨 날아다니면서 길 안내라도 해주는 건 아닌가······ 라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이 순간 떠올랐지만, 아무리 여기가 판타지 세계라도 그건 아닌 것 같고.
'······방향? 방향인가?'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해봤다.
혹시 그냥 나뭇가지가 뻗어있는 방향으로 이동하라는 건가.
아리송했지만 달리 생각나는 것도 없었기에 일단 이동해보기로 했다. 아니다 싶으면 다시 돌아오면 되고.
나는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쪽으로 이동한다."
그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듯한 그녀가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나으리, 생명 없는 가지라는 게 혹시 저걸 말하는 게 아닙니까? 잎사귀가 하나도 안 달렸으니 의미가 얼추 연결되는데요?!"
"······."
참 빨리도 알았다.
던전 탐사도 꽤 해봤다더니 얘는 어째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어쨌든 그렇게 우리는 나뭇가지가 뻗어있는 방향을 향해서 나아갔다.
어느새 해는 완전히 넘어가서 어둠이 숲에 내려앉았다.
발광성을 꺼내들고 걸으며 나는 주위를 유심히 살펴봤다. 어디에 던전의 위치를 암시하는 흔적이 있을지 몰랐으니까.
몇십 분쯤 이동했을까, 확실히 눈에 띄는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다른 나무들 사이에서 홀로 잎사귀를 희미하게 빛내며 존재감을 뿜어내는 한 그루의 나무.
'······야광수?'
레일로도 그걸 발견하고서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야광수네요. 웬만해선 보기 힘든 건데 이 숲에도 있었네."
야광수는 그 명칭대로 밤에 빛을 뿜어내는 나뭇잎을 가진 나무였다. 반딧불처럼.
정확히 우리가 이동하고 있던 경로에 위치해있었기에, 뭔가 흐릿하게 감이 왔다.
'설마 저건가?'
황혼이 가라앉은 때, 밤이라는 시간대가 암호에 굳이 끼어있던 이유.
그건 다르게 해석하면 밤에만 특정해서 볼 수 있는 무언가가 던전으로 향하는 힌트라는 뜻이다.
그리고 야광수는 밤에만 이렇게 빛을 뿜어내는 나무였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팍팍 연결되는 느낌을 받으며, 나는 야광수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음······.'
그래서 뭐지?
생명 없는 가지가 향하는 방향으로 이동했고, 덩그러니 놓여있는 야광수를 발견했다. 여기서 이제 더 뭘 어쩌라는 걸까.
나는 레일로에게 물었다.
"뭔가 좀 알겠나?"
"네?"
"가장 거대한 나무, 황혼이 완전히 가라앉은 때, 생명 없는 가지가 모험자들을 인도하리라. 그래서 그 멘그로디 나무의 가지가 향하는 쪽으로 이동했더니 이 야광수가 나온 거다. 아무래도 던전으로 향하는 이정표인 것 같은데, 뭐라도 떠오르는 게 있으면 말해봐라."
레일로가 멍청한 표정으로 서있다가 물었다.
"모르겠는데요? 그보다 이게 왜 던전으로 향하는 이정표라는 겁니까?"
"밤 시간대에 달리 눈에 띄는 게 이것 말고 또 뭐가 있겠나?"
다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퍼뜩 놀라는 그녀였다.
"과연, 그런 거군요! 좀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지 그랬습니까."
"······정말 던전 탐사를 여러 번 해본 게 맞나?"
"저야 몸 쓰는 걸 더 잘하고, 이런 머리 쓰는 건 다른 동료들이 잘했어서 말입니다."
"동료들은 지금 어디에 있고?"
"유물 하나 찾아서 한탕 크게 해먹은 다음에 전부 은퇴했습니다. 저야 모험가가 천직이라 계속 활동하고 있지만."
그런 사연이.
아무튼 레일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듯했다.
별로 기대는 안 하지만 아셸에게도 물었다.
"뭘 좀 알겠나?"
아셸이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아닙니다."
그러나 말을 하려다 말고 고개를 젓는다.
사람 열받게 하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가 말을 하다가 끊어버리는 건데.
"괜찮으니 말해봐라."
내가 재촉하자 그녀가 마지못해서 다시 말했다.
"유적이라는 건 대부분 지하에 위치해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고대부터 현대까지 긴 시간 이래, 지하보다는 지상에 있는 유적들이 더 눈에 띄니 더 많이 발굴됐으니까. 단순한 이유였다.
"그러니 이 나무 바로 아래에 유적이 숨겨져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지극히 단순한 의견이었다.
근데 뭐지? 왠지 좀 설득력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에이, 그건 좀.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렇게 무식하게 숨겨놨겠습니까?"
레일로가 껴들어서 말했다.
내 이성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지만 직감은 아셸의 의견 쪽으로 기울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아셸에게 명령했다.
"나무 바로 앞쪽을 깊게 파보도록. 멈추라고 할 때까지."
"예."
그리고 멀찍이 뒤로 물러났다.
멀뚱히 서있는 레일로에게도 아셸이 물러나라고 손짓을 했다.
옆으로 온 레일로가 황당하다는 듯 날 쳐다봤다.
"진짜 하시겠다고요?"
"달리 떠오르는 것도 없으니까."
"아니, 얼마나 깊게 파시려는 건진 모르겠는데 대체 어느 세월에······."
콰아이앙!
귀를 강타하는 폭발음에 레일로가 깜짝 놀라서 다시 앞쪽을 돌아봤다.
아셸이 주먹으로 강타할 때마다 지면이 터져나가며 순식간에 땅이 파이고 있었다.
레일로가 입을 쩍 벌리고서 그 터무니없는 광경을 바라봤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땅을 파고 있던 아셸이 돌연 구덩이 위로 훌쩍 뛰어올라서 말했다.
"무언가 석벽 같은 게 나왔는데, 안쪽에 공간이 있습니다."
"······석벽?"
나는 구덩이로 가까이 다가가서 발광석을 대고 아래쪽을 살펴봤다. 깊게도 팠네.
어두워서 잘 안 보이진 않았지만 아셸의 말대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석벽이 희미하게 보이는 듯했다.
'이게 진짜였다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던전을 만든 놈은 이걸 진짜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만든 건가?
내가 찾아놓고도 테이르는 이걸 대체 어떻게 찾았나 신기할 정도였다.
"······?"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뭔가 좀 앞뒤가 안 맞지 않나?
지금 아셸이 판 구덩이의 깊이는 어림잡아도 몇 미터는 훌쩍 넘었다.
그러니까 테이르는 아셸처럼 혼자 이 정도 깊이를 파내서 저걸 발견했다는 건데······ 말이 되나?
"······."
무언가가 어긋난 것 같은 묘한 이질감을 느껴졌지만, 일단 들어가봐야겠지.
나는 레일로에게 말했다.
"다녀올 테니 기다려라."
"······아, 네."
그녀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셸의 괴력을 봐서 그런지 말투가 조금 공손해진 느낌이었다.
나는 구덩이 아래로 그대로 뛰어내렸다.
꽤 높은 높이였지만 문제는 없었다.
부동 장막을 공중에서 사용하면 내 몸이 허공에 그대로 고정된다는 사실은 진작 확인했다.
한마디로 떨어지는 도중에 사용하면 낙하하던 힘이 사라지기에 착지에도 활용할 수 있었다.
터억.
착지하기 직전에 부동 장막을 사용하여 나는 안정적으로 석벽 위에 내려섰다.
아셸이 서있는 곳에 석벽에 뚫린 구멍이 있었다.
발광석을 가까이 대니 그녀의 말대로 안쪽에 공간이 있는 게 보였다.
"들어가지."
"예."
내 말에 아셸이 먼저 석벽 아래쪽으로 뛰어내렸다.
바닥의 높이를 확인한 뒤 이어서 나도 뛰어내렸다. 그리고······.
"······."
나는 조금 벙쪄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둘러봤다.
석벽 안쪽에는 놀랍게도 굉장히 넓은 공간이 펼쳐져있었다. 전혀 짐작하지 못한 스케일이었다.
또한 굉장히 인공적이었다.
마치 어느 비밀 조직의 지하 소굴처럼 반듯하게 깎인 벽면과 통로, 그리고 힘이 거의 다한 듯 희미한 빛을 뿜어내는 발광석들.
'대체 뭐야, 여긴?'
아무리 봐도 보통 던전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던전이 맞긴 한가?
마음속에 피어오른 이질감이 점점 강해지는 걸 느끼며, 일단 앞으로 난 통로를 따라서 이동했다.
통로는 무척이나 길었다. 또 이리저리 구불구불 꺾이기도 했고, 여럿으로 나눠지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한 끝에 우리는 어떤 공동 같은 공간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제단?'
처음 보자마자 떠오른 건 그 생각이었다.
넓은 공간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붉은 석재로 된 구조물.
그 주위의 벽과 천장과 바닥엔 마법진과 괴상한 문자들이 한가득 새겨져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들에는 금세 신경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그 괴상한 구조물 한가운데의 마법진에 '무언가'가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낡은 로브를 걸치고 있는, 일단은 사람의 형태로 보이는 무언가가.
그걸 발견한 순간 근원을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본능적으로 치솟아오름과 함께, 눈을 의심케 하는 숫자가 시야에 비쳤다.
[Lv. 97]
······저게 대체 뭐야, 씨발.
제대로 엿 됐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이곳은 결코 테이르가 신비를 찾았다는 던전 따위가 아니다.
옆에서 긴장한 얼굴로 검자루를 쥔 아셸에게 빠져나가자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번쩍!
보랏빛의 광선이 번쩍였다.
뭘 반응할 새도 없이 광선에 직격당한 아셸이 뒤쪽으로 날아갔다.
"······!"
나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셸은 벽면에 처박혀서 미동도 없었다. 설마 죽었나 싶었지만, 레벨이 보이는 걸 보니 그냥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천천히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웃음소리.
"크흐······ 흐핫, 흐하하핫······!"
로브의 괴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괴한 웃음이 공간을 쩌렁쩌렁 울렸다.
"왔구나, 드디어 온 것이로구나! 결국 운명은 날 저버리지 않은 것이야!"
놈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입고 있던 로브가 부스러지며 흩날렸다.
그리고 드러난 녀석의 몸은······ 그저 기괴했다.
피부는 먹물처럼 검었고, 그 위로 선명히 솟아있는 핏줄은 새하얀 색이었으며, 눈은 핏빛으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피잉!
곧바로 등에 메고 있던 활을 빼내서 화살에 피를 묻혀 겨냥하고 쐈다.
하지만 화살은 어느새 놈을 휘감은 방어막에 막혀서 맥없이 튕겨나갈 뿐이었다.
나는 큰 낭패감을 느끼며 활을 내리고서 입을 열었다.
"······넌 뭐냐."
한참을 웃던 괴인이 웃음을 그치고서 말했다.
"엔피루스 데이마, 영원을 꿈꾸는 마법사."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데."
"오, 이런. 내 이름이 잊혀졌을 정도면 바깥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건지 감도 안 잡히는군."
놈의 레벨은 97. 대군주 라샤테인과 비교해도 1레벨 차이밖에 나지 않는 괴물.
목숨이 지척에 달렸다.
아셸은 쓰러졌고, 즉살 능력은 놈에게 닿지가 않는다.
나는 평정을 유지하며 놈을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했다.
"우리를 공격한 이유는 네 영역에 침범해서인가?"
"침범? 흐하핫! 그 반대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누군가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나?! 이 작은 마법진 밖으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채, 다 죽은 것과 다름없는 육신만 간신히 유지하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다만 놈이 고대의 마법사이며, 어떤 이유로 이곳에 굉장히 오랫동안 갇혀있던 신세라는 건 방금의 말들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이곳에 찾아온 나의 존재에 굉장히 기뻐하고 있다는 것까지.
푸욱!
"······?!"
다시금 빛이 번쩍였고, 배가 화끈했다.
이어서 몰려온 격통과 함께 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끼며, 나는 무릎을 풀썩 꿇었다.
"컥······."
완전히 통째로 뜯겨나가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 옆구리를 내려다봤다.
공격에 아예 반응하지 못했기에 부동 장막을 발동할 틈도 없었다.
그때 의문에 찬 듯한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어냐, 넌? 영혼의 격은 그리도 높으면서 왜 이런 공격 하나 막지 못하는 거지?"
꿀렁!
나한테서 흘러나온 피가 공중에 둥둥 뜨더니 놈에게로 이동했다.
이내 환희에 찬 목소리가 공동을 가득 메웠다.
"뭐, 아무렴 됐나. 너 정도로 격이 높은 존재의 피라면 내 육신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이 빌어먹을 곳에서 나가 드디어 다시 세상에 나설 수 있단 말이다! 흐핫! 흐하하하하!"
귓가에 웅웅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들었다.
놈은 내게서 뺏어간 피를 온몸으로 빨아들여 게걸스럽게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놈의 육신엔 활력이 도는 것처럼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고, 주위에 거대한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고통으로 정신이 아찔했지만 그 광경을 보며 나는 큭큭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피를 전부 마시고서 고양감에 찬 얼굴을 하고 있던 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그리 웃긴 것이냐?"
간신히 입을 열고 목소리를 짜냈다.
"알아서 처먹어줘서······ 고맙다."
"뭐?"
"죽어."
풀썩.
괴인의 몸이 쓰러지며 공동을 채운 기운이 일시에 소멸했다.
초감각 (4)
괴인이 쓰러진 걸 확인한 나는 도로 고개를 푹 떨궜다.
진짜 아파서 뒈질 것 같다.
뻥 뚫린 옆구리가 부글부글 끓으며 새 살이 올라온다. 초재생이 활성화되어 상처를 재생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상이 심각한 건지 놈의 마력이 회복을 더디게 하는 건지 회복이 더딘 느낌이었다.
"끄으······."
이내 부상을 전부 회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에 힘이 쭉 빠진 기분이었다.
여태 겪어왔던 위험 중에 이번이 제일 아찔했다.
옆구리가 아닌 머리에 공격을 맞았다면 난 그대로 죽었으리라. 아무리 초재생이라도 머리까진 회복시키지 못할 테니.
공간을 밝히고 있던 마법진의 빛도 괴인이 죽자 전부 사라졌다.
죽은 놈을 빤히 바라보다가 아차 하며 아셸을 돌아봤다.
아셸은 벽에 널부러져서 미동도 없이 쓰러져있었다.
나는 엉망이 된 옷가지를 추스르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어이."
부상이 심각한 건가, 이걸 어떻게 깨워야 되나 감이 안 와서 일단 뺨을 툭툭 두드려봤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아셸이 천천히 눈을 떴다.
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그녀에게 물었다.
"몸은 괜찮나?"
"······예. 제가 얼마나······ 그 괴인은?"
"죽였다."
혼란스러워하는 아셸은 이내 상황을 이해한 듯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가, 참담한 기색이 되었다.
공격 한 번 맞고 날아가서 리타이어됐으니 솔직히 이번엔 그럴 만도 했다. 나야 레벨이 보이지만 그녀는 아니니까.
"죄송합니다. 또 아무것도······."
"대군주 못지않게 강한 놈이었다. 자책은 됐으니 이거나 마셔라."
그 말에 아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품에서 스칼릿을 꺼내들었다.
공격이 바로 아래쪽에 맞았기에 이건 다행히도 무사했다.
아셸이 고개를 저으며 검을 바닥에 세우고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괜찮습니다."
"마시래도."
"아닙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하여튼 고집 참······.
억지로 내밀어도 계속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기에 입에 가져다 대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아셸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서다가 발을 헛짚고 다시 넘어졌다.
격한 반응에 나도 좀 놀라서 넘어진 그녀를 내려다봤다. 얘 혼자 뭐 하니.
"상태가 정상이 아니잖나, 역시."
"······."
이쪽을 바라보는 아셸의 눈에 희미하게 섞인 민망함과 원망이 느껴졌다.
그러게 누가 계속 고집 부리랬나.
"명령이니까 마셔라."
결국 아셸은 스칼릿을 받아들고 마셨다.
그녀는 내게 있어 대체할 수 없는 인재다. 이깟 포션 따위야 백 병이라도 아까울 리가 있나?
조금이라도 트러블이 있다 싶으면 문제가 없도록 바로바로 해결해줘야 했다.
'그나저나······.'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다시 쓰러진 괴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 새끼는 대체 뭐였지?'
왜 이 숲에 뜬금없이 저런 미친 레벨의 괴물이 있었던 걸까.
고대 마법의 황금기에 강한 마법사들이 아무리 많았다지만 97레벨이라면 대륙에서도 손에 꼽는 강자였을 것이다.
'엔피루스 데이마라고 했지.'
고대의 인물들에 대해선 게임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기에 모르는 이름이었다.
설정부터가 대륙 곳곳에 묻혀있는 유적들 외엔 기록이 거의 없는 게 고대 시대였다.
나는 걸음을 옮겨 제단 위로 올라갔다.
죽은 놈의 주위를 둘러보자 책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들다가 멈칫했다.
책이 살짝 만지기만 해도 부스러지려고 들었기 때문이다. 대체 얼마나 오래된 거야?
별 수 없이 책 앞에 쭈그려앉아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앞장을 넘겨봤다.
"······."
뭐지?
나는 멀뚱히 책에 적힌 글자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이건 고대 문자인데 술술 해석이 됐다.
아까도 일단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에 신경 안 쓰고 넘어갔는데, 괴인과도 고대 언어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했었다.
평소 쓰던 말처럼 갑자기 이해되기 시작한 고대의 언어에 나는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렸다.
이 감각은 전에 한 번 겪은 적이 있었으니까.
'처음에 빙의됐을 때도 그랬었지.'
처음 이 게임에 빙의됐을 때도 문제 없이 대륙공용어로 죄수와 대화를 했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때와 비슷한 어떤 현상이 일어난 게 아닌가 싶었다.
'혹시 대화가 트리거인가?'
내가 모르는 언어로 상대와 직접 대화를 하는 게 트리거라면 말이 되는데.
나중에 다시 확인해보기로 하고, 일단은 책의 내용으로 다시 신경을 돌렸다.
- 나는 영원한 존재가 되고자 했다.
책의 첫 문구는 그렇게 시작했다.
-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모두 필멸의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다. 마력이나 다른 힘으로 노화를 늦추어도, 산 육신은 버리고 죽은 육신으로 부활해도 결국 끝은 찾아온다. 나는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필멸의 껍데기를 벗고 영원한 존재가 되고자 했다.
이어서 구구절절 이어진 내용은 마법 연구에 대한 내용이었다.
읽어봤자 이해도 안 됐기에 대충 넘어갔다.
- 하지만 그 수많은 노력들에도 결국 나는 염원을 이룰 수 없었다.
- 수천 년을 살아온 육신에 끝이 다가왔다. 원래라면 더 살 수 있었겠지만 여러 연구를 거치며 쌓인 부담에 한계가 온 것이다.
- 사령술을 이용해 망자의 몸으로 부활한다면 존재를 연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시는 살아있는 존재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은 평생을 망자의 몸으로 살아야 되겠지. 그것은 내 모든 걸 부정하는 것이다.
- 내 평생을 함께한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기로 했다. 유산은 남기고 싶지 않다. 남길 거라곤 이 일기뿐이다.
- 외로움, 내가 이 감정을 느끼게 되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괜찮은 놈 몇 명을 제자로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을.
여기까진 마법에 미친 마법사의 평범한 일생처럼 보였다.
근데 왜 죽지 않고 이런 꼴로 여태 살아있었던 건데?
그에 대한 답은 바로 다음 내용에 나왔다.
- 죽음의 순간, 모든 걸 내려놓자 그제야 새로운 깨달음이 찾아왔다.
- 이 육신의 수명을 아득히 늘릴 수 있는 방법을 깨달았지만 부질없었다. 그를 위해선 격이 높은 존재의 육신이 제물로 필요했다. 지금의 다 죽어가는 육신으로는 제물을 구하긴 커녕, 간신히 펼친 결계 속에서 생명만 부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어찌 이리도 얄궂은 운명인가.
- 영원한, 완전무결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길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이곳에 속박되어 조금도 움직일 수 없더라도 언젠가 이곳을 찾아낼 누군가를 기다리겠다. 영겁의 시간이 흐르더라도 난 사라지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제물이라니······ 그래서 나를 보고 놈이 기뻐서 날뛰었던 건가?
제왕의 혼 때문인지 놈의 눈에는 내가 격이 높은 존재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 다음부터 이어지는 내용은 갈수록 엉망이었다.
너무 오랜 세월을 혼자 갇혀있어서 그런지 정신이 점점 망가지는 게 글에서 보였다.
내용을 전부 훑어본 나는 책을 덮었다.
'별 건 없네.'
그냥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곳은 지도에 적혔던 장소가 아니었고, 이 엔피루스라는 놈은 던전의 제작자가 아니었다.
나는 아주 우연히, 재수 없게도 미친 고대의 마법사가 봉인된 장소를 원래 찾던 던전 대신 발견한 것이었다.
'······뭔 미친 우연이냐, 이게.'
게임에 빙의되면서 나 무슨 패널티라도 받았나?
스탯창이라도 볼 수 있으면 행운 스탯이 -99로 표시되어있는 거 아니야?
초재생을 찾을 때도 그렇고, 부동 장막을 찾을 때도 그렇고, 어째 신비를 찾으려 할 때마다 순조롭게 가는 일 없이 위기가 터지는 느낌이었다.
다시 한 번 속으로 욕을 뇌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기에서 놈이 아무런 유산도 남기지 않겠다고 적었으니 찾아봐야 유물 같은 게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통로를 나가 다른 곳도 더 돌아다니며 둘러봤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저 이 지하 공간이 내가 머물던 군주성에 못지 않을 정도로 터무니없이 넓다는 사실만 알아냈을 뿐이다. 이만큼이나 거대한 공간이 이 숲에 통째로 묻혀있던 건가.
나는 허무함을 느끼며 아셸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나가지."
***
밖으로 빠져나가자 어째서인지 레일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얘는 또 어디 갔어?'
볼일이라도 보러 간 건가 싶어 기다렸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뭐에 습격이라도 당했다기엔 주위에 전투의 흔적 같은 건 아무것도 없이 들어갔을 때 그대로였다.
내 명령을 받고 주위를 둘러보고 온 아셸이 말했다.
"특별한 흔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설마 튀었나.'
그렇게밖에 여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셸의 실력을 보고 겁을 먹어서 그냥 내뺀 걸지도.
유적을 함께 목격했으니 우리가 죽여서 입을 막으려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으니까.
'돌아가는 길이야 복잡하지도 않았으니 상관없지만······.'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결국 진짜 테이르가 발견했다는 던전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이대로 그냥 돌아가기는 아쉬웠기에 더 찾아보기로 했다.
나뭇가지가 가리켰던 방향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이동했다.
꽤 한참이 지나 또 다른 야광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야광수는 꽤 커다란 바위에 바짝 붙어서 솟아있었는데, 그 주위에는 수풀이 가득했다.
나는 설마 싶어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봤다.
무성한 수풀을 살피자 바위와 지면 사이에 있던 작은 통로가 드러났다.
"······."
나는 그 통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셸도 가까이 다가와서 통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씨발······.'
욕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가 간신히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이걸 놔두고 쓸데없는 걸 찾아서 그 개고생을 했단 말이지.
콰아앙!
아셸을 시켜 통로를 넓히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좁게 이어진 복도를 지나서 넓은 공간이 나타나자, 중앙에 목각인형처럼 나무로 된 거인들이 우두커니 서있는 게 보였다.
[Lv. 48]
놈들의 머리 위에 있는 초라한 레벨을 바라보며 나는 작게 혀를 찼다.
그래, 여기가 맞구만. 테이르가 발견했다는 던전이.
곧 놈들의 눈에 푸른 안광이 피어오르더니, 옆쪽의 벽면에 고대어로 된 문자가 빛나며 나타났다.
- 모험자여, 시련을 맞이하라.
- 시련을 극복하고 이 던전에 숨겨진 나의 유산을 차지하라.
- 가디언들을 피해 각각의 가장자리의 있는 마석을 파괴하면 움직임이 점점 느려질 것이고, 모두 파괴하면 멈출 것이다.
나는 공간을 둘러봤다.
그 말대로 공간의 가장자리의 벽면엔 각각 마석들이 박혀있었다. 저 마석들을 전부 파괴하는 게 던전의 클리어 조건인 모양.
쿠웅.
이내 가디언들이 움직이며 우리를 향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아셸에게 말했다.
"아셸."
"예."
"치워라."
콰아아앙!
아셸의 일격에 가디언들이 전부 쓸러나갔다.
초감각 (5)
생각했던 대로 그리 수준이 높은 던전은 아니었다.
가디언들을 전부 처리하고 계속해서 나아가자 이번엔 함정이 나왔다.
일자로 길게 이어진 통로의 벽면 곳곳에 마법진들이 새겨져있었다.
- 첫 번째 시련을 통과한 그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 사방에서 빗발치는 마력 화살들을 뚫고 반대편 통로로 나아가······.
콰아앙!
아셸이 양갈래로 날린 검기에 벽면에 있던 마법진들이 모조리 파괴되었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뭐가 나오긴 했지만 그대로 하이패스.
벽에 쓰인 문자에 시련이니 뭐니 하면서 이것저것 참 많이도 준비해놨다.
제작자는 이렇게 다 처부수면서 전진하는 걸 기대한 게 아닐 텐데 왠지 좀 미안해지기도 하고.
'그나저나 아직까지 잘도 작동하네.'
던전이라는 건 대부분 고대에 만들어졌다.
때문에 제작자가 준비해둔 가디언이나 함정들이 너무 오래되서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저번의 부동 장막이 숨겨져있던 던전처럼.
근데 이 던전은 제작자가 그닥 뛰어난 마법사인 것 같지도 않은데 여태 장치들이 망가지지 않고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아마 고대에서도 비교적 후기에 만들어졌거나, 아예 고대 시대의 던전이 아닌 건가 싶었다.
이윽고 여기가 마지막 단계라고 광고하는 듯한 거대한 석문이 나왔다.
'끝인가?'
여기까지 오면서 숨겨진 공간 같은 건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니 내가 찾는 신비는 분명히 저 안에 있을 터.
시련 아닌 시련은 이걸로 끝인가 싶었는데, 문 바로 앞쪽의 바닥에 문자가 빛났다.
- 마지막 시련은 그대들의 행운을 시험하는 시련이다.
- 무력, 지혜, 동료, 신뢰, 그리고 강력한 장비들. 그 모든 것들을 갖추었다 한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운.
- 문 바로 앞에 놓인 구슬을 들고, 문에 난 두 개의 흠 중 하나에 꽂아넣어라.
- 정답을 택했다면 문은 열릴 것이고, 오답을 택했다면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다. 기회는 단 한 번이다.
아셸은 고대어를 읽지 못했기에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설명을 모두 읽은 뒤 걸음을 옮겼다.
문 앞의 받침대에 놓여있던 구슬을 집어들고 문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철컥.
별 고민 없이 왼쪽의 흠에 구슬을 끼워넣었더니 문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시 바닥에 문자가 빛났다.
- 오답이다, 모험자여.
- 아쉽게도 그대는 나의 유산을 차지할 자격이 없다. 미련을 버리고 돌아가라.
나는 뺨을 긁적이다가 아셸에게 말했다.
"아셸, 부숴라."
콰아아앙!
거대한 석문이 산산조각 터져나갔다.
마법으로 강화라도 됐던 모양인데 아셸의 무력 앞에서는 별 의미도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 관문까지 죄다 힘으로 처부수고 도착한 던전의 끝.
나는 무너진 문 앞에 서서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고 아셸에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라."
"예."
그녀를 남겨두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좁은 통로를 지나서 이내 나타난 건 연구실 같은 공간.
그 한가운데에는 보물상자처럼 고급스런 목함이 놓여있었다.
그걸 열자 안에는 낡은 고서 한 권과 편지가 들어있었다.
"······."
책은 제목을 보아하니 던전 제작자가 자신의 마법을 정리한 마법서인 듯했고, 편지도 제작자의 편지였다.
대충 내용을 살피니 여기까지 온 걸 축하 어쩌고, 자신의 마법은 일인전승이니 한 명한테만 전수 어쩌고.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편지를 접었다.
던전의 장치들을 보면 제작자의 마법 실력도 알 만한데, 편지엔 무슨 세기의 대마법서라도 남겨놓은 것처럼 써놨다.
'이런 거야 아무래도 좋고.'
주위를 둘러봤다.
더 나아가는 통로도 없으니 신비가 있을 공간은 이곳뿐이다.
하지만 당장 보이는 광경에 신비의 문양은 어디에도 없었다.
설마 이 고생을 하고 또 허탕인가?
나는 약간의 조바심을 느끼며 주위를 좀 더 샅샅이 훑어봤다.
"······아."
그리고 구석에 놓여있던 책장을 움직여서 뒤쪽의 벽면을 살펴봤을 때, 그제야 나는 씩 웃을 수 있었다.
벽면에 새겨진 신비의 문양.
푸른빛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그것은 딱 책장만큼의 크기라서 절묘하게 가려져있었다.
나는 문양을 향해 망설이지 않고 손을 뻗었다.
화아악!
언제나처럼 문양이 밝게 빛나며 내 몸으로 흡수되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주위를 천천히 다시 둘러봤다.
'······뭐야, 이건.'
느껴진다.
신비를 흡수함과 동시에 선명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소리가, 냄새가, 주위에서 흘러들어오는 모든 자극들이.
방 바깥에 서있는 아셸의 존재가 눈에 보이는 듯 선명하게 인지되었다.
정신을 좀 더 집중하자 감각이 더욱 날카로워지며 바닥에 기어다니는 벌레의 기척까지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완전히 새로운 세상의 문턱을 넘은 것만 같은 기분.
'이거였나?'
이 판타지 세계의 초인들이 평소에 느끼는 감각이 바로 이거였던 건가?
그리고 비단 감각뿐이 아니었다.
내 반사 신경 또한 아득히 향상된 게 느껴졌다.
나는 바닥의 돌을 하나 집어들고 던져봤다.
포물선을 그리며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돌이 마치 굼벵이 기어가듯 느리게 보였다.
거기에 시각까지 강화됐으니 날아가면서도 돌멩이의 각진 부분 하나하나가 전부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개쩌네, 진짜.'
이건 정말 놓쳤으면 안 됐을 능력이다.
아까 고대 마법사한테 제대로 당하고서 한 번 더 확실히 깨달았었다.
방어 능력을 가져봤자 공격에 반응할 수 없으면 무용지물이라고.
그러나 이 정도의 인지 능력이라면 이제 웬만한 초인들의 속도에는 대응할 수 있을 것이었다.
'빨리 적응을 해야겠네.'
나는 주먹을 쥐었다 피며 한껏 날카로워진 감각을 도로 진정시켰다.
방금 막 얻었으니 아직이야 익숙하지 않았지만 적응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듯했다.
그러고 보니 이 신비에는 이름이 없다.
없다기보다 몰랐다. 게임에서 테이르가 딱히 이름을 붙여서 말한 적이 없었으니.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적당한 이름을 떠올렸다.
초재생의 신비도 있으니까 이것도 대충 그런 느낌으로.
'초감각.'
이걸로 초감각까지 벌써 세 개의 신비를 얻었다.
***
우리는 바로 던전을 빠져나왔다.
제작자의 유산인 마법서야 필요도 없었지만 굳이 두고 나올 이유도 없었기에 챙겨서 나왔다.
혹시 또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마법을 배울 일은 없겠지만, 나중에 내가 영입할 인재한테 이게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던전에서 나온 다음에는 생각하고 있던 것부터 아셸에게 말했다.
"아셸."
"예."
"한번 전력을 펼쳐서 검을 휘둘러봐라."
"······예?"
그녀가 움찔 놀라며 나를 돌아봤다.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았기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를 공격하라는 게 아니라 빈 허공에 하라는 거다."
"아······."
뜬금없이 이런 요구를 하는 건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었다.
아셸은 의아한 기색이었으나 이유는 묻지 않고 순순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대로 검을 휘두르려는 그녀에게 나는 다시 말했다.
"전력으로. 네 특질까지 사용해서."
백월족인 아셸은 마력을 강화시키는 종족 특질을 지니고 있다.
나는 그 특질까지 활성화한 정말 전력의 그녀를 보고 싶은 것이었다.
내 요구가 조금 당황스러운지 아셸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서 특질을 펼쳤다.
사아아.
아셸의 몸이 은은하게 빛나더니 곧 전신의 피부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녀가 특질을 사용한 건 나도 이 자리에서 처음 보는 거였다. 지금까지는 딱히 사용할 상황이 없었으니까.
자세를 잡은 그녀가 숨을 한 번 고르고는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슈와악!
그냥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거라곤 믿을 수 없는 파공음이 울리며 허공에 검격이 그려졌다.
나는 초감각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그녀의 검무를 응시했다.
'······보인다.'
저 검격이 나를 향한다고 해도 충분히 반응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움직임이 보였다.
초감각은 전력을 펼친 81레벨의 움직임도 잡아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심지어 아직 여유가 있었다.
'이 정도면 80레벨대 정도는 어느 정도 다 반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이상의 강자라면 어떨까?
나는 호송선에서 봤던 권성의 움직임이나 군주 회의 때 복도에서 마주친 광랑의 일격을 떠올려봤다. 아까 전에 내 옆구리를 통째로 없애버렸던 고대 마법사의 공격도.
초감각을 얻기 전의 공격들이야 아예 보이지도 않았으니 떠올려봤자 가늠할 수 있을 리가 없지만······ 모르겠다. 직접 다시 확인하지 않는 이상에야.
어쨌든 어느 정도 만족스런 결과를 확인한 나는 입을 열었다.
"그만."
칼질을 멈춘 아셸이 멈춰서서 가볍게 숨을 골랐다.
많이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정말 전력으로 펼친 모양이었다.
근데 어째서인지 그녀가 무언가를 기대하듯 나를 빤히 바라봤다.
"······."
왜 저렇게 쳐다보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유를 깨달았다.
'······설마 내가 뭐 실력 평가라도 하려고 방금 걸 시킨 줄 아나?'
저 묘하게 기대하는 눈빛을 보니 그게 맞는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확실히 잠재력이 있다. 계속 노력해라."
"······알겠습니다."
그녀가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내 실력으로 너한테 무슨 조언을 해주겠냐.
밤이라 어두웠지만 우리는 쉬지 않고 바로 숲을 빠져나갔다.
여러모로 지쳤지만 초재생이 있으니 버틸 만했다. 잠이야 마차로 돌아가고 나서 자도 됐다.
그렇게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즈음에야 마차에 도착하니,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바로스를 볼 수 있었다.
"오셨습니까."
어디서 사냥이라도 한 건지 그는 토끼 한 마리를 잘 손질해서 구워먹고 있었다.
우리 없는 동안 잘 먹고 있었던 것 같아서 다행이네.
내친 김에 그 자리에서 나와 아셸도 함께 식사를 하고서 도시로 돌아갔다.
***
도시로 되돌아와서 레일로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다시 모험가 길드에 들러봤다.
다른 모험가에게서 그녀가 도시에 돌아왔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다른 도시로 급히 떠나갔다고.
'진짜 쫄아서 튄 거였구나.'
상황이 좀 우스웠지만, 어쨌든 신변에 문제가 있던 게 아니라는 건 확인했기에 그녀에 대해서는 그걸로 신경을 껐다.
하루 더 묵고 나서 바로 도시를 떠났다.
다음 목적지는 원래 예정했던 대로 신퇴의 1군주령. 이번엔 좀 멀었다.
현재 위치에서부터 4, 3, 2군주령을 그대로 쭉 곡선으로 관통해서 최단 경로로 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러 3군주령 변경의 대도시 중 하나인 큐백스에 도착했다.
성문의 검문줄에서 대기하고 선 마차에 차례를 기다리며 생각에 잠겼다.
'여기가 이제 갈림길인데······.'
조금 고민이 됐다.
내게 있어 가장 필요한 능력 중 하나인 혈술. 그것을 얻을 수 있을 장소인 엘로드 숲.
그 엘로드 숲이 이 큐백스 시에서 서쪽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쭉 1군주령으로 갈지, 아니면 엘로드 숲에 한번 들러볼지.'
원래 계획대로면 혈술을 얻는 건 뒤로 하고 그냥 신비에 집중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부동 장막과 초감각을 얻고 어느 정도 안전에 자신이 생기니 그냥 지나치기 아쉬운 마음이 든 것이었다.
'······아니, 역시 아니다.'
짧은 고민 끝에 역시 그냥 1군주령으로 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엘로드 숲으로 향하는 건 너무 변수가 많았으니까.
내 안전에 확신이 생겼다고 한들, 결국 혈술을 얻기 위해선 그곳에 살고 있는 뱀파이어 부족과 대화가 통해야 했다. 근데 그럴 건덕지가 뭐 하나라도 있나.
그러니 본래 계획대로 일단 혈술은 뒤로 미루고 신비에 집중하는 게 최선일 것이었다.
"······?"
상념에 잠겨있는데, 바깥에서 소란이 일기에 창밖을 바라봤다.
성문 앞에 서있는 검문줄을 무시하고 옆쪽으로 당당히 지나가는 마차 몇 대가 있었다.
줄을 선 행인들이 쉬쉬하며 시선을 돌리는 광경이 보였다.
마차의 짐칸은 철창살이 박혀서 마치 감옥처럼 되어있었는데, 그 안에는 어린 소년과 소녀들이 갇혀있었다.
'······노예 상단?'
나는 창틀에 턱을 괴고 그들의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뱀파이어 (1)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를 풍기며 사람들이 실린 마차를 끌고 가는 무장한 사내들.
슥 레벨을 훑어보니 전부 다 30은 넘을 정도로 높았다.
[Lv. 57]
게다가 행렬의 가장 선두에 서있는 장발의 남자.
대장격으로 보이는 그의 레벨은 거의 60에 가까웠다.
단순한 노예 상단이라기엔 상당한 레벨들에 뭐 하는 놈들인가 싶었다.
초감각으로 예민해진 청력에 행인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킬로프다."
"야야, 빤히 쳐다보고 있지 마."
발킬로프?
어딘가 익숙하게 들리는 이름에 이내 놈들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발킬로프라면 분명 그놈들이 아니었나? 3군주령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악명 높은······.
'맞네, 그놈들.'
정보가 하나둘씩 떠오른다.
노예 판매를 가장 주력으로 하고, 그 밖의 더러운 일들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하는 위험한 단체.
게임에서는 놈들이 여는 비밀 경매에 VIP로 참석한 군주성의 고위 관리를 암살하는 서브 스토리가 있었던가.
나는 철창에 갇힌 노예들을 응시했다.
하나같이 눈들이 죽어있는 게 삶에 전혀 의욕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신분제가 완전히 살아 숨 쉬는 이 판타지 세계엔 노예 역시 존재했다.
노예 제도가 불법인 국가들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지만 그게 적어도 칼데릭은 아니었다.
군주가 원한다면야 특정 군주령에서는 불법으로 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 할 군주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봐라, 너희들! 멀쩡히 있는 줄을 두고 뭘 멋대로 지나가고 있는 것이냐!"
그때 내 얼마 떨어진 앞쪽에 서있던 마차에서 한 젊은 남자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내렸다.
귀족으로 보이는 그가 호위 기사를 대동하고 옆을 지나쳐가는 노예상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 모습에 지켜보는 행인들의 분위기가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대장인 장발 남자가 다가온 그를 보더니 히죽 웃었다.
"보시다시피 저희가 달린 물건들이 많아 줄을 서기 번거로워서 말입니다. 조금 양해를 해주십시오."
그러면서 그가 뒤쪽에 실린 노예들을 가리켰다. 그들을 물건이라 칭한 것이었다.
"양해? 지금 장난하는가? 그딴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나으리, 혹시 어느 가문의 자제이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남자가 허 웃더니 말했다.
"가문? 지금 날 겁박하는 것이냐? 내 아버지께선 1군주령 볼카디온 체일 시의 부시장이시다! 감히 비천한 노예상 놈들이······."
그에 듣고 있던 사내들이 실실 비웃음을 지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는지 남자가 당황했다.
"이, 이놈들이 정녕?"
"이런, 제가 무려 부시장 님의 자제를 몰라뵙고 결례를 저질렀군요. 죄송합니다."
"그, 그래. 내가······."
"한데 먼 곳에서 오셔서 저희가 누구인지 잘 모르셨나 봅니다."
장발이 슬쩍 남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초감각이 있었기에 내 귀에는 그 속삭임이 선명하게 들렸다.
"······좀 그만 귀찮게 굴고 꺼져라, 애송아. 그깟 같잖은 직위로 설치지 말고. 사지를 다 비틀어서 뽑아주랴?"
그에 남자가 새하얗게 질려서 아무 말도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장발은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싱글싱글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 마저 갈 길을 가버렸다.
나는 그 일련의 광경을 지켜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웃기는 놈이네.'
발킬로프라면 아마 군주성의 여러 고위 관리들과도 연줄이 깊었을 것이다. 괜히 한 군주령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단체일까.
다른 군주령에서 온 귀족이야, 그것도 고작 부시장 가문이라면야 신경도 쓸 리 없었다.
남자는 떠나가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치욕스런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면서 다시 자신의 마차로 돌아갔다.
성문의 경비병들도 익숙한 듯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는 그들을 바로 도시 안으로 마차를 하나씩 통과시켜주었다.
"표정이 안 좋구나."
아셸이 싸늘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기에 말을 걸어봤다.
그녀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아닙니다."
"노예들이 불쌍한가?"
"······예, 솔직히."
"그래서 돕고 싶다는 건가?"
"아닙니다. 제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 말대로였다.
저번에 5군주령에서 종업원을 도와줬던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이 세계에서 노예 매매는 합법이고, 저들은 그 테두리 안에서 노예를 사고파는 상인일 뿐이다.
더 파고들면 이것저것 수많은 불법들을 저지르고 있겠지만 일단 표면적으로는 그렇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노예들이 너무 불쌍해서 저 남자들을 전부 처치해버리고 노예들을 구해준다면?
그렇게 구한 노예들은 어떻게 할 건가? 끝까지 책임지고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줄 것인가?
또 발킬로프 놈들은 어떻게 하고? 먼저 건드렸으니 죽어라 복수를 하려 들 텐데.
물론 군주의 권력이라면 저까짓 암조직 하나 따위야 뿌리째로 없애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3군주령에 속한 단체라고 해도 군주와 대적했다는 것부터가 칼데릭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위니까.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가?
'그냥 순간의 자기만족일 뿐이지.'
저 발킬로프뿐만 아니라 이 대륙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노예 상단과 노예들이 존재할 것이다.
앞으로 그런 노예상들을 마주칠 때마다 죄다 처죽이고 다니기라도 할 건가? 뒷일 생각도 안 하고 노예들은 풀어주고?
그건 그냥 망나니와 다를 게 없었다. 뭐 하나 명확한 기준이나 신념도 없이 제 꼴리는 대로 일만 싸지르고 다니는.
내가 도울 수 있는 선까지는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돕겠다만, 그 선을 넘으면서까지 무리를 하는 건 곤란했다.
현재의 최우선 목적은 어디까지나 히든 피스들을 모으고 내가 살아남을 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정의의 사도 행세나 하고 다니려고 지금 칼데릭을 떠돌고 있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그래도 불쌍하긴 해.'
어쨌든 현대인의 눈으로 보자면 안타까운 인권 유린의 현장이긴 했다.
하나둘씩 성문 안으로 사라지는 마차들을 바라봤다.
"······!"
그러다 곧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지막 마차에 실려있던 노예들 중 한 소녀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흑발에 적안을 지니고 있는 한 어린 소녀의 모습이.
'······뱀파이어?'
초감각을 더 끌어올려서 시력을 강화하니 그녀의 입에 삐죽 튀어나온 송곳니도 보였다.
분명히 뱀파이어가 맞다.
흑발과 적안은 뱀파이어의 종족적인 특성이다. 돌연변이가 아니고서야 뱀파이어는 전부 흑발에 적안이다.
더불어 옆에 있던 사내들이 떠드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런데 흡혈귀가 나와봤자 누가 입찰하긴 하겠어? 찝찝해서."
"그래도 희귀성이 있는데 다 팔리겠지. 변태 같은 취향 가진 귀족 나으리들이 얼마나 많냐."
나는 그 대화를 들으며, 철창 안에 쭈그리고 누워있는 소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마차가 성문을 통과하고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
나는 등을 기대고 생각에 잠겼다.
웬만해서는 보기 힘든 희소 종족이기에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노예로 잡힌 녀석을.
순간 무언가가 머릿속에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뱀파이어······ 엘로드 숲······.'
뱀파이어는 희소 종족인 만큼 종족애가 강하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저 어린 뱀파이어를 구해서 엘로드 숲으로 데리고 간다면?
저 녀석이 엘로드 숲의 뱀파이어들과 같은 부족인 줄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동족이다.
동족을 구해서 데려왔으니 최소한 다짜고짜 공격은 받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터.
'그래, 그런 방법이 있었잖아?'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이상적인 그림이 그려진다.
이건 충분히 할 만하다 싶었다.
***
도시에 들어간 다음 숙소를 잡고, 곧바로 발킬로프에서 운영하는 노예 거래점을 찾아갔다.
경비를 서고 있던 놈들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카운터의 직원이 보였다.
종이에 무언가를 적고 있던 뚱뚱한 중년의 여인이 날 보고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공자님. 어떤 노예를 구하려고 찾아오셨나요?"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까 보니까 뱀파이어 하나가 노예로 들어온 것 같던데."
"······어머, 맞아요. 방금 막 도착했죠."
여인이 조금 당황했다가, 아쉽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한데 그 아이는 이미 다른 분에게 판매가 예정된 상품이라 구매하실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판매가 예정돼?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말의 숨겨진 의미도.
'그러고 보니 아까 입찰이 어쩌고 했었지.'
도미호크 시에서 열리는 그걸 말하는 거다. 발킬로프가 주최하는 비밀 경매.
그 뱀파이어 소녀는 아무래도 경매에 나가기로 예정되었던 모양이다.
나는 다시 말했다.
"얼마를 지불해도 불가능한가?"
"예, 그렇습······."
"200골드, 백금화 두 닢이라고 해도?"
"······예?"
여인이 잠시 말을 잃었다가 다급히 말했다.
"자, 잠시 기다려주시겠어요, 공자님? 바로 지점장 님을 모셔올 테니······."
그렇게 말하고 안쪽으로 들어간 여인이 돌아온 건 잠시 뒤였다.
두 남자를 대동하고서 돌아왔는데 그중에 한 명은 낯이 익었다.
'그놈이네.'
아까 검문줄에서 봤던 그 장발 놈.
놈이 내게 영업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서 인사했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공자님. 뱀파이어 노예를 구매하시려 방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이쪽은 지점장인 클링크고, 저는 발킬로프의 간부인 존이라고 합니다."
존이라는 놈은 그렇게 말하며 나와 내 뒤에 선 아셸을 한 번 순식간에 훑어봤다.
"한데, 공자님께서는 누구이신지 감히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굳이 알 필요가 있나?"
내 말에 놈의 인상이 아주 미약하게 일그러졌다가, 도로 펴졌다.
"하하! 물론 그럴 필요는 없죠. 백금화 두 닢에 뱀파이어 노예를 구매할 의향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런데 말입니다, 들으셨다시피 이미 구매할 분이 정해진 상품이라 저희도 판매에 약간의 곤란함이······."
혀가 길어지며 간을 보려는 놈에게 나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백금화 세 닢."
"······."
"더 올릴 생각은 없다. 그만 나불거리고 이 금액에 판매할 건지 아닌지만 말해라. 없다면 바로 돌아가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눈앞에서 백금화 세 닢을 꺼내들었다.
그에 옆에 선 지점장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놈을 돌아봤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놈이 이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공자님. 말씀대로 백금화 세 닢에 판매하겠습니다. 저희 발킬로프 노예 거래점을 이용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나는 놈의 안내에 따라 건물의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간격을 두고 있는 철창마다 노예들이 갇혀있었는데,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광경이었다.
"여기입니다."
끝내 도착한 감옥에는 어린 소년과 소녀들이 갇혀있었다.
그중에는 내가 찾던 뱀파이어 소녀도 있었다.
발목에는 철로 된 족쇄를 차고 있었는데, 발목이 다 까져서 피로 딱지가 진 게 보였다.
철창을 열쇠로 열고 안으로 들어간 놈이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일어나라, 흡혈귀 년아. 네 주인님이 오셨다."
그에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다봤다.
공허함이 감도는 텅 빈 눈 속에 나에 대한 경계심과 적의가 섞인 게 느껴졌다.
나도 그녀를 마주 보다가 말했다.
"족쇄를 풀어라."
"예, 예. 알겠습니다."
이내 놈이 발목의 족쇄를 풀어주고 소녀를 철창 밖으로 내보냈다. 아셸이 그녀를 받아들었다.
"원하시면 바로 목욕을 시켜서 깔끔한 상태로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놈이 눈웃음을 지으며 소녀를 바라봤다.
그 눈빛을 받은 소녀가 몸을 움찔 떨었다.
"됐으니 바로 데려가겠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대금을······ 아, 감사합니다."
나는 바로 놈에게 백금화 세 닢을 넘겨주었다.
다시 지상으로 올라간 다음 더 대화도 나누기 싫어 바로 나가려는데, 놈이 나를 붙잡고 말했다.
"공자님, 혹시 저희가 도미호크 시에서 주최하는 비밀 경매에 대해서 아십니까?"
나는 뒤를 돌아봤다.
놈이 씨익 웃으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대체로 다양한 종족의 품질 좋은 노예들이 나오고, 가끔 유적에서 발굴된 보물들이 나오기도 하는 경매입니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이걸······."
놈이 그렇게 말하며 내게 넘긴 건 고급스런 봉투에 담긴 초대장이었다.
"도미호크 시에 위치한 지점장을 찾아가시면 그가 알아서 경매에 대해 잘 안내해드릴 겁니다."
"······."
"그럼 부디 또 만나뵐 수 있기를 고대하겠습니다, 공자님."
또 만나긴 개뿔.
나는 다시 몸을 돌려 건물을 나섰다.
초감각으로 강화된 청력에 안에서 놈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존 님, 정말 괜찮은 겁니까? 경매에 나갈 상품이었는데······."
"형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리면 되니까 상관없어. 그리고 어차피 한 놈 더 있잖아."
"하지만 그래도······."
"뱀파이어면 끽해야 100골드도 못 넘길 상품이었는데, 그걸 몇 배로 팔았으니 얼마나 이득이냐? 킥. 보니까 어디 다른 군주령에서 온 귀족 같은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소녀를 데리고 숙소로 향했다.
뱀파이어 (2)
숙소로 돌아온 후, 꼴이 말이 아니었기에 일단은 목욕부터 시키기로 했다.
씻는 걸 도와줄 사람이 아셸밖에 없었기에 그녀에게 맡겼다.
그렇게 소녀를 씻기고 난 다음 그녀와 대화를 시도해봤다.
"이름이 뭔지 알려줄 수 있겠나?"
"······."
"배가 고픈 거라면 괜찮으니 말해라. 바로 식사를 차려줄 테니."
"······."
하지만 대화는 이렇듯 일방통행이었다.
그녀는 그저 겁 먹은 초식동물처럼 내 눈치를 보며, 어딘가 안절부절못한 기색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뱀파이어라고 대륙공용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건 아닐 텐데 말이다. 그냥 날 경계하는 건가.
"뱀파이어,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셈이냐?"
내 뒤쪽에 서있던 바로스가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압력이 담긴 음성에 소녀가 몸을 움찔 떨며 더욱 움츠러들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바로스를 돌아봤다. 그가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반대쪽의 아셸을 돌아보며 물었다.
"씻길 때도 이랬나?"
"예, 말을 걸어봤지만 아무 말도······."
참 난감하다.
나는 현실에서도 애들과 잘 어울리는 것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기에, 이럴 때는 어째야 되나 싶었다.
일단 뭐 말이 통해야 얘를 엘로드 숲으로 데려가든가 말든가 하지.
"넌 혹시 엘로드 숲에서 살던 뱀파이어 부족인가?"
"······."
그 말에도 소녀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냥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기색이었다.
엘로드 숲의 부족이 맞다면 뭐라도 반응이 있어야 될 텐데······ 그럼 다른 곳에서 살던 뱀파이어인가?
'······근데 생각해보니 그것도 곤란하네.'
엘로드 숲 출신이 아닌 뱀파이어를 대뜸 자기 고향도 아니고 다른 부족들의 품으로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일단 엘로드 숲으로 가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팔려서 그 부분은 깜빡하고 말았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소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널 구속하고 있을 생각이 없다. 원한다면 네가 있던 고향으로 데려다주마."
"······."
"뭐라도 말 좀 해봐라. 아니면 엘로드 숲에서 살고 있는 네 동족들이 있으니 그곳으로 데려다줄 수도 있다."
"······!"
그에 여태껏 아무 말도 없던 소녀에게서 처음으로 반응이 나타났다.
그녀의 동공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드디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엘로드 숲에······ 내 동족······ 살고 있어요?"
나는 옳거니 하며 바로 대답했다.
"그래, 아주 평화로운 뱀파이어 부족이 하나 살고 있지."
"에, 엘로드 숲이······ 어디예요?"
"이 도시에서 서쪽으로 멀리······ 아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곳으로 가고 싶은 거냐?"
가고 싶다고 말해라, 제발.
소녀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속으로 환희를 터뜨리며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곧바로 데려다주마."
"······."
"그런데 배가 고프진 않나? 제대로 뭘 먹진 못했을 것 같은데. 천천히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를······."
······응?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미간을 좁혔다.
소녀의 호흡이 거칠어진 게 느껴졌다.
다리까지 배배 꼬면서 아까보다 더 안절부절못하는 게, 아무리 봐도 정상인 상태로 보이지가 않았다. 뭐지?
"이봐, 괜찮나?"
그녀가 정신이라도 차리려는 듯 고개를 거칠게 휘휘 털었다.
"괘, 괜찮아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안 괜찮아 보인다.
나는 소녀의 상태를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자 그녀가 격한 반응을 보이며 뒤로 거리를 벌렸다. 나도 당황해서 멈칫했다.
"오, 오지 마요."
"······."
"더, 더 참기 힘들어요, 달콤한 냄새······ 가까이 오지 마······."
이제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고개를 도리질치는 그녀를 보며, 나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맞다, 어린 뱀파이어는······.'
뱀파이어는 기본적으로 피를 주식으로 먹을 수 있는 종족이었다. 그리고 선천적으로 흡혈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성체로 자라며 그 본능을 억누를 수 있게 되지만, 아직 어린 뱀파이어는 그게 힘들다는 설정이 있었던 게 기억났다. 주기적으로 본능이 폭발한다고.
그래서 성체들이 어린 뱀파이어에게 자신들의 피를 나눠주며 욕구를 해결시켜주기도 한다고 했던가.
"내 피를 먹고 싶은 거냐?"
나는 소매를 걷고 소녀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먹어라."
"······."
"괜찮으니 먹어도 된다. 이리 와라."
나는 최대한 어르는 투로 말했다.
소녀의 표정이 무언가에 홀린 듯 점점 풀리는가 싶더니, 천천히 나를 향해서 다가왔다.
콰악!
팔에 따끔하고 올라오는 고통.
소녀가 내 팔뚝을 붙잡고 송곳니를 박아넣더니 그대로 피를 쭉쭉 빨아먹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바로스와 아셸이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무, 무례한······ 론 님의 피 말고 내 피를 먹어라, 뱀파이어."
"됐으니 가만히 둬라."
소매를 걷고 나서려는 바로스를 말리고 의자에 앉았다.
잠시 동안 방에 소녀가 피를 빨아먹는 소리만 울렸다.
나는 약간의 어색함과 민망함을 느끼며 팔에 매달려서 정신없이 식사를 하는 소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근데 괜찮나?'
생각보다 좀 오래 먹는데?
초재생이 있으니 괜찮기야 하겠지만.
"······프하."
곧 포만감 가득한 숨을 내뱉으며 소녀가 입을 뗐다.
그리고는 뒤늦게야 민망한 기색으로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죄송해요······."
"괜찮다."
나는 팔에 묻은 피를 닦고서 문 자리를 확인했다. 상처는 금세 재생되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뒤로는 나에 대한 경계가 풀렸는지 소녀와 정상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루디카.
그녀는 엘로드 숲이 아닌 칼데릭에서 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 출신의 뱀파이어였다.
여기까지 노예로 잡혀서 오게 된 이유를 들어보면 이러했다.
"부족들끼리 싸움이 났어요. 나쁜 부족이 우리 부족을 다 죽여버리고 집들도 다 차지했어요."
어려서 그런지 어휘력이 빈약한 설명이었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그러니까 산맥에서 사는 뱀파이어 부족들끼리 전쟁이 났고, 그녀가 속한 부족은 패배해서 밀려난 모양이었다.
그리고 겨우 살아남은 이들은 흩어져서 산맥을 떠났고, 그중에 루디카가 속한 무리는 다른 보금자리를 찾아 떠돌다가 노예상들을 마주쳤다고 한다.
"인간들이 어른은 성가시다고 하면서 다 죽였어요. 우리 엄마하고 아빠도. 그리고 나하고 언니는 붙잡혔어요."
"······."
그 마주쳤다는 인간들이 발킬로프의 노예 사냥꾼들이겠지.
다 자란 성체는 혈술을 사용하니 제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전부 죽인 거겠고.
야만인, 엘프, 수인 등등, 종족을 가리지 않고 세간에서 떨어져 자연에 숨어 사는 소수 부족들을 찾아서 붙잡는 것 역시 놈들이 노예를 수급하는 방식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듣고만 있어도 짜증이 치솟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언니라고?'
혼자가 아니라 언니가 있었다는 건가?
루디카의 말이 이어졌다.
"언니는 날 지키려다가 먼저 잡히고, 나는 숨어있다가 나중에 잡혔어요."
"그렇군."
"이, 인간들이 경매라는 말을 계속 하면서 언니가 거기로 먼저 이동했다고 했어요. 언니는 아마 경매라는 곳에 있는 거예요."
루디카가 다급해진 투로 말했다.
말하는 걸 보니 경매라는 게 뭔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보며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구해달라는 건가······.'
루디카가 울먹이며 계속 말했다.
"에, 엘로드 숲이라는 곳에 있는 동족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는 없을까요? 언니를 구해야 돼요. 언니는 절 구하려다가······."
이제 보니 엘로드 숲에 동족이 있다는 말을 듣고 반응했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던 모양이다. 물론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지만.
나는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라, 네 언니도 구해줄 테니."
그에 루디카의 얼굴이 밝아졌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말은 했지만 상황이 좀 귀찮아진 듯했다.
그렇다고 제 언니는 아직 붙잡혀있다는데 얘만 달랑 데리고 갈 수도 없는 거고.
'일단은 도미호크 시로 가봐야 되나.'
마침 또 경매에 대해 초대장을 받은 게 있기는 했다.
우선 도미호크 시로 이동해서 경매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다음 일은 그때 가서 어떻게 할지 정하기로 했다.
***
하루 도시에서 묵은 뒤, 우리는 곧바로 도미호크 시를 향해서 출발했다.
큐백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기에 마차를 타고 얼마 걸리진 않았다.
쮸우웁.
이동하는 동안 루디카는 계속해서 내 피로 식사를 했다.
뱀파이어라고 평범한 음식을 못 먹는 것도 아닌데 맛이라도 들렸는지 내 피만 고집했다.
나는 한쪽 팔에 매달려있는 루디카를 두고 한 손으로 내 식사를 했다.
그런 그녀를 못마땅한 눈으로 지켜보던 바로스가 말했다.
"뱀파이어, 론 님께 그만 무례를 범하고 내 피를 먹어라. 네게 피를 베풀어주시는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나 아느냐?"
괜찮다니까 쟤도 참 끈질기게 저러고 있었다.
팔에서 입을 뗀 루디카가 바로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싫어요······ 맛없는 냄새 나요."
"······뭣?"
그 말에 바로스는 조금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뱀파이어에게도 입맛에 맞는 피가 있고 아닌 피가 있는 건가.
아무래도 그녀에게 엘프의 피는 입맛에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인간의 피를 좋아하나.
'······인간.'
문득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이 몸의 종족이 인간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확실한 건가?
아셸도 겉으로는 인간과 다를 게 없지만 그녀의 종족은 인간이 아닌 백월족이다.
이 세계에는 인간과 유사한 다른 종족들이 얼마든지 존재했다. 나도 그런 종족 중 하나일 수도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기엔 이 몸에 뭐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뭐, 역시 그냥 인간인 게 맞겠지.
별 싱거운 생각을 털어버리고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식사를 마친 다음 다시 마차에 올라서 출발했다.
앞으로 이틀 정도만 더 이동하면 도미호크 시에 도착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루디카는 졸린지 꾸벅꾸벅 졸다가 곧 고개를 떨궜고, 나는 언제나처럼 창밖의 풍경을 구경했다.
그렇게 몇 시간쯤 이동했을까.
"······?"
초감각에 미약한 기척이 걸렸다. 꽤 떨어진 앞쪽이었다.
뭔가 싶어 감각을 더 강화한 나는 이내 미간을 좁혔다.
'전투?'
쇳소리, 살이 찢기는 소리, 그리고 비명.
명백히 단체로 싸움이 벌어진 듯한 소리들이었다.
'여긴 가도인데.'
혹시나 다른 행인이 도적들에게 습격이라도 당한 건가 싶었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며 소란도 가까워졌다.
이내 상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즈음에는 전투가 끝났는지, 더 이상의 소음은 없었다.
"······."
나는 마차 앞쪽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일단 익숙한 놈들이 있었다.
노예를 싣고 있는 마차, 그를 둘러싼 발킬로프의 조직원들과 간부라는 장발 놈.
순간 놈들이 이곳에 왜 있는 건가 싶었지만 이내 이해했다.
도미호크로 경매에 나설 노예들을 싣고 가던 놈들과 우연히 경로와 타이밍이 겹친 모양.
그리고 어째서인지, 그런 놈들의 주변에 피를 흩뿌리며 널브러져 있는 수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발킬로프의 놈들은 아직 검을 거두지 않은 채 이쪽의 마차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셸과 함께 멈춰선 마차에서 내려서 그들에게 모습을 비추었다.
"······음?"
장발 놈이 내 얼굴을 보고서 활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 공자님. 어쩌다 이런 곳에서 또 뵙게 되었군요. 도미호크로 가시는 길이셨습니까?"
나는 놈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주위에 널브러진 수인들을 슥 훑어봤다.
이미 죽은 이들이 절반이었고, 나머지는 상처를 입은 채 헐떡이며 발킬로프의 조직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시 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놈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아, 다름이 아니라 습격을 좀 당해서 말입니다."
"습격?"
"이 짐승 새끼들이 저기 갇힌 동족을 구하겠다고 저희를 습격할 계획이라도 짰던 모양입니다. 별 일은 아닙니다. 종종 있는 일이죠."
그렇게 말하며 놈이 턱짓을 한 곳에는 철창 안에 갇힌 어린 수인들이 있었다.
전에 루디카와 함께 노예 거래점의 지하에 갇혀있던 그들이었다.
사내들이 킥킥 웃으며 쓰러진 수인들을 하나씩 붙잡고 끌기 시작했다.
"주제도 모르고 우릴 습격했으니 그 대가를 치뤄야지? 죽은 놈들이야 죽은 거고, 산 놈들은 함께 노예로 팔려갈 줄 알거라."
장발의 비웃음 섞인 말에 한 수인족 여인이 이를 빠드득 갈며 소리쳤다.
"이 잔악한 인간 놈들아! 우리의 터전에 먼저 침범한 건, 숲 외곽으로 나갔던 부족원들을 죽이고 어린아이들을 납치한 건 너희들이 아니냐!"
목에서 피가 들끓는 듯한 처절한 외침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장발을 돌아봤다.
놈이 싱긋 웃으며 그녀를 향해 다가가더니 머리를 발로 짓밟고 바닥에 처박았다.
"웃기는 소리를 하고 있네. 자연의 순리라는 게 원래 그런 게 아니더냐? 강하면 짓밟고, 약하면 이렇게 짓밟히는."
"끅······!"
"아, 공자님께는 이런 더러운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개의치 마시고 가던 길 마저 가시지요. 저희는 뒷정리가 좀 오래 걸릴 듯합니다."
놈이 그렇게 말하고는 낄낄 웃으며 짓밟은 머리를 잘근잘근 비볐다.
철창에 갇혀있던 어린 수인 하나가 울먹이면서 소리쳤다.
"어, 언니! 언니이······!"
"오, 이게 혹시 네 언니였냐? 자매가 쌍으로 사이좋게 팔려갈 테니 잘 됐구나. 다양한 취향을 가진 나으리들께서 너희를 골고루 이뻐해주실 거다."
악마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나는 그 광경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하늘을 한 번 쳐다봤다.
검문소에서 노예들을 발견했을 때 들었던 생각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순간의 자기만족일 뿐이라고······.'
그러면 뭐 어떤가 싶었다.
사람이 일관성 있게만 살 수 있다면 그게 사람인가?
가끔은 감정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그게 과연 사람인가.
이건 내 인내심의 선을 넘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내리고 장발에게 말했다.
"그들을 놓아주는 게 어떤가."
장발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놓아주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 혹시 나으리께서 이들을 이 자리에서 구매해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나는 다시 말했다.
"네게 줄 금화는 한 푼도 없다. 그들을 그냥 두고 꺼지라는 소리다."
내 말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수인들을 끌고 가던 발킬로프의 조직원들도 전부 동작을 멈추고, 날 쳐다봤다.
장발이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그게 무슨······."
"못하겠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
그리고 아셸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셸."
"······예."
고요한 가도에 내 목소리가 차갑게 울려퍼졌다.
"전부 죽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