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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3)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아셸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발킬로프 놈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공자님······ 혹시 머리가 갑자기 어떻게 되신 겁니까?"

장발이 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고개를 양옆으로 까닥였다.

"아무리 정의의 사도 흉내를 내고 싶으셔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하셔야죠. 저희가······."

나는 놈을 가리키며 말을 끊고 말했다.

"저놈은 잠깐 목숨을 붙여둬라. 물어봐야 될 게 있으니."

"이런 씨······."

놈이 와락 인상을 찌푸린 순간이었다.

아셸의 검이 뽑혔고, 푸른빛의 섬광이 어둠을 뚫고 번뜩였다.

촤아아악!

그리고 터져나오는 선혈들.

그걸로 끝이었다.

목을 잃은 사내들의 몸이 하나둘씩 바닥에 널부러졌다. 가도가 피로 물들고,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의 시체들이 만들어졌다.

예전이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보이지도 않았겠지만, 이제는 초감각 덕분에 선명하게 보였다.

아셸이 장발 놈의 양옆으로 검기를 쏴서 놈들의 목을 일격에 베어버린 것이었다.

"······끄아아악!"

장발이 잘린 팔의 절단면을 붙잡고 고통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끅끅거리다가 다급히 주위를 둘러본다. 전멸한 수하들을 본 놈의 동공이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이, 이게······ 대체 뭔······."

놈의 눈에는 아셸이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레벨이 60에 가깝다고 해도 80레벨이 넘는 아셸과는 아득한 격의 차이가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놈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도미호크 시에서 열리는 경매에 뱀파이어가 나오나?"

"······."

"너희들이 붙잡은 뱀파이어 자매 중 언니 쪽 말이다."

"······마, 맞습니다. 나옵니다."

놈은 순식간에 공손해져서 반쯤 정신이 나간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살려주십시오, 공자님. 원하시는 건 전부 말씀드릴 테니······."

"경매가 열리는 장소와 날짜는?"

"아, 앞으로 정확히 보름 뒤, 장소는 도시 외곽에 있는 호튼이란 자의 저택의 지하에서 열립니다. 해가 떨어질 즈음부터 자정까지······ 초대장을 들고 찾아가시면 됩니다."

저택의 지하인가.

"경매에는 누가 참가하지?"

"대체로 인근 도시의 귀족들이 참여하고······ 군주성에서 오신 관리 분들도 몇몇 참석합니다."

"양지의 경매도 아닌 듯한데 대놓고 참가하나?"

"무, 물론 아닙니다. 전부 각자 가면을 착용하고 경매에 참석합니다."

"초대장은 한 장당 한 사람만 참여가 가능한가?"

"······아닙니다. 초대장을 가진 참석자가 한 명까지는 동행인을 붙여서 경매에 참여하는 게 가능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볼 만한 건 이게 끝이었다.

놈이 다급해져서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고, 공자님. 제가 도미호크의 경매장까지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이놈들이야 어차피 쓰고 버리는 소모품 같은 놈들이니 죽인 건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VIP로 경매에 참여하실 수 있도록 제가······."

말없이 놈을 빤히 내려다봤다.

내 눈빛에서 곧 일어날 미래를 읽었는지 놈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저, 저를 죽이시면 나으리께서도 곤란해지실 겁니다! 저는 발킬로프의 간부입니다! 군주성의 고위 관리들도 모두 저희 단체에 발을 걸치고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제 형님이 바로 발킬로프의 수장······!"

나는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강하면 짓밟고, 약하면 짓밟히는 거라고 하지 않았나?"

"······."

"네가 말했듯 자연의 순리일 뿐이니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등 뒤로 처절한 외침이 들렸다.

"씨, 씨발 이 개새끼야아아!"

놈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들고 돌아선 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동시에 내 옆을 스치고 아셸의 신형이 날아들었다.

푸화학!

파육음이 울리고, 무언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어차피 아셸이 아니었어도 부동 장막으로 막을 수 있었기에 놀라지도 않았다.

아셸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가까이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약간의 묘한 기분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봤다. 핏물과 함께 널브러진 시체들을.

사람이 죽는 거야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많이 봤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직접 벌인 학살이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살아생전 첫 살인은 권성을 죽인 것이었지만 그때는 별 느낌이 없었다.

그건 솔직히 인간보다도 괴물을 죽인 기분이었고, 즉살로 죽여버린 만큼 무언가를 죽였다는 감각도 별로 없었으니까.

그리고 칼데릭을 돌아다니며 마주친 도적들이야 나서기도 전에 바로스가 알아서 전부 죽여버렸고.

이번에도 별 느낌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근데 그게 단지 제왕의 혼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지금 묘한 기분을 느끼는 건 충격이나 죄책감 따위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마음이 너무 평온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쓰레기들이었다고는 하지만.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냥 내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 모양이지.

"으윽······."

쓰러진 수인족들이 하나둘씩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당혹스런 눈으로 전멸한 발킬로프들을 둘러봤다. 그러다 이내 이쪽으로 시선이 모였다.

"······우리를 도와준 것인가, 인간?"

방금까지 장발에게 밟혔던 수인족 여인이 경계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차까지 챙겨서 서둘러 떠나라. 시간이 지나면 방금 죽인 놈들이 속한 조직에서 추적하려 들 수도 있다."

"아, 알겠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다른 수인들을 통솔해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부상이 심각한 동료들을 살피고 철창에 갇힌 이들을 구했다.

구속에서 풀려난 어린 수인들이 울고불며 그들에게 안겨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마차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데, 여인이 소리쳤다.

"정말로 고맙다, 인간들! 나는 단단한 바위 부족의 부족장인 카고르다! 부족의 명예를 걸고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다!"

단단한 바위?

이름 한 번 참 단순한 부족이었다.

이 대륙에 널리고 널린 게 저런 야만 부족들이었기에, 이 마주침에 특별한 의미를 가질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또 볼 일이 있겠나. 앞으로는 노예 사냥꾼들을 더 조심해라."

"······그래도 은혜는 반드시 기억하겠다! 너의 이름을 알려다오!"

"론이다."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차에 올랐다.

어느새 잠에서 깨 창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던 루디카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 서린 두려움이 보였기에 나는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었다.

"네 언니는 경매장에 있는 게 맞는 모양이다. 금방 구해주마."

정리가 끝나고 수인들이 먼저 떠나갔다.

나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경매장······.'

일단 도미호크 시에서 열리는 경매에 대해선 대충 알았다.

보름 뒤, 호튼이란 인물이 소유하고 있는 저택의 지하에서. 그 저택도 발킬로프에서 관리하는 저택이겠지.

'그대로 참가할까?'

머릿속에 두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그냥 조용히 경매에 참가해서 루디카의 언니만 구하는 것.

어차피 돈이야 넘치도록 있으니 어떤 뱀파이어에 미친 변태 귀족 놈이랑 입찰 경쟁이라도 붙지 않는 이상, 수월하게 내가 낙찰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경매고 뭐고 싹 다 뒤집어엎는 것.

이거는 아셸이 있으니 그냥 혼자서 할 수도 있다.

경매장에 발킬로프의 전투원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지는 상관없었다. 레벨 차이 앞에 머릿수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아니면 도미호크 시의 시장을 찾아가서 권력으로 찍어눌러 일을 완전히 키워버리든가 할 수도 있을 테고.

자기가 관리하는 도시에서 경매가 열리고 있는데 당연히 시장이 모를 리가 없고, 다 함께 엮여있을 테니까.

"······."

잠시 저울질을 하던 나는 끝내 조용히 처리하는 쪽을 선택했다.

역시 다른 군주령에서 일을 크게 벌이는 건 꺼려졌다.

더 성가시게 엮이는 일 없이 어서 루디카의 언니만 구해서 엘로드 숲으로 향하자. 그거면 됐다.

'그리고 방금 죽인 놈들은······.'

목격자야 없지만 혹시나 꼬리가 밟힐 수도 있긴 하겠다 싶었다. 보는 눈이 없다고 추적을 못하는 것도 아닐 테니까.

물론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밟히면 밟히는 거지, 뭐. 또 충돌이 있으면 추적자들도 전부 처리하면 될 뿐이다.

그래도 계속 귀찮게 굴면, 그건 그때 가서 발킬로프를 통째로 뒤집어버려도 되는 거고.

생각은 금세 정리되었다.

다시 출발한 마차가 가도를 가로질렀다.

***

시간이 흘러 도미호크 시에 도착했다.

경매가 열리기까지 시간이 좀 남았기에 그동안은 그냥 도시 구경이나 했다.

그리고 경매일이 다가온 밤.

나는 숙소에 바로스와 루디카를 남겨두고 아셸과 둘이서 거리로 나왔다.

'보이는군.'

거리에는 이미 가면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들이 몇몇 나돌고 있었다.

호위로 보이는 이들도 옆에 붙어있는 걸로 보아 경매에 참여하기 위해 도시로 온 귀족들임은 분명했다.

나는 그들을 둘러보며 야시장이 열린 거리를 걸었다.

마침 가면을 파는 노점상이 있었기에 멈춰서서 가판대에 늘어진 가면들을 살폈다.

여러 동물 가면들도 있었고, 광대가 쓰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가면들도 있었다.

나는 그중에 여우 동물 가면으로 대충 하나 골랐다.

"너도 하나 골라라."

아셸에게 말하자 그녀가 가면들을 슥 훑어봤다.

성격을 생각하면 아무거나 대충 하나 고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신중하게 고르고 있었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이내 아셸이 가면 하나를 집어들었다. 길쭉한 귀가 달린 토끼 가면이었다.

뭔가 어울리지 않는 걸 골랐기에 빤히 쳐다보니, 그녀가 멋쩍은 듯이 말했다.

"너무 눈에 띄면 다른 걸 고르겠습니다."

"아니, 상관없다."

가면을 계산하고 우리는 곧장 목적지로 향했다.

호튼이라는 인물의 저택은 도시의 외곽에 있었는데, 위치는 진작에 파악해뒀다.

대로를 걷다가 골목길로 빠져서 다시 좁은 길로 나왔다.

주변에 사람들은 점점 없어지고, 서서히 저멀리 목적지인 저택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택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어차피 지하에서 경매를 진행하다고 하니 의미는 없었다.

저택 입구 인근에는 가면을 쓴 이들이 하나둘씩 저택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가면을 써라."

"예."

나와 아셸은 가면을 쓰고 그들 사이에 껴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짧게 이어진 정원을 지나 다다른 저택의 입구에는 한 엘프 노인이 서있었다.

그가 앞선 사람들의 초대장을 검사하고 있었기에 나도 품에서 초대장을 꺼냈다.

내 차례가 오고 나는 노인에게 초대장을 보여주었다.

그가 가면을 쓴 나와 아셸을 한 차례 훑어보더니, 초대장을 받아들고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즐거운 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안으로 들어가셔서 앞쪽에 보이는 계단으로 바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뱀파이어 (4) - 무료 끝

어두운 방 안.

한 남자가 책상에 다리를 꼬아 올린 채 앉아서 의자를 까닥이고 있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 터질 듯한 근육질의 전신. 하지만 그와 상반되게 자아내는 분위기는 음산하고도 날카롭다.

앞쪽에 서서 막 보고를 마친 수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니까······."

"예."

"큐백스에서 정체 모를 젊은 귀족 놈팽이가 뱀파이어를 거금에 구매했다, 알아낸 건 이것뿐인가?"

"······그렇습니다."

"그게 내 동생이 죽은 거랑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도 전혀 모르고 말이야······."

남자의 말꼬리가 흐릿하게 늘어졌다.

수하는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의 버릇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킬로프의 수장 잭, 그것이 남자의 정체였다.

조직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경매 주최를 앞두고 현재 잭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동생인 존이 도미호크 시로 경매품인 노예들을 호송해서 오다가 습격을 당해 죽었다.

더 열이 받는 건 그 씹어 죽일 새끼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추적을 하기엔 발견이 너무 늦었고, 뒤늦게 전후 사정을 알아보려 큐백스로도 수하들을 보냈지만 알아낸 거라곤 방금 들은 보고처럼 별 것 없었다.

"후우우······."

잭이 늘어지는 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분노를 억누르기가 힘든 건 오랜만이었다.

틈틈히 자금도 빼돌리고, 함부로 노예들에게 손을 대고, 여러모로 미운 놈이었어도 그래도 세상에 하나뿐인 혈육이었다.

길바닥에서 구르던 시절부터 발킬로프를 조직하고 3군주령 제일의 암조직으로 키우기까지 계속해서 함께해온 혈육.

다시금 꾸역꾸역 치솟는 노기와 허무함을 억누르며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곧 경매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더 자세한 조사는 일단 그쪽부터 마치고 나서였다.

똑똑.

"들어와라."

노크가 울리고, 한 엘프 노인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경매에 참석하는 자들의 입장을 맡은 간부 조직원이었다.

잭이 슬며시 눈을 뜨고 물었다.

"뭐냐."

"예, 다름이 아니라 경매에 정보가 없는 분이 참석하셔서 말입니다."

가면을 쓰곤 있다지만 그건 참석자들끼리 서로의 얼굴을 가리기 위한 용도일 뿐이다.

주최자인 발킬로프는 당연히 참석자들의 정체를 대체로 파악하고 있었다. 애초에 초대장을 건네는 것도 그들이고, 늘 참석하는 이들만 참석하는 게 대부분이었으니까.

물론 종종 정보가 없는 참석자가 생길 때도 있었고, 그럴 때는 그쪽에 더 약간의 주의를 기울이고는 했다.

평소라면 알겠다고 가볍게 넘길 보고였으나 잭은 보고를 올린 수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존, 그놈이 뱀파이어를 구매했다는 놈에게 초대장을 건넸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젊은 인간 남자와 붙어있는 호위 기사는 계집이었다고 했고. 외관이 어떻다고?"

"남자 쪽은 흑발에, 호위 쪽은 백발이었습니다."

잭이 다시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받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흑발의 인간 남성과 백발의 인간 여성이었습니다."

"그놈들이군."

큐백스에서 경매에 나갈 뱀파이어를 구매했다는 놈들.

잭은 잠시 생갹에 잠겨있다가 이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동생의 죽음과 그들이 어떤 연관이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나마 당장 기대해볼 건덕지는 그것뿐인 듯했다.

***

지하로 내려가자 펼쳐진 풍경은 제법 놀라왔다.

좌석과 단상, 딱 상상했던 정도의 경매장의 모습이긴 한데, 공간이 생각보다 넓었기 때문이다.

경매장 내부를 벽면 곳곳에 박힌 흐릿한 발광석들이 어스름히 밝히고 있었고, 이미 좌석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맨 뒤쪽에는 2층 난간에 놓인 좌석들도 존재했는데, 저건 한눈에 봐도 VIP석처럼 보였다.

나는 입구에 서있던 이의 안내에 따라서 자리를 골라 잡고 아셸과 함께 앉았다. 적당한 중간 열이었다.

'이건 뭐야.'

의자의 팔걸이에 번호가 쓰인 피켓 같은 것이 있었기에 들고 살펴봤다. 보아하니 경매에 입찰할 때 사용하는 거였다.

피켓을 내려놓고 다시 단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기서 노예들이 나오는 건가.'

그리고 진행자가 노예들을 소개하며 떠들고, 참석자들은 그걸 우리 안의 짐승 보듯 구경하다가 마음에 들면 입찰하고.

이런 장소를 경험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도 벌써부터 대충 그려지는 광경이었다.

나는 작게 혀를 차며 아셸을 돌아봤다.

그녀 역시 자리가 불편한지 가면 너머로도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언제 시작하냐.'

사람들이 점점 모이며 어느새 좌석은 절반 이상이 가득 찼다.

나처럼 경매가 시작하길 기다리며 조용히 앉아있는 이들이 있는 반면 동행자와 떠드는 이들도 있었는데, 초감각으로 그들의 대화가 훤히 들렸다.

"이번에 수인 노예들 중에 상등품이 많은 모양이야. 기대하라고 아주 자신을 하던데."

"그런가? 내 마음에 쏙 드는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군. 걸어줄 목줄도 따로 하나 특별히 제작해놨는데······."

듣고 있기 역겨운 대화였기에 이내 신경을 껐다.

잠시 뒤, 단상의 커튼이 걷히더니 조명과 함께 가면을 쓴 정장의 남자가 무대에 나타났다.

"모두 안녕하십니까, 경매에 참여해주신 신사숙녀 여러분!"

이제부터 경매가 시작되려는 듯했다.

유쾌한 목소리로 인사한 진행자가 쓸데없는 소리를 잠시 주절주절 떠들다가, 바로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입찰 방식은 앉아계신 의자에 준비되어 있는 피켓을 들고 입찰 가격을 불러주시면 됩니다. 자, 그럼 첫 번째 상품입니다!"

단상 옆에서 반쯤 전라의 엘프 여인이 몸이 구속된 채 걸어나왔다. 눈에 생기가 전혀 없는.

"첫 번째 상품은 여성 엘프입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정도의 미모에 이런 붉은 머리칼을 가진 엘프는 쉽게 보기 힘들죠. 자, 그럼 이제 시작이니 가볍게 20골드부터 입찰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좌석에 앉은 이들 중 누군가가 바로 피켓을 들어올리며 본격적인 경매가 시작되었다.

30골드, 40골드, 70골드, 별 소란도 없이 빠르게 100골드까지 오르고 나서야 더 이상의 입찰은 없었다.

"100골드까지 나왔습니다! 더 입찰하실 분은 없으십니까?! 괜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이 정도 품질의 엘프 노예는 정말 어디서도 구하기 힘듭니다!"

진행자는 계속해서 입찰을 재촉하다가 마지막 카운트를 끊고 아쉽다는 듯 외쳤다.

"축하드립니다! 56번 신사 분께서 100골드에 낙찰하셨습니다!"

그 뒤로도 경매는 계속해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정말 다양한 종족들이 노예로 나왔다. 인간부터 시작해서 수인과 엘프, 그리고 다른 희귀 종족들.

진행자는 몇몇 노예들에겐 그들이 잡혀온 뒷배경을 설명하는 것에도 힘을 썼다. 왜냐면 그 또한 노예의 값을 올리는 데에 크게 한몫하는 부분이었으니까.

특히나 세인테아 출신의 몰락 귀족 영애가 나왔을 때는 입찰가가 천정부지 솟아올라 500골드까지 치솟았다.

"······."

경매장의 더럽고 끈적한 열기가 몸에 달라붙는 듯했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조용히 경매를 지켜봤다.

대충 열 명도 넘게 거치고 나서야 드디어 내가 경매에 참여한 목적이 나왔다.

"다음 상품은 무려 뱀파이어입니다!"

나는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단상으로 끌려나온 이를 바라봤다.

다른 노예들처럼 손만 구속된 게 아니라 입에 재갈까지 물려있는 흑발 적안의 소녀. 한눈에 봐도 루디카와 닮은 얼굴.

"흡혈귀, 저주받은 종족이라고 불린다지만 꺼려하실 필요는 전혀 없다는 점을 미리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린 뱀파이어는 성체와 달리 그들 고유의 피를 다루는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니까요! 또 워낙에 야성이 강한 만큼 길들이는 맛도······."

그녀가 적의가 가득한 눈으로 좌석에 앉아있는 이들을 죽일 듯 노려봤다. 나와도 잠깐 시선이 마주쳤다.

진행자의 설명이 이어지고 슬슬 피켓을 들어올릴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나으리."

옆자리에 누군가 다가와서 털썩 앉았다.

"경매는 즐겁게 즐기고 계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전신에 근육이 터질 듯 우락부락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Lv. 68]

특히나 인상적인 건 머리 위 레벨이었다.

70레벨에 가까운 수준의 실력자.

뜬금없이 내게 말을 걸어온 그는 곧바로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저는 발킬로프의 수장인 잭이라고 합니다."

"······."

"한창 흥이 오르는 중에 죄송하지만, 나으리께 조금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그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큐백스 시에서 어린 뱀파이어를 구매하셨더군요. 초대장도 한 장 받으셨고 말입니다."

"그랬지."

"나으리께 초대장을 건네드린 놈이 제 동생이었습니다. 근데 그놈이 이곳 도미호크로 노예들을 호송해서 오다가 웬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랬나? 유감이군."

"······예, 아주 유감이죠. 그래서 말입니다."

놈의 눈이 야수처럼 번뜩였다.

"참 타이밍이 공교롭기에 혹시나 여쭙는 겁니다만, 나으리께선 그에 대해 뭐라도 알고 계신 게 있으신지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안하지만 잘 모르겠군."

놈이 나를 지그시 응시하더니, 한숨을 내뱉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제가 나으리의 사지를 하나씩 비틀어서 뽑아버려도 같은 대답이 나오겠습니까?"

"······."

"이 짓거리를 하면서 늘은 게 눈치밖에 없어서 말이야. 네가 내 동생을 죽인 게 맞군, 그렇지?"

······걸렸네.

죽인 장소에서부터 추적을 당한 걸까, 아니면 경매에 처음 참여한 거라 눈에 띈 걸까.

아무래도 중요한 건 아니었다. 놈은 이미 내가 동생을 죽였다는 걸 확신한 듯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놈이 죽기 전에 형이 수장이니 뭐니 했던가.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 물을 줄은 생각 못했는데.

'조용히 볼일만 보려 했더니.'

이래서야 그러기는 글렀다.

나는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죽였다."

"왜 죽였지?"

"글쎄, 왜 죽였을까?"

놈이 분노를 삭히는 듯 다시 한 번 긴 숨을 뱉어내고서 말했다.

"아직 말장난이 나오나 보군. 내가 지금부터 너에게 뭘 할 것 같나?"

"······."

"일단 고문실로 끌고갈 거다. 우리 조직에는 뛰어난 고문 기술자들도 아주 많거든. 장담컨대 세상에 이런 고통도 존재한다는 걸 네 온몸의 살과 뼈로 실감할 수 있게 될 거다. 몇 분 지나지도 않아서 그냥 죽여달라고 빌고 또 빌게 되겠지. 너도, 지금 네 옆에 앉아있는 호위 년도."

놈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나마 편한 죽음을 맞이할 기회를 줄 때 묻는 것에 성심성의껏 답하거라. 넌 누구인지, 또 내 동생은 왜 죽였는지."

"감당할 수 있겠나?"

놈이 내 말에 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감당? 같잖은 허세는 관둬라, 애송아. 이 3군주령에서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일은 없다. 네가 군주님의 숨겨진 자식이라도 되느냐? 아니면······."

"나는 7군주 론이다."

말소리가 우뚝 멈추었다.

놈은 귓가에 들려온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

"······뭐라고?"

"두 번 말해줘야 되나?"

나는 팔걸이에 턱을 괴고서 다시 앞쪽의 단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시작된 경매와 오르는 입찰가를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7군주, 론이다."

뱀파이어 (5)

놈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앉아있던 자세 그대로 굳어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순간 사고가 정지한 모양새였다.

"······크핫!"

이내 놈이 웃음을 터뜨렸다.

머리까지 숙이고서 끅끅거리며 웃던 놈이 정색하고서 말했다.

"정신이 나간 거냐? 칼데릭에서 군주의 이름을 사칭해?"

"······."

"네가 군주면 내가 세인테아의 용사다, 미친 새끼. 생각보다 훨씬 맛이 간 놈이었구나. 그딴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가 정말 먹힐 거라고 생각해서 지껄인 거냐."

뭐, 이런 반응이군.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놈에게는 그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게 정상이었다. 군주가 왜, 그것도 엔록의 7군주가 대체 왜 3군주령에서 이런 비밀 경매에 참여하고 있겠나.

"그래, 몸뚱이가 성한 채로는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하니 바람대로 해주마."

그렇게 말하며 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단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진행자의 진행을 멈추고 자신이 단상의 한가운데에 섰다.

"죄송하지만 여러분, 잠시 경매를 중단하도록 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참가자들이 앉은 좌석에서 소란이 일었다.

"저희 조직원들을 살해하고 초대장을 강탈하여 경매에 참가한 이가 있습니다. 쥐새끼를 먼저 처리하고 경매를 계속해서 정상적으로 진행하도록 할 테니,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뭘 어쩌려나 했더니 경매가 끝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 생각도 없던 모양이다.

단상에 선 놈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자연스레 주변의 시선도 나를 향해서 일제히 몰렸다.

참가자들이 떠들어대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이 또한 재밌는 이벤트라고 여기는 듯했다.

'하······.'

슬슬 피곤하다.

이 역겨운 경매를 기껏 여기까지 꾹 참고 봤더니 결국 이 꼴이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굳이 고민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별 수 있나? 날뛰는 대로 어울려줘야지.

"마지막 기회를 주마. 순순히 잡힐 테냐, 아니면 저항하다 팔다리 한두 군데는 잘릴 테냐."

어느새 주위에는 무장한 이들이 나타나서 내가 앉아있는 곳을 넓게 둘러싸고 있었다. 발킬로프의 전투원인가.

전부 50레벨이 넘고 60레벨이 넘는 이들도 몇몇 있는 걸로 봐서 정예 전력인 듯했다.

'약은 새끼네.'

나는 단상에 서있는 놈을 바라봤다.

말만 하는 걸로 봐선 당장 자리에서 지 손으로 찢어버릴 것처럼 굴더니, 혼자 뒤에서 빠져있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내 쪽의 전력이 정확하게 어떤지 모르니 일단 경계하겠다는 거겠지. 신중하다면 신중한 판단이었다.

여전히 가만히 앉아있는 내 모습에 놈이 혀를 차고는 명령했다.

"두 연놈 다 목숨만 붙여놔라."

주위에 있던 다른 참가자들이 바깥쪽으로 물러나고, 전투원들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왔다.

장내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좀 전까지의 더럽고 질척거렸던 열기는 순식간에 서늘함과 흉흉함으로 돌변했다.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우습게도 이 분위기가, 이제 곧 시체와 피비린내로 가득 채워질 이 상황이 사람을 사고파는 경매보다 차라리 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지만 나도 벌써 이 세계에 적응을 다 한 걸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다.

"아셸."

"예."

입을 열자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셸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나는 나지막이 뒷말을 이었다.

"전부 죽여도 상관없다."

상대는 수십, 그리고 전부 50, 60레벨대의 실력자.

반면에 내 쪽은 아셸 한 명.

그러나 나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싸우기 전부터 결과는 이미 정해져있었다.

지금껏 너무 규격 외의 괴물들만 마주쳐왔을 뿐이지, 아셸은 이 세계에서 충분히 최상위 반열에 속하는 강자다.

내가 설득해서 호위로 영입하지 않았다면 본래 대군주성의 최정예 전력인 흑린이 되었을 실력자.

발킬로프가 아무리 3군주령 최고의 암조직이라 한들 격 자체가 아득히 달랐다. 토끼 떼 사이의 늑대였다.

이 라사 세계관에서 레벨의 차이란 그토록 절대적이고 불합리한 것이었다.

"죽······."

전투원 하나가 입을 열려고 했다.

그게 그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촤아아아악!

아셸의 검에서 뿜어져나온 거대한 빛살이 사방으로 갈라졌다.

이어서 그들의 몸이 일시에 투두둑 갈라지며 무너져내렸다.

전투라고도 할 수 없었다. 발킬로프의 전투원들은 그렇게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전멸했다.

내게 있어선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지만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흐, 흐아악!"

잠시 상황을 못 파악하고 있던 참가자들이 이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장내가 혼돈으로 휩싸이는 와중에 나는 단상 쪽의 놈, 잭을 응시했다.

"······!"

반쯤 넋이 나가서 상황을 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놈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단상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와······.'

저렇게 바로 도망친다고?

그 뒤를 쫓아서 바로 아셸이 날아들었다.

등 뒤에서 휘둘러오는 검에 놈은 기겁하며 방어를 했다. 잠시 두 사람의 공방이 이어졌다.

놈도 레벨이 70에 육박하는 만큼 조금은 버티는가 싶었으나, 딱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한쪽 팔을 잘리고 벽면으로 튕겨나가 처박혔다.

"끄억······!"

아셸이 검을 거두고 이쪽을 돌아봤다.

전부 끝났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그녀의 압도적인 무력에 새삼 감탄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매 참가자, 그리고 진행자나 피라미 조직원 놈들은 진작 도망쳤고, 남아있는 건 단상 구석의 노예들뿐이었다.

그들은 어디로 도망치지도 못한 채 두려움에 질려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디아의 언니도 있었다.

"구속을 풀어줘라."

"예."

"안쪽에도 더 있을 테니 그들도 데려와서 한 곳으로 모으고."

나는 노예들은 아셸에게 맡기고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아셸의 검에 복부가 쩍 갈라지고 한쪽 팔도 잘린 채 다 죽어가던 놈이 간신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대, 대체······ 넌······ 뭐냐······."

나는 그 바로 앞에 멈춰섰다.

"말했잖아, 7군주라고."

"······."

"아직도 믿기지가 않나? 이제 와서 뭐가 중요하겠냐만."

"왜······ 왜······."

놈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완전히 탈진해버린 얼굴로 그 말만을 반복했다.

왜 대체 7군주가 이곳에 있는 건지, 왜 대체 자신의 동생을 죽이고 이런 일을 벌였는지.

굳이 다른 말은 붙이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 물음이었다.

나는 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냥."

"······."

"이 세상의 많고 많은 쓰레기들 중 너희가 하필 우연히도, 재수 없게 내 눈에 거슬린 거다. 그뿐이지."

정말 단지 그뿐이었다.

우연히 뱀파이어를 발견했고, 우연히 놈의 동생의 선을 넘은 악행이 눈에 띄었고, 그래서 죽였고, 그 사실을 경매에 참여했다가 걸렸고.

내가 이들에게 특별히 원한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저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굴러온 일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경매는 개판이 났고 이제 곧 수장도 죽을 테니, 발킬로프도 오늘부로 끝일 듯했지만.

"······크아아아악!"

억울함과 울분 섞인 눈빛으로 날 노려보던 놈이 마지막 힘을 짜내 몸을 튕기듯 일으켰다.

멀쩡한 쪽의 손에는 어느새 허리춤에서 뽑은 단검이 들려있었다.

서늘한 날이 목을 노리고 섬전처럼 찔러왔으나 부질없는 발악이었다.

놈의 움직임은 초감각에 너무도 느릿하고 선명하게 보였으니까.

부동 장막에 막힌 검날이 허공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정지했다.

놈은 눈을 부릅 뜨고서 검자루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다시 휘청이며 바닥에 몸을 무너뜨렸다.

한계가 온 듯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놈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즉살을 발동하며 옆으로 밀어버렸다.

풀썩.

그게 놈의 최후였다.

나는 시체에 눈길도 주지 않고 노예들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느새 구속에서 풀린 그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안쪽에서 아셸이 몇몇 노예들을 더 데리고 나왔다.

"그게 전부인가?"

"예, 그렇습니다."

나는 한곳에 모인 그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경매에 나온 인원보다 적은 것 같은데······ 알아서 도망친 사람들도 있는 건가?

"인간, 우리를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때 누군가 사나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루디카의 언니인 뱀파이어였다. 그녀는 여전히 적의 가득한 시선을 띠고 있었다.

기껏 구해주고 받기엔 억울한 눈빛이었지만 이해는 됐다.

가족들은 인간의 손에 죽고, 자신은 이곳에 노예로 잡혀왔으니 당연히 인간들이 증오스러울 수밖에.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루디카의 언니가 맞나?"

내 말에 그녀가 흠칫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 루디카? 어떻게 내 동생을······."

"나는 네 동생의 부탁을 받고 널 구하러 온 거다. 그러니 경계할 필요 없다."

나는 그녀에게 대강 설명해주었다. 큐백스에서 루디카를 만난 것부터 이곳 경매장에 오기까지의 사정을.

이야기를 모두 들은 그녀가 기쁨과 안도감 반, 그리고 여전히 경계가 반 남은 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정말 내 동생의 부탁을 받고 온 거예요? 정말로?"

"그래. 아니면 내가 네 동생의 이름을 어떻게 알겠나."

"······."

"이 도시에 있는 여관에서 네가 오길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따라와라."

그녀가 머뭇거리며 나와 아셸을 번갈아봤다.

눈짓을 주자 아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끌었다.

그렇게 그녀는 주춤주춤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언니라서 그런지 루디카보다는 의심이 많구만.

나는 다른 노예들을 둘러봤다.

루디카의 언니를 확보한 것으로 목적은 달성했지만, 남은 사람들은 어째야 될까······.

'······시장을 찾아가는 편이 나으려나.'

아, 다른 군주령에서 깽판 치기는 진짜 싫었는데.

나는 3군주 천궁에 대해 떠올렸다.

그는 대군주만큼이나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라, 이번 일이 그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게임에서도 그는 세상만사 무관심한 성격으로 보이는 한편 별 사소한 일에 이상하리만치 집요하게 굴기도 했다.

군주들이 신경 쓰는 건 누구를 죽였고 어떤 피해를 입혔냐가 아니다. 발킬로프 따위야 3군주의 안중에나 있겠나?

다만, 다른 군주가 자신의 영역에서 난동을 피웠다는 사실 자체를 못마땅해할 수 있었기에 그게 좀 걸렸다.

그 미치광이와 다름없는 6군주 폭왕도 다른 군주령에서는 함부로 제멋대로 굴지 않으니까.

물론 이게 뭐 엄청난 소란을 벌인 것도 아니고, 먼저 공격을 당한 쪽도 나니까 별 문제는 없겠지만······ 아무튼.

"너희들은 이제 자유다."

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노예들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그 말에도 그들은 그저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서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자유라고 말해봤자 가진 것도 하나 없고, 아예 돌아갈 곳이 없는 이들도 있겠지.

이 난장판을 벌여놓고 이들을 여기에 그대로 남겨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일단 최소한의 뒷정리는 할 생각이었다.

뱀파이어 (6)

도미호크 시의 시장인 발롱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조금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홀로 테라스에서 티타임을 즐긴 뒤, 잠자리에 들기 전 새벽까지 독서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저택에 뜬금없고 갑작스러운 손님이 찾아온 건 그때였다.

"아니······ 베고스 님이 이 새벽에 대체 어쩐 일이십니까?"

경비를 서던 기사들에게 안내받아 중앙홀로 들어온 사내를 보며, 발롱은 눈을 깜박거렸다.

군주성의 고위 인사관인 베고스.

발롱은 그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왜냐면 이 도시에서 열리는 발킬로프의 비밀 경매를 암묵적으로 허용해주고 있는 인물이 바로 시장인 발롱이었고, 베고스는 그런 경매의 VIP였으니까.

'오늘이 경매 주최일이었지.'

이런 새벽에 방문한 건 둘째치고 베고스의 표정이 어쩐지 다급하게 보였기에, 발롱은 의문스럽게 바라봤다.

베고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내 이런 늦은 시간에 경황도 없이 찾아온 건 미안하네만······ 경매에 일이 생겼네."

"일이라니, 그게 무슨······."

"어떤 미친놈이 경매장에서 학살을 벌였어. 관리자들도 다 죽고 잭 그놈도 죽었네. 발킬로프는 이제 끝이야."

"······예? 잭 그자가? 발킬로프의 수장이 죽었다는 겁니까?"

발롱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도미호크의 악마 잭, 3군주령의 음지에선 가장 큰 거물이 난데없이 살해를 당했다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수완도 수완이지만 그의 실력도 3군주령 전체에 정평이 나있을 정도로 굉장한 강자였는데······.

"대체 누구에게 살해당했다는 겁니까?"

"그걸 나도 모른다는 거네. 심지어 여럿도 아니고 고작 한 명이었어."

"한 명이라니······ 혹시 군주성에서 나온 인물인 게 아닙니까?"

"그러면 내가 모를 리가 있겠나? 아무튼 그래서 서둘러 자네하고 의논하려고 찾아온 거니까······ 일단 안으로 들어가세."

그때였다.

"시, 시장님."

다급히 달려온 기사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발롱이 의아하게 그를 돌아봤다.

"또 무슨 일이길래 방정이냐?"

"그, 그게······ 7군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순간 발롱은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어 몇 초 동안 눈만 깜박거리다가, 되물었다.

"누가 왔다고?"

"7군주님께서 지금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기사의 말은 발롱에게 있어 갑자기 땅이 꺼졌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 별반 다르게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7군주라고? 7군주?

'······왜?'

갑자기 7군주가 자신을 왜 찾아왔단 말인가?

사칭? 그럴 리가 없었다. 어떤 미친놈이 칼데릭에서 군주의 이름을 사칭하고 시장을 찾아온단 말인가.

"······!"

그게 당연한 사고의 흐름이었기에 경비를 서던 기사들도 난데없이 저택에 찾아와서 자신을 7군주라고 말한 남자와, 그 뒤에 달린 다양한 종족의 이들을 안으로 모시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유유히 홀로 들어서고 있는 낯선 방문자들의 모습을 보며 발롱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들의 선두에 서있던 남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도미호크의 시장인가?"

"······예! 제가 도미호크의 시장인 발롱입니다."

긴가민가하던 발롱은 영문 모를 위압감에 이내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아무리 7군주령에서 멀리 떨어진 3군주령이라지만 7군주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는 그도 알고 있었다. 인간 남성이라는 것.

그러니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정말 7군주가 맞을 것이다.

한편 베고스도 남자, 7군주와 그 옆에 서있는 아셸을 보고서 경악했다.

'저······ 저······!'

경매장에서는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발킬로프의 전투원들을 몰살하고 경매장을 학살판으로 만들었던 정체불명의 남녀.

7군주가 고개를 돌려 베로스를 쳐다봤다.

베고스는 한순간 넋을 놓았다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7군주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저는 3군주성의 인사관인 베고스입니다!"

이제야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상했다. 뜬금없이 그런 어마무시한 실력자가 어디서 튀어나왔겠는가?

뭔가 큰 줄과 연결되어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군주 본인이었을 줄이야.

'잭, 이 미친 새끼······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초대장을 강탈당했다며 경매장에서 7군주를 먼저 공격하려 들었던 건 분명 발킬로프 측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고 뭐가 어떻게 꼬였기에 그런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발생한 건지 베고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7군주의 입이 열렸다.

"시장,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하나 있어 찾아왔다."

······부탁?

발롱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어지럽게 굴리며 대답했다.

"예, 얼마든 말씀해주십시오!"

"이 도시에서 발킬로프의 비밀 경매가 주최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순간 발롱과 베고스는 심장이 철렁했다.

"그, 그것이······."

"물론 알고 있었겠지. 그걸 탓하려는 건 아니고, 지금 내 뒤에 있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경매장에 노예로 팔려나온 이들인데 어쩌다 처지가 마땅치 않게 됐거든."

상황의 맥락을 알고 있는 베고스는 괜히 침을 꿀꺽 삼켰다.

발롱도 앞서 베고스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그의 반응을 슬쩍 살피고서, 눈치 빠르게 상황을 유추했다.

'······경매장에서 학살을 벌였다는 자가 7군주였던 건가?'

7군주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자네가 이들의 신변을 책임지고 맡아줬으면 해. 돌아갈 곳이 있는 자들에겐 여비를 넉넉히 쥐여서 보내고, 갈 곳이 없는 자들에겐 적당한 일자리를 구해줬으면 하는데."

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으나 발롱은 의아했다.

군주가 일개 노예들 따위의 신변을 챙겨주고 있는 게 더없이 괴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7군주의 본래 성향이 그런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 다른 뜻이 있는 것인가?

짐작할 수 없었지만 감히 의문을 표할 수는 없었다.

"맡겨주십시오. 이들의 신변은 제가 철저히 보장하겠습니다."

"그래, 용건은 그게 끝이다. 그럼 이만 가지."

그러고 7군주는 노예들을 남겨둔 채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 뒤를 호위 기사와 한 뱀파이어가 따랐다.

갑자기 찾아와서 갑자기 떠나가버리는 모습에 발롱과 베고스는 당황해서 인사했다.

"사, 살펴가십시오! 7군주님을 뵙게 되어 평생의 영광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들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허리를 피지 않았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크게 안도하고 있었다.

혹시나 경매와 관련해서 무언가 조금이라도 책임을 물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으니까.

물론 이곳은 3군주령이고 이 도미호크 시를 관리하는 건 온전히 시장의 권한이라지만, 어디 군주가 그런 어쭙잖은 권력이 통하는 상대이던가?

"······십 년은 늙은 기분이군."

베고스가 그 말대로 기가 다 빠진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발롱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대체 7군주께서 도미호크 시에는 왜 찾아오신 건지······."

"위대하신 분들의 생각을 어찌 우리가 짐작하겠나. 이렇게 무사히 넘어간 거나 다행으로 여기세."

발롱이 덩그러니 남겨진 노예들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베고스 님께서 말하신 경매장의 인물이 7군주님이 맞는 거지요?"

"맞네."

"그럼 이제 발킬로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뭘 당연한 걸 묻고 있나, 완전히 끝이지. 고리를 만들어둔 게 있으면 자네도 서둘러 끊어버리게. 후······ 나도 서둘러서 군주성으로 돌아가봐야겠군. 이게 대체 뭔 날벼락인지."

***

노예들의 신변 문제는 그렇게 시장을 이용해 간단하고 확실하게 처리했다.

뭐, 경매의 주최를 눈감아주고 있던 시장도 다 똑같다면 똑같은 놈이었지만······ 여기서 굳이 더 들쑤실 것도 없었다.

경매장에서 학살을 벌인 건 어디까지나 발킬로프가 먼저 공격했기 때문이지, 뭔 정의를 집행하겠답시고 그런 게 아니니까.

우리는 곧장 숙소로 돌아왔다.

루디카는 바로스와 함께 여관의 방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의 모습을 본 루디카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언니!"

"······루디카!"

둘은 곧바로 서로에게 달려들어서 안겼다.

날 완전히 믿지 못했는지, 여기까지 오면서도 계속 얼굴에 일말의 경계를 띄고 있던 그녀도 동생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품에 안았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바로스에게 물었다.

"별 일은 없었나?"

"예."

자매의 재회가 끝나고, 그제야 그녀는 의심이 완전히 풀린 얼굴로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저희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언니 쪽의 이름은 루비카였다.

나는 두 자매를 앞자리에 앉혔다. 이제 본 목적인 엘로드 숲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서였다.

루디카는 이미 들은 이야기였지만 언니인 루비카는 아직 모르는 이야기였으니까.

루비카는 동생을 한쪽 품에 꼭 끌어안은 채 내가 하는 말을 경청했다.

"엘로드······ 숲이요?"

이야기를 모두 듣고, 경계심과 조심성이 많은 성격인 듯한 루비카는 예상했던 대로 조금 불안한 듯한 기색을 내비쳤다.

"다른 부족의 터전이라니, 그들이 저희를 반길지 어떨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아도 본래 그들이 살던 곳에서도 동족에게 쫓겨나 고향을 잃은 자매였다.

다짜고짜 다른 뱀파이어 부족을 찾아가는 게 어떠냐 물어도 이쪽이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뱀파이어가 이 세계에서 이미지가 나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다 큰 성체는 흡혈 본능을 억누를 수 있지만, 성체라고 전부 피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는 놈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인간과 마찬가지였다. 어른은 아이보다 욕망을 더 잘 제어할 수 있지만, 어디 세상에 그런 훌륭한 어른들만 있던가?

'특히나 6군주 폭왕이 그 끝판왕이지.'

그런 놈들이 모여서 부족을 이루면 말 그대로 이 종족 저 종족 다 사냥하고 다니는 흡혈귀 떼가 되는 거고.

루디카 자매가 속해있던 부족의 터전을 침략했다는 부족도 그런 쪽에 가까운 놈들이 아닌가 싶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라."

나는 불안을 씻어주기 위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엘로드 숲에 사는 뱀파이어 부족은 굉장히 온화한 부족이다. 나 같은 인간이야 배척하겠지만 동족이라면 다르지. 외부자라고 해도 사정을 설명하면 순순히 받아들여줄 거다."

물론 나는 그들을 직접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게임을 플레이했으니까.

게임 스토리에서 엘로드 숲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진행될 때, 그들 부족 중에 이들 자매와 비슷한 이유들로 엘로드 숲에 흘러들어온 뱀파이어들이 등장한 부분도 있었다.

엘로드 숲의 부족은 그런 이들까지도 전부 포용해서 자기들끼리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딱 한 가지 '문제'만 빼고 말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내가 해결함으로써 그토록 필요한 혈술을 얻을 가능성이 있는 거고.

루비카는 잠시 고민에 빠진 듯 아무 말도 없다가, 내게 물었다.

"근데 당신······ 아니, 그······."

"론이다."

"네, 론은 엘로드 숲에 산다는 뱀파이어 부족과 친분이 있는 건가요? 이야기를 들으면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요."

······좀 곤란한 부분을 찔러서 묻네.

이 둘은 지금 내가 자신들을 순수한 선의로 새 부족들을 소개시켜주려고 하는 거라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가 이들 자매를 이용해서 엘로드 숲의 뱀파이어들과 연결점을 만드려는 거니까.

나는 약간 양심이 찔리는 걸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 출신의 뱀파이어와 우연히 연이 닿은 적이 있었지. 그래서 엘로드 숲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거다."

어쨌든 난 이들을 엘로드 숲까지 데려가야 하기에 일단은 안심시키는 게 중요했다.

다시 고뇌에 빠진 루비카는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론의 말대로 엘로드 숲으로 가볼게요. 저희한테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해요."

"뭘, 잘 생각했다."

설득은 끝났다.

이제 혈술을 얻으러 엘로드 숲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혈술 (1)

엘로드 숲은 칼데릭의 북서부에 위치한 광활한 숲이다.

일단 칼데릭의 영역이긴 하지만, 이 거대한 판타지 대륙에는 당연하게도 문명이 꽃핀 곳보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간직한 장소가 훨씬 많다.

칼데릭만 해도 대군주령과 나머지 아홉 군주령에 크고 작은 수많은 도시들이 있다. 그러나 그 외곽은 그냥 버려둔 거나 마찬가지인 무주공산의 땅이었다.

'아, 더럽게 흔들리네.'

그리고 그 말은 즉슨, 엘로드 숲으로 향하는 길은 관도와 다르게 조금도 개간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는 평소보다 더 심하게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무표정을 유지한 채 반대편 자리를 바라봤다.

아셸과 함께 앉아있는 루디카 자매는 서로한테 기대서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도미호크 시에서부터 엘로드 숲으로 향하기 시작한 지도 며칠이 흘렀다.

언제나와 다를 것 없는 여정이었지만 다른 게 있다면 뱀파이어 둘이 동행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나는 잠에 든 두 자매의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루비카는 자기가 언니라고 평소에도 더 어른스럽게 행동하려고 하는 게 느껴졌지만, 이럴 때 보면 그냥 나란히 어린애였다.

옆에 앉은 아셸도 어쩐지 묘한 눈길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멋쩍은 듯 시선을 돌렸다.

왠지 자매의 모습을 보며 죽은 동생을 떠올린 것 같았다.

그때 아셸이 입을 우물거리더니 말했다.

"저······ 궁금한 걸 하나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

나는 의외라는 눈빛을 지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먼저 나한테 뭘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얼마든지."

"군······ 아니, 론 님께선 지금까지 유적 같은 장소들을 찾아다니시지 않았습니까."

아셸이 앞말을 더듬고서 질문했다.

여정 중에는 군주라는 호칭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라 했기에 아셸이나 바로스나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셸은 먼저 나를 부를 일이 거의 없었기에 아직도 익숙치 않은지 종종 실수를 했다.

근데, 그나저나 유적은 갑자기 왜?

"다름이 아니라, 무엇을 목적으로 그런 일을 하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아······ 그건가.

'얘도 그걸 이제야 물어보네.'

나야 신비들을 찾고 흡수하면서 아주 알찬 여정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아셸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보지를 못했으니 대체 내가 뭘 하고 다니는 건지 궁금해하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그녀가 지금 호위로 따라다니는 이유는 전 대륙에 이름을 알리게 해주겠다는 내 말 때문이 아닌가.

한데 군주다운 일은 뭐 하나도 안 하고 이러고 있으니 어쩌면 지금 마음속으로는 답답해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앞으로 많은 일들을 할 거라느니, 일단 그때는 거창하게 말하긴 했었는데······.'

근데 뭐 그렇다고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한 건 아니었다.

이 여정을 마치고 군주성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헤쳐나가야 할 난관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니 말이다.

특히나 마족의 침공, 세인테아의 용사, 성검 계승······ 이 라사 세계의 메인 스토리에 대한 문제는 현재의 내 포지션에서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아직 감도 안 잡힌다.

지금 당장 뭘 계획하기엔 그쪽은 너무 스케일이 컸으니까.

'어차피 다음 군주 회의가 오면 대군주가 뭐라도 일을 맡기긴 할 테고.'

일단 칼데릭 내의 신비들부터 전부 찾은 다음에 상황을 봐서 생각해야 할 일이다.

아셸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때까지만 좀 기다려줬으면 좋겠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찾고 있는 것이 있다. 궁금하겠지만 그게 뭔지는 말해줄 수 없어."

"······."

"염려하지 마라. 너와 했던 약속은 반드시 지킬 테니까."

"······예?"

아셸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기색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궁금해서 여쭤본 것이었습니다. 론 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의심한 적은 없습니다."

"······."

너무 또 그렇게 믿으니 양심에 찔리네.

나는 슬쩍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즈음,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마차를 멈춰세웠다.

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잠들어있던 루디카 자매도 어느새 잠에서 깼다.

메뉴는 평소처럼 고기와 수프와 빵.

바로스가 빠르게 식사를 완성하고 적당한 곳에 둘러앉아서 먹고 있는데, 루디카가 수프를 떠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슬쩍슬쩍 나와 루비카의 눈치를 봤다.

"왜 그래, 루디카. 피가 먹고 싶어?"

바로 동생의 상태를 눈치챈 루비카가 자기 팔을 걷었다.

그러나 루디카는 머뭇거리며 내가 앉아있는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괜찮으니 이리 와라."

그에 루디카가 한 번 더 언니를 쳐다보고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다가왔다.

익숙한 듯 내 팔뚝을 앙 물고 피를 빨아먹는 모습에 루비카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루, 루디카?"

루비카를 일행에 낀 뒤로는 처음으로 내 피를 먹는 루디카였다. 그녀에게 있어선 당황스러운 광경일 법도 했다.

지금까지는 언니의 눈치를 보느라 참고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뭐 하는 거야, 루디카. 이리 와서 언니 피를 먹어. 은인께 실례잖아."

그러나 루디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계속 내 피를 먹는 데 집중할 뿐이었다.

그 모습에 루비카는 충격받은 얼굴이 됐다. 마치 저번의 바로스 같은 모양새였다.

"너, 너. 맨날 언니 피가 제일 좋다고 그랬으면서······."

······왜 내가 나쁜 놈이 된 것 같지?

울상이 되어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며 난 뻘쭘해져서 물었다.

"너는 피를 먹지 않아도 괜찮나?"

루디카보다야 나이가 많지만 루비카 역시 아직 완전한 성체 뱀파이어는 아니었다. 흡혈 본능이 날뛰지는 않나 싶었다.

그에 루비카가 날 빤히 쳐다보는가 싶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제가 흠칫 놀라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 괜찮아요. 다 큰 뱀파이어니까 참을 수 있어요."

별로 그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도 자매 둘을 양팔에 나란히 붙이고 채혈하고 싶진 않았기에 굳이 더 묻지는 않았다.

그때 바로스가 슬쩍 나서서 루비카에게 말했다.

"이봐, 뱀파이어. 원한다면 내 피를······."

"싫어요. 맛 없는 냄새 나요."

이전에 루디카에게 들었던 것과 똑같은 반응에 바로스는 다시 조금 시무룩해졌다.

아무래도 뱀파이어한테 엘프의 피는 영 아닌 모양이다.

***

그 뒤로도 여정은 별 탈 없이 순조로웠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드디어 엘로드 숲에 도착했다.

나와 다른 이들은 잠시 가만히 서서 숲의 초입을 둘러봤다.

평범한 숲보다도 나무들이 훨씬 더 큼직했기에 제대로 분위기가 나는 숲이었다.

이곳 엘로드 숲은 본래 세간에서는 부르는 이름이 없는, 그냥 거대한 숲이다.

대륙에 존재하는 수많은 산맥과 숲에 일일이 다 이름이 붙어있지는 않으니까.

단지 여기에 사는 뱀파이어들이 숲을 그런 이름으로 부르는 것뿐이었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마차를 지켜야 하는 바로스만 제외하고 우리는 이내 숲의 안쪽으로 출발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네.'

숲이 무척이나 크기에 뱀파이어들을 찾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못 찾을 거라는 걱정은 들지 않았다.

일단 무작정 깊은 곳으로 계속해서 이동하면 어떻게든 결국 마주치게 될 테니까.

그리고 길을 잃을 걸 생각해 도미호크에서 비싼 나침반도 하나 구했었다.

나침반이라기보다는 한 쌍으로 구성되어 서로의 위치를 알려주는 물건이었는데, 마법 아이템은 아니고 아마 뭐 자석과 비슷한 성질을 지닌 물질로 만들어진 물건인 듯했다. 여긴 판타지 세계니까.

어쨌든 하나는 바로스에게 있으니 다시 돌아가는 데에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좀 으스스한 숲이네요."

숲길을 걷는 중 루비카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나무들이 워낙에 커서 해가 가려진 탓에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의 숲이기는 했다.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뱀파이어는 햇빛을 싫어하는 편인가?"

보통 그렇겠지만 라사 세계관 내의 뱀파이어는 그런 것과 관련된 정보가 정확하게 나온 적이 없었다.

낮에도 태양 아래서 멀쩡히 잘 다니기는 하지만 혹시 좀 싫어하는 성향이 있나 싶었다.

루비카가 날 의아하게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진 않은데요. 오히려 저는 이렇게 어두운 게 더 싫어요."

그렇군. 궁금증 하나를 해결했다.

숲을 돌아다니며 뱀파이어를 찾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것이기에 식량도 넉넉하게 챙겼다.

하지만 아껴둬서 나쁠 건 없기에 사냥을 통해 식량을 수급하기도 했다. 물론 사냥은 아셸의 몫이었다.

그리고 물론 평범한 짐승들뿐만 아니라 몬스터들도 출현했다.

쿠웅.

아셸의 검에 거대한 멧돼지가 쓰러져서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온몸에 자잘한 가시들이 난 게 상당히 징그럽게 생겨먹은 놈이었다.

이 숲에서 출현하는 몬스터들 중에는 확실히 내가 모르는 놈들도 있었다.

이 엘로드 숲 자체가 게임에서는 거의 돌아다닌 적이 없는 낯선 필드였기 때문이다. 관련 퀘스트에서 뱀파이어들을 만날 때나 잠깐 스치듯 지나갔지.

"우와아······."

순식간에 몬스터를 처치하고 아셸이 검을 회수하는 모습을 보며 루디카가 눈을 빛냈다.

그녀는 아셸이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경매장에서 대학살을 봤던 루비카는 어딘가 아셸을 조금 무서워하는 기색이었지만.

"어떻게 해야 그렇게 강해질 수 있어요?"

루디카의 물음에 아셸이 조금 민망한 듯 뺨을 긁적였다.

"단련을 하면 된다."

"단련을 어떻게 하는 건데요?"

"······매일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고, 어쨌든 몸을 움직여야지. 그리고 더 강한 상대와 대련도 하고."

어린애한테 설명하는 게 쉽지 않은 듯 보였다.

루디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저도 여기서 살게 되면 이제 매일 단련할래요! 더 강해져야 언니도 지키고 새로 사귈 친구들도 지키죠!"

"······."

그 말에 루비카도 침울한 기색이 되었다.

아셸이 조금 안쓰러운 눈으로 그런 자매를 쳐다봤다.

그녀 역시 일족이 절멸한 과거가 있으니 아픔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숲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지 사흘째가 되었을 때였다.

"······."

여느 때처럼 하염없이 숲길을 걷고 있는 중, 빠르게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와 아셸은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부터 나무들의 가지를 딛고 이쪽을 향해 훌쩍훌쩍 뛰어오는 인형이 보였다.

아직 먼 거리에서도 초감각을 통해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검은 머리칼에 붉은 눈, 그리고 숲에 어울리는 사냥꾼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남자.

[Lv. 51]

'뱀파이어.'

뱀파이어다.

머리 위에 보이는 레벨은 51로 상당히 높았다.

애타게 찾아다니던 뱀파이어가 드디어 눈앞에 나타났음에 기쁨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조금 긴장했다.

이윽고 바로 근처에 있던 나무의 가지에 착지해 멈춰선 그가 우리를 내려다봤다. 나도 놈을 빤히 쳐다봤다.

상대의 눈빛에는 당연하게도 우호적인 감정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인간하고······ 뱀파이어?"

나와 아셸과 루디카 자매를 번갈아 보던 놈이 조금 혼란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는 뭐냐? 이 숲으로 들어온 이유가 뭐지?"

확실히 녀석에게 있어선 굉장히 뜬금없는 상황일 것이었다.

애초에 이런 깊숙한 숲까지 찾아오는 이도 없거니와,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이 인간과 뱀파이어의 조합이라면.

나는 당황하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너는 엘로드 숲의 뱀파이어 부족인가?"

혈술 (2)

내 물음에 그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어떻게······? 이 숲에 뱀파이어가 살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인간?"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이 세상에 완벽한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나? 너희 부족은 이 숲에서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살아왔다고 들었다. 누구도 아는 이가 없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그것이 오만이지."

"······."

그는 말없이 적의가 가득한 눈으로 날 노려볼 뿐이었다.

옆에서는 루디카 자매가 안절부절 못한 기색으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다른 악의는 없다. 이 숲에 찾아온 이유는 하나뿐이다. 여기 보이는 뱀파이어들, 부족과 고향을 잃은 이 둘에게 새롭게 살아갈 터전을 마련해주기 위해서다."

"······뭐?"

"이들은 칼데릭의 북쪽 산맥에서 살던 뱀파이어들이다. 그곳에서 살던 부족들끼리 다툼이 나서 부족은 대부분 죽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도망쳤다고 하더군."

그의 시선이 루디카 자매에게로 향했다.

이미 엘로드 숲의 부족에도 그런 뱀파이어들이 몇몇 있을 테니 내 설명으로 사정은 바로 이해했을 것이었다.

"그러니 관용을 베풀어 이들을 너희 부족의 품으로 받아들여줄 수는 없겠나? 용건은 그것뿐이다."

그가 말없이 자매와 나를 번갈아 보고는 말했다.

"······이해가 안 되는군. 저 어린 뱀파이어들의 사정은 둘째치고, 왜 인간인 네가 저들을 이곳까지 데리고 온 것이냐?"

"노예 사냥꾼들에게 붙잡혔던 걸 내가 구해줬을 뿐이다. 그리고 마침 나는 이 숲에 뱀파이어 부족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때 또 다른 기척들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나타났던 방향에서 새롭게 나타난 뱀파이어들이 가지의 양옆에 착지했다.

그리고 우리를 발견하고는 놀란 기색을 띠었다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인간하고 뱀파이어? 이게 무슨 상황이냐, 플로크?"

나와 대화를 한 뱀파이어의 이름이 플로크였던 모양.

그가 동료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뱀파이어들이 우리를 힐끔거리며 설명을 모두 듣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잠시 어떻게 해야 되나 소근거리며 의논했다. 하지만 초감각에 내용은 다 들렸다.

"일단은 보고부터······."

"그래, 내가 다녀올 테니 너희 둘이서 지켜보고 있어줘."

이내 결론을 내린 그들이 내게 말했다.

"거기서 어떤 행동도 하지 말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라, 인간. 네게 정말 다른 의도가 없고 그 어린 뱀파이어들을 돕기 위해서 온 것뿐이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래."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루디카 자매의 처우를 결정하기 위해 더 직위가 높은 뱀파이어를 데려오려는 모양이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될 것이다.

동료 뱀파이어들이 다시 떠나가고 한 명만 남아서 우리를 경계하듯 지켜봤다.

그렇게 말없이 가만히 대치한 채 다른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렸다.

***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공간.

한 뱀파이어 여인이 가만히 서서 눈을 감은 채 호흡을 가다듬고 있다.

그녀는 공간의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바위 위에 있었는데, 바위의 한가운데에 난 흠에는 주먹만 한 크기의 붉은 돌덩이 하나가 검은 사슬에 감긴 채 박혀있었다.

바깥의 빛 하나 들지 않은 이 지하 공간을 홀로 요사스런 핏빛으로 밝히고 있는 불길한 돌.

바위 아래에는 그 모습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는 다른 뱀파이어들이 있었다.

"······."

이윽고 천천히 눈을 뜬 여인이 붉은 돌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손이 닿자 돌은 더욱 강렬한 핏빛을 뿜어냈다.

돌에서 뿜어져나오는 불길한 기운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뿐인 뱀파이어들조차도 몸을 떨게 만드는 그 기운을, 여인은 홀로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이어 그녀의 전신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피가 돌로 천천히 흡수되었다.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여인의 표정이 그제야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건 단지 돌에 흡수되고 있는 피 때문이 아니었다.

'크하하하하하하······!'

영혼을 갉아먹는 듯한 기괴하고도 공포스러운 웃음.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그 압도적인 정신파는 지금까지 수십 번을 겪었어도 도저히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인은 무너져내릴 것 같은 의식을 가까스로 유지하며 끝을 기다렸다.

이내 돌에서 뿜어져나오던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본래의 상태로 돌아간 돌은 좀 전보다는 조금이나마 붉은 빛이 약해진 것처럼 보였다.

"······하아."

무사히 의식을 끝낸 여인이 비틀비틀 바위에 난 계단을 내려왔다.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뱀파이어들이 다급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누님······ 괜찮으십니까?"

한 사내가 나서서 그녀를 부축했다.

의식이 진행되는 내내 마치 자신이 의식을 치르듯 덩달아 고통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이였다.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뿐히 그의 팔을 치웠다.

"괜찮다. 늘 하던 일에 요란 떨지 말거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직 손에 떨림이 멎지 않은 그녀를 보며, 사내는 더욱 심란해진 얼굴이 되었다.

혈정의 기운을 억누르는 의식.

그것은 족장들이 대대로 물려받아온 의무이며, 부족의 평화를 위해 반드시 다해야 하는 책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의식이 진행될수록 수명이 깎여나가는 혈육을 보면서도 사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내는 시선을 돌려 바위 위에 박힌 돌을 다시 노려봤다.

대체 부족은 언제까지 저 빌어먹을 것을 떠안고 형제들의 생명을 낭비해야 한다는 말인가? 대체 언제까지······.

"······어서 돌아가서 쉬십시오, 누님. 족장님을 모시거라."

지하 공간에서 나와 여인은 다른 뱀파이어들과 함께 돌아갔다.

사내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반대편에서 한 뱀파이어가 이쪽을 향해서 빠르게 달려왔다. 숲을 주기적으로 정찰하는 임무를 맡은 전사였다.

"전사장님."

사내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냐?"

이어진 보고를 들은 사내가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인간이 어린 뱀파이어들을 데리고 왔다고? 우리 부족의 존재는 어찌 알고?"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보고부터 서둘러서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인간 쪽의 머릿수는?"

"둘뿐입니다."

사내가 여인이 사라진 방향을 힐끗 쳐다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직접 전사들을 대동하고 가겠다. 일단 족장님께는 보고를 올리지 말아라."

***

대충 몇십 분을 기다렸을까.

멀리서부터 가까워지는 수많은 기척들이 느껴졌다.

수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너무 많았기에 나는 좀 당황했다.

'······뭐 이리 많이 몰려와?'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뱀파이어들이 우리가 서있는 곳을 포위하듯 사방의 나무 위에 올라섰다.

그 인원이 가볍게 수십은 됐다. 게다가 레벨도 전부 60이 넘는 정예들이었다.

뭔 전투라도 벌이러 온 모양새에 아셸의 표정도 굳고, 루디카 자매도 겁에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정말 인간이 발을 들였군."

그중 한 뱀파이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이들의 대장 격인 인물이라는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복장도 그렇고, 머리 위의 레벨부터가 그러했으니까.

[Lv. 81]

······무려 아셸과 동등한 레벨의 강자.

나는 레벨을 확인하고서 곧바로 그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엘로드 숲의 뱀파이어 부족, 그중에 이 정도 레벨이 되는 강자는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전사장 칼데르번.'

족장의 친동생이자 엘로드 숲 부족 제일의 전사.

내 기억으로 5년 뒤 그의 레벨은 83으로 지금보다 더 높았던 것 같다.

갑자기 전사장까지 튀어나올 줄은 조금 예상 못했는데.

"인간,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라."

나와 가만히 시선을 교환하고 있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이 숲에 있는 우리 부족의 존재를 알았지?"

아까야 적당히 대답했지만 확실한 답변을 얻으려는 모양이었다.

사실 이건 그들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긴 했다.

오랜 세월 동안 세간의 눈을 피해 숲에서 얌전히 살아오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자신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인간이 찾아온 상황이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오히려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않나."

"······뭐?"

"다른 이들의 발길이 닿지는 않지만 이곳은 엄연히 칼데릭의 영역권이다. 군주들의 눈이 있고 수많은 정보 조직들이 있지. 너희는 이 숲에서 대략 1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자리를 잡고 살아온 것으로 알고 있다. 정말 진심으로 누구도 너희의 존재를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오만이다."

실제로도 대군주와 몇몇 군주들은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다.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그냥 내버려두는 거지.

그리고 이들이 엘로드 숲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온 세월은 이미 200년이 훌쩍 넘었지만, 이 부분은 일부로 틀리게 말했다.

너무 자세히 알고 있으면 경계가 강해질 테니 전부 다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다고 여기게 하기 위해서였다.

옆에서 루비카가 의아한 기색으로 날 보는 게 느껴졌다.

왜냐면 그녀에게 이들에 대해 설명했을 때는 이 숲의 부족 출신의 뱀파이어와 연이 있다고 말했었으니까.

왜 그걸 말하지 않나 싶겠지만, 당연히 거짓말이니까 말할 수 없었다. 애초에 엘로드 숲의 뱀파이어들은 평생을 이 숲에서만 살다가 죽는데 어떻게 연이 닿을 수 있겠나.

아무튼 대답 없이 나를 노려보고 있던 전사장은 어느 정도 납득한 기색이었다. 그가 주제를 바꿨다.

"노예로 붙잡혔던 뱀파이어들을 구해서 우리 부족에게 데려다주기 위해 온 것이라 했지. 그 아이들인가?"

"그렇다."

그때 눈치를 보고 있던 루비카가 나서서 말했다.

"······저희는 칼데릭의 북쪽에 있는 산맥에서 살던 뱀파이어예요! 그리고 이분들은 정말로 순수한 선의로 저희를 구해주셔서 이곳까지 데리고 와주신 거고요. 그러니까······."

분위기가 험악하니 날 변호라도 해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갈 곳을 잃은 동족이라면, 그것도 어린아이들이라면 얼마든지 부족의 품에 안을 수 있다."

"······."

"하지만 인간들은 아니야. 너희는 결코 마을에 들일 수 없다. 그러니 일단 그 아이들부터 이쪽으로 보내라."

그 말에 그녀들은 불안한 눈으로 날 돌아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괜찮으니 가거라."

그렇게 그녀들은 머뭇머뭇 뱀파이어들이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전사장이 한 뱀파이어에게 눈짓을 했다.

눈짓을 받은 그녀가 자매를 덥썩 품에 안아들고 가지를 타며 숲의 안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나는 전사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본 목적을 꺼낼 시간이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

나는 말을 하다가 말았다.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주위에 우리를 포위하듯 선 뱀파이어들에게서 느껴지는 적의가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콰아앙!

갑작스럽게 정면에서 날아든 공격을 아셸이 나서서 대신 막았다.

피로 이루어진 가시가 그녀의 검에 산산조각 박살났다.

그녀가 인상을 사납게 일그러뜨리고 공격을 날린 전사장을 노려봤다.

나도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뭘 하자는 거지?"

그가 담담한 투로 손을 거두며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너희는 살아서 숲을 나가게 둘 수 없다."

"······내가 너희 부족의 존재를 알고 있어서인가? 나뿐만 아는 게 아니라고 했을 텐데."

"아니, 그게 아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동족을 구해준 것에는 깊이 감사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숲에 들어온 외부자를 지금껏 살려둔 적이 없어. 그것이 긴 세월 동안 부족이 터전과 평화를 지켜온 방식이고, 예외는 없다."

주위를 둘러싼 뱀파이어들이 곧바로 전투 태세를 취했다.

그들의 몸에서부터 흘러나온 피가 허공에 뭉쳐지며 형태를 빚어냈다. 누군가는 거대하게, 누군가는 날카롭게.

"그러니 이곳에서 죽어라, 인간."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이 개 같은 흡혈귀 새끼들이······.'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

아무리 그래도 동족까지 구해서 왔는데 이렇게 죽이려 들 줄은 몰랐는데.

곧 우리가 서있는 자리로 사방에서 혈류가 몰아칠 듯했다.

나는 옆에서 전투를 준비하는 아셸의 어깨를 잡고 끌어당겼다.

"엇······."

"내게 가까이 붙어라."

그리고 곧바로 부동 장막을 펼쳤다.

동시에 사방에서 공격들이 쏟아졌다.

***

쉬지 않고 몰아치는 혈류가 인간들이 서있는 자리를 집중포화했다.

다른 전사들이 공격을 퍼붓는 와중에 전사장 칼데르번도 전력을 다한 공격을 준비했다. 침입자에게 방심 따윈 없었다.

스으으.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허공에 뭉쳐지더니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혈술이었다. 이 극독성을 띈 피에 맞으면 아무리 강한 상대라도 흔적도 없이 녹아내릴 수밖에 없다.

거대한 가시의 형태로 빚어진 자색의 혈액이 소용돌이처럼 회전하며 인간들이 서있는 자리를 휩쓸었다.

콰아아아앙!

혈류가 휩쓴 자리가 그대로 소멸하여 폐허가 되었다.

정예 전사들과 함께 퍼부은 합공을 피하지도 않고 전부 고스란히 직격당했다.

칼데르번은 이걸로 끝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혈무와 흙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광경에 그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

인간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멀쩡한 채로 서있었다. 심지어 옷가지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서.

그 상식을 벗어난 광경에 전사장과 다른 전사들은 충격에 빠진 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인간 남자가 유유히 주위를 둘러봤다.

"이게 끝인가?"

그가 더없이 오만하고 무심한 목소리로 읆조리듯 말했다.

"형편없군."

혈술 (3)

'아, 씨발······.'

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사방의 뱀파이어들을 둘러봤다.

부동 장막은 훌륭하게도 몰아치는 공격을 모두 막아주었다.

게임에서도 9성급 스킬이었던 이 절대적인 방어기가 고작 이 정도에 뚫릴 리가 없다.

근데 그게 끝이었다.

내가 이 상황에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가만히 서서 방어하는 것밖에 없고, 방금처럼 허세나 부리며 입 좀 터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좀 먹히긴 했는지 뱀파이어들도 굳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제 어쩌냐.'

이대로 본격적인 싸움이 이어지면 결국 지는 쪽은 우리다.

나야 내 몸만 지키기도 바쁘니 즉살은 사용하기도 힘들고, 저쪽은 아셸만 한 강자가 있는 데다가 머릿수도 훨씬 많았다.

그리고 이곳은 놈들의 터전. 저쪽은 전력을 계속해서 보충하는 게 가능하다.

아셸이 어떻게 전사장을 쓰러뜨린다고 하더라도 그냥 애초에 답이 없는 싸움이었다.

빌어먹을, 역시 이 숲에 오는 건 좀 더 신중히 결정했어야 됐나?

"······저."

옆에서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렸기에 시선을 돌렸다.

내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된 아셸이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아차 하며 어깨를 놔주었다. 신경이 팔려서 깜빡 잊었다.

아셸은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폐허가 된 반경을 둘러봤다.

부동 장막은 오크킹 때 잠깐 사용했던 것 빼고 한 번도 그녀의 앞에서 펼쳤던 적이 없긴 했다.

나는 다시 전사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더 해볼 건가?"

할 수 있는 게 입 놀리는 것뿐이니 그걸로 어떻게는 상황을 타개해보는 수밖에 없다.

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 눈에는 좀 전과 달리 긴장한 기색이 엿보였다.

"뻔뻔하기 이전에 너희는 정말로 어리석구나."

"······."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서, 또 어느 정도의 힘의 격차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다짜고짜 공격인가. 내가 너희에게 아무런 적의가 없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다. 아니면 오늘 너희 부족은 모두 멸망했을 것이니."

"······인간, 넌 대체 누구냐?"

내 말에 놈이 욱한 표정으로 물었다.

의도한 대화의 흐름이었기에 나는 곧바로 대답하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멀리서부터 가공할 속도로 가까워지는 기척이 감각에 걸렸다.

슈와아아악!

늘어지는 자취를 그리며 나무들을 헤치고 날아온 핏빛 구체.

뱀파이어들이 화들짝 놀라며 그 구체를 바라봤다.

내가 서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앞쪽에 멈춰선 구체가 사람의 형태로 빚어지더니, 한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구체에 달려있던 로브를 걸치고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Lv. 67]

"······누님!"

전사장이 기겁하듯 소리쳤다.

그 외침에 나는 그녀의 정체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족장?'

엘로드 숲 부족의 족장인 아클리나.

방금 그건 육신을 피 자체로 바꾸는 그녀의 고유한 혈술이었다.

전사장에 이어서 이제 족장까지 튀어나왔네.

"너무 가깝습니다, 누님! 위험한 인간이니 어서 뒤로 물러나십시오!"

그녀가 폐허가 된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고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어린 동족들을 구해서 온 인간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보거라, 칼데르번."

그녀의 서늘한 목소리에 전사장은 움찔한 기색이었다.

"나한테 보고도 올리지 말라 하고, 전사들까지 이렇게나 대동하고 나서서 이들을 공격한 것이냐?"

전사장과 다른 뱀파이어들은 그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족장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내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족장인 아클리나다."

"······."

"부족을 대표해서 부족원들의 만행엔 진심으로 사과하겠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군."

나는 일단 속으로 안도했다.

그녀의 태도를 보니 더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게임에서도 다른 종족들에 대한 적의와 경계심이 특히 강했던 전사장과 달리, 족장은 온건 부족의 머리답게 비교적 유한 성격이었었다.

그래도 다짜고짜 공격부터 한 건 괘씸했기에 물었다.

"이 숲에 찾아온 게 내가 아닌 다른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미 죽었을 거다. 그때는 싸늘한 주검에 대고서 지금처럼 사과라도 할 생각이었나?"

족장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알다시피 세간에서 뱀파이어들에 대한 인식은 무척이나 좋지 않다. 우리가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장소는 이곳뿐이고, 그렇기에 다른 종족들이 부족의 터전에 발을 들이는 것에 대해서 극도로 예민할 수밖에 없다. 우리 쪽의 사정도 조금은 이해해줬으면 한다."

나는 혀만 한 번 차고서 뭐라 더 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여기까지 왔는데 이 숲에 찾아온 목적은 꺼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 전에 일단······.

"나는 칼데릭의 7군주다."

원래라면 딱히 말할 생각도 없었다. 경계심만 더 살 게 뻔했으니까.

그런데 상황이 이러니, 경계를 사더라도 또 충돌한 일이 없도록 보험을 들어놔야겠다 싶었다.

지금부터 꺼낼 이야기인 '혈정'에 관한 것도 그들에게 있어서 부족의 운명과 직결된 굉장히 예민한 문제였으니까.

내 말에 족장과 전사장을 포함해서 뱀파이어들은 일제히 흠칫 놀란 기색이었다.

아무리 세간과 동떨어져서 사는 이들이라도 칼데릭에서 군주라는 존재가 지니는 위상과, 그 강함을 모를 수는 없다.

"군······ 주?"

특히나 계속 침착했던 족장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게 눈에 띄었다.

그녀가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알기로 7군주는 인간이 아니라 수인족일 텐데."

그녀가 말하는 건 전 7군주였다.

그가 죽어서 7군주좌가 비었고 그걸 최근에 내가 차지했다는 사실까지도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 숲에서는 세간의 정보에 거의 어두울 테니까.

"전 7군주는 죽었다. 그리고 내가 새로운 군주가 되었지."

내 말에 족장은 말없이 침음을 흘릴 뿐이었다.

다짜고짜 군주가 숲에 찾아왔으니 그녀로서는 지금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나는 바로 본제로 들어갔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보겠나?"

"······이야기?"

"이 숲에 찾아온 건 아까 전의 뱀파이어 자매를 데려다주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다른 용건도 있다. 너희 부족이 가지고 있는 혈정에 관한 것이다."

뱀파이어들이 방금 전보다 더 경악하며 나를 쳐다봤다.

난데없이 숲에 찾아온 외부인의 입에서 혈정이란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을 테니까.

"당신이······ 대체 혈정에 대한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지?"

정신을 차린 족장이 이제는 적의가 담긴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혈정.

그것은 이들 엘로드 숲의 뱀파이어 부족이 현재 품고 있는 가장 큰 골칫덩이였다.

배경이 자세하게 전부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충은 기억하고 있었다.

'선조 가스칼리드.'

지금으로부터 먼 과거, 아직 지금으 부족이 엘로드 숲에 자리를 잡고 정착하기도 전일 때.

이들 부족들의 선조 중에는 아주 강력한 뱀파이어가 하나 있었다.

그는 온건 부족이 된 지금의 자손들과는 다르게 사악하고 흉포한 뱀파이어였다. 6군주 폭왕처럼.

'한 이름 모를 대마법사한테 패배해 치명상을 입고, 결국 생명이 다해서 죽었다고 했지.'

뱀파이어라고 죽음이 다른 생물들과 다르지는 않다. 뼈와 살이 썩고, 육신은 자연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혈정이었다.

'가스칼리드의 영혼과 혈술이 잠들어있는 돌.'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장로 뱀파이어 하나가 게임에서 뭐라뭐라 설명했던 것 같기는 한데, 잘 기억은 안 난다. 어차피 설정일 뿐이니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 가스칼리드의 분신과도 같은 그 사악한 돌을 후손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는 것이었다.

가스칼리드가 부활하는 날이 부족이 멸망하는 날이라는 유언과 함께, 그들은 대대로 혈정의 기운을 잠재우기 위한 의식을 지금까지 아주 오랜 세대에 걸쳐 치뤄왔다.

그러나 문제는 의식의 여파였다.

가스칼리드의 피를 이어받은 족장의 혈육들이 자신의 피를 바쳐 혈정의 기운을 진정시키는 의식.

그건 단순히 피를 바칠 뿐이 아니라 의식에 나선 이의 생명력과 정신을 갉아먹는 의식이다.

한마디로 엘로드 숲의 족장들은 의식을 행하면 행할수록 단명할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도 봉인을 하고 있는 것이 겨우였기에 어디로 옮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냥 남겨두고 숲을 떠나면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짓이고.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엘로드 숲의 부족들은 혈정이라는 흉물을 떠안고 족장들의 목숨을 대대로 짜내왔다.

그리고 바로 그 혈정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내가 엘로드 숲에 찾아온 이유였다.

정확히는 해결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능력인 뱀파이어의 '혈술'이 목적이었다.

"나는 너희의 선조인 가스칼리드를 알고 있다."

이제 서로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됐으니 제대로 입을 털어볼 때였다.

날 노려보고 있던 족장이 그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뭐라고······?"

"혈정, 너희의 선조가 내린 저주와도 같은 그 물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머릿속에 구상해뒀던 스토리를 술술 풀었다.

"당시의 족장이었던 할리온이 가스칼리드의 혈정을 직접 봉인했었지. 알고 있나?"

"······."

"족장이라면 선대의 기록들이 남아있을 테니 물론 알고 있겠지. 나는 그와 연이 있었고, 그가 내게 맡겼던 부탁이 있다. 언젠가 때가 되었을 때 혈정을 완전히 소멸시켜달라는 부탁이었지. 미래의 후손들이 더 고통받지 않도록 해달라고 말이야."

"자, 잠깐."

내 말에 점점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던 그녀가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우리들의 선조가 살아있을 때의 몇백 년 전의 인물이란 말인가?"

"그렇다."

그에 아셸도 조금 놀란 기색으로 날 돌아봤다.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진짜라고 해도 딱히 말이 안 될 건 없었다.

군주들만 봐도 알 수 있듯, 이 세계에서 경지를 넘은 초인들에게 육신의 수명이란 기본으로 몇백 년은 되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조금 엄숙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 부탁을 지키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다. 그러니 혈정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굉장히 뜬금없겠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아니면 어찌 외부인이 혈정과 자신들의 선조에 대해 알고 있겠는가?

나는 족장의 대답을 기다렸다.

고뇌에 빠진 듯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지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응?

"이건 저희 부족의 문제입니다. 몇 마디 말만 듣고 외부인에게 혈정의 문제를 맡길 수는 없습니다. 당신의 말이 정말 모두 사실이라면 죄송하지만, 그래도 저희를 배려한다면 돌아가주십시오."

돌아온 건 단호한 거절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칼같이 거절할 줄은 몰랐기에 조금 당황했다.

"누, 누님. 이야기를 더 들어봐야······."

오히려 나에 대해 더 적의를 품고 있던 전사장이 당황하며 그녀를 말렸다.

"그럼 안녕히."

그럼에도 그녀는 내게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는 단호히 몸을 돌렸다.

나는 조금 허망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껏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포기하는 건 절대로 안 되지.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들어가야겠군."

내 말에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사실 너희들의 허락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이건 나와 너희의 선조가 한 맹약이고, 그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제가 방금 괜찮다고 말씀드렸음에도 말입니까?"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뻔뻔하게 말했다.

"그래. 그러니 더 충돌을 빚기 싫다면 나를 혈정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죽은 벗의 후손들의 피를 보기는 싫으니."

혈술 (4)

싸늘하게 얼어붙은 분위기.

바람에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만 들리며 정적이 감돈다.

족장의 눈꺼풀이 미미하게 떨렸다. 이쪽을 노려보는 그녀와 가만히 눈을 마주쳤다.

전력에서 밀리는 건 우리였다. 나라고 기껏 진정된 상황에 다시 불씨를 붙이고 싶겠나?

하지만 이대로 쉽게 혈술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겠다.

설득이 안 먹힌다면 협박, 블러핑으로라도 밀고 나가는 수밖에.

'······먹힌다.'

초감각을 얻은 뒤로는 상대방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에도 특히 더 예민해졌다.

미세한 표정 변화 하나하나가 선명히 보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동요를 내보이지 않겠다는 듯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였으나,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그 말씀은, 지금 저희 부족 전체와 전쟁을 벌이기라도 하시겠다는 겁니까? 당신 혼자서?"

내가 미쳤냐?

하지만 입에서는 속마음과 정반대의 말이 뻔뻔하게 잘도 튀어나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쟁이라는 건 서로의 전력이 어느 정도 맞을 때에나 적합한 말이지. 너희로는 날 막기에 역부족이다."

적어도 수천은 될 부족을 홀로 상대하겠다는 인간 하나.

그러나 지금 뱀파이어들 중 내 말을 비웃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 명의 초인 앞에 머릿수만큼 무의미한 게 없는 세계다.

나는 이미 내가 군주임을 밝혔다. 그리고 좀 전의 합공을 완벽히 막아내며 압도적인 위세 또한 보여주었다.

이들은 결코 내 말을 허세 따위로 치부할 수 없다.

나는 적개심을 뿜어내며, 한편으로는 잔뜩 긴장한 채 나를 노려보는 뱀파이어들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경우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다. 이곳에서 내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다른 군주들까지 개입될 것이다. 그러면 부족이 어떻게 될지는 굳이 설명할 것도 없겠지."

"······."

"그러니 현명한 선택을 해라, 족장."

그녀가 입술을 짓씹었다.

사실 지금 나는 이들에게 힘든 강요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선조의 벗이라며 덜컥 찾아온 외부자에게 선선히 내어주기에 혈정은 너무나 중대한 사안이고, 그렇다고 안내하지 않으면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올 판이었으니.

아셸도 내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는 모습을 처음 봐서 그런지 옆에서 당황한 기색이었다.

좀 미안하긴 하지만, 그나마의 합리화라면 먼저 공격했던 건 저쪽이라는 것이었다.

'나도 부동 장막 아니었으면 진작 수십 번은 죽었다고.'

반면 이쪽에서는 이렇게 말로만 공갈을 치고 있으니 얼마나 평화적인가.

"말했다시피 내 목적은 혈정의 파괴뿐이다. 그것은 내게 있어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다."

"이런 식의 협박을 하고······ 우리가 당신의 말을 신뢰하길 바라는 겁니까?"

"신뢰야 아무래도 좋다. 어찌 됐든 너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알려주려는 것뿐이었으니."

"······."

"너희 부족도 언제까지고 그 저주받은 물건을 품에 안고 있을 거지? 혈정에 의식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다. 언제 부활할지 모르는 선조의 분신을 두려워하며, 네 핏줄들에게도 계속해서 그런 희생을 강요할 건가?"

줄타기가 중요했다. 너무 몰아붙이다가 다시 싸움이 나면 전부 끝이다.

채찍질만 하는 대신 나는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당근을 강요했다.

어쨌든 그들도 나에 대한 신뢰가 없을 뿐이지, 혈정을 처리할 수 있다는 걸 확신한다면 무얼 망설이겠는가?

족장은 고뇌가 깊어진 기색이었다.

나는 더 말하지 않고 그녀에게서 대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최소한 혈정을 어떻게 파괴하겠다는 건지는 설명해주십시오."

역시 그걸 묻는군.

이 정도는 예상한 물음이었기에 태연하게 답했다.

"혈정에 잠들어있는 네 선조의 혼을 완전히 소멸시킬 것이다. 내게는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지."

사실 혈정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선 아직 나도 확신은 없었다.

왜냐면 게임에서 나왔던 것처럼 혈정을 처리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게임의 스토리에서는 강력한 유물의 힘을 빌려 플레이어의 마법사 동료가 가스칼리드의 혼을 소멸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렇게 영혼만 처리하면 돌에 남은 주인 없는 혈술은 가까이 있던 자에게 자연스레 흡수되었다. 종족에 상관없이, 마치 신비처럼.

지금의 내게는 그런 유물이 없고 구할 여건도 되지 없었으니 게임에서 봤던 정석 공략은 애초에 막힌 방법이었다.

하지만 대신 믿고 있는 건 있었다.

정신을 보호해주는 제왕의 혼.

그리고 어떤 대상이든 죽일 수 있는 즉살.

내가 가진 이 두 능력이라면 가스칼리드의 정신 공격을 막을 수도 있고, 또 혈정에 접촉함으로써 그의 영혼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즉살이 영체에도 통하는 건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유일무이의 10성급 스킬인데 영체라고 안 통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냥 감일 뿐이지만 확신에 가까운 감이었다. 저번에 던전에서 가디언을 마주했을 때처럼.

"······."

다시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족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체 선조께서 하셨던 약속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모르겠군요. 지금 우리에게 있어 오랫동안 이어온 부족의 평화를 가장 위협하고 있는 건 바로 당신인데."

······뭐, 그야 애초에 했던 적이 없는 약속이니까.

내가 생각해도 약간 억지인 감이 없지는 않았다.

그녀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안내해드릴 테니 따라오십시오."

······됐다.

마지못한 기색이 가득한 쌀쌀맞은 목소리였으나 난 속으로 환희를 외쳤다.

뱀파이어들도 하나둘씩 나무에서 내려와 날 경계하듯 그녀의 주위를 호위했다.

전사장도 복잡한 얼굴로 나를 슬쩍 바라보고는 그녀의 옆에 붙었다.

그렇게 나는 그들의 뒤를 따라서 아셸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

숲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서서히 건물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천막이나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들도 있었고, 제법 큰 석재 건축물들도 눈에 띄었다. 저런 건 도시에서나 볼 법한데.

야생에서 살고 있다지만 부족의 규모도 그렇고 긴 세월 동안 자리를 잡고 있던 만큼, 이들의 터전은 거의 작은 도시나 다름이 없는 모습이었다.

"내가 데려온 뱀파이어들은 어떻게 할 건가?"

루디카 자매의 행방이 궁금해져서 묻자 족장이 대답했다.

"우리 부족은 외부에서 온 동족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어려움 없이 이곳의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울 겁니다."

마을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한 뱀파이어와 함께 있던 루디카 자매가 보였다. 아까 다짜고짜 그녀들을 데려간 그 뱀파이어였다.

자매가 날 발견하고 안도한 기색으로 소리치며 뛰어왔다.

"론!"

잠깐 못 본 것치고는 격한 반응이었기에 왜 이러나 싶었다.

루비카가 족장 무리를 한 번 흘겨보고는 내게 말했다.

"제, 제대로 작별 인사도 못하고 헤어지는 줄 알고······ 그보다 괜찮은 거예요? 아까 분명 싸우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그 말에 전사장이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이쪽의 시선을 피했다.

니들이 사라지자마자 졸렬하게 기습부터 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관뒀다. 너무 품위가 없어 보일 것 같다.

"괜찮다."

"······이제 이대로 떠나시는 건가요?"

그녀가 조금 슬픈 눈으로 나와 아셸을 번갈아 봤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름 정은 들었던 모양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서 그것만 처리하고 떠날 거다. 난 신경 쓰지 말고, 이제 너희는 이들과 함께 잘 살아가거라."

"······."

"무사히 새 터전을 찾아서 다행이다."

루디카가 울먹거리고, 루비카도 곧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비카까지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기에 나는 속으로 살짝 당황했다.

"정말 감사해요, 론. 당신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선의를 평생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갈게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가지."

옆에서 묘한 눈길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족장을 재촉해서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마을 깊숙한 곳까지 이동하자 족장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장로님들에게도 일단 말을 전해야겠습니다."

뱀파이어 몇몇이 그들을 부르러 가는 듯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늙은 뱀파이어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족장님."

족장이 주위로 뭉친 그들이 이쪽을 흘겨보며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이내 결론이 난 듯하더니 장로 뱀파이어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를 향해서 다가왔다.

"선조님의 친우께서는 혈정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거부할 권한 없이 그것을 믿는 수밖에 없고요."

"그래."

그가 가만히 날 응시하더니 말했다.

"혈정을 처리하시는 과정을 저희가 지켜볼 수 있겠습니까?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는 듯하니 그 조건만 받아들여주십시오."

뭐라도 허튼 수작을 부리진 않을까 최소한 보고는 있겠다는 뜻이었다.

달리 상관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족장과 전사장, 장로들과 함께 혈정이 있는 곳으로 곧바로 이동했다.

마을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있는 동굴이었다. 입구에는 다른 뱀파이어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경사진 동굴길을 내려가자 넓은 지하 공간이 나타났다.

중앙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었는데, 그 위쪽에 박혀있는 붉은 돌이 요사스럽게 빛나며 핏빛으로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저게 혈정인가.'

나는 한눈에 봐도 불길하기 그지없는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돌을 빤히 응시했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게임에서 봤던 풍경과 비슷하다.

족장이 내게 말했다.

"저것이 혈정입니다. 좀 전에 의식을 치뤄서 현재는 기운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그렇군."

"······지금 바로 시작하실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위에 난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온몸을 찌르는 불길함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졌다. 아직 돌에는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Lv. 95]

혈정의 바로 위쪽에 표시된 레벨이 그 기운이 얼마나 강대한 것인지를 아주 잘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은 하지 않았다.

게임에서도 나왔듯, 기껏해야 망령에 불과한 놈이 끼칠 수 있는 건 물리적인 피해가 아니다.

단지 정신적인 공격뿐이라면 제왕의 혼이 완벽히 막아줄 것이라 믿는다. 그렇기에 내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혈정의 바로 앞에 선 나는 천천히 그것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혈정에 손이 닿자, 곧이어 압도적인 존재감이 내 심상에 침입하는 것이 느껴졌다.

'······크하하하하하핫!'

시끄럽기 그지없는 웃음소리가 머릿속에 울린다.

가스칼리드의 영혼이다.

나는 잠자코 손을 댄 채 놈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었다.

'뭐냐, 이번에는 또. 동족이 아니라 인간이냐? 내 피를 이어받기는 커녕 뱀파이어도 아닌 놈이 감히 나의 분신에 손을 대?'

화아아악!

혈정에서 뿜어져나오는 핏빛이 강해졌다.

놈의 존재감이 강해지며 내 정신을 뒤흔들려고 지랄발광하는 게 느껴졌다.

그 정신파가 얼마나 강력한지 동굴이 미약하게 진동하고, 아래에 있던 뱀파이어들까지 머리를 붙잡고서 비틀거렸다.

그러나 나는 마치 홀로 태풍의 눈의 한가운데에 있는 듯했다.

아주 평화로운 마음으로 놈이 난리치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그래도 좀 긴장했었는데 진짜 별 거 없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당황한 듯한 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뭐냐······ 넌? 진작에 정신이 붕괴됐어도 모자랄 판에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냐?!'

나도 놈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야, 망령.'

'······허?'

'아, 들리는 건가? 아무튼 고맙다. 네 능력은 내가 잘 가져가마.'

정말 진심으로 전하는 감사였다.

이제 편히 성불하라고 곧바로 즉살을 발동했다.

'죽어.'

쿠구구구.

놈의 존재감이 한순간에 사라지며 진동이 멎었다.

동굴에 가득했던 기운이 증발한 듯 사라지자 뱀파이어들이 얼떨떨하게 이쪽을 올려다봤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빛이 흐려져가는 혈정을 빤히 내려다봤다.

이내 그 미약한 핏빛마저 전부 흩어지며 내 팔을 타고 몸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혈술 (5)

손부터 시작해서 한순간 이질적인 감각이 차올랐다.

신비를 흡수할 때 느끼는 고양감과는 또 다른 묘한 감각.

흡수된 혈정의 기운이 혈관을 타고 몸 전체를 한 차례 훑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

이내 혈정은 더 이상 미미한 빛조차 뿜어내지 않았다.

나는 그런 혈정을 바라보다가 몸을 체크했다.

가스칼리드의 혈술이 어떤 능력인지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역시 신비를 흡수할 때처럼 직관적으로 어떤 능력인지가 머릿속에 새겨졌다.

"혀, 혈정의 빛이······!"

바위 아래에서 뱀파이어들이 경악하는 소리가 들렸다.

당장 이 자리에서 혈술을 사용해보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있으니 안 되고.

나는 몸을 일으켜 바위 아래로 터벅터벅 내려왔다.

빛을 잃은 혈정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족장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끝났다."

"······."

그녀는 그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부족이 오랜 세월간 고통받아온 문제가 이렇게 쉽게 해결됐으니 이해되는 반응이었다. 정말 손만 잠깐 대고 끝났으니까.

"혈정에 있는 저희 선조의 혼을······ 소멸시키신 겁니까?"

"그래. 저 돌덩이가 이제 더 날뛰는 일은 없을 거다."

영혼은 없애버리고 혈술까지 내가 낼름 먹어버렸으니 혈정에 남아있는 기운은 더 이상 없다. 그냥 평범한 돌이 된 것이었다.

장로 뱀파이어들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안도에 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특히나 전사장이 감격한 기색을 억누르지 못했다.

"누, 누님. 이제 더 이상 의식을 치룰 필요가 없습니다. 누님의 생명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게임에서의 엘로드 숲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혈정을 봉인했을 당시의 족장이 죽고, 이들 부족은 대대로 가스칼리드의 직계 후손을 족장으로 삼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족장들은 자신의 생명력을 바쳐 의식을 통해 혈정의 기운을 억눌러왔다.

현재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며 그것은 족장이 지니는 당연한 책임이자 부족의 풍습이 되었다.

전사장 또한 가스칼리드의 핏줄을 이어받았지만, 그는 부족에게 있어 너무나 뛰어난 전사였기 때문에 누구도 의식에 그의 생명이 낭비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족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사실상 자신을 대신하다시피 해서 족장이 된 누이에게 전사장은 항상 큰 죄책감과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 뒷배경을 알기에 지금 그가 이토록 기뻐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뭐, 아무튼 이걸로 다 끝났다.

빨리 밖으로 나가 혈술을 펼쳐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

기운을 잃은 혈정을 한참이나 더 둘러보고 나서야 뱀파이어들은 정말로 혈정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받아들였다.

동굴 밖으로 나와서 나는 그들에게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받았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조님과의 약속을 의심했던 것 또한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은공 덕분에 저희 부족은 오늘로 비로소 진정한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족장과 전사장, 그리고 장로들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바로 아까 전까지 적대하고 미심쩍어했던 것과는 태도가 순식간에 정반대가 되었지만, 딱히 그들을 탓하는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온 건 나였으니 그게 당연한 대응이었으니까. 나도 순수한 선의로 혈정을 처리한 것도 아니고.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은공."

전사장도 면목이 없다는 듯 내게 다시 한 번 사과를 했다.

그래, 그래도 넌 미안한 줄 알아야지.

고개를 숙여 훤히 드러난 놈의 정수리를 한 번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솟았지만 참았다.

대신 새롭게 얻은 능력을 확인해보기 위해 말했다.

"한번 혈술을 사용해봐라."

"······예?"

내 뜬금없는 요구에 전사장이 고개를 들고 눈을 깜박거렸다.

나는 다시 말했다.

"네 혈술을 펼쳐보라고 했다. 아까 전에 내게 했던 공격처럼 말이야."

"어, 어째서 그러시는······?"

"어서."

다짜고짜 하라고 말만 하니 결국 전사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리곤 서서히 안색이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물들더니 얼빠진 소리를 냈다.

"······어?"

무언가 잘 되지 않는지 전사장은 혈술을 전혀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주위의 뱀파이어들이 그 모습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이런 거군.'

성능을 대충 확인한 나는 펼치고 있던 능력을 도로 거두었다.

그러자 전사장은 다시 정상적으로 혈술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손에 피가 뭉쳐졌다.

"뭐, 뭐지?"

"왜 그러는 건가, 전사장?"

"장로님, 방금 한순간 혈술이······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가 어리둥절하게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가스칼리드 혈술의 고유 능력.

그것은 다른 뱀파이어의 혈술을 그대로 앗아가서 자신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건 즉살처럼 접촉이라는 조건도 없기에 상대가 일정 범위 내에만 있다면 펼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가스칼리드의 혈술에 노출된 뱀파이어는 방금처럼 혈술을 펼치지 못하게 된다.

한마디로 상대가 뱀파이어 한정으로는 사기와 다름없는 능력이었다. 물론 상대가 자신보다 더 강하거나 동등하면 혈술이 아예 안 통하거나, 능력을 완전히 가져오는 데에 시간이 걸리지만.

'이제 뱀파이어를 만날 일은 거의 없을 테니 별로 쓸모가 있을 능력은 아니지만.'

이런 고유 능력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애초에 필요했던 건 혈술의 공통 패시브인 혈액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능력뿐이었으니까.

더 이상 볼일은 없었기에 바로 아셸과 함께 숲을 떠나려고 했다.

그런 나를 뱀파이어들이 붙잡았다.

"은인을 이대로 떠나보낼 수는 없습니다. 혹여 원하시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해주십시오. 가능한 선에선 최대한······."

"됐다. 내가 데려온 뱀파이어들이나 잘 부탁하지."

이미 원하는 건 손에 넣었고, 그 외에 딱히 이들 부족에게서 얻어갈 건 없었다.

내 대답에 뱀파이어들이 더욱 경외하는 눈으로 날 부담스럽게 바라봤다.

이들은 내가 혈정에서 선조의 능력을 흡수했다는 걸 몰랐으니 말이다.

뱀파이어들의 배웅 아래 마지막으로 숲을 떠나기 전.

장로들 중 하나가 내게 말을 걸었다.

가장 연장자로 보였던 그 뱀파이어였다.

"염치없지만 은공께 바깥세상의 일을 하나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

"폭왕은 여전히 칼데릭의 6군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인지······."

······폭왕?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장로들은 하나같이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그들의 반응을 이해했다.

왜냐면 이 대륙에서 뱀파이어라는 종족의 인식을 시궁창으로 처박은 데에 가장 지대한 공헌을 한 존재를 하나만 꼽자면, 그게 바로 폭왕이었으니까.

아직도 바깥에서 그 지랄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모양이었다.

"그럼 부디 살펴가십시오. 은공께서 저희 부족에 베풀어주신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나는 뱀파이어들의 터전을 떠났다.

적당히 거리가 멀어지고 난 후 나는 아셸에게 말했다.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예."

아셸은 의아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런 그녀를 두고 우거진 수풀 안쪽으로 이동했다.

이내 그녀의 기척이 완전히 느껴지지 않을 즈음에 멈춰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이쯤이면 됐겠지.

나는 허공에 손을 뻗고 제대로 혈술을 펼쳐봤다.

스으으.

손바닥에서 피부를 통과하고 스며들듯 나온 피가 두둥실 떠오른다.

나는 그것을 신기한듯 쳐다보다가 이리저리 움직여보기도 하고, 동글게 공 형태로 뭉쳐보기도 했다.

혈액은 내 의지에 따라서 잘도 허공을 유영했다.

'이런 감각이군.'

그냥 혈액을 한정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염동력이나 다름이 없다.

마치 없던 날개가 생겨서 처음으로 파닥여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조종하고 있던 혈액에 전력을 담아서 앞쪽에 보이는 나무로 쏘아봤다. 가시처럼 날카롭게 만들어서.

퍼억!

기세 좋게 쏘아진 혈액이 나무에 부딪혀 껍질을 조금 부수었다.

딱 그 정도의 파괴력뿐이었기에 나는 조금 애매한 표정이 되었다.

'······뭐, 제법 빠르기는 한데.'

화살 같은 것보다야 속도는 훨씬 빠르지만 위력이 전혀 안 나왔다.

아까 전, 뱀파이어들이 날 공격하며 혈술을 사용했을 때는 숲 한편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가공할 위력을 보였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불가능했다.

왜냐면 뱀파이어가 아니라 인간이니까.

게임 종족 설정에 기억하기로 뱀파이어는 피의 밀도나 재생력 자체가 다른 종족들과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그러니까 인간과 별다를 것도 없는 덩치의 몸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양의 혈액을 뽑아내고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혈술을 얻었다고 해도 타고난 종족이 뱀파이어가 아닌 이상 그런 비정상적인 위력은 낼 수 없었다.

한마디로 무기는 기관총인데 안에 든 총알이 비비탄인 셈.

가스칼리드의 고유 능력인 혈술 강탈이야 아까 전사장의 혈술도 완전히 봉인시켰던 걸로 봐서 본래의 위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듯했지만, 혈액 조종은 이 정도가 한계였다.

'이질감도 좀 많고 말이야.'

애초에 뱀파이어의 종족 특질이니 인간인 내 몸에는 맞지 않는 건지, 피를 조종할 때 느껴지는 이질감도 적지 않았다.

이 이질감이 줄면 속도는 지금보다 더 올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계속 사용하다 보면 늘려나?'

사실 내게 있어서 위력이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긴 했다.

어차피 피에 닿기만 하면 죽일 수 있는데 그깟 게 뭐가 중요하겠나. 그냥 좀 아쉬울 뿐이었다.

'그리고 초재생도 있으니 혈술을 사용하는 데에 부담도 없겠고.'

나는 이번엔 허공에 띄운 핏물을 세 갈래로 나눠서 쏘아봤다.

나눠서 쏘려니 제어가 훨씬 힘들었다. 이것도 하다 보면 늘겠지.

어쨌든 즉살의 효율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능력을 얻은 건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방어는 부동 장막, 그리고 공격은 혈술을 이용한 즉살, 그리고 초감각까지.

이 능력 조합이라면 이제 웬만한 것들은 내게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도 약점이 없지는 않지.'

너무 빨라서 피를 맞히기도 힘들거나, 아니면 아예 전신을 두르고 방어막을 펼쳐버리는 상대라면 즉살을 사용하기가 여전히 힘들었다.

하지만 내 즉살의 강점은 누구도 이 능력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점에도 있다.

그런 적을 만나더라도 방심을 잘만 이끌어낸다면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겠지.

나는 팔짱을 낀 채 서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는 거대한 기척이 걸렸다.

뀌이익!

집채만 한 크기의 초대형 멧돼지였다.

이 숲을 떠돌아다니며 제일 많이 마주친 몬스터이기도 했다.

나를 발견한 놈이 콧김을 취익 뿜고는 곧바로 돌진해왔다.

나는 손가락에 피 한 방울을 띄워서 놈에게 쏘아냈다.

핏물에 닿자마자 놈의 몸에 힘이 풀리더니 달려오던 그대로 미끄러지며 요란스레 바닥을 굴렀다.

나는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 더 이상 미동도 하지 않는 놈을 빤히 보고 있다가, 피어오른 흙먼지를 휘휘 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만 갈까."

혈술도 충분히 시험해봤고, 이제 아셸한테 돌아가야겠다.

공간 도약 (1)

숲을 빠져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바로스와 다시 합류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나는 손에 핏물을 띄워 다양한 형태를 만들거나, 아니면 분할하는 법을 연습했다.

아직 컨트롤이 익숙하지 않아서 평소에 이런 식으로 꾸준히 숙련도를 쌓아둘 생각이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남아도는 게 시간이고 할 것도 없었기에 새로운 활력이라면 활력이었다.

굳이 아셸이나 다른 이들에게도 혈술의 존재를 숨길 생각은 없었다.

왜냐면 어차피 알게 될 테니까. 언제가 됐든 대놓고 사용하고 다녀야 될 때가 올 텐데 숨길 이유가 없었다.

아셸은 내가 혈술을 사용하는 걸 처음으로 봤기에 반대편에서 계속 힐끗거리는 게 느껴졌다.

뜬금없이 피를 조종하고 앉았으니 갑자기 왜 저러나 싶겠지.

"할 말이 있나?"

말을 걸자 그녀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론 님께서는······ 뱀파이어셨습니까?"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내가 뱀파이어로 보이나?"

"······아뇨, 인간으로 보입니다."

"그래, 인간이 맞다."

그런데 어떻게 피를 조종하는 건데?

내 말에 아셸이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그 궁금증을 굳이 해결해줄 생각은 없었다.

혈정에서 혈술을 흡수했다는 사실까지는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었으니까.

꽤 한참 동안 혈술을 연습하던 나는 그만 피를 거두었다.

'이제 다음 목적지는······.'

본래의 계획은 엘로드 숲은 뒤로 미뤄두고 바로 다음 신비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었었다.

그게 중간에 뱀파이어를 발견하면서 이렇게 되어버린 거고. 결과적으로 혈술도 성공적으로 얻고 전부 다 잘 됐다.

다음 목적지는 예정했던 대로 1군주령.

그곳에서 찾아내야 할 신비는 따지자면 방어 계열 능력에 가까운 신비였다.

'공간 도약.'

명칭대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신비다.

이 세계에서 공간과 관련된 능력은 굉장히 희귀했다.

보통 게임에서야 마법사라면 개나소나 다 사용하는 게 텔레포트지만 라사 세계관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공간 계열의 마법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도 극히 드물었고, 또 제약도 굉장히 많았다.

'이번 건 특히 찾기 힘들겠지······.'

벌써부터 가슴에 막막함이 턱 쌓이는 기분이었다.

신비 찾기야 뭐 지금까지 쉬웠던 적이 없지만, 이번 건 특히나 그랬기 때문이다.

1군주령에 위치한 가이탄 호.

공간 도약의 신비는 바로 그 거대한 대호수의 어딘가에 숨겨져있다.

한마디로 수중 탐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았다.

'어쨌든 그것까지 얻고 나면 남은 신비는 하나뿐인가.'

공간 도약까지 얻고 난 다음, 마지막으로 얻을 신비는 내가 사용하기 위해서 찾으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 무엇보다도 반드시 찾아내야 하는 신비이기도 했다.

'놈'이 그 신비를 찾게 두는 건 막을 수 있다면 막아야 하는 일이니까.

다만, 숨겨진 장소가 이 대륙에 존재하는 마경 중 한 곳이었기에 다른 신비들부터 찾아서 스펙을 올려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미 늦었을 수도 있나.'

사실 놈이 그 신비를 발견한 게 정확히 어느 시점인지 몰랐기에 어쩌면 이미 늦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 그럴 확률이 높았다. 이런저런 것들을 따져보면 진작 몇 년도 더 전에 찾고 지금쯤 한창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그래도 아직 모르는 일이니 찾아보기는 해야겠지.'

당장은 공간 도약의 신비부터 찾는 일에 집중해야겠지만 말이다.

게임의 플레이 배경으로부터 5년 전 시점인 현재.

시간이 꽤 흘렀으니 메인 스토리의 본격적인 시작까지는 5년도 채 남지 않았다.

칼데릭을 떠돌기 시작한 지도 이제 대충 반 년 가까이 됐나?

슬슬 여정의 끝이 보인다고 생각하며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아셸은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7군주를 힐끔 쳐다봤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신경 쓸 것 없이 자신이 맡은 호위의 책무만 다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벌써 칼데릭을 떠돌기 시작한 지도 거의 반 년, 그동안 그가 보여준 수많은 의외의 모습들은 7군주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들었다.

어떤 때에는 군주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너무도 평범했고, 어떤 때에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호인 같았다.

또 어떤 때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어떤 때는 세상만사 큰 관심이 없는 초월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성향뿐만 아니라 능력 또한 그렇다.

마치 언령처럼 말만으로 상대를 죽이는 능력이라든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방어막이라든가.

방금 보여준 피를 다루는 능력 또한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뱀파이어들과 나눴던 대화의 내용을 생각해보면 몇백 년 전에 그들의 선조와 깊은 연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사람.'

다만,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그가 악인에 가까운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모른 채하지 않았고, 노예로 잡힌 이들도 구해줬으며, 한 부족의 평화가 걸린 중대한 문제를 해결해주기도 했다.

그 행동들이 속에는 어떤 의도를 품고 있었을지 몰라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호위에 집중하고 있나?"

"예?"

"자꾸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 같길래."

"······죄송합니다."

아셸은 잠시 엄한 데에 정신이 팔린 스스로를 탓하며 다시 호위에 신경을 집중했다.

***

3군주령에서부터 여러 도시들을 거치며 많은 시간이 흘렀다.

1군주령의 북쪽의 대도시 중 하나인 포이젤트.

가이탄 대호수의 인근에 위치한 그 도시에 도착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람을 찾는 일이었다.

호수를 탐험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인재를 말이다.

숙소를 잡고 언제나 그랬듯이 가장 먼저 모험가 길드를 찾아갔다.

길드 직원들의 주업무 중 하나는 의뢰인과 적절한 모험가를 연결시켜주는 일이고, 그게 가장 큰 존재 이유였다.

그렇기에 조건에 맞는 인재를 구하려면 보통 길드를 찾아가는 것이 가장 빨랐다. 조건이 다소 까다더라도 말이다.

"음, 그러니까······."

내 말을 들은 모험가 길드의 직원이 확인하듯 물었다.

"인챈트 마법과 무호흡 마법을 동시에 사용할 줄 아는 모험가를 찾으신다는 말씀이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이탄 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지식도 있으면 더 좋지."

직원이 조금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곤란함의 감정이 담긴 웃음이었다.

나는 그녀의 반응을 이해했다.

나도 조건을 요구하면서 정말 여기에 딱 들어맞는 모험가가 있으려나 싶었으니까.

인챈트 마법.

명칭 그대로 자신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 마법의 효과를 부여해주는 마법이다.

이 세계에서 마법이 각인된 아이템이라는 건 마법사들이 마법을 보다 용이하게 사용하기 위한 보조 도구일 뿐이다.

마법의 전개를 담당하는 술식 각인이 복잡할수록 마석에서 금방 지워진다던가 뭐라던가 했던가. 군주성에서 관련 서적을 읽었었는데 잘 기억은 안 난다.

그래서 마법사들은 술식의 중요한 부분만 새겨놓고 그 중간중간만 채워넣는 방식으로 사용하지만, 마법을 모르는 사람은 그게 안 되니까 사용하지 못한다.

고대에는 마법 술식을 장기간 저장하는 기술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대까지 그 기술이 남아있지는 않다고.

그래서 게임에서도 아이템이라고 해봐야 마법사 직업군 외에 액티브 능력이 보유된 아이템은 상당히 희귀하긴 했다. 그만큼 다른 능력치 부분에서 밸런스를 잘 맞추긴 했지만.

어쨌든 그렇기에 이 세계에서 인챈트 마법이라는 건 상당히 위상이 높았다.

심지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도 많지가 않기에 더더욱 그랬다.

이 세계에는 반드시 타고나야만 하는 마력의 성질이라는 것도 있어서, 소수의 마법들은 그 성질이 맞지가 않으면 아무리 마법적 경지가 높은들 사용할 수 없기도 했다. 공간 계열의 마법이나 인챈트 마법이 그러했다.

'거기에 무호흡은 익히는 마법사도 거의 없는 마법일 텐데 말이야.'

마법사가 무호흡 마법 같은 걸 익혀서 대체 어디에 쓰겠는가?

물론 익혀서 나쁠 건 없겠지만 그럴 시간에 훨씬 더 유용하고 강력한 마법들을 익히는 게 보통 아닐까.

한마디로 인챈트에 무호흡을 함께 익히고 있는 마법사는 매우 찾기가 힘들 것이었다.

그럼에도 호수를 탐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찾아내야만 했기에 나는 진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건에 맞는 모험가가 아예 없나?"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없다고 하면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강구할 생각이었다.

좀 더 권력을 활용하면 어떻게든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을 수 있겠지. 이 도시의 시장을 찾아가든가 해서 말이다.

하지만 직원에게선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게······ 마침 딱 한 명 생각나는 특급 모험가 분이 있기는 한데, 지금은 이 도시에 안 계시는 걸로 알고 있어서요."

"그럼 어디에 있지?"

"죄송하지만 그것까지는 저도 잘······ 자주 도시에 들르시기는 한데, 계속 이곳에 머무르고 계시는 거면 소식을 전해드릴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직원에게 은화 한 닢을 건네주었다.

"테리아 여관의 305호로 소식을 전해주면 고맙겠군. 아예 찾는 의뢰인이 있다고 전하고 데리고 와도 좋고."

"앗, 네! 알겠습니다!"

그녀가 동물 귀를 쫑긋거리며 잽싸게 돈을 받아들었다.

일단은 좀 더 도시에 머물면서 그 모험가가 오기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렇게 한 일주일 정도가 흘렀을까.

여관으로 기다리던 소식이 전해왔다.

"지금 도시에 왔다고?"

방 앞까지 찾아온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예, 공자님. 말씀을 전하고 함께 오려고 했는데, 찾는 사람이 직접 오라고 하셔서······."

나는 피식 웃으며 여관 방을 나섰다.

그래, 뭐. 용건이 있는 사람이 가야지.

곧바로 그녀를 따라 아셸과 함께 모험가가 있다는 주점으로 이동했다.

"저분이에요."

그녀가 주점 구석 테이블에서 홀로 앉아있는 수염이 성성한 남자를 가리켰다.

나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홀로 맥주를 마시고 있던 그가 나와 뒤쪽에 있는 직원을 바라보더니, 넉살 좋게 웃으며 물었다.

"아, 나으리께서 절 찾는다는 분이셨습니까?"

직접 오라길래 좀 성깔 더러운 인상을 상상했는데 별로 그렇지는 않아 보였다.

나는 그를 한 번 훑어보고 입을 열었다.

"인챈트 마법과 무호흡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모험가인가?"

그가 콧등을 벅벅 긁고는 킁 소리를 내며 말했다.

"뭐, 그렇습니다. 그보다 저를 어디에 쓰려고 고용하시려는 건지부터 여쭤도 되겠습니까?"

"가이탄 호를 탐험할 거다."

"아, 가이탄 호······."

남자가 씩 웃더니 말했다.

"무슨 보물 지도라도 얻으셨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 큰 호수를 탐험할 생각을 다 하시고, 행동력도 좋으십니다."

나는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잔말은 됐고, 일단 인챈트와 무호흡 마법에 대해서 좀 자세히 묻지."

공간 도약 (2)

무호흡 마법.

당연히도 물속에서는 숨을 쉴 수 없기에 호수 탐사를 위해서 필요한 마법이다.

그리고 그 효과를 마법의 '마'자도 모르는 내게 걸어줄 수 있는 게 인챈트 마법이었다.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나는 남자에게 이 두 마법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물어봤다. 가장 중요한 것부터.

"일단 무호흡 마법을 다른 사람에게 인챈트하는 게 가능한가?"

인챈트 마법은 효과가 효과인 만큼 대상에게 걸 수 있는 종류의 마법이 굉장히 제한적이다.

게임에서는 무호흡도 인챈트가 가능한 마법인 걸로 알고 있었지만 재차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남자가 안주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가능합니다."

"한 번에 인챈트를 걸 수 있는 인원은 얼마나 되지?"

"인원은 제 실력이 미숙해서 1명이 최대입니다."

"인챈트의 지속 시간은?"

"지속 시간이야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만······ 마력을 아예 쌓지 않은 평범한 사람을 기준으로는 그래도 대략 2시간 정도 지속할 수 있을 겁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제 마력과 성질이 잘 맞지 않거나 마력에 친화도가 떨어지면 그보다 지속 시간이 더 짧아지겠죠. 그래도 몸을 격하게만 안 움직이면 마력을 많이 잡아먹는 마법은 아니라서 말입니다.

1명이 한계면 아셸은 두고 혼자 들어가야 한다는 거고······ 2시간이라.

그 거대한 호수를 탐사하며 신비를 찾아내는 데는 턱도 없을 시간이었지만, 당연히 첫 시도에 무조건 찾아내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럭저럭 넉넉하다 싶었다.

설령 그보다 지속 시간이 짧더라도 어쨌든 이런 인재를 당장 어디서 또 구할 수도 없었기에 놓칠 수는 없었다.

"마력을 전부 소진하고 다시 완전히 회복하는 데는 얼마나 걸리지?"

"집중해서 명상을 해도 최소한 반나절은 걸립니다."

잠시 머릿속으로 어림해봤다.

1시간 탐사, 3시간 충전, 그리고 휴식까지 생각하면 하루에 대충 2, 3번씩 잠수해서 탐사할 수 있으려나?

뭐, 효율이야 어찌 됐든 이런 인재를 당장 어디서 또 구할 수도 없었기에 어차피 고용은 확정이었다.

이 남자도 딱히 의뢰를 거절할 생각은 없어 보였기에 바로 제안을 건넸다.

"자네를 고용하고 싶은데."

내 말에 그가 손가락을 말았다.

"의뢰금만 두둑히 챙겨주신다면 저야 물론 좋습니다, 나으리. 그런데 호수는 언제, 얼마나 탐사하실 생각이십니까?"

"출발은 내일 당장. 그리고 기간은 정해진 건 없다. 며칠이 될 수도 있고 몇 주가 될 수도 있지."

"······예? 잠깐, 그건 좀······?"

"자네 말대로 의뢰금은 두둑히 챙겨주지. 착수금과 하루 수당으로 2골드씩, 그리고 의뢰를 끝내는 날에는 5골드를 주겠네."

잠시 주춤한 기색을 보인 그가 이어진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돈지랄, 효과는 말할 것도 없이 뛰어났다.

나는 술자리를 슥 둘러보고서 말했다.

"여기 술값도 전부 내가 계산하지."

"······이것 참 화끈하신 공자님이셨군요."

이내 그가 씩 유쾌한 미소를 지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만, 저는 특급 모험가인 헤이블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공자님께서는?"

"먼 도시에서 와서 가문을 말해봐야 잘 모를 거다."

"아, 그렇습니까. 아무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지불하실 의뢰금이 아까울 일이 없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서 탐사를 보조하겠습니다! 하하핫!"

그리고 그는 곧바로 술을 몇 잔이나 더 시켰다.

나는 미리 넉넉하게 돈을 계산해주고 도로 주점을 나왔다.

내일부터 많이 굴려야 되는데 오늘 하루 즐겨야지.

***

날이 밝고, 약속한 장소에서 헤이블과 만났다.

"아, 오셨습니까."

그는 어젯밤과는 사뭇 다르게 말투가 침착했다.

아무래도 어제는 만났을 때부터 취기가 좀 올라있던 모양이다.

우리는 곧바로 가이탄 호로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이동하면서 헤이블은 자신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냥 과거에 대한 이야기나 그런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때 처음으로 무호흡 마법을 익히게 됐던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뭐, 나름 유용하게 써먹고는 있죠."

"그렇군."

나는 영혼 없이 대꾸하며 그에게 물었다.

"가이탄 호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나?"

"더럽게 큰 호수라는 거 말고는 솔직히 별로 아는 건 없습니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무시무시한 괴어들이 나타난다는 소문 정도? 근데 뭐 끽해봐야 호수에 사는 물고기가 커봤자 얼마나 크겠습니까."

끽해봐야라고 하기엔 가이탄 호는 이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호수 중 하나로 알고 있다.

그런 만큼 그 수면 아래에 살고 있는 생물들도 어마무시한 것들이 많았다.

판타지 세계답게 평범한 상어나 고래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무시무시한 몬스터들이.

'어차피 깊게 들어갈 생각은 없으니까.'

내가 찾고 있는 신비는 호수의 외곽에 붙어있었기에 중앙 쪽까지 깊게 들어갈 일은 없었다.

그 큰 호수 한가운데 쪽 어딘가에 신비가 있었으면 애초에 찾을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혈술까지 얻은 마당에 상대하는 데는 별 문제도 없겠고.

나는 공간 도약의 신비가 숨겨진 장소의 풍경을 떠올려봤다.

이 역시 내가 직접 찾았던 신비가 아니라 다른 유저의 플레이 영상을 우연히 봤던 거라서 정확한 위치는 특정할 수 없었다.

'호수 외곽의 벽면 쪽, 바위들이 성게처럼 뾰족하게 솟아있었고······ 그리고 동굴이 있었는데.'

저번에 부동 장막을 찾을 때처럼 이번에도 완전히 노가다가 될 것이었다.

그 생각은 가이탄 호에 도착하고 호수의 규묘를 직접 본 다음에는 더 강해졌다.

'······미친.'

전방으로 끝없이 광활하게 깔린 수면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욕을 뱉었다.

해안에서 바다를 보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압도적인 크기였다.

여기 어딘가에 숨겨져있는 신비 찾아야 한다고?

이건 진짜 몇 달은 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도 그냥 아예 못찾을지도.

"이곳도 오랜만에 오는군요."

헤이블이 팔자 좋게 호수를 구경하며 말했다.

그야 나한테 마법만 걸어주고 의뢰금을 받으면 그만이었으니 말이다.

호수 근처에 마차가 멈춰서고, 나와 아셸과 헤이블은 호수 바로 앞으로 다가갔다.

호수의 근처로 무성하게 깔린 숲. 이곳이 내가 희미하게 기억하는 지상의 풍경이었다.

신비는 이 일대를 뒤지다 보면 찾을 확률이 높았다.

나는 호수를 잠시 둘러보다가 헤이블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받은 그가 물었다.

"바로 시작하시는 겁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그럼······ 몸에 이상이 온다 싶으면 바로 말씀을 해주십쇼."

헤이블이 곧바로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푸른빛이 모여들더니 그 빛이 천천히 내 몸으로 흡수되었다.

나는 전신에 차오르기 시작한 마력을 느꼈다. 초감각을 얻은 뒤로는 마력과 같은 기운들도 훨씬 잘 느껴졌다.

'······오.'

마법의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지 않아도 전혀 답답한 감각이 차오르지 않게 된 것이다.

그에 신기해하고 있는데, 헤이블이 조금 놀란 얼굴로 말했다.

"공자님께서는 마력을 연마한 적이 아예 없으신 듯한데, 인챈트의 효율이 상당하시군요?"

"효율?"

"마력에 친화도가 높다는 말씀입니다. 무술이든 마법이든 제대로 마력을 연마하시면 대성하실 것 같습니다."

뭐, 마력에 재능이 있다는 건가?

립서비스인가 싶었지만 표정을 보니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지금 중요한 건 아니었기에 나는 다시 호수로 신경을 돌렸다.

'그러면······.'

어디 이제 들어가볼까.

질질 끌 것도 없었다.

나는 걸치고 있던 옷가지를 하나씩 탈의하기 시작했다.

이 두꺼운 것들을 입고 물 속을 헤엄치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가장 안에 입고 있던 얇은 티셔츠와 바지만 남기고 전부 벗었다.

"좀 맡기고 있겠다."

"······아, 예."

아셸이 조금 당황스러운 얼굴로 벗은 옷가지들을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아, 그리고 물 속에서 너무 몸을 격하게 움직이는 데에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공자님. 그럴수록 무호흡에 소모되는 마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집니다."

헤이블의 주의까지 듣고서 두 사람을 다시 마차로 돌려보냈다.

한참을 물 속에서 있을 건데 계속 여기에 세워두고 있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흐음······."

홀로 남은 나는 가볍게 몸을 풀고서 수면 바로 앞으로 다가갔다.

잠수에 대한 부담은 별로 없었다.

평생 게임에만 빠져서 살던 내가 그나마 좀 내세울 수 있던 다른 특기 중 하나가 스쿠버다이빙이었기 때문이다.

나와는 다르게 아주 활동적인 동생이 휴일이면 나를 집밖으로 끌어내서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스키라든가, 클라이밍이라든가.

그중에 특히 동생과 내가 그나마 함께 즐겼던 게 바로 스쿠버다이빙이었다. 이쪽은 내 취향에도 제법 맞았었으니까.

물론 지금은 맨몸이었지만, 초재생도 있고 지칠 일 없이 움직일 수 있으니 별 걱정은 없었다.

첨벙!

물 속으로 다이빙을 하고 호흡부터 바로 다시 체크했다. 문제는 없다.

숨을 참고 있는 동안 소비되는 마력 역시 초감각으로 선명히 느껴졌기에, 이쪽도 문제는 없었다.

'······이 정도면 2시간이 아니라 3시간도 넘겠는데?'

내 몸이 인챈트의 효율이 좋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나는 팔다리를 움직이며 천천히 유영했다.

초감각은 물 속에서도 효과가 유효한지 전방의 시야를 지상과 다름없이 뚜렷하게 만들어주었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물고기들이 하나둘씩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적당한 지점에서 멈춰서 호수의 벽면을 살피며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신비를 찾을 때까지 이런 식으로 끝없는 노가다였다.

······그리고 대충 체감상으로 2시간이 훌쩍 흘렀다.

나는 벽면에 튀어나온 돌부리를 잡고 몸을 멈춘 뒤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진짜 답이 없네.'

예상은 했지만 직접 실감하고 나니 또 느낌이 다르다.

이런 식으로 해서 대체 어느 세월에 찾고 앉았지?

마력이 슬슬 떨어져갔기에 일단 돌아가기로 했다.

위치를 표시해둔 지점으로 돌아가서 지상으로 올라갔다.

마차로 돌아가자 아셸과 바로스는 헤이블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쫄딱 젖은 내 꼴을 보고 바로스가 순간 미약하게 입꼬리를 씰룩이며 고개를 숙였다.

제딴에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거겠지만 초감각 때문에 아주 잘 보였다. 저 자식이 웃참을 하고 앉았네.

헤이블이 내게 물었다.

"원하는 건 찾으셨습니까, 공자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릴 것 같군."

모닥불에서 몸을 말리며 나도 함께 식사를 했다.

그리고 늦은 오후쯤에 다시 호수로 들어가서 탐사를 계속했지만, 역시 신비는 찾을 수 없었다. 그날의 탐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런 식으로 일주일이 흘렀다.

오늘도 아침 일찍부터 호수로 들어온 나는 열심히 신비를 찾으며 물 속을 유영하고 다녔다.

하지만 여전히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신비에 이런 식으로는 안 되는 건가 슬슬 의구심이 차올랐다.

'진짜 이거 찾을 수 있는 게 맞나?'

좀 인력이라도 투입할 수 있는 일이면 당장 그렇게 할 텐데, 신비를 찾는 거니까 그럴 수도 없고.

나는 잠시 수중에 누운 채 멍하니 떠다니면서 생각에 잠겼다.

찾을 수 있다는 확신만 있으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투자할 텐데, 그럴 확신이 없는 게 문제였다.

좀만 더 찾아봐도 안 되면 공간 도약을 찾는 건 나중으로 미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

멀리서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거대한 기척이 느껴졌다.

이어서 시야에 모습을 드러낸 건 거대한 상어였다. 거의 배 한 척 크기와 다름없을 정도의.

[Lv. 51]

······별로 깊이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왜 저런 놈이 튀어나와?

놈이 나를 보자마자 아가리를 쩍 벌리고는 거칠게 돌진해왔다.

'저 새끼가.'

나는 곧바로 혈술을 사용해 핏방울을 쏘아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또 반대쪽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다른 기척이 느껴졌다.

동시에 푸른빛의 마력이 물살을 가르고 쏘아오더니 내게 돌진해오는 상어의 몸체를 강타했다.

퍼어엉!

공격에 직격당한 상어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정신을 못 차렸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다가온 물체가 허리를 낚아채는 게 느껴졌다.

'······어?'

나는 내 허리를 붙잡은 이를 쳐다봤다.

온몸이 비늘로 덮인 푸른 머리칼을 가진 여인.

아무래도 내가 위험에 처한 줄 알고 구해주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물 속이라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게 나는 그녀에게 잡힌 채 영문도 모르고 지상까지 순식간에 끌려갔다. 뭐 이리 빨라?

"······후아!"

지상으로 나온 여인이 거칠게 숨을 내쉬다가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야! 미쳤어, 인간? 죽으려고 작정해서 그렇게 깊은 곳까지 들어갔냐?!"

"······."

"어이구, 완전히 넋이 나갔네. 너 진짜 운 좋은 줄 알아라. 내가 진짜 그냥 무시하려다가 구해준 거니까."

그녀가 그렇게 툴툴거리며 몸의 물기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물기를 털어낸 부분에 덮여있던 비늘이 서서히 인간의 피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조금 눈을 크게 떴다.

'······해린족?'

공간 도약 (3)

해린족.

이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희소 종족들 중 하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여인은 분명히 해인족이 맞았다.

지상에서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물에서는 전신이 비늘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는 종족은 해린족밖에 없었으니까.

설마 이런 곳에서 이 희귀하기 그지없는 종족을 보게 될 줄은 몰랐기에 나는 좀 놀랐다.

"뭘 빤히 쳐다보고 자빠졌어. 신기하냐?"

"······."

어째 입은 좀 험한 녀석이네.

이내 피부에 돋아났던 비늘들이 거의 자취를 감춰버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아서 완전히 나신이 되어버렸기에 나는 시선을 슬쩍 돌렸다.

······그러고 보니 얘네는 인간처럼 맨몸을 드러내는 걸 그닥 수치스러워하는 종족이 아니었지.

여인이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언제까지 넋 놓고 있을 거야? 기껏 물고기 밥 될 거 구해줬더니 고맙다는 말도 없냐?"

나도 머리를 탈탈 털며 몸을 일으켰다.

"구해줄 필요 없었다."

"······뭐?"

"위험하지도 않았는데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렸다는 소리다."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넘어가도 됐지만 괜히 말투가 거슬렸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지.

"와, 허!"

그에 여인이 기가 막힌다는 듯 탄식을 뱉었다.

"그게 위험한 게 아니었다고?"

"그래."

"진짜 뻔뻔하네. 감사 인사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 내가 너희 인간처럼 구해줬다고 뭐 대가라도 요구할 줄 알았냐?"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됐다, 됐어. 아이씨, 하여튼 이래서 인간 놈들은······."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돌렸다.

나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해린족이 가이탄 호에도 살았던가?'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애초에 게임을 플레이하면서도 한 번밖에 못 봤을 정도로 희귀한 종족이었으니까.

그리고 해린족은 분명 해안에서 서식하는 종족으로 알고 있었는데······ 대체 왜 이런 호수에 있는 거지?

정말 뜻밖의 마주침이었는지라 기분이 조금 묘하던 와중, 생각 하나가 퍼뜩 떠올랐다.

'······그럼 여기 호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

즉, 내가 찾고 있는 장소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있을 거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곧장 여인을 불러세웠다.

"이봐, 해린족."

내 외침에 걸음을 멈춘 그녀가 도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

"너 뭐냐? 우리 종족에 대해서 알아?"

"그래."

"어떻게?"

"책에서 본 적 있으니까. 지상에서는 인간의 모습을, 물에서는 물고기처럼 비늘을 덮고 있는 전설의 종족."

"······저, 전설?"

왜인지 그녀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흐음, 흠. 전설이란 말이지. 너희 인간들한테는 우리 종족이 그렇게 소문나있구나?"

"······."

저거 설마 지금 전설이라는 말 듣고 좋아하는 건가?

'그냥 굉장히 보기 힘들다는 뜻으로 말한 건데.'

조금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자니 그녀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닌데? 나 해린족 아닌데? 네가 잘못 본 거야, 인간."

갑자기 또 왜 이래?

"맞잖아."

"아이씨, 아니라고. 너 어디서 우리 봤다고 소문내고 다니지 마라, 응?"

역시 괜히 구해줬다며 그녀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엘로드 숲의 뱀파이어들처럼 자신들의 터전이 노출될까 염려하는 건가 싶었다.

그래도 죽이려 들지도 않고 오히려 구해주려고 했으니······ 입만 좀 거칠지 성격은 반대인 듯했다.

"그래서 뭐? 왜 부르는데?"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호수 안에 바위들이 뾰족하게 솟은 지형을 알고 있나? 아니면 동굴이 있는 곳이라거나."

그녀가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몰라. 그건 왜 물어?"

나는 그 미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초감각을 얻은 뒤로 상대의 표정을 더 잘 읽을 수 있게 됐는데, 그녀는 특히나 감정을 못 숨겼다.

그래서 반쯤 확신했다. 내가 방금 말한 장소를 그녀가 알고 있음을.

"알고 있군."

다시 한 번 떠보듯 말하자 그녀가 약간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역시 알고 있네.

"부탁하지. 나를 그곳으로 안내해줬으면 한다."

"아니, 모른다고."

"원하는 게 있다면 가능한 선에서 보답하겠다."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도로 몸을 돌렸다.

"뭐래, 쓸데없는 말로 더 붙잡지 마. 쫓아오면 다시 호수에 던져버릴 테니까 쫓아오지도 말고."

그리고는 훌쩍훌쩍 뛰어 순식간에 숲 안쪽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머리를 다시 한 번 털며 숲을 응시했다.

놓친 걸 걱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여기 호수 인근에 자리를 잡고 있는 듯했으니까.

'저걸 어떻게 구슬리지.'

일단 돌아갔다가 이따가 다시 찾아가봐야겠다.

***

마차로 돌아가서 몸을 말리고 식사를 마친 뒤, 나는 곧장 아셸을 데리고 여인을 만났던 장소로 돌아왔다.

나는 그녀가 남긴 자취를 쫓았다.

바닥에 새겨진 발자국이라거나 풀이 밟힌 자국 등등, 그거면 그녀가 어디로 향했는지 파악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보통이라면 발견하기도 힘든 흔적들이었지만 초감각을 끌어올리니 그닥 어렵지도 않았다. 이거 추적에도 굉장히 유용하네.

그렇게 흔적을 쫓아서 도달한 곳은 숲 깊은 곳에 위치한 한 동굴이었다.

동굴의 입구에 서서 잡담을 떨고 있는 두 남자가 보였다.

아마 경비를 서고 있는 걸로 보이는 그들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싹 표정을 굳혔다.

"······인간?"

제대로 찾아온 것 같다.

한 명이 동굴 안으로 황급히 들어가고, 남은 한 명이 동굴에 가까이 접근한 우리에게 소리쳤다.

"멈춰라, 인간!"

나는 순순히 멈춰섰다.

안에서 다른 이들이 몰려나오는 기척이 느껴졌기에 가만히 기다렸다.

이내 수십에 가까운 해린족들이 동굴에서 나왔다. 다행히도 이번엔 다 옷들을 입고 있었기에 눈 둘 곳이 없지는 않았다.

"······야, 너!"

그중에 낯익은 얼굴의 여인 하나가 나를 보고는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너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흔적을 쫓아왔다."

"그러니까 왜 쫓아왔냐고! 이게 기껏 구해줬더니 진짜······!"

"그게 무슨 소리냐, 안느. 인간을 네가 구해줬다고?"

긴장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던 다른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옮겨졌다.

"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녀가 당황하며 손을 휘저었다.

점점 소란이 커지고 있는데 동굴 안쪽에서 다시 소리가 들렸다.

"다들 조용히 하거라!"

그에 단숨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동굴에서 걸어나온 사람은 건장한 체구를 지닌 노인이었다. 푸른 머리칼과 수염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지나치고 앞쪽으로 걸어나온 노인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Lv. 87]

······무려 90에 가까운 레벨.

'이 부족의 족장인가?'

해린족이 상당히 강력한 마력 친화도를 타고나는 종족이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대단한 레벨이었다.

나는 속으로 놀라움을 숨기며 가만히 시선을 교환했다. 노인의 눈은 마치 바다처럼 깊은 느낌을 주었다.

나를 응시하고 있던 노인이 이내 너털웃음을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허허, 이거 참. 보통 분이 아니시구려."

"······."

"이곳에는 왜 찾아온 것인지 연유를 말해주시오. 보아하니 내 손녀와는 이미 면이 있는 듯한데."

그렇게 말한 노인이 여인을 슬쩍 흘겼다.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런 둘을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이 부족의 족장 되시오?"

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스스로 어색함을 느꼈다.

왜냐면 이 세계에 빙의한 뒤로 처음으로 사용하는 경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 지금은 부탁할 일이 있어 다짜고짜 찾아온 게 이쪽이니 차릴 예의는 차려야 했다.

내 물음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당신들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추호도 없소. 그저 저 여인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오."

내 시선을 받은 그녀가 발끈한 얼굴로 다시 소리치려 했다.

"야이씨, 너 아까 그거······!"

"그만하거라, 안느야."

족장 노인이 그녀를 말리고서 다시 내게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겠소? 대화를 원하는 거라면 차라도 한 잔 내어드리리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싱긋 웃으며 따라오라는 듯 동굴 안으로 도로 몸을 돌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상처?'

왜냐면 그의 등에 꽤나 커다란 상처가 나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치료 중인지 상처 부위에는 약초 같은 풀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야, 들어올 거면 빨리 들어와."

못마땅한 시선으로 날 쳐다보고 있던 여인이 턱짓을 했다.

뭐, 다행히 손님 취급은 해줄 생각인 듯하니 일단 들어가보자.

***

동굴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소박한 공간이 나타났다.

자리에는 풀들이 깔려있었고, 모닥불 주위에는 물고기 뼈 같은 것들이 모아져서 널부러져있었다.

"그냥 적당한 자리 잡고 앉으시오."

내와 아셸이 어디에 앉아야 하나 머뭇거리고 있자 족장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대충 맞은편에 앉자 누군가 차를 내왔다.

족장에게 먼저 주고, 내 앞에도 찻잔을 내려놓은 해인족이 나를 은근히 째려보며 다시 밖으로 나가버렸다.

족장이 끌끌 혀를 차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이해해주시오. 최근에 있던 일 때문에 다들 인간에 대한 적의가 적지 않소."

그에 구석 자리에 쭈그려앉아서 마찬가지로 날 째려보고 있던 여인이 말했다.

"나는 원래부터 인간 싫어했거든, 할아범."

"시끄럽다, 녀석아."

"아니, 저 뻔뻔한 것 좀 봐봐. 저놈 내가 아까 호수에서 물고기 밥 될 뻔한 거 구해준 거거든? 그런데 쫓아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기어이 여기까지 쫓아왔잖아. 은혜도 모르고."

그에 족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네가 저 인간을 구해줬다고?"

"그렇다니까!"

"정말로 내 손녀에게 도움을 받았소?"

그가 시선을 옮겨 내게 다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쓸데없는 참견이었소."

"그럼 그렇지."

"아니, 와! 저 진짜 뻔뻔한······!"

노인이 무시하고서 말을 이었다.

"손녀가 뭘 오해한 듯하니 그냥 넘어가주시오. 입은 거칠어도 심성은 착한 녀석이니, 나쁜 의도로 한 행동은 아닐 거요."

······이 노인은 나에 대해서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한 걸까?

나는 억울해서 죽겠다는 얼굴로 난리치는 여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말했다시피, 당신의 손녀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은데······."

"야, 너 아까 나한테 물었던 그 장소 가르쳐달라고 하려는 거지?"

"그래."

그녀가 혀를 배 내밀며 말했다.

"너같이 뻔뻔한 놈한테는 안 가르쳐줄 거거든?"

"아까 구해줬던 건 정말로 고맙다. 감사 인사가 늦었군."

"······누굴 바보로 아냐?! 절대로 안 가르쳐줄 거니까 집어쳐!"

그렇게까지 단순하진 않구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족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신비도 신비지만 그에게 궁금한 것도 있었다.

"그런데 해린족은 바닷가에 사는 종족으로 알고 있었는데, 원래부터 이 호수에서 살고 있었소?"

그 물음에 순간 두 사람의 표정이 미약하게 어두워졌다.

족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지금은 사정이 있어 잠시 머물고 있는 것뿐이지."

나는 직감적으로 그 사정이라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혹시 등에 있는 상처 때문이오?"

"그렇소이다. 벌써 꽤 지난 일인데도 회복이 더뎌서 아직도 이 꼴이라오."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물어도 되겠소?"

레벨을 생각하면 그가 누구한테 당할 만큼 약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족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대와 같은 인간과 충돌이 있었소."

"인간이라면······."

"아주 강력한 마법사였지. 자신을 세인테아 황실의 마법사장이라고 하더군."

······뭐?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튀어나왔기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간 도약 (4)

세인테아 황실의 마법사장.

세인테아 소속의 대마법사 중 일인이자, 오성과 동등한 급의 강자.

이들이 어쩌다 그런 강자와 충돌을 빚게 됐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머릿속에 추측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종족 사냥?'

세인테아 황실에서는 은밀하게 인간 외 종족 사냥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셸의 백월족이 몰살을 당했던 것처럼.

그것은 황제의 비틀린 신념이자, 라사의 메인 스토리에서도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는 설정이었다.

'그리고 해린족이라면 분명······.'

해린족에 대한 설정도 하나 떠올랐다.

이들이 특별한 종족인 이유는 그 모습을 아주 보기가 힘들다는 것도 있지만,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마결정.'

아마 그런 명칭으로 불렸을 것이다.

해린족은 정해진 수명을 거의 채우고 죽으면 죽기 직전에 '마결정'이라는 것을 생성한다고 한다.

여느 무협지에 나오는 영물의 내단과도 같은 것이었다.

평범한 마석과 비교해 순도가 극도로 높은 마석, 그것은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천고의 보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면 대충 이해가 되는군.'

더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마결정에 대한 이야기는 굳이 꺼내지 않기로 했다.

그건 이들에게 있어서도 굉장히 예민한 문제일 테니 외부자인 내가 언급해서 좋을 건 없을 것이었다.

"어쩌다 그런 자와 마주치게 된 것이오?"

내 물음에 족장이 찻물을 마시고는 대답했다.

"본고장인 바다를 향해 돌아가는 중에 어쩌다 보니 마주하게 됐소."

"그자는 아무 이유도 없이 당신 부족을 공격한 것이오?"

"그건 아니고······ 그저 탐욕이 부른 결과지, 허허.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다오."

맥없이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게 더 자세히 설명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탐욕이 부른 결과.

역시 마결정과 관련된 문제가 맞음을 나는 확신했다.

"야, 그만 꼬치꼬치 캐물어."

계속 못마땅한 눈으로 대화를 듣고 있던 여인이 껴들었다.

"할아범은 뭘 그리 쓸데없이 다 말해주고 있어? 저놈이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니면 어쩌려고."

"쯧쯧, 그걸 걱정하는 놈이 인간한테 모습을 드러내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느냐?"

"······아니, 내가 언제 데리고 왔어! 쟤가 그냥 멋대로 쫓아온 거지!"

추적당할 거 하나 염두에 두지 못했냐고 껴들어 놀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쉬운 건 내 쪽이니 신경을 긁어서 좋을 건 없었다.

족장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여튼 그런 연유로 이런 상처를 입게 된 것이오. 부족들 모두 물로 도망쳐서 목숨만 겨우 건질 수 있었지."

대충 상황이 연상되었다.

족장이 나서서 다른 부족원들이 도망치는 시간을 벌어주다가 결국 공격에 당하는 상황이.

세인테아 황실의 마법사장이라면 그의 레벨쯤이나 되야 그나마 겨우 상대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뭐, 나야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 부족원들이 모두 살아남은 것만으로 다행이지만······."

"할아범!"

갑자기 여인이 빽 소리를 내지르며 족장을 노려봤다.

"······그딴 말 좀 하지 말라고 했잖아. 뭐가 얼마 안 남았다는 거야?"

"욘석아, 귀 아프게 소리 지르지 마라."

족장은 혀를 차고는 태평하게 차를 들이킬 뿐이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손에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상처가 굉장히 심각한 모양이오."

"솔직히 그렇소. 아무리 몸이 늙었다고 해도 영 나을 기미가 없으니."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치료약이 하나 있소."

그 말에 여인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

"치, 치료약?"

족장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내게 물었다.

"치료약이라면······ 혹시 힐링 포션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소."

알고 있네?

야생에서 사는 이들이기에 포션에 대해서는 모를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나는 곧바로 품에 늘 상비하고 다니는 스칼릿을 꺼내들었다.

지금까지 꽤 사용해서 이제 절반도 안되게 남았지만 충분히 많은 양이었다.

포션에 시선이 완전히 고정된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세간에 돌아다니는 포션 중에는 효과가 가장 좋은 축에 속하는 최상품의 포션이다."

"······."

"내가 찾고 있는 장소가 어딨는지 알려준다면 이걸 주겠다."

나는 신비가 있는 장소를 찾고, 족장은 상처를 회복하고.

서로에게 무엇 하나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다.

"이, 인간이 주는 걸 어떻게 믿고······."

그녀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도로 입을 다물더니, 슬쩍 족장을 쳐다보고는 다급히 말을 바꿨다.

"아, 아니야. 믿을 테니까 줘."

"그 장소가 어디인지 알려줄 건가?"

"그래! 알려줄 테니까 빨리 달라고!"

간절하기 그지없는 외침이었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격한 반응이었기에 나는 속으로 조금 당황하면서도, 할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일단 약속해라."

"또 뭘?!"

"이 포션이 족장의 상처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나도 알 수 없다. 그러니 효과가 미미하거나 없더라도 너는 날 그 장소로 안내해줘야만 한다."

스칼릿은 분명히 훌륭한 포션이다.

하지만 족장이 입은 상처를 회복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완전한 확신이 없었다.

왜냐면 일단 보통 종족이 아닌 해린족이고, 대마법사에게 당한 상처라면 무언가 다를 수도 있었으니까.

솔직히 다친 이를 치료하는 일로 조건 같은 걸 걸기는 내키지 않았지만, 별 수 없었다.

여인도 말없이 그런 기색이 담긴 눈빛으로 날 노려보다가 대답했다.

"······알겠으니까 줘. 그딴 장소 따위 100번도 더 안내해줄 테니까."

원래는 일단 장소부터 안내받은 뒤에 포션을 건네줄 생각이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다.

순서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혹시나 그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었으니까.

'뭐, 설마 그러겠어.'

나는 순순히 그녀에게 스칼릿을 건네주었다.

받아든 그녀가 가만히 서있다가 족장을 돌아봤다.

그가 손짓을 했다.

"이리 줘보거라."

족장이 포션 병을 열어서 내용물을 슥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의 향이 이토록 강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확실히 보통 물건은 아니구려. 정말 이런 걸 받아도 되겠소?"

"나도 얻는 게 있으니 그냥 주는 게 아니오."

"음, 찾고 있다는 장소가 당신에게 있어 상당히 중요한 곳인가 보오. 아무튼 감사히 잘 쓰겠소."

여인이 그에게서 다시 포션을 낚아챘다.

"빨리 등이나 보여줘봐, 할아범. 지금 당장 치료하게."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는 알고?"

"······그, 그냥 상처에 부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눈치를 봤다.

"그냥 내가 할 테니 줘라."

그래도 몇 번이라도 써본 내가 사용법은 더 잘 안다.

족장을 자리에 눕힌 뒤 그의 등에 난 상처를 살펴봤다.

사선으로 길게 찢어진 상처, 그리고 그 주위에는 시퍼런 자국이 나있다. 색은 멍이 든 것과 비슷했지만, 정도는 그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했다.

꼴꼴꼴.

나는 상처 부위를 따라서 위에서부터 아래로 포션을 조금씩 부었다.

염려했던 것과 달리 효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타났다.

조금 더디긴 하지만 상처가 서서히 아물며 서서히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

그 광경에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고 있던 여인이 탄성을 내뱉었다.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족장이 도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얼떨떨한 눈으로 날 돌아봤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어떻소?"

"······내상은 아직 좀 남았지만, 외상은 완전히 치유된 것 같소. 이거 정말 대단한 물건이로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마 남지 않은 포션을 그에게 전부 주었다.

"남은 건 전부 마시시오. 내상도 어느 정도 회복될 테니."

족장이 남은 포션을 전부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빈 병을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는 좀 전보다 훨씬 생기가 도는 얼굴로 씩 웃더니, 여인을 돌아봤다.

"녀석아, 뭘 그리 울먹거리고 있느냐?"

그 말대로 여인은 금방이라도 울 듯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다 나은 거야, 할아범?"

"그래. 이제야 다시 바다로 향할 수 있겠구나.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가 말이다."

"흐읍, 끅······!"

그녀가 족장의 품으로 달려들어 안기더니 아이처럼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족장은 그런 그녀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이들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자세히 모르는 나로서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어색하게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

동굴에서 나온 뒤 다시 마차로 돌아왔다.

나는 무호흡 마법 인챈트를 받고 바로 정해둔 장소로 혼자서 향했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곧 숲 안쪽에서 여인이 나타났다.

"······뭘 봐."

그녀의 눈가가 아직도 붉었기에 빤히 쳐다보니 퉁명스러운 말이 돌아왔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출발하지."

"말 안 해도 그럴 거거든?"

여인이 옷가지를 훌렁훌렁 내던지고는 호수를 향해서 다가갔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이제 공간 도약의 신비를 찾으러 갈 시간이었다.

수면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그녀가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물었다.

"근데 넌 인간이잖아. 물속에 오래 못 있는 거 아니야?"

"마법을 걸어뒀으니 상관없다."

"아, 그래······."

뭔가 다른 할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다."

"······?"

"고맙다고, 우리 할아범 치료해줘서. 진짜로 고마워."

"그래."

나는 짧게 대답했다.

나도 원하는 게 있어서 치료해준 거니 굳이 감사를 받을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가 말하고서 쪽팔린 기색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더듬거리며 소리쳤다.

"······됐지? 이걸로 감사 인사는 한 거다? 난 너처럼 뻔뻔하지 않으니까!"

이건 싸우자는 걸까, 감사 인사를 하는 걸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들어가기 전에 내가 찾는 장소에 대해서 설명이나 해봐라. 호수 어디쯤에 있는지."

그녀가 호수를 슥 둘러보며 한 방향을 가리키더니 말했다.

"저기 보이지? 저쪽까지 이동해서 거의 바닥이 보이는 곳까지 내려가야 돼. 꽤 깊은 곳에 있어."

나도 그녀가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어차피 위에서 봐야 잘 몰랐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좀 걱정되는 건 그 정도 깊이까지 들어가면 그 빌어먹을 가시 물고기들을 마주칠 수도 있다는 건데······."

"가시 물고기?"

"있어, 코는 더럽게 길고 뾰족하고 덩치도 너보다 배는 큰 놈."

코가 더럽게 길고 뾰족만 물고기 몬스터라면······.

'차징 피쉬 말하는 거군.'

레벨은 성체 기준 30대로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없지만, 많게는 수백 마리씩 몰려다니며 몰이 사냥을 하는 놈들.

온몸이 단단한 비늘로 덮여있고, 앞쪽에 돌출된 뾰족한 가시를 무기 삼아 이름대로 돌진 공격을 하는 놈들이기에, 그 수가 많을수록 굉장히 치명적이다.

이놈들은 내가 초보 시절에 멋모르고 잡겠다고 나섰다가 제대로 역관광을 당한 적 있던 몬스터라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뭐, 그래도 괜찮아. 몇 마리 쯤이야 내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 넌 그냥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그녀가 으슥거리며 말했다.

나는 머리 위의 레벨을 쳐다봤다.

39가 그렇게까지 자신감을 가질 레벨은 아니지만, 뭐······ 안내만 잘 해주면 그만이니까.

말을 잇던 그녀가 그제야 궁금하다는 듯 물어봤다.

"근데 그 장소는 왜 찾는 거냐? 거기에 뭐 금은보화라도 숨겨져있어?"

금은보화라.

그딴 거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보물이 숨겨져있지.

"알 것 없다."

"아하, 알겠다. 너 보물선 찾으려는 거구나? 바닷가에서 살 때도 그런 인간들 많이 봤거든······ 잠깐, 근데 여긴 호수잖아. 너 설마 호수에서 보물선을 찾겠다고 멍청한 짓을 하는 건 아니지?"

"그만 떠들고 이제 안내나 해."

그 말에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도 뒤따라서 뛰어들었다.

첨벙!

물 속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자 순식간에 비늘이 뒤덮인 모습으로 바뀌어있었다.

지금 자세히 보니 옆구리에는 아가미 같은 것도 생겨있었다. 신기하긴 하네.

그녀가 나를 향해 따라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닥이고 먼저 헤엄쳐서 이동했다.

'너무 빠르잖아.'

열심히 그녀를 쫓아 이동했지만 당연히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물에서 사는 종족을 인간인 내가 어떻게 따라잡겠나.

내가 뒤쳐지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소리쳤다. 물속임에도 불구하고 귓가에 그녀의 음성이 선명하게 꽂혔다.

- 뭐 그렇게 느려터졌어! 빨리 와! 그냥 두고 간다?!

······해린족은 수중에서도 목소리를 내는 게 가능했던가?

어쨌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내게 속도를 맞춰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꽤 깊은 곳까지 들어가자 슬슬 큼직큼직한 물고기들이 나타나며 곁을 지나쳐갔다.

- 괜찮아, 이것들은 다 먼저 공격하는 놈들은 아니······.

여유롭게 말을 잇던 그녀의 안색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아래쪽에서부터 거대한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갑옷처럼 단단해 보이는 검은색 비늘에, 앞쪽으로 랜스처럼 뾰족한 가시를 가진 괴어가.

'아이씨.'

나도 놈을 보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물속으로 들어오기 전에 그녀가 언급했던 차징 피쉬였다. 이걸 진짜로 마주치네.

- 조심해!

퍼엉!

이쪽을 향해서 돌진해오는 놈을 그녀가 쏘아지듯 날아들어서 주먹으로 후려쳤다.

물 속에서도 마치 지상에서 뛰는 것과 다름없는 속도였다.

몸통을 제대로 가격당한 차징 피쉬가 피를 뿜어내며 축 아래로 가라앉았다.

안심하는 그녀와 달리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이놈들은 단일 개체로 다니는 경우보다 떼로 몰려다니는 경우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곧 주위에서 몰려들기 시작한 엄청난 양의 기척들이 느껴졌다.

- 어, 어?

그녀도 당혹스런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순식간에 몰려든 차징 피쉬들이 우리 주위를 포위하고서 회오리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그 수는 점점 늘어나더니 이내 수백을 가볍게 넘겼다. 마치 검은 파도와도 같았다.

'어우······.'

나는 질렸다는 듯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게 바로 놈들의 사냥 방식이었다.

사냥감을 포위하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빙글빙글 돌다가, 일시에 사방에서 찔러오는.

어차피 자기들끼리는 단단한 비늘 때문에 다치지 않기에 행할 수 있는 방식의 사냥이다.

- 저, 정신 바짝 차려.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을 쳐다보니 그녀는 완전히 패닉에 빠져있었다.

지금 누가 누구더러 정신을 차리라는 건지.

- 내 몸을 꽉 붙잡고 있어. 내가 어떻게든 위쪽을 뚫어볼 테니까······.

나는 괜히 장난기가 도져서 말했다.

- 난 틀린 것 같다. 너라도 빠져나가.

- 뭔 개소리야! 그딴 소리 말고 빨리······!

그래도 버리려고는 안 하는구나.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손바닥에서 스며나온 피가 구체의 형태로 뭉쳐졌다.

막 다시 소리치려던 그녀가 내 손바닥 위에 떠있는 혈구를 보고서 멈칫했다.

'어디 한번······.'

혈술 성능 좀 제대로 시험해볼까?

주위를 회전하던 차징 피쉬 떼가 우리를 향해 돌진해옴과 동시에, 혈구가 폭발하듯 터졌다.

퍼어엉!

사방으로 터져나간 핏방울들이 물살을 헤치고 놈들을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숨 막힐듯 몰려들던 검은 파도가 일시에 힘을 잃고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전멸이었다.

공간 도약 (5)

'개쩌네.'

처음으로 제대로 펼쳐본 혈술에 대한 짧은 감상이었다.

딱 상상한 대로의 그림이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또 달랐다.

혈술과 즉살의 시너지.

이런 식으로 사용하면 대다수의, 특히나 뭉쳐있는 적들을 상대할 때는 그야말로 무적에 가까운 광역기나 다름없었다.

- ······뭐야?

그녀가 떼죽음을 당해 아래로 가라앉은 랜스 피쉬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 네, 네가 한 거야? 뭘 어떻게······ 피에 무슨 맹독이라도 들어있어?

그렇게 말하던 그녀가 물과 섞여 주위에 떠다니는 핏물에 기겁하며 파닥거렸다.

- 으, 흐악!

꼴갑을 떨고 있네.

곧 자신에게는 이상이 없다는 걸 인지한 그녀가 얼떨떨하게 다시 물었다.

- 이거 나는 괜찮은 거 맞지? 응? 나도 죽는 건 아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독 아니라고.

그제야 그녀는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 근데 대체 뭔 마법을 부린 거냐? 너 그런 능력이 있다는 말은 안 했잖아, 씨······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그걸 내가 왜 굳이 너한테 말해.

나는 계속 이동이나 하라는 의미로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앞장서서 헤엄쳤다.

귓가에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스치듯 들려왔다.

- ······그럼 그때 진짜 위험하지도 않았던 거 나 혼자서 생쇼 떤 거였어? 아으씨, 쪽팔리게······.

어느새 또 나타난 괴어 몇 마리가 쏟아지는 랜스 피쉬 사체들을 꿀꺽꿀꺽 삼키는 게 보였다. 저놈들은 오늘 제대로 포식했네.

그것들을 지나쳐 그녀를 따라서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얼마나 내려왔지?'

슬슬 빛이 거의 들지 않을 정도의 깊이까지 들어왔다.

나 혼자서 탐사할 때는 이 정도까지 땅에서 멀리 나온 적도, 깊이 잠수한 적도 없었다.

그래도 초감각 때문에 시야는 아직 별 문제가 없었지만 몸에 느껴지는 압력이 문제였다.

어디 한두 군데 문제가 생기더라도 초재생이 알아서 회복시킬 거라고 믿지만······.

'어디까지 내려가는 거야.'

앞장서서 이동하고 있는 그녀는 여전히 멈출 기미가 없었다.

슬슬 한계라고 느껴질 즈음에 땅바닥이 보였다.

호수의 바닥이 아니라, 수직 벽면에서 한 번 완만하게 꺾여서 만들어진 지형이었다.

'······!'

그리고 그 주위에 마치 석순처럼 무성히 뻗어있는 뾰족한 바위들.

일부는 옆으로 휘기도 해서 죽순이나 거대한 이빨처럼 보이기도 했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나는 벽면을 짚고 몸을 멈췄다.

바닥에 먼저 내려선 그녀가 다 도착했다는 듯 바위들을 가리켰다.

- 네가 말한 게 이거 맞지? 뾰족한 바위들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건 이 일대에 여기밖에 없는데.

아마 맞을 것이다.

플레이 영상에서 봤던 그 장소도 분명 이런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런 특이한 자연 지형이 또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근처에 동굴도 있어야 되는데······.'

거기가 바로 공간 도약의 신비가 숨겨져있는 장소다.

나는 그녀에게 신호를 보냈다.

입을 동굴 모양으로 뻐끔거리자 그녀는 바로 알아들었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 동굴? 잘 모르겠는데. 근데 찾아보면 있을 것처럼 생기긴 했네.

그 말대로 뾰족 바위가 펼쳐진 지대는 매우 넓고 울퉁불퉁해서, 찾아보면 숨은 입구가 있을 만도 했다.

나는 흩어져서 찾아보자는 수신호를 보내려다가 말았다.

그녀가 먼저 동굴을 발견하면 멋대로 안으로 들어갔다가 신비를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제자리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는 의미로 손바닥을 펴보였다.

- 뭐? 기다리고 있으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아니, 왜? 동굴 입구 찾으려는 거 아니야? 나도 같이 찾으면 되잖······.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부탁이니까 그냥 좀 가만히 있어라.

그녀는 어딘가 뚱해진 기색으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작게 중얼거렸다.

- 보물 따위 관심도 없구만, 누가 탐내기라도 할 줄 아나. 하여튼 인간들 탐욕은······.

뭔가 오해한 것 같았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기에 그러게 냅뒀다.

나는 몸을 움직여 바위 지대를 돌아다니며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람 한 명이나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작은 입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평지 쪽부터 전부 살펴보고, 옆쪽으로 돌아서 아래로 급하게 경사진 부분을 살펴보던 중이었다.

'오.'

······찾았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바위들 틈에 절묘하게 숨어있던 입구를 들여다봤다.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허리춤에 묶어뒀던 발광석을 입에 물고, 천천히 안쪽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통로가 좁았기에 들어가기가 상당히 힘들었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물이 있어서 훨씬 수월했다.

뻗은 팔로 번갈아 벽면을 집고 당기며 얼마나 이동했을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통로는 점점 넓어져서 팔다리를 완전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쯤에 정면이 아니라 옆으로 갈라진 작은 통로가 하나 나타났다. 아까 들어올 때 입구 정도 크기의.

'······?'

갈림길인가 싶어서 멈춰섰다가, 곧바로 부동 장막을 펼쳤다.

구멍에서 섬전처럼 튀어나온 거대한 뱀이 장막에 쩍 벌린 아가리를 부딪혔다.

[Lv. 35]

······갈림길이 아니라 이 물뱀 새끼 집이었구만. 아니, 사냥터인가?

장막과 부딪힌 놈은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리며 꿈틀꿈틀 뒤로 물러났다.

나는 그런 놈에게 핏방울을 쏘아내서 그대로 숨을 끊어버렸다. 어딜 기습만 하고 튀려고.

'별 게 다 있네.'

마저 가던 길을 계속했다.

이 안쪽으로도 계속 들어가면 방금 놈보다 더한 괴물이 튀어나오는 건 아닐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큰 놈이 튀어나오든 죽이는 건 간단했으니까.

첫 신비를 찾을 때까지만 해도 뭐 하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는데, 여전히 육체 능력은 형편없어도 나도 이제 많이 강해지기는 했다.

통로는 도중에 꺾여서 한참을 위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끝에 다다르자 나타난 건 괴물이 아니라, 내가 이 호수에서 일주일간 애타게도 찾았던 그것이었다.

작은 방 한 칸 크기의 공간.

그 한가운데의 바닥에서 신비의 문양이 보랏빛으로 밝게 빛나고 있다.

나는 씩 미소를 지으며 문양을 향해서 헤엄쳐 나아갔다.

화아악!

손을 대자 문양이 언제나 그랬듯 밝게 빛나며 내 몸으로 흡수되었다.

나는 머릿속에 밀려오기 시작한 신비에 대한 정보를 더듬다가, 바로 한번 사용해봤다.

'오.'

공간 도약을 사용하자마자 내 위치는 얼마 떨어진 앞쪽으로 순간이동한 채였다.

딱히 이펙트는 없었고, 부동 장막처럼 시전 딜레이 또한 아예 없었다.

여긴 너무 좁아서 제대로 공간 도약을 시험해보기가 힘들었기에 일단 나가기로 했다.

지나온 통로를 그대로 되돌아가 밖으로 나오자, 멀리 떨어진 위쪽에서 이리저리 헤엄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녀를 향해서 순간이동했다.

- ······으헉!

갑자기 앞쪽에 나타난 내 모습에 그녀가 화들짝 놀라서는 정지했다.

- 뭐, 뭐야?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나는 위쪽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그녀가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 ······올라가자고? 뭘 찾기는 한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공간 도약의 신비도 무사히 손에 넣었다.

***

지상으로 올라온 뒤, 나는 공간 도약의 신비를 펼치며 능력에 대해 자세히 시험해봤다.

일단 최대 이동 거리는 걸음으로 따졌을 때 100보가 조금 넘었다. 정확히는 잴 수 없지만 100미터 정도 되는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능력은 횟수 저장이 가능한 충전식이었다.

'최대 3회에, 쿨타임은 10초.'

한마디로 저장치가 최대라면 5번까지는 쿨타임 없이 연속해서 사용할 수 있고, 10초가 지날 때마다 1회씩 차는 것이었다.

게임에서도 공간 도약의 신비는 이런 류의 스킬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게임에서는 하루에 총 사용할 수 있는 횟수가 10회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무래도 그 제약까지는 없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다가 다시 능력을 사용했다.

이번엔 위쪽으로 순간이동을 하자 한순간 내 몸은 높은 공중에 붕 떴다.

그 상태로 부동 장막을 사용하자 몸이 허공에 그대로 고정된 채 떨어지지 않아서, 완전히 공중부양을 한 모양새가 됐다.

부동 장막은 몸을 아예 해당 위치에 고정시키는 능력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네.'

이걸 뭐 사용할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새로운 활용법을 익혀둬서 나쁠 건 없었다.

나는 몸이 떨어지기 전에 바닥으로 도로 순간이동해서 착지했다.

공간 도약의 신비 역시 부동 장막처럼 능력을 사용하면 몸에 작용하고 있던 힘이 아예 사라진다. 떨어지는 도중에 사용해도 낙하하던 힘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이 두 능력만 있으면 앞으로 적어도 낙사로 죽을 일만큼은 없을 듯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선 채 다른 능력들과의 시너지나, 능력의 더 효율적인 사용법을 생각해봤다.

첨벙!

그때 호수에서 여인이 나왔다.

그 손에는 큼직한 물고기 몇 마리가 잡혀있었다.

그녀가 물기를 털며 나한테 성큼성큼 다가왔다.

"야, 가자."

잠깐만 기다리라고 해놓고 도로 호수로 뛰어들길래 기다리고 있었더니, 뜬금없이 어딜 가자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말없이 쳐다보자 그녀가 머리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뭐······ 이제 해도 지는데 돌아가서 저녁 식사나 같이 하자고. 어차피 바로 떠나려고 한 것도 아니잖아?"

"그러려던 참이었는데."

신비도 찾았는데 이 호수에서 더 머물고 있을 이유가 있나.

마차로 돌아가서 낡이 밝으면 곧장 떠날 생각이었다.

내 말에 그녀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매정하게 그러기냐? 그 뭐냐, 우리 할아범 치료해준 것도 있고, 아까 나 구해준 것도 있고······ 어? 그래서 고마우니까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겠다는 거잖아."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이만 헤어지지."

"야, 좀!"

그녀가 성질을 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갑자기 진지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냥 잠깐 좀 오면 안 되냐? 우리 할아범이 너한테 할 아주 중요한 이야기도 있다 했다고."

······중요한 이야기?

그건 갑자기 또 무슨 소리야.

'혹시 세인테아의 마법사장에 대한 이야기인가?'

짚이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 정도 되는 인물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는 것은 아닐 터.

나는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함께 가지."

그녀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진작 그럴 것이지. 배고파 죽겠으니까 빨리 가자고. 이 물고기가 살도 야들야들한 게 진짜 기가 막히거든."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그녀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야, 근데 너는 이름이 뭐냐?"

"론."

"내 이름은 안느야, 론. 잘 기억해두라고."

다른 해린족과 족장이 부르는 걸 들었기에 알고 있었다.

계속 흥얼거리며 걷는 그녀, 안느와 함께 동굴을 향해서 이동했다.

***

"어, 안느. 왔느냐."

동굴에 도착하자 동굴 입구에 뒷짐을 지고 서있던 족장이 우리를 반겼다.

"당신도 또 오셨구려. 그렇지 않아도 떠나기 전에 뭐라도 약소하게나마 대접을 해드리고 싶었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소."

그에 족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요하게 할 이야기? 그런 건 없소만."

······?

나는 안느를 돌아봤다.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내 시선을 피했다.

"미안, 뻥이었어."

"······."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그냥 저녁 한 끼 편히 즐기고 가면 되잖아? 내가 금방 고기 맛있게 구워줄 테니까!"

이걸 이렇게 낚는다고

나는 어이없는 눈으로 동굴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해린족의 보물 (1)

······분명히 저녁 한 끼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어 하는 사이 주위에 다른 해린족 부족원들도 하나둘씩 모여들고 모닥불의 갯수가 늘더니, 금세 축제라도 열린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자네가 족장님의 부상을 치료해줬다는 그 인간인가? 정말로 고맙네, 고마워! 하하!"

"아까 전에 거칠게 맞이했던 건 미안했어요. 그리고 족장님을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정말로 좋은 인간이에요."

내 주위를 지나치는 부족원들이 한마디씩 던지고 지나갔다. 대체로 감사 인사였다.

아까까지 침입자 대하듯 경계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뒤바뀐 태도.

족장의 상처를 치료해준 걸 다들 정말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긴 하지만.

"자, 다 됐다. 이거 먹어봐."

안느가 갓 구운 생선 살점을 꼬챙이에 큼직하게 꽂아서 내밀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입으로 후후 불어 식힌 뒤 한입 작게 뜯어먹었다.

타오르는 모닥불에 그녀의 자신만만한 미소가 비쳤다.

"어때, 끝내주지?"

"그래."

자신했던 대로 맛은 있었다.

과일이며, 훈제 고기며, 안느가 잡아온 물고기뿐 아니라 다른 식량들도 나와서 내가 앉은 자리는 완전히 진수성찬이었다.

"입맛에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오."

족장도 기분 좋게 껄껄 웃으며 물고기를 뼈째로 으적으적 씹었다.

"그나저나 술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잠깐 머무르는 장소일 뿐이라 아쉽게도 담가놓은 것이 없군."

술이라.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 빙의한 뒤로 아직까지 술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럴 처지도 아니었고.

나는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