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마다 적당히 나눠 둘러앉아서 식사를 즐기고 있는 해린족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았다.
고기를 굽는 이들, 목소리를 높여 떠드는 이들, 고기가 언제 다 익는 거냐고 떼를 쓰는 어린아이.
그리고 한쪽에선 아예 지금 물고기를 더 잡아올 심산인지 창을 들고 숲 저편으로 걸어가는 남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다. 한눈에 그런 느낌이 드는 풍경이었다.
"우리는 늘 이런 식으로 모여서 식사를 한다오. 참으로 즐겁고 풍요로운 시간이지."
족장도 부족원들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상처를 회복했으니 이곳에서 곧바로 떠날 것이오?"
"그럴 생각이오. 그렇지 않아도 이동이 계속 지체되고 있었으니 되도록 빨리 떠나야겠지."
이번엔 족장이 내게 물었다.
"당신이야말로 원하던 걸 찾았는지 궁금하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덕분에 찾았소."
그때 열심히 고기를 먹고 있던 안느가 입에 든 내용물을 튀기며 말했다.
"맞아, 할아범! 아까 물속에서 하마터면 물고기 떼한테 갇혀서 죽을 뻔했거든? 그런데 얘가 피를 뿜어내더니 한 번에 다 죽여버렸다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아니 그러니까, 손에 이렇게 피가 뭉쳐졌는데 그걸 펑 터뜨리니까······."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뭔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족장은 그저 입가에 미소를 짓고 말 뿐이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나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것 같던데, 맞소?"
"그렇소."
"그것도 해린족의 능력이오?"
기억하기로 해린족이 특별히 그런 쪽으로 특화된 능력은 없었을 터인데. 그냥 족장의 육감이 특히 뛰어난 건가?
그가 허허로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능력이라고 할 것까지야. 그저 죽을 때가 가까이 오니 지금껏 안 보이던 것들이 조금 보이게 된 것뿐이오. 당신의 영혼에서 새어나오고 있는 그 지고한 격도 그렇고."
아, 제왕의 혼······.
나는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히려 안느가 정색하고 굳은 얼굴로 말했다.
"뭘 또 죽을 때 타령이야, 할아범. 자꾸 그딴 소리 하지 말라니까? 상처도 다 나았는데 죽기는 왜 죽어?"
족장이 끌끌 웃음을 흘렸다.
"녀석아, 네가 부정한다고 정해진 순리를 거스를 수 있겠느냐? 이미 몇 번을 말한 거 자꾸 말하게 하지 말거라."
"······그러니까!"
그러고 보니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쩌니 그런 말을 했었지.
족장은 아무래도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어떻게?
"우리 부족의 고향은 대륙의 북쪽에 있는 폴루브 해역이오."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그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아주 오래 전에 그곳을 떠나 강줄기를 타며, 때로는 대지 위를 걸으며 지금껏 대륙의 북쪽에서 서쪽까지 이어진 바다들을 돌아다녔소. 선조들이 그랬듯, 그리고 후손들이 그럴 것이듯 평생을 머물지 않고 떠도는 것이 우리 해린족이 살아가는 방식이오. 그렇게 순환하는 것이지."
마치 지나온 날들을 회상하듯 읆조리는 어투였다.
나는 가만히 족장의 말을 경청했다.
"어린 시절에 부족의 큰어른들이 말씀하시곤 했었소. 자연으로 돌아갈 때가 되면 고향이 그리워질 거라고, 모든 해린족들이 그러하다고. 이제 내 차례가 오니 남에겐 설명할 수 없어도 확실히 느낄 수 있소. 기이하게도 고향 바다가 그리워지더군."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였나?
자신이 난 장소에서 마지막을 맞이하기 위해서.
"그래서 당신에겐 정말로 감사하고 있소. 아니었다면 끝내 고향에 도착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몸을 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족장이 초연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는 안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그녀는 짜증이 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픈 눈으로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족장.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
그제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그때 그녀가 그리도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었는지.
부족원들에게 있어서, 특히 손녀인 그녀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족장의 마지막 바람을 이뤄주고 싶을 테니까.
식사가 끝나고 그만 돌아갈 때가 되었다.
나는 족장과 안느, 그리고 다른 해린족들의 배웅을 받았다.
"론, 당신이 나아가는 길에 바라는 행복만이 있길 바라겠소."
나도 족장에게 말했다.
"당신들도 무사히 고향에 도착할 수 있기를 바라겠소."
겉치레로 하는 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족장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 내일 또 와서 아침도 먹고 가도 돼."
안느가 콧등을 긁적이며 그렇게 말했다.
물론 올 생각은 없었기에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나는 동굴을 떠나 마차로 돌아가며 괜히 뒤를 돌아봤다. 고요했다.
어쩌면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왠지 모를 묘한 기분을 느끼며 다시 몸을 돌려 숲길을 걸었다.
***
식사 자리 뒷정리를 마치고, 안느는 동굴 앞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곁을 지나 동굴로 들어가는 또래 부족원 하나가 그녀에게 물었다.
"뭐 하냐, 안느?"
안느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그가 짖궂게 웃으며 말했다.
"너 설마 그 인간 생각하냐?"
"······뭐?"
"아니, 그렇잖아. 아까부터 보니까 아주 시선을 못 떼고 있더만. 와, 설마 진짜 그런 거야? 네가 그런 취향일 줄은 몰랐······ 억."
그녀의 주먹이 묵직하게 남자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그가 비틀비틀 물러서며 울먹거렸다.
"농담인데 때릴 것까진 없잖아······."
"닥치고 들어가서 잠이나 처자."
부족원들이 모두 들어가고, 혼자 남은 안느는 숲 저편을 슬쩍 바라봤다. 그러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얼굴은 좀 내 취향이긴 했는데."
내일 아침에 또 오지는 않겠지?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만 동굴로 들어가려고 했다.
"······?"
그때 수풀을 헤치고서 인형 하나가 서서히 다가왔다.
그에 안느의 얼굴에 화색이 띠었다. 설마 론인가 싶었던 것이다.
"야, 왜 다시 왔······."
조금 들뜬 목소리로 그를 부르려던 안느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리고 이내 창백하게 물들었다.
수풀을 헤치고 나온 건 로브를 입은 중년의 인간 남성이었다.
남자가 그녀에게 태연히 말을 건넸다.
"족장은 안에 있나?"
"······."
안느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느끼며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세인테아의 영역을 지나던 부족을 공격한,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중상을 입힌 괴물 같은 인간.
어째서 그가 이곳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단 말인가?
"이······!"
그녀가 동굴 안으로 목소리를 쥐어짜내 소리치려던 순간이었다.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이미 족장은 동굴 안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하, 할아범."
남자를 발견한 족장이 굳은 얼굴로 침음을 흘리다가 물었다.
"대체 어떻게 이곳까지 쫓아온 것이오?"
남자가 물음을 무시하고 말했다.
"족장, 마결정을 넘겨라. 그러면 적어도 모두 고통 없이 보내줄 테니."
"······."
"이번에는 물이 가깝지 않아. 그때처럼 운 좋게 도망칠 수는 없다."
콰아아앙!
남자가 손을 휘젓자 거대한 마력이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족장을 강타했다.
제자리에서 양팔을 들어 공격을 막은 그는 한 걸음 뒤로 비틀 물러섰다.
그 소란에 동굴 안에 있던 부족원들이 몰려나왔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저, 저 인간은!"
남자를 발견한 그들이 기겁했다.
족장이 숨을 한 차례 깊게 내쉬고서는 쩌렁쩌렁 소리쳤다.
"모두 도망쳐라! 아직 안에 있는 부족원들을 챙겨서 뒤돌아보지 말고 호수로 뛰어라!"
남자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좀 전의 일격은 그저 인사에 불과했다는 듯, 그의 주위로 더욱 거대한 마력이 유동했다.
전력을 다해 마력을 끌어올린 족장도 주먹을 휘둘렀다.
섬전처럼 쏘아진 권기가 남자를 노렸지만 어느새 펼쳐진 방어막에 막혀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동시에 족장이 몸을 날렸다. 그는 쉴 틈 없이 주먹을 휘두르며 남자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두 거대한 기운의 충돌에 주변의 땅이 뒤집어지고 수풀들이 뜯겨나갔다.
머뭇거리던 부족원들도 어쩔 수 없이 그의 명령에 따라 호수를 향해 달렸다.
"······안 돼! 안 된다고! 할아버지!"
처절하게 외치는 안느를 다른 부족원들이 억지로 붙잡아 끌었다.
족장은 마지막 남은 생명의 불씨를 모조리 불태우듯 남자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고작이었다.
"읍······!"
거칠게 몸을 움직이던 족장이 한순간 멈칫하더니, 입에서 피를 토해내며 주저앉았다.
아직 내상이 남은 상태에서 격하게 움직인 반작용이 금세 찾아온 것이었다.
"발악은 끝인가?"
여전히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방어막을 펼치고 서있던 남자가 감흥 없다는 듯 말했다.
"······야, 안느! 안돼!"
안느가 부족원들을 쳐내고 족장을 향해서 달려갔다.
"이 녀석아, 어서 도망을 가래도······."
"시끄러워! 이게 대체 뭐냐고! 왜 자꾸 할아버지 혼자서만!"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정신을 못 차리는 족장을 부축하기 위해 애썼다.
그 발버둥을 가라앉은 눈으로 지켜보던 남자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허공에 피어오른 거대한 불꽃이 두 사람을 파도처럼 휩쓸었다.
화아아악!
도망가던 다른 부족원들이 그 광경을 허망하게 지켜봤다.
남자는 몸을 돌렸다. 일단 다른 해린족들도 모두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
그러나 곧 미간을 좁히며 도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불꽃과 연기가 가시고 난 자리에 한 남자가 서있었다.
불꽃은 무엇에 막힌 것인지 그와 다른 두 해린족에게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했다.
주저앉아있던 안느가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론······."
흑발에 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젊은 인간 남성.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다가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 사실에 남자는 섬짓함을 느끼며 물었다.
"웬 놈이냐?"
***
······아슬아슬했다.
나는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로 이동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거대한 마력이 느껴지길래 서둘러 돌아와봤더니, 이게 대체 뭔 꼴이란 말인가.
한참 멀리 떨어져있던 걸 공간 도약을 연속으로 사용해서 일단 겨우 공격을 막아주기는 했지만······.
[Lv. 91]
상황은 완전히 최악이었다.
나는 놈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저 미친 레벨, 그리고 족장이 내게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면 아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세인테아 황실의 마법사장, 라키울.'
이곳까지 해린족들을 추적해온 건가?
침묵한 채 나를 응시하고 있던 놈이 입을 열였다.
"웬 놈이냐?"
나는 대답하는 대신 뒤쪽에 쓰러져있는 안느와 족장을 슬쩍 쳐다봤다.
아······ 진짜 미치겠네.
일단 죽게 놔둘 순 없어서 반사적으로 나서긴 했는데, 이제 놈과 내가 대치한 꼴이 되었다.
나는 놈의 주위에 펼쳐진 방어막을 바라보며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씨발.'
저렇게 방어막을 펼치고 있으면 어떻게 즉살에 기대어볼 건덕지도 없다. 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이대로 전투가 벌어지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방어와 도망뿐이었다.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다면······."
놈이 다시 마력을 끌어올렸다.
순간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이 스쳤다.
일단 계속 방어를? 아니면 도망? 그러면 남은 해린족들은? 내가 군주라고 밝혀야 하나? 그러면 놈이 믿을까?
숲 한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와······ 이건 대체 뭔 상황이야?"
수풀을 헤치고 걸어나온 것은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경악했고, 마법사장의 안색 역시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광랑?"
5군주 광랑.
그렇지 않아도 혼란한 상황에 그녀의 뜬금없는 등장은 더욱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광랑이 나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마법사장을 보며 킥킥 웃으며 말했다.
"아서라, 마법쟁이야. 너 그러다 뒈진다."
해린족의 보물 (2)
고요한 정적 속에 마법사장이 광랑과 나를 번갈아 봤다.
그 모습에서 좀 전까지의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체 어째서 5군주가 이곳에 있는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기는 놈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얼굴에 비친 의문과 긴장, 그리고 낭패감이 여실히 보였다.
'진짜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나는 속으로 한숨을 돌리며 그녀를 응시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몰라도 당장의 위기는 넘긴 듯했으니까.
생판 남과 다름없더라도 일단 광랑은 같은 진영의 아군이다. 이제 궁지에 몰린 건 내가 아닌 마법사장이었다.
"싸울 생각이오, 5군주?"
놈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경고나 위협이 아닌 체념에 가깝게 느껴지는 어투였다.
아무리 세인테아 황실의 마법사장쯤 되는 강자라고 한들, 칼데릭의 군주는 그보다 한층 더 격이 높은 존재. 단순한 레벨 차이만 해도 무려 4레벨의 차이다.
광랑이 마법사장을 죽일 생각이라면 놈이 이곳에서 살아나갈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반대다, 멍청한 놈아. 기껏 말려줬더니 고마운 줄도 모르고."
"······그게 무슨?"
"지금 너랑 마주보고 있는 인간이 누구인지나 아냐?"
광랑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1군주령에서 뭘 하고 있던 건지 모르겠네, 7군주. 낚시라도 하려고 여기에 왔나?"
그 말에 마법사장이 경악한 눈으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광랑과 눈을 마주쳤다.
"······새로운 7군주? 권성을 죽인?"
놈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고 있었나?
하긴, 오성의 일인이 사망한 건 세인테아에서는 엄청난 대사건이었을 터.
애초에 난 호송선의 죄수 신분이었고, 호송선이 습격받은 때와 시기도 공교롭게 칼데릭에선 새로운 군주가 탄생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세인테아 측에서도 권성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는 돌아가는 상황과 조사로 대충 파악했을 터였다.
물론 들켰다고 해도 의미는 없었다.
세인테아와 칼데릭이 마족이라는 거대한 적에 대항해 아직 임시적인 동맹 사이를 맺고 있더라도, 그건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으니까. 그 뒷면에선 현재도 무력적인 충돌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정말 대놓고 죽인 게 아닌 이상에야 물증과 심증이 있어도 정치적인 문제로 끌고 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애초에 지금 놈이 신경 써야 할 건 그딴 게 아니라 스스로의 안위고.
'······그나저나 말린 거라고?'
나는 광랑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말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녀는 마법사장과 싸울 생각이 없는 듯한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칼데릭의 영역에서 세인테아 측의 큰 전력을 마주쳤다.
특히나 전투를 즐기는 그녀라면 더욱이 순순히 보내줄 이유가 없지 않나?
"저놈은 세인테아 황실의 마법사장이다, 7군주. 죽일 건가?"
광랑이 내게 물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되나 고민했다.
그녀는 전투에 개입할 마음이 없는 듯했기에 긍정하기가 애매했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답하기도 애매하고.
이런 때는 그냥 무게나 잡으며 침묵하는 게 답이다. 그러면 그냥 상대가 알아서 해석할 테니까.
광랑은 그런 내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해석한 듯했다.
그녀가 머리칼을 긁적이다가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봐, 7군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한 번만 넘어가면 안 되나?"
이어진 말에 나는 그녀가 어째서 마법사장과 싸우지 않으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저 마법사 놈한테 예전에 진 빛이 하나 있거든. 그래서 죽이겠다면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네."
······빚이라고?
어쩐지 서로 안면이 있는 듯하더니, 광랑과 마법사장 사이에 그런 인연이 있었나? 게임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정보다.
나는 미간을 좁힌 채 입을 열었다.
"보내주지 않겠다면?"
그에 광랑이 쯧 혀를 차며 대답했다.
"말했잖냐?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라고."
"······."
나는 다시 슬쩍 뒤를 돌아봤다.
창백한 안색으로 바닥에 누워있는 족장과, 그를 붙잡고 울고 있는 안느의 모습이 보였다.
초감각으로 느껴지는 그의 맥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미약했다.
"정신 좀 차려보라고, 제발······!"
솔직히 잘 풀린 상황이었다.
그냥 그녀의 말대로 가만히 놈이 도망가게 두면 된다.
그러면 내가 감당할 위험도 없고, 해린족도 무사했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거슬리지.'
족장은 안타깝게 됐지만 별 수 없는 것 아닌가.
여기서 내가 굳이 더 마법사장을 물고 늘어지는 건 아무 의미도 없고, 상황만 악화시키는 멍청한 짓이었다.
하지만 제왕의 혼 때문인지 이 몸에 빙의한 뒤 가끔씩 이성과 입이 따로 놀 때가 있었다.
지금 또 그 입이 사고를 쳤다.
"너도 함께 죽겠다는 건가, 5군주?"
"······."
그 말에 광랑의 동공이 맹수의 그것처럼 세로로 쭉 갈라졌다.
이내 그녀가 입꼬리를 비틀더니, 천천히 등에 멘 대검의 자루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지 않아도 되오."
그때 족장의 기운 없는 목소리가 날카롭게 선 분위기를 뭉그러뜨렸다.
숨소리까지 죽인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부족원들이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족장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하, 할아버지······."
나는 빤히 광랑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족장이 쿨럭쿨럭 기침을 하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론, 미안하지만······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소?"
끝을 예감했는지 그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려는 듯했다.
"저 인간 마법사가 부족을 해하지 못하도록······ 모두가 호수로 들어갈 때까지만 지켜주셨으면 좋겠소. 그것뿐이오."
어차피 마법사장은 이대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기에 알아서 지켜질 약속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걱정 마시오."
"······고맙소이다. 그리고 안느."
훌쩍이고 있던 그녀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결국 이곳이 내 무덤이 되었구나."
"······."
"혹여나 복수를 생각하진 말거라.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생이었다. 끝내 고향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 또한 괜찮다. 모두들 분노할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없다."
"으, 으흑······."
"내가 죽으면 육신은 땅에 묻고, 결정은 호수에 풀어주거라. 강물을 타고 저 바다까지 흘러갈 수 있도록······."
풀린 눈으로 띄엄띄엄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유언을 경청하던 부족원들이 그의 죽음을 묵념하듯 하나둘씩 눈을 감았다. 안느는 허망한 눈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쩌적.
얼마 지나지 않아 족장의 가슴팍이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푸른빛을 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느가 손을 뻗어 천천히 그것을 집어들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마법사장이 두 눈을 부릅 떴다.
"마결정······."
평생을 쌓아온 마력이 뭉쳐져 만들어진 결정. 순수한 마력의 정수.
마법사들에게 있어선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천고의 보물.
고개를 홱 돌린 안느가 그를 죽일 듯 노려봤다.
"고작 이딴 돌 하나 때문에!"
찢어지는 목소리로 처절하게 소리쳤다.
"이미 지상의 절반이 너희 인간들 거잖아! 땅도, 자원도, 전부 다 넘치도록 정복하고 차지했잖아!"
"······."
"그런데 대체 언제쯤 만족하는 건데?! 뭘 얼마나 더 가져가야 만족하는 거냐고!"
"그것은 너희들에게 아무런 쓸모도 없는 보물이다."
마법사장이 미간을 좁힌 채 입을 열었다.
"그리고 참으로 어리석은 말을 하는구나, 해린족. 길고 길었던 전쟁에서 이 대륙을 끝내 지켜낸 건 우리 인간이다. 용사께서 마왕의 목을 베셨고, 사악한 마족들의 침공을 끝내 막아냈다. 지금껏 이 땅의 평화가 멀쩡히 유지되고 있는 게 누구의 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한데도 그런······."
"마법사장."
나는 껴들어서 말을 끊었다.
"살 기회를 줄 때 닥치고 꺼지도록."
놈이 침음을 흘리며 날 바라봤다.
나는 기분이 더러워서 더 비꼬았다.
"그리고 마족의 침공을 막아낸 건 인간들만의 공이 아니지. 무슨 뻔뻔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냐."
"······결국 마왕을 봉인시킨 건."
"그래, 용사지. 하지만 그게 너희들이 해낸 일인가? 그건 인간의, 제국의 공도 아닌 용사가 홀로 해낸 업적일 뿐이다."
"그 용사가 바로 우리 세인테아의 수호자요."
"무고한 종족들을 이리 사냥하고 학살하는 제국의 수호자 말이지. 네놈도 알고 있지 않나? 용사는 너희 황제와 황실을 경멸한다는 걸."
용사가 황실의 이런 은밀한 악행을 지금까지 가만히 놔두고 있는, 아니, 놔두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진정으로 대륙의 평화만을 생각하는 영웅이기 때문에.
그리고 쥐새끼 같은 황제가 제 자식들을 방패 삼아 아슬아슬하게 선을 잘 타고 있기도 했고.
욱한 기색으로 반발하려는 놈의 말을 막고서 말했다.
"이제 그만 꺼져라. 다시 나와 마주치면 그때는 상황이 어떻든 죽일 것이다."
시큰둥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던 광랑이 턱짓을 했다.
"가라. 이걸로 그때 빚은 갚은 거니까 또 칼데릭에서 얼쩡거리면 죽인다."
놈이 입술을 짓씹으며 공중에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허공을 가로질러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광랑이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곤 자기 목을 그으며 물었다.
"정말로 날 죽일 생각이었냐?"
"······."
"군주끼리 죽였다간 대군주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 건 아니지? 뭐, 너도 나처럼 그딴 건 신경도 안 쓰는 놈 같다만······."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지?"
내 물음에 그녀가 자신의 검을 툭툭 두드리며 대답했다.
"뭘 하고 있던 게 아니라, 아고르 영감한테 검 좀 맡겼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1군주 신퇴 말인가?
아무래도 그녀가 이곳에 등장한 건 완전한 우연인 듯했다.
"그래서, 너야말로 이 호수에서 뭘 하고 있던 건데. 저것들은 또 뭐고?"
"알 거 없다."
광랑이 킥 웃으며 몸을 돌렸다.
"더럽게 쌀쌀맞네. 더 볼일은 없으니까 간다. 다음 회의 때 보자고."
다시 수풀 사이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괜히 진이 빠져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론."
멍하니 결정을 들고 있던 안느가 날 쳐다보며 이름을 불렀다.
딱히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몇몇 부족원들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나는 족장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짧게 명복을 빌어주었다.
비록 그는 죽었지만 남은 모두가 살아남았으니, 그 죽음이 의미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
나는 날이 밝을 때까지 그들의 곁에 머물렀다.
그들은 족장을 그들이 머물던 동굴 뒷편에 묻고서 한참이나 의식 같은 걸 치뤘다. 부족의 장례인 듯했다.
동이 트고 나서야 동굴을 떠난 그들은 호수 앞에 나란히 늘어섰다.
안느가 앞으로 나와서 손에 들고 있던 결정을 호수에 풀어놓았다.
그러자 결정은 밝은 빛을 뿜어내더니 천천히 물에 녹아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해린족의 마결정은 특이하게도 물에 닿으면 녹아 사라진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보고있는 것처럼, 그것은 해린족들이 죽은 자를 기리는 방식이기도 했다.
결정이 모두 물에 녹아내리자 안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할아범이 그러더라고. 이 결정은 우리가 평생을 물에서 흡수한 마력으로 만들어지는 거라고. 그걸 다시 물에 풀어줘서 순환을 이어가는 거라고."
"······."
"고마워, 론. 덕분에 적어도 마지막 장례만큼은 제대로 치뤄줬네."
조금 멍한 눈으로 호수를 쳐다보는 그녀에게 물었다.
"바로 떠날 생각인가?"
"어, 그래야지. 이제 쉬지 않고 바다까지 향할 거야."
가이탄 호에서 발원하여 대륙의 북해까지 이어지는 강.
이들은 그걸 타고 곧장 고향으로 향할 생각인 듯했다.
첨벙!
내게 감사와 작별을 건넨 그들은 하나둘씩 호수를 향해서 뛰어들기 시작했다.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안느에게 말했다.
"언젠가, 할 일을 전부 마치고 나면 너희들의 고향으로 찾아가보겠다."
"······어?"
"다시 만날 때는 웃으면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잘 가라."
멍하니 날 쳐다보던 그녀가 슬쩍 입꼬리를 올리고는, 곧바로 호수로 뛰어들었다.
나는 한참을 가만히 서서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고 있다가 몸을 돌렸다.
할루멘타 (1)
한 신형이 산맥의 봉우리들을 훌쩍훌쩍 넘으며 뛰어가고 있다.
그것이 한 번 도약할 때마다 땅이 갈라지고 찢어지는 파공음이 울렸다. 누군가 본다면 두 눈을 의심했을 광경이었다.
5군주 광랑은 어느새 가이탄 호수를 벗어나 남동쪽으로 이어진 산맥을 넘어가고 있었다.
잠시 한 봉우리의 앞에 멈춰선 그녀는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였다.
"······흐."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던 광랑이 난데없이 웃음을 흘렸다.
아까 전에 느꼈던 전율이 아직도 채 완전히 가시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너도 함께 죽여야겠군.'
미약하기 그지없지만, 한순간 등골에 소름이 일었을 정도로 섬뜩하기 그지없던 살기.
그 말을 꺼낸 순간의 7군주는 정말로 자신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바로 다 죽어가던 잡놈 하나가 끼어들어서 흐지부지 넘어가게 됐지만.
"다 집어치우고 한 판 붙었어야 됐나."
그녀는 크나큰 아쉬움을 느끼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서로를 죽고 죽이는 전투만이 그녀가 삶에서 느끼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강렬한 희열이었다.
철칙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제대로 전투를 벌였다면 과연 누가 살아남았을까?
대군주를 제외하면 다른 군주들은 모두 죽일 수 있다고 자신하는 그녀였지만, 어째서인지 7군주 그 인간에게는 그런 확신이 들지가 않았다.
7군주는 결코 자신의 밑이 아니다. 잠깐의 마찰만으로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직감했다.
"하, 씨. 흥분이 안 가라앉네."
콰아아앙!
손을 쥐었다 펴던 광랑이 주먹을 내질렀다. 앞쪽에 있던 거대한 봉우리가 통째로 무너져내렸다.
그녀는 땅을 박차고 다시 허공으로 높이 날아올라 이동을 계속했다.
마수 사냥은 슬슬 또 질려가고, 간만에 동쪽의 경계로 가서 마족들이나 사냥해야겠다.
***
공간 도약의 신비를 찾았고, 해린족은 고향으로 떠나갔다.
가이탄 호에서의 할 일은 모두 마쳤다.
호수에서 머무는 동안 무호흡 마법을 인챈트해준 헤이블에게 약속했던 의뢰금을 지불하고 헤어진 뒤, 곧장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세인테아 황실의 마법사장······ 말입니까?"
아셸의 표정이 굳었다.
궁금해하는 그녀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더니 보인 반응이었다.
워낙에 거대한 충돌이었는지라 그녀도 멀리서 기척을 느꼈지만,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는 명령 때문에 어째야 되나 고민하다가 결국 마차에 계속 있었다고 했다. 어차피 와봐야 별 도움은 안 됐을 테니 잘한 일이었다.
"족장은 전투 중에 죽었고, 나머지 해린족들은 모두 무사히 고향으로 떠나갔다."
"······그렇군요."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아셸은 안타까움과 분노가 섞인 듯한 기색이었다.
아마 자신의 과거가 겹쳐보인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 역시 세인테아의 군세에, 오성 중 일인인 창성에게 일족이 절멸당했으니까.
"······."
나는 아셸을 가라앉은 눈으로 빤히 바라봤다.
······솔직히 그녀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면, 게임을 플레이한 나는 살아남은 백월족이 그녀 외에 아무도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 사실을 말한다고 그녀가 순순히 믿을리도 없고,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지 증명할 방법도 없긴 했다.
하지만 어쨌든 난 진실을 알면서도 그녀가 필요하기에 그걸 미끼 삼아서 이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살아가는 목적은 일족의 생존자를 찾는 것. 그리고 세인테아에 복수를 하는 것.
일족의 생존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 그녀에게 남은 삶의 의미는 복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임에서는 그 사실을 알기 전에 이미 소중한 동료들이 생겼기에, 더 이상 복수에 연연하지 않게 됐었으나······ 여기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족장의 시체 앞에서 처절하게 소리치던 안느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진실을 안 뒤에도 아셸이 엇나가지 않도록 붙잡아주고 싶었지만, 이건 게임 지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닌 감정의 문제였다.
지금까지의 여정으로 벽을 꽤 허물었다고 생각하지만, 현재 그녀가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친밀감이 그렇게까지 깊진 않겠지.
"세인테아에 반드시 복수를 할 생각인가?"
내 물음에 아셸이 움찔 놀라며 날 쳐다봤다.
이내 그녀가 복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일족을 찾는 일에만 집중할 뿐입니다."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원래라면 최대한 시기를 끌 생각이었으나, 마음을 조금 고처먹기로 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기회가 되면 최대한 빨리 아셸을 '그녀'에게로 데려가야겠다고.
'어쨌든 이제 한 곳 남았나.'
신비를 찾는 것도 이제 마지막 남은 하나로 끝이었다.
그러나 이번 신비를 찾는 게 지금까지의 여정 중 가장 험난한 길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왜냐면 숨겨져있는 장소가 다름이 아닌 마경이었으니까. 애초에 그래서 가장 마지막으로 정한 거였고.
만약에 혈술이나 부동 장막 중 하나라도 얻지 못했다면 이번 신비를 찾는 건 아예 다음으로 미뤘을지도 모르겠다.
'마경 할루멘타.'
마경이란 이름 그대로 평범한 생물은 도저히 살 수 없는 지역을 말한다.
온갖 괴이한 지형과 환경, 기상현상, 그리고 상식을 벗어난 괴물들이 존재하는 죽음의 땅.
이 대륙에는 총 다섯 곳의 마경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찾아갈 곳은 그중에 칼데릭과 아주 인접해있는,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한참 이동하면 나오는 할루멘타라는 곳이었다.
'몬스터야 넘치도록 많지만, 환경적으로 조심할 건 딱히 없는 지역이니까······.'
어차피 혈술과 부동 장막이 있는 이상 얼마나 강력한 몬스터와 마주하든 크게 위험할 건 없지 않나 싶었다.
그리고 공간 도약까지 얻었으니 굳이 아셸이 없더라도 장애물이 많은 지형도 걱정할 건 없었고. 그래도 데려가긴 할 거지만.
아무리 마경이라도 네임드 보스가 아닌 이상 웬만한 몬스터들은 아셸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마경에 가본 적이 있나?"
아셸이 의아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러면 이번에 처음으로 경험해볼 수 있겠군."
"······예?"
"다음 목적지는 마경 할루멘타다."
내 말에 아셸이 두 눈을 깜박거렸다.
***
마차는 한참을 이동해서 1군주령의 서쪽 변경에 위치한 도시에 다다랐다.
그곳에서부터는 바로스는 그냥 도시에서 머무르고 있게 하기로 했다.
그도 낮은 레벨은 아니지만 마경에서 함께 다니기에는 솔직히 짐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중간에 혼자 내버려두고 마차 지키며 마냥 기다리라 하고 있기도 좀 그랬고.
마경은 더럽게 넓었기에 이번 신비는 찾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물론 바로스의 성격상 가능한 곳까지라도 따라가서 모시겠다고 고집을 부리긴 했지만, 권위로 간단히 꺾어버렸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바로스가 도시 성문 입구에서 우리를 배웅했다.
나는 아셸과 함께 말을 타고 도시를 떠났다.
말을 타는 건 도시에서 며칠 머물고 있을 때 연습했다.
평생에 처음 타본 말이었지만 초감각 덕분인지 금세 쉽게 익힐 수 있었다.
감각이 발달하니 기본적으로 운동 신경도 그만큼 더 향상된 듯했다.
며칠 이동했을 때는 어느새 고삐도 잡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수준까지 되었다.
나는 말을 타는 채로 지도를 펼쳐서 길을 살폈다.
비싼 값에 구한 칼데릭 북서부와, 그리고 마경의 지형까지 대략적으로 표시된 지도였다.
마경은 안내해줄 길잡이도 구할 수 없었기에 이번 신비 찾기는 철저히 자력으로 해내야 하는 것이었다.
'음······.'
솔직히 지도만 봐서는 잘 모르겠다.
마경들은 내가 게임을 플레이하면서도 밥 먹듯 드나들긴 했던 지역이긴 하다.
하지만 이미 지금까지의 여정으로 충분히 체감했다시피, 게임과 이 실제 세계는 규격 자체가 달랐기에 게임에서의 지리적 지식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냥 애초에 편하게 갈 기대는 집어치우고 제대로 굴러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편이 좋았다.
그렇게 말을 타고 달리며 긴 시간이 흘렀다.
슬슬 마경이 가까워지자 주변 환경과 지형에 변화가 생겼다.
하늘에 낀 검은 구름들이 낮에도 햇빛을 가렸고, 수풀들 또한 점점 사라지며 초록빛은 더 이상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대신 삭막하게 펼쳐진 대지와 검붉은 빛이 감도는 바위들이 종종 시야에 들어올 뿐이었다.
말들도 대기 중에 떠도는 불길한 기운을 느낀 건지 이동할수록 투레질을 하며 멈춰서는 일이 잦아졌다.
"잠시 쉬었다 가지."
"예."
우리는 자리를 잡고 점심 식사를 했다.
참 밥 먹을 맛이 안 나는 풍경이었지만 배는 채워야지.
식사 준비는 항상 바로스의 몫이었지만 없으니 지금은 아셸이 대신하고 있었다.
의외였던 건 바로스만큼은 아니지만 그녀도 요리 솜씨가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산맥에서 살았었고, 대군주성으로 들어오기 전에도 한참 동안 떠돌이 신세였으니 생각하면 당연한 거긴 했지만.
쿠구구.
한창 식사 중에 평야 저편에서 한 몬스터 무리가 몰려왔다.
거대한 타조처럼 생겨먹은 이족보행 조류형 몬스터였다. 평원 지대에 서식하는 매드 버드다.
아셸이 말없이 일어나서 처리하려는데, 다시 보니까 놈들의 뒤쪽에 거대한 무언가가 하나 더 보였다.
[Lv. 61]
목이 2개가 달린 거대한 도마뱀.
나는 초감각을 끌어올려 놈을 확대해서 살폈다.
'······트윈 헤드 리자드네?'
마경에서 기괴한 몬스터를 뽑으라고 하면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머리가 여럿 달린 몬스터들이다.
트윈 헤드 리자드도 그중 하나였다.
이제 보니 우리를 공격하려고 달려오는 게 아니라 놈에게 쫓기고 있었던 듯했다.
마경이 가까워지니 이제 슬슬 경계를 넘어서 밖까지 나온 놈들이 출몰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셸의 손속에 자비는 없었다.
아셸이 쏘아낸 거대한 검기가 몰려오는 놈들을 향해 쇄도했다.
검기는 매드 버드들을 모조리 토막내고 가장 뒤에 있는 놈까지 베어버렸다. 그러나······.
키에엑!
놈은 놀랍게도 아셸의 공격을 버텨냈다.
바닥에 피를 철철 쏟아내면서도 두 머리를 미친 듯이 흔들며 괴성과 함께 돌진해왔다.
아셸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다시 한 번 검기를 날렸다. 방금 전보다 훨씬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는 검기였다.
한 번 더 검기에 적중당한 놈은 끝내 몸이 세로로 반토막이 나서 널브러졌다.
아셸이 어딘가 조금 꺼림칙한 기색으로 검을 거두었다.
나는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마경의 몬스터들이 원래 저렇지.'
강함도 강함이지만, 보통 몬스터와는 그 공격성과 흉포함부터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방금도 보통 몬스터라면 첫 공격을 적중당한 순간부터 냅다 튀었어도 안 이상하지만 놈은 그러지 않았다.
물론 그와는 완전히 정반대로 영악하기 그지없는 몬스터들도 천지였고. 한마디로 이래저래 성가신 놈들이 많았다.
게임에서도 웬만한 레벨의 고인물이 아니고서야 마경의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었다.
"아."
다시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려던 아셸이 자신의 수프 그릇이 엎질러진 걸 보고 짧게 탄식했다.
방금 전에 기운을 강하게 일으켰다가 그 여파에 엎어진 것이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피식 웃어버렸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다시 자신의 그릇에 수프를 떴다.
"많이 먹어라."
"······예."
할루멘타 (2)
대륙에 존재하는 마경들은 환경적인 특징 또한 제각각이었다.
대지에서 용암 기둥이 뿜어져나오는 곳도 있고, 마른 하늘에 벼락이 몰아치는 곳도 있으며, 극한의 추위에 쏟아지는 물마저 즉시 얼려버리는 곳도 있었다.
그런 다른 마경들에 비하면 할루멘타는 환경이나 지형이 그나마 평범한 축에 속했다.
본격적으로 초입에 들어서고도 나와 아셸이 아직까지 멀쩡히 말을 타고 이동하고 있을 수 있는 이유였다.
'태양은 이제 아예 안 보이네.'
거의 흑색에 가까운 먹구름들로 가득찬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것들 때문에 대낮에도 거의 밤과 다름없이 어두웠다.
세상에 종말이라고 하면 바로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오를 법한, 그런 분위기의 풍경이었다.
키에엑!
그리고 쉬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은 덤이었다.
절벽에서부터 곡선으로 낙하해 돌진해오던 괴조 한 마리가 아셸의 검기에 반으로 토막났다.
아직 그렇게까지 강한 놈은 튀어나오지 않았기에 마주칠 때마다 아셸이 알아서 처리하고는 있었으나······.
'진짜 더럽게 많기는 많네.'
평소 숲이나 산맥을 지날 때 마주쳤던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마주치는 횟수가 잦았다. 애초에 그래서 마경이라 불리는 거긴 하지만.
처리야 별 문제가 아니지만 밤에 잘 때도 들이닥쳐서 귀찮게 굴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피곤했다.
나는 다시 지도를 살피며 신비가 숨겨진 장소에 대해 생각했다.
'마경 중앙부에 위치한 탑 형태의 거대한 바위.'
그리고 그 어딘가에 있는 동굴.
게임에서 '놈의' 회상을 통해 나왔던 장소였다.
그래도 이번 신비는 마경 중앙 지역까지 이동해서 그 바위를 찾기만 하면 됐기에, 그나마 장소를 정확히 특정할 수 있었다.
며칠 이동하니 우리는 한 수림에 들어설 수 있었다.
다만 초록색으로 창창한 게 아닌, 잎사귀에까지 검은 빛깔만 감도는 썩은 고목 같은 나무들이었다. 마경답게.
으스스한 분위기의 숲길을 걸으며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나무들에는 마찬가지로 어두운 색의 열매들이 종종 열려있는 게 보였는데, 나는 그것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할루멘타가 사뭇 평범하기는 해도 다른 마경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점은 있었다. 바로 식물이었다.
겉보기에 영 맥아리는 없어도 이렇게나마 자라나는 식물들이 있었다.
어떤 건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어떤 건 굉장한 약효를 지니고 있기도 했다.
'저건······.'
그중에 나는 하나의 열매를 발견하고서 눈을 크게 떴다.
검은색 껍질에 붉은 빛깔로 쩍쩍 갈라진 결이 보이는, 메론만 한 크기의 동그란 열매.
포도처럼 알알이 주렁주렁 달려서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기다랬다.
가까이 다가가자 바닥에 떨어진 열매 한 알을 파먹고 있던 커다란 벌레들이 날아서 흩어졌다.
나는 상태가 멀쩡한 열매를 손으로 하나 따냈다.
게임에서도 업적 때문에 할루멘타에서 약초나 과일 채집을 질리도록 해본 적이 있었기에, 이게 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몽스테슈 열매.'
이건 딱히 몸에 좋은 약효를 지니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생긴 것과 달리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천상의 맛을 지니고 있다는 설정의 열매였다.
게임에서도 발견하기 꽤 힘들었던 건데 운 좋게 마주쳤네.
맛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에 나는 그것을 한입 작게 베어물었다. 과육은 아삭한 식감에, 오렌지처럼 주황색이었다.
'와······.'
먹자마자 입안에 확 퍼지는 강렬한 달콤함에 속으로 감탄했다.
왜 게임에서 왜 천상의 맛이라고 했는지 알겠다. 한입 먹자마자 바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맛이었다.
나는 그 달콤함을 음미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아셸이 조금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날 보고 있었다.
뭔 식은 용암 덩어리마냥 괴상하게 생겨먹은 갑자기 열매를 따서 먹고 있으니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너도 먹어봐라."
하나 더 따서 내밀자 아셸이 작게 침음을 흘리곤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습니다."
"강요는 안 하지만 안 먹으면 후회할 텐데."
이 맛있는 걸 혼자서만 맛보긴 아깝잖아.
내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그녀도 호기심이 생겼는지 머뭇머뭇 받아들었다.
그리고 한입 자그맣게 베어물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먹고 있던 열매를 마저 순식간에 해치웠다. 크기가 워낙 커서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계속 가지."
다시 앞장서서 이동하려는데 뒤에서 뚝,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아셸이 열매를 하나 더 따서 입에 넣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서리라도 하다가 들킨 것 같은 표정으로 우물우물 씹고 있던 열매를 꿀꺽 삼켰다.
"······죄송합니다."
"괜찮다."
더 먹고 싶으면 먹어야지, 뭘 사과를.
***
마경에 들어선 지도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시야에 펼쳐진 풍경은 끝없이 펼쳐진 검은 대지와 수풀들의 반복이었고, 뭔가 특별한 건 없었다.
다만 달라진 건, 점점 마경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강한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Lv. 64]
[Lv. 68]
[Lv. 71]
.
.
.
이번에 마주친 놈들은 떼로 몰려다니던 것들이었다.
원숭이 괴물도 있었고, 사자와 코뿔소를 섞은 것처럼 생겨먹은 놈도 있었고, 그리고 무수한 눈이 징그럽게 박혀있는 거대 거미들도 있었다.
'뭐지, 이것들은?'
그 이질적인 광경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같은 종끼리 다니는 것도 아니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몬스터 무리였으니까.
그워어!
일단 처리가 우선이었기에 생각은 나중으로 하고 아셸에게 말했다.
"저 원숭이를 맡아라."
"예."
따로 떨어져있던 레벨이 가장 높은 원숭이 괴물을 향해서 아셸이 곧장 돌진했다.
나머지 몰려있던 놈들은 이쪽을 향해서 사나운 기세로 돌진해왔다.
나는 손을 뻗고 핏방울들을 터뜨려 쏘아냈다.
개체 하나하나가 작은 도시 하나쯤은 혼자서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수준의 몬스터들이었지만, 즉살 능력에 레벨은 아무 의미가 없다. 놈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전멸했다.
촤아악!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셸도 원숭이 놈을 어렵지 않게 처치했다.
내 쪽을 돌아본 그녀가 모조리 죽어있는 다른 몬스터들을 보고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검을 거두었다.
그 이후에도 이런 이질적인 조합의 몬스터 무리들을 종종 마주쳤다.
그것들을 계속 처치하고 나아가며 나는 하나의 생각을 떠올렸다.
'······아, 설마 그건가?'
마경에는 온갖 까다롭고 괴상한 능력을 가진 몬스터들이 많았다.
피어부터 시작해서 강력한 마력포를 쏘아낸다거나, 불이나 전기를 뿜어낸다거나, 아니면 환각을 유발시키는 놈도 있었다. 그런 놈들은 대부분 네임드 보스로 분류된다.
그리고 그중에는 아주 희귀하게 다른 몬스터들을 지배하고 부리는 능력을 지닌 몬스터 또한 존재했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흉포한 마경의 몬스터들끼리 이리 사이좋게 붙어디나는 걸 보니······ 어쩌면 그 지배의 능력을 가진 놈이 지금 이 마경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하기로 할루멘타에 지배 계열의 능력을 가진 보스는 없었는데······.'
뭐, 지금은 플레이했던 배경에서 과거 시점이니 내가 모르는 보스몹들이 있을수도 있는 거니까.
나는 그닥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 지배 능력을 가진 놈이 있다고 해도 큰 위협이 되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덤벼드는 몬스터들을 모조리 시체로 만들고 나아가며 또 며칠이 흘렀다.
대기 중에 희미하게 퍼진 검붉은 안개를 보니 슬슬 진짜 마경의 중심부까지 들어오지 않았나 싶었다.
돌아갈 길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선 확실히 대비했다.
전에 엘로드 숲에서 사용했던 상호 위치 표시 나침반의 하나는 마경 입구에 묻어두었고, 또 챙겨온 길잡이용 가루도 지나온 길에 틈틈히 뿌려두었으니까.
나는 초감각으로 시야를 최대까지 확장하여 바위를 찾기 위해 애썼다.
탑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라 멀리서도 발견하기 쉬울 텐데······.
그리고 그 생각대로, 일대를 한나절 정도 돌아다닌 끝에 끝내 바위를 찾아낼 수 있었다.
'······저거다.'
안개 너머, 한눈에 봐도 탑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바위를 향해서 가까이 다가갔다. 근처에 몬스터는 없었다.
바로 앞까지 도착한 나는 바위 주위를 돌며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았다.
그리고 곧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바위의 한가운데에 대놓고 뚫려있는 넓은 통로 하나를.
이곳이 바로 내가 찾는 마지막 신비가 숨겨져있는 장소.
"들어갔다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아셸에게 그렇게 말하고 어두운 동굴 안으로 홀로 걸음을 옮겼다.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아무것도 없이 고요했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안쪽으로 이동했다.
일자로 이어져있는 통로는 생각보다 훨씬 길어서, 벌써 몇십 분은 걸었는데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 끝나는 거야?'
슬슬 걷는 게 지겨워져서 그냥 뛰었다. 어차피 잘 지치지도 않는데 왜 걷고 있었지.
그렇게 몇 분은 더 뛰었을까.
드디어 일자 통로가 끝나고 거대한 공동이 나타났다.
나는 공동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이제 안으로 나아가는 통로는 더 없는 듯했다.
그럼 여기가 끝이라는 건데······ 공동에는 아무것도 없이 어둡기만 했다. 밝게 빛나는 신비의 문양 따위는 없었다.
잘못 찾아왔나 싶었지만 이곳이 분명히 맞았다.
탑처럼 생긴 바위에 난 굴이 여기 말고 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는 건, 즉······.
"······."
나는 굳은 얼굴로 공동의 중앙으로 다가갔다.
그곳의 바닥에 말라붙은 희미한 핏자국이 보였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듯한, 나보다 먼저 다른 누군가가 이곳에 다녀갔다는 흔적.
이곳에 신비의 문양이 왜 없는지 이해하기에는 충분한 흔적이었다.
"······이미 챙겨갔나."
나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놈'은 이곳을 이미 오래 전에 발견해서, 결국 그 신비를 흡수한 모양이었다.
마지막 신비를 선점하는 것은 실패였다.
***
아셸은 7군주의 명령대로 동굴 앞에서 주위를 경계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검자루에 손을 올리고 선 채 동굴 안쪽을 빤히 바라봤다.
매번 7군주는 어떻게 이런 장소들을 알고 찾아오는 걸까? 그리고 안에 들어가서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고?
'······쓸데없는 생각을.'
그녀는 호기심을 털어내고 다시 경계에 집중했다.
명색이 호위인데 지금까지 만난 강적들과의 전투에선 항상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적어도 그분이 하시는 일에 방해는 되지 않도록, 몬스터가 동굴로 들어가는 걸 막는 일만큼은 제대로 해내야 할 터였다.
"······?"
그렇게 한참을 석상처럼 서있던 아셸은 문득 이질감을 인지했다.
주위에 껴있던 안개가 왠지 좀 더 짙어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본능적인 불쾌감.
미간을 좁힌 채 검을 뽑아들려던 그녀의 손이 굳었다.
그리곤 서서히 눈이 감기더니, 몸을 위태롭게 휘청거리다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스스스.
그녀가 쓰러진 자리에 이내 징그럽게 얽힌 식물의 줄기 같은 것이 나타났다.
그녀의 몸을 휘감은 줄기가 땅바닥을 기어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
"······?"
생각에 잠긴 채 동굴 밖으로 나온 나는 의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어째서인지 아셸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급하게 볼일이라도 보러 갔나 싶어 팔짱을 끼고 서서 기다렸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
나는 굳은 얼굴로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봤다.
뭐지?
얜 또 갑자기 어디로 증발한 거야?
할루멘타 (3)
어두운 숲 한가운데, 한 쌍의 남녀가 모닥불 앞에 앉아있다.
허리춤에 여러 종류의 무기를 차고 있는 남자와, 얇은 로브 차림의 여자.
그들의 옆에는 난도질이 된 채 죽어있는 거대한 늑대의 시체가 놓여있었다.
익숙하다는 듯 단검으로 몬스터의 살점을 슥슥 발라내서 불 위에 올린 여자는 휘파람을 불며 고기가 익기를 기다렸다.
"마경의 몬스터라고 해서 다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거든요. 오히려 몇몇 놈들은 보통 짐승의 고기보다 훨씬 맛있다고요."
여자의 말에도 남자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저 타오르는 불만 응시할 뿐이었다.
그녀가 칫 혀를 차며 고기가 꽂힌 꼬챙이를 뒤적거렸다.
"그래서, 중앙 지역까지 왔는데 이제부터 어쩌려고요?"
"놈을 찾아야지."
"그러니까 자세한 계획이 어떻게 되냐고요. 여기까지 오면서 계속 입만 다물고 있었잖아요."
"그런 건 없다. 할루멘타 전체를 뒤져서라도 놈을 찾아서 죽인다. 그뿐이야."
무식하기 그지없는 남자의 대답에 여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했잖아요, 마경이 어떤 곳인지. 그놈도 지금쯤 더 강한 괴물한테 진작 잡아먹혔을 수 있다니까요? 그러면 어쩌게요?"
"계속 그렇게 참견할 거면 따라오지를 말라고 했을 텐데."
그녀가 불만스레 미간을 좁혔다.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 했죠?"
"······."
"랜드는 내게도 가족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동료였어요. 그 형이 동생 복수를 하겠답시고 기약도 없이 사지를 떠돌겠다는데, 내가 참견을 안 할 수가 있겠어요?"
"쓸데없는 걱정이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해."
"예예, 아무렴요. 그러시겠죠. 무려 그 악명 높은 바르카토의 레인저셨는데, 저 같은 모험가 나부랭이가 감히 비교가 되겠나요? 길 안내하고 고기 굽기나 열심히 해야죠."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고기를 뒤적였다.
남자가 그 광경을 보다가 슬쩍 말했다.
"······식량 놔두고 몬스터를 굽겠다고 나선 건 너다."
"누가 뭐래요?"
"시킬 일이 있으면 말해라."
"없어요. 다 구우면 먹기나 해요."
그녀는 퉁명스레 말하면서 속으로는 피식 웃었다.
성격은 정반대지만 마음 여린 건 형제가 참 똑같았기 때문이다.
크릉!
한창 고기가 익어가는데 수풀이 흔들리더니 다시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거대한 전갈과 다리가 여섯 달린 악어, 그리고 흉악한 뿔이 달린 사슴이었다. 종잡을 수가 없는 괴상한 조합.
긴장한 얼굴로 옆에 내려둔 스태프를 집는 여자와 달리, 남자는 허리춤의 단검 하나를 뽑아들었다.
푸슉!
빛살처럼 쏘아진 단검이 가장 먼저 사슴의 미간을 관통했다.
이어 곧장 장검을 뽑아든 남자가 몸을 날려 전갈을 향해 돌진했다. 검날에는 푸른빛의 짙은 검기가 빚어진 채였다.
독침을 바짝 세운 채 휘둘러오는 꼬리를 피하고 검을 휘둘러 그것을 반토막냈다.
남자는 몸부림치는 전갈의 몸체를 난도질하다가 순식간에 머리까지 베어내 절명시켰다.
콰악!
옆쪽에서 펄쩍 뛰어오른 악어가 애꿎은 허공만 물어뜯었다.
기습적인 일격이었지만 남자는 어느새 땅을 딛고 허공으로 도약한 채였다.
그리곤 나무 기둥을 한 번 디디고 곧장 다시 아래로 쏘아지더니, 악어에게로 떨어지며 그대로 머리를 꿰뚫었다.
"······헤에."
순식간에 셋을 처치해버리고 유유히 검을 거두는 남자의 모습을 여자가 잠시 넋 놓고서 바라봤다.
나서서 도울 틈도 없이 간단히 끝났다. 그의 실력이야 여기까지 오면서 충분히 경험했지만 볼 때마다 놀라웠다.
"이런 놈들을 자주 마주치는군."
남자가 죽은 몬스터들을 슥 둘러보고는 말했다.
사슴, 악어, 그리고 전갈. 도대체 무슨 조합인지 알 수가 없는 무리.
"마경의 몬스터들은 원래 이렇나?"
"아뇨, 그럴리가요. 그냥 이놈들이 이상한 거예요."
그렇게 말한 여자도 묘한 눈빛으로 그들의 시체를 바라봤다.
마경은 보통의 상식을 벗어난 장소고, 갖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마주하는 거야 일상이다.
하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그것이 계속해서 반복되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의 몬스터 무리를 여기까지 오며 꽤나 마주쳤다.
여태 깊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그녀도 슬슬 의아함과 이상함을 느꼈다.
끼이익!
고개를 들어올리니, 하늘에서 새 한 마리가 기분 나쁜 울음소리를 내며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기로 신경을 돌렸다.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동안 고기가 벌써 다 익은 듯했다.
***
곤란하다.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상정해본 적이 없기에 더욱 그랬다.
동굴 밖으로 나오니 온데간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아셸. 거기다 말들도 사라졌다.
동굴에 있는 동안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뭐냐고, 대체······."
몬스터에게 습격이라도 당했나?
떠오르는 가능성은 그것밖에 없었다.
무언가 불가피한 일이 있었던 게 아니고서야 그녀가 내 명령을 어겼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만약 정말 습격을 당했다면 어떤 놈한테 당했단 말인가?
일단 이곳이 아무리 마경이라도 그녀를 압도할 만한 수준의 몬스터들은 네임드 보스들밖에 없다.
그리고 그 정도로 강한 놈들과 전투가 있었다고 하면, 아무리 내가 굴 깊은 곳에 있었어도 초감각으로 알아챘을 텐데······.
'이상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바위탑 위쪽을 올려다보다가, 공간 도약을 연속해서 사용해 순식간에 정상까지 올라갔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 마경의 전경을 한눈에 둘러봤다.
앞쪽은 우리가 지나온 길, 왼쪽으로는 숲이 있었고, 오른쪽과 뒤쪽으로는 평야가 있다.
물론 시각을 최대한으로 강화한 채 샅샅이 살펴봐도 아셸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나더니 거대한 괴조 한 마리가 이쪽으로 날아들었다.
안 그래도 심란한데 덤벼드는 놈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핏방울을 쏘아냈다. 기세 좋게 날아들던 놈이 그대로 추락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놈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바위 아래로 내려갔다.
그래도 주위에 흔적을 살펴보면 뭐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여기가 서있던 자리.'
아셸이 서있던 자리부터 시작해서 주위의 흔적을 샅샅이 훑어봤다.
딱딱한 돌바닥이라서 발자국 같은 것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초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려 아주 작은 흔적 하나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땅바닥에 무언가 희미하게 쓸린 흔적이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뭐야?'
무언가가 난잡하게 쓸린 흔적.
상상력을 발휘해봤지만 그 이상의 것은 파악할 수 없었다. 흔적이 너무 희미했기에.
그러나 그게 어디로 나아갔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나는 흔적이 이어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숲이 있는 방향이었다.
"······."
다시 한 번 상상력을 발휘해봤다.
바닥에서 찾을 수 있는 흔적은 이 쓸린 자국뿐이고, 그 외의 것은 아예 없다.
일단 이 정체 모를 흔적의 주인이 덩치가 거대한 놈은 아닐 것이었다.
그러면 무게 때문에 땅이 조금이라도 파였겠지, 이런 식의 흔적이 남지는 않았을 테니까.
'별로 크지 않고 가벼운 무언가.'
그런 무언가가 아셸을 습격해서 숲으로 끌고 갔다? 아니, 끌고 간 게 맞나?
모르겠다. 하지만 아셸이 사라졌으니 당장은 그런 방향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할루멘타에 서식하는 네임드 보스들을 떠올렸다.
다 덩치가 산만큼 거대한 놈들이라서 아셸을 습격한 무언가가 놈들 중에 있다기에는 맞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결국 뭔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일은 흔적을 쫓아보는 것밖에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셸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핏자국은 없다는 것이었다. 아직 그녀가 멀쩡히 살아있기를 바라며 숲을 향해 이동했다.
숲부터는 바닥이 흙이었기에 이어진 흔적이 훨씬 더 선명했다.
나는 놈이 지네처럼 다리가 많이 달린 몬스터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흔적을 살피니 그것도 아니었다.
이건 마치, 뭐라고 해야 되나······ 촉수?
마치 어지럽게 얽힌 촉수가 바닥을 꿈틀거리면서 기어가면 이런 식의 흔적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부스럭.
[Lv. 56]
흔적을 계속해서 쫓는데 수풀을 헤치고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이마에 난 뿔이 악마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사슴이었다.
놈이 나를 보며 입맛을 다시더니 고개를 숙이고는 앞발로 바닥을 긁어댔다. 돌진을 준비하는 모양새였다.
손가락을 뻗고 핏방울을 쏘아내려는데 그 순간 서있던 바닥이 진동했다.
"······?"
이건 또 뭐야?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 건 바로 그 다음이었다.
푸확!
갑작스레 땅바닥을 뚫고 튀어나온 거대한 손이 사슴의 몸을 우왁스레 붙잡고 짓눌러버렸다.
살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 놈은 썩은 열매처럼 그대로 땅바닥에 찌부러져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어서 앞쪽의 땅이 통째로 뒤집어지며 그 아래에 묻혀있던 손의 주인이 그 거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Lv. 82]
전에 루터스 산맥에서 마주쳤던 벨르바고라에 못지않을 정도로 거대한 곰.
나는 두 눈을 깜박이며 놈을 응시했다.
'······불칸티어?'
내가 알고 있는, 헬루멘타에 서식하는 네임드 보스들 중 하나.
참으로 뜬금없이 땅바닥에서 튀어나온 놈은 얼마나 땅속에 묻혀있던 건지 등에 나무가 자라있을 정도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뭔 겨울잠이라도 자고 있었냐?"
불칸티어가 몸을 흔들어 등에 무성히 난 풀과 나무들을 털어냈다.
덩치가 어찌나 큰지 나무를 털어내는 게 마치 티끌을 터는 것처럼 보였다.
크릉!
이윽고 놈이 시뻘건 안광을 빛내며 금방이라도 날 찢어죽일 듯 온몸으로 흉흉함을 뿜어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한 놈을 다시 영원히 재워주기 위해서 손가락을 뻗었다.
그 순간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로 물러나요!"
이어서 날아든 거대한 불꽃이 불칸티어의 몸을 강타했다.
고개를 돌리니 웬 두 남녀의 모습이 보였다. 사람?
[Lv. 73]
불덩이에 맞은 놈의 정신이 잠시 팔린 틈에 내게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날 떠밀었다.
"방해되니 물러나라."
그리곤 내 말은 듣지도 않은 채 불칸티어에게 몸을 날린 그가 가까이 붙어서 검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놈의 질긴 가죽을 찢어내지 못하고 전부 생채기에서 그쳤다.
곧 다시 정신을 차린 놈이 성난 포효를 터뜨리며 거대한 앞발을 우악스레 휘둘렀다.
공격을 피하고 뒤로 간신히 물러난 남자가 굳은 얼굴로 자신의 검을 내려다봤다.
이어서 내게 가까이 다가온 여자가 마법을 준비하며 다시 내게 소리쳤다.
[Lv. 59]
"이런 곳에서 혼자 뭘 하는 거예요? 우리가 상대할 테니 빨리 도망쳐요!"
"아니······."
말을 하려 했지만 그녀 역시도 내 말을 무시하고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뭐야, 이것들은?
***
콰아앙!
고전하고 있는 남자를 보며 여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껏 마주쳤던 몬스터들이 전부 새끼처럼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곰.
예전에 동료들과 마경을 한창 돌아다닐 때도 이런 터무니없는 괴물을 마주쳤던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 손쉽게 몬스터들을 처지했던 남자도 겨우겨우 공격만 피하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그녀는 지팡이를 치켜세우고 마력을 끌어올려 자신이 펼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 순간 곰이 기습적으로 방향을 틀어 그녀를 노렸다.
"······!"
간발의 차로 몸을 날린 남자가 그녀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는데 이미 곰은 지척이었다. 덩치에 맞지 않는 가공할 속도였다.
'······아.'
이렇게 허무하게?
차마 방어 마법을 펼칠 틈도 없었다. 아니, 펼친다고 해도 산산히 부서질 것이었다.
온몸을 내리찍어오는 거대한 앞발을 보며 두 사람이 죽음을 직감한 순간이었다.
앞쪽에 무언가가 나타남과 동시에 충격파에 주위의 지면이 터져나갔다.
"······?"
두 사람이 얼떨떨한 얼구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바로 앞에 방금 전 마주친 남자가 서있었다.
그리고 곰의 앞발은 허공에서 우뚝 멈춰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라도 막힌 것처럼.
곰이 당황한 기색으로 끙끙거리다가 뒤로 물러났다.
'이게 무슨······?'
남자의 모습이 다시금 눈앞에서 증발하듯 사라졌다.
굉음이 울리며 곰의 거체가 무너진 건 그와 동시였다.
쿠우웅!
두 사람은 어느새 쓰러진 곰의 등 위에 서있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둘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듣지."
할루멘타 (4)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공간 도약을 펼쳐 도로 내려왔다.
내가 갑자기 앞에 나타나자 뒤늦게 몸을 일으키고 있던 두 사람이 움찔 놀랐다.
"테, 텔레포트······?"
여자가 경악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누구지?"
마법사인 여인과 검사인 남자.
특히 남자 쪽의 레벨은 73으로 상당히 높았다.
설마 마경의 한가운데에서 이렇게 사람을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뭐 하는 사람들이지?
남자가 뒤쪽에 쓰러진 불칸티어와 날 번갈아 보며 침음을 흘렸다. 기껏 구해줬더니 경계하는 기색이다.
대신 여자가 머리에 묻은 흙을 털며 얼떨떨한 목소리로 답했다.
"예, 예. 저희는 그냥 모험가인데요."
"모험가? 둘이서 이런 마경을 돌아다니고 있었나?"
"네, 그런데요······."
"어째서?"
"그, 그야 모험가니까 모험을 하려고······?"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남자를 힐끗 쳐다봤다.
그가 여전히 날 경계하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목숨을 구해주신 건 감사하오. 경은 누구이신지 여쭤도 되겠소?"
나는 뭐라 대답해야 되나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모험가."
"······모험가가 마경엔 어째서?"
"······모험을 하려고?"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음, 생각해보니 그렇구나.
마경의 한복판에서 생뚱맞게 마주친 낯선 사람.
내 사정을 일일이 설명할 것도 없고, 그냥 모험가라고 둘러대는 게 적당한 대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대충 이들도 이들의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며 더 관심은 안 가지기로 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서 다니게. 그럼 이만."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리려 했다.
"앗, 잠깐······!"
"경, 잠시만."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붙잡았다.
왜 부르나 쳐다보자 여자가 먼저 말했다.
"그, 실례가 아니라면 잠시만 뭐 좀······."
"실례다."
뭔 부탁이라도 하려나 싶어 바로 끊어버렸다.
아셸의 생사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찾아야 하는데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아, 아직 말하지도 않았는데······?"
여자를 뒤로 하고 남자가 나섰다.
"찾고 있는 몬스터가 있는데, 혹시나 그 몬스터를 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소."
"······몬스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나도 지금 한시가 급······."
말을 하다가 뚝 끊었다.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단둘이서 헬루멘타의 중앙 지역을 돌아다니고 있던 이들.
사정을 설명하면 혹시나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게 싶은데."
"예?"
"내 동료가 갑자기 사라졌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이들에게 내 사정을 빠르고 간결하게 요약해서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셸이 사라져버린 것, 현장에 전투의 흔적은 아예 없었던 것, 그리고 흔적을 쫓아 현재 이 숲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까지.
그들은 내 뜬금없는 설명을 일단 잠자코 모두 경청했다.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짐작이 되나?"
설명이 끝나자 남자가 여자를 쳐다봤다.
"글쎄요, 저도 잘······ 아."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작게 탄성을 뱉었다.
"혹시 뭐 상대를 수면시키거나, 아니면 환각을 불러일으키거나, 그런 류의 능력을 가진 몬스터에게 잡혀간 건 아닐까요?"
그건 나도 짐작한 부분이었다.
다만, 아셸의 레벨이 레벨이기에 웬만큼 강력한 능력을 가진 놈이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거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 자리에서 처리한 게 아니라 굳이 끌고 간 이유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내 게임 지식으로는 환각계 능력에 특화된 몬스터는 할루멘타에 없었다.
"아, 생각해보니 짐작이 가는 몬스터가 있기는 한데······."
그러나 여자는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기억을 더듬듯 말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동료들하고 할루멘타를 한창 돌아다녔던 때가 있거든요. 그때 마주쳤던 놈인데 하마터면 전부 죽을 뻔했죠."
"어떤 놈이지?"
"음, 그게······ 사실 그게 뭐였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어느 순간에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차리고 보니 웬 식물 줄기 같은 것에 꽁꽁 묶여있더라구요."
······식물 줄기?
나는 쫓고 있던 바닥의 흔적을 다시 쳐다봤다.
내가 상상하고 있는 무언가의 이미지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 설명이었다.
"근데 그 줄기에 묶여있는 동안 저도 그렇고, 나중에 물어보니까 다른 동료들도 모두 악몽을 꿨다고 하더라고요. 떠올리기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서 헤맸다고 해야 되나. 결국 한 명이 깨어나서 나머지를 전부 구해준 덕에 간신히 살았지만요."
악몽······.
나는 미간을 좁혔다. 어쩐지 슬슬 감이 잡혔기 때문이다.
마경의 몬스터들 중에는 온갖 괴상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놈들이 많다.
그리고 그중에는 상대의 마음의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그 고통을 자신의 양분으로 삼는 것들도 있었다.
특히 정신력이 약하거나 큰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당하기가 쉬운 종류의 능력이었다.
'이놈도 그런 놈인가?'
내 기억에 할루멘타에 그런 류의 몬스터는 없었지만, 지금은 과거 시점이니 모르는 몬스터는 얼마든 있을 수 있었다.
만약 이놈이 그런 식의 환각계 능력을 가진 몬스터라면, 그래서 아셸을 손쉽게 제압해서 끌고 간 거라면?
나는 다시 흔적을 쫓아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다급히 나를 따라왔다.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놈이 남긴 흔적을 쫓는 중이다."
"흔적······?"
남자가 눈매를 좁힌 채 내 시선이 향한 바닥을 살피더니, 곧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희미한 흔적을 쫓아가고 있는 거였소?"
"그래."
"어, 뭐가 보이긴 해요? 제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여자도 바닥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아무튼 동료 분을 구하러 가시는 거라면 우선 저희도 도와드릴게요."
"정보를 준 건 고맙지만, 딱히 도움이 필요할 것 같진 않은데."
"어, 그야 엄청 강해 보이시니 그렇긴 하겠지만······ 그래도 혹시 도움이 될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렇죠?"
여자가 남자에게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그는 뭔가 말하려는 듯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뜻밖의 두 낯선 사람까지 붙여서 추적을 함께하게 됐다. 돕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도 없었으니.
"저쪽으로 방향을 꺾었군."
그리고 남자는 추적에 꽤나 조예가 깊은지, 흔적이 헷갈릴 때마다 제대로 방향을 파악하고 짚어주었다.
덕분에 잡아먹는 시간을 아끼며 속도가 붙었다. 거리가 얼마 남지 않은 듯 점점 선명해지는 흔적.
"······."
그리고 마침내 목표했던 것을 발견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눈앞의 펼쳐진 풍경을 바라봤다.
[Lv. 70]
주위의 나무들을 휘감고 허공에 뻗어있는 식물 줄기. 그 한가운데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처럼 묶여있는 한 사람.
바로 아셸이었다.
"저, 저놈이 맞아요! 그때 그놈이에요!"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여자가 그렇게 소리쳤고, 남자는 곧바로 검을 뽑아들고 전투 태세를 취했다.
우우웅.
그 순간 식물을 중심으로 한순간 역장처럼 파동이 퍼져나왔다.
파동에 고스란히 노출된 두 사람이 위태롭게 휘청거리더니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나는 황당한 눈으로 그런 둘을 쳐다보다가, 다시 식물 줄기로 시선을 옮겼다.
'뭐야?'
이게 놈의 능력인가?
하지만 제왕의 혼 덕분에 내게는 통하지 않는 듯했다.
놈의 능력이 환각 계열이라고 들었을 때부터 이럴 건 예상했다.
나는 저벅저벅 걸음을 내딛었다.
내가 멀쩡하자 놈이 당황한 듯 꿈틀거리더니 연이어 파동을 쏘아냈다. 하지만 통할 턱이 없었다.
정신적인 공격이 안 되니 놈은 남아있는 줄기 몇 가닥을 내게 채찍처럼 휘둘렀다. 하지만 그 역시 부동 장막에 막혔다.
레벨이 높은 건 전부 환각 능력 때문인지 형편없는 파괴력이었다.
피잇.
내 손가락에서 쏘아진 핏방울이 놈의 줄기에 닿았다.
생명이 끊어져 축 늘어진 놈은 더 이상 성가시게 꿈틀거리지 않았다.
나는 아셸이 묶여있는 위쪽 줄기로 순간이동해서 그녀의 앞에 섰다.
"······."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줄기 사이로 드러난 아셸의 얼굴, 볼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이 보였기 때문이다.
대충 짐작이 되었다. 지금 그녀가 어떤 악몽을 꾸고 있는 건지는.
나는 묵묵히 몸에 묶인 줄기를 하나씩 뜯어내기 시작했다.
전신이 잔줄기에 어지럽게 엉켜있어서 빼내려면 고생을 좀 해야 될 듯했다.
***
"언니는 꿈이 뭐야?"
아셸이 휘두르던 검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수련은 팽개치고 풀밭에 누워 뒹굴거리고 있던 동생의 물음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하고 싶은 게 뭐냐고. 아니면 되고 싶은 거라거나."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동생은 때때로 이런 생뚱맞은 질문을 자주 던지곤 했다.
아셸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하고 싶은 건 잘 모르겠고······ 일족 제일의 전사가 되고 싶은데."
동생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에이, 그게 진짜 언니가 되고 싶은 거야? 그건 어른들 바람이잖아! 맨날 언니가 천재라고 치켜세우면서 수련 열심히 하라는 말밖에 안 하고."
"아니야. 나도 그러고 싶어."
"거짓말.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봐, 이 둔해빠진 언니야. 마음속 깊이 진심으로 하고 싶은 게 뭔지. 분명 뭐라도 있을걸?"
아셸은 다시 한 번 고민해봤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별로 없는 것 같아.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러워."
그 대답이 동생에겐 지루하게만 들렸나 보다.
동생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우리 언니지만 참 이해가 안 된다니까."
"그러는 넌 뭘 하고 싶은데?"
"나? 나야 당연히 산맥 바깥으로 나가는 거지!"
벌떡 몸을 일으킨 그녀가 산맥 저편을 가리키며 신나서 소리쳤다.
"언젠가 꼭 바깥세상으로 나가서 대륙을 모험할 거야! 그리고 온 세상에 위대한 모험가로 내 이름을 알리는 거지!"
"또 그 소리를 하네. 진심이야?"
"그럼 늙어 죽을 때까지 여기서 평생을 살 일 있어? 아무리 언니라도 내 꿈은 절대로 못 막아."
아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족이 산맥 바깥의 세상으로 나가는 건 금기였다.
그럴 경우엔 산맥에 있는 모든 부족, 그러니까 일족 전부가 나서서 막는다.
왜냐면 그것이 그들의 터전을 외부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동생은 시작부터 막힐 터무니없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었다.
"언니는 궁금하지도 않아? 산맥 바깥에 대체 어떤 세상이 펼쳐져있을지?"
"글쎄. 나가봐야 배척만 당하지 않을까."
"플로빅 할아범이 말해줬어. 대륙 북쪽에는 온갖 종족들이 다 모여서 사는 칼데릭이란 땅이 있다고."
플로빅은 부족 제일의 연장자이자, 이제는 얼마 남아있지 않은 바깥세상을 직접 경험해본 일족이었다.
"거기서는 어떤 종족도 배척하지도, 배척받지도 않는다고 했어. 그리고 다스리는 우두머리가 무려 드래곤이래!"
그녀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그러니까 만약에 밖으로 나간다면 거기서부터 시작할 거야. 새로운 모험! 새로운 동료! 그리고 새로운 사랑!"
"음."
"어째 내 주변에는 죄다 따분하고 한심한 남자들밖에 없어. 밖으로 나가면 나한테 어울리는 진정한 반려도 찾을 수 있겠지?"
그리곤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더니 묻는다.
"언니는 어떤데? 수련하고 먹고 자고, 수련하고 먹고 자고, 계속 이렇게만 살다가 결혼은 또 누구랑 하려고?"
"누구랑 하냐니······ 때가 되면 부모님이 적당한 상대를 맺어주시겠지."
"아니, 뭔 이야기를 들은 거야. 언니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야지! 부모님이 데려오기만 하면 저기 겔트나무 부족장 아들처럼 쪼다 같은 놈이랑도 결혼할 거야?"
"그건 아니지만."
동생이 불만스런 얼굴로 다시 풀밭을 뒹굴대며 중얼거렸다.
"하여튼 그러니까······ 그래, 그러면 되겠네. 나중에 내 결심이 완전히 섰을 때 일족 제일의 전사가 된 언니가 다른 사람들을 혼자서 전부 막아주는 거지. 그 사이에 나는 산맥을 무사히 빠져나가고."
엉뚱하기 그지없는 말에 아셸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왜 웃어? 난 진심인데? 그래도 동생 평생의 소원인데 안 들어주진 않을 거지?"
그때 저멀리서 부르는 목소리에 자매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한 여인이 온화하게 웃으며 손짓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였다.
"아싸, 밥 다 됐나 보다. 수련 끝."
"너 검 몇 번 휘두르지도 않았잖아."
"헤헤, 아빠한테는 비밀이다? 엄마아!"
먼저 잽싸게 달려가는 동생을 보며 아셸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그녀가 어서 오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평화롭다. 따스하다. 그리고 안락하다.
아셸은 더 특별한 것을 바라지 않았다.
수련을 하고, 사냥을 하고, 가족과 함께 식사하며 웃고 떠들고, 동생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저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이라도 지금의 행복이 영원토록 이어지기만 한다면.
······하지만 그 영원할 것만 같았던 평화는 너무도 갑작스럽게, 그리고 쉽게 무너져버렸다.
"도망쳐라, 아셸! 뒤돌아보지 말고!"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가 괴한들을 막아서고 처절하게 소리쳤다.
그 품에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된 어머니의 시체가 있었다.
폭풍우가 쏟아지는 밤.
갑옷을 입은 이들이 부족들을 검으로 베고, 로브를 입은 이들이 불태웠다. 창을 든 괴물 하나가 부족의 전사들을 모조리 무참하게 도륙했다.
사나운 우뢰조차 산맥 전체에 메아리치는 일족의 비명을 가리지 못했다.
아셸은 동생의 손을 잡고 달렸다. 핏물을 밟고, 시체들을 넘고, 악귀처럼 검을 휘두르며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몸을 움직였다.
비명이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만큼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도착했을 때, 더 이상 괴한들의 모습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수장으로 보이던 괴물은 끝내 자매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절벽 끝에 내몰린 둘을 향해 걸어왔다. 무정한 눈이었다. 일족의 핏물로 한껏 적셔진 창날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아셸은 동생을 등 뒤로 떠밀었다. 이곳에서 끝까지 싸우다 죽을 생각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그때 갑작스레 등에 격통이 일었다.
"······!"
동생의 손이 상처를 꾹 짓누르고 있었다.
어째서, 의문을 품을 틈조차 없었다.
한순간 휘청인 몸을 그녀가 거세게 떠밀었다. 아셸은 무력하게 허공으로 떠밀렸다.
손을 뻗어 동생의 손을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그녀의 몸이 절벽 아래의 강물로 서서히 추락했다.
서글픈 얼굴로 웃는 동생의 중얼거림만이 귓가에 희미하게 닿을 뿐이었다.
"······살아남아, 언니."
곧바로 돌아서서 괴한을 향해 달려드는 동생과, 그런 그녀의 가슴팍을 꿰뚫은 은빛의 창날이 마지막으로 시야에 비쳤다.
아셸은 서서히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시야가 암전되었다. 세상에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이내 볼을 타고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고 하염없이.
'왜······.'
바깥의 세상 같은 건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평화롭게 산맥에서 살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부질없는 후회와 격정이 차올랐다.
아버지에게서 등을 돌려선 안 됐는데. 살아남은 건 동생이었어야 했는데. 모두와 함께 끝까지 싸우다 죽었어야 했는데.
대체 무엇을 위해서 홀로 살아남았단 말인가?
이제 곁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일족도, 터전도, 부모님도, 동생도, 아무것도. 그런데 대체 무엇을 위해서······.
부스럭.
끝없이 아래로 가라앉던 몸이 덜컥 멈추었다.
퍼석. 찌지직.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감긴 눈꺼풀 사이로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아셸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물속이 아닌 숲속이었다.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살아는 있나 걱정했더니, 팔자 좋게 자고 있었군."
아셸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두 눈만 깜박거렸다.
얽혀있는 풀줄기를 털어낸 7군주가 손을 뻗었다.
"그만 일어나라."
아셸은 그 새하얀 손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마주 손을 뻗었다.
이제 무엇이 됐든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꼭 붙잡았다.
할루멘타 (5)
할루멘타의 어느 깊은 땅굴.
그것이 원통처럼 길고 거대한 아가리를 지상으로 쭉 뻗었다. 몸체에 박힌 수백의 눈들이 눈동자를 뒤룩거리며 사방을 훑었다.
그것의 주위로 날아든 새들이 말을 전하듯 시끄럽게 지저귀며 주위를 멤돌았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빠르게 진화하며 특히나 뛰어난 지성을 가지게 된 그 괴물은, 자신의 종속들을 죽이고 다니는 침입자의 존재를 인지했다.
아주 작디 작은 벌레 넷.
괴물은 그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주 가끔씩 외부에서 흘러들어오곤 하는 종잡을 수 없는 생물들.
어떤 것은 제 덩치에 맞게 나약하기 그지없다가도, 또 어떤 것은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품고 있기도 했다.
특히나 최근에 이 땅을 휩쓸고 다녔던 붉은 벌레는 그야말로 재앙과 다름없었다.
그 붉은 벌레에 대항해서 괴물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이 안식처에 숨을 죽이고 숨어있는 것뿐이었다. 벌레가 종속들을 마음껏 학살하다가 만족하고 떠나가기를 기다리며.
그오오.
그때의 화풀이를 하기엔 마침 적절한 먹잇감들이었다.
그것이 지상으로 거체를 일으켰다. 낮고 무거운 포효를 내뿜어 일대에 위치한 모든 종속들을 불렀다.
이윽고 사방의 지평선에서 시커멓고 거대한 물결들이 몰려왔다.
***
"몸은 괜찮나?"
"예, 괜찮습니다."
정신을 차린 뒤에도 아셸은 현실감이 마저 돌아오지 않았는지 잠시 동안 넋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몇 분 지나고 나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완전히 평소처럼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면목이 없습니다."
"됐다. 앞으로는 주의해라."
나는 식물 줄기 한쪽에 얽혀서 죽어있는 말들을 슬쩍 바라봤다.
아셸과 함께 덩달아 끌려갔다가 죽은 것이었다.
그녀가 살았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쟤들도 꽤 오래 함께한 말들인데. 짧게 명복을 빌어주었다.
이내 바닥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던 두 사람도 정신을 차렸다.
멍한 얼굴로 몸을 일으킨 여자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우리를 발견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죠? 저희가 언제 쓰러진 건가요?"
나는 축 늘어진 식물 줄기를 가리켰다.
그녀가 상황을 이해한 듯 탄성을 뱉었다. 그리곤 내 옆에 서있는 아셸을 발견하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동료는 무사히 구하셨군요? 다행이네요."
반면 남자는 썩 좋지 않은 표정으로 몸 상태를 확인하듯 살펴보다가 일어났다.
인지도 못한 채 당해서 쓰러졌으면 저게 보통 반응이었다. 여자 쪽이 이상한 거지.
아셸이 의아한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어쩌다 우연히 만난 자들이다. 모험가라고 하더군."
"아······."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도와줘서 고맙다. 찾고 있다는 몬스터에 대해서 말해봐라. 아는 게 있다면 알려주지."
내게 원하는 게 있기도 하니 돕겠다고 쫓아온 것일 터다.
어쨌든 두 사람 덕분에 몬스터에 대한 정보를 얻고 추적에 시간을 훨씬 단축한 건 사실이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들을 도와주기로 했다.
물론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알고 있는 몬스터면 기억나는 출몰 지역이라도 알려줄 생각이었다.
끼이익!
그때 하늘에서 날고 있던 새들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시끄럽게 울어댔다.
나는 슬쩍 놈들을 올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자꾸 주위를 얼쩡거리고 있는 것 같은데, 뭐지?
"예, 저희가 찾고 있는 건 생김새가 두꺼비와 닮은 몬스터인데······."
여자가 나서서 찾고 있다는 몬스터에 대해서 설명했다.
두꺼비라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데빌 토드?'
시커먼 전신에, 3갈래로 갈라진 혀를 가진 거대 독두꺼비. 레벨은 아마 70에 가까웠던가?
할루멘타에서 두꺼비형 몬스터라고 하면 생각나는 건 놈밖에 없었다.
"······온몸이 새카맣고 혀가 여러 개로 갈라진 놈이었어요. 어, 그리고 또 독을······."
"어떤 몬스터인지 알 것 같군."
내 말에 여자보다도 남자가 더 격하게 반응했다.
그가 눈을 크게 뜨고서 다급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 전에, 놈은 왜 찾고 있는 건지부터 물어도 되겠나?"
이유를 묻는 이유는 2가지였다.
하나는 단순한 호기심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데빌 토드. 할루멘타의 네임드 보스 중에선 최약체에 속하는 몬스터지만 그래도 일단 보스다.
게임에서도 유저의 독 저항력은 대부분 무시할 만큼 강력한 극독 공격을 하던 성가신 놈이었다.
아무리 남자의 레벨이 높더라도 놈을 상대하다 까딱 방심이라도 했다간 한 번에 골로 갈 것이었다.
남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소. 그저 놈을 죽이기 위해서요."
"어째서?"
"놈이 내 동생을 죽였으니까."
아······ 복수인가?
더없이 간단하고 명확한 이유였다.
근데 동생은 뭘 하는 사람이었길래 이런 마경을 돌아다니다가 죽은 거지?
그 의문은 이어진 여자의 말에 풀렸다.
"제 동료이기도 했죠."
"동료?"
"네. 다섯이서 마경이든 어디든 대륙 곳곳을 탐험했었어요. 녀석이 죽은 뒤로는 지금은 다 뿔뿔이 흩어져버렸지만."
그러고 보니 예전에 한창 마경을 돌아다니고 어쩌고 했었지.
남자에 비해 레벨이 낮을 뿐이지 여자도 결코 낮은 수준의 마법사는 아니었다.
59레벨이면 어지간한 대귀족가에서도 한자리 꿰찰 수 있는 실력이니까. 모험가 기준에선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또 마경을 함부로 돌아다닐 정도는 아닌데.'
내 눈빛에서 의아한 기색을 읽었는지 여자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워낙에 합이 잘 맞던 녀석들이라, 강한 몬스터를 마주쳐도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쓰러뜨릴 수 있었어요. 근데 그게 몇 번 반복되면서 자신감이 되고, 자신감이 쌓여서 자만이 되어버린 거죠. 그래서······."
뒷말은 굳이 잇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데빌 토드를 마주쳐서 끝내 그는 죽고 나머지만 살아남았다는 것이었다.
푹 한숨을 내쉰 그녀가 남자를 쳐다봤다.
"그렇게 반 년이 흘렀는데, 갑자기 녀석의 형이라면서 이 사람이 저를 찾아왔어요. 동생의 복수를 하려니까 할루멘타에 대한 정보를 달라고. 그래서 어찌어찌하다가 결국 이곳까지 함께 오게 된 거예요."
나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솔직히 더 궁금한 건 그의 정체였다.
여자와 마찬가지로 모험가인 것 같지는 않고, 평범한 신분은 아닐 텐데.
"아, 그리고 이 사람은 바르카토의 레인저 출신이었다고 해요."
······바르카토?
여자가 남자의 정체를 대신 밝혔다. 나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바르카토라면 세인테아의 남부 국경을 수호하는 레인저 집단의 최정예 전력 아닌가. 어쩐지 보통 레벨이 아니더라니.
남자가 멋대로 정체를 말한 게 못마땅한 듯 여자를 한 번 흘겨보고는, 내게 재촉하듯 말했다.
"이제 그 몬스터에 대해 아는 정보를 말해주시오."
뭐, 복수라는데 어쩔 수 없지.
내가 어떻게 말리거나 설득할 문제는 아닌 듯했다.
"그나마 놈이 출몰할 확률이 높은 지형이나 환경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다."
"······!"
"하지만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지 정확한 건 아니야. 그거라도 괜찮다면 알려주지."
"뭐든 상관없소. 알려주시오."
나는 그에게 데빌 토드가 서식할 만한 장소의 특징, 그리고 아예 지역을 직접 몇 군데 짚어주었다.
뭣 하면 기억나는 공격 패턴까지도 알려주고 싶었지만 게임과 현실이 얼마나 다를지는 알 수 없었다. 괜히 역효과만 날까봐 그건 관두기로 했다.
설명을 모두 들은 남자가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이오?"
그저 마주친 정도로는 알 수 있는 지식도 아니고 의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믿을지 믿지 않을지는 자유다."
딱히 둘러댈 말이 없었기에 그냥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침음을 흘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감사하오."
이것으로 서로에게 볼일은 끝이었다.
숲은 빠져나가야 했기에 그때까지만 마저 동행하기로 했다.
원래 말이 지고 다녔던 짐들은 아셸이 모두 짊어졌다.
숲길을 걷다가 여자가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요. 저는 체르시라고 해요."
그녀가 시선을 돌리자 남자도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켈립이오."
어차피 곧 헤어질 텐데 이제와서 굳이 이름을 주고받나 싶었다.
"론이다. 이쪽은 아셸."
체르시가 다시 물었다.
"론 경이셨군요. 여쭙기가 조심스러워서 이제야 여쭙는 건데, 경께선 누구신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모험가라고 했었는데."
그녀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그건 아무리 봐도 진짜 신분이 아니시지 않나요? 옆에 분도 지금 보니까 동료가 아니라 호위기사······."
내 대답이 없자 그녀도 더 묻지 않고 다른 질문들을 했다.
"그러면 아까 전에 마주쳤던 곰은 대체 어떻게 죽이신 건지 알려주세요, 네? 마력이 아예 안 느껴졌는데 마법은 아니죠?"
모험가라 그런가 호기심이 많은 여자였다. 눈치를 보면서도 물어보고 싶은 건 다 물어본다.
전부 대답하기가 애매했기에 그냥 적당히 무시했다.
그녀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더니 주제를 돌렸다.
"그런데, 어째 아까부터 새들이 저희 머리 위를 빙빙 도는 것 같네요. 기분 탓인가?"
나도 계속 거슬렸던 것이기에 슬쩍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까부터 어디론가 왔다거리면서 머리 위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새들. 왜 저럴까.
거의 숲 밖으로 빠져나왔을 즈음이었다.
초감각으로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
아니, 희미한 건 단지 거리 때문이었다.
멀리서부터 우르르 몰려오고 있는 그것은 아주 방대한 머릿수의 무리였다.
이내 땅의 진동까지 미세하게 느껴지며 다른 세 사람도 이상함을 인지했다.
"어······ 뭐죠? 땅이 진동하는데?"
그리고 이윽고 숲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 모두가 볼 수 있었다.
전방의 대지로 지평선을 따라서 펼쳐져있는 검고 거대한 선을.
그것은 이곳 할루멘타 마경의 수많은 괴물들로 이루어진 몬스터 대군이었다.
"······."
순간 저게 대체 뭔가 싶었다.
나는 황당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아니······ 진짜 저게 뭐야?
"······꿈인가?"
체르시가 넋을 놓은 얼굴로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
옆에서 아셸과 켈립은 심각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자세히 보니 몬스터들 사이에 눈에 띄는 놈이 하나 있었다.
아주 거대하고, 몸체 한가운데에 길고 두꺼운 촉수 같은 게 달려있는······ 그보다 괴상한 생김새는 둘째치고.
[Lv. 91]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놈의 레벨이었다.
91레벨.
권성과 동일한, 그리고 전에 루터스 산맥에서 만났던 벨르바고라보다도 1레벨이 더 높은 괴물.
'······아.'
나는 놈의 레벨을 확인하고서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저놈이었음을.
마경을 돌아다니면서 이해하기 힘든 몬스터 무리를 자주 조우했던 것도, 아까부터 머리 위에서 거슬렸던 새들도, 지금 눈앞에 펼쳐져있는 몬스터 군단도, 전부 놈의 소행이었음을.
'지배 능력.'
다른 몬스터들을 지배하고 자신의 노예처럼 부리는 능력.
현재 시점에서의 할루멘타에는 아무래도 지배 계열의 능력을 가진 네임드 보스가 존재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저게 뭔 미친 물량이야.'
놈이 거대한 촉수를 꿈틀거리며 이쪽을 향해 뻗었다.
촉수의 끝에서 곧 빛이 모여들더니 거대한 자색빛의 광구가 생성되었다.
여기까지 느껴지는 섬뜩한 마력의 기운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부동 장막을 최대한 넓게 펼쳤다.
번쩍!
시야가 완전히 빛으로 물들었다.
놈이 쏘아낸 마력포가 장막을 완전히 뒤덮은 것이었다.
빛이 가시고 다시 돌아온 시야에 보인 건 폐허가 된 주위였다. 등 뒤로 나무들이 우수수 무너지는 소리가 울렸다.
장막에 막힌 부분만 멀쩡하고 숲 한가운데가 지워진 듯 뻥 뚫려있었다.
"······무슨 정신 나간."
상황을 파악한 켈립이 맥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넋을 놓고 있던 체르시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바, 방금 막아주신 건가요?"
나는 대답 없이 저멀리 있는 놈을 빤히 응시했다.
방금의 일격이 아무래도 총공격의 신호였나 보다.
몬스터들이 일제히 포효를 터뜨리는가 싶더니 이쪽을 향해서 해일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도, 도망가죠! 빨리요!"
체르시가 하얗게 질려서 소리쳤다. 켈립은 왜 가만히 있냐는 듯 날 쳐다봤다.
"론 님."
아셸도 드물게 다급한 기색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일천의 머릿수가 넘는 마경의 몬스터 대군단. 저것과 정면으로 맞부딪혔다가는 뼛조각 하나 남기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도망칠 필요는 없었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경우라 좀 당황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내 눈에는 저것들 전부가 죽으려고 뛰어드는 불나방 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앞쪽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스으으.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혈액이 하늘 높이 떠올라 뭉쳐지며 구체를 만든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혈술을 펼쳐 피를 뽑아냈다.
점점 크기가 불어나는 시뻘건 혈구는 이내 내 몸통만큼이나 거대해졌다.
나는 그것을 최대한 압축한 뒤, 그대로 전방을 향해 전력으로 폭발시켰다.
퍼어엉!
허공에서 터진 무수한 핏방울들이 대지를 뒤덮은 괴물들을 향해 폭우처럼 쏟아져내렸다.
할루멘타 (6)
한순간 전방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쏟아지는 핏물 세례에 그렇게 된 것이다.
작고 가늘은 핏방울들이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뒤덮었다.
그리고 붕괴는 순식간이었다.
돌진해오던 몬스터들의 전열이 우르르 무너졌다. 서로 걸리고, 엉키고, 쓰러지고, 거칠게 지면을 뒹굴고 미끄러졌다. 자욱한 흙먼지가 퍼졌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단 몇십 초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
아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더 이상 살아서 움직이는 몬스터는 없었다. 무더기로 겹겹이 쌓인 시체들의 언덕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시간이 얼마나 주어지든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였기에.
'이건 대체······.'
도대체 이건 어떤 종류의 힘이란 말인가?
지금껏 7군주의 능력은 바로 곁에서 제법 많이 봐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오만한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아셸은 시선을 돌려 멍하니 7군주를 바라봤다.
손을 거둔 그는 무심한 눈으로 저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체들 너머, 촉수를 꿈틀거리며 다급히 움직이고 있는 거대한 괴물을. 마치 도망가는 모양새였다.
하찮다는 듯한 웃음을 흘린 7군주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는 저멀리 떨어진 허공에 있었다.
***
완전한 전멸.
저리 무식하게 떼거지로 몰려왔을 때부터 예정된 결과였기에 별 감흥은 없었다.
"······."
다만 아셸이나 다른 두 사람은 완전히 넋을 잃고 있었지만.
어째서 몬스터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인지, 내 능력을 전혀 모르는 타인의 시선으로는 눈앞에 대학살 현장을 이해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저 약아빠진 새끼 보게.'
나는 촉수를 꿈틀거리며 열심히 도망가고 있는 대장 몬스터 놈을 바라봤다. 부하들이 전부 죽자마자 바로 줄행랑인가?
나는 공간 도약을 연달아 펼쳐 놈과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그으으!
놈이 다급한 기색으로 또다시 촉수에서 마력구를 뭉쳐냈다. 이번엔 광선처럼 쏘지 않고 통째로 던졌다.
나는 공중에서 부동 장막을 펼쳤다.
장막과 충돌한 광구가 그대로 폭발했다. 가공할 위력이었으나 장막의 방어력을 뚫기엔 어림도 없었다.
섬광이 가시자마자 곧바로 혈술을 펼쳐 길쭉한 가시 형태로 만들어냈다.
아직 거리가 멀지만 피를 맞출 정도까지는 가까워진 상태였다.
허공을 가르고 쏘아진 핏물이 놈의 거대한 몸체에 적중했다.
쿠우웅!
요란스런 굉음과 함께 쓰러진 놈의 모습을 확인하고서, 나는 지면에 사뿐히 착지했다.
주위는 몬스터들의 시체 밭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잠시 둘러보고 있다가 괜히 입맛을 다셨다.
이만한 몬스터 군단을 학살하고도 경험치 하나 얻을 수 없다는 현실에 새삼 아쉬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죽인 놈들이 얼마인데, 만약 레벨업이 가능했으면 지금쯤 몇 레벨이었을까.
다시 공간 도약을 해서 쓰러진 대장 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나저나 이런 놈이 왜 몇 년 뒤에는 할루멘타에 네임드 보스로 없었을까.
떠오르는 이유야 많았다. 더 강한 몬스터에게 당했거나, 아니면 외부에서 온 초인에게 죽었거나.
특히 광랑이 마경으로 사냥을 많이 다니기도 하니 어쩌면 그녀에게 걸려서 죽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내 내가 있는 곳으로 아셸이 달려왔다.
다른 두 사람도 어느새 근처로 와있었다.
몬스터들의 시체 사이에서 무언가를 빤히 살펴보고 있길래 뭘 보고 있나 했는데, 거대한 두꺼비 몬스터의 시체였다.
'······어.'
잠깐만, 저거 설마?
나는 그들의 옆으로 다가가서 같이 몬스터의 시체를 바라봤다.
데빌 토드. 두 사람이 복수를 위해 찾고 있었다는 몬스터.
아무래도 이놈도 지배에 걸려서 몬스터 무리 사이에 섞여있었던 모양이다. 일이 또 이렇게 되네.
"······이놈이 맞아요. 죽었네요."
체르시가 중얼거렸다.
켈립은 대답 없이 놈의 시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허무함을 포함해서 복잡한 감정들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조금 무안한 채로 서있는데, 그가 이내 내게 시선을 돌려서 말했다.
"내 손으로 직접 죽이지 못한 건 아쉽지만······ 감사하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체르시도 어딘가 시원섭섭한 얼굴로 데빌 토드의 시체를 쳐다봤다.
다소 허무하긴 하겠지만 이걸로 깔끔하게 마경을 떠나는 게 그들에게도 좋은 일일 것이었다.
서걱.
다시 이리저리 시체를 살펴보던 켈립이 놈의 발가락 끝부분을 조금 베어내더니, 그것을 허리춤의 가죽 주머니에 넣었다.
저걸 왜 챙기나 싶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뭐, 동생의 원수라니 묘에라도 가져가려는 걸 수도 있지.
어쨌든 이걸로 전부 끝이었다.
이곳에서의 볼일은 진작 끝났었지만 아셸이 실종되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됐다.
이번에도 참 이것저것 일이 많았다. 정작 얻어야 할 신비는 못 얻었는데.
***
체르시와 켈립, 두 사람도 목적을 이뤘기에 더 마경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방향이 같으니 밖으로 나갈 때까지는 동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헬루멘타를 빠져나온 뒤 작별을 나눴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론 경! 그리고 아셸 경도! 정말로 감사했어요!"
체르시가 활기차게 손을 흔들었고, 켈립도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마지막으로 짧은 감사를 전했다.
나와 아셸은 다시 둘이 되서 이동했다.
말을 잃어버린 탓에 올 때와는 다르게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초재생 덕분에 체력이야 남아돌기에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그렇게 부지런히 이동하며 긴 시간이 흐른 끝에 바로스가 기다리고 있는, 가장 처음 출발했던 도시로 돌아왔다.
히히힝!
달리는 마차 안에서 언제나 그랬듯 창밖 경치를 구경했다.
이것으로 신비 찾기 여정도 끝이다. 이제 7군주령으로 돌아갈 때였다.
하나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계획대로 얻었기에 만족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 신비는······ 역시 아쉽네.'
나는 끝내 할루멘타에서 얻지 못한 마지막 신비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신의 육체를 버리고, 조건이 맞는 타인의 몸을 빼앗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신비.
한마디로 빙의 능력이다.
다만, 단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버린 자신의 육체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다는 패널티는 있었지만.
나한테 있어선 별 쓸모도 없을 그 신비를 얻으려고 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그 신비를 통해 미래에 거대한 재해를 일으킬 빌런이 하나 존재했으니까.
나는 라사의 메인 스토리를 전부 클리어했다.
당연하게도 그 과정에서 큰 문제들을 일으킬 주요 빌런들의 존재 역시 모두 알고 있었다.
다만, 다른 빌런들과 다르게 '놈'은 성가시게도 그 빙의 능력으로 자신의 망가진 몸을 바꿔버린 놈이었다.
때문에 그 전에는 어떤 몸이었는지, 또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유일하게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신비를 미리 선점해서 아예 문제를 원천차단시키려고 했었던 건데······.
'어쩔 수 없지.'
나는 깔끔하게 미련을 털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어쩌겠나.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앞으로도 계속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
마차는 달리고 달려 1군주령, 3군주령을 거쳐 6군주령까지 도착했다.
1군주령에서 대군주령을 관통해 바로 7군주령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발킬로프에 대한 소식을 한번 확인하고 싶었기에 일부러 3군주령을 거쳤다.
"후우······."
그렇게 해서 현재 위치는 6군주령의 수도인 마헤아.
나는 여관 방의 창틀에 서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음 군주 회의까지는 몇 달의 시간이 남았다. 군주성으로 돌아가고 나면 뭐부터 해야 되나 고민 중이었다.
세인테아로 넘어갈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것까진 촉박하고, 이제 다음 회의까지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었기에.
그때 거리에서 소란이 일었다.
나는 고개를 내렸다.
웬 남자가 한 어린 소년의 멱살을 붙잡고서 윽박을 질러대고 있었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소매치기를 당할 뻔한 걸 잡은 모양이었다. 주위의 행인들이 힐끔거리며 그들을 쳐다봤다.
"어이, 무슨 일이야?"
그때 무장한 병사 둘이 그들을 향해서 다가왔다.
소년의 멱살을 잡고 있던 남자가 조금 움츠러든 기색으로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히죽 기분 나쁜 웃음을 짓더니 소년을 쳐다봤다.
"어이구, 소매치기라고? 비켜보쇼. 이런 몹쓸 버러지한테 그리 말로만 해서 되겠나?"
그리고는 남자를 밀치더니 갑자기 창대를 휘둘러 소년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병사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라는 듯 쓰러진 소년을 가차없이 구타하기 시작했다.
"악, 아악······!"
병사의 발길질에 밟힌 소년의 팔에서 우득 소리가 났다. 소년이 더 큰 비명을 내질렀다.
지나치게 가혹한 손속에 오히려 소매치기를 당한 남자도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봤다.
주위 행인들도 다들 쉬쉬하며 병사들을 피해서 가던 길을 갈 뿐이었다.
나는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윗물이 썩으면 아랫물도 저렇게 썩어버리는 법이다.
폭왕이 다스리고 있는 이곳 6군주령의 치안이란 대체로 저런 꼬라지였다.
뒷골목의 양아치마냥 여행객들의 돈을 털거나, 처벌을 가장해 폭력을 행사하며 즐긴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도 그랬었지.
그렇게 병사들은 몇 분 가량을 실컷 소년을 짓밟고 난 뒤에야 떠나갔다.
"으, 으으······."
온몸이 흙먼지에 피투성이가 된 소년이 바닥을 꿈틀거렸다. 물론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걸 도와줄까 말까 고민하고 있자니, 그때 한 지나가던 노인이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난쟁이처럼 작달막한 체구에 주황색의 수염이 성성한 노인.
그가 소년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혀를 차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그의 부러진 팔에 꼴꼴 붓기 시작했다. 포션이었다.
그렇게 노인은 소년을 치료해주고서 곧장 다시 가던 길을 가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소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등에 연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보였다.
"······."
그 일련의 광경을 조금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봤다.
이 세계에서 포션은 질이 낮은 하품이라도 귀하다. 그런 포션을 남에게 선뜻 베풀어줄 수 사람이란 보기 드문 선인이었다.
멀어져가던 노인은 이내 어느 골목 안으로 들어가서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거리 구경을 관두고 침대에 누웠다.
한참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머릿속에 번뜩하고 무언가가 스쳤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서 튕기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그 노인, 설마?
개성이 강한 외모였기에 나는 이내 곧바로 노인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작게 탄성을 뱉었다.
'그 사람이 왜 이 도시에 있지?'
지금 시점에서의 그는 6군주령의 수도에 있었단 말인가?
전혀 예상치 못한 거물의 발견이었다.
잠시 어쩔까 고민하다가, 서둘러 방 한쪽에 걸려있던 로브를 뒤집어쓰고 여관 밖으로 나섰다. 아셸을 놔두고 혼자서.
나는 거리로 나서서 노인이 들어갔던 골목으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가서 이어진 길로 쭉 이동하니, 이내 저멀리 있는 포션 가게의 간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인가 싶어 다가가려는데 옆쪽으로 난 샛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거기! 잠깐 멈춰봐!"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아까 거리에서 봤던 병사 두 놈이 나를 향해 건들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리프리곤 (1)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병사들이 나를 이리저리 훑어봤다.
그러더니 곧 능청스레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너 뭐야? 수상한데? 대낮에 로브를 뒤집어쓰고 이런 골목을 돌아다니고 있나?"
······뭐라는 거야?
로브 후드 좀 올렸다고 수상하다니,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다가 이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설마 지금 삥뜯는 거여?'
다른 군주령에 비해서 특히나 여러모로 막장인 6군주령이었다.
치안을 유지해야 할 병사들이 행인들의 돈주머니를 터는 것쯤은 이곳에선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병사 중 한 놈이 야비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서 손을 흔들거렸다. 다른 한 놈은 조금 떨어진 뒤에서 위협하듯 창을 까닥거렸다.
"조용히 지나가고 싶으면 성의 좀 보이지 그래. 아니면 어디 몇 군데 얻어맞고 우리랑 함께 가든가."
그냥 대놓고 하는 강도질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 자식이 쪼개고 있네? 지금 장난 같냐?"
놈들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무시하고서 위쪽을 둘러봤다.
내 능력에는 중간이 없어서 죽일 게 아니라면 이것들을 적당히 제압할 방법이 없었다.
마경에서 몬스터들을 그렇게 학살하고 다녔으면서 20레벨도 안되는 병사 두 놈 제압하지 못하는 처지가 레전드네.
아무리 그래도 죽이긴 그렇고, 대충 공간 도약으로 건물 위로 올라가서 빠져나가려고 할 때였다.
"어이."
또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막 향하려던 포션 상점에서 나온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허리춤에 검을 메고 있는, 얼굴에 사선으로 길쭉한 칼자국이 난 단발의 여인. 한 손에는 막 구매해서 나온 것인지 포션 한 병이 들려있다.
그녀의 모습을 본 병사들이 어째서인지 움찔 놀라며 물러섰다.
그녀가 그런 놈들과 나를 한 번 번갈아 보고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꺼져, 병신들아."
병사들에게 한 말이었다.
그에 한 놈이 욱한 표정으로 뭐라 입을 열려고 했으나, 동료가 다급히 말렸다.
"야, 야······ 가자."
두 놈은 여인을 노려보는 것밖에 못한 채 이내 도망치듯 옆쪽의 샛길로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놈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씨발, 기껏해야 노예 나부랭이인 년이 건방지게······."
······노예?
나는 말 한마디로 병사들을 쫓아내버린 여인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시선도 주지 않고 곧장 옆을 지나쳐서 가던 길을 마저 가버렸다. 뭐지?
일단 도와준 것 같은데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홱 가버리니 좀 황당하다.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신경 끄고 나도 마저 갈 길을 갔다. 그녀가 나온 포션 상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간판이 걸린 낡은 나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밖에서 본 외관처럼 낡았지만 깔끔히 정돈된 분위기였다. 다만 냄새는 뭔가 이것저것 섞인 매캐한 냄새가 났다.
여기저기 진열되어 있는 갖가지 색의 포션들. 알키마스 공방에서 봤던 풍경이 떠오른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자니 이내 구석에 있던 진열대 안쪽에서 노인이 걸어나왔다. 찾고 있던 노인이었다.
'제대로 맞게 찾아왔네.'
그가 나를 슬쩍 쳐다보고는 계산대의 의자로 다가가서 털썩 앉으며 말했다.
"못 보던 손님이군. 어떤 포션을 구매하려고 오셨나?"
나는 잠시 고민하고 대답했다.
"일단 좀 둘러보고."
"편한대로 하시게."
노인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책상 위에 있던 담뱃대를 집어들었다.
서랍에서 잎파리를 꺼내 채워서 불을 붙이고는 입에 물고 뻑뻑 피워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노인을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진열대의 포션들을 훑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일단 둘러보겠다고 한 건, 그와 어떻게 대화의 장을 열어야 하나 신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연금술사 굴피로.'
현시대의 대륙에서 가장 명망 높은 대연금술사 중 하나.
그리고 무려 엘릭서, '디페리의 성혈'을 제작해낸 인물.
그것이 바로 노인의 정체였다.
그가 어째서 이런 인적 드문 골목에서 낡은 포션 상점이나 운영하고 있는지는, 현시점에서의 그의 처지가 어떨지 알기에 대충 예상이 됐지만······.
생각을 정리한 나는 다시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른한 얼굴로 담배연기를 뿜고 있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주인장, 이 가게는 얼마나 운영했지?"
그가 미간을 좁혔다.
"거 젊은 놈이 말을······ 이제 대충 1년 정도 됐지, 왜?"
1년이라.
나는 다시 물었다.
"주인장은 이름이 뭔가?"
"내 이름? 플레온. 그건 알아서 어디에 쓰시게."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명이 아닌 진짜 이름을 묻는 것이다."
그 말에 순간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노인이 풍기고 있던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대신 위압감으로 채워졌다.
그가 물고 있던 담배를 내려놓고 정색한 채 나를 쳐다봤다.
"누구냐, 네놈은?"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7군주."
"······뭐?"
노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위협할 생각은 없다. 잠시 그대와 대화를 나누고 뿐이다, 연금술사 굴피로."
그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가게 창밖을 슬쩍 쳐다봤다. 그 모습에 말을 덧붙였다.
"혼자서 왔다."
"······정말 당신이 7군주요? 이번에 새로 즉위했다는?"
"그래."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고?"
"아니라면 칼데릭에서 군주의 이름을 사칭하는 미치광이인 거겠지. 조금안 알아봐도 드러날 사실을 거짓말할 이유가 있나?"
노인, 굴피로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는 물어봐야 의미도 없겠지. 이유가 뭐요?"
왜 자신을 찾아왔냐고 묻는 것이었다.
"엘릭서라도 만들어달라고 할 셈이면 관두시오. 이제는 못 만드니까."
"아니다."
"아니면 영입을 할 생각이신가? 날 죽이겠다고 협박해도 소용없으니까 그것도 관두시고."
"그 또한 아니다."
무려 엘릭서로 인정받을 정도의 신약을 제작한 전적이 있는 인물이다.
당연히 영입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나는 딱히 그것을 목적으로 이 사람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대연금술사 굴피로.
그는 라사의 메인 스토리에서도 아군 진영에 중요한 때에 한 번 큰 도움을 주는 강력한 조력자로서 등장했었다.
아까 길거리에서 소년을 돕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선인이기도 했고.
그렇기에 굳이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게 아니더라도, 그의 신변이 위험하지 않게 보호할 수 있다면 보호해주는 게 좋았다.
왜냐면 지금 그는 아마······.
"세인테아의 눈을 피해서 칼데릭까지 온 거겠지."
굴피로가 쯧 혀를 찼다.
"뒷조사야 이미 다 했을 거면서 뭘 물으시나?"
그는 본래 세인테아 진영에 속해있던 인물이었다.
세인테아에서 가장 거대하고 위세 높은 마법사 집단인 마탑.
본래 그곳에 속해있던 연금술사인 그는 어떠한 이유로 마탑과 황실에 배신을 당했다. 엘릭서와 관련된 문제였다.
그리고 목숨만 건져 겨우겨우 추적에서 벗어난 그는, 몇 년 뒤 미래에선 이곳 칼데릭이 아니라 남대륙의 땅에 있었다.
나는 궁금해져서 물었다.
"굳이 6군주령의 수도에 자리를 잡은 이유가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성향상이나 다른 여러가지 것들이나, 이곳 마헤아는 자리를 잡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폭왕의 군주성이 떡하니 있고 매일마다 '노예 검투'까지 벌여대는 도시였으니까.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사정이 있어서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소. 안 그래도 가능하면 바로 뜰 생각이오."
"그럼 7군주령의 수도로 오면 되겠군."
나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말했다.
굴피로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영입할 게 아니라고 하지 않으셨소?"
"영입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내가 다스리는 땅으로 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나는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다, 굴피로. 그저 세인테아의 추적으로부터 그대의 신변을 완전히 보호해주고 싶을 뿐이야."
그가 점점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게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신변을 보호해주겠다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다른 누구도 아닌 무려 군주가, 아무런 대가도 원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보호해주겠다니.
그에게 있어서는 당연히 믿을 수가 없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전부 사실인데.
"일단 이것부터 알아둬라, 굴피로."
나는 솔직하게 내 생각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굴피로쯤 되는 인물에게 어설픈 이유를 갖다붙이기는 통하지 않을 테니.
"그대는 이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연금술사 중 한 명이다. 그런 인물이 세인테아에 등을 돌리고 칼데릭에 왔는데, 이 땅에 머물고 있게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이득이지. 칼데릭이 너의 안위를 챙기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당신들과 손을 잡을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해도?"
"그래, 생각이야 나중에도 얼마든 바뀔 수 있는 법이니까. 솔직히 말하면 호감 사기라고 여겨도 좋다."
나는 굴피로의 성향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게임의 메인 스토리에서도 그리 크지 않은 사소한 빚 하나 때문에 유저 일행을 끝까지 도와줬었다.
한마디로 뭘 받기만 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때문에 지금 당장 나와 손을 잡을 생각이 없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그를 곁에 두고서 지속적으로 호감도를 쌓으면 언젠간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으니까.
"······호감 사기라, 허."
굴피로가 헛웃음을 흘렸다.
"칼데릭의 군주나 되시는 지고한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도 단순히 대륙적인 명성만으로는 군주에 못지않은 인물이었다.
단지 일신의 무력이 부족한 연금술사기에 이렇게 세인테아의 눈을 피해 숨어서 사는 신세가 된 것이지.
"이거 좀 마저 펴도 되겠소?"
굴피로가 내려놓은 담뱃대를 가리켰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생각에 잠긴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며 잠시 연기만 뻑뻑 피워대더니, 곧 입을 열었다.
"대군주도 내 존재를 알고 있소?"
"아니."
"그러면 6군주는?"
"그 역시 모른다."
그에 굴피로가 어째서인지 작게 침음을 흘리고는 말을 이었다.
"만약 7군주령으로 가면 설마 군주성에서 머물러야 되는 것이오?"
"거처야 원하는 곳으로 얼마든 마련해주지."
순간 머릿속에 알키마스 공방이 떠올랐다.
굴피로와 그녀를 은근히 접촉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스칼릿은 재능 있는 연금술사고, 그런 그녀가 굴피로에게 조금이라도 연금술을 배울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테니까.
다시 생각에 잠긴 듯 굴피로는 말없이 한참을 담배만 태웠다.
그리고는 몇 분이 지난 뒤에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7군주 그대의 말대로 엔록으로 가지. 어차피 거절해도 내 주위에 눈은 계속 붙여둘 것 아니오."
······음,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하지만 내 제안을 수락한 데에 그것까지도 고려한 듯했으니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잘 생각했다고 말하려는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단, 그 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소."
리프리곤 (2)
······조건?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연금술 연구에 필요한 재료라도 구해달라고 하려는 건가?
그러나 이어진 말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사람 한 명을 좀 구해줬으면 하오."
"······사람?"
"이 도시에서 벌어지는 악티폴의 노예 검투에 대해 아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모를 리가 있나.
'근데 갑자기 그건 왜?'
굴피로가 한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 도시에 정착했을 즈음부터 꽤 친하게 지낸 자가 하나 있소. 작은 과일 노점상을 운영하던 밴이라는 젊은 놈인데, 최근에 얼굴 비추는 일이 없어서 알아보니 도시의 대부업자들한테 빚을 못 갚고 끌러갔다더군."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였기에 나는 눈만 깜박거렸다.
"이미 악티폴 쪽에 노예로 팔려서 경기에 출전하게 될 것 같다고 하던데, 7군주께서 그놈을 구해줬으면 하오. 부탁드리겠소."
방금 전보다 좀 더 정중해진 말투로 부탁하는 그였다.
나는 턱을 긁적이며 물었다.
"갚아야 할 빚이 좀 큰가?"
"이자를 얼마나 붙여먹은 건지 30골드가 넘었다더군. 악티폴을 찾아가보니 놈들은 몸값을 거기서 또 배로 부르고 있고. 그래서 제대로 된 포션이라도 하나 제작해야 되나 고민하고 있던 차였소. 내가 지금 재산이랄 게 거의 없는 빈털털이 처지라."
이게 무슨 말인가 잠시 알아듣지 못했다가 이내 이해했다.
상품의 포션을 제작해서 그 잡혀갔다는 남자의 몸값을 대신 지불해주려 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던 차에 내가 찾아온 거고.
'······조금만 늦었으면 곤란할 뻔했잖아?'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내가 기가 막힌 타이밍에 굴피로를 찾아왔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지금은 그냥 적당한 포션들이나 만들며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가 정말 제대로 된 포션을 제작해서 판매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이 수도의 권력자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엔 정체까지 탄로날 수도 있는 일이다.
그가 멀지 않은 미래에 이곳에 계속 남아있지 않고 남대륙으로 이동했던 것도 어쩌면 이번 일과 관련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어려울 건 없는 일인데.'
주머니에 썩어나는 게 돈이었다. 몇십 골드쯤이야 푼돈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돈으로 안 되는 일이라고 해도 권력으로 얼마든 해결할 수 있었고.
단지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알겠다. 바로 데려오도록 하지."
"고맙소."
나는 일단 흔쾌히 대답했다.
그리고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눈 뒤, 대화를 마무리하고서 가게를 빠져나왔다.
***
폭왕이 다스리는 6군주령.
특히 수도인 마헤아는 그의 악명답게 여러가지 패악과 부패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하나를 꼽자면 바로 노예 검투였다.
'저기군.'
여관으로 돌아간 뒤, 아셸과 함께 곧장 다시 밖으로 나서서 향한 곳은 도시의 서쪽이었다.
나는 저멀리 보이기 시작한, 대로와 건물들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세워져있는 거대한 건축물을 바라봤다.
악티폴.
마치 콜로세움처럼 생긴 저 거대한 경기장을 부르는 이름이다.
무장한 노예 검투사들이 출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는, 오로지 승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죽음의 경기.
주위에는 경비를 서고 있는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악티폴 안으로 출입하고 있는 많은 행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도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인지 경기장 안에서는 관중들의 시끄러운 환성과 야유가 뒤섞여 울려퍼지고 있었다.
"쯧."
나는 작게 혀를 찼다.
게임에서도 악티폴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특히 그 스토리가 어두웠었다.
그렇기에 저 안에서 지금 얼마나 처절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을지 안 봐도 훤히 보였다.
목숨의 무게가 한없이 가벼운 세계였고, 특히 이 마헤아 시는 더더욱 그렇다.
저들에게 있어 노예들의 처절한 사투는 그저 한순간의 여흥일 뿐이고, 도박으로 한탕 크게 따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나는 마저 걸음을 옮겼다.
지금 향하고 있는 목적지는 경기장이 아니라 그 옆에 붙은 노예 수감소 건물이었다.
굴피로가 말했던 대로면 그 밴이라는 남자는 지금쯤 저곳에 갇혀있을 테니까.
'일단 돈으로 해결을 봐보고.'
좀 염려되는 건 저쪽에서 자꾸 몸값을 올려치려 하거나, 아예 강짜를 부리며 안 팔겠다고 나오는 경우인데.
그럴 경우에는 그냥 권력으로 찍어누르면 그만이긴 했지만 이게 또 애매했다.
내가 7군주라고 정체를 밝히면 당연히 군주성에 있을 폭왕의 귀에도 순식간에 들어갈 테니까.
내가 이 도시에 있다는 게 놈에게 알려지는 건 웬만해서 피하고 싶었다. 혹시 날 만나겠다고 직접 찾아올지도 모르니.
지금 이렇게 로브까지 입고 다니는 이유도 혹시나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그런 것이었다. 7군주령과 바로 이웃한 6군주령이었으니까.
'폭왕 발테거.'
나는 잠시 놈에 대해 떠올렸다.
놈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아주 많으면서도 하나같이 간단했다.
쓰레기, 말종, 폭군, 악마, 괴물, 그리고 밖에도 기타 등등······.
놈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대로만 행동하며, 타인의 고통을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즐기는 최악의 흡혈귀다. 노예 검투장 악티폴이 세워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고.
이 라사 세계관에는 수많은 빌런들이 존재하지만, 그중에 가장 원초적으로 역겹고 추악한 놈을 꼽으라면 그건 폭왕이었다.
"······."
그러고 보니, 놈에 대해 생각하니 문득 또 다른 인물 하나가 떠오른다.
사실 폭왕은 다른 군주들보다 여러모로 주의를 기울여 지켜봐야 할 놈이기도 했다.
그냥 단순한 쓰레기라면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놈의 정도를 한참 벗어난 악인이긴 해도 어쨌든 같은 군주로 있는 이상 딱히 나에게 해가 될 건 없었으니까.
단지 이유는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라사의 메인 스토리에서 다른 중요한 인물 하나와 아주 깊이 엮여있었기 때문이다.
'살귀 리프리곤.'
7군주좌의 본 주인.
지금은 어쩌다 내가 차지하게 된 7군주좌에 본래 앉았어야 할 인물.
게임 플레이 시점에서, 그러니까 몇 년 뒤 시점에서의 칼데릭의 7군주는 바로 그였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왜냐면 게임에서도 그에 대한 정보는 나온 게 아예 없다시피했기 때문이다. 군주씩이나 되는 거물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가면을 쓰고 다녔기에 얼굴조차 드러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리프리곤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라고는 인간 남성이라는 것, 한마디로 종족과 성별 정도였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가 폭왕에 대해 엄청난 복수심과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
심지어 메인 스토리에서도 세인테아 테러 에피소드 중 폭왕을 무참히 살해한 뒤 허망하게 자폭해버렸기에, 그에 대한 자그마한 뒷배경조차 하나 나오지 않았었다.
'그래서 유저들 사이에서도 라사 최대의 미스테리 중 하나로 꼽혔었지.'
따로 배경 스토리도 안 풀 놈은 대체 왜 군주로 만들어놓은 거냐고 운영진 욕도 엄청 했었고.
혹시 리프리곤과 관련된 히든 피스라도 숨겨져있는 건가 찾아다닌 유저들도 한가득이었지만 결국 발견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굳이 리프리곤뿐이 아니더라도, 라사의 메인 스토리에는 이런저런 시원찮게 풀리지 않은 부분들이 많았기에 유저들의 원성을 많이 사긴 했었다.
어쨌든 그래서 폭왕은 앞으로 계속 신경을 써야 될 놈이기는 했다.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모르는 리프리곤의 존재 때문에.
그 정체 모를 괴물이 미래에 어떤 변수가 될지 모르니 신상 파악은 가능하면 해두는 게 이로운 것이 당연했다.
'일단은 굴피로부터 데려가는 일에 집중하고.'
잡생각을 마치고 다시 해야 할 일로 신경을 돌렸다.
수감소 건물로 향하는데 근처에서 고함이 울려퍼졌다.
"······어, 저거 저놈!"
경기장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던 한 병사 무리였다.
병사들 중 하나가 날 가리키며 소리치더니 이쪽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또 뭔가 싶어 인상을 찌푸리는데, 자세히 보니 아까 전에 골목에서 마주쳤던 그놈들이었다.
"뭐야? 뭔 일인데?"
"아니, 아까 골목에서 마주친 놈인데······."
한 놈이 동료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다른 한 놈은 띠꺼운 미소를 입에 건 채 내 앞에 섰다.
"너 이 새끼, 잘 걸렸다. 아까는 잘도 그렇게 빠져나갔지?"
······아, 바쁜데 짜증나게 구네.
놈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했다.
그에 아셸이 나서서 놈의 팔목을 덥썩 붙잡았다.
"뭐, 뭐야? 이거 안 놔?"
놈이 붙잡힌 팔목을 빼내려고 발버둥쳤지만 될 리가 없다.
나는 고개를 까닥였다.
"치워라."
그에 아셸이 가볍게 옆으로 밀어버리자 놈이 한순간 붕 떴다가 비명을 내지르며 요란스레 땅바닥을 굴렀다.
다른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창을 치켜들었다.
어째 판에 박힌 삼류 빌런 같은 모습들에 괜히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이것들 진짜 뭐 하냐?
"가, 감히 병사를 공격······."
"무슨 소란들이냐!"
그때 또 여기로 다가오는 새로운 인물이 있었다.
경갑으로 무장하고 있는 기사처럼 보이는 남자였다.
저벅저벅 이쪽으로 다가온 그가 병사들을 둘러보고는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병사를 공격한 걸로 보이는데,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
나는 귀찮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데 왜."
"그런데 왜? 마헤아에서 감히 군권에 저항한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나?"
기사가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린 채 검을 뽑아들었다.
"두 연놈 모두 순순히 투항하고 따라오도록. 아니면 바로 즉결 처형하겠다."
얼씨구······.
진짜 이 도시가 아주 개판이긴 하구나 싶었다.
살기까지 뿜어내는 게 놈은 말에 따르지 않으면 진심으로 죽일 생각인 듯 싶었다.
소란에 주위에 인파가 조금 몰려들었다.
방금 아셸에게 던져져서 날아간 놈은 기사의 눈치를 보며 우리를 향해 꼴 좋다는 듯 조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이 병신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생각하다가, 순간 미간을 좁힌 채 옆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
그럴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부터 거대한 기운 하나가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곧 경기장 입구로 이어지는 길에 모습을 드러낸 건 두 남녀의 모습이었다.
흑발에 적안을 지닌 거구의 남자, 그리고 그 뒤쪽에 붙은 수행원으로 보이는 여인.
[Lv. 94]
나는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고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썅, 마주치기 싫었는데 하필······.
"······!"
일대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남자의 등장에 경기장 주위를 지나다니던 행인들이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나한테 검을 겨누고 있던 기사 놈 역시 마찬가지였다.
놈은 검을 떨어뜨리고서 허겁지겁 무릎을 꿇은 뒤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6군주 폭왕.
모두가 바닥에 납작 엎드린 가운데 서있는 사람은 나와 아셸뿐이었다.
"미, 미친놈. 뭘 하는 거냐? 6군주님이시다! 어서 무릎을 꿇어!"
나를 힐끗 올려다본 기사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외쳤다.
나는 무시하고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폭왕을 빤히 응시했다.
이내 바로 근처까지 가까이 다가온 놈이 걸음을 멈춰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폭왕이 씨익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거 깜짝 놀랐군. 6군주령에는 무슨 일로 왔는가, 7군주?"
리프리곤 (3)
자그마한 딸꾹질 소리가 울렸다.
내 옆쪽에서 바짝 엎드리고 있던 기사와 병사들 사이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폭왕의 발언에 그의 곁에 있던 수행원이 화들짝 놀란 기색으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서 아셸도 잠시 머뭇거리다가 폭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서 입을 열었다.
"잠시 볼일이 있어서."
"그래? 수도에 직접 걸음할 거였으면 연락이라도 하지 그랬나. 그럼 아주 성대히 맞이했을 텐데 말이야."
놈은 마치 오랜 벗이라도 대하듯 친근한 투로 말했다.
방문 목적에 대해서는 다행히 자세히 안 묻는 건가.
폭왕이 입가에 미소를 건 채 옆쪽의 기사와 병사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나저나 뭔가 실랑이가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게 무슨 상황일까?"
그들의 몸이 덜덜 떨렸다.
나를 향해 엉거주춤 몸을 돌린 기사가 바닥에 다시 한 번 머리를 쿵 박았다. 그리곤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더듬대며 말했다.
"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무지함에 감히 위대하신 분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부디 자비를······."
나는 그 모습을 빤히 내려다봤다.
그때 폭왕이 클클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눈웃음을 지은 채 그들을 내려다봤다.
"그래그래, 어쩐지. 웬 벌레들이 7군주 자네한테 무기를 들이밀고 있길래, 나는 또 내 눈이 잘못된 줄 알았지 뭐야."
쫘아악!
섬뜩한 파육음과 기사의 몸이 몇 갈래로 분리되었다.
이어서 뒤쪽에 엎드린 병사들까지도 전신이 무참히 찢겨나갔다.
시뻘건 선혈이 흩뿌리고 시체 조각들이 바닥을 뒹군다. 그 광경에 아셸이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내 대신 사과하지, 7군주. 귀한 손님에게 실례가 많았어."
마치 벌레라도 내쫓듯 폭왕이 휘두른 손짓에 여섯은 그렇게 갈기갈기 찢긴 고깃덩이로 변모했다.
나는 속으로 탄식하며 대수롭지 않게 손을 거두는 놈을 바라봤다.
'미친놈······.'
원래 이런 놈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보니 진짜 또라이 새끼가 따로 없었다.
거리 한편에 한순간에 일어난 참극.
하지만 주위에선 터져나오는 비명 하나 없다. 엎드려있던 행인들 중 몇몇은 입을 틀어막고 간신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마치 자그마한 숨소리라도 내면 지금 널브러진 주검들과 똑같은 꼴이 될 거라는 걸, 모두가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으, 우으······."
그때 한쪽에서 작은 소리가 울렸다.
한 어린아이가 입을 비집고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한 것이었다.
그에 아이를 끌어안고 있던 모친으로 보이는 여인이 하얗게 질렸다. 그 작은 입을 틀어막고서 아이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간절한 목소리로 빌기 시작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제발······."
······더 지켜보고 있기 힘든 광경이다.
나는 입꼬리를 올린 채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는 폭왕을 말로 붙잡았다.
"사과는 받는 걸로 치고 이쪽도 부탁 하나 하지, 6군주."
다시 내게 시선을 돌린 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탁? 무슨?"
"저 수감소에 있는 노예 한 명을 데려가고 싶은데."
아······ 이놈한테 내 목적을 꺼내기는 별로 안 내켰는데.
다급하게 관심 돌릴 이야기를 찾다 보니 이게 튀어나왔다.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놈에게 부탁해서 후딱 데리고 빠져나가야겠다. 별 것도 아닌 일인데 들어주겠지.
놈이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호, 노예를 구하려고 이곳까지 온 거였나? 어떤 놈을 찾는 거지? 왜 찾는 건데?"
놈이 이 일에 깊게 흥미를 가지는 건 좋지 않다.
나는 물음을 무시하고서 무심함을 가장한 채 물었다.
"들어줄 건가?"
그에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던 놈이, 이내 킬킬 웃으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물론이지, 누구의 부탁인데. 그깟 노예야 한 놈이든 백 놈이든 원하는 대로 데려가라고. 대신에 나도 부탁 하나만 하지."
뭐?
놈이 내 어깨 너머로 경기장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이거든. 잠깐 시간 좀 내서 나와 함께 구경 좀 하자고. 어때? 그 정도는 괜찮겠지?"
"······."
나는 말없이 미간을 좁혔다.
이건 또 갑자기 뭔 개소리야?
***
폭왕의 행차는 갑작스러운 것이었는지, 악티폴 안으로 들어가자 높은 간부로 보이는 이들이 허겁지겁 몰려와서 놈을 모셨다.
현대의 축구장 크기는 될 법한 거대한 원형 경기장.
관중석은 바깥에서 들렸던 소리처럼 수많은 사람들로 빽빽히 채워져있다.
나는 경기장의 가장 높은 곳에서 황제나 앉을 법한 화려한 의자에 앉아서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내 바로 옆에 앉아있는 폭왕은 팔걸이에 턱을 괴고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실실 쪼개고 있었다.
'쯧.'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어쩌다 보니 잠시 이놈과 함께 어울려서 경기를 관람해야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나에 대해 파악하고 싶은 건지, 친분을 쌓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냥 단순한 변덕인 건지.
최대한 마찰 없이 노예만 빼가야 하니 별 수 없이 거절하지 않고 수락은 했다만, 참 성가시고 불편한 자리였다.
"입은 안 허전한가, 7군주? 술이라도 한 잔 하면서 구경하면 될 텐데 말이야."
술은 개뿔이.
나는 욕을 퍼붓고 싶은 걸 참으며 무뚝뚝하게 답했다.
"필요 없다."
"큭큭, 그래. 곧 경기가 재개할 모양이니 즐겁게 감상하자고."
놈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수하들이 대령해온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황금색 잔에 한가득 담긴, 각설탕처럼 생긴 붉은색 큐브.
힐끗 쳐다보자 놈이 큐브 하나를 더 집어들어서 입에 넣고 으적으적 씹으며 말했다.
"아아, 이거? 피로 만든 간식이다. 신신한 피도 좋지만 오랫동안 숙성시켜서 굳힌 피도 나름 맛이 각별하거든."
······하여튼 역겹네.
폭왕은 최악의 흡혈귀답게 한시도 쉬지 않고 피를 갈구하는 놈이었다.
게임에서도 고작 놈의 식사 때문에 매년 마헤아에선 수백의 생명들이 희생된다고 했던가.
와아아아!
나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경기가 시작되려는지 관중들의 환호성이 커졌다.
경기장 끝쪽에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철문이 굉음과 함께 올라가더니, 각각 노예 검투사가 걸어나왔다.
검과 방패로 무장한 인간 남자,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제 몸집만 한 거대한 대검을 들고 있는 수인 남자였다.
- 벌써 10경기째 압도적인 연승을 이어가고 있는 괴물 신인, 오그! 그리고 그 상대는 3계의 수문장, 가테리!
확성 마법 같은 거라도 사용했는지 경기장 전체에 쩌렁쩌렁 울리는 사회자의 목소리와 함께, 곧바로 결투가 시작됐다.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수인이 우렁찬 포효와 함께 먼저 돌진했다.
그에 인간 남자도 몸을 옆으로 빼내며 방패로 능숙하게 상대의 공격을 흘렸다.
그렇게 잠시 동안 치열한 접전이 이어졌으나, 나는 어느 쪽이 더 승리할 확률이 높은지 쉽게 알 수 있었다.
[Lv. 26]
[Lv. 23]
왜냐면 검과 방패를 든 인간 쪽이 레벨이 더 높았으니까.
결과는 곧 레벨의 차이대로 나왔다.
거칠게 몰아치는 공격을 노련하게 계속 방어만 하고 있던 그가, 한순간 빈틈을 노려 수인의 옆구리를 베었다.
잇따라 몰아치는 공격에 팔과 다리까지 연달아 베인 수인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악티폴의 검투는 누군가 한 명은 죽어야만 끝나는 경기다.
그래서 경기를 끝내기 위해서는 이대로 남자가 수인을 죽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경기를 끝내지 않고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수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허리춤에 찬 단검을 뽑아 그의 눈에 들이밀었다.
"······끄아악!"
단검에 두 눈을 뽑힌 수인이 피눈물을 쏟아내며 바닥을 굴렀다. 관중들이 환호했다.
남자는 관중석에 손을 흔들며 여유롭게 수인의 주위를 돌아다녔다.
곧 수인이 떨어뜨린 무기를 더듬더듬 집어들고서 처절한 울부짖음과 함께 마구잡이로 휘둘러댔다.
하지만 앞이 보이지도 않는 상태에서 공격이 맞을 리가 없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관중석에서 연신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실컷 수인을 농락하던 남자는 분위기가 식어갈 즈음에 끝내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나는 그 모든 광경을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봤다. 속으로는 인상을 한가득 찌푸린 채.
'지랄맞네, 참······.'
악티폴의 검투.
게임에서도 관련 에피소드가 있었기에 이 경기가 이딴 식이라는 건 물론 알고 있었다.
상대를 무조건 모두 죽여야만 경기가 끝나고, 그 과정에 규칙 따윈 아무것도 없다. 고문을 하든 뭘 하든 상대에게 어떤 짓을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렇기에 더 높은 퍼포먼스를 관중들에게 보이기 위해 상대를 최대한 잔혹하고, 자극적으로 죽이는 노예들도 많았다. 그래야 자신의 몸값을 더욱 높일 수 있었으니.
악티폴에서 일정 등급 이상의 노예는 수감소에 갇혀있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의 자유를 얻고 재산도 축적할 수 있다.
그렇기에 단지 생존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부와 자유를 얻기 위해서도 필사적이게 되는 것이었다.
이어진 경기들은 1대1 결투 외에도 여러가지 것들이 있었다.
한쪽이 전부 죽을 때까지 싸우는 단체전이라거나, 포획한 몬스터를 풀어놓아서 처절한 사투를 벌이게 하기도 했다.
단체전에서는 한 사람을 남겨놓고 여럿이 남은 쪽이 사방에서 농락하듯 쫓아다니다가 무참히 죽여버렸다.
몬스터를 상대하는 경기에서는 노예들보다 몇 배는 더 덩치가 큰 대호가 나왔는데, 결국 상대하는 노예들은 전부 다 죽고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 일련의 경기들을 보며 내가 느낀 기분은······ 그저 더러움밖에 없었다.
이딴 게 즐거운가?
어떻게 사람이 서로 죽고 죽이는 걸 보면서 이리도 열광할 수 있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다.
옆에 앉은 폭왕을 돌아보니 놈은 따분하기 그지없다는 눈으로 경기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럴 거면 나는 왜 끌어들여서 경기를 보자 한 거야?
- 자, 그럼 다음 경기는 모두가 기다리시던 5계의 경기입니다!
사회자가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악티폴의 검투사 등급에 대해 상기했다.
가장 낮은 1계부터 시작해서 5계까지, 그리고 가장 위에는 챔피언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5계의 경기면 챔피언전을 제외하고서 악티폴에서 가장 강한 검투사들이 맞붙는 경기였다.
- 먼저 수문장 루톤을 꺾고 이번에 새로 5계로 승급한 검투사, 철격의 폴!"
이전의 경기들보다 훨씬 커진 함성과 함께, 경기장으로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머리통만 한 쇠구가 달린 거대한 철퇴를 무기로 들고 있었다.
- 그리고 그 상대는 벌써 5계에서 반 년을 넘게 살아남고 있는! 챔피언을 제외하면 사실상 최강의 검투사, 투귀 리프!
이어서 그 반대편의 철문에서 나온 것은 평범한 검을 들고 있는 단발의 여인.
나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서 눈을 크게 떴다.
왜냐면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었으니까.
전에 골목에서 마주쳤던, 병사들을 쫓아내줬던 바로 그 여자였다.
"흐."
그때 지금까지 감흥 없는 표정만 짓고 있던 폭왕이 어째서인지 눈을 빛내며 웃음을 흘렸다.
관중석의 관중들이 흥분에 가득 차서 두 검투사의 이름을 연신 외쳐댔다.
'······리프?'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모습을 빤히 내려다봤다.
리프리곤 (4)
사방에서 울려퍼지는 함성 속, 여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손에 쥔 검을 늘어트리고 섰다.
무장이라고는 지금껏 나온 노예들처럼 방어구 하나 없이 무기가 전부다. 반대편에 선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남자가 철퇴를 붕붕 휘두르며 그녀를 흉흉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마치 투지를 끌어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쪽이 이길 것 같나?"
폭왕이 내게 물었다. 묘하게 들뜬 듯한 목소리.
지금껏 쓸데없는 말들만 지껄이다가 처음으로 경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를 한 번 쳐다봤다가, 다시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여자 쪽이 이기겠지."
놈이 나를 묘한 눈빛으로 돌아보며 웃음을 흘렸다.
"바로 단언하는군? 확신할 수 있나?"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Lv. 43]
[Lv. 42]
확신까지는 아니었다.
40레벨대에서의 1레벨이 그렇게까지 큰 격차는 아니니까.
여자 쪽이 이길 확률이 높은 건 맞지만 변수가 일어나긴 충분한 차이였다.
'그렇다고 해도······.'
왠지 그 변수가 일어날 일은 없을 것 같네.
이건 그냥 직감이었다.
나는 마주 보고 서있는 두 검투사의 모습을 빤히 내려다봤다.
- 자, 그럼······ 경기 시작!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남자가 돌리고 있던 철퇴를 곧장 여인을 향해 쏘아냈다.
여인이 몸을 틀어 피하며 접근했다. 그에 남자가 능숙하게 철퇴를 거둬들이며 다시 한 번 휘둘렀다.
그는 거리를 좀처럼 내주지 않았다. 뒤로 몸을 빼내며 육중한 철퇴를 거침없이 휘둘렀다. 철구에 붙은 가시가 여인의 몸 이곳저곳을 스치고 피가 튀어올랐다.
그녀는 몰아치는 공격을 한끗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계속해서 상대에게 몸을 붙이려 들었다. 한 대쯤은 맞아도 상관없다는 듯, 야수처럼 과감하고 거침없는 움직임이었다.
"쥐새끼 같은 년이······!"
기세에서 밀린 쪽은 남자였다.
그가 다급히 철퇴를 짧게 잡고서 강하게 내리쳤다.
여인의 순간 낮게 자세를 낮췄다. 공격을 피하며 철구와 이어진 사슬에 검을 한 차례 휘감고서, 확 당겨버렸다.
남자가 철퇴를 놓쳤다. 그녀 역시 사슬에 얽힌 검을 그대로 내던져버리고서 허리춤의 다른 검을 뽑아들며 돌진했다.
다급히 검을 뽑아든 남자도 여인의 공격에 응수했다.
잠시 동안 검투가 이어졌다. 검술을 모르는 내가 봐도 명백히 실력이 위인 쪽은 여인이었다.
거칠게 몰아치는 검격에 남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방어만 하기 급급했다.
촤아악!
그리고 어느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남자의 한쪽 팔이 날아갔다.
그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사, 살려줘! 제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시간도 없이 남자가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집에 기다리고 있는 동생들이 있어! 내가 없으면 걔들은 전부 죽는다고! 제발······!"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허공에 붕 떠오른 남자의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여인이 무정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거칠어진 호흡을 골랐다.
그녀는 남자의 시체에도, 관중들에게도 시선 하나 주지 않고서 몸을 돌렸다. 그리곤 바로 출구로 걸음을 옮겼다.
여지껏 싱겁게 끝난 시합들에는 야유만 퍼붓던 관중들이었기에 역시 관중석에서 야유가 터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만큼 환호성도 컸다.
"하하! 역시 리프 저 년이 최고라니까!"
"최고긴 뭐가 최고야? 저건 예전에 한창 밑바닥에서 구를 때가 재밌었지, 요즘은 이따위로 다 싱겁게만 끝내고 말이야."
"그나저나 5계에서는 이제 아예 상대가 없겠는데? 곧 챔피언한테도 도전하지 않겠어?"
"에이, 아무리 그래도 챔피언한테는 아직 안 되지······."
귓가에 들려오는 관중들의 대화 소리.
폭왕이 능청스레 감탄하듯 말했다.
"이거 자네 말대로 됐군."
"······."
놈은 경기장 밖으로 퇴장하는 여인의 모습을 묘한 시선으로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내게 물었다.
"어때, 7군주. 경기는 즐거웠나?"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런 게 재밌나?"
예상한 반응이었다는 듯 놈이 클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글쎄, 제법?"
"······."
"벌레들 싸움도 나름의 재미가 있는 법이거든. 저런 하찮은 목숨이라도 부지하겠다고 아등바등 발악하고, 물어뜯고, 끝내 절망하고. 가끔씩 구경하면 가벼운 여흥 정도는 된다고······ 뭐,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이구만. 큭큭."
다른 군주들도 다 그렇더라고.
그렇게 뒷말을 덧붙인 놈이 쩍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몇 경기 더 남은 모양인데, 계속 관전하겠나?"
이제 볼 건 다 봤다는 듯한 말투였다.
고개를 저으며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그럼 그만 끝낼까. 찾는다는 노예는 이놈한테 안내받으면 돼."
그렇게 말하며 놈이 가리킨 이는 뒤쪽에 서있던 수하들 중 한 명이었다. 덥수룩한 장발에, 무뚝뚝한 인상을 가진 수인 남자.
"만나서 즐거웠어, 7군주. 나는 먼저 가보겠네."
놈은 그렇게 말하고서 손을 흔들며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수하들이 따라붙었다.
나는 놈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홀로 자리에 남은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수감소장인 길로크입니다. 수감소에 있는 노예를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 말씀해주시면 곧바로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아래를 힐끗 내려다봤다.
여인의 모습은 어느새 출구 바깥으로 사라져있었다.
아직 채 식지 않은 열기 속에 경기장에는 핏물과 시체 한 구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
길로크는 자신이 찾고 있는 노예를 데려오겠다고 했지만, 나는 직접 수감소로 이동했다.
이것저것 뒤섞인 역겨운 냄새가 가득 풍기는 복도.
노예들이 갇혀있는 철창을 지나치며 앞장서서 걷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마지막으로 본 경기에 출전했던 여자, 이름이 리프라고 했던가?"
길로크가 의아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나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6군주과 무슨 관련이라도 있나?"
아까부터 궁금했던 거였다.
다른 경기들엔 관심도 없던 폭왕이 유일하게 그녀의 경기에만 흥미를 드러낸 것처럼 보였으니까.
경기 자체는 딱히 특별할 게 없었다.
이전 경기들보다 수준이 높긴 했어도 기껏해야 40레벨대의 대결, 놈이 보기에는 어차피 전부 거기서 거기일 테니까.
그렇다면 경기가 아니라, 여인의 존재 자체에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건데······.
예상이 맞는지 그가 조금 굳은 얼굴로 대답을 머뭇거렸다.
"꺼내기가 곤란한 이야기인가?"
"아닙니다."
"그럼 말해보도록."
재촉하자 곧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친동생이 6군주님의 혈술에 중독된 상태입니다."
"······중독?"
그 말에 나는 곧바로 이해했다.
6군주의 혈술, 중독.
'······광혈병을 말하는 거군.'
6군주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혈술은 놈의 성향답게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놈의 혈술은 기본으로 육체 능력을 증폭시키는 능력이다.
하지만 혈술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폭주 상태에 돌입하면 몸에서 혈무를 뿜어내는데, 문제는 그 안개에 접촉한 대상은 이성을 잃고 폭주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전신에 피가 들끓어 스스로의 생명력을 불태우며 말이다.
이것이 병이라 불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폭주가 끝나고 간신히 목숨을 건져도 놈의 혈기가 계속해서 몸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살아도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몸에 지니고 살아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존재 자체가 재앙인 놈이지.'
놈이 최악의 흡혈귀라 불리는 데에는 단순히 악한 성격 때문이 아니라, 그 능력의 존재도 큰 몫을 했다.
게임에서도 놈의 그런 능력 때문에 과거에 멸망한 도시나 마을이 몇몇 있다는 설정이 있었던 게 떠올랐다.
조금이라도 마력이 있거나 정신의 격이 높다면 저항이 가능했지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민간인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챔피언을 차지한 검투사에게는 6군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그녀는 악티폴의 검투사가 된 겁니다."
"······."
짧은 설명이지만 의문을 모두 해결하기에는 충분했다.
광혈병에 걸린 동생, 그리고 챔피언이 되면 6군주에게 하나의 소원을 빌 수 있다.
그러니까, 그녀는 챔피언이 되서 동생의 병을 고쳐달라고 하기 위해 검투사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자연스레 의문이 하나 더 생겼다.
"현재 챔피언은 누구지?"
"저입니다."
······뭐?
내가 쳐다보자 길로크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제가 현 악티폴의 챔피언입니다."
"······아까는 이곳의 수감소장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 소원으로 노예 수감소를 관리하고 싶다고 간청드렸기에 수감소장의 직위도 함께 겸하고 있습니다."
아, 그런 건가.
나는 살짝 이해가 안 되서 물었다.
"왜 하필 수감소장이지? 훨씬 더 좋은 자리들이 있을 텐데."
소원이라고 해도 당연히 한계는 있겠지만, 그래도 평생 놀고먹으며 살 재산을 얻거나 군주성의 기사 직위 정도는 꿰찰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게임에서도 6군주성에 악티폴의 챔피언 출신인 기사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니까.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 당시에는 달리 원하는 게 없었습니다. 그저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었고, 함께 생활했던 노예들의 형편이나 조금이라도 좋게 해주자는 생각으로 수감소장이 되었습니다."
"······."
의외의 이유라서 나는 조금 놀랐다.
6군주령 온데간데서 삶이 시궁창에 처박힌 인간들이 전부 모이는 장소.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경기가 매일마다 치뤄지는데 동료애 따위가 생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노예들의 형편을 봐주려고 소원으로 수감소장이 됐다니.
이 길로크라는 남자가 어떤 인물인지 대충 파악하기엔 충분한 대목이었다.
나는 그와 더 대화를 나누지 않고 말없이 걸었다.
머릿속에 맴도는 건 리프라는 여인에 대한 생각이었다.
'동생의 병을 고치기 위해 챔피언이 되려고 한다고······.'
[Lv. 48]
마음 한편에 찝찝함이 느껴졌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길로크의 레벨이 그녀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 아니었다.
설령 그녀가 길로크를 꺾고 챔피언이 된다고 해도······ 내가 알기로 광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수단은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병의 근원이 되는 혈왕이 죽는 것.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광혈병에 걸리고 살아남은 이 역시 아무도 없었고.
'······뭐,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만.'
나는 굴피로의 부탁대로 밴이라는 남자만 데리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그걸로 6군주령에도, 악티폴에도 더 이상 볼일은 없었다.
곧 길로크가 어느 철창 앞에서 멈춰섰다.
어두운 철창 안에 여러 노예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있었다.
"문을 열어라."
"예."
끼기긱.
길로크의 명령에 경비병이 철창의 문을 열었다.
그가 구석에 무릎을 감싸고 앉아 쭈그려있던 젊은 남자를 가리켰다.
"저 자가 밴입니다."
지목당한 밴이 두려움에 가득 질린 눈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끌려와서 꽤나 얻어맞았는지 얼굴에 피딱지와 멍이 한가득이었다.
"과일 가게를 운영하던 밴이냐?"
"······예, 예? 맞습니다."
나는 그에게 손짓했다.
"나와라. 풀어주마."
***
경기장의 외곽 복도.
막 수감소에서 나와 복도를 걷던 길로크는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여인을 보고 멈춰섰다.
그러나 여인은 그를 한 번 힐끗 쳐다보기만 하고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지나쳐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길로크가 입을 열었다.
"동생의 상태는 괜찮나?"
우뚝.
그제야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 차갑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길로크를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길로크는 입을 우물거리며 할 말을 고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챔피언 자리에 도전하지 마라, 리프."
"······."
"너는 날 이기지 못해.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설령 승리한다고 해도, 6군주는 분명······."
"닥쳐."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말을 끊은 리프가 도로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가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길로크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엿 같군, 정말."
리프리곤 (5)
수감소에서 밴을 빼내 곧장 포션 상점으로 데리고 갔다.
혹시나 폭왕이 눈을 붙이려고 들진 않을까 초감각을 최대로 펼친 채 이동했으나, 딱히 따라붙는 이는 없었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감사합니다, 플레온 씨! 정말로 감사합니다!"
"전부 이쪽의 나으리 덕분이지, 뭘. 나한테 감사할 게 있나."
그렇게 상점에 도착하고, 그는 나와 굴피로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플레온이 누군가 싶었지만 그의 가명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이제 바로 떠날 건가?"
내 물음에 굴피로가 상점 내부를 슥 둘러보며 대답했다.
"며칠만 시간을 주시겠소? 대부분은 버리고 가긴 할 거지만, 이것저것 정리할 게 많아서."
음, 하긴.
짐을 정리하고 챙기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할 듯했다.
계속 폭왕의 도시에 머무르고 있어서 좋을 건 없었지만 며칠쯤이야 상관없겠지.
"아무튼 밴을 구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하오. 이건 빚으로 여기고 마음에 남겨두겠소."
굴피로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밴을 구해준 건 그가 나를 따라서 7군주령으로 향하는 일에 대한 조건이었기에 빚이라고 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는 이조차도 빚으로 치고 나중에 갚을 모양이었다. 내게 있어선 좋은 일이었다.
"혹시 모르니, 준비가 끝날 때까지 내 호위를 이곳에 붙여두지."
나는 아셸을 쳐다보며 말했다.
폭왕은 딱히 내가 마헤아에서 뭘 하는 건지 관심이 없는 듯 보였지만, 떠날 때까지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러나 굴피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소. 나도 내 한 몸 지킬 힘 정도는 있으니."
[Lv. 56]
나는 그의 머리 위를 쳐다봤다.
물론 굴피로의 레벨은 상당했다.
그가 비록 전투와 거리가 먼 연금술사이긴 해도, 대륙적인 명성을 지닌 만큼 보통의 연금술사는 아니었으니까.
마법의 수준도 상당한 걸로 알고 있기에 웬만해서야 위험할 일은 없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정리가 얼마나 걸리겠나?"
"일주일이면 충분하오."
"그럼 그때 다시 찾아오지."
굴피로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눈 뒤, 가게를 나섰다.
나는 아셸에게 말했다.
"멀리서 상점을 계속 지켜봐라. 수상한 것이 보이면 바로 보고하고."
아셸이 슬쩍 가게를 돌아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만약을 대비해 이 정도 안전 장치는 해둬서 나쁠 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아셸은 남겨두고 여관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골목길을 빠져나가는데, 반대편에서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방금 나온 포션 상점으로 들어가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곧 다시 몸을 돌렸다.
***
"미안하지만 아직 들어온 정보가 없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대편에 앉은 리프는 그런 그를 말없이 노려볼 뿐이었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광혈병이야. 그 생존자를 찾는 일이 그렇게 쉬운 줄 아나?"
"······."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시간이 좀 더 필요한 일이네. 그래도 의뢰를 취소하겠다면 별 수 없지만······."
그녀는 이를 꽉 깨물며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남자가 싱긋 웃으며 돈주머니를 받아들었다.
"인력을 좀 더 동원해서 조사 지역을 넓혀보도록 하지. 다음에 찾아올 땐 반드시 좋은 소식을 준비해놓고 있겠네."
자리에서 일어나 홱 밖으로 나가버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남자의 뒤에 서있던 수하가 슬며시 물었다.
"정말 조사 인력을 더 늘리실 겁니까?"
"미쳤나? 안 그래도 부족한 인력을 그딴 쓸데없는 곳에 낭비하게."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광혈병 생존자라니, 찾아봐야 애초에 있을 리가 없지. 만에 하나 있다고 해도 치료법을 알 수 있을 리는 더더욱 없고."
"그런데도 벌써 반 년째 아닙니까? 이쯤 되면 의뢰를 취소할 법도 한데 끈질기네요."
"저년도 속으로는 알고 있을걸? 어차피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끝내 지푸라기를 못 놓아서 이러고 있는 거지."
남자가 킥킥 조소를 터뜨렸다.
"뭐, 우리야 계속 적당히 시늉이나 하면서 의뢰금만 받아먹으면 그만이니까 말이야."
정보 길드 건물에서 나온 리프는 길거리를 걸었다.
주위에서 힐끗거리는 시선들을 무시하고 다음으로 향한 목적지는 포션 상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계산대에서 담배를 피고 있던 굴피로가 그녀를 쳐다봤다.
"왔느냐?"
그는 익숙한 듯 서랍에서 붉은빛이 감도는 포션 한 병을 꺼내들었다.
포션을 챙겨든 리프가 은화 몇 닢을 꺼내서 올려놨다. 그리고 한마디 대화 없이 도로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굴피로가 물고 있던 담뱃대를 입에서 빼고 말했다.
"난 이제 곧 마헤아에서 떠날 거다. 아마 일주일 뒤쯤에."
"······?!"
그 말에 그녀가 다급히 돌아봤다.
"걱정하지 마라. 포션의 제작법은 푸른 이슬 상점의 마릭 영감한테 맡겨놨으니까. 이제 그쪽에서 제작을 받으면 된다."
"······갑자기 왜 떠나는 건데요?"
"좀 그럴 사정이 생겨서 말이다."
그녀는 잠시 우두커니 서있다가 가게 밖으로 나가버렸다.
"쯧."
작게 혀를 찬 굴피로가 다시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안타깝다는 눈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며.
***
퍼억.
길거리를 걷고 있는 리프의 머리에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그녀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한 중년 남성이 붉어진 눈시울로 씩씩거리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괴물 새끼야! 네가 내 아들을 죽였어! 누구인지 기억하고나 있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 중년을 다급히 말렸다.
리프는 무표정하게 머리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다시 가던 걸음을 옮겼다.
소란에 행인들이 몰렸다. 몇몇 이들의 적의 가득한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사방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질긴 년, 그렇게 많이 처죽이고서 지는 언제까지 살아남으려고······."
악티폴의 노예 검투.
그 죽음의 경기에서 계속해서 살아남는다는 건 그만큼 다른 누군가를 죽였다는 것.
또한, 그만큼 그녀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이기도 했다.
노예 검투사 중에는 그녀처럼 이 도시에 혈육을 두고 있는 이들 역시 많았으니까.
리프는 입술을 짓씹었다.
손에 들고 있던 포션을 품으로 끌어당겨 꼭 쥐고서, 계속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한 여인이 현관으로 나와서 그녀를 반겼다.
"아, 오셨어요?"
여인은 동생의 간병인이었다.
집에는 경비원과 간병인을 한 명씩 두고 있었다.
3계 이상의 검투사들은 경기 때 외에는 도시 내에서 자유롭게 일상을 지낼 수 있고, 손에 쥐어지는 돈도 많았다. 5계에서도 최상위 검투사인 리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막 식사를 마치셨어요."
"오늘 상태는?"
"그, 몇 시간 전에 각혈을 몇 번 하시기는 했는데······ 지금은 다시 안정됐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녀의 말에 리프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위층의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앉아있는 소년이 보였다.
그녀와 똑같이 잿빛의 머리칼을 가지고 있는 소년.
창가를 바라보고 있던 그가 방으로 들어온 리프를 보고 활짝 웃었다.
"어서와,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