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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리프도 옅게 미소 지으며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몸은 어때."

"괜찮아. 말했잖아?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고."

잠시 시답잖은 대화가 이어졌다. 주로 소년이 떠들고 리프가 듣는 쪽이었다.

두 자매는 약속이라도 한 듯 검투 경기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도 꺼내지 않았다.

리프가 건넨 포션을 받아든 소년이 한 모금 마시고서 웩 소리를 냈다.

"항상 먹는 거지만 끔찍한 맛이네. 좀 더 맛있게 만들어달라고 할 수는 없어?"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다 마셔."

소년은 불만스레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계속 포션을 마셨다.

걷힌 소매로 소년의 팔이 드러났다.

앙상하고 창백한, 그리고 비정상적으로 울룩불룩 솟아난 검붉은 핏줄.

그것을 바라보는 리프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그런데 누나."

포션을 전부 마신 소년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리프는 빈 병을 들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말이 나올지야 뻔했기 때문에.

"피곤하겠다. 그만 쉬어."

"아니, 나 안 피곤······ 읍."

소년이 갑작스레 입을 틀어막은 채 몸을 숙였다.

리프는 깜짝 놀라서 병을 내던지고 그에게 다가갔다.

"쿨럭, 컥!"

격한 기침과 함께 소년의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올리아!"

리프는 다급히 간병인을 불렀다.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온 여인이 소년의 상태를 살폈다. 몸을 반쯤 눕히고 진정시키며 입가의 피를 닦아냈다.

간신히 상태가 다시 안정되고 그녀가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요. 이대로 주무시고 일어나시면 나아지실 거예요."

"······."

리프는 심란한 눈으로 반쯤 정신을 잃은 채 누워있는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간병인을 남겨두고 방에서 나왔다.

철컥.

방문을 닫은 그녀는 옆쪽의 벽에 턱 이마를 기댔다.

그녀의 얼굴에 짙은 피로가 내려앉았다.

6군주령의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

그들 자매가 살던 본래의 터전이었다.

그녀의 동생은 마을에서 천재라 불렸었다.

마을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며 검술 교관을 하던 방랑기사 백 씨도, 자신이 마탑 출신의 마법사라고 허구한 날 자랑하던 마법사 다키오 영감도 동생이 세상에 다시 없을 불세출의 천재라고 했다.

당시 아무것도 몰랐던 리프도 그들의 말이 괜한 추켜세우기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

왜냐면 검술과 마법을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검으로 큰 나무를 단칼에 베어버리고, 불덩이를 날리며 짐승을 사냥하던 동생의 모습은 누구의 눈에나 비정상적이었으니까.

동생은 천재였다.

그런 동생에게 있어서 시골 마을의 울타리는 너무도 좁아 보였다.

그래서 떠나보내기로 했다. 방랑기사 백 씨가 아는 인맥으로 수도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가족들은 동생이 떠나기 전날 밤 큰 잔치를 열었다.

마을의 주민들이 다같이 모여서 기쁨과 슬픔을 머금고 동생의 앞날에 축복을 빌어줬다.

분위기가 무르익은 늦은 밤이었다.

마을의 한쪽 하늘이 갑작스레 검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귀가 찡하고, 폭풍이 몰아쳤다. 정신을 차린 뒤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무너진 건물들과, 마을 사람들의 시체.

자욱한 피 안개가 마을 전체를 덮었다. 주민들의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그 뒤의 기억은 없었다.

그저 덜덜 떨면서도 그녀를 껴안은 채 손에서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던 동생과, 온몸에 차올랐던 알 수 없는 기운만이 흐릿하게 떠오를 뿐이다.

정신을 차린 다음 가장 먼저 보인 건 곁에서 정신을 잃고 있던 동생이었다.

일대가 폐허였다. 살아있는 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모님도, 친인척도, 친구들도.

꿈이라도 꾸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잔혹한 현실이었다.

좀처럼 정신을 못 차리는 동생과 간신히 수도로 이동했다.

행인들이 떠드는 소리에 마을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를 알 수 있었다.

군주성에 세인테아의 간첩이 숨어있었다고 한다. 성의 관리들을 학살하고 도주한 그를 6군주가 직접 쫓아서 참했다고 했다.

그 전투가 일어났던 장소가 바로 그녀의 마을 근처였다.

동생이 걸린 병은 광혈병이라는 것이었다. 6군주의 혈술에 접촉한 대상이 걸리는 죽음의 병.

마력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저항할 수 있지만, 왜인지 동생은 광혈병에 걸렸다.

그제야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지옥 속에서 몸을 채웠던 알 수 없는 기운이 무엇이었는지를.

동생이 자신의 마력을 그녀에게 모두 흘려넣고 그 끔찍한 피 안개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던 것임을.

마을은 멸망하고, 가족은 전부 죽고, 유일하게 남은 동생은 시한부가 됐다. 한순간에 시궁창으로 처박힌 삶.

수도에서 악티폴이라는 노예 검투가 매일마다 열린다는 걸 알게 됐다. 챔피언이 되면 6군주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선택의 여지가 있었겠는가?

그녀는 그 산지옥으로 직접 걸어들어가 검투사가 되었다.

지난 3년간 죽을 고비가 수백 번은 있었지만, 끝내 살아남았다.

5계의 검투사는 원하면 언제든 챔피언의 자리에 도전할 수 있다. 이제 그토록 염원했던 목표는 바로 코앞이었다.

"······."

다시 차갑게 표정을 굳힌 리프가 벽에서 머리를 뗐다.

싸운다. 승리한다. 살아남는다. 그리고 동생의 병을 고친다.

그 일념만으로 버틴 지옥 같은 3년이었다.

동생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더 칼에 피를 묻힐 수 있다. 죽인 시체들로 산을 쌓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제 와서 새삼 거리낄 건 없었고, 죽음 또한 두렵지 않았다.

단지 두려운 것은 하나였다.

만약 챔피언에게 도전했다가 패배한다면 홀로 남게 될 동생.

그것이 이제 단 한 걸음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아직까지 그녀를 망설이게 하고 있는 이유였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닫힌 방문을 바라보고서,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몸도 머리도 전부 피곤했다. 쉬고 싶었다.

리프리곤 (6)

마헤아에 본진을 두고 있는 거대 정보 조직, 놀헤이브. 수장 데르산의 업무실.

"무슨 일이냐? 헐레벌떡 와가지고."

소파에 반쯤 누워 과자를 씹고 있던 데르산이 남자를 쳐다보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온 그가 어딘가 다급한 기색으로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형님, 내가 엄청난 걸 알아낸 것 같소."

"······뭐? 뜬금없이 뭔 개소리냐."

"농담 아니니까 일어나서 제대로 들어보시오. 도시 동쪽의 1번가 골목에 있는 무명의 포션 상점을 아시오?"

데르산은 이놈이 뜬금없이 뭔 소리를 하나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름 없는 포션 상점? 몰라. 왜."

"그곳에 플레온이라는 노인이 주인으로 있는데 말이오, 내가 어쩌다 그 양반의 행적에 대해서도 좀 파고들게 됐는데······."

남자가 책상에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데르산은 그것을 집어들고서 슥 훑어봤다.

귀찮음 섞인 얼굴로 빠르게 내용을 읽어내려가던 그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미간을 좁힌 채 한참이나 종이를 뒤적거리다가 심각해진 표정으로 나지막이 물었다.

"······이거 진짜냐?"

"그럼 거짓이겠소?"

남자가 조사한 내용들은 이러했다.

몇 달 전, 작은 여관을 운영하는 호든이라는 인물이 회복하기 힘든 난치병에 걸린 것.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뛰어난 마법사에게 거액을 갖다바쳐야나 치료할 수 있는 병을 그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완치했다는 것.

다른 것을 조사하다가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호기심에 그에 대한 조사를 가볍게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튀어나온 자가 바로 무명 상점의 주인인 플레온이었다.

여러 정황들을 통해 그의 병을 치료해준 것이 플레온이라 판단한 남자는 이번엔 플레온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1년 전 마헤아 시에 자리를 잡은 인물.

사실 그와 관련된 눈에 띄는 정보는 별달리 없었고, 순간의 호기심과 변덕으로 시작했던 조사는 거기서 접어도 무방했다.

그때 남자가 하나의 허무맹랑한 생각을 떠올렸던 건 순전한 우연이었다.

왜냐면 근래에 대륙을 떠들석하게 했던 세인테아의 대연금술사, 굴피로의 실종 시기 역시 약 1년 전이었으니까.

얼마든지 우연일 수 있는 시기의 맞물림일 뿐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설마 하면서도 계속해서 플레온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경악스럽게도, 그 터무니없는 가정에 확신을 더해주는 정황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중에 가장 확정적인 것은 굴피로의 외관에 대한 정보였다.

녹색의 수염과 머리칼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진 굴피로와 달리 플레온의 외관은 주황색 머리칼과 수염이었으나, 조사 과정에서 그것이 염색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에 도시에 찾아왔을 때만 하더라도 그의 수염과 머리칼이 녹색이었다는 증언을 안면이 있는 몇몇 사람에게서 캐냈으니.

누군가의 눈에 띄는 걸 피하려는 게 아니려는 이상, 난치병을 고칠 만큼 실력이 뛰어난 연금술사가 그런 작은 포션 가게나 운영하면서 외관까지 바꾼 이유가 있겠는가?

그렇게 남자는 플레온이라는 인물의 정체가 세인테아에서 도주해온 대연금술사 굴피로라는 것을 거의 확신했다.

"······."

데르산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없이 종이를 반복해서 훑었다.

한참이나 아무 반응이 없자 남자가 조금 답답한 듯 말했다.

"정황적인 증거뿐이라도 이건 거의 100퍼센트요, 형님."

"······그래, 그렇군."

"고민할 것도 없지 않소? 6군주님께 어서 보고를 올립시다."

남자의 말에 데르산은 인상을 찌푸렸다.

둘은 6군주 폭왕과 같은 레오셀 산맥 출신의 뱀파이어다.

그가 부족을 학살해 멸망시키고 세상으로 나왔을 때, 그를 따랐던 부족원들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그래도 폭왕의 후광에 기대어 6군주령 제일의 정보 조직을 키워낼 수 있었으나, 그도 요즘은 과거의 영광이었다.

폭왕의 관심이 점점 시들해지며 신경에 거슬리는 경쟁 조직들도 하나둘씩 생겨나고, 군주성의 관리들까지 슬슬 눈치를 보며 은근히 조직을 이리저리 찔러대고 있는 마당이었기 때문이다.

"이 정보를 알고 있는 건 너뿐이냐?"

데르산의 물음에 남자가 뭘 당연할 걸 묻느냐는 듯 대꾸했다.

"그렇지, 조사야 수하들이 했지만 내가 다 끼워맞춘 거니까······."

말을 잇던 남자가 퍼뜩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데르산을 쳐다봤다. 그의 눈에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잠······."

화아악!

허공에 피어오른 핏빛의 화염이 순식간에 남자의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이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소멸해버렸다.

방금까지 남자가 서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데르산이 혀를 찼다.

"멍청한 놈아, 6군주 그놈이 아직 우리에게 남은 관심이 있는 것 같더냐?"

갈수록 궤를 벗어난 악마가 되어가고 있는 놈에게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고향의 일족조차도 아무 의미가 없다.

예전이면 몰라도 더 이상 폭왕에게 무언가를 갖다바쳐서 얻을 수 있는 콩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데르산은 그를 잘 알았다.

아무렇지 않게 몇십 년을 함께한 의동생을 죽여버린 데르산은 조금의 안타깝다는 기색만 내비치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릭서를 제작한 세인테아 출신의 대연금술사.

확실한 확인을 위해서는 직접 찾아가보는 수밖에 없다.

아는 사람은 남자뿐이라고 했지만 조사 과정에서 눈치를 챈 다른 조직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서둘러야 할 것이었다.

"굴피로······."

그의 두 눈이 흥분과 탐욕이 번뜩였다.

***

늦은 밤, 가게를 정리하고 있던 굴피로는 때 늦은 손님을 맞이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온 리프를 보며 그는 굽히고 있던 허리를 쭉 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

그녀가 어수선한 가게 내부를 슥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떠나기 전에 동생의 상태를 한 번만 더 살펴봐주세요.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굴피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돈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이미 몇 번이나 말했지 않느냐? 더 봐도 달라질 건 없다고."

굴피로 역시 리프의 사정은 잘 알고 있었다.

이 마헤아 시에서는 그녀에 대해 모르는 이를 더 찾아보기가 힘드니까.

애초에 그녀의 동생에게 맞는 포션을 제작해서 지금까지 제공해준 사람이 바로 그였다.

처음 그녀가 가게에 찾아왔던 게 반 년 전이었던가?

그녀의 사정을 들은 굴피로는 직접 집으로까지 찾아가 그녀의 동생의 상태를 직접 살폈었다.

광혈병의 혈기는 마력과는 완전히 상극인 힘을 지닌 기운이었다.

애초에 마력을 가진 대상은 중독되지 않지만, 이미 한 번 중독된 대상에게 있어서는 마력이 치명적인 독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마력이 아예 들어가지 않은 포션을 제작하여 동생의 상태를 조금이라도 완화시킬 수 있는 포션을 제작해주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게 간신히 붙잡고 있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요즘 가게에 찾아오는 빈도가 늘어난 것만 봐도 포션의 약효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결국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이상 결국 그녀의 동생은 죽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광혈병, 6군주 폭왕의 고유한 혈술에 접촉한 이들이 겪는다는 불치의 병.

그것은 대연금술사인 굴피로에게 있어서도 어떻게 치료할 방도가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는 리프의 처지를 동정했지만, 더 이상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돌아가거라."

"······."

리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양손에 주먹을 꽉 쥔 채 굴피로를 반쯤 노려보고 있다가, 이내 체념한 기색으로 몸을 돌렸다.

"······감사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녀가 가게 밖으로 도로 나가려고 하는 순간 먼저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문을 열고 들어온 낯선 손님에게로 옮겨졌다.

로브를 뒤집어써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남자.

그가 굴피로와 리프를 한 차례 번갈아 보고서 입을 열었다.

"구매하고 싶은 포션이 있는데······."

굴피로의 안색이 미약하게 굳었다.

그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애초에 평범한 손님이 찾아올 시간이 아니었다.

"말해보시게. 혹시 급하게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라도 있나?"

"아니아니, 그건 아니오."

남자가 후드를 걷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구매하고 싶은 물건은 엘릭서요, 대연금술사 굴피로."

"······!"

굴피로의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남자, 데르산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가에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맞군."

"······네놈은 누구냐?"

데르산은 대답 없이 리프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에 굴피로는 다급히 마력을 끌어올려 마법을 펼쳤다.

콰아앙!

허공에서 혈기와 마력이 충돌했다.

굴피로의 방어 덕분에 직격당하지는 않았으나, 그 충격에 리프는 가게 한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컥······!"

굴피로가 곧바로 다음 마법을 펼치려고 할 때였다.

순식간에 지척까지 접근한 데르산이 어느새 뽑아든 단검을 목에 겨누고 있었다.

"······."

굴피로는 그런 그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두 손을 내렸다.

데르산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선택이시오."

"우리를 공격하는 이유가 뭐냐?"

"아, 그건 오해 마시고. 난 당신에게는 전혀 적의가 없소. 단지 대화에 방해되는 방해꾼부터 치우려는 참이었는데······ 혹시 저 여자가 당신에게 중요한 사람이었나?"

데르산이 빈손으로 턱을 긁적이며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내 깨달은 듯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아, 너는 악티폴의 노예 검투사 년이 아니냐? 리프였던가?"

비틀비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리프가 그를 사납게 노려봤다.

"뭐, 아무튼 일단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조금이라도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데르산이 다시 굴피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오, 굴피로. 당신이 제작한 엘릭서인 디페리의 성혈, 어디에 있소?"

굴피로가 쯧 혀를 차며 대답했다.

"그건 나에게 없다."

"수중에 없다고 해도 당연히 레시피는 가지고 있겠지. 그걸 내게 넘기시오."

"미친놈, 고작 목에 칼 한 자루 밀고 협박한다고 내가 네 말대로 따를 것 같더냐?"

데르산이 손에 시뻘건 불꽃을 피워내서 리프를 향해 겨누었다. 그에 굴피로가 침음을 흘렸다.

데르산이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렇군. 저 검투사 년과 꽤나 각별한 사이셨나 보오?"

"······."

"얌전히 엘릭서의 레시피를 가지고 오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것부터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태워버릴 테······."

그 순간이었다.

창가에서 섬전처럼 쏘아져온 푸른 검기가 그대로 데르산을 덮쳤다.

"······!"

다급히 몸을 비틀어 간신히 방어한 그가 가게 한쪽으로 튕겨나갔다.

바로 이어서 신형 하나가 창문 사이로 날아들어와 가게 한쪽에 착지했다.

검을 들고 있는 여인, 아셸이 싸늘한 눈으로 비틀거리는 데르산을 응시했다.

굴피로가 놀란 눈으로 그런 그녀를 쳐다봤다.

"자네······?"

이어서 가게 문이 열리며 목소리 하나가 더 끼어들었다.

"그러게 말했지 않았나? 혹시 모른다고."

저벅저벅 걸어들어온 남자가 난장판이 된 가게 내부를 슥 둘러봤다.

그리곤 더없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데르산에게 시선을 멈췄다.

남자, 7군주가 입을 열었다.

"넌 뭐냐, 흡혈귀."

리프리곤 (7)

늦은 밤, 여관에서 나와 거리를 걸으며 가벼운 산책을 했다.

아셸은 지금도 굴피로의 상점을 지켜보고 있기에 나 혼자였다.

고생을 시켜서 미안하긴 하지만 과한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세인테아 측의 추적자든, 아니면 폭왕이 보낸 끄나풀이든, 남은 시간 동안 어느 쪽이 굴피로에게 접근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었으니까. 가능성이 희박하더라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저번에 가이탄 호에서도 내가 떠나자마자 세인테아 황실의 마법사장이 해린족을 습격해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었던가?

"이건 얼마지?"

"동화 한 닢입니다, 나으리."

나는 야시장이 열린 밤거리에서 먹을 만한 간식을 구매했다.

나온 김에 아셸에게도 좀 가져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의 몫까지 챙겼다.

그리고 포션 상점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초감각에 미약한 기운의 충돌이 걸렸다.

"······?"

나는 인상을 굳힌 채 서둘러 포션 상점을 향해서 뛰었다.

행인들의 눈을 피해 공간 도약까지 사용하며 상점에 도달하자 보인 풍경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난장판이 된 내부와 검을 쥐고 서있는 아셸.

'휴우······.'

대체 무슨 난리야?

그래도 다행히 늦지 않았구나 싶어 뛰던 걸음을 멈추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내 등장이 갑작스러웠는지 아셸과 굴피로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게 말했지 않았나? 혹시 모른다고."

굴피로에게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로브를 뒤집어쓴 남성과 여인.

나는 여인의 얼굴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프?

'쟤는 왜 또 여기에 있어?'

그녀 역시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아셸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Lv. 63]

침입자로 보이는 쪽은 남자였다. 외관으로 보아 뱀파이어였다.

설마 정말로 폭왕 쪽에서 보낸 놈인가?

"넌 뭐냐, 흡혈귀."

놈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침묵한 채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리던 놈이 기습적으로 내게 손을 뻗었다. 허공에 시뻘건 핏빛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나는 곧바로 가스칼리드의 혈술을 사용했다.

그러자 불꽃이 사그러들더니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렸다.

"뭐, 뭣?"

놈이 얼빠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는 놈에게서 강탈한 혈술을 펼쳐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폭발하듯 터진 혈화가 놈을 뒤덮었다.

놈이 바닥에 나자빠졌다. 폭발에 통째로 뜯겨나간 한쪽 팔을 붙잡고서 억눌린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악······!"

대충 이런 능력이군.

가스칼리드의 혈술은 뱀파이어를 상대로는 정말 완전한 카운터나 다름없었다.

나는 쓰러진 놈의 앞으로 다가가서 섰다.

"6군주가 보냈나?"

그렇게 물으며 손에 다시금 혈화를 피어올리자, 놈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6군주님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그럼 뭐냐."

"그, 그것이······."

놈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고 보니 마헤아 시에는 6군주와 같은 고향 출신의 뱀파이어들이 꽤 있었던가?

몇몇은 군주성에도 있고, 몇몇은 따로 조직들을 창설해서 열심히 6군주의 발을 핥아주고도 있고······ 아.

'설마 그쪽인가?'

6군주령 제일의 정보 조직인 놀헤이브.

왠지 모르게 정보 조직 쪽과 관련된 놈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떠보듯 물었다.

"놀헤이브냐?"

"······!"

순간 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짐작이 맞았음을 확신하고 굴피로에게 물었다.

"이놈이 정체를 알고 찾아온 건가?"

"······그렇소. 대체 어떻게 안 건지는 모르겠지만."

모르면 지금부터 알아보면 그만이었다.

다시 놈에게로 시선을 돌려 물었다.

"지금부터 조금이라도 대답에 뜸을 들이면 죽이겠다. 어떻게 굴피로의 존재를 알았지?"

내가 불꽃을 더 크게 피어내자 놈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 그저 우연입니다!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자세히 설명해라."

이어진 놈의 설명은 이러했다.

대연금술사 굴피로와 그가 도시에 도착한 시기가 겹친 것, 한 난치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해준 것, 그리고 외관에 대한 것까지.

설명을 모두 들은 나는 조금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굴피로를 돌아봤다.

그 역시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흘렸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들켰다고? 허······."

어쨌든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만약 정말로 폭왕 쪽에서 보낸 거였다면 괜히 또 놈과 얽혀서 일이 성가셔졌을 테니까.

"그러니까, 결국 엘릭서를 탐내서 상점을 습격했다는 거군."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놈을 싸늘하게 내려다봤다.

굴피로의 정체까지 알게 된 놈이니 자비를 베풀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제 최후를 예감했는지 놈의 안색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자, 잠깐만······!"

놈의 전신이 화염에 뒤덮였다.

거칠게 넘실거리던 불꽃은 순식간에 놈을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태워버렸다.

"허어, 참······."

탄식을 흘리고 있던 굴피로가 나와 아셸에게 말했다.

"고맙소. 두 분 덕분에 살았소. 하마터면 정말로 큰일날 뻔했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아있는 한 사람을 쳐다봤다.

내 시선을 받은 여인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래서 쟤는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자세한 상황이 궁금해서 굴피로에게 물어보려고 하는데, 그가 먼저 내게 물었다.

"그런데 방금 그건 어떻게 한 것이오? 마치 그 뱀파이어의 능력을 빼앗은 것처럼 보였는데."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놈의 혈술을 빼앗은 게 맞다."

"호오······ 그런 게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이오? 마법일 리는 없고, 설마 신비인가?"

굳이 자세히 대답해주진 않았다.

"혀, 혈술을 빼앗아?"

그때 여태 입을 다물고 있던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다시 시선을 옮기니, 그녀가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혈술을 빼앗을 수가 있다고? 정말?"

"······그래, 그런데 왜."

나는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그녀가 난데없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제발 도와주세요, 나으리. 제, 제 동생이 광혈병에 걸렸어요."

"······."

"혈술을 빼앗을 수 있는 능력이면 그 병도 고칠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런 거죠? 그러니 제발······."

나는 미간을 좁힌 채 절박하게 애원하는 그녀를 말없이 내려다봤다.

내 시선을 무슨 의미로 이해한 건지 그녀는 아예 바닥에 이마를 붙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제발요, 나으리······ 제게 원하시는 게 있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가진 재산도 전부 바치겠습니다. 개처럼 짖으라면 짖고 핥으라면 핥겠습니다. 제발 제 동생만······."

"이봐."

나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나는 네 동생의 병을 고쳐줄 수 없다."

"······."

"이건 혈술 자체를 빼앗는 것이지, 혈술의 능력에 중독된 누구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광혈병은 오로지 폭왕의 목숨이 끊어져야만 세상에서 사라지는 병이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설령 내가 폭왕의 혈술을 빼앗는다고 해도 이미 광혈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해줄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건 애초에 놈에게 있어서도 자의로 제어가 가능한 능력이 아니었으니까.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가 날 허망히 올려다봤다. 절망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그녀가 이번엔 굴피로에게로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에, 엘릭서. 엘릭서라면? 엘릭서라면 내 동생을 치료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네? 플레온 영감님······."

"치료할 수 없다."

굴피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광혈병이 어떤 병인지 말했지 않느냐. 조금이라도 마력이 포함된 포션이라면 맹독만 될 뿐이다. 그게 설령 엘릭서라고 하더라도."

그녀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한참을 미동도 없이 주저앉아있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왜?"

울분과 억울함에 가득 찬 표정으로, 절규하듯이 소리쳤다.

"왜, 왜! 왜 안 된다는 건데! 엘릭서잖아!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신약이잖아! 근데 왜!"

"······."

"왜 그깟 병 하나를 못 고친다는 거냐고, 씨발······ 왜 다들 안 된다고만 하는 건데······ 왜······."

그녀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위태로운 걸음으로 가게 밖으로 걸어나갔다.

나도 굴피로도, 아셸도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

거리를 방황하다 집으로 돌아온 리프는 위층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다급히 계단을 올라갔다.

간병인 여인이 피를 토하며 발작하는 소년을 온몸으로 붙잡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는 검붉은 핏줄이 터질 듯 솟아나있었다.

"꺼르륵······!"

리프는 간병인과 함께 한참을 씨름해 간신히 소년을 진정시켰다.

날이 다 밝았을 즈음에나 의원을 불러와서 상태를 살폈다.

소년의 몸을 진찰한 의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한계가 왔습니다. 누누이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고."

"······."

의원도 간병인도 내보내고, 리프는 방에 홀로 남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동생을 내려다봤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녀는 양손으로 이마를 부여잡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젠 정말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이른 아침부터 악티폴의 경기장에는 거대한 인파가 몰려들었다.

평소에도 경기 때면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장소였으나, 오늘은 특히나 그 정도가 심했다.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었다.

바로 오늘 악티폴에서 열리는 경기는 그 무엇보다도 특별한 경기였으니까.

챔피언전, 좀처럼 관전하기 힘든 그 빅매치를 보기 위해 모든 관중들이 기대를 품고 몰려든 것이었다.

"기어코 챔피언에게 도전을 했구만. 오늘 드디어 리프 그 년의 목이 날아가는 꼴을 볼 수 있는 건가?"

"하하, 그거야 모를 일이지. 절대로 못 이길 거라고 예상했던 시합들도 전부 역전해서 지금껏 살아남은 독한 년인데."

"그것도 그렇긴 하지. 그래서 자네는 리프 쪽에 걸 건가?"

"아니, 그래도 돈은 챔피언한테 걸어야지. 아무리 그래도 길로크를 꺾기엔 아직 역부족이지 않겠나."

"뭐? 하하!"

지금껏 10번도 넘는 방어전에서 모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철벽의 챔피언, 길로크.

그에 도전하는 건 지난 몇 년 동안 누구보다도 빠르게 5계의 검투사 자리까지 올라온 리프.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관중석에는 벌써 흥분과 열기가 가득했다.

몰이꾼들이 도박에 돈을 걸라고 사람들을 재촉하고, 서로가 목소리를 높여 경기의 결과에 대해 예측했다.

"그런데 어째 좀 서둘러서 챔피언 자리에 도전한 느낌이란 말이지."

"그거 아니겠어? 동생이 광혈병에 걸렸잖아. 슬슬 더 끌고 있을 수도 없이 위태로운 모양이지."

"오, 그런가? 그럼 이번에 패배하면 동생까지도 바로 누이를 뒤따라서 죽겠구만, 큭큭."

악티폴의 검투사 중에서도 가장 유명인사인 리프의 사정에 대해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광혈병에 걸린 동생을 치료하기 위해서 챔피언이 되려고 하는 것.

물론 그런 리프를 동정하는 관중은 누구도 없었다.

그 간절함조차 그들에게 있어선 그녀의 마지막 최후를 더욱 비참하게 장식해줄 흥미진진한 배경이었을 뿐이니.

대기실에서 리프는 미동도 없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꽉 쥔 주먹을 내려다봤다.

마음은 이상하게도 차분했다. 아니, 차분하다기보다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

그래, 새삼 무얼 기대했던 건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기댈 곳 따윈 어디에도 없었는데.

누군가의 동정도, 도움도 필요 없다. 그딴 걸 기대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악티폴에 들어왔던 그날, 필사적으로 첫 경기에서 승리했던 그날 다짐하지 않았던가?

반드시 챔피언이 되어 동생을 치료하고야 말겠다고······.

"나와라. 입장할 시간이다."

이제 그 마지막이 다가왔을 뿐이다.

대기실로 들어온 병사의 말에 리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길고 어두운 복도를 걸어 활짝 열린 철창을 통과하자 보인 건 푸른 하늘, 그리고 사방에 들어찬 관중들.

와아아아!

기대감과 흥분에 찬 역겨운 함성들이 울렸다.

리프는 고개를 들었다.

경기장의 가장 높은 곳,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괴고 있는 6군주의 모습이 보였다.

- ······다음으로 현 챔피언, 길로크가 입장합니다!

다시 시선을 내려 서서히 올라가고 있는 반대편의 철창을 응시했다.

경기장으로 걸어나오는 길로크를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이 살의로 가득 찼다.

리프리곤 (8)

길로크는 무표정한 얼굴로 옷을 챙겨 입었다.

허리춤에 메인 검을 뽑아서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도로 검집에 집어넣고 벨트를 꽉 고정했다.

철컥.

준비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한 여인이 생글생글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준비는 다 끝나셨어요?"

"음."

"자, 여기. 레몬하고 설탕하고 섞은 에이드예요. 쭉 들이키세요."

길로크는 여인이 건넨 음료를 단숨에 들이키고 빈 컵을 넘겼다.

"그럼 다녀오세요."

현관으로 나선 그는 자신을 배웅하는 여인을 바라봤다.

그녀는 밝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얼굴 한편엔 숨길 수 없는 미약한 어두움이 깃들어있는 게 느껴졌다.

경기 때면 매번 그랬지만 오늘은 유독 그늘이 짙은 느낌이었다.

여인은 길로크의 아내였다.

노예상에게 억울하게 붙잡혀 수감소까지 끌려왔던 그녀를 길로크가 구해줬던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길로크는 새삼 생각했다. 인생은 어디로 흘러갈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고.

평생을 검이나 휘두르다 쓸쓸히 죽게 될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여인을 만났으니.

"걱정 마, 엘리. 이기고 돌아올 테니."

아내의 볼에 입을 맞춰주고서 길로크는 저택을 나섰다.

익숙한 거리를 지나 악티폴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대기실로 이동했다.

"시간이 다 됐소."

어두운 복도를 걸어 경기장으로 나서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길로크는 관중석을 한 차례 둘러보고서 앞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반대편의 철창에서 먼저 나와 서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리프.'

이쪽을 살기등등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그녀를, 그는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챔피언전.

지금껏 수많은 도전자들을 꺾어왔지만, 이번 경기는 길로크에게 있어서도 특별하다면 특별했다.

처음 리프의 경기를 봤던 건 대충 3년쯤 전이었던가.

당시는 길로크가 막 새로운 챔피언이 되었을 즈음의 시기였다.

아직 여인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여린 소녀가 한 자루 검을 쥐고 경기장에 섰다.

상대는 그 배는 되는 덩치의 사내였다. 누가 봐도 애초에 성립될 것 같지 않던 경기.

모두의 예상대로 리프는 손쉽게 제압당했고, 사내는 그런 그녀를 곧바로 죽이지 않고 덮치려 들었다.

악티폴에선 상대 검투사에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모든 게 퍼포먼스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결국 살아남은 쪽은 리프였다.

길로크는 아직도 그때의 광경이 뇌리에 선명히 각인된 것만 같았다.

몸 위에 올라탄 사내가 방심한 틈을 타 그의 목을 섬전처럼 물어뜯었던 리프의 모습을.

기겁하며 단검을 뽑아든 그가 옆구리를 연신 찔러도 놓지 않고, 기어코 아득바득 버티던 지독한 독기를.

사내의 몸이 축 늘어져 더 움직이지 않게 된 뒤에도 리프는 그의 목을 물고서 놓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후에도 계속.

"······."

길로크는 슬쩍 고개를 돌려 경기장의 위쪽을 올려다봤다.

또한 잊지 못했다.

그 경기를 모두 지켜본 6군주의 입가에 걸렸던, 섬뜩하고 악의 가득한 미소를.

'저 계집, 동생이 광혈병에 걸렸다고 했었나?'

'······예, 그렇습니다.'

'죽지 않게 치료해서 살려라.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싸우는 법도 가르쳐보고.'

그 명령대로 길로크는 리프에게 여러가지를 가르쳤다. 마력을 쌓는 법, 검을 휘두르는 법, 몸을 움직이는 법······.

물론 리프도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뭐라도, 누구에게라도 배울 수 있으면 배워야만 했으니까.

그저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 외에 감정의 교류는 일절 없었다.

분명 길로크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지만 둘은 사제 사이라고도 할 수 없는 묘한 관계였다.

그녀는 정말 경이로울 정도로 빠르게 강해졌다. 워낙 필사적이기도 했지만 본래 전투에 타고난 자질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리고 시간은 흘러 순식간에 5계의 검투사가 되었고, 이제 챔피언의 자리에 도전하기 위해 바로 눈앞에 서있었다.

'이렇게 됐군, 결국은······.'

길로크는 짧은 상념을 마쳤다.

예전이었다면, 아무 의미도 없이 그저 살아있기에 살아가던 때였다면 이 경기를 그냥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에게도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에게 구해야만 하는 동생이 있듯, 그에게도 지켜야 하는 행복이 있었으니.

- ······모두가 기다리시던 챔피언전! 그 대망의 경기가 지금 시작됩니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리프가 먼저 몸을 날렸다.

사납게 돌진해오는 그녀를 보며 길로크는 차분하게 검을 치켜들었다.

카앙!

두 검투사의 검이 맞붙었다.

길로크가 리프의 검을 강하게 튕겨냈다. 그녀는 허리를 꺾어 이어진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곧바로 다시 검을 휘둘러 하단을 노렸으나 간단히 막혔다.

푸른 검기에 휩싸인 두 검날이 연신 부딪히고 엉켰다. 어지러운 공방이 오고 갔다.

주로 공격하는 쪽은 리프였다. 그녀는 광인처럼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는 듯 미친 듯이 길로크를 몰아붙였다.

길로크는 여전히 처음과 같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몰아치는 공격을 전부 피하고, 막아냈다.

리프의 모습은 반쯤 이성을 잃고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길로크는 알았다.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차가운 냉정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순수한 실력만으로 부딪히면 길로크를 이길 수 없다는 건 그에게 검을 배운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방심을 끌어내는 수밖에 없다.

먼저 틈을 드러내 상대의 틈을 찾는 것, 아주 작은 방심이라도 좋으니 그 틈을 비집고 어떻게든 검날을 쑤셔넣는 것, 그것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나마의 가능성일 뿐이었다.

길로크는 당연하게도 그런 그녀의 의도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함부로 방심 같은 걸 하는 인간이었다면 지금까지 챔피언 자리에서 이토록 오래 살아남지도 못했으리라.

퍼억!

길로크의 발차기가 리프의 복부에 꽂혔다.

리프는 헛숨을 들이키며 뒤로 물러섰다. 잠시의 겨를도 주지 않고 공격이 곧바로 이어졌다.

이제야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선다는 듯 길로크는 매섭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리프는 연신 뒤로 물러서기만 하며 방어하기 급급했다.

온몸에 잔상처가 점점 늘어간다. 순식간에 뒤집힌 양상은 다시 역전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리프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어떻게든 넘어간 기세를 되찾으려고 발악했다.

어느 순간, 길로크의 검이 섬전처럼 그녀의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끅······!"

길로크는 잠시 검을 거두고서 휘청거리는 그녀를 비정히 응시했다.

만약 리프에게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시간이 촉박하지 않았더라면 언젠간 분명 길로크를 꺾고 챔피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둘 사이에는 넘기 힘든 근본적인 실력의 차이가 있었다.

피가 쏟아져나오는 옆구리를 붙잡은 채 리프가 곧장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녀의 안광이 형형히 번뜩였다.

여전히 투지가 조금도 꺾이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그뿐이었다.

길로크도 재차 검을 치켜들고 자세를 잡았다. 더 끌지 않고 경기를 끝내기 위해서.

'설령, 네가 챔피언이 되었다고 해도······.'

어차피 그녀의 동생은 처음부터 살릴 수 없는 목숨이었다.

길로크는 그것을 확신했다.

6군주 폭왕, 그 악마가 얼마나 치가 떨리도록 악랄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여기서 이렇게 죽는 게 그녀에게는 차라리 나은 일일지도 모른다.

"······미안하다."

그가 입을 열고 작게 중얼거렸다.

"네 동생의 마지막은 내가 곁에서 배웅해주마."

리프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졌다.

길로크가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촤아악!

길로크의 검격이 그녀의 몸 곳곳을 베고 지나갔다.

멀쩡한 상태에서도 간신히 막기만 하는 게 고작이었다. 중상까지 입은 마당에 더 이상의 결투는 성사되지 않았다.

"크아아아!"

리프는 처절하게 포효하며 악에 받쳐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길로크에게 조금도 닿지 않았다.

바닥에 시뻘건 선혈이 낭자했다. 아직까지 쓰러지지 않고 서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리프의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급소만큼은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었다.

길로크는 그만 끝을 내려고 했다. 전신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옆구리를 베어오는 이 검격을 튕겨낸 후, 그대로 그녀의 심장을 꿰뚫을 생각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

속에서 치솟아오르는 구역감과 함께, 길로크는 한순간 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공격을 막지 못했다. 리프의 검이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그의 몸이 휘청였다.

리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필사적으로 찌른 검이 그의 심장을 노렸다.

"······!"

길로크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관통한 검날을 내려다봤다.

몸이 무겁고 차가웠다. 마치 독에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그것은 단지 지금 심장을 꿰뚫은 검 때문이 아니었다.

'이건······ 대체······.'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집에서 나오기 전, 아내가 건네주었던 음료.

길로크는 간신히 고개를 틀어 경기장의 가장 위쪽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즐거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 유쾌한 미소를 짓고 있는 6군주의 모습을.

'······아.'

그제야 길로크는 깨달았다.

처음부터 전부 정해진 결과였음을.

그는 허망한 눈으로 리프를 바라봤다. 전신이 피투성이인 그녀는 필사적으로 검자루를 쥔 채 버티고 서있었다.

'결국 너나, 나나 끝까지······.'

저 악마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다 죽는구나.

검이 뽑히고, 길로크의 몸이 허물어졌다.

***

거친 숨을 몰아쉬며, 리프는 멍한 눈으로 바닥에 쓰러진 길로크를 바라봤다.

'······이겼어.'

이겼다.

길로크를 죽였다. 챔피언을 쓰러뜨렸다.

속에서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치솟았다. 기쁨과 슬픔, 성취감과 죄책감 따위의 상반된 것들이 덩어리처럼 뒤섞였다.

리프는 입술을 꽉 짓씹고서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관중석에서는 자그마한 환호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관중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곧 폭왕이 자리해있는 바로 아래까지 이동한 리프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제가 이겼습니다!"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갈라지는 목소리로 쩌렁쩌렁 외쳤다.

"제가 이제 악티폴의 챔피언입니다!"

고요한 정적 속, 폭왕은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었다.

"그래······."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조용하지만 거대한 음성이 경기장 전체에 선명히 울려퍼졌다.

"어디 소원을 말해봐라."

"제 동생!"

리프는 차오르는 격정에 잠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가, 다시 외쳤다.

"위대하신 6군주님께 간청드립니다! 부디 동생의 광혈병을 치료해주십시오! 소원은 오직 그것 하나뿐입니다!"

폭왕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동생의 병을 고쳐달라고?"

"······."

"혈육에 대한 정이 참 갸륵하구나. 좋다, 네 바람대로 동생을 치료해주도록 하마."

리프의 얼굴에 환희가 차오르려는 순간이었다.

"한데 그 전에, 아직 남은 게 있다."

"······예?"

그녀가 멍하니 폭왕을 올려다봤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건 마치, 지금까지 오랫동안 공들여 키워낸 달콤한 과실을 막 따낼 순간을 맞이한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폭왕이 경기장 한편에 있는 사회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길을 받은 사회자가 곧바로 외쳤다.

- ······자, 그럼! 몇 년 만의 새로운 챔피언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이벤트 경기가, 지금 바로 이어서 시작됩니다!

그에 관중석에서 소란이 일었다.

본래 챔피언전에 그런 이벤트 경기 같은 건 여지껏 없었으니까.

쿠르르르.

경기장 한쪽에 위치한 철창이 올라갔다.

하지만 그곳은 검투사가 아닌 포획한 몬스터가 나오는 문이었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리프의 표정이 서서히 알 수 없게 일그러졌다.

문에서 걸어나온 건 익숙한 소년의 모습이었다.

다만 다른 건, 전신이 검붉게 물들어 완전히 괴물과 같은 모습이었다는 것.

"아, 아······."

리프는 그런 소년을, 동생을 바라보며 넋이 나간 신음을 뱉었다.

크르르.

소년이 시뻘건 안광을 번뜩이며 그녀를 노려봤다.

제 누이가 아닌 당장이라도 찢어죽일 적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네 동생의 병은 얼마든지 고쳐주마. 고쳐주고말고. 물론 그 전에 남은 경기부터 끝내야겠지?"

폭왕의 웃음 섞인 말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악마의 속삭임처럼.

넋이 나간 채 주저앉아있는 리프를 보며 그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자, 뭘 하고 있는 거냐? 어서 저 괴물을 죽이지 않고."

이성을 잃고 폭주한 소년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

"······."

나는 경기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참극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챔피언전을 관전하러 온 건, 도시를 떠나기 전에 그냥 결과만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상점에서 봤던 그녀의 모습이 걸렸기에.

하지만 경기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애초에 이럴 생각이었군.'

나는 저멀리 경기장 높은 곳에 앉아있는 혈왕을 노려봤다.

동생에게 일부러 더 혈기를 주입해서 광혈병을 폭주시킨 건가?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폭왕, 놈의 악의는 상상을 가볍게 초월했다.

이대로라면 그녀가 제 손으로 동생을 죽이거나, 아니면 동생의 손에 죽어야만 했다. 악티폴의 경기는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끝나는 것이었으니까.

옆에 있는 아셸도 참담하게 굳은 얼굴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관중들은 방금 전 길로크와의 경기보다 더욱 흥분에 차서 환호하고 있었다.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나는 그녀를 도와줄 수 없다.

애초에 광혈병은 폭왕이 죽어야만 사라지는 병.

저 자매를 구하자고 폭왕과 적대하고 놈을 죽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군주가 같은 군주를 죽이는 건 칼데릭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 절대적인 철칙이 있기에 각자 다른 성향의 군주들이 서로에게 일절 간섭하지 않는 것이고, 칼데릭의 질서와 체계가 몇백 년의 세월 동안에도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쯧."

나는 작게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더 이곳에 있기도 역겨웠기에 그만 경기장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

순간 밀려드는 엄청난 두통에 나는 이마를 잡고 휘청였다.

아셸이 놀라서 나를 붙잡았다.

"······론 님? 왜 그러십니까?"

나는 그런 그녀를 밀어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이게······.'

머릿속에 알 수 없는 기억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기시감? 데자뷰?

마치 언젠가 한 번 일어났던 일인 것만 같은 기이한 감각.

[전부, 전부 죽여버리겠다!]

죽은 여인, 리프의 시체를 붙잡고 울부짖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스쳤다.

[너, 마족이랑 계약했구나? 아아, 좀처럼 보기 힘든 자질을 타고났는데 그걸 쓰레기통에 처박고, 아깝게 됐네.]

시간이 흘러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해버린 소년과, 그런 그를 제압하고 앞에 서있는 대군주의 모습이 스쳤다.

[어때, 나랑도 계악을 하는 건? 네 목숨은 살려줄게. 대신 너는 칼데릭의 7군주가 되는 거야. 딱 5년이면 돼. 그 뒤에는 네가 뭘 하든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어느 도시.

타오르는 열화 속에서, 환하게 미소를 지은 채 대학살을 벌이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스쳤다.

"······."

이내 두통이 가시고, 더 이상 스쳐가는 기억 따윈 없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다시 경기장을 내려다봤다.

제 누이를 죽이기 위해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소년을 멍하니 응시했다.

***

리프는 쓰러질 것 같은 몸을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소년은 마치 맹수처럼 달려들며 그녀를 붙잡고 물어뜯으려 했다. 보통을 훨씬 뛰어넘는 괴력이었다.

그에 대항해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검을 휘둘러 반격할 수도 없고, 그저 공격을 쳐내는 게 고작이었다.

크아악!

동생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정신을 차리라고 소리쳐도, 돌아오는 건 지독한 살의에 찬 괴성뿐.

울려퍼지는 관중들의 함성 속에 리프는 그렇게 한참을 동생과 씨름했다. 그러나 진작 한계에 달했던 몸이었다.

"으······!"

리프는 자신을 깔아뭉갠 채 이빨을 들이미는 소년의 얼굴을 간신히 붙잡았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목을 물어뜯기 위해 미친 듯이 발악하는 동생을, 그저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이보다 끔찍한 악몽이 또 있을까.

그녀의 손아귀에 힘이 점점 빠졌다.

꿈이라면 깨고, 현실이라면 그냥 이대로 다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힘이 다한 건 소년 쪽이었다.

소년의 몸이 옆으로 털썩 넘어갔다. 기운이 다해 폭주가 끝난 것이었다.

리프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동생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폭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즐거워 죽겠다는 웃음을 입가에 건 채 이쪽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어서 끝을 내라고 종용하는 것처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사방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온몸에 수북한 상처 때문이 아니라, 저 악마들의 함성 때문에.

리프는 풀린 눈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들고, 쓰러진 소년이 아닌 자신의 목에 검날을 가져다 댔다. 그들의 바람대로 경기를 끝내기 위해서.

그 순간이었다.

텁.

검을 쥔 손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리프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서있었다.

방금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함성들은 어디에도 없고, 경기장에 지독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허?"

즐겁게 웃고 있던 폭왕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쓰러진 소년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가 폭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 7군주의 입이 나지막이 열렸다.

"경기를 끝내라, 6군주."

리프리곤 (9)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나는 사방에 집중된 이목 속에 소년의 모습을 빤히 내려다봤다.

대체 뭐였지, 그건?

소년의 외모는 스쳐간 기억 속에서 본 그의 모습과 분명히 똑같았다.

경기에 난입한 건 그저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여기서 이들 남매를 이렇게 죽게 둬선 안 된다는 직감······ 근원을 알 수 없는 그런 직감이 솟아올랐기에.

"······."

그러고 보니 이번뿐만 아니라 예전에도 한 번 이런 감각을 느낀 적이 있는 것 같았는데, 언제였더라?

미간을 좁힌 채 기억을 더듬다 이내 떠올릴 수 있었다.

혼돈의 상자를 융합하고 처음 게임에 빙의했던 순간.

그때, 세상이 뒤집어지는 어지러움과 함께 흐릿하게 울렸던 알 수 없는 목소리.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 그거다.

분명히 그때 느꼈던 것과 똑같다.

마치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하지만 언젠가 일어났을 수도 있는 미래를 엿본 듯한 감각.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머리가 더 혼란스러워졌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일단 뒤로 미뤘다.

얼추 동요가 가시고 이성이 돌아오고 나니,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파악이 됐다.

나는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서 손을 떼고 폭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놈은 더없이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공들여서 만든 쇼를 끼어들어 망쳐버렸으니 제대로 빡친 모양.

일단 나서기는 했는데 놈과 대놓고 대치한 꼴이 된 것이다. 심지어 이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어째야 되나, 이제?

뒤늦게 후회가 차올랐지만 이미 저지른 일을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한 관성과,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맴돌고 있는 찝찝한 기시감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복잡하게 섞인 가운데, 나는 입을 열었다.

"경기를 끝내라, 6군주."

경기장 전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관중들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나와 폭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길 수 없는 격노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던 놈도 입을 열었다.

"지금 뭘 하자는 거냐, 7군주?"

······나도 몰라, 씨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나는 지금 득 하나 될 것 없는 멍청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얼굴 몇 번 본 게 고작인 남매 하나 살리자고 다른 군주의 행사를 망쳐버렸으니.

그러나 이내 결정을 확고히 굳혔다.

이번 한 번은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저지르기로.

'얘네들은 살려서 데리고 나간다.'

방금 내게 일어난 이 알 수 없는 현상과 뭔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면, 마냥 죽게 두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닐 것이다.

나는 가만히 폭왕과 시선을 교환하고 있다가 말했다.

"이 둘은 내가 데리고 가겠다."

"······뭐라고?"

놈은 이제 화가 끓어오르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광혈병의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말해라."

"······."

"치료법을 알려주고, 이 둘의 신변을 내게 넘긴다면 이번 건 빚으로 남겨두고 나중에 갚겠다."

적어도 내가 아는 광혈병의 치료법은 폭왕이 죽는 것밖에 없지만, 혹시나 놈이라면 다른 방법을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물론 이게 제안이 아니라 그냥 싸우자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알고서 하는 말이었다.

그래도 이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만에 하나라도 완만하게 이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당연히 그쪽 길을 선택해야 했으니까.

"하, 흐핫······."

하지만 역시 어림도 없는 모양이다.

놈이 실소를 흘리더니, 이내 고개를 쳐들고 쩌렁쩌렁하게 웃다가 서서히 소리가 그쳤다.

다시 고개를 내린 놈이 살의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입을 뗐다.

"정신이 나갔군. 감히 내 행사를 망치고 지껄인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냐?!"

콰아아앙!

거대한 기운의 폭발과 함께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초감각으로 아슬아슬하게 반응하여 펼친 부동장막을 거두고서,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짐승이 할퀸 듯한 3갈래의 거대한 자국이 경기장을 반으로 나누고 새겨진 채였다.

사방에서 비명과 소란이 일었다. 공격에 휘말린 관중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간 것이 보였다. 혼란과 공포에 빠진 채 도망가는 사람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폭왕은 주위 공기가 붉게 물든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지독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론 님."

아래로 내려와 곁에 선 아셸이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여전히 넋을 놓은 표정을 짓고 있는 리프와, 쓰러진 소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둘을 데리고서 멀리 물러나라."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아셸이 곧바로 두 남매를 양팔에 안고서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다시 폭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건 아니지. 정말로 아니야, 7군주. 지금 선을 굉장히 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흉흉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놈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이곳이 6군주령이면 내 방식을 존중할 필요가 있는 거야. 반대로 내가 7군주령에 방문했어도 너의 방식을 존중했을 거고. 한데도 내가 직접 공들여 차린 경기를, 내 눈앞에서 망쳐버려? 설령 대군주라 해도 이딴 식으로 날 무시할 수는 없다!"

구구절절 틀린 건 없는 말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놈이 벌이고 있는 게 끔찍한 악행이란 사실을 미뤄두고, 군주 대 군주의 입장으로만 봤을 때.

"내게 정식으로 사과하고 남매를 도로 데려와라, 7군주. 그리고 내 눈앞에서 네 손으로 직접 죽여라. 그러면 이번 일은 그냥 참고 넘어가지."

나는 놈의 말을 무시하고 머릿속으로 가늠해봤다.

94레벨의 혈왕.

고유 혈술은 육체 능력 증폭, 순수한 육체파에 가까운 초인. 그리고 방어막 따위의 능력은 없다.

······대충 할 만하다.

생각을 마친 나는 다시 말했다.

"광혈병의 치료법을 말해라."

놈은 내가 태도를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입꼬리를 비튼 놈의 전신이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권왕을 일격에 죽였다고 했었지? 어디 그 실력 좀 직접 보자고."

퍼어엉!

폭발음과 함께 순식간에 놈의 신형이 내 눈앞까지 도달했다.

나는 재차 부동 장막을 펼쳐서 주먹을 막았다. 주위 지반이 통째로 뒤집어지며 허공에 바위들이 비산했다.

이전에 오크킹의 일격을 막았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파괴력이다.

경기장 반대편으로 순간이동한 뒤 혈술을 펼쳐 허공에 핏방울들을 띄워냈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 놈이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혈술?"

뱀파이어도 아닌데 혈술은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

그 의문에 굳이 답해줄 이유는 없었다. 놈 역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다시 나를 향해서 돌진했다.

놈은 다행히도 내 주위에 떠있는 핏방울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은 채 접근해와서 주먹을 휘둘렀다.

공격은 다시금 장막에 막혔고, 놈의 육체는 내 핏방울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나는 다시 허공으로 순간이동했다. 아래에서 곧장 용오름처럼 피로 이루어진 회오리가 솟아올랐고, 그 역시 장막에 막혔다.

"귀찮은 능력을 가지고 있구나!"

나는 공간 도약과 부동 장막을 적절히 섞어 사용해 도망치고 방어했으며, 놈은 그런 나를 계속해서 쫓으며 공격을 퍼부었다.

폭왕은 기본적으로 광랑과 같은 육체파 초인에 속하지만, 놈은 순수하게 육체로만 싸우는 게 아니라 혈술까지 사용했다.

놈의 권격이나 혈기가 한 번 몰아칠 때마다 충격에 경기장 한편이 무너져내렸다. 아직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관중들은 그대로 떼죽음을 당했다.

점점 몰아치는 공격이 빠르고 강해짐에 따라 놈의 몸에서 자욱한 피 안개가 뿜어져나왔고, 어느새 일대를 뒤덮었다.

"······!"

나는 아찔함을 느끼며 순간이동을 하자마자 날아든 놈의 혈술을 간신히 막았다.

슬슬 공격에 반응하는 데에 한계가 오고 있었다.

최대로 끌어올린 초감각도 94레벨 초인의 속도에 반응하기에는 좀 부족한 모양이었다.

부동 장막이나 공간 도약이 발동에 조금이라도 딜레이가 있는 능력이었다면 진작에 몸이 찢겨나갔을 것이다.

"언제까지 쥐새끼처럼 도망만 칠 거냐!"

놈이 부동장막을 펼친 채 공중에 떠있는 나를 바라보며 기세등등하게 포효했다.

내가 저 괴물에 맞서 할 수 있는 일은 방어와 도주밖에 없다. 죽일 게 아니라면.

그래서 안전장치로 공방 와중에 틈틈히 혈술을 펼쳐 놈에게 내 피를 묻혀둔 것이었다.

공격을 막는 데에 한계가 오면 그냥 즉살로 죽여버려야 했으니까.

애초에 믿는 구석이 없었으면 저 괴물 놈과 싸움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즉살 말고도 믿고 있는 건 하나 더 있었다.

전투가 시작됐을 때부터 놈에게 발동해둔 가스칼리드의 혈술.

가스칼리드의 생전 레벨은 95, 그리고 폭왕의 레벨은 94였다.

아직까지는 전혀 통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기에 레벨 차이가 너무 미미해서 통하지 않나 싶었지만······.

'······왔다.'

어느 순간이 지나자, 내 육체에 서서히 힘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로 부동 장막만 펼친 채 제자리에서 버티기에 들어갔다.

내 바로 아래에서 연신 혈술을 퍼붓던 폭왕의 기세가 서서히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슬슬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놈도 공격을 멈추고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게 무슨······?"

와중에도 내 몸에 흘러들어오는 기운은 시시각각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지면으로 내려와 폭왕과 마주 보고 섰다.

당황하고 있던 놈이 내게 물었다.

"이 빌어먹을······ 무슨 술수를 부린 거냐?"

"글쎄."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린 놈이 거칠게 포효하며 내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놈의 공격은 더 이상 좀 전만큼 강력하지도, 반응하지 못할 만큼 빠르지도 않았다.

나는 여유롭게 놈의 공격을 피하고 막으며 발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Lv. 90]

[Lv. 89]

[Lv. 88]

.

.

.

재밌는 건 놈의 레벨 정보도 힘을 빼앗김에 따라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었다.

레벨의 기준이 그 대상의 현 시점에서의 힘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점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놈의 레벨은 계속해서 내려가고 내려가 이제는 아셸보다도 한참 낮아지게 되었을 때.

[Lv. 70]

"이 인간 놈이! 내 몸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아아아!"

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울부짖었다.

나는 내 육체를 가득 채운 미증유의 힘을 느끼며, 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놈이 창백하게 질려 뒤로 물러섰다.

"이······!"

놈이 꼴사납게 몸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쥐었다 펴고 있다가, 발을 굴렀다.

콰아앙!

한 번의 발구름에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놈은 다급히 팔을 올려 방어하려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내가 아무리 몸으로 치고받는 싸움 한 번 해본 적 없는 초짜라도, 이미 놈과 나 사이의 육체 능력엔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겼다.

쩌어어엉!

내 주먹에 얻어맞은 놈이 그대로 날아가서 무너진 경기장의 잔해에 처박혔다.

나는 조금 얼얼한 손을 털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들었다. 리프의 검이었다.

"끄으으······."

정신을 못 차린 채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놈에게 다가가서, 목에 검날을 가져갔다.

"광혈병의 치료법은?"

이런 식으로 패배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지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던 놈이, 이내 실성한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딴 건 없다."

"말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없어, 이 개 같은 새끼야! 없다고! 네가 뭔 지랄을 해봐야 그 애새끼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었단 말이다!"

"······."

"그딴 웃기지도 않은 협박은 집어치워라. 어디 다음 군주 회의에서 두고보자고. 이번 일은 명백히 네놈이 먼저 시작한 일이다! 내가 직접 대군주께······."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역시 다른 방법은 없었던 건가?

놈을 제압한 것도 헛수고고, 결국 처음부터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놈도 서서히 지껄이던 말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봤다.

"사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뭐?"

"아주 간단한 방법이지. 네가 죽으면 된다. 그럼 이 대륙에서 광혈병은 완전히 사라질 테니."

놈이 멍청하게 날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뭔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내가 죽으면 광혈병이 낫는다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글쎄."

게임에서는 그랬으니까.

어차피 설명해봐야 놈은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나는 놈을 차갑게 내려다봤다.

놈이 침을 꿀꺽 삼키고서 말했다.

"정말 날 죽이겠다고? 군주가 군주를?"

"······."

"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라. 칼데릭을 적으로 돌릴 셈이냐? 대군주가 네 목숨을 직접 거두려 들 거다! 그깟 애새끼들 하나 때문에 지금 날 죽이겠단······!"

촤아악!

검날이 내리쳐졌고, 놈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그야 죽은 놈이 걱정할 건 아니지."

리프리곤 (10)

머리를 잃은 몸이 바닥에 허물어진다.

칼데릭의 군주나 되는 이의 최후치고는 초라한 꼴이었다.

놈의 시체를 잠시 내려다보고 있다가 부러진 검을 바닥에 던졌다. 목을 벰과 동시에 검날도 충격을 못 견디고 부러졌다.

'음.'

나는 전신에 치미는 가벼운 탈력감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육체를 채우고 있던 거대한 힘이 증발하듯 전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폭왕이 죽으니 놈에게서 빼앗은 혈술의 능력이 사라진 것이었다.

기대는 안 했지만, 역시 본 주인이 죽었다고 강탈한 능력을 영구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건 아니었던 모양.

'뭐, 하긴······ 그게 되면 사기지.'

영구 강탈이 가능하면 생전의 가스칼리드도 동족이란 동족은 죄다 학살하며 혈술을 흡수하고 다녔지 않았으려나.

나는 잡생각을 하다가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자욱했던 혈무는 걷히고, 완전히 폐허가 된 경기장 한쪽의 떨어진 곳에 있는 이들이 보였다. 아셸과 리프였다.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아셸이 들고 있는 소년은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였다.

하지만 좀 전까지 그의 몸에 감돌고 있던 검붉은 색이나 울룩불룩 징그럽게 튀어나왔던 핏줄은 더 이상 없었다. 몸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온 것이었다.

"······아."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리프는 피를 그렇게 흘리고도 용케도 아직 의식을 잃지 않고 있었다.

내가 소년을 빤히 쳐다보자 그녀의 시선도 자신의 동생에게로 옮겨졌다. 그리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네 동생의 광혈병은 나은 모양이다."

"······."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 리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내 눈에 초점이 풀리더니 휘청거리며 몸이 넘어갔다. 결국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아셸이 재빨리 쓰러지는 그녀를 빈손으로 받아들었다.

남매 모두 한없이 호흡과 맥박이 미약했지만 끊어지지 않고 살아있었다.

스칼릿도 다 사용해서 수중에 있는 포션이 없었기에 서둘러 굴피로에게로 데려가야 했다.

나는 아셸에게 말했다.

"가자. 치료부터 서둘러야겠군."

"예······."

아셸의 시선이 다시 경기장 저편으로 향했다. 폭왕의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는 곳으로.

그녀도 설마 내가 폭왕을 죽이기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표정에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들 남매를 죽이든가, 폭왕을 죽이든가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리고 나는 놈을 죽이고 남매를 살리는 길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쓰읍······.'

다시 생각해도 정말 제대로 정신 나간 짓을 벌이긴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후련했다. 아까 경기에 난입할 때까지만 해도 치밀었던 후회 또한 없었다.

나 스스로도 대체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게 올바른 선택이 맞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머릿속의 이성은 여전히 날 미친 새끼라고 욕하고, 앞으로의 뒷감당은 어쩔 거냐며 다그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다고 정말 뒷일을 아예 생각하지도 않고 저지른 건 아니었다.

일단 남매의 치료가 우선이었기에, 고민은 나중에 하고 어서 포션 상점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

그때 한쪽에서 우르르 몰려오는 기척이 가까워졌다.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 나는 그들이 군주성 소속의 기사라는 걸 곧바로 알 수 있었다.

6군주성 직속의 기사단이면 아마도 암혼 기사단이었던가?

성에 있던 기사들이 죄다 몰려오기라도 했는지 그 수는 언뜻 봐도 백은 가볍게 넘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이런 난리가 났으니 당연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당황한 기색으로 무너진 잔해와 시체들을 넘어서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Lv. 72]

이내 우리를 발견한 그들이 흠칫 놀라며 멈춰섰다.

가장 선두에 있는 단장으로 보이는 기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여 7군주님이십니까?"

아무래도 6군주와 내가 싸움이 붙었다는 것까지는 파악하고 서둘러서 달려온 모양이었다.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이 내 뒤쪽으로 향했고, 바닥에 널브러져있는 폭왕의 시체를 발견하고서 눈을 찢어져라 크게 떴다.

나는 그들이 있는 쪽으로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물러서라."

폭왕의 죽음을 확인하고서도 기사들은 날 막아서지 못했다.

그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허겁지겁 앞길에서 물러날 뿐이었다.

아무리 자신들의 군주가 살해당했다고 해도 막아설 엄두가 날 리 없었다.

나는 기사들이 양옆으로 갈라진 길을 따라서 걸어갔고, 아셸이 남매를 양손에 짊어진 채 뒤를 따라왔다.

우리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도 기사들은 한참을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있었다.

***

악티폴에서 나온 뒤, 곧바로 굴피로가 있는 포션 상점으로 이동했다.

어째서인지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가게 앞에서 담배를 피고 있던 그는 우리를 발견하고서 화색했다.

"7군주! 무사하셨군."

"······?"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다급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오? 악티폴이 있는 쪽에서 난리가 났길래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 그대와 6군주가 맞붙었다 하던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

아, 벌써 도시 전체에 소란이 다 퍼진 건가.

그가 아셸이 들고 있는 남매를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이들을 구하느라 6군주와 충돌한 것이오?"

나는 태연히 대꾸했다.

"별 일은 아니다. 잘 해결됐으니."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6군주가 순순히 이들을 내어줬소?"

"내어줄 수밖에 없지. 죽었으니까."

"······?!"

굴피로가 경악해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주, 죽였다고? 6군주를?"

"일단 들어가서 이들부터 치료하지."

"아, 그, 그렇지. 어서 들어오시오."

이내 그도 서둘러서 만신창이가 된 남매를 가게 안으로 들였다.

가게 안쪽에 있는 침상에 두 사람을 눕히고서 잠시 상태를 살피더니, 곧장 포션 몇 개를 가지고서 돌아왔다.

"어떤가?"

"일단 리프는 목숨에 지장은 없소. 출혈이 심하긴 해도 외상만 회복시키면 되니. 동생 쪽이 광혈병 때문에 효과 좋은 포션을 못 사용해서 문제지만, 어떻게든 될······."

나는 그에게 말했다.

"광혈병이라면 완전히 나았으니, 마력이 담긴 포션을 사용해도 된다."

"······음? 그게 무슨 소리요?"

굴피로가 의아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나는 소년에게로 턱짓했다.

그에 다시 한 번 소년의 상태를 살펴보던 그가 천천히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게 무슨······ 어떻게?"

잠시 나와 소년을 번갈아 보던 그가, 일단은 치료가 우선이라 생각했는지 다시 바깥으로 나가서는 다른 포션을 더 가져왔다.

그리고는 소년에게 먼저 포션을 먹이고 몸에 부은 뒤, 이어서 리프도 치료했다.

나와 아셸은 방 한쪽에 가만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내 치료가 끝났는지 굴피로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폈다.

리프는 잠깐 사이에 전신에 가득했던 검상이 순식간에 회복되어 있었고, 창백했던 동생 쪽의 혈색에도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과연 대연금술사가 제작한 포션다운 효과였다.

"이제 말씀해보시오. 대체 광혈병을 어떻게 치료한 것이오?"

굴피로의 물음에, 나는 나란히 누워있는 남매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6군주를 죽였더니 곧바로 낫더군. 광혈병은 놈이 죽어야 사라지는 병이었던 것 같다."

그 사실을 알고 죽인 것이기에 말이 반대이긴 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아니었다.

굴피로가 작게 탄식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리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그녀가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킨 그녀가 주위에 서있는 우리를 둘러봤다.

굴피로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일어났느냐?"

"······여기는?"

"포션 상점이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녀가, 이내 옆에 누워있는 소년을 발견한 그녀가 다급히 그의 상태를 살피려고 했다.

"괜찮다. 너도 동생도 전부 치료했으니 안심해라."

"아, 아니. 광혈병, 광혈병이······."

"그래, 네 동생의 몸에 있던 혈기도 완전히 사라졌더구나. 광혈병은 6군주를 죽여야 낫는 병이었던 모양이야."

굴피로의 말에 그녀가 넋이 나간 탄성을 흘리다가, 나를 바라봤다가, 다시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에서 곧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으, 으으······."

동생의 몸 이곳저곳을 떨리는 손으로 매만지다가 아예 품으로 끌어 안아들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만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그녀는 한참을 목놓아서 엉엉 울었다.

***

나와 아셸은 여관에 있는 바로스까지 불러와서 굴피로와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는 상점에 있는 식재료로 바로스가 간단하게 차렸다.

"쯧쯔, 저러다 얼굴에 구멍 나겠군."

아직도 방 안에서 침상 옆에 앉아 누워있는 동생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리프를 보며, 굴피로가 작게 혀를 찼다.

그녀의 몫으로도 수프를 가져다줬지만 다 식을 때까지 먹지 않고 놔두고 있었다.

그럴 만하다 싶었다.

동생 하나 구하자고 악티폴에서 몇 년을 구르다 이제야 겨우 그 염원을 이뤄낸 것이었으니까.

"한데 괜찮겠소? 군주를 죽였는데······."

굴피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별 수 없지. 그대는 7군주령으로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

"아니, 그 문제는 둘째치고 따로 생각해둔 것이 있으시냔 말이오. 그걸 알아야 나도 뭘 어떻게 할지 정하지 않겠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주가 군주를 죽였으니 대군주가 어떻게 나올지는 안다. 그에 대해서는 대충 생각해뒀다.

내 반응에 굴피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뭐, 생각이 있다면 이제 와서 나도 빠질 생각은 없소이다. 7군주령으로 함께 갈 것이오."

"그래······."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대답했다.

지금은 그보다도 아까 경기장에서 스쳐갔던 기억을 되새기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스쳐간, 이제는 흐릿해져서 잘 떠오르지도 않는 기억.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건 마지막에 스쳐간 기억에서 대학살을 벌이던 그의 모습이었지만······.

[너, 마족이랑 계악했구나? 아아, 좀처럼 보기 힘든 자질을 타고났는데 그걸 쓰레기통에 처박고 아깝게 됐네.]

[어때, 나랑도 계악을 하는 건? 네 목숨은 살려줄게. 대신 너는 칼데릭의 군주가······.]

"······!"

내 눈이 서서히 커졌다.

대군주에게 제압당한 소년, 그런 그에게 제안을 하고 있던 대군주.

나는 다급히 방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려 남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굴피로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소년의 이름이 뭐지?"

굴피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아직 모르셨소? 리곤이오."

"······."

나는 침상에 누워있는 소년의 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리고 그제야, 스쳐간 기억 속의 그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리프, 리곤······.'

살귀 리프리곤.

폭왕에게 혈육을 잃고, 제 누이의 이름까지 뒤집어쓴 살육에 미친 복수귀가 바로 그였음을.

긴급 소집 (1)

소년, 리곤이 깨어난 건 한나절이 지나고 늦은 저녁이 되어서였다.

"으음······ 누나?"

낮에도 한참을 울었던 리프는 동생이 깨어나자 또다시 한바탕 눈물을 쏟아냈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어리둥절한 얼굴로도 그런 그녀를 안고서 달랬다.

경기장에서의 기억은 없는지 상황 파악이 전혀 되지 않은 그에게 진정한 리프가 일어난 일들을 설명해줬다.

인상을 일그러트렸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가지각색의 표정을 지으며 설명을 모두 들은 그는 가장 먼저 나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그, 어······."

"론이다."

"아, 론 님. 누님과 저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 정말로······."

몸을 움직여 침대에서 벗어나려던 리곤이 어지러운 듯 휘청거리다가, 도로 털썩 주저앉았다.

"움직이지 마. 빨리 다시 누워."

리프가 그런 그를 다급히 도로 뉘였다.

"몸이 정상으로 회복되려면 아직 멀었다. 비단 이번 폭주뿐 아니라 원래부터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상태였었으니."

굴피로가 혀를 차며 거들어 말했다.

"수중에 있는 것 중에 가장 효력이 좋은 포션을 사용하긴 했다만, 그래도 당분간은 움직이지 말고 안정을 취하거라."

"네······ 플레온 영감님도 정말 감사합니다."

상황이 얼추 정리되고, 이야기의 주제는 다시 앞으로의 향방에 대한 것으로 옮겨졌다.

"이 아이들의 처우는 어떻게 할 생각이시오?"

굴피로의 물음에 나는 남매를 바라봤다.

일단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야 뭐······ 생각할 것도 없이 심각했다.

군주의 사망은 칼데릭 전체가 뒤집어질 대사건, 하물며 그를 죽인 상대는 다른 진영의 인물도 아니고 같은 군주다.

게임 속 설정에서, 군주가 군주의 손에 죽은 경우는 칼데릭의 역사에 단 2번 존재했을 것이다. 기억하기로는 그랬다.

그리고 그 참사를 벌인 두 군주는 모두 숙청당했다.

한 명은 긴급 소집으로 군주들이 전부 모인 자리에서, 다른 한 명은 일을 벌이고 그대로 도주했다가 끝내 대군주에게 붙잡혀 그녀의 손에 직접.

이건 내게 제시된 갈림길이기도 했다.

'7군주령으로 돌아가거나, 튀거나.'

하지만,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후자는 선택할 수 없었다.

그건 정말로 칼데릭 전체를, 대륙의 4대 세력 중 하나를 완전히 적으로 돌리는 일이었으니까.

추적이야 둘째치더라도, 그래서야 앞으로 있을 수많은 난관들을 계획했던 대로 과연 잘 해결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무책임하고.'

내가 이대로 튀어버리면 나와 관련이 있는 남겨진 사람들은 당연히 큰 곤경에 처할 것이다.

7군주령의 수도에만 하더라도 알키마스 공방이 있었다. 대군주가 그들을 어떻게 하려고 들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7군주령으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었다.

이대로 7군주령으로 돌아간다면 아마 곧바로 긴급 소집이 걸릴 것이다.

긴급 소집이란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바로 지금과 같은 중대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군주의 권한으로 모든 군주들을 소집하는 것.

그리고 나 역시도 반쯤 죄인 신세로 소집에 응해야만 하게 되겠지.

'그래도 가는 수밖에.'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정말 죽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둔 것이 없진 않았다.

일단 순순히 소집에 응하고, 대군주와 대화를 한다.

이 위기는 거기서 해결을 보고 매듭을 짓는 게 적어도 내 판단으로의 최선이었다.

나는 일단 남매에게 간단히 설명부터 해주었다. 그들도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야 할 것이기에.

내가 칼데릭의 7군주인 것, 6군주 폭왕이 죽은 것, 그리고 대충 앞으로 벌어질 일들.

스케일이 너무 크게 느껴졌는지 리곤은 이야기를 들으며 입을 헤 벌렸고, 리프는 굳은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니 너희도 나와 함께 7군주령으로 이동한다."

지금 내 처지가 위태롭다고 해도, 그래도 당장은 내 곁에 있는 것이 두 사람에게도 그나마 가장 안전할 것이었다.

아셸과 함께 이들을 따로 빼돌리는 것도 생각하긴 했으나······ 어차피 긴급 소집에서 일이 틀어지면 다 소용없는 짓일 테니까.

다행히 두 사람은 내 말에 반감을 드러내거나 거절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무엇을 원하시든 말씀대로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리프가 그렇게 말했고, 리곤도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리곤을 빤히 응시했다.

하여튼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처음 그녀의 이름이 리프라는 걸 알았을 때 순간 리프리곤을 떠올리긴 했었지만, 그저 우연으로 치부했었다. 관련을 지을 점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녀의 동생이, 이 순진무구해 보이는 소년이 바로 그 리프리곤이었다니······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을까.

'잘 된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군.'

결국 그 알 수 없는 기억이 떠오른 원인은 이거였나?

미래에 타락하여 리프리곤이 될 소년을 구하고 확보하는 것.

······아, 모르겠다. 이 문제는 어차피 더 고민해봐야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리프에게 말했다.

"일단 둘 모두 식사부터 해라."

리곤은 물론이고 아까부터 깨어있던 리프도 동생만 지켜보느라 뭐 하나 먹지 않고 있었다.

바로스에게 시켜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게 했다.

그러나 리프는 또 자신의 몫은 제쳐두고 리곤에게 먼저 수프를 떠먹여주려고 했다. 참 끔찍한 동생 사랑이었다.

결국 리곤이 수프 그릇을 뺏어들어 직접 떠먹기 시작한 다음에야, 그녀도 자신의 식사를 했다.

방 밖의 테이블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굴피로가 물었다.

"출발은 언제 할 것이오?"

"리곤의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되면."

"그럼 너무 늦어질 텐데······ 서둘러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니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서둘러봐야 바뀔 건 없었으니 아무렴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렇게 사흘의 시간이 흘렀다.

상점에 머무르는 동안 바깥에서 간간이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그뿐이었다.

그동안 리곤의 상태는 혼자서 거동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 빠르게 회복되었다.

여전히 몸은 수척했지만 막 깨어났을 당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혈색 역시 좋아졌다.

'슬슬 이동해야겠군.'

이제 7군주령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

7군주령 엔록의 수도 버크혼.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마차는 군주성에 도착했다.

반 년도 넘는 시간 만에 돌아온 군주성이었지만 집에 돌아왔다는 느낌은 딱히 없었다.

애초에 이곳에서 머물렀던 시간도 얼마 되지 않았었으니까.

성의 정문에서 가장 먼저 날 맞이한 건 집사장인 플로토였다.

항상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했었던 그는 어딘가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정렬하고 서있는 기사들의 분위기 역시 그러했는데, 그 이유는 뻔했다.

"성에 누가 찾아왔었나?"

"······예, 대군주성의 기사들이 바로 얼마 전에 방문했었습니다."

이미 대군주령과 이곳까지는 소식이 싹 다 닿은 모양이었다.

대응이 빠르다 여길 것도 없었다.

내가 서둘러서 움직인 것도 아니고, 대군주 측에서도 상황을 파악하기에 시간은 충분했을 테니.

나는 굴피로와 리프 남매도 성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며 시간을 보냈다.

기다리고 있으면 곧 저쪽에서 반응을 보일 테니 내가 뭘 할 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에 성 주위의 멀리 떨어진 곳에선 꾸준히 이쪽을 지켜보는 눈들이 느껴졌다.

대군주성 측에서 보낸 감시자일 건 뻔했기에 신경 쓰지는 않았다. 내가 성에서 떠날 수도 있으니 지켜보는 거겠지.

그렇게 대략 보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끼이익!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봤다.

하늘 저편에서 성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3개의 거대한 비행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와이번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탄 사람들은······.

'이제야 왔네.'

나는 방 밖으로 나서서 문 앞에 있던 아셸에게 말했다.

"남매와 굴피로를 데리고 성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그리고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오면, 내가 말했던 대로 행동하도록."

그녀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으나, 이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나는 그녀를 남겨두고 아래층의 중앙홀로 내려갔다.

바깥의 수선한 분위기 속에 곧 집사장이 다가와서 내게 말을 전해왔다.

"대군주님의 전령을 전하기 위해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이내 홀에 모습을 드러낸 건 세 인물이었다.

드워프와 로브의 남자, 그리고 기사.

나는 그들과 마주 보고 서서 차례로 바라봤다.

중앙홀에 더없이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Lv. 96]

[Lv. 89]

둘은 아는 얼굴이었다.

1군주 신퇴와 참모장 데이폰.

[Lv. 95]

그리고 오른쪽에 서있는 흑갑의 기사는 레벨로 보아서 아마······.

'흑린의 단장이군.'

흑린의 기사단장, 크라디엘.

참모장이 대군주의 왼팔이라면, 그는 대군주의 오른팔이자 가장 강력한 검이었다.

흑린의 기사들은 군주들과 달리 대군주에게 충성을 바치고 오로지 그녀의 명령만을 따랐으니까.

"대군주가 긴급 소집을 선언했네, 7군주."

은은한 오색빛 광채를 뿜어내는 갑옷과 검으로 무장하고 있는 신퇴가, 가장 먼저 입을 뗐다.

"이유를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사실 확인부터 하겠네. 마헤아 시에서 6군주와 전투를 벌이고, 끝내 그를 죽인 이가 7군주 그대가 맞는가?"

부정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어째서 6군주를 죽였지?"

"그건 굳이 지금 말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군."

"······그 말은, 소집에 순순히 응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는가?"

신퇴가 가라앉은 눈으로 물었다. 그의 갑옷 주위에 아지랑이처럼 역장이 일렁거렸다.

흑린의 단장 역시 검자루에 올리고 있던 손을 슬며시 쥐었다.

싸늘하면서도 숨 막히는 긴장감이 홀에 감돌았다.

나는 그들과 가만히 마주하고 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

애초에 그럴 생각이 아니면 군주성으로 돌아왔을 리가 있나.

그리고 그것은 세 사람도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때 참모장이 나서서 말했다.

"악티폴의 경기에서 한 인간 남매를 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여 그들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면······."

"이동하는 건 나뿐이다."

나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가 굳은 얼굴로 신퇴를 돌아봤고, 신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럼 바로 대군주성으로 이동하지."

다른 군주들도 지금쯤 전부 모였으려나?

그게 궁금했지만 어차피 이제 곧 알게 될 것이기에 굳이 묻지는 않았다.

나는 참모장을 바라봤다.

성으로 귀환하는 건 그의 텔레포트를 이용해서 이동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짐작대로 그가 나섰다.

"제 곁으로 와주십시오. 텔레포트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세 사람의 곁으로 저벅저벅 다가가서 섰다.

곧 거대한 마력의 유동과 함께 주위 시야가 일그러졌다.

긴급 소집 (2)

시야가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펼쳐진 건 어두운 공동이었다.

사방에 박혀있는 마석들과 발밑의 마법진,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로브의 마법사들.

호송선에서 탈출해 처음으로 대군주성에 발을 들였을 때의 그 풍경이었다.

지상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 복도를 걸으며, 나는 처음 대군주성에 왔을 때와 조금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호랑이 아가리로 들어온 것만 같은 그 기분.

그리고 그건 실제로도 다르지 않았다.

이 긴급 소집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오늘 이곳은 내 처형장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다만 그때와 달리 마음은 평온한 건 이 세계에 그만큼 익숙해지기도 했고, 또한 오기 전에 충분한 각오를 했기 때문이리라.

군주로서 근엄함을 연기하는 것도 계속 하다 보니 이제 내면까지도 조금은 동화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스름한 복도를 걸어 이내 기사들이 정렬하고 서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전부 흑린의 단장과 같은 칠흑의 갑주를 입고 있는 데다가, 레벨들도 80이 넘는다. 전원이 흑린의 기사인 듯했다.

그리고 그 끝에 보이는 건 거대한 문.

우리는 기사들을 지나쳐 걸어 회의장의 입구 바로 앞에 섰다.

'······음.'

문 너머로 숨길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들이 느껴졌다.

그에 나는 안에 군주들이 전원 모여있음을 확신했으며, 동시에 깨달았다.

만약 일이 계획대로 안 풀린다면 정말로 살아나갈 방법이 없을 것임을.

"이번 소집은 7군주 그대가 6군주를 죽인 것에 대한 해명을 듣기 위해 열린 자리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신퇴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를 슬쩍 돌아봤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군주의 앞에서 거짓을 입에 담는 건 무의미한 짓이야."

"······."

"부디 순순히 자네의 진심을 밝히고 대군주를 설득할 수 있길 바라지. 나 역시 이번 일에 대해선 완만한 해결을 바라고 있네."

1군주 신퇴는 아홉 군주 중에서도 가장 특별하다면 특별한 존재였다.

우선 군주들 중 가장 레벨이 높기도 하고, 무엇보다 칼데릭의 건국부터 군주로서 자리를 지켜온 최초의 군주였으니까.

그만큼 그는 칼데릭의 가장 거대한 기둥과 다름이 없으며, 또한 누구보다 진심으로 칼데릭의 평화를 생각하는 이였다.

아마 그 역시도 나만큼이나 이번 일로 인해 더 이상의 충돌을 빚기를 원치 않는 듯했다.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직접 희의장의 문을 열었다.

쿠구구구.

문이 열리고 회의장 안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대한 원탁,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앉아있는 군주들.

그들의 시선은 이미 전부 이쪽으로 모여있었다.

"······."

지금 내 옆 서있는 1군주 신퇴부터, 이전의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던 4군주 망자왕과 9군주 거왕까지.

시간이 많이 흐른 것도 아니라서 몇 명쯤은 불참했을 법도 한데 정말로 군주 전원이 모였다.

나는 특히나 자리 한편을 혼자서 전부 채우고 있는 9군주의 모습을 바라봤다.

키가 적어도 5미터는 되어 보이는 어마무시한 덩치의 거인. 희소 종족 중 하나인 거인족이다.

그는 다른 군주들과 달리 홀로 몸집에 맞는 거대한 의자에 앉아서 침착한 눈으로 내가 서있는 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특별히 적의나 살의를 뿜어내는 이는 없으나, 거대한 압력이 회의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왜냐면 자리에 앉아있는 군주들 전원이 제대로 무장을 하고 있었기에.

"어서 와, 7군주."

원탁의 상석에 앉아있던 대군주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이전에 봤던 것과 같은 검은 드레스 복장이었다.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적의 따위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웃음에, 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별 충돌은 없었던 모양이야?"

팔걸이에 턱을 괴고 있던 광랑도 자세를 바로하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내 자리로 다가가서 앉았다.

신퇴도 자신의 자리에 앉고, 참모장과 흑린 단장은 대군주가 앉아있는 뒤쪽으로 다가가서 섰다.

잠시 회의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곧 대군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모두 모였으니 시작해볼까?"

그녀가 빈 6군주의 자리를 가리켰다.

"긴급 소집을 선언한 이유는 다들 알다시피 6군주의 죽음 때문이야. 그리고 그를 죽인 게 바로 얼마 전에 즉위한 7군주고."

다시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방금 말한 사실에 대해서 정정할 부분이 있어?"

"없다."

이 또한 형식적인 확인이었다.

내 대답에 대군주가 계속 말을 이었다.

"좋아, 우선 내가 파악한 정황은 이래. 6군주가 주최한 검투 경기에서 7군주가 갑작스레 난입했고, 경기 중인 노예 검투사를 거둬가겠다고 6군주에게 일방적으로 선언, 그리고 그에 분노한 6군주와 충돌이 일었고, 치열한 전투 끝에 6군주를 죽였다."

"······."

"어때, 7군주. 이에 대해서도 뭐라도 정정할 부분이 있어?"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일단 선공은 6군주 쪽에서 했다."

"아, 그래. 그렇다고 하더라고. 근데 그거야 중요한 사실이 아니잖아?"

대군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2군주 뇌후가 끼어들어서 말을 보탰다.

"선공은 6군주가 했다고 해도 먼저 6군주의 행사에 개입한 건 7군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일의 발단 역시 분명히 그에게 있습니다."

나는 슬쩍 뇌후를 바라봤다.

전에 회의에서 시비가 붙었던 게 아직도 앙금이 있는지, 왜인지 유독 적극적으로 보이는 그녀였다.

대군주가 눈웃음을 지으며 날 바라봤다.

"그리고 7군주, 대답해줄 수 있겠어? 6군주가 먼저 공격하기 전에도 6군주를 죽일 의지가 아예 없었는지 말이야."

"······."

본질을 찌르는 질문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쉽게 흘러가지는 않을 듯했다.

세인테아의 용사 또한 가지고 있는 능력이기도 한, 진실과 거짓을 꿰뚫어보는 능력.

대군주에게 그 능력이 있는 이상 이 자리에서 어설프게 입을 놀리는 건 씨알도 먹히지 않았으니까.

6군주가 선공하기 전에 놈을 죽일 생각이 없었냐고?

아예 없었다고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면 그때 나는 이미 결심을 마친 상태였었으니까.

놈에게서 광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캐내지 못하면, 놈을 죽여서라도 리프 남매를 살려서 데리고 나가야겠다고 말이다.

"아예 없지는 않았지."

대군주가 다시 물었다.

"그럼 전투가 너무 격해진 끝에 어쩔 수 없이 죽인 게 아니라,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6군주를 죽인 거라는 거겠지?"

"그렇다."

이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내가 놈을 죽인 건 놈의 육체 능력을 대부분 빼앗은 뒤 제압하고 난 다음이었으니.

그런 내 대답에 군주들이 각각의 반응을 보였다.

신퇴와 뇌후가 슬며시 미간을 좁혔고, 광랑이나 흑해 여제는 처음 들어왔을 때 봤던 것처럼 묘한 웃음을 지었으며, 나머지 군주들은 별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실 확인을 분명히 했으니, 이제 이유를 들어봐야겠지."

대군주가 어느새 웃음이 가신 얼굴로 이어 물었다.

"7군주, 어째서 6군주를 죽인 거야?"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6군주를 죽인 이유.

이 소집은 결국 내게서 그 이유를 듣고, 이유가 합당하지 않으면 나를 처형하기 위해서 열린 자리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 문답이 바로 내 생사를 가를 결정적인 문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합당한 이유를 말할 수가 없지.'

당연했다.

이들에게 있어선 아무런 가치도 없는 하찮은 벌레에 지나지 않을, 두 명의 인간.

고작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6군주를 죽여버렸다고 대답한다면 어떻게 되겠나?

물론 거기에도 이유라면 있었다.

남매 중 남자 쪽이 미래에 6군주를 죽일 인물이었다는 것, 어차피 개입하지 않았어도 놈은 머지않은 미래 죽었을 거라는 것.

하지만 당연히 이건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물론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이 있는 대군주라면 내 터무니없는 예지가 정말로 진실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또 일이 복잡하게 꼬인다. 리곤의 존재를 대놓고 대군주에게 드러내면 또 뭐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어때, 나랑도 계악을 하는 건? 네 목숨은 살려줄게. 너는 대신 칼데릭의 군주가······.]

······간신히 지옥에서 탈출한 그들 남매를 다시금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는 일이다.

여기서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고 목숨을 건지자고 내가 가진 패들을 다 대군주에게 꺼내놓는 건, 최악은 아니지만 차악이었다.

그러니 나는 어느 정도의 리스크는 감수하고 이곳에서 살아나갈 생각이다.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그게 최선이었다."

"······응?"

대군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곳에서 6군주를 죽이는 게, 적어도 내 판단에서는 최선이었다는 이야기다. 칼데릭의 미래에 덜 해로운."

이것은 거짓 하나 없는 진실이었다.

어차피 미래에 죽었을 6군주가 좀 더 일찍이 죽었을 뿐이다. 그리고 미래에 살귀가 될 리곤은 타락하지 않았다.

이게 칼데릭에게 이득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손해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대군주가 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지금, 6군주의 존재가 칼데릭에 해악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

"침묵하지고 있지만 말고 왜 그렇게 판단한 건지 이유를 설명해줬으면 좋겠는데, 7군주."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다."

여기서 더 파고들면 어떻게든 리곤의 존재를 드러내야만 했기에, 나는 더 이상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대군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 이유를 모르면 아무런 판단을 할 수가 없다고.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면······."

"더 들어볼 게 있겠습니까?"

뇌후가 싸늘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군주가 군주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그냥 넘어간다면 칼데릭의 질서가 뿌리부터 흔들릴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 됐든, 얼마나 합당하든, 여기서 당장 7군주를 처형해 흔들린 질서를 바로잡아야만 합니다."

그에 광랑도 입을 열었다.

"야, 근데 너 6군주 존나 싫어했잖아. 솔직히 저번 회의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뒤끝 부리는 것도 있지?"

"······지금 상황에 장난이 나옵니까?"

"봐봐, 찔렸구만."

그녀가 킥킥 웃으며 옆쪽에 세워뒀던 검을 집어들었다.

"그래도 나도 2군주 의견엔 찬성이야. 죽인 이유야 뭐가 됐든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이런 일을 그냥 어영부영 넘어갔다간 다들 어떻게 생각하겠어?"

"맞아요, 대군주님. 보니까 적극적으로 해명할 생각도 없는 듯한데,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서 죽이죠."

흑해 여제도 끼어들어 피막 날개를 파닥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나는 대군주를 바라봤다.

"7군주, 마지막 기회를 줄게."

그녀가 무언가 흥이 팍 식었다는 얼굴로 말했다.

"설득이든 뭐든 내 마음을 바꿀 말을 해봐. 아니면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게 될 거야."

그 말투는 마치, 군주들의 말대로 무슨 이유를 댔든지 처음부터 나를 처형할 생각이었다는 투였다.

나는 숨을 내쉬며 팔짱을 끼었다.

대군주는 종잡을 수 없지만 합리적인 인물이다.

여기서 합리적이라는 건, 그녀가 어떤 일에 대해서 자존심 따위를 세우는 성격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그녀가 날 처형하기로 결정한 건 오로지 그게 칼데릭에 더 이득이기에 그런 것이다.

네가 감히 철칙을 깨고 군주를 죽여? 따위의 감정적인 선택이 아니라 말이다.

아무리 날 뛰어난 인재로 판단했다고 해도 나는 이제 막 군좌에 앉은, 사실상 아직 신뢰가 더없이 부족한 인물.

수백 년간 유지되어온 칼데릭의 근본적인 질서를 뒤흔든 불안 요소를 계속해서 남겨두고 감수할 만큼의 메리트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나를 살리는 것에 이득이 없다면, 반대로 죽이는 것에 감수해야 할 피해를 각인시켜주기로.

원탁에 둘러앉은 군주들이 서서히 전의를 일으키며 나를 빤히 응시했다.

나는 그들을 한 차례 훑어보고서 입을 열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내가 살아남을 방법은 없겠지."

이것은 사실이다.

아무리 내가 많은 능력들을 얻었다고 해도, 대군주를 포함한 모든 군주들의 합공에 살아남을 가능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명심해라."

여기서 방어막 계열의 능력이 없는 군주는 5군주 광랑과 9군주 거왕, 그리고 8군주 흑해 여제······.

공간 도약을 연달아 펼칠 수 있는 횟수는 3번, 그리고 혈술.

회의실이라는 한정된 공간, 만약 혈술을 펼쳐 사방으로 피를 터뜨린다면 군주들이 얼마나 고스란히 그에 맞아줄까?

알 수 없다. 어쩌면 한 명도 맞히지 못할 수도 있고, 방심 때문에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많이 맞힐 수도 있다.

즉,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내가 한 명도 죽이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을 수도, 반대로 군주들이 몰살을 당할 수도 있다.

"이곳에 자리한 절반."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는 말은 허세이되 허세가 아닌,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서 오는 순수한 진심이었다.

그리고 대군주는 그를 알 것이다.

"나를 죽일 생각이면, 너희도 절반 이상은 죽을 각오를 하도록."

긴급 소집 (3)

회의장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주 차갑고, 숨 막히는 정적이.

군주들의 시선이 전부 모인 가운데, 나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가장한 채 대군주에게 말했다.

"한번 확인해보겠나, 대군주?"

"······."

그녀가 소름 끼칠 정도로 표정이 없는 얼굴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대군주와 아홉 군주, 그리고 흑린의 단장에 참모장까지.

만약 용사가 없다면, 다른 병력 없이 그들만으로도 세인테아를 대륙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을 재앙적인 전력.

나는 지금 그들의 전면에 대고서 말한 것이다.

나 혼자 싸워도 너희 중 절반은 저승길 길동무로 데려갈 수 있다고.

군주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1군주 신퇴와 3군주 천궁, 그리고 4군주 망자왕은 별다른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5군주 광랑은 입꼬리를 올렸으며, 8군주 흑해 여제와 9군주 거왕은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오만하군."

거왕이 제 덩치만큼이나 육중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래, 그래. 이거지. 이 느낌이지······."

광랑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흥분과 열기가 가득 섞인 숨결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정신이 나간 인간이군요."

그리고 황당함과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를 내뱉은 건 2군주 뇌후였다.

살의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날 노려보는 게 저번 회의에서 봤던 모습이 겹쳐보였다.

"그딴 같잖은 허풍이 진심으로 통할 거라 생각했다면, 참으로 멍청하기 짝이 없습니다."

뇌후의 전신을 휘감고서 푸른색의 스파크가 파직거렸다.

그때 갑자기 대군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군주들이 시선을 돌려 배까지 붙잡고 깔깔거리며 웃는 그녀를 바라봤다.

곧 천천히 웃음을 멈춘 그녀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싸늘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는, 어느새 다시 입가에 천진난만한 웃음을 걸고 있었다.

"······빈말이 아니구나, 7군주?"

그런 대군주의 말에 뇌후가 움찔한 기색으로 미간을 좁혔다.

"진심으로 나와 군주들 전원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9군주의 말마따나 오만일까, 아니면 정말 사실일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딱히 대꾸할 말이 없다면, 상대가 알아서 생각하게 두도록 무게나 잡고 있는다.

적어도 지금까진 잘 풀리지 않은 적이 없던 훌륭한 의사소통 방법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참이나 대군주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그녀는 머릿속으로 고민하고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그저 오만함에 가득 찌든 인간의 주제 모르는 망언일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판단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대군주는 아직 내 능력에 대해서 무엇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

그리고 실제로도 폭왕까지 죽이며 나는 내 강함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때문에 대군주는 미지의 장막 속에 숨은 나를 판단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만약 정말로 전투를 벌였다가 내 엄포대로 군주들 중 절반 이상이 죽어나간다면?

그건 단순히 전력이 반토막 나는 게 아니라 칼데릭의 존망이 걸린 문제였다.

정말 그런 대참사가 발생하면 칼데릭의 가장 큰 대적자인 세인테아가 가만히 보고만 있지도 않을 테니까.

······솔직히 한편으론 지금 내가 완전히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건 알았다.

먼저 철칙을 깨놓고 날 죽일 거면 니들도 다 뒈질 각오를 하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좀 많이 뻔뻔하긴 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뻔뻔한 억지라도 이런 협박을 안 했으면 결국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내 방금의 발언을 그녀의 머릿속에 각인시키는 것, 그래서 처형을 섣불리 결정할 수 없는 도박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

그거면 일단 1차적인 목적은 달성이었다.

그리고 지금 대군주를 보면 충분히 내 그런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한 발자국 물러서야지.'

하지만 이대로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안 됐다.

나는 타이밍을 재며 다시 말을 꺼낼 준비를 했다.

잠깐 처형 개시에 제동을 걸긴 했어도 그뿐이다.

어쨌든 이대로면 대군주의 결정이 바뀌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칼데릭의 정점에 선 지배자들.

좀 전의 뇌후의 말마따나 이런 협박에 물러날 이들이 아니다.

위신은 둘째치고, 내가 이런 말을 꺼낸 순간부터 나를 살려둔다고 해도 언제 또 터질지 모르는 대형 폭탄을 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이대로 간다면 결국 대군주는 날 어떻게든 죽이기 위해 처형을 결정할 확률이 높았다.

아직 분위기가 완전히 그쪽으로 넘어가지 않았을 때, 이 상황을 유하게 마무리 지어야 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여전히 변함은 없다. 6군주를 거기서 죽이는 것이 칼데릭에 있어서도 이득이었다는 걸."

"······."

"하지만 그 행동이 칼데릭의 질서에 혼란을 일으켰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

대군주가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 맹세하지. 앞으로 다시 이번과 같은 일이 반복될 일은 없을 거라는 걸. 물론 내가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이 말은 진심이었다.

폭왕이야 이런저런 상황이 우연히 겹치고 겹쳐서 결국 죽이게 된 거고, 사실상 내가 또 군주들과 대적할 일이 뭐가 있겠나?

"흐응······."

대군주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몇몇 군주들이 어처구니 없다는 기색으로 날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고작 몇 마디 말로 이번 소집을 조용히 넘기자고 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긴 하겠지.

대군주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을게, 7군주. 6군주를 죽인 일이 네가 구했다는 인간 남매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었어?"

"······."

"그래, 그런가 보네. 알겠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군주는 대답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다시금 흥미가 솟은 듯한 즐거운 얼굴로 군주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른 군주들의 의견은 어때? 7군주가 다시 이런 혼란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건 진심인 것 같은데."

뇌후가 바로 항의하고 나섰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철칙을 깼으면 이유를 불문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 합니다!"

대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의견이 좀 갈릴 것 같으니 찬반으로 가보자고. 2군주는 처형에 찬성인 걸로 하고, 다른 군주들은?"

그에 흑해 여제가 가장 먼저 나섰다.

"저도 찬성이에요, 대군주님. 저 인간 너무 뻔뻔해서 재수가 없네요."

"아, 나도 찬성."

광랑도 곧바로 거들었다.

아까부터 검자루를 꽉 쥐고 있는 게 이미 싸울 생각밖에 없는 듯했다.

"1군주는?"

대군주의 물음에 신퇴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본장은 대군주의 뜻에 따르겠소."

그녀의 시선이 다음으로 3군주 천궁에게로 향했다.

아까부터 귀찮음 가득한 얼굴로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나도 대군주가 하자는 대로."

이제 남은 사람은 4군주 망자왕과 9군주 거왕뿐이었다.

나를 슬쩍 바라본 망자왕이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말했다.

"나는 처형에 반대하겠네."

그에 다른 군주들이 의외라는 듯이 그를 쳐다봤다.

"뭐야, 4군주. 네 성격이면 당연히 찬성할 줄 알았는데? 설마 쫄았냐?"

광랑의 말에 망자왕은 그저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나도 설마 그가 반대를 할 줄은 몰랐기에 속으로 조금 놀랐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 망자왕은 신퇴나 뇌후와 더불어 질서의 유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였으니까.

'······설마 저번에 빚 남겨뒀던 거 갚는다고 반대하는 건가?'

아무튼 이제 남은 사람은 9군주 거왕뿐이었다.

팔짱을 끼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앉아있던 그가 이내 눈을 뜨고서 말했다.

"······나도 대군주의 뜻에 따르겠다."

그에 뇌후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찬성 셋에 반대 하나, 그러나 3명이 대군주에게 결정을 맡겼으므로 대군주가 4표를 가진 셈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대군주의 결정에 따라서 내 처우가 결정되는 것이기에 그런 것이리라.

"자, 그럼 내가 결정하면 되는 거네?"

대군주가 대충 예상했다는 듯 태연하게 말하며 다시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그녀의 입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만약 그녀가 여기서 내 처형을 결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는 추하게라도 살아남아야지.'

당연히 순순히 목숨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때는 그녀가 흥미를 가질 만한 미래 정보로 딜을 걸든 뭘 하든, 정말 가진 패를 다 꺼내서라도 살아남는 수밖에.

그래도 결국 전투가 벌어지면 나도 혼자 뒈지긴 억울하니 최대한 많이 길동무로 데려갈 생각이었지만······.

꽤나 긴 침묵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7군주, 나는 그래도 이번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책임은 져야 된다고 생각해. 아무리 그래도 군주가 군주를 죽인 일이잖아? 고작 말 몇 마디로 넘어가는 건 아니지."

그녀가 해맑게 웃었다.

"그러니까 내 부탁을 3개만 들어줬으면 해."

"······?"

"물론 터무니없는 게 아니라 충분히 합리적인 부탁을 할 거니까 걱정 말고. 우선은 얼마 뒤에 있을 중립국 회의부터."

중립국 회의?

내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그녀가 설명했다.

"얼마 뒤에 세인테아 쪽이랑 중립국에서 회담이 있거든. 그때 나와 동행해서 같이 가줬으면 해. 이걸로 횟수 하나는 치고 나머지 2개는 나중으로 남겨두는 거야. 어때?"

나는 잠시 그녀의 제안에 대해 생각했다.

3개의 부탁, 어차피 군주들은 누리는 권한만큼 대군주의 명령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기에 매번 군주 회의에서 대군주의 결정에 따라서 각자 군주들이 할 일이 정해지는 거고.

물론 그에 명분이 부족하다면 군주들도 얼마든지 대군주의 명령을 거절할 수 있었지만······.

'거절 권한이 없는 명령권인 거군.'

하지만 뭐, 이 상황을 무사히 넘어가는 걸로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거기다 한 번은 세인테아와의 회담에 함께 동행하는 걸로 까겠다니,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부탁이다.

뜬금없이 나를 세인테아의 회담에 왜 데려가고 싶어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물론 대군주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지만, 어차피 내가 제안을 거부할 처지도 아니고.

"받아들이지."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대군주가 싱긋 웃었다.

"좋아, 그럼 이걸로 끝. 7군주의 처형은 없는 걸로."

대군주의 선언에 광랑이 김빠진 얼굴로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씁, 간만에 좀 싸워보나 싶었더니······."

흑해 여제도 언짢음이 팍팍 드러나는 시선으로 날 쳐다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어떻게 되나 싶었지만 이번 위기도 결국 무사히 잘 넘겼다.

어쨌든 이제 이대로 다 끝나는 건가 싶었을 때, 갑자기 고함이 울려퍼졌다.

"······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모였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뇌후가 씩씩거리며 날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긴급 소집 (4)

"다들 이대로 넘어가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뇌후가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군주들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이미 결정이 난 사안 아닌가. 그리고 그냥 넘어가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대가를 치르기로 했고."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군주가 군주의 손에 살해를 당했습니다! 죽음으로밖에 대가를 치를 수 없는 중죄 중의 중죄란 말입니다!"

"아, 저거 또 오버하고 앉았네."

광랑이 쯧쯧 혀를 찼다.

참모장이 끼어들어서 말했다.

"군주끼리 전투가 벌어졌거나, 혹은 군주가 군주를 살해했을 시, 소집을 통해 대군주의 권한으로 처벌 수위를 결정하는 것으로 헌령에 제정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반드시 처형이 집행되어야만 하는 사안은 아닙니다, 2군주님."

뇌후가 홱 시선을 돌려 참모장을 노려봤다가, 대군주를 바라봤다.

항의가 가득 담긴 그녀의 시선에도 대군주는 말없이 입가에 웃음만 걸고 있을 뿐이었다.

뇌후가 입술을 짓씹고는 말했다.

"이제 막 군좌에 앉은 이가 벌써부터 이런 혼란을 일으켰지 않습니까. 쉬이 넘어갔다간······."

"이리 열성적으로 칼데릭의 미래를 생각해줘서 고맙네, 2군주."

"······."

"그래도 나 혼자 결정한 것도 아니고, 모두가 다수결로 결정한 사안이잖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조곤조곤 타이르는 듯한 대군주의 목소리에는 감히 항거하기 힘든 압력이 서려있었다.

"그래요, 2군주. 나도 마음에 안 들지만 별 수 있겠어요? 꼬맹이가 떼쓰는 것도 아니고, 결정에 따라야죠."

비꼬는 듯한 흑해 여제의 말투에 광랑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꼬맹이, 전에 군주 회의에서도 광랑이 그런 말을 했었지.

나는 두 사람이 왜 뇌후를 그렇게 부르며 놀리는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날 제외하고 군주들 중 가장 최근에 군주가 된 인물인 데다가, 살아온 세월도 가장 어렸으니까.

자기도 군좌에 앉은 지 고작 몇 년밖에 안됐으면서 나더러 방금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 우습게 들릴 만도 하겠지.

뭐, 그래도 그녀의 가문만큼은 칼데릭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 중 하나이긴 하지만······.

"이······!"

발작적으로 그런 둘을 노려보던 뇌후가 눈을 질끈 감고 호흡을 내쉬었다. 폭발하려는 화를 억누르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내 다시 눈을 뜬 그녀가 나를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허락해주십시오, 대군주."

"응?"

"7군주와의 정식 결투를 원합니다. 감히 아까와 같은 망언을 지껄일 만한 실력이 정말로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겠습니다."

그에 나는 속으로 탄식을 뱉었다.

'······또냐?'

저번 회의에서도 그 지랄을 하더니, 이번에도 또 이러고 있었다.

아니, 그냥 좀 넘어가면 어디가 덧나나. 왜 나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진짜 저번에 붙었던 시비 때문에 아직도 뒤끝이 남아있나?

"음, 결투 말이지······."

대군주가 고개를 까닥거리며 나와 뇌후를 번갈아 봤다.

"뭐, 그래. 정 그리 납득하지 못하겠다면 나도 말릴 생각은 없는데······."

그러다 히죽 웃으며 내게 물었다.

"어때, 7군주? 아까 그런 말을 들으니 나도 조금은 7군주의 실력이 직접 보고 싶어졌는데."

"······."

씨발.

나는 속으로 욕을 뇌까리며 외통수에 걸렸음을 직감했다.

저번에야 입을 털어서 어떻게든 적당히 넘어갔지만, 이번엔 대군주도 마침 잘 됐다는 듯 빠져나가게 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금 막 처형 위기를 넘겼기에 지금의 나는 발언권도 부족한 상황이었으니까.

"오, 그러면 나도! 나도 7군주랑 한판 붙을래!"

대군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광랑도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제발 좀 닥쳐줬으면.

나는 더 상황이 막장으로 흘러가기 전에 머리를 굴려 해결책을 짜냈다.

여기서 결투라는 건 당연히 상대를 죽이는 게 아닌 제압하는 결투었다. 즉, 즉살을 사용할 수 없는 내게는 승리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폭왕을 상대할 때야 놈이 마침 흡혈귀라 운 좋게도 가스칼리드의 혈술까지 사용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도 않았다.

고작해야 부동 장막으로 방어하고 공간 도약으로 회피하는 게 전부······.

'······아.'

그래, 그러면 되잖아?

"이렇게 하지."

나는 뇌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했다시피 나는 적당한 제압에 별 소질이 없다. 6군주까지 죽인 마당에 또 다른 군주를 죽이면 내 처지만 곤란해지지."

"하! 설마 또 그따위 핑계로 결투를 회피하겠다는 건 아니겠······."

"그러니 방어만 하겠다."

"······뭐라고요?"

"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공격에 방어만 하겠다는 뜻이다."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는지 잠시 멈칫한 뇌후가, 이내 살기를 폭사했다.

"날 모욕하는 것도 정도껏 하세요, 7군주. 이제 그 오만함이 경멸스러울 지경이니. 내 공격에 제자리에서 방어만 하겠다고?"

"그래."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2군주 뇌후, 천둥의 정령술사. 군주들 중 파괴력 하나만큼은 제일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다지."

"······."

"3번의 공격을 모두 완전히 막아내면 내 승리, 그렇지 못하면 네 승리다. 이 조건이면 결투를 받아들이도록 하지."

대군주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흥미진진하기 그지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대로 뇌후는 귀까지 부르르 떨며 분노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Lv. 95]

이해 못할 반응은 아니었다.

그녀는 전 대륙에 존재하는 엘프들 중 거의 최강에 가까운 정령술사다.

그런 그녀의 공격을 나는 제자리에서 가만히 막기만 하겠다 선언한 것이고.

특히 자존심이 강한 그녀의 성격이면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다고 느끼고 있지 않을까.

"······좋습니다."

이내 뇌후가 흉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말대로 결투를 진행하는 대신, 조건을 더 추가하죠. 만약 7군주 당신이 패배한다면, 당신의 오만한 언행에 대해서 내게 무릎을 꿇고 사과하십시오."

"그러지."

······됐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쯧, 그딴 게 뭐 결투라고 재미없게······."

방금까지 활기가 넘치던 광랑도 흥이 죽었는지 다행히 알아서 물러나줬다.

대군주가 상황을 정리했다.

"자, 그럼 7군주와 2군주가 방금의 조건대로 결투를 벌이겠다는 거지? 바로 적당한 장소로 이동하자고."

***

회의장에서 나서서 이동한 곳은 대군주성 한편에 위치한 거대한 연무장이었다. 언뜻 봐도 직경이 몇백 미터는 되어 보이는.

나와 뇌후는 그 연무장의 한가운데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섰고, 다른 군주들은 관전하기 위해 주위에 섰다.

파지직.

뇌후의 전신에 푸른색의 스파크가 튀어올랐다.

질질 끌 것도 없이 바로 결투를 시작할 마음이 한가득인 기색.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조건을 바꿔도 상관없습니다, 7군주."

조금은 비웃음이 섞인 듯한 그녀의 말에 나는 대답 없이 팔짱을 꼈다.

경멸 어린 눈으로 날 쳐다보며 헛웃음을 흘린 그녀가 더욱 기운을 거세게 일으켰다.

츠츠츠.

이내 그녀의 머리 위에 거대한 독수리와 같은 푸른빛의 형상이 나타났다.

저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녀와 계약한 수많은 천둥의 정령들 중 하나인 코고스.

'대충 중간급 정도 되는 놈이었나.'

처음부터 전력으로 나올 생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점점 그녀의 주위를 휘감은 뇌기가 강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여유롭게 부동 장막을 펼쳤다.

빠지지직!

한 차례 날갯짓을 한 독수리 정령이 강대한 뇌기를 휘감은 채 그대로 나를 향해서 날아들었다.

뇌기가 폭발하고, 한순간 시야가 새파란 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뇌기는 장막에 완벽히 막혀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하고 허무히 소멸했다.

나는 장막을 거두고서 뇌후를 바라봤다.

손을 거둔 그녀가 미간을 좁힌 채 말했다.

"이제 시작이야."

콰르릉!

사나운 천둥소리와 함께 다음으로 나타난 형상은······ 페가수스?

등에 한 쌍의 날개와 머리에 거대한 뿔이 달린 말이었다.

'저게 이름이 레퀴사크론이었나.'

2군주가 부리고 있는 정령들은 그녀의 레벨만큼이나 워낙 많았기에, 이름이 가물가물한 것도 있었다.

그래도 놈이 뇌후가 부리는 정령들 중에서 거의 최상위 정령에 가까운 놈이라는 건 알았다.

놈의 등장에 그녀의 주위에 퍼진 뇌기가 좀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뇌기에 파묻혀서 이제 뇌후의 모습이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다만 그녀의 입가에 걸린 자신만만한 미소가 보일 뿐이었다.

파츠츠츠!

놈의 이마에 달린 뿔 끝에 뇌기가 구의 형태로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들이쉬고서 다시 한 번 부동 장막을 펼쳤다.

곧 거대하게 뭉쳐진 구체에서 섬광이 터짐과 동시에 가공할 뇌기가 몰아쳤다.

시야가 좀 전보다 훨씬 강한 빛으로 물들었으나, 이번에도 역시 피해를 주기엔 역부족이었다.

슈우우우.

나는 장막을 거두고 폐허가 된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 전력은 발휘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인가.

속으로 감탄하며 다시 뇌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도 이번엔 조금은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이 정도까지 했음에도 아직 내 옷자국 하나 그을리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제 한 번 남았다."

내 말에 그녀가 이를 까득 깨물었다.

"······혀를 놀릴 만한 실력이 최소한 없지는 않았군요."

그녀의 머리칼이 서서히 위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방금 전 두 정령과는 비교조차 안될 강대한 기운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꽈르르릉!

어찌나 뇌기가 강한지 사방이 전부 푸른빛으로 뒤덮여, 결계에 갇힌 것처럼 주변이 아예 보이지도 않게 됐을 정도.

나는 온몸이 따끔거리는 걸 느끼며 허공에 나타난 거신과 같은 인간형 정령을 멍하니 응시했다.

'결국 저걸 꺼내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최강의 천둥 정령인 라크시아.

그 거신의 양손에 서서히 가공할 뇌기가 뭉쳐지더니, 곧 길쭉한 창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거신은 그 거대한 창을 그대로 나를 향해 내리찍으려는 듯 창대를 역수로 쥐고 겨누었다.

게임에서도 뇌후의 궁극기였던 바로 그 기술.

'잠깐만, 이거······.'

나는 부동 장막을 펼치면서도 섬짓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설마 못 막는 건 아니겠지?'

애초에 내가 질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내건 승부였다.

아무리 강력한들 게임에서도 무적 방어기였던 부동 장막을 뚫을 수 있는 공격은 없었으니까.

······근데 실제로 직접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뇌후의 궁극기 역시 게임에서는 고정 피해를 입히는 즉사기에 가까운 공격이었었기에, 더더욱 쫄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부동 장막이 뚫리는 건 아닐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마음에 솟아오른 것이었다.

"어디, 이것도 피하지 않고 막아봐라!"

뇌후가 그렇게 소리치며 손을 뻗었다.

결국 나는 본능에 가깝게 장막을 거두고 혈술을 사용했다.

핏방울이 막 창을 내려꽂으려는 라크시아를 향해 날아갔고, 형체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타버려 사라졌다.

쿠구구구.

그리고 그렇게 핏방울과 함께 라크시아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소멸해버렸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싼 뇌기도.

"······어?"

막 기세 좋게 공격을 날리려던 뇌후가 얼빠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긴급 소집 (5)

뇌후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어휴······.'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레 겁먹어서 나도 모르게 즉살을 사용해버렸다.

하지만 잘한 일인 것 같았다.

누가 알아, 혹시나 진짜 장막이 뚫렸으면 가루 하나 안 남고 그대로 소멸했을 텐데.

'그나저나 정령한테도 통하긴 하는구나.'

한편으로는 더 강력한 확신도 얻었다.

영혼이든 뭐든, 그냥 넓은 의미로 살아있다고 볼 수 있는 대상이면 즉살은 대체로 다 통할 거라는 걸.

사방을 자욱하게 가렸던 뇌기가 걷히고, 결투를 관전하고 있던 군주들의 모습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멀쩡하기 그지없는 내 모습을 보고서 놀란 듯한 기색들이었다.

나는 다시 뇌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방금 전보다 더욱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처럼.

눈을 감았다 떴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왜 저래?'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런 그녀를 바라봤다.

뭐, 갑자기 소환한 정령이 소멸했으니 당황스럽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어째 너무 평정을 잃은 것 같은······.

[Lv. 90]

······?

나는 뇌후의 머리 위에 떠있는 레벨을 확인하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간 잘못 본 줄 알았다.

95레벨이었던 그녀의 레벨이 90레벨까지 확 하락해있었다.

대체 뭔 일어난 건가 싶다가, 이내 곧바로 상황을 이해하고서 속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설마 정령이 완전히 소멸해서?'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즉살에 당해 소멸했으니 천둥의 대정령 라크시아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건 즉, 그녀가 다시 라크시아를 소환하는 건 영영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이미 소멸해버린 정령을 어떻게 불러오겠나.

가지고 있던 가장 거대한 힘 중 하나를 잃어버렸으니, 당연히 그에 따라 그녀의 레벨 역시 그만큼 하락한 것이고.

'와, 잠깐만.'

나는 그제야 내가 좀 엄청난 짓을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지금 뇌후의 힘을 무려 5레벨만큼이나 영구적으로 깎아버렸다는 거잖아?

그것도 보통 5레벨이 아니라 90레벨대에서의 5레벨이면 정말 어마무시한 값이다.

의도치 않은 대참사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나와 눈을 마주친 뇌후가 움찔 놀랐다.

"다, 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그때 대군주와 다른 군주들이 주위로 다가왔다.

그에 뇌후는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대군주가 나와 그녀를 한 번씩 번갈아 보고서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7군주가 이긴 것 같네. 2군주, 승부를 인정하겠어?"

대군주의 말에도 뇌후는 대답 없이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그녀에게 말을 걸려 했다.

"2군주, 정령······."

그녀가 기겁하며 입을 열었다.

"이, 인정해요! 제 패배를 인정한다고요!"

"······."

"7군주······ 당신의 승리라고요."

그 반응에 다른 군주들이 의아한 기색으로 뇌후를 바라봤다.

그녀는 패닉에 빠진 눈으로 나를 한 번 더 쳐다보고는 도망가듯 자리를 빠져나갔다.

"저거 왜 저래? 쪽팔려서 튀는 거야?"

광랑이 중얼거렸다.

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진짜 큰일났네, 쟤.'

솔직히 2군주가 힘을 잃든 말든 내 알 바야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벌인 짓이니 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90레벨이면 군주는 고사하고, 세인테아의 오성과 비교해도 그 언저리 수준까지 약해졌다는 게 아닌가?

지금 저렇게 황급히 도망가는 것도 대군주와 다른 군주들의 눈을 의식해서 그런 것이리라.

'음······.'

뭐, 별 수 있나?

조금, 아니, 좀 많이 미안하긴 했지만 내가 뭘 어떻게 책임질 방법은 없었다.

이미 소멸해버린 정령을 무슨 수로 되돌리겠나. 내 능력은 죽이는 것뿐이지, 도로 살리는 능력은 없는데.

'미안.'

속으로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곧바로 합리화를 시작했다.

아니, 그러게 누가 싸움을 걸랬나? 저쪽에서 먼저 시작한 거니까 내 잘못만 있는 것도 아니잖······.

"정말로 대단하군."

그때 갑자기 내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돌리자 거왕이 눈을 빛내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왜?

그가 감탄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2군주의 라크시아는 나도 이전에 한번 온몸으로 부딪혀본 적이 있어서 알지. 뼛속까지 태워버리는 듯한 그 가공할 뇌기."

"······."

"그 일격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고스란히 받아내다니, 진심으로 감탄했다. 7군주 그대는 들은 대로 뛰어난 전사군."

······뛰어난 전사?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서 진중한 얼굴로 찬사를 내뱉는 거왕을 쳐다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 덩치만큼이나 무게를 잡고 있더니, 갑자기 뭔가 싶었다.

'뭐······ 거왕 성격이 그런 쪽이긴 했나.'

전형적인 전사 캐릭터.

게임에서도 거왕은 자신이 인정한 뛰어난 전사에겐 일방적인 호의를 보이곤 했었다. 설령 그게 다른 진영의 인물이더라도.

여기서 뛰어난 전사라 함은 어떤 공격에도 물러서지 않고 오로지 정면에서 맞부딪히는 그런 걸 뜻했다. 좋게 말하면 우직하고, 나쁘게 말하면 무식한. 그렇다고 거왕이 뇌까지 근육인 그런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걸로 소집은 종료지?"

아쉬움이 담긴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던 광랑이 몸을 돌렸다.

"잔뜩 기대하고 왔더니 이것도 저것도 죄다 싱겁게 끝나고, 나도 그만 돌아가련다."

성큼성큼 걸어가던 그녀가 아, 하며 내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7군주, 너 전에 내 군주령에서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

"······?"

"그거 있잖아, 빌페크 시라고 했었나? 아무튼 어디 시장 놈이랑 말이야."

······아, 그거.

테이르를 만났던 레스토랑에서 미쳐 날뛰었던 그 귀족 영애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것들은 어떻게 됐나.

광랑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집사장한테 듣기로는 너한테 별 지랄을 다했다던데, 그래서 대충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거든. 뭐 다른 거 원하는 거라도 있냐?"

"······알아서 해라."

뭘 어쩌든 별 관심도 없었다.

광랑이 픽 웃고는 손을 휘휘 저으며 도로 몸을 돌렸다.

"자, 그럼 이대로 해산할까. 다음 회의 때 다들 다시 보자고."

대군주도 손뼉을 짝짝 치며 소집의 종료를 알렸다.

"아~, 그나저나 곤란하네. 이번 빈자리는 또 언제쯤에 채워지려나······."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본성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이내 다른 군주들도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아까까지의 심각했던 분위기치고는 꽤나 싱거운 끝이었다.

"7군주, 언제든 9군주령에 방문하면 환영하겠다."

거왕은 그 말을 남기고 쿵쿵 육중한 발걸음을 옮겼다.

"7군주, 6군주는 얼마나 강했던가요?"

흑해 여제는 떠나기 전에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말했다.

"그냥 궁금해서요. 참 밥맛없던 흡혈귀라, 예전부터 으적으적 씹어서 삼켜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었거든요."

"······."

"근데 이제 당신도 좀 밥맛이 없어지려고 하네요. 이번엔 그냥 이렇게 넘어가게 됐지만, 앞으로는 주의하자고요. 후후······."

나는 더듬이를 살랑거리며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천궁은······?'

전에 3군주령에서 벌였던 발킬로프 건으로 나한테 뭐라도 말을 걸지 않으려나 했는데, 이미 진작 떠나가고 없었다.

다들 떠나가고 이제 자리에 남은 건 1군주 신퇴와 4군주 망자왕뿐이었다.

신퇴가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전부 완만히 해결된 것 같아 다행이군."

······완만히가 맞나?

뭐, 과정은 제쳐두고 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기는 했다. 적어도 생사를 건 전투가 벌어지진 않았으니.

'근데 무슨 용건이야.'

여태 기다리고 있던 걸 보니 다른 용건이라도 있나 싶었다.

이어서 신퇴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이전에 대군주령 변경의 루터스 대산맥에서 7군주 그대가 처치했던 거대한 뱀 몬스터, 기억하는가?"

벨르바고라?

그걸 이 드워프가 어떻게 알고 있나 싶어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대가 시장에게 사체를 그냥 맡기고 갔길래, 그 비늘을 내가 좀 가져다가 썼었네. 아주 훌륭하더군. 감사 인사는 해야겠다 싶어서 말이네."

아······ 그랬나?

나는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장장이인 그에게 그만한 몬스터의 비늘이야 좋은 재료이긴 했을 터였다.

"혹여 필요한 장비가 있다면 1군주령으로 찾아오게. 그럼······."

할 말은 그것뿐이었다는 듯 신퇴도 인사를 건네고서 곧바로 떠나갔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망자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역시도 용건이 있는 듯 다른 군주들이 모두 떠나가기를 여태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서."

망자왕이 말했다.

"자네에게 전에 건네받은 권성의 시체, 언데드로 되살리는 게 불가능하더군. 혼이 완전히 소멸해서 말이야."

뭐?

그 말에 속으로 놀랐다.

"망자의 몸에는 영혼의 잔재가 남아. 언데드 마법은 기본적으로 그 혼을 붙잡아 종속시키는 것부터 시작하는 마법이네. 한데 7군주 그대가 죽인 권성의 시체엔 자그마한 잔재 하나 남아있지 않고 영혼이 깔끔히 소멸했더군."

"······."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맞춰지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영혼이 소멸해?'

즉살에 죽은 권성의 영혼이 완전히 소멸했다고 한다.

그럼 설마, 즉살은 대상의 영혼 그 자체를 소멸시키는 능력이었던 건가? 그래서 영체에도 상관없이 잘 통한 거고?

'아니, 잠깐만······.'

그럼 그때 던전에서 죽였던 가디언은 뭘까. 가디언한테도 영혼이 있나?

나는 망자왕에게 물었다.

"4군주, 고대의 골렘에 대해서 알고 있나?"

내 뜬금없는 물음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골렘을 제작하는 마법도 영혼과 관련된 마법인가?"

"음, 더미 마법 말인가? 그쪽은 별 관심이 없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런 걸로 알고 있네."

"······."

"그건 다른 대상에게서 수확한 영혼의 잔재를 인형의 몸체에 주입하는 마법이지. 이미 죽은 것이든, 애초에 살아있던 적이 없는 것이든, 뭐든 움직이게 만드려면 마력뿐만 아니라 영혼의 잔재가 반드시 필요하니까."

어쨌든 마법 골렘에도 영혼이 들어있기는 하다는 뜻이었다.

'그럼 진짜 맞는 것 같은데.'

즉살의 본질이 대상의 영혼 그 자체를 소멸시키는 능력이라면, 지금까지 죽인 대상들과도 전부 다 들어맞는다.

능력의 원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지만 안다고 뭐가 딱히 달라지는 건 없는 사실이었다. 그냥 그런 거였구나 싶었다.

그나저나 언데드한테는 아직 사용해본 적이 없는데, 얘 말대로면 언데드한테도 상관없이 잘 통하겠네.

"그래서, 그에 대해 따지고 싶은 건가?"

내 물음에 망자왕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단지 그대가 한 일이 맞나 궁금해서 물은 것이네. 반응을 보니 그런 것 같군."

호기심은 해결했다는 듯 망자왕도 몸을 돌렸다.

"그럼 나도 이만 가보도록 하지. 회담은 잘 다녀오고 다음 회의에서 보세, 7군주."

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었기에 그를 붙잡고 물었다.

"처형에는 어째서 반대했었나?"

이제 보니 빚을 갚으려고 그런 것도 아닌 듯한데.

망자왕이 날 돌아보고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저 개인적인 판단이었네. 전투를 벌였다간 왠지 그대의 협박이 정말로 실현될 것 같아서 말이지."

"······."

"하지만 그에 대한 악감정은 없네. 나는 7군주 그대와 우호적인 관계를 쌓길 원하니까 말이야."

나는 그런 망자왕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6군주의 시체는 아마 언데드로 되살릴 수 있을 거다."

"······음?"

폭왕은 즉살로 죽이지 않았으니 영혼의 잔재라는 게 제대로 남아있을 것이었다.

내 말에 망자왕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웃음을 흘렸다.

"그런가? 고맙네. 아주 좋은 재료가 하나 생겼군. 대군주에게 말해봐야겠어."

나는 떠나가는 망자왕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곧 나도 몸을 돌렸다.

'후우······.'

처형 재판에, 결투에, 심신이 피곤했다.

그만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짧은 여유 (1)

무사히 군주성으로 귀환했다.

도착한 건 한밤중이었지만 아셸과 리프는 이때까지 깨어있었는지, 집사장과 함께 입구에서부터 나와서 날 맞이했다.

"다행입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아셸이 진심으로 안도한 기색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치고는 굉장히 격한 반응이었기에 의외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신퇴에 흑린 단장에 우르르 몰려와서 날 끌고 갔었으니.

옆에 있는 리프도 우물쭈물 서있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저희 때문에······."

"괜찮다."

결국 전부 내 선택으로 벌어진 일일 뿐이니 리프 남매를 탓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물론 후회도 없었고.

뭐, 진짜로 죽을 위기에 놓였으면 후회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다 잘 풀렸으니까. 중요한 건 결과 아니겠는가.

성으로 들어가자 굴피로와 뒤늦게 일어났는지 얼굴을 비추었다.

"무사 귀환하셔서 다행이오, 7군주. 정말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소."

나는 그들에게 별 문제 없이 전부 잘 해결됐다고 적당히 말해주었다.

군주를 죽여놓고 어떻게 별 문제가 없는 건지 굴피로는 몹시 궁금해하는 기색이었지만, 굳이 과정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대충 상황을 정리한 뒤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몸부터 던지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 늦은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를 하며 생각했다.

'뭔가 오랜만에 여유를 느끼는 기분이네.'

대군주의 말대로 중립국에서 열리는 회담에 동행하는 건 대략 1달 뒤.

6군주 문제도 무사히 매듭지었으니 남은 시간 동안 딱히 할 일도 없었다.

다음 목표를 위해서는 세인테아로 향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시간이 애매했으니까.

신비들을 얻고 스펙업을 하며, 이제 신변의 안전과 군주로서의 포지션은 어느 정도 안정됐다.

이 세계에서 무사히 살아남기 위한 1차적인 목표는 성공적으로 달성한 셈이었다.

물론 여전히 신체 능력은 일반인 수준이었지만, 그건 마력이라도 쌓지 않는 이상 어차피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용사, 그리고 계승자······.'

나는 포크로 집은 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다음 목표에 대해 생각했다.

게임의 본격적인 메인 스토리.

앞으로 세인테아에서 해야 하는 일들은 바로 그 메인 스토리와 관련된, 이 세계의 운명과 관련된 것이었다.

굉장히 거창하다 싶지만 진짜로 거창한 게 맞았다.

왜냐면 무려 마왕에 부활을 저지할 성검의 다음 계승자를 찾아내고, 그녀를 현 용사와 무사히 접촉시켜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이건 아무리 하기 싫어도 무조건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아니면 세상이 멸망할 텐데 피한다고 뭘 어쩌겠어.'

일단 세상이 멀쩡해야 나도 멀쩡히 살아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어쨌든 실제로 라사를 플레이하며 진행되는 큰 줄기의 스토리가 바로 그거였였다. 용사 계승자와 함께하는 천방지축 모험.

지금의 내게는 시스템이나 형편 좋은 가이드 라인 따윈 없기에 그걸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스스로 해내야 하는 것이었고.

대략적인 맥락은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아무것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갈 길이 태산이다, 진짜.'

어차피 일단 계승자와 용사부터 만나고 봐야 할 일이기에 당장의 고민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래도 지금까지의 내 행동들이 알게 모르게 어떤 나비효과를 미쳤을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찾기는 해야겠지만.

나는 상념을 마치고 다시 눈앞의 스테이크에 집중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근처에 서있는 집사장에게 물었다.

"1군주 일행이 타고 왔던 와이번은 아직 성에 있나?"

그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알아서 돌아갔습니다."

······알아서 돌아가?

순간 고개가 갸웃했지만 뭐 이상할 건 없다 싶었다.

와이번은 영수라 불릴 만큼 굉장히 영리한 생물이었으니 말이다.

'와이번이라······.'

그나저나 와이번 같은 게 하나 있으면 좋긴 할 텐데.

군주들 몇몇이 타고 다니는 걸 보니 문득 필요성이 느껴지기는 했다. 이곳저곳 빠르게 돌아다닐 수 있을 테니까.

이제는 신비들도 얻었으니 타고 다니다가 까딱 떨어져서 죽을 걱정도 없고 말이다.

와이번은 이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비행 수단이자,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른 평범한 몬스터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하고, 날쌔며, 영리한 아룡종.

하지만 워낙 희소하기도 하고, 포획이나 사육은 불가능에 가까운 데다가, 놈들 고유의 그 '까다로운 특성'상 실제로 타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와이번을 구하고 싶으면 내가 직접 놈들의 서식지로 찾아가야만 할 텐데······.

'그것도 일단 회담부터 다녀오고 나서 생각해봐야겠네.'

마찬가지로 시간이 애매해서 이동할 겨를이 없었으니 말이다.

달그락.

식사를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남은 시간 동안은 성에 눌러앉아서 푹 쉴 생각이었다.

그동안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고생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

휴식이라고 해도 생활이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냥 평소보다 조금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낼 뿐.

나는 책을 읽기도 하고, 굴피로와 이런저런 대화도 나누고, 리곤의 상태도 간간이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계속 성에서 지낼 생각이 없다고 했었지."

"그렇소. 이렇게 사람 많고 넓은 공간은 영 나한테 맞지가 않아서 말이오. 리곤만 완전히 회복되면 바로 나가겠소."

나는 굴피로에게 슬쩍 말했다.

"혹시 제자 같은 걸 둘 생각은 없나?"

그가 뭔 뜬금없는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제자라,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소만. 한데 그건 갑자기 왜······?"

"별 건 아니고, 내가 아는 연금술사 중 재능이 뛰어난 젊은 연금술사가 있어서 말이지."

다행히 굴피로는 관심이 끌린 듯한 기색이었다.

"누구요? 이 도시에 있는 연금술사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