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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 도시에 있는 알키마스라는 공방의 주인이다. 언제든 마음이 내킬 때 한번 찾아가봤으면 좋겠군."

"음······ 알겠소이다. 7군주께서 그렇게 말하니 조금 호기심이 생기긴 하는구려."

그렇게 굴피로에게도 스칼릿에 대해서 말을 해두었다.

기왕이면 두 사람의 관계가 사제지간으로 좋게 진전되길 바라면서.

한 번은 그냥 성안을 혼자 산책하며 돌아다니다가 의외의 광경을 마주하기도 했다.

야외 연무장 구석에서 병사들 몇몇이 모여서 체스를 두고 있던 것이다. 한쪽에 동화 몇 닢을 쌓아두고.

"······응? 헉!"

나를 발견한 병사들이 허겁지겁 일어나서 경례를 했다.

나는 그들에게 손짓하며 체스판을 빤히 내려다봤다. 기사도 아니고 병사들이 체스를 다 두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둬봐라."

"예? 예, 옛!"

어떻게 두나 좀 구경하려고 했더니, 병사들은 손을 덜덜 떨며 말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돈이 아니라 목숨이 내걸린 듯.

결국 나는 그들을 놔주고 다시 성으로 돌아왔다.

'체스라······.'

뭐, 이 세계에서 보드게임이라 해봐야 체스가 고작이긴 하겠지.

괜히 흥미가 솟아오른 나는 집사장에게 시켜서 체스판과 말을 준비하게 했다.

사실 나도 체스는 꽤 둘 줄 알았다.

이것저것 뭐든 안 좋아하는 게 없는 동생의 다양한 취미에 어렸을 때부터 자주 어울려줬었으니까.

체스를 함께 둘 상대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셸이었다.

"······."

내 부름을 받고 방으로 들어온 아셸이 테이블 위의 체스판을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나는 반대편 자리로 손짓을 했다.

"체스를 둘 줄 아나?"

"예, 알긴 압니다만······."

아셸은 뜬금없이 웬 체스인가 싶은 기색이다가도 어쨌든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말하기로 대군주성에서 견습 기사로 있을 때 동기들에게 배워서 몇 번 둬봤다고 했다.

'초보라는 거군.'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맞수가 아니라 초보와 두는 것도 슬슬 가르치면서 두는 맛이 있었으니까.

"가볍게 즐기자고 두는 거니 부담은 갖지 마라. 잘 모르겠는 부분이 있으면 가르쳐줄 테니."

"예······."

아셸이 어째서인지 묘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흘리며 대답했다.

나는 그녀에게 흰말을 주고서 흑말을 가져갔다.

아셸이 먼저 말을 움직이며 게임은 시작되었다.

그렇게 몇십 분이 흘렀을까.

"······."

나는 멍하니 체스판을 바라봤다. 아셸의 말들에 완전히 갇혀버린 내 킹을.

뭔가 하나둘씩 꼬이는가 싶더니 전세가 기울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뭐지?'

왜 잘 두지?

별로 안 둬봤다면서 이게 뭔데.

내가 장고 끝에 말을 움직이자마자 아셸이 말을 움직이며 말했다.

"체크메이트입니다."

"······."

나는 굳은 얼굴로 패배를 인정했다.

"내가 졌군."

뒤늦게 수치심이 몰려왔다.

게임 시작하기 전에 잘 모르면 가르쳐주겠다는 말까지 했는데, 이건 뭐 아주 시원하게 처발렸기 때문이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내 눈치를 보고서 아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물론 내게는 수치심만 더 자극될 뿐이었다.

나는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이해가 안 되서 물었다.

"정말로 몇 달밖에 안 둬본 게 맞나?"

"예."

아셸이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 성격에 굳이 이런 거에 거짓말을 할 리도 없다.

그럼 진짜로 이게 고작 몇 달밖에 안 둬본 사람 실력이라고?

'천재인가?'

아셸이 체스를 잘 둔다는 정보는 게임에서도 나온 적 없는 사실이었다.

얘는 몸 쓰는 일 말고는 다른 것들은 별로 못하는 캐릭터인 줄 알았는데. 내심 왜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어쨌든 고작 한 판으로 상대와의 레벨 차이를 순순히 인정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었다.

"한 판 더 두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2번째 판은 처음 판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패배했다.

곧장 3번째 판이 이어졌다.

***

"······."

아셸은 반대편에서 신중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체스판을 내려다보고 있는 7군주를 바라봤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갑자기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되서 입술을 슬쩍 깨물고서 참았다.

평소에도 그가 이 정도로 집중한 모습은 별로 본 적 없었는데, 고작 체스에 정말 진심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참 알 수 없는 분이야.'

이 사람의 목적은 뭘까, 그리고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처음에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의심했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들은 이제 와선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길진 않지만 짧지도 않은 시간을 그와 함께했다. 적어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확신을 가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고작 면식 하나 없는 남매 두 사람을 구하기 위해 군주와 척을 지고, 대군주성으로 끌려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와서 평소처럼 지내고 있을 뿐이었다.

아셸은 그저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의 어깨에 지금 얼마나 무거운 짐들이 얹혀있을지를.

어쩌면 지금 이렇게 의미 없이 체스를 두는 것도 근래 무거워진 주변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함이 아닐까.

어쩔 때는 한없이 냉정하지만 어쩔 때는 그 속에 깃든 선의와 친절함이 분명히 느껴지는, 그런 7군주의 면모가 좋았다.

'······.'

좋았다?

아셸은 자기가 생각하고서 움찔 놀라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고개를 드니, 장고 끝에 수를 마친 7군주가 의아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차례다."

"아, 예."

아셸은 곧바로 말을 움직였다.

"체크메이트입니다."

"아."

짧은 여유 (2)

리프 남매는 성에서 지내면서도 눈치를 보는 일이 많았다.

그들의 처지상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특히 리프는 그 정도가 심했다.

집사장의 보고로는 시중을 드는 하녀에게 잡일이든 뭐든 괜찮으니 뭐라도 자기가 할 일을 달라고 했다고.

"내가 보기에는 동생 때문에 많이 불안해하는 기색이었소."

굴피로가 혀를 차며 말했다.

"평소에도 몇 번씩은 동생의 광혈병이 완전히 치료된 게 맞냐고 내게 묻고 있소, 거의 강박에 가깝게."

"음······."

"아마 언제든 또 병이 발발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계속 7군주의 곁에 남아있고 싶어하는 게 아닌가 싶소."

그런 건가?

폭왕이 죽으며 리곤이 앓고 있던 광혈병은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 재발될 턱이 없었다.

그건 그녀에게도 이미 충분히 설명했지만 아직도 완전히 불안감을 지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머리로는, 이성으로는 이해를 해도 굴피로의 말마따나 강박의 영역에 가까운 불안일 것이었다.

지난 몇 년을 그렇게 살아왔으니 그러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둘의 처우에 대해서는 아직 딱히 확실히 생각한 게 없다.

그야 당연했다. 나도 특별히 어떤 목적을 가지고서 그들을 구한 게 아니었으니까.

물론 리프의 걱정대로 그들을 쫓아낼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리곤이 미래의 살귀 리프리곤이라는 걸 알았으니 웬만해선 쭉 계속 곁에 두고 싶었지.

그리고 그건 그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니 잘된 일이었지만······.

'한번 제대로 키워봐야 되나?'

두 사람 모두 재능이라면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리프 쪽은 평범한 일반인에서 고작 몇 년만에 40레벨 수준까지 강해졌다고 하니까. 말할 것도 없이 천재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특히나 리곤 쪽은······.

'적어도 앞으로 5년 안에 칼데릭의 군주가 됐던 녀석이지.'

저번에 스쳐갔던 기억 속에서 대군주가 마족과 계약이니 뭐니 했던 걸로 봐서, 아마 마족의 힘이 있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비정상적인 성장이었다.

지금의 평범한 수준에서 고작 몇 년만에 군주급 강자가 됐다는 건데······ 진짜 뭔 불세출의 천재라도 되나?

"리곤도 이제 다 회복됐다고 했었지."

"그렇소."

몇 년이나 광혈병에 좀먹힌 탓에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있었다고 하지만, 굴피로의 활약으로 회복은 굉장히 빨리 되었다.

나야 그가 말하는 대로 포션의 재료만 조달해주면 됐으니까.

어쨌든, 그렇게 재능이 있는 원석들이라면 계속 놀려두고만 있는 것도 아깝긴 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성에서 계속 머무르는 건 자기들도 불편해하는 것 같다니 뭐.

다음날, 나는 곧바로 리프 남매와 아셸을 불렀다.

"굴피로는 이제 곧 성에서 나갈 것이다. 너희 둘은 계속 이곳에서 지내고 싶으냐?"

남매에게 묻자 리프가 우물쭈물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송구하지만 허락만 해주신다면······ 시키실 일이 있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군주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셸."

"예."

"한번 두 사람에게 검술을 가르쳐봐라."

그에 아셸도, 리프도 깜짝 놀랐다.

"······제가 이들을 말입니까?"

"그래. 혹시 내키지 않나?"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아셸이 두 사람을 바라봤다.

검술을 가르쳐보라는 요구가 아셸에겐 꽤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성에 기사들이야 넘치도록 많았지만 그중에 가장 강한 기사는 당연히도 아셸이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그녀에게 시켜보려고 한 건데······.

"너희는 어떠냐."

나는 남매에게로 시선을 옮겨 물었다.

리곤이 의욕이 충만한 기색으로 냉큼 대답했다.

"당연히 좋습니다! 가르쳐주시기만 하면 최선을 다해 배울게요!"

리프는 침음을 흘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저희가 너무 과분한 은혜들을 받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주기만 하는 게 아니다. 이왕이면 제대로 검술을 배워 기사로서 성에 남아있는 게 좋지 않겠나?"

"······예?"

그 말에 리프가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둘 모두 배울 마음이 있다면 열심히 배워보도록. 아셸은 이곳 7군주령에선 가장 강한 전사다."

내 칭찬에 아셸이 조금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껏 누굴 가르치는 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괜찮다. 일단 한번 가르쳐보도록."

정 아니다 싶으면 그때 성에 있는 다른 검술 교관들에게 시키든가 하면 되니까.

그렇게 당장 내 눈앞에서 아셸의 지도가 시작되었다. 나는 한편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일단 아셸은 둘을 나란히 앉히고서 리프부터 등에 손을 얹었다.

초감각으로 느껴지는 마력의 흐름을 보니 내부에 마력을 흘리는 모양이었다.

마력 연공 같은 것에 대해선 1도 모르는 나는 수준 파악을 하려는 건가 그저 짐작할 뿐이었다.

이내 리프의 등에서 손을 뗀 아셸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연공을 배운 지 3년 정도 됐다고 했었지?"

"예."

"이만한 마력을 그 짧은 시간에 안정적으로 잘 쌓았구나."

역시 리프의 재능은 생각했던 대로 뛰어난 모양이다.

다음으로 아셸이 리곤의 등에 손을 얹고 마력을 흘렸다. 그리곤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미 마력로가 뚫려있는데, 예전에 연공을 배운 적이 있었니?"

"아, 네. 병에 걸리기 전에 검술하고 마법을 조금씩은······."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배운 적이 있었다고?'

리곤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은 아예 없길래 아닌 줄 알았는데.

그럼 애초에 마력이 있는데 광혈병에는 왜 걸렸던 건가 싶었다. 쌓은 마력이 너무 미약해서 그랬나?

"저기, 아셸 경."

리곤이 갑자기 아셸을 불렀다.

"제 몸으로 흘리고 계신 마력, 이거 그냥 제가 움직여도 될까요?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어?"

그리고는 눈을 감더니 집중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그에 아셸의 인상에 의아함이 퍼지더니 곧 경악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모른 채 멀뚱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

다만, 리곤의 몸 내부에 흐르고 있는 마력의 흐름이 약간 달라졌다는 것만 느낄 뿐이었다.

잠시 뒤에 리곤은 좀 전보다 훨씬 상쾌한 얼굴로 눈을 떴고, 아셸은 멍하니 등에서 손을 뗐다.

"어떠냐."

나는 그 반응의 이유가 궁금해서 슬며시 물었다.

그녀가 개운한 얼굴로 기지개를 켜는 리곤을 괴물 보듯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친화력입니다. 아무리 체내로 들어왔다고 해도, 제 것도 아닌 마력을 그리 자유롭게······."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리곤을 바라봤다.

뭔 말인지 잘 알아듣진 못하겠어도 아셸이 이렇게 놀랄 정도면 어마무시한 재능인 듯했다.

'역시 보통 천재가 아닌가 보네.'

진짜 잘만 키워두면 나중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는데?

메인 스토리까지 시간이 많이 남지도 않았지만 그동안 폭발적인 성장을 한다면 말이다.

일단 연무장으로 이동해서 아셸에게 본격적인 지도를 계속해보라고 말하려 할 때였다.

"군주님."

모습을 비춘 집사장이 보고했다.

"2군주님께서 성에 방문하셨습니다."

"······?"

2군주? 갑자기?

***

나는 일단 세 사람을 놔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성의 홀로 들어온 뇌후는 어딘가 상당히 초췌한 기색이었다. 며칠 잠은 못 잔 사람처럼.

"무슨 용건이지?"

그녀가 가만히 나를 노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죠."

"찾아온 용건부터 말해라."

"저번 결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다고요. 됐습니까?"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에서 억눌린 분노가 느껴졌다.

역시 그것 때문에 찾아왔나 싶었다.

"따라와라."

내 방으로 이동해서 뇌후와 테이블에 마주 보고서 앉았다.

"이제 이야기해라."

"······."

그녀는 좀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그저 사나운 눈빛으로 날 노려보며 일방적인 적의만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이나 내려앉은 침묵 속에 나는 기다리기 지쳐서 먼저 말을 꺼냈다.

"정령에 대한 문제로 온 거겠지."

"······!"

그녀가 이를 까득 깨물며 그제야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왜 내 정령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겨버린 거죠? 아니, 존재감조차 더 이상 아예 느껴지지 않게 됐다고요!"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야 소멸했으니까."

"······뭐라고?"

"네가 가진 천둥의 대정령 라크시아는 완전히 소멸했다는 거다.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질 않으니 존재감이 느껴질 리가."

숨길 것도 없었기에 면전에 대고 팩트를 말해주었다.

뇌후가 완전히 충격에 빠진 얼굴로 멍하니 날 바라봤다.

나는 그녀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주며 생각했다.

엘프의 종족 특질인 정령술.

정령이라는 건 엘프와 완전히 별개의 자연적인 존재다.

하지만 오로지 엘프만이 정령과 계약하고 그들의 힘을 빌리는 게 가능하기에, 엘프의 종족 특질로 불리는 것이었다.

정령에 대한 친화력을 강하게 타고난 엘프는 그만큼 많고 강한 정령들과 계악할 수 있다.

한마디로 정령술이라는 건 선천적으로 타고나야만 하는 재능의 영역.

그리고 뇌후는 이 대륙에서 그 축복을 가장 강하게 받은 엘프 중 하나였다.

그래서 라크시아쯤 되는 대정령과 계약할 수 있었던 것이고, 칼데릭의 군주도 될 수 있었던 것이지.

'근데 이제 그 대정령이 없네.'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강의 전력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녀의 레벨을 바라보며 약간의 숙연함을 느꼈다.

그녀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곧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소, 소멸했다고? 라크시아가······?"

"그래."

"······왜? 어째서?"

"그야 내가 소멸시켰으니까."

그녀의 얼굴에 불신감과 깊은 절망감이 차올랐다.

"우, 웃기지 마. 웃기지 말라고요. 라크시아가 소멸했을 리가······."

현실을 부정하며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나는 딱 끊어서 말했다.

"되살릴 방법은 없다. 미련을 버리고 깔끔하게 포기해라."

"그걸······ 지금 말이라고······."

이어진 건 분노였다.

뇌후는 붉어진 눈시울로 나를 죽일 듯 노려봤다. 나는 조금 황당해졌다.

'저거 우냐?'

그녀가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7군주 당신, 죽여버릴 거야. 진짜로 죽여버리겠어."

"······."

"반드시 이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거라고! 어떻게든지!"

그리고는 홱 몸을 돌려 성큼성큼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원래부터 좋은 관계야 아니었지만 어째 이번 일로 그녀와는 완전히 척을 진 것 같았다. 뭐, 그럴 만했지만······.

'······그럼 굳이 좋게 갈 필요도 없나?'

나는 군주들과도 웬만하면 모두 완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틀어진 군주가 있다면 차라리 확실히 우위를 점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혹여 후에 걸림돌이 될 일이 없도록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싸움도 지가 먼저 걸어놓고 저러는 꼴이 짜증나기도 해서 나는 입을 열었다.

"대군주나 다른 군주들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르겠지."

내 말에 뇌후가 멈칫했다.

"대정령을 잃고 힘이 많이 약해진 것 같은데, 그걸 대군주가 알아도 계속 군주위를 유지할 수 있겠나?"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녀는 좀 전보다 훨씬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었다.

"다, 당신······."

협박이라는 걸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수치심과 분노와 온갖 감정이 뒤섞인 듯한 얼굴로, 그녀가 전신에서 뇌기를 뿜어냈다.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다른 정령들까지 전부 잃어도 상관없다면 공격해도 좋다."

"······."

그녀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서서히 뇌기를 도로 가라앉혔다.

나는 반대편 자리를 가리켰다.

"다시 와서 앉아라."

짧은 여유 (3)

제자리에 굳은 듯 우두커니 서서 날 노려보기만 하는 뇌후. 꽉 쥐고 있는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게 보인다.

차마 내 말대로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앉기는 자존심이 상하는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다시 말했다.

"더 대화할 생각이 없다면 그대로 나가도 상관없다."

"······."

하지만 아무리 그녀라도 군주 자리를 걸고 넘어지는 협박은 아찔한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이를 부서져라 까드득 갈며 천천히 자리로 되돌아와서 앉았다.

"당신······ 지금 날 협박하는 겁니까?"

보시다시피 그런데.

나는 대답하지 않고 할 말을 궁리했다. 딱히 다음 말을 생각하고 부른 건 아니었기에.

어쩔까. 여기서 좀 더 몰아붙여볼까, 아니면······.

"대군주께서 사실을 알면, 당신은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하는 사이 뇌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역협박에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봤다.

"6군주까지 죽여놓고서 파렴치하게 같은 군주의 전력을 크게 떨어뜨리지 않았습니까. 대군주가 이 사실을 안다면 분명 당신도 결코 가만히 놔두지는 않을 겁니다."

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물론 영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군주는 칼데릭 최대의 전력이고, 6군주처럼 죽이지 않았다고 한들 그 중대한 전력을 깎아먹은 것도 죄라면 죄였으니.

만약 사실을 알게 되면 대군주가 내게 아예 아무런 책임도 물으려 하지 않을 거라는 장담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봤자지.'

애초에 이건 서로에게 걸린 리스크의 무게가 전혀 맞지 않는 문제였다.

나와 달리 지금 뇌후는 가당치도 않은 협박에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절박한 건 이쪽이 아니라 저쪽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당장 대군주에게 사실을 알리러 가볼까."

그에 뇌후가 기겁하며 덩달아 벌떡 일어났다.

"자, 잠깐만!"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상황이 누구에게 불리한 건지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농락당했다는 걸 깨달은 그녀가 뾰족한 귀를 시뻘겋게 물들인 채 날 노려봤다. 이제는 처연함마저 느껴졌다.

"이, 이 비열하기 그지없는 인간이······!"

"······."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내 정령을 소멸시킨 것이겠지. 당신은 명예도 긍지도 없습니까? 그래고 군주라는 자가 이렇게 치졸하고 더러운 협박을!"

갑자기 뭔 또 명예 타령이래.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글쎄, 결투에 패배한 다음에 꼴사납게 찾아와 진상이나 부리고 있는 누구만 할까."

"······지, 진상?"

"이미 결론이 난 문제에 꼬투리를 걸고 넘어진 게 누구였지? 결투를 먼저 제안한 건 또 누구였고."

"······."

"심지어 그 일격은 정말로 날 죽일 생각으로 날린 일격이었지. 자신의 행동에도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계속 이렇게 남탓만 하고 있을 건가? 이제야 다른 군주들이 했던 말이 이해가 가는군. 정말로 꼬맹이가 떼쓰는 거나 다름이 없어."

신랄하게 말을 쏟아내자 그녀가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우, 웃기지 마. 당신이 뭘 안다고······ 어쨌든 당신이 죽인 건 죽인 거잖아······."

더듬더듬 목소리를 뱉어내지만 방금 말들이 가슴에 제대로 꽂힌 듯 영혼이 없다.

그녀는 본전도 찾지 못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쯧 혀를 차며 말했다.

"2군주."

"······."

"앞으로 내 앞에서 아까 같은 같잖은 위협이나 협박은 하지 마라. 그런 거슬리는 눈으로 쳐다보지도 말고."

그녀는 분함과 억울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여전히 날 노려봤다.

"말이 말 같지가 않나 보군."

하지만 눈꺼풀을 파르르 떨다가 곧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마지막 자존심인 듯했지만 처량해보일 뿐이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렇게나 분한지 꽉 깨문 입술에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짜 개빡쳤네.'

상대 입장에서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힘도 크게 잃은 마당에 그걸 빌미로 잡혀 협박까지 당하고 있으니.

군주 자리에 앉아있으면서 이런 치욕을 겪은 일이 언제 또 있었겠는가.

일단 누가 위에 있는지 위치 차이를 확실히 새겨주긴 했지만 이래서야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이 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한풀이 꺾였어도 나에 대한 반감과 적의가 점점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테니.

그냥 나중에 생각하고 대충 넘어갈 걸 괜히 붙잡았나도 싶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매듭은 제대로 지어야겠지.

방법은 대충 2가지가 있는 듯했다.

하나는 정말 완전히 몰아붙여서 아예 고개도 처들지 못하게 하는 것.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힘들겠고.'

군주위가 강력한 협박패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녀의 목숨줄을 잡은 것도 아니다.

너무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다간 그녀의 자존심 강한 성격상 그냥 터져버릴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나게 채찍질을 했으니 이제 당근을 주는 것.

마침 문득 생각난 게 있기는 했다.

정령이라는 건 엘프의 종족 특질과는 별개로 자연적인 존재이기에 그들의 정령술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임에서도 정령은 사냥할 수 있는 몬스터, 혹은 스토리상의 조력자나 적으로서 정령은 간혹 등장하곤 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뇌후가 다루는 천둥의 정령들 역시 등장한 적이 있었고, 라크시아만큼 강한 대정령 또한 있었다.

그거라면 만약 그녀가 직접 찾아가서 그 정령과의 계약에 성공한다면 이전의 힘을 되찾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솔직히 그놈이 계약이 가능한 정령인지는 모르겠지만······.'

왜냐면 놈은 게임에서도 처치해야 할 보스로 등장했던 만큼, 누군가와 계약 따위를 맺을 순한 정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놈이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가능성만으로도 당근으로 휘두르기엔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할 것이었다.

"나는 라크시아만큼이나 강한 천둥의 대정령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

내 말에 분을 씹어삼키고 있던 뇌후가 흠칫 놀라서 돌아봤다.

"······뭐라고요?"

"네가 계속 그런 태도를 고수하겠다면 대화는 이만 여기서 마치지. 돌아가라."

그녀가 다급하게 말했다.

"내, 내 태도가 어떻다는 건데요! 계속 말해봐요."

그러면서 방금까지 은근히 뿜어내고 있던 살기는 싹 거두는 꼴이 가관이었다.

"방금 말했다시피, 나는 네가 다뤘던 라크시아 못지않게 강한 천둥 정령이 있는 장소를 알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자 그녀의 눈이 부릅 크게 떠졌다.

"그리고 그것을 네게 알려줄 생각도 없지는 않았었지."

"거, 거짓말.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죠?"

"믿지 못하겠다면 믿지 않으면 된다."

나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쉬운 건 그녀였다.

"하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적의만 뿜어내는 상대에게 굳이 그런 친절을 베풀 필요가 있겠나? 어떻게 생각하지?"

"······."

"대답해라, 2군주. 아니면 이야기는 이만 여기서 마치든가."

그녀가 반신반의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리고는 잠시 깊은 고뇌에 잠긴 듯하다가, 결국 눈을 질끈 감고서 말했다.

"미안······ 해요. 내가 너무 감정이 격해졌었습니다."

그 사과에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한순간에 이렇게 저자세가 되는 걸 보니 정말 정령이 중요하긴 한 모양이었다.

여기서 갑자기 거짓말이었다고 하면 그녀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순간 호기심이 솟아올랐지만, 생각으로만 하고 참았다.

"그러니까 말해주세요. 그 정령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고작 사과 한 번으로 되겠나?"

"······읏."

그녀의 인상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럼, 결국 나에게 바라는 게 있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정말 당신은······."

"아니, 네게 딱히 바라는 건 없다."

나는 말을 끊고서 말했다.

"단지 이만한 정보를 그냥 넘겨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지. 반대로 생각해봐라, 그럴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지?"

"······."

"그러니 앞으로 좀 지켜볼 생각이다."

2군주 뇌후.

비록 힘을 크게 잃었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90레벨, 충분히 거대한 전력이다.

이렇게 미끼를 걸어두면 그녀의 도움이 필요할 때 손쉽게 빌릴 수 있을 것이었다.

내 말이 알아서 기라는 의미로 들렸는지 뇌후는 또다시 사나운 얼굴이 됐다. 물론 제대로 알아들은 게 맞았다.

하지만 뭘 어쩌겠나? 그녀에게 그렇게 중요한 정령이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데.

"날 그렇게 기만만 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면, 아니, 애초에 거짓말이었다면······."

나는 말을 끊고 말했다.

"정 그렇다면 그 부분은 맹세하지.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

"······."

"설마 이것마저도 기만이라고 날 모욕하지는 않겠지, 2군주?"

칼데릭의 군주위는 대군주의 임명으로만 정해지는 만큼 혈족의 계승 따위는 없다.

세인테아에서 백성들이 황족의 피를 신성하다 믿고 그들의 군림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칼데릭에서 역시 군주는 감히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지고한 존재로서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렇기에 이런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래도 군주들 중 몇몇은 혈족이나 일족으로 거대한 가문을 이루고 있기도 했는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뇌후의 케리온느 가문 역시 그러했다.

그녀는 칼데릭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의 출신인 만큼, 그에 대한 자존감과 권위 의식이 누구보다 드높은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같은 군주인 내가 이렇게 이름과 명예를 걸어버린다고 말하면, 그건 그녀에게 있어 결코 어겨질 수 없는 약속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거였다.

물론 명예고 자시고 후에 일이 수틀린다면 약속을 지킬 생각 따윈 없었지만 말이다.

"······좋아요. 당신의 말을 믿죠."

뇌후가 마지못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럼 대화는 여기서 마무리 짓지."

나는 살짝 물러나는 말을 해주었다.

"지금이야 말하는데, 네 정령을 소멸시킨 건 나로서도 의도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지 않으면 위협적이었을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으니까."

앞으로 그녀와의 관계가 다시 회복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웬만하면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싶었으니까.

"······그만 가보겠어요."

그녀는 허탈함과 이런저런 감정들이 섞인 듯한 복잡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힘이 빠져서 축 늘어져 보이는 걸음걸이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쟤를 써먹을 일이 어디에 있을까.'

비록 힘은 좀 잃었다고 해도 뇌후는 얼마든지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거물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는 필요할 때 힘을 빌릴 수 있게 됐으니 좀 고민을 해봐야······.

'······아.'

그때 생각 하나가 퍼뜩 떠올랐다.

와이번.

놈들은 희귀하기 그지없는 아룡종인 만큼 대륙에서도 서식하는 장소가 몇 없는데, 그중 하나가 칼데릭에서 서쪽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글라이드 대산맥이었다.

평범하게 이동한다면 도착하는 데에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만약 와이번을 타고 이동한다면?

"이봐, 2군주."

나는 그녀를 불러세웠다.

그녀가 또 뭐냐는 듯 걸음을 멈추고서 돌아봤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 와이번을 타고 왔지?"

"······그런데, 왜요?"

"여기서부터 와이번을 타고 글라이드 산맥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리지?"

그녀가 뭔 뜬금없는 걸 묻느냐는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적어도 닷새 안에는 도착하겠죠. 갑자기 그건 왜 묻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이동하지."

"······뭐라고요?"

그녀가 두 눈을 깜박였다.

회담까지 남은 시간은 약 1달.

그 전에 다녀오기에는 충분했다.

와이번 (1)

"잠깐만."

뇌후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지금 내 와이번으로 7군주 당신을 글라이드 산맥까지 데려가라는 겁니까?"

"그래."

"내가 어째서······!"

그녀는 항의를 하려다가 곧 도로 입을 다물었다.

바로 방금 전 대화한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리라. 그녀에게 도움을 받으면 정령에 대한 정보를 주겠다는 말.

"산맥까지 데려다주면······ 그 정령의 위치를 알려주겠다는 건가요?"

잠시 침묵하고 있던 그녀가 기대감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니지. 고작 이 정도 도움이 정보의 가치와 무게가 맞는다고 생각하나?"

뇌후의 힘을 빌릴 기회를 고작 와이번 왕복 한 번으로 퉁칠 생각은 없었다.

언제 한 번 크게 써먹기 전까지는 이런 자잘한 도움들은 최대한 많이 받아둘 생각이었다.

어차피 정보를 미끼로 걸고 있는 이상 그녀는 사소한 부탁쯤은 거절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이런 식으로 나올 생각이었군요? 언젠가 한 번 큰 도움을 받기 전까지 날 계속 이런 식으로 이용하려고?"

"······."

어라.

그런데 단번에 간파당해버렸다. 그래도 역시 군주는 군주인 모양.

하지만 뭐 눈치챈다고 바뀌는 건 없었다.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는 뇌후에게 난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거절할 건가?"

마음의 평정을 되찾으려는 듯, 눈을 감고서 깊은 한숨을 내쉰 뇌후가 물었다.

"난데없이 그곳에는 왜 가겠다는 거죠?"

"와이번을 잡으러 간다."

"굳이 내게 데려가달라고 하는 이유는?"

"그편이 빠르니까."

원래 글라이드 산맥에는 회담에 다녀온 다음 갈 생각이었다. 남은 시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안에 다녀올 수 있다면 당장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회담까지는 푹 쉬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솔직히 며칠 쉬고 나니 벌써부터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진 참이기도 했고.

전부 결과적으로는 목숨이 걸린 문제라 그런가, 아니면 얼마 전까지 너무 열심히 신비를 찾고 다녀서 관성이 붙은 건가.

내가 원래 이런 부지런한 성격은 절대로 아니었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지금 당장 떠날 생각이니 준비하고 있어라, 2군주."

뭐, 할 일이 태산인데 살아남으려면 잠시도 쉴 틈 없이 움직이기는 해야지.

요 며칠 동안 짧게나마 만끽했던 여유도 이것으로 끝이었다.

***

"글라이드 산맥이라면······?"

"와이번들이 서식하는 곳이다."

뇌후와 대화하는 사이, 위층에서 계속 리프 남매를 살피고 있던 아셸이 조금 당황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갑자기 와이번들의 서식지로 향하겠다는 내 말 때문이었다.

"와아······."

한쪽에서 명상이라도 하는 듯 정좌를 하고 있던 리곤이 눈을 반짝이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응을 보니 와이번이라는 말에 관심이 쏠린 모양. 하지만 물론 데려갈 수는 없었다.

집사장에게 시켜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섰다.

성안에 위치한 공터에 뇌후와 한 푸른색 갑주를 걸친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각각 서있는 거대한 2마리의 생물체, 와이번.

나는 그 광경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위기사도 함께 왔었나?'

[Lv. 83]

레벨도 아셸보다 무려 2레벨이나 높은 강자였다. 거기다 와이번까지 타고 다니는 모양.

뇌후의 가문이야 워낙 거대한 가문이니 이상할 건 없었지만······.

'그나저나 생각보다 훨씬 크네.'

[Lv. 67]

[Lv. 62]

가까이서 보니 와이번의 크기는 훨씬 거대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만큼 레벨들도 상당했다.

더 레벨이 높은 뇌후의 와이번은 그녀와 상반되게 붉은색이었고, 호위의 와이번은 초록색이었다.

뇌후는 나를 보고 멀리서부터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채였다.

그르르.

그러자 그녀의 와이번 역시 내게 적의를 드러내며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주인의 감정을 읽고 나를 적으로 인식이라도 한 건가? 똑똑하다.

뇌후가 와이번의 목 아래를 쓰다듬으며 녀석을 얌전하게 하고는 입을 열었다.

"대체 내가 왜 이딴 일이나 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기다리고 있는 동안 생각해보니 더 분노가 올라왔는지 목소리가 사나웠다.

군주를 뭔 배달부 비슷하게 써먹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2명씩 타고 가면 되겠군."

원래 아셸까지 데리고 갈 생각은 없었는데, 마침 와이번도 2마리니 상관없을 듯했다.

그런데 뇌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2명씩? 지금 내 와이번에도 사람을 태우겠다는 말인가요?"

"안 보이나?"

나는 날 배웅하기 위해 따라나온 아셸을 가리켰다.

뇌후가 아셸을 바라보고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때 뇌후의 호위기사가 나서서 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7군주님, 두 분 모두 제가 모시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와이번을 쳐다봤다.

3명이 함께 타도 상관없을 정도로 크긴 하지만······ 그래도 둘씩 타는 게 낫지 않나?

다시 뇌후를 쳐다보니 그녀는 완전히 질색하고 있다가 안도한 기색이었다.

자기 와이번에 다른 사람을 태우기가 싫은 건가, 아니면 그냥 다른 사람이랑 함께 타는 게 싫은 건가.

그녀라면 격이 떨어진다 생각해서 충분히 그럴 법도 했다.

"혹시 성에 3인용 안장이 있습니까? 있다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호위기사의 물음에 곁에 서있던 집사장이 걸음을 옮기려 했다.

나는 그런 그를 말렸다.

"됐다. 그냥 나 혼자서 가지."

굳이 아셸까지 동행시킬 필요는 없긴 했다.

나는 아셸에게 말했다.

"보름 안으로는 돌아올 테니, 그동안 남매를 잘 지도하며 기다리고 있어라."

"예, 알겠습니다."

호위기사의 안장은 원래부터 2인용이었기에 안장을 교체할 필요가 없었다.

아마 지금처럼 손님을 태우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2인 안장을 타고 다니는 듯했다.

"쉬이, 착하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대놓고 싫은 기색을 보이는 와이번을 호위기사가 목을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이게 바로 와이번을 가축처럼 사육하는 게 불가능한 이유였다.

워낙에 강하고 사나워서 포획부터가 매우 어렵지만, 와이번은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은 인물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따르지 않으니까.

지금껏 많은 이들이 와이번을 길들이려고 들었다가 시작부터 실패한 이유가 하나같이 똑같기도 했다.

포획해서 가둬놓으니 굶어 죽을 때까지 먹이를 먹지도 않거나, 그냥 스스로 자해해서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과 동승하는 게 아니면 다른 와이번을 빌려타는 것도 불가능하지.'

와이번을 진정시킨 호위기사가 먼저 놈의 등 위로 훌쩍 뛰어 올라탔다.

그 모습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공간 도약을 사용해서 뒤쪽에 올라탔다.

갑자기 내가 뒤에 나타나자 그녀가 흠칫하며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가, 다시 한 번 화들짝 놀라며 도로 손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말을 안 했군."

이 세계에서 순간이동이 흔한 능력도 아니고, 갑자기 등뒤를 무방비하게 잡히면 놀랄 만도 했다.

어쨌든 대충 그렇게 준비가 끝났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아셸이 아래서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돌렸다.

펄럭!

뇌후가 탄 와이번이 먼저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주위에 돌풍이 일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안장 앞쪽에 달려있는 손잡이를 쥐었다.

곧 내가 탄 와이번도 뇌후의 와이번을 따라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떠오르자마자 순식간에 가속이 붙더니 와이번은 가공할 속도로 비행하기 시작했다.

아래로 보이는 군주성은 눈 깜짝할 사이에 멀어져서 점처럼 보였다.

'으음.'

간만에 놀이기구 타는 기분을 만끽하며 쥐고 있는 손잡이와 허벅지에 더 힘을 불어넣었다. 놓쳤다간 바로 날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현실에서도 놀이기구를 즐겁게 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닷새는 이동해야 한다고 했는데 벌써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

판타지 만화나 영화에서 보면 그렇다. 평범한 사람도 와이번이나 그리폰 같은 걸 편하게 잘도 타고 다니지 않는가?

실제로 겪으니 역시 허구는 허구일 뿐이었다.

정면에서 쉬지 않고 불어닥치는 바람에, 날갯짓 한 번 할 때마다 위태롭게 덜컹거리는 균형에.

날짐승에 탄다는 건 말이나 마차 따위와는 정말 비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호위기사는 내가 빙의한 이 몸이 멀미를 거의 하지 않는 체질이라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아니면 진작 그녀의 등에 토했을 테니.

와이번을 구한다면 이 정도 속도의 비행은 어차피 적응해야 될 문제다.

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지금의 비행을 즐기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렇다고 정말 즐거워지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어느 정도의 적응은 금방 되었다.

여전히 승차감이 편히 느껴지지는 않았어도 경치를 구경하는 맛만큼은 일품이었다.

'오······.'

나는 아래로 펼쳐진 푸르른 산봉우리들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지도라도 살피면서 어디쯤 지나고 있는 건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빈손이 없기에 아쉽게도 그러지는 못했다.

와이번은 지치지도 않는지 줄곧 한나절은 쉬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비행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고 해가 슬슬 질 때가 되서야 지상으로 내려섰다.

"여기가 어디쯤까지 온 거지?"

"대략 이쯤입니다."

호위기사가 지도의 한곳을 가리키며 대답해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를 도로 집어넣었다.

마차를 타면 족히 일주일은 넘게 걸릴 거리를 고작 한나절만에 왔다.

날아다니다 보니 지형의 제약이 없기도 하기 때문이겠지만 정말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저녁 식사의 준비는 호위기사가 했다.

그녀는 익숙하게 와이번의 등에 달린 짐자루에서 식기들을 꺼내서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 외에는 달리 맡을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그녀의 몫이기는 했지만, 생각해보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

83레벨이나 되는 초인한테 고작 요리나 시키고 있었으니까.

'기사가 아니라 뭔 하인이야?'

한쪽에서 와이번의 옆구리에 기대 앉아있던 뇌후가 입을 열었다.

"비올라······."

그러다가 내 눈치를 보고는 도로 입을 다물어버린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슬며시 호위기사에게 다가가서 속삭였다. 그러나 초감각 때문에 내 귀에는 다 들렸다.

"저녁 뭘로 할 거야?"

"치즈 스튜입니다."

"스튜는 질렸어. 고기 구워줘."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도로 자리로 돌아와서 앉았다.

나는 더 어이가 없어져서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격식 없이 말 건네는 투를 보니 그냥 평범한 주종관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뇌후가 군주가 되기 전까지는 가문의 귀한 영애이긴 했을 테니, 뭐······.

내 시선을 의식한 뇌후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계속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죠?"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호위기사는 순식간에 고기를 구울 틀을 설치하고, 훈제된 고기를 꺼내 불에 한 번 더 굽기 시작했다.

이내 고기가 먹음직스럽게 다 구워지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 식사가 시작됐다.

식사가 거의 끝날 즈음에 뇌후가 입을 열고 물었다.

"와이번을 구하겠다고 했었죠."

"그래."

"7군주 당신은 얼마 뒤에 회담에 가야 하잖아요. 그 안에 구할 수나 있겠어요?"

그녀가 조금은 자부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녀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았다.

와이번을 길들이는 건 말 따위를 길들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이었으니까.

오로지 운이라면 운, 와이번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어느 한 마리라도 자신을 주인으로 선택하기를 바라는 것밖에 없었다.

와이번 (2)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내 말에 뇌후가 작게 코웃음을 치고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와이번.

이놈의 까다로운 특성은 물론 게임에서도 마찬가지였었기에 원래부터 잘 알고 있었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도 와이번을 얻는 퀘스트는 몇몇 유저들의 키보드를 부숴먹게 할 정도로 악명이 높았었으니까.

심지어 뭔 히든이나 특별 퀘스트도 아니고, 그냥 스토리를 거쳐가면서 탈것을 얻기 위해 당연히 클리어해야 하는 퀘스트였는데도 말이다.

한창 라사에 미쳐서 하루에 자는 시간만 빼고 종일 플레이했을 적의 나도 꼬박 사흘은 밤새워 겨우 얻었을 정도니 오죽할까.

'솔직히 허탕만 칠 확률이 더 높을 것 같긴 한데.'

그럼에도 애매하게 남은 시간 동안 빈둥거리고만 있기 아까워 찾아가고 있는 거긴 했지만, 사실 이유 하나가 더 있었다.

게임에서 내가 획득했었던 와이번.

몇십 분은 고민해서 '띠용'이라는 입에 착 감기는 이름을 붙어줬던 그 녀석.

녀석이 서식했던 장소가 마침 공교롭게도글라이드 현재 향하는 목적지인 글라이드 산맥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시점에 찾아가도 같은 장소에 그놈 둥지가 있으려나?'

호기심이 솟아날 수밖에 없었다.

과연 놈이 게임이 현실이 된 지금도 다른 네임드 NPC나 몬스터들처럼 멀쩡히 존재할지, 그리고 나와 마주친다면 날 주인으로 인정할지.

그래도 이왕 와이번을 얻는다면 게임에서도 함께했던 녀석을 얻고 싶긴 했으니 말이다.

"하나만 묻죠, 7군주."

그때 뇌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6군주를 죽인 진의가 대체 무엇이죠?"

타오르는 모닥불에 시선을 두고 있던 나는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소집에서 이미 말했을 텐데."

"누가 그걸 묻는 건가요? 당신의 그 잘난 최선의 판단이란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묻는 것이지 않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가 하, 헛웃음을 뱉으며 말했다.

"대군주께는 말의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이 있죠. 그래서 당신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결정하신 모양이지만, 나는 절대로 당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야 어련하실까.

나는 그녀에게 역으로 물었다.

"너는 첫 군주회의 때부터 계속 내게 반감을 드러냈었지. 달리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능력도 신원도 확실치 않은 외부인을 지고한 군좌에 다짜고짜 앉히다니, 아무리 대군주의 결정이라 해도 거기에 순순히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

"결국 당신은 6군주까지 죽이며 질서에 큰 혼란을 일으켰죠. 그러니 나는 여전히 내 행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당신의 알 수 없는 괴이한 능력 때문에 라크시아를 잃긴 했지만······."

말하다가 또 화가 끓는지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말을 잇는다.

"다른 군주들이야 어떤지 몰라도 난 진심으로 칼데릭의 안정을 원합니다. 물론 오늘 당신에게 다짜고짜 찾아가서 그런 식으로 막말을 퍼붓고 따진 건 실책이었어요. 하지만 내 개인적인 증오를 빼놓고 봐도, 당신은 칼데릭에 있어 불안하기 그지없는 요소라는 말입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하는 뇌후는 확실히 아까 성에서와 달리 냉정을 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이 어느 정도는 진심이라는 건 알았다.

선악의 성향을 떠나서, 게임에서도 그녀는 진심으로 칼데릭의 평화를 바라는 인물로 나오긴 했었으니까.

사실 생각해보면 대군주나 다른 군주들이 워낙 상식 밖인 거지, 뇌후가 특별히 깐깐하거나 까다로운 성격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이 보다 평범한 이들이었다면 애초에 내가 군주가 될 수나 있었겠나?

"말했다시피 내게는 아무런 꿍꿍이도 없다."

뇌후가 바로 대꾸했다.

"그러니까 그걸 신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짧은 대화는 거기서 끝나고, 더 이상 오가는 말은 없었다.

***

날이 밝고 이동은 계속되었다.

글라이드 산맥에 도착하기까지는 뇌후가 말했던 대로 정확히 닷새가 좀 안되게 걸렸다.

'오.'

글라이드 산맥은 지나치며 봤던 다른 산맥들보다 독특한 경관이었다.

특히나 다른 산맥들보다 자잘하게 솟아난 봉우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유롭게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잠시고 나는 곧 열심히 눈을 굴렸다.

이제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녀석의 둥지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와이번은 무리 생활을 하지 않고 철저히 단독 생활을 하는 생물이라 했다.

그런 놈들의 거처를 둥지라고 하는데 보통은 동굴 같은 장소였다.

지금 내가 찾아야 할 띠용이의 둥지도 꽤 큰 굴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위치가 분명 그 암벽의 한가운데였었지.

키아악!

그때 난데없이 들려오는 괴성과 함께 아래쪽에서부터 무언가가 빠르게 접근해왔다.

거대한 화이트 와이번이 이쪽을 향해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고 있었다.

'오.'

벌써부터 마주한 와이번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놈은 우리를 공격할 생각밖에 없는 듯했다.

뇌후의 와이번과 호위기사의 와이번도 포효를 내뱉었다.

아예 육탄 박치기를 할 생각인 듯 돌진해오는 놈에게 호위기사가 마력을 일으키더니 팔을 휘둘렀다.

후우우웅!

그러자 넓게 파진 마력이 폭풍처럼 몰아쳐서 놈을 강타했다.

놈은 중심을 잃고 잠시 허공에서 휘청거리다가 곧 방향을 돌려서 황급히 도망가버렸다.

'허.'

나는 조금 황당한 눈으로 그 빠른 태세 전환을 바라봤다.

와이번은 기본적으로 사납고 포악하지만 영리한 만큼 눈치도 빨랐다.

공격을 맞자마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강자라고 판단하고 내뺀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