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어쨌든 계속해서 광할하게 펼쳐진 산맥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았다.
다행히 녀석의 둥지가 위치한 곳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왜냐면 특히 산맥에서도 굉장히 눈에 띄고 이질적인 지형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크고 평평한 암벽.'
마치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생긴 그런 암벽 지형이 이 산맥에는 존재했다.
그리고 둥지가 위치한 곳은 바로 그 근처였다.
아마 이렇게 위에서 날아다니면서 보면 멀리서부터 한눈에 발견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혹시 몰라서 호위기사에게 물었다.
"나무 그루터기처럼 생긴 거대한 암벽을 알고 있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뭐, 그럼 별 수 없지.
나는 다시 말했다.
"방금 말한 지형을 찾을 때까지 산맥을 크게 돌아보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와이번을 타고 신비를 찾을 때도 지겹게 했던 장소 찾기가 시작됐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훨씬 빠르고 편할 것이라는 점이었지만.
둥지를 찾는 와중에도 각양각색의 와이번들이 간간이 모습을 비추었다.
대부분은 우리에게 신경 쓰지 않고 제 갈 길을 갔지만, 몇몇은 아까의 화이트 와이번처럼 덤벼들기도 했다. 그런 놈들은 마찬가지로 호위기사가 전부 쫓아냈다.
게임에서 와이번은 비늘의 색에 따라서 총 5종류로 구분됐었다.
그린, 블루, 레드, 화이트, 그리고 블랙 와이번.
단지 색깔만 다른 게 아니라 놈들은 명백히 다른 특징이 있었다.
개체에 따라서 다 다르긴 하지만, 그린에서 블랙으로 갈수록 평균적으로 훨씬 몸집이 크고 강하며 성질도 더러웠다. 또한 희귀했고.
그래서 게임에서도 블랙이 와이번 중에는 능력치가 가장 뛰어났지만, 그만큼 찾고 길들이는 난이도도 가장 높았었다.
내가 게임에서 타고 다녔던 띠용이 역시 블랙 와이번이었다.
색에 따른 능력치 차이가 게임 내에서는 그렇게 유의미할 정도로 크진 않았었지만, 이왕이면 최고의 와이번을 타고 다니고 싶었기에 참 고생해서 잡았었지.
"······7군주! 와이번을 잡겠다면서요?"
우리가 착륙할 생각 없이 계속 날아다니고만 있자 옆에서 날고 있는 뇌후가 소리쳐 물었다.
"찾는 장소가 있으시다고 합니다!"
내가 입을 열기 전에 호위기사가 대신 대답했다.
뇌후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날 흘겨보고는 더 묻지 않았다.
"저게 말씀하신 장소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탐색을 시작한 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곧 그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 한가운데에 홀로 주위에 어우러지지 않게 위치해있는 거대한 바위 암벽.
그 테두리를 따라서 천천히 비행하며, 나는 초감각으로 시야를 최대로 강화시켜 암벽면을 샅샅이 훑었다.
'······찾았다.'
그리고 곧 발견할 수 있었다.
암벽의 정확히 한가운데 높이에 위치한 큼지막한 동굴 하나가.
"저기로 내려가지."
내 요구대로 호위기사는 그 굴의 입구에 착륙했다.
뒤따라 착지한 뇌후도 굴을 의아한 눈으로 둘러봤다.
"······아는 장소인가요? 대체 뭘 하려고 이런 곳에 찾아온 건데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기대감을 품은 채 굴 안쪽으로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왜냐면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통로는 짧았고, 곧 시야에 나타난 건 어둠 속에서 웅크린 채 누워있는 검고 거대한 생물체였다.
"······블랙 와이번이군요."
뇌후와 호위기사도 와이번을 발견하고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크르릉.
나는 동굴이 떠나가라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와이번을 빤히 쳐다봤다.
'······얘가 띠용이 맞나?'
뭐, 아마 맞겠지?
솔직히 외관으로 구분할 방법은 없었다.
왜냐면 게임에서 와이번마다 각각 외관이 다른 것도 아니고 당연히 다 통일됐었는데, 어떻게 그걸 알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이 동굴에서 둥지를 짓고 있는 블랙 와이번이라면 녀석 외에는 없을 것이었다.
"······."
잠시 그렇게 묘한 기분을 느끼며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니, 이내 코골이가 멈추고 녀석이 눈을 떴다.
그리곤 쩍 하품을 하더니 길게 쭉 찢어진 동공으로 이쪽을 빤히 쳐다봤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뒤에서 뇌후가 약간의 조소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블랙 와이번을 길들인 사람은 대륙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없다는 걸 아나요? 보나마나 실패하겠죠."
녀석이 천천히 다가오는 나를 계속 빤히 쳐다보고만 있더니, 이내 그 거체를 일으켰다.
날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바로 공격부터 날려올 게 뻔했기에 방어할 준비를 했다.
나와 녀석의 거리가 열 걸음도 되지 않게 좁혀졌다. 그리고······.
그르릉.
"······?"
녀석이 순한 울음소리를 내며 내게 먼저 고개를 들이밀었다.
내 품에 억지로 거대한 머리를 파묻으려 드는 놈을 나는 당황하면서도 일단 쓰다듬었다.
'얘 뭐지?'
아무래도 바로 주인으로 인정받은 듯했다.
그래도 내가 알기로 처음부터 이렇게 호의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데? 그것도 성질 더러운 블랙 와이번이 말이다.
"어······."
그 광경에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뇌후도 당황스러움이 섞인 얼떨떨한 탄성을 뱉었다.
나는 생판 처음 본 내게 더없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녀석을 보며, 왜인지 모르게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이 내가 게임 속에서 타고 다녔던 와이번 띠용이가 분명히 맞다고.
'반갑다, 야.'
나는 약간의 반가움을 느끼며 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계속 나한테 머리를 들이미는 녀석의 목 부근을 열심히 쓰다듬어주며.
이걸로 와이번은 성공적으로 얻었다.
와이번 (3)
내가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기자 띠용이는 아주 자연스럽게도 뒤를 따라왔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연신 날갯짓으로 통로 벽면을 긁어대며 내게 치대려고 했기에, 좀 부담스러웠다.
만난 지 이제 10분도 안됐는데 누가 보면 10년은 된 줄 알겠네.
"······별종이로군요."
이해하기 힘들다는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뇌후가 말했다.
"혹시 그것도 7군주 당신의 능력입니까? 몬스터의 정신을 지배해서 조종한다거나."
나는 어이가 없어서 대꾸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와이번이 처음부터 이리 사람을 잘 따르는 게 정상적인 경우는 아니지 않습니까."
뭐······ 그건 그렇지만.
나도 녀석이 나를 이렇게나 잘 따르는 이유가 뭔지는 몰랐다.
설마 정말 게임에서도 함께했던 것 때문에 날 주인으로 인정하기라도 한 걸까.
좋은 게 좋은 거긴 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당신뿐 아니라 그냥 아무나 잘 따르는 와이번인 건 아닌지······."
뇌후가 그렇게 말하며 띠용이에게 슬며시 다가왔다.
그러자 그르렁거리고 있던 녀석이 순식간에 험악한 기세로 돌변하더니 포효를 터뜨렸다.
키아악!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도로 물러섰다.
바로 옆에 있던 나도 고막에 타격을 입었기에 녀석의 목을 툭 쳤다. 이 자식이 안 그래도 동굴이라 울리는데.
[Lv. 70]
띠용이의 레벨은 무려 70으로, 뇌후와 호위기사의 와이번이나 여기까지 오며 마주했던 모든 와이번들보다도 높았다.
게임에서는 시스템 제약상 타고 날아다니는 용도로밖에 사용하지 못했지만 여기서는 전투에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70레벨이면 아주 막강한 전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웬만큼 강한 전투 부대도 혼자서 신나게 날뛰며 학살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
'와이번 비늘이 특히나 마력에 대한 저항력도 높은 설정이었던가.'
이내 동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절벽에 서서 제 주인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뇌후와 호위기사의 와이번들이 띠용이를 보고 경계하듯 낮은 울음소리를 흘렸다.
몸집은 녀석들보다 블랙 와이번인 띠용이가 눈에 띄게 더 컸다.
녀석들의 적대에도 띠용이는 짧게 숨을 내뱉고는 무시하듯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얘 지금 설마 코웃음 친 거냐?
"아무튼 이걸로 볼일은 끝이겠죠?"
뇌후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였던 와이번을 바로 얻었으니 이 산맥에 더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이 둘과 계속 함께할 이유도 없었고.
"여기서 바로 헤어지지."
"듣던 중 정말 반가운 소리네요."
그때 호위기사가 입을 열었다.
"안장이 필요하시면 일단 제 안장을 드리겠습니다."
그에 나는 속으로 반색했다.
그렇지 않아도 안장도 없이 불편해서 저걸 어떻게 타고 돌아가나 싶었는데,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그래도 되겠나?"
"예."
좀 미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사람이야 숙련자니까 나보다야 덜 불편할 것 아닌가.
굳이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그녀의 친절함을 받기로 했다.
물론 대화를 듣고 있는 뇌후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그녀와 날 쳐다봤지만.
크르릉!
그때 와이번들이 거친 울음소리를 뱉었다.
뭔가 싶어 시선을 돌리니 슬금슬금 뇌후의 와이번에게로 다가간 띠용이가 녀석에게 시비를 건 것이었다.
"저 미물이······."
뇌후가 황당함과 분노가 섞인 얼굴로 뇌기를 뿜어냈다.
그에 화들짝 놀란 띠용이가 다급히 내 뒤에 달려와서 숨었다.
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런 녀석을 바라봤다.
'뭐 하냐, 너?'
이놈이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여러모로 보통 와이번과는 거리가 참 먼 듯했다.
어쨌든 호위기사에게 안장을 받은 나는 녀석에게 착용시켰다.
물론 내가 하는 법은 몰랐기에 그녀가 대신 해주었다.
"가만히 있어라, 띠용아."
안장이 불편한 건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손길이 싫은 건지 녀석이 몸부림치려고 했지만, 내가 쓰다듬으며 말하자 이내 얌전해졌다.
영리해서 그런지 의사소통도 어느 정도는 수월하게 되는 듯했다.
"······띠용? 벌써 이름을 붙이기라도 한 건가요? 특이한 어감이군요."
갑작스러운 뇌후의 말에 나는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릴 뻔했다.
대륙공용어가 아닌 한국어라 무슨 의미인지 모를 뿐이지만, 너무 태연하게 저 이름을 남이 입에 담으니까 왠지 모르게 웃겼던 것이다.
'아이씨, 훅 들어오네.'
어쨌든 안장의 착용이 전부 끝나고 나는 녀석의 등에 올라탔다.
녀석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준비를 했다.
마지막으로 뇌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 회의에서 보지, 2군주."
"······그러죠. 다시는 이런 쓸데없는 일에 날 이용할 생각 말아요."
호위기사에게도 말했다.
"안장은 고맙다. 성에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돌려주도록 하지."
"예. 그럼 살펴가십시오, 7군주님."
펄럭!
두 사람이 먼저 날아오르고, 나는 빠르게 하늘 저편으로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녀석의 목을 툭 두드렸다.
"우리도 가자. 저쪽으로."
힘차게 포효한 녀석이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서 7군주령으로 향했다.
앞으로 계속해서 함께할 녀석이니, 이동하는 동안에도 나는 녀석에 대해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세심히 관찰했다.
크르릉!
그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있다면 어마무시한 식성.
나는 어디선가 거대한 늑대 몇 마리를 잡아와 뼈째로 거칠게 뜯어먹고 있는 띠용이의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녀석은 뇌후와 호위기사의 와이번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식사를 하는 동안 알아서 사냥을 해다가 자신의 식사를 마련했다.
근데 무슨 한끼로 먹는 고기의 양이 제 몸집의 3분의 1은 될 정도로 엄청났다.
뇌후와 호위기사의 와이번은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런 식습관 같은 것 외에 다른 행동들을 분석하는 건 별 의미가 없었다.
왜냐면 녀석은 내가 뭘 하든 싫어하는 기색 하나 없이 너무도 잘 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는 와중에 한 가지 더 알게 된 사실이 있었는데······.
'얘 설마 그냥 내 말을 알아듣나?'
굳이 제스처를 취하지 않아도 녀석과의 의사소통이 너무나 잘 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냥 내 말을 알아듣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니면 훈련도 하나 안 시킨 녀석과 이렇게까지 소통이 수월하게 될 리가 없으니까.
식사도 하고 잠시 쉬고 있던 중, 나는 웅크려있던 녀석과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일어서라."
그러자 녀석이 벌떡 일어섰다.
"앉아라."
도로 풀썩 주저앉았다.
"굴러라."
크릉?
이번엔 좀 당황하는가 싶더니 날개를 움츠리고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녀석을 쓰다듬어주었다.
'진짜 다 알아듣네.'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 싶었지만, 애초에 판타지 세계니까 새삼 이런 거에 신기해할 것도 없긴 했다.
나는 녀석을 쓰다듬어주었다.
어쨌든 내 말을 잘 들어도 너무 잘 들었기에 앞으로도 별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듯했다.
시간이 흘러 군주성에 도착했다.
성벽을 넘은 나는 아래로 몰려드는 기사들을 보며 착지할 장소를 찾았다.
'아, 습격으로 오해했나?'
검까지 뽑아들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에 나는 착지하는 속도를 늦추었다.
내 와이번을 성의 기사들은 지금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까.
거리가 가까워지자 누가 등에 타고 있는 나를 알아봤는지 소리치며 동료들을 말렸다.
그제야 기사들은 당황하며 검을 황급히 거두었다.
"죄송합니다, 군주님! 잠시 적의 습격으로 착각했습니다!"
"괜찮으니 일들 보도록."
와이번에서 내린 나는 기사들을 해산하게 했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이내 집사장이 나왔다.
"다녀오셨습니까, 군주님."
조금 놀란 듯한 집사장의 시선이 띠용이에게 닿았다.
나는 녀석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녀석을 둘 만한 공간이 성에 있나?"
"예, 물론 있습니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집사장을 따라서 이동한 곳은 성 한쪽에 위치한 거대한 철제 울타리와 지붕으로 둘러싸인 우리였다.
우리라기보다도 굉장히 넓어서 그냥 공터에 가까웠지만.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띠용이도 바로 뒤따라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둘러보는 모습이 앞으로 자기가 지낼 공간이라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와이번을 관리할 전속 하인들을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집사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몇 사람을 데려왔다.
낯선 사람들이 더 많아져서 주위로 다가오자 녀석이 으르렁거렸다. 하인들이 움찔 놀라며 물러섰다.
"가만히 있어라."
나는 녀석을 진정시키고서 차분하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앞으로 네가 이곳에 적응하는 데에 도와줄 사람들이다. 절대로 공격하거나 적의를 드러내지 마라. 알겠느냐?"
그르릉.
녀석이 알아들은 듯 곧장 도로 온순해졌다.
그렇게 녀석은 하인들에게 맡긴 뒤 나는 건물로 들어갔다.
'아셸은 어디에 있지?'
진작 나와봤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아직까지 모습을 안 비추고 있었다. 나오면 띠용이 좀 자랑하려 했더니.
의아한 마음으로 성의 홀에 들어가니 어째서인지 아래층에서 몰아치고 있는 마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
이건 아셸의 마력인데?
평소에도 맨날 느끼던 것이니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아래층의 위치한 연무장으로 곧장 내려갔다.
그리고 이내 리프 남매와 그 앞에 눈을 감은 채 서있는 아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종족 특질까지 사용해서 전신을 하얗게 물들인 채 있었는데, 은은한 순백색의 마력 아지랑이가 마치 불꽃처럼 넘실거리며 그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이게 뭔 상황인가 하니 리프 남매가 날 발견하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냐?"
내 물음에 리프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셸 경께서 리곤을 상대해주시다가 갑자기 우뚝 멈추시더니, 눈을 감으시고 이렇게······."
옆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검을 쥐고 있는 리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나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서있는 아셸을 바라보다가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아, 설마······.'
무슨 깨달음이라도 온 건가?
리프의 말만 들어보면 리곤과 대련을 해주다 뭐 갑작스런 깨달음 같은 게 찾아온 게 아닌가 싶었다.
얼굴이 평온한 걸 보면 몸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지는 않았기에, 나는 일단 가만히 서서 지켜봤다.
스으으.
곧 몰아치던 마력이 그녀의 몸으로 순식간에 갈무리되었고,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Lv. 82]
······다름이 아니라 머리 위에 떠있는 아셸의 레벨이 상승한 것이다.
다시 평상시 상태로 돌아와 천천히 눈을 뜬 아셸이 만족감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한쪽에 서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론 님, 언제부터······."
딱히 해줄 말을 찾지 못한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한층 더 성장했구나."
그에 당황하고 있던 아셸이 슬며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진짜 갑자기 웬 뜬금없는 레벨업이야?
암영 프레온 (1)
상황이 마무리되고 아셸이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를 설명했다.
"리곤의 검술 지도를 해주는 와중에 갑작스레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검술 지도 중에 깨달음이 찾아와?
그 자세한 사정을 들어보니 더욱 어이가 없었다.
자유 대련을 하며 리곤의 검을 받아주고 있던 중, 바로 얼마 전에 가르쳐줬던 마력 연공과 검술을 순식간에 자신의 식대로 응용해서 펼치는 리곤의 모습에 한순간 번뜩 깨달음이 찾아왔다고.
남을 가르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배움도 있다지만, 설마 그렇다고 리곤을 가르치다가 아셸이 레벨업을 할 줄은 몰랐다.
'······아니.'
그렇다고 아셸만 성장한 건 아니었다.
나는 이제야 리곤의 레벨을 확인하고서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Lv. 21]
21레벨.
11레벨도 아니고 21레벨이다.
쟤가 분명······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고작 3레벨이 아니었었나?
망가졌던 마력로만 간신히 회복해서 아무것도 쌓인 게 없는 백지 상태라고 했었는데.
그런데 고작 보름도 안되는 시간 만에 무려 20레벨에 가까운 성장을 했다는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비정상적인 성장 속도에 나는 속으로 한 박자 늦게 경악성을 내뱉었다.
'이건 진짜 뭐······.'
완전히 정신 나간 재능이지 않은가?
이 정도 천재성이니까 가르치는 아셸도 덩달아 깨달음이 찾아올 수 있었던 건가?
"그······ 성취를 축하드립니다, 아셸 경."
리프가 더듬더듬 어색하게 말했다.
뭐라도 말해야 되나 할 말을 생각하다가 겨우 내뱉은 기색이었다.
"고맙다."
아셸이 옅게 웃으며 리곤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게도 정말로 고맙다. 덕분에 오랫동안 막혀있던 벽이 조금은 허물어진 것 같아."
"아, 네. 경께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정말 기쁩니다."
리곤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저, 그런데 괜찮으시면 대련을 계속 이어서 해주실 수 있을까요?"
"응? 아······ 알겠다."
아셸이 고개를 끄덕이며 도로 검을 들어올렸다.
리곤도 순식간에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더니 자세를 잡았다.
나는 약간 흥미로운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승부가 아닌 가르침이 목적인 대련이긴 하지만, 아셸에게 깨달음을 찾아오게 한 리곤의 검술에 궁금증이 들었기 때문이다.
파앗!
리곤이 발을 구르고, 검날이 빠르게 아셸의 목을 노렸다.
레벨 차이야 워낙 아득하니 위험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진검 대련인데 급소를 노리는 데 전혀 망설임이 없는 모습이었다.
'아셸이 그렇게 하라고 했나?'
아셸은 평온한 얼굴로 검격을 가볍게 튕겨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공격도 이리저리 검을 휘두르며 전부 제자리에서 막았다. 굉장히 빠른 템포의 공방이 이어졌다.
상단부터 하단까지, 리곤은 모든 부위를 다양하게 노리며 검을 휘둘렀다. 가끔씩 자루를 역수로 쥐기도 하고, 몸을 유연하게 꺾어 기이한 각도에서 기습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
저걸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검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계속 지켜보고 있자니 리곤이 펼치는 검술에 명백히 와닿는 느낌은 있었다.
'엄청 자유롭네.'
커다란 틀은 있지만 그 안에 체계는 하나도 없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것은 조잡함 따위가 아니라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에 훨씬 가깝게 느끼졌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드는 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검뿐만이 아니었다.
리곤의 몸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흐름, 그 역시도 리곤의 움직임에 따라 몸 안에서 아주 자유롭게 활개를 치고 있었다.
아셸이 전투를 할 때는 저런 식으로 마력을 운용하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허.'
[Lv. 22]
그보다 전투 중에 또 레벨이 올랐다. 이건 뭐 싸우면서 강해지고 있네.
리곤은 한껏 고양감이 치솟은 얼굴로 점점 더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카앙!
계속 공격을 받아주며 간간이 적당한 반격을 날리던 아셸이, 어느 순간 리곤의 검을 아래로 흘리고 바닥에 눌러 고정시켰다.
"아······."
리곤이 낭패라는 표정으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셸도 조금 질렸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공방이 격화될수록 본능에 가깝게 검을 휘두르고 있다."
"아, 죄송해요. 흥분하면 자꾸 주체가 되지 않아서······."
"나쁘다는 뜻이 아니야. 그 본능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고 제어하라는 거지. 그러니까 리곤, 너는······."
아셸은 잠시 방금의 대련에 대해 이런저런 점들을 짚어주며 리곤에게 조언해주었다. 리곤도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그럼 오늘은 이쯤에서 마치자."
"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경."
리곤이 우렁차게 대답하고 리프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두 남매가 먼저 나가고 나와 아셸은 잠시 연무장에 둘이 남았다.
나는 떠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래도 잘 가르치고 있는 것 같구나."
"아, 예······ 제가 잘 가르치는 게 아니라 두 사람 모두 뛰어나서 그렇습니다."
"특히 리곤이 말이지."
내 말에 아셸이 전적으로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타고난 무재가 정말 뛰어납니다. 빈말이 아니라 불세출의 천재란 게 있으면 아마 저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까지 고평가인가.
나는 괜히 장난기가 돌아서 물었다.
"아셸, 너와 비교하면 어떻지?"
"예? 물론 저보다도 훨씬 뛰어납니다."
아셸은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 없이 잘라서 말했다.
음, 얘가 이런 거에 자존심 세울 성격은 아니긴 하지.
대화가 끊기고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가 아셸이 이제야 생각난 듯 아, 하고 탄성을 뱉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돌아오셨는데 마중을 나가지 못해서······."
"괜찮다."
"와이번은 얻으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보러 가보겠나?"
그렇게 잠깐 아셸에게도 띠용이를 구경시켜주었다.
***
군주성으로 돌아오고서 1주일 정도가 흘렀다.
그동안 나는 아셸의 검술 지도를 구경하기도 하고, 띠용이와 놀아도 주고, 중립국 정세에 대해 알아보기도 하며 회담 날짜가 오길 기다렸다.
"기사 시험?"
나는 읽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돌려 집사장을 쳐다봤다.
"예. 새로운 견습 기사들을 뽑고, 또 기존의 견습 기사들 중 정식 기사로 승급할 이들도 뽑는 시험입니다."
"그렇군. 그런데 왜?"
"다름이 아니라, 혹 리프 남매도 시험에 참여하기를 원하시는지 의중을 여쭙고자······."
아, 그 얘기인가.
집사장도 내가 여러모로 리프 남매에게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은 물론 알고 있었다.
나는 책을 덮고 잠시 고민에 잠겼다.
'시험이라.'
기사 작위야 언제든 내 마음대로 두 사람에게 내려주면 그만이긴 하다.
하지만 마침 시험 같은 정식 의례가 있다면 그쪽을 거치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했다.
리프는 지금 바로 정식 기사가 되어도 충분한 수준이니까.
'그리고 좀 궁금하기도 하네.'
성에서 계속 생활하긴 했지만 기사들에게 관심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시험이 어떤 식인지도 구경할 겸 리프를 시험에 참가시키기로 했다.
"참가하겠습니다!"
그녀를 불러 의사를 묻자 예상대로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즉답했다.
옆에 있는 리곤은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리곤의 레벨로는 견습 기사는 될 수 있어도 아직 정식 기사가 되기엔 조금 부족했다.
물론 지금의 성장세로는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순식간에 그만한 수준까지 도달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기사 시험의 날이 다가왔다.
"시험을 관전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철혈 기사단의 단장이 정말 감격한 듯한 얼굴로 경례했다. 얘 이름이 아킨이었던가.
거대한 야외 연무장에 질서정연하게 모여있는 엄청난 수의 기사들.
현재 나는 아셸과 함께 한쪽에 마련된 단사 위에서 의자에 앉아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프 역시 무장을 하고 그들 사이에 섞여있는 게 보였다.
"군주님께서 경들의 결투를 지켜보시고자 직접 이곳에 걸음하셨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여······."
기사단장의 짧은 연설이 끝나고, 시험은 질질 끌 것 없이 곧바로 시작되었다.
우선은 정식 기사로 승급하는 견습 기사들의 시험부터였다. 30레벨대가 대부분인 기사들.
시험의 형식은 군주성의 최정예인 철혈 기사단원과 결투를 펼쳐서 일정 시간 이상 버티면 통과하는 식이었다.
그 시간은 고작 3분에 불과했음에도 버티지 못하고 금세 떨어져나가는 기사들의 절반 이상이었다.
'음······.'
나는 조금 따분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좀 빡세 보이긴 하네······ 그 이상의 감상은 없었다.
나도 내가 뭘 기대하고 시험을 구경하러 온 건지는 모르겠다만, 직접 보니 생각보다 썩 재미가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리프의 차례도 왔다.
그녀의 상대인 기사단원은 50레벨 중반의 엘프 기사였는데, 검이 아니라 창을 무기로 들고 있었다.
쐐액!
결투가 시작하자마자 안면을 노리고 찔러오는 창날을 리프는 고개를 틀어 피했다.
그녀는 리치 차이를 이용해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막아내며 거리를 좁히려 들었다.
악티폴의 경기 때도 봤듯 목숨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과감한 움직임. 그에 공격을 퍼붓던 단원도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카앙! 카카캉!
물론 두 사람의 실력 차이는 현격했기에 끝내 거리가 좁혀지는 일은 없었다.
아셸은 갈수록 더욱 거세게 몰아치는 공격에 방어만 하기 급급하다가 3분의 시간이 끝났다.
다른 기사들보다 훨씬 치열한 공방을 펼쳤음에도 검을 거두는 리프의 얼굴엔 아쉬움이 감돌았다.
"자네는 목숨이 10개라도 되는가?"
결투가 끝나고 상대를 했던 단원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까딱 방심했다간 나도 당할 것 같아서 조금 더 열을 올렸네. 그 젊은 나이에 대단한 성취야. 자부심을 가져도 좋네."
와아아!
지금껏 없었던 찬사에 주위에 서있던 기사들에게서 짧게 함성이 터졌다.
나도 슬며시 웃으며 칭찬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때였다.
"······?"
나는 퍼뜩 시선을 돌렸다.
연무장 한쪽, 기사들과 동떨어진 곳에 서서 시험의 결과를 기록하고 있는 행정관들.
[Lv. 67]
그 가운데 굉장히 비정상적인 레벨을 하고 있는 행정관 하나.
나는 미간을 좁힌 채 그 갈색 머리칼의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게 뭐야?'
그건 명백히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그야 고작 행정관이 무려 70에 가까운 레벨을 하고 있었으니까.
"집사장."
"예, 군주님."
"저기 저 여자는 뭐지?"
옆쪽에 서있던 집사장이 내 시선이 닿아있는 곳을 보고 대답했다.
"몇 달 전에 새로 임명된 케이트라는 신입 행정관입니다."
······몇 달 전?
자연스레 사고가 흘러갔다. 첩자.
저만한 실력을 굳이 숨기고 있는 이라면 그런 경우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67이나 되는 레벨의 첩자면 대체 어느 세력에서······.
"······!"
이내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67레벨의 갈색 머리칼 여인, 첩자.
이 키워드와 일치하는 캐릭터가 정확히 퍼뜩하고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친, 설마 저거······.'
나는 경악스러움과 황당함을 느끼는 와중에도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확인하지? 따로 조용히 불러내야 되나?
하지만 저 행정관이 정말로 그녀라면 따로 불러내려 했다간 바로 눈치 빠르게 튀어버리지 않을까 싶었다.
잠깐만 있어봐, 생각을······.
'아.'
너무 빤히 쳐다봤는지, 종이에 펜을 끄적이고 있던 그녀가 시선을 느끼고 이쪽을 돌아봤다.
그녀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계속 응시했다.
그러고 있자 이내 수선했던 분위기가 가시고 기사들도 하나둘씩 내 시선이 닿아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자연스레 모든 이들의 시선이 여인에게로 집중되었다.
내 곁에 서있던 아셸이나 기사단장도 의아한 기색으로 여인을 쳐다봤다.
그제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인이 슬쩍 고개를 들어올렸다.
나와 그녀의 시선이 몇 초 동안 마주쳤다. 그녀의 표정이 미약하게 굳었다.
"······."
연무장에 적막이 내려앉은 가운데, 판단을 마친 나는 그녀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첩자다. 잡아라."
암영 프레온 (2)
세인테아의 수도, 켈리아로드.
로브를 걸친 한 남성이 인적 없는 어두운 골목길을 걷고 있다.
남성은 이내 벽면에 그려진 희미한 문양을 발견하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본 그가 입을 열었다.
"나와라."
스으으.
그러자 남성의 뒤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기척 하나 없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남자와 마찬가지로 로브를 걸치고 있는 장신의 여인이었다.
밤하늘에 떠오른 반월을 올려다본 그녀가 입꼬리에 호선을 그렸다.
"황실의 의뢰를 받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네요, 슬리안 공."
그녀가 입을 열고 나서야 존재를 알아챈 남자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불쾌함이 드러나는 표정으로 쯧 혀를 찼다.
암영.
대륙에서 여인을 부르는 이름은 많고도 다양했지만, 가장 잘 알려진 이름은 그것이었다.
그림자처럼 어둡고, 잡히지 않으며, 어둠 속에선 어느샌가 모습을 감춰버리는 이명 그대로와 같은 존재.
"그래서, 이번 의뢰는 뭘까요? 암살 의뢰는 여전히 받지 않고 있으니 그쪽이 목적이면 그대로 돌아가주시면 된답니다."
남자는 그녀의 여유로운 태도가 거슬렸지만 이곳까지 걸음한 목적에 집중했다.
"칼데릭의 7군주에 관한 것이다."
여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원하는 건 정보다. 7군주의 성에 잠입을 하든 어쩌든 그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수집하면 된다."
"흐응, 정보 수집이었나요. 그것도 이번에 새로이 즉위한 군주에 관한 정보라······."
그녀가 씩 미소를 지었다.
"권성도 그의 손에 죽었다고 하죠? 세인테아 출신의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나돌던데 말이에요."
그에 남자의 인상이 다시금 찌푸려졌다.
소문 같은 게 나돌 리 없다. 권성이 새로운 7군주의 손에 죽었다는 건 아직 세인테아의 고위층들만 짐작 식으로 아는 사실.
여인은 그것을 알면서도 능청스레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여느 거대 정보 단체와도 맞먹을 정도의 정보력을 지니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 있다면 바로 그녀였으니.
"아하하, 죄송해요. 아무튼 그런 의뢰라면 이번엔 값을 좀 많이 지불하셔야겠는걸요? 무얼 챙겨오셨을까요?"
남자가 아무런 대답 없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어서 여인을 향해 던졌다. 돈주머니.
그 안에는 무려 10닢이 넘는 백금화가 들어있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여인이 휘파람을 불고는 돈주머니를 품에 갈무리했다.
의뢰를 수행하지 않고 그냥 들고 튀어도 이상하지 않을 어마무시한 금액의 선수금.
하지만 돈을 건넨 남자는 그에 대해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 금액에 그녀가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를 무너뜨리고 황실과 척을 지려고 할 리 없었으니.
"그럼 먼저 가볼게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1년 내로는 좋은 소식을 들고 찾아뵙도록 하죠."
여인이 벽면에 그려진 문양을 손가락으로 슥 문질러 지웠다.
스르륵.
다시 한 번 좀 전과 같은 검은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여인의 모습은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쳐다보고 있던 남자도 이내 걸음을 옮겨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어느 어두운 골목에서의 은밀한 접선은 하늘에 떠오른 달만을 목격자로 남긴 채 끝났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칼데릭.
"케이트, 종이랑 펜 챙겨서 따라나와라."
"예? 종이하고 펜은 갑자기 왜?"
"오늘 기사 시험 있잖냐. 그거 기록 담당한 레피 씨가 몸살 앓고 누워서 너랑 내가 해야겠다. 잔말 말고 빨리 나와."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상관의 명령에 여인은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속으로는 욕을 뱉으며.
'아이씨, 귀찮게.'
이전에 골목에서 봤을 때와 완전히 다른 외모를 하고 있는 그녀의 정체는 바로 암영이었다.
7군주령 엔록으로 와서 이곳 군주성에 들어온 지도 몇 개월.
온갖 재주가 많은 그녀에게 행정관 신분으로 성에 잠입하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헉······ 군주님께서 직접 나오셨잖아?"
상관을 뒤따라서 이동한 연무장에는 이미 수많은 기사들이 모여있었고, 심지어 7군주까지 나와있었다.
작게 중얼거리는 상관의 목소리를 들으며 여인은 7군주가 앉아있는 단상을 슬쩍 곁눈질로 살폈다.
'7군주······.'
성에서 지낸 지도 몇 달이 지났지만 아직 7군주에 대해서 얻은 큰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왜냐면 그는 성에 있는 것보다 바깥을 나도는 시간이 훨씬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방랑벽이라도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알아낸 건 단지 종족, 성별, 외모적 특징, 그리고 성의 관리들에게 딱히 위세를 부리지 않는 유한 성격이라는 것 정도일까.
그리고 최근에 6군주를 죽이며 군주들의 긴급 소집까지 열린 엄청난 대사건이 있었지만, 그에 대해선 아무리 그녀라도 깊게 파고드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어떻게 멀쩡히 살아돌아온 걸까. 분명히 죽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그래서 근래에는 7군주가 6군주를 죽인 이유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추측되는 리프 남매에 대해 조사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최근엔 그의 호위이자 굉장한 실력자로 짐작되는 아셸이 직접 도맡아 남매에게 검술 지도까지 하고 있었다.
7군주가 그들 남매에게 명백히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는 뜻이었고, 당연히 무언가 있다는 냄새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성에서 머물며 더 캐낼 건 없으니 조만간 6군주령의 수도로 향해 그들 남매의 과거를 본격적으로 알아볼 생각이었다.
시험이 시작되고, 그녀는 신경은 7군주에게 기울인 채 결과를 기록했다.
그중에는 리프도 있었는데 그녀는 다른 견습기사들보다 뛰어난 실력으로 어렵지 않게 시험을 통과했다.
슬슬 그렇게 시험이 끝나갈 즈음 그녀는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슬쩍 돌리니 어째서인지 7군주가 이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
뭐지?
순간 의아함과 영문 모를 불길함이 솟아올랐지만, 그녀는 일단 깜짝 놀라며 다급히 고개를 숙이는 척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자니 서서히 주위의 소란이 멎기 시작했다.
숨 막히는 정적과 함께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주위의 시선은 모두 이쪽으로 모여있었다.
"······."
무언가 단단히 틀어졌음을 인지한 그녀는 미약하게 굳은 얼굴로 7군주를 바라봤다.
그가 이쪽을 가리키고서 입을 열었다.
"첩자다. 잡아라."
***
촤앙!
철혈 기사단의 단원들이 내 말과 동시에 곧바로 검을 뽑아들었고, 다른 기사들은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렸다.
내 양옆에 서있는 아셸과 철혈 기사단장도 굳은 얼굴로 검을 든 채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곧 연무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기사들 전원이 그녀에게 검을 겨눈 상황이 되었다.
"어, 어어? 헉!"
여인의 옆에 서있던 다른 행정관은 얼빠진 얼굴로 서있다가 기겁하며 그녀에게서 물러섰다.
완전히 낭패라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 그녀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잠깐."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기색.
그녀가 진지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들 알고 계시나요? 제가 오늘 먹은 점심 메뉴가 뭔지?"
"······."
하지만 이어진 말은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헛소리였다.
그에 기사들도 이게 갑자기 뭔 개소리인가 싶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나는 작게 혀를 찼다.
'그 여자 맞네.'
저건 그냥 한순간이라도 기사들의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한 아무 의미 없는 헛소리일 뿐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건······.
화아아악!
갑작스레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나온 안개가 순식간에 사방을 뒤덮었다.
해가 중천에 떠있음에도 아예 빛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자욱한 칠흑의 안개가.
"······첩자가 도주한다! 잡아라!"
누군가 소리쳤지만 안개에 둘러싸인 기사들은 그 안에서 우왕좌왕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 아셸과 철혈 기사단장이 곧바로 연무장으로 뛰어들며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두 갈래의 거대한 검풍이 안개를 갈라버리고 시야가 되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여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온데간데 없었다.
아셸조차 도주한 그녀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미간을 좁힌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나는 초감각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그녀의 능력이 무엇인지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곧 감각에 걸려들었다. 모습을 감춘 채 빠르게 멀어지고 있는 기척 하나가.
'더럽게 빠르네.'
나는 곧바로 공간 도약을 연달아 사용해서 연무장 한쪽 허공으로 이동함과 동시에 부동 장막을 펼쳤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고, 내 장막에 가로막혀 충돌한 그녀는 그대로 아래로 추락했다.
"껙······."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그녀의 목에 검날이 겨누어졌다.
어느새 따라붙은 아셸이 바닥에 쓰러진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봤다.
이어서 몰려든 기사들도 주위를 완전히 에워싸고서 빠져나갈 틈 하나 없이 도주로를 차단했다.
그녀가 조금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굴하게 웃으며 천천히 두 손을 들어올렸다.
"하, 항복. 항복이요."
바닥에 착지한 나는 마무리된 상황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경외가 담긴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기사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은 무시하며.
'암영······.'
그래서, 이 여자는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야?
***
상황을 정리하고서 나는 아셸과 함께 여인을 내 방까지 끌고 왔다.
반대편 자리에 앉히고서 나는 가만히 그녀와 마주 앉았다.
연신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눈치를 살피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말했다.
"네가 무슨 술수를 부리든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암영."
"······."
"몸을 숨기는 그 신비도 사용해봤자 소용없다. 다시 도주를 시도하면 그때는 바로 목을 벨 테니 단념하도록."
검은 안개 속에서 아셸조차 그녀를 잡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은신의 신비 때문이었다.
나야 초감각이 있어서 어떻게든 몸을 숨기고 도망치는 걸 캐치할 수 있었지만.
정체와 능력까지 단번에 간파당했는 줄은 몰랐는지, 그녀가 미간을 좁힌 채 날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 뭐 이런 괴물한테 걸려서······."
이제야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된 것 같다.
나는 팔짱을 끼고서 가장 먼저 물었다.
"누가 보냈지?"
암영 프레온.
이 대륙에서 가장 신출귀몰한 존재를 꼽으라면 반드시 한 손에는 꼽을 수 있을 인물.
대륙 최고의 정보원이자 도둑이기도 한 그녀는 지금과 같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첩자 활동도 밥 먹듯 하곤 했다.
그녀 정도 되는 인물을 부릴 수 있는 세력이야 어차피 몇 곳 있지도 않으니 대충 짐작은 가는데······.
그녀가 반쯤 체념한 기색으로 물었다.
"말하면 살려주실 건가요?"
"일단 말해라."
"원하신다면 전부 불 수야 있는데, 그 전에 저를 어떻게 하실 건지부터 알고 싶은데요. 그 전에는 죽어도 입을 안 열 겁니다."
"그럼 죽어야지. 아셸."
내 말에 옆에 서있던 아셸이 검자루로 손을 가져갔다.
그녀의 입이 바로 열렸다.
"······세인테아 황실이요."
암영 프레온 (3)
역시 세인테아 쪽이었나.
칼데릭에, 그것도 군주성에 직접 첩자를 들여놓을 생각을 할 세력은 그쪽 말고는 딱히 없었다.
그리고 기억하기로 암영은 황실의 의뢰를 여러 차례 수행하며 그쪽과 줄이 꽤 긴밀하게 닿아있는 인물이었고.
나는 그녀에게 계속해서 물었다.
"성에 잠입한 목적은?"
"7군주님에 대한 정보 수집이요."
"황실이 어째서 그런 의뢰를 요청했지?"
"저야 보수만 받고 의뢰를 수행하는 거라 자세한 이유는 몰라요. 그런데 뭐······ 알려진 정보 하나 없이 베일에 쌓인 사람이 칼데릭의 새로운 군주가 됐는데, 당연히 세인테아에서도 한번 조사해볼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뭐, 그렇긴 하지.
암영에게까지 의뢰를 요청해가며 7군주성에 첩자를 들였는데, 목적이 나에 대한 것 말고는 달리 뭐가 있겠는가?
나는 더 캐묻지 않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가 불안 섞인 얼굴로 그런 내 시선을 슬쩍 피했다.
배후가 세인테아라는 것은 크게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다.
어차피 칼데릭이든 세인테아든 서로 진영에 쉬지 않고 첩자들을 심어놓는 거야 일상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물론 그렇다고 해도 군주성에까지 첩자가 잠입한 건 꽤 심각한 사안이긴 하다.
하지만 이번과 같은 경우는 딱히 성의 경계 태만을 탓해야 할 문제는 아닐 것이었다. 왜냐면 상대가 암영이니까.
"저, 군주님. 제가 말씀을 조금 드려도 될까요?"
그때 그녀가 눈치를 보고 있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를 한눈에 알아보신 걸로 보아 참으로 영광스럽게도 저에 대해서 이것저것 잘 알고 계신다고 생각됩니다만, 저는 어느 세력에도 속해있거나 얽혀있지 않습니다."
"······."
"이번 일도 정말 철저히 사무적으로 황실의 의뢰를 받아든 것뿐이지 개인적인 의도 따윈 추호도 없었고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걸려버린 이상에야 할 말이 뭐가 있겠냐만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혀가 길어지기에 말을 끊었다.
"조만간 중립국 회담이 있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그곳에서 제가 황실의 의뢰를 받고 군주성에서 첩자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전부 자백 진술할 수도 있습니다. 제 목숨에 조금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만 한다면······."
그녀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중립국 회담에는 세인테아 측에서도 황제가 직접 참여하니, 그들을 대놓고 쥐어짤 강력할 명분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참나······.'
암영의 대충 이런 성격의 캐릭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목숨이 가장 소중한.
그러니까 이렇게 의뢰주를 팔아넘기는 데도 일말의 망설임이 없는 것이고.
뻐기는 건 안 통하겠다 싶었는지 어떻게든 당장 목숨부터 연명하고 보자 판단한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제안은 그닥 끌리는 내용이 아니었다.
왜냐면 내가 세인테아를 압박한다고 해서 딱히 얻을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내 다음 목표에 도움이 될 것도 하등 없고.
난 지금 다른 무엇보다도 암영, 그녀의 존재 자체에 대한 관심이 컸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되나.'
첩자질이야 당장 목이 떨어져도 차고 넘칠 죄목이긴 했지만, 일단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야 이만한 인재를 그냥 처형해버리는 건 아까웠으니까.
뛰어난 정보 수집과 추적 능력에, 67이라는 레벨만큼 상당한 전투력에, 대륙에서 그녀만큼 발이 빠르고 온갖 다양한 재주에 능한 인물은 거의 없었다.
'게임 스토리에서 딱히 조력자 역할을 한 적 있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크게 빌런 짓을 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마침 슬슬 뛰어난 정보원이 필요한 시점이긴 했다.
여태까지는 신비 찾기에 집중했었지만 이제 앞으로의 목표는 본격적인 메인 스토리와 관련된 것이다.
미래에 발생한 사건들, 내 게임 지식으로도 해결이 부족한 몇몇 중대한 사항들에 대해선 정보 조사가 필요했다.
단지 문제는 그녀가 내가 밑에 두고 다룰 수 있을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
어디 가서 정보라도 수집하라고 풀어놓으면 그대로 도주해서 종적을 감춰버릴 테니 말이다.
'문제는 잡아두고 다룰 수 있을 만한 방법이 없다는 건데.'
어디 정보라도 수집하라고 풀어놓으면 그대로 도주해서 종적을 감춰버릴 테니 말이다. 아니면 뒷통수를 맞거나.
그 이름이나 이명이 전 대륙에 널리 퍼져있는 자들은 괜히 그만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그녀는 어중간한 협박이나 약점 잡기로 부려먹을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지금도 말만 하면 발이라도 핥을 것처럼 저자세로 나오고 있지만, 전부 어떻게든 살아나갈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거겠지.
'······아.'
고민에 잠겨있던 나는 속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가지고 있는 물건 중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에 있어 더없이 유용할.
"일단 너를 죽일 생각은 없다."
"······정말이신가요? 감사합니다."
대답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말 앞에 '일단'이 붙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불안감은 정확히 맞았다.
"낙인 반지."
"······예?"
"네가 가지고 있는 고대의 유물 말이다. 당연히 지금 가지고 있겠지. 꺼내라."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한순간일 뿐이었고 곧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낙인 반지······? 고대 유물? 죄송한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참 대단한 연기력이다 싶었다.
자신 말고는 아무도 몰라야 할 물건의 존재를 입에 담았는데도 이런 반응인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소용없다, 그렇게 잡아떼도. 내가 어떻게 이 이름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정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
"아셸, 내가 셋을 세기 전에 이 여자가 아무것도 꺼내지 않으면 목을 베어라."
아셸이 곧바로 검을 뽑아들었다.
"하나."
나는 팔짱을 낀 채 나지막하게 카운트를 뱉었다.
그리고 둘을 세기 전에 그녀의 입이 다시 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혼란스러운 시선이 함께.
"······대체 뭐예요? 내가 가지고 있는 유물에 대해서까지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지. 어서 꺼내기나 해라."
고대 마법의 황금기에는 현재는 실전된 온갖 종류의 마법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낙인 반지, 그것은 누군가에게 무슨 수로도 지울 수 없는 마력 낙인을 남길 수 있는 고대의 유물.
그리고 반지의 소유자는 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낙인이 찍힌 대상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암영이 그 유물의 능력을 활용하는 건 게임에서 나온 적이 있었기에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녀가 더없이 굳은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내가 낙인 반지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느냐는 둘째치고, 이 타이밍에 그걸 꺼내라는 이유를 그녀도 짐작 못할 리는 없었으니.
"자꾸 경고하기도 지치는군. 그냥 이대로 죽겠느냐?"
"······."
하지만 결국에는 거의 울상이 돼서 로브 품에서 반지를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가 꺼낸 반지를 받아들고서 이리저리 살펴봤다.
때가 낀 낡은 은반지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육각형의 문양이 하나 작게 새겨져있었다.
"자."
아셸에게 건네주자 그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받아들었다.
나는 마력이 없기에 유물의 능력을 활성화시킬 수가 없었다.
"마력을 주입하면 유물의 능력이 활성화될 거다. 한번 해봐라."
"아, 예."
아셸은 왜 굳이 자신에게 시키는지 의아한 기색이면서도, 더 묻지 않고 순순히 내 말대로 반지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반지에 새겨진 육각형 문양에서 자색의 빛이 은은하게 뿜어져나왔다.
나는 암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디에 찍겠나?"
"······손목이요."
그녀가 한쪽 팔을 힘없이 내밀었다. 반쯤 해탈한 얼굴이었다.
아셸이 엉거주춤 빛이 뿜어져나오는 반지를 가져가서 그녀의 손목에 도장처럼 찍었다. 그러자 반지의 문양대로 자색의 육각형 문양이 새겨졌다.
나는 다시 아셸에게서 반지를 받아들고서 살펴봤다.
반지에서 얇고 희미한 빛살이 뿜어져나와 정확히 그녀가 있는 위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좋아.'
나는 만족스럽게 반지를 챙겼다.
이제 그녀가 어디에, 얼마나 멀리 있든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그녀는 이제 평생을 내게서 도망칠 수 없는 신세가 된 것이었다.
방금 찍은 마력 낙인은 또 다른 대상에게 사용하기 전까지 영원히 그녀에게 남아있을 테니까.
멍하니 손목의 낙인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너무 침울해하지 마라. 시키는 일만 제대로 수행한다면 널 죽이지 않겠다 맹세하지. 그리고 반지도 다시 돌려주고."
그녀가 날이 선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한테 선택권이 있기야 한가요. 원하시는 게 뭔데요?"
"정보 수집이다."
가장 먼저 시킬 생각인 건 세인테아 제국의 수도 테러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전에 할루멘타에서 선점하는 데에 실패했던 빙의의 신비. 그 신비를 얻은 빌런이 일으킬 끔찍한 재앙.
일단 내가 알고 있는 미래의 사건들 중 피해의 단위가 가장 큰 재해였기에 그것부터 조사시킬 생각이었다.
어쨌든 이것으로 아주 뛰어난 정보원 한 명을 얻었다.
***
그녀는 내 요구에 따라서 곧바로 조사를 위해 세인테아로 떠났다.
뇌후도 그렇고 왠지 요즘 들어서 여기저기 협박을 많이 하고 다니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나도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서 내 나름대로의 노력하고 있는 것일 뿐이었는데.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리프는 정식으로 군주성의 기사 작위를 받았고, 리곤은 폭발적인 성장을 이어가 26레벨에 도달했다. 아셸은 자신의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는 한편 그런 두 남매를 계속 열심히 가르쳤다.
언제나와 같이 방에 박혀서 책을 읽고 있던 나는 대군주성으로부터의 소식을 받을 수 있었다.
'사흘 뒤에 출발인가.'
이제 슬슬 회담을 위해 중립국으로 이동할 때가 된 것이다.
나는 준비를 마친 뒤 띠용이를 타고 대군주성으로 날아갈 준비를 했다.
"너는 성에 남아서 계속 남매의 지도에 집중하면 된다."
리곤의 성장세가 심상치 않았기에 이번에도 굳이 아셸은 데려가지 않고 성에 남겨두고 갈 생각이었지만······.
"······저도 데려가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조금 놀라서 그녀를 돌아봤다.
그녀가 내 명령과 반대해서 스스로의 뜻을 주장한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세인테아 때문인가?'
이번 회담은 두 중립국 사이의 갈등을 논의함과 동시에, 세인테아의 황족들과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자리였다.
나는 고개를 숙인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알겠다. 그럼 동행하지."
그렇게 나는 아셸을 데리고 띠용이가 있는 우리로 향했다.
이미 하인들에게 시켜서 안장은 모두 착용시킨 상태였다.
그르릉.
여전히 머리를 들이밀며 치대는 녀석의 목을 한 번 쓰다듬어주고, 아셸과 함께 등 위에 올랐다.
녀석은 다른 사람이 같이 탄 게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몇 번 칭얼거리듯 몸을 흔들고는 더 난리를 치진 않았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군주님."
"그래."
언제나처럼 집사장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띠용이를 툭툭 두드렸다.
녀석이 힘찬 포효와 함께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중립국 회담 (1)
세인테아 제국 연합.
세인테아 제국을 중심으로 뭉친 여러 인간 중심 국가들의 연합이자, 라사 세계관의 메인 스토리 줄기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세력.
칼데릭은 세인테아와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다.
두 세력 사이의 중간 지대에는 여러 중립국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립이라고는 해도 말뿐이지, 마족 침공 이후로는 세인테아에 흡수되다시피 한 국가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까지도 실질적으로 중립의 진영에 남아있다고 할 수 있는 국가는 둘뿐이었다.
어스힐 왕국과 카숄 왕국.
칼데릭과 세인테아, 두 거대 세력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중립을 표방하고 있는 두 국가.
전체 국력이 칼데릭의 군주령 하나만도 못한 두 약소국이 지금까지 중립의 진영에 남아있을 수 있던 것에는 여러 정치적인 이유들이 있었다.
어스힐에서 열리는 이번 중립국 회담은 칼데릭과 세인테아, 그리고 그런 중립국의 왕족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였다.
'다 왔네.'
띠용이를 타고 빠르게 대군주령까지 날아온 나는 저멀리 보이기 시작한 대군주성을 바라봤다.
고도를 낮춰 성의 입구로 가까이 다가가자 이미 나와있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는데, 대군주와 참모장이었다.
띠용이가 날개를 펄럭이며 그들의 바로 앞에 착륙했다.
내가 먼저 공간 도약으로 내려서고, 뒤따라 내려선 아셸이 대군주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왔어, 7군주?"
대군주는 언제나처럼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그녀가 묘한 눈빛으로 아셸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곧 띠용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눈에 이채를 띠며.
"글라이드 산맥으로 와이번을 구하러 갔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블랙 와이번이네? 7군주랑 똑같이 눈동자도 황금색이고."
대군주가 빤히 쳐다보자 띠용이는 왜인지 꺼리는 듯한 기색으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 반응에 그녀가 싱긋 웃고는 도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7군주, 듣기로는 2군주의 와이번을 타고 함께 갔었다고 하던데 말이야. 저번 소집에서는 2군주가 아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는데, 그새 어떻게 친해지기라도 한 거야? 하하."
······그것까지 다 알고 있었나?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출발은 언제지?"
"음, 글쎄? 7군주만 상관없으면 지금 바로 출발할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그녀의 복장을 바라봤다.
여태껏 볼 때마다 그랬듯 검은 드레스 차림이었다. 저대로 이동하겠다는 건가?
이제부터 중립국으로 향하는 건데, 회담이 아니라 어디 마실이라도 나가는 듯한 분위기에 조금 황당해졌다.
이런 식으로 대충대충이 아니라 그래도 제대로 된 행렬을 차려서 이동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동하는 건 넷뿐인가?"
"아니. 참모장은 남아있을 거니까 셋이 되겠네."
"행렬을 차려서 이동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
대군주가 픽 웃으며 말했다.
"쓸데없고 번거롭잖아. 이 내가 직접 걸음하는데 달리 뭐가 또 필요하다고?"
상당히 오만하게 들렸지만 틀린 건 없는 말이긴 했다.
어쨌든 그렇게 대군주성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중립국으로 이동하는 게 결정되었다.
대군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와이번을 데리고 왔는데, 띠용이와 같은 블랙 와이번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녀석은 푸른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나는 대군주에게 물었다.
"회담에 굳이 날 동행시키려는 이유가 따로 있나?"
내 물음에 그녀는 묘한 웃음만 지어 보이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여튼 속을 알 수가 없네.
"자, 어쨌든 그럼 출발해볼까?"
대군주의 주위에 어둠이 일렁이더니 그녀의 차림이 바뀌었다.
방금 전의 드레스보다는 단촐하고 적당히 화려한 느낌의 의복으로.
복장을 바꾼 그녀가 사뿐히 떠올라 와이번의 등에 올랐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약간의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군주도 와이번을 소유하고 있다는 거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녀가 와이번을 탄다는 것 자체가 그냥 조금 묘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종족이 종족이었으니까.
크오오!
대군주의 와이번이 힘차게 포효하고는 먼저 하늘로 날아올랐다.
다시 띠용이의 등에 탄 나와 아셸도 곧 뒤를 따라서 출발했다.
중립국까지의 거리는 군주령과 군주령 사이의 거리보다 조금 더 먼 정도였기에 시간은 얼마 걸리지도 않을 것이었다.
이번의 중립국 회담은 어스힐 왕국에서 열리는 회담이었다.
서로의 연대와 협력을 위하자는 취지로 시작된, 3년을 주기로 중립국들에서 돌아가며 열리는 대회담.
칼데릭과 세인테아, 그리고 중립국의 왕족들까지 모두 모여 대륙의 미래에 대해서 평화롭게 논의하는 자리.
······물론 그런 것들이야 당연히 듣기 좋게 내건 이유일 뿐이고, 결국은 세력 다툼이었다.
특히나 돌아가는 정세를 보면 이번 회담은 단순한 신경전 정도로 끝나리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아마 카숄 왕국에서 본격적으로 어스힐 왕국과의 전쟁 명분을 바로 이번 회담에서 선포하려는 생각인 듯했으니까.
그것이 내가 이번 회담에 별 고민 없이 순순히 대군주를 따라서 참여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스힐 왕국······.'
나는 이전에 5군주령에서 만났던 한 남자에 대해 떠올렸다.
테이르 바몬, 어스힐 왕가의 핏줄을 이은 둘째 왕자.
만약 그가 내 말대로 왕성으로 돌아왔다면 아마 이번 회담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놈. 이제야 왕성으로 기어들어와서 그 얼빠진 낯짝을 뻔뻔하게 들이밀고······."
"······."
"보기도 싫으니 썩 물러가라."
어스힐의 국왕, 롱포드는 애증이 담긴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다가 곧 시선을 거두었다.
남자, 테이르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서 방 밖으로 나섰다.
어스힐 왕국, 수도 셀라프의 왕성.
오랜 시간만에 돌아온 왕성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으나, 곧 있을 회담으로 평소보다 훨씬 삼엄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어쩌다 궁전 바깥의 정원까지 걸음이 닿은 테이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벌써 후회가 되는군······.'
역시 괜히 돌아온 건가 싶었다.
오랫동안 왕성을 떠나있다가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돌아온 그가 이런 상황에 딱히 할 일이 있지는 않았다.
그저 붕 뜬 처지로 지금처럼 궁전 안팎이나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을 뿐.
테이르는 수풀의 잎사귀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원래라면 회담이 다가왔다고 왕성에 돌아올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존재가 도움 될 일이 있지도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길었던 방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이유는 하나였다.
이전에 5군주령에서 만났던 남자.
자신이 7군주라고 했던 그의 별것도 아닌 말이, 어째서인지 괜히 계속해서 맴돌았기 때문이다.
'······내가 있을 곳으로 돌아가라고.'
대체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심지어 그는 심상치 않은 중립국의 정세와 관련하여, 언젠가 어스힐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말까지 입에 담았었다.
테이르는 무엇 하나 알 수 없었다.
그 남자가 정말 칼데릭의 7군주였던 건지, 정말이라면 왜 그런 대단한 존재가 고작 자신 따위에게 관심을 가진 것인지.
"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테이르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정갈한 드레스 복장을 하고 있는 한 여인이 어느새 정원 한쪽에 서있었다.
테이르는 잠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흐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한테 야가 뭐냐, 세리."
그에 루디라 불린 여인이 인상을 슬쩍 찌푸리며 대꾸했다.
"2년 가까이 바깥을 싸돌아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온 멍청이한테 오라비 대접을 해줘야 되나?"
"······."
"그래서 여기서 팔자 좋게 뭐 하고 있는 건데, 오라버니."
말은 그렇게 하지만 곧장 오라버니 호칭으로 돌아간 그녀였다.
테이르는 만지고 있던 잎사귀를 계속 만지작거리며 슬며시 대답을 넘겼다.
여전히 거리를 두는 듯한 그 모습을 보는 세리의 표정에는 한심함과 서운함, 그리고 미안함 등의 감정이 뒤섞여있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고 물었다.
"갑자기 돌아올 마음은 왜 든 거야? 다시는 안 돌아올 것처럼 말하고서 떠났으면서."
"그러게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런 때에 괜히 더 어수선하게 해서 미안하다."
"아이씨, 그런 말이 아니잖아! 지금 누가 오라버니가 돌아와서 싫댔냐고!"
울컥해서 소리친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잠시 어색한 공기가 감돌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애초에 왜 떠났던 거야? 분명히 말했었잖아. 나는, 아니, 나뿐만 아니라 루커스 오라버니도 정말로······."
"그만."
테이르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만해라, 세리.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는 걸 알잖아."
"······."
"그보다 너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 준비 같은 건 다 끝난 거냐? 별 문제는 없고?"
억지로 화제를 돌리는 모습에 세리도 더 하던 말을 잇지는 못했다.
그녀는 속에서 치솟는 답답함을 삼키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신경 꺼. 뭐 하나 거든 것도 없으면서 말해봐야 알기나 하겠어."
퉁명스런 대꾸에 테이르가 쓴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세인테아 쪽도 도착했고, 이제 칼데릭만 남았다고 했지."
"······그래."
각 중립국들의 왕족은 물론이고, 바로 어제 오후에 황제를 포함한 세인테아 측의 인사들까지도 전부 왕성에 도착했다.
루디는 문득 짜증나는 인물이 떠올라서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카숄 왕국의 1왕자.
그녀가 테이르에게 말했다.
"어쨌든, 괜히 바깥에서 어슬렁거리지 말고 그냥 얌전히 방에나 있어. 회담이 끝날 때까지는······."
그때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린 루디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고서 눈쌀을 찌푸렸다. 화려한 복색의 남녀와 호위기사.
"여기에 계셨군, 세리 왕녀."
가까이 다가온 남녀 중 남자 쪽이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카숄 왕국의 1왕자인 초르단과, 2왕녀 올리비카.
그들은 이번 회담에 참여하기 위해 카숄의 국왕과 동행해서 온 카숄 측의 대표 인사 중 하나였다.
"그렇지 않아도 찾고 있었소. 날이 좋아 다른 왕자와 왕녀들하고 차를 마시려는데, 함께 자리하는 게 어떻겠소?"
세리는 속에서 치솟는 짜증을 삼키며 표정을 관리했다.
아직 회담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기에 왕성에 찾아온 중립국의 들은 서로 교류하며 친분을 다지고 있었다. 1왕자인 초르단을 중심으로.
사실 이미 편이 다 갈린 상황에 어스힐의 아군은 누구도 없었다. 그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모두 앞에서 망신이나 주려는 속 뻔한 목적으로 계속 찾아와 속을 긁어대고 있는 것이었다.
"죄송하지만 회담 준비로 바빠서 그럴 시간은 없을 것 같습니다."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것이오? 지금도 보니 한가로워 보이는데 이것 참 사람 민망하게, 하하."
올리비카 왕녀가 끼어들었다.
"이번엔 거절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요, 세리 왕녀. 세인테아의 5황자님께서도 시간을 내어 자리해주시기로 하셨거든요."
"······그래서요?"
"귀하신 분과 사적으로 담화를 나눌 좋은 기회를 드리겠다는 거잖아요? 그러니 그만 거절하고 함께 어울려주시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우쭐거림과 깔봄이 깔려있었다.
세인테아 제국의 황족은 왕족인 그들에게 있어서도 격이 다른 고귀한 존재.
다른 왕자녀들은 물론이고, 그런 황족과도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에서 5황자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아, 그래. 그러고 보니 자네도 있었군. 바몬 왕가의 자랑이었던 테이르 왕자 아닌가."
초르단은 이제야 옆에 서있는 테이르를 발견했다는 듯 짐짓 놀란 투로 말했다.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투에 세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왕성을 가출했다는 소식을 듣긴 했었는데 다시 돌아온 모양이군그래. 어때, 자네도 함께 가보겠나?"
"괜찮으니 사양하겠습니다."
테이르가 무표정한 얼굴로 즉답했다.
그에 초르단은 픽 웃었다.
"뭐, 알겠네. 설마 왕녀까지 또 거절할 생각은 아니리라 믿소."
"죄송하지만, 시간이 없어 사양하겠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초르단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올리비카도 인상을 찌푸린 채 코웃음을 쳤다.
"세리 왕녀, 이렇게 뻣뻣하게 굴어서 좋을 게 있을 것 같나요? 지금 당신네들 처지를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됐다, 올리비카. 그만 가자."
두 사람은 몸을 돌려 도로 정원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데 말이오, 왕녀. 이번 회담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소?"
초르단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세리를 돌아봤다.
"저번처럼 유야무야 어중간하게 마무리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오. 알고 있지 않소? 사실 명분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걸. 우리가 어스힐에 전쟁을 선포하면, 세인테아든 칼데릭이든 과연 굳이 간섭하려고 들 것 같소?"
"······."
세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세르단을 노려봤다.
초르단은 그런 그녀에게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디 회담이 끝난 뒤에도 계속 이런 식으로 굴 수 있을지 한번 보겠소. 그럼······."
그오오오!
그때 왕성 전체에 거대한 포효가 울렸다.
초르단과 올리비카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세리와 테이르도 마찬가지였다.
하늘 저편에서 검고 거대한 두 물체가 왕성을 향해서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와이번······?"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보던 초르단과 올리비카가 서둘러서 정원을 빠져나갔다.
갑작스러운 와이번의 등장, 현재 상황에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드디어 칼데릭의 대군주가 왕성에 도착한 것이었다.
"······칼데릭의 대군주야."
세리도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테이르도 머뭇거리다가 그 뒤를 따랐다.
***
어느새 왕성의 정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스힐의 국왕 롱포드는 물론이고 각 중립국의 국왕과 왕자 왕녀들, 그리고 수많은 가신들까지.
자리에는 단지 세인테아 측의 인사들만을 제외하고 회담에 참여한 모든 중립국의 왕족들이 모여들었다.
비록 이번 회담의 주최자가 어스힐이라고 한들 다른 참여자들 역시 감히 얼굴을 비추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까.
싸늘하게 얼어붙은 분위기 속, 모두가 하나같이 긴장감이 역력한 눈으로 왕성의 입구로 걸어오는 여인을 응시했다.
칼데릭의 대군주, 라샤테인.
달고 온 행렬 하나 없이 그녀의 곁에는 한 젊은 인간 남성만이 서있었다.
하나 단지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존재감은 자리에 있는 모두를 압도하고 있었다.
롱포드가 침착하게 앞에 나서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어스힐까지 먼 걸음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대군주."
대군주가 콧소리를 흘리며 주위를 한 차례 둘러봤다.
"그래요, 롱포드 국왕. 아무래도 우리가 제일 늦은 모양이네요. 안으로 들어가죠."
"예. 한데 이분은······."
롱포드가 의아한 눈으로 대군주의 옆에 선 남자를 쳐다봤다.
지금껏 그녀가 회담에 참여할 때 누군가를 동행한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대군주가 싱긋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칼데릭의 새로운 7군주랍니다."
"······!"
그에 모두가 놀란 기색으로 남자를 응시했다.
칼데릭의 새로운 7군주.
최근에 같은 군주인 폭왕까지 살해하며 현재 대륙을 가장 떠들석하게 만들고 있는 인물.
무엇 하나 알려진 것 없이 베일에 쌓여있던 그 거인이 이번 회담에 대군주와 함께 걸음한 것이었다.
"······."
한편 대군주가 말을 꺼내기도 전부터 계속 멍하니 7군주만 바라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테이르였다.
이전에 5군주령에서 만났던,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는 외모 그대로의 남성이 대군주의 옆에 서있었다.
테이르는 그의 정체가 정말로 7군주였음을 깨닫게 됨과 동시에 생각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건지.
대군주와 7군주가 양옆으로 갈라진 인파 사이를 걸어 입성했다.
회담에 처음 참여하여 칼데릭의 대군주를 살아생전 처음 마주한 젊은 왕족들은 위압감에 함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시선을 아래에 둔 채 두 사람을 힐끔거리고 있던 세리는 문득 옆에 서있는 자신의 오라비를 돌아봤다.
그가 너무 빤히 대놓고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하는 거야? 바보가······.'
그녀가 테이르의 옆구리를 찔러 눈치를 주려다가, 다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7군주의 시선이 어째서인지 이쪽으로 향해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스침이겠거니 싶었지만 7군주는 곧 두 사람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기까지 했다.
"······."
모두의 시선이 걸음을 멈춘 7군주에게로 집중되었다.
대군주도 의아하다는 듯 그런 그를 돌아봤고, 곁에 서있던 롱포드의 인상은 딱딱하게 굳었다.
세리는 무언가 실수라도 한 것인지 쿵쿵대며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짧은 정적 뒤, 7군주의 입이 열렸다.
"오랜만이군, 테이르."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모습에 모두가 경악한 눈으로 테이르를 바라봤다.
중립국 회담 (2)
7군주의 행동에 테이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안면이 있는 사이라고는 해도 이런 자리에서 갑작스레 아는 체를 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놀란 건 테이르뿐만이 아니었다.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해 못할 상황에 롱포드 국왕은 눈을 휘둥그레 떴고, 세리는 아예 반쯤 넋을 놓았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칼데릭의 군주가 뜬금없이 테이르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단 말인가? 대체 무슨 접점이 존재한다고?
집중된 이목 속, 테이르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몰라 우물쭈물거렸다.
그에 7군주가 다시 입을 열고 물었다.
"왕국에는 언제 돌아왔나?"
"······아, 예. 바로 오늘 돌아왔습니다."
테이르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7군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가던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남기고.
"나중에 다시 보지."
단지 몇 마디 대화일 뿐이었지만 마치 고요한 폭풍이라도 몰아친 분위기였다.
대군주와 7군주가 왕성 안쪽으로 들어가고 자리에는 어수선한 소란이 감돌았다.
'뭐지, 진짜······.'
테이르는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에 서있는 카숄의 인사들 사이에 초르단과 올리비카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 오라버니. 방금 대체 뭐야? 응?"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세리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테이르는 대답하지 않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제일 혼란스러운 건 그였다.
***
'도착하자마자 바로 마주쳤네.'
나는 어스힐의 국왕을 따라 궁전 안으로 입장하며 테이르에 대해 생각했다.
네가 있을 자리로 돌아가라, 내가 이전에 그에게 남겼던 한마디.
그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말일 뿐이라 아무것도 안 달라졌어도 이상할 건 없었지만, 결국 돌아온 모양이었다.
"7군주, 실례가 아니면 테이르 왕자를 어떻게 알고 계신지 여쭐 수 있겠습니까?"
그때 어스힐의 국왕이 입을 열었다.
그는 좀 전부터 나를 신경 쓰는 기색이 만연했는데, 그게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별 것은 아니오. 그저 5군주령에서 우연히 연이 닿은 적이 있었을 뿐이니."
그리고 아주 고맙기 그지없는 빚을 지다시피하기도 했고.
테이르가 준 지도 덕분에 본래라면 얻지 못했을 초감각의 신비를 얻었으니 말이다.
"······그렇습니까."
국왕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묻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만도 하겠다 싶었다.
대체 왕성 밖으로 나가서 뭔 짓을 하고 다녔기에 칼데릭의 군주를 다 마주쳤나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궁전 복도를 걷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다가오고 있는 일련의 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젊은 여인과 초로의 남성,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늙어 보이는, 그들의 가운데 서있는 작은 체구의 노인.
세 명의 뒤로는 몇몇 수행원이나 기사들이 따라붙어 있었다.
"······."
나는 그들을 보자마자 바로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가운데의 노인은 세인테아의 황제, 그란디오스.
그 왼쪽에 서있는 남자는 레벨과 외관으로 보아 오성 중 일인인 창성, 퀘이덴.
그리고 오른쪽의 여자는······ 아마 황녀 중 하나일 텐데,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잠시 걸음이 멈추고, 대군주가 눈웃음을 지으며 전방에 마주 선 그들을 바라봤다.
짧게 이어진 침묵 뒤에 먼저 입을 연 것은 황제였다.
"오랜만이오, 대군주. 방금 막 도착하신 모양이오."
중저음의 갈라지는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그는 작은 체구에 전혀 높다고 할 수 없는 레벨을 가지고 있었으나, 확실히 형용하기 힘든 묘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나는 게임에 처음 빙의하고 대군주를 처음 마주했을 때와 약간은 비슷한 감상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황제라는 인물 자체에서 대군주만큼의 강대한 격을 느꼈다는 게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왜냐면 어쨌든 황제였으니까.
이 라사 세계관의 메인 스토리 흐름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바로 그 용사가 존재하는 세력의 우두머리였으니까.
"그래. 오랜만이네, 황제."
대군주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어스힐의 국왕에게는 최소한의 존중은 담아 경어를 썼던 그녀였지만, 황제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황제도 그에 대해서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의 시선이 내게로 닿았다.
"······그대가 칼데릭의 새로운 7군주겠군. 만나게 되어 반갑소."
아무래도 한눈에 내 정체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놀랄 건 없었다. 황제도 나에 대한 정보는 당연히 이것저것 알아봤을 테고, 지금 내가 당장 대군주와 나란히 서있기도 했으니.
자연스럽게 새로운 7군주라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용사는 이번 회담에도 오지 않은 건가?"
"그렇소. 오지 않았지."
"아아, 아쉬워라. 저번에도 얼굴을 못 봐서 이번엔 기대했었는데 말이야."
대군주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기색으로 그렇게 툴툴거렸다.
"그럼 회담 때 다시 보겠소."
그리고 더 이어지는 대화는 없었다.
우연한 마주침은 아니었겠지만 황제는 단지 잠깐 얼굴을 보는 게 목적의 전부였던 듯했다.
황제의 옆에 서있던 여인은 나와 대군주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창성은 내 뒤에 서있는 아셸을 힐끗 바라봤다.
그렇게 그들은 곁을 지나쳐서 가던 길을 마저 가버렸다.
"······."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아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꽉 쥔 주먹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 들끓는 살기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시선은 멀어지는 세 사람 중 한 명의 등에 꽂혀있었다. 나도 그 시선을 따라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창성······.'
그녀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알고 있었다.
창성 퀘이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일족을 몰살시킨 원수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그 누가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당장 검을 뽑지 않고 덤벼들지 않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아셸."
내가 이름을 부르자 아셸은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죄송합니다."
뭐라도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그냥 관두기로 했다.
고개를 돌리니 대군주가 흥미롭다는 눈길로 그런 아셸을 쳐다보고 있었다.
***
마저 안내를 받아 회담 동안 머무를 숙소로 이동하고, 마침 때였기에 나와 대군주는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국왕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 건 어차피 이제 회담의 시작이 곧이었고, 그게 끝난 뒤엔 연회가 있기 때문이었다.
쓸데없이 긴 식탁에서 대군주와 마주 앉고서 말없이 식사를 하는데, 그녀가 물어왔다.
"7군주의 호위 기사 말이야, 이름이 아셸이라고 했던가? 본래 대군주성의 견습 기사로 들어왔었지?"
나는 고기를 썰던 나이프를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속으로 약간 당황하며.
지금까지 별 말 없길래 신경도 안 쓰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들어오네.
"참모장이 7군주가 견습 기사 하나를 데려갔다고 하길래, 좀 관심이 있긴 했거든. 그래도 그 정도로 뛰어난 인재일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하하. 7군주가 데려가지만 않았으면 흑린에도 충분히 입단할 수 있었을 텐데."
"······."
싱글싱글 웃으면서 하는 말이었지만 어째 조금 탓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고 보니 대군주가 아셸을 처음으로 본 건 중립국으로 출발하기 전 대군주성에서였다.
그녀라면 당연히 처음 봤을 때부터 아셸의 한눈에 수준을 파악했었겠지.
나도 아셸을 빼간 것에 대해선 솔직히 약간 찔리는 마음이 있긴 했기에 그냥 침묵했다.
"카숄이 어스힐에 전쟁을 예고할지도 모른다고 했던가."
슬쩍 회담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자, 대군주가 작게 웃음을 흘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근데 왜?"
"관여할 생각이 있나?"
"아니, 없어. 물론 황제도 그럴 거고."
질문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역시 그런가.
어스힐과 카숄의 전쟁은 메인 스토리의 수많은 에피소드 중 하나였다.
게임에서도 칼데릭과 세인테아는 어느 쪽도 그 전쟁에 간섭하지 않았었기에, 대군주의 의향이야 이미 알고는 있었다.
물론 그들이 전쟁에 간섭하지 않으려는 이유 또한 알고 있었고.
"그런데 7군주는 아까 그 왕자를 꽤 신경 쓰는 것 같던데? 일부러 그렇게 말까지 걸고 말이야. 아까 말했던 우연한 연이라는 게 뭔지 궁금하네~."
"신경 쓸 것 없다."
대군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튼 삭막하다니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군주의 말대로 아까 그 자리에서 테이르에게 말을 걸었던 건 약간 의도한 부분은 있었다.
왜냐면 일단 나는 어스힐 왕국을 도와줄 생각이었으니까.
테이르한테 진 빚이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게임의 메인 스토리에서도 이 전쟁은 결국 어스힐의 승리로 끝났었으니까. 유저 일행의 활약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사실 무엇이 이득인지를 착착 계산하고 하려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스토리가 그랬으니까, 그를 따라서 잠재적인 위험을 최대한 줄이고 싶을 뿐이지.
뭐, 일단 회담이 시작하고 상황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부터 봐야겠지만 말이다.
***
"오라버니, 말 좀 해보라니까? 대체 밖에서 뭘 하고 돌아다녔길래 칼데릭의 군주랑 친분을 쌓은 건데! 응?!"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테이르는 옆에서 쫑알거리는 세리를 시끄럽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내 도착한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는 이미 롱포드 국왕이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다른 남자가 서있었는데, 그의 형이자 1왕자인 루커스였다.
"······어서 와라."
"어, 응."
루커스의 어색한 인사에 테이르도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롱포드가 작게 혀를 차며 턱짓을 했다.
"앉거라."
"······아뇨. 그냥 서있겠습니다."
테이르는 루커스의 반대편에 거리를 두고 섰고, 세리도 그 옆에 슬며시 섰다.
잠시 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복잡한 눈빛으로 테이르를 바라보고 있던 롱포드가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테이르, 내 아들아. 너는 대체 바깥에서 뭘 하고 돌아다닌 것이냐?"
"······."
"7군주가 말하기로는 5군주령에서 우연히 연이 닿은 적이 있었다고 하더구나. 좀 설명해줄 수 있겠느냐?"
"예, 뭐······."
테이르는 순순히 7군주와 관련해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자신의 팔을 짜르려 했던 미친 영애 이야기부터 술술 전부.
그렇게 사정을 모두 들은 세 사람은 하나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그게 전부냐?"
방금의 이야기에서 7군주가 테이르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가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세리가 조금 흥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무려 칼데릭의 군주잖아요. 이유가 뭔진 몰라도 오라버니를 좋게 본 거라면······."
"그게 문제라는 거다. 의중을 알 수 없으니 더욱 조심해야지. 그들은 감당할 수 없는 위험한 자들이야."
루커스의 말에 테이르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7군주에게 별다른 속셈이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그럴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설마 고작 그 지도 때문은 아닐 거고.'
물론 말마따나 결국 이유를 알 수가 없기에 이해되는 반응이기는 했다.
심란한 기색으로 이마를 문지르고 있던 롱포드가 다시 물었다.
"테이르, 네가 보기에 7군주는 어떤 인물이었느냐?"
중립국 회담 (3)
7군주는 어떤 인물인가.
테이르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한 번의 짧은 마주침이었을 뿐이다. 고작 그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역시 악인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데.'
그야 첫 만남부터가 하마터면 외팔이 될 뻔했던 걸 구해주지 않았던가?
의아하기는 해도 테이르는 7군주에게 그저 고마움만을 느끼고 있을 뿐이지, 부정적인 감정은 조금도 없었다.
"악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숨겨진 속셈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적어도 제가 느낀 바로는 그렇습니다."
상당히 확신에 찬 테이르의 목소리에 롱포드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영문을 알 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카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2년 만에 돌아온 아들은 또 다른 큰 고민을 안겨주었다.
롱포드는 칼데릭의 군주쯤 되는 인물이 순수한 선의로 테이르를 도와주었다고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그가 악인인지 아닌지는 그와 관련해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상대의 의도를 모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상대가 이쪽이 감당할 수 없는 강자라면 더욱이 말할 것도 없이 그러했고.
무엇 하나 제대로 알려진 정보가 없는 칼데릭의 새로운 7군주.
그는 얼마 전에 6군주를 죽였고, 대군주는 그런 7군주를 대동하고서 회담에 참여했다.
그리고 7군주는 어째서인지 테이르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롱포드는 온갖 의문들로 어지럽혀진 머릿속을 정리했다.
일단 당장은 회담부터였다. 고민해봐야 어차피 알 수 없는 것들을 붙잡고 있을 게 아니라.
"일단은 알겠다. 더 할 얘기가 있느냐?"
테이르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없습니다."
"······."
"더 물으실 게 없으시면 그만 다시 물러가보겠습니다."
그리고는 꾸벅 인사하고서 방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내일 회담에 절 대신해서 테이르가 참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버지."
1왕자 루커스의 말에 테이르가 흠칫 놀라서 그를 돌아봤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형님?"
"말한 대로다."
루커스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7군주가 구태여 네게 말을 건넸다. 의도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행동인데, 그럼에도 회담에 네가 참여하지 않고 내가 참여하면 혹시나 그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는 일이지 않느냐."
회담에는 각 국당 대표 인사 한 명과 발언권이 없는 관전인 한 명이 참여할 수 있다.
본래라면 관전인 자격으로는 1왕자인 루커스가 참여할 예정이었지만, 그것을 테이르로 바꾸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어떠십니까, 아버지."
루커스의 말에 롱포드도 고민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구나. 테이르, 회담에 함께 참여해줄 수 있겠느냐?"
"아니······."
테이르는 당황한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가출해있다가 이제야 돌아온 마당에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예, 뭐······ 그럼 알겠습니다. 제가 회담에 참여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테이르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무튼, 더 물으실 게 없으시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테이르가 방 밖으로 나가고, 슬쩍 롱포드의 눈치를 본 세리도 그를 따라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롱포드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씁쓸한 표정으로 서있던 루커스가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지. 7군주의 의중은 알 수 없더라도, 정말 그가 이번 회담에서 어스힐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비춘다면······."
"그런 기대는 하지 말거라."
롱포드는 단호하게 끊어서 말했다.
여지껏 중립국의 정세에 조금이라도 관여한 적이 없던 대군주였다. 그 견고했던 입장이 갑자기 이번 회담에서 깨질까.
결국 뭐가 됐든 칼데릭의 도움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맞았다.
'후우······.'
롱포드는 심신이 한층 피곤해지는 것을 느끼며, 내일 열릴 회담에 대한 생각을 이어갔다.
***
하루가 지나고 회담 당일이 되었다.
어스힐, 카숄, 마토르, 플라가스, 그리고 라쟌.
다섯 중립국의 국왕들은 일찍이 회담장에 입장하여 원탁의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서 앉았다.
칼데릭의 대군주나 세인테아의 황제보다 늦게 자리하는 참사가 일어나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뒷편에는 회담의 관전인 자격으로 입장한 왕자와 왕녀들이 각각 한 명씩 서있었다.
중립국 회담.
그 이름대로 회담에서 나올 안건들은 중립국들 사이의 문제에 관련한 것들이다.
그리고 이번 회담의 최고 안건은 모두가 이미 알다시피 어스힐과 카숄의 대립이었다.
아직 황제와 대군주가 도착하기 전, 누구 하나 입을 열고 있지 않은 고요한 분위기 속.
카숄 측의 1왕자 초르단은 어스힐 측의 자리를 연신 곁눈질했다.
'······1왕자가 아니라 2왕자가 참석했군.'
어스힐 국왕의 뒤에 관전자로서 서있는 인물은 1왕자 루커스가 아닌, 2왕자 테이르였다.
바로 어제 있었던 일로 카숄 측 역시 하루 동안 생각이 복잡해진 채였다.
도대체 새로운 7군주와 2왕자 테이르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으니까.
'칼데릭의 대군주가 지금까지 중립국들 사이의 문제에 관여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과연 7군주의 정확한 의중이 무엇인지는 파악할 수가 없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변수가 생긴 것이었다.
"세인테아 제국의 황제께서 입장하십니다."
나지막이 울린 목소리에 다섯 국왕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회담장에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2왕녀 아렌을 대동하고.
그들이 원탁의 한쪽에 자리하고 회담장에 흐르는 공기엔 더욱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상태로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르고······.
"칼데릭 군주회의 대군주님과 7군주님께서 입장하십니다."
국왕들은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막 속에 발자국 소리가 울리고, 회담장 안으로 한 쌍의 남녀가 걸어들어왔다.
칼데릭의 대군주와 7군주.
그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두 자리로 다가가서 앉았다. 황제의 바로 맞은편 자리였다.
본래라면 대표 인사 한 명과 관전자 한 명이 회담에 참여하는 것으로, 관전자 자격으로서 참여한 이는 원탁에 앉는 게 아닌 뒤쪽에 서야 했지만, 7군주는 대군주의 옆에 나란히 자리하고 앉았다.
엄밀하게 따지면 칼데릭 군주회는 열 국가의 연합이라 할 수 있었고, 7군주는 그중 한 국가의 수장이었으니까.
그저 대군주가 지금껏 다른 군주를 대동하고서 회담에 참여한 적이 없었기에 처음으로 발생한 상황일 뿐이었다.
그에 대해 굳이, 그리고 감히 이이를 제기할 사람은 자리에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회담장에 자리하고, 원탁을 한 차례 둘러본 롱포드가 입을 열었다.
"그럼 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
첫 번째 안건은 라쟌 왕국과 플라가스 왕국 사이 자그마한 무역 분쟁이었다.
"아시다시피 북동부의 무역로는 지형이 몹시 험악하오. 관세 재정은 그것을 고려하여 신중히 해야 할 문제요, 솔릭 국왕."
"물론 그 부분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오. 근 몇 년간 라쟌에서 들여온 소금의 수입량이······."
회담은 갈등이 있는 국가들끼리 서로 논의하고, 그와 무관한 국가들이 가끔 의견을 내며 거드는 식이었다.
'처음 군주 회의에 참가했을 때 생각나네.'
나는 잘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시피 했다.
그들 사이의 사소한 문제들은 나와 전혀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대군주와 황제는 서로 단 한마디의 발언도 하지 않았다.
'대군주는 애초에 그냥 관심이 없고······.'
나는 슬쩍 옆을 돌아봤다.
그녀는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정말 회담에서 오고가는 내용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황제 쪽은 대군주가 가만히 있으니 굳이 자극할 필요가 없기에 나서지 않는 것이겠지.
회담은 그런 식으로 내 생각보다도 훨씬 순조롭게 흘러갔다.
안건이 차례차례 지나가고, 곧 어스힐과 카숄의 차례가 다가오기 전까지는.
"우리는 어스힐과의 국경에 위치한 로왈프 평원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하오, 롱포드 국왕."
카숄의 국왕의 직설적인 발언에 어스힐 국왕과 그 뒤에 선 테이르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보였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붙이고 있던 등을 슬며시 뗐다.
'역시 이렇게 되나.'
회담에 참여하기 전에 나도 알아본 게 있었기에 카숄이 물고 늘어지는 게 뭔지는 알고 있었다.
로왈프 평원.
어스힐 왕국 최대의 곡창 지대 중 하나인 황금의 땅.
"카숄이 로왈프 평원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것도 없소. 더 왈가왈부할 것도 없이 로왈프는 국경 안쪽에 위치한 명백한 어스힐의 영토요."
어스힐 국왕의 단호한 말에도 카숄 국왕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주장을 이어갔다.
"우리는 벌써 20년도 전부터 계속해서 로왈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왔소. 결코 부정할 수 없을 신빙성 있는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말이오."
"근거라니, 저번 회담에서도 제시했던 그 터무니없는 자료를 말하는 것이오? 그 자료의 대체 어디에 신빙성이······."
두 국왕 사이에 벌어진 설전을 들어보면 이러했다.
카숄 국왕은 카숄의 왕실에 남은 선대의 기록을 들먹이며 본래 로왈프가 카숄의 중요한 영토였음을 주장했고, 어스힐은 그건 근거가 될 수 없다며 반박했다.
누가 듣기에도 카숄의 주장은 그들이 언급한 신빙성을 찾아볼 수 없는 억지였지만, 그에 대해 걸고 넘어지는 국왕은 없었다.
사실상 세인테아 쪽에 붙은 나머지 세 국가가 황제와 반대되는 의견을 낼 리가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사실 카숄이 어떤 주장을 하든 명분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국가 사이의 권익 다툼이란 게 원래 이런 거겠지.
"우리는 이미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평화적으로 로왈프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소.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런 식으로 카숄을 무시하기만 한다면, 더 이상은 가만히 두고만 보지 않을 것이오."
카숄 국왕이 선언했다.
"만약 어스힐이 현재의 입장을 계속 고수할 생각이라면, 카숄은 어스힐과의 전쟁도 마다하지 않겠소."
전쟁.
회담장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담긴 내용에 비해 너무도 담담한 선포였으나, 자리한 이들 중 놀라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당연히 모두가 알고 있었을 테니까.
단지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애초에 다른 세 국가는 모두 카숄의 편에 가까웠다.
나는 슬쩍 테이르를 바라봤다.
그는 더없이 굳은 얼굴로 조용히 어스힐 국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스힐 국왕이 노기가 담긴 눈빛으로 카숄 국왕을 노려봤다.
"어찌 전쟁이라는 말을 그리 쉽게 입에 올리는······."
"쉬이 내린 결정이 아니오. 그만큼 우리의 각오가 확고하다는 걸 인지하라는 것이오, 롱포드 국왕."
"······."
"다른 분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듣고 싶소."
카숄 국왕이 주위를 둘러보자 다른 세 국왕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카숄 측의 주장에 충분한 합당함이 있다고 생각하오. 라쟌이 간섭할 문제가 아닌 것 같소."
"마토르 역시 마찬가지의 의견이오."
"플라가스도 그렇소."
짜고 친 듯 술술 나오는 반응에 어스힐 국왕은 다시 한 번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이윽고 황제의 입도 열렸다.
"두 국가의 분쟁에 세인테아는 간섭할 생각이 없소."
황제는 그들의 전쟁에 조금도 간섭할 이유가 없었다.
단순한 이유였다. 두 국가 중 세인테아에 조금 더 협조적인 쪽은 카숄이었으니까.
더 파고 들면 나중에 말을 바꿔서 이번 일을 문제 삼아 카숄의 목줄을 틀어쥘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카숄 역시 그를 감수하고서 어스힐을 치려는 것이었다.
이제 남은 인물은 대군주뿐이었다.
카숄 국왕이 눈치를 살피듯 나와 대군주가 있는 쪽을 슬쩍 바라봤다.
지루한 기색으로 자리에 앉아있던 대군주가 하암 하품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칼데릭도 딱히 간섭할 생각은 없답니다. 알아서들 하세요."
그에 카숄 국왕의 얼굴에서 엿보였던 일말의 불안감이 사라지고, 미약한 환희가 피어올랐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스힐과 카숄의 전쟁.
원래 게임의 메인 스토리에서는 두 국가의 전쟁은 아직 시기가 아니었다.
선포가 뒤고 전쟁을 일으키는 건 더 늦은 것인지, 아니면 내 존재가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키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제 카숄은 로왈프부터 빌미 삼아 하나씩 야금야금 먹으며, 어스힐을 아예 삼켜버리기 위한 전쟁을 벌이려 할 것이다.
두 국가의 국력은 엇비슷하지만 카숄은 게임에서도 다른 세 국가의 병력 지원까지 끌어왔었기에, 어스힐이 그들의 침공을 막아내기란 힘든 일이었다.
"어쩌시겠소, 롱포드 국왕? 카숄은 이미 전쟁을 각오했소."
어스힐 국왕과 테이르가
카숄 국왕은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다는 듯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그의 유일한 걱정은 칼데릭의 간섭이었겠지만, 방금 대군주의 발언으로 그것마저 완전히 불식되었으니까.
카숄이 착각한 것이라면 단 하나였다.
대군주가 칼데릭이 간섭할 생각이 없다고 선언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곧 내 뜻까지 포함한 것은 아니라는 걸.
나는 두 국가의 전쟁에 간섭하지 않을 생각이 없었다.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라면, 나는 어스힐을 지지하겠다."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당황, 경악, 그리고 충격에 찬 시선들이.
카숄 국왕이 말을 잇지 못하고 두 눈만 깜박이다가, 대군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분명 칼데릭은 간섭하지 않겠다고······."
대군주가 고개를 까닥 비틀며 나를 돌아봤다.
"7군주, 난 7군주령의 군사권을 이번 일에 허가할 생각이 없는데?"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
칼데릭 외부로의 군사권 발휘는 대군주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했으니까.
나는 대군주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곧 내 말을 이해한 듯 입꼬리를 올리고서 웃음을 터뜨렸다.
"푸흐, 흐하하하! 아, 그런 말이었어? 그러면 내가 관여할 건 아니지."
다른 사람들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얼떨떨한 얼굴들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말을 잘못 이해한 것 같군."
나는 다시 카숄 국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대군주의 말대로 칼데릭은 전쟁에 관여하지 않는다. 아주 자그마한 병력도, 단 한 명의 기사나 마법사도 동원될 일은 없다."
멍한 표정으로 두 눈을 깜박거리는 그에게 말했다.
"어스힐 왕국을 지원하겠다는 건 칼데릭이 아니라, 그저 나 혼자뿐이라는 거다."
중립국 회담 (4)
카숄 국왕은 할 말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7군주, 저 작자가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란 말인가?
'······전쟁을 일으키면 어스힐의 편에서 홀로 참전하겠다고?'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다.
아니,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실소조차 나오지 않을 헛소리다.
하지만 그 발언을 한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칼데릭의 군주라면, 그건 더 이상 허언이나 헛소리 따위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칼데릭과 세인테아, 두 거인 사이에 껴있는 중립국의 왕으로서 오랜 시간을 군림해온 그였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어중간한 강자 따위가 아닌 진짜, 한 명의 초월자가 가지는 힘이 얼마나 상식을 벗어나는 것인지를.
칼데릭의 군주, 그들 개인이 가지고 있는 힘은 말 그대로 능히 홀로 한 국가를 압도할 수 있었으니까.
"······."
7군주의 난데없는 발언에 롱포드와 테이르도 반쯤 넋을 놓고서 그를 바라봤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건······ 말이 조금 이상하지 않소?"
카숄 국왕은 궤변이라고 하려다가 간신히 수위를 낮춰서 말했다.
"군주도 엄연히 칼데릭의 전력일지인데, 개인만 나서서 참전하겠다는 건······."
7군주가 말을 끊었다.
"칼데릭은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열 군주령의 연합이다. 대군주의 뜻이 나머지 군주들의 뜻을 전부 포함하는 건 아니다."
군주들은 대군주가 아래에 두고 거느리는 것이 아닌, 협력 관계에 있는 독립적인 세력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대군주도 웃음을 흘리며 거들었다.
"칼데릭은 간섭하지 않겠다는 발언에 오해의 여지가 있긴 했군요. 그건 내 뜻일 뿐이라고만 받아들이세요."
카숄 국왕은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이를 꽉 깨물었다.
형식적인 체계로 따지면 그렇긴 하지만 7군주왇 대군주의 말은 여전히 궤변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 회담의 모든 내용은 결국 칼데릭과 세인테야 양측의 의지 아래 이루어질 뿐이며, 중립국들은 두 세력의 암묵적인 허락 아래 눈치를 보며 제 이권을 챙기는 말들에 불과했다.
어느 한쪽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면 명분이 어떻고 이유가 어떻든 그 뜻에 반항할 수는 없었다.
카숄이 어스힐에 전쟁을 들먹였던 것처럼 중요한 건 명분 따위가 아닌, 그저 힘이었으니까.
'세인테아는······.'
그래서 카숄 국왕은 황제를 돌아봤다.
칼데릭이 직접 몸을 일으켰으니, 그들을 막아설 수 있는 건 세인테아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황제는 무심한 표정으로 7군주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곧 그의 입이 열렸다.
"어스힐 왕국을 지원하려는 이유가 무엇이오, 7군주?"
7군주가 대답했다.
"지금 같은 시기에 고작 영토 문제 따위로 전쟁과 같은 혼란을 일으켜서 될까."
"······."
"난 대륙의 안정을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건 용사도 마찬가지겠지, 황제. 그렇게 방관이나 하려는 걸 보니 용사는 아직 회복에 집중하고 있는 모양인데, 뒷감당을 할 수 있겠나?"
그 말에 황제의 눈가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재밌다는 듯 그런 황제를 바라보며 실실 웃던 대군주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7군주는 정말 참전할 모양인데, 어때?"
잠시 침묵하던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세인테아의 뜻에 변함은 없소."
"······."
"풀리지 않을 갈등을 힘으로 억누르기만 하는 건 대륙의 평화를 위한 최선이 아니지. 본인은 단지 그렇게 생각하여 두 국가의 분쟁에 간섭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오. 하나 7군주의 의지가 그렇다면 그 역시 존중하오. 그 의지대로 하면 될 일이오."
결국은 7군주가 관여하더라도 세인테아는 끼어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카숄 국왕이 허망한 얼굴로 작게 실소를 흘렸다.
7군주가 그런 그에게 물었다.
"카숄 국왕, 어스힐과의 전쟁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각오에 여전히 변함이 없나?"
"······."
"변함이 없다면 이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해도 좋다."
그렇게 말하고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는 7군주의 오만한 모습에, 카숄 국왕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고블린들 사이의 전쟁에 갑자기 오우거가 끼어들겠다는 꼴이다.
그 하나만 나서도 왕국의 존립이 위태로울 텐데, 미쳤다고 전쟁을 벌일까.
"······결정이 섣불렀던 것 같소. 앞선 발언들을 모두 철회하겠소. 카숄은 어스힐과 전쟁을 할 의지가 없소."
결국은 두 손을 들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카숄 국왕의 신속한 번복에 다른 국왕들도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세인테아가 나서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더라도 답이 없는 일이었으니.
"이번 안건은 아직 서로 간의 대화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도 좋소."
롱포드는 순순히 태도를 굽히는 카숄 국왕을 바라보고 있다가, 7군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고작 몇 마디 말로 간단히 카숄을 물러나게 만들어버린 그는 이리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태연한 기색이었다.
새삼 칼데릭의 위상에 경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체 왜······.'
7군주는 대체 왜 어스힐을 도와주는 거란 말인가?
여전히 그에 대해 의문과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기에, 안도감도 잠시였다.
그렇게 회담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동안 롱포드는 7군주에게서 신경을 뗄 수가 없었다.
***
길었던 회담이 끝나고, 나는 지친 얼굴로 회담장을 서둘러 빠져나가는 카숄 국왕과 왕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어쨌든 이걸로 전쟁은 막았고.'
내가 어스힐을 지지하겠다는 뜻을 명확하게 내세웠으니, 카숄이 앞으로 어스힐을 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정말로 돌아버려서 어스힐을 침공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없었다.
그때는 나도 정말로 전쟁에 참전해서 어스힐을 도우면 될 뿐이었으니.
내 능력만큼 전쟁에서의 대량 학살에 특화된 능력도 없었으니까.
물론 나도 그런 짓거리는 전혀 하고 싶지 않았기에, 몇 마디 말로 전쟁을 막은 건 굉장히 잘한 일이었다.
'그리고 황제는 참······.'
게임에서 나왔던 대로 참 능구렁이 같은 인물이기는 했다.
사실 이번에 카숄이 어스힐에 대놓고 전쟁을 선언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용사의 부재.
아까 황제를 한번 찔러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카숄이 전쟁하겠다고 설치는 것도 그렇고, 이번 회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때부터 대충 예상은 했지만······.'
아무래도 지금 용사는 '성동'에 들어가있는 모양이었다.
카숄이 그걸 세인테아 측에게 흘려들어서 알고 있던 건지, 아니면 회담에서 반응을 보고 결정하려 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거야 아무래도 중요한 건 아니었고.
마족과의 전쟁은 오래 전의 일이지만, 마왕과의 전투에서 용사가 입었던 후유증은 그녀를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좀먹고 있다.
그렇기에 그 속도를 늦추려 비정기적으로 회복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가 있었고, 그 기간 동안에 그녀는 세간의 일에 간섭할 여력이 없다.
만약 지금 용사가 건재히 세상에 나와있었다면, 황제가 오늘 회담에서 전쟁 문제에 나몰라라 방관만 할 수 있었을 리가 없지.
'용사를 이번 회담에서 만났으면 좋기는 했을 텐데.'
아직 계승자를 찾지는 못했지만, 순서야 어떻든 그녀와 만나서 대화를 먼저 하는 것도 아마 괜찮았을 것이다.
나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아직까지 자리에 남아있던 어스힐 국왕과 테이르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와 대군주를 한 차례 번갈아 본 그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어스힐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7군주."
감사 인사인가.
딱히 할 말은 없었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옆에 서있던 테이르가 내게 물었다.
"······7군주님, 정말로 궁금한 걸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봐라."
"아무리 생각해도 7군주님께서 어스힐을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는지 어스힐 국왕이 흠칫 놀라서 테이르를 돌아봤다.
나는 긴장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는 테이르를 보며 뭐라 대답할까 고민했다.
생각해보면 그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일 것이었다.
칼데릭에 무슨 이득이 있다고 군주가 직접 나서면서까지 카숄의 전쟁 선포를 막아준 것인지.
사실 굳이 테이르를 5군주령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도, 나는 아마 어스힐을 돕기는 했을 것이다.
내가 이들을 도운 가장 큰 이유는 테이르에게 진 빚이 아니라 게임의 메인 스토리 때문이었으니까.
단지 의도치 않게 테이르와 사소한 인연도 닿아서 도울 이유가 더 명확해진 것뿐이지.
나는 이참에 지도에 대한 감사를 전할까 하다가 그냥 관두기로 했다.
옆에서 대군주가 듣고 있는데 굳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내키지 않았다.
"칼데릭의 군주로서 명예를 걸고 다른 속셈이 있는 건 아니니, 그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좋소."
나는 어스힐 국왕에게 말했다.
아까 카숄에 대한 안건이 끝나고, 계속해서 내 쪽의 눈치를 보며 심란한 기색을 보였었기 때문이다.
나한테 숨겨진 꿍꿍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오해하고 있는 듯하니 조금이라도 안심은 시켜줘야겠지.
생각이 맞았던 듯 그가 속을 찔린 듯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테이르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어스힐을 도운 이유는 아까 말했던 대로다. 나는 대륙에 쓸데없는 혼란이 빚어지기를 원치 않아. 그게 전부다."
특히나 시기가 시기였으니 말이다.
아직까지 대륙을 조용히 뒤덮어가고 있는 그림자를 인지한 이들은 거의 없었지만, 나만큼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메인 스토리. 마족들의 본격적인 준동은 몇 년 뒤에나 일어날 일이지만, 지금도 대륙 곳곳에서 위험한 움직임들은 있었다.
내 위치가 위치였기에 구태여 알아보지 않더라도 종종 알아서 귀에 들어오는 큼직한 사건들이 있었다.
최근에는 세인테아 쪽에서 몰살당한 마을에 '원마' 중 하나로 추정되는 마족의 흔적이 나왔다는 것도 그렇고.
아직 시간이 남았더라도 여유를 부릴 틈은 없었다.
내 존재가 어떤 식으로 메인 스토리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지금처럼 제어할 수 있는 변수는 최대한 제어하고, 쉬지 않고 목표를 향해서 계속 나아가야만 했다.
"그렇······ 군요."
테이르나 어스힐 국왕은 내 말을 완전히 믿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칼데릭의 군주가 대륙의 평화를 원한다니.
만약 죽은 폭왕 놈이나 흑해 여제가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기는 했을 것이다.
나는 잠시 테이르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말했다.
"왕국으로 돌아온 건 잘한 일이다."
"······."
"피하기만 해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을 잊지 말고,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라."
테이르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대군주가 흥미롭다는 눈길로 날 바라봤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나는 어스힐 국왕에게 목례를 건네고 대군주와 함께 회담장 밖으로 나갔다.
거리가 멀어질 때까지 한참이나, 등 뒤로 우두커니 날 바라보는 테이르의 시선이 느껴졌다.
중립국 회담 (5)
회담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왔다.
곧 저녁에는 만찬과 함께 연회가 준비되어 있었기에 그것까지 마치면 중립국에서의 일정은 끝이었다.
전쟁 발발도 막았고 이룰 목적이야 다 이뤘으니 당장 떠나도 상관은 없었지만, 굳이 그럴 이유도 없었기에 여유롭게 숙소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쇼파에 몸을 기댄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최우선 순위는 세인테아에서 성검의 계승자를 찾는 것.
이건 정말로 신중해야 할 사항이었기에 암영에게도 정보 수집을 맡기지 않았다. 무슨 딴생각을 할지 모르니까.
'신비 찾을 때처럼 내가 직접 발로 뛰어서 찾아야 되는데······.'
문제가 있다면 현재 시점에서의 계승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특정할 수가 없다는 것.
게임에서 나왔던 정보들을 종합해서 그녀가 있을 거라고 추정 중인 장소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범위가 너무 넓었기에 결국엔 찾으려면 상당한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할 것이었다.
'그것도 그렇고.'
또 세인테아의 영역에도 숨겨진 장소를 알고 있는 신비가 2개 있기는 했다.
하지만 둘 모두 지금의 내게 절실히 필요한 능력들은 아니었다.
이미 칼데릭에서 여러 신비들을 얻어서 스펙이 크게 업된 상황이고, 더 이상 툭하면 죽을 개복치 목숨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당연히 얻어서 나쁠 건 없지만.'
신비를 많이 흡수한다고 해서 뭔 부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얻을 수 있는 신비는 얻는 게 무조건 다다익선이지 않겠는가?
본격적인 계승자 찾기는 두 신비부터 깔끔하게 챙기고 시작하면 될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반드시 얻는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말이다. 하나는 숨겨진 장소가 상당히 난감하기도 했고.
'그리고 군주 회의······.'
그나저나 시간이 거의 겹쳐 바로 얼마 뒤에 있을 군주 회의가 변수라면 변수였다.
말만 부탁인 명령권이 아직 2개가 남았기에 나는 대군주의 명령을 거절할 수가 없는 처지였으니까.
이번 회담만 해도 결국 왜 동행한 건지 모르겠는데, 그녀가 또 무슨 이상한 걸 시키려 들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할 일도 많은데 성가신 말은 안 꺼냈으면 좋겠는데······.
"······."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가 슬쩍 시선을 한쪽으로 돌렸다.
문 바깥에서 미동도 없이 서있는 아셸의 기척을 느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까 들어올 때도 봤지만, 어제부터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아셸이었다. 생각할 것도 없이 창성의 존재 때문이리라.
창성 퀘이덴은 아셸의 일족을 직접 손에 피를 묻혀 학살한 당사자고, 그 배후에는 황제와 황실이 존재한다.
일족의 원수들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심정이 어떨까. 그 심정이 어떨지는 함부로 짐작할 수 없었다.
사실 세인테아 황실의 백월족 학살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묻힌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당시에 이미 제국 내에서도 한 차례 공분을 샀었던 참사.
그리고 그 주도자와 책임자로 지목되어 처형을 당했던 인물은 5황자와 그 측근들이었다.
학살의 진짜 배후는 황제였지만, 황제는 애초부터 그럴 생각으로 5황자를 말로 세운 뒤 꼬리를 잘라버린 것이었다.
형제들 사이에서 뒤쳐진 그는 아비인 황제에게 능력을 인정받고자 그의 말대로 따랐다가, 그대로 팽을 당한 것이었고.
아셸은 몰살당한 백월족의 유일한 생존자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그런 식으로 마무리가 지어졌던 그 사건은, 이제 와서 생존자인 아셸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나선다고 한들 진짜 배후인 황제를 위협할 수도, 더 물고 늘어질 수 있는 건덕지도 없다는 것이었다.
잘해봐야 마음에도 없는 황실의 사과쯤이나 받을 수 있겠지.
그렇기에 아셸이 진정 복수를 원한다면, 그것이 실현 가능한 방법은 제 손에 직접 피를 묻히는 방법밖에 없었다.
제 손으로 직접 황제와 창성을 죽이는 게 아니고서야 그녀가 일족의 원수를 갚을 마땅한 방법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는 아직 확실히 마음을 정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애초에 그럴 능력도 없었다.
세인테아라는 거대 세력의 수장인 황제, 그리고 91레벨의 창성을 아직 82레벨에 불과한 그녀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지.'
황제와 창성을 죽이는 것.
분명 아셸은 내게 있어 소중한 인물이다.
단순히 능력적으로 뛰어난 인재임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벌써 일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거의 항상 곁에 두고 붙어다녔는데, 사람인 이상 정이 안 들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아셸을 위해서 그런 부담을 질 수 있느냐는 둘째치고, 애초에 그것을 그녀가 원할 리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 성격에 일과 무관한 내 손을 빌려 원수를 갚고 싶어할 리는 없었으니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성장을 돕는 것뿐이었다.
언제든 그녀가 마음을 확실하게 정했을 때, 그 선택이 무엇이든 의지대로 행할 무력을 갖추고 있을 수 있도록.
"······."
그러려면 빨리 아셸을 '그 장소'로 데려가야 되는데 말이다.
그곳은 아셸이 잠재력을 폭발시켜 극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장소임과 동시에,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일족에 대한 정보를 알려줄 수 있는 존재가 잠들어있는 곳이었다.
물론 아셸 외에 살아남은 백월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진실을 그녀에게 알려주기로 한 건 이미 마음을 정한 부분이었다.
고민이 깊어졌다.
일단 신비와 계승자를 먼저 찾는 것을 우선해야 할지, 아니면 그 전에 아셸을 먼저 그곳으로 데려가야 할지.
······아,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쇼파에 몸을 풀썩 뉘였다. 천천히 생각해보자.
***
"안 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기대했었는데 아쉬워. 용사한테 7군주를 한번 소개시켜주고 싶었는데 말이야."
대군주가 찻잔을 휘적거리며 한탄하듯이 말했다.
맞은편에 앉은 황제가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대군주의 뜻이오?"
"음? 뭐가?"
"어스힐을 돕는 것, 7군주의 단독적인 행동이리라 생각되지 않는데."
"아······ 그거? 맞는데? 나도 갑자기 7군주가 그렇게 나설 줄은 몰랐지 뭐야."
대군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어스힐의 2왕자와 7군주가 어떤 연결 고리가 있었다는 것은 그녀도 몰랐던 사실이었고, 그렇기에 당연히 7군주가 두 국가의 분쟁에 그리 적극적으로 끼어들 거라고도 예상하지 못했다.
단지 아무래도 상관없었기에 그에 간섭하지 않은 것이었지.
그러나 황제는 믿지 않는다는 듯 눈매를 가늘게 떴다.
그가 다시 입을 열고 물었다.
"혹여 칼데릭의 위신이 떨어지진 않을까 염려스럽소. 규율을 깨고 군주를 살해한 자를 대군주가 비호하는 것처럼 보이니······."
"아아, 걱정해줘서 고맙네."
그 말에 대군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데 말이야, 황제. 다른 누구도 아니라 네가 그런 같잖은 소리를 지껄이면, 입을 좀 찢어버리고 싶어지는걸?"
대군주의 갑작스러운 폭언에 황제의 뒤에 서있던 2황녀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황제 역시 미약하게 굳은 얼굴로 대군주를 바라봤다.
"나와 맞먹으려고 들지 마. 주제를 파악하렴, 하찮은 쥐새끼야. 내가 세인테아에 대해 존중하는 건 어디까지나 용사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지."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
발끈해서 끼어들려던 황녀는 대군주의 시선이 닿자마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한순간 전신을 휘감은 가공할 위압감에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기세를 거둔 대군주가 피식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위협이나 하자고 온 게 아닌데 말이야. 나도 좀 묻고 싶은 게 있거든."
이어진 그녀의 말에 황제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죄수 호송선, 권성."
"······."
"대체 '그건' 잡아다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거야, 황제? 호송선에 숨겨 태워 수용소로 이송하면서까지?"
황제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찻물을 쭉 들이킨 대군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고하는 거야, 황제. 뭔진 몰라도 자꾸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 권성처럼 아까운 전력들만 계속 죽어나가게 두기 싫으면."
저벅저벅 방 바깥으로 향하는 그녀에게 황제가 물었다.
"대체 대군주는 무엇을 원하는 것이오."
"······."
"마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건 모를 리가 없겠지. 세인테아가 무너지면 바로 다음은 칼데릭 차례지. 한데도 자꾸 세인테아와 각을 세우고, 그리 애매모호한 태도만 보이는 저의가 무엇이냔 말이오."
황제를 돌아본 대군주가 싱긋 웃었다. 그뿐이었다.
***
저녁이 되고 연회가 시작되었다.
회담에 직접 참여한 인사들 말고도 그들과 동행한 이들은 많았기에 연회장은 많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왕족은 왕족들끼리, 그보다 신분이 낮은 이들도 저들끼리 구석 자리에 모여 회담의 결과에 대해 떠들었다.
대군주와 7군주를 따라서 연회장으로 이동한 아셸은 굳은 안색으로 연회장 한쪽에 시선을 끌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곳에는 황제를 비롯해서 그와 동행했던 창성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7군주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셸은 정신이 혼잡한 걸 들켰나 싶어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애썼다.
"아셸, 방으로 돌아가서 쉬어라."
7군주의 말에 그녀는 역시 들켰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명색이 호위 기사인데 혼자 먼저 돌아가서 쉬는 게 가당키나 한가?
하지만 이번에는 7군주도 상당히 강경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그러면 테라스로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도록."
아셸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바깥에 나서서 서늘한 바람을 맞자 머리의 열이 조금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
아셸은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깊게 묻어두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세인테아, 창성, 일족을 몰살한 원수.
지금 바로 안쪽의 연회장에서 태연자악하게 앉아있는 황제와 창성의 모습에 아셸은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한 스스로에게 한심함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복수도, 일족 찾기도, 벌써 그 끔찍한 날로부터 1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사실 마음속 깊은 진심으로는 이미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살아남은 일족 따윈 어디에도 없다는 걸.
그저 그럴 리가 없다고 현실을 부정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그래서 복수조차 제대로 마음 먹지 못하고 이리 한심하게 시간만 축내고 있는 것인가.
원수를 바로 눈앞에 두고도 검조차 뽑지 못하는데······ 이래서야 죽은 일족들을 볼 낯이 있기는 한 걸까.
아셸은 두 눈을 감고서 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익숙한 일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심마가 찾아오는 거야 일상이고 다반사였었으니까.
그렇게 몇 분 동안 호흡을 하며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아셸은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
테라스로 한 남자가 걸어들어왔다.
창성 퀘이덴.
아셸을 슬쩍 바라보고서 반대편 난간에 선 그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셸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여기서 소란을 피워봐야, 놈에게 살의를 뿜어내봐야 전부 아무 의미도 없으며, 론 님에게 피해만 끼치는 짓일 뿐이라고······.
그렇게 들끓는 분노를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억누르며 마저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어제부터 계속 걸렸었는데, 이제서야 기억이 났다."
갑작스레 열린 그의 입이 아셸을 도로 붙잡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10년 전, 알텐 대산맥. 유일하게 놓쳤던 그 백월족이 너였나."
중립국 회담 (6)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든 느낌.
다시금 점화된 분노가, 그리고 당혹스러움이 한순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몰려들어 아셸의 마음을 터질 듯 조여 맸다.
'어떻게······.'
어떻게 눈치챘는가?
10년 전의 어두운 밤, 그리고 서로가 마주쳤던 건 그저 짧은 순간일 뿐이다.
아셸은 그가 설마 자신을 알아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지만,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그딴 것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셸은 금세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살의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창성을 노려봤다.
그의 시선은 무심하고 차가웠다. 지금까지도 선명히 기억에 남아있는, 절벽에서 자신들을 바라봤던 그 눈빛처럼.
바람이 불고, 두 사람밖에 없는 테라스에는 잠시 적막이 맴돌았다.
"결국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었을 줄은 몰랐군."
마치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처럼, 조금은 불쾌함이 스며있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아셸은 이를 까득 깨물었다.
"나를······ 기억하나?"
"방금 그렇다고 말했을 터인데."
"······."
"제법 사나워서 잡는 데 애를 먹었던 성가신 백월족이 하나 있었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창성이 안쪽의 연회장을 슬쩍 흘겨보고는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7군주의 호위 기사로 있는 모양인데, 칼데릭에 투신한 것인가? 복수를 위해서?"
아셸은 다시 입을 열려다가 간신히 다물었다.
한 손이 저도 모르게 어느새 검자루에 올려져있음을 깨달았다.
치밀어오르는 격노를 삼키는 그녀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여기서 더 놈과 말을 섞으면 그때는 정말 더 이상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아셸은 거친 숨을 몇 번이나 들이쉬고 내뱉고는, 창성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마저 걸음을 옮겼다.
창성이 그런 그녀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재차 입을 뗐다.
"일족의 원수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그런 미적지근한 태도인가?"
아셸은 무시하고서 계속 움직였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또다시 반사적으로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 결국은 목숨이 아까운 모양이군. 한심하지만 현명한 선택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내 눈에 띄지 말고 도망치거라."
아셸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창성을 홱 돌아봤다.
목숨이 아까워? 도망쳐?
뚫린 입이라고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단 말인가?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에 입을 열었다.
"닥쳐. 넌, 언젠가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일 것이다."
창성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 그렇게 변명하며 도망치라는 거다."
"나는 도망치는 게······!"
"그때 절벽에서 너와 함께 있었던 백월족이 네 친동생이었던가?"
이성의 끈이 툭하고 끊겼다.
"그때도 동생을 버리고 도망치고, 오늘도 또다시 이렇게 도망치는군. 저승에 있는 동생이 널 원망하겠구나. 겁쟁이라 부르짖으며 말이다."
"······!"
아셸의 전신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검집에서 뽑아진 그녀의 검에서 거대한 검기가 몰아쳤다.
콰아아앙!
***
아셸이 테라스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회장 한쪽에 있던 창성도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테라스로 나갔다.
어스힐의 국왕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나는 그 광경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뭐지?'
나는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서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저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불안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불안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테라스로 걸어가며 초감각을 끌어올리니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