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 결국은 목숨이 아까운 모양이군.
- 그때 절벽에서 너와 함께 있었던 백월족이 네 친동생이었던가?
- 그때도 동생을 버리고 도망치고, 오늘도 또다시 이렇게 도망치는군. 저승에 있는 동생이 널 원망하겠구나. 겁쟁이라 부르짖으면서······.
나는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였다.
콰아아앙!
거대한 마력의 기운, 그리고 폭발.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화들짝 놀라서 시선을 돌렸다.
연기가 걷히고, 반파된 테라스에 서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이런······.'
아셸은 전신을 새하얗게 물들인 채로 종족 특질까지 발동하고 있었다.
검을 뽑아들고서 핏발이 가득 선 눈으로 지독한 살기를 뿜어내며.
그리고 그 바로 앞에서 한 손을 뻗은 채 태연하게 서있는 창성.
아셸이 공격을 날리고 창성이 그것을 막은 광경이었다.
소란 속에 금세 주위로 경계를 서던 기사들이 모여들고, 다른 이들은 테라스가 있는 쪽에서 멀찍이 물러섰다.
나는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아셸."
내가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날 슬쩍 돌아봤지만, 곧 다시 창성에게로 시선을 돌려 그를 노려봤다.
어느새 근처로 다가온 대군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뭐야, 7군주의 호위 기사잖아? 즐거운 연회에 이게 다 무슨 소란일까?"
나와 대군주를 바라본 창성이 뻗고 있던 손을 거두고서 말했다.
"나는 그저 공격에 방어했을 뿐이오. 아무래도 이쪽의 경에게 무언가 오해를 산 것 같소."
나는 실소를 흘렸다.
초감각으로 두 사람이 했던 대화를 전부 들었기에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방금 대놓고 그런 망발을 지껄여놓고 저건 뭔 개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아셸에게로 시선을 옮긴 대군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흐음······ 그보다 7군주는 알고 있었던 건가? 저 모습을 보니, 인간이 아니라 백월족이었구나?"
대군주 역시 아셸이 종족 특질을 사용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이번에 처음으로 안 사실이었다.
굳이 그걸 알려줄 필요도 없어니 나도 그녀에게 말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녀의 발언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백월족? 백월족이라면 분명······."
"그래, 세인테아 황실에서······."
10년 전의 일이었지만, 당시에 한창 제국을 떠들석하게 했던 그 사건을 모르는 이는 자리에 없었다.
아무리 서열이 낮은 황자라고 해도 무려 황족이 직접 황실의 이름으로 처형을 당했던 대사건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지금 나를 공격한 여인은 대군주가 말했다시피 백월족의 생존자요."
그때 창성의 목소리가 소란을 일시에 잠재우고 연회장 전체에 나지막이 울렸다.
"그리고 그녀가 날 공격한 이유는 세인테아 황실에 품고 있는 원한 때문이오. 그러니 나는 그것을 이해하오."
그리고는 다시 아셸을 바라보며 정중한 목소리로 말한다.
"세인테아의 오성으로서 지난날의 황실의 과오에 진심으로 유감을 표한다."
"······."
"하지만 그것은 황실의 뜻이 아닌 5황자와 그 일당들이 치밀한 계획 아래 벌인 참변이었으며, 그들은 이미 황실의 준엄한 정의 아래 처형됨으로써 심판받았다. 황실을 향한 너의 증오심은 이해하나, 나는 네 일족을 멸한 원수가 아니다."
아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 역시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그의 말에 어이가 완전히 없어졌다.
창성, 놈은 황제의 명에 따라서 아셸의 일족을 직접적으로 몰살한 주범이다.
그런 놈이 자신은 연관이 없다며 지금과 같은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날 황실이 벌인 끔찍한 학살의 죄악은 진짜 배후가 아닌, 5황자와 그 측근들이 전부 완벽하게 뒤집어쓴 채 처형당했으니까.
진실을 아는 이는 황제와 창성, 그리고 유일한 생존자인 아셸밖에 없었다. 게임을 플레이한 나를 제외하고는.
어느새 근처로 다가와 서있는 황제는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미약하게 놀란 기색이 느껴졌는데, 아무래도 창성이 황제와 이야기를 하고 벌이는 짓은 아닌 듯했다.
슬쩍 황제가 있는 쪽을 바라본 창성이 그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백월족의 생존자여, 그럼에도 그토록 덧없는 증오를 불태우고 싶다면 기꺼이 받아주겠다."
"······."
"내게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해도 좋다는 뜻이다. 네 검이 내게 닿는다면, 그때는 얼마든지 내 목을 내어주마."
그 말에, 나는 그제야 창성의 목적을 알 수 있었다.
결투.
애초부터 놈은 이럴 생각으로 아셸을 도발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목적이 무엇인가? 실수를 가장해서 아셸의 목숨을 앗아가고 싶은 건가?
뭐가 됐든 호응해줄 필요가 없는 뻔한 도발일 뿐이었고, 그건 아셸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반쯤 이성을 잃은 기색이었다.
"아셸, 관둬라."
아셸이 나를 돌아봤다.
뻔한 도발에 넘어가지 말라고, 복수는 얼마든지 나중을 기약해도 된다고 말하려던 때였다.
"죄송합니다, 론 님."
"······."
"이번은······ 이번 한 번만큼은, 부탁드립니다 저를 말리지 말아주십시오."
온갖 감정들로 점칠되어 위태롭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녀가 다시금 살의를 뿜어내며 창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결투를 신청하겠다, 창성. 네놈이 지껄인 대로 목을 베어주마."
그에 한 차례 주위가 술렁였고, 창성이 나를 바라봤다.
"허락하겠소, 7군주? 서로의 목숨을 건 생사결이오. 명확한 승패가 갈리기 전까지 결투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주시오."
"······."
군중의 시선이 나에게로 몰렸다.
옆에 있는 대군주가 언제나 그랬듯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아셸과 나를 번갈아 봤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82레벨인 아셸과 91레벨인 창성의 결투.
애초에 결과가 정해진 승부다.
80, 90레벨대에서 9레벨 차이란 무슨 수를 써서도 넘을 수 없는 아득한 격차였으니까.
어떤 경우에도 아셸이 오성 중 일인인 창성에게 승리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말하는 꼴로 봐서, 짐작했던 대로 놈이 원하는 건 역시 아셸의 목숨인 듯했다.
하지만 아셸은 이미 말린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이 정도로 지독한 살기를 뿜어내는 걸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몸 안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불안정하게 들끓고 있었고, 검을 쥔 손은 지금이라도 창성의 목을 향해 휘둘러질 듯 움찔거렸다.
······이걸 말려야 되나?
정 말리려고 하면 억지로 뜯어말릴 수야 있을 것이다.
어차피 승패가 뻔히 정해진 결투를 허락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
나는 다시 한 번 아셸의 표정을 보고서 그러지 않기로 했다.
결과가 어떻든, 이번 결투를 말리면 왜인지 그녀가 크게 엇나가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좋다."
그렇게 두 사람의 결투가 성사되었다.
***
결투는 곧바로 연회장 바깥에 위치한 연무장에서 이루어졌다.
관전자로서는 나와 대군주와 황제, 그리고 다른 중립국의 국왕들만 자리했다.
연무장 한가운데에 아셸과 창성이 서로 마주 본 채 섰다.
창성은 한 손에 자신의 키보다도 훨씬 길다란 창을 무기로 든 채였다.
곧 창성이 아셸에게 말했다.
"선공은 양보하겠다."
중립국 회담 (7)
창성 퀘이덴은 맞은편에 선 아셸을 바라보며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순간의 방심으로 놓쳤던 백월족 하나.
그 자그마한 실책은 지금까지도 살에 박힌 잔가시처럼 그를 쭉 거슬리게 해왔던 기억이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지금의 상황은 더없이 기꺼웠다. 정말로 우연하게 찾아온 기회.
이번에야말로 마지막 남은 하나까지 죽여 없애 완전한 매듭을 지으리라.
창성은 손에 쥔 창을 가볍게 휘두르며 입을 열었다.
"선공은 양보하겠다."
"······."
아셸의 전신이 다시금 새하얗게 물들었다.
뿜어내는 기세는 여전히 흉흉하기 그지없었지만, 아까 전과 다르게 그녀는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세인테아의 창성.
기억 속, 10년 전 산맥에서 일족을 학살했던 그의 무위는 그야말로 괴물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강했던 일족의 전사들조차 몇 합을 제대로 나누지도 못하고 모조리 쓸려나갔었으니까.
그럼에도 아셸은 패배를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 역시 지난 10년의 시간 동안 몇 번이나 벽을 넘고 부수며 강해지지 않았는가.
놈과의 격차가 얼마나 될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만큼은 그저 스스로를 믿고서 투지를 끌어올렸다.
스으으.
특질 능력으로 극한까지 정화된 마력이 더욱 가속하며 아셸의 전신을 순환했다.
간을 볼 이유 따위가 없는 상대였다. 아셸은 처음부터 전력을 끌어올렸다.
그녀의 검이 순백의 광채로 물들고, 전신에도 새하얀 마력 고리가 흐릿하게 생겨났다.
창성은 태연하게 서서 그런 그녀를 바라봤다. 무엇을 하든 얼마든지 기다려주겠다는 듯. 그의 창에도 푸른 기운이 빚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셸의 신형이 섬전처럼 창성을 향해 쏘아졌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맞물린 검날과 창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가볍게 공격을 막아낸 창성이 창대를 빙글 돌려 위로 처올렸다. 아셸은 고개를 젖혔다.
곧바로 꺾여서 목을 노리고 휘둘러오는 공격마저 회피한 그녀는 다시 검을 내질렀다. 하단을 노린 일격. 창성은 또다시 창을 빙글 돌려 간단히 막아버렸다.
본격적인 접전이 이어졌다.
검과 창이 쉬지 않고 맞부딪히고, 때때로는 빈 허공을 갈랐다. 흰 선과 푸른 선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얽혀들었다.
한 번 한 번의 충돌에 강대한 충격파가 일고,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도 베여버릴 듯한 예기가 두 사람을 중심으로 몰아쳤다.
관전자들 중 경지가 높지 않은 이들은 그들의 움직임을 조금도 눈으로 쫓지 못했다.
그저 사방으로 퍼져오는 마력 충돌과 충격파에 창백하게 질려 경계선에서 더욱 멀찍이 물러설 뿐.
공방의 흐름은 아셸이 공격하고 창성이 방어를 하는 쪽으로 흘렀다.
창성도 간간이 반격을 날리긴 했지만 대체로 아셸이 그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한 것보다는!'
아셸의 마음에 미약한 쾌락이 솟아올랐다.
창성은 분명히 강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만큼은 압도적이지 않았다. 그의 방어에 서서히 틈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아셸은 퍼붓는 공세에 더욱 한계까지 힘과 속도를 붙였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파고들면 된다. 그러면 정말로 놈의 목에 검격이 닿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
시간이 흐를수록, 합이 늘어날수록 아셸의 안색이 천천히 굳었다.
서서히 이질감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간격이 어느 지점에서 전혀 좁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마치 애초부터 닿을 수 없었을 신기루처럼.
카앙!
검날과 창날이 맞물리고, 찰나간 공방이 멈추었다.
아셸은 창성과 눈을 마주쳤다. 놈의 눈빛은 결투를 시작할 때와 변함없이 차갑고 무미건조했다.
'이제야 알았나?'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셸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놈의 손아귀 위에서 놀며 농락당하고 있었다는 걸.
세인테아의 오성, 창성과의 격차는 생각보다도 훨씬 작았던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상상 이상으로 아득한 것이었음을.
슈와악!
뒤로 물러서려는 아셸에게 가공할 속도로 일격이 쏘아졌다. 이제까지와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아셸의 뺨에 핏물이 튀어올랐다. 간신히 고개를 틀어 피한 그녀는 쉴 틈 없이 곧바로 이어지는 공격을 막아야만 했다.
휘두르고, 찌르고, 창격이 몰아친다. 접전이 격화되었다.
창성의 창에 담긴 기운은 아셸의 검기와 엇비슷했다. 그러나 하나하나의 일격에 그녀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깨달음이 녹아있었다.
그는 아셸에게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결투를 완전히 끝낼 일격을 날리지도 않았다.
아셸이 어지럽게 쏟아지는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맞받아치며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죽일 생각인가.'
한순간 이성이 날아가서 창성과의 결투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아셸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속셈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렇게 도발하며 상황을 여기까지 끌어온 이유가 뭐겠는가?
결투를 통해 정당히 자신의 목숨을 거두려는 것밖에 없다.
하지만 압도적인 실력 차이로 승리해버릴 수는 없으니 적당히 수준을 맞추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치열한 접전을 가장해야만 결투 중 어쩔 수 없이 상대를 죽였다는 명분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만약 항복을 외친다면 창성도 결투를 끝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항복 선언은 명백히 결투의 승패가 가려진 것이고,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더 수작을 부리지는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설령 이 자리에서 싸우다 죽는다고 해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전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개죽음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도망, 가슴에 날붙이처럼 깊게 틀어박힌 창성의 그 말이 그녀에게 물러섬이라는 선택지를 지워버렸다.
아셸은 이를 까득 깨물었다.
절대로 도망치지 않는다.
놈의 목에 검이 닿지 않는다면, 하다못해 한쪽 팔이라도.
아셸의 몸을 두르고 있던 순백의 고리가 더욱 강한 빛을 발했다.
마력을 3개의 코어로 나누어 서로 간의 공명을 통해 증폭시키는 마력 운용법. 일족의 비전.
백월족의 역사에서도 창시조 외에 완전히 익히는 것에 성공한 인물이 없던,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기술.
아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3개의 코어를 모두 최대로 활성화했다.
지금까지가 전력이었다면 이제는 그 한계조차 넘어섰다. 대가는 그녀 스스로도 얼마나 크게 찾아올지 모르는 반작용이었다.
콰아아앙!
갑작스레 증폭된 기운에 검격을 막은 창성의 눈가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 역시 창에 더욱 기운을 불어넣고서 아셸의 공격을 쳐냈다.
그녀는 광인처럼 미쳐 날뛰면서도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창성이 그리는 창의 경로를 눈에 담았다.
한계를 넘어선 육체 능력이, 그리고 감각이.
놈의 창이 그리는 무질서한 선을, 바로 방금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것을 보다 선명히 머리에 각인시켰으니까.
불안정하게 날뛰는 마력에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아셸의 몸에 부하가 찾아왔다.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목숨마저 내버린 전투 속에서, 아주 잠시일 뿐이라도 한계를 넘어서고 나서야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
그 잡힐 듯 말 듯 희미하기 그지없는 깨달음을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졌다.
'조금만 더······.'
아셸의 각성에도 여전히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창성이었다. 애초에 그는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 적이 없었으니까.
창성의 창이 아셸의 옆구리를 얕게 베고 지나갔다. 다음은 다리와 어깨. 선혈이 튀어올랐다. 그녀의 검은 여전히 닿지 않았다.
날뛰는 마력에 육체의 균형은 무너지기 직전이었고, 그녀의 의식을 붙잡고 있는 건 그저 순간의 초인적인 집중력이었다.
변화무쌍한 창성의 창. 리곤을 가르치며 우연히 찾아왔던, 그러나 차마 전부 녹여내지 못했던 그 깨달음.
머리에서 따로따로 놀던 자그마한 조각들이 선처럼 이어진 건 찰나였다.
피잇.
창성의 얼굴에 핏물이 튀어올랐다.
검을 뻗은 아셸은 스스로가 무엇을 했는지 한 박자 뒤에야 깨달았다. 그의 뺨에 미세한 혈선이 그어져있었다.
'······아.'
결국, 끝내 닿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주 조금은 스쳤다.
모든 것을 쏟아부은 최후의 일격을 날린 아셸은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몸을 휘청였다.
"······!"
창성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허물어지는 아셸을 향해 곧바로 창날이 내질러졌다. 그녀의 육체를 단숨에 한 줌의 핏물로 만들어버릴 듯 강대한 기운이 담긴 일격이었다. 그리고······.
콰아아앙!
허공에서 우뚝 멈춰선 창.
창날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듯 정지한 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창성은 돌연 눈앞에 나타난 남자의 모습에 흠칫 놀라며 창을 거두고 물러섰다. 7군주였다.
쓰러지는 아셸을 받아든 그가 물끄러미 정신을 잃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창성에게 시선을 옮기고서 입을 열었다.
"결투는 끝이다. 네 승리로군."
창성은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격노에 눈꺼풀을 푸르르 떨었다.
승리, 그것은 애초부터 당연한 것이었다.
그 당연한 결과에 아주 조금이라도 자신이 피를 흘렸다는 사실에 그는 형용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7군주······ 분명 결투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7군주가 오만한 눈으로 말했다.
"뭐 어쩌라는 거지?"
"······."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면 네까짓 게 뭘 어쩔 거냐는 듯, 마치 그런 투였다.
순간 할 말을 잃은 창성은 7군주를 노려봤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
나는 이쪽을 노려보는 창성을 무시하고 아셸의 상태를 살폈다.
마력이 좀 불안정하긴 했지만 그냥 탈진해서 정신을 잃은 듯했다.
'그보다······.'
아셸의 레벨로 시선을 옮겼다.
[Lv. 85]
갑작스럽게 기운이 증폭된 후, 그녀의 레벨은 놀랍게도 전투 도중에 급상승했다.
그것도 무려 82레벨에서 3레벨이나 훌쩍 뛰어 85레벨로.
'전투 중에 벽을 넘었나?'
워낙에 치열한 전투였으니 이상할 건 없나 싶었다.
막강한 적과 싸우며 깨달음을 얻고 성장하는 거야 대표적인 클리셰 중 하나가 아닌가. 물론 이건 현실이었지만······.
어쨌든 9레벨이나 높은 창성에게 공격이 조금이라도 스치는 데 성공한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였다.
나는 다시 창성을 바라봤다. 그리고 보라는 듯 손가락으로 뺨을 스윽 그었다.
"아쉽군. 조금만 더 깊었으면 입이 찢겨나갔을 텐데 말이야."
놈이 이를 까득 갈며 씹어뱉듯 말했다.
"······방심했을 뿐이다. 애초에 전력을 다했으면."
"그래, 그렇게 변명할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거다."
의도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것으로 아셸의 성장 속도는 게임에서의 메인 스토리보다도 훨씬 빨라졌다.
나는 놈과 황제를 번갈아 보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장담하지. 대가를 치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너도, 황제도."
창성이 억지로 비웃음을 흘렸다.
"천만에 한 번의 우연이었을 뿐이다. 그 백월족 계집의 검이 다시 내게 닿을 일은 결코 없다."
"그렇다고 한들 변하는 건 없다. 그때는 내 손에 직접 죽게 될 테니."
황제도, 그리고 창성도, 게임의 메인 스토리에서는 언젠가 저지른 죄악에 대한 대가를 치를 빌런들이었으니. 지금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내 말에 그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게 무슨······."
"그러니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잘 간직하고 있도록."
결투는 끝났다.
사방에 모인 시선 아래, 나는 조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아셸을 부축한 채로.
***
"······."
두 눈을 뜨자 천장이 보였다.
아셸은 욱씬거리는 몸을 일으키고서 멍하니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의 숙소였다.
"아, 일어나셨어요?"
침대 옆에는 한 여인이 앉아있었고, 뒤쪽에는 시녀 몇몇이 서있었다. 앉아있는 여인은 어스힐의 왕녀인 세리였다.
아셸 역시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기에 당황했다.
세리가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설명했다.
"결투 중에 정신을 잃으셨어요. 날이 밝고 깨어나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창밖을 바라보니 아직 동이 완전히 트지 않아 어스름했다.
아셸은 기억을 더듬었다. 마지막 일격에 실패한 후 날아들었던 창성의 공격, 그리고······ 7군주.
7군주가 창성의 공격을 막고 결투를 중단했다는 사실까지 떠올린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또······.'
창성과의 결투에서 모든 걸 쏟아부은 탓일까.
정신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열화처럼 활활 타올랐던 감정은 이제 사그라들어서 불씨만 남은 듯했다.
그보다는 멋대로 날뛰어 7군주에게 또다시 폐를 끼쳤다는 죄책감이 컸다. 대체 무슨 낯으로 뵌단 말인가?
아셸은 자신의 몸을 살폈다.
창에 베였던 상처들은 전부 거의 아물어있었다. 포션으로 응급 처치를 한 모양.
그보다는 마지막에 비전을 한계까지 사용한 반작용으로 몸에 퍼진 부담이 더 컸다. 온몸이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결투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면목이 없는 표정으로 세리에게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연회를 완전히 망쳐버렸습니다."
"괜찮으니 그건 마음에 두지 마세요, 경. 그보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왜 왕녀가 직접 여기서 자신을 살피고 있단 말인가?
그 의아한 기색을 읽은 듯 세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전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경이 깨어나실 때까지만 잠시 자리를 지키려고 했던 거예요."
"예, 아무튼 감사합니다.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이곳까지 옮기고 치료까지······."
궁전 바깥에 있던 연무장에서 여기까지 옮기려면 번거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세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 옮기는 건 저희가 한 게 아니예요. 7군주님께서 옮기셨죠."
"······?"
그녀가 어딘가 짖궂은 기색이 섞인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양팔을 뻗어 아래로 내렸다가 올렸다.
"그러니까, 연무장에서 쓰러진 경을 이렇게 번쩍 품에 안아드신 다음에."
그리고는 살포시 올렸던 팔을 내려놓는 시늉을 했다.
"여기 방까지 오셔서 침대에 뉘여놓고 가셨어요. 7군주께서 직접."
"······네, 네?"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아셸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카볼리사의 유적 (1)
새벽녘 동이 트기 시작할 즈음.
나는 옆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말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벌써 정신을 차렸나?'
그렇지 않아도 잠이 영 오지를 않아서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었는데, 아셸이 깨어난 모양이었다.
뭔 바람인지는 몰라도 뜬금없이 어스힐 측의 왕녀가 직접 자리를 지켜주겠다 하길래 알아서 하라고 했었는데······.
- 그러니까, 연무장에서 쓰러진 경을 이렇게 번쩍 품에 안아드신 다음에······.
- 네, 네?
······뭔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왕녀가 저런 성격이었나 생각하며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바로 옆에 위치한 아셸의 방 앞으로 다가가서 노크를 했다.
"아셸."
안쪽에서 잠시 소란이 일더니 곧바로 시녀가 방문을 열어주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는 아셸과 옆에 앉아있는 왕녀의 모습이 보였다. 둘 모두 상당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아······ 7군주님, 경께서 방금 막 정신을 차리셔서······."
나는 아셸을 쳐다보며 물었다.
"몸은 괜찮나?"
외상이야 포션으로 치료했고, 초감각으로 살피니 마력도 얼추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침대로 가까이 다가가며 묻자 아셸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내 시선을 피하며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하는 듯하더니, 결국 슬며시 고개를 숙이고서는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축 잠긴 목소리로 다짜고짜 사과부터 건네는 그녀였다.
솔직히 이번엔 그녀의 잘못이 명백히 있었기에 나도 별 대꾸는 하지 않았다. 물론 일을 벌인 심정이야 백분 이해했지만.
"저,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왕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상태를 봐줘서 고맙군."
"아닙니다, 군주님. 별말씀을요."
꾸벅 인사를 한 왕녀가 이내 시녀들과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그녀가 앉아있던 의자에 털썩 앉았다.
"······."
잠시 우리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나는 단지 그녀의 상태를 살피러 온 것이었고, 괜찮다는 걸 확인했으니 딱히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할까. 일단은 레벨업했으니 성장을 축하한다고 해야 되나?
고민하고 있자니, 우물쭈물거리고 있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고 먼저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론 님."
아니나 다를까 또 사과였다.
나도 이번엔 작게 혀를 차며 대답했다.
"계속 사과만 할 참이냐?"
"······."
"이번 일에 네 잘못이 명백한 건 맞지만, 그에 대해서 딱히 꾸짖고 싶진 않으니 그만 말해라."
"하지만 너무 큰 폐를 끼쳤습니다. 론 님께선 저 때문에 맹세까지 어기시고······."
······맹세?
나는 순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다가, 이내 뭔 말인지 깨달았다.
결투가 성사되기 전에 내가 그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창성과 약속했던 걸 말하는 모양이다.
그녀의 표정이 너무 죄스러워 보였기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하긴, 이 세계에서는 약속과 맹세라는 게 명예와 관련되어 조금은 신성시되는 관념이 있기는 했다.
특히나 칼데릭의 군주씩이나 되는 거물이라면야 그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지는 말할 것도 없었고.
그녀는 아마 내가 맹세를 어겨서 굉장한 모욕을 감수했다고 생각하고 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딱히 아무렇지도 않은데.'
물론 난 모욕감이나 수치심 따윈 조금도 느끼고 있지 않았다. 자랑할 건 아니었지만.
애초부터 지킬 생각이 없던 약속을 어겼다고 거기에 쪽팔림을 느낄 리가 있나?
단지 문제라면 군주로서의 위신과 신뢰가 떨어질 염려인데······뭐, 이번 한 번 감수하면 될 일이었다.
세인테아 쪽이야 중요한 건 용사 하나뿐인데 황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이유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창성 그놈은 그런 식으로 대놓고 무시해서 엿 먹이고자 했던 마음도 있었다. 워낙에 개같은 놈이었으니.
나는 아셸을 빤히 보고 있다가 말했다.
"네 목숨은 내 명예보다 가볍지 않다."
그 말에 그녀가 움찔 놀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째 서서히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았기에 나는 속으로 당황하며 화제를 돌렸다.
"이번 결투에서 또다시 성장한 것 같더구나. 저번보다도 훨씬."
"······예, 그렇습니다."
아셸이 조금 목메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시 고민하며 할 말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네 일족을 학살한 배후, 그 가장 뒤에는 황제가 있다."
아셸은 직접 자신의 두 눈으로 봤던 창성 외에 정확한 배후가 누구인지는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대충 짐작은 했겠지만.
어쨌든 적어도 황제와 관련이 없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에 대해 증오를 불태우고 있는 것이었지.
내가 그 사실을 정확히 짚어주자 아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거기에 어떻게 그걸 알고 확신하냐는 등의 의구심 따위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이제 그녀가 그만큼이나 날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리라.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황제는 오로지 인간 종족의 번영만을 생각하는 광인이다. 그가 너희 백월족을 학살한 이유는 오로지 그것과 관련이 있다."
"······."
"그러니 세인테아에 대한 네 복수심은 더없이 합당하고 정당하다. 그것만은 내가 확실히 보증해주마. 네 망설임의 이유에 그것 또한 껴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아닙니다, 저는."
아셸이 고통스러운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저 두려울 뿐입니다. 만일 살아남은 일족이 하나라도 있다면, 제가 반드시 찾아내야만 하니까······ 복수에 눈이 멀어 그를 남겨두고서 혼자 죽어버릴 수는 없으니까······."
역시 그런가.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내 일을 우선시할지, 아니면 아셸의 선택을 존중하여 우선시할지.
그것은 전부터 계속해서 고민했던 부분이었다.
신비들을 얻기 전까지야 그녀의 존재가 필수불가결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솔직히 이제는 그런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처음부터 그녀와 나의 관계는 나의 기만으로 시작된 관계였다.
살아남은 일족이 없다는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빌미 삼아 그녀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었으니.
그녀와의 관계가 지금보다도 더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에 대한 죄책감은 더욱 커질 것이었다.
지금껏 충분히 많은 신세를 졌다.
그녀가 없었다면 검 하나 휘두르지 못하는 연약한 몸으로 대륙을 돌아다니며 신비들을 찾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고민 끝에 확실히 결정했다.
"무엇이 됐든 네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셸이 얼떨떨한 얼굴로 날 올려다봤다.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아셸을 그 장소로 데려가야겠다.
***
일단 그 장소는 다른 유적, 던전들과 다르게 입장하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 있었다.
바로 고대의 마전석.
마전석은 보통 마법 아이템을 제작하는 데 쓰이는 마석과는 다른 것이었다.
마석의 한계는 아무리 순도가 높더라도 그 술식의 장기간 저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있다.
전에 대군주성에서 봤던 참모장의 텔레포트 장소도 그래서 항상 다른 마법사들이 그곳에 상주하고 있는 것이었고.
하지만 고대 마법의 황금기에 마법사들이 제작하고 사용한 마전석은 마법 술식의 초장기간 저장이 가능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남아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유적이나 던전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더 이상 대륙에 남아있는 마전석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면 기술의 실전도 있지만, 더 이상 마전석 제작에 필요한 재료가 자연적으로 거의 생성되지 않는다는 설정이었으니까.
또 마전석에는 한 번 술식을 새기면 다른 술식을 새기는 건 불가능했기에 유적에 남아있는 것을 채굴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남아있는 순수 마전석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내 기억으로는 대군주도 가지고 있는 마전석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니까.
나는 곧바로 그녀를 찾아가지 않고 우선 어스힐의 국왕부터 찾았다.
"마전석······ 아쉽게도 저희 왕가가 가지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7군주."
"그런가."
어스힐의 국왕이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나는 순순히 납득했다.
애초에 마전석은 단순히 돈 따위로 그 값어치를 환산할 수 없는 굉장한 귀물이었으니.
미련을 버리고 다음으로 곧바로 대군주를 찾아갔다.
"주먹만 한 크기 정도의 마전석이 하나 필요하다고?"
대군주가 내 말에 흐응, 콧소리를 흘렸다.
"가지고 있는 게 있기는 한데, 설마 그걸 공짜로 달라고 하는 건 아닐 테고."
"원하는 게 뭐지?"
"글쎄······ 7군주가 내 부탁을 들어줘야 할 횟수가 2번 남았지? 그걸 다시 하나 더 늘리겠다면 얼마든지 줄게."
그 말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역시 순순히 받을 수는 없나.
하지만 그렇다고 대군주의 명령권을 한 번 더 늘리는 건 내키지 않았다.
"마전석을 가지고 있는 다른 군주는 누가 있나?"
대군주가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1군주, 2군주, 4군주, 그리고 8군주. 그 외에 다른 군주들은 나도 잘 몰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
"그보다 그렇게 매정하게 나오니 좀 슬픈데, 7군주? 내 부탁을 들어주기가 그렇게 싫어?"
나는 그녀의 능청스러운 말을 흘려들으며 생각했다.
'일단 8군주는 제외하고.'
다행히 나머지 군주들은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었다.
1군주나 4군주는 내게 진 빚이 있었고, 2군주는 약점을 잡고 있는 게 있었으니까.
나는 누구를 찾아갈까 고민하다가 이내 정했다.
사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1군주나 4군주를 찾아가서 빚을 퉁치고 마전석을 받는 것보다는, 2군주를 찾아가는 게 당연히 훨씬 이득이었다.
왜냐면 그녀는 내 부탁을 들어준다고 해서 깔끔히 빚을 청산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정보에 상응할 만큼의 도움이라는 말로 애매모호한 약속을 했었으니 말이다.
아마 말만 잘하면 이번에도 공짜로 챙길 수 있으려나.
오전이 되고, 슬슬 왕성에서 떠날 준비를 했다.
마땅한 우리가 없어서 띠용이는 왕성 한편의 넓은 공간에 두고 있었는데, 날 보자 신나서 파닥거리며 엉겨왔다.
"저희 어스힐 왕국을 도와주신 것,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 살펴가십시오."
어스힐 국왕과 테이르, 그리고 왕녀와 1왕자의 배웅을 받으며 띠용이의 위에 올라탔다.
나는 마지막으로 테이르와 한 번 눈을 마주쳤다.
전쟁은 막았으니 더 이상 어스힐에 큰 암운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보니 아직 왕가의 갈등까지 풀린 건 아닐 터였다.
테이르도 언젠간 혈육들과 진심을 터놓고 오해를 화해하기를 바라며, 도로 시선을 돌렸다.
"가자."
띠용이를 툭툭 두드리자 녀석이 우렁찬 포효와 함께 날아올랐다.
***
올 때는 대군주와 함께였지만 돌아갈 때는 따로였다.
대군주는 대군주령으로 향했고 나는 2군주령으로 향했다.
와이번의 속도가 워낙 어마무시했기에 띠용이를 얻고 난 뒤 확실히 시간적 여유가 많이 생기기는 했다.
예전이었으면 다음 군주 회의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이럴 여유도 없었겠지.
그렇게 어스힐에서부터 2군주령의 수도까지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곧바로 군주성에 방문하여 2군주 뇌후와 만난 나는 용건부터 꺼냈다.
"······마전석이 필요하다고요?"
"그래, 대략 주먹막 한 크기의."
"그걸 지금 나한테 달라고 한밤중에 난데없이 찾아온 거고요."
"그렇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뇌후에게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기가 막힌 기색으로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카볼리사의 유적 (2)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날이 잔뜩 선 뇌후의 목소리.
예상한 대로의 반응이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마전석씩이나 되는 귀물을 내놓으라니, 내가 생각해도 뻔뻔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어쨌든 반응을 보니 가지고 있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전에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요. 계속 이딴 식으로 날 이용하려 들면······."
"다음 부탁을 확실히 마지막으로 하지."
실랑이를 해봤자 힘들 것 같았기에 나는 깔끔하게 잘라서 말했다.
뇌후가 움찔 놀랐다.
"······다음 부탁을 마지막으로 하겠다고요?"
"그래. 이번에 마전석을 주면 확실히 다음 부탁을 끝으로 약속했던 정령의 위치를 알려주겠다."
나는 슬쩍 그녀 머리 위에 떠있는 레벨을 바라봤다. 이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90이었다.
내가 소멸시켰던 천둥의 대정령 라크시아와 맞먹을 정도의 강력한 정령이 있는 장소.
그게 미끼로 걸려있는 이상에야 어차피 그녀는 거절할 수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바라보던 뇌후가 말했다.
"마전석이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 알고나 있는 건가요? 솔직히······."
"간을 볼 생각이면 그냥 다른 군주를 찾아가지."
나는 밑밥을 까려는 걸 바로 차단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 부탁으로 그냥 퉁쳐버리는 건 안 되지.
내 말에 그녀가 다시금 인상을 팍 찌푸리며 관두었다.
"마전석은 어디에 쓰려고 구하는 거죠?"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진 않죠. 약속이나 제대로 지키세요, 7군주. 당신은 다음 부탁을 마지막으로 반드시 정보를 내게 줘야만 해요."
"물론이다."
간절한 뇌후와 달리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굉장히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혀를 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기다리세요."
아무래도 직접 가져오려는 모양인지 그녀는 방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서 여유롭게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만약 정령을 얻게 되면 또 나랑 완전히 척을 지려고 하려나.'
그녀가 어떤 태도를 보이든 웬만해서 약속을 안 지킬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한 번 그렇게 당했었으니 머저리가 아니고서야 또 나한테 함부로 덤비지는 않을 테니까.
곧 다시 방으로 돌아온 뇌후의 손에는 주먹만한 크기의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마전석, 그것은 희미한 푸른빛을 띄는 보통의 마석과 다르게 완전히 투명한 빛을 띄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건네주는 것을 받아들고 살펴봤다.
"고맙다. 그럼 이만 가보지."
그렇게 마전석을 얻은 나는 곧바로 2군주성을 나왔다.
밤이 깊었지만 뇌후의 성에서 머무르는 건 나도 안 내키고 그녀도 그럴 것이기에, 그냥 바로 이동하기로 했다.
***
게임에서는 수많은 유적과 던전들이 존재했다.
그중에는 메인 스토리와 관련이 없는 것들도 있었지만, 물론 있는 것들도 존재했다.
카볼리사의 유적.
고대의 한 시기에 대현자라 칭송받았던 어느 위대한 마법사가 남긴 유적.
지금 아셸과 함께 찾아가고 있는 장소 역시 게임에선 메인 스토리와 관련이 있던 유적이었다.
아셸이 살아남은 일족이 없다는 진실을 알게 되고, 스스로의 마음을 확실히 정하는 에피소드였으니까.
크오오오!
아까부터 계속 속도를 줄이고 방향을 꺾기만 하자 답답한지 띠용이가 포효를 내질렀다.
나는 녀석의 목을 두드려 진정시키며 열심히 아래를 살폈다.
현재 위치한 곳은 세인테아의 서쪽으로 있는 광활한 고원.
카볼리사의 유적은 메인 스토리의 일부로 거쳤던 장소인 만큼 장소를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푹 파인 구덩이 같은 지형이었는데······.'
작지 않고 상당히 큰 지형이었으니 발견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대로 곧 발견할 수 있었다.
벌판 한가운데, 마치 완만한 화산의 분화구처럼 불쑥 튀어나왔다가 들어가있는 지형을.
"내려가자."
띠용이를 그 구덩이의 한가운데에 착지시키고 등에서 내렸다.
위에서 보니 좀 작게 보였던 거지, 아래로 내려오니 시야가 완전히 막힐 정도로 돌출된 면이 높았다.
'어디 보자······.'
초감각을 최대로 끌어올린 채 주위를 둘러보며 유적의 입구를 찾았다.
오래 살필 것도 없었다. 이내 저멀리 거대한 마력의 기운과 함께 찾던 것이 시야에 들어왔으니까.
조금은 어색한 느낌으로 경사면에 박혀있는 바위가.
'저거다.'
나와 아셸은 그 바위로 가까이 다가갔다.
길고 넓적해서 마치 석문을 연상케 하는 바위였는데, 그 중앙에는 3개의 주먹만 한 마석이 삼각형 형태로 박혀있었다.
2개는 은은한 황금빛을 발하고 있지만 하나는 반쪽이 깨져서 투명한 빛만을 띄고 있다.
나는 그 반쯤 깨진 마석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슬쩍 힘을 줘봤다.
'음.'
꼼짝도 안 하네.
반은 깨져서 없는데도 마석은 석문에 단단히 박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떼고 아셸에게 말했다.
"이걸 흠에서 빼봐라."
"······아, 예."
그녀도 바위와 그 안쪽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마력을 느꼈는지 거기에 정신이 팔려있다가, 내 말에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깨진 마석을 손쉽게 흠에서 쑥 빼냈다.
의아한 기색으로 날 바라보는 그녀를 다시 뒤로 물리고, 나는 챙겨왔던 마전석을 흠에 박아넣었다.
크기가 맞지 않았지만 마전석은 흠에 닿자마자 자석처럼 착 붙었는데, 곧 바위에서 느껴지던 마력이 화악 끓어오르듯 격동하더니 마전석마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진동하는 바위에서 물러난 다음 아셸에게 말했다.
"바위에 마력을 주입해봐라."
아셸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바위에 손을 대고서 마력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녀의 푸른 마력과 황금빛의 마력이 뒤섞이더니, 바위가 쩍 갈라져서 양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게임의 스토리에서도 이곳은 망가져버린 하나의 마전석 때문에 처음 발견했을 때는 입장에 실패했던 유적이었다.
어지간한 유적이라면 그냥 부수고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곳은 그런 어지간한 유적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이윽고 안쪽의 통로가 드러났다. 천장에 발광석이 촘촘히 박혀있어서 어둡지는 않았다.
"가자."
내 말에 얼떨떨한 얼굴로 통로 안쪽을 바라보고 있던 아셸이 조금 놀란 듯 돌아봤다.
지금껏 신비를 찾을 때 이런 장소를 발견하면 항상 바깥에 두고 혼자서만 들어갔어서 그런 것이리라.
하지만 이곳은 오로지 아셸을 위해서 찾아온 유적이었다. 그녀에게는 아직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긴 했지만.
내가 먼저 걸음을 옮기고, 아셸은 언제나처럼 무엇도 묻지 않고 묵묵히 내 뒤를 따라왔다.
'넓네.'
피부에 닿는 서늘한 공기를 느끼며 넓은 통로를 걸었다.
그리고 금세 다다른 건 바닥에 마법진이 새겨진 훨씬 더 넓은 공간이었다.
대군주성에서 봤던 지하의 풍경처럼 사방에 마석들과, 마력으로 이어진 선, 그 중앙의 마법진.
나와 아셸은 마법진 위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허공에 반투명한 푸른빛의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정령, 그러니까 영체와 같은.
저것의 정체가 뭔지 알고 있는 나는 얌전히 기다렸다.
유적의 가디언이라기보다는 안내자라고 해야 할까.
녀석은 이 유적의 주인이 제작한, 유적에 마련된 시련의 안내를 맡고 있는 존재였다.
이내 녀석이 제대로 형상을 갖추더니 늙은 노인의 외모로 변했다.
- ······이게 얼마만이야! 드디어 사람이 찾아왔구만!
굉장히 들뜬 듯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녀석이 씨익 웃으며 나와 놀란 기색의 아셸을 번갈아 보고는 말을 이었다.
- 환영한다, 모험자들아! 이곳은 위대하신 대현자 카볼리사 님께서 후인들을 위해 안배하신 장소다. 그리고 이 장소를 찾아낸 너희들은 시련에 도전할 자격이 있다. 마련된 시련은 총 2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시련을 통과한다면 그 끝에는 합당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녀석의 말대로 공간 한쪽에 위치해있는 2개의 입구를 바라봤다.
아셸이 한 박자 늦게 날 따라서 시선을 옮겼다.
- 왼쪽 입구는 무력을, 오른쪽 입구는 정신력을 시험하는 시련이다. 만약 시련에 실패하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니 신중이 선택하도록. 시련에 도전하지 않겠다면 지금 당장 유적에서 나가면 된다.
나는 오른쪽 입구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신력의 시련.
이건 도전자가 가지고 있는 고통스런 기억들을 끄집어내 정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여서, 그 번뇌와 괴로움을 극복해야만 하는 시련이었다.
예전에 마경에서 아셸이 몬스터에게 당했던 환각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보다도 정도가 훨씬 더할 것이라는 것.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시련이었기에, 아셸 스스로가 의지를 확고히 한다면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다. 게임에서도 그랬으니.
'실패하면 목숨을 잃는다.'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크긴 했지만, 그에 대해선 믿는 것이 있었기에 걱정하지 않았다.
제왕의 혼이 있는 내게는 시련이고 뭐고 정신 공격이 통하지 않을 테니까.
여차하는 상황에는 아셸을 챙겨서 그냥 탈출할 생각이었다.
물론 이 유적에 또 어떤 위험한 장치가 마련되어 있을지는 모른다만,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겠지.
"오른쪽 입구로 들어간다, 아셸."
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오른쪽 입구로 걸어갔다.
아셸은 뜬금없이 뭔 시련인가 당황한 기색으로 뒤를 따라왔고, 안내자도 둥둥 떠서 우리의 뒤를 따라왔다.
입구 안쪽에는 또 다른 마법진이 방 전체를 뒤덮고 새겨져있었는데 느껴지는 마력이 훨씬 거대했다.
- 너희는 정신력의 시련을 선택했다. 그럼 바로 시련을 시작하도록 하지.
그때 안내자가 마력을 일으키더니, 그에 반응한 마법진이 환한 빛을 뿜어냈다.
"······!"
그와 동시에 몸을 비틀거리던 아셸이 곧바로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발동된 마법에 의식이 날아간 것이었다.
반대로 나는 여전히 멀쩡히 서있었다.
다만, 머릿속에서 해일처럼 몰아닥치고 있는 과거의 기억들을 느끼며.
'오······.'
대충 이런 식이구나.
지금껏 살아오며 겪은 모든 괴로운 기억들이 선명하게 스쳐간다.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을 극한까지 증폭시킨다.
하지만 썩 평탄하게 살아왔던 내 겜창 삶에 별다른 난항이 없었던 건 둘째치고, 역시 제왕의 혼 때문에 정신에 영향은 없었다.
그저 신기함만을 느끼며 스쳐가는 기억들이 끝나가는 걸 느끼고 있는데, 다음으로 이어진 건 알 수 없는 기억들이었다.
"······?"
······뭐지, 이건?
내가 어둡기 그지없는 피를 흘리며 죽어라 도망치고 있었다. 어떤 추적자들에게 쫓겨서.
불타는 마을, 절규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멍하니 서있는 나······.
알 수 없는 기억들에 혼란을 느끼던 나는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내가 빙의하기 전이 아니라, 진짜 이 몸의 본 주인의 기억이다.
불규칙적이고 엉망으로 얽힌 기억의 파편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도로 가라앉는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지나간 기억들을 되새겼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지나가버린 기억들은 금세 꿈처럼 흐릿해져서 떠오르지 않았다.
- 호, 제법 버티는데?
안내자가 우두커니 서있는 날 보며 끌끌 웃었다.
- 하지만 계속 그렇게 억지로 버티고 있다간 미쳐버릴 것이다. 어서 네 동료처럼 정신을 잃어라. 이건 본래 맨정신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서 극복하도록 마련된 시련······.
"이봐."
나는 녀석의 말을 끊고 말했다.
"지금 걸고 있는 환각 마법, 훨씬 더 강도를 높여서 걸어줄 수는 없나?"
- ······응?
"기억이 다 지나가서 안 떠오르잖아. 잊어버리기 전에 빨리."
녀석이 당황한 기색으로 미친놈 보듯 날 쳐다봤다.
카볼리사의 유적 (3)
알 수 없는 기억들.
혹시나 마법의 강도가 더 세지면 다시금 떠오를까 안내자를 서둘러 재촉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 이, 이미 새겨진 술식을 발동시킨 것뿐이라 강도는 내가 조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니, 그보다 왜 이리 멀쩡하지······?
아, 젠장.
나는 혀를 차며 머리를 긁었다.
이제 완전히 사라져버린 기억들은 아주 찰나의 순간들만 드문드문 남아 머릿속에 맴돌 뿐이었다.
'대체 뭐였지?'
저번에 악티폴에서 경험했던 그 기시감 같은 기억과는 달랐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방금 그건 분명 몸의 본 주인과 관련된 기억들이 맞았을 텐데······.
기억이 여기서 끝나버린 것에 제법 아쉬움이 남았다.
이 몸의 과거를 꼭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빙의한 몸이니 궁금증이 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나는 그나마 남은 흐릿한 기억의 편린들만을 되새기며 생각에 잠겨있다가, 위를 올려다봤다.
- 마법에 오류가 있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하지만 순수한 정신력으로 저항했다는 건 더 말이 안 되는······.
"어이."
내 머리 위에서 빙빙 돌며 정신 사납게 굴고 있는 안내자에게 물었다.
"어쨌든 이걸로 시련은 끝인가?"
- ······.
녀석은 못마땅한 듯 정신파로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내다가, 결국 마지못해 대답했다.
- 그래······ 너는 시련에 통과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우는 또 처음 보는군.
그렇게 굉장히 간단히 끝나버렸다.
제왕의 혼이 있으니 처음부터 예상한 일이었기에 별 감흥은 없었다.
시선을 돌려 쓰러진 아셸을 바라봤다.
나는 통과했지만 그녀도 시련을 극복하고서 깨어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었다. 게임에서는 그랬었으니.
'꼬박 한나절은 걸렸었지.'
게임 속에서 그녀가 시련에 도전했을 때는 지금보다도 낮은 레벨이었었다.
레벨이 높다고 시련에 더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는 건 아마 아닐 거라 생각되지만, 어쨌든 조건이 더 나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제 남은 건 그냥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뿐이다.
나는 아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바닥에 널브러져있는 그녀를 뒤집어 똑바로 뉘인 다음, 도로 구석 벽면으로 이동해서 털썩 등을 기대고서 앉았다.
그 광경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던 안내자가 내게 물어왔다.
- 정말 특이한 인간이 들어왔군. 시련에 대해서 더 물어볼 건 없는 건가? 네 동료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내 태도가 태연한 게 희한하게 비추는 모양이었다.
녀석으로서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우연히 유적에 들어온 모험자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나는 시련에 통과했으니 네가 말했던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나?"
- 으음, 그래. 하지만 네 동료까지 결과가 나온 다음이다 너 혼자서 이곳을 벗어나면 시련은 무효다.
당연히 내가 아셸만 두고 나 혼자 나갈 리가 없었다.
그보다는 만약 그녀가 시련에 통과하지 못할 경우도 대비해야 되는데······.
"이 공간을 벗어나면 환각 마법의 효과도 풀리는 건가?"
- 그렇지.
"그럼 내가 아직 통과 못한 동료를 억지로 데리고 나가면 규칙 위반인가?
- 물론 위반이다! 일단 시련에 도전하면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 그럴 경우에는 내가 직접 제재할 것이야.
안내자가 단호히 소리쳤다.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녀석의 레벨을 바라봤다.
[Lv. 83]
상당히 높은 레벨.
녀석은 영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단순한 영혼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러면 눈에 보일 리가 없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봐서 마력이 섞여있었는데······ 아무래도 대현자의 마법이겠지.
힘의 원천이 자연의 기운이 아니라 마력일 뿐이지, 정령 비스무리한 게 아닌가 싶었다.
'아마 싸우면 마법으로 싸우겠지?'
아셸이 시련에 실패하고, 바깥으로 탈출하는 일에 방해받으면 그때는 싸워야 할 것이다.
방어막 같은 걸 펼치면 곤란하니 전투가 벌어지면 기습 공격으로 소멸시키는 게 최선일까.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내자는 근엄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심심한데 이야기나 하지."
- 이야기? 흠, 좋다. 말상대 정도야 해주지.
말을 그렇게 하지만 자기가 더 들뜬 기색이었다.
아까 처음에 반응도 그렇고, 여기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혼자서 박혀있었을 테니 뭐.
어쨌든 이렇게 조금이라도 친해져서 방심을 쌓아두면 나중에 필요할 때 기습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었다.
물론 대화할 상대가 녀석밖에 없으니 정말로 심심해서 말을 거는 것도 있었지만.
- 마지막 도전자는 체감 상으로 100년도 넘게 전에 찾아왔었지. 총 5명이었는데 그들은 무력의 시련에 도전해서 전멸했다.
- 지금 시대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위대하신 카볼리사 님께서는 당대에 그 누구보다도 위대하셨던 마법사······.
······하지만 녀석의 어마무시한 수다량에 금세 질려서 입을 다물게 되었다.
고대 시대에 대한 정보나 좀 캐볼까 해도 그닥 쓸모있는 정보도 없었고.
그런 식으로 시간이 흘렀다.
나는 챙겨왔던 식량을 조금씩 먹으며 아셸의 상태를 살폈다.
지금쯤 그녀가 환상 속에서 무슨 일을 겪고 있을지는 잘 알았다.
괴롭고 고통스럽겠지만 결국 성장을 위해서는 전부 마주하고 극복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
폭풍우와 천둥번개가 몰아치는 밤.
억센 빗줄기를 뚫고 산길을 달리는 한 여인이 있었다.
아셸은 손에 잡고 있는 동생의 손을 꽉 붙잡고서 검을 휘둘렀다. 사방에서 덤벼오는 괴한들을 베어넘겼다.
그 처절한 도주 속에 다다르는 종착지는 언제나 똑같았다.
벼랑 끝에 다다라서야 발을 멈춘 아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폭우에 잔뜩 불어난 강물을 내려다보다가, 뒤를 돌아봤다.
창을 든 괴인 하나가 이쪽을 향해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으아아아!"
이게 대체 몇 번째인가.
아셸은 괴성을 내지르며 놈을 향해서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일 뿐이었다.
투욱.
언제나처럼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자신을 절벽 아래로 밀어낸 동생의 씁쓸한 미소만이 또다시 마지막으로 비출 뿐이었다.
첨벙!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아셸은 더 이상 허우적거릴 힘조차 없었다.
몇 번, 몇십 번, 몇백 번이고 반복되는 이 상황에 그녀는 의문을 느끼지 못했다. 덧없는 꿈처럼, 끔찍한 악몽처럼.
그저 끔찍한 괴로움에 서서히 무너져가는 마음만을 느끼며 다시금 학살의 현장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도망쳐라, 아셸! 뒤돌아보지 말고!"
아버지가 죽은 어머니를 품에 안은 채 울부짖었다.
아셸은 또다시 동생을 데리고 도망쳤다.
또다시 괴한들의 손에 학살당하는 일족들을 내버려두고 도망쳐, 또다시 벼랑 끝에 내몰렸다.
또다시 절벽 아래로 홀로 떨어진다. 또다시 서늘한 창날이 동생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또다시, 또다시, 또다시.
"······."
아셸은 어느 순간에서야 이것이 전부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그저 7군주와 함께 어떤 유적을 찾았고······ 영문도 모른 채 시련이라는 것에 도전했다는 것을, 현실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게 바로 그 시련일까?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위한 시련이란 말인가.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다. 어차피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데, 심지어 이 환상 속에서조차 자신은 무엇 하나 못 바꾸고 있었다.
"으······."
그 사실이 너무 비참해서, 아셸은 눈물을 쏟아냈다.
무정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걸어오는 창성이 보였다.
손을 붙잡고 있는 동생이 당황하며 오열하는 그녀를 돌아봤다.
"언니, 왜 그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어서······."
그래,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겠지.
현실로 돌아간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건 복수밖에 없겠지. 죽은 가족도, 죽은 일족도 살아돌아오지 않겠지.
세상에 남은 건 정말로 나 혼자뿐일 수도 있겠지.
'무엇이 됐든 네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끝내 마음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몰리고 나서야, 아셸은 비로소 모든 걸 인정할 수 있었다. 모든 걸 확실히 할 수 있었다.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지만 더 이상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터억.
아셸은 자신을 밀어내려는 동생의 손을 붙잡았다.
그 팔을 잡아당겨 품에 꼭 안았다.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
"그러니까······ 이제 그만 가."
당황하며 품을 벗어나려고 하던 동생의 발버둥이 뚝 멈추었다.
아셸은 한참이나 더 그녀를 안고서 있다가 천천히 몸을 뗐다.
동생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전보다는 조금 덜 슬프게, 그리고 조금은 덜 씁쓸하게.
스르륵.
동생의 몸이 신기루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아셸은 얼굴에 뒤섞인 눈물과 빗물을 닦아내고서 앞을 바라봤다. 그곳에 우두커니 창성이 서있었다.
주위의 풍경이 바뀌었다. 절벽에서, 아무것도 없는 끝없는 어둠으로.
검을 쥔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아셸은 그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5번의 합이 오가고, 바로 그 다음 순간 아셸의 목이 창날에 날아갔다.
어둠이 몰아치고 시간이 역행한다.
순식간에 죽어버린 아셸은 다시금 멀쩡한 상태로 창성과 마주 보고 섰다.
그녀는 또다시 덤벼들었고, 이번에는 세 합조차 버티지 못하고 심장이 꿰뚫렸다.
"커흑······!"
강하다.
이전에 어스힐의 연회에서 싸웠던 것과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무위.
그녀 역시 그날의 결투를 기점으로 한 차례 크게 성장했지만, 여전히 격차는 아득했다.
이것이 바로 창성의 전력이고, 놈과 자신 사이의 진실된 간격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환상, 자신의 기억 속일 뿐일진데, 놈의 존재는 대체 무엇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거란 말인가? 무의식? 상상?
자그마한 의문이 일었지만 무엇이 됐든 아무래도 좋았다.
아셸은 무감정한 눈으로 눈앞의 창성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또다시 덤벼들었다.
수십 번의 결투, 그리고 족히 수백 번의 합이 오갔다.
아셸 역시 그만큼이나 죽고 부활하기를 반복했다.
어차피 죽어도 끝이 아닌 이 환상 속에서 목숨을 거리낄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점점 적응했다. 투지와 감정을 최소한으로 가라앉히고 차분히 관조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싸우면서도, 마치 제3자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둘 사이의 전투를 살폈다.
움직임 하나하나를 뜯어살피고, 머릿속에 각인했다. 필요하다면 다시 덤벼들어 동작을 재현했다.
그 끝없는 반복 속에서 마침내 하나씩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벽을 허물었다.
파악!
3056번째 죽음.
아셸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가 다시금 재생했다.
놀랍게도 창성의 팔에도 희미한 핏자국이 있었다. 그녀의 검이 스친 상처였다.
'부족해, 아직······.'
얼마나 놈과 가까워져야, 어느 경지까지 도달해야 이 시련이 끝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셸은 아직 끝이 가까워지지 않았기를 바랐다.
비록 이 환상 속에서라도 놈을 넘어서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검을 휘두를 수 있기를.
***
반나절 정도가 흐르고 처음으로 아셸에게서 변화가 나타났다.
그녀는 여전히 죽은 듯 누워있었지만 머리 위에 떠있는 레벨이 말이다.
[Lv. 86]
1레벨이 올랐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레벨이 올랐다는 건 그녀가 환영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무사히 시련을 헤쳐나가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그녀의 레벨은 1레벨이 더 올라 87레벨이 되었다.
비정상적인 속도였으나, 거기서 멈춘 다음 또 한참 동안이나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한나절 정도가 더 흘렀을까.
"······?"
멍하니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금껏 미동도 없던 아셸의 몸이 미약하게 움찔거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Lv. 90]
······87에서 한 번에 도약해, 마침내 80의 벽을 깨고 90에 다다라있는 레벨이 보였다.
게임에서도 그녀가 시련을 극복하고 도달했던 것과 동일한 레벨이.
- 오호······.
안내자의 나지막한 감탄사가 울렸다.
이내 천천히 아셸의 두 눈이 뜨였다.
몸을 일으킨 그녀는 차분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할 말을 정해둔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물었다.
"전부 극복했느냐?"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슬픔과 기쁨, 공허함과 성취감, 그리고 미련과 후련함.
온갖 상반된 감정들이 뒤섞인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 것 같습니다."
카볼리사의 유적 (4)
정신을 차리고 난 뒤 아셸은 분위기 자체가 조금 변한 느낌이었다. 평소보다도 더 정적으로.
그것이 90레벨에 도달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시련 속에서 어떤 심경의 변화를 크게 겪은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나쁜 방향으로 나아간 것 같지는 않았기에 나는 조금은 안심했다.
- 둘 모두 환영 속에서 벗어났으니 시련은 끝이다.
안내자가 그렇게 말하며 한쪽으로 이동했다.
막혀서 아무것도 없는 벽이었는데, 녀석이 마력을 일으켜 무언가를 하는 듯하자 곧 변화가 나타났다.
쿠구구.
벽이 갈라지더니 서서히 양옆으로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와 아셸은 그 안쪽에 드러난 광경을 바라봤다.
짧게 이어진 통로 끝에 마법진이 있었고, 그 가운데 지팡이가 하나 박혀있었다.
언젠가 게임을 플레이하며 한 번 봤었던 공간.
아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큰 분기점이 될 공간.
기억 속의 그 희미한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조금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 시련에 통과했으니, 말했던 대로 너희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 대가가 뭐인지야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묻지 않았다.
나는 아셸을 한 번 쳐다보고서 안내자의 뒤를 따라서 지팡이를 향해 이동했다.
아셸도 의문이 섞인 기색으로 내 뒤를 따랐다.
- 자, 그럼······.
우리 둘이 지팡이 앞에 서자 안내자가 다시금 마력을 일으켰다. 방금 전보다 훨씬 거대하게.
황금빛으로 넘실거리는 마력이 고요하게 휘몰아치고 마법진이 번쩍였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문득 허공을 쳐다봤다. 안내자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사아아아.
거대하게 격동하던 마력이 지팡이로 모두 흡수된 건 한순간이었다.
잠잠해진 주변, 곧 지팡이에서 희미한 형체가 스멀스멀 떠올랐다.
안내자와 같은, 하지만 외모는 달리 젊은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는 반투명한 영체가.
대현자 카볼리사.
고대 마법 황금기의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위대한 마법사.
그녀가 몽롱한 눈빛으로 나와 아셸을 한 차례 번갈아 훑어봤다.
- 하아······ 이제서야 통과자가 나온 건가? 세월이 대체 얼마나 흘렀길래 마법이······.
한탄하는 듯한 목소리가 가장 먼저 머릿속에 울리고, 말이 이어졌다.
- 반갑다, 모험자들아. 난 이 유적을 제작한 마법사인 카볼리사 오빌트라고 한다.
"······."
"왜 아무 대답이 없는 것이냐? 내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너희도 너희의 소개를 해보거라.
그에 눈만 깜빡이고 있던 나는 짧게 입을 뗐다.
"론이다."
신기하다는 듯 대현자를 바라보고 있던 아셸도 이어서 대답했다.
"아셸입니다."
조금 못마땅한 기색의 대현자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 뭐, 좋다. 나도 바깥에 대해 궁금한 게 많지만 시간이 얼마 없구나. 이곳까지 와서 나를 깨웠다는 건 내가 마련해둔 시련에 무사히 통과했다는 의미겠지.
"그래."
- 그에 대한 대가는 나의 지식이다. 지금 내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마법이 다할 때까지, 약 10분의 시간 동안 어떤 질문에라도 답해주마. 원래는 이보다 훨씬 길었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서 마법 술식에 자그마한 오류가 생겼구나. 설마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날 동안 시련에 통과하는 놈이 아무도 없었을 줄이야.
다시 한 번 한탄하듯 말하는 그녀였다.
그녀는 고대의 마법사들 중에서도 특히나 오래 전의 인물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니 이 유적 역시 그러할 것이다.
- 나는 한때 이 세상의 진리에 가장 통달했던 인간이었다. 만약 마법적인 깨달음을 원한다면 그를 도와줄 것이고, 다른 지식을 갈망한다면 그 또한 내가 아는 선에서 대답해줄 것이다. 무엇이든 물어보도록.
시간이 많지 않으니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었다.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애초부터 이것을 묻기 위함이었으니.
"백월족에 대해 알고 있나?"
내 물음에 아셸이 흠칫 놀랐다.
대현자가 대답했다.
- 백월족이라, 물론 알고 있지. 마력을 정화시켜 순도를 높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종족이 아니더냐. 내 개인적으로도 연을 맺었던 친우도 몇 있었지.
"이 여자가 그 백월족이다."
나는 아셸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현 시대에 백월족은 어떠한 이유로 거의 절멸당하다시피했다."
- ······흐음?
"알고 싶은 건, 현재 대륙에 살아있는 백월족이 이 여자 외에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하는지의 여부다. 알 수 있겠나?"
대현자가 묘한 눈길로 아셸을 바라봤다.
아셸은 꽤나 당황한 기색으로 나를 돌아봤다.
그럴 만도 했다. 아무리 대현자라고 해도 신도 아니고, 그런 걸 무슨 수로 알겠나 싶을 테니까.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그걸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 꽤 참신한 요구를 하는구나.
"불가능한가?"
- 아니, 불가능하지는 않다. 필요한 조건이 모두 갖춰져있기는 하니.
크게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대현자의 말에 아셸의 두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고 있었다.
대현자가 아셸에게 말했다.
- 네 피가 필요하니 바닥에 몇 방울만 떨어뜨려보거라.
"······예, 예."
아셸이 다급히 칼로 팔에 상처를 내서 피를 흘러내리게 했다.
나는 옆에서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핏물이 작은 웅덩이를 이루었다.
- 간단히 설명해주마. 지금부터 펼칠 마법은 네 피와 같은 뿌리를 지닌 존재를 탐색하는 마법이다. 한마디로 네 동족을 찾을 수 있는 마법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대현자가 마력을 끌어올리며 설명했다.
넋을 놓고 있던 아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걸로······ 제 동족이 얼마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있든 찾아내는 게 가능하다는 겁니까?"
- 본래라면 불가능하지. 아무리 방대한 마력을 품고 있다 한들 대륙 전체 범위에 걸친 탐색 같은 게 가능할 리 있나.
"그러면 어떻게······?"
-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신비들 중 하나를 마법과 결합하면 아주 잠깐 동안은 가능하다. 그 부분은 설명해봐야 어차피 알아듣지 못할 테니 그냥 그렇게만 알도록.
아셸이 입을 꾹 다물었다.
말마따나 그녀에게 중요한 건 마법의 원리 따위가 아니라, 정말 살아있는 동족이 존재하는지의 여부였으니.
우우웅.
황금빛과 흑색의 기운이 뒤섞여서 아셸이 흘린 핏물에 깃들었다.
하나는 대현자의 마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힘이었다. 아마 대현자가 말한 신비이리라.
곧 핏물 바로 위의 허공에 반투명한 구체가 나타났고, 구체 안에서 꿈틀거리던 마력이 화살표를 그렸다.
아셸이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켰고, 나 역시 다른 의미로 조금은 긴장하며 가라앉은 눈으로 결과를 지켜봤다.
솔직히 나도 아주 조금은 혹시나 싶은 마음이 있었다.
게임에서야 아셸을 제외하고 살아남은 생존자가 아무도 없었다지만, 만에 하나 여기서는 다를 수 있는 거였으니까.
당연히 나 역시도 그 아주 작은 가능성이 존재하기를 마음 깊이 바랐다. 하지만······.
스르륵.
고장난 나침반처럼 사방으로 어지럽게 회전하던 화살표가 도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작은 기대는 배반당했고, 당연한 결과가 나왔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 아셸은 대현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 흐음······.
작게 고개를 끄덕인 대현자가 말했다.
- 존재하지 않는다.
"······예?"
"이 대륙에 존재하는 백월족은 널 제외하고서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결과가 그렇게 나왔군.
그 말을 들은 아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허공에 떠있는 구체를 멍하니 바라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살아남은 동족을 찾는 것.
그건 아셸이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이었을 것이고,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로써 전부 끝났다.
여기까지 다다르고 나서야 나는 조금 뒤늦은 후회를 했다. 너무 서두른 건 아니었을지.
너무 메인 스토리에 휘둘려 그녀의 현재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아직 감당하기 버거운 고통을 던져준 건 아닐지.
"······."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셸의 표정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슬픔도, 부정도, 분노도,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서, 더없이 씁쓸한 눈빛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렇습니까."
한편으로는 후련한 감정마저 느껴지는 담담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대현자에게 물었다.
"······결과가 틀릴 가능성은 만에 하나라도 없나?"
"없다. 마법은 완벽하게 펼쳐졌다. 원한다면 다시 펼쳐줄 수야 있지만, 결과가 변할 일은 없을 거다."
대현자가 아셸을 돌아보며 말했다.
- 유감이다, 백월족의 아이야. 네 일족이 어째서 절멸한 건지는 모르겠다만······.
아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마법을 펼쳐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셸은 대현자가 말해준 진실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차분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기에 나는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그녀 역시 살아남은 일족의 존재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 해도, 이제는 일말의 희망조차 사라지고 완전히 확정된 것이 아닌가. 이 세상에 백월족은 자신 혼자 남았다는 사실이.
어쩌면 시련 과정에서 마음을 확실히 다잡은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어쨌든 잘된 건가.'
뭐, 이 정도면 잘 풀린 거겠지.
나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은 거냐."
아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습니다."
"······."
"정말로 괜찮습니다, 론 님. 그저 조금 마음이 허할 뿐입니다. 이 대륙의 마지막 백월족이 저라는 것이, 이제 더 이상 일족이 맥이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그때 대현자가 끼어들었다.
- 일족의 맥이 이어지지 않는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예? 그야 이제 대륙에 남은 백월족은 저뿐이니까······."
의아한 듯 아셸을 바라보던 그녀가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 아······ 혹시 몰랐던 건가? 백월족은 인간과 이종 간 생식이 가능한 종족이다.
"······예?"
- 백월족이 인간과 생식하여 자손을 낳으면 절반의 확률로 백월족이 태어난다. 이 세상에 남은 백월족이 너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후손을 남기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거다.
아셸이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 그렇게 네가 인간 남성과 생식하여 백월족을 낳고, 네 자식들이 또 다른 인간과 생식하여 백월족을 낳고, 그 후손들이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백월족의 핏줄을 계속해서 이어나간다면······ 뭐, 다시 번성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릴지라도, 적어도 네 일족의 맥이 끊기는 일은 없겠지. 이해했느냐?
"······."
- 그러니까 인간 남성을 찾아서 혼인한 다음 최대한 많은 자손을 남기거라. 네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그것뿐이다.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아셸이 작게 중얼거렸다.
"······인간 남성."
그리고는 나를 슬쩍 쳐다봤다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게······ 죄송합니다."
뭔 소리야.
나는 왜 저러나 싶다가 이내 신경을 끄고 대현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나도 하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대현자."
- 음?
"혹시 다른 차원의 세상에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나?"
카볼리사의 유적 (5)
그저 하나의 게임에 지나지 않았던 이곳 라키로니아 대륙.
본래의 현실 세계였던 지구.
내가 지금의 몸, 게임 속 캐릭터가 되어버린 빙의 현상은 모든 것의 시작이자, 현재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가장 큰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선 당연히 지금껏 누구에게도 관련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아무 의미도, 이득도 없는 짓이었으니.
하지만 과연 대현자라면 어떨까?
나는 아주 자그마한 기대를 품고서 처음으로 그에 대해 질문했다.
- 다른 차원의 세상?
"그래, 이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법칙과, 다른 문명이 존재하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너는 그런 이세계의 존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실이 있나?"
내 물음에 대현자는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 글쎄······ 잘 모르겠군. 다른 차원의 세상이라, 적어도 유의미한 근거가 있는 범위 내에서 내가 그에 대해 가진 지식은 없다.
"조금도 아는 게 없다는 건가?"
- 그렇다. 몇몇 머저리들이 내세운 비슷한 가설을 몇 번 들어본 기억은 있지만, 그거야 전부 근거 하나 없는 허무맹랑한 공상의 영역일 뿐이지.
······허무맹랑이라.
역시 아무리 대현자라도 답을 얻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나는 질문을 조금 바꿨다.
"그러면, 혹시 내 존재에 대해 어떤 이질감이 느껴지지는 않나?"
나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건너온 존재이니 그에 대해 무언가 느껴지는 게 있지 않을까.
이 역시 별 기대는 하지 않고 물은 것이었지만, 대현자가 날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대답했다.
- 그러고 보니······.
"······?"
- 음, 그저 기분 탓이라 여겼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알겠군. 네 영혼에서는 무언가 미묘한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해. 영혼은 내가 생전에 가장 깊게 파고 들었던 학문 중 하나이기에 알 수 있다.
"괴리감?"
- 그래, 혼이 육체와 묘하게 맞물리지 않는 듯한 그런 괴리감 말이다.
맥을 정확히 찌르는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영혼과 육체가 맞물리지 않는다.
그건 생각할 것도 없이 내게 일어난 빙의 현상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 그래서라니? 그저 그런 감각이 느껴진다는 게 전부다. 원인을 묻고 싶은 거라면 그 또한 나는 알 방도가 없다.
순간 조금 흥분했다가 도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래, 다른 세계의 존재에 대해서도 모르는데 이거라고 관련된 정보를 더 캐낼 수가 있겠나.
그래도 그나마 얻은 수확이 있다면, 내게 일어난 빙의 현상이 파고들 방법이 아예 없는 미지의 영역은 아니리란 희망이었다.
'육체와 영혼의 괴리감이라······.'
그때 묘한 눈길로 날 쳐다보던 대현자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 했다.
- 설마 싶지만, 너는······.
파아앗!
그러나 그 순간, 바닥의 마법진이 밝게 빛나며 대현자의 형체가 어그러졌다.
서서히 희미해지는 그녀가 자그마한 탄식을 흘렸다.
- 벌써 시간이 다 된 모양이군. 아쉽지만 대화는 여기까지다, 모험자들이여.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이제 완전히 소멸하는 건가?"
- 그렇다. 애초에 죽은 육신에서 마법으로 영혼만 간신히 붙잡고 있었던 것이니.
시간이 많다면 좀 더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아쉬움을 느끼며 서서히 사라지는 그녀를 응시했다.
- 이 지팡이를 포함해서 유적에 남은 물건들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챙겨가도 상관없다. 그럼······.
이내 그녀의 영혼은 완전히 사라져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나는 빈 허공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지팡이에 손을 가져갔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당연히 챙겨갈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바닥에 끝부분이 박힌 걸 뽑아내고 살펴봤다.
'대현자의 지팡이.'
자세한 설명도 해주지 않았지만 게임을 플레이했던 나는 이 마법 아이템에 담긴 능력들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마법사이기는 커녕 마력 한 톨도 없는 내게는 쓸모도 없는 물건이긴 했지만.
어쨌든 대현자가 생전에 사용했던 만큼 굉장히 훌륭한 아이템이니, 나중에 누구에게라도 주면 될 것이었다.
리곤이 마법에도 재능이 뛰어나다니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하면 녀석이 쓰게 하든가.
"······."
지팡이를 챙기고 아셸을 돌아봤다.
그녀는 아까부터 조금은 넋을 놓고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역시 충격이 큰 것일까, 아니면 대현자가 했던 이야기 때문일까. 어느 쪽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긴······ 당혹스럽기야 하겠지.'
아까 대현자가 했던 이야기는 꽤나 터무니없으면서도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어쨌든 이제 이 세상에 남은 백월족은 아셸 한 명뿐이었고, 그녀의 어깨에 일족의 명운이 걸린 것과 마찬가지가 됐으니까.
내가 그녀 입장이었어도 참 황당하면서 마음의 짐이 무겁게 느껴졌을 것이었다.
선택은 스스로의 몫이겠지만 그녀 성격에 일족의 맥을 이대로 영영 끊기게 둘 리는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대현자의 조언대로 사랑하는 인간을 찾아 백월족의 피를 이은 자손을 남기면 되는 일이었으니.
"아셸."
이름을 부르자 아셸이 다시금 움찔 놀라며 날 돌아봤다.
"예, 론 님."
······어째 아까부터 반응하는 게 좀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담담하게 물었다.
"이제부터 무엇을 할 것이냐."
이제 그녀가 더 이상 내 곁에 남아있을 이유는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살아남은 일족이 없다는 건 확실히 깨닫게 되었으니까.
물론 이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이렇게 차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에 안도감이 더 컸다.
이제부터의 선택은 오로지 그녀의 몫이었고, 이대로 내 곁을 떠나겠다고 해도 말릴 생각 따윈 없었다.
"처음에 네가 내 호위가 되었던 건, 대륙에 네 명성을 알리게 해주겠다는 설득 때문이었지."
조금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더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 같구나. 너는 이로써 살아남은 동족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고작 1년 남짓한 시간에 굉장한 성장 또한 이루었다."
"······."
"전에 말했던 대로, 무엇이 됐든 네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이대로 내 곁을 떠나도 좋다. 그것이 복수를 위해서든, 혹은 대현자의 말대로 일족의 맥을 잇기 위해서든······."
아셸은 한참이나 입을 열지 않고서 침묵했다.
나는 묵묵히 대답을 기다렸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당연히 나도 마음속으로는 아셸이 떠나가는 걸 바라지 않았다.
90레벨씩이나 되는 무력을 갖췄으면서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인재가 그녀 말고 이제 또 어디에 있겠는가.
심지어 여기서 더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것도 게임을 플레이한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그만큼 그녀를 존중하기에, 선택을 온전히 스스로의 의지에 맡기게 하고 싶을 뿐이었지.
한참의 침묵 끝에 아셸이 입을 열었다.
"혹여, 저를 더 곁에 두고 싶지 않으신 거라면 솔직히 말씀해주십시오. 그렇다면 기꺼이 떠나겠습니다."
"······."
"하나 그런 게 아니라면, 정말로 저를 배려해주시는 것뿐이라면······ 송구스럽지만 부족한 능력으로라도 계속 곁에 남아있고 싶습니다."
목소리 끝이 미미하게 떨려나왔다.
긴장을 해야 할 건 나인데, 오히려 그녀가 어떤 말이 돌아올지 몰라 긴장한 기색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알 수 없는 유적으로 끌려와 시련에 도전했고, 또 일족의 진실 또한 알게 되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는 듯 내 이상한 행동에 많은 의문이 들 법도 했지만, 그녀는 내게 무엇도 묻지 않고 그렇게 답했다.
'······제법 긴 시간이기는 했지.'
나는 속으로 환희와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생각했다.
혹시 계속해서 남아있겠다고 하는 이유가 내게 느끼는 은혜나 부채감 때문이 아닐지.
실제로 내가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상황들은 제법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까지 구태여 묻지 않은 건 마지막 남은 작은 이기심이었다.
"내가 너를 곁에 두고 싶지 않아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
"그러니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
내 대답에 아셸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염려했지만 그녀는 결국 내 곁을 떠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이로써 마음에 걸렸던 일들은 한 번에 모두 해결되었다.
"······단지,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때 아셸이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론 님께서는 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행동하시고 있는 건지, 저의가 궁금합니다."
지금껏 그녀가 내게 한 번도 물은 적이 없던 부분이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아니었지만, 참으로 애매한 질문.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대륙의 평화다."
"······."
"왜, 믿기지 않나? 아니면 너무 단순한가?"
물론 스스로도 알았다.
뭔 용사도 아니고, 이게 칼데릭의 군주가 입에 담기에 전혀 어울리는 말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거짓이 섞인 말은 아니었다.
내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일단 결국 이 세상부터 구하고 봐야 됐으니까.
눈을 깜빡이던 아셸이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뜻이 그러시다면 저도 기꺼이 함께하겠습니다."
그래, 나야 고맙지.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일족의 피를 잇는 문제는 어쩔 셈이냐?"
"······예?"
"다행히 인간과도 자손을 남길 수 있다고 하니 말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봤는지 묻는 것이다."
아셸은 이제 세상에 남은 유일한 백월족이니, 까딱 그녀가 잘못되면 백월족의 맥은 영영 끊기는 것이었다.
그녀가 계속 내 곁에 남아있겠다고 결정한 게 기쁘기는 했지만, 한 종족의 명운이 걸린 문제였기에 솔직히 나도 한편으로는 염려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 음······."
어째서인지 아셸의 얼굴이 조금 붉게 물들었다.
그녀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슬쩍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고서 대답했다.
"······백월족의 피는 당연히 무슨 일이 있어도 끊기게 두지 않을 것이지만, 아직 좀 더 신중히 사려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
피를 잇는다고는 해도 마땅한 상대도 없는 마당에 그녀도 여러모로 심란하기는 할 것이다.
앞으로 함께할 반려를 찾는 일이 서두른다고 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혹여 마음에 차는 상대가 생긴다면 얼마든지 말해라. 성심껏 도와줄 터이니."
"······예에."
"그럼 이만 나가지."
이 유적에 볼일은 이제 끝이었다.
나는 그대로 들어왔던 입구로 빠져나가려다가 걸음을 멈췄다.
혹시나 챙긴 지팡이 말고 또 다른 아이템이 있진 않으려나 생각이 들었기에, 유적을 좀 더 살펴보기로 했다.
'······딱히 별 거 없네.'
하지만 30분 정도 살펴본 끝에 딱히 챙겨갈 물건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뭐 아이템이 아니더라도 마법서라도 있으면 일단 챙겨가긴 했을 텐데 그런 것조차 없었다.
유적에 남은 물건들은 얼마든지 챙겨가도 좋다고 선심 쓰는 것처럼 말하더니, 뭐가 있지도 않네. 뭐 유산도 안 남겨뒀나?
어쨌든 그렇게 간단한 탐색을 마치고 바깥으로 나갔다.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해가 중천에 떠있었는데, 벌써 저문 해가 도로 떠올라서 동이 트고 있었다.
나는 잠시 노을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한쪽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다가 날 발견하고서 부스스 일어나는 띠용이의 모습이 보였다.
"가자."
뒤뚱거리며 다가온 녀석의 등에 올라타서 곧장 출발했다.
칼데릭으로 돌아갈 즈음이면 군주 회의가 바로 코앞일 것이었다.
과업
7군주성으로 돌아온 뒤, 군주 회의까지 아주 짧은 시간적 여유가 남았다.
그동안은 얌전히 쉬기로 했다. 다음 계획들을 시작하는 건 일단 회의에 참여한 다음이었으니.
'얘는 그새 또 레벨업했네.'
연무장에서 서로 대련을 벌이고 있는 리프 남매.
나는 리곤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Lv. 29]
저번에 어스힐로 출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23레벨이었던가?
그사이에 또 6레벨이 올라 30레벨이 되기 직전이었다.
카카카캉!
어지럽게 몰아치는 공격을 막아내던 리프가 그만 결투를 끝내려는 듯 순간 가속했다.
리프의 검이 날카롭게 리곤의 검을 위쪽으로 쳐냈지만, 순간 리곤의 검도 꺾이더니 그녀의 검을 흘려버렸다.
자신의 검을 흘려버리고서 역으로 내리쳐오는 검격에 리프가 깜짝 놀라서 발로 리곤을 차버렸다.
그에 공중에 붕 떠서 튕겨나간 리곤이 바닥을 몇 바퀴는 구르다가 멈췄다.
"아야야······."
기습적인 반격에 순간 힘조절이 되지 않은 모양.
10레벨도 넘게 차이나는 상대를 한순간이나마 전력을 끌어냈다는 것부터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괜찮아?"
리프가 쓰러진 리곤에게 당황하며 다가가는 것으로 대련은 끝났다.
레벨이 오를수록 서서히 성장세가 더뎌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이대로면 리곤이 리프의 레벨을 넘는 것도 반 년 내에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리프 남매의 얼굴을 보러 마침 성에 찾아온 굴피로에게도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도시 외곽에 위치한 저택에서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정말로 대단한 여인이더군."
또 저번에 제안했던 대로 알키마스의 공방주도 한번 찾아가서 만나봤다고 했는데, 말하는 걸 들어보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제자로 삼을 셈인가?"
"아니오, 제자는 무슨. 그저 간간이 공방에 들려서 이런저런 조언만 해주고 있을 뿐이오."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것부터 이미 반쯤 사제지간이나 다름없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성내를 산책하며 이런저런 잡생각을 했다.
'대군주가 무슨 일을 시키려나······.'
회의에 불참하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별 의미는 없는 짓이었다.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군주에게는 나중에 따로 회의 내용에 대한 전령이 전달된다고 하니 사실 불참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단지 회의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못한다는 패널티가 있을 뿐이지. 그러니 오히려 참석하지 않아봐야 손해였다.
짐작하건대, 이번 회의에서 대군주가 내게 아무런 일도 시키지 않을 확률은 낮았다.
명령권이 있으니 입을 털거나 해서 빠져나갈 방법도 없었고.
여러모로 참 꺼림칙했지만, 그에 불만을 가지는 것도 이기적이기는 했기에 그러고 싶진 않았다.
군주 자리가 공짜도 아니고 지금껏 누린 권익들이 있는데, 그만큼 능력을 제공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처음부터 원해서 앉은 자리도 아니긴 했지만.
처음 빙의한 때로부터 벌써 1년인가?
나도 지금의 처지에 이제 완전히 적응이 된 듯했다.
솔직히 말하면 마음이 조금은 해이하게 풀어진 감도 있었다.
많은 능력들을 얻었고, 더 이상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위협에 하루하루를 긴장 속에 보내야 하는 처지도 아니었고.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며, 본래 현실이었던 세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되었다.
이대로도 썩 나쁘지만은 않은데······ 라는 마음이 문득문득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심하게 말이야.'
그런 안일함으로 안주하면 끝이다.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 미래에 파멸밖에 없다는 거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갈 길이 한참 멀었고, 아직 시작은 하지도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시간이 흐르고 슬슬 이동할 때가 되었다.
아셸을 대동한 채 띠용이를 타고 빠르게 대군주성으로 향했다.
***
대군주성에는 회의가 시작하기 거의 직전에 딱 맞춰서 도착했다.
회의장에 입장할 수 없는 아셸은 홀에 남겨두고 나는 홀로 회의장으로 향했다.
"······."
복도를 걷는데 우연히 3군주 천궁과 마주쳤다.
그는 어째서인지 복도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진열되어있는 석상 중 하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말없이 이쪽을 돌아본 그가 곧 시선을 도로 거두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회의장이 있는 쪽이었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나도 계속 걸어갔다.
방금 뭘 하고 있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어차피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기에 이해하기는 관둔 채로.
그렇게 도착한 회의장 안에는 아직 1군주 신퇴만이 도착해서 앉아있었다.
"어서 오게, 3군주. 그리고 7군주."
나는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서 내 자리로 다가가서 앉았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 4군주 망자왕이 도착했고, 그 다음으로 육중한 울림과 함께 9군주 거왕이 도착했다.
그렇게 하나둘씩 도착해서 거의 모든 군주들이 모이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대군주와 참모장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도 회의장에 입장하지 않은 건 2군주와 8군주뿐이었다.
나는 뇌후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일부러 참석 안 했나?'
힘을 크게 잃은 마당이니 대군주와 마주하는 건 피하려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 알 바는 아니었기에 이내 신경을 껐다.
"2군주하고 8군주는 불참이고,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
대군주가 손뼉을 치고서 곧바로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의 양상은 이전에 한 번 경험했던 것과 별다를 게 없었다.
차례차례 안건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지고, 대군주는 몇몇 군주들에게 명분에 따라 합당한 일을 맡겼다.
그리고 해당 군주들은 그에 대해 대체로 별 이견 없이 받아들이고 넘어갔다.
대군주가 준비한 안건들이 끝난 뒤에는 몇몇 군주들 또한 개인적인 안건을 꺼내서 추가적인 논의들이 이루어졌다.
나는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대군주가 나한테 뭔 일을 시키려나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있었지만······.
"자, 이번 회의는 이걸로 끝!"
회의는 거기서 끝이었다.
대군주는 끝까지 내게 어떤 일도 맡기지 않은 채로 해산을 알렸다.
'······뭐지?'
나는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이번 회의에서는 뭐라도 내게 일을 시킬 줄 알았는데?
뭔지는 몰라도 1년은 더 꽁으로 벌 수 있는 건가 기대가 차오르던 때였다.
순간 대군주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향해 눈웃음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아, 7군주는 자리에 남아주겠어? 잠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럼 그렇지.
그에 다른 군주들이 의아한 기색으로 대군주와 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회의에서도 꺼내지 않고 굳이 단둘이 나눌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할 테니까.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군주들이 모두 떠나고, 회의장에 남은 건 나와 대군주와 참모장뿐이었다.
곧 그녀가 깍지를 낀 손을 무릎에 올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7군주에게도 개인적으로 하나 맡기고 싶은 일이 있어서 말이야. 칼데릭과 관련된 일은 아니고, 세인테아 쪽에."
"······."
"플라베로스 마탑의 마탑주, 안크 가인데라. 7군주도 그를 모르지는 않겠지?"
상당히 뜬금없는 인물이 튀어나왔기에 나는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플라베로스 마탑의 마탑주?'
세인테아 최고의 마법사 세력, 마탑.
여기서 마탑은 하나의 탑이 아닌 3개의 탑을 두루 일컫는 명칭이다.
그중에 지금 대군주가 언급한 플라베로스 마탑은 본탑이 아닌 2개의 분탑 쪽에 해당하는 마탑이었다.
3명의 마탑주는 세인테아를 대표하는, 대륙적으로 명망이 자자한 대마법사들이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플라베로스의 마탑주라면 특히 내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그쪽에 심어둔 정보원들에게서 근래에 꽤 터무니없는 소식이 들어왔거든. 뭘 것 같아?"
그 말에 설마 싶었다.
대군주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플라베로스의 마탑주, 놈에 대해서 터무니없는 정보라고 할 만한 거리라면 단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플라베로스의 마탑주가 마족에 대한 연구를 비밀리에 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마족을 직접 생포해서 말이야."
······역시 그거였나?
그때 참모장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몇 장의 서류. 방금 대군주가 말한 플라베로스 마탑주에 대한 정보들이었다.
마족 연구에 대한 대략적인 정황, 그에 사용된 물적 자원과 희생된 생명의 짐작 규모, 그 밖에 기타 등등, 제법 세세하게.
나는 적힌 내용을 대충 훑어보다가 대군주를 빤히 바라봤다.
지금 중요한 건 그녀가 어째서 이 이야기를 내게 꺼내냐는 것이었으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그리고 이어진 말은 내 예상을 꽤나 벗어난 것이었다.
"7군주가 그를 죽여줬으면 해. 물론 큰 소란은 벌이지 말고 조용히."
나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암살.
그녀의 말은 한마디로 플라베로스의 마탑주를 암살해달라는 것이었으니까.
"어째서?"
나는 의문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정말로 알 수가 없었으니까. 뜬금없이 이런 일을 요구하는 이유를.
말하는 걸 보면 마족에 대한 연구가 트리거라는 건 알겠는데, 그녀가 그에 대해 신경을 쓰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대군주가 대답했다.
"그야 마족이니까. 욕망에 눈이 먼 머저리들이 어중간하게 건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처리하고 싶은 것뿐이야."
"그러니까, 칼데릭과는 별 관련도 없는 일에 어째서 신경을 쓰는 것인지 묻는 거다."
마족이 위험하기 그지없는 존재라는 건 나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건, 피해를 입어도 세인테아가 입을 일에 어째서 그녀가 신경을 기울이느냐였다.
그러나 그녀는 내 물음에 답하지 않고 싱긋 미소 지을 뿐이었다.
"아직 횟수가 2번 남았지? 7군주의 능력이라면 별로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게임에서도 대군주는 늘 이런 식이었었다.
단 한 번이라도 그 진의나 속마음이 정확히 나온 적이 없었고, 항상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
설마 함정인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뜬금없이 대군주가 왜 날 처리하려고 함정 같은 걸 판단 말인가.
설령 저번 긴급 소집 때문에 이미 날 처리하기로 결심했던 거라고 해도······ 아니, 역시 그럴 리가 없지.
자신의 영역인 칼데릭도 아니고 굳이 세인테아까지 보내서, 그곳에 날 죽일 만큼 치명적인 함정을 마련해두었다? 말도 안 되고 가능할 리가 없었으니까.
'암살이라······.'
어쨌든 목적은 알 수 없었지만 썩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플라베로스의 마탑주는 언젠가 처리해야 하기는 해야 할 빌런이었기 때문이다.
대군주의 말대로 놈이 벌이고 있는 만행 때문에 언젠가 큰 참사가 벌어질 거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결국 나중에 해야 할 일인데, 이왕 시기도 더 앞당기고 대군주에게 남은 명령권도 지우면서 하면 나쁠 건 없지 않겠는가.
문제는 내 능력으로 플라베로스의 마탑주를, 90레벨에 육박하는 대마법사를 은밀히 처리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였다.
그냥 죽여버리는 거야 어떻게든 할 수 있다고 쳐도 암살은 또 다른 영역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차피 거절의 선택지는 없었다.
빠르게 머릿속으로 놈에 대한 정보들을 상기한 뒤,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대군주에게 다시 물었다.
"기한은 언제까지지?"
"딱히 서두를 필요는 없어. 다음 군주 회의 때까지만 결과를 알려주면 돼."
1년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정도나 여유가 있으면 뭐 어떻게든 되겠지.
무구 제작 (1)
회의장에서 나오며 앞으로 할 일들을 정리했다.
계승자 찾기, 그리고 마탑주 암살.
둘 중에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결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일단 마탑주 처리부터.'
긴 시간이 주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여유를 부려서 좋을 것도 없는 일이었다.
뭘 어떤 식으로 처리해야 할지 계획한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혹여 제시간 내에 해결하지 못했다가는 내 능력을 의심받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건 좀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계승자 찾기는 다른 데에 신경 분산될 일 없이 잡일들을 전부 끝내놓고 시작하는 편이 나으리라.
'그래도 신비부터 가장 먼저 챙기는 게 낫겠지?'
세인테아에 숨겨져있는 2개의 신비.
그거야 뭐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으니 찾아두고 시작하는 게 나을 것이었다.
마탑주를 처리하는 일에 혹시나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거고 말이다.
그러면 우선 신비를 찾고, 다음으로 마탑주를 처리한 다음에, 본격적으로 계승자 찾기를 시작하면 되겠······.
"······?"
나는 저멀리 보이는 인물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띠용이가 기다리고 있는 자리에 신퇴가 서있었기 때문이다.
그르릉.
자신의 주위에 있는 신퇴를 경계하듯 연신 낮은 울음소리를 흘리고 있는 띠용이.
그리고 신퇴는 거리를 둔 채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런 녀석을 구경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곧 내게로 시선을 돌린 그가 말을 걸어왔다.
"대군주와 이야기는 잘 마쳤는가?"
······날 기다리고 있었나?
딱히 그와 나눌 만한 말은 없었기에 뭔 용건인가 싶었다.
나는 대답 없이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대군주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고 있나?"
"모르네. 별다른 의미가 아니라 그저 인사차 물은 것이야."
고개를 저은 신퇴가 물었다.
"조금 묻고 싶은 게 있어 기다리고 있었네. 저번에 자네가 참여한 중립국 회담과 관련하여······."
"······."
"듣기로는 어스힐 왕국의 편을 들어 7군주 그대가 전쟁 발발을 막아주었다고 하더군."
갑자기 중립국 이야기가 왜 튀어나오나 싶었지만 나는 순순히 긍정했다.
"그랬지."
"혹시 어스힐을 도운 이유가 개인적인 연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목적인가?"
"······내가 그걸 대답해줘야 할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메인 스토리, 테이르, 여러 이유들이 섞이긴 했지만 그걸 굳이 설명할 이유는 없었다.
그보다 신퇴가 왜 갑자기 거기에 관심을 가지는 거지?
"캐묻고자 했던 건 아니네. 단지 자그마한 노파심이 들었을 뿐이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가 이내 말을 이었다.
"이전에 말했다시피 나는 현 칼데릭의 체제에 균열이 발생하기를 원치 않는다네. 군주들 모두 각자의 생각과 뜻들을 품고 있지만, 그것이 갈등이 될지언정 반드시 충돌의 결과로 이어져야만 하는 건 아니야."
"······?"
"서로 한 걸음씩만 물러선다면 나아가는 방향이 다르더라도 얼마든 공존할 수가 있네. 지금껏 수많은 이들이 군좌를 거쳐가고 군주들 간에 그만큼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칼데릭은 여전히 건재하듯,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지."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
무구 제작 (1)
갸올
말의 맥락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 드워프가 뜬금없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군."
그에 신퇴는 뭐라 더 말하려다가 관두는 기색이었다.
"아니네. 쓸데없는 말이 길었군. 혹여 앞으로 다른 군주와 또 갈등이 생긴다면, 저번에 6군주를 죽였던 것처럼 과격한 방식으로 해결하려 들지 않기를 바라겠네. 이미 대군주와 한 약속이 있으니 7군주 그대가 알아서 하겠지만······."
그의 시선이 문득 내 뒤에 서있는 아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백월족의 핏줄아,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 말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중립국 회담에서 있었던 일은 전부 전해들은 건지 아셸이 백월족이라는 사실도 아는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아셸이 나를 슬쩍 쳐다보고서 대답했다.
"아셸입니다."
"성은?"
"······그론힐트입니다."
신퇴의 눈에 순간 이채가 서린 듯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꺼운 우연이구나. 가브롬 그론힐트라는 이름을 아느냐?"
······가브롬 그론힐트?
나는 어딘가 들어본 것 같은 그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금세 떠올릴 수 있었다.
게임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었던 아셸의 아득한 선조.
현재 그녀가 불완전하게 익히고 있을 백월족의 비전을 창시한 창시조였으니까.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아셸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벌써 수백 년 전의 이야기군. 네 선조의 생전에 나는 그와 작은 연이 있었다. 한번 내기를 했다가 패배해서 검 한 자루를 제작해준 적이 있었지."
"······!"
이어진 신퇴의 말에 아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역시도 전혀 몰랐던 이야기였기에 조금 놀랐다.
'뭔 소리야, 이게?'
1군주 신퇴와, 백월족의 비전을 창시한 아셸의 선조가 연이 있었다고?
게임에서도 그와 관련된 내용은 전혀 나온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곧 짚이는 부분이 하나 퍼뜩 떠올랐기에, 나는 다시 한 번 놀라며 속으로 작게 탄성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 아셸의 검······.'
게임에서 흑린의 기사로 처음 등장했던 아셸은 지금과 달리 제대로 된 자신의 전용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검신 전체가 완전히 푸른색인 '창섬검'이라 불렸던 명검.
하지만 나는 그녀가 그걸 어디서 얻은건지 지금까지 몰랐다. 왜냐면 설정집에서조차 정보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후에 유저 일행에 합류해 동료들이 물어봐도 그녀는 대답을 피하며 제대로 알려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 검을 제작해준 인물이 바로 신퇴였었던 모양이었다.
대군주성 소속 흑린의 기사에, 선조와의 인연까지 있다면 충분히 아셸에게 무기를 제작해줄 법도 했으니까.
그녀가 흑린의 기사로 있을 때는 이미 자신이 백월족이라는 사실도 당당히 드러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진짜 그런 거였나?'
퍼즐이 딱 맞아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아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말문이 막힌 기색이었다.
뜬금없이 자신의 선조와 연이 있다는 인물이 나타났으니 그럴 법도 했다.
"네 일족이 당한 참변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하마."
신퇴가 말했다.
"어스힐에서 세인테아의 창성과 결투를 벌여 일방적으로 패배했다고 들었다."
"······예."
"한데 지금 보이는 건 전해들은 것과 다르구나. 충분히 그와 전력으로도 어느 정도 자웅을 겨룰 수 있는 경지로 보이는데, 방심한 것인가, 아니면 그 짧은 사이에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것인가?"
그가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에 아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방금의 말은 신퇴가 스스로 입으로 그녀의 경지가 세인테아의 오성에 거의 근접했다고 인정한 것이었으니까.
'이제 거의 근접하기는 했지.'
물론 레벨이 보이는 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현재 아셸의 레벨이 90이고 창성이 91레벨이니, 어느 정도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거라 판단한 신퇴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유적의 시련을 통과하기 전에는 정말로 압도적인 차이였기에 그렇게 일방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나는 아셸을 슬쩍 쳐다봤다가 신퇴에게 말했다.
"1군주."
"······?"
"그녀에게 검을 제작해줄 수 있겠나?"
아셸이 깜짝 놀라서 날 돌아보고, 신퇴도 묘한 눈빛을 띠었다.
저번 긴급 소집에서 신퇴는 벨르바고라의 사체에 대한 대가로, 필요한 장비가 있으면 찾아오라는 말을 남겼었다.
어차피 나야 장비가 필요할 일도 없으니, 이번 기회에 아셸에게 제대로 된 무기를 만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신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네. 7군주 그대 덕분에 저번에 좋은 재료를 얻기도 했으니 갑옷까지 제작해주지. 한데······."
"······?"
"그러면 지금 바로 1군주령에 함께 갈 수 있겠나?"
"······지금 바로? 장비를 제작하는 데 그렇게 시간이 짧게 걸리나?"
"아니, 바로 완성한다는 말이 아니네. 어울리는 무구를 제대로 제작하려면 내 눈으로 직접 살펴봐야 할 것들이 있어서."
그가 그렇게 말하며 아셸을 쳐다봤다.
나도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서 대답했다.
"그럼 그러지."
뭘 본격적으로 만들어주려는 것 같으니 잠시 1군주령에 들르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저, 론 님······."
아셸이 당황하며 날 불렀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무시하고서 띠용이의 등에 올라탄 뒤 말했다.
"어서 타라, 아셸. 1군주령으로 간다."
***
뛰어난 손재주를 지닌 드워프 종족은 보통 대장장이의 종족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현 시대에서 그 정점에 선 인물이 바로 신퇴, 아고르였다.
칼데릭의 군주임과 동시에 누구도 이이를 제기하지 않는 대륙 제일의 명장.
그런 그에게 직접 장비를 제작받을 수 있는 기회는 그 값어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귀했다.
'1군주령 군주성은 처음 보네.'
1군주와 동행하여 금세 1군주령까지 날아왔다.
나는 신퇴를 뒤따라 성의 입구를 통과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가 아닌 여기서 실제로 1군주성을 본 건 처음이었다.
신비를 찾으며 1군주령을 지나쳤을 때는 수도까지 들르지 않았었으니까.
특이하게도 본성 뒤쪽에 그만큼 거대한 건축물이 하나 더 있었는데, 탑이라기보다도 마치 거대한 굴뚝처럼 생긴 건물이었다.
저곳이 대장간이라는 사실은 게임에서도 봤기에 알고 있었다.
대장간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커지고 몸에 닿는 열기가 강해졌다.
안으로 들어가자 그 안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이들은 모두 드워프였다.
신퇴의 등장에도 그들은 가볍게 목례만 할 뿐이지 이내 묵묵히 하고 있던 일에 도로 집중했다.
이전에 6군주령의 악티폴에서 봤던 폭왕과는 완전히 상반된 분위기.
신퇴도 그런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대장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어느 넓은 공간에 도착한 뒤, 신퇴가 아셸에게 말했다.
"한번 검술을 펼쳐보거라."
아셸이 허락을 구하듯이 이쪽을 쳐다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섰다.
스르릉.
검을 뽑아든 그녀가 한 차례 호흡을 하고는, 곧바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빈 허공에 수많은 검격들이 몰아치며 흉흉한 파공음을 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검에 대해 무지한 내가 검술적인 진전에 대해서는 알 방도가 없다.
하지만 저번에 창성과의 결투에서 봤던 것보다 검격이 훨씬 빠르고, 훨씬 강해졌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종족 특질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
한참을 아셸의 검무를 지켜보고 있던 신퇴가 입을 뗐다.
"잠시 기다려보거라."
그렇게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이내 몇 자루의 검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크기나 형태가 제각각 조금씩 다른 검들이었다.
"이번엔 이 검들로 검술을 펼쳐봐라."
아셸은 의아한 기색이면서도 순순히 요구대로 그가 가져온 검들로 다시 검술을 펼쳤다.
내가 보기엔 좀 전과 별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신퇴의 눈에는 뭔가 다른 게 보이는지 진지한 기색으로 아셸의 검무를 모두 지켜봤다.
"됐다. 그만하거라."
그렇게 마지막 검까지 끝난 뒤, 신퇴는 나와 아셸을 데리고서 또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대장간 밖으로 나와 본성에 있는 지하로.
지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자 거대한 창고가 하나 나왔는데, 그 안에는 수많은 광석들이 어둠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푸른빛을 내는 보석부터 찾았다. 게임에서 봤던 아셸의 창섬검이 푸른빛이었으니.
하지만 앞장서서 걸어가던 신퇴는 자줏빛을 뿜어내고 있는 광석 앞에서 멈춰섰다.
"한번 이 돌에 마력을 주입해보거라."
그 말대로 아셸은 돌에 손을 올리고서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자줏빛의 광석이 환한 빛을 뿜어냈다.
그것을 신중한 눈길로 응시하던 신퇴가 이내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훨씬 적합하구나. 한번 다른 것들도 살펴봐야겠다."
무구 제작에 쓸 재료를 정하는 건가?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기에 물었다.
"지금 뭘 하는 거지?"
"무구에 어떤 재료를 사용해야 적합할지 살피고 있는 거네. 무조건 마력에 대한 전도가 높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마력 성질과 얼마나 호응하는지도 중요하니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그냥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퇴는 아셸을 데리고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광석들에 하나씩 마력을 주입했고, 나는 약간 지루한 감을 느끼며 따라다녔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
"······?"
창고 안쪽에 가까워질수록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에, 나는 미간을 좁힌 채 시선을 돌렸다.
무구 제작 (2)
미세하지만 분명히 느껴진다.
마치 질척이는 어둠과 같은 음산하고 흉험한 기운.
나는 초감각을 끌어올려 어둠 너머로 보이는 창고 안쪽을 반쯤 노려보듯 응시했다.
시야에 들어온 건 묵색의 상자였다.
사슬 같은 것으로 둘둘 둘려있는 게 한눈에 봐도 심상치가 않아 보였다. 사슬에서는 마력이 느껴졌다.
그것은 다른 광석들과 떨어져 홀로 구석에 박혀있었는데, 느껴지는 기운의 근원은 바로 저 상자 안에 있는 듯했다.
"느껴지는가? 과연 뛰어난 감각이군."
그때 신퇴가 그렇게 말하며 따라서 창고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셸은 느껴지지 않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 안에 뭐가 있지?"
광석들을 보관하는 창고인 줄 알았는데, 무슨 마법 아이템이라도 들어있나?
아주 희미하게만 흘러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로 기분이 불쾌해질 정도였다.
신퇴에게 묻자 그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순순히 대답했다.
"광석이네. 주위에 보이는 것들과 다를 것 없는."
"······광석이라고?"
"물론 평범한 광석은 아니지. 한번 직접 살펴보겠나?"
신퇴가 걸음을 옮겨서 상자 바로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잠금 장치 같은 것을 간단히 풀어버리고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들어있던 건 그의 말대로 광석이었다.
검은빛 광채를 뿜어내고 있는 광석.
단지 불길하기 짝이 없는 기운을 한가득 띠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지.
뭔 재질로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자 자체가 그 기운을 차단하고 있던 건지, 뚜껑이 열리자마자 기운이 확 강해졌다.
"이건 예전에 마경 옥테아에서 우연히 구했던 것으로, 아직 붙인 이름이 없지만 내가 평생에 본 것들 중 손에 꼽을 정도로 훌륭한 광석이네. 하지만 장비 제작에 사용하기엔 힘든 재료지."
······옥테아에서 구한 거라고?
내가 이전에 가본 적이 있는 할루멘타와는 또 다른 마경이었다.
재료로 사용하기 힘들다는 건 또 뭔 소리인가 하니, 신퇴의 설명이 이어졌다.
"자연에서 생성되는 광물 원석은 온갖 무궁무진한 종류가 존재하지. 그중에는 아주 드물게 단순히 마력 전도가 강한 것뿐 아니라 고유의 특성을 지닌 것들도 있는데, 이건 어떤 원리로 생성된 건지는 알 수 없어도 온갖 영혼 파편들이 뭉쳐져 혼탁한 사념이 깃든 광석이네. 본래 마경이야 온갖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일어나는 장소니 놀라울 것도 없지만."
"······?"
"직접 손을 대보면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걸세."
나는 검은 광석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그 말대로 손을 대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광석 안에 존재하는, 내 의식에 침투해오려 드는 강대하고 사이한 존재감을.
- 끼아아아······!
머릿속에 웃음과 괴성과 섞인 듯한 기괴한 울림이 메아리처럼 맴돈다.
수백, 수천, 수만······ 그 안에서 신퇴의 설명대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념들의 존재가 느껴졌다.
제왕의 혼 덕분에 정신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지만, 보통 사람이었다면 바로 정신줄을 놔도 이상하지 않을 기운.
마치 이전에 혈술을 얻을 때 경험했던 가스칼리드의 혈정을 떠올리게 했다.
"정신 사납군."
내가 별 기색 없이 도로 손을 떼자 신퇴는 사뭇 놀란 기색이었다.
"이 사념 때문에 재료로 쓰는 게 어렵다는 건가?"
"그렇네. 단순히 정신력이 강하다고 해서 버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니까."
신퇴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
무구 제작 (2)
갸올
궁금하다는 듯 광석을 쳐다보고 있는 아셸에게 말했다.
"궁금하다면 손을 대보거라. 네가 이 광석에 깃든 사념을 견딜 수 있다면, 기꺼이 이걸 재료로 사용해 최고의 검과 갑옷을 제작해줄 터이니."
그에 아셸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을 뻗었다.
과연 그녀가 버틸 수 있을지는 나도 궁금했다.
결과는 곧바로 나왔다.
"······!"
광석에 손을 올리자마자 한 차례 헛숨을 들이키더니, 몇 초 지나지도 않아 기겁하듯 손을 떼버렸다.
그 잠깐 사이에 아셸은 귀신이라도 본 듯 창백하게 질린 안색이 되었다.
90레벨까지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저 정도인가?
이 광석에 깃든 사념은 생각보다도 훨씬 위협적인 모양이었다.
"사념만 없앨 방법은 없나?"
신퇴가 고개를 저었다.
"진작 대군주에게도 부탁해봤지만, 광석을 파괴하지 않고 사념만 없애는 건 힘들겠다고 하더군. 단순한 제련이나 마법적인 처리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네."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물끄러미 광석을 쳐다봤다.
문득 생각이 따올랐다.
'······이것도 되지 않으려나?'
추측하기로, 내 즉살 능력은 대상의 영혼 자체를 소멸시키는 능력이다.
그렇기에 이전에 혈정 때도 가스칼리드의 잔여 사념을 없애는 게 가능했었다.
그러니 아마 이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 광석에 깃든 사념 역시 즉살로 없앨 수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게 아닌가?
신퇴가 제 입으로 평생에 본 것들 중 손꼽을 정도로 훌륭한 광석이라 했으니, 만약 이걸 재료로 사용한다면 굉장한 무구가 탄생하지 않을까 싶었다.
아셸이 좋은 무구를 사용할수록 내 전력이 크게 상승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그건 아주 좋은 일이었다.
이전에 긴급 소집 때 봤던, 신퇴가 오리하르콘을 사용해 제작한 최고의 신갑인 '가엘디드' 못지 않을 정도로······ 아니, 그 정도까지는 너무 설레발인가. 아무튼.
"사념에 대한 문제만 해결되면, 이 광석을 재료로 아셸의 무구를 제작해줄 수 있나?"
"그래. 하지만 말했다시피 아직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한 번 광석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즉살을 사용했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서 울려퍼지던 괴성이 한순간에 뚝 끊겨 사라졌다. 광석에서 풍기던 사이한 기운 또한.
생각한 대로 사념이 성공적으로 소멸한 것이었다.
그것을 느꼈는지 신퇴가 의아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지금 무엇을······."
나는 광석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광석에 깃든 사념을 없애버렸다."
"······?"
신퇴가 이게 뭔 소리인가 싶은 기색으로 광석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곧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이리저리 광석을 훑어보다가, 곧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놀랍군. 정말로 사념이 완전히 소멸했어. 방금 무엇을 한 건가?"
여태 차분하기만 했던 목소리에서 약간은 들뜬 기색마저 느껴지는 게, 정말로 놀란 듯했다.
그의 눈에는 그저 광석에 손을 댔다가 떼기만 한 것으로 보일 테니 놀라울 건 당연했다.
"이제 문제가 없는 거겠지?"
신퇴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한 대로 이걸 재료로 써서 무구를 만들어주겠네. 허 참, 몇십 년은 창고에 박아뒀던 애물단지였는데······."
광석의 크기는 상당해서, 아셸 몫의 검과 갑옷 한 벌을 만들고도 절반은 훨씬 넘게 남겠다 싶을 정도로 컸다.
나는 문득 신퇴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물었다.
"그런데, 사용하는 사람과의 성질 호응도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나?"
이 검은 광물은 아셸의 마력하고 잘 맞기는 한 건가?
겉으로만 보면 색이 정반대이니 뭔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가 않은데.
신퇴가 고개를 저었다.
"효율이 어느 정도 비슷한 광석들끼리 그렇다는 거지, 이건 방금 살펴봤던 것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니 상관없네. 마력 전도든 내구성이든 무엇이든."
······뭐, 어련히 알아서 잘 만들어주겠지.
나는 광석에 정신이 팔린 그에게 이것저것 더 묻지 않았다.
창고를 나온 뒤, 우리는 곧바로 떠나기 위해 군주성에서 나섰다.
볼일이 다 끝났으니 더 머무르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무구는 제작이 모두 끝나면 7군주령으로 전령을 보내겠다고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1군주님."
아셸이 신퇴에게 조금 뒤늦은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녀야 의지와 상관없이 반쯤 끌려서 따라온 감이 있었지만, 어쨌든 무려 대륙 제일의 대장장이가 직접 제작한 장비를 받게 된 것이었으니까.
신퇴가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를 배웅했다.
"그럼 살펴 가게, 7군주."
바로 띠용이의 등에 오르려는데, 그가 갑자기 다시 아셸을 불렀다.
"한데, 너는 그론힐트의 비전을 아직 완전히 익히지 못한 것 같더구나."
"예."
"내가 기억하기로 마력의 코어를 3개로 나누는 운용 방식이었던 것 같은데, 맞느냐?"
"······예, 그렇습니다."
일족의 비전을 그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지, 아셸은 조금 떨떠름한 기색이 되었다.
"오해하지 말거라. 모두 네 선조에게 직접 들은 내용일 뿐이니까. 그저 대략적인 원리만 알고 있을 뿐이다."
신퇴가 말했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네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 하나 있어서다. 이미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가 기억을 더듬는 듯 말했다.
"분리된 코어를 각자 별개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로 여기고 제어해라."
"······."
"네 선조가 비전과 관련하여 마지막 벽을 넘기 위한 핵심이라고 했던 말이다."
아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반응에 신퇴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을 보니 알고 있었던 내용은 아닌 것 같구나."
"예······."
"당시의 네 선조는 군주와 비교해도 무색하지 않을 경지를 이룩한 이였다. 너 또한 그의 유산을 완전히 받아들이면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신퇴는 덤덤한 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아셸은 얼떨떨한 눈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나도 조금은 궁금해졌다. 그 아셸의 선조라는 인물과 신퇴가 어떤 사이였던 것인지.
수백 년 전의 아득한 인연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이런 조언을 해주는 것만 봐도, 제법 친분이 있는 사이였던 것 같은데······ 음.
"가자."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입을 열었다.
띠용이가 육중한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쨌든 무구 제작도 맡겼으니, 이제 본래 계획대로 다음 목적지로 향할 때였다.
세인테아에 숨겨져있는 신비들이 있는 장소로.
***
세인테아의 북쪽에 위치한 메마른 광야.
얼굴을 쉴 틈 없이 때리는 건조한 바람에 나는 연신 눈을 비비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식물 하나 없이 주위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칙칙한 바위들뿐인 이곳에 찾아야 할 신비가 있다.
'가속의 신비.'
이름 그대로 속도를 높이는 신비였다.
몸을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는 신비.
몸을 쓸 일이 거의 없는 데다가 이미 공간 도약도 얻은 내게는 거의 쓸모가 없는 능력이었지만, 어쨌든 가진 능력이야 많고 다양할수록 좋은 거니까 이렇게 찾기 위해 왔다.
가속의 신비는 게임에서 내가 직접 발견했던 신비였고, 숨겨진 장소의 지형도 눈에 띄었기에 찾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띠용이를 타고 날아다니며 금세 평원 한가운데 위치한 자그마한 웅덩이와, 그 근처의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어라."
언제나처럼 아셸은 바깥에 남겨두고 홀로 굴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예전에 찾았던 부동 장막의 신비처럼 던전이 위치한 장소였다.
굴 안쪽으로 끝까지 들어가서 주위를 탐색하자 곧 던전의 입구인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
나는 미간을 좁혔다.
누가 먼저 던전 안으로 들어간 듯 문이 활짝 열려있었기 때문이다.
'뭐지?'
초감각을 끌어올려 지나왔던 길을 자세히 훑어보자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흔적들이 있었다.
땅바닥의 쓸림, 희미한 발자국, 누군가 먼저 이 던전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간 흔적들을.
나는 조금 황당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게임상에서, 그러니까 미래 시점에서 나보다 이 던전을 먼저 발견했던 사람은 없었으니까.
무언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대체 왜? 착각이었나? 아니면 내 존재로 인한 나비효과로 생긴 변수인가?
"······."
다시 나온 흔적은 없는 걸 보니 아직 불청객들은 안에 있는 듯했다.
나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열린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여기까지 왔는데 신비가 무사히 남아있는지는 확인해야 됐으니까.
헛수고 (1)
어두운 내리막 통로를 걸으면서 주위를 살폈다.
아무리 초감각이 있어도 빛 한 점 없는 완전한 어둠까지 꿰뚫어볼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챙겨온 발광석에 의지해서 시야를 밝혀야 했다.
아직까지 위험은 없었지만 던전이니만큼 갑자기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는 알 수 없다.
게임에서 내가 직접 찾아냈던 장소이기는 하지만, 워낙에 예전이니 확실히 기억나는 건 많이 없었으니까.
함정보다도 가디언들이 상당히 많은 던전이었다는 것 정도만 대충 떠올랐다.
'여기 던전의 가디언들이 몇 레벨쯤이었더라.'
한 30, 40레벨쯤 됐었나?
그중에 보스 격이었던 놈들은 아마 50레벨이 넘었던 것 같다.
뭐가 됐든 지금의 내게 위험이 될 만한 건 없을 테니 문제는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별 긴장감 없이 계속해서 성큼성큼 나아갔다.
앞선 불청객들의 흔적 또한 끊기지 않고 나아가고 있는 길로 계속 이어져있었다.
일자형 통로가 끝나고 나타난 건 중간이 끊긴 길이었다.
장애물 같은 게 있는 게 아니라, 정말로 절벽처럼 완전히 단절되서 끊긴 길이.
"······."
나는 약간 황당함을 느끼며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동굴 지하에 있기에 썩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지형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입구에 이런 길목도 있었던가?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어 절벽 아래로 던져보니 한참 지나서 작게 소리가 울렸다. 적어도 몇백 미터는 되는 듯했다.
나는 멀리 떨어진 건너편을 바라보다가 공간 도약을 사용해서 건넜다.
근처에 땅바닥이 유독 거칠게 쓸린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착지한 흔적인가?
아무래도 불청객들은 그냥 도약해서 건넌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이동하자 이번에 나타난 건 여러 갈래의 갈림길이었다.
나는 6개로 나누어진 통로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 가장 먼저 들어갔던 통로는 아마 한가운데 통로였었지.
하지만 신비가 어느 통로로 이어진 곳에 있었는지는 기억이 흐릿했다.
통로가 안쪽에서 서로 이어져 같은 자리로 되돌아와 빙빙 돌며 헤맨 기억도 있었기에 헷갈렸기 때문이다.
'결국 맨 오른쪽으로 이어진 통로에서 찾았었나? 아니, 왼쪽이었나······.'
맨 왼쪽 아니면 오른쪽이라는 건 그나마 확신할 수 있었다.
불청객들의 흔적은 왼쪽에서 2번째 통로로 이어져있었다.
나는 이내 맨 왼쪽의 통로를 선택하고 걸음을 옮겼다.
잘못 선택하면 죽는 것도 아니고, 틀렸으면 뭐 도로 되돌아와서 다른 통로들도 확인하면 그만이었으니.
통로 안쪽으로 나아가자 슬슬 인공적인 느낌이 가미된 공간이 나타났다.
사방에 난잡하게 박히고 그려진 마석과 마법진들.
사방의 벽면에 또 다른 통로들이 수십 개가 숭숭 뚫려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또 갈림길인가?
콰아앙!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그때, 갑작스럽게 들어온 입구가 멋대로 닫혀버렸다.
이어서 마석과 마법진들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마력의 기운이 강해졌다.
사방에 나있던 통로에서 수많은 형체들이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그 다음이었다.
쿠웅. 쿠웅.
암석으로 몸체가 이루어진 네발짐승 형태의 가디언들.
어둠 속에서 떼지어 나타난 놈들의 두 눈과 마디 관절들이 푸른 빛으로 빛났다.
레벨은 모두 31레벨이었으며, 그 수가 대충 봐도 수십은 가볍게 넘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이런 공간도 있었던가?
가물가물했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포위하듯 사방을 둘러싼 놈들이 일제히 돌진해왔다. 나는 위쪽 허공으로 순간이동했다.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
헛수고 (1)
갸올
갑작스레 사라진 목표물을 놓친 놈들이 한순간 저들끼리 엉켜서 부딪히다가, 곧 위쪽을 올려다봤다.
몇 놈은 도약해서 나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장막에 막혀서 도로 떨어질 뿐이었다.
'하여간 참.'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들어온 입구는 막아놓고, 도망갈 공간도 없이 가디언들을 무더기로 풀어놓고.
이 정도면 들어오는 놈은 그냥 죽으라고 만든 거나 다름없는 던전이었다.
이 던전을 제작한 마법사는 꽤나 성격이 더러운 놈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퍼어엉!
장막을 해제함과 동시에 아래로 떨어지며 혈술을 펼쳤다.
사방으로 터져나간 핏물이 닭 쫓던 개마냥 위를 올려다보고 있던 가디언들의 몸체를 적셨고, 놈들은 일시에 동작을 정지했다.
사뿐히 바닥에 착지한 나는 우수수 쓰러진 가디언들을 둘러보다가 한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놈들이 튀어나온 통로 중 가장 입구의 크기가 거대한 통로로.
마력의 기운이 유독 거대하게 느껴지는 그곳에서는 아직 아무런 가디언도 튀어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쿠우웅.
곧 육중한 땅울림과 함께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튀어나온 놈들과 다를 것 없이 네발짐승의 형태를 띄고 있는 가디언.
하지만 크기는 그 몇 배는 될 정도로 거대하다.
[Lv. 52]
······그래, 그러고 보니 이런 놈도 있었지.
놈이 이쪽을 향해서 돌진해왔다. 덩치에 전혀 맞지 않는 가공할 속도.
나는 곧바로 혈술을 펼쳐 놈에게 핏방울을 쏘아냈다.
하지만 날아간 핏방울은 놈의 몸체를 두르고 있는 마력 장막에 막혀서 닿지 않았다.
"어."
콰아아앙!
짧은 탄식과 함께 공간 도약을 사용해서 회피했다.
날 대신해서 암벽을 강타한 가디언은 벽면 한쪽을 완전히 무너트리고서 기계처럼 몸을 일으켰다.
나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그런 놈을 바라봤다.
아예 패시브로 방어막을 두르고 있을 건 또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잠깐의 여유를 부릴 틈도 없이 놈이 곧바로 다시 이쪽을 향해서 뛰어들었다.
나는 마치 투우사가 된 기분을 느끼며 부동 장막과 공간 도약을 번갈아 펼치며 공격을 막고 피했다.
'······어쩌지?'
버티며 상대하는 거야 어렵지 않았지만 이래서야 쓰러뜨릴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힐끔 들어왔던 입구의 문을 바라봤다.
은은한 푸른빛이 뒤덮혀서 빛나고 있는 게 마찬가지로 마력 장막이 덮여있는 듯했다.
그럴듯한 방법이 떠오른 나는 통로 바로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개의치 않고 방향을 틀어서 돌진해오는 놈을 공간 도약으로 피했다.
콰아앙!
놈이 출구의 장막과 거하게 충돌했다.
충격을 버티지 못한 출구가 한 번에 문째로 산산히 박살났다.
내가 뚫린 입구로 빠져나가자 놈도 계속 끈질기게 뒤쫓아왔다.
나는 공간 도약과 장막을 연신 사용하며 그런 놈을 이끌고 아까 전 통로 초입의 절벽까지 이동했다.
마지막으로 절벽의 한가운데 허공으로 순간이동해서 장막을 펼쳤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향해서 도약했고, 장막에 부딪혔다가 그대로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어휴······."
도로 땅에 착지한 나는 조금 지쳐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아셸도 데리고 들어오는 건데.
이제라도 도로 나가서 데리고 올까 했지만 관두고 다시 안쪽으로 들어갔다.
지나온 길을 그대로 돌아가서 가디언들이 있던 장소의 출구를 지나쳤다.
다시 긴 통로가 이어졌고, 더 이상 튀어나오는 함정이나 가디언은 없었다.
이내 눈앞에 펼쳐진 또 다른 거대한 통로를 바라보며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여기다.'
위쪽 벽에는 눈동자처럼 생긴 어떤 문양이 있었는데, 분명 가속의 신비가 이렇게 생겨먹은 통로 너머에 있었다는 건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한층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통로의 입구를 지나쳤다. 그리고······.
"······?"
이내 안쪽에서 느껴지기 시작한 인기척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
"······저, 단장. 이제라도 그냥 돌아가면 안 되겠습니까?"
클락은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연신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두운 통로를 걷고 있는 9명의 남녀.
이 모험단의 신입이자 짐꾼을 겸하고 있는 그에게 발언권이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에 튀어나온 가디언 무리만 해도 하마터면 누구 한 명이 죽어나갔을 정도로 위험천만했으니까.
안쪽으로 들어가서 더 위협적인 가디언이 튀어나온다면 모험단이 전멸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이씨, 너 내가 닥치라고 했지?"
시위에 활을 걸고서 후방을 경계하던 여인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렇게 겁나면 징징거리지 말고 혼자서 빠져나가라고, 응? 아니면 그냥 여기서 네 묫자리부터 깔아주고 가랴?"
"헤이른, 집중해라."
가장 선두에 서있던 남자가 엄한 목소리로 끼어들어서 말했다. 그녀가 혀를 찼다.
"그러려고 해도 저 병신이 자꾸 짜증나게 하잖아. 별 쓸모도 없는 새끼 하도 사정해서 받아줬더니, 어휴······."
클락은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처먹은 짬만 많지, 솔직히 모험단에서 능력도 제일 달리는 년이 갈구는 건 단원들 중에 최고였기 때문이다.
"클락, 너도 그쯤 해라. 조금만 더 들어가보고 아니다 싶으면 돌아갈 테니. 나에 대한 신뢰가 그 정도로 없는 거냐?"
"······아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단장."
그에 반해 단장인 레그닐의 타이름은 점잖기 그지없었다.
클락은 순순히 사과하고서 마음을 다시 한 번 굳게 다잡았다.
'그래, 그래도 던전인데 단장도 이대로 포기하기는 아깝겠지······.'
그가 누구보다도 단원들의 목숨을 중시한다는 사실에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단지, 이건 모든 모험가들이 바라 마지않는 일확천금의 기회가 아닌가?
저 안에 기다리고 있을 보상은 분명히 감수하는 위험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
철컥.
모두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어, 어?"
활을 든 여인이 당황해서 자신의 발을 내려다봤다.
단원들의 표정이 일제히 딱딱하게 굳었다.
쿠구구구.
진동이 가까워지고, 곧 지나온 길에서 자그마한 벌레 형태의 가디언들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뛰어!"
저건 상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모두가 보자마자 깨달았다.
단장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단원들이 허겁지겁 전력질주했다.
클락도 하얗게 질려서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걸 참으며 죽어라 달렸다.
"······아악!"
그때 바로 옆에서 뛰던 여인이 발을 헛디뎌서 넘어졌다.
"도, 도와줘! 나만 두고 가지 마! 아악!"
클락은 뜀박질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벌써 지척까지 다가온 벌레 가디언 몇 마리와 엉켜서 바닥을 뒹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앞장서서 뛰고 있는 단원들은 그녀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전방에 닫히고 있는 통로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욕을 뇌까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칼을 뽑아들고 그녀를 공격하는 벌레 가디언들을 쳐냈다.
"빨리! 문 닫히기 전에 들어가야······!"
퍼억!
순간 클락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낑낑거리며 일어난 여인이 팔을 부축하던 그의 몸을 발로 차버린 것이었다. 그리고는 혼자서 죽어라 뛰기 시작했다.
벌떡 몸을 일으킨 클락은 기가 막히다는 눈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저 미친년이 진짜······! 끅!"
그는 팔목을 물어뜯은 벌레 가디언을 쳐내고 서둘러서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이미 뒤쳐졌던 상황에 앞장선 단원들을 따라잡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철컥.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른 함정을 밟은 클락의 몸이 다시금 기울어졌다.
갑작스레 땅바닥이 푹 꺼지며 나타난 내리막에 그의 몸이 추락하는 것과 다름없이 데굴데굴 굴렀다.
막힌 벽에 부딪히고서 간신히 몸이 멈추긴 했지만 재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우르르 몰려떨어지는 눈앞의 가디언들을 보며 그가 비명을 질렀다.
"으, 으아아아아!"
쿠우웅!
그 순간 앞쪽에 갑작스레 떨어진 석벽이 공간을 단절하고서 가디언들을 막아주었다.
클락은 창백한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욱씬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씨발."
여기는 또 대체 어디야?
뭐가 뭔지는 몰라도 제대로 엿 됐다는 사실 하나만은 모를 수가 없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석벽 때문에 간신히 살긴 했지만 나갈 길이 완전히 막혔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이내 옆쪽에 나있는 다른 통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달리 갈 길도 없었기에, 클락은 다시 한 번 욕을 내뱉고서 천천히 통로 안쪽으로 이동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통로를 지나서 걷자 곧 나타난 건 넓은 공동이었다.
"······."
공동의 곳곳에는 거대한 석상들이 서있었다.
클락은 얼떨떨한 눈으로 공동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에 시선을 고정했다.
붉은색으로 은은한 빛나고 있는 바닥에 새겨진 문양에.
그리곤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시, 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