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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위의 맑은가람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하필 납치해도 강철민의 지인을 납치하다니 참 운 없는 이들이었다.

결국 헌터들이 나섰어야만 할 일이지만, 대한민국 헌터 전원이 움직일 계기를 줘 버렸으니.

앞서 나간 헌터들이 노스트라와 맞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랭커급 헌터들이 하나둘 멈춰 서자, 9위 무사 백당수가 검을 빼 들었다.

"그럼 시작합니다."

그의 검 위에 오러가 덧씌워진 순간 백당수는 망설임 없이 바닥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바닥이 가루가 되어 없어졌고, 순식간에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한 랭커급 헌터들은 지하에 모여 있던 노스트라 쪽 헌터들과 마주쳤다.

"What the fxxk!"

"랭커급 헌터 처음 보나. 새끼들아!"

제일 먼저 바닥에 착지한 도각이 영어 비명을 지르는 노스트라 헌터 한 명을 단검으로 제압했다.

연이어 그 뒤를 따라 선룡이 바람을 타고 적들을 쓸어 버렸고, 맑은가람이 손짓 한 번으로 아군 쪽에 날아든 모든 마법을 지웠다.

"날뛰기 좋구먼."

"강철 오빠,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줘야죠."

연이어 백노현이 검을 휘두른 순간 노스트라가 들고 있던 무기들이 산산조각 나 버리고, 곧 무기의 파편들은 뱁새의 얼음에 뒤덮이며 적들을 꿰뚫었다.

"읏차."

마지막으로 바닥에 착지한 서강선이 손으로 바닥을 짚자 그를 중심으로 몰아친 물결이 도주하던 노스트라 헌터들을 붙잡아 한곳으로 모아 버렸다.

순식간에 지하 1층의 노스트라 헌터 전원을 제압한 이들은 미리 보고받은 숫자에서 한 명이 비었음을 눈치채곤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스팔트 구멍 하나가 나 있었다.

깨끗하게 도려진 구멍 아래쪽에선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고, 서강선은 그 모습을 보며 쓰게 웃었다.

"성격 급하기는."

이미 땅을 부수고 지하 2층으로 강철민이 내려가 버렸기 때문이다.

'끝났군.'

강철민이 간 이상 아래로 갈 이유가 없어졌다.

자신이 할 일 중 남은 건 붙잡은 노스트라 녀석들을 심문해서 정보를 뜯어내는 것뿐이었다.

* * *

타닥타닥!

거친 발걸음 소리가 지하 공간에 울려 퍼졌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미리 파 둔 지하 길을 따라 맹렬히 달리고 있는 한 외국인 남자는 얼굴 가득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세계적인 헌터 범죄 조직 노스트라의 간부 중 한 명인 알리오.

현재 노스트라의 임무를 받고 한국에 찾아온 것이었다.

임무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서산 물류 센터 지하에 생긴 서브 게이트에서 발견된 대량의 값비싼 마석을 자금 조달용으로 캐는 것.

본래 그것들은 헌터 총회국에서 관리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번 게이트는 감지 계열에 걸리지 않는 특이한 유형이었다.

노스트라에는 그런 게이트만을 전문적으로 찾는 인력이 있었고, 그 결과 헌터 총회국보다도 먼저 이번 게이트를 발견해 낸 것이었다.

게다가 이 게이트는 마석을 캐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복구되는 마석 복원 게이트였다.

마석은 헌터가 사용하는 무기들의 주재료다.

지금과 같은 대 헌터 시대에 그 값어치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기에 이 게이트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진배없었다.

물론 오랜 시간 게이트를 방치하게 되면 점차 그 크기가 커져 끝내 주변 지역이 몬스터가 자연 생성되는 마경화가 진행되어 버리지만, 그딴 건 노스트라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마경화를 막는 건 국가의 헌터들의 소관이지, 범죄 조직인 자신들이 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것이 첫 번째 임무.

이 임무는 벌써 한 달 전부터 이어져 온 것이기에 알리오가 이곳에서 한 일은 감독 정도다.

그가 이곳에 온 진짜 이유는 다음 임무 때문이다.

그 임무는 바로 한 중3 꼬마 아이 한미리를 납치하여 노스트라 쪽으로 데려가는 것.

고작 이런 임무에 자신이 투입된다는 게 우스울 정도였지만, 노스트라 상부는 간부인 자신에게조차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이런 경우 범죄 조직에 속한 자신이 보기에도 꺼림칙한 것에 연루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알리오는 눈치 빠르게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임무를 시작했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범죄를 저지른 한국 헌터 한 명을 이용해 납치하는데 성공했고, 이제 자신이 직접 내일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탑승하면 끝이었다.

정말 싱거울 정도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왜일까.

정말로 대체 왜일까.

109화

한 달 동안 마석 복원 게이트를 노스트라가 넘나드는 동안에도 개입하지 않던 멍청한 대한민국의 헌터들이 이 소녀를 납치하자마자 움직였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왜 이딴 일에 랭커급 헌터가 움직이는 거냐고!'

랭커급 헌터, 무서울 게 없는 세계적인 범죄 조직이라도 랭커급 헌터들과 정면으로 부딪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물며 한국은 세계급 랭커 헌터들만 5명 이상 보유한 국가다.

노스트라의 현 최고 간부인 아몬 또한 세계급 랭커 헌터라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아몬 혼자다.

일개 말단 간부에 불과한 알리오는 세계급 랭커 헌터는커녕 일반 랭커급 헌터 상대조차 되지 못한다.

그런 랭커급 헌터가 한두 명도 아니고 거의 전원이 이곳에 모였다.

고작 이 소녀를 납치했다고 해서.

'이 꼬마가 대체 뭐라고.'

자신의 손에 덜렁덜렁 달려 있는 꼬마를 내려다보며 그는 비명을 억세게 억눌렀다.

자신들에게 납치당한 뒤로도 태연하던 그녀는 자신의 팔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었다.

분명 납치했을 때 통신 기기는 전부 빼앗았었는데 대체 어느 틈에 손에 넣은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걸 다시 빼앗을 틈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등 뒤를 쫓는 무언가가 마치 흉포한 포식자처럼아가리를 벌린 양 알리오의 혼을 쏙 빼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앙!

뒤에서 또다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옅게 들려왔다.

그 소리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차 더 다가오고 있었고, 알리오는 이제는 식은땀과 함께 눈물까지 흘리기 시작했다.

오러를 다루는 헌터이기에 안다.

뒤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 얼마나 괴물 같은 놈인지.

자신의 손에 들린 일말의 오러도 느끼지 못하는 소녀가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젠장!"

어떻게든 의지를 부여잡고 소녀를 든 채 도망치고 있었지만, 알리오는 더 이상은 한계임을 느꼈다.

그 섬뜩한 오러는 이제 자신의 등 뒤에 닿아 있었고, 이 이상 달려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는 잔뜩 겁을 먹은 채 소녀를 들어 올려 품에서 군용 나이프 하나를 뽑아 소녀의 목에 겨누었다.

그러곤 방금 충격으로 모든 전등이 깨지는 바람에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곳을 향해 오러를 일으키며 노려보았다.

"히끅!"

하나 그는 곧 자신의 눈에 오러를 일으킨 것을 후회했다.

오러를 일으킨 눈동자 속으로 비친 것은 알리오의 눈이 일순간 멎을 정도로 거대한 오러의 덩어리였기 때문이었다.

이를 딱딱 부딪치며 그가 한껏 겁먹어 있자, 어둠 속에서 뚜벅뚜벅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것은 괴물이었다.

정장이 겨우 몸을 감싸고 있는 듯 터질 듯한 근육에 2m나 되는 몸, 머리 위에 사자의 갈기처럼 솟아 있는 머리칼과 눈가에 광기가 흘러나오는 듯한 거구의 사내.

그가 헌터가 아니었더라도 겁을 먹을 외형이었다.

세계적인 범죄 조직이라 할지언정 그를 모를 수가 없었다.

세계급 랭커 헌터 중에서도 2위.

만년 2위라며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하지만, 어떠한 헌터들보다도 더 많은 업적을 세웠으며 영웅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이 낳은 보물.

강철민.

그가 그곳에 있었다.

"왜! 왜 강철민이 여기 있어!"

"시끄럽다. 한국에 왔으면 한국말을 써라."

억센 소리와 함께 알리오의 입에서 영어가 터져 나오자 강철민은 눈살을 찌푸리곤 소녀 쪽을 힐끔 보았다.

"네가 한미리지?"

"맞는데."

목에 칼이 닿아 있는 주제에 태연하게 한미리가 대답하자 알리오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자신이 잡은 인질은 도대체 왜 겁도 안 먹는가.

그리고 어째서 눈앞에는 왜 강철민 있는가.

자신은 누구고, 여긴 어디인가....

"그러고 보니 어디서 본 얼굴인데."

"봤긴 하지. 저번에."

강철민의 말에 휴대폰을 보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강철민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강철민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더니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냐면 소녀는 저번 헌터 총회 때 봤던 그 싸가지 없는 10대 꼬마였기 때문이었다.

인질극 상황에서 자신은 무시하고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하는 두 사람을 보고 알리오는 울분을 삼켰다.

이제는 자신이 인질인 게 아닐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불쌍하게 느껴질 때쯤 강철민은 알리오를 보며 물었다.

"그냥 순순히 놔주는 게 더 좋을 거다."

"엿 먹어! 이 녀석을 놔주면 날 바로 죽일 거잖아!"

"대한민국 헌터 헌법상 어떠한 이유에서든 사람을 죽일 순 없어."

조금 안도할 법한 말이었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이 남아 있었다.

"대신 헌터면 죽도록 팰 수는 있지."

손가락을 두둑하고 푸는 강철민을 보고 알리오는 급히 군용 나이프를 더더욱 소녀의 목에 깊게 들이밀었다.

"아야."

하도 겁을 먹어서인지 알리오의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고, 그 결과 소녀의 목에서 핏물이 새어 나왔다.

처음으로 아픈 소리를 낸 소녀는 눈살을 확 찌푸렸고 빨리 어떻게든 해 보라는 양 강철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강철민은 그런 소녀를 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설마 인질이 효과가 있는 걸까.

강철민 정도 되는 자라면 인질이 다치지 않게 자신을 제압하는 건 손쉬운 일이라 생각했는데.

'아니, 저 정도 덩치잖아. 너무 강한 놈들은 가끔씩 약하게 힘을 쓰는 법을 제대로 몰라!'

이건 기회라고 생각한 그는 소녀를 더욱 억세게 붙잡으며 그녀의 목에 검을 들이민 채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따라오지 마! 따라오는 즉시 이 꼬마의 목을 잘라 버릴 거니까!"

이제는 오러까지 일으키며 알리오가 위협하는 데도, 강철민은 가만히 있었다.

그 모습에 회심의 미소를 지은 그가 조금씩 발걸음에 속도를 붙이려 하자, 품 안에 있던 소녀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정의의 사도 아니야?"

"남을 걱정시키는 꼬마는 정의를 논할 가치가 없다."

"아, 저번에도 그렇고 정말 꽉 막혔네."

둘의 대화에 알리오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낄 때쯤 갑자기 콰광 하고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설마 강철민이 무언가를 했는가 싶어 그가 서둘러 그를 돌아봤지만, 강철민은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놀라 긴장하던 알리오는 무언가 안 좋은 예감을 느꼈다.

진동은 아래에서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것은 자신들이 관리하던 마석 복원 서브 게이트가 있는 곳이었다.

지금 시간은 본래 게이트가 마경화가 되지 않도록 옆에서 게이트의 마력을 관리하는 녀석들이 파견되어야 했던 시간이다.

그러나 헌터들이 노스트라를 초토화해 놓은 탓에 그럴 시간이 없었다.

벌써 게이트가 열린 지 한 달 이상 지났다.

그런 만큼 몇 분이라도 마력 관리를 제대로 해 주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마경화가 일어날 정도로 게이트는 상태가 좋지 않았었다.

'오버 브레이크.'

이 진동은 게이트의 마경화를 알리는 징조임을 눈치챈 알리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강철민에 이어 마경화까지 시작되다니.

이대로 빠르게 빠져나가지 않는다면 마경화로 인해 쏟아져 나온 몬스터들이 자신들을 덮칠 것이었다.

"안 막아? 아래에서 뭔가 시작된 거 같은데."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막아야지. 난 널 구하러 온 거다."

"구하러 온 거면 빨리 구해 주던가."

툴툴거린 한미리의 말에 강철민은 어깨를 으쓱이었다.

그걸 본 한미리는 볼을 커다랗게 부풀리더니 알리오를 힐끔 보았다.

"뭐해. 도망칠 거면 빨리 도망치던가 하지."

"아, 어."

갑자기 한미리가 유창하게 영어로 말하자, 당황했던 알리오는 소녀의 말에 홀린 양 발걸음을 내뻗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강철민은 팔짱을 낀 자세로 물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숨고만 있을 거냐?"

"남이사."

퉁명스레 한미리가 대답하자 강철민은 쯧 하고 혀를 찼다.

"하원이가 널 많이 걱정했다. 오죽하면 나한테 부탁하면서까지 울더라."

그런 순간 알리오의 몸이 갑자기 우뚝 경직되었다.

그가 멈춘 것이 아니었다.

마치 실타래가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의 몸은 바닥으로 고꾸라졌고 그와 함께 의식도 서서히 꺼져감을 느꼈다.

대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전혀 모른 채로 그가 잠에 빠져드는 동안 한미리는 꿈틀꿈틀 그의 품에서 나오더니 그녀는 교복 치마를 정리하곤 강철민을 바라보았다.

한미리의 목에 났던 상처는 어느새 없어져 그녀의 새하얀 목이 돋보였다.

쿠구구구구구궁.

마경화로 인해 주변에 진동이 더 강해지는 동안에도 말없이 시선을 교차하던 끝에 한미리가 물었다.

"아저씨, 우리 언니랑 자주 같이 있는 모양인데 무슨 사이야?"

"직접 알아보던가."

씨익하니 강철민이 웃자 한미리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맺혔다.

"너라면 뭐든지 알아볼 수 있잖아."

그리고 강철민의 팔짱이 풀렸다.

"용."

1위 용.

랭커급 헌터마저도 정체를 모르는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 * *

[축하합니다. 3번째로 33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33층의 주인' '종말을 부르는 늑대'가 기다랗게 목을 늘어트리며 울음소리를 냅니다. 33층의 보상이 지급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한미리가 용이라는 것을 확신하자 층 하나가 클리어되었다.

역시 하원과의 일이 괜히 이루어진 게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34층의 주인' '종말을 부르는 늑대'가 34층 클리어 조건을 제시합니다.]

[용의 정체를 알게 된 강철민. 언제나 굳건하게 헌터로서만 살아오던 그의 앞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하지만 시시각각 쫓아오고 있는 세계의 멸망, 그 멸망을 앞두고 강철민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두루뭉술하게 던져 놓은 설명을 손으로 휘저어 끈 나는 한미리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것은 중3의 꼬마.

하지만 이 녀석은 지금 강철민의 수준으로 제대로 탐색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함을 갖춘 녀석이었다.

[준성좌 '용들의 군주' 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를 향해 호승심을 보입니다.]

그런 와중 끼어드는 알림을 또다시 손으로 휘저어 끈 나는 가만히 용을 바라보았다.

조그마한 머리에 검은색의 흑발.

서클렌즈를 낀 듯한 눈 아래에는 처음 볼 당시 어둡고 모자를 쓴 탓에 제대로 못 봤지만, 별 모양의 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만 제외하면 어디에서나 볼법한 꼬마인 그녀는 휴대폰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제 어쩌려고? 마경화가 시작되면 이 지역 초토화될 텐데."

용은 그걸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 사실은 강철민의 기억이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런 그녀를 잠깐 보던 나는 말 없이 등 뒤에 찬 대검을 뽑았다.

그러곤 내가 구멍을 뚫으려 하자 그 모습을 용이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용인 거 알았잖아. 아래 있는 거 나한테 시키면 될 텐데?"

"꼬마는 발 뻗고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 네 언니 걱정이나 시키지 말고."

"아저씨, 어디 가서 고집스럽단 말 많이 듣지 않아?"

"어른이 되면 그렇게 된다."

쿠웅, 내가 낸 구멍 아래로 아스팔트 바닥이 떨어졌다.

그러자 구멍 난 사이로 비대해진 게이트가 엿보였고 그 게이트는 주변에 나무처럼 뿌리를 내린 채 몬스터를 토해 내고 있었다.

뿌리를 내림으로써 마경화의 초기 단계에 진입한 것이었다.

내가 아래로 내려가려 하자 잠자코 보던 한미리는 조그맣게 한숨 내쉬었다.

"정말 어른답네. 좋아. 우리 언니랑 아는 사이니까, 기분이야."

그 순간 주위 풍경이 뒤바뀌었다.

110화

한미리의 손은 반투명한 무언가에 사라져 있었고 아래쪽 공간이 제멋대로 뒤틀려 가고 있었다.

'공간 마법인가.'

구멍 사이로 마경화가 시작된 게이트가 뒤틀리며 열렸던 주둥아리가 제멋대로 닫혀 버리고 공간 채로 뒤엉키더니 종적을 감추었다.

나오던 몬스터들은 당연히 공간 마법에 휘말려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져 가고 있었고, 한미리는 그걸 끝으로 손을 내렸다.

"어때? 1위의 위엄은. 이래도 나한테 발 뻗고 자라는 말 할 수 있어?"

"별거 없는데."

[현재 동화율 62% → 61%]

무심코 솔직하게 말해 버리자 동화율이 떨어졌다.

이런, 강철민의 입장에선 감탄할 만한 일이었나.

한미리가 진심이냐는 양 나를 보고 있자, 나는 다시 강철민 모드로 돌아섰다.

"꽤 하는군."

"됐어. 이미 흥 식었어."

싸가지 없기는.

"철민아!"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 해 주고 있자, 뒤쪽에서 서강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부름에 내가 고개를 돌리려 하니, 어느새 한미리가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다른 사람한테는 비밀이니까."

"뭐 하러 숨기는 거냐?"

"원래 2위는 평생 1위의 마음을 모르는 법이야."

그러면서 마치 나한테 구출된 양 가냘픈 새끼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몸을 떠는 한미리를 질린 듯 본 나는 이쪽으로 온 헌터들과 마주했다.

내가 한미리를 구출했다는 것을 알고 다들 안도했고, 이후 노스트라 쪽 일당을 전부 검거하며 일은 일단락되었다.

"미리야!"

내가 연락을 넣어 놨기 때문일까, 서산 타운 물류 센터 쪽으로 하원과 그녀의 가족이 함께 왔다.

그들은 달려와 한미리를 끌어안고 엉엉 울고 있는 그 속에서 소녀는 피곤한 듯 내 쪽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런 신파극을 바랐냐는 양.

"강철민 헌터님, 정말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저희 희원이에 이어서 미리까지... 감사합니다!"

어느새 내게 온 하원의 어머니가 내 손을 맞잡으며 연신 감사 인사를 내뱉었다.

'희원'은 아무래도 저번에 내가 구한 그녀의 언니인 듯하였다.

이내 저 멀리 시선을 돌리자 거기에는 구출해 주었던 희원이 그녀의 엄마처럼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했고, 그러면서 미리의 머리도 강제로 눌러 인사시키고 있었다.

"아뇨. 제 본업이 사람을 구하는 일인걸요."

강철민 모드로 정중하게 어머님을 대하자, 그녀는 감사 인사를 한 번 더 하며 떠났고 그런 어머님과 교차하듯 하원이 슬쩍 다가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현실 모습은 처음이라서인지 그녀는 어색한 티를 잔뜩 내며 조심스레 말했다.

"가, 강철민 헌터님. 감사합니다."

"평소처럼 굴어라."

"그게 쉽지가 않은데요...."

난처한 듯 하원은 볼을 긁적였다.

"그럴 거면 그냥 게임에서처럼 하천성이라고 불러."

"그게 더 편하긴 하겠네요. 하지만 감사 인사는 진심이니까요. 제 여동생을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마 내가 구하지 않았더라도 저 녀석에게 큰 문제는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무슨 이유로 자신이 1위라는 걸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건 차차 알게 되겠지.

크라운 로드 속 이야기는 결국 그런 거니까.

"보상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상이라는 말에 나는 힐끗 하원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와 얼마간 시선을 마주치던 하원은 볼을 붉히더니 볼에 양손을 올리며 몸을 배배 꼬았다.

"앗, 그렇게 원하시면 부끄러울지도...."

이 녀석은 게임이나 현실이나 다를 게 없다 이건가.

나는 평소처럼 머리를 한 대 쿵 내려찍으려다 멈췄다.

이 몸은 강철민이니, 그런 짓을 했다간 또 동화율이 깎일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말 없이 녀석의 머리 위에 손을 턱 하니 올리는 거로 대신했다.

"무리하지 마라. 여동생이 납치되어서 많이 걱정했었잖냐."

그 말에 멈칫한 하원은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 나는 미소를 지어주곤 그대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으아야야야!"

"그리고 깝치지 말고."

다행히 이 정도는 동화율도 눈 감아 주었다.

하원이 다시 가족 곁으로 갈 때쯤, 나는 옆에 서강선이 다가왔음을 눈치챘다.

"꽤 친해진 모양이네."

"그래."

서강선의 말에 대답하던 나는 멈칫하였다.

나는 그에게 하원과 원래부터 아는 사이라고 소개했다.

그렇기에 친해진 모양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었기 때문이다.

"눈치챘었냐?"

"너랑 안 지가 몇 년인데. 그야 눈치채지. 그래도 나쁜 아이는 아닌 거 같아 다행이야."

뭐가 다행이라는 걸까.

"얼굴도 예쁘장하고 색싯감으로는 괜찮을 거 같아."

"아들 장가보내는 아버지처럼 굴지 마라."

"둘 다 무슨 이야기 해요?"

그러던 순간 우리 틈 사이로 뱁새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서강선은 자연스레 몸을 뒤로 빼었다.

이 자식이.

"애들아! 우리 강철민이 오늘 감사 인사로 뒤풀이 쏜댄다! 비싼 데로 가자!"

내가 빠져나가려는 서강선의 뒷덜미를 잡자 그는 급히 상황을 타파하고자 외쳤다.

그러자 저 멀리서 헌터들의 좋다는 호응 소리가 울려 퍼지고, 나는 서강선을 못마땅한 듯 쳐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 정도는 하는 게 맞겠지.

어차피 강철민 돈이고.

"아, 하원 양 가족분들도 같이 가시죠."

"네? 저희도요?"

"네, 노스트라는 범죄 조직입니다. 미리 양을 왜 노렸는지는 아직 조사가 덜 끝나 확실하게 알지 못하지만, 이후에도 미리 양을 노릴 가능성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리고 사건 조사를 위해서라도 앞으로 미리 양 곁에 경호 헌터 분들을 좀 붙여야 할 것 같아서 이야기할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아, 그렇다면야."

그러면서 서강선은 자연스레 하원의 가족을 끌어들였다.

확실히 헌터 총회 소속인 서강선의 입장에서 한미리가 왜 노스트라에게 납치당했는지는 반드시 알아야 할 문제다.

노스트라가 바로 다시 한미리를 노리지 않으리란 법도 없고, 겸사겸사 첫날 정도는 안전을 위해 헌터들 곁에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리라.

소녀의 부모가 상의하고 동의하자, 한미리만이 나를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한 짓도 아니었기에 뭘 보냐는 듯 마주 쏘아보자 그녀는 획 하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 싸가지가.

그 순간.

나는 이전 헌터 총회 당시 용에 대한 것을 얼핏 서강선을 통해 들은 게 떠올랐다.

'용의 가족은 전부 죽었다고 하지 않았었나?'

내 시선이 한미리와 함께 있는 가족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동화율이 떨어질 것을 알아도 그 즉시 내 본신의 오러를 눈에 끌어 올렸다.

[현재 동화율 62% → 58%]

미친 듯이 떨어져 내려가는 동화율에도 불구하고 나는 얼마간 한미리와 그녀의 가족들을 살폈다.

그러곤 곧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 뒤 눈의 오러를 지웠다.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군.'

소녀가 뭘 하고 있는지 깨달은 나는 일단 이건 묻어 두기로 했다.

이후 하원의 가족과 함께 우리는 헌터들을 데리고 이동하였다.

서강선은 아예 회장 하나를 따로 예약하여 이번 일에 참가해 준 헌터들을 전부 데려와 자리에 모았다.

'어차피 내 돈도 아니니 딱히 상관은 없지만.'

강철민의 지갑이 비어 가는 소리가 여실히 들려왔다.

물론 이 정도야 강철민 선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수준이었기에 큰 문제는 없겠지만 말이다.

오늘은 헌터 일도 있었고, 이동하느라 꽤 시간을 지체했기 때문일까.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어 굶주린 헌터들이 열심히 음식을 비워 나갔다.

당연히 성인이 대다수였기에 이 자리는 어느새 술판이 되었고 나는 오랜만에 소주잔을 기울여 볼 수 있었다.

입안에 감도는 알코올 맛과 특유의 단맛이 옅게 감돌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소주를 마시는 건 몇 회차 만인지 모르겠네.'

괜히 또다시 한국의 모습이 회상된다.

한국인들답게 술 게임까지 시작하며 왁자지껄한 모습을 보니, 20대 때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지금도 겉모습은 20대지만 다시 돌아간다 한들 그 시절만큼 즐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정말 한국에 온 거 같네.'

구태여 오러를 일으켜 술기운을 떨쳐 내지 않았기 때문일까, 술자리 속 아른거리는 한국의 풍경에 멈칫한 나는 오러를 끌어 올려 술기운을 지웠다.

'위험해라.'

술기운 탓에 한순간 강철민의 기억과 내 기억이 섞여 들어갔음을 깨달은 나는 눈가를 매만지며 술기운을 떨쳐 내었다.

층은 언제나 참가자가 떠나지 못하도록 매료하려 한다.

이 층은 이런 식의 방식으로.

언제라도 내가 이번 층에 너무 심취해 버린다면 강철민의 기억과 내 기억이 뒤섞여 여기를 정말 한국으로 생각할 수도 있게 될지도 모른다.

'역시 나도 크라운 로드에 너무 오래 있었군.'

성좌의 함정에 빠질 뻔했다는 것에 몸서리치며 나는 소주잔을 내려 두었다.

'나도 확실히 망가지고 있다. 만약 이번 회차가 실패하면, 아무리 나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정신의 한계치에 다다른 것이 매일같이 느껴져 왔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 회차에 모든 걸 걸 정도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최선이 무너지면 나라고 한들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불안한 생각을 애써 지우며 힐끔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내 앞에 놓인 것이 소주병만 해도 10개나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안주 하나 먹지 않고 터무니없는 양을 비운 것이다.

"강철 오빠아."

그걸 보며 나 스스로 어이없어 하고 있었을까. 나는 옆에서 들려온 콧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뱁새가 내 어깨에 기댄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에 그렇게 잠겨 있어요오?"

"뱁새, 오러 써라."

취한 듯한 뱁새를 보고 내가 말하자 뱁새는 흥 하고 고갯짓하더니 말했다.

"싫어영."

그러면서 은근슬쩍 더 달라붙어 오는 뱁새를 보고 나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이후 뱁새가 묻는 말에 몇 번 더 대답을 해 주었을까. 어느새 술기운이 잔뜩 오른 뱁새는 내게 기댄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난 개안타! 난 개안타고! 썅!"

"도각, 야 대체 와 이러냐."

"모름. 아까부터 저 소리만 계속함."

뱁새를 탁자에 엎드리게 해 주고 있을 때쯤, 저 멀리 도각이 병나발을 불며 꼬인 혀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옆에서 선룡과 무사 백당수가 한심한 듯 도각을 보고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을 질질 흘렸다.

"여자는 좋아하는 사람 옆에서는 절대로 진짜로 취하지 않는 거 모르시나 보네요."

그러던 순간 이번에는 어느새 내 옆자리에 하원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손으로 소주잔을 매만지며 내게 히죽 웃었다.

녀석도 꽤 마신 것인지 얼굴이 옅게 달아올라 있었다.

"강선이 녀석이랑 이야기는 다 했냐."

"주로 부모님이 이야기했죠. 저는 그 틈에 빠져나와서 헌터들이랑 일면식 좀 했고요."

손으로 돈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인맥 좀 만들었죠.' 하고 하원이 말해왔다.

하긴, 이 녀석 낯가림이라곤 1도 없는 성격이니 그럴 만하다.

물론 서강선과 뱁새를 처음 봤을 때 잠시 당황하긴 했었지만, 그 뒤로 금방 친해졌고.

"뱁새 언니 이렇게 예쁜데 왜 신경도 안 써주세요?"

"네가 상관할 게 아니야."

잠든 뱁새 쪽을 보며 빙그레 웃는 하원의 말에 나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러자 그런 나를 하원은 못마땅한 듯 올려다보았다.

"선을 그으려면 확실히 긋고, 받으려면 확실히 받아야죠."

"뱁새는 좋은 동료야. 우리는 헌터고. 선을 긋는다는 시점에서 서로를 못 믿는다는 소리가 돼."

그 증거로 뱁새는 말이나 행동은 저렇게 하면서 단 한 번도 선을 넘은 적은 없다.

"그리고 헌터는 꽤 잘 죽는다."

이것은 강철민의 기억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헌터의 사망률은 생각보다 높다.

111화

그것은 랭커급 헌터라고 할지라도 다르지 않다.

당연한 일이다.

일반 직업과는 다르게 생사와 직결되는 일을 하는 것이 헌터니까.

서브 게이트는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너도 메인 게이트는 알겠지."

"그야 모를 리가 없죠."

문제는 세계 각지 상공에 나타나 있는 메인 게이트.

오래전 헌터가 탄생하던 시대부터 생겨난 메인 게이트는 아직도 서울 상공에 존재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누구도 그걸 닫을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다.

이러한 메인 게이트는 일정 기간이 지날 때마다 문이 열리며, 랭커급 헌터들은 그 거대한 문을 닫고자 게이트 속으로 뛰어든다.

그곳에서 수많은 랭커급 헌터들이 전사했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은 고스란히 강철민에게 남아 있었다.

"작년 본래 4위였던 작열이 죽었다. 그건 랭커급 헌터들 전부가 목격한 일이야."

"작열 님은 뱁새 언니 친오빠죠."

"그래."

나는 말 없이 잠든 뱁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작열, 그는 뱁새의 친오빠였다.

그는 메인 게이트 속에서 위기에 처한 뱁새를 구하고 대신 죽었다.

그 충격으로 뱁새는 정신이 붕괴했었다.

그걸 강철민이 아슬아슬하게 구하고 메인 게이트를 클리어한 뒤, 작열의 시체와 뱁새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었다.

뱁새는 부모가 없는 고아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친오빠가 죽었으니 그건 그녀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때 그를 대신하여 나타난 게 강철민이었다.

"나는 뱁새의 도피처야."

뱁새는 헌터로서 강하다.

하지만 헌터로서 아무리 강하더라도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결국 그녀는 친오빠의 죽음을 견디고자 강철민에게 기대기로 하였다.

적어도 강철민만은 게이트 속에서 죽지 않을 테니까.

이렇게라도 해야 작열을 잃은 아픔을 조금이라도 견딜 수 있을 테니까.

[현재 동화율 58% → 60%]

강철민을 너무 연기에 몰입했기 때문일까, 동화율이 올랐다.

'이놈에 연기력 한 번 참.'

하나 이번 내 농담에는 동화율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치 깠군.'

내가 일부러 강철민과의 적당히 동화율을 조절하고자, 과장스럽게 행동했던 것을 눈치챈 듯 변동 없는 동화율을 보고 나는 혀를 찼다.

동화율은 너무 떨어지면 층의 실패로 이어지지만, 반대로 너무 올라서도 안 된다.

예전 내가 층의 주민1이 되었던 것처럼 강철민과 완전히 동화하는 순간, 나 또한 강철민이 되어 버릴 테니까 말이다.

['34층의 주인' '종말을 부르는 늑대'가 목울대를 울립니다.]

꼼수는 그만 쓰라는 양 경고하는 성좌를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똥개 같으니라고.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역할극에서 동화율은 떨어트리기 쉽다는 점이겠지.

"그래서 받아 주지 않는 건가요."

"남에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서는 법도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참, 순박하게 사시네요. 그러다가 뱁새 언니가 다른 사람이랑 사귀면 서운하지 않겠어요?"

"서운하면 서운한 거겠지."

미안하지만 강철민이라는 녀석은 뱁새에게 정말로 마음이 없다.

그저 같은 헌터로서 좋은 동료이자 귀여운 여동생으로 여기고 있을 뿐.

이 녀석은 게이트 공략밖에 관심 없는 진성 변태 헌터인 것이다.

['서릿발의 고양이'가 당신도 딱히 다르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그 말에 나는 콧방귀를 내쉬었다.

이 녀석은 이 세계에서 발 쭉 뻗고 잘 살 수 있지만 5년마다 초기화 당하는 개 같은 크라운 로드를 달리는 나랑 같을 쏘냐.

['돌원숭이'가 그것보다 교미가 보고 싶다고 합니다.]

원숭이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으며 나는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로 걸어 나왔다.

쌀쌀한 밤바람이 코끝을 간질이고 지나갔다.

시선을 옮기자 저 멀리 우후죽순처럼 솟아난 건물들이 오늘도 열심히 한밤중에도 자신들을 빛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그 빛이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두렵기라도 하는 양.

나는 이번에는 하늘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34층쯤 오고 나니 서서히 별자리들이 보이기 시작했군.'

크라운 로드의 하늘은 탑을 오르면 오를수록 참가자들의 눈에만 보이는 별자리들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5회차나 굴러먹어서 그런지 지겹도록 본 성좌들을 싫어하긴 하지만, 저 별자리만큼은 내가 크라운 로드를 오르고 있다는 지표처럼 느껴지곤 했다.

이전 33층에서는 너무나 희미했기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별자리들이 이제는 윤곽을 갖추기 시작했다.

['조소하는 신데렐라' 가 당신에게 반가운 양손을 흔들어 보입니다.]

그런 순간 왼편에서 유달리 열심히 빛을 뿜는 별자리 하나가 보였다.

오랜만에 등장해 주신 조소하는 신데렐라를 보고 나는 말 없이 다른 별자리들에도 시선을 옮겼다.

['오만의 아틀리에'가 자신의 자랑스러운 빛을 뽐내 봅니다.]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깔깔 웃으며 양손을 휘젓습니다.]

['돌원숭이'가 따분한 양 기다랗게 하품을 내뱉습니다.]

['서릿발의 고양이'가 새하얀 꼬리를 가볍게 흔들어 보입니다.]

자신들이 최상위 성좌임을 증명하듯 가장 높은 곳에 있는 4개의 별자리가 제각기 다른 빛을 내었다.

그 빛은 자신들 발아래 있는 별자리들의 빛을 모조리 집어삼킬 정도로 강한 빛이었다.

지금까지 달려왔던 크라운 로드 중 이번 회차만큼 앞서 나간 적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4회차에 들어서서야 황제 편에 섰기에 겨우 볼 수 있었던 최상위 성좌들이 이 정도로 내게 관심을 보였던 적은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최상위 성좌는 제천대성 놈을 포함해 5명이었지.'

현재 별천도의 눈을 통해 나를 보고 있는 최상위 성좌는 4명.

그중 제천대성을 빼면 나머지 셋은 들어 본 적도 없는 최상위 성좌들인 셈이다.

괜스레 나락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최상위 성좌의 힘이 필요할 거란 말이.

"너희들이 나한테 도움이 되긴 하냐?"

지금 저 녀석들이 할 줄 아는 건 저렇게 촐랑거리며 말 거는 것밖에 없다.

혹은 가끔씩 전혀 쓸모도 없는 선물을 쥐어 주려 한다던가.

['서릿발의 고양이'가 그렇담 50층을 오르라며 손가락을 까닥거립니다.]

자신들이 배후성이라도 돼 주겠다는 건가.

같잖다는 눈으로 별자리를 보던 나는 눈을 돌렸다.

배후성에게 크게 데인 적이 있었던 나로서는 그다지 달가운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저씨, 우리 언니랑 친하긴 한가 보네."

그런 순간 테라스에 어둠 사이로 한미리가 걸어 들어왔다.

내 옆을 따라 선 그녀는 자신보다 높은 난관의 턱을 대곤 가만히 도시 속 밤 풍경을 바라보았다.

"언니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게임."

이미 알고 있을 한미리에게 딱히 숨길 이유도 없었기에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그러자 한미리는 키득거리며 웃음소리를 내었다.

"아저씨,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하지 않아? 게임에서 알게 된 친구의 동생이 용이라니."

"내가 하원이 네 언니라는 걸 눈치채고 접근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없지는 않잖아?"

확실히 나는 참가자로서 하원이 용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심은 딱 맞아떨어졌고.

'이 녀석.'

혹시 이 녀석이 이 층의 사도인가 의심이 들었지만, 나는 곧 부정했다.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는 사도 특유의 느낌과는 거리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은 그저 감이 예민한 것 뿐이다.

"나에 대해 궁금하지 않아?"

"내가 왜?"

"만년 2위라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잖아. 그렇담 괜히 자격지심 같은 게 막 생기고 그럴 거 같은데."

"그래 보이냐?"

"딱히."

내가 헌터 총회 당시 용에 대해 알아내려고 했을 때 동화율이 떨어졌었다.

그것만 보아도 강철민은 용에게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저씨는 내가 메인 게이트에 참가하지 않는 게 싫지 않아?"

메인 게이트는 랭커급 헌터들의 특권이자 사명이다.

강철민보다 강한 용의 도움이 있다면 메인 게이트를 막는 건 분명 보다 손쉬울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미리는 지금까지 메인 게이트에 직접적으로 참가한 적이 없다.

"너야말로 나한테 그런 걸 묻는 이유가 뭐냐?"

내 물음에 한미리는 쓴 물을 삼킨 양 살짝 표정을 찌푸리며 조소를 내뱉곤 중얼거렸다.

"그러네. 나야말로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의미심장한 마지막 말을 듣고 나는 층의 클리어 조건에 한 발자국 다가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똥개가 층에 관해 설명을 할 때 녀석은 계속해서 세계의 멸망을 언급했다.

그리고 그 멸망은 강철민에게 어떠한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확실치 않지만 나는 그 선택에 반드시 눈앞에 한미리가 필요할 것이라 확신했다.

"용."

"한미리라고 불러. 다른 사람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난 아저씨한테 들킨 것만으로 충분하거든?"

내 부름에 핀잔을 준 한미리는 왜 불렀냐는 양 나를 돌아보았다.

"노스트라가 널 납치한 이유는 뭐냐."

이것만은 동화율이 떨어지더라도 물어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 이건 강철민에게도 궁금한 이유였는 듯 동화율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용이라서?"

"노스트라가 세계급 랭커 헌터 1위를 구태여 건드릴 이유가 있을 리 없다고 보는데."

"그렇담 내 힘이 필요했겠지."

한미리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는 듯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곤 난관에서 몸을 떼었다.

그러곤 회장 안으로 몸을 돌려 들어가며 말했다.

"어쨌건 앞으로 우리 언니 잘 부탁해."

뭘 부탁한다는 건지.

중3 꼬맹이 아니랄까 봐 생각하는 수준도 흔한 로맨스 소설 정도인 듯하였다.

'노스트라라.'

그런 한미리를 보며 나는 세계 범죄 헌터 조직 노스트라를 떠올렸다.

감이 왔다.

다음 층의 클리어 요소는 그 녀석들이 쥐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들을 떠올리며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래.

그러곤 발신을 걸자 반대편에서 대답이 들려왔고, 나는 그에게 내가 새롭게 안 사실을 말했다.

"총회장님, 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총회에서도 언급했듯 서강선은 용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다.

그렇담 헌터 총회장인 서호랑이 용의 정체를 모를 리가 없었다.

내 물음을 듣고 회장은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강철, 자네도 알았나.

역시 그는 이미 용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야 그렇겠지.

'그 정도 일을 부탁하려면 헌터 총회장인 서호랑 밖에 없었을 테니까.'

"예,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답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세계의 비밀에 접근하기로 하였다.

* * *

한미리와의 사건이 있은 뒤로 나는 노스트라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헌터 총회 소속인 서강선 또한 한국에 상륙하기 시작한 노스트라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인지 헌터 총회 쪽에서도 내게 힘을 빌려주었다.

알아보니 노스트라의 활동력은 최근 들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 악명은 날이 갈수록 그 정도를 더해가고 있었고, 세계 각지에서 그런 그들을 골칫거리로 보며 어떻게든 노스트라들을 붙잡으려 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노스트라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자 잡아 두었던 노스트라 잔당들을 심문하여 어떻게든 정보를 뜯어내었고, 그 결과 노스트라 쪽에서 한국 상륙이 최근 들어 더 잦아졌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걸 통해 나는 그들의 한국 상륙의 이유가 한미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노스트라 녀석들은 뭔갈 알고 있다.'

아직 꼬리를 전부 잡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할 모양이지만 말이다.

딩동.

그렇게 며칠 뒤, 헌터 총회 쪽 소식을 기다리며 게임을 하던 중 나는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서강선이 노스트라 정보라도 물어 왔나 하며 문을 연 순간 문 앞에는 뜻밖의 녀석이 서 있었다.

112화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냐."

"총회장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던데."

거기에는 한미리가 있었다.

검은색 모자에 허리가 전부 가리는 흰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집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녀석은 나를 제대로 안 지 하루밖에 안 되었건만, 마치 오랫동안 알고 있던 사이처럼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

"와, 크네."

"뭐 하러 찾아온 거냐?"

집안을 둘러보던 한미리를 황당한 듯 쳐다보고 있자 그녀는 자기 몸에 몇 배는 될 법한 소파에 털썩 앉더니 말했다.

"하원 언니랑 싸워서 가출했어."

"돌아가."

"싫어. 언니가 사과하기 전까지 안 가."

"그렇담 네 친구 집으로 가. 왜 우리 집으로 온 거냐?"

"나 친구 한 명밖에 없어. 오늘은 안 된데."

저렇게 싸가지가 없으니 친구가 없지.

내가 속으로 욕하는 걸 눈치챈 듯 찌릿 노려본 한미리는 자기 집인 양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쉰 나는 이전에 하원이 녀석의 번호를 받았던 걸 떠올리며, 전화를 걸고자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자마자 한미리가 내 휴대폰을 공간 마법으로 빼앗아 자기 손에 쥐었다.

"뭐 해?"

"네 언니한테 말해서 데려가게 할 거니까 내놔."

"싫어."

그리 말하며 한미리는 어디서 본 건지 자신의 상의 안에 휴대폰을 넣었다.

이러면 못 뺏을 거라는 양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는 한미리를 보고 기가 찬 나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 녀석의 옷을 들추곤 휴대폰을 꺼냈다.

"...짐승."

내가 미동도 없었기 때문일까, 도리어 넋 나간 표정을 짓는 한미리를 두고 나는 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딩동 하고 초인종 소리가 울렸고, 내가 현관문을 열자 거기에는 급하게 뛰어온 듯 숨이 찬 하원이 서 있었다.

"미리, 어디 있어요?"

"저기."

내가 안쪽을 가리키자 하원은 신발을 벗곤 안으로 쿵쿵 거리며 뛰어 들어왔다.

그러곤 소파에 태평하게 누워 있는 한미리를 보더니 기겁하며 소리쳤다.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시끄러."

"얘가 대체 왜 이래? 게다가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건데."

한미리는 용이라는 걸 가족에게까지 감추고 있으니, 그걸 알 노릇이 없는 하원은 지금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듯하였다.

"아저씨가 알려 줬어."

그러자 싸가지가 하원의 의문을 내게로 돌렸다.

"하천성 오빠가 왜?"

한미리에게 집 주소를 가르쳐 줄 이유가 있냐는 듯 나를 돌아보자, 임기응변으로 답했다.

"혹시 노스트라가 또 노린다면 연락하라고 전화번호 줬었어. 대뜸 주소 물어보길래 뭔가 싶어서 일단 말해 줬더니, 이렇게 된 거지."

내 능숙한 대처에 한미리는 휘파람을 한 차례 불어 보였다.

"죄송해요. 저희 미리가 폐 끼쳐서. 금방 데려갈게요."

고개를 연거푸 숙인 하원은 그 즉시 한미리에게 달려들었다.

또래치고도 작기 때문일까, 달려든 하원의 손아귀에 한미리는 비명을 지르면서 맥없이 끌려나갔다.

그러나 나는 이 상황이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이윽고 헌터 총회에서 보내 준 노스트라 쪽 정보를 훑어보고 있을 때 어느새 내 소파 옆에 한미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녀석이 공간 마법으로 되돌아 왔음을 눈치챈 나는 자료 쪽에 눈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하원은."

"한눈팔 때 버리고 왔어."

그럴 줄 알았다.

"뭐로 싸웠는지 모르겠지만 화해해. 나 끌어들이지 말고."

"언니가 사과할 때까지는 화해 안 해."

"그럼 화해하지 말고 난 끌어들이지 마."

"아저씨가 있어야 언니가 더 열 받아."

그리 말한 한미리는 아무렇지 않게 내 옆에 다가와 내가 보던 자료 하나를 들어 올렸다.

"노스트라 녀석들을 찾으려고?"

"그래."

"도와줄까?"

헌터 일은커녕 정체까지 숨기던 녀석이 도와주겠다는 말에 나는 한미리를 돌아보았다.

녀석의 목적은 뻔했다.

"도와줄 테니 네 언니한테서 지켜 달라, 이거냐."

"정답."

이 녀석 가족의 유전자에는 철면피 속성이 들어 있는 건가.

"네가 뭘 도와줄 수 있는데?"

내 물음에 한미리는 자료들 몇 가지를 늘어놓더니 노스트라가 활동하고 있는 장소를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했다.

"1초 만에 전부 데려가 줄 수 있어."

그리고 돌아온 말에 나는 호오 하고 소리를 내뱉었다.

확실히 그 점은 쓸 만했다.

당연한 거지만 이렇게 자료로 보는 정보 따위보다야 직접 쳐들어가서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게 훨씬 정보의 질이 높을 테니 말이다.

이래 보여도 한미리는 1위 용, 나는 2위인 강철.

한미리가 나서지 않고 해당 위치로 이동만 시켜 주어도 나는 혼자서 노스트라 활동 지역을 전부 헤집을 자신이 있다.

"괜찮은 제안이네."

"그치?"

실속 있게 녀석들의 정보를 뜯어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

게다가 강철민도 찬성하는 내용인지, 내가 받아들이려 해도 동화율이 떨어지지 않았다.

"채택."

"와아."

양손을 들어 환호하는 한미리를 보고 나는 거실에 놓인 대검을 들었다.

"설마 곧바로 가게?"

"시간을 지체할 이유는 없으니까."

"실속 주의자도 아니고. 나 좀 피곤한데."

농땡이를 피우려는 속셈이 훤히 드러나자 나는 말 없이 휴대폰을 들었다.

그러자 한미리는 하는 수 없이 졌다는 양 소파에서 일어나서 내 옆에 다가왔다.

"자, 아저씨. 어디부터 데려가 줄까?"

"여기."

이런 건 가장 유력한 곳부터다.

노스트라 미국 지부를 가리키자 한미리는 접수했다는 양 내 옷깃을 잡곤 그대로 발을 한 차례 굴렀다.

그 순간 그녀의 몸 주위에 공간 마법이 뒤덮이고, 이내 시야가 뒤바뀌었을 때 내 몸을 중력이 맹렬히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곧 구름이 눈가를 스쳐 지나가기 시작하자, 나는 그 즉시 이곳이 어느 지역 상공임을 깨달았다.

한참 아래에 빌딩들이 마치 장난감처럼 조그맣게 늘어진 것을 확인하며 거센 바람의 압력을 피하고자 나는 서둘러 오러를 둘렀다.

"한미리."

"기다려 봐."

그녀를 부르자, 내 등 위에서 마치 비행기를 타는 양 앉아 있던 한미리가 대답했다.

그녀는 눈썹 위에 손을 올려 우리 아래쪽에 있는 건물들을 잠깐 둘러보았고, 곧 또 한 번 허공에 발을 굴렀다.

그 순간 내 눈앞에 갑자기 바닥이 나타나자 곧바로 낙법을 펼쳐 한 바퀴 굴러 착지하였다.

"아저씨, 머리 웃긴다."

그걸 듣고 나는 그녀의 머리를 쿵 하고 찍었다.

"이렇게 갈 거면 미리 말을 해라."

"그런 것 치곤 별로 당황한 얼굴도 아니면서."

자기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미리가 대답하는 동안 나는 바람 탓에 엉망진창으로 뻗친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돈했다.

거기에 주름진 옷까지 한 차례 정돈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이곳은 방금 보았던 건물의 내부인 듯하였다.

"좌표 확인 제대로 했으니까 맞아. 아까 내부도 살펴봤고."

내 등 위에서 했던 행동은 내부를 살피는 거였나.

그 거리에서 잘도 살폈다고 생각하며 나는 질문을 던졌다.

"이 건물 안에 몇 명이나 있지?"

내 물음을 듣고 한미리는 건물 벽에 손을 대었다.

그 순간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공간 마법 술식이 내부로 뻗어 나갔고, 곧 그녀는 건물의 상황을 모조리 파악했다.

"사람은 321명 그리고 강아지 한 마리."

"그 강아지 한 마리가 지금 사람이랑 같이 있냐?"

"응, 그런데."

"그럼 그쪽으로 가면 되겠네."

내 말에 한미리는 고개를 기울였다.

"왜 하필 강아지가 있는 곳이야?"

"세계 범죄 헌터 조직인 노스트라 건물에 강아지를 키울 녀석이 노스트라 간부가 아니고서야 누가 있겠냐."

"그렇긴 하네."

일리 있다며 고개를 끄덕인 한미리는 다시금 내 옷깃을 잡았다.

그러자 시야가 다시금 바뀌었고 곧 앞에 펼쳐진 참상을 보고 대화를 멈췄다.

"뭐, 뭐야 너희들은!"

거기에는 강아지 옷을 입고 강아지 앞에서 흉내를 내고 있는 40대로 보이는 다 큰 성인 남자가 있었다.

"미안, 강아지가 두 마리였을지도."

굳은 표정으로 정정하는 미리를 두고 나는 손을 뻗어 남성의 목을 틀어쥐었다.

당황한 듯 피할 생각조차 못 하고 우리에게 붙잡힌 그는 컥컥 소리를 내며 버둥거렸고, 나는 그 즉시 오러를 일으켜 그 발버둥을 멈추게 했다.

"지금부터 묻는 말에 답해라."

내가 능숙하게 영어를 하자 한미리는 의외라는 양 나를 돌아보았다.

나도 그렇고, 강철민 녀석도 다행히 영어 정도는 할 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너, 너 설마 가, 강철?!"

강철민을 알고 있는 듯한 남성의 말에 나는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나서 그를 든 채 그대로 한미리 앞으로 왔다.

한미리가 뭐 하냐며 고개를 기울이고 있자, 남성은 그녀를 보자마자 히익 하고 비명을 지르며 경기를 일으켰다.

"당첨이네."

"뭐 한 거야?"

"널 알아보는 녀석이니, 노스트라에서 중요한 사람일 거 아니냐."

노스트라에서는 한미리를 특정하여 잡아 오라고 따로 지시를 내렸다.

그렇기에 주요 간부들은 당연히 한미리의 정체를 알고 있을 거고, 이런 나의 예상대로 그는 세계 헌터 1위인 용이 직접 이곳에 왔다는 것에 경악했다.

"네놈 이름은?"

내 물음에 남성은 정신을 차리고는 재빨리 입을 꽉 다물었다.

하긴, 처음에야 당황해서 그런 거지 한 조직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스스로 정보를 털어놓으면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잘 알고 있겠지.

나는 이런 녀석들을 조지는 법을 잘 알고 있다.

"한미리, 나가 있어."

"알았어."

눈치 빠르게 소리가 밖에 새어 나가지 않는 마법까지 걸어 주고, 공간 마법으로 빠져나간 한미리를 확인한 나는 남성을 바라보며 씨익 하니 웃었다.

"입을 안 열겠다. 이거지."

나는 사내를 끌고 가 비싸 보이는 가죽 의자에 그를 던지듯 앉혔다.

그러곤 그 즉시 녀석의 사타구니 사이의 빈 공간을 콰앙 하고 내려쳤다.

그로 인해 의자의 좌판이 반 이상 사라지자, 절반 정도 벗겨진 남성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말 안 할 때마다 1cm 씩 사라진다."

참고로 앞으로 남성의 사타구니와 남은 거리는 3cm.

"노스트라 내에서 네 위치는."

남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1cm를 줄였다.

"노스트라 내에서 네 위치는."

또 한 번 대답이 없었다.

나는 다시금 1cm를 줄였다.

"위치는."

그리고 1cm가 줄었다.

"위치."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진심으로 내려칠 기세임을 알아챈 남성의 호흡이 매우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그 즉시 손을 내려쳤다.

"초, 총간부진에 노스 중 한 명일세!"

비명을 지르듯 남성이 외친 순간 내 손이 우뚝 멈췄다.

사타구니 직전에 멈춰 있는 손은 오러를 담고 있었고, 나와 같은 헌터인 그는 그 손이 더 내려온 순간 즉시 자신의 사타구니와 영원히 안녕할 것임을 잘 알았다.

'노스가 분명.'

서강선이 구해 줬던 자료 중에서 노스는 노스트라의 회장인 세계급 랭커 헌터 아몬 아래 가장 높은 간부 중 한 명이었다.

역시 제대로 찾아왔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렇담 넌 용을 납치하려 했던 이유를 잘 알고 있겠군. 아몬의 지시냐? 아니면 너희 노스 중에 한 명이 한 일이냐."

내가 되묻자 남성의 눈동자가 열심히 궁리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즉시 남성의 사타구니를 내려쳤다.

113화

쩌억하고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핏물이 치솟았으나 내 눈에 흔들림은 없었다.

악당은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은 강철민도 동의하는지 동화율 또한 변함없었다.

"아아아아아아악!"

치솟는 핏물 속에서 비명을 내지르는 그를 보고 나는 오랜만에 회복용 물약을 꺼내 들었다.

[현재 동화율 65% → 63%]

아이템을 사용한 만큼 동화율이 급격하게 떨어졌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사타구니에 질질 물약을 부었다.

그러자 그는 회복된 자신의 사타구니를 확인하곤 벌벌 떨기 시작했고, 나는 말 없이 아이템 창에서 회복용 물약을 꺼내 책상 위에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 물약이 놓일 때마다 남성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이내 하얗게 변해 버렸다.

"혀 깨물어 자살해도 소용없다. 입에다가 흘려 넣어서 다시 되살릴 거니까."

미소 짓고 있는 내 얼굴은 그야말로 악귀와 같았다.

실제로 내 말에 거짓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어차피 나머지 노스 녀석들도 전부 찾아가 너와 똑같은 질문을 할 거다. 하지만 만약 그들 중에 너와 같은 대답을 하지 않는 녀석이 있다면."

회복 포션 병 하나를 쥔 채 나는 손안에서 빙그르르 굴렸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아내야겠지?"

그렇게 나는 모든 자백을 받아 내었다.

* * *

반쯤 기절한 듯 머리를 떨어뜨리고 있는 남성을 보며 나는 손에 묻은 핏물을 옆에 있던 티슈로 닦아 내었다.

남성의 말에 의하면 이번 일은 그들의 최고 보스인 아몬의 명령이 맞았다.

한미리가 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의 철저한 조사가 아닌 우연히 이전 게이트 사건 때 한미리가 공간 마법을 쓰는 모습을 목격한 노스트라의 말단 덕분이었다.

노스트라 내에서는 이전부터 아몬이 공간 마법을 사용하는 자를 발견하면 어떤 자든지 그 즉시 보고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노스트라의 최고 권력자의 바로 아래인 이 남성도 한미리가 용이라는 사실만 알뿐 그 이상은 모르는 듯하였다.

전부 아몬의 명령이라서 움직였을 뿐.

거기다가 최근 몇 년간은 아몬을 본 적도 없다고 한다.

이번 명령을 조달한 것은 노스 중에서 2인자이며 아몬과 가장 가까운 대제라는 자였고, 그가 아는 건 거기까지가 다였다.

'대제라는 놈은 지금 이탈리아에 있단 말이지.'

남성에게 대제가 찍힌 사진까지 받아뒀다.

이탈리아 전역을 뒤지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단서를 잡으려면 찾아내는 수밖에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창문을 열었다.

그 순간 바깥으로 내보내는 소리를 없애 주는 사일런스 마법이 해제되었고, 한미리가 창문 사이로 거꾸로 매달린 채 나타났다.

"다 했어?"

"그래, 그리고 이젠 이탈리아로 가야 할 거 같다."

"세계 여행이네. 이탈리아는 티라미수랑 젤라또가 맛있는데. 사 주라."

이미 공간 마법으로 한번 가 본 모양인 듯 한미리는 익숙하게 말했다.

하긴, 이 정도의 공간 마법을 가졌으니 세계 일주쯤이야 가볍게 해 볼 만하겠지.

"알았으니 출발하자. 어차피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할 모양이니까."

내 말에 그녀는 또 한 번 나를 데리고 공간 마법을 발동시켰다.

뒤바뀐 시야에 제일 먼저 피사의 사탑이 들어왔고, 그 주변으로 이탈리아의 경치가 보였다.

그런 경치 속에서 깍지 낀 손으로 뒤통수를 감싼 한미리는 태평하게 주위 구경을 하고 있었고, 나는 택시로서는 최고의 능력을 지닌 한미리를 가만히 보았다.

이 녀석 저 싸가지 성격만 아니면 층을 오를 때 데려가고 싶을 정도다.

어떻게 능력만 똑 떼서 가져갈 수 없으려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나는 주위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한미리를 낚아채어 당겼다.

내 팔에 딸려온 한미리가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을 동안 나는 우리 곁에 다가온 남성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중절모에 기다란 코트를 입은 그는 모자를 벗으며 내게 영어로 인사를 해 보였다.

"반갑습니다. 강철, 저는 대제. 당신들과 같은 세계급 랭커 헌터는 아니나 한때 미국에서 랭커급 헌터였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여기 온 걸 바로 알아차린 건...."

"네, 미국 쪽 지부를 담당하던 노스 알카만이 연락을 주었죠."

"호오, 그놈. 그렇게 당해 놓고도 바로 보고했단 말이지. 생각보다 근성 있네."

아직 덜 길들인 모양이니, 나중에 가서 더 패 줘야 할 듯싶었다.

"반갑습니다. 한미리 양 저희는 당신을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내가 그 남자를 떠올리는 동안 대제는 한미리에게 인사했다.

그러자 한미리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낯가림이라도 하는 양 내 등 뒤로 파고들며 얼굴을 숨겼다.

나를 처음 봤을 때는 낯가림이고 뭐고 없었던 녀석이 말이다.

그런 한미리에게 미소를 지어 준 대제는 우리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몬이 당신들과 만나고 싶어 합니다."

우리 쪽에서 만나고 싶다고 광고를 한 덕에 저쪽에서 먼저 선뜻 다가온 모양이다.

'잘됐네.'

보통 사람이라면 함정이다, 위험하다고 생각할 법한 상황.

그러나 솔직한 말로 내 입장에선 함정이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냥 그동안 올려 둔 동화율 좀 희생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안내해."

그러니 나는 겁 없이 말했다.

내 대담한 말에 대제는 미소를 지었고, 그걸 보며 한미리가 내 옷을 꾹꾹 당겼다.

"아저씨, 나 티라미수랑 젤라또."

아무래도 겁 없는 건 나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 녀석이 말하는 것 좀 사줘."

"여부가 있겠습니까. 최상품으로 사다 드리겠습니다."

"아싸."

태평한 우리 둘의 태도를 보고 대제의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은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나야 강철민이니 그렇다 치고 옆에 있는 한미리의 정체를 모르기에 저러는 것 같았다.

이 녀석이 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까무러치겠지.

그렇게 티라미수와 젤라또를 품 안 가득 받은 한미리와 함께 나는 이탈리아식으로 지어진 오래된 건물 하나에 들어섰다.

내부는 구조 변경을 한 듯 겉과는 달리 깨끗했고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층을 올라 잠시 후 어느 방 앞으로 안내받았다.

대제가 문을 열고 먼저 들어서자 우리도 따라 들어갔고, 거기에는 등을 돌린 채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아몬님."

흑색의 장발을 등 뒤에까지 올 정도로 기다랗게 늘어트린 그는 우리들은 안중에도 없는 양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이 들어 온 것을 신경 쓰지 않는 듯 게임하고 있던 그는 대제가 크게 헛기침하고 나서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 우리를 보고 '오.' 하고 소리를 내었다.

"잘생겼다."

"어디가?"

한미리의 말에 나는 비쩍 마른 아몬이라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몸에서 은근하게 흘러나오는 기운이 그가 나름의 실력자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 녀석이 아몬.

한미리와 나의 바로 뒤에 있는 헌터 세계 랭커 3위이자 노스트라의 수장이었다.

"안내하느라 수고했어. 대제."

"네, 그럼 전 나가 보겠습니다."

아몬의 말에 정중히 대답한 대제는 고개를 숙이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를 힐끔 보던 나는 아몬이 무엇을 하고 있던 건지 보았다.

모니터에는 창이 하나가 띄워져 있었는데, 그건 내가 잘 아는 게임의 사이트였다.

바로 디스 헌터.

"아, 한국에서도 디스 헌터 유명하지? 무려 그걸 개발한 곳이니까."

내가 자신의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음을 눈치 챈 아몬이 능숙하게 한국말을 내뱉었다.

"최근에 하천성이라는 유저가 유명해서 말이야. 그걸 좀 찾아본다고 정신 팔렸어."

"그 하천성이 나다."

"아, 진짜? 그런 거 같더라. 나 팬이야."

내 말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양 아몬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빙그레 눈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한미리가 작게 탄성을 내뱉는 걸 무시한 나는 소파로 다가가 털썩 앉고는 다리를 꼬았다.

"너희가 용을 납치하려 했던 이유는 뭐냐?"

시간을 끌기 싫었던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나가기로 했다.

내가 바로 본론부터 꺼내자 아몬은 나를 따라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차라도 내줄까?"

"말 돌리지 마라."

그에 반해 녀석이 느긋한 자세로 나오자, 내 몸에서 곧바로 오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내 오러를 정면에서 맞으면서도 그는 옆 서랍에서 감자칩 봉투를 꺼내 태연하게 뜯었다.

그런 아몬을 보며 내 옆에 다가와 앉은 한미리는 들고 왔던 티라미수와 젤라또를 꺼내 먹기 시작했고, 죽이 잘 맞는 그 둘을 보던 나는 이마에 주름이 생겨났다.

이것들이.

"간단해. 용의 힘이 필요해서야."

내가 책상을 뒤엎을 것 같은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일까, 아몬은 슬쩍 감자칩 봉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 힘이 왜?"

"그건 용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아?"

아몬의 웃음을 보고 나는 이 층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세계의 멸망과 관련된 이야기.

동시에 나는 이 녀석이 그 멸망과 관련되어 있는 녀석임을 눈치챘다.

"예언 하나가 내려졌어. 각 나라에 분포된 다음 메인 게이트의 키워드가 멸망이라고."

"그딴 예언 하나 믿고 용의 힘을 빌리려고 납치하려 했다는 거냐?"

"그 예언이 지금까지 다 맞았거든. 우리 쪽 예언가가 유능해서 말이지. 본인을 신의 사도라고 칭하는 이상한 녀석이지만."

사도라는 말에 나는 혀를 찼다.

이번 사도는 노스트라 쪽에서 예언가 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짜증 나지만 녀석이 사도인 이상, 그 예언가의 말은 사실일 거다.

그의 말대로 다음 메인 게이트는 이 세계의 멸망을 초래하리라.

"넌 범죄 집단이잖아. 세상이 멸망하든 말든 상관없는 거 아니냐?"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다 죽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는 없잖아? 범죄 조직도 경제는 필요해."

그리 말하며 그는 우리 앞에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영어로 작성된 그 종이에는 백악관 문양이 찍혀 있었고, 그건 다음 메인 게이트를 막기 위해 아몬과 협력하겠다는 내용의 협정이 적힌 종이였다.

"웬만해선 예언이 뭐가 되었든 크게 신경 쓰지 않던 나지만, 이번 건은 좀 달라. 그래서 백악관 쪽에도 협력을 요청했지. 그 녀석들도 우리 쪽 예언가의 힘은 잘 알고 있거든."

세계 범죄 조직이 세상을 멸망에서 구하려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지만 아몬의 눈은 진지했다.

그가 말한 대로 세계가 멸망해 버리면 범죄 조직이고 뭐고 의미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백악관 쪽에서 다른 나라에도 연락을 넣는다고 했어. 아마 지금쯤이면 너희 나라인 한국의 청와대에도 연락이 갔을 거야."

그가 그리 말하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한국 랭커급 헌터 채팅방 쪽에서 서강선이 아몬이 했던 이야기를 공지로 올리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채팅방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휴대폰을 내려두곤 그를 직시했다.

마치 짠 것처럼 상황이 아몬의 말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게 성좌의 의도일까.

"다음 게이트가 열리면 멸망은 기정사실이야. 그걸 막기 위해선 용, 네 도움이 필요해."

"다른 누구도 아닌, 용의 도움이 필요하단 건 대체 무슨 뜻이냐?"

"게이트를 막을 사람은 용밖에 없다고 예언가가 말했으니까. 나는 개인적으로 1위인 용을 만나고 싶어서 수소문해 두긴 했었지만, 마치 미리 정해진 것처럼 예언자의 예언과 함께 용을 발견했어. 이건 분명 세계의 뜻이야."

사도가 아닌 주민이 세계의 흐름을 읽은 건가.

114화

[축하합니다. 3번째로 34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34층의 주인' '종말을 부르는 늑대'가 꼬리를 흔들며 34층의 보상을 지급합니다.]

아몬의 말이 사실인 것을 증명하는 양 연달아서 클리어 소식이 터져 나왔다.

['35층의 주인' '종말을 부르는 늑대'가 35층 클리어 조건을 제시합니다.]

[세계의 멸망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아몬을 통해 미래를 얼핏 본 강철민, 멸망을 막을 실마리는 전부 모였다. 이제 당신은 선택해야 할 것이다.]

설명을 다 읽고 난 뒤, 나는 한미리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티라미수와 젤라또를 전부 먹어치운 한미리는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끝내 그녀의 입술이 열릴 무렵.

"싫어."

한미리는 나를 붙잡더니 공간 마법을 발동시켰다.

어느새 시야가 뒤바뀌고, 우리 집으로 돌아오게 된 한미리와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마침 바깥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흐린 날씨 때문에 어두워진 방안을 보고, 나는 불을 켜고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내 옷깃을 한미리가 꾹 잡았다.

"왜 아무것도 안 물어? 나보고 세계를 구하라는데."

"자기 가족 하나 지키기 힘든 녀석이 세계를 어떻게 구하냐?"

그 순간 한미리의 전신이 돌처럼 굳었다.

나는 녀석의 손에서 빠져나와 불을 켜곤 부엌 찬장에 가선 라면을 꺼내 들었다.

아까부터 두 녀석만 먹고 있는 걸 보니 배고파졌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눈치챘어?"

"어제, 너랑 네 가족을 직접 보고 나서."

녀석의 물음에 답해 주자 한미리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습을 줄곧 감추던 네가 유일하게 헌터 총회장님이랑 면식이 있는 이유도 그래서였겠지."

어제 나는 본신의 힘을 들키지 않을 만큼 끌어 올려 한미리와 함께 있는 가족들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 한미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용에게 가족은 없다.

각성하던 날 용의 가족은 전부 죽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한미리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공간 마법을 이용해 그들이 죽지 않은 평행 세계에서 데려온 가족들이.

그리고 그러한 말도 안 되는 짓은 그녀의 힘이 조금만 끊기더라도 세계의 법칙에 따라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당연히 평행 세계에서 데려온 가족들은 한미리의 사정을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들이 원래 살던 삶 그대로를 재현하고자 헌터 총회장에게 부탁했다.

가족이 죽은 사실을 없었던 일로 해 달라는 것과 헌터 총회의 힘을 이용해 가족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곳을 만들어 달라는 것.

내가 헌터 총회장 서호랑을 통해 들은 것이 바로 이러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용은 정말 위험할 때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의 가족을 유지 시키는 데 이미 너무 많은 힘을 소모하고 있으니까.

나와 함께 게임을 하던 하원도, 내가 구했던 하원의 언니 한희원도, 나에게 감사하던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이 세계에서 한미리의 힘없이는 1초도 존재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녀가 세계를 지키려고 힘을 쓰는 순간 또다시 가족과 이별해야만 한다는 소리였다.

가족을 다시 평행세계에서 데려온다 한들 그들은 그녀가 지금까지 함께 해 온 가족들과는 다른 사람일 테니까.

사람은 때론 아주 예민하다.

그리고 진실을 알고 있는 한미리에게 그 자그마한 차이는 가족과의 극심한 거리감을 형성했을 것이다.

"어린애는 어린애답게, 그냥 어른들이 하는 걸 보고 있기만 해도 돼."

세계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중학교 3학년, 그게 바로 한미리다.

비록 성좌가 만들었다고 한들 고작해야 정신 연령은 한국 나이로 16살.

나에게 익숙한 듯 굴었던 건 그녀의 가족인 하원이 항상 내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녀석은 자신의 가족에게 공간 마법을 발동하는 만큼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이 알기 싫어도 자신에게 계속 전해져 왔을 테니까.

그런 사람에게 세계가 우선이냐, 가족이 우선이냐고 묻는다면.

어느 누가 선뜻 세계가 먼저라고 말할 수 있겠나.

세계를 지켜야만 하는 이유에 가족이 포함되어 있을 텐데 말이다.

"내가 없으면 못 막는다고 하잖아."

"세계에 헌터가 얼마나 많은데 너 하나 없다고 못 막겠냐."

"나 세계 헌터 1위야."

"나는 2위지. 네가 못하면 내가 하면 된다. 넌 가족부터 지켜."

한미리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족이 아니잖아."

내가 사실을 전부 알고 있기 때문일까, 고개를 떨어트린 한미리가 포기한 듯 중얼거렸다.

"그 사람들이 사는 세계랑 내가 사는 세계는 다른 세상이니까."

그러던 순간 딩동 하고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라면을 끓이려던 것을 멈추곤 현관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거기에는 종일 한미리를 찾아다닌 듯 땀과 빗물이 뒤섞여 엉망이 된 하원이 서 있었고, 그녀는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미리...."

"안에 있다."

내 말에 그녀는 신발을 벗어 던지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러곤 내 쪽을 바라보고 있던 한미리에게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돌아가자. 미리야. 너 또 없어지면 나 못 견뎌."

하원은 울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미리는 납치를 당했었다.

아직 그 트라우마가 다 가시지도 않았을 텐데 한미리가 또 없어졌으니 그녀의 입장에선 미칠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런 하원을 끌어안고 있는 한미리를 보고 나는 입 모양으로 물었다.

이런데도 네 가족이 아니냐고.

하원의 옷은 빗물과 진흙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한미리가 또다시 사라지고 나서 종일 그녀를 찾아다녔기 때문에.

"둘 다 이제 그만 돌아가. 시간 늦었다."

그 순간 바깥에 천둥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우리가 돌아왔을 때부터 쏟아지던 비는 이제는 돌아다니기 힘들 정도로 더 억세졌다.

바깥을 잠시 바라보던 하원이 나와 눈을 마주치고, 나는 풀이 잔뜩 죽은 한미리를 보다가 머리를 긁었다.

"비 그칠 때까지만 있다가 가라."

"고마워요."

대답하는 하원을 보고 나는 방으로 들어가 옷과 수건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씻어. 엉망이다."

내게서 옷을 받아든 하원은 자신의 옷 상태를 둘러보았다.

현관에서부터 이어진 오늘 한 고생의 흔적이 집안 여기저기에 보였고, 그녀는 실례했다는 생각에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라면 끓일 건데, 먹을래."

"머, 먹을게요."

그러곤 내가 다시금 라면을 끓이려 하는 순간, 하원이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떨어뜨렸다.

그 모습에 나는 문득 예전에 상영하던 영화 속 대사를 떠올리곤 말했다.

"오해하지 마라."

"오해 안 해요! 미리도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정말!"

열심히 욕실을 찾아 뛰어가는 하원을 보던 나는 힘없는 한미리의 머리를 툭 쳤다.

"풀 죽지 말고 정신 차려라. 네 언니가 걱정한다."

그 말을 하고 나는 라면을 끓이러 돌아갔다.

* * *

하원과 한미리와 함께 라면을 먹은 후, 나는 아직도 내려치고 있는 번개와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하원은 종일 한미리를 찾느라 고생하였기 때문인지 배를 채운 뒤, 어느새 소파에 잠들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들어 침대에 눕혀 준 뒤, 이불을 덮어 주고 밖으로 나오자 한미리가 말없이 TV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부모님한테 연락해 둬라. 걱정한다."

"해 뒀어."

그래도 아까보다는 괜찮아진 건지, 한미리가 바로 대답하자 나는 그녀의 옆에 가서 털썩 앉았다.

한미리의 작은 몸이 내가 소파에 앉자 한 번 위로 떴다가 다시 내려왔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아저씨."

"왜?"

"아저씨는 아저씨 가족이랑 어때?"

한미리의 말에 나는 강철민의 가족을 먼저 떠올렸다.

그러나 연이어 떠오른 것은 진짜 우리 가족이었다.

"싫다. 밉기도 하고. 한 명은 정말 증오스러울 정도로 미워. 하지만 그 녀석만 제외하면 나머지는 그럭저럭이야."

강철민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를 했지만, 어째서인지 동화율은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 가족보다 심하네. 난 증오스러울 정도로 미운 적은 없었는데."

"일이 많았거든. 그리고 앞으로 너한테도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앞으로란 말에 한미리는 입을 작게 벌렸다가 닫았다.

그 앞으로란 단어는 그녀가 세계가 멸망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가족들만을 지켰을 때에만 존재하는 것이니까.

"세계는 정말 멸망하는 걸까?"

"모르지."

"랭커급 헌터 채팅방은 나도 들어가 있어. 백악관이랑 청와대가 정말로 움직이고 있는 걸 보면 그만큼 큰일인 거잖아."

한미리는 현재의 헌터들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터졌을 때 모습을 드러냈다.

평행 세계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힘을 최소한으로만 썼어야 하니까.

그러나 그런 힘도 헌터들과 사람들을 구하기에는 충분했다.

최소한의 능력만으로도 그녀는 한국을 몇 번이고 지켜 낸 것이다.

하지만 이번 건은 내가 보기에도 그 정도의 힘만으로 막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세계를 지키려면 한미리는 자신의 가족을 포기해야만 한다.

"너 내가 하는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나는 몇 번이고 어린애는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내 말을 조금도 귀담아듣지 않은 듯 아까부터 볼멘소리만 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한미리는 힘없이 웃더니 자기 무릎을 가슴으로 모아 끌어안았다.

그러곤 무릎에 볼을 바짝 붙인 채 그 상태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저씨가 나 지켜줄래?"

"애들 뒤치다꺼리는 안 한다. 너희 가족한테나 지켜 달라 해."

이미 앞에서 질리도록 해 봤으니까 남의 가족까지 챙겨 줄 생각 없었다.

"TV로만 보던 강철이 바보같이 대단한 사람인 건 알았는데. 이 정도로 바보인 줄은 몰랐어."

"남을 바보 취급할 거면 자기도 바보 취급당할 건 각오하고 내뱉는 거겠지?"

"응, 나도 바보겠지. 오래전에 잃은 가족에게 아직도 묶여 있는 걸 보면."

어린애가 지어서는 안 되는 웃음을 지은 한미리를 보고 내가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메인 게이트 발생, 메인 게이트가 다시 재가동 시작했으니, 시민들은 지금 당장 서울의 대피 구역으로 이동해 주시길 바랍니다.]

TV와 휴대폰에서 동시에 속보가 울려 퍼졌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줄기는 세상의 멸망을 가리키기라도 하는 양 더 세차게 내렸고, 나는 한미리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언니 잘 지키고 있어라."

그리 말한 나는 별천대검을 등에 차곤 헌터 방어구를 챙긴 뒤 현관으로 나섰다.

그러자 뒤따라 나온 한미리는 내 등 뒤를 보며 물었다.

"정말로 끝까지 도와 달라고 하지 않을 셈이야?"

그 물음에 나는 대답 없이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주륵주륵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우산 하나를 핀 채 걸음을 옮긴 나는 슬슬 끝이 다가옴을 느꼈다.

하늘 위 메인 게이트는 마치 블랙홀 마냥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그 크기가 점차 커지고 있었고, 그 아래 지상에는 여기저기서 비상벨이 미친 듯이 울리고 있었다.

메인 게이트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나는 홀로 메인 게이트를 향해 걸어 나가고 있었고, 곧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비 한 번 참 억세게 내리네. 강철 형님, 우산이 너무 작은 거 아닙니까."

"도각, 강철 형님 덩치면 맞는 우산이 없다."

제일 먼저 온 것은 도각과 선룡이었다.

녀석들은 내 우산을 보며 농담을 내뱉었지만,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슬슬 가동 될 시기긴 했네."

"밥 먹다 나와서 배고픔."

연이어 군복차림인 백노현과 그의 손자인 무사 백당수가 나타나 게이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백악관 쪽 알림이 없었어도 그냥 알 수 있겠어요. 저거 위험해요."

"메인 게이트는 늘 위험했으니 새삼스러울 거 있나요."

뒤따라 뱁새와 맑은가람이 합류하고.

"거참, 헌터 총회일로 바쁜데 메인 게이트도 나타나고. 나도 힘들게 산다."

서강선이 내 옆에 나타나 섰다.

언제나 최전선을 달리는 8명의 한 자릿수 랭커들이 이 자리에 모였다.

115화

하늘 위 메인 게이트의 크기는 점차 커지고 있었고, 그 속에서 곧 하나둘 검은색 인영의 괴생명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검은색 액체를 뚝뚝 떨어트리는 녀석들은 닿는 것만으로 건물을 부식시켰고, 서강선은 그걸 보며 혀를 찼다.

"메인 게이트가 열린 게 방금 전인데, 벌써 게이트 바깥으로 몬스터가 튀어나오고 있는 건 너무하지 않냐."

그 말대로 메인 게이트는 본래 다른 서브 게이트들과 같이 몬스터를 바깥에 내보내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런데도 방금 막 생긴 메인 게이트가 몬스터들을 토해 내고 있는 것이다.

"안에 대체 얼마나 가득 찼기에 저따구야."

질린 표정을 지은 도각은 허리춤에서 두 개의 단도를 꺼내 들었다.

그를 따라 각자 헌터들이 자신의 무기를 꺼냈고, 나도 대검을 잡았다.

"뱁새, 난 게이트로 간다."

"길 열어 드릴게요."

이곳에서 위험하다고 말리는 멍청이는 어느 한 명도 없었다.

메인 게이트를 막지 못하면 끝장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뱁새의 얼음이 바닥에 맺히고, 곧이어 하늘에 고고히 떠 있는 메인 게이트로 얼음길이 이어졌다.

내가 곧장 그 위를 달리기 시작하자, 게이트 속에서 나온 검은 것들이 덤벼들었다.

그러나 멈출 필요가 없었다.

나와 함께 앞으로 나선 랭커급 헌터들이 검은 것들을 처리해 주기 시작한 것이다.

랭킹 2위 강철민이 가는 길은 늘 우직했고, 그것의 원동력은 믿음이었다.

그렇기에 그 뒤를 따르는 헌터들은 언제나 강철민이 가는 길을 뚫어 주었다.

그렇게 나는 순식간에 게이트 안으로 진입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붉게 물든 하늘과 마찬가지로 땅을 전부 뒤덮은 그와 같은 색의 풀잎이었다.

대검을 쥔 채 게이트 속 바닥에 착지한 순간, 그곳에는 마치 탑처럼 거대한 무언가의 집합체가 보였다.

게이트 바깥으로 내보내던 검은 것들과 같이 검은색 액체가 뒤덮인 탑은 보는 것만으로 기분 나쁜 감각을 주었다.

내 뒤를 따라 하나둘 게이트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다른 랭커급 헌터들도 같은 감정인지, 그들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아무래도 저놈이 바깥에 있는 검은 것들을 만들어 내보내고 있는 듯하였다.

"안이 독기로 가득 차 있어요. 방어 마법 걸어 드릴 테니 다들 주의하세요."

입가를 가린 뱁새가 서둘러 사람들에게 방어 마법을 거는 동안 나는 중심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때마침 내가 바라보는 방향에서 폭발음과 함께 사람들이 튀어 나왔다.

"저거 일본 쪽 랭커급 헌터 아이가."

"저쪽은 러시아군요. 이번 메인 게이트는 전부 이어져 있나 보네요."

도각의 말에 맑은가람도 연이어 다른 사람들을 발견했는지 반응했다.

지금까지의 메인 게이트는 나라마다 하나씩 분리되어 있었다.

만약 그 나라가 메인 게이트를 막지 못하고 완전히 붕괴하여 사람이 살지 않게 되면 메인 게이트는 문을 닫고 모습을 감추기에 현대에 이르러서는 메인 게이트의 공략 여부에 나라의 존폐가 갈리게 되었다.

그렇기에 각 나라의 다른 메인 게이트들이 전부 통합된 것은 특이한 경우라 볼 수 있다.

"온다."

누군가의 한마디와 함께 아까 보았던 검은 녀석들이 마치 해일같이 우리에게 쏟아져 오기 시작했다.

서로를 짓밟으면서 몰려오는 검은 것들을 보고 랭커급 헌터들 전원이 뛰어나갔다.

"이것들 뭐고. 바깥에 있을 때랑은 다른데."

그러자 가장 먼저 앞서나간 도각이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게 오러를 두른 헌터들이 열심히 검은 것들을 베어 봤지만, 녀석들은 끄덕도 없는지 반 토막이 난 상태로도 자신들의 손을 휘둘러 공격해 왔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마치 정말 물에다가 검을 휘두르는 느낌에 근접계 헌터들이 곤혹스러워하고 있자 마법사들이 나섰다.

"나랑은 상성이 좋네."

"아예 지워 버리지 않으면 안 죽는 모양이네요."

뱁새의 얼음 마법이 검은 것들을 얼린 순간 맑은가람의 마법이 일제히 그 얼음들을 깨트렸다.

그 모습에 서강선 또한 물바다를 일으키며 검은 것들을 쓸어 모아 주었고, 뱁새와 맑은가람이 합세해 한 번에 검은 것들을 지워 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너무 많은 물량 앞에서는 자주 할 짓이 못되었다.

"오러를 더 끌어모아. 오러로 아예 압살시켜 버리면 잡을 수 있다."

그러자 겨우 공략법을 찾은 백노현의 말에 근접계들도 하나둘 검은 것들을 지워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러로 압살해야 하는 만큼 체력 소모가 상당했기에 다들 얼마지나지 않아 지친 표정이 되어갔다.

한국의 최정상의 헌터들이 들어 온 지 몇 분도 안 되어 힘이 부치기 시작한 것이다.

"왔네?"

그러던 순간 아몬이 등장했다.

내 옆에 선 아몬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곧 내게 물음을 던져왔다.

"용은?"

"그 녀석은 안 온다."

그는 내 대답을 듣고 난처하다는 양 볼을 긁적였다.

"그렇담 큰일이네. 세계가 진짜 멸망할지도."

저 멀리서 또다시 폭발음과 함께 비명이 뒤섞여 들려왔다.

중심에 있는 탑 같은 형태로 세워진 물체에선 계속해서 검은 것이 쏟아져 나왔기에, 그 물량을 견디지 못한 다른 나라 헌터들이 죽어 가는 소리였다.

"하긴, 어차피 결국 올 거야. 이거 우리론 못 막아."

"뭐꼬, 인마 아몬 아닙니까?"

그 순간 도각과 한국 랭커급 헌터 몇 명이 내 곁에 나타나 아몬을 경계했다.

아몬은 헌터들 사이에서도 주의해야 할 인물로 퍼져 있었기에 다들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세계 범죄 조직인 노스트라의 수장인 아몬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그를 공격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은 메인 게이트, 헌터로 살아온 자들은 게이트 속에서 서로를 공격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직.

그러던 순간 풀잎 속에서 튀어나온 검은 것 한 마리가 아몬을 공격하려 하자, 그는 들고 있던 손도끼로 그것을 한 방에 아작 내었다.

그의 손도끼에서 풍겨지는 칠흑색 오러는 그가 실력자임을 모두에게 되새겨 주었고, 그러자 주변의 헌터들이 바짝 긴장하였다.

"저걸 한 방에 잘도 죽이네요."

"세계 3위라더니. 괴물임."

뱁새와 무사 백당수가 아몬의 행동을 경계하며 대화를 나눴다.

자기들이 전력으로 쏟아낸 오러로 겨우 검은 것 한 마리를 잡았는데, 녀석은 딱히 힘들일 것도 없이 손쉽게 잡아 버렸기 때문이다.

아몬의 등장에 너무 긴장한 듯한 헌터들을 보고 나는 하는 수 없이 우리 쪽으로 오고 있던 검은 무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곤 운 속성의 오러를 대검에 두름과 함께 검을 휘두르자, 그 순간 검은 무리가 일격에 모조리 사라졌다.

"마, 비나? 우리 강철 형님이 더 위라 이거다!"

"도각, 너 쫄았었잖아. 부끄럽다. 그만해라."

한순간 아몬에게 겁먹었던 도각이 이 틈에 열심히 외치자, 선룡이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이야기했다.

그런 둘을 두고 나는 방금 전 아몬이 했던 말에 대답해 주기로 했다.

"막는다."

내 말을 들은 아몬은 나를 보며 비웃듯 조소를 내뱉더니 손가락으로 탑을 가리켰다.

"중심부에 저거 보여?"

"안 보일 리가 있나."

"응, 근데 문제가 있어. 저거 형체가 없어."

그 말에 나는 아몬을 돌아보았다.

보이기만 한다는 건.

"저 탑에 가 본 거냐?"

"나라도 저것들을 다 뚫고 다가가는 건 힘들고, 니콜라제가 전력을 다해서 탑을 향해 쐈거든. 그런데 1도 안 먹혔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니콜라제가요?"

그 말에 니콜라제와 같은 마법사인 뱁새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니콜라제는 세계 랭커급 헌터 4위로, 마법을 다루는 자들 중 가장 뛰어나다.

화력만으로는 세계 1등이라 칭송받는 녀석이 쏘아 낸 마법이 안 통했다는 건 다른 헌터들이 저 탑을 향해 공격해도 소용없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니콜라제 말로는 공간 마법의 일종일 거래. 저건 여기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 같은 거라 하더라고."

"그래서 저걸 쓰러트리려면 용이 필요하다...."

"그렇지. 예언에서 그토록 용을 언급하던 이유가 저것 때문인 거 같아."

이제 용을 불러올 생각이 생겼냐는 양 아몬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에도 나는 변함없이 대검을 쥔 채 앞으로 걸어 나갈 뿐이었다.

내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몬은 참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양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집불통이네. 강철이라면 용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랑 그 녀석은 알게 된 지 며칠 안 됐어. 설령 내가 설득한다 한들 그 녀석이 그걸 들을 것 같아?"

"얼굴을 본 지 며칠 안 된 것뿐이지, 너희 둘은 누구보다 오랫동안 서로를 알고 있는 사이잖아."

그 말대로 강철은 언제나 2위였고 용은 언제나 1위였다.

강철민과 한미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서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은근히 낯가림이 있는 한미리 또한 강철민인 나에게만큼은 그토록 편하게 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미리 말해 두었다.

한미리에게 오지 말고 가족이나 지키라고.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한미리가 나서지 않아도 강철민인 내가 해결하고자.

확신할 수 있다.

이 메인 게이트가 이번 이야기를 끝낼 마지막 피날레.

이 피날레를 어떻게 장식하는가에 따라 이야기는 끝이 날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발아래 오러를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내가 해결한다."

그리고 내 몸이 탄환같이 쏘아져 나갔다.

나는 내 눈앞을 새까맣게 물들여 오는 검은 것들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그 한 번에 수십 마리의 검은 것들이 양단 당했다.

강철민은 지금 이곳에 모인 어느 헌터들보다도 가장 강했다.

그렇기에 나는 강철민답게 언제나 우직하게 길을 뚫어 나갈 뿐이었다.

탑과의 거리는 상당히 멀다.

그리고 그 앞을 막는 검은 것들의 수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강철민으로서 또 한 번 메인 게이트를 막고자.

그런 내 뒤를 따라오는 건 한국의 랭커급 헌터들이었다.

아몬과 내 대화를 들었음에도 그들은 나에게 용을 왜 데려오지 않았냐는 물음 한 번 던지지 않았다.

하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그들과 항상 최전선에 선 것은 용이 아니라 강철민이다.

그들은 본 적 없는 용을 믿는 것보다 눈앞에 있는 강철민을 믿었기 때문이다.

"끝이 없잖아. 썅!"

"저쪽에서 또 쏟아져 온다!"

"젠장, 다 죽는다. 다 죽겠다고!"

여기저기서 다른 나라의 헌터들의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한국의 랭커급 헌터들조차 한 마리, 한 마리가 상대하기 벅찼다.

다른 나라는 우리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해일처럼 끝없이 몰려드는 검은 것들의 산에 그들의 눈에 절망적인 감정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우리는 우직하게 검은 것들을 뚫고 나갔다.

비장의 수,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그저 눈앞에 있는 것들을 뚫어서 저 탑에 도달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그렇게 어느새 우리가 제일 최전선에서 검은 것들에 맞서기 시작하자 하나둘 다른 나라 헌터들도 이쪽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116화

"강철이다."

자신들의 앞을 달려 나가고 있는 우리를 보고 그들은 경악을 내질렀다.

"저걸 뚫어? 한국은 괴물들의 집합소냐?"

"강철이 있잖아. 그는 괴물이라고."

자신들은 몰려오는 걸 막기에도 급급한데 우리는 아예 검은 것들을 뚫고 나가고 있었으니, 차원이 다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강철이라면 혹시 저 탑을 무너트릴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강철이라도."

강철민의 위용은 다른 나라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렇기에 서서히 자신들과 멀어져 탑으로 다가서는 우리를 보고 그들은 조금씩 희망을 느낀 듯하였다.

"그냥 다 강철 쪽에 붙어! 지금 나라고 뭐고 의미 없어! 이것들이 밖에 나가면 전부 다 끝장이야!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고!"

한 헌터가 거칠게 자기 나라말로 외쳤다.

그들도 알아차린 것이다.

나라의 손이익을 따지며 검은 것들을 상대하기에는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혹여나 이대로 자신들이 패배하는 순간 어떻게 될까.

뻔하다.

저것들은 게이트를 타고 넘쳐흘러 자신들이 살던 나라에 쏟아질 것이다.

강철민의 기억 속에서 다른 나라의 헌터들은 언제나 서로를 견제하고 나라를 위해 다투었었다.

그러나 그렇게 아웅다웅하던 그들도 모두 하나같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강철의 뒤를 따라가!"

"우리론 못 막는다. 저쪽에 합류하자. 어떻게든 협력해서 뚫는 수밖에 없다."

"살다 살다 한국이랑 협력하는 날이 다 오네."

그렇기에 그들은 나라를 위한 이익, 생각, 명예와 같은 그런 잡스러운 것 따위 전부 집어치우고 우리들의 곁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각개격파로 이곳을 돌파할 수 없다.

그렇담 하나로 뭉친다.

헌터로서, 한 명의 사람으로서 자기들이 지켜야 할 것을 등에 지고 전 세계의 헌터들이 힘을 모았다.

그러자 돌파하는 속도가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협력하는 것을 떨떠름하게 여기던 헌터들도 서서히 손과 발을 맞추기 시작했고, 곧 그들은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서로가 동료라는 걸 인식했다.

"하하, 진짜로 살다 살다 이런 날이 다 오네."

"그러게나 말이에요."

내 옆에서 필사적으로 검은 것들을 죽여 나가던 서강선의 웃음소리에 뱁새가 받아 말했다.

한국 헌터 총회에서 일하는 그이기에 가장 잘 알 것이다.

전 세계의 다른 헌터들이 서로를 얼마나 미워하고, 시기하며 다퉜는지.

그런 그들이 힘을 합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 서로를 손가락질하던 녀석들도 결국은 똑같은 헌터였나."

"이대로 밖에 나가게 되면 새로운 역사가 쓰이겠네요."

백노현과 맑은가람이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여기 있는 모두가 눈치채고 있었다.

'만약 이 한 번의 기회에 뚫지 못하면 돌아갈 방법조차 없다.'

헌터들이 힘을 모아 맹렬히 앞을 뚫고 있는 동안 검은 것들은 우리 뒤쪽에서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느새 검은 것들의 중심부에 도달한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밟고 있는 바닥은 녀석들의 사체로 뒤덮여 있었기에. 어찌 보면 우리는 검은 것들로 이루어진 감옥 속에 갇혀 버린 느낌이었다.

"아아악!"

"으아아악!"

옆에 있던 다른 헌터들 몇 명이 검은 것들에게 잡아먹히며 죽음을 맞이했다.

점점 나아갈수록 헌터들의 표정이 서서히 나빠져 가기 시작했지만, 그 누구도 겁에 질려 앓는 소리를 내뱉지 않았다.

그저 다들 앞만을 직시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돌아가지 못한다는 감정에 잡아먹힐 거로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인다!"

어느 한 명이 외친 순간 모두의 눈에 일렁거리는 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몬이 말했던 대로 탑은 신기루같이 흐릿했고, 이를 둘러싼 공간이 뒤틀려 있는 것 같았다.

"철민아!"

"그래."

눈앞에 있는 검은 것들의 몸에 대검을 박아 넣은 나는 서강선의 부름에 바닥을 박찼다.

그러자 무언가 위협을 느낀 것인지 즉시 내게로 달려든 검은 것들은 곧 맑은가람의 마법에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졌다.

그 사이로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양 거센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이어서 그 물은 그대로 고개를 꺾더니 탑을 향해 뻗어졌고, 곧 뱁새에 의해 빠르게 얼어붙었다.

내가 순식간에 생긴 발판의 위로 착지한 뒤 달리기 시작하자, 아래쪽에서 검은 것들이 날개를 만들어 내가 탑에 도달하는 것을 저지하려 하늘 위로 치솟았다.

"어딜!"

"누굴 무시하나."

검은 것들이 날아오르자마자 어느새 내 옆에 온 도각이 단검을 내지르고, 선룡이 바람 마법을 일으켜 녀석들을 추락시켰다.

하지만 그들로는 너무 많은 적들을 막기에는 부족했고, 그를 눈치챈 내가 오러를 일으키려 하자.

"거참, 죽기 직전까지 싸우겠구만."

"할아버지 운명임."

연이어 나타난 백노현과 무사 백당수가 나 대신 검을 휘둘러 남은 검은 것들을 지워 주었다.

그들은 믿고 있었다.

내가 반드시 저 탑을 무너트려 줄 것이라고.

그들 덕에 어느새 탑에 눈앞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아직 멀다.

이 정도 거리는 도약을 해도 모자라다.

"내가 당신이랑 협력하는 날이 다 오는군요."

그런 순간 내 옆으로 창 한 자루에 올라타 있는 니콜라제가 나타났다.

세계급 헌터 랭킹 4위답게 잘도 내 뒤를 따라온 그는 창에서 내리더니, 허공에서 창을 던질 자세를 취했다.

"뚫겠습니다. 알아서 잘 올라타세요."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에 검은 것들이 서로를 밟으며 벽을 만들기 시작했다.

탑에 접근하는 걸 막으려는 그들을 보던 니콜라제가 든 창이 주홍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고, 곧 그것은 마치 거대한 공성추 마냥 부풀어 올랐다.

롱기누스의 창.

거창한 이름을 붙인 그 마법은 헌터계 최고의 화력을 가진 창이었다.

그리고 이내 니콜라제가 창을 내던졌다.

내던져진 창은 주홍색 빛을 흩뿌리며 포탄같이 날아갔고 나는 재빨리 그 창의 뒤꽁무니를 붙잡았다.

콰가가가가가각!

최고의 화력을 가진 창답게 그 위력 하나만큼은 엄청났다.

눈앞에 있던 검은 것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며 나아간 창에 매달린 나는 순식간에 탑에 도달할 수 있었고, 바로 눈앞에 신기루 같은 탑의 모습이 보였다.

곧 뒤틀린 공간의 탑은 롱기누스의 창을 마치 다른 공간으로 날려 버리는 양 집어삼켜 버렸다.

[A클래스 백귀화를 발동합니다.]

백귀화를 발동한 순간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물들며 전신의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마치 흰색의 괴수가 된 양 커진 나는 대검에 강철민의 모든 힘을 불어넣어 탑을 향해 휘둘렀다.

찌지지지지지직!

공간이 찢겨 나가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요동치고, 탑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탑을 가르고자 미친 듯이 오러를 쏟아붓자 내 근육이 터질 것 같이 더욱더 부풀어 올랐다.

뼈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직통으로 전해졌다.

강철민의 힘 앞에 탑 또한 맹렬한 반발 작용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쩌적!

그러던 순간 내 대검에 의해 갈라진 틈 사이로 검은색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그 액체가 내 몸의 닿자 매캐한 타는 냄새와 함께 팔이 급속도로 썩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만큼이나 오러를 둘렀음에도 불구하고 오러를 뚫고 육체에 직접적으로 대미지를 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 안은 전부 이걸로 가득 차 있다 이거냐.'

썩어 가는 팔을 보며 내가 아득 이를 간 순간, 탑에서 쏟아져 나온 반발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내 육체가 튕겨 날아갔다.

"강철 오빠!"

"강철 씨!"

가까스로 뱁새와 맑은가람이 동시에 나를 마법으로 받아 주었지만, 그들은 반 이상 썩어 들다 못해 사라진 내 팔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나를 보고 다른 나라 헌터가 급히 다가와 내게 치유 마법을 걸어 주었다.

그 덕에 팔의 형체가 어느 정도 돌아오고 있긴 했지만, 헌터들의 눈에는 서서히 절망이 돌기 시작했다.

"강철민도 못 했다고? 니콜라제까지 도왔는데."

"젠장, 결국 개죽음이냐."

침음이 여기저기 오고 갔지만, 그 중에서 나를 탓하는 자는 없었다.

그런 그들을 보고 나는 대검을 쥔 채 다시 몸을 일으켰다.

"다시 간다. 뱁새, 서강선 둘 다 준비해."

내 말에 둘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또다시 뛰었다.

역할극 속 내가 빙의한 강철민이 외치고 있었다.

자신이 할 일은 지금 저 탑을 무너트리는 것이라고.

다시 바닥을 박차고 탑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현재 동화율 67% → 73%]

또 한 번 탑의 반발력에 튕겨 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재차 공격하길 반복했다. 그때마다 몸에 상처가 늘어났다.

하지만 강철민은 일어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수십 번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이 녀석은 절대로 쓰러지지 않았다.

엉망이 되어 가는 강철민을 보며 다른 나라의 헌터들은 미련하다는 듯 강철민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할 수 있어요."

하나 그들이 어떤 눈으로 보든 지금까지 강철민과 함께해 온 한국의 랭커급 헌터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강철민에게 어떻게든 더 힘을 보태주고, 때론 자신들도 함께 탑으로 뛰어들었다.

생을 포기하고 그저 조건반사적으로 검은 것들에게 맞서던 다른 나라의 헌터들이 조금씩 우리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벌써 몇 번이고 탑에 공격을 퍼부었지만, 탑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강철민을 중심으로 모인 그들은 조금도 포기한 기색이 없었다.

[현재 동화율 73% → 79%]

"대체 뭘 믿길래."

저렇게까지 할 수 있냐고 그들은 묻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깨달았다.

지난 몇 년간 한국이 어째서 헌터 최강국이라고 불리고 있던지를.

용을 보유해서, 강철을 보유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것과는 달랐다.

저들은 포기라는 것을 몰랐다.

몸이 엉망이 되어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해도, 그들은 또 한 번 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래, 뚫어! 뚫어라, 강철민!"

다른 나라의 한 헌터가 다시금 달리는 강철민의 뒤를 따라 탑을 향했다.

그는 강철민의 길을 열어주고자 능력을 쏟아부었고, 곧 검은 것들에게 덮쳐 죽었다.

탑에 도달한 강철민은 또다시 반발력에 튕겨 날아갔다. 이제는 신체의 절반이 죽어 가고 있었지만, 다시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재 동화율 79% → 86%]

휘청거리는 강철민의 옆에 뱁새와 도각이 동시에 서서 그를 받아주었다.

강철민은 둘의 어깨를 잡아 몸을 일으키곤 대검을 쥐었다.

"도와."

"도와라!"

"강철을 도와!"

"망할, 그냥 도와! 개죽음이고 자시고 돕는다!"

다른 나라의 헌터들이 이를 아득 갈며 탑을 향해 달리는 강철민을 따라 뛰었다.

이제 뒤는 모른다.

하지만 유일하게 걸 수 있는 희망은 그것밖에 없었다.

또다시 헌터들이 죽어 나간다.

하나 이제 그들에게 포기란 없었다.

그저 멍청할 정도로 우직하게 탑을 향해 달려가는 강철민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거 봐. 나 없으면 안 되잖아."

그리고 또 몇 번의 시도가 있었을까, 다시금 도약하려던 순간 강철민은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자그마한 소녀가 있었다.

올해로 고작해야 16살.

우리 집에서 가져온 듯 자기한테는 한참 커 보이는 강철민의 후드티를 챙겨 입은 녀석은 모자를 꾹 눌러 쓴 채 이곳에 서 있었다.

117화

"어, 어라? 이 애."

이제는 나만큼이나 엉망이 된 뱁새가 하원의 여동생으로 알고 있는 그녀를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이 녀석은 세계를 통틀어 1위 헌터 용, 한미리.

이 녀석이 기어코 여기에 오고 말았다.

"돌아가."

"아저씨, 저거 결국 못 뚫었잖아."

치유 마법을 몇 번이나 썼음에도 엉망진창이 된 강철민을 보고 한미리가 말했다.

"저거는 나도 다루기 힘든 공간 마법이 몇백 개나 걸려 있어. 힘으로는 절대 못 뚫어."

"그래서 네가 돕겠다는 거냐."

한미리는 본인 스스로 시인했다.

자기도 다루기 힘든 공간 마법이라고.

그렇담 저걸 뚫으려면 한미리도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와, 용 왔구나."

나를 보고 한미리가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어느 틈에 다가온 건지 아몬이 반가운 양 한미리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도 나름대로 고생한 듯 이전보다 엉망이 된 상태였지만, 아몬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곧 녀석의 말에 주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용이라고?"

"저런 어린 애가?"

"아몬이 용이라잖아. 그리고 저 애, 아까까지는 없었어. 갑자기 나타났다고!"

"용이다. 진짜 용인 거야!"

사람들의 표정에 하나둘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들이 1위 용의 등장에 새로운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보고 한미리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래도 자신이 정말로 나설 필요가 없는 거냐고.

아몬 녀석은 한미리를 부추기고자 일부러 다른 녀석들에게 한미리의 정체를 까발린 거였다.

"아저씨, 나 여기까지 왔어. 결정했어. 가족이 무슨 소용이야. 살 곳이 없어지면 아무 의미 없잖아."

씩 하니 한미리가 웃음 지었다.

그 웃음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웃음이었고, 나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강철민과 동화하듯 손을 들어 올렸다.

90%까지 차오른 동화율 탓에 내 기억과 강철민의 기억이 제멋대로 뒤섞여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강철민 녀석은 내게 사과하고 있었다.

한미리는 여기에 와선 안 되었다고.

자신이 약한 것에 미안하다며.

'그래, 이제 내 차례다. 빠져 있어. 강철민.'

한미리를 잠시 본 나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그러곤 그 상태로 주먹을 쥐곤 한미리의 머리를 그대로 내리쳤다.

이에 놀라 한미리가 공간 마법을 발동시키며 피했고. 그런 녀석을 보고 나는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

"야, 말 좀 쳐 들으라고."

"어어?"

이를 아득 간 내 말에 한미리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의 반응을 보며 나는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곤 대검을 쥔 손에 내 본래의 오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파직.

이내 천둥소리가 튀고 대검의 형체가 서서히 별천도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내 오러가 성좌의 힘을 넘어섰기에 덧씌운 이미지가 부서진 것이다.

[현재 동화율 90% → 81%]

"아저씨?"

놀란 한미리가 나를 바라보는 동안 별천도를 허리춤에 두르곤 탑을 돌아보았다.

지금껏 필사적으로 쌓아 놓은 동화율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잘 들어. 넌 여기서 기다린다."

"하지만."

"좀 들어 처먹어라. 16살 살고 세상 다 산 표정 짓는 꼬맹이가 세상을 구하긴 뭘 구해."

스파크가 몸 위에서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내 본래의 오러가 강철민의 몸을 뚫고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나를 보고 주위 헌터들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철, 너 어떻게."

그들은 내 본연의 힘을 가늠할 수 조차 없는지 시종일관 태평하던 아몬조차도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나를 보고 있었다.

[현재 동화율 81% → 72%]

그에 따라 동화율이 미친 듯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상관없었다.

이야기의 끝이 코앞까지 도착했다.

이걸 위해 강철민 녀석이 필사적으로 저 탑에 맞선 것이니까.

"한미리, 어차피 앞으로도 평생동안 수많은 녀석들이 너에게 와서 세상을 구해야 한다고 할 거다."

[현재 동화율 72% → 59%]

"그게 무슨...."

아니, 이미 했을지도 모른다.

나보다 앞서 클리어한 사람이 2명이나 있다. 그리고 뒤를 따라올 참가자들은 더 많다.

그 녀석들 대부분이 한미리에게 강요할 거다.

가족을 지키기보다는, 세계를 구하라고 그것이 바로 가족을 지키는 일일 거라고.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 그것이 성좌가 만들어 낸 이야기의 결말이다.

하지만 나는 확실히 알고 있다.

성좌가 원하는 이야기는 자신이 만들어 낸 결말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참가자가 새롭게 쓰는 이야기. 그리고 그 끝을 완성하는 것이다.

녀석들은 자신이 창조한 이야기가 언제나 새롭게 바뀌기를 고대하고 또 고대하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더 철저하게 이야기를 만들고, 예정된 결말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그러한 역경을 뚫고 우리가 자신들이 생각 못 한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 주기를 바라니까.

['35층의 주인' '종말을 부르는 늑대'가 침을 삼킵니다.]

눈앞에 뜨는 알림창.

곧 강철민의 몸에 스파크가 튀고 내 모습이 얼핏 드러났다.

당연히 그만큼 동화율이 떨어졌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탑을 향해 별천도를 겨누었다.

"그러니 나만큼은 너한테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이 층에서 가져가기로 한 이야기니까."

별천도 위에 응집된 오러가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것을 토해 내려는 양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온 번개 속에서 나는 검을 내리그었다.

일순간 일대는 빛으로 휩싸였다.

구식(九式)

낙뢰(落雷)

쏟아지는 빛줄기가 탑에 내리꽂히고, 탑은 감당할 수 없는 오러 앞에 미친 듯이 뒤틀렸다.

마치 세계를 지워 버릴 듯한 위력의 낙뢰를 목격한 이들은 경악스러운 소리를 내뱉었지만, 나는 그저 말없이 앞을 직시하고 있었다.

[현재 동화율 59% → 36%]

단 한 방에 벌써 동화율이 30%대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검은 것들은 낙뢰 한발에 모조리 쓸려 나갔지만, 탑만은 아직도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 순간 파직하고 층의 제약이 붉은색 스파크를 튀며 내 몸 위로 덧씌워졌다.

이 이상 힘을 발휘하면 역할극과 층의 법칙이 깨져 버릴 것이라는 양 이 제약은 나를 어떻게든 옥죄려 했다.

이것들은 '이곳에서 너는 강철민, 하천성이 아닌 강철민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저씨!"

"철민아! 너!"

몸 위에 튀고 있는 층의 제약을 보고 놀란 녀석들이 소란스럽게 외쳤다.

아무래도 녀석들의 눈에 지금 나는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방출해 나를 희생하여 탑을 분쇄하려고 하는 듯이 비치는 것 같았다.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그간 쌓아 온 동화율을 희생시키고 있으니까.

성좌 놈은 바라고 있는 거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제약을 내게 걸어 이야기를 원래의 결말에 도달하게 만들려고 하면서도.

내가 자신이 거는 제약과 모든 역경을 어떻게든 뚫어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 주기를.

"그래, 그걸 바라는 거라면 들어 줘야지. 강철민 이 머저리도 함께하면 되는 거 아니야."

[S클래스 백귀야행을 발동합니다.]

살아오며 단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S클래스.

그 클래스가 발동된 순간 내 몸의 인영이 흩뜨려지기 시작했다.

주위가 일순간 구름에 휩싸이고, 그 안에서 나와 똑같이 생긴 자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전원이 별천도를 쥐고 있었고, 탑을 향해 동시에 겨누었다.

S클래스 백귀야행, 자신과 똑같은 능력을 지닌 자를 다수 강림시키는 단순한 클래스였다.

하나 강철민 녀석이 쓰면 보잘것없는 클래스라도 나에게는 다르다.

지금 내 옆에 선 이 녀석들 전원이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할 하천성의 분신이니까.

토옹.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여기 모인 하천성 전원이 같은 자세로 같은 오러를 끌어 올린다.

그러자 층의 제약조차 견디지 못하고 경악하며 몸을 움츠러트렸다.

세계조차 경악하는 그 힘이 들고 있는 검 한 자루에 담겼다.

그리고 나는 검을 휘둘렀다.

십식(十式)

전야(電夜)

수십 개의 번개가 휘몰아치는 밤.

곧 붉은색의 하늘이 번개에 집어 삼켜졌다.

마치 번개는 지금까지 있었던 울분을 토해 내는 양 모든 것을 지워 나갔고, 이윽고 탑이 있던 자리에는 새하얀 공간만이 남았다.

곧 깨져 나가는 소리가 사방팔방에서 울려 퍼졌다.

탑은 번개의 밤과 같이 종적을 감추어 버렸고, 검은 것들은 견디지 못하고 소멸했다.

하나둘 사라져 가는 분신들 속에서 나는 가만히 흰색의 공간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성좌에 의해 빙의했던 강철민의 몸이 조각조각 나며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아저씨."

잠시 오랜만에 제대로 써 본 내 힘에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시선이 뒤로 향하자 거기에는 어느 틈에 쓰고 있던 모자가 날아가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있는 한미리가 서 있었다.

녀석은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그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냐는 듯 내게 답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 녀석을 보며 나는 그저 핫 하고 가볍게 비웃어 줄 뿐이었다.

"어린애는 집에 가서 발 뻗고 잠이나 자라."

처음과 같이 나는 마지막까지 녀석에게 같은 말을 해 줄 뿐이었다.

[축하합니다. 3번째로 35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35층의 주인' '종말을 부르는 늑대'가 격하게 소리 내어 짖으며 기쁨을 표합니다.]

['35층의 주인' '종말을 부르는 늑대'가 당신을 지목합니다.]

['35층의 주인' '종말을 부르는 늑대'가 당신에게 세례를 내립니다.]

이야기의 끝을 알리듯 성좌의 알림이 열심히 떠올랐다.

쏟아지는 메시지 속에서 나는 새하얀 공간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내 뒤를 한미리가 급히 쫓아왔다.

"아저씨, 아저씨는 처음부터 강철이 아니었지!"

마법에 예민한 녀석이기 때문일까, 녀석은 어느 틈에 내가 자신이 알던 강철민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성좌가 만들어 낸 환상까지 잘도 꿰뚫어 보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다시, 다시 볼 수 있어?"

내가 떠나간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한미리가 애타게 불렀다.

그 부름에 나는 손을 흔들며 대답해 주었다.

"너도 떠나보내는 거에 익숙해져라."

내 말은 녀석의 가족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층의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언젠가 녀석은 결국 가족을 떠나보내야 할 때가 또 오겠지.

그때는 또다시 스스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현재 동화율 3%]

이제는 강철민의 기억이 흐려지다 못해 사라져 가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거기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지난 며칠간 내가 함께했던 그는 가뜩이나 최종 악당같이 생긴 녀석이어서 그런지, 엉망이 된 모습이 마치 죽기 직전의 마왕과 같았다.

"내가 이렇게 한 건 성좌 녀석의 지목을 받으려고 한 거다."

퉁명스러운 내 말을 듣고 강철민은 옅게 웃음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 모습이 조금 아니꼬워 한 대 쳐 줄까 싶었지만, 녀석은 금방이라도 쓰러지기 직전이었기에 나는 그만두었다.

대신 옆에 다가간 나는 손을 들어 녀석의 어깨를 한 차례 두드려 주는 거로 대신했다.

"고맙다."

강철민의 감사 인사를 듣고 괜스레 낯간지러운 기분이 된 나는 녀석을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이 세계는 늘 그렇듯 다음 참가자를 위해 다시금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성좌에게 어떠한 결말을 보여 준다 한들, 그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 속에서 또 다른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길 원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까지만은 세계를 네가 책임지라고 생각한 채 또 한 번 층을 올랐다.

118화

Chapter 9 ― 되새기는 기억

"아, 소주나 라면 더 먹어둘걸."

다음 층인 36층에 오르기 전 쉴 수 있는 공간인 35.5층에 도착한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오랜만에 맛본 한국 음식이 계속해서 입안을 감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층, 다시 돌아갈 생각도 없었기에 나는 35.5층에서 구매한 버터 오징어를 우물거렸다.

그러면서 이번에 그동안 따로 처리하지 않고 쌓아 둔 아이템과 성좌 녀석의 권능을 살펴보기로 했다.

"좋은 것 좀 줘 봐라. 나만 만날 이게 뭐냐."

마치 내가 이미 힘을 가졌으니, 더 이상 줄 건 없다는 양 크라운 로드는 줄곧 나에게 보상을 짜게 주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이전보다 나은 대가를 주기를 바라며 아이템을 수령하기로 하였다.

[32층 클리어 보상으로 '은하수의 눈물'이 지급되었습니다.]

[33층 클리어 보상으로 '멈추지 않는 금 주머니'가 지급되었습니다.]

[34층 클리어 보상으로 '별석 잔해'가 지급되었습니다.]

[35층 클리어 보상으로 '필연의 결계'가 지급되었습니다. ]

내 앞에 놓인 아이템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했다.

은하수의 눈물은 주로 스텟 성장에 도움을 주는 아이템으로, 예전부터 유명했다. 그래서인지 상위권 녀석들은 무조건 이걸 복용했던 거로 기억한다.

"지금 나한테는 쓰레기네."

두 번째로 멈추지 않는 금 주머니는 말 그대로 시간마다 금을 계속해서 내뱉는 아이템이다.

크라운 로드에서 돈은 어느 층이든 전부 통용되어 있다.

이전에 금광이 있는 층에서 돈을 상당히 많이 벌어둔 탓에 평소에도 펑펑 쓰고 다니긴 했던 나지만, 앞으로 더욱 자본 걱정이 없을 듯싶었다.

"이건 그래도 좀 쓸만하고. 잠깐, 오호라. 이걸 준다 이 말이지."

다음으로는 별석 잔해.

오랜만에 등장한 제대로 된 아이템에 눈을 반짝이었다.

[별석 잔해 (유니크)]

*재료 아이템

설명 : 오래전 사라진 성좌의 파편, 미약한 성좌의 힘이 깃들어져 있습니다.

이건 나중에 쓸모가 있겠다고 생각하며 고이 넣어 둔 나는 마지막으로 필연의 결계라고 이름 지어진 두 개의 반지를 살펴보았다.

[필연의 결계 (에픽)]

설명 : 서로를 믿을수록 강렬한 힘을 가집니다. 그 믿음이 진짜라면 서로의 힘을 공유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