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딱히 숨길 이유는 없었기에 바로 대답해 주었다.
"이자벨라라면 분명."
"너한테는 성녀로 더 익숙하겠지."
이자벨라의 지명이 성녀였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하고 보니 참, 지지리도 안 어울리는 지명이었다.
"맞아. 당신 성녀랑...."
내가 이자벨라와 어떤 관계였는지 알고 있었던 듯 그녀의 눈에 안타까움이 묻어 나왔다.
"그런 눈 하지 마라. 딱히 별일 없었으니까."
"층이 당신의 기억 속에서 선택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이럴 때만큼은 강한 척 안 해도 돼. 나도 같은 층을 올랐으니까."
"같은 층을 올랐다고 해서 같은 기억을 본 건 아닐 텐데?"
"그렇긴 하겠지만."
우물쭈물하는 검왕을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나 지금이나 검왕은 크라운 로드를 오르기에는 너무 착해 빠졌다.
'이 녀석이 본 과거가 무엇일지는 몰라도.'
나보다도 빨리 자신의 과거에서 빠져나와 층을 클리어한 것을 보면, 그녀와 같은 얼빠진 과거이지 않을까 싶었다.
"됐다. 난 갈 테니 알아서 해라."
"그럼 나도 같이 갈게."
그 순간 검왕은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뭔 헛소리야. 넌 구천옥녀를 기다려야 하잖아."
앞에서 구천옥녀를 기다린다고 말한 주제에 나를 따라오겠다고?
무슨 생각이냐고 그녀를 돌아보고 있자 검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끼리 이야기해 둔 게 있거든. 3일 이상 기다렸는데 층을 클리어하지 못할 경우, 기다리는 사람이 먼저 층을 오르는 거로."
"3일이라는 건."
"응, 벌써 4일이 넘었어."
그리 말하며 검왕은 뒤에 아래층과 이어지는 계단이 나타난 장소를 바라보았다.
구천옥녀가 어떤 과거를 보고 있는지는 몰라도 현재로서는 언제 나올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이 앞서 나가 다음 층에 대해 미리 알아본다면, 혹여나 실패하더라도 시간을 유용하게 쓸 수 있기에 이런 계획을 짜 둔 것일 것이다.
크라운 로드에서 시간은 5년으로 한정된 귀중한 자원이니까.
"그렇담 저도 같이 끼워 주세요. 왕들이시여."
그러던 중 듣기 싫은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다.
내가 찌푸린 얼굴로 시선을 돌리자, 거기에는 익숙한 얼굴이 한 명 서 있었다.
"나락? 당신도 하천성이랑 아는 사이였어?"
"저희가 얼마나 돈독한 관계인지 검왕이 알면 깜짝 놀라 질투하게 될 겁니다."
검왕의 놀란 얼굴에 나락은 장난스레 나에게 팔짱을 꼈다.
그 행동에 오싹하고 소름 돋은 나는 녀석을 발로 차버리며 그 즉시 별천도를 뽑았다.
"야신 녀석의 비밀을 결국 말 안 해 놓고 도망간 주제에 잘도 겁 없이 다시 나타났다. 이거지?"
"이런, 벌써 오래전 일인데 왜 그러세요."
오래전 일은 개뿔이.
"잠깐만, 진정해. 하천성, 나락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지는 모르겠지만, 나락은 성좌들한테 비호를 받고 있어. 그를 함부로 죽였다간 당신한테 해코지하려는 성좌들이 몰려올 거야."
"그럼 그놈들도 싹 다 죽이면 돼."
['돌원숭이'가 이번 건 말 잘했다며 박수를 칩니다.]
['오만의 아틀리에'가 자신도 당신과 함께해 줄 거라고 결심합니다.]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동감한다는 듯 어서 싸우라는 양 재촉합니다.]
['서릿발의 고양이' 가 재밌겠다는 양 젤리 같은 발바닥으로 꾹꾹이를 합니다.]
내 쪽에 붙은 최상위 성좌 녀석들이 응전 태세를 보이자 그에 따라 별천도의 빛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나락 쪽의 성좌들도 힘을 보태 녀석의 몸 주위에 별자리들이 맴돌기 시작했고, 검왕은 그 사이에 껴서 어쩔 줄 몰라 하였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하늘이 칠흑으로 물들고 행성을 반으로 갈라 버릴 만한 크기의 검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
['무기의 신'이 이곳에 검을 강하하려 합니다.]
나조차도 몸이 떨릴만한 성좌의 격이 주위에서 제멋대로 요동쳤다.
거대한 검의 등장에 놀란 수준 낮은 별자리들은 서둘러 도망을 치고, 오로지 최상위 성좌들만이 그 검에 대응하듯 자신의 별을 빛내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해! 당신들도 그쪽 성좌들한테 적당히 하라고 해!"
검왕이 소리치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별천도를 허리춤으로 돌렸다.
그에 따라 나락도 성좌들에게 그만해 달라며 부탁을 하였고, 검왕은 말없이 하늘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서서히 거대한 검이 밤하늘 속으로 사라지더니, 하늘이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검왕, 무기의 신이 너의 배후성이 되어 준 거냐?"
내 물음에 그녀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더니 스리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의 신, 내가 돌원숭이와 같이 이름을 알고 있는 최상위 성좌 중 하나.
그리고 녀석은 그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아주 오래전 무왕이라는 녀석이 딱 한 번 무기의 신과 배후성을 맺은 적이 있다고 들었다.
아쉽게도 그 무왕이라는 놈은 내가 1회차일 때 최전선에서 죽어 버려 소문으로밖에 모른다.
내가 5회차에 걸쳐 크라운 로드를 오르는 동안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무기의 신이 무왕과 계약을 맺은 이래로 다시금 자신의 배후성을 택할 줄이야.
'확실히 검왕은 검 하나는 잘 다루기는 하는데.'
그녀의 지명이 괜히 검왕인 게 아니다.
내가 알기로 검왕은 지금까지 본 그 누구보다 검을 제일 잘 다루는 녀석이었으니까.
애초에 소문으로 듣기론 이 녀석은 원래 지구에서도 검도 국가대표였다고 할 정도니 말 다 했다.
"50층 전에 성좌와 배후성을 맺은 건 나도 처음 있는 일이라서 얼떨떨하지만 일단 그렇게 됐어."
앞에서 말했듯이 배후성이란 진명을 가진 성좌의 선택을 받는 것으로, 원래는 50층부터 이루어지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검왕의 경우 50층이 아님에도 벌써 배후성이 생겼으니, 성좌들 쪽에서도 상당히 소란이 있었을 것이리라.
'하지만 무기의 신이니까.'
규칙을 묵살하고 일을 진행 시킬 만큼 힘이 있는 성좌이니, 검왕 녀석도 당황스럽긴 하지만 배후성으로 받아들인 것이겠지.
하여튼 성좌란 것들은 다 똑같다.
겨우 상황이 진정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검왕은 나와 나락은 번갈아 보곤 내게 물음을 던졌다.
"그나저나 야신과 관련된 거라면 나도 그냥 넘어갈 수 없겠는데, 무슨 이야기야?"
황제는 야신의 손에 죽었다.
그와 함께 최전선을 달렸던 검왕에게도 야신은 증오의 대상일 것이다.
그렇게 검왕이 자신을 쏘아보고 있자, 그는 도망갈 구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이었다.
"간단해요. 제가 천왕님께 야신의 비밀을 알려 주기로 했다가 도망쳤거든요."
"그건 당신이 나빴네."
내 편을 들면서 은근슬쩍 야신의 이야기를 들으려 드는 검왕을 보고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현 랭커에, 이전 회차에도 최전선을 매일같이 누비던 여자가 자기 속내 한 번 참 못 숨긴다.
'순진한 건지. 아니면 그게 본인의 강점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실제로 나는 오히려 속내를 숨기며 능청스레 구는 나락보다 검왕이 대하기가 더 어려웠다.
내가 겉과 속이 같아 보이는 녀석은 그다지 많이 대해 본 적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27화
Chapter 10 - 나는 키워서 먹어
"어서 하천성한테 이야기 해 줘. 앞으로 크라운 로드를 계속 올라야 할 텐데, 층을 오르는 걸 좋아하는 당신이라면 하천성과는 이후로도 계속 마주칠 거 아냐."
내 옆에 서서 당당히 정보를 요구하는 검왕이었다.
"그러네요. 거래는 거래니까요. 별님들이 말하면 재미없을 거라고 닦달한 탓에 은근슬쩍 넘겨보려 했지만, 이 이상하면 제가 신뢰를 잃겠네요."
신뢰 따위 원래도 존재하지 않았다만.
어찌 되었든 이야기해 주겠다고 하니,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자 나락은 씨익 하니 웃더니 말했다.
"야신은 별님이 되었어요."
이내 이어진 녀석의 말에 나는 서서히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성좌가 되었다고?"
그러자 대협이 떠오른 듯 검왕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심각한 상황임을 깨닫고 이를 아득 갈았다.
"...그 녀석, 설마 진명까지 얻은 거냐?"
"네, 맞아요."
"잠깐. 성좌가 되었던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진명을 얻었다니? 야신은 참가자인데?"
진명, 50층 이후부터 존재하는 진짜배기 성좌들.
녀석들은 마음먹으면 어느 층이든 가볼 수 있고, 참가자의 배후성이 되어 줄 수 있는 존재들이다.
대협이 준성좌가 되고자 그렇게 발버둥 쳤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스케일로 야신은 움직이고 있던 것이다.
'어째서 야신 녀석이 클리어하지도 않은 층에 모습을 드러냈나 했더니.'
이전에 마주한 야신을 떠올린 나는 눈살을 팍 찌푸렸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녀석이 어디에든 갈 수 있단 건, 아직 참가자들이 오르지 않은 층도 녀석은 자기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은 최전선까지 뛰어본 야신에게 최고의 무기다.
미리 층을 본다는 건 그만큼 대처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니까.
게다가 진명을 가진 성좌와 진명이 없는 성좌는 격이 다르다.
야신 녀석이 마음먹고 그 힘을 휘두르면 진명이 없는 성좌들은 야신에게 강제로 층을 클리어하기 위한 정보를 내놓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다른 진명을 가진 성좌들이 그 꼴을 그냥 보고만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하지만 성좌 중에는 오히려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았다는 양 야신을 돕는 녀석들도 상당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놈들이 건넨 정보는 분명 고스란히.
"썩을, 하일성 개자식이."
하일성 자식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층을 오르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야신 녀석이 그런 식으로 도와주어서였다.
지금까지 하일성이 층을 클리어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은 것 또한 야신 녀석의 조작에 의한 것.
'아직 녀석이 가진 클래스의 대해서도 모르는데, 야신이 진명을 가진 성좌가 되었다고? 쌍으로 지랄 맞네.'
물론 이런 것이 통하는 건 50층까지겠지만.
'그 녀석들은 반드시 내가 50층 이상 오르는 것을 막으려 하겠지.'
그때가 끝장을 볼 때이다.
"제가 별님들의 힘이 필요할 거라는 이유를 이제 잘 아시겠죠?"
이전 나에게 억지로 돌원숭이를 붙여 주기까지 했던 나락이 싱글벙글 웃자 괜스레 짜증이 났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이 녀석 말대로 진명을 가진 성좌가 된 야신을 억제하려면 최상위 성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돌원숭이'가 왜 안 싸우냐며 야유합니다.]
['오만의 아틀리에'가 '무기의 신'은 좀 그렇다며 헛기침을 내뱉습니다.]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들었던 칼을 아쉽게 내립니다.]
['서릿발의 고양이'가 깔깔거리며 꼬리를 살랑거립니다.]
문제는 이 녀석들이 나를 도와줄 거란 보장이 없다는 거겠지만.
아까 전 나락과 싸움이 붙으려던 찰나에 기꺼이 응전하려는 태도를 보여 주던 녀석들도 그때 가서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이래저래 탁상공론을 한들 도움 될 건 없다고 생각한 나는 층이나 마저 오르기로 했다.
"하천성, 갈 거면 같이 가."
내가 말없이 먼저 몸을 돌리자, 대화를 듣고 있던 검왕이 바로 따라오려 했다.
그러나 나는 그걸 거절하듯 나락을 검지로 가리켰다.
"넌 이 녀석이랑 층을 오르든가 해. 실력만 본다면 같이 갈 사람으론 충분할 테니까."
"잠깐만, 난 당신에게 같이 가자고 했잖아."
"싫다니까."
나는 이번에도 단칼에 거절하고 몸을 돌렸다.
"고집불통, 크라운 로드는 참가자끼리의 경쟁을 조성하지 않는데, 정말 왜 이리 경쟁심이 강한 거야? 아까 짜증 안 낸다는 말 취소. 바로 취소야."
"원래 저런 분이니까요. 화병을 몸에 두른 채 살아가는 화의 마신. 앞으로 천왕이 아니라, 화왕으로 부르죠."
야유를 퍼붓는 검왕과 나락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층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두 녀석은 내 뒤를 그대로 따라오기 시작했고, 그 행동에 나는 눈살을 팍 찌푸렸다.
"내 말이 말 같지가 않냐?"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검왕과 나락을 노려보자 둘은 서로를 바라보곤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나도 이제 층을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해서 움직인 거 뿐이야."
"저도 마찬가지죠. 이전 층을 클리어했으니, 다음 층에 오르는 거야 당연한 거잖아요?"
이 뻔뻔한 녀석들이.
내가 이 녀석들을 너무 오냐오냐 받아 준 건가?
이참에 한 번 제대로 두들겨 패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팀을 하자곤 안 해. 어차피 당신이 층을 클리어하면, 나도 똑같이 층이 클리어될 테니까. 같이 오르기만 해도 득을 보는 거라 이러는 것 뿐이야."
"난 손해다."
"그렇담 팀을 하면 되지?"
놀리듯 히죽 웃는 검왕을 보고 나는 이마를 감쌌다.
이 녀석이 착해 빠졌다고 한 건 취소다.
랭커답게 영악한 구석을 여실히 드러내는 검왕을 보고 나는 주먹을 들어 올리려다가, 그러는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져 알아서 하라는 양 몸을 돌리고 층을 올랐다.
['37층의 주인' '원초의 씨앗'이 당신을 향해 싹을 틔워 보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층에 입장했다는 알림과 함께 눈앞이 변화했다.
이내 뒤를 돌아보았지만, 검왕과 나락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개인 층인가.'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한 나는 곧바로 이어지는 성좌의 메시지를 살폈다.
['37층의 주인' '원초의 씨앗'이 당신에게 37층의 클리어 조건을 제시합니다.]
['세계를 휩쓸 당신의 군단을 만들어 보세요.' 세계 대륙 전쟁의 발발로 인해 각 종족이 서로 맹렬하게 대립하고 있는 세계, 당신은 그 세계에 사는 한 종족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대륙 전체를 당신이 지배하는 종족의 손에 넣기 위해 오늘도 필사적으로 살아가 봅시다.]
[이번 층은 37층부터 38층까지 연결되어 있으며, 다음 층은 당신이 원하는 때에 언제든 클리어할 수 있습니다.]
[37층은 개인 클리어 층으로, 오로지 종족을 성장시키는 것에만 투자 가능합니다.]
[37층에서의 한 달은 바깥 시간을 기준으로 하루이며, 머물 수 있는 기한 최대 1년입니다.]
[※ 주의사항 ※ 대륙을 차지해야 하는 것은 당신이 아닌 다음 세대의 수장입니다. 당신의 권한은 38층에서 박탈당하며, 종족의 운명은 당신의 권력을 물려받은 다음 세대 수장에게로 이어집니다.]
"설명이 뭐 이리 많아. 적당히 요약할 것이지."
짜증스레 외친 나는 턱 위에 손을 올린 채 가만히 설명을 들여다보았다.
일단 내게 할당되는 종족을 육성하는 층이라는 것은 잘 알았다.
'드래곤을 키울 때 보다 육성 기간이 짧기는 하다만 시간에는 크게 제한이 없는 모양이고.'
문제는 뒤에 이어진 주의사항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 놔도 만약 다음 수장인 놈이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38층은 끝장이었다.
'게다가 다음 층에서 저번과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이전의 드래곤 로드 때처럼 38층도 다른 녀석들이 키운 종족들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 이야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것도 내가 개입도 못 하는 전쟁을.
"또 짜증 나는 걸 만들어 놨네."
그리고 이번에는 한 명만 키우는 것이 아니다.
종족 전체를 키우는 것이니까.
"빨리 다음 단계로 진행해."
여기서 불평불만을 늘어놔 봤자 의미 없다.
차라리 어서 빨리 종족을 고른 다음, 클리어 조건을 찾은 뒤 그에 맞춰 대처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성좌를 재촉하자마자, 순간 눈앞에 슬롯머신 하나가 쿵 하고 내려왔다.
[슬롯머신을 돌려 종족을 뽑아 주세요.]
녹이 이곳저곳 쓸어서 싸구려처럼 보이는 슬롯머신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하는 수 없이 손잡이를 잡고 내렸다.
그러자 슬롯머신의 릴 위에 적혀 있던 다양한 종족들이 빠른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잠시 후 그 속도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띠링!
슬롯 중앙에 박힌 릴이 완전히 멈춘 순간, 알림음과 함께 슬롯머신에 결과가 표기되었다.
[리저드맨 C급]
[슬롯머신을 앞으로 2회 더 돌릴 수 있습니다. 단, 다음 차례에는 해당 종족이 슬롯머신에서 제외됩니다.]
종족이 몇 개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전 스치듯 지나가던 S급에는 아수라란 단어가 붙어 있었다.
앞으로 기회가 두 번이나 더 있는 것을 고려하면 돌려 보는 게 좋겠지.
슬롯머신의 손잡이를 다시 한 번 잡고 당기자, 또다시 전면부에 자리한 릴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몽마 C급]
[슬롯머신을 앞으로 2회 더 돌릴 수 있습니다. 단, 다음 차례에는 해당 종족이 슬롯머신에서 제외됩니다.]
그리고 얼마 뒤, 이전과 같은 C급이 또 나오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이 슬롯머신 C급만 주야장천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얼핏 들었으나 나는 어차피 똑같은 C급이 나올 거라면 정신계 능력이 주력인 몽마보다는, 차라리 리자드맨같이 전투에 적합한 녀석을 더 원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슬롯머신 손잡이를 잡곤 속으로 쓸 만한 녀석이 나와 달라며 빌면서 마지막 기회가 담긴 레버를 당겼다.
그러자 또 한 번 종족이 새겨진 릴이 돌아갔고, 나는 이번에는 전과 달리 긴장된 표정으로 기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게 마지막. 어느 종족이 나오든 간에 어떻게든 키워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을까. 슬롯머신의 릴이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원통의 속도가 멈출 듯 말 듯 줄어들며 S급인 이프리트에서 움직임이 멎으려 했다.
드디어 괜찮은 종족이 나왔다고 생각하며 쾌재를 외치려던 순간, 마치 누가 조작이라도 한듯 달칵하고 릴 플레이트가 한 칸 더 움직였다.
[트롤 F급]
[슬롯머신 횟수를 전부 다 소모하셨습니다.]
결과가 확정되자 축하라도 하는 양 형형색색의 빛을 터트리기 시작하는 슬롯머신을 보고 나는 벙벙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F급?
C급을 두 개나 포기했는데, 결국 돌아온 게 F급이라고?
"야, 이 개...."
개 같은 상황에 욕설을 내뱉으려던 찰나, 마치 내 항의는 들어 주지도 않겠다는 양 시야가 뒤바뀌었다.
그렇게 공간이 전환되고 얼마 뒤, 나는 어느 나무 바닥에 앉아 있었다.
한 차례 눈을 깜빡이다가, 곧 상황을 직시하고 서서히 눈살을 찌푸려 갈 때쯤 덜컥 하고 문이 열렸다.
그러자 자그마한 체구에 회색의 나무껍질 같은 피부를 가진 인간형 몬스터가 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한없이 약해 보이는 녀석이 바로 트롤임을 인지한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문제는 이 녀석만이 아니다.
나도 저 녀석과 똑같은 트롤의 몸이 되어 버렸다.
분명 내가 기억하는 트롤은 커다란 몸집에 육중한 체구를 가진 녀석들이었는데, 여기 트롤들은 왜 이리 작은 건지.
"우어아!"
덩치에 맞지 않게 큰소리를 지른 트롤은 내 앞으로 걸어와 열심히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우어어."
"설마 대화도 안 통하냐."
128화
[종족 언어 '트롤' 스킬이 활성화됩니다.]
내가 한심하게 트롤을 바라보고 있자 알림음이 떴다.
다행히 언어조차 통하지 않게 만들어 두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족장 후보, 족장 후보 자리, 도전자가 옴."
이제야 들리기 시작하는 트롤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지능이 꽤 낮게 측정된 모양인지 녀석은 말을 띄엄띄엄했다.
좀 답답하긴 하지만 그래도 말이 안 통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보통 이런 거면 트롤과 관련된 상태 창이 나올 법한데.'
아직 그런 창이 나오지 않는 것은 이 녀석의 말대로 내가 후보라서일까.
그냥 처음부터 족장으로 등록해 줄 것이지 족장 '후보'로 넣었다며 투덜거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놈 어디 있는데."
"따라."
내 물음에 녀석은 나를 안내해 주기 시작했다.
녀석을 따라 밖으로 나오자 거기에는 숲이 하나 있었다.
나무에 집을 짓고 사는 듯한 이 녀석들은 평범한 사람의 절반도 안 될 정도로 아담한 몸을 가졌고, 그래서인지 1m 정도만 되어도 트롤 중 가장 클 정도였다.
그런 작은 체구로 세상 걱정 없이 여기저기를 쏘다니고 있는 그들을 보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 녀석들은 약해도 너무 약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괜히 F급이 아니라 이건가.'
처음 나온 리저드맨을 잡았어야 했다고 생각한 나는 트롤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에 중심에는 작은 체구에 나름 근육을 단련한 듯한 트롤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녀석은 자기 키만 한 곤봉을 붕붕 휘두르다가 이내 나와 마주하곤 으르릉거렸다.
아무래도 저 녀석이 족장 후보 자리 도전자인 모양이었다.
"나, 도전."
곤봉으로 나를 가리키며 어눌한 말을 내뱉자, 나는 귀찮아하면서 별천도를 검집 채로 들어 올리려다 멈췄다.
'기다려. 굳이 내가 한 놈 한 놈 조질 이유가 없잖아.'
내가 아직 족장 후보인 걸 떠나, 다른 도전자까지 나오는 시점에서 이 녀석들은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힘의 논리로 움직이는 것이 분명했다.
젊은 사자가 늙은 사자에게 우두머리의 자리를 빼앗듯이 말이다.
그렇담 족장 자리를 놓고 펼치는 이 각축전에서 제대로 힘을 보여 주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덤벼들 터.
"좋아. 마침 이 정도 모였으니 차라리 잘됐네."
나는 별천도를 내리고 그 즉시 오러를 사용했다.
오러에 담은 것은 위협.
내게서 스멀스멀 기어 나온 오러가 그 즉시 주위를 장악했다.
수준은 기절하지 않을 정도, 위압감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무기, 들어라."
"후보, 뭐하냐."
"빨리 싸워라."
"겁쟁이냐."
하지만 돌아온 트롤들의 야유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에게 도전자 역할로 온 트롤은 물론 주위에 구경하던 트롤 또한 멀쩡히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녀석들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너희들 약해도 너무 약한 거 아니냐."
사람이 아무리 노려보며 위협해도 박테리아가 사람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듯이 트롤과 내 격차가 너무 커서 녀석들은 내 오러조차 느끼지 못한 것이다.
생물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준으로 약한 트롤을 보며 나는 이마를 감쌌다.
이건 연지 녀석보다 훨씬 더 멍청하고 약하지 않는가.
[준성좌 '용들의 군주'가 당장 싸우자며 소리칩니다.]
들려오는 메시지를 손으로 휘저어 끄며 나는 하는 수 없이 도전자라는 트롤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나에게 그 즉시 둔기를 휘두르려는 트롤의 머리를 쿵 하고 내려치자 녀석은 이마가 움푹 파인 채 바닥에 내리꽂혔다.
몸의 반 이상이 바닥에 박힌 트롤은 발작하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움직이지 않았고, 그러자 아까까지 나에게 야유를 퍼붓던 트롤들이 조용해졌다.
"앞으로 나한테 재촉하지 마라. 이 꼴 난다."
오러가 안 통한다면 힘으로 누르는 수밖에.
"족장은 어디 있냐."
"이쪽."
내 물음에 나를 처음 만난 트롤 녀석이 바로 안내를 시작했다.
그나마 얼빠진 다른 트롤들과 다르게 눈치 빠른 녀석이었다.
"너 이름은?"
"이름, 그게 뭐냐?"
눈치 빠른 놈을 옆에 두는 게 편할 거로 생각한 내가 이름을 묻자 녀석은 고개를 기울였다.
하긴, 종족 언어가 활성화되어서 이야기가 통하는 거지 원래 언어조차 없던 녀석들이다.
이름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내 눈에 트롤은 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만큼 부를 명칭은 있어야 했다.
"앞으로 네 이름은 보리다. 내가 보리라고 부르면 널 부르는 거야. 알겠냐."
옛날에 친구 녀석이 키우던 개 이름으로 적당히 붙이자 보리는 일단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나.
내 힘을 보고 나서부터 내 말을 고분고분 잘 따라는 것은 마음에 들었다.
"여기다."
이윽고 우리는 주위에서 가장 큰 나무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족장의 집인 듯 보리는 입구 앞에 세워진 나무판을 옆으로 옮기곤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래도 저 나무판이 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그 안에는 다른 트롤보다 체구가 큰 트롤 한 마리와 여러 다른 암컷 트롤들이 녀석의 주위에서 함께 자고 있었다.
아까까지 자손이라도 열심히 만들고 있었던 듯 집 안 가득 퍼진 기분 나쁜 냄새에 나는 자고 있던 족장 트롤의 머리를 잡아들어 올렸다.
"으, 아아!"
자는 도중 봉변을 당하자 놀란 족장이 눈을 번쩍 뜨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잠에 취해 몽롱한 표정으로 나를 살펴보다가 곧 누군지 알아차렸는지 외쳤다.
"족장 후보, 뭐냐!"
"족장을 계승하는 중입니다. 족장아."
그리 말한 나는 그대로 족장을 밖으로 내던졌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놀란 암컷 트롤들의 비명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오자, 바닥을 나뒹군 족장이 열이 받은 듯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족장은 다른 트롤보다 강한 정도지 일반 성인 남성보다도 훨씬 약했기에, 내 발에 걷어차이곤 축 늘어졌다.
[종족 '트롤'의 족장이 되었습니다.]
[종족 '트롤'이 등록 되었습니다.]
[트롤의 전승이 시작됩니다.]
내 예상대로 힘으로 움직이는 종족답게 트롤 족장을 쓰러트리자마자 전승이 시작되었다.
"새 족장이다."
"족장이 바뀌었다."
"족장! 족장!"
전승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소란 탓에 몰려든 트롤들이 내가 족장을 쓰러트린 것을 보곤 열심히 떠들어 대고 있었다.
"나, 보리, 족장의 오른팔."
"보리, 그게 뭐냐."
"먹는 거냐."
그러자 보리 녀석이 냉큼 주위에 자신이 내 오른팔이라며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다.
그 모습을 잠깐 보고 있었을까, 곧 전승이 완료되었다는 소리와 함께 창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종족 트롤(F급)]
종족 레벨 : 1
보유 종족 포인트 [G] : 0
트롤은 소형 나무 몬스터에서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무리를 이루기 시작한 소규모 종족입니다.
그들은 현재 이곳 아침 물향나무숲에서만 분포하고 있습니다.
이슬과 광합성을 즐기는 이들은 야만적이지만, 의외로 감성적인 종족일지도 모릅니다.
[현재 구매할 수 있는 목록]
1. 언어 진화 1단계 : 100G
2. 육체 진화 1단계 : 100G
3. 문명 진화 1단계 : 100G
4. 번식 진화 1단계 : 100G
5. 1차 돌연변이 : 1000G
※ 종족 포인트는 종족을 성장시키는 수단 중 하나일 뿐,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역량이 달라지며 스스로 성장할 수도 있습니다.
[종족 포인트를 얻는 방법]
1. 종족 전쟁 : 종족을 이끌어 다른 종족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세요.
2. 종족 성장 : 종족을 성장시켜 봅시다. 간단한 먹을거리부터 기술까지, 종족은 족장인 당신에게 배우며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트롤의 종족 상태 창을 읽은 나는 턱을 매만지곤 트롤 녀석들을 돌아보았다.
일단 가장 빨리 이 녀석들을 성장시킬 방법이 종족 포인트를 모으는 것이라는 건 알겠는데.
'근데 나 혼자서 쓸어 버려도 종족 포인트가 벌리는 건가?'
일단 나도 트롤의 몸이 되었긴 한데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방법으로 명시되어 있는 말 중에 종족을 이끌라는 말이 적혀 있기도 하고 말이다.
'바로 시험해 보고 싶긴 한데 만약 아니라면 가까이 있는 녀석들은 가급적 내버려 두고 싶고.'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곧 자기선전에 열중인 보리를 돌아보았다.
"보리 녀석의 상태창도 볼 수 있냐."
성좌 쪽에 물음을 던지자 불쑥 창 하나가 떠올랐다.
이런 쪽 지원은 척척 잘해 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보리]
[칭호 : 족장의 오른팔]
종족 : 트롤
성별 : 男
나이 : 3세
LV.1
체력 2
마력 0
힘 2
지력 3
민첩 1
―스킬 창―
약삭빠름[F랭크]
뛰어난 소화기관[F랭크]
재생하는 나무껍질[F랭크]
보기만 해도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태 창이 떠올랐다.
게다가 마력이 0.
이 녀석들이 어째서 내 오러를 못 느꼈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상태 창이었다.
골치 아픈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던 나는 우선 녀석들의 식습관부터 바꿔 보기로 했다.
뛰어난 소화기관이 있다는 것은 녀석들은 뭐든지 먹을 수 있다는 소리고, 앞에서 미리 '간단한 먹을거리부터'라는 말이 적혀 있었을 정도니 이게 정석 루트이리라.
"보리, 너희들 그동안 뭐 먹고살았냐?"
"먹는 거? 이슬과 나무껍질, 광합성만 있으면 충분."
지금도 하고 있는 중이라는 양 보리는 양팔을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단백질은 전혀 없는 식단이라 이거지.
육체를 성장시키는데 단백질만 한 것도 없었기에 나는 식습관을 손쉽게 고칠 수 있음을 깨닫곤 오러 감지를 사용했다.
숲 이곳저곳으로 퍼진 오러 감지는 숲에 존재하는 생물들을 한 차례 훑고 지나갔고, 나는 곧 괜찮은 녀석을 발견했다.
"보리, 트롤 녀석들 여기 다 모아놔."
그리 말한 뒤 나는 짧은 다리를 움직여 오러 감지로 발견한 몬스터를 향해 달렸다.
그러곤 얼마 안 가 인간이 보기에도 산만 한 몸집에 곰 같이 생긴 몬스터 한 마리가 보였다.
머리 위에 꽃 하나가 솟아 있는 이끼 낀 곰 몬스터는 방금 막 사냥한 듯 먹이를 열심히 먹고 있었고, 나는 그 즉시 별천도를 뽑곤 도약했다.
서걱!
오러를 쓸 것도 없이 힘만으로 곰 몬스터의 목을 순식간에 갈라 버리자 녀석은 나를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죽었다.
그 뒤, 손쉽게 곰 몬스터를 들어 올린 나는 곧바로 트롤 군락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마침 열심히 트롤을 모으고 있는 보리와 트롤들을 마주했다.
"으아아!"
"우어어!"
이내 곰 몬스터를 든 내 모습을 보고 트롤들이 경기를 일으켰다.
[트롤들이 천적 에우플 베어에게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녀석이 트롤의 천적이었나.
마침 잘됐다.
약할 때는 겁먹어도 괜찮지만 강해지고 나서까지 이러면 곤란하니, 에우플 베어를 먹어 겁을 줄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오늘부터 너희 먹이는 나무껍질, 이슬, 광합성 같은 게 아니라 이거다."
"머, 먹이?"
"족장 미쳤다."
소란스러운 트롤들을 두고 나는 별천도로 에우플 베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오래전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숲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층을 겪은 덕분에 서바이벌 기술은 익숙했다.
그렇기에 에우플 베어도 별로 어렵지 않게 해체할 수 있었고, 나는 손질한 고기를 한 입씩 베어 먹어 보며 독이 있는지 없는지만 확인해 보았다.
생으로 씹으니 맛은 그냥 양념 하나 안 된 육회 같았고, 식감은 풀을 씹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더한 것도 먹어 본 적 있기에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보리 녀석한테 장작을 가져오게 시켰다.
이윽고 보리가 열심히 장작을 챙겨오자 해체를 전부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트롤들을 모으곤 말했다.
"잘 봐라. 이게 불 피우는 법이니까. 앞으로 내가 안 해 줄 거니까 너희들 스스로 터득해. 못하는 녀석은 두들겨 팬다."
그리 말하고 나는 화톳불을 만든 다음, 곧바로 불부터 피워 보였다.
"악마! 악마다!"
"불! 피해!"
그러나 태생이 식물이라서인지 내가 불을 피우자마자, 트롤은 경악하며 도망치려 했다.
그렇기에 나는 도망치는 녀석들을 한 대씩 쥐어박으며 바닥에 내리꽂아 주었고, 곧 불보다 더한 공포에 굴복하여 다들 얌전히 내게 다시 모여들었다.
129화
"배워."
"알았다."
"무섭다. 불보다 족장이 더 무섭다."
투덜거리면서도 트롤들은 열심히 불 피우는 법을 배웠다.
몇몇은 불을 피우다가 자기의 몸에 불을 붙인 머저리들도 있었으나, 다들 그럭저럭 잘 배워 나갔다.
[트롤이 불 피우는 방법을 깨달았습니다. 종족 포인트를 20 획득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런 것도 종족 성장으로 판단되는 듯 종족 포인트가 들어왔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간단하게 종족 포인트가 올랐다.
'이거 이러면 초반에는 포인트 모으기가 쉽겠는데.'
무언가 새로운 걸 가르치는 것만으로 포인트가 모인다면, 원시인의 발전을 토대로 가르치면 포인트를 전부 챙길 수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것도 언젠가는 한계가 올 것이다.
새로운 것을 무한하게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담 결국 다른 종족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수밖에 없다는 소리.'
나는 피운 불로 에우플 베어를 구우며 가만히 종족 포인트로 구매할 수 있는 내역을 바라보았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오러조차 느끼지 못하는 트롤의 육체를 진화시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도 무시할 게 못 되었다.
언어는 지능과도 연관이 있을 것 같고, 번식은 전쟁을 대비하여 개체 수가 많아야 하는 만큼 필요했다.
개체 수가 늘어나는데도 시간이 걸릴 테니 이것도 초반에 투자해 두지 않으면 골치 아프리라.
'언어나 번식도 필요하긴 하겠지만, 무엇보다 문명이 마음에 걸리는데.'
지금 내가 불을 피우는 것을 가르치면 배우듯 이것 또한 문명이라면 문명이다.
하지만 종족 포인트 칸에 문명 진화가 떡하니 박혀 있는 만큼 이것에 투자해 두지 않으면 어느 시점부터는 가르쳐도 녀석들이 이해 못 하는 순간이 올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돌연변이.'
가장 많은 포인트를 잡아먹는 돌연변이.
이건 트롤의 진화일 것이다.
지금까지 탑을 오르며 여러 트롤을 봐왔으니, 이 녀석들이 그 트롤들의 초기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그간 내가 봐 온 몬스터들은 아마 돌연변이 화하여 진화한 것이리라.
'트롤 중에 가장 상위 개체가 뭐였지.'
에우플 베어를 얌전히 앉아 있던 트롤들에게 먹으라고 던져 주며 나는 상위 개체를 떠올렸다.
트롤의 주요 특성은 회복.
분명 그 회복력이 너무 높아 목이 잘려도 목에서 몸이 자라나고, 몸에서도 목이 자라나 두 마리가 되어 버리는 플라나리아 같은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 나는 그와는 별개로 또 다른 개체를 하나 본 기억이 있다.
'엄청 단단한 녀석이었지.'
무슨 짓을 한 건 지 피부가 너무 단단하여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베이지 않는 트롤이 하나 있었다.
회복력과는 별개로 방어력에만 치중된 이상한 녀석이 말이다.
'그놈도 돌연변이로 만들어진 건가?'
성좌 녀석도 F급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약하게만 만들어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본래 돌연변이란 생존 환경에 따라 발현하는 것.
결국 이 녀석들을 어떻게 성장시킬지는 전부 내 몫이라는 뜻과 같았다.
[트롤이 구운 먹이를 먹는 식습관을 깨달았습니다. 종족 포인트를 30 획득 하셨습니다.]
[트롤이 '먹이 : 에우플 베어'를 인식하였습니다. 종족 포인트를 10 획득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이제는 열심히 에우플 베어를 먹고 있는 트롤들을 보고 있자 연이어 포인트가 들어왔다.
생활의 기본요소가 의식주이듯, 역시 식습관의 변화만으로도 포인트가 들어오는 모양이다.
"맛있냐?"
내 물음에 트롤들은 검댕이 묻은 입가를 닦을 새도 없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마치 먹이를 달라는 아기 새 같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어미 새가 아니라, 자기 새끼를 낭떠러지에서 미는 사자다.
"그렇담 지금부터 사냥을 배울 거다. 사냥만 할 줄 알면 저기 있는 것들 싹 다 배부르게 먹을 수 있어."
녀석들의 마력은 0.
우선 어떻게든 마력 수치를 올려야 내가 오러를 가르치든 말든 할 수 있을 거 같다.
마력 수치를 올리는 건 어느 층이나 간단하다.
몬스터를 죽인다.
혹은 자신보다 강자를 쓰러트린다.
경험을 쌓는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만 축적된다면 층의 주민 또한 레벨이 오르니까.
그렇기에 나는 더더욱 먹을 것에 굶주린 녀석들의 식욕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우선 무기 제작이다. 저기 돌 있지. 싹 다 가져와."
자, 뗀석기 시대부터 시작하자.
* * *
쾅쾅쾅.
돌과 돌이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싫다!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손 아프다! 돌 싫다!"
다른 트롤들과 같이 돌을 두드리고 있던 트롤 한 명이 돌을 내던지며 소리를 내질렀다.
그런 녀석을 덤덤히 보고 있던 나는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놈을 화형에 처해라."
"다시 한다. 불 무섭다."
내 말을 듣자마자 얼른 앉아 다시 돌을 두드리는 녀석을 보고는 나는 팔짱을 낀 채 나머지 트롤을 관찰했다.
원생 트롤은 나무껍질 같은 손발을 제외하면 무기가 없다.
그렇기에 나는 트롤들에게 돌을 깨게 하여 뗀석기 무기를 만들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뭐, 별로 효과는 없겠지만.'
사실 이럴 것 없이 좀 나가다 보면 어딘가에 다른 종족도 있을 것이기에, 그들에게서 무기를 빼앗아 오면 되긴 했다.
애초에 철제 무기와 돌은 비교 자체가 안 되니까.
[트롤이 돌을 깨는 법을 깨우쳤습니다. 앞으로 돌을 이용한 다양한 도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종족 포인트를 30 획득하셨습니다.]
이윽고 떠오른 메시지에 나는 씨익 하니 웃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런 비효율적인 짓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종족 포인트를 벌기 위해서다.
이렇게 단계를 차근히 밟아 가면 자연스레 얻을 수 있는 포인트인데, 괜히 철제 무기를 가져와 장비시키면 이런 것들을 다 놓치게 된다는 소리지 않는가.
트롤들이 좀 고생하게 되긴 하겠지만, 결국 다 피와 살이 될 것들이다.
나중에 나 없이 종족 전쟁을 치르게 될 텐데 무기 만드는 법 하나 모른 채로 싸워서야 쓰나.
무작정 싸움 기술만 가르치는 게 능사가 아니다.
"다 만들었다."
"나 돌 무섭다. 족장도 무섭다. 불도 무섭다."
하나둘 내가 알려 준 대로 돌창을 들어 올리는 트롤들을 보고 나는 만족한 양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드는 것들이기에 그들의 돌창은 조잡하기 그지없지만, 그건 딱히 상관없었다.
'일단 가능하면 제일 괜찮게 싸우는 녀석이 누군지 알고 싶은데.'
나는 현재 경험치 상승률을 높이는 소뤼에느의 영약과 스텟 효율을 올려 주는 은하수의 눈물이 있다.
소뤼에느의 영약은 하루가 지나면 다시 차니 상관없지만, 은하수의 눈물 같은 경우에는 일회용.
그렇기에 나는 가급적이면 가장 전투 센스가 좋은 녀석을 고르고 싶었다.
'뭐, 일단은.'
어차피 지금 당장 사냥에 나갔다 올 테니.
"보리, 이리 와라."
손재주가 좀 있는 듯 제일 먼저 돌창을 완성했던 보리가 내 부름에 쪼르르 달려왔다.
그런 녀석을 보고 나는 소뤼에느의 영약을 꺼내 들곤 녀석에게 건네주었다.
"쭉 들이켜. 몸에 좋은 거니까."
"알았다. 난 족장 믿는다."
독약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결연한 표정으로 내게서 받든 소뤼에느의 영약을 마신 보리는 별다른 맛이 느껴지지 않아서인지 살짝 입맛을 다셨다.
그런 보리에게서 소뤼에느의 영약을 받아 챙겨 넣은 나는 곧바로 오러를 일으키곤 트롤들이 적당히 상대할 만한 몬스터를 발견했다.
"다들 따라와. 사냥 시작이다."
트롤들을 이끌고 숲속을 지나자, 절벽 아래쪽에서 땅을 파고 있는 늑대형 몬스터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톨울프다. 족장, 톨울프, 위험하다. 도망쳐야 한다. 우리의 천적."
이 녀석들에게 천적이 아닌 게 있을까.
허둥지둥거리는 트롤들을 보며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번 건 내가 잡아 주기로 했다.
겁 많은 녀석들이니 나는 이 기회에 확실하게 녀석들의 머릿속에 내가 안전장치로 여겨지게 위해서였다.
"전부 잘 보고 있어. 지금 도망가면 톨울프보다 내가 더 무서워질 거다."
그리 말한 나는 겁먹은 트롤들을 두고 풀숲을 헤치며 걸어 나왔다.
그러자 내 냄새를 맡은 톨울프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게걸스레 이빨을 드러내었다.
"컹!"
위협을 하듯 소리를 내친 톨울프를 보고 나는 주먹을 쥐었다.
저 녀석들이 확실하게 볼 수 있도록 뛰지도 않고 천천히 다가가자, 톨울프는 잠시 경계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먼저 달려들었다.
"족장, 죽는다!"
"버리고 도망 간다!"
톨울프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내 목을 물어뜯으려 하자, 뒤에서 트롤들의 비명이 울렸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톨울프의 벌려진 턱을 손으로 붙잡곤 그대로 반대 손으로 콧등을 잡아 큰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닫았다.
"키이이잉!"
순식간에 이빨 몇 개가 빠진 톨울프는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멈추지 않고 톨울프의 두개골을 내려쳤고, 내 일격을 맞은 톨울프는 두개골이 함몰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꿈틀꿈틀 거리다 결국 움직임이 완전히 멎은 톨울프를 보고 내가 시선을 뒤로 돌리자, 거기에는 멍하니 이쪽을 보는 트롤들이 있었다.
"족장, 너무 강하다."
"무섭다. 톨울프보다 무섭다."
"나 앞으로 평생 족장 따른다. 저 주먹에 맞으면 죽는다."
오히려 내게 겁먹은 양 웅성거리는 트롤들이었지만, 이로써 내 힘에 대한 믿음이 생겼을 것이다.
그들이 톨울프를 상대로 위기에 처하더라도 내가 이 힘으로 지켜 줄 수 있을 거란 믿음을.
'반대로 도망쳐도 내게 죽는다는 생각에 악바리 정신도 억지로 생기겠지.'
내 웃음에 더더욱 겁먹은 트롤들을 이끌고 그대로 다음 사냥감을 찾아 나섰다.
몇 번이고 내 힘을 각인시켜 준 결과 트롤들은 이제 순순히 내 말을 따랐고, 곧 다음 사냥감과 마주하게 되어 드디어 첫 사냥이 시작되었다.
상대는 이번에도 톨울프.
겁먹은 듯한 트롤들이었지만, 이쪽이 수가 많은 만큼 톨울프 쪽도 겁을 먹기는 마찬가지였다.
"야, 싸워. 가르쳐 준 대로만 해."
한참을 톨울프와 트롤들이 대치만 하고 있자 보다 못한 내가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그들은 내가 자신들을 두들겨 팰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한 발자국씩 다가가며 포위망을 조여 가기 시작했다.
"컹!"
결국보다 못한 톨울프가 먼저 선수를 쳤다.
제일 가까이 있던 트롤을 노리고 그가 달려들자, 놀란 트롤이 반사적으로 돌창을 내질렀다.
그런 트롤의 행동에 돌창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톨울프는 창을 앞발로 후려치곤 그대로 트롤에게 이빨을 드러내었다.
"지금이다. 찔러."
트롤 한 마리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당황한 트롤들에게 나는 냉정히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나쁜 머리로도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했는지, 날카롭게 깎은 돌창을 톨울프에게 내질렀다.
"커헝!"
사방에서 한꺼번에 내지른 돌창 때문일까, 아무리 트롤보다 강한 톨울프라지만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격에 당해 녀석의 다리와 어깨에 돌창이 박혀 들어갔다.
깊숙이 박힌 것은 아니나 통증은 무시할 것이 못 되는 듯 톨울프는 트롤들을 뿌리쳐 그대로 줄행랑을 치려고 했다.
"안 되지."
그러나 그걸 그냥 두고 볼 내가 아니었다.
도망치려는 자신의 앞을 내가 막아서자, 녀석은 이빨을 드러냈으나 나는 그에 개의치 않고 오러를 드러냈다.
내 오러에 휘감긴 톨울프는 눈을 부릅뜨더니, 곧바로 몸을 부르르 떨며 내게서 물러섰다.
트롤들과 달리 오러를 느끼는 톨울프 입장에선 뒤에 있는 트롤 몇 마리보다 내가 몇만 배는 더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넌 저놈들과 싸워야 해. 그게 네가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이다."
130화
내가 똑똑히 톨울프에게 본인이 처한 상황을 자각시켜 주자 녀석은 꼬리를 축 내린 채 겁먹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몸을 휙 돌렸다.
그러곤 자신이 유일하게 살아남을 방법인 '나를 제외한 트롤들을 전부 죽인다'를 택하기로 하고 그는 트롤들에게 달려들었다.
여기저기서 트롤들의 비명이 들리고, 돌창을 내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관망하다가, 톨울프에게 당해 죽어가는 트롤에게 포션을 부어 주며 돌아다녔다.
그렇게 얼마 후.
"크흥, 끼잉."
상처 입은 부분이 새파랗게 변하기 시작한 톨울프가 앓는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트롤의 돌창에는 독성이 있는 풀과 그들의 배설물을 섞어 만든 독을 발라 두었다.
그렇기에 격렬하게 움직이던 톨울프의 전신에 독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가 기회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지 그래도 꼴에 톨울프와 좀 맞서 봤다고 이제는 나름대로 투기가 생긴 트롤들이 녀석과 거리를 좁혔다.
내가 알려 준 몰이 사냥을 이제야 겨우 이해 한 것인지 톨울프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모여든 트롤은 돌창을 앞세우며 그에게 접근했다.
"커헝!"
결국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톨울프가 마지막 힘을 담아 트롤 한 마리에게 달려들었다.
하나 몇 번이나 톨울프에게 그런 식으로 당해 봤던 트롤들은 더는 당황하지 않고 있는 힘껏 일제히 창을 내질렀다.
트롤 한 마리를 죽음의 길동무 삼아 데려가려던 톨울프는 사방에서 찔러 오는 창에 찢겼고, 그중 그의 목을 관통한 돌창 하나에 생을 마감했다.
"우오오오!"
"해냈다! 살았다!"
톨울프가 쓰러지자 트롤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트롤이 사냥을 터득하였습니다. 종족 포인트를 110 획득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나도 환호했다.
다른 거에 비해 그래도 사냥은 꽤 힘들었기 때문인지 종족 포인트를 110이나 받았다.
이러면 이전에 모아 둔 종족 포인트를 포함해 200이 된다.
'가능하면 돌연변이를 찍고 싶지만.'
지금 트롤들은 약해도 너무 약하다.
아마 톨울프를 잡아 나름대로 레벨 업 했겠지만, 그거로는 아직 한참 모자란 상황.
'그렇다면 지금은.'
[종족 포인트 100으로 육체 진화 1단계를 구매하셨습니다.]
[종족 포인트 100으로 문명 진화 1단계를 구매하셨습니다.]
나는 육체 진화와 문명 진화를 동시에 구매해 두었다.
사냥과 문명 쪽을 우선적으로 발전시켜 그를 통해 최대한 종족 포인트를 모아 두기 위해서였다.
혹시나 싶어 트롤의 능력치를 살펴보니 전체적으로 능력치가 올라 있었다.
아쉽게도 마력을 얻은 녀석들은 없었지만, 이걸로 사냥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자, 다음 사냥 간다. 준비해."
"족장, 우리 방금 사냥했다. 힘들다."
"우리 죽는다."
확실히 트롤들의 상태가 엉망이긴 했다.
하지만 나는 가능하면 기세가 붙었을 때, 한 번 더 하여 앞으로는 사냥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딱 한 마리만 더 잡는다. 제일 잘 싸운 놈한테는 내일 사냥 면제권을 주마."
"그럼 우리 앞으로 매일 이걸 하나?"
트롤들은 경악하고 몸을 벌벌 떨었다.
매일같이 이런 게 반복되면 자신들은 살 수 없다는 양.
나는 그 공포심을 역이용하기로 했다.
"잘 알고 있네. 중간중간 쉬는 날을 끼워 주겠지만, 거의 매일이다. 내일 푹 쉬고 싶은 녀석들은 잘 알겠지?"
"간다! 톨울프는 내가 잡는다!"
"아니다. 나다! 내가 잡는다!"
그러자 트롤 한 명이 제일 먼저 투지를 불태웠고, 뒤따라 다른 트롤들도 소리쳤다.
이러한 보상의 무서운 점은 의욕이 없더라도 다른 녀석들이 어떻게든 내일 쉬고자 먼저 나서게 되면, 당장 휴식을 원하던 녀석들도 덩달아 움직여 자연스레 경쟁하게 되는 것이다.
남이 이득을 보면 자기가 손해 보는 구조만큼 의욕을 돋우는 것도 없으니까.
"의욕 좋네. 가자. 막타 치는 놈이 승자다."
그렇게 즐거운 사냥 시간이 다시 시작되었다.
* * *
오후, 톨울프 한 마리를 무사히 더 사냥하고 군락으로 돌아온 뒤. 나는 톨울프를 굽게 시키곤 트롤들을 살폈다.
내가 옆에서 보조하고, 크게 다친 녀석들은 그 자리에서 포션으로 치료했던 만큼 트롤들은 겉보기에는 엉망이어도 큰 상처는 없었다.
그걸 알기 때문인지 두 번째 사냥에서는 트롤들의 움직임이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변했다.
다친다 한들 내가 치료해 줄 수 있으니 아프긴 해도 죽지는 않는다는 사실로 인해 겁먹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사냥이 하루, 이틀,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에는 다들 군말하지 않고 사냥에 나갈 정도로 익숙해져 있었다.
그 일주일 동안 나름대로 종족 포인트를 벌었다.
그 결과 진화 항목 중 언어와 번식은 1단계를, 신체는 2단계를 구매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나는 트롤들을 관찰하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녀석들 피부를 재생하면 할수록 더 단단해지잖아.'
처음 톨울프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녀석이 어느 샌가 톨울프의 이빨에도 생채기만 날 정도로 피부가 단단해졌다.
그 결과 사냥 효율은 이전보다 훨씬 더 올라갔고, 이로써 톨울프보다 높은 상위 개체도 사냥할 수 있게 되었다.
'신체 진화 2단계로 올린 것도 분명 도움이 됐겠지만.'
이건 아무래도 트롤의 자체 특성인 듯하였다.
그리고 이 특성은 포션을 쓰는 것보다 스스로 회복하는 게 더 큰 효과를 발휘하는 듯하였다.
'만약 재생해서 더 단단한 피부를 얻는 거라면.'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 나는 한 가지 시험해 보기로 했다.
"보리."
내 부름에 보리가 쪼르르 달려왔다.
차근히 강해져 가는 트롤들 중에서도 가장 두각을 보이는 것은 당연 보리였다.
애초에 트롤 자체가 워낙 약한 종족이다 보니 다들 고만고만했기 때문일까.
소뤼에느의 영약을 계속해서 지급 받은 보리는 다른 녀석들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레벨이 높아져 나를 제외하면 트롤 중 일인자나 마찬가지인 정도가 되었다.
'고작 소뤼에느의 영약을 일주일 복용한 거로 일인자라. 나 원.'
반대로 트롤들이 얼마나 약한지 여실히 드러나는 증거에 나는 자신의 근육을 한껏 뽐내는 보리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우선 한 놈이라도 제대로 키워 두는 게 좋을 것 같기는 하니 계속 먹이긴 할 텐데, 앞으로 전쟁을 해야 하는 이상 저놈 한 놈이 아무리 커 봤자 내 수준까지 오르는 게 아니니 의미가 없다.
'게다가 다른 녀석들도 똑같이 키워서 데리고 올 테고.'
이번 층이 개인전인 이상 나락과 검왕도 똑같이 자신의 종족을 키워 올 것이다.
그래도 최전선을 뛰던 녀석들이니, 종족을 키우는 방법쯤이야 어느 정도 파악했을 거다.
그렇기에 나도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꼭 그 녀석들만 적이라는 법은 없지.'
참가자들끼리 다투는 층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결국 성좌가 원하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는 이상 전쟁에 승리하는 것 말고도 다른 달성 조건이 있으리라.
그걸 해내려면 이러나저러나 어떤 상황이 닥쳐도 대응할 수 있도록 이 녀석들을 키우는 게 관건이었다.
'아니, 지금은 이게 아니라.'
나는 생각을 멈추곤 보리에게 다가오라는 양 손을 까닥거렸다.
그러곤 별천도를 뽑아 들곤 날을 확인한 뒤 녀석의 팔을 내밀게 했다.
"지금부터 피부 수술을 시작한다. 살짝 따끔한 정도니까 알아서 참아라."
"조, 족장?"
당황한 보리가 도망치려 하자, 녀석의 팔을 텁 하니 잡은 나는 별천도를 팔 위에 대었다.
그러곤 미세하게 오러를 조절해 보리의 겉껍질을 한 꺼풀 벗겼고, 겁에 질린 보리는 눈을 꽉 감았다가, 이내 그다지 아프지 않았는지 의아해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족장, 뭐 했나?"
"아니, 이러고 하루 뒤에 좀 보자."
그리 말하고 밖으로 걸어 나온 나는 저 멀리서 광합성을 하고 있는 녀석들에게 다가가 발로 걷어찼다.
"어이, 사냥 시간이다. 사냥하고 와."
내 재촉에 트롤들이 쫓기듯 사냥을 하러 뛰어나갔고, 그 모습을 보다가 뒤를 돌아본 순간 나는 눈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최근 음식의 양이 많아져서인지 쌓이기 시작한 트롤의 오물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저 녀석들이 돌아오면 우선 배설 시설을 만들어야 할 듯싶었다.
* * *
트롤이 살고 있는 군락의 아침 물향나무숲.
이 세계에서 가장 큰 숲 중 하나인 이곳에는 트롤 말고도 다양한 가지각색의 생물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트롤의 군락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서식하는 종족은 바로 나바족이었다.
호수를 거점으로 삼아 살아가는 그들은 지상과 물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종족으로, 발달한 상체와 아가미 그리고 물갈퀴를 가진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최근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조그마한 트롤들이었다.
물 마법과 창을 잘 다루는 그들은 이전부터 지상의 몬스터를 종종 사냥하곤 했는데, 사냥 도중 톨울프와 싸우는 트롤과 마주했던 것이다.
"뭐지, 저 꼬마들은."
"최근에 한두 마리씩 보이던 녀석들 아니야? 무슨 종족인지는 몰라도 개체 수가 많이 늘었네."
"아니, 그보다 저 녀석들 톨울프를 사냥하고 있잖아. 조악하지만 돌창도 쥐고 있고. 저 녀석들 지능이 좀 있다는 소리인데?"
나바족 두 명이 톨울프를 트롤을 구경하며 잡담을 나누었다.
앞서 말했듯 아침 물향나무숲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숲인 만큼 각 종족의 세력에 따른 나름의 영역이 정해져 있다.
호숫가가 나바족의 것이라면 깊은 숲 안쪽은 엘프족, 그 옆 산은 웨어울프 족, 고산은 용족, 세계수는 요정족 등등 여러 가지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다들 지성을 가지고 있어, 정해진 주기마다 한 번씩 각 종족의 대표가 회담을 나눌 정도로 확실하게 구역을 나누어 살아가고 있다.
즉, 이곳 호숫가와 얼마 거리가 되지 않는 트롤은 나바족 영토에 함부로 들어와 살아가고 있다는 소리였다.
"지성을 가지고 있는 녀석들이 우리 땅에서 살아가고 있단 건 엄연한 영역 침범이야."
"어라, 얼마 전에는 그냥 이슬이나 받아먹고 사는 녀석들 아니었나? 고블린보다 지능이 낮아 보였는데."
"뭔가 변화가 있었던 거겠지. 어찌 되었든 계속 발전하게 둬선 안 돼. 족장에게 알리자. 우리 땅에서 내보내야 해."
그리 말한 나바족 한 명이 족장에게 알리러 가자, 남은 나바족은 머리를 긁적이며 트롤을 지켜보곤 자기도 몸을 돌렸다.
왠지 모르게 트롤들이 자신들이 마주한 톨울프보다도 겁먹은 상대가 있는 것만 같았지만, 그는 구태여 신경 쓰지 않았다.
만약 그때 신경 썼다면 적어도 나바족의 끝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 * *
이틀 뒤, 트롤 녀석들을 시켜 생각해 둔 토대로 배설 시설과 목책을 마련한 나는 착실히 쌓이는 종족 포인트를 보며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신체 진화는 어느덧 3레벨.
이 레벨까지 접어들고 나니 다음 필요 포인트가 500이 되었기에 나는 신체 진화를 잠시 멈춰 두었다.
신체 진화가 3레벨에 돌입한 만큼 트롤들도 하나둘 마력 스텟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 오러를 가르치기엔 미약한 수준이나, 나는 녀석들에게 꾸준하게 오러를 느끼는 법을 가르쳐 나갔다.
일종의 조기 교육인 셈이다.
오러를 가르칠 수 있게 된 만큼 나는 본격적으로 트롤들을 돌연변이 시키기 위해 당분간은 종족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고 모으기로 했다.
신체 진화도 좋지만, 돌연변이가 그들의 진화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줄 것이라 확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나는 보리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미세하게 베어 낸 보리의 겉껍질은 재생 효과로 이전보다 확실하게 단단해져 있었다.
게다가 오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 녀석의 피부는 톨울프 때의 상처보다도 더욱 단단하고 질겨진 것이었다.
'이건.'
트롤 녀석들을 키울 새로운 방법을 알아낸 나는 눈을 번뜩였다.
보리를 통해 계속 확인해 본바 녀석들의 겉껍질은 대미지를 입는 만큼 그 성질에 맞춰 더욱 강하게 회복된다.
그리고 그 성질은 오러는 물론 속성 마법까지도 통용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샐러맨더라는 도마뱀 한 마리가 쏘아낸 불덩어리에 맞은 녀석이 다음 날부터 불에 공격당해도 버틴 것처럼 말이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최고의 물리 방어력과 마법 방어력을 얻게 된다는 소리였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과정을 통해 겉껍질이 단단해지다가, 일정 수준 이상부턴 작은 생채기도 나지 않았겠지.'
그러다가 단단해진 겉껍질을 단숨에 뚫을 수 있는 강자를 만난다면 십중팔구 죽을 것이고.
하지만 이 녀석들은 그렇게 되지 않을 거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트롤 녀석들의 겉껍질이 아무리 단단하고 질겨지더라도 계속해서 베어 낼 수 있다.
즉, 이 녀석들을 방어력 하나만은 최대치로 찍을 수 있다는 소리다.
131화
그걸 알고 나서 나는 우선 보리 녀석을 중점적으로 겉껍질이 재생하는 족족 오러를 통해 깎아 내었다.
물론 예리한 오러로 얇게 베어 냈기에 보리가 알아챌 정도로 큰 상처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몸을 구성하는 세포 조직이 오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만큼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을 거다.
그로 인해 재생된 껍질은 위협에 대응하듯 더욱 질기고 단단하게 변했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줄기차게 보리의 겉껍질을 깎아 주었다.
그 결과 날이 가면 갈수록 보리의 겉껍질은 물리 방어력이 증가한 건 물론, 오러에 대한 방어력까지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이걸 보리를 비롯해 다른 녀석들까지 스스로 할 수 있게 습관을 들일 수만 있다면.'
하나, 다른 녀석들이 나처럼 큰 상처 하나 없이 겉껍질을 깎는 건 아직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오러를 터득하고 어느 정도 실력이 오른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나처럼 금방금방 강해지지는 못하겠지만, 시간을 들인 만큼의 만큼 성과는 있으리라.
"어이, 보리 오늘은 개인 과외다. 좀 따라와 봐."
아직도 내 행동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던 보리를 데리고, 한 언덕을 지나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그 아래로 바글바글한 톨울프들의 무리가 보였는데, 뒤이어 도착한 보리는 헥헥 거리며 내 옆에 서더니 녀석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오늘 사냥은 족장이 하는 거냐?"
"아니, 네가 해야지."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보리가 나를 돌아본 순간 녀석을 가볍게 걷어찼다.
그로 인해 절벽 쪽으로 몸이 밀린 보리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봤고, 곧 비명을 내지르며 아래로 추락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몸부림치며 떨어진 보리가 바닥에 나뒹굴며 도착하자, 녀석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톨울프의 새까만 콧등이었다.
갑자기 트롤 한 마리가 자신들의 무리 속에 떨어지자 톨울프가 경계하듯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릉거리기 시작했고, 보리는 기겁하며 무기로 될 만한 걸 찾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절벽에서 맨손으로 굴러떨어진 보리가 무기를 갖고 있을 리 없었다.
곧 밀려오는 공포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보리는 톨울프에게서 벗어나고자 뒤늦게 몸을 일으켰지만, 이미 톨울프 한 마리가 녀석의 등 뒤에서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보리가 반사적으로 팔을 휘둘렀을 때, 톨울프 무리 전원이 보리를 덮쳤다.
"아악! 나 죽는다! 족장, 나 죽는다! 죽어!"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보리의 목소리가 절벽 아래를 열심히 울렸다.
그러나 그 울림은 얼마 안 가 멋었고, 대신 톨울프의 앓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건 바로 보리를 깨물었다가 이빨이 부서진 톨울프가 우는 것이었다.
톨울프의 이빨로는 전보다 휠씬 단단해진 보리의 겉껍질을 뚫을 수 없던 것이다.
자신들의 무기인 이빨과 발톱이 전혀 통하지 않자, 도리어 공포심을 느낀 톨울프들이 보리를 두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덩그러니 혼자 남은 보리는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곤 자기 자신을 살펴보았다.
톨울프의 공격이 하나도 안 통한 만큼 당연히 보리에게는 상처 하나 없었다.
절벽에서 굴러떨어지기 전과 같이 자신이 멀쩡하다는 사실에 보리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고, 나는 그런 녀석 옆에 다가섰다.
"족장, 나한테 뭘 한 거냐?"
"네 피부를 튼튼하게 만들어 줬지. 그래도 이 정도면 꽤 쓸 만하네."
만족한 미소를 지은 나는 보리를 데리고 군락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보리에게 쉬라고 말하자, 녀석은 어디론가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돌칼을 쥐었다.
그러더니 그걸 치켜들고는 뜬금없이 자신의 팔을 쾅 내려쳤고, 곧 돌칼이 으스러지며 가루가 되었다.
"보리, 뭐 하냐?"
"또 족장이 이상한 거 시킨 거냐?"
"아니면 드디어 미친 거냐."
자해 행위와도 같은 짓을 하고 있는 보리를 보며 주변 트롤들이 안쓰러운 눈을 한 채 위로했다.
"바보들. 그런 게 문제가 아니다."
위로하는 트롤들을 제치고 보리는 내게로 뛰어왔다.
"족장, 나한테 한 걸 다른 트롤들한테도 해 줄 수 있나?"
그러곤 보리의 입에서 대뜸 나온 첫마디를 듣고, 나는 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애들한테도 해 달라고? 차라리 너 혼자 독점하는 게 더 좋지 않냐? 다른 애들한테도 했다가 너만큼 강해지면 지금의 네 자리가 위협받을 수도 있을 텐데?"
"아니다. 나 혼자 강해 봤자 의미 없다."
내 물음에 보리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족장이 무리 사냥을 가르쳐 줬다. 우리는 뭉치면 뭉칠수록 강하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더 강해지면, 우리는 뭉쳤을 때 더 강해진다."
꽤 단순한 말이었지만, 현답이었기에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녀석, 약삭빠른 만큼 내가 트롤들에게 가르친 것들에 대한 의도를 제일 먼저 깨우쳤다.
그간 트롤에게 무리 사냥을 가르친 이유는 트롤들이 약해서도 있지만, 그 과정을 통해 녀석들이 함께 싸우는 법을 터득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혼자서도 모든 걸 다 해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하기에 홀로 움직이는 쪽을 택한 것이지, 나도 한창 약하던 시절에는 무리에 속했다.
약한 녀석들은 서로서로 뭉치는 것이 살아남기 위한 최적의 길이자 방패이고, 무기이기 때문에.
"옳지. 네 말대로야. 너 혼자서 계속 강해져 봤자, 네가 지켜야 할 게 늘어날 뿐이지. 자고로 무리는 서로를 지켜 줄 수 있을 정도의 대등한 관계일 때 더욱 가치 있는 법이야."
정답을 말해 준 보리를 칭찬한 나는 잘했다는 양 녀석의 머리를 톡톡 두 번 두드려 주곤 트롤들을 모았다.
그러곤 우선 보리에게 직접 트롤들에게 녀석이 겪은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도록 한 뒤, 녀석들 앞에서 보리의 겉껍질을 베어 보였다.
내 행동에 트롤들은 눈을 질끈 감거나 경악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보리의 표정은 평온했던 탓인지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먼저 해 볼 녀석 없냐? 늦으면 늦는 대로 너희들 손해다."
보리가 시범을 보여 주었음에도 트롤들은 여전히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게 눈으로 보기에는 생살을 자르는 모습이었을 테니, 겁 많은 트롤들에게는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해라. 트롤들. 우리는 너무 약하다. 하지만 이 방법이라면 강해질 수 있다."
그러자 보리가 설득을 시작했다.
"강해지고 또 강해지면... 우리는 언젠가 족장의 손에서 언젠가 벗어날 수 있다!"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가만히 듣고 있던 순간 나는 귀를 의심케 하는 한마디에 보리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녀석은 멈추지 않고 열변을 토했다.
"생각해 봐라! 노예와도 같은 이 지옥 같은 삶. 족장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하면서 제대로 잠자지도 못하는 삶. 이상한 것들을 계속 익히면서 살아가는 이 삶을! 하지만 강해진다면 벗어날 수 있다! 우리 스스로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다!"
보리의 열변에 트롤들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나는 눈가를 짚었다.
기껏 자기들 생각해 줘서 열심히 해 줬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이거라.
[준성좌 '용들의 군주'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 녀석은 뜬금없이 왜 트롤에게 공감하는 걸까.
'하여튼 열심히 키워 놓은 것들이 등에다 칼 꽂는 건 다 똑같아요.'
쯧쯧, 하고 못마땅하게 혀를 차고 있자 트롤 한 명이 무리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정말로 아프지 않은 거냐?"
그러곤 내게 조심스럽게 물어오자 나는 한숨을 내쉬곤 '그래.' 라고 대답해 주었다.
어찌 되었든 보리 녀석의 설득이 통하긴 통한 모양이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 두기로 했다.
내가 무서워서 벗어나고 싶어서라도 열심히 해 준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어차피 나는 38층에 오르는 순간, 녀석들이 어떻게 싸워 나가는지 지켜봐야 할 처지밖에 안 되니까.
"알았다. 난 보리를 믿는다. 족장에게서 우리가 언젠가 벗어날 그 날을 위해!"
내가 앞에 있음에도 대놓고 말하는 트롤의 말에 그 뒤로 하나둘 트롤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은 눈물겨운 투지를 보여 주는 것과 별개로 꽤 불쾌해진 나는 한 대씩 쥐어박을까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참고 녀석들의 겉껍질을 차례차례 벗겨 내었다.
'아직 트롤의 수가 적으니 쉽긴 한데.'
나중에 번식해서 트롤의 수가 점차 많아진다면 조금은 귀찮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모든 겉껍질을 벗겨 낸 나는 별천도를 허리춤에 되돌렸다.
"알몸이 된 기분이다."
"뭔가 이상하다. 바람이 부니까 몸이 오들오들 떨린다."
"아프지 않긴 하다."
자신의 겉껍질이 벗겨진 게 신기한 듯 떠드는 트롤들을 두고 나는 보리 녀석에게 손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녀석은 자신이 했던 말이 내 기분을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린 듯 오들오들 떨며 조심히 다가왔다.
"이거 먹어라."
보리가 앞으로 다가오자 나는 녀석의 손에 은하수의 눈물을 쥐어 주었다.
그걸 받아든 보리가 나를 올려다보자, 나는 얼른 먹으라고 쏘아 보았다.
"독약이군. 나는 오늘로 죽나."
"한 번만 더 헛소리하면 독물을 풀어 거기에 빠트려 주마."
내 말에 보리는 퍼뜩 은하수의 눈물을 삼켰다.
은하수의 눈물은 스텟 성장 보조제.
이로써 보리는 다른 트롤들보다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스텟이 성장할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미 정해 두었다.
내 뒤를 이어 족장이 될 녀석은 보리라고.
그렇게 그날부터 본격적으로 트롤들의 겉껍질 벗기기가 시작되었다.
일과를 마치고 매일같이 겉껍질을 벗은 결과, 어느새 이것은 일상이 되어 트롤들은 겉껍질을 벗겨 내는 걸 하루의 묵은 때를 벗기는 듯한 목욕 따위가 된 모양이었다.
오히려 겉껍질을 하루에 한 번 벗기지 않으면 찝찝하다는 반응을 보일 정도가 되자, 나는 과거 한국의 때밀이 아저씨가 이런 기분이었을 까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아, 그리 생각하니 목욕탕 좀 가고 싶네.'
어린 시절부터 재벌로 살아왔기에, 내가 목욕탕을 처음 가 본 것은 군대 휴가 때였다.
휴가 나온 녀석들과 함께 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잠깐 회상해 본 나는 아직도 군대를 추억하는 자신이 곧 한심하게 느껴졌다.
지구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군대 때 기억이다 보니, 유달리 그때의 기억만이 가장 생생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 썩을, 개 같다. 개 같아."
이번에 클리어 못 하면 또 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치를 떨었다.
['트롤' 사이에 겉껍질 벗겨 내는 것이 풍습이 되었습니다. '트롤들'은 당신이 없더라도 앞으로 꾸준히 이 풍습을 이어 나갈 것입니다. 종족 포인트를 20 획득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겉껍질 벗기기가 녀석들 사이에서 풍습이 되어 버렸다.
내가 없더라도 이 풍습을 이어 나갈 거라고 하는 걸 보아하니 자기들 자식에게도 꾸준하게 가르칠 모양인가 보다.
'모양새가 좀 그렇긴 해도. 내가 없어도 알아서 강해지는 건 좋네.'
잘됐다고 생각한 나는 모인 종족 포인트를 확인해 보았다.
돌연변이를 할 수 있을 때까지 필요한 포인트는 앞으로 100포인트.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 열심히 모았지만, 최근 들어 점점 가르칠 게 줄어들고 있는 만큼 종족 포인트가 쌓이는 속도도 줄기 시작했다.
남은 100포인트를 어떻게 모아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져 있었을까, 나는 숲 쪽에서 느껴진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숲 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한두 명이 아닌 다수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또 뭐람.'
132화
그 기척은 명백히 트롤의 군락을 향해 뻗어 오고 있었다.
얼마 안 가 그들이 트롤의 군락에 도착할 거라 예상한 나는 직접 나서려다가 멈칫하였다.
'혹시.'
성좌가 준비해 둔 이벤트일 가능성을 떠올린 나는 자신들이 사냥해 온 것들을 먹고 있는 트롤들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매일같이 단련시키고 꾸준히 겉껍질을 벗겨 낸 결과, 트롤들은 이전과 다르게 확연히 강해져 있었다.
내가 이 층에 들어선 지 첫날에 비하면 하늘과 땅 수준으로 녀석들을 성장했고, 최근에는 신체 강화 덕분인지 키와 근육도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럼에도 아직 오러를 사용 못 하는 단순한 트롤이긴 하나, 이제 어디 가서 두들겨 맞고 다닐 수준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잘됐군. 저쪽이 무슨 목적으로 트롤을 습격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이 기회에 지성 있는 상대와 싸워 보게 해야겠다.'
게다가 종족 간의 전쟁에서 승리하면 종족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아주 괜찮은 기회가 왔음을 상기한 나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아직도 누가 습격할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희희낙락하는 트롤들을 그대로 둔 채 스리슬쩍 모습을 감추었다.
* * *
숲속을 해치고 거니는 자들.
물갈퀴가 인상적인 그들은 바로 아침 물향 호수의 주인인 나바족이었다.
최근 들어 자신들의 영역에 지성이 가진 생물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이 사는 곳을 알아낸 나바족은 이를 안건으로 하루 동안 회의를 했다.
그리고 그 회의의 결과로 그 생물이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했다고 의견이 모여 나바족의 전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들을 몰살하거나 혹은 다시는 나바족의 영역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혼쭐을 내어 내쫓으라고.
명령을 받은 전사들은 곧바로 무장을 마치고,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트롤의 군락을 향했다.
"참, 귀찮은 일은 우리한테 다 시킨단 말이지."
"우리 전사들이 계급이 제일 낮으니 어쩔 수 없겠지."
"그 꼬마들 저번에 봤는데 그냥 머저리들이던데. 칼 몇 번 쑤셔 죽이면 어련히 알아서 도망가지 않을까?"
트롤 군락으로 향하는 나바족 전사들은 무척이나 태평했다.
자신들이 목표로 하는 트롤들을 멀리서 본 적 있던 그들은 트롤이 사용하던 조악한 돌 무기를 떠올리자 비웃음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그야 당연하다.
태생적으로 오러를 다룰 줄 아는 나바족은 태어날 때부터 물을 이용해 자신의 무기를 만들어 낼 줄 안다.
그들이 사용하는 물로 된 무기의 절삭력은 바위도 가를 정도이며, 이러한 능력이 바로 나바족이 아침 물향 호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얼른 해치우고 돌아가자. 배고프다."
"그 꼬마들, 먹을 만할까."
"작아서 먹을 맛도 안 날걸. 고블린이랑 다를 것도 없을 거 같은데."
입맛을 다시며 이야기를 나눈 나바족은 잠시 후, 트롤의 군락 앞에 도착했다.
꼴에 지성이 있는 듯 목책까지 지어 놓은 것이 보이자, 그들은 재밌다며 낄낄거리곤 물로 된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목책은 그들의 검을 견디지 못하고 힘없이 잘려 나갔다.
애초에 트롤 기준으로 세운 목책은 나바족이 보기에는 담장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에 방해가 전혀 되지 못했다.
잘린 목책을 발로 뻥 차서 밀어 넘어트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자신들을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트롤들과 마주했다.
1m 90cm가 평균 키일 만큼 덩치가 큰 나바족에게 최근에 나름대로 덩치가 커진 트롤들조차도 여전히 꼬마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트롤들에게 물로 만든 활을 겨누곤 외쳤다.
"다 죽여."
그 순간 물로 된 화살이 트롤들에게 쏘아졌다.
나바족의 화살이 마치 비 오듯 쏟아져 내리자 놀란 트롤들이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그걸 보며 낄낄거리며 웃던 나바족은 계속해서 화살을 쏘다가 이내 공격을 멈추더니, 이번에는 칼을 들고 트롤에게 달려들었다.
쨍강!
바로 그때였다.
가장 가까운 트롤에게 내려친 물의 검 날이 부서지더니, 빙그르르 돌며 바닥의 푸욱 하니 박힌 것이.
"어, 어?"
머리를 감싸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트롤과 자신의 부서진 검을 번갈아 본 나바족 전사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깃들었다.
그러던 그때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트롤들은 자신의 화살 세례에 놀라 도망치긴 했지만, 단 한 명도 죽은 녀석이 없다는 것.
게다가 그들 중 누구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으며, 바닥에 피 한 방울조차 안 떨어졌음을.
"우어?"
겁먹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던 트롤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고개를 들었고, 이내 자신에게 전혀 상처가 없음을 깨닫고 나바족을 돌아보았다.
트롤과 눈이 마주친 나바족은 눈을 부릅뜨곤 다시금 새롭게 만든 물의 검을 휘둘렀으나, 트롤은 이전과 달리 손을 들어 나바족의 검을 턱 하고 잡았다.
그러곤 팔의 힘을 주자, 그 순간 쨍강하고 또 한 번 나바족이 소환한 물의 검이 두 동강 났다.
"우어어."
뭐야 아무것도 아니었잖아.
트롤의 말을 해석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들린 나바족 전사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을 때 저 멀리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나바족 전사 한 명이 트롤의 돌과 주먹에 얻어맞아 도망도 못 치고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나바족 전사들은 하나둘 트롤에게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이 녀석들은 자신들이 알던 그 보잘것없는 꼬마들이 아니다.
그와 전혀 다른 괴물들이었다.
"후퇴, 후퇴하자!"
나바족 전사 한 명이 외치자, 모두가 동의한 듯 자신들이 뚫어 놓은 목책 쪽으로 뛰었다.
그러나 그런 나바족 전사들을 가만히 두고 볼 트롤들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안식처에 쳐들어왔다면, 그만한 값을 치러야 하는 법.
이내 트롤들은 톨울프에게 그러했듯 나바족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 나바족 전사들을 트롤들이 발 빠르게 원을 그리듯 포위하여 몰아세우자, 나바족 전사들은 순식간에 포위되고 말았다.
"이놈들 대체 뭐야!"
"오러가 안 통해 피부가 대체 뭐로 만들어졌기에!"
경악하는 그들에게 돌창을 내세운 트롤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는 것 같았다.
그걸 보고 트롤들에게 대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바족은 우두머리와 교섭을 하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언어가.'
이 녀석들과는 말이 통하지를 않는다.
나바족도 자기만의 언어가 있지만 아주 오래전 종족 대통합을 이룬 시조 테라시아의 의해 공용어가 생겼다.
그러나 트롤들은 테라시아 언어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나 원, 생각보다 약하잖아. 조금은 쓸 만할 줄 알았는데. 아니, 우리 애들이 오러 내성이 너무 강해져서 그런 건가?"
그러던 순간 말이 통하는 트롤이 걸어 나왔다.
자신들을 포위한 트롤 모두가 주목하는 모습에 나바족은 바로 그가 트롤의 대장임을 알아챘다.
"네가 대장인가!"
"야."
그러나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차라리 눈앞에 있는 트롤들에게 죽임당하는 게 나았다는 것을.
"어딜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 꿇어. 그리고 공손하게 내 말에 전부 대답해라."
트롤 대장의 서슬 퍼런 말에 자존심 강한 나바족 중 몇 명이 욱한 표정을 지었다.
나바족은 다른 이종족들과 서로의 영역을 정하고 나누고 살아가고 있긴 하나, 기본적으로 그들을 자신들과 같은 지성 높은 종족이라 취급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종족이란 지성 있는 괴물, 인간의 관점으로 비유하자면 자신들과 대화가 할 수 있고 다른 능력을 지닌 외계인 같이 인식 되고 있는 것이다.
본래 선천적인 성격상 남과 규합하는 걸 꺼리는 나바족이기에 트롤에게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대하라는 말은 무척이나 치욕스러운 소리였다.
그렇기에 아무도 트롤 대장의 말을 따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일까, 트롤 대장은 머리를 긁적이다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다가서자 나바족 모두가 경계 어린 표정을 보였고, 대장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 중 한 명 앞에 서더니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빠직.
그러자 나바족의 다리에서 무릎 관절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아악!"
순식간에 두 다리 다 박살 난 나바족은 서 있지 못하고 그대로 무릎을 꿇었고,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안 꿇어?"
이어서 트롤 대장이 그들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발차기조차 눈으로 제대로 좇지 못했던 나바족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고, 트롤 대장은 건들거리며 다음 녀석에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무릎을 꿇지 않았기 때문일까, 트롤 대장은 어쩔 수 없다는 양 한숨을 내쉬곤 또다시 다리를 걷어찼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자신의 다리를 걷어찰 거라 예상한 나바족은 무릎 위에 자신의 오러를 한계치 끌어모아 두른 것이다.
빠각.
하지만 또다시 들려온 건 아까와 별 다를 바 없는 소리였다.
"으어, 아아아어어!"
비명을 내지르는 나바족 한 명을 보고, 트롤 대장이 힐끔 다음 녀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눈이 마주친 나바족이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오러가 깃들건 말건 자신들의 다리를 저렇게 손쉽게 부숴 버릴 수 있는데, 고작 무릎 꿇는 게 뭐가 어려운 일인가.
한 명이 무릎을 꿇자, 트롤 대장은 다음 녀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을 따라 하나둘 무릎을 꿇었고, 그 와중에도 무릎 꿇지 않는 녀석들은 방금 같이 강제로 꿇게 만들었다.
"좋아. 보리야 무릎 부서진 녀석들은 필요 없으니 죽여."
"자, 잠깐! 죽일 필요까지는!"
아무렇지 않게 죽이라는 말을 내뱉는 트롤 대장의 말에 무릎 꿇었던 나바족 한 명이 당황한 듯 외쳤다.
그러자 트롤 대장은 비스듬히 그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악마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기 종족 사이에서도 자존심 강한 녀석들이 자기 입으로 정보를 털어 낼 리가 없잖아. 어차피 너희들이 있으니 저것들은 필요 없어."
그의 말을 듣고 나바족은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단순한 물건 취급하는 그의 잔인한 성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나, 나바족에게 상황이 이렇게 된 건 자신들이 벌인 일 때문이란 것은 그들의 인식 속에 없었다.
결국 그들이 먼저 트롤들을 유린하고 몰살하려고 했기에 이렇게 되었음에도.
그렇게 나바족의 비명이 트롤 군락에서 조용히 울려 퍼질 뿐이었다.
* * *
나바족의 정보를 전부 얻어낸 나는 이 세계에 대해 새롭게 인식했다.
우선 아침 물향나무숲은 내 생각 이상으로 거대하다는 것과 그곳에 나바족과 트롤 말고도 여러 종족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러의 인식 범위를 넓히려면 더 넓힐 수 있긴 한데.'
오러 인식 범위를 최대치로 넓히면 이 층 전부를 뒤덮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짓을 했다간 아무리 육체가 스텟으로 강화된 나라고 한들 정신은 인간이기에 너무 많은 것들을 인식해 뇌에 과부하가 와 버린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조절하며 인식 범위를 사용하던 내게 늘 걸리던 건 나바족과 톨울프 같은 몬스터 정도였다.
'종족 전쟁을 해서 포인트를 벌어야 하는 만큼 다른 종족이 있을 거야 진작 예상했었으니.'
우선 옆에 있는 녀석들부터 차근히 먹어 나가면 되겠지.
자기들끼리 영역을 정해 놓고 살아가는 만큼 나바족을 조져 놓으면 자연스레 다른 종족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어련히 알아서 나타나 주리라.
"그건 그렇고 공용어라."
나바족에 의하면 트롤들과는 다르게 다른 이종족들 사이에서는 공용어가 존재한다고 한다.
테라시아 언어라는데, 자기들끼리 우어어 거리며 대화하는 트롤들이 그런 공용어를 알 리가 없었다.
['테라시아' 언어를 습득하였습니다.]
그나마 다행히 나바족의 말을 듣고 있던 내가 성좌의 버프로 공용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긴 했는데.
'나 글자나 이런 건 잘 못 가르치는데.'
133화
내 심성이 급한 성격이란 걸 나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검술이나 생활에 바로바로 적용할 수 있는 건 어떻게든 잘 가르치는 편이지만, 언어와 같이 지적인 부분은 가르치는 게 까다로웠다.
'이건 언어 진화를 계속 올리는 수밖에 없으려나.'
현재 언어 진화는 1레벨을 습득한 상태.
레벨이 오르고 나니 트롤들은 자기들끼리 글자를 만들어 사용하는 변화를 보이긴 했지만, 공용어를 배우는 건 아직은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이 부분은 언어 진화 레벨을 올려야 해결되겠지.
'다른 종족과 전쟁을 하려면 정보가 필요해. 나 혼자 다 모아봤자 의미가 없으니, 공용어는 빨리 배워 둬야 하겠지.'
여러 곳에서 종족 포인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며 나는 머리를 긁적이었다.
역시 성좌 녀석, 괜히 진화 항목을 여러 개 만들어 둔 게 아니었다.
'그렇담 결국 종족 포인트를 벌면 그만이다.'
마침 돌연변이를 할 수 있는 포인트까지 얼마 안 남은 마당.
나바족의 거처와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아내었으니 종족 전쟁으로 포인트를 대거 벌어 내면 그만이다.
'나바족에서 가장 문제인 것들은 마법사들.'
같은 나바족에게 듣기로 물을 다루는 나바족의 마법사들은 호수에서 최강의 힘을 자랑한다고 한다.
그들이 있기에 나바족의 영역이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고 할 정도니까.
물론 내 입장에선 마음먹고 호수를 지워 버려 물 마법 따위 못쓰게 할 수 있지만.
"나 혼자 사는 것도 아니고."
트롤 녀석들은 이곳에서 먹고 자며 살아가고 있다.
갑자기 호수 하나를 없애 버렸다간 트롤 녀석들에게도 덩달아 피해가 온다.
내가 지금까지 크게 힘을 휘두르지 않은 이유도 녀석들이 사는 터전이기에 환경을 고려하여 조심하는 것이다.
['오만의 아틀리에'가 당신의 세심함에 놀라움을 표합니다.]
['서릿발의 고양이'가 그냥 평소답게 굴라고 손짓합니다.]
"시끄러워. 난 평소에도 이랬어."
내 성격이 불같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지만, 층을 클리어할 때만큼은 제어해 왔다.
그러니 짜증 나게 굴지 말라고 하늘을 쏘아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능하면 미래 종족 전쟁을 위해 트롤들이 직접 나바족을 쓰러트렸으면 하지만 이번 건은 아직 힘들 것 같았다.
'슬슬 층 전체가 오러를 쓰기 시작했나.'
아래층에서는 실력 있는 자가 오러를 겨우 다루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나바족의 일반 전사라는 녀석도 오러 유저 수준이다.
게다가 나바족 족장은 그랜드 마스터급이라고 하니, 층의 난이도가 얼마나 올랐는지 잘 느껴졌다.
"뭐, 나한테는 결국 다 똑같지만."
이러나저러나 그 수준으로는 나와 부딪쳐 봤자 심심풀이도 안 될 거다.
그나마 기대되는 건 슬슬 엠페러급이 나온다는 걸까.
'지금의 트롤들은 엑스퍼트급이 아슬아슬하게 한계선일 거 같고.'
내가 매일같이 트롤들을 열심히 강화하고 있긴 하나, 그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은 상황이다.
무엇보다 아직도 오러를 다루지 못하는 상황.
오러 사용자와 미사용자의 차이는 명확하다.
나바족 일반 전사들이야 오러 유저 수준이니 손쉽게 쓰러트렸을 테지만, 본격적으로 오러를 사용하기 시작하는 엑스퍼트를 상대로는 오러를 전혀 못 쓰는 트롤들이 지금처럼 이기긴 힘들다.
거기에 마스터급은 한 명만 있어도 죄다 학살당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오러를 직접 경험해 볼 찬스란 말이지.'
그랜드 마스터급이 있다는 것은 그 아래도 있다는 소리.
그렇담 이 층에는 트롤이 아슬아슬하게 상대할 만한 녀석들도 상당수 있다는 소리였다.
오러는 직접 몸으로 경험해 보는 것만큼 좋은 경험은 없다.
이 층은 유일하게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층.
그렇담 첫 돌연변이까지는 내가 직접 움직여도 괜찮을 듯싶었다.
"보리, 애들 모아라. 터전 확장할 시간이다."
첫 종족을 집어삼킬 시간이 왔다.
* * *
다음 날. 나바족 족장 나비아는 오늘 생긴 사건 사고들을 훑고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릴 겸 눈앞에 놓인 곤충 과자를 입안에 넣으며 달콤함을 즐기고 있었을까, 그는 문뜩 아직 돌아오지 않은 나바족 전사들이 있음을 확인하곤 고개를 기울였다.
어제 10명의 나바족 전사들에게 최근 영역에서 활동하던 이름 미정의 종족을 몰아내라고 파견했는데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 종족이 생각보다 수가 많았나?'
하지만 그렇다 한들 중간 보고 하나 정돈 들어 올 법한데 보고가 전혀 없다.
이상함을 느낀 나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에 경계를 서던 사람 한 명을 불렀고, 곧 그의 앞에 한 나바족이 부복 자세로 나타났다.
"어제 이름 미정 종족에게 파견한 나바족 전사들의 행방을 좀 알아봐라."
이때까지만 해도 나비아는 나바족 전사들이 이름 미정 종족들을 가지고 놀다가 보고를 깜빡했거나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 용맹한 나바족 전사들이 미개한 종족에게 당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그러고 나서 나비아가 다시 집무를 보고 있었을까, 그는 곧 복도 쪽에서 들려온 급한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내 덜컥 하고 열린 문에서 아까 나갔던 나바족 한 명이 들어오자, 나비아는 곧 눈살을 팍 찌푸렸다.
"뭐가 그리 급해. 노크할 생각도 안 하고."
"죄송합니다. 워낙 큰일인지라 결례를 범했습니다. 지금 막 호숫가에 아까 말씀하셨던 나바족 전사 한 명이 돌아왔는데, 몰골이 엉망입니다."
"뭐?"
그의 보고를 듣고 나비아는 무슨 소리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서둘러 그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설마 다른 종족이 개입이라도 한 건가.'
나바족은 다른 종족과 그리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다.
이름 미정 종족이 살아가고 있는 영역은 아침 물향 호수를 지배하는 나바족의 경계 부근이라, 줄곧 다른 타 종족과 땅 문제로 다툰 적이 많았다.
그래서 언제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타고 있었는데, 앙심을 품은 타 종족이 때마침 나바족 전사들을 보고 공격해 왔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젠장, 영역 문제는 늘 머리 아픈데.'
물론 그만큼 가장 큰 문제기도 했다.
밖으로 나온 나비아는 호숫가 앞에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나바족들을 헤치곤 중심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거기에는 치료를 받으며 넋을 놓고 있는 나바족 전사 한 명이 보였다.
확실하다.
분명 자신이 어제 파견을 보냈던 그 전사가 맞았다.
"티라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혹시 다른 종족들이 습격해 온 거냐?"
나비아의 물음에 치료를 받고 있던 나바족 전사 티라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곧 입을 뻐끔거리며 무언가 이야기했고, 나비아는 그런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누르며 되물었다.
"뭐냐. 정신 좀 차려 봐."
"위험, 위험합니다. 괴물들이. 트롤들이 옵니다."
트롤이라는 말에 나비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들렸기 때문이다.
"저희가 공격, 하려고 했던 그 종, 족입니다. 그 녀석들은 괴, 물입니다."
티라나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다시는 생각하기 싫다는 양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보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잘 이해가 안 가는 나비아는 턱을 손으로 감쌌다.
아무래도 그 이름 미정의 종족명이 트롤이라는 것 같은데.
'그 녀석들은 지성이 낮다고 하지 않았나? 공용어에 대해서도 전혀 모를 정도로 미개한 녀석들이라 보고를 받았는데.'
그렇다면 티라나가 그 녀석들의 종족 이름이 트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그저 티라나가 지은 이름?
아니다.
티라나의 반응은 누군가에게 그들의 종족 이름을 들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트롤이란 종족명을 말할 수 있는 공용어를 아는 자가 개입했다는 소리.
즉, 타 종족의 개입이다.
타 종족이 다시 영역 분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확실시 한 나비아는 이를 까득 부딪쳤다.
"썩을, 티라나. 누구냐. 어느 종족이 너희를 이런 꼴로 만든 거야."
"트, 롤입니다."
"젠장, 정신계 종족인가."
계속해서 트롤이란 말만 반복하는 티라나를 보며 나비아는 머리를 감쌌다.
어느 종족이 티라나가 그 단어밖에 기억하지 못하도록 세뇌를 건 것이 분명했다.
"티라나를 우리 쪽 정신계 마법사에게 보내라. 어서 빨리 회복시켜서 제대로 된 정보를 말할 수 있도록. 그리고 당장 나바족 전사는 물론 마법사까지 소집해라. 영역 분쟁이다."
빠르게 판단을 하고 지시를 내린 그는 아직도 트롤이라며 중얼거리는 티라나를 안쓰럽게 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역 분쟁이 확실시된 이상 준비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정신계 종족은 상대하기 골치 아프니.
'몽마나 서큐버스, 혹은 밴시.'
대표적인 세 종족을 떠올리며 그는 이번 영역 분쟁에는 마법사들이 많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전포고도 없는 습격.
'우리 나바족을 물로 보는군.'
서둘러 집무실로 돌아온 그는 그동안 있었던 영역 분쟁들을 살펴보며, 정신계 종족과 다투었던 분쟁 문서를 뒤졌다.
자신이 족장이 되고 나서 정신계 종족과 영역 분쟁을 해 본 적이 없었던 만큼 그는 예전의 자료를 최대한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비아님, 저희 왔습니다."
그렇게 자료들을 열심히 책상 위로 나르고 있을 때쯤 울린 노크 소리에 들어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무장한 나바족 두 명이었다.
한 명은 나바족 전사 중 가장 높은 지위의 용맹한 전사이자, 군무장관인 산드라.
다른 한 명은 나바족 마법사 중 최고봉이자, 마법장관을 맡은 포가드였다.
"잘 왔다. 소식은 들었겠지."
"예, 영역 분쟁이 발생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이름 모를 종족을 몰아낼 목적으로 파견한 티라나가 반송장이 되어 돌아왔다는 것까지."
군무장관 산드라가 그의 소속인 티라나를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티라나가 말하길 그 이름 모를 종족은 트롤이라고 하더군. 이전에는 공용어도 모르는 잔챙이에 불과한 생물이었는데 말이다."
"흐음, 타종족이 개입한 건 확실하군요."
눈치 빠른 마법장관이 바로 상황을 판단하고 말을 받았다.
족장과 마찬가지로 마법장관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일단 난 정신계 종족이라고 추측하고 있어 그들과 관련된 자료를 모으는 중이다. 너희 둘도 다른 생각이 있다면 말해다오."
"우선 몽마와 서큐버스 쪽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적으로 세뇌를 거는 그들은 육체적인 피해는 주지 않으니까요. 티라나의 상태를 보았을 때, 역시 빙의가 가능한 밴시가 가장 확률이 높지 않을까 싶습니다."
밴시인가.
마법장관의 말에 나비아는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밴시는 실체가 없기에 타인에게 빙의하여 살아간다.
웬만한 생물이면 빙의가 가능한 밴시는 그들이 좋아하는 빛이 가장 들지 않는 어두운 동굴이나 습지대에서 주로 살아가며, 빙의체의 수명이 한계치에 이르러 썩기 시작하면 그때 다른 대상으로 갈아타 명을 유지한다.
그렇기에 빙의체를 갈아타야 하는 시기가 되어 영역 분간 없이 나돌아다니는 밴시 탓에 생긴 문제는 나바족의 역사에서도 꽤 자주 있었던 일이다.
'밴시의 자료는.'
이윽고 밴시와의 영역 분쟁 자료를 꺼내든 나비아는 내용을 확인하였다.
그러곤 몇 가지 시기를 집어 보더니 곧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밴시의 빙의체가 본격적으로 썩는 시기는 주로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다.
하나, 지금은 겨울에서 봄으로 갓 넘어가는 때라 아직은 추위가 남아 있는 시기.
'밴시가 움직이는 시기와는 전혀 안 맞는데.'
무언가 태엽이 제대로 맞물리지 않는 기분에 나비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134화
"군무장관, 마법장관 혹시 그 세 종족 말고도 정신계 종족이 더 있나?"
"몬스터라면 몇몇 있긴 합니다만 공용어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성을 가진 종족은 그렇게밖에...."
군무장관의 대답에 나비아는 으음 하고 신음을 내뱉곤 자료를 덮었다.
그래, 밴시 쪽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 확률도 있고 괜히 옛 자료에만 기대서는 안 되겠지.
"알았다. 그럼 우선 밴시 쪽에 사자 한 명을 보내라. 혹시나 모르니 몽마와 서큐버스 쪽에도 한 명씩 보내. 그리고 준비한 전사와 마법사들은 바로 트롤이 살던 군락으로 향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군무장관과 마법장관이 대답을 하고 밖으로 나가자 족장은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며 창가 앞에 섰다.
그러곤 잠시 가만히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는 곧 푸른 하늘에서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눈을 찌푸리며 그 점을 바라보았다.
"뭐야. 저건?"
왠지 모르게 그 점이 점점 더 커지며 완전한 형상이 보일 만큼 가까워지자, 나비아는 반사적으로 위협을 느끼곤 물의 검을 만들었다.
그러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창문 바로 앞까지 도달한 순간 그는 그랜드 마스터급의 오러를 끌어 올리며 그 즉시 검을 휘둘렀다.
쨍그랑!
창문이 깨져 나가며 휘둘러진 그의 검과 상대의 검이 맞부딪쳤다.
그러나 힘에서도 오러에서도 압도적으로 밀린 나비아는 바닥을 나뒹굴었고, 그러는 동안 방 안에 착지한 인영은 뒤로 손을 뻗었다.
'유리 공작'
깨진 창문이 순식간에 새로운 유리로 교체되고 안으로 들어선 자는 트롤, 하천성이었다.
넘어져 머리를 찧었던 나비아는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작해야 트롤에게 당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으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고위 밴시에게 씌인 것이라면 밴시의 능력 여하에 따라 오러와 육체 능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킬 수 있다.
물론 밴시의 능력을 빙의 대상이 버틸 수 있어야만 할 테지만.
'한 번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하천성이 겨우겨우 힘을 짜내 한 번 자신을 쓰러트렸다고 생각한 나비아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 * *
항상 느끼는 거지만 족장은 이상한 트롤이다.
최근 덩치가 커진 나와는 다르게 전혀 성장하지를 않는 족장이지만, 나보다 100배는 강했다.
자고로 100이란 내가 아는 숫자 중 가장 큰 숫자.
족장은 정말 너무너무 강했다.
그렇기에 그에게 혼나는 건 무서웠다.
하지만 왜일까, 족장이 내 이름을 보리라고 지어준 이후 그날부터 분명 족장에게 시달리는 나였지만, 멍청한 나라도 점차 무언가 변해 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히 느껴졌다.
주위 트롤들이 몰라보게 강해지자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졌고, 그 탓에 왠지 모르게 삶이 조금씩 재밌어지고 있었다.
느긋하게 광합성을 하며 땅거미를 괴롭히는 나날도 재밌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심심하기 짝이 없는 나날이었다.
사냥은 재밌다.
구운 고기는 맛있다.
강해지는 건 기쁘다.
나날이 바뀌어 가는 내 능력을 체감할 때마다 먹는 것과는 또 다른 감각이 몸을 지배했다.
「그게 달성감이다. 보리, 그걸 잘 기억해둬라. 달성감이라는 건 어떠한 것보다도 가장 가치 있는 감정이다. 스스로 성장을 체감했을 때야말로 비로소 진짜로 성장한 거야.」
족장의 말은 어려워서 이해를 못 했다.
그러나 이 감각이 족장이 말한 달성감이라는 것이라면, 나는 앞으로도 쭉 이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오러라는 걸 쓰게 되면 달성감을 더 느낄 수 있는 걸까.'
매번 족장이 트롤들에게 느껴 보라며 가르치던 오러.
오러만큼은 우리들이 당장 느끼지 못하더라도 족장의 눈에는 초조한 기색이 없었다.
마치 이것만큼은 우리가 언젠가는 해내야만 하는 것이라는 양.
'족장이 사용하는 찌릿찌릿.'
그것을 족장은 오러라고 말했다.
보리는 자신이 쥔 돌창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역시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보리, 우리는 저놈들을 공격하면 되냐."
숲을 지나쳐 나와 아침 물향 호수에 도착하자 옆에 있던 트롤이 물어왔다.
그의 물음에 보리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약삭빠르긴 해도 머리가 나쁜 자신이다.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는 건 보리는 할 줄 모른다.
"맞다. 족장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 우선 보리는 지금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가자."
어느새 트롤들의 선두에 서는 게 익숙해진 보리가 돌창을 쥔 채 나바족 입구를 순찰 중이던 전사에게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보리의 등장에 놀란 나바족 전사는 흠칫하곤 급히 물의 검을 만들어 보리에게 휘둘러 왔다.
그러나 보리는 멈추지 않고, 그 즉시 자신의 팔을 물의 검에 들이밀었다.
쨍강!
보리의 단단한 겉껍질과 물의 검이 부딪친 순간, 물의 검이 두 동강 나며 부서졌다.
눈을 부릅뜬 전사를 향해 보리는 주먹을 꽉 쥐곤 그 즉시 힘을 담아 그의 복부에 내질렀다.
"크학?!"
은하수의 눈물과 소뤼에느의 영약으로 폭풍 성장한 보리의 주먹이 그의 복부를 강타한 순간, 나바족 전사의 몸이 기역 자로 꺾였다.
상대는 오러를 사용하여 방어했으나 엑스퍼트가 안 되는 수준.
그대로 튕겨 날아간 그는 한참 거리가 있던 나무와 부딪치며 기절했고, 순찰병을 처리한 보리는 후하고 자기 주먹을 불었다.
최근 들어 돌창을 휘두르는 것보다 주먹을 쓰는 일이 부쩍 많아진 보리였다.
"습격이다! 안쪽에 알려라!"
보리의 등장에 주변에 있던 다른 나바족 전사 한 명이 놀라 급히 외쳤다.
다른 트롤들이 그를 막고자 그에게 돌창을 휘두르고 있었으나, 자신과 같이 손쉽게 상대를 쓰러트리지는 못했다.
보리가 강한 거지 다른 트롤들은 혼자서 나바족 전사를 압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물론 보리와 같이 나바족 전사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 것은 같았지만 말이다.
그러던 그때 안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들의 공격을 대비하기라도 한 건 지 무장한 나바족 전사들이 물의 검을 들고 쏟아져 나왔고, 보리와 트롤들은 그들을 보며 창을 꽉 쥐었다.
두려운 마음은 없었다.
저들은 자신들한테 상처를 입히지 못했으니까.
그들에게 두려운 건 단 하나였다.
만약 여기서 나바족을 이기지 못하면 족장이 자신들을 어떻게 두들겨 팰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트롤들, 맞서 싸워라! 못 이기면 죽는 건 우리다!"
그렇기에 보리가 제일 먼저 돌창을 높게 들어 올리며 커다랗게 외쳤다.
그러자 트롤들은 호응하듯 돌창을 들어 올려 같이 외쳤고, 전차처럼 밖으로 나온 나바족 전사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개떼처럼 몰려오는 트롤들에 기겁한 나바족 전사들이 맞서 싸우자, 상황은 삽시간에 전쟁 통이 되어 갔다.
"으악!"
그러던 순간 처음으로 트롤의 비명 하나가 울려 퍼졌다.
검에 베인 트롤 한 명이 자신의 가슴팍에서 핏물을 쏟아낸 채 널브러졌고, 그를 벤 나바족 전사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트롤을 바라보았다.
그런 나바족 전사와 마주한 순간 트롤들의 마음에 알 수 없는 감각이 휘몰아쳤다.
최근 들어 족장에게 느껴지기 시작한 그 기묘한 감각이 그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러가 엑스퍼트 중급 이상인 공격은 이 녀석들에게 통한다. 그 아래는 전부 빠져라. 너희론 이 녀석들을 못 베. 마법사들도 더 수준 높은 녀석들을 데려와라."
처음에는 하등한 종족이라며 트롤을 무시했던 나바족들이었지만, 그들과 싸우고 나니 이 녀석들이 상상 이상으로 골치 아픈 존재인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녀석들의 몸에는 일정 수준 이하의 오러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
엑스퍼트 중급 이상은 나바족 전사들 사이에서도 꽤나 높은 수준이기에 그리 많지 않았지만, 벨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트롤들의 전투 기술은 그저 우악스럽게 달려들기밖에 못할 정도로 형편없기 그지없었으니까.
"나 원, 이런 하등한 것들이 어떻게 오러에 내성을 가지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침을 퉷 하고 뱉어낸 엑스퍼트 중급의 실력자인 나바족 전사 알토르는 물 속성의 오러를 끌어 올렸다.
"감히 나바족을 건드린 걸 평생 후회하게 해 주마."
투쾅!
바닥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알토르가 트롤 사이를 종횡무진하기 시작했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트롤 한 명이 당했고, 그런 알토르의 선전에 트롤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으악!"
"아아악!"
동료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겁먹은 트롤들이 하나둘 알토르에게서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이전 나바족 전사들을 손쉽게 제압했던 트롤들인 만큼 그의 무쌍한 실력은 트롤들에게 예정되어 있지 않은 위험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트롤들의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나가는 시점, 보리는 가만히 알토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트롤들 중 족장과 가장 가까운 관계였던 만큼 보리는 간혹 족장이 검을 쓰는 것을 몇 번 본 적 있다.
그러나 그런 족장을 한참을 보아도 아직 오러도 다루지 못하는 보리였기에, 족장을 통해 무언가 깨달음을 얻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던 보리의 눈에 처음으로 족장보다 낮은 수준인 자를 만났다.
알토르는 족장과 달리 움직임을 눈으로 좇을 수 있고, 그의 오러가 체감되었기 때문이었다.
숲에 있으면 숲을 보지 못한다고 하였던가.
너무 거대한 숲 대신 알토르라는 나무를 마주하자, 보리에게는 족장의 가르침보다 더 쉽게 느껴졌다.
"이렇게 인가?"
돌창을 쥔 보리는 알토르의 행동을 따라 해 보기 시작했다.
트롤들이 죽어 나가는 통에 할 일은 아니었으나, 보리는 지금 이걸 익히지 않는다면 알토르를 이길 방법이 없음을 본능적으로 눈치채었다.
「오러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담는 것이다. 간혹 멍청한 녀석들은 그냥 오러를 출력하는 것밖에 모르지만.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삶을 담는 데 집중하지.」
보리는 어려운 말을 모른다.
보리의 올해 나이는 고작 해야 3살.
트롤 사이에서도 보리의 나이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보리의 삶은 그저 광합성을 하는 삶뿐이었다.
하지만 최근 딱 하나 달라진 것이 있었다.
족장과의 만남.
족장은 강했고, 그를 통해 여러 가지를 보게 된 보리의 삶에 어느새 하천성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파직.
번갯불이 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삶을 담으라는 말에 족장만을 떠올린 보리의 돌창에서 희뿌연 오러가 떠올랐다.
"이게."
오러.
그동안 족장이 매일 같이 입이 닳도록 설명해 주던 오러를 직접 본 보리는 왠지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또다시 달성감이라는 감각이 보리를 몰아쳐 오기 시작한 거다.
지금 당장 이것을 사용해 봐야 한다고 확신한 보리는 돌의 창을 잡았다.
'족장은 어떻게 했었지.'
족장을 모방하며 보리는 발가락 끝에 오러를 끌어모았다.
지금껏 올렸던 마력 스텟이 보리의 힘에 힘을 실어 줬고, 그 순간 보리는 포탄처럼 쏘아졌다.
"윽?!"
갑작스러운 보리의 돌진에 놀란 알토르가 급히 몸을 틀었다.
그러자 아직 오러에 익숙지 않았던 보리는 옆에 있던 나무 몇 개를 쓰러트리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방향 전환이 생각보다 까다로웠던 탓이다.
'뭐냐, 저건.'
하지만 그런 보리를 보자마자 위협을 느낀 알토르는 눈살을 팍 찌푸렸다.
트롤들은 누구도 오러를 사용할 줄 몰랐다.
그러나 저기 있는 트롤은 방금 분명히 오러를 사용했다.
그것도 자신과 엇비슷한 엑스퍼트급의 오러를.
이를 아득 간 알토르는 다른 트롤들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부서진 나무를 헤치고 일어난 보리만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누군지 알토르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저 녀석의 힘은 비이상적이었다.
135화
"우어어."
알토르가 듣기에 무슨 소리인지 모를 말이 보리에게 흘러나왔다.
그러자 또 한 번 보리가 바닥을 박찼다.
오직 직선적이기만 한 움직임.
빠르긴 하나 오랫동안 검술을 단련해 온 알토르가 대항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이제는 손쉽게 보리의 돌진을 피한 알토르는 역으로 달려든 보리의 복부를 걷어차 올렸다.
알토르의 발차기에 보리의 몸이 한순간 붕 뜨자, 그 즉시 알토르는 물의 검을 보리를 향해 내려쳤다.
엑스퍼트 중급의 힘이 담긴 알토르의 검이 자신에게 날아들자, 보리도 급히 대항하여 창을 휘둘렀다.
파직!
천둥소리가 튀어 오르며 알토르의 검과 보리의 창이 부딪쳤다.
"윽!"
하나, 아직 오러를 담는 법이 미숙한 만큼 먼저 튕겨 난 것은 보리 쪽이었다.
'이 녀석 오러가 미숙해. 힘은 강하지만 오러에서는 나한테 밀린다!'
자신의 우위를 확신한 알토르는 그 즉시 보리에게 연이어 검을 휘둘렀다.
보리도 알토르에게 똑같이 맞섰지만, 매번 튕겨 나기를 반복해 몸에 서서히 상처가 늘어 가기 시작했다.
다른 트롤들처럼 알토르의 일격에 당할 정도로 보리의 겉껍질은 약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한 대미지는 착실히 쌓여 가고 있었다.
자신이 알토르보다 한참 모자란다는 것을 인식한 보리는 천천히 자기의 경험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사냥한 톨올프는 매섭고 빨랐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자신과 같이 직선적인 공격만을 하지 않았다.
상대를 교란하는 움직임이 톨울프의 기본 소양.
톨울프를 떠올린 보리는 다시금 바닥을 박찼다.
보리의 경험이 고스란히 오러 속에 담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펼쳐지는 건 또 한 번 아까와 같은 직선적인 공격.
단순하기 짝이 없는 보리의 공격 패턴에 비웃음을 흘린 알토르는 그 즉시 상대를 향해 물의 검을 내질렀다.
그런 순간이었다.
보리는 창을 휘두르는 대신 자신의 팔을 알토르의 검을 향해 내질렀다.
갑작스러운 보리의 행동에 당황한 알토르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이대로 보리의 팔을 잘라 버릴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롤 중에서도 가장 먼저 하천성을 통해 겉껍질이 벗겨 졌던 보리다.
검을 향해 내지른 팔에 보리는 처음으로 직접 오러를 깃들였다.
그러곤 자신의 방어력을 믿고 전력을 다해 휘둘렀다.
쨍강!
그 순간 알토르의 검이 보리의 팔에 의해 두 동강 나며 검날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와 함께 오러가 미숙한 탓에 온전히 공격을 상쇄하지 못한 보리의 팔에서도 핏물이 똑같이 튀어 올랐다.
"뭣?!"
하지만 당황한 알토르에 비해 보리는 침착했다.
처음부터 예상했다는 듯 튀어 오른 핏물 사이로 알토르의 검날을 잡은 보리는 그 즉시 알토르를 향해 그걸 내려찍었다.
눈앞에 날아오는 자신의 검날에 알토르는 급히 물의 검을 해제했다.
그의 의지로 만들어진 물의 검은 남의 손에 들어간다 한들 지울 수 있었기에 곧바로 보리가 쥐고 있던 검날은 사라졌다.
하지만 보리는 사라진 검날 대신 자신의 주먹을 꽈악 쥐었다.
알토르는 한 가지 예상하지 못했다.
보리의 손에 물의 검이 사라진다 한들 그가 내지른 주먹이 멈출 리 없다는 걸.
곧이어 보리의 주먹이 정확하게 알토르의 얼굴에 꽂혔다.
콰앙!
전력을 담은 보리의 일격에 알토르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땅속에 머리가 움푹 파이며 들어갔다.
땅이 깊게 파일 정도로 강렬한 일격에 얼굴이 곤죽이 된 알토르는 부들부들 몸을 떨다가 그대로 축 늘어졌고, 보리는 가늘게 숨을 반복하여 내쉬었다.
"...이겼다."
뭘까, 이 감정은.
톨울프를 사냥할 때와는 다른 감정이 보리의 몸속에 맴돌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승리의 고양감이 보리의 몸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이겼다! 이겼어!"
포효하듯 거칠게 소리를 내지른 보리는 승리감에 도취 되었다.
처음으로 깨우친 오러, 처음으로 겪은 위기, 처음으로 겪은 승리.
이 세 가지가 보리를 급속도로 성장시켜 주고 있었다.
"보리! 보리가 이겼다!"
그에 따라 다른 트롤들의 사기도 높이 치솟았다.
보리가 적 중 가장 강력한 자를 쓰러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알토르는 나바족 전사 중 강한 편이긴 하나, 그와 같은 실력자들이 소식을 전해 받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트롤들이 넘어야 할 산은 남아도 아직 한참 남았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모르고 잠깐의 승리에 취해 기뻐했다.
이 상황이 전부 자신들의 족장이 준비한 트롤의 성장 과정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오늘도 트롤은 구른다.
* * *
"잘하네. 잘해."
창문 너머 열심히 나바족과 싸우는 트롤들을 보며 나는 만족감이 어린 미소를 흘렸다.
['트롤'들이 처음으로 오러를 깨우쳤습니다. '트롤'에게 '오러'가 싸움의 수단이 됩니다. 종족 포인트를 70 획득 하였습니다.]
보리 녀석이 제일 먼저 오러를 깨우치고 나서, 뒤따라 다른 트롤들도 하나둘 오러에 눈을 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뭐가 되었든 경험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의자를 빙글 돌렸다.
그러자 무릎을 꿇고 있는 나바족 몇 명이 보였다.
그들은 내가 계속해서 내뿜고 있는 오러 탓에 식은땀을 흘리며 벌벌 떨고 있었고, 나는 그런 녀석들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자, 그래서 누구부터 항복할래."
내가 그들에게 한 제안은 하나였다.
앞으로 1시간을 주겠다.
그때까지 내 오러를 견뎌낼 수 있는 녀석이 있다면 나바족을 공격하는 걸 멈추겠다고.
지금 이 자리에 모인 5명은 나바족에서 가장 강한 마스터급의 실력자들이었다.
나에게 한 대씩 얻어맞아 기절한 뒤 용천성의 용포 탓에 계속 강제 기절 당하고 있던 나바족 족장의 방에 끌려온 그들은 아까부터 내 오러에 이렇듯 정면에서 노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선을 한 명에게 옮길 때마다 그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고작해야 아직 3분 정도 지났을 뿐이건만 벌써 다들 죽을상이다.
그들을 보며 미소 지어 준 나는 오러의 출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그러자 그들 중 한 명이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쥐어뜯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마치 수천 마리의 벌레가 자신의 몸을 쥐어뜯는 듯한 공포감에 견디지 못하고 망가진 그는 바닥을 나뒹굴다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고, 나는 덤덤히 말했다.
"한 명 탈락. 앞으로 넷이다."
"왜,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냐! 우리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다고!"
그래도 이 중에서 가장 강한 나비아가 내 오러를 가까스로 견디며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그런 그를 보고 나는 오히려 고개를 기울였다.
"웬 적반하장이야. 트롤을 공격한 건 너희가 먼저였는데."
"여긴 우리 영역이다! 우리가 사는 영역을 지키기 위함인데 우리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거냐!"
하여튼 누구나 자기가 남을 공격할 때는 옳은 행동이라 외치면서도, 정작 상대에게 공격받으면 피해자 행세를 하며 자신의 잘못들을 부정하는 건 다 똑같은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 '똑같은 것들'을 워낙 싫어하는 성격이기에 녀석들을 더 괴롭혀 주기로 했다.
"응, 그래서 앞으로 우리 영역하려고. 헛소리 말고 견뎌 보기나 해. 이제 56분 남았다."
내 말을 들은 나비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나에게 무슨 말을 하든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쳤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부터 이 녀석들이 내 오러를 이겨 낼 방법은 없었다.
오리진이라도 사용할 수 있다면 모를까, 인생의 모든 것을 필사적으로 담아낸 오리진은 이런 녀석들은 사용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그 날 나바족이 무너져 내리고 나바족이 트롤의 수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종족 전쟁에서 처음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첫 종족 전쟁 승리 특전으로 종족 포인트를 800 획득 하셨습니다.]
나바족이 항복을 선언하자 알림이 떠올랐다.
"오, 엄청나게 많이 들어오네."
역시 종족 전쟁 쪽이 일반적인 생활 포인트보다 훨씬 많은 양의 포인트가 들어왔다.
이로써 트롤의 첫 돌연변이 포인트를 다 모은 나는 그 즉시 돌연변이를 구매했다.
[종족 포인트로 1차 돌연변이를 구매하셨습니다. ― 1000G ]
[돌연변이는 하루가 지난 후부터 적용됩니다. ― 남은 시간 23:59]
결과를 보려면 하루를 기다려야 하나.
조금 아쉽긴 하지만 잘됐다.
이걸로 트롤들은 한층 더 강해지리라.
"그것보다 다음 돌연변이 너무 비싼 거 아니냐."
1차 돌연변이가 1000포인트인 것에 비해 2차 돌연변이는 무려 3000포인트였다.
가뜩이나 다른 곳에도 포인트가 드는 만큼 세배나 높아진 가격에 투덜거린 나는 창을 끄곤 족장의 방을 걸어 나왔다.
내가 모아 놓은 녀석들이 모두 기절했기에 더 이상 이 방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각, 또각.
그러던 순간이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복도 끝자락에서 구두 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비스듬히 시선을 돌리자 거기에는 푸른색 머리카락의 한 여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 위 솟아난 사슴뿔과 등 뒤 보이는 기다란 꼬리를 가진 꽤 괜찮은 미모의 여성은 나를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듯하였다.
"나 원, 뭔 소란이야. 나바족 녀석들."
투덜거리며 걸어오던 그녀는 이제야 나를 알아차리곤 눈을 깜빡이었다.
방 앞에 서서 내가 가만히 그녀를 보고 있자, 여성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더니 시선을 맞추고자 자세를 낮췄다.
"꼬마야, 넌 누구니?"
내게 물음을 던지는 여성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도 그럴 게 이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오러가 엠페러급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녀석 이 층에서 중요 인물인 거 같은데.'
여기선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자그만 게 귀엽네. 나바족 애들이 키우는 아이인가?"
"야, 어딜 쓰다듬어."
"어머, 꽤 까칠하네."
내 말에 그녀는 미안하다는 듯 손을 떼곤 곧 귀엽다는 양 히죽 웃었다.
트롤의 외형은 겉보기에 귀여운 모습이 아닌데, 이 여자의 취향은 꽤 매니악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여자들 특유의 알 수 없는 점에서 귀여움을 느끼는 걸지도 모르고.
'이 녀석 종족이 뭐지?'
겉보기에 가장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용족이었다.
하지만 연지 녀석과 꽤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탓일까, 용족의 특성을 확실히 기억하는 나는 그들과는 어딘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용족의 먼 친척쯤 되는 건가.'
잠깐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던 나는 곧 흥미를 잃은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어차피 이곳에서 볼 일을 전부 다 봤기에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않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트롤 녀석들의 돌연변이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내가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하자, 그녀가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마치 길거리에서 발견한 강아지를 따라가는 듯한 그 행색에 눈살을 팍 찌푸린 나는 그녀를 돌아보곤 외쳤다.
"할 일 없어? 꺼져."
"일이 있긴 한데. 저 안에 내부를 봐버렸거든."
그리 말하자마자 그녀의 눈동자에 푸르른 오러가 서렸다.
눈이 투시라도 되는 건가.
내가 그 방에서 나올 때 이 녀석과 마주쳤으니 나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잡아갈까 싶어서. 나바족은 그래도 나랑 동맹 관계거든. 아니, 정확히는 주종관계랄까. 주인으로서 부하들이 당했는데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
나랑 동맹이라고 말했다는 건 이 녀석은 혼자서 나바족 전부를 아우를 수 있는 급이라는 소리다.
136화
확실히 엠페러급 정도 되다 보면 이 층에서는 가장 강한 부류에 속할 테니 그럴 만하긴 한데.
'이런 녀석은 가능하면 트롤들이 나중에 쓰러트렸으면 좋겠는데.'
그냥 없애 버리자니 조금 찝찝해진 나는 잠시 고민했다.
없애 버릴까, 아니면 트롤을 위해 남겨 둘까.
내가 열심히 고민하고 있을 동안 여성은 나와 다시 시선을 맞추곤 빙그레 웃었다.
"어때? 따라오지 않을래? 넌 귀여우니까 특별히 예뻐해 줄게."
"어, 싫어."
더 이상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 필요 없음을 깨달은 나는 그 즉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생긴 얼음의 벽이 내 주먹을 막아서려 했다.
꽤 빠르게 마법을 쓰긴 했지만, 나는 별 신경도 쓰지 않고 주먹을 마저 내질렀고 곧 내 손에 닿은 얼음벽이 산산조각 났다.
그러나 방금까지 있던 상대가 보이지 않아 시선을 옮기자, 천장 위에 뜬 채 싱글벙글 웃는 그녀가 보였다.
마치 선녀 옷처럼 양팔 위로 하늘하늘 휘날리는 푸른색 천을 발견하고는, 곧 그녀의 종족을 눈치챘다.
"너 미드르족이냐?"
"이제야 알았어?"
그녀의 몸에 둘린 푸른색 천은 미드르족들이 날기 위해 만들어 내는 구름이었다.
어쩐지 용족 느낌이 엇비슷하게 나더라니.
녀석들은 세상을 몸으로 휘감고서도 머리로 자신의 꼬리를 물 수 있는 최상위 성좌 '세상을 몸으로 두르는 뱀'의 파편들이었다.
'골치네. 이 녀석이랑 연관되어서 괜히 그 녀석까지 오는 거 아니겠지.'
내가 그나마 알고 있던 3번째 최상위 성좌와 관련된 생물이 튀어나오자, 나는 게슴츠레 별천도를 내려다보았다.
['별천도'가 당신의 시선에 반응합니다.]
지금도 별천도 속에서는 다수의 최상위 성좌들이 양반다리를 하고 나를 지켜보고 있다.
그러자 순간 층을 오르기 직전 나락이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야신이 최상위 성좌가 되었다는 말이.
그 생각이 떠오르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생리적으로 자기 이야기에 푹 빠져 사는 관음증 변태 녀석들의 힘을 빌리는 걸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 녀석들 때문에 지금까지 층을 오르면서 치른 곤욕이 한두 개가 아니기도 하고.
'젠장, 이용할 건 다 이용하기로 했잖아.'
최상위 성좌가 되어 버린 야신에, 그런 녀석의 배후성이 되었을 하일성을 쓰러트리려면 결국 최상위 성좌 녀석들의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담 나는 지금 한 명이라도 내 편이 되어 줄 최상위 성좌를 더 늘려야만 했다.
내가 주먹을 꽉 쥔 순간 빙그레 웃은 여성에게서 오러가 형상화하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바족을 저렇게 엉망으로 만든 데다가 내 마법도 손쉽게 부수는 걸 보면 너도 보통내기는 아니지?"
그 순간 눈앞에 거대한 강물이 쏟아져 오기 시작했다.
범람한 강물은 산을 뒤덮었고, 뒤덮어진 산에서 쏟아져 내리는 강물은 마치 폭포와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강물과 산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나를 노려보았다.
자신이 살아온 일화를 오러에 담은 미드르족은 마치 천재지변과도 같았다.
유한의 존재인 생물이 천재지변 앞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도망밖에 없다.
그리고 여성의 눈에는 나 또한 그렇게 비칠 터였다.
하지만 그 압박감 속에서 나는 같잖다는 양 웃음을 흘렸다.
"미안한데. 난 행성을 한입에 집어삼키는 네 조상님을 직접 보고 왔거든."
쿠웅!
내 발이 바닥을 내려찍었다.
거기서 치솟아 오른 스파크가 순식간에 산과 폭포를 타고 올라 뱀의 머리에 도달하였다.
자신이 뿜어낸 살기가 깨진 것은 물론이고, 튀어 오른 스파크가 머리카락 일부까지 불태우자 미드르족의 얼굴이 처음으로 살며시 찌푸려졌다.
"...너 뭐니? 이 세상에서 나한테 이렇게 대항할 수 있는 녀석들은 거의 없는데."
"전형적인 대사는 필요 없고, 나는 네가 필요해졌거든? '요르문간드'놈을 불러낼 산 제물이 돼 줘야겠다."
일부러 진명까지 언급한 나는 그 즉시 녀석을 별천도를 뽑아 들었다.
삼식(三式)
뇌격발도(雷擊拔刀)
검집 속에 담긴 번개가 휘몰아치며 그녀를 덮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확실하게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녀가 급히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발 앞에 치솟아 오른 거대한 바위가 아슬하게 검격을 막았으나, 내 검은 바위조차 갈라 버리고 그녀의 목을 베었다.
아슬하게 피한 미드르족의 목에서 핏물이 흘러내리자, 그녀는 자신의 목을 얼어 붙이곤 재차 손을 쥐었다.
그 순간 그녀의 손아귀에서 수백 마리의 얼음 이무기가 싸라기눈을 뿌리며 이빨을 드러냈다.
빙월(氷月)
동침리낙명(冬寢彲落命)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죽은 이무기들은 등장하자마자, 피부를 뜯겨 나가게 할 법한 얼어붙은 입김을 진득하게 내뿜었다.
곧이어 이무기들이 내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점점 층수가 올라가는 만큼 마법에도 오러가 서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러 마법이라 이제 팍팍 난이도가 상승해 주는구만."
별천도에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이에는 이, 오러에는 오러.'
그녀의 오러에 대항하듯 번개가 별천도를 타고 올라오더니, 내 검을 따라 움직였다.
이식(二式)
섬뢰적선(殲雷迪渲)
번개와 번개가 꼬리를 물고 사라진 잔상을 쫓기 시작한다.
멈추지 않는 검무는 날아든 모든 얼음의 이무기들의 명줄을 끊어 버렸고, 그 사이로 미드르족의 당혹스러운 표정이 엿보였다.
자신의 오러가 담긴 마법조차 내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별천도 속에서 다시금 오러가 서리기 시작하자, 여성은 급히 다음 마법을 발동시켰다.
원월(元月)
빙영추산화(氷霙追散華)
그 순간 바닥에서 얼음으로 된 덩굴이 치솟아 올랐다.
그 덩굴은 순식간에 눈꽃을 피워내었고 지독한 한기가 주변을 휘몰아쳤다.
뼛속까지 얼려 버릴 한기는 내 몸조차도 얼어붙게 했고, 일대는 눈과 얼음에 파묻혀 새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내가 움직이지 않아서일까, 여성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겨우 허공에서 내려왔다.
"정말 놀라게 하고 있어."
그리 말한 여성이 내 앞에 천천히 다가온 순간 얼어붙었던 내 팔이 순식간에 움직여 그녀의 목을 콱하고 붙잡았다.
"꺄윽, 윽!"
내 손에서 전 속성의 오러가 튀고 있었기 때문일까, 고통에 찬 소리를 내뱉은 그녀는 급히 오러로 대항해 왔다.
그러나 자신이 꺼낸 오러가 족족 내게 닿자마자 모조리 파괴당해 버리자,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더니 곧 축 늘어졌다.
자신이 그동안 쌓아온 삶을 담은 오러였지만, 나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무슨 삶을 살아왔기에 이런 힘을."
"한 세상에서만 갇혀 사는 너희들이랑은 근본적으로 다르거든."
층의 이야기 속 살아온 인생은 이 녀석이 더 길지 몰라도 나는 이 녀석이 마주한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보았다.
이것이 크라운 로드를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회귀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강점이다.
층에 사는 이들이 쌓아 온 일화보다 훨씬 더 많은 인생을 겪은 회귀자들의 오러는, 이런 녀석쯤은 이길 만한 강력한 무기가 되니까.
'물론 그 때문에 더더욱 대협 같은 머저리처럼 정신력이 바닥나 버리는 녀석들도 꽤 있지만.'
그렇다 한들 결국 인간은 회귀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망가져 가는 정신력 약한 존재들이다.
물론 녀석도 이번 성좌변동으로 크라운 로드의 잔혹함에 지쳐 그런 짓을 벌인 걸 테지만.
"네가 머무르는 곳이 있지? 그곳에 요르문간드의 상이 있냐?"
"...아까도 그렇고, 네가 우리의 신을 어떻게 아는 거니?"
"신이라고 말하는 걸 보니 있는 모양이네. 좋아."
요르문간드는 다른 제천대성 같은 머저리처럼 자기 진명을 언급하거나 했다고 쉽게 반응해 주지 않는다.
"안내...."
그리 말하던 나는 아 하고 멈칫하였다.
내가 여기에 오게 된 이유는 트롤 녀석들의 전쟁을 위해서였다.
종족 포인트가 들어 온 걸 보면 전쟁 쪽이 마무리되긴 한 거 같은데 녀석들에게 뒤에 뭘 해야 할지 가르쳐 놓지 않았다.
머리가 나쁜 트롤들이니 전쟁에서 이겼다고 좋아하면서 그냥 돌아가 버릴 것 같기에, 지금 당장 이 녀석을 따라가 버리면 트롤들을 캐어해 줄 사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