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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보리는 아직 그런 쪽은 한참 부족하기 그지없는 녀석이기도 하고.

"너 말고 다른 미드르족이 몇 명이나 있지?"

"...5명."

다른 미드르족도 이 녀석 수준인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이 수준이라면 이 층에서 최강자 자리에 군림할 것은 분명하다.

그렇담 결국 싫든 좋든 트롤들이 계속 성장해 나간다면, 미드르족과 부딪치게 되리라.

'잘됐네. 어차피 미드르족에게 갈 일은 어련히 알아서 생길 거 같으니, 내가 급히 먼저 찾아갈 이유는 없지. 차라리 미드르족에 미리 대항할 수단을 만들어 둘 겸 이 녀석을 트롤들 겉껍질을 강화하는 데 써야겠어.'

내가 눈을 반짝거리자 여성은 불안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뭐 하려는 거야. 미리 말해 두지만 다른 애들은 나보다 위험한 애들이란다."

"그건 딱히 상관없어. 널 쓸 만한 데를 찾았거든."

그리 말한 나는 히죽 웃고 용천성의 용포를 꺼내 들었다.

곧이어 내게 목이 붙잡혀 있던 그녀에게 용천성의 용포를 씌웠고, 그러자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닫곤 용포를 벗어 던지려 했다.

파지지직!

그 순간 튀어 오른 스파크가 그녀의 행동을 저지시켰다.

그녀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시선을 마주하며 웃어 줄 뿐이었다.

"앞으로 그거 평생 쭉 입고 다녀라."

"너, 너!"

그리고 또 스파크가 튀자 여성은 입을 다물었다.

성능 확실하구만.

"이거 어서 풀렴!"

"배려 타령은. 그거 풀어 주면 바로 도망칠 거를 내가 모를 줄 아냐? 너희들 은신 잘하는 거 나도 잘 알아. 괜히 요르문간드 녀석이 행성 하나를 삼킬 때까지 그 행성 녀석들이 놈의 존재를 못 알아차렸을까 봐."

그리 말하며 나는 뒷짐을 쥔 채 얼른 따라오라는 양 쏘아 보자 그녀는 울상을 지은 채 내 뒤를 따라왔다.

그렇게 건물 밖을 나오자, 저 멀리 웅성웅성 모여 있는 트롤들이 보였다.

내가 보리 녀석에게 포션을 챙겨 주었던 만큼 큰 상처를 입은 녀석들도 대부분 회복한 모양이었다.

"족장!"

내가 도착하자 보리가 눈을 반짝이며 뛰어왔다.

"나 오러를 깨우쳤다."

그럼과 함께 보리 녀석이 자신의 손에 오러를 피어 올리자 나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리, 너 말고 몇 명이나 깨우쳤냐."

"나 말고는 네 명 정도다."

현재 전쟁에 써먹을 수 있는 트롤의 수는 현재 약 50명.

앞으로도 오러를 쓰는 녀석들이 계속해서 더 생겨나긴 하겠지만 아직 한참 모자란 수다.

'그거야 차차 해결될 테고.'

나는 대부분 부서진 돌창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슬슬 이 녀석들이 뗀석기에 졸업해야 할 시기임을 느꼈다.

"야, 너 무기와 관련된 종족 아냐."

용천성이 용포 속에서 얌전히 서 있던 미드르족을 힐끔 돌아보며 묻자, 그녀는 못마땅한 얼굴로 대답했다.

"야가 뭐야. 내 이름은 미드르 소니란다. 적어도 이름으로는 불러 주렴."

"됐고, 알아 몰라?"

"드워프족이나 에고웨폰족이 있긴 한데. 저 애들한테 무기라도 들려 주려는 거야?"

"맞아."

알고 있다면 다행이다.

아무리 나라도 철을 캐고 그걸로 철제 무기를 만드는 법까지 트롤들에게 가르치기에는 힘드니까.

그 부분은 다른 방법으로 채워 주는 게 더 나았다.

"저런 애들한테 어떻게 무기를 들려 줘! 저 자그마한 손으로 뭘 한다고! 너랑 다르게 저렇게 연약한 애들을."

이 녀석 진심으로 트롤을 귀엽다고 생각 하고 있는 건가.

아무래도 진짜 머리가 이상한 녀석인 모양이다.

137화

"그리고 애초에 드워프족은 나바족 같은 협박은 안 통할 거란다. 그 애들은 자신이 만드는 물품에 목숨을 바치는 고집 센 애들이니까. 전쟁으로 이겨 봤자 어떤 방식으로든 최악의 무기만 내놓겠지."

드워프에게서 무기를 구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양 소니가 평가를 내렸다.

하나, 그녀의 말에 나는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뭔 소리야? 드워프는 필요 없어. 에고웨폰족이면 돼."

"...너야말로 무슨 소리야? 에고웨폰족이 드워프보다 쉬울 거라 생각하는 거니? 의지를 가진 검만큼 까다로운 게 없는데."

그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이해 못할 표정으로 소니가 나를 보고 있긴 했지만, 에고웨폰족 상대로 나는 다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에고웨폰족이 있다는 것은 들었으니 무기 쪽은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을 알았다.

"어이, 보리 다른 애들도 전부 데리고 와라. 앞으로 여기가 우리 터전이다."

이로써 첫 종족 전쟁을 무사히 끝마쳤다.

* * *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본격적으로 트롤들을 전쟁을 위해 훈련하기 시작했다.

오러를 쓸 수 있는 녀석들이 나타난 만큼 다른 녀석들 사이에서도 묘한 경쟁심이 생겨 서서히 하나둘 오러를 배워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난, 난 못 견디겠어."

그러는 동안 나는 내가 잡아 온 미드르족 소니에게 트롤들의 겉껍질을 벗기는 역할을 맡겼다.

이 세계관에서 군림하는 미드르족인 만큼 언젠가 트롤들과 부딪칠 것이 뻔했기에 그녀를 이용해 미드르족에 대한 내성을 기를 속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녀석들을 귀엽게 여기는 그녀는 트롤의 생살을 벗겨 내는 일이 너무 괴롭다는 양 고통스러워했다.

정작 트롤들은 나보다 조심성 있게 겉껍질을 벗기는 소니를 더더욱 좋아하며 따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첫 돌연변이가 무사히 끝났다.

[보리]

[칭호 : 족장의 오른팔, 트롤의 최초 오러 사용자]

종족 : 아이언 트롤

―강철 같은 피부를 지닌 트롤의 상위종입니다. 그들은 태생부터 강력한 피부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에게서 깎아낸 피부는 무기로 만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성별 : 男

나이 : 3세

LV.42

체력 78

마력 21

힘 71

지력 30

민첩 42

―스킬창―

약삭빠름[D랭크]

뛰어난 소화 기관[E랭크]

재생하는 철 껍질[C랭크]

강철 같은 육체[C랭크]

물 속성 내성[F랭크]

전 속성 내성[D랭크]

물리 내성[C랭크]

오러 내성[C랭크]

보리를 이용해 살펴보자 최근 들어 부쩍 성장한 스텟과 스킬들이 눈에 띄었다.

연지 때와는 다르게 아예 종족 진화가 가능한 만큼 보리의 성장 속도는 은하수의 눈물을 감안하고서도 놀라운 속도였다.

'또 육성층이라고 투덜거렸는데 이거 생각보다 수월하잖아.'

다른 종족을 뽑지 못했던 만큼 다른 녀석들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트롤의 겉껍질 강화만큼은 상당히 유용했다.

시간이 걸리긴 하나 내성을 계속해서 끊임없이 늘릴 수 있는 만큼 방어력 하나만큼은 정말 뛰어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녀석들이 깎아낸 피부로 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곰곰이 보고 있으니 좋은 생각이 났다.

"어이, 소니."

"왜 부르냐."

트롤의 겉껍질을 마음 아파하며 벗기고 있던 소니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 그녀를 보고 나는 아침 물향나무숲에 존재하는 광물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물어보았다.

"광물? 아만다티움 몇 개가 드워프들이 매일같이 파는 광산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언제 들은 적 있긴 한데. 그것도 오래전 일이라 잘 모르겠네. 애초에 난 광물 같은 건 그다지 관심 없으니까."

광물은 그 정도 수준인가.

하긴, 크라운 로드에서 최고 광물인 스텔라 같은 게 이런 낮은 층에 있을 리도 없을 테고. 아다만티움 정도면 높게 쳐 줄만 하겠지.

'아다만티움이 희귀한 광석이란 말이지.'

크라운 로드를 수없이 반복해 온 느낌상 트롤의 돌연변이는 아마 광석 순으로 진화해 나갈 것 같았다.

만약 녀석들이 아다만티움 정도의 강도로 피부가 성장한다면, 광석에 미쳐 사는 드워프들에게도 상당히 괜찮은 거래 조건이 만들어질지도 몰랐다.

'드워프는 소니 녀석 말대로라면 어차피 까다로워서 딱히 필요 없을 거라 판단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쉽게 가능할지도.'

물론 그전에 종족 포인트를 잔뜩 모아야만 하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속성별로 내성이 생기는 것도 좋네.'

한순간 이게 왜 F급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곧 씁쓸히 웃었다.

이 정도가 F급이라는 건 다른 종족은 이보다 더 빨리 강해지는 법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후에 종족 전쟁의 결과를 봐야 알겠지만, 얼마나 더 사기성이 짙은 종족들이 나타날지 상상이 안 간다.

어찌 되었든 트롤은 시간만 들인다면 계속해서 강해진다.

트롤을 육성할 수 있는 시간은 최대 1년.

크라운 로드의 시간으로 12일 정도 소모하게 되겠지만,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런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폭죽 소리가 연달아 울리기 시작했다.

트롤과 소니 녀석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크라운 로드 참가자인 나만큼은 이 폭죽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크라운 로드의 창시자' '천상'이 전합니다.]

[1년 첫 하루가 되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보자, 별들의 흐름이 제멋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내 각기 다른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그 쏟아지는 별들 속에서 내 눈살이 서서히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1년, 37층을 오르는 데 1년이나 걸렸다.

'저번 회차에서는.'

50층을 오르는 데도 1년이 소모되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며, 나는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좌변동의 영향이 생각보다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당연한 거다.

성좌변동 전에는 클리어 방법을 전부 알고 있는 채로 올랐고, 50층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2층부터, 사실상 처음부터 이전 회차와는 다른 층이 생겨나는 바람에 공략을 직접 찾아내는 식으로 쭉 클리어하고 있는 지경.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 나는 됐다는 양 시스템 창을 휘저어 껐다.

이런 거 보고 있어 봤자 기분만 잡칠 뿐이니,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트롤 녀석들을 키워 층을 오르는 데만 집중하자.

다음 층, 종족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또다시 이 짓을 반복해야만 하니까.

'자, 그럼.'

나는 일단 무기 쪽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소니, 하루 정도 나갔다 올 테니 보리 녀석들 잘 데리고 있어."

"어디를 가려고?"

"에고웨폰족을 만나야 할 거 아니야."

에고웨폰족이 어디에 있는지는 소니에게 들었다.

그렇기에 그리 말하자 소니는 에고웨폰족을 무기로 만들려는 게 진심이었냐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마을을 떠날 채비를 마쳤다.

채비라고 해 봤자 별천도를 들 뿐이었지만 말이다.

"족장, 어디 가나?"

내가 나가려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일까, 어제부터 어미 닭 쫓는 병아리처럼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보리 녀석이 보였다.

오러를 깨우치고 나서 몸이 근질거리는 모양인지 보리 녀석은 줄곧 내게 오러를 배우는 걸 갈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흐음."

보리 녀석을 얼마간 바라보던 나는 이 녀석도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에고웨폰을 다뤄야 하는 건 이 녀석들이기도 하고, 가는 길에 보리 녀석도 단련시켜 두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보리가 내 뒤를 이어 줘야 하는 만큼, 녀석은 최고가 되어 줘야만 하니까.

"보리, 따라와."

"알겠다."

내가 말을 바꿀세라 돌창 하나만 쥐고 쫄래쫄래 따라오는 보리의 모습에 나는 곧바로 트롤 마을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연지 때 가르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보리에게 에고웨폰족의 영역에 도착할 때까지 상시 오러를 발동하게 하였다.

"이게 도움이 되나?"

10분 정도 오러를 몸 주위에 계속 발동하고 있었음에도 별로 힘들지 않았던 탓일까, 보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물어 왔다.

"뭐, 해 봐라."

그런 보리를 보며 나는 그저 옅게 미소를 지어 줄 뿐이었다.

오러의 이응 자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녀석이니, 직접 몸으로 체감시켜 줄 속셈이었다.

"조, 족장, 족장 기다려라."

길을 출발한 지 1시간. 보리 녀석은 나름대로 잘 버텼지만, 이 이상은 한계인 듯 애달픈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안 기다린다. 늦으면 버리고 갈 거니까 계속 따라와. 참고로 오러 끊기는 순간 처음 길에서 다시 출발할 거다."

"아, 아어어!"

그러나 나는 보리에게 얄짤없이 말했다.

오러를 상시 발동한다는 것은 근육에 계속해서 힘을 주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짓을 한 시간이나 했으니, 오러 쪽도 체력 쪽도 엉망진창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근육에 그런 짓을 하면 근육통만 생기겠지만, 오러는 이러면 이럴수록 출력 양이 늘어난다.

'아직 오러가 거의 처음이니 연지 때처럼 오러를 계속해서 쓰며 전력 질주를 시키는 건 아직 무리겠지만.'

이것만으로도 보리의 오러의 양은 쭉쭉 늘어 날게 분명했다.

그러는 동안 아침 물향나무숲에서 자주 등장하는 몬스터들이 하나둘 우리 쪽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족장?"

보리 녀석이 몬스터들을 알아차리고 나를 불렀으나 나는 대답 없이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참고로 나는 출발하고 나서부터 계속 몬스터를 불러들이는 파나만의 피리를 발동하고 있었다.

그동안 보리가 계속해서 오러를 출력한 탓에 위협을 느낀 몬스터들이 차마 공격해 오지 못했었지만, 보리의 힘이 점점 줄어 가자 먹잇감이 약해졌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당연히 나는 오러를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으니, 녀석들에게 약해진 먹이는 맛있는 만찬으로밖에 비추지 않았겠지.

몬스터들의 안광이 수풀 너머 이곳저곳에서 보이기 시작하자, 나는 보리를 돌아보고 씨익 하니 웃었다.

"몬스터들이랑 싸우면서도 오러 멈추지 마라. 물론 발도 멈추지 마. 못 쫓아오면 버리고 갈 거니까."

내 이야기를 듣고 보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악마! 악마다! 족장 이 악마야!"

곧이어 보리의 비명이 뒤편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보리의 겉껍질을 뚫을 수 있는 몬스터는 이곳에 없다.

그러나 오러로 약해진 육체는 마치 근육통이라 생긴 듯 몬스터에게 공격당할 때마다 극심한 고통을 일으켰다.

"미안하다! 천사다! 족장 천사! 족장 살려 달라! 내가 잘못했다아아악!"

보리의 비명이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러기를 며칠.

그사이 보리가 오러로 탈진한 것도 두 자릿수가 넘어갔다.

연지 때는 차라리 약과였을 지도 모른다.

녀석에게는 빠른 회복을 돕기 위해 물약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지만, 보리 녀석은 자체 회복으로 겉껍질의 내성을 늘려야 하는 만큼 회복 물약을 전혀 써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보리는 통증을 온전히 본인이 다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렇게 오늘도 어김없이 나는 기절한 보리를 질질 끌고 나아갔다.

버리고 가겠다고 거짓말하긴 했지만, 걸음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녀석이 탈진하여 쓰러져 버리면 나는 줄로 묶어 보리 녀석을 끌고 갔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보리는 망설임 없이 오러를 전부 출력하다가 기절하고를 반복했다.

물론 오러를 전부 써 육체가 약해진 만큼 이렇게 끌려가는 동안에도 똑같이 통증을 느낄 테지만, 이렇게라도 쉬어야 한다고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느새 그것이 일상이 되었을 때.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또 한 번 보리 녀석이 기절하고 일어난 뒤 24시간이 경과 했다.

그러나 보리는 아직도 오러를 출력하고 있었다.

"어때? 할 만하냐."

"보리, 오러, 보리, 오러 쓴다. 보리, 오러. 오러, 갈 끄니깐."

음, 정신이 망가졌나.

138화

어차피 밥 먹고 재우면 정상으로 돌아올 테니, 나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그래도 합격점이라 할 수 있었다.

마침 옆에 있는 강물에 보리를 들어 그곳에 뻥 하고 차 주었다.

"으겍, 엑!"

그러자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가라앉던 보리가 정신을 되찾은 듯 미친 듯이 수면 위로 튀어 올랐고, 나는 정신을 차린 보리에게 말했다.

"고생했다. 다 왔다."

내 말을 듣고 보리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철로 된 나무가 빼곡히 세워져 있는 숲이 보였다.

이곳이 에고웨폰족들이 살아가는 아침 물향나무숲에 자리한 지역 중 하나인 철옹의 숲이었다.

"아, 아아아아!"

그러자 보리 녀석이 양 주먹을 쥐고 거세게 소리를 내질렀다.

마치 살아남았다고 포효하는 듯한 녀석을 보고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돌아갈 때도 똑같이 해야 하는데.

하지만 나는 굳이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있기로 했다.

"우아아아아아아!"

아직도 소리 지르는 보리의 머리를 한 대 딱 하고 쳐 주자 보리는 물속에 한 번 가라앉았다가, 비적비적 물 밖으로 기어 나왔다.

"저 안으로 가는 거냐."

"그래, 뭐, 지금의 너라면 아마 상처도 안 날 거다."

그리 말한 나는 보리와 함께 철옹의 숲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몸 위로 오러를 두르자 철로 된 나무와 잎들이 닿자마자 바스러졌다.

고개를 뒤로 힐끔 돌리자, 보리 녀석도 이제는 익숙하게 오러를 두르며 내 뒤를 따라왔다.

그동안 오러를 줄곧 사용하는 연습을 한 만큼 보리는 이제 숨 쉬듯 오러를 쓰는 방법을 알았다.

거기에 더해 겉껍질을 오러로 강화하는 법도 깨우친 듯 녀석의 방어력은 이전보다 몇 배는 더 상승해 있었다.

'성장 속도는 괜찮군.'

연지 때보다 훨씬 수월함을 느끼며 나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간 철옹의 숲을 다녔을까, 내 주위에서 하나둘 기척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왔군.'

그 기척의 주인들은 당연 철옹의 숲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에고웨폰족.

그들이 주로 먹고사는 것은 철과 같은 광물이기에 철옹의 숲은 그들에게는 먹을거리가 풍부한 장소였다.

"온다."

내가 한마디를 툭 던진 순간 철로 된 나무 사이로 검 하나가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틀어 피한 순간 녀석은 곧바로 내 뒤에 있는 보리에게 자신의 몸체를 휘둘렀고, 보리는 급히 팔을 들어 올려 막았다.

챙!

아이언 트롤이 된 만큼 오러를 두른 보리의 몸은 강철과 같았다.

그렇기에 쉽사리 에고에폰족의 첫 공격을 막자, 이번에는 하늘에서 화살 비가 쏟아져 내렸다.

한 발, 한 발 오러가 담긴 화살 비 속에서 보리가 기겁하며 방어할 동안 나는 유유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곤 한 발 쿠웅 찍어 날아오른 나는 화살을 쏘아대던 에고웨폰족 한 마리를 발로 내려찍어 밟았다.

"너희 수장은 어디 있냐."

내 물음에 에고웨폰이 우우웅 하며 소리를 내었다.

이 녀석들이 사념을 전달하는 식으로 대화하는 건 알고 있었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활을 쥐었다.

[여긴 우리의 영역이다. 나가라.]

그러자 경계와 분노가 섞인 감정이 제멋대로 섞여 들어왔다.

그러곤 에고웨폰족 특유의 정신장악을 하고자 오러를 사용해 왔고, 나는 간단하게 오러로 맞받아쳐 그걸 끊어 버렸다.

내 오러가 자신의 힘을 아득히 뛰어넘었던 탓일까, 녀석에게서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너희 수장, 어디 있냐고. 핵 파내기 전에 말해라."

에고웨폰족은 기본적으로 몸체 속의 중심에 핵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들을 이루는 원동력이자 약점이다.

그게 파괴되면 일반적인 생물처럼 죽음에 이르기에 내가 이를 가지고 협박을 해 보이자, 녀석이 자존심이 상한 듯 노성을 담아 외쳤다.

[죽여라. 우리의 왕은 너 따위가 만질 수 있는 분이....]

나는 말이 끝나기 전에 아무렇지 않게 핵을 파괴했다.

가장 주요하고 약점인 만큼 지금까지 삼킨 가장 단단한 광물과 오러가 둘린 핵이었지만,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파괴된 에고웨폰족을 바닥에 내던진 나는 곧바로 바로 옆에 있던 다른 에고웨폰을 뒤쫓아 턱 하니 붙잡았다.

[놔라!]

"잘 들어. 너희 왕인지 수장인지 난 마음먹으면 찾을 수 있어. 그런데 이러는 이유는 그놈이 제 발로 나오게 하기 위함이야. 스스로 안 기어 나온다면 나는 오늘 여기 있는 모든 에고웨폰들을 박살 낼 거다."

[네놈은 악마냐!]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아. 난 너희 핵이 파괴되어도 딱히 상관없거든."

에고웨폰의 가장 큰 장점은 스스로 오러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과 주인이 위험할 때 지켜 줄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간혹 특별한 능력을 지닌 개체가 있기도 하고, 에고웨폰과 마음이 통일된 검사는 최고의 검사가 된다는 말이 있기도 하기에 여러 층에서 에고웨폰은 유용하게 사용된다.

하지만 그것뿐, 핵이 파괴되면 그저 잘 만들어진 무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무기를 구하러 왔다.

결국 내게 에고웨폰족은 협력해 주면 좋은 덤일 뿐이지, 실제론 굳이 살아 있는 에고웨폰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내가 진심임을 깨달은 것일까, 악을 쓰던 에고웨폰 쪽이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우리 족장은 악마다."

[젠장, 어떻게 이런 녀석 밑에서 살아갈 수 있는 거냐.]

왜인지 모르게 뒤에서 씁쓸하게 보리가 에고웨폰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녀석들 보리가 검을 쥐지 않았으니 사념으로 대화가 불가능할 텐데 어떻게 자연스레 이어지고 있는 거지.

내가 희한한 걸 다 본다는 표정으로 둘을 보고 있던 그 순간 주위의 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느껴지던 에고웨폰족들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하나둘 경외를 담기 시작하자, 나는 가장 강한 기척이 다가오는 쪽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검 한 자루가 있었다.

수천 년을 산 듯한 거대한 고목과 같은 오래된 검이.

그 검을 보고 나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너구나. 왕이."

그리 말한 나는 내가 쥐고 있던 에고웨폰을 보리에게 던져서 줘 버리곤 그 녀석을 붙잡고자 손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내 손이 닿기 직전 파직 하고 스파크가 튀는 결계에 막혔다.

'이놈 전 속성이네?'

나와 같은 속성인 것을 알고 내가 눈을 반짝이자, 그 순간 갑자기 별천도가 맹렬히 몸을 떨었다.

['별천도'가 주인에게 급히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합니다.]

같은 검이라 위기감이라도 느낀 것일까, 어차피 이 녀석은 층의 인물이라 가져갈 방법도 없으니 상관없었긴 하다만.

별천도를 무시하고 손 위에 오러를 둘러 왕이 만들어 놓은 결계를 뚫으려 한 순간,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왕에게서 먼저 사념이 흘러들어 왔다.

[이방인, 여기에 무슨 볼일이지. 이곳은 우리 에고웨폰들의 땅이다.]

"볼일이야 뻔하지. 무기가 잔뜩 필요하거든."

결계를 뚫으려던 걸 멈추고 내가 바로 본론을 꺼내 들자, 에고웨폰의 왕에게서 진득한 살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본디 무기의 형태로 살아가고 있으나, 누군가에게 휘둘러지기 위해 살지 않는다.]

"아, 그래, 그렇담 핵을 다 부수고 가져가지 뭐."

내가 아주 쉽게 대답하자, 에고웨폰의 왕 뒤에 갑자기 검들이 파바바박 바닥에 꽂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 에고웨폰의 왕은 내게 이 행동의 의미를 말해 주었다.

[지금부터 이자가 우리의 핵을 건드리려 하면 모두 그 즉시 육체를 폭파해라. 시체가 적에게 농락당할 바에야 우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

스스로 의지를 가진 만큼 에고웨폰은 주인을 선택하는 데 까다롭다.

그렇기에 만약 마음에 들지 않는 주인의 손에 휘둘러지게 된다면, 견디지 못한 에고웨폰이 스스로 폭발하여 주인과 함께 죽는 것은 상당히 유명한 일화였다.

소니 녀석이 나한테 에고웨폰은 얻지 못할 거라는 투로 말한 이유도 이러한 이유였겠지.

하지만 그런 걸 하나도 모른 채 온 내가 아니다.

에고웨폰의 왕을 보고 나는 별천도를 뽑아 들었다.

내가 공격하려는 느낌이었기 때문일까, 왕에게서 맹렬한 분노가 담긴 오러가 느껴졌으나 나는 아무렇지 않게 별천도를 그에게 던졌다.

"에고웨폰은 본래 가장 가치가 높은 녀석이 지배자가 되지?"

에고웨폰은 다른 주인에게 확실히 주도권이 넘어가기 전까지 한 에고웨폰에게 의지해 정신 공명을 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에고웨폰의 지배자, 왕 혹은 수장이라고 불리는 자들이며 지금 저기 있는 녀석 또한 이곳 철옹의 숲에 있는 모든 에고웨폰의 정신적 지주를 담당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즉, 저 정신적 지주의 위치만 빼앗아 올 수 있다면 이곳에 있는 에고웨폰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이건 무엇이냐? 설마 고작 이런 검 한 자루가 나보다 가치가 높다고 생각하는 건가?]

땅을 일부 가르고 우뚝 선 별천도를 보고 왕은 기가 찬다는 듯 소리쳤다.

"잘 봐라."

그러나 그 말에 나는 씨익 하니 웃었고, 곧 별천도에서 진동이 생겨났다.

['별천도'가 새침하게 자신을 뽐냅니다.]

곧 별천도에서 나온 별빛이 주변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성좌의 눈이 심어진 별천도는 일반 검들과 다르게 자신의 의지를 지니고 있다.

즉, 별천도 또한 어떤 의미론 에고웨폰족에 속한다.

여기서 문제다.

고작해야 층이 만들어 낸 에고웨폰의 왕과 성좌들이 직접 눈을 심어 놓아 미약하게나마 성좌의 힘을 지닌 별천도.

어느 쪽이 더 우위일까.

[아, 아아]

당혹스러운 소리를 내뱉은 에고웨폰의 왕은 급히 자신의 오러를 주위에 확산하기 시작했다.

그에 의해 펼쳐진 오러의 세계 속에서 수만 개의 검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별천도, 더 세게."

그런 검의 비 속에서 내가 무뚝뚝하게 내뱉은 지시가 울려 퍼졌다.

['별천도'가 거세게 자신의 존재를 부각합니다.]

아까 전 검으로서 위기감을 느낀 별천도가 내 말에 자신이 쓸모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더더욱 환한 빛을 쏟아 내었다.

그러자 별천도에게서 뻗어져 나온 빛들은 검의 비들을 모조리 꿰뚫고 지워 버렸다.

그리고 그 끝에 정면에서 본다면 눈이 멀어 버릴 정도의 강렬한 빛이 왕에게까지 쏟아지자 왕은 주춤거리며 오러로 악착같이 대항했지만, 이내 그의 결계가 우두둑 하고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

쨍그랑!

결계가 깨져 나가는 소리가 주변으로 울려 퍼진 순간, 견디지 못한 왕이 바닥에 땡그랑 소리를 울리며 떨어져 내렸다.

[내, 내가 졌다.]

무기로서의 가치가 높은 쪽이 왕이 되는 이곳에서 성좌의 눈이 심어진 별천도보다 높은 수준에 무기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에 가치로서 한참 밀린 에고웨폰의 왕이 울며 겨자 먹자 식으로 패배가 인정한 것이다.

['별천도'가 자신이 에고웨폰족의 왕이 되었음을 당신에게 알립니다.]

그러자 그 즉시 잘했냐는 양 열심히 빛을 내뿜는 별천도가 보였다.

저렇게 보니 칭찬받고 싶은 강아지 같았다.

139화

"자, 너희의 왕은 내 검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알겠지?"

이제는 별천도를 중심으로 움직여야 하는 에고웨폰에게 선택권은 하나밖에 없다.

그저 별천도를 따라와 앞으로 트롤들에게 검으로써 사용되는 것.

['트롤' 들이 처음으로 에고웨폰과의 계약에 성공하였습니다. 앞으로 '트롤'에게 에고웨폰과의 계약이 전승됩니다. 종족 포인트를 60 획득 하였습니다.]

그러던 순간 갑자기 어이없는 알림이 울렸다.

내가 뒤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아까 전 내가 던져 주었던 에고웨폰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보리가 있었다.

"맞다. 내가 그렇게 여러 가지를 당했다. 너와는 뭔가 통하는 게 있는 것같다. 족장의 진실을 한눈에 알아보다니. 좋다. 너랑은 함께 하고 싶다."

그걸 본 나는 눈살을 팍 찌푸렸다.

이 새끼가.

내가 왕을 제압하고 있는 동안 에고웨폰과 뒷담이나 까고 있던 보리를 보고 이마를 감쌌다.

보리는 내가 가장 투자하고 있는 녀석인 만큼 왕을 쥐여 줄 생각이었는데 다른 녀석과 벌써 계약을 끝마쳐 버린 것이다.

에고웨폰 중 한 번이라도 계약한 상대가 있으면, 다른 에고웨폰과 절대로 계약하지 못하는 것이 그들의 규율.

그러니 벌써 계약까지 마쳐 버린 보리는 더 이상 왕과 계약할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마음이 가장 잘 맞는 녀석이 제일 좋은 효율을 내기는 하는데.'

그래도 아까 별천도에게까지 대항하려 할 정도로 왕의 성능이 워낙 좋았기에 나는 아까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나는 곧 나름대로 납득하기로 하였다.

어차피 보리 수준에서는 왕에게 끌려다니기만 할 테고, 그로 인해 오히려 성장을 못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살짝 짜증 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였다.

층에서 내 마음대로 된 적이 없는 건 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대는 너무 아름답구려. 아까 미처 알아보지 못한 내가 미안하네. 혹시 아다만타이트를 좋아하나? 내가 좋은 것을 하나 구해 두었는데.]

['별천도'가 별꼴이라며 새침하게 흥 하고 콧방귀를 내쉽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반대쪽에서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까 무기로서의 가치가 밀린 왕이 별천도에게 헌팅을 하는 듯한 행동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녀석 설마 패배를 인정하고 나서 별천도에게 반하기라도 한 걸까.

가지가지 한다며 앞머리를 쓸어 올린 나는 별천도를 쥐어 허리춤으로 되돌렸다.

"오늘부터 너희가 살 곳은 트롤의 마을이다. 이 숲에 사는 녀석들 전부 나를 따라온다. 알겠지?"

[기다려라. 그 말을 따르기 전에 한 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내 지시에 왕이 급히 한마디를 던졌다.

무슨 할 말이 있냐는 듯 내가 녀석을 바라보자 왕은 조심히 자신들의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여기 사는 이유는 철옹의 숲에서 나오는 강철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식은 광물, 광물이 없는 곳에서 우리는 녹슬고 가치가 떨어진다.]

그거야 앞에서 말했듯이 잘 알고 있었다.

"보리, 이리 와봐."

그렇기에 미리 방안을 생각해 둔 나는 보리를 불렀다.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온 보리를 향해 즉시 검을 휘둘러 녀석의 겉껍질을 벗기곤 왕에게 던져 주었다.

[호오.]

보리에게서 나온 겉껍질을 받은 왕이 꽤 진지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곤 검 끝을 겉껍질로 가르더니 곧 나에게 물었다.

[너희 종족은 전부 이런 걸 가지고 있는 거냐.]

"그래, 다른 녀석들도 전부 그래. 앞으로 우리의 겉껍질을 너희에게 계속 제공해 줄게. 트롤의 겉껍질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더욱 단단해지고 질이 좋아져. 나중에는 강철은 넘어서서 훨씬 더 질 좋은 광물처럼 될 거다."

트롤들에게서 벗겨 낸 겉껍질은 에고웨폰의 주 먹이가 될 수 있을 거란 걸 나는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에고웨폰이 트롤과 상성이 좋을 것이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 대신 너희는 우리 중 마음이 맞는 녀석과 계약해 줘야겠어."

이번에는 명령보다는 제안이었기에 왕은 얼마간 침묵을 표했다.

[알겠다. 그러지. 이것보다 더 질 좋은 것을 먹이로 삼을 수 있다면, 오히려 너를 따라가는 것이 우리에겐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일일 테니.]

침묵을 깨고 제안을 받아들인 왕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로써 트롤의 무기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내가 돌아갈 채비를 하려던 순간, 왕이 말을 걸어왔다.

어차피 저쪽이 이야기를 잘 받아 준 만큼 나도 나름대로 타협해 줄 생각이 있었기에, 왕을 바라보자 녀석이 스리슬쩍 내게 엉겨 붙어 왔다.

[당분간이라도 좋으니, 나도 같이 데리고 있어 주지 않겠나?]

그 물음에 나는 녀석이 원하는 게 뻔히 보였다.

검 주제에 부끄러운 양 몸을 꼬고 있는 왕을 한심하게 쳐다본 나는 알겠다고 말하곤 녀석을 쥐어 별천도 반대편에 채워 넣었다.

['별천도'가 몸을 떨며 극혐합니다.]

별천도가 맹렬히 거부 반응을 보이고는 있지만 말이다.

"보리, 돌아간다. 준비해."

아직도 에고웨폰과 대화하고 있던 보리를 질질 끌며 발걸음을 옮기자, 우리를 따라 에고웨폰 족들이 뒤따라오기 시작했다.

각종 무기가 하늘에 부웅 뜬 채로 뒤를 따라오는 것이 어찌 보면 장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철옹의 숲 밖으로 나온 나는 보리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보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자, 눈살을 팍 찌푸렸다.

"뭐 해. 처음 올 때랑 같아. 오러 켜."

"조, 족장, 여기에 온 지 하루도 안 되었다! 나는 조금도 못 쉬었다!"

"하하, 보리야. 내가 같은 말을 한 번 더 말해야겠냐."

내 친절한 미소에 보리가 울상을 지으며 몸 주위에 오러를 일으켰다.

자, 돌아가자.

* * *

각종 각색에 식물들이 자라나고 있는 거대한 들판과 푸르른 하늘이 펼쳐진 장소.

그곳에는 커다란 원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원탁에는 각기 다른 외형을 한 자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제각각 다른 생각을 품고 대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최근에 나바족 녀석들이 이상하다."

한참 대화가 이어지고 있던 도중 한 종족이 입을 열었다.

그 종족은 나바족과 가장 인접한 곳에 살고 있는 에뛰드족의 충왕이었다.

거대하고 새하얀 애벌레 같은 외형이 돋보이는 그의 머리 위에 올려진 왕관은 그중 가장 높은 지위임을 표시하고 있었다.

"나바족? 그러고 보니 회의에도 참가를 안 한 것 같던데."

그의 말을 듣고 호랑이의 얼굴을 가진 호왕이 오늘 회의에 불참한 나바족의 빈자리를 돌아보았다.

종족 회의는 서로의 영역에 대한 것부터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이야기가 많이 오가는 만큼 빠지는 쪽이 명백히 손해이기에, 가능하면 모두가 참가하는 편이었다.

그런 종족 회의에 나바족이 빠졌다는 것에 의문을 가지고 있자, 충왕이 마저 말을 하였다.

"우리 아이들에게 듣기론 처음 보는 종족이 나바족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이 나바족보다 더 지위가 높은 듯 행동한다더군."

"처음 보는 종족이라고?"

새로운 종족의 등장은 아침 물향나무숲에서는 드물지만, 꼭 없는 일만은 아니었다.

일반 생물들이 지능을 갖추고 무리를 형성하다가 곧 종족의 형태로 발전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러한 종족은 이미 오래전부터 종족을 이룩한 다른 종족에게 밀려 모두 몰살당하거나, 한두 마리 정도만 살아남는 게 정상이었다.

게다가 나바족은 타 종족에게 영역을 뺏길 만큼 약한 종족이 아니다.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오러를 사용하고, 자신의 무기를 만들어 내는 자들이니까.

그렇기에 그런 그들이 처음 보는 종족에게 지배당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녀석들의 외형은?"

"겉에 철 같은 껍질이 있다는 것과 나바족보다 훨씬 작은 왜소한 체격. 그리고 못생겼다."

애벌레인 충왕이 외모를 논하는 건 어떨까 싶지만, 저래 보여도 충왕은 에뛰드 종족 중 가장 빼어난 외모라고 하니 호왕은 어이없어하면서도 그러려니 했다.

지금 문제는 나바족이 그런 자그마한 종족에게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미드르 소니도 함께 있었다."

그 순간 아까까지 시큰둥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왕들이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드르 소니? 그 괴물이?"

"그 할망구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미드르 소니가 골치 아픈 일을 벌이는 것은 지금껏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질릴 대로 질린 그들은 자연재해 같은 인물의 등장에 또다시 큰일이 생기고 있음을 인지했다.

"나바족은 분명 소니의 관할이었지?"

"맞아. 그 여자 뭔가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 설마 그 새로운 종족과 함께 종족 전쟁이라도 벌이려는 거 아니야?"

"일리 있어. 그 괴물, 이상한 부분에서 한 종족을 예뻐하는 경향이 있잖아. 이번에도 그런 거면 또다시 종족 전쟁이라고."

미드르 소니가 다시금 무슨 짓을 꾸미고 있다고 확신한 왕들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큰 게 오고 있음을 다들 눈치챘기 때문이다.

"제발 우리 문제에 최상위 종이 끼지 말라고."

미드르족 같은 최상위 종들은 개체 수가 적으나, 그 힘이 너무 강력해 그들이 장난으로 벌이는 짓이라도 종족 대대로 역사에 남는 기막힌 짓이 많았다.

그렇기에 왕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찰 수밖에 없었다.

"젠장, 이대로 둘 수는 없다. 저쪽이 뭔가 꾸미고 있는 거라면 우리 쪽에서도 대항할 방법을 구상해야 해. 일단 그 새로운 종족이 뭐 하는 녀석들인지 알아내야 한다. 충왕 이쪽은 그대에게 맡겨도 괜찮겠나?"

"그러지. 우리 종족은 탐색이 가장 큰 장점이니까."

충왕이 스스럼없이 맡아 준다는 말에 다들 안도를 보였다.

이젠 얻어 낸 정보를 토대로 미드르 소니가 벌일 짓을 최소화할 방법을 구상할 수 있으리라.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지.'

미드르 소니가 일을 벌이면 꼭 한 명 또 나타나는 자가 있다.

그자가 관련되면 종족 중 몇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멸종해도 이상할 거 없으리라.

부디 이번에는 조용하게 끝나기를 종족의 왕들은 간절히 빌었다.

그것이 의미 없는 바람이라는 것도 모르고.

* * *

어느새 또 한 달이 지났다.

바깥은 또 하루가 지나갔을 거라 생각하며 나는 눈앞에서 열심히 에고웨폰을 휘두르고 있는 트롤들을 내려다보았다.

에고웨폰을 가지고 돌아온 뒤, 나는 곧바로 트롤들에게 각자에게 맞는 무기를 쥘 것을 명령했다.

처음에는 아직 지성이 매우 낮은 트롤들을 에고웨폰들은 굉장히 못마땅해했다.

보리가 에고웨폰과 바로 계약을 했던 게 기적일 정도로, 다른 에고웨폰은 트롤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를 며칠, 트롤들에게서 나오는 겉껍질을 꾸준히 섭취하던 에고웨폰들의 태도가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다.

트롤들에게서 나오는 겉껍질은 그들에게는 최상품의 먹이였고, 트롤을 미워하기에는 그들에게서 나오는 겉껍질이 너무 가치가 높았다.

그 결과 어느샌가 에고웨폰들은 트롤들과 하나둘 계약을 시작하였다.

트롤 녀석들이야 내가 한 달 내로 계약 못 하는 녀석은 지옥을 보여 주겠다고 하니, 에고웨폰이 계약을 제안하자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였지만 말이다.

'먹이로 길들인 셈인가.'

처음에는 삐걱거리던 에고웨폰들이었으나, 어느샌가 거의 모든 트롤들이 에고웨폰과 계약을 마쳤다.

그 결과 오러가 미숙하던 트롤들도 에고웨폰의 도움 아래 빠른 속도로 오러를 깨우쳤고, 서서히 서로의 힘을 증폭해 나갔다.

그중에서 당연히 가장 발군인 것은 보리였다.

내 뒷담으로 급격히 친해진 둘은 잘 때마저 함께였고, 그 결과 어느새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이제는 확실하게 트롤 중 나를 제외한 누구도 보리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거기에 종족 포인트를 진화에 꾸준히 넣어 준 덕분일까, 녀석은 어느샌가 마스터급의 턱걸이로 도달해 있었다.

140화

이 성장 속도라면 그랜드 마스터급도 얼마 안 가 도달할 수 있으리라.

'다행히 쭉쭉 성장해 주는 구만.'

트롤들 전체가 확실히 강해진 것을 확인하며 나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여기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층의 시간으로 약 10달.

그동안 최대한으로 이 녀석들을 성장시켜 줄 속셈이었다.

'게다가 다음 돌연변이까지의 포인트도 얼마 안 남았단 말이지. 슬슬 다음 종족 전쟁을 하기 위해 움직여도 괜찮을 것 같네.'

나바족을 지배하에 둔 이후 나는 녀석들을 통해서 다른 종족들에 관한 것을 전부 들었다.

아침 물향나무숲에는 미드르족같이 최상위 종족이나, 에고웨폰 같은 소수 종족을 제외하면 나바족을 포함하여 총 열셋 종족이 균형을 맞추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즉, 단순 계산으로 앞으로 열두 번의 종족 전쟁을 더 할 수 있다는 소리와 같았다.

'앞으로 돌연변이는 몇 번이나 할 수 있으려나.'

아이언 트롤로 돌연변이 화하고 최근 트롤들이 부쩍 강해진 만큼 나는 종족 포인트를 최대한 돌연변이 쪽에 투자하고 싶었다.

분명 모을 수 있는 포인트에는 한계치가 있을 테니, 효율적으로 잘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내 앞으로 소니가 다가왔다.

최근 트롤들을 워낙 이뻐한 탓에 트롤에게 거의 어머니 취급을 받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 소니는 내 앞에 거대한 애벌레 한 마리를 툭 내려다 두었다.

"이건."

"에뛰드족이야. 최근 며칠 사이에 숨어서 보고 있던데 몰랐어?"

"알고는 있었는데. 딱히 신경 안 썼어."

내가 이 녀석들을 신경 안 쓴 이유는 트롤들에게 전쟁 경험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바족과 맞부딪쳐 나름의 승리를 쟁취한 트롤들이라곤 하나, 그건 진짜 제대로 된 전술을 짜서 전쟁을 치른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일부러 우리 쪽 정보를 다른 종족이 알 수 있도록 흘려 주었고, 트롤들이 그걸 헤쳐 나가게 할 속셈이었다.

"그래도 슬슬 전쟁으로 포인트를 벌 때가 오긴 한 모양이네."

소니의 손에 반쯤 죽어가는 에뛰드족을 내려다보며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이, 나비아."

"예, 예!"

내가 부름을 하자 물 속성 오러를 가진 트롤들에게 검을 가르치던 나비아가 급히 뛰어 왔다.

나비아는 나에게 완전히 패배한 뒤로도 아직 자존심을 지키던 녀석이었다.

그러나 소니가 내게 반항 한 번 못하고 내 말을 따르는 것을 본 뒤로 녀석은 큰 충격을 받은 듯하였다.

마치 자신이 믿고 따르던 신이 추락한 느낌이랄까.

그러고 나서부터 녀석은 내 부름이라면 자다가도 뛰어오는 충실한 종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조차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거겠지.

"저번에 종족 회의 같은 게 있다고 했었지."

"예, 있습니다. 분명 최근에도 한 번 했을 겁니다."

"다음 회의는 언제냐?"

"보통 한 달에 한 번 주기로 하곤 하니, 조금 기다리셔야 할 듯합니다."

그렇담 시간이 좀 남나.

저번 회의에 참가했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하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던 나는 곧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종족 회의 같은 건 비상일 때도 하냐?"

"종족들 간에 큰일이 벌어졌을 때 회의 소집을 부탁하면 하기도 합니다."

그 말에 나는 가벼운 눈웃음을 짓곤 소니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용천성의 용포가 둘린 그녀는 내 시선에 몸을 움츠러트리곤 눈살을 찌푸렸다.

"또 무슨 꿍꿍이니?"

"아니, 너 지금까지 이래저래 민폐 짓 많이 했다면서."

"난 그런 짓 한 적 없어."

소니의 대답에 내게 그녀의 진상을 알려 주었던 나비아가 대신 질린 표정을 지었다.

"됐고 네가 문제 좀 일으켜 봐. 긴급 종족 회의가 열릴 정도로."

"난 살면서 문제 한 번 일으킨 적 없는데?"

"지금이 봄이니 겨울이라도 다시 오게 하던가."

"그건 늘 하던 거니 딱히 어렵지 않긴 한데."

이게 늘 하던 거냐. 왜 나비아 녀석이 이 녀석을 민폐 취급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 정도야라는 태도로 푸른색 머리카락을 꼬던 그녀는 곧 무언가 하나 떠올랐는지 살며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거 하면 날 좀 싫어하는 녀석이 한 명 있어서 걔가 훼방 놓을 건데."

"걔가 누군데?"

내가 의아스럽게 소니를 바라보자 그녀는 말을 조심하는 듯 망설였다.

그런 그녀를 보고 옆에 있던 나비아가 대신 입을 열었다.

"소니님과 같은 최상위 종인 독각귀 조율입니다."

독각귀, 도깨비 쪽인가.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흥미를 보입니다.]

그러던 순간 매일같이 나를 싸우라고 부추기던 녀석이 반응을 보였다.

의아한 표정으로 하늘을 돌아본 나는 이매망량의 뜻을 떠올리곤 턱을 짚었다.

이매망량(魑魅魍魎), 모든 글자가 도깨비로 이루어진 말이었으니.

'무기의 신에게 대적하는 시점에서 당연히 최상위 성좌인 건 알고 있었지만.'

원숭이들이 제천대성의 후손이거나 미드르족이 요르문간드의 파편인 것과 같이 최상위 성좌는 한 종을 통틀어 대표 격인 경우가 상당수 있다.

그렇다면 이매망량의 속앓이도 도깨비들의 가장 원천이거나 우두머리일 가능성이 컸다.

'흐음, 이거 잘만하면 이매망량을 이용해 뭔가 할 수 있으려나.'

당연한 거지만 종족은 자신의 원천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

소니 녀석과 같은 수준이라는 건 이 층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녀석이라는 걸 테고 어딘가 이용할 방법이 있으리라.

"그놈이 왜 널 싫어하는데?"

"몰라. 나만 보면 귀찮게 하지 뭐니."

자신도 영문을 모르겠다며 소니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소니를 두고 나는 나비아를 돌아보았다.

"왜 그런데?"

"소니님은 그나마 괜찮지만, 조율은 성깔이 아주 더러워서요. 싸우는 걸 워낙 좋아하기에 소니님이 일을 일으키면 좋다고 나타나서 같이 부시는 거로 유명합니다."

날뛰는 성향은 자기 조상을 닮아서 그런 건가.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입니다.]

저 녀석은 뭐가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소니를 돌아보았다.

"잘됐네. 그 녀석도 불러."

"싫어. 걔랑 관련되면 좋은 게 없어."

"하하, 좋든 말든 뭔 상관이냐. 명령이야. 네가 내 말에 토 달 처지야?"

환한 웃음을 지으며 되묻자 소니는 상처받았다는 양 얼굴을 와락 구겼다.

"못됐어. 정말."

"내 성격 어디 안 가. 얼른 가서 늘 하던 대로만 해. 다른 종족을 통째로 잡아먹든 구워삶든 상관없으니까. 문제만 확실히 일으켜 놔. 그러고 나서 할 일을 가르쳐 줄 테니까."

내가 어서 가 보라는 양 손짓하자, 소니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하다못해 이거라도 벗겨 주렴."

"그냥 가. 어차피 입고 있어도 별문제 없잖아."

용천성의 용포를 슬쩍 벗으려는 소니를 쏘아보자 그녀는 투덜거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 옆에 있던 나비아가 마치 나를 경외하듯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너 최근에 그 짓 많이 하는데 왜 그러는 거냐?"

마치 신이라도 영접한 듯한 녀석의 행동에 내가 못마땅해하고 있자 나비아는 두 손을 모은 채 울먹거렸다.

"소니 님은 자연재해 같은 괴물이라 저희로서는 어떤 해악을 끼쳐도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괴물이 꼼짝 못 하는 모습을 보니 몇십 년간 쌓였던 묵은 체증이 한 번에 쓸려나가는 것 같아 절로 기도를 올리게 됩니다."

아무래도 타 종족 녀석들은 소니 때문에 어지간히 골머리를 썩인 모양이었다.

내가 소니를 막 대하는 것을 보고 나비아뿐만 아니라, 다른 나바족 녀석들도 이러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종족 회의에서 소니 님을 막을 수 있는 것만 보여 주어도 다들 별말 없이 하천성 님을 따를 겁니다."

"아니, 난 그걸 원하는 게 아니거든."

나는 녀석들이 나를 따르든 말든 상관없다.

내가 하려는 건 어디까지나 종족 포인트와 트롤 녀석들에게 조금이라도 경험을 더해 주고자 하는 거니까.

오히려 가능하면 트롤이 아슬아슬 한 선에서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녀석들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지경이다.

'뭐, 어쨌든 소니 녀석이 어련히 알아서 해 주겠지.'

지금까지 수많은 문제를 일으킨 녀석이라고 하니 이번에도 알아서 잘 문제를 일으켜 줄 거다.

그러니 나는 그냥 트롤이나 키우며 느긋이 기다리기로 했다.

* * *

하천성에게 무시당하며 지금은 트롤의 강화용 소모품처럼 사용되고 있는 미드르 소니.

그러나 그녀는 이 층에서 오직 하천성을 제외하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자연재해와 같은 자였다.

본래도 성격이 제멋대로인 그녀였지만, 최근 하천성에게 잡혀 살았기 때문에 그녀의 몸속에는 차곡차곡 스트레스가 쌓여 가고 있었다.

"이익, 나쁜 녀석!"

그런 와중 하천성에게 문제아 취급을 당한 그녀는 자존심에 상처가 생겼다.

'날 이렇게나 막 대한다. 이거지.'

몇백 년간 단 한 번도 누구에게 이런 취급을 받아 본 적 없는 소니는 결심했다.

하천성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큰 사고를 쳐 주기로.

하지만 하천성은 자신보다도 훨씬 강했다.

그런 그에게 사고라고 생각할 만한 것이 어디 있을까.

'그러고 보니 그 녀석 분명 신상을 알고 있었는데.'

트롤 군락을 벗어나 들판에 앉은 소니는 곰곰이 하천성이 원하던 것을 떠올렸다.

자신들의 신상을 그가 원한 이유가 뭘까.

'잠깐만 신상을 원하는 거라면.'

문뜩 떠오른 생각에 소니는 진한 웃음을 지었다.

하천성에게서 벗어날 기막힌 방법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좋아. 이거라면.'

이런 수모도 당분간만 버티면 된다.

'그래, 지금은 스트레스나 풀고 있으면 돼. 때가 되면 기회는 온다.'

하천성에게 복수할 미래를 떠올리며 소니는 즐겁게 산을 타고 올랐다.

그러곤 그녀는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고 오러에 일화를 담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빗물, 떨어지는 낙뢰, 몰아치는 바람.

소니의 오러는 장마와 폭풍우를 불러 왔다.

그녀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기 뜻대로 변해 가는 세상을 보는 것.

그녀에게 있어서 계속해서 새로움을 품고 나타나는 사계절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봄에는 꽃과 새 생명을 여름에는 푸름과 생명의 활기참을 가을은 따스함과 노곤함을 겨울에는 죽음과 아쉬움을 품고 있는 사계절이야말로 영생을 사는 그녀에게 가장 새로운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일화는 계절이 되었고, 자신의 손에 이리저리 자연이 변해 가는 모습을 보는 취미가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의 취미가 이러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일반 종족들에게는 큰 피해가 된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하는 짓은 자연 자체를 갈아엎어 버리는 재해였으니까.

그렇기에 호족의 왕, 호왕은 산등성이에서 멍하니 범람한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에서 끝도 없이 쏟아져 내린 빗물은 호족이 살던 곳은 물론 산까지 물이 차고 올라 주위의 모든 것을 물바다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41화

"하, 하하."

넋놓고 웃음소리를 낸 그는 아직도 비가 쏟아지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름 특유의 습기 찬 기운과 폭풍우.

아직 여름이 오기까지는 한참 남은 이때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는 건 확실하다.

'미드르 소니, 그 괴물 여자가 또.'

제멋대로 계절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스케일이 역대급이다.

아무리 소니라도 이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만든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소니가 새로운 종족과 함께 있다고 했었는데.'

저번 종족 회의에서 충왕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린 그는 빗물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하고 있는 이 행동에 혹시 무슨 의미라도 있는 걸까.

소니가 이런 일을 벌이는 건 그저 스트레스 풀기용이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걸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오히려 알았다면 고작 그딴 일로 이런 짓을 벌이냐며 피눈물을 흘렸으리라.

그 순간 하늘 위에서 낙뢰가 내려쳤다.

갑작스러운 낙뢰에 멈칫한 호왕은 불안한 표정으로 낙뢰가 떨어진 산 위를 바라보았고, 곧 거기에는 머리 위에 난 뿔 하나가 인상적인 자가 있었다.

독각귀, 조율.

소니와 같은 자연재해가 또 하나 나타났다.

"소니! 어디 있냐! 하하하하핫! 이번에는 제대로 붙어 보자고!"

거친 웃음소리를 흘린 조율이 소니를 찾고자 또다시 번개가 되어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번갯불이 튄 탓에 숲이 타오르기 시작했으나, 다행히 폭풍우 탓에 금방 꺼졌다.

만약 소니가 폭풍우가 아닌 다른 재해를 일으켰다면 조율에 의해 거대한 산불이 되어 주변으로 번졌으리라 생각하며 호왕은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제발 자신들에게 피해 끼치지 말고 조용히 좀 지낼 수는 없는 걸까.

그렇게 속으로 울분을 삼킨 호왕.

"누구 있느냐."

"예."

이내 호왕이 부름을 하자 호족 중 한 명이 그의 앞에 부복 자세로 나타났다.

그런 그를 보고 호왕은 기다랗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다른 종족에게 회의가 필요할 것 같다고 연락을 넣어라."

그에 의해 얼마 전에 했던 종족 회의가 다시금 시작되었다.

소니가 벌이는 일의 규모가 규모인 만큼 호족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들도 피해를 보고 있었기에 그들도 서둘러 모인 것이었다.

"젠장, 미친년 이번에는 눈이야."

"대체 언제까지 저 짓을 하려는 거지? 이번에는 역대급이잖아. 이 정도로 난리를 피운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조율 쪽도 문제야. 소니 하나 찾는다고 독각귀 놈이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니는 통에 지금 불타 버린 숲만 몇 개째인데."

종족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소니가 이 일을 벌인지 고작해야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여자를 죽여야겠어."

"어떻게 죽이게. 죽일 방법은 있고?"

하지만 그들에게 마땅한 수는 없었다.

소니가 일을 벌이면 그들이 하는 건 늘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뿐, 그래서 종족 회의조차 하지 않을 때가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단지, 이러한 일로 굳이 회의를 모은 건 그만큼 이번에 소니가 벌인 일이 역대급으로 피해를 많이 끼쳤기 때문이다.

"공물이라도 받치길 원하는 건가?"

"그런 거라면 차라리 낫지. 저 여자, 대부분 이럴 때는 히스테리를 부리는 거라고. 무언가 단단히 열 받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저번에 뭔가 일을 꾸미고 있었잖아. 그거랑 관련된 거 아니야?"

결국 소니를 막을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자들은 우선 그녀가 대체 어떤 이유로 이런 짓을 벌이는지에 대한 것부터 검토해 나가기 시작했다.

"충왕, 그때 조사해 본 건 어떻게 됐나?"

그러는 동안 호왕은 충왕에게 저번 일에 대한 정보를 물어왔다.

그러자 충왕은 게슴츠레 눈을 뜨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보내는 족족 우리 애들 상태가 이상해져서 돌아와서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계속 새로운 종족 중 한 명에게 미드르 소니가 구박받는다는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았는지라. 아마 미드르 소니가 무슨 짓을 한 거겠지."

그나마 기대했던 충왕의 정보가 변변치 못하다는 말에 호왕은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자신의 수하들도 몇 명 움직여 조사해 볼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괜히 잘못했다가 소니에게 미움 사게 되면 좋지 않은 일을 겪었을 거다.

"다들 또 쓸데없는 이야기만 하고 있나."

그러던 순간이었다.

회의장에 한 인물이 등장했다.

"나비아."

그를 알아본 자들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바로 나바족의 수장 나비아, 얼마 전 종족 회의에 불참했던 그가 다시금 나타나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미드르 소니에게 당했을 거라 생각한 그가 당당히 종족 회의에 다시 나타날 거라곤 아무도 생각 못 했기 때문이다.

"나비아, 네 녀석 미드르 소니가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알고 있지!"

성질 급한 한 왕 한 명이 나비아가 등장하자마자 그를 쏘아붙이며 캐물으려 했다.

나비아는 그런 그를 보고 한숨을 한 차례 내뱉고는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었다.

"그래, 잘 알고 있다. 오늘 여기 온 건 통보를 하러 온 것이니까."

"통보라고?"

모두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희망 없는 미래를 아는 자는 이곳에 나비아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드르 소니 님의 명이다. 오늘부로 모든 종족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최근 미드르 소니 님이 가호를 하고 있는 트롤."

"잠깐, 기다려라! 나비아 그게 무슨 헛소리냐!"

놀란 왕들이 그의 말에 바락 외쳤으나, 나비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전쟁에 미드르 소니 님은 참가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분이 말씀하신바, '대신 트롤이 종족 전쟁에서 완전히 패하거나 혹은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계속해서 내가 같은 자연재해를 일으킬 것이다. 자신이 키운 트롤을 막아 봐라'가 전언이다."

전할 것을 모두 전했다는 양 나비아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리려 했다.

자기가 이곳에 온 것은 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는 양.

"...대체 이런 짓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거냐."

그런 나비아를 향해 호왕이 입술을 꽉 깨문 채 물음을 던졌다.

나비아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전부 그분의 뜻이다."

그분, 미드르 소니의 뜻이라는 걸까.

하지만 왜인지 호왕은 나비아가 어딘가 그 너머를 가리키고 있는 듯한 감각을 받았다.

대체 나비아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 종족을 대표할 정도로 우직하고 강하던 그가 지금 호왕의 눈에는 한 마리의 겁먹은 토끼처럼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비아...."

"재밌는 이야기를 하고 있네."

그가 나비아를 다시금 부르려고 했을 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왕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몇몇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호왕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금발 머리카락 위에 솟은 뿔 하나가 인상적인 독각귀 한 명이 있었다.

독각귀 조율.

그의 등장에 왕들이 당혹스러워하고 있을 때 조율은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소니, 그 녀석 영문은 모르겠지만 위치를 발견할 수가 없단 말이지. 그런데 이런 재미난 짓을 준비했을 줄이야."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압박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있을 수 있는 건 이곳에서 나비아 밖에 없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드넓은 바다를 보고 난 뒤 흐르는 개울을 보듯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조율은 그런 그에게 이상함을 느꼈다.

'뭐지. 이놈? 뭔가 깨달은 눈치인데.'

자신 앞에서 이런 태도를 취하는 자는 처음이었기에 그는 나비아가 눈치채지도 못할 속도로 앞으로 다가섰다.

"이것 봐라? 네 녀석 소니 말고도 뭔가 있구나?"

나비아에게 얼굴을 들이민 조율이 눈동자를 희번덕이듯 떴다.

그 행동 하나만으로 주위가 제멋대로 일렁거리고, 전 속성의 오러로 인해 스파크가 제멋대로 튀었지만. 나비아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조율 님은 우물 안 개구리를 아십니까."

"하핫, 지금 날 개구리 취급하는 거냐?"

"잘 알고 계시는군요."

농담 삼아 내뱉은 말에 나비아가 진지하게 답해 오자 조율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순간 조율의 손아귀가 순식간에 나비아를 향해 뻗어 왔다.

나비아가 인식조차 못 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의 머리를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릴 대량의 오러가 담긴 조율의 손이 닿기 직전.

서슬 퍼런 감각이 조율의 배꼽을 타고 올라 머리를 강타했다.

반사적으로 나비아에게서 100m가량을 떨어진 조율은 한순간 자신의 목을 조여 온 무언가에 놀라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보이는 것은 방금 자신이 죽이려 했던 나비아와 조율의 행동에 당황한 왕들밖에 없었다.

'방금 건?'

살아가며 한평생 느껴 본 적 없던 오싹한 감각에 조율의 시선이 다시금 나비아를 향했다.

방금 조율에게 자신이 죽을 뻔했단 걸 깨달은 나비아였지만, 그는 곧 자신을 누가 구해줬는지 깨닫곤 미소 지었다.

"조율 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선포는 아침 물향나무숲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향한 것이니까요. 부디 승리를 쟁취해 보기를."

그 말을 끝으로 나비아는 왔을 때와 같은 걸음걸이로 종족 회의를 빠져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막을 생각도 못 하고 모두가 멍하니 보고 있을 때, 조율의 표정이 서서히 찌푸려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독각귀족인 자신이 지금 이런 취급을 받았다는 것에 자존심이 깎여 나갔다.

"하, 하하!"

거친 웃음소리를 토해 낸 조율이 그 즉시 바닥을 박차고 사라졌다.

번개와 한 몸이 된 그의 지금 목적은 방금 나비아가 말한 트롤들을 모조리 말살시켜 버리는 것.

소니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지금 상당히 열이 받은 상태였다.

쏟아지는 폭풍우를 꿰뚫으며 나비아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트롤의 군락으로 향한 그는 전신에서 오러를 끌어 올렸다.

트롤의 군락에 도착하는 순간 그 즉시 녀석들을 모조리 지워 버릴 속셈이었다.

콰앙!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는 거대한 크레이터와 함께 진흙 바닥 속에 처박혔다.

"뭐, 뭐가."

무언가에 머리를 얻어맞은 양 추적추적 내리는 빗물 속에서 조율은 정신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시야가 제멋대로 흐려지고, 갈비뼈가 몇 개는 부서진 듯 호흡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감각에 그가 애써 몸을 추스르며 일어서려 하자 다시금 번개가 내리꽂혔다.

자신의 몸을 타고 흐른 전류 속에서 조율의 눈이 새하얗게 까뒤집어지더니, 이내 그는 그대로 몸을 축 늘어트렸다.

기절한 조율의 위에 터벅터벅 누군가 한 명이 걸어왔다.

"넌 아직 안 돼. 우리 애들 수준에 맞춰서 나중에 와야지."

번개와 한 몸이 되었던 조율조차 인식 못 할 만큼 빠른 속도로 그의 머리를 내려찍었던 것은 다름 아닌 하천성이었다.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십니다.]

아쉽기는 개뿔이, 저런 게 나랑 싸울 수나 있다고 생각한 건가.

태평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기절한 조율을 두고 몸을 돌렸다.

그렇게 다시금 내리는 빗물 속으로 하천성이 사라지고 조율이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의 이야기였다.

142화

일주일 뒤 계속 되는 비바람을 견디지 못한 종족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니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그들이었지만, 자신들로서는 그녀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나비아가 제시했던 대로 그들에게 남은 수단은 트롤과 전쟁을 하는 것밖에 없었다.

결국 각 종족 내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들이 차출하며 본격적인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소니가 관련된 만큼 트롤이라는 종족이 호락호락하지 않으리라고 그들도 확신하고 있었다.

'사실 소니가 아니라 전부 내가 준비한 거지만 말이지.'

비교적 트롤의 군락과 가까운 엘프 마을에 모이기 시작하는 종족들을 보며 나는 나무 위에서 느긋이 그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내가 잡히기라도 할까 봐?"

나를 따라 나무 위에 앉아 있던 나비아의 물음에 시선을 돌려 쳐다보자, 녀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라면 저기에 무기 없이 혼자 뚝 떨어진다 해도 한 손가락으로 전부 해치우고 나올 수 있다.

"그것보다는 본인의 성격을 못 이기시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뭐라고?"

"아닙니다."

내가 들었을까 싶어 얼른 입을 다무는 나비아를 한 차례 쏘아 볼 때쯤, 마침 우리 아래로 지나가는 한 녀석을 발견했다.

"저 녀석이지."

두 발로 선 도마뱀. 검은 비늘 위로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제복 같은 걸 입은 녀석은 바로 시리스 종족이었다.

"예, 시리스족 중 대표 전사 시리스 게르가입니다. 이번 회의에 참가 요청을 받은 것도 확인해 뒀습니다."

"그래? 잘됐네."

그리 말한 나는 곧바로 검을 빼 들었다.

나비아는 자신도 휘말릴까 싶어 급히 다른 나뭇가지로 넘어갔다.

그러는 동안 내 검에 오러가 준비되자 그 즉시 검격을 날렸다.

사식(四式)

뇌도탄룡(雷刀彈龍)

용의 형상을 한 기탄이 쏜살같이 날아들어 게르가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다른 이들이 눈치챌 틈도 없이 쓰러지는 게르가를 확인한 나는 곧장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면서 아이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전의 36층을 클리어하고 받은 보상인 '모방의 광대'

상대의 피를 담아 섞은 모방의 광대를 마시면 하루 동안 그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아이템이다.

자신보다 수준이 높은 상대에게는 반드시 들킨다는 것과 대상이 죽어야만 사용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나에게는 사실상 패널티가 없다고 봐도 무방한 아이템이었다.

게르가의 핏물을 받아 둔 모방의 광대를 마시자, 나는 순식간에 체격이 커지며 죽은 녀석과 똑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게르가의 일생이 담긴 기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방의 광대'의 가장 큰 장점은 모습을 카피할 뿐만 아니라 기억까지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점이다.

참가자들에게 사용할 수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층의 클리어를 하는 데 가장 유용한 아이템 중 하나인 것이다.

'근래에 얻은 것 중에는 가장 유용하네.'

오러 또한 게르가와 엇비슷한 수준으로 변한 것을 확인한 나는 나무 위에 있던 나비아에게 가 보라는 양 손짓했다.

그러자 녀석은 내게 고개를 숙인 후 사라졌고, 나는 곧바로 게르가가 향하려 했던 회의 장소로 이동했다.

"게르가 님!"

그런 순간 게르가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게르가와 같은 시리스족이 한 명 있었고, 녀석은 내게 차렷 자세로 경례를 하였다.

그러니까 이 녀석의 이름이 뭐였더라.

아, 찾았다.

"파폰, 왜 이리 급해. 무슨 일이라도 있냐?"

기억의 파편 속에서 겨우 상대의 정보를 찾아내고는 내 앞에서 숨을 헐떡이는 파폰이라는 이름의 시리스족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러면서 나는 기억 속 평소 게르가가 하는 행동과 말투를 몸에 자연스럽게 배게 하며 서서히 그 녀석과 일치 되어 갔다.

'이놈의 연기력이란.'

이제 슬슬 정말 배우로 데뷔하는 게 좋지 않을까.

[준성좌 '용들의 군주'가 한심하게 바라봅니다.]

['오만의 아틀리에'가 한심하게 바라봅니다.]

['서릿발의 고양이'가 한심하게 바라봅니다.]

['돌원숭이'가 한심하게 바라봅니다.]

이것들이 진짜.

그러는 동안 나는 이매망량 녀석의 메시지가 없는 걸 보곤 고개를 기울이었다.

조율 녀석을 한 방에 패대기쳐 준 이후, 녀석이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자식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가.'

성좌들이 하는 짓이야 늘 나에게 폐 끼치는 일들이었기에 내 감이 자연스레 무슨 일이 생길 것을 짐작했다.

'쓸데없는 짓만 안 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겨우 숨을 돌린 파폰을 바라보았다.

"각하께서 부르십니다."

종족 회의에서는 다들 공통되게 왕이라고 칭하지만, 종족 내에서는 제각각 부르는 게 다르다.

시리스에서는 각하라 칭해지는 호칭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안내를 따라 엘프가 내어 준 건물 하나에 들어서자, 거기에는 여러 시리스 종족이 있었다.

나를 본 시리스족 대부분이 아까 전 파폰과 같이 내게 경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괜히 군대 생각이 나긴 했지만, 나는 자연스레 경례를 받아 주곤 각하의 방 앞에 도착하였다.

"각하, 접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형식상의 말을 늘어놓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에는 시가를 물고 기다랗게 연기를 내뿜는 시리스족의 총대장 시리스 가르시아가 있었다.

과거 종족 전쟁에서 눈 한쪽에 상처를 입어 검은색 안대를 끼고 있는 그에게서 백전노장의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곧 내가 경례 자세를 취하자, 가르시아는 앉으라고 손짓했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도 나를 따라 비치된 소파에 털썩 앉았다.

"엘프 것들은 하나같이 전부 불편하기 그지없군. 나무에다가 천이나 몇 개 올려놓은 게 소파라니. 조금만 힘을 줘도 부서져 버리겠어."

"다 말라서 힘이 없기로 유명한 엘프들이지 않습니까. 자기들 무게만 생각하면 이런 것밖에 놓일 수 없죠."

시리스 종족은 체격 자체가 크며 기본 키가 230cm의 달할 만큼 거구에 근육질들이다.

그렇기에 170cm라는 평균 키에 대부분이 마른 체격인 엘프들이 사용하는 물건들은 시리스족들에게는 하나같이 작고 연약했다.

"하지만 엘프들 앞에서 그런 말 하시면 안 되십니다."

"하핫, 나도 그만큼 어리석진 않아. 네 앞에서야 이리 편하게 말하지 고지식한 그 녀석들 앞에서는 확실히 주의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엘프와 당장 전쟁을 해서는 안 되니까."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 가르시아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시리스 족은 기본적으로 강인한 육체로 싸우는 반면, 엘프들은 자연의 힘을 이용해 싸운다.

옛말에 엘프들과 척을 지면 풀이 있는 곳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엘프들이 다루는 자연의 힘은 강력했다.

실제로 그 자연의 힘 덕택에 엘프들이 살아가는 땅은 그나마 소니가 내뿜는 오러의 영향에서 조금은 피할 수 있었을 정도니까.

'자연의 힘이라.'

엘프의 원천인 성좌 '긴 귀의 여명'은 진명을 가진 상위 성좌 중 한 명.

녀석은 사막이라고 할지라도 그냥 그 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숲을 피워 내는 자연의 힘의 정수를 가졌다는 걸 나는 기억하고 있다.

트롤은 손상될수록 내성이 생기는 겉껍질 덕분에 웬만한 곳이라면 어디든 적응할 수 있다.

그러니 엘프들을 이용해 자연의 힘과 관련된 내성을 미리 키워 놓으면, 혹한의 땅에서도 무리 없이 견딜 수 있으리라.

'엘프는 수장이 하이 엘프 여왕이랬지. 이 녀석도 기회 될 때 잡아가는 게 좋겠네.'

"너를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알겠나?"

잠시 트롤을 강화할 방법만 생각하고 있었을까, 대뜸 물음을 던지는 가르시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둔한 제 머리론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각하의 명이라면 뭐든지 해내겠습니다."

그러고는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자, 그는 입가에 거친 미소를 걸더니 곧바로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나는 이번 전쟁을 시작점으로 종족 내 서열을 확실히 가릴 생각이다."

"미루어 두었던 종족 전쟁을 재개하겠다는 소리십니까?"

이것 참 넝쿨째로 호박이 굴러들어 오고 있네.

"맞다. 나비아 녀석이 말했지. 전쟁을 하자고. 트롤이라는 녀석들이 아무리 미드르 소니의 손에 키워졌다고 한들, 분명 전쟁은 우리가 이길 것이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지. 이 일 덕에 한동안 꺼졌던 전쟁의 불씨가 다시 퍼질 것이다."

"지금도 종족 사이에서 규합은커녕 신경전이 벌어지는 상황이니까요."

"그래, 지금은 공통의 적 탓에 힘을 합치고 있으나, 본디 물과 기름과 같은 녀석들이다. 섞일 수 있을 리가 없지. 이번 전쟁이 끝나는 즉시 여러 곳에서 분란이 일어날 것이다. 한동안은 멀리했기에 알지 못했던 종족 간의 불화가 다시금 시작되겠지. 나는 그걸 노릴 거다. 내 목표는 우리 대에 전 종족을 우리 시리스 발아래 두는 것."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겉으로는 굳은 표정을 지어 주었다.

원대한 야망을 꿈꾸고 있는 가르시아였지만, 아쉽게도 그가 제일 처음부터 실수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이번 전쟁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녀석들에게 승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르시아 님, 그렇다면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냐?"

"곧 있으면 전사의 대표들끼리 자리가 있다는 것은 가르시아 님도 잘 아실 겁니다. 그곳에서 제가 분란을 조성하겠습니다. 마치 트롤 녀석들을 먼저 공격해서 쓰러트리면 이후 종족의 명성을 얻을 수 있도록 말이죠."

"먼저 공격해서 쓰러트려 명성을 얻는 건 득이다만."

"명성, 당연히 중요한 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입니다. 무려 그 미드르 소니가 준비한 녀석들입니다. 나바족이 당한 것만 봐도 녀석들이 약하지만은 않겠죠. 그러니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앞다투어 트롤들을 공격한 종족들은 그때 반드시 전력이 많이 깎여 나갈 겁니다. 애써 얻었을 그 명성을 지키지조차 못할 만큼 엉망진창으로 말이죠."

"오호라. 그에 반해 전력을 최대한 아끼고 있던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뒤를 치자, 이 소리냐."

"예, 맞습니다."

그럴싸한 계획을 듣고 가르시아는 흥미로운 눈초리를 취했다.

조금만 머리가 좋은 녀석이라도 이 이야기의 허점을 눈치챘을 테지만, 타 종족에 비해 전투적이긴 하나 상대적으로 지능이 낮은 시리스족은 그런 걸 알아챌 수 없었다.

"좋다. 내 허락하지. 게르가, 한 번 해 보아라."

"예, 각하."

내 말에 완전히 넘어온 가르시아가 명령까지 내리자, 나는 그의 명을 받들곤 밖으로 나왔다.

그러면서 그대로 쭉 걸어 나온 나는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숨겼다.

'어디 보자 다른 종족의 대표인 녀석들은.'

나는 나비아 녀석이 준 정보와 게르가의 기억을 토대로 대표들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녀석들의 이름을 대강 나뭇가지로 땅에다가 써 두며 한 명씩 성향을 체크했다.

'이 녀석은 안 되겠고, 이 녀석도 안 되고. 아, 얘는 되겠네.'

성향을 파악해 둔 나는 발로 땅에 적힌 이름을 지워 두곤 기척을 숨긴 채로 건물 하나를 찾았다.

내가 종족들이 모인 이곳에 온 이유는 트롤 녀석들을 위해 밸런스를 조절시키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내가 열심히 키워 놓은 트롤들이라도 이제 막 마스터급에 들어선 보리를 제외하곤 전 종족을 적으로 두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최대한 종족들끼리 파가 나뉘게 한 뒤 녀석들이 앞다투어 트롤들을 공격하게 하는 양상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그렇다면 패가 필요하다.

종족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고 너도나도 미드르 소니가 준비한 트롤들을 쓰러트리고 영웅이 되어야 한다는 갈망을 시킬 패가.

143화

그러니 엘프가 타 종족을 준비한 건물 중 하나에 나는 우두커니 들어섰다.

악마의 가까운 형태를 가진 그들은 그랑이라는 종족이었다.

몽마와 서큐버스와 같은 악마계 종족들을 하위에 거느리고 있는 그들은 어둠의 사는 자들이라는 이명이 붙어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어둠에 살던 어디에 살던 내 기척조차 알아채지 못한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것은 그랑의 최고위 마법사 그랑 이플람이었다.

"이플람."

"우와씨, 깜짝이야?!"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기절할 듯 소리친 이플람이 기다란 흑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던 그녀는 내 모습을 보고는 눈살을 확 찌푸렸다.

"게르가, 이 저능아 자식이 어디라고 여길 기어들어 와. 이 주위엔 내 마법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 들어왔어?"

나를 몰아세우듯 소리치던 이플람이었지만, 그녀는 곧 내게서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 시작했다.

내 몸에서 은근하게 흘러나오던 오러가 주변을 잠식하며 공간을 먹어 치워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잠깐만 너 누구야? 게르가가 아니지?"

"눈치채 줘서 고맙군. 기억대로 멍청한 녀석은 아닌 거 같으니 말이야."

내가 이플람에게 한 발짝 다가선 순간 그녀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곧장 내게서 도망칠 방법을 궁리하고자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순간에 덮친 내 오러가 그녀의 목을 조여 버렸다.

이플람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곤 부들부들 몸을 떨기 시작했다.

"뭐, 뭐야. 대체 무슨 괴물이."

"너 미드르 소니가 사용하는 오러 마법에 꽤 관심 있지."

나는 방금까지 이플람이 앉아 있던 의자를 빙글 돌려 앉았다.

그러곤 내 앞에 무릎 꿇고 있는 그녀에게 묻자 대답 대신 어깨가 움찔하며 반응하였다.

실제로 지금 그녀가 들여다보고 있던 것 또한 소니와 관련된 자료들이었다.

나는 그 종이를 손으로 들어 올렸다.

"오러 마법, 내가 직접 미드르 소니한테 배우게 해 줄 수 있는데."

"다, 당신이?"

"그래, 네가 이 전쟁에 참가한 건 미드르 소니의 오러 마법이 탐나서잖아?"

내 말을 듣고 이플람은 침을 꿀꺽 삼켰다.

게르가의 기억 속에서도, 나비아의 들은 바로도 그녀는 마법에 미쳐 있었다.

지금 이 대화를 통해 내가 소니와 관련된 인물인 것은 어림짐작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정말로 소니에게 오러 마법을 배우게 해달라고 할 수 있는 자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만한 힘을 지녔다는 것은 눈치챘을 거다.

"저한테 무슨 부탁이라도 하시려고...."

어느새 이플람은 웃어른 대하듯 내게 공손히 말했다.

자기 능력으로는 날 어떻게 할 수 없단 걸 깨달은 시점에서 현명한 태도였다.

"종족 사이에서 분란을 일으켜라. 마치 트롤을 공격하려던 건 미끼고, 진짜는 뒤에서 종족 전쟁을 조성하려는 종족 통합을 노리는 양."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책임은 내가 져 주지.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네 목숨을 구해주고, 앞서 말한 대로 오러 마법을 배울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이 정도면 너한테는 최고의 제안이지 않나?"

마법을 위해서라면 제 종족도 파는 것이 그랑 이플람.

그녀가 과거에 새로운 마법을 배우겠다고 동족을 이용했다가 100년간 그랑에서 추방당했던 것은 이 세계에서 유명한 일화였다.

지금은 그랑의 왕과 모종의 거래를 하여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싫으면 하지 마. 물론 내 이야기가 퍼지지 않도록 입막음은 해 둘 속셈이지만. 당연히 오러 마법도 물 건너가겠지."

그렇기에 그녀는 내 말을 듣자 이마를 바닥에 바짝 붙였다.

"네, 네! 명 받들겠습니다! 이 그랑 이플람, 당신의 명을 평생 받들겠습니다!"

"좋아."

쉽게 대답하는 이플람을 보던 나는 녀석의 책상 위에 때마침 괜찮은 걸 하나 발견했다.

"오러 계약서네."

이플람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오러 계약서.

오러를 담을 수 있게 만들어진 종이로, 서로의 오러로 작성한 뒤 계약을 위반하게 되면 계약서에 깃든 오러가 합쳐져 저승사자가 되어 나타나 계약자를 죽이는 악랄한 것이었다.

계약자의 오러가 서로서로 합쳐지는 만큼 당연히 계약을 한 자의 오러보다 강력한 저승사자를 이길 수 없기에, 서명을 하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계약서였다.

이플람 녀석이 어디에 쓰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잘됐다.

나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이플람에게 오러 계약서를 건넸다.

"잘만 이행하면 돼. 잘."

"네, 네."

내 오러가 자신의 발끝을 타고 기어오르자 이플람은 서둘러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그러자 그녀의 오러가 일부분 타고 흘러 계약서의 각인되었다.

나 또한 서명을 마친 뒤, 아이템 창에 던져 두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잘해라."

그리고 나는 처음 나타났던 때와 같이 기척을 드러내지 않고 빠져나온 다음, 곧바로 다음 타깃으로 움직였다.

롤리앙족, 산양의 머리에 난 것과 같은 뿔과 발굽이 특징인 종족이다.

그리고 그들의 종족 중 가장 강한 전사는 롤리앙 에틀리아.

얼마 전 소니로 인한 자연재해에 딸을 잃은 자이며, 누구보다도 그 여자를 증오하고 있는 자다.

엘프의 마을과 별로 떨어지지 않은 숲속, 그 장소에 홀로 앉은 에틀리아는 가만히 명상에 잠겨 있었다.

주위에는 그의 명상을 방해하지 않게 하고자 같은 롤리앙족들이 숲을 지키고 있었으나, 그들의 수준으로는 내 기척을 눈치챌 수 없었다.

"에틀리아."

빗물에 젖은 풀을 밟고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감겼던 에틀리아의 눈이 떠지며 내게로 향했다.

"게르가, 무슨 볼일이지."

"이야기할 것이 있어서 왔다."

"네가 나한테 이야기할 게 있으리라곤 생각 들지 않는데."

"미드르 소니와 관련된 이야기다."

그 순간 에틀리아의 전신이 꿈틀거렸다.

자연재해로 딸을 잃은 그에게 있어서 이 말은 일종에 기폭장치였고, 곧 에틀리아의 두 눈에 맹렬한 분노가 깃들기 시작했다.

"...자세히 말해 봐라."

"미드르 소니가 이번에 왜 이런 일을 했는가에 대한 정보를 알아냈다. 지금 모인 열셋 종족 중 한 종족이 미드르 소니와 동맹을 했다는 소식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에틀리아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이렇게 몰래 널 만나러 온 것만 봐도 충분하지 않나."

"너와 나는 종족 전쟁에서 몇 번이고 맞부딪친 적군 관계다. 이런 걸 굳이 나한테 알려 줄 이유가 없을 텐데."

에틀리아와 게르가는 종족 전쟁에서 늘 적으로 마주했다.

서로가 선봉장을 서는 만큼 가장 부딪칠 일도 많았던 두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에 이 둘의 사이는 적을 넘어 알게 모르게 형성된 관계가 있었다.

각 종족 내에서 가장 강한 두 사람의 실력은 엇비슷했기에 언제나 승부를 내지 못한 라이벌인 만큼 알게 모르게 정이 든 것이다.

"딸 때문에 풀 죽은 모습이 꼴 보기 싫어서 그런다."

게르가의 말투를 흉내 내며 내가 퉁명스레 말하자, 에틀리아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그런 꼴로 있지 마라. 널 끝장내는 건 나지. 다른 녀석이 아니야. 그러니 내 말을 믿든 안 믿든 그건 네 자유다. 괜히 미드르 소니한테 농락당해 죽지 마라."

그러면서 모든 정보를 알려 주진 않는다.

자기 스스로 고민하고 찾도록 유도해 종족 내에 갈등을 형성하는 것이다.

분노에 잠 된 상황 속에서 동맹 중 배신자가 있다는 말은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그의 정신을 더욱 내몰겠지.

게르가와의 관계를 이용해 에틀리아를 흔들어 놓은 나는 몸을 돌려 장소를 빠져나갔다.

이걸로 어설프게 규합한 종족 연합군을 흔들어 놓을 준비는 끝마쳤다.

'남은 건 회의를 얼마나 뒤흔들어 놓는 가다.'

트롤을 쓰러트리고자 했던 동맹을 박살 내 놓고 뿔뿔이 흩어지게 만드는 것이 관건.

'이거 참. 성좌도 아니고 내가 난이도 조절이나 하고 있는 꼴이라니, 나 원.'

어깨를 으쓱거린 나는 적당히 주변을 돌아다니며 필요할 것 같은 정보들을 모아 놓았다.

그러는 동안 어느덧 시간이 흘러 종족 회의의 개의 시간이 다가왔고, 이윽고 각 종족에서 내로라하는 최강의 전사들이 한자리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랜드에서 마스터급을 왔다 갔다 하는 정도인가.'

트롤 녀석들 상대로는 딱 적당하다고 생각하던 찰나, 회의가 본격적인 부분으로 나아갔다.

"그렇담 지휘권 쪽 이야기를 해 보지."

회의가 무르익을 무렵 가장 중요한 지휘권 이야기가 나왔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면 미드르 소니를 물러나게 했다는 역대 최고의 명성을 쥘 수 있기 때문일까, 모두의 눈빛이 변하였다.

"당연히 우리가 맡아야지."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회의 내내 시종일관 팔짱을 끼고 있던 호족이었다.

오러까지 풍기며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는 그의 태도에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니, 헛소리 마라. 내가 한다."

"이것들이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지휘를 왜 너희들이 맡아?"

그간 몇천 년간 수많은 종족 전쟁을 겪은 탓에 서로의 신뢰도가 낮기 때문일까, 지휘권 문제는 일종에 폭탄과도 같은 주제였다.

지휘권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불이 붙은 듯 전원이 강자의 오러를 풍기기 시작하자, 회의는 삽시간에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콰앙!

그러던 순간 그랑 이플람이 자신의 발로 탁자를 콰앙 내려쳤다.

흑색 머리카락 위로 솟은 두 개의 붉은 뿔이 인상적인 그녀는 나에게 보였던 겁먹은 표정과 달리 표독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가득하게 그렸다.

"하핫, 저능아들. 그렇담 한 번 싸워서 서로 결정하지 그래? 이기는 쪽 말 무조건 듣기로."

그녀에게서 풍겨 나오는 새까만 오러가 제멋대로 일렁거리자, 이플람에게 당해내지 못하는 자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저래 보여도 수명이 긴 편인 그랑 중에서도 가장 오래 산 자 중 한 명인 그녀의 명성은 유명했다.

실제로 여기서 그녀와 1:1로 붙는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자들이 몇 명 없을 정도니까.

내가 힐끔 그녀를 보자, 이플람은 자기가 잘했냐는 양 악마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나는 에틀리아를 바라보았다.

종족 사이에 분쟁이 심화하기 시작하자 아까 들었던 내 말을 떠올린 듯 녀석은 눈을 열심히 굴리며 침묵하고 있었다.

동맹 중 배신자가 누군지 알아내기 위해 필사적인 듯하였다.

그렇기에 나는 녀석을 위해 총대를 매 주었다.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다는 소리가 있다."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그 말 그대로다. 이 중에 미드르 소니와 손을 잡은 녀석이 있다. 만약 그 녀석이 지휘권을 쥐게 된다면 우리는 미드르 소니 손에 전부 죽겠지."

애초에 미드르 소니가 왜 이런 짓을 한 건지조차 여태 안 밝혀진 상황.

아직도 그녀의 의도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배신자가 있다는 말은 서로의 마음속에 의심을 쌓기 시작했다.

만약 정말로 미드르 소니가 종족들을 몰살시키기 위해 이런 짓을 벌이는 거라면?

미묘해진 상황 속에서 나는 탁자를 쾅 내려쳤다.

"미드르 소니 손에 언제까지 놀아날 수는 없다. 이 자리에서 배신자를 밝혀내야 해. 그러지 못할 거라면 우리는 이번 종족 전쟁에서 따로 움직이겠다."

144화

"따로 움직여서 어쩌자는 거냐. 너희 종족만으로 미드르 소니를 이길 수 있을 거 같으냐?"

호족 녀석이 타이밍 좋게 핀잔을 주자, 나는 녀석을 쏘아보며 대답했다.

"적어도 배신당해 전부 몰살당하는 건 막을 수 있겠지. 나는 우리 시리스가 그런 꼴로 죽는 건 두고 볼 수 없다."

호족과 내가 으르렁거리며 기 싸움을 하고 있자, 대표들이 각자 서로의 생각을 내뱉으며 이야기가 혼란스러워져 가기 시작했다.

미드르 소니를 막기는커녕 종족 간의 갈등이 더 심화할 상황 속에서 나는 묵묵히 팔짱을 끼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여튼 저능아들 이야기 안 통하는 건 똑같지. 됐어. 난 일어날래. 그랑도 빠지겠어."

소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이플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예 빠지겠다고 선언하자 몇 명이 그녀를 말리는 기색을 보였지만, 이플람의 의지는 변함없었다.

"네년이냐."

그 순간 가만히 상황을 보고 있던 에틀리아가 대뜸 입을 열었다.

딸을 잃은 그의 눈에는 배신자를 향한 증오심을 가득 품고 있었는데. 그는 이미 마음속에서 이플람을 그렇게 낙인찍은 듯하였다.

"무슨 헛소리야?"

그에 지지 않고 이플람 또한 자신을 배신자 취급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듯 에틀리아를 쏘아보았다.

"내가 왜 배신해?"

"이플람, 네가 미드르 소니의 오러 마법을 원해서 이 전쟁에 참가한 것은 여기 모두가 알고 있다. 서로 반목할 만한 이야기를 꺼내 소란을 일으킨 것도 그렇고. 혹시 미드르 소니가 오러 마법을 가르쳐 주는 대가로 네 녀석을 꼬드긴 거 아니냐?"

꽤 눈치 빠르게 에틀리아가 이플람을 쏘아붙였다.

그러나 이플람도 이런 추궁에 눌릴 만큼 약하지 않았다.

"에틀리아, 함부로 말하지 마. 소니의 오러 마법이 탐나는 건 사실이지만, 배신자 낙인까지 받을 생각은 없어. 미드르 소니가 한 짓은 이번에 도를 넘었으니까."

그리고 이플람은 에틀리아에게 한껏 비웃음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고작해야 딸 하나 잃은 거로 나한테 분풀이하는 짓은 그만두지? 여기서 너만 잃은 게 있는 줄 아나 본데. 너야말로 배신자 아니야? 혹시 알아? 미드르 소니가 몰래 접근해 딸을 부활시켜 주겠다고 말했을지."

"너!"

에틀리아가 발끈하여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변 이들이 그를 말렸다.

지금 여기서 이대로 이플람이 빠져 버린다면 전력에 큰 손실이 오기 때문이었다.

"진정해. 에틀리아, 개인적인 감정은 일단 넣어 두자고."

"이플람이 지금 당장 빠져선 안 돼. 적어도 미드르 소니의 마법을 막을 수 있는 건 그녀밖에 없잖나. 트롤이라는 녀석들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된 조사도 못 했고. 아직 그녀의 힘이 필요해. 자네가 진정하게나."

그러나 그들의 이플람을 싸고도는 행동 탓에 에틀리아는 더더욱 분노했다.

아무래도 에틀리아는 이플람을 배신자로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배신자로 쑥덕거리는 것도 이쯤 하지. 그랑 게르가, 애초에 그 정보는 어디서 얻은 거지?"

그리고 드디어 처음 배신자라는 말을 내뱉은 나에게 화살이 돌아왔다.

이 말을 내뱉은 자는 엘프의 최고 전사였고, 그녀는 줄곧 배신자라는 말을 내뱉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나마 이 중에서 눈치 빠르고 머리가 좋은 녀석인 거겠지.

"나바족에게서 얻었다."

"나바족?"

그러나 이미 그에 대한 준비는 되어 있었다.

나바족에게 들었다는 내 말에 장내가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다들 어딘가 짐작 가는 데가 있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사전에 나바족이 미드르 소니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정보를 은근하게 퍼트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번 사건이 터진 후, 종족들은 다들 자기 나름대로 정보를 얻고자 트롤과 나바족 진영에 정보를 캐낼 수단을 심어 놓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나는 나비아에게 시켜 사전에 나바족들에게 연기를 지시했고, 그 조작된 정보는 고스란히 이들에게 들어갔을 것이다.

미드르 소니는 폭군.

미드르 소니의 아래에 있는 나바족이라고 할지라도 그녀에게 당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렇기에 이번 일도 결국 나바족은 미드르 소니의 힘 탓에 어쩔 수 없이 따르는 포지션이 된 것이다.

그런 생각이 자리 잡았을 이때, 나바족을 통해 정보를 얻었다는 말을 한다.

모두의 머릿속에 나바족이 억지로 그녀를 따르는 것처럼 되어 있는 만큼, 나바족 쪽에서 미드르 소니에게 해방되고자 정보를 알리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나바족이 미드르 소니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은 다들 알 거다. 그쪽에서 준 정보이니 확실하겠지."

"확신하기에는 이르지 않나? 녀석들이 미드르 소니의 명령으로 일부러 가짜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도 있다."

"네 말대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누가 미드르 소니와 손을 잡던 이상할 게 없다는 게 문제다. 만약에 자기 종족만이라도 살아남기 위해 그런 짓을 벌이지 않았을 거란 가능성을 넌 부정할 수 있나?"

그리 말하고 엘프를 쏘아보자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애초에 지난 몇천 년을 다투어 온 종족 사이에 불신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 내가 한 일은 그 뿌리를 이용해 꽃을 피운 것뿐.

피운 꽃에서 흘러나오는 배신의 향기는 모두의 마음속에 진하게 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시금 말하지만 나는 배신자가 있는 이곳과 협력할 마음이 없다. 시리스는 이번 연합에 빠져 개인으로 움직일 테니 그리 알아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

원래부터 고집스러운 성격이 있는 게르가였기 때문일까, 다들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 행동을 말리지 못했다.

오히려 내 확고한 태도가 더더욱 그들 사이에 배신자가 있음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내가 자리를 뜨자 이윽고 몇몇 다른 이들도 동조하듯 연합은 좀 더 고려해 보자며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대로 연합이 박살 나면 대체 누가 미드르 소니를 막을 거냐며 소리치는 엘프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 왔지만, 이미 충분한 균열이 생긴 마당이었다.

'자, 남은 건.'

게르가가 머물던 방으로 돌아온 나는 방 한구석에 게르가의 시체를 두었다.

그러곤 마지막 혈서로 엘프 녀석의 이름을 적어두곤 손을 탁탁 털었다.

'끝.'

처음 배신자의 존재를 알렸던 게르가가 이렇게 죽어 버리면 자기들끼리 의심암귀를 펼치면서 난리를 치겠지.

그 분란은 이플람 녀석이 책임지고 잘 유도해 줄 것이다.

게다가 시리스 종족의 그 각하 놈도 게르가가 죽었다는 사실에 분개해서 연합에서 나와 주리라.

조작을 끝마친 나는 그 뒤 아무도 모르게 엘프 마을을 빠져나왔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나비아 녀석이 나타났다.

"나바족 녀석들한테 다른 종족들에게 배신자 건에 대한 제보를 계속하도록 유도해. 나바족은 미드르 소니를 이미 배신하기로 맘먹고 정보를 전한다는 식으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비아의 대답을 듣고 종족 회의를 완전히 가지고 놀았던 나는 한줄기 미소를 짓고는 그 장소를 떠났다.

* * *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드르 소니와의 전쟁이 아니었다.

처음 그녀와의 전쟁을 대비했었던 종족 연합은 배신자를 알렸던 시리스 게르가의 죽음 이후 내부 균열이 급격하게 심화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어느샌가 서로에게 검을 겨누고 다투며 내분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묵혀 두던 원한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며 아침 물향나무숲은 순식간에 전쟁으로 뒤덮여 갔다.

"왜 이렇게 된 거냐?"

몇 달째 여기저기서 종족 전쟁이 터져 나오는 상황에서 몇십 년간의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자가 있었다.

검은색 털이 인상적인 늑대와 같은 외형을 가지는 그는 로드비 펜시스라는 이름으로 과거 아침 물향나무숲의 종족 연합을 추진했던 자였다.

숲의 현자라 불리던 그는 종족들이 다툼 없이 더불어 살아가기를 바랐고, 그 방법을 찾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났다가 막 돌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대혼란이었다.

자신이 떠나던 때만 하더라도 나름대로 잘 규합하여 살던 아침 물향나무숲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깊은 안타까움을 느끼며 펜시스는 전쟁의 시발점을 찾고자 조사를 시작했다.

"펜시스 님!"

그가 제일 먼저 찾은 것은 비교적 수명이 길어 자신을 기억할 엘프 종족이었다.

전쟁이 심화되었기 때문일까, 자연의 힘을 이용해 몇 겹의 나무 목책을 쌓아 놓은 그들은 펜시스를 반갑게 맞이 해주었다.

"아리엘."

"오랜만이군요. 펜시스님."

엘프의 여왕인 아리엘이 펜시스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전에 기억과 달리 상당히 수척해진 아리엘의 모습의 펜시스는 안타까운 웃음을 짓곤 그녀에게 그간의 사정을 들었다.

"그런 일이."

전부 미드르 소니가 벌인 일이라는 말에 펜시스는 탄식했다.

본래도 사고를 자주 치던 소니이긴 했지만, 이 정도 일을 벌일 여자는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러는 걸까.

"트롤이라는 종족들도 문제입니다. 호족과 그랑, 시리스, 심지어 에고웨폰까지 벌써 수많은 종족이 트롤에게 넘어갔죠. 미드르 소니가 매일같이 일으키는 자연재해도 문제지만, 그들의 강세가 보통이 아닙니다. 저희 목책도 그들에 의해 벌써 몇 번이나 부서졌고요."

"트롤이라 분명 내가 아침 물향나무숲을 떠나기 전까지 없었던 종족으로 기억하는데, 이번에 새로 나타난 종족인가?"

트롤의 대해 들어 본 적이 없던 펜시스는 의문을 가졌다.

고작해야 몇십 년 사이에 새롭게 나타난 종족이 아무리 미드르 소니의 가호를 받고 있다 한들 몇천 년의 역사를 가진 기존의 종족들을 이 정도로 손쉽게 장악할 수 있단 말인가.

"예, 그것도 성장 속도가 너무 빠른 종족입니다. 그들의 껍질은 아다만타이트 수준이고, 전원이 오러 사용자에 지능도 급격히 좋아지고 있죠. 솔직히 두려울 지경입니다. 게다가 드워프 종족은 그들이 제공하는 아다만타이트 껍질에 혹해 매일같이 무기까지 만들어 주고 있으니 더 미칠 노릇이죠."

아리엘의 말을 듣고 펜시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그런 종족이 존재한다니.

아리엘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침 물향나무숲에서 트롤을 상대할 수 있는 종족은 어디에도 없었다.

"뭔가가 그들을 강하게 만들고 있군."

이 정도로 빠른 속도의 성장은 무언가 이상하다.

펜시스는 분명 미드르 소니뿐만 아니라 다른 엄청난 것이 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네, 게다가 몇 번이나 교섭을 시도해 봤지만 묵묵부답입니다. 이 이상 위험해지면 저희도 그냥 아침 물향나무숲을 떠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는 지경이죠."

아리엘은 이제는 지쳤다는 양 기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그 말대로 엘프족들 상당수가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양 짐을 싸고 있었다.

몇천 년간 살아온 땅을 버리고 떠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다른 최상위 종족은 뭘 하고 있지? 아무리 미드르 소니라고 해도 이 정도 난리를 피우면 누군가가 막으려 할 텐데. 아, 그러고 보니 조율은 무얼 하나?"

"최상위 종은 잘 모르겠습니다. 원래도 이런 데 관심 없기도 하고. 그리고 조율 님도 몇 달 전 종족 회의 때 잠시 모습을 드러낸 이후 사라져 버렸는지라. 사실상 저희 힘 말고는 기댈 때가 없죠."

"알겠다. 고생했어. 내가 한 번 트롤에게 가 보지. 그들의 수장이랑 미드르 소니와 타협을 해 보겠네."

"감사합니다. 펜시스 님."

아리엘이 상황을 전부 설명 해주었던 것도 펜시스가 일을 조금이라도 해결 해주기를 바랐기에 한 것이다.

아리엘에게 펜시스가 사실상 마지막 보루였던 것이다.

만약 그마저 실패한다면 결국 아침 물향나무숲을 떠날 생각인 그녀는 트롤이 사는 곳으로 떠나가는 펜시스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145화

부디 숲의 현자인 그가 악랄한 미드르 소니와 트롤을 막아 내주기를.

엘프족과 헤어진 뒤 펜시스는 곧바로 트롤을 찾았다.

그들의 악랄함은 엘프족에게 들었지만, 펜시스는 우선 최대한 중립적으로 생각하기로 하였다.

혹여나 트롤들이 이런 일을 해야만 할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해결하여 종족 간의 갈등을 풀어 주자고 생각한 그는 트롤을 찾았다.

그러나 그곳에 광경은 펜시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제일 처음 펜시스가 본 것은 트롤들이 서로가 상대의 피부를 오러가 깃든 칼로 베어 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기이한 행동은 숲의 현자인 펜시스가 보기에도 비정상적인 것이었지만, 트롤들에게는 마치 일상과도 같은 행위인 듯했다.

'아니, 그들의 껍질은 아다만타이트 수준이라고 하였다. 저런 특이한 방식이 그들을 강하게 만드는 것일 거야.'

순식간에 트롤의 습성을 눈치챈 펜시스는 자리를 잡고 그들을 관찰했다.

우선 교섭을 하기 전에 최소한의 정보를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 안 가 펜시스는 트롤을 보던 중 알아낸 또 다른 사실에 놀랐다.

트롤이 현재 수하에 둔 종족은 나바족, 시리스족, 그랑족, 호족, 에고웨폰족 등이며 하위 종족까지 포함하면 무수히 많은 종을 거느리고 있었다.

몇천 년간 어우러지지 못했던 종족이 한자리에 모이면 생길 일은 뻔하다.

알게 모르게 마찰과 다툼이 계속해서 생겨날 수밖에.

하지만 그런 생각과 달리 지금 그들에게서 이렇다 할 다툼이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가 왜인지는 펜시스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종족의 사이에서 트롤은 일종에 완충재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몇천 년간 서로의 불신이 쌓여 이해 관계를 형성하기 힘든 종족들에 반해, 무리를 이룬 지 얼마 안 된 트롤은 타 종족을 선입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결과 트롤은 다른 종족과도 별다른 편견 없이 친해졌고, 그것은 곧 그들이 중재자의 역할을 하기에 매우 적합한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

1살짜리 어린 아이가 편견 없이 세상을 받아들이듯, 그들 또한 같은 것이다.

시리스족의 단순하지만 우직함을.

그랑족의 까칠하지만 확실함을.

호족의 거칠지만 다정함을.

나바족의 복잡하지만 섬세함을.

트롤은 이 모든 것을 수용하고 있었다.

'모르기에 받아들일 수 있다니.'

트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두려움이 없었다.

그들은 자유로웠고 강인한 종족이었다.

각 종족들의 머릿속에 깃든 정복과 굴복이라는 편견을 깨고, 그들은 다른 종족들과 어우러져 상대의 문화를 배우고 성장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펜시스는 사상이 뒤흔들릴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꿈꾸던 종족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배우고 터득하며 쌓아 온 그간의 역사가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 진입 장벽이 되었다는 사실에 펜시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동안 내가 배우고자 했던 것은.'

누군가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중립을 유지하겠다며 나섰던 자신은 알고 보니 틀에 박힌 사상에 갇혀 있던 것이다.

'이들의 지도자는 누굴까.'

몇 달 전에야 발견된 새로운 종족인 트롤.

세월의 때가 조금도 묻지 않은 이들이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지도자의 덕이 가장 클 것이다.

'소니는 아닐 거다. 소니는 강하긴 해도 이런 걸 할 수 있는 위인은 아니야.'

벌써 소니를 본 지 몇십 년도 더 되었지만, 수명이 긴 종족일수록 변화가 적다는 것을 펜시스는 잘 알고 있다.

긴 수명은 세월에 무감각하게 만드니까.

그렇기에 펜시스는 소니보다 뛰어난 지도자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만나고 싶다.

이들의 지도자를 펜시스는 만나고 싶었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펜시스의 눈에 한 트롤이 비친 것이.

여타 다른 트롤과 그다지 다를 것 없는 외형에 까칠해 보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그러나 그 눈 안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세계를 마주하며 지켜 온 듯한 오묘한 감각이 펜시스의 뇌리를 스쳤다.

그에게는 세계를 반짝이는 별들이 깃들어져 있었다.

마치 별의 선택을 받은 듯한 그는 주변 이들을 거칠게 대했지만, 그럼에도 상대는 누구보다 믿음을 보이고 있었다.

저자다.

저자가 트롤들, 아니, 이 다섯 종족의 지도자임을 그는 확신했다.

그 순간 그의 시선이 이쪽으로 뻗어져 왔다.

자신의 존재를 눈치챈 듯한 그를 보고, 펜시스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로 하였다.

저자와 대화해 보고 싶어졌다.

어쩌면 지금까지 뿌리 깊었던 종족들의 갈등을 그가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저 다섯 종족이 왜 이토록 어울려 지낼 수 있는가.

그건 그의 생각대로 트롤이 완충재 역할이 되어 준 덕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공통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외친다.

타도 하천성.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하듯이, 그들은 공통의 적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이제는 그들은 안다.

진짜 적은 미드르 소니가 아니라 바로 하천성이라는 것을.

매일같이 하천성을 쓰러트리고자 작당 모의를 하고 있었지만, 오늘 그들을 본 펜시스는 알 길이 없었다.

* * *

'늑대?'

오늘도 어김없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트롤 녀석들을 살피던 도중 느껴진 기척에 내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서 웬 늑대 인간 한 명이 걸어 나왔다.

내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기울이니, 나비아 녀석이 깜짝 놀라 내 귀에 늑대 인간의 정체를 속삭였다.

"하천성 님, 저자가 로드비 펜시스입니다."

"로드비라고?"

로드비, 분명히 들어 본 적 있는데.

"아침 물향나무숲의 현자라고 불리던 자입니다. 수십 년 전, 모든 종족 간에 평화를 위한 방법을 찾고자 숲을 떠났었는데 돌아온 모양입니다. 저래 보여도 미드르 소니만큼이나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옆에서 나비아 녀석이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지만, 나는 귀담아듣지 않고 있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로드비라는 종족을 어디서 들어 봤냐는 것이다.

'이 층에 여러 종족 녀석들이 많아서 그런가. 어디선가 들어 본 종족들이 상당히 많단 말이야. 특히 성좌 놈들과 관련된 녀석들이.'

소니의 경우에는 바로 떠올랐지만, 펜시스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세상을 몸으로 두르는 뱀'이 혀를 내밉니다.]

펜시스를 보고 있자 요르문간드 녀석이 반응했다.

* * *

얼마 전 기어코 소니 녀석을 이용해 요르문간드 상이 있는 곳을 알아낸 나는 소니 녀석을 끌고 곧장 미드르 족이 사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아침 물향나무숲 밖에서 좀 떨어진 바닷속이었다.

"정말로 들어갈 생각이니? 난 온순하지만, 우리 가족들은 달라.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너도 온순하지는 않다만.

아직도 본인이 다른 종족들에게 어떻게 불리고 있는지 모르는 건가.

한심하게 소니 녀석을 바라보던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양 바다 위 절벽에서 준비 운동을 하였다.

"나랑 몇 달을 지냈으면 슬슬 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좀 알지 그러냐."

"모르는 건 아닌데."

소니가 툴툴거리는 동안 준비 운동을 마친 나는 아이템 창을 뒤적거렸다.

'어디 보자 물속에 들어갈 수 있는 아이템이.'

이런 때를 위해 아이템을 모아 둔 거다.

아이템 창을 뒤적거려 미리 구해 둔 수중에서도 숨을 쉴 수 있는 마법이 걸린 반지를 꺼내 곧바로 손가락에 끼웠다.

그러자 내 몸 주위로 투명한 막이 생겨났고, 나는 그 위에 오러를 둘렀다.

"간다."

"잠깐만!"

내가 그 즉시 바닷속으로 뛰어내리려 하자 소니가 뒷덜미를 잡아 세웠다.

무슨 짓이냐고 그녀를 노려보자, 소니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턱대고 가서 어쩌자는 거니. 무슨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그냥 요르문간드 상을 내놓으라고 할 건데."

이런 일로 뭔 계획까지 세운담.

내가 귀찮아하며 소니를 보고 있자 그녀는 나를 꽉 붙잡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신상을 줄 리가 없잖니. 신상은 우리 미드르가 매우 신성시하는 거란 말이야."

"그래서 어쩌자고."

당연히 알고 있는 것이었기에 어차피 힘으로 해결할 속셈이었다.

그렇기에 굳이 방법을 고민하는 소니를 못마땅하게 보고 있자, 그녀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나를 돌아보았다.

"하나 있어."

"뭔데."

"네가 우리 일족으로 들어오면 돼."

기막힌 해결책이라는 양 소니가 말해왔다.

"우리 종족은 처음 태어나거나 종족에 들어올 때 신상에 기도를 올려. 그걸로 신께 인정받고 비로소 미드로 족의 일족이 돼. 그러니 하천성 네가 우리 일족에 들어오면 자연스레 신상으로 안내받을 거야."

"쉽게 말하는 걸 보면 일족에 들어가는 방법도 알고 말하는 거겠지."

"간단해. 우리 일족 중 누군가와 결혼 하여 아이를 만들면 되니까."

그것참 간단한 방법이었다.

나는 한심한 눈으로 소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내 아이는 누가 만들어 주는데. 네가 만들어 주기라도 하냐?"

"응? 아, 몰랐구나. 우리 종족은 포유류처럼 출산을 안 해. 미드르 여성이 낳은 알에 오러만 제공해 주면 돼."

연지 때랑 비슷한 건가.

미드르 족에 대한 걸 알긴 해도 이 녀석들이 어떻게 생식을 하는 지까지는 몰랐다.

"그 알은."

"매달 낳고 있으니 내 집에 잔뜩 쌓여 있어. 지금도 배 속에 하나 있고. 내려가서 낳을 테니 오러만 제공해. 그러면 너도 우리 일족으로 인정받을 테니까."

매달 낳고 있었나.

'뭐, 굳이 힘으로 해결할 필요가 없다면야.'

나는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오러 제공 정도야 어려운 일도 아니고 가끔은 평화롭게 가는 것도 괜찮겠지.

"그럼 가자."

계획도 정해졌겠다 나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퐁당 하고 들어온 바닷속은 때마침 하늘에 가득 드리운 구름 탓에 매우 어두웠다.

눈에 오러를 집중하자 어두웠던 시야가 보이기 시작했고, 그 순간 거대한 상어 한 마리가 하늘에서 웬 떡이 떨어졌냐는 양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깜짝아."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상어에 놀라 콧대를 쾅 하고 내려치자 상어가 몸을 부르르 떨다가 뒤집어졌다.

그러게 왜 눈앞에 나타나서는.

상어를 발로 밀치고 있자, 나를 따라 내려온 소니가 상어를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얜 왜 죽였어."

"갑자기 나타나서 삼키려 하잖아."

"이 근방에는 첫째 언니가 키우는 애들이 많아. 막 죽이지 마."

이 녀석은 내가 보는 족족 뭐든 다 죽이는 살인광으로 알고 있는 건가.

"시끄러워. 안내나 해."

"알았어."

수영해야 하는 나에 비해 물에 영향을 안 받는 듯 소니가 손쉽게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 앞에서 살랑거리는 소니의 꼬리를 보던 나는 그대로 손을 뻗어 그걸 콱 하고 잡았다.

"꺄으아?!"

내가 갑자기 꼬리를 잡자 놀란 소니가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곤 뭐 하는 짓이냐는 듯 소니가 돌아보자, 나는 도리어 그녀를 쏘아보았다.

"...말을 하던가."

"그냥 가기나 해."

"정말."

한숨을 내쉰 소니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는 편하게 물속을 지날 수 있었다.

이거 좋네, 자가용으로 딱 이다.

꼬리를 잡은 채 한참을 내려가자, 어느샌가 어두운 바닷속 너머에 용궁 같은 것이 보였다.

금색의 용 한 마리가 똬리를 튼 듯한 생김새의 용궁을 보고 잠시 작게 탄성을 뱉고 있을 때쯤, 소니는 용궁의 입구 앞에 도착하곤 내게서 획 하고 꼬리를 회수했다.

까탈스럽긴.

146화

"미드르 소니다. 문 열어."

소니의 명령에 용궁 문이 드드드득 하고 열리기 시작했다.

물살을 헤치고 열린 문 사이로 소니가 걸어 들어갔다.

그녀를 뒤따라 공기막 같은 것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은 물이 없는 듯 마법 아이템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지자 나는 반지에 발동된 마법을 끄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금칠이네."

"우리 어머니가 사치를 좋아하시거든. 난 흥미 없지만."

그리 말하며 소니는 푸른색 천을 둘렀다.

자신이 만든 구름으로 이루어진 천을 통해 그녀는 반쯤 공중에 뜬 상태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그 뒤를 말없이 따랐다.

"소니, 네가 무슨 낯짝으로 돌아왔데?"

소니와 함께 용궁 안을 거닐던 중 한 미드르 족과 마주쳤다.

소니보다 키가 큰 그녀는 머리 위 사슴뿔을 반짝이며 표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니 언니."

살짝 기가 죽은 소니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이 녀석 자기 터를 떠난 이유라도 있었나.

"어머니가 아끼시던 항아리를 예쁘다고 만지다가 깨 먹고 선 도망치더니, 잘도 돌아왔네."

아니, 별 사정 아니었다.

가니가 소니를 한심하게 보듯 나 또한 그녀를 그렇게 쳐다보자, 소니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실수였어! 그리고 언니랑 어머니가 하도 나한테 뭐라 하니까 도망친 거 아니야!"

"그렇다고 500년 동안 안 돌아오니. 너도 참 대단하다. 대단해."

"흥, 그래봤자 500년인데 뭘."

그 정도 세월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구는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보고 있자, 가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이제야 나를 발견했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곤 가까이 다가와 무릎을 꿇어 시선을 맞추곤 물었다.

"이 귀여운 애는 누구야?"

미드르족은 하나같이 트롤 같은 외형을 귀여워하기라도 하는 건가.

그 동생에 그 언니라고 생각하던 찰나, 자연스레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가니의 손을 내쳤다.

"어딜 만져."

"쪼그만 게 까칠하네."

그런 내 행동도 귀엽다는 양 가니가 배시시 웃자, 갑자기 내 몸이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알고 보니 소니 녀석이 가니한테서 나를 채가 끌어안은 것이었다.

트롤이 된 이상 어린애와 같은 체형인 내가 소니를 쏘아보고 있자, 그녀는 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니에게 외쳤다.

"얘는 내 것이니 관심 가지지 마."

"뭔데, 펫이라도 삼은 거야?"

"아니, 내 서방이야."

참 일 잘 굴러간다.

소니가 당당히 외치자 가니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곤 자기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얘가 500년이나 밖에 나돌아다니더니 돌았나."

"안 돌았어. 언니야말로 나한테 신경 꺼. 어머니한테 허락 맡으러 가야 하니까."

저 갈 길 가겠다는 양 나를 안은 채로 소니가 걸어가려 하였다.

그러자 가니는 소니의 옆을 따라오며 계속해서 말했다.

"...너 말이야. 남편으로 삼겠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나 있지?"

"알아."

"아는 애가 그래? 우리 종족은 정기적으로 알을 낳긴 하지만, 부화할 수 있는 알은 하나야. 물론 그 알에서 우리처럼 3명이 태어날 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한 번 생명이 탄생하면,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알에선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고."

뭐야, 그건 난 모르는 일이었는데.

진짜냐고 묻듯 소니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그 대신 나를 더더욱 꽉 끌어안으며 그녀는 말했다.

"알아."

"정말 고집은. 몰라. 어머니가 알아서 하겠지."

한숨을 내쉰 가니는 소니를 내버려 두고 떠나 버렸다.

이윽고 나는 소니의 품에서 내려오곤 그녀에게 물음을 던졌다.

"방금 말 진짜냐? 너 뭔 생각이야. 진짜 내 애라도 가지고 싶은 거야? 너 나한테 당한 거 잊었냐?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도 걸린 거야?"

"그런 거 안 걸렸고, 그냥 사정이 있어서 차라리 그게 낫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뭔 사정이 있어야 인생에서 단 한 번 만들 수 있는 아이를 나랑 만들 생각을 하냐?"

내가 별 희한한 놈을 다 보겠다는 듯 말하자, 소니는 약간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마당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언니는 내가 항아리를 깨서 도망간 거로 알고 있지만 사실 어머니가 자꾸 괜찮은 남자가 있다면서 억지로 약혼시키려 해서 도망간 거야."

적어도 항아리 깨서 도망간 게 사실이 아니라 다행이다.

"너는 어차피 나한테 별로 관심 없잖아. 난 약혼 같은 걸 해서 누군가한테 묶이는 건 딱 질색이야. 게다가 넌 나보다 강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이참에 강한 사람의 오러를 받아 아이를 만들면, 어머니도 더 이상 약혼 일로 귀찮게 안 할 거 같아서."

"어떤 의미론 네가 날 이용하려 했다, 이거냐?"

"서로 이해 관계가 맞는 거니까 괜찮지 않아?"

이 녀석도 참 쉽게 쉽게 생각한다.

"그런 생각으로 만든 애가 불쌍하지도 않냐?"

"별로? 어차피 알은 여기다가 맡기고 갈 생각이었는데."

일단 이 녀석이 어머니로서 자격이 조금도 없음은 잘 알았다.

우리 어머니보다 심한 녀석일세.

"너도 참 대단하다."

"왜? 어차피 내가 키워도 행복할 일 없을 텐데, 차라리 여기서 크는 게 애한테도 더 좋지."

하긴, 이런 녀석 밑에서 자라 봤자 제대로 된 애가 될 리도 없을 테니. 일리는 있었다.

이 녀석은 상당히 나사 빠진 녀석이니까.

"아, 가기 전에 알 먼저 낳고 가자. 어머니가 뭐라 하기 전에 미리 기정사실로 만들어 두고 가야 아무 말도 못 하니."

기정사실이라고 말하니, 상당히 거북해진다만.

나는 나중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알을 낳는 건 간단했다.

낳는다고 표현하기도 그런 것이, 소니 녀석이 푸른 천 같은 구름으로 배를 감싸자마자 알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새파란 뱀비늘 같은 무늬가 새겨진 알을 소니가 내밀자, 나는 찝찝해하면서도 오러를 불어 넣었다.

그러자 알의 색깔이 내 전 속성과 어우러져 에메랄드빛이 되었고, 소니는 곧 그 알을 안아 들었다.

"이걸로 됐어. 어머니도 아무 말 못 할 거야."

"너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

"우리 종족은 오래 사는 만큼 딱히 과거 일을 기억하며 후회하지 않아. 긴 시간을 사는데, 하나하나 그러는 건 지겹잖아? 짧게 사는 단명종 아이들이나 그러지."

그래도 이건 후회할 거 같은데.

본인이 그렇게 말하니 나도 그러려니 하긴 하겠다마는.

딱히 소중하지도 않다는 양 알을 대충 품에 안고 가는 소니를 뒤따라 나는 이 용궁에서 가장 큰 방에 도착하였다.

"여기가 우리 어머니가 사는 곳이야. 내가 잘 말할 테니, 넌 그냥 가만히 있어."

"그래."

이만큼 일을 벌여 놨으면 소니가 알아서 해결하는 게 맞겠지.

본인도 다 생각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나는 이번 일만큼은 소니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어머니, 소니 왔어요. 들어가도 돼요?"

그러자 거대한 문이 열리고, 기압 차로 발생한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이윽고 열린 문 사이로 흘러나온 끈적끈적한 오러가 내 몸을 훑는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소니의 말대로 그녀보다 강한 오러였다.

'일반 참가자들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 하겠구만.'

들어오려면 이 오러를 뚫고 오라는 듯한 느낌에 나는 하는 수 없이 내 오러로 상쇄시켜 버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거대한 기척이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가자."

침을 꿀꺽 삼킨 소니가 긴장된 표정으로 말하고 안으로 들어서자, 나도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궁전 내부는 진귀한 보석과 귀물들이 장식되어 있어 엄청나게 화려한 모습이었다.

사치도 보통 사치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안을 둘러보던 중 나는 거대한 의자와 테이블을 발견했다.

마치 내가 거인국에라도 온 듯한 착각을 느끼는 것도 잠시, 그곳에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는 4m 크기의 거대한 여성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있는 게 보였다.

소니와 같은 꼬리와 사슴뿔을 가진 그녀는 진득한 숨을 내뱉곤 우리를 돌아보았다.

요르문간드의 파편이 진하게 느껴지는 그녀가 바로 소니의 어머니, 미드르 니시카인 듯싶었다.

'이 여자 거의 준성좌 급이네.'

"어미한테서 도망쳐서 500년이나 집을 비운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돌아온 거니?"

소니의 어머니가 미소를 짓자 일대가 일렁거렸다.

그 작은 움직임 하나만으로 파급력을 일으킬 만큼 그녀의 기운은 강력했다.

사실상 그녀를 이 층에서 가장 강한 존재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어머니가 하기도 싫은 약혼을 계속 강요하니까요."

"그렇게 약혼이 싫다고 나가더니 처음 보는 종족의 아이를 만들어서 오고, 너무 막무가내지 않으냐. 난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건데."

부모들이 가장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은 니시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큰 몸집이 불편하다는 양 폴리모프 마법으로 몸을 2m 가까이 줄이곤 소니의 앞으로 걸어왔다.

"우리 종족은 수명이 길지 않으냐. 그렇기에 동반자를 선택하려면 그에 걸맞은 수명을 가진 자가 좋아. 그런 자들과 너를 이어 주려 한 어미의 마음을 모르겠니?"

"몰라요. 그런 거 관심 없어요."

"예나 지금이나 독립적인 성향은 똑같구나. 그나저나 최근 아침 물향나무숲에서 자연재해를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너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니시카가 소니의 가슴팍을 검지로 꾹꾹 눌렀다.

자기 딸이지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면서.

그러자 소니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대뜸 나를 가리켰다.

"어머니가 눈치챈 대로 쟤가 내 서방이에요. 그래서 우리 미드르 종족에 걸맞게 하려고, 종족 통합을 시켜 종족의 왕의 자리에 앉힐 거예요."

니시카는 소니의 손가락을 타고 시선을 옮겨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내가 가만히 니시카를 올려다보고 있자, 그녀는 한 손으로 볼을 감싸더니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그런데 앉혀 봤자 무슨 의미가 있니. 단명종이 그런 자리에 앉아 봤자 기껏해야 100년 남짓일 텐데."

"적어도 태어날 내 아이한테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자랑할 수 있을 거 아니에요."

"네 아이가 태어날 때는 저 단명종은 진작 죽었겠지. 미드르 족의 아이는 알에서 태어나는 데 300년이 걸리니까."

어느새 내가 죽은 뒤의 일까지 진행된 대화.

미드르족답게 수명에 관해 이야기하는 두 사람을 보고, 이내 나는 따분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실랑이를 하려는 건지, 슬슬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이, 소니 어머니."

결국 보다 못한 내가 나서기로 하였다.

소니가 가만히 있으라는 양 짜릿하고 나를 노려봤지만,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댁들 수명 자랑을 계속 들어 줄 생각은 없어. 소니의 알은 어찌 되었든 내 오러를 품고 태어날 거거든? 그러니 나도 이제 미드르족 소속이니까 요르문간드 상이나 내놔."

"하천성!"

그만하라는 양 소니가 소리쳤지만, 나는 소니를 쥐뿔도 신경 쓰지 않고 니시카를 노려보았다

미드르족으로서의 자격은 다 갖춰줬다.

여기서 거절하면 힘으로라도 가져갈 속셈이었다.

"흐응, 그 검에 요르문간드 님의 힘이라도 싣고 싶은 모양이지?"

"너 사도구나."

147화

성좌의 기척을 알아챈 그녀의 반응에 나는 곧바로 니시카가 사도임을 눈치챘다.

"그래, 맞다. 우리 세계에서 어떻게든 득을 보고 가고 싶은 모양인데, 난 그런 걸 그다지 고깝게 보지 않거든."

뒤이어 니시카의 곁에서 수만 마리의 푸른색 뱀들이 나타나 혀를 날름거리기 시작했다.

"어머니, 그만!"

오러로 형상화된 그녀의 뱀들은 내 주위를 둘러싸며 모여들기 시작하자, 니시카가 히죽 하고 미소를 지었다.

"너 강하지? 하지만 욕심이 많으면 화를 부르는 법이야. 우리 딸애의 혼삿길을 완전히 망쳐 놨으니, 대가는 치러야지."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만 마리의 뱀들이 나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나는 감흥 없는 표정으로 그 뱀들은 따분하게 바라보며 한 차례 바닥을 내려찍었다.

내 발을 중심으로 뻗어 나간 오러가 뱀들을 모조리 박살 내자, 그 즉시 검을 뽑으려 했다.

"하천성, 안 돼!"

그러나 그 순간 내 몸이 허공으로 부웅 하고 떠올랐다.

뒤이어 무언가 반응하기도 전에 눈 깜빡할 사이에 튕겨 날아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느샌가 용궁 밖으로 쫓겨났다.

'이건.'

내 오러나 스텟을 모조리 무시하고 발동된 기원과 같은 능력.

오리진이다.

그 여자, 오리진을 사용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내가 검을 뽑으려는 그 순간,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용궁 밖으로 내쫓겼다.

혹시나 싶어 시험 삼아 똑같은 행동을 해 보았지만, 용궁 밖에서는 별 탈 없이 검을 뽑을 수 있었다.

보아하니 용궁 안에서 무기나 적의를 보이는 자를 밖으로 내보내는 식으로 쓰이는 오리진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건 용궁 안에서는 최강이라는 소리인가.'

까다로운 오리진에 내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자, 소니가 서둘러 용궁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잔뜩 화난 표정을 보고 나는 소니가 왜 그제야 계획을 세우자고 했는지 눈치챘다.

소니는 니시카의 오리진을 알고 용궁 안에서는 대항할 수단이 없다고 판단하여 계획을 세우자 했던 것이었다.

"정말, 다 된 밥에 왜 재를 뿌리는 거야!"

소니가 화를 내자 나는 겸연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번 건은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이 녀석 내가 요르문간드 상을 부숴도 괜찮은 건가.

어느 순간부터는 내 편이라는 양 나를 돕고 있는데.

'어지간히 약혼으로 괴롭힌 모양이군.'

나도 재벌가에서 산만큼 성년이 되고 나서 소니와 비슷한 일을 몇 번 겪어 봤기에 조금은 이해는 됐다.

소니의 나이가 미드르족 기준으로 몇 세인지는 몰라도, 그런 식으로 괴롭히는 건 누구든 간에 지치게 만드니까.

"어머니 앞에서 무기를 뽑거나 적의를 보이는 건 금지야. 용궁 안에서 어머니를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래, 그런 모양이네."

"다시 들어가자. 어차피 네가 내 알에 오러를 불어 넣은 이상 너도 이제 미드르의 일원이야. 아무리 어머니라도 미드르의 규칙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아니, 됐어."

부탁하면 될 거라는 소니의 말에 나는 물속을 헤치고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런 나를 보고 소니가 의아하게 바라보는 동안, 나는 검집 속에 오러를 응집시키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뭘 하려고?!"

"안에서 최강이라며. 그럼 나오게 하면 그만이지."

"우리 집을 부술 속셈이야!"

소니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내 검집 속 오러가 더더욱 쌓이기 시작했다.

내가 베려는 것은 용궁이 아니다.

용궁 위에 덧씌워진 니시카의 오리진이지.

안에서는 적의를 보일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지만, 밖이라면 다르다.

바닷물 속 임에도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청명하게 울렸다.

오식(五式)

무형뇌절(無熒雷絶)

눈에 서린 오러에 의해 드러난 오리진을 타고 번개가 뻗어져 나갔다.

공간을 짓이기며 나아간 번개는 니시카의 강력한 오리진조차 모조리 찢어발겼고, 이윽고 용궁은 벌거숭이가 되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린 소니만이 넋 놓고 나를 보고 있었다.

깔끔히 오리진만 지워 낸 나는 별천도를 허리춤에 되돌리곤 안으로 들어섰다.

때마침 자신의 오리진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니시카는 급히 뛰어나오고 있었다.

그녀와 마주한 나는 가볍게 웃음 지었다.

"아까까지는 득의양양하더니, 이제 좀 표정이 볼만해졌네."

내 말에 인상을 와락 구기긴 했지만, 오리진이 이렇게 쉽게 깨진 이상 그녀는 나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순순히 안내하라는 양 고갯짓하자 니시카는 얼굴을 감싸며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가자들은 다 너와 같이 막무가내니?"

"제각기 다른 방법으로 막무가내긴 하겠지."

적어도 나처럼 힘으로 짓누르는 녀석은 몇 없겠지만 말이다.

"순순히 안내 안 할 거라면 힘으로 가져갈 속셈인데."

"우리 딸도 뺏어 가놓고, 신상까지 가져가겠다니. 너무 염치없지 않니?"

"당신 딸은 가져갈 생각 없어."

내가 말했지만 왜 이리 나쁘게 들리는 거지.

미묘한 표정을 지었던 나는 됐다는 양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 휘둘려줄 생각은 없었기에 어서 신상이 있는 곳에나 안내하라고 쏘아보자, 니시카는 별수 없이 소니를 불렀다.

"안내해 주렴."

결국 포기한 니시카가 안내를 하라고 하자, 소니는 혹시나 말이 바뀔세라 나를 데리고 서둘러 신상으로 향했다.

"이걸로 더 이상 어머니가 약혼을 들먹이며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결론만 보면 잘됐긴 한 데, 뭐든 너무 무턱대고 좀 하지 마. 심장이 쪼그라들 거 같으니."

"알았으니 안내나 하셔."

이래 보여도 많이 기다려 준 건데. 나 원.

소니의 안내를 따라 용궁의 지하 구역으로 내려오자, 거기에는 내가 기다리고 있던 요르문간드의 신상이 있었다.

거대한 크기의 신상에서는 요르문간드의 기척이 느껴졌기에 목적을 거의 달성한 나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하다.

이걸 부수면 요르문간드 녀석이 나를 인식할 것이다.

'야신 놈.'

내가 이렇게 귀찮은 짓까지 하게 만들다니 반드시 혼쭐을 내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요르문간드 상 앞으로 걸어갔다.

"신상을 부수거나 하는 건 이제 딱히 상관없는데. 미드르족이 되는 기도부터 올려 줘. 그걸 해야 확실히 인정되니까."

"너 어느샌가 나한테 부탁하는 게 많아졌다? 최근에 내버려 뒀다고 정신 못 차리는 모양인데."

내가 눈살을 확 찌푸리자, 소니는 찔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참고로 소니는 여전히 용천성의 용포를 두르고 있었다.

그녀를 보고 혀를 찬 나는 부탁대로 기도를 올리기 위해 두 손을 모았다.

내가 기도를 시작하자 신상에서 요르문간드의 잔재가 흘러나왔다.

뱀의 현상을 한 잔재는 순식간에 내 몸으로 파고들더니, 그 즉시 안을 제멋대로 휘젓기 시작했다.

"하하! 드디어 당했구나!"

그러던 순간이었다.

뒤에 있던 소니가 나를 보고 소리치자, 나는 그녀를 멀뚱히 돌아보았다.

"우리 종족 말고 다른 종족이 신상에 기도를 올리는 순간, 종속이 되는 계약이 발동하거든! 자, 어서 이걸 벗겨!"

용천성의 용포를 가리키며 소니가 기고만장하게 소리치자, 왜 이 녀석이 그토록 나를 여기로 데려오려 했는지 깨달았다.

자기 아이까지 팔아먹으며 한 짓이 참 대단하다.

"잘하는 짓이다."

그런 그녀를 보고 나는 검지와 엄지를 딱 하니 부딪쳤다.

파직!

"꺄아아아아!"

그러자 용천성의 용포에서 튀어 오른 스파크가 소니를 뒤덮었고, 이내 새까만 연기를 뿜으며 소니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걸 보며 나는 왜 이 녀석의 어머니가 왜 그토록 약혼을 시키려고 했는지 알겠다.

어떻게든 이 바보를 조금이라도 정신 차리게 하고 싶었겠지.

"어, 어떻게."

"종속 계약은 개뿔이. 요르문간드 본인도 아니고, 매개체인 신상 따위가 나한테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거 같았냐."

그리 말하며 나는 몸속을 휘젓고 다니던 뱀을 콱하니 잡아서 밖으로 꺼내 들었다.

반투명한 뱀은 내 손에 잡힌 채 발버둥 치고 있었고, 소니의 두 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거세게 흔들렸다. 이내 나는 녀석의 입에다가 친히 뱀을 넣어 주었다.

"그거나 얌전히 씹고 있어라. 난 신상이나 부술 거니까."

"우구, 안 돼! 그걸 부수면 우리 미드르족의 다음 자손이 태어날 수가 없단 말이야!"

"내 알 바냐? 어차피 거의 무한히 사는 놈들이라 자손을 만들 생각도 없으면서."

뱀을 뱉고 소리치는 소니를 무시하며 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세상을 몸으로 두르는 뱀'이 당신의 존재를 인식했습니다.]

별천도를 휘두르기 직전, 나는 갑자기 떠오른 메시지에 멈칫하였다.

아직 신상을 부수지 않았는데도 나를 인식했다고?

의아해하며 내가 하늘을 올려다보자, 바다 너머에 거대한 별 하나가 기척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상을 몸으로 두르는 뱀'이 혀를 내밀며 당신에 대해 호기심을 보입니다.]

['세상을 몸으로 두르는 뱀'이 자신의 종속이 되다 만 당신을 신기하게 바라봅니다.]

그렇군.

신상에서 나온 저 뱀은 엄밀히 말해 요르문간드의 존재였으니, 그로 인해 자신의 파편인 미드르족뿐만 아니라 타 종족도 요르문간드의 종속이 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본래라면 거스르지 못할 종속 계약을 내가 튕겨 내버렸으니, 그때 내 존재를 인식한 거겠지.

'이러면 부술 필요가 없긴 하네.'

그래도 소니 녀석이 수작 부린 게 못마땅해서 부숴 버리고 싶었지만, 나는 그냥 참아 주기로 했다.

"요르문간드, 너도 다른 녀석들처럼 얌전히 똬리 틀고 지켜나 보고 있어."

['세상을 몸으로 두르는 뱀'이 쪼끄만 게 뭐라고 하는 거냐며 의아해합니다.]

['서릿발의 고양이'가 반가운 듯 앞발을 들어 보입니다.]

['세상을 몸으로 두르는 뱀'이 놀란 표정을 짓습니다.]

둘이 아는 사이인가.

최상위 성좌끼리의 사이까지는 잘 모르는 나이기에 나는 그러려니 했다.

"돌아간다."

"...알았어."

풀이 죽은 소니를 데리고 위로 올라오자 우릴 기다리고 있었던 니시카가 곰방대를 피우며 서 있었다.

그러곤 소니 앞으로 다가오더니, 그녀가 품에 안고 있던 알을 쏙 빼내었다.

"알은 내가 맡으마. 넌 아이는 절대 못 키워."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요."

"저런 사람의 오러를 깃들었으니 이 아이는 기필코 강하게 크겠지. 미드르족을 위해서라면 나쁘지는 않아."

결국 내 힘이 탐난 모양이다.

"연지야. 저 알이 네 동생이랜다."

[준성좌 '용들의 군주'가 시큰둥해합니다.]

자기랑 똑같은 방식으로 태어났는데도 관심 없구만.

"그러고 보니 아까 종족 통일인가, 뭔가 말을 했었지."

아까 소니 녀석이 아무렇게 내뱉은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듯 니시카가 물어왔다.

트롤에게 쓸 종족 포인트를 벌기 위해서는 종족 통일은 필수 불가결하기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참가자든 말든 우리 종족에 소속되었으니, 도울 건 도와야겠지. 다른 최상위 종들에게 너희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못 박아 두마."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 어차피 최상위 종들도 다 내 밑에 들어오게 할 거야."

전송 마법을 사용하려던 그녀는 내 말을 듣곤 멈칫하였다.

나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좋네. 미드르 소속인 네 밑에 전부 들어오게 된단 건 미드르족의 세력이 늘어난다는 소리기도 할 테니. 그렇담 더더욱 미리 건드리지 말라고 일러둬야지. 방심하고 있을 때 전부 쓸어 버리게."

소니 녀석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나를 이용해 자신의 야망을 마음껏 펼치는 니시카를 보고 나는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어떤 방식이든 종족 포인트만 벌면 되는 나로서는 그녀의 도움이 독이 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우리 도리도리 못 봤어요?"

그러던 순간 지금껏 보이지 않던 또 다른 미드르족 한 명이 나타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가왔다.

아무래도 소니의 첫째 언니인 듯한 그녀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도리도리? 그 애완 상어 말이냐."

"네, 아까 잠깐 산책가고 나서 쭉 안 보이네요."

상어라면 설마 그 녀석인가.

소니도 눈치챈 듯 그녀는 나를 휙 돌아보았고, 나는 조용히 있으라고 눈짓하고는 슬그머니 자리를 벗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렇게 미드르족을 떠나 돌아왔다.

148화

숲으로 돌아온 뒤.

펜시스를 눈앞에 두고 있는 나는 그의 원천이 뭔지 떠올리기 위해 고민에 잠겼다.

늑대와 관련된 녀석이 분명 한 명 있었는데 잘 안 떠올랐기 때문이다.

'잠깐만, 늑대라면.'

순간, 나는 33층 때 늑대 한 놈이 더 있었던 게 떠올랐다.

녀석은 성좌이긴 하나 진명이 없는 녀석이었다.

즉, 녀석은 원천이 아니다.

녀석 보다 상위의 존재가 있다는 소리였다.

'썩을, 그놈이구나.'

그 순간 나는 최상위 성좌 한 놈을 떠올렸다.

성좌를 잡아먹는 늑대.

진명은 펜리르.

내가 이름만 알고 있는 최상위 성좌 중 한 놈이었다.

성좌 '종말을 부르는 늑대' 녀석도 펜리르에게서 새어 나온 녀석일 터.

'펜리르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는데.'

기껏해야 녀석이 성좌도 잡아먹을 정도로 먹성 좋은 미친개라는 것뿐이다.

하지만 성좌를 잡아먹는 행동 때문에 녀석의 평판이 성좌들 사이에서 무척이나 안 좋다는 건 나도 안다.

혹여나 그놈을 별천도에 묶어 두면 녀석을 싫어하는 성좌들이 괜히 나를 귀찮게 할 가능성도 있었다.

'괜한 문젯거리를 만들 필요는 없겠지.'

태생이 게으른 탓에 자기한테 무슨 짓을 하든 신경 안 쓰는 요르문간드라면 모를까, 포악한 펜리르까지 옆에 두는 건 위험 부담이 컸다.

돌발 행동을 하는 건 돌원숭이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이 녀석은 됐고.'

본론으로 돌아온 나는 펜시스를 바라보며 물음을 던졌다.

"숲의 현자란 놈이 여긴 왜 온 건데?"

"아침 물향나무숲으로 돌아온 뒤 엘프에게 그간 숲에 있었던 일을 들었네. 종족끼리의 전쟁이 심화 되었다고."

전부 내가 저지른 일이었기에 나는 시큰둥했다.

"그랬지. 그런데 왜?"

"나는 이 사태를 멈추고자 왔네. 말해주게. 트롤이 전쟁에 이토록 열을 올리는 이유가 있는가? 부디 대화로는 해결이 안 되겠는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라면, 당연히 종족 포인트 수급이다.

하지만 이대로 말해봤자 이해할 리는 없었기에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안 돼. 대화로 해결될 거라면 진작 해결했을 거니까."

대화로는 종족 포인트가 안 벌린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로군. 말해주게나.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거라면 돕겠네."

"네가 도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우리는 앞으로도 종족 전쟁을 할 거다. 그리 알아."

"어떻게 안 되겠나? 이렇게 부탁하겠네. 전쟁을 멈출 수 없겠는가. 나는 아침 물향나무숲이 파괴되는 걸 지켜볼 수 없네."

나 원, 귀찮게 군다.

나는 고민하는 척 팔짱을 낀 채 펜시스를 바라보았다.

펜리르와는 연관되고 싶지 않은 만큼 펜시스는 멀리하고프니 나는 그냥 막말하기로 했다.

"아, 그냥 종족 다 통합하고 너희들 전부 내 발아래에 두려는 거야. 그러니 꺼져."

근처를 지나가던 트롤과 다른 종족들이 내 이야기를 듣곤 나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이놈들은 왜 만날 저러고 나서 나한테 두들겨 맞는 주제에 저리 편하게 대하는 거지.

내가 만만한가?

['오만의 아틀리에'가 이제야 알았냐고 묻습니다.]

성좌 놈의 말을 듣고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들을 두들겨 패는 녀석을 왜 만만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 그러고 보면 소니 녀석도 나한테 그렇게 당하고도 계속 수작 부리던 걸 보면.'

지금까지 내 태도가 잘못되었던 걸까.

앞으로는 조금 더 냉철해질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준성좌 '용들의 군주'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며 그냥 그렇게 살라고 말해줍니다.]

['돌원숭이'가 코를 후벼 파며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다며 비웃습니다.]

우선 이놈들부터 쥐어패고.

"그렇군. 그런 목적이었나."

내가 성좌와 다른 종족 녀석들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었을까, 갑자기 펜시스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양 외쳤다.

녀석의 반응이 이상해서 그를 바라보자 펜시스는 이제야 알아차렸다는 양 입가를 감싸고 있었다.

그 순간, 펜시스가 발동시킨 사일런스 마법이 주위 소리를 차단했다.

나와 둘만의 대화 공간을 만들어 낸 그는 따스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 스스로 악당이 되기를 자처했군."

"뭐?"

펜시스가 갑자기 헛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뭘 보고 그딴 말이 나오냐는 듯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자 펜시스는 주위에 다른 종족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내게 당한 게 있는 만큼 나에 대한 원한이 가득했다.

언제라도 내 뒤통수를 칠 수 있는 녀석들인 것이다.

"공공의 적, 나도 이건 생각하지 못했네. 적의 적은 아군. 본디 강한 적이 나타나면 약자들은 뭉치는 법이지."

틀린 말은 아니다만.

왜인지 모르게 펜시스의 눈에 나는 스스로 악역을 자처하는 멋진 놈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놈, 과대망상이 심하구만.'

아니면 현실 도피인가.

"게다가 경박한 말투와 몸짓 그리고 엑스트라 1정도의 하찮음을 일부러 연기하여 다른 종족들이 자네를 꺾을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게끔 유도하여 모두의 마음을 한데 뭉치다니. 믿을 수 없네. 이런 방법으로 종족 통일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오냐, 네가 내 욕하는 건 잘 알았다.

평소대로 생활하며 살아왔던 나이기에 나는 이를 아득 갈며 펜시스 놈의 머리를 힘껏 내려쳐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자네의 뜻이라면 이해하겠네. 이것이 자네 만의 종족을 통합시키고 유지하는 방법이라면 나 또한 받아들여야겠지."

새로운 것을 깨우쳤다는 양 그는 기다랗게 탄식을 내뱉곤 다시금 주변 종족들을 바라보았다.

각양각색의 종족들은 내 뒤통수를 노리며 작당 모의를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뭔가 다르게 비치는 모양이었다.

마치 어느샌가 모두가 함께 이루어져 살아가는 환상이라도 엿본 것 같았다.

"트롤, 생각 이상으로 멋진 종족이었네. 이 사실은 다른 종족들에게는 말하지 않겠네. 스스로가 악당이 되기를 자처한 자네의 의지를 무색하게 만들어선 안 되겠지."

이 녀석 바보인가.

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 상황을 이해한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를 보고 있자 펜시스는 사일런스 마법을 지웠다.

"난 그만 가보지. 자네의 끝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이 도래했을 때 다시 찾아오지."

자기 할 말만 다 하고 펜시스는 떠나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펜시스가 왜 저런 식으로 이 상황을 제멋대로 해석했는지 얼추 파악할 수 있었다.

'가끔씩 있지. 머리가 꽃밭인 놈.'

주위 사람이 하는 행동은 모두 정당한 이유가 있으며 세상에 악이란 없다고 생각하는 바보 천치 꽃밭들을 나는 몇 번인가 본 적 있었다.

애초에 숲의 평화를 가져올 방법을 찾기 위해 전 세계를 배회한 녀석이었으니 충분히 머릿속이 꽃밭 일만 했다.

저놈, 최상위 종족만 아니었다면 진작 주위 놈들에게 얻어터졌으리라.

"저놈, 사기 많이 당하지 않냐? 숲의 현자라거나 그런 말 붙이기 뭐할 정도로 머릿속이 꽃밭인데."

펜시스의 사일러스 마법 탓에 우리 대화를 못 들었을 나비아에게 물어보자 그는 씁쓸히 웃었다.

"최상위 종족 중 유일하게 저희를 보살펴 주던 분입니다. 하천성 님 말대로 뭐든 착하게 해석하시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이번에 벌이신 일도 분명히 좋은 방향으로만 해석하셨죠?"

전과가 있었구만.

"하여튼 힘 있는 것들은 사상이 고착화된 경우가 많아."

남들이 자기 사상을 부정할 수가 없으니 머릿속에 한 번 자리 잡은 것들이 바뀌지를 않는다.

본인이 절대 잘못된 걸 모르니까.

"너도 안 바뀌잖니."

어느새 나타난 소니가 내 말에 딴죽을 걸었다.

"난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어서 괜찮거든?"

"그게 유연하면 일반 사람들은 모두 연체동물인 모양이네."

나는 펜시스 대신 소니를 쥐어박아 주었다.

"정말 손버릇이 왜 이리 나빠! 넌 그게 문제야!"

내가 쥐어박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니가 또다시 바락바락 대들었다.

옆에서 다른 종족들도 소니를 은근슬쩍 응원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펜시스 녀석이 왜 나를 그렇게 봤는지 어렴풋이 알 거 같았다.

'썩을, 이것들을 단체로 확 그냥.'

쯧, 됐다.

전부 내 친화력이 좋은 탓이지.

너무 편하게 대해준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아, 물론 전부 한 대씩 쥐어박는 건 잊지 않았다.

* * *

"족장, 이제 아침 물향나무숲에서 우리를 대적할 만한 종족은 없다."

또다시 몇 달이 흘렀다.

어느새 이 층의 시간도 막바지가 다 되었고, 나는 보리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몇 달간 계속해서 성장시킨 결과 녀석은 이제 제대로 된 공통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존댓말은 못 배워 먹었는지 아직도 반말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봐줄 만한 수준이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커다란 키의 보리가 보였다.

'이 녀석들이 커지기 시작한 게 여섯 번째 돌연변이부터였나.'

전쟁을 할 때마다 얻은 종족 포인트로 트롤들을 계속해서 성장시킨 결과 어느 시점부터 평균 덩치가 커지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2m 정도의 거구로 변한 녀석들은 이제는 매일 같이 자신들의 근육을 자랑하는 헬창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트롤을 귀엽게 여기던 소니가 피눈물을 흘렸지만,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종족 진화의 영향을 안 받는지 여전히 처음 트롤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긴, 내 성장 시점은 이미 지났으니 층이 영향을 못 준거겠지.

"족장은 언제나 조그맣군."

"이게, 몇 달 전엔 너랑 나랑 같았어. 인마."

훗하고 이겼다는 표정을 짓는 보리의 다리를 걷어차 준 나는 집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곳에는 종족들이 힘을 모아 함께 만들어 낸 제대로 된 마을이 있었다.

여전히 자연 친화적인 마을이긴 하나 그곳에는 여러 종족이 아우러져 살아가고 있었다.

트롤은 13 종족을 상대로 모든 전쟁에서 승리했다.

모든 분야에서 트롤은 아침 물향나무숲 종족 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그리고 승리를 할 때마다 트롤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자리를 차지하고 싶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좋으니 덤비라고.

그 덕에 지금까지 일어난 반란은 10번, 어느새 반란은 어떤 의미로 문화가 되어 있었다.

처음 내가 트롤의 족장 녀석을 걷어차며 족장 자리를 얻었듯이 그 문화는 아직까지도 계승되고 있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이런 문화이기에 종족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도전 해왔다.

힘으로, 때론 지능으로, 전략으로, 문화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이다.

힘에 국한되지 않은 반란은 종족 간에 경쟁심을 불러일으켰다.

어느새 아침 물향나무숲 중심이 되어버린 트롤의 군락에서 그들은 각자가 가진 종족으로서의 장점을 보여주고 여러 자리를 쟁취해냈다.

군사 담당, 식량 담당 등등 중요 요직들을 그들은 꿰차기 시작했던 것이다.

능력에서 밀리면 트롤은 순순히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그다음 그들이 다시 그 자리에 도전했다.

'처음 그렇게 시킨 건 그냥 종족 포인트를 벌 속셈이었지만.'

우습게도 이 방법이 종족들끼리의 장점을 규합시켜 나가고 있었다.

나야 종족 포인트나 벌 생각이기에 종족 통일에는 그다지 관심 없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로드비 펜시스랑 친하게 지내는 보리에게는 다른 모양이었다.

사실상 족장 일을 거의 다 도맡고 있는 보리는 진지하게 종족 통일에 대해 펜시스와 논의하고 있었다.

'나는 완전히 욕받이 취급이구만.'

여전히 공공의 적으로 취급받는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차피 나는 사라질 몸.

오히려 이게 더 좋았다.

149화

"족장, 오랜만에 대련 어떤가."

보리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난 1년, 나는 보리의 인생에 깊게 자리 잡았다.

보리에게 나는 족장이면서도 스승이었다.

"호오, 머리 좀 커졌다고 덤빈다 이거냐."

나는 가볍게 웃으며 별천도를 들었다.

종족 포인트로 진화에다가 집중 케어까지 해주었다.

그 결과 보리는 1년이라는 시간 만에 엠페러 급에 도달하였다.

녀석은 아침 물향나무숲 내에서 최강자라 칭할 수준만큼 성장한 것이다.

최근에는 소니 녀석과도 자주 대련하는 모양이니 계속해서 발전하리라.

'나는 그걸 보지 못하겠지만.'

보리는 괜찮을 거다.

녀석은 리더로서의 자질도 충분히 있었으니까.

대련이 시작되었다.

보리와 내가 대련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금세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자리를 잡았다.

"보리, 이겨!"

"제발 하천성 좀 쓰러트려라!"

"보리야 너한테 건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마 전까지 물고 뜯고 싸우던 종족들은 어느덧 하나로 어울려서 우리 대련을 구경하고 있었다.

물론 내부사정은 아직 탄탄치 못하다.

트롤에게 힘으로 밀렸기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실제론 종족 간에 갈등은 아직까지도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할 것이 아니었다.

지금 내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 보리가 해결할 문제다.

"보리야."

내 부름에 에고 웨폰을 휘둘러오던 보리가 나를 바라보았다.

녀석에게서 꽤나 쓸만한 오러가 흘러나왔다.

가느다랗게 몰아쉬는 보리의 숨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종족 통일 후에는 뭐할 거냐."

"숲 밖으로 나갈 거다."

채엥!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검합 속에서 보리는 나와 같은 검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내 옆을 줄기차게 따라다니며 열심히 배워 나간 녀석의 검술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서히 바뀌어나가겠지.'

아직은 나에게 의존하는 보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신만의 길을 찾아낼 것이다.

다음 층에서는 또 다른 종족 전쟁이 시작된다.

그때가 보리의 기준으로 언제일지는 장담하지 못하겠지만 이 녀석은 더 강해져서 올 것이다.

"소니에게 들었다. 밖에는 아침 물향나무숲에서 보지 못한 수많은 종족들과 강자들이 있다고. 족장 덕에 강해지는 재미 하나는 잘 알았으니까. 숲 밖에도 나가 봐야지."

"감당할 수 있겠냐? 이 숲에서의 종족 통일도 힘든데."

"족장이 있잖나. 족장은 나쁜 놈이지만 그래도 강한 건 사실이다."

그 말에 나는 웃었다.

그렇군.

나를 믿고 있던 거냐.

"인마. 나, 얼마 안 남았어."

그 순간 보리의 검이 우뚝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