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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1화. 여주인공의 아빠가 되었다 (1)

"X발, 이건 또 무슨...."

난데없는 화재로부터 죽음을 맞이했다.

침실에서 게임을 즐기던 도중 거실에서 일어난 불꽃.

원인은 나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전기장판을 꺼 두지 않았던가?

1.5룸에서 자취 생활을 보내던 나는 그렇게 갑작스러운 화재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금 눈을 뜬 순간, 난생처음 보는 허름한 집에 서 있었다.

정신을 번뜩인 채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아빠?"

"너... 너는 누구...."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

8~9살 정도쯤 되려나?

멍하니 소녀를 바라보던 때.

내 머릿속에 수많은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내 기억이 아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연상의 아내와 결혼하는 과정, 그리고 딸을 대신해 교통사고를 당한 아내가 병원에서 끝내 사망하는 장면들이 하나씩 머릿속에 주입되듯 떠오르기 시작했다.

"크윽!"

갑작스러운 두통에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박건혁...."

나는 한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물론, 내 이름은 신무영이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30대 중후반으로 추정되는 남자.

그래, 눈앞의 남자가 바로 박건혁이라는 인물이다.

그보다도 33살이 왜 이렇게 폭삭 늙었어?

40대라 말해도 믿겠네!

"...."

나를 지그시 응시하는 9살의 소녀.

그녀의 이름은 박수영으로, 박건혁의 딸인 모양이다.

그리고....

'아내의 죽음을 딸의 탓이라고 생각했던 건가.'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것은 벌써 1~2년 전의 이야기다.

그녀의 죽음은 그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회사의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정리 해고를 당하고, 도박에 손을 뻗었다가 전 재산을 탕진.

막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와중에도 매일 밤마다 술을 마시면서 딸인 수영을 학대하기까지, 그야말로 인간 말종이 되었다.

"...방에 들어가 있으렴."

내 한마디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빙마궁주(氷魔弓主) 회귀하다."

나는 연재가 중단되었던 한 웹 소설을 떠올렸다.

죽음을 맞이하기 불과 몇 개월 전까지 정주행을 마친 소설.

작가에게 쪽지를 보내 재연재를 부탁했을 정도로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100편도 채 되지 않는 적은 편수에 중단되어 얼마나 아쉬웠던지.

박수영이란, 해당 웹 소설의 주인공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리고 박건혁은 그녀의 아버지.

"하하."

나는 '설마'라는 생각에 TV 리모컨을 주웠다.

그러곤 20인치의 허접한 모니터를 향해 전원을 눌렀는데.

공중파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

KKB방송국에서 진행하는 '헌터의 일상!'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채널을 멈췄다.

"X발."

욕설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부분은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지.

하지만 왜 하필이면 박건혁으로 되살아난... 아니, 이 경우에는 빙의했다고 말해야 하나?

인간 말종인 박건혁은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한다.

하지만 그 부분은 지금부터라도 막을 수 있다.

수영이 고등학교에 진학한 직후의 일이니까.

문제는 수영이 '2회차 인생을 살고 있다면.'이다.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하는 박건혁의 미래가 비틀어지게 되는 2회차 인생.

'박수영이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나? 본래 알코올 중독으로 죽어야 할 박건혁이 갑작스러운 레이드 발생으로 마수에게 잡아먹히게 되는....'

수많은 마수들이 게이트를 넘어오는 현상, 레이드.

사람들은 게이트가 폭발했다는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회귀를 경험한 수영은 본인의 능력으로 위기를 피해 내지만, 일반인에 불과한 건혁은 해당 사건에 휘말려 죽음을 맞이한다.

'세계의 종말보다도 지금은 내 목숨부터 잘 간수해야겠어.'

1회차 박수영은 이계에서 넘어온 마족의 군세에게 죽음을 맞이한다.

지구군과 마계... 아르덴군이 벌이는 세계 전쟁급 인마대전.

인마대전까진 앞으로 18~19년이란 시간이 남아 있다.

그 부분은 천천히 생각해 봐도 괜찮겠지.

'그보다... 앞으로 어떡하냐?'

사회 생활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내게 박건혁의 지식은 나름대로 쓸모가 있었으나, 그게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차라리 박수영에게 지금의 내 상황을 설명하고...."

그런 생각은 무참히 짓밟혔다.

수영을 불러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해 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전생의 이야기는 필터링되어 수영에게 전달되는 모양이다.

무언가에 통제되듯이 말이다.

[플레이어의 상습적 도배로부터 한 달간 발언이 제한됩니다.]

눈앞에 떠오른 경고 창.

나는 한 달 동안 전생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면서 문장과 단어들을 내뱉었다.

그러나 모든 발언은 필터링 처리되어 전달됐다.

물론, 글로도 남겨 보려 했지만, 볼펜에 잉크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트에는 아무런 내용도 기입되지 않았다.

"이런 쓸데없는 것들은 상관없는데 말이야."

제한 범위가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확인할 수 없었던 나는 골치가 아파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아, 일단은 막노동이라도 다녀와야 하나?"

30대 중반임을 믿을 수 없는 볼품없는 몸.

이게 올챙이배라는 건가?

나는 불룩 튀어나온 아랫배를 보며 쓰게 웃었다.

그나마 막노동을 일삼았기 때문일까?

팔에는 약간의 근육이 붙어 있었다.

"수영이는 회귀한 게 맞겠지."

그녀는 모친이 죽은 이후에... 정확히 초등학교 2학년생으로 회귀를 하게 된다.

나는 수영의 하교 시간에 맞춰 그녀의 등 뒤를 미행했다.

매번 늦어지는 그녀의 하교 시간.

그로 인해 수영의 회귀 가능성을 추측해 보았는데.

스윽.

'역시.'

초등학교 뒷산으로 올라간 그녀는 허공에 손을 뻗어 얼음의 활과 화살을 만들어 냈다.

이어, 수십 미터 떨어진 나무를 향해 저격하는 광경까지.

그 모든 걸 두 눈으로 확인했다.

이후, 내 행동은 분주해졌다.

헌터로 각성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

자연적 각성과 인위적 각성.

인위적 각성이란, 민간 기업에서 제작한 각성제를 복용하여 힘을 얻는 경우를 일컫는다.

"그나마 소설 속의 박건혁과는 다르다는 건가?"

누군가가 내 행동을 통제하는 대신 그에 따른 능력이 주어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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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건혁

*종족: 인간

*칭호: -

*출신 국가: 한국

*LV: 1

*근력: 7

*민첩: 5

*체력: 8

*마력: 0

*AP: 0

*스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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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 게임에서 볼 수 있는 스테이터스.

능력 자체는 너무나도 허접해 보였지만, 능력을 수치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세계는 아쉽게도 게임 판타지 요소 중 하나인 스테이터스가 존재하지 않았다.

능력의 강화는 가능하지만, 그것을 수치화하여 볼 순 없다는 의미다.

"무슨 게임 세계에 들어온 기분이네. 그보다 마력은 0이야? 민첩은... 뭐, 이 배로는 당연한 건가."

나는 불뚝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의 박건혁에게는 친구도 친척도 가족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연락 자체가 끊어졌다 해야겠지.

그나마 가족이라 부를 만한 인물이라곤 자녀인 박수영뿐이려나?

"가자."

나는 후줄근한 티셔츠에 가벼운 점퍼를 걸치고 버스에 올라탔다.

현재 내가 소지 중인 현금은 1,237,000원.

도박에 사용하기 위해 모아 둔 것인지, 녀석이 사용하기 전에 내가 빙의한 모양이다.

서초구의 구석진 아파트에서 거주하게 된 나는 서울특별시 중구에 위치한 대한민국 헌터 협회 서울 중앙 본부를 방문하였다.

"네, 무슨 일로 방문하셨나요?"

반갑게 맞이해 주는 접수원.

"그... 각성을 해서 등록 신청을 하려고 하는데...."

"아, 그러시다면 이쪽의 신청서부터 작성을...."

내 후줄근한 차림을 보고도 여직원은 친절하게 대응하며 신청서를 한 장 건네주었다.

이름과 연령, 연락처, 주소 등의 정보들을 기입한 다음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자 등록 신청비로 50,000원을 받아 간 직원.

나는 지갑에서 현금으로 지불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무래도 헌터 등록하려고 온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 모양이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기다린 뒤, 나는 살짝 지친 얼굴로 검사실로 들어갔다.

내가 제17 검사실로 입실한 순간.

남성 검사관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네, 반갑습니다. 지금 검사를 준비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는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더니, 나를 검사 부스로 들여보냈다.

부스 바깥에서 무언가를 체크하던 검사관은 고개를 몇 차례 끄덕이더니, 내게 미소를 지으면서 '나오셔도 됩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흐음, 각성 점수는 7점이네요. 대신, 성장 점수가 21점으로 나쁘지는 않습니다."

참고로 각성 점수과 성장 점수는 10,000점 만점이다.

물론, 10,000점에 도달한 헌터는 아직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초기 각성자 중 100점을 넘어가는 사례 역시 정말로 드물다고 한다.

검사관이 보여 준 초기 각성자의 평균 점수.

나는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평균 각성 점수가 4~50점대야?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결과에 그만 씁쓸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너무 실망하진 마세요. 현재 대한민국 헌터 서열 28위이신 강민철 헌터님도 초기 각성 때에는 평균 점수에도 미치지 못했으니까요. 성장 점수가 낮게 나왔지만, 박건혁 님께서는 얼마든지 강해지실 수 있으니, 부디 대한민국을 위해 그 힘을 보태 주십시오."

다른 의미로 해석하면 고기방패가 되어 달라.

그 말인가?

나는 그의 발언이 형식적인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협회에서 받은 카드 형태의 헌터증은 간단한 내용만이 기입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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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건혁

*출신 국가: 대한민국

*서열: 567,211위

*등록일: 2016.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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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8,397명 중 567,211위인가."

참고로 서열을 매길 때는 각성 점수에서 소수점 다섯 번째 자리까지 반영된다고 한다.

서열이 겹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

그보다 내 뒤로 1,100명이나 있구나.

물론, 내 위로는 567,000명이 존재하지만.

아쉽게도 주인공이 될 순 없는 모양이다.

1회차의 박수영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한민국 3대 은행 중 하나인 DH은행에 취직한다.

그리고 23살에 각성, 25살에 빙마궁주라는 이명을 얻어 서열 100위에 진입.

물론, 100위에 진입하자마자 마계와의 전쟁이 시작되어 그녀는 27살부터 29살까지 전장에서 활동하다 전사하게 된다.

"...말도 안 되는 먼치킨이잖아."

독자들 입장에서 주인공이 먼치킨이라는 요소는 매력적일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매력적인 요소 때문에 소설에 빠져들었었지.

하지만....

"정작 엑스트라 입장은 이렇게나 씁쓸한 거구나."

나는 헛웃음을 터트리곤 PC방에 들어가 헌터 협회의 사이트에 회원 가입을 진행했다.

헌터로 등록을 해 둔 덕분일까?

회원 가입의 절차는 간단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나는 서둘러 게이트 조사대의 모집 공고를 둘러봤다.

"흐음.... 역시 소설대로네."

 

제2화

2화. 여주인공의 아빠가 되었다 (2)

서열 500,000위 내에도 들지 못한 나는 게이트 조사대에 합류하여 짐꾼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조사는 당일치기 또는 1박 2일 등으로 다양하게 나열되어 있다.

당일치기 조사대의 짐꾼은 일급으로 20만 원을, 1박 2일로 함께하는 짐꾼은 일급 30만 원을 지급해 준다는 모양이다.

"일단, 경험 삼아 당일치기 조사대에... 아니, 그냥 1박 2일에 합류해 볼까?"

하루에 20만 원과 이틀에 60만 원.

60만 원으로 마음이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고심 끝에 1박 2일을 선택했다.

"그보다 레벨은 어떻게 올리지?"

물론, 레벨을 올리는 방법 자체는 알고 있다.

스테이터스 기능엔 도움말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타 생명체의 생명 에너지를 흡수하여 높일 수 있는 LV.

말 그대로 마수를 토벌하면 그 에너지를 흡수하여 경험치로 치환시킨다는 의미다.

레벨이 올라가면 어빌리티 포인트(AP)가 주어지는데, 해당 포인트로 근력과 민첩 등의 육체 능력 등을 상승시킬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운동이라는 단순한 방법으로도 근력과 체력을 높일 순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인족의 최대 능력치인 10까지가 한계다.

"뭐, 막노동이나 짐꾼이나 어차피 먹고살려면 돈은 벌어야 하잖아."

20대 초반에 생을 마감하게 된 나는 단 한 번도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게 부양해야 될 딸이 생겼다는 부분은 확실히 충격적이었고, 수영이에게 실제로 무언가를 해 줘야 하는지조차 의문이 일어났다.

PC방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자, 수영이 살짝 어깨를 움찔거리면서 나를 바라봤다.

건혁이라는 인물은 그녀에게 트라우마적인 존재일 것이다.

내가 다른 엑스트라로 환생했더라면 건혁을 수영에게서 떨어트리려고 했겠지.

"크흠, 내일부터 사흘간 집에 들어오지 않을 테니까, 밥은 알아서 챙겨 먹어. 김하고 고추참치, 그리고 김치도 사다 놨으니까. 그리고... 이건 필요한 데에 사용하고."

나는 식탁에 만 원짜리 다섯 장을 올려 두었다.

1회차를 경험했다면 식사 정도는 알아서 챙겨 먹을 수 있을 거다.

나는 수영과 눈이 마주치곤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건혁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그... 그동안 미안했다."

나는 그 한마디를 뒤로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내가 거주 중인 지하 방은 17평 규모에 방이 두 개나 존재했다.

부엌과 거실은 일체형이고, 화장실은 얼마나 오랫동안 청소를 안 했는지, 곰팡이로 지저분하더라.

'얼른 돈부터 모아서 이사를 가야겠어.'

내가 침대에 걸터앉은 순간.

스마트폰이 진동을 울렸다.

서초구 제11번 게이트를 조사할 유신 길드의 조사대로부터 전달받은 공지문.

짐꾼인 나는 맨몸으로 정해진 시간까지 게이트에 도착하면 된다.

풀썩.

공지문을 확인한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침대에 드러누웠다.

"후우, 살짝 기대되네."

소설로 읽어 본 미지의 존재들.

게다가 판타지적인 능력을 구사하는 헌터들까지.

웹 소설 마니아였던 나는 살짝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 * *

무영... 아니, 건혁이 잠에 든 그 시각.

수영은 1년간 비어 있던 밥솥에 새하얀 쌀밥이 채워져 있자 살짝 울컥하고 말았다.

부친에게 당해 온 학대는 몸과 마음이 기억하고 있다.

그를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용서할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미안하다'라니...."

전생의 부친, 박건혁이라는 존재는 사과를 모르는 그야말로 망나니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막노동으로 벌어 온 돈을 모두 도박으로 탕진하고, 유흥업소를 드나들면서 하루하루를 덧없이 소비하는 그러한 사내다.

그런 건혁이 며칠간 학대를 멈추자, 수영은 의아함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를 생각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강해질 수 있도록 훈련을....'

그녀는 건혁이라는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사흘간 집을 비운다는 건혁의 발언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단지, '또 도박장에 가려나 보네.'라고 생각했을 뿐.

하지만....

"...."

건혁의 말대로 소주로 가득했던 냉장고에는 마트에서 사 온 것인지, 김치가 용기에 담겨 있었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쓰레기통에서 김치 봉투를 발견했다.

그리고 냉장고 옆에 놓인 김 봉투와 고추참치 7캔.

"왜... 왜 갑자기 이런...."

그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마음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헌터는 만 17세부터 등록 신청이 가능했다.

때문에 고등학교를 진학하자마자 건혁으로부터 벗어날 생각이었던 그녀.

마음을 정리한 지는 오래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아니야, 잠시 동안의 변덕일 뿐일 거야. 반드시... 반드시 이 집을 벗어나고 말겠어."

주먹을 세게 쥔 채 입술을 깨문 그녀는 건혁의 변화를 믿지 않았다.

1회차에서 보여 준 건혁의 행동을 떠올리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겠지.

그녀는 건혁이 지어 둔 새하얀 쌀밥을 그릇에 푼 뒤, 김과 김치를 걸쳐 저녁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 * *

2016년 10월 18일, 서초구 내곡동 지역에 위치한 인릉산.

산의 중턱에서 개방된 제11번 게이트는 현재 유신 길드에서 관리 중인 D등급의 게이트다.

게이트 앞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정장을 입고 있는 남성 직원에게 헌터증을 내밀면서 짐꾼임을 자처했다.

그러자 그가 몇몇 조항들이 기입된 계약서 한 장을 건네주었는데.

"계약서이니 확인하고 사인하세요."

헌터 협회 직원과 상반되는 차가운 태도.

그들은 본인이 '갑'임을 잘 알고 있었다.

짐꾼 따위는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을'의 입장에서 순순히 계약서의 내용을 확인했고, 주의 사항과 짐꾼의 역할 내용들을 다시 한 번씩 살펴봤다.

"빨리 사인하세요. 곧 출발해야 하니까."

미간을 찡그리며 독촉하는 사내.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뒤, 사내는 콧바람을 불면서 거대한 가방을 내게 건네주었다.

"잘 들어야 합니다. 안에는 5인용 텐트 세 개가 들어 있거든요. 넘어지다가 고장 나면 그쪽이 책임지셔야 해요."

나처럼 처음으로 짐꾼을 해 보는 사람에게는 텐트 등의 저가 물품을 맡긴다.

포션과 같은 고가의 물건은 짐꾼들 중에서도 베테랑 짐꾼에게 건네준다.

참으로 기이한 사회였지만,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크으...."

"꽤 가벼울 거예요. 30kg 정도밖에 안 되니까요."

내가 처음인지라 30kg으로 맞춰 줬다는 직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짐꾼들은 평균 40~50kg의 짐을 들었고, 베테랑 짐꾼들은 최대 70kg 무게의 짐들을 들고 조사대와 함께한다는 모양이다.

"출발하겠습니다! 모두들 모여 주십시오!"

유신 길드의 조사대장, 한강윤.

그는 서열 20만대의 실력자다.

조사대에 참가한 길드원들 역시 30만대의 서열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게이트 내부는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위험 지대입니다. 독단적인 행동은 금하며, 절대로 방심하지 마십시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드디어 출발이다.

전생의 나는 현역으로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때문에 완전 군장을 한 채 행군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을 오늘 몸소 깨닫게 되었다.

'제길... 제길... 제길....'

진심으로 욕밖에 안 나온다.

무기를 쥔 채 가벼운 모습으로 앞서 나가는 30여 명의 헌터들.

게이트를 들어온 직후, 나는 신기한 마음에 감탄사를 터트렸다.

산속이었던 주변 환경이 푸르스름한 타원형의 에너지 속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한순간에 동굴로 뒤바뀌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동굴의 벽면에선 난생처음 보는 광석들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누군가는 저것을 채굴하여 비싼 값에 팔아먹으려고 했지만, 해당 광석은 채굴함과 동시에 마력 하나 담겨 있지 않은 돌멩이가 되고 만다는 모양이다.

다시 말해 그렇게 높은 가치는 없다는 의미다.

"시X... 시X... 시X.... 언젠가 반드시 성공하고 말겠어."

게이트에 들어서고 대략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내 옆에서 욕설을 중얼거리며 밝은 미래를 다짐하는 한 짐꾼이 보였다.

그 역시 나처럼 초보 짐꾼인 것인지, 숨을 상당히 헐떡이고 있었다.

내가 잠시 숨을 고르던 순간, 모두가 강윤의 수신호에 맞춰 발걸음을 멈추었다.

"전투 준비!"

전방에서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

나는 눈을 크게 뜨면서 전투 광경을 지켜봤다.

"방패!"

강윤의 외침과 동시에 방패를 쥔 헌터들이 앞으로 나아갔다.

-캬아아아악!

신장 1m에 늑대 얼굴을 지닌 이족 보행의 마수.

PC방에서 확인한 코볼트의 사진과 일치했다.

다섯 마리의 코볼트는 마치 짐승인 마냥 헌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쾅!

방패로 놈들의 돌진을 막아 낸 헌터들.

이어, 뒤에서 대기 중이던 헌터들이 순식간에 코볼트의 목을 베어 냈다.

서걱!

깔끔하다는 단어 이외의 말은 필요 없었다.

뚝뚝, 바닥으로 떨어지는 붉은 핏물.

난생처음으로 목격한 살육 현장에 살짝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짐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아니, 헌터를 계속하기 위해선 고작 이 정도의 현장에 고개를 돌릴 순 없겠지.

나는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전투 장면을 두 눈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었다.

"아저씨, 오늘이 처음이라고 하던데...."

아까까지 욕설을 중얼거리던 젊은 청년이다.

내가 아저씨라고 불리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네.

"적어도 살이나 빼고 참가하시지.... 그보다 땀도 엄청나네. 사회에서 도대체 뭘 하다가 들어온 겁니까?"

"작은 회사를 다녔었습니다."

"흐음,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런 힘든 일을... 아, 회사에서 잘려서 이쪽으로 온 거죠?"

개념을 밥 말아 먹은 녀석인가?

그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우월감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아저씨 나이에는 분명 서열 30만 위 내에는 들어가 있겠네. 그러면 나도 저 새끼들처럼 가볍게 걸어 다닐 수 있으려나?"

그가 꿈꾸는 밝은 미래에 나는 함부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말한들 그의 미래가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의 말투에 살짝 짜증이 난 나는 미간을 찡그리면서 전방을 주시했고, '휴식 시간입니다!'라는 강윤의 외침에 작게 한숨을 토해 냈다.

"후우...."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적셔졌다.

30kg의 가방을 어깨에 멘 채 두 시간 동안 이동한다고 생각해 보아라.

체력도 저질인 이 육체로.

지치지 않는 게 이상하겠지.

한편, 짐꾼들과 달리 헌터들은 멀쩡한 얼굴로 걸어 다니고 있었다.

두 시간 동안 헌터들은 대략 6번의 전투를 치렀고, 전투 한 번 한 번이 10~15분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저 가방에만 수백만 원이 들어 있는 셈인가.'

나는 한 짐꾼의 가방을 지그시 바라봤다.

유신 길드에 정규직으로 고용된 짐꾼.

그의 가방에는 코볼트의 마석이 담겨 있다.

세계 헌터 협회는 코볼트라는 마수를 D랭크로 책정했다.

한국에선 마리당 2~30만 원 정도에 거래되고, 그중 마석이 15~20만 원 정도의 가치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정상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짐꾼의 발걸음도 따라 줘야 할 터.

때문에 헌터들은 사체를 제외한 마석만을 회수하는 모양이다.

 

제3화

3화. 짐꾼 (1)

"자,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강윤의 목소리에 짐꾼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벌써 출발한다고?

불만으로 가득 찬 그들의 얼굴.

하지만 누구 하나 반발하지 않았다.

이대로 무일푼으로 돌아갈 순 없지 않은가.

나 역시 '나는 이미 죽은 몸이다.'라는 생각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하아... 하아... 하아...."

두 시간의 행군과 30분의 휴식을 4차례나 반복한 조사대.

강윤은 수십 미터 지름의 공터에 도착한 다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대원들을 비잉 둘러봤다.

"오늘 조사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내일은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예정이니, 전원 최대한 휴식을 취해 두십시오."

드디어 끝이다.

아직 내일이 남았지만, 오늘은 이제 걷지 않아도 된다.

나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때.

"아저씨, 얼른 텐트 펼쳐야지!"

어느 젊은 헌터가 나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면서도 순순히 가방에서 텐트를 꺼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구나.

고작 텐트를 펼치는 데에만 1~2시간이 소요됐다.

도대체 언제쯤 쉴 수 있는 거야!?

텐트가 모두 펼쳐질 무렵, 헌터들이 텐트 안을 마음껏 드나들었다.

"아, 수고하셨어요."

내게 인사를 건네며 텐트로 들어간 한 여성.

헌터들 중에서도 그나마... 그래, 그나마 가장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내게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해 준 헌터는 한 명도 없었으니 말이다.

참고로 점심 식사와 저녁 식사는 주먹밥 하나와 컵라면 하나가 전부였다.

그리고 짐꾼인 내 잠자리는 3인용 텐트였는데.

"제길."

3인용 텐트에서 5명의 짐꾼이 다닥다닥 붙어서 자야 한다니!

땀 냄새가 진동하는 텐트 안.

나는 속으로 욕설을 터트리면서 '그냥 당일치기로 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로 하룻밤을 지새웠다.

* * *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나는 하루가 지나자마자, 곧바로 텐트를 정리하기 위해 발걸음을 움직였다.

"...."

텐트 내부를 들락거리는 헌터들.

그 때문에 나는 몇 분을 기다려야 했다.

강윤이 10분 뒤에 출발하겠다고 선언하자, 나는 서둘러 텐트를 정리하고 가방에 담았다.

다급한 내 모습에도 누구 한 명 도와주지 않았다.

헌터들끼리는 작게나마 동료 의식이 존재하지만, 짐꾼들은 그야말로 개인주의였다.

'나 같아도 생판 모르는 남한테 도움을 주진 않겠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짐을 정리했다.

"빨리빨리 해 주세요! 서둘러 출발해야 합니다!"

강윤이 재촉하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아니, 도대체 아까까지 뭘 하고 있었기에...."

어느 젊은 헌터의 중얼거림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너희들이 들락거리는 바람에 정리를 못 했던 거잖아!

그러나 그 발언은 속으로 삼켜야 했다.

나는 '을'이니까.

"출발하겠습니다!"

내가 짐을 모두 정리하자 강윤이 출발을 선언하며 대원들을 선두에서 이끌기 시작했다.

심부를 향해 나아가는 헌터들.

나는 그 뒤를 따르면서 '젊은 새끼들이....'라는 식으로 욕설을 터트렸다.

그렇게 땀 냄새가 나는 짐꾼들과 함께 걸으면서 마침내 동굴의 최심부에 도착하게 되었다.

"...여기가 보스룸인가."

거대한 강철의 문을 쓰다듬는 강윤.

"지연아."

"네, 지도는 그려 뒀어요."

내부를 살펴보진 않는 모양이다.

솔직히 게이트 내부, 즉 던전의 보스가 얼마나 강력한지 궁금했다.

실제로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굳이 죽음을 재촉할 필요는 없겠지.

강윤은 지연이라는 여성 헌터가 그린 지도를 살펴봤다.

"좋아, 이제 그만 물러나도록 하죠."

강윤이 모두를 선도하며 귀환하려던 순간.

콰앙!

등 뒤에서 거대한 폭음이 일어났다.

정확히는 보스룸의 방향에서다.

대열의 후위에 서 있던 내 등 뒤에서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

나는 폭음과 함께 바닥을 뒹굴면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보스룸을 굳게 닫아 주고 있었던 거대한 철문이 어제 그 건방진 청년을 덮쳐 버린 모양이다.

"으... 으아아악!"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바닥에는 청년의 머리만 남아 있을 뿐.

그 외의 신체는 확인되지 않았다.

"미... 미노타우로스?!"

"왜 B랭크 마수가 여기에...!"

당혹감 섞인 헌터들의 목소리.

그중 조사대장인 강윤은 눈을 크게 뜨면서 소리쳤다.

"다... 달리세요! 당장 도망쳐야 합니다!"

-쿠워어어어어어어!

놈이 보스룸을 빠져나온다.

소설 속 그대로 황소 머리를 가진 신장 5m의 거인형 마수.

녀석의 쩌렁쩌렁한 포효에 몸을 움찔 떨었다.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땐....

"아... 아...."

헌터와 짐꾼들 모두가 도망간 상태였다.

어젯밤 떠올렸던 후회가 다시금 내 머릿속을 강타했다.

'역시... 당일치기로 했어야 했는데.'

난생처음으로 살기란 것을 느껴 본다.

미노타우로스가 흘려 대는 진득한 기운.

내 얼굴은 사색이 되고 말았다.

이게 살기라는 것이구나.

나는 공포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뒤늦게 눈치챘지만, 소변을 지려 버린 모양이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따스한 액체.

하지만 당장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녀석의 붉은 안광이 나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으니 말이다.

"사... 살려...."

죽기 전 엑스트라들이 내뱉는 전형적인 대사.

나는 가방을 몸 앞으로 가져오면서 몸을 떨었다.

그런 내 모습을 비웃듯 녀석이 오른손에 쥔 거대한 대검을 들어 올렸다.

"으... 으아악!"

옆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비명 소리.

나 외에도 도망가지 못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비명을 내지름과 동시에 곧바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크릉... 쿠워어어어어!

달아나는 상대를 죽이고 싶었던 것일까?

미노타우로스는 도망가는 젊은 짐꾼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나 역시 비틀거리는 다리로 다급히 일어났다.

후방에는 미노타우로스.

전방에는 보스룸.

"이... 일단은...."

어차피 뒤로 간다면 방금 그 소 대가리 녀석에게 죽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보스룸에서 숨을 장소를 찾아보는 것이 낫겠지.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달리 숨을 장소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보스룸의 내부는 그야말로 공터(空攄).

직경 20~30m에 육박하는 거대한 직사각형의 공터였다.

"이... 이런 망할."

정말 이대로 끝인가?

-쿠워어어어!

뒤에서 들려오는 녀석의 포효 소리에 나는 어깨를 움찔거리면서 곧바로 주변을 살펴봤다.

간혹 던전의 내부에는 비밀의 공간이 숨겨져 있다.

실제로 소설 속의 박수영이 그 비밀 공간 덕분에 목숨을 건진 적도 있으니까.

쿵... 쿵... 쿵... 쿵....

녀석이 다가오고 있는 걸까?

도저히 사람의 발걸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진동과 소리에 내 심장이 점점 두근거렸다.

벽을 만져 보던 나는 손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녀석의 발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내 심장은 마치 고장이라도 난 듯 폭주하였다.

쿠웅!

보스룸으로 돌아온 미노타우로스.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녀석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니, 나만 그렇게 느꼈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살기에 나는 당장 무릎이라도 꿇고 싶어졌다.

"제... 제발...."

나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내게 천천히 다가오는 녀석.

덜컥.

무슨 소리지?

내가 자리에 주저앉은 순간, 무언가가 손에 걸렸다.

작은 홈이 만져진 것이다.

나는 그 홈에 손가락을 넣었다.

그러자 바닥이 살짝 들썩거렸는데.

"버... 버튼...!"

바닥을 살짝 들추자, 작은 버튼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릉!

당황한 건가?

미노타우로스의 발걸음이 살짝 빨라진 거 같다.

-쿠워어어어!

"으... 으아악!"

나는 지체할 것 없이 버튼을 눌렀다.

바닥에 새겨진 수많은 아라비아 숫자와 기괴한 문자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름 3m가량의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쓔욱!

눈앞에서 미노타우로스가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이다.

"하... 하하하.... 이동 술식... 인가?"

이동한 곳은 특별히 숨겨진 공간은 아닌 모양이다.

어제오늘 걸어 다녔던 던전의 내부.

나는 동굴의 통로 한가운데로 이동했다.

지금 당장 죽지는 않겠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이상, 나는 언젠가 마수들의 먹이가 되어 버리리라.

"제기랄."

절망감.

그래,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절망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텐트는 보스룸의 앞에 내던지고, 두 손에는 무기 하나 들려 있지 않았다.

마수들의 먹이로서 게이트 안에 던져진 기분이랄까?

"하하...."

때마침 마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 킬러 레빗."

E랭크로 지정된 소형 마수.

외형은 토끼를 닮아 귀여운 부분이 있지만, 앞발에 달린 날카로운 칼날은 베테랑 헌터들조차 쉬이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녀석의 주변을 살펴봤다.

"한 마리."

그래, 한 마리다.

눈동자에 희망이 감돌았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으득!' 이를 갈았다.

"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제기랄, 덤벼 봐! 이 새X야!"

내 외침에 녀석이 '캬아아악!'이라는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내던졌다.

쓔와아악!

나는 황급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녀석의 앞발이 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눈앞에 휘날리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

나는 등 뒤로 날아간 녀석에게 재빨리 달려들었다.

-캬아아아아악!

먼저 녀석의 앞발을 붙잡았다.

손바닥에서 고통이 느껴진다.

살짝 베인 건가?

이어, 녀석이 날카로운 이빨로 내 오른손을 물어뜯었다.

콰직!

"으아아아아악!"

나는 비명을 질렀다.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의 고통.

이 정도의 고통은 전생에 죽기 직전 빼고는 경험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일까?

나는 눈동자에 핏발을 세운 채 녀석의 머리를 세게 깨물었다.

콰득!

-...!?

녀석이 잠시 행동을 멈추자, 나는 녀석의 앞발을 강제로 움직였다.

서서히 녀석의 목덜미로 향하는 앞발.

푸욱!

칼날처럼 날카로운 앞발이 녀석의 목을 꿰뚫었다.

녀석의 무기로 녀석을 죽인 것이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까?

녀석이 기력을 잃은 듯 몸을 축 늘어트렸다.

"크아아아악!"

아드레날린이 분비된 덕분에 고통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뒤늦게 찾아온 통증에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을 뒹굴었다.

엉망이 되어 버린 두 손.

도대체 헌터라는 존재가 무엇일까?

웹 소설로부터 느꼈던 재미와 흥미에 헌터라는 직업을 과소평가하지 않았을까?

나는 후회와 반성을 거듭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죽은 킬러 레빗의 앞발을 이용해 티셔츠를 찢어 손바닥을 감았다.

"이 녀석은...."

녀석의 힘줄로 뼈와 앞발을 묶어 작은 단도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조그마한 마석 역시 주머니에 챙겨 뒀다.

"돌아가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영의 얼굴.

"후우, 스테이터스."

혹시 하는 생각에 스테이터스를 확인했지만, 아쉽게도 레벨은 그대로 1이었다.

E랭크 마수 한 마리로는 경험치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 봐야 시간만 허비할 뿐이다.

게다가 마수들이 몰려올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출입구를 찾아 몸을 움직이는 것이 낫겠지.

 

제4화

4화. 짐꾼 (2)

건혁이 집을 비우고 사흘째가 되는 날.

저녁 식사를 먹으며 뉴스를 보고 있던 수영은 갑작스러운 급보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방금 전에 들어온 소식입니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제11번 게이트에서 미노타우로스가 출현했습니다. 사망자 3명, 실종자 2명이 발생하여 유신 길드에서는....

간혹 낮은 등급의 게이트에서 출현하는 높은 랭크의 마수.

게이트 내부에서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다.

하지만 실종자 가운데 공개된 사진과 이름이....

"아... 아빠?"

그녀의 부친인 박건혁이었다.

식사를 멈추고 벌떡 일어난 수영.

그녀는 서둘러 건혁의 침실로 들어갔다.

집에 단 한 대뿐인 노트북을 사용하기 위해서다.

인터넷에 접속한 그녀는 서둘러 서초구 제11번 게이트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기사를 찾아봤다.

"마... 말도 안 돼. 아빠가 각성자였다고? 그보다 왜 게이트에...."

1회차에서 볼 수 없었던 건혁의 행동에 수영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 * *

푸욱!

-...크엑... 크....

코볼트의 가슴을 파고들어 간 단도.

나는 킬러 레빗을 사냥하여 여러 개의 단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단도를 투척하는 등의 형태로 코볼트를 사냥했고, 그렇게 얻은 코볼트의 뼈를 사용하여 기다란 창을 제작했다.

"됐다."

바지의 밑단과 점퍼를 찢어 만든 포대.

나는 무기들을 포대에 담아 이동했다.

꼬르륵.

"X발...."

최소한 불이라도 있었더라면 킬러 레빗을 구워서 먹었을 텐데.

실제로 토끼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던가.

먹어 본 적은 없지만, 공복을 견디기 위해선 그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생고기를 그대로 먹을 순 없잖아."

생고기의 경우 기생충과 병균 등이 죽지 않아, 꽤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함부로 생고기를 먹는 것은 위험하겠지.

그러나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킬러 레빗의 생고기를 포대에 챙겨 두었다.

죽기 직전 바로 먹을 수 있도록 말이다.

나는 생고기를 살펴보면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냥 먹을까?

침을 꿀꺽 삼켰다.

짜악!

뺨을 때리며 이성을 되찾았다.

생고기를 먹는 건 정말 죽을 것 같을 때.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을 때 먹어야 한다.

생고기를 먹다 복통으로 죽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래도 지금은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한숨을 토해 냈다.

"후우,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 보자."

현재 내 레벨은 7.

레벨이 한 단계씩 오를수록 어빌리티 포인트 역시 1씩 획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7레벨이 되면서 얻은 6AP는 모두 근력과 체력에 나누어 분배했다.

약간이긴 하지만 실제로 힘이 강해진 느낌이 있다.

단도를 투척할 때나 창을 휘두를 때 그 감각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흐읍!"

푸욱!

-캬아아악!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최대한 단도를 투척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물론, 그 숫자가 다섯을 넘어간다면, 뒤로 물러나 다른 길로 우회해야겠지.

그렇게 지나온 통로는 벽에 X자로 흔적을 남기면서 게이트 내부를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다리가 아프고 공복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시선이 서서히 킬러 레빗의 생고기로 향할 무렵.

"우... 우오오오!"

짐꾼들이 버리고 간 가방을 발견하게 되었다.

심지어 가방 내부에는 주먹밥과 컵라면, 그리고 생수로 가득했다.

그야말로 신께서 내려 주신 행운!

"이 가방이 여기에 있다는 건...."

보스룸까지 그리 멀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식량이 먼저다.

나는 서둘러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도대체 몇 시간... 아니, 며칠을 공복으로 견뎠을까?

이후 은박지를 뜯어 주먹밥을 먹으며, 보온병에 담긴 뜨거운 물을 컵라면에 부었다.

마침내 찾아온 행복한 시간.

음식을 먹으며 꿈과 같은 기쁨을 느끼던 그 순간.

쿠웅!

"...."

바닥에서 거대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리자,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이 게이트의 주인인 미노타우로스가.

녀석이 100m 정도의 거리에서 나를 매섭게 노려본다.

그에 우물거리던 주먹밥을 꿀꺽 삼켜 버렸다.

-쿠워어어어어!

저번보다 더욱 우렁차면서도 살기로 가득한 포효.

나는 주먹밥과 컵라면을 내던지면서 가방을 주워 들었다.

가방은 발견했을 때보다 살짝 무거워져 있었다.

포대에 담아 둔 무기들을 가방의 내부에 담아 둔 탓이다.

나는 녀석이 달려오기 시작하자, 가방을 어깨에 들쳐 메고 달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쿵! 쿵!

계속되는 진동과 녀석의 거대한 발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까지 싸워 온 놈들과 차원이 다르다.

발길질 한 번에 전신이 박살 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나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가방에 넣어 둔 단도를 꺼내 뒤로 던졌다.

쓔욱!

녀석에게 제대로 날아갔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두 번째 단도를 던졌을 때 슬쩍 고개를 돌아보았다.

"이... 이런 제기랄!"

단도는 확실히 녀석에게 직격했다.

하지만, 녀석의 가죽을 뚫지 못하고 힘없이 튕겨 나간 단도.

달리는 속도를 아무리 높여 봐도 녀석으로부터 달아날 순 없었다.

구조대가 와 주기를 바랐지만....

"으아앗!"

희망적인 기대를 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가 않다.

나는 가방에서 단도와 창을 하나씩 꺼내 들었다.

그러곤 가방을 옆으로 던졌는데.

뒤로 돌아본 순간.

어느새 내 등 뒤로 다가온 것인지, 녀석은 이미 대검을 높이 들어 올린 상태였다.

나는 뒤로 물러나는 것보다 앞으로 먼저 발을 내디뎠다.

콰아앙!

대검으로 화려하게 바닥을 내리찍은 미노타우로스.

"죽어!"

녀석의 가랑이 사이를 뒹굴었던 나는 놈의 등 뒤에서 창을 내질렀다.

푸욱!

창끝은 분명 녀석의 등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묵직함은... 도대체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크르르....

창끝에서 핏물로 보이는 붉은 액체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뚫은 것은 녀석의 가죽뿐.

아니, 가죽조차 제대로 꿰뚫지 못했다.

"미... 미친."

게임을 즐겨 하던 전생에서도 나는 욕설을 최대한 삼갔다.

게임에서 지더라도 짜증만 낼 뿐, 욕설에 관해서는 조심스러웠었는데.

게이트에 들어와서부터 욕설의 사용 빈도가 크게 늘어났다.

-쿠워어어!

퍼억!

녀석의 발길질이 내 복부에 직격했다.

눈이 번쩍여질 정도의 충격.

"커헉...!"

녀석에게 걷어차인 나는 5~6m 정도 날아갔다.

숨이 막힐 정도의 충격에 헛구역질을 해 댔다.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장기가 꼬인 것 같다.

그렇게 다시 한번 녀석에 대한 공포가 뇌 속에 각인되었다.

덜덜덜 떨리는 두 팔.

왼손은 끝까지 단도를 놓지 않았으나, 이 작은 검으로 녀석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콜록... 콜록...! 자... 잠깐...."

녀석이 내 말을 들어줄 리는 없겠지.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나를 죽이기 위해 다시 한번 대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죽음을 앞두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빙의하고 며칠이 됐다고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한단 말인가.

차라리 몇 년이라도 살고 레이드에 휘말려 죽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근데, 왜 수영의 얼굴이 떠오르는 거지?

이럴 때는 주마등처럼....

'...?'

뭐지?

벌써 죽은 건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죽었다고?

아쉽게도 내게 두 번째 죽음은 찾아오지 않았다.

촤아아아악!

나는 힐끔 눈을 떴다.

순식간에 고기 조각이 되어 버린 미노타우로스.

이게 무슨....

"괜찮으세요?"

내게 다가오는 흑발의 여인.

은색 갑옷을 착용하고 푸른빛이 감도는 검을 오른손에 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잠시나마 넋을 잃고 말았다.

"...."

"저는 유신 길드의 신민영 헌터입니다. 살아 계셔서 정말로 다행이에요."

이어서.

"새... 생존자다! 생존자가 있어!"

신민영이라는 헌터 외에도 다른 헌터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유신 길드에서 편성한 구조대.

잠시 뒤, 40대로 보이는 중년 헌터가 내게 다가왔다.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와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기백.

무심코 침을 한 번 삼켜 버렸다.

그는 내 왼손에 쥐어진 단도와 주변에 널브러진 창들을 살펴보면서 마치 감탄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박건혁 씨가 맞습니까?"

"...네, 제... 제가 박건혁입니다."

"저 무기들은...."

무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조잡하다.

그러나 저것들은 내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설마, 킬러 레빗과 코볼트의 뼈로 만든 겁니까?"

멀리서 살펴본 것만으로 그걸 알아챈다고?

그만큼 눈에 익어 있다는 의미일까?

나는 그의 물음에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 힘줄로 킬러 레빗의 앞발과 뼈를 연결시켜서...."

"허어...."

사내는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기가 막힌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신기한 일일까?

나는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기 위한 일이다.

누구라도 나처럼 했을 것이다.

잠시 뒤, 그의 시선이 내 양손으로 향했다.

"호철아!"

"예, 부르셨습니까."

"가져온 포션 있지? 어서 드려라."

"알겠습니다."

호철이라 불린 헌터는 본인이 가져온 작은 배낭에서 포션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그대로 복용하시면 됩니다."

50mL의 플라스틱병에 담긴 붉은 액체.

포션에도 등급은 존재한다.

1등급부터 5등급까지.

참고로 1등급 포션의 경우에는 제조가 어렵고, 필요한 재료 역시 만만치 않아 미국에서만 생산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지금 내게 건네진 것은 5등급 포션.

시중에서 100만 원으로 구매할 수 있는 물약이다.

가능하면 가져다가 팔아 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간 도로 가져가 버리겠지.

꿀꺽.

나는 포션을 한입에 들이켰다.

애초에 50mL밖에 안 되는 소량이라, 한입에 먹기에도 부족한 양이다.

"상처가 모두 치료되려면 적어도 1~2시간 정도는 기다리셔야 합니다. 포션의 경우에는 인체에 필요하지 않은 세균들도 제거해 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 그렇군요."

간암과 위암 등의 암조차 3등급 포션을 지속적으로 복용하는 것으로 완치시킬 수 있다.

심지어 1등급 포션을 사용하면 잘려 나간 팔과 다리, 또는 시각 장애인의 시력조차 되살릴 수 있다고 한다.

포션의 등장으로 의사들의 존재는 크게 희미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포션의 금액이 금액인지라 현금이 부족한 사람들은 대개 병원을 찾아간다.

저벅, 저벅, 저벅.

나는 호철이라는 헌터에게 부축을 받아 게이트의 출입구까지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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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건혁

*종족: 인간

*칭호: -

*출신 국가: 한국

*LV: 9

*근력: 11

*민첩: 6

*체력: 11

*마력: 0

*AP: 1

*스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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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도라는 것도 존재하는 건가?'

미노타우로스의 죽음으로 나는 레벨을 한 단계 높일 수 있었다.

분명, 죽인 것은 신민영이라는 여성이었을 터.

RPG 게임처럼 기여도에 따라 경험치가 분배될지 모른다는 추측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민첩이 올랐네.'

스테이터스를 멍하니 살펴보면서 게이트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런 나를 반겨 준 것은 다름 아닌 수영이었다.

그녀의 마중에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가능하면 비밀로 할 생각이었는데....'

수영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겠다.

죄책감.

그래, 내가 저지른 행동은 아니지만, 건혁의 기억들이 머릿속에 들어오면서 그녀를 향한 무거운 죄책감이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고 있었다.

심지어 1회차에서 건혁이 저지른 만행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저 아이와 눈을 마주치겠는가.

"따님... 아니신가요?"

호철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돌리면서 대답했다.

"...맞습니다."

게이트에서 내가 나옴과 동시에 수영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져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회피한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 꼴이 뭐야?"

"...."

"집에 가자."

초등학교 2학년생에게 위로를 받는 이 기분은 뭘까?

헛웃음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울컥한 나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이어,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마수들과 싸우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주마등처럼 전생의 과거가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른 건 전생의 가족들도 아닌 바로 박수영이다.

왜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 세상을 관리하는 누군가의 조작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에게 죄를 빌고 싶었다.

"크흑.... 아... 아빠가 미안해. 아빠가...."

내 어깨 뒤로 수영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끅끅거리는 수영의 울음소리에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고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눈물을 쏟아 내면서 나를 원망스레 바라보는 수영.

하지만....

"으아아아아아아앙!"

그녀가 울음을 터트리자, 나 역시 눈물을 쏟아 내면서 다시 한번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울음을 터트린 나와 수영의 모습을 열심히 촬영하는 기자들.

그들은 촬영을 진행하면서도 고개를 홱 돌리면서 눈가를 훔쳤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나는 게이트 안에서 나흘이라는 시간을 보냈던 모양이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정말로 기겁하는 줄 알았었지.

게이트의 내부에선 시간 개념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으니까.

 

제5화

5화. 짐꾼 (3)

"아빠, 하... 학교 다녀올게요."

"그래, 조심히 다녀와."

실종 사건을 계기로 나와 수영은 조금이나마 가까워질 수 있었다.

매일같이 내게 두려움을 느끼던 작은 소녀는 천천히... 그래, 천천히 내게 마음을 열었다.

아니, 전생을 기억하고 있기에 더욱 빠르게 마음을 열어 보인 걸지도 모른다.

나는 유신 길드로부터 보수였던 60만 원을 입금받았다.

그리고 사후 처리로서 내게 5등급 포션과 보상금 3,000만 원을 지급해 준 유신 길드였다.

나는 그들의 보상을 사양하지 않았다.

3,000만 원이라는 거액을 마다할 수 있을 정도로 내 생활 환경은 좋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해당 내용이 기사화되면서 내게 건네준 보상이 유신 길드라는 조직의 이미지 관리를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나야 좋지만...."

내 신상은 공개되지 않으면서 보상을 받고, 유신 길드는 이미지를 관리하고.

그야말로 윈윈이라고 해야겠지.

물론, 언론에서는 사람의 목숨값이 고작 3,000만 원이냐면서 비난의 목소리도 적지는 않았지만, 헌터는 항상 죽음에 대한 위험을 동반하는 직업이다.

내겐 3,000만 원도 감지덕지다.

"일단, 보험부터 가입해 두자. 그리고 마석들도 처분해야지."

나는 헌터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유명 보험사에 가입한 뒤, 대한민국 헌터 협회 게이트 처리 관리소 서초점을 방문하여 마석들을 모두 처분했다.

"E랭크 마석 7개, D랭크 마석 3개. 도합 139만 원이 되겠습니다. 헌터증을 건네주시면 헌터증에 기입된 은행 계좌로 입금을 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헌터증을 건네주었다.

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이 작은 진동을 울렸다.

스마트폰을 통해 은행 계좌에 139만 원이 입금되었음을 확인하곤 바로 자리를 벗어났다.

참고로 대기업과 길드에서 역시 마석을 매입하고 있다.

정부의 허가에 의해.

그러나 굳이 그런 곳까지 방문할 필요는 없겠지.

'A랭크 마석이라면 모를까, E랭크와 D랭크 마석으로는... 거기서 거기니까.'

그렇게 마석을 처분한 다음, 중구에 위치한 헌터 협회 서울 중앙 본부를 방문했다.

"711번 고객님, 19번 각성 능력 검사실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직원의 친절한 안내에, 나는 발걸음을 옮겨 19번 각성 능력 검사실로 들어갔다.

"흐음.... 정말로 각성 능력치를 검사하기 위해 오신 건가요?"

"네."

검사관의 떨떠름한 표정에 나는 쓰게 웃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이라도 서열을 높여야 돼.'

초기 각성자들은 일거리를 찾기 쉽지가 않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성장한 낌새가 보인다면, 곧바로 각성 능력치를 측정하여 서열을 높였다.

서열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일거리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니까.

물론, 각성 능력 검사는 매달 1회만 가능했기에 대부분의 헌터들은 헛돈을 사용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검사 일자를 정해 두었다.

그런데....

"...일단, 부스 내부로 들어가 주십시오."

초기 각성 검사를 받은 것이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그런데 초기 각성 검사에 이어 각성 능력 검사를 같은 달에 받는다고?

검사관으로선 의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내 경력은 유신 길드의 조사대에 짐꾼으로 참가한 것뿐.

단 하나의 경력으로 각성 능력치 검사를 요청하다니.

검사관은 '뭐, 초기 검사가 잘못됐다고 믿고 싶었던 거겠지. 돈만 날린 셈이겠지만....'이라 생각하면서 검사 데이터를 확인했다.

"어... 어라?"

데이터를 확인한 검사관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끝났나요?"

"아... 네, 끝났습니다. 각성 점수는... 17점입니다."

그는 말을 더듬었다.

17점이 높은 점수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높은 점수는 아니겠지.

만점이 10,000점이니 말이다.

"...대단하시네요. 어떻게 이런 단기간에...."

아무래도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다.

"서열은 언제쯤 확인이 가능할까요?"

"서열의 갱신은 매달 1일에 진행됩니다. 헌터증이나 홈페이지에서 곧바로 확인이 가능합니다."

"그렇군요. 그럼, 이만 돌아가도 괜찮을까요?"

"아, 네.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검사실을 빠져나와 버스에 올라탔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트를 들렀는데.

마석을 처분하면서 얻은 139만 원.

모처럼 거금이 손에 쥐어졌으니....

"그래, 한우도 한 번쯤은 먹어 봐야지."

나는 한우 300g과 찌개용 돼지고기 500g을 고른 뒤, 대파와 양파 및 마늘과 간장 등, 냉장고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려 65만 원어치의 식자재와 간식들을 구매했다.

물론, 이 많은 것들을 들고 갈 순 없다.

나는 배달을 요청했고, 소고기와 콜라 등의 오늘 저녁에 먹을 것들만 봉투에 담아 집으로 돌아갔다.

* * *

덜컥, 끼이이익.

삐걱거리는 현관문.

나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안 왔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수영이 방문을 열고 슬쩍 얼굴을 내밀었다.

"하하.... 있었구나. 오늘 저녁은 아빠가 준비해 줄게."

"...."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간 그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내 착각인 모양이다.

뭐,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단지, 조금이라도 웃어 준다면....

덥석.

식탁에 식자재를 꺼내던 도중 내 다리에 무언가가 달라붙었다.

고개를 내리자.

"수... 수영아?"

"이제 술 안 마실 거야?"

그녀의 작은 목소리에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 마실 거야."

"집에도 매일매일 들어올 거고?"

"그건... 조금 상황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아빠가 열심히 돈을 벌어야 우리 수영이 맛있는 밥도 해 주고, 옷도 사 줄 수 있으니까."

"...."

침묵한 그녀의 모습에 나는 두 눈을 감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가능하면 매일매일 집에 들어올게."

그런 내 대답에 수영이 오른손을 뻗어 왔다.

"손가락 걸기."

"그래, 손가락 걸기."

수영의 조그마한 새끼손가락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약속 어기면 절대로 안 돼."

"그래, 알겠어. 그동안 아빠가 나쁜 짓 해서 미안해. 용서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앞으로... 더 잘할 테니, 조금만 믿어 줄 수 있을까?"

그녀는 내 다리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마워. 아, 그리고 오늘 저녁 식사는...."

그래, 이 아이가 내 딸이다.

죽은 아내가 남기고 간 소중한 아이.

지금까지, 그리고 미래에서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는 평생 동안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자.

나는 신무영임과 동시에 박건혁이니까.

수영이와 함께하게 된 오랜만의 저녁 식사.

최고급 한우는 입안에서 살살 녹아내렸다.

나는 술을 대신해 콜라를 마셨고, 수영이에겐 오렌지 주스를 건네주었다.

"흐음, 다 끓었네."

자취 생활에서 수시로 해 먹었던 돼지고기 김치찌개의 최고급판.

수영이는 찌개를 한 번 맛보면서 눈을 크게 떠야 했다.

"마... 맛있어."

"다행이네."

나는 뿌듯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한우를 기름장에 찍어 먹는 수영은 정말로 맛있다는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저 아이는 저렇게 미소를 지을 수 있었지.

박건혁의 기억을 더듬다 보면 수영이가 마지막으로 웃은 게 언제였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다음 소식입니다.

TV에서는 중국의 어느 지역에서 발생한 레이드를 보도하고 있었다.

'원작에서는 수영이가 중학교 2학년 때 레이드가 발생했었어. 그렇다면....'

나 역시 나름대로 준비를 해 둘 필요가 있으리라.

해당 사건은 내 죽음과 직결되는 문제니까.

잠시 뒤, 마트에서 주문해 둔 식자재들이 도착했다.

"쌀은... 이쪽에 둬야겠네. 이건 냉장고에...."

20kg의 쌀 포대가 생각보다 살짝 가벼운 느낌이다.

이것도 스테이터스의 능력치가 반영된 효과겠지?

나는 식자재와 간식들을 정리한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서랍장에서 꺼낸 작은 노트.

"적어도 이 주일 동안 수영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모두 해 주자."

이 주일 뒤, 11월이 되면 내 서열도 조금은 올라가 있으리라.

그때, 새로운 일을 찾아봐도 되겠지.

그리고 그 전까지는 최대한 수영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마음을 먹은 나였다.

노트에 차곡차곡 채워 나가는 항목들.

수영의 낡은 옷과 신발도 새로운 것으로 사 줘야 하고, 이사할 만한 집도 알아봐야 한다.

"월세가 조금 높더라도 최대한 깨끗한 집을 알아봐야겠어."

어차피 그렇게 큰 집은 필요 없었다.

부녀가 살아가기에 좁지만 않으면 충분하니 말이다.

똑똑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빠."

"그... 그래, 들어오렴."

내 허락에 수영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양손으로 베개를 껴안은 채.

"오늘... 같이 자도 돼?"

조심스러운 그녀의 물음에 나는 두 눈을 감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괜찮지. 그럼, 오늘은 아빠랑 같이... 아니, 잠깐만 기다려 줄래?"

나는 침대의 커버와 덮을 이불, 베개까지 모두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했던 걸까?

지금까지는 그냥 사용하는 대로 사용했지만, 수영이가 저런 더러운 이불 위에 눕는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끔찍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장롱에서 새로운 커버와 이불을 꺼내 침대에 세팅했다.

"후우, 이제 누워도 괜찮을 거야. 아빠는 저 이불들 좀 세탁기에... 아니, 그냥 버리고 올게."

찝찝해서라도 사용할 수 없겠네.

내 말에 수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나는 마트에서 사 온 종량제 봉투에 이불을 담아 쓰레기장에 버려 버렸다.

방으로 돌아오자 수영이가 침대 위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불을 끄고 침대로 다가갔다.

"내일은 학교 끝나고 돌아오자마자 백화점에 가 보자."

"백화점...?"

"수영이 옷이랑 신발이랑 가방도 한번 보고...."

"그냥 시장에서...."

"아빠, 이제 돈 많아. 그러니까 아무런 걱정 말고 수영이는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하고 싶은 거 하면 돼. 알았지?"

"...."

내 말에 수영이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참고로 백화점이라고 모두 똑같은 백화점이 아니다.

확실히 시장에서 구매한다면 백화점보다는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겠지.

하지만 백화점 중에서도 중산층 고객들이 자주 방문하며, 꽤 괜찮은 금액으로 의류를 구매할 수 있는 곳도 존재한다.

실제로 전생에서도 그런 백화점에서 옷과 가방을 구매했었으니까.

"잘 자."

그렇게 행복했던 하루가 마무리됐다.

* * *

잠든 부친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는 수영.

그녀의 얼굴은 복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정말로... 믿어도 괜찮은 걸까?'

어째서 부친의 미래가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세계는 내가 알고 있는 과거와는 다른 세계인 건가?'

도서관의 PC로 확인할 수 있었던 세계선에 관한 내용들.

1회차에서 박건혁이라는 인물은 헌터로 각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2회차에서 헌터로 각성하게 된 박건혁.

그로 인해 폭력적이었던 성격이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주변 환경과 엄마의 죽음은 모두 똑같았어. 그런데 왜 아빠만...."

 

제6화

6화. 짐꾼 (4)

수영은 건혁이 이불을 버리러 간 사이 책상에 올려진 노트를 확인했다.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빼곡하게 적어 둔 수많은 항목들.

1회차에서 수영은 부친에게 애정이라는 것을 바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러나 부친의 폭력적인 행동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대수냐는 듯이 더욱 화를 냈었지.

"왜... 왜 다 포기한 지금에서야...."

흐느끼기 시작한 수영은 천천히 부친의 따뜻한 품으로 들어갔다.

"아빠."

* * *

나는 수영이를 학교로 보내고 샤워를 하면서 거울 너머의 내 모습을 바라봤다.

확실히 얼굴은 나쁘지 않다.

게다가 빙의했을 당시보다 혈색도 좋아졌다.

"그 올챙이 같았던 배도... 많이 들어갔네."

게이트에서 며칠간 굶었던 덕분도 있겠지만, 육체의 변화는 스테이터스의 영향도 상당 부분 적용되는 모양이다.

신장 182cm에 넓어진 어깨.

얼굴도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나는 옷장에 처박아 둔 정장 바지와 와이셔츠, 그리고 검은색의 얇은 코트를 꺼냈다.

"넥타이도 하나 해야 하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끝내 넥타이를 매면서 곧바로 외출 준비를 마쳤다.

번쩍이는 검은색 구두.

나는 부동산을 돌아다니면서 월세로 가능한 매물들을 둘러봤다.

문제는 역시 돈이다.

"제길, 무슨 보증금이 이렇게 비싸?"

그나마 지하방을 전세로 살았던 만큼 전세 보증금인 8,000만 원과 유신 길드에서 받은 3,000만 원을 합한다면 어떻게든 18평 규모의 오래된 아파트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보증금 1억에 월세 80만 원.

솔직히 이 금액으로 서초구에서 방을 구한다면 대부분이 원룸 형태일 것이다.

살펴본 매물의 월세 보증금은 대부분이 2~5억 원 상당의 금액.

"어차피 수영이는 전학시킬 생각이었어."

허름한 옷차림에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수영.

원작에선 중학교 1학년 시절까지 그 괴롭힘이 따라다녔다.

같은 초등학교 출신의 여학생들이 주도한 따돌림.

게다가 부모인 내가 이 모양 이 꼴이니.

"후우, 지금부터라도 잘해야지."

나는 마음속으로 골라 둔 두 개의 아파트를 떠올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수영이는 오랜만에 학교를 마치자마자 귀가했다.

훈련도 거르고 돌아온 건가?

"가자."

그녀와 손을 잡고 백화점으로 출발했다.

"아빠, 나는 이거...."

"흐음, 그러면 이 신발이랑 예비용으로 하나 더 사 두자."

수영은 내 지갑 사정을 고려한 듯 최대한 저렴한 신발들로 골랐다.

"금액은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이제 아빠도 헌터니까, 돈도 엄청 벌 수 있어."

"그래도...."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이사할 집도 알아봤어. 거리가 조금 멀어서 전학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응, 전학은 상관없어. 어차피 친구는...."

말끝을 흐렸다.

나는 씁쓸한 얼굴로 아동복 매장으로 이동했다.

초등학교 2학년생이 입기에 적당하면서도 꽤 유명한 브랜드의 제품들.

나는 4계절 동안 입을 수 있도록 봄, 여름, 가을, 겨울용 상의와 하의를 구매하였다.

한순간에 300만 원 가까이가 증발해 버린 상황.

그럼에도 내 표정은 무덤덤했다.

'도박으로 날려 버렸던 돈들만 있었더라면... 더 비싸고 좋은 것들로 사 줄 수 있었을 텐데.'

사치로 날려 버린 돈들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왜 과거의 건혁은 그런 멍청한 행동을 했었던 것일까?

물론, 일확천금을 노리고 싶었겠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을 터.

'후우....'

구매한 의류는 대부분 자택으로 배송시켰다.

그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수영이와 함께 1층 식품 매장을 돌아다니면서 떡볶이와 호떡 등의 먹거리를 즐기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노트북을 거실로 가지고 나왔다.

이사하게 될 집의 구조와 내부 사진들을 수영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다.

"이 두 개 중에 어디가 좋을까?"

"으음...."

내부 구조와 기본 옵션 및 관리비 등을 살펴보는 수영.

"이쪽은 월세가 높은 대신에 세탁기랑 냉장고... 게다가 에어컨까지 전부 기본 옵션이네."

"그래서 아빠도 이쪽이 마음에 들어. 물론, 우리 집 냉장고, 세탁기도 6~7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쪽은 신축이라서 모든 옵션이 새거라는 모양이야."

나는 새집을 알아보면서도 수영이가 다닐 초등학교와 가까운 입지를 조건으로 하여 위치를 선정했다.

수영이가 중학교에 입학한다면 버스 통학을 해야겠지만, 그때는 더욱 좋은 집으로 이사하여 도보로 통학할 수 있도록 맞추면 된다.

"나는 이쪽이 좋아."

"그래? 아빠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한 달 중 닷새 정도만 당일치기로 뛰면 월세쯤은 충분히 부담할 수 있다.

물론, 일거리를 구하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은 아니겠지.

게다가 게이트는 규정된 인원에 맞춰야만 출입이 가능하다.

단독으로 출입이 가능한 것은 규정된 서열 내의 실력자들 뿐.

'30만대에만 들어갈 수 있다면... 헌터로서 공략대에 참가할 수 있을 텐데.'

지금으로서는 꿈이나 다름없는 이야기다.

다음 날, 나는 정장 차림으로 수영이와 함께 초등학교를 찾아갔다.

2학년 3반의 학생들은 새 옷으로 차려입은 수영이의 모습에 잠시 멍을 때렸는데, 심지어 검은 정장에 단정한 헤어스타일로 치장한 내가 수영이의 부친임을 밝히자, 아이들의 눈동자가 그만 휘둥그레졌다.

"수... 수영이 아빠가 헌터래."

"대박...."

"그런데 왜 지금까지 그런 옷을...."

내 직업을 듣자마자 학생들의 놀라움이 퍼져 나갔다.

분명 이 아이들은 2학년의 귀여운 학생들이다.

하지만 수영이를 따돌리던 아이들이기도 하다.

선생은 수영이가 전학을 간다는 소식을 아이들에게 전달해 주었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이사를 준비했다.

이삿짐은 모두 택배로 부쳤다.

대부분이 의류들뿐이니까.

대형 가전제품과 가구들은 모두 동사무소에 신청하여 처분했다.

"우... 우와.... 정말로 여기가 우리 집이야?"

확실히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큰 차이가 있었다.

수영이는 거실을 뛰어다니면서 본인의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와 책상은 모두 도착한 상태다.

그리고....

"컴퓨터!"

아직 9살에 불과하지만, 1회차를 경험한 수영에게도 인터넷이라는 정보망은 필요할 것이다.

온라인 게임을 즐기기는 조금 어려운 사양이지만, 검색을 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으리라.

그 외 개별적으로 구매한 것은 32인치의 TV와 3인용 소파 등.

"냉장고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세탁기도 작지는 않고...."

기본 옵션은 확실히 마음에 들었다.

부녀 둘이서 거주하기에는 충분하겠지.

나는 곧장 침실로 들어갔다.

"이전에 살던 집이랑은 차원이 다르네."

창가로부터 햇살이 들어온다.

한때 레이드가 발생하여 통제 구역이 되었던 서초구 내곡동.

이곳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게 될 곳이다.

통제 구역이었던 이미지 때문인지 사람들의 인식은 좋지 않았지만,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수두룩했고, 초등학교 역시 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침실에서 나와 수영의 방으로 걸어갔다.

벌써부터 컴퓨터로 검색을 하는 건가.

"수영아, 오늘은 짜장면 먹을까?"

"응!"

나는 인근 중국집에서 짜장면 두 그릇과 탕수육 하나를 주문했다.

군만두를 서비스로 건네주는 배달원에게 나는 감사 인사를 건넨 다음 마침내 새집에서의 첫 식사를 먹었다.

역시, 짜장면과 탕수육은 질리려야 질릴 수가 없다.

물론, 치킨이랑 피자도 그렇지만.

"다음 주부턴 새로운 학교에 등교해야 하니까, 내일은 서점이랑 문구점부터 다녀오자."

짜장면을 흡입하는 수영은 아무런 대답 없이 눈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 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수영이와 다양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함께 시장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음식들을 먹어 보거나, 영화관을 방문해 새롭게 개봉한 영화를 보기도 했으며, 장난감 가게에서 인형을 사 주기도 하였다.

물론, 수영이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았다.

대신 귀여운 곰 인형을 본인의 침대에 올려 두면서 장식했는데.

나는 몰래 수영이의 뒤를 따라가 초등학교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잘 적응한 모양이네."

다행스럽게도 새로운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게 된 모양이다.

친구들과 함께 하교하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물론....

"자네, 아까부터 계속 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던데...."

초등학교의 경비원에게 붙잡혀 사정을 설명하느라 진을 빼기도 했다.

하여간에 수영이가 학교생활을 잘 보내고 있음을 확인한 나는 11월이 되자마자 새 컴퓨터를 통해 일거리를 찾아봤다.

"우오오!"

내 서열은 567,211위에서 순식간에 512,130위까지 상승했다.

헌터증 역시 내장되어 있는 시스템을 통해 자동적으로 순위가 변동되었다.

헌터증에는 여러 칩들이 내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중에는 GPS도 포함되었는데, 뛰어난 육체 능력과 특수 능력을 보유한 헌터들이 범죄에 연루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이런 장치를 내장해 둔다는 모양이다.

"좋았어!"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곤 짐꾼으로서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봤다.

567,211위였던 시절에는 참가 신청서를 제출하면 몇 번이나 반려되었었지만, 서열이 상승하게 된 지금은 일거리가 넘쳐날 지경이었다.

"11월 3일에는 강남구 제3번 게이트, 11월 7일에는 관악구 제7번 게이트, 11월 9일에는 송파구네. 그리고 11월 13일에는 수정구 제16번 게이트에서...."

나는 스케줄을 메모해 두면서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두가 당일치기였지만, 11월 동안 참가하게 될 공략대 및 조사대는 모두 13개.

보수는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계산해 본 결과 총 317만 원에 육박했다.

"공략대도 두세 번 정도는 참가해 봐야겠어."

나는 수영이와 함께한 시간 동안 아침저녁으로 조깅과 전력 질주를 반복하면서 민첩을 7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물론, 6에서 7로 올라갔을 뿐이다.

하지만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고 능력치를 올렸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건혁 씨, 마석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베테랑 헌터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마석들을 수거했다.

확실히 C랭크의 오크들이 보유한 마석들은 크기가 엄청났다.

킬러 레빗의 마석이 손가락만 했었다면, 오크의 마석은 주먹만 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

함께하게 된 헌터들은 모두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자유 헌터들이다.

때문에 그들에겐 마석을 수거할 짐꾼을 개별적으로 고용할 필요가 있었다.

"건혁 씨,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보수는 조금 더 담아 뒀어요. 괜찮으시다면 다음에 또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물론입니다. 불러만 주세요."

다행스럽게도 공략대의 리더는 꽤 친절한 남자였다.

하지만 헌터들 모두가 이렇게 친절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내게 화풀이를 하는 사람도 존재했고, 내가 마석을 빼돌렸다면서 보수를 건네주지 않았던 사람도 있었다.

"마석 하나에 얼만데.... X발!"

욕설을 토해 내며 얼굴을 일그러트린 젊은 청년.

"내가 손해를 보는 거지만, 이번에는 봐줄 테니까 그냥 꺼지쇼."

나를 벌레 취급하듯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젓는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짐꾼으로서의 평판이 나빠지게 된다면 내 일거리도 금세 끊어지게 될 거다.

건혁이 익혀 둔 사회생활 덕분에 나는 진상 헌터들을 개인적인 블랙리스트에 적어 두어 최대한 그들과 접촉하지 않고 일거리를 찾아다녔다.

 

제7화

7화. 헌터 (1)

"하아...."

한 달간 공략대와 조사대를 오가면서 짐꾼으로 대활약을 펼쳤다.

물론, 공략대에 참가해 레벨을 높이기도 했는데.

조사대는 이른바 게이트를 공략하기 위한 사전 작업.

즉, 지도를 제작하거나 게이트 내부에 서식하는 마수들의 종류를 파악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고, 공략대는 오로지 사냥을 위해 편성된 조직이었다.

그 경계가 분명하진 않지만, 헌터들의 전투를 유심히 살펴보며 다양한 배움을 얻어 냈다.

그 덕분에.

"210만 원."

내가 거론한 금액은 순수하게 헌터로서 활동해 얻은 수익을 의미했다.

세금을 제외한 순수익을 말이다.

공략대의 리더는 수익의 15~20%를 가져갔으며, 그 외 나머지 대원들은 서열에 맞도록 비율이 조정됐다.

내 경우에는 6~8% 정도였었지?

그런 낮은 비율에도 불구하고 고작 세 번의 공략대 참가로 큰돈을 만질 수 있었는데.

"이번 달 수입은 총 530만 원 정도인가?"

헌터들의 갑질로 받지 못한 보수, 70만 원은 여러모로 아쉬웠지만, 월세와 생활비는 충분히 벌 수 있었다.

"그 망할 애송이 새끼들.... 언젠가 제대로 성공해서 복수해 주마."

현재 내 스테이터스는....

------------------------

*성명: 박건혁

*종족: 인간

*칭호: -

*출신 국가: 한국

*LV: 14

*근력: 15

*민첩: 8

*체력: 14

*마력: 0

*AP: 0

*스킬: -

------------------------

...이러했다.

레벨이 오를 때마다 근력과 체력에 모든 어빌리티 포인트를 투자했다.

민첩은 10까지 채운 뒤에 천천히 올려도 괜찮겠지.

지금은 마수의 가죽을 꿰뚫을 수 있는 근력과 활발한 활동에도 지치지 않는 체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스킬을 개별적으로 얻을 순 없는 걸까?

나는 협회에서 취급하는 30만 원의 도검을 구매해 휘두르기와 찌르기 등의 동작을 반복하며, 스킬을 얻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한 달 동안 별다른 알림은 없었다.

"...각성제라도 복용해 볼까?"

하지만 각성제의 대금은 지금의 내가 감당할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심지어 각성자가 각성제를 복용하여 특수 능력을 얻었다는 사례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물론, 그와 비슷한 루머가 과거에 몇 차례 올라온 적이 있었지.

그로부터 각성제의 금액이 순식간에 10배까지 치솟기도 했으며, 각성제를 구매한 헌터는 본인이 헛돈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분노를 터트렸다고 한다.

각성자가 각성제를 복용한다 하여 새로운 능력을 얻는다는 것은 일종의 루머.

지금은 노화를 방지하고,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용도로 거래된다.

'그래도 시도해 볼 가치는 있어.'

어차피 지금 당장 구매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스킬이라는 항목이 존재하는 이상, 특수한 능력을 얻을 가능성이 존재함을 생각해 봤을 뿐.

헌터들 중 초능력에 가까운 특수 능력을 얻은 헌터들은 대부분 1,000위 내에 속해 있었다.

그만큼 특수 능력이란 것은 높은 희귀성을 자랑했는데.

주인공인 박수영은 그것을 9살 때부터 구사해 보였다.

'확실히 부럽기는 부럽네.'

지금 당장 박수영이 헌터증을 발급받는다고 한다면, 아마 10만대 안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

나와는 재능부터가 다르다.

아무리 1회차를 경험했다 하더라도... 아니, 1회차 역시 그녀의 재능은 가히 천재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나 역시 강해질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할 거야."

나는 주먹을 세게 쥐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분명, 지구의 위기는 주인공인 박수영이 막아 내 줄 것이다.

내가 신무영이었다면... 아니, 한 명의 엑스트라에 불과했다면, 그렇게 믿음을 가진 채 살아갔으리라.

하지만 박수영은 이제 내 딸이다.

"모든 위기를 그 아이 혼자서 감당하게 할 순 없어."

최소한 아버지로서 부담을 덜어 내 주고 싶다는 마음에서일까?

나는 곧바로 12월 스케줄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이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자유 헌터들은 모두 임시 공략대를 구성하였는데, 나는 짐꾼의 업무량을 줄이고, 서서히 헌터로서의 활동을 개시했다.

"으아아아아!"

서걱!

11월 29일의 각성 능력 검사를 통해 서열이 높아진 덕분일까?

나를 공략대로 받아들이는 헌터들이 꽤 많아졌다.

"후우...."

"수고하셨습니다, 박건혁 씨. 지금부터는 뒤에서 쉬도록 하세요. 나머지는 저희들이 처리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그들 역시 마수를 토벌하는 것으로 능력을 강화해 나갔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조사해 본 결과, 상위 1%를 제외한 99%의 헌터들은 모두 더딘 성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지금 나와 함께하는 헌터들 역시 매달 수십에서 수백 명을 제칠 뿐, 나처럼 급격한 상승세를 보이는 경우는 정말로 드물다는 것이 협회 검사관의 설명이었다.

"여러분,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하죠."

7명의 헌터들이 각자 자리를 잡으면서 바닥에 앉았다.

공략대 대장인 김현진이 내게 다가오며, 시원한 생수를 건네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오늘은 저번보다도 대활약이었네요. 혼자서 코볼트 여덟 마리를 토벌하시다니...."

"하하하...."

"그저께 보내 주신 신청서를 보니, 저번 달보다 2만 위나 상승하셨던데요? 곧 건혁 씨를 TV에서 볼 수 있겠어요."

전투에 방해를 받기 싫다며, 머리를 깨끗이 밀어 버린 현진.

나는 그의 칭찬에 머쓱한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나는 512,130위에서 493,201위가 되었다.

순식간에 40만대의 서열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정말로 부럽네요. 저는 2년간 노력해서 겨우 40만대에 들어섰는데...."

11월에 함께했던 현진은 내 재능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며 작게 부러움을 보였다.

현진의 서열은 현재 432,157위.

그는 소규모 길드에서 스카우트를 받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자유 헌터를 지향하고 있다는 모양이다.

"건혁 씨라면 분명 대규모 길드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겁니다. 그런데... 결혼은 하셨나요?"

"네, 딸아이가 한 명 있습니다."

"그렇군요. 가족분들께서도 건혁 씨가 정말로 자랑스럽겠어요."

현진의 발언에 나는 씁쓸히 웃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의 휴식을 마친 헌터들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의 뒤에선 세 명의 짐꾼이 함께했다.

식량과 마석들을 회수하는 짐꾼들이.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저렇게 짐을 들고 다녔었지.'

그들의 얼굴은 게이트에 입장한 순간부터 계속 무표정했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천재적인 재능으로 각성 초기부터 높은 서열을 보유한 헌터들과 다르게 나와 그들은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했으니까.

"정지."

현진의 수신호에 모두가 멈춰 섰다.

"...블랙 울프. 숫자는... 다섯 마리 정도입니다. 방패 준비하세요."

네 명의 헌터가 전방을 향해 방패를 겨누었다.

이어, 현진이 품속에서 작은 종을 꺼내 블랙 울프들로부터 관심을 끌었다.

소리에 예민한 블랙 울프.

멀리서 볼 때는 몰랐지만, 녀석들이 질주해 오기 시작하자 나는 놈들의 크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컹! 커어엉! 컹컹!

협회에서 왜 놈들을 D랭크로 지정했을까?

그 이유를 한순간에 납득하고 말았다.

사람만 한 크기의 괴물.

"레드 울프였다면 곧바로 달아나야겠지만, 블랙 울프라면 할 만할 겁니다. 세정 씨와 건혁 씨는 저와 함께 공격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세정이라는 여성 헌터와 눈을 마주친 뒤, 곧바로 전방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쾅! 콰콰콰콰쾅!

"크윽...!"

놈들이 방패를 향해 몸을 들이받았다.

방패를 쥐고 있던 헌터들이 작게 신음을 흘리면서 뒤로 물러난 그 순간.

"공격!"

현진의 외침에 방패를 든 헌터들이 서둘러 좌우로 갈라졌다.

나는 세정과 현진의 뒤를 따라 곧바로 전방을 향해 달려들었다.

방패에 몸을 들이받으면서 잠시 뒤로 물러나게 된 녀석들.

푸욱!

-키에에엑?!

목덜미를 꿰뚫린 블랙 울프는 이내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파팟!

또 다른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몸을 던졌다.

나를 물어뜯으려는 듯 아가리를 쩌억 벌린 녀석.

"이런...!"

화들짝 놀란 나는 재빨리 검을 바짝 당기면서 녀석의 공격을 대비했다.

그 순간.

퍼억!

방패를 든 한 헌터가 옆에서 녀석을 들이받았다.

"지금입니다!"

대답할 시간 따윈 없다.

나는 벽면으로 날아간 블랙 울프를 향해 검을 내질러 숨통을 끊었다.

푸욱!

-크... 크르....

녀석의 붉은 눈동자가 서서히 생기를 잃기 시작하자 곧바로 몸을 돌렸다.

상황은 이미 마무리된 직후.

나는 작게 한숨을 흘리면서 두 눈을 감았다.

방금은 정말로 위험했다.

미노타우로스를 마주했을 때처럼 목숨의 위기를 느낀 상황.

그나마 방패로 녀석을 들이받아 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강준 씨,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죠."

넉살 좋게 웃어 보인 신장 190cm의 사내.

신장뿐만 아니라 그는 듬직한 덩치를 보유하여 헌터들의 마음을 안심시켜 주었다.

나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지금부터라도 민첩에 포인트를 투자해야겠어.'

약간 아까운 느낌은 있었지만, 방금 전의 상황으로 민첩의 중요도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자아, 계속 이동하겠습니다!"

짐꾼들이 마석을 모두 회수하자, 현진이 박수를 치며 지시를 내렸다.

나는 도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서둘러 발걸음을 움직였다.

* * *

그렇게 공략을 마치고 세 짐꾼에게 건네준 보수는 도합 60만 원.

인당 20만 원씩 지급되고, 그 외의 잔금은 무려 1,085만 원이나 되었다.

이번 공략대에서 대장인 현진은 28%를 나는 14%의 비율로 보수를 건네받았다.

'하루 만에 150만 원인가.'

살짝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공략대 대장인 현진은 300만 원 상당의 금액을 받았다.

'공략대 대장이 좋기는 좋구나.'

대원들 역시 130~170만 원 상당의 보수를 받고, 임시 공략대는 곧바로 해산됐다.

"으아아! 오늘은 족발이라도 사 갈까? 아니다. 수영이는 피자를 좋아했었지?"

모처럼 큰 수익을 본 것이다.

나는 오늘을 기념하며 피자 두 판과 1.25L의 콜라 한 병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덜컥.

"수영아, 아빠 왔다!"

설마,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날이 오다니.

하지만 집에 돌아옴과 동시에 누군가가 반겨 주는 것은 나름 기쁜 일이었다.

'아빠!'라고 외치면서 내게 와락 안겨 오는 수영이.

나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리면서 그녀와 볼을 비벼 댔다.

"오늘 저녁은 피자다!"

"와아!"

행복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 그녀의 모습에 나 역시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1회차를 경험한 수영의 정신 연령은 분명 20대의 성인일 터.

이 아이가 정말로 기뻐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행복한 얼굴로 피자를 거실로 가져가 그녀와 함께 피자를 베어 먹었다.

 

제8화

8화. 헌터 (2)

"체하니까 콜라랑 피클도 같이 먹어."

"응."

그녀는 작은 두 손으로 컵을 붙잡고 콜라를 들이켰다.

"크하~"

마치 맥주를 마시는 듯한 행동.

가끔씩 그녀로부터 어른스러운 행동과 말투가 흘러나온다.

그럴 때마다 '아, 이 아이는 이미 1회차 인생을 경험했었지.'라는 생각이 다시금 머릿속에 되새겨졌고, 그와 동시에 전생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부모와 형제에 대한 그리움.

또, 연애 한번 해 보지도 못했던 모태 솔로가 갑자기 유부남이 되어 부양해야 할 딸이 생겼다고 생각해 보자.

심지어 아내는 이미 교통사고로 이승을 떠났다.

'박건혁으로 빙의했을 때는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이렇게 적응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신기할 지경이다.

박건혁의 기억이 아니었다면 분명 혼란에 빠져 한동안은 막막했었겠지.

수영이와의 관계도 서서히 좋아지고 있으니....

나로서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상황이다.

"아빠, 오늘도 힘들었어?"

"에이, 아빠도 이젠 잘나가는 헌터야. 오늘도 돈 많이 벌었어."

"헤에...."

"아 참, 용돈을 안 준 지도 오래됐네. 친구들이랑 맛있는 것도 사 먹고, 필요한 물건 있으면 마음껏 사도 돼. 그리고 컴퓨터도 바꿔 줄까? 인형이랑 장난감도 필요하면...."

"자... 장난감은 괜찮아. 컴퓨터도 산 지 겨우 한 달밖에 안 됐잖아. 그리고 용돈도 아직 남아 있어."

확실히 내 어린 시절과 비교되는 모습이다.

나는 어린 시절 장난감과 게임기를 사 달라면서 부모님께 매일매일 졸라 댔다.

집안 사정이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고.

성인이 된 이후 어머니한테 그 당시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땐 얼마나 후회를 했었는지.

'후우....'

아버지는 H기업의 에어컨 기사셨다.

20년을 에어컨 기사로 활동하시던 아버지는 H기업을 나오신 뒤, 본인의 인맥을 통해 장사를 시작했다.

판매하는 상품은 바로 에어컨 자재였다.

몇 년간 가게는 고난을 맞아야 했고, 대출을 받으면서까지 하루하루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께선 매출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때마다 대출금과 생활비를 위해 공사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뛰셨으며, 어머니께서는 가게를 맡아 장사를 하셨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블록 장난감과 게임기를 사 달라고 조르기나 했었지.

심지어 기어코 부모님에게 선물로 받아 낸 장난감과 게임기는 받자마자 감사 인사 한번 없이 놀기 바빴었다.

'은혜 한 번 갚지 못했어.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도 한 번... X발!'

갑작스러운 어린 시절 기억에 주먹이 쥐어졌다.

"나도 나중에 아빠처럼 헌터가 되고 싶어!"

수영의 목소리에 회상에 잠겼던 내 정신이 깨어났다.

"어? 뭐라고?"

"나도 아빠처럼 멋있는 헌터가 되고 싶다고."

그녀의 한마디에 내 몸이 잠시 멈추었다.

고개가 숙여지고, 어깨가 부들부들 떨린다.

수영이의 발언으로 신무영으로서 남아 있던 기억이 더욱 강하게 일어났다.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크흑...."

내가 고개를 떨어트린 채 잠시 눈물을 흘리자.

"아... 아빠?"

당황스러워하는 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내... 내가 헌터가 되겠다는 말 때문에...."

내게 다가와 안절부절못하는 수영이의 모습에 나는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러곤 한동안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전생에 대해선 전할 수 없다.

도대체 무엇을....

스윽.

수영의 작은 손바닥이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에게 바랐던 행동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위로.'

그래, 나는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괜찮아. 아빠는 괜찮아."

도대체 무엇이 괜찮다는 걸까?

물론,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와 따스한 손길에 취할 뿐.

나는 소매로 눈가를 비비면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빠가 못난 모습을 보여 버렸네. 이제 괜찮으니 어서 피자부터 먹자."

"...응."

조용히 자리로 돌아간 수영.

나는 그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네가 원하는 걸 하렴. 헌터가 되겠다면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겠지? 그에 대해서도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고."

수영은 피자를 우물우물 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아빠를 불러. 아빠가 우리 수영이를 도와주러 갈 테니까."

그런 내 발언에 수영이 미소를 보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이제 와서 전생을 떠올려 봐야 무의미하다.

본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 지금은... 수영이가 위험해질 때 도와줄 수 있는 든든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보자.

* * *

수영은 침대에 누웠다.

저녁을 먹은 뒤, PC로 수많은 기사와 정보들을 수집한 그녀.

하지만 지금은 그런 정보들보다 울고 있던 부친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는 눈물을 흘렸던 걸까?

그리고 왜 자신은 울고 있는 그를 껴안으면서 위로해 주었을까?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었다.

"엄마."

자신을 지키기 위해 교통사고를 당한 모친을 떠올렸다.

솔직히 모친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야 5살 때 일어났던 일이니까.

그러나 자신을 감싸 준 모친의 모습과 모친의 죽음에 절망하는 부친의 모습만은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트라우마처럼.

지금 다시 떠올려 봐도 부친의 학대는 정말로 끔찍했다.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던 시간.

때문에 그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내 탓이야. 내가 엄마를 죽게 한 탓에 아빠가...."

울고 있는 부친의 모습은 마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언제나 거대하며 무서웠던 존재가 오늘은 정말로 작아 보였다.

수영은 잠시 죄책감에 휩싸였다.

"내가 죽고 엄마가 살았더라면...."

그런 생각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수많은 생각과 함께 밤을 보내게 되었다.

* * *

12월 25일의 크리스마스와 1월 1일 신정에는 스케줄을 비워 수영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루를 바쁘게 보내 왔던 내게 포상을 내려 준 것일까?

수영이는 내가 TV를 볼 때마다 등 뒤로 다가와 등을 두드리거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그녀의 행동이 내게는 귀엽게만 보였다.

물론, 작은 주먹에 비해 상당한 힘이 들어가면서 어깨가 박살 나는 줄 알았지만....

하여튼, 그렇게 1월이 지나 2017년 2월 1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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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건혁

*출신 국가: 대한민국

*서열: 399,999위

*등록일: 2016.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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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30만대에 들어섰다고 말해도 괜찮은 거겠지?"

드디어 30만대 순위에 들어섰다.

아슬아슬한 턱걸이긴 하지만 말이다.

작년 12월부터 활동을 멈추었던 헌터들이 마치 겨울잠을 끝낸 듯 서서히 헌터 협회 홈페이지에 공략대 및 조사대의 모집 공고를 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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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집 공고) 공략 대원 모집합니다.]

*공략 대장: 유세린(서열: 298,296위)

*유형: 임시

*목적지: 경기도 분당구 제8번 게이트(게이트 등급: D)

*인원: 7/10

*참가 자격: 서열 350,000위부터 399,999위까지.

*비고: 근접전 가능하신 분만 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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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할 수 있는 건가?"

공략 대장이 서열 20만대라는 부분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공략할 게이트의 등급은 D.

게이트 내부에 F~D랭크의 마수들이 서식하고 있다는 의미다.

물론, 가끔가다가 C랭크 마수들도 출몰하지만, 대다수가 F~D랭크의 마수일 것이다.

"그냥 질러 보자."

나는 모집 공고에 참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곤 다른 모집 공고를 둘러보았고, 도합 13개의 공략대에 참가 신청서를 보냈다.

겹치는 날짜는 없었다.

또, 공략대에 참가한 다음 날에는 반드시 스케줄을 비워 뒀다.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잠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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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인: 유세린(서열: 298,296위)

*참가 신청서 확인했습니다. 2월 3일(금) 오전 10시까지 경기도 분당구 제8번 게이트로 와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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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로 나를 받아들여 준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내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지.

30만대의 턱걸이가 무슨 배짱으로 참가 신청을 했는지 말이야.

하지만....

"모처럼 레벨 좀 올려 보겠어."

현재 내 레벨은 21이다.

체력은 그대로지만 민첩은 12, 근력은 18까지 상승하게 되었다.

나는 팔을 긁적이면서 게이트에 대한 사전 조사를 시작했다.

협회 홈페이지에는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대다수의 게이트가 관리되고 있었다.

그리고 관리 안에 존재하는 게이트는 법적으로 핵의 파괴가 금지되어 있었는데, 아마 마석이라는 자원을 지속적으로 공급받기 위한 조치일 것이다.

"흐음, 서식하는 마수는 주로 고블린이네."

짐승의 털을 보유한 코볼트와 다르게 소귀(小鬼)라 불리는 괴물이다.

오크와 마찬가지로 녹색 피부를 보유하고 있지만, 녀석은 120~130cm이란 낮은 신장에 날렵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한다.

어느 SNS에 올라온 고블린의 동영상.

미국의 어느 최상위 헌터는 녀석을 여유롭게 제압해 보였다.

그에 고블린이라는 존재가 나약한 마수처럼 보였는지.

⤷ㅇㅈ 솔직히 고블린 따위도 못 잡으면 헌터라고 자처하지 마라.

⤷ㅋㅋㅋㅋㅋ 한 손으로 고블린을 던져 버리네.

⤷친척 중에 헌터 한 명 있는데, E랭크도 못 잡으면서 명절마다 존X 잘난 척함.

⤷E랭크 마수도 못 잡으면, 그냥 짐꾼 아니냐?

⤷짐꾼이랰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솔직히 위에 분 말대로 E랭크 한 마리도 못 잡으면 짐꾼이 맞지. 최소한 D랭크 마수는 잡고 나서 헌터라고 말하자.

<실제로 마주하면 눈물 콧물 쏟아 낼 것들이....>

⤷응, 저런 허접은 일반인도 죽일 수 있음. 모르면 그냥 짜져라.

⤷잼민이냐? 그냥 조용히 숙제나 해.

⤷www.xxxx.com. 여기 들어가 봐.

⤷왜? 트로이 목마라도 심으려고? 이 시국에도 이런 녀석은 꼭 있구나. 미친 새X.

⤷위에 사이트 들어가지 마세요. 백 퍼 바이러스 먹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쉽게 잡아 버리네.>

⤷미국에서도 서열 1,000위에 들어가는 헌터임. 고작 고블린 하나도 못 잡으면....

⤷우리나라는 헌터가 대략 56만 명이지만, 미국은 200만 명을 넘는다. 인구가 워낙 많잖아.

⤷저 사람이 한국에 오면 서열 100위대다.

⤷그건 ㅇㅈ.

SNS 댓글을 확인하던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현재 대한민국의 인구는 4,300만.

미국 인구는 2억 6천만에 육박한다.

그리고 미국 협회에 가입된 헌터의 숫자는 무려 200만 명.

물론, 허수는 어느 국가에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대한민국 역시 각성자 중 헌터로 등록해 두고, 재능의 차이에 절망하거나, 짐꾼을 버텨 내지 못하고 새로운 직업을 찾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제9화

9화. 헌터 (3)

"활과 검을 다루는 마수라...."

고블린의 특징이 자세하게 기록된 어느 블로그.

나는 해당 내용을 훑어보면서 서초구 제7 헌터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하루 3,000원을 지불하는 것으로 눈치 볼 필요 없이 훈련을 할 수 있는 공공장소다.

심지어 훈련용 무기들이 비치되어 수많은 헌터들이 이 시설을 이용하고 있었다.

"후우... 후우... 후우...."

훈련장에 들어가자마자 외곽에 설치된 트랙을 따라 30분간 조깅과 전력 질주를 반복했다.

파바바밧!

순간 속도를 높이기 위한 전력 질주.

그렇게 1km의 트랙을 다섯 바퀴 정도 달렸을까?

나는 훈련용 도검을 하나 가져왔다.

날이 세워지지 않은 도검.

파밧! 쓔와아악!

10m 거리를 순식간에 돌파하여 도검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러곤 다시 한번 사선 베기를 반복했다.

사선 베기와 찌르기를 하루 300번씩 반복하여 몸에 익숙하게 만드는 수련.

무식할지도 모르지만 기본기 하나 없는 내겐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1~2개월 전에 검을 휘둘렀을 때보다 자세가 더욱 안정적이다.

'영상에서 알려 준 대로 점점 효과가 보이고 있어.'

나 역시 처음에는 의심스러웠다.

고작 이 정도의 동작이 과연 큰 도움이 될까?

그러나 실제 전투에서 그 효과는 톡톡히 보았다.

"하아... 하아... 하아.... 이번에는...."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켠 뒤, 곧바로 5,000원을 지불하여 동체 시력 훈련장으로 입장했다.

허공에 매달린 지름 30cm 크기의 스펀지 볼.

한두 개가 아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아니, 벽에 부착된 안내판에 50개의 스펀지 볼이 설치되어 있다고 쓰여 있으니 50개가 맞겠지.

삐익!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스펀지 볼이 사방에서 나를 향해 덮쳐 왔다.

다리, 어깨, 가슴, 머리, 팔.

나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사방에서 달려드는 스펀지 볼을 피해 냈다.

그렇게 1분이 지나자.

삐익!

훈련 종료를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훈련장 직원으로부터 작은 프린트 용지를 건네받았다.

일주일간의 기록과 금일 기록을 비교하듯 그래프로 구분된 자료.

"오른팔 5번, 왼팔 4번...."

스펀지 볼은 총 13번이나 내 몸과 접촉했다.

동체 시력 훈련장은 1~3단계로 강도가 나누어져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낮은 레벨인 1단계를 선택하여 훈련을 진행했다.

"1단계에서 13번...."

씁쓸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동체 시력 역시 재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천재들의 경우에는 각성하고 불과 1개월이란 시간으로 동체 시력 훈련 1단계를 100점으로 완료했다.

신체와 접촉한 스펀지 볼의 개수가 0개라는 의미다.

그에 비해 각성하고 반년이 되어 가는 나는... 여전히 1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니야. 범재인 나로선 노력만이 강해질 수 있는 최선의 길이겠지.'

주먹을 세게 쥐면서 다섯 번이나 동체 시력 훈련을 반복했다.

결과는 모두 비슷했다.

내 몸에 접촉한 스펀지 볼의 개수는 13~18개 정도.

점수는 접촉한 스펀지 볼마다 2점씩 감산하여 책정됐다.

"후우, 검이라도 휘두르자."

실용적이면서 실전에서 유용하게 사용되는 간단한 검술들.

상위 헌터들이 선보이는 화려하고 강력한 검술과는 다르게 내 검술은 수수함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 기본기는 언젠가 실전에서 큰 도움이 되리라.

나는 그렇게 믿었다.

* * *

"흐음.... 오늘도 무식하게 검만 휘두르는군요."

훈련장의 구석진 장소에서 주변을 둘러보던 40대의 중년 남성.

그는 건혁을 바라보면서 잠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곁을 지키던 검은 정장의 여성이 스마트폰을 확인하면서 입을 열었다.

"저번 달보다 확실히 실력이 좋아졌습니다. 게다가 방금 전 동체 시력 훈련에서도 13~18개의 성적을 보였더군요. 조사해 보니 서열도 30만대에 들어섰습니다."

"허어, 반년도 지나지 않아 30만대 순위가 되었단 말입니까?"

살짝 놀란 듯한 사내의 목소리에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 30만대는 30만대이지만... 정확히는 399,999위입니다."

"푸흐흐흐.... 정말로 턱걸이로 30만대 순위가 되었군요."

"그래도 재능만큼은 확실합니다. 불과 4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서열은 567,211위였습니다. 이런 단기간으로 39만대에 들어섰다는 것은...."

"네, 정말로 놀랄 만한 일이죠. 하지만 지금은 잠시 기다려 봐야겠군요. 그의 성장이 어디까지인지는 확실하지 않잖습니까."

사내의 이름은 김광석.

대한민국 제11대 길드에 속해 있는 고구려 길드의 제1 인사팀 팀장이다.

훈련장은 헌터들의 자기 개발을 위한 장소이면서도 길드의 입장에선 장래가 유망한 신인을 발굴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광석은 고구려 길드 제1 인사팀 주임인 이해연과 함께 훈련장을 살펴보면서 눈동자를 반짝였다.

"마침 박도진 씨가 계시는군요. 서둘러 가 보죠."

서열 37,280위에 속해 있는 실력자.

광석은 건혁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박도진이라는 젊은 헌터를 향해 다가갔다.

특수 능력이 발현하여 초기 각성 때부터 10만대의 서열을 보유했던 박도진.

'박건혁과 박도진의 재능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의 차이다.'

길드의 전력이 되어 줄 도진을 향해 푸근한 미소로 다가간 광석.

한편, 건혁은 목에 걸어 둔 수건으로 땀을 닦아 낸 다음 곧장 샤워실로 들어갔다.

* * *

"처음 뵙겠습니다. 공략대장인 유세린이라고 합니다."

나를 향해 악수를 건네는 20대 초반의 여성.

검은 단발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지닌 그녀는 연예인 뺨칠 정도의 미모를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헌터로서의 뛰어난 재능까지 가지고 있으니.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구나.

"참가 자격을 399,999위까지 맞춰 두기는 했었지만... 정말로 399,999위의 헌터분께서 참가 신청을 넣어 주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하하하...."

그녀의 이야기에 나는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간에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세린은 고개를 돌려 헌터들의 앞에 멈춰 섰다.

"사전에 이메일로 공지를 해 드렸지만, 게이트 너머는 초원 지대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고블린들은 수풀 아래에 숨어 공격을 해 오겠죠. 보수는 말씀드렸듯 개개인이 쓰러트린 만큼 분배될 것입니다."

퍼센티지에 따른 비율이 아닌 개개인의 토벌에 따라 보수가 분배된다는 이야기다.

말 그대로 내가 고블린 다섯 마리를 토벌하면, 그에 대한 보수가 오로지 내게 주어진다.

"하지만 만약 주변에 위험한 헌터가 있다면 반드시 도와주십시오. 저 역시 여러분들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반드시 도와드릴 것입니다."

최소한 서로 간에 도움을 주고받아 죽는 사람이 없도록 노력하자는 세린의 발언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를 바라봤다.

짐덩이가 된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게이트를 관리하던 협회의 직원은 세린이 헌터증을 제시하고 서류 한 장 제출하자, 곧바로 입장을 허가해 주었다.

게이트를 통과한 순간.

세린의 말대로 드넓은 초원 지대가 펼쳐졌다.

"그러면 두 팀으로 나눠서 움직이도록 하죠."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상당한 경험을 보유한 베테랑들이다.

그런 그들이 우르르 몰려다녀 봐야 사냥감만 줄어들겠지.

세린은 가장 먼저 나를 본인의 팀에 합류시켜 주었다.

이 사람은 정말로 상냥하구나.

"만약 무슨 일이 발생한다면 건네 드린 신호탄을 쏘아 올리세요. 그러면 저희들이 곧바로 도우러 가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죠."

다른 한 팀의 팀장을 맡게 된 40대의 남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팀은 10명의 짐꾼을 각 팀에 다섯 명씩 분배했다.

1인당 짐꾼을 한 명씩 전담하고, 짐꾼에 대한 보수는 개개인이 부담한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법한 여성이 거대한 배낭을 어깨에 멘 채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에 나 역시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에게 지급해야 될 비용은 정확히 30만 원.

그 정도는 고블린 두 마리면 충분히 벌 수 있으리라.

그렇게 게이트로부터 수백 미터를 이동하자, 세린이 내게 다가왔다.

"위험하면 곧바로 소리를 지르세요. 제가 도와드리러 갈 테니까요."

그녀의 발언에 나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차피 상대가 고블린이라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물론, 고블린 궁사는 여러모로 골치가 아프겠지만, 나는 왼손에 착용한 건틀렛을 내려다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몇 미터를 걸었을까?

아니, 1km 이상은 걸은 것 같다.

"고블린입니다."

세린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였다.

"각자 전투 준비하세요. 짐꾼의 호위는 돌아가면서 맡겠습니다."

"그럼,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신장 190cm를 가볍게 넘는 장신의 사내.

그가 짐꾼의 호위를 자처하자, 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면 부탁드립니다, 준호 씨. 그리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위험하다 생각되면 곧바로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괜히 무리하다가 죽지 마시고요."

세린의 충고에 헌터들이 나를 힐끔 살펴보더니 이내 검과 방패를 들었다.

나는 헌터들의 시선에 씁쓸히 웃으면서도 건틀렛의 중앙에 위치한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촤라락.

얼굴만 한 크기의 둥그런 방패가 펼쳐졌다.

두께는 5mm밖에 되지 않지만, 마력으로 코팅되어 상당한 강도를 자랑했다.

'화살은 이걸로 커버하면 되겠지.'

세린은 내 장비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캬아아아아악!

"공격!"

세린의 지시와 함께 다리를 움직였다.

고블린의 숫자는 대략 열 마리 정도.

활의 시위를 당긴 고블린 궁사들의 모습에 앞서가던 헌터들이 방패를 내밀었다.

태앵! 태태탱!

허공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방패와 충돌한 화살들.

그 순간, 고블린 전사들이 수풀에 몸을 감추었다.

헌터들이 주변을 경계하던 그 순간, 나는 재빨리 궁사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무... 무슨...!"

"저 바보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무시했다.

내 목표는 처음부터 전사가 아닌 궁사였으니까.

-키익....

나를 향해 활을 겨누는 고블린 궁사.

화살이 코앞까지 날아오자, 나는 왼손의 건틀렛으로 화살을 막아 냈다.

태앵!

둥그런 방패에 화살이 튕겨 나갔다.

씨익

제대로 막은 모양이다.

파바밧!

내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방패의 성능도 확인이 됐으니,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한편, 화살을 막아 낼 줄 몰랐던 걸까?

고블린들의 표정에서 당혹감이 느껴졌다.

이내, 서둘러 재정비를 하고, 활의 시위를 당기는 고블린들.

다시 한번 나를 향해 세 개의 화살이 날아왔다.

쐐액! 쐐애액!

바람을 가르며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간 화살.

나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화살들을 회피했다.

그리고 회피가 불가능하다 판단되는 화살은 곧바로 방패로 막았다.

태앵!

"흐읍!"

녀석들과의 거리가 2~3m까지 좁혀진 그때.

나는 지면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키에엑...!?

서걱!

한 녀석의 가슴을 베었다.

그러자 우측에 있던 두 고블린이 활을 버리고 단검을 뽑아 들었다.

-캬아아아악!

분노한 놈들의 울음소리에 황급히 도검을 휘둘렀다.

쓔와아아악!

눈앞에서 붉은 핏물이 휘날린다.

순식간에 세 마리의 고블린을 토벌한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없는 건가?"

아무래도 일곱 마리는 모두 세린의 일행에게 향한 모양이다.

 

제10화

10화. 헌터 (4)

타다다닷!

나는 재빨리 세린의 일행에게 되돌아가면서 헌터들에게 달려드는 고블린들을 추적했다.

파슥.

수풀이 흔들린 장소를 향해 도검을 내질렀다.

푸욱!

-키엑?!

아무래도 적중한 모양이다.

어깨를 꿰뚫린 채 발버둥 치는 고블린.

녀석은 나를 향해 검을 내던졌다.

채앵!

건틀렛에 맞아 내 얼굴로 향하던 양날 직검의 궤도가 비껴갔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검이 내 얼굴에 꽂혔을 것이다.

간담이 서늘해진 순간.

내 눈동자 역시 차갑게 식었다.

나는 녀석의 우측 어깨에 박혀 있는 도검을 두 손으로 붙잡은 뒤.

"죽어."

촤아아악!

좌측 허리까지 사선으로 베어 버렸다.

육체가 둘로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숨을 거둔 고블린.

나는 서둘러 주변을 경계했다.

역시 베테랑이라는 건가?

나머지 여섯 마리의 고블린들은 이미 토벌된 모양이다.

나는 조금 전에 쓰러트린 세 마리의 고블린으로부터 세 개의 마석을 회수했다.

"여기요."

도합 4개의 마석을 함께하게 된 파트너, 이지혜라는 짐꾼에게 건네주었다.

그때, 세린이 내게 다가왔다.

"건혁 씨, 방금과 같은 행동은 사전에 말씀을 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함께하는 헌터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말이죠."

살짝 화가 난 듯한 그녀의 얼굴에 나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투는 협동이 아닌 개별적으로 진행한다고 해서...."

"후우, 개별적으로 전투를 진행한다고 하더라도 방금처럼 독단적인 행동을 취할 때는 팀장인 제게 먼저 이야기를 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다음부턴 반드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박건혁이 사회생활로부터 배운 행동 덕분일까?

나는 상사에게 고개를 숙이듯 행동을 보였으며, 진심을 담아 사죄의 말을 건넸다.

그러자 세린의 분노는 살짝 누그러졌다.

"그보다도 어떻게 된 거예요? 처음부터 고블린 궁사를 공격할 생각이었나요?"

"적들의 후위를 먼저 공격하여 아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생각했습니다. 인터넷으로 조사해 본 결과, 고블린 또는 오크와의 전투에선 후위를 담당하는 궁사와 주술사 등의 존재가 가장 거슬린다고 하더군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그런 무모한 행동을 저지를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 게다가 그 작은 방패로 잘도 화살을 막아 냈어요."

"동체 시력을 높이기 위해 자택 근처의 훈련장에서 훈련을 했었습니다."

세린은 살짝 감탄하면서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전 조사를 통한 지식의 습득.

상대에 대한 대처 능력과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가짐까지.

그야말로 상급자들이 좋아하는 태도다.

"그러면 앞으로 궁사들을 상대할 땐 건혁 씨가 맡아 주실 수 있을까요?"

"맡겨 주신다면 놈들은 제 쪽에서 최대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하지만 이 부분은 제가 무조건 결정할 순 없겠죠.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떤가요?"

세린의 질문에 헌터들이 잠시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였다.

"뭐, 방금처럼만 움직여 준다면 걱정 없이 전사 놈들에게 집중할 수 있겠지."

"전사들을 상대하면서 궁사들까지 신경 쓰는 건...."

헌터들이 한 명씩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지금 보여 준 능력이라면....

"짐꾼들을 지키는 역할도 잘 수행할 수 있겠는데?"

짐꾼의 호위는 정말로 중요하다.

물론,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겠지.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짐꾼이 사망하게 된다면, 공략대의 헌터들은 사망한 짐꾼의 유가족들에게 일정 금액의 현금을 보상해 주어야 한다.

수익을 중요하게 여기는 헌터들이라면 짐꾼의 죽음으로 발생하게 될 손실을 책임지고 싶지 않아 할 것이다.

'보상금의 경우 호위 중인 헌터가 70%를 부담하니....'

호위 역할의 어깨가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슬슬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짐꾼들은 전담 헌터들이 토벌한 고블린으로부터 마석을 회수하여 본인의 가방에 집어넣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헌터들이 짐꾼이라는 존재를 얼마나 홀대하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물론, 일시적인 관계다 보니 대화 한번 나누지 않는 모습은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마석의 회수 작업이 너무 늦다면서 욕설을 중얼거리는 모습은....

여러모로 보기 불편하네.

"하아, 헌터가 뭐 대수라고."

'직업에 귀천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나는 믿지 않았다.

분명, 귀한 직업과 천한 직업을 함부로 구분 지을 순 없다.

그러나 갑을 관계는 언제나 존재한다.

"이동하겠습니다!"

나는 세린의 목소리에 곧바로 시선을 돌려 발걸음을 움직였다.

* * *

건혁의 전담 짐꾼이 된 지혜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마석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녀는, 직접 마석을 회수해 건네줄 때마다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해 오는 건혁의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봤다.

헌터에게 있어 짐꾼이란 존재는 게임으로 치자면 일종의 인벤토리나 다름없다.

때문에 헌터들로부터 무시를 받는 발언을 듣더라도 짐꾼들은 참아야 했다.

물론, 법적으로 해당 행위에 관해서는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최대 3,000만 원의 벌금과 최고 징역 2년이라는 처벌이 법률로 규정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헌터를 신고한 짐꾼이 과연 몇이나 될까?

'녹음 자료 같은 걸 증거 자료로써 사용한다면, 앞으로 짐꾼으로는 활동할 수 없게 되겠지.'

헌터들은 이미 몇 차례 짐꾼들에게 신고당한 경험이 존재했다.

해당 법률이 시행된 이후 몇몇 짐꾼들은 집단으로 한 헌터를 범죄자로 만들어 거액의 합의금을 뜯어냈다.

그런 사건이 한동안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신고 내용이 거짓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직후, 짐꾼의 이미지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보호를 받기 어려워지고, 헌터들 역시 짐꾼들의 행동에 의심을 품어 블랙리스트에 올린 것이다.

'우리는 프리랜서야. 헌터들이 짐꾼의 정보를 공유하는 부분에 관해서는 정부에서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겠지.'

'어느 헌터는 어떠하고, 어느 짐꾼은 어떠하다'라는 정보를 헌터들끼리 공유하는 것에 대해 사법부와 헌터 협회에선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누구는 업무를 개판으로 하고, 누구는 마석을 빼돌리려고 했다.'

해당 내용이 협회 게시판 또는 헌터들이 가입하는 카페 등에 공유된다면, 헌터들은 사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공유된 정보를 사실로 간주하고, 해당 주인공을 최대한 거르려고 할 것이다.

"지혜 씨, 잘 부탁드릴게요."

지혜는 건혁의 친절함을 가식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거나.

하지만 마음이 있는 사람치곤 대화 내용이 너무나도 짧고 간단했다.

게다가....

"...대단해."

399,999위라는 순위가 무색할 정도의 실력.

설마, 건틀렛에 부착된 작은 방패로 화살들을 정확하게 막아 낼 줄이야.

게다가 다수의 고블린을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했다.

'저... 저 사람이 정말로 399,999위라고?'

그녀는 건혁의 순위를 들었을 때, 마음속으로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는 이번 공략대에 참가할 수 있는 최소 조건에 정확히 도달한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다른 헌터들보다 압도적인 토벌 수.

현재 지혜의 가방에는 D랭크 마석이 13개나 들어 있었다.

"허어, 체력이 남아도는 건가?"

지혜는 호위 담당 헌터의 중얼거림에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고블린 궁사를 향해 단독으로 질주하는 건혁.

분명, 그의 체력은 다른 헌터들보다 몇 배나 빠르게 소모될 것이다.

그런데.

"부탁드릴게요."

그는 피로 젖은 마석을 건네주며 작게 심호흡을 할 뿐, 크게 지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에게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금세 사라졌다.

저 정도의 능력이라면 분명 아름다운 여성들로부터 구애를 받겠지.

그렇게 점심 식사 시간이 찾아오자, 일행들은 사전에 발견해 둔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짐꾼들은 서둘러 바닥에 돗자리를 펼치고, 도시락과 음료를 가방에서 꺼내 주었다.

지혜 역시 건혁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

그녀가 입을 뻥긋거리자, 건혁은 아침에 준비해 둔 도시락을 우물우물 먹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도시락은 직접 준비하신 건가요?"

지혜의 물음에 건혁은 음식을 삼킨 뒤,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가요."

건혁의 단답에 지혜는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조용히 도시락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지혜 씨는 짐꾼 일 시작한 지 얼마나 됐나요?"

"이제 1년 정도예요."

"많이 힘드시죠? 저도 처음 짐꾼을 할 때는 뭣도 모르고 1박 2일로 했다가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

건혁의 이야기에 지혜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 건혁 씨도 짐꾼을...."

"네, 저도 몇 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짐꾼으로 매달 15번씩은 뛰었었어요. 헌터들한테 보수도 떼여 본 적도 있었고, 온갖 욕이란 욕도 먹어 봤었죠. 그래서 지혜 씨나 다른 짐꾼들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어요."

본인의 입장을 공감해 주는 건혁의 모습에, 그의 작은 배려들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욕을 먹고, 보수를 받지 못하더라도 아무 말도 못 하니... 처음에는 신고라도 해야 하나 싶었는데, 그랬다간 헌터들 사이에서 낙인이 찍힐 수 있다고 해서 그만뒀었죠."

"아...."

"그래서 그 녀석들에게 언젠가 내가 성공한 모습을 보여 주고, 되갚아 주겠다는 마음으로 이렇게 헌터가 됐어요."

건혁이 주먹을 세게 쥐면서 말했다.

그 모습에 지혜는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 대단하시네요."

마음만 먹는다고 짐꾼에서 헌터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만한 재능과 노력이 없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겠지.

건혁은 지혜가 감탄을 터트리자, 어색한 웃음과 함께 머리를 긁적였다.

"뭐, 솔직히 말하면 그런 복수심보다도 부양할 가족이 있다 보니... 어떻게든 참을 수밖에 없었죠."

"아, 결혼을 하셨나요?"

"네, 지금은 딸이 하나 있습니다."

건혁이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혜는 민망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유부남인 그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했었다니!

지혜는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그녀의 이상한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린 건혁.

"갑자기 왜...."

"아... 아니에요! 얼른 밥이나 먹죠."

"아, 네."

지혜는 허겁지겁 도시락을 비워 버렸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후부터 재개된 마수 사냥.

가방이 살짝 가벼워진 덕분인지, 짐꾼들의 얼굴은 편해 보였다.

마석보다도 무거웠던 음료와 도시락.

그러나 오후부터 재개된 사냥으로 짐꾼의 가방들이 다시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정지, 전원 자세를 낮추십시오."

세린의 지시에 모두가 수풀 아래로 몸을 낮추었다.

"아무래도 고블린 부족인 모양이네요."

전방의 공터에는 낮은 목책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움집처럼 보이는 건축물이 다수 보였는데.

언뜻 보더라도 고블린의 숫자는 수십을 가볍게 넘어갔다.

"물러나겠습니다."

그녀의 결정은 옳았다.

고블린의 숫자도 숫자지만, 놈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녀석과 충돌하는 것은 가급적 피하는 게 좋겠지.

모두가 발걸음을 돌려 조심스럽게 자리를 벗어나던 그때.

지혜는 그만 얼굴을 경직시켜야 했다.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신장 110cm의 작은 고블린.

-캬아아아아아악!

녀석이 지혜를 보며 우렁차게 울부짖자, 건혁이 재빨리 고블린의 목을 베어 버렸다.

서걱!

모두가 고개를 돌려 고블린 마을을 바라봤다.

씨익 웃고 있는 고블린 장군.

녀석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새파래진 세린의 안색.

그녀는 얼굴을 굳히며 다급히 소리쳤다.

"다... 달려요!"

 

제11화

11화. 헌터 (5)

-캬아아악!

-카아악!

수십 마리의 고블린이 헌터들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놈들의 울음소리를 '죽여라!' 정도로 추정하면서 재빨리 게이트를 향해 달아나는 헌터들.

이어.

파앙!

신호탄을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렸다.

구조 또는 지원을 바란다는 표시다.

-캬아아악!

"다... 달려!"

"이 멍청한 새끼야! 뒤돌아보지 마!"

짐꾼들이 고개를 돌리려 하자, 한 헌터가 짐꾼들을 향해 일갈을 터트렸다.

놈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헌터와 짐꾼들의 체력도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상태.

한 헌터가 스윽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힘겹게 달리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바로 박건혁의 파트너, 이지혜다.

그는 작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슬쩍 그녀의 다리를 걸었다.

파악!

"꺄악!"

짐꾼의 목숨값은 최대 1억 2천만 원.

적게는 3,000만 원 정도다.

헌터는 본인의 죽음을 피할 수 있다면, 최대 1~2천만 원 정도는 사용할 의향이 있었다.

아니, 대부분의 헌터들이 그렇게 생각하겠지.

1~2천만 원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다면....

그리고 짐꾼이 바닥에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헌터들은 그것을 무시했다.

"으...."

미끼가 된 지혜는 고통을 호소하며 일행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 나도...."

그 누구도 그녀의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캬아아악!

등 뒤에서 들려오는 고블린의 울음소리에 몸이 경직됐다.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

자신을 넘어트린 헌터에게 무언가 복수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복수는 뒷전이다.

붉은 안광을 빛내면서 다가오는 고블린들 탓에 복수보다도 공포가 먼저 일어났다.

"제... 제발 살려...."

마수 따위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다.

그러나 지혜는 고블린들에게 간절히 목숨을 구걸했다.

두 손을 열심히 비벼 댄 것이다.

그에 고블린들은 비웃음이라도 터트리듯 키득키득거렸는데.

그 순간.

-쿠어!

신장 2m에 육박하는 고블린 장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다른 고블린들에게 무언가 명령을 내리듯 손짓을 했다.

이내, 다수의 고블린들이 달아난 헌터들의 뒤를 추격했다.

-크르....

"아...."

부하들을 보낸 고블린 장군이 지혜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악귀처럼 무서운 얼굴과 거대한 몸집.

동시에 녀석이 풍기는 농후한 살기에 지혜는 그만 소변을 지리고 말았다.

"사... 살려...."

푸욱!

날카로운 무언가가 살을 파고들어 가는 소리.

지혜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왜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거지?

죽음을 기다리던 그녀가 슬쩍 눈을 깜빡였다.

-캬아악!

서걱!

이번에는 무언가를 베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덥석!

누군가가 자신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지혜는 화들짝 놀라면서 기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상대를 올려다본 그 순간, 표정이 얼어붙고 말았다.

헌터들과 함께 달아나지 않았던가?

이 사람이 왜 이곳에....

"얼른 일어나세요!"

그녀는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면서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저 미친...!"

지혜를 넘어트린 젊은 헌터의 모습에 나는 그만 욕설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자.

"불만이면 당신이 구하러 가든가!"

내 욕설을 들은 걸까?

헌터가 나를 향해 되레 소리쳤다.

나는 이를 뿌드득 갈면서 곧바로 우측으로 몸을 돌려 버렸다.

"저... 저런...!"

정말로 내가 지혜를 구하러 갈 줄은 생각도 못 했던 모양이다.

나는 내 목숨을 아주 중요히 여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내 딸인 수영이를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목숨을 각오할 준비 역시 되어 있다.

하지만....

"제길, 호구가 다 됐네."

어째서지?

나는 지혜를 구하러 가면서도 그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만들어 냈다.

'그래, 도시락 통을 아직 건네받지 못했잖아. 마석들도 전부 그녀한테 있고!'라면서 지금의 행동을 설득시켰다.

파슥!

나는 지혜를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수풀 아래에 몸을 숨겼다.

'제길....'

나도 멍청이는 아니다.

고블린 장군과 4~50마리로 추정되는 수많은 고블린들.

저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가는 100% 죽고 말겠지.

'장군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잠시 뒤, 내 예상대로 40여 마리의 고블린들이 도망간 헌터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지혜의 주변에는 고블린 장군과 대략 여섯 마리의 고블린뿐.

나는 헌터들을 추격하는 고블린들을 보고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고블린 장군을 정면에서 이길 순 없어. 그렇다면....'

나는 최대한 상황을 지켜봤다.

지혜에게 다가가는 고블린 장군.

"스테이터스."

------------------------

*성명: 박건혁

*종족: 인간

*칭호: -

*출신 국가: 한국

*LV: 25

*근력: 18

*민첩: 12

*체력: 16

*마력: 0

*AP: 4

*스킬: -

------------------------

남은 AP를 모두 민첩에 투자했었다.

그리고 고블린 장군이 지혜를 향해 아가리를 벌린 그 순간.

파밧!

지면을 박차 몸을 던졌다.

기척을 감지한 걸까?

녀석이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 검 끝은 이미 녀석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푸욱!

-크륵....

나는 재빨리 검을 뽑아내고, 사선으로 휘둘러 녀석의 상체를 베었다.

"뒈져!"

서걱!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고블린들은 우두머리의 죽음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나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캬아악!

나는 서둘러 지혜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얼른 일어나세요!"

내 외침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지혜.

"절대로 제 곁에서 멀어지지 마세요."

어차피 고블린들에게 포위되어 지혜가 도망갈 수 있는 장소는 없다.

솔직히 고블린 여섯 마리 정도는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체력으로 놈들을 모두 쓰러트릴 수 있을까?

근력과 민첩을 최대치까지 사용하기 위해 상당한 체력을 소모했다.

곧 바닥을 드러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하면서 검을 세게 쥐었다.

잠시 뒤.

-캬아아악!

녀석들이 달려들었다.

채앵! 서걱!

녀석의 검격은 건틀렛으로 손쉽게 막아 낼 수 있었다.

공격을 막아 낸 이후에는 도검을 휘둘러 일격에 숨통을 끊어 냈다.

괜히 한 녀석에게 많은 시간을 붙잡힐 순 없으니까.

'목... 목... 목....'

그래, 나는 녀석들의 목을 집중적으로 베어 냈다.

훈련의 성과가 나타난 걸까?

내 검격은 정확히 놈들의 목덜미를 베어 냈고, 고블린의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숙이세요!"

내 외침과 동시에 곧바로 바닥에 주저앉는 지혜.

나는 뒤에서 달려드는 고블린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푸욱!

-크헤엑!

녀석은 무기를 버리고, 두 손으로 내 도검을 붙잡았다.

목에서 도검을 뽑기 위해 발악하는 것이다.

그런 녀석의 얼굴을 향해 왼손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퍼억!

그러곤 발로 걷어차면서 도검을 녀석의 목덜미에서 뽑아냈다.

"하아... 하아... 하아...."

마석을 회수할 시간 따윈 없다.

언제 녀석들이 되돌아올지 모르니까.

지혜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내 모습에 곧바로 부축을 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저... 저야말로...."

"그보다 게이트 방향으로 가면 안 됩니다. 오른쪽으로 이동하죠."

"네."

나와 지혜는 게이트 방향에서 시선을 돌렸다.

가능하면 서둘러 게이트로 도망가고 싶었다.

게이트를 관리하는 직원은 다섯 명.

그들 대부분이 20~30만대 서열을 보유한 실력자들이다.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생존 확률은 크게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40여 마리의 고블린이 게이트의 방향으로 이동한 현재.

놈들이 다시 되돌아오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없다.

'제길.'

C랭크 마석을 내버려 두고 왔다는 사실은 확실히 가슴이 쓰라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은 목숨을 우선시해야지.

그렇게 수백 미터... 아니, 1km 정도를 이동했을 무렵.

"여기에서 잠깐 쉬도록 하죠."

우리는 새로운 공터를 발견했다.

"하지만...."

"이 게이트에는 놈들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내 발언에 그녀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참고로 이 게이트의 보스는 고블린 장군이 아니다.

협회에서 파악한 바에 의하면 보스는 고블린 주술사.

장군과 마찬가지로 C랭크의 마수지만, 장군보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녀석이다.

'그런 녀석과 만났다가는... 기적조차도 바랄 수 없을 거야.'

나는 공터의 바닥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음료가 남았던가요?"

"아, 네."

지혜는 허겁지겁 가방에서 음료를 꺼냈다.

나는 그녀에게서 이온 음료를 건네받아 잠시 목을 축였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지혜가 스마트폰을 꺼내면서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4시 47분. 이제 30분 정도 지난 것 같아요. 슬슬 움직이는 게...."

"...."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를 향해 움직이던 도중 우리는 대여섯 마리의 고블린과 조우하게 되었다.

놈들을 가볍게 쓰러트리고 게이트 인근에 도착하자, 한곳에 모여 있는 헌터와 짐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저... 저 사람!"

누군가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세린이 내게 달려왔다.

"무... 무사하셨군요."

"예, 당신들이 넘어트려 미끼로 내던졌던 지혜 씨도 구해 왔습니다."

가시가 박힌 내 목소리에 지혜를 넘어트렸던 젊은 헌터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동시에 다른 헌터들도 내 시선을 회피했는데.

나는 그들을 한 번씩 노려봤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죠. 앞으로는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지혜 역시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그들을 향해 원망과 욕설을 쏟아 내도 헌터들은 딱히 할 말이 없겠지.

그런데, 분노를 참아 내는 걸까?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가요."

그녀의 한마디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지혜는 먼저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인근의 게이트 처리 관리소 분당점에서 마석을 처분했다.

D랭크 마석 34개.

세금을 제하면서 내 통장에는 712만 원이 입금되었다.

"오늘 보수입니다. 한동안은 편히 쉬도록 하세요."

나는 은행에서 300만 원을 뽑아 지혜에게 건네주었다.

"이... 이건...."

"그런 상황을 겪고서 30만 원을 받아 간다면 기분만 더러울 겁니다. 그러니 받아 두세요."

"...네, 감사합니다."

300만 원이면 적어도 한 달 치 생활비는 될 것이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돈 봉투를 받자, 나는 작게 미소를 지으면서 은행을 나섰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보도록 해요. 저는 이만...."

그렇게 지혜와 작별 인사를 나누려던 순간.

위잉, 위잉, 위잉.

스마트폰이 진동을 울리기 시작했다.

내 것만이 아니다.

주변의 행인과 은행의 직원 등.

심지어 지혜의 스마트폰까지 진동을 울렸다.

[재난 문자]

나는 서둘러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

*제목: 안전 안내 문자

*내용: 강남구 세곡동에서 레이드 발생

(세곡동, 신촌동, 내곡동, 일원본동, 수서동... 의 주민들께서는 신속히 인근의 학교, 지하철역, 헌터 훈련장... 으로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자택에 계신 분들께서는 자택에서 나오지 마시고 얌전히 대기하여 주십시오.)

------------------------

"...?!"

세곡동?!

나는 서둘러 수영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세곡동은 서초구와 바로 인접한 지역으로, 내곡동과는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지역이다.

―아빠?

스마트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딸의 목소리.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작게 안도할 수 있었다.

"지금 집이지?"

―응, 아빠 언제 와?

"후우, 지금 갈 거야. 절대로 밖으로 나가면 안 돼. 알겠지?"

 

제12화

12화. 헌터 (6)

다행히 초등학교는 모두 방학 중이다.

가끔씩 친구 집에 놀러 간다는 핑계로 집을 나서는 수영.

그녀가 친구 집이 아닌 뒷산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때문에 오늘도 집 밖에 있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히 오늘은 집에서 나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수영이의 안전을 확인한 나는 서둘러 택시를 붙잡았다.

"내곡동 OO초등학교로 가 주세요."

"예? 내곡동은 방금...."

"10배로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10배라는 말에 액셀을 밟는 택시 기사.

그런데....

콰앙!

"으아악...!"

택시의 앞으로 거대한 바위가 들이닥쳤다.

차창 너머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대략 200m 정도의 거리에서 보이는 늑대의 무리.

D랭크 마수인 블랙 울프다.

"돈은 여기에 둘 테니까 그냥 도망가세요!"

나는 조수석에 5만 원 지폐 다섯 장을 던진 뒤, 황급히 택시에서 내렸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경보음.

택시는 내가 내리자마자 곧바로 후진을 하더니, 서둘러 분당구 방향으로 도망쳤다.

"제길!"

스마트폰으로 위치를 확인해 본 나는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내곡동에는 진입한 모양이지만, OO초등학교까지는 대략 800m.

자택까지는 837m를 이동해야 했다.

-커엉! 컹컹컹!

-아우우우!

"...."

블랙 울프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마음이 점점 다급해졌다.

등 뒤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블랙 울프에게 물어뜯기고 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블랙 울프의 울음소리가 순식간에 도로 위를 가득 채웠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미 말했지만 그들의 목숨보다 내게는 수영의 목숨이 더욱 소중하다.

물론, 수영이는 헌터들 중에서도 희귀하다는 특수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심지어 성장 능력까지 비상식적인 천재 중의 천재.

'한두 마리 정도는 상관없겠지만....'

지금의 그녀에겐 육체 능력의 성장에 한계가 존재한다.

육체 연령이 이제 겨우 10살이니까.

심지어 그녀는 회귀하고 이제 겨우 1년밖에 되지 않았다.

미래의 능력을 고스란히 가지고 회귀했다면 나 역시 걱정할 이유는 없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하아... 하아... 하아...."

나는 고블린 장군을 토벌하면서 얻은 AP를 곧바로 체력에 투자했다.

-커엉!

오른쪽에서 날아와 내 어깨를 물어뜯으려는 블랙 울프.

나는 몸을 내빼면서 녀석의 목덜미를 베어 냈다.

서걱!

"꺼져!"

수영이가 다니는 OO초등학교를 지나 집 앞으로 달려갔다.

"아...."

아파트로 들어갈 생각을 못 하고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섰다.

내 머릿속은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검은 갈기털을 지닌 코볼트들.

놈들이 사람들의 시체를 아파트에서 꺼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마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수영이 아파트 밖으로 꺼내진 순간.

내 이성이 잠시 끊어지고 말았다.

"크아아아아아아아!"

적어도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버티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이 아파트만은 마수들이 들이닥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블랙 울프라면 분명 수영이도 어떻게든 대처했을 터.

하지만 코볼트가 이 동네를 공격해 왔을 줄이야.

촤아아아악!

눈앞이 캄캄해졌다.

주변에서 코볼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제정신을 되찾았을 때, 나는 코볼트의 시체들 위에 서 있었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보자, 수십에 달하는 코볼트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더라.

나는 피로 적셔진 두 손을 바라보면서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수... 수영아."

오른손에 쥐고 있던 도검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수영이에게 다가갔다.

이마에서 선혈을 흘리는 그녀.

나는 허겁지겁 수영의 맥박을 확인했다.

"사... 살아 있어."

수영이뿐만이 아니다.

코볼트들이 아파트 밖으로 꺼내 둔 사람들 역시 몇몇은 살아 있었다.

나는 수영이를 데리고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소파 위에 수영이를 눕혀 둔 뒤, 서랍장에 보관해 둔 5등급 포션을 그녀에게 먹였다.

그래, 일전에 유신 길드로부터 받은 포션이다.

"...."

포션을 복용하고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수영이가 천천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나는 거실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하아...."

수영이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강남구에서 레이드가 일어나는 내용은 원작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 레이드 발생은 내가 원인이라는 건가?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고작 짐꾼과 헌터로서 몇 차례 활동하고, 조금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했을 뿐이다.

"X발."

나는 수영의 작은 손을 꼬옥 붙잡았다.

부디 건강하게 눈을 떠 주길 기도하면서 말이다.

수영의 상태를 살펴보던 시각.

창밖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군인과 헌터들이 도착한 모양이다.

'나머지는 저 사람들이 알아서 해 줄 거야.'

다른 피해자들은 안중에 없었다.

나는 이기적인 놈이니까.

잠시 뒤, 헌터로 보이는 사람들이 군인들을 데리고 아파트로 들어왔다.

남아 있는 잔당을 소탕하기 위함이겠지.

그리고 현관문을 열어둔 탓일까?

한 헌터가 신발을 신은 채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저는 대한민국 헌터 협회 청룡 기사단 소속 박민철이라고 합니다."

신분증을 보여 주는 그의 모습에 나 역시 헌터증을 제시했다.

"헌터로 활동 중인 박건혁입니다."

"그렇군요. 이쪽은... 자녀분이십니까?"

"네, 일단 포션을 먹여 두기는 했습니다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구급차가 도착할 겁니다."

민철의 대답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예."

"바깥의 코볼트들은... 설마, 박건혁 헌터님께서...."

그가 말끝을 흐리자,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예, 제가 처리했습니다."

"그... 그렇군요."

놀라울 것이다.

아니, 의심스러울지도 모르지.

서열 39만대의 헌터가 코볼트 수십 마리를 토벌해 냈다는 것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니까.

심지어 내 서열은 399,999위다.

40만대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의 애매모호한 순위.

"무전을 따로 넣어 두도록 하겠습니다. 구급대원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는 위층에 남은 마수들이 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민철이 아파트를 수색하는 동안 두 구급대원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수영이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조심스럽게 들것에 실었다.

그렇게 나는 구급대원들과 함께 구급 차량을 타고 병원으로 이동했다.

"포션을 먹이셨다고요?"

"네."

"상처는 확실히 아물었습니다. 하지만 머리를 다친 것이니,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검사를 진행해 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예, 부탁드립니다."

나는 정밀 검사를 통해 수영이의 몸에 이상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이틀간 진행된 정밀 검사.

다행스럽게도 수영이에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후유증과 트라우마가 남았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소견엔 고개를 끄덕일 뿐.

나는 병실에 입원하게 된 수영이를 찾아갔다.

"으으...."

이틀 만에 눈을 뜬 수영.

나는 다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

"수... 수영아?"

"...아빠."

"그래, 아빠야."

수영이가 잠시 눈동자를 굴렸다.

"여기는... 병원?"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아빠가 너무 늦어서 미안해."

수영이가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곤 왈칵 눈물을 터트렸다.

이어서 작은 주먹으로 내 가슴을 때렸는데.

"흐윽... 어... 언제든지 와 준다고 했었잖아!"

나는 그녀를 와락 껴안으면서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수영이가 아무리 1회차 인생을 경험하고, 마수들과의 전투에 익숙하다 할지라도 본인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대 앞에선 분명 무서웠을 것이다.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 역시 미노타우로스의 앞에서 소변까지 지렸었으니까.

나는 한동안 수영이를 안정시켜 줘야 했다.

잠시 자리를 비우려는 순간에도 내 소매를 붙잡는 수영이.

"어... 어디 가?"

"아빠 화장실 좀 다녀올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으면서 작게 미소를 지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친 뒤, 잠시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인터넷에 접속하자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졌다.

D등급 게이트가 폭발하면서 일어난 중규모 레이드.

현재 집계된 사망자는 무려 380여 명.

실종자는 1,800여 명으로 집계되었고, 그 외 부상자는 5,000명이 넘어갔다.

'이 정도가 중규모인 건가.'

도대체 대규모 레이드라는 것은 어느 정도라는 거지?

나는 인터넷으로 대규모 레이드를 검색해 봤다.

그러자....

<부산에서 발생한 대규모 레이드, 대한민국 사상 최대 규모의 피해?!>

기사 내용을 확인하곤 미간을 와락 찡그렸다.

사상자 9만 8천여 명.

그중 사망자는 6,200명에 육박했다.

재산 피해 역시 8,000억대 규모로 확인됐다고 한다.

건물, 도로, 지하철 및 각종 시설들이 파손되는 등.

기자가 촬영한 사진들은 그야말로 인류의 종말을 연상케 했다.

"아빠!"

병실 앞에서 나를 찾는 수영이.

나는 화들짝 놀라면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아, 아빠 여기 있어."

나는 다급히 딸에게 달려갔다.

내게 안기려 하는 수영이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정말로 이 작은 아이가 1회차를 경험했던 걸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1회차를 경험했든 경험하지 않았든, 내 사랑스러운 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나는 수영이의 퇴원 수속을 밟고 곧바로 자택으로 돌아왔다.

"수영이는 들어가서 쉬고 있어. 아빠가 정리해 둘 테니까."

"...나도 도울래."

"괜찮아. 아빠가 청소할게."

나는 수영이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려 곧장 침실에 들여보냈다.

집 안은 정말로 엉망이었다.

창문이 깨지고, 가구와 TV는 박살 났다.

게다가 바닥 역시 얼마나 더러워졌는지....

"하아, 그냥 전부 버려 버리자."

나는 소파와 테이블 등의 가구를 포함해 TV까지 전부 버려 버렸다.

동시에 바닥을 청소기로 한 번 정리한 다음 걸레로 닦아 냈다.

"벽지는... 업체를 불러서 시공해야겠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휑해진 거실을 바라봤다.

기본 옵션이었던 것들까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참에 이사라도 가 볼까?"

지금까지 저축해 둔 돈과 보증금을 합친다면 적어도 2억 원 정도는 마련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전세 대출까지 받는다면 조금이나마 괜찮은 지역으로 이사할 수 있겠지.

"기사단 지부가 위치하는 지역은 집값이 10억이 넘어가고, 청약 통장도 없으니 공공 분양을 받기도 조금 어려우려나...."

심지어 공공 분양 역시 요새는 안전 지역에서 조금 먼 곳들을 대상으로 시행하고 있었다.

이번 레이드도 서초구라는 지역 덕분에 군인과 헌터들이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던 거겠지.

"조금 멀더라도 기사단이 주둔 중인 지역이면 좋겠는데...."

협회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이름을 가진 기사단이 산하에 존재한다.

그중 청룡 기사단과 백호 기사단은 서울 용산구에 주둔 중이며, 주작 기사단은 인천, 현무 기사단은 부산에 주둔 중이었다.

물론, 각 도시마다 기사단의 지부들이 존재하지만, 기사단 본부와 가까운 용산구 근처에 집을 마련해 둔다면....

"뭐, 당장은 불가능한 일이겠지."

 

제13화

13화. 헌터 (7)

기사단의 본부가 위치한 지역은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높은 집값을 자랑했다.

상위 1~2%가 거주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지.

"강남구에는 청룡 기사단 지부가 몇 개 존재했던가?"

나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확인해 보니 강남 삼성동과 도곡동에 청룡 기사단 지부가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초구의 경우에는 교대역 부근에 백호 기사단 지부가 존재했는데.

"교대역 주변으로 집을 알아봐야겠어."

나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어 두고, 서둘러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돼지고기와 간장, 설탕, 다진 마늘 등의 재료를 준비해 제육볶음을 만들었다.

식탁이 위치했던 자리에 간이 테이블을 펼쳐 두고 밥과 반찬들을 올려 두었다.

제육볶음과 함께 다급히 준비한 된장국을 차린 다음에야 수영이를 불렀다.

"우와, 제육볶음!"

"내일 식탁이랑 가구들을 보러 갈 생각인데, 수영이도 따라갈래?"

"응!"

방학 중인 초등학교에서는 교직원 중 몇몇이 사망하게 되어 레이드가 마무리되기 전까진 방학이 연장될 예정이라며 스마트폰으로 통지를 보내왔다.

현재 세곡동에서 발생한 레이드는 헌터들에 의해 진압 중이라고 한다.

게이트의 등급이 D인 만큼 진압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마수의 숫자가 이례적일 정도로 많다는 기사가 조금 전에 업로드되었다.

완벽하게 레이드를 진압하기 위해선 적어도 일주일에서 이 주일 정도는 소요될 것이라고 하니, 한동안은 스케줄도 취소하면서 수영이와 함께해도 괜찮겠지.

"잘 먹었습니다. 우선은 TV부터 사야 할 것 같네."

식사 시간 때마다 틀어져 있던 TV 소리가 사라지자, 무언가 허전함을 느꼈다.

"정부로부터 받을 재난 지원금은 한 달은 지나야 나올 테니... 에휴."

* * *

다음 날, 나는 집주인에게 연락하여 현 상황을 설명하고, 인터넷으로 TV를 주문한 뒤, 수영이와 함께 경기도에 위치한 가구 매장을 찾아갔다.

정확히는 스크래치 종합 가구 매장이다.

리퍼 제품을 취급하는 매장으로, 원가의 20~40% 금액으로 구매할 수 있어 나로서는 큰 부담 없이 마음에 드는 가구를 찾아볼 수 있었다.

"흐음, 이것도 괜찮아 보이네."

고급스러운 소파와 세련된 서랍장.

가격표가 붙어 있다 보니 나는 마음껏 둘러보면서 금액을 비교해 볼 수 있었다.

수영이는 소파에 앉아 보면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베이지 색상의 패브릭 소파.

"이게 마음에 들어?"

"응, 아빠도 앉아 봐."

나는 수영이를 따라 소파에 앉아 봤다.

확실히 마음에 든다.

금액도 적당하고.

"그럼 소파는 이걸로 구매하자. 다음은...."

거실에 비치할 작은 테이블.

그 외 서랍장 등의 가구들을 구매하고 배달을 요청했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본 스크래치 가구 매장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다음은... 영화관이라도 갈까?"

"갈래!"

수영이가 활짝 웃으며 하늘로 두 손을 뻗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까운 영화관을 찾아갔다.

팝콘과 콜라를 양팔에 가득 든 우리는 새롭게 개봉한 영화를 관람하고, 인근의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야 자택으로 귀가할 수 있었다.

"후우, 드디어 집이네."

"아빠, 내일은 일 나갈 거야?"

"아니, 한동안은 아빠도 좀 쉬려고."

그런 내 대답에 수영의 얼굴에서 화색이 돌았다.

수영이는 보드게임을 가지고 나오더니, 거실에 간이 테이블을 펼쳤다.

"아빠, 젠가 하자!"

"그럴까?"

나는 과자를 보관해 둔 수납장에서 과자들을 꺼내 거실로 가지고 왔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도중.

"아빠, 헌터들이 하는 일은 많이 힘들어?"

"으음... 조금은 힘들지."

"아빠는 헌터들 중에서 얼마나 강해?"

"제일... 강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럭저럭 많이 강할걸?"

수영이를 구할 때 무의식적으로 코볼트를 토벌하면서 내 레벨은 순식간에 35까지 치솟았다.

그리고 레벨 30에 도달함과 동시에 특전으로 10AP가 주어졌는데.

덕분에 근력은 26으로, 민첩은 15, 체력은 20까지 급성장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서열을 크게 높일 수 있을 거야. 레이드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협회를 찾아가 보자.'

수영이는 게임을 즐기면서 내 헌터 생활에 대해 질문을 던져 왔다.

"배도 많이 들어간 것 같아."

"아하하...."

내 하복부를 바라보는 수영이.

확실히 빙의 초기에만 하더라도 볼록한 올챙이배였었지.

지금은 확실히 복근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게다가 피부도 이전보다 깨끗하다.

'각성자는 노화의 진행 속도가 느리다고 하니....'

현재 대한민국 서열 100위대에 속해 있는 헌터들은 대부분 4~70대의 중장년층이다.

그러나 외견만은 30대... 많게는 40~50대 정도로 유지됐다.

그만큼 수명도 일반인의 2배에 달할지 모른다는 가설이 거론되고 있었는데.

게이트의 첫 개방이 2000년인 만큼 해당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알아갈 수 있으리라.

"오오~근육!"

수영이는 내 팔뚝을 만지면서 감탄사를 터트렸다.

"하하하!"

그렇게 밤은 금세 찾아왔다.

나는 침실에 들어오자마자 곧장 인터넷으로 교대 인근의 매물들을 살펴봤다.

대출을 받아도 턱없이 부족할 정도의 금액.

"월세 보증금도 장난 아니네."

한동안은 이 주변을 벗어나긴 힘들겠어.

이번 레이드로 내곡동의 집값은 잠시 하락세를 보였지만, 게이트가 진압되는 과정이 TV와 인터넷으로 보도되자, 본래의 값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 청룡 기사단에서 나를 찾아왔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 헌터 협회 청룡 기사단 소속 박민철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의 명함을 받으면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청룡 기사단의 분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

오전에 연락을 걸어온 민철.

대면을 요청한 그는 일부러 집 근처까지 찾아왔다.

수영이를 집에 놔둔 채 인근 카페로 나온 나는 명함을 받고 난 뒤, 슬그머니 자리에 착석했다.

"우선 일전의 코볼트들에 대한 금액입니다. 인근 CCTV를 통해 박건혁 헌터님이 코볼트를 토벌했다는 사실은 확인됐습니다. 마석과 부산물들을 전부 협회에서 매입하고 싶습니다만...."

"예, 그건 상관없습니다."

"그러면 이쪽의 매각 처리 동의서를 작성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건네받은 동의서에 이름, 전화번호, 서열, 계좌 번호 등의 정보를 기입했다.

입금받을 금액은 무려 1,034만 원.

마석뿐 아니라 코볼트의 가죽과 뼈 등의 부산물까지 포함된 금액이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내가 토벌한 사실까지 확인해서 돈을 건네주려 하다니.

"여기 있습니다."

민철은 스윽 동의서를 한 번 훑어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 박건혁 헌터님을 저희 청룡 기사단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갑작스러운 스카우트 제의에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정말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니야?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사단원인 그가 직접 찾아온 것에도 납득할 수 있었다.

고작 매각 처리 동의서에 사인을 해 달라는 것이 본론이었다면 협회에서 직원을 보냈을 터.

"어째서 저를 기사단에...."

내 물음에 민철이 생긋 미소를 지으면서 가방에서 서류를 한 장 꺼내 보였다.

"실례지만 헌터님의 그간 성적들을 확인해 봤습니다. 매달 주기적으로 성장하시는 모습에 저희 청룡 기사단에서는 박건혁 헌터님께 헌터로서의 뛰어난 재능이 존재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동시에 일전의 CCTV를 통해 확인한 결과, 37마리의 코볼트를 단신으로 토벌해 낸 능력 역시 저희 기사단에서는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협회에서 각성 점수를 검사해 보신다면 분명 30만대 초반의 서열을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상당한 고평가에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그 당시의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제 딸이 놈들에게 죽었다는... 아니,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이성이 끊어진 듯 폭주한 거라서...."

"아버지의 힘이라는 거군요."

민철의 발언에 나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되나요?"

하지만 기사단에 입단한 단원들은 대부분 서열 10만대 이상.

대한민국의 정예 중 정예들이다.

국가로부터 고용된 그들은 각종 혜택을 제공받을 수 있으며, 6~7급 공무원보다 몇 배나 높은 월급까지 보장됐다.

헌터들에게는 그야말로 꿈의 직장이나 다름없으리라.

물론, 수익적인 부분을 추구한다면 길드 쪽이 더욱 압도적이기는 하겠지.

그러나 수시로 게이트를 드나드는 길드와 다르게 기사단은 국가의 치안과 재난 상황에 대처하는 존재들이다.

물론, 실전 훈련을 위해 게이트를 드나들긴 하겠지만, 그 빈도수는 길드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으니, 업무적인 면에서는 기사단 쪽이 조금 더 수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편하게 먹고살려면 기사단 쪽이 좋기는 하겠지. 연금까지 보장되는 공무원이니까.'

민철은 고민하는 내 모습에 작게 미소를 지으면서 새로운 서류를 꺼내 보였다.

"이쪽은 계약서입니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참고로 기사단에 입단할 경우, 헌터님의 성장을 위해 협회에서 수많은 지원을 해 드릴 것을 약속해 드립니다. 해당 내용은 계약서의 3페이지에 기입되어 있으니,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의 정중한 태도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직 레이드 건이 마무리되지 않아서요."

민철이 카페를 나서자, 나는 계약서의 내용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세금을 제한 초봉은 약 1억 원 정도.

대중교통 할인과 식비(점심 식사) 지급 및 공공 주택 할인 등.

수많은 혜택들이 주어졌다.

그리고 3페이지를 확인한 순간.

나는 기사단의 입단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한화 수천만 원 상당의 무기와 방어구를 지원. 매달 5등급 포션 3개 지급. 실전 훈련이 필요하다 생각되는 경우, 기사단장으로부터 게이트의 출입 허가서를 받으면 단독으로도 출입이 가능하다고?"

게이트의 출입 인원을 규정해 둔 것은 헌터들의 안전을 고려함과 동시에 그들의 죽음을 방지하기 위한 대비책이었다.

2000년부터 시작된 대격변.

그리고 2001년부터 새롭게 탄생한 헌터라는 직업.

이어서 마수들로부터 위기를 헤쳐 나가고, 마수가 남긴 부산물, 즉 가죽과 마석 등의 가치가 서서히 증명되기 시작하면서 헌터들은 마수를 토벌해 부와 명예를 쌓고자 게이트에 들어갔다.

그러나 2002년, 협회에 등록된 수십만 명의 헌터들 중 2~30%가 마수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원인을 조사해 본 결과, 사망자 대부분이 소규모 그룹 또는 단독으로 게이트에 출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그 사실이 언론으로 퍼지게 되면서 정부와 국회는 헌터 협회와의 논의 끝에 2003년 게이트 출입에 필요한 최소 인원을 규정하는 법안을 발의하여 2004년에 통과시켰다.

"반발이 꽤 심했다고 하던데...."

당시 헌터들로부터 어마어마한 반발을 사게 된 법안.

때문에 국회와 정부에서는 헌터들에게 단독으로 게이트의 출입이 가능한 최소한의 규정을 제시했다.

등급에 따라 단독으로 게이트의 출입이 가능한 서열 규제를 만든 것이다.

 

제14화

14화. 헌터 (8)

"규제가 좀... 많이 엄격하긴 하지."

F등급 게이트는 서열 200,000~299,999위.

E등급 게이트는 서열 150,000~199,999위.

D등급 게이트는 서열 100,000~149,999위.

....

2007년 각성 능력을 측정할 수 있는 기계가 미국에서 수입되자, 국가에선 서열 규제를 통한 단독 출입을 규정해 헌터들의 불만을 가라앉혔다.

국가로서는 헌터라는 자원을 쉽게 잃을 순 없다.

마수들 중에는 전차의 포격조차 버텨 내는 괴물들이 존재하니까.

그리고 그런 괴물을 단신으로 토벌해 낸 존재가 나타났다.

"서열제 도입 이후 대한민국 서열 1위를 지키고 있는 고구려 길드 마스터, 검신(劍神) 정윤호."

검신(劍神)이라는 이명은 어느 커뮤니티에서 시작된 단어다.

TV와 신문에서 정윤호에 대한 활약이 공개될 때마다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해 정윤호의 이명을 널리 퍼트렸고, 결국에는 언론에서까지 정윤호를 검신이라는 이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지금은 이명을 정하는 거대 커뮤니티가 인터넷에 존재하게 되었는데.

회원 수 200만 명을 돌파한 해당 커뮤니티에선 서열 1,000위 내에 속한 헌터들을 대상으로 투표라는 형식을 통해 이명을 붙였다.

"뭐, 이명은 됐어. 지금은 서열 399,999위인 내게도 F등급 게이트에 단독으로 출입이 가능한지가 중요하니까."

나는 계약서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민철에게 전화하여 궁금한 부분들을 물어봤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나는 F등급 게이트에 단독으로 출입할 수 없다는 모양이다.

심지어 평일에는 기사단 지부에 방문하여 훈련을 받아야 하고,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상시 대기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게다가 주말에 공략대에 참가할 때는 협회 홈페이지에 개별적으로 신청서를 제출하여 승인까지 받아야 한다고 하니....

"후우, 규제가 너무 많아."

매력적인 혜택들도 많았지만, 그만큼 불편한 부분도 많았다.

"차라리 길드를 만들어 보자."

E등급 게이트를 출입하기 위한 조건은 서열 40만대 이상의 헌터 다섯 명이다.

물론, 그 외 특별 조항도 존재했다.

서열 30만대 이상의 헌터가 한 명이라도 포함되어 있으면 요구되는 헌터의 숫자는 줄어든다.

"E등급 던전은 30만대 헌터 셋만 있으면 되는구나."

나는 하루가 지나자마자 수영이와 함께 헌터 협회 서울 중앙 본부를 방문했다.

나는 30,000원이라는 각성 능력 검사 비용을 지불한 후, 검사실 앞으로 다가갔다.

"수영이는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면 돼. 알겠지? 누가 말 걸어도 그냥 무시하고, 맛있는 거 사 준다고 따라가면 절대 안 돼."

"나도 다 알아."

수영이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작게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러면 아빠 잠시만 들어갔다가 나올게."

나는 검사실로 들어가, 검사관의 안내에 따라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각성 능력을 수치화하여 확인한 검사관.

그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다... 다시 한번 검사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재검사가 시작된 이후, 직원은 다시 한번 놀라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검사 부스를 나온 순간, 그는 마치 괴물을 보듯 나를 바라봤다.

"저... 저번 달 대비 각성 능력의 점수가 대폭으로 향상되셨습니다."

10,000점 만점에서 나는 216점이라는 점수를 받았다.

저번 달의 각성 능력 점수는 137점.

검사관의 '대폭'이라는 말이 납득되었다.

"서열 299,999위의 각성 점수를 알 수 있을까요?"

"네,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개인 정보 보호법에 의거해 이름과 전화번호 등의 정보를 건네줄 수 없지만, 299,999위의 각성 능력 점수는 협회 홈페이지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는 모양이다.

협회 홈페이지에 접속해 점수를 확인한 검사관은 박수를 치면서 내게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순위가 어떻게 변할지는 함부로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저번 달 기준으로 299,999위의 각성 능력 점수는 209점이었네요. 잘하면 단번에 20만대 서열에 들어가실 수도 있으시겠어요."

그의 발언에 내 얼굴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특전으로 받았던 10포인트가 큰 역할을 해 준 모양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보다도 약한 헌터가 20만 명 이상 존재한다는 건가?

'게다가 10,000점 만점에서 209점이 299,999위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검사관은 내 데이터를 확인하면서 작게 의문을 표했다.

"성장 점수도 확실히 증가했지만, 초기 각성 검사보다 13점 정도 상승했을 뿐이네요. 그런데도 이런 성장력이라니...."

현재 내 성장 점수는 고작 34점.

서열 40만대 헌터들과 비슷한 정도라고 한다.

그럼에도 이런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다니.

"후우...."

검사관은 무언가 질문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끝내 한숨을 내쉬면서 내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검사는 이걸로 끝입니다. 이후 박건혁 헌터님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형식적인 인사를 마무리로 나는 검사실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의자에 앉아 기다리던 수영이가 내게 달려왔다.

"아빠, 검사 끝났어?"

"응, 이제 나가서 밥이라도 먹고 돌아가자."

"돈가스!"

힘차게 대답하는 수영.

나는 흐뭇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오늘 점심은 돈가스로!"

우리는 돈가스 전문점에서 9,000원에 판매하는 치즈돈가스를 먹은 뒤, 주변을 둘러보다가 호떡 하나를 베어 물고 집으로 돌아왔다.

'20만대 서열에 올라선다면 길드 멤버를 모으는 것도 여러모로 수월해질 거야.'

그렇게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세곡동 레이드가 진압되길 기다렸다.

* * *

내곡동의 피해 시설들이 하나씩 복구되기 시작하고, 마침내 2017년 3월이 되었다.

내 헌터증은 3월 1일 자정이 되자마자 곧바로 갱신됐다.

299,999위로 말이다.

"...저... 정확하게 299,999위라고?"

바뀐 숫자는 고작 하나.

첫 번째 자리가 3에서 2가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숫자 하나가 정말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보여 주었다.

공략대에 참가 신청을 하는 순간, 곧바로 승인 메일을 보내 주는 공략대장들.

399,999위였던 시절 D등급 게이트 공략에선 다양한 사유를 통해 거절 답변을 받았었다.

실제로 D등급 게이트 공략에서 나를 받아 준 것은 유세린뿐이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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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인: 김전일(서열: 312,143위)

*참가 신청서 확인했습니다. 3월 5일(일) 오전 9시까지 서울 강남구 제17번 게이트로 나와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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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이 20만대에 들어선 덕분일까?

공략대장들의 태도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역시... 서열은 높이고 봐야겠어."

3월 1일 오전 11시경, 나는 민철로부터 축하 문자를 받았다.

아무래도 내 서열을 확인해 본 모양이네.

그의 문자 내용에서 놀라움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야 한순간에 10만 명이라는 헌터들을 제치고 20만대에 올라선 것이니까.

물론, 이번에도 턱걸이지만.

"설마, 10만대에 들어설 때도 199,999위로 들어서는 건 아니겠지?"

물론, 나쁜 일은 아니지만, 기분이 살짝 묘할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고 곧바로 거실로 나갔다.

슬슬 점심 식사를 준비해야지.

"아빠, 오늘은 라면 먹을래."

"흐음, 그러고 보니 라면을 먹은 지도 꽤 오래됐네. 그래, 오늘은 짜장 라면 먹을까?"

"아니, X라면 먹을래."

"...그래, 한국인이라면 역시 X라면이지."

수영이의 건강을 생각하다 보니, 나는 인스턴트 음식을 한 달에 2~3번 정도로 줄이게 되었다.

그리고 인터넷에 떠도는 영상들을 통해 요리를 배우고, 수영이가 좋아하면서도 건강한 음식들을 손수 만들었다.

조금씩이지만 부모로서의 행동을 몸에 익히려 한 것이다.

오랜만에 수영이와 함께 먹게 된 라면.

확실히 자취 생활에서 먹었던 라면보다 더욱 맛있었다.

파와 달걀을 넣어서 그런가?

아니면 마주 앉아 함께 먹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걸지도.

어찌 됐든 점심 식사를 마치고, 수영이의 문제집을 확인했다.

"...전부 다 풀었네."

초등학교 3학년과 4학년 과정의 문제집.

답안지는 내가 미리 회수해 두었지만, 틀린 문제는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1회차를 경험한 그녀라면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나는 작게 미소를 지으면서 수영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수영이, 정말로 대단한데? 벌써 4학년 수학까지 전부 푼 거야? 이거 영재들만 나온다는 TV 프로그램에라도 출연해야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헤헤헤...."

수영이 배시시 웃어 보였다.

확실히, 지금의 그녀라면 영재를 뛰어넘는 천재로서 TV에 출연해도 문제는 없으리라.

물론, 정말로 그럴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오늘은 뭘 할까? 인형 놀이? 아니면...."

내 물음에 수영이는 쓰게 웃어 보였다.

그래, 나도 이해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초등학교 3학년생은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게 정상이 아닐까?

수영이는 방으로 들어가 마수 백과라는 서적을 가져왔다.

"이거 읽어 줘."

"마수... 백과? 이건 수영이한테 아직 어렵지 않을까?"

물론, 어렵지 않겠지.

이미 머릿속에 보유한 지식들일 테니까.

수영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대답했다.

"상관없어. 나도 나중에 헌터가 되려면 공부해야지."

나는 그녀의 대답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분명, 아빠인 내가 놀아 줘야 하는데, 마치 수영이가 나를 놀아 주는 듯한... 아니, 가르치는 듯한 느낌이다.

마수 백과를 읽어 주자 수영이는 곰곰이 생각에 잠기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 왔다.

'정말로 내가 배우는 기분이네.'

협회에서 발간한 마수 백과엔 다양한 정보들이 실려 있었다.

이전에 싸웠던 코볼트와 고블린, 블랙 울프 등의 정보들까지.

인터넷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그보다도 상세한 내용이 담겨 있는 마수 백과.

"흐음...."

나는 잠시 읽는 것을 멈추고 마수들의 행동 패턴에 대한 생각에 빠졌다.

그런 내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린 수영.

"아빠?"

수영이가 내 소매를 잡아당기자, 나는 화들짝 놀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아아, 미안해.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그보다 어디까지 읽어 줬더라?"

"여기, 이쪽의 오크 전사의 특징까지 읽었어."

"그... 그랬었지."

C랭크 마수인 오크 전사.

서열이 20만대에 올라섰다고는 하지만, 지금 당장 도전해 보긴 어려운 사냥감이다.

2m를 가볍게 상회하는 높은 신장.

살벌한 근육에 다부진 육체.

녹색의 피부와 붉은 눈동자.

밖으로 돌출된 어금니까지.

'동영상으로 몇 번 보기는 했었지만, 평범한 성인 남성이 오크 전사 앞에선 어린아이처럼 보였었지.'

서열 21만대의 헌터가 오크 전사 한 마리를 상대로 힘겨워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물론, 오크를 토벌하는 것은 성공했다.

하지만 상대가 둘이었다면?

분명, 그 헌터는 목숨을 잃었겠지.

'하물며 내 경우는 장비조차 허접하니....'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으면서 다시 수영이에게 마수 백과를 읽어 주기 시작했다.

 

제15화

15화. 헌터 (9)

그렇게 한 시간이 흘러 마수 백과는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수영이가 TV로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는 동안 나는 세탁기에서 빨래들을 꺼내 건조기에 넣고, 청소기로 거실과 침실, 부엌 바닥을 밀고 다녔다.

"오늘은 화장실도 청소해 둬야지."

일주일에 2~3번씩 청소하는 화장실.

나는 구석구석 물때를 닦아 내면서 화장실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그러는 동안 건조기가 벨 소리를 울렸다.

화장실 청소를 마친 다음, 건조기에서 빨랫감들을 꺼내 옷들을 갰다.

그리고 잠시 수영이와 함께 TV를 보다가 오후 6시 30분쯤 부엌에서 앞치마를 걸쳤다.

"수영아, 먹고 싶은 거 있니?"

"부대찌개!"

마침 TV 프로그램에서 부대찌개가 나온 모양이다.

"그래, 오늘 저녁은 부대찌개로 먹자."

"라면도!"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나는 부대찌개 재료를 준비하면서 찬장에서 X라면을 집었다.

7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부대찌개가 완성되었다.

냄새를 맡은 걸까?

수영이 슬그머니 내 곁으로 다가와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낸다.

"밥은 아빠가 준비할게."

나는 주걱을 쥔 채 밥솥 뚜껑을 열었다.

쌀밥 위로 새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왔다.

주걱으로 밥그릇에 쌀밥을 담아 곧바로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그러자 밥그릇을 제 자리에 옮겨 두며, 숟가락과 젓가락을 준비하는 수영이.

"잘 먹겠습니다!"

수영이는 쌀밥 위에 라면을 건지기 시작했다.

면발이 너무 붇게 되면 맛이 없어질 테니, 라면부터 빠르게 먹어 치울 생각인 모양이다.

나는 시장에서 사 온 반찬들을 먹으면서 부대찌개에 손을 뻗었다.

그렇게 나름 오붓한 저녁 식사 시간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밤 10시가 될 때쯤 침실로 들어가 컴퓨터 전원을 켰다.

"다음 달에는 협회를 한번 찾아가 봐야겠어."

내 책상에는 길드 설립 신청서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미 길드명까지 생각해 둔 상태.

협회 홈페이지에는 길드원 모집 공고를 올리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나 길드원으로 받아들일 순 없는 법.

나는 서열보다도 신뢰도를 중심으로 길드원을 모집할 생각이다.

'짐꾼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하는 게 마음이 편하겠지.'

때문에 한 달간은 임시 공략대를 오가면서 인맥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 * *

3월 5일 일요일, 강남구 제17번 게이트.

나는 게이트 앞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나게 되었다.

"아... 안녕하세요."

세곡동 레이드가 일어난 당일, 함께 게이트를 드나들었던 파트너, 이지혜다.

나는 그녀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랜만이네요.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잠시 뒤, 공략대장이라는 사내가 헌터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보수는 유세린이 이끌었던 공략대와 마찬가지.

비율 분배가 아닌 개별 분배 방식으로 진행됐다.

"박건혁 씨와 이지혜 씨는 2팀으로 가시면 됩니다."

제2팀 팀장은 한다예라는 20대 후반의 여성이다.

그녀의 서열은 262,380위.

상당한 실력자다.

그녀는 팀원들을 호출해 각자의 역할을 분배했다.

"고블린 궁사는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건틀렛은 방패인가요?"

다예의 손가락이 내 왼팔을 가리켰다.

"네, 크기는 작지만 마력 코팅이 되어 화살을 막아 내는 것 정도는 가능합니다."

"100m 기록은 몇 초죠?"

"최고 7.61초입니다."

내 대답에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곤 첫 전투에서 내 실력을 확인해 보겠다는 듯 '알겠습니다. 그럼, 한번 지켜보도록 하죠.'라고 대답했다.

* * *

강남구 제17번 게이트.

임시 공략대 제2팀 팀장인 다예는 첫 전투에서 짐꾼의 호위를 맡았다.

동시에 팀원들의 움직임을 살폈는데.

촤아아악!

드넓은 평야를 홀로 질주하는 사내.

그는 순식간에 고블린 궁사들을 토벌해 냈다.

무려 다섯 마리의 고블린 궁사를 홀로.

'생각한 것보다 더 뛰어나네. 서열이 299,999위라고 하기에 30만대 실력자 정도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생각을 고쳐야겠어.'

그녀는 건혁의 움직임에 감탄을 자아냈다.

다른 헌터들과 달리 균형이 잡혀 있는 육체.

근력과 민첩이 적절히 어우러지면서 적을 쓰러트린다.

심지어 고블린 궁사 다섯을 토벌하고도 동료를 돕기 위해 재빨리 되돌아오는 건혁.

그는 고블린 궁사 다섯 마리와 고블린 전사 세 마리를 토벌하는 것으로 첫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짝짝짝짝짝.

"훌륭하네요. 정말 턱걸이로 20만대에 들어선 헌터가 맞나요?"

"아하하하...."

"아무튼 간에 다음 전투에서 짐꾼의 호위 역은 건혁 씨가 맡아 주세요. 이후의 전투에선 고블린 궁사를 상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건혁은 회수해 온 마석을 지혜에게 건네주었다.

"회... 회수 작업은 제가 해도 괜찮은데...."

"궁사들은 여기에서 100m나 앞에 있습니다. 저 거리를 혼자서 다녀오기는 위험하잖아요."

"...아저씨가 함께해 주시면 제가 작업할 수 있어요."

"뭐, 그것도 그렇지만... 여덟 마리를 혼자서 처리하기는 오래 걸리지 않을까요? 게다가 제 경우에는 손쉽게 작업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또, 회수 작업에 오랜 시간을 들인다면 일행들에게 불편을 끼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궁사들은 제 쪽에서 처리하겠습니다. 그 외의 전사들은 부탁드릴게요."

헌터가 직접 마석을 회수한다는 것은 보기 드문 광경이다.

짐꾼으로선 본인의 업무를 헌터가 대신해 주는 셈이니, 여러모로 부담도 되겠지.

하지만 건혁은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한 방법을 선택했다.

짐꾼의 근력으로는 고블린의 살과 가죽을 베어 내는 데 여러모로 시간이 필요하다.

마석을 찾아 회수하기까지는 마리당 대략 1~2분 정도가 소요되는데, 그 작업을 건혁은 10초 만에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나와 함께 100m를 이동해서 5~10분간 회수 작업을 한다면, 괜히 다른 일행들로부터 좋지 않은 시선을 받을 수도 있겠지.'

지혜를 배려하려던 건혁의 행동은 다른 짐꾼들로부터 의아한 눈길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헌터들 역시 마석을 회수하는 건혁을 힐끔 살펴보며 미간을 좁혔다.

마석의 회수 작업이 진행될 때, 헌터들은 조금이나마 휴식을 취했다.

다음 전투를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100m를 질주하여 궁사들을 상대하는 건혁이 마석까지 직접 회수한다니....

"건혁 씨, 조금이라도 쉬어 두는 게 좋아요. 회수 작업은 지혜 씨에게 맡겨 두고...."

"100m를 지혜 씨 혼자서 보내기가 조금 그래서요."

다예는 고개를 돌려 고블린 궁사들의 사체를 바라봤다.

확실히 헌터 서열 537,980위인 지혜를 홀로 50~100m 정도 떨어진 지역에 보내는 것은 위험하다.

"숨어 있는 마수들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면, 지혜 씨는 분명 위험에 빠질 겁니다."

그런 건혁의 대답에 다예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혜의 죽음은 곧 헌터들의 손해와 연결되니 말이다.

건혁으로부터 듣게 된 내용을 다른 헌터들에게 전달하는 다예.

"흐음...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짐꾼 한 명이 죽으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잖아."

"오늘 토벌한 마석은 모두 증발해 버릴지도...."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계산하는 헌터들.

그들은 모두 짐꾼으로서 활동한 경력이 없었다.

초기 각성부터 높은 점수를 받아 30만대 서열부터 시작한, 그야말로 선택받은 존재들이니까.

짐꾼 경력이 있는 건혁과는 다르단 의미다.

그 때문일까?

그들과 건혁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했다.

밑바닥 생활을 경험하면서 누구보다 높은 장소로 올라가겠다며 아등바등 노력하는 건혁.

반면, 제2팀의 팀장인 다예를 포함한 세 명의 헌터들은 현재의 위치에 만족하면서 더욱 높은 곳을 바라지 않았다.

물론, 도달할 수 있다면 좋겠지.

그러나 그들은 본인들의 한계를 스스로 정하고, 느긋한 성장과 지금의 풍족함에 만족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과는 어울려 봐야 좋을 게 없겠어. 오히려....'

헌터들을 노려보며 주먹을 쥐는 짐꾼들.

그들에게선 강해지고 싶다는 갈망과 욕구를 느낄 수 있었다.

밑바닥 생활에 적응하고, 포기해 버린 놈들은 의미가 없다.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녀석들이 필요해.'

길드원을 인원 채우기 용도로 끝낼 생각은 없다.

'조금이라도... 그래, 조금이라도 수영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길드로 만들어 보자.'

건혁은 작은 결심을 하면서 3월 동안 12번의 임시 공략대에 참가했고, 수많은 헌터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3~50만대 서열의 헌터들에게 건혁의 존재는 상당한 실력자처럼 비춰졌다.

특히, 게이트를 빠져나왔을 때는 더욱.

공략대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이루고, 어마어마한 보수를 챙겨 갔으니 말이야.

그렇게 4월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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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건혁

*출신 국가: 대한민국

*서열: 243,211위

*등록일: 2016.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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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많이 올라갔네."

건혁은 4월이 되자마자 헌터 협회를 찾아가 길드 등록 신청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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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명: 흑월(黑月)

*마스터: 박건혁(서열: 243,211위)

*부마스터: -

*길드원: 1

*길드 등급: F

*설립일: 2017. 0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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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 등급은 높으면 높을수록 국가로부터 다양한 혜택과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등급은 매년 기말에 평가되는데, 게이트 공략 및 마수의 토벌 등의 실적으로 평가된다는 모양이다.

"홈페이지에 모집 공고를 올리는 것보다는... 이 사람들한테 먼저 입단 제의를 해 보는 게 좋겠지?"

건혁은 지난 3월 연락처를 주고받은 헌터들에게 안부를 물으면서 길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대부분의 헌터들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대답을 망설였다.

하지만 짐꾼들은 달랐다.

성장이 더딘 그들은 조사대와 공략대를 옮겨 다니면서 수입을 벌어야 했다.

공략대든 조사대든 간에 구박을 받으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

그럴 바에는....

"짐꾼들에게 잘 보여 둔 보람이 있었네."

건혁으로부터 가입 제의를 받은 헌터들은 모두 짐꾼 경력이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짐꾼이 받아야 하는 차별적인 대우.

그것을 알기에 짐꾼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던 자들이다.

짐꾼 역시 법을 악용해 헌터를 범죄자로 몰아가는 자들은 최대한 걸러 내야겠지.

"답변이 안 온 사람은... 다섯 명 정도인가?"

그중 네 명은 현재 짐꾼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서열은 51~55만대.

그들로선 길드의 가입 제의를 처음으로 받아 보는 거겠지.

소규모 길드에서도 45~49만대의 헌터들을 고용해 짐꾼으로 움직였다.

전투도 하지 않는 짐꾼인데, 왜 서열을 따지냐고?

이유는 두 가지를 들 수 있었다.

한 가지는 경험.

베테랑 짐꾼들은 초보 짐꾼들과 다르게 여러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어 위급한 상황에서도 재빠르게 대처했다.

두 번째는 육체 능력이다.

짐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체력과 근력.

이 두 가지의 능력은 얼마나 많은 물건을 오랫동안 나를 수 있느냐, 또 얼마나 빠른 속도로 마석과 부산물들을 회수할 수 있느냐를 결정짓는다.

그러니....

위이잉.

건혁은 생각을 멈추고, 진동이 울리는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제16화

16화. 길드, 흑월 (1)

"여보세요."

―저기... 저한테 이상한 문자를 보내신 거 같아서요.

"크흠, 딱히 이상한 문자는 보내지 않았습니다. 흑월이라는 길드는 방금 전에 설립해서 인력난이 극심하거든요."

―그래도....

"저는 서열보다도 신뢰와 인성을 더욱 우선시하여 제안을 드린 겁니다. 그러니 한번 생각해 봐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참고로 짐꾼들에게는 한 달에 다섯 번 정도 헌터로서의 전투를 경험할 수 있도록 스케줄을 조정할 생각입니다."

―예? 그러면 짐꾼은 누가....

"그 경우에는 제가 짐꾼을 맡을 생각입니다. 확인한 바로는 130kg까지는 4~5시간 동안 들고 다닐 수 있으니, 해당 부분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건혁의 통화 상대는 이지혜라는 헌터다.

3월이라는 기간 동안 건혁의 뒤를 졸졸졸 따라다닌 지혜.

건혁이 공략대에 참가할 때마다 그녀 역시 짐꾼으로 해당 공략대에 합류했다.

그리고 매번 그의 전담을 자처했는데.

"일단, 한번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세한 부분은...."

덜컥.

"아빠, 나 배고...."

수영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건혁은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 줄래? 아빠가 통화 중이라서...."

"응."

수영이는 군말 없이 문을 닫고 거실로 나갔다.

"크흠, 자세한 부분은 협회의 길드원 모집 게시판을 확인해 주세요. 가입 신청서는 따로 받고 있지 않지만, 길드 소개란을 한번 확인하시고 다음 주까지 문자 주시면 됩니다."

―...네,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오히려 지혜 씨가 길드에 가입해 주신다면, 무명 길드의 마스터인 제가 더 감사해야죠."

―....

"그보다 슬슬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돼서...."

―아, 네. 그러면 다음 주까지 문자 보내 드릴게요.

"만약 문의 사항이 있으시다면 협회 홈페이지에서 문의 메일 남겨 주세요. 확인하고 곧바로 답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그럼....

통화가 끊어지자 이번에는 다른 헌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건혁은 스마트폰을 가지고 거실로 나와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그들의 연락에 성심성의껏 대답을 해 주었다.

그 모습을 본 수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건혁이 스마트폰을 내려 둔 순간, 수영은 TV를 끄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부엌으로 걸어가 건혁의 다리에 매달렸다.

"아빠, 길드에 들어갔어?"

미역국을 준비하던 건혁은 다리에 달라붙은 수영의 모습에 작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들어간 게 아니라 만들었어."

그런 건혁의 대답에 화들짝 놀란 수영.

그녀는 과거 건혁의 서열을 몰래 살펴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어느덧 4~5개월 전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아무리 빨리 성장한다 하더라도 건혁의 현 서열은 40만대 수준일 터.

"아... 아빠가 길드 마스터야?"

당황한 수영의 목소리에 건혁은 냄비의 뚜껑을 닫으면서 바닥에 쪼그려 앉아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아빠가 열심히 일해서 내년에는 반드시 안전한 곳으로 이사 갈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 그러니 올해까지만 참아 줄 수 있을까?"

그런 건혁의 물음에 수영은 온몸을 경직시킬 수밖에 없었다.

40만대의 헌터가 길드를 설립한다?

웃기지도 않는 말이다.

하지만....

'나 때문에 무리하는 거야?'

얼굴을 굳힌 수영의 모습에 건혁이 작게 웃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수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곧바로 가스 불을 껐다.

"자아, 오늘은 소고기미역국이야. 고구마순김치를... 사다 뒀던가?"

냉장고를 살피는 건혁의 모습에 수영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무...."

"응?"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녀는 조그마한 손으로 주먹을 쥔 채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니, 전생에선 평생에 걸쳐 부친이라는 존재를 원망했다.

그래, 솔직히 그가 미웠었다.

당장 눈앞에서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고 역시 생각했지.

그러나 갑작스러운 부친의 변화를 바라보게 되면서 그녀는 모친의 죽음이 자신의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동안 커다란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빠는 정말로 변했어. 전생의 그 악마가 아니라고!'

유일한 가족.

그래, 지금의 박건혁이라는 남자는 자신의 가족이다.

전생에 부모의 애정을 받지 못한 탓인지, 수영은 조금씩이지만 건혁에게서 애정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나... 나는 여기도 좋아."

헌터가 얼마나 위험한 직업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낮은 서열의 헌터들에게는 그 위험도가 몇 배나 높아진다.

수영은 지금의 부친을 잃을까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빠는 엄청 강한 헌터라고."

자신만만한 건혁의 모습이 수영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런 수영의 모습에 건혁은 씁쓸히 웃으면서 잠시 본인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곤 오른손에 작은 카드를 가지고 나왔는데.

"수영이가 조금 이해하긴 어려울 수 있겠지만, 저번에 마수 백과에서 나온 F~D랭크 마수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쓰러트릴 수 있어."

아무런 기대 없이 건혁으로부터 건네받은 헌터증.

헌터증을 건네받은 수영은 그만 눈동자를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2... 243,211위?!'

작년 12월 초에 확인했던 건혁의 서열은 분명 493,201위였다.

그런데 고작 4~5개월 만에 243,211위가 되었다고?!

수영은 헌터증이 가짜가 아닌지 살펴보면서, 놀란 얼굴로 미역국을 식탁에 올려 두던 부친을 올려다봤다.

'마... 말도 안 돼.'

헌터 생활을 해 본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였는지, 그것을 1회차에서 수많은 헌터들... 그리고 언론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특수 능력을 보유한 자신은 정말로 특별했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 높은 서열에 자리를 매길 수 있었지.

'설마, 특수 능력이라도 각성한 건가?'

초기 각성이 아닌 후천적으로 특수 능력을 깨우치는 사람들이 종종 존재했다.

물론, 전 세계의 헌터 중 0.00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숫자이지만 말이다.

수영은 헌터증을 다시 한번 살폈다.

건혁의 헌터증에는 특수 능력에 대한 문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성장 점수가 다른 헌터들보다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걸까?

"자아, 이제 밥 먹어야지."

부친의 목소리에 수영은 헌터증을 건네주며 곧바로 본인의 자리로 걸어갔다.

서열 40만대의 헌터가 길드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분명 누군가는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길드원을 제대로 모집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겠지.

하지만 20만대의 헌터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딸그락.

수영의 얼굴에서 불안이라는 감정이 사라졌다.

머릿속이 잠시 복잡해졌을 뿐.

그렇게 두 사람이 저녁 식사를 시작한 시각.

건혁으로부터 길드 가입 제안을 받은 헌터들 역시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누나, 무슨 일 있어? 계속 핸드폰만...."

"아, 미안해. 얼른 먹자."

지혜는 남동생의 목소리에 정신을 되찾으면서 젓가락을 집었다.

건혁과 함께하면서부터 수입이 크게 늘어난 지혜.

본래 한 달 수입이 200~250만 원 정도였다면, 지난 3월에는 한 달에 400만 원을 벌 수 있었다.

건혁이 추가 수당이라면서 매번 주머니를 채워 주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다른 헌터들과 달리 그는 단 한 번도 보수를 떼어먹은 적이 없다.

'그 아저씨를 따라가는 게 옳은 건가?'

이것을 기회라고 받아들여야 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5년 전, 마수들로부터 죽임을 당한 부모님.

다행스럽게도 유산과 보험금의 액수는 상당했다.

지혜와 남동생인 지혁이 10년간은 안정적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부모님의 유산과 보험금은 모친의 단 한 명뿐인 언니.

지혜에게 이모였던 여인이 '나중에 지혜가 어른이 되면 전부 돌려줄게.'라는 한마디로 모두 가져가 버렸다.

집의 전세금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말이다.

그렇게 지혜와 지혁은 지혜가 20살이 될 때까지 이모의 집에서 지냈다.

'전세금이랑 보험금에 유산까지....'

본래 지혜에게 건네질 금액은 최소 5~6억 원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지혜에게 주어진 돈은 고작 3,000만 원 정도.

동시에 지혜와 지혁은 이모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때, 믿어선 안 됐었는데...."

이모라는 이유만으로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당시 지혜의 나이는 불과 16살.

중학교 3학년생이다.

부모의 죽음만으로도 충격적인 일이었던지라 재산에 대해 신경 쓸 수 없었던 상황.

하지만 지혜는 중학교 3학년이었던 자신을 탓하면서 주먹을 세게 쥐었다.

"누나, 나는 먼저 들어갈게."

"그래."

경기도 성남시 OO동에서 거주 중인 지혜.

그녀는 16평 크기의 투 룸에서 보증금 2,500만 원에 월세 40만 원을 지불하며 하나뿐인 동생과 함께 생활하는 중이다.

동생의 고등학교는 버스로 15분 거리다.

반면, 지혜의 경우에는 게이트까지 한 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성남과 분당 쪽 공략대에 참가한다면 통근 거리가 짧아지면서 분명 편해지겠지.

그러나 통근 시간이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지혜는 건혁을 따라다녔다.

'아저씨 덕분에 요즘에는 편히 잘 수 있었던 것 같아.'

건혁은 자신을 최대한 배려해 주었다.

덕분에 그녀가 느낄 만한 스트레스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수당까지 얹어 주면서 수입도 늘었으니.

통근 시간보다도 낮은 스트레스와 높은 수당을 선택한 지혜였다.

하지만....

"길드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아저씨와 함께할 수 없을 거야."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간이 테이블에 차려진 반찬들을 냉장고에 넣어 둔 뒤,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했다.

하루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

지혜는 15만 원에 중고로 구매한 낡은 노트북으로 협회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흑월(黑月) 길드.'

이름은 꽤 멋있다.

겉멋이 좀 들었다고 해야 할까?

"교통비와 식비도 지원해 준다고?"

교통비는 거리에 맞춰 대중교통 비용으로 책정되었다.

지혜가 받게 될 교통비는 하루 3,000원 정도.

식비는 일당 8,000원 정도가 지급된다는 모양이다.

공략대는 한 달에 10~15번 정도로, 길드원만으로 운영되며, 만약의 경우에는 외부의 인적 자원을 고용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짐꾼의 보수는 일당 40만 원... 10번이면 400만 원 정도인가? 식비랑 교통비는 11만 원 정도 되겠네."

지혜로서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조건들이었다.

임시 공략대에서 지혜가 받는 수당보다 무려 4~50%나 높은 금액.

심지어 그 박건혁이라는 사내가 길드의 마스터다.

지금까지 받아 왔던 좋지 못한 대우도 개선될 수 있겠지.

이런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멍청이나 다름없으리라.

"게다가 짐꾼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기회도 제공해 준다 말했었어."

지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바닥에 놔둔 스마트폰을 집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