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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화

126화. 침공 (2)

콰앙! 콰콰콰쾅!

"무슨...."

"레... 레이드?!"

자세를 낮춘 유진과 세실리아가 다급히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굉음 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 사람은 주머니 속에서 진동을 느끼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서... 서울에서 6개의 게이트가 폭발...?!"

건혁의 경악성에 세실리아가 황급히 SNS를 확인했다.

"그 외에도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수많은 게이트가 폭발했다고 해요! 출현 마수는 F~A랭크로 다양하다고...."

그녀는 말을 멈췄다.

SNS에 올라온 수백 장의 사진들.

그중에는 마수들과 함께 민간인을 공격하는 어느 존재들이 포착됐다.

"...마족?"

푸른색과 붉은색 피부를 지닌 이형의 존재들.

머리에 거대한 뿔을 달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세실리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은 걸까?

건혁이 세실리아의 스마트폰을 낚아챘다.

"이... 이런 미친!"

절로 터져 나온 욕설에 유진이 화들짝 놀랐다.

건혁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온 게 도대체 얼마 만이지?

진심으로 당황한 듯한 그 얼굴에 유진이 상체를 일으켜 건혁을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레이드입니다. 지금 당장 길드원들에게 연락하세요. 주민들의 피난 유도에 주력하라고. 저는 잠시 자리를 비워야 될 것 같습니다."

건혁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용기사 골렘들을 불러냈다.

이어, 빙룡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갔는데.

스으으으윽.

주변을 가득 채운 새하얀 냉기.

그 속에서 수많은 골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왕, 기사단장, 마법 기사단장, 정예 기사 등.

무려 2~300여 기의 골렘을 소환해 사방에서 몰려드는 마수들을 막았다.

"마... 마스터!"

본부에서 뛰쳐나온 길드원들.

거기에 청룡 기사단원이 가세하면서 마수들의 진로는 차단되었다.

-캬아악?!

푸화아아아악!

빙룡이 뿜은 브레스는 수많은 마수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가자!"

건혁은 수서역 인근에 3기의 용기사 골렘을 배치했다.

상대가 F~A랭크 마수라면, 이 정도도 넘치는 전력이겠지.

그는 5기의 용기사 골렘과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서울 전역에서 들려오는 경보음.

스마트폰에선 긴급 재난 경보 문자가, TV에서는 경보 방송이 보도되며, 한국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이건...."

전쟁터가 된 도시 한복판.

지금까지 경험한 레이드와는 차원이 다르다.

병장기로 무장한 채 사람들을 도륙하는 마수들.

D랭크 마수 따위가 강철로 된 갑옷으로 무장한다고?

듣도 보도 못한 상황 속에서 건혁은 마수들을 지휘하는 존재를 확인하고 눈동자를 번뜩였다.

"몇 놈만 남겨 두면 된다. 저 날파리 같은 놈들은... 전부 죽여."

건혁의 차가운 목소리에 5기의 용기사 골렘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날개를 펄럭이던 악마족들은 용기사 골렘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제길, 저게 용기사 골렘이라는 건가?!"

"박건혁이라는 놈이 근처에 있다! 당장 물러나!"

마족들이 다급히 몸을 내빼기 시작했다.

상대는 바실리스크조차 쓰러트리는 골렘이다.

최상급 마족이 나서지 않는 이상, 막아 내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러나 용기사 골렘은 그들의 도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의 속도를 순식간에 따라잡은 것이다.

푸화아아악!

"브... 브레스...!"

"크아아악!"

용기사의 브레스가 마족들을 집어삼켰다.

불과 몇 초 만에 목숨을 잃게 된 수백여 명의 악마족들.

건혁의 시선이 도로 위를 가득 채운 마족들에게 향했다.

하늘을 날 수 없는 마족들이다.

"놈들을 생포한다."

아르덴을 세상에 공개할 수 있는 기회다.

건혁은 회복된 마력을 확인하고 기사왕 골렘들을 소환했다.

파밧!

소환됨과 동시에 마족들을 향해 달려든 기사왕 골렘들.

그들은 수백 미터의 거리를 한순간에 돌파한 뒤, 마족들의 다리를 주저 없이 잘라 냈다.

서걱!

"크아아악!"

"고... 골렘?!"

"무... 무슨 골렘이...!"

지구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기사 및 귀족들에게만 전달되었다.

병사들에게 전달된 정보는 아주 미미한 수준일 뿐.

때문에 병사들은 골렘의 등장과 함께 혼란에 빠져야 했다.

"저... 저런 괴물 같은 골렘이 존재한다는 건 듣지 못했다고!"

"제기랄! 당장 도망쳐!"

퇴각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자리를 이탈하는 병사들이 나타났다.

"너희는 수영이한테 가 봐!"

수영에겐 이미 기사왕 골렘 다섯이 붙어 있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마족을 상대하려면, 마법 기사 또는 마법 기사단장 골렘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최강은 용기사 골렘이지만.

"하필이면 방학식 날에...."

건혁은 미간을 찡그린 채 용기사 셋을 수성고등학교로 보냈다.

"감히 인간 따위가...!"

건혁을 향해 달려드는 한 마족.

허름한 가죽 갑옷을 걸친 병사다.

공적에 대한 욕심에 이글거리는 눈동자.

건혁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녀석의 사지를 절단시켰다.

촤악!

"크아아악!"

"걱정 마. 죽이진 않을 테니까."

절단 부위가 얼음으로 꽁꽁 얼어붙어 출혈을 막았다.

대신, 얼어 죽을 것 같긴 하지만....

이대로 죽는다면 그것도 이 녀석의 운명이겠지.

파앗!

건혁은 100m의 거리를 질주하며 수백여 명의 마족들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마족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새파란 얼굴색과 쩌억 벌어진 입.

"마... 말도 안 돼."

일개 가축 따위가 어찌 저런 힘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인족이 맞긴 한 건가?

마족들의 경악에 건혁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왜? 인간이 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게 믿기지 않나?"

"너... 너는 누구...."

서걱!

"내가... 질문을 허락해 줬던가?"

건혁은 마족의 다리를 앗아 갔다.

"크아아악!"

병사 따위에게 일일이 신경을 쓸 시간은 없다.

이왕이면 많은 정보를 보유한 마족.

그래, 지금 도망치려 하는 저 녀석이 좋겠네.

파밧!

건혁은 지면을 박차면서 녀석을 뒤쫓았다.

겉모습만 보면 지휘관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깔끔한 푸른색 제복.

오른손에 쥔 고급스러운 양날 직검.

거기에 단정한 머리 모양까지.

...지휘관이 맞나?

무슨 견학이라도 온 귀족처럼 생겼네.

'뭐, 생포하면 알겠지.'

서걱!

"끄아악!"

다리가 절단되면서 녀석이 바닥을 뒹굴었다.

"자아, 내 질문에 솔직하게만 대답해 주면 목숨은 살려 줄게. 이쪽은 꽤 인도적인 부분들이 많아서 말이야."

"끄으...."

녀석이 신음을 흘리면서 바닥을 기었다.

퍼억!

건혁은 녀석의 복부를 걷어찼다.

"대답은 해 줘야지, 안 그래?"

푸욱!

생긋 웃으며 녀석의 어깻죽지에 검을 꽂은 건혁.

"크아아악!"

눈물을 흘리며 오들오들 몸을 떠는 것이, 딱 철부지 귀족 가문의 자제처럼 보였다.

"그럼, 네 이름부터 말해 줄래?"

콰과과과광!

건혁의 질문과 동시에 용기사 골렘이 날뛰기 시작했다.

수천에 달하던 병사들과 수만에 달하던 마수들이 순식간에 바닥에 널브러졌다.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지닌 젊은 마족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건혁을 바라봤다.

이런 괴물이 정말로 인간이라고?

믿을 수 없다.

하등 종족이라 불리는 인간이 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니!

"네가 아르덴에서 넘어왔다는 사실은 이미 알아. 지구를 침공해 왔다는 건... 이미 게이트가 만들어졌다는 의미겠지?"

마족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마왕 루시퍼는 지구로 넘어왔나?"

"마... 마왕께서는 저...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신다고...."

"이유는?"

"지... 지구를 온전히 얻고자...."

건혁은 세실리아로부터 얻은 정보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지구로 넘어온 병사... 아니, 마왕군의 숫자는 얼마나 되지?"

마족은 살짝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모든 정보를 순순히 대답해도 괜찮을까?

당연히 괜찮지 않다.

군사 기밀을 적군에게 발설하는 것은 사형에 해당되는 중죄니까.

입을 꾹 다문 청년의 모습에 건혁이 작게 혀를 찼다.

"쯧, 다른 놈한테 물어보는 게 빠르겠군. 지금쯤이면 꽤 많은 귀족들이 생포되었을 테니 말이야."

건혁이 빙마검을 들어 올리자, 마족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대... 대답하겠습니다! 혀... 현재 지구에 존재하는 각국에 병력을 투입하였으며, 그 숫자는 마수를 포함해 1억을 조금 넘는다고...!"

죽음을 문전에 두니 봇물 터지듯 나오는구나.

잠깐, 지금 1억이라고 한 건가?

1천만이 아니고?

건혁은 잠시 말을 잃었다.

'제3차 세계 대전의 발발인가? 아니, 제1차 차원 전쟁... 이라고 부르는 게 맞나?'

건혁은 헛웃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끝? 추후에 투입되는 병력은...."

"혀... 현재 2차 병력으로는 3억에 가까운 숫자가 계획되어 있습니다. 3차에는 그보다 많은 숫자가...."

도대체 몇 차까지 보내는 거야?!

건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오들오들 떨면서 말을 더듬는 젊은 마족.

이 녀석의 정보는 꽤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아는 정보를 모두 넘겨라. 다른 마계 귀족과 내용이 일치한다면 최대한 인도적으로 대우를 해 주마. 추후에는 두 다리 역시 재생시켜 주지."

건혁이 살기를 드러내며 녀석을 매섭게 노려봤다.

마족의 이름은 호반 L 요론.

요론 자작가의 차남이라고 한다.

"하... 한국이라는 국가는 현재 바... 박건혁 님으로부터 경계 대상에 오른 상태입니다. 때문에 한국에 투입된 병력은 30만을 조금 넘는 수준으로, 박건혁 님의 발이 묶여 있는 동안 타국을 정벌하고자...."

발을 묶는 것치곤 숫자가 너무 많지 않나?

그러나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를 비롯해 멕시코, 브라질, 몽골, 일본 등에 투입된 병력은 백만 단위에 달한다고 한다.

"특히, 핵보유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는 아르덴에서도 최중요 경계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핵에 대한 정보까지 보유하고 있다고?

"허, 도대체 얼마나 조사를 한 거야?"

"...사전에 조사대를 파견하여 지구에 대한 정보들을 수집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골치가 아파진다.

놈들은 분명 군사 기지를 중점적으로 공략하려고 할 터.

특히, 핵무기가 빼앗겼다가는....

'아니, 지구를 온전히 얻고자 한다면, 핵탄두를 사용할 일은 없나? 하지만....'

현대 병기만 넘어가더라도 지구의 군대는 높은 확률로 패배하게 될 것이다.

건혁은 심각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꺼내 헌터 협회에 전화를 걸었다.

마족의 대답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경계할 필요는 있겠지.

―....

헌터 협회 회장, 김정호는 건혁의 연락에 끄응 시름을 앓았다.

―안 그래도 조금 전 공군 기지가 공격받았다고 들었네. 뭐, 그쪽은 어떻게든 막아 내는 중이라고 하지만, 논산 쪽의 육군 훈련소도 공격을 받았다고 하더군. 놈들이 화기(火器)를 확보해 대량으로 생산해 낸다면....

소총을 다루는 마족들.

아니, 코볼트와 고블린만 하더라도 화기를 다룰 수 있으리라.

마수들이 소총을 쏴 대고, 박격포를 다룬다고 생각해 보자.

더욱이 전차와 전투기 등의 병기까지 다룬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겠군요."

―일단, 이계의 존재들을 심문하여 아르덴의 존재를 세계에 알려야겠지.

정호는 깊게 한숨을 쉬면서 건혁에게 마왕군의 진압과 마족들의 생포를 지시했다.

―그럼, 부탁하네.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마족들을 바라보는 건혁.

정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정예 기사 골렘들이 마족들을 한곳에 모아 두었다.

"포박이 살짝 애매하긴 하지만... 쯧, 너희는 이 녀석들을 감시하도록 해."

건혁은 마족들의 힘줄을 끊고, 주문을 읊지 못하도록 천을 입에 물렸다.

전투와 도주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으나,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기사왕 골렘 1기와 정예 기사 골렘 5기를 감시로 붙였다.

 

제127화

127화. 침공 (3)

"곧 너희를 데리러 사람이 올 거다. 협조만 잘해 준다면... 잘못되는 일은 없겠지."

조금 전까지 정보를 술술 내뱉던 젊은 귀족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간절한 눈빛을 보내왔다.

살려 달라는 것보다도 도망치게 해 달라는 의미가 내포된 눈빛이다.

건혁은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몸을 내던졌다.

"가라!"

건혁의 외침에 빙룡들이 도로 위를 향해 브레스를 뿜어 댔다.

차량이고 뭐고 가릴 때가 아니다.

지금은 재난이 아닌 전시 상황이니까.

펄럭!

고도를 낮추는 빙룡.

건혁은 녀석의 등 뒤로 뛰어올랐다.

이내, 안장에 걸터앉아 빙마검을 한 번 휘둘렀다.

쓔와아아악!

허공을 가르는 얼음의 칼날이 포효를 터트린 거구의 마수를 두 동강 내 버렸다.

스르륵 흘러내리는 상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쿠웅!

강남구 일대를 들쑤시고 다니며, 기사 골렘들을 소환하는 건혁.

골렘들은 주민들의 대피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기사 골렘 소환!"

골렘의 숫자는 끝없이 늘어났다.

1시간 동안 무려 450기의 기사 골렘이 소환된 것이다.

골렘들이 마수를 가로막는 동안 주민들은 황급히 달아났다.

그렇게 주민들의 대피가 완료되면 용기사들이 지상을 향해 브레스를 뿜었다.

푸화아아아아!

거리가 모조리 얼어붙었다.

도로와 인도, 차량과 각종 시설물까지.

마치 세계가 얼어붙은 듯한 광경이다.

건물로 대피한 주민들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박건혁의 등장에 환호하기 시작했다.

"바... 박건혁 헌터의 골렘이야!"

"사... 살았어, 살았다고!"

"박건혁 헌터가 왔어요! 곧 구조대가 도착할 겁니다!"

그때, 하늘에서 보도 헬기가 추락했다.

투콰앙!

도로 위로 추락한 헬기는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음과 함께 수그러든 환호성.

사람들은 창밖을 내다보면서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인터넷에선 보도, 구조, 전투 헬기 등 수많은 헬기들이 비행형 마수에 의해 격추되었다는 기사가 전달되고 있었는데.

SNS에 올라온 헬기의 격추 영상과 사진은 사람들의 불안감을 더욱 자극시켰다.

"다... 당장 도망가야...!"

"어디로 도망을 가야 하는데요?! 바깥은 마수들로 우글거리고 있어요. 구조 헬기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박건혁 헌터의 골렘을 믿고 얌전히 있어야 해요!"

헬기가 머리 위로 추락할지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일까?

몇몇 사람들이 정서 불안의 모습을 보였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수에게 죽느니, 차라리 추락한 헬기에 죽는 편이 낫다고 외쳐 댔다.

한번 생각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거다.

바깥으로 나가 자력으로 안전 지역까지 도망칠 수 있는 확률.

헬기가 머리 위로 추락할 확률.

둘 중 어느 것이 우위에 있는지 말이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말고, 이 책장이나 밀어요!"

건물에 숨은 사람들은 가급적 높은 층으로 올라갔다.

구조 헬기가 도착했을 때 바로 구조를 받기 위해.

물론, 마수들을 회피하기 위함도 있다.

"끄응...!"

사람들은 사무실과 독서실로 들어가 무거운 물건들로 비상계단을 막았다.

어느새 가구들로 가득 채워진 비상계단.

비상문 역시 잠가 둔 다음, 그 앞에 책상들을 가져다 두었다.

"하아... 하아...."

사람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스마트폰으로 SNS와 인터넷 기사를 확인했다.

새롭게 게시된 사진과 영상엔 하늘을 날아다니는 검은 무리들이 찍혀 있었다.

헌터들이 레이드 진압에 나선 걸까?

펄럭이는 박쥐 날개와 머리에 돋은 검은색 뿔.

외형을 바꾸는 특수 능력은 국내에도 여럿 존재한다.

하지만, 똑같은 능력을 수백 명이 모두 보유하고 있다고?

이게 가능한 일인가?

사람들의 의문은 곧 경악으로 물들었다.

놈들이 마수가 아닌 기사단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 테러리스트!?"

하필 이 타이밍에!

문제는 또 하나 존재했다.

테러리스트가 마수들과 나란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설마, 마수를 사역한 건가?

그런데, 도대체 몇 명이나 동일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거야!?

영상 속의 테러리스트는 지상을 향해 특수 능력을 퍼부었다.

운동장 수십 개의 면적을 순식간에 폐허로 만들어 버린 녀석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용기사 골렘에 의해 토벌되었다고 한다.

"하아, 어떻게든 진압이 되고 있다는 거 같아요."

국군, 4대 기사단, 11대 길드 및 중소 길드들까지.

대한민국 총전력이 움직이면서 상황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웃 국가인 중국과 일본의 사정은 여러모로 좋지 않은 모양이다.

한국에 비해 10배 이상의 마왕군이 투입되었으니....

막아 낼 수 있을 리 없겠지.

"제기랄!"

건혁은 해당 소식을 접하고 욕설을 터트렸다.

마왕군은 중국과 일본을 비롯해 세계 각국으로부터 군사 기지와 군사 시설을 빼앗았다.

관련 지식과 기술 및 장비가 없다면, 현대 무기를 양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관련 지식과 기술을 보유한 사람을 생포하고, 생산을 위한 설비를 확보한다면, 생산 라인쯤은 금세 구축될 것이다.

물론, 빼앗은 병기를 다룬다는 것만으로도 지구인에겐 엄청난 위협이 되겠지.

"아르덴과의 전쟁이... 이렇게 진행된다고?"

이게 맞는 건가?

건혁은 눈을 질끈 감으면서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수영으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교사들의 인도에 따라 훈련장에 모여 대기 중인 학생들.

기사왕 골렘과 용기사 골렘의 활약으로 수성고등학교 내 사상자는 거의 없다고 한다.

"후우...."

마왕군의 침공이 시작되고 10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마족들이 슬그머니 몸을 빼기 시작했다.

이어, 마수들을 이끌고 게이트로 물러났다.

임무를 완수했다는 듯이.

"정말... 내 발을 묶기 위한 거였어?"

건혁은 SNS를 살피면서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세계 각국의 도시들이 마왕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뿐이랴.

마왕군에게 점령된 군사 기지와 시설만 수백 개가 넘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져 가는 피해.

대한민국 헌터 협회는 생포한 마족들을 대상으로 심문을 진행했다.

정신 계열의 헌터를 통해 아르덴의 정보를 끄집어낸 것이다.

"다른 세계가 실존한다는 말입니까?"

청룡 기사단 단원, 유성진이 마족들의 진술에 미심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구 외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쉰 청룡 기사단 부단장, 이진화.

그녀는 조용히 팔짱을 꼈다.

"구룡산 게이트... 기억하지?"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대한민국 최악의 레이드 중 하나를 말이다.

"구룡산 게이트의 보스가 아르덴이라는 세계의 귀족이었어."

"...?!"

화들짝 놀란 성진의 모습에도 진화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체내에 핵까지 품고 게이트 보스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더라고. 그 탓에 바깥으로 데리고 나올 순 없었지만, 게이트 안에서 각종 심문을 진행해 본 결과, 아르덴의 존재에 대해 들을 수 있었어. 마족과 마왕에 대한 내용까지도 말이야."

"그... 그런 걸 어째서 지금까지 감추고 있었던 겁니까?!"

"너 같으면 믿겠니?"

성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마족, 엘프족, 드워프족, 정룡족, 수인족 등이 살아가는 판타지 세계.

만화와 소설에서나 등장하는 세계관을 과연 사람들이 믿어 줄까?

"정신병자로 몰리지만 않으면 다행일걸?"

"하... 하지만 게이트에 마수들까지 존재하는 마당에...."

"그래서 협회장님도 다른 나라들과 정보를 공유하려고 하셨어. 자료까지 모두 준비하고. 그런데 이곳저곳에서 레이드가 터지면서 일정이 미뤄졌지."

"아...."

"이렇게 빠르게 공격해 올 줄도 몰랐고."

성진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거기다 인간 사회에 숨어들 줄 누가 알았겠어? 사전 조사에 이어 군사 기지와 시설을 빼앗으려는 계획까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야. 그나마 아르덴 측에서 박건혁 헌터를 경계해 준 덕분에 한국에 투입된 군대는 빠르게 물러났다고 하잖아."

전쟁이 장기화되었다면 사상자는 지금의 배 이상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아 참, 게이트 위치는 확인해 봤어?"

"예, 놈들의 도주 경로를 추적해 도합 11개의 게이트를 확인했습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게이트.

진화는 큰 충격을 받아야 했다.

게이트를 마음대로 없앴다가 다른 장소에 개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전 세계는 마왕군으로부터 뒤통수만 맞게 될 것이다.

하지만 게이트를 개방시키는 데 사용되는 마도구, 게이트 큐브는 그렇게 간단한 물건이 아니라고 한다.

1년에 생산 가능한 게이트 큐브의 개수는 대략 3~40개 정도.

또, 한 번 사용한 게이트 큐브는 폐쇄와 동시에 모든 기능을 잃는다.

다시 말해 마력만 충분히 보급되면 게이트를 반영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으나, 한 번이라도 폐쇄되면 해당 게이트를 개방시키는 데 사용한 큐브는 단순한 돌멩이가 된다는 뜻이다.

"저쪽에서 지구의 무기를 탐낸다고 한다면... 우리 역시 놈들의 무기를 가져오면 되지 않을까?"

진화의 발언에 성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게이트 큐브를, 지구에서 만들자는 의미입니까?"

"뭐, 그것도 그렇지만, 지구의 기술을 아르덴의 기술에 접목시키면...."

진화는 말끝을 흐리면서 생긋 미소를 지었다.

"협회장님께서도 여러 가지 생각하고 계시겠지. 일단, 게이트 주변부터 확실하게 감시해."

"아... 알겠습니다."

진화는 스마트폰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토해 냈다.

어떻게든 위기를 넘긴 한국과 달리 일본과 중국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아니, 일본과 중국을 걱정하기 이전에 북한을 더 걱정해야 하나?

북한은 각성자를 군인으로 징병해 길러 내는 국가다.

결과, 북한의 헌터들은 애매모호한 전투력을 보유하게 되었는데.

수도인 평양은 현재 아수라장이 된 상태다.

조선노동당 국무위원장과 간부들은 평안북도 신의주로 북상하는 중이라고 한다.

"하아, X같네. 하필 북한의 핵 시설을...."

마왕군은 100만 대군을 움직여 재빨리 군사 기지와 핵 시설부터 빼앗았다.

북한의 SLBM과 ICBM은 남한을 넘어 주변 국가들에게도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그런 전략 무기가 아르덴에게 넘어갔다면, 주변 국가들로선 밤잠을 설칠 수밖에 없겠지.

"부단장님, 이은성 단장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래, 지금 갈게."

진화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 시각, 세계 헌터 랭킹 1위 박건혁은 3천 기의 병사 골렘을 투입하여 피해자의 구조와 복구 작업을 지원하고 있었다.

또, 정부의 요청으로 아르덴 게이트에 용기사 및 기사왕 골렘을 배치시킨 건혁.

그는 유X브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드디어 발표했구나."

인터넷과 TV를 통해 공개된 아르덴의 존재.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레이드를 대한민국 헌터 협회는 아르덴의 선전 포고라고 공개하며, SNS에 올라온 수많은 영상들을 증거 영상으로 보고, 마족들을 카메라 앞에 내세웠다.

대한민국 국민들을 도륙하고, 국군의 전차와 전투 헬기를 공격하는 등 테러리스트와 같은 행위를 저지르며, 마수들을 지휘해 한국을 위기에 빠트린 자들이다.

댓글은 당혹과 놀람으로 가득했다.

허구로만 존재해 온 판타지 세계가 실존하고 있었다니!

마족들의 진술에 따르면 아르덴에는 엘프족, 드워프족, 수인족 등의 다양한 종족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목적은 지구를 침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식량이라고 하더군요.

대한민국 헌터 협회 회장, 김정호의 발언에 기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르덴은 핵전쟁과 같은 격렬한 전쟁을 겪은 탓에 기상 이변이 연이어 관측되어 왔으며, 그로 인해 곡물과 같은 식량을 재배할 수 있는 환경이 무너져 버렸다고 합니다. 가축을 키우기 위한 사료조차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마수를 식량으로 대체하는 경우도 존재하며, 인간을 마수에게 던져 먹이처럼 사용되기도....

정호의 이야기는 기자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제128화

128화. 침공 (4)

사람을 마수의 먹이로 던져 준다고?

식량난이라는 재앙은 아르덴의 상황을 구석까지 몰아붙였다고 한다.

마수를 식용으로 사용할 정도로.

―때문에 마왕은 지구를 온전히 얻고자 전쟁에 나서는 것을 가급적 회피한다고 합니다.

정호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카메라를 바라봤다.

―그들은 현재 지구에 대한 사전 조사를 마친 상태로, 군사 기지와 핵 시설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며, 이번 1차 공격으로 핵무기를 확보해 각국의 핵 사용을 막기 위한 억제제로 사용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미사일에 대한 대책으로 대규모 결계를 펼칠 수 있는 마도구를 준비했다는 진술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 그들과 식량을 거래할 수는 없는 겁니까?

한 기자의 질문에 정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르덴에는 30억의 마족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밖에 인간과 아인까지 포함하면, 숫자는 배에 가까워질 거라고 하는군요. 물론, 대화로 풀어 나갈 수 있다면 대화를 나누어 보고도 싶습니다만, 마족은 인족과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에 불쾌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인간을... 낮잡아 본다는 뜻입니다.

―....

―더욱이 아르덴의 환경은 나날이 악화되어, 마왕은 모든 마족들을 지구로 이주시킬 계획이라고 합니다.

지구의 자원과 식량을 탐하는 아르덴.

전쟁은 피할 수 없다는 의미다.

해당 소식은 세계 각국으로 전달되었다.

각국의 헌터 협회는 마족들을 생포해 대한민국 헌터 협회의 발언이 사실인지 여부를 확인했다.

"제기랄! 아르덴이라는 세계가 정말로 존재한다고?!"

세계는 경악성을 터트리며, 아르덴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이어, 대규모 군대를 놈들이 건너온 게이트로 투입시켰는데.

그것은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1만 명의 군인과 3천 명의 헌터를 투입시킨 대한민국.

타타타타탕! 타탕!

게이트를 건넘과 동시에 마주친 마수의 군대.

한국군은 놈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개미 떼처럼 바글거리는 마수들이 바닥에 널브러지기 시작하자, 수백 미터의 거리에서 가지각색의 마법이 날아와 아군 진영을 덮쳤다.

콰앙! 콰콰콰쾅!

"마... 마족들이다!"

마족의 공격에 수십 명의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빙벽 세워!"

건혁은 수백 기의 마법 기사 골렘에게 지시해 빙벽을 만들었다.

펄럭!

하늘로 날아오르는 10기의 용기사 골렘.

흐름은 한국군에게 넘어갔다.

"지금이다, 공격해!"

헌터들은 빙벽을 뛰어넘어 마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뒤에서 총격과 포격을 가하는 한국군.

마왕군은 대열이 흐트러지며 아수라장이 되었다.

"X발, 마족이라는 것들은 정말... 하나같이 괴물 같은 놈들뿐이구만!"

헌터들은 마족과의 충돌에 진땀을 흘려야 했다.

마족의 등급은 다섯 단계로 구분된다.

최하급,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으로 말이다.

그중 최하급과 하급으로 분류되는 마족들은 아르덴에서 밑바닥 사회에 존재하나, 헌터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베테랑 헌터와 견줄 만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카앙!

마왕군의 압도적인 물량에 한국군은 살짝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물량조차 무시해 버리는 용기사 골렘의 절대적인 모습에 마족들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놈들이 도망친다!"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붙잡아!"

수만에 달하는 마수들이 토벌되고, 수천의 마족들이 생포될 무렵.

건혁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감이 담긴 한숨을 말이다.

아군의 피해는 예상보다 크지 않았다.

이 정도면 대승이라 불러도 무방하겠지.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전쟁에서 승리했는데도 말이다.

포박된 마족들을 지구로 이송시키는 군인들.

건혁은 그들을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네요."

청룡 기사단 부단장, 이진화가 다가왔다.

"너무 허술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예?"

"게이트 큐브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수십 명의 상급 마족이 이곳을 지키고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더욱이 2차 침공으로 3억에 가까운 병력이 움직일 텐데, 이 정도의 병력만 배치시켜 두었다는 것은... 조금 마음에 걸리네요."

"...."

진화는 건혁의 추측에 얼굴을 구기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확실히 이상하다면 이상하다.

게이트 큐브를 지구인에게 이렇게 쉬이 넘겨준다고?

한국을 경계하고 있다면 더욱 많은 병력을 배치시키거나, 게이트 자체를 파괴하여 한국과의 충돌을 회피해야 한다.

진화는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안색을 굳혔다.

"설마, 저희를 유도한...."

그녀가 말을 끝내기 전,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져 갔다.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다.

불과 몇 초 만에 어두컴컴해진 하늘.

"왜... 왜 갑자기...."

진화가 말을 더듬었다.

건혁은 일렁이는 검은 구름을 올려다봤다.

불안함과 함께 등 뒤로 흘러내리는 땀방울.

포로를 이송시키고 무기를 정비하던 헌터와 군인들조차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누군가가 침을 꿀꺽 삼킨 순간.

검은 머리카락의 남성이 구름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찰랑거리는 기다란 머리카락과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

"서... 설마...."

진화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저 남자가 누구인지, 직감적으로 눈치챈 것이다.

"당장... 게이트로 도망쳐!"

건혁은 적막을 깨고 황급히 소리를 내질렀다.

지금 저 남자와 싸워선 안 된다!

아니, 마주치는 것조차 위험하다.

건혁은 도망칠 시간을 벌고자 용기사들을 투입시켰다.

"죽여!"

다섯의 용기사가 사내를 향해 달려든 순간.

쿠르릉!

붉은 벼락이 용기사들을 뚫고 지상을 내리쳤다.

콰아아아아아앙!

벼락은 지상과 충돌하며 거대한 충격과 돌풍을 불러일으켰다.

"끄아아아악!"

군인과 헌터들이 날아간다.

사람의 몸을 날려 버릴 정도로 강력한 돌풍.

쾅!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걸까?

군인들이 비명을 멈추고 바닥을 뒹굴었다.

그 밖에도 무사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귀... 귀가...."

"사... 살려 줘! 다리가 부러져서...!"

고통을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크으...."

마법 기사 골렘이 세운 빙벽으로 돌풍을 막아 낸 건혁.

그는 고개를 돌려 진화를 바라봤다.

진화는 바닥에 쓰러진 채 꿈적이지 않았다.

고막이 터진 듯 핏물이 흘러내리는 귓가.

죽은 건 아니겠지?

건혁은 진화를 어깨에 둘러멘 채 달리기 시작했다.

'X발... X발... X발....'

이길 수 없다는 걸 일격으로 직감했다.

최상급 마족에 견준다는 용기사 골렘이 단 일격으로 증발한 것이다.

그것도 다섯 기가 동시에!

건혁이 이를 악문 그때,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구에서 가장 강한 존재라 들었거늘...."

건혁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놈과의 거리는 3~400m조차 넘는다.

그것은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런데,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자신의 귀까지 닿는다고?

건혁이 달리는 동안 군인과 헌터들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 정도뿐인가."

실망스럽다는 녀석의 목소리에도 건혁은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달려어어어어!"

건혁의 외침에 사내는 작게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정말로 공격하려는 건가?

이곳에는 생포된 아군이 존재하는데도?!

군인과 헌터들은 기겁한 듯 게이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죽어라."

감정이 담기지 않은 무심한 목소리.

사내는 손끝을 아래로 휘둘렀다.

쿠르릉!

하늘에서 붉은 번개가 내리치려는 순간.

푸화아아악!

사방에서 용기사 골렘들이 나타나, 벼락을 향해 브레스를 뿜었다.

콰아앙!

브레스는 지상으로 내리치는 벼락을 막아 내 보였다.

아니, 간신히 버티는 수준인가?

건혁은 이를 악물었다.

마왕이라는 존재가 이토록 무지막지했을 줄이야.

세실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승률을 가늠했던 자신이 참으로 멍청하게 느껴졌다.

"제기랄!"

그는 진화를 게이트로 던진 뒤, 고개를 돌려 군인과 헌터들을 확인했다.

벼락과 브레스가 충돌하며 일어난 거대한 돌풍.

그 돌풍은 아군의 도주에 장애가 되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벼락의 줄기와 얼음의 파편은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지 않고 수많은 목숨을 앗아 갔다.

"빙벽을 세워!"

건혁의 지시에 마법 기사 골렘들이 수십... 수백 개의 빙벽을 만들었다.

콰앙! 콰쾅!

대기를 울리는 진동과 태풍과 같은 돌풍만으로 빙벽들이 파괴됐다.

충돌은 수백 미터 거리, 수십 미터 상공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 여파만으로 저 두꺼운 빙벽들이 파괴된다고?

놀람은 나중이다.

건혁은 '무너진 빙벽에 아군이 깔리지 않을까?' 걱정하며, 다급히 기사 골렘들을 소환해 미처 대피하지 못한 군인과 헌터들을 데리고 게이트를 뛰어넘었다.

게이트를 넘으려는 그 순간까지.

건혁의 머릿속은 불안으로 가득했다.

'용기사 골렘을 일격에 박살 내는 괴물을... 도대체 어떻게 쓰러트려야 하는 거지?'

쿠르릉! 콰아아아아아앙!

루시퍼의 두 번째 공격이 가해지자, 용기사와 게이트가 증발해 버렸다.

시체조차 남지 않은 폐허.

루시퍼는 그 폐허를 내려다보며 광소를 터트렸다.

"크... 크하하하하!"

웃음이 멎었다.

이내 귓가에 걸리는 입꼬리.

그는 사라진 게이트를 지그시 응시했다.

"내 공격을 막아 낼 줄은 생각도 못 했어. 특히, 그 골렘들은...."

벼락을 막아 낸 새하얀 브레스.

물론, 다섯이 달려들어 고작 일격을 막아 냈을 뿐이다.

그러나 루시퍼는 기대 이상이라는 반응을 내보였다.

자신의 공격을 인족이 막아 낸 것이다!

"인간의 수명은 7~80년에 불과했던가? 그렇다면 2~30년쯤은 살았겠군."

루시퍼는 건혁의 외견으로 연령을 짐작했다.

"성장할 가능성은 무한하겠어."

인족이란 참으로 신기한 종족이다.

7~80년밖에 되지 않은 수명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어찌 그렇게 강해질 수 있는 거지?

루시퍼는 붉은 안광을 번뜩였다.

잊고 있던 호승심이 불타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 강해져라. 지금보다 강해진 다음 내 앞에 찾아오도록."

지구로 넘어가 날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지구는 마족들의 새로운 이주처다.

잘못을 반복할 순 없지.

루시퍼는, 건혁이 다시 한번 아르덴에 찾아오기를 기대했다.

지금보다 더욱 강해져서 말이다.

* * *

"하아... 하아... 하아...."

경기도 이천시에 위치한 어느 공원.

수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소리를 터트렸다.

게이트는 지구로 건너옴과 동시에 흩어졌는데.

"...."

건혁은 주변을 둘러보며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선발대로 1만 3천여 명이 투입됐다.

그러나 지구로 귀환한 인원은 5천 명 정도.

게이트 앞에서 대기 중이던 헌터 협회 간부는 다급히 빠져나온 군인과 헌터를 보고 화들짝 놀라더니, 게이트가 허공에서 흩어지자 눈을 크게 뜨며 건혁에게 달려갔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르덴으로 넘어가 게이트 주변에 군사 기지를 구축하고자 한 정부.

그것을 위해 박건혁을 선두로 하여 선발대를 투입했다.

게이트 주변의 마왕군을 청소하기 위해 말이다.

'게이트까지... 박살 내 버린 건가.'

마지막까지 시간을 벌어 주던 용기사 골렘 역시 소멸한 모양이다.

루시퍼가 지구로 넘어오지 않을까 우려하던 건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김정호에게 영상 통화를 걸어 이진화와 함께 상황을 보고했다.

―루시퍼 본인이 직접 공격해 왔다는 말인가?

"예, 아무래도 저희를 그 장소로 유도한 것 같습니다."

건혁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진화가 부가 설명을 덧붙였다.

정호는 시름을 앓으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사상자가 1만 명에 달하는 상황.

시체조차 회수하지 못한 사람이 8천 명에 이르렀다.

이것을 국민들에게 어찌 알려야 할지....

정부와 헌터 협회는 물론이고, 박건혁 역시 비난을 회피하지 못할 것이다.

 

제129화

129화. 고백 (1)

―용기사 골렘을 일격에... 이 사실이 공개됐다간 국민들이 혼란에 빠질 것이네.

"사실을 숨기자는 말씀이십니까?"

―모든 것을 감추기는 어렵겠지. 이미 인터넷 기사까지 보도된 상태니까. 기자 회견에선 마왕과 상급, 최상급 마족 등이 포함된 대규모 병력이 한국군을 공격해 왔다고 보도할 생각이네. 마왕에게 용기사 골렘이 파괴되었다는 소식 역시 전하기는 하겠지만, 약간의 거짓을 섞어 어쩔 수 없는 패배로 만들어야 돼.

"...."

건혁의 떨떠름한 얼굴에 정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자리를 비우고 있을 때, 미국에서 아르덴으로 투입시킨 군대가 전멸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네. 그중에는 세계 랭킹 100위권에 드는 헌터가 아홉 명이나 있었고 말이야. 또, 일본에선 최상급 마족으로 추정되는 존재에 의해 백귀야행의 마스터, 타케하라 키리노죠가 중상을 입었다고 하더군.

건혁과 진화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자네는 마왕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거론되고 있어.

건혁은 미간을 좁히면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에 든 원작의 정보는 이제 의미가 없다.

수영이 한층 더 강해질 수 있는 계기들 역시....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내가 원작의 에피소드를 건드려서?'

원작대로 수영을 학대하고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던 걸까?

....

'그럴 리가.'

자책감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에피소드를 바꾼 것에 후회는 없다.

죽고 싶지 않다.

수영이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지도 않다.

그것을 위해 달려온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을 리 없겠지.

'지금보다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루시퍼를 쓰러트리는 것은 주인공의 역할이다.

그런 마음에 수영의 성장을 최대한 지원해 온 건혁.

그러나 루시퍼와 직접 마주한 그는 생각을 뒤집었다.

마왕군의 침공이 앞당겨진 현재.

수영의 성장력으로 루시퍼를 따라잡으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과 같은 속도라면... 수영이 성장하기도 전에 마왕군이 지구의 대부분을 점령할 거다.'

그렇다면 미래를 바꿔 버린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지.

건혁은 쓴웃음을 보이면서 정호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대한민국과 아르덴의 1차 전쟁은 패배로 막을 내렸다.

언론은 김정호 헌터 협회장의 기자 회견에 따라 보도를 진행했다.

대한민국은 각국에서 패배 소식이 전해지는 와중 한 줄기 희망과 다름없었다.

그 때문일까?

세계 최강의 헌터, 박건혁이 패배했다는 소식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렸다.

⤷용기사 골렘이 파괴되었다는 건 솔직히... 충격이네.

⤷마왕까지 등판했다고 하잖아. 상급, 최상급 마족들까지 우르르 몰려드는데, 박건혁 혼자서 어떻게 막아 내냐?

⤷상급이랑 최상급의 기준이 너무 애매모호함.

⤷세계 헌터 협회에서 세계 랭킹에 빗대서 정리해 줌. 상급 마족은 세계 랭킹 11위~1,000위, 최상급 마족은 세계 랭킹 1~10위라고 함.

⤷세계 랭킹 1,000위랑 11위를 동일 선상에 두는 건가?

⤷상급 마족 중에서도 격차가 존재한다잖아. 대충 저 정도는 된다는 거겠지.

⤷최상급 마족 하나 건너오면 국가 하나는 금방 X되는 거다.

<일본 서열 1위인 타케하라 키리노죠도 최상급 마족 앞에서는 X밥이다. 그런데 상급 마족에 최상급 마족, 마왕까지 가세했다면...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용한 거임.>

⤷박건혁 없으면 대한민국도 개X된다.

⤷타케하라가 털렸으면 정윤호도 거의 비슷하다는 뜻이니까.

⤷제발, 박건혁 욕하는 새X들은 전부 나가서 뒈져 주라.

⤷박건혁이 무슨 대한민국의 수호신이네ㅋㅋㅋㅋㅋ

⤷수호신은 인정해야 되지 않냐? 혼자서 서울 강남구 하나를 커버하는 정도잖아.

⤷강남의 수호신!

⤷수호신 ㅇㅈㄹㅋㅋㅋㅋㅋ

과대 포장을 한 덕분일까?

건혁을 비난하는 댓글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용기사 골렘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심어 주었다.

S랭크 마수를 가볍게 압도하는 용기사.

용기사를 파괴하는 마왕 루시퍼.

먹이 사슬처럼 나열된 공식.

세계 언론은 용기사를 최상급 마족과 동급으로 취급했다.

그렇다면 마왕이라는 존재는 도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걸까?

모두가 의문에 빠져 있을 무렵.

일본이 한국에게 지원 요청을 보내왔다.

일본은 도쿄를 중심으로 가와사키, 요코하마, 사이타마, 지바 등의 수많은 '시'들을 마왕군에게 빼앗긴 상태다.

심지어 군사 기지까지 함락되면서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한다.

주일 미군의 빠른 대처로 시즈오카로 남하하던 마왕군을 막아 내긴 했지만, 수도와 군사 기지를 빼앗겼다는 사실은 일본 국민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마왕군의 침공으로 발생한 일본 측 사상자는 무려 백만 단위.

북쪽 센다이와 남쪽 오사카에서 게이트가 개방되며 피해는 지금도 늘어나는 중이다.

<사재기가 급증하고 있는 일본....>

<후쿠오카를 통해 부산으로 건너오는 일본인이 증가해....>

<후쿠오카, 이와미, 오카야마 등의 공항은 이미 마비 상태....>

일본에 대한 소식은 한국으로까지 쏟아졌다.

물론, 마왕군에 의한 피해는 일본에 국한되지 않았다.

중국과 미국을 비롯해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중동 및 유럽까지.

"말 그대로 전 세계가 패닉에 빠진 건가."

"...마스터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마스터실을 방문한 세실리아는, 건혁이 마왕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입술을 깨물었다.

박건혁 역시 마왕을 상대로는 어쩔 수 없는 건가?

마왕군의 승리가 예상되는 가운데, 건혁은 팔짱을 끼며 미간을 찡그렸다.

"일단, 지구로 넘어온 놈들부터 처리해야지. 특히, 최상급과 상급 마족들은...."

거대한 경험치 덩어리일 것이다.

"빙마검과 골렘 소환에 대한 능력은 이미 한계치에 도달했다고...."

"그러니, 육체 능력을 강화하는 데 주력해 보려고."

지금까지 마력에 투자했던 AP를 육체 능력에 투자했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마왕을 압도하는 근력과 민첩을 보유한다?

건혁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첩과 근력을 최대치로 발휘하는 데에는 체력이라는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특수 능력 없이 S랭크 마수를 쓰러트리기 위한 근력과 민첩을 갖추려면 그에 걸맞은 체력이 요구되겠지.

어마어마한 AP가 체력에 투자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지금의 내가 근력과 민첩을 최대치로 발휘하려면... 아마 체력의 7~80%가량이 증발하게 될 거야.'

위력은 분명 어마어마할 것이다.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하지만 전력을 발휘하는 시간은 30초도 채 되지 않으리라.

그러니, 지금부터는 마력이 아닌 체력에 집중해야 될 때다.

'아니, 그냥 용기사 골렘을 추가로 소환하는 게 더 낫나?'

건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 거지?

턱을 매만지는 건혁.

그에 세실리아는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언론 보도가 과장임은 건혁을 통해 전해 들었다.

마왕의 일격에 박살 난 다섯 기의 용기사 골렘.

또, 일격을 막아 낸 용기사의 브레스.

"문제는 그 공격이 루시퍼의 전력이었는지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거야."

"만약 전력일 경우에는...."

"물량으로 몰아붙이는 수밖에. 골렘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24시간. 그러니, 적어도 20시간 동안 계속 용기사 골렘을 소환해 100기를 마왕에게 보낸다면...."

"승률이 0%는 아니라는 거네요."

"하지만, 녀석의 전력을 확인할 수 없으니, 지금은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돼."

세실리아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꺼내 계산기 어플을 켰는데.

"마스터는 마력을 수치화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래."

스테이터스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었기에 건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1시간에 회복할 수 있는 마력량을 알 수 있을까요?"

"...."

맹약에 의해 비밀 유지를 보장할 수 있다고는 하나, 마력 회복에 대한 내용까지 누설하는 것은 살짝 거리낌이 느껴졌다.

"아니면 20시간 동안 소환할 수 있는 용기사 골렘의 숫자를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건혁은 살짝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20시간 동안 골렘을 소환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또, 용기사 골렘을 50기 이상 소환해 본 경험도 없지.

건혁은 계산기를 두드리면서 눈을 크게 떴다.

"...꽤 많이 소환할 수 있네?"

"2~300 정도가 넘나요?"

건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장 먼저 소환해 둔 골렘들을 선두로 앞세워 물량으로 시선을 사로잡고, 사방에서 브레스를 뿜어낸다면... 그를 쓰러트릴 가능성이 없지 않아 존재한다는 뜻이네요."

"녀석이 브레스를 막아 낼 가능성도 고려해야지."

"마스터께서 강해지시는 데 필요한 건 강력한 생명 에너지이니, 세계 각국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용기사 골렘을 보내는 건 어떨까요?"

세실리아의 제안에 건혁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직접 가 본 적 없는 지역으로 골렘을 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골렘도 길을 잃고 우왕좌왕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길드원에게 골렘에 대한 명령 권한을 넘기고 세계 각국으로 보낸다면....

위기를 막아 냄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으리라.

"지원을 바란 국가가... 17개국이었나? 모처럼 일본도 여행해 보겠어."

"...직접 가시려고요?"

"그래, 최상급 마족이 얼마나 강한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려고."

일전에 상대했던 최상급 마족, 그리드 T 레드펠은 사령술사였다.

망자를 언데드로 되살려 병사로 부리는 존재.

사령술이 아닌 마법과 검술을 익힌 최상급 마족은 과연 어느 정도의 힘을 보유하고 있을까?

"마스터, 저도 일본에 따라갈 수 있을까요?"

세실리아의 물음에 건혁이 잠시 멈칫했다.

"중국으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중국으로는 김유진 대장님을 보내도록 하죠. 저는 마스터를 보좌하도록 할게요."

건혁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각국의 지원 요청을 수락한 다음 일정과 계획을 길드원들에게 공지했다.

17개국을 한 번에 지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가까운 지역을 대상으로 지원 날짜를 잡은 흑월.

유진은 공지 메일을 확인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 세실리아가 건혁 씨랑 일본에 간다고?"

통역사 겸 보좌로 따라가는 세실리아.

그런데, 정작 자신은 중국으로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그녀는 살짝 울상을 지으면서 마스터실로 달려갔다.

마스터실 앞에서 대기 중이던 비서는 김유진의 방문에 화들짝 놀라면서 수화기로 그녀의 방문을 알렸다.

"드... 들어오시라고 하십니다."

유진은 마스터실로 들어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울상을 지으면서 말이다.

"예, 유진 씨가 이 시간에는 어쩐 일로...."

"왜 제가 중국으로 가야 되는 건가요?"

"시간이 조금 촉박하다 보니, 독단으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이의가 있으시다면 다른 분들과 조율해서 목적지를 변경하거나 파견에서 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건혁의 담담한 대답에 유진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세실리아는... 왜 일본행으로 결정된 거죠?"

"본인이 바라더군요."

"그럼... 그럼, 저도 일본으로 따라갈게요!"

"두 분이나 따라오실 필요는...."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건혁 씨를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따라가는 거예요! 저도 세실리아도요!"

악을 지르듯 토해 낸 유진의 목소리에 건혁이 화들짝 놀랐다.

지금... 자신에게 고백을 한 건가?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건혁은 살짝 당황스러운 얼굴로 상체를 뒤로 물렸다.

꿀꺽.

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아...."

뜨거워진 머리가 식은 걸까?

유진은 눈을 크게 뜨곤 어깨를 움찔거렸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건혁은 두 손을 들어 다급히 유진을 진정시켰다.

 

제130화

130화. 고백 (2)

"이... 일단, 앉아서 조금 진정하세요."

건혁은 유진을 소파에 앉히고, 개인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냈다.

유리컵에 생수를 따라 그녀에게 건네준 건혁.

유진은 물을 한 모금 들이켜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

건혁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후우...."

고개를 숙인 채 정수리만을 보이던 유진은 유리컵을 만지작거리면서 눈치를 살폈다.

그에 건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 유진 씨 말대로...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유진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물론, 착각일지 모른다고도 생각했었죠. 괜한 착각으로 유진 씨를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 또, 서로에게 난감한 상황이 될 수 있어, 가급적 그쪽으로는 대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건혁은 두 손으로 깍지를 끼면서 피식 웃었다.

"대화를 피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유진 씨의 마음에 제대로 대답해 줄 자신이 없었으니까요. 머릿속에선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죽은 아내가 수영이를 껴안으며 행복해하는 얼굴이...."

"...."

"그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죄책감이 들더군요. 그래서 대화 자체를 거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저는...."

그녀의 작은 목소리에 건혁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아내를 잊는 건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재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일단, 수영이의 의사를 듣고 대답을 해 드릴게요. 지금의 저에게는 수영이가 최우선입니다."

"수영이라면... 이미 허락해 줬어요."

유진의 대답에 건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영이 허락해 주었다?

무슨 소리지?

유진은 며칠 전 수영과 나눈 대화를 건혁에게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건혁의 고개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내,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

"대... 대답은 천천히 해 주셔도 괜찮아요. 대신, 저도 일본에 따라갈게요."

유진은 도망치듯 마스터실을 빠져나갔다.

적막이 감도는 마스터실.

건혁은 홀로 남아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봤다.

"수영이가...."

목구멍이 체한 듯이 막혀 온다.

아니, 울컥했다고 표현해야 하나?

"끄흑...."

건혁은 눈물을 흘리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 * *

마스터실을 빠져나온 유진은 곧바로 세실리아에게 찾아갔다.

"세실리아, 나 좀 잠깐 볼까?"

살짝 화가 난 듯한 유진의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거린 세실리아는 어색한 웃음으로 그녀를 졸졸졸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건혁 씨에게 고백했어. 또, 일본에는 함께 갈 예정이야."

마스터실로 올라가기에 중국행에 대해 따지러 간 것은 짐작했지만, 설마 그 짧은 시간에 고백까지 마치고 돌아오다니...!

세실리아는 눈을 크게 뜬 채 침을 한 번 삼켰다.

"대... 대답은...."

"아직 못 들었어. 천천히 생각하고 결정을 해 주시겠지."

선수를 빼앗긴 건가?

세실리아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내가 새치기를 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먼저 새치기한 건 너였으니까."

"...."

세실리아는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아무튼, 전할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야."

"자... 잠깐만요. 하나만 물어도 괜찮을까요?"

"뭔데?"

"그... 만에 하나 저희 둘 모두 마스터의 아내가 될 수 있다는 선택지가 존재한다면...."

유진은 미간을 찡그린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남성에게 두 명의 아내가 존재한다?

재벌가에서 듣던 정실과 첩실에 대한 이야기인가?

유진이 기괴한 표정을 보이자, 세실리아는 눈동자를 굴리며 당황한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아르덴에는 귀족 제도가 존재한다고 하잖아요. 그곳에선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가 허락된다 하더라고요. 또, 재벌가의 회장님들도 비슷한...."

"서로 싸우지 않고 건혁 씨의 사랑을 나눠 받을 수 있다면 이상적이기는 하겠네. 하지만, 내 남자를 다른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은 내키지 않아. 또, 정실과 첩실로 구분된다는 것 자체에...."

"두 사람 모두 정실부인이 된다는 가정하에서라면...."

"무슨 질문이 그래?"

유진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예시로 아르덴의 여성과 지구의 여성이 한 남자를 사랑하는 거예요. 지구에서의 정실부인과 아르덴에서의 정실부인으로 나누어지는 거죠."

"그건...."

유진은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문뜩 '왜 내가 이런 생각을 해야 하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어 세실리아를 노려봤다.

질문의 의도가 도대체 뭘까?

설마, 말장난을 하자는 건 아니겠지?

유진의 화난 얼굴에 세실리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마스터에게 고백을 하셨다고 말씀하셨죠? 그럼... 저랑 같이 마스터실로 가 주실래요?"

"왜 내가...."

고백하고 이제 겨우 1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마스터실로 돌아간다고?

유진은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도 마스터에게 고백을 하고 싶어서요. 그리고... 두 분께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있고요."

미소와 함께 잔잔한 눈빛을 보내는 세실리아.

"부탁드릴게요."

그녀가 고개까지 숙이자, 유진은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결국, 마스터실을 빠져나오고 불과 20분 만에 다시 마스터실 앞으로 되돌아온 유진.

비서는 어색한 얼굴로 두 사람의 방문을 건혁에게 알렸다.

잠시 뒤, '들어가셔도 됩니다.'라는 비서의 한마디에 세실리아와 유진이 마스터실로 들어갔다.

"또 오셨네요. 두 사람 모두 들어와서 앉으세요."

건혁은 씁쓸히 웃으며 두 사람을 맞이해 주었다.

세수를 한 듯 축축해져 있는 얼굴.

두 여인은 건혁의 붉은 눈가를 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남자가 눈물을 터트렸다?

어째서?

유진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세실리아에게 조금 전, 고백 당시의 상황을 말해 주었다.

"아...."

수영에 대한 이야기로 눈물까지 보인다니.

얼마나 감성적인 남자란 말인가.

세실리아는 맞은편 소파에 앉은 건혁을 보면서 입을 뻐끔거렸다.

생각해 둔 계획을 차근차근 이야기할 생각이었는데....

이런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걸까?

"으...."

세실리아는 살짝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툭툭.

"뭐... 뭐 하는 거야?"

유진이 팔을 툭툭 쳤다.

"그... 아니, 그게...."

세실리아는 '저지르자!'라는 생각과 함께 소리를 질렀다.

"저도 마스터를 사모하고 있었어요!"

"그래."

건혁이 푸근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세실리아는 살짝 당황한 얼굴로 손가락을 덜덜 떨더니, 눈동자를 굴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 사랑하고 있다는 의미예요."

"내가 바보인 줄 알아? 어째서 나를 좋아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 호감은 평소에도 눈치채고 있었어."

"그... 그렇군요."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깊게 한숨을 토해 냈다.

"마스터께서... 한 가지 허락을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응?"

"유진 언니한테 제 과거를 알려 줘도 괜찮을까요?"

건혁의 이마가 살짝 구겨졌다.

본인이 아르덴의 마족임을 밝힐 생각인 건가?

세실리아의 존재가 알려지면 건혁은 각국으로부터 스파이 의심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어째서 그녀를 지금까지 숨겨 왔냐며 말이다.

때문에 세실리아의 정체는 극비로 다루어 왔다.

그런데, 스스로 정체를 밝히겠다고?

"유진 언니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만약, 마스터에게 문제가 될 것 같을 때는... 저를 죽이셔도 상관없어요."

유진은 세실리아의 마지막 한마디에 화들짝 놀라야 했다.

죽여도 상관없다니?

도대체 무슨 과거를 가지고 있기에 그런 말까지 하는 거지?

건혁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과거라니... 도대체 무슨...."

건혁은 유진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세실리아를 지그시 노려봤다.

"이유는? 왜 하필이면 지금인 거지?"

"저희 둘 모두 마스터를 사모하고 있다는 걸 밝혔으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세실리아는 눈을 감고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유진 언니라면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두서없는 그녀의 발언에 건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허락해 주실 수 있을까요?"

건혁은 세실리아의 진지한 눈빛에 그만 백기를 들고 말았다.

세실리아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하고, 유진에게 자신의 과거들을 하나씩 털어놓았다.

자신이 아르덴의 마족이라는 사실부터 시작해, 아르덴에서 어떠한 사건을 겪고 지구로 넘어왔는지, 이후 건혁에게 도움을 받은 이야기들까지 전부.

유진은 한마디 없이 세실리아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었다.

"...."

아르덴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다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했겠지.

세실리아는 날개와 뿔을 드러내는 것으로 본인이 마족임을 확실하게 밝혔다.

"그렇게 마스터와 복종의 맹약을 맺어 주종 관계가 되었어요. 물론, 주종 관계는 형식적일 뿐이에요. 마스터께선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해 주셨으니까요."

이야기가 끝난 순간.

유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째서 이 사실을 감춰 왔던 걸까?'라는 의문이 들기 이전에 세실리아의 운명이 너무나도 안타깝게 느껴졌다.

반역이라는 누명을 쓴 것도 모자라, 가족들의 처형식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것이다.

백성들로부터 욕설과 돌팔매질을 당하며 죽어 간 가족들을 한 번만 상상해 보자.

어쩌면 자신보다도 가슴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동족에 의해 억울한 죽임을 당한 거니까.

유진은 깊게 한숨을 토해 내며, 무언가 떠오른 듯 세실리아를 바라봤다.

"아, 그러면 나이는...."

"올해로 120살이에요."

"배... 백...."

유진은 경악한 표정을 대놓고 드러냈다.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던 아이가 실제로는 수십 살이나 많은 할머니였다고?!

세실리아는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마... 마족은 보통 100살에 성인식을 치러요! 인족을 기준으로 하면 이제 겨우 20대 초반에 접어들었을 뿐이에요!"

"아... 아니, 그래도 120년을 살았다는 거잖아."

"그건 맞지만...."

"할머니잖...."

"아직 새파란 젊은이예요! 할머니가 되려면 적어도 5~600년은 더 지나야 된다구요!"

억울하다는 듯한 세실리아의 외침에 유진은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건혁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세실리아의 과거는 비밀로 해 주십시오. 이 사실이 발각되면 정부 측에서 세실리아를 강압적으로 데려가 각종 심문을 할지도 모릅니다."

"예? 그건 왜...."

"아르덴은 이미 지구에 대한 사전 조사 작업을 마쳤습니다. 그러니 세실리아가 아르덴의 조사대원일 가능성을 우려할 사람이 나타날 겁니다. 제가 증언을 해 준다고 한들... 아니, 증언을 해 준다면 저 역시 의심을 받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째서 지금까지 그녀를 숨겨 왔냐면서 말이죠."

건혁이 씁쓸히 웃자, 유진은 고개를 돌려 세실리아를 바라봤다.

 

제131화

131화. 고백 (3)

"왜... 나한테 과거를 이야기해 준 거야?"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우리 두 사람이 마스터의 정실부인이 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요."

"무슨...."

"저는 마스터와 아르덴에서 결혼식을 치를게요. 물론, 마왕군과 전쟁이 끝난 다음에요. 언니는 한국에서 마스터와 결혼식을 올리세요. 그렇게 하면 우리 둘 다 정실부인이잖아요?"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니, 그보다 내가 동생이잖아!"

"아, 언니라는 호칭이 입에 달라붙어서... 아무튼, 저는 마스터를 포기할 생각 없어요."

세실리아의 단호한 목소리에 유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건혁을 바라봤다.

건혁 역시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유진과 지구에서 결혼하고, 세실리아와 아르덴에서 결혼한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아 참, 아르덴에는 인족을 반마(半魔)로 만들어 주는 비약이 존재해요. 육체를 마족에 가깝게 변화시켜 수명을 늘려 주고, 마기(魔氣)를 다룰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물약이죠. 무조건 마시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한번 고민은 해 봐 주세요. 저는 모두랑 오랫동안 행복하고 즐겁게 살고 싶거든요."

"아니, 그 전에 결혼에 대한 이야기부터 천천히 이야기 좀 나눠 볼까?"

유진의 험악한 얼굴에 세실리아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건 결정 사항이에요!"

그녀가 마스터실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세실...?!"

세실리아를 부르며 손을 뻗은 유진.

그녀는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황당한...."

"저도... 당황스럽네요."

유진은 슬쩍 고개를 들어 건혁을 바라봤다.

"기쁘시겠어요? 미녀 두 사람한테 고백도 받고, 이제는 결혼까지 하게 될 테니까요."

"미녀라니...."

본인 입으로 본인을 미녀라 자처할 줄이야.

건혁의 쓴웃음에 유진이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팔짱을 꼈다.

"그럼, 미녀가 아닌가요?"

"하하하, 두 분 모두 미녀가 맞죠. 하지만 결혼은... 수영이랑 상의를 좀 해 봐야겠어요."

"새엄마가 둘이나 될지도 모르니까요."

세실리아의 충격적인 발언 탓일까?

유진은 조금 전 고백에 대한 것을 잊고 허탈한 듯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세실리아의 중혼 이야기를 순순히 받아들인 자신에게도 작은 충격을 느껴야 했다.

"후우, 저도 이제 그만 일어나 볼게요. 돌아가서 생각 좀 정리해야겠어요."

"네, 저도 오늘은 일찍 퇴근해야겠네요."

유진이 마스터실을 나서자, 건혁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판타지 소설 속 주인공이 된 듯한 이 기분은 뭐지?

건혁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젖힌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어찌 됐든 연애고 결혼이고 전부 마왕을 쓰러트린 다음의 일이지."

당장 연애를 즐길 생각은 없었다.

레벨 업에 주력하며 루시퍼를 쓰러트릴 힘을 손에 넣어야 하니까.

건혁은 고개를 내리면서 모니터를 바라봤다.

"일찍 좀 퇴근을... 할까?"

업무는 모두 끝마쳤다.

모니터에 띄워진 것은 유X브와 SNS뿐.

뭐, 이것도 업무라면 업무인가?

세계 각지의 상황을 시시각각 살펴보며 각국에 보낼 용기사 골렘의 숫자를 조정했다.

건혁은 인터넷 창을 닫고 컴퓨터 전원을 껐다.

그리고 마스터실을 나서면서 비서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먼저 들어가 볼게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비서를 향해 손을 들면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건혁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세단에 올라탔다.

"집으로 가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운전기사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차량을 몰기 시작했다.

5~6분 만에 도착한 집 앞의 거리.

차량은 골목길로 들어가 저택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운전기사는 차량을 주차한 다음 문까지 열어 주며 깍듯한 모습을 보였다.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아닙니다. 그럼, 저는 이만...."

중년의 운전기사는 운전기사 전용 주차장에 주차된 자차를 타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저벅, 저벅, 저벅.

"아, 다녀오셨어요."

계단을 올라가자 30대 초반의 젊은 가사 도우미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 왔다.

건혁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들었다.

"네, 고생하세요."

수영의 침실로 발걸음을 옮긴 건혁.

똑똑똑.

"수영아, 방에 있니?"

"아, 들어와도 돼!"

건혁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언제 보나 깨끗한 침실이다.

방금까지 컴퓨터를 한 걸까?

모니터에는 SNS 창이 띄워져 있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하려고 하는데... 지금 바빠?"

"아니야, 그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SNS로 살펴보고 있었어."

"하긴, 많이 떠들썩하니까."

건혁은 침실에 비치된 1인용 소파에 앉았다.

소파와 테이블이 비치될 정도로 넓은 크기의 침실이다.

수영은 태블릿으로 음료와 다과를 주문했다.

잠시 뒤, 가사 도우미가 쟁반에 다과와 음료를 올려 침실로 찾아왔다.

테이블에 음식을 내려 두고 침실을 나서는 가사 도우미.

확실히 편리한 시스템이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야?"

"유진 씨랑 세실리아가 아빠한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거... 알고 있었다면서?"

"뭐, 그 모습을 보고 모르면 이상한 거지. 아빠도 알고 있었잖아?"

수영이 배시시 웃으며 질문하자, 건혁은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짐작은 하고 있었지."

그는 테이블에 놓인 콜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수영과 눈을 마주쳤다.

"수영이는 괜찮아? 아빠가 재혼해도."

"아빠가 결정한 거라면 나는 상관없어. 엄마도 분명 아빠의 곁을 누군가가 지탱해 주길 바라고 있을지도 몰라."

건혁은 '엄마'라는 단어에 살짝 멈칫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계속 아빠랑 살 순 없잖아. 언젠가는 시집도 가야 할 테고."

"어...?"

생각도 못 해 봤다는 듯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 건혁.

딸이 자신의 곁을 떠날 것이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건혁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다급한 얼굴로 손을 휘적거렸다.

"그... 요즘에는 미혼들도 많잖아? 혼자서 취미도 즐기며 사는 사람들도 점점 증가하는 추세고, 결혼하는 사람도 적다고...."

주절주절 떠드는 건혁의 모습에 수영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당장 결혼하겠다는 말이 아니잖아. 아빠 말대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으면 혼자서 취미 생활이나 즐기면서 살아 보는 것도 나름 괜찮을 거 같고, 전국을 여행하거나 맛집을 탐방해 보는 것도 괜찮겠네."

건혁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 냈다.

"근데, 아빠는 재혼을 하는데, 나는 결혼하면 안 되는 건 너무하지 않아?"

"재혼 안 할게."

건혁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자, 수영은 쓴웃음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박건혁이 팔불출이라는 것은 흑월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유명한 사실이다.

길드원과의 회식도 마다하고, 딸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간다니.

심지어 레이드가 일어날 때마다 박건혁은 가장 먼저 딸에게 달려갔다.

딸을 위해서라면 지옥불에도 뛰어드는 남자.

수영은 해당 SNS와 게시 글을 볼 때마다 흐뭇함과 뿌듯함을 느꼈다.

"재혼을 안 하면... 언니들은 어떡하게?"

"거절해야지."

이렇게 딱딱 대답해 주는 부분도 살짝 기뻤다.

하지만, 아무리 팔불출이라도 인생은 자기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건혁은 장난 아닌 장난을 멈추고 씁쓸히 웃었다.

"장난이야. 수영이가 좋아하는 남자라면... 피눈물을 흘리고서라도 허락해 줘야지. 대신, 조건을 하나 붙여도 될까?"

"무슨 조건?"

"아빠를 쓰러트리지 못하면... 사위 후보 탈락."

"그건 무리잖아!"

세계 최강의 헌터를 무슨 수로 이기란 말인가!

수영과 건혁은 하하 호호 웃으면서 30분간 대화를 나누었다.

웃음소리로 가득한 침실.

건혁은 손목시계를 슬쩍 살펴보며 본제를 꺼내 들었다.

"아빠가 재혼하는 거는... 반대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유진 언니랑 세실리아 언니에 한해서는."

"...그 세실리아에 대해서 이야기해 줄 게 있어."

건혁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장난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니까.

그는, 조금 전 세실리아가 유진에게 해 주었던 이야기를 고스란히 수영에게 들려주었다.

"...!?"

설마, 세실리아가 아르덴의 존재... 마족이었다니!

수영에게 있어 마족이란,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자신의 목숨마저 앗아 간 괴물.

놈들이 사람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또 치욕스럽게 죽이는지... 수영은 몇 번이나 봐 왔었다.

어제까지 함께했던 헌터가 희롱당하는 모습은 지금 떠올려 봐도 치가 떨릴 지경이다.

으득!

세실리아의 과거사를 듣더라도 분노는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안타깝지 않느냐고?

인간을 노예처럼, 가축처럼 여겨 온 그녀를, 어째서 안타까워해야 하는 거지?

수영은 오히려 경계심을 높였다.

'첩자일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설마, 아빠한테 접근한 것도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

부친에게 접근해 무언가를 얻어 내려고 한 거라면?

아니, 부친을 죽이기 위해 접근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당장 부친에게서 떼어 내야 한다.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모두 얻어 낸 다음, 처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수영이 심각한 표정을 짓자, 건혁은 한숨을 쉬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수영아?"

"...어?"

그녀가 정신을 되찾으며 건혁을 바라봤다.

"세실리아가 아르덴에서 넘어온 첩자... 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

"아빠도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몇 가지 확인을 진행해 봤어. 맹약의 효력도 마찬가지고. 세실리아는... 아르덴의 첩자가 아니야."

"하지만!"

건혁은 오른손을 들면서 '조금만 더 들어 봐.'라고 말했다.

"일전의 침공에서 몇 명의 마족을 생포해 세실리아에 대해 질문을 건네 봤어. 그녀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직접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으니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10여 명의 마족들을 임의로 선정하여 질문을 건네 보았다.

"결과, 모든 마족들이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고. 세실리아가 반역자로 몰렸던 사건이 아르덴에서는 나름 큰 사건이었던 모양이야. 또, 세실리아에겐 나름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 있대."

"그래도... 마족이잖아! 사람을 가축처럼 여긴다고 하는...!"

건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부정할 수 없겠지. 아르덴에서 산 100년 이상의 시간 동안, 세실리아는 수많은 인간들을 하찮게 여겼을지도 몰라. 본인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어."

"고작 반성만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수영의 분노에 건혁은 수긍했다.

그러나 세실리아 본인은 인간에게 단 한 번의 폭력도 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확히는 인간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별로 없다는 모양이다.

직접적으로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으니까.

단지, 하등한 종족이기에 노동력으로 쓰인다고만 배울 뿐.

"세실리아가 태어났을 무렵에는 이미 인간들과의 전쟁이 끝나고 수백 년이나 지났었어. 인간이 밑바닥에 존재하는 사회와 환경이 자리를 잡은 상태에서 그것을 그대로 수용...."

"아빠는... 세실리아를 좋아하는 거야?"

이젠 '언니'라고도 부르지 않는 건가.

수영이 입술을 깨물며 건혁을 향해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 눈빛은 비수처럼 날아와 건혁의 가슴을 꿰뚫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차라리 왼팔을 잃었을 때가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제132화

132화. 일본행 (1)

"세실리아가 자라 온 환경과 상황을 조금만 이해해 보자는 뜻이었어. 수영이가 반대한다면 결혼은 하지 않을 생각이야. 또, 세실리아가 위험하다고 판단될 때는... 그에 마땅한 조치를 취하도록 할게."

건혁의 씁쓸한 미소에 수영은 아차 하며 어깨를 움찔거렸다.

마족에 대한 복수심은 변치 않으리라.

하지만 되레 부친에게 원망을 쏟아 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다.

"결혼은 그냥 유진 언니랑 하면 안 돼?"

"그럼, 그렇게 한번 생각해 볼게."

건혁은 급히 화제를 마무리 지었다.

어차피 지금 당장 결혼할 생각은 없으니까.

마왕군에 의해 세계가 멸망의 위기를 겪는 중이다.

이 와중에 연애와 결혼을 즐긴다고?

아니, 연애는 즐길 수 있을지도....

스마트폰 게임의 자동 전투 시스템처럼 골렘들이 알아서 경험치를 가져다주니까.

대화를 마친 건혁은 터덜터덜 본인의 침실로 올라왔다.

풀썩!

"후우, 마족에 대한 분노는... 어쩔 수 없겠지?"

자신의 목숨을 앗아 간 자들이다.

복수심에 불타는 것은 당연한 일.

그 복수심이 모든 마족에게 향한다는 것 역시 납득할 수 있다.

"너무... 무신경했던 걸까?"

세실리아의 정체를 밝히면 안 되었을지도 모른다.

1회차를 경험한 수영에게라면 더욱더.

그러나 언젠가 알게 될 문제를 계속 숨기고 있는 것도 좋지만은 않으리라.

이번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얼른 레벨이나 올려야지."

복잡한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워 버렸다.

뭐, 비운다고 비워지는 것도 아니지만.

건혁은 일정에 맞춰 용기사 골렘을 소환했다.

해외로 파견 나갈 골렘들이다.

한편, 일찍이 세계 각국에 헌터들을 투입시킨 대한민국.

정부와 헌터 협회는 국내 대규모 길드와 헌터 협회 소속 기사단을 움직였다.

국외 문제인 만큼 헌터들은 거부가 가능했지만, 보수가 약속된 의뢰 형식의 지원이기 때문일까?

수많은 헌터들이 인천 공항에 얼굴을 비추며 여객기에 몸을 실었다.

<세계 각국으로 뻗어 나가는 대한민국의 헌터들.>

<중국으로 지원을 나간 고구려, 흑월, 유신....>

<전 세계의 위기를 함께 극복하고자 대한민국 헌터 협회, 기사단을 움직여....>

<대한민국 정부, 이번 위기는 전 세계가 손을 잡고....>

쏟아지기 시작한 수많은 기사들.

그중에서도 주목을 받은 건 바로 흑월이었다.

용기사 골렘들을 세계 곳곳으로 파견을 보낸 건혁.

연락을 받은 각국 헌터 협회가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는데.

그들은 골렘의 통제권을 가진 흑월 길드원에게 상황을 설명해 준 다음, 용기사 골렘의 전선 투입을 허가해 주었다.

* * *

2024년 12월 22일 일요일.

인도 마하라슈트라주의 주도이자, 상업의 중심지라 불리는 뭄바이.

과거 1,200만의 인구가 거주했던 대도시, 뭄바이는 현재 마왕군에게 지배를 받는 중이다.

인도 측은 대규모 군대를 편성해 뭄바이 탈환 작전을 준비했다.

정확히는 뭄바이를 비롯한 주변 10여 개 도시를 탈환하기 위한 대규모 작전이다.

"단장님, 흑월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찾아온 20기의 용기사 골렘.

그중 절반은 해상을 통해 뭄바이를 덮치는 중이다.

대한민국 백호 기사단 부단장, 고승찬은 작전이 시작되었다는 보고에 무전을 기다렸다.

인도 측 사령부는 다수의 드론을 운용해 적진을 살폈다.

―고승찬 부단장님, 인도 측으로부터 작전 개시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현지에서 거주하는 통역사의 목소리에 승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군용 차량을 타고 뭄바이 동남쪽에 위치한 거대한 도시, '푸네'로 출발했다.

콰앙! 콰콰콰콰쾅!

"화력 하나는 끝내주는구만."

지상을 초토화시키는 전투 헬기.

그때, 비행형 마수들이 인도 측 전투 헬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놈들은 전투 헬기의 공격을 날렵하게 회피했다.

기계보다 더욱 정교한 움직임이다.

전투 헬기가 우왕좌왕하던 순간.

푸화아아아!

푸른빛 브레스가 놈들을 집어삼켰다.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광경.

심지어 차량까지 흔들렸다.

전투 헬기는 무사히 자리를 벗어나 작전을 속행했다.

타타타타탕! 타탕! 타타탕!

도로 위를 질주하던 대한민국 측 차량이 총격을 받았다.

끼이이익!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차량을 옆으로 회전시킨 운전자들.

차량은 건물을 향해 들이받았다.

쿠웅!

"내려!"

승찬의 목소리에 수십 명의 대원들이 차량에서 내려 몸을 숨겼다.

"X발, 고블린 따위가 무슨 총을...!"

타탕!

욕설을 쏟아 내던 승찬이 황급히 자세를 낮추었다.

헌터의 육체가 튼튼하다고는 하지만 총격을 버텨 낼 정도는 아니다.

대원들은 차량 뒤에 숨어 거울과 스마트폰을 이용해 고블린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맞은편 건물 2층 테라스... 어?"

한 대원이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대... 대전차 로켓?! 다들 자리에서 벗어나!"

대원들은 화들짝 놀라며 건물로 달려 들어갔다.

맞은편 건물 옥상에서 RPG를 어깨에 걸친 고블린.

녀석이 탄두를 발사하기 직전.

대원들은 다급히 차량에서 떨어져 건물로 숨었다.

투콰앙!

탄두에 직격당한 차량이 폭발을 일으켰다.

대원들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박살 난 차량들을 바라봤다.

이곳에 자신들이 참전해도 괜찮았던 걸까?

화기를 다루는 마수를 도대체 무슨 수로 상대하지?

대원 대부분이 근접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말이다.

"제길, 특수 능력자들을 중심으로 반격한다!"

승찬의 지시에 원거리 특수 능력 각성자들이 맞은편 건물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타타타타탕! 퍼엉!

종군 기자들은 인도 뭄바이를 비롯해 마왕군과 충돌한 수많은 전쟁터의 모습을 세계에 알렸다.

카메라에는 경악스러운 장면들이 포착됐다.

화기를 다루는 D~C랭크 마수들.

지금까지의 전투를 부정하는 듯한 광경이다.

마왕군과 전투를 앞둔 헌터들은 화기를 마련하는 데 급급해졌다.

한편, 수많은 나라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대도시 탈환 작전에 들어간 인도, 중국,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등에서는 전쟁이 시작되고 불과 하루 만에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화기를 다루는 마수가 이렇게까지 위험할 줄 누가 알았을까.

심지어 마족의 특수 능력이 발휘한 시너지 효과는 정말로 어마어마했다.

전쟁터의 심각한 상황이 세계로 뻗어 나간 이후.

일본에선 '한국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게 아닐까?'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제기랄, 한국한테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헌터들을 불러들였다면서?"

"정부도 정부지만 그걸 냉큼 받아먹은 한국 놈들도 참...."

"그 녀석들은 예전부터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들이었잖아."

일본 국내 길드 서열 1위, 백귀야행(百鬼夜行)의 길드원들은 한국 헌터들이 일본을 방문했다는 기사를 보고 작게 혀를 찼다.

"솔직히 박건혁 외에는 전부 별 볼 일 없지 않나? 정부는 도대체 왜 그런 놈들까지 불러들인 거야? 차라리 국내 헌터들이나 데려다가 쓰지."

"피 같은 세금만 축내는 꼴이군."

"에이, 너무 그러지들 마. 고기방패가 늘어났다고 생각하면 나쁘진 않잖아?"

백귀야행의 부마스터, 켄보 키요히코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비아냥거렸다.

그에 단발머리의 여성 길드원이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귀야행 제1군 소속, '하리가야 유이나'다.

"뭐, 시간 벌기용으로는 나쁘지 않겠지."

키요히코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군마현 이세사키시 시청에서 개최된 대규모 작전 회의.

시청에는 일본 측 길드 마스터들과 한국 측 길드 마스터 및 청룡 기사단원들이 찾아왔다.

또, 주일 미군의 장교 및 일본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방문해 회의 내용을 경청했는데.

일본 측 길드 마스터들은 한국 측을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굳이 한국한테까지 지원을 요청해야 했던 건가? 아니, 박건혁을 부르는 건 이해할 수 있는데, 왜 저런 쓸데없는 녀석들까지 큰돈을 주고 데려온 건데?"

"상황이 그만큼 좋지 않다는 뜻이겠지. 사상자가 수백만에 달하는데, 한국이고 중국이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돈으로 해결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미국 측 헌터를 데려오는 게...."

"미국도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하잖아. 아르덴에 토벌 부대를 투입시켰다가 괴멸을 당했다고...."

한국에 반감을 갖고 있던 헌터들은 불쾌한 얼굴로 한국 측 헌터들을 노려봤다.

K-POP과 K-드라마 등의 문화 산업으로 일본의 청년들은 한국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일본 정부와 우익 단체의 활발한 활동으로 몇몇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심지어 이번 아르덴의 침공에 의한 피해가 전부 한국 탓이라 주장하는 세력까지 등장하는 판국이다.

한국 측의 피해가 너무나도 적다는 이유로 말이다.

물론, 한국에선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내보였다.

마왕군이 물러난 이유는 박건혁의 존재를 경계했기 때문이며, 마왕은 박건혁을 아르덴으로 불러내 제거하기 위한 함정까지 준비해 둔 상태였다고 언론을 통해 밝혔다.

역사적 문제로 얽혀 있던 한일 관계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크게 악화되었다.

"...계속 노려보는데?"

"그냥 무시해. 비즈니스라고 생각하자고."

긴장감이 흐르는 시청의 대강당.

도쿄 탈환을 위한 작전 회의는 1시간 동안 계속됐다.

"박건혁 헌터님께선 오늘 밤에 도착하신다고 했던가?"

고구려 길드 제1군 대장, 임진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재혁을 바라봤다.

정윤호의 아들이자 고구려 제1군 부대장직을 맡은 정재혁.

그는 스마트폰을 확인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인도의 뭄바이와 캄보디아의 프놈펜에서 격렬한 전투가 관측되었다고 하던데...."

"용기사 골렘은 무사히 사령부로 귀환했다고 합니다. 현재는 골렘에게 부착해 둔 카메라를 살펴보는 중이라고 하더군요."

"용기사 골렘을 따라간 사람이 없었던가?"

"뭄바이나 프놈펜과 같이 병력을 집중시켜 둔 곳에 항공기를 투입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투입된 전투기가 비행형 마수와 마족에게 격추된다고...."

"하긴, 그러니 일본도 이런 상황이 된 거겠지."

"또, 뭄바이와 프놈펜 역시 도쿄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고 합니다."

"일전에 말한 미사일 대책이라는 건가. 어차피 생포된 국민이 존재한다면, 국가는 함부로 폭격을 가할 수 없거늘...."

탄두를 투하하거나 미사일을 발사했다간 언론으로부터 '생존자들까지 무참히 죽여 버린 국가'라는 어마어마한 질타를 받게 될 것이다.

물론, 그런 질타도 감수해야 한다는 듯 폭격을 가하는 국가들도 존재했다.

대(大)를 위해 소(小)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수도에 폭격을 가한다면, 국가적으로도 엄청난 타격이...."

때문에 수도를 빼앗긴 일본, 캄보디아 등의 국가들은 폭격이 아닌 박건혁이라는 존재를 선택하여 탈환 작전을 시도하고자 했다.

"우리는 이쪽... '오타'라는 지역에서 '고가'로 이동한 다음, '도네강'을 건너 도쿄의 북쪽을 공략하는 건가."

"...백귀야행 길드가 함께하는군요."

"적들이 자위대 기지에서 화기를 탈취해 무장하고 있으니... 최대한 경계하면서 이동해야겠군."

"박건혁 헌터께서 이세사키시에 도착하실 때,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보낸 장비도 함께 도착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잠시 뒤, 단상에 올라선 주일 미군 사령관.

그는 스크린에 비친 도쿄도의 지도를 레이저 포인터로 가리키며 작전을 설명했다.

 

제133화

133화. 일본행 (2)

"...박건혁 헌터님께서는 단독으로 움직이시는군요."

도쿄도의 네리마구와 나카노구를 일직선으로 통과해 게이트가 개방된 신주쿠로 향하는 건혁.

그에겐 게이트 큐브 파괴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아르덴으로 넘어가 게이트 큐브에 시한폭탄을 설치한 다음 지구로 복귀하는 것이다.

말로 설명하면 간단해 보이지만, 게이트 주변의 고위 마족들을 쓰러트리고, 게이트 너머의 위협까지 감수해야 하는 난도 높은 임무다.

일본 최강의 헌터, 타케하라 키리노죠는 단 한 명의 최상급 마족에게 패배했다.

상급 마족을 상대로도 버거운 모습을 보인 타케하라.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신주쿠에... 단독으로 뛰어든다니.'

알렉스 브라운조차 성패를 가늠하기 어려운 작전이다.

그러나 수많은 전문가들은 일본의 도쿄 탈환 성공률을 70% 이상으로 전망했다.

박건혁이라는 존재 하나만으로 말이다.

그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어마어마한 등락을 보여 준 성공률.

진규와 재혁은 박건혁의 존재에 살짝 자부심을 느꼈다.

대한민국에 세계 최강의 헌터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뿌듯한 일인가.

"게이트 큐브를 파괴한 다음에는 도쿄도 주변을 자유롭게 휘저으며 생존자 구출에 주력한다고 합니다."

"독자적인 구출 작전을 수행해도 상관없다는 의미겠지. 참으로 대단한 남자야."

진규는 끌끌 웃음을 흘리면서 단상의 스크린을 바라봤다.

작전 회의는 1~2시간으로 마무리됐다.

도쿄 탈환 작전 제39 특임 부대 대장으로 임명받은 임진규는 부대원들과 자리에서 일어나, 작전을 함께 수행하게 된 제1 특임 부대, 백귀야행 길드원들에게 다가갔다.

고구려 길드의 방문에 피식 조소를 날린 백귀야행의 길드원들.

부마스터 켄보 키요히코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진규와 눈을 마주쳤다.

"오랜만... 이라 해야겠지?"

"그래, 오랜만에 보는군."

두 사람은 서로의 통역사를 통해 대화를 주고받았다.

"서로 아무런 피해 없이 작전에 성공할 수 있도록 해 보자고."

키요히코의 발언에 진규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고구려 길드원들이 자리를 벗어나려는 순간.

주변에서 수군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일본어를 이해할 순 없었으나, 욕설만큼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조X징 놈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박건혁을 제외하면 전부 쓰레기잖아. 저런 놈들한테 세금을 썼다는 게 아까워서 참...."

"제기랄,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들한테...."

주변의 욕설에도 대한민국 7개 길드와 청룡 기사단의 헌터들은 덤덤히 시청을 빠져나갔다.

그에 일본 측 헌터들은 불쾌한 얼굴을 보이며 대놓고 욕설을 터트렸다.

한편, 군용기를 타고 일본 마쓰모토 공항으로 출발한 박건혁.

세실리아는 그의 옆에 앉아 일정을 설명해 주었다.

"일단, 마쓰모토 공항에 도착한 다음, 헬기를 타고 '이세사키'로 향할 예정입니다. 작전에 대한 내용은 방금 전 이메일로 도착했습니다."

"흐음?"

"임무 내용 자체는 간단합니다. 단독으로 도쿄도의 신주쿠구로 돌입해 시한폭탄으로 게이트 큐브를 파괴하시면 됩니다."

"게이트 큐브를... 시한폭탄으로 파괴할 수 있나?"

"폭탄으로 파괴가 불가능할 경우, 기사왕 골렘의 운용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래, 게이트 큐브를 파괴한 다음 사라지라고 명령해 두면 되겠지."

어째 시한폭탄보다 기사왕 골렘 쪽이 더 확실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애초에 기사왕 골렘으로 파괴하면 되는 거 아닌가?

건혁이 이런저런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한폭탄은 5개가 지급된다고 합니다. 우선 두 개의 시한폭탄을 작동시킨 후, 게이트 너머로 던지라고 하는군요."

"오, 그건 나쁘지 않은데?"

"게이트가 닫히면 임무는 성공입니다. 하지만, 파괴되지 않을 경우에는 아르덴으로 넘어가 원인을 확인한 뒤, 세 개의 시한폭탄을 설치해 두고 지구로 복귀하라고 합니다."

"그냥 기사왕 골렘으로 박살 내면 되는 걸 왜 그렇게까지...."

"마스터께서 지구에 계시고, 골렘이 아르덴으로 넘어갔을 때, 통제권이 그대로 유지되는지의 여부가 확인되지 않아 이러한 작전을 구상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뭐, 통제권은 확실히 희미해지기는 하겠지."

골렘만 게이트를 넘어가면 명령을 내리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처법은 존재한다.

골렘에게 갖가지의 명령을 주입시켜 두는 것이다.

이번과 같은 경우에는 게이트 큐브의 파괴를 명령하면 될 뿐.

이후 자결을 하거나 마왕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은 따로 추가하면 될 것이다.

"용기사 골렘 소환."

건혁은 이동하는 도중에도 용기사 골렘을 불러냈다.

작전은 내일 오전 8시에 시작된다.

동해를 건너는 지금 시각이 오후 7시 47분이니, 방금 소환한 용기사 골렘은 작전이 시작되고도 11~12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으리라.

인천 공항에서 소환해 둔 용기사 골렘 역시 10시간 이상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콰아앙!

"...마수?"

군용기를 중심으로 반경 500~1,000m의 거리를 유지한 채 마수들을 처리하는 용기사 골렘들.

마수들은 산, 바다, 하늘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확인되지 않은 수많은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겠지.

그 탓에 항공기가 격추되거나, 군함과 잠수함이 공격을 받은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전투기보다 용기사의 경호가 더 안심이네."

건혁의 중얼거림에 세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 말이네요."

경호기로 예정되었던 KF-21 초음속 전투기와 무인 전투기들.

대한민국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4~5세대 전투기로, 전쟁 및 레이드에서 다양한 활약을 선보여, 현재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전투기다.

건혁은 경호기가 따라붙는다는 이야기에 용기사 골렘을 거론하며 경호를 사양했다.

초음속에 가까운 속도, 장애가 없는 움직임, S랭크 마수를 쓰러트리는 공격력까지.

정부와 국방부는 살짝 쓴웃음을 지으면서 경호기를 제외시켰다.

"그런데...."

세실리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슬쩍 시선을 옮겼다.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수영.

"그... 수영아?"

세실리아의 부름에 수영은 가시가 돋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왜요?"

"언니가 뭐... 실수한 게 있었니?"

"별로...."

수영은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옆에 앉아 있던 유진은 수영을 달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갑자기 왜....'

세실리아는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유라도 알려 주면 어떻게든 개선을 해 보려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수영은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을 노려봤고, 유진에게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히잉...."

태블릿으로 작전 내용을 훑어보던 건혁은 세 사람을 힐끔 살펴봤다.

수영을 달래며 머리를 쓰다듬는 유진.

유진에게 과할 정도로 달라붙는 수영.

수영의 반응에 울상을 짓는 세실리아.

'...수라장이네.'

건혁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군용기는 금세 일본 영공에 들어섰고, 마쓰모토 공항에 착륙한 건혁의 일행은 수송 헬기로 옮겨 타 '이세사키'로 이동했다.

두두두두두두두!

이세사키시의 한 고등학교 운동장에 착륙한 수송 헬기.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건혁을 마중 나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일본 헌터 협회 이세사키 본부 본부장인 나카요시 소스케(中吉 草介)라고 합니다."

통역사를 통해 인사를 건넨 헌터 협회 이세사키 본부 본부장, 나카요시 소스케.

세계 최강의 헌터를 마중하기에는 살짝 급이 낮은 사람이다.

하지만 일일이 신경을 쓸 필요는 없겠지.

모종의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만큼, 일본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건혁은 그와 악수를 나누면서 인사를 건넸다.

"작전 내용은...."

"오는 길에 확인했습니다."

"그렇군요. 작전은 내일 오전 8시에 개시합니다. 박건혁 헌터님께서는 7시 50분쯤 작전에 필요한 장비를 건네받으신 후, 도쿄도의 시부야구로 돌입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제1 임무는 게이트 큐브의 파괴, 제2 임무는 최상급 및 상급 마족의 토벌, 제3 임무는 도쿄 내의 생존자 구출이다.

임무가 임무인 만큼 일본은 흑월에게 어마어마한 의뢰 대금을 달러로 건네주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금액은 2~3천억 원대 정도.

실제로 지급한 의뢰 대금은 1조 원에 달한다.

엔화의 가치가 추락한 상태에서 9억 달러, 한화 1조 원에 달하는 대금을 지불하다니.

일본은 이번 탈환 작전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의지를 톡톡히 보여 주었다.

'이참에 엔화라도 사 둬야 하나?'

마왕군이 침략해 오기 전, 일본의 통화인 100엔은 1,044원에 거래됐다.

그렇다면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는 지금은 어떨까?

경제에 큰 피해를 입은 일본.

현재 100엔은 663원으로 거래되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일본에 대한 수출도 엄청 늘었었지?'

일본의 위기는 한국에게 기회로 다가왔다.

과거 일본이 6·25전쟁을 통해 경제 부흥을 이루어 낸 것처럼 말이다.

매년 일자리 부족으로 전전긍긍하던 한국은 일본과 중국으로 대량의 식품, 생필품, 군수품 등을 수출하면서 말 그대로 호황기를 맞이하는 중이다.

한국의 국내 총생산(GDP)이 작년의 2배 이상이 될 것이라 전망하는 전문가들.

이세사키시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에서 스마트폰을 살펴보던 건혁은 키득키득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또, 주식 보고 있어?"

수영의 목소리에 건혁이 어깨를 움찔거리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이야, 이곳저곳에 분할해서 투자를 했었는데... 주가가 엄청나게 뛰어오르더라고. 수익률이 2.461%라고 하네."

"24배나 뛴 거야?! 주식에 얼마나 투자했는데?"

"담보 대출까지 받아서... 2~3조 원 가까이 투자했었을걸?"

"...대출은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결과적으로 2~3조 원이 63조 원이 됐는데?"

"그건...."

수영은 말끝을 흐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만큼 결과가 어마어마했으니 말이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수영은 본인의 스마트폰을 집어 증권사 어플을 열었다.

과거 부친을 통해 개설한 증권 계좌.

미래를 알고 있던 그녀는 장래 2~3배까지 뛰어오를 종목에 장기 투자를 해 두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해당 종목이 5~6배까지 뛰어오른 것은 물론이오, 모든 종목에 빨간불이 들어온 상태였다.

'...나도 대출이나 받아서 투자를 했어야 했나?'

부친의 동의를 얻고, 헌터 신분을 이용하면, 미성년자임에도 대출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서열이 서열인 만큼 상당한 현금을 마련할 수 있었을 터.

수영은, 증권사 어플을 보며 키득거리는 부친을 보고 작게 한숨을 토해 냈다.

"너무 과하게 빠지지는 마."

"그래,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 정도까지 치솟았으면... 슬슬 빠질 때도 됐겠지."

건혁은 어플을 닫은 뒤로도 미소를 지울 수 없었다.

돈은 부족할 때나 곤란하지, 많아서 곤란할 일은 없잖아.

"아...."

건혁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양도 소득세와 종합 소득세 등 각종 세금들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생각만 해도 이마가 지끈거리네.

도대체 무슨 세금을 그렇게 많이 거두어들이는 건지....

그나마 국내 헌터 서열 1위에 올라선 덕분인가?

각종 공제와 면세 혜택을 받은 건혁은 본래 지불해야 되는 세금의 30%만 지불하면 되었다.

"그래도 엄청나긴 엄청나네."

세금을 '조' 단위로 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존재할까?

건혁은 한숨을 쉬면서 소파에 걸터앉았다.

 

제134화

134화. 일본행 (3)

"용기사 골렘 소환."

쉬는 동안에도 골렘의 소환은 계속됐다.

"내일은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 돼. 알겠지?"

"응, 다녀오면...."

"그래, 온천이라도 한번 가 보자."

건혁은 임무를 마친 다음 온천 여행을 계획했다.

모처럼 수영이와 함께 해외로 온 것이다.

그 정도 사치는 부려도 괜찮겠지.

'그보다, 괜히 이야기했나?'

건혁은, 침대에 드러눕는 수영을 바라보며 씁쓸히 웃었다.

금일 오전 다급히 결정된 수영의 일본행.

'세실리아와 함께 일본으로 간다.'라는 이야기가 화근이었던 모양이다.

"먼저 자. 아빠는 잠깐 아는 사람하고 만나고 올게."

"응, 알겠어."

건혁은 방을 나와 1층 로비로 내려갔다.

건혁을 기다린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들.

고구려, 유신, 단군, 골드캣 등 7개 길드와 청룡 기사단의 간부들이다.

그들은 반가운 얼굴로 건혁을 맞이했다.

"박건혁 헌터님이라면 분명 무난하게 임무에 성공하실 것입니다."

"최상급 마족이 위험하다고는 하지만, 박건혁 헌터님의 용기사 골렘에 비할 바는 아니겠죠."

"박건혁 헌터님의 참전으로 작전의 성공률이 대폭으로 올라갔다 하더군요. 단 한 명의 헌터가 작전의 성패를 좌지우지하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이 자리의 모두가 대한민국 최정상에 자리를 매긴 헌터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극찬과도 같은 아부를 듣게 될 줄이야.

건혁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겸손을 보였다.

겸손은 미덕이라고 하지 않던가.

물론, 과한 겸손은 독이 될 수 있으니, 적당한 선에서 당당함을 드러내야 된다.

"슬슬 방으로 돌아가 봐야겠군요.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요."

마력도 상당량 채워졌다.

슬슬 용기사 골렘들을 소환해 둬야겠어.

어차피 자다 일어나면 100%로 채워져 있을 테니까.

"그럼, 저희도 슬슬...."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투콰앙!

폭발음이 들려왔다.

마족들이 공격해 온 건가?

상황이 상황인 만큼 헌터들은 작은 소란에도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나가 봐야겠군요."

건혁의 차가운 목소리에 대한민국 헌터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텔을 빠져나갔다.

* * *

박건혁이 1층 로비로 내려온 시각.

바람을 쐬러 나온 유진은 한숨을 쉬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상공을 어슬렁거리는 용기사 골렘들.

저들의 경계를 뚫고 공격해 올 마족은 아마 없을 것이다.

더욱이 지상은 일본의 자위대와 일본 헌터 협회 소속의 헌터들이 배치되어 있다.

"다들 마음 편히 잘 수 있겠네."

작전 당일, 유진과 세실리아는 수영과 함께 호텔에서 대기하기로 결정됐다.

수영을 혼자 내버려 둘 순 없으니 말이다.

유진은 스마트폰을 꺼내 각종 기사들을 살펴봤다.

"...건혁 씨에 대한 기사밖에 없네."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찬 바람이 강해지기 시작하자, 호텔로 들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유진의 앞을 가로막은 세 명의 남성.

"역시, 한국에서 온 여자였잖아?"

일본어.

일본 측 헌터인 건가?

남성들은 유진의 우측 가슴에 채워진 대한민국 국기의 배지를 보고 씨익 웃음을 보였다.

'백귀야행의 제복....'

유진은 미간을 꿈틀거리면서 남성들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현재 최악으로 치달은 상태다.

하지만 내일이 바로 작전 당일인데, 전날 밤에 시비를 걸려는 멍청이는 없겠지.

"꽤 반반하게 생겼잖아?"

일본어를 배운 유진은 그들의 말투와 태도에 살짝 불쾌감을 일으켰다.

"호텔로 들어갈 생각입니다만, 잠깐 나와 주실 수 있을까요?"

차가운 표정과는 달리 최대한 정중하게 질문을 건넨 유진.

굳이 소란을 일으켜 시끄럽게 만들 필요는 없잖아.

가급적이면 그들과 대화를 피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유진의 유창한 일본어에 백귀야행 길드원들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소위 악당들이 짓는 표정과 함께.

"마침 잘됐네. 우리도 심심하던 참이었거든. 우리 방에서 같이 놀지 않을래?"

헌팅인가?

내일이 작전... 즉, 전쟁에 투입되는데?

도대체 얼마나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유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해서... 실례하겠습니다."

사내가 비켜 줄 기미를 보이지 않자, 유진은 옆으로 비켜 호텔로 걸어갔다.

그때.

덥석!

유진의 손목이 붙잡혔다.

"나는 백귀야행 길드, 제1군 소속 '오타리 야스아키'야. 백귀야행 제1군 차기 부대장으로 손꼽히는 남자라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하는 야스아키.

유진은 얼굴을 와락 찌푸린 채 그를 노려봤다.

"그래서?"

도대체 어쩌자는 거지?

그녀의 표독스러운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야스아키는 장난스러운 모습을 싹 지운 채 싸늘한 얼굴로 유진을 내려다봤다.

"너무 건방 떨지 말라는 의미야, 조X징."

한국인을 비하할 때 사용하는 단어.

유진은 피식 웃으면서 조소를 터트렸다.

"조X징이 도대체 언제 적 조X징이야? 지금 도움을 받고 있는 국가가 어딘지... 아직도 모르나 봐?"

유진은 말을 놓으며 비아냥거렸다.

더 이상 존중해 줄 가치가 없다 판단한 것이다.

야스아키는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박건혁만 뒈지면 너희 조선은 우리 백귀야행 길드만으로도 짓뭉개 버릴 수 있어."

"조선이 아니라 한국이란다. 그리고 백귀야행 길드의 마스터는... 세계 랭킹 11위 아니던가? 고구려 길드의 마스터 정윤호가 세계 랭킹 9위... 푸훕! 박건혁 헌터가 움직이지 않아도 백귀야행 정도는 가벼울 거 같은데?"

유진의 비웃음에 야스아키를 비롯해 양옆의 두 남성 역시 얼굴을 잔뜩 구겼다.

작은 반도 국가의 인간이 감히 일본 제1 길드라 불리는 백귀야행을 무시해?

한국이라는 나라를 가난한 국가로 바라보고 있던 야스아키는 얼굴을 험상궂게 일그러트리면서 유진을 향해 손바닥을 휘둘렀다.

유진은 뒤로 물러나 야스아키의 손찌검을 피하며 조소를 날렸다.

"왜, 찔려? 말로 안 되니까 손찌검까지 하려 하네? 박건혁 헌터가 한국으로 돌아가 버리면 어떡하려고 그래?"

"이 X 같은 X이...!"

"너희의 행동 때문에 박건혁 헌터가 귀국해 버리면... 도쿄를 탈환하는 게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고."

유진은 조롱을 계속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화가 난 야스아키가 마력을 일으키며 유진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정말로 죽일 작정인 건가?

주먹에 담긴 위력은 유진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쓔와악!

작은 파공음이 들려왔다.

만약 일반인이 저 주먹에 맞았다면, 중상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겠지.

유진은 뒤로 물러나며 호텔로 달려갔다.

입에 걸레를 물기는 했지만, 실력 하나는 진짜였으니 말이다.

"이 X 같은 X이, 어딜 도망가려고!"

"백귀야행의 이름을 모욕하고도 순순히 돌려보내 줄 거라고 생각했어?"

야스아키의 일행들이 퇴로를 차단하면서 유진을 위협했다.

두 남성 역시 백귀야행 제1군에 소속되어 있다고 한다면, 세계 랭킹은 분명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높을 것이다.

승산은 없다 봐야겠지.

유진이 소리를 질러 도움을 요청하려던 순간.

퍼억!

"...?!"

야스아키의 발차기가 그녀의 우측 허리를 강타했다.

유진이 균형을 잃고 자리에 넘어지려 하자, 야스아키는 그녀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육체 강화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후, 야스아키의 일방적인 구타가 시작됐다.

유진이 반항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뭐야, 의족?"

야스아키 일행은 키득 웃으면서 유진의 의족을 발로 걷어찼다.

까앙!

"크학...! X발, 뭐가 이렇게 단단해?!"

"그냥 분리시켜 버려!"

"지문 센서가...."

"멍청아, 이렇게 하면 되잖아!"

유진의 오른손을 가져다 대 지문을 찍은 야스아키.

의족이 분리되자 유진의 몸무게가 크게 줄어들었다.

"끄으...."

유진의 입에서 터져 나온 침음.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선혈.

코뼈도 부러진 듯하다.

정신이 혼미한 상황.

야스아키는 유진의 머리끝을 잡아당기며, 도로를 건너 맞은편 건물로 걸어갔다.

질질 끌려가던 유진은 혼미한 정신 속에서 오른손을 뻗었다.

그녀의 행동이 도움을 바라는 사람처럼 보였던 걸까?

야스아키와 그 동료들은 작게 비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조X징이면 조X징답게 말을 잘 들었어야지."

"이 X, 적당히 가지고 놀다가 죽여 버리는 게 낫겠지?"

"뭐, 그래야지 어쩌겠어? 이 여자 하나 때문에 작전이 미뤄질 일은 없을 테고, 작전이 진행되면 적당히 마수한테 뒈졌다고 생각할걸?"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존재하는 걸까?

유진은 정신을 꽉 붙든 채 이를 악물며 호텔을 향해 화염구를 던졌다.

투콰앙!

유진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1m 지름의 화염구가 호텔 외벽을 파괴했다.

야스아키 일행은 화들짝 놀라면서 유진을 바라봤다.

설마, 속성 능력까지 보유한 헌터였다니!

"이런 X 같은...!"

'어째서 그 능력을 야스아키 일행에게 사용하지 않았느냐?'라고 묻는다면,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야스아키의 공격은 육안으로도 쫓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 상대의 앞에서 멍청하게 화염구를 만들어 던지라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겠지.

야스아키는 유진을 데리고 재빨리 건물의 골목길로 들어갔다.

퍼억! 퍼억! 퍽!

"죽어, 죽어 버려!"

화가 난 야스아키는 유진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이어, 주변의 바위를 손에 쥐곤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호텔 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곧 사람들이 주변을 둘러보려고 할 터.

야스아키는 유진을 죽여 눈앞에 비치된 쓰레기통에 숨기려 했다.

"죽어!"

유진의 얼굴을 향해 바위를 내리찍으려던 순간.

서걱!

무언가 베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야스아키는 멍하니 유진의 얼굴을 바라봤다.

분명, 바위를 내리찍었는데, 왜 바위가 보이지 않는 걸까?

그리고....

자신의 오른팔은 어디로 간 거지?

툭.

바닥으로 떨어진 오른팔.

야스아키는 멍하니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봤다.

푸화악!

절단 부위에서 대량의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끄아아아악!"

야스아키는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넘어졌다.

일행들은 바닥을 뒹구는 야스아키를 보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어째서 야스아키의 오른팔이 절단된 거야?!

그들이 의문에 빠져 있을 무렵.

검은 인영이 두 사람의 다리를 앗아 갔다.

촤아악!

"크악!"

짧은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엎어진 일행들.

야스아키는 우측 어깨를 붙잡으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설마, 마족이 나타난 건가?

그때, 검은 코트의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유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품속에서 포션을 꺼낸 사내.

"누... 누구...."

"닥치고... 가만히 기다려라. 네놈은 찢어 죽일 테니...."

분노와 살심으로 가득한 목소리.

야스아키는 사내의 대답에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일본어가 아니다.

이세사키 시청에서 몇 차례 들어 본 한국어.

야스아키는 사내를 향해 왼손을 뻗었다.

"나... 나는 백귀야행 제1군에 소속된 오타리 야스아키다! 우리를 공격하고도...!"

사내는 야스아키의 외침을 무시한 채 유진의 입가에 포션을 넣어 주었다.

"쿨럭...."

핏물을 토하며 포션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사내는 본인의 입에 포션을 털어 넣은 뒤, 그녀와 입을 맞추어 강제로 마시게 만들었다.

 

제135화

135화. 일본행 (4)

꿀꺽, 꿀꺽.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가는 2급 포션.

망가졌던 얼굴과 외상 및 내상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내, 숨을 고르며 안정을 되찾은 유진.

야스아키 일행이 비명을 지른 탓일까?

호텔 쪽에서 수많은 헌터들이 달려왔다.

"이... 이게 무슨...!"

헌터들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스아키가 그들을 향해 도움을 청했는데.

건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야스아키를 향해 오른손을 휘둘렀다.

서걱!

"끄아아악!"

건혁은 야스아키의 두 다리를 절단시켰다.

그에 수많은 헌터들이 건혁에게 달려들려고 했으나....

쿠웅!

하늘에서 내려온 기사왕 골렘들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이... 이 골렘들은...."

"왜... 왜 박건혁 헌터의 골렘이...."

기사왕 골렘에 의해 길이 가로막힌 헌터들.

야스아키는 왼팔을 이용해 바닥을 기었다.

"사... 살려 줘! 조... 조X징 놈이 나를 죽이려 한다고!"

야스아키의 외침에도 헌터들은 꿈쩍할 수 없었다.

왜냐고?

바로 눈앞에서 용기사 골렘들이 으르렁거리며 적의를 드러내고 있으니까.

쿠웅!

하늘을 맴돌던 용기사 골렘들이 금세 헌터들을 에워쌌다.

"이게 무슨...."

헌터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군이라 생각했던 골렘들이 자신들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그때, 야스아키와 일행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걱!

"끄아아아악!"

촤아악!

"사... 살려... 으아아악!"

사지를 절단시키고, 생식기를 터트리며, 눈알을 끄집어내는 등, 그 잔혹함에 수많은 헌터들이 기겁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정녕 저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이란 말인가?

마족이라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헌터들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검은 코트의 사내를 바라봤다.

콰앙!

호텔 방향에서 거대한 마력 폭발이 일어났다.

"멈춰라!"

사자후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중년의 남성.

일본인 헌터들은 그의 등장에 반색했다.

긴 머리카락과 매서운 눈매.

기모노와 허리에 찬 도검까지.

말 그대로 사무라이 그 자체다.

"타... 타케하라 키리노죠(嵩原 桐之丞)다!"

키리노죠는 피 칠갑을 한 채 골목길을 빠져나온 검은 코트의 사내를 노려봤다.

"타... 타케라하 님, 녀석이 야스아키 일행을...."

백귀야행 소속의 길드원이 키리노죠를 향해 상황을 설명했다.

건혁의 두 팔에 들려 있는 흑발의 여인.

상황은 금세 파악됐다.

"박건혁, 네놈을 살인죄로 구속하겠다! 야스아키 일행이 죄를 저질렀다고는 하나, 그 죄를 심판하는 것은 법으로 해결해야 될 일! 네놈의 행위는 일본 그 자체를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는...!"

콰아아앙!

키리노죠의 언성을 끊어 버린 거대한 마력 폭발.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건혁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키리노죠를 노려봤다.

그에 눈치를 살피던 한 헌터가 건혁에게 다가왔다.

"저... 저는 청룡 기사단의 이주한이라고 합니다. 타케하라 키리노죠 헌터께서는...."

주한은 키리노죠의 발언을 그대로 통역해 주었다.

건혁은 기가 찬 듯 코웃음을 쳤다.

"하! 네놈들의 입맛대로 움직이는 일본의 사법부를... 왜 내가 이용해야 하지? 또, 지금은 전시 상황이다. 아군의 목숨을 위협한 범죄자... 아니, 반역자는 사형에 처하는 것이 당연지사 한 일이지."

주한은 살짝 움찔거리면서 건혁의 발언을 일본어로 통역했다.

건혁의 마력 폭발에 바닥을 뒹군 키리노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이놈...!"

"나를 구속하겠다고?"

머리 위를 가득 채운 6~70여 기의 용기사 골렘들.

이어, 하늘에서 6~70여 기의 기사왕 골렘들이 뛰어내렸다.

쿠웅! 쿠쿠쿠쿵!

"할 수 있으면 해 봐."

건혁은 비릿한 웃음으로 도발을 걸었다.

도로 위의 골렘까지, 무려 80여 기의 기사왕 골렘들이 주변을 포위했다.

으르렁거리며 브레스를 준비하는 빙룡과 한국 측 헌터를 보호하며 일본 헌터들을 경계하는 기사왕 골렘들.

나아가 박건혁은 빙마검을 꺼내면서 적의를 드러냈다.

'이... 이런 미친! 박건혁이랑 싸워야 한다고?'

'그 알렉스도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었잖아!'

'아무리 타케하라 님이라도....'

모두가 눈치를 살피던 그때.

건혁이 적막을 깨고 키리노죠를 향해 입을 열었다.

"눈 깔아."

주한의 통역에 키리노죠가 마력을 일으켰다.

콰앙!

"감히!"

건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렉스를 쓰러트리면 더 이상 무시당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세계 랭킹 11위가 자신을 향해 '감히'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마지막 경고다. 눈 깔고, 당장 꺼져."

"닥쳐라!"

키리노죠는 주한의 통역을 듣기도 전에 화영검(火靈劍)을 꺼내 보였다.

사방에서 솟구치는 불꽃이 키리노죠의 주변을 둘러쌌다.

일본 최강의 헌터이자, 염제(炎帝)라 불리는 타케하라 키리노죠(嵩原 桐之丞).

일본의 위대함에 자부심을 가지고, 한국을 후진국이라 무시해 온 사내.

우익의 대표적 인물로 거론되는 키리노죠는 한국에게 뒤처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정윤호가 그의 세계 헌터 랭킹을 뛰어넘었을 때, 키리노죠의 자존심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분노에 못 이긴 그는 카메라의 앞에서 한국을 향해 비하 발언들을 마구잡이로 쏟아 냈다.

"일본에게 빌붙어 살아온 기생충 따위가!"

한국의 성장은 모두 일본의 덕분이다.

그런데 은혜도 모르고 일본을 물어뜯어?

그는 우익 중에서도 극우 성향을 띄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세계 랭킹 1위의 자리에 박건혁이란 이름이 등록된 순간.

곧바로 언론을 움직여 한국의 사기극을 비난했다.

'크하하하! 드디어 알렉스 녀석이 움직였구나!'

당시 키리노죠는 알렉스의 방한 소식을 듣고 웃음을 터트렸다.

결투를 통해 박건혁의 사기극이 밝혀질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상상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알렉스를 압도적인 실력 차로 짓누른 박건혁.

이제 겨우 9년 차밖에 안 된 애송이가 세계 최강의 헌터라고?

심지어 그 헌터가 한국의...!

박건혁을 향해 강한 분노를 품어 온 키리노죠는 야스아키 일행의 죽음을 통해 그동안 억눌러 온 감정을 폭발시켰다.

"네놈의 사지를 찢어 마족들의 아가리에 던져 주마!"

화영검을 횡으로 휘둘러 거대한 칼날을 만들어 낸 키리노죠.

건혁은 주한의 멱살을 잡아 옆으로 던져 버렸다.

"으... 으아악?!"

주한이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코앞까지 다가온 화염의 칼날.

건혁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빙마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앙!

화염의 칼날과 빙마검(氷魔劍)... 즉, 불꽃과 얼음이 충돌하자, 거대한 폭풍이 일어났다.

눈치를 살피던 헌터들과 호텔 쪽에서 달려오던 일본 헌터 협회의 인사들은 몸이 붕 떠오르더니 수십 미터 정도 날아가야 했다.

"이게... 끝이냐?"

건혁이 작게 비웃음을 터트리자, 키리노죠가 '빠드득!'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공격을 이토록 손쉽게 막아 내다니!

그는 알렉스와의 격차를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박건혁과의 격차는 인정하지 않았다.

파앗!

"죽어라!"

키리노죠는 지면을 박차며 건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앙! 콰콰쾅!

두 사람의 충돌로 피해를 본 한국 헌터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자세를 낮추었다.

"염제(炎帝)라 불리는 타케하라 키리노죠의 공격을...."

알렉스의 천뢰검을 상대할 때와 달리 제자리에서 키리노죠의 화영검을 막아 내는 건혁.

"크아아아아!"

자존심에 상처가 난 걸까?

키리노죠는 사자후까지 터트려 봤으나, 건혁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파밧!

뒤로 물러난 키리노죠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주먹 한 번으로 부서질 것만 같은 저 검이... 이토록 단단할 줄이야.

심지어 자신의 불꽃으로도 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죽인다.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겠어!"

눈앞의 사내는 괴물이다.

이 자리에서 죽이지 않는다면, 최상급 마족 이상의 존재가 되어 버리겠지.

그러니, 이 자리에서 그를 제거하고....

'내가 세계 최강의 헌터가 된다.'

쿠웅!

지면에서 치솟는 여섯 개의 불기둥.

불꽃은 이내 각각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용(龍)이라 부르긴 애매하고, 뱀이라 부르기도 다소 어려운 모습.

일본인들은 그것을 보고 '이무기'라고 불렀다.

'유X브에서 봤던....'

건혁은 살짝 실소를 터트렸다.

30m 길이를 자랑하는 거대한 괴수.

크기만 보면 용기사 골렘을 압도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콰앙! 콰콰콰쾅!

'마력만 낭비하는군.'

여섯 마리의 이무기는 단 한 기의 용기사 골렘에 의해 형태를 잃고 쓰러졌다.

키리노죠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박건혁과의 격차를 잘못 판단했던 건가?

아니,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지.

"이... 이건 말도 안...."

브레스 한 번으로 쓰러져 버린 이무기들의 모습에 키리노죠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얼굴로 발걸음을 뗀 건혁을 향해 말이다.

건혁이 한 걸음을 뗄 때마다 키리노죠의 심장은 미친 듯이 들썩였다.

"주... 죽어라!"

화영검을 뻗어 고열의 화염을 방사한 키리노죠.

건혁은 조용히 빙마검을 휘둘러 얼음의 칼날을 날려 보냈다.

쓔와아악!

칼날은 화염을 가르며 키리노죠를 향해 날아갔다.

"이... 이런...!"

자신의 화염이 고작 저런 얼음 따위에 종잇장처럼 찢어지다니!

키리노죠는 바닥을 구르며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그 순간.

콰앙!

칼날은 5층 상가 건물을 파괴하며 와르르 무너트렸다.

폭삭 주저앉아 버린 건물.

사방으로 먼지구름이 확산되었다.

먼지구름에 뒤덮인 두 사람.

"슬슬 끝내야겠어."

세계 랭킹 11위는 과연 얼마나 강할까?

나름 일본 최강의 헌터라기에 그런 의문을 가졌지만, 키리노죠와 몇 차례 부딪쳐 본 결과, 건혁은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애초에 알렉스를 기준으로 기대한 것이 잘못이었겠지.

건혁은 작은 파공음을 일으키며 몸을 내던졌다.

"죽이진 않으마."

대신, 죽여 달라고 빌게 될 거다.

쓔와악!

뒤늦게 화염검을 들어 빙마검을 막아 내려 한 키리노죠였으나, 건혁은 화영검과 함께 키리노죠를 수직으로 그어 그의 오른팔을 잘라 냈다.

콰앙!

거대한 돌풍에 모두가 몸을 움찔거렸다.

"크아아악!"

키리노죠의 오른팔과 함께 화영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직이야."

쓔와악! 서걱!

이어, 키리노죠의 왼팔이 절단됐다.

건혁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양팔을 절단하고도 전신에 옅은 상처들을 만든 것이다.

피부가 벗겨지는 듯한 격통!

"끄아아아아악!"

살려 달라는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가 낼 수 있는 건 오로지 비명뿐.

키리노죠가 바닥에 드러누워 팔딱거렸다.

건혁은 그런 키리노죠를 향해 빙마검을 내리꽂았다.

푸욱!

"끄으으으...!"

허벅지를 꿰뚫은 빙마검.

키리노죠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진다.

"이 악물어라."

퍼억! 퍼억! 퍼억!

사지를 잃고 무차별 폭행을 당하는 키리노죠.

그가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찢어진 피부가 벌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

자존심과 오만함으로 가득하던 키리노죠의 눈동자에 공포와 두려움이 새겨졌다.

건혁의 일방적인 공격을 멍하니 바라보던 헌터들이 입을 수차례 뻥긋거렸다.

세계 랭킹 11위, 타케하라 키리노죠가... 이토록 무력하게 패배한다고?

"이제, 꺼져."

퍼억!

건혁은 키리노죠의 복부를 걷어찼다.

콰앙!

키리노죠는 눈을 까뒤집은 채 건물 외벽에 처박혔다.

그때, 반파된 호텔 1층에서 한 여성이 걸어 나왔다.

"...아빠?"

그녀의 목소리에 건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전 세계의 헌터들에게도 본보기가 되었겠지.

건혁은 일본 헌터 협회 인사들을 바라봤다.

"이번 작전에서 흑월은 빠지도록 한다."

적막으로 가득한 도로 한복판에 건혁의 목소리가 채워졌다.

기사왕 골렘에게 들린 유진.

안색이 많이 편해졌다.

건혁은 호텔 정문으로 다가가 수영을 데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세실리아한테도 전화를 해 둬야겠어.'

건혁은 수영을 번쩍 들어 빙룡에 태워 주었다.

"혼자서 탈 수 있지?"

"응."

"그래, 아빠는 유진 씨랑 같이 갈게."

수영의 시선이 기사왕 골렘에게 향했다.

정확히는 기사왕의 양팔에 들린 유진에게 향한 것이다.

건혁은 그녀를 품에 안고 빙룡에 올라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수영은 입을 꾹 다문 채 조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타케하라 키리노죠....'

전투 불능에 빠진 채 벽에 처박힌 세계 헌터 랭킹 11위의 남자.

그가 왜 부친과 싸우고 있었던 걸까?

수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면서 고삐를 잡아당겼다.

한편, 창문 너머로 상황을 지켜보던 세실리아는 건혁의 전화를 받자마자 호텔 옥상으로 올라가 빙룡에 올라탔다.

그렇게 밤을 지새우며 빙룡을 타고 바다를 건넌 건혁의 일행.

그들은 부산에 도착한 다음, 호텔에서 숙면을 취했다.

아침이 되었을 무렵.

대한민국에 폭탄과 같은 소식이 떨어졌다.

<일본 최강의 헌터, 타케하라 키리노죠에게 중상을 입힌 대한민국 헌터, 박건혁.>

한국 정부는 해당 기사를 확인하자마자, 다급히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정부가 움직이기에 앞서 건혁이 먼저 기자들을 불러 직접 정황을 설명했다.

 

제136화

136화. 갈등 (1)

<흑월의 부마스터를 강간, 살해하려 한 백귀야행의 길드원?!>

<전시 상황에서 중죄를 저지른 백귀야행의 길드원들... 그들을 처형시킨 박건혁?>

<타케하라 키리노죠, 박건혁의 행동에 문제를 지적하며 구속하려 해....>

<박건혁, '마력 폭발을 일으키기는 했으나,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였을 뿐!' 먼저 살심을 드러내며 공격해 온 것은 타케하라 키리노죠라고....>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던 그 시각.

SNS에서 여러 영상들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김유진이 백귀야행 길드원들에게 끌려가는 영상.

헌터들이 골렘들에게 포위되는 영상.

박건혁과 타케하라 키리노죠가 충돌하는 영상까지.

모두 호텔에서 머무르던 헌터들이 업로드한 것들이다.

해당 SNS를 살펴본 수영은 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익명으로 게시 글을 올렸다.

<흑월에 소속된 헌터입니다. 흑월 제1군 대장이신 김유진 헌터님께서는 현재 박건혁 마스터와 열애 중인 관계입니다. 김유진 헌터님이 마스터의 자택에 드나드는 것은 길드 내에서도 유명하고, 마스터의 따님과 언니 동생 관계로 지내는 것 역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들께서 한번 생각해 봐 주십시오. 만약 본인의 연인이 누군가에게 폭행, 강간, 살해 등의 위협에 처했을 때를 말입니다.

특히, 범죄를 저지른 장소는 일본입니다. 백귀야행에 대해서 조금만 찾아봐도 아시겠지만, 수많은 범죄를 돈으로 덮어 버리는 길드입니다. 그런데, 일본에게 사건을 넘기라는 건... 고양이한테 생선을 넘기는 격이 아닐까요?>

수영의 게시 글에도 박건혁의 행동이 과했다며 지적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범죄를 저지른 백귀야행의 길드원들은 그렇다고 넘어가자. 하지만, 타케하라 키리노죠를 먼저 공격한 것은 박건혁이다. 타케하라 키리노죠를 향해 적대 행위를 취한 부분은 인정해야지.>

⤷무슨 X소리야? 선제공격은 키리노죠가 먼저 했다고 보도됐는데?

⤷영상부터 확인해 보고 대댓 달아라. 박건혁이 먼저 마력 폭발을 일으켜서 공격함.

⤷마력 폭발이면 경고라고 봐야지. 그게 어떻게 공격임?

⤷X발, 눈이 옹이구멍이냐? 박건혁이 마력 폭발로 반항하니까, 키리노죠가 제압하려고 달려든 거잖아! 영상을 보면 키리노죠가 대화로 풀어 나가려는 것처럼 보이는구만.

⤷대화로 풀기는 무슨.... 또, 박건혁이 순순히 구속을 당해야 할 이유가 있나? 지원을 간 상황에서 부마스터가 공격을 받았는데, 왜 박건혁을 구속하냐?

⤷선제공격은 백귀야행이 먼저 해 왔고, 흑월은 그에 반격한 것뿐이다.

<어차피 박건혁한테 징역형을 선고하는 건 불가능함. 전 세계가 아르덴과 전쟁을 벌이는 현 상황에서 인류 최대의 무기인 박건혁이 징역살이를 한다고 생각해 봐라.>

⤷일단, 한국부터 존X게 털리지 않을까?

⤷그냥 집행 유예로 끝내는 게 제일이다. 아니면 무죄 때리든가.

⤷알렉스는 사람도 죽이고 잘 돌아다닌다.

⤷X발, 그 새끼는 범죄란 범죄는 다 저지르고 다니잖아. 그에 비해 박건혁의 인성이 좋다는 건 유명하지. 짐꾼을 헌터로 길러 내기 위해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고 하고.

⤷연인이 강간, 폭행, 살인을 당할 뻔했던 사건이다. 박건혁의 분노는 정당하며, 백귀야행 길드원들 역시 죽을 만했으나, 키리노죠에 대한 부분은... 아마 박건혁이 적절히 보상을 해야 하지 않을까?

⤷마력 폭발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듯.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지는 와중 일본은 도쿄 탈환 작전을 강행했다.

1급 포션을 복용하고 병원으로 옮겨진 타케하라 키리노죠.

전선에서 이탈한 박건혁.

두 사람을 제외한 한미일 연합군이 도쿄로 진격한 것이다.

결과는 불과 며칠 만에 전 세계에 전해졌다.

<일본... 진짜로 X됐네.>

⤷키리노죠라는 최고 전력이 전투 불능 상태가 된 것도 모자라 최상위권 헌터들까지....

⤷한국 측 피해도 엄청나더라. 1,000위 안에 드는 헌터가 1백 명이나 사망했다네.

⤷타국을 위해 싸우신 분들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번 도쿄 탈환에 투입된 군인 13만 6천 명 중 사상자가 8만 9천여 명이라고 한다. 심지어 1만 8천 명의 헌터 중 9,800명이 사망하고, 4,300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하니... 말 그대로 괴멸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지.

⤷미군 측은 이미 철수를 결정한 듯하던데....

⤷미국도 당장 다른 국가를 도와줄 처지는 아니잖아.

⤷땅따먹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는 건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님. 전 세계가 한바탕 뒤집어졌잖아.

⤷한국도 박건혁 없으면 X되는 거 순식간이다.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된다.

⤷당장 무슨 대책을 마련하라는 거야? 헌터를 육성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든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박건혁의 몸값은 천정부지 치솟는다.>

⤷덕분에 한국이라는 국가도 해외에서 연일 보도하는 중임.

⤷K-POP에 이은 역대 최고의 국위 선양이지.

⤷박건혁을 절대로 해외로 유출시키면 안 된다! 어떠한 혜택을 주더라도 발목을 붙잡아야 함!

⤷수많은 국가에서 러브 콜이 날아오고 있다는데....

일본은 이번 도쿄 탈환 작전의 실패를 박건혁 탓으로 돌리고, 타케하라 키리노죠의 부상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며 강력히 항의했다.

우선적으로 시행된 수출 규제를 통해 양국 간의 갈등이 불거졌다.

박건혁의 만행을 국제 사회에 호소하며 그에게 처벌을 하고자 국제 소송을 건 일본.

하지만, 국제 소송 이후 백귀야행에 대한 수많은 기사들이 전 세계에서 쏟아져 나왔다.

<백귀야행의 길드원, 주가 조작으로 구속되어....>

<백귀야행 소속 오타리 야스아키, 강간과 폭행을 일삼아... 피해자만 39명?>

<중국의 범죄 길드에게 암살을 의뢰한 백귀야행의 마스터, 타케하라 키리노죠.>

<백귀야행 길드 지하실에서 발견된 8,000억 원어치 필로폰... 관련 길드원 검거.>

<성매매, 살인, 강간, 폭행, 도박, 마약, 뇌물, 투기 등 각종 범죄에 연루된 백귀야행.>

하루아침 만에 범죄자로 전락해 버린 타케하라 키리노죠와 백귀야행의 길드원들.

일본 정부는 해당 소식을 듣고 다급히 언론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런 중대한 내용들이 어째서 따로 전달되지 않고 보도된 거지?

수사 명령은 도대체 누가 내린 거야?!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는 순간.

일본의 한 중년 정치인은 슬그머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XX당의 독주 체제.

그에 반하는 OO당 대표, 타나키 노리마사(棚木 典政)는 XX당의 시대를 끝내고자 백귀야행을 감싼 그들의 행위를 적나라하게 보도시켰다.

"이것은... 일본을 위한 일이다."

수도인 도쿄를 비롯해 요코하마, 오사카, 센다이가 마왕군에 손에 넘어갔다.

더욱이 인근 도시와 마을까지 빠른 속도로 병력을 확장시켜 나가는 상황.

말 그대로 절망 그 자체다.

"자위대의 공격까지 모조리 받아쳐 버리니...."

마왕군을 향해 어마어마한 화력을 쏟아부은 일본의 자위대.

효과는 분명 존재했다.

대규모 폭격으로 수많은 마왕군이 목숨을 잃었으니까.

하지만, 단 두 명의 최상급 마족이 등장함으로써 상황은 급변했다.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자위대의 해군 함대를 괴멸시키고, 전투기 3개 대대를 격추하며, 육군 2개 사단을 박살 냈다.

물론, 모든 것이 단둘에 의해 행해졌다는 것은 아니다.

두 최상급 마족이 이끈 100여 명의 상급 마족들.

마족의 등급은 제복을 기준으로 판단을 내렸다.

붉은색 제복은 최상급, 보라색 제복은 상급, 푸른색 제복은 중급으로 말이다.

"타케하라급의 괴물을 일백이나 상대하는 것이다. 박건혁이 작전에서 빠진 이상, 이번 작전이 성공할 일은 없겠지."

노리마사는 주먹을 쥔 채 눈을 번뜩였다.

"한국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일으켜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려는 것도 이제 끝이다. 백귀야행의 만행을 수면 위로 드러내, 박건혁을 다시금 일본으로 끌어들여 반드시... 반드시 도쿄를 되찾고 말겠다!"

수도인 도쿄를 되찾는다는 것만으로 OO당의 지지율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것이다.

노리마사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XX당에 대한 인터넷 기사를 살폈다.

자신이 잡은 동아줄이 썩은 동아줄이 아니길 바라며.

* * *

"고생하셨습니다."

건혁은 눈앞의 사내에게 현찰 200억 원을 건네주었다.

5만 원 지폐로 가득 찬 수많은 가방들.

PA흥신소 제1팀 팀장, 오송진은 손사래를 치면서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VIP 고객님의 의뢰이신데 이 정도는 당연한 일입니다."

닷새 전, 일본에서 도쿄 탈환 작전에 들어갈 무렵.

PA흥신소에선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선수금 100억, 잔금 200억의 의뢰가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의뢰 내용을 듣게 된 송진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일본의 여당과 백귀야행 길드의 뒷조사.

위험이 너무나도 크다.

'의뢰에 필요한 비용은 모두 지불하겠습니다. 특히, 백귀야행이 중국의 스컬과 자주 교류를 한다고 하더군요. 그쪽에 대한 정보도 확보해 주십시오.'

'스컬 쪽 증거를 확보하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아니, 증거를 확보한들 저희가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일단, 스컬하고만 교류하고 있는 건 아닐 테니, 다른 쪽으로 조사를 해 보기는 하겠습니다만... 다소 뒷돈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 일본의 XX당에 대한 것 역시....'

'선수금과 함께 현찰로 500억 원을 드리겠습니다.'

송진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눈동자를 굴렸다.

잔금보다 많은 금액을 당장 현찰로 주겠다고?

건혁은 차가운 얼굴로 송진을 바라봤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습니까?'

'무... 물론입니다.'

송진은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엔화의 가치가 떨어지고, 물가가 급등하기 시작한 일본.

미국과 유럽으로 도망친 정치인들도 존재하는 현재.

뇌물을 마다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또, 백귀야행으로부터 피해를 받아 온 사람들에겐 신변 보호와 이주를 도와주는 조건으로, 백귀야행의 악행을 SNS로 공유하고, 법정에서 그동안 모아 온 증거물을 제출함과 동시에 증언을 해 주는 약속을 받아 냈다.

박건혁의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움직인 PA흥신소의 직원은 총 47명.

약간의 지원을 준 직원들까지 포함하면 60명에 달한다.

그만큼 PA흥신소는 신중하고 확실하게 의뢰를 처리했다.

건혁은 결과물을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고작 닷새 만에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니.

PA흥신소에 잔금을 지불한 그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자곡동 저택에선 현재 세실리아와 유진이 머무르고 있었는데.

"다녀오셨어요."

세실리아의 마중에 건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가사 도우미에게 외투를 건네주었다.

"유진 씨는...."

"오늘도 방에서 수영이랑 같이 있어요."

유진은 장기 휴가를 내고 건혁의 집에서 요양을 취했다.

왜 하필 건혁의 집이냐고?

그녀가 건혁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유진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강한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도 인간인 이상, 일본에서 겪은 충격은 후유증으로 남았고, 절망에서 구해 준 건혁을 의지할 존재로 인식했다.

한국으로 귀국하고 2~3일 동안 건혁을 졸졸졸 따라다닌 유진.

그녀는 건혁의 저택에 눌러앉아, 4일째부터는 게스트룸에 틀어박혔다.

 

제137화

137화. 갈등 (2)

"일어날 때마다 마스터를 찾는 건 그대로예요. 불안해하던 모습은 조금 나아진 거 같지만요."

세실리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도 몇 차례 언니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건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과거를 떠올렸다.

검단산 게이트와 구룡산 레이드의 사건을 말하는 건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면서요? 길드 내 갈등에 대한 부분이라든가, 의족에 대한 부분까지도...."

세실리아의 이야기에 건혁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박수를 쳤다.

"아 참, 의족도 새로 맞춰 왔으니, 한번 착용해 보라고 말해 봐야겠네."

"일본에 대한 문제는... 잘 해결된 건가요?"

"소송은 저쪽에서 물러나지 않는 이상 계속 진행할 수밖에. 그래도 백귀야행에 대한 이미지는 최악으로 치달았어. 키리노죠에 대한 문제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서 진행하게 되겠지."

"그렇군요."

손상된 장기를 회복하고, 사지를 재생시킨 키리노죠.

분명, 육체는 멀쩡히 돌아왔다.

그러나 후유증 때문일까?

그는 대외적인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의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다는 모양이다.

"지금은 자택에 틀어박혀 있다나 뭐라나.... 하여간, 의족부터 가져다주고 올게."

"네."

건혁은 다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세단의 트렁크에서 두 개의 의족을 꺼낸 그는 게스트룸으로 발걸음을 옮겨 유진에게 새 의족을 건네주었다.

"아, 제가 따로 다녀와도 괜찮았는데...."

목제 의족을 착용하고 있던 유진이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잠깐 나가 있죠."

건혁이 게스트룸을 나서자, 유진은 수영의 도움을 받아 새 의족을 착용했다.

이전 제품과 동일한 사이즈이면서 패턴과 비밀번호로 잠금을 설정하는 시스템.

지문 인증의 간편함은 정말로 훌륭하다.

하지만 일본에서 겪은 일 때문인지, 유진은 비밀번호와 패턴의 잠금장치를 설치하고자 했다.

"비밀번호 설정은 이쪽에서...."

수영은 설명서를 보며 비밀번호와 패턴의 설정을 도와주었다.

잠금장치를 모두 설정한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의 주변을 걸어 보았다.

"언니, 1급 포션으로 다리를 재생시킬 생각은 없는 거야?"

수영의 물음에 유진은 침대에 걸터앉으면서 무릎의 고정대를 살펴봤다.

"당연히 재생시키고 싶지. 안 그래도 마침 건혁 씨가 길드원 전용 마켓을 운영한다고 하셨어. 길드원만이 이용할 수 있는 인터넷 마켓으로 시세보다 저렴한 금액에 포션과 장비를 구매할 수 있게 한다는 모양이야. 판매되는 아이템 중에는 1급 포션도 있을 거라 하더라고."

"요새 1급 포션의 시세가...."

"이번 아르덴의 침공이 시작되면서 1,000억 원에 구매하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해. 거의 부르는 금액이 값이라는 거겠지."

"아빠랑 결혼하면 공짜로 받을 수 있어! 열애설까지 떠 버렸는데 이참에 결혼까지...!"

"그런 목적으로 결혼을 하고 싶지는 않아. 가능하면 1급 포션은... 내 힘으로 얻어 보려고."

수영은 유진의 대답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친이 유진과 결혼하고 나면 세실리아와의 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질 것이다.

열애설까지 터졌으니 순순히 결혼까지 달려가면 좋으련만.

'3~40대가 되면 연애나 결혼에 느긋해지는 걸까? 보통 조급해진다고들 하던데....'

똑똑똑.

복도에서 기다리던 건혁이 노크를 하고 '들어가도 괜찮을까요?'라고 질문했다.

"네, 들어오세요."

유진의 허락과 동시에 방문을 열고 들어온 건혁.

의족을 착용하는 동안 주방에 다녀오기라도 한 걸까?

그는 약 봉투와 생수, 유리컵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있었다.

"점심은 먹었다면서요? 슬슬 약을 먹을 시간이라고 가사 도우미분께서 가져오시더군요."

건혁은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 두었다.

"약은 꼭 챙겨 먹고, 불편한 곳 있으면 바로바로 말해 주세요."

"일본에 대한 건...."

"그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미 손을 써 둔 상태입니다."

건혁의 대답에도 유진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내가 일본에 따라가겠다며 억지만 부리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건혁이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스마트폰을 통해 확인했다.

자신의 탓에 건혁이 '살인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죄책감이 든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유진 씨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하... 하지만 저 때문에 사람을...."

유진이 살짝 울먹이려 하자, 건혁은 작게 미소를 보였다.

"사람은 이미 몇 차례 죽여 본 적 있습니다."

범죄자를 말이다.

"제 손은 이미 마족들의 핏물로 더럽혀져 있죠. 이제 와서 두세 명 죽인 걸로 무언가를 느끼진 않아요. 또, '살인자'라는 비난을 받고 있긴 하지만, 백귀야행이 수많은 범죄에 연루되고,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상황이 바뀌고 있는 중입니다."

SNS는 '악질 범죄자를 처단한 박건혁'이라는 게시 글로 수두룩했다.

그동안 수많은 범죄에 관해 낮은 수위의 처벌을 받아 온 백귀야행.

일본 국민들 역시 정부와 사법부가 백귀야행을 함부로 건들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아니, 이 부분은 일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전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국내 서열 10위 내의 헌터들에 한해서는 범죄에 연루된다 하더라도 최대한 편의를 봐주며 처벌 수위를 낮춰 주었다.

국가의 안위를 위해.

하지만 백귀야행의 최정예가 도쿄 탈환 작전에서 사망하고, 타케하라 키리노죠가 폐인이 되어 버리면서 일본 국민들은 그동안 쌓아 둔 분노를 인터넷에 폭발시키기 시작했다.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안정을 취하세요."

"...네."

수영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작게 한숨을 흘렸다.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은 왜 이렇게 답답한 거지?

너무 적극적인 것도 오글거리지만, 소극적인 것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저는 소송 관련으로 처리해야 될 게 남아 있어서...."

"아...."

유진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건혁을 붙잡거나 하지는 않았다.

소송 관련으로 처리해야 될 업무가 있다지 않은가.

'귀찮은 여자라고 생각되고 싶지 않아.'

박건혁이라는 남자는 자신의 정신적 기둥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그에게 미움을 받는다 생각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유진은 '이제 저 남자가 없으면 자신은 살 수 없다.'라는 마음이 일어날 정도의 상황이 된 것이다.

"언니, 그렇게 소극적이면 세실리아 언니한테 아빠를 빼앗겨 버릴걸?"

"그 부분이라면... 이제 괜찮아."

수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다니, 무슨 소리지?

설마, 부친을 포기했다는 건가?!

"우... 우리 아빠, 포기하는 거야?"

수영의 물음에 유진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이젠... 건혁 씨가 내 전부야. 어떻게든 나를 좋아하게 만들어야지."

그럼, 조금 전 괜찮다는 말은 무슨 뜻이지?

수영이 의문에 잠긴 시각.

복도로 나선 건혁은 스마트폰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열애설은 도대체 어디서 터져 나온 거야?"

* * *

거액을 들여 변호사를 선임한 건혁은 국제 소송에 대처하며 일본 정부를 상대했다.

대한민국에 주목하기 시작한 수많은 국가들.

과연 세계 최강의 헌터에게 어떠한 판결이 떨어질까?

하지만, 일본의 상황은 재판에 신경을 쓸 정도로 여유롭지 않았다.

오히려 소송을 물려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기 시작한 상황.

그 배경에는 일본 OO당의 여론 플레이가 돋보였다.

특히, 뭄바이 탈환 작전과 프놈펜 탈환 작전에 대한 소식이 전해진 덕분일까?

소송 취하에 대한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

<인도의 뭄바이 탈환 작전, 캄보디아의 프놈펜 탈환 작전에서 상급, 최상급 마족을 쓰러트린 용기사 골렘!>

<용기사 골렘의 활약을 공개한 캄보디아 정부, 흑월에게 감사를 표하며....>

<인도 대통령, 박건혁에게 훈장을 수여코자 방문을 청해....>

<세계 최초로 최상급 마족을 쓰러트린 대한민국의 헌터, 박건혁!>

용기사 골렘의 활약을 생생히 담은 정찰용 드론.

해당 드론은 1~2급 금속이 사용됨과 동시에 최신 기술을 반영해 제작되었는데.

뭄바이의 중심지로부터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건물 옥상에 착륙한 뒤, 다리를 지면에 고정시켜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뭄바이에 투입된 정찰 드론의 숫자는 37기.

프놈펜 역시 17기가 투입되었다고 한다.

두 국가는 정찰 도중 용기사 골렘의 활약을 확인하고 경악성을 터트렸다.

일격으로 수십 채의 건물을 파괴하는 최상급 마족.

저건 재앙이다.

S랭크 마수를 뛰어넘는 재앙!

그런데, 그런 괴물을 위협하는 것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앗아 간 용기사 골렘은 뭐지?

용기사 골렘은 상급 마족과 A~S랭크 마수들을 쓰러트리며, 인도와 캄보디아에게 의뢰 대금을 확실하게 돌려주었다.

반면.

"...."

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에도 건혁의 얼굴은 살짝 굳어졌다.

"최상급 마족을 보다 확실하게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2기 이상의 용기사 골렘이 투입되어야 하는 건가."

물론, 1기로도 상대는 가능하다.

승률은 많이 쳐 줘야 6~70% 정도겠지만.

건혁은 최상급 마족에 대한 자료들을 하나둘씩 확보하고 회수된 경험치량을 체크했다.

마침 대량의 경험치가 들어왔다.

알림을 제거해 둔 탓에 정확한 경험치량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3%에 불과했던 경험치를 단번에 채우더니 레벨이 두 단계나 올라갔다.

"무슨 경험치 덩어리네, 덩어리야."

S랭크 마수를 쓰러트릴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경험치량이다.

건혁은 스테이터스 레벨이 320에 도달함을 확인하고, AP를 체력에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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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건혁

*종족: 인간

*칭호: 빙마군주(氷魔君主)

*출신 국가: 한국

*LV: 320

*근력: 87(+5)

*민첩: 100(+5)

*체력: 120(+5)

*마력: 1946(+300)

*AP: 0

*스킬: [빙마검(氷魔劍)-LV10] , [얼음 골렘 소환-LV10], [마력 회복-LV9], [성장 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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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사 골렘을 소환해 마력을 소모시키는 건혁.

그는 국내의 민간인 통제 구역을 청소하고, 길드원들을 선발해 해외 파견을 준비시켰다.

기자들은 건혁에게 왜 직접 해외로 나서지 않느냐며 의문을 보였다.

타케하라 키리노죠를 가볍게 쓰러트린 무력이라면 분명 어마어마한 전력이 될 터.

건혁은 기자들의 의문에 '일본의 국제 소송'을 거론하며 일단락시켰다.

<박건혁의 해외 출장을 가로막은 일본의 국제 소송....>

<길드원에게 지휘권을 맡겨 용기사 골렘을 해외로 파견 보내는 국내 서열 1위 헌터 박건혁, 1인 길드나 다름없는 위용을 선보이며....>

<흑월의 다음 목적지는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 거리와 당국의 상황을 고려해 신중하게 파견을 결정하겠다는 흑월.>

<박건혁의 발목을 잡은 일본, 세계 각국으로부터 질타를 받아....>

건혁의 몇 마디에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는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자극적인 기사 제목도 눈에 띄었는데.

기사가 올라올 때마다 수백 개의 댓글이 달리며, 박건혁을 옹호하는 세력과 비난하는 세력이 충돌했다.

 

제138화

138화. 갈등 (3)

"살인을 정당화할 순 없지만, 부마스터가 공격을 받은 상황이면... 박건혁은 정당방위 아니냐? 동영상에선 의족을 박살 내고 머리채를 붙잡고 끌고 가더만."

"그렇다고 키리노죠와 싸운 건...."

"그 부분은 조금 애매하긴 하지. 박건혁도 골렘으로 위협을 가했다고 하니까. 근데, 특수 능력을 이용한 선제공격은 키리노죠가 먼저 시작했다고 하잖아. 더욱이 권한도 없는 녀석이 강제로 구속하려고 한 거고."

"뭐, 그건 그렇지."

"야스아키... 였었던가? 그 X끼들은 아군을 죽이려고 한 거니까, 일종의 반역죄로 봐야 하는 거 아니냐? 또, 키리노죠도 X발 존X 나쁜 새X라고 기사로 뜬 데다가, 백귀야행 놈들도 전부 구속됐다고 하던데... 이 정도면 쉴드 불가능이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20대의 젊은 청년들.

국내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화제는 바로 박건혁의 재판이다.

일본 측에서는 국제 소송을 통해 박건혁에게 한화 3조 원대의 보상금과 도쿄 탈환 작전에서 죽은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한 책임을 지라며 일본 본토의 마왕군 진압을 요구했다.

<3조 원이 누구 집 개 이름이냐? 아니, 3조 원을 요구한다고는 쳐. 근데 일본 본토로 가서 마왕군을 진압하라는 건 무슨 X소리야?>

⤷3조 원도 미친 소리다. 흑월의 부마스터를 죽이려고 한 게 누군데? 심지어 경위 조사 없이 한국의 헌터를 구속하려고 한 건 한국을 물로 보는 거임.

⤷그래도 키리노죠에 대한 부분은 박건혁이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싸워라! 계속 싸워!ㅋㅋㅋㅋㅋㅋ

⤷확실히 키리노죠의 행동도 이해는 됨. 그런데 타케하라 키리노죠가 무슨 권한이 있어서 박건혁을 구속하려는 거지? 일본 헌터 협회에서 경위를 파악하고자 조사에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더라면 박건혁도 순순히 따라갔을 텐데 말이야.

⤷영상 속 키리노죠는 100% 박건혁을 죽일 목적으로 공격했다. 박건혁은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로 마력 폭발을 일으키고, 골렘으로 위협을 가했을 뿐. 실제로 용기사 골렘이 키리노죠를 직접 공격했냐?

⤷영상 살펴보면 일본 헌터 협회 측 사람들도 보인다. 키리노죠가 나대지만 않았어도 경위를 제대로 파악해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도쿄 탈환 작전도 100% 성공하고 말이야.

일본 측의 요구에 대해 박건혁 측은 반박 기사를 내보냈다.

그렇게 서로가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던 시각.

캄보디아가 프놈펜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세계 군사력 순위 105위.

헌터계 역시 부족함이 많이 드러났으나, 중국군의 지원을 받은 캄보디아는 용기사 골렘의 파견이 결정된 순간, 프놈펜 탈환 작전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캄보디아는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마왕군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다음은 이집트, 터키, 그리스...."

건혁은 세계 각국으로 용기사 골렘을 투입시켰다.

마왕군과의 전쟁에서 대활약을 펼쳐 보인 용기사 골렘들.

영상은 유X브와 SNS를 통해 쏟아져 나왔다.

그럴 때마다 일본은 더욱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 본토를 집어삼키기 시작한 마왕군.

반면, 박건혁은 세계를 구하는 영웅이 되어 버렸다.

"제기랄!"

일본 XX당의 의원들은 욕설과 함께 분노를 터트렸다.

현재 XX당은 자국 국민들로부터 맹비난을 받고 있는 중이다.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했던 청년들마저 거리로 나와 시위에 참가했는데.

계기는 마왕군의 침공에서부터 시작됐다.

더욱이 타케하라 키리노죠와 관련된 XX당의 비리가 쏟아지자, 일본 전국에서 시위대가 일어나 정치권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XX당을 향해 비판을 쏟아 냈던 야당들 역시 국민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했다.

총리를 탄핵시키고 XX당으로부터 정권을 빼앗기 위해.

<타케하라 키리노죠, 극심한 정신적 고통으로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해....>

<흑월의 부마스터를 향해 악질적인 범행을 자행한 백귀야행의 길드원들! 타케하라 키리노죠에게 한국 헌터를 구속할 수 있는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었다?>

<마력 폭발과 골렘으로 다가오지 말라며 위협을 가한 박건혁, 특수 능력을 사용해 살심을 드러낸 타케하라 키리노죠. 美 국제 재판관, 박건혁에게 무죄를 선고해....>

<박건혁, 정윤호 등 한국 헌터에 대한 비난과 욕설을 쏟아 낸 타케하라 키리노죠, 방송사에 뇌물을 건네 왜곡된 보도를 내보내기도....>

<흑월의 부마스터를 살해하려 한 백귀야행 소속 오타리 야스아키, 효도 카즈키, 하라하시 토미히데의 죽음에 대해 재판부는 박건혁에게 무죄 판결을....>

박건혁의 승소를 알리는 기사들이 쏟아지자, 일본은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왕군을 막아 내는 데 용기사 골렘의 존재는 필수 불가결하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의뢰를 모두 거절해 버린 흑월.

일본의 야당들은 국제 소송을 강행한 현 정권을 비난하고, XX당과 백귀야행의 만행을 다시금 꺼내 들어 국민들의 분노를 터트렸다.

"서둘러!"

"대충 중요한 것만 챙기고 나와!"

흑월과 관계가 틀어져 버린 일본에선 대규모 피난이 시작되었다.

일본에 대한 소식은 매일같이 한국에 전해졌다.

방어선을 뚫고 나고야를 공격한 마왕군.

TV에서는 나고야에 들이닥친 수많은 마수들이 비쳐졌다.

"...미친."

마수들이 차량을 몰고 바리케이드를 들이받았다.

이어, 전차와 박격포와 같은 재래식 무기들이 등장하자, 세계인들은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짐승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 현대의 병기를 다루다니!

"저... 저건 또 뭐야!"

유X브를 시청하던 수영은 재래식 무기를 다루는 마수들의 모습에 경악성을 터트렸다.

8년이나 빨라진 마왕군의 침공에 이어 재래식 무기를 다루는 마수들까지.

미래가 크게 바뀌었다.

도대체 원인이 뭐지?

미래를 알 수 없게 된 탓일까?

수영은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며 어깨를 덜덜 떨었다.

'이 세계는... 내가 아는 세계가 아닌 건가? 평행 우주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가설들.

마왕군의 침공이 8년이나 앞당겨진 만큼 세계 각국이 무너지는 것도 금방일 것이다.

본래 최전선에서 싸워야 할 재능 넘치는 헌터들이 지금은 학생 신분이니까.

때문에 마왕군이 침공해 올 당시, 수영은 거의 모든 것을 포기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빨리 공격해 온 거야?"

백월에 소속된 학생들은 모두 장래가 유망한 헌터들이다.

8년이라는 시간이 존재한다면 분명 강력한 전력으로 키울 수 있을 터.

수영은 빼앗긴 8년이란 시간을 떠올리며 절망했다.

'곧... 세계 각국이 마왕군에 의해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려오겠지.'

그녀의 예상대로 전 세계는 제대로 뒤집어졌다.

수도와 군사 시설을 빼앗기며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설마, 마왕군이 재래식 무기까지 다룰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그로 인해 지구인의 멸망은 더욱 가속화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빗나갔다.

세계는 분명 절망적인 위기를 겪는 중이다.

그러나 마왕군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수많은 국가들.

"아... 아빠의 능력이라면 적어도 2~3년 정도의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부친의 존재는 세상에 있어 희망과도 같은 존재였다.

홀로 수많은 마족들을 쓰러트린 인류의 영웅.

수영은 건혁의 능력에 희망을 품었다.

"아빠 혼자서 마왕군... 아니, 마왕을 쓰러트리는 건 어려울지도 몰라."

그렇다면 전생의 능력을 되찾아 건혁이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도록 지원한다.

그녀는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빡빡한 스케줄을 세웠다.

길드 활동이 없을 때는 단독으로 게이트를 공략하며, 여유가 생길 때는 수서역 헌터 훈련장을 찾아가 궁술을 갈고닦았다.

단 하루의 쉼 없이 2~3개월 동안 게이트를 들락거린 그녀는 금세 서열 3천대 안에 들어섰다.

파파파팡!

수영과 함께 민간인 통제 구역에 들어선 건혁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재능에 노력이 더해진 결과... 인 건가?'

불과 2~3개월이란 시간으로 1만 명이 넘는 헌터들을 제치다니!

서열 1만대라는 마의 구간을 가볍게 돌파한 것도 모자라, 2,877위의 자리에 이름을 올린 수영의 모습에 건혁은 작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는 수영의 전투를 살펴보면서 작게 박수를 쳐 주었다.

"모... 못 본 사이에 많이 강해졌네?"

"성장기니까."

수영은 살짝 뿌듯한 표정으로 가슴을 폈다.

이걸 성장기라는 단어 하나로 정리할 수 있나?

건혁은 피식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많이 자랐네.'

중학교에 들어간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고등학생이다.

건혁은 수영의 빠른 성장에 뿌듯함과 약간의 씁쓸함을 느꼈다.

언젠가는 자신의 곁을 떠나려 하겠지.

"아빠?"

너무 오랫동안 멍을 때렸나?

수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래, 가야지."

건혁은 빙마검을 꺼내 앞으로 치고 나갔다.

서걱!

오크들을 가볍게 베어 내던 그때.

후위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푸푹!

화살은 양측에서 달려들던 오크 전사의 이마를 정확히 꿰뚫었다.

심지어 수백 미터 떨어진 오크 궁사까지 일격에 맞춰 쓰러트린 그녀.

저격술 하나는 올림픽에서 1위를 먹고도 남을 실력이다.

두 사람은 더욱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1박 2일 노숙... 아니, 캠핑을 했다.

통제 구역 캠핑은 주말마다 계속되었는데.

그 시각, 일본에선 내각 총리대신이 사임을 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다.

XX당 의원들이 구속되고 조사를 받는 도중, 야당 의원들은 한국에 방문해 직접 흑월에게 지원을 요청해 보겠다고 나섰다.

그들을 매국노 또는 친한파라 비난하는 우익 세력들.

야당 의원들은 그러한 비난 속에서도 굳은 의지를 드러내며 기자 회견을 진행했다.

"국민 여러분들의 비난은 모두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기억해 주십시오. 저희는 일본을 위해! 오직 일본을 위해 한국과 협상을 하여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거래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국가 재정은 현재 바닥을 드러낸 상태입니다. 더욱이 이재민의 숫자가 급증하여 식량과 생필품의 공급에도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제1야당의 대표, 타나키 노리마사는 깊게 한숨을 내쉬면서 카메라를 지그시 노려봤다.

"이와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마왕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도, 굶어 죽는 것이 더욱 빨라질지도 모릅니다. 현재 흑월... 아니, 박건혁 헌터의 골렘은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활약을 선보이며, 최상급 마족에게 유일하게 대항할 수 있는 존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박건혁 헌터와 '거래'를 하고자 이번 방한을 결정하였습니다."

유독 '거래'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제1야당의 대표.

문제는 박건혁에게 지불해야 되는 의뢰금의 액수다.

불과 한 달 전과 다르게 엔화의 가치는 큰 폭으로 급락하게 되었다.

한화와 비교하면 100엔의 가치는 현재 386원 정도.

말 그대로 바닥이다.

그 때문일까?

일본에선 물가 급등 현상과 함께 사재기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일본 전역에서 패닉이 일어난 것이다.

 

제139화

139화. 유럽으로 (1)

'박건혁 헌터의 지원은 이미 약조를 받은 상태다. 하지만....'

의뢰 내용이 일전보다 더욱 확장되고, 박건혁의 몸값은 수직으로 상승했다.

재정이 어려운 일본으로선 비용 문제를 어찌 감당해야 할지조차 막막할 지경이다.

"후우, 이번 위기만 극복해 낸다면... OO당이 정권을 잡을 수 있겠지."

노리마사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언론을 움직여 XX당과 백귀야행을 공격하는 대가로 받은 약조.

OO당 의원들은 XX당의 지지 세력들의 주장과 비난을 짓누르기 위해 일본의 현 상황을 가감 없이 언론으로 내보냈고, XX당과 백귀야행 길드원들의 만행을 연일 보도하는 등으로 국민들의 감정을 건드렸다.

활발한 언론 보도와 SNS 공유를 통해 일본의 대다수 국민들은 박건혁의 도움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납득하면서 XX당의 지지 세력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시청을 국회로 사용하며, 대회의실에 모인 각 당의 의원들은 새로운 내각 총리대신을 뽑기 위한 선거에 대해 입을 바쁘게 움직였다.

더욱이 1조 엔을 지불하여 박건혁을 데려와야 한다는 야당의 목소리 때문일까?

여당이었던 XX당의 의원들이 반발을 일으켰다.

한화로 4조 원에 가까운 액수다.

"지금 미치셨습니까? 어떻게 일개 헌터를 데려오는 데 1조 엔이라는 금액을...!"

"일개 헌터가 아닙니다! 최상급 마족을 쓰러트릴 수 있는 건 오직 박건혁 헌터밖에 없단 말입니다! 더욱이 최상급 마족들이 군함을 파괴하는 영상을 이 자리의 모두가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왕군과의 전쟁에서 박건혁 헌터의 용기사 골렘은 필수 불가결합니다!"

"엔화의 가치 역시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1달러가 3~400엔이 되어 버렸단 말입니다!"

"1조 엔으로 마왕군을 토벌하여 본토를 되찾는다면, 일본은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박건혁 헌터의 몸값을 고려하면 1조 엔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중국에선 이미 수조 엔 단위의 위안화를 박건혁 헌터에게 지불할 용의가 있다고 하잖습니까!"

"굶어 죽는 국민들을 생각하십시오! 1조 엔으로 일본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리해야죠!"

야당의 속사포에도 XX당의 의원들은 얼굴을 구기면서 반론을 꺼내 들었다.

"박건혁 헌터는 일본의 국민을 살해한 살인자입니다! 그런 살인자와 거래를 한다니...! 어디서 그런 막말을 꺼내십니까!"

XX당의 강력한 반발에 노리마사는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박건혁에게 약조를 받았다고는 하나, 협상 자체가 불가능하다면 약조도 무의미해진다.

야당 의원들은 새파래진 얼굴로 여당을 설득했다.

그러나 해당 의결이 부결됨과 동시에 내각 총리대신이 XX당에서 선출되었다.

야당 의원보다 2배나 많은 XX당 의원들.

정권을 붙잡는 건 너무나도 손쉬운 일이었다.

'결국, 다음 총선까지 기회를 살필 수밖에 없는 건가!'

노리마사는 허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야 했다.

야당의 몇몇 의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설마, XX당이 이렇게까지 거세게 나올 줄이야.

아직도 상황을 모르는 건가?

"제기랄!"

야당 의원들이 욕설을 터트리면서 XX당 의원들을 향해 달려갔다.

난데없는 난투극에 한바탕 뒤집어진 시청.

회의 내용을 스마트폰과 TV로 지켜보던 일본의 국민들 역시 난리가 났다.

자위대와 일본 헌터만으로도 충분히 마왕군을 제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XX당.

그들은 폐인이 된 타케하라 키리노죠가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였다.

"이... 이게 무슨 X 같은 소리야?!"

시청 앞에 모인 야당의 지지 세력들은 어깨를 덜덜 떨었다.

"최상급 마족 하나에 항공 모함과 구축함 다섯 척이 박살 났었다고!"

"미국의 함대를 괴멸시킨 괴물을 도대체 무슨 수로 상대한다는 말이야!"

"일본의 최상위 헌터들은 모두 도쿄 탈환 작전에서 죽었었잖아!"

"1조 엔이든 2조 엔이든 간에 박건혁의 용기사 골렘을 데려와야 한다고!"

"마왕군의 숫자가 수백만을 넘어간다면서! 심지어 미사일에도 멀쩡한 S랭크 마수가...!"

그들의 당황스러운 목소리에도 극우 세력은 환호와 동시에 야당의 지지자들을 비난했다.

기자들조차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상황을 보도했는데.

그것을 유X브로 지켜보던 건혁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비서를 불러 일정을 조정했다.

"일본행은 아무래도 취소해야겠네요. 이탈리아와 프랑스... 유럽 쪽 일정을 앞당겨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번에 정부에서 북한과의 통일을 추진하려고 한다던데...."

한국 정부는 무정부 상태가 되어 버린 북한과 통일을 이루고자 미국, 중국과 회담을 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북한의 핵무기가 마왕군에게 넘어간 것은 정말로 간담이 서늘한 일이다.

남한으로선 경계를 넘어 공포를 느껴야겠지.

그리고 그것은 중국과 러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북한 영토가 남한에게 편입되는 것을 과연 중국이 달가워할까?

그럴 리가.

대한민국 정부의 발표 직후 중국은 북한의 동맹국임을 강조함과 동시에 북한의 의사 없이 통일을 함부로 정할 수 없다면서 회담에 부정적인 의사를 내비쳤다.

"북한에 자리를 잡은 마왕군이 중국으로 북상할 거라는 생각은 못 하는 건가?"

건혁은 인터넷에 공개된 위성 사진을 보면서 까득 손톱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마왕군 사이에서도 북한에 대한 정보가 전해진 모양이다.

한국인이 함부로 진입할 수 없는 국가.

골렘이 북한의 영토에 들어갔다가는 중국에서 무언가 반응을 내보일 것이다.

동시에 미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으리라.

거기에 제3 국가와 러시아까지 움직인다면 제3차 세계 대전의 시초가 될지도 모른다.

마왕군이라는 공공의 적을 앞두고 말이다.

"일단, 중국에서 온 의뢰는 전부 거절해 둬야겠어."

이미 건혁은 몇 차례 중국의 의뢰를 받고 마왕군을 격퇴시킨 적이 있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현금을 벌었는지....

그러나 더 이상은 무리다.

이 시국에 괜히 중국으로 지원을 나갔다간 국민들로부터 욕을 바가지로 먹을 테니까.

물론, 중국에 차고 넘치는 경험치들이 아쉽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추후에 찾아올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그때까진 유럽과 중동에 집중하면서 레벨을 높여야 한다.

"간만에 유럽 여행 좀 다녀와야겠네."

건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본부를 빠져나갔다.

* * *

중국 후베이성의 성도, 우한.

중국 중부 지역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했던 도시는 현재 마왕군에 의해 점거된 상태다.

불과 몇 년 전, 최상급 마족의 반열에 올라선 로블란드 T 하벨 후작은 우한의 총사령관으로 부임함과 동시에 한국의 동태를 살폈다.

정확히는 박건혁의 움직임이다.

"아무래도... 중국에서 보낸 의뢰를 거절한 모양입니다."

부관의 보고에 로블란드는 씨익 웃으면서 팔짱을 꼈다.

"그거 다행이군. 슬슬 항저우를 뚫고 상하이를 공략해야 됐었는데 말이야."

"정저우에서 120만, 창사에서 180만, 난창에서 50만의 군대가 상하이를 향해 진군하고 있습니다."

"우리 우한에서 보내는 110만의 군대를 포함하면 460만 정도 되겠군."

병력의 대부분이 낮은 랭크의 마수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지구인들은 그들의 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놈들은 더 이상 허접한 무기를 들고 돌격해 오던 짐승이 아니다.

지구의 화기를 다루며 마족들의 지휘에 따라 작전을 펼치는 하나의 병사.

때문에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코볼트와 고블린과 같은 이족 보행의 마수에게 공포를 느껴야 했다.

드르륵.

로블란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부관이 눈치를 살피면서 추가 보고를 올렸다.

"그리고...."

"흐음?"

"베트남 총사령관이셨던 크라스 공작님께서 박건혁의 용기사 골렘에 의해 전사하셨다는 소식이... 조금 전에 전달되었습니다."

"...."

로블란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단 한 명의 인족이 무려 13명의 최상급 마족을 쓰러트린 것이다.

백작급 마족 3명, 후작급 마족 8명, 공작급 마족 2명.

최상급 마족 중에서도 정점을 찍었다는 공작급 마족이... 고작 골렘 따위에게 죽는다고?

이곳이 아르덴이었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박건혁의 무력은 모든 추측과 예상을 뛰어넘었다.

'놈을 쓰러트리기 위해선 다수의 최상급 마족들이 일제히 달려들어야 한다.'

단 한 명의 인족을 쓰러트리고자 최상급 마족 여럿이 공격을 해야 한다니.

로블란드는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본인이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었던 탓이다.

그간 세력 다툼을 벌이던 최상급 마족들이 고작 인족 하나를 죽이고자 합심을 해야 된다고?

이런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또 어디에 있을까.

"박건혁은 상하이부터 박살 낸 다음 생각해야겠군."

부관과 함께 우한의 시청을 빠져나온 로블란드는 곧장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상하이로 진격했다.

그가 떠난 우한에는 30만의 병력이 남아 생포한 인간들을 노동력으로 굴렸다.

인간을 하찮게 여기며, 인간에게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 마족 사회.

마족에게 생포된 세계 각국의 인간들은 말 그대로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한편, 460만의 대군이 상하이를 향해 진격하던 그 시각.

박건혁은 이탈리아의 상공을 날아다니며 마족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래, 사냥이다.

이것을 전투라고 부르기는 다소 어려움이 있겠지.

콰아아아앙!

"저... 저게 용기사 골렘인가."

마족들은 용기사 골렘의 출몰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박건혁이 이탈리아로 온다는 것은 이미 TV와 인터넷을 통해 확인했다.

그래서 다수의 병력을 배치하여 대비를 하였건만....

이탈리아 나폴리의 총사령관, 오페론 T 이드셀은 검을 쥔 오른손에 힘을 넣었다.

"놈을 죽이면 골렘들도 형체를 잃고 쓰러질 터. 녀석을 죽이면... 분명, 이드셀 가문은 이 지구에서 가장 비옥한 영토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간 수많은 고위 마족들을 쓰러트려 온 박건혁이다.

공적을 바라는 마계 귀족들은 박건혁을 죽이는 데 안달이 나 있었는데.

오페론 역시 그에 속했다.

"지금이다!"

사방에서 푸른색 화염이 방사되었다.

하늘로 치솟으며 건혁을 향해 뻗어 나가는 불꽃.

위력은 7서클... 최상급 마족의 공격력에 준하는 수준이다.

스무 곳에서 방사된 화염이 박건혁과 용기사 골렘을 덮치려던 그때.

용기사 골렘들이 다급히 브레스를 뿜어냈다.

푸화아아아아!

이어, 안장에 탄 기사왕 골렘이 검을 휘두르며 화염을 갈랐다.

그사이.

파앗!

"흐읍!"

안장에서 뛰어내려 새로운 용기사 골렘을 소환한 건혁.

다섯 기의 용기사 골렘으로 스무 개의 7서클 마법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직감한 걸까?

건혁은 오페론이 준비해 둔 함정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것을 본 오페론은 씨익 웃으면서 검은 박쥐 날개를 펄럭였다.

쓔와아앙!

오페론의 돌격에 사방에서 상급 마족들이 일제히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100여 명의 상급 마족과 함께 박건혁에게 돌격하는 오페론.

'용기사 골렘이 1기... 지금이라면 놈을 죽일 수 있다!'

콰아앙!

상공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스크롤을 통해 방사한 푸른색 화염이 용기사 골렘들을 덮친 것이다.

화끈거리는 열풍에 상급 마족들은 얼굴을 찌푸리며 검을 휘둘렀다.

마기를 사용해 형성시킨 검기, 데빌 블레이드를 두른 채.

쐐애애액!

이 자리엔 상급, 최상급 소드 마스터가 1백이나 된다.

제아무리 박건혁이라도 무사하지는 못할 터!

오페론은 승기를 자신했다.

하지만....

씨익.

박건혁의 얼굴을 본 그는 섬뜩함을 느꼈다.

분명 함정에 빠진 것은 그일 텐데, 어째서 저리 여유를 부린단 말인가.

오페론이 의문을 품던 그 순간.

눈앞에 10기의 용기사 골렘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140화

140화. 유럽으로 (2)

"이... 이런 미친...?!"

오페론은 몸을 다급히 멈추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설마, 자신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홀로 남은 건가?!

황급히 퇴각 명령을 내리려 한 오페론.

그러나 상황은 이미 늦었다.

푸화아아아아아!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브레스와 10여 개의 푸른색 칼날.

"무... 물러나! 퇴각하라!"

공적에 눈이 멀었던 걸까?

"끄아아악!"

"마... 말도 안 돼!"

"이... 인족 따위가 어떻게 저 정도의 마력을...!"

"도대체 몇 기나 소환할 수 있는 거야!?"

상급 마족들은 경악성을 터트리면서 급정지와 동시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브레스에 삼켜진 상급 마족들은 얼어붙은 채 지상으로 떨어졌다.

이내, 지면과 충돌하며 박살이 나 버린 상급 마족들.

일격이다.

일격이면 자신들의 목숨이 날아간다!

파앙!

"누가 도망치게 놔준대?"

어느새 빙룡과 함께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박건혁.

오페론은 기겁을 하면서도 대대로 내려져 온 가문의 마검(魔劍)을 휘둘렀다.

10기의 용기사 골렘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박건혁이 코앞에 있다면...!

카앙!

오페론의 검격이 튕겼다.

그 순간 일전에 본 동영상이 떠올랐다.

'박건혁 VS 알렉스 브라운'이라는 타이틀로 업로드된 동영상.

해당 영상에서 개인 무력은 분명 알렉스가 앞섰다.

그 알렉스는 후작급 마족에게 패배하여 도망쳤지.

그런데, 개인 무력에서 알렉스보다도 약한 박건혁이 자신의 검격을 튕겨 내?

"골렘만 보내니까 내가 너무 만만해 보였나?"

"이익!"

오페론은 데빌 블레이드로 감싼 마검을 다시 한번 휘둘렀다.

쾌검(快劍)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속도와 묵직함이 느껴지는 일격.

상급 마족조차 일도양단시킬 공격을... 박건혁은 막아 냈다.

카앙!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쇳소리.

오페론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알렉스보다 약한 것이 아니었나?!

건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조소를 흘렸다.

그에 분노에 찬 듯 오페론이 얼굴을 붉혔다.

"크아아아아!"

채채채채채채채채채채챙!

수십... 수백... 수천의 공방이 이어졌다.

서로가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감을 극으로 끌어올렸다.

마치 세상에 두 사람만이 남은 듯한 광경.

그러나 주변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오페론은 이를 악물면서 박건혁과 거리를 두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칠흑빛의 칼날이 건혁에게 날아가려던 순간.

콰아아앙!

오페론은 머리 위에서 내리친 브레스에 삼켜지고 말았다.

"...."

용기사 골렘은 지상의 마족들을 향해 브레스를 뿜었을 뿐이다.

오페론은 얼떨결에 직격타를 맞아 버린 거고.

건혁은 오페론의 자살극에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하려고 한 거야?"

의도치 않게 죽여 버린 적장, 오페론 T 이드셀.

건혁은 얼음 기둥에 갇힌 녀석을 보고 빙마검을 한 번 휘둘렀다.

콰앙!

오페론은 산산조각이 난 채 길바닥에 흩어졌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세 단계나 올라갔다.

멍청하긴 해도 최상급 마족은 최상급 마족이라는 건가.

그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돌리자.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눈앞에 다시 한번 알림창이 떠올랐다.

프랑스로 보낸 용기사 골렘이 최상급 마족을 쓰러트린 모양이다.

그렇게 나폴리를 탈환하게 된 이탈리아는 승전 소식을 듣고 축제를 벌였다.

"박(Park)이 또 해냈어!"

"그는 이 지구의 영웅(Hero)이야! 최상급 마족은 알렉스도 막아 낼 수 없었던 괴물이라고 하잖아!"

"드... 드디어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어! 으아아아아!"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며 박건혁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K-POP 아이돌보다 더욱 유명해진 상황.

더욱이 박건혁의 팬클럽은 해외에서까지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환호성을 내지르던 시각.

건혁은 상급, 최상급 마족들을 모두 쓰러트린 후, 마력을 회복하여 2~3천의 기사, 정예 기사 골렘을 이끌고 나폴리 내의 마수들을 토벌하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기자들이 드론을 이용해 그 광경을 그대로 촬영했는데.

해당 영상은 이탈리아군 사령부조차 경악하게 만들었다.

"저것이 단 한 명의 힘이라는 게... 믿겨지지가 않는군요."

"여단급 병력을 소환해 전쟁을 치르는 헌터라니...."

"하지만, 저곳에 소환된 골렘은 기사와 정예 기사 골렘입니다. 질적으로는...."

"그 문제는 상공의 용기사 골렘들이 해결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또, 나폴리 내의 마수들은 대부분이 C랭크 이하의 마수들입니다. 생존자가 존재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기사와 정예 기사 골렘들을 투입시키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입니다. 물론, 퍼포먼스를 보여 주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이탈리아군 사령관이 슬쩍 기자들을 바라봤다.

기자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곧바로 본국에 알렸다.

동시에 박건혁 팬클럽은 해당 영상을 SNS에 올려 공유했고, 팬클럽 회원의 숫자를 빠른 속도로 늘려 나갔다.

'북한 문제로 한국과 중국이 갈등을 빚고 있다고 하던데... 고위 마수가 다수 활동하는 중국이라면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겠지.'

미국조차 박건혁을 향해 수십 번의 러브 콜을 보내는 상황이다.

중국이라고 어쩔 수 있겠는가.

미국과 중국은 영토가 넓은 만큼 주둔한 마왕군의 숫자도 어마어마했다.

추정이긴 하지만 1~2천만에 달한다는 소식까지 들려오는 상황이다.

"후우,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어찌 저런 헌터가 탄생한 건지...."

박건혁이라는 헌터는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다.

이탈리아 역시 수차례 러브 콜을 보냈지만, 건혁은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한국 남아 있겠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한국이 북한의 영토를 가져온다면... 지금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겠군."

대륙과 육로로 연결되는 것이다.

심지어 육로를 통해 유럽으로 진출할 수도 있겠지.

그뿐이랴.

북한에 매장되어 있다는 어마어마한 자원까지!

일본이라는 특수를 보며 한국의 GDP는 단숨에 2배까지 치솟았다.

이 와중에 북한의 영토까지 편입된다면....

'물론, 양국의 GDP가 7~80배나 차이 나는 만큼 통일에 투입되는 비용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과거 독일 역시 동독과 서독의 GDP 격차는 4배 정도나 되었다.

1인당 GDP는 1.7배, 무역 규모는 서독이 동독보다 13배나 높았다고 한다.

지금이야 많이 안정되었다고는 하지만, 당시 두 국가가 통일되는 데 들어간 통일 비용은 정말로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한국과 북한의 상황이라면?

남한은 현재 호황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경제와 생활을 남한과 비슷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과거의 독일보다도 더 큰 비용이 들어갈 것이다.

'뭐, 이 문제는 한국 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겠지.'

자신이 걱정한들 무엇이 변할까.

나폴리 탈환 작전의 총사령관직을 맡은 에도아르도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모니터를 응시했다.

이탈리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

퇴각하지 않고 마수들을 지휘하며 전쟁을 계속하는 마족들.

그들은 전차에 올라탄 채 화기로 무장한 오크, 고블린, 코볼트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타타타타탕! 타탕! 퍼엉!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총성과 폭음.

되찾으려 한 나폴리는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한국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군.'

에도아르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폴리의 옛 모습을 다시 되찾으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할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이 서서히 막을 내릴 무렵.

중국 상하이의 서쪽에 위치한 우시시와 쑤저우시, 항저우시에선 격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도시 전역에서 치솟는 불길.

중국은 공군과 육군을 대거 투입하여 방어전을 벌였지만, 상급 마족을 선두로 하여 중국군을 괴멸시킨 마왕군이었다.

"이대로 상하이까지 진격한다!"

"죽여라! 전부 죽여 버려!"

마족들은 전투에 흥분하며 전공을 세우고자 무기를 휘둘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국의 헌터들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민간인을 보호하고 마족들을 모조리 죽여라!"

상하이로 파견을 나온 중국의 최정예 헌터들은 길드원과 함께 몸을 내던졌다.

5만여 명의 헌터와 75만의 군인이 투입되어 마왕군을 토벌하고 상하이를 지켜 내고자 한 중국.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고위 마족들이 공군을 상대하는 동안 마수들은 육군을 철저하게 박살 냈다.

포격에도 끄떡없다는 싸이클롭스, 버팔로드, 케르베로스, 바실리스크 등 S랭크 마수 10여 마리가 일제히 도시에서 난동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후방에선 마왕군의 총격과 포격이 이어지고 있다.

"제기랄! 저런 걸 도대체 어떻게 이기라는 거야!"

"도... 도망쳐!"

군인들이 기겁하며 탈영을 시도하려던 그때.

케르베로스의 삼두(三頭)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쿵!

"우리 남궁세가의 앞에 퇴각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싸워라!"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던 오대세가와 구방일파의 각성자가 출현함과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실제로 무공이 존재한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누가 먼저 세가와 일파의 이름을 사용하느냐가 관건이었을 뿐.

"흐아아아!"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이름뿐인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을 펼치면서 마수들을 쓰러트리기 시작하자, 겁을 먹고 퇴각하려던 군인들이 몸을 돌려 총구를 다시 마왕군에게 겨누었다.

"나... 남궁세가다! 남궁세가가 왔다고!"

"이... 이길 수 있어!"

"쏴!"

타타타탕!

사기를 되찾은 군인들.

그에 남궁세가 길드의 마스터... 아니, 가주 남궁현이 화려한 제왕검형(帝王劍形)을 선보이며, 고위 랭크의 마수들을 하나씩 죽여 나갔다.

"우리 남궁세가가 함께하는 한, 패배 따위는 없다!"

난세에 등장하는 영웅.

군인과 헌터들은 남궁세가의 압도적인 무위를 보고 사기를 높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콰앙!

"가... 가주님! 제갈세가와 황보세가가 전멸하였다고...!"

"하북팽가 역시...!"

오대세가의 괴멸 소식에 이어 구방일파에서까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구방일파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던 소림과 화산이 단 한 명의 최상급 마족에 의해 박살이 났다는 것이다.

"종남과 곤륜에서는 퇴각을 하고 있다는 모양입니다!"

가주 남궁현은 장로들의 얼굴에서 두려움을 엿볼 수 있었다.

그래, 두렵겠지.

중국 헌터 서열 2위였던 하북팽가의 가주가 목숨을 잃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서열 10~100위대 헌터 2~30여 명이 전사했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게나 강하단 말인가."

차라리 범죄 길드인 스컬과 천마교를 상대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남궁현은 주먹을 쥔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젠 어쩔 수가 없다.

자신들까지 죽었다간 중국의 헌터계는 무너지고 말 테니까.

"제기랄!"

남궁현은 욕설을 터트리면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제141화

141화. 유럽으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