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115화. 박건혁 vs 알렉스 브라운 (4)
<현(現) 세계 랭킹 1위 박건혁 VS 전(前) 세계 랭킹 1위 알렉스 브라운의 결투, 결과는 박건혁의 압도적인 승리?!>
<세계 헌터 협회 및 15개국 헌터 협회 모두 박건혁의 승리에 이의가 없음을 밝혀....>
<명실상부 세계 최강의 헌터가 된 박건혁, 대한민국의 새로운 얼굴이 되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몽골, 베트남 등 수많은 국가로부터 러브 콜을 받게 된 박건혁.>
각종 기사들이 쏟아지면서 수성고등학교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알렉스의 승리를 확신하던 학생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고, 수영을 걱정하던 백월의 길드원들 역시 눈을 크게 뜨면서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설마, 정말로 알렉스 브라운을 쓰러트릴 줄이야!
"이길 걸... 알고 있었던 건가?"
건혁의 승전 소식에도 무덤덤한 얼굴로 노트를 살펴보는 수영.
마치 결과를 알고 있었다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유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유빈이 다시 스마트폰을 바라본 순간.
수영은 힐끔 주변을 살피면서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로, 아빠가 알렉스를 이겼어.'
공부를 하면서도 얼마나 걱정이 되었던가.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불안함.
부친의 승리를 믿으며 공부에 집중하려 했으나, 결과가 발표되기 직전까지 불안함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잠시 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교내는 한바탕 아수라장이 되었다.
박건혁과 알렉스 브라운의 결투 영상이 SNS와 유X브 및 방송국을 타고 퍼져 나간 것이다.
"...알렉스를 완전 가지고 노네."
"처음에 충돌했을 때는 박건혁이 순살 당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골렘이 참전하자마자 이렇게까지 상황이 뒤집어지냐."
"우와, 직접 알렉스의 공격을 막아 냈어. 이걸... 도대체 어떻게 막은 거야?"
"골렘도 골렘이지만 박건혁 개인 무력도 존X 강하네. 저번에 S랭크 마수를 골렘 없이 쓰러트리더만...."
"크흐흐흑... 이렇게 보니까 알렉스 개X밥이네. 제대로 반격도 못 하고 존X 도망치기만 하잖아."
한순간에 비웃음거리가 되어 버린 알렉스.
그만큼 박건혁이 보여 준 무력은 어마어마했다.
개인이 가지기에는 너무나도 큰 힘.
야당에선 그에게 규제를 가해야 되는 것이 옳지 않겠냐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여당과 헌터 협회는 야당의 의견에 목소리를 높이며 반대하고 나섰다.
세계 각국에서 러브 콜을 받는 박건혁에게 규제를 가한다고?
대한민국 헌터 협회 회장, 김정호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화를 냈다.
"이런, 멍청한 사람들을 봤나! 당장 미국만 해도 어마어마한 조건을 약속하며 박건혁을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이 와중에 규제를 가해야 하는 게 아니냐니! 그게 무슨 X 같은 소리야! 그랬다가 박건혁이 미국으로 떠난다면, 한국이 그걸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미국이 경제적으로 압박을 가해 온다면 한국은 미국을 넘어 수많은 국가들로부터 경제적인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 경우에 받게 될 막대한 피해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겠지.
더욱이, 갈수록 레이드의 발생 빈도가 늘어나는 추세다.
헌터 한 명, 한 명이 귀중한 시국에 세계 헌터 랭킹 1위를 타국에 유출시킨다고?
"허어...."
문제는 레이드만이 아니다.
'아르덴'이라는 곳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들의 공격에도 대비를 해 둬야 할 터.
그런 의미에서 박건혁은 대한민국의 수호신이나 다름없었다.
정호는 깊게 한숨을 내쉬면서 책상 위의 모니터를 바라봤다.
국회에서의 발언은 현재 기사로 작성되어 보도되었다.
여당이 움직인 것이겠지.
현재, 야당은 대한민국 국민들로부터 실시간으로 맹비난을 받는 중이다.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미국의 백악관조차 세계 랭킹 1위였던 알렉스 브라운에게 함부로 규제를 가하지 못했는데, 네놈들이 뭐라고 박건혁한테 규제를 가한다 만다... 어휴."
정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 시각, 미국 헌터 협회 회장, 토마스 무어 애플게이트(Thomas Moore Applegate)는 알렉스의 패배에 충격을 받은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수차례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정부와 헌터 협회를 곤란하게 만든 남자, 알렉스 브라운.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존재에 자부심을 가지는 미국인은 수두룩했다.
세계 랭킹 1위로서 미국 헌터계의 위상을 우뚝 일으켜 세운 장본인이니까.
그런 미국의 얼굴마담이 한국이란 나라의 헌터에게 깨지고 말았다.
각성 점수에서 밀려난 것에 이어 1대1 결투에서까지 완벽하게 박살 난 것이다.
"차라리 가만히라도 있었더라면 박건혁을 사기꾼으로 몰아갈 수 있었을 텐데...!"
결투 영상이 전 세계로 퍼진 현재.
박건혁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이제 없을 것이다.
결투 현장에만 15개국의 헌터 협회 간부들이 참석했으니까.
더욱이 촬영을 담당하던 직원과 경호로서 따라간 헌터들까지... 증인은 차고 넘칠 정도다.
"이렇게 된 이상, 박건혁을 미국으로 데려와야 한다."
토마스는 건혁에게 제시할 매력적인 조건을 찾는 데 급급해졌다.
이번 알렉스 브라운과의 결투는 박건혁의 이름을 다시 한번 전 세계에 알리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알리는 데 역시 큰 도움이 되었다.
K-POP과 K-드라마에 이어 헌터계로서도 이름을 알리게 된 대한민국.
박건혁의 얼굴이 언론과 SNS를 통해 퍼지던 그 시각.
당사자 본인은 자곡동에 위치한 낡은 주택 3채를 매입하여 재건축을 위한 허가를 받고 있었다.
본래라면 단칼에 거절되었을 부분들이 특례로 적용되어 허가가 떨어지고, 세금까지 감면이 되면서 건혁은 나름... 그래, 나름 적은 비용으로 대규모 부지에 거대한 저택을 짓기로 결정했다.
"450평은... 너무 과했나?"
모처럼 주택에서 사는 것이다.
이왕이면 부잣집처럼 살아 보자는 마음에 확 질렀으나, 수영에게 잔소리를 듣고 잠시 후회에 빠졌다.
건혁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설계도를 살펴봤다.
저택의 부지는 250평 정도.
정원의 부지는 150평으로 현재 시공에 들어간 상태다.
지하에는 주차장을, 건물 내부에는 다양한 시설을 만들어 누군가를 초청할 때, 외부로 나가지 않고도 즐겁게 놀 수 있는 오락 공간을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숙직이 가능한 가사 도우미도 고용하고, 근처에 경호원들 숙소를... 아니, 어차피 수서역이 5~10분 정도 거리에 있으니 경호원 숙소는 그대로 놔둬도 상관없나?"
알렉스 브라운에게 승리한 이후, 수서동의 집값은 미친 듯이 치솟았다.
세계 헌터 랭킹 1위가 거주하는 동네라는 것만으로 말이다.
그런데, 건혁이 자곡동으로 이사를 간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은 하루빨리 자곡동의 아파트와 건물들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수서동의 집값은 소폭 하락하는 것으로 그쳤다.
흑월(黑月)의 본부가 수서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하락세를 멈추게 한 모양이다.
한편, 병원에서 깨어난 알렉스는 병실을 부수면서 악을 내질렀다.
"크아아아악!"
쾅! 콰콰쾅!
"꺄아아악!"
간호사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알렉스의 병실로부터 도망쳤다.
알렉스는 씨익씨익거리면서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빙산(氷山)에 갇히기 전에 느껴진 격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느껴진 것이다.
"내가... 내가 졌다고? X발, 웃기지 마! 그 원숭이 자식을 당장이라도...!"
콰앙!
병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청룡 기사단 단장, 이은성.
그는 병실을 부순 알렉스를 노려보며 주먹을 쥐었다.
"얌전히 계십시오. 더 이상의 행패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용납? 네놈 따위가...!"
쿠웅!
갑작스러운 굉음에 알렉스는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자신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냉기가... 바로 등 뒤에서 느껴진 탓이다.
알렉스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자신을 노려보며 이빨을 보이는 빙룡(氷龍).
알렉스는 다리를 덜덜 떨면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크으...."
대한민국 헌터 협회는 알렉스를 통제하기 위해 건혁으로부터 용기사 골렘을 대여했다.
"귀국 절차는 이미 마무리되었습니다. 준비해 주십시오."
은성은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뒤, 알렉스의 침실을 찾아온 제우스의 길드원들.
그들은 분노한 알렉스를 보곤 눈치를 살피면서 귀국 준비를 시작했다.
알렉스를 따라 난동을 부릴 수도 없다.
바깥에는 3기의 용기사 골렘이 대기 중이니 말이다.
"...제기랄."
알렉스는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병원을 빠져나갔는데.
병원 앞에서 기다리던 기자들이 알렉스의 등장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내, 우르르 몰려가 질문을 던졌지만, 알렉스는 그들을 무시하면서 차량에 올라탔다.
제우스 길드원들과 함께 병원 주차장을 벗어나는 알렉스는 차창 너머로 보이는 용기사 골렘들을 보면서 까득 이를 악물었다.
결투의 마지막.
전력을 다한 자신의 공격을 저 빙룡(氷龍)이 브레스로 짓눌러 버렸다.
'놈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았어. 나를 가지고 논 거라고!'
공포와 분노에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X발!"
쾅!
알렉스를 태운 차량은 차 문이 찌그러진 채 공항까지 이동했다.
뒤를 따라가던 기자들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알렉스에게 달려갔다.
한마디라도 건지기 위해.
그러나 알렉스는 그들의 눈을 제대로 마주칠 수 없었다.
건혁을 원숭이라 비하하며 자신만만하게 승리를 장담했다.
그런데, 제대로 된 공격 한번 못 해 보고 패배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창피하고 쪽팔린 일이란 말인가.
결국, 알렉스는 기자들의 물음에 단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인천 공항에서 제우스 길드의 전용기를 타고 미국으로 귀국했다.
* * *
수성고등학교에서 '박수영'과 '백월(白月)'의 이름은 갈수록 유명해져 갔다.
알렉스를 이기고 명실상부 세계 랭킹 1위로 자리매김한 박건혁.
백월은 그가 뒤를 봐주고 있는 길드다.
학생들은 백월에 들어가기 위해 수영에게 질척하게 달라붙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자승최강의 마스터, 김종현은 주먹을 세게 쥐면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자승최강은 현재 헌터 협회로부터 제재를 받아 게이트 공략이 중단된 상태다.
그런 와중에 박수영은 기말고사에서 전교 1등을 차지하고, 길드원들과 함께 C등급 게이트를 공략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퍼억!
"끄으...."
종현은 새로이 받아들인 E~F반 학생들을 수시로 불러내 학교 뒤뜰에서 주먹을 휘둘렀다.
과거 짐꾼을 담당하던 F반 학생들이 죽은 탓일까?
종현은 새로운 짐꾼을 받아들이기 위해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해 E~F반 학생들을 끌어들였다.
"하아... 하아... X발!"
퍼억!
F반 남학생의 복부를 걷어찬 종현.
자승최강의 부마스터였던 곽도현은 길드를 떠났다.
그 외의 길드원들은 종현으로부터 콩고물이라도 건지기 위해 남아 있을 뿐.
자승최강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박수영... 그 X발 X을 한번 족쳐 봐?"
종현의 중얼거림에 길드원들이 흠칫 놀랐다.
"그... 그럴 바에는 차라리 백월에 소속된 놈들을 족치는 게 낫지 않을까?"
"마... 맞아! 박수영을 건드리는 건 위험 부담이 너무 크잖아."
다급히 종현을 말리는 길드원들.
종현 역시 수영을 직접 공격하는 것은 부담이 되었다.
과거 수성중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을 떠올려 보아라.
박건혁은 박수영을 끔찍이 아낀다.
박수영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100% 수성고등학교에 들이닥치겠지.
최악의 경우, 단군을 박살 내려 들지도 모른다.
제116화
116화. 김종현 (1)
"오늘부터 백월에 소속된 새X들, 한 놈씩 불러내."
"저... 정말로?"
"장난 같아?"
종현이 눈을 부라렸다.
길드원들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눈치를 살폈다.
확실히 박수영을 건들 바에는 백월에 소속된 학생들을 건드는 것이 낫다.
하지만, 박수영이 그것을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을까?
"한 놈씩 족치면서 백월에서 빼내면 되지."
"그래도...."
"그래도 뭐?"
"박수영이 알면...."
"입막음을 하면 되잖아! X발, 그냥 평소대로만 하면 된다고!"
종현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내, 명품 브랜드의 지갑을 꺼냈다.
"그 새끼들 족친 다음에 즐거운 마음으로 놀러 가자. 저번에 내가 데려다준 룸살롱 기억하지?"
종현이 미소를 짓자, 길드원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새X들만 족치면 매주 데려가 줄게. 어때?"
미성년자임에도 단군의 이름을 빌려 들어가는 초호화 룸살롱.
비용은 용돈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길드원들의 눈동자가 욕망으로 가득 찬 순간.
종현이 싸늘히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학교 끝나고 한 놈만 불러 봐."
길드원들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 * *
방과 후 동료들과 함께 훈련장을 빠져나오는 1학년 남학생.
백월의 길드원이다.
그가 동료들과 헤어진 순간.
종현의 일행은 납치하듯 그를 상가 건물의 골목길로 데려갔다.
거친 훈련을 한 탓일까?
그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덕분에 무난하게 두들겨 팰 수 있었던 종현의 일행.
"왜? 박수영, 그 XX한테 말해 보려고? 어디 말해 봐! 이 X발 X끼야!"
퍼억!
복부를 걷어찬 종현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박수영이든 경찰이든... 입만 뻥끗하면 너희 집에 범죄자 X끼들이 줄지어 들이닥칠 거다."
바닥을 뒹굴던 남학생은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X발, 얌전히 포션이나 마시고, 아직 정신을 덜 차린 거 같으니... 계속 맞아 보자."
파각!
"끄악...!"
손가락을 부러트리면서 폭행을 계속하는 종현.
결국, 남학생은 백기를 들고 종현의 지시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고문과도 같은 폭행을 17세의 청소년이 어찌 계속 버텨 낼 수 있겠는가.
눈물과 콧물을 쏟아 내며 살려 달라고 비는 남학생의 모습에 종현과 자승최강의 길드원들은 웃음을 터트리면서 그의 입에 4~5급 포션들을 탈탈 털어 넣었다.
폭행 사실을 없애기 위함이다.
"백월을 나온 이후로도 박수영한테 다가갈 생각하지 마라. 한 번이라도 눈에 띄면... 이 자리에서 구르는 건 너희 부모님이 될 수도 있어."
남학생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자아, 우리는 슬슬 가 보자고!"
길드원들과 함께 골목길을 빠져나간 종현은 곧바로 초호화 룸살롱을 찾아갔다.
다음 날, 종현의 협박대로 백월에서 탈퇴한 1학년 B반의 남학생.
종현은 그의 이름조차 몰랐다.
단지, 백월 소속이라는 사실만 기억할 뿐.
수영의 일행은 그의 탈퇴에 의문을 보였지만, 해당 남학생은 개인적인 이유라며, A반 교실을 빠져나갔다.
씨익.
종현은 어리둥절해하는 수영을 보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특별한 갈등은 없었다.
복지에도 문제가 없고.
그런데 어째서지?
백월을 탈퇴하는 학생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났다.
그들에게 공통되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같이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눈빛이랄까?
수영은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 직전 동아리실로 길드원들을 호출했다.
"찬열이까지 모두 8명이야. 게이트를 공략하는 게 많이 힘들었나?"
수영의 의문에 유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1주일에 한 번씩 공략하는 게 힘들다면, 헌터라는 직업은 꿈도 꾸지 말아야지."
부마스터인 시현 역시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빈이 말대로야.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포기하려는 것도 좀 이상하긴 이상해. 게다가...."
시현은 탈퇴를 신청한 여덟 학생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공포에 질린 듯한 눈빛.
길드 내의 문제가 아니다.
아마 바깥에서 모종의 영향이 있었던 거겠지.
유빈은 시현의 생각을 읽은 듯 눈을 한 번 마주치며 수영을 바라봤다.
"누군가가 길드원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게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을 거 같아."
유빈의 발언에 동아리실 내 전원이 미간을 찡그렸다.
길드원들에게 탈퇴를 강요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의미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잠시 적막해진 가운데, 민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탈퇴 신청한 길드원들의 얼굴을 보면... 아마 폭행에 휘말렸을지도 몰라."
"특별히 아파 보이거나 하지는...."
"웬만한 상처는 4~5급 포션으로 치료할 수 있잖아. 하지만 정신적인 충격은...."
민아의 발언에 길드원들은 멈칫하며 표정을 굳혔다.
수영 역시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8명이나 탈퇴한 것은 전력 면에서도 문제가 있다.
특히,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탈퇴를 강요한 것이라면 더욱 큰 문제겠지.
"일단, 탈퇴한 애들한테 따로 문자를 보내 볼게. 혹시 모르니까 다들 정문 앞에서 택시를 타고 귀가하도록 해. 교통비는 추후 영수증을 가져오면 길드 자금에서 지급해 줄 테니까.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가급적이면 2~3명씩 붙어서 이동하고."
수영의 당부에 길드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체 행동을 시작했다.
하교하기 시작한 백월의 길드원들.
수성고등학교 정문을 바라보던 종현은 피식 웃으면서 자리를 벗어났다.
룸살롱에 들어간 그는 곧바로 SNS에 익명 게시 글을 올렸다.
백월을 탈퇴한 여덟 명의 학생들.
종현은 탈퇴 이유가 정산금 갈등 및 길드 내 왕따 문제라며, 악성 루머를 퍼트려 백월과 박수영에 대한 비난 여론을 만들기 시작했다.
'댓글 알바를 구하는 것도 나름 나쁘진 않은데?'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깨지기는 했지만, 이걸로 백월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더욱이 수영에 대한 악담이 교내에 퍼지게 되겠지.
경쟁 상대의 몰락은 나름대로 즐거움이 가득했다.
씨익.
"그 건방진 X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도... 나름 기대된단 말이야?"
입학식 당일 자신을 무시한 것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일그러진 수영의 얼굴을 보면 쾌감이라도 느낄 것 같은 기분이다.
종현은 수시로 SNS를 살펴보면서 비릿한 미소로 술잔을 들어 올렸다.
* * *
"...이건 뭐야?"
SNS를 살펴보던 수영은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백월의 SNS 계정을 찾아와 욕설을 쏟아붓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정산금에 대한 갈등과 왕따 문제를 거론하더니, 백월을 탈퇴한 8인을 안타까워하는 듯한 댓글을 남겼다.
탈퇴한 8인을 대상으로 문자를 보낸 것이 불과 1~2시간 전의 일이다.
탈퇴를 결심하는 데 외부적인 요소가 개입했는지를 물어본 수영.
답장은 전부 'NO'였다.
"설마, 내가 모르는 곳에서 왕따를 당했었다는 말이야?"
수영은 곧바로 시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SNS를 보고 당황한 걸까?
시현의 목소리는 크게 떨리고 있었다.
정산 문제는 넘어가더라도 왕따와 학교 폭력 등의 사건들은 간과하기 어렵다.
최악의 경우 백월에 소속된 학생들이 교내에서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
―어... 어떻게 해야....
시현이 울먹이기 시작하자, 수영은 그녀를 다독여 주었다.
"일단, 길드 내에서 왕따 문제는 없었다는 말이지?"
―응, 내가 알기로는 특별한 갈등도 없었던 걸로 기억해.
시현의 대답에 수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탈퇴한 애들한테 제대로 확인하고, 해명해 줄 수 있냐고 한번 물어볼게. 너는 길드원들한테 단체 메일을 보내서 해당 사건과 관련해 아는 것이 있는지 물어봐 줘."
―응, 알겠어.
수영은 시현과 연락을 마친 다음 탈퇴한 학생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X발."
8명 모두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치 담합이라도 한 듯이.
그동안 SNS를 보고 정신에 큰 타격을 받아야 한 백월의 길드원들.
SNS에 올라온 수많은 비난 댓글들은 일개 고등학생이 버텨 내기에 어려웠다.
특히 수위가 높은 비난이라면 더더욱.
―하아, 내 전화도 안 받아.
유빈의 목소리에 수영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왼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내일 공략은 취소하도록 할게. 시현이 대신 네가 단체 문자 좀 보내 줘."
―그래, 알겠어.
"또, 수성고등학교의 이름이 인터넷 기사로 작성됐어. 다음 주 월요일에... 아마 부모님들한테 전화가 갈지도 몰라."
―....
"왕따나 폭행이 없었다는 건 확실하지?"
―응, 선배들이랑 다른 애들도 모두 없었다고 대답했어. 모집할 때 인성 시험까지 치르면서 선별한 사람들이니... 그럴 리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수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작게 혀를 찼다.
"그럼, 너희 말대로 누군가가 우리 길드를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겠네."
―...김종현, 그 녀석 아닐까?
"응?"
―아니, 널 계속 적대시했었잖아. 저번에 C등급 게이트 공략도 우리 길드를 경계하면서 무리하게 결정한 게 아닌지....
유빈의 의심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누군가를 위협하고 협박하기 위해선 그만한 능력이 필요하다.
심지어 박수영을 공격하려면 무력이든 재력이든 모종의 힘을 보유하고 있어야겠지.
세계 랭킹 1위의 딸을 누가 함부로 건들려 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너랑 갈등을 빚고 있는 사람은 김종현뿐이잖아. 더욱이 그 녀석 성격이면... 막 가족들까지 거론하면서 협박을 했을지도....
수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빈의 말에 동의했다.
'이런 일을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저질렀다고 한다면....'
확실히 김종현뿐이다.
또, 익명 계정으로 올라온 게시 글이 빠르게 확산되고, 1시간 만에 수백여 개의 댓글이 달릴 정도라면, 댓글 알바를 고용한 것이라 추측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후우, 일단 한번 조사해 볼게."
―그래.
"아 참, 내일 시현이네 집에 찾아가 볼 생각인데...."
―당연히 같이 가야지. 시현이가 차갑고 침착해 보여도 마음은 여리잖아.
"오전 10시쯤에 갈 생각인데...."
―나도 그쯤에 찾아갈게.
"알겠어. 너도 괜히 SNS 찾아볼 생각하지 말고, 오늘은 단체 메일 보낸 다음 편히 쉬도록 해."
―그래야지.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수영은 전화를 끊은 뒤, 모니터를 지그시 바라봤다.
김종현은 강력한 용의자다.
하지만 심증 외에 물증이 없으니, 추궁을 해 봐야 발뺌을 하겠지.
탈퇴한 8인이 협박을 받은 상태라면 직접 찾아가더라도 해명은 해 주지 않으리라.
"증거부터 먼저 확보해야 돼."
수영은 마스터로서 길드 게시판에 해명하는 글을 작성했다.
또, 그동안 촬영한 전투 영상과 정산 비율을 투명하게 공개하며 루머에 대한 반박 글을 올렸다.
하지만 SNS의 반응은 여전히 차가웠다.
<청소년법을 개정하여 백월에 소속된 학생들을 처벌해야 된다.>
<헌터증을 반납하게 하고 수성고등학교에서 퇴학시키자!>
이어, 가정 교육에 대한 비난과 욕설까지 난무하면서 댓글 창은 한바탕 난장판이 되었다.
수영이 머리를 붙잡으며 한숨을 토해 내던 그때.
비난을 자제해 달라는 댓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명확한 증거도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이다.
해당 댓글은 수영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이 아닌 세계 헌터 랭킹 1위, 박건혁이 대한민국을 떠날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위이잉.
진동을 울리는 스마트폰.
수영은 살짝 놀라면서 스마트폰을 집었다.
발신자는 흑월의 총무팀이다.
제117화
117화. 김종현 (2)
―...그러하니 당분간 SNS를 살펴보지 않으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언론은 정부와 헌터 협회에서 차단하고 있습니다만, SNS 확산세가 만만치 않아....
"그런가요."
―또, 수성고등학교에는 따로 전화를 해 두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영은 한숨을 흘리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전화를 마친 그녀는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수영은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툭툭 치더니,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갔다.
벽과 바닥, 천장 모두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복도.
수영은 슬리퍼를 신은 채 천천히 중앙 계단으로 걸어갔다.
"...너무 넓어."
중앙 계단을 내려가던 그녀는 스마트폰을 살펴보는 부친, 건혁을 발견했다.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노려보고 있었다.
서서히 일그러져 가는 얼굴.
마치 무언가에 분노한 듯하다.
"아빠."
수영의 부름에 건혁은 눈을 감고 스마트폰을 소파 위에 내려 두었다.
"그래, 네가 다른 애들을 괴롭혔을 리는 없겠지.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래서 말인데... 드론이랑 카메라 같은 장비들을 좀 빌릴 수 있을까?"
"...왜?"
"물증이 없으면 사람들은 믿어 주질 않잖아. 그러니까 직접 증거를 모으고 싶어."
건혁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물증이 없다면 사람들은 믿어 주지 않는다.
오히려 보다 거세게 물어뜯으려 하겠지.
수영이 가해자라는 증거가 없음에도 말이다.
스마트폰을 다시 손에 쥔 건혁.
"...아빠가 가끔 이용하는 흥신소가 있어. 의뢰 내용만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 주면 그쪽에서 처리할 수 있게끔 해 볼게."
"흥신소...?"
"그래."
부친이 흥신소를 이용한다고?
아니, 크게 이상해할 건 없으리라.
그는 세계 헌터 랭킹 1위임과 동시에 한 길드의 마스터니까.
"지금 바로 정리하고 올게!"
수영은 방으로 달려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김종현의 미행, 학교 주변 사각지대에 카메라 설치, 탈퇴한 학생들의 행적 등.
수많은 의뢰 내용을 하나의 파일로 정리하여 건혁의 이메일로 보냈다.
의뢰 비용은 꽤 비싸겠지만, 건혁은 상관없다며 의뢰를 맡겼다.
"김종현이면... 김수호 헌터의 막내아들이 아닌가? 저번에 자승최강인가 뭔가...."
건혁의 중얼거림에 수영이 거실 바닥에 앉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김수호 헌터의 막내아들."
"그 애하고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
"...딱히? 특별히 충돌한 적은 없는데, 우리 길드만 보면 맨날 씩씩거리더라고. 열등감이라 해야 되나? 아무튼, 혼자서 막 X발 발광을 떨어. 또, 다른 학생들을 괴롭히기도 하고... 그냥 학교마다 있는 양아치야, 양아치."
"김수호 막내아들이 양아치...."
대한민국의 방패라 불리는 단군의 마스터, 강철(鋼鐵) 김수호.
그의 막내아들이 양아치라고?
건혁은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어, 다시 한번 수영이 보낸 파일을 확인하곤 국내에서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PA흥신소'에 전화를 걸어 의뢰 내용과 비용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조금 전 SNS에 대해 조사를 해 달라는 말씀이시군요.
역시 정보 하나는 빠르네.
건혁은 작게 웃으면서 긍정했다.
―그럼, 계약서는 따로 메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최첨단 장비를 동원한 감시와 수성고등학교 인근 지역 CCTV의 확인.
그 외 은신에 능숙한 헌터들이 움직여 김종현 일행의 미행까지.
의뢰 비용은 눈동자가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하지만 건혁의 재산에 비하면 손톱만 할 뿐.
아니, 수성전자의 주가를 떠올려 보면....
손톱보다 더욱 작을지도 모른다.
현재 수성전자의 주식, 500만 주를 보유한 건혁.
2024년 7월이 끝나 가는 현재, 수성전자의 주가는 113,200원대를 기록하는 중이다.
몇 년간 꾸준히 주식을 매수해 온 탓일까?
순수익은 167%, 대략 3,500억 원에 달했는데.
그 밖에 현금과 부동산 등의 재산 역시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세계 랭킹 1위가 괜히 세계 랭킹 1위가 아님을 국내외에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
잠시 뒤, 계약서가 암호화 메일로 도착했다.
또, 계약서 파일은 2중으로 암호화가 되어 있었는데.
건혁은 태블릿을 가져와 계약서에 서명을 한 다음, 메일을 회신하며 선수금을 곧바로 입금해 주었다.
"방학까지 얼마나 남았더라?"
"다음 주 금요일부터...."
다행이라면 다행인 건가?
닷새만 버티면 학교에는 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 닷새간 수영과 백월의 길드원들은 교내에서 좋지 못한 시선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질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등교를 거부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터.
그런 건혁의 의견에 수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나까지 빠져 버리면 이 헛소리를 모두 긍정하고 회피하는 꼴이 되어 버릴 거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당당하게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교내에서 어떤 말을 듣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수영이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건혁은 쉬이 표정을 풀지 못했는데.
그런 부친의 모습에도 수영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교사와 학생들의 수군거림?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전생의 자신은 그보다 더한 상황을 겪었었다.
죽고 싶어질 만큼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들을 말이다.
'시현이처럼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아이들은 학교를 빠지라고 말해 둬야겠어. 또, 길드 활동도 1~2주 정도 쉬는 게....'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소파로 다가가 건혁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드러누웠다.
'...그냥 아빠 길드에나 들어갈 걸 그랬나?'
수영이 후회에 빠져 끙끙 시름을 앓자, 건혁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특별히 약을 먹은 것도 아닌데, 머리가 조금이나마 편해지는 기분이다.
누군가는 엄마 손이 약손이라던데....
'아빠 손도 약손이네.'
수영은 피식 웃으면서 잠시 눈을 감았다.
한편, PA흥신소는 계약서를 회신받고, 선수금이 입금되자마자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수성고등학교 인근의 CCTV 기록 확인과 사각지대에 초소형 카메라를 설치하는 것까지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김종현이다.
그가 김수호의 막내아들인 만큼 행적을 조사하는 데에 신중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파밧!
김종현을 미행하는 PA흥신소의 직원들.
과거 뛰어난 은신술로 이름을 날렸던 헌터들이다.
의뢰 하나에 10여 명의 인원이 움직인 상황.
PA흥신소는 박건혁의 의뢰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렇게 작업이 시작되고 하룻밤이 지나갔다.
수영이 시현의 자택에 찾아갔을 무렵.
PA흥신소는 김종현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을 확보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꽤 잘나가는 일진이었네? 수성고등학교에 들어와서도 E~F반 학생들을 괴롭히는 모습을 자주 보이고 있고, 자승최강 길드의 정산 내역도 약간 구린 냄새가 나는 데다가...."
PA흥신소의 제1팀장, 오송진은 모니터에서 재생되는 영상을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백월에 소속된 학생들을... 사각지대로 데려가?"
잠시 뒤, 김종현과 그 일행이 골목길에서 빠져나왔다.
그렇게 15분 정도가 지났을까?
백월을 탈퇴했다던 학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당 학생이 귀가하기까지의 모든 영상을 살펴본 결과.
특별한 부상은 확인되지 않았다.
어딘가 아파 보이지도 않고.
하지만, 바닥을 뒹군 듯 더러워진 교복은 모종의 사건이 있었음을 의미했다.
"설마, 폭행에 대한 증거를 없애기 위해 포션을 사용한 거야?"
그 비싼 포션을 고작 그딴 곳에 사용한다고?!
"아니, 그것보다 포션으로 폭행 증거를 없앤다는 게...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생각인가?"
송진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영상을 멈췄다.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구린내가 나는 행적들이다.
특히, 룸살롱을 수차례 드나들었다는 내용은 고개를 가로젓게 만들었다.
행적을 확인한 PA흥신소는 해당 룸살롱 직원에게 뇌물을 먹여 김종현이 방문했었다는 기록과 결제 내역을 사진으로 확보했다.
이어, 흥신소 직원을 손님으로 위장 투입시켜 룸살롱을 찾은 종현의 일행을 초소형 카메라에 담아 각종 영상 파일로 만들어 냈다.
"이거, 기사로라도 터지면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겠어."
송진이 사진과 영상을 정리하던 그 시각.
고등학교에 등교한 수영은 주변의 수군거림을 일체 무시했다.
가끔씩 욕설이 들리곤 했지만, 그래 봐야 멀리서 뒷담을 할 뿐.
그녀에게 직접 욕을 내뱉을 수 있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한 명... 그래, 한 명이 있다.
"길드원들을 그렇게 괴롭혀 놓고 당당하게 학교를 등교하다니... 배짱 한번 대단한데? 그냥 이시현처럼 아프다면서 빠지는 게 더 좋지 않았냐?"
키득키득 웃으면서 비아냥을 보내는 김종현의 모습에 수영이 피식 조소를 날렸다.
"그런 헛소문을 믿는 바보도 있었구나?"
"헛소문은 무슨... 탈퇴한 길드원만 여덟 명이라면서."
종현이 입꼬리를 올리자,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우리 길드보다는 너희 길드를 먼저 걱정해야 되지 않겠니? 길드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수준이던데. 저번에 받아들인 F반 학생들... 매일 때리고 다닌다면서?"
종현은 얼굴을 붉히면서 발끈했다.
"증거도 없으면서 X소리 지껄이지 마!"
"그럼, 너도 X소리 지껄이면 안 되지. 증거도 없으면서...."
"증거...? 그래, 증거가 없으니까 그렇게 당당한 거였구나?"
종현이 눈을 치켜뜨자, 수영은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무언가를 저지르려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행적은 현재 PA흥신소에서 주시하고 있을 터.
"그래, 언제까지 그리 당당한지... 한번 지켜보자고."
종현은 그 말을 끝으로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는 수업이 시작되었음에도 교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 전 반응... 역시 수상하다.
수영은 몰래 부친에게 문자를 보냈다.
김종현이 무언가를 꾸밀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위이잉.
컴퓨터 앞에 앉아 유X브를 보던 건혁은 문자를 받자마자 PA흥신소에 전화를 걸었다.
―당장 전화로 말씀드리기는 조금 곤란하니, 한 번 찾아와 주신다면 자세한 내용을 말씀드리고, 자료들을 넘겨드리겠습니다.
건혁은 알겠다고 대답하며 PA흥신소 본사를 찾아갔다.
제1팀장, 오송진과 직접 얼굴을 마주한 건혁은 PA흥신소에서 확보한 자료들을 확인했다.
불과 2~3일 만에 이토록 많은 자료들을 확보하다니.
역시라고 해야 하나?
송진은 건혁의 반응에 쓴웃음을 지었다.
"자료는 정말로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또, 워낙 저지른 일들이 많다 보니... 자료도 그만큼 늘어나게 되더군요. 그리고 조금 전 김종현 학생의 스마트폰에서 백월을 탈퇴한 학생들에게 문자를 보낸 내역들이 확보되었습니다."
"...스마트폰을 해킹한 겁니까?"
"예."
당연히 위법이다.
걸리면 100% 처벌을 받겠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흔적을 남길 정도로 허술하진 않으니까요."
종현이 룸살롱을 방문했을 때.
그의 스마트폰을 해킹한 PA흥신소.
어떻게 해킹했냐고?
간단하다.
룸살롱에 비치된 충전기에 칩을 설치하고, 스마트폰을 충전하도록 유도하면 될 뿐.
덕분에 종현의 스마트폰에서 수많은 범죄의 행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종현은 피해 학생들에게 '박수영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했었다'라는 발언을 녹음하여 SNS에 올리라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쪽이 그 문자 내역입니다."
건혁은 작게 헛웃음을 흘리면서 출력된 문자 내역을 살펴봤다.
이렇게 분노한 게 얼마 만일까?
세계 헌터 랭킹 1위가 되면서 그 누구도 수영을 건들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감히 내 딸한테 수작을 부려?'
가해자가 김수호의 막내아들이라는 것이 기분을 살짝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공격을 해 온다면 마땅히 응수해 주는 것이 도리라는 것이겠지.
송진은 건혁의 험악한 얼굴을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알렉스 브라운을 쓰러트리고 명실상부 세계 최강의 헌터가 된 박건혁.
그가 자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수성중학교 사건으로 이미 명명백백해졌을 터.
아무리 고등학생이라지만 이 정도까지 주제를 모른다면... 그건 죄다.
제118화
118화. 김종현 (3)
송진은 두 손을 마주 잡으면서 건혁과 눈을 마주쳤다.
"말씀만 해 주신다면 해외 IP를 통해 외국인 계정으로 SNS에 해당 자료들을 업로드한 다음 대량으로 확산시킬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국내에서는... 스트리머들에게 일정 비용을 건네주고 해당 자료를 퍼트리면 될 겁니다. 또, 고객님께서 SNS로 말씀 한마디만 하신다면...."
정부는 언론을 함부로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김수호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해 온 정부와 헌터 협회.
하지만, 박건혁을 막기 위해 김수호에게 붙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후우, 일단 이것을 어떻게 공개할지는... 딸과 한번 대화를 나눠 봐야겠군요."
"예, 알겠습니다. 추가적으로 확인되는 정보가 있다면 다시 연락을 드리도록 하죠."
건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료가 담긴 USB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계약서에 명시된 잔금을 입금시켰는데.
송진은 입금 내역을 확인하곤 화들짝 놀랐다.
"백월에 대한 루머를 잠재우기에는 충분한 정보들이었습니다. 일단, 계약대로 2~3주 동안은 계속해서 김종현의 행적을 조사해 주십시오."
"무...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팀장급이 담당하는 VIP 고객.
건혁은 예정된 잔금의 2배를 입금시켰다.
VIP로서의 재력을 보여 준 것이다.
이걸로 오송진 팀장은 어마어마한 특별 수당을 받게 되겠지.
건혁은 흥신소 지하에 주차된 검은색 세단에 올라탔다.
"집으로 출발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운전기사는 차량을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멍하니 차창 너머를 바라보던 건혁은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 PA흥신소에서 조사한 정보만으로도 백월에 대한 루머는 곧바로 풀릴 것이다.
룸살롱에 드나들었다는 각종 증거 자료와 김종현의 스마트폰에 저장된 수많은 사진 파일.
그를 악역으로 몰아가기에는 충분한 증거물들이다.
거기에 문자 내역까지 공개하면 백월에 대한 비난과 루머는 금세 수그러들겠지.
"하아...."
건혁은 목을 젖히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수성고등학교 학생들은 아니꼬운 시선으로 수영과 백월의 길드원들을 노려봤다.
어찌 저리 당당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고개를 숙이고 다녀도 모자랄 판국에!
"X발, 저런 새X들은 그냥 소년원에 보내 버려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냐? 박수영이 소년원에 들어갔다가는...."
"나도 알아! 그래도 백월에 소속된 녀석들은 학교 차원에서라도 처벌을 내려야 하는 거 아니냐? 아니면 헌터 협회에서 헌터증을 반납하게 하든가. 저런 것들이 나중에 헌터가 된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끔찍하다, 끔찍해!"
남학생들은 백월에 소속된 2~3학년생들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이어, 수영과 유빈의 일행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치는 여학생들.
그녀들은 슬쩍 수영의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
'구내식당에서 범죄자들이 당당히 식사를 하는 모습'이라는 게시 글과 함께 말이다.
수많은 댓글이 달리기 시작하자, 여학생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저런 X들은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켜 버려야 돼. 저런 게 사회로 나온다고 생각해 봐."
"어차피 나중에는 저런 미친X들 아래에서 활동해야 될걸?"
"X발, 갑자기 기분 확 더러워지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던데... 박건혁도 뭔가 있는 거 아니야?"
"그럴지도? 세계 랭킹 1위라면서 정부가 언론을 차단하고 있을지 누가 알아? 요즘 같은 세상엔 서열이 깡패잖아. 세계 랭킹 100위 안에만 들어도 웬만한 범죄들은 전부 덮어 줄걸?"
"하긴...."
여학생들은 투덜거리면서 다시 한번 SNS를 살펴봤다.
댓글의 숫자가 더욱 늘어났다.
어째서일까?
관심이 많아질수록 풍족해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그녀를 비롯한 몇몇 학생들은 수영과 백월에 소속된 학생들을 몰래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리곤 수많은 욕설과 비난을 쏟아부었다.
<대한민국 수준 봐라. 범죄자들이 당당하게 학교에 등교하고 다니네.>
⤷학교 폭력은 근절해야 되는 사항이다. 당장 미래의 범죄자들을 감옥으로 보내자!
⤷네가 보내 봐.
⤷아빠가 세계 랭킹 1위라서 정부도 함부로 못 건듦.
⤷X발, 박건혁은 나름 좋은 이미지였는데... 딸내미가 다 말아먹었네.
<박건혁 자식만 소중한 자식이냐? 피해 학생들 역시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이다.>
⤷아무리 욕해도 박건혁 딸내미는 멀쩡하게 학교를 다닐 거다.
⤷위 댓글에 인정할 수밖에 없음.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갈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당장 미국만 하더라도 박건혁을 못 데려가서 안달인데....
⤷법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감옥에 들어간 재벌들부터 한번 봐 봐라. 그게 평등해 보이냐? X발, 마약에다가 폭행을 하고도 그냥 집행 유예를 받아 버리네.
⤷돈 없는 서민들 앞에서만 존X게 평등해지는 법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게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런 악마들이 나중에 크면 OOO와 같은 범죄자가 되어 버릴 겁니다.>
⤷이놈의 대한민국은 누군가가 죽어야 뒤늦게 움직이는 척이라도 하는 건가?
⤷누가 죽는다고 해서 박건혁 딸을... 건들 수 있을까?
⤷레이드는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박건혁이라는 전력을 빼면 대한민국은 개X밥이 되어 버릴지도....
⤷X소리하지 마라. 정윤호만으로도 레이드는 충분히 막을 수 있음. 방승재랑 김수호까지 더해지면 S등급 게이트도 공략할 수 있다.
⤷그래, 정윤호에 방승재랑 김수호까지 더해지면 S랭크 게이트 정도는 공략할 수 있겠지. 근데, 박건혁은 혼자서 S등급 게이트를 공략한다. 정윤호가 며칠을 걸려 공략할 때, 박건혁은 하루도 안 돼서 S등급 게이트 공략함.
⤷알렉스 브라운도 처바른 박건혁이다. 정윤호랑 비교하기에는 격이 안 맞지.
댓글의 대부분은 박수영이 아닌 박건혁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찼다.
이에 대해 헌터 협회와 정부는 특별한 발언을 하지 않았다.
수성고등학교 역시 마찬가지.
물론, 증거물이 제출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명확한 증거물 앞에서도 침묵을 유지한다면....
그때는 모든 국민들이 분노하고 일어나겠지.
수영이 하교하던 그 시각.
SNS에선 피해 학생의 호소문이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게시 글이 올라왔다.
"하!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수영은 해당 게시 글을 읽으면서 기가 막힌 듯 코웃음을 쳤다.
왕따를 당했었다는 내용은 넘어가더라도 정산 문제를 가지고 논란을 일으켜?
그동안 정산금을 입금시켜 준 것은 다름 아닌 흑월이다.
입금 내역은 고스란히 남아 있을 터.
그걸 알고도 이런 게시 글을 올린 걸까?
그렇다면 멍청하다며 한마디 욕설을 내뱉고 싶어지네.
수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도착했습니다."
차량이 집 앞에 멈춰 섰다.
"고생하셨어요."
"아가씨, 무슨 일 생기시면... 곧바로 전화 주십시오."
SNS를 본 건가?
여성 경호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수영을 바라봤다.
그에 작게 미소를 지어 보인 수영.
"알겠어요. 조심히 돌아가세요."
경호원은 씁쓸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색 세단 3대가 줄줄이 골목길을 빠져나가자, 수영은 대문에 카드 키를 찍은 뒤, 자동으로 개방되는 대문 너머, 정원에 들어섰다.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저택.
그녀는 분수대를 지나치며 저택으로 들어갔다.
"지금 돌아왔구나. 학교에선...."
수영은 아무 말 없이 달려가 건혁의 품에 안겼다.
"...별일 있었나 보네."
쓴웃음과 함께 수영의 머리를 쓰다듬는 건혁.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수영에게 보여 주었다.
"이건...."
"흥신소에서 받은 증거 자료들이야. 이게 공개되면... 아마 백월에 대한 루머와 비난은 잠재워지겠지. 더욱이 김종현이라는 아이는 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힐 테고."
수영은 화들짝 놀랐다.
불과 2~3일 만에 그 정도의 정보를 확보했다고?
건혁은 수영을 번쩍 안아 들고, 거실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혀 주었다.
이어, 거실에 설치해 둔 노트북에 USB를 연결한 다음 사진과 영상 파일을 보여 주며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까지 확보된 증거는 여기까지. 추가적인 정보는 들어오는 대로 연락을 주겠다고 하는데...."
"이거, 지금 당장 공개해 줄 수 있어?"
"물론이지. 해외 IP를 사용해서 외국인 계정으로 국내에 뿌린다는 모양이야. 스트리머들에게도 정보를 넘겨서 사람들한테 공유되게 해 보겠대. 그리고...."
"응?"
"아빠도 SNS에 게시 글 한번 올려 보려고. 우리 공주님을 건들려고 했으니, 어떻게든 처벌을 받게 만들 거라고 말이야."
"그... 공주님이라는 건 이제 그만하면 안 돼? 나도 이제 고등학생인데...."
"아빠한테 수영이는 할머니가 되어도 공주님이야."
수영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살짝 붉혔다.
고개를 돌리면서 시선을 회피하기까지.
민망한 걸까?
건혁은 흐뭇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일단, 이건 지금 당장 공개하도록 할게. 괜찮지?"
"응."
수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내, PA흥신소에서 사용하는 이메일로 '기러기'라는 단어를 보낸 건혁.
오송진은 해당 메일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SNS에 올라온 피해 학생들의 호소문은 지금까지 조사해 온 자료들과 극명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었다.
씨익.
이런 맛있는 먹잇감을... 아니, 모순덩어리의 게시 글을 올려 줄 줄이야!
송진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대여섯 개의 SNS 계정으로 수많은 사진과 영상을 업로드함과 동시에 세계 각지의 언론사에 로비를 시작했다.
기사 제목마다 붙어 있는 '박건혁'이라는 이름.
한국 정부는 해당 기사 내용을 확인하곤 화들짝 놀라야 했다.
"이걸로... 정부도 언론 통제에 잠시 주춤하겠지."
송진은 작게 웃으면서 영상과 사진을 순식간에 확산시켰다.
거기에 몇몇 유명 스트리머들에게는 익명으로 해당 정보를 넘기고, 화장품 회사의 이름으로 수백여만 원을 입금시켜 주었다.
명목은 광고비로 해 두면 되겠지.
특별히 PA흥신소에서 걸릴 만한 부분은 없었다.
그야 해당 화장품 회사는 정말로 존재하니 말이다.
PA흥신소 사장은 작은 화장품 회사를 인수하여 친척의 이름을 대표 이사로 내세우고, 전문 경영인에 의해 회사를 운영하게 만들었는데.
해당 회사는 이윤을 만들기보다 PA흥신소의 조력자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화장품을 적당히 노출시킨 다음, 건네받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유X브 영상을 제작하기 시작한 스트리머들.
평균 1~2만 조회 수를 기록하던 스트리머조차 수십만 조회 수를 볼 수 있는 대박 정보다.
그들에게는 맛있는 먹잇감이나 다름없겠지.
<백월로부터 괴롭힘을 당해 왔다는 피해 학생들, 그들은 과연 피해자들인 걸까?>
<김수호의 막내아들, 김종현의 협박으로 만들어진 가짜 피해자...!>
<피해자는 오히려 백월이다?!>
<박건혁의 딸을 건든 자승최강 길드원들의 추악함!>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쏟아지는 영상들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끌어모았다.
더욱이 SNS를 통해 퍼져 나간 사진과 영상들이 해외에까지 보도되자, 대한민국 국민들은 백월을 향한 비난을 멈추고, 비난의 화살을 김종현과 자승최강 길드원들에게 겨누었다.
제119화
119화. 김종현 (4)
"이... 이게 무슨...."
종현은 자신의 SNS에 달리는 댓글 알림을 보곤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째서 자신의 스마트폰에 보관되어 있는 사진과 영상들이 SNS에 올라와 있는 거지?
분명, 누구한테도 넘긴 적이 없을 텐데!
심지어 문자 내역까지 고스란히 공개되면서 SNS 이용자들은 잠시 마비 현상을 겪어야 했다.
콰앙!
"말도... 말도 안 돼!"
그는 책상 위를 내리치며 입을 뻐끔거렸다.
이내, 악을 내지르면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머릿속에 한 인물이 떠올랐다.
그래,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건 딱 한 명뿐이다.
"박수영!"
그는 주먹을 쥔 채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마치 저주를 하듯 수영의 이름을 연신 외쳐 댔다.
"크으...."
속으로 저주를 퍼붓는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덧없음을 깨달은 종현은 까득 이를 악물었다.
그때, SNS에 새로운 게시 글이 올라왔다.
종현이 룸살롱에 드나들었던 사진과 영상이 공개된 것이다.
"아... 아...."
이게 왜... SNS에 올라온 거지?
룸살롱까지 파헤쳤다고?
종현은 털썩 주저앉으면서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봤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현실을 부정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종현.
그는 다시 한번 알림음 소리가 들려오자, 스마트폰을 낚아채 벽으로 던져 버렸다.
쾅!
"X바아아알!"
그렇게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비명을 지르듯 욕설을 터트렸다.
그 시각, 검찰은 종현이 방문한 룸살롱에 들이닥쳐 압수 수색을 시작했다.
이어, 김종현이 방문한 내역과 CCTV 영상이 확보된 순간.
인터넷은 한바탕 뒤집어지고 말았다.
"바... 박건혁이 공식 입장을 냈다!"
젊은 기자가 스마트폰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헌터 협회 홈페이지, 흑월의 길드 게시판에 업로드된 공지 글은 인터넷 기사와 SNS를 타고 순식간에 확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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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흑월(黑月)의 마스터, 박건혁입니다.
이번 백월에 대한 사건의 입장을 내비치기 위해 이렇게 공지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현재, 백월에 소속된 헌터들은 근거도 없는 모욕적인 비난과 욕설에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막 헌터증을 발급받은, 1년 차도 되지 않은 헌터로서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미성년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아무런 증거도, 근거도 없이 모욕적인 게시 글과 댓글을 단 모든 분들을 저희 흑월은 모두 고소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백월에 소속된 길드원들을 협박으로 탈퇴시킨 후, 백월의 이미지를 훼손시킨 자승최강 길드 역시 적법한 절차를 통해 고소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더욱이 자승최강의 김종현 마스터로부터 그동안 피해를 받아 온 분들을 도와 그동안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통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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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혁은 백월을 향해 도를 넘는 게시 글과 댓글을 단 SNS 이용자들을 고소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현금을 쏟아부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책임을 묻기는 어렵겠지.
숫자가 숫자니까.
그러나 사전에 캡처해 둔 게시 글과 댓글의 숫자만 해도 무려 1천여 건에 달한다.
적어도 수백여 명의 SNS 이용자들을 본보기로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이게 무슨 X 같은...!"
해당 소식을 접한 김수호는 다급히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퍼억!
냅다 종현의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
"이런 천하의 쓰레기 같은 놈이...! 룸살롱? 협박? 이런 X부랄!"
평소의 침착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분노로 가득한 수호의 악귀 같은 얼굴에 종현은 입을 뻥긋거리며 소변을 지렸다.
암모니아 냄새가 진동함에도 수호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동안 귀엽게만 봐 온 막내아들을 죽기 직전까지 팬 뒤에야 냉정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자식들을 노려봤다.
경고를 하듯이 말이다.
"후우...."
수호는 주먹을 쥔 채 아무 말 없이 서재로 들어갔다.
쾅!
세게 닫힌 서재의 문.
장남, 차남, 장녀.
김수호의 세 자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 종현아."
김수호의 아내, 유소은이 황급히 막내아들에게 달려갔다.
아무리 미워도 배 아파 낳은 아들이다.
소은은 종현의 입가에 포션을 먹여 주었다.
"엄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 자식은 그냥 죽어 버리게 내버려 둬!"
"어떻게... 가족을 가지고 협박을 해? 저런 게 내 동생이라고?"
"그 새끼는 감옥에 처넣어서 정신 좀 차리게 해야 돼. 도대체가...."
자식들의 비난 어린 목소리에도 소은은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숙여 종현을 바라봤다.
피해 학생들은 현재 SNS에 게시 글을 올리면서 흑월에 찾아가는 중이다.
흑월이 움직인 이상, 죄를 피하기는 어렵겠지.
'적어도... 적어도 소년 교도소만큼은....'
소은은 두 눈을 감으면서 종현을 번쩍 들어 올렸다.
* * *
김종현에 대한 악행이 폭로된 다음 날.
수영을 촬영해 SNS에 게시 글을 올린 학생들은 손을 덜덜 떨어야 했다.
어마어마한 자금을 쏟아 수많은 악플러들을 고소하기 시작한 흑월(黑月).
해당 기사 내용을 본 몇몇 학생들은 초조한 듯 스마트폰을 꽈악 쥐었다.
'지... 지금이라도 수영이한테 달려가서 사과해야 되나?'
'설마, 그 많은 사람들을 전부 고소할 리가....'
불안함에 휩싸인 수십여 명의 학생들.
또, 수영을 보고 수군거리던 학생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일상을 보냈다.
피식.
수영은 빈자리를 보고 웃음을 지었다.
김종현의 자리다.
종현은 오늘 등교를 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김종현의 집 앞으로 수많은 기자들이 들이닥쳤다는 모양이다.
흑월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백월을 탈퇴했던 학생들은 다급히 호소문에 대해 해명하는 글을 올렸다.
김종현에게 끔찍한 폭력을 당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포션을 먹였다는 등.
가족에 대한 협박으로 어쩔 수 없었다며 글을 게시했지만, 여론의 반응은 이해하기보다 비난하는 측으로 기울어졌다.
"아무리 협박을 받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한테 도움을 구하지도 않고 탈퇴를 했어. 심지어 길드의 이미지를 박살 내고, 우리들한테...."
"맞아, 그 녀석들을 다시 받아들이는 건 반대야. 나는 SNS로 부모님에 대한 욕까지 들어야 했다고! 최소한 수영이나 시현이한테 언질이라도 넣어 줬더라면...."
백월에 소속된 학생들은 탈퇴 학생들의 재가입을 격하게 반대했다.
다시 돌아온들, 이전처럼 대해 줄 수 없다면서 말이다.
길드원들의 의사를 확인한 수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똑.
회의가 진행되던 도중 길드를 탈퇴한 여덟 명의 학생들이 동아리실로 들어왔다.
"허, 무슨 생각으로 여길 찾아와?"
"우리가 힘들 때는 연락을 끊어 버린 주제에...."
시현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봤다.
"미... 미안해. 하지만 우리도 그 녀석들한테 끌려가서...!"
"가족들을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고통을 호소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었다.
가족을 건들겠다는 협박 앞에서는 그들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두려움에 질려 제대로 된 판단도 할 수 없었을 테고.
"수... 수영이 네가 움직이면 곧바로 우리 가족들을 해친다고...."
수영은 피해 학생들을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들을 다시 길드원으로 받아들여 줘야 할까?
연락이 두절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들의 상황도 이해할 수밖에 없겠지.
그녀는 슬쩍 길드원들의 반응을 살폈다.
조금 전까지 재가입을 반대하던 길드원들도 살짝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그래, 상황은 알겠어. 그런데, 설마 다시 가입을 시켜 달라는 건 아니지?"
유빈의 물음에 여덟 학생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너희가 잠적한 탓에... 심지어 이상한 호소문까지 올린 탓에 시현이랑 다른 애들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아?!"
유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시현을 진심으로 걱정했기 때문일까?
그녀의 분노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무릎을 꿇은 학생들은 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고개를 들었다.
"우... 우리도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SNS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두 봤었으니까."
"그러면...!"
"우리도 힘들었어! 뒷골목에 끌려가서 수십 분 동안 두들겨 맞는 것보다도! 가족들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때, 민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차가운 눈으로 피해 학생들을 바라봤다.
"그래, 너희 상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사죄를 받아들일 용의도 있고. 하지만, 다시 길드로 들어오려는 건 염치가 없는 짓이라는 걸... 너희도 잘 알잖아?"
"그... 그건...."
사죄는 받되, 인연은 여기까지라는 의미다.
민아의 냉소적인 목소리에 길드원들은 살짝 놀라야 했다.
그녀가 이토록 차가운 표정과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니.
수영조차 처음으로 보는 민아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눈을 감았다.
"민아의 말대로 사죄는 받아들이도록 할게. 재가입에 관해서는 길드원들과 회의를 진행해서 결정하도록 하겠어. 2~3일 안에 재가입에 대한 결정을 메일로 알려 줄 테니, 오늘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 봐."
여덟 학생들은 고개를 숙인 채 동아리실을 빠져나갔다.
이 자리에서 누가 더 힘들었느냐를 따져 봐야 입만 아플 뿐이다.
수영은 자세를 바로잡고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1학년부터 시작해 2~3학년생들까지.
열두 명의 길드원들이 수영의 말을 기다렸다.
"...익명 투표로 결정하자. 내가 결정을 내리는 것보단 반발심도 덜할 테니까. 일단,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서 신중하게 생각하고 투표를 해 줘. 투표는 내일 밤 10시에 마감하도록 할게."
수영은 상황을 일단락하면서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길드원들은 무리를 지어 동아리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단체 활동을 유지하며 집으로 귀가했는데.
수영은 경호원으로부터 받은 문자를 확인하곤 쪽문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많이들 오셨네.'
수성고등학교 정문에서 진을 친 수많은 기자들.
수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면서 쪽문을 통해 학교를 빠져나갔다.
김종현이 조사를 받기 시작할 무렵.
룸살롱의 장부에서 김종현과 유명인들의 이름이 확인되며 논란은 더욱 커졌다.
그런 시끄러운 상황 속에서도 수성고등학교는 여름 방학을 맞이했고, 수영은 탈퇴한 길드원들에게 재가입이 불가능함을 메일로 알려 주며, 본격적으로 C등급 게이트 공략에 들어갔다.
* * *
"...."
유치장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는 종현.
머릿속은 온통 새하얀 백지장이 되어 버렸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도와주겠다며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셨지만, 아버지는 죗값을 달게 받으라면서 분노로 가득한 목소리를 터트렸다.
설마, 자신을 이렇게 버려 버릴 줄이야.
그는 BM족쇄에 채워진 채 몇 시간을 물 흐르듯 보내야 했다.
"조... 종현아, 우리 금방 나갈 수 있는 거 맞지?"
자승최강의 길드원들은 종현의 곁에서 불안한 얼굴로 몸을 덜덜 떨었다.
흑월... 그것도 박건혁 본인이 움직였다.
김수호 정도의 도움이 없다면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없겠지.
그 때문일까?
길드원들은 마치 희망 줄을 보듯 종현을 바라봤다.
그라면 자신들을 도와줄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하지만 재판에 넘겨지고, 형량이 떨어진 순간.
길드원들의 눈동자는 지진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아...."
그들의 시선이 종현에게 향했다.
제120화
120화. 김종현 (5)
"지... 징역 5년? 집행 유예가 아니고?!"
"기... 김종현, 이 X발 새끼야! 네가... 네가 다 책임질 수 있다고 말했잖아!"
"저는 저 새끼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했었던 거예요! 저 시X놈이 협박을 해서...!"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찬 길드원들의 목소리가 재판장을 가득 채웠다.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종현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멍하니 정면을 응시했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면서 자신의 두 손을 바라봤다.
"내가... 징역 10년이라고?"
그리 중얼거리면서 방청객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팔짱을 낀 채 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부친과 눈이 마주쳤다.
그 옆에서 어떻게 좀 해 달라는 듯이 부친의 팔을 붙잡고 늘어진 모친이 보인다.
이게... 정말로 현실인 걸까?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종현을 포함해 자승최강 길드에 소속된 대여섯 명의 학생들은 마침내 소년 교도소행 티켓을 끊고 재판장을 차례차례 벗어나기 시작했다.
더불어 종현이 수시로 드나든 룸살롱은 탈세 등의 혐의가 추가되면서 벌금 및 추징금으로 수십억 원대가 부과되며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자승최강 길드의 마스터, 김종현. 범죄 소년에 해당되나 헌터증을 발급받은 헌터로서 가중 처벌이 인정돼....>
<'단군' 김수호, "아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죗값을 받길 바란다.">
<"징역 10년이 웬 말이냐!" 분노한 피해자들, 거리에 현수막 내걸어.>
수많은 기사들이 작성되며 보도되던 그 시각.
경상북도에 위치한 청소년 교도소.
악질적인 범죄 청소년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 종현의 일행이 발을 내디뎠다.
그들의 얼굴은 잿빛이 되어 있었다.
살벌한 얼굴로 자신들을 노려보는 청소년 범죄자들.
본래라면 한주먹 거리도 되지 않았겠지만....
퍼억!
"크헉?!"
복부를 꿰뚫은 묵직한 주먹.
종현은 눈을 크게 뜨면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헛구역질을 해 댔다.
"이런, X발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눈을 부라려?"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나운 눈빛.
마치 살인자를 보는 느낌이다.
주먹질과 발길질과 같은 구타는 기본.
자신의 얼굴을 깔고 앉아 개인 시간을 보내거나, 변소에서 끔찍한 짓들을 벌이는 등.
식사 시간마저 피를 말리는 지옥과 같은 일과가 시작됐다.
"아... 아...."
"저런 X발... 입맛 떨어지게...."
식사 중이던 한 수감자가 종현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짜악!
"꾸웩!"
종현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MB족쇄를 찬 탓에 각성자로서의 능력을 모두 상실하고 평범한 고등학생이 되어 버린 그는 일방적인 폭행에도 감히 반항할 의지를 느끼지 못하며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비단 종현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종현과 함께 교도소에 입소한 전(前) 자승최강의 길드원들 역시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보내면서 깜깜한 앞날에 절망했다.
한편, 이번 사건과 관련해 단군은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김수호는 부모로서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고 바닥에 무릎까지 꿇어 사죄를 보였다.
이미 명확히 드러난 증거물들.
수호는 종현을 아들이라고 하여 감싸고 돌 의사가 없음을 확실하게 밝혔다.
더욱이 피해 학생들에게 직접 찾아가 적절한 피해 보상으로 이미지를 굳혔는데.
국민들은 그에게서 진심이 보인다는 이유로 우호적인 반응을 내비쳤다.
딸칵.
수서역에 건설된 흑월 본부의 최상층, 마스터실.
건혁은 스크롤을 내리면서 인터넷 기사를 살펴봤다.
기사에 달린 수백여 개의 댓글들.
"흐음...."
그는 미묘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뭐, 김수호 헌터가 잘못한 건 아니니까."
건혁은 김종현에 대한 수감 생활을 수차례 보고받았다.
단군의 마스터, 김수호의 아들이라면 소년 교도소에서 왕처럼 군림하고 있지 않을까?
그 경우, 그의 악행이 재발할 가능성이 존재했다.
더욱이 수영과 피해 학생들에게 보복하려는 의지를 보일 수도 있겠지.
때문에 건혁은 이곳저곳 손을 써 소년 교도소 측에 뇌물 아닌 뇌물을 먹였다.
'내가...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할 줄이야.'
헛웃음과 함께 머리를 살짝 긁적였다.
"슬슬 출발할까?"
금일 예약된 민간인 통제 구역의 S등급 게이트.
지금쯤 백월도 C등급 게이트를 공략하고 있을 거다.
마스터실을 나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건혁.
그는 검은 세단을 타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스테이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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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건혁
*종족: 인간
*칭호: 빙마군주(氷魔君主)
*출신 국가: 한국
*LV: 298
*근력: 85(+5)
*민첩: 100(+5)
*체력: 100(+5)
*마력: 910(+300)
*AP: 0
*스킬: [빙마검(氷魔劍)-LV10] , [얼음 골렘 소환-LV10], [마력 회복-LV9], [성장 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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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회복'의 스킬 레벨은 최대치를 코앞에 둔 상태다.
스테이터스의 레벨 역시 곧 300에 도달한다.
하지만 S랭크 마수를 쓰러트렸음에도 큰 폭으로 오르지 않는 경험치량.
건혁은 서서히 한계라는 벽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수영이의 성장과 흑월의 확장에 주력해야겠어.'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은 이 세계의 주인공인 박수영의 역할이다.
한때는 용기사 골렘으로 마왕을 쓰러트릴 생각도 해 봤으나, 세실리아의 이야기에 따르면 용기사로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한계점에 도달한 자신의 능력으로 세계관 최강의 흑막을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조력자로서 활동하는 수밖에.
'나를 이 세계로 환생시킨 녀석도... 내가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는 건 아닌 모양이야.'
딱히 주인공에 대한 집착은 없다.
수영의 안위가 걱정될 뿐이지.
덜컹.
민간인 통제 구역에 들어선 순간.
차량이 살짝 흔들렸다.
도로가 심하게 파인 모양이다.
건혁은 도로 위를 가득 채운 마수들의 시체를 발견했다.
"자잘한 것들만 가득하네."
정부의 요청을 받아 일주일에 2~3번씩 민간인 통제 구역에 골렘을 투입시켰다.
덕분에 몇몇 도시는 벌써부터 수복 계획을 세우는 중이라고 한다.
드르륵.
차량이 금일 예약해 둔 S등급 게이트 앞에 멈춰 섰다.
농후한 마력으로 형성된 붉은빛 오로라.
건혁은 게이트에 들어서자마자 용기사 골렘 5기를 소환했다.
"가라."
쓔와아아악!
사방으로 흩어지는 용기사 골렘들.
금일 공략하게 될 게이트는 정부로부터 핵의 파괴를 요청받은 곳이다.
사정을 봐 가면서 움직일 필요는 없겠지.
건혁은 마력이 회복되는 즉시 용기사 골렘을 소환하여 마수의 토벌 및 핵의 수색을 시작했다.
콰앙! 콰콰쾅!
용기사 골렘들이 마수들을 토벌한 다음, 정예 기사 골렘들이 마석과 부산물들을 회수하고, 병사 골렘들은 회수된 것들을 배낭에 담아 게이트 쪽으로 가져왔다.
건혁이 골렘들을 지휘하며 부산물을 게이트 바깥으로 나르던 그때.
수성그룹에서 보내온 화물차들이 줄지어 게이트 앞으로 다가왔다.
"아, 마석은 이쪽으로 부탁드립니다! 가죽이랑 뼈는 이쪽으로...!"
부서장급 인사가 직접 찾아와 현장을 지휘했다.
화물차마다 한 명씩 붙은 각 담당자들은 골렘들이 가져오는 물건들을 직접 확인하고, 정산 내역을 작성하기 위해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렸다.
어마어마한 물량에도 불구하고 대여섯 명의 담당자와 1~20대의 화물차로부터 물건의 확인과 정산은 안정적으로 이루어졌다.
"부장님, 6~10호차 들어오고 있습니다."
현장 책임자인 박도호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아 참, 김 과장. 어제 고구려에 대한 건...."
"예, 연락해 뒀습니다. 박 대리가 눈치를 많이 보더라고요. 그것보다... 정말 대단하네요."
김 과장의 감탄사에 도호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말이다. 어떻게 S등급 게이트를 공략할 때마다 수백억 원대의 물량을 뽑아내는지...."
"이러다가 정말로 민간인 통제 구역을 모두 되찾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
김 과장이 헛웃음을 터트리자, 도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박건혁이라면 정말로 가능할지 모른다 생각한 것이다.
한 해 동안 그가 공략해 온 게이트의 숫자를 떠올려 보자.
게다가 그가 소환한 골렘들의 능력을 고려해 보면....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단언할 순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수입해 왔다던 그... F35였던가요? 비행형 마수한테 900억대의 전투기 몇 대가 박살 나 버렸으니... 심지어 K2 전차도 라이오스의 공격에 먹통이 되었다고 하잖습니까. 어휴!"
무턱대고 미사일을 쏘자니, 마을과 도시에 대한 피해를 가늠할 수 없었다.
국가가 과연 모든 피해를 감당할 수 있을까?
또, 폐허가 되어 버린 고향에 누가 돌아가려 할까?
어마어마한 예산과 수복하는 데 들어가는 긴 시간으로, 정부는 군의 적극적인 공격에 쉬이 찬성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잃어버린 땅에 대해 서서히 잊혀져 갔다.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와중에 대한민국에서 세계 최강의 헌터가 탄생했다.
"충북 OO시에 박건혁 헌터의 골렘이 투입되었다고도...."
"그래, 아까 보니까 고위 마수들이 모두 토벌되었다고 하더라고. 슬슬 군이 투입된다고 하던데...."
도호는, 멀찌감치 떨어져 골렘들을 지휘하는 박건혁을 보곤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김 과장 말대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서 한번 고향에 좀 다녀오고 싶네."
정윤호를 중심으로 간신히 버텨 오던 대한민국은 박건혁이라는 한 사람에 의해 변화하기 시작했다.
* * *
위이잉.
"응?"
골렘을 지휘하던 건혁은 스마트폰의 진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게임 알림과 다른, 살짝 긴 진동이다.
그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열었다.
"...."
흑월 본부에서 보내온 문자다.
"이번엔... 독일 정부에서 의뢰가 들어왔네."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위치한 뒤셀도르프.
2019년까지만 하더라도 60만 명의 사람들이 거주했던 도시다.
"뒤셀도르프라면...."
2019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곳이다.
당시 뒤셀도르프에서 폭발한 S등급 게이트.
독일 정부는 헌터와 군을 총동원하여 게이트를 진압시켜 나갔다.
다행히 초기 진압에 성공하며 큰 어려움을 보이지 않았는데.
문제는 게이트가 폭발하고 사흘이 지났을 무렵이다.
S등급 게이트가 폭발하고 사흘째가 되는 날.
뒤셀도르프를 중심으로 5~10km 지역에서 10여 개의 게이트가 연이어 폭발했다.
폭발한 게이트의 등급은 D~A로, 중·대규모로 규정된 레이드였다.
"사상자만... 거의 6~7만 명에 달한다고 했었던가?"
방어선을 무너트리고 독일의 총전력을 뒤에서 덮쳐 버린 마수들.
해당 사건은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반경 5~10km 지역에서 10여 개의 게이트가 연이어 폭발한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인가.
당시 전문가들은 해괴한 표정을 보이면서 연관성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뒤셀도르프의 탈환 작전에 협력해 달라는 건가."
현재 뒤셀도르프에서 서식하는 마수의 숫자는 8~90만 정도에 달한다.
이미 수많은 도시와 마을을 폐허로 만든 경험이 존재하는 독일.
그들에게 이 이상의 피해는 분명 부담스러울 것이다.
"주된 임무는... A~S랭크 마수를 쓰러트려 달라는 거네."
도시를 탈환하는 것도 분명 중요한 일이겠지.
하지만 독일 정부는 도시를 탈환하겠다는 것보다도 도시 내의 마수들이 언제 뛰쳐나올지 모른다는 것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은 간신히 억제만 하고 있을 뿐.
도시의 마수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분명 어마어마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제121화
121화. 조사대 (1)
"일본이랑 이탈리아에서도...."
전 세계로부터 의뢰를 받게 된 흑월.
정확히는 박건혁에게 보낸 의뢰다.
알렉스와의 결투 영상은 전 세계에 희망을 심어 주었다.
인명 피해를 줄이면서 잃어버린 땅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말이다.
건혁은 곧바로 흑월 본부에 전화를 걸었다.
"독일 측에서 보내온 의뢰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메일로 보내 주세요. 확인한 후에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1~2분 뒤, 메일이 도착했다.
한화로 3~4천억 원대의 보수를 지급한다는 독일 정부.
그들이 요청하는 최소 조건은 S랭크 마수 다섯, A랭크 마수 1백, B랭크 마수 1천을 토벌해 달라는 것이었다.
약속된 보수 외에도 토벌한 A~S랭크 마수의 마석은 건네준다고 한다.
"B랭크 이하의 마석들은 50%의 금액으로 독일 측에서 매입한다, 라... 뭐, 나쁘진 않네."
조건과 보수 모두 만족스러웠다.
"안 그래도 국내 최상위 길드에서 몇 명 좀 빼 오려고 했었는데... 독일 측 의뢰만으로도 상당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겠어."
국내 서열 1,000위 내의 헌터들을 스카우트하려면 적어도 수십억 원대의 계약금을 약속해야 한다.
100위 안으로 들어가면 100억도 부족하겠지.
물론, 100위 내의 헌터들은 흑월의 스카우트 대상에서 벗어났다.
건혁이 노리는 것은 1,000~199,999위에 속해 있는 헌터들.
과거 짐꾼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만난 인성이 바른 헌터들에겐 이미 스카우트 제의를 마쳤다.
그 외에는 각종 시험을 통해 선별했는데.
책정한 예산이 예산이기 때문일까?
제1군과 제2군의 규모가 대폭 늘어날 것으로 예측됐다.
"효영 씨도 이번에 유신 길드를 탈퇴하고 흑월로 들어온다고 했던가?"
2016년 헌터증을 발급받자마자 참가했던 유신 길드의 조사대.
건혁은 당시 서초구 제11번 게이트를 조사하던 도중 텐트를 치던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 왔던 한 여성 헌터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게이트를 처음으로 들어갔던 만큼 그녀에 대한 인상이 크게 남아 있었다.
"뭐, 다른 길드들로부터 견제를 받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돈 앞에선 모두가 평등해지는 법이다.
더욱이 흑월 내에선 차별과 불만의 목소리가 거의 없었다.
다른 길드에 비해 상당히 청결한 편이랄까?
또, 기부와 봉사 활동 등으로 이미지까지 높이면서 국민들로부터 호감을 얻었고, 헌터들 역시 흑월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가입을 희망했다.
그렇게, 흑월이 규모를 부풀리며 길드 서열을 높이기 시작할 시각.
박건혁은 또다시 흑월과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 일조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2024년 8월 6일.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뒤셀도르프.
쿠웅! 쿠쿵!
수많은 독일의 헌터들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지상을 향해 브레스를 뿜어 대는 푸른빛 드래곤.
조금 전까지 도로 위를 가득 채우고 있던 마수들이 꽁꽁 얼어붙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마... 마스터, 바실리스크가... 조금 전에 토벌되었다고 합니다."
코브라를 연상시키는 형체.
두께 7~8m에 길이 100m를 자랑하는 거대한 '뱀형' 마수.
녀석이 뿜는 독은 베테랑 헌터들조차 즉사에 이르게 만든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적인 헌터들조차 두려워하는 녀석을....
고작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쓰러트렸다고?
녀석은 SS라는 새로운 랭크로 불릴 뻔했던 괴물이다.
때문에 독일 정부로서도 골칫거리로 여겨 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독일의 헌터들은 용기사 골렘과 기사왕 골렘들의 전투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확신했다.
5년 전에 빼앗긴 도시.
뒤셀도르프를 탈환할 수 있다고 말이다.
사령부는 박건혁의 맹활약을 듣고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역시, 박건혁을 선택한 건 정답이었어!"
"알렉스의 능력으론 바실리스크 하나 상대하는 것도 벅차지 않았을까?"
"알렉스에게 1~2억 유로를 줄 바에는 차라리 박건혁에게 3억 유로를 주고 맡기는 게 더 이득이지! 하마터면 돈을 쓰레기통에 버릴 뻔했군!"
알렉스를 쓰레기통이라 비유하는 장교의 목소리에 모두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거만함으로 가득 찬 알렉스의 태도를 누가 좋아할까.
더욱이 범죄와 인종 차별을 서슴지 않고, 타국을 무시하는 듯한 말투는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에 비해 박건혁은 세계 랭킹 1위에 올라섰음에도 겸손을 잃지 않았다.
그뿐이랴, 위에 서 있는 자로서 카리스마와 대담함까지 보여 준 건혁.
말 그대로 믿음직스럽다는 의미다.
콰앙! 콰과광!
"덕분에 이쪽에서도 움직이기 편해졌어."
박건혁이 고위 마수들을 토벌하는 동안 독일은 군과 헌터를 투입하여 뒤셀도르프 탈환 작전을 진행시켰다.
독일 정부는 박건혁의 활약을 언론을 통해 국민들에게 전달하고, 뒤셀도르프 탈환 작전에 청신호를 들어 올렸다.
박건혁이 쓰러트린 S랭크 마수는 무려 다섯 마리.
"그밖에 A랭크 287마리와 B랭크 1,083마리, C랭크 5,891마리까지... 이게 한 명의 인간이 이틀 만에 쓰러트린 마수들이라고?"
독일 헌터 협회 회장은 박건혁의 공적을 보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알렉스가 뒤셀도르프 탈환 작전에 참가했더라면... 1~2개월은 족히 걸렸겠지."
세계인들은 다시 한번 알렉스와 박건혁을 비교하며 박건혁의 압도적인 우위를 장담했다.
특히, 대한민국 국민들은 K-POP과 K-드라마에 이어 K-헌터의 이름까지 드높인 박건혁이라는 존재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SNS와 유X브에 수많은 응원의 댓글을 달았다.
그렇게 뒤셀도르프 내 A~S랭크 마수들의 씨가 말라 갈 무렵.
독일 정부는 뒤셀도르프 탈환 작전의 성공을 국내외로 알리면서 축제를 벌였다.
물론, 도시 내 모든 마수들을 토벌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작전에 실패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
5년 전과 같은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은 말이다.
<뒤셀도르프 내에만 8~90만 마리 마수들이 바글거린다고 하지 않았나? 근데, 작전을 시작하고 사흘 만에 성공했다고?>
⤷SNS에선 뒤셀도르프의 6~70%를 되찾았다고 함.
⤷박건혁이 세계 랭킹 1위의 위엄을 보여 주네. 솔직히 바실리스크를 10분도 채 안 돼서 쓰러트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뒤셀도르프 내 모든 S랭크 마수를 박건혁 혼자서 쓰러트림. 이젠 알렉스가 비빌 만한 수준이 아니다.
<박건혁의 사흘간 실적을 정리해 보면, S랭크 6마리, A랭크 347마리, B랭크 1,619마리, C랭크 9,783마리, D~F랭크는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라고 한다.>
⤷D~F랭크는 대략 7~8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고 인터넷 기사로 올라왔음.
⤷초보자 사냥터에 고인 물 하나 끼어드니까 제대로 뒤집어지네.
⤷소환술은 성장하기 어려운 X밥 같은 능력이라고 생각했는데, 박건혁을 보면 존X 사기 같은 능력이라는 걸 깨닫게 됨.
⤷그것도 사람마다 다르지. S랭크 마수를 쓰러트리는 소환술사는 세계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일걸?
⤷저런 사람이 국내 최하위권 서열로 각성해서 짐꾼으로 활동한 경력까지 있다는 게... 믿겨지지가 않는다.
⤷최근 SNS 살펴보면 박건혁이 짐꾼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만난 헌터들이 흑월로부터 스카우트를 받고 있다고 한다. 거대 길드급으로 계약금까지 맞춰 주고, 대우도 상당히 좋아서 이적하는 헌터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임.
⤷이래서 평소의 행실이 중요한 거다. 박건혁이 짐꾼으로 활동하던 때, 막말에 갑질을 했었던 것들은 지금쯤 존X 후회하고 있을 듯.
<흑월의 규모가 너무 커지는 게 아닌가 모르겠네. 인터넷 기사에서는 상반기 동안 300명에 가까운 헌터들을 영입했다고 하던데....>
⤷확실히 성장세가 가파르긴 하지만, 그 정도로 고구려 같은 최상위 길드를 넘어서는 건 어려울 듯.
⤷근데, 솔까 박건혁 혼자서도 고구려는 압도할 수 있다.
⤷그건 ㅇㅈ. 대한민국 11대 길드 전부가 달려들어도 박건혁 하나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임.
⤷일단 물량에서는 절대로 안 질 테고, 개인 무력도 알렉스급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으니....
⤷현실판 먼치킨 캐릭터임. 세상 존X 불공평하네, X발....
박건혁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던 시각.
대한민국 충청남도의 한 폐공장에서 게이트가 개방되었다.
S등급 게이트와 마찬가지로 붉은빛이 감도는 에너지.
해당 게이트에서 다섯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어딘가로 넘어오긴 한 모양이군."
그들은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게이트를 보며 작게 한숨을 토해 냈다.
"게이트를 유지하는 건 아직 불가능한 건가."
"7~8초 정도...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군."
"먼저, 이곳이 그리드 님께서 보내 주신 좌표가 맞는지부터 확인해 보도록 하지."
"그래."
그들은 폐공장을 빠져나왔다.
어두컴컴한 하늘.
주변은 기묘한 건물들로 가득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들은....
촤악!
등 뒤로 검은 박쥐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생소한 풍경.
다행히 아르덴의 어딘가는 아닌 모양이다.
마족들은 즐비하게 나열된 건물들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좌표는... 맞는 거 같군."
마도구에 표시된 번호는 그리드가 보낸 좌표와 비슷했다.
약간 다른 부분은 개방된 위치 때문이겠지.
"이 정도 건축술이면 기술도 상당히 발전해 있을 것 같은데... 하나하나 새롭게 만들어 나갈 필요는 없겠어."
"건축술은 아르덴보다 더 뛰어날지도...."
마족들은 주변을 둘러본 다음 아르덴을 향해 확인 신호를 보냈다.
이내, 폐공장으로 되돌아온 다섯 마족.
"한 달에 한 번 이곳에 게이트가 개방될 거다. 그러니 우리는 이 세계의 정보를 수집하는 데 주력한다."
리더로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의 마족이 대원들을 비잉 둘러봤다.
그러자 대원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럼, 슬슬 움직이도록 하지."
그들은 세상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존재들을 대상으로 접근을 시도했다.
충청남도의 폐건물에서 살아가는 존재들.
아르덴에서 슬럼가의 범죄자라 불리는 자들이다.
서걱!
마족들은 인간들을 한곳에 모아 둔 채 무자비함을 보여 주었다.
"더러운 피가 묻어 버렸군."
인간이란 가축과 다름없는 하찮은 종족이다.
그럼에도 당장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원천이 그들밖에 없다.
공포에 질린 인간들은 마족들의 질문에 술술 정보를 내뱉었다.
언어의 장벽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법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
그보다도....
"한낱 가축 따위에게 이 정도의 지식이 존재한다고?"
"이 세계의 인족은... 아르덴의 인족과 무언가가 다른 모양이군."
"설마, 이놈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 건 아니겠지? 인족 따위가 그 정도의 문명을 이루어 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우리는 이 세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 우리들의 기준으로 함부로 단정을 짓는 것은 위험하지. 일단, 이놈들의 정보를 토대로 조사를 시작한다."
"크흠...."
인간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에 불쾌감을 드러낸 한 마족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한 달 뒤, 우리가 넘어온 그곳에서 다시 한번 게이트가 개방된다. 그때까지 각자 이 세계에 대한 정보들을 확보해 보고서로 작성해 두도록."
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며칠... 아니, 몇 시간 뒤, 지구의 문명에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어찌 인간이 이런 고도의 문명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자동차, 지하철, 비행기 등의 이동 수단은 물론이고, 아파트와 빌딩 등의 거주 시설까지.
마족들은 뿔과 날개를 감추고 종족을 속인 채 인간 사회에 보다 깊숙이 숨어들었다.
"식량에도 큰 부족함은 없나 보군. 지구 온난화라는 현상으로 기온이 높아지고 있다지만, 아르덴에 비하면...."
아르덴의 사막화 현상은 고속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에 비해 지구의 온난화는 귀여운 수준이다.
지구로 파견된 조사대의 대장, 데릭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122화
122화. 조사대 (2)
지구로 넘어오고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조사대장인 데릭은 대원들로부터 지구의 군사력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인터넷을 통해 확보한 수많은 정보들.
"기밀로 다루어지는 정보들까진 손을 댈 순 없었지만, 문명이 발전한 만큼 전투에 대한 것 역시 아르덴과 차원이 다르다. 특히, '핵'이라는 무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을 보유하고 있더군. 위력만 따지면 우리와 같은 중급 마족들은...."
"우리가... 고작 인족이 만든 무기 따위에 당할 거라는 말인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린 조사대원, 글리코르.
그에 조사 내용을 언급하던 오르바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바의 반응에 글리코르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아무리 고도의 문명을 이룩하였으나, 상대는 가축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다.
그런 놈들에게 중급 마족인 자신들이 당할 것이라니...!
"문제는 위력보다도 범위다. '핵'이 폭발하게 된다면 반경 수 킬로미터... 넓게는 수십 킬로미터 일대를 순식간에 전소시킨 다음 방사능이라는 오염 물질이 주변으로 확산되어 육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아마 우리 마족들에게도 영향이 있겠지."
"허어...."
"더욱이 핵탄두가 실린 미사일을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날려 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더군."
오르바는 작게 숨을 고르며 말을 덧붙였다.
"또한, 인터넷 등의 연락망을 통해 각국의 상황을 금세 확인할 수 있고, 인공위성이라는 것을 통해서도...."
계속되는 오르바의 보고에 데릭은 미간을 좁힌 채 눈을 감아야 했다.
설마, 인간이라는 종족을 경계하게 될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엘프와 드워프 같은 인외종이 없다는 것은 다행이라 여겨야겠지만, 헌터라는 존재들 역시 경계 대상에 포함시켜야 된다. 특히, 최상급 마수를 단독으로 쓰러트리는 자들은... 요주의 인물이다."
데릭은 '박건혁'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생소하면서도 특이하다 생각되는 이름이다.
하지만, 그 특이한 이름의 소유주는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인족으로서, 상급 마족들조차 버거워하는 바실리스크를 손쉽게 쓰러트려 보였다.
가히 마왕급에 견줄 만한 강자라고 봐야겠지.
'이 사실을 당장 마왕님께 보고드려야 한다.'
조사대는 수많은 보고서를 챙겨 충청남도의 폐공장에 들어갔다.
곧 게이트가 개방될 시간이다.
그들은 게이트가 개방되기 전까지 자리에 앉아 시간을 기다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데릭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쯤 게이트가 개방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터.
통신 역할을 하는 마도구 역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데릭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주일 동안 교대로 폐공장에서 대기했다.
"일주일째 감감무소식이라는 건...."
"무슨 문제가 발생했다고 판단하는 게 옳겠지."
데릭은 작게 한숨을 쉬곤 대원들을 바라봤다.
"일단, 한 달 동안 이곳에서 교대로 대기한다."
폐공장에서 대기하는 2명의 대원과 외부 활동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확보하는 2명의 대원.
데릭은 범죄자들로부터 뜯어낸 현금으로 식량과 생필품을 구매해 폐공장에 쌓아 두었다.
한 달은 거뜬히 버틸 수 있도록.
그러나 한 달이 지났음에도 데릭의 일행은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
"후우, 어쩔 수 없군."
결국 매주 정기적으로 폐공장을 찾아오기로 한 데릭은 조사대원들과 함께 인간들의 사회에 숨어들어 정보 수집을 계속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런 작은 물건으로 연락을 나눌 수 있다니....'
데릭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구의 문명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또, 헌터들의 활약을 TV와 인터넷으로 접했을 때는 경계심을 높이며 마기(魔氣)를 최대한 억눌러 정체를 숨기려 했다.
'우리가 마족이라는 사실이 발각되었다가는... 분명, 각종 고문을 받게 될 것이다.'
범죄자들을 통해 현금을 조달해 온 데릭의 일행은 당시의 현장이 TV를 통해 보도되자, 화들짝 놀라면서 한동안 충남의 폐공장에 틀어박혀 은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청룡 기사단 놈들이 현장에 들이닥쳤다는군. 청룡 기사단에는 우리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헌터가 존재한다. 더욱이 대규모 길드들이 움직였다가는...."
"...."
인족을 하찮게 여기던 글리코르조차 침묵했다.
지구의 인간들은 아르덴의 인간들과 다르다.
데릭은 살상을 회피하거나 증거를 없애는 것으로 자금의 확보 수단을 변경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증거를 처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르바의 얼굴이 인터넷에 노출되고 말았다.
"...우리가 죽였던 놈들의 차량 블랙박스에 얼굴이 찍혔다고 한다."
"후우, 슬럼가처럼 보이지만 길거리의 CCTV 역시 몇 개는 상시로 가동되는 모양이야."
"범죄자들도 근래에는 중국과 일본으로 넘어간다고 하더군."
"그럼, 우리도 중국이나 일본으로...."
"게이트가 언제 개방될지 모르는 와중에 타국으로 넘어가는 것은...."
조사대원들의 대화에 데릭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일전에 죽였던 놈들... 스컬이라는 중국 범죄 길드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하더군. 스컬이라는 길드에는 상당한 실력자들도 존재하는 모양이다. 이번에 오르바의 얼굴이 알려지게 되었으니...."
"표적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그래, 그러니 오르바는 한동안 이곳에서 게이트가 개방되는 것을 살피도록. 나머지는... 범죄자들과 엮이지 않도록 자금을 조달하고, 게이트가 개방되기 전까지 정보를 수집한다."
데릭의 최종 결정에 대원들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바를 제외한 조사대원들은 자금 조달을 위해 경기도의 한 가구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다.
불법 체류자로 말이다.
그들은 공장장의 지시에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빠릿빠릿하게 작업을 처리하여 공장장으로부터 호감을 얻어 냈다.
그러나 글리코르는 공장장의 호감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감히 중급 마족인 자신들을 이따위 작업에 투입시키다니...!
으득!
"제기랄! 최저 시급밖에 안 되는 급여에 중급 마족인 우리가...."
"야근 수당이라도 좀 챙겨 줬으면 좋겠는데...."
데릭의 일행은 정당한 요구조차 할 수 없었다.
공장장이 불법 체류자라는 사실을 들먹이며 협박을 해 온 탓이다.
기사단이 들이닥칠까 두려웠던 그들은 한숨을 내쉬면서 자금 조달을 위해 분노를 억눌렀다.
하루 11시간을 일하고도 야근 수당 없이 최저 시급을 지급받은 데릭의 일행.
더욱이 그들이 생활하는 숙소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4인이 하나의 방에서 생활하며, 보일러도 들어오지 않고, 여름에는 선풍기 하나로 버텨야 하는 그야말로 지옥이나 다름없는 장소.
"내가 왜 이런 꼴을...!"
마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고 저택에서 생활한 것이 바로 엊그제 일이다.
그런데 귀족인 자신들이 이런 허름한 곳에서 생활해야 한다니!
글리코르는 현 생활 환경에 불만을 터트렸다.
"제길, 그놈의 불법 체류자가 뭐라고!"
글리코르의 분노에 데릭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불법이긴 하지만 실종된 사람의 명의로 신분증을 발급받는 것이 가능하다더군."
"저... 정말?!"
글리코르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드디어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가?!
데릭은 씁쓸히 웃으면서 본인의 스마트폰을 보여 주었다.
"문제는 비용이다. 인당 2~3천만 원씩 받는다고 하는데...."
과거 범죄자로부터 빼앗은 대포 폰.
이젠 전화도 문자도 불가능한 일종의 공기계가 되었지만, 자비를 들여 공유기를 설치해 둔 덕분에 인터넷은 사용할 수 있었다.
데릭은 SNS와 인터넷을 통해 얻은 정보를 설명하며 한숨을 토해 냈다.
"...."
"...."
특별히 작업이 힘든 건 아니다.
인족에게 지시를 받는 것과 제대로 된 임금을 지급해 주지 않는 것이 불쾌할 뿐.
그렇게 한 달간 분노를 참고 작업을 진행한 데릭의 일행은 평소 함께 근무하던 불법 체류자들이 대거 해고되는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정도 작업은 너희들만 있어도 충분하잖아?"
공장장의 발언에 데릭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데릭의 일행이 공장에 들어온 이후 작업 속도는 확연히 빨라졌다.
그 때문일까?
공장장은 다른 직원들을 해고해 인건비를 줄이고자 했다.
대신, 데릭의 일행에게 10% 인상된 급여를 약속하며 근무 시간을 13시간까지 연장시켰다.
그는 악마보다 더욱 악마 같은 존재였다.
데릭은 치가 떨린다는 얼굴로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놈은 분명 악마가 틀림없다!'
정체성마저 잊게 만드는 공장장의 행태에 데릭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한국이란 나라를 헬조선(Hell Joseon)이라 부르는 것이로구나!'
'지옥이라고 불리는 국가...!'
'인간의 탈을 쓴 악마 같으니라고!'
데릭과 조사대원들은 한국이라는 국가에 대해 작은 공포를 느꼈다.
전 세계에서 TOP5에 드는 군사 및 헌터 강국!
물론, 한국에 핵이라는 최악의 무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의 국방부는 포방부라고 불릴 정도로 화력에 미쳐 있다고 한다.
"영토는 쥐똥만 하면서 무슨...!"
강력한 군사력에 이어 경제 개발에 앞선 선진 국가.
도대체 무엇이 이 작은 국가를 이렇게까지 성장시킨 걸까?
그리고 무엇이 이 국가를 지옥으로 만든 거지?
"후우, 그래도 음식만큼은 아르덴보다 훨씬 낫군."
"치킨과 맥주의 조합은 정말로 최고야."
"작업을 마친 뒤에 마시는 맥주는 정말로...."
부당한 대우를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넘어가며, 한국 생활에 점점 적응하기 시작할 무렵.
폐공장에서 대기 중이던 오르바는 데릭으로부터 현금과 각종 보고서를 전달받았다.
그렇게 지구로 넘어오고 3개월째가 되던 시각.
인터넷은 박건혁에 대한 기사로 가득 채워졌다.
"이 녀석은 정말...."
데릭은 기가 질린다는 얼굴로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자신들조차 두려워하는 마수들을 도대체 몇 마리나 쓰러트리는 거지?!
마수에게 빼앗긴 강원도 도시들을 되찾아 대한민국의 영웅이 된 사내.
데릭은 박건혁에 대한 기사를 파일로 정리하여 인쇄했다.
숙소에 구비된 컴퓨터, 프린터기는 보고서 작성에 탁월한 효과를 보여 주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생활을 계속해야 되는 건지...."
조사대원들은 익숙해진 듯 작업을 하며 저녁마다 맥주와 소주를 들이켰다.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인족이나 마족이나 다를 바가 없는 모양이다.
데릭이 푹푹 한숨을 내쉬던 그때.
마도구가 빛을 내기 시작했다.
아르덴에서 신호를 보내온 것이다.
"...!"
데릭은 다급히 조사대원들을 호출했다.
"아르덴에서...!"
대원들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쁜 것이겠지.
늦은 저녁,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날아오른 네 개의 인영.
그들은 CCTV와 블랙박스 등의 카메라를 피해 충남의 폐공장으로 날아갔다.
"오르바!"
데릭의 부름에 오르바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폐공장.
"서... 설마, 오르바 혼자서 아르덴으로 돌아간 건가?"
"제기랄!"
데릭은 주변을 둘러보다 미미한 마력을 감지했다.
가느다란 실처럼 이어진 마력의 흐름.
데릭은 그 흐름을 따라 걸어갔다.
이내, 구석진 작은 바위 아래에 숨겨진 A4용지를 발견했다.
"그건...."
글리코르의 목소리에 데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바가 남긴 메모다."
데릭은 접혀 있는 A4용지를 펼쳤다.
제123화
123화. 조사대 (3)
메모에는 게이트가 개방되고 5분 이상 유지되었다고 한다.
보고서를 아르덴으로 넘긴 다음 데릭의 일행을 기다린 오르바.
그는 게이트가 닫히기 시작하자, 메모를 남기고 아르덴으로 넘어갔다.
자세한 보고를 올리기 위해.
데릭을 포함한 조사대원들에겐 지구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도록 지시가 떨어졌다.
"다... 다시 돌아가야 돼?"
한 조사대원의 절망 어린 목소리에 데릭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어째서 약속된 시간에 게이트가 개방되지 않았던 거지?"
글리코르가 미간을 좁힌 채 의문을 보였다.
데릭은 A4용지를 건네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게이트 큐브에 문제가 생겼었다고 하는군."
게이트를 인위적으로 개방시키기 위한 마도구, 게이트 큐브.
오르바가 남긴 메모에 의하면 큐브 내에 설치된 수백 개의 회로 중 몇몇이 충돌을 일으켜 고장이 났었다고 한다.
"지구... 아니, 한국 시간으로 다음 달 저녁 8시 47분에 이곳에서 게이트가 개방된다. 그러니 정보를 수집해서 각자 보고서를 작성해 두도록."
"보고서라... 더 이상 보고할 게 남아 있나?"
3개월간 작성한 다량의 보고서들.
A4용지만 수천 장을 사용했을 것이다.
해당 보고서를 정독하면 지구에 대한 대략적인 부분은 금세 파악할 수 있겠지.
데릭은 조사대원들을 보며 쓰게 웃었다.
"우주에 대한 내용을 보고서로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다."
"우주... 확실히 행성이라는 개념은 정말로 엄청났지. 아르덴 역시 하나의 행성일 테니까."
데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와 아르덴이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기보다... 그래, 아주 먼 행성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만하지 않을까?"
데릭의 의문에 조사대원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르덴에서는 상상조차 해 볼 수 없는 가설이다.
하지만 지구의 기술력이라면... 아니, 아르덴과 지구의 기술이 하나가 된다면 해당 가설을 증명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만약 해당 가설이 증명된다면... 다른 행성을 탐색하기 위한 기술이 개발될 수도 있겠지."
데릭의 이야기는 허무맹랑하게 들렸지만, 보고서로서는 나쁘지 않은 주제였다.
"후우,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야겠군."
글리코르의 한숨 소리에 조사대원들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뭐, 어쩔 수 없지."
데릭의 일행은 깊게 한숨을 토하면서 곧바로 가구 공장으로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온 그들은 보고서 작성을 위한 주제를 선별했다.
"지식백과에 나와 있는 걸 복사해서 가져다 붙이면...."
잔머리를 굴리는 글리코르.
어차피 보고할 내용은 '지구에 대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좋았어!"
100페이지 보고서가 2~3시간 만에 작성됐다.
글리코르는 프린터기에서 인쇄되는 보고서를 보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보고서 작성이 이렇게 간편하다니!
수기로 작성하던 시절을 떠올려 봐라.
전투를 하는 것보다 더욱 끔찍했다.
"아르덴에도 컴퓨터가 보급된다면 정말 간편하겠어."
* * *
마계(魔界), 아르덴.
회색빛 머리카락과 콧수염을 지닌 노인 악마.
마왕성의 재상, 위르겐 G 세르비안 공작은 오르바의 보고 내용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정확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인족이 자신들보다 더욱 앞선 문명을 이룩했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러나 조사대원들이 준비해 둔 보고서의 내용... 나아가 노트북이라는 전자 기기를 통해 재생되는 영상 자료들은 재상을 비롯한 마계 귀족들의 의심을 거두게 만들었다.
"...아르덴의 인족들과는 차원이 다르군요."
재상의 중얼거림에 왕좌에 앉아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던 마왕.
루시퍼 K 베르젤드는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식량을 확보하는 데는 지장이 없겠지?"
오르바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예, 아르덴의 백성들에게 공급하기에는 충분한 양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급격한 기술의 발전으로 온난화라는 현상이 일어나 급격한 기후 변화가 초래되고는 있습니다만, 아르덴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루시퍼는 눈을 뜨며 붉은 안광을 반짝였다.
식량 확보에 문제가 없다면 길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
"지금 당장 귀족들을 소집하도록."
"알겠습니다."
재상은 다급히 마계 귀족들을 소집시켰다.
수도로 모이는 수천여 명의 귀족들.
그들은 게이트 큐브의 실험 내용을 듣고 화들짝 놀라야 했다.
차원과 차원을 연결하는 게이트를 마침내 만들어 낸 것인가!
모두가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실험이다.
수군수군.
대한민국 국회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대회의실.
마계 귀족들은 평소보다 더욱 시끄러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잠시 뒤, 귀족들의 대화가 멈추었다.
뚜벅, 뚜벅, 뚜벅.
구두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마왕, 루시퍼 K 베르젤드.
그는 단상 위 국회의장석처럼 마련된 왕좌에 착석했다.
그렇게 적막이 감돌던 도중 재상이 발언석으로 걸어갔다.
회의의 진행을 맡은 재상은 귀족들을 향해 회의가 개시되었음을 알린 뒤, 본제를 꺼내 들며 지구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허어, 인족 따위가 그 정도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로군."
"마왕께선 설마 저 이야기를 믿고 계신다는 건가?"
모두가 의심에 빠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인족이란, 아르덴에서 가장 열등한 종족이니 말이다.
코볼트 하나 상대하지 못하는 가축.
위르겐은 정사각형의 마도구를 작동시켜 노트북 화면을 허공에 띄웠다.
허공에 펼쳐진 거대한 홀로그램.
"흐음?"
귀족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중 위르겐은 묵묵히 노트북 영상을 재생시켰다.
귀족들의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영상들.
귀족들은 술렁임을 멈추고 멍하니 그것을 바라봤다.
지구에서 개발된 각종 재래식 무기들.
그중 핵 실험 영상은 귀족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저... 저게 무슨...."
"저런 무기가... 정말로 존재한다고?"
귀족들이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영상이 끝난 순간.
위르겐은 귀족들을 바라봤다.
"방금 보여 드린 핵폭발 실험 영상은 반경 수 킬로미터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체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고, 앞서 말씀드린 방사능 낙진 등으로 추가적인 피해를 일으킵니다. 물론, 핵을 보유한 국가는 9~10개국 정도로 확인되었지만, 대륙 간 탄도 미사일(ICBM)은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에 위치한 목표물조차 타격할 수 있다고 하니...."
웬만한 곳은 모두 타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위르겐의 설명에 회의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렇다고 핵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핵을 사용하는 경우, 환경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어 핵의 사용에는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핵을 비롯한 미사일 외에도 지구의 군대가 보유한 전차, 박격포, 전투기 등의 무기 역시 간과할 수 없습니다."
"지구의 존재들과 대화를 나눠 보는 것은...."
한 백작의 목소리에 모두가 인상을 찡그렸다.
인족 따위와 대화를 나눈다고?
그러나 위르겐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구에는 5~60억의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르덴에 존재하는 30억의 마족들이 이주하게 된다면... 아니, 그들뿐만이 아니죠. 마족들이 지배하는 마수들과 그 밖의 종족들까지 포함하면 지구 역시 식량 문제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귀족들은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지구에 5~60억의 인족이 살아가고 있다고?!
귀족들은 위르겐의 대답에 고개를 한 번씩 끄덕였다.
5~60억의 인구와 공존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럴 바에는 마수들을 병력으로 움직여 지구를 정벌하고, 생포한 인족들을 노동력으로 활용해 식량을 확보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렇군요."
의견을 낸 백작이 씁쓸히 웃었다.
"그럼, 계속해서 설명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구라는 세계에는 엘프, 드워프 및 아인종이 존재하지 않으며...."
지구로 파견한 조사대원들의 보고서를 짧게 정리하여 설명하는 위르겐.
귀족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면서 분위기는 점차 심각해져 갔다.
'...정벌이 생각보다 어려워지겠군.'
'이번 기회에 세금도 못 내는 기생충들을 대거 병사로 받아들여 전쟁에 투입시켜야겠어.'
'전공을 쌓아 지구에서 비옥한 영토를 얻어야 한다. 잘하면 작위를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귀족들은 호승심을 일으키며 각자 목표를 설정했다.
평화에 찌든 생활도 끝이다.
곧 세계 규모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때, 루시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귀족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전쟁을 준비하라! 게이트가 개방되는 직후, 아르덴은 지구를 향해 진군한다!"
귀족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들고 함성을 내질렀다.
아르덴의 오랜 골칫거리를 해결할 수 있는 날이 온 것이다.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루시퍼는 귀족들을 보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부디 내가 참전하지 않도록 해 주었으면 좋겠군."
루시퍼가 전력을 드러내는 순간.
지구 역시 아르덴과 같은 꼴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때문에 지구를 온전히 얻고자 한 루시퍼는 전쟁 초 몸을 움직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마계 귀족들은 루시퍼의 발언에 눈빛을 더욱 반짝였다.
루시퍼가 참전하지 않는다면 전공을 세울 기회 역시 많아질 터!
더욱이 지구에는 아인종과 드래곤 등, 강력한 종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경계해야 될 것은 지구인들이 보유한 무기와 헌터라는 존재들뿐.
"지구와 연결하는 게이트 큐브는 이미 개발되었다. 그러니 지구에 존재하는 각국의 좌표를 회수한 다음, 게이트를 반영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마석들을 모아 병력을 지구로 투입시킨다. 시기는 대략 3개월 뒤! 그동안 병력을 최대한 끌어모으도록!"
루시퍼의 명령에 귀족들의 발걸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몇몇 영지에서는 빈곤에 허덕이는 빈민들까지 끌어모아 머릿수를 채웠다.
지구에 존재하는 인족은 5~60억에 달한다.
분명, 어마어마한 숫자임에는 틀림없겠지.
하지만 전투가 가능한 인구는 1%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헌터의 숫자 역시 천만 단위에 이르나, 70% 이상이 하급 마족조차 상대하지 못하는 쓰레기들뿐.
"지구에 사는 인족에게는 마법에 대한 지식과 마도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미사일이란 무기는... 결계석을 사용하여 대규모 결계를 펼친다면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겠지. 또, 비행형 마수와 날 수 있는 마족들을 분산시킨다면 적에게 혼란을...."
귀족들은 위르겐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구를 정벌하기 위한 작전을 구상했다.
그렇게, 아르덴 전역에서 전쟁을 준비하던 그 시각.
게이트 큐브를 생산하는 데 박차를 가한 마왕성.
이어, 중급 마족으로 구성된 수십 개의 조사대가 지구로 투입됐다.
조사대의 임무는 지구에 존재하는 각국의 좌표를 확보하는 것.
새로이 투입된 조사대는 데릭의 일행이 작성한 것과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보고서 내용은...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군."
위르겐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주먹을 쥐었다.
"어떻게든 지구를 정벌해야 한다."
아르덴을 버리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화된 상태였다.
새로운 이주처를 발견했으니 말이다.
적들이 고도의 문명을 보유하고 있다고?
그것은 경계할 부분이면서도 반가워해야 할 부분이다.
자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그들의 문명을 모두 흡수할 수 있을 테니까.
아르덴의 기술과 지구의 기술을 접목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똑똑똑.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재상 각하, 마왕님께서 부르십니다."
시종장의 목소리에 위르겐은 정신을 되찾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지금 가지."
제124화
124화. 조사대 (4)
"정말 오랜만에 얼굴을 보네요. 강원도에서 대활약을 했다면서요?"
흑월 본부 1층 로비에서 마주친 제1군 대장, 김유진.
건혁은 그녀의 인사말에 작게 웃어 보였다.
강원도의 민간인 통제 구역들은 대부분 해제된 상태다.
B~S등급 게이트는 핵이 파괴되고, F~C등급 게이트는 헌터 협회에 의해 관리되는 중이다.
마석의 확보와 헌터의 육성을 위해 일정 게이트는 남겨 두는 것이 좋겠지.
유진은 건혁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망설임이 더욱 깊어졌다.
'너무... 멀어졌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고백을 주저하던 그녀는 고백하기 위한 조건을 내세웠다.
그의 동료로서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때.
그때 당당한 모습으로 고백을 하자.
그녀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새로운 특수 능력이 각성함과 동시에 서열이 7천대까지 올라선 것이다.
'세실리아는 3천대에 들어섰다고 하던데....'
김지수라는 연적은 사라졌다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안심할 순 없었다.
나이 차를 들먹이며 그럴 리 없다 생각했던 세실리아가 건혁에게 호감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막강한 연적의 등장에 유진은 살짝 초조해졌다.
'고백하자. 그래, 이번에야말로 고백하겠어.'
작년의 결심대로 올해가 끝나기 전에 반드시 마음을 전하고자 결정을 내린 유진.
아니, 그냥... 지금 이 자리에서 전해 봐?
"흐음?"
생각이 너무 길어진 탓일까?
건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진은 건혁과 눈을 마주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조금 그렇겠지?'
건혁이 결정을 내리는 데에도 부담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이 오가는 로비 한가운데에서 당당히 고백할 수 있는 용기 따윈 그녀에게 없었다.
"어... 저번에 중국과 일본에서 의뢰가 들어왔다고 들었어요."
"예, 중국이랑 일본은 내년 초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1~2개월은 조금 쉬면서 국내의 민간인 통제 구역이나 돌아다녀 보려고요. 아 참, 12월 중에 1군을 데리고 S등급 게이트에도 한번 들어가 봐야겠네요. S랭크 마수를 두 눈으로 보는 것도 나름 좋은 경험이 될 테니까요."
"그건...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유진은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평균 서열 2만대로 구성된 흑월의 제1군이 S등급 게이트에 들어간다니.
S등급 게이트에는 S랭크도 S랭크지만, B~A랭크 마수들이 바글거릴 것이다.
"물론, 제 마음대로 결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1군 멤버들도 언젠가 S랭크 마수들과 싸우게 될 테니, 한 번쯤 봐 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유진은 SNS에서 본 건혁의 전투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건혁의 골렘이라면 사상자가 발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S랭크 마수를 직접 보는 것 역시 길드원들에겐 큰 도움이 되겠지.
"일정은 나중에 조율하기로 하고, 슬슬 마스터실로 올라가 봐야겠네요. 처리해야 할 업무가 조금 있어서요."
"아, 제가 너무 붙잡고 있었네요. 그런데...."
"예?"
"다음에 수영이 얼굴 좀 볼 겸 자택에 방문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수영이도 분명 기뻐할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유진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건혁의 뒷모습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래 건혁의 자택을 제집 마냥 들락거리는 세실리아.
수영과 언니, 동생 하는 모습을 볼 때는 기분이 살짝 미묘했다.
'그래, 세실리아는 언니일 뿐이겠지. 나라면... 수영이한테 좋은 엄마가 되어 줄 수 있어.'
유진은 살짝 주먹을 쥐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본부 최상층으로 올라간 건혁은 마스터실에 들어가자마자 의자에 앉아, 책상에 놓인 결재 보고서들을 확인하며 최종 결재란에 서명을 했다.
이어, 헌터 협회에서 보내온 메일을 확인하고, 직접 답변 메일을 작성해 송신했다.
업무가 조금씩 마무리될 무렵.
건혁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후우, 한동안은 느긋하게 좀 보내고 싶네."
스테이터스 레벨은 300대를 돌파한 지 오래다.
레벨이 300에 도달하면서부터 레벨 업을 할 때마다 얻는 AP가 3으로 증가했다.
또, 새로운 스킬을 얻는 대신 '어빌리티 포인트(AP)+1,000'이라는 항목을 선택해 마력을 대폭으로 높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건혁의 스테이터스는....
------------------------
*성명: 박건혁
*종족: 인간
*칭호: 빙마군주(氷魔君主)
*출신 국가: 한국
*LV: 302
*근력: 90(+5)
*민첩: 100(+5)
*체력: 100(+5)
*마력: 1915(+300)
*AP: 0
*스킬: [빙마검(氷魔劍)-LV10] , [얼음 골렘 소환-LV10], [마력 회복-LV9], [성장 촉진]
------------------------
...이러했다.
"단번에 21기의 용기사 골렘을 소환할 수 있으니, S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도 하루... 아니, 이틀 정도면 가능하겠지."
물론, 카메라 앞에서만큼은 최대한 많은 숫자의 골렘들을 소환했다.
일종의 퍼포먼스랄까?
대열을 이루며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는 기사 및 정예 기사 골렘들.
그 주변에 배치된 용기사와 거인 골렘들까지.
건혁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빙마군주라는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하지만....
"크윽...."
SNS에 올라온 영상과 사진을 확인한 그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댓글의 반응은 나쁘지 않다.
오히려 긍정적인 댓글로 가득하다.
단지, 새로운 흑역사가 만들어진 것 같은 기분에 부끄러움이 몰려들 뿐.
건혁은 SNS를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업무를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1~2시간 정도.
그는 마스터실을 나와 지하 주차장에 주차된 세단을 타고 집으로 귀가했다.
* * *
"다녀오셨어요."
건혁을 마중해 준 것은 저택을 관리해 주는 40대의 가사 도우미, 박예정이었다.
저택을 관리하며 2~30대 가사 도우미들을 지휘하는 총책임자.
그녀는, 피곤해하는 건혁의 얼굴을 보면서 곧바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어쩜 나이가 들수록 더 멋있어지시는 거 같네. 젊은 애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겠어.'
신장 186cm, 넓은 어깨, 뚜렷한 이목구비, 오뚝한 콧날까지.
완벽한 비율과 외모에 성격까지 바르다고?
더불어 매달 1천억 원 이상의 수입을 자랑하는, 말 그대로 걸어 다니는 중소기업이다.
'어휴, 우리 남편이 건혁 씨의 절반... 아니, 반의반이라도 닮았더라면....'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면서 30대 가사 도우미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준비한 뒤, 휴게실로 들어가 탕비실에 마련된 커피 머신으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뽑았다.
저택에는 고용인들을 위한 숙실, 휴게실, 탕비실 등의 시설들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17년간 가사 도우미로 활동한 예정조차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복지 환경이었다.
"정말, 월급도 빵빵하고 복지도 훌륭한 데다가 저희처럼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숙실까지 제공해 주니... 이렇게 좋은 일자리가 또 어디에 있겠어요."
30대 가사 도우미, 수미의 이야기에 청소를 마치고 돌아온 20대 가사 도우미들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사장님께서도 정말 좋으신 분이시잖아요. 따님... 아니, 아가씨한테도 엄청 다정하시고...."
건혁을 '사장님', 수영을 '아가씨'라고 부르는 가사 도우미들.
"예전에 근무했던 곳에서는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었는지.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끔찍해 죽겠어요. 매번 쓸데없는 심부름이나 시켜 대고, 욕설과 같은 폭언에 짜증까지 부려 대니... 어휴! 월급을 여기처럼만 줬었어도 참았을 텐데...."
"에이, 여기처럼 월급을 주는 곳이 어디 있겠어요?"
"월급만 듣고 달려든 가사 도우미가 거의 800명이 넘었었죠? 서류에, 면접까지 합격했을 때는 무슨 대기업에 입사한 것처럼 좋아했었는데...."
"식사랑 숙실 제공에, 월급도 5~600만 원에다가 특별 수당에 유급 휴가, 퇴직 급여까지... 이 정도면 대기업 아닌가요?"
"오호호호, 그것도 그러네요."
저택이 넓기는 하지만, 인원이 인원인 덕분일까?
가사 도우미들은 어렵지 않게 저택을 관리할 수 있었다.
거기에 휴식 시간도 충분히 주어지며, 경력에 따라 급여도 높아지니, 말 그대로 최고의 근무지라 할 수 있겠지.
가사 도우미들이 옹기종기 휴게실에 모여 대화를 나누던 시각.
건혁은 서재에서 컴퓨터 전원을 켰다.
"오늘은... 골드로 올라간다."
2005년에 출시된 국민 FPS 게임.
매 시즌마다 골드와 실버를 오가던 건혁은 수영이 귀가하기 전까지 게임을 즐기면서 감탄사와 투덜거림을 반복했다.
마침내 승급전이 시작됐다.
2번의 전투에서 1승만 거두면 승급하는 상황.
"이런... X! 무슨 맵도 몰라!?"
2번 모두 패배한 건혁은 머리를 감싸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골드'라는 거대한 장벽에 부딪힌 것이다.
그는 답답한 심정에 테라스로 나가 바람을 쐬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찬 바람이 그의 얼굴을 감쌌다.
"후우, 저녁에 수영이랑 랭크전 좀 돌려야겠다. 골드는 만들어 놔야지."
찬 바람을 쐬며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던 건혁은 조용히 서재로 들어갔다.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가는 하루.
그 하루가 지날수록 수영은 가파른 성장세를 보여 주었다.
"허어...."
건혁은 컴퓨터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수영의 서열이 마침내 유진을 뛰어넘은 것이다.
백월에 소속된 학생들 역시 눈에 띄는 성장세와 함께 세간을 놀랍게 만들었다.
"이 정도까지 빠르게 성장할 줄은 몰랐는데...."
백월에 소속된 학생들 역시 소설 속 인물들보다 더욱 빠른 성장력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정도면 원작보다 훨씬 나은 거 아닌가?
"재능이란 게 참... 무섭네."
수성고등학교... 아니, 수성중학교에 입학시켰던 것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원작이 중간에 중단된 만큼 조연들이 어떠한 재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들 역시 주의 깊게 살펴보며 지원을 해 줘야겠지.
상황이란 게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렇게, 추위가 강해지며 12월에 접어들었다.
건혁의 집을 빈번히 찾아오는 유진과 세실리아.
"수영아, 이번에 학교에서...."
"저번엔 C등급 게이트를...."
두 여인은 수영에게 과할 정도의 관심을 보였다.
'...언니들도 정말 고생이네.'
수영은 두 사람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모친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녀를 잊을 수 있을 리는 없겠지.
스윽.
수영은 세실리아와 유진을 살폈다.
'이 두 사람이라면... 분명 아빠의 곁을 지켜 줄 수 있을 거야.'
철옹성이나 다름없는 부친을 향해 몇 년 동안 일편단심의 마음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아빠의 외모와 재산에 빠진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은 해소된 지 오래다.
수많은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의 인성을 살펴본 결과.
무작정 외모와 재산만을 보고 호감을 가진 게 아님을 깨달았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이 재산에 구애받을 필요도 없잖아.'
두 사람은 흑월 제1군에 소속된... 그것도 서열 1만대 안에 드는 헌터다.
몇 년간의 생활을 살펴보면 두 사람이 의외로 검소하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돈벌이에 비해 검소하다는 의미다.
'우리 아빠는 짠돌이 수준이고.'
금년, 부친이 사용한 지출을 떠올려 보자.
아마 지출의 대부분이 길드를 위한 추가 예산일 것이다.
그 밖의 큰 지출이라고 한다면....
어려운 형편에 놓인 각성자들에게 지원해 준 걸 뽑을 수 있으려나?
뭐, 기부액도 엄청나지.
그로 인해 흑월의 이미지는 거의 정상을 찍고 있었다.
제125화
125화. 침공 (1)
수영은 작게 웃으면서 눈앞의 두 여인을 바라봤다.
서로 눈치를 살피는 걸까?
두 사람은 최대한 말을 아꼈다.
"언니들, 잠깐 내 방으로 따라올래?"
결국 수영은 사랑의 큐피드 역할을 하기로 결심했다.
유진과 세실리아를 향해 철벽을 치는 부친.
관계는 진전이 없었다.
물론, 그 모습이 기쁘기도 했다.
세상을 뜬 모친을 향해 올곧은 사랑을 보여 주고 있는 거니까.
10년이 지났음에도 그 모습은 변치 않았다.
하지만, 그런 부친을 볼 때마다 수영은 가슴이 아려 왔다.
유진과 세실리아를 거부할 때마다 보이는 죄책 어린 모습.
'엄마도... 분명 아빠의 행복을 바라고 있을 거야.'
새로운 사랑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른다.
유진과 세실리아가 진심을 담아 고백했을 때.
부친이 거절한다면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결정하든 그건 당사자들의 마음이니까.
덜컥.
침실로 들어온 수영은 작게 웃으며 두 여인을 바라봤다.
"두 사람, 우리 아빠 좋아하고 있지? 연애적인 감정으로 말이야."
수영이 씨익 웃으며 직설적으로 묻자, 유진과 세실리아의 어깨가 살짝 움찔거렸다.
"이제, 슬슬 결판을 내야 할 때가 아닐까?"
수영의 발언에 유진은 놀란 표정을 가다듬고 잠시 눈을 감았다.
세실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진보다 건혁을 좋아했던 시간이 더 짧다는 이유도 있지만, 마족에게 있어 몇 년이라는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100년을 살아야 성인이 되는데, 고작 몇 년이 대수일까?
때문에 수십 년 동안 공을 들여서라도 건혁의 마음을 얻어 내고자 했다.
그러나 초조해 보이는 유진의 모습에 세실리아는 '아차' 하며 입을 작게 벌렸다.
'...마족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되었었구나!'
헌터라는 존재가 장수를 한다곤 하지만, 그래 봐야 일반인보다 수십 년 정도 더 살 뿐이다.
그렇다면 인족에게 몇 년이란 분명 긴 시간일 터.
세실리아는 주먹을 쥐면서 미간을 좁혔다.
'만약 아르덴이 지구를 침공해 온다면... 비약을 가져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과거 한 괴짜 귀족이 수많은 인족을 병사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 낸 물약.
육체를 마족에 가깝게 변형시키고, 수명을 몇 배로 늘려 주며, 젊음까지 보장해 주는 비약으로, 인족을 비롯해 아인족까지도 마족에 가까운... 반마(半魔)로 만들어 준다.
'인족은 대부분 불로장생이라는 걸 꿈꾸며, 영원한 젊음을 바란다고 하던데....'
건혁은 과연 어떨까?
세실리아가 고민하던 사이.
유진이 눈을 뜨고 수영을 바라봤다.
"그래, 슬슬 제대로 된 고백을 해야지. 거절을 당하더라도... 몇 년 정도는 더 도전해 볼 생각이야. 헌터는 남들보다 더 오래 살면서 젊음을 유지한다고들 말하잖아."
"하긴...."
70대 중반으로 향하는 정윤호조차 여전히 40대 정도로 보이는 수준이다.
또, 정윤호의 경우에는 각성한 연령대와 한계점에 도달한 시기로부터 2~30대의 젊음을 유지할 수 없을 뿐.
박건혁과는 상황이 다르다.
"우리 아빠 얼굴이 40대는 아니지."
"20대 초반이라고 말해도 믿을걸?"
수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아, 잘하면 동생도 볼 수 있는 건가?"
수영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유진이 어깨를 살짝 움찔거리면서 헛기침을 했다.
유진과 건혁의 미래가 결정된 듯한 상황.
세실리아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주먹을 쥐었는데.
그것을 본 수영이 팔짱을 꼈다.
"세실리아 언니는 어때? 언니는 올해로 24살이잖아. 우리 아빠는 41살이니...."
수영이 말끝을 흐리자, 세실리아는 침을 삼켰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실제 나이를 황급히 삼켜 버린 것이다.
"나... 나이 차는 상관없다고 생각해."
"17살이나 차이가 나는데도?"
세실리아는 작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17살이 아니라 79살 차이긴 하지만....'이라 생각하며 말이다.
"아무튼, 나이 차는 상관없어. 유진 언니의 말대로 헌터는 오랫동안 살 수 있잖아?"
유진과 언니, 동생의 관계까지 발전해 나간 세실리아.
처음에는 '언니'라는 호칭에 살짝 거부감이 일었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아이에게 언니라고 불러야 한다니!
그러나 연령을 속이고 있는 이상, 호칭에 대한 부분은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이 차가 17살이나 나는데...!"
"17살 차가 뭐 대수인가요?"
유진과 세실리아가 살짝 신경전을 벌였다.
수영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박수를 쳐 주의를 끌어당겼다.
여기서 싸워 봐야 아무런 이득도 없으니까.
게다가 두 사람은 흑월의 주요 전력이다.
괜히 싸우게 만들었다가 흑월에 문제가 생긴다면, 이 자리를 마련한 자신의 책임이 되겠지.
"두 분의 고백을 받는다면 아빠는 분명 제 의사를 물어보겠죠."
그건 유진과 세실리아도 예상하고 있었다.
"저는 두 분 모두 아빠를 지탱해 주실 수 있으리라 믿고 있어요. 그러니, 선택은 아빠한테 맡길 생각이에요."
수영은 두 사람에게 합격 판정을 내렸다.
더 이상 자신의 결정에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다.
이제 남은 건 당사자인 박건혁의 결정뿐.
"고백은 언제쯤에...."
"크리스마스 이전에는 할 생각이야."
유진의 대답에 세실리아는 놀람을 감추면서 최대한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두 사람의 결심을 확인한 수영은 따뜻한 미소와 함께 둘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응원할게요."
유진과 세실리아는 살짝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설마, 수영에게서 응원을 받게 될 줄이야.
'정말... 많이 컸어.'
수영을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 온 탓일까?
두 사람은 그녀의 성장에 푸근한 미소를 보이면서 한 번씩 껴안아 주었다.
이내, 유진이 세실리아를 바라봤다.
"건혁 씨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서로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하자."
"포기하지 않는다면서요."
"우리 둘 다 선택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재도전을 해 봐야지."
생긋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에 세실리아는 아쉬움을 느꼈다.
'이곳이 아르덴이었다면....'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가 허락되는 세계, 아르덴.
물론, 해당 제도가 '귀족'이라는 신분에 제한되긴 하지만, 반마(半魔)일지라도 박건혁 정도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누구 하나 손가락질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수많은 여성 귀족들이 건혁에게 달라붙으려 하겠지.
힘을 절대적으로 여기는 세계이니 말이다.
'만에 하나... 그래, 만에 하나 루시퍼가 마스터에게 쓰러진다면....'
건혁을 아르덴의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할 수 있지 않을까?
두 세계의 기술력이 합쳐진다면 아르덴의 기상 이변을 대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스터가 마왕의 자리에 관심이 없다면, 내가 마왕비가 되어 아르덴을 관리하면 돼!'
상상만으로도 흥분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미래였다.
건혁의 능력이라면 반발하는 영주들조차 순식간에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
용기사 골렘은 그만한 힘과 기동력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야.
하지만.
"후우...."
그녀는 밝은 미래에도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 미래의 앞에는 거대한 장벽이 우뚝하게 서 있으니 말이다.
마왕 루시퍼라는 장벽이.
"이제 거실로 나가요."
세실리아는 수영의 손길을 따라 거실로 나갔다.
"어라? 아빠는...."
"방금 서재에서 통화를 나누고 계셨어요."
30대 가사 도우미의 말에 수영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유진과 세실리아를 데리고 거실 소파에 앉은 수영.
그렇게 세 사람이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수다를 떠들 무렵.
건혁이 계단을 내려왔다.
"이제 저녁 시간인데... 괜찮다면 같이 먹도록 할까요?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이쪽 태블릿에서 골라 보세요."
벽걸이 거치대에 설치된 18인치 태블릿.
유진과 세실리아는 먹고 싶은 메뉴와 디저트를 선택했다.
그동안 수영과 건혁은 스마트폰을 사용해 음식을 골랐는데.
배달 음식을 주문한 것이 아니다.
해당 주문은 주방에 설치된 태블릿으로 전달되어 주방장의 손에 의해 직접 만들어졌다.
"우와, 정말 맛있겠네요."
유진의 감탄에 세실리아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식, 중식, 일식, 양식에 대한 자격증과 5성급 호텔에서 근무한 경력을 보유한 주방장.
실력 하나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디저트조차 고급 카페에서나 볼 법한 데코레이션이 되어 대령됐다.
"이건... 정말 먹기 너무 아깝네요."
유진이 스마트폰을 꺼내 디저트를 사진으로 담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네 사람은 디저트를 즐기며 대화를 나누었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곗바늘.
유진과 세실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정말로 즐거웠어요."
"수영아, 다음에 또 언니랑 놀자~"
콜택시를 타고 돌아가는 두 사람.
떠들썩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건혁은 슬쩍 수영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빠랑 서X어X 랭크전이나 돌릴까? 이번에 다시 실버로 떨어져서...."
"저번에 골드까지 올리고 랭크전 안 돌린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 퀘스트로 랭크전을 돌리라고 하더라고. 아빠는 꽤 무난하게 했었거든? 근데 팀 운이 너무 나빠서...."
수영의 티어는 '레전드'.
랭크전 최고 등급이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며 미소를 지었다.
"어휴, 알겠어."
건혁과 함께 랭크전을 돌리기 위해 만들어 둔 부계정.
그녀는 일부러 실버까지 떨어트려 둔 계정으로 접속해 건혁과 함께 2~3시간 동안 게임을 플레이했다.
* * *
순식간에 지나간 평화로운 일상.
수성고등학교는 마침내 겨울 방학을 맞이했다.
수영이 길드원들과 방학 일정을 조율하던 그 시각.
건혁은 유진의 부름에 본부 옥상으로 올라갔다.
"길드 마스터를 옥상으로 부르다니...."
1군의 대장이라면 그 정도 위치는 되려나?
덜컥.
"뭐야, 세실리아도 같이 있었네?"
"네, 저도 마스터한테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건혁은, 유진과 나란히 서 있는 세실리아의 대답에 몸을 살짝 움찔거렸다.
무언가 각오를 한 듯한 목소리.
유진 역시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설마....'
그동안 물 흐르듯 흘려 넘겼던 것을 꺼내려는 건가?
'유진 씨도 유진 씨지만... 세실리아는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호감을 느낀 거지?'
건혁은 쉬이 입을 떨어트리지 않았다.
고백을 한다고 결정된 것도 아니잖아.
만약 혼자만의 착각이라면 분명 흑역사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빛은... 이미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하아...."
죄책감에 아려 오던 가슴도 지금은 많이 가라앉았다.
죽은 아내에 대한 기억을 잊은 건 아니다.
그 기억을 어떻게 잊어.
이미 심장에 박혀 있는데.
하지만 재혼에 대한 가능성은 충분히 열어 둘 생각이다.
전생인 '신무영'으로서 경험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조금씩 채워 나가기 위해.
'물론, 수영이가 재혼을 반대하면... 그땐 어쩔 수 없는 거고.'
건혁은 손바닥이 축축해진 것을 느꼈다.
이런 긴장감을 느낀 게 도대체 얼마 만이지?
전투할 때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을 거다.
건혁의 쓴웃음에 유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알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각오가 무뎌지기 전에 내뱉어야 한다.
자신의 진심을.
"저는 오래전부터...!"
그녀가 상체를 내밀며 고백을 하려던 순간.
투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
돌풍이 몰아치자 세 사람은 재빨리 자세를 낮추었다.
일원동 방향에서 검은 연기가 올라온다.
이어, 가락 시장 방향에서... 문정동 방향에서... 아니, 사방에서 굉음이 일어났다.
제126화
126화. 침공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