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101화. 수성고등학교 (1)
"...많이들 왔네."
전 세계의 시선이 집중된 와중 건혁은 수많은 길드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받았다.
한 번쯤 들어 본 듯한 유명한 길드들이다.
건혁은 그들의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그들의 제의를 받을 바에는 화랑에 들어가고 말지.
한편, 흑월의 새로운 본부가 될 건물이 수서역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과거 구룡산 레이드로 인해 크게 파손된 빌딩.
건혁은 해당 빌딩을 매입하여 기존 건물을 헐고, 허가를 받아 10층 빌딩을 새로이 지었다.
정확히는 짓는 중이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너무 긴장하지 말고."
수성고등학교에서 치러지는 입학시험.
신입생의 숫자는 500명으로 정해져 있다.
약간의 예외는 존재하나, 원칙은 500명으로, 필기시험 40%, 인성 시험 10%, 실기 시험 50%의 점수 비율로 총점을 매겨 순위를 나눈다.
필기시험이 진행되는 교실.
입학시험을 치는 학생 전원이 각성자다.
"...."
오전 3시간 동안 진행된 5과목의 필기시험.
수성중학교에서 매년 전교 1등을 해 온 덕분일까?
수영은 특별히 막히는 부분 없이 여유롭게 필기시험을 끝마쳤다.
그리고 건혁이 준비해 준 도시락을 먹은 후, 13시부터 14시까지 인성 시험을 치렀다.
말 그대로 가벼운 마음으로 문제를 풀었다.
"이제 마지막이네."
수영이 제2 훈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체육관처럼 보이는 거대한 건물.
내부는... 체육관 그 자체다.
바닥과 벽이 마력으로 코팅되어 있을 뿐.
"수영아!"
번호표를 받고 줄을 선 민아가 수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민아의 목소리가 너무 컸던 걸까?
수영과 민아에게 수많은 시선이 집중됐다.
"하아, 저 애는 정말...."
어떻게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변하질 않는 걸까?
시현의 경우에는 성숙한 외모로 침착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반면, 민아는 여전히 활발하다.
수영이 쓰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이내 수영도 번호표를 받아 줄을 섰다.
'정말로 각성 능력 검사를 받네.'
수영은 살짝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의 자신은 과연 얼마나 강해져 있을까?
1회차의 전성기보다는 확실히 뒤떨어지겠지.
그래도 3~4만대 서열까지는 기대해 볼 만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왕이면 헌터증까지 발급해 주면 좋을 텐데....'
수영은 아쉬운 얼굴로 검사실 쪽을 바라봤다.
검사실을 나온 수험생들은 교사들로부터 무언가를 듣게 되었는데.
각성 능력 점수에 대해 알려 주는 모양이다.
점수를 듣게 된 수험생들의 얼굴은 희비가 갈라졌다.
"다음 수험생, 검사실로 들어오십시오."
수영은 천천히 검사실로 들어갔다.
잠시 뒤, 스피커에서 나와도 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사는 깜짝 놀란 얼굴로 모니터에 기록된 점수를 수영에게 말해 주었다.
"1,893점... 역시라고 해야 될지... 이 정도면 2만대 서열을 받을 수 있겠네요."
"아...."
"신입생 중에서 이 정도의 점수를 받았던 학생은 아마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교사는 작게 헛웃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아 참, 박수영 수험생은 특수 능력을 발현하셨나요?"
"네."
"어떤 능력인지 설명해 주세요."
수영은 자신의 능력을 짧게 설명해 주었다.
"그렇군요. 이제 평가장으로 가시면 됩니다."
바로 옆에 위치한 평가장에서는 10명의 교사들이 의자에 앉아, 수험생들이 준비한 무술과 특수 능력을 살펴보며 체크리스트에 점수를 적었다.
30초 동안 2m 높이의 목각 인형에 공격을 가하는 수험생들.
수험생 1인당 교사 2인이 붙어 평가를 진행했다.
한 수험생이 목소리를 높이며 교사에게 무언가를 애원하고 있다.
화려한 기술을 보여 주려다가 그만 제한 시간을 넘긴 모양이다.
'곧바로 부숴 버렸으면 조금이라도 점수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제한 시간을 넘긴 수험생은 0점으로 처리된다.
수험생은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교사들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영은 제3 평가장으로 걸어갔다.
교사는 테이블에 놓인 태블릿을 가리켰다.
30초 타이머가 준비된 태블릿 PC.
"자신이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30초 안에 보여 주십시오. 또, 30초 안에 목각 인형을 50% 이상 파괴하지 못하면 0점으로 처리되니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수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오른손에 빙마궁을 소환했다.
교사는 덤덤한 얼굴로 태블릿을 향해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교사의 발언과 동시에 수영이 두 개의 화살을 시위에 걸쳐, 목각 인형을 향해 발사했다.
파각!
목각 인형의 두 팔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이어, 인형의 발밑으로 하나, 허공으로 하나를 쏘았다.
푹!
화살이 바닥에 꽂힌 순간.
인형의 다리가 바닥과 함께 얼어붙었다.
이어, 허공에 쏘아 올린 화살은 인형의 정수리를 꿰뚫었다.
저게 만약 사람이었다면 두개골을 부수고 뇌를 타격했겠지.
"후우...."
끼릭.
수영은 최후의 일격을 가하겠다는 듯 화살에 마력을 실었다.
교사들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자신들조차 방심할 수 없는 농후한 마력.
16세의 여학생이 보여 줄 수 있는 힘이 아니다.
퉁!
화살이 목각 인형을 향해 날아갔다.
푸욱!
인형의 가슴에 화살이 박혔다.
그때.
퍼엉!
인형의 가슴에서 거대한 얼음 조각들이 튀어나왔다.
산산조각 나 버린 목각 인형.
수영은 밤송이처럼 가시가 돋친 얼음덩어리를 보며 활을 내렸다.
남아 있는 시간은 3초.
얼음덩어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교사는 화들짝 놀라면서 태블릿을 바라봤다.
"제... 제가 실수로 Stop을 누르지 못했네요. 제한 시간 내에 통과하신 걸로 처리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험생을 비롯한 훈련장 내의 교사 전원이 수영을 바라봤다.
이제 막 중학교를 졸업하려는 청소년이 베테랑과 같은 실력을 보여 준다고?
또, 제한 시간에 맞춰야 된다는 부분은 분명 학생들에게 압박감을 심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영은 여유로운 얼굴로 시험을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중년 교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설마, 저 아이가...."
옆에 서서 침을 꿀꺽 삼킨 젊은 교사.
"그래, 이번에 세계 랭킹 1위에 올라선 박건혁 헌터의 딸이겠지."
"부... 부녀가 쌍으로 괴물이네요. 게다가 박건혁 헌터와 같은 얼음 속성의 능력을...."
"이번엔 왜 이렇게 재능 많은 학생들이 많은 건지 모르겠네. 제1 훈련장에서는 김수호의 막내아들이 시험을 보고 있다면서?"
"예, 심지어 대한민국 11대 길드에 든 정의(正義)와 골드캣(Gold Cat) 마스터의 자녀들도 함께 보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11대 길드에서 1군으로 활동하는 헌터들을 부모를 둔 수험생들도 꽤 많다고 하더군요. 거의 역대급이라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이 바로 박수영이라는 여학생이다.
세계 최강의 헌터라 불리는 박건혁의 딸.
그녀가 박건혁의 DNA를 물려받았다면....
물론, 각성 능력이 유전에 따르는 건지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단지, 정윤호의 아들인 정재혁의 성장세를 보고 기대를 할 뿐.
'어린아이에게 너무 기대를 거는 것도 조금은 문제가 되겠어.'
수영이 부담감에 못 이겨 일탈을 저질러 버릴지도 모른다.
'학생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자신들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 주는 게 우리들의 일이다.'
중년 교사는 초심을 되찾듯 무언가를 다짐했다.
* * *
입학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귀가한 수영.
거실에서 TV를 보던 건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시험은 어땠어?"
"으음, 크게 실수한 부분은 없었던 거 같아."
"다행이네. 어서 손부터 씻어."
"냉장고에 음료수...."
"아까 나가서 사다 뒀어."
수영은 손을 씻은 뒤, 냉장고에서 오렌지주스를 꺼냈다.
이어 주스로 목을 축인 다음, 거실 바닥에 앉아 턱을 괸 채 TV를 바라봤다.
시험 결과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떨어진다고 한들 일반고에 진학하면 될 뿐.
물론, 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을 거다.
필기시험은 크게 어렵지 않았고, 인성 시험도 무난하게 마무리했으니까.
더욱이 실기는 제한 시간에 맞춰 능력을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떨어지게 된다면 외부로부터 압박이 가해졌다고 의심해 봐야겠지.
"아빠, 과일 같은 거 없어?"
"사과라도 깎아 줄까?"
"으음...."
"아니면 귤이랑 딸기도 있는데."
"아, 딸기 먹고 싶어!"
건혁은 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전에 사다 둔 딸기를 깨끗하게 씻어 접시에 담아 거실 테이블에 대령해 주었다.
수영은 TV를 보면서 딸기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익숙하면서도 평화로운 일상.
두 사람은 TV를 보는 와중에도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 앞에 길드 본부를 짓는다고 했었지? 인터넷에서 수서역 집값이 치솟고 있다면서 한바탕 난리던데... 아니, 각성 능력 검사를 받은 이후부터였나?"
대한민국 헌터 서열 1위임과 동시에 세계 헌터 랭킹 1위가 거주하는 지역.
많은 국민들은 수서동의 치안과 안전이 높아졌다고 느꼈다.
그로 인해 청룡 기사단 지부가 생길 때보다 큰 폭으로 집값이 치솟으면서 수서동 주민들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는 모양이다.
"16억에 거래되던 아파트가 지금은 35억대에 거래된대."
수영의 이야기에 건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수서동에 흑월의 길드 본부가 생긴다는 것만으로 집값이 오르지는 않으리라.
왜냐고?
흑월에 소속된 헌터들의 서열을 한번 생각해 보자.
아마 그들의 영향은 미미할 것이다.
결국, 집값 상승의 원인은 박건혁 한 명의 영향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년이면 헌터증도 발급받을 수 있는데... 정말로 길드 만들어 봐도 괜찮아?"
"그래, 한번 하고 싶을 때 해 봐야지. 누가 알아? 고구려보다 대단한 길드가 될지."
"에이, 고구려를 따라잡으려면 수십 년은 더 걸릴걸?"
건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수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빠는 슬슬 들어가 볼게. 길드 건으로 처리해야 될 일도 있고 하니까."
건혁은 방으로 들어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 * *
흑월의 게시판에 올린 신입 모집 공고.
지원자는 며칠 만에 3~4만 명을 넘겼다.
덕분에 지원서를 확인하는 데에만 거의 한 달여가량의 시간이 소요됐다.
지원자 대부분은 4~50만대 서열로, 그동안 짐꾼으로 활동했던 자들이다.
그중에는 1~30만대 서열의 헌터들도 간혹 눈에 들어왔다.
"정말... 많기는 엄청 많네요."
"서열이 10만대 안에 든 헌터들만 1백 명에 달해요. 이 사람들만 들어와도 분명 길드 서열은 크게 상승할 거예요."
"지원서의 7~80%는 짐꾼 경력이 존재하는 헌터들인데... 그중에는 헌터들과 소송을 벌였던 사람들도 꽤 많이 포함되어 있어요.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탓에 일자리를 잃었던 사람들이겠죠."
"후우, 최대한 정리를 한 게 이 정도라니...."
"일단, 열심히 줄여 보죠. 전부 받아들일 순 없잖아요. 어차피 내년에도 2차 모집 공고를 올릴 텐데...."
새롭게 편성된 흑월의 간부들은 긴 회의를 통해 인원을 1천 명까지 줄였다.
'아무래도 인사팀을 따로 꾸려 봐야겠어.'
지원서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은 건혁.
그렇게 지원서를 정리하고, 면접 날짜가 정해질 무렵.
건혁은 수영과 함께 헌터 협회 서울 중앙 본부를 찾아갔다.
"어...?"
건혁의 얼굴을 알아본 걸까?
헌터들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자, 수영이 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
제102화
102화. 수성고등학교 (2)
"이...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직원의 태도가 너무나도 정중하다.
임원급 상사를 대하듯이 말이다.
그에 살짝 뿌듯한 표정을 지은 수영이 검사실로 들어갔다.
검사 결과는 수성고등학교에서 측정된 점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897점.'
서열로는 대략 26,000대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검사관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수영을 바라봤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될 아이에게 이 정도의 수치가 측정되다니!
17세의 평균 각성 점수를 고려하면 수영은 말 그대로 천재 중의 천재였다.
'이거, 제대로 주목받겠는데?'
검사관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검사실을 나오는 수영에게 각성 점수를 알려 주었다.
검사 결과를 듣게 된 수영은 곧바로 헌터증 발급을 신청했다.
지난달 1,897점을 받은 헌터와 똑같은 서열을 부여받게 된 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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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수영
*출신 국가: 대한민국
*서열: 26,483위
*등록일: 2024. 0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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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손에 들어온 헌터증.
수영은 배시시 웃으면서 건혁에게 달려가 자신의 헌터증을 보여 주었다.
건혁은 감탄사를 흘리면서 수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단한데? 이 정도면 금세 아빠도 따라잡겠어."
"아빠는...."
수영은 대답을 멈췄다.
S랭크 마수를 가볍게 쓰러트리는 것도 모자라, 알렉스 브라운을 뛰어넘은 그 힘을... 과연 자신이 따라잡을 수 있을까?
"응, 못 따라잡을 거 같아."
수영은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불가능한 건 불가능한 거다.
물론, 노력은 해 봐야지.
하지만 1회차 전성기 시절을 떠올려 보면, 부친과의 격차는 더욱 실감 나게 느껴졌다.
'차라리 정윤호를 뛰어넘는 게 더 현실적이겠어.'
헌터증을 발급받은 수영은 게이트 출입이 허가되자, 부친을 따라 게이트를 들락거렸다.
콰앙! 콰과과광!
"...대박."
빙룡에 올라탄 수영은 기사왕 골렘의 허리를 껴안으면서 멍하니 지상을 내려다봤다.
부친의 전투는 길드라는 존재를 부정하는 듯했다.
홀로 S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압도적인 무력.
이 정도라면 마왕군의 침공도 막아 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잠시 뒤, 건혁이 탄 빙룡이 수영의 옆으로 다가왔다.
"서쪽에서 C랭크 마수들이 몰려오는 중이니까, 슬슬 내려가서 한번 싸워 보자."
수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내, 지상으로 내려와 전투를 준비했다.
10여 분이 흘러 서쪽 1km 지점에서 검은 무리들이 발견됐다.
1회차에서 수없이 봐 온 마수, 오크(Orc).
수영은 놈들을 보고 살짝 기가 질렸다.
'뭐... 뭐가 저렇게 많아?'
2~3천여 마리의 오크 전사들이 블랙 울프를 탄 채 달려온다.
이른바 '오크 라이더'라는 놈들이다.
수영은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새하얀 망토와 붉은색 망토를 걸친 기사 골렘들.
그 위로 5기의 용기사가 날개를 펄럭이고 있다.
적에 비하면 조촐한 숫자다.
그러나 마음만큼은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브레스 한 방이면 수백 마리의 오크를 얼려 버리겠지.'
그녀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2~3천여 마리의 오크 라이더와 골렘들이 충돌한 순간.
브레스에 의해 단숨에 얼어붙은 수백 마리의 오크들.
수영은 씨익 웃으면서 활의 시위를 당겼다.
끼릭, 퉁!
하늘을 향해 3개의 화살을 쏘아 올렸다.
상대가 저렇게 뭉쳐 있다면, 굳이 저격할 필요도 없겠지.
특별히 조준을 하지 않았음에도 3개의 화살은 오크와 블랙 울프에게 꽂혔다.
"빙벽을 세워 속도를 죽여라!"
기사왕 골렘과 기사단장 골렘이 바닥에 검을 꽂고 거대한 빙벽을 만들었다.
눈앞이 빙벽에 가로막히자, 오크 라이더들은 다급히 속도를 줄였다.
그 순간, 3기의 마법 기사단장 골렘이 거대한 얼음덩어리를 내던졌다.
쓔우욱!
얼음덩어리는 빙벽을 파괴하면서 오크 라이더들을 덮쳤다.
콰과과광!
"...정말로 1인 군단이네."
골렘들의 전투력은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들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공격!"
건혁의 목소리에 골렘들이 라이더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상공을 맴돌던 빙룡들 역시 지상으로 브레스를 뿜어 댔다.
세계 랭킹 1위, 박건혁의 전투는 말 그대로 전쟁이다.
처억.
수영은 자신의 옆에 선 기사왕 골렘을 보고 쓴웃음을 흘렸다.
부친은 자신을 너무 걱정한다.
일종의 과보호라고 해야 할까?
끼릭, 퉁!
수영은 시위를 당기면서 화살을 발사했다.
푸욱!
블랙 울프의 미간에 꽂힌 얼음 화살.
오크 전사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파악! 파파파파팍!
수영이 쏜 화살은 마수들의 미간과 심장을 노렸다.
백발백중(百發百中).
건혁은 딸의 저격술을 보며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2~300m에 달하는 거리, 순하지 않은 바람, 움직이는 표적 등.
수많은 조건 속에서 정확히 심장과 머리를 노리다니.
심지어 오크들의 다리를 묶어 골렘의 전투를 더욱 효율적으로 만들어 주기까지.
'너무 노골적으로 실력을 드러내는 거 아니야?'
누가 봐도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베테랑이다.
신체가 자라고 마력량이 늘어난 덕분일까?
수영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파파팍!
마수들의 발밑에 꽂힌 세 개의 화살.
지면이 얼어붙기 시작하더니.
쓔왁!
뾰족한 가시들이 튀어나와 오크와 블랙 울프들을 꿰뚫었다.
10분간 수영이 토벌한 마수는 대략 100여 마리 정도.
헌터증을 발급받고 1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17세 청소년에게는 과한 실적이다.
'굳이 수성고등학교에 들어갈 필요가 있나?'
건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옆에서 달려드는 오크를 발로 걷어찼다.
퍼엉!
걷어차인 오크는 10m 정도를 날아가더니, 눈동자를 까뒤집은 채 핏물을 토해 냈다.
내상을 입은 걸까?
녀석은 엎드린 상태로 숨을 거두었다.
수영의 저격술에 감탄하던 건혁은 슬쩍 웃으면서 빙마검을 크게 휘둘렀다.
콰과과과과광!
며칠간 빙마검을 사용해 S랭크 마수를 쓰러트렸다.
어떻게 쓰러트렸냐고?
빙룡의 브레스로 S랭크 마수를 얼려 버린 다음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그래, 막타만 가져간 것이다.
덕분에 빙마검의 스킬 레벨은 금세 9에 도달해, 기술의 위력과 마력의 효율이 크게 높아졌다.
또, 스테이터스 레벨이 오를 때마다 마력과 체력에 AP를 투자한 건혁.
덕분에 특별한 기술 없이 검을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어마어마한 위력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아이스 블레이드(Ice Blade)!"
거대한 얼음의 칼날이 수백 마리의 오크와 블랙 울프를 절단시켰다.
이어, 반경 1~2km를 얼려 버리자, 블랙 울프들이 꼼짝을 못 하며 울부짖었다.
오크들은 재빨리 블랙 울프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취이익!
'죽여라!'라는 식으로 해석하면 될까?
사방에서 달려드는 수많은 오크 전사들.
건혁과 기사왕 및 기사단장 골렘들은 한바탕 학살극을 벌이며 2~30분 만에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2~3천 마리의 오크라이더.
정확히는 오크 전사와 블랙 울프, 즉 D랭크와 C랭크 마수 5~6천여 마리가 건혁에 의해 전멸당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수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진짜... 괴물이네."
괜히 세계 랭킹 1위가 아닌 모양이다.
골렘들이 마석을 회수하는 동안 수영은 건혁을 향해 박수를 쳐 주었다.
그에 건혁은 수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했다.
"이 정도면 C등급 게이트에 혼자서 들어가도 괜찮겠는데?"
"정말로?!"
"2~3주 뒤에 C등급 게이트 하나 예약해 둘게. 호위 겸 짐꾼으로 골렘 하나 붙여 줄 테니까, 혼자서 C등급 게이트에 들어가 봐."
수영의 얼굴에서 화색이 감돌았다.
이제 막 17살이 된 자신을 어느 짐꾼이 따라와 주겠는가.
하물며 C등급 게이트에 들어가는 것이니, 짐꾼들은 수영과 함께하기를 분명 꺼려 할 것이다.
이왕이면 경력이 존재하는 베테랑들과 함께하려 하겠지.
"흑월 제1군하고 B등급 게이트에 들어가 보는 것도...."
"갈래!"
수영은 제1군 멤버들과는 안면이 있다.
경험이 부족할지라도 김유진급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그들도 마다하진 않을 것이다.
게이트를 빠져나온 건혁과 수영은 마석을 처분한 다음 집으로 돌아갔다.
구룡산 게이트 이후 재개된 짐꾼용 골렘의 배달.
덕분에 4~50만대 헌터들 역시 F~E등급 게이트 공략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수도권 내에서 당장 예약이 가능한 C등급 게이트는 없었다.
때문에 건혁은 제1군 대장인 김유진에게 수영을 맡겨 B등급 게이트 공략에 합류시켰다.
1군의 길드원들은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괜찮은 건가?"
"우리보다도 서열이 압도적으로 높다지만...."
"아직 어린애잖아."
건혁을 따라 A등급 게이트를 몇 차례 들락거렸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17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애다.
살육에 대해 거부감이 들 연령대.
"설마, 저 골렘을 직접 보게 될 줄은...."
멋스러운 갑주에 새하얀 망토를 두른 골렘.
S랭크 마수를 쓰러트린 국내 최강의... 아니, 세계 최강의 골렘이다.
짐꾼용으로 받은 기사 골렘과는 확실히 무언가가 달랐다.
"여차하면 저 골렘이 구해 주겠지."
"혼자서 S랭크 마수도 쓰러트린다던데...."
"전력으로 쓰면 아마 B~A랭크 마수를 대량으로 학살할 수 있을걸?"
"조금 아깝네."
1군 멤버들은 수군거리면서 골렘과 수영을 번갈아 봤다.
그렇게 공략 준비를 마친 길드원들은 유진과 세실리아를 필두로 게이트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수영을 걱정하던 길드원들은 전투가 시작됨과 동시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파팍!
B랭크 마수, 드레이크.
두 개의 얼음 화살이 녀석의 눈동자를 파고들어 갔다.
-캬아아악!
녀석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발광을 하자.
끼릭, 퉁!
수영이 녀석의 아가리를 향해 다시 한번 화살을 쏘았다.
푸욱!
목구멍을 꿰뚫은 얼음 화살.
이내, 녀석의 아가리에서 '파앙!' 하며 얼음으로 된 가시들이 튀어나왔다.
'커컥...!'이라는 공기 빠진 소리를 내는 드레이크.
녀석은 곧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아가리에서 대량의 핏물이 쏟아져 나오자, 유진이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부녀가 쌍으로 괴물이야."
수영은 시선을 돌려 다음 표적을 향해 시위를 당겼다.
뛰어난 저격술과 강력한 특수 능력.
거기에 단단한 정신력과 냉철한 판단력은 베테랑 못지않았다.
수영을 어린애라며 무시했던 한 길드원은 멍하니 죽은 드레이크를 바라봤다.
"...아까 한 말 취소할게."
"어린애는... 우리였네."
머리에서 꼬리까지 25m에 달하는 괴물을 불과 30초 만에 쓰러트린다고?
이게 가능한 일인가?
길드원들이 놀라는 그 순간에도 수영은 재빨리 나무 위로 올라가 시야를 확보했다.
세실리아를 향해 화염을 뿜어내려던 드레이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위를 당겨 화살을 쏜 수영.
화염을 뿜어내려던 드레이크의 아가리로 화살이 들어갔다.
푸욱! 파앙!
화살이 박힘과 동시에, 폭발하듯 녀석의 아가리에서 날카로운 얼음 가시가 터져 나왔다.
'지금의 내 화살로는 가죽을 뚫고 치명상을 입힐 수 없어.'
드레이크의 가죽은 갑옷처럼 단단하다.
당장은 녀석의 심장을 꿰뚫을 수 없겠지.
'아빠라면 단칼에 베어 버렸겠지만 말이야.'
제103화
103화. 수성고등학교 (3)
골렘이 없어도 박건혁이라는 존재는 충분히 강력하다.
B랭크는 일격이면 충분하며, A랭크는 1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더욱이 건혁이 날려 보내는 얼음의 칼날에 중상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던 S랭크 마수.
골렘과 함께하면 수십 마리의 S랭크가 달려들어 와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후우...."
부친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선 따라잡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났다.
밑바닥에서 세계 최강까지 올라간 사내의 등을 좇고 싶다는 욕망이.
저벅, 저벅, 저벅.
전투가 마무리된 후, 기사왕 골렘이 마수의 시체를 깔끔하게 분해했다.
뼈, 가죽, 마석 등으로 분류된 부산물이 기사 골렘의 배낭에 채워졌다.
길드원들은 휴식을 취하면서 수영을 힐끔 살폈다.
비위가 상할 법도 한데, 멀쩡히 재정비를 한다니.
'정말로 17살 맞아?'
'유전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무서운 거였나?'
수영의 침착함에 길드원들은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한편, 수영에게 다가가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감탄사를 터트리는 유진과 세실리아.
두 여인은 수영의 능력에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훈련장에서 보여 준 실력을 실전에서 그대로 살려 낼 줄은 생각도 못 했네.'
'역시 마스터의 핏줄이라는 건가? 지금과 같은 성장세라면 1~2년 내에 상급 마족과 견줄 만한 실력을 가지게 될 거야.'
금일 게이트 공략의 1등 공신은 바로 박수영이었다.
완벽한 후방 지원에 이어 단독으로 드레이크를 쓰러트리기까지.
길드원들은 그녀의 실력을 순순히 인정하며, 1~2월의 공략에 함께하는 것에 찬성을 표했다.
* * *
"이건...."
수성고등학교로부터 메일을 받은 수영.
"합격이네."
그녀는 수성고등학교에 수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SNS에선 그녀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박건혁의 딸이 수성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화제가 된 것이다.
수석이 아닌 꼴등으로 입학하더라도 화제가 되었겠지.
건혁은 수영의 수석 입학 소식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수성중학교에서 3년 연속 전교 1등을 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어렵다던 수성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할 줄이야.
아무래도 압도적인 실기 점수가 한몫을 한 모양이다.
수영은 수성고등학교 입학이 결정됨과 동시에 수성그룹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
수성중학교에서 3년 연속 전교 1등을 한 것에 대한 장학금과 수성고등학교에 수석 입학을 한 것에 대한 장학금으로 교육비 등을 전액 면제받은 것이다.
더욱이 식비 문제까지 해결됐다.
"3년 식비로 3,000만 원을 지급해 준다고? 수성그룹도 참 대단하긴 대단하네."
수성고등학교의 식당은 대학 식당처럼 식권을 구매해 음식을 건네받도록 되어 있다.
인터넷에 올라온 메뉴의 종류로는 상당히 다양했는데.
메뉴가 매일 바뀌면서도 하루 총 다섯 가지의 메뉴가 준비되는 수성고등학교 식당.
심지어 교내에는 3개의 유명 브랜드 카페와 2개의 편의점 등 각종 시설이 위치해 있다고 한다.
"...이게 무슨 고등학교야?"
먼 곳에서 오는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까지 구비된 수성고등학교.
건혁은 작게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교육비가 높은 이유가 있구나.
수성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대개 대학교 진학을 계획하지 않는다.
어째서냐고?
그야 바로 헌터로 취직이 가능하니까.
웬만한 길드에만 취직하면 박사나 학사 학위는 필요 없다.
만약 학위를 원한다면 헌터로 활동하면서 등록금을 번 뒤에 짬을 내 다니면 된다.
'중규모 길드 제2군에만 들어가도 한 달에 500만 원씩은 벌 텐데, 학위 없다고 무시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건혁은 수성고등학교 홈페이지를 살펴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영이가 길드를 만들면 B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려 하겠지?"
B등급 게이트를 단독으로 공략할 수 있는 서열은 1,000위부터 29,999위까지.
수영은 시현과 민아를 포섭하려고 했다.
두 사람에게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의미인가?
"후우, 원작 에피소드가 사라지게 생겼네. 뭐, 원작의 인물들은 이미 포섭을 해 뒀으니...."
L고등학교 2학년, 도윤성.
L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될 이시은과 박한결.
소규모 길드에서 활동하다 백수가 될 몇몇 헌터들까지.
건혁은 그들의 신상을 조사하며, 포섭을 위한 사전 작업을 해 두었다.
소설의 조연인 만큼 어느 정도의 잠재력을 품고 있을 것이다.
"이쪽은 흑월에서 키우면 되고, 시현이랑 민아는... 수영이한테 맡기는 수밖에 없나."
수성고등학교에서라면 원작보다 더욱 뛰어난 동료들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마왕군의 침공이 앞당겨질지도 모르는 현 상황에서는 더없이 좋은 상황이겠지.
건혁은 수성고등학교 홈페이지를 닫고 헌터 협회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 * *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과 날카로운 눈매.
살짝 사나운 인상을 가진 L고등학교 2학년, 도윤성은 수서동 제9 헌터 훈련장을 찾아갔다.
"해 보자."
그는 러닝으로 기초 체력 훈련을 시작했다.
본래 이 시간대는 아르바이트로 바쁠 때다.
그런데 왜 헌터 훈련장에 찾아왔냐고?
바로 흑월에서 시행한 헌터 육성 프로젝트에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흑월에서는 가정 형편에 따라 생활 지원금을 지급함과 동시에 헌터 육성에 필요한 교육을 제공했다.
물론, 교육은 인터넷 영상을 통해 진행되며, 영상은 전문가를 초빙하여 제작되었다.
"하아... 하아... 하아...."
교육 영상에 따라 체력 훈련을 진행한 윤성.
그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했다.
공사 현장에서 허리를 다친 아버지.
식당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설거지를 하는 어머니.
윤성은 어린 시절부터 가난한 삶을 살았다.
허름한 옷을 입은 탓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기도 했고, 험악한 인상 때문에 몇 차례 누명을 쓴 적도 있으며, 돈이 부족해 준비물을 살 수 없었을 때는 선생님에게 혼나기도 했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어째서냐고?
부모님은 밤낮으로 일하며 쓰러지듯 수면에 취하기 때문이다.
힘들어하는 두 사람을 더욱 힘들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윤성은 참고 견디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공사 현장에서 허리를 다치셨다.
그로 인해 집안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고, 윤성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생활비를 보탰다.
L고등학교에 입학해 1~2개월을 보냈을 무렵.
윤성은 자신이 각성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날아갈 듯이 기뻤다.
자신도 정윤호처럼 영웅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니 말이다.
하지만 각성 능력 검사를 받은 직후, 그는 크나큰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부여된 서열은 600,053위.
금년도 대한민국 헌터가 601,883명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말 그대로 밑바닥이라고 해야겠지.
때문에 헌터라는 꿈을 빠르게 접고, 아르바이트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진열대를 채우던 중 한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너, 각성했구나?"
"예?"
"내가 각성자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거든."
모자를 쓴 채 씨익 미소를 짓는 사내.
살짝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한번 여기에 지원해 볼 생각 없니?"
윤성은 사내가 건네준 전단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헌터 육성... 프로젝트?"
"그래, 흑월이라는 곳에서 주관하는 프로젝트야.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한번 지원해 보는 게 어때?"
"싫어요."
사내의 물음에 윤성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에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어차피 떨어질 테니까요."
"서열이 낮다는 게 이유라면... 별로 상관없지 않을까 싶네."
"네?"
"흑월의 마스터를 아니?"
윤성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박건혁은 대한민국에서 유명한 헌터 중 한 명이다.
중장년은 물론, 청소년들에게 역시.
"박건혁 헌터 역시 밑바닥... 짐꾼에서부터 시작했거든."
"그건... 저도 들었어요."
"그렇다면 당장 포기하기보다도 한번 지원해 보는 걸 추천할게. 생활이 어려운 가정에는 생활 지원금으로 매달 1~300만 원 정도를 지급해 주거든. 물론, 흑월에 가입하는 게 전제 조건이긴 하지만...."
사내의 이야기에 윤성은 전단지를 자세히 살펴봤다.
"뭐, 잘 생각해 봐."
발걸음을 돌리며 어깨 위로 손을 흔드는 사내.
그는 곧바로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무엇 하나 구매하지 않은 채 말이다.
윤성은 진열대에 상품을 채워 둔 다음, 스마트폰으로 헌터 협회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그리고 전단지에 기입된 설명대로 '흑월'의 길드 게시판에 올라온 공지를 확인했다.
"...정말이네."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헌터 육성 프로젝트.
지원서 양식은 간단했다.
단지, 선정된 이후 생활 지원금을 받기 위한 서류 양식이 조금 많을 뿐.
윤성은 수많은 고민 끝에 지원서를 작성해 제출하기로 결정을 했다.
며칠 뒤, 프로젝트에 선정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저... 정말로? 정말로 내가 선정된 거야? 600,053위... 아니, 이번 달에는 600,107위까지 밀려났는데도?"
해당 소식을 듣게 된 부모님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셨다.
"너무 위험한 거 아니니? 게이트에 들어가면 마수들이랑 싸워야 할 텐데...."
어머니의 걱정에 이어 아버지 역시 근엄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네가 정말로 원한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돈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그만둬라. 허리도 이제 다 나았어. 돈이라면 아빠가 벌어 올 테니까, 아르바이트도 그만두고 공부에나 집중해."
"아... 아르바이트는 계속해도 괜찮아요!"
"성적은?"
"...."
"공부는 너 자신의 가치를 높여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좋은 성적을 받아 둔다면 언젠가 네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한 발판이 되어 줄 거야."
아버지의 발언에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빠 말처럼 공부는 열심히 해 둬. 어느 대학교에 들어가더라도 네가 원하는 학과에서 공부를 해야지."
윤성은 고개를 숙이며 전단지를 바라봤다.
자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헌터가 되려는 이유에는 돈을 벌고자, 집안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이유도 존재했다.
하지만....
'...영웅이 되고 싶어.'
TV에 출연하는 수많은 헌터들은 정말로 눈이 부셨다.
마수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는 존재.
그야말로 영웅이 아닌가.
"헌터... 해 보고 싶어요."
각오를 마친 듯한 윤성의 눈빛에 부친은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 보고 싶다면 해 봐야지."
"여보?!"
"지금까지 떠밀리듯 살아온 아이야. 윤성이가 언제 떼를 쓴 적 있어? 가지고 싶은 거, 원하는 거 한번 못 하면서 살아왔어. 그렇다면 최소한... 하고 싶을 걸 지지하고 응원해 주기라도 해야 할 거 아냐."
"헌터가 얼마나 위험한 직업인지는 당신도 잘 알잖아요! 매년 얼마나 많은 헌터들이 죽는데...! 윤성이를 그런 위험한 곳에 보낼 생각이에요?!"
"그래서 윤성이가 흑월에서 주관하는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거 아니야! 인터넷 교육을 받으면서 헌터 훈련장을 다닐 뿐이라잖아. 한동안 게이트에 들어가는 위험한 일은 없다고."
"그... 그래도...."
"게다가 매년 일정 서열을 높이지 못하면 프로젝트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쓰여 있어. 윤성이한테 헌터로서의 자질이 없다면 그때 가서 포기하면 될 일이지."
부친의 설득에도 모친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분명, 윤성이에게는 너무나도 많은 짐을 짊어지게 만들었다.
어린 나이부터 철이 든 아이를 볼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는지....
그런 아들을 사지(死地)로 내보내야 한다고?
"엄마, 저 진짜 열심히 해 볼게요. 재능이 없다고 판단되면 헌터라는 직업을 포기할 거예요. 그리고 생활 지원금을 받게 되면, 아르바이트를 할 시간도 사라지니까, 공부에도 조금은 전념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제발, 이번 한 번만 믿어 주세요."
모친은 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안방으로 들어가자, 윤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윤성의 간절함에 결국 모친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제104화
104화. 수성고등학교 (4)
며칠 뒤, 윤성은 생활 지원금을 받기 위해 각종 서류들을 준비했다.
이어, 해당 서류들을 스캔한 다음 흑월의 공식 이메일로 사본을 보냈는데.
결과가 발표되는 날.
윤성은 스마트폰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2... 250만 원!"
윤성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윤성에게 지급되는 생활 지원금 액수는 한 달에 2,500,000원.
즉, 1년에 무려 3천만 원의 생활 지원금을 지급받는다.
또, 흑월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에선 무료로 인터넷 강의까지 들을 수 있다.
윤성은 아르바이트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갔다.
"엄마! 아빠! 생활 지원금 액수 떴어요!"
부모는 250만 원이라는 금액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설마, 이 정도의 금액을 지원해 줄 줄이야.
흑월에서 주관하는 헌터 육성 프로젝트는 현재 인터넷 기사로까지 작성됐다.
선정된 고등학생의 숫자는 125명이며, 그들에게 지급되는 생활 지원금의 1년 총액은 대략 24~30억 원 정도라고 한다.
"...흑월이란 곳이 상당히 큰 길드였던 모양이구나."
"SNS에서도 엄청 유명해요. 마스터인 박건혁 헌터는 저처럼 밑바닥이었는데, 지금은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라고 불린다고 들었어요!"
흥분으로 가득한 아들의 목소리에 부친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는 혼자서 S랭크 마수인 만티코어를 쓰러트렸다고...."
흑월에 대해 전혀 몰랐던 윤성의 부모는 몇 개월 뒤, TV를 통해 박건혁이라는 존재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밑바닥에서 시작해 세계 최정상의 자리를 차지한 헌터.
박건혁의 존재가 대한민국 헌터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나도... 나도 할 수 있어!"
박건혁에 대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윤성은 자리를 박차고 집을 뛰쳐나갔다.
그가 간 곳은 다름 아닌 수서동에 위치한 제9 헌터 훈련장.
몇 개월 사이 윤성의 서열은 큰 폭으로 높아졌다.
60만대에서 57만대까지.
몇 개월 만에 3만여 명의 헌터들을 제친 것이다.
'나도 헌터가 될 거야!'
윤성은 훈련용 검을 휘두르며 악을 내질렀다.
"열심히 하는 모양이네."
흑월의 마스터, 박건혁은 제9 헌터 훈련장에 들러 윤성의 성장을 살펴봤다.
원작대로 진행된다면 그는 1~2년 사이에 특수 능력을 발현할 것이다.
그때부터 폭발적인 성장세가 시작되겠지.
건혁은 스윽 훈련장을 빠져나왔다.
"...박건혁 헌터 아니야?"
"에이, 박건혁 헌터가 여기에 왜... 맞나?"
"바... 박건혁 헌터다!"
건혁의 얼굴을 알아본 주민들이 화들짝 놀라면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어, 사진을 촬영하려던 순간.
건혁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신기루처럼 말이다.
소리를 지른 주민들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머리를 긁적이면서 자리를 벗어났다.
* * *
원작의 조연들을 일일이 살펴본 건혁은 시간이 흘러 수성고등학교의 입학식에 찾아갔다.
갈색 재킷을 걸친 교복 차림으로 강당에 들어온 수영.
건혁은 객석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수영을 향해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곤 주변을 슬쩍 둘러봤다.
"...원래 고등학교 입학식에는 학부모가 많이 안 오는 건가?"
내빈석에 빈자리가 너무 많았다.
건혁이 전생과 현생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쓴웃음을 짓자, 입학식을 기다리던 몇몇 신입생들이 작게 욕설을 터트렸다.
"우와, X발... 진짜 박건혁이다."
"올해 박건혁 딸이 입학했다고 하던데... 헛소문이 아니었어?"
"미친, 저게 어떻게 40살 아저씨야? 요새 뜨는 아이돌이랑 비교해도 절대 안 꿀리겠네."
"어째 기자들이 수두룩하게 왔다 했더니만...."
잠시 뒤, 강당 입구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강철(鋼鐵) 김수호가 입학식장을 찾아온 것이다.
수호는 아들을 향해 손을 들더니, 객석으로 걸어가 건혁과 인사를 나누었다.
"구룡산 게이트 이후였나요? 오랜만에 뵙는군요."
"예, 오랜만입니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눈 후, 나란히 의자에 착석했다.
"요새 흑월에서 많은 헌터들을 모집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갈수록 레이드 발생 빈도가 높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대한민국 헌터의 수준을 조금이나마 높이고자 노력하는 중입니다."
"예, 그 뜻은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화랑의 제안을 거절하신 것은... 현명한 판단이라고 보기는 어렵군요. 승재 형님께서 차기 마스터직까지 약속하셨다고 하던데...."
"화랑과 흑월의 뜻이 달랐을 뿐입니다."
수호는 근엄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헌터로서 대선배이면서도 건혁보다 20년이나 더 산 수호.
올해로 61세가 된 그는 건혁의 결정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충고를 건네기도 애매하겠지.
짐꾼을 헌터로 키우는 과정은 이미 흑월에서 시행되어 왔으니 말이다.
또, 헌터로서 대선배일지라도 국내 서열과 세계 랭킹은 박건혁이 우위에 있었다.
서열이 전부인 헌터 사회에서 김수호가 박건혁을 꾸짖는 행위는 비아냥이나 다름없으리라.
"후우, 박건혁 헌터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아 참, 따님분께서 수석으로 입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2만대 서열로 헌터증을 발급받았다고...."
"어렸을 때부터 헌터라는 직업에 관심이 많았던 아이인지라...."
"대한민국 헌터 사회가 다시 한번 빛나는 순간일 겁니다. 따님분께서도 언젠가는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로서 활동하게 되겠죠. 혹시, 따님분은 흑월에서 활동하게 되는 건지...."
"아니요. 중학교 때부터 함께한 친구들과 길드를 만들어 보겠다고 하더군요."
수호는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따님분께서도 대단하시군요. 저희 막내아들 놈도 길드를 만들겠다면서 떼를 쓰던데... 허구한 날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며 졸라 대니...."
골치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는 수호.
건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젊을 때 많은 경험을 해 봐야죠. 아들분께서도 특수 능력을 발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봐야 9만대 서열에서 어리둥절하고 있을 뿐입니다."
금년도 수성고등학교 입학시험 차석이 바로, 김수호의 아들인 김종현이다.
종현은 필기와 인성 시험에서 고득점을 받았으나, 실기에서 수영에게 큰 폭으로 뒤처지고 말았다.
2만대 서열과 9만대 서열의 격차는 쉽게 메울 수 없겠지.
한편, 방송국의 카메라맨들은 김수호와 박건혁의 대화 장면을 카메라로 잡았다.
"대박이다."
"야, 저... 저기...!"
기자들의 목소리에 카메라맨들이 고개를 돌렸다.
수성전자 부회장, 임준호가 대강당 출입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트... 특종이다."
대한민국 재계 1위, 세계 반도체 및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1위, 세계 시가 총액 9위 등을 기록한 수성전자의 부회장이 지금 수성고등학교 강당에 얼굴을 비추었다.
임준호는 기자들과 교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내빈석으로 걸어갔다.
그가 박건혁에게 다가선 순간,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지기 시작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수성전자 부회장인 임준호라고 합니다."
건혁은 살짝 놀란 얼굴로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흑월 길드의 마스터, 박건혁이라고 합니다."
"박건혁 헌터님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자랑이자 영웅이시죠."
건혁은 살짝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성전자 부회장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듣게 될 줄이야.
준호는 고개를 돌려 수호를 바라봤다.
"김수호 헌터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구면인 걸까?
수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임준호와 인사를 나누었다.
"예, 오랜만이군요. 그런데,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두 분께서 저희 수성고등학교를 방문하셨다고 들어 잠시 시간을 내 들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수호는 슬쩍 건혁을 바라봤다.
임준호의 머릿속에 자신은 안중에도 없겠지.
오로지 박건혁이라는 존재만을 바라보고 찾아온 것이리라.
"잠시 앉아서 대화라도...."
건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임준호는 40대 후반의 연령임에도 꽤나 젊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듣기로는 각성제를 통해 노화를 억제시켰다고 한다.
수많은 사담이 오가면서 대화의 흐름이 느슨해질 무렵.
준호가 건혁을 지그시 바라봤다.
"아 참, 이번에 저희 수성그룹에서도 길드를 설립하기로 결정을 했답니다."
"수성그룹이 설립한 길드라면, 분명 패룡(覇龍)이라는 이름으로...."
건혁의 말에 준호가 쓴웃음을 보였다.
"패룡(覇龍)은 작년에 해산시켰습니다. 그리고 'KS(Knight of Suseong)'라는 길드를 새로이 설립하기로 결정했죠."
"그렇군요."
"패룡에 소속된 길드원 중 대부분이 KS로 이적하게 될 겁니다. 또, 전력 강화를 위해 최정예 헌터분들을 영입하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준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이미 말뚝을 박은 헌터들을 데려오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리라.
때문에 수성그룹은 현재 KS길드의 설립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이대로면 제2의 패룡이 탄생하게 될 뿐일 테니까.
"그래서 박건혁 헌터님만 괜찮으시다면, 어떻게든 KS로 모시고 싶습니다."
준호는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흑월에 소속된 길드원들을 모두 데려오셔도 상관없습니다. 또, KS길드의 마스터로 취임하신다면, 보수와는 별개로 매년 1,000억 원의 수당을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마석에 대한 처분은 수성전자에서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만, 그에 대한 편의는 최대한 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금액대도 헌터 협회보다 높은 수준으로 맞춰 드리죠."
최고의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보수와 별개로 매년 1,000억 원의 수당을 약속받는다니.
대신, 매년 50개 이상의 S랭크 마석을 수성전자에 처분해 줄 것을 요구했다.
"물론, 불편하신 부분과 원하시는 부분에 대해서 역시 수성그룹에서 바로바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그건...."
"세계적인 길드로부터 수많은 제의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중에는 부마스터직을 약속한 길드들도 꽤 많았겠죠. 흑월이 규모를 키우는 모습을 보면...."
"예, 모두 거절했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KS는 새로이 출범하는 길드인 만큼 박건혁 헌터님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희 수성그룹의 자본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죠. 한번 생각해 보시고 연락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건혁은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의를 봐서라도 조금은 생각하는 척을 해야겠지.
물론, 길게 시간을 끌 생각은 없다.
사흘 안에 거절의 답변을 보낼 테니까.
"저는 업무가 남아 있어서 이만... 만나서 정말로 영광이었습니다."
준호는 자리를 떠나기 전 스마트폰으로 입학식 사진을 찍었다.
어디를 찍는 거지?
카메라 방향은 학생들 쪽이다.
의미 모를 행동을 보인 후, 강당을 벗어난 준호.
그에 수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세계 랭킹 1위가 대단하긴 대단하군요. 수성전자 부회장님이 직접 찾아와서 스카우트를 다 하다니...."
"살짝 당황스럽기는 하네요."
"그래서, 박건혁 헌터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매년 1,000억 원의 수당에, 헌터 협회보다 더욱 비싼 값에 마석을 처분해 준다고 한다면...."
"딱히 KS에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값을 높게 쳐 주신다면 헌터 협회보다는 수성전자에 처분하는 쪽이 이득이겠네요."
"세계 랭킹 1위를 KS에 두는 것으로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들을 끌어모을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뭐, 마석을 수성전자에 처분해 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감사해야 할 일이겠죠."
제105화
105화. 수성고등학교 (5)
세계적인 스타가 된 박건혁이 KS에 들어간다면, 아마 전 세계에서 KS로부터의 영입 제안을 냉큼 잡으려 할 것이다.
거기에 KS의 인지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수성에 대한 홍보 역시 더해지게 되겠지.
"TV에는 출연할 생각이 없으십니까? 분명, 광고 제안도 받으셨을 거 같은데...."
건혁은 쓴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수성전자로부터 스마트폰 및 가전제품의 광고 제안을 받았다.
그 외에도 다양한 방면에서 광고 제의가 들어왔으나, 건혁은 그들의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제 행동 하나하나가 딸한테 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니, 방송에는 가급적 출연을 자제하면서 조용히 지내고 싶습니다."
수호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정부에선 박건혁 헌터를 대한민국의 얼굴로 사용할 겁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세계 최강의 헌터가 탄생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방송과 광고에 출연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또, 현재 수서동의 아파트에서 거주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면 출퇴근도 어려워질 겁니다. 주택가로 이사를 하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수서역 주변에도 주택이 들어선 마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한번 고민해 봐야겠네요."
건혁은 제대로 된 답변을 보내지 않은 광고 제의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토크 쇼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역시 출연 요청을 받은 상태다.
딸을 위해 가급적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했으나, 정부가 자신을 얼굴마담으로 사용하려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윤호 형님도 처음에는 TV에 얼굴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 하셨습니다. 정부 역시 눈치를 살펴야 했죠. 그러나 정부는 적정한 선을 지키며 '정윤호'라는 존재를 세계에 알려, 한국의 얼굴로 사용했습니다. 세계 랭킹 TOP30에 든 존재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국가의 위상이 달라지니까요."
결국, 정윤호는 국익을 위해 정부의 행동을 용인해 주었다.
또, 각종 요청에 따라 TV에 얼굴을 내밀었는데.
정윤호가 처음 출연한 TV 프로그램은 바로 다큐멘터리였다.
"당시 해당 프로그램은 역대 최고 시청률을 찍었다고 합니다."
딱딱하면서도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정윤호의 기백에 국민들은 감탄을 자아냈다.
동시에 정윤호라는 존재 하나만으로 사람들은 대한민국 국민임에 자부심을 느꼈다.
거기에 두려움에 떨던 국민들 역시 조금이나마 혼란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국내에 세계적인 헌터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든든해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박건혁 헌터님께서 등장하신 겁니다. 정윤호 헌터님은 물론이고, 그 알렉스 브라운까지 뛰어넘은 세계 최강의 헌터가 말입니다."
건혁은 어색하게 웃었다.
'세계 최강'이라는 단어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다.
엊그제까지만 하더라도 '박 씨!'라고 불리면서 헌터들의 짐을 등에 메고 다녔었는데....
지금은 걸어 다니는 중견 기업이라고 불린다.
수영의 입학식을 지켜보던 건혁은 작게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따님분께서 올라가시는군요."
수석으로 입학한 수영이 신입생 대표로서 단상에 올라갔다.
올해 신입생 수석이 박건혁의 딸이라는 사실은 이미 SNS에서도 유명했다.
때문에 수영의 얼굴을 모름에도 수호는 신입생 대표가 건혁의 딸임을 알았는데.
건혁을 촬영하던 기자들 역시 수영의 존재를 확인하고 재빨리 카메라를 움직였다.
'막아 봐야 의미는 없겠지.'
수영의 얼굴이 노출되지 않기를 바랐으나, 금일 입학식은 수성고등학교 홈페이지에 올라간다는 모양이다.
기자들을 막아도 SNS를 통한 확산은 막을 수 없다는 의미다.
입학식이 마무리된 이후, 학생과 학부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X발, 우리 학교 지금 인터넷에서 난리 났네."
"아까 신입생 대표로 올라갔던 애가 박건혁 딸이라고 하던걸? 재능까지 물려받은 듯."
"박수영이었던가? 존X 예쁘던데... 무슨 아이돌이 찾아온 줄 알았다니까?"
"그 아빠에 그 딸이라는 거겠지. 저기, 박건혁 얼굴 좀 봐라. 비율도 존X 쩌네. X발, 같은 인간 맞냐?"
비속어를 쓰면서 박건혁과 박수영에게 시선을 보내는 학생들.
그들은 스마트폰을 꺼내 건혁을 촬영했다.
마치 유럽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는 유명한 축구 선수를 보는 기분이었다.
스윽.
건혁은 학생과 기자들을 향해 몇 차례 손을 흔들면서 수영에게 다가갔다.
"이제 우리 딸도 고등학생이네?"
수영이 배시시 웃었다.
잠시 뒤, 건혁에게 다가오는 두 부부.
민아의 부모인 호준과 규리, 시현의 부모인 동진과 나경이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두 부부는 건혁의 인사에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 헌터 랭킹 1위가 되신 것,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로 눈동자가 빠지는 줄 알았어요."
호준과 규리에 이어 동진과 나경 역시 감탄을 자아내 보였다.
"애들이 길드를 만든다고 하던데...."
규리가 말끝을 흐리자, 건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는 최대한 지지해 줄 생각입니다. 해 보고 싶으면 해 봐야죠."
"하지만 애들끼리 게이트에 들어가는 건...."
"수영이는 이미 흑월의 1군과 함께 B등급 게이트를 수차례 공략했습니다. 수영이의 전투 영상은 찍어 뒀으니 나중에 보여 드리겠습니다."
"수영이가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희 아이들은 아직 전투가 미숙해요. 마수를 토벌할 때도 위험할 뻔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고요."
"그럼, 경호로 골렘들을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원래는 짐꾼용으로만 붙일 생각이었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S랭크 마수를 상대할 수 있는 골렘을 붙이도록 하죠."
건혁의 대답에 호준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소문의 용을...."
'용(龍)'이라는 단어에 민아와 시현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건혁은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빙룡은 게이트 환경에 제약을 받는다.
동굴과 같은 환경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겠지.
"그럼, 새하얀 망토... 아니, 기사왕 골렘을 붙여 주신다는 말입니까?"
건혁은 골렘의 명칭과 그 능력을 헌터 협회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기자들은 해당 내용을 고스란히 옮겨 기사로 작성했는데.
지상파 방송국 역시 해당 내용을 상세히 공개하면서 국민들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헌터들은 S랭크 마수와 견줄 만한 기사왕 골렘과 S랭크 마수를 손쉽게 제압하는 용기사 골렘에 큰 관심을 가졌다.
재앙이라 불리는 괴물을 단독으로 쓰러트리는 골렘이다.
대한민국 최정상급 실력을 보유한 만큼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호준의 물음에 건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부부의 얼굴에서 살짝 안도감이 보였다.
"기사왕 골렘의 전투 능력은 S랭크 마수인 데스나이트를 상회하는 수준이니, B등급 이하의 게이트에서는 아이들을 잘 지켜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야...."
"또, 흑월 제1군에서 활동하는 서열 14,912위 세실리아를 한 달간 대동시킬 예정입니다. 짐꾼으로는 기사 골렘 4기... 정도면 충분하겠죠. 또, 3~5급 포션과 무기, 방어구 등의 장비 역시 지원할 생각입니다."
"그... 그렇게까지...."
"아이들의 성장도 중요하지만, 안전이 최우선이지 않겠습니까."
두 부부는 놀람을 뒤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의 성장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것은 바로 안전이다.
부모의 마음이란 다 똑같은 것이겠지.
잠시 뒤, 교사들의 안내에 따라 각 반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학생들.
"나, 가 볼게."
수영이 손을 흔들며 민아와 시현을 데리고 강당을 빠져나갔다.
아이들을 배웅한 건혁은 호준과 동진네 부부를 데리고 가까운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주변의 소란은 잠재워질 기미가 없었다.
"후우, 아무래도 대화는 나중에 나누는 게 좋겠네요."
"아하하, 세계 최고의 헌터이시니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애들이 길드를 만든다고 했을 때는 걱정이 많이 됐었는데, 박건혁 헌터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까 많이 안심이 됩니다."
"솔직히... 우리 애들이 수영이한테 방해가 되는 게 아닌지도 살짝 걱정이 되긴 해요."
민아와 시현의 서열은 16만과 17만대로, 수영과 너무나도 큰 격차를 보여 주고 있었다.
나경은 두 아이가 수영의 전투를 방해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을 보였는데.
건혁은 그럴 리 없다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요. 분명, 서로 협력하고 도우면서 잘해 나갈 겁니다."
민아와 시현이 얼마나 성장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소설에서 거론된 적이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으니까.
하지만 수영이 선택한 아이들이라면 분명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겠지?
소설을 통한 정보보다도 1회차를 경험한 정보가 더욱 자세할 테니 말이다.
"지금은 아이들을 믿고 응원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그래야죠."
"그럼, 슬슬 일어나야겠네요. 이러다가 집에도 못 돌아가는 게 아닌지...."
건혁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창밖을 슬쩍 힐끗거렸다.
사람들이 카페 내외를 가득 채우고, 스마트폰으로 건혁의 일행을 촬영하고 있었다.
동진과 호준네 부부는 작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먼저들 돌아가세요."
"아, 그러면...."
두 부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카페를 빠져나갔다.
계산을 마친 건혁은 '팬이에요!'라고 소리쳐 오는 사람들을 향해 작게 손을 흔들었다.
팬이라는데 차갑게 무시하고 지나갈 순 없잖아.
건혁은 영업용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면서 수성고등학교 주차장에 세워 둔 검은 세단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손을 씻고 침실로 들어간 건혁.
그는 컴퓨터 전원을 켜 예약해 둔 게이트를 확인했다.
"내일은... 청계산 쪽에 있는 S등급 게이트네. 게이트 환경은 동굴...."
용기사를 소환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기사왕 골렘들로 공략해야 되는 건가."
건혁이 다음 날 계획을 확인하던 그 시각.
수영은 수성고등학교 1학년 A반으로 배정을 받았다.
실력에 따라 A~F로 반을 나누어 학생들을 교육하는 수성고등학교.
민아와 시현 역시 A반으로 배정을 받았는데.
수영의 일행은 주변 학생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었다.
정확히는 박수영 한 명에게 시선이 모인 것이다.
"쟤가 박건혁 헌터의...."
"이번에 2만대 서열로 헌터증을 발급받았다고 하던데...."
"입학시험 점수가 차석이랑 엄청 차이가 난다고도...."
대한민국 서열 4위, 김수호의 아들인 김종현은 학생들의 관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차석을 차지하고도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종현은 수영을 살짝 노려봤다.
언제나 주역이었던 자신이 마치 엑스트라가 되어 버린 듯한 상황.
종현은 작게 혀를 차고 두 눈을 감았다.
그때, D반으로 배정을 받은 한 남성이 A반으로 들어왔다.
훤칠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훈남이다.
그는 곧장 박수영을 향해 다가갔다.
"반가워. 나는 1학년 D반의 임영우라고 해."
모두가 머뭇거리던 때.
임영우라는 사내가 수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제106화
106화. 수성고등학교 (6)
"그래, 나는 박수영이야. 그런데 D반이 왜 A반에...."
"박건혁 헌터님의 딸이 올해 입학했다고 들었거든. 게다가 2만대 서열로 각성해서 헌터증을 발급받았다면서?"
수영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에 대해 조금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
"그... 렇구나."
D반 학생이 A반에 당당하게 들어오는 경우는 정말로 드물었다.
또, A반 학생들 역시 D~F반처럼 낮은 실력을 가진 학생들이 자신의 반에 들어오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는데.
그 탓일까?
임영우의 입실에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종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야, D반 쓰레기가 어딜 감히 A반 교실에 들어와?"
영우는 종현의 목소리에 미간을 살짝 좁혔다.
"말을 좀 험하게 하네. 같은 수성고등학교 1학년이잖아. D반 학생이 A반에 들어와선 안 된다는 규칙은 없던데... 또, 실력이 낮더라도 성장할 가능성은 존재하는 거 아니야? 반대로 A반 학생이 D반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거고."
"병X, D반 벌레 X끼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네. D반에서 A반까지 올라가는 경우가 10년에 1~2명 정도라는 건 알고 있냐? 더러운 발로 들어오지 말고 그냥 꺼져."
"흑월에는 짐꾼에서부터 시작해 10만 이내에 든 헌터들이 꽤 많다고...."
"그냥 꺼지라고, X발 새끼야."
종현은 영우의 말을 끊고, 눈을 부라리며 욕설을 터트렸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일진들과 어울린 탓인지, 그는 욕설과 건방진 태도가 멋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영우는 최대한 정중한 태도로 종현을 설득하려 했는데.
종현은 영우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살기를 흩뿌렸다.
영우가 눈살을 찡그리자, 수영이 작게 한숨을 흘렸다.
"그만해."
그녀의 한마디에 종현이 헛웃음을 터트리곤 영우를 향한 살기를 더욱 진하게 만들었다.
수영은 영우에게 향한 살기를 그대로 흘려보냈다.
그제서야 A반과 D반의 격차를 실감한 영우.
설마, 이 정도까지 차이가 났을 줄이야.
"...X발."
종현은 자신의 살기를 흘려보낸 것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어, 민아와 시현이 종현을 향해 적의를 드러냈다.
적막이 감도는 교실.
그때, 마침 종소리가 울렸다.
"임영우라고 했었지? 종 쳤으니까 반으로 돌아가 봐."
"...그래, 알겠어."
영우는 종현을 살짝 노려본 뒤, A반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에 종현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영우의 눈빛이 건방져 보였기 때문이다.
당장 영우의 얼굴을 후려치고 싶었으나, 교실에 들어오는 교사로 인해 분노를 참아야 했다.
'X발.'
자리에 앉은 종현이 뿌득 주먹을 세게 쥐었다.
중학교 시절, 학생들은 자신의 한마디에 공포에 떨면서 고개를 돌렸다.
당시 학생들은 자신의 명령이라면 절대복종을 하듯이 따랐다.
왕처럼 군림하던 것이 바로 엊그제인데, 자신을 이렇게 대놓고 무시한다고?
종현이 이를 갈면서 수영을 노려봤다.
'저 X도 한번 짓뭉개 놔야....'
종현은 생각을 멈췄다.
서열에 따른 격차가 너무 크다.
과연 자신이 박수영을 쓰러트릴 수 있을까?
'그래, 나 혼자라면 불가능하겠지.'
종현은 고개를 돌려 자신과 함께할 '친구'를 바라봤다.
정의(正義) 길드 마스터 곽도진의 막내아들, 곽도현을 말이다.
그와 함께라면 박수영 정도는 손쉽게 박살 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오전 수업이 마무리된 직후, 종현의 얼굴은 다시 한번 일그러지고 말았다.
골드캣(Gold Cat)의 마스터, 이설아.
그녀의 막내딸인 이유빈이 박수영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던 탓이다.
"야, 박수영은 뭐 하러 건들게. 쟤 주변 안 보이냐?"
유민아와 이시현의 부모는 모두 고구려 길드 제1군에 소속되어 있으며, 100위대의 서열을 보유한 대한민국에서도 알아주는 헌터다.
거기에 이유빈의 모친은 서열 38위로, 대한민국 11대 길드 중 하나인 골드캣(Gold Cat)의 마스터다.
수영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B~C반 학생들 역시 손쉬운 상대가 하나 없었다.
"수성고등학교 입학생 중 30%가 수성중학교 출신이잖아."
종현의 주변 역시 호화로운 인맥으로 가득했으나, 수영과의 싸움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눈치였다.
"종현아, 흑월이랑 화랑이 동맹을 맺었다는 거... 알고 있지? 괜히 박수영 건드렸다간 우리 아빠랑 너희 아빠네 길드 전부 난리 난다."
도현의 말에 종현이 작게 혀를 차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임영우라는 새끼는 찾아봤어?"
"...그 자식도 가급적이면 건들지 말자. 박수영도 박수영인데, 임영우를 건들면... 정말로 다 뒤집어진다."
"무슨 X소리야?"
"임영우... 그 녀석, 수성전자 부회장 둘째 아들이래."
"...?!"
종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재벌가의 아들이란 말인가?!
그것도 수성그룹의!
헌터계에서 정점을 찍은 박건혁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 그런 새끼가 왜...."
"재벌들이 노화를 억제하려고 많이들 사용하잖아. 각성제라는 거. 임영우의 경우에는 헌터라는 직업에 관심이 많았다는 모양이더라고."
"아까 입학식에 수성전자 부회장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아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뭐, 박건혁 헌터와 만나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만...."
"하아, X발... X같네, 진짜."
종현은 육두문자를 중얼거리면서 일행과 함께 음식을 받아 커다란 테이블로 걸어갔다.
"쯧, 중학교 때 그 새끼들을 데려왔으면, 미리미리 식권을 구매해서 자리까지 세팅해 뒀을 텐데...."
"각성도 못 한 것들인데 어쩌겠냐. D~F반에서 괜찮은 놈 하나 찾아보든가. 돈 좀 쥐여 주면 바닥을 기어서라도 하려고 할걸?"
"X발, 생각해 보면 존X 웃기기는 하네. 예전에 그 새끼들...."
비속어로 가득한 대화 내용에 주변 학생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종현의 일행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수성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 중 헌터를 부모로 둔 학생의 수가 50%를 넘으니 말이다.
괜히 거대 길드의 자식들과 적대해 봐야 좋을 건 없겠지.
한편, 수영과 함께 점심 식사를 먹던 유빈이 인상을 팍 구겼다.
"쟤네는 욕하는 게 멋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오히려 더 멍청해 보이는데...."
"내버려 둬. 누굴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니잖아. 또, 저런 애들이랑 엮이면 괜히 귀찮아져."
수영의 말에 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똥을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는 거지."
그때, 종현과 눈이 마주친 민아.
목소리가 너무 컸던 걸까?
종현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X발, 지금 우리보고 말한 거냐?"
민아는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거리곤 식사를 재개했다.
"야, 이 시X 년아! 뒈지기 싫으면 내 눈 똑바로 쳐다보고 대답해라."
종현과 그 일행이 다가오려는 순간.
수영이 작게 한숨을 쉬며 발을 '쿵!' 세게 내리쳤다.
그에 종현의 일행이 살짝 어깨를 움찔거렸다.
"시끄럽게 하지 말고 얌전히 밥이나 처먹어."
"이 미친X이, 돌았냐!"
눈을 부라리는 종현의 모습에 수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훈련장에서 다리 하나 부러트려 줄까?"
수영의 살기에 종현이 발걸음을 멈췄다.
뒤를 따르던 도현과 일행들 역시 움직일 수 없었다.
수많은 전장을 헤쳐 온 듯한 베테랑 헌터급의 살기.
수영은 종현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꺼져."
수영의 곁으로 민아와 시현, 유빈이 다가섰다.
도현은 눈살을 찡그리면서 종현을 바라봤다.
상대가 나쁘다.
세계 랭킹 1위로서 거대 길드들조차 감히 건들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박건혁이다.
이 자리에서 박수영을 건드렸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후폭풍이 두려워졌다.
도현의 생각을 모르는 건지, 종현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종현과 수영에게 집중된 수많은 시선들.
남들 앞에서 누군가에게 밀리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 탓에 그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내가... 저 X한테 진다고?'
연약해 보이는 팔과 다리.
자신이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어째서 특수 능력을 발현하지 못하는 거지?
종현은 뒤늦게 자신의 몸이 경직된 것을 깨달았다.
'...말도 안 돼. 내가 저런...!'
등 뒤로 흘러내리는 식은땀.
수영의 날카로운 눈빛에 종현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때, 유빈이 피식 웃으면서 팔짱을 꼈다.
"너, 중학교 시절에 일진들이랑 어울리고 다녔다면서? 욕하고 담배 피우는 게 멋있는 줄 아는 멍청이잖아."
"이 미친X이...!"
"미친X은 개뿔... 눈앞에 서 있는 수영이가 누군지 몰라? 단군 길드가 한번 흔들려야 정신을 차리려나? 그 뒤에는 정의(正義) 길드의 곽도현이네?"
도현이 몸을 움찔거렸다.
"지금 수영이한테 싸움 거는 거 맞지? 박건혁 헌터님이 움직이면 어떻게 되는지... 한번 경험해 보고 싶은 건가? 박건혁 헌터님이 '단군'이랑 '정의'를 박살 내도 정부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할걸? 알렉스 브라운을 뛰어넘는 헌터를 다른 나라로 유출시킬 순 없잖아. 안 그래? 그럴 바엔 차라리 단군이랑 정의를 묻어 버리고 말지."
유빈의 이야기에 종현과 함께하던 학생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박건혁이 범죄를 저지른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박건혁의 몇 마디에 헌터 협회가 움직여 단군과 정의를 압박할지도 모른다.
박건혁은 그 대가로 몇 차례 S랭크 마석을 협회에 매각해 주면 되겠지.
"고등학생이나 돼 가지고 일진 놀이를 하고 싶을까? 그 시간에 훈련장에서 체력이나 좀 키우지? 아니면 제대로 된 친구를 좀 사귀든가."
종현이 뿌드득 이를 갈면서 수영과 유빈을 노려봤다.
"할 말 없으면 이제 그만 가 주지 않을래? 우리 점심 좀 먹게."
유빈의 말에 종현은 '쾅!' 발을 크게 내리찍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참나, 성질까지 더럽네."
이내, 유빈은 수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점심 먹고 주변 좀 돌아보자. 어차피 오후에는 수업도 없잖아."
입학식 오리엔테이션은 오전에 마무리됐다.
수업을 마친 학생들 대부분은 하교를 했으나, 몇몇 신입생들은 학교 내 시설을 구경하거나,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마찬가지로 점심을 먹은 수영의 일행은 교내를 돌아다니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중학교랑은 정말 차원이 다르네. 정원에다가 분수대까지.... 원래 고등학교가 다 이런 건가?"
교내 정원과 분수대를 바라보는 시현.
"우와, 저 카페 인테리어 엄청 예뻐!"
카페 안을 살펴보며 메뉴를 확인하는 유빈.
"편의점도 있으니까 간식도 마음껏 사 갈 수 있겠다. 사물함에 과자 넣어 둬야지~"
편의점을 보며 즐겁게 웃는 민아까지.
수영은 세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작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귀여운 여동생들이 생긴 기분이랄까?
'근데, 애들 말처럼 신기하긴 신기하네. 무슨 대학교도 아니고... 아니, 수업료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당연한 건가?'
고등학교 수업료가 전액 면제된 것은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그러나 수성고등학교 수업료는 대학 등록금에 맞먹는 고액으로 유지되는 대신, 재학생 중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국가 장학금이 지급되는 식으로 대체되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학생의 경우, 국가 장학금으로 수업료 전액을 면제받는 일도 존재한다고 한다.
덕분에 교내 시설만큼은 국내 고등학교 중 최고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났다.
제107화
107화. 백월 (1)
'학생들의 취미를 위해 수영장, 농구장, 배구장, 테니스장까지 만들다니....'
일종의 동아리 활동이라고 해야 할까?
학생들이 학교생활을 즐기도록 다양한 취미 활동을 장려하는 수성고등학교.
수영은 자신이 국내 최고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는 사실이 살짝 얼떨떨했다.
"수영아, 저쪽 카페에 들어가서 길드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맞아, 얼른 길드를 만들어서 게이트에 들어가야지."
시현과 민아의 말에 유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길드? 너희 길드 만들려고? 수영이는 그냥 흑월에 들어가서 활동해도 괜찮지 않나?"
"우리끼리 새로운 길드를 만들어 보려고. 아빠도 허락해 주셨어."
"...그럼, 나도 껴 줄 수 있을까? 엄마네 길드는 어차피 언니들이 물려받으려고 하거든."
수영은 '기꺼이'라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카페로 들어간 그녀들은 길드명을 결정한 후, 유빈에게 활동 계획과 흑월의 지원 내역을 알려 주었다.
유빈은 흑월의 지원에 살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S랭크 마수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기사왕 골렘이 함께한다니!
안전만큼은 100% 확보된 셈이리라.
'수영이랑 친해지길 잘했어.'
박수영을 마스터로 한 길드, 백월(白月).
흑월(黑月)의 검은 달과 상반되는 새하얀 달을 상징하는 길드명이다.
수영은 길드원이 될 민아, 시현, 유빈의 서열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실전을 얼마나 경험했는지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수영이, 너는 흑월의 길드원들이랑 같이 게이트에 들어갔었지?"
"헌터증을 발급받고 며칠은 아빠랑 같이 A등급 게이트에 들락거렸었어. 게이트 내에서 토벌한 마수는 대개 D~C랭크 마수들로, 토벌 수는 하루 평균 1~200여 마리 정도는 됐었던 거 같아."
역시라고 말해야 될까?
"2만대 서열이라는 게 엄청나긴 엄청나네."
"흑월 1군이랑 함께할 때는 B랭크 마수를 여러 번 토벌해 봤어. 혼자서 쓰러트린 B랭크 마수는 하루 평균 10여 마리 정도...?"
수영의 실전 경험은 평범한 고등학생들의 것과 격이 달랐다.
그에 비해 서열 16만대인 민아와 유빈, 서열 17만대인 시현의 경우에는 C랭크 마수 한 마리를 토벌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든다는 모양이다.
특수 능력을 사용했음에도 말이다.
유빈은 시선을 떨어트리면서 작게 한숨을 토해 냈다.
"실력 차가 너무 나는데... 이 정도면 우리가 수영이한테 방해가 될지도 몰라."
수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특수 능력을 보유한 만큼 성장도 빠를 거야. 또, 우리가 만드는 길드에 들어오겠다는 애들도 꽤 많으니까, 애들이랑 협력하면서 마수를 쓰러트리면, C등급 게이트 정도는 공략할 수 있어."
"...하긴, 여차하면 골렘이 지켜 줄 테니까."
"그래도 긴장감을 놓으면 안 돼. 골렘에게 의존해 버리면 성장할 수가 없으니까."
"그 정돈 나도 알아. 근데, 길드에 들어온다는 애들은 몇이나 있어?"
"중학교 때 만난 애들인데, 7~8명 정도는 될 거 같아. 일단, 천천히 규모를 키우면서 수성고등학교 안에서 동료를 구해 보려고."
수영의 대답에 유빈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먼저, E등급 게이트에서 각자의 실력을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거 같아. 처음부터 D등급 게이트는 조금 위험할 테니까."
* * *
수영은 건혁의 도움을 받아 백월(白月)이라는 길드를 설립했다.
길드원은 11명으로, 수영을 제외한 대부분의 길드원들이 1~20만대 서열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부모를 따라 실전을 경험한 덕분일까?
백월에 소속된 학생들은 E등급 마수를 상대로 나름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다들 고생 많았어! 정말로 잘 싸우던걸?"
백월의 멤버들을 격려해 주는 검은 머리카락의 여인, 세실리아.
서열 14,912위인 그녀의 칭찬에 학생들은 살짝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에 세실리아는 귀엽다는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정산하러 가야지?"
세실리아의 말에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인근 게이트 처리 관리소에 들어가자, 학생들은 살짝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정도면 D등급 게이트에 들어가도 괜찮지 않나?"
"...직접 돈을 벌어 보는 건 처음이네."
"킬러 레빗만 176마리를 토벌했었지?"
"그래, 그리고 그중 절반... 아니, 7할 정도는 수영이 혼자서 쓰러트렸을 거야."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 수영이 정산된 금액 중 30%를 가져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토벌 수는 70%를 가볍게 상회하는 수준.
학생들은 살짝 어색한 미소와 함께 볼을 긁적였다.
"수영이 덕분에 흑월한테 지원까지 받는데, 40%까지는 가져가도 괜찮은 거 아닌가?"
"맞아, 골렘이 짐꾼 역할도 해 주는 데다가 호위까지 해 주잖아. 이 골렘을 하루 동안 호위로 데려다 쓰려면 몇억 원은 줘야 할걸?"
"게다가 세실리아 언니는 1만대 서열의 헌터야. 호위 역할을 해 주는 건 물론이고, 부족한 부분까지 가르쳐 줄 정도면...."
"세실리아 언니는 한 달 동안만 도와주는 거니까 다들 배운 걸 머릿속에 기억하고, 다음 공략에서 언니한테 좋은 모습을 보여 주자. 또, 보수에 대한 부분은 따로 대화를 나눠서 결정하고."
유빈이 앞서 상황을 정리했다.
잠시 뒤, 수영과 세실리아가 게이트 처리 관리소를 빠져나왔다.
"정산금은 흑월의 길드 계좌로 입금해 놨어. 비율에 맞게 각자의 계좌로 입금시켜 줄 거야. 일단, 이쪽이 오늘 우리가 번 금액이야."
수영이 보여 준 영수증에는 1,600만 원이 기입되어 있었다.
"각자 계산해 보고 입금된 금액하고 비교해 봐.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곧바로 나한테 말하고."
설명이 끝남과 동시에 학생들의 스마트폰이 진동을 울렸다.
수영을 제외한 10명의 길드원에게 균일한 비율로 보수가 입금되었다.
금액은 인당 1,145,760원.
하루 만에 번 금액치고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하루 만에 110만 원을 벌어 버리네."
"수영이가 30%만 받아 가서 그런 거잖아. 우리가 토벌한 숫자를 생각하면... 아마 인당 30만 원 정도였을걸?"
"짐꾼까지 고용하면 30만 원도 채 안 될 거야. 다음에는 D등급 게이트에 들어갈 텐데... 그 전에 비율을 바꿔 두는 게 좋을 거 같아."
학생들은 나중에 수영과 상의하여 정산 비율을 새로이 조정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정산 비율 조정에 대해 불만을 품은 학생은 없었다.
이 자리엔 수영이 고르고 고른 성실하고 정직한 아이들만이 모여 있으니 말이다.
"집에 돌아가기 전에 회식이나 하자!"
"오오!"
어른들이 업무를 마친 뒤에 즐긴다는 회식!
어른을 동경하던 학생들로서는 살짝 흥분되는 단어였다.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는 것도 어른스러운 멋이라고 생각되기에 하는 행동이겠지.
세실리아는 어른을 흉내 내려는 아이들을 보고 '푸훕!'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로 귀엽네.'
그녀는 보호자로서 식당까지 따라갔다.
백월의 길드원들은 고깃집에서 콜라와 삼겹살을 먹는 것으로 즐거운 회식 자리를 가졌다.
"오늘은 내가 살 테니까 마음껏 먹어! 세실리아 언니도 사양하지 말고 마음껏 주문해도 돼."
"그래, 그럼 잘 먹을게."
언제 이렇게 컸을까?
엊그제만 하더라도 조그마한 아이였던 거 같은데.
세실리아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삼겹살을 주문했다.
한편, 백월(白月)에 대한 소식은 인터넷 기사로 보도됐다.
박건혁의 딸, 박수영이 설립한 수성고등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길드.
길드원과 마스터의 서열 차가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지적도 거론되었지만, 부친인 박건혁을 따라 동료들을 성장시킬 계획일지 모른다는 추측이 난무했다.
서열 1~20만대에 특수 능력을 발현한 만큼 성장세는 흑월의 길드원보다 더욱 빠를 것이라는 전문가의 의견이 덧붙여지면서 사람들은 감탄을 터트렸다.
"동아리실 받아 왔어!"
수영의 목소리에 민아가 밝은 얼굴로 기뻐했다.
"조금 작기는 하지만 회의실 정도로 사용하면 될 거 같아."
길드 활동을 동아리 활동으로 인정받아 동아리실을 받아 낸 수영.
동아리실은 대략 6~7평 정도의 규모로, 작년 종이접기 동아리가 폐쇄되면서 빈 곳이라고 한다.
수영은 직사각형 책상 5개와 13개의 의자를 가져다 두는 것으로 작은 회의실을 만들었다.
물론, 회의실은 길드원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드는 공간으로도 이용되었다.
작은 냉장고를 구매하여 음료를 구비하고, 서랍장에 과자를 채워 두며 아지트와 같은 분위기를 만든 길드원들.
그들은 굳이 카페에 갈 것 없이 회의실에 모여 다과를 즐기고 사담을 나누었다.
그 무렵, '백월'에 대한 소식을 접한 걸까?
많은 학생들이 백월에 가입 문의를 넣으면서 작은 곤란한 상황이 발생했다.
수영은 헌터 협회 홈페이지의 백월(白月) 공식 게시판에 길드 내부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당분간 새로운 길드원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의사와 함께 추후 길드원을 모집하기 위한 공지를 따로 올리겠다는 문장을 남겼다.
"어차피 새로운 길드원은 받아들여야 하니까."
"그건 그렇지."
"아 참, 부마스터도 뽑아야 하는 거 아니야? 수영이가 지휘하기 어려울 때 마스터직을 대행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잖아."
민아의 발언에 길드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게 익명 투표가 시작됐다.
내심 기대한 걸까?
민아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투표 결과를 지켜봤다.
결과는 이시현 6표, 유민아 2표, 이유빈 3표로, 시현이 부마스터를 맡기로 결정됐다.
"뭐, 시현이라면야...."
민아도 수긍하고 나서는 모습이다.
유빈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투표의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야 길드원 대다수가 수성중학교 출신이니까, 함께한 시간이 긴 만큼 신뢰도도 높겠지.
게다가 침착한 성격으로 보아 상황 대처도 남다를 것이다.
"그럼, 부마스터는 시현이로 결정하고. 정산 비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었지?"
그에 부마스터가 된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저번 E등급 게이트에서 토벌한 200마리의 마수 중 수영이, 네가 140여 마리를 토벌했잖아. 그런데 비율이 30%라는 건... 조금 좋지 않은 거 같아서. 이것도 한번 투표로 결정해 볼까?"
화이트보드에는 40, 45, 50, 55, 60이라는 퍼센티지가 기입되었다.
재개된 익명 투표에서 대다수가 50%라는 비율을 선택했다.
흑월의 지원을 반영하여 선택한 퍼센티지다.
수영은 잠시 턱을 만지면서 미간을 좁혔다.
"내가 가져가는 비율을 40%로 하고, 나머지 10%를 길드 자본으로 저축해 두는 게 어떨까?"
"길드 자본...?"
"언제까지 흑월한테 의존할 순 없잖아. 일단, 사무실을 대여할 비용이랑 직원을 고용하는 데 필요한 비용, 포션과 같은 소모품을 구매할 때 사용할 자금을 모아 두는 거지."
"흑월한테서 독립하겠다는 의미야?"
"대체적으로 그래. 짐꾼용 골렘은 계속해서 받아 올 생각이지만."
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쁘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흑월에게 의존하는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라고 보면 되겠지.
그동안 흑월로부터 다양한 것들을 배워 두면 된다.
민아와 유빈을 포함한 길드원들 역시 수영의 의견에 반론을 꺼내지 않았다.
제108화
108화. 백월 (2)
"아, 그러고 보니... 김종현이었던가? 그 녀석도 길드를 만들었다고 하더라고. 저번에 우리처럼 D등급 게이트를 공략했다나 뭐라나. 길드명이... 뭐였더라?"
"'자승최강(自勝最強)'이야. '자신을 이기는 자가 가장 강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뜻이고."
"...그 멍청이들이 그런 사자성어를 길드명으로 쓴다고?"
"듣기로는 '정의'랑 '단군'한테 꽤 많은 지원을 받았다고 해. 뭐, 우리도 흑월한테 지원을 받고 있으니 뭐라 할 순 없겠지만. 아무튼, 우리도 이번 주 토요일에 D등급 게이트를 공략한다고 말했었지?"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수는 고블린이고, 필드 환경은 평야... 대형을 새롭게 짜야겠는데? 육체 강화 능력이랑 속성 능력을 발현한 애들을 섞어 가면서 전위를 편성해야겠어. 후위에는 수영이랑...."
시현은 A4용지에 길드원들의 이름을 기입하면서 새로운 대형을 구상했다.
기존 동굴에서의 대형으로는 좌우의 기습에 대응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물론, 대형이 일방적으로 편성되는 건 아니다.
길드원들의 의견을 반영해 최대한 조율하고, 고블린에 대한 특징과 전투 스타일을 분석했다.
"방과 후에 교내 훈련장에서 2~3시간 정도 훈련을 진행하려고 하는데... 너희들은 어때?"
"나는 상관없어. 훈련 마치고 주변 식당에서 저녁이나 같이 먹으면 되겠네."
"나도 괜찮아. 교내 훈련장이면 헌터 훈련장만큼 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잖아."
길드원들의 긍정적인 반응에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백월은 본격적으로 길드 활동을 시작했다.
길드원들은 성장을 위해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안전에 유의하면서 매주 토요일마다 D등급 게이트를 공략했다.
또, 중간고사 시즌에는 동아리실에 모여 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대부분이 높은 성적을 받으면서 중간고사를 마무리했다.
학생들이 노래방과 PC방으로 향할 무렵.
수영은 길드원들을 동아리실로 불렀다.
"내일 공략할 게이트는 C등급으로, 필드 환경은 동굴, 출현하는 마수는 오크야. 다들 기억해 둬."
'고블린'과 '오크'는 RPG 게임에 자주 등장하는 익숙한 마수다.
또, 유X브와 SNS에 공개된 토벌 영상 역시 수두룩했다.
수영은 길드 자본으로 구매한 컴퓨터를 켜 오크를 토벌하는 영상을 재생시켜 주었다.
"보다시피 상대는 2m라는 신장에 거대한 육체를 보유하고 있어. 평범한 공격은 먹히지도 않을뿐더러 지금의 우리들로서는 직접 부딪치는 것도 어렵겠지. 녀석의 공격은 육체 능력 강화를 가진 10만대 서열의 헌터들조차 버거워하는 상대야."
14만대 서열의 헌터가 간신히 오크를 토벌한다.
해당 영상이 모니터로 재생되자, 길드원들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수영은 그 모습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실리아 언니는...."
민아의 목소리에 수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끔씩 도와준다고 말하기는 했는데... 한동안은 조금 어렵다네."
백월이 활동을 시작하고 한 달간 보호자로서 따라다닌 세실리아.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 그녀는 주말마다 단독으로 C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면서 개인 훈련 시간을 가졌다.
"그래도, 골렘은 같이 들어가는 거지?"
시현의 질문에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골렘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은 버려. 강해지기 위해서는 위험도 경험해야 돼. 게이트에 들어간 순간, 우리는 일개 고등학생이 아닌 마수를 토벌해야 하는 '헌터'야. 이걸 절대로 잊지 마."
수영의 진지한 목소리에 10명의 남녀 학생들이 긴장한 듯 주먹을 쥐었다.
D등급에서도 고전을 면하지 못했는데, 벌써 C등급 게이트에 들어간다고?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닐까?
몇몇 학생들은 우려를 보이면서 살짝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수영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번 C등급 게이트를 공략한 다음에는 D등급 게이트와 번갈아 가면서 공략할 계획이야. 일단, C랭크 마수에 적응해야 되니까. 또, B랭크 마수가 출현할 때는 기사왕 골렘이 움직일 테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길드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쳤다.
짝!
"오늘은 이쯤에서 해산하자. 그동안 공부 때문에 힘들었으니, 오늘은 돌아가서 편히 쉬어 둬."
"쉬는 것도 쉬는 거지만, 다들 내일 아침 9시까지 모이는 거 잊지 마!"
시현이 다시 한번 약속 시간을 상기시켰다.
길드원들은 회의실을 나서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자마자 C등급 게이트 공략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특히, 오크를 토벌하는 영상을 수시로 찾아봤는데.
영상을 보면 볼수록 심장은 더욱 크게 요동쳤다.
"저런 괴물을... 우리가 쓰러트릴 수 있다고?"
특수 능력을 사용한들, 녀석에게 작은 상처 하나 만들기 어려워 보였다.
녀석이 대검을 바닥에 내리꽂는 순간.
거대한 굉음이 귓구멍을 꿰뚫었다.
"...위력도 어마어마하네."
거체에 맞먹는 묵직한 일격.
정면에서 맞섰다가는 100% 쓰러지고 마리라.
긴장되는 하루를 마무리하고, 마침내 C등급 게이트 공략이 시작됐다.
파란만장한 공략이 말이다.
"히익?!"
공포에 질려 잦은 실수를 보인 길드원들.
바닥에 넘어진 길드원은 덜덜덜 떨면서 오크를 올려다봤다.
실제로 보니 공포스러울 지경이다.
오크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붉은 안광을 빛냈다.
그때.
푸욱!
녀석의 목덜미에 푸른빛 화살이 꽂혔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죽고 싶어?!"
수영의 외침에 길드원이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파파파팍!
후위에서 다섯 마리의 오크를 저격한 수영.
그녀는 일부러 오크의 허벅지와 다리를 노렸다.
마지막 타격을 길드원들에게 양보한 것이다.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되찾도록.
"죽여!"
수영의 외침에 길드원들이 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황금빛 번개가 일렁이는 민아의 주먹이 오크의 안면을 강타하고, 시현이 만든 번개의 창이 녀석의 복부를 꿰뚫었으며, 유빈이 만든 화염의 칼날이 육체를 불태웠다.
이어, 목을 베고, 가슴을 꿰뚫는 등으로 다섯 마리의 오크를 철저하게 박살 냈다.
"하아... 하아... 하아...."
길드원들이 부상당한 다섯 마리의 오크를 상대할 동안 수영은 오크 궁사 셋을 저격했다.
궁사의 목덜미를 꿰뚫은 세 개의 화살.
단 일격으로 세 마리의 오크를 쓰러트린 것이다.
"역시... 다르긴 달라."
유빈은 수영을 보면서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마 저 오크들도 일부러...."
"그래, 우리가 쓰러트릴 수 있도록... 아니, 두려움을 떨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거겠지."
수영의 의도를 깨달은 몇몇 길드원들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봤다.
바닥에 드러누운 오크의 시체.
설마, 살아 있는 건 아니겠지?
녀석의 거체와 악귀 같은 얼굴은 공포 그 자체였다.
이런 괴물들과 계속 싸워야 한다니....
'고블린도 무섭기는 했지만, 녀석들은 그나마 작기라도 했잖아.'
'이게 C랭크....'
구룡산 게이트를 직접 체험해 볼 때는 건물 안에 숨어 구조를 기다릴 뿐.
실제로 마수들과 조우해 전투를 치른 적은 없었다.
해 봐야 헌터가 되어 녀석을 쓰러트릴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정도랄까?
"하아, B랭크는 도대체 얼마나 괴물이란 거야?"
"수영이는 B랭크도 쓰러트려 봤다고 했었잖아. 게다가 박건혁 헌터님을 따라 A랭크랑 S랭크 마수를 실제로 보기까지...."
골렘들이 오크의 가죽을 베어 마석을 회수하자, 길드원들은 고개를 돌리면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부산물을 회수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그로테스크했다.
고블린을 해체할 때보다 더욱.
게다가 냄새까지 고약하다.
'이래서 헌터들이 부산물 회수를 짐꾼한테 맡기는 건가?'
길드원들이 멍하니 서 있을 무렵.
수영은 피해를 확인한 다음, 행군을 지시했다.
오크 정찰대와의 조우는 계속됐다.
또, 2~3차례에서 보인 길드원들의 미숙한 모습이 4~5차례에서는 확연하게 개선되었다.
콰앙!
"크윽...!"
왼손에 방패를 쥔 남학생이 이를 악물면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오크의 뒤에서 창을 내지르는 여학생.
오크의 고개가 뒤로 돌아가자, 남학생이 오른손에 쥔 한손검을 휘둘렀다.
서걱!
종아리에서 터져 나오는 붉은 핏물.
남학생은 얼굴을 핏물로 적시면서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걸레가 되어 버린 방패를 바닥에 내던지고 한손검을 오크에게 겨누었다.
백월은 2인 1조를 구성하며 오크를 공격했다.
파파팍! 파팍!
한편, 다섯 마리의 오크 궁사를 저격한 수영은 빙마궁을 내리면서 길드원들의 전투를 살펴봤다.
"많이들 좋아졌네."
수영은 짐꾼용 골렘에게 스마트폰을 넘겨 길드원들의 전투를 촬영했다.
뛰어난 동료를 모으기 위해서는 먼저 백월이란 길드를 알릴 필요가 있다.
촬영되는 영상은 추후 편집을 통해 홍보 영상으로 거듭날 것이다.
'골렘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C랭크 마수인 오크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사실을 공개해야... 2~3학년 선배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수성중학교와 수성고등학교에는 수영이 1회차에서 만난 인재들이 가득했다.
그들을 백월로 가입시킨다면 마왕군과의 전쟁에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취이익!
공략을 시작하고 몇 시간이 지났을까?
점심을 먹고도 4~5시간을 게이트 안에서 보낸 백월.
그들이 게이트를 빠져나갈 무렵.
손목시계의 바늘은 오후 4시 5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터덜터덜 지친 발걸음으로 게이트를 빠져나온 길드원들은 게이트 처리 관리소 앞에 주저앉았다.
털썩.
"하아, 오늘은 정말로 최악이었어."
"도대체 몇 시간이나 들어가 있었던 거야?"
"아침 9시부터 시작했으니까... 8시간 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중 1시간은 점심 식사로 보내고, 2~3시간은 휴식을 취했잖아. 이동과 전투에 들어간 시간은 4시간 정도야."
시현의 정확한 설명에 민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게다가 우리가 쓰러트린 오크는 37마리고, 수영이가 쓰러트린 오크는 63마리지."
"그 37마리 중 절반은 수영이의 지원 덕분이었잖아. 솔직히, 지금의 우리 수준으로 C등급 게이트는 공략하기 어려울 거 같아."
유빈의 기운 빠진 목소리에 길드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자신들에게 C등급 게이트는 무리다.
차라리 D등급 게이트에서 천천히 성장하는 게 옳지 않을까?
모두가 한숨을 푹푹 내쉬던 그때.
스마트폰이 진동을 울리기 시작했다.
"미... 미친...."
통장에 입금된 금액은 300만 원.
역대 최고 금액에 길드원 전원이 경악성을 터트렸다.
금일 고생이 순식간에 씻겨 나간 느낌이랄까?
길드원들은 헛숨을 들이켜면서 게이트 처리 관리소를 빠져나온 수영을 바라봤다.
"수... 수영아, 우리 전부 300만 원씩 입금됐는데...."
물론, 시현의 경우에는 부마스터로서 5% 정도를 얹어 315만 원을 받았다.
어찌 됐든 길드원들의 당혹스러운 반응에 수영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C등급 게이트에서 오크를 토벌한 것이다.
이 정도의 보수는 당연할 텐데....
"C등급 게이트 평균 보수에 대해 조사 안 해 봤어? 10만대 서열의 헌터들은 대개 5~600만 원씩 받아 가잖아. 물론, 헌터가 2~30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고, 짐꾼까지 고용한 상태로지만...."
참고로 수영이 단독으로 C등급 게이트에 들어간다면 홀로 1~2천만 원까지도 가능했다.
실제로 서열 3만대였던 건혁이 그렇게 벌었었으니 말이다.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일 때, 수영은 씨익 웃으면서 팔짱을 꼈다.
제109화
109화. 자승최강 길드 (1)
"다들 갈아입을 옷은 가져왔지?"
"아, 가져오기는 했는데...."
골렘의 배낭에 든 새 옷들.
수영은 박수를 치면서 길드원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근처 사우나에서 땀 좀 씻고, 같이 저녁이나 먹고 돌아가자! 사우나비랑 식사비는 전부 내가 낼 테니까 영수증 받아 두고!"
마스터로서 소소한 복지를 제공해 주고자 한 수영.
길드원들은 작게 환호하면서 곧바로 가까운 사우나로 들어갔다.
골렘은 사우나 바깥에서 대기했다.
지나가던 행인들은 골렘들을 보곤 화들짝 놀라 사진을 찍었다.
"조... 조각상인가?"
행인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시각.
땀을 깨끗이 씻어 내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수영의 일행은 곧바로 택시를 붙잡았다.
일행과 골렘을 태운 택시들은 강남구에 위치한 스테이크 가게 앞에 멈춰 섰다.
길드원들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여기, 진짜 오랜만에 와 보네."
"그러게. 나도 몇 달 만인지...."
스테이크도 스테이크지만, 식당 내부에 비치된 샐러드 바에는 피자, 치킨, 갈비, 새우, 우동, 떡볶이, 감자튀김, 고구마 맛탕 등을 비롯해 케이크, 푸딩, 요거트 등의 디저트와 콜라, 사이다 등의 음료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천국이나 다름없는 장소.
"스테이크도 주문하려면 주문해도 돼."
주말 저녁으로 샐러드 바 금액은 33,000원 정도.
그 외 길드원들이 주문한 스테이크 금액은 1~3만 원대까지 다양했다.
인원이 많기 때문일까?
사우나비, 택시비, 식사비를 통틀어 7~80만 원가량이 사용됐다.
그러나 수영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길드 자본으로 600만 원이 빠진다 하더라도, 금일 그녀의 통장으로 들어온 돈은 2,400만 원이 넘으니까.
"오늘 번 돈은 집에 돌아가서 마음껏 사용해 봐. 게임기, 스마트폰, 화장품, 명품 가방이나 지갑 같은 것도 한번 살펴보고."
"아...."
"돈을 버는 이유는 쓰기 위해서야. 백월은 계속해서 성장할 거고, 너희도 나와 함께 강해질 거야. 오전에는 고생을 좀 많이 하기는 했지만, 오후에는 좋은 모습을 많이들 보여 줬으니... 2주 뒤의 C등급 게이트에선 분명 오늘보다 더 수월하겠지."
"수월... 하려나?"
민아가 쓴웃음을 보이자, 수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2주 뒤에 예약해 둔 게이트 역시 오크들이 자주 출몰한대. 그러니, 오늘 겪은 경험과 긴장감을 절대로 잊지 마. 훈련을 게으르게 하지 않고, 다음 주 D등급 게이트 공략에서 실전을 겪어 둔다면, 아마 2주 뒤 C등급 게이트에서 조금 전에 말했던 대로 수월하게 공략할 수 있어."
길드원들은 수영의 이야기에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2학년이 되기 전에 서열을 최대한 높여서 모두를 놀라게 해 주자고! 건배!"
길드원들이 '건배'를 복창하며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내, 자리를 오가며 샐러드 바에서 다양한 음식을 가져오는 길드원들.
수영 역시 분위기를 즐겼다.
길드원들은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지금 XX에서 게임 할인 판매하고 있어! 지금이면 저렴하게 해 보고 싶었던 게임 다 살 수 있을걸? 아니, 조금 비싸더라도 이 정도면...."
"막상 돈이 생기니까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하네."
"나는 이번에 새로 나온 폴더블폰을 구매하려고. 게임기도 새로 나온다고 했는데...."
"나는 손목시계나 하나 사야겠다. 저번에 봐 둔 게 너무 비싸서 망설였었거든."
게임기, 스마트폰, 손목시계 등으로 대화를 나누는 남성 길드원들.
반면, 시현, 민아, 유빈 등의 여성 길드원들은 수영의 곁에서 화장품, 옷, 액세서리를 화제로 대화를 나누면서 평소에 가지고 싶었던 물건을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아 참, 우리 내일은 영화나 보러 가자."
하루 만에 300만 원이라는 현금이 생긴 탓일까?
길드원들은 살짝 흥분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돈을 쓰는 데 바쁜 길드원들의 모습에 작게 미소를 지은 수영.
그래, 돈을 벌었으면 쓰는 맛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더욱 많은 돈을 바라고, 지금보다 강해지기를 원하겠지.
저녁 식사를 마친 수영은 길드원들을 해산시키고, 대기 중인 경호원들에게 다가갔다.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경호원이 손수 뒷문을 열어 주었다.
그렇게 수서동으로 향하는 세 대의 차량.
수영은 창밖을 내다보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시현이랑 유빈이가 있어서 다행이야. 길드를 운영하는 게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생각도 못 했어.'
흑월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더욱 피곤했을지도 모른다.
'일단, 홍보 영상을 만들 편집자부터 구해 보자.'
금일 이후 2~3차례 추가 촬영을 한 다음, 2~3분 분량의 홍보 영상을 제작할 계획이다.
부족한 모습보다는 멋있는 모습을 촬영하는 게 좋겠지.
그렇다면 좋은 장면들을 뽑아 영상으로 제작해야 된다.
또, 골렘의 도움 없이 C등급 게이트를 공략했단 사실이 공표되면, 아마 수성고등학교 2~3학년 선배들도 관심을 가질 게 분명하다.
'그 사람들이 가입 신청을 해 줄지는 모르지만, 장차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가 될 사람들이라면, 하루빨리 받아들여 두는 게 좋을 거야.'
수영은 몇몇 선배들의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한편, 백월의 길드원들은 돈을 쓰는 데 서서히 맛을 들여 갔다.
화장품, 스마트폰, 의류에 돈을 사용하는 여학생들과 게임기, 컴퓨터, 태블릿 등에 돈을 사용하는 남학생들.
그들은 서서히 시야를 넓혀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 주일이 흘러 길드원들은 C등급 게이트 공략에서 번 돈으로 명품 브랜드의 지갑, 파우치, 손목시계 등을 구매하며 외견을 가꾸었다.
"우와, 저거 스위스 OOO 아니야? 인터넷에서 백만 원은 넘던데...."
"백월이 이번에 C등급 게이트를 공략했다고 하잖아."
"C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면... 도대체 얼마나 벌 수 있는 거지?"
"그거, 골렘으로 공략한 거 아니야? 백월에 데스나이트를 상대할 수 있는 골렘이 붙었다고 하던데... 적당히 몇 번 움직이면 몇천만 원은 순식간일걸?"
"아, 그럴 수도...."
게이트의 공략을 골렘에게 의존한 백월.
해당 소문은 자승최강(自勝最強) 길드의 마스터, 김종현에 의해 파다하게 퍼져 나갔다.
교내의 모두가 '백월'을 가시 박힌 눈길로 바라보던 도중 헌터 협회 홈페이지, 백월의 길드 게시판에 공식 홍보 영상이 올라왔다.
D~C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길드원들의 모습이 촬영된 영상이다.
2~3시간짜리 영상 12개를 2분 56초로 편집하다니.
돈을 좀 쓴 덕분일까?
영상의 퀄리티는 어마어마했다.
"1학년생이 C랭크 마수를 벌써 쓰러트린다고?"
"2인 1조로 토벌하는 건가? 박수영은... 얘는 그냥 논외로 쳐야겠네."
"혼자서 도대체 몇 마리를 잡는 거야?"
"D랭크 마수는 가볍게 쓰러트리는 거 같은데?"
해당 영상이 공개됨과 동시에 종현이 욕설을 터트렸다.
"이런 X 같은...!"
백월(白月)과 다르게 자승최강(自勝最強)은 현재 E등급 게이트를 주로 공략하는 중이다.
가끔 D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며 '자승최강' 길드의 우수함을 소문냈는데.
이번 백월이 공개한 홍보 영상으로 자승최강의 소문은 순식간에 파묻혔다.
"X발! 애들이 전부 백월로 가고 있어!"
"우리 길드하고 계약하겠다던 선배들까지 돌아가 버렸다고!"
길드원들의 욕설에 종현은 까드득 이를 악물었다.
백월은 홍보 영상을 올림과 동시에 신입을 모집한다는 게시 글을 올렸다.
그 탓일까?
자승최강으로 들어오려던 학생들이 우르르 백월로 몰려갔다.
"...우리도 홍보 영상을 만들어야겠어. 당장 예약 가능한 C등급 게이트를 찾아봐."
종현의 말에 도현이 미간을 찡그렸다.
"설마, C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려고? 애들 수준으로는 D등급 게이트도 벅찬 거 너도 잘 알잖아!"
"X발, 그럼 어떡하라고! 우리 쪽에서 봐 둔 새끼들이 전부 백월로 가고 있잖아! C등급 게이트 공략 영상을 편집해서 쓸모 있는 놈들만 대거 받아들이면 돼. 그럼, 앞으로 C등급 게이트 공략은 한결 수월해지겠지!"
"하지만...."
"한 번이면 돼! 딱 한 번이면 2~3학년까지 데려올 수 있어. 그러니, 당장 예약 가능한 C등급 게이트부터 찾아봐."
도현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종현의 매서운 눈빛에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헌터 협회 홈페이지에 들어간 도현.
그는 수도권 내에서 예약이 가능한 C등급 게이트들을 살펴봤다.
"경기도 광주 쪽에 있는 게이트야. 언데드형 마수가 대체로 서식하는 중이고. 아니면 하남 쪽에 오크가 자주 출몰한다는...."
"아니, 오크는 너무 식상해. 백월 새끼들도 쓰러트린 놈들이잖아. 그것보다 C랭크면 구울인가? D랭크인 스켈레톤은... 뭐, 별거 아니겠지. 게이트 보스로 듀라한이 서식 중인... 뭐, 녀석과 마주칠 일은 없을 테니 상관없고. 다음은...."
C랭크를 가볍게 입에 담는 종현의 모습에 도현은 살짝 기가 막히고 말았다.
C랭크가 누구 집 개 이름인 줄 아는 건가?
만반의 대비를 해 두어도 부족한 상대다.
도현은 종현과 상의하며 만일의 사태를 대처할 수 있도록 대비책을 마련했다.
"짐꾼은...."
"뭐, 저번처럼 F반 새끼들을 짐꾼으로 데려가면 되겠지. 2~3만 원만 줘도 열심히 하는 새끼들이니까 말이야."
종현은 자승최강 길드에 F반 학생 다섯 명을 받아들였다.
A반 학생들을 받아들여도 모자랄 판국에 왜 하필이면 F반을 받아들인 것이냐.
이유는 간단하다.
학생으로 이루어진 자승최강과 함께하려는 짐꾼이 없었기 때문이다.
종현은 F반 학생들을 달콤한 제안으로 유혹해, 짐꾼이 모집되기 전까지만 짐꾼 역할을 맡아 주면서 견학을 해 달라는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화가 난 F반 학생들은 탈퇴를 신청하려 했으나, 종현이 그들을 학교 뒤편으로 데려가 폭행을 가하며, 협박으로 자승최강 길드에 묶었다.
"새끼들, 2~3만 원이라도 쥐여 주는 게 어디야? 짐도 제대로 못 드는 것들이...."
짐꾼의 보수가 낮아진 덕분에 전투원이 받는 보수는 더욱 높아졌다.
그래 봐야 6~7만 원 정도지만 말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따라야지, 안 그래?"
동의를 구하는 종현의 물음에 도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 익명 투표를 진행한 종현.
안건은 짐꾼의 보수를 2~3만 원대에서 10만 원대까지 높이자는 것이었다.
결과, 과반수가 반대하여 해당 투표는 그대로 막을 내렸다.
반대표 열셋에 찬성표 다섯.
결국, F반 학생을 제외한 길드원 전원이 반대표를 던진 셈이다.
그 당시 보인 F반 학생들의 절망 어린 표정에 길드원들은 작게 조소를 터트렸다.
"병X 새X들, 미쳤다고 보수를 10만 원이나 주겠냐?"
"저 새끼들한테 10만 원을 주려면... 우리가 3~4만 원을 내줘야 하잖아. 저 자식들한테 그 정도의 가치가 있던가?"
"X발, 저 새X들 때문에 공략이 늦어졌던 걸 생각하면... 진짜 2~3만 원도 많이 주는 거다."
8~9시간의 공략에 참가해서 2~3만 원을 벌어 간다?
차라리 아르바이트를 하고 말지.
제110화
110화. 자승최강 길드 (2)
F반 학생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울음을 터트렸다.
"시끄러워!"
퍼억!
한 길드원이 울음을 터트린 남학생을 걷어찼다.
복부를 걷어차인 남학생은 콜록콜록 기침을 터트리며 바닥에 넘어졌다.
그때, 용기를 낸 F반 학생이 목소리를 냈다.
"서... 선생님한테...!"
"말해 보든가. 대신, 저번에도 말했었지? 내가 정학을 당하든 퇴학을 당하든, 너희 집안만큼은 어떻게든 박살 낼 거라고."
"...."
"왜, 못 할 거 같아? 요즘 같은 시대에 사람 한두 명 죽이는 게 어렵겠어?"
F반 학생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중학교 시절 김종현이 행해 온 악행은 최근 들어 더욱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특히, 당시에 발생한 실종 사건의 내용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나...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까지도....'
마수에게 뜯어 먹힌 변사체로 발견되고 마리라.
"자아, 민주적인 익명 투표는 여기까지."
종현은 밝게 웃으면서 안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F반 학생들을 짐꾼 및 교내 셔틀로 사용해 온 것도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2024년 5월 18일 토요일.
경기도 광주 남쪽에 위치한 C등급 게이트.
자승최강 길드원들은 서열에 맞지 않는 훌륭한 장비를 착용한 채 게이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파각!
"X발, 지금까지 사용했던 검하고는 차원이 다르네."
"D랭크인 스켈레톤을 이렇게 쉽게... 확실히 리바늄이 좋긴 좋네."
"야, 이왕이면 최대한 화려하게 쓰러트려 봐! 홍보 영상으로 만든다고 하잖아!"
"너, 저번에 한소연한테 고백한다면서! 영상에서 분량 좀 나오면 얼굴도 알려질걸?"
'홍보 영상'이라는 단어에 자극이라도 받은 걸까?
길드원들은 화려한 검술로 마수를 쓰러트리기 시작했다.
점심 식사를 먹던 도중 종현은 결과물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슬슬 구울하고 싸워 봐도 괜찮겠는데? 놈들이 나타나는 지역하고도 곧 가까워질 테니까, 다들 힘 좀 써 보자고! 백월, 그 X새끼들한테 밀려서 되겠냐!"
"이번에야말로 우리가 수성고등학교 1학년 최강 길드로 자리 잡자!"
2~3학년의 길드를 따라잡으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하지만, 자신들이 추후 B랭크 마수까지 쓰러트린다면....
'교내 최강 길드로 거듭날 수 있겠지.'
2~3학년조차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
종현은 씨익 웃으면서 길드원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출발하자!"
식사를 마친 종현이 길드원들을 데리고 구울이 자주 출몰한다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짐을 멘 F반 학생들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서열 10만대의 헌터조차 버겁다는 C랭크 마수를 과연 종현의 일행이 쓰러트릴 수 있을까?
최악의 경우, 자신들의 목숨까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F반 학생들은 종현의 일행을 따라가면서도 서로서로 무언가 대화를 주고받았다.
"저 새끼들이 여기서 죽어 버린다면 좋겠지만...."
"위험할 거 같을 때... 뒤에서 밀어 버릴까?"
평생 종현의 밑에서 노예처럼 살 생각은 없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그들을 C랭크 마수에게 먹이로 던져 주는 것이겠지.
물론, C랭크 마수를 쓰러트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F반 학생들이 수군거리던 순간.
종현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X발, 분위기 X 같네, 진짜."
진한 갈색빛을 띠는 나무 기둥과 검은색 나뭇잎.
수풀 역시 불에 타기라도 한 듯 검게 그을려 있었다.
게다가 날이 저물려는 걸까?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는데.
칙칙한 분위기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캬악.
좌우에서 구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울음소리를 어떻게 아냐고?
그야 인터넷으로만 수십 번이나 들어 봤으니까.
"전원, 전투 준비해."
종현의 지시에 길드원 전원이 긴장한 얼굴로 무기를 겨누었다.
난생처음으로 상대하는 C랭크 마수지만, 단군의 지원으로 리바늄제 무기와 갑옷을 착용하고, D랭크 마수인 스켈레톤을 1대1로 쓰러트렸다.
C랭크?
백월도 쓰러트렸는데, 자신들이라고 못 할까?
"절대로 방심하지 마! 확실하게 쓰러트려서 학교에 자승최강이란 이름을 알리자고!"
호응하듯 미소를 짓는 길드원들.
잠시 뒤, 수풀에서 '파삭' 소리가 들려왔다.
길드원의 시선이 일제히 수풀로 향했다.
-캬아아악!
기괴한 울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울음소리.
나무 위에 잠복하고 있었던 건가?!
반들거리는 검은빛 피부.
반짝이는 붉은 안광.
날카로운 손톱과 이빨.
녀석이 나무에서 뛰어내려 길드원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콰득!
"끄아악!"
살점을 뜯어 간 직후, 놈은 수풀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 뒤를 쫓던 종현이 욕설을 터트렸다.
"X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구울.
목덜미를 물어뜯긴 길드원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덜덜덜 몸을 떨었다.
다급히 포션을 가져온 도현이 그의 목덜미에 포션을 뿌렸다.
촤악!
1~2급 포션이었다면 곧바로 회복되었겠지.
하지만 지금 사용된 포션의 등급은 4급이다.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고, 몸을 떨던 길드원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주... 죽었어?"
"마... 말도 안 돼. 호성이가... 죽었다고?"
어제까지 함께하던 친구이자 동료가 목숨을 잃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너무 멀게 생각했던 걸까?
충격을 받은 길드원들은 몸을 경직시킨 채 멍하니 호성의 시체를 바라봤다.
"당장 주변 경계해!"
종현의 외침에 길드원들이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X발, 내가 방심하지 말라고 했지!"
종현은 분노했다.
설마, 자신의 길드에서 희생자가 발생할 줄이야.
이런 낭패가 또 어디에 있을까!
최소한 구울만큼은 쓰러트려야 한다.
빈손으로 돌아갔다가는 무리하게 도전했다가 피해가 발생했다고 비난을 받겠지.
그러나 구울을 쓰러트린다면 비난 여론은 조금이나마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왜냐고?
자승최강 길드의 전력이 C랭크 마수를 상대할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니까.
다시 말해 무리한 도전이 아니었음을 언급할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다섯 마리 정도는....'
사상자의 경우에는 길드원들과 입만 맞춰 두면 된다.
전투 도중 수십여 마리의 구울이 몰려온 탓에 발생한 피해라고.
종현은 영상을 녹화하던 스마트폰을 재빠르게 낚아채 박살 내 버렸다.
"뭐... 뭐 하는...."
"스마트폰은 새 걸로 사 줄 테니까, 다들 절대로 긴장 늦추지 마. 적어도 대여섯 마리 정도는 토벌한 다음에 물러나야 돼."
길드원들이 눈치를 살피면서 호성의 시체를 바라봤다.
"눈 돌리지 마!"
푸슥!
종현의 외침과 동시에 수풀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붉게 반짝이는 안광.
번들거리는 검은 피부를 지닌 마수.
녀석의 악귀 같은 얼굴에 길드원들은 흠칫 놀라면서도 재빨리 방패를 겨누었다.
-캬아악!
쾅!
"한 마리 정도는...!"
푸욱!
방패로 공격을 막아 낸 길드원이 눈을 크게 떴다
뭐지?
분명, 공격은 막아 냈을 터.
그런데, 가슴에서 느껴지는 이 뜨거운 느낌은 뭐야?!
그의 고개가 천천히 떨어졌다.
가슴을 꿰뚫은 검은 손.
구울의 손이다.
왜 자신의 가슴에서 녀석의 손이 튀어나온 걸까?
그는 의문을 해소시키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X발, 뒤에도 있어!"
"위... 위에도...!"
호성의 죽음에 충격을 헤매던 순간.
놈들은 사방을 포위하고 있었다.
육안에 포착된 숫자만 다섯.
토벌하고자 한 숫자와 일치한다.
"허... 허둥거리지 마! 주변을 경계하면서...!"
"저 개X끼들이...! 종현아, 짐꾼 X끼들이 도망치고 있어!"
종현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함께했던 F반 학생들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진입해 온 방향으로 도망친 것이다.
"이런 X발 X끼들이...!"
짐꾼들의 도주로 길드원들은 더욱 큰 혼란에 빠져야 했다.
서걱!
"크악!"
비명 소리를 내지르며 몸을 파르르 떠는 도현.
"내... 내 팔이...!"
그는 잘려 나간 오른팔을 보곤 눈물과 콧물을 쏟아 냈다.
도현의 팔이 절단된 직후.
종현은 상황 판단을 끝마쳤다.
사상자에 대한 핑계를 만들고자 계획했던 것이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이야.
다섯 구울에게 사냥을 당한 자승최강의 길드원들.
"으... 으아악!"
"도망쳐!"
전의는 이미 상실했다.
퇴각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길드원들은 재빨리 짐꾼의 뒤를 쫓아 달렸다.
"아...."
무언가 명령하려는 걸까?
종현은 멍하니 길드원들의 등을 바라봤다.
"크윽...."
이내 그는 이를 악물고 도현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C랭크가 이토록 무서운 마수였다니!
백월에게 주목된 관심 탓에 중요한 사실을 망각했던 모양이다.
종현은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제길...."
추격해 오는 구울들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었다.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나 보자는 듯이.
마침내 자신의 입장을 깨달았다.
자신은 사냥꾼이 아니다.
"X발!"
사냥감일 뿐.
종현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전방을 바라봤다.
짐을 버리고 도망친 짐꾼들의 모습이 포착됐다.
"그 새끼들 전부 넘어트려!"
길드원들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종현의 목소리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종현의 지시에 따르는 순간 자신들은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뒤에서 쫓아오는 구울들 때문일까?
길드원들은 자기 합리화를 하듯 핑계를 만들면서 짐꾼들에게 달려가, 그들의 다리를 걷어차 넘어트렸다.
"끄악!"
다섯 명의 짐꾼이 바닥을 뒹굴었다.
"X발, 너희가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동우는 죽지 않았어!"
"뒈져 버려! 이 쓰레기 같은 새끼들아!"
짐꾼들을 향해 욕설을 토해 내며 숲속을 벗어나는 길드원들.
한편, 짐꾼들은 길드원들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악을 내질렀다.
분노와 원망이 담겨 있는 목소리.
짐꾼들이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종현은 그들을 있는 힘껏 내던졌다.
추격해 오는 구울을 향해 말이다.
구울은 날아오는 F반 학생을 그대로 물어뜯었다.
콰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들이닥친 거대한 고통.
"끄아아아악!"
"사... 살려...!"
미끼가 된 F반 학생들은 그대로 구울에게 먹히고 말았다.
추격에서 벗어난 종현과 길드원들은 체력이 다한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하아...."
"도... 도대체 몇 명이...."
살아남은 사람은 고작 6명뿐.
게이트에 들어온 18명 중 무려 12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심지어 도현을 비롯한 두세 명은 부상을 입은 상태.
전멸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기랄!"
종현은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면서 뿌드득 이를 갈았다.
분명, C등급 게이트 공략에 부합되는 서열과 인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처참한 결과가 만들어진 거지?
그가 수많은 의문에 헤매던 그때.
도현은 3급 포션을 들이켜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제... 제발... 제발...."
오른쪽 어깨에 만들어진 단면에서 다량의 핏물이 쏟아져 나온다.
머리가 새하얘지려던 것을 정신력으로 버티고, 사라진 오른팔이 다시 재생되길 바란 도현.
그는 다시 한번 3급 포션을 들이켰다.
그러나 상처 부위가 서서히 아물 뿐.
오른팔은 재생되지 않았다.
"이... X바아아아알! 내... 내 오른팔...! 김종현, 이 X발 새끼야! 내가 C등급 게이트는 이르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도현이 종현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종현은 화들짝 놀라면서 도현의 복부를 걷어찼다.
퍼억!
"이런, 미친 X끼가! 너희들도 다 동의했잖아! 왜 이제 와서 내 탓을 해!"
왼손으로 복부를 부여잡은 도현이 눈이 충혈된 채로 종현을 노려봤다.
제111화
111화. 자승최강 길드 (3)
"크윽... 네가 강압적으로 결정했으면서 무슨 X소리야! 이 X발 X끼야!"
다시 한번 돌진해 오는 도현을 향해 종현이 주먹을 내질렀다.
이어, 도현이 일어날 수 없을 때까지 두들겨 팼다.
오른팔을 잃은 탓일까?
도현은 제대로 반항 한번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하아... 하아... 하아.... 개X끼야, 네 오른팔은 '단군'이랑 '정의'에서 1급 포션을 마련해 재생시키면 돼. 지금은 사망자가 발생한 것부터 처리해야 된다고!"
종현은 고개를 돌려 길드원들을 노려봤다.
"우리는 수십여 마리의 구울에게 포위를 당해 도망친 거다. 도망치던 도중 사망자가 발생했고, F반 그 X발 X끼들은 우리를 버리고 도망치다가 지쳐서 구울한테 당한 거야. 알겠어?"
길드원들이 눈치를 살피며 망설이자, 종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내가 말한 그대로만 대답하면, 각자 현찰로 천만 원씩 건네줄게. 반대로 이상한 말을 꺼내면... 범죄자를 고용해서라도 반드시 죽여 버린다."
종현의 살벌한 경고에 길드원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단지, 명령에 따를 뿐.
종현은 2~3시간 동안 회복과 휴식을 취하면서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게이트를 관리하던 협회 직원은 종현과 그 일행의 행색을 보곤 화들짝 놀랐다.
설마, 안에서 사고라도 발생한 건가?
종현은 미리 구상해 둔 이야기를 협회 직원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따... 따라오세요!"
협회 직원은 그들을 게이트 주변에 설치된 관리소로 데려갔다.
종현과 일행은 부상자들이 누울 수 있는 간이침대에 누워 편히 쉬었다.
그렇게 2~30분이 지났을 무렵.
관리소로 찾아온 청룡 기사단원들이 자승최강 길드원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조사에 협조한 길드원들은 지도의 한 곳을 가리키며 비슷한 내용을 내뱉었다.
"그래, 이쪽 숲에서...."
기사단원은 작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너희는 이곳에서 쉬고 있으렴. 곧 부모님께 연락을 드릴 거란다."
자승최강의 길드원들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한편, 자승최강에게 닥친 사건은 인터넷을 비롯해 방송국에까지 전달됐다.
대한민국 헌터 육성 기관인 수성고등학교 학생 중 사상자가 나온 것이다.
속보로 다루어도 부족함이 없는 사건.
덕분에 종현과 자승최강 길드원들은 수성고등학교에서 유명인이 되어 버렸다.
바랐던 것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그리고 이번 자승최강 길드의 사건으로 국회에선 고등학생의 게이트 출입에 대한 규제를 새로 신설해야 된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발의된 법안에는 '헌터증을 발급받은 미성년자의 경우, 게이트에 반드시 보호자를 대동해야 된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보호자에 대한 세부 내용은 2~3페이지까지 길게 열거됐다.
"세실리아 언니가 따라와 주면 좋기는 한데...."
수영은 발의된 법안을 보면서 한숨을 토해 냈다.
현재 서열을 높이기 위해 주말마다 개인 훈련을 진행하고 있는 세실리아.
그런 그녀에게 매번 도움을 구할 순 없으리라.
그렇다면....
'아빠한테 도와달라고 해야 되나?'
아직 법안이 통과된 것은 아니니, 천천히 생각해 보고 결정해도 괜찮겠지.
하지만 국민들이 법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수영은 발의된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기를 바라며 교실로 들어갔다.
드르륵.
A반 학생들은 작게 수군거리면서 스마트폰을 살펴봤다.
이번에 사망한 자승최강의 길드원들은 대부분 정예 헌터를 부모로 두고 있었다.
또, 정의 길드의 마스터, 곽도진은 아들인 도현이 외팔이 되어 돌아왔다는 사실에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1급 포션을 구하기 위해 수소문을 했다.
그렇게 자승최강에 대한 소식이 연일 보도되고, 어느새 1학기 기말고사 시즌이 찾아왔다.
인원이 늘어난 탓일까?
수영은 스무 명의 길드원들과 함께 교내 도서관에 들러 기말고사를 대비했다.
"아 참, 내일부터 김종현 돌아온다더라. 곽도현이랑 자승최강 길드원들도."
"정신 치료 때문에 거의 2~3주 정도 쉬었던가?"
"그 자식들 때문에 이상한 법안이 통과되게 생겼잖아. 짜증 나네, 진짜."
"그러게 왜 안전도 확보되지 않은 상태로 들어가는 건데?"
"2학년부터 시작되는 실전 훈련도 전부 중단됐다고 하더라."
백월에 소속된 학생들은 이번에 발의된 청소년 헌터의 규제 법안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법안이 통과되면... 일단, 부모님들한테 부탁을 해 보자. 돌아가면서 보호자로 참가해 주실 수 있냐고 말이야."
수영의 말에 길드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면 박건혁 헌터님도 뵐 수 있는 거야?"
유빈의 들뜬 목소리에 수영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법안이 통과된다면... 그렇겠지? 아빠도 상관없다고 말씀해 주셨고."
"우와, 세계 랭킹 1위를 직접 볼 수 있다니...."
헌터계의 전설이자 우상이나 다름없는 존재.
또, 7~8년이라는 시간으로 밑바닥에서 최정상까지 오른 헌터가 바로 박건혁이다.
수성고등학교에 다니는 재학생이라면 모를 수가 없겠지.
"나는 송파구 레이드 이후로 박건혁 헌터님에 대해서 엄청 찾아봤어. 거기다가 팬 카페에도 가입하고, SNS로 게이트 공략 영상도...."
"어, 유빈이 너도 팬 카페에 가입했어?"
민아가 살짝 놀란 얼굴로 유빈을 바라봤다.
"당연하지! 골렘들을 이끌고 싸우시는 모습에 반해 버렸거든. 말 그대로 군주님이시잖아."
"아, 팬 카페라면 나도 가입했어."
"나도...."
길드 내 팬 카페 회원이 과반을 넘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팬 카페에 가입했었다니.
수영이 놀란 표정을 보이자, 민아가 스마트폰으로 팬 카페를 보여 주었다.
"이것 봐! 벌써 회원 수가 30만 명을 넘었어. 게다가 해외에서까지 팬 카페가 만들어졌다고도 하던걸?"
"웬만한 아이돌 그룹 팬 카페는 씹어 먹는 수준이지."
"요새 SNS까지 시작하셨다면서? 시작하자마자 팔로워가 수십만 명이 됐다고 하던데...."
"지금은... 300만 명을 넘겼는데?"
수영은 화들짝 놀랐다.
SNS 계정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부친을 통해 들었다.
바로 나흘 전에 말이다.
건혁의 SNS에는 골렘의 전투 영상과 게이트 안에서 찍은 사진들이 올라와 있었다.
"진짜, 무슨 화보 찍으신 줄 알았다니까? 이 얼굴이 어떻게 41살이야. 누가 봐도 20대 초중반이구만."
"근데, 확실히 게이트 안의 환경이 깨끗하고 좋은 거 같아. 호수도 엄청 투명해 보여."
"아, 방금 영상 새로 올라왔다!"
"뭔데?"
수영은 쓰게 웃으면서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다들 시험공부 해야지. 선배들도 얼른...."
길드원들의 귀에 수영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영상에 푹 빠져 버린 그들은 입을 쩌억 벌렸다.
수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스마트폰을 꺼내 SNS 어플을 열었다.
'정말로 300만 명이 넘었네.'
그녀는 건혁의 팔로워 수를 확인한 뒤, 새로 업로드된 영상을 재생시켰다.
지금까지 올린 골렘의 전투 영상이 아닌 박건혁 본인의 전투 영상이다.
S랭크 마수, 싸이클롭스.
건혁은 녀석을 농락하면서 가볍게 숨통을 끊어 냈다.
1분도 채 되지 않은 영상.
"마... 말도 안 돼."
카메라를 향해 수신호를 보내고 1분도 채 지나지 않는 짧은 시간으로 싸이클롭스를 쓰러트렸다.
"싸이클롭스를 53초 만에...."
"고... 골렘 없이도 S랭크를 여유롭게 쓰러트려 버리시네."
"팔로워... 미친 듯이 올라가는데?"
"댓글도 엄청나."
길드원들은 슬그머니 수영을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은 덤덤했다.
부친의 강함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S랭크 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싸이클롭스를 이토록 손쉽게 쓰러트릴 줄이야.
'정말... 마왕군은 아빠한테 맡기면 되는 거 아닐까?'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후우...."
수영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SNS를 닫았다.
'아무리 강해도 아빠 혼자서 마왕군을 막아 낼 순 없어.'
마왕군의 규모는 레이드와 차원이 다르다.
제3차 세계 전쟁이라 일컬어도 모자라지 않겠지.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돼.'
그녀는 굳은 다짐과 함께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다들, 얼른 공부 시작하죠."
지금은 기말고사가 먼저다.
기말고사를 마무리한 다음, 여름 방학에 매주 3회씩 C등급 게이트를 공략할 생각이다.
흑월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길드를 만들려면 약간의 무리함은 감내해야겠지.
물론, 자승최강과 다르게 백월은 어느 정도의 안전을 보장받고 있다.
박건혁의 골렘에 의해.
때문에 길드원들은 수영의 무리한 계획을 따랐고, 전력이 증강된 이후부터는 더욱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다들... 부디 잘 따라와 주세요.'
수영은 길드원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교과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 * *
"어서 오십시오. 한국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청룡 기사단 단장, 이은성의 밝은 미소에 금발, 벽안을 가진 중년이 뿌득 이를 악물었다.
"박건혁이라는 놈은 어디에 있지?"
"박건혁 헌터님께서는 현재 S등급 게이트를 공략하시는 중입니다."
"지금 당장 그 자식을 내 앞으로 부르도록. 실력으로... 서열을 판가름하겠다."
사내의 명령조에 은성이 미간을 좁혔다.
미국 제우스 길드의 마스터, 알렉스 브라운(Alex Brown).
세계 헌터 랭킹 1위를 차지한 절대적 존재.
헌터계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하지만, 헌터 협회... 아니, 대한민국 정부에 소속된 자신을 이토록 낮잡아 보다니.
일개 단원도 아닌 기사단장인 자신을 말이다.
이런 무례가 또 어디에 있을까.
'그가 오만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는 '주저'라는 단어를 모르는 남자다.
TV 프로그램에서 보인 막말은 물론, SNS를 통해 정치인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까지.
정부에서 압박을 가하려는 모습을 보일 때면 알렉스는 영상을 촬영해 SNS에 올렸다.
어떤 영상이냐고?
바로 무력 시위... 아니,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는 영상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특수 능력으로 만든 수많은 크레이터들.
그는 언제든지 군대를 박살 내고 당신들을 죽일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된 경고 영상을 SNS에 올려 정부를 위협했다.
'박건혁 헌터의 인성에... 극찬을 보내도 모자랄 지경이군.'
마약, 폭행, 살인 등의 혐의를 받은 적이 있는 알렉스 브라운과 박건혁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겠지.
"일단, 연락은 드려 보겠습니다."
영어를 사용해 대답한 은성.
알렉스는 눈매를 좁히면서 그를 압박했다.
"반드시 데려와라. 데려오지 않는다면... 길드원들을 움직여 직접 끌고 오도록 하지."
"이곳은 미국이 아닙니다. 제우스 길드가 대한민국의 영토에서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할 경우에는... 전원 구속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구속이라... 할 수는 있고?"
알렉스의 조소에 은성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한국은 세계 랭킹 1위의 헌터를 보유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순간, 알렉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역시 원숭이라 지능이 부족한 모양이군. 한번 짓밟아 놔야 정신을 차리겠어."
기자들의 시선에도 알렉스는 인종 차별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가 인종 차별자라는 사실은 인터넷에서도 유명한 사실 중 하나.
때문에 은성은 미소를 유지하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굳이 그와 이 자리에서 싸울 필요는 없으니까.
제112화
112화. 박건혁 vs 알렉스 브라운 (1)
"그럼, 예약된 호텔로 가시죠."
제우스 길드가 대한민국 5성급 호텔로 향한 그 시각.
헌터 협회는 박건혁에게 전화를 걸어 알렉스 브라운의 요청 아닌 요청을 전달했다.
게이트 안에서 1대1로 결투를 벌여 세계 랭킹 1위의 자리를 결정하자고 말이다.
건혁은 해당 내용을 전달받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랭킹은 각성 점수로 정해질 텐데, 무슨 결투를...."
―저희 쪽에서도 그렇게 설명을 했습니다만, 미국 쪽에서 알렉스 브라운을 설득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가 한국에 입국했다는 말입니까?"
―예, 현재는 OO호텔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후우...."
―알렉스 브라운은 박건혁 헌터와의 결투를 영상으로 녹화하여 세계에 공개하고자, 수많은 방송국에 해당 상황을 전파했습니다. 한국에 입국하려는 외신들만 수백여 명에 달하는 수준으로, 박건혁 헌터께서 결투를 피하신다면 이미지에 큰 피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이....
"예, 무슨 말씀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결투에는... 응하도록 해야겠군요. 장소 섭외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무... 물론입니다. 괜찮은 날짜와 시간을 말씀해 주신다면, 장소를 섭외하여 일정을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건혁은 적당한 날짜를 언급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인터넷 기사를 살폈다.
'세계 최강의 자리를 건 알렉스 브라운과 박건혁의 결투'라는 자극적인 기사가 떡하니 메인에 자리를 잡았다.
결투 영상을 촬영하여 공개하겠다며 세계인들을 흥분케 만든 알렉스 브라운.
그는 SNS에 세계 헌터 협회가 한국에게 돈을 받아먹은 것이 의심된다며 비난했고, 한국인을 향해 인종 차별적인 발언을 내뱉으며 세계인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내가 세계를 속인 사기꾼...?"
번역기를 사용해 알렉스의 SNS 게시 글을 확인한 건혁은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토록 무례한 발언을 직설적으로 내뱉는다고?
게다가 인종 차별적인 발언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애초에 봐줄 생각도 없었지만, 그의 맹렬한 비난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순간, 욱한 마음에 SNS에 게시 글을 올릴까도 했으나, 건혁은 분노를 꾹 참아 내면서 곧바로 헌터 협회에 전화를 걸었다.
"드론이든 뭐든 전부 동원해서 결투 영상을 촬영해 주십시오. 아, 그리고 제우스 길드에게 2급 이상의 포션을 준비해 두라는 내용도 전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알렉스의 SNS를 본 순간.
건혁은 그를 철저히 박살 내기로 결정했다.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한편, 10여 명의 제우스 길드원들이 머무는 5성급 호텔에 이은성이 찾아왔다.
"날짜는 모레 오전 10시입니다. 78개의 방송국과 385개의 신문사 기자들이 게이트 앞에서 대기할 것이며, 결투 영상은 한국, 미국, 일본, 중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총 15개국의 헌터 협회에서 모든 장비를 동원하여 촬영할 예정입니다. 또한, 약속 장소는...."
은성의 이야기를 가볍게 듣던 알렉스는 한 여성 길드원을 품에 안은 채 다리를 꼬았다.
"약속 날짜 당일 미국 측에서 호텔 정문에 차량을 준비시켜 두겠다고 하니...."
제우스 길드원들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위스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드디어 세계를 속인 사기꾼을 끌어내리는 건가?"
"그 자식은 무슨 생각으로 결투를 받아들인 거야? 그 허접한 골렘들로 마스터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푸하하하! 알렉스, 이참에 그 자식 얼굴을 좀 뭉개 버리라고!"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던데... 그 자식, 게X 아니야?"
제우스 길드원들은 은성의 앞에서 자연스레 건혁을 모욕했다.
그에 알렉스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위스키 잔을 들었다.
"나를 여기까지 찾아오게 만든 놈이야. 이왕이면 1급 포션으로도 재기가 불가능하게 만들어야지."
1급 포션으로 재기가 불가능하다?
육체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죽이지 않는 한은 말이다.
하지만, 정신을 파괴한다면... 1급 포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겠지.
은성은 눈매를 매섭게 좁히며 알렉스를 노려봤다.
대한민국의 얼굴인 박건혁을 자신의 앞에서 이토록 모욕한다고?
이 얼마나 불쾌한 일이란 말인가!
뿌드득!
"뭐야, 얼굴이 왜 그렇게 구겨져 있어? 나랑... 전쟁이라도 해 보자고?"
은성은 '전쟁'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숙였다.
박건혁이 존재하는 이상 알렉스를 크게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제우스와 미국을 상대하기에 한국이란 나라는 너무나도 약소했다.
군사력과 경제력이 TOP10에 들어 봐야 상대는 불패의 TOP1인 미국이다.
그들과 사이가 나빠져 봐야 좋을 건 없겠지.
차라리 미국과 한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결투에서 박건혁이 승리하길 바랄 뿐이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표정 관리는 연습해 둬. '벌레'를 짓밟는 건 내 취미거든."
알렉스의 비아냥에 은성은 고개를 돌리면서 헌터 협회로부터 전달받은 내용을 떠올렸다.
"...이걸 말씀드리지 못했군요."
"흐음?"
"박건혁 헌터께서 2급 이상의 포션을 준비해 두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은성의 말에 알렉스와 제우스 길드원들이 배를 붙잡으며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하! 그래, 1급 포션을 준비해 줄 테니까 걱정 말라고 그래!"
"이러다가 마스터를 법원에 고소하는 게 아닌가 모르겠네! 폭행죄로 말이야!"
"크하하하하!"
제우스 길드원들의 비웃음에도 은성은 묵묵히 방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걷던 은성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분노로 가득한 그의 검은 눈빛.
지나가던 사람들은 은성을 보곤 살짝 겁에 질리고 말았다.
"...단장님."
"출발하지."
은성의 한마디에 정문에서 기다리던 기사단원이 곧바로 차량의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렇게....
침묵으로 가득 찬 차량이 호텔을 빠져나갔다.
그 시각, 박건혁과 알렉스 브라운의 결투 소식은 수성고등학교를 뜨겁게 달구었다.
기말고사가 바로 코앞인데, 학생들이 스마트폰만 붙잡고 있으니 교사들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었지만, 교사들 역시 교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스마트폰으로 해당 기사와 뉴스를 찾아봤다.
그만큼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수성고등학교 1학년 A반.
수영이 자리에 앉아 교과서를 살펴볼 때.
동급생들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박건혁이 이기겠지?"
"지금까지 알렉스가 보여 준 걸 생각하면... 조금 어렵지 않을까?"
"국내 서열이나 세계 랭킹은 각성 점수로만 결정되는 거잖아. 능력의 상성을 고려해 보면... 왠지 알렉스가 이길 거 같아."
"박건혁 골렘들 못 봤냐? S랭크를 X밥처럼 잡잖아."
"그건 알렉스도 똑같잖아."
"그니까, 알렉스급 괴물을 여럿 소환할 수 있다는...."
"X소리 좀 작작 해라. 그게 말이 되냐?"
두 사람의 결투 소식으로 SNS는 폭발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특히, 승패를 예상하는 투표에서는 알렉스가 70%의 지지를 받으면서 소란은 더욱 거세졌다.
더욱이 박건혁을 '사기꾼'이라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많아져 갔는데.
수성고등학교 학생들은 수영의 모습을 살피면서 박건혁의 능력에 의심을 가졌다.
"한국에 무슨 돈이 있다고 박건혁한테 사기꾼이라는 건지...."
"근데... 정말로 거품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세계 랭킹 1위가 된 건... 조금 이상하잖아."
모두가 의심을 품는 와중에도 수영은 공부에만 집중했다.
부친이 걱정되지 않느냐고?
그럴 리가.
결투가 확정된 당일, 수영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불안함과 다르게 건혁은 여유롭게 앞치마를 걸치고 빨래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 아빠? 정말로 알렉스랑...."
빨래를 개던 건혁이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이... 이길 수 있는 거지?"
수영의 걱정 어린 표정에 건혁이 밝게 웃어 보였다.
"당연하지. 아빠가 누구야? 세계 최강의 헌터잖아."
"절대로... 다치면 안 돼."
"그래, 최대한 노력해 볼게."
승리를 확신하는 건혁을, 수영은 믿기로 결심했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한눈을 팔지 말자.
어차피 결과는 곧 알게 될 테니까.
수영은 최대한 주변의 수군거림을 무시한 채 공부에만 집중했다.
"수영이, 정말로 괜찮을까?"
민아의 걱정에 시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박건혁 헌터님이 이긴다고 말씀하셨다잖아. 우리도 얼른 공부하자."
백월에 소속된 학생들은 수영을 걱정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으나, 수영이 건혁의 승리를 확신하듯 대답하자, 곧바로 기말고사를 대비하기 위해 교과서를 펼쳤다.
세계인들은 마치 월드컵이 개최되는 듯 한국이라는 나라에 집중했다.
2024년 6월 20일 목요일.
강남구 E등급 게이트에 수많은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또, 국내외의 유X버들이 찾아오면서 소란은 더욱 커졌는데.
경찰들은 유X버들을 통제하면서 한국, 미국, 일본, 중국, 영국 등의 15개국에서 찾아온 헌터 협회 직원들을 게이트 안으로 들여보내는 데 노력했다.
"이곳은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위치한 광수산 게이트 앞입니다. 현재 세계 헌터 랭킹 1위인 박건혁 헌터와 세계 헌터 랭킹 2위인 알렉스 브라운 헌터의 결투를 위해 15개국 헌터 협회에서 준비한 촬영 장비들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금일 결투하게 될 게이트 안의 마수들은 청룡 기사단에 의해 모두 토벌되었으며, 해당 부분은 15개국의 헌터 협회 역시 직접 확인하여 결투에 장애가 되는 요소를 모두 제거했습니다."
기자는 슬쩍 스마트폰을 살펴보더니, 다시 카메라를 바라보며 말을 계속 덧붙였다.
"게이트 내부의 필드 환경은 황무지라고 합니다. 1대1 전투에 장해를 받는 요인은 없으며, 두 사람이 모든 전력을 쏟아 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어서...."
결투의 상세한 내용을 설명하던 기자는 갑작스러운 소란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지... 지금 제우스 길드가 도착했습니다!"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게이트 앞에 멈춰 선 알렉스.
그는 기자들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세계를 속인 사기꾼을 끌어내리고, 내가 세계 최강의 헌터임을 다시 한번 알리도록 하겠다!"
알렉스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기자들이 다급히 질문을 던졌지만, 알렉스는 그들을 무시한 채 게이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 예, 알렉스 브라운 헌터는 세계를 속인... 사기꾼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세계 최강의 헌터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겠다고 선언하며 게이트로 들어갔습니다."
설마, 대놓고 박건혁을 '사기꾼'이라고 비난할 줄이야.
순간 말이 턱 막혀 버린 기자는 당황한 얼굴로 알렉스의 발언을 통역하여 시청자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저런 새끼가 세계 랭킹 1위였었다는 사실이 참담하기 그지없다.>
⤷알렉스 인성은 미국에서도 알아준다. 개X발 X끼로 말이야.
⤷최소한의 예의도 안 보이네. 한국인들한테 원숭이라고 인종 차별하기도 했다던데....
⤷미국 정부가 경고를 내리면 무력으로 시위를 한다더라. 아니, 협박인가?
⤷박건혁이 저 새X 좀 존X게 패 줬으면 좋겠다.
⤷인터넷 조사에 따르면 박건혁이 이길 확률이 27%, 알렉스가 이길 확률이 73%라고 한다.
⤷박건혁의 27%는 알렉스를 싫어하는 새끼들이 준 표임.
⤷왜 그렇게 박건혁을 싫어하는 거냐?
<저런 새끼는 당장 강제 추방해야 된다.>
⤷인종 차별은 법적으로 제재를 가해야 합니다.
⤷알렉스 인종 차별은 미국에서도 유명한데, 미국 정부도 알렉스를 법적으로 어떻게 못 하더라.
⤷X발, 레이드도 갈수록 늘어나는 데다가 힘으로 협박까지 하는데, 어떻게 제재하냐?
⤷박건혁이 저 새X 안면을 좀 박살 내 버렸으면 좋겠다.
⤷건혁아, 가즈아!
⤷저 새X 나이도 60대 초반이라던데... 나이를 똥X로 처먹었나?
<알렉스 브라운, 전과만 수십여 개인 범죄자다. 저런 범죄자가 TV에 당당히 얼굴을 내밀고 다닌다는 게 믿겨지지가 않는다.>
⤷혐의는 수백 개가 넘는다, X발.
⤷폭행, 살인 미수, 마약... 강력 범죄는 모두 저질렀던 놈이다. 정부도 형식적인 경고만 던질 뿐이고, 지금은 완전히 방치 상태로 내버려 둠. 피해자만 존X 억울한 거지.
⤷건혁아, 저 개X끼 좀 죽여 줘!
⤷죽여도 박건혁은 무죄다. 과거 한국이 알렉스한테 지원 요청을 할 때... 다들 기억하지?
⤷1,000억이었나? X발, 미친 금액을 보수로 요구했었던 거... 잊으면 매국노다.
제113화
113화. 박건혁 vs 알렉스 브라운 (2)
수백... 수천... 수만 개의 댓글이 주르륵 달리기 시작할 무렵.
마침내 대한민국 헌터 서열 1위, 박건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찰들은 기자들의 공세를 막아 내면서 그에게 길을 내어 주었다.
저벅, 저벅, 저벅.
길드원을 대동하지 않은 채 홀로 모습을 드러낸 건혁은 기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여유로운 모습으로 게이트 앞에 멈춰 섰다.
이내, 미소를 싹 지워 진지한 얼굴로 기자들을 바라봤다.
"알렉스 브라운은... 선을 넘었습니다. 저는 세계 헌터 랭킹 1위로서 알렉스 브라운이라는 헌터에게 처벌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뒤에 뵙도록 하죠."
건혁은 짧은 발언과 함께 게이트로 발을 내디뎠다.
게이트 안에서 그를 마중해 준 것은 청룡 기사단 단장, 이은성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바로 제우스 길드의 마스터, 알렉스 브라운이 서 있는 장소다.
"자네는 저곳에서 싸우게 될 거네. 상공에는 100여 대의 드론이 띄워진 상태고, 반경 5km 지점에서 수많은 카메라들이 자네와 알렉스의 결투를 촬영하겠지."
건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또, 이 자리에는 15개국 헌터 협회의 간부들이 지켜보고 있네. 각성 점수로 나열된 세계 랭킹에 함부로 손을 대지는 않겠지만, 자네가 알렉스에게 패배한다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자네를...."
"예, 알렉스의 말처럼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겠죠."
은성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건혁의 어깨를 토닥였다.
"5분 뒤, 하늘에서 결투를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릴 테니...."
"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은성은 쓴웃음과 함께 한국 헌터 협회 간부들이 위치한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후우, SNS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얼굴이 알려지는 게 싫어 망설였는데...."
SNS를 시작하든 말든 얼굴이 알려질 계기가 이렇게 생기는구나.
건혁은 하늘에 띄워진 100여 개의 드론을 바라봤다.
자신의 골렘을 의식한 듯 고도를 최대한 높이며 거리를 두는 드론들.
이어, 알렉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자신을 향해 비릿한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세계를 상대로 사기를 칠 생각을 하다니... 그 대범함은 칭찬을 해 줘야지. 근데, 나를 건들고 몸이 성할 줄 알았나?"
"범죄자 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영어를 모르는 건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에 알렉스는 조소를 터트리며 씨익 입꼬리를 말았다.
"원숭이가 인간의 언어를 알아들을 리는 없나?"
다른 영어는 모르겠지만, 원숭이(Monkey)라는 단어 하나는 확실하게 들려왔다.
그가 아시아인을 모욕할 때 쓰는 동물 단어.
건혁은 헛웃음과 함께 눈을 부라렸다.
"이런 미친 X발 새끼가 뒈지려고 환장했나. 야, 이 XX XXX XXXX...."
말로는 설명하기 도저히 어려운 욕설들이 건혁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알렉스는 눈썹을 꿈틀거린 채 건혁을 노려봤다.
눈빛과 표정만으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짐작한 것이다.
감히 자신을 향해 저런 표정을 지어 보이다니.
"이런 건방진 새끼가...!"
―양측,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3분 뒤에 결투를 알리는 호루라기를 불겠습니다. 그 전까지 100m의 거리를 유지한 채 대기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영어와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공지를 알리는 드론.
알렉스는 슬쩍 드론을 보면서 '으득!' 이를 악물었다.
결국 두 사람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이 자리에서 습격을 가해 봐야 나중에 좋지 않은 목소리만 나오겠지.
알렉스는 분노를 꾹 참아 내며 건혁을 매섭게 노려봤다.
잠시 뒤, 전투 준비를 알리는 목소리가 들리자, 건혁은 등 뒤로 골렘들을 소환했다.
촤아악!
날개를 펄럭이는 5기의 용기사 골렘.
이내, 용기사 골렘 앞으로 10기의 기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투 준비 시간은 1분이 주어졌다.
그 1분간 건혁은 마력을 회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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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건혁
*종족: 인간
*칭호: 빙마군주(氷魔君主)
*출신 국가: 한국
*LV: 284
*근력: 80(+5)
*민첩: 100(+5)
*체력: 100(+5)
*마력: 187/887(+300)
*AP: 0
*스킬: [빙마검(氷魔劍)-LV10] , [얼음 골렘 소환-LV10], [마력 회복-LV8], [성장 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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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회복'의 스킬 레벨이 8이 됨과 동시에 초당 회복되는 마력이 0.5로 늘어났다.
동시에 세계인들에게 '빙마군주(氷魔君主)'라는 이명이 알려진 덕분일까?
비어 있던 칭호란에 '빙마군주(氷魔君主)'라는 단어가 생기면서 육체 능력을 소폭, 마력을 대폭으로 상승시켜 주었다.
"후우, 기사왕으로는 발목을 붙잡는 정도밖에 되지 않겠지."
알렉스가 어째서 길드명을 제우스라고 지었느냐.
이유는 간단하다.
번개 속성의 특수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번개의 신, 제우스의 이름을 내걸어 길드를 설립했다.
그가 보유한 능력은 세 가지다.
번개의 검을 만드는 라이트닝 소드(Lightning Sword).
번개 광선을 쏘는 썬더 캐논(Thunder Cannon).
번개의 칼날을 날려 보내는 라이트닝 블레이드(Lightning Blade).
그의 능력은 모두 헌터 협회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는 상태다.
'그가 원작에서 벗어나지만 않았다면... 그 외에 다른 특수 능력은 없을 거다.'
알렉스 브라운은 멍청한 남자다.
욕망을 대놓고 드러내며 과시를 서슴지 않는 남자.
SNS를 보면 정말... 사이코패스를 보는 기분이다.
파지직!
알렉스의 오른손에 황금빛 라이트닝 소드가 쥐어졌다.
저게 동양에서 천뢰검(天雷劍)이라 불리는 검인가.
동일한 '라이트닝 소드'라는 특수 능력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 알려진 번개의 검.
뭐, 스킬 레벨이 1이냐 10이냐의 차이겠지.
건혁이 천뢰검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때.
삐이이익!
상공에서 결투를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파앙!
100m의 거리를 단숨에 뚫고 눈앞까지 다가온 알렉스.
그가 천뢰검을 한 번 휘두르자, 건혁은 화들짝 놀라 재빨리 빙마검으로 맞받아쳤다.
콰앙!
"...!"
빠르다.
심지어 위력까지....
'이런, 무식한 자식이!'
콰쾅! 콰콰콰콰쾅!
두 사람의 충돌은 굉음과 함께 대기를 진동시켰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휘날리는 날카로운 얼음 조각과 번쩍이는 황금빛 번개.
건혁은 자신이 밀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빙마검의 스킬 레벨은 이미 최대치를 찍은 상태다.
그렇다면 근력, 민첩과 같은 육체 능력 차이겠지.
"가라!"
건혁의 명령에 기사왕 골렘이 몸을 내던졌다.
"꺼져라!"
콰앙!
기사왕의 대검이 알렉스가 휘두른 천뢰검에 의해 박살 났다.
이어, 사방에서 달려드는 기사왕과 대등하게 검을 겨루면서 압도적인 면모를 보여 준 알렉스.
확실히 괴물은 괴물인 모양이다.
그러나 10기의 기사왕이 협공을 가하기 시작한 탓일까?
알렉스는 이를 악물면서 뒤로 물러났다.
"겁쟁이 같은 놈! 골렘만 없으면 네놈 따위는...!"
건혁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알렉스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펄럭!
허공으로 날아오른 용기사 골렘이 알렉스를 향해 브레스를 뿜어냈다.
푸화아아아!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냉기.
알렉스는 위험을 느낀 건지, 바닥을 박차면서 브레스를 피했다.
그에 작게나마 감탄사를 터트린 건혁.
"아까보다도 빠르네?"
설마, 브레스를 회피할 줄이야.
"그런데, 나머지도 마저 피해야지?"
건혁은 씨익 웃으면서 알렉스를 바라봤다.
그 순간, 다섯 마리의 빙룡이 알렉스를 향해 연이어 브레스를 토해 냈다.
"이... 이런 미친...!"
알렉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상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썬더...!"
"누가... 공격할 시간을 준다고 했지?"
쓔와아아아악!
사방에서 날아드는 10여 개의 얼음의 칼날.
알렉스는 화들짝 놀라면서 바닥을 뒹굴었는데.
어느새 기사왕 골렘들이 그의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다.
기사왕 골렘들은 알렉스와 1~2km의 거리를 유지한 채 얼음의 칼날을 쏘아 보냈다.
콰앙! 콰콰콰쾅!
"X바아아아아알!"
흙먼지를 뒤집어쓴 알렉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욕설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에게 분노할 시간이 있을까?
당장 머리 위에서만 해도 피부가 따가운 브레스가 내리치고 있는데 말이다.
브레스를 회피하면 또다시 얼음의 칼날이 눈앞에서 날아온다.
"제기랄!"
말 그대로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이었다.
피식.
건혁은 열심히 뛰어다니는 알렉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올 때는 한국어 좀 공부해서 와라. 왜 X발 남의 나라에서 영어로 말하고 X랄이야? 아니지, 한국어보다도 예의를 먼저 배우는 게 좋겠네."
그는 손가락을 한 번 튕기면서 용기사 골렘을 소환했다.
그리고 빙룡에 올라탄 기사왕 골렘을 내렸다.
"가세해."
건혁의 한마디에 기사왕 골렘이 알렉스를 향해 달려갔다.
건혁은 빙룡에 올라타면서 추가로 2기의 용기사 골렘을 소환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전투 상황이 훤히 보이는 하늘.
지상을 내려다보던 건혁이 골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슬슬 끝내야겠어."
지루해진 걸까?
건혁은 머릿속으로 지시를 내렸다.
쿠구궁!
두꺼운 빙벽을 세워 올리는 기사왕 골렘들.
서서히 알렉스의 도주로가 차단되어 갔다.
숨 막히듯 답답한 상황.
그때, 5기의 용기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죽여."
건혁의 지시와 동시에 알렉스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브레스가 뿜어졌다.
"써... 썬더 캐논(Thunder Cannon)!"
100m의 거리를 1초 만에 돌파할지라도, 사방이 거대한 얼음덩어리로 가득하다.
얼음덩어리를 부수고 도망친다 한들 브레스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알렉스는 회피가 불가능함을 깨닫자마자, 번개의 광선을 쏘면서 발악을 시작했다.
그래, 말 그대로 발악이다.
한 방향으로 뻗어 나간 번개 광선은 하나의 브레스만을 막아 낼 뿐.
아니, 막아 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마... 말도 안 돼!"
지금까지 보여 준 공격은 모두 장난이었던 건가?!
브레스의 위력은 조금 전까지 보여 준 것과 차원이 달랐다.
그가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던 그 순간.
사방에서 새하얀 브레스가 덮쳐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앙!
브레스는 지면을 얼리며 반경 1km 일대에 거대한 빙산(氷山)을 만들었다.
빙산의 중심에서 손을 뻗은 채 얼어붙은 전(前) 세계 최강의 헌터, 알렉스 브라운.
녀석의 몸은 브레스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졌다.
"뭐, 죽지는 않았겠지."
브레스의 위력을 조절해 뒀으니까.
공격 범위만 광범위할 뿐.
위력 자체는 알렉스의 번개 광선을 조금 능가하는 수준이다.
그러니, 얼어붙은 상태에서도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터.
건혁은 알렉스의 의식을 살피면서 빙산을 천천히 녹이기 시작했다.
마왕군과의 전쟁에서 전력이 되어 줄 녀석을 지금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잖아.
* * *
건혁과 알렉스가 충돌하기 1분 전.
결투 준비를 알리는 음성이 들려온 그 시각.
제우스 길드 측에서는 알렉스의 승리를 확신했다.
골렘 따위가 알렉스를 막아 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크흐...."
제우스의 길드원들은 위스키를 마시며, 파라솔 아래에 앉아 느긋하게 모니터를 시청했다.
모니터에선 실시간 녹화 중인 드론에 의해 각 영상들이 제공되고 있었다.
천뢰검(天雷劍)을 만들어 보인 알렉스 브라운.
골렘과 빙마검(氷魔劍)을 소환한 박건혁.
실시간으로 송출된 영상은 15개국 헌터 협회의 간부와 협회 소속의 고위 헌터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결투의 승패를 증언해 줄 사람만 수백여 명에 달한다는 의미다.
콰앙!
분명 두 사람은 10k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결투를 벌이고 있을 터.
하지만 그들의 충돌음은 10km의 거리를 가볍게 꿰뚫었다.
더욱이 돌풍이 일어나자, 드론들이 휘청거리면서 천천히 거리를 두었다.
"골렘을 사용하지 않고도... 알렉스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다고?"
"저걸... 그대로 받아 내?"
건혁은 수차례의 공방 속에서도 알렉스에게 크게 밀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15개국 헌터 협회의 간부들은 살짝 놀란 표정을 보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세계 랭킹 1위와 2위의 결투를 실시간으로 보는 것이다.
어찌 긴장되지 않을 수 있을까.
제114화
114화. 박건혁 vs 알렉스 브라운 (3)
"역시, 뒤로 물러나는군."
"알렉스의 공격을 제대로 받아 낼 수 있을 리 없지! 실제로 간신히 버텨 내는 느낌이었잖아!"
"알렉스의 말대로 사기꾼이었어."
제우스 길드원들의 목소리에 한국 헌터 협회 간부들은 미간을 찡그렸다.
자신들이 주변에 있음에도 무시하는 듯한 태도라니!
참으로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제우스 길드원들을 지적하지 않았다.
어째서냐고?
바로 청룡 기사단 단장, 이은성이 막아섰기 때문이다.
"보십시오."
은성의 작은 목소리에 대한민국 헌터 협회 간부들이 모니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건혁이 물러나자마자 알렉스를 향해 달려든 10기의 기사왕 골렘.
기사왕 골렘의 협공에 알렉스는 고전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뒤로 물러났다.
"저 원숭이 새끼가...!"
"비겁한 자식! 골렘 뒤에 숨지 말고, 직접 싸우라고!"
"저건 반칙이잖아!"
어째서 골렘을 사용한 것이 비겁한 거지?
알렉스가 특수 능력을 사용한 것처럼 박건혁도 특수 능력을 사용했을 뿐.
제우스 길드원들의 욕설, 비난, 항의에도 각국의 헌터 협회 간부들은 담담히 모니터를 바라봤다.
"X발!"
제우스 길드원들은 욕설을 터트리면서 각국의 인사들을 노려봤다.
그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뒤로 물러난 알렉스를 향해 용기사 골렘들이 브레스를 뿜어댄 것이다.
살벌한 위력에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킨 순간.
한 드론이,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미소 짓고 있는 박건혁을 찍었다.
"...알렉스를 가지고 노는 것 같군."
대한민국 헌터 협회 회장, 김정호는 모니터를 보면서 작게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 저런 헌터가 존재했을 줄이야.
옆에 서 있던 은성 역시 작게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반면, 미간을 찡그리며 모니터를 응시하는 미국 헌터 협회 간부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알렉스가 저렇게 무력하게...."
그때, 모니터 속에서 새로운 용기사 골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또... 또 소환을...."
미국에 이어 일본, 중국, 영국, 프랑스 등 각국의 헌터 협회 간부들은 경악과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기사왕 골렘에 의한 검상(劍傷)과 브레스에 의한 동상(凍傷)으로 만신창이가 된 알렉스.
흙먼지에 뒤덮인 채 바닥을 구르는 그의 모습에 모두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퇴로를... 막는군요."
기사왕 골렘들이 빙벽을 세우기 시작하자, 알렉스는 수십 개의 빙벽을 파괴했다.
아주 가볍게 말이다.
문제는 무너진 빙벽의 얼음덩어리가 조금씩 쌓여 간다는 것이다.
퇴로를 막으려는 건혁의 의도는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봐야겠지.
쿠웅!
"저... 저런...!"
퇴로가 차단된 상황.
사방에서 알렉스를 향해 브레스가 쏟아졌다.
조금 전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이다.
그에 발악하듯 알렉스가 번개의 광선을 쏘았으나, 발악은 몇 초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알렉스를 중심으로 솟아오른 거대한 빙산(氷山).
"끝났군요."
은성의 한마디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제우스 길드원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모니터를 보며 입을 쩌억 벌렸다.
세계 최강이라 불렸던 '알렉스 브라운'이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한다고?!
모두가 충격과 경악에 휩싸인 그때.
세계 헌터 협회 회장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댔다.
―결투는 박건혁 헌터의 승리로 판정을 내리겠습니다. 이의가 있으신 분들께서는 손을 들어 발언해 주십시오.
목소리는 드론에 장착된 스피커를 통해 각 촬영 지점 및 결투장으로 전해졌다.
15개국 헌터 협회의 간부들은 침묵했다.
골렘을 사용한 것이 반칙이라고?
웃기는 소리!
박건혁은 자신의 특수 능력을 사용해 알렉스 브라운의 특수 능력을 짓밟았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미국 헌터 협회조차 알렉스의 패배를 수긍해 보이자, 제우스 길드원들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봤다.
"마... 말도 안 돼. 마스터가 이런 작은 나라의 동양인한테...."
"아... 알렉스가 저런 애송이한테 졌다고?"
알렉스의 패배를 감추고 싶어도 보는 눈이 너무 많다.
결투 영상이 공개된다면 아마 제우스 길드는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고 말겠지.
그 때문일까?
길드원들은 으드득 이를 갈면서 모니터를 노려봤다.
"제기랄."
그 시각, 100m 높이에 달하는 빙산에서 알렉스를 꺼낸 건혁.
알렉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기사왕 골렘에게 베인 상처는 둘째 치고, 브레스에 직격으로 맞은 탓일까?
알렉스는 사지가 나가떨어진 채 꽁꽁 얼어붙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다행히... 죽진 않았네."
알렉스가 의식을 잃은 즉시 빙산을 녹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빙산을 녹이는 것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지금쯤 목숨을 잃고 이승을 떠났으리라.
더욱이 세계 헌터 협회 소속의 의료진들이 제우스 길드에서 준비한 1~2급 포션을 가져온 덕분에 알렉스는 간당간당했던 목숨을 겨우 부지할 수 있었다.
들것에 실어 알렉스를 차량에 태우는 의료진들.
건혁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빙룡을 타고 드론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벗어났다.
2~3개의 그늘막 아래에서 결투 상황을 지켜보던 세계 헌터 협회 및 15개국 헌터 협회의 간부들과 제우스 길드원들.
펄럭!
빙룡이 날개를 펄럭이면서 착륙하자, 은성과 한국 헌터 협회 간부들이 환한 얼굴로 마중을 해 주었다.
"정말로 수고했네. 알렉스 브라운을 완전히 농락해 버렸군."
한국 헌터 협회 회장인 김정호의 감탄사에 건혁이 작게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어, 각국의 헌터 협회 간부들이 건혁에게 다가와 극찬에 가까운 칭찬을 보내 주었다.
천하의 알렉스 브라운에게 압도적인 패배를 맛보게 해 주다니!
분명, 이 소식은 전 세계를 들썩이게 만들겠지.
'S등급 레이드가 갈수록 늘어나는 지금, 박건혁과 대화를 나눠 안면을 익혀 둬야 한다.'
'국가적 위기가 닥쳐올 때, 박건혁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박건혁은 S랭크 마수를 가볍게 쓰러트리는... 심지어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골렘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가히 1인 군단에 견줄 만한 존재야!'
15개국 헌터 협회 간부들은 알렉스를 농락하던 골렘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S등급 레이드를 혼자서도 종식시킬 수 있는 전력!
알렉스가 이곳저곳에 돌아다니며 마수를 토벌할 때, 박건혁은 다수의 병력으로 S등급 레이드를 진압할 수 있으리라.
'국가적 위기가 닥칠... 아니, 잃어버린 도시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박건혁의 지원은 필수 불가결하다!'
마수들에게 빼앗긴 수많은 접근 금지 및 통제 구역들.
그중에는 과거 대도시로 위광을 받던 곳도 포함됐다.
이 자리에 모여 있는 국가들은 이미 한 번쯤 탈환 작전을 수행해 보았을 것이다.
빼앗긴 도시를 되찾기 위한 탈환 작전을 말이다.
하지만 성공 사례는 드물었다.
아니, 성공했다 하더라도 희생된 목숨들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려 미쳐 버릴 지경이겠지.
'박건혁 헌터라면... 특별한 희생 없이 도시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력만 충분하면 계속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소환수.
특히, 박건혁의 경우에는 소환할 수 있는 숫자가 공개되지 않았다.
'그의 영상을 살펴보면 3~400여 기까지는 충분히 소환할 수 있었던 것처럼 보였어. 물론, 새하얀 망토의 골렘과 저 드래곤을 그만큼 소환할 수 있을 리는 없겠지만... 지금 보여 준 능력만으로도 도시를 탈환하는 데에는 엄청난 도움이 되겠지.'
독일의 헌터 협회 간부는 박건혁을 보며 눈동자를 반짝였다.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위치한 뒤셀도르프.
60만여 명이 거주하던 해당 도시는 불과 5년 전 마수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독일 헌터 협회 간부는 당시를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S등급 게이트가 폭발한 직후, 불과 5~10km 반경에서 연이어 폭발한 D~A등급 게이트들.
도합 10여 개의 게이트가 동시에 폭발하며 어마어마한 규모의 마수들이 뒤셀도르프를 덮쳐 왔다.
'대규모 폭격으로 짓뭉개지 않는 한, 도시를 되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당시 독일 정부 및 국민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 새로운 희망이 나타났다.
'그가 독일인이 될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돼.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지원이라도....'
박건혁을 자국의 인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독일뿐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생각했다.
반면, 한국 측에서는 박건혁을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국보나 다름없는 존재를 타국으로 유출시킨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박건혁 헌터님께서는 많이 지치셨을 겁니다. 이제, 휴식을 취하시도록...."
청룡 기사단원들은 몸을 던져 건혁을 보호하며 안전히 차량에 태웠다.
까득.
그 모습을 수십 미터쯤 떨어져서 지켜보던 제우스 길드원들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린 채 욕설을 중얼거렸다.
이 자리에 서 있는 게 어째서 알렉스가 아닌 저 녀석인 거지?
그에게 비겁하다 비난을 보내고 싶었으나, 생각해 보면 박건혁이 반칙을 한 것은 아니다.
단지, 특수 능력으로 골렘을 소환해서 알렉스를 몰아붙였을 뿐.
골렘 뒤에서 여유롭게 지켜본들 무엇이 잘못되었으랴.
"...제기랄."
그들은 터덜터덜 알렉스가 치료를 받고 있는 천막으로 걸어갔다.
피식.
청룡 기사단 단장, 이은성은 제우스 길드원들의 초라한 등을 바라보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쌤통이라는 듯이.
* * *
게이트를 빠져나간 건혁은 청룡 기사단원에게 양해를 구해 기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와 특별히 달라진 것 없이 빠져나온 그 모습에 기자들은 살짝 놀란 기색을 보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몇몇 기자들이 영어로 질문해 오자, 건혁은 손사래를 치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때, 한국어로 질문을 던진 금발, 벽안의 여성 기자.
"아... 알렉스와의 결투는...."
"알렉스 브라운 헌터는 중상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 제우스 길드에서 준비한 1급 포션을 복용한 후, 게이트 안에서 안정을 취하는 중입니다."
"그 말씀은... 겨... 결투에서 승리하셨다는 뜻입니까?"
"결과는 추후에 공개될 영상으로 확인이 가능할 겁니다."
물론, 문제 되는 부분은 모자이크로 처리될 것이다.
하지만 결투 영상은 전 세계에 공개하기로 이미 합의를 본 상태다.
그러니 15개국의 헌터 협회 간부들이 각종 촬영 장비를 가지고 게이트에 들어왔지.
"박건혁 헌터님께선 특별히 다치신 곳이 없으신 것 같으신데...."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동양의 남성 기자.
한국인이겠지?
건혁은 슬쩍 자신의 몸을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네요."
"그럼, 골렘들로 알렉스를 쓰러트리는 동안 뒤에 계셨던 건...."
"그에 대한 부분은 영상을 통해 자세한 확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어, 기자들의 질문이 계속됐다.
건혁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기자들의 질문에 착실히 대답을 해 주었고, 2~30분이 지나 헌터 협회의 차량에 올라타 자택으로 귀가했다.
그렇게 박건혁의 인터뷰가 세상에 퍼진 그 시각.
SNS는 알렉스와 박건혁의 이름으로 한바탕 뒤집어졌다.
각국의 헌터 협회 간부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기자들은 마치 사냥감을 물어뜯듯 달려들었다.
기자들을 무시한 채 차량에 올라타는 미국 측 인사들과 다르게 한국 측 인사들은 기자들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며 박건혁의 승리에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115화
115화. 박건혁 vs 알렉스 브라운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