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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88화. 구룡산 게이트 (5)

건혁과 골렘들이 일제히 버팔로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골렘들은 지면을 얼려 녀석의 다리를 붙잡고, 발목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며, 버팔로드를 넘어트렸다.

건혁은 거인 골렘들을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던져!"

조금 전, 버팔로드의 아가리에 들어간 다섯 골렘과 링크가 끊어졌다.

안에서 어떠한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겠지.

때문에 거인 골렘을 이용해 기사단장 골렘들을 다시 한번 던졌다.

녀석이 바닥에 넘어진 덕분일까?

기사단장 골렘들은 단번에 녀석의 머리 위로 착지했다.

"들어가서 장기들을 모두 찢어 버려! 나머지는 바닥을 얼리고, 녀석의 발목을 베어라!"

골렘들을 향해 지시를 내린 후, 빙마검을 바닥에 내리꽂은 건혁.

"아이스 필드(Ice Field)!"

다시 한번 바닥이 얼어붙었다.

파바밧!

300m의 거리를 5~6초 만에 돌파해 버팔로드의 발밑에서 멈춰 섰다.

"아이스 버스트(Ice Burst)!"

서걱!

베어 낸 부위에서 거대한 얼음 조각들이 튀어나왔다.

피부를 얼마나 꿰뚫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아킬레스건을 베었으니, 아마 쉽게 일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잠시 뒤, 버팔로드가 핏물을 쏟아 냈다.

"계속... 계속 공격해!"

서걱! 촤아악!

골렘들은 팔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이길 수 있다. 이길 수...!'

승리를 확신하려던 그 순간.

녀석이 바닥을 구르며 순식간에 몸을 뒤집었다.

콰아앙!

"크윽...!"

건혁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바닥을 굴러 간신히 도망쳤다.

반면, 2~3기의 기사단장 골렘은 녀석의 등에 깔리면서 파괴된 것 같다.

도대체 몇 기의 골렘이 파괴된 걸까?

그는 스테이터스를 확인했다.

"46기... X발, 거의 절반이 당했잖아."

건혁은 소매로 눈가를 한 번 닦았다.

"계속 공격해!"

사자후와 같은 명령을 터트리며, 골렘들이 다시 한번 놈에게 달려들게 만들었다.

-케헥...!

녀석의 입에서 대량의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이다.

지금이 녀석을 죽일 수 있는 기회야!

건혁은 자세를 낮추고 녀석을 향해 질주했다.

파앗!

녀석과의 거리가 10m까지 가까워졌다.

그는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라 몸을 던졌다.

이내 빙마검을 어깨 뒤로 당겨, 녀석의 이마를 향해 내질렀다.

푸욱!

"아이스 버스트(Ice Burst)!"

기합처럼 외친 스킬... 아니, 기술명.

파치잉!

이마에서 거대한 얼음 조각이 치솟았다.

분명, 녀석의 뇌에도 닿았을 터!

아니, 닿았을까?

녀석의 가죽과 피부를 생각해 보면, 아주 살짝이라도 뇌에 닿았는지에 대해 의문이 일어난다.

-우워어어어!

버팔로드가 아가리를 벌리며 울음소리를 터트렸다.

고통에 대한 비명인가?

"얼려!"

건혁의 외침에 기사단장 골렘들이 황급히 지면을 얼렸다.

버팔로드의 움직임이 멈춘 그때.

거인 골렘이 달려왔다.

건혁은 옆으로 구르며 소리쳤다.

"걷어차!"

버팔로드의 이마에 꽂혀 있는 빙마검.

퍼엉!

거인 골렘의 발차기가 정확히 빙마검의 손잡이 끝에 적중했다.

그러게 왜 몸을 뒹굴어?

녀석이 머리를 바닥과 맞대 준 덕분에 거인 골렘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버팔로드가 경련을 일으킨다.

"지금이다!"

끝을 내겠다는 듯 기사단장 골렘들이 버팔로드의 몸에 올라타 목구멍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푸푸푸푸푸푹!

그나마 가죽의 두께가 얇은 곳이다.

약점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몸을 뒤집은 것은 녀석의 패인이 되었다.

"하아... 하아... 하아...."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잔상처가 남은 건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띠링!

스테이터스에 대량의 경험치가 들어왔다.

꿈쩍하지 않는 버팔로드.

건혁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거인 골렘의 어깨로 올라가 그대로 걸터앉았다.

털썩.

"후우, 힘들어 죽겠네."

전투 도중 '얼음 골렘 소환'의 스킬 레벨을 높여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했다.

기사왕 골렘이라면 분명 S랭크 마수를 쓰러트릴 수... 아니, 쓰러트릴 수 없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상대는 될 것이다.

그러나 '아깝다'라는 마음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어차피 신호만 보내면 대한민국에서 네 번째로 강한 남자가 달려와 주지 않은가.

건혁은 스킬 레벨의 경험치량을 살펴봤다.

'빙마검'은 4~5% 정도, '얼음 골렘 소환'은 6~7% 정도의 경험치를 획득했다.

아마, 골렘들의 공헌도가 높은 탓이리라.

'1년은 걸리리라 생각했는데, 이번 레이드에서 S랭크 마수 다섯... 아니, 여섯 마리 정도만 토벌하면 스킬 레벨을 올릴 수 있겠어.'

주먹을 꽈악 쥐면서도 버팔로드를 바라보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이런 전투를 앞으로 여섯 번이나 더 해야 된다고?

어째서 A랭크 마수와 S랭크 마수의 경험치가 이렇게 크게 차이 나는 걸까?

A랭크 마수로는 3~40여 마리를 토벌해야 1%가 올라갈까 말까 한 수준이다.

현 상황에선 골렘만으로 1천여 마리의 A랭크 마수를 토벌해야겠지.

"막막하네."

잠시 뒤, 은성과 청룡 기사단원들이 차량을 타고 다가왔다.

"정말로 쓰러트렸군."

놀란 듯한 은성의 목소리에 건혁이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대신, 기진맥진한 상태입니다."

"골렘만으로 싸우는 건 불가능한 건가?"

"공격력과 움직임 자체는 제 쪽이 조금 더 높습니다. 때문에 제가 가세해야 승률이 조금 더 높아지죠."

"그렇군. 내심 조마조마했네. 자네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야."

건혁은 작게 웃었다.

"조금만 도와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그래, 앞으로는 이진화 부대장과 함께 싸우도록 하게. 오늘은... 내가 맡도록 하지."

그러나 S랭크 마수는 더 이상 출현하지 않았다.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수백 마리의 B~A랭크 마수들이 몰려온 탓에 제1 탐색 부대는 다급히 도망쳤고, 대부분의 전투는 골렘들이 알아서 처리하며 구룡산 게이트에서의 첫날을 마무리했다.

이튿날, 청룡 기사단원들은 살짝 지루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봤다.

"야간에 불침번을 서는 사람이 줄어든 건 좋은 일이고, 위험한 전투에 투입되지 않는다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냥 차량만 타고 이동하려니 조금 지루하네."

"확실히 평소랑은 다르지. 게다가 저 골렘들... 우리보다도 강하잖아."

청룡 기사단 제1군은 서열 1~200위대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번 탐색에 참가한 청룡 기사단원들은 제1군 멤버 중에서도 약간 낮은 서열에 속했다.

어째서 높은 서열의 단원들을 게이트에 들이지 않았냐고?

이유는 간단하다.

대한민국 거대 길드의 정예와 이은성 및 이진화의 빈자리를 보충하기 위해.

백호 기사단의 지원으로 범죄 길드의 활동은 억제되고 있지만, 헌터 협회는 기사단의 전력난을 서서히 실감하기 시작했다.

"박건혁 헌터가 청룡 기사단에 들어와 준다면 좋을 텐데...."

제1 탐색 부대의 한 부대원이 골렘들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단 한 명이 수백여 명의 역할을 수행한다.

홀로 하데스의 지부를 공격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후우...."

구룡산 게이트의 탐색이 시작되고 사흘째가 되는 날.

게이트 주변으로 각 탐색 부대가 집합했다.

제1 탐색 부대를 제외한 모든 탐색 부대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저희 제2 탐색 부대는 3명이 전사하고, 7명이 부상을...."

"저희 제3 탐색 부대는 1명이 전사하고, 13명이 부상을...."

각 부대의 피해 보고에 은성이 미간을 좁혔다.

"제1 탐색 부대는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은 겁니까?"

"예, 박건혁 헌터 덕분에 위기를 대부분 헤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전투를 고의로 피하신 건...."

단군 길드의 마스터, 김수호의 의심에 은성이 슬쩍 고개를 돌려 트럭에 실린 거대한 마석을 가져와 각 부대의 대장들에게 보여 주었다.

S랭크 마석 중에서도 큰 부류에 속한 마석이다.

대장들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건...."

"버팔로드의 마석입니다."

"...버팔로드를 토벌하셨단 말씀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물론, 이 마석의 소유주는 박건혁 헌터입니다."

"그게 무슨...."

"추후 영상이 공개될지는 모르지만, 박건혁 헌터께서 홀로 버팔로드를 토벌하셨습니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승원이 언성을 높였다.

"여러분들에겐 추후 영상을 보여 드리도록 해야겠군요. 또, 수천 개의 마석이 트럭에 실려 있으니, 지금 당장 김수호 대장의 의심을 풀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됐습니다."

수호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은성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사흘간의 전투로 스트레스가 쌓여 있을 것이다.

짜증 정도는 너그러이 이해를 해 줘야지.

"그보다...."

은성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제5 탐색 부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요."

"그 멍청한 여자라면... 어디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을지도 모르죠."

진화의 목소리에 대장 전원이 침묵했다.

편을 들어 주고 싶어도 김다은이라면 정말 그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약속한 시간이 훨씬 지났다는 사실에 헌터들이 분통을 터트렸다.

은성은 제2~4 탐색 부대를 게이트 바깥으로 내보냈다.

그들을 이 이상 붙잡고 있을 순 없으니 말이다.

"자네도 이만 가 보도록 하게. 마석에 대한 정산은 추후 확실하게 처리해 주지. 아 참, 버팔로드를 토벌했단 사실을... 국민들에게 공표해도 괜찮겠나?"

"예, 상관없습니다."

"영상의 공개는...."

"그건... 자제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영상은 기밀 자료로 등록해 두지."

건혁이 게이트로 나가려던 그때.

이진화가 다급한 얼굴로 달려왔다.

"제... 제5 탐색 부대가 전멸을 당했다는 보고입니다! 게이트로 도망쳐 온 오지오 헌터의 말에 따르면, 사람의 외형에 커다란 박쥐의 날개를 가진 신형 마수가 나타나 제5 탐색 부대를 괴멸시켰다고...!"

게이트로 향하던 건혁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사람의 외형에 커다란 박쥐의 날개를 보유한 마수.

건혁은 손을 떨면서 진화를 바라봤다.

설마, 아르덴의 마족이 이 세계로 넘어온 건가?!

"서열 152위, 오지오 헌터의 말로는 제5 탐색 부대 대장인 김다은 및 다수의 헌터가 놈이 이끄는 언데드들에게 생포 당했다고 합니다."

"...언데드를 이끈다고?"

"예, 그중에는 데스나이트 및 아크 리치가 다수 존재했었다는 오지오 헌터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은성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S랭크 마수인 데스나이트와 아크 리치가 다수 존재한다?

다수라면... 도대체 얼마나 존재한다는 뜻이지?

그 의문을 해소시켜 주듯 진화가 정보를 술술 내뱉었다.

"데스나이트 및 아크 리치의 숫자는 최소 다섯 이상이라고 합니다."

"S랭크가 다섯...."

"신형 마수는 그들을 통제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허, 마수를 통제하는 건가. 헌터일 가능성은? 신체를 변형시킬 수 있는 특수 능력 각성자일 수도...."

"저 역시 범죄 길드 소속의 헌터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만, 오지오 헌터의 증언에 의하면 녀석이 이끄는 언데드의 숫자가 수천을 가볍게 넘길 것이라고 하여...."

"끄응...."

"또한, 지구에 존재하는 사령술사 중 S랭크에 견줄 만한 언데드를 소환하는 자는 없습니다."

세계는 사령술이라는 능력을 발견한 뒤로 엄격한 규제를 만들었다.

비상시를 제외하고 인간의 시체를 언데드로 부활시켜서는 안 된다.

국제 연합에 가입된 국가들은 해당 법률을 수용했다.

죽은 자의 육체를 영혼도 없이 부활시키려 한다니!

종교계에서는 사령술사를 악(惡)으로 규정한 적도 있었다.

사령술사에 대한 이미지가 최악으로 치닫던 무렵에 만들어진 법률.

세계 각국의 사령술사들은 해당 법률을 따르겠다며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다 알려진 사령술사 역시 B랭크에 견줄 만한 언데드를 소환할 뿐입니다. 더욱이 소환 가능한 숫자도 열을 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화는 슬쩍 건혁을 바라봤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소환수는 아마 박건혁 헌터님의 기사단장 골렘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진화의 이야기에 은성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어찌 됐든 녀석이 제5 탐색 부대를 괴멸시켰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겠군."

"마수일 경우에는...."

"그래, 녀석이 이 게이트의 주인이란 의미겠지."

 

제89화

89화. 마족 (1)

은성과 진화의 대화 내용을 조용히 듣고 있던 건혁이 침을 한 번 삼켰다.

데스나이트와 아크 리치를 소환할 수 있다고?

건혁은 해당 증언만으로 녀석이 소설 속에서 등장하던 SS랭크의 괴물임을 추측해 냈다.

검신(劍神) 정윤호가 움직여야 겨우 막아 낼 수 있는 괴물.

다행이라면 녀석이 사령술을 사용한다는 것이겠지.

S랭크의 언데드를 다수 지배할 뿐.

녀석의 개인 무력은 아마 A~S랭크 수준일 것이다.

대한민국 헌터들에게도 승산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건혁이 식은땀을 흘리며 게이트를 빠져나가려던 순간.

은성이 건혁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긴급 사태가 벌어진 모양이군."

"...예."

"적의 능력을 모두 파악한 것은 아니나, 데스나이트와 아크 리치가 같은 지역에 머무르고 있다면, 기사단의 힘만으로 쓰러트리는 것은 어려울 것이네. 지금 당장 해산된 길드의 마스터 및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들을 소집할 계획이니...."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들을 소집한다?

만약 정윤호가 함께한다면 녀석을 생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세실리아가 모르는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

대한민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경계심을 심어 줄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세실리아와는 상황이 다르다.'

그녀가 자신을 마족이라 소개하고 아르덴에 대해 설명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명확한 증거물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설령 믿는다 하더라도 아르덴이 지구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상황이다.

세계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아르덴을 경계하기보다 눈앞에 닥친 레이드와 각종 문제들을 우선시할 것이다.

반면, 제5 탐색 부대를 괴멸시킨 녀석은 데스나이트와 아크 리치를 통제하고 있다.

아르덴의 존재를 명확하게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S랭크 마수를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헌터 협회는 어느 정도 경계심을 품을 수밖에 없으리라.

"자네도 함께해 줄 수 있겠나?"

건혁은 은성의 부탁에 턱을 한 번 매만졌다.

"S랭크 언데드를 상대하는 것은 만티코어와 버팔로드를 상대하던 것과는 다릅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러니 그 거대한 골렘과 붉은 망토의 골렘으로 A랭크 이하의 마수들을 쓰러트려 주었으면 하네."

"그 정도라면...."

"고맙네."

은성이 건혁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전에 잠시 딸에게 전화 좀 하고 와도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지금 당장 소집하려 해도 금방 모이지는 않을 걸세. 자택에 들렀다가 내일 아침까지 와 주게."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게이트를 빠져나간 건혁.

집으로 돌아가자 수영이 반갑게 마중을 해 주었다.

자신이 무사히 돌아온 것에 기뻐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건혁은 목구멍이 막혔다.

치킨을 시켜 분위기가 조금씩 올라갈 무렵.

"다... 다시 게이트에 들어가야 한다고?!"

수영이 손을 멈춘 채 건혁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백화(白花)라는 길드에서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백화(白花)...."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들을 소집해서 구출 작전을 펼친다고 하더라고."

"...."

수영은 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주방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 방으로 들어가는 그녀.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건혁은 작게 한숨을 쉬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문은 안 잠갔네.'

내심 따라 들어와 주기를 바란 걸까?

수영은 침대에 엎어져 있었다.

건혁은 침대 끝에 조심히 걸터앉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빠가 요새 수영이한테 너무 소홀했었지? 많이 섭섭했다는 것도 알아. 다녀와서 놀이공원에... 아니, 동물원...."

놀이공원과 동물원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건혁은 쓰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온천이랑 워터 파크가 붙어 있는 콘도에 놀러 가자."

"...."

"아빠는 뒤에서 골렘들만 움직이면 된대. 여차하면 바로 도망칠 수도 있어."

건혁의 이야기에도 수영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집안일은 세실리아한테 말해 두고 갈게."

스윽.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려던 순간.

수영이 뒤에서 와락 껴안았다.

"언제... 돌아오는데?"

그녀의 물음에 건혁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2~3일 걸릴 거 같아. 물론, 그 전에 돌아올 수도 있고."

"...돌아와서 같이 콘도 가야 해."

"그래, 알겠어."

S등급 게이트는 헌터에게 있어 사지(死地)나 다름없다.

실제로 구룡산 게이트에서 수많은 최정예 헌터들이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그 죽음이 건혁에게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로 금방 돌아올 테니까."

건혁이 고개를 돌려 수영을 안아 주었다.

그녀를 안심시키듯이 말이다.

그러나 수영의 얼굴은 불안함으로 가득했다.

아니, 정확히는 두려움이었다.

부친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자아, 나가서 치킨마저 먹어야지."

"...응."

건혁은 수영을 달래고 난 다음 치킨을 깨끗하게 먹어 치웠다.

"아빠 잠깐 세실리아한테 다녀올게."

수영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건혁은 현관문을 나서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세실리아는 건혁을 반갑게 마중하며 집 안으로 들였다.

그가 거실 테이블 앞에 앉자, 조용히 홍차를 준비해 온 세실리아.

"그동안 수영이를 돌봐 줘서 고마워."

"괜찮아요. 저도 수영이랑 친해질 수 있어서 즐거웠거든요."

"그럼, 한 번만 더 부탁하자."

"...네?"

"게이트를 탐색하던 도중 문제가 발생했어."

"설마... 다시 가야 되는 건가요?"

건혁이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상관없는데... 수영이가 많이 섭섭해하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달래고 오는 중이야. 그리고...."

"...?"

"구룡산 게이트 안에... 최상급 마족이 있을지도 몰라."

세실리아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휘둥그레진 눈동자.

그녀는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면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 그게 무슨 소리...!"

"인간의 형체에 박쥐의 날개를 가진 존재가 포착됐대."

"신체 변형 능력을 가진 헌터라면 그 정도는...."

"다수의 데스나이트와 아크 리치를 통제하고 있는데도? 심지어 육안으로 수천의 스켈레톤을 확인했다는 증언까지 확보된 상태야. 물론, 단 한 사람의 증언일 뿐이지만... 그를 제외하고 해당 탐색 부대의 부대원들이 아무도 귀환하지 못했어."

"데... 데스나이트와 아크 리치를... 하지만, 헌터 중에서도 사령술을 사용할 수 있는 자가 존재한다고...!"

"S랭크에 견줄 만한 언데드를 소환할 수 있는 사령술사는 없어. 물론, 그동안 신분을 숨기고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박쥐의 날개에 고위의 사령술까지 다룬다면 마족임을 의심해 볼 수밖에 없겠지."

세실리아는 불안한 얼굴로 손가락을 떨었다.

"마... 마왕이 넘어오면 지구는 끝이에요. 서열 1위인 정윤호조차 최상급 마족을 상대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는데...."

"후우, 일단은 정보가 필요해. 너처럼 우연찮은 계기로 넘어온 것이라면...."

"그렇다 하더라도 위험한 건 달라지지 않아요! 지구와 아르덴의 마력 파장이 맞물리기 시작했다는 의미란 말이에요!"

그녀의 언성에 건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르덴에서 지구의 마력 파장을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두 차원을 연결할 수 있는 반영구적인 게이트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거예요. 지구의 문명은 확실히 대단하지만, 아르덴과의 전투력을 비교하면 크게 뒤처져 있어요."

"...그 정도까지야?"

"유X브와 SNS를 통해 확인해 본 결과, 세계 랭킹 5위 안에 들어오는 헌터들이라면 최상급 마족과 견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대한민국 서열 1위인 정윤호는 어느 정도 상대만 될 뿐, 그래 봐야 시간 벌기 정도일 거예요."

건혁은 작게 한숨을 토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정윤호조차 시간 벌기 용도라니.

수영이 성장할 때까지 마왕군이 과연 기다려 줄까?

"...저는 마스터에게 명운을 걸고 있어요."

세실리아의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건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마스터가 소환하시는 붉은 망토의 골렘은 상급 마족에 견줄 만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어요. 지금까지의 성장세를 고려해 보면... 분명, 최상급 마족에 견줄 만한 골렘 역시 소환할 수 있겠죠."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구나.

건혁은 입을 다물면서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기사왕 골렘이라면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최상급 마족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대한민국 상위 10위 안에 들 정도의 실력은 보유하고 있겠지.

하지만 마왕은?

기사왕 골렘은 그렇다 치더라도 용기사 골렘이 과연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을까?

'물량으로 밀어붙이면... 아니, 마법이라는 걸 사용하면 단번에 수십 기의 용기사 골렘을 파괴해 버릴 수도 있을 거야.'

참으로 골치가 아픈 존재다.

"하아, 자세한 이야기는 구룡산 게이트를 다녀온 다음에 하자. 녀석이 헌터인지 마족인지도 불분명하고, 생포할 수 있을지 어떨지 역시 모르는 일이니까."

세실리아는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술사라면 승기는 존재하겠지만... 죽이는 것만으로도 벅차긴 하겠네요."

"아무튼, 수영이 좀 잘 부탁한다."

"예, 알겠어요."

현관문을 나서려던 중 건혁이 세실리아와 눈을 마주쳤다.

"오늘 나와 나눈 대화 내용은 함구해 둬."

"네, 그렇게 할게요."

복도로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건혁.

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얼마 만에 맛보는 푹신한 감촉인가.

"...그냥 푹 쉬고 싶다."

아쉽게도 그의 희망 사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난 건혁은 경호원을 호출한 후, 경호 차량에 붉은 망토의 골렘들을 태웠다.

차량 한 대당 3기의 골렘이 탑승해, 총 15기의 골렘이 구룡산 게이트에서 내렸다.

경호원들이 숙소로 돌아가던 시각, 그는 게이트에 들어서자마자 최대치까지 채워진 마력으로 기사단장 골렘들을 추가로 소환했다.

"그 거대한 골렘은...."

"그 녀석들은 차량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적들과 충돌할 때 소환하는 게 좋겠죠."

"그렇군."

잠시 뒤, 게이트 안으로 헌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실종된 제5 탐색 부대의 구출 및 게이트를 공략하기 위한 공략 부대다.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들로 구성된 공략 부대.

데스펠의 마스터, 박강석 역시 게이트에 들어왔다.

건혁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까득!

강석은 살기를 일으키며 주먹을 쥐었다.

지금 당장 건혁의 머리를 터트리려는 기세로 말이다.

처억!

살기를 감지한 걸까?

기사단장 골렘들이 건혁의 주변을 둘러쌌다.

그에 코웃음을 치며 조소를 터트린 강석.

"골렘에게 보호받지 못하면 쓰레기나 다름없는 모양이군."

강석의 도발에 건혁이 작게 웃었다.

"당신도 검이 없으면 똑같지 않나요?"

"...뭐?"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

그에 건혁은 당당히 그와 눈을 마주쳤다.

"골렘은 제 특수 능력이자 무기입니다. 당신 역시 검이 없으면 별 볼 일 없을 거 같은데...."

"이 애송이가...!"

콰앙!

강석이 분노를 터트리며 체내의 마력을 폭발시켰다.

그에 대응하듯 건혁 역시 마력을 터트렸다.

두 기운이 충돌하자,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헌터들이 신음을 터트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크으...."

"이... 이건...."

서열 10위와 서열 17위가 일으킨 마력 폭발.

죄 없는 헌터들은 두 사람의 기운에 그만 짓눌리고 말았다.

격이 다르다.

어찌 사람의 몸에서 이런 거대한 마력이 방출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그만!"

우렁찬 사자후가 들려왔다.

강석과 건혁은 해당 목소리에 마력을 잠재웠다.

"지금 이게 무슨 소란인가!"

청룡 기사단 단장, 이은성.

그의 언성에 강석이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서열 4위, 이은성 앞에서는 꼬리를 내린다 그 말인가?

건혁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눈을 감았다.

 

제90화

90화. 마족 (2)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문제가 있다면 밖에서 법적으로 해결하게! 지금은 백화(白花) 길드를 구조하고, 구룡산 게이트를 공략하는 게 우선이야!"

강석이 홱 고개를 돌리며 자리를 떠났다.

"저놈, 저거... 성질머리가 여전하구만. 자네도 그만하고 자리로 돌아가게."

"예, 알겠습니다."

헌터들은 강석과 건혁의 충돌에 식은땀을 흘렸다.

마력을 방출한 것만으로 이 정도의 충격을 일으킬 수 있다니.

'이게 대한민국 최정상들의....'

두 사람의 소란으로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때, 건혁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는 중년의 남성.

건혁은 그를 보고 살짝 놀랐다.

대한민국 서열 2위, 화랑 길드의 마스터 방승재다.

"자네가 빙마군주(氷魔君主)로군."

시비를 거는 건 아닌 모양이다.

"...예, 그렇게 불리고는 있습니다."

"자네 이야기는 귀가 닳도록 들었네. 이번에는 버팔로드까지 쓰러트렸다면서?"

"운이 좋았습니다."

"흐흐, 운으로 버팔로드를 쓰러트릴 수 있다니... 정말로 대단한 운이로군그래."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건혁이 미간을 찡그리자, 승재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흑검하고 한판 붙었다고 들었네. 유신의 화룡과도 전쟁을 벌이려 한다던데...."

"박강석 헌터가 시비를 걸어오더군요. 그에 대응했을 뿐입니다. 또, 유신은... 부모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 당연한 일이지. 부모라면 그 기세를 보여야 돼. 요샌 그 당연한 걸 잘 못 하더라고. 강한 상대에게 아득바득 달려드는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어."

승재는 건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네, 우리 화랑에 들어올 생각 없나? 차기 마스터로 내가 팍팍 밀어주지."

"...예?"

"짐꾼을 헌터로 키우는 것도 보기 좋았네. 자네라면 화랑을 믿고 맡길 수 있을 거 같아."

이게 무슨 생뚱맞은 소리지?

화랑의 길드 마스터로 밀어준다고?

자식들은 어쩌고?

건혁의 당혹스러운 얼굴에 승재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군. 물론, 아들놈에게 넘겨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하지만, 그 녀석은 실력이 부족해."

"...아드님이 섭섭하실 겁니다."

"섭섭해하기는! 녀석도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 마스터의 자리에 욕심을 내지 않는 거겠지."

승재의 이야기에 건혁이 쓴웃음을 보였다.

화랑에 대한 평판은 나쁘지 않았다.

현 마스터가 후계자로 받아 준다면, 넙죽 고개 숙여 들어가야지.

"제안은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솔직히... 정말로 마음이 끌리지만, 한동안은 흑월의 이름으로 길드를 키워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흐음, 아쉽군. 자네의 성장세라면 분명 올해... 아니, 올해가 아니더라도 내년에는 10위 안에 들어설 것이라 예측하고 서둘러 가입 제의를 한 것인데 말이야. 자네의 재능이라면 윤호 형님의 자리도 노려볼 수 있을 걸세."

서열이 붙어 있기 때문일까?

나이 차가 10년 정도 나지만, 승재는 정윤호를 가볍게 '형님'이라 불렀다.

"이제 겨우 방승재 헌터님의 발밑에 도달했을 뿐입니다. 두 분을 따라가려면 한참은 걸리겠죠."

건혁의 대답에 승재가 기분이 좋은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겸손은...."

"그런데, 정윤호 헌터님께서는... 많이 늦으시는군요."

"아, 윤호 형님은 오늘 부산에 내려갔다고 하네."

건혁이 크게 당황했다.

"부... 부산이요?!"

"어제 부산에서 S등급 레이드가 발생했다더군. 그래서 윤호 형님이 내려갔네."

건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낭패라는 듯이 말이다.

정윤호를 빼고 최상급 마족을 쓰러트린다고?

놈들은 만티코어나 버팔로드와 같은 짐승이 아니다.

최상급 마족의 지시에 따라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병사.

'데스나이트와 아크 리치가 통제되고 있다는 증언을 듣고도 정윤호를 부산으로 내려보내?!'

건혁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뭐, 전력 손실이 크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형님네 친척이 부산에서 살고 있거든."

"그...렇군요."

"아이고, 은석이 녀석이 부르는군. 이만 가 보자고."

이은석을 '녀석'이라 부르는 사람이 존재할 줄이야.

건혁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불안함을 가라앉혔다.

그래, 상대는 사령술사다.

적들이 체계적으로 움직이긴 하겠지만, 그것은 헌터들 역시 마찬가지.

상대방이 고위 마법을 사용하거나, 정윤호처럼 강력한 검기(劍氣)를 다룬다면 모를까, 사령술사라면 어찌어찌 상대할 수 있으리라.

이 자리에는 대한민국 서열 2위부터 5위가 전부 모여 있으니까.

'...정윤호를 대신해 저 두 사람이 참가한 건가.'

서열 5위, 고구려 길드 제1군 대장인 임진규.

서열 8위, 고구려 길드 제1군 부대장이자, 정윤호의 첫째 아들인 정재혁.

건혁은 두 사내를 보면서 정윤호의 빈자리를 달랬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은성이 헌터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세팅된 플라스틱 의자에 착석한 헌터들.

이어, 눈앞에 테이블과 40인치 모니터가 설치되었다.

"금일 새벽, 드론을 통해 적의 거점을 확인했습니다."

은성의 발언과 동시에 영상이 재생됐다.

"놈들의 거점은 게이트로부터 57km 정도 떨어진 숲입니다. 그 내부에는 오래된 궁전이 존재하며, 궁전 주변에는 추정 10만에 가까운 스켈레톤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흐음, 사령술사가 헌터는 아니겠군."

팔짱을 낀 방승재의 중얼거림에 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룡 기사단은 녀석이 구룡산 게이트의 보스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먼저, 부대 편성표를 확인해 주십시오."

젊은 청룡 기사단원이 헌터들에게 프린트물을 나누어 주었다.

"먼저, 제1 공략 부대는 제가 지휘하도록 하겠습니다. 제2 공략 부대는 이진화 헌터가, 제3 공략 부대는 박건혁 헌터가 맡습니다."

"제3 공략 부대에는 부대원이 하나도 없습니다만...."

"박건혁 헌터는 독립 부대로 움직입니다. 우선, 화면을 봐 주십시오."

은성은 영상을 멈추고 가느다란 쇠막대로 화면을 가리켰다.

작전 내용은 간단했다.

궁전의 우측을 제2 공략 부대가, 좌측을 제3 공략 부대가 타격해 적들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이후, 제1 공략 부대가 궁전 내부로 들어가 제5 탐색 부대의 구조 및 게이트 보스의 토벌과 함께 핵을 파괴한다.

참고로 제1 공략 부대에는 30위 이내의 헌터가 열다섯, 31위부터 100위까지의 헌터가 스물일곱, 도합 4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2 공략 부대 역시 비슷한 숫자로, 제3 공략 부대만이 독립 부대로 인정을 받았다.

작전을 모두 설명한 끝에 누군가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작게 혀를 찼다.

"그냥 마도 폭탄으로 날려 버리면 좋을 것을...."

오지오는 해당 헌터를 매섭게 노려봤다.

당장 주먹을 날리지는 않았으나, 그를 죽일 것 같은 눈빛이었다.

한편, 마도 폭탄이란 단어를 들은 걸까?

은성이 작게 헛기침을 하면서 궁전의 겉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추가로 궁전의 후면은 드론을 사용하여 마도 폭탄을 투하합니다."

"그렇다면 궁전까지도...."

"궁전의 외벽은 마력으로 코팅되어 있습니다. 드론을 궁전과 최대한 가까이 붙여 농도를 측정해 본 결과, lv.8~10의 마도 폭탄을 사용해야 궁전을 무너트릴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흐음, 그럼에도 사용하지 않으려는 건 생포되었다는 백화(白花) 길드를 구조하기 위함인가?"

정확히는 성녀(聖女) 김다은을 구조하기 위함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유일하게 1급 포션에 준하는 치유 능력을 보유한 헌터.

그녀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보고 정부와 헌터 협회는 청룡 기사단에게 구조 작전을 명령했다.

은성은 승재의 물음에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 외에도 lv.9~10의 마도 폭탄은 함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폭발 범위 때문이로군."

"예."

lv.10의 마도 폭탄은 반경 5km의 일대를 전소시켜 버린다.

lv.9의 경우에는 4~5km 정도로, lv.10과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사용 가능한 것은 lv.8의 마도 폭탄이지만, 해당 마도 폭탄은 국가에서 엄격히 관리되고 있으며, 국가는 김다은의 생존 가능성을 가정하고 lv.8 마도 폭탄의 사용 허가를 내리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을 생략했음에도 의도를 파악한 헌터들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김다은을 구조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들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의미네."

"치유 능력 없어서 서러워 죽겠어."

은성은 최대한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 사항을 단단히 일러 주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공략 부대에 참가하려던 오지오는 청룡 기사단의 만류에 거점에서 대기하게 되었다.

한 팔을 잃고도 김다은을 구하려고 하다니.

몇몇 헌터들은 그의 충성심에 살짝 경의를 보였다.

반면, 건혁과 고위 헌터들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뭐, 숭배심도 어찌 보면 충성심이긴 한가?'

백화의 길드원은 김다은을 신앙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째서냐고?

그야 잘려 나간 신체 부위를 재생시킬 수 있으니까.

기적을 행하는 그녀의 모습은 신의 사자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았다.

'성녀(聖女)'라는 이명도 그런 영향을 받은 것이겠지.

덜컹!

차량이 거칠게 흔들렸다.

광활한 황무지를 질주하는 60여 대의 차량.

공략 부대는 1~2시간이 뒤,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

진한 갈색의 나무와 검게 그을린 나뭇잎들.

딱히 불에 탄 것 같지는 않았다.

"...검은색 잎은 처음 보네."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건혁 역시 바닥에 떨어진 검은 나뭇잎을 주웠다.

'마기(魔氣)에 오염된 건가?'

건혁은 나뭇잎을 바닥에 버리고, 조금 전 건네받은 지도를 확인했다.

그때, 차량에서 내린 은성이 청룡 기사단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드론 부대, 정찰 드론과 폭격 드론을 띄우도록. 폭격 명령과 동시에 목표 지역을 타격한다."

"예, 알겠습니다!"

30여 명의 청룡 기사단원이 150기의 드론을 수송 차량에서 내렸다.

수송 차량 안에는 수많은 모니터와 기계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50기의 드론을 고작 10명이서 조작한다는 모양이다.

'기술이 너무 좋은 거 아니야?'

드론이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하자, 은성이 박수를 치며 헌터들을 집합시켰다.

"그럼, 각자 위치로 이동하겠습니다!"

숲으로 발을 내딛는 세 공략 부대.

이어, 150기의 드론이 300m의 고도를 유지하며 이동했다.

백화(白花)... 아니, 김다은 구출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치직.

―제1 공략 부대, 목표 지점에 도착했습니다.

치직.

―제2 공략 부대, 마찬가지로 목표 지점에 도착했습니다.

두 공략 부대의 보고에 건혁 역시 무전기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제3 공략 부대, 목표 지점에 도착했습니다."

치직.

―드론 부대, 폭탄 투하 준비 완료되었....

중간에 말이 끊어졌다.

마력 파장의 영향일까?

숲에 들어오고 불과 4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지도상의 거리는 대략 2km 정도일 터.

치직!

―저... 적들의 움직임이 포착됐습니다! 남쪽과 북쪽에서 마력 반응 다수! 1~2만 규모로 추정됩니다! 또한, 목표 방향에서도 다수의 마력 반응이 감지되기 시작했습니다! 숫자는... 5만을 넘을 것 같습니다!

 

제91화

91화. 마족 (3)

언데드에게 체온은 존재하지 않는다.

열 감지가 불가능해 마력을 감지하는 장치가 개발됐다.

―C지역과 G지역 일대에 폭탄을 투하하도록!

―알겠습니다.

은성의 명령과 동시에 좌우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제2 공략 부대와 제3 공략 부대는 지금 당장 목표물을 향해 돌격한다!

제1 공략 부대가 무사히 궁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제2 공략 부대와 제3 공략 부대가 서둘러 목표물 방향으로 달려갔다.

―드론 부대, 보고하겠습니다. C지역과 G지역의 마수들은 전멸하였습니다. 마력 반응 확인되지 않습니다.

"마도 폭탄은 얼마나 남았지?"

―lv.5의 마도 폭탄 37개, lv.6의 마도 폭탄 21개, lv.7의 마도 폭탄 5개가 남아 있습니다.

"놈들이 목표물로부터 1km 정도 떨어졌을 때 배후를 타격한다."

정찰 드론이 고도를 높이면서 목표물을 향해 접근했다.

마수들이 궁전에서부터 점점 멀어질 무렵.

폭격 드론이 마수들의 배후를 향해 마도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투콰아앙! 콰콰콰콰쾅!

―공격!

건혁이 자리에 멈춰 섰다.

"거인 골렘 소환!"

눈앞에 50기의 거인 골렘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라!"

거인 골렘들이 스켈레톤을 향해 돌진하자, 그 뒤를 23기의 기사단장 골렘들이 따랐다.

"주의를 끌어야 한다면... 마법 기사단장 골렘 소환."

눈앞에 나타난 3기의 마법 기사단장 골렘.

건혁은 그들에게 명령을 내려 순식간에 요새를 만들었다.

발밑에 만들어진 7m 높이의 빙벽.

이어, 주변을 둘러싼 10m의 외벽이 솟아올랐다.

"마법 기사 골렘 소환."

3기의 마법 기사단장 골렘과 5기의 마법 기사 골렘이 외벽에 선 채 스켈레톤을 향해 거대한 얼음덩어리를 던졌다.

콰앙!

시선을 제대로 끈 건가?

바글거리는 스켈레톤을 보고 건혁이 쓴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징글징글하네. 그보다...."

왜 S랭크 마수들은 보이지 않는 거지?

A랭크인 듀라한과 리치라면 드문드문 발견됐다.

'병력을 남쪽과 북쪽에 배치해 두었다는 건... 우리의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의미인가?'

그렇다면 데스나이트와 아크 리치는 궁전 내부에서 대기 중일지도 모른다.

사령술사를 지키기 위해 말이다.

잠시 뒤, 제1 공략 부대가 궁전에 도착했다.

아주 무난하게 말이다.

제1 공략 부대는 궁전 외벽의 마력 코팅을 확인하며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lv.9~10의 마도 폭탄도 견뎌 내겠군."

"벽만 온전히 뜯어 가도 보수로는 충분하겠어."

제1 공략 부대는 감탄을 터트리면서 궁전으로 들어갔다.

주변을 경계하며 무기를 겨누는 헌터들.

그들은 폭 10m의 넓적한 복도를 거닐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궁전이 왜 이렇게 허전해?"

"내벽도 마력으로 코팅되어 있군요."

"이 정도의 건축물을 마수가 만들어 냈다는 건... 확실히 놀랍군."

강석과 은성, 승재의 목소리에 헌터들이 살짝 수긍하며 경계의 틈을 촘촘하게 만들었다.

잠시 뒤, 눈앞으로 한 마리의 스켈레톤이 다가왔다.

헌터들이 전투 자세를 취한 순간.

스켈레톤이 무기를 버리고, 오른손을 좌측 가슴에 얹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저게 무슨...."

"지금... 우리에게 인사를 하는 건가?"

난생처음 보는 스켈레톤의 행동에 헌터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스켈레톤이 다가오자, 헌터들이 움찔거렸다.

분명 D랭크에 불과한 녀석인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걸까?

스켈레톤은 오른손에 쥔 메모지를 은성에게 내밀었다.

"이건...."

메모지에는 '한글'로 된 문장이 기입되어 있었다.

'동료를 구하고 싶다면, 스켈레톤을 따라 나를 찾아와라.'

문구를 본 은성이 미간을 찡그렸다.

"'나를'... 찾아오라고?"

"설마, 언데드들을 통제하는 게 신형 마수가 아니라 헌터라는 말인가?"

사령술사는 일반적인 소환술사와 다르다.

죽은 자의 육체를 언데드로 부활시켜, 영구적인 노동력 및 병력으로 사용한다.

이 부분은 각국의 경계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그야 혼자서 수십만의 대군을 편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헌터들이 보유한 능력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사령술사에게는 소환할 수 있는 언데드의 숫자에 한계가 존재한다.'

과거 수십여 명의 사령술사들이 마수를 대상으로 실험을 해 본 결과.

한계치에 부딪힌 사령술사들은 마력이 회복되었다 하더라도 언데드를 추가로 소환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헌터의 능력에 따라 부활시킬 수 있는 시체도 정해져 있다.

가령 서열 50만대의 헌터라면 F랭크 마수만을 언데드로 부활시킬 뿐, 그보다 높은 랭크의 마수를 언데드로 부활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러모로 성가신 능력이지만,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언데드는 다른 소환수와 다르게 영구적으로 유지됐다.

'어떻게 10만이 넘어가는 언데드를....'

은성을 비롯한 헌터들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스켈레톤을 바라봤다.

"...따라가야 하는 건가."

은성의 중얼거림에 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

"함정일 경우에는 김다은 헌터는 물론이고, 우리들의 목숨까지 위험해진다."

"함정일 경우는 무슨... 100% 함정이다! 지금 당장 눈앞의 스켈레톤을 쳐부수고, 2개의 조로 나누어 김다은 헌터를 찾는 게 훨씬 효율적이겠군!"

강석의 강한 목소리에 헌터들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스켈레톤의 머리를 박살 내 버린 은성.

그는 강석의 말대로 2개의 조를 편성해 궁전 내부를 탐색하기로 결정했다.

적에게 놀아날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한 결정.

그런데, 과연 이 결정이 옳았던 걸까?

은성이 맡은 1조와 승재가 맡은 2조는 복도의 갈림길에서 헤어지고, 각 방을 수색하던 도중 언데드의 무리와 조우하게 되었다.

"데... 데스나이트...."

치직!

―여기는 제1 공략 부대 1조! 데스나이트의 무리와 조우했다! 지원 바란다!

1조의 지원 요청에 승재는 작게 헛웃음을 흘리며 무전기를 들었다.

"여긴 제1 공략 부대 2조, 마찬가지로 데스나이트의 무리와 조우했다. 대략 7~8마리 정도는 되겠군."

―...X발.

은성의 욕설에 승재 역시 육두문자를 내뱉었다.

이렇게 많은 S랭크를 한 번에 보게 될 줄이야.

제1 공략 부대 1, 2조의 헌터들은 곧바로 전투 자세를 취했다.

"제기랄, 그냥 부산에 내려갈 걸 그랬군."

강석의 중얼거림에 승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제2, 3 공략 부대에게 지원 요청을 보냈다.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때니까.

서걱!

서열 93위의 헌터가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서열 51위, 서열 147위, 서열 102위...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헌터들이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런 X 같은...!"

조원들의 죽음에 분노한 승재는 다급히 시위를 당겨 아르늄제 화살을 발사했다.

끼릭, 퉁!

데스나이트의 날렵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승재의 화살은 정확히 녀석의 다리에 적중했다.

화살에 마력이 담긴 탓일까?

새하얀 화살은 갑옷을 꿰고 다리를 부쉈다.

철커덕.

멀쩡히 움직이는 걸 보니 다리뼈가 완전히 부서진 건 아닌 모양이다.

쓔와악!

데스나이트의 검격에 승재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속도라면 내 쪽이 더 우세하다.'

승재는 총 7개의 화살을 사용해 데스나이트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전투 장소가 복도라는 부분과 내벽이 튼튼하다는 것이 승리의 요인이 되어 주었다.

좁은 전투 환경은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게 해 주니 말이다.

그러나 승재가 데스나이트 1마리를 쓰러트릴 동안 10여 명의 헌터들이 죽었다.

카앙!

"이 노인네가 뭘 멍하니 서 있어! 궁신(弓神)도 나이는 못 속이는 거냐! 힘들면 뒤에서 자빠져 있으라고!"

박강석의 일갈에 승재는 피식 웃으면서 시위를 당겼다.

이내, 화살에 마력이 담긴 순간.

시위로부터 손을 뗐다.

화살은 강석과 싸우던 데스나이트에게 날아갔다.

파각!

목뼈를 정확히 관통한 화살.

일반인의 육안으로는 절대 좇을 수 없는 움직임에도, 승재의 화살은 정확히 목뼈를 관통하여 녀석의 머리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강석은 눈앞의 데스나이트가 바닥에 쓰러지자, 작게 웃으면서 승재를 바라봤다.

"실력은 여전하구만."

"어린놈의 자식이 어디서 반말이야!"

"어린놈은 얼어 죽을...! 어차피 3살 차이잖아! 닥치고 저 새끼들이나 쏴 죽여!"

강석이 몸을 내던졌다.

승재는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곧장 시위를 당겼다.

확실히, 말투에 대해 논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살아남은 헌터라고는 자신을 포함해 다섯뿐.

스무 명 중 다섯 명만 살아남은 것이다.

그중 데스나이트와 제대로 겨루고 있는 건 흑검(黑劍) 박강석과 강철(鋼鐵) 김수호뿐.

그 외의 두 헌터는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는 정도다.

끼릭, 퉁!

시위를 당겨 3개의 화살을 동시에 쏜 승재.

데스나이트는 재빨리 몸을 회전시켰으나, 화살 하나가 녀석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데스나이트.

녀석을 향해 또 하나의 화살이 쏘아졌다.

승재는 마석을 온전하게 얻고자, 언데드의 약점 중 하나인 목뼈를 정확히 관통시켰다.

파각!

'이 마석들은 유가족에게 건네주도록 하마.'

그는 죽은 조원들을 바라보며 그리 약속했다.

총 여덟 마리의 데스나이트를 토벌한 제1 공략 부대 제2조.

피해는 심각했다.

살아남은 헌터는 다섯.

그중 28위와 33위의 헌터는 중상을 입어 포션을 들이켰지만, 당장 전투에 투입되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타타타타탓!

잠시 휴식을 취하려던 승재 일행은 갑작스러운 발걸음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발걸음의 주인공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화(白花)를 구조하기 위해 움직인 제2 공략 부대다.

아무래도 지원 요청을 받고 다급히 달려온 모양이다.

2조의 헌터들은 작게 안도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데스나이트가 전부 이 안에 있었던 모양이군요."

진화의 발언에 승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은...."

"박건혁 헌터가 궁전 주변에 빙벽을 세워 마수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1조 대원들은...."

"그쪽에도 사람을 보내 뒀습니다."

승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1조의 헌터들이 제2 공략 부대원들과 함께 걸어왔다.

1조 역시 인명 피해가 심각했다.

사망자 열둘에 부상자 넷.

또, 부상자 중에는 전투가 불가능한 헌터가 셋이나 있었다.

"무사하셨군요."

"그래, 자네도 무사했군."

은성과 승재가 서로의 무사함을 확인했다.

"더 이상 S랭크와 싸울 순 없네. 강석이나 수호나 마력이 크게 소모됐어."

"...2조는 몇 마리의 데스나이트와 조우하셨습니까?"

"여덟 마리네."

"저희는 일곱 마리입니다. S랭크가 열다섯이나 쓰러진 겁니다. 아크 리치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은 현재 초조해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승재가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그래서, 계속 나아가겠다는 건가?"

"부상자는 제2 공략 부대와 함께 궁전을 나가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자네...!"

"이대로 돌아가면 추후 새로운 S랭크 마수들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이 적을 쓰러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은성의 무거운 목소리에 제1 공략 부대원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대로 작전을 속행한다고?

S랭크가 상당수 죽었다고 한들, 전부 죽었다는 뜻은 아니다.

이대로 전투를 속행했다가는 자신마저 목숨이 위험해지겠지.

때문에 은성은 추가 대책을 마련했다.

 

제92화

92화. 마족 (4)

"지금부터 제2 공략 부대의 지휘는 서열 79위, 이현정 헌터가 맡는다."

"...예?"

은성의 지시에 현정이 화들짝 놀랐다.

"이현정 헌터는 제2 공략 부대원들과 함께 부상자를 궁전의 출입구까지 데려가도록."

"아... 알겠습니다."

"이진화 헌터와 박건혁 헌터는 제1 공략 부대원으로 움직인다. 제2 공략 부대는 궁전에 들어오려는 마수들을 토벌하도록."

현정의 얼굴이 경직됐다.

박건혁을 궁전 내부로 들인다고?

그럼, 바깥의 마수를 제2 공략 부대원만으로 막아 내란 말인가?!

현정은 박건혁의 부재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출입구만 막아 내면 되네. 놈들을 궁전 안으로만 들이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현정은 결국 부상자들과 함께 궁전을 빠져나갔다.

부대원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강석은 불쾌한 얼굴로 대검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의 길드를 엉망으로 만든 '그 녀석'과 함께 싸워야 한다니.

이런 불쾌한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심지어 몇 시간 전 자신에게 대항하려 하는 그 건방진 모습은 찢어 죽여도 시원찮았지만, 게이트 보스를 죽이기 위해서는 당장 개미 손이라도 빌려야 할 때였다.

'녀석의 골렘이라면 미끼로 적당하겠지.'

A랭크 마수를 어렵지 않게 쓰러트리는 붉은 망토의 골렘.

그들이라면 S랭크의 시선을 끄는 데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타타타탓!

건혁이 30기의 골렘과 함께 복도를 달려왔다.

"상황은 이현정 헌터에게 들었습니다."

"그래, 자네가 우리를 좀 도와주게."

은성이 건혁의 어깨를 토닥였다.

강석은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 외 승재와 수호 및 제1 공략 부대원들이 건혁과 한마디씩 주고받았는데.

그렇게 제1 공략 부대는 10명으로 새롭게 편성됐다.

"그럼, 슬슬 출발하겠습니다!"

은성의 목소리에 부대원들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복도를 걸으며 수많은 방을 거쳤다.

이렇게 허전한 궁전이 지구에도 존재할까?

심지어 언데드 역시 한 마리도 발견되지 않았다.

"정말로 병력이 다 떨어진 거 아니요?"

강석의 말에 은성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반대로 병력이 한곳에 집중되어 있을 수도 있겠지. 백화의 길드원들과 함께 말이야."

3~40분 동안의 탐색에도 언데드는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특별한 전투 없이 궁전의 중심부에 다다른 헌터들.

그들은 보스룸처럼 보이는 거대한 철문 앞에 멈춰 섰다.

드래곤과 악마를 연상시키는 그림이 새겨진 5m 높이의 양문형 철문.

보기만 해도 묵직함이 느껴진다.

"들어가겠습니다."

골렘들이 앞서 철문을 열어젖혔다.

순간, 눈앞에 웅장한 홀(Hall)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로세로의 길이만 대략 2~300m 정도.

바닥에 깔린 레드 카펫과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샹들리에는 고급스러움을 보여 주었지만,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와 전리품들은 헌터들의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군."

왕좌에 앉아 있던 남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급스러운 붉은색 제복을 입고 거대한 박쥐 날개를 펄럭이는 남성.

그의 머리에 돋은 두 개의 뿔은 그가 악마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일으켰다.

그보다....

"조금 전 메모도 그렇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도...."

"정말로 헌터가...."

승재와 은성을 비롯해 제1 공략 부대 전원이 경악했다.

조금 전에 쓰러트린 데스나이트는 15마리.

S랭크 열다섯을 통제하는 헌터가 정말로 실존한단 말인가?!

"참고삼아 말하지만 나는 네놈들과 같은 하등 종족이 아니다."

"...종족?"

"나는 마계 아르덴의 38 후작 가문 중 하나인 레드펠 후작가의 전(前) 가주, 그리드 T 레드펠이다."

그리드의 자기소개에 강석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마계 아르덴...? 레드펠은 또 뭐야?"

"흐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되는군."

"저게 그... 인터넷에서 떠도는 중2병이라는 건가?"

헌터들의 중얼거림에 건혁이 쓰게 웃으면서 녀석을 바라봤다.

"가축이나 다름없던 인간들이 내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불쾌하군."

쿠구구궁!

대기가 진동함과 동시에 헌터들이 전투 자세를 취했다.

S랭크 마수와 마주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기세다.

"그래도 네놈들은 인정을 해 주도록 하마. 이 지구의 인간들은 아르덴의 인간보다 더욱 뛰어난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리드는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네놈들이 원하는 건... 이것들이겠지?"

그리드의 발밑에서 검은 그림자가 올라왔다.

그림자가 벗겨진 순간.

피범벅이 된 백화의 길드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쿨럭! 사... 살려...."

핏물을 쏟아 내며 목숨을 구걸하는 10명의 헌터들.

피부가 벗겨지고 팔과 다리가 기이한 방향으로 꺾이는 등.

그들의 상태는 언뜻 보더라도 심각해 보였다.

은성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들을 한 명씩 살펴봤다.

이내, 성녀(聖女) 김다은이 발견됐다.

팔다리가 부러지고, 얼굴이 기이하게 뭉개지며, 간신히 목숨만 붙어 있는 것 같다.

헌터 협회는 다은을 위해 2급 포션을 다량 준비해 두었다.

'포션은 드론을 통해 보급받을 수 있다. 지금은 그녀를 구출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은성의 생각은 너무나도 안일했다.

그리드가 과연 다은을 쉽게 놓아줄까?

콰앙!

철문이 세게 닫혔다.

화들짝 놀란 제1 공략 부대원들은 어깨를 살짝 움찔거렸다.

크크극.

시체들이 쌓여 있던 벽면에서 몸을 일으키는 칠흑의 기사.

양측에서 2~30여 마리의 데스나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왕좌 뒤에서 10여 마리의 아크 리치가 나타나 그리드의 뒤에 멈춰 섰다.

"마... 말도 안 돼."

"이걸 어떻게...."

"무... 문을 부수고...."

은성은 힐끗 철문을 보면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철문은 벽보다도 더욱 진득한 마력으로 덮여 있다.

저걸 부수고 도망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

"이제,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했나?"

그리드의 미소에 제1 공략 부대원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눈앞의 사내는 헌터가 아니다.

아니, 인간이 아니다.

말 그대로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는 악마(惡魔)다.

"X발!"

강석이 욕설을 터트렸다.

아크 리치와 데스나이트가 존재할 경우, 놈들을 뒤로 흘려보내 건혁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 정도는 우연과 실수로 메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기 어렵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불분명한 상황.

'제길, 창문이라도 있었다면 녀석을 미끼로 던지고 도망칠 수 있으련만....'

강석은 작게 혀를 차며 대검을 겨누었다.

이 이상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 데스나이트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으니까.

카앙!

박강석이 데스나이트와 충돌한 그때.

서열 2위, 방승재가 시위를 당겨 아크 리치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흐읍!"

전방으로 튀어 나가는 단군 길드의 마스터, 김수호.

그는 방패를 겨눈 채 전방을 향해 돌진했다.

콰앙!

방패와 충돌한 데스나이트가 멀찌감치 날아가 버렸다.

청룡 기사단 단장 이은성과 고구려 길드 제1군 대장 임진규도 수호의 뒤를 따라 달렸다.

"하...."

건혁은 살짝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고작 한 놈을 쓰러트리기 위해 대한민국 2, 3, 4, 5위의 헌터들이 동시에 달려든다니.

"방승재 헌터를 지켜!"

건혁의 명령에 골렘들이 승재의 주변으로 달려갔다.

아크 리치의 능력은 데스나이트보다 성가시다.

지금 김수호의 돌격을 두꺼운 바위벽으로 막아 낸 것처럼.

그 외에도 광대한 공격 범위와 각종 마법들로 헌터를 위협했다.

쿠웅!

바위벽을 무너트리며 은성과 진규에게 길을 내어 준 수호.

콰앙!

"크윽...!"

그는 눈앞으로 날아오는 거대한 화염구를 막아 내며 작게 신음을 터트렸다.

묵직한 것도 묵직한 거지만, 열기가 장난이 아니다.

당장 화상을 입어도 이상하지 않은 고열.

은성과 진규 역시 양옆에서 달려든 데스나이트에 의해 진로가 막히고 말았다.

"크으... 제기랄!"

두 사람은 데스나이트의 공격에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아크 리치로부터 거대한 화염구가 날아왔다.

콰앙!

두 사람은 화염구를 회피하며 데스나이트의 공격을 상대했다.

채앵! 채채채채챙!

"가세하겠습니다!"

정윤호의 아들인 정재혁이 검기(劍氣)를 일으키며 달려왔다.

검신(劍神)이라 불리는 정윤호처럼 압도적인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40대 중반이라는 연령을 고려하면, 재능만큼은 정윤호와 비슷하다 일컬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또한, 재혁의 검기는 데스나이트를 쓰러트리기에 충분했다.

푸욱!

재혁의 검 끝이 데스나이트의 좌측 가슴.

마수들의 심장인 마석을 정확히 꿰뚫었다.

파괴된 마석은 마력이 증발하여 가치가 사라진다.

물론, 이 와중에 마석 걱정을 할 순 없겠지.

"박건혁 헌터의 골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서둘러 녀석을...!"

재혁의 목소리에 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리드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제자리걸음만 반복할 뿐.

서걱!

"크악!"

옆구리를 베인 은성이 이를 악물면서 자리를 벗어났다.

양측에서 달려드는 두 마리의 데스나이트.

거기에 전방에서 화염구와 번개의 화살이 날아들면서 무리에서 벗어난 은성, 진규, 수호, 재혁은 고전을 면할 수 없었다.

퍼엉!

뒤에서 들려오는 폭발음.

골렘들이 파괴되는 소리다.

살아남은 골렘의 숫자는 10여 기 정도.

방승재 역시 더 이상 아크 리치만을 노릴 수 없게 된 걸까?

그는 주변의 데스나이트를 향해 화살을 쏘아 댔다.

푸욱!

"...?!"

서열 29위, 32위의 헌터가 데스나이트에게 복부와 심장을 꿰뚫렸다.

고작 2~3분의 전투로 두 명의 헌터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 자리에 남은 헌터는 방승재, 이은성, 박강석, 임진규, 정재혁, 김수호, 박건혁, 이진화... 이렇게 여덟 명뿐이다.

그것을 지켜보던 백화의 길드원들... 특히, 김다은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대한민국의 최정상들이 이토록 무참히 짓밟히다니...!

"으으...."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리드의 고문은 정말로 악랄했다.

그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부러트리거나 치명상에 가까운 상처를 만든 후, 김다은이 자기 자신과 동료를 치료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치료된 다음에는 똑같은 고통이... 아니, 더욱 심한 고통이 이어졌다.

마치 어디까지 치료할 수 있는지 보자는 듯이 말이다.

또, 그녀가 치료를 거부할 땐 화롯불에 담가 둔 쇠막대를 가져와 최악의 고통을 선사했다.

그는 악마 그 자체다.

"싫어... 싫어...."

다은과 백화의 길드원들은 공포에 휩싸인 채 은성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이... 이은성 헌터님! 살려 주세요! 제발... 제발 살려...!"

푸욱!

"크아악!"

한 헌터의 허벅지에 날카로운 쇠꼬챙이가 꽂혔다.

"너무 시끄럽군. 불구덩이에 던져 놔야 조용해지려나?"

그리드의 싸늘한 목소리에 백화의 길드원들이 입을 다물고 눈물을 흘렸다.

"흐음, 저쪽의 골렘은 꽤 쓸 만해 보였는데... 조금 아쉽군."

 

제93화

93화. 마족 (5)

골렘에게 토벌된 데스나이트의 숫자는 셋.

물론, 방승재의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골렘의 기여도는 2~30% 정도라고 봐야겠지.

그러나 날렵한 움직임과 함께 다양한 기술을 구사하는 골렘들의 모습은 그리드의 눈길을 확 끌어당겼다.

심지어 데스나이트의 일격에도 버텨 내지 않았는가.

고작 두세 번뿐이지만.

"확실히 아르덴의 인간들과는 다르군. 용사들과 비교하면 조금 부족하지만, 저 정도의 골렘을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은... 아니, 저것도 특수 능력이라는 건가?"

그리드는 골렘을 지휘하는 건혁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녀석은 사지를 잘라서 생포하도록."

그리드의 지시에 데스나이트 5기가 건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화들짝 놀란 건혁이 빙마검을 바닥에 내리꽂으면서 빙벽을 만들었다.

쿠구구궁!

그는 스테이터스 화면을 눈앞에 띄워 둔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민첩과 근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탓일까?

체력이 남아나질 않았다.

"하아... 하아... 하아... X발, X망 기여도 같으니라고."

골렘들이 상대한 데스나이트는 대부분 방승재가 마무리를 지었다.

때문에 본래 S랭크로부터 얻어야 할 경험치 중 2~30%만이 스테이터스에 들어왔다.

스킬 레벨 역시 레벨 업을 하려면 한참....

콰앙!

... 한참은 아닌가?

방승재가 데스나이트의 다리를 무너트린 순간.

골렘이 녀석의 머리를 베어 버렸다.

데스나이트의 움직임은 상상을 초월한다.

심지어 갑옷과 갈비뼈는 아르늄 이상의 강도를 자랑해 쉽게 뚫을 수도 없지.

목뼈 역시 투구로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목덜미를 노린 승재의 화살이 빗나간 덕분일까?

녀석의 투구가 상당 부분 파괴된 상태.

골렘이 근거리에서 아이스 블레이드(Ice Blade)를 사용하여 녀석을 쓰러트렸다.

파앗!

건혁은 빙벽에서 뛰어내려 방승재에게 달려갔다.

덥석!

그러곤 오른손으로 승재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에 깜짝 놀란 승재가 재빨리 뒤로 물러나 활을 겨누었는데.

그는 건혁을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왜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거지?

설마, 그리드를 쓰러트려 주길 바라는 건가?

자신이 화살을 쏘는 동안 보호해 주겠다는....

"저 좀 도와주십시오!"

승재의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저는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방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골렘들이 데스나이트를 마무리할 수 있게 놈들의 다리와 투구를 공격해 주십시오!"

건혁의 요청에 승재가 잠시 활을 내렸다.

물론, 길게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다.

이미 앞뒤에서... 아니, 사방에서 데스나이트가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서걱!

"크윽...!"

건혁은 어깨를 베인 채 바닥을 구르면서 '부탁드립니다!'라고 소리쳤다.

승재는 건혁의 의도를 알 수 없었으나,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활의 시위를 당겼다.

마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상태다.

진화와 강석 역시 도망치는 게 전부이며, 이은성 일행은 그리드에게 접근조차 못 하고 있다.

그렇다면... 믿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박건혁이라는 지푸라기일지 쇠사슬일지 모르는 희망의 줄을 말이다.

파각!

'다리와 투구를 공격해 달라니... 참으로 무리한 요구를 하는구만!'

좌측 가슴을 저격해 두 마리를 토벌할 수 있음에도 승재는 두 개의 화살로 데스나이트의 다리와 투구를 저격했다.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데스나이트를 향해 골렘이 달려들었다.

골렘만이 아니다.

건혁 역시 안간힘을 쓰며 지면을 박차 빙마검을 휘둘렀다.

서걱!

그 시각, 다리가 잘려 나간 은성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드는 은성의 일행을 죽이지 않았다.

지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이니 말이다.

백화(白花)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기는 했으나, 은성과 같은 강한 인간이라면 그보다 더욱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크으...."

은성, 수호, 진규, 재혁은 모두 전투 불능의 상태가 된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주변을 포위하듯 둘러싼 데스나이트들.

상황은 이미 정리된 듯 보였다.

"저 활잡이는 다른 놈들보다 강하군. 그런데...."

박건혁을 본 그리드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약한 사내.

골렘만 없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쯧, 어쩔 수 없군. 그냥 죽여 버려라."

은성의 일행을 포위하던 몇몇 데스나이트가 승재와 건혁을 향해 달려갔다.

10여 마리의 데스나이트에게 포위된 상황.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바로 저렇게....

서걱!

"크악!"

가슴을 베인 승재가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양옆과 뒤에서 달려든 데스나이트가 흑색의 검을 내질렀다.

회피가 늦음을 깨닫고 몸을 비튼 승재.

검 하나가 뺨 근처를 스쳤다.

그러나 두 개의 검은 어깨와 허벅지를 관통하듯 꿰뚫었다.

푸욱!

"크윽...!"

마력도, 체력도 모두 바닥났다.

심지어 오른쪽 다리는 검에 관통당하면서 절단된 듯 너덜너덜해진 상태.

승재는 바닥에 쓰러지며, 고개를 돌려 건혁을 바라봤다.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는 방법은 어떻게 됐을까?

여전히 잠잠한 걸 보면 아무래도 실패한 모양이다.

'...이게 주마등이라는 건가?'

눈앞에 나타나는 가족들의 환한 얼굴.

'아무래도... 집에는 못 돌아갈 거 같아.'

그는 씁쓸히 웃으며 눈을 감았다.

모두가 절망하고 희망의 끈을 놓은 그 순간.

콰앙!

굉음이 울려 퍼졌다.

바닥에서 울려 퍼진 거대한 진동에 화들짝 놀라 눈을 뜬 승재.

주변을 포위하던 데스나이트가 자취를 감추었다.

어디로 간 거지?

"끄으...."

그가 이를 악물며 상체를 일으키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방금까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던... 아니, 모두를 절망에 빠트린 데스나이트가 단 하나의 골렘에 의해 우왕좌왕하고 있던 탓이다.

펄럭!

"...골렘?"

지금까지 본 붉은 망토의 골렘과 다르다.

화려함과 날카로움을 더한 멋스러운 갑주.

새하얀 바탕에 황금빛 자수가 박힌 망토.

전체 길이 140cm의 대검은 마치 전설 속의 검을 보는 듯했다.

"가라."

바닥에 주저앉은 건혁이 작게 중얼거렸다.

파앗!

새하얀 망토를 펄럭이며 데스나이트를 향해 달려간 골렘.

새로운 골렘의 등장에 그리드는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승재와 건혁을 쓰러트린 10마리의 데스나이트를 움직였다.

그때, 건혁의 주변에서 새하얀 망토의 골렘들이 추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저게 무슨...."

그리드의 얼굴이 처음으로 당혹감에 물들었다.

카앙!

10마리의 데스나이트에게 대항하는 10기의 새하얀 망토... 아니, 기사왕 골렘은 이 자리의 모두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후우, 마력을 모두 털어 기사단장 골렘을 소환해야 하나, 아니면 '스킬 레벨+1'을 사용해야 되나 엄청 조마조마했네."

기사왕 골렘을 소환하기 위해 마력을 최대한 보존해 둔 건혁.

덕분에 의수가 박살 나고, 포션이 전부 깨져 버렸지만, 이 정도면 성공이라고 해야겠지.

또, '마력 회복'의 스킬 레벨이 오르면서 마력은 초당 0.3씩 회복되었다.

기사왕 골렘을 1기 소환하는 데 2분 47초면 충분하다는 의미다.

건혁은 터덜터덜 승재의 옆으로 다가갔다.

"덕분에 특수 능력을 한 단계 더 강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실전을 통해 특수 능력을 진화시킨 건가."

"포션은...."

"가지고 있네."

건혁은 승재의 품속을 뒤지면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2급 포션을 품속에 넣어 두고 다니는 건가.

대단하긴 대단하네.

건혁이 승재의 입 안에 포션을 쏟았다.

이내 골절과 어깨의 상처가 천천히 아물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벅지의 상처는 회복이 더뎠다.

"허벅지는... 병원에서 수술을 받든가 해야겠군."

"그렇군요."

건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농민 골렘을 소환했다.

"문까지 조심히 데려다드려."

소환된 3기의 농민 골렘은 승재의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앉은 자세로 조심히 들어 올렸다.

승재가 철문으로 이송되는 동안에도 데스나이트와 기사왕 골렘의 충돌은 계속됐다.

서걱!

데스나이트가 하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한 걸까?

그리드는 대기시켜 둔 10여 마리의 데스나이트를 추가로 움직였다.

이어, 아크 리치의 지원 공격까지 더해진 순간.

기사왕 골렘은 다급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회피와 공격을 펼쳐 나갔다.

"그쪽이 추가 병력을 투입시킨다면 이쪽도 똑같이 지원을 보내야지."

건혁은 씨익 웃으며 새로운 골렘을 소환했다.

"용기사 골렘 소환."

대량의 마력이 빠져나간다.

거대한 마력 파장과 동시에 공기 중의 수분이 거대한 얼음덩어리를 형성시켰다.

지름 15m에 달하는 얼음덩어리를 말이다.

이내, 덩어리의 바깥 부분이 '와장창!' 깎여 나가면서 하나의 형체를 만들었다.

"허...."

몸을 웅크린 도마뱀이 눈을 번뜩였다.

촤아악!

좌우로 펼친 거대한 날개.

마치 B랭크 마수인 드레이크에게 거대한 날개가 달린 모습이다.

아니, 이 경우에는 드래곤(Dragon)이라 부르는 게 정확하겠지?

까득!

드래곤은 그리드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골렘이 맞는 건가?"

이를 갈면서 남색 눈동자를 번뜩이는 모습은 말 그대로 짐승과 다름이 없었다.

"헌터들을 최우선으로 구조한다!"

건혁의 외침에 기사왕 골렘들이 데스나이트로부터 멀어졌다.

데스나이트가 기사왕 골렘들을 추격하려던 그때.

새하얀 브레스가 그들을 덮쳤다.

극저온의 냉기를 품은 브레스.

데스나이트의 육체는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콰앙!

그런 데스나이트들을 향해 꼬리를 휘두른 빙룡(氷龍).

순식간에 5기의 데스나이트가 박살 나고 말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그리드는 몸을 움찔거리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드... 드래곤이라고?"

마왕에 견줄 만한 절대적 힘을 가진 존재.

비록 그들이 마왕에게 패배했다고는 하나, 최상급 마족들은 드래곤에 대한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드는 빙룡(氷龍)으로 추정되는 녀석을 보고 눈살을 찡그렸다.

"마... 말도 안 돼! 특수 능력이란 것으로 드래곤까지 소환할 수 있다고? 한낱 가축 따위가?!"

그리드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 때, 기사왕 골렘들은 황급히 은성의 일행을 구조해 승재의 옆에 데려다 두었다.

이후, 그리드를 향해 달려드는 기사왕 골렘들.

정확히는 백화의 길드원들을 구조하기 위함이다.

"감히 골렘 따위가...!"

지금까지 지원만을 고수한 것과 다르게 본격적으로 전투를 개시한 아크 리치.

그들은 대규모 마법을 시전하며 기사왕 골렘들을 타격했다.

콰앙!

광범위한 공격에 휘말린 기사왕 골렘들.

그러나 파괴된 골렘은 단 한 기도 없었다.

그리드는 주먹을 쥐며 으득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병사들이 고작 골렘... 그것도 인족이 만든 골렘에게 밀리고 있다니!

"데스나이트, 전원 복귀하여 저 골렘들을 상대해라! 아크 리치는 저 드래곤을 공격하도록! 성체가 되지 않은 드래곤이다. 분명, 제6 서클 마법에 피해를 입을 터!"

드래곤은 날개를 펄럭이며 몸을 띄웠다.

홀의 높이는 대략 5~60m 정도.

드래곤이 떠오른 높이는 겨우 1~20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초저공 비행이라고 해도 될 판이다.

빙룡이 그리드를 향해 날아가려는 순간.

"공격해!"

그리드가 다급한 얼굴로 소리쳤다.

 

제94화

94화. 마족 (6)

빙룡(氷龍)의 약점이 무엇일까?

얼음을 녹이는 건?

그래, 불이다.

아크 리치들은 서둘러 화염구을 쏘아 던졌다.

슈와앙!

몸을 회전시켜 화염구를 회피한 빙룡.

안장에 탄 기사왕 골렘은 몸을 기울이면서 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 순간, 아이스 블레이드(Ice Blade)가 아크 리치들을 향해 날아갔다.

기사단장 골렘의 것보다 농후한 마력이 담긴... 또, 보다 거대한 크기의 칼날이다.

그에 대항하듯 화염구를 던진 아크 리치.

지름 10m에 달하는 거대한 화염구가 얼음의 칼날과 충돌했다.

투콰앙!

폭발의 여파로 돌풍이 불었다.

쐐애액!

빙룡은 폭발을 뚫고 몸을 회전시켜 꼬리를 휘둘렀다.

그리드는 얼굴을 찌푸린 채 뒤로 물러났다.

저 폭발을 뚫고도 아무런 피해가 없다고?

콰앙!

대피가 늦은 아크 리치 셋이 꼬리에 직격당해 바닥에 쓰러졌다.

'어째서... 어째서 브레스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냐.'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상황임에도 브레스를 뿜지 않은 빙룡의 모습에 의아함을 드러낸 그리드.

그 의아함은 금세 풀렸다.

그리드가 뒤로 물러난 그때.

푸른 망토를 두른 골렘들이 백화의 길드원들을 향해 다가온 것이다.

다은과 그 동료들을 데리고 뒤로 달아나는 골렘들.

그중 한 골렘이 작별 인사를 하듯 그리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빠직!

이마에 혈관이 돋은 그리드가 데스나이트들을 향해 소리쳤다.

"저것들을 전부 죽여 버려!"

그의 외침에 데스나이트가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푸른 망토의 골렘을 공격하려던 찰나, 기사왕 골렘들은 재빨리 데스나이트의 뒤를 추격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한순간의 결정이 패인이 되고 말았다.

그리드는 주먹을 쥐면서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레드펠 가문의 가주였던 자신이 고작 가축 따위에게 패배하는 건가?

한낱 인족 따위에게!?

"일어나라!"

그리드는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대량의 마기를 사용해 순식간에 10기의 데스나이트를 만들어 낸 그리드.

그 광경에 이번엔 건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냥 나뒹구는 시체로 데스나이트를 만든다고?"

지구의 사령술사는 데스나이트급 언데드를 만들기 위해 S랭크 마수의 시체가 필요했다.

D랭크의 시체로 S랭크의 언데드를 만든다면, 말 그대로 사기나 다름없는 능력이겠지.

건혁은 그런 사기적인 능력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파밧!

건혁의 옆으로 정예 기사 골렘들이 지나쳐 갔다.

김다은 및 백화의 길드원은 모두 구조됐다.

건혁은 슬쩍 고개를 들어 용기사 골렘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쓔와아앙!

용기사 골렘은 건혁을 본 것이 아님에도 명령을 이해하고, 천장을 맴돌면서 데스나이트 및 아크 리치를 향해 무차별로 브레스를 뿜어냈다.

푸화아아아악!

냉기를 쏟아 내며 언데드들을 모조리 얼려 버린 빙룡.

꿈쩍도 못 하게 된 언데드는 이내 기사왕 골렘들에게 파괴됐다.

승패는 이미 갈렸다 봐도 무방하다.

한편.

"이... 이게 무슨...."

데스펠 길드의 마스터, 박강석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까득.

이를 악물며 주먹을 쥐었다.

그토록 역겨워하던 골렘에게 부축까지 받아 물러나게 되다니.

데스나이트에 견줄 만한 새하얀 망토의 골렘.

박건혁은 자신이 손을 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힘을... 감추고 있었던 건가?"

그의 중얼거림에 승재가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데스나이트와의 전투로 특수 능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고 말하더군."

"웃기는 소리! 그 단시간에 그런 게 가능할 리가...!"

"그래, 천재라 불리는 이들조차 불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그걸 해낸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강석은 정윤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각성해 실전을 겪고 급속도로 성장한 대한민국 최강의 헌터.

하지만 정윤호와 박건혁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어째서냐고?

20년 이상을 헌터로 살아온 정윤호와 이제 겨우 8년 차가 된 박건혁이 같을 리가 없지 않은가!

"고작 8년 차의 헌터가 정윤호와 비슷한 영역에 들어선 거야. 이건...."

"근래 세계 각국에서 S등급 게이트가 연이어 폭발하고 있다. 우리들도 이제 신시대의 영웅들을 받아들일 때가 된 거겠지."

"영웅은 개뿔!"

강석은 욕설을 지껄이면서 건혁을 노려봤다.

은성의 일행을 포위하던 데스나이트와 그리드의 곁에 서 있던 아크 리치가 움직인다.

기사왕 골렘들이 밀리기 시작한 순간.

건혁의 옆에서 거대한 용(龍)이 나타났다.

"저... 저건 또 뭐야!?"

강석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새하얀 망토를 두른 골렘만으로도 머리가 아파 미칠 지경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용을 소환해 낸다고?!

"...강석아, 네 말대로 힘을 감추고 있었던 게 아닌지 의심이 들기 시작하는구나."

"저게... 골렘이라고?"

브레스를 뿜어내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드래곤이었다.

아니, 크기를 고려하면 와이번이라 하는 게 정확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S랭크인 데스나이트를 얼려 버리는 모습은 경악 그 자체였다.

와이번의 브레스로 데스나이트에게 치명타를 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눈앞의 용은 그것을 가능케 만들었다.

심지어 꼬리를 휘둘러 파괴하기까지.

도대체 데스나이트를 몇이나 쓰러트리려는 걸까?

스윽.

승재의 옆으로 은성이 눕혀졌다.

이어, 재혁과 진규를 비롯해 멀리 떨어져 있던 진화까지, 모두 출입구에 모였다.

은성은 승재의 다리를 툭 치면서 피식 웃었다.

"다시는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줄 알았습니다."

"나도 죽는 줄만 알았네. 그보다 포션은...."

"제 건 모두 깨져 버려서...."

은성의 대답에 진화가 품속을 뒤적거렸다.

"제가 여분까지 챙겨 뒀습니다."

"저도... 아, 깨져 버렸군요."

진규는 깨진 유리 조각들을 주변에 던지면서 작게 혀를 찼다.

그에 재혁이 힘겹게 일어나, 출입구에 놔둔 가방을 가져왔다.

허리에 차고 다니는 작은 보조 가방이다.

"깨질까 봐 출입구에 놔둔 건데... 다행히 무사한 모양입니다."

그는 3급 포션을 꺼내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그렇게 응급 처치를 마친 은석이 상체를 일으켜 멍하니 전방을 주시했다.

그 뒤를 따르듯 진규와 진화가 상체를 일으켰다.

두 사람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김다은 헌터를 구조하는군요."

진화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드는 자신들이 우르르 달려들어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상대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구조한다고?

모두가 어깨를 축 늘어트릴 때.

강석은 분하다는 얼굴로 어깨를 떨었다.

흑검(黑劍)으로서 위용을 선보여 온 자신이 저런 애송이에게 제쳐지다니!

그는 이를 악물면서 몇 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박건혁을 데스펠로 데려와야 한다며 강력히 설득해 오던 아들, 박태준.

태준의 설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면, 녀석은 지금쯤 데스펠에서 뛰고 있었을까?

'그 당시 최정상 헌터급의 대우를 해 주었다면....'

가정 따위는 필요 없겠지.

강석은 깊게 한숨을 토해 내며 건혁을 매섭게 노려봤다.

당장 죽이고 싶을 만큼 화가 나지만, 자신의 손으로는 처리할 수 없다.

아니,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헌터들이 박건혁을 우러러보게 될 것이다.

"제기랄."

강석의 욕설에 승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시 한번 물어봐야겠군. 화랑의 후계자가 되어 줄 수 있는지 말이야."

승재의 폭탄 발언에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대한민국 공식 길드 서열 3위에 속해 있는 화랑을 박건혁에게 물려준다고?

은성은 승재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승재 형님, 설마 은퇴를 생각하시는 건...."

"나도 올해로 61살이다. 슬슬 준비는 해 둬야지."

"헌터는 노화가 늦습니다! 서열 2위인 형님이 빠지시면...!"

"이놈아! 그러니까 준비라고 말했잖아! 또, 눈앞의 상황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저 녀석은 내가 아니라, 윤호 형님과 비교해야 될 정도의 괴물이라고! 이번에 돌아가서 각성 능력 검사를 받으면 분명 세계 랭킹 최상위권에 이름을 남길 거다!"

"그... 그건 그렇지만...."

은성이 말을 더듬자, 승재가 씨익 입술로 호선을 그렸다.

"나 하나 빠지는 것 정도는 메우고도 남을 녀석이야. 나도 몇 년 뒤에는 은퇴하고 느긋하게 살아 보련다."

"끄응...."

"그리고 확정된 이야기도 아니니까 호들갑 좀 떨지 마라. 이미 한 번 차였어."

"후... 후계자직을 약속했는데도 말입니까?"

"그래."

이 무슨 배짱이란 말인가!

화랑의 마스터직을 거절하는 사람이 존재하다니.

은성을 비롯해 진화와 재혁, 진규에 이어 강석마저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눈앞의 광경을 보곤 그만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단신으로 화랑에 맞먹는 전력을 보유한 사내.

그라면 홀로 S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저벅, 저벅, 저벅.

푸른 망토의 골렘들이 다가왔다.

"김다은 헌터, 무사하십니까?"

"아... 아아...."

그녀는 눈물을 쏟으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외 백화의 길드원들 역시 살았다는 사실에 눈물과 콧물을 흘리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다은은 천천히 자신의 몸을 회복시켰다.

"내 다리도 좀 치료해 주면 좋겠는데."

승재가 푸근한 얼굴로 자신의 다리를 가리키자, 다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료들을 바라봤다.

"사... 상처가 심한... 사... 사람들부터...."

공포가 가시지 않은 걸까?

다은은 말을 더듬으면서 비틀비틀 동료들에게 다가갔다.

반대로 꺾인 팔과 다리를 끼워 맞춘 뒤, 치유 능력을 사용해 회복시켜 주었다.

잔상처를 내버려 둔 채 심각한 부상만을 치료하는 다은.

승재는 일부 잘려 나간 허벅지가 달라붙기 시작하자, 놀랍다는 얼굴로 감탄사를 터트렸다.

"1급 포션에 준하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들었는데... 확실히 대단하군. 병원에 갈 필요도 없겠어."

다은은 아무런 말 없이 강석과 진화에게 다가갔다.

"나는 필요 없다."

"저도 괜찮아요."

두 사람의 대답에 다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다리가 절단된 은성에게 다가갔다.

헌터들이 하나둘씩 일어날 무렵.

전방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투콰앙! 콰콰콰쾅!

아크 리치의 무리를 박살 내 버린 빙룡.

이어, 그리드가 무언가 주문을 읊은 순간.

벽면에 널브러진 시체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 말도 안 돼."

"데... 데스나이트? 데스나이트를 만들기 위해선 S랭크에 견줄 만한 헌터의 시체가 필요할 텐데...!"

헌터들이 경악한 얼굴로 몸을 떨었다.

서열 10위 안에 드는 헌터들의 시체가 저렇게 많았던가?

은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룡산 게이트가 개방된 직후, 10위 안에 든 헌터는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일반인의 시체로도 S랭크 언데드를 만들 수 있다는 의미군."

승재의 중얼거림에 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런 모양입니다."

그러나 건혁은 그들의 놀람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빙룡의 브레스에 딱딱하게 굳어 버린 대여섯 마리의 데스나이트.

콰앙!

빙룡이 꼬리를 휘두르자, 놈들은 순식간에 박살 나 버렸다.

"...."

"...."

승재와 은성은 입을 다문 채 멍하니 건혁을 바라봤다.

 

제95화

95화. 마족 (7)

기사왕 골렘들과 함께 그리드에게 다가가는 건혁.

그리드는 사령술 외에도 화염구를 만들거나, 벼락을 내리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물론, 해당 공격은 기사왕 골렘의 선에서 마무리됐다.

"목숨만 붙여 둬."

건혁의 중얼거림에 기사왕 골렘들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들은 그리드를 보호하는 아크 리치의 목을 베어 낸 후.

서걱!

그리드의 사지를 한순간에 베어 냈다.

"크아아악!"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 소리.

건혁은 그의 가슴을 짓밟은 채 눈을 차갑게 내리깔았다.

"너는 어떻게 넘어왔지?"

"...?!"

"루시퍼가 진행한 실험이 성공한 건가?"

"네... 네놈이 그걸 어떻게...!"

그리드의 경악에도 건혁은 차가운 얼굴로 빙마검을 내리찍었다.

푸욱!

"크아악!"

빙마검이 그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대답해. 그럼, 사지를 재생시켜 포로로서 대우해 주지."

"닥쳐라! 나는 레드펠 후작가의...!"

퍼억!

건혁이 녀석의 안면을 걷어찼다.

그에 그리드는 부러진 이빨을 내 다리를 향해 내뱉었다.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핏물.

그는 광기에 젖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크흐흐흐.... 이미 지구에 대한 좌표는 아르덴에서 확보한 상태다. 나는 약간의 오차로 이곳에 넘어오게 되었지만, 두 차원을 연결하는 게이트가 만들어진다면, 마왕께서 지구를 정벌하고, 너희 인간들을 마수의 먹이로 던져 버릴 것이다!"

건혁은 잠시 턱을 매만졌다.

좌표는 확보했으나, 게이트는 아직이다?

오차로 넘어왔다는 건 무슨 소리지?

세실리아가 넘어온 게이트처럼 일시적으로나마 게이트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인가?

잠시 뒤, 다리를 이어 붙인 은성과 강석이 뒤로 다가왔다.

"이제 그만하게. 그를 구속하여 헌터 협회로 데려가지."

"이 녀석이 보스라면 게이트를 나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게이트 보스는 핵에 의해 구속을 받는다.

게이트 안에서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지만, 게이트 바깥... 즉, 지구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부분은 나가서 확인해 봐야겠군. 녀석이 보스인지 아닌지...."

참고로 게이트 핵을 지정된 장소로부터 강제로 떼어 내거나 파괴하면 에너지를 잃고 일정 시간 뒤에 게이트가 소멸된다.

강석은 주먹을 쥔 채 그리드의 얼굴을 두들겨 팼다.

퍼억! 퍼억! 퍼억!

"당장 말해! 핵은 어디에 있냐고!"

강석의 분노에도 그리드는 힘없이 실실 웃어 댔다.

"이곳을 유지하는 차원 에너지라면... 내 몸속에 있다."

"무슨...!"

"나는 지구로 넘어오자마자 이 게이트에 휘말리고 말았지. 그 순간, 네놈들이 말하는 핵... 차원 에너지는 내 몸속에 들어왔다. 덕분에 직접 게이트를 나갈 순 없지만, 바깥의 인족을 생포하여 정보를 얻거나, 언데드를 내보내 더욱 정확한 좌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이제 네놈들의 세상은 끝이다! 마왕군이 넘어와 네놈들을...!"

퍼억!

다시금 강석의 주먹이 그리드의 얼굴에 꽂혔다.

"마왕이고 나발이고 네놈을 죽이면 된다는 거 아니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칠흑의 검을 들어 올렸다.

그에 은성이 나서며 강석의 행동을 만류했다.

그리드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라면 지구는 크나큰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일단, 녀석을 게이트까지 데려간다."

은성의 결정에 건혁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기사왕 골렘이 녀석을 어깨에 걸쳤다.

절단된 부위에서 핏물이 쏟아지자, 은성이 다은을 불러 치료를 부탁했다.

"치료...? 지금 이 X 같은 X발 X끼한테 치료를 하라는 말씀이세요?!"

그녀의 분노에 은성은 난색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살려서 데려가야 하지 않겠는가.

수중에 남아 있는 포션은 없다.

따로 드론으로 보급을 받아야 하는 상황.

"골렘에게 조심히 들라고 전해 주게."

"알겠...."

건혁이 대답하려던 그때, 다은이 씨익 싸늘히 웃었다.

"아, 지혈 정도라면 해 드릴게요."

"흐음?"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백화의 길드원 중 한 명을 데려온 다은.

함께 그리드의 고문을 견뎌 온 남성이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오른손에 작은 불을 피웠다.

다은은 바닥을 뒹구는 양날 직검을 불로 가열시킨 다음 녀석의 절단 부위에 지져 버렸다.

치이이익!

"크아아아아아악!"

지혈이란 이름의 고문이 시작되었다.

그리드가 눈동자를 뒤집은 채 거품을 물었다.

"크크큭, 가축에게 사지가 지져진 느낌은 어떠신가?"

다은의 광기에 은성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만하게."

건혁은 빙룡을 움직여 출입구를 박살 냈다.

정확히는 일부분이 찌그러지며 활짝 열렸을 뿐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마력을 퍼부은 걸까?

'...아르늄보다 훨씬 더 단단하겠어.'

그보다 만티코어를 상대로도 잘 버텨 낸 아르늄제 의수가 산산조각이 나 버리다니.

정비를 소홀하게 한 탓인가?

건혁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빙룡의 안장에 올라탄 기사왕 골렘을 내려오게 만들었다.

"흐음?"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헌터들.

뭘 하려는 거지?

건혁은 그들의 의문을 무시한 채 빙룡의 등으로 뛰어올라 안장에 올라탔다.

잠시 뒤, 궁전의 중앙 화원을 통해 하늘로 날아오른 빙룡.

건혁은 고삐를 당기면서 궁전 바깥의 언데드들을 향해 브레스를 쏟아 냈다.

푸화아아아아!

제2 공략 부대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와... 와이번?"

"와이번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등에 사람이... 저거, 박건혁 헌터 아니야?"

"그게 무슨 헛소리...."

제2 공략 부대원들의 대화는 중간에 잘리고 말았다.

언데드를 향해 브레스를 뿜어 대던 용이 지상으로 착륙한 탓이다.

헌터들은 안장에 올라탄 건혁의 모습에 몸을 움찔거렸다.

"...설마, 저것도 골렘이라고?"

그들은 믿을 수 없단 얼굴로 건혁을 바라봤다.

한편.

"...."

건혁은 담담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브레스를 뿜어냈음에도 언데드의 숫자는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늘어난 거 아니야?

"가라."

제2 공략 부대원들은 등 뒤에서 튀어나온 인영에 화들짝 놀랐다.

콰아앙!

새하얀 망토를 펄럭이며 얼음의 칼날을 날려 대는 골렘들.

이어, 제1 공략 부대원들과 백화의 길드원들이 궁전을 빠져나왔다.

제2 공략 부대 대장인 현정은 구조 작전이 성공했다는 사실에 얼굴이 밝아졌다.

"마도 폭탄이 투하될 테니, 전원 자세를 낮추도록!"

은성의 목소리에 제2 공략 부대원들이 다급히 자세를 낮추었다.

투콰앙! 콰콰콰콰콰콰쾅!

사방에서 들려오는 폭발음.

먼지가 피어오른 순간.

기사왕 골렘들이 다시 한번 얼음의 칼날을 날려 버렸다.

건혁이 빙룡을 타고 돌파하기 시작하자, 은성이 부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이다. 달려!"

제1, 2 공략 부대원들은 건혁의 뒤를 따라 달렸다.

"X발, 힘들어 죽겠네!"

강석의 욕설에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제 다리가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말을 내뱉는 것조차 힘들 지경.

그나마 언데드와의 충돌은 한 번도 없었다.

'박건혁 헌터가 참가해 주지 않았다면... 이 자리의 모두가 목숨을 잃었겠군.'

도주로를 만들며 주변 언데드들을 쓰러트리는 기사왕 골렘들.

심지어 헌터들의 뒤에선 병사 골렘들의 손에 의해 전사자들이 옮겨지고 있었다.

그들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사히 숲을 빠져나온 헌터들은 곧 드론 부대와 합류하게 되었다.

"하아... 하아... 하아...."

제1 공략 부대의 대원들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더는... 더는 못 움직여."

강석이 배 째라는 식으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이놈아, 차에 올라가서 쉬어!"

"X발, 알아서 들어 올리든가!"

강석의 행동에 헌터들이 고개를 돌리면서 차량에 올라탔다.

은성은 드론들을 회수한 다음, 백화의 길드원들과 전사자들을 빈 수송 차량에 태웠다.

또, 그리드는 험비에 태워진 채 은성과 진화의 감시를 받았는데.

건혁은 빙룡을 타고 하늘에서 주변을 경계하며 마수의 접근을 무전기로 전달했다.

물론, 대부분이 기사왕 골렘의 선에서 마무리되어 귀환 길 역시 순탄하게 마무리됐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저...."

"기사왕이라고 부를 생각입니다."

"...그래, 기사왕 5기와 용을 남겨 두고 같이 지구로 넘어가 주게."

"알겠습니다."

건혁은 기사왕 5기와 용기사 골렘을 게이트 안에 놔두고, 이은성과 함께 그리드의 양팔을 붙잡은 다음 게이트를 넘어갔다.

구룡산에 도착한 은성과 건혁은 고개를 돌리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정말로 게이트 보스였던 모양이군요."

"후우, 심문은 게이트 안에서 해야겠군."

은성은 골치가 아프다는 얼굴로 헌터 협회에 전화를 걸었다.

정확히는 협회장인 김정호에게다.

그리드에 대한 문제를 일개 직원에게 전달할 순 없는 일이니까.

그렇게....

김다은 및 백화의 길드원을 구조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공략 부대원 중 사망자의 숫자가 30여 명에 이르고, 보스로 추정되는 존재는 한국어를 구사함과 동시에 S랭크 마수 80여 마리를 통제해 보였다.

해당 보고를 받은 정호는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기가 막힌 목소리를 냈다.

"멀쩡한 S랭크 마석 48개, 파괴된 S랭크 마석 37개를 모두 회수했습니다. 또한, 언데드를 통제하는 사내는 자신을 '그리드 T 레드펠'이라 밝히며 다른 세계의 존재라고 합니다."

―...다른 세계? 자네,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저도 100%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은성은 조금 전 그리드의 모습을 떠올렸다.

"신체 변화와 다양한 속성 능력을 사용하며, 수십만의 언데드와 80여 마리의 S랭크 마수를 소환 및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일단, 게이트 바깥으로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게이트 안에서 그를 심문해야 할 것 같으니, 협회 측에서 서둘러 조치를 취해 주십시오."

―...그리하겠네.

정호의 의심스러운 목소리에 은성이 작게 한숨을 토해 냈다.

목숨을 걸고 공략 및 구조 작전을 수행한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의심할 줄이야.

억울하긴 하지만 정호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신 역시 머리가 복잡한 상태니까.

은성과 건혁은 게이트로 넘어가 그리드를 감시했다.

"다른 분들께서는 게이트를 나가셔도 괜찮습니다."

헌터들이 그제야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김다은 헌터님과 백화의 길드원분들, 그리고 방승재, 김수호 헌터님께서는 잠시 남아 주십시오. 그리드를 심문할 때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승재와 수호 역시 마찬가지.

이후, 전사자들의 시체가 게이트 바깥으로 옮겨지기 시작하자, 은성을 비롯한 청룡 기사단의 단원들은 고개를 숙이면서 예우를 갖추어 주었다.

"모두들 정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부디 편안히 쉬십시오."

그리드의 족쇄로서 남게 된 박건혁 역시 고개를 숙이고 두 눈을 감았다.

묵념을 마친 뒤, 승재가 발걸음을 돌려 건혁에게 다가갔다.

"화랑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한 번만 더 생각해 봐 주게."

"그건...."

"자네라면 윤호 형님을 넘어설 수 있을 거야. 그럼, 화랑 역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대한 길드가 되겠지. 동시에 자네의 흑월 역시 화랑에 편입시킨다면, 그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네."

건혁은 잠시 고개를 떨어트리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나는 천막에 들어가서 조금 쉬도록 하지. 수고하게."

 

제96화

96화. 마족 (8)

청룡 기사단원들이 펼쳐 준 거대한 천막들.

승재와 수호는 그 안으로 들어가 벌러덩 간이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반면, 건혁은 커다란 상자에 앉아 마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뒤, 숲 쪽에서 달려오는 언데드의 군세.

"...오는군요."

건혁의 옆으로 다가온 은성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방승재와 김수호 등의 헌터들은 마력이고 체력이고 이미 방전된 상태다.

그것은 이은성을 비롯한 청룡 기사단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드를 바깥으로 내보낼 수만 있다면, 언데드들을 콘크리트 벽으로 막아 낼 순 있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현재로서는 건혁만이 그리드를 지키며 언데드를 막아 낼 수 있는 유일한 헌터였다.

"지원이 곧 도착할 테니, 그때까지 시간을 벌어 주게."

"알겠습니다."

건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전에 타고 온 빙룡의 등에 올라탔다.

"너희는 이곳을 지켜라."

기사왕 골렘들을 게이트 주변에 배치시킨 건혁.

이후, 작은 목소리로 '용기사 골렘 소환'을 중얼거렸다.

건혁의 주변으로 3기의 용기사가 모습을 드러내자, 은성이 화들짝 놀라면서도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자네도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지고 있군."

건혁은 피식 웃으면서 고삐를 잡아당겼다.

"가자!"

건혁이 하늘로 날아오른 순간.

그 뒤를 3기의 용기사 골렘들이 뒤따랐다.

그 광경을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던 진화와 청룡 기사단원들은 멍을 때렸고, 천막에 들어가려던 다은은 발걸음을 멈춘 채 건혁을 바라봤다.

"박...건혁."

언데드들을 향해 날아간 빙룡들은 지상을 향해 브레스를 뿜어 댔다.

푸화아아아아!

이어, 안장에 올라탄 건혁과 기사왕 골렘이 얼음의 칼날을 날리면서 추가 타격을 먹였다.

콰콰콰쾅! 콰앙!

건혁이 언데드들을 막아 내던 그 시각.

기사단 측 헌터들과 협회 측 고위 간부들이 게이트를 넘어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은성 기사단장님."

헌터 협회 서울 중앙 본부 본부장, 정우혁.

헌터 협회 서울 중앙 본부 게이트 관리부 부장, 최현승.

헌터 협회 서울 중앙 본부 마수 등록 처리부 부장, 김명준.

세 사람의 뒤를 따르는 과장, 차장 직급의 직원들과 청룡 기사단원들까지.

은성은 우혁, 현승, 명준과 차례로 악수를 나누었다.

셋 모두 40대 후반 및 50대 초반의 중년들이다.

은성이 그리드를 향해 안내하려던 그때.

콰아앙!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어깨를 움찔거린 우혁이 고개를 돌려 폭발음이 들린 방향을 바라봤다.

바글거리는 언데드들과 그 위를 날아다니는 푸른빛의 드래곤.

"이... 이은성 기사단장, 저게 무슨...!"

기사단원들이 전투 자세를 취하려 하자, 은성이 두 손을 들면서 그들을 안심시켰다.

"모두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드'라는 사내가 만들어 낸 언데드를 '박건혁 헌터'가 토벌하는 중입니다."

"바... 박건혁 헌터?"

"예, 저 하늘에 보이는 용과 주변의 골렘들이 저희를 안전하게 지켜 줄 겁니다. 가능하면 그리드라는 사내를 게이트 바깥으로 내보낸 후, 조사를 받게 하고 싶지만... 게이트 핵이 그의 체내에 흡수된 탓에 데리고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더군요."

은성의 설명에 협회의 간부들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콰앙! 콰콰콰쾅!

"그... 그리드라는 사내에 대해서는 이미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 박건혁 헌터가 저런 골렘까지 소환할 수 있다는 건...."

"이번 전투를 통해 특수 능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우혁은 멍하니 건혁의 전투를 지켜봤다.

어찌 저것이 개인이 부릴 수 있는 전투 능력이란 말인가.

우혁의 생각은 게이트 관리부 부장인 최현승과 마수 등록 처리부 부장인 김명준과 같았다.

아니, 이 자리의 모두가 그리 생각할 것이다.

"자네는 김다은 헌터와 백화의 길드원분들을 데려오게."

"알겠습니다."

"자네는 방승재 헌터와 김수호 헌터를 모셔 오고."

두 청룡 기사단원이 고개를 끄덕인 채 자리를 벗어났다.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은성은 협회 측 간부들을 데리고 거대한 천막으로 들어갔다.

대략 2~30평은 될 법한 천막이다.

잠시 뒤, 김다은과 백화의 길드원이 천막으로 들어왔는데.

그때, 바깥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X발, 저게 뭐야!?"

"미친...!"

방승재와 김수호의 목소리다.

무엇을 보고 저리 놀란 걸까?

두 사람은 헐레벌떡 천막으로 들어오더니, 곧바로 이은성을 향해 달려갔다.

"저... 저 하늘에 떠 있는 용들...!"

은성이 작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박건혁 헌터가 소환한 골렘입니다."

방승재와 김수호는 헛웃음을 터트리면서 주변에 비치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본 협회 측 간부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그 이유는 은성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은성은 다은을 구출할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이야기해 주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말이다.

"지금... 농담하는 겁니까?"

우혁의 반응에 은성은 증거물로서 마석을 보여 주고, 방승재, 김수호, 김다은 일행의 증언으로 자신의 이야기가 사실임을 증명했다.

"허어, 믿기 어려운 이야기로군요."

우혁이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에 옆에 서 있던 김명준이 마석들을 하나씩 살펴봤다.

"증인들이 이렇게나 많은 데다, S랭크 마석들까지 회수해 왔다면... 믿을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박건혁 헌터의 골렘이 승패를 뒤집었다고 말씀드려야겠군요."

은성의 대답에 승재와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골렘이 아니었다면 자신들은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겠지.

"박건혁 헌터라면 조금 전에 그...."

우혁이 말끝을 흐리자, 은성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예, 현재 언데드들의 접근을 차단해 주고 있는 헌터입니다. 물론, 방승재, 김수호, 임진규, 정재혁, 박강석 등의 수많은 헌터들의 힘이 없었다면 이번 작전은 실패했을 겁니다."

"박건혁 헌터의 능력을 항시 주목하고 있었지만...."

우혁의 중얼거림에 게이트 관리부 부장인 최현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까지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군요."

80여 마리의 S랭크 마수 중 절반인 40여 마리를 쓰러트린 것이 바로 박건혁이다.

이 사실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된다면, 국민들은 정윤호와 박건혁을 비교하기 시작하리라.

현재 S등급 게이트에서 단독으로 16마리의 S랭크 마수를 토벌한 전적을 보유한 정윤호.

경이로운 실적이다.

그런데, 박건혁이 그보다 배 이상인 40여 마리를 쓰러트렸다고?

은성은 상황을 설명하면서도 씁쓸히 웃어 보였다.

'박건혁 헌터는 S랭크를 가볍게 쓰러트린 용을 세 마리나 더 소환했다. 서열 1위는 이미 따 놓은 거나 다름없겠지.'

은성의 마음은 승재와 수호에게 역시 전달됐다.

용기사를 추가로 소환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정윤호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수십 년간 넘을 수 없는 벽이라 생각했던 검신(劍神)이 무너진다.

그리고 빙마군주(氷魔君主)라는 새로운 벽이 세워지게 될 것이다.

'...그라면 세계 최강의 헌터라는 자리도 노려 볼 수 있겠어.'

은성은 작게 웃으면서 청룡 기사단원을 호출했다.

"그리드를 데려오게."

"알겠습니다."

잠시 뒤, 그리드가 기사왕 골렘에 의해 끌려왔다.

걸레가 되어 버린 날개와 한쪽이 부러진 뿔.

또, 사지가 절단되고, 얼굴이 짓뭉개져 핏물을 토해 내던 그는 씨익 웃으면서 은성과 그 일행들을 둘러봤다.

"내게서 무언가 정보를 바라는 눈빛이군. 그럼, 그 대가는 무엇이지? 나를 살려 주기라도 할 건가? 차원 에너지를 품은 나를?"

"순순히 협조를 해 준다면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게이트 안에서 관리 감독을 받게 되겠지."

우혁의 대답에 그리드가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하! 거짓말이 능숙하지 못하군. 네놈의 눈동자는 거짓말쟁이들의 빛을 띠고 있다."

"...."

우혁이 침묵하자, 그리드는 씨익 웃으며 주변을 비잉 둘러봤다.

"한 가지 말해 주지. 네놈들의 운명은 변하지 않는다. 가축처럼 사료를 받아먹으며, 마수들의 먹이가 될 운명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쓔와아악!

그리드의 붉은 눈동자가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내, 그가 뿜어내는 진득한 살기에 모두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리드는 그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았다.

오히려....

까득!

"설마...!"

승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드가 털썩 쓰러지려던 그때.

김다은이 테이블을 밟고 뛰어올라 그리드를 향해 치유 능력을 사용했다.

이렇게 편히 죽게 할 순 없다.

녀석에게 잔인하고도 극악무도한 고문을 해서라도 울분을 쏟아 낼 것이다!

"커헉!"

핏물을 쏟아 내며 눈을 뜬 그리드.

다은은 그가 자결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소매를 뜯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재갈!"

"아...!"

구깃구깃 틀어막은 소매를 청룡 기사단원으로부터 건네받은 재갈로 바꿔 착용시켰다.

"으읍...!"

그리드는 이마를 찡그린 채 눈매를 좁혔다.

인족 따위에게 이런 치욕을 당하다니!

그리드가 분노하면 분노할수록 다은의 얼굴에는 미소가 활짝 피어올랐다.

퍼억!

그녀는 그리드의 복부를 강하게 걷어찼다.

"끄윽...!"

"마음대로 죽을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너는 내 허락 없이 절대로 죽을 수 없어."

다은이 눈을 번뜩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성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그녀의 행동을 말렸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그리드를 괴롭힐 필요는 없다.

언데드와 인근의 마수들만 마무리되면, 게이트 주변에 건축물을 만들 계획이다.

그리드를 수감시킬 건축물을 말이다.

"그곳에서 고문을 진행한 후, 정신 계열의 헌터를 불러 정보를 끄집어낼 겁니다. 원하신다면 김다은 헌터에게 고문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드릴 테니...."

"그 약속, 꼭 지켜 주시길 바랄게요."

다은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사람에게 고문을 행하는 것은 법에 저촉되는 일이다.

테러리스트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상대가 마수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람들은 마수를 악(惡)으로 규정 짓고, 마수들에 대한 실험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고문이나 다름없는 실험.

눈앞의 사내는 과연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지능을 가지고,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인족과 비슷한 외견을 지닌 존재.

수많은 헌터를 죽인 범죄자라면 곧바로 헌터 협회의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구로 내보낼 수 없다면, 게이트 안에서 조사를 할 수밖에.

조사 과정에서 약간의 과격한 행동은 용인될 수밖에 없겠지.

'대한민국의 최정예 헌터들을 죽였으니 말이야. 또, 녀석이 게이트 핵을 품고 있다면, 어차피 녀석은 죽여야 할 대상이다. 고문쯤은....'

은성은 재갈을 문 그리드를 바깥으로 내보냈다.

'이 자리에 김다은이 있었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겠군. 만약 이곳에 오기 전에 자결을 했었다면....'

협회 측 인물들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타다다닷!

"단장님, 지원이 도착했습니다."

"그래, 박건혁 헌터를 도와 언데드들을 토벌하라 지시하도록."

"알겠습니다."

게이트로 들어온 5백여 명의 청룡 기사단원들.

그들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지상을 향해... 아니, 언데드를 향해 브레스를 뿜어내는 드래곤.

심지어 그 드래곤의 등에 올라탄 것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제97화

97화. 마족 (9)

"마... 마수끼리 싸우는 건가?"

"괜히 끼었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잠시 뒤, 은성에게 지원군 도착을 알린 기사단원이 달려왔다.

"박건혁 헌터를 도와 언데드들을 토벌하라고 하십니다."

"...박건혁? 박건혁이 어디에 있는데?"

"예? 저기에 계시잖습니까."

기사단원이 가리킨 것은 하늘 위, 푸른빛의 드래곤이었다.

"...저기?"

"예, 저 용들은 모두 박건혁 헌터님께서 소환하신 골렘입니다. 박건혁 헌터님께서는 현재 용의 등에 올라탄 채 전투를 진행하고 계십니다."

"...용(龍)? 저게 박건혁이... 아니, 박건혁 헌터가 소환한 골렘이라고?"

"예, 서둘러 움직여 주십시오."

5백여 명을 이끌고 온 청룡 기사단 역삼 지부 지부장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 박건혁 헌터에게 우리가 도착했다고 전하도록. 저 드래곤... 아니, 용의 브레스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면 안 되니까."

"알겠습니다."

"후우... 그럼, 다들 가 보자고!"

역삼 지부장은 5백여 명의 기사단원들과 함께 언데드를 향해 돌격했다.

그들의 전투 구역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용기사들.

아무래도 무전을 통해 지원군의 도착을 전달받은 모양이다.

전투는 대략 3~4시간 정도로 마무리됐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구룡산 게이트로 컨테이너 상자 및 다양한 시설과 자재들을 보내왔다.

타앗!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건혁은 수많은 컨테이너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게이트 보스를 가두기 위해 임시 특별 감옥을 제작하는 중입니다."

어느새 다가온 걸까?

건혁의 옆에서 의문을 해소시켜 준 진화.

그녀의 설명에 건혁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당한 마력으로 코팅되어 있군요."

"이 정도는 되어야 조금은 안심할 수 있겠죠. 녀석은 사령술 외에도 속성 능력을 사용해 보였으니까요. 또, 녀석의 목에는 미국에서 수입해 온 BM족쇄가 채워질 거예요."

"마력을 봉인한다는...."

"예, 범죄 헌터들의 마력을 억제할 수 있는 족쇄죠. 이번에 신형이 들어왔거든요. 아마 조금은 그리드의 특수 능력을 억제시킬 수 있을 거예요."

건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잠시 뒤, 은성이 건혁에게 다가왔다.

"정말로 고생 많았네. 자네가 없었다면 분명 그리드를 언데드에게 빼앗기고 말았겠지. 자네도 이제 돌아가도 괜찮네. 보수는 협회에 등록된 계좌로 입금시켜 주지."

"예, 알겠습니다."

"아, 저 골렘들을 몇 기 주변에 배치시켜 주면 좋겠는데...."

건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용기사 골렘과 기사왕 골렘을 반경 1km 지역에 배치시켜 두었다.

은성은 감사를 전하면서 게이트까지 배웅을 해 주었다.

2박 3일을 각오한 건혁은 24시간이 조금 지나 집으로 귀가하게 되었다.

* * *

거실에서 TV를 보던 세실리아는 멍하니 건혁을 바라봤다.

"버... 벌써 돌아오신 건가요?"

"벌써라...."

건혁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일주일 정도는 지난 느낌이랄까?

현재 시간은 오후 1시 47분.

수영은 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다는 모양이다.

덜컥!

"아빠?!"

건혁의 목소리를 들은 걸까?

수영이 방문을 열었다.

건혁은 딸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하하,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나서...."

수영이 건혁의 품에 안겼다.

"...다녀오셨어요."

"그래, 다녀왔어."

건혁은 수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세실리아가 준비해 준 점심을 먹었다.

TV에선 한창 구룡산 게이트에 대한 이야기로 들썩였다.

80여 마리의 S랭크 마수를 토벌해 낸 대한민국의 최정예 공략 부대.

헌터 협회의 기자 회견으로 대한민국은 박건혁의 활약을 주목했다.

40여 마리의 S랭크 마수를 단독으로, 24시간 이내에 토벌한 세계 유일의 헌터.

세계 랭킹 1위조차 공식 기록은 34마리라고 한다.

'뭐, 증명할 수 있는 영상 자료가 없으니 공식 기록으로 남지는 않으려나?'

하지만 세계를 놀라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또한, 대한민국 헌터 협회는 구룡산 게이트의 보스를 아크 리치 이상의 언데드라고 밝혔다.

그리드 T 레드펠의 존재를 숨긴 것이다.

정부는 공략 부대로 참가한 헌터들에게 그의 존재를 함구할 것을 명령했고, 은성은 서열 10위 내의 헌터들에게 아르덴의 존재를 알렸다.

아니, '10위 이내의 헌터+박건혁'에게 알렸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

박건혁의 서열은 이미 대한민국 TOP3에 들 테니 말이다.

"그러면... 마족들이 이 지구로 넘어오기 위해 인공 게이트를 만들고 있다는 말이군요."

―그래, 나도 허황된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마수와 게이트가 실존하는데, 마족이랑 다른 세계가 없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은성의 발언에 건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드는 후작이라는 고위 귀족이면서도 최상급 마족이라고 하네.

"최상급 마족...?"

―S랭크 마수를 손쉽게 쓰러트리는 괴물이라고 하더군. 그런 의미에선 자네가 소환하는 용과 비슷하다고 봐야겠지.

"...."

―후우, S랭크 이상... SS랭크라고 불러야 하나? 심지어 마왕이라는 존재는 최상급 마족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더군. 그러면 SSS랭크까지 탄생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은성의 헛웃음에 건혁은 두 눈을 감았다.

SS랭크와 SSS랭크는 실제로 탄생하게 될 등급이다.

시기가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아르덴에서 살아가던 인간들은 한동안 노예처럼 부려지다, 가축이 되어 버려졌다고 하네. 원인은 식량난이라고 하더군. 격렬한 전쟁으로 기상 이변이 일어나며 작물을 재배할 수 없게 되고, 돼지와 소 등의 가축들에게 먹일 식량도 사라지고, 대체할 수 있는 식량을 찾으려 해도....

은성의 이야기는 세실리아에게 들은 것과 비슷했다.

―결국, 그들은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 중 하나로, '용사'라는 자들이 소환되었다는 '지구'와 공간을 연결시키기 위한 실험을 진행했다는 모양이야.

"...그 실험이 성공했군요."

―성공... 어찌 말하면 성공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게이트 자체가 만들어진 건 아니야.

"그게 무슨...."

―그리드는 실험체로서 지구에 왔다고 하더군. 아르덴은 이미 게이트를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이 있다고 하네. 해당 기술을 적용해 '용사'의 시체에서 지구의 차원 에너지를 추출해 냈다고 하더군.

"용사의 시체... 말입니까?"

―인마대전에서 죽은 용사를 언데드로 부활시켰다더군.

그 언데드에서 지구의 차원 에너지를 채취해 냈다는 모양이다.

"...그렇군요."

―아르덴은 지구의 차원 에너지를 복제하는 데 성공하고, 게이트를 생성할 때 필요한 에너지와 지구의 차원 에너지를 혼합하여 새로운 에너지를 창조해 냈다고 하네.

물론, 해당 에너지로 게이트를 생성하는 것은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모양이다.

―그리드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수많은 마족들이 차원을 넘어갔으나, 답신과 정확한 좌표를 보내온 마족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말했네.

"그... 좌표라는 건 어떻게 보내는 겁니까?"

―차원을 넘을 때 가져온 '마도구'라는 물건에 마력을 흘려보내면 된다고 하더군. 해당 마도구에는 아르덴과 지구의 차원 에너지가 혼합되어 있다고....

차원을 넘은 마족은 지구의 존재를 확인한 다음 좌표와 답신을 보낸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답신과 좌표를 받은 적이 없다면... 해당 마도구가 개량되었다 할지라도 아르덴에서 정확한 신호를 받았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심지어 게이트를 제작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린다면 조금은 여유가 있다는 의미겠지.

"이 사실을 국민들에게는...."

―한동안은 밝히지 않을 생각이네. 괜히 불안감만 조성할 테니 말이야. 지금은 타국과 정보를 교류하며, 대책을 마련하는 데 주력해야겠지. 뭐, 믿어 줄지는 모르지만....

판타지 소설을 쓰냐면서 비아냥거릴지도 모른다.

"녀석이 거짓을 말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없겠지.

그리드는 헌터 협회의 잔악한 고문과 김다은의 치료를 받으며 정신이 피폐해진 상태다.

고문과 치료를 수십 차례 반복하며 정신을 무너트린 후, 정신 계열 능력을 가진 헌터에게 도움을 받아 정보를 끄집어낸 헌터 협회.

고문에 대한 부분은 철저하게 입막음을 해 두었다.

외부로 새어 나갔다가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정보를 내뱉는 모습은 확실하게 녹화를 해 두었다.

말끔히 차려입은 그리드가 정신 계열의 헌터에 의해 술술 정보를 내뱉는 영상.

해당 영상은 추후 타국과 정보를 공유할 때 증거 자료로 사용된다고 한다.

―하아, 마수들만으로도 골치가 아파 죽겠는데, 이젠 마족이라는 자들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공격해 온다 하니....

그리드로부터 끄집어낸 마왕군의 병력은 말 그대로 경악 그 자체였다.

놈들이 각국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면 분명 지구는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끝에는 놈들에게 굴복할지도 모르지.

―만약 아르덴이라는 세계가 지구와 연결된다면, 자네도 전쟁에 참전하게 될지도 모르네. 그러니, 만일의 사태를 준비해 두고 있어 주게.

"...알겠습니다."

건혁은 은성과 전화를 마친 뒤, 옆에 앉아 있던 세실리아를 바라봤다.

"뭐라고 그래요?"

"게이트가 만들어진 건 아닌 모양이야. 하지만 용사의 시체로부터 지구의 차원 에너지를 추출해 실험을 진행하는 중이래."

"그럼, 레드펠 후작... 아니, 전 후작이 실험체로서 지구로 넘어왔다는 말이에요?"

세실리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레드펠 가문의 전 가주가 죽을지도 모르는 실험에 참가하다니!

지구의 차원 에너지를 사용했다고는 하나, 게이트 에너지를 혼합 및 융화하여 새로운 에너지를 창조해 낸 것이다.

100% 지구와 연결되었다 확신할 수 없는 위험한 실험.

최악의 경우, 미지의 세계로 가거나, 차원의 틈새에 갇혀 평생을 썩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미지의 세계라면 나쁘진 않을 거야. 좌표만 제대로 보내지면 해당 세계에서 식량을 구할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차원의 틈새에 갇힐 경우에는....'

말 그대로 죽었다고 생각해야겠지.

세실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면서 냉장고에서 캔 음료를 가져왔다.

마치 제집인 마냥 주방을 마음껏 드나드는 세실리아.

건혁은 그녀의 행동을 지적하지 않았다.

수영을 돌봐 주고 있으니까.

딸칵!

음료를 한 모금 들이켠 세실리아는 TV를 보면서 캔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두었다.

"그래도... 조금은 안심하고 있어요."

"응? 무슨 소리야?"

"이번 구룡산 게이트에서 40여 마리의 S랭크 마수를 토벌했다면서요. 정확히는 30여 마리의 데스나이트와 10여 마리의 아크 리치지만... 마스터가 빠른 속도로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로 큰 위안이 돼요."

"상대가 사령술사였기에 이길 수 있었을 뿐이야. 다른 최상급 마족과 마왕을 상대하려면...."

"저번에 게이트에서 보여 주신 용기사 골렘은 아마 최상급 마족과도 견줄 수 있을 거예요. 기사왕 골렘은 아마 상급 마족보다 조금 강한 정도? 하여튼, 기사왕 골렘과 용기사 골렘은 마력만 충분하면 얼마든지 소환할 수 있다면서요."

"아니, 얼마든지는 아니야. 유지 시간이 존재하니까."

"그럼, 3~4시간 동안 용기사 골렘 20기 정도는...."

"그 정도는 가능할지도...."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테이블 위에 검지를 세워 빙글빙글 원을 그렸다.

 

제98화

98화. 각성 능력 검사 (1)

"최상급 마족에 준하는 골렘 20기를 이끈다면... 아니, 8시간 정도면 40기가 되겠네요. 하여튼, 그 정도 전력이면 마왕군이 공격해 와도 절대로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을 거예요. 문제는 마왕이 되겠지만, 마스터의 성장세라면 금방...."

"아니, 용기사 골렘보다 더 강력한 골렘을 소환하는 건 불가능해."

"...무언가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있나요?"

"그래."

망설임 없는 건혁의 대답에 세실리아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마왕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도시 하나 정도는 한순간에 소멸하고 말 것이다.

용기사 골렘 역시 어렵지 않게 파괴하겠지.

건혁의 성장력을 믿은 세실리아는 새로운 대책을 머릿속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아, 당장 떠오르는 건 없네요."

"뭐, 내 쪽에서 최대한 노력은 해 볼게."

"용기사보다 더 강한 골렘은 소환할 수 없다면서요."

"그러니, 다른 능력을 강화시켜 봐야지."

"빙마검(氷魔劍)이요?"

건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빙마검을 최대 레벨까지 강화시킨다고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을까?

건혁은 잠시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스테이터스 레벨을 높여서 새로운 스킬을 얻어야 하나?'

그동안에 뜬 스킬의 항목은 대부분 아르덴에서 마법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것들이다.

그 외에는 상처 치유와 육체 강화 정도였던가?

굳이 빙마궁(氷魔弓)까지 얻을 필요는 없겠지.

'육체 강화와 빙마검의 조합이라면 나쁘지 않을 거 같기는 한데....'

건혁은 잠시 턱을 매만지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 * *

며칠 뒤, 구룡산 게이트가 닫히기 시작했다.

정보를 모두 얻어 냈다고 판단한 협회에서 그리드를 처리한 것이리라.

대한민국이 구룡산 게이트 공략으로 떠들썩해진 그 시각.

건혁은 모르건 의수 매장을 찾아갔다.

"이 자식, 왜 이렇게 자주 안 와?!"

"매달 찾아오고 있잖아요."

"일주일에 한 번씩은 찾아와 줘야지!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다고!"

의수 매장이 위치한 건물은 레이드가 터졌었음에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멀쩡했다.

아마 진철이 직접 움직인 덕분일 것이다.

과거 800위대의 헌터였던 그라면, 웬만한 마수들 정도는 가볍게 박살 낼 테니까.

"그것보다 각성 능력 검사는 받았냐?"

"오늘 받으려고요."

"인마! 그러면 검사부터 받고 왔어야지! 구룡산 게이트에서 S랭크를 40마리나 쓰러트렸다면서! 그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궁금했는데...!"

건혁은 피식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검사받은 뒤에 게이트에 들를 생각이라서... 어차피 서열 갱신은 다음 달이잖아요."

"각성 점수가 궁금하다고! 대한민국에 새로운 1위가 탄생하는지...! 그 전설적인 모습을 두 눈으로...!"

"다음 달에 또 들를 테니까, 아르늄제 의수나 하나 가져와 주세요."

"이익...!"

그는 얼굴을 잔뜩 붉히면서도 벽걸이에 걸린 의수를 하나 가져왔다.

일본에서는 저런 걸 츤데레라고 하던가?

겉으로는 툴툴대면서도 은근히 걱정해 주고 다정하게 대해 주는....

"아 참, 음성 인식 장치는 달려 있죠?"

"쯧... 그래, 달아 뒀다."

"장비는...."

"이전에 사용하던 거랑 똑같아."

건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수를 고정대에 착용했다.

익숙한 감각이다.

건혁이 의수를 몇 차례 움직여 볼 때.

진철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돈은 충분하지 않아?"

"예?"

"왜 1급 포션을 구하지 않는 건가 싶어서."

"아뇨, 이미 구해 두기는 했어요."

건혁의 대답에 진철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저번 수성경매장에서 거래됐다는...."

"예, 저예요."

"...그런데 왜 아직까지 의수를 고집하는 거냐?"

"익숙해진 탓도 있지만, 전투에 도움이 되잖아요. 그래서 당장은 의수로 만족하려고요."

"뭐, 네가 그렇다면야...."

건혁은 피식 웃으면서 진철을 바라봤다.

그도 내심 싫지만은 않을 것이다.

자신이 1급 포션을 마신다면, 이곳을 방문할 일이 거의 없어질 테니까.

건혁은 체크 카드를 내밀면서 일시불로 결제했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그래, 다음 달에는 반드시 헌터증 가져와라!"

"네네, 알겠습니다."

의수 매장을 나선 건혁은 야구 모자를 쓴 채 헌터 협회 서울 중앙 본부를 찾아갔다.

모자를 썼음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건혁을 알아봤다.

"저 사람, 박건혁 아니야?"

"...정말이네? 각성 능력 검사를 받으러 온 건가?"

"그럼, 더 대박이잖아! 이번에 세계 랭킹 1위가 되어 버리는 거 아니야?"

"살짝 기대되긴 하네."

협회 직원과 헌터들은 건혁의 방문에 침을 꿀꺽 삼켰다.

과연 각성 점수가 몇 점이나 나올까?

모두가 고대하던 가운데 건혁이 2층으로 올라가 검사실로 걸어갔다.

그가 각성 점수를 측정받는 동안 SNS를 통해 해당 소식을 접한 기자들이 허겁지겁 헌터 협회 서울 중앙 본부로 달려왔다.

"젠장! 얼굴이 알려지는 걸 싫어한다는 건 알고는 있었지만...!"

"빨리 차에 타! 정윤호를 뛰어넘지 못하더라도 세계 랭킹 100위 안에는 들지도 모른다고!"

차에 탄 기자는 스마트폰으로 정윤호의 각성 점수를 확인했다.

"정윤호가 8,005점, 방승재가 7,420점이네."

"세계 랭킹 1위는?"

"당연히 미국의 알렉스 브라운(Alex Brown)...."

"각성 점수!"

"잠시만 기다려 봐."

기자는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감탄사를 터트렸다.

"8,105점이네. 박건혁이 작년에... 7,113점이었으니 거의 1천 점이나 차이가 나는데? 정말로 따라잡을 수 있는 건가?"

세계 랭킹 100위 내 각성 점수는 매년 큰 변동이 없었다.

많이 올라 봐야 2~30점 정도?

그 와중에 7,113점으로 세계 랭킹 294위에 이름을 새긴 박건혁이 거대한 폭풍을 몰고 왔다.

기자들이 헌터 협회에 도착해 진을 칠 무렵.

야구 모자를 쓴 박건혁이 묵묵히 건물을 빠져나와 재빨리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방금... 누구 지나가지 않았어?"

"응? 장비 체크하느라 못 봤는데...."

"내가 잘못 봤나?"

1~2시간이 지났음에도 박건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자들은 불안한 마음에 건물로 들어갔고, 검사실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잠시 뒤, 박건혁이 강원도에 갔다는 SNS가 올라왔다.

"X발, 벌써 나간 거야!?"

기자들은 허탕을 친 것에 욕설을 지껄였다.

"강원도에 간 거면... 100% 게이트에 들어가려는 거겠지? 당장 박건혁이 예약한 게이트부터 확인해. 너희는 장비 챙기고!"

이런 특종을 놓칠까 보냐!

기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차량에 올라타 강원도로 출발했다.

건혁이 들어갔다는 게이트 앞에서 다시 한번 진을 친 수많은 기자들.

그들은 몇 시간을 기다렸다.

"이렇게 무작정 기다립니까? 차라리 어디 카페에서 좀 기다렸다가...."

"박건혁이 가 버리면 네가 책임질 수 있어?!"

버럭 소리를 지르는 선배의 모습에 젊은 기자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고개를 돌렸다.

결국, 6~7시간 가까이를 기다리고 나서야 건혁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바... 박건혁 헌터다!"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건혁은 미간을 좁힌 채 작게 한숨을 토해 냈다.

화제가 될 줄은 알았지만, 설마 강원도까지 따라올 줄이야.

"박건혁 헌터님, 금일 각성 능력 검사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검사 결과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현재 정윤호 헌터와 1위의 자리를 다툴 수 있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건혁을 향해 스마트폰을 내미는 기자들.

주변에서 달려드는 질문들에 건혁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배낭을 멘 골렘들을 잠시 주변에 대기시켰다.

"아, 각성 능력 검사를 받은 건 사실입니다. 검사 결과는... 좋았다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세한 부분은 헌터 협회 사이트에서 확인 부탁드립니다. 정윤호 헌터와 함께 거론되는 부분은 정말로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대한민국 헌터 서열 1위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을지는... 11월이 되어야 알 수 있겠네요."

건혁은 최대한 답변을 회피하면서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와 마석들을 모두 처분했다.

그렇게 일과를 마치고 자택으로 돌아온 그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면서 어깨를 살짝 움찔거렸다.

강원도에서 촬영한 영상이 바로 저녁 뉴스에서 보도된 것이다.

"아빠, 언제 인터뷰했었어?!"

수영의 놀란 목소리에 건혁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기자님들이 게이트 앞까지 찾아오셨더라고."

수영은 건혁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래서, 각성 점수는 몇 점이야?"

"11월에 헌터 협회 홈페이지에서...."

"싫어! 알려 줘! 나한테는 알려 줘도 괜찮잖아!"

이렇게 떼를 쓰는 게 얼마 만이지?

건혁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수영의 귓가에 소곤소곤 점수를 알려 주었다.

그 순간, 수영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구룡산 게이트에서의 일은 이미 인터넷을 통해 접한 그녀였다.

대한민국 헌터 서열 10위 안에 드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런데....

"저... 정말로?"

"그래, 정말로."

수영은 입을 쩌억 벌렸다.

믿기 어려울 것이다.

건혁 역시 점수를 듣자마자 경악했으니까.

"오... 오늘은 파티...."

"이미 김치찌개 다 끓였는데?"

"그... 그럼, 내일이라도...."

건혁은 작게 웃으면서 수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내일은 치킨이라도 시켜 먹자."

"피자도!"

"피자까지? 너무 많지 않나?"

"세실리아 언니 부르면 돼! 이왕이면 유진 언니도 불러서...!"

수영은 들뜬 얼굴로 건혁을 바라봤다.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낼 기세네.

'뭐, 세실리아나 유진 씨도 내일은 쉴 테니....'

마침 내일은 목요일이다.

게이트 공략이 없는 날.

건혁은 두 사람에게 문자로 저녁 식사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유진과 세실리아는 모두 긍정적인 대답을 보내왔다.

"아, 유진 언니는 스파게티를 좋아하니까, 피자집에서 스파게티도 하나 주문할까? 세실리아 언니는 파인애플 피자를 맛있게 먹던데...."

"그래, 그래. 시키고 싶은 거 다 시키자."

다음 날, 학교를 다녀온 수영은 세실리아와 함께 전단지를 살펴봤다.

"이것도 하나 시키자. 그리고 파인애플 피자랑...."

방 안에서 인터넷 기사를 살펴보던 건혁은 '파인애플 피자'라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인애플 피자가 그렇게 맛있나?

몇 번 먹어 보긴 했지만, 맛있다고 말하기는 애매했다.

마우스를 움직이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던 그는 벨 소리가 들리자 거실로 나갔다.

"...이걸 다 먹을 수 있어?"

치킨 두 마리, L사이즈 피자 세 판, 스파게티 1인분, 1.5L 콜라 3병.

네 명이서 전부 먹을 수 있을까?

"아... 아직 떡볶이랑 순대 안 왔는데...."

"...."

건혁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여기에 떡볶이랑 순대까지 시켰다고?

정확히는 떡볶이 2인분, 순대 1인분, 모둠튀김 2인분이라고 한다.

수영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세실리아가 볼을 긁적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번에 맛있게 먹었던 곳이라 제가 추천했어요. 떡볶이값은 제가...."

건혁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눈을 감았다.

그래, 기분 좋은 날이잖아.

"괜찮아, 시키고 싶은 걸 다 시키라고 한 건 나였으니까. 어차피 비싼 것도 아니고."

물론, 배달비까지 포함하면 15만 원 정도는 된다.

하지만 이 정도는 상관없겠지.

어제만 해도 80억 원을 벌었으니 말이다.

잠시 뒤, 유진이 현관문으로 들어왔다.

 

제99화

99화. 각성 능력 검사 (2)

"세실리아는 이미 와 있었네요."

"바로 아랫집이니까요. 얼른 앉으세요."

유진은 거실 테이블을 보고 멈칫했다.

"...많네요."

"아하하, 많이 드시고 가세요."

TV에선 올해 초에 개봉한 영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영이 결제를 한 모양이다.

그렇게 네 사람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이렇게 잔뜩 주문을 하고...."

"제가 각성 능력 검사를 받은 기념이라네요."

"아 참, 검사 결과는...!"

건혁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씨익 웃었다.

"11월에 한번 확인해 보세요."

"아...."

"아무튼, 10위 안에는 들어갈 것 같아요."

"100% 들어가."

우물우물 피자를 먹던 수영이 건혁의 예측에 힘을 얹었다.

유진이 눈을 번뜩였다.

"수영이는 아빠한테 각성 점수를...."

"네, 들었어요."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영에게 다가가 귓가에 소곤댔다.

"언니한테만 알려 줄 수 있을까?"

"안 돼요."

수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더니.

"11월 1일을 기대해 주세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에에...."

유진은 아쉬운 목소리를 내면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러곤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여간 10위 안에 드는 게 확정이라면, 흑월에 들어오려는 헌터들도 많아지겠네요."

"그거야... 아 참, 그러고 보니 연락을 안 드렸네요."

"무슨 연락이요?"

"화랑의 마스터, 방승재 헌터님한테요."

'방승재'의 이름이 거론되자, 수영과 유진이 화들짝 놀랐다.

대한민국 서열 2위, 궁신(弓神)과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라고?!

건혁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방승재 헌터님한테서 화랑의 가입 제의를 받았거든요."

"하... 하긴, 건혁 씨 정도면...."

"화랑의 마스터직도 약속받았어요. 흑월의 길드원들을 화랑에 가입시켜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대한민국 공식 길드 서열 3위인 화랑의 후계자직을 약속받았다?

어떻게 그 말을 저렇게 가볍게 할 수 있는 거지?

유진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건혁을 바라봤다.

"저... 정말로 마스터직을 물려준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분명 방승재 헌터님에게는 아들이...."

"아들에게는 헌터로서의 재능이 부족하다면서 마스터직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하더라고요."

자식에게 길드를 물려주지 않는다?

부모의 입장에선 콩고물 하나라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을 것이다.

자식 역시 부모의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하면 섭섭함을 느끼겠지.

그런데도....

"...건혁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가입 제의라면 한 번 거절했었어요."

유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런 파격적인 조건을 거절했다고?!

그녀는, 건혁이 정말로 미친 게 아닐까 하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또다시 제의를 해 주시더라고요. 아무래도 새로운 골렘을 소환하게 된 것이 큰 영향을 끼친 거 같아요. 게이트 밖에서 연락을 해 드리기로 했었는데... 생각해 보니 따로 전화를 드리지 못했네요."

머리를 긁적이는 건혁의 모습에 유진이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김유진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흑월을 화랑으로 편입시키는 것에 대해."

"저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물론, 화랑의 길드원들이 건혁 씨를 받아들여 줄지는 모르지만, 그건 11월이 되면 어느 정도 해결되겠죠."

10위 안에 드는 헌터가 화랑으로 들어와 새로운 마스터가 되는 것이다.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건혁이 만약 TOP3에 들어간다면, 아마 화랑의 모두가 반갑게 환영해 줄 것이다.

"일단, 팀장들과 대화를 나눠 본 다음, 강의실을 대여해 길드원들에게 익명 투표를 진행해 봐야겠네요."

"굳이 투표까지...."

"그들의 의중을 들어 보고, 화랑에 편입될 경우에 대해서도 방승재 헌터님과 대화를 나눠 봐야 합니다. 무작정 편입시킬 순 없으니까요."

흑월의 길드원들이 편입된다면 대부분이 화랑의 2~3군에 편입될 것이다.

그중에는 짐꾼으로 전락하는 자들도 있겠지.

때문에 건혁은 제4군의 편성을 고려했다.

"제4군이요?"

"저는 짐꾼에게도 헌터로서 성장할 기회가 주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56만대의 헌터가 노력으로 대한민국 최상위 헌터가 될 수 있음을 그들에게 각인시켜 주는 거죠."

"건혁 씨의 경우는 노력도 노력이지만...."

"예, 재능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이 정도의 성장세를 재능 없이 노력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니까요. 그러면 흑월 제1팀에서 뛰는 헌터들은 어떤가요?"

"그건...."

"짐꾼이었던 사람들이 특수 능력까지 발현했습니다. 저는 각성자 모두가 어떠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제4군은 짐꾼의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매달 4~5회 정도 헌터로서 활동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흑월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는 의미다.

유진은 건혁의 생각에 반박을 하지 않았다.

자신을 제외한 현 흑월의 제1 팀원들은 과거 짐꾼으로 활동했다.

그들이 두각을 드러낸 것은 흑월에 들어오고 몇 년이 지난 후.

특히, 태형의 경우에는 서열을 7만대까지 높이면서 자신의 뒤를 바짝 쫓아왔다.

"문제는 화랑에서 그것을 받아들여 줄지...."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면 제의를 거절하면 될 뿐입니다. 굳이 화랑의 마스터직에 고집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건혁의 대답에 유진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S랭크 마수를 홀로 40여 마리나 쓰러트린 사내다.

흑월의 규모 정도는 언제든지 불릴 수 있겠지.

"제의를 거절하게 될 때는 신입들을 대거 뽑도록 하겠습니다."

"대거라면 어느 정도...."

"흑월 역시 '군'제로 편성을 할 생각입니다. 제1군에 2개의 팀을, 제2군에는 3개, 제3군에는 5개의 팀을 두고 활동할 계획입니다."

"...1~200명 정도는 늘어나겠네요."

"그 정도는 되겠죠. 서류 전형, 면접 심사, 실전 평가 및 인성 검사 등을 거치려면 아마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할 겁니다."

화랑의 마스터직에 강한 관심을 드러내지 않는 건혁.

흑월로 화랑을 뛰어넘으려는 걸지도 모른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슬쩍 세실리아를 바라봤다.

"세실리아는 이곳에 자주 드나드나요? 수영이하고 많이 친해진 거 같던데...."

"아무래도 아랫집에 살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유진은 살짝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자식의 애정을 빼앗긴 기분이랄까?

하지만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이제 겨우 23살이 된 세실리아가 마흔이 된 건혁과 결혼할 리는 없으니까.

세실리아와 수영의 나이 차 역시 7살밖에 되지 않는다.

'세실리아보다는 내가 더....'

문제는 자신 역시 서른넷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올해에는... 아니, 늦어도 내년에는 고백을 해야겠어.'

젊음이 계속 유지된 탓일까?

그녀는 나이에 대한 것을 까마득히 잊고 말았다.

물론, 헌터의 노화가 늦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헌터들의 결혼 연령은 갈수록 늦춰져 갔다.

더욱이 이혼율과 재혼율도 상당히 높아졌는데.

유진은 적어도 마흔이 되기 전에 고백하여 결혼까지 나아가길 바랐다.

'건혁 씨가 먼저 고백해 주면 냉큼 받았을 텐데....'

건혁은 재혼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죽은 아내를 향한 죄책감 때문일까?

건혁에게 관심을 보이던 길드 내 여성들은 건혁의 굳건한 철벽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몇 년간 함께해 온 유진조차 고백을 망설일 정도의 강력한 철벽이다.

'지수도 요즘에는 태형이랑 어울리는 거 같던데....'

연적이 사라지는 건 좋은 일이다.

더욱이 길드원의 연애는 응원을 해 주어야겠지.

유진은 슬쩍 건혁을 보면서 치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으음, 역시 너무 많이 주문했네."

건혁은 남은 음식들을 보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다음에는 적당히 주문하자, 알겠지?"

"네에!"

수영의 대답에 건혁이 정리를 시작했다.

유진과 세실리아는 동시에 일어나 정리를 도왔다.

정리를 마무리하고, 유진과 세실리아는 잘 먹었다는 인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는데.

수영 역시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건혁은 세탁물을 건조기에 넣고, 새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어 돌렸다.

이어, 설거지와 거실 청소를 마친 후, 침실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후우, 체력은 남아도는데, 왠지 지치는 기분이네."

그는 노곤한 듯 어깨를 축 늘어트리면서 컴퓨터 전원을 켰다.

이어, 1~2시간 동안 유X브로 시간을 죽이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시간은 물 흐르듯 지나갔다.

기념 파티를 열고 일주일이 흘러, 2023년 11월 1일을 맞이한 대한민국.

건혁의 서열을 궁금해하던 사람들은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시... 시X!"

육두문자가 절로 터져 나오는 결과다.

박건혁의 팬들은 해당 결과를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화랑의 마스터, 방승재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모니터를 바라봤다.

'설마'라고 생각한 것이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김 비서, 늦은 밤에 미안하군."

―아닙니다. 박건혁 헌터에 대한 것이라면 방금 확인했습니다.

"그래, 자네도 봤으니 알겠지? 당장 계약서를 준비해 두게. 하루라도 빨리 그의 이름을 부마스터직에 올려야겠어. 원하는 조건이 있다면 최대한 수용해 주게."

―예, 알겠습니다.

승재는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국내를 넘어 세상을 들썩이게 만들었구나."

자정이 되었음에도 대한민국은 빛으로 가득했다.

경악성을 터트린 김태형.

헛웃음과 함께 한숨을 토해 내는 김유진.

두 눈을 감고 작게 미소를 짓는 지혜와 지수.

작게 웃으며 결과에 납득하는 진화와 은성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박건혁에게 집중한 그 시각.

데스펠의 마스터, 박강석은 책상 위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콰앙!

"제기랄!"

박건혁은 이제 겨우 8년 차에 불과한 헌터다.

그에게 제쳐진 것도 모자라 국내 헌터 서열 11위로 밀려나게 된 강석은 분노와 질투를 동시에 느꼈다.

'스컬을 움직여서라도 싹을 잘라 냈어야 했어.'

그가 100위 안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라도 1천억 원을 들여 녀석을 처리해야 했다며 자책하는 강석이었다.

박건혁은 너무 커 버렸다.

스컬조차 함부로 건들지 못할 정도로.

강석이 분노하던 그때.

데스펠 제1군 대장인 태준은 부친의 목소리를 듣고 두 눈을 감았다.

'그는 더 이상 데스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을 거다.'

부친에게 듣기로 화랑으로부터 차기 마스터직을 약속받았다고 한다.

그가 화랑의 마스터가 되는 날에는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겠지.

물론, 지금도 그렇겠지만 말이다.

"후우, 세상 참 모르는 일이군."

과거 그에게 향했던 원망은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한편, 헌터 협회 홈페이지를 확인한 기자들은 다급히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특종을 넘어선 대특종!

대한민국과 세계가 들썩이는 소식이 기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파됐다.

해당 내용은 새벽에도 SNS를 타고 흘러 나갔고, 아침 뉴스 역시 박건혁의 이름을 도배하면서 한바탕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거 참.... 너와 진규가 도움을 받았다길래 인사라도 한번 하려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시일을 조금 앞당겨야겠구나."

"설마, 이 정도까지일 거라고는...."

"아니, 구룡산 게이트에서 보여 준 실적이라면 인정을 해야지."

대한민국 헌터 서열 1위, 세계 헌터 랭킹 9위, 검신(劍神)의 이명과 함께 고구려 길드의 마스터직을 보유한 정윤호는 작게 웃으면서 스마트폰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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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건혁

*출신 국가: 대한민국

*서열: 1위 (각성 점수: 8,237점)

*등록일: 2016.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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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화

100화. 각성 능력 검사 (3)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탄생한 세계 최강의 헌터.

박건혁은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인터넷과 방송국은 수시로 박건혁에 대해 보도를 내보냈고, 그가 짐꾼이었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인생 역전의 스토리를 설명했다.

TV를 보던 윤호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밑바닥에서 최정상까지 올라오는 의지.

짐꾼을 헌터로 키우려는 행보.

지금까지 물 흐르듯 지나갔던 내용들이 다시금 화제로 떠올랐다.

"이거, 기분은 좋군."

"예? 그게 무슨...."

"세계 랭킹 1위인 알렉스는 나를 거들떠도 안 봤는데, 지금쯤 얼굴이 얼마나 구겨졌는지를 생각하면... 웃음이 다 나온다 그 말이야."

키득키득 어린아이처럼 웃는 부친의 모습에 재혁은 살짝 놀란 모습을 보였다.

부친이 이렇게 웃어 본 게 과연 얼마 만일까?

재혁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한국 연령으로 알렉스 브라운은 61세, 정윤호는 72세로 11년이나 차이가 났다.

연장자로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상관없다.

단지, 같은 헌터로서 대화를 나누길 바랐을 뿐.

그러나 알렉스는 윤호와 같은 아시아계의 헌터들을 무시하고, 조롱하며, 모욕적인 언사까지 자연스럽게 내뱉었다.

"그 순간만큼은 일본의 '타케하라 키리노죠(嵩原 桐之丞)'와 함께 녀석을 노려봤었지."

"타케하라 키리노죠라면... 백귀야행의 마스터로군요."

"녀석과는 매번 순위 경쟁을 했었는데 말이야."

윤호는 과거를 회상하듯 고개를 젖힌 채 눈을 감았다.

"박건혁을 고구려에 받아들이기 위한 조건으로... 무엇이 있을까?"

"...차기 마스터직을 약속하는 겁니다."

재혁의 대답에 윤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구려는 네가 물려받아야 한다. 그보다는 부마스터직을 약속하는 편이 낫겠어. 진규가 물러나게 된다면 그 뒤를 잇는 거다."

"그 조건은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흐음?"

"화랑의 방승재 헌터님께서 박건혁 헌터에게 마스터직을 약속했습니다. 물론, 한 차례 거절했다고 하지만, 방승재 헌터님께서 다시 한번 제의를 하시더군요."

"그래, 그 이야기라면 진규 녀석에게서 들었다. 승재 녀석, 정말로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이 없나 보군."

윤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윤호와 승재는 상반되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일구어 낸 길드를 핏줄인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윤호.

반대로 능력을 갖춘 자에게 길드를 물려주고, 자식에게는 간부 직책을 맡기려는 승재.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승재 아들 녀석과 다르게 너에게는 재능이 있다. 언젠간 나를 뛰어넘을지도 모르지."

올해로 17년 차 헌터가 된 재혁은 42세라는 연령으로 서열 8위에 올라섰다.

매년 각성 점수도 오르고 있으니, 5위 안에 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윤호는 그 재능을 높이 샀다.

자식이라는 부분도 있지만, 재능만큼은 누구보다도 특별하니까.

"주혁이와 혜연이도 금세 100위 안에 들 거다."

차남 정주혁과 장녀 정혜연은 현재 고구려 길드 제2군에 소속되어 올해 1,000위 안에 들어섰다.

"재능의 면에선 너에게도 꿀리지 않겠지. 분명, 길드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거다."

"예, 알고 있습니다."

"하여간, 박건혁을 어떻게든 한번 꼬셔 봐. 저런 보물을 흑월이라는 곳에서 썩힐 순 없잖아."

재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한편, 건혁에 대한 소식으로 전 세계가 들썩이던 시각.

방승재는 곧바로 건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자네 전화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나?"

―죄송합니다. 저도 마침 연락을 드리려던 참이었는데....

"자정에 보고를 받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어휴, 지금도 심장이 벌렁벌렁해."

승재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건혁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세계를 놀랍게 만든 소감은 어떤가?"

―조금 얼떨떨합니다. 헌터 협회에 각성 점수를 조금 낮춰서 등록해 줄 수 있느냐고 물어봤는데, 그 부분은 조금 어렵다고 하더군요.

"당연히 그리 말하겠지. 국가의 위상이 높아질 수 있는 일이니까."

―아하하....

"하여튼, 자네도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군그래. 뭐, 구룡산 게이트에서 보긴 했지만 말이야. 설마 단번에 세계 최강의 헌터가 되어 버릴 줄은 생각도 못 했어. 크하하하하!"

승재의 폭소에 건혁이 귀를 틀어막았다.

"아 참, 그래서 화랑에 들어오는 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 좀 해 봤나?"

―예, 저희 쪽 길드원들과 대화를 나눠 봤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방승재 헌터님의 제안은...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유를 말해 줄 수 있겠나? 자네가 원하는 조건이라면 대부분 수용해 줄 수 있네."

승재가 스마트폰을 향해 다급히 말했다.

웃음기가 싹 사라진 진지한 목소리.

세계 최강의 헌터를 붙잡는 것이다.

무엇인들 못 해 주겠는가.

―길드원 대부분이 화랑으로의 편입을 바라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이틀 전, 흑월에서 진행된 익명 투표에서 길드원의 과반수가 화랑으로의 편입을 반대했다.

건혁과 간부들은 투표 결과를 보며 쓰게 웃었다.

찬성 11%, 반대 89%.

과반수랄까.

너무나도 압도적인 격차에 건혁은 간부들과 대화를 나눈 끝에 화랑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무래도 흑월(黑月)이라는 곳에 정이 든 모양입니다. 그동안 거들떠봐 주지도 않았던 자신들에게 헌터로서 살아갈 기회를 준 길드로서 말이죠. 물론, 저 역시 흑월(黑月)이 사라진다는 것에 살짝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 자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네. 하지만 마음만으로 결정할 일이 아님을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자네가 화랑의 부마스터가 된다면 길드원들 역시 마음을 굳게 먹고 화랑으로 넘어올 것이네. 그저 이름만 달라질 뿐이야."

―저는 1천여 명에 가까운 4~50만대 헌터들을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그게 무슨...."

―이은성 기사단장님으로부터 '아르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셨을 겁니다.

"...자네는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는 건가?"

―반신반의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아르덴이 아니더라도 세계적으로 레이드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흐음...."

승재는 불편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4~50만대 헌터들을 성장시키는 것보다는 1~20만대 헌터들을 키우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네만...."

―1~20만대 헌터들은 이미 자력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4~50만대 헌터들에게는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고 있죠. 분명, 무언가의 재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재능을 밑바닥에서 썩히고 있는 중이라는 의미입니다.

"...."

―또, 짐꾼을 경험한 분들께선 대부분 강한 마음을 품고 계십니다. 7년 전의 '저'처럼 강해지고자 하는 마음을 말이죠. 그러한 마음을 품은 분들께서는 현재 특수 능력을 발현하여 흑월 제1군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건혁의 긴 이야기에 승재는 푸욱 한숨을 토해 냈다.

"그래, 1천여 명의 짐꾼을 받아들인다고 하면, 분명 화랑의 간부진들이 난리를 치겠군."

화랑 역시 짐꾼과 헌터의 갈등이 계속되는 중이다.

새 정책으로 짐꾼들이 편의를 봐주었던 승재.

짐꾼들은 승재의 정책에 반갑게 환영했다.

하지만 호의가 계속된 탓일까?

짐꾼들은 계속되는 호의를 자신들의 권리인 것 마냥 받아들였고, 그 뻔뻔한 태도에 헌터들이 수차례 비난과 항의를 쏟아 내자, 짐꾼들은 해당 헌터들을 고소하여 법적으로 처벌을 했다.

정확히는 누명을 쓰고 집행 유예와 벌금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해당 소식을 듣게 된 승재는 분노한 얼굴로 자신이 고안한 정책을 없애 버렸다.

'그때는 정말....'

정책이 소멸되면서 짐꾼들은 수많은 항의를 보내왔다.

마치 본래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고자 하는 듯이.

'당시 29명의 짐꾼들을 해고하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가 되었었지.'

짐꾼은 차고 넘친다.

회사처럼 해고에 제한이 걸리는 것도 없다.

계약서에 따른 위약금만 물어 주면 될 뿐.

한바탕 칼바람이 불고 나서야 화랑은 잠잠해졌다.

29명의 짐꾼이 본보기가 된 탓일까?

짐꾼들은 위축된 채 현장에 투입되었고, 헌터들은 짐꾼들을 가시 박힌 눈으로 바라봤다.

스윽.

승재는 씁쓸한 얼굴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자네라면... 분명 화랑의 분위기를 바꿔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네."

―흑월과 화랑이 뒤섞이면 오히려 좋지 않은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그래, 이미 결정을 내렸다면 더 이상 뭐라고 말할 순 없겠지. 그렇다면... 화랑과 동맹을 맺는 건 가능하겠나?"

―동맹... 말입니까?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위험할 때는 도움을 주는 관계.

흑월에겐 반가운 이야기였다.

물론, 화랑 역시 세계 랭킹 1위가 마스터로 있는 길드를 동맹으로 둔다면 마음이 든든할 것이다.

결국 흑월의 편입은 무산되고, 흑월과 화랑의 동맹이 체결됐다.

"거참... 부지런하구만."

승재는 인터넷에 뜬 박건혁의 기사를 보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충북 민간인 통제 구역에서 새로이 개방된 S등급 게이트.

건혁은 해당 게이트에 단독으로 들어가 21마리의 S랭크 마수와 238마리의 A랭크 마수를 토벌하고 마석을 회수해서 빠져나왔다.

해당 소식은 방송국을 타고, 유X브와 SNS로 퍼져 나갔다.

그 시각, 세계인들은 '박건혁'이라는 생소한 이름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난데없이 알렉스를 제치고 세계 랭킹 1위를 차지한다?

특히, 알렉스의 출신 국가인 미국에선 박건혁의 각성 점수가 조작이라며 시위를 일으켰다.

"박건혁... 이거, 중국인 아니야?"

"중국에서 세계 협회에 돈을 주고 랭킹을 속인 거야!"

박건혁이 중국인이 아니냐는 헛소문까지 SNS에서 퍼져 나갔다.

더욱이 미국 정부까지 움직인 탓일까?

세계 협회는 결국 꼬리를 내리며 한국으로 조사단을 파견 보냈다.

이어, 박건혁을 대한민국 헌터 협회 서울 중앙 본부로 불러 각성 능력 점수를 측정했는데.

"...오히려 점수가 더 늘었군요."

전문가를 동원해 각종 시설을 점검하며, 2~3차례 측정을 진행한 조사단.

건혁은 계속되는 재측정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조사단 대표, 미하엘을 노려봤다.

금발, 벽안을 가진 미하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통역사를 통해 자신의 발언을 전달했다.

"각성 능력 검사는 이걸로 마무리하시겠다고 합니다. 기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박건혁 헌터님의 각성 능력 점수를 그대로 세계 랭킹에 반영한다고 하시는군요."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 기자 회견은...."

통역사가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됐습니다."

건혁은 재빨리 검사실을 빠져나갔다.

건물 내외를 가득 채운 수많은 기자들.

국내 기자들은 물론,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전 세계의 방송국 기자들이 모두 찾아왔다.

건혁은 후드를 뒤집어쓴 채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파앗!

뒤뜰에 무사히 착지한 건혁은 곧바로 주차장을 향해 발걸음을 움직였다.

 

제101화

101화. 수성고등학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