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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73화. 유신의 만행 (1)

"녀석과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전력으로 싸워도 어렵겠어."

4~5기의 골렘이라면 어떻게든 이길 수 있다.

그러나 건혁은 순식간에 마력을 회복하고, 어마어마한 숫자의 골렘을 소환한다.

물론, 그 붉은 망토의 골렘을 몇 기나 소환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을 위기에 빠트릴 정도는 가능하겠지.

그야말로 치트급 능력이다.

"하루 만에 A랭크인 웜을 87마리나 쓰러트렸으니까... 그 자식, 돈 좀 많이 벌었겠네."

성욱은 피식 웃으면서 노트북을 덮었다.

* * *

건혁이 서열 59위에 도달하고, 어느새 2021년을 맞이했다.

수영이 중학교에 입학하는 연도다.

건혁은 A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며 레벨 업에 박차를 가했다.

성장 촉진이라는 스킬 덕분일까?

스테이터스 레벨은 예상보다 더욱 빠르게 올랐고, 빙마검의 스킬 레벨 역시 8에 도달하며 적은 마력으로 더욱 위력적인 능력을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헌터의 자녀들이 다닌다는 수성중학교에 등교하게 된 수영.

건혁은 도보로 3분 거리에 위치한 중학교를 선호했으나, 수영은 수차례의 설득을 통해 결국 차량으로 10~15분 거리에 위치한 수성중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으로부터 한 달이 지난 시점.

수영은 새롭게 만난 친구들과 어울렸다.

"임진규 헌터, 엄청 멋있지 않아? 혼자서 S랭크 마수를 쓰러트렸대!"

고구려 길드 제1군 대장, 임진규.

서열 8위인 그의 활약이 기사로 보도되자, 헌터를 희망하는 학생들이 환호했다.

"아 참, 수영이 아빠도 헌터라고 말하지 않았어?"

흑색 단발머리에 뚜렷한 이목구비.

새하얀 피부와 오뚝한 콧날을 지닌 14세 소녀, 유민아의 질문에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안경을 쓴 긴 머리카락의 소녀, 이시현이 눈동자를 반짝였다.

"수영이도 수성고등학교에 진학한다고 했었지?"

"응."

"그럼, 고등학교도 같이 다니겠네!"

민아와 시현은 특수 능력을 발현한 각성자다.

그것도 초등학교 6학년 때.

수영은 1회차에서의 기억을 되살렸다.

서열 117위, 뇌권(雷拳) 유민아.

서열 138위, 뇌창(雷槍) 이시현.

부모가 모두 고구려 길드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일까?

둘은 태어날 때부터 함께한 친구로, 언제나 쌍둥이처럼 함께 활동했다.

'이런 인맥이라면 언제나 환영이지.'

수영의 외모는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발했다.

신장 160cm에 몸무게 48kg, 아이돌 뺨치는 얼굴에 우윳빛 피부까지.

중학생이 맞는지 의심되는 성숙한 외모에 수영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았는데.

덕분에 인맥은 나날이 확장되어 갔다.

"히히, 처음에 수영이 봤을 땐 부잣집 아가씨인 줄 알았다니까?"

민아의 말에 시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잣집 아가씨... 맞지 않아? 집에 갈 때마다 경호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마중 나오잖아."

수영은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빠가 과보호라서 경호원을 붙여 주신 것뿐이야."

"어느 길드에 계시는데?"

"그냥 작은 길드에서 활동하고 계셔."

"흐음, 그렇구나."

작은 길드에서 활동하는 헌터가 딸에게 경호원까지 붙인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시현은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그렇게 수다가 한창 진행되던 때, 교실로 한 남학생이 들어왔다.

남학생 뒤를 졸졸졸 따라다니는 대여섯 명의 학생들.

그들의 부모는 모두 유신 길드에 소속된 헌터들이다.

"나 참, 무슨 양아치도 아니고 저렇게까지 무리를 짓고 다녀야 하나?"

민아의 투덜거림에 시현과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두에 선 남학생의 이름은 하지완.

유신 길드의 마스터, 하승원의 막내아들이다.

거만한 성격에, 타인을 깔보는 태도는 수영의 미간을 절로 찌푸리게 만들었다.

"오늘도 고구려의 쌍둥이랑 같이 있었네?"

지완이 멈춰 선 곳은 바로 수영의 앞이다.

시현과 민아는 지완을 매섭게 노려봤다.

수영을 보호하듯이 말이다.

그에 지완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정말로 안 사귈 거야? 나랑 사귀고 싶어 하는 녀석들은 차고 넘친다고?"

지완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수영이 작게 한숨을 토해 냈다.

며칠 전부터 계속되는 구애.

아니, 이것도 구애라고 봐야 하나?

민아와 시현이 없었다면 지금 당장 밀어붙였을지도 모른다.

"너와 사귀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또, 너는 내 이상형이랑 정반대라서 말이야. 그냥 그 차고 넘친다는 사람들과 좋은 사랑 나누기를 바랄게."

그때, 누군가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교실 한복판에서 차이게 된 지완.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분노일까?

아니면 수치심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그의 요구를 거절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게 왜 교실 한복판에서 당당히 그런 말을 꺼내?'

도대체 무슨 자신감이지?

수영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에 지완이 숨을 고르며 수영을 노려봤다.

"너희 아빠도 헌터라고 했었지?"

"그런데?"

"어느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지 알 수 있을까?"

"그냥 작은 길드야."

수영의 대답에 지완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주제도 모르고 경호원이나 붙이고 다닌 거야? 어디, 태권도장이라도 열심히 다니신 분들이신가?"

"그냥 가 주면 안 될까?"

그녀가 귀찮다는 듯 대답하자, 지완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수영은 의문에 빠졌다.

먼저 시비를 걸어 놓고, 어째서 화를 내는 거지?

중학교 1학년생이라, 자기감정에 대한 관리가 안 되는 건가?

수영은 지완의 가정 교육에 대해 신경이 쓰였다.

반면, 주먹을 꽉 쥔 채 조소를 터트린 지완.

"우리 유신 길드가 힘 좀 쓰면 너희 아빠네 길드는 금방 무너질걸? 아빠 때문에 길드 하나가 무너지는 꼴...."

"부모님만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민아의 외침에 지완이 말을 멈추고 그녀를 매섭게 노려봤다.

"뭐... 라고?"

"유신 길드를 네가 만들었어? 네 아빠가 대단한 거지, 네가 대단한 건 하나도 없잖아! 저번에 누구 괴롭히던 것도 다 봤어! 이 나쁜 놈아!"

"X발, 이게 미쳤나!"

"왜 또 욕하고 난리야! 욕하는 게 멋있는 줄 알아?! 선생님도 네 아빠 때문에 가만히 계신 것뿐이거든!"

그 순간, 분노가 폭발한 걸까?

지완이 허공에 화염구를 만들었다.

그에 민아 역시 양손에 황금빛 스파크를 일으켰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 수영이 한숨을 흘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그만!"

수영의 사자후에 지완과 민아가 화들짝 놀랐다.

"나랑 사귀고 싶다고? 그럼, 나를 이겨 봐. 이번 주 토요일 오전 10시, 제9 헌터 훈련장에 찾아오면 상대해 줄 테니까."

"...뭐?"

"왜? 막상 싸우려니까 겁나?"

"이게 미쳤나! 나는 특수 능력 각성자야! 너 따위랑...!"

수영은 눈을 차갑게 식히며 오른손에 활을 만들었다.

"나도 특수 능력 각성자인데?"

"무... 무슨...."

지완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내 이상형은 강한 남자거든. 너처럼 약한 남자는... 내 취향이 아니야."

"이익!"

"아니면 토요일에 제9 헌터 훈련장에 찾아오든가. 거기선 특수 능력을 사용한 대련이 허용되거든. 진 사람이 뭐든지 하나 들어주는 걸로. 어때?"

지완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X발... 어디 해 보자."

지완의 무리가 교실 문을 박차고 복도로 나갔다.

아무래도 오늘도 땡땡이를 치려는 모양이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민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수영을 바라봤다.

"괜찮아? 저 싸가지, 저래 보여도 서열 20만대 헌터들이랑도 자주 대련한다고...."

"거기에 마력도 넘쳐 나는지 화염구도 스무 개나 던질 수 있다고 들었어. 일격에 C랭크 마수한테 치명상을 줄 수 있다고 하던데...."

민아의 걱정에 시현이 가세하면서 우려를 표했다.

수영은 차분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 걱정되면 제9 헌터 훈련장에 찾아와 줄래?"

"응, 반드시 갈게!"

"나도."

두 사람의 대답에 수영이 작게 웃음을 지었다.

수업을 마친 후,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건혁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헌터증을 발급받지 못한 미성년자의 대련은 보호자가 함께해야 가능하다.

대련을 말릴 수 있는 보호자가 말이다.

"그래서 모레에...."

수영은 흠칫 떨면서 말을 멈추었다.

언제나 다정했던 부친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괜히 말한 건가?

건혁은 '뿌득!' 주먹을 쥐면서 '유신'이라는 이름을 연신 중얼거렸다.

"그... 그래서 모레에 대련하기로 결정했는데...."

"그래, 알겠어."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수영이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혼나고 있는 기분이라 해야 되나?

하지만 무서움보다는 살짝 기쁜 감정이 일어났다.

자신을 위해 화를 내 주고 있는 것이다.

무서워할 이유는 없겠지.

그녀는 건혁의 품속에 안겼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그냥 OO중학교로 전학을...."

"나중에 헌터가 될 친구들을 사귀고 싶어."

수영의 고집에 건혁은 한숨을 쉬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음 날, 지완은 등교하자마자 수영을 보고 피식 조소를 날렸다.

그에 수영은 무시하듯 고개를 돌렸고, 민아가 오른손을 들어 가운뎃손가락을 펼쳤다.

"저 미친X이...!"

지완의 분노에 민아는 '흥!' 콧바람을 차면서 수영에게 '착!' 달라붙었다.

시현 역시 수영을 껴안으며, 지완을 차가운 눈으로 노려봤다.

지완은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곧장 교실을 나갔다.

조용해진 교실.

수업도 무난하게 마무리됐다.

* * *

"수서역은 오랜만에 와 보네."

짧은 스포츠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민아의 부친, 유호준.

"나도 송파구 레이드 때문에 온 것 말고는 처음이야."

검은 머리카락과 구릿빛 피부를 가진 시현의 부친, 이동진.

두 사람 모두 고구려 길드 제1군에 소속된 서열 100위대의 헌터들이다.

"아빠, 빨리 가야 돼!"

민아가 재촉하자 호준은 머쓱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동진 역시 시현과 손을 잡고 제9 헌터 훈련장을 찾아갔다.

네 사람이 훈련장에 들어가자,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수영이 몸을 풀고 있었다.

"수영아!"

민아와 시현이 수영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호준과 동진이 수영에게 다가간 순간.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수영의 곁에 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수영이 아빠인 박건혁이라고 합니다."

헌터의 노화가 늦다는 것은 익숙한 이야기다.

20대처럼 보여도 크게 문제 되지 않겠지.

그러나 호준과 동진은 건혁의 외모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배우와 마주한 기분이다.

"자... 잠깐, 박건혁이라면...."

호준의 중얼거림에 동진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눈을 크게 떴다.

"서... 설마, 흑월의 마스터이신 박건혁 헌터님이십니까?"

건혁은 헌터증을 보여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증에 새겨진 서열을 보고,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면서 악수를 청했다.

"고구려 길드 제1군 소속 유호준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 길드 제1군 소속 이동진입니다. 박건혁 헌터님을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될 줄은...."

"저도 고구려 길드의 제1군 분들을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민아와 시현은 깜짝 놀란 얼굴로 수영을 바라봤다.

설마, 수영의 부친이 흑월의 마스터, 빙마군주(氷魔君主)였다니?!

수많은 골렘들과 함께 게이트 방방곡곡을 누비는 헌터.

특히, 송파구 레이드와 강원도 레이드에서 보여 준 활약은 수많은 헌터들을 매료시켰다.

 

제74화

74화. 유신의 만행 (2)

"바... 박건혁 헌터님이...."

"말도 안 돼. 빙마군주님이 내 눈앞에...."

동경 어린 눈길로 건혁을 바라보는 민아와 시현.

수영은 쓴웃음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수성중학교 내에서도 박건혁의 이름은 유명하다.

그야 밑바닥에서 최정상까지 치고 올라간 인물이니 말이다.

민아가 사인을 요청하려던 순간.

건혁의 눈동자에 냉기가 가득 찼다.

"들어오는군요."

제9 헌터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낸 유신 길드의 막내아들, 하지완.

그 곁에는 유신 길드 제2군에 소속된 헌터가 서 있었다.

보호자 겸 경호원이라는 거겠지.

지완은 비릿한 미소를 보이며 다가왔다.

"뭐야, 친구들까지 데려오셨네?"

"네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해서."

"X랄하네."

지완은 스윽 건혁을 올려다봤다.

"도대체 가정 교육을 어떻게 시킨 겁니까? 주제도 모르고 말을 함부로...."

콰앙!

지완은 화들짝 놀라며 말을 매듭짓지 못했다

발을 한 번 굴려 훈련장 내에 굉음을 일으킨 건혁.

그에 정장 차림의 여성이 지완의 앞으로 나와 건혁을 노려봤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애X끼가 가정 교육을 못 받은 거 같으니 혼 좀 내 줘야지."

건혁의 살벌한 목소리에 여성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이분은 유신 길드 마스터의 막내 아드님이십니다."

"그래서?"

"무례하군요!"

"누가 무례한지는... 지켜보면 알겠군."

여성을 포위한 10기의 기사단장 골렘.

그들이 붉은 망토를 펄럭이자, 여성은 흠칫 놀라면서 뒤로 물러났다.

대한민국을 한창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

얼음 골렘은 그자를 연상시키는 존재가 되었다.

"바... 박건혁?"

"유신 길드에서 나를 알아준다니, 이거 영광이라고 해야 되나?"

"다... 당신이 왜...."

"그 애X끼가 내 딸을 계속 귀찮게 한다더군. 그래서 대련으로 매듭을 짓겠다고 해서 따라왔더니만... 나와 내 딸을 모욕해 친절하게 도발까지 해 주네?"

여성은 초조한 얼굴로 지완을 바라봤다.

지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빙마군주...."

"내 이름은 들어 본 모양이군. 나와 내 딸을 모욕한 것에 대한 사죄를 받고 싶은데...."

"비... 빙마군주가 뭐 대수야?! 우리 아빠는 대한민국 서열 7위인 화룡(火龍) 하승원이라고!"

"그래서 뭐?"

건혁이 눈을 부릅떴다.

지완은 뒤로 물러나면서 몸을 떨었다.

그때, 수영이 건혁의 소매를 붙잡았다.

"아빠, 내가 마무리할게."

"...쯧, 유신의 가정 교육은 개판이군."

건혁은 작게 혀를 차며 골렘들을 뒤로 물렸다.

"예정대로 대련을 진행한다. 패배를 선언할 때까지 대련은 진행되며, 목숨이 위험하다 판단될 경우에만 보호자가 참가한다. 동의하겠지?"

지완은 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대련장 위에 올라선 지완과 수영.

지완은 자택에서 가져온 검을 쥐었다.

1급 금속으로 만들어진 훈련용 검이다.

반면, 수영은 빙마궁을 쥔 채 지완을 노려봤다.

"시작!"

건혁의 목소리에 지완이 이를 악물었다.

"으아악!"

허공을 가르는 화염구.

수영은 덤덤한 얼굴로 시위를 당겼다.

끼릭, 퉁!

화살이 화염구를 꿰뚫고 지완의 뺨을 스쳤다.

"무... 무슨...!"

"약해 빠진 불꽃이네."

"이익!"

수영의 도발에 지완이 발끈했다.

이내, 다섯 개의 화염구가 다시 한 번 허공을 갈랐다.

확실히 중학교 1학년생치고는 뛰어난 재능이다.

호준과 동진의 경악한 얼굴만으로도 설명은 충분하겠지.

두 사람은 다급히 건혁을 부르려 했지만, 화염구는 금세 허공에서 사라졌다.

오히려....

"으아악!"

비명을 지르는 지완.

그의 팔과 다리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아직이야.'

수영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팔과 다리를 꿰뚫는다면 보다 확실하게 끝나겠지만, 지완은 명색이 유신 길드 마스터의 막내아들이다.

과한 공격은 흑월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픽! 피픽!

지완의 뺨, 손등, 팔, 허벅지, 다리, 발목 등에 화살이 스쳤다.

"끄아악!"

고작 스친 상처로 저렇게까지 비명을 지르나?

아니, 피부가 살짝 깊게 베인 만큼 고통스러울지도.

심지어 바닥에 핏물이 튄 순간.

지완은 겁에 질린 듯 무기를 떨어트렸다.

탱그랑!

"그... 그만...! 내... 내가 졌어!"

그는 자리에 주저앉은 채 울먹이듯 소리쳤다.

지완이 패배를 시인함과 동시에 수영은 활을 내렸다.

이어, 그에게 다가가 차갑게 말했다.

"진 사람이 뭐든지 다 들어주기로 했었지? 그럼, 당장 수성중학교를 자퇴해."

눈물과 콧물을 흘려 대던 지완이 벙찐 얼굴로 수영을 바라봤다.

씨익.

"설마, 약속한 것도 못 지키는 건 아니지?"

수영의 미소에 지완이 몸을 덜덜덜 떨었다.

지완의 보호자로 참석한 정장 차림의 여성은 서둘러 포션을 꺼냈다.

5급 포션으로도 충분히 치료가 가능한 경미한 상처들.

치료가 마무리되자 여성은 지완을 데리고 훈련장을 벗어났다.

"잘했어."

수영은 건혁의 칭찬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한편, 수영과 지완의 대련을 지켜보던 호준과 동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게 중학교 1학년생이 보일 만한 실력인가?

지완만 하더라도 여러 천재 중의 한 명이라 생각했다.

머리만 한 크기의 화염구를 단번에 다섯 개나 던져 댔으니까.

마력량도 웬만한 각성자들과는 비교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지완을 수영은 가볍게 지르밟아 버렸다.

'화살이 화염구를 정확히 꿰뚫었어. 게다가 그 침착함.... 도대체 언제 각성한 거지?'

'1~2년 훈련해서 될 정도의 실력이 아니야.'

그들의 딸들이 수영에게 달려갔다.

그녀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지완의 패배를 쌤통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호준과 동진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유신 길드의 마스터가 이번 대련을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어린애들의 대련에 설마 어른이 개입하지는 않겠지.

호준은 작게 웃으며 건혁에게 다가갔다.

"수영이가 정말로 대단하네요. 그렇게 정확한 저격술을...."

"수영이는 3년 전부터 훈련장에서 저와 함께 훈련을 진행했습니다. 아마 서열 10만대의 헌터들 정도는 가볍게 상대할 수 있겠죠."

"10만대를... 말입니까?"

동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10만대의 베테랑을 고작 중학교 1학년생이 상대할 수 있다고?

호준 역시 농담이 심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모처럼이니 저와의 대련도 보여 드릴까요? 방금 그... 아이와는 너무 싱겁게 끝났으니...."

지완의 이름을 기억 못 한다는 듯한 말투에 호준과 동진은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대련장으로 올라가게 된 수영이 가볍게 시위를 당겼다.

건혁은 제자리에서 그녀의 화살을 가볍게 피한 후, 다리를 움직이며 '진짜' 대련을 시작했다.

파파팍!

지면에 꽂힌 세 개의 화살이 건혁의 다리를 얼렸다.

이어, 화살을 연발하며 건혁을 저격하는 수영.

건혁은 얼음을 손쉽게 부수고,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검으로 막아 내는 것은 간단하다.

하지만 수영의 저격술을 높여 주기 위해서는 움직이는 표적을 목표물로 삼게 하는 게 좋겠지.

건혁은 슬그머니 다가가 얇은 막대기를 휘둘렀다.

조금만 부딪쳐도 부서지는 나무 막대기다.

파밧!

수영은 막대를 가볍게 회피하며 활의 시위를 당겼다.

끼릭, 퉁!

건혁은 몸을 회전시키면서 수영의 화살을 회피했다.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던 호준과 동진은 잠시 멍을 때리고 말았다.

저게 중학교 1학년생이 보여 줄 수 있는 저격술이라고?!

심지어 뒤로 물러나는 과정에서 화살을 쏘는 모습은 마치 베테랑 헌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부녀가 쌍으로 괴물이라는 건가?"

"지금 당장 고구려 길드에서 뛰게 해도 괜찮겠어."

물론, 제3군에 소속된 일개 팀원으로서다.

제1~2군과 다르게 제3군은 실력자를 육성하기 위한 30개의 팀원제로 운영된다.

고구려 길드 제3군에 소속된 헌터는 대략 1,000여 명 정도.

그중에서 선발된 정예가 바로 제1군과 제2군이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생에게 고구려 길드 제3군행은 파격적인 일이다.

거기에 헌터의 재능이 부모의 유전자를 따른다고 한다면.... 금세 제1군으로 오르겠지.

대련은 건혁의 막대가 수영의 어깨를 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대박, 하지완이랑 할 때하고는 엄청 달랐어!"

흥분으로 가득 찬 민아의 목소리에 수영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박건혁 헌터님."

"예."

"실례가 안 된다면 저 붉은 망토의 골렘과 대련을 해 봐도 괜찮겠습니까?"

호준의 요청에 건혁은 잠시 미간을 좁혔다.

골렘의 능력을 판단할 수 있는 기회다.

하지만 전력을 대외적으로 알릴 수도 있는 일이겠지.

때문에 호준은 거절 받을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흐음, 알겠습니다."

호준이 승낙을 받은 탓일까?

동진이 앞으로 나서면서 손을 들었다.

"아, 그렇다면 저도...!"

"뭐, 대련장은 여유로우니... 상관없겠죠."

건혁은 순순히 승낙하면서 골렘 두 기를 호출했다.

민아와 시현은 곧바로 대련장을 바라봤다.

아빠의 전투 모습을 영상이 아닌 실제로 보는 것이다.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는 일이다.

"시작하겠습니다!"

훈련장에서 훈련용 대검을 빌린 호준.

그는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파앗!

'빠르다!'

역시라고 해야 할까?

붉은 망토의 골렘은 자신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면서 반격을 가해 왔다.

채앵! 채채채챙!

'크으... 공격도 묵직하잖아!'

호준은 대검에 화염을 둘렀다.

그 순간, 골렘 역시 얼음의 칼날을 날리는 등 특수 능력과 비슷한 기술을 사용하며 그를 위협했다.

콰앙!

"크아아악!"

무심코 튀어나온 기합 소리.

대검에서 거대한 화염이 일어나자, 골렘은 두꺼운 빙벽을 세웠다.

대련장 한가운데에서 일어난 폭발음.

훈련장의 수많은 시선이 대련장으로 모였다.

파괴된 빙벽.

시야가 흐릿한 상황 속 골렘은 지면을 얼려 호준의 다리를 묶었다.

"이런...!"

균형을 잃은 호준이 넘어지려 하자, 골렘이 그의 목덜미에 검을 들이밀었다.

"져... 졌습니다."

두 손을 들어 투항하는 호준.

그는 숨을 몰아쉬면서 골렘을 올려다봤다.

고작 한 기도 상대하지 못할 줄이야.

이런 골렘을 박건혁은 몇 기나 소환할 수 있다는 건가?

호준은 작게 헛웃음을 흘리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침 동진 역시 대련을 끝마친 듯 두 손을 들고 있었다.

"정말... 넘사벽이구나."

박건혁 본인 역시 붉은 망토의 골렘들과 비슷한 무력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골렘이 아니더라도 개인 무력만으로 서열 100위 내에 들 수 있다는 의미겠지.

호준과 동진은 한숨을 내쉬면서 대련장을 내려왔다.

"일격은 먹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정말로 강하네요."

호준의 감상에 건혁이 미소를 보이면서 골렘들을 없앴다.

"시간도 시간인데 점심이라도 함께 드시는 건 어떠신지...."

"아, 그럴까요?"

"저도 괜찮습니다."

호준과 동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히 샤워를 마친 그들은 가까운 부대찌개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공깃밥과 라면 사리가 무한 리필이라는 문구에 동진과 호준이 살짝 탄사를 터트렸다.

"요새 공깃밥이랑 라면 사리도 전부 돈을 받던데... 여기는 모두 무한 리필이네요."

"냄새도 좋네요."

"맛은 괜찮을 겁니다. 일전에 이진화 헌터님께서도 맛있었다면서 가끔씩 찾아오시거든요."

'이진화'라는 이름에 두 사람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처... 청룡 기사단 부단장인 이진화 헌터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말로 이진화 부단장님과 인연이 있으셨군요."

"예, 저희 수영이를 많이 귀여워해 주셔서요. 어쩌다 보니 알게 됐습니다."

건혁의 대답에 두 사람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자신의 딸들과 수다를 떠드는 수영에게 말이다.

 

제75화

75화. 유신의 만행 (3)

이진화조차 수영을 노리고 있다는 의미인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훈련장에서 보여 준 수영의 능력은 10만대는 물론이고, 8~9만대 헌터들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헌터증을 발급받는 날에는 얼마나 강해져 있을지....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정말 맛있었어요. 나중에 한번 가족들이랑 찾아와 봐야겠네요."

점심 식사를 끝으로 호준과 동진은 딸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건혁은 뒤늦게 수영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지완이라는 소년을 너무 괴롭힌 건 아닐까?

괜히 수영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그러한 걱정에 건혁은 수영의 경호를 추가로 고용하고, 차량 세 대에 기사단장 골렘 6기를 태우기로 결정했다.

"이...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내가 무슨 대통령도 아니고...!"

경호 차량 세 대, 경호원 여섯, 기사단장 골렘 여섯으로 구성된 수영의 경호원단.

확실히 과하지 않은 감은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데스펠에 이어 유신까지 척을 지게 생겼다.

이 정도로는 부족할 따름이지.

건혁은 수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웃었다.

"아빠가 걱정돼서 그래. 유신에서 무슨 짓을 해 올지 모르잖아."

"그래 봐야 어린애들 대련인데...."

"부탁할게."

건혁의 간곡한 요청에 수영은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납치를 당한 전례가 존재했으니까.

건혁이 A등급 게이트로 향한 시각.

수성중학교 앞에서 멈춰 선 세 대의 최고급 세단.

경호원들은 수영을 보호하며 중학교 안까지 데려다주었다.

"쟤야? 흑월 마스터의 딸이라는 애가...."

"경호원까지 대동할 필요가 있나?"

"저번에 납치를 한 번 당했다고 하잖아. 게다가 흑월의 마스터면 그 빙마군주인데, 경호원 몇 명 고용하는 게 대수겠냐?"

"하긴, 서열 59위면...."

수영에 대한 소식이 학생들 사이에 퍼진 모양이다.

민아와 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제9 헌터 훈련장에 누군가 목격자가 따로 있었다는 뜻인가?

수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침실에 틀어박힌 채 등교를 거부하게 된 지완.

경상남도에서 레이드를 진압하고 돌아온 유신의 마스터 하승원은 월요일 아침 지완의 경호 역을 맡은 민정으로부터 당시 대련의 내용을 보고받았다.

승원은 막내아들의 재능을 높게 사고 있었다.

체내에 보유한 마력량까지도.

그런 막내아들을 압도적인 실력으로 짓누른 14세의 소녀, 박수영.

자존심이 높은 지완에게는 아마 충격적인 일이었으리라.

승원 역시 중학생들의 일인지라 크게 간섭하진 않았다.

"추가로 박수영의 부친이 누군지 확인했습니다."

"흐음?"

"빙마군주라 불리는 박건혁 헌터입니다."

민정의 보고에 승원이 눈을 크게 떴다.

"흑월의 마스터를 말하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크하하하하! 그래, 그 남자의 딸이 수성중학교에 입학한 모양이구나."

승원의 웃음소리에 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훈련장에서 오간 말다툼 역시 자세히 보고했다.

"끄응, 너무 오냐오냐 키웠던 모양이군."

귀여워하던 늦둥이 막내아들이 그런 험악한 말을 내뱉었을 줄이야.

승원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민정을 사무실에서 내보내려던 순간.

아내의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충격적인 소식과 함께 말이다.

* * *

짜악!

수성중학교 교감실로 호출을 받은 수영.

그녀는 자신의 뺨을 후려친 여인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난데없이 이게 무슨 행패란 말인가!

"어딜 감히 우리 아들한테 상처를 입혀?"

"...누구시죠?"

수영의 덤덤한 목소리에 여인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누구시죠? 이 계집애가 어디서 눈을 부라려!"

여인이 다시 한번 손바닥을 휘두르려 하자, 수영이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휘익!

허공을 가른 여인의 손바닥.

수영은 차가운 눈으로 여인을 노려봤다.

"한 번은 봐드렸습니다. 하지만 두 번은...."

"이년이...!"

헌터인 걸까?

그녀가 날렵한 움직임으로 주먹을 내질러 왔다.

눈대중으로 봐도 40만대... 아니, 좋게 봐도 39만대 수준밖에 되지 않는 위력이다.

때문에 수영은 가볍게 뒤로 물러나며 여인의 주먹을 회피했다.

그때, 교감이 수영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바닥에 엎드려 사과드려! 이분은 유신 길드의 사모님이시다!"

"아아, 그 양아치 부모님이셨나요."

"뭐? 양아치?! 이게 가정 교육을 얼마나 X같이 배웠으면...!"

"당신 아들이 담배를 피우는 건 아세요? 무리를 이루면서 다른 학생들 괴롭히는 거는요? 심지어 여학생들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아, 전부 아시죠? 그러니 그 많은 사건들이 조용히 덮였지."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수영의 발언에 여인이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이년이 지금 미쳤나! 내가 한마디만 하면 네 애비 따위는 지금 당장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릴 수 있어!"

"그랬다간 기사단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허, 애X끼라서 그런지,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르는구나? 유신 길드가 움직이면 기사단도 다 입 꾹 다물고...!"

그녀의 이야기에 수영은 슬쩍 창가를 바라봤다.

그러곤 겁에 질린 표정을 보였는데.

교감이 그런 수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수영을 제압하기 위함이다.

전직 3만대 서열을 보유한 헌터답게 교감은 수영을 손쉽게 제압해 여인의 앞에 대령해 주었다.

퍼억!

제압당한 수영을 향해 일방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여인.

그녀는 14세의 소녀를 향해 주먹질과 발길질을 서슴지 않았다.

잠시 뒤, 수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입가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인의 폭력에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교감.

오히려 수영을 더욱 강하게 붙잡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익숙한 듯이 말이다.

퍼억!

"하아... 하아.... 네 애비도 지금 당장 X신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어디 한번 기사단한테 말해 봐."

여인의 조소에 수영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순간.

챙그랑!

교감실 창문을 깨고 들이닥친 여섯 명의 정장인들.

그들은 여인의 등을 발로 차더니, 이내 교감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퍼억!

"쿠헥?!"

두 사람이 바닥으로 나가떨어지자, 복도에서 대기 중이던 유신 길드 제2군 소속의 경호원들이 교감실로 들어왔다.

"이... 이게 무슨...."

경호원들은 바닥에 쓰러진 하승원의 아내, 유지현을 보곤 정장인들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사모님을 보호해!"

지현을 보호함과 동시에 정장인들을 향해 달려든 유신의 경호원들.

전투 능력은 서로가 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창문을 넘어 들어온 얼음 골렘들로 인해 전황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붉은 망토를 걸친 멋스러운 기사 형태의 얼음 골렘.

"저... 저 골렘은...!"

유신의 경호원들은 골렘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 했다.

그야 조회 수 5천만을 돌파시킨 영상의 주인공들이니까.

퍼억!

"크악!"

골렘들의 가세로 유신의 경호원들이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한편, 교감실에서 일어난 소란 때문일까?

수성중학교에서 비상벨이 울려 퍼졌다.

"이... 이것들이 지금 미쳤어?! 나 유신 길드 마스터 아내야!"

지현의 외침에도 정장 차림의 여성이 다급히 수영에게 달려갔다.

"아가씨!"

'아가씨'라는 호칭에 화들짝 놀란 지현.

뭐지?

어디 굴러다니는 헌터의 딸내미가 아니었던 건가?

수영은 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상은요?"

"예, 확실하게 찍어 뒀습니다."

수영은 정장 차림의 여성으로부터 스마트폰을 건네받았다.

이내, 화면을 몇 차례 두드리곤 지현에게 다가가 스마트폰을 보여 주었다.

"유신 길드의 사모님께서 유명인이 되셨네요."

교감실 창가에서 찍은 촬영물.

목소리까지 확실하다.

교감실로 호출될 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고자 경호원들에게 문자를 보내 둔 수영.

물론, 교감이 직접 움직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덕분에 폭행 영상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중학교 1학년생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는 유신 길드 마스터의 부인.

동시에 중학교 1학년생을 제압하여 폭행에 가담한 수성중학교 교감.

수영은 영상을 유X브 및 다양한 SNS에 게재하면서 사건을 알렸다.

"너... 너어!"

"이번에는 증거도 확실하고, 그 증거물도 사람들이 동네방네에 퍼트려 공유하고 있으니... 아마 덮기는 쉽지 않으실 거예요."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한 것이다.

아무리 각성을 했다곤 하지만, 복부를 걷어차고, 얼굴을 후려치는 등의 행동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이겠지.

정장인들은 곧바로 경찰과 기사단 측에 전화를 걸었다.

"헌터의 미성년자 폭행 사건... 재판부가 얼마나 강한 처벌을 내려 줄지 궁금하네요. 아 참, 저희 아버지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게다가 X신으로 만들겠다고까지... 그리고 기사단도 사건에 대해 입을 꾹 다문다, 라. 진화 언니한테 나중에 물어봐야겠네요."

"서... 설마, 정말로 흑월의...."

경호원 중 누군가가 수영이 누군지 눈치챈 모양이다.

지현은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경호원을 노려봤다.

"흑월? 왜 흑월이 여기서...."

"어머, 저희 아빠를 아시나 보네요."

수영이 생긋 미소를 짓자, 지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눈앞에 보이는 붉은 망토의 골렘과 정장을 걸친 경호원들.

이것만으로 수영이 누군지를 조금이나마 직감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을 한바탕 들썩이게 만든 '그'의 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그런 말은....'

막내아들인 지완이 어째서 방에 틀어박히게 된 걸까?

지현은 대련이 있었던 당일 저녁 지완과 대화를 나누었다.

박수영과의 대련에서 패배하고, 자퇴를 요구받게 된 막내아들.

아니, 지완의 이야기만 들으면 박수영은 말 그대로 악녀, 그 자체였다.

그러나 지완의 고자질에서 박건혁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 듣지 못했다.

"그... 그래도 유신 길드는...!"

"그럼, 한번 그 유신 길드의 힘으로 이번 사건도 무마해 보세요."

천사처럼 아름다운 수영의 미소가 지현의 눈에는 마치 마녀처럼 보였다.

그리고....

영상이 게재된 그 시각.

모처럼 휴일을 맞이한 건혁은 세실리아로부터 전화를 받고 미간을 찡그렸다.

"이게 무슨...."

―이... 이거 수영이 맞죠?!

건혁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마스터?

폭발할 듯한 분노 때문일까?

세실리아의 부름에 대답을 하지 못한 건혁.

그는 전화를 끊고 곧장 수성중학교에 들이닥쳤다.

"이런... 이런 X 같은 X끼들이...!"

콰앙!

차에서 내려 차 문을 박살 내듯 닫아 버린 건혁.

그는 수성중학교 운동장에 도착하자마자 기사단장 골렘 3기, 정예 기사 골렘 10기, 병사 골렘 100기 소환하며, 운동장으로 대피한 학생 및 교직원들의 가운데를 당당히 걸어갔다.

그 순간.

끼이익!

유신의 문양이 찍힌 검은 차량들이 운동장에 들이닥쳤다.

건혁은 차량들을 노려보며 빙마검을 소환했다.

"이 X 같은 놈들이... 감히 내 딸을 건드려!"

건혁의 사자후에 차량에서 내린 유신의 길드원들이 살짝 움찔거렸다.

마치 전쟁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다.

이어, 차량에서 내린 중년 사내가 건혁의 앞으로 다가왔다.

'제길, 하승원....'

건혁은 얼굴을 구기면서 전투 태세를 유지했다.

상대가 하승원이면 어떠하랴!

수영이... 자신의 딸이 비겁한 방식에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한 것이다.

그것도 헌터증을 발급받은 성인 여성에게!

그 여성이 승원의 아내라는 사실 역시 유X브를 통해 확인했다.

건혁이 분노에 못 이겨 빙마검을 휘두르려던 그때.

"...?!"

모두가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털썩!

대한민국 서열 7위의 헌터, 화룡(火龍) 하승원.

S랭크 마수조차 홀로 쓰러트린다는 그가 서열 59위의 헌터, 박건혁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제76화

76화. 유신의 만행 (4)

"제 아들과 아내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승원이 흙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그 광경은 대한민국의 수많은 국민들에게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건혁은 분노 어린 얼굴로 주먹을 세게 쥔 채 빙마검을 한 번 휘둘렀다.

아무도 없는 빈 장소를 향해 말이다.

콰아아앙!

5m 높이의 뾰족한 빙산이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치솟았다.

그에 엉덩방아를 찧고 만 학생과 교직원들.

수십 초간 양측은 침묵을 지켰다.

그때, 골렘의 품에 안겨 운동장으로 빠져나온 수영.

유지현과 유신의 경호원들은 골렘과 정장 차림의 경호원들에게 구속된 채 그 뒤를 따랐다.

지현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남편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여... 여보?!"

유신과 대치 중인 113기의 골렘들.

그 선두에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성이 서 있었다.

저 사내가 바로 박건혁이겠지.

"아... 아빠!"

수영이 울먹이며 건혁에게 달려갔다.

"그래, 많이... 많이 아팠지?"

"으아아앙!"

수영이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별로 무섭지는 않았다.

지현의 폭행도 버틸 만했고.

모욕적인 언사 역시 영상을 확보하기 위해 끝까지 버텨 냈다.

그리고....

지현의 절망 어린 표정을 볼 때만 하더라도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런데, 어째서지?

건혁의 분노를 본 순간, 수영을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1회차와 달리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절대적 강자의 앞에서조차 무조건 자신의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래, 이제 괜찮아. 일단, 포션부터 마시자."

수영은 증거물로 사용하기 위해 미리 자신의 상처를 사진으로 남겼다.

때문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포션을 벌컥벌컥 들이켠 그녀.

"여... 여보...."

떨리는 목소리로 남편을 부른 지현.

승원은 아내의 부름에도 손가락 하나 꿈쩍이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고 있을 뿐.

잠시 뒤, 기사단과 경찰들이 찾아와 상황을 조사했다.

"유지현 씨께선 저희와 함께해 주셔야겠습니다."

청룡 기사단원들은 지현과 교감에게 마력 코팅된 수갑을 채우고 차량에 태웠다.

동시에 수영의 경호원들 역시 교감실의 기물 파손 등의 혐의로 기사단과 함께 지부로 향하게 되었으며, 건혁은 학교에서 난동을 피운 죄목으로 수영과 함께 경호원의 뒤를 따라갔다.

영상 자료 덕분일까?

경호원은 간단한 조사를 받고 금세 풀려났다.

건혁 역시 마찬가지.

"고생하셨습니다."

건혁의 한마디에 경호원들이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일단, 돌아가도록 하죠."

건혁은 수영을 품에 안은 채 차량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경호원 중 한 명이 건혁의 차량을 운전하며 수서동으로 출발했다.

해당 사건은 TV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는데.

인터넷은 다시 한번 뜨겁게 달구어졌다.

⤷하승원 이미지 나락으로 떨어지네.

⤷욕밖에 안 나온다. 상황 설명 들어 보니까 하승원 아들이 박건혁 딸한테 치근덕거렸다면서? 심지어 헌터 훈련장에서 대련으로 승부까지 가렸다는데... 학교까지 쫓아와서 뒷북을 친다고?

⤷대련은 어디에서 나온 이야기임?

⤷흑월 길드 게시판에 상황 설명 전부 올라와 있음. 박건혁이 어떻게든 하승원 아내 감옥에 처넣겠다면서 돈을 미친 듯이 쏟아붓는 중이란다.

⤷X발, 애들끼리 해결했으면 끝난 거지, 왜 부모까지 나서서 지X인 건데?

⤷저런 미친X을 다 봤나! 저런 X은 사형시켜야 함. 사회에 나와서도 똑같은 짓 하고 다닌다.

⤷헌터증 발급받은 사람이 저지른 범죄라 처벌 수위는 꽤 높을 듯.

<애가 울면서 아빠한테 달려가는 거 봐라. 얼마나 무서웠으면....>

⤷당연히 무섭지. 각성했어도 정신은 어린애다. 교감이라는 새끼는 뒤에서 제압하고, 하승원 아내가 앞에서 무자비하게 때려 패는데, 안 무섭겠냐?

⤷어떻게 교감이라는 작자가....

⤷성인 둘이서 애 하나 때려잡으려고 작정을 했네. 둘 다 사형시켜 버려!

<자식이 있는 입장으로서 박건혁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지금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듯.>

⤷내 자식이 저렇게 폭행을 당한다고 생각해 보면 자식이 없더라도 화가 난다.

⤷영상에서 하승원 아내가 말하는 거 들어 봐. 사람 한두 명 죽여 본 게 아닌 듯.

⤷막내아들이 저지른 범죄도 열심히 덮어 준 모양이네. X발, 유신이나 데스펠이나 뭐가 달라?

⤷ㅇㅈ. 솔직히 유신도 한번 털어 봐야 한다.

<박건혁 분노한 영상 링크 올려 드림. www.xxx.xxx.com.>

⤷보고 나서 지려 버렸다. 팬티 갈아입어야지.

⤷혼자서 전쟁이라도 할 기세네.

⤷얼굴은 모자이크됐지만, 어떤 얼굴이었을지는 짐작된다.

⤷진짜 지렸다. 골렘들 숫자만 보면 유신한테 안 밀릴 것 같음.

⤷길드원 한 명 없이 혼자서 유신이랑 전쟁하려는 유일한 헌터!

⤷자식이 당했는데 눈에 보이는 게 있겠냐? 유신 길드에 쳐들어가도 이상할 게 없음.

⤷X발, 골렘 없으면 X밥인 줄 알았는데, 검 한 번 휘두른 것만으로 저 정도냐....

⤷100위 이내는 육체 능력부터가 격이 다르다. 심지어 빙마검이란 특수 능력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해당 영상들은 외신조차 주목할 정도로 큰 이슈가 되었다.

세계 랭킹 293위인 하승원과 세계 랭킹 1,831위인 박건혁의 충돌.

물론, 하승원이 사죄하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되었지만, 박건혁의 행동에 수많은 사람들은 이해가 간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부모라면 당연한 일이라면서 말이다.

한편, 자택으로 돌아온 건혁은 한 달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그리고 수영을 집에서 쉬게 하면서 돌봐 주었는데.

"수영이는...."

"지금 방에서 쉬는 중입니다."

토요일 아침 일찍 건혁의 자택을 방문한 제1팀 팀장, 김유진.

그녀는 수영의 방을 바라보곤 안타까운 눈을 보였다.

설마, 수성중학교에서 그러한 끔찍한 만행이 일어나다니.

그 탓에 수성그룹에서도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하아, 어떻게 14살 어린애한테 그런 짓을...."

청룡 기사단은 현재 유신 길드에 쳐들어가 수색 작업을 시작했다.

동시에 수성중학교 교감은 직위 해제되었다고 한다.

수성그룹은 이번 사건을 절대로 묵과할 수 없다면서 직접 법무팀까지 움직였다.

그로 인해 교감에게는 87년의 징역형이 선고됐다.

그가 전직 3만대의 헌터임이 고려된 결과다.

또, 유신 길드에서 각종 비리 문서 및 하데스와 연관된 메일들이 확인되자, 마스터인 하승원 역시 협회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헌터 협회 서울 중앙 본부 지하 3층에 위치한 유치장에 갇힌 유지현.

그녀는 남편의 도움을 간절히 기다렸다.

분명, 남편이라면 자신을 어떻게든 꺼내 줄 것이다.

그리 확신했다.

그러나 청룡 기사단은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유신 길드를 탈탈 털었다.

그로 인해 길드 전체가 멈춰 버린 상황.

남편 역시 협회에 출석해 조사를 받는 중이라고 한다.

"이... 이게...."

지현은 절망 어린 표정을 지어야 했다.

눈앞이 깜깜해진 그때.

누군가의 얼굴이 번뜩였다.

"아... 아빠라면...!"

지현의 부친은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건설사, 도정건설의 사장이다.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부친의 소식을 기다렸는데.

도정건설 쪽은 불법 재하도급 의혹이 불거지고, 횡령 등의 비리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각종 수사를 받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도정건설의 주가가 바닥을 치고 도정건설 사장이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은 곧바로 지현의 귀에 전해졌다.

"아... 아...."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도정건설 사장은 조사를 받는 도중 협회 측 고위 간부에게 뇌물을 건네 지현을 도와주고자 했지만, 해당 고위 간부는 뇌물 수수를 고발하며 기사를 내보냈다.

지현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 말도 안 돼. 고작... 고작 애X끼 하나 때문에 내가 감옥에 가야 한다고?"

그녀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며칠 뒤, 도정건설의 주가가 바닥을 내리치자, 수성그룹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정건설을 인수하기 위한 밑바탕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승원은 기자 회견을 열어 직접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아내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박건혁 헌터님과 따님분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현재 정신적인 치료를 받고 있다고 알려진 수영.

그 탓에 여론은 유신을 더욱 거세게 비난했다.

방에 틀어박혔던 하승원의 막내아들, 하지완.

그는 모친이 헌터 협회의 유치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눈을 크게 떠야 했다.

"그... 그게 무슨...."

경호원인 민정이 일련의 사건들을 설명해 주었다.

"바... 박수영... 그년이 우리 엄마를...!"

민정은 눈썹을 작게 꿈틀거렸다.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걸까?

잘못은 분명 유지현이 했는데, 어째서 피해자인 박수영에게 분노하는 거지?

눈동자에 핏줄을 세운 채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린 지완.

민정은 사정을 다시 한번 설명해 주었으나, 지완의 귀에 그녀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절대로...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어!"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 주던 사람이 유치장에 갇힌 것이다.

거기에 유신 길드를 위기에 빠트리고, 외할아버지의 회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지완은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만들겠다며 악을 내질렀다.

'왜... 왜 이렇게 삐뚤어지신 걸까?'

민정은 작게 한숨을 쉬며 지완의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 시각, 민아와 시현이 부친과 함께 수영의 병문안을 찾아왔다.

"수... 수영아, 괜찮아?"

두 소녀가 걱정 어린 눈으로 수영을 바라봤다.

수영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두 소녀를 자신의 침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동진과 호준은 안쓰러운 눈으로 수영을 보며 거실에 조용히 앉았다.

단지, 몇 마디 안부 인사와 수영에 대한 걱정을 드러낼 뿐.

'유지현... 그 여자가 죽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야.'

'시현이가 그런 일을 당한다면... 나 같아도 유신 길드에 쳐들어갔겠지.'

두 사람은 부모 된 입장으로서 건혁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승원의 앞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적의를 드러내는 모습은 존경스러웠다.

유신의 길드원들과 대치한 100여 기의 골렘들.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그 모습을 영상으로 보고, 호준과 동진은 가슴이 두근거리며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시간도 늦었는데 저녁이라도 드시고 가실래요?"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 TV를 보던 두 사람이 건혁의 목소리에 곧바로 반응했다.

"아, 괜찮습니다. 집사람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저도 슬슬 일어나 봐야겠네요."

수영과 대화를 나누던 민아와 시현도 마침 거실로 나왔다.

두 부녀는 아파트를 나서고, 각자의 차량에 올라탔다.

민아는 흥분한 얼굴로 수영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었다.

"방도 엄청 넓고, 욕실에 귀족들이 사용할 것 같은 욕조도 있고... 정말 부잣집 아가씨 같은 느낌이야!"

"우리 집도 엄청 넓잖아."

"으음, 그래도 바닥이 대리석인 데다가 벽지도 새까맣고 매끈해서 그런가? 조금 더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는 거 같았어."

호준은 민아의 이야기에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확실히 인테리어가 장난 아니기는 했지.

민아 말대로 드라마에서 나오는 부잣집이라 해야 되나?

"우리 집도 그렇게 바꿔 볼까?"

"정말로?!"

민아가 얼굴을 환하게 밝히자, 호준이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흘렸다.

"그래, 돌아가서 엄마랑 상의해 보자."

"앗싸!"

그렇게 민아와 시현의 병문안 이후, 수영의 등교가 재개됨과 동시에 유지현에 대한 재판 결과가 뉴스에서 보도됐다.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지현은 공허한 눈으로 웃음을 흘렸다.

TV를 통해 지현을 본 도정건설의 사장은 황급히 하승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77화

77화. S랭크 마수 (1)

"자네, 정말로 우리 지현이를 이렇게 보낼 생각인 건가? 징역 65년이라니! 당장 항소를 해서...!"

―나머지는 장인어른이 알아서 하십시오. 지금 유신 길드가 얼마나 피해를 받았는지 아십니까? 벌금도 벌금이지만 기사단의 압박으로 활동 자체가 중단됐습니다!

"자네만 힘든 줄 아나!? 수성그룹에서 도정건설 주식을 대거 사들이고, 거래처들을 압박하면서 우리 회사는 한바탕 뒤집어지기 직전이라고! 계약도 다 끊기게 생겼어!"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

"어려울수록 힘을 합쳐야지!"

―저희 유신은 도정의 힘 따위 필요 없습니다! 곧 지현이하고 이혼 수속도 밟을 테니, 나머지는 알아서 하십시오.

승원의 냉정한 목소리에 도정건설 사장은 눈가에 핏발을 세우며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쾅!

"이런... 이런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놈이...!"

각종 비리와 혐의로 인해 수사를 받게 된 도정건설의 주식은 연일 하한가를 기록했다.

밑바닥을 드러낼 때쯤 수성이 움직였다.

대주주들마저 포기라도 한 듯 수성그룹에게 주식을 넘겼다.

소액 주주들 역시 주식을 대거 팔아 치운 결과.

간신히 연명하던 도정건설은 몇 개월 만에 수성그룹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도정건설이 수성건설에 합병된 직후, 각종 비리와 뇌물 수수 혐의를 받고 구속된 도정건설 전(前) 사장.

사건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한편, 도정건설의 소식을 전해 들은 수성중학교에선 지완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허구한 날 애들이나 괴롭히더니... 쌤통이다!"

지완이 일반 중학교로 전학을 가자, 몇몇 학생들은 노골적으로 비웃었고, SNS에서 그에 대한 악담을 당당하게 퍼트렸다.

더 이상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탓이다.

그에 따라 피해자들 역시 속출했고, 하승원은 아들의 죄를 순순히 인정하며, 부모들 앞에서 사죄한 다음 재판 결과에 따라 지완을 소년 교도소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아... 아빠!?"

승원을 향해 손을 뻗은 지완.

그는 부친을 향해 도움을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승원은 그 손을 차갑게 노려보곤 '홱!' 고개를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지완은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뻐끔거렸다.

새파래진 안색.

얼굴은 곧 절망으로 물들었다.

"아...."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박수영과 엮이지 않았다면... 그래, 그녀와 엮인 것부터가 잘못이다!

그녀만 없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도 않았겠지.

지완은 박수영을 향해 원망을 보내며 눈물을 흘렸다.

"크으...."

* * *

재판이 마무리되고 자택으로 돌아온 승원은 주방 식탁에 맥주 캔을 내려 둔 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아내한테 너무 소홀했던 건가?"

승원은 과거를 회상했다.

"좋은 남편이... 좋은 아빠가 되고자 노력했는데...."

가족을 위해서라면 더러운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게... 그게 잘못이었던 거겠지.

승원은 한숨을 쉬며 맥주를 들이켰다.

"아버지."

유신 길드 제1군 부대장직을 맡은 장남, 하동호가 천천히 식탁으로 다가왔다.

"정말로... 어머니를 내버려 두실 생각이십니까?"

"...어린애다."

"예?"

"헌터증을 발급받은 사람이 14살 여자애를 죽도록 팼어! 동호, 너는... 그걸 용서하라는 말이냐?"

"어머니께서 실수를...."

"실수? 나 몰래 하데스와 교류한 것도 모자라, 지완이한테 괴롭힘을 당한 사람들을 위협한 게 실수라고?"

"...."

"그래, 나도 깨끗하지는 않아. 하지만 적어도 선은 넘지 말아야지! 애들 문제에 왜...!"

쾅!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친 승원.

식탁이 반으로 쪼개지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승원의 분노에 동호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모친이기 때문일까?

징역 65년형은 너무하다 생각했다.

동호는 모친이 감형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달라며 승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것은 동호뿐만이 아니다.

대학생인 차남과 장녀 역시 승원에게 찾아와 무릎을 꿇고 감형을 부탁했다.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자식들이 무릎을 꿇고 부탁하는 게 아내의 감형이다.

아니, 지금은 전 아내인가.

자식들의 간절한 부탁에 승원은 항소를 하여 20년을 감형시켰다.

무려 20년이다.

해당 결과에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했고, 유신의 이미지는 다시 한번 나락으로 떨어졌다.

* * *

유신과의 사건이 마무리됨과 동시에 1학년을 수석으로 마무리한 수영.

매번 전 과목 100점을 받음에도 그녀는 특별히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덤덤한 모습에 동급생들은 '역시 우리랑은 다르구나.'라고 생각하며 그녀와의 관계를 조금씩 멀리했다.

평범한 자신들과는 어울릴 수 없는 드높은 존재로 인식한 것이다.

그럼에도 매주 수영과 함께하는 두 여학생.

학교에서뿐만이 아니다.

수영이 주말마다 헌터 훈련장을 드나든다는 이야기에 두 사람은 부친을 설득하여, 매주 토요일마다 수서동 제9 헌터 훈련장을 찾아갔다.

덕분에 호준과 동진 역시 건혁과 더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질 수 있었다.

"슬슬 시작할 땐가."

수영이 2학년으로 진학한 오늘날.

박건혁의 죽음에 대한 스토리가 곧 다가온다.

게이트가 개방되는 곳은 개포동 쪽에 위치한 구룡산.

등급은 분명 D였었지?

출현하는 마수는 코볼트일 것이다.

숫자는 수십만을 가볍게 상회하며, 대모산을 넘어 세곡동과 자곡동 일대를 뒤덮는다.

수서동은 어떨지 모르지만, 영향을 피하기는 어렵겠지.

문제는 대치동 근처에 위치한 수성중학교 역시 영향권 안이라는 것이다.

'원작의 수영이는 분명 학교에 등교한 상태였어. 그렇다면 평일에 게이트가 터진다는 건데....'

시기는 대략 봄에서 초여름 정도로 추측했다.

원작에선 '수영이 2학년으로 진학하고 몇 개월 뒤'라고 표현되었었으니 말이다.

건혁은 생각을 하나씩 정리하면서도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원작대로 D등급 게이트가 개방되는 거겠지?'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들은 원작에서 존재하지 않은 에피소드들이었다.

'내가 벌인 일들이 원인이 된 건가?'

지금의 자신은 소설 속 박건혁과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로 인해 수영을 스토리라인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말았다.

건혁은 작게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지나친 걱정도 탈이 될 것이다.

'인위적인 사건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레이드는....'

분명, OO월드의 레이드는 소설 속에 등장하지 않았을 뿐.

실제로 일어나도 이상하지는 않은 일이다.

게다가 빠른 속도로 진압되지 않았던가.

본래라면 수영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았을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이변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지금의 자신이라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으리라.

수영에겐 기사단장 골렘 6기와 서열 1만대의 경호원 6명을 붙여 주었으니, D~B등급 게이트가 폭발하더라도 가볍게 헤쳐 나갈 수 있겠지.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와."

건혁은 2022년 3월부터 게이트의 공략 횟수를 급격히 줄였다.

주에 4~5번 정도 진행되던 공략을 2~3번로 줄이고, 수시로 SNS와 인터넷 기사를 확인했다.

구룡산에 이변이 있는지 말이다.

그렇게 2개월이 흐르고, 마침내 5월이 되었다.

"...레이드가 일어나지 않는 건가?"

원작의 에피소드가 사라졌다고?

건혁이 조금씩 긴장감을 내려놓으려던 시각.

그가 품은 희망은 불과 일주일 만에 무너졌다.

집에서 SNS와 증권사 어플을 확인하며, PC로 유X브를 시청하던 건혁은 SNS에 업로드된 레이드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됐다.

매번 지방에서 포착된 레이드.

그 탓에 건혁의 경계심은 크게 누그러진 상태였다.

그는 '강남구'라는 지명을 확인하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남... 강남 어디야?"

SNS에서 게재된 OO중학교의 이름을 곧바로 인터넷에 검색했다.

"X발, 구룡산 게이트다!"

그는 황급히 추가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SNS 및 인터넷 기사를 찾아봤다.

원작대로 D등급 게이트가 폭발한 걸까?

SNS에 게재된 코볼트의 사진에 건혁은 작게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아, 코볼트 정도면 기사단장 골렘들로도 충분하겠어."

최우선 사항은 수영의 안전이다.

경호원과 기사단장 골렘을 붙여 두긴 했지만,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고자, 건혁은 레이드 진압을 수성중학교 주변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역 근처에서 재난을 알리는 경보가 울렸다.

건혁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량에 올라탔다.

덜컥.

이내, 액셀을 밟고 대로변으로 빠져나갔다.

도로는 경찰들에 의해 제한 속도를 지키도록 유도되고 있었다.

괜히 무리하게 속도를 냈다가 교통사고가 난다면 이도 저도 안 될 테니까.

차량이 신호에 걸린 순간, 건혁은 다시 한번 스마트폰으로 SNS를 확인했다.

코볼트가 찍혀 있는 사진들이 한가득 업로드될 무렵.

새로운 긴급 알림 문자가 도착했다.

"뭐야, 레이드의 등급을... 수정한다고?"

D등급으로 규정되었던 레이드의 등급이 단번에 S까지 솟아올랐다.

건혁은 두 눈을 의심했다.

코볼트가 이렇게 쏟아져 나오는데, 어떻게 레이드 등급이 S가 돼?!

다급한 마음에 인터넷 기사를 찾아보자, 코볼트 외에도 오크, 미노타우로스, 트롤 등의 다양한 랭크의 마수들이 구룡산 인근에서 출몰했다는 모양이다.

그 정도에서 끝났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사자의 얼굴, 박쥐의 날개, 전갈의 꼬리를 가진 이형의 괴물.

해당 괴물 사진이 인터넷 기사에 첨부되었다.

"마... 만티코어?!"

건혁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었다.

부우웅!

액셀을 강하게 밟은 건혁.

"왜... 왜 S랭크 마수인 만티코어가 구룡산에 나타난 건데?!"

녀석의 특징은 간단하다.

첫 번째, 날개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날 수 없다.

두 번째, 단단한 다리를 이용해 날렵하게 움직인다.

세 번째, 날카로운 발톱과 꼬리를 사용해 상대를 공격한다.

이 세 가지가 마수 백과에 기입된 주요 내용이다.

"X바아아알!"

이것도 자신의 탓인 건가?!

신호에 걸려 멈춰 선 차량들.

건혁은 욕설을 터트리며 차량을 멈춰 세웠다.

이어, SNS에 만티코어를 검색하자....

"이... 이런 개X끼가! 왜 대치동으로 가?!"

그는 차량을 길가에 대고 곧장 바깥으로 나왔다.

파바바밧!

인도를 달리는 수많은 사람들.

건혁은 그들을 지나치며 이를 악물었다.

세상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걸까?

아니, 시점을 바꿔야 한다.

자신이 아닌 수영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영이 강해진 만큼 위기의 난이도도 높아진....

-쿠워어어어어!

수성중학교 방향에서 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얼마나 크면 사람들이 도망치던 것도 잊고 귀를 틀어막고 있겠는가.

건혁은 식은땀을 흘리며 다급한 얼굴로 다리를 움직였다.

"만티코어는... 만티코어는 아니잖아! 이 X 같은 세계야!"

* * *

수성중학교 운동장에서 멈춰 선 거대한 사자형 마수.

15m 높이에, 꼬리까지 4~50m 길이에 달하는 만티코어가 우렁찬 포효를 터트렸다.

-쿠워어어어어!

창문이 와장창 깨짐과 동시에 학생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악!"

"끄아아아악! 귀... 귀가...!"

몇몇 학생들의 귀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아무래도 고막이 터진 모양이다.

만티코어가 포효를 멈추자, 수영이 다급히 일어났다.

"도... 도망쳐! 밖으로 나가야 해!"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복도로 뛰쳐나간 학생들.

그중 누군가가 넘어졌다.

학생들은 그를 짓밟거나, 걷어차며 복도를 달렸다.

뒤늦게 교실을 나선 수영은 바닥에 널브러진 학생들을 보고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주... 죽은 거야?"

수영과 함께한 민아와 시현이 복도를 보며 몸을 덜덜 떨었다.

그때.

콰앙!

만티코어가 꼬리를 휘둘러 체육관을 파괴했다.

수영은 두 사람을 데리고 복도를 달렸다.

계단을 내려가 본관 건물을 빠져나간 세 사람.

학생과 교직원들이 향한 후문은 이미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쪽이야!"

수영은 민아와 시현을 데리고 주차장으로 달렸다.

후문으로 빠져나가는 건 어렵다.

그렇다면....

"아가씨!"

경호원들과 합류하자.

"차가 나갈 수 있게 담을 부숴 주세요! 비용은 나중에 아빠가...!"

콰앙!

수성중학교 본관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쿠구궁! 쿠궁!

건물이 와르르 무너지려는 순간.

경호원들이 다급히 수영의 일행을 감싸며 자리에 엎어졌다.

콰앙!

건물의 잔해가 주차장을 그대로 덮쳤다.

 

제78화

78화. S랭크 마수 (2)

그 시각, 수성중학교 본관이 무너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된 건혁.

그는 정문 앞에 선 채 멍하니 무너진 본관을 바라봤다.

본관은 학생들이 수업을 듣는 곳이다.

지금 시간이면 수영도 저 건물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을 터.

"아... 아니지? 분명, 대피했을...."

-쿠워어어어!

만티코어의 쩌렁쩌렁한 포효가 건혁의 고막을 강타했다.

귓가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선혈.

아무래도 오른쪽 고막이 터진 모양이다.

"...기사단장 골렘 소환."

대기에 가득한 수분이 냉기가 되어 얼음 조각이 만들어졌다.

불과 1~2초 만에 형태를 구성한 10기의 기사단장 골렘.

"가라."

그의 중얼거림에 골렘들이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몸을 내던졌다.

골렘들은 만티코어를 둘러싸 포위한 다음 운동장을 얼려 녀석의 움직임을 봉했다.

녀석의 움직임을 멈춘 시간은 불과 2~3초 정도.

그러나 골렘들이 녀석에게 접근할 시간으로는 충분했다.

파바밧!

10기의 골렘이 만티코어에게 달려들었다.

서걱! 촤아악!

가죽을 찢는 골렘의 검격.

만티코어에 새겨진 수많은 검상.

고통을 느낀 걸까?

-쿠워어어!

만티코어가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골렘들을 향해 꼬리를 휘둘렀다.

쾅! 콰콰콰쾅!

지면에 만들어진 수많은 크레이터들.

골렘들은 망토를 펄럭이면서 놈의 공격을 회피했다.

서서히 아물기 시작하는 만티코어의 상처.

그것을 본 건혁은 오른손에 빙마검을 소환하고 바닥을 박찼다.

파밧!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서걱!

쿠워어어어어!

얕다.

상처의 깊이는 대략 10cm 정도.

가죽을 겨우 뚫고 살코기를 벤 것뿐이다.

그러나 만티코어가 날뛰면 날뛸수록 건혁은 더욱 분노했다.

"크아아아악!"

무너진 잔해 속에 수영이 파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잔해를 짓밟고 꼬리를 휘둘러?

건혁은 각종 기술을 사용하며, 더욱 깊은 상처를 만들어 냈다.

상처 부위에서 솟은 얼음 조각.

해당 부위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전원, '아이스 버스트(Ice Burst)'를 사용한다!"

골렘들은 건혁의 지시에 따라 아낌없이 기술을 퍼부었다.

서걱!

베인 부위에서 '파앙!' 치솟는 날카로운 얼음 조각.

만티코어는 어느새 고슴도치가 되어 있었다.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솟아오른 고슴도치가.

그러나, 녀석은 여전히 발버둥을 치면서 골렘들을 파괴했다.

-쿠워어어!

콰앙! 콰콰쾅!

녀석이 휘두른 꼬리에 건혁은 회피가 늦었음을 깨닫고 재빨리 의수를 들어 공격을 막아 냈다.

콰앙!

"...?!"

묵직한 충격이 뇌리에까지 전해졌다.

체육관 잔해로 날아간 건혁은.

퍼엉!

그대로 처박혔다.

"커헉!"

그는 핏물을 토하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S랭크 마수는... A랭크와 차원이 다르다.

B랭크와 A랭크 수준의 격차가 아니다.

A랭크를 아득히 뛰어넘는 경계가 존재했다.

"크으...."

건혁은 고개를 들어 의수를 바라봤다.

설마, 아르늄을 찌그러트리다니....

전개시켜 둔 방패가 걸레짝이 되어 버렸다.

"아... 알파-1, 전개."

쥐어짜듯 목소리를 냈다.

반응하지 않는 의수.

음성 인식 장치에 문제가 생긴 건가?

건혁은 수동으로 방패를 제거하고, 검신을 펼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통증.

건혁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마력은....'

충분히 남아 있다.

"기사 골렘... 소환."

좌우에서 모습을 드러낸 20기의 기사 골렘.

건혁은 그들에게 건물의 잔해를 조사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지금은 수영의 생존 확인이 우선이다.

이어, 기사단장 골렘 3기를 추가로 소환하여 만티코어에게 달려들게 만들었다.

"...살아 있어. 분명, 살아 있을 거야."

수영이 살아 있을 거라는 믿음... 아니,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설득인가.

그러나 수영에게 붙여 둔 골렘들과의 링크는 계속 연결되어 있다.

즉, 파괴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문제는 링크를 통해 지시를 내렸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잔해에 깔려 움직이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서둘러 구조해야 돼.'

파바밧!

건혁은 만티코어가 잔해로 다가가지 못하도록 몸을 내던졌다.

남아 있는 마력은 100을 조금 넘는 수준.

그는 만티코어의 시선을 분산시키면서 녀석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눈을 공격해!"

가죽의 보호를 받는 몸통과 달리 눈동자는 보호를 받지 못하는 부위다.

꼬리는... 전갈의 껍데기로 몸통보다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콰드득!

골렘 한 기가 만티코어에게 잡아먹혔다.

"크윽...!"

골렘의 하체가 '쿵!' 바닥으로 떨어진 순간.

만티코어의 아가리에서 핏물이 쏟아졌다.

-캬아아악!

녀석이 고통스러운 듯 고블린과 비슷한 울음소리를 냈다.

만티코어의 혀에 검을 박고, 안간힘을 쓰며 버텨 내는 골렘.

그 모습을 본 건혁이 다급히 소리쳤다.

"드... 들어가! 목구멍에서 아이스 버스트(Ice Burst)를...!"

상체만 남은 골렘은 마치 자신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듯 만티코어의 목구멍을 향해 몸을 내던지더니, 이내 혀에 꽂혀 있던 검을 뽑아 목구멍에 거대한 상처를 만들었다.

푸욱!

만티코어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눈에 핏발을 세운 채 경련하던 순간.

건혁이 기사단장 골렘과 함께 녀석의 눈동자에 검을 꽂았다.

만티코어가 '쿨럭!' 핏물을 토해 내며 괴로운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가리로 들어간 녀석이 무언가를 해 주고 있는 모양이다.

"아이스 필드(Ice Field)!"

만티코어의 다리를 묶은 건혁.

그는 골렘들을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멈추지 마! 계속 공격해!"

숨을 쉴 시간조차 주면 안 된다.

지금 몰아붙여서 끝내야 돼!

건혁은 골렘들과 함께 만티코어의 육체에 수많은 상처를 만들었다.

베어서 안 된다면 찔러서라도 말이다.

'...부서졌어. 위액에 녹은 건가?'

만티코어의 아가리로 들어간 골렘과 링크가 끊어졌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아니나, 훌륭히 임무를 완수한 골렘에게 경의를 보인 건혁은 곧바로 만티코어의 얼굴을 향해 얼음의 칼날을 쏘아 보냈다.

"아이스 블레이드(Ice Blade)!"

촤아아악!

녀석의 눈동자에서 서서히 생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건혁은 만티코어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정수리에 안착한 그는 마무리를 짓고자 빙마검을 발밑으로 내리찍었다.

푸욱!

그 순간, 녀석이 비틀거리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쿠웅!

육중한 몸뚱이가 주저앉자, 주위로 흙먼지가 퍼졌다.

"하아... 하아... 하아...."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세 번이나 오른다고?

알림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띠링!

['얼음 골렘 소환(Summon Ice Golem)'의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토록 염원하던 '얼음 골렘 소환'의 스킬 레벨까지 올랐다.

건혁은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돌려 잔해 쪽을 바라봤다.

수영이는 어떻게 된 거지?

이내, 주차장 방향에서 한 무리가 발견됐다.

기사 골렘에게 안긴 채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작은 소녀.

건혁은 그녀를 보곤 털썩 만티코어의 머리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아, 살아...."

-캬아악!

안도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 건가.

등 뒤에서 코볼트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건혁은 살아남은 6기의 기사단장 골렘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이내,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 코볼트를 쓰러트리는 골렘들.

"...."

파앗.

지상으로 내려온 건혁은 수영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 * *

만티코어가 쓰러지기 10분 전.

수성중학교 주차장을 뒤덮은 본관의 잔해.

그 속에 9명의 사람이 깔렸다.

경호원의 품속에 안긴 수영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끄으...."

그에 경호원이 상체를 들며 수영을 바라봤다.

"아가씨, 괜찮으신...."

"저... 저는 괜찮아요. 민아랑 시현이는...."

수영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좌우에서 두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나는 괜찮아."

"...나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공간.

본관의 잔해에 깔렸음을 직감한 수영은 곧바로 스마트폰을 켜 주변을 살펴봤다.

이내, 잔해에 깔렸음에도 무사할 수 있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너희들이 지켜 준 거구나."

수영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번에도 아빠가 구해 준 것이다.

사방을 빙벽으로 가로막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어 잔해를 막고 있는 골렘들.

"산... 건가?"

민아를 감싼 여성 경호원이 상체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도 위험하니 서둘러...."

쾅! 콰콰콰쾅!

"크윽!"

"이... 이게 무슨 소리...!"

거대한 땅 울림과 함께 잔해 속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경호원들은 귀를 틀어막으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만티코어가 폭주하기 시작한 걸까?

잠시 뒤, 바깥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명이 아니다.

마치 무언가와 싸우는 듯한....

"허... 헌터들이 도착한 건가?"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들이 도착했다면 안심이다.

경호원들이 골렘과 함께 잔해를 밀어내려던 순간.

누군가가 머리 위의 바위들을 하나씩 치우기 시작했다.

"구... 구조다!"

민아가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머리 위의 잔해가 모두 치워진 순간.

모두가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어... 얼음 골렘?"

"아... 아빠?"

수영의 목소리에 경호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설마, 박건혁이 수성중학교를 찾아왔단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 만티코어와 싸우고 있는 것은....

하늘을 가리던 잔해가 모두 사라지자, 기사단장 골렘들은 경호원과 세 소녀를 품에 안은 채 차례대로 내보내 주었다.

바깥으로 나온 수영은 만티코어의 머리에 빙마검을 꽂은 건혁을 보고 온몸을 경직시켰다.

정말... 혼자서 쓰러트렸다고?

다른 헌터들의 도움 없이?

놀란 건 수영만이 아니었다.

"마... 말도 안 돼."

"호... 혼자서 만티코어를 쓰러트렸다고? 박건혁 헌터님의 서열은 분명 59위...."

경호원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군가... 분명,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될 리가 없지 않은가!

한편, 민아와 시현은 건혁을 바라보며 눈동자를 반짝였다.

"머... 멋있다."

"나도 나중에는...."

두 소녀가 거대한 꿈을 키워 가던 그때.

건혁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더니, 수영의 일행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무언가 안도한 듯한 얼굴로 만티코어의 머리에 주저앉았다.

-캬아아악!

정문 방향에서 들려오는 코볼트의 울음소리.

민아와 시현이 몸을 움찔거리자, 건혁이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그 순간, 만티코어를 포위하던 붉은 망토의 골렘들이 일제히 정문으로 달려갔다.

"아... 아빠...."

터덜터덜 수영의 일행에게 다가선 건혁이 곧바로 수영을 껴안았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지?"

"응, 아빠는...."

"아빠도 괜찮아."

특별한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단지, 서로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

"누구 다친 사람은 없죠?"

"...예, 대부분 잔상처뿐입니다."

"포션이 필요하시면...."

"괜찮습니다. 적당히 연고를 바르면 되는 상처들이니까요."

"그... 그보다도 만티코어를... 저... 정말로 혼자서 쓰러트리신 겁니까?"

말을 심하게 더듬는 경호원의 목소리에 건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 경호원들은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건혁의 대답에 다시금 표정을 굳힌 경호원들.

"골렘들과 함께 쓰러트린 겁니다."

"다른 헌터는...."

"아무래도 조금 늦는 모양이군요."

경호원들은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골렘... 결국 혼자 쓰러트렸단 의미잖아!?'

'59위의 헌터가 S랭크 마수를 쓰러트려? 기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겠네.'

건혁은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만티코어가 난동을 피운 덕분에 학교의 담은 물론이고, 주변 상가와 빌딩들까지 무너지며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그 아수라장 속으로 우르르 달려오는 수많은 코볼트들.

도대체 몇 마리나 되는 걸까?

"탈출은... 조금 어려워 보이는군요."

"잔해 위로 올라가서 방어전을 하는 건...."

"저희가 잔해 위로 올라가 전투를 벌인다면, 추후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저희 탓에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누군가가 깔려서 죽었다고 말이죠."

"아...."

"방어전은... 운동장에서 하도록 하죠."

"예?"

설마, 만티코어의 위에서 방어전을 하자는 건가?

쓰러진 만티코어의 높이로는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지형적인 이점이 없다면 그냥 평야에서 방어전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겠지.

"따라오세요."

하지만 건혁이 만티코어를 향해 달려가자, 경호원들도 미간을 찡그린 채 민아와 시현을 데리고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제79화

79화. S랭크 마수 (3)

만티코어와 5m 정도 떨어진 지점.

왜 이곳에서 멈추는 거지?

경호원들의 의문에도 건혁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묵묵히 거인 골렘 10기와 마법 기사 골렘 10기를 불러낼 뿐.

건혁은 거인 골렘을 둥글게 배치시킨 다음, 마법 기사 골렘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발밑으로 7m 높이의 빙벽을 만들어 봐."

쿠구구궁!

"으아악!?"

깜짝 놀란 민아와 시현이 그만 바닥에 넘어졌다.

"이... 이건...."

발밑에서 솟아오른 빙벽이 겹겹으로 치솟았다.

어느새 가로세로 5~6m에 높이 7m의 빙벽... 아니, 요새가 만들어졌다.

마법 기사 골렘들은 요새의 면적을 차곡차곡 넓혔다.

불과, 수십 초 만에 가로세로의 길이는 15m까지 늘어났다.

"돌아와."

건혁의 중얼거림에 정문으로 향한 골렘들이 서둘러 운동장으로 돌아왔다.

"놈들을 막아라!"

빙마검을 치켜든 채 골렘들에게 명령을 내린 건혁.

빙마검을 든 이유는 단순한 멋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의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함은 부가적인 이유일 뿐.

건혁이 슬쩍 경호원들을 살펴봤다.

경외심이 담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살짝 민망하네.'

건혁은 빙마검을 스르륵 팔 아래로 내렸다.

이어, 빙벽 위에서 대기 중인 마법 기사 골렘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콰앙!

명령과 동시에 얼음덩어리를 던지며 코볼트를 짓뭉갠 마법 기사 골렘들.

그렇게 공성전 아닌 공성전이 시작됐다.

"후우, 지원이 도착하기 전까지 휴식을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건혁은 바닥에 앉으며 잠시 숨을 돌렸다.

그를 뒤따르듯 바닥에 앉은 경호원들.

민아와 시현은 바닥에 앉으려 했지만, '차가워.'라고 중얼거리며 우물쭈물거렸다.

두 소녀를 본 건혁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아, 그렇구나. 잠시만...."

건혁이 외투를 벗은 순간.

"아, 두 분은 저희가...."

두 경호원이 겉옷을 벗어 민아와 시현이 앉을 자리에 깔아 주었다.

건혁의 외투는 수영의 엉덩이에 깔렸다.

마수들의 비명 소리.

검과 검이 충돌한 쇳소리.

거인 골렘의 몽둥이에 맞은 둔탁한 소리.

사방에서 들려오는 전투음에 경호원들이 쓴웃음을 흘렸다.

"마수들이 몇 미터 거리에 있는데도 이렇게 여유롭게 쉴 수 있는 건 난생처음이네요."

"그래도 화살은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니 경계는 해 두세요. 빙벽 위의 골렘들이 최대한 몸으로 막아 내기는 하겠지만...."

"이보다 높게는... 아니, 차라리 이 위로 다시 빙벽을 쌓는 건 불가능한 건가요?"

"7m가 최고점입니다."

"빙벽 위에 빙벽을 쌓는다면...."

"저 역시 그 생각은 해 봤습니다. 게이트 안에서 실험을 해 본 결과, 위에 쌓은 빙벽이 그대로 쓰러지더군요."

"아... 그... 그러면 얼음이 녹는 건...."

"마력이 들어가서 그런지, 보통 얼음보다 꽤 단단합니다."

"그럼, 제거할 때는 파괴해야 되는 건가요?"

건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골렘에게 명령하면 곧바로 녹일 수 있습니다."

"골렘이 파괴될 경우에는...."

"그때는 직접 파괴해야겠죠. 하지만 24시간이 지나면 마력을 잃고, 평범한 얼음이 됩니다."

"그렇군요."

상당히 편리한 능력이다.

잠시 뒤, 하늘에 보도 헬기가 떠올랐다.

강남의 참혹한 현장을 생생히 국민들에게 보도하는 중이겠지.

마법 기사 골렘들의 공격이 멈추었다.

'마력이 전부 소모된 건가?'

건혁은 병사 골렘을 소환하여 마법 기사 골렘의 사이에 채워 넣었다.

화살을 막아 내기 위한 이른바 골렘벽이다.

또, 수시로 기사 골렘들을 소환해 마수 토벌에 투입시키면서 인터넷 기사와 SNS 및 유X브를 살펴보며 강남구의 상황을 확인했다.

"난장판이네."

건혁의 중얼거림에 경호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떠오른 듯 건혁이 경호원들을 바라봤다.

"아 참, 가족분들은...."

"저희 가족들은 모두 경기도에서 살고 있어서 괜찮습니다."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참고로 경호원 전원 건혁이 마련해 둔 수서동의 개인 숙소에서 생활하는 중이다.

정확히는 전용 면적 49㎡에 관리비 포함 월세 80만 원의 아파트로, 매달 경호원들의 숙소 비용으로 480만 원을 지불해 온 건혁.

서열 1만대의 헌터를 고용하는 것이다.

그 정도의 근무 환경은 당연하게 준비해 줘야겠지.

한편, 부모님과 전화 통화를 하는 걸까?

민아와 시현이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 댄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잠시 뒤, 민아가 스마트폰을 가지고 건혁에게 다가왔다.

"아... 아빠가 바꿔 달래요."

건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받았다.

"예, 전화 받았습니다."

―정말... 정말로 감사합니다.

가슴을 쓸어내린 듯한 안도의 목소리.

조금 전, 자신이 느낀 그 감정을 호준 역시 느끼고 있으리라.

―길드원들과 게이트를 공략하던 중이어서 S등급 레이드가 벌어졌다는 걸....

게이트 내부와 바깥은 통신이 연결되지 않는다.

때문에 게이트를 관리하던 협회 직원은 다급히 게이트로 들어가, 현 강남구의 상황을 직접 알려 줄 수밖에 없었다.

"아내분께서는...."

―아내는 고구려 길드 제2군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 게이트를 빠져나왔다고 연락받았고요.

"그렇군요."

―후우,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 동진이도 지금 옆에서 감사하다고 전해 달라네요.

건혁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지원... 아니, 구조는 언제쯤 도착할지...."

―현재 기사단의 총전력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대치동 방향으로는 데스펠이 출동했다고 하는군요.

"데스펠이 말입니까?"

이것도 질긴 악연이라고 해야 되나?

―예, 저희 고구려 길드는 서초동 양재역 부근으로 향한다고 합니다.

본래라면 자리를 이탈해 수성중학교로 달려가려 했었다고 한다.

아내 역시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는데.

민아의 목소리를 들은 덕분에 다행히 마음을 가라앉힌 모양이다.

―저희 민아와 시현이를 부탁드려도....

"예, 걱정하지 마세요. 안전하게 보호하는...."

-쿠워어어!

"...중이니 말입니다."

대답 중간에 오우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문일까?

―...부탁드립니다.

호준의 목소리가 더욱 간절해졌다.

"A랭크 마수 정도는 수십 마리가 몰려와도 쓰러트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A랭크라면 문제없다.

S랭크가 문제일 뿐.

호준은 '감사합니다.'라는 한마디를 남긴 후, 전화를 민아에게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전화를 받은 민아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수영은 통화를 마친 민아와 시현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세 소녀가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경호원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건혁은 슬쩍 스테이터스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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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건혁

*종족: 인간

*칭호: -

*출신 국가: 한국

*LV: 235

*근력: 74

*민첩: 75

*체력: 75

*마력: 206/530

*AP: 9

*스킬: [빙마검(氷魔劍)-LV8] , [얼음 골렘 소환-LV8], [마력 회복-LV5], [성장 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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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에 투자하는 게 좋겠지?'

건혁은 마력에 모든 어빌리티 포인트를 투자한 다음, 새롭게 소환할 수 있게 된 마법 기사단장 골렘을 눈앞에 불러냈다.

오른손에 기다란 스태프를 쥐고, 붉은 로브를 펄럭이는 녀석.

건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사 골렘들을 빙벽에서 내려보냈다.

파각!

"아, 미안."

다리가 박살 난 채 지면을 구르는 병사 골렘들.

건혁은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병사 골렘들을 소환 해제하여 물로 만들었다.

건혁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경호원들과 세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10m 높이의 빙벽을 만들어 봐."

요새보다 3m나 높은 빙벽.

마법 기사 골렘이 4~5초간 주문을 읊었다면, 마법 기사단장 골렘은 2~3초의 주문으로 10m 높이의 빙벽을 만들어 냈다.

"이... 이게 무슨...."

"아무래도... 조금 더 강력한 골렘을 소환할 수 있게 된 모양입니다."

건혁은 경호원의 의문을 해소시킨 뒤, 곧바로 마법 기사단장 골렘을 바라봤다.

"요새의 주변을 둘러싸도록 빙벽을 세워."

골렘은 차례차례 빙벽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이내, 요새에는 3m 높이의 방어벽이 만들어졌다.

"아, 이 부분은 8m, 9m, 10m로 차례차례 쌓아 봐."

순식간에 3단 계단이 완성됐다.

추가로 10m 높이와 5m 길이의 빙벽을 16개 정도 만들었는데.

마법 기사단장 골렘은 마력이 고갈된 듯 건혁의 명령에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래, 내려가서 쉬고 있어."

골렘이 계단을 타고 7m 높이의 빙벽으로 내려갔다.

건혁은 남은 마력을 쏟아 5기의 마법 기사단장 골렘을 소환해, 요새의 방어벽 두께를 3m까지 보강했다.

이어, 마법 기사 골렘들과 함께 지상으로 얼음덩어리를 던졌다.

건혁은 고개를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이걸로 조금은 더 안심할 수 있겠네요."

조용하다.

누구 한 명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단지, 멍한 얼굴로 건혁을 바라볼 뿐.

그것은 수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부친의 능력이 이토록 기상천외한 것일 줄이야.

"후... 훌륭한 요새가 만들어졌네요. 계단까지 만드시고...."

한 경호원의 목소리에 건혁이 작게 웃으면서 바닥에 앉았다.

"대신, 조금 더 추워졌다는 단점이 있죠."

건혁의 발언에 세 경호원이 겉옷을 벗어 수영 일행에게 걸쳐 주었다.

딱히 겉옷을 벗어 주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뭐라고 말하기도 애매하겠지.

15살의 애들이 교복만 입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니까.

"가... 감사합니다."

세 사람이 경호원들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때,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강남구 도로 한복판에 군이 진입한 모양이다.

요새 외벽에 앉아 주변을 둘러본 건혁.

"...데스펠이 도착한 모양이군요. 마수들이 다른 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수영이 데스펠이라는 단어에 표정을 굳혔다.

방준우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것이리라.

건혁 역시 딱딱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잠시 뒤.

한 무리가 정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 *

데스펠 제1군 소속 5명, 제2군 소속 20명으로 구성된 제38 토벌 부대.

해당 부대는 폐허가 된 수성중학교로 들어가, 마수들로 쌓인 언덕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언덕의 중심에서 솟은 얼음 기둥.

스으으으.

얼음 기둥이 밑바닥부터 빠른 속도로 녹기 시작했다.

이내, 엘리베이터 마냥 기둥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들.

데스펠의 헌터들은 그들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오랜만이군요."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박태준 헌터님."

태준과 건혁이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밝게 웃으며 마주할 수 있는 관계는 아니다.

하지만 강남구에 S등급 게이트가 터진 이상, 마냥 적대적인 입장을 보일 수도 없겠지.

"박건혁 헌터님께도 지원 요청 문자가 도착했겠지만... 곧 군용 수송 차량이 도착할 테니, 일단은 해당 차량을 타고 통제 구역에서 벗어나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태준은 슬쩍 시선을 돌려 만티코어를 바라봤다.

 

제80화

80화. 구조 (1)

"...정말로 토벌하셨군요, 만티코어를."

건혁과 만티코어의 전투는 보도 헬기의 카메라를 통해 전국으로 전해졌다.

믿을 수 없음에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

영상을 본 시청자들은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런 놀라운 일을 저지르고도 건혁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운이 좋았습니다."

만티코어로부터 마석을 회수한 기사단장 골렘들.

그 외 B~A랭크 마수들 역시 마석이 뽑힌 채 골렘들의 손에 들렸다.

그 광경을 본 태준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무운을 빌겠습니다."

태준은 건혁과 눈을 마주치면서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차근차근 계단을 오를 때 혼자서 엘리베이터를 탄 것 같군.'

서열 59위의 헌터가 홀로 만티코어를 쓰러트린다?

웃기는 소리!

지금 당장 건혁이 각성 능력 검사를 받는다면 최소 10~20위대의 서열을 받을 수 있으리라.

태준은 그리 확신했다.

'제길, 아버지 말대로 진작에 처리를 했어야 했던 건가?'

물론, 당시의 건혁을 은밀히 처리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그런데, 지금은 미지수를 넘어 불가능한 영역에 들어섰다.

데스펠 제1군 전원이 움직여도 승리를 확신하기 어려운 상태.

'아버지가 직접 움직이지 않는 이상, 녀석을 죽이는 건....'

태준은 미간을 질끈 감으면서 눈앞의 마수들을 노려봤다.

고작 코볼트다.

길드원들에게 맡겨도 될 일이겠지.

그러나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기 위함일까?

그는 허공에 화염의 창을 띄워 놈들을 향해 던졌다.

푸푸푹!

창은 세 마리의 코볼트를 꿰뚫으면서 불태워 버렸다.

제38 토벌 부대가 전투를 재개할 무렵.

건혁은 군의 수송 차량을 보고 필요 없는 골렘들을 사방으로 풀어 토벌 작전에 투입시켰다.

수성중학교 정문에서 멈춰 선 다섯 대의 수송 차량.

군인들은 골렘의 두 팔을 가득 채운 거대한 마석을 보고 작게 탄사를 흘렸다.

"저게 S랭크 마석...."

"하나에 1억에서 3억 원 정도 나가는 거잖아."

"...대박이네."

건혁은 군인들로부터 배낭 다섯 개를 얻었다.

잠시 뒤, 배낭은 B~A랭크 마석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 외 마석들은 골렘들이 두 손 가득 쥔 채 수송 차량의 뒤를 따라 달렸다.

차량의 속도를 따라오는 골렘들의 모습에 작게 헛웃음을 터트린 군인들.

"도착했습니다."

수송 차량이 수서역에 도착했다.

"지원 요청에 대한 문자와 메일에 답장을 보내 주시면, 곧바로 담당 구역에 대한 공지를 문자 또는 메일로 해 드릴 겁니다."

"알겠습니다."

군인들은 경례를 취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수서역 주변이 다시금 휑하게 변했다.

가끔 마수들의 울음소리가 들렸으나, 건혁은 일행과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일단, 모두들 들어오세요."

민아와 시현을 포함해 경호원들까지 집으로 들인 건혁.

수영이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민아랑 시현이는 내 방에서...."

건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렇게 해. 경호원분들께서는 개인 숙소로 돌아가셔서...."

"일단, 2인 1조로 복도에서 근무를 서겠습니다."

건혁은 인당 3,000만 원, 즉 1억 8,000만 원 상당의 비용을 매달 경호업체에 지불한다.

마수를 토벌하지 않고 2,000만 원 이상의 월급을 받는 경호원들.

돈을 공짜로 받을 수 없다는 걸까?

경호원들은 교대로 경계 근무를 서기로 결정했다.

"나머지는... 이걸로 어떻게든 되겠지."

수성중학교에서부터 데려온 5기의 기사단장 골렘과 5기의 마법 기사단장 골렘.

"조금... 부족하려나?"

그는 추가로 10기의 기사단장 골렘을 소환했다.

S랭크 마수가 나타나도 수영을 무사히 대피시킬 수 있는 전력이다.

마력이 다시 한번 바닥을 드러내자, 마력을 회복할 겸 휴식을 취하면서 협회의 지원 요청에 응하겠다는 메일을 보냈다.

잠시 뒤, 일원본동으로 향하라는 문자가 도착했다.

"...3시간 안에 일원본동으로 향하라고?"

걸어서도 금방인 거리다.

그런데, 어째서 3시간이라는 여유를 주는 걸까?

건혁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인터넷 검색창에 자신의 이름을 검색했다.

이내,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졌다.

"...보도 헬기가 지나갔었네."

전투에 집중하느라 보도 헬기를 신경 쓰지 못했던 모양이다.

인터넷 기사를 살펴보자 댓글이 난리가 났다.

서열 59위의 헌터가 단독으로 S랭크 마수를 쓰러트린 건 전례 없는 대사건이니 말이다.

"그보다 구룡산 북쪽 일대는... 말 그대로 박살이 나 버렸네. 강남역은 교통이 마비되고...."

실시간으로 업로드되는 소식에 건혁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원작의 구룡산 게이트와 이렇게까지 다를 수가 있나?

인터넷 기사에서는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온 마수의 숫자가 50만을 가볍게 넘을 것이라며, 강남, 송파, 서초 3구에서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자택에서 머무르거나, 당장 대피하는 것을 권고했다.

참고로 통제 구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군인 및 헌터들에 의해 구조되는 중이라고 한다.

"하아, 무슨 전쟁이라도 일어난 거 같잖아."

건혁은 사진 한 장을 보고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이 정도면 전쟁이라 봐도 무방한가?"

대한민국은 휴전 국가다.

서울 남부가 아수라장이 되었음에도 국민들은 북한의 공격을 염려하지 않았다.

어째서냐고?

그들이 공격해 올 가능성이 한없이 낮기 때문이다.

북한은 한때 각성자들을 군인으로 육성시켜 특수 부대를 창설하였으나, 그 수준이 한없이 낮아 레이드 발생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군사 기지를 빼앗기는 등의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불과 1~2년 전만 하더라도 수도인 평양이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받으면서 고위 간부들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시 말해 한국을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의미다.

물론, 그것은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장 병력을 움직일 여유가 있는 국가는 몇몇의 강대국뿐이겠지.

"일원본동에는 코볼트와 고블린이 대부분이네. 이왕이면 B~A랭크 마수들이 어슬렁거리는 지역이 좋은데...."

건혁이 살짝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워 2시간 동안 골렘을 소환한 건혁.

어느새 거실에는 붉은 망토를 휘날리는 기사단장 골렘들로 가득 찼다.

"...여름에는 에어컨을 켜는 것보다 이 녀석들을 소환해 두는 게 더 시원하겠어."

골렘들이 풍기는 냉기에 거실은 냉장고가 되어 버렸다.

"나가자."

건혁은 경호원에게 다녀오겠다는 한마디를 던지곤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간 순간.

골렘들이 비상계단 방향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자동차를 도로 한복판에 놔두고 온 탓일까?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골렘들과 함께 일원본동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동하는 도중 고블린들이 몇 차례나 달려들었다.

서걱!

달려드는 고블린을 깔끔하게 베어 낸 기사단장 골렘.

일원본동에 도착한 건혁은 가까운 상가 건물로 들어가, 스마트폰으로 일원본동에 도착했다는 메일을 헌터 협회 공식 메일에 보내 뒀다.

"너희는 주변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마수들이나 쓰러트려."

건혁은 10기의 기사단장 골렘을 상가에서 내보냈다.

띠링!

['마력 회복'의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건혁이 화들짝 놀랐다.

이렇게 갑자기 마력 회복의 스킬 레벨이 오르다니.

바라 마지않은 상황이다.

"초당 0.2의 마력이 회복되는 건가."

씨익.

"최고잖아."

45분 만에 모든 마력이 회복됐다.

상가 1층 복도를 가득 채운 100기의 기사 골렘.

건혁은 기사단장 골렘 1기에 기사 골렘 30기를 붙여 하나의 부대를 편성시켰다.

그렇게 3개의 부대가 상가를 빠져나가, 각 방향으로 흩어졌다.

건혁은 복도에 비치된 벤치에 앉아 마력을 회복했다.

* * *

―보십시오! 만티코어를 쓰러트린 박건혁 헌터의 골렘들이 일원본동에서 마수들을 토벌하기 시작했습니다! 가히 전쟁을 연상시키는 광경인데요. 현재 골렘들은 여러 개의 부대로 편성되어 일원본동의 각지에서 마수들을 토벌하고, 주민들을 구조하고 있다고 합니다.

보도 헬기에서 일원본동의 상황을 전달하는 여기자.

그녀의 목소리는 흥분과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해당 영상이 유X브에 올라온 시각.

시청자들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며 박건혁의 해외 팬들까지 댓글을 남겼다.

<캬하~ 이게 대한민국 최정예 클라스다.>

⤷만티코어를 쓰러트리고도 일원본동 전역에 골렘을 투입시킨다고? 진짜 미쳤네.

⤷추정 3~400기의 골렘들이 일원본동 각지에서 마수들을 학살하는 중임.

⤷그래 봐야 D~C랭크 마수들이다. 최상위권 헌터들과 비교하기는 아직 이른 듯.

⤷혼자서 만티코어를 쓰러트렸는데도 이런 평가를 받아야 한다니....

⤷국뽕을 다 빼고 객관적으로 보자. 대한민국에서 S랭크 마수를 단독으로 쓰러트릴 수 있는 헌터가 몇이나 되는지.

⤷골렘 없으면 개X밥 헌터죠~

⤷그 골렘도 박건혁 특수 능력이죠~

⤷골렘 없으면 개X밥이래ㅋㅋㅋㅋ 존X 웃기는 놈이네. 골렘은 무슨 다른 사람이냐? 그리고 골렘 없이도 A랭크 마수 개X밥처럼 썰어 버린다.

<지금의 박건혁이면 10위권에 살짝 걸치는 수준은 되려나?>

⤷10위가 백호 기사단 단장인 오지석인가?

⤷오지석은 이번 달에 9위로 올라감. 지금 10위는 흑검(黑劍) 박강석임.

⤷박강석이 혼자서 S랭크 마수를 토벌한 적이 있던가? 저번 강원도 레이드에서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2인 1조로 임진규랑 같이 움직였잖아.

⤷게이트 안에서 S랭크 마석을 가져온 적은 있었음.

⤷그때 혼자서 S랭크 마수를 토벌했다고 말하기는 했는데, 1군이랑 같이 들어가서 사실인지 아닌지는....

⤷박강석이랑 비교하기는 애매한데, 11위인 주작 기사단 단장 여지윤은 홀로 S랭크 마수를 쓰러트린 적이 없다. 고로 박강혁은 여지윤보다 강하다!

⤷ㄹㅇㅋㅋ

⤷ㄹㅇㅋㅋ

⤷ㄹㅇㅋㅋ

<박건혁 얼굴은 언제 공개해 주는 거임?>

⤷예전에 잠깐 얼굴 공개됐었는데, 지금은 전부 모자이크로 처리됨. 아마 박건혁 본인이 얼굴 알려지는 걸 싫어하는 듯.

⤷SNS에서 찾아봐라. 박건혁 얼굴 떠돌고 다닌다.

⤷ㄹㅇ 구라 안 치고 아이돌 뺨 후려친다.

⤷구독 안 하면 프사 미래 아들.

⤷여기서 구독자 구걸하냐. 역겨운 X끼.

⤷구독해 주지 마. 저 X끼 계정 돈 받아서 판다.

불과 1시간 만에 1만 개 이상의 댓글이 달렸다.

한편, 개인 숙소 TV로 뉴스를 시청하던 경호원들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만티코어를 쓰러트리고 수성중학교에서 방어전을 벌인 건혁이다.

그가 쓰러트린 마수가 몇 마리였지?

1~200은 가볍게 넘을 것이다.

4급 포션을 복용해 상처를 치료했다지만, 마력과 체력은 무한하지 않을 터.

게다가 정신적인 피로까지 생각하면....

"...정말 괴물인 건가?"

경호원은 뉴스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지 주방을 뒤졌다.

S랭크 게이트가 터진 현재.

이 근방에서 배달을 시키는 건 무리다.

지금은 숙소에 남아 있는 음식들로 해결하는 수밖에.

"...라면밖에 없네."

경호원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한숨을 토해 냈다.

그렇게 S등급 게이트가 터졌음에도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경호원들이었다.

 

제81화

81화. 구조 (2)

일원본동에 투입된 헌터들은 안전 지역으로 물러나면서 머쓱한 얼굴로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박건혁 헌터의 골렘들을 보셨나요?"

"네, 직접 두 눈으로 봤습니다. 고블린들에게 포위된 저희 부대를 도와주셔서... 이렇게 다친 사람 없이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골렘의 전투 능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가 감히 뭐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렵네요. 하지만 붉은 망토의 골렘은 정말로 무시무시했습니다. 망토를 걸치지 않은 골렘들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을 보여 주면서 홀로 수백 마리의 고블린들을 학살하더군요."

헌터들의 생생한 인터뷰에 기자들이 눈동자를 반짝였다.

하룻밤 사이 대한민국의 인기 스타가 된 박건혁.

TV에 얼굴 한번 비추지 않았음에도 그의 이름은 대중들의 뇌리에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늦은 저녁 시간.

호준과 동진은 토벌 작전을 마무리한 후, 자차를 타고 수서역으로 출발했다.

조수석에 탄 아내는 조급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박건혁 헌터님 자택에서 머무르고 있다고 하니...."

"애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아내의 중얼거림에 호준이 입을 다물었다.

이번 사건이 민아에게는 트라우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헌터가 되겠다는 꿈을 접게 만들었을 수도 있겠지.

부부는 민아가 헌터가 되든 말든 상관없었다.

단지, 건강하게 자라 원하는 것을 이루길 바랄 뿐.

호준과 동진의 차량이 수서동 OOO아파트의 지하 주차장에 들어섰다.

"10층...."

두 부부는 엘리베이터에 타 10층으로 올라갔다.

이내,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을 발견했다.

"고구려 길드의 유호준입니다. 이쪽은 이동진으로...."

두 사람이 헌터증을 보여 주자, 두 경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연락은 받았습니다."

경호원 한 명이 벨을 눌러 두 사람의 방문을 알렸다.

현관문이 열리며, 건혁이 얼굴을 내밀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두 부부는 경호원을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내들은 살짝 놀랐다.

자신들도 비싼 최고급 아파트에서 살고 있지만, 건혁의 집은 말 그대로 부잣집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엄마!"

거실에서 식사 중이던 민아와 시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소녀는 곧장 모친에게 달려갔다.

어째서 아이들은 엄마를 먼저 찾는 걸까?

아빠들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걸 어떻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할지...."

호준의 아내인 김규리가 눈물을 글썽였다.

건혁은 손사래를 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저도 수영이 생각에 무작정 달려간 거라... 아 참, 저녁 식사가 아직이시다면 함께 어떠신가요?"

거실 테이블에는 각종 반찬과 육수가 준비되어 있었다.

"샤브샤브를 해 먹으려던 중이었거든요."

"고기 엄청 맛있어!"

민아의 목소리에 규리는 작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겁에 질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을 줄 알았던 딸.

그러나 민아는 활짝 미소를 지으면서 활발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규리는 작게 안도한 모습으로 거실 바닥에 깔린 방석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수영이 고개를 살짝 숙이자, 규리와 동진의 아내인 나경이 따스한 얼굴로 인사를 해 주었다.

'이 아이가 유지현한테....'

'이런 아이한테 그런 끔찍한 짓을....'

두 여인은 하승원의 아내, 유지현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을 떠올렸다.

이런 어린아이를 꿈쩍도 못 하게 만든 뒤, 무자비한 폭행을 가하다니....

건혁이 잠시 부엌으로 간 그때.

TV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우와, 아저씨 또 나오고 있어!"

민아의 목소리에 두 부부가 TV를 바라봤다.

만티코어를 쓰러트리는 모습에 이어, 일원본동에서 보인 활약까지.

기자는 살짝 격양된 목소리로 해당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건혁이 부엌에서 야채들을 가져오자, 호준이 살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혼자서 만티코어를 쓰러트리다니... 정말로 대단하시네요."

"골렘들이 없었으면 위험했을 겁니다."

"그 골렘도 박건혁 헌터님의 능력이잖습니까."

"예, 그렇기는 하죠."

"각성 능력 검사는 언제쯤 받으실 생각이신지...."

건혁은 자리에 앉으면서 대답했다.

"올해 10월 정도에 받을 계획입니다."

"지금만 하더라도 서열 10위인 흑검과 견줄 수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나오던데...."

"만티코어를 쓰러트린 건 정말로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지금 당장 각성 능력 검사를 받아도 1~20위대에 진입하는 건 어려운 일이겠죠."

동진과 호준의 부부는 건혁이 겸손을 보인다 생각했다.

그러나 진지한 얼굴로 대답한 건혁.

상대가 만티코어였기에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데스나이트와 같은 인형의 마수와 전투를 치렀다면, 자신은 7~80%의 확률로 패배를 겪고 죽음을 맞이했겠지.

그것을 두 부부에겐 설명하지 않았다.

뭐,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고기가 벌써 다 익어 버렸네요."

건혁이 육수에서 고기들을 건져 냈다.

그렇게 세 가족이 먹어 치운 한우는 3kg으로, 1.5L의 음료수 역시 세 병이나 비워졌다.

야채가 담긴 그릇 역시 깨끗하게 비워지며, 그들은 배부른 식사를 마무리했다.

"맛있게 잘 먹었어요."

"다행이네요."

건혁이 작게 웃으면서 테이블을 정리했다.

그에 호준과 동진이 도우면서 규리와 나경이 싱크대에 자리를 잡았다.

"설거지는 저희가 할게요."

"아니요, 제가...."

건혁의 만류에도 규리와 나경은 설거지를 강행했다.

식사 대접도 식사 대접이지만, 딸아이를 구해 준 것에 대한 소소한 감사의 표시였다.

그렇게 두 여인이 설거지를 마무리하자, 민아와 시현이 피곤한 얼굴로 꾸벅꾸벅 고개를 흔들었다.

"슬슬 돌아가 봐야겠네요."

"네 분께서는 내일도 토벌 작전에 투입되시는 건가요?"

"예, 오늘과 마찬가지로 서초동 일대를 돌아다닐 예정입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안전 지역에 호텔을 하나 잡아 두었으니, 출퇴근이 가능한 가사 도우미분을 고용할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호준과 동진이 아이들을 등에 업고, 아내들과 함께 현관문을 나섰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식사 정말로 맛있었어요. 나중에 한번 저희 집에 초대할게요."

"수영아, 다음에 보자~"

현관문이 닫혔다.

방금까지의 떠들썩함이 거짓말인 마냥 조용해졌다.

수영이 방으로 들어가자, 건혁은 뒷정리를 한 후,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SNS와 유X브에선 금일 레이드로 한바탕 난리 법석이었다.

집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강남구 한복판에서 S등급 게이트가 폭발한 것이니 말이다.

심지어 헌터들이 보이는 대활약!

그중 박건혁이라는 이름은 독보적이었다.

"...유난히 서열 59위를 강조하네."

건혁은 턱을 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음 골렘 소환'의 스킬 레벨이 9에 도달하면... 기사왕을 소환하게 되는 건가."

기사단장 골렘으로 S랭크 마수를 상대하는 것은 역부족이다.

그것은 A등급 게이트에서도 확인했을 터.

그러나 기사단장 골렘이 무리를 지어 덤벼들면 S랭크 마수도 애를 먹는다.

"기사왕 골렘은... 데스나이트 수준의 무력을 갖추고 있으려나?"

스킬 레벨은 언제 올리지?

성장 촉진이라는 스킬로 충족되어야 할 경험치 중 30%가 증발했다.

그럼에도 막막하기는 그지없었다.

채워야 하는 경험치량이 LV8까지 오르기까지보다 몇 배나 높아졌으니까.

"그냥 S랭크 토벌에 합류시켜 주면 좋겠는데...."

금일 일원본동에서 얻은 경험치량은 정말 개미만 한 수준이다.

건혁은 거실의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잠시 뒤, 스마트폰이 몇 차례 진동을 울렸다.

길드원들이 보내온 안부 문자다.

"뭘 이렇게 장문으로 보내?"

건혁은 답장을 보낸 다음 밤 10시가 되자 침대에 드러누웠다.

오늘 하루의 피로가 서서히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꼭두새벽에 일어난 건혁은 수영과 아침을 먹고, 지하 주차장에서 골렘을 소환했다.

그는 골렘들과 함께 다시 한번 일원본동 일대를 휩쓸었다.

서걱!

"마음 같아선 거인 골렘으로 전부 박살 내 버리고 싶은데...."

도로 위에 외제 차의 숫자가 너무 많다.

고작 고블린들을 죽이는 데 몇억 원을 쓰는 건 아깝지.

때문에 기사 골렘들을 투입시켜 코볼트와 고블린의 군세를 쓰러트렸다.

촤아악!

건물 안에 숨어 하룻밤을 보낸 사람들.

그들은 창밖을 보고 작게 환호했다.

박건혁의 활약이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개포, 도곡, 대치동 일대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캬아아악!

서걱!

"하아... 하아... 하아.... 이걸 도대체 언제까지...."

도로를 가득 채운 마수의 군세.

그 외 아파트 단지와 공원 및 학교 등 역시 마수들로 붐볐다.

-쿠워어어!

콰앙!

마침내 방어선이 뚫렸다.

마수들이 서초동과 삼성동으로 진군하며 군인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이어, 전차와 장갑차 및 수송 차량까지 파괴되면서 희생자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는데.

국방부는 지금 당장 폭격을 가해야 한다고 외쳤다.

도시 한복판에 폭격을 가한다?

정부와 국회는 국민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폭격을 가했다가 생존자들까지 죽는다면....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습니다. 강남구와 서초구가 이미 놈들에 의해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서울의 남부 지역이 전부 마수들에게 넘어갈 것이고, 국민들의 비난은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백 명의 목숨으로 만 명의 목숨을 구하자는 국방부 장관의 목소리가 대외적으로 알려졌다.

장관의 목소리에 국민들은 찬반으로 나누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 지역은 넓어지고, 사상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멀쩡히 살아 있는 요구조자의 머리 위를 폭격한다?

국군이 국민을 죽인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말이다.

국회와 정부에서는 격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결과, 정부는 폭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국민의 비난도 비난이지만, 자국민을 향해 폭격을 가한다는 선례를 남기지 않고자 한 것이다.

대신, 동원하는 헌터의 서열을 10만까지 높여 지방 각지의 헌터들을 불러들이고, 동시에 10만여 명의 군인을 투입하여 레이드의 진압에 나섰다.

타타타타타탕!

"X발,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되는 거야!"

고블린들을 향해 총격을 가하는 군인들.

그들은 뒤로 물러나던 도중 옆 골목에서 튀어나온 고블린들을 보고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키에에엑!

"으아악?!"

푸욱!

군인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은 단검.

그에 함께하던 동료가 고블린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으아아악! 죽어어어어!"

타타타타타탕!

고블린은 바닥을 재빠르게 구른 뒤, 군인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단검은 군인의 목에 정확히 박혀 들어갔다.

총을 놓고 목덜미를 부여잡은 군인.

"커헉...."

털썩!

그는 불과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레이드가 발생하고 사흘 만에 5천여 명의 군인과 3천여 명의 헌터들이 목숨을 잃었다.

무려 8천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것이다.

그 외 부상자는 3만여 명을 넘는다.

통제 구역 내에 잔존한 생존자는 대략 4천여 명.

그들을 위해 이 이상의 인명 피해를 만들어야 할까?

심지어 헬기로 구조할 수 없는 생존자만 2천 명이 넘는다.

"대한민국의 최정예 헌터들이 움직이고 있음에도...."

대한민국 헌터 협회장 김정호는 침음을 흘리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S랭크 마수는 이미 토벌됐다.

단지,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수가 너무나도 많을 뿐.

5~60만의 군세에 식은땀을 흘렸던 정호는 금일 다시 한번 땀을 흘려야 했다.

S등급 게이트에서 다시 한번 쏟아지기 시작한 마수의 군세.

놈들이 송파구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제82화

82화. 구조 (3)

"지금 당장 이진화 부단장과 고구려 길드의 헌터들을 송파구 쪽으로 보내게."

"알겠습니다."

"박건혁 헌터는...."

"현재 일원본동에서 마수들을 막아 내는 중입니다. 하지만 숫자가 숫자인지라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정호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주먹을 쥐었다.

보도 헬기에 송파구와 성남 방향으로 향하는 마수들의 모습이 포착됐다.

D~C랭크 마수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군세.

드문드문 발견되는 B~A랭크 마수들은 건물을 파괴하고, 구조를 기다리는 생존자들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었다.

마침내 국방부 장관의 의견에 찬성하기 시작한 수많은 국민들.

피해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국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러나 여론이 움직인들, 시내에 폭격을 가하는 건 불가능하다.

정부는 마수들이 쏟아져 나오는 구룡산을 타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구룡산을 가로지르는 터널이 무너지긴 하겠지만, 당장은 어쩔 수 없다는 발언으로 구룡산 일대에 폭격이 가해졌다.

투콰아앙! 콰콰콰콰콰쾅!

구룡산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폭발음에 생존자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여... 여기도 저렇게 날려 버릴 수 있다는 말이잖아."

"다... 당장 도망쳐야 돼!"

몇몇 생존자들은 공포심에 못 이겨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들을 마중해 주는 것은 헌터도 군인도 아닌 고블린이었다.

생존자들이 건물을 빠져나와 사망한 사건이 순식간에 100건 이상으로 늘어났다.

정부는 생존자들이 거주하는 구역에 포격 및 폭격을 가할 생각이 없음을 확실하게 밝히면서 그들의 마음을 안심시키고자 노력했다.

그 시각, 건혁은 일원본동에서 마수의 파도에 휘말렸다.

"이게 무슨 X 같은...."

그는 상가 건물의 옥상에서 지상을 내려다봤다.

도로 위를 빼곡하게 채운 마수들.

아무래도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기 그른 모양이다.

건혁은 작게 헛웃음을 터트리며 헌터 협회에 전화를 걸었다.

도로와 차량을 비롯해 건물마저 엉망이 되었다.

도로 위에서만큼은 재산 피해를 걱정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의미다.

"거인 골렘을 소환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협회 직원은 잠시 상급자와 대화를 나눈 후, 건혁에게 거인 골렘의 소환 허가를 내렸다.

"거인 골렘 소환."

도로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30기의 거인 골렘.

"가라!"

거인 골렘들이 D~C랭크 마수들을 모조리 밀어 버렸다.

그 밖에 거인 골렘의 발밑까지 접근하려는 마수들은 기사 골렘들이 목을 베어 버렸다.

드문드문 보이는 B~A랭크 마수들은 기사단장 골렘들이 상대했는데.

일원본동의 생존자들은 TV를 통해 박건혁의 전투를 지켜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촤아악!

박건혁은 전투에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상가 건물 옥상에서 휴식을 취하고, 5시간 동안 500기의 기사 골렘, 30기의 거인 골렘, 5기의 기사단장 골렘을 소환하여 일원본동의 마수들을 대량으로 학살했다.

"여... 역시 박건혁이야!"

"마수들이 갑자기 늘어났을 때는 어떻게 되나 했는데...."

주민들은 안심이라도 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대의 중심에 서게 된 건혁.

그는 지그시 지상을 내려다봤다.

"이 정도의 골렘을 소환하게 될 줄은...."

오전에 소환한 골렘까지 포함해 대략 800여 기의 골렘들이 마수의 파도를 막아 내는 중이다.

건혁은 마력을 회복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내, 벤치에 누워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 순간, 스마트폰이 진동을 울렸다.

"응?"

수영이 문자라도 보낸 걸까?

건혁은 스마트폰을 확인하며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문자를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흑월 제1팀 소속 김태형이다.

서열을 9만대까지 끌어올린 그는 헌터 협회의 요청을 받아, 흑월 제1팀 팀장인 김유진과 함께 도곡동 일대를 누볐다.

문제는 S랭크 게이트 2차 폭발로 도곡동 일대를 리자드맨 무리가 덮치면서 시작됐다.

태형이 소속된 부대는 괴멸.

유진은 정신을 잃은 채 리자드맨에게 끌려갔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고... 생포했다고? 설마, 의식을 치르려는 건가?"

종교와 같은 의식을 행하는 마수들은 흔하게 발견되었다.

그 증거로 제물을 바치는 제단과 토템 등이 확인되었는데.

유진을 생포했다면 아마 살아 있는 제물을 바치기 위한 것이겠지.

건혁은 미간을 찡그린 채 헌터 협회에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 도곡동으로 향하겠습니다."

―예? 그게 무슨....

"저희 길드원이 리자드맨에게 생포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골렘들은 일원본동에 놔둔 채 도곡동에서 길드원을 구조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저희가 무언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10분 안으로 다시 전화를 드릴 테니....

협회의 직원은 다급히 전화를 끊고, 5분 만에 다시 전화를 걸어 왔다.

―박건혁 헌터님께 메일을 하나 보내 드렸습니다. 해당 건물의 옥상에서 기다려 주신다면, 30분 이내로 군용 헬기가 헌터님을 태우고 도곡동까지 데려다드릴 겁니다.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기 위해 생포되었다는 길드원분의 자세한 정보가 필요합니다만....

"길드 흑월에 소속 김유진 헌터입니다."

―김유진... 43,218위인 김유진 헌터님은 제237 토벌 부대로 활동하셨습니다. 매봉산 남쪽 지역으로... 예, 매봉역 근처의 OOO아파트 단지네요. 해당 지역에서 리자드맨이 출현하였다는 소식을 조금 전에 전달받았습니다.

"...."

―지금 당장 10대의 드론을 띄워 리자드맨의 위치를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 주시는 거죠?"

건혁의 말 그대로다.

일개 헌터에게 군용 헬기까지 지원해 준다고?

심지어 길드원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열 대의 드론까지 동원해 준다고 한다.

―대한민국을 위해 지속적인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그게 무슨...."

―이번처럼 도시 한복판에서 레이드가 발생할 경우, 대한민국은 박건혁 헌터님과 같은 강력한 헌터가 필요합니다.

생존자들이 존재하는 도시에서 무차별 폭격을 가할 순 없다.

그렇다고 군인들의 현대화기만으로는 한계가 존재하며, 전차와 장갑차는 A랭크 마수 앞에선 장난감 자동차밖에 되지 않으니, 국가는 헌터라는 존재를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특히, 고위 서열의 헌터에게 특별 대우를 해 주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이루어졌다.

―저희 헌터 협회는 김유진 헌터님을 구조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대신, 이번 구룡산 게이트를 막아 내기 위해 부디 힘을 빌려주십시오.

자신들의 성의에 대한 보답을 해 달라는 의미다.

건혁은 작게 한숨을 쉬며 최대한 노력해 보겠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이후, 메일을 확인한 그는 헬기의 착륙 장소로 이동했다.

두두두두두두두!

거대한 프로펠러 소리와 함께 건물의 옥상에 착륙하는 군용 헬기.

헬기에서 군복 차림의 사내가 손을 뻗었다.

건혁은 그 손을 붙잡고 헬기에 올라탔다.

헬기가 서서히 고도를 높이기 시작하자, 건혁은 어깨에 낙하산을 멘 채 지상을 내려다봤다.

'지옥이 따로 없네.'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던 건혁은 몇 년간 함께해 온 유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단지, 그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

가능하면 자신보다 더욱 좋은 남성을 만나길 바랐다.

그러나 거리를 두면 둘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유진.

전생체인 신무영에겐 첫 연애이자 첫 결혼이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그 두근거림을 박건혁의 기억과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혔다.

'죽은 아내를 배신할 수 없다', '수영이에게 또다시 상처를 줄 수 없다' 등의 마음이 신무영의 두근거림을 순식간에 잠식시켜 버린 것이다.

'어찌 됐든 유진 씨는 몇 년을 함께해 온 소중한 동료야. 반드시... 구해 내겠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설령 죽었다 하더라도 시체만은 어떻게든 확보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위이잉.

헌터 협회로부터 걸려 온 전화.

―리자드맨의 무리와 함께 생포된 사람들의 위치가 확인되었습니다.

* * *

"여긴...."

눈을 뜬 유진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윽...."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녀가 이마에 손을 대자, 핏물이 잔뜩 묻었다.

"으아아아악!"

갑작스러운 비명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단 위에 올려진 한 남성.

쇠사슬에 포박된 그는 바둥거리면서 불에 태워졌다.

남성을 향해 무언가 기도를 올리는 리자드맨들.

-키헤헤헥!

주술사처럼 보이는 리자드맨이 스태프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자 리자드맨들이 두 손을 들어 경배를 올린다.

마치 사이비 종교를 보는 기분이다.

"꺄아아아악!"

"사... 살려...!"

콰드득!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팔과 다리를 하나씩 물어뜯는 리자드맨들.

그 끔찍한 광경에 유진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철커덕!

"히익!"

유진은 손목과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보고 기겁했다.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한 두려움.

당장 도망치려 해도 의족의 마력전지 에너지가 바닥을 내리쳤다.

일어서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절망 그 자체의 상황.

-키에엑!

철컹!

한 리자드맨이 유진의 의족과 연결된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시... 싫어!"

유진이 몸을 비틀며 발악을 하자, 몇몇 리자드맨들이 그녀의 팔다리를 붙잡고 제단에 올렸다.

누더기 로브를 걸친 주술사가 무언가 주문을 읊었다.

그 순간, 양옆에서 두 리자드맨이 유진의 손등에 단검을 박았다.

푸욱!

"꺄아아아아악!"

손등을 꿰뚫고 제단에 박힌 단검.

그녀는 경련을 일으키면서 주술사를 향해 애원했다.

살려 달라고.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함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애절하게 빌었다.

티끌만 한 희망을 안고서 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간절한 희망은 무참히 짓밟혔다.

주술사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면서 오른손에 횃불을 쥐었다.

"제... 제발... 제발... 시... 싫어!"

횃불이 눈앞까지 다가온 순간.

푸욱!

주술사의 안면에서 푸른빛의 검신이 튀어나왔다.

이어, 횃불을 든 오른팔이 잘렸다.

털썩!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는 주술사.

유진의 앞으로 한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는 제단의 양측에 서 있던 리자드맨의 목덜미를 순식간에 베었다.

-캬아아악!

사방에서 들려오는 리자드맨의 울음소리.

동시에 둔탁한 굉음이 들려왔다.

콰아앙!

제단을 둘러싼 30기의 거인 골렘.

"가라."

사내의 중얼거림에 골렘들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유진은 그 사내를 바라보며 검단산 게이트의 일들을 떠올렸다.

어째서지?

어째서 그는 자신이 위험할 때마다 찾아와 주는 걸까?

그녀가 입을 뻐끔거리던 때.

손등에 박힌 단검을 붙잡은 젊은 남성... 아니, 외견만 젊게 보일 뿐.

실제 나이는 30대 후반의 유부남이다.

"뽑겠습니다. 참으세요."

푸확!

"끄아악!"

유진은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남성은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고 포션을 들이켜게 만들었다.

그녀의 몸부림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제 다리의 족쇄를 풀 테니, 걱정 말고 얌전히 계세요."

파캉!

족쇄가 금세 박살났다.

눈물을 훔치던 유진이 남성... 아니, 건혁을 지그시 바라봤다.

건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일어나지 않는 거지?

"그... 마... 마력전지의 에너지가 바닥나서...."

"아...."

의족이 움직이지 않던 건 그래서였나.

유진이 입술을 깨문 채 팔을 뻗자, 건혁은 두 손으로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생존자는...."

"모... 모르겠어요. 아까까지는...."

유진의 떨리는 목소리에 건혁이 잠시 두 눈을 감았다.

이내, 생각을 마친 듯 입을 열었다.

"건물로 들어간다. 길을 열도록."

거인 골렘들이 상가 건물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콰앙!

엉망이 되어 버린 도로.

건혁은 거인 골렘의 무릎, 어깨, 머리를 짓밟고 건물의 3층 창문으로 뛰어 들어갔다.

챙그랑!

창문을 깨고 복도에 들어선 그는 우측의 리자드맨들을 보고 작게 혀를 찼다.

 

제83화

83화. 구조 (4)

-캬아아악!

"기사단장 골렘 소환."

5기의 기사단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리해."

골렘들은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리자드맨들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서걱! 촤아아악!

리자드맨이 바닥에 쓰러졌다.

건혁은 골렘의 뒤를 따라 달렸다.

타다다닷!

"어... 어디로...."

"상공에서 헬기가 대기 중입니다. 옥상에서 신호를 보내면 내려올 겁니다."

그는 계단을 오르면서 리자드맨들을 걷어찼다.

B랭크 마수를 이토록 가볍게 농락하다니.

유진은 긴장되던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두 눈을 감았다.

'따뜻해.'

건혁의 품속은 너무나도 안심되었다.

옥상으로 올라온 건혁은 그녀를 잠시 바닥에 내려 두고, 손전등으로 상공에 신호를 보냈다.

점차 고도를 낮추기 시작한 헬기.

건혁은 유진을 먼저 태운 다음 올라탔다.

"골렘들은...."

"도곡동 일대에서 싸우도록 내버려 두셔도 됩니다."

어차피 데려갈 수도 없다.

주변을 둘러보면 이유는 금세 깨달을 수 있겠지.

도로와 거리를 완벽히 차단한 리자드맨의 무리.

놈들을 뚫고 이동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헬기가 고도를 높이기 시작하자, 유진은 건혁의 품속에 안겨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군인은 무전기에 대고 작전 성공을 보고했다.

"자택까지 안전히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주소를...."

건혁이 집 주소를 알려 주었다.

몇 분 뒤, 헬기는 건혁과 유진을 수서동 아파트 옥상에 내려 주고, 고도를 높여 자리를 벗어났다.

"아...."

유진은 건혁의 품속에 안긴 채 멍하니 헬기를 바라봤다.

"들어가서 쉬도록 하죠."

"...네."

저벅, 저벅, 저벅.

비상계단을 내려가던 중 유진은 건혁의 뒤통수를 지그시 응시했다.

이 남자가 아니면 안 된다.

그래, 이 남자가 없으면 살 수 없을지도 몰라.

건혁의 존재는 그녀의 마음속에 완전히 자리를 잡아 버렸다.

내년이면 그도 마흔이지만, 자신 역시 서른넷이 된다.

여섯 살 차이면 나쁘다고 보긴 어렵겠지.

띠동갑도 서로 좋다며 결혼까지 하지 않던가.

그녀가 무언가 각오라도 한 듯 입을 떨어트리려 했다.

그러나....

"돌아오셨습니까."

기가 막힌 타이밍에 두 경호원이 건혁에게 다가왔다.

"교대는...."

"오늘내일은 저희 둘이 지키고 있겠습니다."

"힘드시면 말씀하세요. 남은 침실은 없지만 거실에 들어와서 쉬셔도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건혁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빠!"

현관문으로 달려오는 수영.

그녀는 부친의 품에 안긴 유진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수영이 멍하니 서 있자, 건혁은 쓴웃음과 함께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갔다.

이어, 게스트룸에 가득 채워 둔 골렘들을 빼냈다.

"으음, 완전 냉장고네."

이런 곳에서 유진을 재웠다간 감기에 걸리게 할 것이다.

결국, 건혁은 그녀를 자신의 방에 눕혀 두고 거실로 나왔다.

부엌에서 생수를 한 잔 들이켜고, 소파에 앉아 고개를 젖힌 건혁.

수영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유진 언니한테... 무슨 일 있었어?"

"응,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었어. 수영이도 얼른 방에 들어가서 자."

"아빠는?"

"아빠는... 거실에서 자야지."

"그냥 내 침대에서 같이...."

건혁은 작게 웃으면서 수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축구 좀 보다가 자려고 그래."

"...응."

수영이 방으로 들어갔다.

건혁은 TV를 켜고 소리를 줄인 채 해외 축구 채널을 틀었다.

각성자들을 축구 선수로 기용하여 운영하는 세계적인 축구 리그.

움직임과 몸싸움이 평범한 축구와는 격이 달랐다.

경기를 멍하니 바라보던 건혁은 스마트폰을 오른손에 쥐었다.

SNS 계정으로 보내오는 수많은 메신저들.

그중에는 연락이 끊어진 사촌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연락을 끊은 사람들이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고...."

사촌들이 보내온 메시지 내용은 정말로 다양했다.

근무하던 중소기업에서 정리 해고를 당한 고모부.

공장에서 근무하다 다리가 절단된 사촌 형.

결혼 사기를 당한 사촌 누나까지.

유일하게 경제 활동을 하던 고모는 근무처가 레이드에 휘말리면서 해고를 당했다는 모양이다.

그 외 대학교를 다니던 사촌 동생이 휴학을 신청하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는 모양이다.

"아내가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 얼굴 한번 비추지 않았던 사람들이 구구절절하게도 써 놨네."

건혁은 피식 웃으면서 SNS를 닫고, 인터넷으로 구룡산 레이드에 대한 소식을 찾아봤다.

"허, 장난이 아니네."

구룡산 게이트는 해외에서까지 주목받는 대사건이 되었다.

개발 도상국에서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선 세계 최초의 국가이자, 군사력과 경제력을 겸비한 대한민국.

그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S랭크 게이트가 폭발해 어마어마한 인명 및 재산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심지어 현재 진행형이다.

"사상자 17만 중 사망자만 5만을 넘고, 재산 피해액은 추산이 불가능할 정도... 2차 폭발로 방어선이 뚫렸다, 라...."

이걸 도대체 어떻게 막아 내야 할까?

* * *

건혁이 거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수마에 빠진 그 시각.

바깥에서 마수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건혁은 새벽 4시경 잠에서 깨 테라스로 달려갔다.

"하아, 정말 폭탄이라도 떨어트리는 게 낫지 않나?"

도시 한복판에 우글우글거리는 마수들.

정말 끔찍한 광경이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건혁은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아침 뉴스에서는 아파치, 코브라 등의 전투 헬기와 K1 전차 및 박격포와 같은 현대 병기가 모습을 드러내며, D~C랭크의 마수들을 전멸시키는 모습이 보도됐다.

또한, 공원과 산속의 마수들을 향해 폭격을 가하며,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각종 영상과 자료를 언론 매체에 공유했다.

"대박."

식기를 준비하던 건혁은 TV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저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확실히 현대 병기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단지, 적들의 숫자가 너무나도 많을 뿐.

다음 뉴스로는 통제 구역에서 생존자 중 50% 이상을 구조했다는 소식이 전달되었다.

건물 옥상에서 생존자들을 구조하는 수많은 헬기들.

"대단하네."

구조된 생존자들은 대부분 임시 대피소에서 생활하는 중이라고 한다.

잠시 뒤, 유진과 수영이 방에서 나왔다.

"죄송해요. 제가 방을 뺏어서...."

"괜찮아요."

"그 마력전지도..."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마력전지는 여유 있을 때마다 쌓아두거든요. 그보다 얼른 앉아서 아침부터 드세요. 수영이도 아침 먹어야지."

된장국과 각종 반찬이 차려진 식탁.

수영은 화장실에서 세수를 한 다음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거실 TV를 끄고 주방 TV를 켠 건혁.

현대 병기로 마수를 토벌하는 영상이 다시 한번 보도됐다.

"...대단하네요."

"예, 확실히 D~C랭크 마수를 상대로는 현대 병기가 효과적이더라고요. 구조 작업도...."

말하기 무섭게 생존자들이 군용 헬기에 탑승하는 장면이 띄워졌다.

"오늘도 나가시는 건가요?"

"그래야죠. 골렘들은 제 방으로 옮겨 둘 테니, 유진 씨는 게스트룸에서 쉬세요. 헌터 협회에서도 아마 조치를 해 주실 겁니다."

유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오늘부터는 수서동 인근에서 활동합니다. 혹시 모르니 말해 둘게요."

식사를 마친 건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기를 정리했다.

이어 양치를 한 후, 수영에게 다가가 시선을 마주쳤다.

"무슨 일 생기면 곧바로 아빠한테 전화해. 알겠지?"

"응."

건혁은 가벼운 차림으로 현관문을 나섰다.

그리고 비상계단을 내려가던 도중 오크의 무리와 조우했다.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오크들.

파각!

놈들은 건혁의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1층으로 내려온 건혁은 앞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겼다.

-취익!

하룻밤 사이 지상 주차장에는 대규모 야영지가 만들어졌다.

참나,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오네.

"가 봐."

건혁을 뒤따르던 붉은 망토의 골렘들이 다리를 움직였다.

야영지를 만든 건 조금 전에 조우한 C랭크 마수, 오크다.

-취이익!?

서걱!

놈들은 발악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쓰러졌다.

애초에 상대하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다.

A랭크도 아닌 C랭크 마수가 어딜....

건혁은 10기의 기사단장 골렘을 지상에 배치시킨 다음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여기까지 들어온 건가.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스릉.

허리께에서 도검을 뽑은 건혁.

서걱!

다섯 마리의 오크가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취익?!

당혹스러움이 묻어나는 울음소리.

건혁의 모습을 포착하지 못한 듯하다.

이내, 열 마리의 오크가 바닥에 쓰러졌다.

-취이익! 취익!

딸칵.

형광등이 꺼졌다.

그에 오크들의 공포는 더욱 짙어졌다.

"전부... 죽여."

건혁의 작은 중얼거림과 동시에 사방에서 오크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형광등에 불빛이 들어올 무렵.

오크들은 모두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후우, 체력 소모가 장난 아니네."

건혁은 살짝 숨을 고르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랜만에 최대로 끌어올린 민첩.

속도를 높이면 높일수록 체력 소모는 늘어났다.

저벅, 저벅, 저벅.

어느새 건혁의 곁으로 푸른 망토의 골렘들이 다가왔다.

"밖으로 나가서 마수들이나 처리해."

골렘들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지하 주차장 출입구로 달려갔다.

드르륵.

건혁은 출입구 쪽에 플라스틱 의자를 가져다 두고,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스마트폰을 보며 골렘들을 소환했다.

그렇게 하나의 부대가 편성되면 곧바로 바깥으로 내보냈다.

그 시각, 피로에 못 이겨 자리에 주저앉은 두 경호원.

수영은 슬그머니 현관문을 열어 두 사람을 불렀다.

"아빠가 들어와서 쉬어도 괜찮대요. 거실에 이불 깔아 뒀으니 어서 들어와요. 아, 배고프시면...."

두 여성 경호원은 눈치를 살피며 '실례하겠습니다.'라는 한마디와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수영이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식탁에 내려 두었는데.

이어, 모락모락 새하얀 김이 나는 쌀밥을 밥그릇에 푸고, 식기까지 준비해 둔 다음 두 경호원을 의자에 앉혔다.

수영의 호의에 두 사람은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식사를 시작했다.

"된장국도 데워 뒀어요."

따뜻한 된장국에 밥을 말아 먹은 두 경호원.

집밥이 이렇게나 맛있었다니.

말 그대로 꿀맛이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수영이 꺼내 준 새 칫솔로 이를 닦은 뒤, 거실에 펼쳐진 이불에 누워 잠시 숙면을 취했다.

"이리로 와."

수영은 건혁의 방에서 두 골렘을 데리고 나와 현관문 앞에 세웠다.

"마수들이 나타나면 전부 쓰러트려 줘."

두 골렘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럼, 수고해."

현관으로 들어선 그녀는 침실로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그때, 스마트폰이 진동을 울렸다.

부친으로부터 온 문자다.

[마수들 한번 쓰러트려 볼래?]

수영은 화들짝 놀랐다.

지금껏 금지해 온 마수 토벌을... 드디어 허락해 주려는 건가?

수영이 '응!'이라는 짧은 답변을 보내자, '골렘을 한 기 보낼 테니까,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라는 문자가 도착했다.

수영은 옷을 챙겨 입고 신발을 신었다.

"어디 가니?"

유진의 물음에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래요."

"언니가 같이...."

"골렘을 보내 준다고 했어요."

"그래도 따라갈게."

"네."

유진은 잠든 경호원들을 깨웠다.

비몽사몽 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거리는 두 사람.

"건혁 씨가 지하 주차장에 계신다고 해서 저희도 잠깐 내려갔다가 올라올게요."

"그... 그런 거라면 저희도...."

"아니에요. 건혁 씨가 골렘을 올려 보내 준다고 말했어요. 현관문이랑 집 안에 골렘이 대기 중이니 편히 주무셔도 괜찮아요. 깨워서 죄송해요."

"아... 아닙니다."

"그럼, 저희는 내려갔다 올게요."

수영과 유진이 현관문을 나서자, 두 경호원은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왔다!"

비상계단으로 10층까지 올라온 기사단장 골렘.

수영은 골렘의 품에 안긴 채 계단을 내려갔다.

 

제84화

84화. 구룡산 게이트 (1)

-취이익!

2층까지 내려오자 오크의 울음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니, 울음소리라기보다는 비명 소리라고 해야 되나?

두 사람은 지하 주차장에 내려온 순간, 기묘한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기둥과 바닥을 잔뜩 적신 붉은 핏물.

"피 냄새...."

골렘의 발걸음은 주차장의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건혁은 두 사람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진 씨도 오셨네요."

"네, 혹시 몰라서... 그런데 수영이는 왜 내려오라고 한 건가요?"

"아, 말씀을... 안 드렸나 보구나."

수영이 아차 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건혁은 작게 웃으며 유진을 바라봤다.

"내후년이면 수영이도 헌터증을 발급받게 될 겁니다. 그러니 이참에 마수를 한번 토벌하게 해 보려고요."

"아직 15살이에요. 수성고등학교에서도 실전 훈련은 따로 진행하니...."

"수성고등학교에 진학한 학생들 중 10% 정도는 14~16살에 부모를 따라 실전 경험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예, 저도 유진 씨와 똑같습니다. 수영이에겐 아직 이르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수영이 본인의 생각은 다르더군요."

유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수영을 바라봤다.

눈동자를 빛내며 오른손에 빙마궁을 쥔 수영.

그녀는 이미 준비를 마쳤다는 표정을 지었다.

-취익!

출입구 방향에서 오크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골렘에게 두 팔이 포박된 다섯 마리의 오크.

"한번 맞춰 봐. 안 되겠다 싶으면 곧바로 말하고."

"응."

다섯 오크의 포박이 풀렸다.

동시에 뒤로 물러난 골렘들.

오크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경계하듯 울음소리를 냈다.

끼릭, 퉁!

수영의 화살이 오크에게 날아갔다.

푸욱!

일격으로 꿰뚫은 심장.

수영의 선제공격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오크들은 동료의 죽음에 분노한 듯 수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에 비해 침착한 얼굴로 세 개의 화살을 시위에 걸친 그녀.

끼릭, 투투퉁!

세 화살이 정확히 오크들의 심장에 꽂혔다.

순식간에 셋이 당한 것이다.

살아남은 오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자신들의 울음소리에도 덤덤한 수영의 얼굴.

그녀에게서 공포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내, 오크는 깨달았다.

상대와의 격차를.

심지어 자신은 무기도 없지 않은가.

-취익... 취... 취익!

오크는 등을 보이며 출입구로 달아나려 했다.

푸욱!

녀석의 후두부를 저격한 수영.

그녀에게 자비란 느껴지지 않았다.

첫 토벌임에도 불구하고, 수영의 얼굴은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정말로 15살이 맞는 걸까?

유진은 침을 삼키면서 수영을 바라봤다.

"괜찮아? 속이 안 좋다거나...."

"괜찮아요. 마수가 죽는 광경은 인터넷에서도 몇 번이나 찾아봤었거든요. 그리고 화살을 쏜 것뿐이라서 그런지... 기분이 살짝 미묘하네요."

수영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답했다.

유진은 미간을 좁히며 걱정을 감추지 못했는데.

건혁의 경우에는 작게 웃으며 수영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그래, 고생했어. 해체 작업은 내년에 따로 가르쳐 줄게."

"...벌써 끝이야?"

"오늘은 이 정도만 해도...."

"더 할 수 있어! 마력도 충분하고, 체력도 충분해! 딱히 구역질이 나올 것 같지도 않고!"

건혁은 자신의 허리에 달라붙어 떼를 쓰는 딸을 보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몇 마리 더 데려와 줄게."

수영이 밝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1~2시간 동안 37마리의 오크 전사를 토벌해 냈다.

마치 전성기를 되찾아 가려는 듯한 익숙한 움직임.

신장 2m에 묵직한 근육을 지닌 녹색 피부의 마수.

오크는 결코 약하지 않다.

'이게... 가능한 일이야?'

유진은 눈을 뜨고도 믿을 수 없었다.

고작 15살의 중학생이 C랭크 마수인 오크를 쓰러트린다고?

시위를 당기는 근력.

상대방의 움직임을 좇는 동체 시력.

움직이는 상대를 정확히 맞추는 저격술까지.

물론, 헌터 훈련장에서 수영의 능력을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실전에서 그것을 정확히 적용시킨다는 것은 정말로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마력은 어때?"

"충분히 남아 있어."

"팔이랑 어깨는?"

"괜찮아."

"그럼, 계속한다?"

"응."

건혁과 수영의 대화에 유진이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부녀는 부녀라는 건가?

잠시 뒤, 다섯 마리의 오크 전사들이 포박된 채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조금 전과는 다르다.

골렘들은 오크들을 풀어 준 다음 무기와 방패를 바닥에 던져두었다.

"할 수 있지?"

수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겁지겁 방패와 검을 집어 든 오크 전사들.

놈들이 골렘들을 경계하던 그때.

수영이 화살을 쐈다.

푸욱!

-취이익?!

고통으로 가득한 울음소리.

어깨를 꿰뚫린 녀석이 검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이내, 오크들의 적의가 수영에게 향했다.

-취익! 취이익!

수영에게 달려들기 시작한 오크 전사들.

역시 짐승은 짐승이구나.

골렘에게 대놓고 등을 보일 줄이야.

끼릭, 퉁!

화살이 방패를 꿰뚫었다.

손바닥과 함께 말이다.

-취이익!

방패가 목 밑으로 내려간 순간.

푸욱!

얼음 화살이 녀석의 목젖을 꿰뚫었다.

그렇게 단말마와 함께 쓰러진 녀석.

나머지 넷 역시 비슷한 과정을 겪으며 숨을 거뒀다.

"후우, 화살을 2~3배 정도 많이 사용하게 되네."

수영의 중얼거림에 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비를 갖춘 마수를 상대하는 것은 체력 및 마력 소모에도 관련이 된다.

1회차를 경험한 수영이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겠지.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에? 아... 아직 더 할 수 있는데...."

"이제 점심 먹어야지. 골렘도... 이 정도면 충분하고."

병사 골렘 50기, 기사 골렘 200기, 정예 기사 골렘 35기, 기사단장 골렘 16기.

총 10개의 부대가 편성돼 수서동 각지에서 마수를 토벌하는 중이다.

또, B~A랭크 마석을 병사 골렘의 배낭에 회수하고, 회수된 마석은 깨끗하게 씻어 다용도실에 보관했다.

그렇게 구룡산 S등급 게이트가 폭발하고 12일이 지났을 무렵.

마침내 반격의 봉화가 피어올랐다.

방어선이 몇 차례 밀려나며 20만 이상의 사상자를 만들어야 했으나, 결과적으로 레이드는 최종 진압에 들어가게 되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대참사.

"하, 소란이 끊이질 않네."

건혁은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해외에서 대한민국을 집중 보도할 때가 바로 엊그제다.

그런데, 지금은 중국 톈진에 대해 집중 보도하고 있다.

불과 이틀 전, 톈진에서 S등급 게이트가 폭발해 1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모양이다.

"...역시, 중국은 중국이라는 건가?"

인구가 많은 만큼 헌터의 숫자도 어마어마하다.

심지어 대규모 폭격과 함께 수많은 병기와 30만의 중국군이 투입되면서 레이드는 불과 닷새 만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부상자 52만, 사망자 21만이라는 참혹한 결과로 막을 내린 톈진 S등급 레이드.

중국 정부는 폭격에 의해 재산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피해를 보상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폭격에 의한 인명 피해는 없었다고 못을 박았는데.

외신들은 폭격에 의한 사망자 및 부상자가 존재했다며 게시글 및 영상 자료들을 인용하여 중국 정부의 폭격에 비난을 가했다.

"뭐, 우리가 중국에 신경을 쓸 처지는 아니지."

건혁은 창밖을 내다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량들을 견인해 가는 폐차 업체.

지하 시설 및 건물 등의 공사가 시작되고, 도로가 새롭게 깔리기 시작했다.

<재난 지원금의 액수와 기준을 산정한 정부.>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소정의 피해 보상을 해 주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보상 금액이 너무 적다며 불만을 표출하며 시위를 일으켰다.

수억 원의 피해를 받고도 1~2천만 원밖에 지급받지 못한다니!

그러나 레이드는 일종의 자연재해다.

국가가 모든 것을 책임지기도 어렵거니와 예산 역시 촉박한 실정이기에 재난 지원금의 액수를 늘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때, 대기업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백억 원대의 기부를 시작했다.

이어, 연예인, 가수, 기업인, 정치인, 헌터들 역시 상당액을 기부하면서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문구를 SNS에 남겨 주목을 받았는데.

건혁 역시 길드원들로부터 현금을 걷어 '흑월'이란 이름으로 100억 원을 기부했다.

"...우리 10만 원씩 걷지 않았었냐?"

"우리 팀장님은 50만 원을 내셨어."

"아무튼, 우리 팀만 400만 원 정도일 텐데... 어떻게 100억이 되는 거지?"

"제1팀에서 2~3억 정도 내고, 제2팀에서 4~5천만 원 정도 냈다고 했었어. 나머지 팀은 우리랑 거의 비슷하고."

"그럼, 마스터 혼자서 95~96억 원을 기부하셨다는 말이네?"

"...그렇게 되겠지?"

길드원들은 건혁의 배포에 작게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또, 박건혁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수많은 팬들은 100억 원의 기부액에 감탄사를 터트렸다.

거대 길드의 기부액과 비슷한 수준의 금액.

유명 스트리머들은 흑월의 내부 구조를 설명하면서 기부액의 9할이 박건혁의 주머니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았고, 그에 박건혁을 응원하던 시청자들은 환호의 댓글을 달았다.

"설마, 이걸 주제로 영상을 만들 줄이야."

건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10억만 기부했었다간 욕을 바가지로 먹었겠어."

댓글의 반응은 정말로 쉽게 뒤집힌다.

범행 사실이 정확히 입증되지 않았음에도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토해 내다가도 무죄가 밝혀지고 진범이 나타났을 때는 위로와 격려 등의 댓글을 남긴다.

다급히 수습하듯이 말이다.

때문에 건혁은 가급적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SNS와 인터넷에서 퍼져 나간 자신의 사진.

"미치겠네."

얼굴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사진이다.

건혁은 '박건혁 팬클럽'이라는 문구를 보고 해당 사이트에 접속했다.

회원 수는 3,817명.

다른 헌터들의 팬클럽과 비교하면 적은 숫자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복구 작업이 진행되던 도중 흑월도 활동을 재개했다.

그리고 헌터 협회에선 동원된 헌터들에게 각자 보수를 지급해 주었다.

"...꽤 많이 들어왔네."

만티코어 및 B~A랭크 마수의 사체와 D~C랭크 마수들의 부산물들.

헌터 협회에서는 170억 원 정도를 건혁의 통장에 입금시켜 주었다.

"수성경매장이라...."

적법한 규정에 따라 설립된 수성그룹의 경매장이다.

건혁은 홈페이지에 접속해 회원 가입 및 회원증 발급을 신청했다.

헌터 협회에서 구매가 불가능한 1~2급 포션을 구매하기 위해.

물론, 왼팔을 재생시키기 위함은 아니다.

수영의 위험에 대비할 뿐.

"흐음...."

그는 홈페이지에 등록된 경매 내역들을 살펴봤다.

"...비싸네."

2급 포션은 그나마 1~2억 원대에 최종 낙찰이 된다는 모양이다.

레이드 발생 직후에는 금액이 4~5배까지 뛰었고, 1급 포션의 경우에는 시작가가 100억 원, 최종 낙찰가는 최고 1,100~1,200억 원 정도라고 한다.

왜 이렇게까지 큰 차이가 나는 걸까?

이유는 간단했다.

사지가 절단되는 경우.

치료가 불가능한 희귀병에 걸리는 경우.

전신에 화상을 입는 경우.

눈이 실명되는 경우까지.

1급 포션은 그 모든 경우를 단숨에 해결해 주는 이른바 만병통치약이다.

물론, 2~3급 포션 역시 중상 및 암을 치료하는 데 사용된다.

그러나 용도 자체가 다르다.

"VIP 경매는... 매년 2번 정도 실시되는 건가."

봄과 가을에 진행되는 VIP 경매.

최소 수십억 원 가치의 상품이 출품되는 경매다.

2급 포션은 일반 경매로 구매할 수 있으니, VIP 경매가 열리기 전에 마련해 두는 게 좋겠지.

건혁은 곧바로 일반 경매의 일정을 알아봤다.

 

제85화

85화. 구룡산 게이트 (2)

"...매달 말에 열리네."

이달 말은 구룡산 게이트 때문에 취소된 모양이다.

"다음 달부터는 정상적으로 진행하니... 일단, 번호표부터 받아 둬야겠어."

건혁은 홈페이지에서 번호표를 발급받았다.

그 순간, 다음 달 거래되는 경매 상품의 목록을 확인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아르베트와 아르늄과 같은 1~2급 광석.

게이트에서 발견된 수많은 유적.

오우거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방어구.

라이오스의 뼈로 만들어진 무기.

평범한 인간을 각성시켜 주는 각성제.

전당포에서 거래되는 예술품까지.

정말 다양한 물품들이 등록되어 있었다.

"...각성제랑 포션을 사 두자."

스테이터스는 다른 헌터들의 능력과 다르다.

각성제를 통해 새로운 스킬을 얻을 수 있다면 시도할 가치는 있다고 봐야겠지.

아무런 효과가 없다면 그냥 10억 원을 헛돈으로 날려 버리는 셈이고.

건혁은 경매장에 가기 전까지 휴식을 취했다.

물론, 헌터로서의 박건혁이 쉬는 것뿐.

주부로서의 박건혁은 여전히 계속됐고, 수영의 학교생활을 듣거나 성적표 등을 살펴보면서 집안일에 전념하는 시간을 보냈다.

* * *

어느 날, 저녁을 먹던 수영이 건혁을 지그시 바라봤다.

"아빠."

"응?"

"1급 포션은... 안 사? 돈은 충분하잖아."

건혁은 왼팔을 만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에 도움도 되고, 익숙해지기도 해서... 한동안은 괜찮을 거 같아."

육체 강화 능력자라면 모를까.

빙마검과 골렘을 소환하는 자신에게 지금 당장 왼손은 필요하지 않았다.

건혁의 대답에 수영은 '그렇구나.'라고 작게 대답하며 삼겹살을 우물우물 씹었다.

그러면서도 슬쩍 건혁의 왼손을 바라봤다.

"...정말로 괜찮은 거지?"

"그래, 오히려 요즘에는 너무 익숙해진 게 아닌가 싶어졌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밥부터 먹어. 아빠가 참외 깎아 줄 테니까."

"응."

건혁은 밥그릇과 식기를 정리한 다음 과도와 참외, 그리고 접시를 가져왔다.

평화로 찌든 생활.

바깥은 분노와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했다.

그런 와중에도 복구 작업은 서서히 진행됐고, 세실리아는 아랫집으로 이사를 왔다.

"이번처럼 마스터가 나가야 할 때는 제가 수영이를 돌봐 줄게요."

"뭐, 그래 준다면 고맙지."

물론, 이사를 온 이후 세실리아는 빈번히 건혁의 집을 찾아왔다.

'덕분에 수영이를 부탁할 수 있었으니....'

난생처음으로 방문하게 된 경매장.

그는 회원증과 함께 자택에서 프린트한 출입증을 경매장 직원에게 보여 주었다.

이내, 예약했던 번호표를 건네받고, 경매장으로 들어가 해당 번호에 맞는 좌석에 착석했다.

무슨 영화관에 있는 기분이네.

경매장에 들어오는 사람들 중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들이 상당수 발견됐다.

아니, 헌터뿐만이 아니다.

뉴스에서 본 적 있는 기업인들까지 얼굴을 비추었다.

잠시 뒤, 단상 위로 사회자와 유리관에 담긴 상품이 올라왔다.

"그럼, 첫 번째 경매품입니다. 일반인을 각성자로 만들어 주는 각성제! 1억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억이라는 금액에 모두가 팔걸이의 버튼을 눌렀다.

모든 좌석을 나타내는 스크린에서 수십 개의 푸른빛이 들어왔다.

버튼을 누른 사람이 몇 번 고객인지,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건혁은 자신의 번호인 173번에 불빛이 들어왔음을 확인했다.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거구나.'

사회자는 천만 원 단위로 금액을 높여 갔다.

3억대부터는 억 단위로 올라갔고, 금액이 올라갈 때마다 스크린의 불빛이 조금씩 사라졌다.

건혁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계속 버튼을 눌렀다.

스크린에 자신의 번호만 남을 때까지 말이다.

땅! 땅! 땅!

"네, 11억 3천만 원에 173번분께서 낙찰되셨습니다!"

두 번째부터 열 번째 경매품 역시 모두 각성제로, 해당 물건들은 10억 8~9천만 원 정도의 선에서 낙찰되었다.

4~5천만 원의 손해에도 건혁은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경험'에 투자했다는 식으로 생각을 접은 것이다.

이어, 게이트에서 발견된 희귀한 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저런 걸 낙찰받으려는 사람도 있구나. 수집하려는 건가?'

수집은 부자들의 취미 중 하나다.

더욱이 '희귀'하다는 것이라면 더더욱.

지루한 얼굴로 경매를 지켜보던 건혁은 이내 자세를 바로잡았다.

'드디어....'

사회자 옆으로 작은 유리병이 대령됐다.

3급 포션의 유리병과 달리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유리병이다.

건혁은 경매가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버튼을 눌렀다.

낙찰가는 2억 3,000만 원.

두 번째 2급 포션은 2억 1,500만 원에 낙찰을 받았다.

구룡산 레이드 때문일까?

낙찰가가 평소의 2배까지 뛰어올랐다.

'뭐, 받으면 장땡이지.'

나머지 세 개 역시 2억대로 낙찰을 받은 건혁.

누군가 이빨을 간 것 같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겠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매장을 빠져나갔다.

목적은 모두 이루었으니까.

뚜벅, 뚜벅, 뚜벅.

건혁은 번호표를 가지고 경매품을 받으러 찾아갔다.

"173번 고객님이시군요. 먼저, 결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체크 카드를 건네주었다.

단번에 26억 8천만 원이 통장에서 빠져나갔다.

90억대의 기부를 한 탓일까?

아니면 통장에 든 현금 덕분일지도.

26억이라는 거액이 통장에서 빠져나갔음에도 건혁은 손가락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여기 있습니다."

상자에 고이 포장된 물품.

건혁은 물건을 확인하고 곧장 경매장 건물을 빠져나갔다.

덜컥!

새로이 마련한 검은 세단.

이전에 타던 차량은 오우거에게 짓밟혀 폐차하게 되었다.

경호 차량의 경우에는 수리가 가능한 수준이었으나, 건혁은 해당 차량들을 모두 저렴한 금액에 팔아 치웠다.

그리고 새로운 차량을 구입해 가까운 유료 주차장에 대금을 지불하고 주차해 두었다.

운전석에 앉은 건혁은 작은 기대감을 갖고 각성제를 들이켰다.

꿀꺽, 꿀꺽.

그 순간, 귓가에 알림음이 들려왔다.

정말로 무언가 변화가 있는 건가?!

그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알림창을 확인했다.

띠링!

[891,823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건혁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새로운 스킬을 얻을 순 없었지만,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중대한 발견이었다.

각성제로 얻은 경험치량은 경험치 총량의 10% 정도.

나쁘지 않은 수확이다.

참고로 스킬 경험치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혹시 몰라서 찾아봐 둔 건데... 올해는 전국을 돌아다녀야겠어."

대한민국에는 수성경매장 외에도 11개의 합법 경매장이 존재한다.

건혁은 모든 경매장 홈페이지에서 회원 가입을 하고 회원증 발급을 신청했다.

특별한 전투를 치르지 않고도 상당량의 경험치를 확보할 수단이 생긴 것이다.

이걸 쉬이 내버려 둘 순 없지.

이후 건혁은 매달 10회씩 게이트에 드나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2급 포션과 각성제를 낙찰받았다.

그리고....

2022년 10월 25일.

수성경매장의 VIP 경매가 인터넷 기사로 작성됐다.

매년 화제가 되는 1급 포션이 대한민국으로 들어와 1,480억 원에 낙찰된 것이다.

낙찰을 받은 사람이 비공개로 처리되자, 모두가 다양한 추측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1월 1일 자정, 건혁의 서열이 새롭게 갱신됐다.

"아, 17위...."

3개월 전, 61위까지 떨어졌던 그는 다시 17위까지 치솟았다.

59위로 상승했을 때보다 더욱 뜨거워진 분위기다.

대한민국의 짐꾼들은 밑바닥에서부터 최정상에 오른 박건혁을 롤 모델로 삼고 가슴에 불꽃을 일으키며 헌터 훈련장을 찾아갔다.

얼굴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박건혁이 대한민국에 큰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한편, 붕괴되었던 수성중학교는 비대면 강의를 통해 한 해를 보내고, 2023년 새 건물로 단장하여 신입생들을 받아들였다.

중학교 3학년이 된 수영은 최고 학년으로서 모든 학생들로부터 우상적인 존재가 되었다.

"저 언니가 흑월의...."

"듣기론 특수 능력을 발현했다고...."

"성적도 전교 1등이라면서? 얼굴도 예쁘고, 특수 능력도 각성하고, 거기에 아빠가 그 박건혁 헌터라니...."

키 165cm, 몸무게 49kg, 아이돌 뺨치는 외모, 우수한 성적, 특수 능력 발현, 마지막으로 집안 배경도 좋다.

"게다가 친구가 유민아 선배님이랑 이시현 선배님이잖아."

"...말 그대로 상류층이네."

수영은 주변의 시선에 반응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부러움과 질시는 1회차에서 몇 번이나 질리도록 경험했다.

아이들의 질투 정도는 가볍게 흘려 넘겨도 괜찮겠지.

딱히 건드는 것도 아니니까.

아니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고개를 '홱!' 돌려 버린 몇몇 학생들.

아마 자신의 부친의 영향일 것이다.

'지옥 같았던 학교가... 조금은 괜찮게 느껴지네.'

참고로 수성중학교의 교사들은 수영을 어렵게 대하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전 교감이 저지른 만행.

수영을 꼼짝하지 못하게 포박하고, 일방적인 구타를 당하도록 한 교감의 만행이 교사들의 행동을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이제 곧 졸업이네."

"내년이면 우리도 고등학생이야! 헌터증도 발급받을 수 있고!"

민아의 활기찬 목소리에 옆에 서 있던 시현이 팔짱을 낀 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성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실전도 경험하게 된다던데...."

"아, 그럼 우리도 마수를 토벌해 보게 되는구나. 조금 긴장되네."

활기찬 목소리가 축 가라앉았다.

그에 수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이미 구룡산 레이드를 통해 수차례 실전을 경험했다.

부친이 생포해 온 1백여 마리의 오크로 말이다.

게다가 1회차에서 쓰러트린 마수만 수십만을 가볍게 넘길 것이다.

지금 당장 C등급 게이트에 들어가도 문제가 없다는 의미다.

수영은 스마트폰을 보던 도중 작게 혀를 찼다.

'핵을... 아직도 못 찾은 건가?'

구룡산 게이트는 여전히 파괴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들이 투입되었음에도 말이다.

헌터 협회는 해당 게이트에서 수많은 S랭크 마수가 발견되었음을 공표했다.

인근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었으나, 다행히도 1년간 3차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폭격에 무너져 버린 산.

게이트는 허공에 띄워진 상태다.

정부는 게이트 주변에 1~200m 높이의 콘크리트 벽을 세웠는데.

게이트의 지름이 5~60m나 된 탓에 벽의 높이는 수십 미터나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해당 벽을 마력으로 코팅하여 A랭크 마수의 공격에도 끄떡없다면서 국민들의 마음을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아...."

"뭐 봐?"

민아가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구룡산 레이드... 검신(劍神) 정윤호까지 움직였는데도 핵을 못 부쉈다며?"

"응, 필드도 넓지만 S랭크 마수가 너무 많이 출몰한다는 모양이야."

"...S랭크라고 하니까 갑자기 만티코어가 떠오르네."

시현의 말에 민아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때 수영이 아빠 엄청 멋있었는데... 아 참, 나도 저번 달에 팬 카페에 가입했어."

"팬 카페... 거기 회원 많아?"

"5만 명 정도는 되는 거 같았어. 운영자가 SNS에서 떠도는 사진을 가져와서 회원 수가 엄청 늘어났거든. 자, 봐봐."

민아가 스마트폰을 보여 주었다.

팬 카페에는 건혁의 사진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던 건혁의 희망과 다르게 SNS를 통한 확산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두 손을 들고 투항한 건혁.

팬 카페는 그동안 사진과 영상을 모자이크로 덮었다.

박건혁의 팬으로서 그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말자는 식으로 카페를 운영해 온 것이다.

그리고 건혁의 허가가 떨어진 순간, 팬 카페 운영진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제86화

86화. 구룡산 게이트 (3)

"이 영상도 모자이크가 사라진 상태로 올라왔어."

송파구 레이드 때 촬영된 영상이다.

골렘들을 지휘하고 화려한 기술을 펼치는 모습이 그대로 노출됐다.

수영은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영상은 나도 SNS에서 봤었어."

"진짜, 엄청 멋있어!"

아이돌에 빠진 광팬처럼 민아가 전율에 떨었다.

"나도 흑월에 들어갈까? 그쪽은 짐꾼들이랑 사이도 좋다고 하잖아."

"부모님이 반대하지 않으실까?"

민아는 팔짱을 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허락은 해 줄 수도 있다.

피눈물을 흘리면서 말이지.

수영은 작게 웃으며 제안을 꺼냈다.

"길드에 들어가는 것보다 우리가 길드를 만드는 건 어때?"

"...우리가?"

"우리 셋 다 특수 능력을 발현한 상태잖아. 그러니, 수성고등학교에서 함께할 동료를 모으는 거야."

"우리가 길드의 간부라는 의미지?"

민아의 밝은 얼굴에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 역시 반대하진 않았다.

단지, 부모님이 허락해 줄지가 우려될 뿐.

학생들로 이루어진 길드가 게이트에 들어간다 생각해 보자.

보호자도 없이.

"어찌 됐든 부모님을 설득하는 게 먼저야. 수영이도 아빠가...."

"우리 아빠는 상관없다고 말씀하셨어. 오히려 지원까지 해 주시겠다고 하던데?"

서열 17위를 뒷배로 둔 길드.

그 누구도 함부로 건들지 못할 것이다.

든든한 지원군이라고 해야겠지.

시현은 턱을 매만지면서 눈가를 좁혔다.

"고구려에 들어가 봐야 어차피 제3군에서 말단으로 활동해야 돼. 게다가 연령과 경험을 고려해 뒤에서 구경이나 하라고 하겠지. 반대로 길드를 만들어 우리가 직접 게이트를 공략한다면... 위험하긴 하겠지만 실전 경험을 제대로 익힐 수 있을 거야."

"짐꾼도 따로 고용할 필요 없어. 아빠가 골렘들을 빌려주신다고 말씀해 주셨거든."

"그건... 좋네."

"거기다 A랭크 마수를 쓰러트렸던 붉은 망토의 골렘 알지?"

민아와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골렘을 보험으로 붙여 주신대."

"...짐꾼에 안전까지 확보하는 셈인가. 그 정도면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아."

시현의 긍정적인 반응에 수영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아 참, 마스터는...."

"네가 하는 게 낫지 않아?"

민아의 대답에 수영은 시현을 바라봤다.

"시현이가 더 어울릴 거 같은데...."

"아니, 나보다는 네가 더 어울려. 민아는 조금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시현의 뒷말에 민아가 어깨를 움찔거리며 크게 반응했다.

"내가 왜?!"

"이유는 네가 직접 생각해 봐."

민아와 시현이 평소처럼 투닥거렸다.

반면, 수영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스터로서의 자질이 과연 자신에게 존재할까?

1회차에선 홀로 게이트를 공략했다.

개인 활동이 익숙한 자신이 누군가의 리더가 된다고?

그런 의미에서 박건혁이란 존재는 정말로 거대하게 느껴졌다.

'짐꾼들을 길드원으로 받아들여 그들을 훌륭한 헌터로 성장시켰어. 또, 태형 오빠는 아빠에 대한 신뢰와 충성심으로 가득했었지. 다른 사람들 역시....'

태형에게 듣기로, 몇몇 길드원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길드원들이 건혁에게 깊은 은혜를 느끼고 있다고 한다.

'짐꾼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하나? 하지만 그들을 어엿한 헌터로 키우려면 시간이....'

수영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민아와 시현의 말다툼을 중재했다.

'어찌 됐든 수성고등학교에서 믿을 수 있고, 함께 싸울 수 있는 동료를 만들어야 돼.'

그녀가 눈빛에 힘을 주고 각오를 다졌다.

"아, 선생님 오셨다."

"나머지는 점심시간에 이야기하자."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성중학교가 4교시 수업을 시작할 시각.

건혁은 그동안 낙찰받은 각성제 및 각종 포션들을 하나씩 살펴봤다.

상자에 담겨 있는 것은 1급 포션 1개, 2급 포션 16개, 각성제 247개다.

꿀꺽, 꿀꺽.

건혁은 7~8개월 동안 모아 둔 각성제들을 하나씩 마시기 시작했다.

특별한 맛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띠링!

[889,945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경험치가 들어온 순간.

속이 살짝 울렁거렸다.

"흐읍!"

띠링!

[905,311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띠링!

[899,446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30개의 각성제를 마신 이후, 건혁은 눈살을 찡그리면서 생수를 들이켰다.

"...천천히 마시자."

당장 마셔야 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일주일간 영양제처럼 각성제를 복용한 건혁은 몇 차례 레벨을 올리면서 느긋하게 A등급 게이트를 들락거렸다.

2023년 9월 22일, 금요일.

마지막 각성제를 복용함과 동시에 또 한 번 레벨이 올랐다.

"정말... 딱이네."

한 달간의 토벌과 각성제의 복용으로 스테이터스 레벨이 마침내 250에 도달했다.

띠링!

[스킬을 선택해 주십시오.]

"역시, 뜨는구나."

얼마 만에 느껴 보는 흥분일까.

건혁은 곧바로 눈앞의 알림창을 바라봤다.

1. 아이스 스피어(Ice Spear) - 'Active Skill.'

2.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ning) - 'Active Skill.'

3. 파이어 버스트(Fire Burst) - 'Active Skill.'

4. 빙마궁(氷魔弓) - 'Active Skill.'

5. 어빌리티 포인트(AP)+1,000

6. 스킬 레벨+1

건혁은 네 번째 항목을 보고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빙마궁은 도대체 언제쯤 사라지는 걸까?"

이 정도면 누군가가 빙마궁을 고르라고 하는 게 아닌지 의심까지 든다.

건혁은 다섯 번째 항목에서 눈을 크게 떠야 했다.

스킬을 대신해 1,000의 어빌리티 포인트를 준다고?!

이어, 여섯 번째 항목에선 기겁하고 말았다.

스킬 레벨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단 말인가?

'얼음 골렘 소환'은 A랭크 마수를 마구잡이로 토벌하며 7~80%까지 채웠다.

반면, 빙마검은 정체 상태로, 레벨을 올리려면 적어도 1년은 더 걸리리라 예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선택 하나만으로 뒤집을 수 있다니!

1~4번 항목은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는 5~6번 항목을 보면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떻게 해야 되지?"

1,000AP를 얻는다면 마력을 대폭으로 늘려 단번에 골렘의 군세를 편성... 아니, 기사단장 골렘을 단숨에 50기 이상 소환할 수 있다.

기사 골렘의 경우에는 대략 320기 정도다.

단지, 마력 회복에 시간이 조금 걸릴 뿐.

"아니, 민첩과 근력에 투자하면... S랭크 마수도 토벌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건혁은 그대로 생각을 멈췄다.

"지금 당장 '얼음 골렘 소환'의 스킬 레벨을 올리면 기사왕 골렘을 소환할 수 있어. S랭크 마수를 단신으로 토벌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골렘을...."

물론, '얼음 골렘 소환'의 스킬 레벨을 지금 당장 올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올린다면 스킬 레벨을 9까지 올린 뒤여야겠지.

용기사 골렘은 '기사왕 골렘'에 '비룡(飛龍) 골렘'을 추가로 얹은 골렘이다.

"이왕이면 브레스를 사용할 수 있는 비룡 골렘을 가지는 게 낫잖아."

비룡 골렘은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아이스 브레스(Ice Breath)를 뿜어낼 수 있다.

안장에 탄 기사왕 골렘은 얼음의 칼날을 날릴 뿐.

대체로 전투는 비룡 골렘이 하는 모양이다.

하여튼!

"스킬 레벨... 그래, 스킬 레벨로 가자."

건혁은 결국 여섯 번째 항목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띠링!

['스킬 레벨+1'을 획득하셨습니다.]

알림음과 동시에 스테이터스창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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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건혁

*종족: 인간

*칭호: -

*출신 국가: 한국

*LV: 250

*근력: 74

*민첩: 80

*체력: 75

*마력: 570

*AP: 300

*스킬: [빙마검(氷魔劍)-LV8] , [얼음 골렘 소환-LV8], [마력 회복-LV5], [성장 촉진]

⤷('스킬 레벨+1'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하는 스킬을 선택하여 레벨을 올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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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지금 당장 사용할 필요는 없는 모양이다.

"아, 추가 어빌리티 포인트가 있었지."

레벨 250에 도달하며 얻은 300AP.

이걸 과연 어디에 투자해야 할까?

S랭크 마수조차 눈으로 좇을 수 없게 민첩에 투자해?

아니면 근력에 투자해서 단단한 가죽을 찢어 봐?

체력에 투자해서 민첩과 근력을 마음껏 사용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오감에도 불구하고 선택은 결국 마력이었다.

어차피 다수의 기사왕을 소환하려면 그만한 마력이 필요하니 말이다.

'민첩이랑 체력은 일단 100으로 맞춰 두자. 근력은 80으로....'

그렇게 모든 어빌리티 포인트를 분배했다.

며칠 뒤, 헌터 협회로부터 구룡산 게이트의 공략 지원을 요청받은 건혁.

S랭크 마수를 토벌할 수 있는 기회다.

건혁은 냉큼 요청을 받아들이고, 경호원과 세실리아에게 수영을 맡겼다.

골렘을 유지할 수 있는 건 24시간뿐.

게이트 안에서 2박 3일을 보내야 하는 건혁은 다소 불안한 얼굴을 하였다.

"출발하겠습니다!"

서열 4위 청룡 기사단 단장, 이은성의 목소리에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들이 발걸음을 움직였다.

게이트 공략에는 도합 150명의 헌터들이 동원됐다.

서열은 500위 이내로, 순위는 제각각이었으며, 도합 5개의 탐색 부대로 나누어졌다.

제1 탐색 부대는 이은성이 이끄는 청룡 기사단의 제1군.

제2 탐색 부대는 검신(劍神) 정윤호가 이끄는 고구려의 제1군.

제3 탐색 부대는 강철(鋼鐵) 김수호가 이끄는 단군의 제1군.

제4 탐색 부대는 화룡(火龍) 하승원이 이끄는 유신의 제1군.

제5 탐색 부대는 성녀(聖女) 김다은이 이끄는 백화의 제1군.

모두가 거대 길드의 정예 멤버들이다.

건혁은 청룡 기사단의 제1 탐색 부대에 합류했다.

또, 제1 탐색 부대에는 이번 달 서열 14위가 된 이진화가, 제2~5 탐색 부대 역시 서열 1~20위대의 헌터들이 포함되었다.

'정윤호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네. 게다가 대한민국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서열 3위 김수호와 국내 최고의 치유 능력을 사용한다는 성녀 김다은까지... 원작의 인물들을 이렇게 보게 되다니.'

이걸 감격스럽다고 해야 되나?

김다은은 자신보다 높은 서열에겐 경어를 사용하되, 낮은 서열에게는 하대하듯 말을 낮추며 강압적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버지뻘에게도 말이다.

참고로 김다은의 최고 서열은 26위로, 이번 달은 31위로 떨어졌다고 한다.

'후우, 서열이 높아서 다행이네.'

그녀와 엮이는 것도 싫지만, 말다툼을 하는 것도 싫다.

그때, 유신의 마스터 하승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일 뿐, 다가오거나 무언가 인사말을 건네 오진 않았다.

뭐, 친근하게 인사나 나눌 사이는 아니지.

잠시 뒤, 구룡산 게이트를 향해 발걸음을 움직인 건혁.

구룡산에는 게이트를 감싸는 두꺼운 콘크리트 벽이 세워져 있었다.

북쪽으로는 1~200개의 계단과 함께 아르늄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문이 설치되었는데.

이른바 게이트로 들어가기 위한 출입구다.

건혁은 헌터들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철컥!

문 앞에서 근무 중이던 협회 소속 직원은 은성을 보고 재빨리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이내, 묵직해 보이던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의 너머로 발을 내디딘 150여 명의 헌터들.

'...벽이 엄청 두껍네.'

실제로 보니 더 두꺼운 느낌이다.

잠시 뒤, 헌터들이 게이트로 들어갔다.

필드 환경은 적토의 황무지.

게이트 인근에는 수십 대의 험비가 주차되어 있었다.

 

제87화

87화. 구룡산 게이트 (4)

'허어....'

수많은 길드들은 차량을 대신해 짐꾼들을 고용한다.

그 이유는 대체로 비용 등이 거론되었는데.

마수들의 공격에도 끄떡없으며, 많은 짐을 실을 수 있는 차량이 과연 얼마나 할까?

또, 다수의 길드원이 함께한다면 1~2대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뭐, 비용도 비용이지만 게이트 내 필드 환경은 대부분 동굴, 평야, 숲이니....'

우거진 수풀과 나무로 통행이 어려운 숲.

언제 적이 튀어나올지 모르고, 지면의 상태도 확인이 불가능하며, 바위가 튀어나와 있는 경우, 차량이 전복되거나 바퀴에 이상이 생길 수 있는 평야.

많은 차량이 통행할 수 없으며, 때때로 차량이 퇴로를 가로막아 버리는 동굴.

과거 게이트에 들어간 차량들은 모종의 이유로 수차례나 마수들에게 박살 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황무지라면 이야기는 다르지.'

헌터들이 수군거리던 그때.

은성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크흠, 지도를 건네 드리겠습니다."

상당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지도다.

아마 드론을 이용해 주변을 촬영하여 제작한 거겠지.

"처음 뵙는 분들도 계시니 참고삼아 말씀드리겠습니다. 방금 건네 드린 지도는 필드의 4~50% 정도에 불과합니다. 핵이 존재할 것 같은 건축물과 동굴 등을 다수 발견했으나, S랭크 마수가 몇 차례 출몰할 뿐, 게이트의 핵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임무는 미탐색 지역을 드론으로 촬영하여 해당 데이터를 저희 청룡 기사단에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저희 쪽에는 드론을 조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만?"

김다은이 손을 들며 말했다.

"예, 그 부분도 지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각 탐색 부대에는 저희 청룡 기사단 단원이 4~5명 정도 따라붙게 될 겁니다. 드론을 조작할 수 있는 단원들이죠. 여러분들께선 드론으로 미탐색 지역을 촬영하는 동안 주변을 경계하며 마수를 토벌해 주시면 됩니다."

은성의 설명에 다은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잠시 뒤, 건혁의 곁으로 진화가 다가왔다.

"오랜만이네요."

"네, 오랜만입니다."

"10월에... 각성 능력 검사받으실 거죠?"

"예, 그럴 생각입니다."

"이번에는 10위 안에 들어서시는 거 아니에요?"

진화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건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난 1년간 정체기를 겪고 있어서요. 제가 S등급 게이트에 들어와도 되는 건지...."

"서열 17위가 왜 이렇게 겸손을 떨어요? 만티코어를 혼자서 쓰러트린 분이 그러시면 여기 있는 다른 헌터들은 어떻게 하라고요?"

"만티코어는 정말로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만으로 만티코어를 쓰러트리는 헌터는 없을걸요?"

건혁은 쓰게 웃으며 입을 꾹 닫았다.

잠시 뒤, 제1 탐색 부대 대장 및 총대장 직책을 맡은 이은성이 다가왔다.

제2~5 탐색 부대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도 출발하지."

은성의 한마디에 30여 명의 청룡 기사단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량에 올라탔다.

"박건혁 헌터님은 이쪽으로 오세요."

건혁은 진화의 안내에 따라 가장 앞 차량에 탑승하게 되었다.

"기사단장 골렘 소환."

차량 주변에 소환된 25기의 기사단장 골렘들.

옆 좌석에 앉은 진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량으로 이동하면...."

"골렘들은 차량의 속도를 따라올 수 있습니다. 또한, 체력에도 제한이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건혁의 대답에 조수석에 앉은 은성이 작게 감탄사를 흘렸다.

이내, 미탐색 지역을 향해 출발한 제1 탐색 부대의 차량들.

다섯 대의 험비와 세 대의 트럭이 1~2시간을 달렸다.

건혁은 마력이 회복될 때마다 골렘들을 추가로 소환했다.

"...도대체 얼마나 소환하실 수 있는 거예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한계까지 소환해 본 적이 없어서요."

"마... 마력도 금세 회복되시는 거 같던데...."

"아하하...."

건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수석에 앉은 은성이 작게 웃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자네의 골렘이라면 피해도 줄일 수 있겠군."

"밤중의 경계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이 정도면 야간 경계 근무의 인원을 줄여도 괜찮겠어."

은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만티코어를 쓰러트린 게 자네와 저 붉은 망토의 골렘들이었지?"

"예, 맞습니다."

"전투에서 자네의 골렘들이 선봉을 서 주었으면 하네."

인명 피해를 줄이고자 골렘을 선두에 내보내자는 은성.

건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골렘은 전투를 위한 병기일 뿐.

생명체와는 다르니 말이다.

잠시 뒤, 차량이 미탐색 지역에 도착했다.

"드론 띄워."

―예, 알겠습니다.

다섯 대의 드론이 하늘로 떠올랐다.

이어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주변 일대를 촬영하며 마수의 위치 및 종류를 보고했다.

―서쪽 2~3km 부근에서 오우거의 무리가 접근하는 중입니다.

"오우거라... 숫자는?"

―...여덟 마리입니다.

은성이 시선을 돌려 건혁을 바라봤다.

건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곧바로 골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한 10기의 기사단장 골렘들.

골렘들은 오우거를 쓰러트린 다음 마석을 회수하여 차량으로 돌아왔다.

"마석 회수까지... 꽤 빠르군. 골렘 하나하나가 서열 100위대의 실력을 보유한 건가."

은성이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수의 접근을 사전에 차단시켜 버린 골렘들.

덕분에 부대원들은 편안한 탐색을 하게 되었다.

치직!

―대장님, 드론 회수했습니다.

군사용으로 개발된 최신 드론임에도 게이트 안에서는 4~5km 바깥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게이트 내의 이질적인 마력 파장이 드론과의 신호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그 이유였다.

때문에 탐색 부대는 최대 4km 일대를 촬영하고, 드론을 회수하여 이동하는 것을 반복했다.

드르르르.

차량이 거칠게 흔들렸다.

"구룡산 레이드 직후, 게이트 너머는 마수들로 수두룩했지. 3차 폭발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은성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건혁은 귀를 쫑긋 세워 경청했다.

구룡산 게이트를 공략하기 위해 수많은 헌터들이 소집되었을 당시.

첫 공략 작전에서 헌터들은 대패를 겪고 물러나야 했다.

투입된 헌터의 숫자는 240여 명.

그중 사망자는 107명으로, 청룡 기사단은 수많은 정예들을 잃었다.

해당 소식을 TV로 접한 건혁은 슬쩍 진화를 바라봤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가 쓰러트렸다던 만티코어 역시 세 마리나 있었네."

"만티코어가...."

"이 게이트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세상의 종말을 보는 기분이었지."

"...."

"수많은 헌터들이 목숨을 잃고 난 뒤에야 게이트 주변이 정리되고, 본격적인 탐색을 시작할 수 있었네."

하지만 탐색에도 난항은 계속됐다.

필드는 끝을 보이지 않았고, 마수들은 연이어서 나타났다.

당시 공략대가 토벌한 S랭크 마수는 12마리.

그 외 1년간 토벌한 A랭크 마수는 2~3천여 마리라고 한다.

은성의 이야기가 진행되던 도중 무전기에서 '치직!' 소리가 났다.

―대장님, 동북쪽 3km 지점에서 버팔로드가 접근하는 중입니다.

"부대원 전원, 차량에서 내려 전투를 준비한다."

차량에서 다급히 내리는 청룡 기사단원들.

은성은 그들을 이끌고 차량으로부터 500m 정도 떨어졌다.

차량에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부탁하네."

은성의 말에 건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100여 기의 골렘들과 함께 앞서 나갔다.

이은성, 이진화 및 30여 명의 청룡 기사단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건혁은 눈앞의 거대한 버팔로들을 바라보며 골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파바바밧!

골렘들이 망토를 펄럭이며 흩어졌다.

녀석과의 거리가 1km까지 좁혀질 무렵.

건혁이 몸을 내던졌다.

파앗!

동시에 골렘들 역시 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뭐... 뭐가 이렇게 커?'

높이 120m, 길이 150m, 폭 30m를 자랑하는 걸어 다니는 재앙.

녀석이 도시에 나타나는 순간.

수많은 건물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눈에 훤하게 보였다.

녀석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건혁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런 걸... 어떻게 쓰러트리냐?"

만티코어 쪽이 더욱 무난한 게 아닐까?

건혁은 자리에 멈춰 선 채 빙마검을 휘둘렀다.

"아이스 블레이드(Ice Blade)!"

녀석의 얼굴을 향해 날아가는 얼음의 칼날.

골렘들 역시 발걸음을 멈추고 검을 휘둘렀다.

쓔와아악!

사방에서 수십 개의 칼날이 버팔로드를 덮쳤다.

가죽을 뚫고 피부를 베어 낸 칼날.

수십 리터의 핏물이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우워어어어!

녀석이 거대한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이내,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돌려 골렘들을 노려봤다.

붉은 망토를 펄럭이는 대여섯 기의 골렘.

마치 투우(鬪牛)가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다.

콰아앙!

녀석이 뒷발을 한 번 굴리자, 건혁과 골렘들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크으... 덩치에 비해 움직임이 너무 빠르잖아!"

욕설이 절로 터져 나온다.

버팔로드의 질주는 정말로 순식간이었다.

수백 미터의 거리를 불과 1~2초 만에 돌파하여 다섯 기의 골렘들을 짓밟은 버팔로드.

덩치에 속도까지 갖춘 괴물이라니.

"거인 골렘 소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다섯 기의 거인 골렘.

상대의 덩치가 크다면, 일전에 만티코어를 쓰러트렸던 것처럼 하면 된다.

문제는 높이다.

만티코어가 직접 골렘을 아가리에 넣었을 때와는 달리 버팔로드의 머리는 상공 100m 위에 존재한다.

파밧!

다섯 기의 기사단장이 거인 골렘의 오른손에 올라탔다.

버팔로드가 고개를 돌린 그때.

건혁이 소리쳤다.

"던져!"

파앙!

기사단장 골렘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버팔로드에게 날아갔다.

파앙!

버팔로드와 부딪친 기사단장 골렘들.

그들은 녀석의 털을 붙잡고 매달렸다.

건혁은 그들이 임무에 성공할 수 있도록 버팔로드의 발밑에서 주의를 끌었다.

콰앙! 콰앙! 콰앙!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은성을 바라봤다.

"지금이라도 돕는 게...!"

"아니, 그가 신호를 보내면 움직인다."

"하지만 혼자서 버팔로드를 상대하는 건...."

진화의 우려에 청룡 기사단 소속 헌터, 구준영이 초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단장님의 말씀대로입니다! S랭크 중에서도 중급으로 취급되는 만티코어를 상대하는 것과 상급으로 취급되는 버팔로드를 상대하는 것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은성은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찌푸렸다.

"기다린다."

그의 한마디에 부대원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건혁은 골렘들과 함께 훌륭히 버팔로드를 상대하고 있다.

놀라울 정도의 능력으로 말이다.

하지만 버팔로드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예측됐다.

콰앙! 콰콰콰콰콰쾅!

버팔로드는 질주를 반복하며, 머리의 뿔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이어, 머리를 들어 올리는 것으로 다량의 흙을 허공에 흩뿌렸다.

건혁의 시야가 가려진 상황.

마침내 은성이 허리께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때.

-우워어어어!

버팔로드가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이상 증세에 화들짝 놀란 제1 탐색 부대원들.

대지가 갈라질 정도의 거대한 충격.

부대원들은 서둘러 자세를 낮추었다.

"이... 이게 무슨...."

 

제88화

88화. 구룡산 게이트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