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59화. S등급 레이드 (3)
"게다가 이번에 B랭크 마수를 단번에 쓰러트릴 수 있는 골렘도 소환할 수 있게 돼서 크게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요."
"...또 새로운 골렘을 소환하는 건가요?"
유진의 게슴츠레한 눈빛에 건혁이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덕분에 A랭크 마수도 조금 더 여유롭게 토벌할 수 있었어요."
"하아, 이러다가 나중에는 정윤호도 이기는 게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무리 그래도 검신(劍神) 정윤호를 이기는 건 어렵겠죠. 그것보다 내일부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은 30분 정도 대화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저녁 6시쯤에 찾아올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문자로 보내 줘. 알겠지?"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건혁과 눈을 마주한 유진.
"조심히 다녀오세요."
"네, 수영이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현관문이 닫힌다.
유진이 자택으로 돌아간 뒤, 건혁은 수영과 얼굴을 마주한 채 헌터 협회에서 전달받은 사항들을 전부 설명해 주었다.
"S랭크는커녕 A랭크 마수와 싸우게 될 일도 거의 없을 거야. 그러니, 유진 씨랑 2주일 정도만 기다려 줄 수 있을까?"
"...알겠어."
수영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얻어 낸 수영의 허락.
물론, 허락을 해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건혁은 내일 강원도로 떠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영의 허락을 얻지 못했다면 계속 마음이 불편했겠지.
"아빠."
"응?"
"유진 언니랑 나중에 결혼할 거야?"
건혁이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 그게 무슨...."
"두 사람이 많이 친해 보여서...."
"그... 그럴 리가. 아빠는 수영이만 있으면 돼."
"...아빠가 좋으면 상관없어. 재혼하는 거."
건혁이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갑자기 재혼 이야기를 왜 꺼낸 거지?
설마, 엄마라는 존재를 바라는 건가?
그럴 리 없음은 그 자신이 더욱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근래 유진 씨가 호감을 보이는 것 같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유부남인 나랑 결혼하고 싶지는 않을 거야. 게다가 애까지 있잖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을까?
오히려 흠으로 꼽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기에 건혁은 최대한 착각하지 않고자 노력했다.
"아빠는 정말로 수영이만 있으면 돼. 그리고 수영이 엄마는 세상에서 한 사람뿐이잖아."
건혁의 눈길이 TV 서랍장 위에 비치된 한 사진으로 향했다.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
참고로 전생체인 신무영은 해당 사진을 보자마자 경악하고 말았다.
어째서 저런 미녀가 박건혁과 같은 남자와 결혼을 한 것일까?
더욱 훌륭하고 멋있는 남자와 결혼해도 됐을 텐데.... 잠시 혼란스러웠던 무영이었지만, 박건혁의 기억과 어우러지면서 그러한 생각은 점차 수면 아래에 가라앉게 되었다.
"아 참, 오늘 저녁은 치킨으로 할까? 저번에 새로 나온 메뉴가 먹고 싶다면서."
"먹을래! 저번에 TV에서 나온 그거!"
기분이 좋아진 듯 수영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좋아, 그러면 오늘 저녁은 치킨이다!"
"오오!"
* * *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네, 마스터도 조심히 다녀오세요.
나는 유진과 전화를 마친 후, 곧바로 서울을 빠져나가 강원도로 출발했다.
어제저녁에 받은 문자 메시지에 따르면 나는 S등급 레이드 제47 토벌팀으로 활동하게 된다는 모양이다.
그리고 강원도 원주시 서쪽 부근에 위치한 제3사령부에서부터 시내의 마수들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레이드에 투입된 헌터의 숫자는 3만 명 정도.
1,000위 안에 든 헌터는 933명으로 확인됐다.
그 외 수만 명의 군인들 역시 통제 구역을 포위하고 있다고 한다.
역시 S등급 레이드라는 건가.
제3사령부에 도착하자 군복 차림에 소총을 쥔 군인들이 차량으로 다가왔다.
"헌터 협회 소속 제47 토벌팀으로 활동하게 된 서열 779위, 박건혁 헌터입니다."
헌터증을 확인한 군인은 경례를 취하면서 차량을 사령부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우와, 대박이네."
사령부에는 K2전차와 장갑차, 전투 및 수송용 헬기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녹색의 군용 천막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수많은 군인들.
지금 당장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다.
그보다 여기, 원래는 밭이었던 곳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군인들의 안내에 따라 차량을 주차했다.
차에서 내리자, 기사단 제복을 걸친 사내가 마중을 나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청룡 기사단 소속 유성진입니다."
서열이 1,000위 안에 드니 이런 대접도 받는구나.
1~20만대 서열이었다면 적당히 대기 장소만 알려 주었을 것이다.
"예, 반갑습니다."
"먼저, 회의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군과는 따로 움직이는 모양이다.
"현재 레이드에 지원한 헌터들은 모두 투입된 상태로, 군 역시 피해자의 구조 작전에 들어갔습니다. 박건혁 헌터님께서도 1~2시간 뒤, 통제 구역에 투입될 예정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대한 천막으로 들어갔다.
천막 내부에서 스마트폰을 두드리는 수많은 헌터들.
몇몇은 어제 본 얼굴들이다.
그보다... 저 사람들도 있는 건가.
어제 시비가 붙었던 데스펠 길드의 헌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30분이 흘러 10개의 팀이 모두 회의실에 집합했다.
이내, 앞으로 나서는 한 여성.
"청룡 기사단의 부단장 이진화입니다. 지금부터 여러분들의 전투 구역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먼저, 제17 토벌팀은...."
이렇게 다시 얼굴을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네.
나는 인사할 겨를도 없이 스크린에 띄워진 전투 구역을 사진으로 찍어 뒀다.
A랭크 마수들이 발견됐다는 지역은 제17, 제22, 제24 토벌팀이 맡게 되었다.
참고로 제22 토벌팀은 박태준의 팀이다.
'그냥 내가 상대하면 안 되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내 전투 구역을 확인했다.
C~B랭크 마수들이 바글거리는 장소.
자잘한 경험치를 잔뜩 모아 봐야 A랭크 마수만 할까.
"이상입니다. 1시간 내에 개인 정비를 마치시고, 각 전투 구역으로 출발해 주십시오."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진화.
뭐, 인사는 나중에 해도 괜찮겠지.
'저 자식은 또 왜 저래?'
나를 노려보며 비릿한 웃음을 흘리는 제22 토벌팀 소속의 헌터, 방준우.
설마, 암살자라도 고용한 건가?
아니면 전투 구역에서 무언가 함정을 준비해 뒀다거나.
'이참에 A랭크 마수들이나 보내 줬으면 좋겠네.'
나는 작게 한숨을 흘리면서 천막을 빠져나왔다.
이어, 전투 구역으로 향하려던 순간.
헌터 협회로부터 'Korea'의 문구가 기입된 험비를 제공받았다.
아무래도 각 팀마다 제공받는 모양이다.
"트렁크에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5급 포션 10개와 상비약 및 식량과 생필품들이 들어 있습니다. 만약 사령부로 돌아오지 못하실 경우에는 가까운 건물에서...."
"아, 가능하면 전투 구역 안에서 생활할 생각입니다만... 식량을 조금 더 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라면, 통조림, 전투 식량, 생수 및 간단한 간식 등.
2주일 정도는 넉넉하게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뒷좌석에 가득 채워졌다.
어차피 뒷좌석에 누가 탈 일은 없으니까.
"아, 이쪽은 ME 어댑터입니다. 이 상자에 마석을 넣으시고, 콘센트를 꽂으시면 마력을 전기처럼 에너지로 사용할 수 있는...."
"예, 알고 있습니다."
커피포트를 사용할 때 쓰라는 거겠지.
차량의 경우, C랭크 마석의 에너지가 전부 충전될 정도의 배터리가 장착되어 있어 2주일간 시내를 마음껏 돌아다녀도 문제가 없다는 모양이다.
뭐, 어차피 전투 구역만 돌아다닐 테니, 배터리 용량은 크게 상관없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나는 사령부를 빠져나가 전투 구역으로 출발했다.
"진짜, 무슨 전쟁이라도 난 것 같네."
도시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건물에서 드문드문 보이는 마수들.
나는 놈들을 무시한 채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 주차를 했다.
자아, 여기가 바로 제47 토벌팀이 맡게 된 전투 구역이다.
"흐음, 사자의 아가리에 들어온 기분이네."
아파트에서 반짝이는 수백... 수천 개의 붉은 안광.
사방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다.
놈들의 정체는 바로 오크.
슬그머니 1층으로 내려오는 놈들.
나는 곧바로 기사 골렘들을 소환했다.
"내가 마력을 회복하는 동안 적들의 공격을 막아 내 줘."
차량의 주변을 둘러싼 30기의 기사 골렘.
-취이익!
오크의 울음소리와 동시에 전투가 시작됐다.
골렘들이 오크들을 쓰러트리는 동안 나는 천천히 마력을 회복시켰다.
마력 회복의 스킬 레벨이 4가 된 덕분일까?
100의 마력을 회복하는 데 16~17분 정도면 충분했다.
그보다....
"너무 많은 거 아니냐?"
도대체 얼마나 쏟아져 나오는 거야?
나는 100의 마력이 회복될 때마다 20기의 기사 골렘을 보충했다.
이어, 전황을 뒤엎고자 정예 기사 골렘 5기를 소환해 차량을 지키도록 명령을 내렸다.
무슨 디펜스 게임을 하는 거 같네.
사방으로 수많은 시체들이 뒤엉키고, 비명과 같은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끄러워 죽겠네."
나는 차 안으로 들어가 골렘을 소환할 때만 창문을 열었다.
의자를 뒤로 눕히고, 다리를 핸들에 걸친 자세.
이렇게 편하게 있어도 괜찮은 걸까?
쾅!
"하아, 그만 좀 쏴라."
차량을 향해 쏟아지는 수많은 화살들.
덕분에 차에서도 시끄러워 미칠 지경이다.
나는 품속을 뒤적거리면서 이어폰을 꺼냈다.
그리고 유X브를 시청하며 수십 분이 지나자.
"기사 골렘 소환."
창밖으로 팔을 내민 채 골렘들을 소환했다.
지금까지 몇 기를 소환한 거지?
나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스테이터스로 전투 중인 골렘을 확인하던 찰나, 뱃속에 거지가 밥을 달라고 울어 댔다.
일단, 점심부터 먹고 보자.
부스럭부스럭.
나는 간단하게 식사를 하면서 스마트폰으로 유X브를 시청했다.
스테이터스의 마력이 어느 정도 채워졌을 때마다 잠시 창밖으로 팔을 내밀 뿐.
그렇게 오후 4시가 될 무렵.
나는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봤다.
"...장관이네."
전투는 거의 마무리된 상태다.
현재 전투 중인 골렘의 숫자는 총 307기.
기사 골렘 242기, 정예 기사 골렘 45기, 마법 기사 골렘 20기.
기사 골렘은 상당히 파괴된 모양이네.
반면, 정예 기사 골렘은 단 한 기도 파괴되지 않은 것 같다.
"호오, 오크 장군도 있었구나."
시체들을 밟으며 주변을 거닐었다.
땅을 밟고 싶어도 땅이 보이지 않는다.
시체로 가득 찬 단지 내의 주차장.
"...이거, 이동도 못 하겠네."
차량이 완전히 갇혀 버린 상태다.
나는 기사 골렘들을 추가로 소환하여 부산물 회수를 시작했다.
부산물이 회수된 오크의 시체는 거인 골렘을 이용해 치워 버렸다.
"자아, 너희들은 배낭에 부산물들을 담도록!"
트렁크의 뒷좌석에 실린 10여 개의 배낭.
병사 골렘들은 해당 배낭에 부산물들을 담았다.
아무래도 배낭이 더 필요하겠어.
가까운 곳에서 구할 수 있으려나?
나는 정예 기사 골렘들과 함께 아파트에 들어갔다.
박살 난 현관문.
집 안으로 들어가자 인간의 뼈로 보이는 것들이 발견됐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나는 기도를 올린 다음 여러 집에서 배낭을 가지고 나왔다.
제60화
60화. S등급 레이드 (4)
골렘들이 4~50여 개의 가방에 부산물들을 가득 채우는 동안 나는 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서 저녁은 맛있게 먹었고?"
―응, 아빠는 저녁 먹었어?
"이제 슬슬 먹으려고."
―...괜찮은 거지?
"당연하지. 아빠가 얼마나 대단한 헌터인데."
살짝 허세를 부려 본 거지만, 정말 대단해지긴 대단해졌네.
금일 토벌한 오크의 숫자가 3천여 마리를 넘는다.
아파트에 도대체 얼마나 들어가 있었던 건지....
"그리고 아빠가 배치된 구역은 숫자만 많지, 대부분이 C랭크의 오크들뿐이었어. 저번에 레이드가 일어났을 때 기억하지? 아빠가 오크를 얼마나 많이 쓰러트렸는지 말이야."
―응, 아빠는 '오크 슬레이어'야.
오크 슬레이어?
조금 어감이 이상한데.
이명으로 사용하기도 민망하고 말이야.
하지만 모처럼 수영이가 지어 준 별명이다.
"그... 그래, 아빠는 오크 슬레이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 참, 유진 씨하고는 잘 지내고 있지? 잠깐 바꿔 줄 수 있을까?"
―유진 언니, 지금 샤워하고 있어.
"아, 그러면 어쩔 수 없네. 아빠 빨리 끝내고 돌아갈 테니까 유진 씨랑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알겠지?"
―응, 아빠도 조심해.
"그래."
수영이와 전화를 하는 동안 오크의 시체가 단지 내 놀이터에 쌓이기 시작했다.
뭐, 오늘은 슬슬 마무리해도 괜찮겠지?
해도 저물었고 말이야.
나는 전화를 끊은 다음 차량을 아파트 앞으로 가져다 대고, 핏물로 가득한 집으로 들어갔다.
"오늘 하루만 실례하겠습니다."
해골들을 고이 모셔 둔 채 커피포트에 생수를 담은 뒤, ME 어댑터를 사용해 물을 끓였다.
전기가 모두 끊어진 탓에 가전 기기는 사용할 수 없다.
부엌도 가스레인지가 아닌 인덕션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컵라면에 끓는 물을 부은 후, 스마트폰을 충전하며 유X브로 최신 뉴스들을 살펴봤다.
"뭐야, 케르베로스가 벌써 토벌됐어?"
역시 대한민국의 최고봉들은 무언가 다른 모양이네.
"아, 나도 찍혔었네."
아무래도 보도 헬기가 지나갔던 모양이다.
너무 게으름을 부렸나?
그나마 댓글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안전한 곳에서 마력을 회복하며 소환수를 소환해 마수들을 쓰러트리는 전투.
소환술사들의 정석적인 전투 방식이다.
그보다 차에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하늘에서 보니까 무슨 전쟁이라도 벌어진 듯한 광경이네.
"제1부대와 제2부대는 아파트에서 경계 근무를 서고, 제3부대는 주변에서 마수를 토벌하도록."
정예 기사 골렘으로 구성된 제1부대.
거인 골렘과 마법 기사 골렘으로 구성된 제2부대.
기사 골렘으로 구성된 제3부대.
나는 기사 골렘으로 구성된 제3부대를 단지 밖으로 내보내 마수를 토벌하게 했다.
그리고 피로 더러워진 가정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제1부대와 제2부대가 주변을 경계하며 마수들의 접근을 차단시켰다.
"나만 너무 편한 거 아닐까?"
나는 중간중간 정예 기사 골렘을 소환했다.
오크를 수백, 수천 마리 죽여 봐야 자잘한 경험치밖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일은 B랭크 마수들을 찾아 나서는 수밖에.
나는 과자를 쩝쩝거리면서 예능 프로그램을 결제해 시청했다.
* * *
사령부로 돌아온 제22 토벌팀.
모두가 휴식을 취하던 그 시각.
방준우는 미리 포섭해 둔 군인에게 현금 다발을 건네주며 통제 구역으로 들어갔다.
"분명, 이 근처라고 했었던 거 같은데...."
흠칫!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통제 구역에 들어서고 1~2시간이 지난 현재.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건물에 숨어 창문으로 바깥을 살폈다.
'제길, 뭐가 저렇게 많아?!'
도로 위를 어슬렁거리는 A랭크 마수, 라이오스.
대여섯 마리였다면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숫자는 2~30여 마리를 넘었다.
저 정도의 숫자를 혼자서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그렇기에 확실하기도 했다.
서열 779위인 박건혁을 죽이는 데 말이다.
준우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면서 오른손에 랜턴을 쥐었다.
"흐읍!"
투콰앙!
허공에 띄운 보랏빛 번개의 창이 라이오스 무리에 직격했다.
크게 상처를 입은 녀석은 없었다.
단지, 창이 날아온 방향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릴 뿐.
준우는 랜턴을 켠 채 달리기 시작했다.
파바바밧!
"이쪽이다!"
그의 목소리에 2~30여 마리의 라이오스가 도로 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5분간 잡힐 듯 말 듯한 추격전이 계속됐다.
라이오스의 무리가 추격을 멈추려 할 때마다 번개의 창을 던져 놈들의 시선을 잡아당긴 준우.
그는 얼음 골렘들을 발견하곤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꺼져!"
콰콰콰쾅!
단순한 무력으로 골렘들을 파괴했다.
이어, 라이오스의 무리를 아파트 단지로 유인한 뒤, 사전에 준비해 둔 향수를 단지 내부에 마구잡이로 뿌려 댔다.
쿠르릉!
"흐익?!"
라이오스의 공격에 준우는 화들짝 놀라면서 재빨리 아파트 안으로 숨어들었다.
하마터면 통구이가 될 뻔했네.
그는 창밖으로 라이오스의 동태를 살펴봤다.
-크르르르....
살기로 번뜩이는 붉은 안광.
약이 오른 걸까?
놈들은 맞은편 아파트를 노려보며 우렁찬 포효를 터트렸다.
'뭐지?'
준우가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맞은편 아파트에서 기사 갑주를 걸친 골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7m가량의 거대한 골렘이 나타났을 때는 '설마' 하는 생각에 표정을 굳혔지만, 라이오스의 전격에 거인이 산산조각 나 버리자, 준우는 씨익 웃으면서 창밖으로 뛰어내려 단지를 벗어났다.
'빨리...!'
황급히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던 그때.
콰아앙!
다수의 라이오스가 일제히 전격을 퍼부은 걸까?
아파트 한 채가 쓰러지며 조금 전 준우가 숨었던 아파트를 그대로 덮쳐 버렸다.
도로 위에 쓰러진 두 채의 아파트.
꿀꺽.
거대한 굉음에 준우는 침을 삼키면서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래, 이 정도면 녀석도 죽었겠지.
단지 내에 주차된 차량까지 덮쳤으니, 박건혁이 무사할 일은 없을 거다!
그리 확신하며 서둘러 사령부로 물러났다.
그러나 아쉽게도 준우의 확신은 비껴가고 말았다.
"끄응.... 이...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아파트가 무너지기 직전 정예 기사의 품에 안겨 창밖으로 도망친 건혁.
그는 스테이터스를 확인하며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아파트가 무너진 탓인지, 골렘의 상당수가 파괴되고 말았다.
정예 기사 골렘들은 무사히 대피한 모양이지만....
"아파트가 왜 갑자기 무너진 거야?"
그는 골렘의 품에서 내려 아파트 단지를 바라봤다.
먼지로 가득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뿌연 먼지 속에서 번쩍이는 황금색 불빛.
저게 뭐지?
건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내,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쿠르릉!
이 굉음을 몇 번이나 들었을까.
A등급 게이트에 드나들고 아마 수십 번은 족히 넘을 것이다.
건혁은 다급히 정예 기사 골렘을 소환했다.
-크르르르....
그래, 이 울음소리도 수십 번은 들었었지.
건혁은 작은 헛웃음과 함께 미간을 찌푸렸다.
"X발, 너희들이었구나? 내 차랑 마석들을 전부 깔아뭉개 버린 게."
먼지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라이오스의 무리.
저벅, 저벅, 저벅.
"...."
생각한 것보다 너무 많은데?
건혁은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렸다.
주변에 모인 52기의 정예 기사 골렘들.
기사 골렘, 마법 기사 골렘, 거인 골렘들은 모두 파괴된 모양이다.
"하아, A랭크 마수가 나타나 주길 바라고는 있었지만, 밤중의 기습은 아니지 않냐?"
-크르르르....
"그래, 짐승들이 뭘 알아듣겠니."
건혁은 잠시 눈을 감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가라."
그의 한마디에 52기의 정예 기사 골렘들이 지면을 박찼다.
그 순간, 포효를 터트리며 골렘들에게 벼락을 내리치는 라이오스.
미친 듯이 쏟아지는 벼락에 정예 기사들이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X발, 아직도 있어?!"
무너진 아파트에서 튀어나온 대여섯 마리의 라이오스.
도대체 몇 마리나 있는 거야!
건혁은 뒤로 물러나 도로 건너편의 상가로 달려갔다.
그러곤 상가 건물에 숨어 상황을 살폈다.
'이길 수 있으려나?'
정예 기사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물론, 라이오스의 비명과 같은 울음소리도 들려온다.
건혁은 마력이 회복되자마자 10기의 정예 기사 골렘을 소환해 투입시켰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수십 분은 지났을지도 모른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 업을 알리는 알림음이 세 차례나 울렸다.
이어, 한 정예 기사 골렘이 내게 다가왔다.
"끝났어?"
건혁의 물음에 골렘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바깥으로 나가자 라이오스의 시체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래도 27기나 살아남았구나."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무너진 빙벽, 얼어붙은 지면, 라이오스의 시체에서 돋은 거대한 얼음 조각까지.
건혁은 라이오스의 마석을 회수하도록 골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마력의 한계는 존재하나, 체력에는 한계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동안 건혁은 10기의 거인 골렘들을 소환했다.
"바위들 좀 치워!"
아파트의 잔해들을 치우며 차량을 찾기 시작한 거인 골렘들.
건혁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성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 사령부 회의실로 안내해 준 청룡 기사단원이다.
'혹시 몰라 받아 둔 건데....'
왼손에 쥐어진 성진의 명함.
사령부와 연결된 무전기는 험비에 놔둔 상태다.
성진과도 연락이 안 된다면 직접 걸어서 사령부까지 갈 수밖에 없겠지.
그러나 다행히도 성진은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잠을 자던 중이었을까?
잠에서 덜 깬 그의 목소리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서열 779위, 박건혁 헌터입니다."
―네, 무슨 일로 전화를....
"제 담당 구역에서 27마리의 라이오스가 출현했습니다. 덕분에 잠시 머무르려던 아파트가 무너져 버렸는데...."
―...네? 아파트가 무너져요?
잠이 조금 깬 건가.
그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예, 라이오스는 모두 토벌했습니다만, 차량이 무너진 아파트에 깔려 버렸습니다."
―A랭크인... 그 라이오스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아니, 그 구역은 분명....
"그래서 연락을 드린 겁니다. 자는 도중 갑자기 놈들이 공격해 온 바람에... 후우, 일단 거인 골렘으로 잔해를 치워 차량을 찾고 있습니다만, 차량이 고장 난 경우 새로운 차량을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약간 흔적이 남았을지는 모르지만, 차량은 아마 무사할 겁니다. 그것보다 조금 전에 라이오스가 27마리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예, 조금 전에 사체를 세어 봤습니다. 지금은 부산물을 회수하는 중이고요."
―허어, A랭크 마수 27마리를 정말로 혼자서 토벌하셨단 말씀이십니까
성진의 놀란 목소리에 건혁은 카메라의 플래시를 켜고, 라이오스의 시체들을 사진으로 찍어 문자로 보내 주었다.
―...정말이었군요.
서열 779위의 헌터가 27마리의 A랭크 마수를 쓰러트릴 줄이야.
그것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서!
서열 100위대의 헌터들조차 쉽게 보이기 어려운 실적이다.
아니, 27마리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면, 100위대의 헌터일지라도 패배를 맛볼 수밖에 없겠지.
제61화
61화. S등급 레이드 (5)
―어디 다치거나 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예, 딱히 부상이라고 말씀드릴 만한 부분은 없습니다."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부산물을 모두 들고 다니신다면 불편하실 겁니다. 현재 사령부에서는 헌터분들의 정산도 처리해 드리고 있으니, 정산 후 해당 금액을 박건혁 헌터님의 계좌로 입금시켜 드리겠습니다.
"아, 그렇게 해 주신다면야 감사하죠."
―1~2시간 안에 차량을 보내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지고 40분이 지났다.
무너진 아파트 건너편에서 멈춰 선 다섯 대의 화물차.
건혁은 거인 골렘을 통해 라이오스의 사체를 화물차에 실었다.
이어, 전날에 타고 온 험비와 오크들의 부산물이 담긴 배낭들이 발견됐다.
"오크들의 시체는...."
"저쪽에 있습니다."
한곳에 쌓아 둔 덕분일까?
무너진 잔해가 살짝 튀어나와 위치를 금방 특정할 수 있었다.
부산물도 부산물이지만, 오크의 가죽 역시 값을 매겨 준다는 모양이다.
뭐, 보수가 늘었다면 좋은 거겠지.
그렇게 화물차가 오크의 시체로 가득 채워졌을 무렵.
새로운 화물차들이 줄지어 나열됐다.
"골렘 덕분에 회수 작업이 금방 끝나겠네요.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헌터 협회 서울 중앙 본부 소속의 이주환 과장.
그의 감사 인사에 건혁은 겸손을 보이면서 정예 기사 골렘들을 소환했다.
회수 작업이 진행되는 4~5시간 동안 정예 기사 골렘들이 주변에 배치돼 경계 근무를 섰다.
오전 8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회수 작업이 마무리되고 이주환 과장과 화물차들이 모두 후방으로 물러났다.
"하아, 피곤해 죽겠네."
건혁은 상가 건물로 들어가 OO부동산에 비치된 소파에 드러누웠다.
상가 건물을 지키는 82기의 정예 기사 골렘들.
그 외 10기의 거인 골렘들 역시 건물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조금은 안심하고 수면을 취해도 괜찮을 것이다.
"...."
3~4시간 정도 수면에 든 건혁.
그가 잠에서 깬 시각은 오전 11시 47분이었다.
아침 겸 점심을 먹으며 느긋하게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시청하던 그는 그만 음료를 내뿜고 말았다.
"푸훕! 콜록... 콜록.... 이... 이게 무슨...."
새벽에 무너진 두 채의 아파트.
지금까지의 피해와 비교하면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아파트를 무너트린 것이 27마리의 라이오스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것을 779위의 헌터가 쓰러트렸다는 사실에 국민과 언론은 놀랍다는 반응을 내보였다.
"똑같은 내용의 뉴스를 도대체 몇 개나...."
건혁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컵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한편, 건혁이 수면에 취한 그때, 잠에서 깬 준우는 상쾌한 얼굴로 군인들이 준비한 아침밥을 먹었다.
"쯧, 조금 짜잖아."
호텔 주방장을 데려와 요리를 맡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군인과 똑같은 식사를 먹는다는 것은 이미지 개선에 큰 도움이 된다.
마스터 박강석의 지시였기에 준우는 얼굴을 찌푸린 채 식사를 계속했다.
잠시 뒤, 주변에서 '라이오스'라는 단어가 들려왔다.
'벌써 소문이 난 건가?'
준우는 피식 웃으면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리고 검색창에 '라이오스'라는 단어를 검색한 순간.
다양한 기사들이 나열됐다.
"이... 이건 뭐야?"
기사 제목이 이상하다.
어제 본 2~30여 마리의 라이오스를 박건혁이 쓰러트렸다고?
서열 779위인 박건혁이?!
그는 기사를 클릭해 자세한 내용을 확인했다.
쾅!
"이런, X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준우.
그에 주변에서 식사를 하던 헌터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의 술렁거림은 준우의 귓가에 들리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는 감정만이 머릿속을 지배할 뿐.
"이... 이게 말이 돼? 서열 779위인 그 녀석이 27마리의 라이오스를 쓰러트려?"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린 탓일까?
헌터들은 그에게서 멀어지고자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 모습을 본 제22 토벌팀 팀장, 박태준이 미간을 좁힌 채 식판을 들고 준우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죠?"
태준의 물음에 준우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의 힘없는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린 태준은 맞은편 의자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이어, 태준의 옆으로 다가와 아침을 먹기 시작한 채원.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준우의 스마트폰을 살펴보면서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
채원은 준우의 스마트폰을 집어 태준에게 보여 주었다.
"바... 박건혁 헌터가 라이오스를... 그것도 27마리나 쓰러트렸다고 기사가 났어요!"
스마트폰을 건네받은 태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가짜 뉴스라도 본 듯이.
그러나 인터넷에는 수많은 기사들이 올라와 있었다.
심지어 화물차에 라이오스의 사체가 실려 처분이 진행되는 중이라고 한다.
"...."
서열 243위인 자신조차 불가능한 일을 서열 779위의 헌터가 해냈다고?
그게 정말로 가능한 일인가?
태준은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토해 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사람이군요."
어째서일까?
그에게 가입 제의를 했던 때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신이 너무 오만했던 걸까?
더욱 정중한 태도로 나갔어야 했나?
아니면 최고의 대가를 마련해 그를 데스펠로 끌어들여야 했을지도 모른다.
설마, 그가 품고 있던 잠재력이 이 정도일 줄은....
"...식사를 마친 후 담당 구역으로 이동하겠습니다."
태준은 덤덤히 식사를 시작했다.
* * *
―정말로 괜찮은 거 맞죠?
"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나는 유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멋쩍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후우, 아침에 뉴스를 보고 수영이가 얼마나 놀랐는지.... 게다가 전화까지 안 받으셔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어요.
자기 전에 전화를 해 둘 걸 그랬나?
어차피 주말이라 수영이도 학교에 가지 않았다.
헌터 훈련장에 가려던 일정도 수영이가 한바탕 울고불고한 탓에 취소한 모양이다.
"수영이는...."
―마스터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TV로 보고 나서야 안심하고 잠들었어요.
"그런가요."
―어휴, 얼마나 힘이 강한지, 수영이를 말리느라 저도 진을 다 뺐네요.
나는 쓰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유진이었기에 수영이를 만류할 수 있었던 거겠지.
만약 가사 도우미를 고용했다면 지금쯤 수영이는 내 눈앞에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걱정을 끼쳤네요."
―그보다 C~B랭크 마수들이 출몰하는 지역에 배치됐다고 하지 않았어요?
"예, 저도 그렇게 전달받았습니다. 그런데, 수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어슬렁거리던 놈들이 여기까지 찾아온 모양이에요."
―...좀 이상하네요.
이상해도 어쩌겠는가.
지금 당장 조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조금 위험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레벨 업을 했으니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지.
―아, 수영이가 깬 모양이에요. 전화를 바꿔 드릴까요?
"예, 그래 주세요."
나는 10분간 수영이한테 잔소리를 듣고, 이런저런 변명을 하느라 식은땀을 흘렸다.
억울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내가 원해서 마주친 것도 아닌데....
통화하는 동안 골렘들은 마수의 부산물을 회수했다.
―그러니까 아침 8시랑 저녁 6시에 반드시 전화하기! 알겠지? 꼭이야!
"그래, 그래."
―전화하기 어려우면 문자라도 보내!
"알겠어."
그 정도면 상관없겠지.
어차피 내가 싸울 일은 많지 않을 테니까.
전화를 끊은 뒤, 나는 담당 구역을 돌아다니면서 자잘한 경험치들을 모았다.
라이오스를 쓰러트릴 때랑은 격차가 너무 크네.
이런 경험치론 간에 기별도 안 오겠어.
나는 닷새간 통제 구역에서 생활하며 인터넷으로 상황을 살폈다.
"이제 남은 S랭크 마수는 싸이클롭스뿐인가."
그보다 슬슬 돌려보내 주지 않으려나?
담당한 구역의 마수들은 대부분 토벌됐다.
이 정도면 나는 충분히 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또, 이번 레이드로 번 33억 원 중 10억 원을 피해 복구를 위해 기부했다.
"하아, A등급 게이트나 나타나 주지 않으려나?"
생각 없이 내뱉은 말.
그 말은....
곧 현실이 되고 말았다.
* * *
2020년 2월 7일 금요일, 오후 5시 47분.
태준은 소매로 이마를 닦으면서 팀원들을 바라봤다.
"30분간 휴식을 취하고, 사령부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팀원들은 마수의 시체 위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했다.
건혁의 제47 토벌팀보다 조금 더 위험한 지역을 배정받게 된 제22 토벌팀.
그러나 건혁과 달리 특별히 눈부신 활약은 없었다.
서열에 맞는 실적이라고 해야 될까?
태준은 서열 779위의 실력으로 기상천외한 실적을 만드는 건혁이 특별하다 생각했다.
"후우...."
해가 저물면서 하늘이 어두워진다.
"슬슬 돌아가겠습니다."
팀원들이 두 대의 차량에 올라탔다.
태준은 채원이 조수석에 앉자,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그렇게 도로 위를 달리는 두 대의 차량.
사령부와의 거리가 1~2km까지 좁혀졌을 무렵.
전방에서 보랏빛의 에너지가 오로라처럼 일렁였다.
"뭐지?"
태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속도를 줄이던 그때.
게이트에서 거무스레한 무언가가 튀어나와 차량을 덮쳤다.
콰앙!
"크윽!"
차량의 가운데가 깔끔하게 절단됐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태준과 채원은 절단된 부분을 바라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내... 내려!"
두 사람이 서둘러 차량에서 뛰어내렸다.
콰앙!
차량이 폭발했다.
"이... 이게 무슨...."
태준은 뒤에서 따라오던 차량을 바라봤다.
차 안에서 비명을 내지르는 사내.
아무래도 차량을 몰던 방준우가 부상을 당한 모양이다.
태준과 채원이 차에서 뛰어내린 탓일까?
두 팀원 역시 준우를 데리고 차량에서 내렸다.
"티... 팀장님! 방준우 대장의 오른팔이...!"
"지금은 포션으로 응급 처치를 하세요! 상황이...."
태준이 말을 멈추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살벌한 기운.
준우를 부축한 두 팀원 역시 태준의 등 뒤로 보이는 녀석을 보고 몸을 경직시켰다.
-크흐....
작은 숨소리가 들린다.
사람의 것이 아닌 기괴한 숨소리가.
철커덕.
검은 갑주를 걸친 해골의 기사.
팀원의 부축을 받은 준우는 놈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덜덜 떨리는 전신.
이 정도의 공포를 느껴 본 것이 과연 언제였을까?
"왜... 왜 저 녀석이...."
준우의 목소리에 태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미국에서 수많은 헌터들의 목숨을 앗아 간 S랭크 마수, 데스나이트(Death Knight).
언데드계 중에서도 아크리치와 함께 최상위 랭크를 기록하는 마수다.
태준은 녀석이 풍기는 사기(死氣)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녀석이 오른손에 쥔 대검을 슬쩍 든 순간.
"흐읍!"
태준이 바닥을 구르며 자신의 머리 위로 거대한 화염의 창을 만들었다.
"룬 프레이어(Rune flare)!"
콰앙!
화염의 창이 데스나이트의 대검과 충돌했다.
그 순간, 태준은 준우를 둘러업으면서 소리쳤다.
"전원, 대피해!"
그의 우렁찬 목소리에 우측으로 뛰어내린 채원이 재빨리 다리를 움직였다.
한편, 화염의 창을 대검으로 막아 낸 데스나이트.
녀석은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태준의 뒤를 따라 달리던 두 팀원을 대검으로 베어 버렸다.
서걱!
무언가가 베인 듯한 소리에 태준의 몸이 절로 반응했다.
"룬 프레이어(Rune flare)!"
허공에 띄워진 다섯 개의 창이 다시금 데스나이트에게 쏘아졌다.
녀석이 쓰러졌는지 아니면 막아 냈는지를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지금은 무조건 달아나는 데 집중할 뿐.
태준에게 업힌 준우는 전방에서 헌터의 무리를 발견했다.
레이드 참가를 지원한 헌터들이다.
제62화
62화. 세실리아 T 포튼 (1)
"...이제 내려 주셔도 됩니다."
준우의 목소리에 태준이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알아서 내리세요!"
준우는 슬쩍 등 뒤를 바라봤다.
등 뒤를 맹렬히 추격해 오는 데스나이트.
녀석의 얼굴에서 무언가 섬뜩함을 느꼈다.
그래, S랭크 마수가 자신들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저 새끼, 지금 즐기고 있어.'
그는 태준의 어깨에서 내려, 눈앞의 헌터들을 향해 달려갔다.
헌터들이 데스나이트의 모습에 기겁한 순간.
"라이트닝 스피어(Lightning Spear)!"
헌터들을 향해 번개의 창을 던졌다.
그에 화들짝 놀란 태준과 채원.
아군을 공격한다고?
지금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저놈들을 미끼로 도망치겠습니다!"
준우의 발언에 태준이 얼굴을 굳혔다.
그들을 미끼로 목숨을 부지하자고?
1~2초의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생각을 마친 태준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최정예 헌터다. 저런 하찮은 것들의 목숨과는 가치가 다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설득했다.
준우의 공격으로 바닥에 넘어진 여덟 명의 헌터들.
그 외 짐꾼도 다섯이나 함께하고 있었다.
열셋이면 미끼로 충분하겠지.
파지직!
"크윽...."
"마... 마비?"
"이게 무슨...!"
헌터들은 몸이 움직여지지 않자, 당황스러운 얼굴로 준우를 바라봤다.
마수가 바로 등 뒤에 있는데, 어째서 자신들을 공격한단 말인가!
그때, 한 헌터가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저 자식들, 우리를 미끼로 사용할 생각이야!"
"이... 이런 X발! 움직여! 움직이라고!"
헌터들은 통제되지 않는 몸을 아등바등거리면서 준우를 향해 욕설을 쏟아 냈다.
"이 시X 새X가!"
"죽어 버려! 그 마수한테 죽어 버리라고!"
헌터들과 다르게 마비에서 금세 풀려난 짐꾼들.
물론, 찌릿한 느낌은 들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공격 범위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겠지.
헌터들은 자리에서 일어난 짐꾼들을 바라봤다.
"우... 우리를 골목길로 숨겨 줘! 어서!"
"빨리 움직여!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헌터들의 목소리에 짐꾼들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닥쳐! 우리도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이 새끼가, 지금 나한테 닥치라고 했냐?"
눈을 부릅뜬 헌터의 눈빛에 짐꾼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X발, 그러면 알아서 살아남든지!"
"맞아, 닷새 동안 보수도 제대로 주지 않은 주제에!"
"우리는 우리 몸도 가누기 어렵다고!"
다섯 명의 짐꾼들이 골목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기다려!"
"가... 가지 마! 나도 데려가라고!"
"보수고 뭐고 전부 줄 테니까 나도...!"
헌터들이 다급히 짐꾼들을 불렀지만, 그들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태준의 일행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한 헌터가 억지로 팔을 움직여 준우의 다리를 붙잡았다.
쾅!
준우가 바닥에 넘어졌다.
태준과 채원은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
"크으...! X발, 이거 놔!"
퍽! 퍽! 퍽!
헌터를 향해 발길질을 퍼붓는 준우.
이내, 주변의 헌터들마저 팔을 움직여 준우를 붙잡으려 했다.
"이... 이것들이...! 이거 놔!"
퍼억!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랑 내가 똑같다고 생각하는 거냐!"
한 헌터의 머리가 준우의 발길질에 짓뭉개졌다.
태준은 황급히 준우를 일으켜 세우면서 채원과 함께 달렸다.
그렇게 세 사람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자, 헌터들의 앞에 데스나이트가 멈춰 섰다.
-크흐....
"아... 아... 제발...."
목숨을 구걸하는 헌터들.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들어준 것일까?
데스나이트는 그들을 지나치며 태준의 일행을 추격했다.
"하... 하하...."
바지에 소변을 지리고 만 헌터들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면서 멍하니 바닥을 바라봤다.
그 순간, 소름 끼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콰드득!
"끄아아악! 사... 살려...!"
언제 다가온 거지?
점액이 덮인 검은빛 피부.
루비처럼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
녀석이 날카로운 이빨로 한 헌터의 팔뚝을 물어뜯었다.
음식을 먹을 때는 두 손을 움직이되, 이동할 때는 두 손을 발처럼 사용하며, 사족 보행으로 날렵하게 움직이는 C랭크 마수.
"구... 구울!"
데스나이트는 자신들을 살려 보내 준 것이 아니었다.
단지, 구울에게 줄 신선한 먹잇감을 건들지 않았을 뿐.
태준의 일행이 달려온 방향으로 수백 마리의 구울들이 들이닥쳤다.
콰드득!
"으아아아악!"
우드득! 우득!
"꺄아아악! 사... 살려...!"
도로 한복판에서 울려 퍼진 헌터들의 비명 소리.
잠시 뒤, 도로 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해졌다.
* * *
한편, 건혁이 취침에 들려던 그 시각.
바깥에서 전투 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건혁은 달빛에 비친 도로를 바라봤다.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저건?!"
도로 위를 가득 채운 스켈레톤의 군세.
수백... 수천... 아니, 도대체 몇 마리나 되는 거지?
건혁은 골렘과 충돌한 스켈레톤의 군세를 보면서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도로만이 아니다.
아파트 단지, 건물 내부 등.
시내에 스켈레톤이 가득 들어찼다.
-그어어....
마치 도시가 울음소리를 내는 것 같다.
아니, 이것도 울음소리라고 해야 하나?
건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어폰으로 귓구멍을 틀어막았다.
잠시 뒤, 스켈레톤 무리 가운데, 해골로 된 말에 올라탄 머리 없는 기사들이 보였다.
A랭크로 분류되는 듀라한이다.
"...도대체 몇이나 있는 거야?"
듀라한뿐만이 아니다.
건물의 벽을 타고 오르는 구울.
새까만 망토과 스태프를 착용한 리치 등.
B~A랭크의 언데드계 마수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복도로 뛰쳐나간 건혁.
그는 정예 기사 골렘과 충돌한 구울의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서걱!
정예 기사 골렘은 구울의 머리를 손쉽게 베어 냈다.
"X발, 이게 무슨...."
하룻밤 머무르려던 아파트 단지 역시 스켈레톤으로 가득 차고 말았다.
현 상황을 사령부에 보고하자, 몇 분 지나지 않아 사방에서 포격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허름한 가죽 갑옷을 걸치고, 검과 활로 무장한 스켈레톤.
포격은 훌륭한 효과를 선보였다.
투콰앙! 콰앙! 콰콰콰쾅!
사령부로 진격하던 스켈레톤의 군세가 순식간에 뼛조각이 되어 버렸다.
기자들이 사령부 인근에서 생활하고 있는 걸까?
인터넷에 관련 기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이어, 하늘에 드론과 보도 헬기가 띄워졌다.
콰앙!
스켈레톤의 머리를 박살 낸 건혁이 작게 욕설을 터트렸다.
"X발, 10만은 가볍게 넘는다고...?"
보도 헬기 및 드론으로 촬영된 영상에는 시내를 가득 채운 언데드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건혁은 머리를 박박 긁으면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무래도 사령부까지 탈출하는 건 어려울 것 같다.
더욱이 시내에서 터진 레이드의 등급은 S.
아크리치에 의해 드론이 격추당했다는 기사 내용에 건혁은 헛웃음을 터트리면서 도검을 크게 한 번 휘둘렀다.
파각!
"왜 하필 강원도에 S등급 게이트가 2개나 터지는 건데!"
건혁은 울분을 토하듯 스켈레톤을 박살 내며 정예 기사 골렘들을 소환했다.
아파트 단지 내 주차장에서 스켈레톤과 구울의 무리를 막아 내는 건혁의 일행.
몇 번을 죽여도 놈들은 끝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서걱!
-캬하아악!
이마에서 구슬땀이 흘러내리자, 건혁은 'Korea'의 문구가 기입된 험비 안으로 들어갔다.
무너진 아파트도 버텨 낸 차다.
스켈레톤과 구울의 공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겠지.
"하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고. 정예 기사 골렘 소환!"
창밖으로 살짝 손을 내밀어 10기의 정예 기사 골렘을 소환했다.
차량을 중심으로 전투를 진행하는 골렘들.
덕분에 차에 다가오는 언데드는 거의 없었다.
건혁은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살폈다.
"...미친, 게이트까지 몇 km 안 되잖아."
설마, 데스나이트가 찾아오는 건 아니겠지?
듀라한이라면 대환영이지만, S랭크로 규정된 데스나이트와 아크리치라면 극구 사양이다.
건혁은 스테이터스를 확인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빙마검의 스킬 레벨도 높였어야 했는데...."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듀라한을 쓰러트린 모양이다.
구울과 스켈레톤으로 레벨을 올릴 순 없으니까.
건혁은 다시금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새로이 만들어진 10기의 정예 기사 골렘들.
건혁이 스마트폰을 살펴보던 그때.
차량으로 누군가가 주먹을 휘둘렀다.
쾅! 쾅쾅쾅쾅!
기사를 읽던 건혁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간절한 얼굴로 창문을 두드리는 한 여성.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깨끗한 새하얀 피부에 서구적인 외견.
아이돌 뺨을 가볍게 후려칠 것 같은 미모다.
그러나 건혁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니, 당혹스러움이라고 해야 할까?
"우... 웃기지 마. 왜 지금 마족이...!"
머리에 돋은 두 개의 뿔.
등에서 휘청거리는 박쥐의 날개.
그녀는 마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성의 몰골이 조금 이상하다.
더러워진 드레스, 끄트머리가 부러진 한쪽 뿔, 이곳저곳이 찢어진 박쥐 날개.
누군가로부터 도망쳐 온 건가?
덜컥.
건혁은 험악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이내, 오른손에 빙마검을 소환했다.
"마족이... 왜 이곳에 있지?"
"%$#... #@$% $@%#."
건혁의 살벌한 눈빛에 여인은 알 수 없는 언어로 무언가를 호소하듯 대답했다.
뭐지?
도움을 바라는 건가?
아니, 함정일지도 모른다.
건혁은 정예 기사 골렘 5기를 소환해 그녀를 포위했다.
"마족에게는 통역할 수 있는 마법이 있을 텐데?"
"$%#...."
그녀가 무언가를 중얼거리자, 건혁이 다급히 빙마검을 겨누었다.
건혁의 위협에 몸을 움찔거린 그녀.
"사... 살려 주세요!"
"...너는 누구지?"
"저는 포튼 후작가의 장녀, 세실리아 T 포튼입니다. 페틴 영지로 도망치던 도중 갑자기 이곳으로...."
건혁은 눈을 부릅떴다.
후작급 마족이라니!
아니, 장녀라고 했으니 후작급 마족보다는 훨씬 약하려나?
그래도 그녀가 마계 귀족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건혁의 경계심이 한층 더 강해졌다.
"이곳은 지구라는 세계다. 네가 거주하는 곳과는 다른 세계지."
"그... 그게 무슨...."
"지금부터 내가 묻는 질문에 하나도 빠짐없이 대답하도록."
세실리아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어떻게 이곳으로 넘어왔지?"
"도... 도망치던 도중 갑자기 눈앞에 게이트로 보이는 것이 나타나서...."
"게이트? 위치는?"
"그... 그게...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1~2시간 정도는 달렸던 거 같은데... 그리고 게이트는 제가 이곳으로 넘어오자마자 사라져서...."
건혁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게이트가 사라졌다고?
"저... 저도 자세한 건 몰라요! 여기에 오자마자 언데드들한테 쫓겨서... 골렘들이 구해 준 덕분에 이곳으로 도망쳐 올 수 있었던 것뿐이에요!"
그녀의 말이 사실일까?
일단, 질문이나 계속해 보자.
"게이트를 넘기 전부터 도망을 쳤었다고?"
"네."
"어째서지?"
"조금 긴 이야기인데...."
"상관없다."
건혁의 딱딱한 대답에 그녀는 사건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62화. 세실리아 T 포튼 (1)
"...이제 내려 주셔도 됩니다."
준우의 목소리에 태준이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알아서 내리세요!"
준우는 슬쩍 등 뒤를 바라봤다.
등 뒤를 맹렬히 추격해 오는 데스나이트.
녀석의 얼굴에서 무언가 섬뜩함을 느꼈다.
그래, S랭크 마수가 자신들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저 새끼, 지금 즐기고 있어.'
그는 태준의 어깨에서 내려, 눈앞의 헌터들을 향해 달려갔다.
헌터들이 데스나이트의 모습에 기겁한 순간.
"라이트닝 스피어(Lightning Spear)!"
헌터들을 향해 번개의 창을 던졌다.
그에 화들짝 놀란 태준과 채원.
아군을 공격한다고?
지금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저놈들을 미끼로 도망치겠습니다!"
준우의 발언에 태준이 얼굴을 굳혔다.
그들을 미끼로 목숨을 부지하자고?
1~2초의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생각을 마친 태준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최정예 헌터다. 저런 하찮은 것들의 목숨과는 가치가 다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설득했다.
준우의 공격으로 바닥에 넘어진 여덟 명의 헌터들.
그 외 짐꾼도 다섯이나 함께하고 있었다.
열셋이면 미끼로 충분하겠지.
파지직!
"크윽...."
"마... 마비?"
"이게 무슨...!"
헌터들은 몸이 움직여지지 않자, 당황스러운 얼굴로 준우를 바라봤다.
마수가 바로 등 뒤에 있는데, 어째서 자신들을 공격한단 말인가!
그때, 한 헌터가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저 자식들, 우리를 미끼로 사용할 생각이야!"
"이... 이런 X발! 움직여! 움직이라고!"
헌터들은 통제되지 않는 몸을 아등바등거리면서 준우를 향해 욕설을 쏟아 냈다.
"이 시X 새X가!"
"죽어 버려! 그 마수한테 죽어 버리라고!"
헌터들과 다르게 마비에서 금세 풀려난 짐꾼들.
물론, 찌릿한 느낌은 들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공격 범위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겠지.
헌터들은 자리에서 일어난 짐꾼들을 바라봤다.
"우... 우리를 골목길로 숨겨 줘! 어서!"
"빨리 움직여!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헌터들의 목소리에 짐꾼들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닥쳐! 우리도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이 새끼가, 지금 나한테 닥치라고 했냐?"
눈을 부릅뜬 헌터의 눈빛에 짐꾼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X발, 그러면 알아서 살아남든지!"
"맞아, 닷새 동안 보수도 제대로 주지 않은 주제에!"
"우리는 우리 몸도 가누기 어렵다고!"
다섯 명의 짐꾼들이 골목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기다려!"
"가... 가지 마! 나도 데려가라고!"
"보수고 뭐고 전부 줄 테니까 나도...!"
헌터들이 다급히 짐꾼들을 불렀지만, 그들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태준의 일행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한 헌터가 억지로 팔을 움직여 준우의 다리를 붙잡았다.
쾅!
준우가 바닥에 넘어졌다.
태준과 채원은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
"크으...! X발, 이거 놔!"
퍽! 퍽! 퍽!
헌터를 향해 발길질을 퍼붓는 준우.
이내, 주변의 헌터들마저 팔을 움직여 준우를 붙잡으려 했다.
"이... 이것들이...! 이거 놔!"
퍼억!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랑 내가 똑같다고 생각하는 거냐!"
한 헌터의 머리가 준우의 발길질에 짓뭉개졌다.
태준은 황급히 준우를 일으켜 세우면서 채원과 함께 달렸다.
그렇게 세 사람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자, 헌터들의 앞에 데스나이트가 멈춰 섰다.
-크흐....
"아... 아... 제발...."
목숨을 구걸하는 헌터들.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들어준 것일까?
데스나이트는 그들을 지나치며 태준의 일행을 추격했다.
"하... 하하...."
바지에 소변을 지리고 만 헌터들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면서 멍하니 바닥을 바라봤다.
그 순간, 소름 끼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콰드득!
"끄아아악! 사... 살려...!"
언제 다가온 거지?
점액이 덮인 검은빛 피부.
루비처럼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
녀석이 날카로운 이빨로 한 헌터의 팔뚝을 물어뜯었다.
음식을 먹을 때는 두 손을 움직이되, 이동할 때는 두 손을 발처럼 사용하며, 사족 보행으로 날렵하게 움직이는 C랭크 마수.
"구... 구울!"
데스나이트는 자신들을 살려 보내 준 것이 아니었다.
단지, 구울에게 줄 신선한 먹잇감을 건들지 않았을 뿐.
태준의 일행이 달려온 방향으로 수백 마리의 구울들이 들이닥쳤다.
콰드득!
"으아아아악!"
우드득! 우득!
"꺄아아악! 사... 살려...!"
도로 한복판에서 울려 퍼진 헌터들의 비명 소리.
잠시 뒤, 도로 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해졌다.
* * *
한편, 건혁이 취침에 들려던 그 시각.
바깥에서 전투 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건혁은 달빛에 비친 도로를 바라봤다.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저건?!"
도로 위를 가득 채운 스켈레톤의 군세.
수백... 수천... 아니, 도대체 몇 마리나 되는 거지?
건혁은 골렘과 충돌한 스켈레톤의 군세를 보면서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도로만이 아니다.
아파트 단지, 건물 내부 등.
시내에 스켈레톤이 가득 들어찼다.
-그어어....
마치 도시가 울음소리를 내는 것 같다.
아니, 이것도 울음소리라고 해야 하나?
건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어폰으로 귓구멍을 틀어막았다.
잠시 뒤, 스켈레톤 무리 가운데, 해골로 된 말에 올라탄 머리 없는 기사들이 보였다.
A랭크로 분류되는 듀라한이다.
"...도대체 몇이나 있는 거야?"
듀라한뿐만이 아니다.
건물의 벽을 타고 오르는 구울.
새까만 망토과 스태프를 착용한 리치 등.
B~A랭크의 언데드계 마수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복도로 뛰쳐나간 건혁.
그는 정예 기사 골렘과 충돌한 구울의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서걱!
정예 기사 골렘은 구울의 머리를 손쉽게 베어 냈다.
"X발, 이게 무슨...."
하룻밤 머무르려던 아파트 단지 역시 스켈레톤으로 가득 차고 말았다.
현 상황을 사령부에 보고하자, 몇 분 지나지 않아 사방에서 포격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허름한 가죽 갑옷을 걸치고, 검과 활로 무장한 스켈레톤.
포격은 훌륭한 효과를 선보였다.
투콰앙! 콰앙! 콰콰콰쾅!
사령부로 진격하던 스켈레톤의 군세가 순식간에 뼛조각이 되어 버렸다.
기자들이 사령부 인근에서 생활하고 있는 걸까?
인터넷에 관련 기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이어, 하늘에 드론과 보도 헬기가 띄워졌다.
콰앙!
스켈레톤의 머리를 박살 낸 건혁이 작게 욕설을 터트렸다.
"X발, 10만은 가볍게 넘는다고...?"
보도 헬기 및 드론으로 촬영된 영상에는 시내를 가득 채운 언데드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건혁은 머리를 박박 긁으면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무래도 사령부까지 탈출하는 건 어려울 것 같다.
더욱이 시내에서 터진 레이드의 등급은 S.
아크리치에 의해 드론이 격추당했다는 기사 내용에 건혁은 헛웃음을 터트리면서 도검을 크게 한 번 휘둘렀다.
파각!
"왜 하필 강원도에 S등급 게이트가 2개나 터지는 건데!"
건혁은 울분을 토하듯 스켈레톤을 박살 내며 정예 기사 골렘들을 소환했다.
아파트 단지 내 주차장에서 스켈레톤과 구울의 무리를 막아 내는 건혁의 일행.
몇 번을 죽여도 놈들은 끝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서걱!
-캬하아악!
이마에서 구슬땀이 흘러내리자, 건혁은 'Korea'의 문구가 기입된 험비 안으로 들어갔다.
무너진 아파트도 버텨 낸 차다.
스켈레톤과 구울의 공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겠지.
"하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고. 정예 기사 골렘 소환!"
창밖으로 살짝 손을 내밀어 10기의 정예 기사 골렘을 소환했다.
차량을 중심으로 전투를 진행하는 골렘들.
덕분에 차에 다가오는 언데드는 거의 없었다.
건혁은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살폈다.
"...미친, 게이트까지 몇 km 안 되잖아."
설마, 데스나이트가 찾아오는 건 아니겠지?
듀라한이라면 대환영이지만, S랭크로 규정된 데스나이트와 아크리치라면 극구 사양이다.
건혁은 스테이터스를 확인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빙마검의 스킬 레벨도 높였어야 했는데...."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듀라한을 쓰러트린 모양이다.
구울과 스켈레톤으로 레벨을 올릴 순 없으니까.
건혁은 다시금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새로이 만들어진 10기의 정예 기사 골렘들.
건혁이 스마트폰을 살펴보던 그때.
차량으로 누군가가 주먹을 휘둘렀다.
쾅! 쾅쾅쾅쾅!
기사를 읽던 건혁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간절한 얼굴로 창문을 두드리는 한 여성.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깨끗한 새하얀 피부에 서구적인 외견.
아이돌 뺨을 가볍게 후려칠 것 같은 미모다.
그러나 건혁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니, 당혹스러움이라고 해야 할까?
"우... 웃기지 마. 왜 지금 마족이...!"
머리에 돋은 두 개의 뿔.
등에서 휘청거리는 박쥐의 날개.
그녀는 마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성의 몰골이 조금 이상하다.
더러워진 드레스, 끄트머리가 부러진 한쪽 뿔, 이곳저곳이 찢어진 박쥐 날개.
누군가로부터 도망쳐 온 건가?
덜컥.
건혁은 험악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이내, 오른손에 빙마검을 소환했다.
"마족이... 왜 이곳에 있지?"
"%$#... #@$% $@%#."
건혁의 살벌한 눈빛에 여인은 알 수 없는 언어로 무언가를 호소하듯 대답했다.
뭐지?
도움을 바라는 건가?
아니, 함정일지도 모른다.
건혁은 정예 기사 골렘 5기를 소환해 그녀를 포위했다.
"마족에게는 통역할 수 있는 마법이 있을 텐데?"
"$%#...."
그녀가 무언가를 중얼거리자, 건혁이 다급히 빙마검을 겨누었다.
건혁의 위협에 몸을 움찔거린 그녀.
"사... 살려 주세요!"
"...너는 누구지?"
"저는 포튼 후작가의 장녀, 세실리아 T 포튼입니다. 페틴 영지로 도망치던 도중 갑자기 이곳으로...."
건혁은 눈을 부릅떴다.
후작급 마족이라니!
아니, 장녀라고 했으니 후작급 마족보다는 훨씬 약하려나?
그래도 그녀가 마계 귀족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건혁의 경계심이 한층 더 강해졌다.
"이곳은 지구라는 세계다. 네가 거주하는 곳과는 다른 세계지."
"그... 그게 무슨...."
"지금부터 내가 묻는 질문에 하나도 빠짐없이 대답하도록."
세실리아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어떻게 이곳으로 넘어왔지?"
"도... 도망치던 도중 갑자기 눈앞에 게이트로 보이는 것이 나타나서...."
"게이트? 위치는?"
"그... 그게...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1~2시간 정도는 달렸던 거 같은데... 그리고 게이트는 제가 이곳으로 넘어오자마자 사라져서...."
건혁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게이트가 사라졌다고?
"저... 저도 자세한 건 몰라요! 여기에 오자마자 언데드들한테 쫓겨서... 골렘들이 구해 준 덕분에 이곳으로 도망쳐 올 수 있었던 것뿐이에요!"
그녀의 말이 사실일까?
일단, 질문이나 계속해 보자.
"게이트를 넘기 전부터 도망을 쳤었다고?"
"네."
"어째서지?"
"조금 긴 이야기인데...."
"상관없다."
건혁의 딱딱한 대답에 그녀는 사건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제63화
63화. 세실리아 T 포튼 (2)
마족, 인족, 수인족, 엘프족, 드워프족, 어인족 등.
다양한 종족들이 살아가는 세계, 아르덴.
말 그대로 중세 및 판타지가 섞인 세계다.
"수백 년간 지속되어 온 인마대전은 마왕 루시퍼의 손으로 매듭이 지어졌어요. 하지만 그 피해는 결코 적지 않았죠. 더욱이 마족의 승리를 불쾌하게 여기던 드래곤들이 움직이면서 아르덴은 엉망이 되어 버렸어요."
그럼에도 마왕은 드래곤을 쓰러트리고 아르덴을 지배했다고 한다.
그러나 드래곤과의 격렬한 전투 탓일까?
지구보다 심각한 기상 이변이 연달아 일어나고, 식량을 재배할 수 없는 환경이 되어 가면서 마족들은 극심한 식량난을 겪게 되었다.
"몇 년 뒤에는 노동력으로 이용하던 타 종족까지 식량으로 사용하려는 마족들이 속출했죠. 게다가 마수 농장이라는 새로운 시설이 만들어졌을 때는 정말로 황당해했었어요."
아르덴의 마수들은 던전 게이트의 마수들처럼 자연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 '던전의 마수들은 게이트의 핵이 가진 에너지로 만들어지는 존재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겠지.
도대체 게이트의 핵은 무엇으로 이루어진 걸까?
그런 의문이 들 때쯤 세실리아가 말을 이어 나갔다.
"마수를 식량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음에도 식량난은 해결되지 않았어요. 마수 농장을 만들어도 먹일 만한 먹이가 없으니...."
건혁은 조용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식량이 재배되는 지역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마왕은 그 지역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고, 식량을 각지에 일정량만 판매하기로 결정을 내렸죠. 하지만... 그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반란이라도 일으켰나?"
세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당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거죠. 그로 인해 마왕은 점점 포악해졌어요. 역모가 의심되는 귀족들을 모두 숙청해 버린 거죠. 저희 가문은 이웃 영주에 의해 누명이 씌워져...."
그녀의 눈가에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부모님과 여동생은 수많은 백성들 앞에서 처형을 당하셨어요. 정말... 정말로 착하신 분들이셨는데, 백성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면서...."
확실히 가여운 이야기다.
동정해 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날 정도로.
그러나 그녀가 거짓을 이야기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건혁은 경계심을 놓지 않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훌쩍.... 그러고 보니 마왕성에서 식량난을 해결하고자 게이트에 대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건혁이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인마대전 당시 용사로 소환된 자들이 있었거든요. 아버님께서는 용사들의 세계를 아르덴과 연결시키려는 실험이 마왕성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말씀을 해 주셨어요."
"그래서 마족들이...."
마계의 존재... 아니, 아르덴의 마족들이 어째서 지구를 침략해 온 것인지.
그 이유를 알게 된 건혁은 미간을 좁힌 채 작게 한숨을 토해 냈다.
세실리아는 입술을 한 번 깨물면서 건혁을 바라봤다.
"...여기가 용사들의 세계인 건가요?"
"몰라."
건혁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에 세실리아가 살짝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쯧, 왜 갑자기 게이트가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얻을 정보는 다 얻은 건가."
건혁이 빙마검을 들어 올리자, 세실리아가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지... 질문에 모두 대답했는데 어째서...!"
"네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사실을 말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 게다가 마계... 아니, 아르덴에서 넘어온 스파이일 수도 있잖아. 당연히 기절시켜서 헌터 협회... 아니, 국가에 넘겨야지."
국가에 넘긴다.
세실리아는 그 말뜻을 깨달았다.
각종 고문을 받고, 처형식을 거행한다.
마족인 자신을 용사의 국가에서 무사히 살려 줄 리는 없겠지.
그녀는 귀족으로서의 수치도 잊고,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박았다.
"매... 맹약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국가에 넘기는 것만은...!"
건혁은 세실리아의 두려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성을 가진 생명체를 해부하진 않을 거다.
고문이 있을지는... 조금 생각해 봐야지.
'아니, 정신병자로 취급할 수도 있으려나?'
세계에는 외형을 변형시킬 수 있는 헌터들 역시 존재한다.
희귀하기는 하지만.
세실리아를 보면 아마 정신이 이상한 특수 능력 각성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중2병에 빠진 특수 능력 각성자라거나.
"하아, 복종의 맹약이라도 맺겠다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마족을 산하에 둔다?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복종의 맹약이라는 건 또 뭐야?
아르덴에는 그런 게 정말로 존재하는 건가?
건혁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맹약의 대가로 국가에는 넘기지 않겠다."
"가... 감사합니다."
"준비해."
세실리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본인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다.
이어, 자신의 핏물로 건혁의 손등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한 그녀.
'...역으로 내가 복종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
살짝 불안함이 일어났다.
그녀가 무언가를 중얼거린 순간.
건혁의 손등에 그려진 그림이 빛을 발하면서 문신처럼 새겨졌다.
"이... 이걸로 끝입니다."
"...."
정말인가?
건혁은 바닥에 도검을 떨어트렸다.
"자신의 두 다리를 베도록."
"...?!"
그녀는 화들짝 놀라면서 건혁을 바라봤다.
"무... 무슨...."
그녀가 도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의지와 달리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모양이다.
그녀가 자신의 다리를 베려던 그때.
카앙!
건혁의 빙마검이 도검을 가로막았다.
"뭐,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네."
세실리아는 멍한 얼굴로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슬그머니 올라오기 시작한 암모니아 냄새.
건혁은 슬쩍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미안하다. 맹약은 처음이라서...."
그녀는 머리를 빙글빙글 돌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극도의 긴장이 한순간에 풀리면서 정신을 잃은 모양이다.
건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를 험비의 뒷자리에 눕혀 주었다.
"냄새는... 모르겠다."
그녀가 정신을 잃은 동안 건혁은 차량 지붕에 앉아 주변을 살펴봤다.
"...이 정도면 뼈로도 건물을 만들 수 있겠네."
물론, 그런 소름 돋는 행동은 하지 않겠지만 말이야.
건혁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연신 하품을 해 댔다.
도대체 이 소란은 언제쯤 끝나는 걸까?
그냥 지금이라도 자 버릴까?
하지만 S랭크 마수가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걱정에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조금 정리되면 사령부로 돌아가자."
날이 밝고 있음에도 스켈레톤의 무리는 여전히 단지 내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건혁은 기계 마냥 정예 기사 골렘들을 소환할 뿐.
콰앙!
다섯 마리의 듀라한이 들이닥쳤다.
뭐, 크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겠지.
수십 기의 정예 기사 골렘들에게 다구리를 당하는 듀라한들.
똑똑똑.
세실리아가 일어난 건가?
차 안에서 누군가 노크를 했다.
건혁은 그녀를 차에서 내리게 하면서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환기 좀 시켜야겠네."
"으으...."
수치심에 얼굴을 잔뜩 붉힌 세실리아.
건혁은 그녀에게 예비용 옷들을 던져 주었다.
"그걸로 갈아입어. 속옷은... 뭐, 남자 거긴 하지만 없는 것보단 나으려나."
"가... 감사합니다."
"됐어. 애초에 내 잘못이니까."
1시간 동안 에어컨을 켜 두고, 차 문을 열어 두었더니 냄새는 대부분 빠졌다.
"들어가서 좀 잘 테니까, 위험해지면 문 열고 바로 깨워."
"네, 그렇게 할게요."
"혹시 모르니... 내게 위해를 가하는 행동은 절대로 불허한다."
"어차피 맹약을 맺은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는 건 불가능해요."
"그럼 됐고."
건혁은 운전석에 앉아 의자를 뒤로 젖혔다.
그가 수마에 빠진 시각.
세실리아는 멍하니 바닥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스켈레톤과 구울을 손쉽게 쓰러트리는 골렘들.
대여섯 마리의 듀라한이 나타났을 때는 화들짝 놀라며 건혁을 깨우려 했지만, 그들 역시 골렘들의 먹잇감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무... 무슨 골렘이 저렇게 강해?'
전투용 골렘은 아르덴에서도 몇 차례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듀라한을 쓰러트릴 정도의 골렘은 처음이다.
게다가 정교한 움직임에 마법과 같은 기술까지.
정말로 골렘이 맞기는 한 건가?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인간에게 복종의 맹약을 하게 될 줄은...."
복종의 맹약이란, 상대방에게 목숨마저 바치는 일종의 저주다.
건혁이 맹약에 대해 모른다는 걸 진작에 알았더라면, 역으로 그를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었을 텐데....
골렘들이 포위를 한 탓일까?
잘못했다간 목이 베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녀는 순순히 자신의 목에 족쇄를 채워 버렸다.
세실리아는 후회가 깃든 한숨을 내쉬면서 바닥에 쪼그려 앉아 두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의 일들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끄윽...."
백성들의 앞에서 화형에 처한 부모님과 여동생.
돌팔매질을 당하며 불에 태워질 때.
가족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특히, 여동생의 경우에는 자신의 이름을 외치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 마법을 사용해 가족들을 구출했더라면... 아니, 오히려 처형식은 자신을 불러내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서 자신을 포박해 가족들과 함께 화형에 처하려는 것이었겠지.
그건 주변에 배치되었던 상급 마족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차라리... 같이 죽었어야 했나?"
가족들의 원망 어린 목소리가 꿈에서까지 들려온다.
어째서 자신들을 구해 주지 않았냐고 말이다.
그녀가 쪼그려 앉아 조용히 흐느끼자, 차 문이 열리면서 건혁이 내렸다.
이내, 건혁은 세실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아르덴이 이 지구를 공격해 올 거다. 가족을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너희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간 자들에 대한 복수라면 가능하겠지."
"아...."
"복수를 바란다면 나를 따라와라. 나 역시 아르덴을 무너트리기 위해 강해질 생각이니 말이야."
세실리아는 건혁을 멍하니 올려다보더니, 무언가 각오를 마친 듯 눈빛을 굳혔다.
그래,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너무나도 억울하다.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가족에게 비난과 돌팔매질을 한 백성들.
처형식을 진행시킨 마왕과 수많은 귀족들.
그녀는 아르덴을 향한 강한 복수심이 일어났다.
"...11시가 좀 넘었네."
건혁은 3시간밖에 자지 못했다는 것에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꼬르륵.
세실리아의 뱃속에서 거지가 울어 댔다.
"그래, 점심을 먹을 때가 되기는 했지. 그보다 아침도 안 먹었지?"
"...네."
"오늘은 닭갈비덮밥이랑 통조림으로... 자, 받아."
세실리아는 건혁에게 받은 작은 상자를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이쪽 부분을 당기면... 증기가 나올 거야. 일단, 뜨거우니까 바닥에 내려 두고. 이쪽은 고추참치... 약간 매콤한 생선이라고 생각하면 돼."
세실리아는 건혁을 따라 상자의 줄을 잡아당겼다.
상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증기.
건혁은 상자에서 내용물을 꺼내 세실리아에게 하나씩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 밥에다가 소스를 붓고 비벼 먹는 거야."
"비... 비벼서 먹는다고요?"
"그래. 그리고 이런 봉투도 같이 들어 있는데, 이건 볶음김치라고 해서 적당히 곁들어 먹으면 돼."
건혁은 덮밥이 담긴 종이 상자에 볶음김치를 쏟으면서 식사를 시작했다.
세실리아는 살짝 의심스러운 눈치로 상자를 바라봤다.
정말로 먹을 수 있는 건가?
아니, 음식에 무엇이 들었을 줄 알고 함부로 먹어?
그런 의심과 걱정 속에서도 공복은 정신을 지배했다.
이틀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이겠지.
그녀는 덮밥을 만들어 허겁지겁 입 안에 넣었다.
제64화
64화. 세실리아 T 포튼 (3)
"이... 이런 음식이 있다니.... 이 생선도 맛있어요!"
고작 이 정도 식사에 이런 반응을 보인다고?
아르덴에서는 얼마나 맛없는 식사를 한 걸까?
건혁이 작게 웃었다.
"다행이네. 후식은 복숭아야."
"이게...."
세실리아는 건혁의 시식을 본 다음 복숭아를 입에 가져다 댔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맛이지?!
화들짝 놀란 얼굴로 통조림을 바라본 그녀.
이건 자신이 아는 복숭아가 아니다.
복숭아가 이렇게까지 달달하다고?
"이... 이렇게 맛있는 복숭아는 난생처음이에요."
"그래, 그래. 이건 간식으로 먹어 둬."
건혁이 감자칩을 던져 주었다.
세실리아는 다시금 건혁을 바라봤다.
봉투를 찢고 감자칩을 먹는 그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기 위함이다.
"조... 조금 짜네요."
"그 맛으로 먹는 거야."
건혁은 세실리아에게 생수와 음료 캔을 건네주곤 주변을 둘러봤다.
아파트 단지로 흘러 들어오는 언데드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슬슬 출발할 생각인데... 뿔하고 날개를 감출 수 있어? 이왕이면 눈동자 색도...."
세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으로 가능해요. 하지만 유지 시간이 12시간 정도라서, 효력이 떨어지면 다시 마법을 사용해야 돼요."
"뭐, 그 정도는 상관없겠지."
차량에 올라탄 후, 무전기로 사령부와 연락을 나눈 건혁.
아무래도 퇴로는 확보된 모양이다.
건혁은 트렁크에 세실리아를 숨기고, 골렘들을 앞세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퇴로는 개뿔...."
도로 위를 어슬렁거리는 수천의 스켈레톤.
10기의 거인 골렘이 앞으로 나가, 스켈레톤의 무리를 전부 쓸어 버렸다.
그렇게 퇴로를 직접 만들며 사령부로 물러난 건혁은 마침내 피폐한 얼굴의 군인들과 대면하게 되었다.
"너희는 담당 구역으로 돌아가서 마수들을 처리해."
골렘들은 고개를 작게 숙이고,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반면, 신분이 확인되자마자 사령부로 들어간 건혁.
유성진 청룡 기사단원이 그에게 다가왔다.
"고생하셨습니다, 박건혁 헌터님."
"아닙니다. 그보다 피해는...."
"...미처 돌아오지 못한 헌터들 중 상당수가 실종 상태입니다. 심지어 제22 토벌팀으로 활동하시던 데스펠 길드의 도정민, 김민수, 김채원 헌터님께서는 데스나이트에게 죽임을 당하셨고, 방준우 헌터님께서는 오른팔을 잃은 채 사령부로 귀환하셨습니다."
"박태준 헌터님은...."
"박태준 헌터님은 방준우 헌터님과 함께 무사히 귀환하셨습니다."
"그렇군요."
"문제는 제163 토벌팀에서 짐꾼으로 활동하던 헌터들이...."
성진의 이야기에 건혁이 미간을 찡그렸다.
방준우의 공격으로 마비에 걸린 제163 토벌팀.
그들이 데스나이트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한 미끼로 사용되었다는 모양이다.
"일단, 박태준 헌터님과 방준우 헌터님께서는 해당 이야기를 부정하고 계십니다. 사실 여부는 따로 조사를 해 봐야겠죠."
"그렇군요."
"피곤해 보이시는데 천막에서 편히 쉬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건혁은 차량을 주차하고, 트렁크에서 세실리아를 내려, 개인 천막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적당히 쉬어. 어디 나가지는 말고.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사람이 사령부에 들어왔단 사실이 알려지면... 나도 꽤 골치가 아파지거든."
"네, 알겠어요."
"아, 이거라도 먹고 있든가."
건혁이 구석에 놓인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과자와 젤리 등의 간식들이 담겨 있는 상자로, 강원도에 오기 전 개별적으로 구매한 것들이다.
"그럼, 나는 한숨 잘게."
간이침대에 누워 수면에 빠진 건혁.
세실리아는 과자들을 살피더니, 봉투를 하나씩 뜯기 시작했다.
과자 3봉지, 젤리 2봉지, 1.25L 음료 3병을 섭취한 그녀는 이내 멍하니 시간을 죽였다.
그렇게 4~5시간이 지나자, 건혁이 부스스한 얼굴로 잠에서 깨어났다.
"잘 주무셨어요?"
"끄응.... 목이 아직도 뻐근한 거 같아. 점심시간은... 벌써 지나 버렸네. 가서 즉석 밥이랑 통조림이나 조금 받아 올 테니까,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네."
건혁은 천막을 나가 물자를 관리하는 직원에게 찾아갔다.
직원으로부터 즉석 밥과 몇 가지 반찬 및 통조림을 받은 뒤, 천막으로 돌아가던 도중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툼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란의 주인공을 본 순간.
홱!
"...."
곧바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엮이지 말자.
그래, 저기에 엮여 봐야 성가셔질 뿐이다.
"X발, 내가 무슨 공격을 해! 팀 내 헌터들을 미끼로 삼아서 도망친 주제에 어딜 남한테 뒤집어씌우려고! 짐꾼들이 뒤통수치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준우의 목소리에 주변으로 모인 헌터들이 짐꾼들을 노려봤다.
상황이 불리해짐을 느끼고 당황한 짐꾼들.
그들은 준우를 향해 분노를 터트리며 자신들에게 향한 의심을 떨쳐 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짐꾼들이 발악을 하면 할수록 헌터들은 짐꾼에 대한 의심만 높였다.
"정말로 뒤집어씌우려는 거 아니야?"
"담당 구역이 비슷했다고 저러는 건...."
"데스펠의 이미지가 좋지는 않지만, 짐꾼들 이미지도 여간 나빠야지...."
건혁은 살짝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방준우의 성격이 얼마나 쓰레기인지는 헌터 협회에서 직접 봤었으니까.
방준우라면 타인을 미끼로 쓴다 해도 이상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짐꾼들을 돕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심한 얼굴로 자리를 벗어날 뿐.
그때, 건혁을 발견한 걸까?
준우가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트린 채 건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렇게 억울하면 저기 있는 흑월의 마스터한테 도움을 요청하든가! 짐꾼을 챙기기로 유명한 놈이잖아!"
그에 모두의 시선이 건혁에게 향했다.
건혁은 작게 한숨을 토해 내며 준우를 지그시 바라봤다.
"괜히 끌어들이지 마시죠."
"허, 짐꾼들을 그렇게 보듬어 주시던 분께서...."
"말은 바로 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냥 짐꾼이 아닌 제 길드에 소속된 짐꾼입니다. 또, 저는 이번 사건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입니다. 직접 본 것도 아니고, 명확한 증거도 없는데, 함부로 누구의 편을 들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결국은 방관자라는 말이군."
헛웃음을 터트린 준우의 모습에 건혁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사자도, 목격자도 아닌 사람한테 뭘 바라시는 겁니까?"
건혁의 대꾸에 준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데스펠에서도 정예로 손꼽히는 동료 셋이 데스나이트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자신의 오른팔이 증발해 버리며 짜증과 분노가 솟구쳤다.
그 와중에 제163 토벌팀 짐꾼들의 고발은 준우의 심기를 강하게 건드렸다.
그래, 지금의 준우는 폭발하기 직전의 폭탄과 다름없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분노를 꾸욱 억누르며 무력을 자제한 준우.
사령부에서 무력을 사용했다가는 청룡 기사단이 움직여 자신을 구속하려 들겠지.
때문에 마침 눈에 띈 건혁에게 화풀이를 하고자 시비를 걸었다.
그러나 건혁은 자신의 시비를 당당히 맞받아치며 개인 천막으로 돌아갔다.
'X발... X발... X발....'
준우는 마음대로 되지 않자,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러곤 짐꾼들을 뿌리치며 개인 천막으로 돌아갔다.
풀썩.
간이침대에 누운 뒤에도 그의 마음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당장 이 답답함을 풀지 않으면, 머리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분노의 배출구로 박건혁의 얼굴을 떠올렸다.
27마리의 라이오스를 쓰러트리고, 승승장구를 연이어 가는 서열 779위의 헌터.
서열 183위인 자신이 고작 779위의 헌터에게 무시를 당하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최상급 포션 때문에 전 재산을 턴 것도 짜증 나는데...."
데스펠에서 최상급 포션을 주문하느라 전 재산이 증발해 버렸다.
서열 183위인 자신이 의수를 착용하고 다닐 순 없지 않은가.
"크으...."
그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최상급 포션이 사령부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한편, 개인 천막으로 돌아간 건혁은 세실리아와 함께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통제 구역에서 먹은 식사보다 푸짐한 양이다.
세실리아는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들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 마스터는 기사님이신 건가요?"
"마스터?"
"그...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서...."
"...그래. 뭐, 마스터도 나쁘지는 않네."
평소에도 그렇게 불리고 있으니까.
"참고로 내 이름은 박건혁이다."
"박... 건혁?"
"그래. 그리고 이 세계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국가들은 오래전에 신분제가 폐지됐어. 뭐, 왕족이 남아 있는 국가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 그럼 국가는 누가...."
"국민들이 직접 투표를 하는 것으로 국가의 대표를 선발해. 자세한 건...."
건혁은 스마트폰으로 대통령제와 의원 내각제를 검색했다.
이내, 한 블로그에 들어가자, 두 제도는 물론이고, 두 제도에서 장점들을 뽑아 만든 대한민국의 제도의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아, 한글은 읽을 수 있지? 이렇게 손가락으로 내리면 화면도 내려가니까 한번 읽어 봐."
"시... 신기한 도구네요."
세실리아는 대답을 하면서도 스마트폰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작게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감은 세실리아.
신분제를 당연하게 여겼던 그녀에겐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백성들이 국가의 왕(대통령)과 귀족(국회 의원)을 직접 선출한다니...."
심지어 기간제 신분이다.
세실리아는 작게 웃으면서 건혁에게 스마트폰을 돌려주었다.
"이 세계는 정말로 신기하네요."
"개인적으론 이런 제도 덕분에 국민들이 어느 정도 먹고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생각해."
"그건...."
"게다가 자유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수많은 기업들이 만들어지고, 경쟁이 시작되면서 발전도 가속화됐지. 참고로 신분제는 존재하지 않지만, 자본주의에 따라 재벌과 서민 등의 빈부 격차는 존재해. 범죄를 저질러도 돈을 쓰면 어느 정도 해결되는 부분도 있고. 말 그대로 자본주의 사회라는 거야."
세실리아는 씁쓸히 웃으면서 식사를 재개했다.
"이 세계에 대한 공부를 조금 해 보고 싶은데...."
"사령부에서 나가게 되면 수많은 자료를 읽을 수 있도록 해 줄게."
건혁은 작게 하품을 하면서 간이침대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에 문자를 보내 두긴 했지만, 전화를 하는 게 마음이 편하겠지.
세실리아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건혁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정보를 확인할 수도 있으면서 통신구의 역할까지 하는 건가?'
이 지구라는 세계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문명을 가지고 있는 거지?
세실리아의 시선을 무시한 채 전화를 마친 건혁은 유X브를 시청하며 시간을 보냈다.
스마트폰에서 사람의 목소리와 음악이 흘러나온 탓일까?
세실리아가 슬그머니 건혁의 옆으로 다가갔다.
슬쩍 옆자리를 내어 준 건혁.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그냥 편하게 봐."
"이건...."
"뉴스. 이 나라 각지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알려 주는 하나의 언론 매체야."
"상자 안에 있는 사람이 마스터한테 정보를 전달해 주는 건가요?"
건혁은 설명을 멈추고, 인터넷에 접속해 전화기, 스마트폰, 뉴스, 게임 등의 수많은 정보를 검색하여 세실리아에게 보여 주었다.
제65화
65화. 세실리아 T 포튼 (4)
"이 스마트폰이라는 도구를 국민 대부분이 소유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뭐, 한국을 포함한 웬만한 국가들은 다 그렇겠지?"
"시... 실시간으로 수많은 정보를 국민들에게 공유할 수 있다니...."
놀라워하는 세실리아.
건혁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이내, 테이블에 설치한 뒤, 몇 개월 전에 구매한 FPS 게임을 실행시켰다.
온라인은 불가능하지만 캠페인을 즐길 순 있다.
"마... 마스터, 다른 정보를 확인하려면...."
세실리아의 도움 요청에 건혁은 차근차근 검색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그녀가 검색에 몰두하기 시작할 무렵.
건혁은 두 귀에 이어폰을 낀 채 게임을 시작했다.
그렇게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성진이 건혁의 천막으로 다가왔다.
"서열 10위에서 30위까지의 헌터분들이 곧 데스나이트 토벌 작전에 참전하실 예정입니다. 또, 전투 헬기가 투입돼 중기관총 등으로 언데드의 무리를 공격할 예정이니, 박건혁 헌터님께서는 모레 오전 중 건물 내부에 숨어든 마수들을 토벌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아마 다음 주 수요일 정도에는 자택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마수들이 통제 구역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선을 지키는 5만여 명의 군인.
마수를 토벌하되, 피해자들의 구조를 최우선적으로 수행하는 5,800여 명의 기사단원.
통제 구역에 투입되어 마수의 토벌을 최우선적으로 수행하는 10,800여 명의 헌터.
구조된 주민, 부상당한 헌터와 군인을 치료하고 병원으로 이송시키는 1천여 명의 의료진.
그 외 수많은 사람들이 이번 S등급 레이드에 동원되었다.
레이드가 서서히 마무리될 것 같은 그때.
새로운 S등급 게이트가 폭발하며 대한민국은 한바탕 시끄러워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게이트가 통제 구역에서 생성된 덕분에 정부는 초기 진압에 성공했고, 수십만에 달하는 스켈레톤을 중기관총으로 박살 내겠다는 결단으로, 국민들은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으으...."
세실리아는 귀를 틀어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밤낮으로 끊이지 않는 소음.
건혁은 세실리아에게 인이어를 건네주곤 바닥에 이불을 펼쳤다.
"바... 바닥에서 자는 건가요?"
"하아, 내가 바닥에서 잘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아...."
"그냥 자."
세실리아는 살짝 눈치를 보면서 간이침대에 누웠다.
다음 날, 건혁은 온종일 골렘 소환에 집중하며 천막 주변에 정예 기사 골렘들을 배치시켰다.
그러자 지나가던 헌터들이 구경거리라도 발견한 듯 건혁의 천막으로 모였다.
이내, 동영상을 촬영하기 시작한 헌터들.
천막에서 정예 기사 골렘 10기가 걸어 나오자, 한 헌터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스타X래프X야? 배럭에서 병사를 만드는 거 같네."
"푸핫! 생각해 보니까 진짜 스타X래프X 실사판이네. 배럭에서 해병들 뽑는 줄."
"그보다 도대체 몇 기나 소환할 수 있는 거지?"
"유지 시간이 존재한다는 모양이더라고. 송파구 레이드에서도 300기 정도까지만 운용했다고 들었어."
"미친, 혼자서 부대 하나를 편성하네."
"그러니까 단독으로 움직이는 거겠지."
헌터들은 질린다는 얼굴로 골렘들을 바라봤다.
그러곤 슬그머니 건혁의 천막으로 다가갔다.
SNS에 촬영물을 업로드해도 되는지 허락을 받기 위함이다.
"크흠, 박건혁 헌터님."
덤덤한 얼굴로 천막을 나온 건혁.
"무슨 일이시죠?"
"그... 골렘들을 찍은 영상을 SNS에 올려도 되는지...."
"예, 제 얼굴이 나오지만 않는다면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사령부에서 찍은 영상을 함부로 SNS에 업로드해도 괜찮은 겁니까?"
"아, 그것도 헌터 협회 직원분들한테 여쭤볼 예정입니다."
"그렇다면야...."
헌터들은 건혁에게 감사하단 한마디를 건넨 후, 협회 직원의 허락을 받고 SNS에 해당 영상을 업로드하여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영상은 유X브 및 TV에까지 전파되었고, 국민들은 박건혁이라는 이름을 몇 차례나 되새기며, 그에게 이명을 붙여 주자는 이야기까지 거론되기 시작했다.
"...괜히 허락했나?"
사령부를 떠나 통제 구역으로 들어간 건혁은 씁쓸히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허락과 관계없이 무단으로 업로드하려는 헌터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목이 갈 바에는 순순히 허락을 해 주는 편이 낫겠지.
서걱!
건혁이 빙마검을 휘둘러 구울을 쓰러트리자, 세실리아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 소환술사가 아니셨군요."
"처음 만났을 때도 이거 보여 줬잖아."
건혁이 빙마검을 살짝 들어 보였다.
그에 세실리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단순히 위협용이라고만.... 저런 골렘들을 소환하시는 분이 검술까지 익혔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뭐, 원래는 이쪽이 본업이었어."
촤아악!
그는 일순간에 수십 마리의 스켈레톤을 정리했다.
"엘리멘트 매직(Element Magic) - 에어로 봄(Airo Bomb)!"
퍼엉!
제3 서클 바람 속성의 마법을 다루는 세실리아는 후위로 물러나 건혁과 골렘들을 지원했다.
이틀간 담당 구역을 휘젓고 다니던 그는 주변 일대가 조용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몇 시간 뒤면 집으로 복귀할 수 있다.
그 때문일까?
5층 빌라의 가정집으로 들어간 건혁은 마음 편히 취침을 취했다.
* * *
새벽 1시.
달빛이 구름에 가려지며 도시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빌딩 옥상에서 건혁이 머물고 있는 빌라를 노려보는 한 남성.
그는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마침내 터질 것만 같았던 두통을 폭발시킬 때가 왔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죽여 주마."
구름이 개어지자, 서열 183위 헌터, 방준우의 얼굴이 달빛에 비쳐졌다.
데스나이트로부터 막대한 피해를 입은 제22 토벌팀은 현재 잠정적으로 토벌 작전이 중단된 상태다.
때문에 태준과 준우는 사령부에서 대기하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태준에게 일찍 자겠다며 8시가 되자마자 개인 천막으로 들어간 준우는 몰래 자리를 벗어나 일전에 섭외해 둔 군인에게 다시 한번 현금 다발을 건네주며 통제 구역으로 들어갔다.
이어, 건혁의 담당 구역을 찾아가 골렘들의 이동 경로를 추적했다.
"...저거군."
눈앞에 나타난 험비 한 대.
그래, 박건혁의 차량이다.
준우는 해당 차량을 쫓아갔다.
"저건... 누구지?"
건혁과 함께 빌라로 들어가는 한 여성.
레이드에 휘말린 피해자일까?
아니면 실종된 헌터?
어찌 됐든 상관없다.
그녀 역시 건혁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씨익.
"박건혁에게 구조된 것을 불행이라 생각하라고."
빌라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지점.
준우는 빌딩 옥상에서 번개의 창 10여 개를 허공에 띄웠다.
이 정도면 100% 놈을 죽일 수 있겠지.
아니, 죽이진 못하더라도 전격에 의한 마비로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2차 공격까지 생각해 둔 준우는 곧장 번개의 창을 내던졌다.
쐐애애액!
허공을 가로지르는 번개의 창이 빌라 건물과 충돌했다.
콰콰콰콰쾅!
일전에 라이오스의 무리가 아파트를 무너트렸을 때와 비슷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대여섯 개의 창이 기둥을 부순 탓일까?
빌라가 폭삭 주저앉아 버렸다.
쿠쿠쿠쿵!
준우는 2차 공격을 할 겸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허공에 번개의 창을 띄웠다.
"죽어라!"
쐐애액!
건물의 잔해에 번개의 창이 꽂히면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동시에 인근 골렘들까지 파괴되었는데.
"크하하하하! 그딴 장난감들이 내 창을 막아 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마력이 대폭으로 깎여 나갔음에도 준우는 폭소를 터트리며, 지금까지의 답답함을 터트리듯 번개의 창을 연이어 내던졌다.
콰앙! 콰콰콰쾅! 콰아앙!
"뒈져! 뒈져 버려!"
그래, 이번에야말로 100%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어째서 소환술사가 죽었음에도 소환수가 멀쩡하게 어슬렁거리는 거지?
준우는 불안한 마음에 마력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번개의 창을 내던졌다.
"죽어... 죽어... 죽어어어어어!"
준우가 포효를 터트리듯 소리쳤다.
그때.
톡톡.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그의 어깨를 건드렸다.
"저쪽에 누가 있습니까? 누구를 그렇게 공격하시는 건가요?"
준우는 흠칫 몸을 떨었다.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익숙한 목소리.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고개를 돌렸다.
"왜... 왜 네가 여기에...."
"그러는 당신은 왜 남의 담당 구역에서 날뛰는 건지... 이유를 여쭈어도 괜찮을까요?"
"그... 그건...."
"아 참, 당신이 쫓아오는 모습은 현재 사령부의 드론으로 촬영됐을 겁니다."
"그... 그게 무슨...!"
"당신이 계속 쫓아오시길래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서 촬영을 부탁드렸거든요. 마침 저기 내려오네요."
건혁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에서 2~3대의 드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준우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털썩.
이내 절망 어린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상태.
드론을 파괴하고 박건혁을 죽인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미 영상은 사령부에 기록되어 있을 텐데.
"하... 하하...."
"지금부터 범죄 헌터 방준우를 구속하겠습니다."
"범죄 헌터... 범죄 헌터라...."
준우는 연신 '범죄 헌터'라는 단어를 중얼거렸다.
"그래, 어차피 범죄자가 될 거라면... 너라도 죽이고 달아나 주마."
"마력이 남아 있기는 한가요?"
"골렘만 없으면 네놈 따위는...!"
준우가 번개의 창을 던지려 하자, 건혁은 지면을 박차며 빙마검을 휘둘렀다.
서걱!
"크아아아아악!"
바닥에 떨어진 왼팔.
그러나 단면이 만들어진 왼쪽 어깨에선 핏물이 쏟아지지 않았다.
준우는 천천히 본인의 왼쪽 어깨를 바라봤다.
잘려진 부위가 푸른빛 얼음으로 덮여 있다.
"아... 내... 내 팔...."
눈물과 콧물을 질질 짜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이게 서열 183위라는 건가.
건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다리까지 내어 줄 생각이라면 마음껏 발악해 보시죠."
"마... 말도... 말도 안 돼. 이건...."
그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지금의 당신은 짐꾼보다 못한 존재입니다. 제가 특수 능력을 사용할 가치도 없다는 의미죠."
"고... 고작 779위 따위에게 내가...."
"후우, 대화가 안 통하는군요."
건혁은 정예 기사 골렘을 소환했다.
흠칫 놀란 준우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정예 기사 골렘은 그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고 머리를 붙잡았다.
"끄아아악!"
골렘은 준우의 목을 뜯어낼 것처럼 머리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때, 건혁의 주먹이 준우의 복부를 꿰뚫었다.
퍼억!
"그냥 얌전히 주무세요."
"끄윽...."
준우가 눈을 까뒤집으며 정신을 잃자, 정예 기사 골렘은 그의 머리를 놓아주었다.
털썩.
상황을 지켜보던 사령부는 곧바로 건혁에게 무전을 넣었다.
범죄 헌터 방준우를 회수해 오라고 말이다.
건혁은 준우를 포박하여 차량의 뒷좌석에 실었다.
"후우,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네."
세실리아가 다시금 트렁크에 올라탔다.
건혁이 사령부로 도착한 시각.
군 장교와 청룡 기사단원 및 제22 토벌팀 팀장인 박태준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박건혁 헌터를 공격하기 위해 일부러 사령부를 빠져나갔다, 라...."
"방준우 헌터와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건혁은 헌터 협회 서울 중앙 본부에서의 소소한 말다툼과 사령부에서 벌어진 짐꾼과의 분쟁에 자신을 끌어들이려 한 것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제66화
66화. 세실리아 T 포튼 (5)
"그 외에 방준우 헌터와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습니다."
"...고작 그런 일 때문에 이런 소동을 일으켰다고?"
"어린애도 아니고 이게 무슨...."
나이 든 장교들은 바닥에 눕혀진 방준우를 보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뒤, 협회의 직원이 다가와 영상 자료를 모두에게 공개했다.
데스펠 제1군 대장, 박태준은 영상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린 채 의료진에게 응급 치료를 받는 준우를 매섭게 노려봤다.
분명, 마스터로부터 얌전히 있으라고 경고까지 받았을 터.
그럼에도 이런 소란을 일으키다니!
"박태준 헌터님께서는 이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군 장교의 질문에 태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몰랐습니다. 일찍 잔다면서 개인 천막에 들어간 걸 본 게 마지막이었고, 한동안 얌전히 지내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습니다."
"그렇군요. 일단, 방준우 헌터는 치료를 받게 한 뒤, 구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서열 183위의 범죄 헌터를 함부로 방치해 둘 순 없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타국으로 망명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겠지.
태준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 무어라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박건혁 헌터님께서는 잠시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청룡 기사단은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건혁에게 조사에 대한 협조를 부탁했다.
건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건혁이 대답할 수 있는 내용은 많지 않았다.
실제로 방준우와 대화를 나눈 건 손에 꼽을 정도니까.
때문에 청룡 기사단은 태준에게 추가 협조를 요청했다.
평소 분노와 짜증이 많다는 이야기로 청룡 기사단은 방준우 헌터가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게 아닌지를 의심하게 되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태준은 눈을 감고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개인 천막으로 돌아갔다.
이어, 방준우가 저지른 만행을 마스터... 아니, 부친인 박강석에게 보고했다.
늦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받은 강석은 이를 갈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 쓰레기 같은 놈이... 감히 내 경고를 무시해? 태준이, 네놈은 뭘 하고 있었던 거냐! 그놈 하나 제대로 지켜보지 않고!
"죄송합니다."
―제길, 멍청한 놈 하나 때문에 길드 이미지가 추락하게 생겼군. 안 그래도 최정예 헌터들을 가입시키기가 힘들 지경인데....
"어떻게든 덮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멍청한 소리! 군의 장교들이라면 모를까, 청룡 기사단까지 움직인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덮어!
강석의 일갈에 태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
―후우, 방준우는 지금 어느 병원으로 이송됐다고 했지?
"OOO대학 병원입니다."
―그래, 알겠다. 괜히 쓸데없는 짓 저지르지 말고 얌전히 있도록.
"알겠습니다."
태준은 깊게 한숨을 토해 내며 간이침대에 몸을 눕혔다.
아침이 밝자, 방준우의 만행이 속보로 보도되었다.
국민들은 방준우에게 비난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방준우를 함정에 빠트려 제압한 건혁의 능력을 높이 치하했다.
그리고 기다리기라도 한 듯 수십 명의 짐꾼들이 데스펠의 본부에 모여 시위를 진행했다.
말 그대로 데스펠의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진 순간이다.
<데스펠이 범죄 길드랑 다를 게 뭐가 있냐?>
⤷그래도 흑검(黑劍)은 존X 멋있던데....
⤷그래 봐야 범죄 길드 마스터임.
⤷S랭크 마수를 홀로 쓰러트리는 헌터를 국가에서 함부로 건드릴 리는 없다. 아마 방준우 선에서 이번 사건은 마무리될 듯.
<서열 183위를 쓰러트린 서열 779위... 박건혁이 대단한 거냐, 아니면 방준우가 거품인 거냐?>
⤷박건혁은 거품이다. 그래, 언빌리 '버블'이다.
⤷X발, 언어의 창조술사넼ㅋㅋㅋㅋ
⤷라이오스 27마리를 쓰러트린 박건혁을 방준우가 어떻게 이겨? 그냥 골렘으로 몰아붙이면 서열 183위도 그대로 밀려 버림.
⤷물량발이면 인정해야지.
<송파구 레이드 영상 찾아봐라. 박건혁 검술도 꽤 나쁘지 않음.>
⤷뭐, 검술도 검술인데, 검 하나에 기술이 존X 많다. 빙벽 세우기, 얼음 칼날 날리기, 바닥 얼리기... 그리고 또 뭐 하나 있었던 거 같은데, 암튼 빙마검이라는 능력도 X사기 능력임.
댓글 대부분은 데스펠을 비난하는 쪽으로 몰려 있었다.
건혁은 뉴스를 본 다음 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급함이 느껴지는 딸의 목소리에 건혁은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아빠는 괜찮아. 방준우 헌터가 쫓아오는 걸 미리 눈치채고 있었거든."
―오... 오늘은 돌아오는 거지?
"그래, 오늘은 돌아갈 거야."
―빨리 와!
"알겠어."
통화를 마친 건혁은 검은 세단을 천막 앞에 주차해 두었다.
그리고 천막에 들였던 노트북 등의 개인 물품을 세단의 트렁크에 싣고, 세실리아를 차량의 뒷좌석에 몰래 탑승시켰다.
정리를 마무리하고 사령부를 나서려던 순간.
성진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빠른 시일로 레이드를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청룡 기사단을 대표하여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한 명의 국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성진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방준우 헌터에 관한 부분은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예, 청룡 기사단을 믿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건혁이 사령부 출입구를 지나가자, 수많은 군인들이 경례를 취해 주었다.
동시에 사령부를 나서자마자 수많은 기자들이 진을 친 채 촬영을 시작했다.
"숙여."
건혁의 중얼거림에 세실리아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내, 차량은 기자들 사이를 빠져나가 고속도로를 향해 달렸다.
국도를 벗어나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에 도착한 건혁.
그는 익숙한 길이 나타나자 무언가 가슴이 편안해졌다.
"후우, 몇 년 만에 돌아온 기분이네."
반면, 세실리아는 차창 너머로 시내를 구경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고층의 건물, 도로 위의 차량, 걸어 다니며 스마트폰을 하는 사람들까지.
아르덴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건혁은 아파트 단지 내 주차장에 차량을 주차했다.
덜컥.
"내려도 돼."
세실리아가 조심히 차 문을 열었다.
"끄으... 드디어 집이구나!"
건혁이 기지개를 켜며 아파트를 바라봤다.
"들어가자."
세실리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건혁을 따라 아파트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 순간.
그녀는 화들짝 놀라면서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뿐이랴,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도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세실리아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손가락을 떨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1층에 있었을 터!
그런데 창문밖에 보이는 광경은 1층의 것이 아니었다.
"이... 이게 무슨...."
"그만 놀라고 들어와."
건혁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실리아는 놀란 얼굴로 그 뒤를 따라갔다.
자택의 크기는 다소 협소해 보였다.
건혁의 능력과 비교하면 말이다.
"아... 아빠!"
작은 소녀가 건혁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우리 딸, 아빠 많이 보고 싶었어?"
"어디 다치지는...."
수영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건혁의 어깨 너머로 세실리아를 본 것이다.
주방에서 나온 유진 역시 몸을 굳힌 채 멍하니 세실리아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반응에 세실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이쪽은...."
"세실리아라고 합니다."
"이번 레이드에서 만난 사람인데, 데스나이트한테 동료들을 잃고 사정이 좀 어렵다고 해서 데려왔어."
동료를 잃었다는 것은 확실히 가슴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사정이 어렵다고 자택까지 데려오다니.
유진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무슨 관계지?
건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수영이를 안고 거실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세상 물정을 제대로 모르는 모양이더라고."
"나이가 몇이길래...."
유진의 의문에 세실리아가 대답했다.
"올해로 20살이 됐습니다."
"아...."
그제서야 유진과 수영의 얼굴이 풀렸다.
건혁과의 나이 차가 무려 17년이나 되니 말이야.
그러나 20살이라는 연령은 건혁과 입을 맞춰 둔 연령일 뿐.
세실리아의 실제 연령은 116세.
건혁과 80년에 가까운 나이 차가 존재했다.
'뭐, 악마족은 100살에 성인식을 치른다고 하니....'
인족 기준에는 20세나 마찬가지겠지.
건혁은 세실리아의 안타까운 사연들을 수영과 유진에게 들려주었다.
급조한 이야기치고는 나쁘지 않았던 걸까?
수영과 유진이 안쓰러운 눈길로 세실리아를 바라봤다.
"타국에서 온 것도 모자라 기억까지 잃다니...."
"그나마 특수 능력이 발현된 덕분에 생활은 조금씩 나아진 모양이지만, 다른 헌터들에게 속으면서 많은 돈을 잃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번 레이드에...."
"예, 기억하는 건 이름이랑 연령뿐이라고 합니다."
"그런...."
"한동안은 제집에서 머무르게 할 생각입니다. 새 신분증이 나오는 대로 흑월에 가입시켜, 길드 차원에서 대출을 해 주고, 새집을 알아볼 수 있게 지원해 주려고요."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차라리 제집에서 생활하게 하는 건...."
세실리아가 뒷걸음질을 치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러곤 건혁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보냈는데.
건혁은 속으로 작게 감탄을 터트렸다.
'...배우를 시켜도 잘하겠는데?'
유진의 반응은 건혁의 예상대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실리아를 함부로 누군가에게 보낼 순 없다.
보내더라도 최소한의 기본 지식을 익힌 뒤여야겠지.
때문에 건혁은 세실리아에게 다양한 지시를 내려 두었다.
이 집에서 머물 수 있도록 말이다.
한편, 유진은 세실리아의 반응에 씁쓸히 웃으며 건혁을 바라봤다.
"안 되겠네요."
"뭐, 한동안은 제가 거실에서 자야죠."
건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 참, 점심은 드셨나요?"
"아니요. 사령부에서 바로 넘어와서 아직...."
"그럼, 다 같이 먹으면 되겠네요. 지금 김치찌개를 끓이는 중이거든요."
"아까부터 맛있는 냄새가 나던데...."
"조금만 기다리세요."
생긋 웃으며 주방으로 간 유진.
수영이 건혁의 품속에 안기자, 세실리아는 바로 옆에 앉아, 멍하니 TV를 바라봤다.
거실 테이블에 대령되는 김치찌개와 각종 반찬들.
"반찬들은 그저께 사다 둔 거예요."
"우와, 반찬도 반찬이지만 김치찌개도 정말 맛있겠네요."
"세실리아도 어서 드세요."
"아, 네."
그렇게 네 사람은 점심을 먹으면서 다양한 화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세실리아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끼어들지 못한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 내용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녀는 대화 내용을 무시한 채 조용히 뉴스를 시청했다.
식사가 끝난 후, 건혁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유진과 수영은 세실리아에게 달라붙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봐도 괜찮아요."
"저도 도와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도와줄게요."
두 사람의 따스한 손길에 세실리아는 울컥하고 말았다.
특히, 수영의 얼굴에서 여동생의 얼굴이 겹쳐 보인 탓일까?
세실리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눈물을 흘렸다.
"어... 언니?"
"어디 안 좋은 곳이라도...."
수영과 유진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의 걱정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누군가로부터 걱정을 받는 게 얼마 만이지?
"괘... 괜찮아요."
티슈로 눈가를 닦으면서도 가슴이 욱신거린 세실리아였다.
어째서 자신은 인족을 하찮게 여겼던 걸까?
그들 역시 마음을 가진 하나의 생명체인데 말이다.
마족들은 인족의 짧은 수명, 나약한 육체, 멍청한 두뇌를 비웃었다.
'수명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육체와 두뇌는 훈련과 학습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어.'
그러나 마족들이 아르덴을 지배한 이후, 인족에게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동력으로 사용되는 그들에게 훈련과 학습은 사치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인족은 멍청할 수밖에 없었고, 무력을 손에 쥘 수 없었다.
그렇게 마기(魔氣)라는 강력한 힘에 굴복한 것이다.
제67화
67화. 세실리아 T 포튼 (6)
'아르덴이 지구를 침략한다면....'
물론, 세실리아는 지구의 편에 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족들에게 죽은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마스터가 소환하는 골렘은 중급 마족과 견주어도 부족함 없는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어.'
박건혁이라는 사내는 이 세계에서 과연 얼마나 강한 존재지?
이 지구에는 루시퍼를 쓰러트릴 정도의 실력자가 존재할까?
세실리아는 건혁을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유진이 자택으로 돌아가고, 수영 역시 본인의 방에 들어간 시각.
건혁은 세실리아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컴퓨터를 사용하는 방법을 차근차근 알려 주었다.
"이...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요?"
"그래."
세실리아는 1시간 만에 정보를 조사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타다다다닥.
키보드를 빠른 속도로 두드리는 세실리아.
그에 건혁이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배우는 게 엄청 빠르네.'
세실리아는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미간을 찡그렸다.
"로그인을 해야 된다는 건...."
"아, 로그인은 신분증을 발급받아야 가능하니까, 로그인이 무엇인지는 한번 검색해서 찾아봐. 아 참, 이왕이면 대한민국으로 귀화할 수 있는 방법도 한번 조사해 둬."
"네, 알겠어요."
그녀는 다양한 정보들을 검색하며, 머릿속에 각종 지식들을 무더기로 채워 넣었다.
이어, 귀화 절차 및 방법 등을 찾아보면서 담당 기관에 문의를 넣었는데.
특수 능력 각성자라 할지라도 귀화 시험은 반드시 봐야 하며,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사람은 각종 검사 및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모양이다.
"끄응, 꽤 복잡하네."
"그래도 불가능하지는 않은 모양이에요."
"...그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고."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인 뒤, 시선을 모니터로 옮겼다.
원래 마족들은 배움이 빠른 걸까?
그녀는 불과 이틀 만에 컴퓨터를 완벽하게 터득해 냈다.
그리고 일주일간 기본적인 지식들을 습득하면서 귀화 허가 신청서, 귀화 사유서, 서약서 등의 다양한 서류들을 준비해 귀화 신청을 접수했다.
"이런 것도 일종의 특혜인 건가?"
서열 1,000위 내의 헌터가 귀화 신청자를 보호·감독한다면, 귀화 신청자의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더라도 정상적으로 접수된다는 모양이다.
게다가 각성 점수가 1,751점으로 측정되면서 특혜는 연달아 계속됐다.
서열 2만대의 헌터가 귀화를 하겠다는데, 거절하려는 국가가 어디에 있을까?
범죄 경력을 확인할 수 없다는 부분은 불안 요소였지만, 귀화 필기시험에서도 만점을 받고, 서열 779위인 박건혁의 보호·감독이 따르면서, 주민 등록증은 금세 발급받을 수 있었다.
"마스터, 흑월에 가입 신청서 제출해 뒀어요."
"그래, 나중에 확인해 볼게."
세실리아는 지구에 존재하는 병기 및 헌터에 대해 수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아르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예측하기 위해서.
결과, 지구의 승률은 1%에도 못 미쳤다.
'이래선 마왕은커녕... 최상급 마족들조차 상대할 수 없을 거야.'
지구에서 재앙이라 불리는 S랭크 마수조차 최상급 마족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반면, 대한민국의 최상위 헌터들은 어떨까?
그녀는 S랭크 마수를 토벌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헌터들의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정윤호... 라고 했던가? 그라면 최상급 마족들을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겠지만....'
검신(劒神) 정윤호는 세계 랭킹 9위의 실력자다.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강한 사내가 최상급 마족을 겨우 대적할 정도라니.
그럼, 그 뒤에 있는 마왕은 누가 막는단 말인가.
'대한민국에선 정윤호를 제외하면... 중~상급 마족들조차 버거운 수준이야.'
대한민국 헌터 서열 2위부터는 세계 랭킹 50위권 바깥에 머무르고 있다.
그만큼 정윤호의 능력이 압도적이라는 의미겠지.
한편, 길드 활동을 재개한 건혁은 A등급 게이트에 드나들 때마다 세실리아를 대동시켰다.
기척 감지와 후방 지원에 능한 그녀는 공략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방준우의 기척을 감지할 때도 그렇고... 꽤나 편리한 능력이네.'
가만히 선 채 집중하면 최대 4~500m 거리의 기척까지 감지할 수 있다는 모양이다.
"마스터는 서열과 다르게 강력한 힘을 가지고 계시네요."
"S랭크 하나 토벌 못 해서 도망 다니는데, 강력한 힘은 무슨...."
"567,211위에서 779위가 되셨다고 들었어요. 게다가 지금도 급성장을 계속하고 있다고...."
"지금은 정체 중이야."
건혁은 대답을 하면서도 레벨 업의 알림음을 가볍게 흘려 넘겼다.
스테이터스 레벨을 높여 새로운 스킬을 얻어도 나쁘진 않을 거다.
아니, 오히려 흥분될 정도로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얼음 골렘 소환'의 스킬 레벨을 높이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기사단장 골렘이라면 S랭크 마수를 쓰러트릴 수 있지 않을까?
불가능하다면 한 단계 더 높여 마법 기사단장 골렘과 협공을....
"후우, 빙마검보다 레벨 업이 많이 더디네."
마법 기사단장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당장은 기사단장만으로도 충분하겠지.
건혁은 골렘들이 마석을 회수하자, 곧바로 발걸음을 움직여 공략을 재개했다.
"엘리멘트 매직(Element Magic) - 윈드 애로우(Wind Arrow)!"
트롤을 향해 바람의 화살을 쏘아 대는 세실리아.
골렘들은 한결 수월하게 트롤을 토벌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공략을 마치고 자택으로 돌아온 두 사람.
세실리아가 샤워를 하는 동안 건혁은 소파에 앉아 뉴스를 시청했다.
그는 콜라를 마시던 중 미간을 와락 찡그렸다.
"에휴,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대학 병원으로 이송된 방준우가 실종되었다고 한다.
위잉.
스마트폰이 진동을 울렸다.
"예, 여보세요."
―OOO인테리어입니다.
건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세실리아가 거주할 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그는 샤워를 마친 세실리아와 함께 3층으로 내려갔다.
마침 같은 아파트에서 매물이 나온 덕분에 출퇴근을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네가 고른 인테리어대로 시공했어. 가전도 대부분 들어와 있으니까, 생활하는 데 큰 불편함은 없을 거야."
흑백의 벽지와 새하얀 대리석 타일 등.
집을 뜯어고친 덕분일까?
구조는 건혁의 집과 똑같았지만, 보다 고급스러운 면모를 보여 주었다.
"너도 참 징글징글하다. 나도 검정색은 좋아하지만...."
냉장고, 전자레인지, 소파, 서랍장, 침대까지.
가구 대부분이 검정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벽지에 하얀색이 섞여서 다행이지, 검정색만 있었으면 정말 끔찍했겠어."
"하하...."
"그래서, 네가 원한 대로 된 거 같아?"
"네, 그런 거 같아요. 단기간에 이 정도의 결과물을 만들어 낼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뭐, 요즘에는 금방금방 다 되니까."
세실리아는 침실을 둘러보면서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부터는 혼자서 생활해야 하는 거네요. 집이 살짝 큰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어차피 화요일이랑 목요일은 나랑 같이 게이트에 들어가잖아? 심심하면 올라와서 수영이랑 놀아 주든가."
"그래도 되나요?"
"물론."
그녀가 수영과 함께하는 것은 건혁 역시 바라던 일이다.
방준우의 행방이 묘연해진 현재.
건혁은 수영의 안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빌 때 초등학교에 마중 나가 주면 더 좋고. 통장이랑 카드는 어떻게 쓰는지 알지?"
"네, 스마트폰으로도 결제할 수 있으니까, 그 부분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러면 다행이고. 일단, 나와 동행하지 않을 경우, 이 집을 중심으로 반경 5km 이내까지의 자유 활동을 허락해 줄게. 그 정도면 백화점이나 웬만한 시설들은 충분히 이용할 수 있을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괜히 소란 피우지 마. 범죄도 저지르지 말고. 혼자서 이동할 때는 목숨이 위험할 경우에만 무력을 사용하도록 해."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각종 제약을 걸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건혁.
그를 배웅한 세실리아는 새집으로 돌아오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쓸쓸하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만의 집이 생겼다는 것은 역시 기쁠 수밖에 없었다.
거실, 부엌, 화장실, 테라스, 다용도실이 각각 하나씩.
침실은 두 개로 하나는 개인 서재로 만들어 두었다.
"책도 주문해서 하나씩 채워야지."
그녀는 책장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복종의 맹약을 맺었을 때는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동안 인족에게 해 온 행위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속죄하고자 하는 마음에 모든 것을 내려 두었다.
그러나 건혁은 인도적 대우는 물론, 개인 생활 및 자유 활동까지 보장해 주며, 게이트 공략에 의한 보수까지 약속했다.
어째서지?
그 이유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오늘은 혼자서 저녁을 먹어야겠네."
해가 저물 무렵.
그녀는 첫 독립을 기념해 가까운 중국집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주문했다.
잠시 뒤, 배달 온 음식들을 거실 테이블 위에 내려 두고, 뉴스를 시청하면서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으음~"
일전에 딱 한 번 먹은 것만으로 반해 버린 음식이다.
그 외에도 피자, 치킨, 햄버거를 비롯해 부대찌개, 갈비찜, 불고기 등의 음식들 역시 인터넷으로 찾아보며 미리미리 연락처를 스마트폰에 저장해 두었다.
행복한 얼굴로 저녁 식사를 마친 그녀는 뒷정리를 한 다음 서재로 들어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흐음, 저번에 장바구니에 담아 둔 책들부터 구매해야겠다."
수많은 책들을 주문하려던 그때.
건혁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네, 마스터."
―지금 네 짐들 가지고 내려갈게. 좀 이따가 문 열어 줘.
"아, 알겠어요!"
잠시 뒤, 벨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건혁이 가지고 내려온 세 개의 박스.
세실리아는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를 전하고, 곧바로 상자들을 거실로 들였다.
"짐 정리가 먼저겠네."
상자에 담긴 짐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짐 정리를 마친 뒤에는 새벽 2~3시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다양한 서적을 구매하고, SNS를 찾아보면서 수많은 정보들을 알아 갔다.
다음 날, 그녀는 스마트폰으로 SNS를 둘러보다가 수영의 하교 시간에 맞춰 택시를 타고 마중을 나갔다.
그녀는 월·수·금요일마다 초등학교로 마중을 나갔다.
"우와, 수영이 엄마 엄청 예쁘다!"
"아빠도 엄청 잘생겼었어. 게다가 엄청 강한 헌터래!"
하교하던 아이들은 부럽다는 눈길로 수영을 바라봤다.
반면, 그 시선이 너무나도 생소했던 걸까?
수영은 멋쩍은 얼굴로 세실리아와 함께 택시에 올라탔다.
"돌아가는 길에 뭐 좀 사 갈까요?"
세실리아의 물음에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떡볶이랑 매운 오뎅이 먹고 싶어요."
수서역에서 내린 세실리아는 수영의 안내에 따라 분식집으로 걸어갔다.
* * *
그 시각, 충청남도에 위치한 한 폐건물.
환자복 차림의 남성이 의수를 착용했다.
철컥.
그는 의수를 몇 차례 움직여 보면서 씨익 미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군."
그에게 다가간 해골 가면의 남성.
뚜벅, 뚜벅, 뚜벅.
"수술 비용까지 포함해서 대금은 제대로 지불해 주셔야 할 겁니다."
"걱정 마. 대금은 저쪽 상자에 담아 뒀으니까."
삐걱.
환자복 차림의 남성, 방준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68화
68화. 납치 (1)
데스펠은 일전에 지불한 최상급 포션에 대한 비용을 목숨값이라며, 중국의 범죄 길드인 스컬에게 준우의 납치를 의뢰했다.
빈털터리 신세로 폐건물 생활을 해야 했던 준우.
그는 스컬에 소속된 의사로부터 불법으로 고정대 수술을 받고, 1급 광석으로 만든 의수를 주문했다.
이어, 대가를 마련하기 위해 관리 감독을 받지 않는 게이트에 들어가 수많은 마석을 회수했다.
특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한 팔이 없는 것 정도로는 게이트 공략에 큰 지장이 없었다.
해골 가면은 준우가 준비한 상자를 확인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하군요."
"이쪽 상자는 선수금이다."
"...선수금?"
"스컬의 전력을 빌리고 싶다."
"저희는 데스펠의 마스터로부터 당신을 중국까지 데려가라는 의뢰를 받은 상태입니다."
"그 전에 한국에서 일 하나만 처리하자고."
해골 가면은 팔짱을 낀 채 준우의 의뢰 내용을 들었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쉽다고 봐야겠지.
해골 가면은 작게 한숨을 쉬며 의뢰를 받아들였다.
"대신, 의뢰가 끝나는 순간 곧바로 중국으로 떠나겠습니다. 채비를 해 두십시오."
"그래, 알겠어."
준우는 씨익 웃으면서 발밑의 상자들을 건네주었다.
B랭크 마석들로 가득 채워진 상자들.
선수금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준우는 추후 30억 원대의 마석을 지불하겠다고 계약을 맺었다.
굴러다니는 헌터가 아닌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의 계약이다.
30억 원 정도는 몇 개월만 있으면 벌 수 있겠지.
* * *
2020년 3월 10일 화요일.
건혁과 세실리아가 자리를 비운 시각.
하교한 수영은 자택으로 돌아가기 전에 초등학교 인근의 산에서 개별 훈련을 진행했다.
타다닷!
좌우로 움직이며 활의 시위를 당겼다.
끼릭, 퉁!
목판의 중앙에 화살이 꽂혔다.
움직이면서도 목표한 곳을 정확하게 맞춘 것이다.
마력도 서서히 늘기 시작했으니, 지금 당장 홀로 C등급 게이트에 들어가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수영이 이마의 땀을 소매로 닦아 내자, 누군가가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짝짝짝짝짝.
"이야, 대단한데?"
지금까지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았던 장소다.
그런 장소에 한 명도 아닌 다섯 명이나 찾아왔다고?
"...!"
수영은 그들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1회차에서 몇 번이나 본 가면.
살인, 강간, 폭행, 마약 등의 범죄를 일삼는 길드, 스컬.
그 스컬을 상징하는 해골 가면을 쓴 다섯 명의 남녀.
끼릭, 퉁!
화살이 해골 가면의 안면에 박혔다.
방심하고 있었던 그들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설마, 초등학생인 그녀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누군가를 죽일 줄이야!
그들이 잠시 당황한 사이, 수영은 연이어 화살을 발사했다.
푸욱!
"크윽!"
오른팔이 꿰뚫렸다.
그때, 굴곡진 정장 차림의 해골 가면이 소리쳤다.
"제... 제압해!"
그녀의 외침에 세 해골 가면이 지면을 박차며 수영에게 달려들었다.
파바밧!
수영은 날렵한 움직임으로 산을 타며 그들에게 화살을 쏘아 댔다.
나무 뒤에 숨어 해골 가면들을 저격하는 수영.
그에 해골 가면들은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X발, 무슨 애X끼가...."
해골 가면의 여성은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동료들의 시체를 바라봤다.
벌써 셋이나 당했다.
그것도 초등학생 하나한테.
자신들이 말단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초등학생한테 당하다니.... 이 얼마나 쪽팔린 일인가!
"어떻게...."
"당연히 잡아야지! 저 애X끼도 분명 마력이...."
푸욱!
목덜미를 꿰뚫은 얼음의 화살.
여성은 말을 매듭짓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수영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씨익 웃었다.
승리를 확신한 것이다.
그 순간.
저벅.
"우와, 정말로 초등학생 맞아?"
바로 옆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을 구르며 활을 겨눈 수영.
사내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냥 얌전히 잡혀 주면 안 될까? 어린애를 때리는 건 취미가 아닌데...."
"그쪽이야말로 얌전히 돌아가 주시죠. 저희 아빠는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입니다. 저를 납치하려는 거라면...."
"서열 56만대에서 779위까지 성장한 헌터라면서? 아니지, 이번 달에는 783위로 떨어졌던가? 아무튼, 정말로 대단하긴 대단하더라. 짐꾼에서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라니... 무슨 웹 소설이냐?"
"...."
사내는 수영의 경계심 가득한 얼굴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수영이 화살을 발사하자, 사내는 옆으로 가볍게 회피했다.
"바로 얼굴을 노리냐."
쓴웃음과 함께 수영의 복부를 주먹으로 후려친 사내.
퍼억!
순식간이다.
눈으로 포착할 수 없는 움직임.
묵직한 충격에 눈을 크게 뜬 수영은 두 손을 덜덜 떨며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사내는 수영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가볍네. 아 참, 나도 예전에는 대한민국의 헌터였어. 서열 101위의... 뭐, 들리진 않나?"
사내는 산을 내려가며 살아남은 부하의 어깨를 토닥였다.
"뒷정리 부탁한다."
"예, 알겠습니다."
부하는 군기가 바짝 든 이등병처럼 차렷 자세로 대답했다.
그렇게 수영이 만든 비밀 훈련장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편, 집으로 돌아온 건혁은 깜깜한 거실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방에 있더라도 거실의 불을 켜 두는 수영이다.
그런데 오늘은 왜 불이 안 켜져 있는 거지?
"수영아, 아빠 왔다."
건혁이 거실의 불을 켜고, 수영의 방문을 두드렸다.
대답은 없었다.
무슨 일일까?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깜깜한 침실.
불을 켰음에도 수영은 보이지 않았다.
"수영아?"
그는 화들짝 놀라 집 곳곳을 살피면서 곧바로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학교에 남아 있는 학생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다는 거지?
"세실리아, 지금 수영이 거기 있어?"
―예? 아니요. 수영이라면 마스터 집에....
"없어. 학교에도... 이게 무슨...."
이내, 스마트폰이 진동을 울렸다.
발신자 불명의 문자.
거기에는 의자에 묶여 있는 수영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
"...!"
건혁의 심장이 철렁 주저앉았다.
우려했던 일이 마침내 일어나고 만 것이다.
사진 아래에는 혼자서 찾아오라는 문구가 기입되어 있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시, 그녀를 죽이겠다.'는 문구와 함께 말이다.
콰앙!
그의 주먹질 한 번에 부엌의 탁자가 박살 났다.
"방준우... 그 X발 X끼밖에 없어."
아니, 데스펠 제3 인사팀 팀장인 우진혁일지도 모른다.
그 역시 현재는 실종 상태이니까.
건혁은 미간을 좁히면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마스터?
"기다리고 있어. 잠깐 다녀올 테니까."
―어디를....
건혁은 세실리아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어, 차량을 타고 충남으로 내려갔다.
뒤에서 따라오는 두 대의 검은 차량.
세실리아와 동행하지 않은 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만일을 대비해 만들어 둔 세컨드 폰으로 진화에게 문자를 보냈다.
"후우, 누구든지 간에 절대로 살려서 보내진 않는다."
후환을 남겨 두지 말자.
그리 다짐하며 고속도로를 달렸다.
* * *
건혁이 충남으로 내려가던 그 시각.
수영은 팔과 다리가 묶인 채 눈앞의 사내를 노려봤다.
얼마 전 레이드에서 부친을 암살하려 했던 서열 183위의 헌터, 방준우다.
"호오, 방금 출발했다고 하네?"
준우의 목소리에 수영이 피식 조소를 터트렸다.
"우리 아빠한테 한 번 진 주제에...."
수영의 말에 준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영의 앞으로 다가갔다.
짜악!
"어른이 말하면 조용히 들어야지. 애비한테 예의도 못 배웠니?"
수영의 입가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이쯤이면 두려움에 떨 법도 했지만, 수영은 여전히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럴 리가. 단지, 초등학생한테 정곡을 찔려서 손찌검하는 쓰레기한테까지 예의를 보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준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짜악! 짜악! 짜악!
수영의 뺨을 수차례 후려갈긴 준우.
그녀의 뺨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
하지만 수영은 끝까지 공포를 드러내지 않았다.
"애비나 딸내미나 제 주제도 모르는 버러지들이군."
준우는 고개를 숙인 채 핏물을 흘리는 수영을 바라보며 털썩 소파에 걸터앉았다.
"박건혁이 죽으면 너는 스컬과 함께 중국에 가게 될 거다. 나머지는...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수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중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범죄 길드, 스컬(Skull).
그들이 방준우와 함께하고 있다면 건혁에게 승기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골렘들을 미리 소환해 둔 상태라면 모를까.
'오지 마, 제발....'
수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시간 뒤, 폐건물 앞에 도착한 박건혁.
준우는 묶여 있는 수영을 창가로 데려갔다.
"특등석이다. 네 애비가 죽는 모습을 두 눈으로 잘 지켜보라고."
그는 곧바로 폐건물을 나섰다.
차량에서 내린 건혁이 건물을 나서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이내, 건혁을 포위하듯 둘러싼 해골 가면의 사내들.
"스컬을 고용한 건가. 범죄자가 다 되셨군."
건혁의 헛웃음에 준우는 피식 조소를 흘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도 양아치는 아니야. 딸을 구할 수 있는 기회는 줄게."
"...무슨 소리지?"
"나를 포함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쓰러트려 봐. 그럼, 네 딸은 무사히 데려갈 수 있을 거야."
수영을 인질로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건혁은 곧바로 정예 기사 골렘 10기를 소환했다.
"역시, 마력이 회복될 때까지는 추가로 골렘을 소환할 수 없나 보네?"
준우의 비웃음에 건혁이 얼굴을 굳혔다.
"자아, 시간 끌지 말고 서둘러 시작해 보자고!"
30여 명의 해골 가면이 건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앙!
양측이 충돌했다.
숫자로 밀어붙이며 정예 기사 골렘들을 하나씩 쓰러트려 나가는 해골 가면들.
준우는 팔짱을 낀 채 비릿한 얼굴로 건혁을 바라봤다.
"뭐 하는 거야. 네 자랑인 골렘들이 파괴되고 있다고! 어서 더 많은 골렘들을 소환해야지!"
준우의 외침에 건혁이 까득 이를 악물었다.
'말단이 아닌 건가?'
건혁은 다섯 명의 해골 가면을 상대하면서 진땀을 흘려야 했다.
1대1이면 100% 승리할 수 있는 놈들이 이렇게까지 버겁게 느껴질 줄이야.
"흐아앗!"
서걱!
드디어 한 놈을 베어 냈다.
그러나 등 뒤에서 달려든 해골 가면에게 등을 내어 주고 만 건혁.
그는 등에 잔상처를 만들면서 바닥을 굴렀다.
치명상은 아니다.
이 정도쯤은....
채앵! 채채챙!
놈들의 공격은 쉼 없이 계속됐다.
한숨을 내쉬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
거기에 7기의 정예 기사 골렘이 파괴되면서 위기를 맞이했다.
"크아아아!"
건혁은 악을 내지르며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푸욱!
"커헉!"
빙마검이 한 해골 가면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 순간, 해골 가면들이 일제히 건혁에게 달려들었다.
서걱! 촤아아악!
건혁은 등, 허벅지, 어깨를 베이며 핏물을 쏟아 냈다.
심지어 고정대에 문제가 생긴 듯 의수가 말을 듣지 않는다.
거친 숨을 토해 내면서도 육체 능력을 최대한 조절하며 빙마검을 휘둘렀다.
작은 낭비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 승률이 0.1%라도 올라가겠지.
촤아악!
세 해골 가면은 미처 회피하지 못하고, 빙마검에 의해 상·하체가 분리되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준우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스컬의 2급 길드원을 무려 다섯이나 쓰러트리다니.
박건혁의 개인 무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모양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골렘들을 바라봤다.
'라이오스를 쓰러트릴 정도의 실력은 있다는 건가.'
정예 기사 골렘들은 2급 길드원을 압도하는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골렘들이 상대하는 것은 마수와 같은 짐승이 아닌 협공이 가능한 인간이다.
대다수의 골렘들이 파괴될 무렵.
해골 가면의 숫자 역시 10명이나 줄어들었다.
제69화
69화. 납치 (2)
"네놈을 쓰레기라고 한 것은 취소해야겠군. 너는... 7백대 서열로선 보일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준우의 목소리에도 건혁은 '퉤!' 침을 뱉으면서 그를 노려봤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투지를 잃지 않은 눈빛이다.
아니, 승기를 보았다.
일부러 마력을 아껴 둔 건혁.
그는 스테이터스창의 마력이 160이 된 순간.
"정예 기사 골렘 소환."
소매로 핏물을 닦아 내며 다시 한번 10기의 정예 기사 골렘들을 소환했다.
해골 가면과 준우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1~2기도 아니고, 10기를 또 소환해?
벌써 모든 마력이 회복됐단 의미인가?!
파직!
준우는 허공에 번개의 창을 만들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
박건혁의 성장 가능성은 지금까지 봐 온 그 누구보다도 거대하다.
나중에는 자신보다 더욱 강한 헌터가 되겠지.
털썩!
준우가 번개의 창을 던지기 전.
건혁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X발....'
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슬쩍 시선을 떨어트렸다.
허벅지에서 흘러내리는 다량의 핏물.
입가에선 붉은 선혈이 흘러내린다.
피식.
헛웃음만 터져 나온다.
건혁이 빙마검을 지지대로 삼아 몸을 일으켰다.
새로이 소환된 정예 기사 골렘들도 해골 가면들에게 쓰러져 가는 상황.
해골 가면들은 지친 듯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크으...."
열일곱 명이 당했다.
고작 한 사람에게.
그 한 사람이 100위 안에 드는 헌터라면 어떻게든 수긍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783위라는 헌터에게 2급 길드원이 열일곱이나 당하다니!
"하아... 하아... 하아...."
건혁은 몸을 비틀거리면서 다리를 덜덜 떨었다.
특별한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 스컬의 2급 길드원들을 상대하려 한 탓일까?
생각보다 빠르게 체력이 바닥을 드러냈다.
저벅, 저벅, 저벅.
준우가 건혁에게 다가갔다.
전투는 이미 끝났다.
파괴된 20기의 골렘들.
거기에 건혁 역시 전투가 불가능한 상태다.
서 있는 게 용할 지경이지.
건혁과의 거리가 5m까지 좁혀졌을 때.
준우가 허공에 번개의 창을 만들었다.
마력을 조절하여 만든 1m 크기의 창이다.
지금의 건혁은 이 공격만으로도 죽을 것이다.
"이제 그만... 죽어라."
피범벅이 된 건혁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죽기는 무슨."
그러곤 준우와 눈을 마주쳤다.
"이제 다 채워졌다, 시X놈아."
그의 중얼거림에 준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다 채워졌다고?
무슨 소리지?
생각을 멈추고 창을 내던진 그 순간.
건혁의 앞으로 새로운 골렘이 나타났다.
퍼엉!
창에 직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크래치 하나 생기지 않았다.
정교하고 멋스러운 갑주에 붉은색 망토를 두른 기사 형태의 골렘.
방금까지 쓰러트린 골렘과는 무언가 분위기가 달랐다.
"타이밍 한번... 절묘하네, 진짜."
건혁은 작게 미소를 지으면서 골렘의 등을 바라봤다.
"저 망령 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려!"
골렘은 명령과 동시에 다리를 움직였다.
촤아악!
"크아악!"
"이... 이게 무슨...!"
"다... 당황하지 마! 아까처럼...!"
건혁은 해골 가면들을 비웃었다.
"아까처럼 해도 괜찮겠어?"
정예 기사 골렘을 상대할 때처럼 협공을 펼치려는 해골 가면들.
그러나 눈앞의 골렘은 정예 기사가 아니다.
그보다 한 단계 위의 존재.
게다가....
놈들은 정예 기사와의 전투로 마력과 체력이 바닥을 드러낸 상태다.
해골 가면들은 속절없이 골렘의 검격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말 그대로 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그에 화들짝 놀란 준우는 소환사인 건혁을 향해 번개의 창을 내던졌다.
"죽어라!"
파앙!
건혁의 앞을 가로막은 또 한 기의 기사단장 골렘.
"마... 마력이 바닥난 게 아니었던 건가?!"
건혁은 고개를 살짝 들어 준우를 바라봤다.
"그래, 바닥이 났었지.... 방금 회복했고 말이야."
"그... 그게 무슨...."
"설명이 필요해? 어차피 죽을 건데."
건혁이 씨익 미소를 짓자, 기사단장 골렘이 준우에게 달려들었다.
황급히 허공에 10여 개의 번개의 창을 띄운 방준우.
골렘과의 거리는 불과 2~3m 정도다.
이 거리에서 창을 던졌다간 자신 역시 무사하지 못하겠지.
그러나 골렘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걱정과 불안함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로지 다급함에 의존하며 창을 던진 것이다.
"주... 죽어!"
골렘은 회피하지 않았다.
회피했다가는 뒤에 있는 건혁이 맞을 테니까.
때문에 검을 휘둘러 번개의 창들을 다른 방향으로 흘려보냈다.
파앙!
흘려보낸 창은 뒤에서 전투 중이던 해골 가면들에게 날아갔다.
콰앙! 콰콰쾅!
"크아아악!"
번개에 감전된 해골 가면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의도치 않게 팀 킬을 하게 된 셈이다.
파앗!
기사단장 골렘은 방준우의 앞으로 달려가 검을 내질렀다.
푸욱!
검 끝이 그의 복부를 정확히 꿰뚫었다.
"커헉! 이... 이건 말도...."
"...그래,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얼음 골렘 소환(Summon Ice Golem)'의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마력 회복'의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눈앞에 떠오른 두 개의 알림창.
이 두 알림창 덕분에 승패를 뒤집을 수 있었다.
품속을 뒤적거리던 건혁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손가락을 벤 유리 조각.
3급 포션들이 모두 깨져 있다.
"아까워 죽겠네."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기사단장 골렘을 소환했다.
기사단장 골렘을 한마디로 평가하면 '강하다', 그뿐이다.
정예 기사와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과 검술.
그들이 펼치는 기술은 자신의 것보다도 더욱 위력적이었다.
털썩.
방준우가 바닥에 쓰러진다.
건혁은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폐건물을 향해 비틀거리는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콰앙!
건혁을 향해 거대한 주먹이 쇄도했다.
그리고 주먹을 막아 낸 기사단장 골렘.
건혁은 고개를 돌려 공격해 온 해골 가면을 바라봤다.
사람의 것이라 볼 수 없는 두꺼운 팔에서 붉은 화염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는가 싶었더니...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넌... 뭐야?"
"자기소개는 생략할게. 그냥 스컬의 1급 길드원이라고만 생각하면 돼. 네가 쓰러트린 저놈들의 대장이지."
"...그럼, 너도 죽어야겠군."
해골 가면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아쉽게도 더 이상 전투를 할 생각은 없어. 의뢰주가 죽어 버렸거든. 싸워 봐야 나만 손해라는 거지. 그리고...."
파파팡!
건혁이 몸을 움찔거렸다.
눈 깜짝할 사이 기사단장 골렘의 두 팔이 부서졌다.
"이걸로는 나를 이길 수 없어."
"...."
스컬의 2급 길드원들을 쓰러트린 두 기사단장 골렘이 어느새 건혁의 곁으로 다가왔다.
"뒷정리만 할 테니까, 딸이나 데리고 나와."
건혁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기사단장 골렘 3기를 추가로 소환해 폐건물 앞에 배치시켰다.
그렇게 다시 한번 바닥을 내리찍게 된 마력.
해골 가면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경계심 많은 녀석이네.'라고 중얼거렸다.
'너 같으면 순순히 믿고 등을 보여 주겠냐?'
그가 부하들의 해골 가면을 회수하던 그때.
청룡 기사단의 차량이 들이닥쳤다.
"이런, X발...!"
사내는 재빨리 도망쳤다.
서열 2~30위대 정도는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다.
그러나 차량에서 내린 것은 청룡 기사단의 부단장인 이진화다.
이번 달, 서열 15위가 된 대한민국 최상위 헌터.
그녀를 상대로 승리를 장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30여 명의 청룡 기사단원까지 대동한 상태이니.... 스컬의 1급 길드원, 한성욱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허겁지겁 자리를 벗어났다.
"거기 서!"
진화와 10여 명의 청룡 기사단원이 성욱을 추격했다.
'너희 같으면 서겠냐?!'
성욱은 품속에서 연막탄을 꺼내 바닥에 굴렸다.
퍼퍼퍼퍼펑!
반경 100m를 가득 채우는 새하얀 연기.
진화는 추격을 멈추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제기랄!"
―부단장님, 박건혁 헌터를 발견했습니다.
진화가 다급히 무전을 향해 소리쳤다.
"수영이는?!"
―무사합니다.
그녀는 다급히 폐건물로 돌아갔다.
건혁은 수영을 끌어안은 채 정신을 잃었다.
수영 역시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며 부친의 목을 꼭 끌어안고 있었는데.
진화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양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포션은...."
한 단원이 주사기를 보이며 대답했다.
"방금 박건혁 헌터에게 주입했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진화는 건혁으로부터 문자를 받자마자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답장을 보냈다.
방준우의 실종에 범죄 길드가 관여되어 있으리라 예상하고 있었던 청룡 기사단이다.
때문에 수영을 납치한 것이 정말 방준우라면, 무언가 함정을 준비해 두었을 것이라 예상했다.
오히려 함정을 준비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그러나 건혁은 아무런 작전 없이 무턱대고 적진에 들어갔다.
"어휴...."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면서 수영을 바라봤다.
퉁퉁 붉게 부어오른 뺨.
"이런 쓰레기 같은 것들이 어린애한테까지...."
진화는 직접 수영에게 포션을 먹여 주었다.
"부단장님, 앰뷸런스 도착했습니다."
구급 차량은 수영과 건혁을 싣고 병원으로 출발했다.
건혁이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한 것이다.
"...부단장님, 저것들 앰뷸런스 따라가는데요."
구급 차량의 뒤를 따라 달리는 5기의 골렘들.
진화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뭐, 상관없겠지.'라고 대답했다.
한편, 기사단원들은 시체들을 조사하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이 얼굴... 2017년에 실종된 서열 533위의 범죄 헌터 OOO입니다."
"이 녀석은 2018년에 실종된...."
대다수가 건혁보다 높은 서열을 보유한 범죄 헌터들이었다.
서열 783위의 헌터에게 승기 따윈 존재하지 않는 전투.
도대체 어떻게 이긴 거지?
심지어 '전(前)' 서열 183위인 방준우까지 시체로 발견됐다.
"도대체... 정체가 뭐야?"
* * *
"...."
새하얀 천장이다.
이세계로 넘어온 건 아니겠지?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래도 병원에 입원한 모양이다.
몸을 일으키자, 보호자 침대에 누워 있는 수영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아...."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안도감이 깃든 한숨이.
"스테이터스."
내 중얼거림과 함께 반투명한 스테이터스창이 허공에 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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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건혁
*종족: 인간
*칭호: -
*출신 국가: 한국
*LV: 197
*근력: 50
*민첩: 53
*체력: 60
*마력: 300
*AP: 4
*스킬: [빙마검(氷魔劍)-LV7] , [얼음 골렘 소환-LV7], [마력 회복-LV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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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투로 스테이터스 레벨이 200에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나 지금은 스테이터스 레벨보다도 스킬 레벨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
기사단장 골렘을 소환할 수 있게 됨과 동시에 초당 0.15의 마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마력 회복량이 단번에 50%나 증가한 것이다.
'레벨을 올리는 것도 수월해지겠어.'
나는 스테이터스창을 닫고, 서랍장 위의 스마트폰을 집었다.
수십 통의 전화와 문자가 와 있었다.
오늘은 길드원들과 함께 게이트를 공략해야 하는 금요일이다.
내 탓에 제1팀의 일정이 취소되고, 현재는 각자 자택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근데... 빙마군주(氷魔君主)는 또 뭐야?"
인터넷 기사 제목에 붙은 '빙마군주'라는 단어에 미간이 찡그려졌다.
설마, 이게 내 이명이라는 건가?
강원도 레이드에서 활약할 때부터 서서히 빙마군주라는 이명이 퍼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빙마군주'가 아니라 '빙마궁주'겠지."
빙마궁주(氷魔弓主) 박수영.
그래, 내 딸은 추후 빙마궁의 주인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대활약을 하게 될 것이다.
애매하게 비슷한 이명에 나는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차라리 빙마검주(氷魔劍主)가 더 나은 거 같은데....
제70화
70화. 빙마군주 (1)
내가 스마트폰을 살펴보자, 수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내, 상체를 일으켜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아... 빠?"
나는 스마트폰을 내려 두고,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빠 때문에 무서운 경험하게 해서 미안해. 아빠가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수영이 와락 안겨 들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곤 그녀를 안아 주었다.
품속에서 작게 흐느끼는 수영.
그녀의 울음소리는 내 심장을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했다.
일종의 죄책감이라고 해야겠지.
방준우는 분명 나를 끌어내기 위해 수영이를 납치했다.
다시 말해 내 탓에 수영이가 납치되었다는 의미다.
"어... 어디 아프지는 않은 거지?"
수영이 코를 훌쩍이며 나를 바라봤다.
"그래, 특별히 아픈 부분은 없는 거 같아. 수영이는...."
"나... 나도 괜찮아."
나는 작게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눈가를 닦아 주었다.
"앞으로는 경호원과 골렘을 붙여 줄게. 지금까지 소환한 골렘들보다도 더 강한 골렘이야."
수영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개인 훈련 시간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이번처럼 수영이를 위험에 빠트리게 할 순 없다.
원작의 수영 역시 헌터증을 발급받은 이후... 즉, 고등학교에서부터 두각을 드러낸다.
시기를 고려하면 현재 수영의 성장은 원작을 크게 웃돈 셈이다.
세실리아의 존재가 조금 신경 쓰이지만, 마계... 아니, 아르덴과의 전쟁이 원작보다 조금 더 일찍 찾아온다면, 수영이가 성장할 시간을 내가 벌면 될 뿐이다.
그러기 위해 강해진 거니까.
그보다....
'고정대 수술을 다시 받아야 한다니....'
인상이 찡그려지려 했지만, 지금은 수영이 앞이다.
나는 최대한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 일단, 골렘들이 계속 따라붙어서 1인실로 배정을 해 드리긴 했습니다만...."
"아, 비용은 제대로 지불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소환 해제를 잊은 모양이다.
뭐, 어쩔 수 없지.
수영이를 보자마자 머릿속이 모두 비워져 버렸으니까.
"포션값도...."
"청룡 기사단 측에서 3급 포션을 체내에 주입했다고 들었습니다. 대금은 청룡 기사단에...."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이진화가 늦지 않게 도착해 준 모양이다.
나는 퇴원 수속을 밟고 수영과 함께 병원을 나섰다.
주차장으로 나서자 진화가 병문안 겸 마중을 나와 주었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괜찮아요. 방준우 헌터가 스컬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데스펠을 더욱 압박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아...."
"그것보다 기다리라는 문자를 무시하고, 무작정 돌격한 것에 대한 사과를 듣고 싶네요."
나는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확실히 청룡 기사단을 기다렸다면 상황이 조금 더 수월하게 풀렸을지도 모른다.
대신, 방준우를 죽이지 못했겠지.
'아니, 애초에 청룡 기사단을 기다리는 건 무리였나?'
감시가 따라붙은 상황에서 누굴 어떻게 기다린단 말인가.
괜히 수영의 신변에 위험만 생길 뿐이다.
당시의 결정이 옳았다고 봐야겠지.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지만, 수영이를 무사히 구조하고, 후환도 제거할 수 있었으니까.
잠시 뒤, 나는 사죄의 뜻으로 가까운 한식당에서 식사를 대접했다.
식사 도중 진화가 수영을 바라봤다.
"수영이도 뺨은 괜찮아졌어?"
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수영이가 대답을 망설인 탓일까?
진화는 쓰게 웃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차량은 견인해 뒀어요. 저한테 주소지 하나만 보내 주시면 그곳으로 차량을 가져다드릴 거예요."
그녀에게 의지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게 벌써 몇 년 전 일일까?
이번 일로 도대체 몇 번이나 도움을 받은 건지.
나는 고개를 숙여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것보다 각성 능력 검사는 언제쯤 받으실 생각이세요?"
"올해 가을에나 한번...."
"그냥 이번 달에 한번 받아 보시는 건...."
"예?"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진화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여 주었다.
"이번에 박건혁 헌터님이 쓰러트린 범죄 헌터들의 목록이에요. 서열 보이시죠? 전부 박건혁 헌터님보다 강한 헌터들이었어요. 심지어 서열 183위인 방준우 헌터까지.... 이 정도면 아마 100위대에 진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얼음 골렘 소환'과 '마력 회복'의 스킬 레벨이 높아진 현재.
각성 능력 점수 역시 대폭으로 향상되었을 터.
그녀의 말대로 100위대에 진입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분명 2~3백여 명 정도는 가볍게 제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제안은 사양했다.
"이왕이면 100위 안에 진입하는 게 더 흥분되지 않을까요?"
그래, 100위대보다도 100위 안에 진입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어차피 스테이터스 레벨도 3만 올리면 200이고 말이야.
그 정도면 100위 안에 진입할 수 있겠지.
진화는 내 대답에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러네요. 근데 의수는...."
"고정대에 조금 문제가 생겨서... 아무래도 수술을 다시 받아야 할 거 같아요."
"아, 그렇군요."
대화가 잠시 끊어지고 조용히 점심을 먹었다.
진화는 본인의 차량으로 우리를 수서역까지 데려다주었다.
"태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차피 가던 길이니까요.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멀어지는 차량을 보고 수영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나가고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돌아온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무거웠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후우, 길드 건으로 잠깐 전화 좀 할게. 방에 들어가서 쉬어."
"...응."
수영이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제1팀에게 한 달간 유급 휴가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이제 와서 예약한 게이트를 모두 취소하고 D등급 게이트를 예약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빨라도 2~3주 뒤겠지.
그것도 서울이 아닌 경기도권으로.
"아, 팀장들이랑 세실리아한테도 전화를 걸어 둬야겠네."
세실리아는 전화를 받자마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리 집으로 튀어 올라왔다.
이내, 수영의 건강한 모습을 보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인터넷 기사를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나 뭐라나.
소란 법석을 떠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작게 웃으면서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었다.
* * *
사무실로부터 유급 휴가에 대한 문자를 받은 제1팀의 길드원들.
그들은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그러곤 팀원들끼리 카페에 모여 욕설을 쏟아 냈다.
"X발, 방준우 이 새끼는 우리 마스터한테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
"범죄 헌터들까지 동원해서 딸을 납치해? 이런 미친 X끼가...."
"그래도 마스터랑 따님이 무사한 게 얼마나 다행이냐. 방준우, 그 자식도 죽었다고 하고 말이야."
"300만 원... 이거 받아야 하냐?"
제1팀의 길드원들은 월말에 300만 원씩 지급받기로 결정됐다.
휴가 기간 동안에는 임시 공략대에 들어가도, 훈련장에서 훈련을 해도 상관이 없었다.
마음껏 휴식을 즐겨도 괜찮겠지.
"300만 원은 마스터가 자비로 지급해 주는 돈이야. 위약금까지 생각하면 상당액이 깨지겠지. 그 와중에 고정대 수술도 받으셔야 하는데...."
"야, 돈 때문에 마스터를 걱정하는 건 시간 낭비다. A등급 게이트 한 번 들어갈 때마다 몇억씩 버시는 분인데, 그 정도가 부담이나 되겠냐? 차라리 훈련장에 가서 목각 인형이나 더 사. 마스터도 그걸 더 바라실걸?"
"그건...."
"정 불편하면 수술 마치고 병문안 겸 자택에 찾아가 보든가."
"그건 조금...."
회사와 비교하면 임직원이 사장의 자택을 방문하는 것이다.
일개 길드원으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반면, 팀장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과일 바구니를 가지고 건혁의 자택에 방문했다.
고정대 수술을 마치고 안정을 취하던 건혁은 팀장들을 거실에 앉히고, 길드의 운영 방식을 바꿔 보자는 주제를 꺼내 들었다.
"마스터의 말씀은 제1팀부터 높은 서열대로 배정하자는 말씀이신가요?"
"예, 저희도 대규모 길드의 구조를 따라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태형이 팔짱을 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제4팀 팀장인 지수는 미간을 찡그린 채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건혁은 사전에 준비해 둔 구조 조직도를 이메일로 보내 주었다.
"제1팀은 15명, 제2팀은 20명, 제3~5팀은 모두 30명씩 배정되어 있네요."
"경쟁은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성장한 자들에게는 그만한 보수가 필요하죠. 이 자리의 여러분들은 지금보다 더욱 높은 보수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스터도 제1팀에 배정되는 건가요?"
지수의 물음에 건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저는 단독으로 움직입니다. 참고로 짐꾼에 대한 보수는 전액 제가 부담합니다."
"...마스터가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듯한 팀장들의 반응에 건혁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제3~5팀에 배정될 길드원들의 보수는 아마 1~20% 정도 떨어지게 될 겁니다. 그 부분을 조금이나마 충당해 주고자 하는 것이며, 부담할 금액이 얼마 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제1팀과 제2팀의 짐꾼에 대한 보수는 전투원들이 전액 부담하는 걸로 하죠."
유진의 제안에 팀장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수가 늘어나는 만큼 수십만 원 정도는 크게 신경 쓸 필요 없겠지.
건혁은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한 후, 정리해 둔 사항들을 하나씩 설명해 주었다.
또, 매달 4~5회씩 시행되는 짐꾼들의 실전 훈련에서 보호자 겸 짐꾼으로 따라가는 4~5명의 전투원에게는 500만 원의 보수를 지급해 주겠다고 말했다.
"이것도 마스터가 부담하시는...."
"어차피 한 달에 1억도 안 되니 괜찮겠죠. 단독으로 활동하는 만큼 제 수입도 큰 폭으로 늘어날 겁니다. 그냥 세금을 조금 더 낸다고 생각하면 돼요."
건혁은 대답을 하면서도 붉은 망토의 골렘을 떠올렸다.
녀석과 함께한다면 단 한 번의 공략으로도 10억 원 이상의 현금을 벌 수 있으리라.
매달 길드를 유지하기 위해 지출되는 1~2억 원 정도는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해야지.
"자세한 사항은 돌아가서 이메일로 보낸 ppt 파일을 확인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업무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근래 잘들 지내시는지 이야기나 좀 나눌까요?"
분위기를 풀며 팀장들과 사담을 나누기 시작한 건혁.
근래 어떻게 지내는지를 시작으로, 어떠한 사건을 주제로 꺼내거나, 요새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주식 투자에 대한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주식을 안 샀었네.'
2~3년 전부터 건혁은 남은 돈을 수성증권의 계좌에 입금시켜 수성전자의 주식을 매수했다.
세계 순위에 드는 수성전자가 무너질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수성전자의 주가가 떨어진들, 다시금 올라갈 것을 알기에 수많은 직장인들은 수성전자에 주식을 투자하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팀장들이 대화에 빠져들 무렵.
건혁은 슬쩍 스마트폰으로 증권사 어플을 열었다.
'허, 이렇게까지 올랐다고?'
처음 주식을 투자할 때는 주당 38,100원에 거래됐다.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52,400원이었던 주가가 지금은 82,300원을 찍고 있었다.
그동안 수성전자에 투자한 금액은 대략 5억 원 정도.
건혁은 12,000주를 보유했다.
12,000주의 현재 금액은 10억 원이 조금 안 되는 수준.
'은행 이자보다는 낫겠지'라는 생각에 넣어 둔 돈이 2배로 불어난 것이다.
팀장들이 돌아간 직후, 건혁은 주식들을 모두 호가에 매도하고, 모르건 의수 매장을 찾아갔다.
제71화
71화. 빙마군주 (2)
"얀마, 멀쩡하면 얼굴 좀 비춰야지! 뒈진 줄 알았잖아!"
모르건 의수 매장의 주인, 진철이 험한 말투로 건혁에게 달려왔다.
성격은 여전하구나.
하지만 그의 얼굴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겉과 다르게 속이 따뜻한 사람이다.
건혁은 머쓱한 얼굴로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하고, 1급 금속 아르늄으로 제작된 의수를 구매했다.
"그래서, 검사는 언제쯤 받을 생각이냐?"
"10월에나 받아야죠."
"왜, 100위 안에 들어 보려고?"
"예, 그럴 생각이에요."
건혁의 덤덤한 대답에 진철이 미간을 좁혔다.
"...가능해?"
"일단, 열심히 노력해 봐야죠. 아, 300MN 마력 전지 들어왔어요?"
"그래, 100개 정도 받아 뒀다."
"그것도 부탁할게요."
진철은 작게 혀를 차면서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그때, 매장 입구에서 의족을 찬 여성이 들어왔다.
이번 달 서열 3,553위가 된 이세민 헌터다.
"아, 건혁 씨!"
그녀가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몸은 괜찮으세요? 고정대 수술을 다시 받았다는 이야기도 들려오던데...."
"수술은 잘 마무리됐습니다. 의수도 어느 정도는 움직여도 괜찮아요."
"후우, 따님도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데스펠이 범죄 길드와 연루되어 있다고는 들었지만, 설마 스컬하고까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세민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아, 그거 아르늄제 의수 아니에요?! 저번에 아저씨가 20억에 내놨던...!"
세민은 건혁의 왼팔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벌써 아르늄제 의수를 구매한다고?
진철이 만든 만큼 성능 하나는 확실하지만, 비용적으로 너무나도 부담되는 물건이다.
"우와, 엄청 출세하셨네요."
"운이 좋았죠."
"이번에 이명까지 붙었다면서요? 빙마군주... 였었나요?"
"네."
건혁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민망한 이명이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진철이 건혁의 어깨를 툭 쳤다.
언제 다가온 거지?
"자아."
건혁은 체크 카드를 돌려받았다.
"자주 좀 찾아와라. 심심해 죽겠다고."
"시간 비면 딸이랑 놀아 줘야 해요. 헌터가 되겠다면서 계속 훈련장으로 끌고 가거든요."
"어휴, 서러워서 못 살겠네."
진철이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푹푹 내쉬자, 옆에 서 있던 세민이 버럭 화를 냈다.
"내가 자주 와 주고 있잖아요!"
"너는 그만 좀 와라! 허구한 날 와서 잔소리만 중얼중얼...."
"이익!"
두 사람의 말다툼에 건혁은 작게 웃으면서 의수를 움직여 봤다.
확실히 아르베트제보다 정교한 느낌이 든다.
무게도 조금 가벼워진 거 같고.
역시, 실력 하나는 훌륭하네.
건혁은 슬쩍 진철을 봤다.
그보다....
'1급 포션을 따로 마련해야 하나?'
의수에 익숙해진 탓일까?
1급 포션에 대한 필요성이 점점 떨어져 갔다.
게다가 전투에서 의수는 특별한 역할을 해 주었다.
"이만 돌아가 볼게요."
"벌써?"
"딸이랑 훈련장에 가기로 약속해서요."
진철은 작게 혀를 차면서 손을 휘저었다.
"그래, 가 봐."
"수고하세요."
모르건 의수 매장을 나선 뒤, 곧장 집으로 돌아간 건혁.
그는 수영과 함께 점심 식사를 먹고 헌터 훈련장을 찾아갔다.
훈련장에 비치된 TV에서는 한창 데스펠의 마스터가 기자 회견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방준우 및 스컬과 자신들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뜻을 전함과 동시에 박강석은 건혁과 수영에게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하지만 사람들은 강석의 발언을 믿지 않았다.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한 데스펠이다.
스컬과 연을 맺고 있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겠지.
그러나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일까?
기사단 측에서도 압박과 경계를 가할 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는 못했다.
"후우...."
건혁은 멍하니 수영의 훈련을 지켜봤다.
지금 당장 헌터로 데뷔시켜도 손색이 없는 실력.
초등학생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힘이다.
"오랜만입니다, 박건혁 헌터님."
"아, 오랜만입니다."
청룡 기사단에 소속된 헌터, 박민철.
그는 건혁과 악수를 나누면서 씁쓸히 웃었다.
"방준우가 일으킨 납치 사건을 들었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었습니다. 따님께서 무사하셔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예,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이번에 청룡 기사단 수서 지부의 지부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마침 이진화 부단장님께서 제9 헌터 훈련장을 찾아가면 박건혁 헌터님을 뵐 수 있다고 해서 인사도 드릴 겸 찾아왔습니다."
"아, 그렇군요."
"언제 한번 박건혁 헌터님을 찾아봬 다시 한번 입단 제의를 해 보려고 했습니다만...."
건혁은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흑월이라는 길드를 운영하고 있다.
길드원들을 버리고 청룡 기사단에 들어갈 순 없겠지.
그것을 예상한 듯 민철이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박건혁 헌터님께서 죄송하실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박건혁 헌터님께서 활약하실 때마다 뿌듯하더군요.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는 기분이 들어서 말입니다."
"아하하...."
건혁이 머쓱하게 웃었다.
이내, 민철이 수영을 바라봤다.
"대단하네요. 아직 초등학생이라고 들었는데...."
"올해로 초등학교 6학년입니다."
"...이진화 부단장님께서 눈을 반짝이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민철은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명함을 건혁에게 건네주었다.
"앞으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제게 연락해 주십시오. 부단장님께서 움직이기 어려우실 때는 제가 최대한 도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이진화의 입김이 들어간 모양이다.
건혁은 명함을 받으면서 부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도움을 받는다면, 자신도 무언가 보답을 해야 되지 않을까?
'아....'
보답.
건혁은 민철과 진화의 의도를 깨달았다.
국내 최정예 헌터에게 빚을 만들어 둔다면, 추후 국가가 위태로울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심지어 3~4년간 미친 성장력을 보여 준 자신이라면, 서열이 조금이라도 낮을 때 일찍이 빚을 만들어 두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그래도 이 정도의 인맥은 내게 큰 이득이 될 거야.'
잠시 뒤, 수영이 훈련을 마무리 지었다.
"아, 모처럼이니 같이 점심이라도 드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진화 헌터님께서 이 근처의 부대찌개집이 정말로 맛있다고 해서...."
민철의 제안에 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수영이 샤워를 마칠 때까지 훈련장의 정문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수영이 훈련장을 나오자, 세 사람은 부대찌개집에서 식사를 했는데.
점심을 먹은 뒤, 건혁과 수영은 다시 훈련장을, 민철은 청룡 기사단 수서 지부로 향하면서 헤어졌다.
평화로운 일상이 지나가고, 4월 중순이 될 무렵.
흑월의 구조가 새롭게 개편됐다.
"드디어 흑월도 다른 거대 길드들의 구조를 따라가기 시작하는구나."
"뭐, 이쯤 되면 그럴 만도 하지. 그보다 짐꾼에게 지급되는 비용을 전액 마스터가 부담한다더라고. 보통 거대 길드에선 길드원들로부터 받은 수수료를 예산으로 편성해 짐꾼들의 월급을 챙겨 준다고 하던데...."
"하긴, 흑월에서 걷는 수수료는 다른 길드에 비해 엄청 낮은 편이긴 하지."
"게다가 짐꾼들의 실전 훈련에 동행하는 헌터들한테도 500만 원씩 지급한다 하더라고."
"한 달에 1억에서 1억 2,500만 원 정도인가? 우리한테는 엄청나게 큰돈이지만... 뭐, 마스터한테는 한 달 수입의 10%도 안 될걸?"
"그건 그렇지. 그래도 마스터가 신경을 써 주고 있다는 건...."
"그래, 나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길드원들을 위해 억대의 자비를 투자하는 마스터가 과연 몇이나 될까?
포션 및 장비의 지원 역시 건혁의 자비로 투입된다.
이 정도면 천사나 다름없겠지.
뚜벅, 뚜벅, 뚜벅.
강의실 단상에 선 건혁.
그는 길드원들을 바라보며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은 여러분들의 성장을 위한 투자입니다. 부디 지금보다 더욱 강해지셔서 뒤따라올 후배들을 잘 이끌어 주실 수 있는 헌터가 되어 주십시오."
몇몇 길드원들은 이번 구조 개편에 살짝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보수가 줄어든 것에 대한 불만이다.
건혁은 그들의 반응을 예상한 듯 추가 시행 제도를 길드원들에게 발표했다.
바로 매달 받는 보수의 5~10%를 추가로 지급해 주는 제도다.
물론,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탈퇴에 대한 마음을 접기에는 충분했다.
"동료들에게 뒤처지지 않고, 서로를 도와주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길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공지가 마무리된 직후, 길드원들에겐 뷔페식당의 식권이 지급되었다.
무리를 지어 강의실을 나서는 길드원들.
건혁 역시 팀장들과 함께 해당 식당을 방문해 점심을 먹었다.
딸그락.
"아 참, 게이트는 세실리아와 함께 들어갈 생각이신가요?"
유진의 물음에 건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실리아는... 슬슬 길드원들과 움직이게 할 생각입니다. 일단, 제1팀에 배정시키는 게 좋겠네요."
세실리아의 서열은 27,893위로, 현재 흑월에서도 두 번째로 강한 실력자다.
이인자의 자리를 빼앗긴 유진은 살짝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강한 헌터가 길드에 들어오는 것은 환영해야 될 일이겠지.
그렇게 흑월은 새로이 개편된 구조에 따라 게이트 공략을 개시했다.
퍼엉!
제1팀 팀장직을 맡게 된 유진은 세실리아의 특수 능력에 감탄사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대... 대단하네요. 능력이 다양하다고 듣긴 했지만...."
1~3서클 마법 중 4개를 특수 능력으로 등록한 세실리아.
4개 모두 바람과 관련된 능력으로, 전투에서 다양한 활약을 펼치며 B등급 게이트를 무난히 공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강자는 언제나 환영을 받기 마련이다.
제1 팀원들은 세실리아와의 첫 공략을 기념하며 가까운 삼겹살집에서 회식을 했다.
"자아, 세실리아 씨의 합류를 기념하고 흑월의 번영을 위하여!"
"위하여!"
그렇게 좋은 분위기 속에서 흑월의 다섯 팀이 활동을 시작하고, 무더운 여름이 지나 어느새 10월이라는 날짜가 찾아왔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건혁은 허공에 띄워진 알림창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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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건혁
*종족: 인간
*칭호: -
*출신 국가: 한국
*LV: 213
*근력: 70
*민첩: 72
*체력: 70
*마력: 500
*AP: 0
*스킬: [빙마검(氷魔劍)-LV7] , [얼음 골렘 소환-LV7], [마력 회복-LV5], [성장 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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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레벨에 변동은 없었다.
그러나 스테이터스 레벨이 200에 도달하면서 얻은 200AP.
또, 레벨 업을 통해 3AP씩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마력이 대폭으로 늘어나면서 전투에 참가하는 골렘 역시 많아졌다.
그리고 얻을 수 있는 다섯 가지의 스킬, 아이스 스피어(Ice Spear) / 상처 치유 / 육체 강화 / 빙마궁(氷魔弓) / 성장 촉진 중에서는 '성장 촉진'을 선택했다.
스킬 레벨은 존재하지 않으나, 스테이터스 레벨 및 스킬 레벨에 필요한 경험치량을 30%나 줄여 주는 스킬이다.
지금의 그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
건혁은 부산물을 처리한 다음 스마트폰으로 계좌를 확인했다.
"57억 2,180만 원."
이게... 고작 하루 만에 번 수익이다.
건혁의 재산은 어느새 3천 억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 경매장에서 1급 포션을 구매하고도 남을 금액.
그러나 경매장에는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의수가 전투에 큰 도움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그는 차량에 올라타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 * *
며칠 뒤, 각성 능력 검사를 받기 위해 헌터 협회에 방문하려던 건혁은 잠시 난색 한 표정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나도 따라갈래! 따라갈 거야!"
다리에 착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딸, 수영.
어린애처럼 떼를 쓰는 그녀의 모습에 건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72화
72화. 빙마군주 (3)
결국, 건혁은 수영과 함께 헌터 협회를 방문했다.
건혁이 검사실로 들어가자, 검사관은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작년 10월 검사 결과는 5,488점이었다.
그 결과, 박건혁은 779위라는 서열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794위까지 떨어졌지만, 이번 검사로 그의 서열은 다시 한번 큰 폭으로 상승할 것이다.
건혁이 검사 부스를 나오자, 검사관이 각성 점수를 말해 주었다.
"정말... 보고도 안 믿어지네요. 올해 각성 점수는 6,825점입니다."
"저번 달 100위의 헌터는 몇 점이었죠?"
"6,217점이군요. 박건혁 헌터님의 점수라면... 5~60위대까지 바라보실 수 있을 겁니다."
순간, 건혁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절로 쥐어지는 주먹.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건혁은 겉옷을 챙겨 입고 검사실을 빠져나갔다.
검사실 앞에서 기다리던 수영이 눈동자를 반짝였다.
"몇 점이었어?"
"으음, 나중에 홈페이지로 확인해 봐."
건혁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수영이 얼굴을 잔뜩 붉혔다.
"알려 줘! 알려 줘! 알려 줘!"
다리에 달라붙어 떼를 쓰는 수영.
그에 건혁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내, 소곤소곤 검사 결과를 그녀의 귓가에 알려 주었다.
"허업! 그... 그러면...."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우리끼리 비밀이다? 알겠지?"
건혁은 마치 중대한 비밀인 마냥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그 행동에 수영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응."
11월이 되자 유X브, SNS 및 방송국 등에선 박건혁에 대한 이야기로 소란스러워졌다.
저번 달 794위까지 떨어졌던 헌터가 이번 달에는 59위라니?!
TV에서는 '빙마군주(氷魔君主) 박건혁'이라는 이름을 계속해서 등장시켰고, 흑월에 소속된 길드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반면, 당사자인 박건혁은 세상이 떠들썩한 그 순간에도 덤덤히 아빠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재산이 3천억 원에 도달하며, 바로 옆에 위치한 단지의 아파트를 계약한 건혁.
공급 면적 152㎡로 침실 넷, 화장실 둘, 발코니 셋, 거실 하나, 주방 하나로 구성된 곳이다.
리모델링과 인테리어를 마치고, 비싼 가전들이 집에 들여진 후, 건혁은 수영을 데리고 새집으로 향했다.
"바... 바닥이 반짝거려."
"대리석으로 시공해 달라고 요청했거든. 거실에는 카펫을 깔아 뒀어."
"우와, 드... 드라마에 나오는 부잣집 같아."
세실리아의 집을 보고 번뜩인 이미지.
건혁은 흑백 인테리어로 새집을 깔끔하게 꾸몄다.
물론, 두 명이 살기에는 너무나도 큰 집이다.
"원래는 침실이 네 개인데, 너무 많은 거 같아서... 이쪽은 욕실로 확장시켜 봤어."
화장실과 붙어 있던 작은 침실에는 직사각형의 거대한 욕조가 매립되어 있었다.
그것을 본 수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눈살을 좁혔다.
저렇게 큰 욕조를 언제 사용해?
또, 화장실과 욕실로 연결되는 1~2m의 공간은 문으로 차단하여 단절시켰다.
공간 분리는 확실하지만, 과연 이렇게까지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너무... 과하지 않아?"
"아빠도 살짝 후회하는 중이야."
수성전자의 주식을 사들이는 데 사용한 1,000억 원.
게다가 길드를 운영하는 자금 역시 개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수영이를 경호하는 경호원, 즉 1만대 헌터 두 명을 고용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수영의 하교를 위한 최고급 차량을 구매하는 비용 등.
이곳저곳에서 지출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혁의 통장에는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
때문에 새집의 리모델링과 인테리어 비용에 상당 액수의 비용을 투자했는데.
건혁 역시 너무 과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일어났다.
"현관 바로 옆에 있는 이쪽이 수영이 방이야."
"...여기도 너무 넓은 거 같아."
안방과 견줄 만한 거대한 규모의 침실.
건혁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 및 가구와 컴퓨터 등의 가전은 수영의 취향에 맞춰 들여진 상태다.
"돈을 너무 막 쓰는 거 아니야?"
"...아빠 통장에 있는 돈에서 3%도 안 나갔어."
몇몇 은행에 보관 중인 현금의 합계는 대략 2,100억 원 정도.
그중 3%라면 63억 원이다.
어마어마한 금액이지만, 3%라는 초라한 수치 때문일까?
수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건혁에게 안겼다.
"고마워."
"아빠가 더 고맙지.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 주는데."
"피이...."
수영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새집에서의 첫 식사는 바로 짜장면이었다.
두 사람은 거실 바닥에 앉아 TV를 보며 점심 식사로 짜장면을 먹고, 세실리아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어... 엄청 넓네요."
수영은 조금 전과 달리 밝은 얼굴로 세실리아의 손을 붙잡은 채 집의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이쪽은 욕실이야!"
세실리아는 욕실의 크기에 살짝 감탄하고 말았다.
귀족 시절에나 볼 수 있었던 거대한 욕조.
그녀가 머무는 자택과 너무나도 크게 비교됐다.
"이... 이런 곳에서 살려면 얼마나 벌어야 하죠?"
"매매가에 리모델링, 가구, 가전이랑 이것저것까지 다 포함하면 50억 원 정도는 들겠지? 유지 비용이랑 세금은 조금 비싸지만, 서열 100위 안에 들어서 그런지 웬만한 것들은 다 감면되더라고."
세실리아는 연신 감탄을 터트리며 본인의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본인의 통장 잔고다.
'나도 여기로 이사 올까?'
돈은 충분하다.
단지, 혼자서 관리할 수 있을지가 관건일 뿐.
건혁은 세실리아에게 관리를 위한 가사 도우미 업체를 소개해 주었다.
"고정대 수술을 받고 난 후에 몇 번 이용해 봤는데, 비용도 괜찮고, 청소도 깨끗하게 잘해 주시더라고. 그래서 주말에 가끔씩 부르고 있어."
세실리아는 스마트폰으로 해당 업체를 검색해 봤다.
"나쁘진 않네요. 후기도 대부분 만족스럽다는 것뿐이고."
"아무튼, 거실에서 수영이랑 TV라도 보고 있어. 지금 추어탕 끓이는 중이거든."
"네, 알겠어요."
세실리아와 수영이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동안 건혁은 주방에서 앞치마를 둘러맸다.
* * *
"...하아, 결국에는 들어섰군."
데스펠 길드 제1군 대장, 박태준은 헌터 협회 홈페이지를 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방준우를 쓰러트렸다는 사실은 스컬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뿐이랴.
스컬의 2급 길드원 30명이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보였다.
그 단기간에 또 다른 성장을 이루어 냈다고?
2020년 11월 1일이 된 그때.
태준은 모든 것을 납득할 수 있었다.
설마, 794위에서 59위까지 치고 올라올 줄이야.
TV에서는 몇 차례나 박건혁의 이름을 언급했다.
"후우, 그때 어떻게든 붙잡아야 했었어."
도대체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박건혁의 당당함을 자만이라 생각하고 언젠가 후회하게 될 날이 오리라 믿었다.
하지만 후회하게 된 건 자신의 쪽이었다.
"제길, 이쪽도 마찬가지인가."
방준우를 포함한 정예 넷을 잃고, 이미지가 바닥까지 내리치며, 스카우트가 불가능해진 상황.
말 그대로 최악이다.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들은 대부분 데스펠과 엮이지 않으려 했고, 내부에서 역시 크게 흔들리면서 탈퇴를 희망하는 길드원들이 서서히 늘어났다.
뿌드득!
"방준우, 그 자식만 아니었어도...."
기사단의 경계·감독에 위축된 데스펠은 다른 길드들에게 밀려 순위를 몇 단계나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 탓에 부친인 박강석은 나날이 분개했고, 아들인 박태준을 향해 욕설을 쏟아 냈다.
그러나 아무리 분노해도 죽은 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때문에 강석은 분노의 표적을 방준우에서 박건혁으로 돌렸다.
쾅!
"기사단은 도대체 언제쯤 물러나는 거냐!"
기사단의 경계·감독 탓에 박건혁에게 성장할 시간을 주고 만 데스펠.
강석은 지금 당장이라도 박건혁을 죽여야 한다며 날뛰었다.
태준은 그런 부친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는데.
"박건혁은 청룡 기사단의 부단장인 이진화와 인연이 있습니다. 방준우가 일으킨 납치 사건 때도 이진화 본인이 움직이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지금의 박건혁은 서열 59위로 상당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어,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닥쳐라!"
강석은 태준의 설득에도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책상 및 가구들을 모조리 부숴 버렸다.
이걸로 몇 번째 리모델링일까?
마스터실의 수리 및 리모델링 비용으로만 벌써 수십억이 깨졌다.
그래도 이 정도로 부친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그렇게 사흘 정도가 지나, 박건혁에 대한 소식이 뚝 끊어졌다.
한숨을 쉬며 눈가를 좁힌 태준.
"후우, 지금보다 더 강해지기 전에 스컬의 1급 길드원들을 한국으로 들여야 한다."
한 명으로는 부족하다.
2급 길드원 다수가 달려들어도 무의미하겠지.
때문에 태준은 스컬의 대한민국 총괄본부장인 한성욱과 수차례 연락을 나누었다.
전 대한민국 헌터이자, 현 스컬의 제1급 길드원으로 활동 중인 그는 박건혁의 암살 의뢰에 난처한 반응을 내비쳤다.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지금의 박건혁은 저희 쪽에서도 함부로 건들기 힘들다고.
"비용이라면 최대한...!"
―녀석이 A등급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 혼자서 87마리의 웜을 토벌했다는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지금 일본의 백귀(白鬼) 놈들과 전쟁을 벌이느라 움직일 수 있는 1급 길드원의 숫자가 부족합니다.
사정을 이해해 달라는 투로 대답하는 성욱이었다.
그에 태준은 주먹을 세게 쥐고 눈을 감았다.
"알겠다. 추후 다시 연락하지."
―예, 알겠습니다.
* * *
전화가 끊어지자, 성욱은 미간을 찌푸린 채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새끼는 어디서 함부로 반말이야? 흑검(黑劍)의 아들이라니까, 지도 잘난 줄 아는 건가?"
이번 달, 새롭게 갱신된 박태준의 서열은 229위다.
자신의 손가락 하나 건들지 못하는 쓰레기.
흑검(黑劍) 박강석 때문에 반말을 용인해 주고 있을 뿐.
만약 박강석만 없었다면 진즉에 그의 목숨은 이승의 것이 아니었으리라.
"그보다 이 자식은 도대체 정체가 뭐야? 794위에서 어떻게 59위가 되는 건데?"
테이블에 놓인 노트북 화면에는 박건혁의 프로필이 자세하게 기입되어 있었다.
"딸한테는 경호에, 골렘까지 붙였으니...."
수영을 경호하는 서열 1만대의 헌터들.
그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단지, 그들과 함께 움직이는 골렘들이 거슬릴 뿐.
외부로는 노출되지 않았으나, 정찰을 보낸 결과, 경호 차량에서 붉은 망토의 골렘 2기를 포착할 수 있었다.
심지어 자택에는 그 이상의 전력이 배치되어 있으리라 추정됐다.
"하아, 정말 성가신 녀석이네."
성욱은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방준우의 의뢰로 박건혁과 마주한 그 날.
붉은 망토의 골렘은 자신의 손에 의해 파괴됐다.
순식간에 말이다.
하지만....
"분명, 내 공격에 반응했어."
골렘이 재빠르게 취한 방어 자세로 오른손이 강하게 저려 왔다.
때문에 2기의 골렘이 건혁의 곁에 선 순간.
성욱은 전투 의사가 없음을 밝히면서 약간의 허세를 부렸다.
그리고 허세가 먹힌 걸까?
건혁은 경계심만 취할 뿐, 자신을 쉽게 놓아주며 폐건물로 들어갔다.
제73화
73화. 유신의 만행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