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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53화. 송파구 레이드 (4)

"마스터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지만... 그런 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렇게 사는 건지 모르겠어요."

"할 일이 없으니까 시간이 남나 보죠. 아니면 마스터가 잘나가서 질투하는 걸 수도 있고요."

"별 웃기지도 않는 댓글에 팩트로 대댓글을 달아 봤더니, 억지를 부리면서 욕이나 퍼붓는 거 있죠? 참나...."

세 조장의 대화에 몇몇 길드원들이 참여하며 악플러들을 향해 비난을 쏟아 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린 건혁과 유진.

이후, 구조 작전이 재개됐다.

콰앙!

거인 골렘의 몽둥이에 오크 장군이 날아갔다.

길드원들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진짜, 길드 하나는 제대로 들어왔어."

골렘의 전투에 길드원들의 사기가 급격히 치솟았다.

"다친 녀석들은 후위로 물러나!"

전투가 어렵다고 판단된 경상자들이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이어, 중상자들은 후위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 골렘들에 의해 구조됐다.

5급 포션과 함께 간단한 응급 처치를 마친 뒤에도 전투가 불가능한 길드원들은 구조된 주민들과 함께 방어선으로 물러나, 구급 차량을 타고 병원으로 이동했다.

서서히 저녁이 되어 가기 시작하면서 건혁은 길드원들에게 퇴각 신호를 보냈다.

"하아, 그냥 폭격을 날려서 전부 죽여 버리면 편할 텐데...."

"그런 말 하지 마라.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하잖아. 게다가 재산 피해는 어떻게 감당하게?"

"그거야 마석들을 회수해서...."

"오크 1만 마리를 멀쩡히 잡아 봐야 8~90억 원대잖아. 뭐, 가공하고 수출하면 그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질 순 있겠지만, 그걸로 수천억대의 재산 피해를 어떻게 다 감당해?"

"...수천억은 조금 과장 아니냐?"

"야, 여기 서울이야. 그것도 강남이랑 송파라고. 건물을 새로 짓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그것도 그러네."

지금 당장 폭격기와 전차를 투입하고 싶어도 정부는 재산 피해와 인명 피해를 우려하며 국민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군인들의 총격만으로는 오크들을 쓰러트리기도 어렵다.

때문에 수많은 헌터들을 동원해 송파구 레이드를 막아 내기로 결정한 정부.

덕분에 적은 피해로 피해자들을 구출하고, 빠른 속도로 레이드를 진압할 수 있었다.

* * *

호텔로 돌아와 냉수를 들이켜던 나는 뉴스를 보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송파구에서 터진 B등급 게이트.

그 안에는 오크들이 세운 나라가 존재한다는 모양이다.

청룡 기사단이 촬영한 영상이 공개되자, 나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마수가 무슨 나라를...."

물론, 선례가 없는 건 아니다.

실제로 몇몇 게이트 안에선 드문드문 도시처럼 보이는 것들이 발견되었고, 정부는 해당 도시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뭐, 아직까지 활용 방안이 공표되지 않은 것을 보면 활용도가 없다는 뜻이겠지.

대한민국 정부 역시 해당 게이트의 핵을 파괴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흑월이 잔당들을 처리할 시각.

청룡 기사단과 백호 기사단 정예들이 게이트의 핵을 파괴하고 복귀했다.

닷새 만에 진압된 대규모 레이드.

빠른 진압에도 불구하고 사상자의 숫자는 2만 명에 달한다.

해당 기사를 본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사망자는 2천 명대인가."

정확히는 2,681명이다.

그 외 중상자는 1,887명, 경상자는 15,897명이라고 한다.

대규모치고는 상당히 적은 규모의 피해다.

하물며 폭발한 게이트의 등급은 B.

이번에는 협회의 대응이 빨랐다는 것을 인정해야겠지.

"주말에만 21억 원, 길드원들과 함께했을 때는 24억 원 정도.... 이번 레이드에서만 대략 45억 원을 번 건가."

내가 70%의 비율을 가져갔음에도 레이드에 참가한 길드원들은 환호했다.

사흘간 레이드에 투입된 것만으로 1천만 원에 가까운 보수를 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월·화·수를 꼬박 통제 구역에 드나든 길드원들.

그들은 목·금을 휴가로 받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반면, 나는 호텔에 비치된 컴퓨터로 이사를 가기 위해 매물을 찾아봤다.

"조금 더... 그래, 조금 더 안전한 지역으로 이사를 가자. 설마, 거기에서까지 레이드가 터지진 않겠지."

걱정되는 마음에 절로 스트레스가 일어났다.

똑똑똑.

"아빠, 나 배고픈데...."

"아이고, 벌써 점심시간이네. 수영이, 오늘 먹고 싶은 거 있어?"

"떡볶이!"

메뉴를 미리 생각해 두고 있었구나.

나는 작게 웃으면서 컴퓨터로 고개를 돌렸다.

"떡볶이가... 주변에 있었던가?"

호텔과 가까운 분식집을 검색해 봤다.

"바로 앞에 있네. 그럼, 챙겨 입고 나가자."

바로 50m 거리에 위치한 분식집.

나는 옷을 챙겨 입고 수영이와 함께 호텔을 나섰다.

분식집에 도착한 우리는 여러 메뉴들을 주문하면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식사가 마무리될 무렵.

"수영아, 아빠가 이사를 갈까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입 안에서 우물우물 떡볶이를 씹던 수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로 가는데?"

"일단, 안전한 지역으로 가 보려고. 이번처럼 위험한 일이 생겼을 때, 바로바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우리 집 앞에도...."

그래, 청룡 기사단 지부가 바로 코앞에 있음에도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다.

그렇기에 나는 지부가 아닌 본부가 위치한 지역으로 이사를 가고자 마음을 먹었다.

서울에서 대규모 레이드가 일어난 탓인지, 본부가 위치한 지역의 집값이 큰 폭으로 오르긴 했지만, 그럼에도 수영이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투자할 가치가 있는 돈이다.

"기사단 지부가 아닌 본부가 위치한 곳으로 가 보려고."

용산구에는 청룡 기사단과 백호 기사단의 본부가 위치해 있다.

하루에도 수백여 명의 최정예 헌터들이 오가는 지역.

범죄 헌터들 역시 용산구에는 최대한 접근하려 하지 않았는데.

본부와 수백 미터 정도 떨어진 지역의 아파트.

그것도 24평 정도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구매가 가능하다.

'문제가 있다면... 수영이가 전학을 가야 된다는 점과 내 출퇴근 시간이겠지.'

그러나 안전을 위해서다.

이 정도는 감안해야 되지 않을까?

수영이는 전학에 대해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등학교에는 아무런 마음도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아빠 출퇴근 시간은 괜찮아?"

"으음, 퇴근 시간이 조금 늦어지기는 하겠지만...."

아니, 조금이 아니다.

내가 퇴근하는 시간대는 오후 6시.

평범한 직장인들과 비슷한 시간대다.

그때면 이미 도로는 마비된 상태겠지.

출근 시간도 비슷할 터.

"흐음...."

나는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길드의 구조도를 다시 짜야 하나?

아니, 서울의 중북부 지역에 거주하는 헌터는 우리 길드에 없다.

최대한 가까운 게이트를 예약한다 하더라도 대부분이 D~F등급의 게이트뿐.

'...이사는 조금 더 생각을 해 보자.'

결국, 이사에 대한 결정을 보류했다.

대규모 레이드가 진압되고, 잔당들이 토벌된 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엉망이 되어 버린 건물과 도로.

주차장의 차량들 역시 폐차해야 될 정도로 심각하게 파손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멀쩡해 보이는 차량 한 대.

"비싸게 산 보람이 있네."

역시, 방탄 성능이 추가된 차량으로 구매한 게 정답이었어.

약간의 스크래치 정도는 카센터에 맡기면 되겠지.

나는 차량 내부를 확인하면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한편, 정부에선 피해 규모에 따라 약간의 금전적 보상을 해 주기로 결정을 내렸지만, 그래 봐야 1백만 원에서부터 최대 3천만 원 정도에 불과했다.

누군가는 많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피해 규모를 정하는 기준은 엄격했고, 최대 3천만 원의 보상금을 받은 사람은 2~3억 원 이상의 재산 피해를 본 사람이라고 한다.

"후우, 집도 멀쩡하네."

우리 집은 11층이다.

엘리베이터를 탈 줄 모르는 오크들이 굳이 11층까지 비상계단으로 올라오려 하지는 않았겠지.

또, 수서동 인근은 레이드가 발생되고 이틀 만에 정리되었다.

얼음 골렘에 의해.

"아빠랑 게임이나 할까?"

"응, 어제 PC방에서 했던 좀비 모드 하고 싶어!"

"그래, 그러면 게임하고 나서 이거 구워 먹으면 되겠네."

수영이가 눈을 반짝이며 내 오른손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조금 전 마트에서 구매한 한우다.

나는 한우를 냉장고에 넣어 둔 다음, 거실 창가 쪽에 설치해 둔 두 PC로 게임을 시작했다.

각방에서 플레이하는 것보다 옆에 앉아 대화를 나누며 게임하는 게 더 재밌지 않은가.

이후 창밖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거실 테이블에 가스버너를 올려 두고, 예능을 시청하며 한우와 함께 각종 반찬을 곁들여 먹었다.

그렇게 나름 평화로운 하루가 지나갔다.

"...많이 어수선해졌네."

새벽부터 도로와 주차장의 차량들을 견인해 가는 폐차 업체들.

견인은 오후까지 계속됐고, 수많은 공무원들이 도로 위를 어슬렁거리거나, 건물들을 드나들면서 무언가를 조사하고 있었다.

드문드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란다로 나가자, 누군가가 말다툼을 벌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바닥에 주저앉아 목청껏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들이 보였는데.

목소리를 들어 보니... 아무래도 친족이 죽고, 유산 문제로 다툼이 벌어진 모양이다.

"역겨운 것들."

나는 고개를 돌려 베란다 문을 닫았다.

괜히 간섭할 필요는 없겠지.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환경 속에서도 나는 평소처럼 수영이를 초등학교에 데려다준 뒤, 길드원들과 함께 게이트 공략을 시작했다.

* * *

송파구 레이드 당시.

건혁에 대한 기사와 영상을 본 데스펠 길드 제1군 대장, 태준은 눈을 부릅뜨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이 정도의 능력을 감추고 있었을 줄이야!

그의 활약은 웬만한 최정예 헌터들 못지않았다.

"이... 이 정도의 골렘을 소환할 수 있다고?"

그의 놀라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레이드가 진압되고, 11월 1일 자정이 된 순간.

건혁의 서열이 새로이 갱신됐다.

일부러 자정까지 컴퓨터를 켜 두고 있었던 태준은 건혁의 서열을 보자마자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쾅!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는 어깨를 덜덜 떨면서 일전에 만난 건혁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의 제의를 거절하며 당당해하던 그 얼굴을 말이다.

무언가 있으리라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이제... 이제 겨우 3년 차가 된 헌터가...."

태준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허어...."

마찬가지로 흑월에 소속된 길드원들 역시 본인들의 성장을 확인하기 위해 자정까지 컴퓨터를 켜 두었다.

"좋았어!"

"드디어 30만대에...!"

길드원들은 자신들의 성장에 기뻐하면서 무심코 소리를 내질렀다.

그에 가족들이 깬 것은 여담으로 넘어가자.

그들은 자신들의 서열을 확인하고, 곧장 박건혁의 이름을 검색했다.

1년 가까이 각성 능력 검사를 받지 않은 그가 과연 얼마나 성장했을지 의문이 든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의 성장보다도 건혁의 성장에 더욱 큰 기대를 하고 있었던 길드원들.

흑월 제2팀 제1조 조장인 지수는 눈을 크게 뜬 채 육두문자를 내뱉고 말았다.

"허... 허허...."

그녀는 힘이 빠진 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진짜... 길드 하나는 제대로 들어왔네."

 

제54화

54화. 김유진 (1)

지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으면서 스마트폰을 쥐고 전화를 걸었다.

수신인은 아니나 다를까 이지혜였다.

자정이 넘었음에도 지혜 역시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어... 언니, 지금 마스터 서열...!

"그래, 언니도 봤어. 우리 마스터, 정말로 미친 거 아닐까?"

―아... 아하하하.... 이... 이게 말이 되는 건가요? 프로그램 오류라든가.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내일 한번 협회에 전화를 해 봐야 하나?"

지수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지혜가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래도 조금씩 납득이 돼 가지 않니? 저번 주에 일어난 레이드를 떠올려 보면 말이야."

―그건....

"어휴, 예전에는 마스터가 유부남에 딸이 있다는 이유로 마음을 접었었는데... 이런 멋있는 남자를 놓치기는 너무 아깝단 말이지."

―나이 차는....

"언니, 지금 서른 살이야. 마스터랑 6살 차이고."

―아....

"으히히, 서열이 높아지면서 노화도 점점 늦춰지고 있잖아. 게다가 마스터도 20대 중후반의 외모를 가지고 있으니까...."

지수가 생각에 잠긴 듯 말끝을 흐렸다.

그에 지혜는 살짝 우려스러운 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김유진 팀장님도 마스터한테 호감을 가진 것처럼 보였어요.

"후우, 역시 그렇겠지?"

―아... 아마도....

"라이벌이 너무 막강하네."

지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보다 지혜는 누구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아직....

"정말로? 너한테 호감을 가진 길드원들은 엄청 많아 보이던데...."

―에이, 그럴 리가요.

지혜의 겸손에 지수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설마, 칭찬해 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

―예?

"우리 지혜는 예쁜 데다가 특수 능력까지 각성한 최고의 신붓감입니다~"

―에에?!

당황한 듯 지혜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그에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린 지수.

―노... 놀리지 말아 주세요!

"푸하하하하! 미안, 미안."

―정말....

삐친 듯한 지혜의 목소리에 지수는 연이어 사과를 했다.

"태형이도 많이 올랐네. 김유진 팀장님도 곧 5만대에 들어가겠는걸?"

―지민 언니랑 진석 오빠도 곧 10만대에 들어설 거 같아요.

길드원들의 서열 그래프를 살펴보던 지수는 작게 웃으면서 쭈욱 기지개를 켰다.

"짐꾼도 헌터가 될 수 있네."

―...그러게요.

새삼 웃기기 그지없었다.

평생을 짐꾼으로 살아갈 줄 알았는데.

바라만 보던 서열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지다니.

"슬슬 자자. 괜히 늦게 잤다가 지각이라도 하면...."

―네, 알겠어요. 그럼, 편히 쉬세요.

"그래, 너도 잘 자~"

두 사람은 전화를 마친 뒤,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몸은 수마에 빠지길 바랐으나, 정신은 건혁의 서열 탓에 또렷했다.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는 숫자.

지수는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침대를 몇 번이나 뒹굴었다.

한편, 흑월의 이인자로 불리는 유진 역시 새롭게 갱신된 건혁의 서열을 보곤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일이 일어나니, 살짝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면 정말로 다른 길드들이 함부로 건들지는 못하겠어."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으면서 마우스 커서를 검색창에 가져다 댔다.

"으음, 다른 길드원들은 어떻게 됐는지 한번 볼까?"

그녀는 제3팀에 소속된 길드원들의 서열을 확인했다.

다들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지금의 전력이라면 C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데도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

물론, 자신이 동행한다는 조건이 필수로 붙겠지만.

"제2팀도 C등급 게이트를 예약하기 시작했었지?"

그녀는 씨익 웃으면서 잠시 턱을 괴었다.

"내일이라도 사무실에 연락을 해 둬야겠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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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건혁

*출신 국가: 대한민국

*길드: 흑월(黑月)

*서열: 779위

*특수 능력: 빙마검(氷魔劍), 얼음 골렘 소환(Summon Ice Golem)

*등록일: 2016.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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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로이 갱신된 헌터증을 멍하니 바라봤다.

마침내 내 서열도 1,000위 안에 들어섰다.

대한민국의 최정예 헌터가 된 것이다.

나는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거, 꿈은 아니겠지?"

기쁨, 행복, 흥분 등의 긍정적인 감정이 어우러지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오른손을 심장 위에 올리며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후우, 드디어 A등급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어."

지금보다 더욱 많은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C~B랭크 마수를 토벌하는 것만으로 레벨을 올리는 것은 어려워졌다.

일전에 레이드에서도 분명 4천여 마리의 오크를 토벌했을 터.

그럼에도 내 레벨은 157에서 160이 되었을 뿐.

크게 성장한 모습을 보여 주진 못했다.

스킬 레벨도 변동이 없고 말이야.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량이 늘어난 것이 주된 원인이다.

뭐, 당연한 거지만.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길드원들과 함께 C등급 게이트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싱겁네.'

토벌의 대부분을 길드원들에게 맡긴 나는 비율을 새롭게 조정했다.

무난하게 마무리된 C등급 게이트 공략.

그리고 화요일 오전 10시, 유진과 함께 A등급 게이트에 들어갔다.

"전방에 미노타우로스 무리가 있습니다."

유진의 보고에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어, 30기의 기사 골렘, 5기의 마법 기사 골렘, 3기의 거인 골렘을 이끌고 놈들에게 달려갔다.

-쿠워어어!

놈들도 우리를 발견한 모양이다.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거칠게 질주해 오는 미노타우로스들.

쿵! 쿵! 쿵! 쿵!

놈들의 질주는 위험하다.

일격에 기사 골렘들이 박살이 날 테니까.

나는 골렘들을 산개시킨 다음, 마법 기사 골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 순간, 허공에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떠올랐다.

"던져!"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날아가는 얼음덩어리들.

콰앙! 콰쾅!

얼음덩어리에 직격을 당한 탓일까?

약이 오른 건지 놈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골렘들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지금이다, 달려들어!"

내 명령과 동시에 골렘들이 놈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쿠웅!

몽둥이를 휘두르는 거인 골렘.

서걱!

미노타우로스의 다리를 베는 기사 골렘.

기회를 노려 얼음덩어리를 던지는 마법 기사 골렘까지.

그렇게 A등급 게이트에서의 첫 전투는 승리로 마무리됐다.

이후 전투에 참여하며 실적을 만들어 낸 유진.

그러나 무난할 것만 같았던 전투는 오우거 무리와 충돌하면서 무너지게 되었다.

콰아앙!

일격에 박살 나 버린 2기의 기사 골렘.

확실히 미노타우로스와 같은 B랭크 마수와는 차원이 다르다.

1~2마리까지는 어떻게 쓰러트릴 수 있겠지만....

쿠웅!

-우워어어어어!

A랭크 마수가 일곱 마리라면 버거워질 수밖에.

나는 녀석의 포효에 귀를 틀어막았다.

"크윽!"

"마... 마스터!"

"뒈져라!"

나는 지면을 박차며 녀석을 향해 얼음의 칼날을 내던졌다.

그 순간, 안광을 번뜩이며 거대한 몽둥이를 휘두른 오우거.

파앙!

칼날이 몽둥이와 부딪치며 박살 났다.

기사 골렘들에게 시선이 끌린 게 아니었나?!

나는 욕설을 작게 중얼거렸다.

이내, 녀석이 내리치려는 몽둥이를 보고 다급히 자리에서 벗어났다.

콰앙!

지면이 움푹 파였다.

저걸 빙마검으로 막아 낼 수 있을까?

아무래도 서열 779위가 되면서 자만에 빠진 모양이다.

나는 뒤로 물러나면서 지면을 얼려 놈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공격해!"

방어를 고수하던 골렘들이 일제히 반격을 시작했다.

게이트를 공략하면서 이렇게까지 격렬한 전투를 치렀던 적이 있었던가?

마력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전투는 계속됐다.

"하아... 하아... 하아...."

"마스터...?"

"후우, 괜찮습니다. 그보다 부산물을 회수하고 서둘러 돌아가야겠군요."

게이트에 들어오고 3~4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전투를 속행하기는 어렵겠지.

나는 엉망이 된 골렘들을 바라봤다.

"B등급 게이트에서 상대했던 놈들보다 더 강한 느낌이더군요."

"네,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역시 A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은 조금 나중에...."

"...."

유진의 말대로 한동안은 B등급 게이트에서 레벨을 올려야 하나?

약간의 망설임이 일어났다.

오우거를 쓰러트리고 얻은 방대한 경험치.

B등급 마수를 쓰러트릴 때와는 차원이 다른 경험치량이다.

이걸 한동안 잊어야 한다는 건... 너무나도 아쉬웠다.

"...A등급 게이트는 계속해서 공략하겠습니다. 강해지기 위해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겠죠. 김유진 헌터님께서는...."

"저는 B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임시 공략대에 들어가 볼게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하죠."

B등급 게이트부터 천천히 성장해도 문제는 없다.

그러나 B랭크 마수 10마리를 토벌하는 것보다 A랭크 1마리를 토벌하는 것이 더욱 이득이니, 토벌이 몇 시간 일찍 끝나더라도 경험치만 따지면 효율이 좋다고 말할 수 있었다.

게다가 A랭크 마석은 1,000~5,000만 원 정도로 처분할 수 있다.

부산물까지 포함하면 한 마리를 토벌한 것만으로 수천만 원을 벌 수 있다는 의미다.

"이렇게까지 챙겨 주지 않으셔도...."

"지금까지 함께해 주신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금일 토벌한 마수는 B랭크 16마리와 A랭크 7마리.

내 예상대로 놈들은 B등급 게이트의 마수보다 더욱 강력한 개체였는데.

농후한 마석을 획득한 대가로 우리는 무려 5억 5,400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그중 2억 원을 유진의 통장에 입금시켰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많아요. 오늘 저는 미노타우로스를 다섯 마리밖에...."

본래 그녀가 가져갈 보수는 4~5천만 원대에 불과하다.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액수임은 틀림없겠지.

그러나 나는 뜻을 굽히지 않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진 씨가 함께해 준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그 돈으로 장비와 포션을 사거나, 새로운 의족을 구매할 때 보태서 사용하세요."

"그래도 2억은...."

"저는 3억 5,400만 원을 챙겼습니다. 이 정도면 보수로는 충분해요. 아무튼, 지금까지 수고하셨습니다."

"...네, 마스터도 고생하셨어요."

"저는 딸이 기다리고 있어서...."

나는 작게 웃으면서 차량에 올라탔다.

"냉동실에 닭갈비가 남아 있던가?"

* * *

건혁이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차량을 출발시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왜 저렇게 눈치가 없는 사람인지....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 위해 몇 번이나 눈치를 주었건만, 그는 매번 똑같은 이유를 들이대며 자택으로 돌아갔다.

"후...."

마지막이기 때문일까?

유진은 살짝 씁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마지막이라고 해 봐야 둘이서 함께 게이트에 들락거리는 것이 마지막일 뿐.

매주 금요일마다 팀장 회의에서 얼굴을 마주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주말마다 딸이랑 집 근처의 헌터 훈련장에 간다고 했었지?"

박건혁이라는 철옹성을 공략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딸인 수영이와 관계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과거 건혁과 사담을 나눌 때, 수영이가 헌터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헌터 훈련장을 드나들 정도면... 이미 각성을 마쳤다는 의미겠지?

 

제55화

55화. 김유진 (2)

"수영이가 훈련하는 걸 도와주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도 있을 거고...."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초등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화제들을 인터넷으로 찾아봤다.

만약 건혁과 부부의 인연을 맺는다면 수영이는 자신의 딸이 될 터.

그렇다면 지금 당장 친해져서 거리감을 좁혀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나중에 생일 선물도 챙겨 주는 게 좋겠지? 12살 여자아이가 좋아할 만한 게... 아니, 차라리 소형 무기를 선물해 주는 게 좋으려나? 생일이 언제인지도...."

유진이 컴퓨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던 시각.

건혁은 냉동실에 넣어 둔 닭갈비를 꺼내 수영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이후,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TV를 바라보는 건혁.

그는 금일 게이트에서의 전투를 떠올리며 푹푹 한숨을 토해 냈다.

"하아, 사람의 욕심이란 게 끝이 없구나."

강한 존재와 마주하게 될 때마다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무작정 돌격해 봐야 소모전만 될 뿐이야. 무언가 작전을...."

건혁은 TV를 끄고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이내, 인터넷에서 A랭크 마수를 토벌하는 방법을 검색했다.

누군가 자신과 비슷한 의문을 가졌던 걸까?

1년 전의 질문과 당시에 올라온 답변들.

<그냥 1,000위 안에 들어가면 됩니다.>

그 1,000위 안에 들어도 힘드니까 문제잖아.

<정공법으로 쓰러트릴 수 없다면 함정이라도 준비해 보시는 게 어떠신지....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안전하게 A랭크 마수를 토벌할 수 있습니다.>

<위에 댓글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함정에 필요한 도구들은 존X 비쌉니다. 낭비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차라리 B랭크 마수를 토벌하는 게 더 이득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A랭크 마수를 보다 손쉽게 토벌할 수 있는 함정.

그 함정에 사용되는 마도 폭탄은 높은 금액을 자랑했다.

"꽤 비싸기는 하지만... A랭크를 상대로 이 정도 타격을 가할 수 있다면, 몇 개 마련해 봐도 괜찮겠어. 마도 폭탄 외에도...."

건혁은 매주 화·목요일마다 정부와 헌터 협회에서 엄격하게 관리되는 무기들을 A등급 게이트에 가지고 들어갔다.

-쿠워어어!?

나뭇가지로 덮어 둔 깊이 3m의 구덩이에 오우거의 무리가 떨어졌다.

그 순간.

투콰아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땅 울림이 일어났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듯 괴성을 내지르는 오우거들.

건혁은 골렘들을 향해 소리쳤다.

"달려들어!"

골렘들이 구덩이로 달려가, 구덩이에서 튀어나온 오우거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건혁이 잠시 팔짱을 꼈다.

"...나쁘지 않아."

협회에서 구매한 마도 폭탄(lv.5).

마도 폭탄은 위력에 따라 레벨(lv)을 나눈다.

가장 강력한 lv.10의 마도 폭탄은 반경 5km 일대를 전소시킬 수 있는 위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핵과 다르게 방사능이 없어 고평가를 받고 있지만, 위력 자체는 lv.9과 크게 다르지 않고, 제작 비용이 천문학적인지라 대량 생산은 불가능했다.

참고로 lv.6~10의 마도 폭탄은 국가에서, lv.1~5의 마도 폭탄은 협회에서 엄격하게 관리하며, lv.4~5의 마도 폭탄은 신분이 증명된 고위 헌터에게만 판매하고 있다.

"마도 폭탄... 소설 속에서도 몇 차례 등장했었지?"

해당 내용을 잊고 있었던 건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스테이터스를 살펴봤다.

피식.

"현질로 레벨 업을 하는 셈인가."

lv.5의 마도 폭탄은 현재 7억 5천만 원에 거래됐다.

7억 5천만 원을 투자해 A랭크 마수 다섯 마리에게 타격을 가했다면 큰 손해는 아니겠지.

아니, 손해인가?

실질적으로 lv.5의 마도 폭탄으로 A랭크 마수를 쓰러트리는 건 불가능하다.

단지, 강한 충격으로 일순간 정신을 못 차리게 할 뿐.

건혁은 미간을 좁히면서 A랭크 다섯 마리의 부산물 처분 금액을 계산했다.

"...끄응, 가죽이랑 뼈를 모두 가져가도 손해잖아."

막대한 손해는 아니지만, 수천만 원가량이 허공에 증발한다 생각하면 된다.

"그 대가로 레벨을 올릴 수 있다면 이득이긴 하겠지만...."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구덩이로 다가갔다.

골렘들은 부산물을 회수하는 중이었다.

큰 파손 없이 전투를 마무리한 골렘들.

이 정도면 꾸준히 마력을 회복해 골렘의 숫자를 늘릴 수 있다.

마력을 100% 채우기 위해서는 40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나, 빙마검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상당 부분의 마력을 절약할 수 있었다.

"기사 골렘 소환."

건혁은 30분 간격으로 20기의 기사 골렘을 소환했다.

그렇게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골렘들만으로 B~A랭크 마수를 토벌한 후, 마도 폭탄이 모두 소모되자마자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후우, 드디어 올라갔네."

마력 회복의 스킬 레벨이 마침내 4가 되었다.

초당 0.1의 마력을 회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A등급 게이트의 공략이 한결 수월해지기 시작했을 무렵.

주말마다 유진이 제9 헌터 훈련장을 찾아왔다.

'분명 집 주변에도 훈련장이 있을 텐데....'

건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동체 시력 훈련장에 들어갔다.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온 스펀지 볼.

1단계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다.

파밧!

"흐읍!"

재빠른 몸놀림으로 스펀지 볼을 회피하던 건혁은 훈련장을 나와 머리를 긁적였다.

"전부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동체 시력 훈련장을 관리하는 직원으로부터 건네받은 결과지에는 총 4번의 타격이 있었음이 나타나 있었다.

그가 아쉬워하며 정수기로 다가가던 그때.

수영의 훈련 상대를 맡은 유진이 경악 아닌 경악을 터트리고 말았다.

12살의 어린아이다.

아직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어린아이.

그런데, 특수 능력을 각성한 것도 모자라 그 능력을 베테랑처럼 사용하다니?!

'이... 이게 말이 돼?!'

부녀가 쌍으로 괴물이라니!

무슨 황금 유전자라도 타고난 건가!?

그녀는 작게 헛웃음을 터트리며 수영의 화살을 훈련용 검으로 받아쳤다.

육체 강화 능력을 사용한 채로 말이다.

푸욱!

지면에 꽂힌 화살.

쩌저적!

얼음이 자신의 다리를 붙잡기 위해 지면을 타고 뻗어 왔다.

그것을 본 유진은 재빨리 자리에서 벗어났다.

'마스터랑 똑같은 기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유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순간.

건혁이 다가와 훈련을 중지시켰다.

"이제 곧 12시인데, 점심이나 먹으러 가죠."

"아... 네, 알겠어요."

유진은 건혁의 등장에 살짝 놀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이도."

"응."

샤워실로 들어간 세 사람은 20분이 지난 뒤, 훈련장 정문에 모여 가까운 부대찌개집으로 걸어갔다.

청룡 기사단의 부단장인 이진화와 함께 온 그 집이다.

레이드로 엉망이 된 가게는 현재 리모델링을 통해 새롭게 단장했다.

"많이 복구됐네요."

"대신 저희 집은 엄청 시끄러웠어요. 이 기회를 틈타 재건축에 들어간 건물도 있었고, 엉망이 된 도로를 새롭게 깔면서...."

건혁의 이야기에 유진이 쓰게 웃었다.

"그보다 수영이가 정말 대단하네요. 아직 초등학생인데도 특수 능력을 그 정도까지 다룰 수 있다니...."

"헌터가 되겠다면서 이것저것 노력하고 있더라고요."

건혁은 수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자식이 칭찬받는 것은 기분이 좋은 일이다.

설령 1회차를 경험했다 할지라도.

"오후에도 훈련장에 가실 건가요?"

"예, 수영이가 그러고 싶다고 하네요. 예전에는 오전만으로도 힘들어하더니만...."

"에헴!"

수영이 본인의 팔뚝을 보여 주며 근육을 과시했다.

그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건혁이 수영의 팔뚝을 살짝 꼬집었다.

"에헴은 무슨 에헴이야. 말랑말랑하고만."

"그... 그게 다 근육이야!"

"그래? 이런 말랑말랑한 근육도 있었구나. 아빠만 몰랐나 봐."

건혁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수영이 뾰로통한 얼굴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조용히 부대찌개에서 햄을 건져 먹었다.

건혁은 작게 웃으면서 유진을 바라봤다.

"유진 씨는 어떻게...."

"아, 저도 훈련장에서 몸 좀 풀다가 갈게요. 수영이랑 훈련하는 게 많은 도움이 됐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훈련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건혁이 다시 한번 동체 시력 훈련장으로 들어가자, 오른손에 빙마궁을 쥔 수영이 슬쩍 유진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응? 왜 그래?"

"어... 언니는 아빠를 좋아하는 거예요?"

유진이 어깨를 살짝 움찔거렸다.

"그게 무슨...."

"그... 이제 아빠랑 게이트 같이 공략 못 하니까, 여기까지 와서 훈련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우물쭈물거리며 말하는 수영에게 그만 정곡을 찔리고 말았다.

유진은 눈을 굴리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초등학생이 이렇게 눈치가 좋다고?

아빠랑은 왜 이렇게 다른 거야?!

똘망똘망한 수영의 눈빛에 유진은 손을 작게 떨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모친의 자리를 뺏으려 하는 것처럼 느낀다면 어떡하지?

그런 유진의 걱정을 눈치챈 걸까?

수영이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아빠가 괜찮으면 저도 괜찮아요."

"...어?"

수영이 고개를 돌려 유진의 시선을 피했다.

"아빠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저도 상관없어요."

"그... 그렇구나."

유진은 작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인정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건혁은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으니....

'정면으로 고백을 해야 하는 걸까?'

그는 자신을 이성으로도 보지 않았다.

길드 내의 소중한 동료.

그것이 자신의 위치다.

자신을 이성으로 느끼게 만들기 위해서는 무언가 강한 자극이 필요할 터.

유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수영과 함께 훈련에 들어갔다.

'일단, 수영이랑 친해지는 것부터 시작하자.'

수영이와 함께한 주말은 말 그대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건혁이 A등급 게이트에 들락거리던 그 시각.

유진은 임시 공략대에서 B등급 게이트를 공략했다.

"하아... 하아... 하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진땀을 흘리는 짐꾼들.

유진은 그들을 보며 안쓰러운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죄책감도 일어났다.

로스터 길드의 마스터였던 시절, 그녀는 짐꾼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부산물을 회수할 때도 빨리빨리 해 주기를 바랄 뿐.

그들의 느린 움직임에 짜증을 낸 적도 있었다.

그뿐이랴.

동료들과 회식을 하는 날 역시 짐꾼들에게는 일정 급여를 지급하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같이 식사 정도는 해도 괜찮았을 텐데....'

뒤늦은 후회 때문일까?

그녀는 헌터들로부터 꾸짖음을 당한 짐꾼들에게 따뜻한 격려를 해 주었다.

이어, 힘들어하는 짐꾼에게는 수건과 생수를 건네주며 어깨를 토닥였는데.

이동하던 도중 그들과 대화를 나누던 유진은 살짝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부모님을 잃으면서 홀로 설 수밖에 없었던 젊은 청년.

가정을 위해 어떻게든 돈을 벌어 가야 하는 중년.

저마다 각각의 이유가 있어 짐꾼이라는 고된 일을 선택했다.

"어... 언니는 흑월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하셨죠?"

"응."

"흑월에서 신입은 모집하지 않는 건가요?"

"안 그래도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중이야. 지금까지 짐꾼으로 활동하던 길드원들을 헌터로 전환시키고, 새로운 짐꾼들을 모집해서 4~5번째 팀을 편성하자고 말이지."

유진의 대답에 몇몇 짐꾼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흑월에서는 짐꾼들도 5~6백만 원씩 벌 수 있다고 하던데...."

"으음, 지난달에는 더 벌었을걸? 다들 실력이 꽤 올라서 그런지, 실전에 참가할 때 꽤 많은 보수를 가져갔다고 들었거든."

"그... 그렇구나."

모친의 수술비를 위해 게이트에 뛰어든 여대생.

그녀는 흑월에 가입하기를 간절하게 희망하고 있었다.

보수도 보수지만, 현재 짐꾼들이 받는 부당한 대우가 너무나도 힘겨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대우는 유진이 참가한 공략대에서도 벌어졌다.

 

제56화

56화. 김유진 (3)

"아 X발, 더럽게 느려 터졌네."

"오히려 이쪽이 보수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

"조금만 속도 좀 내 주세요."

헌터들의 짜증스러운 말투에 유진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자리에 있는 헌터들은 대부분 7~8만대의 베테랑 헌터들이다.

반면, 짐꾼들은 40만 중후반대 수준.

임시 공략대를 꾸려 F등급 게이트에 들어가 헌터로 활동해도 하루 2~30만 원을 벌기 어렵다.

그렇다면 차라리 B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임시 공략대에서 4~50만 원을 받는 게 낫겠지.

쿠웅!

드레이크를 홀로 쓰러트린 유진.

그에 몇몇 헌터들이 박수를 보내왔다.

"우와, 역시 대단하시네요."

"흑월에서도 이인자로 불리신다고 하던데...."

"송파구 레이드에서 활약하신 서열 779위, 박건혁 헌터님의 오른팔이라고 들었습니다."

짐꾼에게 향하던 짜증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칭찬과 감탄만이 가득한 헌터들의 얼굴.

유진은 이중인격과 같은 그 모습에 그만 기가 막히고 말았다.

오후 6시경, 게이트 공략이 마무리되고 공략대원들이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이어, 부산물을 모두 처분하고 모두가 보수를 나눠 받던 그때.

누군가가 언성을 높였다.

"보수? 당신 때문에 공략이 몇 시간이나 늦어졌어! 오히려 우리가 보상을 받아야 하는 판국에 보수는 무슨 보수야!"

"맞아, 당신들만 아니었어도 몇백만 원은 더 벌었다고!"

"X발, 일을 그따위로 해 놓고 보수를 달라고 하네?"

"앞으로 40만대 헌터들 좀 안 쓰면 안 되냐?"

"아니, 40만 원에 30만대 헌터를 고용할 순 없잖아. 30만대 헌터들을 데려오려면 7~80만 원 정도는 줘야 할걸?"

"야, 이 녀석들이 시간만 안 뺏었으면, 그 돈을 우리가 벌었을 거다."

"그건...."

헌터들의 비난 어린 눈빛에 짐꾼들의 어깨가 위축됐다.

B랭크 마수의 가죽을 베고, 부산물을 챙겨 드는 것은 짐꾼들에게 아주 고된 일이다.

때문에 가죽을 벗기는 데에만 3~40분 이상이 소요됐는데.

불만으로 가득 찬 헌터들은 짐꾼들에게 보수를 지급해 줘야 하는지 논의를 시작했다.

그 결과, 15명의 짐꾼에게 각각 25만 원이 지급됐다.

"그거라도 챙겨 주는 걸 고맙게 여겨라."

"10만 원만 주자고 한 녀석도 있었지?"

"손해를 생각하면 10만 원도 아깝잖아."

그런 헌터들의 목소리에 몇몇 짐꾼들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것을 본 걸까?

한 헌터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해당 짐꾼들에게 다가갔다.

"X발, 25만 원이 불만이냐? 오늘 너희가 얼마나 시간을 지체했는지 알아!"

그의 분노를 말리듯 안경을 쓴 20대의 젊은 헌터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야, 잠시만 기다려 봐."

안경을 쓴 헌터는 짐꾼들을 보며 '짝!' 박수를 쳤다.

"자아, B랭크 마수 한 마리가 평균 6~700만 원 정도로 처분되거든? 너희가 시간을 지체시킨 덕분에 대여섯 마리를 못 잡았어. 손해만 3~4천만 원 수준인데, 그 손해를 너희들이 채워 줄 수 있을까?"

"그... 그걸 왜 우리가...."

"하아, '손해'라는 단어를 모르는 건가? 피해를 끼쳤으면 손해 배상을 하는 게 당연하지 않아?"

짐꾼들이 주먹을 쥔 채 고개를 돌렸다.

"헌터들 뒤통수나 칠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좀 해 봐. 공짜로 돈 받아 갈 생각하지 말고."

안경잡이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유진이 작게 한숨을 토해 냈다.

여기서 짐꾼들을 도와주면 오히려 역풍이 불겠지.

자신에 대한 악담이 인터넷이 퍼지는 건 상관없다.

어차피 자신은 길드에 소속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헌터들이 안 좋은 마음을 품고 짐꾼들에 대한 악담을 인터넷에 퍼트린다면, 그들은 생계 자체가 위험해지게 될 것이다.

때문에 유진은 보수 배분이 끝마쳐질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1,100만 원. 마스터랑 같이 공략했을 때는 2~3배 더 벌었는데....'

열 명이 분배받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B랭크 마수를 토벌하기 위해 헌터들은 서로 협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마수의 토벌 시간과 부산물의 회수 작업 시간이 건혁과 함께했을 때보다 몇 배까지 늘어났다.

'갑자기 골렘들이 그리워지네. 지금쯤이면 마스터도 게이트를 나왔으려나?'

잠시 건혁에 대한 생각에 잠긴 그녀.

그때, 안경잡이 헌터가 다가왔다.

"저어, 오늘 근처 고깃집에서 회식을 하려고 하는데...."

"저는 저녁 약속이 있어서요."

"아, 그렇군요. 그럼,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헌터들이 무리를 지어 자리를 떠나갔다.

유진은 울상이 된 짐꾼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그러곤 게이트 처리 관리소 옆에 비치된 ATM 기계에서 5만 원 지폐 60장을 뽑았다.

"다들 받아 가세요."

그녀는 인당 20만 원씩 지급해 주었다.

"이건...."

"이걸로 다들 45만 원이 채워졌을 겁니다. 원래는 40만 원이지만... 5만 원은 일종의 수고비라고 생각하세요."

"이... 이걸 왜 언니가...."

조금 전, 유진과 대화를 나누던 여대생이다.

그녀의 시선에 유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돌렸다.

"열심히 일했는데 정당한 대가를 지급받지 못하면 기분만 꿀꿀하잖아. 아까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은 순 억지였고 말이야. 아, 참고로 그 자리에서 도와드리지 않은 이유는 여러분들을 위해서라는 건... 다들 아시고 계시죠?"

"그게 무슨...."

"저는 악플이 달려도 생활에 큰 문제는 없어요. 이미 길드에 소속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헌터들이 안 좋은 마음을 먹고 여러분들의 악담을 인터넷에 퍼트린다면...."

짐꾼들은 유진의 이야기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집에 돌아가서 맛있는 거 먹고 스트레스나 푸세요."

"가... 감사합니다!"

가정을 위해 게이트에 뛰어들었다는 중년이 가장 먼저 허리를 45도로 굽혔다.

그에 한 명씩 유진에게 고개를 숙이는 짐꾼들.

유진은 작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붉은색 스포츠카에 올라타자, 짐꾼들이 어깨를 살짝 움찔거렸다.

"페... 페X리네."

"저런 차를 타고 다니니까 이렇게 20만 원씩 주고 갈 수 있는 거겠지."

"머... 멋있다."

짐꾼들은 5만 원 지폐를 품속에 넣고, 자리를 벗어나 자택으로 돌아갔다.

한편, 신호등에 걸려 차량을 멈춰 세운 유진.

그녀는 두 눈을 감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짐꾼들로부터 받은 감사 인사는 조금이지만 마음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물론, 몇 개월... 빠르면 며칠 내에 그들의 머릿속에서 잊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300만 원 정도는 신경 쓸 필요도 없겠지."

1,100만 원 중에서 300만 원이다.

짐꾼에게 건네주고도 남는 금액.

물론, 그 300만 원이 자신에게 있었다면, 최신 스마트폰 또는 고성능 컴퓨터를 구매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나누어 준 그 300만 원은... 아니, 짐꾼들이 지급받은 20만 원이라는 현금은 정말로 필요한 장소에 쓰이게 될 것이다.

1~2만 원이 아주 소중하게 사용된다는 의미다.

"오늘은 피자나 먹어야겠다!"

그녀는 상쾌한 얼굴로 액셀을 밟고 집으로 향했다.

* * *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띠링!

['얼음 골렘 소환(Summon Ice Golem)'의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나는 알림음과 동시에 고개를 젖혔다.

A등급 게이트에 드나든 것도 벌써 2개월째다.

2개월간 나는 다양한 고역을 치러야 했다.

함정에 걸려들지 않는 마수, 마도 폭탄에도 큰 충격을 받지 않는 마수 등.

여러 마수들로부터 호된 꼴을 당하면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런 의문이 들 때쯤 그간의 노력이 결과로 나타났다.

"정예 기사 골렘 소환."

스으으....

눈앞에서 냉기가 일렁인다.

허공에서 얼음 조각 하나가 반짝이더니, 2m 높이의 조각상이 한순간에 만들어졌다.

푸른색 망토를 펄럭이는 기사 형태의 골렘.

얼굴과 갑주의 형태는 기사 골렘보다 더욱 정교하고 날카로워 보였다.

무기는 기사 골렘들이 사용하는 대검과 비슷했지만, 조금 더 정교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쿠워어어어!

정예 기사 골렘을 살펴보던 도중 미노타우로스의 무리가 우렁찬 포효를 터트렸다.

수백 미터의 거리에서 붉은 안광을 번쩍이는 놈들.

"오...."

마침 실력 좀 보려고 했는데, 잘됐네.

놈들이 맹렬히 질주해 오기 시작하자, 나는 씨익 웃으면서 고개를 까딱였다.

"가 봐."

내 한마디에 정예 기사 골렘이 다리를 움직였다.

망토를 펄럭이며 홀로 미노타우로스 무리를 향해 달려간다.

이동 속도는 나와 비슷한 정도인가?

전투 능력은....

콰앙!

...나보다 강한 거 아냐?

빙마검을 사용할지라도 녀석에게 승리를 할 수 있을지 쉽게 장담할 수 없었다.

왜냐고?

녀석 역시 빙마검에 준하는 무기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예 기사 골렘이 펼치는 기술들은 전부 내가 사용하는 기술과 비슷했다.

"아이스 버스트(Ice Burst)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이스 필드(Ice Field)와 아이스 블레이드(Ice Blade)까지 사용할 줄은...."

물론, 녀석에게도 마법 기사 골렘처럼 한계는 존재할 것이다.

마법 기사 골렘은 기술을 사용할 때마다 마력을 소모하고, 상당량의 마력을 소모하면 회복을 필요로 했다.

"뭐, 저런 기술을 마구잡이로 사용할 수 있다면... 말 그대로 최강의 부대가 되어 버리겠지."

마력에 한계가 존재하나, 기초 능력이 뛰어난 정예 기사.

정예 기사가 10기가 된 이후부터 A등급 게이트 공략은 크게 수월해졌다.

"마도 폭탄은 그만 사도 되겠어."

함정 역시 필요 없을 것 같다.

콰앙!

날렵한 움직임으로 오우거의 주먹을 회피한 다음, 기술을 사용해 반격하는 정예 기사 골렘들.

심지어 따로 지시를 내리지 않았음에도 협력을 통해 오우거를 몰아붙였다.

무슨 AI라도 탑재하고 있는 건가?

"...앞으로는 '얼음 골렘 소환'의 스킬 레벨을 최우선적으로 올려야겠어."

빙마검의 스킬 레벨이 멈추고 성장이 정체된 현재.

나는 한 줄기의 빛을 보게 되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멍하니 서 있는 것만으로 경험치가 들어온다.

정예 기사 골렘이 이 정도면 기사단장 골렘은 도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거지?

그 위의 골렘들은?

특히, 스킬 레벨이 10에 도달했을 때 소환할 수 있다는 용기사 골렘은....

"...S랭크 마수도 혼자서 쓰러트리는 거 아니야?"

나는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전방을 바라봤다.

쿠르릉!

30기의 정예 기사에게 토벌당한 여덟 마리의 라이오스.

녀석은 황금빛 갈기를 보유한 거대한 사자 형태의 마수다.

해외에서는 네메아의 사자라고도 불리며, 황금빛 번개를 일으켜 상대를 공격한다.

"많이 애를 먹은 모양이네."

정예 기사 5기가 파괴되고, 3기가 크게 파손된 채 비틀거렸다.

라이오스가 원거리 공격을 해 온 탓일까?

아니면 덩치와 달리 재빠른 움직임 때문일지도.

하여튼, 오우거보다 성가신 상대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너희는 그만 돌아가 봐. 나머지는 부산물을 회수하고."

중파된 3기의 골렘이 스르륵 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나는 회복된 마력을 사용해 새로운 골렘들을 소환했다.

그래, 마력만 회복되면 골렘은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다.

A등급 게이트의 공략을 계속 진행할 수 있다는 의미다.

"좋아, 병사 골렘들은 모두 부산물을 챙겨 들어!"

짐꾼으로 따라온 30기의 병사 골렘들 덕분에 대량의 부산물을 게이트 처리 관리소에 처분할 수 있었다.

통장에 입금된 금액은 11억 4천만 원.

마도 폭탄을 사용하지 않고 번 금액이다.

 

제57화

57화. S등급 레이드 (1)

"슬슬 길드의 규모를 키워 봐도 괜찮겠어."

나는 팀장 회의를 통해 헌터 협회 홈페이지에 길드원 모집 공고를 올렸다.

그리고 서류 전형, 면접, 실력 검증 시험, 인성 검사 등을 거쳐 새로운 길드원을 뽑아, 길드의 구조를 5개의 팀으로 재편성했다.

기존 길드원들은 모두 전투조에 배치되고, 신입들은 후방 지원조로서 짐꾼을 맡았다.

그렇게 각 조는 D~C등급 게이트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신입 길드원들은 기존 길드원들과 어울리며 강해지고자 하는 마음을 키워 나갔다.

"이만 해산하겠습니다. 모두들 고생하셨습니다."

길드원들과 함께 C등급 게이트를 공략한 나는 검은 세단에 올라타며 자택으로 귀가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무렵.

스마트폰이 세 차례 진동을 울렸다.

주차장에 차량을 주차한 후, 스마트폰을 확인하자 긴급 알림 문자가 와 있었다.

"강원도 치악산에서 S등급 레이드 발생... 치악산이 어디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았다.

검색하자마자 떠오르는 수많은 기사들.

치악산에서 폭발한 S등급 게이트에서 C~A랭크 마수들이 쏟아져 나와 강원도 원주시를 덮쳤다는 모양이다.

"허어, S랭크가 도대체 몇 마리나 나타난 거야?"

현재 확인된 S랭크 마수만 세 마리다.

외눈박이 거인, 사이클롭스.

타르타로스의 파수꾼이라 불리는 삼두견(三頭犬), 케르베로스.

소형 드래곤인 와이번까지.

현관문을 열자 수영이 내 소매를 잡아끌면서 TV를 가리켰다.

"S... S등급 게이트가 폭발했대!"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에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 보였다.

"그래, 아빠도 방금 문자 받았어."

TV에서는 긴급히 출동한 군인과 청룡 기사단원들이 괴멸을 당했다는 소식을 보도하고 있었다.

―현재 파악된 마수의 숫자는 30만에 달한다는....

30만....

"저 정도 규모면 기사단만으로는 어렵겠어."

게이트에서 나온 건 F~D랭크의 허접한 마수들이 아니다.

대부분이 C~B랭크로 구성되어 있으며, A랭크 역시 수백이나 확인됐다고 한다.

군과 기사단만으로는 역부족이겠지.

때문에 헌터 협회는 시급히 대규모 길드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서열이 1,000위 안에 드는 최정예 헌터들에게 소집령을 내렸다.

"하아, 미쳐 버리겠네."

나는 머리를 박박 긁어 댔다.

부득이한 사유가 없는 이상, 소집령에는 반드시 응해야 한다.

부득이한 사유.... 그냥 다리 한쪽을 부러트려 볼까?

아니, 협회 놈들이라면 포션까지 지원해 주면서 데려가려 할 것이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턱을 매만졌다.

"편부모라는 것도 불참에 대한 사유가 되려나?"

인터넷을 찾아본 결과.

실제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헌터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협회는 가사 도우미를 직접 고용해 해당 헌터의 자택에 보내 주었다.

나는 작게 혀를 차며 헌터 협회의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편부모인 헌터들을 위해 제공하는 가사 도우미 고용 서비스.

서열 1,000위 이내의 헌터는 비용의 70%까지 지원해 준다는 모양이다.

"100위 안에 들면 90%까지 지원해 주는 건가."

나는 홈페이지에서 가사 도우미란을 클릭했다.

이내, 우수수 수많은 항목들이 나열됐다.

가사 도우미로 구직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이력서다.

"...단기도 있네."

그뿐이랴.

택시로 등하교를 도와주는 서비스도 있다.

물론, 택시 비용은 내가 전부 부담해야겠지.

나는 턱을 괸 채 필터로 원하는 가사 도우미를 검색해 봤다.

기간은 2~3주, 월급은 무관, 나이도 무관, 경력은 5년 이상 등.

그에 맞춘 가사 도우미들이 나열됐다.

"뭐야, 후기도 있어?"

거참, 없는 게 없구만.

그러나 고용하는 입장에서는 보기 편리했다.

"경력이 높을수록 시급도 조금씩 높아지네."

비용을 따로 고려할 필요는 없다.

하루에 백만 원을 지불하더라도 수영이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가사의 전반적인 부분을 담당해 주면 그만이다.

마침내 마음에 드는 이력서가 발견됐다.

해당 가사 도우미에게 메일을 보내려던 순간.

스마트폰이 진동을 울렸다.

"전화?"

발신자는 김유진 팀장이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예, 박건혁입니다."

―마스터, 방금 전 서열 1,000위 안에 드는 헌터들에게 소집령이 떨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예,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고민을 하던 중이었는데...."

―제1팀은 어떻게 할 생각이신가요?

"한동안은 활동 지역에 따라 네 팀으로 분배를 할 수밖에 없겠죠."

공략 게이트의 등급을 낮추고 싶어도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다.

예약을 해도 2~3주 뒤에나 가능하겠지.

참고로 예약해 둔 게이트들의 경우에는 위약금을 따로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모양이다.

이번 경우는 정부의 소집령에 의해 취소된 것이니까.

―수영이는....

"지금 가사 도우미를 찾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수영이를 돌봐 줘도 괜찮을까요?

"...유진 씨가요?"

―네, 수영이랑도 많이 친해졌고, 저희 집하고도 그렇게 멀지 않으니까요.

"그건...."

―아직 봄 방학 시작 안 했죠? 그럼, 출근하기 전에 초등학교에 데려다주고, 게이트 공략이 끝난 다음에 잠깐 들러서 수영이랑 같이 저녁을 먹으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요.

그래도 이건 조금 아니지 않나?

상사의 자녀를 통학시켜 주는 부하 직원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는 미간을 좁힌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일찍 집에 돌아가 봐야 혼자서 저녁 먹고 TV 보는 것뿐이거든요. 게다가 주말마다 수영이랑 헌터 훈련장에서 훈련도 좀 하고....

"아, 헌터 훈련장...."

보호자 없인 헌터 훈련장에 들어갈 수 없으니, 수영이는 주말에 집에만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가사 도우미와 어색한 시간을 보내게 되겠지.

아니, 방에서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럴 바에는 유진과 함께 헌터 훈련장에 방문하고, 같이 식사도 하는 것이 걱정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제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수영이랑 대화를 나누는 것도 재미있고.

"끄응...."

나는 2~30초간 생각을 한 다음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생판 모르는 분에게 맡기는 게 조금 걱정됐거든요."

―저도 이해해요. 그럼, 내일 잠깐 자택에 들러도 괜찮을까요?

"내일은 임시 공략대에...."

―아, 어제 취소돼서 괜찮아요.

"...그렇군요."

우연인가?

이렇게 타이밍 좋게 취소가 되다니.

"저는 내일 당장 협회에 찾아가 봐야 해서... 아마 오후 2~3시가 되기 전에는 돌아오겠지만, 일단 수영이한테 따로 말해 둘게요."

―네, 알겠어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길드원에게 부탁하기엔 너무나도 껄끄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연락이 끊어진 친척들에게 부탁할 수도 없고.

때문에 가사 도우미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하지만 생판 모르는 남보다는 2년간 함께해 온 동료에게 맡기는 것이 더욱 안심되겠지.

더욱이 그녀는 수영이와 매주 얼굴을 맞대는 사이다.

수영이도 조금은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으리라.

유진과의 연락이 끊어진 뒤, 나는 수영의 방을 찾아갔다.

"그... 그럼 정말로 강원도에 가는 거야? 강원도에는 A랭크 마수들이 잔뜩...."

"아빠는 골렘들을 소환하면서 뒤로 물러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물론, 내가 어디에 배치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소환사인 나를 함부로 전선에 내보내지는 않겠지.

수영이 역시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그녀는 내 소매를 붙잡은 채 울상을 지었다.

"저번에 아빠가 헌터증 보여 줬었지? 아빠도 이제 대한민국에서 엄청 강한 헌터야."

"...알아."

나는 씁쓸히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금방 다녀올게. 알겠지?"

"...."

수영이는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S등급 레이드는 지금까지의 사건과는 차원이 다르다.

정말로 눈앞에 S랭크 마수가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100% 죽게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치악산에서 출몰한 A랭크 마수는 수백 마리.

물론, 그 전부를 상대할 일은 없지만, 수십여 마리만 되더라도 나는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괜찮아, 괜찮아."

수영의 얼굴에서는 불안한 기색이 사라지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가 잠들 때까지 옆을 지키면서 등을 토닥여 주었다.

다음 날, 수영이는 초등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아무래도 단단히 삐친 모양이네.

내 쓴웃음에도 그녀는 덤덤히 차량에서 내려 초등학교로 걸어갔다.

"저녁에 치킨이라도 사 가야 하나?"

나는 볼을 긁적이며 핸들을 꺾었다.

잠시 뒤, 헌터 협회 서울 중앙 본부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량에서 내리자 고위 헌터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무슨 연예인을 보는 기분이네."

TV에서 얼굴을 자주 내비치는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들.

그중에는 데스펠 길드 측 사람들도 보였다.

'데스펠의 마스터, 박강석... 제1군 대장인 박태준과 제2군 대장인....'

너무 오랫동안 바라본 탓일까?

태준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간을 살짝 좁혔다.

어깨를 움찔거릴 뻔했지만, 끝내 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며 그에게 고개를 작게 숙였다.

얼굴을 한 번 마주한 적이 있으니 말이야.

인사 정도는 해도 괜찮겠지.

그러나 태준은 내 인사를 무시한 채 협회 건물로 들어갔다.

"사람 무안하게...."

나는 작게 한숨을 흘리면서 그들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움직였다.

건물 앞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촬영을 진행하고 있었다.

TV와 기사에 내보내지는 건 100위 안에 드는 헌터들뿐일 거다.

이번 달에 779위가 된 나는 덤덤한 얼굴로 들어가면 되겠지.

실제로 플래시가 터지던 데스펠과 달리 내 등장에 기자들은 기자재를 점검하고 있었다.

'뭐, 내 얼굴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니까.'

협회의 직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건물에 들어선 순간.

제복을 걸친 젊은 청룡 기사단원이 나를 가로막았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서열 779위, 박건혁 헌터입니다."

내가 헌터증을 제시하자, 그는 화들짝 놀라면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실례했습니다.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나는 팻말을 따라 대강당에 들어갔다.

단상 위에 서 있는 청룡 기사단 단장, 이은성.

그 외에도 백호 기사단 단장과 데스펠, 유신, 고구려 등의 거대 길드의 마스터들이 심각한 얼굴로 은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 사람이 대한민국 헌터 서열 1위인가.'

검신(劍神) 정윤호를 실제로 보게 될 날이 오다니!

나는 조용히 빈 좌석에 앉았다.

시곗바늘이 오전 10시를 가리키자, 단상에 선 은성이 마이크를 잡았다.

"모두들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헌터들이 하나둘씩 자리에 착석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강원도 S등급 레이드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은성은 뒤로 물러나며 젊은 청룡 기사단원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피해 지역, 피해 규모, 게이트의 위치, 파악된 마수의 종류 및 숫자 등.

수많은 정보들을 거론하며, 소집된 헌터들이 어느 지역에 배치될 예정인지를 설명해 주었다.

"10위권 내의 헌터분들께서는 헬기를 통해 곧바로 S랭크 마수 토벌 지역에 투입됩니다. 그 외의 헌터분들께서는 팀으로 움직이며 C~A랭크 마수들을 토벌해 주시면 됩니다. 그동안 각 기사단 및 화면에 띄워진 12개의 길드가 미처 대피하지 못한 주민들을 구조하는 작업을 진행하게 됩니다."

작전 자체는 간단하다.

하지만 5인을 하나의 팀으로 묶으려는 것은 살짝 성가시네.

이 자리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참고로 청룡 기사단의 부단장인 이진화는 S랭크 토벌 지역에 배치되어 주변을 경계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고 한다.

내가 작게 한숨을 내쉴 무렵.

단상의 기사단원이 작은 헛기침과 함께 스크린에 새로운 페이지를 띄웠다.

 

제58화

58화. S등급 레이드 (2)

"다음으로 스크린에 띄워진 헌터분들께는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작전권이 주어집니다."

대부분이 서열 100위 안에 든 헌터들이다.

저런 전력들을 팀으로 묶는 것은 오히려 손해겠지.

그런데, 왜 저기에 내 이름까지 있는 거냐?

"서열 779위가 왜 저기에 있어?"

"박건혁이면... 흑월의 마스터 아니야?"

"SNS에서 골렘들의 전투를 보긴 했지만, A랭크 마수랑 조우하면 X털릴 것 같던데...."

어떤 새끼냐?

X털릴 것 같다고 한 놈은.

정예 기사 골렘의 매서운 주먹맛을 보여 줘야 하나?

"서열 779위, 박건혁 헌터님께서는 최대 200여 기의 골렘을 소환하실 수 있는 소환술사이십니다. 그러니, 다수의 C~B랭크 마수들이 모여 있는 지역에서 토벌을 진행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주변에서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100위 안에 드는 헌터들이다.

제길, 그냥 각성 능력 검사를 받고 정예 기사 골렘들을 선보여야 했나?

자잘한 경험치만 얻게 생겼네.

"하아...."

나는 팔짱을 낀 채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으로 설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설명이 마무리된 이후, 협회 직원들이 헌터들에게 프린트물을 나누어 주었다.

프린트물에는 지금까지의 설명이 상세하게 기입되어 있었다.

팀원은 협의를 통해 구성할 수 있는 건가.

다음 페이지에는 서열, 이름, 연락처 및 추후 보수를 지급받게 될 은행명과 계좌를 기입하는 란이 존재했다.

나는 볼펜으로 필수 사항들을 기입하고 프린트물을 다시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직원이 프린트물을 회수하고 자리를 벗어나자, 누군가가 내게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정중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는 젊은 남성.

데스펠 길드의 제1군 대장이자, 서열 243위의 헌터 박태준이다.

조금 전에는 대놓고 무시를 하더니만....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인사를 해 오는 거지?

"예, 오랜만입니다."

"송파구 레이드에서의 활약은 정말로 대단하셨습니다. 설마, 그 정도의 힘을 감추고 계셨을 줄은 생각도 못 했군요."

"...."

"솔직히 정말로 아쉽습니다. 당신 정도의 실력자가 이번에도 40만대 서열의 헌터들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말이죠."

내 길드를 왜 그렇게 신경 써?

"데스펠에 들어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말씀은 정말로 감사합니다만, 대답은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 대답에 태준의 뒤에 서 있던 남성이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 40만대의 헌터들을 모아 놓고 왕 노릇이라도 하려는 모양이군. 아니면 그들을 성장시키는 것으로 무슨 쾌감이라도 느끼는 건가?"

이어, 옆에 있는 여성이 가세한다.

"이번에 치유 능력을 발현한 헌터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 희귀한 특수 능력자를 썩힐 생각이신 모양이네요."

TV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얼굴이네.

분명, 데스펠 길드 제2군 대장인 방준우와 제1군 부대장인 김채원이었지?

서열은 방준우가 183위, 김채원이 275위였을 것이다.

"예, 분명 저희 길드에는 치유 능력을 발현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도 예전에는 50만대의 서열로 짐꾼 활동을 하셨죠. 그 외에도 육체 강화 능력을 발현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이걸로 짐꾼에게도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군요."

내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김채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심지어 방준우는 나를 매섭게 노려보며 살기까지 일으킨다.

"건방진...."

"후우, 두 분께서는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미숙하신 모양이네요."

"뭐라고?! 고작 7백대의 쓰레기 따위가!"

어이, 그 발언은 이 자리에 있는 7백대... 아니, 700~1,000위의 헌터들을 무시하는 말이라고.

그걸 알고서 말하는 건가?

태준 역시 준우를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에 준우는 어깨를 살짝 움찔거리더니, 뿌드득 이를 갈며 나를 쏘아봤다.

"방준우 대장을 대신해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방준우 헌터님의 말씀대로 7백대의 쓰레기이니, 다른 대단하신 분들에게 제의를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 대답에 방준우가 눈을 부릅떴다.

김채원 역시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는데.

뭐, 신경을 쓸 필요는 없겠지.

나는 고개를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로비로 나온 나는 작게 한숨을 토해 냈다.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지들은 뭐 처음부터 그 서열이었나? 그보다 어떻게 저런 녀석이 제2군 대장직을 맡고 있는 거지?"

데스펠 제2군에 속해 있는 헌터들이 살짝 불쌍하게 느껴졌다.

아니, 놈들도 방준우와 똑같은 성격이라면.... 짐꾼들만 미치겠구나.

"하아, 그냥 돌아가자."

팀원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다.

레이드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낼 사람이 없다는 의미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건물을 나갔다.

건물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는 기자들.

"아, 저기요! 헌터들이 언제쯤 나오는지 알 수 있을까요?"

한 여기자의 물음에 살짝 당황했다.

정말로 직원으로 착각한 거였냐?!

나는 씁쓸히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직 다들 강당에 모여 계시니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조용히 건물을 나와 곧바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 *

"내가... 입조심하라고 말했을 텐데?"

태준의 살벌한 목소리에 준우가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서열이 크게 앞섬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고개를 숙이는 준우.

태준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그의 부친인 박강석의 무력이 두려울 뿐.

"하아, 56만대에서 3년 만에 7백대까지 올라온 사람이 어디 흔한 줄 알아? 심지어 수백 기의 골렘을 다룰 수 있다는 부분은 우리 데스펠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그걸...."

태준은 이마를 짚은 채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채원 역시 눈치를 살피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이내, 주변을 둘러보자 헌터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방준우의 말실수 탓이겠지.

"데스펠에서는 서열 7백대를 쓰레기처럼 취급하나?"

"박건혁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짐꾼을 헌터로 키운다는 것도 웃기지만, 서열 7백대를 쓰레기 취급하는 것도 존X 웃기네."

"이러니 데스펠의 이미지가 최악이지. 기분 X같네, 진짜."

소란스러워진 강당.

강석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린 채 방준우를 협회의 빈 회의실로 호출했다.

회의실에 들어선 순간.

퍼억!

거대한 주먹이 준우의 복부를 꿰뚫었다.

"커헉!"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듯한 강렬한 충격.

준우는 눈을 크게 뜬 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강석은 그를 차갑게 내려다봤다.

"네놈 때문에 강당이 소란스러워졌더군. 내가 한동안은 입조심을 하라고 일러두지 않았던가?"

준우는 무릎을 꿇은 채 끅끅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곤 머리를 바닥에 박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끄... 죄... 죄송... 합니다."

"용서는 이번 한 번뿐이다. 한 번 더 이런 일이 생길 경우에는... 네놈의 사지를 찢어 버리도록 하지."

온몸을 옥죄는 듯한 살기에 준우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강석은 준우를 지나치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에 몇 차례 기침을 터트리며 고개를 든 준우.

분명, 자신은 강해졌다.

과거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박강석의 힘은 격이 달랐다.

S랭크 마수조차 단신으로 쓰러트린다는 서열 9위의 헌터.

그에게 대적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크으... 제기랄."

준우는 박건혁을 떠올렸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짐꾼을 헌터로 키운다는 것도.

제1군 대장인 태준의 가입 제의를 거절한 것도.

건혁의 행동이 모두 위선처럼 보였기 때문일까?

준우는 그와의 대면에서 짜증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번... 이번 레이드에서 놈을 반드시 죽여 버린다."

송파구 레이드 이후로 건혁의 이름은 상당히 유명해졌다.

영웅으로서 말이다.

아마 그것이 주제도 모르고 데스펠이란 이름 앞에서 당당해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준우는 주먹을 세게 쥔 채 조용히 회의실을 나섰다.

한편, 헌터 협회 서울 중앙 본부를 나선 건혁은 자택으로 돌아가던 도중 초등학교에 들러 수영을 차에 태웠다.

그가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할 무렵.

붉은색 페X리가 그 뒤를 따라왔다.

"마스터, 지금 헌터 협회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페X리에서 내린 유진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네, 따로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어서 그냥 돌아왔어요."

이내, 수영이 차량에서 내리며 유진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래, 수영이도 잘 지냈어?"

세 사람은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아파트로 들어갔다.

건혁의 자택을 처음으로 방문한 유진은 간소한 살림들을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A등급 게이트를 드나들고 있다면 매달 10억 원 이상은 벌고 있을 터.

설마, 그 많은 돈을 계속 통장에 박아 두고 있는 건가?

"아, 점심은 드셨나요?"

건혁의 물음에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집에서 좀 먹고 왔어요."

"그러면 잠시만 거실에서 쉬고 계셔 주실래요? 제가 점심이 아직이라서...."

"그러세요."

건혁이 부엌에서 찌개를 데우는 동안 수영이 유진을 소파로 안내해 주었다.

"보고 싶은 거 봐도 괜찮아요."

"언니는 수영이랑 같이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

"다음 주부터 봄 방학이라면서? 화요일이랑 목요일에 언니랑 같이 훈련장에 갈래?"

수영이 어깨를 살짝 움찔거렸다.

'놀이공원도 아니고 훈련장을 좋아하는 어린아이라니....'

참으로 특이한 아이였다.

유진은 TV를 켜 둔 채 수영이를 옆에 앉혔다.

그리고 건혁이 집을 비우는 동안 무엇을 할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는데.

수영은 살짝 들뜬 얼굴로 인스턴트 음식들을 입에 담았다.

"수영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치킨이야?"

"네, 피자랑 햄버거도 좋아해요."

"그러면 아빠가 잠시 나가 계시는 동안 몰래 먹어 버릴까?"

수영과 유진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자, 홀로 식탁에 앉아 점심을 먹던 건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먹었습니다."

건혁은 점심을 먹은 다음 유진에게 집 내부를 설명해 주었다.

"빨래는...."

"세탁기랑 건조기는 제가 알아서 돌릴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부엌으로 가죠."

식기 및 그릇이 위치한 장소를 설명해 주는 건혁.

이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유진은 냉장고 안을 보고 살짝 놀랐다.

이렇게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다니.... 심지어 반찬의 종류도 다양하다.

"반찬은 어제 채워 뒀어요. 그리고 이쪽에는...."

10분간 집을 둘러본 유진은 평범한 가정집을 연상시킬 수 있었다.

그보다 빨래, 청소, 요리 등의 집안일을 모두 하면서 헌터 활동에 수영이까지 돌본다니.

그야말로 슈퍼맨이 아닌가!

'게다가 저 정도 외모에 저런 성격이면... 말 그대로 1등 신랑감이네.'

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면서 건혁이 대령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자, 수영이는 오렌지주스."

"...응."

수영은 유진과 대화할 때와 달리 시무룩한 얼굴로 컵을 건네받았다.

아무래도 건혁이 강원도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건혁이 쟁반을 부엌에 가져다 놓고 거실 바닥에 앉자, 유진은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 두고 그를 바라봤다.

"그래서, 언제쯤 출발하실 예정이신가요?"

"내일 아침에 수영이를 데려다주고 바로 출발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건혁이 슬쩍 수영을 바라봤다.

"C~B랭크 마수들이 득실거리는 지역으로 배치됐어요."

수영은 귀를 쫑긋 세우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감이 담긴 한숨을 말이다.

 

제59화

59화. S등급 레이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