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39화. 데스펠 (3)
'법원에선 대체로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데스펠 길드에게 처벌을 내리지 못했었지.'
심지어 스컬이라는 중국 최대 규모의 범죄 길드와 마약 거래를 트고 있는 데스펠이다.
나는 진심으로 진화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데스펠에게 눈도장을 찍혔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됐을 테니까.
아니, 나뿐만이 아니다.
흑월에 가입된 헌터들.
심지어 수영이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
'...이사를 온 게 잘못이었나?'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수영이와 대화를 나누는 진화를 바라봤다.
"어머, 그럼 아빠랑 지금 훈련하고 있었던 거야?"
"네."
"수영이 훈련하는 거 언니도 도와줄까?"
청룡 기사단 부단장이 직접 도와준다고?
나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편,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진화를 바라보는 수영.
"어... 어떻게요?"
"언니한테 화살을 쏘면 돼."
"그거 아까 아빠랑도 했는데...."
"아, 그... 그렇구나. 그래도 한 번 더 하면 좋지."
당혹스러워하는 진화의 목소리에 수영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면서 나를 바라봤다.
마치 허락을 구하듯이 말이다.
"수영이하고 잠시 훈련을 해 봐도 괜찮을까요?"
"네, 물론이죠."
나는 수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자리를 벗어나 SNS에 접속했다.
1~2분 전, 데스펠의 인사팀 팀장이 이진화에게 고개를 숙였다는 이야기가 몇 문장으로 업로드되었다.
그러나 해당 게시글은 순식간에 지워졌다.
트레이너들의 재빠른 대처와 게시글의 삭제.
'훈련장에 오기 전에 미리 조치를 취해 둔 건가.'
청룡 기사단 부단장이 등 뒤에 있다 하더라도 최악의 상황을 면하고자 한다면, 사건의 내용이 데스펠에게 전달되지 않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설마, 우진혁과 유승준이 데스펠의 간부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지는 않겠지.
서열 2만대의 헌터와 초등학생을 스카우트하려다가 청룡 기사단 부단장한테 고개를 숙인 일을 어떻게 설명할까?
"후우, 진짜 다사다난하네."
나는 깊이 한숨을 내쉬면서 멍하니 수영이와 이진화 헌터를 바라봤다.
* * *
"시작할게요."
"그래, 언니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막기만 할게."
나긋나긋한 진화의 목소리에 수영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자존심 상해할 필요는 없었다.
1회차에서도 자신은 이진화를 이길 수 없었으니까.
심지어 서열 2만대 헌터인 부친도 자신의 화살을 손쉽게 막아 냈다.
웬만한 공격으로는 진화를 놀라게 할 수조차 없겠지.
'후우, 전력으로 간다.'
수영은 오른손에 활을, 왼손에는 화살을 만들었다.
이어, 시위를 당겨 진화를 향해 조준했다.
여유로운 자세로 오른손에 푸른 불꽃을 일으킨 진화.
'청염(靑炎)....'
수백의 마수를 집어삼킨 푸른 악마의 불꽃.
수영은 그녀의 특수 능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적이 있다.
거리에 바글바글한 마수를 순식간에 불살라 버린 그 광경은... 지금도 여전히 잊을 수 없었다.
"...."
타앙!
화살이 바람을 찢고 날아갔다.
진화가 살짝 놀란 얼굴로 화살을 덥석 붙잡았는데.
화살은 청염에 의해 녹아 버리고 말았다.
"설마, 지금 어깨를 노린 거니?"
"네."
"대... 대단하네. 그 나이에 이 정도의 저격술을 가지고 있다고?"
"계속 갈게요."
수영은 화살을 만듦과 동시에 진화를 저격했다.
어깨, 허리, 허벅지 등 부위별로 저격한 다음, 발밑에 화살을 꽂아 진화의 발목을 붙잡은 수영.
그녀는 다시 한번 발밑에 화살을 꽂았다.
그 순간, 진화의 발밑에서 튀어나온 얼음의 가시들.
"으악?!"
진화는 기괴한 목소리와 함께 가시들을 모두 녹여 버렸다.
저격술도 저격술이지만, 화살에 부여할 수 있는 효과까지 다양하다니!
눈을 반짝이며 수영을 바라보는 진화.
그 순간.
"...어?"
수영이 비틀거리면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에 건혁과 진화가 동시에 달려갔다.
마력 고갈 및 체력 고갈에 의한 무기력증.
건혁은 땀에 흠뻑 젖은 수영이를 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다 싶으면 그만두기로 약속했잖아."
"조... 조금 더 가능할 거 같았는데...."
"어휴, 오늘은 그만하고, 점심 먹으러 가자."
건혁의 품에 안긴 수영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진화 헌터님께서도 함께 점심이라도 드시면 어떨까요? 도와주신 보답으로 점심은 제가 사겠습니다."
"아, 그러면 감사하죠."
"그럼, 샤워 후에 훈련장 정문에서 보는 걸로...."
"알겠어요. 수영아, 언니랑 같이 샤워하러 가자."
"아, 수영이 갈아입을 옷 가져올게요."
건혁은 수영의 손에 새 옷과 샤워 도구가 담긴 바구니를 쥐여 주었다.
수영이 진화의 손을 잡고 샤워실로 들어가자, 건혁 역시 남자 샤워실로 들어가 몸을 씻은 후,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훈련장 정문에서 모인 세 사람은 가까운 부대찌개 식당으로 들어갔다.
"더 비싼 음식도 괜찮은데...."
"아니에요. 저도 부대찌개 엄청 좋아하거든요. 아, 라면 드시죠?"
"네."
"제가 부대찌개에 들어가는 라면을 엄청 좋아해서...."
진화는 소탈한 모습을 보여 주면서 부대찌개에 생라면 2개를 집어넣었다.
"수영이가 정말 대단하네요. 아직 11살인데도...."
"예,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수영이가 헌터증을 발급받을 무렵에는... 1~2만대 서열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특수 능력도 특수 능력이지만, 서열 1~20만대 헌터들에 견주는 마력량과 베테랑급 저격술은 진화 역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수영은 라면을 먹으면서 진화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서열 16위로부터 듣는 이야기는 아주 귀중하다.
때문에 건혁 역시 진화의 경험담을 주의 깊게 들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A~S랭크 마수들과의 전투.
건혁은 데스펠과의 충돌로부터 강해지자는 마음이 더욱 강해졌다.
'이진화 헌터에게 도움을 받는 건 이번뿐이다. 다음에는....'
진화와 수영이 대화를 나누던 도중 건혁은 홀로 무언가를 각오했다.
* * *
"X발, 왜 그런 허접한 녀석들이 이진화랑 아는 사이인 건데?!"
훈련장을 나선 진혁이 주먹을 쥐며 투덜거렸다.
그에 담배를 피우던 승준이 나지막이 경고했다.
"앞으로 흑월에는 간섭하지 마라."
"아니, 이참에 제대로 짓밟아 놓는 것도...."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어디 마음대로 해 봐. 청룡 기사단이 우리 길드에 들이닥친 순간, 너는 고블린들의 먹이가 되어 있을 거다."
승준의 살벌한 목소리에 진혁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이진화가 SNS는 전부 통제한 모양이니까, 상부에는 따로 보고하지 말고 한동안 자숙하고 있어. 뭐, 2만대 서열의 헌터랑 초등학생 하나 스카우트하려다가 인사팀장 둘이 청룡 기사단 부단장한테 고개를 숙였다는 이야기는... 쪽팔려서 어디다가 말도 못 하겠네."
진혁은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숙였다.
해당 소식을 데스펠의 마스터가 안다고 생각해 보아라.
데스펠의 이름을 실추시켰다는 명목으로 끔찍한 일을 당하고 말겠지.
승준이 담배를 바닥에 던진 후 짓밟았다.
"하여튼, 한동안 자숙하고 있어."
이내, 검은색 세단에 올라탄 승준.
진혁은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와 줘서 고마워, 형."
"다음에는 사고 치지 마라. 이번 같은 일은 나도 못 도와주니까."
"알겠어."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달리기 시작한 승준의 차량을 바라봤다.
뿌드득.
"흑월... 그 X새X들은 언젠가 반드시 죽여 버린다."
그는 눈동자에 핏발을 치켜세운 채 자리를 벗어났다.
* * *
데스펠과 약간의 언쟁이 벌어지고, 2개월이라는 시간이 조용하게 지났다.
나는 수영의 성장을 바라보며 살짝 감탄을 터트렸다.
역시 주인공은 주인공이라는 건가?
수영의 성장에 자극을 받은 나는 화·목요일에 들어가는 C등급 게이트에서 무리할 정도의 전투를 펼쳐 보였다.
유진은 내 무리한 전투를 보면서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무리한 전투가 위험한 상황을 초래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때문에 몇 차례나 내게 주의를 주었지만, 나는 그녀의 주의를 듣고도 머쓱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돼.'
그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소중한 존재를 지킬 수 있는 힘을 바랐다.
유진은 몸을 망칠 뿐이라고 말했지만, 내 각성 능력은 다른 헌터들과 다르다.
토벌한 마수로부터 생명력을 흡수해 경험치로 치환시키는 능력.
날마다 늘어나는 토벌 수에 유진은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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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건혁
*종족: 인간
*칭호: -
*출신 국가: 한국
*LV: 83
*근력: 34
*민첩: 40
*체력: 35
*마력: 60
*AP: 0
*스킬: [빙마검(氷魔劍)-LV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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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레벨에서 빙마검을 얻었다면, 100레벨에서 역시 또 다른 특수 능력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2개월간 각성 능력 검사를 받지 않았다.
무리한 전투를 펼치면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인 스테이터스.
갱신된 서열은 분명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데스펠과 같은 대규모 길드들 역시 가입 제의를 해 오겠지.
흑월을 해산시킬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
그렇다면 대규모 길드의 압박에도 견뎌 낼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각성 능력 검사는 레벨 100에 도달한 직후에 받아 보자.'
길드원들은 서서히 떨어져 가는 내 서열을 보고 의문을 품었다.
지금까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여 주던 남자가 어째서 하락세를 보이는 걸까?
그 이유는 팀장인 유진과 태형에게만 알려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훈련장에서 활의 시위를 당기던 수영이 슬그머니 내게 물었다.
"...아빠, 각성 능력 검사 안 받고 있어?"
"응?"
"협회 사이트에서 아빠 서열이 계속 떨어지고 있길래...."
나는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가을이나 겨울쯤에 한 번 받으려고."
"...그렇구나."
이유는 묻지 않는 건가?
아니, 수영이라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수영이는 30개의 목각 인형을 박살 내고 잠시 휴식에 들어갔다.
부위별로 꽂혀 있는 얼음의 화살.
6~70발은 쏜 모양이네.
나는 목각 인형 100개를 새로이 구매했다.
그리고 머리, 손목, 팔, 어깨, 가슴, 허리, 허벅지까지.
총 10여 번을 휘둘러 목각 인형을 나무 조각으로 만들었다.
서걱! 촤아악!
절단된 부위에서 돋아난 얼음 조각들.
심지어 다양한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100개의 목각 인형을 깔끔하게 절단시켰다.
수영은 그 광경을 지그시 바라봤다.
아마 내 실력을 가늠하는 중이리라.
한편, 목각 인형이 박살 날 때마다 훈련장 직원은 허겁지겁 달려와 나무 조각들을 수레에 담아 정리해 주었다.
목각 인형을 구매할 때 드는 비용에는 처리 비용도 포함되어 있다.
추가로 박살 난 목각 인형은 따로 재활용된다는 모양이다.
짝짝짝짝.
"아빠, 대단해!"
밝게 웃으며 박수를 쳐 주는 수영이.
100개의 목각 인형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절단시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더욱이 목각 인형의 다리를 얼리고, 얼음 조각을 날리는 등으로 극심한 마력 소모 속에서 빙마검을 유지한다는 것 역시 대단하다면 대단한 일이겠지.
나는, 귀엽게 웃으며 달려오는 수영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씻고 점심 먹으러 가자."
"웅! 그리고 오후에도 훈련장에서...."
"그래, 그래."
우리는 인근 식당에서 육개장을 먹고, 훈련장으로 돌아와 2~3시간 동안 땀을 흘렸다.
마력이 바닥을 드러내도 체력이 남아 있다면, 다양한 훈련을 진행할 수 있다.
수영은 훈련용 활과 화살을 대여한 후, 나를 표적으로 저격술을 단련했다.
나는 그녀의 훈련에 어울려 주면서 동체 시력을 높였고, 덕분에 우리 부녀는 나날이 빠른 속도로 강해질 수 있었다.
제40화
40화. 새로운 스킬 (1)
봄은 금세 지나갔다.
지구 온난화로 무더운 여름이 시작될 무렵.
길드원들은 흠뻑 땀에 젖은 채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오늘도 찜질방에나 가자고."
"으아, 더워 죽겠네. 속옷도 다 젖었어!"
"간만에 찜질도 하고 갈까?"
"안 그래도 너무 힘들었는데... 찜질방에서 조금 쉬다가 집에 돌아가자."
여름에 접어들면서 길드원들이 찜질방에 가는 빈도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 와중에도 딸 걱정에 얼른 집으로 귀가하는 건혁.
길드원들은 그 모습을 이제 당연하게 여겼다.
딸아이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는 남자다.
저런 팔불출한테 찜질방을 권유하는 건 멍청한 짓이겠지.
그렇게 무더위가 서서히 식으면서 9월 말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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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건혁
*종족: 인간
*칭호: -
*출신 국가: 한국
*LV: 100
*근력: 40
*민첩: 45
*체력: 40
*마력: 70
*AP: 31
*스킬: [빙마검(氷魔劍)-LV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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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링!
[레벨이 100에 도달하였습니다.]
띠링!
[어빌리티 포인트(AP) 30이 주어집니다.]
띠링!
[특전, 스킬을 획득하셨습니다.]
건혁은 1월부터 9월까지 C등급 게이트를 들락거리면서 100억 원 가까이를 벌어들였다.
함께한 유진 역시 어마어마한 수익을 통해 고급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반면, 여전히 수서동에서 지내던 건혁은 기존 차량을 중고로 매각하고, 방탄 성능을 보유한 10억 원 상당의 롤X로이스 세단을 구매하여 수영을 안전히 초등학교까지 데려다주었다.
처음에는 험비를 구매할까도 고민했지만, 원작을 떠올린 그는 초고가의 세단을 구매했다.
초등학교 시절 교통사고로 사망한 모친.
거기에 건혁은 1회차에서 알코올 중독으로, 2회차에서는 레이드에 휘말려 죽음을 맞이한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고아가 되어 버린 탓일까?
수영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다.
그나마 1회차를 경험한 덕분에 2회차에서는 사이다 전개로 잘 풀어 나갔지만, 1회차의 수영은 다수의 여학생들로부터 폭행, 갈취 등의 수많은 수모를 당해야 했다.
때문에 건혁은 따돌림 전개를 막고, 수영의 자존심을 높이고자 초고가 세단을 구매하였다.
그 누구도 자신의 딸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띠링!
[스킬을 선택해 주십시오.]
1. 마력 회복 - 'Passive Skill.'
2. 상처 치유 - 'Active Skill.'
3. 육체 강화 - 'Active Skill.'
4. 빙마궁(氷魔弓) - 'Active Skill.'
5. 얼음 골렘 소환(Summon Ice Golem) - 'Active Skill.'
눈앞에 떠오른 다섯 가지의 항목.
빙마검을 얻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원하는 스킬을 고를 수 있는 모양이다.
건혁은 빙마궁이란 항목을 보자마자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수영이와 똑같은 스킬을 가져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육체 강화는 그렇다 치더라도 마력 회복과 상처 치유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스킬 레벨이 높아질수록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효과를 보여 줄 수 있는 스킬들.
상처 치유의 스킬 레벨을 높인다면 추후 왼팔을 복구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눈길은 다섯 번째 항목에 꽂혔다.
"골렘...."
건혁은 스킬 내용을 자세히 확인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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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골렘 소환: 얼음으로 형성된 인체 형태의 골렘을 소환하여 부릴 수 있습니다.
-Skill LV이 1에 도달할 시, 1의 마력을 소모해 농민 골렘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Skill LV이 2에 도달할 시, 3의 마력을 소모해 병사 골렘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Skill LV이 3에 도달할 시, 5의 마력을 소모해 기사 골렘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Skill LV이 4에 도달할 시, 7의 마력을 소모해 마법 기사 골렘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Skill LV이 5에 도달할 시, 10의 마력을 소모해 거인 골렘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Skill LV이 6에 도달할 시, 15의 마력을 소모해 정예 기사 골렘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Skill LV이 7에 도달할 시, 30의 마력을 소모해 기사단장 골렘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Skill LV이 8에 도달할 시, 35의 마력을 소모해 마법 기사단장 골렘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Skill LV이 9에 도달할 시, 50의 마력을 소모해 기사왕 골렘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Skill LV이 10에 도달할 시, 100의 마력을 소모해 용기사 골렘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단, 소환된 골렘은 24시간 동안 유지되며, 24시간이 넘은 후에는 자동적으로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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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환 가능한 골렘을 하나하나 확인해 본 건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쁘지 않아."
오히려 다른 스킬보다 더욱 매력이다.
열에 취약하다는 부분은 여러모로 안타까웠지만, 300℃ 이상의 고열이 아니라면 24시간 동안 절대로 녹지 않는다는 모양이다.
건혁은 30분간의 고민 끝에 '얼음 골렘 소환' 항목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띠링!
['얼음 골렘 소환-LV1' 스킬을 배우셨습니다.]
이후 AP는 마력에 30, 체력에 1을 투자했다.
단숨에 100의 마력을 가지게 된 건혁.
그는 주먹을 세게 쥔 채 지갑에서 헌터증을 꺼내 들었다.
9월에 갱신된 서열은 30,011위.
2만대에서 3만대까지 내려왔다.
"9월 27일... 쓰읍, 슬슬 협회에 들러야 하나?"
건혁은 입술을 한 번 핥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얼음 골렘 소환'의 스킬 레벨을 3... 아니, 4 정도까지 높인 다음에 가 보자."
건혁은 두 번째 스킬에 대해 유진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유진이야 C등급 게이트를 함께 드나드는 사이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복수 스킬을 보유한 헌터는 대한민국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그중에는 이진화 역시 포함되어 있다.
'육체 강화'와 '청염(靑炎)'이라는 스킬을 보유한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
뭐, 그녀와 자신을 비교할 순 없으려나?
며칠 뒤, 건혁은 C등급 게이트에서 골렘을 소환해 봤다.
냉기를 품은 푸른빛의 골렘.
녀석은 인체 형태에 2m의 신장과 둥그런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건혁은 녀석의 오른손에 쥐어진 갈퀴를 바라봤다.
"농기구도 얼음이네."
저게 마수한테 먹히려나?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하던 건혁과 달리 유진은 골렘을 바라보면서 입을 쩌억 벌렸다.
두 번째 스킬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전화를 통해 전달받았다.
그러나 스킬이 무엇인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목격했다.
'어... 얼음 골렘....'
설마, 골렘 소환이라는 희귀한 스킬을 얻었을 줄이야.
그녀는 놀라움과 부러움이 담긴 눈빛으로 건혁을 바라봤다.
"가... 각성 능력 검사는 아직이라고 말씀하셨죠?"
"네, 능력을 조금 사용해 본 뒤에 검사를 받을 생각입니다."
"...아마 1만대 안에 들어서실 거예요."
"그러면 좋겠네요."
건혁의 겸손에 유진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에 보여 준 건혁의 전투 능력은 8~9천대 헌터들조차 한 수 접어야 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그 와중에 얼음 골렘까지 소환할 수 있게 되었으니....
유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골렘의 전투를 살펴봤다.
건혁이 소환한 10기의 농민 골렘이 오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취익!
오크와 충돌하는 골렘들.
"...확실히 약하긴 약하네."
골렘의 갈퀴는 오크의 가죽을 뚫지 못했다.
그러나 오크들의 정신이 분산된 덕분일까?
건혁은 평소보다 더욱 수월하게 오크를 토벌할 수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유진은 다시 한번 뾰로통한 얼굴로 부러움을 내비쳤다.
"어차피 나중에는 더 강한 골렘을 만들 수 있을 거 아냐. 진짜, 될 사람은 다 되는 건가?"
게이트에 들어서고 1시간이 지나, 두 사람은 오크 부족을 발견했다.
숫자는 대략 4~50마리 정도.
이어, B랭크인 오크 장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공격하겠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혼자서라도 도망치세요."
"저... 정말로 공격하시게요?"
"네, 한번 도전해 봐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오크 부족을 습격하는 것은 그동안 망설였던 과제 중 하나였다.
4~50마리의 오크는 어찌어찌 쓰러트릴 수 있겠지.
하지만 그 뒤에 있는 오크 장군까지 상대할 수 있을까?
계속된 망설임 탓에 전투를 회피해 왔던 건혁은 무려 30기의 농민 골렘을 만들었다.
"이 정도면 시간 끌기는 가능하겠죠."
"...사기네요."
"아하하, 저도 방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럼, 주변을 잘 경계하면서 대기하고 계세요."
17채의 건물이 세워진 작은 마을.
건혁은 30기의 골렘과 함께 마을로 돌격했다.
-취이익!
오크들이 고개를 돌려 건혁을 바라봤다.
그중 오크 장군은 붉은 안광을 번쩍이더니,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랜만의 먹잇감을 보는 것 마냥.
"무리하게 공격하지 말고 최대한 버텨!"
건혁의 명령을 이해한 걸까?
골렘들이 갈퀴와 삽을 쥔 채 방어 자세를 취했다.
-쿠워어어어!
장군의 우렁찬 포효와 함께 오크들이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세력이 마을 외곽 부근에서 부딪쳤다.
채앵!
"버텨!"
건혁은 오크들의 시선이 분산된 것을 보고, 지면을 박차 빙마검을 휘둘렀다.
서걱!
오크의 머리를 베어 낸 후.
"뒈져라!"
얼음의 칼날을 날려 대여섯 마리의 오크를 한순간에 쓰러트렸다.
단 한 명에 의해 전황이 뒤집혀진 것이다.
그 순간, 장군의 얼굴이 굳어졌다.
녀석은 왕좌에서 일어나 대검을 쥐고 건혁을 향해 발걸음을 움직였다.
-크르르....
건혁은 고개를 돌려 장군을 바라봤다.
"드디어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드는구나."
오크들이 골렘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지금이 기회다.
골렘들이 파괴될 무렵에는 장군과 오크 전사들로부터 협공을 당하고 말 것이다.
파앗!
그것을 알기 때문일까?
건혁이 장군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놈과의 거리가 10m까지 가까워진 그때.
건혁은 지면으로 빙마검을 내리꽂았다.
푸욱!
"아이스 필드(Ice Field)."
입으로 내뱉기가 살짝 민망한 기술명.
그러나 대부분의 특수 능력 각성자들은 기술을 사용할 때마다 기술명을 내뱉었다.
사기를 드높이기 위한 함성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중2병으로 오해를 받을 만한 기술명임에도 그 누구 하나 헌터들을 비웃지 않았다.
기술명에 걸맞은 화려한 기술이 실제로 펼쳐지니 말이다.
쩌저적.
바닥이 얼어붙으면서 오크 장군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어, 건혁은 얼음의 칼날을 날려 보낸 다음 전방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촤아악!
-쿠워어어!
얼음의 칼날에 직격한 녀석이 비명에 가까운 포효를 터트렸다.
"죽어."
서걱!
깔끔하게 목덜미를 베어 냈다.
두꺼울 것만 같았던 가죽이 종이처럼 썰린 것이다.
-크륵... 크....
호승심으로 가득했던 붉은 눈동자가 서서히 차갑게 식어 내렸다.
건혁은 잠시 한숨을 돌리며 골렘들을 향해 달려갔다.
어느새 7~8기로 줄어든 농민 골렘들.
그래, 이 정도만 해도 잘 버텨 준 거다.
건혁은 빙마검과 의수를 교차로 사용해 오크 전사와 궁사들을 하나씩 쓰러트렸다.
-캬하아아악!
털썩.
부족의 마지막 오크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건혁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면서 빙마검을 없앴다.
드디어 끝난 건가.
"후우...."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던 그때.
유진이 마을을 향해 달려왔다.
"어... 어디 다치지는...!"
"예, 괜찮습니다. 그보다 마석을 회수해야겠네요."
"...도와드릴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건혁은 유진의 도움을 사양하지 않았다.
마을에 널브러진 시체는 오크 장군 1마리와 오크 전사 37마리, 오크 궁사 15마리다.
도합 53마리의 시체로부터 마석을 채취하려면 분명 많은 시간이 들 터.
실제로 두 사람이 마석과 부산물을 채취하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30분 정도였다.
제41화
41화. 새로운 스킬 (2)
"...이것만으로도 3~4,000만 원은 되지 않을까요?"
"예, 아마도 그렇겠죠."
"단 한 번의 전투로 3~4,000만 원...."
"하하하하, 이런 전투는 하루에 2~3번 정도가 한계일 거예요. 골렘을 만들 때도 그렇지만, 오크 장군을 쓰러트릴 때 역시 상당량의 마나를 사용했거든요."
건혁은 대답을 하면서도 조금 전의 전투를 머릿속에 되살렸다.
오크 장군에게 사용한 두 개의 기술.
기술을 사용할 때 건혁은 마력을 너무 낭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검단산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와 비교하면, 민첩은 거의 2배 가까이 오른 상태다.
근력 역시 오크의 가죽을 종잇장처럼 베어 낼 정도이니....
'다음에는 기술을 쓰지 않고 싸워 보자.'
건혁은 그리 다짐하며 스테이터스를 확인했다.
골렘들이 직접 오크를 쓰러트리지 않았기 때문일까?
스킬 레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쯧...."
건혁은 다음 전투에서부터 오크들의 사지를 베어 낸 다음 골렘들에게 사냥감을 양보했다.
"그... 그렇게 해야 골렘들이 더 강해지나요?"
"저도 잘... 일단, 한번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
건혁은 오크들의 아가리를 강제로 벌리고, 골렘들에게 갈퀴를 내지르라 지시했다.
그렇게 10마리 정도를 토벌했을 무렵, 마침내 스킬 레벨이 올라갔다.
띠링!
['얼음 병사 골렘'을 소환하실 수 있습니다.]
해당 알림과 함께 건혁이 입을 열었다.
"병사 골렘 소환."
밋밋했던 농민 골렘과 달리 병사 골렘은 살짝 멋스러운 경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게다가 갈퀴가 아닌 2m 30cm 길이의 얼음으로 된 창을 쥔 병사 골렘.
신장 2m인 얼음 골렘에게는 적당한 길이의 창이다.
그런데....
"갑옷이랑 무기들이 모두 얼음이네."
그럼 의미가 없는 게 아닌가?
순간 그런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농민 골렘과 병사 골렘의 내구도 및 공격력을 살펴본 결과, 걱정은 곧바로 접을 수 있었다.
갑옷과 무기의 내구도가 농민 골렘보다 2배나 높은 병사 골렘.
게다가 움직임 역시 농민 골렘보다 더욱 정교하다는 모양이다.
"아... 아까랑 다른 골렘...."
"예, 아무래도 직접 마수를 쓰러트려야만 강화시킬 수 있나 보네요."
"...."
유진은 양 볼을 살짝 부풀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부러워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능력을 강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마스터가 강해져서 길드가 부강해지는 것은 바라 마지않던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적당히 잘돼야지!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병사 골렘을 바라봤다.
"슬슬 점심을 먹을까요?"
"...네."
시무룩한 얼굴로 돗자리를 펼치는 유진.
그동안 병사 골렘 셋이 주변을 경계했다.
"햇빛에 서 있으면 녹지 않을까요?"
"아, 그것도 한번 실험해 봐야겠네요. 이틀 전에 거실에 놓고 내버려 뒀을 때는 24시간 동안 물 한 방울 안 떨어트리다가 24시간이 지나자마자 순식간에 녹아내려서 거실에 홍수가 났었거든요."
"24시간...."
"일단, 한번 지켜보죠."
두 사람이 도시락을 먹고 있는 동안 병사 골렘은 마치 조각상인 마냥 햇빛 아래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흐음, 녹진 않는 모양이네요. 만져도 그렇게 차갑진 않던데...."
"신기하네요."
유진이 신기한 듯 병사 골렘의 이곳저곳을 만져봤다.
건혁은 작게 웃으면서 배낭을 어깨에 걸쳤다.
"슬슬 공략을 재개하죠. 서포트 원하시면 말씀하세요. 병사 골렘 2기를 빌려 드릴게요."
"후우, 혼자서 해 볼게요."
10개월간 서열을 7만대까지 끌어올린 그녀는 얼음 골렘을 보자마자 자극을 받았다.
자신도 지금보다 강해지게 된다면, 건혁처럼 복수의 능력을 가질 수 있을까?
아니, 그러지 않더라도 흑월의 이인자 자리만큼은 어떻게든 지켜 내고 싶었다.
현재 그녀의 뒤를 열심히 쫓아오는 태형과 지수.
10월에 들어선 현재.
태형은 264,997위를, 지수는 274,141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심지어 제2팀에 소속된 우지민과 우진석 남매 역시 현재는 28만대와 29만대를 유지하면서 빠른 속도로 수많은 헌터들을 제치고 있다.
'내가 안주하는 동안 그 사람들은 계속해서 치고 올라올 거야.'
건혁과 유진처럼 휴일마다 게이트에 드나드는 길드원들.
20만대에 들어선 헌터들은 F등급 게이트의 단독 공략이 가능하다.
그리고 20만대 서열의 헌터가 넷이 모이면 E등급 게이트의 출입이 허가됐는데.
태형과 지수는 우지민과 우진석 남매를 끌어들여 화·목요일마다 E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면서 개별적으로 용돈벌이 밑 실전 훈련을 진행했다.
건혁은 길드의 게이트 공략에 지장이 생기지 않는 선에서는 상관없다는 허락을 내렸다.
하지만 만약 공략에 지장을 줄 경우에는 경고를 주며, 세 번 경고를 받은 길드원은 지체 없이 강제 탈퇴를 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20만대가 된 그들이라면 지금 당장 탈퇴하더라도 웬만한 중규모 길드에 들어가 높은 수익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수와 태형은 흑월에서 나가기를 원치 않았다.
그에 의아해하던 유진은 며칠 전 팀장 회의가 끝난 직후, 태형과 커피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다른 길드로 간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텐데... 지수 씨도 그렇고 왜 아직까지 흑월에 남아 있는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태형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켰다.
'저랑 지수 누나 외에도 기존 흑월의 길드원들은 마스터한테 큰 은혜를 입었어요. 그 은혜는 평생을 갚아도 모자라겠죠.'
'그게 무슨....'
'마스터가 제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도 짐꾼이나 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텨 나갔을 거예요. 그건 지수 누나랑, 지혜, 현민이 형이랑 세형이 형... 기존 흑월의 멤버들이라면 모두 똑같은 마음이겠죠.'
'....'
유진이 잠시 입을 다물자 태형은 쓰게 웃으면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저희는 모두 짐꾼에서부터 시작했어요. 그래서 짐꾼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지, 그리고 헌터들에게 부조리한 일을 당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현실을 잘 알고 있죠. 그런 지옥에서 구원해 준 사람을 배신한다는 건... 솔직히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네요.'
'그렇군요.'
'게다가 마스터는 데스펠과 같은 나쁜 길드들의 압박에도 당당해질 수 있는 길드를 만들려고 하고 있잖아요. 흑월이 유신이나 고구려와 같은 거대 길드가 될지도 모르는데, 지금 나가 버리면 엄청난 손해가 아닐까요?'
방글방글 웃어 보인 태형의 얼굴에 유진이 피식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러네요.'
다시 현재로 돌아와, 태형과의 대화 내용을 떠올리던 유진은 입가에 호선을 그린 채 오크들의 목덜미를 깔끔하게 베어 냈다.
서걱!
'그래, 흑월도 언젠가는 대형 길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길드가 될지도 몰라.'
그 생각은 얼음 골렘을 본 후, 거의 확신처럼 바뀌었다.
"하아... 하아... 하아...."
"마석은 제가 회수해 두겠습니다. 슬슬 돌아가야 하니까, 조금이라도 쉬어 두세요."
"저... 저도...."
"괜찮습니다. 금방 끝나요."
유진이 바닥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는 동안 건혁은 오크들로부터 부산물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오늘은 42마리나 토벌하셨네요."
"마스터는 89마리였어요. 게다가 마력이랑 체력도 남아도시는 것 같은데...."
"돌아갈 때를 대비해 둬야 하니까요."
건혁의 말대로 게이트로 돌아가는 도중 오크 전사 다섯 마리와 조우했다.
물론, 놈들은 순식간에 토벌되었다.
골렘들이 나설 새도 없이 말이다.
게이트를 빠져나가기 직전.
건혁은 스킬을 해제해 골렘과 빙마검을 없앴다.
그리고 게이트를 나선 두 사람은 부산물을 먼저 처리했다.
"5,848만 원 입금됐네요."
"저는 2,383만 원이에요. 이렇게 벌어 본 건 난생처음이네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후우, 오늘은 조금 무리한 것 같으니, 집에 돌아가자마자 편히 쉬어야겠어요."
"네, 오늘 편히 쉬시고, 내일도 수고하세요."
"마스터도 고생하셨어요."
두 사람은 각자의 차량을 타고 자리를 벗어났다.
* * *
"괜찮은 능력을 얻었어."
나는 액셀을 밟으면서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농민 골렘은 말 그대로 시간 끌기용에 불과했다.
그러나 병사 골렘은 오크에게 작게나마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그렇다면 기사 골렘은 오크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앞으로 마석을 회수하는 작업도 많이 편해지겠네."
아니, 짐꾼도 필요 없으려나?
D등급 게이트에서 짐꾼을 전투원으로 나서게 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아...."
수영이한테는 미리 말해 두는 게 좋겠지?
유진에게는 거실에서 골렘을 24시간 동안 소환해 두었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즉석에서 생각해 낸 거짓말로, 골렘을 소환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냥 말해 둘 걸 그랬네."
이왕 말할 거라면 '능력을 한번 사용해 본 다음에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잠시 말을 아꼈던 나는 치킨 두 마리를 사 가지고 집에 들어갔다.
"수영아, 아빠 왔다!"
"다녀오셨어요."
방에서 나온 수영이 치킨 냄새를 맡았는지, 펄쩍 뛰면서 내게 달려왔다.
"오늘 저녁 치킨이야?!"
"그래, 아빠가 좋은 일이 있어서 치킨 두 마리 사 왔지!"
"접시 준비해 둘게!"
후다닥 부엌으로 달려가는 수영이의 모습에 입꼬리가 귓가에 걸렸다.
도대체 누구 딸이기에 저렇게 귀여운 걸까?
나는 치킨과 콜라를 거실 테이블에 올려 두고 TV를 켜 뉴스를 틀었다.
테이블 위로 접시와 컵을 가져온 수영.
"우와, 뿌X클이랑 맛X킹이다!"
"자아, 먹자!"
"잘 먹겠습니다!"
어째 내가 해 주는 음식보다 더 맛있게 먹는 기분이네.
나는 씁쓸히 웃으면서도 치킨을 한입 베어 물었다.
'으음, 확실히 내가 만든 음식보다 맛있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나름 요리에 자신이 붙었음에도 치킨과 피자에는 이길 수가 없었다.
어째서지?
나는 그런 의문 살짝 지르밟으면서 콜라를 들이켰다.
"캬하~"
"근데 좋은 일이 뭐야?"
"응? 아, 이번에 새로운 특수 능력을 각성해서 말이야."
대답과 동시에 치킨을 한입 베어 물었다.
동시에 우물거리던 수영이의 귀여운 볼때기가 움직임을 멈췄다.
"새로운... 특수 능력?"
"크흠, 병사 골렘 소환."
냉기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푸른빛의 얼음 골렘.
그 순간, 수영이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눈알 튀어나오겠네.
나는 슬쩍 뿌듯한 얼굴로 골렘한테 지시를 내렸다.
"가서 화장실 좀 청소해 줘."
골렘을 소환해 두고 하는 명령이 고작 화장실 청소라니.
내가 보기에도 살짝 웃겼지만, 모처럼 소환했는데 그대로 해제할 순 없잖아.
나는 수영이의 놀란 얼굴을 보면서 왼손 의수로 볼을 쿡쿡 찔렀다.
"아빠가 치킨 다 먹어 버린다?"
"아... 어... 언제 각성한 거야?"
"사흘 전에. 그리고 오늘 게이트에서 처음으로 소환해 봤어."
내 대답에 수영이 살짝 아쉬운 표정을 보였다.
"사흘 전이면 미리 알려 주지."
"한번 사용해 보고 어떤 능력인지 확인한 다음 알려 주려 했지. 그보다 집에 2기 정도 두고 갈게."
"어? 왜...."
"아빠가 자리를 비웠을 때, 레이드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수영은 내곡동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한 번 소환하면 영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거야?"
"아니, 24시간 정도 지나면 사라지나 봐. 그러니 매일 아침마다 소환해 두고 나가야지."
"응, 그렇구나."
제42화
42화. 암살 (1)
수영은 오늘 게이트에서 일어난 일들을 질문하기 시작했다.
특히, 골렘이 어느 정도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수영이었다.
나는 농민 골렘과 병사 골렘의 공격력과 내구도를 말해 주었다.
"그럼, 병사 골렘은 고블린을 쓰러트릴 수 있다는 건가?"
"그건... 나중에 한 번 시험해 봐야지. 이번 달 말에 각성 능력 검사를 받을 생각이니까, 검사를 받은 직후에 길드원들한테 공표할 생각이야."
"오늘 같이 간 사람한테는...."
"그 사람한테는 말해 뒀어.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이니 함부로 발설하고 다니지는 않을 거야."
수영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렇구나."
"치킨 식겠다. 얼른 먹자."
"응."
수영은 치킨을 먹으면서 힐끔힐끔 화장실을 청소하는 골렘을 살펴봤다.
"앞으로는 집안일도 쟤한테 시키면 되겠네."
"우리 수영이 똑똑한데? 얼음이 녹아내리지도 않는 데다가, 냉동실에 넣어 둔 얼음하고 비슷한 정도의 냉기였으니 나쁘지는 않겠다. 여름에는 에어컨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고. 그래도... 아침이랑 저녁은 아빠가 만들어 줄게."
모처럼 배운 요리다.
수영이가 맛있게 먹어 주는 모습을 볼 때마다 뿌듯함을 느낀다.
나는 그 뿌듯함을 쉬이 내던지고 싶지 않았다.
수영은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아빠가 만든 음식이 가장 좋아!"
"언제는 치킨이 더 맛있다면서."
"치... 치킨은 두 번째로 맛있어!"
나는 피식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작은 창고.
정장을 걸친 수십 명의 사내들이 창고 주변을 지켰다.
잠시 뒤, 창고 안으로 들어간 30대 중반의 청년.
그를 마중한 것은 50대로 보이는 중년이었다.
"3만대 서열의 헌터에 잔챙이만 30명이라...."
얼굴에 그어진 칼자국과 날카로운 눈매 때문일까?
중년의 얼굴은 100이면 100이 험상궂다 말할 것처럼 생겼다.
거기에 두꺼운 목소리까지 더해지니, 30대 청년은 기가 죽은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키면서 입을 열었다.
"현찰로 5억을 드리겠습니다."
"5억이라... 나쁘진 않군. 가벼운 운동거리는 되겠어."
"그러면...."
"2급 암살자 두 명을 보내 두지. 서열로는 1만대에 버금가는 녀석들이다."
"감사합니다!"
청년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그리고 뒤처리는...."
"우리가 언제 뒤처리를 안 했던가?"
"아... 아닙니다!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아 실언을 했습니다."
"그래, 현금은 밖에 녀석들한테 건네주고, 얌전히 소식이나 기다리고 있어."
"알겠습니다."
청년은 속으로 안도하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창고를 나서고 차량에 실어 둔 현금 가방을 정장의 사내들한테 건네주는 청년.
그는 트렁크를 닫고 곧장 차에 올라탔다.
"후우, 무서워 죽는 줄 알았네."
등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
청년... 아니, 데스펠 길드 제3 인사팀 팀장 우진혁은 앞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면서 시동을 걸었다.
"X발, 내가 왜 그 새끼들 때문에 1년이나 근신을 받아야 해? 게다가 제9 헌터 훈련장 근처에는 가지도 말라니.... 승준이 형은 겁이 너무 많아."
진혁은 차량을 처리한 다음 새 차로 갈아타면서 서울로 올라갔다.
한편, 진혁으로부터 5억의 현찰을 건네받은 범죄 길드, 하데스.
대한민국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범죄 길드로, 주로 암살 의뢰를 받거나 마약을 유통시키는 것으로 큰돈을 벌었다.
하데스 길드의 제2 지부장, 도승호는 진혁의 의뢰를 부하에게 건넸다.
"이번 달 흑월이 예약해 둔 게이트가 어디 어디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부하는 노트북 키보드를 두들기며 검색했다.
"매주 월·수·금 모두 예약해 둔 상태로, 대부분이 서울 남부 쪽에 몰려 있습니다. 그리고 10월 29일에 예약된 청계산 게이트에 저희 쪽에서 심어 둔 협회 직원을 배치시킬 수 있습니다."
"좋아. 당일에 움직일 수 있는 2급 암살자 두 명, 청계산으로 등산 좀 하라고 보내 둬."
"알겠습니다."
부하는 고개를 끄덕인 후, 곧바로 자리를 벗어났다.
* * *
"비싸기는 더럽게 비싸네."
나는 오랜만에 협회에 들러 각성 능력 검사를 받고, 5급 포션 30개와 4급 포션을 10개를 구매했다.
통장에서는 무려 1억 1천만 원이 빠져나갔다.
솔직히, 포션에는 부가세를 빼야 하는 거 아니냐?
그보다 이 조그마한 물약들이 왜 이렇게 비싼 거야!
나는 담당 직원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모두들 해당 금액에 구매해 가는데, 혼자 괜히 진상을 부릴 순 없지.
"그보다 검사관 얼굴은 진짜...."
나는 큭큭 웃으면서 검사관을 떠올렸다.
1월에 받았던 각성 점수는 1,633점이다.
2~10월까지 9개월간 검사를 받지 않고, 11월에 찾아가 받은 각성 점수는 무려 3,321점!
검사관은 서둘러 10월 서열과 각성 점수를 찾아봤는데.
아무래도 내 각성 점수가 서열 3,091위와 비슷하다는 모양이다.
"그냥 내년에 검사를 받을 걸 그랬나?"
나는 작게 웃음을 흘리면서 11월에 갱신될 서열을 기대했다.
그렇게 즐거운 일요일이 지나가고, 10월 29일 월요일 아침 청계산을 찾아갔다.
게이트 앞에서 수군거리는 30명의 헌터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평소처럼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전달한 뒤, 게이트로 들어가 공략을 시작했다.
촤아악!
제1팀 전투 조원 모두가 3~40만대 서열에 접어든 이후, 10~15시까지 뒤에서 대기하며 짐꾼의 호위를 맡았다.
이어, 15~17시까지는 홀로 D랭크 마수들을 학살했고, 길드원들은 뒤에서 짐꾼들을 호위했다.
"1조, 방패 제대로 들어!"
"뒤로 흘리지 마! 일격으로 숨통을 끊으라고!"
11월부터 C등급 게이트를 공략하기 때문일까?
팀원들은 목소리를 높이며 눈앞의 마수를 쓰러트렸다.
제3조가 마석들을 회수할 시각.
제1조에서부터 점심시간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에 들른 공터에서 점심을 먹도록 하겠습니다."
팀원들은 내 지시에 따라 발걸음을 움직였다.
격렬한 전투로 체력을 소모한 전투 조원들은 허겁지겁 점심을 먹으면서 다리를 쭉 뻗었다.
그렇게 30분이 지나가고 제2조의 점심 식사가 시작됐다.
"마스터 어제 각성 능력 검사받고 왔다던데?"
"김유진 팀장님이랑 매주 C등급 게이트에 드나드셨다잖아. 그러면... 드디어 1만대 서열에 진입하시는 건가?"
"다시 2만대에 진입하게 되는 걸지도 모르지. 서열은 높을수록 오르기 힘들어진다잖아."
"하긴, 그것도 그러네."
뒤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나는 피식 웃었다.
1~2만대에 들어가려고 그렇게 무리하게 활동한 줄 알아?
며칠 뒤 그들이 놀랄 얼굴이 기대되네.
흠칫!
뭐지?
누군가가 노려보는 듯한 느낌에 어깨를 살짝 떨었다.
벌써 마수들이 이곳까지 온 건가?
미간을 좁힌 채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린 그 순간.
콰앙!
뒤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이... 이게 무슨...."
점심을 먹고 있던 5명의 길드원이 육편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동시에 7~8명의 길드원 역시 부상을 입은 듯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눈을 크게 뜬 상태로 길드원들의 중심에 서 있는 복면인을 바라봤다.
말 그대로 검은 옷을 입고, 얼굴에 검은 복면을 쓴 사내다.
암살자?
"이... 이런...!"
파앗!
녀석을 향해 달려갔다.
"이, X발 새끼가!"
오랜만에 터져 나온 욕설.
녀석이 화염구를 던지자, 나는 오른손에 쥔 빙마검을 세게 휘둘렀다.
콰앙!
이 정도면 손쉽게 이길 수 있겠어.
너무 쉽게 막아 낸 탓일까?
녀석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크아아악!"
뒤에서 들려온 길드원의 비명 소리.
뭐야, 한 놈이 아니었어?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작게 중얼거렸다.
"기사 골렘 소환."
스르르르.
10기의 기사 골렘이 냉기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가서 처리해라."
골렘들은 내 명령의 의미를 순식간에 파악했다.
아니, 그런 느낌이 들었다.
골렘들이 뒤로 달려가는 순간.
나는 눈앞의 흑의인과 눈을 마주쳤다.
"...복수의 특수 능력에 각성했다고?"
암살자가 아니었나?
대놓고 목소리를 드러내네?
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네... 네놈이 어째서 3만대에...."
"그게 궁금해? 그러면 날짜를 잘못 잡았어. 다음 달까지 기다렸어야지."
여유를 부리려던 그때,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제길, 기사 골렘으로도 역부족인 건가.
골렘이 파괴될 때 무언가가 느껴졌다.
자세히 표현할 순 없지만, 골렘과 연결된 실이 끊어졌다 해야 하나?
링크가 끊어졌다... 라고 말하는 게 가장 적당할 것이다.
그보다 3기의 기사 골렘이 파괴됐으니, 더 이상 지체할 순 없겠어.
파밧!
나는 지면을 박차면서 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이스 블레이드(Ice Blade)!"
"제길, 파이어 볼(Fire Ball)!"
콰앙!
다시 한번 화염구와 얼음의 칼날이 충돌했다.
나는 폭발을 향해 몸을 던졌고, 순식간에 녀석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쐐액!
"...!"
이 거리에서 피한다고?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새로운 기사 골렘을 소환했다.
좌측에서 모습을 드러낸 골렘이 복면인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크윽!"
녀석이 자세를 무너트리며 몸을 회전시켰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으아아!"
채앵!
제길,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몸이냐?!
허벅지를 베어 내려 했으나, 녀석은 허공에서 내 검격을 맞받아쳤다.
나는 속으로 욕설을 터트리면서도 넘어지려 하는 녀석을 보곤 재빨리 빙마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푸욱!
"아이스 필드(Ice Field)."
녀석의 오른쪽 팔과 다리가 바닥에 얼어붙었다.
이젠 못 피하겠지.
나는 골렘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크악!"
베었다.
드디어 녀석의 오른쪽 허벅지를 베어 냈다.
골렘의 검 끝은 녀석의 좌측 팔목을 꿰뚫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왼쪽 허벅지를 베어 내고, 골렘 역시 오른쪽 팔목을 끊으면서 사지를 봉했다.
이어.
"흐읍!"
왼손으로 녀석의 복부를 강하게 후려쳤다.
"크으...."
내장이 비틀린 기분일 거다.
평범한 주먹이 아닌 아르베트제 의수니까.
눈동자를 까뒤집으며 정신을 잃은 녀석.
"여기서 녀석을 지키고 있어."
기사 골렘이 복면인 주변에서 멈춰 섰다.
나는 고개를 빠르게 돌렸다.
골렘들과 함께 복면인을 몰아붙이는 길드원들.
뭐야, 아직도 안 도망갔었어?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골렘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암살자.
나는 재빨리 녀석에게 다가갔다.
서걱!
"...?!"
이 녀석은 별거 아니네.
녀석의 허벅지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놈들은 암살자처럼 재빠른 움직임을 특기로 보여 주었다.
그러나 다리를 잃으면 아무것도 아니지.
나는 골렘들에게 지시해 발목과 손목의 힘줄을 끊고, 곧바로 복부를 후려쳐 기절시켰다.
"마... 마스터...."
1조 조장을 맡은 강원석이라는 헌터가 손을 떨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복면인을 가리켰다.
"이 녀석뿐입니까?"
"...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피해 상황은...."
"여덟 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섯 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일곱 명이 경상으로...."
제길, 사상자만 20명이라는 말이잖아!
몇 개월이나 함께한 동료다.
나는 그들의 죽음에 눈을 질끈 감으면서 왼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마음 같아서는 복면인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싶지만....
이들은 국법으로부터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또, 누군가로부터 사주를 받았을 가능성도 있으니, 정확한 조사를 받을 필요가 있겠지.
제43화
43화. 암살 (2)
"들어."
두 골렘이 복면인들을 번쩍 들어 올렸다.
"농민 골렘 소환."
나는 병사 골렘 넷과 농민 골렘 넷에게 동료들의 시체를 맡겼다.
모두가 충격을 받은 듯 새파란 얼굴로 터덜터덜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나 역시 괜찮지만은 않았다.
설마, 암살자에게 공격을 받게 될 줄이야.
'잠시만... 협회 직원이 관리하는 게이트에 어떻게 들어온 거지?'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발걸음을 멈추었다.
"...마스터?"
원석의 부름에 나는 그를 바라봤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저들이 어떻게 게이트에 들어왔는지 의문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건...."
"이 게이트는 마력으로 코팅된 콘크리트제 건축물 안에 있습니다. 문의 잠금장치는 헌터 협회에서 관리하고 있죠."
"협회 직원이 저들과 한패라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진화 찬스를 한 번 더 써야겠어.
그녀의 도움을 받지 않기 위해 강해지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은 공권력이 필요한 때다.
게이트를 나간 직후.
우리는 잠시 건축물 안에서 대기했다.
정확히는 나갈 수 없었다.
밖에서 문을 열어 주지 않고 있으니까.
문이 마력으로 코팅되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어렵지 않게 부술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나가기보다도....
―예, 박건혁 헌터님. 오랜만에 전화 주셨네요.
스마트폰 너머로 들려오는 이진화 헌터의 목소리.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약간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저도 지금은 좀 바쁜데....
"믿을 수 있는 기사단분을 보내 주셔도 상관없습니다. 지금 부탁드릴 수 있는 분이 이진화 헌터님뿐인지라...."
이진화라는 이름을 듣고 화들짝 놀란 길드원들.
반면, 진화는 작게 한숨을 토해 냈다.
―하아,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나는 게이트 내에서 일어난 암살 사건과 현재 게이트를 가두는 건축물 안에 갇혀 있다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
사태가 심각하기 때문일까?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전과 달리 진지해졌다.
―암살자들은....
"두 명 모두 사지를 봉해 둔 상태입니다. 일단, 지혈을 해 두긴 했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면 조금 위험할 것 같아 보입니다."
―청계산이라고 말씀하셨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바로 사람을 보낼게요.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추후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식사나 한 끼 사 주시든가요.
그 한마디를 끝으로 통화가 끊어졌다.
"마스터, 이진화라면...."
"예, 청룡 기사단 부단장이신 이진화 헌터입니다."
모두가 잠시 감탄을 터트린 그때.
철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느라고...."
너는 화장실을 30분이나 다녀오냐?
그는 골렘들이 든 시체들을 보고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게이트 안에서 저희를 습격한 자가 있었습니다."
"...제가 당장 협회 측 사람을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직원의 진지한 목소리에 나는 오른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만류했다.
"곧 청룡 기사단 측 분들께서 도착하실 겁니다."
"예?! 그게 무슨...!"
이 녀석 봐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나는 눈가를 좁힌 채 길드원들을 향해 턱을 까딱였다.
그 순간, 주변을 경계하듯 자세를 취하는 길드원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걸까?
협회 직원이 뒷걸음질을 쳤다.
툭.
그의 등이 골렘과 부딪쳤다.
"저희와 함께 계셔 주시죠."
"아... 아니, 그래도 협회에 연락을...."
"이미 연락은 갔을 겁니다.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직후 청룡 기사단 측 분과 연락을 나눴으니 말입니다."
내 대답에 그가 눈동자를 굴리면서 손가락을 살짝 떨었다.
잠시 뒤,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는 그들을 막아섰다.
"협회에서 찾아왔습니다. 이곳에서 암살 사건이 일어났다고...."
"이 자리의 그 누구도 협회에 연락하지 않았습니다만? 아무래도 잘못 찾아오신 모양이군요."
나는 가장 앞에 선 사내의 말을 끊고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러자 사내는 협회 직원을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까딱였다.
그 순간, 뒤따르던 다섯 사내가 일제히 몸을 움직였다.
게이트를 지키던 직원마저 골렘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는데.
나는 뒤로 물러나면서 빙마검을 휘둘렀다.
"아이스 월(Ice Wall)!"
눈앞에 만들어진 3m 높이의 빙벽(氷壁).
"기사 골렘 소환!"
이내, 양옆으로 기사 골렘 4기가 소환됐다.
"공격해!"
게이트를 빠져나오던 도중 조금이나마 마력을 회복시켜 둬서 다행이네.
스테이터스에 비친 잔여 마력은 31이었다.
이 정도면 버틸 수 있겠지.
채앵! 서걱!
"크윽...!"
뭐야, 버티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이거 잘하면 이길 수도 있겠는걸?
"청룡 기사단이 온다고 합니다! 서두르십시오!"
직원의 목소리에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와의 대화에서 무언가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팀원들에게 스마트폰의 음성 녹음을 켜 두라 지시했다.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오지 않았다면 헛수고였겠지만, 직원의 목소리는 확실하게 녹음되었으리라.
또, 내게서 스마트폰을 건네받은 농민 골렘이 현 상황을 고스란히 촬영하는 중이다.
'증거물은 충분하겠어.'
이제 남은 문제는 이곳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청룡 기사단이 오고 있다는 말 때문일까?
사내들의 움직임이 더욱 거칠어졌다.
콰앙!
특수 능력까지 사용하며 압박을 가해 오기 시작한 그 순간.
"전원, 무기를 버리고 두 손 들어!"
30여 명의 청룡 기사단원들이 우리 주변을 포위했다.
살짝 위험했던 순간에 잘 찾아와 준 청룡 기사단.
정장 입은 사내들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청룡 기사단을 공격했다.
콰앙! 콰콰콰쾅!
사방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길드원들이 귀를 틀어막았다.
파앗!
나는 지면을 박차면서 도망치려는 협회 직원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퍼억!
아르베트제 주먹이 녀석의 복부를 꿰뚫었다.
눈을 크게 뜬 채 바닥에 쓰러지려는 직원.
나는 그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료들을 죽인 죗값, 반드시 치르게 만들어 주마."
빙마검을 없앤 나는 품속에서 헌터증을 꺼냈다.
"흑월의 마스터, 박건혁입니다."
내 자기소개와 동시에 청룡 기사단 제복을 걸친 한 중년이 다가왔다.
"예,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조사를 위해 협조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뒤의 골렘들은...."
"제가 소환한 골렘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새로운 특수 능력을 각성하셨군요."
중년은 작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아니, 중년만이 아니다.
기사단 전원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산을 내려가자 수많은 구급차와 경찰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동료의 시체와 두 복면인이 넘겨지고, 우리는 협회에서 2~3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다.
"조사에 협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길드원들은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이번 주 공략은 쉬도록 하겠습니다."
이 와중에 게이트를 공략하는 건 어렵겠지.
길드원들은 고개를 숙이면서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동안 너무 안정적으로 공략을 해 왔기에 잊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이란, 너무나도 쉽게 죽는 존재라는 걸.
나는 한숨을 쉬면서 길드원 한 명, 한 명을 다독이며 자택으로 돌려보냈다.
헌터 협회 서울 중앙 본부 주차장에 주차된 내 차량.
아무래도 견인해 온 모양이다.
나는 차량에 올라탄 다음 곧장 수서동으로 출발했다.
자택에 도착하자 수영이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어... 어디 다치지는...."
"괜찮아."
나는 그녀를 다독이며 거실 TV를 바라봤다.
청계산 게이트에서 벌어진 암살 사건이 속보로 전해지는 중이다.
게다가 '흑월'이라는 문구가 대문짝하게 자막으로 달렸다.
저런 건 허락 좀 받고 달면 안 되는 건가?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불안해하는 수영이를 한 번 안아 주었다.
"저녁 먹어야지."
"오... 오늘은 쉬어도 돼. 컵라면 먹으면 되니까."
나는 작게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녁을 만드는 것 정도는 별로 힘들지도 않다.
오히려 이대로 방에 들어갔다가는 침대에 누워 죽은 동료들을 떠올리고 말겠지.
나는 요리를 하면서 충격을 조금이나마 잊으려고 노력했다.
'이번 사건은... 보험으로도 처리가 안 되겠지.'
게이트에서 죽은 헌터는 보험을 적용받을 수 없다.
그것이 범죄자에게 죽은 헌터일지라도.
유가족들이 금전적 손해 배상을 받는 것 역시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는 상황.
나는 불편한 마음을 못 이기고 자비로 인당 5억 원을 유가족들에게 지급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 * *
청계산 게이트에서 암살 사건이 벌어지고 며칠이 지났다.
인터넷과 TV에서 연일 보도되는 기사들.
<흑월의 마스터 박건혁, 유가족들에게 5억 원의 생활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해....>
<흑월의 마스터로부터 인당 5억 원을 지급받게 된 유가족들.>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유가족들에게 사죄하는 박건혁 헌터.>
건혁은 마스터로서 책임을 통감한다며 길드원들과 함께 장례식장을 방문해 유가족들에게 사죄를 건넸다.
유가족 중 몇몇은 건혁을 탓하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눈물을 훔치면서 건혁을 바라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동시에 기사들이 보도되면서 여론은 흑월을 옹호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아니, 애초에 박건혁의 잘못이 아니라는 의견이 대다수다.
<왜 박건혁을 욕하는 거냐? 범죄자 새끼는 따로 있는데, 박건혁이 대신 욕먹고 다니네.>
⤷일단은 길드의 마스터니까 그러는 거겠죠.
⤷마스터면 전부 책임져야 하나? 범죄자 새끼들한테 책임을 물어야지!
⤷X발, 죽인 놈은 따로 있는데 왜 박건혁한테 저 X랄인지....
⤷그나마 박건혁이 있었기에 22명이 살 수 있었단다. 8명을 죽인 살인범이 아니라, 22명을 살린 영웅이다.
⤷헌터들이 마수한테 죽었다면 박건혁이 어느 정도 책임을 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범죄자한테 죽은 걸로 박건혁한테 저런 욕설을 지껄이는 건 잘못된 거지.
⤷나도 레이드에서 친동생을 잃은 경험이 있다. 유가족들 마음은 이해하지만, 박건혁한테 저러는 건 이해할 수 없다.
<박건혁 마음도 오죽하겠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작 몇 개월이기는 하지만 짐꾼들을 헌터로 키우려고 수많은 지원을 해 준 사람이다. 현재 흑월의 헌터들은 대부분 3~40만대 서열이지만, 그중에는 50만대에서 20만대까지 올라간 사람도 존재한다. 그뿐이냐? 지금까지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았다. 칭찬받아도 모자랄 판국에 욕이나 먹어야 한다니.... 대한민국 잘 돌아가는구나.
⤷박건혁처럼 짐꾼을 헌터로 키우려는 길드들이 조금씩 등장하던데, 이번 사건으로 해당 길드들 전부 해체될지도....
⤷박건혁 헌터님, 부디 상심을 이겨 내고 일어나 주길 바랍니다.
<서열 3만대에서 3천대로 급상승한 썰 푼다.>
⤷빙마검(氷魔劍) 존X 간지였는데, 이제는 얼음 골렘까지 데리고 다니는 거야?
⤷짐꾼 필요 없을 듯. 그냥 1인 길드 해도 상관없지 않나?
⤷9개월간 검사를 안 받은 이유는 뭐야? 힘순찐이라도 할 생각이었던 건가?
⤷9개월 만에 30,011위에서 3,192위까지 올라간 정도면 힘순찐 맞지 않냐?
⤷이 정도면 웹 소설에서나 등장하는 주인공 격이네. 56만대에서 3천대까지 2년 정도 걸렸잖아.
<박건혁 딸도 특수 능력 각성했다고 함. 아직 초등학생이라던데....>
⤷X발, 황금 유전자네.
⤷초등학생이 특수 능력을.... 나는 뭐지?
⤷짐꾼이지 뭐야, 가서 짐이나 날라!
⤷대가리 후려 패네ㅋㅋㅋㅋ
⤷어이, 짐꾼들끼리 그러지들 말라고.
⤷나도 각성해서 특수 능력이나 하나 얻었으면 좋겠다! 망할 놈의 X소기업! 월급이 210만 원이야! 세금 빼면 200만 원도 안 돼!
⤷왜 여기서 급발진하냐ㅋㅋㅋㅋㅋ
제44화
44화. 암살 (3)
SNS에 수많은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암살 사건이 TV로 보도된 직후, 데스펠 길드 제3 인사팀장인 진혁은 하데스가 암살에 실패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이어 11월이 되자마자 건혁의 서열이 3,192위가 되었다는 사실에 경악하면서 뒷목을 부여잡았다.
"보... 복수 특수 능력 각성자?!"
협회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박건혁의 프로필에는 빙마검(氷魔劍) 옆에 얼음 골렘 소환(Summon Ice Golem)이라는 단어가 추가되어 있었다.
"우... 웃기지 마! 어떻게 9개월 만에 두 번째 특수 능력을 발현하고, 서열을 3천대까지 올릴 수 있는데!"
그의 의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제길... 제길... 제길...."
진혁은 스마트폰으로 기사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건혁이 암살자들을 모두 죽였다면 상관없다.
그러나 두 암살자는 물론이고, 하데스 쪽 범죄 헌터 다섯과 그들에게 협력한 협회 직원이 모두 구속된 채 협회의 지하 감옥에 갇혔다.
최악의 경우 하데스와 데스펠의 연관성이 확인될 수도 있겠지.
게다가 자신이 하데스에게 암살을 의뢰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면....
자신은 100% 죽게 될 것이다.
"제발, 그냥 자결해 버려! 아니면 입 꾹 다물고 있든가!"
진혁이 간절히 기도하던 그 시각.
하데스 역시 총비상이 걸렸다.
설마, 2급 암살자 둘이 임무에 실패할 줄이야.
심지어 협회에 심어 둔 스파이와 연락을 받고 움직인 3급 암살자 다섯이 모두 생포되어 협회로 이송되었다.
콰앙!
"제기랄! 설마, 서열을 속이고 있었을 줄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박살 낸 하데스 제2 지부장, 도승호는 분개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거기에 청룡 기사단과도 인연이 있다고?"
3급 암살자들이 청룡 기사단에게 체포되었다는 보고에 승호는 뿌드득 이를 갈면서 눈가를 매섭게 좁혔다.
서열 3천대 헌터를 고작 5억을 받고 죽이려 했다니.
"2급 암살자들은 알아서 자결하겠지만, 3급 암살자와 협회에 심어 둔 녀석들은...."
2급 암살자는 자결을 서슴지 않는다.
충성심 때문이 아니다.
임무에 실패하여 구속되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럽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각종 이유로 구속되자마자 자결을 시도하는 2급 암살자들.
반면, 3급 암살자는 실력은 뛰어나나, 죽음에 대해 망설임이 존재하는 자들이다.
거기에 협회에 심어 둔 스파이는 단순한 협력자 수준.
죽음에 대해 공포를 느끼며 돈을 위해 범죄 길드에게 협력하는 존재들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2급 암살자 외에 지부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후우, 이번 건은 우진혁에게도 책임을 물어야겠군."
하데스 역시 자체적으로 흑월에 대해 조사를 진행했으나, 진혁이 가져온 문서 파일에는 더욱 자세하고 세세한 정보가 기입되어 있었다.
해당 자료를 토대로 작전을 준비한 하데스.
물론, 건혁이 서열을 속이고 있었기에 해당 부분을 논해 봐야 큰 의미가 없겠지.
하지만 승호는 이번 사건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묻고자 했고, 그 누군가를 데스펠 길드 제3 인사팀장 우진혁으로 지목했다.
"데스펠 길드에 우진혁 팀장의 의뢰 내용을 알리도록. 그리고 거짓 정보를 준 것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데스펠과 하데스에서 대화가 오가던 무렵.
건혁이 생포한 2급 암살자 둘이 혀를 깨물고 자결했다는 소식이 뉴스로 보도되었다.
반면, 사흘 만에 입을 열어 하데스의 이름을 거론한 3급 암살자들.
하데스에게 협력한 협회 직원 역시 순순히 이야기를 꺼내면서 대한민국은 한바탕 큰 소란이 벌어졌다.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큰 범죄 길드가 흑월을 노렸다고?"
"100% 누가 사주한 거겠지. 그런데, 흑월을 건든다고 누가 무슨 이득을 보나?"
"용의자가 누군지를 알 수가 없으니...."
협회 직원들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수많은 조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하데스에게 흑월을 공격하라고 사주한 용의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조사 작업이 지지부진한 상황 속에서 청룡 기사단과 백호 기사단은 하데스에게 경고를 하고자 대규모 수색 작전을 펼쳐 보였다.
자택에서 해당 소식을 접한 건혁은 곧장 진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청룡 기사단 부단장 이진화입니다.
"흑월 마스터, 박건혁입니다. 현재 백호 기사단과 함께 대규모 수색 작업을 진행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저도 지금 단원들과 합류할 예정이에요.
"하데스 제4 지부와 제7 지부의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무슨 소리죠?
"따로 사람을 움직여 놈들의 활동 범위와 거점 등의 정보를 확보했습니다. 본래라면 제가 직접 움직여 놈들을 공격할 생각이었습니다만... 기사단분들께서 수색 작업에 들어가셨다고 들어 해당 정보를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건혁의 대답에 진화가 잠시 뜸을 들였다.
―일단, 알려 주세요. 서둘러 확인해 보겠습니다.
건혁은 문자로 자세한 위치 정보를 건네주었다.
그에 해당 지역을 조사해 본 다음 다시 연락을 주기로 약속한 진화.
2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진화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정확한 정보인 것 같네요. 박건혁 헌터님께서는 집에 계셔 주세요. 직접 움직였다가는 추후 보복의 위험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
"그건...."
―박건혁 헌터님이야 어떻게든 괜찮으시겠지만, 수영이까지 위험에 처하게 될 수도 있어요.
건혁은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걱정하지 마세요.
건혁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애초에 직접 움직일 생각 따위는 없었다.
수영이보다 소중한 것은 없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일까?
왜 이렇게 분한 마음이 드는 거지?
그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면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더...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돼."
수영이를 지킬 수 있으면서 동료의 복수까지 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을 원한다.
기사단의 공격을 받음에도 어째서 하데스는 기사단을 향해 반격하지 않는 걸까?
이유는 간단했다.
기사단이 보유한 강대한 힘.
그 힘에 하데스는 얌전히 뒤로 물러났다.
보복을 했다가 더 큰 보복이 달려들까 우려스러운 것이다.
"기사단만큼은 아니더라도 대규모 길드에 버금가는 힘을 가져야 놈들도 우리를 함부로 건들지 못한다."
길드가 어수선한 시각.
건혁은 홀로 B등급 게이트에 들어갔다.
게이트에 들어서자마자 15기의 기사 골렘을 소환한 그는 곧장 2~3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면서 마력을 회복했고, 13시가 되자마자 공략을 시작했다.
"죽여!"
B랭크 마수, 드레이크.
길이만 25m에 육박하는 거대한 악어형 마수로, 강철처럼 단단한 비늘을 가지고 있으며, 아가리에서 초고온의 화염을 뿜어낸다.
건혁은 골렘들을 움직여 드레이크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빙마검을 휘둘러 녀석의 가죽을 꿰뚫었다.
녀석이 팔딱거리면서 발버둥 치자, 지면에서 거대한 충격이 느껴졌다.
-크워어어어!
녀석의 아가리에서 붉은 화염이 보였다.
"흩어져!"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는 기사 골렘들.
길드원들을 지휘할 때보다 토벌은 더욱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건혁은 드레이크의 화염을 회피하며, 골렘의 어깨를 밟고 뛰어올랐다.
이내, 드레이크의 목덜미에 내리꽂는 빙마검.
푸욱!
"뒈져!"
한결 수월해진 전투.
그는 4~5시간 동안 무려 B랭크 마수 18마리, C랭크 마수 37마리를 토벌해 냈다.
드레이크 17마리, 오크 장군 1마리, 오크 전사 25마리, 오크 궁사 12마리.
놈들로부터 회수한 부산물들을 모두 처분하자, 통장에는 무려 9,840만 원이 입금되었다.
"하아, 100레벨부터는 레벨이 오를 때마다 2AP를 받는 건가."
스테이터스의 레벨이 101에 도달하며 얻은 2어빌리티 포인트.
동시에 '얼음 골렘 소환'의 스킬 레벨 역시 4가 되면서 마법 기사 골렘을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며칠간 B등급 게이트를 홀로 드나들며 마법 기사 골렘과 기사 골렘을 소환하여 몇 차례의 무리한 전투를 강행한 건혁은 TV로 보도되는 기사를 보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하데스 길드의 제4 지부와 제7 지부가 청룡 기사단과 백호 기사단의 공격을 받아 괴멸당한 것이다.
수많은 범죄 헌터들이 체포된 채 이송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이걸로 한동안은 조용해지려나?"
두 기사단이 움직인 이상, 하데스는 물론이고 국내의 범죄 길드들 역시 한동안은 얌전해질 수밖에 없으리라.
아니, 그러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데스 제4 지부에서 발견된 문서 중 데스펠 길드와 관련된 문서들이 다수 발견되어....
건혁은 데스펠의 꼬리가 잡혔다는 사실에 작게 웃었다.
이번 사건의 배후에 데스펠 길드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생각한 것이다.
정확히는 데스펠 길드 제3 인사팀장인 우진혁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고작 한 번뿐인 만남.
심지어 그와 말다툼을 한 것은 9~10개월 전의 일이다.
그가 자신의 죽음을 의뢰한 것은 너무 과한 생각이 아닐까?
그러나 하데스와 인연이 있으면서 억대의 보수를 지급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수밖에 없었다.
* * *
서울 광진구에 위치한 어느 빌딩.
소회의실 상석에 앉은 50대의 남성이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제4 지부와 제7 지부가 공격받은 것이 우리 책임이라는 말이군."
"예, 하데스에서는 지금 당장 거짓 정보를 건넨 우진혁 팀장과 제4, 제7 지부를 공격받은 것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50대의 남성, 데스펠 길드의 마스터인 박강석은 제1군 대장 박태준의 대답을 듣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보상은 X발...."
그동안 하데스에게 의뢰했던 몇몇 문서 자료들이 협회의 손에 넘어갔다.
지금 당장 기사단이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겠지.
하데스는 제4 지부와 제7 지부에서 보관 중이던 의뢰 내역들을 데스펠에게 알려 주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주요 문서들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마약 등에 관련된 문서들이 협회에 넘겨진 탓에 강석은 고개를 젖히면서 제1군 대장이자, 아들인 태준을 바라봤다.
"지금 당장 제3 인사팀 소집시키고 기자 회견 열어."
"알겠습니다."
강석은 기자들을 불러 모아 이번 사건과 관련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
"하데스와 데스펠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하데스에게 의뢰한 내역들은 제3 인사팀에서 헌터들에게 앙심을 품고 독자적으로 움직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저희 데스펠은 제3 인사팀 전원을 해고하고, 그들의 신병을 협회에게 인도하여 성심성의껏 협조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강석은 제3 인사팀을 순식간에 해체하고, 우진혁과 팀원 전원을 기사단에게 넘겨주었다.
구속된 채 특수 내장 탑차에 실려진 진혁과 제3 인사팀원들.
그들의 모습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겨 실시간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보도되었다.
차량에 실린 진혁은 주먹을 쥔 채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3... 30억이면 중국에서도 풍족하게 살 수 있어. 게다가 새 신분을 얻어서 괜찮은 길드에 취직하면 되잖아.'
데스펠 길드 제1군 대장, 박태준.
그는 진혁을 비롯한 제3 인사팀원들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해 주었다.
한국의 땅을 떠나야 하지만 해외에서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태준의 말대로 협회의 수송 차량이 누군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콰앙!
도로 한복판에서 울려 퍼진 폭발음.
진혁은 바닥에 넘어지면서 허겁지겁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내.
쿠웅!
차량의 문이 파괴되면서 복면인들이 자신들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타!"
진혁과 제3 인사팀원들은 복면인들의 지시에 따라 황급히 검은 내장 탑차에 올라탔다.
차량은 수많은 연막을 터트리며 도로 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제45화
45화. 암살 (4)
끼이익!
"으아악!"
차량이 크게 흔들렸다.
탑차의 뒤를 추격하는 협회의 차량들.
복면인들은 추격해 오는 차량들을 향해 각종 특수 능력을 사용했다.
콰앙!
협회의 차량들이 크게 한 번 뒤집히면서 도로 위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계속 날려!"
투콰앙! 콰콰콰쾅!
탑차를 가로막은 SUV, 스포츠카, 해치백, 트럭, 버스와 오토바이까지.
복면인들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전방의 차량들을 모조리 폭발시키면서 한바탕 전쟁터를 연상시키는 광경을 만들었다.
해당 소식을 전달받은 협회는 다급히 기사단을 움직였다.
그러나 탑차가 도망치던 그 시각, 수도권 각지에서 하데스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됐다.
하데스뿐만이 아니다.
스컬을 비롯한 수많은 범죄 길드들이 가세하며 한바탕 큰 소란을 일으켰고, 대한민국은 총체적인 위기를 맞이하면서 범죄 길드의 진압에 나서야 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출동 명령을 받은 이진화는 눈앞의 광경에 그만 말을 잃었다.
수많은 차량들이 전복된 채 연기를 뿜고, 사람들이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으며, 건물과 도로가 크게 파손되어 엉망이 되어 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광경에 진화는 단원들을 향해 생존자의 구조 및 범죄 헌터들의 사살 등 각종 지시를 내리면서 몸을 내던졌다.
투콰앙!
"이 X새끼들아!"
그녀는 욕설을 토해 내며 특수 능력을 사용하는 범죄 헌터에게 달려들었다.
서걱!
"처... 청룡 기사단이다! 전원, 물러나!"
진화의 등장과 동시에 물러나기 시작한 범죄 헌터들.
그녀는 단원들을 향해 목청껏 소리쳤다.
"한 놈도 살려 두지 마! 전부 죽여 버려!"
테러를 저지른 범죄 헌터에게 더 이상 인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생포가 아닌 살상 명령을 내린 진화.
그것은 다른 부대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청룡 기사단과 백호 기사단 및 대테러 부대가 움직인 덕분에 사태는 1~2시간 만에 진압됐다.
피해자들은 군인과 경찰 및 구급대원으로부터 구조를 받았고, 협회는 대규모 길드들에게 범죄 길드의 소탕 작전에 협조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육군과 해군이 움직이며 국내 전체가 들썩이던 그 시각.
우진혁을 포함한 데스펠 제3 인사팀원들은 보령 쪽에 위치한 오래된 창고에서 내렸다.
"도... 도시 한복판에서 그런...."
진혁은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중얼거렸다.
"어이구, 귀한 분들이 오셨네."
진혁의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는 하데스 제2 지부장, 도승호.
그가 고개를 한 번 까딱이자, 주변에 서 있던 정장의 사내들이 진혁의 일행을 바닥에 꿇렸다.
쿵!
"크윽...!"
"너희들 덕분에 박강석 씨가 많~은 돈을 쓰셨어요. 우리 하데스랑 스컬, 그 밖에 중소 규모의 범죄 길드들까지 움직이면서 한 3~400억 원 정도 사용하셨던가?"
진혁이 몸을 움찔거렸다.
자신들을 구조하기 위해 3~400억 원이라는 현금을 사용하다니!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채 모르쇠로 일관할 것이라 생각했던 진혁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그러면 저희들은...."
"그래, 보내 드려야지."
승호의 환한 미소에 진혁의 얼굴이 밝아졌다.
"저세상으로 말이야."
서걱!
진혁은 자신의 발목이 베인 순간, 눈을 크게 뜨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악!"
동시에 제3 인사팀원들 역시 손목과 발목이 베이면서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 죽겠네. 아가리 좀 다물게 해라."
진혁과 그 일행에게 재갈을 물린 정장의 사내들.
이내, 소름 끼치는 고문이 시작됐다.
"으으읍! 으... 으으으윽!"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30억을 받고 중국으로 가면 되는 거잖아!
진혁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런 진혁을 향해 씨익 웃으며 금니를 보인 승호.
"우리가 열심히 준비한 최고급 마사지는 어떤 기분이지?"
"으읍...!"
진혁은 바닥을 기어 승호의 신발에 얼굴을 붙이면서 살려 달라 애걸했다.
"그러게 왜 잘못된 정보를 줘서 기사단을 움직이게 만들어. 덕분에 우리 쪽도 엄청난 손해를 봐야 했다고."
"으읍! 으으으읍!"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듯 고개를 거칠게 가로젓는 진혁의 모습에 승호는 눈매를 초승달처럼 휘며 그의 머리를 짓밟았다.
"으... 으으...."
"이거 보여?"
승호가 왼팔을 들어 보였다.
"네놈의 거짓 정보 때문에 내 왼손이 잘렸거든."
"...."
"나는 말이야, 당한 건 100배로 갚아 주는 사람이라서... 그러니 100번 정도 잘리면 용서해 줄게."
승호의 살벌한 미소에 진혁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 * *
수도권에서 테러가 일어나고 4~5시간이 지났다.
데스펠은 모든 길드원들을 투입해 피해자들을 구조하기 시작했고, 100억 원을 기부하는 것으로 여론의 흐름을 조금씩 가져왔다.
데스펠의 마스터, 박강석은 지출된 비용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쯧, 쓰레기 하나 때문에 쓸데없는 지출이 생겨 버렸군."
범죄 헌터들을 움직이는 데 든 비용은 무려 374억 원.
게다가 100억 원의 기부액까지 포함하면 무려 474억 원의 현금을 지출한 셈이다.
"그래도 제3 인사팀은 무사히 빠져나간 모양입니다."
"확실하게 처리하라 전해 둬."
"알겠습니다."
"그리고 데스펠 길드와 관련된 모든 문서들은 지금 당장 불태워 버리라고... 아니, 말해 봐야 입만 아프겠군."
"예, 안 그래도 하데스 길드에 말을 해 봤습니다만, 각 지부에서 본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데스펠의 약점을 잡아 두려 했었다며, 본부 측에서는 지금 당장 각 지부를 조사해 관련 문서들을 모두 폐기 처분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태준의 보고에 강석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놈들도 해당 자료를 함부로 공개할 순 없을 거야. 우리도 놈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보다 하데스에서 실패했던 의뢰가 뭐였지?"
"흑월의 길드 마스터 및 30명의 길드원을 암살하는 것입니다."
"흑월?"
"1~2년 전에 만들어진 신생 길드입니다. 11월에 갱신된 길드원의 서열은 대부분 3~40만대입니다."
"쓰레기들이군."
"예, 하지만 길드 마스터인 박건혁은 현재 3,192위의 서열로,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 외 주목할 만한 길드원으로는 간부 중 한 명인 김유진 헌터입니다만... 이번 달 78,399위가 되었다고 합니다."
강석은 살짝 흥미를 일으켰다.
서열 3천대의 헌터가 3~40만대의 헌터들을 길드원으로 두고 있다?
설마, 길드원 전원을 짐꾼으로 활용하고 있는 건가?
그러나 이어지는 태준의 보고 내용에 강석이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짐꾼을 헌터로 키운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길드원의 숫자는 85명... 이었으나, 청계산 게이트에서 하데스와의 충돌로 78명까지 줄었다고 합니다. 박건혁의 특수 능력은...."
강석은 태준의 보고에 듣기 싫다는 듯 휘휘 손짓을 했다.
"됐어. 짐꾼을 헌터로 키운다니.... 그런 멍청한 놈은 그냥 내버려 둬."
"하지만 그의 성장세를 고려하면...."
"야망도 없는 놈한테 시간을 쏟아 봐야 아까울 뿐이지. 그냥 열심히 유치원 놀이나 하라고 해."
태준은 보고서에 그려진 그래프를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2년이란 시간으로 56만대에서 3천대까지 치고 올라온 것은 충분히 주목할 만했다.
짐꾼의 대우를 개선하고자 하는 모습은 거슬리지만, 그렇다고 내버려 두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인재다.
그러나 강석은 태준의 설득을 듣지도 않고 못을 박아 버렸다.
'후우, 스카우트는 한동안 보류해 둬야겠군.'
태준은 두 눈을 감은 채 속으로 한숨을 토해 냈다.
* * *
"이... 이게 무슨 X 같은...."
나는 TV를 보며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데스펠의 마스터, 박강석의 기자 회견은 이해할 수 있다.
꼬리 자르기는 고위층의 특기 중 하나니까.
그러나 데스펠 제3 인사팀원들이 수송차로 이송되던 도중 하데스와 범죄 헌터들의 테러가 시작됐다.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현장.
나는 털썩 소파에 주저앉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지부를... 괜히 건든 건가?'
1만여 명의 사상자가 속출한 테러 사건.
사망자만 1천 명을 넘는다고 한다.
데스펠은 테러를 기회 삼아 구조 작업에 협조하고, 100억 원을 기부하면서 이미지를 한순간에 뒤집었다.
게다가 꼬리 자르기까지 성공했으니, 그들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일이리라.
'X발, 하데스 본부의 위치는 원작에서도 안 나왔었는데....'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TV를 바라봤다.
비슷한 내용의 뉴스가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테러를 당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한편, 내 옆에서 뉴스를 보고 있던 수영이는 눈을 크게 뜬 채 얼굴을 굳혔다.
1회차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이 수두룩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녀의 혼란스러운 표정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팔짱을 꼈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테러 소식은 해외에서까지 보도되었고, 악화된 치안을 완화시키기 위해 정부는 총전력을 움직여 범죄자들을 진압했다.
동시에 6~8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범죄 헌터들.
정부는 엄격한 모습으로 범죄 헌터들을 다스렸다.
테러 사건이 서서히 마무리되고, 흑월이 활동을 재개할 무렵.
나는 각성 능력 검사를 다시 한번 건너뛰었다.
"또, 몇 개월 뒤에 검사를 받으실 생각인 건가요?"
B등급 게이트 공략을 함께하게 된 유진.
그녀는 마석을 채취하는 나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나는 리자드맨으로부터 마석을 뽑아낸 후,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내년 10월에 검사를 받을 생각입니다."
"...1년이나 건너뛰시게요?!"
정부는 협회에 등록된 헌터들이 1년에 1번 이상 각성 능력 검사를 받도록 법률을 제정했다.
그러니, 정확히 1년 후인 2019년 10월 중에 검사를 받을 예정이다.
얼마나 성장했는지는 스테이터스를 통해 수치로 확인할 수 있으니, 서열 역시 대략이나마 예측할 수 있겠지.
"이동하겠습니다."
유진은 나를 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제가 따라온 의미가 있나요?"
농민 골렘 3기를 짐꾼으로 활용하고, 기사 골렘 10기를 전위에, 마법 기사 골렘 3기를 후위에 배치시켰다.
말 그대로 1인 공략팀이다.
심지어 부산물의 채취에 기사 골렘들이 가세하면서 유진은 할 일이 거의 없어졌다.
"유진 씨도 기사 골렘들과 함께 마수들을 상대해 주셨잖아요."
유진이 쓰게 웃었다.
"제가 없어도 특별히 달라지는 건 없는 거 같은데요. 물론, 저한테는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이긴 하지만...."
"저도 유진 씨와 함께하면 마음이 든든해요. 그리고 유진 씨가 강해지면 흑월이 강해지는 거잖아요. 저한테도 이득인 셈이죠."
"그건...."
스윽.
나는 오른손을 들어 유진의 말을 잘라 냈다.
그러곤 전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번에는 꽤 많네요."
숲속과 늪지대에서 서식하는 리자드맨.
나는 마법 기사 골렘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입을 뻥긋거리면서 소리 없이 주문을 외우는 마법 기사 골렘들.
잠시 뒤, 지름 3m가량의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리자드맨의 무리를 덮쳤다.
콰앙!
-캬하아아악!
리자드맨들이 뱀처럼 긴 혓바닥을 내밀며 소리를 내질렀다.
"공격!"
내 지시에 기사 골렘과 유진이 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빙마검을 휘두르며 골렘들이 리자드맨을 쓰러트릴 수 있도록 서포트를 해 주었다.
왜냐고?
몇 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빙마검의 스킬 레벨이 오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얼음 골렘 소환'의 스킬 레벨을 높이는 편이 낫겠지.
제46화
46화. 분란 (1)
푸푸푹!
-캬하악!
수십 개의 얼음 화살이 리자드맨들에게 꽂혔다.
역시, 후방 지원이 존재하니 마음이 든든하네.
게다가 B랭크 마수의 가죽을 뚫는 위력적인 공격.
나는 씨익 웃음을 보이면서 리자드맨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렸다.
이내.
촤아악!
리자드맨의 사지를 분리시키고, 기사 골렘에게 녀석을 넘겨줬다.
도합 17마리의 리자드맨 무리를 토벌한 우리는 곧바로 부산물의 회수 작업에 들어갔다.
리자드맨 한 마리를 겨우 쓰러트린 유진.
그녀는 작게 한숨을 토해 내며 리자드맨의 단단한 가죽을 만지작거렸다.
"리자드맨의 가죽은 꽤 비싸겠죠?"
"마리당 150만 원에서 160만 원 정도로 처분할 수 있다 들었습니다."
"...비싸네요. 골렘이 없었더라면 아마 전부 챙겨 가지 못했을 것 같아요."
"제가 회수한 가죽들은 추후 갑옷으로 만들 예정입니다. 길드원들이 C등급 게이트를 공략하기 시작한 만큼 안전에도 유의를 해 둬야겠죠."
얼마 전에 일어난 청계산 게이트 암살 사건.
8명의 동료를 잃은 끔찍한 사건이다.
유진 역시 해당 사건을 떠올린 것인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럼, 제 것도 가져가 주세요."
"유진 씨 몫은 제가 개당 150만 원에 구매하도록 하겠습니다. 처음부터 그럴 마음이었거든요."
"그냥 가져가세요. 길드원들의 안전을 위한 거라는데... 팀장으로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야죠. 게다가 저는 오늘 회수한 마석만으로도 충분해요. 이것만으로도 2천만 원은 가볍게 넘을걸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감사도 괜찮아요. 제가 마스터 덕분에 번 돈이 얼마인데요. 그리고... 목숨값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목숨값이라고?
나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도 동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슬슬 이동하죠. 갑옷을 만들려면 적어도 10개는 더 필요하니까요."
가죽 하나당 2명분의 갑옷을 제작할 수 있다.
상체만을 보호해 줄 뿐이지만, 생존율은 크게 올라갈 것이다.
갑옷의 재료가 리자드맨의 가죽이라면 더더욱.
우리는 43마리의 리자드맨을 토벌한 뒤에야 게이트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게이트를 빠져나온 시각은 오후 6시 13분.
마석을 처분하자, 내 계좌에는 1억 3,200만 원이 입금됐다.
또, 3,800만 원을 입금받은 유진.
그녀는 살짝 헛웃음을 터트리면서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역대 최고 기록이네요."
"저도 이 정도 금액은 처음이네요. 그보다 가죽들은 실력 있는 장인한테 맡겨 두도록 하겠습니다."
"아, 비용의 일부는...."
"아니요, 가죽을 제공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갑옷은 추후 길드의 비품으로 등록해 길드원들에게 대여를 해 주는 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예, 좋은 생각이에요. 그보다 정말로 괜찮으시겠어요? B랭크 가죽을 갑옷으로 만들려면 상당한 비용이 들 텐데...."
유진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나는 일전에 조사해 둔 정보를 입으로 내뱉었다.
"찾아보니 개당 1천만 원 정도가 든다고 하더군요. 43개의 가죽을 모두 갑옷으로 만든다면, 86개의 가죽 갑옷이 만들어질 테니... 최대 9억 원 정도가 필요하겠네요. 그 정도는 충분히 투자할 수 있습니다."
하루 만에 1억 3천만 원을 벌었다.
게다가 여러 통장에 들어 있는 현금들을 합하면 7~80억 원은 족히 넘을 터.
길드를 위해 9억 원 정도도 투자하지 못할까?
"...앞으로는 길드원들한테 일정액의 수수료를 받는 게 어떨까요?"
"길드 사무소의 유지 관리 비용 중 30%는 길드원들이 받는 보수에서 수수료를 떼어 내 사용되고 있습니다."
"나머지 70%는 마스터의 자비잖아요!"
"세금이 낮은 만큼 조금 더 낼 뿐입니다."
내 대답에도 유진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본래 길드에 가입된 헌터들은 보수의 5~10%를 수수료로 길드에 지불한다.
그것은 전 세계가 비슷했다.
길드에 가입해, 실력 있는 헌터들과 주기적으로 한 단계 높은 게이트를 공략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매력적인 일이니까.
5~10%의 수수료는 별것도 아니겠지.
한편, 흑월은 길드원들로부터 1~2% 정도의 수수료만을 지급받아 왔다.
그렇게 길드원들로부터 걷은 수수료는 매달 1천만 원 정도뿐.
사무실의 월세, 직원들의 급여 및 다양한 부대 비용까지 고려하면 사무실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은 3~4천만 원 정도가 된다.
사무실을 유지하기 위해 자비로 매달 2~3천만 원씩 지불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서열이 3천대까지 오르면서 세율이 1.1%까지 줄었는데... 이 정도도 지불하지 않으면 마스터로서 체면이 안 살잖아.'
금일 리자드맨을 토벌하면서 지불한 세금은 146만 원 정도다.
1억 3,346만 원의 보수 중 세금으로 지불한 것이 146만 원이라는 것이다.
이 정도면 세금을 낸다는 생각으로 B등급 게이트에 들락거릴 때마다 200만 원씩 추가로 지불한다 생각하면 되잖아.
한 달에 10번이면 2,000만 원이 될 테니까.
유진의 불만도 이해는 한다.
그러나 보수가 낮은 길드원들에게 더 많은 수수료를 지불하라는 건 살짝 불편하게 느껴졌다.
호구처럼 느껴지더라도 최소한의 호의는 보여도 괜찮겠지.
물론, 호의를 권리처럼 받아들인다면....
'그때 가서 5%로 높이면 돼. 최악의 경우에는... 강제 탈퇴를 시키거나.'
나 역시 무조건 베풀어 주는 사람은 아니다.
선만 넘지 않는다면 호의는 계속되겠지.
"아무튼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목요일에 뵙도록 할게요."
"...네, 수고하셨어요."
* * *
2018년 12월 24일 월요일.
크리스마스이브로 연인들이 한창 데이트를 즐기던 시각.
흑월의 길드원들에게 리자드맨 가죽으로 만들어진 갑옷이 지급됐다.
"해당 갑옷은 김유진 헌터와 함께 마련한 길드의 비품으로 여러분들의 안전을 위해 대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여라면 언제까지...."
1조 조장인 원석의 물음에 나는 팀원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길드에서 활동하는 동안은 소지하고 계셔도 상관없습니다. 단, 길드를 탈퇴할 경우에는 반드시 정비 및 세척 후에 반납하십시오. 추가로 정비와 세척은 반드시 수성에서 운영하는 갑옷 매장에 맡기도록 하세요. 영수증을 제출하신다면 사무실에서 50%까지는 환급해 드릴 겁니다."
팀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건혁은 팀원들과 함께 C등급 게이트에 들어갔다.
오전 동안 홀로 수십 마리의 마수를 토벌하면서 주의할 부분, 마수들의 약점, 전투 방법 등을 팀원들에게 설명해 준 건혁.
오후에 재개된 공략에서 1조와 2조는 훌륭한 성과를 보여 주었다.
'C랭크 마수를 이렇게까지 수월하게 쓰러트린다고?'
건혁이 미간을 좁힌 순간, 옆에서 3조 조장이 씨익 웃으며 다가왔다.
"마스터가 김유진 팀장님과 B등급 게이트에 가셨을 때, 저희도 D~C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면서 실력을 키웠습니다."
"더 이상 무력하게 동료를 잃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맞습니다. 지금은 비록 짐꾼에 불과하지만...."
3조 조원들의 목소리에 건혁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랬었군요. 내년에는 1~3조를 모두 전투조로 움직일 생각이었습니다만,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확신이 서게 됐습니다."
"예? 세 조를 모두 전투조로 움직인다면, 짐꾼은...."
"골렘들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3조 조원들로부터 작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또, 각 팀에 매달 5급 포션을 10개씩 보급할 예정입니다. 여러분들이 강해질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을 해 드리겠습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 주시는 겁니까? 마스터라면 분명 더욱 뛰어난 헌터들을 스카우트할 수도 있었을 텐데...."
"짐꾼이 헌터가 될 수 있는 사례를 만들고 싶다는 것 역시 한 가지 목표입니다. 짐꾼들이 자신의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뛰어난 헌터가 되어 다른 짐꾼들을 이해해 줄 수 있다면, 대한민국의 헌터계가 한 단계 발전하지 않을까요?"
"그건...."
"또, 저는 그저 실력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라, 짐꾼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동료를 배려할 수 있으며,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가 필요합니다."
3조 조원들은 표정을 굳힌 채 주먹을 쥐었다.
무언가를 각오한 듯이.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건혁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가 공격해 오더라도 자신을 지키고, 동료를 지킬 수 있는 힘을... 두 번 다시 무력하게 동료를 잃지 않을 힘을 가지도록 노력해 봅시다."
그의 힘 있는 목소리에 3조 대원들이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한편, 1조와 2조의 전투가 마무리되자, 건혁은 기사 골렘들을 소환하여 3조와 함께 부산물 회수에 가세했다.
회수 작업은 불과 10분 만에 마무리됐다.
"이동하겠습니다!"
1조와 2조는, 부산물을 챙겨 든 농민 골렘과 3조를 호위하는 기사 골렘들을 바라보면서 작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저 정도면 혼자서도 B등급 게이트를 공략할 수도 있겠네.'
'김유진 팀장님도 7만대까지 올라서셨지만, 마스터는 정말로 격이 다르구나.'
'그보다 11월에 각성 능력 검사를 안 받으신 건가? 12월 달 서열이 조금 떨어지셨던데... '
'또 얼마나 놀라게 해 주시려고.... 다음에 검사받으면 1,000위 안에 들어서는 건 아니겠지? 아니, 지금의 성장세를 생각해 보면 가능성은 있을지도....'
그들은 공략을 진행하면서도 건혁의 성장에 기대를 품으며 미소를 지었다.
흑월은 강해질 것이다.
대규모 길드에 못지않게 말이다.
단지, 자신들이 박건혁의 뒤를 쫓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뿐.
제1팀의 팀원들이 사기를 높이며 가슴에 불꽃을 지핀 그때.
크리스마스가 지나 신년이 다가오며 제3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보수의 비율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진 모양이다.
전투에 많이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높은 비율의 보수를 가져가게 된 유진.
그녀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유진은 단지 사무실에서 분배해 준 비율에 따라 보수를 받았을 뿐이니까.
"후우, 비율을 조정해 봐야겠군요."
건혁은 1월 4일 금요일에 진행된 팀장 회의에서 비율을 약간 조정했다.
"앞으로 팀 내의 정산 비율은 팀장의 권한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제3팀의 불화에 대해서는 김유진 헌터님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괜찮아요."
제3팀은 비율이 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유진의 비율이 40%나 된 탓일까?
몇몇 길드원들은 불만을 가지고 유진에 대한 악평을 건혁의 이메일로 송신했다.
"앞에서 몇 마리 잡지도 않는 주제에 왜 40%나 가져가는 거야?"
"30%였으면 조금이나마 이해하긴 했을 텐데... 40%는 선 넘었지."
"그래도 60%에서 40%까지 떨어진 거면 마스터랑 팀장들도 꽤 신경을 써 준 것 같은데...."
"그럼, 너는 계속 그렇게 받든가. 이런 부조리함은 바로바로 잡아야 해. 나중에는 팀장들이 80%까지 걷어 갈걸?"
제3팀에서 보내온 12개의 익명 메일에는 욕설, 폭행 등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행위를 잦게 행하는 김유진에 대한 이야기가 길게 쓰여 있었다.
이게 과연 사실일까?
건혁은 1년 이상을 유진과 함께 게이트를 공략했다.
자신이 아는 유진이라면 이런 짓을 함부로 저지르진 않았을 터.
"후우, 세형 씨랑 유리 씨를 제3팀에 넣어 두길 잘했네."
제47화
47화. 분란 (2)
건혁은 제3팀 1조 조장인 세형에게 전화를 걸어 메일의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예? 김유진 팀장님께서 욕설에 폭행... 도대체 누굽니까? 그런 헛소리를 한 사람이.
"제3팀에서 보내오긴 했습니다만, 익명으로 처리되어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하아, 그냥 전부 무시해 주십시오. 김유진 팀장님이 욕설을 하신 적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때는 팀원들이 불화를 일으켜 동료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욕설로 끝나서 다행인 거죠. 저 같았으면 진짜... 어휴!
"그렇군요."
―도대체 누가 그런.... 설마, 보수의 비율 문제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겠죠?
세형의 의문에 건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각 팀장의 비율을 40%까지 낮췄습니다. 60%에서 40%까지 낮췄는데, 여기서 더 불만을 가질 리는 없을 겁니다."
―그러면 다행이지만....
"일단, 한동안은 팀원들을 주시해 주십시오. 다음 주 월요일 협회에 연락해 해당 메일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런 거짓말로 김유진 팀장을 몰아내려는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내쫓는 게 길드를 위한 일일 겁니다."
건혁이 차갑게 말했다.
그에 세형 역시 동의한다는 듯 수긍해 보였다.
한편, 제3팀 3조 조장인 박유리에게 역시 사실 여부를 확인한 건혁.
유리는 분개한 목소리로 메일을 보낸 사람들을 비난했다.
―처음에야 조금 불편했지만, 지금은 길드원들의 안전에 유의하면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어요! 그런 사람을 몰아내려고 한다니....
"예, 알겠습니다. 박유리 조장님도 한동안은 조용히 팀원들을 잘 주시해 주세요."
―알겠어요. 그런 사람들이 우리 길드에도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네.
그녀의 투덜거림에 건혁은 작게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싸늘한 얼굴로 메일을 살펴봤다.
도대체 누구일까?
길드 내에 불화를 가져오려는 사람들이.
건혁은 제2팀 팀장인 태형과 조장을 맡은 지수, 현민, 지혜에게도 해당 사실을 알리면서 팀원들을 자세히 주시하라고 일러두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 새로운 익명 메일들이 도착했다.
"허, 정말로 정산 비율로 불만을 가진 거였어?"
건혁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메일의 내용을 읽었다.
김유진 헌터의 갑질을 폭로하는 내용은 물론이고, 40%의 비율을 가져갈 정도의 활약이 없었다는 내용들이 빼곡하게 기입되어 있었다.
김유진이 왜 마수를 흘려보내 주는 것인지, 정말로 모르는 건가?
게다가 그녀의 존재는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위험한 마수가 나타났을 때,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길드원들을 지켜 줄 수 있는 안전장치.
한번 생각해 보자.
서열 3~40만대 헌터들만으로 구성된 집단이 C등급 게이트를 공략할 때와 서열 7만대 헌터가 그들과 함께하고 있을 때의 경우를 말이다.
'낮은 서열의 헌터들이 높은 보수를 지불하면서 고위 헌터를 고용하는 걸 본 적이 없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고자 고위 헌터를 고용하는 길드는 다수 존재한다.
반면, 유진의 경우에는 팀원들의 성장을 도와주면서 만약의 경우까지 대비하는 중이었다.
더욱 높은 보수를 주어도 모자랄 판국이지.
실제로 유진이 홀로 C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면 과연 얼마나 벌 수 있을까?
지금 받는 보수의 2~3배도 손쉬운 일일 것이다.
'모처럼 7만대 헌터가 시간 들여 버스를 태워 주고 있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지.'
건혁은 진심으로 분노했다.
동시에 각 팀장들의 정산 비율을 50%로 상향시켰다.
제1팀과 제2팀은 정산 비율의 갑작스러운 상승에 의문을 품었다.
이내, 길드원들의 지원이 아닌 대대적인 토벌을 시작한 각 팀의 팀장들.
촤아아악!
"가... 갑자기 왜 저러시는 거야?"
제1팀 팀원들은 박건혁의 학살극에 살짝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홀로 수십 마리의 오크들을 토벌해 내는 건혁.
그뿐이랴.
그는 골렘들과 함께 8~90여 마리가 살고 있는 고블린 부족을 공격했다.
-쿠워어어!
고블린 장군의 우렁찬 포효에 건혁이 싸늘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시끄러워."
서걱!
끼어들 새 없이 고블린 장군과 92마리의 고블린을 홀로 쓰러트린 건혁의 대학살극.
팀원들이 어깨를 살짝 움찔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무엇이 건혁의 심기를 건드린 걸까?
건혁은 최대한 딱딱한 표정을 유지하며 FM대로 공략을 시작했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갑자기 저렇게 기분이 나빠지신 거야?'
팀원들의 의문에도 건혁은 묵묵히 마수들을 토벌해 토벌 수의 8할을 가져갔다.
제2팀의 경우에는 팀장인 태형과 제1조 조장인 지수, 제2조 조장인 현민이 활약을 펼쳤으며, 제3팀은 김유진의 미친 듯한 폭주로 토벌 수의 9할을 차지했다.
금일 저녁, 건혁은 협회의 홈페이지 관리자로부터 메일을 건네받았다.
다행히 익명의 악성 제보자에 대한 메일 주소를 확인해 볼 수 있다는 모양이다.
물론, 여러 절차를 밟아야 하기 때문에 협회에 방문해 달라는 문구가 기입되어 있었다.
―네, 무슨 일이세요?
"내일은 게이트 공략을 쉬려고 합니다."
―아, 무슨 일이....
"예, 잠시 협회에 방문해야 될 일이 생겨서요."
건혁은 유진과의 약속을 취소하고, 아침 9시경에 협회를 찾아갔다.
길드 문서 및 헌터증을 제시하고, 메일 내용을 복사한 A4용지와 익명 제보자의 메일을 확인하려는 사유 등을 협회 직원에게 말하면서 메일 확인을 신청했다.
"원칙적으로 개인 정보 보호법에 따라 메일 주소 확인은 불가능합니다만, 익명 제보자의 메일이 흑월 제3팀에 소속되어 있다고 뜨네요."
길드 마스터에게는 익명으로 보낸 길드원의 메일 주소를 확인할 수 있다는 특례가 존재했다.
회원 가입할 때에도 명시되어 있는 사항이지만, 누가 회원 가입을 할 때 약관 동의의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겠는가.
직원은 익명의 메일 주소를 확인한 뒤, 프린트하여 건혁에게 건네주었다.
확인이 가능한 개인 정보는 메일 주소와 성명뿐.
물론, 그거면 충분하다.
건혁은 협회를 빠져나와 팀장들을 길드 사무실로 호출했다.
제일 먼저 길드 사무실에 도착한 건혁은 노트북을 준비했다.
잠시 뒤, 소회의실을 찾아온 유진.
"오늘 협회에 방문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예, 조금 전에 용무는 마쳤습니다. 그보다 앉아서 이걸 먼저 확인해 주세요."
건혁의 딱딱한 말투에 유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노트북 화면을 살펴봤다.
"며칠 전, 김유진 팀장님이 팀원들에게 욕설 및 폭행을 가했다는 익명 제보가 도착했습니다. 또, 비율 문제를 거론한 팀원들도 있었죠."
"이... 이게 무슨...."
충격을 받은 유진이 고개를 홱 들어 건혁을 바라봤다.
"저는 이런...!"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김유진 팀장님과 1년 이상을 함께했는데, 고작 메일 몇 개로 단정을 지을 순 없겠죠. 때문에 1조 조장인 노세형 씨와 3조 조장인 박유리 씨에게도 확인을 해 봤습니다."
"아...."
"두 분께서는 김유진 팀장님께서 그동안 팀원들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를 적극적으로 증언해 주시더군요. 그래서 메일을 보낸 사람들을 길드에서 내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유진은 세형과 유리가 자신의 편을 들어 주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메일을 보낸 사람들입니다."
메일 주소 및 성명이 기입된 A4용지를 유진에게 넘겨준 건혁.
유진은 용지를 바라보면서 두 눈을 감았다.
"...모두 2조에 속해 있는 헌터들이에요."
"해당 헌터들을 모두 강제 탈퇴를 시킨 다음, 제1팀에서 인원을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금요일 게이트 공략은 취소하고, 길드원을 모두 소집시켜 이번 사건에 대한 경고를 하죠."
"...."
흑월에 들어오면 무언가가 바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팀원들로부터 받은 배신 때문일까?
그녀는 로스터 길드에서 받은 트라우마를 되새기며 눈물을 흘렸다.
건혁은 두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그녀가 눈물을 훔칠 무렵, 제2팀 팀장인 김태형이 소회의실로 들어왔다.
"어, 무슨 일...."
울먹이는 유진의 모습에 태형이 몸을 움찔거렸다.
건혁은 그에게 착석을 권하며 유진에게 한 이야기를 그대로 말해 주었다.
이내, 험상궂게 일그러진 태형의 얼굴.
"내일의 게이트 공략 역시 취소하겠습니다. 단체 문자를 보낼 예정이니 두 팀장님께서는 그렇게 알아 두십시오."
"알겠습니다."
태형이 살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유진은 여전히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째서지?
정말로 비율 때문에 이런 메일을 건혁에게 보냈다고?
차라리 자신에게 직접 말해 주었다면 직접 조정을 해 봤을 텐데....
지금까지의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된 듯한 기분이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김유진 팀장, 고개 숙이지 마세요. 호의를 권리라고 착각한 사람들의 어리석음 때문이지, 당신이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쓰레기들을 거를 수 있으니 길드에게는 큰 이득이 될 겁니다."
건혁은 곧바로 길드원 전원에게 전체 문자를 보냈다.
내용은 간단했다.
수·금요일 게이트 공략이 취소되었으며, 금요일 역삼동 OO아카데미의 A강의실로 모여라.
길드원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마음에 길드 사무실로 연락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흑월 제1팀 제2조에서 활동 중인 OOO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왜 갑자기 게이트의 공략이 취소된 건지....
"마스터께서 중요한 공지가 있을 것이라고만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저희들도 전달받지 못해서...."
―...그런가요.
"예, 일단 금요일 오전 10시까지 OO아카데미 A강의실에 출석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길드원들은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지 못한 채 궁금증에 시달려야 했다.
한편, 김유진에 대해 허위 제보를 한 길드원들은 서로에게 연락을 걸며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자신들의 제보가 거짓임을 마스터가 안 것이 아니냐는 듯이 말이다.
―그러고 보니 1조 조장님과 3조 조장님은 마스터와 함께한 시간이 길잖아요! 저희가 보낸 메일이 그분들에게까지 전달되었다면....
"조금 전, 협회에 문의를 해 보니까, 개인 정보 보호법에 따라 익명으로 보낸 메일주소를 누군가가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어요. 얌전히만 있으면 괜찮을 테니, 함부로 누군가한테 말하거나 하지 마세요.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흑월을 나가면 되잖아요!"
―그건....
"우리도 40만대 서열에다가 전투 경험도 많으니, 임시 공략대에 들어가 헌터로 활동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소규모 길드에 가입하거나...."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까 40만대 헌터 중에서 우리만큼 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했어요! 진짜, 왜 마스터한테 그런 메일을 보내자고 해서....
"당신도 동의했잖습니까! 왜 제 탓을 하고 그래요!"
―당신이 선동하지만 않았으면 이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어요!
허위 제보를 한 헌터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말다툼을 벌였다.
뒤늦게 후회가 일어난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그냥 얌전히 있었다면 평소처럼 높은 월급을 받으면서 성장에 집중할 수 있었을 텐데.
월요일에 보인 김유진 팀장의 학살극.
'설마, 7만대의 헌터가 그렇게까지 강할 줄은....'
D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던 제3팀은 김유진의 폭발적인 전투에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그동안 마수를 뒤로 흘려 주던 그녀가 왜 갑자기 그런 이상한 모습을 보였을까?
표정과 말투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혹시 몰라 제1팀, 제2팀의 길드원들과 메일을 주고받은 결과.
두 팀의 팀장들 역시 비슷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특히, 마스터인 박건혁은 홀로 7천만 원에 가까운 수익을 만들어 냈다.
제48화
48화. 분란 (3)
"X발,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울상을 지으면서 입술을 잘근 깨문 허위 제보자 1, 유진천.
그는 불안한 마음에 다시 한번 인터넷을 검색해 봤다.
익명으로 메일을 보낼 경우 받은 사람이 메일의 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지, 40만대 헌터의 평균 월수입은 어느 정도인지 등.
2~3시간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진천은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다시 한번 울상을 지었다.
"아씨, 왜 그 사람 말을 들어 가지고...."
팀장의 비율이 40%까지 내려간 것을 보고 아무래도 마음이 혹한 모양이다.
김유진 팀장이 그동안 마수를 후위로 흘려보낸 이유가 게으름 탓이라 생각했던 그는 협회 게시판에 익명으로 질문을 남겼다.
잠시 뒤, 댓글을 남긴 몇몇 헌터들.
<게으름은 무슨... 한 마리씩 잡으라고 앞에서 조절해 준 거네.>
<길드 이름 좀 알려 주세요.>
<승객 주제에 버스 기사한테 게으르다고 하넼ㅋㅋㅋ>
<40만대가 D등급 게이트를 공략한다고? 듣보잡아, 앞에서 마수를 한 마리씩 보내 주면 '감사합니다.' 하면서 받아먹어야지. 여기서 게으르다 뭐 하다 글이나 싸지르냐?>
임시 공략대는 이미 수차례 들어간 적 있다.
허위 제보를 한 일곱과 함께 말이다.
단지, 공략하던 게이트가 F~E등급이었을 뿐.
게다가 실력자가 있었기 때문일까?
진천은 어려움 없이 무난한 공략을 진행할 수 있었다.
보수는 50만 원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 그럼 정말로 우리를 성장시켜 주려고 그런 거였어?"
허위 제보를 선동하며 유진의 게으름을 비판했던 서열 418,411위의 헌터, 이가윤.
그녀는 평소에도 유진에 대한 악담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 와중에 마수를 뒤로 흘려보내는 유진이 보수의 60%를 가져가니, 얼마나 아니꼽게 보였을까.
진천은 월요일에 보인 유진의 학살극과 협회 게시판의 댓글을 보곤 가윤과 함께한 것에 후회와 자책을 느끼면서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제길...."
이제 와서 후회해도 늦었다.
차라리 마스터에게 찾아가서 자수를 할까?
하지만 금요일에 발표할 중요한 공지가 메일에 관련된 게 아니라면?
진천은 금요일 OO아카데미에 도착하기 전까지 울상을 지으며 불안에 떨어야 했다.
"왜 갑자기 게이트 공략이 취소된 거지?"
"그러게. 위약금도 꽤 비싸다고 하던데...."
"월요일에 너희 팀장님 괜찮으셨냐? 우리 팀 팀장님은 완전 대학살을 벌이셨거든."
"우리 팀은 팀장님이랑 조장님들이 한바탕 난리를 치셔 가지고 팀원들 분위기 존X 삼엄했어."
"이게 뭔 난리야? 제1팀에선 마스터 혼자 C등급 게이트를 뒤집어 버렸다던데...."
"마스터까지?"
길드원들이 OO아카데미 A강의실로 집합한 시각.
박건혁과 두 팀장이 단상 위에 올라섰다.
"수요일과 금요일 공략이 갑작스럽게 취소된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건혁은 고개를 작게 숙인 후, 곧바로 빔 프로젝터의 전원을 켰다.
"먼저, 영상을 하나 시청하겠습니다."
스크린에 비친 동영상.
선두에서 마수를 뒤로 흘려보내는 어느 고위 헌터의 모습이 찍혀 있다.
그 순간, 허위 제보를 한 길드원들이 일제히 몸을 움찔거렸다.
그들과 눈을 한 번씩 마주친 건혁.
"선두의 헌터가 왜 마수를 뒤로 흘려보내는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후위의 헌터들에게 적절한 페이스로 마수를 토벌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아닙니까? 또는 후위 헌터들에게 마수 토벌의 경험을 시켜 주기 위해 일부러 한 마리씩 흘려보내는...."
제1팀, 제1조 조장인 원석의 대답에 허위 제보자들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설마, 유진의 행동이 후위 헌터들의 안정적인 토벌을 위해서였다니!
건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협회 홈페이지에 접속해 허위 제보의 메일들을 길드원들에게 보여 주었다.
"며칠 전, 제 메일 주소로 도착한 제보 메일입니다. 김태형 팀장님, 프린트한 것들을 길드원들에게 나누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태형은 18개의 메일을 모두 프린트해 스테이플러로 찍은 것을 길드원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30분간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읽고 계십시오."
건혁이 두 팀장과 자리를 비우자, 길드원들이 메일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내용은 가관이었다.
특히, 제3팀에 속한 길드원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얼굴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간 김유진으로부터 격려와 조언을 받은 헌터들이다.
"이... 이게 무슨 X 같은...."
가윤과 진천의 일행 역시 유진으로부터 격려와 조언을 받았었다.
단지, 그녀의 조언과 격려를 위선과 조소처럼 느끼면서 아니꼽다는 마음을 품었을 뿐.
조언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그들은 더딘 성장을 김유진의 탓으로 돌리기까지 했었는데.
진천은 뒤늦은 후회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쾅!
"어떤 새끼들이야! 어떤 X 같은 놈들이 김유진 팀장님한테 이런...!"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친 제3팀, 제1조 조장 노세형.
그의 분노에 제3팀 팀원들이 동조하기 시작했다.
"허, 김유진 팀장님이 우리한테 폭행을 했었다고?"
"욕설도 X 같은 짓을 해서 받은 거잖아! 동료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는데, 욕을 안 먹는다는 게 말이나 되냐!?"
이어, 원석이 미간을 와락 찌푸린 채 고개를 숙였다.
"청계산 게이트 건으로 마스터 기분도 꿀꿀한 와중에 이런 미친 짓을...."
"마스터랑 팀장님들이 합의해서 비율을 40%까지 낮춰 주셨잖아! 지금이야 50%로 다시 오르긴 했지만... F~D등급의 게이트를 공략하는 공략대가 안전을 위해 고위 헌터를 고용하면 원래 높은 금액의 보수를 건네준다고!"
"팀장님들의 토벌 수도 꽤 높은 걸로 아는데...."
"김유진 팀장님이 홀로 D등급 게이트를 공략할 때, 1~2천만 원을 가볍게 버신다는 건 알고 이런 문자를 보낸 건가?"
"마스터랑 B등급 게이트를 공략했을 때는 3~4천만 원까지 번 적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
길드원들이 일제히 분노를 쏟아 내자, 가윤 일행은 고개를 돌리면서 불안에 몸을 떨었다.
"하, 팀장님들이 왜 한바탕 날뛰셨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네. 김유진 팀장님이 왜 3~40만대 헌터들이랑 D등급 게이트에 들어가? 중규모 길드에만 들어가도 상전처럼 대접을 받으실 분인데."
"마스터는 대규모 길드에 들어가서 A등급 게이트를 공략하고 계셔도 이상하지 않지."
"X발, 익명 메일이라 주소는 확인이 불가능한 건가?"
"참나, 이런 기생충 같은 놈들이 우리 길드에도 있었구나."
30분간 익명 제보자들을 향해 욕설과 비난을 쏟아 내는 길드원들.
가윤은 반발할 마음조차 가지지 못했다.
조장들을 포함한 길드원 대다수가 익명 제보를 비난하는 와중에 반발 의견을 내뱉었다가는 100% 익명 제보자로 찍히고 말겠지.
뒤늦게나마 인터넷에 검색해 3~40만대 헌터들의 평균 연봉을 찾아본 가윤.
그녀는 흑월에서 받는 연봉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새삼 다시 깨닫게 되었다.
'괘... 괜찮아, 어차피 누가 보냈는지는 모르는 거잖아.'
그녀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고자, 조용히 심호흡을 하면서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제3팀 소속의 길드원들은 물증이 없어 함부로 욕할 수 없을 뿐, 익명 제보자가 누구인지를 대략적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유진의 조언과 격려를 아니꼽게 바라보던 길드원들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 제2팀의 제1조 조장인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메일 보낸 사람들 전원 자수하고, 마스터와 김유진 팀장님께 직접 사과드리세요."
지수의 말이 끝난 순간 강의실 문이 열렸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건혁의 목소리에 지수가 조용히 자리에 착석했다.
두 팀장과 함께 강의실로 돌아온 건혁.
그는 길드원들을 바라보면서 씨익 웃음을 지었다.
"이번 기회로 걸러 내야 될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에, 저는 마음이 아주 편합니다."
웃는 얼굴과는 반대로 살벌한 목소리에 길드원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길드를 창설한 이유는 신뢰할 수 있는 동료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길드 내에 '동료'로 위장한 '배신자'들이 숨어 있는 모양이더군요."
적막감이 감도는 강의실.
이내, 건혁이 미소를 싹 지우고, 매서운 눈초리로 몇몇 길드원들을 노려봤다.
"누군가를 헐뜯었다면 그에 마땅한 대가를 받는 것이 당연한 도리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요. 본래 익명 메일의 주소는 개인 정보 보호법에 따라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건혁이 말끝을 흐린 순간, 가윤의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예외가 존재하죠. 협회 홈페이지에 회원 가입을 하실 때, 모두들 약관 동의를 하셨을 겁니다."
'약관 동의'라는 단어에 길드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당 내용을 하나하나 읽어 본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할 터.
때문에 건혁이 직접 스크린에 약관의 내용을 띄워 주었다.
"익명으로 보내온 메일은 길드원일지라도 확인이 불가능하나, 길드 내에 혼란을 초래하거나 문제를 일으킬 경우, 소속된 길드원에 한하여 메일 주소 및 성명의 확인이 가능하다. 이 조항에 따라 저는 지난 화요일에 필요한 서류들을 갖추고 협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허위 제보자 8명의 명단을 확보했죠."
건혁은 명단을 손에 쥔 채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분들은 길드에서 강제 탈퇴 처리될 겁니다. 그럼, 제3팀 제2조에 소속된 이가윤 헌터, 유진천 헌터...."
8명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길드원들은 일제히 그들을 향해 비난 어린 눈길을 보냈다.
설마,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호명할 줄이야.
"호명된 여덟 분께서는 금일 강제 탈퇴 처리하겠습니다. 두 번 다시 뵙지 않기를 바라죠."
호명된 헌터들이 일제히 주범인 가윤을 노려봤다.
시선을 느낀 걸까?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이렇게 마음대로 탈퇴시키는 게 말이 됩니까?!"
건혁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건혁만이 아니다.
길드원들 역시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을 꿈틀거렸다.
"착각하고 계신 게 있는 모양이군요. 길드원의 강제 탈퇴 및 길드의 해산은 마스터의 권한으로 행사가 가능합니다.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법적으로 소송을 하세요."
"이익...!"
가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건혁은 그것을 무시한 채 강의 탁자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호명된 분들께서는 지금 당장 강의실을 퇴실해 주십시오."
"요... 용서해 주세요! 가윤 씨의 말에 혹해서 그만...!"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가윤을 제외한 7인이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다... 당신들도 내 의견에 동의했었잖아! 팀장들의 정산 비율이 40%까지 내려갔을 때만 해도 기뻐했던 주제에 왜 이제 와서 내 탓을 하는데!"
"가윤 씨가 선동하지만 않았어도 메일 같은 건 보내지도 않았어!"
"맞아, 누나가 그런 말만 하지 않았어도...!"
강제 탈퇴 선고를 받은 8인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기사 골렘 소환."
건혁은 10기의 기사 골렘을 소환해 소란을 일으키는 8인에게 위협을 가했다.
"계속해서 소란을 벌이시겠다면 50m 거리에 위치한 백호 기사단 지부에 전화를 걸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무력을 행사하신다면 골렘들에 의해 진압될 것을 알려드리며, 가능한 얌전히 강의실에서 퇴실하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가윤은 골렘들을 바라보며 몸을 움찔거렸다.
길드원들의 매서운 눈초리 역시 압박처럼 다가왔다.
이곳에서 계속 소란을 일으켜봐야 자신만 손해일 것이다.
제49화
49화. 분란 (4)
"용서를 구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보낸 메일은 길드원들과 신뢰를 쌓기 위해 노력해 온 김유진 팀장의 노력을 배신하고, 그녀의 마음을 도려낸 행위입니다."
제3팀에 소속된 길드원들은 고개를 숙이며 두 눈을 감았다.
김유진의 노력을 잘 알기 때문이다.
"결정을 번복할 일은 없으니 퇴실해 주십시오."
건혁의 차가운 목소리에 가윤이 재빨리 강의실을 뛰쳐나갔다.
그 뒤를 따라 자리를 비우는 7명의 헌터들.
마침내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건혁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지금부터 각 팀을 새롭게 편성하겠습니다."
건혁은 마우스를 움직여 사전에 준비해 둔 길드의 구조를 스크린에 띄웠다.
팀장과 조장은 그대로다.
그러나 몇몇 팀원들이 새로운 팀으로 배정됐는데.
제1팀은 과거 암살자로부터 7명의 헌터를 잃었고, 제3팀은 조금 전 8명이 강제 탈퇴를 당했다.
길드원의 숫자가 70명까지 줄어든 흑월.
"인원은 제1팀에 20명, 제2팀에 25명, 제3팀에 25명이 배정됩니다. 배정 기준은 각 팀의 활동 지역과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분들로 배정했습니다. 만약 불만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해 주십시오. 다른 분들과 상의한 후에 교체를 해 드리겠습니다."
길드원들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눈치를 살피지 않으셔도 됩니다."
건혁의 발언에도 그 누구 하나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러면... 다음 주부터는 이 구조에 따라 활동을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해당 구조도의 사진 파일은 금일 여러분들의 이메일로 보내지게 될 겁니다. 참고 삼아 확인하십시오."
건혁은 추가 전달 사항을 길드원들에게 말해 준 다음 준비해 둔 뷔페식당 식권을 한 장씩 길드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OO아카데미에서 100m 거리에 위치한 뷔페식당 식권입니다. 식권 뒷면에 식당 이름과 주소 및 지도가 있으니, 점심들 드시고 돌아가세요."
인당 32,000원으로 식사를 할 수 있는 뷔페식당의 식권.
온종일 딱딱한 표정을 짓던 길드원들의 얼굴에서 작은 미소가 피었다.
"그럼,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이만 해산하셔도 됩니다."
길드원들이 무리를 지어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이내, 건혁의 주변으로 모여든 두 팀장과 아홉 명의 조장들.
"하아, 드디어 조장직을 내려 둘 수 있게 됐네요."
며칠 전까지 제1팀 제3조 조장직을 맡았던 다은.
건혁은 새롭게 편성한 구조에서 제1팀 제3조를 완전히 제거해 버렸다.
제3조의 역할은 추후 골렘들이 대신하게 될 예정이다.
"그럼, 점심이나 먹으러 가죠."
건혁의 한마디에 팀장과 조장들이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 * *
흑월로부터 강제 탈퇴 처분을 받은 가윤 일행.
그들은 각자 임시 공략대에 들어가 마수를 토벌했다.
게이트를 한 번 들락거릴 때마다 받는 보수는 대략 4~50만 원 정도로, 가윤만이 80만 원에 가까운 보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금을 떼면 70만도 채 되지 않았고, 임시 공략대에서 받는 부조리함에 나날이 스트레스가 늘어 울상을 지었다.
"X발, 내가 왜 이런...."
가윤은 스마트폰을 바라보면서 터덜터덜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금일 받은 보수는 세금을 제외하면 63만 원 정도에 불과했다.
D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임시 공략대들은 418,411위인 가윤을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심지어 E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임시 공략대들조차 가윤을 받아들이는 데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그렇게 부조리한 대우를 받고, 주에 2~3번씩 E~F등급 게이트를 드나들던 그녀는 월 900만 원에 가까운 보수를 받을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액수임은 틀림없으나, 흑월에서 받은 금액과 비교하면....
게다가 교통비와 식비 및 포션 등의 부대 비용은 모두 자비로 부담해야 한다.
"흑월에선 1,400~1,500만 원씩 받았었는데...."
교통비도 지원되며, 포션 등이 보급되기까지.
흑월에선 큰 스트레스 없이 공략을 진행할 수 있었다.
반면, 임시 공략대에서는 정신적 스트레스에 따른 고난의 행군으로 육체적인 고통이 가중되면서 미쳐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에 2~3회씩 게이트를 공략했음에도 매일같이 막노동을 한 듯 육체는 근육통을 호소했다.
훈련장?
훈련장을 방문할 시간이 어디 있어!
쉬기도 바빠 죽겠는데.
그녀는 임시 공략대에 드나드는 횟수를 조금씩 줄였다.
이대로 계속했다간 과로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후우...."
보수는 절반 가까이 줄었으나, 생활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짐꾼으로 활동하던 시절과 비교해 보면 출세했다 봐도 무방하겠지.
틈틈이 취미 활동 시간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일관되게 보내던 그녀는 어느 날 협회 홈페이지에서 흑월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녀가 탈퇴하고 9개월이 지난 시각.
흑월의 길드 등급은 B로, 길드 공식 서열은 99위까지 치솟았다.
길드원들 역시 대부분이 2~30만대 서열에 진입하면서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 냈다고 한다.
"트... 특수 능력에 각성했다고?"
제2팀에 소속된 김태형, 김지수, 이지혜가 모두 특수 능력에 각성했다는 모양이다.
물론, 태형과 지수는 육체 강화라는 흔하디흔한 특수 능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지혜는 상처 치유라는 세계에서도 희귀한 회복 능력을 가진 특수 능력 각성자가 되었다.
"마... 말도 안 돼."
가윤은 세 사람의 서열을 보곤 멍한 표정을 지었다.
10만대 끝자락에 걸친 세 사람.
심지어 제3팀 팀장인 김유진은 6만대 서열에 돌입했다.
반면, 건혁의 서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떨어지는 추세였는데.
가윤은 그가 각성 능력 검사를 받지 않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지난 일들을 후회하기 시작한 그녀.
어째서 김유진에게 그러한 마음을 품었던 걸까?
그녀를... 왜 싫어했던 거지?
"왜...."
가윤이 홀로 중얼거리던 그때, 2019년 10월을 맞이한 건혁은 데스펠 길드 제1군 대장인 박태준과 수서동의 한 카페에서 대면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건혁 헌터님."
"아닙니다. 그보다 무슨 일로...."
"박건혁 헌터님과 흑월 길드원들을 저희 데스펠로 모시고 싶어 직접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 제안일까?
건혁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숙였다.
"과거 우진혁 팀장님께도 거절을 했듯 저는 흑월을 해체할 생각이 없습니다."
건혁의 단호한 대답에 태준은 미소를 유지한 채 가방에서 몇 가지 서류를 꺼냈다.
"최고의 대우와 지원을 약속드립니다."
서류에는 말 그대로 최고위 헌터들에게나 제공되는 지원과 혜택들이 기입되어 있었다.
"아, 참고로 저희 데스펠 길드 내에서는 길드원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물품을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박건혁 헌터님의 왼팔을 재생시킬 수 있는 1급 포션도 해당되죠."
태준이 눈동자를 반짝였다.
건혁은 어깨를 살짝 움찔거리면서 서류의 내용을 하나씩 살펴봤다.
확실히 매력적이다.
최고급 장비의 지원은 물론이고, A등급 게이트를 드나들어 더욱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다는 부분은 수영이를 위해서라도 받아들이는 편이 좋겠지.
그러나 데스펠 길드의 어둠을 알기 때문일까?
건혁은 순순히 태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살인, 폭행, 마약 등의 범죄를 일상처럼 여기는 놈들이다. 이놈들과 엮여서 좋을 건 없어. 그리고... 지금까지 쌓아 올린 흑월을 이대로 무너트릴 순 없잖아?'
건혁은 작게 한숨을 쉬며 서류를 태준에게 돌려주었다.
"제안은 정말로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쌓아 올린 흑월을 이대로 무너트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1급 포션은 현재 길드 내에서도 1,200억 원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박건혁 헌터님에게는 특별히 800억 원대 금액에 제공해 드리죠."
순식간에 400억 원을 증발시키는 건가.
건혁은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한동안은 의수로도 충분하여, 제안은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정도의 제안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겁니다."
건혁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그에 눈썹을 꿈틀거린 태준.
데스펠 길드의 제1군 대장인 자신이 직접 스카우트를 하기 위채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며.
1급 포션의 금액을 400억 원이나 낮추어 주었음에도 건혁이 굳은 결정을 고수하자, 태준은 작게 헛웃음을 흘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차가운 눈으로 건혁을 노려봤다.
"11개월 정도 각성 능력 검사를 받지 않으셨던가요?"
"...예, 그래서 이달에 검사를 받을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이번엔 서열이 얼마나 높아져 있을지 기대해 보겠습니다."
태준이 작게 조소를 흘리며 자리를 떠났다.
건혁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데스펠의 사람들은 스카우트를 이런 식으로 진행하나?
제안을 거절했다고 조소를 흘린다니....
사람 일 어떻게 될 줄 알고 저러는 거지?
"우리 길드원들이 데스펠에 들어갔다가는 험한 꼴만 당하겠어."
건혁이 눈앞의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기대해 보겠습니다... 인가."
그는 조금 전 태준의 발언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마음껏 기대해 봐. 나 역시 많은 기대를 하는 중이거든."
------------------------
*성명: 박건혁
*종족: 인간
*칭호: -
*출신 국가: 한국
*LV: 157
*근력: 50
*민첩: 50
*체력: 60
*마력: 230
*AP: 0
*스킬: [빙마검(氷魔劍)-LV8] , [얼음 골렘 소환-LV5], [마력 회복-LV3]
------------------------
스테이터스 레벨이 150에 도달하면서 받은 100AP는 육체 능력 향상에 큰 역할을 해 주었다.
추가로 얻은 패시브 스킬, 마력 회복은 초당 0.01의 마력을 회복시켜 주었는데.
스킬 레벨이 3에 도달함과 동시에 초당 회복되는 마력량은 0.07까지 상승했다.
그래, 25분 정도로 100의 마력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뭐, 마력 회복도 마력 회복이지만, 거인 골렘의 전투력은 진짜....'
1개월 전, 유진과 함께 들어간 B등급 게이트.
건혁은 해당 게이트에서 거인 골렘를 소환해 미노타우로스와 겨루게 만들었다.
거대한 몽둥이를 다루는 양측.
승패의 결과는 골렘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두 마리의 미노타우로스를 상대할 때는 상황이 달라졌다.
거인 골렘이 힘겨운 모습을 보이며 무릎을 꿇은 것이다.
해당 결과로 건혁은 거인 골렘 1기를 미노타우로스 1마리와 동급의 존재로 추정하게 됐다.
"그만 일어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협회를 찾아갔다.
어차피 이달 내에 받아야 할 검사다.
며칠 조금 일찍 받는다고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지.
'이번 검사로 999위 안에 들어간다.'
A등급 게이트를 단독으로 공략하기 위한 기준이 바로 999위다.
지난달 서열 999위 헌터의 각성 점수는 4,988점.
작년 11월에 받은 각성 점수와 1,600점 이상의 격차를 보여 주었다.
마력 회복은 그렇다 치더라도 레벨 150에 도달하며 얻은 100AP와 빙마검 및 골렘 소환의 스킬 레벨을 고려하면 적어도 4,000점 중후반대의 점수는 받을 수 있을 터.
"이... 이게 무슨...!"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사관의 것이다.
건혁은 그에게서 각성 점수를 듣고 씨익 웃음을 지었다.
제50화
50화. 송파구 레이드 (1)
2019년 10월 19일 토요일.
나는 수영이와 함께 헌터 훈련장을 찾아갔다.
"하아... 하아... 하아.... 아... 아빠, 너무 강해진 거 아니야?"
나는 수영이가 쏜 화살들을 여유롭게 회피하며 도검으로 흘려보냈다.
이전보다 동체 시력도 좋아진 모양이네.
게다가 근력과 민첩이 늘어난 덕분일까?
수영이의 화살 정도는 가볍게 회피할 수 있게 되었다.
30개의 화살을 쏜 수영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그만할까?"
대답할 기운도 없다는 듯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양한 기술을 사용하며 실전처럼 대응하고, 다리를 움직여 여러 방향에서 화살을 쏜 수영.
그녀는 고위 마수를 토벌하듯 나를 공격했다.
도저히 어린아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전투 능력이다.
이 정도면 마왕군이 출몰하기 전에 서열 1위에 도달하는 거 아니야?
"이제 씻으러 가자. 점심 먹으러 가야지."
"...응, 알겠어."
수영이 터덜터덜 샤워실로 들어갔다.
조금 적당히 봐줄 걸 그랬나?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보다 땀도 흘리지 않았는데, 굳이 샤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모처럼이니까 그냥 씻고 가자."
샤워실을 나오자 수영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먹고 싶은 거 있어?"
"짜장면!"
"저번 주에도 짜장면 먹지 않았던가?"
"저번 주에는 김치찌개 먹었었어. 그 전주에는 국밥 먹었고."
"그... 그랬던가? 우리 수영이, 기억력 좋네?"
나는 수영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가까운 중국집을 찾아갔다.
"수영이는 짜장면이랬지?"
"짬짜면!"
"그래, 아빠는 간짜장으로 하고... 탕수육도 먹을래?"
"응!"
그녀는 조금 전 지친 모습과 달리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맛있는 걸 먹을 때는 기분이 좋아지는구나.
나는 호출 벨을 눌러 직원을 불렀다.
"예, 말씀하세요."
"짬짜면 하나랑 간짜장 하나, 그리고 탕수육 하나 주세요."
"짬짜면 하나, 간짜장 하나, 탕수육 하나, 이렇게 드리면 될까요?"
"예."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직원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수영이가 대뜸 게이트 관련으로 질문을 해 오기 시작했다.
뭐, 대화 내용이라고 한다면 헌터와 관련된 것뿐이겠지.
하지만 나는 수영이의 학교생활이 궁금하다.
"요즘 친구들이랑은 잘 지내고 있지?"
탕수육을 우물우물 씹고 있던 수영이 잠시 멈칫했다.
먹던 건 그냥 다 먹지....
양 볼에 탕수육을 가득 채운 채 눈동자를 굴리는 수영이.
뭐랄까, 다람쥐 같네.
"다 먹고 대답해도 돼."
수영이가 탕수육을 삼킨 후, 음료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 잘 지내고 있어."
시선을 회피하는 걸 보니 잘 못 지내는 모양이구나.
나는 씁쓸히 웃었다.
소설 속의 그녀는 오로지 미래를 대비하고자 교우 관계를 일절 무시했다.
그나마 고등학교 시절부터였나?
도움이 될 만한 인재를 모으기 위해 동료를 얻고, 남자 주인공들과 인연을 만들어 간다.
'2회차의 수영이는 초·중학교 시절 동급생들의 눈에 띄지 않게 최대한 조용히 활동했었지.'
나는 수영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에 짬뽕을 입에 가져다 댄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많이 먹어."
수영이는 살짝 눈웃음을 짓더니, 시선을 내려 짬뽕을 바라봤다.
그렇게 식사를 마무리하고 카운터에서 계산을 마친 그 순간.
투콰아앙!
바깥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중국집의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며 가게가 한바탕 아수라장이 되었다.
바닥에 넘어진 의자와 테이블.
인테리어용 화분과 장식들마저 바닥을 뒹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수영이를 껴안고 자세를 낮추었다.
"어... 어디 다치진 않았지?"
수영이 내 품속에 안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으으...."
계산을 해 주던 여직원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또, 음식을 먹던 손님들마저 고통을 호소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나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꺄아아아악!
바깥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
잠시 뒤, 건물 앞에서 수많은 마수들이 레이스를 벌이듯 우르르 달리기 시작했다.
레이드인가?
근데, 저게 도대체 몇 마리야?!
나는 개미 떼처럼 바글거리는 오크들을 보고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긴급 속보입니다. 방금 전, 서울 송파구 가락 시장 부근에서 C등급 게이트가 폭발했다고 합니다. 헌터 협회는 대규모 레이드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시급히 기사단을 동원해 진압할 것을 발표했습니다.
드라마가 중단되며 긴급 속보를 보도하는 공중파 방송국.
그보다... 대규모 레이드라고?!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소란스러운 가게 출입문을 바라봤다.
챙그랑!
유리문을 박차고 들어온 오크.
녀석이 붉은 안광을 빛내면서 입술로 호선을 그렸다.
―통제 구역으로 지정된 곳에서 거주하시는 주민분들께서는 절대로 자택에서 나오지 마십시오. 또한, 바깥에 계시는 분들께서는 시급히 지하철역으로 대피하시거나, 가까운 건물로 들어가 숨어 계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아나운서의 주의와 동시에 중국집 안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꺄아아악!"
비명을 즐기듯 오크 전사가 커다란 울음소리를 냈다.
-취이이익!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시끄러워."
파각!
녀석에게 다가가 의수를 휘두르자, 일격에 머리가 짓뭉개졌다.
순간, 가게 안이 조용해졌다.
나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깊게 한숨을 토해 냈다.
"수영아, 여기에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아빠가 잠깐 주변 좀 정리하고 돌아올게."
"...따라가면 안 돼?"
"으음...."
괜찮으려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TV를 바라봤다.
게이트의 등급은 C로, 쏟아져 나오는 마수들은 9할이 오크라고 한다.
숫자는 대략 4~5만 정도?
아니, 지금까지도 쏟아져 나오는 중이라고 하니, 4~5만이라는 숫자도 금세 넘어가겠지.
"대신, 아빠 말에 반드시 따라야 돼. 알겠지?"
수영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헌터라는 사실을 알아서일까?
손님 몇 명이 나를 불러 세웠다.
"자... 잠시만요! 저... 저희는 어떻게...."
"기사 골렘 소환."
내 옆으로 기사 골렘 1기가 소환됐다.
"이 녀석을 계단에 배치해 두겠습니다. 오크 정도는 가볍게 상대할 수 있으니, 여러분들께서는 기사단이 도착하기 전까지 얌전히 기다려 주십시오."
"아...."
"그럼, 저는 이 주변의 마수들을 토벌하도록 하겠습니다."
수영이는 내 뒤를 따라 중국집을 빠져나왔다.
취이익!
1층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이내, 계단에서 오크와 마주쳤다.
녀석이 내게 달려들던 순간.
"알파-1, 전개."
촤르륵!
왼쪽 손등에서 50cm의 검신(劍身)이 튀어나왔다.
이어, 오크의 목덜미를 향해 의수를 휘둘렀다.
서걱!
대량의 핏물이 뿜어져 나오자, 나는 '아차!' 하면서 고개를 돌려 수영이를 바라봤다.
"괘... 괜찮아. X튜브로 많이 봤었으니까."
"후우, 그렇구나."
그래도 조금은 걱정하는 티를 보여야겠지.
나는 '1회차를 모르는 박건혁'이니 말이다.
그러나 걱정하는 모습을 연기하던 나는 황급히 수영의 눈을 가려야 했다.
"아... 아빠?"
"...."
사람들을 물어뜯고 있는 오크들.
이런 참혹한 광경이 또 어디에 있을까.
1회차를 경험했다 하더라도 이 광경만큼은 수영이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기사 골렘 소환."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30기의 기사 골렘들.
"가라."
파바바밧!
골렘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오크 전사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취이이익?!
서걱!
건물 내부를 깔끔하게 처리하는 동안, 나는 수영이를 품속에 안은 채 번쩍 들어 올렸다.
"...실전은 나중에 경험하자."
"나는 괜찮...."
"아빠가 안 괜찮아!"
무심코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금방 돌아올게. 그러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수영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이가 중학생 정도였다면 조금이나마 나았으려나?
초등학생인 그녀에게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중국집으로 돌아가 여직원에게 수영이를 맡겼다.
"잠시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내 중국집 안에 1기, 중국집 주변에 5기의 기사 골렘을 배치했다.
나머지 골렘은 상가 내부를 정리하고 내 뒤를 따라 바깥으로 나왔다.
거리에 바글거리는 오크들.
길바닥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마법 기사 골렘 소환. 거인 골렘 소환."
푸른 로브를 펄럭이는 5기의 마법 기사 골렘과 1기의 거인 골렘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라."
골렘의 무리가 오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앙! 콰콰콰쾅!
7.5m 높이에 달하는 거대한 골렘이 몽둥이를 휘두르자, 오크 전사들은 힘 한번 제대로 못 써 본 채 아작이 나 버렸다.
이어, 기사 골렘의 뒤에서 빙(氷) 속성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 기사 골렘들.
나는 고개를 까딱이면서 오른손에 빙마검을 소환했다.
파밧!
"사냥감은 넘친다! 전부 죽여 버려!"
오크 전사의 머리를 베어 내며, 골렘들을 향해 소리쳤다.
콰앙!
내 명령에 대답하는 걸까?
거인 골렘이 큰 몸짓으로 오크 전사를 짓뭉갰다.
* * *
거리 한복판에서 벌어진 오크와 골렘의 전쟁.
중국집에서 창밖을 내다보던 사람들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단 한 명이 저렇게나 많은 골렘들을 소환할 수 있다고?
게다가 건혁의 무력은 웬만한 헌터들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저... 정말로 저 사람이 너희 아빠니?"
중국집 여직원의 물음에 수영이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녀 역시 상당히 놀라워하고 있었다.
설마, 자신의 부친이 저렇게까지 강했을 줄이야.
그런데, 저 거대한 골렘은 또 뭐지?
'도대체 아빠는 얼마나 많은 마력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녀는 창문을 통해 부친의 전투를 지켜봤다.
한편, 건혁의 집 주변에서 대규모 레이드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흑월의 길드원들.
그들은 건혁에게 전화를 걸면서 인터넷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SNS에선 수많은 영상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이... 이게 무슨...."
지수는 해당 영상을 확인하고, 그만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가락 시장을 중심으로 반경 3km 지역에서 전쟁이 펼쳐졌다.
그래, 전쟁이다.
'전쟁' 말고는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는 건혁이 전화를 받지 않자, 스크롤을 내리며 수서동의 상황을 살펴봤다.
잠시 뒤, 수서역 부근에서 실시간으로 영상을 송출하는 유X버를 발견했다.
"어... 얼음 골렘!"
분명, 마스터가 소환한 골렘일 것이다!
―저... 저는 지금 수서역 인근의 OO빌딩 3층에 있습니다. 지금 창고에 숨어 있는데요. 현재, 한 헌터가 밖에서 마수들과 싸워 주고 있습니다.
"X발, 네 얼굴 말고 빨리 바깥 상황을 보여 주라고!"
지수의 분노를 느낀 걸까?
남성 유X버는 열려 있는 환기창을 통해 바깥 상황을 시청자들에게 보여 주었다.
얼음 골렘들과 함께 오크들을 학살하는 남성.
살짝 흐릿하기는 하지만, 분명 마스터가 확실하다.
"저... 저건 또 뭐야?"
거대한 골렘이 유X버의 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제51화
51화. 송파구 레이드 (2)
―존X 멋있죠? 아무래도 저 헌터가 소환한 골렘인 모양입니다. 해외에서도 높이 5~6m급 골렘을 소환하는 헌터가 존재한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바지에 소변을 지리게 생겼어요.
지수는 멍한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저런 골렘을 소환할 수 있었다고?
마법을 사용하는 골렘에 대해서는 이미 전달받은 바가 있었다.
그리고 몇 차례이긴 하지만 건혁, 유진과 함께 B등급 게이트를 드나들며 실제로 보기도 했다.
기사 골렘, 마법 기사 골렘의 전투 능력은 정말로 놀라웠다.
마치 특수 능력 각성자 같다고 해야 하나?
그런 골렘을 24시간 동안 불러내 전투에 투입할 수 있다니....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배가 아플 지경이다.
그런데, 저 거대한 골렘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하... 하하하하.... 저... 저 괴물은 도대체 뭐야?"
건혁을 다급하게 걱정했던 지수는 헛웃음을 흘리면서 컴퓨터를 꺼 버렸다.
허탈함을 느끼던 그녀는 잠시 뒤, 친자매처럼 지내 온 지혜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
―어... 언니, 마스터가 전화를 받지 않아요! 지금 수서동에서도 난리가 났다고...!
"그래, 나도 걱정돼서 조마조마했는데, 그냥 배달 음식이나 시켜서 영화나 보려고."
―...에?
"마스터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궁금하면 SNS나 유X브에 검색해서 한번 찾아봐 봐. 걱정해서 괜히 손해만 봤네."
지혜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일전에 구매한 최신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아, 얼음 골렘으로 검색해야 빠르게 찾을 수 있더라."
―얼음... 골렘....
영상을 보는 중인가?
"잠시만... 배달 어플로 햄버거 좀 주문하게."
전화 도중 배달 어플로 햄버거를 주문한 지수.
이내, 스마트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그래서 영상은 잘 봤어?"
―언니는... 알고 있었어요? 이 커다란 골렘....
"아니, 나도 조금 전에 어느 유X버가 방송하는 걸로 본 게 전부야."
―어떻게 한 사람에게 이런 힘이....
지혜의 놀란 목소리에 지수는 작게 웃으면서 거실의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그래,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건혁이 보유한 재능은 자신들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어떻게 저런 사람한테 그런 낮은 성장 점수가 주어진 걸까?
"아 참, 그러고 보니 유신 길드한테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면서?"
―이미 거절했어요.
"벌써? 대한민국 10대 길드 중 하나인데도?"
―어차피 치유 능력 때문에 가입 제의를 한 거잖아요. 이 능력을 가지게 해 준 건 마스터예요. 제가 아무것도 없을 때, 손을 내밀어 주신 분을 어떻게 배신해요.
"배신... 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지수는 지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밑바닥에 있었던 시절, 자신들을 끌어올려 준 남자.
은혜를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저번에 태형이 오빠도 다른 길드로부터 가입 제의를 받았었다고 들었어요. 규모가 큰 길드였는데도 제의를 받은 그 자리에서 단칼에 거절했다고....
"그래, 나도 들었어. 뭐, 태형이 성격에 마스터를 떠날 일은 없겠지."
태형은 그 누구보다도 건혁에게 깊은 은혜를 느끼고 있었다.
박건혁의 추종자라 말해도 틀리지는 않겠지.
지수는 TV를 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쪽은 괜찮아?"
―네, 언니 쪽은....
"이쪽도 괜찮아. 일단, 통제 구역과 가까운 곳에서 거주하는 길드원들한테 전화 한번 돌려 보자."
―알겠어요.
지수가 조원들에게 전화를 걸려고 할 때, 햄버거가 도착했다.
지수는 TV를 켠 채 햄버거를 세팅하고, 제2팀의 팀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도 누구 하나 다친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방금 들어온 제보입니다. 수서역 부근에서 다수의 얼음 골렘이 마수들을 토벌하고 있다는....
지수는 뉴스에서 등장한 얼음 골렘들의 모습에 그만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콜록, 콜록.
"끄으... 무슨 연예인이야? 왜 이렇게 자주 TV에 출연하는 건데?"
골렘을 지휘하며 푸른빛의 검을 휘두르는 검은 머리카락의 남성.
그의 활약에 수많은 국민들이 다시 한번 '박건혁'이라는 이름을 외쳐 댔다.
새로운 영웅의 등장!
건혁은 7~8m에 육박하는 골렘의 무릎을 밟고 높이 뛰어올라 오크 장군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우와~ 마스터가 대단하긴 대단하네. B랭크 마수인 오크 장군을 일격에 쓰러트려?"
지수는 햄버거를 베어 물면서 TV를 바라봤다.
"이번에 각성 능력 검사를 받았다고 했던가? 설마, 100위 안에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TV에 비춰진 골렘의 숫자는 100을 가볍게 넘고 있었다.
저 정도의 골렘을 소환할 수 있는 헌터가 세계에 몇이나 될까?
단시간에 마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수단이 있지 않는 한, 각국의 최정상급 헌터들만이 가능할 것이다.
―골렘을 지휘하는 헌터는 흑월 길드의 마스터, 박건혁 헌터로 확인됐습니다.
자막에 '흑월'이라는 문구가 떠오르자, 지수가 헤실헤실 바보처럼 웃어 댔다.
흑월의 인지도가 한 단계 더 높아진 것이다.
그러나 레이드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일찍이 방어선을 구축해 둔 덕분에 오크들이 통제 구역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헌터와 오크의 전투는 온종일 계속되었고, 통제 구역에선 총격음과 폭발음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한편, 수서역 인근에서 청룡 기사단과 합류해 전투를 펼치던 건혁.
그는 수영을 데리고 곧장 통제 구역을 벗어나 호텔에서 묵기로 결정했다.
"하아, 귓가에서 계속 오크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
'취익' 울음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도대체 몇 마리를 토벌했을까?
2~3시간 동안 1~2천여 마리는 토벌한 것 같은데.... 건혁은 협회로부터 긴급 요청을 받은 상태로, 내일 오전 통제 구역을 들어가야 했다.
"아빠, 많이 힘들어?"
양치를 마친 수영이 건혁의 어깨를 주물렀다.
"괜찮아, 괜찮아. 그보다 얼른 자야지."
건혁은 그녀를 침실로 들여보낸 다음 거실로 나와 스테이터스를 확인했다.
"드디어 올랐네."
골렘을 통제 구역에 배치해 둔 덕분일까?
편히 쉬고 있음에도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었다.
건혁은 마력이 회복될 때마다 마치 한계를 시험해 보겠다는 듯이 골렘들을 계속해서 소환했다.
"...지금 11기를 소환했으니, 이걸로 250기를 채운 건가?"
호텔의 한 층을 모두 대여한 건혁은 소환해 둔 골렘을 각 방과 복도에 배치시켜 두었다.
그가 잠에 든 것은 새벽 1시를 조금 넘었을 무렵으로, 통제 구역에서 활동하는 골렘까지 총 377기의 골렘이 소환되었다.
* * *
일요일 아침 8시 37분.
출발 준비를 마친 건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한계가 없는 건가?"
의문을 뒤로한 그는 수영을 호텔에 남겨 두고, 곧장 바깥으로 나섰다.
호텔 앞에는 무려 6대의 버스가 대기 중이었다.
건혁은 협회의 요청을 받은 대신, 버스 6대의 지원을 부탁했다.
협회에서는 지원을 순순히 받아들였는데.
"저... 정말로 골렘들이...."
협회 직원은 버스에 탑승하는 얼음 골렘들을 바라보며 입을 뻥긋거렸다.
"출발해 주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건혁의 목소리에 협회 직원이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되찾았다.
통제 구역까지는 20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통제 구역 주변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군인들은 버스에서 하차하는 200기의 골렘을 바라보며 어깨를 살짝 움찔거렸다.
"거인 골렘 소환."
이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7.5m 크기의 거인 골렘 10기.
말 그대로 하나의 부대가 편성됐다.
"이동하겠습니다."
"무... 무운을 빌겠습니다."
협회 직원은 거인 골렘들을 바라보며 바보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위풍당당하게 통제 구역으로 들어가는 골렘의 부대.
그 선두에 선 건혁은 오크의 무리를 발견한 순간, 골렘들을 향해 소리쳤다.
"공격!"
게이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수십 마리 규모의 무리가 아니다.
수백, 수천 규모로 움직이는 오크들.
그리고 놈들을 지휘하기 위함일까?
오크 장군과 오크 주술사가 드문드문 발견됐다.
"진짜... 소름 끼치네. 무슨 부대를 편성한 거 같잖아?"
건혁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금일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는 마수 토벌과 동시에 대피하지 못한 주민들의 구조다.
최우선시되는 임무는 마수 토벌이 아닌 생존자의 구조.
"지금부터 건물로 들어가 생존자를 구조한다. 생존자 발견 시 GPS의 버튼을 누르고, 무전기의 전원을 켜도록."
건혁은 자리에 앉은 채 골렘들의 신호를 기다렸다.
그렇게 20분 정도가 지났을까?
GPS에 신호가 떠오르며, 무전기에 불빛이 켜졌다.
그는 무전기를 입에 가져다 댔다.
"아아, 저는 흑월의 길드 마스터, 박건혁입니다. 무전기를 쥔 골렘은 제가 소환한 것이니, 모두들 안심하시고 건물 밖으로 나오십시오."
치직.
―저... 정말로 나가도 되는 겁니까?
"인근에서 활동하던 마수들은 대부분 토벌했습니다. 지금 구조대에 연락을 보냈으니, 15분 내로 차량이 도착할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
"일단, 침착하게 건물 밖으로 나와 주십시오."
건물 안의 마수들을 쓰러트리며 피해자들을 구조해 낸 골렘들.
어느새 수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도로 위에 모이게 되었다.
이내, 피해자들을 마중 나온 10대의 군용 버스와 5대의 험비.
각 버스에서 1~2명의 군인들이 내렸다.
"버스에 탑승해 주십시오! 안전 지역으로 대피하도록 하겠습니다!"
군인들은 피해자들이 버스에 탑승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기사단 소속의 헌터들은 험비에서 내려 주변을 경계했다.
"협력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영관 계급의 장교가 건혁에게 경례를 해 왔다.
건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주민분들의 피난은 맡겨 주십시오.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골렘들과 함께 구조 작전을 재개한 건혁.
그는 세 차례 오크의 무리와 조우했고, 2~3천여 명의 피해자들을 구조하면서 TV에 다시 한번 이름을 띄우게 되었다.
일전에 모자이크 처리를 부탁해 둔 덕분일까?
방송국에서는 건혁의 전투 장면을 내보내되, 얼굴이 뚜렷하게 보일 것 같은 장면은 모자이크로 처리하며 국민들의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하아, 힘들어 죽겠네."
건혁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골렘의 숫자를 확인했다.
오크에게 박살 난 골렘은 2~300여 기를 가볍게 넘겼다.
동시에 2~30분 간격으로 50기의 기사 골렘을 소환했는데.
그로 인해 건혁의 주변에는 15기의 거인 골렘과 188기의 기사 골렘, 32기의 마법 기사 골렘이 주변을 경계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이것 좀 정리해 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돗자리와 짐 정리를 골렘에게 맡겼다.
그리고 점 정리가 끝날 때까지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살펴봤다.
"...너무 날뛰었나?"
청룡 기사단과 대규모 길드의 최정예 헌터들이 이번 레이드에 참전하면서 인터넷에 수백 개의 기사들이 쏟아졌다.
그러던 중 수십 개의 기사를 작성하게 만든 한 중소 규모의 길드.
건혁은 기사 제목에 기입된 '흑월'이라는 단어를 보곤 머리를 살짝 긁적였다.
제52화
52화. 송파구 레이드 (3)
"조금 민망하네."
위이잉!
스마트폰이 진동을 울렸다.
[(경고!) 가락 시장 부근에서 S랭크 마수, 오크 킹이 출몰했습니다. 게이트 인근에서 전투 중인 헌터분들께서는 시급히 대피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통제 구역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아닌 게이트로부터 멀어지라는 지시다.
구조 작전은 계속 속행해도 괜찮겠지.
건혁은 다리를 움직이고 30분 정도가 지나,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한숨을 토해 냈다.
"이젠 건물을 요새처럼 사용하는 거냐?"
3~4채의 빌딩에서 창문을 깨고 화살을 겨누는 오크들.
220여 기의 골렘들이 함께 움직인 탓인지, 놈들에게 쉬이 포착된 모양이다.
건혁은 작게 혀를 차며 골렘들을 바라봤다.
"지금부터 세 부대로 나누어 공략한다."
건혁은 임의로 부대를 편성하고, 각 부대를 건물들을 향해 돌격시켰다.
그 순간, 건물의 4~5층 부근에서 화살들이 쏟아졌다.
퍼억! 퍼퍼퍽!
화살에 직격당한 골렘들.
얼음 조각들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이어, 몇몇 기사 골렘들은 팔과 다리를 잃고 전투 불능 상태가 되자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각 부대가 건물에 다다를 무렵.
건물 정문에서 우르르 오크 전사들이 뛰쳐나왔다.
-취이익!
콰앙!
거인 골렘의 주먹에 한 오크 전사가 짓뭉개졌다.
"...그냥 나와 주네?"
5층 이상의 건물을 파괴하지 말라고 권고한 헌터 협회.
추후 발생될 재산 피해와 마수들에게 생포된 사람들은 물론, 건물이 무너짐으로써 인근 건물에 영향을 끼쳐, 숨어 있던 생존자들마저 위험에 처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때문에 건혁은 마법 기사 골렘을 움직이지 않았다.
거인 골렘 역시 화살받이로 사용한 후, 뒤로 물릴 생각이었는데.... 설마, 저렇게 우르르 건물에서 쏟아져 나와 싸울 줄이야.
"저 녀석들, 요새라는 개념을 모르는 건가?"
아니, 요새의 개념과 활용법은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오크는 고블린과 달리 지능이 높으니까.
그렇다면....
"거인 골렘이 건물을 무너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가."
확실히, 건물을 무너트리면 놈들은 일망타진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겠지.
건물에 깔려 죽을 순 없을 테니까.
"이런...!"
파밧!
느긋하게 서 있던 건혁이 황급히 발걸음을 움직였다.
머리 위에 보도 헬기가 뜬 탓이다.
잠시 뒤, 건혁을 향해 수십 개의 화살이 쏘아졌다.
"어이쿠!"
포물선을 그리며 그를 노리는 조잡한 화살들.
건혁은 몸을 약간 움직이는 것으로 대부분의 화살들을 회피했다.
그리고 피하기 어렵다 싶을 때는 도검을 휘둘러 화살을 튕겨 냈는데.
건물 앞에 도착한 그는 서둘러 전투에 참전했다.
서걱!
-취이익?!
바깥의 오크들이 전부 쓰러지자, 골렘들이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거인 골렘은 전부 물러나라!"
거인 골렘들은 창가에서 화살을 쏘아 대는 궁사들의 표적만 될 뿐, 더 이상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건혁은 건물로 들어가자마자 어깨를 살짝 움찔거렸다.
"...난장판이네."
건물의 로비에서 골렘과 오크 전사가 충돌했다.
"아니, 도대체 몇 마리나 들어와 있었던 거야?!"
비상계단에서 우르르 쏟아져 내려오는 오크 전사들.
전투할 공간조차 부족해졌다.
그냥 거인 골렘으로 무너트리는 게 더 효율적이었을지도.
건혁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빙마검을 소환해 오크들을 베어 버렸다.
'대충 막 휘둘러도 맞겠네.'
이내, 골렘들을 뒤로 물리면서 건물을 빠져나온 건혁.
"거인 골렘 다시 돌아와!"
2~300m 정도 떨어져 대기하던 거인 골렘들을 다시 건물로 호출했다.
이어, 2~3기의 기사 골렘들이 거인 골렘의 두 손에 올라탔다.
그리고 거인 골렘이 승강기 마냥 2~3층 높이까지 손을 들어 올리자, 기사 골렘들이 창가의 오크들을 죽이면서 다시금 건물 내부로 침입했다.
1층을 돌파하는 것은 무리다.
로비는 이미 시체들로 가득해 걷는 것조차 어려우니까.
"너희도 전부 나와!"
건혁은 골렘들이 침투했던 건물을 향해 소리쳤다.
역시 전부 1층에 있었구나.
2층으로 올라간 골렘은 단 한 기도 없었다.
골렘들이 건물을 나온 순간, 그 뒤를 오크들이 따르려 했다.
쿠웅!
오크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출입구에 빙벽을 만들었다.
"거인 골렘을 통해 2~3층으로 돌입한다!"
골렘을 지휘하는 건혁의 모습은 보도 헬기의 카메라에 정확하게 촬영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기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갑자기 건물에서 나와서... 거인 골렘으로 2~3층에 올라가려는 거지?"
"1층에 오크가 너무 많아서 그런 거 아니야? 비상계단까지 막혀 버린 상황이라면...."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카메라맨의 대답에 여기자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슬쩍 지상의 골렘들을 바라봤다.
"정말 대단하네. 어떻게 저 정도의 골렘을 소환할 수 있는 거지? 아니, 그것보다도 소환할 수 있는 숫자에 한계가 없는 건가?"
여기자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이후 생방송으로 해당 상황을 시청자들에게 생생하게 보도했다.
건물을 공략하여 생존자들을 구출해 내는 흑월의 마스터, 박건혁.
그는 이번 레이드를 통해 영웅이라 칭송받는 헌터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주목도는 서서히 떨어져 갔다.
청룡 기사단 단장, 이은성이 다수의 장군과 주술사를 토벌하고, 오크 킹의 목을 베어 냈기 때문이다.
<아까까지 박건혁을 찬양하던 사람들 어디 갔냐?>
⤷ㅋㅋㅋㅋㅋ박건혁이 길거리에 널린 오크들 토벌할 때, 이은성은 오크 장군이랑 오크 주술사를 학살하고, A랭크 마수인 오크 킹을 순식간에 죽여 버림.
⤷...박건혁이랑 이은성을 비교한다고?
⤷서열 4위랑 서열 3,301위를 비교하는 게 말이 되냐? 박건혁은 3천대 헌터로서 월등한 성적을 보여 준 거고, 이은성은 대한민국 최상위 헌터로서 그에 마땅한 능력을 보여 주었을 뿐이다.
⤷이은성이 대단하긴 대단한데, 박건혁을 까는 이유는 도대체 뭐지?
⤷이은성이 오크 킹을 토벌할 때, 박건혁은 수많은 피해자들을 구조하고 있었다. 누가 더 낫다기보다는 둘 다 대단한 건데... 이걸 이렇게 돌려 까면서 비교할 줄은 생각도 못 했네.
⤷S랭크 마수도 혼자서 쓰러트리는데, A랭크는 그냥 X밥이지.
⤷내 채널에서 무료로 5천 원 받는 법 있다. 이거 모르면 인생의 절반을 손해 보는 거임.
⤷뜬금없이 5천 원 가져가래ㅋㅋㅋ 5천 원 그냥 너나 가져가라.
⤷그냥 인생 절반 손해 보고 만다.
⤷이은성 영상 볼 때마다 가슴이 웅장해짐.
<전 세계에서 100위권 내에 드는 헌터를 박건혁하고 비교하지는 말자.>
⤷왜 이렇게 박건혁이랑 이은성을 붙이는 댓글들이 많은 거야? 그냥 둘 다 대단하다고 말해 주면 안 되는 건가?
⤷이은성이 대단한 건 국민 모두가 인정하는 거임. 그런데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각성 초기부터 특수 능력을 보유하고, 15년을 헌터로 활동한 이은성이랑 각성 초기에 특수 능력 하나 없이 56만대 헌터에서부터 시작한 3년 차 헌터인 박건혁. 이은성은 100% 재능이지만, 박건혁은 50%의 재능과 50%의 노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건혁 기록 살펴보면 확실히 대단하긴 대단함. 5년 정도만 지나면 이은성이랑 어깨를 나란히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
⤷박건혁이라는 듣보잡과 이은성을 비교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 듣보잡만도 못한 주제에 방구석에서 유X브나 처보고 있지? 게이트 터졌을 때 질질 짜면서 네가 말한 듣보잡 헌터들한테 도움 요청하지 마라.
⤷대댓글 싸우는 거 보니까 X나 웃기네ㅋㅋㅋㅋ
이은성의 영상에 박견혁을 거론하는 수많은 댓글들.
그 탓에 두 헌터를 비교하는 듯한 양상이 펼쳐졌다.
그러나 국민들로부터 오랫동안 지지를 받아 온 탓일까?
이은성을 지지하는 댓글이 70%를 넘기면서 박건혁에 대한 악플이 수두룩하게 달렸다.
물론, 비교를 자제해 달라는 댓글과 두 사람을 모두 응원한다는 댓글 역시 쇄도했는데.
건혁은 해당 댓글들을 보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뭐, 이은성이랑 비교하면 아직은 듣보잡이기는 하지."
딱히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일까?
건혁은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따라잡으면 될 일이잖아.
수영과 함께 가까운 식당에서 김치볶음밥과 만둣국을 주문한 건혁.
수영은 씩씩거리면서 스마트폰을 두드리고 있었다.
"...?"
컵에 물을 따르던 건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슬쩍 수영의 스마트폰을 살펴봤다.
그녀는 유X브에 댓글을 달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과 은성이 나오는 영상에서.
"수... 수영아? 거기 댓글들은 그냥 무시해도 돼."
"해도 될 말이 있고, 해선 안 되는 말이 있는 거잖아! 자기들은 집구석에서 유X브나 보고 있는 주제에...."
수영의 말투가 격해졌다.
그러자 건혁은 머쓱한 얼굴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중에 보란 듯이 잘나가면 그 사람들도 할 말 없을걸?"
"그래도...."
"이번에 각성 능력 검사를 받았으니까,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히잉...."
수영은 시무룩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 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건혁은 예약해 둔 게이트를 모두 취소한 다음 길드원들을 수서동으로 집합시켰다.
도시에서의 전투를 경험시키게 하기 위해서다.
흑월이 수서동에서 오크를 토벌하기 시작할 무렵, SNS와 유X브 등에 '수서동에서 구조된 수천 명의 피해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영상이 업로드되었다.
―박건혁 헌터님이 구해 주러 오지 않으셨으면 정말로....
오크에게 구속되었던 피해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박건혁을 향해 감사 인사를 전했다.
홀로 대규모 길드와 비슷한 숫자의 인명을 구조해 낸 건혁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건혁을 향한 악플러들을 비난하고 찬사를 쏟아 냈다.
"이쪽입니다!"
피해자들을 버스가 대기 중인 장소까지 유도한 흑월의 길드원들.
"흑흑...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
"이제 안심하시고 안전 지역으로 대피하세요."
길드원들은 피해자들의 감사 인사에 안쓰러움과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서걱!
골렘들이 마석을 회수하기 시작하자, 길드원들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수백 마리의 오크들과 조우했을 때는 정말로 어떻게 되나 싶었는데...."
지수의 중얼거림에 지혜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영상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마주한 것에는 극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심지어 수백 마리의 오크들이 살기를 뿜었을 때는 오금마저 지릴 뻔했는데.
그 와중에도 선두에서 골렘들을 이끌고 돌격한 건혁.
잠시 전투를 지켜보던 지혜는 헛웃음을 흘리면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저 거대한 골렘이 오크들을 짓뭉갰을 때는... 정말이지 닭살이 다 돋았다니까요?"
"어제만 하더라도 마스터 혼자 2천여 마리의 오크를 토벌했다고 하잖아요."
유리가 대화에 끼어들자, 지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건혁과 대화를 나누는 유진을 향해.
"우리가 모두 멍을 때리는 동안 김유진 팀장님만 마스터와 함께 몸을 움직였다고 하네요."
"그건... 뭐, 어쩔 수 없잖아요. 김유진 팀장님한테 오크 정도는.... 게다가 마스터랑 오랫동안 게이트를 들락거리기까지 했었으니, 골렘들의 전투 능력도 대략이나마 파악하고 있었겠죠."
유리의 대답에 지수와 지혜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어제 유X브에서 마스터를 비난하는 악플들...."
유리가 말끝을 흐리자, 지수와 지혜는 물론이고 주변에서 대화를 엿듣던 길드원들마저 인상을 와락 구긴 채 욕설을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