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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24화. 의수 (4)

"알파-1, 전개."

철컥.

팔등에서 튀어나온 50cm 길이의 검신.

"알파-1, 해제. 알파-2, 전개."

쓔욱! 촤라라락!

검신이 손목으로 들어간 다음 손등에서 지름 30cm의 소형 방패가 펼쳐졌다.

"...전투에서 큰 도움이 되겠어."

살짝 무거운 느낌도 있지만, 이 정도 무게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내일 오전부터는 헌터 훈련장에서 재활 훈련을 시작해 보자."

수영이가 학교에 간 시각.

나는 오전 9시가 되기 전에 헌터 훈련장을 찾아갔다.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의수를 움직여 보면서 전투 훈련을 시작했다.

쓔와아악!

"크윽!"

무게 중심이 크게 흔들리면서 상체가 뒤틀린 채 검의 궤도가 비껴 나갔다.

"제길, 하루 이틀로는 어렵겠는데...."

역시 조금 더 가벼운 의수를 구매하는 게 나았을지도.

나는 교환을 고려해 보면서 3시간 동안 인터넷으로 공유된 재활 훈련 영상을 확인하며 몸을 움직였다.

"알파-1, 전개."

철컥.

검신이 튀어나온 순간, 나는 재빨리 몸을 회전시켜 왼팔을 휘둘렀다.

이어, 오른손에 쥐어진 도검을 재빠르게 내질렀는데.

전투 스타일이 다양해진 덕분일까?

나는 새로운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알파-2, 전개."

촤라락!

왼손을 바짝 당기면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검신과 방패를 동시에 전개한 상태.

그만큼 마력 전지는 빠르게 소모됐다.

"37%... 슬슬 돌아가자."

4시간의 훈련 결과, 100MN의 마력 전지는 63%나 소모됐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인터넷을 통해 재활 훈련 스케줄을 확인했다.

그리고 의수를 착용한 헌터의 전투 장면을 살펴보며 리바늄이라는 금속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코볼트의 공격에도 흠집 하나 생기지 않는다니... 대단하긴 대단하네."

그렇게 저녁 시간까지 헌터들의 전투와 훈련 영상을 살펴봤고, 그에 맞춰 자택에서도 가능한 재활 활동을 시작했다.

* * *

"1급 포션을 구할 수 있다면... 아니, 그건 어렵겠지. 그렇다면 그 여자한테...."

수영은 본인의 컴퓨터로 한 여성의 이름을 검색했다.

대한민국 서열 26위, 성녀 김다은.

특수 능력 중에서도 희귀하다 일컬어지는 치유의 힘을 가진 여인이다.

일본에서 역시 신녀(神女)라는 존재가 있었으며, 미국 역시 천사(Angel)로 불리는 치유 능력의 헌터가 존재한다.

하지만 잘려 나간 왼팔을 재생시킬 정도의 능력을 보유한 것은 세계에서도 단 일곱 명뿐.

그중 한 명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김다은이란 여인이다.

"이 여자가 올해로 27살이구나. 그런데, 어째 40대였던 시절하고 바뀐 게 하나도 없네."

그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아랫사람처럼 대하였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또한, 그녀가 설립한 백화(白花) 길드의 멤버들은 그녀를 여왕처럼 떠받들었다.

뭐, 그녀가 만든 길드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건가?

1회차의 수영은 다은의 오만함에 그만 기가 질리고 말았다.

엮이기 싫은 헌터 중 한 명으로 손꼽을 정도로.

"차라리 올리비아나 사쿠라한테 부탁하는 편이 낫겠어."

치유 능력자는 희귀한 만큼이나 국가에서 높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세금 면제를 포함한 수많은 혜택들.

국민들은 그 혜택에 시위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김다은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겠다고 선언한 그 순간, 정부와 협회는 언론을 통제하며 그녀를 어르고 달래야 했다.

1등급 포션에 준하는 치유 능력자는 대한민국에서 그녀 한 명뿐이니까.

그녀를 잃었다가는 막대한 손실이 뒤따르겠지.

꽈악.

수영은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조그마한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내가 전생에서의 힘만 되찾을 수 있다면...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1급 포션을 구매할 정도의 돈은 쉽게 마련하기 어렵겠지. 게다가 지금 연령으론 헌터증도 발급받지 못할 테고."

던전의 출입에는 헌터증이 반드시 필요했다.

정부 및 대규모 길드들이 관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통제를 벗어난 지역의 게이트라면 언제든지 출입이 가능하다.

동시에 마수들에게 점령된 전라도 등의 지역에서 마석을 확보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돼."

눈앞에서 죽어 가던 부친의 모습이 모친의 마지막 모습과 겹쳐 보였다.

"더 이상... 잃을 순 없어."

수영은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건혁이 재활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게이트에 들어간 시각.

그녀는 뒷산으로 올라가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한적한 길목으로 들어갔다.

이전부터 가끔씩 방문했던 그녀만의 훈련장이다.

"후우, 시작하자."

* * *

2017년 8월 25일.

초등학교의 여름 방학이 끝나 갈 무렵.

나는 모르건 의수 매장을 찾아갔다.

매장의 주인인 진철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는데.

그는 두 달간의 내 성장에 경이로움을 표했다.

"이야, 역시 천재는 천재라는 건가? 특수 능력도 없는 주제에 이렇게까지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다니...."

내 헌터증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보이는 진철.

그보다 '주제에'라는 단어는 빼 주시면 좋겠네요.

나는 작게 한숨을 흘리면서 오른손으로 체크 카드를 건넸다.

"150MN 마력 전지 30개만 부탁드릴게요."

"오케이. 의수 쪽은 괜찮고?"

"네, 문제없어요."

일전의 거친 전투로 음성 인식 장치가 한 번 고장 난 적이 있었다.

오작동을 일으켰을 땐 간담이 서늘했었지.

음성 인식 장치를 끄고 수동으로 조정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작게 안도했다.

"문제 생기면 바로 말해. 공격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방패가 접혀 버리기라도 한다면...."

"아하하하, 그건 좀 무섭네요."

진철의 말투에는 어느 정도 적응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말을 막 던지는 것 같아 보였지만, 지금은 그가 무심코 툭 내던지는 말 한마디에도 걱정이라는 감정이 담겼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매장을 자주 방문하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게이트에서 무사히 돌아오길 바란다는 의미 정도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

어째서 그렇게 해석했냐고?

그건....

"오랜만이네요. 건혁 씨."

"아, 오랜만입니다. 세민 씨."

모르건 의수 매장의 단골.

대한민국 서열 3,781위인 이세민으로부터 진철의 과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달에 갱신된 서열이 11만대였었죠? 정말 축하드려요."

"아니에요. 그보다 세민 씨도 서열이 많이 오르셨던데요?"

저번 달까지만 하더라도 4,017위였던 그녀는 드디어 3천대에 진입하게 되었다.

그에 비해 나는 이제 겨우 117,890위.

대한민국 정예 헌터인 그녀와 비교하면 초라한 서열이다.

"그래도 56만대 서열에서 11만대까지... 그것도 1년이란 시간으로 도달하셨다는 건 정말로 대단한 일이에요. 진심으로 존경스러울 정도인걸요."

그녀는 특수 능력 각성자다.

물론, 초기 각성 시절 특수 능력 점수가 평균보다 낮게 나와 27만대의 서열에 등록되었지만, 무려 5~6년이란 시간을 쏟아 3,781위로 등극할 수 있었다.

뭐, 나와 시작 지점이 다르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

그러나 그녀는 11만대까지 성장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었다.

"제 경우에는 11만대까지는 특수 능력 덕분에 2년이란 시간으로 가능했지만...."

그래, 나는 특수 능력 하나 없이 56만대에서 11만대까지 도달했으니,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 꽤나... 아니, 상당히 대단해 보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길드원들도 내 성장력을 경악스러운 눈으로 바라봤었지?

"그런데 세민 씨는 오늘 무슨 일로...."

"아, 새로운 의족을 하나 마련해 두려고요."

그녀가 착용한 것은 1급 금속인 아르늄으로 제작된 의족이다.

시중에서도 10~30억 원대를 자랑하는 제품.

물론, 이 모르건 의수 매장에선 최소 8억 원, 최대 17억 원대로 구매할 수 있다.

"뭐, 저렴한 것도 저렴한 거지만, 저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진철 아저씨의 실력은 웬만한 장인보다 더 뛰어나요. 그런 제품을 다른 곳보다 더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면, 이곳을 이용하는 게 당연하겠죠."

그녀의 말대로다.

다른 매장의 제품은 잘 모르지만, 진철이 제작한 의수는 착용감을 포함해 전투 시에도 여러모로 빛을 보였다.

세민은 작게 웃으면서 이내 미간을 찡그렸다.

"아씨, 저 아저씨가 또...!"

담배 냄새인가.

세민은 곧장 진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저씨, 내가 담배는 밖에서 피우라고 말했잖아요!"

"어이, 여기는 내 가게...."

"손님한테 간접 흡연하게 만들 셈이에요?! 최소한 담배는 밖에서...!"

진철을 꾸짖는 세민.

올해로 28살이 된 그녀에게 쩔쩔매는 진철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진철로부터 체크 카드와 함께 작은 종이 상자에 포장된 마력 전지를 건네받았다.

"나중에 문제 생기면 또 찾아와라. 다음 달에도 헌터증 가져오고!"

"제 서열은 헌터 협회 홈페이지에서...."

"그런 건 당사자 앞에서 보는 게 즐거움이라고."

진철이 키득키득 웃어 보이자, 나 역시 작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차피 점검 때문에라도 방문할 생각이었어요. 그러면 가 볼게요. 세민 씨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는 진철과 세민에게 인사를 건넨 뒤, 곧바로 매장을 빠져나왔다.

모르건 의수 매장의 방문객은 의외로 상위 헌터들이 많았다.

세민도 그중 한 명이었지만, 일전에 만났던 나민석이라는 사내.

협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해 본 결과.

그가 서열 767위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열 1,000위 내에 들어선 최정예 헌터를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네.'

아무래도 이 모르건 의수 매장은 몇몇 소수의 헌터에게만 알려진 명당인 모양이다.

첫 방문에서 진철의 불친절한 태도에 매장을 박차고 나갔다면, 나 역시 의수를 비싸게 구매할 수밖에 없었겠지.

나는 수영이를 마중 나가기 위해 택시를 붙잡아 OO초등학교로 출발했다.

* * *

"아빠!"

정문으로 달려오는 수영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이내, 수영이 또래로 보이는 세 명의 여학생이 우물쭈물거리면서 내게 다가왔다.

"아... 안녕하세요."

"흐음? 수영이 친구들이니?"

수영이는 '친구'라는 단어에 살짝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러곤 친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려 작게 손을 흔들었다.

"내일 보자."

"으... 응, 내일 보자."

"잘 가~"

수영이를 향해 손을 흔드는 아이들.

그리고 아이들의 부모들일까?

초등학교 정문에서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돌아가면서 뭐라도 사 갈까?"

"별로... 그보다 저녁에 치킨 시켜 먹을래! 맥... 아니, 콜라도!"

방금 '맥주'라고 말하려던 건 아니지?

나는 수영이를 향해 쓰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치킨은 그저께도 먹었잖아."

"그랬나? 그래도 또 먹고 싶어!"

수영이가 내 품에 안겨 들며 떼를 썼다.

그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던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오늘 저녁은 치킨이다! 대신에 다음 주까지 치킨이나 피자는 참자. 알겠지?"

"으... 응."

대답에 살짝 힘이 없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매일같이 수영이에게 인스턴트만 먹일 순 없지.

 

제25화

25화. 특수 능력 (1)

촤아악!

"흐읍!"

건혁이 서열 117,890위에 올라서고 어느새 이 주일이란 시간이 흘러 9월이 되었다.

서열은 117,890위에서 104,839위로 새로이 갱신됐다.

드디어 정확하게 10만대의 헌터가 된 것이다.

"제3팀은 주변 경계! 제4팀은 마석을 회수해 주세요!"

흑월의 멤버는 어느새 17명까지 늘어났다.

대부분이 3~40만대 서열의 헌터이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헌터들은 전투팀인 제1팀과 제2팀에 배정되었고, 실력이 부족하다 판단된 헌터들은 제3팀의 후방 지원팀에, 그 외 짐꾼들은 제4팀에 배정됐다.

"마스터, 슬슬 점심 식사 시간입니다."

제1팀 팀장인 태형의 보고에 건혁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후우, 벌써 그렇게 됐나요? 그럼, 바로 식사를 할 만한 장소를 찾아보죠."

기존 길드원이었던 태형은 현재 제1팀의 팀장을 맡았다.

지수의 경우에는 제2팀 팀장을, 지혜는 제3팀의 후방 지원팀 팀장을 맡게 되었다.

그 외 현민과 세형은 제1팀의 소속으로 흑월 길드 내에서도 정예로서 활동했다.

물론, 다섯 명 모두 이제 겨우 3~40만대에 접어들었을 뿐이지만 말이다.

'...마스터는 도대체 어디까지 성장할 생각이신 거야?'

지수는 입술을 깨물면서 유유히 앞서 나가는 건혁을 바라봤다.

현재 공략 중인 게이트의 등급은 D다.

게이트의 내부는 숲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수의 코볼트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D랭크로 알려진 코볼트 수십 마리를 단숨에 토벌해 낸 건혁.

길드원들은 그 모습을 이젠 당연하다는 듯 바라봤다.

'정말로 따라갈 수 없는 건가? 아무리 노력해도 천재의 앞에선....'

가슴 속에서 작게나마 일어난 절망감.

그것은 지수만이 아니다.

언젠가 건혁의 옆에 나란히 서겠다던 태형 역시 해당 목표를 접고 본인의 성장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자아, 점심 식사 시간입니다! 짐꾼 여러분들께선 돗자리와 음식들을 꺼내 주세요!"

한 달 전, 신입 모집을 통해 입단하게 된 서열 517,890위, 제4팀... 아니, 수거팀 팀장 박유리가 짐꾼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팀장들의 서열이 3~40만대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녀의 서열은 확실히 비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낮은 서열에 비해 그녀는 다양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F등급 게이트에선 임시 공략대 대장을 맡았던 적도 존재하여 건혁은 그녀에게 제4팀 팀장직을 맡겼다.

제4팀에 소속된 짐꾼들은 그녀의 지시에 따라 서둘러 돗자리를 꺼내 음식들을 세팅했다.

"제1팀과 제4팀은 12시 34분까지 식사를 해 주세요!"

현재 시간은 12시 04분.

두 팀에겐 정확히 30분의 식사 시간이 주어졌다.

그동안 제2팀과 제3팀이 경계 근무를 섰다.

"아아, 나도 빨리 밥이나 먹고 싶네."

"오늘은 꽤 빡세지 않았어?"

후방 지원팀에 소속된 두 남성이 경계를 선 채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확실히 저번보다 빡세기는 했지. 그래도 토벌 수는 마스터가 압도적일걸? 아까 봤냐? 마스터가 코볼트 녀석들 학살하는 거."

"그래, 솔직히 아직도 내 눈을 의심하는 중이야. 코볼트 수십 마리가 떼거리로 몰려왔을 땐 정말 죽는 줄만 알았거든."

"이번 달에 우리 흑월(黑月)이 대한민국 길드 공식 서열 476위가 됐다는 이야기 들었냐? 길드 등급도 D로 올라갔잖아."

길드 순위는 길드의 대외 실적과 길드원들의 서열 및 전력에 따라 움직였다.

30위 안에 들어간 길드들은 웬만한 헌터들이라면 모두 알 정도로 유명한 대규모 길드들이다.

그 외 100위 이내에 들어선 길드들 역시 길드원의 숫자가 100명을 넘을 정도로 큰 규모를 이루고 있었는데.

현재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길드의 숫자는 무려 2,371개.

그만큼 많은 헌터들이 임시 공략대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안정적인 수입 및 고정적인 멤버들을 바란다는 의미였다.

그중 흑월(黑月)이라는 길드는 불과 몇 개월의 시간으로 최하위권에서 중상위권의 순위에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대단하긴 대단하지만, 그만큼 허수도 많기는 하잖아."

"허수가 많다 하더라도 길드가 만들어진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476위까지 올라선 길드는... 솔직히 나는 처음 본다."

"나는 꽤 봤었는데? 대규모 길드에서 빠져나온 헌터가 길드 하나를 새로 만들어서 단숨에 200위대까지 올라선 거."

동료의 대답에 대화를 나누던 사내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건 예시가 다르잖아. 마스터가 헌터로 각성한 건 2016년 10월이라고 하니... 아직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고? 각성할 때만 하더라도 우리보다 서열이 낮았다고 하던데, 단기간에 서열 10만대에 들어서고, 이런 길드를 만들어 냈으니...."

"그래서?"

"아니, 그냥 내 롤 모델이란 이야기야. 듣기론 성장 점수가 나보다 낮다고 하더라고. 그런데도 끊임없는 노력으로 성공하게 된 헌터잖아. 나도 언젠간 제1팀으로 들어가서 마수들이랑 싸워 보고 싶어."

한 달에 다섯 번.

제3팀과 제4팀에게도 실전 경험을 익힐 기회가 주어졌다.

당일엔 제1팀 또는 제2팀 중 한 팀이 건혁과 함께 참석해 수거팀으로 활동했다.

제3팀과 제4팀에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뒤에는 건혁을 비롯한 흑월의 정예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의미다.

"다음 주엔 실수나 하지 마라. 이틀 전에 네가 너무 앞서 나가면서 우리는 엄청 힘들었었다고."

"나... 나도 알고 있어!"

제3팀과 제4팀은 F~E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며 실전을 익혔다.

그리고 각자 자택 주변의 헌터 훈련장에서 개인 훈련 시간을 가졌는데.

제3팀과 제4팀의 헌터들은 짐꾼으로서의 비참함을 절실하고 느끼고 있었다.

지금이야 흑월 길드에서 높은 수익을 받으면서 활동하고 있지만....

'나도 반드시....'

그들 모두 '진짜' 헌터가 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건혁이란 존재는 그야말로 하위 헌터들의 롤 모델이나 다름없었다.

56만대의 서열에서 11개월 만에 10만대로 성장하였으니 말이다.

박건혁이 각성했을 당시 성장 점수를 비롯해 각성 점수는 평균 이하.

심지어 특수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지, 노력 하나만으로 불가능함을 가능하게 만들어 낸 건혁의 존재는 수많은 헌터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본인들 역시 '진짜'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물론, 작심삼일로 끝난 헌터들도 상당히 많았지만, 건혁은 절실함을 바탕으로 노력하는 헌터들을 흑월로 받아들였다.

"출발하겠습니다!"

제2팀과 제3팀이 점심 식사를 마친 다음 공략이 재개됐다.

푸슥.

수풀을 가로지르며 주변을 경계하는 길드원들.

그들은 코볼트 부족과 조우하며 한바탕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바닥에 널브러진 70여 마리의 코볼트들.

제3팀은 제4팀의 마석 채취를 도왔고, 제1팀과 제2팀은 그동안 휴식을 취했다.

"하아, 힘들어 죽겠다."

"그보다 코볼트 장군도 순살(瞬殺)이네."

"...정말로 10만대 헌터가 맞는 걸까?"

"무슨 소리야?"

"아니, 마스터 말이야. 10만대 서열의 헌터가 C랭크인 코볼트 장군을 저렇게 빠르게 죽일 수 있나 싶어서."

"확실히... 이상하긴 이상하네."

"저번에 유X브에서 8만대 서열의 헌터가 단신으로 코볼트 부족과 싸우는 모습을 봤었는데, 코볼트 장군한테 조금 고전하는 모습을 보이더라고."

"아, 그거 나도 본 거 같아. 근데 그 헌터는 코볼트 50마리를 쓰러트린 다음에 장군과 싸운 거잖아. 고전하는 것도 당연하지."

"...그런가?"

건혁의 전투 능력에 의문을 보인 한 길드원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게 공략이 마무리되고, 흑월의 길드원들은 게이트를 빠져나가 결산을 했다.

길드 계좌에 입금된 금액 중 비율에 맞춰 분배된 보수.

길드원들은 모두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몇 번 이야기를 했었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중소 규모 길드들과 함께 B등급 게이트를 조사할 예정입니다. 1박 2일로 진행되니, 불참할 사람들은 모레까지 제게 문자를 보내 주세요. 필수 참가는 아니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건혁의 이야기에 길드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이번에 참가하는 길드 중에는 길드 공식 서열 87위, 크로스펠이 참가하기로 결정됐습니다."

"크... 크로스펠이요?!"

"예, 크로스펠에서 파견되는 부대원은 모두 2군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서열 10,876위인 정찬우 씨가 해당 부대의 대장을 맡는다고 하더군요."

"우와!"

서열 1만대의 정예 헌터가 동행한다는 소식에 길드원들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이번 공략에 참가하는 길드의 숫자는 8개로, 참가 인원은 2~300명 정도로 예상됐다.

"만약 참가를 희망하시는 분들은 조금이라도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대비를 해 두시길 바랍니다."

길드원들은 기대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해산하겠습니다. 모두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건혁은 박수를 치며 마무리를 짓고, 미리 불러 둔 택시에 올라탔다.

그것을 본 길드원들은 이번 B등급 게이트 공략에 참가할지, 서로의 의견을 물어보며 시끄러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덜컥.

택시에 탄 건혁은 씨익 입술을 말아 올렸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듯이 말이다.

그는 황급히 자신의 스테이터스를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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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건혁

*종족: 인간

*칭호: -

*출신 국가: 한국

*LV: 50

*근력: 30

*민첩: 21

*체력: 25

*마력: 25

*AP: 0

*스킬: [빙마검(氷魔劍)-L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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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D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던 도중 레벨이 50에 도달했다.

그와 함께 스킬란을 채우게 된 건혁.

그래, 세간에서 특수 능력이라 떠드는 것이 발현된 것이다.

그것도 속성 능력이라 불리는 빙마검이!

또한, LV50에 달성한 것을 축하하기 위함일까?

15AP를 받은 그는 메마른 입술을 한 번 핥으면서 민첩과 마력에 모든 포인트를 투자했다.

"크으...."

주먹을 쥔 채 희열에 떠는 건혁의 모습을 택시 기사는 의아하게 바라봤다.

"무슨 좋은 일 있으셨나 봐요?"

택시 기사의 물음에 건혁이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조금 기쁜 일이 있어서요."

건혁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수영이 만든 훈련장을 찾아갔다.

흔적만 남기지 않는다면 조금 정도는 사용해도 상관없겠지.

하늘이 깜깜해져 가는 그때.

건혁의 오른손에 푸른빛을 내는 얼음의 검이 쥐어졌다.

"위력을 한번 시험해 보고 싶긴 한데...."

바위나 나무를 베었다간 수영에게 들키고 말 것이다.

때문에 건혁은 본인이 사용하는 도검을 향해 빙마검을 내리쳤다.

카앙!

커다란 쇳소리가 울려 퍼진다.

전력으로 내리쳤음에도 빙마검과 도검은 모두 멀쩡했다.

그러나 도검의 일부분을 덮은 얼음 조각들.

건혁은 그것을 내려다보며 작게 탄사를 터트렸다.

"스킬 레벨을 높이면 덮는 범위도 위력도 강해진다는 건가."

스킬 레벨 역시 생명체의 에너지를 경험치로 치환하여 높일 수 있는 모양이다.

건혁은 입술을 씰룩이면서 뒷정리를 하고 산을 내려갔다.

자택으로 귀가한 그는 수영에게 이 사실을 밝힐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직접 말하기보다 언론 매체를 통해 놀라게 해 주고 싶었던 탓이다.

'다음 주까지 조금이라도 스킬 레벨을 올려 둬야겠어.'

 

제26화

26화. 특수 능력 (2)

건혁은 조용히 수영의 방문을 열었다.

침대에 누워 새근새근 잠든 딸.

마치 천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조심조심 방문을 닫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이내, 유X브 및 SNS에서 빙마검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헌터들을 찾아, 능력을 빠르게 강화시킬 수 있는 방법과 능력의 활용법 등을 조사했다.

'우와. 이런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구나.'

인터넷에서 찾은 특수 능력자들의 기술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큰 동작과 광범위한 효과.

저 기술에 맞는 멍청이도 있을까 싶지만, 마수들은 그 화려한 기술에 당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지능이 낮은 마수들을 상대로는 효과적이겠네."

다음 날, 수영이를 등교시킨 건혁은 곧바로 훈련장을 찾아갔다.

오른손에 소환되어 쥐어진 빙마검.

이 냉기가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들겠어.

그는 작게 심호흡을 하면서 기초 검술을 펼쳤다.

쓔와악!

주변에서 놀란 듯한 목소리가 일어났다.

훈련장을 꾸준히 나오던 헌터들은 건혁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그만큼 단골이었으니 말이다.

언제나 훈련용 도검을 휘두르던 그가 특수 능력... 그것도 속성 능력을 사용해 보이다니!

쓔악!

건혁은 잠시 숨을 내쉬었다.

빙마검을 감출 생각 따윈 없다.

힘순찐 주인공을 흉내 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감춰야 할 정도의 힘 같은 건 없으니까.'

지금의 그는 힘을 감춰 봐야 손해일 뿐이다.

오히려 대놓고 자유롭게 훈련을 하는 것이 마음도 편하겠지.

한편, 건혁의 훈련을 지켜보던 고구려 길드 제1 인사팀 팀장, 김광석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건혁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폭발적인 성장을 보여 준 그가 과연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작은 기대감이 일어난 것이다.

때문에 스카우트 대상에게 다가가기 전, 매번 그의 훈련을 지켜보던 광석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특수 능력?"

"바... 박건혁 씨가 특수 능력을 각성했단 이야기는 없었을 텐데...."

광석의 옆에 서 있던 인사팀 주임, 해연 역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해연이 스마트폰을 두드리던 때, 광석의 발걸음이 건혁을 향해 이동했다.

그와의 거리는 어느새 2~3m까지 가까워졌다.

건혁은 자신에게 다가온 광석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그에 광석은 재빨리 명함을 꺼냈다.

"실례했습니다. 저는 고구려 길드 제1 인사팀 팀장인 김광석이라고 합니다."

"아... 예, 그런데 무슨 일로...."

"실례지만 저희 인사팀에서는 박건혁 헌터의 폭발적인 성장력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특수 능력을 각성했다는 내용을 발견한 적이 없었던지라...."

"특수 능력은 어제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그... 그렇군요."

바로 전날에 각성한 능력을 이 정도까지 펼쳐 보였다고?!

광석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베테랑 헌터들 역시 이제 막 각성한 특수 능력을 적응하기 위해서는 몇 주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건혁의 몸놀림은 특수 능력이 발현되고 몇 개월은 지난 듯한 사람처럼 보였다.

"실례가 아니라면 곁에서 훈련을 조금 지켜봐도 괜찮을까요?"

"예, 상관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광석은 10m 정도 떨어져 건혁의 훈련을 지켜봤다.

"아, 목각 인형이 필요하시다면 저희 쪽에서 비용을 대 드리겠습니다."

광석의 발언에 해연이 살짝 놀랐다.

이 사람한테 이런 모습이 있었던가?

10만대 서열의 헌터에게 비용까지 지불하며 훈련을 지켜보겠다니.

그러나 건혁은 부담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건혁은 2m 높이의 목각 인형을 자비로 구매하여 설치했다.

서걱!

인형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 내는 빙마검.

이어, 가슴과 허리를 분리시키면서 목각 인형을 세 조각으로 만들었다.

광석은 절단된 부위에서 일어난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을 보고 작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저 정도면 5만대 서열에 들어서는 것도 가능하겠는데?"

"하지만 마력이 받쳐 줄 수 있을지...."

해연의 말에 광석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아무리 뛰어난 특수 능력일지라도 마력이 부족하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러나 건혁은 1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빙마검을 휘둘렀다.

"의수를 착용한 채 특수 능력을 1시간 동안 구현할 수 있다면... 마력량은 충분하다는 이야기지."

광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빙마검을 해제하고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아 내는 건혁.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광석을 바라봤다.

"정말로 훌륭한 검술이었습니다."

광석의 칭찬에 건혁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단순한 기초 검술입니다."

"현재 흑월이라는 길드를 운영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박건혁 씨라면 분명 흑월을 큰 길드로 만들 수도 있으시겠죠.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제안이요?"

"고구려 길드에 가입해 보실 의향은 없으십니까? 흑월 길드의 멤버들 역시 전원 저희 고구려 길드에서 수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파격적인 제안에 건혁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뒤늦게 달려온 해연 역시 마찬가지다.

"티... 팀장님?"

그녀는 광석의 행동을 만류하려 했다.

건혁의 가입은 반가워해야겠지.

그러나 흑월의 길드 멤버들은 다르다.

고구려 길드에 소속된 짐꾼들이 차라리 나을 정도니까.

그나마 몇몇은 짐꾼으로 받아 줄 수도 있겠지만, 50만대의 헌터를 도대체 어디에 쓰란 말인가.

건혁은 광석의 제안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희 길드의 멤버들은 어떤 역할을 맡게 되죠?"

"아쉽게도 건혁 씨와 함께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마 3군의 공략대 및 수거팀으로 배정되겠죠."

"후우, 그렇다면 제안은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유를 여쭈어도 괜찮을까요?"

"죄송합니다. 제 개인적인 고집 때문인지라...."

"그렇군요."

설마, 이 자리에서 제안을 걷어찰 줄이야.

광석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반면, 해연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황금이 제 발로 굴러들어 온 마당에 그걸 걷어찬다고?

지금 자신이 얼마나 큰 행운을 거절한 것인지 아는 걸까?

해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고구려 길드로 들어오신다면 박건혁 씨는 다양한 전투 경험을 익힐 수 있을 겁니다. 또, 그에 따른 천문학적인 보수가 약속되겠죠. 흑월의 헌터들 역시 지금보다 더욱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저희 길드의 짐꾼들은 매달 8~900만 원의 월급을 받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수입을 약속해 주실 수 있나요?"

"...예?"

고구려 길드에선 짐꾼들에게 매달 500만 원의 월급을 지급한다.

물론, 실력이 늘수록 급여 역시 늘어나지만, 8~900만 원의 월급을 받는 짐꾼은 아마 몇 없을 것이다.

때문에 건혁의 발언에 해연이 미간을 좁혔다.

"저희는 일당 40만 원을 지급하며, 매달 5번 정도 공략대로서 활동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짐꾼들을... 공략대로 말입니까?"

"예, 그리고 수거는 저와 기존 공략 대원들이 번갈아 가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방식에 광석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반면, 해연은 콧바람을 차면서 팔짱을 꼈다.

"그럼, 공략 대원들의 보수가 줄지 않나요?"

"저희 길드의 공략 대원들은 매달 3,000만 원 이상의 보수를 지급받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3,000만 원은 저희 길드에서도 신입들이 받는 보수입니다. 또한, 길드원 전원 해당 운영 방침에 특별한 반발 없이 따라 주고 있습니다."

해연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40만대의 헌터들이 매달 3,000만 원 이상의 보수를 받는다고?

그녀는 자신의 월급을 떠올리면서 얼굴을 살짝 붉혔다.

"참고로 저는 길드원들보다 몇 배 많은 보수를 받고 있습니다."

광석은 해연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영업용 미소와 함께 건혁을 바라봤다.

"만약 생각이 바뀌신다면 명함에 적혀 있는 번호로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제안은 정말로 감사합니다."

광석은 해연을 데리고 곧장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얼굴을 붉힌 채 입술을 잘근 깨무는 해연.

그녀는 서열 39만대의 헌터로, 고구려 길드 인사팀에 취직해 760만 원의 월급을 받고 있다.

그런데, 서열 50만대의 짐꾼이 자신보다 100만 원이나 더 번다고?

8~900만 원은 자신이 헌터로 활동했던 시절에나 받을 수 있었던 금액이다.

그걸 고작 50만대 서열의 짐꾼이....

뿌드득.

그녀는 이를 갈면서 주먹을 세게 쥐었다.

* * *

광석과 해연이 훈련장을 나서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아까운 짓을 한 건가?"

그러나 후회는 딱히 없었다.

길드원들이 받을 차별적 대우와 모욕적인 언사를 생각해 보면, 방금의 대처는 길드 마스터로서 당연한 것이겠지.

길드원들의 안정적인 삶을 바란다면 고구려 길드에 들어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짐꾼의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다는 신문 기사를 떠올리자, 광석의 제안은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샤워 및 탈의를 한 다음 수영을 마중 나갔다.

"아빠!"

도도도 달려오는 수영이를 번쩍 들어 올린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몸을 편히 쉬게 만들었다.

뭐, 그래 봐야 거실 소파에 앉아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정도지만.

그렇게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으로 하루가 지나갔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수영이를 등교시키고, 택시를 잡아 관악구로 향했다.

남현동에 위치한 D등급 게이트 앞에선 흑월에 소속된 헌터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마지막인 모양이네.

"다들 모이셨네요. 그럼, 출발하도록 하죠."

나는 협회 직원에게 서류와 헌터증을 보여 주고, 길드원들과 함께 게이트로 들어갔다.

게이트의 필드 환경은 동굴로, 블랙 울프들이 주로 서식하고 있다는 모양이다.

C랭크 마수인 레드 울프도 간간이 발견된다는 정보 역시 협회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기본 대형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제1팀과 제2팀은 방패를 준비해 두십시오."

내가 선두에 서고, 제1팀과 제2팀은 후방 지원팀과 수거팀을 호위하며 마수를 토벌한다.

이것이 흑월 길드의 기본 대형이다.

게이트에 들어오고 1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전방에서 붉은 구슬들이 반짝였다.

"전투 준비하세요. 블랙 울프입니다."

허공을 떠도는 붉은 구슬은 다름 아닌 블랙 울프의 눈동자였다.

나는 허리께의 도검을 바라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은 스킬 레벨을 높이는 데 집중해야겠어.

"후우, 빙마검(氷魔劍)."

내 중얼거림과 동시에 오른손에서 냉기가 피어올랐다.

쩌저적.

눈 깜짝할 사이에 만들어진 푸른빛의 양날 직검.

그 순간.

"...?!"

길드원들이 경악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빙마검을 한 번 휘두른 다음 고개를 슬쩍 돌려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마... 마스터? 그건...."

"제가 말씀드리지 못했네요. 그저께 특수 능력을 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음의 검을 만드는 능력이더군요."

"트... 특수 능력...."

"...검사는 받으셨습니까?"

지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 익숙해진 뒤에 받을 생각입니다. 그래도 이번 달 안에는 받아 두는 게 좋겠네요. 다들 긴장하세요.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냄새를 맡은 건가?

아니면 너무 시끄럽게 떠든 탓일지도.

블랙 울프의 무리가 우리에게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헛웃음과 한숨 소리는 일단 무시하자.

"선공을 취하겠습니다. 방패 준비하세요."

내 지시에 제1팀과 제2팀의 멤버들이 전방을 향해 방패를 겨누었다.

나는 지면을 박차고, 놈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블랙 울프와 눈이 마주친 순간.

촤아악!

빙마검을 휘둘렀다.

눈앞을 휘날리는 붉은 액체.

"흐읍!"

어제도 느낀 거지만, 확실히 무겁긴 무겁네.

빙마검은 크기가 큰 만큼 도검보다 2~3배 정도 무거웠다.

나는 빙마검을 두 손으로 잡고, 어제 연습한 대로 몸을 움직였다.

 

제27화

27화. 특수 능력 (3)

파밧!

신속함과 정확함.

나는 그 두 가지를 추구하며 블랙 울프를 단 일격으로 쓰러트렸다.

그것을 본 길드원들은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전 전투에서는 제가 모든 마수들을 토벌하겠습니다. 오후에는 제1팀과 제2팀이 번갈아 가며 선두를 맡고, 제가 후위에서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의수와 특수 능력을 동시에 사용하면 마력 소모가 장난이 아니거든요."

"아...."

"그러니, 오후에는 마력을 회복하며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길드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선두에 선 채 수십... 아니, 수백 마리의 블랙 울프와 일곱 마리의 레드 울프를 토벌하면서 길드원들의 놀라움을 일으켰다.

도검을 사용할 때보다 빙마검을 사용할 때, 마수의 가죽은 더욱 쉽게 베어졌다.

게다가 속성 공격으로 추가 데미지까지 들어가니, 토벌 속도가 평소의 2배나 빨라진 모양이다.

나는 수거팀으로부터 토벌 수를 듣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블랙 울프를 217마리나 잡았다고요?"

"네, 이 정도만 해도 4,000만 원은 될 것 같은데...."

마력이 바닥을 칠 만도 했네.

너무 욕심을 부린 모양이다.

물론, 그 덕분에 스킬 레벨이 2로 오르면서 빙마검을 사용할 때 소모되는 마력량이 줄고, 위력이 조금이나마 상승된 모습을 보였다.

"후우, 오후에는 후위에서 대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레드 울프가 출몰할 때만 가세하죠."

"알겠습니다."

제1팀 팀장 김태형이 대표로 대답했다.

"슬슬 점심 식사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수거팀과 후방 지원팀 분들께선 식사 준비 부탁드립니다."

* * *

건혁의 지시에 제3팀에 소속된 멤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돗자리를 펼치고 각 길드원들의 도시락을 준비한 것이다.

이후, 제2팀과 제3팀은 주변 경계를, 제1팀과 제4팀은 점심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다음 길드원들은 공략을 재개했다.

후위로 물러난 건혁.

오전에 졸졸졸 건혁의 뒤를 따라다닌 제1팀과 제2팀은 힘이 넘치는 모습으로 큰 활약을 펼쳤다.

"으아앗!"

푸욱!

"죽어!"

길드원들의 사기가 크게 향상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호승심이 일어난 것이다.

오전에 본 건혁의 미친 듯한 전투 능력.

안 그래도 괴물 같았는데, 특수 능력을 얻은 건혁은 괴물 그 자체였다.

길드원들은 그런 건혁을 보면서 절망했다.

역시 재능에 격차가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 절망하는 와중에도 제1팀 팀장, 태형은 주먹을 쥔 채 눈을 부릅떴다.

언젠가 따라잡겠다고 다짐했던 사내가 이젠 하늘까지 올라가 버렸으니....

"절망하지 마라. 저 사람과 함께하기로 결심한 그 순간부터 내게 절망 따윈 허락되지 않았어. 나는... 저 사람 곁에서 '진짜' 헌터가 된다."

그는 무너지려는 마음을 붙잡듯 자기 자신을 향해 그리 말했다.

그것을 들은 길드원들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짐꾼으로 밑바닥 인생을 경험한 그들에게 헌터란 닿을 수 없는 선망의 존재였다.

그러나 박건혁이라는 사내는 그런 자신들의 손을 붙잡아 주었다.

그래, 우리는 헌터가 되기 위해 흑월에 들어온 것이다!

"절망은... 질릴 듯이 경험해 봤어."

"적어도 마스터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헌터가 된다."

"X발, 짐꾼으로 되돌아갈까 보냐. 반드시 헌터가 돼서 그 녀석들 앞에서 당당해질 거야."

그들은 저마다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눈빛을 굳혔다.

그저께보다 2~3배나 늘어난 토벌 수.

후방 지원팀과 수거팀은 제1팀과 제2팀의 활약을 지켜보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니, 전율했다는 표현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그저께보다 월등히 높아진 두 팀의 전투 능력.

그런데, 자신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제길."

제1, 2팀이 빠르게 앞서가기 시작했다.

그에 영향을 받은 제3, 4팀 역시 눈에 불꽃을 튀기며 주먹을 쥐었다.

그것을 지켜본 건혁은 씨익 입술을 말아 올렸다.

'빙마검을 보고 절망하지 않을까도 걱정했었는데... 아무래도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모양이네.'

그렇게 게이트를 빠져나온 길드원들은 모두 녹초가 되어 있었다.

후방 지원팀과 수거팀은 수백 개의 마석을 채취하는 데 진을 뺐고, 제1팀과 제2팀은 전투에 모든 체력을 쏟아 내고 말았다.

건혁만이 멀쩡한 얼굴로 게이트를 나와 직접 마석들을 처분했다.

"금일 길드 계좌에 입금된 금액은 7,972만 원입니다."

"우와...."

"치... 칠천...?"

"...내일은 마사지라도 받아야겠네."

6~70%는 건혁의 공적이었으나, 건혁은 고정된 비율에 따라 정확하게 보수를 분배했다.

수거팀과 후방 지원팀에게는 고정 보수에 특별 보수를 더하여 도합 80만 원을 지급해 주었다.

물론, 특별 보수는 건혁의 자비로 지급된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만족스러운 하루가 지나갔다.

* * *

다음 날, 수영이 학교에 등교한 시각.

건혁은 개별적으로 신청해 둔 D등급 게이트를 찾아갔다.

"정말로... 혼자서 들어갈 생각이십니까?"

"예, 확인 부탁드립니다."

강동구에 위치한 D등급 게이트.

협회 직원이 걱정스러운 눈치로 건혁의 헌터증과 문서를 확인했다.

단독 공략을 예약해 둔 건혁.

10만대 서열을 지닌 그에게는 D등급 게이트의 단독 공략이 허가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는 홀로 D등급 게이트에 들어가 실전 훈련을 개시했다.

언제까지 훈련장을 뒹굴 순 없으니 말이다.

촤악!

-캬아악?!

"후웁!"

건혁은 숨을 들이마시며 재빨리 몸을 비틀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코볼트들.

쩌억, 아가리를 벌린 늑대 얼굴은 참으로 공포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건혁은 몸 한 번 움찔거리지 않고, 침착하게 코볼트의 머리를 베어 냈다.

서걱!

수십 채의 움집이 세워진 작은 마을.

건혁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수거팀이 없으니까 조금 귀찮네."

전투보다 마석을 회수하는 데 더 많은 체력이 소모된 것 같은 느낌이다.

배낭이 두둑해졌을 무렵, 건혁은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아쉽게도 스킬 레벨은 오르지 않았다.

스테이터스 레벨 역시 마찬가지.

"뭐, 하루 만에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니까."

건혁은 길드원들과 함께하지 않는 날마다 D등급 게이트를 예약했다.

그리고 길드원들과 함께할 때보다 1.5배 많은 수익을 거두었고, 협회에 각성 점수를 받으러 갈 무렵에는 스킬 레벨 역시 3에 도달해 검사관의 경악성을 자아냈다.

입을 떡 벌리며 검사 결과를 바라보는 검사관.

그는 금일 검사 결과를 8월 말에 받은 검사 결과와 대조해 보면서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특수 능력에 대한 점수가 반영되면서 이번 달 각성 점수는 1,200점을 넘으셨네요. 9만대 서열의 헌터가 6~700대 점수임을 고려하면... 10월에는 서열이 큰 폭으로 상승하실 거예요."

컴퓨터에 표시된 건혁의 각성 점수는 1,207점.

처음 각성했을 때만 하더라도 7점에 불과했던 각성 점수는 수직 상승에 가까운 그래프를 나타냈고, 불과 1년 만에 1,200점을 높이는 기적을 보여 주었다.

'수영이가 헌터증을 발급받기 전까지 1,000위 내에 들어가자.'

헌터증을 발급받은 당시에 1,000위 안에 들어가자는 목표를 세웠다면 모두가 한결같이 비웃음을 터트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황은 급변했다.

'빙마검(氷魔劍)의 스킬 레벨을 더욱 높인다면....'

분명, 대한민국에서도 최정예로 불리는 헌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협회 건물을 나선 건혁은 가까운 분식집에서 점심을 먹은 뒤, 수영이를 마중 나갔다.

건혁의 성장에 자극을 받은 길드원들.

그들은 10월 1일 자정이 되자마자 곧장 협회 사이트에 접속했다.

"좋았어!"

지수는 주먹을 쥐면서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자신의 서열이 37만대에 들어선 것이다.

광범위하게 말하면 30만대 서열의 헌터가 되었다.

그러나 기쁜 것도 잠시.

그녀는 서둘러 '박건혁'의 이름을 검색했다.

"미... 미친...!"

놀람에 튀어나온 육두문자.

위잉!

그녀의 스마트폰이 진동을 울렸다.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후방 지원팀의 팀장을 맡은 지혜였다.

―언니, 지금 마스터 서열...!

"그래, 나도 봤어."

―아... 아니, 어떻게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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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건혁

*출신 국가: 대한민국

*길드: 흑월(黑月)

*서열: 60,113위

*특수 능력: 빙마검(氷魔劍)

*등록일: 2016.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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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만에 4만 명을 제치고 6만대 서열의 헌터가 된 건혁.

아니, 정확히는 고작 1년 만에 50만 명을 제친 것이다.

그의 성장 그래프를 본 지수는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마스터, 정말로 미친 거 아니냐?"

―....

"그보다 지혜는... 드디어 43만대 서열에 들어갔네. 축하해."

―...기분이 조금 묘하네요.

"마스터는 휴일에도 혼자서 게이트에 들어가셨잖아. 그만큼 노력한 결과라고 봐야지. 뭐, 무언가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말이야."

지수의 말에 지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제1팀 팀장인 태형과 제4팀 팀장인 박유리 및 길드원 전원이 서로에게 연락을 걸면서 건혁의 서열에 대한 놀라움을 드러냈다.

"진짜, 취직 하나는 잘했네."

"X발, 이러다가 쫓겨나는 건 아니겠지?"

"어떻게 한 달 만에 4만 명을 제치고 6만대 서열이 돼?! 아니, 113명만 제쳤으면 5만대였네."

"미친, 나도 혼자서 게이트에 들어가고 싶다. F등급 게이트를 단독 공략하려면... 적어도 299,999위에 들어가야 하는 건가?"

길드원들은 온갖 생각을 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하필이면 10월 첫 공략이 8개의 중소 길드와 함께하는 B등급 게이트 공략이다.

때문에 사흘간 휴식 시간을 가지게 된 길드원들은 건혁의 서열에 자극을 받은 것인지, 쉬는 동안 훈련장을 드나들면서 미친 듯이 몸을 움직였다.

* * *

2017년 10월 2일 월요일,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검단산.

8개의 중소 길드가 참가하는 대규모 공략대.

그중 대장직을 맡은 건 대한민국 길드 공식 서열 87위, 크로스펠의 1군 멤버인 서열 10,711위 정찬우였다.

나는 주변을 슬쩍 둘러봤다.

'이 중에서 내 서열은 다섯 번째 정도인가.'

로스터 길드의 마스터, 김유진 - 서열 53,788위.

빌포드 길드의 마스터, 박재진 - 서열 54,511위.

왕검 길드의 마스터, 김석민 - 서열 59,013위.

그 외 길드의 마스터들은 대부분 서열 10만대 밖을 겉도는 헌터들이었다.

흑월에서 B등급 게이트 공략에 참가하기로 한 길드원은 17명으로, 전원이 참가했다.

잠시 뒤, 정찬우가 단상으로 올라갔다.

"예, 인원 파악은 끝났네요. 도합 157명의 헌터들과 50명의 짐꾼들이 금일 B등급 게이트 공략에 함께합니다. 먼저,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저는 금일 공략대를 총괄할 크로스펠 제1군에서 활동 중인 서열 10,711위 정찬우라고 합니다. 모두들 반갑습니다."

몇몇 헌터들이 박수를 보내 주었다.

"다음으로 공략대를 8개의 팀으로 구성하도록 하겠습니다. 각 길드의 마스터들께서 팀장 역할을 맡아 주시면 되고, 제1팀은 크로스펠 길드, 제2팀은 빌포드 길드, 제3팀은 흑월 길드...."

아무래도 팀 순서는 마구잡이로 정한 모양이다.

그는 기본적인 설명과 주의 사항을 전달한 다음, 협회 직원에게 서류와 헌터증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입장 허가가 떨어지자, 각 길드의 마스터들이 찬우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움직였다.

 

제28화

28화. 검단산 게이트 (1)

"저희도 움직이죠."

아무래도 잔뜩 긴장한 모양이다.

아니, 위축되었다고 해야 하나?

참가한 헌터들 중 흑월의 길드원들은 모두 최하위권의 서열을 보유하고 있다.

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 때문일까?

주변에서 날아오는 시선들이 살짝 따가웠다.

"...4~50만대 서열이 헌터로 참가했다고?"

"차라리 짐꾼들이랑 싸우고 말지. 저게 뭐야?"

"그래도 마스터 쪽은 6만대의 헌터라잖아. 심지어 특수 능력까지 각성했다 하니...."

"마스터가 멱살 잡고 끌고 가는 건가? 무슨 버스 기사도 아니고...."

주변의 수군거림에 흑월 멤버들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태형과 지수는 발끈한 기색을 보였지만, 나는 두 사람을 말리면서 고개를 슬쩍 돌렸다.

"고작 주변 시선과 수군거림에 위축되어 있을 거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세요. 그 상태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겁니다."

길드원들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이번 공략은 당신들이 더욱 높은 곳을 바라보기 위한 경험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신청했습니다. 물론, 제게도 큰 경험이 되겠죠.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태로는 무의미하겠군요."

"걱정 마세요. 이 정도 시선은 익숙하거든요. 아니, 짐꾼으로 활동할 때는 더 심했었죠."

수거팀 팀장, 박유리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대답했다.

서열 480,991위가 된 그녀는 피식 웃으면서 주변을 비잉 둘러봤다.

"설마, 여러분들은 저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으려는 건 아니죠? 그동안 해 왔던 노력을 내던지고 싶으시다면, 일찌감치 흑월을 떠나 주세요. 저는 저 콧대 높은 놈들을 짓누르기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강해질 생각이니까요."

유리의 발언으로 길드원들의 눈빛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작게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 너머는 거대한 나무들이 울창하게 뒤섞이고, 사방으로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숲 형태의 필드 환경.

또한, 해당 게이트에는 미노타우로스와 오크들이 주로 서식하고 있다는 모양이다.

"각 팀, 전투 대형을 갖추십시오!"

수풀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미노타우로스의 무리.

한두 마리가 아니다.

언뜻 보더라도 열 마리는 족히 넘어갈 것 같았는데.

찬우는 각 팀마다 1~2마리씩 토벌할 수 있도록 자리를 배치해 주었다.

"저... 저게 미노타우로스...."

신장 5~8m에 이족 보행이 가능한 갈색 피부의 마수.

머리는 황소의 형태로, 거대한 도끼를 주무기로 사용한다.

일전에 본 녀석과 똑 닮았네.

미노타우로스는 내게 트라우마나 다름없는 존재다.

짐꾼으로 유신 길드 공략대에 참가했을 때, 녀석에게 몇 번이나 죽을 뻔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른손에 쥐어진 빙마검 덕분일까?

살짝 떨리던 새끼손가락이 지금은 안정을 되찾았다.

"후우, 오랜만이다. 이 X발 새끼들아."

내 중얼거림을 들은 건가?

지수와 태형이 살짝 놀란 표정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길드원들 앞에서 욕설을 내뱉은 적이 없었던가?

"알파-2, 전개."

촤라락!

지름 30cm에 리바늄으로 제작된 소형 방패가 손등에 펼쳐졌다.

"제가 먼저 간을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지원을 준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나는 태형의 대답을 듣고, 전방의 미노타우로스들을 바라봤다.

잠시 뒤.

-쿠워어어어!

한 미노타우로스가 우리를 향해 질주해 오기 시작했다.

새파래진 길드원들의 안색에도 불구하고, 나는 몸을 내던지면서 빙마검을 지면에 내리꽂았다.

푸욱!

그 순간, 지면을 타고 미노타우로스의 발을 얼려 버린 얼음 조각들.

발목이 붙잡힌 탓일까?

질주해 오던 녀석이 그만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콰앙!

그것을 본 나는 지면을 박차며 녀석의 목덜미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푸욱!

-...?!

녀석이 눈을 부릅뜨면서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만히 있어."

파앙!

녀석의 목덜미에서 거대한 얼음 조각들이 튀어나왔다.

울컥하며 쏟아져 나오는 다량의 핏물.

나는 빙마검을 뽑아낸 후, 다음 목표물을 확인했다.

제1팀인 크로스펠 쪽에서 우리 쪽으로 미노타우로스를 흘려보냈다.

"부탁드립니다!"

정찬우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높이 뛰어올랐다.

촤아악!

녀석의 다리를 벤 순간, 나는 길드원... 아니, 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공격!"

태형을 선두로 팀원들이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물론, 나 혼자서도 쓰러트릴 순 있지만, 방금 전 미노타우로스를 쓰러트릴 때 사용한 기술, 명명(命名) 아이스 필드(Ice Field)와 아이스 버스트(Ice Burst)는 상당량의 마력을 잡아먹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3~4마리쯤은 혼자서도 잡을 수 있겠어."

하지만 팀원들이 존재하는데, 굳이 무리를 할 필요는 없겠지.

게다가 효율적이지도 못했다.

"그보다...."

두 다리가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거칠게 날뛰고 있었다.

팀원들은 뒤로 물러나면서 녀석의 빈틈을 살폈다.

이번 기회로 그들 역시 B랭크 마수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실감하게 되었으리라.

나는, 팀원들에게 정신이 팔린 녀석에게 다가가 허리께의 도검을 내던졌다.

푸욱!

도검이 녀석의 오른팔을 꿰뚫었다.

이내, 높이 뛰어올라 녀석의 오른손을 베었다.

서걱!

"지... 지금이다!"

태형의 외침에 팀원들이 다리를 움직였다.

죽음은 두려워하되, 적을 두려워하지 말라.

모순적인 이야기지만, 헌터들은 그 말의 뜻을 금세 이해할 수 있었다.

푸욱! 푸푸푹!

"죽어!"

"으아아아아!"

사방에서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뻥긋거리는 녀석의 아가리를 향해 빙마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그렇게 두 마리의 미노타우로스를 토벌한 우리 팀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제3팀은 제8팀을 지원해 주십시오!"

찬우의 지시에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설마, 8개의 길드 중 공식 서열이 가장 낮은 흑월이 다른 길드를 돕게 될 줄이야.

미노타우로스의 기백에 겁먹은 제8팀의 헌터들.

반면, 제3팀의 헌터들은 내 지시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좋아, 조금 전보다 재빨라졌어.'

흑월의 헌터들은 단 한 번의 전투로 움직임이 더욱 신속해졌다.

나를 주축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제3팀의 헌터들.

제8팀은 그것을 멍하니 지켜봤다.

* * *

'아까까지 계속 비웃더니만....'

지수는 제8팀 헌터들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서열이 높으면 뭐 하나.

하나같이 겁쟁이들뿐인데.

제3팀 흑월의 길드원들은 건혁의 지시에 따라 재빨리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푸욱! 푸푸푸푹!

"3조 물러나고, 2조 달려들어!"

'팀'이 아닌 '조'라는 명칭으로 팀원을 구분하는 건혁.

물론, 조원들은 평소와 똑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후방 지원팀과 수거팀이었던 3조와 4조 역시 전투에 참전한다는 것이겠지.

두 조는 미노타우로스의 시선을 끄는 미끼 역할을 맡으면서 1조와 2조가 더욱 수월하게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흐읍!"

서걱!

건혁이 미노타우로스의 머리를 베어 내자, 주변에서 감탄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런 감탄사에도 건혁의 눈길은 정면을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눈앞에 뜬 반투명한 스테이터스 창이다.

'후우, 레벨 업 한번 더럽게 힘드네.'

마침내 레벨 55에 도달했다.

스킬 레벨 역시 4가 되면서 마력 소모가 크게 줄어들고 위력이 올라갔다.

전투를 마무리한 찬우는 건혁에게 다가오면서 미소를 지었다.

"대단하시네요. 정말로 서열이 6만대이신가요? 이 정도 실력이면 웬만한 2~3만대 헌터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텐데...."

"형태를 유지하는 정도라면 괜찮지만, 몇 가지 기술을 사용하려면 마력 소모가 조금 많이 들어서요."

마력이 부족해 수많은 미노타우로스와 싸울 수 없다.

찬우는 그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래도 엄청난 기술이네요. 길드원분들도 모두 대단하시고요."

"감사합니다."

찬우는 작게 웃으면서 각 팀장들을 바라봤다.

"짐꾼분들께서는 각 팀이 토벌한 마수로부터 부산물들을 회수하십시오! 30분 뒤에 이동하겠습니다!"

50명의 짐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능숙한 손길로 시작된 해체 작업.

C랭크부터는 마석을 제외하고도 주요 부산물들까지 회수한다.

건혁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팀원들과 함께 휴식을 취했다.

"아까 저희한테 도움받은 헌터들 얼굴 봤어요? 바보처럼 멍하니 바라보던데...."

"푸훕! 웃기긴 했어요. 짐꾼이 더 낫다느니 뭐 하다느니 수군거린 주제에 정작 마수 앞에서는...."

"뭐, 우리도 사돈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잖아요. 마스터가 아니었으면 한 발짝도 못 움직였을걸요? SNS로 미노타우로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기는 했었는데, 막상 눈앞에 있으니까...."

"...."

태형의 말에 팀원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노타우로스가 포효를 터트린 순간, 팀 전원이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저런 괴물이 실존하다니.

인터넷에서 봤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마스터가 먼저 움직여 주셨기에 망정이지...."

"그것도 그러네요. 그보다 빙마검(氷魔劍)이었던가요? 설마, 그런 기술들까지 가능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지수가 건혁을 보며 살짝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수건으로 도검을 닦던 건혁이 고개를 들어 작게 웃었다.

"비슷한 능력을 가진 헌터들이 유X브에 영상을 올렸더군요. 덕분에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물론, 마력 소모가 엄청난 만큼 함부로 사용할 순 없어요. 그러니,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팀원들은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짐꾼들이 작업을 마무리하고, 공략대는 다시금 행군을 재개했다.

조금 전 전투를 직접 목격했음에도 헌터들은 중얼중얼 아니꼬운 눈초리로 제3팀의 헌터들을 바라봤다.

"어차피 마스터만 없으면 별것도 아니잖아."

"맞아, 고작 시선 끌기 역할밖에 못 하는 주제에 잘난 척은...."

"우리가 박건혁 헌터랑 함께했으면 더 수월했을걸?"

"그건 그렇지."

그런 수군거림에도 제3팀의 멤버들은 무덤덤한 얼굴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저런 투덜거림까지 일일이 상대했다간 끝이 없을 테니 말이다.

잠시 뒤, 오크의 마을이 발견됐다.

"숫자는 대략 2~300여 마리, 오크 장군 다섯과 오크 주술사 하나... 대규모 부족이군요."

물러날 이유는 없다.

이곳에는 1만대 서열 한 명과 5~6만대 서열 네 명이 있으니까.

거기에 흑월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20만대 서열의 헌터들이다.

물론, 간혹 30만대 헌터들도 몇몇 섞여 있지만, 전력으로서는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찬우는 8개의 팀을 4개의 부대로 편성해 각 지역에 배치했다.

제5팀, 로스터 길드와 함께하게 된 제3팀, 흑월 길드.

건혁은 로스터 길드의 마스터, 김유진을 바라보며 한마디를 건넸다.

"잘 부탁드립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그 외 나눌 이야기는 없었다.

오직 작전에 집중할 뿐.

참고로 짐꾼의 호위 부대는 없다고 한다.

50명의 짐꾼 전원이 40만대 서열의 헌터들이다.

기본적인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겠지.

치직!

―공격!

무전기에서 들리는 찬우의 명령에 자세를 낮추며 대기하던 각 팀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우와아아아아!

우렁찬 함성 소리에 놈들이 당황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네 방향에서의 일제 공격.

적들을 혼란시키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이다.

건혁의 일행은 마을의 좌측 측면을 타격했다.

서걱!

-취익?!

건혁은 고개를 돌려 팀원들을 살폈다.

제1조는 제3조와 제2조는 제4조와 함께 움직였다.

제3조와 제4조의 헌터들을 단독으로 오크와 붙게 만들었다간 분명 큰 변을 당하고 말 것이다.

때문에 건혁은 위험해 보이는 팀원들을 도우면서 전투를 속행했다.

 

제29화

29화. 검단산 게이트 (2)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스터 길드의 마스터, 김유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건혁에게 다가갔다.

"도대체 왜 4~50만대 헌터들을 데려온 건가요? 저 사람들이 당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고요!"

그녀가 목소리를 높인 탓일까?

흑월에 소속된 몇몇 헌터들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게이트에 들어올 당시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던 박유리 역시 자신이 방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미노타우로스와의 전투로 붙은 자신감이 폭삭 주저앉은 것이다.

'제길, 우리가 없었다면 마스터는 혼자서....'

'역시... 괜히 참가했어.'

'X발, X발, X발....'

흑월의 헌터들이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세게 쥐었다

건혁은 유진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곤 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여긴 전장이다! 고개 처박고 우울할 시간 따윈 없어!"

그에 화들짝 놀란 흑월의 헌터들.

그들은 달려오는 오크들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김유진 씨, 제가 공략대 참가한 이유는 경험을 익히기 위함입니다. 길드원들 역시 이번 경험을 통해 더욱 강해질 수 있으리라 믿고 참가를 허락한 거고요. 그보다 저희 팀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해내고 있을 텐데요?"

"저 사람들 때문에 당신이 필요 없는 체력까지 사용하고 있잖아요!"

"그건 저희 쪽 사정이죠. 제 팀원은 제가 알아서 관리합니다. 그러니, 그쪽 길드원들이나 신경 쓰세요."

"이익...!"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유진.

곧 터질 것 같은 폭탄 같았다.

건혁은 작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짜증은 나중에 내도 상관없잖아.

왜 하필 전투 중에 아군의 사기를 떨어트려?

투콰앙!

'...시작됐나?'

크로스펠의 2군과 정찬우 일행이 오크 주술사와 충돌한 모양이다.

건혁은 위태로워 보이는 지혜를 발견하곤 허리께의 도검을 내던졌다.

푸욱!

도검은 오크 전사의 머리를 꿰뚫었다.

이어, 빙마검을 휘둘러 오크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건혁.

그는 흑월... 아니, 이 자리에서 가장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주었다.

그에 유진은 더더욱 흑월의 헌터들을 안 좋은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6만대 헌터라고는 믿을 수 없는 무지막지한 전투 능력을 4~50만대 헌터들을 돕는 데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레이드가 발생한다면 인명 구조를 우선시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지금은 게이트를 공략하는 중이다.

마수 토벌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의미다.

'저 정도 실력을 가졌으면서 왜 저런 허접한 사람들을....'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새하얀 이마를 찌푸렸다.

우측에서 달려드는 오크 전사.

-취이익!

푸욱!

그녀가 내지른 창끝이 오크의 가슴팍에 꽂혔다.

이내, 창을 내리그으며 녀석을 종잇장처럼 허리께까지 갈라 버렸다.

촤아악!

'적어도 1~20만대 서열의 헌터들과 함께했더라면, 분명 지금보다 더욱 높은 곳을 바라볼 수도 있었을 텐데... 정말로 멍청한 사람이야.'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시선을 홱 돌려 버렸다.

더 이상 건혁에게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흑월은 박건혁 덕분에 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 내고 있다.

아니, 그 이상의 성과를 보였다.

무어라 지적할 거리가 없을 정도로.

때문에 유진의 제5팀은 흑월에게서 신경을 끄고, 오크 전사들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카앙! 채채채챙!

전투가 격렬해질수록 헌터들의 체력 역시 빠르게 소모됐다.

"1팀으로부터 연락은 아직인가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유진의 물음에 건혁은 무전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라면 주술사와 장군을 쓰러트린 크로스펠과 빌포드 길드가 각 팀을 지원하면서 우세를 점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고 30분이 지난 현재까지, 두 팀으로부터 연락이 도착하지 않았다.

주술사와 장군과의 전투에 애를 먹고 있다는 의미겠지?

건혁은 작게 한숨을 쉬며 3조와 4조의 헌터들을 뒤로 물렸다.

그것을 본 유진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저 두 조는 지금까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으니까.

카앙!

건혁은 왼손의 방패로 오크 전사의 공격을 막아 낸 후, 도검을 휘둘러 녀석의 가슴에 큰 사선을 그었다.

푸확!

핏물이 쏟아져 나와 건혁의 바지를 적셨다.

"찝찝하게시리...."

그는 작게 혀를 차곤 위태로워 보이는 팀원들에게 달려갔다.

그 순간.

콰아앙!

-쿠워어어!

맞은편 방향에서 거대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포효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했다.

헌터들이 어깨를 움찔거린 그때.

오크들 역시 전투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콰앙! 콰콰콰쾅!

"미... 미노타우로스?!"

오크 마을에 들이닥친 미노타우로스의 무리.

언뜻 보더라도 3~40마리는 족히 넘어가는 숫자다.

놈들의 공격에 오크들이 하늘로 날아올랐고, 몇몇 헌터들은 날아오른 오크들과 충돌하며 목숨을 잃었다.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전장.

치직.

―퇴각! 지금 당장 도망쳐!

다급한 찬우의 목소리에 헌터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한 미노타우로스가 맹렬히 질주하면서 한 헌터를 향해 도끼를 내려찍었다.

콰앙!

"으아아아악!"

"도... 도망쳐!"

사방에서 들려오는 헌터들의 비명.

반면, 오크들은 미노타우로스들을 향해 으르렁거리더니, 겁도 없이 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퍼억!

미노타우로스의 발차기에 걷어차인 오크.

녀석은 로스터 길드의 마스터, 김유진에게 들이닥쳤다.

콰앙!

오크의 입에서 장기가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끄으...."

두 다리가 짓뭉개진 채 신음을 흘리는 유진이 동료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 나도...."

동료들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서로 눈치를 보면서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아... 아...."

그녀는 흔들리는 눈으로 동료들의 등을 바라봤다.

설마, 자신이 버려지게 되다니.

그것도 몇 년을 함께한 동료들에게!

배신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오크들을 바라봤다.

어느새 그녀의 곁으로 다섯 마리의 오크 전사들이 둘러쌌다.

놈들의 붉은 눈동자에선 살기가 느껴졌다.

"사... 살려...."

푸욱!

"꺄아아악!"

대검이 그녀의 어깨를 꿰뚫었다.

난생처음으로 느끼는 격통!

툭.

바닥에 왼팔이 떨어졌다.

그녀는 눈물과 콧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생각할 때가 아니다.

그녀는 오크들을 향해 간절히 목숨을 구걸했다.

"사...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걸까?

오크들은 비릿한 웃음과 함께 일제히 무기를 들었다.

유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제... 제발!"

서걱!

무언가가 베였다.

그 소리에 유진은 몸을 크게 떨었다.

곧 찾아올 것만 같았던 죽음은... 찾아오지 않았다.

어째서?

푸화아악!

사방에서 솟아오른 피 분수.

다섯 마리의 오크가 핏물을 쏟아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때, 모습을 드러낸 검은 머리의 사내.

그는 재빨리 유진의 몸을 어깨에 둘러업었다.

"아프더라도 참으세요!"

"끄아악!"

유진은 두 다리와 왼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통증에 그만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사내는 바닥에 널브러진 유진의 팔을 겨드랑이에 끼워 넣고 달리기 시작했다.

유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를 바라봤다.

'왜... 왜 나를....'

흑월의 마스터, 박건혁.

그와는 조금 전 작은 언쟁을 벌였다.

아니, 언쟁까지는 아닌가?

그러나 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가 자신을 도와줄 이유 따윈 없다.

그런데 왜....

"마스터!"

건혁을 향해 손짓하는 몇몇 헌터들.

그들은 오크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건혁이 도망칠 시간을 벌었다.

로스터 길드의 헌터들과 상반되는 광경에 유진의 눈가에서 작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지수 씨, 유진 씨를 업어 주세요! 지혜 씨는 팔을...!"

건혁은 유진을 지수에게 넘겨주고, 지혜에게 유진의 팔을 건넸다.

이어, 힘겨워하는 팀원들에게 달려가 순식간에 오크들을 토벌해 냈다.

"달리세요!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팀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달리기 시작했다.

건혁은 오크들의 추격을 막아섰다.

서걱!

-취이익?!

팀원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무렵.

그는 눈앞의 오크를 베어 내며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미노타우로스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

남아 있는 체력과 마력으로 놈들까지 상대할 순 없다.

파바밧!

건혁이 5~10분 정도를 달리자, 흑월의 멤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로스터의 멤버들은 아무래도 조금 더 먼 곳까지 도망친 모양이다.

"하아... 하아... 하아...."

양손으로 무릎을 짚고, 거친 숨을 토해 내는 건혁.

지수는 생수병을 가지고 그에게 달려갔다.

"마스터, 괜찮으세요?"

건혁은 생수병을 건네받아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푸하! 힘들어 죽겠네요. 서둘러 움직이죠. 오크와 미노타우로스가 충돌하고 있는 지금이 도망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겁니다."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유진 씨의 응급 처치가 먼저겠네요."

지혜로부터 응급 처치를 받고 있는 유진.

지혜는 지혈을 마무리한 뒤, 유진의 입에 천천히 5급 포션을 먹였다.

"...팔을 붙이기 위해서는 3급 이상의 포션이 필요해요. 다리는...."

완전히 짓뭉개진 그녀의 다리.

건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1급 포션으로 재생시키거나, 누군가로부터 기증을 받는 수밖에 없겠지.

그러나 다른 누군가로부터 기증을 받은 신체 부위는 헌터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기증받은 두 다리로는 지금까지 보여 준 움직임을 펼칠 수 없다는 의미다.

'헌터의 다리를 기증받는다면 어느 정도 문제는 해결되겠지만....'

헌터의 특별한 신체를 수술할 수 있는 의사는 몇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술 비용이 천문학적이며, 수술의 대기 인원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는 모양이다.

그럴 바엔 의족을 착용하는 게 이득이겠지.

건혁은 유진을 어깨에 둘러업고, 팀원들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게이트를 향한 그들은 마침내 수많은 헌터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끄으으...."

짐꾼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그러나 공략대에 참가한 157명의 헌터는 어느새 절반으로 줄었고, 살아남은 절반 역시 대부분 크고 작은 부상들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건혁은 눈을 질끈 감으면서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무사하셨군요."

공략대장인 찬우가 건혁에게 다가왔다.

그는 건혁의 어깨에 업힌 유진을 발견하고 심각한 표정을 보였다.

"유진 씨는...."

"살아 있습니다. 잘린 왼팔은 무사히 회수했습니다만, 두 다리는...."

너덜너덜해진 그녀의 두 다리.

찬우는 얼굴을 와락 찌푸리면서 눈을 감았다.

"서둘러 게이트를 나갈 겁니다. 몸이 괜찮으신 분들은 부상자들을 부축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흑월의 헌터들은 곧장 다른 팀의 부상자들에게 다가가 부축을 해 주었다.

공략대가 게이트를 빠져나간 시각.

게이트 앞을 어슬렁거리던 몇몇 기자들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크로스펠의 1군, 정찬우가 이끈 공략대가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받으며 귀환하다니!

게이트를 지키던 협회의 직원들은 서둘러 찬우에게 달려갔다.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찬우는 게이트에서 일어난 일들을 협회 직원에게 모두 설명해 주었다.

이어, 찬우에게 다가오는 대여섯 명의 기자들.

그들은 부상당한 헌터들을 카메라에 담으며, 찬우의 이야기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검단산 B등급 게이트에서 벌어진 사건은 곧장 인터넷 신문에 게재됐고, 지상파 방송국을 통해 속보로 보도됐다.

 

제30화

30화. 검단산 게이트 (3)

<검단산 B등급 게이트에 들어간 8개의 중소 길드, 괴멸에 가까운 피해와 함께 물러나다!>

<검단산 게이트에 들어간 207명의 헌터 중 사상자는 118명으로 확인되어....>

<검단산 게이트에서 목숨을 잃은 76명의 헌터들. 그중에는 서열 54,511위의 박재진도 포함돼....>

<로스터 길드의 마스터 김유진, 심각한 부상으로 현재 OO대학 병원으로 이송....>

해당 소식이 대한민국 각지로 퍼지자, 생존한 헌터들의 스마트폰이 일제히 진동을 울렸다.

생존 여부를 확인하고자 가족들이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건혁 역시 스마트폰에 뜬 '사랑하는 우리 딸'이라는 문구를 보고 씁쓸히 웃었다.

툭.

―아빠!

통화 버튼을 누르자, 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아빠는 괜찮아."

―저... 정말로 괜찮은 거지? 저번처럼 거짓말하는 거...!

"정말로 괜찮아. 아빠 길드는 모두 무사히 빠져나왔어."

―으... 으아아아앙! 티비에... 티비에 아빠가 들어간 게이트...! 으아아앙!

스마트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에 건혁은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아빠, 정말로 괜찮아. 곧 집으로 갈 테니까...."

그는 수영을 달래는 데 진을 빼야 했다.

설마, 전생을 기억하는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다니.

그러나 내심 기쁜 마음도 일어났다.

누군가가 걱정해 주는 건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일이니 말이다.

"아빠가 치킨 사 가지고 들어갈게."

―훌쩍.... 치킨 필요 없어! 그냥 빨리 와!

그녀의 우렁찬 목소리에 건혁이 작게 웃었다.

"그래, 빨리 갈게."

공략대가 확보한 마석들은 대부분 유가족들에게 지급되는 보상금으로 결정됐다.

보험사는 게이트에 들어간 헌터들의 죽음에 대해 책임지지 않았다.

레이드에 의한 피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자의로 게이트에 들어가 마수를 토벌하는 도중 사망한 경우는 자연재해로 치지 않았고, 사법부 역시 보험사 측에게 손을 들어 주었다.

때문에 게이트 공략 도중 짐꾼 또는 헌터의 사망은 함께한 헌터 및 길드들이 책임을 졌는데.

책임에 대한 기준은 전투 시, 함께한 헌터들을 대상으로 비율이 나누어졌다.

"죽은 사람들은 정말로 안타깝지만...."

작게 한숨을 내쉰 지수.

흑월에서 따로 지불해야 될 보상은 없었다.

왜냐고?

흑월이 책임져야 할 보상은 흑월과 로스터 길드에 대한 몫이다.

반대로 로스터 길드 역시 자신들과 흑월의 피해에 대한 보상을 책임져야 했다.

흑월의 사망자와 부상자는 0명.

로스터 길드는 사망자 2명과 부상자 1명으로 흑월을 제외하고 이번 공략대에서도 가장 낮은 피해를 받았다.

그 때문일까?

몇몇 헌터들이 두 길드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봤다.

"...우리보다 먼저 도망친 거 아니야?"

"저 녀석들 때문에 우리가 포위된 건...."

그러나 그 의심도 금세 잠재워졌다.

짐꾼들이 촬영해 둔 영상에 의해서 말이다.

피해와 보수를 정확히 분배하기 위해 짐꾼 중 몇몇이 촬영을 진행했다.

본래라면 보수를 분배하기 위함이었지만, 해당 영상 자료 덕분에 흑월과 로스터 길드는 주변 헌터들의 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나쁜 새끼들...."

"마스터를 버리고 도망쳐? 이런 미친...."

로스터의 헌터들이 유진을 버리고 도망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반면, 수많은 마수를 토벌하고, 유진을 포함한 여러 헌터들을 도운 건혁의 모습이 인터넷에 떠돌면서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건혁은 해당 영상을 보고 곧장 모자이크 처리를 요청하려 했지만....

⤷미노타우로스를 혼자서 쓰러트림.

⤷저게 무슨 6만대 헌터야?! 1~2만대라고 해도 믿겠네.

⤷길드원 챙기는 모습은 진짜 감동이다. 김유진 구할 때는 진짜로 지렸음.

⤷로스터 개X끼들은 그냥 나가 뒈져라.

⤷www.xxxxxxx.com으로 들어가 보셈.

⤷존X 뜬금없네.

⤷낚시 꺼져, X발 놈아.

⤷위에 사이트 접속하지 마. 에러 뜬다.

<흑월 길드는 왜 가입 신청서를 안 받는 거야?!>

⤷마스터는 6만대 헌터인데, 길드원들은 3~50만대의 허접들임ㅋㅋㅋㅋ

⤷방구석에서 키보드나 두드리는 너보단 나음.

⤷근데 3~50만대 헌터치고는 꽤 잘 싸우더라. 게다가 박건혁 도망칠 때 오크들하고 싸우는 거 보셈. 로스터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ㅇㅈ... 솔까 저 정도면 저평가된 거다.

⤷흑월에는 어떻게 가입함? 가입 신청서 비활성화되어 있던데....

⤷X발, 나도 흑월에서 짐꾼 하고 싶다!!

⤷흑월 짐꾼 대우 존X 좋음. 박건혁이 짐꾼들도 헌터로 키우려고, 매달 5~6번 정도 짐꾼들 실전 경험시켜 준다고 함. 참고로 짐이랑 마석들은 평소 전투팀으로 활동하는 헌터들이랑 박건혁이 들고 가 준다.

⤷레알 미친 복지넼ㅋㅋㅋㅋ

<짐꾼들 헌터들한테 갑질 엄청 당한다던데... 흑월은 빛 그 자체네요.>

⤷X랄하네. 헌터도 짐꾼한테 뒤통수 후하게 두들겨 맞는다. 아는 지인이 짐꾼한테 물려 가지고 몇 개월간 고생했다.

⤷왜 갑자기 급발진해? 현직 헌터구나ㅋㅋㅋ

⤷근데 실제로 짐꾼한테 뒤통수 맞은 헌터도 존X 많기는 함. 물론, 짐꾼들도 갑질 엄청 당하고.

⤷댓글 하나하나 살펴봤는데, 왜 흑월에 가입하는 방법은 아무도 모르냐?

⤷듣기로는 박건혁이 직접 임시 공략대 돌아다니면서 스카우트한다더라. 뽑는 기준은 잘 모르겠음.

유X브에 업로드된 영상에만 수만 개의 댓글들이 달렸다.

영상의 주인공이 흑월의 마스터라는 사실이 알려진 탓일까?

사람들은 협회 사이트에 접속해 흑월 길드를 조사하고, 박건혁에 대한 수많은 정보들을 가져다 날랐다.

"...미치겠네."

협회 사이트에 접속하자, 수많은 헌터들이 자신에게 메일을 보내왔다.

가입을 희망한다는 메일만 수백 개를 넘었는데, 그중에는 칭찬과 찬사가 담긴 메일과 욕설과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메일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참... 할 짓 없는 사람들이네."

건혁은 메일들을 살펴보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대부분이 4~50만대 서열의 헌터들인가."

가능하면 전원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법이겠지.

아무나 받아들였다가 길드가 엉망이 되어 버린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 것이다.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 짐꾼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 동료를 배려하는 태도 등.

건혁은 자신이 세운 가입 기준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각 팀장들에게 메일을 돌렸다.

------------------------

*보낸 사람: 박건혁

*받는 사람: 김태형, 김지수, 이지혜, 박유리

흑월의 길드 마스터, 박건혁입니다.

현재 수백 명의 헌터들이 메일을 통해 가입 신청을 희망해 왔습니다.

때문에 사무실에서 새로운 팀의 편성과 신입 면접에 대한 회의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일단, 이번 주 주말에 시간이 괜찮으신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만약 불가피한 상황이 있으시다면 다른 날짜로 조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해당 메일을 보냄과 동시에 스마트폰으로 '메일 확인 부탁드립니다.'라는 문자를 보냈다.

2~30분 뒤, 팀장들로부터 답변이 도착했다.

네 명 전원 주말에 시간이 빈다는 답변을 보내왔고, 건혁은 자세한 날짜와 시간을 문자로 공지하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생각도 못 했네."

자곡동에 마련해 둔 작은 사무실.

8층 높이 상가 건물에 위치한 7~8평 규모의 사무실이다.

길드원이 대폭으로 늘어난다면, 정산은 당일이 아닌 매달 처리하도록 해야 한다.

때문에 건혁은 새로운 사무실을 알아봤다.

"적어도 2~30평 정도는...."

면접장도 대여해야 하나?

건혁이 길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무렵.

수영은 컴퓨터로 건혁의 전투 영상을 찾아봤다.

"마... 말도 안 돼."

아빠가 특수 능력 각성자였다니?!

그러나 특수 능력에 각성한 건 불과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모양이다.

"아... 아무리 그래도 특수 능력에 각성했다고, 10만대에서 6만대 서열이 되는 게 말이 되나?"

그녀는 협회 홈페이지를 유X브 사이트 옆에 펼쳐 두며 미간을 찌푸렸다.

'빙마검(氷魔劍).'

자신의 빙마궁(氷魔弓)과 흡사한 특수 능력이다.

아니, 무기가 검과 활이라는 부분만 다를 뿐.

효과는 완전히 똑같았다.

과연 우연일까?

아니면 유전?

전생의 부친 역시 헌터로 각성해 빙마검(氷魔劍)을 익힐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현생과 도대체 무슨 차이가 존재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이 정도의 실력이면... 흑월도 금세 중규모 길드가 될 수 있겠지."

그녀는 댓글의 반응을 살폈다.

짐꾼을 헌터로 키우려 하는 부친의 행동에는 살짝 의아함이 일어났다.

딱히 짐꾼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헌터들은 더욱 자유롭게 전투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굳이 짐꾼들을 헌터로 키울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실력 좋은 헌터들을 정예 헌터로 키우는 게 더 나을 텐데....

수영은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부친에게 달려갔다.

"아빠, 특수 능력 각성했다면서! 왜 나한테 말 안 해 줬어?"

"하하하하, 우리 딸 놀라게 만들어 주려고 했지. 그보다 또 유X브에서 본 거니?"

"응, 그런데... 왜 짐꾼들을 그렇게 챙겨 주는 거야?"

"음?"

"아니, 댓글에서 짐꾼을 헌터로 키운다고...."

아, 그 댓글을 본 건가.

건혁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짐꾼들이 평생 짐꾼으로 살아간다면 아마 헌터들의 갑질은 사라지지 않을 거야. 아, 갑질이란 건...."

"나도 알아."

수영의 대답에 건혁은 씁쓸히 웃으며 자세를 낮춰 수영과 눈을 마주쳤다.

"그렇구나. 아무튼, 갑질을 경험한 짐꾼이 헌터가 된다면, 나중에 짐꾼으로 활동하게 될 사람들이 조금은 편해지지 않을까?"

짐꾼의 고됨을 경험한 헌터라면, 새로이 각성해 짐꾼이 된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짐꾼도 헌터의 뒤통수를 치자는 생각을 안 하게 되겠지.

그런 건혁의 이야기에 수영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아빠가 길드를 만들었을 당시에는 서열이 많이 높지 못해서...."

건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

"아빠는 길드원을 모집할 때, 헌터의 서열을 가급적이면 보지 않아."

"그럼?"

"헌터가 되고 싶어 하는 강한 욕심, 짐꾼의 고됨을 이해해 주는 마음, 동료를 배려해 주는 태도 같은 것들을 최우선적인 기준으로 두고 있어. 그래서 임시 공략대를 돌면서 짐꾼들과 헌터들을 살펴봤었지. 뭐, 헌터들은 모두 스카우트를 거절했지만 말이야."

건혁이 머쓱한 표정을 보이면서 일어났다.

이내, 프라이팬에서 김치볶음밥을 밥그릇에 담기 시작했다.

수영은 반찬을 꺼내면서 부친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생각해 봤다.

서열보다 인성을 더욱 우선시하는 건혁.

지금의 그에게 현 흑월의 헌터들은 방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부친은 그들이 강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모양이다.

'...검단산 게이트에서 로스터의 길드원들은 대부분 1~20만대 서열의 헌터들이었어. 하지만 마스터를 버리고 도망쳤지. 반면, 흑월의 길드원들은....'

분명 마수와의 전투 도중 건혁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동료를 구하려는 마음과 50만대 서열의 헌터들을 배려하는 행동이 영상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수영은 헌터증을 발급받자마자 곧장 대규모 길드에 가입할 계획이었다.

수많은 지원과 혜택을 받으며 마왕군의 공격에 대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부친의 길드, 흑월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제31화

31화. 신입 (1)

"자아, 이제 먹자."

건혁은 김치볶음밥 위에 달걀프라이를 얹고, 그릇을 수영의 앞으로 대령해 주었다.

평화로운 시간이 지나가고, 토요일 오전 10시경.

건혁이 자곡동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팀장들은 일찍이 도착해 사무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어요?"

테이블과 소파 다섯 개가 비치된 사무실.

사무용 컴퓨터 및 책장도 마련되어 있지만, 허전한 건 변함이 없었다.

내가 상석에 앉자, 각 팀장들이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에는 지수가 사다 둔 아이스커피가 놓여 있었다.

"금일 오전에 협회 사이트에 접속해 본 결과, 8~900명 정도가 저희 길드에 가입을 희망해 왔습니다."

"우와~"

"그... 그렇게나 많이요?"

태형과 지혜의 놀란 목소리에 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대부분이 4~50만대 서열의 헌터였습니다. 대부분이 현직 짐꾼이거나, 짐꾼 경력이 존재하는 분들이셨죠."

"하긴...."

지수가 이해한 듯 팔짱을 꼈다.

"저는 여러분들을 스카우트할 때 몇 가지 기준을 머릿속에 구상해 두었습니다. 헌터가 되고 싶다는 강한 욕심, 짐꾼의 고됨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마음, 동료를 배려해 주는 태도 등, 저는 이러한 부분을 서류와 면접을 통해 확인하고자 합니다."

팀장들이 어깨를 살짝 움찔거렸다.

설마, 그런 기준이 존재했을 줄이야.

그냥 안면을 익힌 헌터들에게 가입 제의를 한 줄로만 알았던 팀장들은 건혁을 보면서 눈을 크게 떴다.

"그... 그런 기준이 있었군요."

지수의 말에 건혁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말이다.

"무작정 아무나 받아들일 순 없잖습니까. 그리고 8~900명의 헌터들 역시 모두 받아들였다간 흑월이 엉망이 되어 버릴 겁니다. 경쟁은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남을 깎아내리려는 태도는 제가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렇군요."

"먼저, 가입 신청서에 자기소개서가 빼곡하게 작성되어 있더군요. 해당 부분을 확인하여 거를 사람들은 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면접도 면접이지만, 실제로 그들을 게이트로 데려가 직접 인성을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럼, 면접을 빼는 건 어떨까요? 실력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게이트로 데려가서...."

태형의 이야기에 건혁은 잠시 턱을 매만졌다.

지수와 지혜, 유리 역시 추가적인 의견을 꺼내며 새 길드원을 모집하기 위한 시험을 더욱 구체적으로 계획했다.

2시간 동안 진행된 회의.

12시가 되자마자 건혁은 팀장들과 함께 가까운 한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말씀드리지 못했네요."

무언가 떠올린 듯 박수를 친 건혁.

식사 중인 팀장들이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김유진 씨가 로스터 길드의 마스터직을 내려 두고, 저희 흑월에 가입하기를 희망해 왔습니다."

그의 폭탄과 같은 발언에 네 팀장이 일제히 음식물을 뿜었다.

푸훕!

"으악! 더럽게...!"

얼굴에 음식물이 묻은 건혁이 벌떡 일어났다.

콜록! 콜록!

"로... 로스터 길드의 마스터 김유진 씨요?"

"케헥.... 저... 정말로 그 사람이 저희 흑월에 가입 신청을 했다고요?"

"끄으.... 뭐가 아쉽다고 우리 길드에...."

"서열 5만대의 헌터라면 분명 다른 대규모 길드에서도 흔쾌히 받아들여 줄 텐데...."

건혁은 티슈로 음식물을 닦아 내며, 네 사람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잘려 나간 왼팔은 수술과 포션을 통해 붙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 다리는 짓뭉개진 탓에 의족을 착용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그에 따라 서열도 큰 폭으로 떨어질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두 팔이 멀쩡하면...."

"예, 10만대는 유지할 수 있겠죠. 게다가 값비싼 의족을 착용한다면 7~8만대 서열 역시 불가능하진 않을 겁니다. 그녀는 특수 능력 각성자니까요."

그녀의 특수 능력은 육체 강화.

근력과 각력을 일시적으로 높여 준다는 흔하디흔한 능력.

물론, 특수 능력자 사이에서 흔하다는 의미지, 일반 각성자들 사이에선 육체 강화라는 능력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하여간에 저희가 세운 시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특수 능력 각성자라 할지라도 예외 없이 탈락시킬 겁니다."

건혁의 단호한 결정에 네 사람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평균 서열 4~50만대인 흑월이 5만대 서열의 헌터를 탈락시킨다고?

오크 부족과 싸울 때, 유진의 말투는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단지, 그녀의 발언이 정곡을 찌른 탓에 그 누구도 반론을 꺼내지 못했을 뿐.

'그래도....'

그녀의 실력은 진짜였다.

성격이 나쁠지라도 그녀의 창술은 순순히 인정을 해야겠지.

특수 능력인지는 모르나, 오크 전사를 두 동강 내는 그 모습은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네 사람이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

건혁의 단호한 결단에 반론을 제기해야 할까?

"반론은 받지 않습니다. 김유진 씨가 아무리 뛰어난 헌터일지라도 길드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든다면, 추후 게이트 공략에 지장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팀장들의 생각을 읽은 듯 건혁이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지수는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뭐, 마스터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태형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지혜와 유리 역시 마찬가지.

그들은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사무실로 돌아와 시험의 세부 내용을 구상하면서 가입 신청서를 보낸 헌터들에게 단체 메일을 보냈다.

* * *

검단산 게이트 사건이 서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할 무렵.

시간이 흘러 11월 1일, 수요일이 되었다.

건혁의 서열은 마침내 3만대에 들어섰다.

검단산 게이트에서 미노타우로스와 오크를 쓰러트린 결과였는데.

흑월의 길드원 역시 대폭으로 서열을 높이면서 길드의 공식 서열을 337위까지 끌어올렸다.

"후우, 드디어 정리됐네요."

건혁은 협회 사이트에 공지글을 올렸다.

흑월에서 신입 길드원을 모집한다는 글이다.

서류 전형과 면접 및 실력 검증을 통해 진행되는 시험.

이어, 흑월의 운영 방침을 공식적으로 표방하면서 수많은 헌터들이 건혁의 이메일로 이력서를 제출했다.

이력서를 제출한 헌터는 무려 2~3,000여 명에 달했고, 건혁은 길드원들을 동원해 일주일 동안 이력서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상한 메일이 3~400개는 됐었죠? 그 외에도 엄청 걸러 낸 거 같은데...."

"그렇게 걸러 내도 면접자가 700명이나 된다니...."

"아무래도 면접을 나흘 정도로 나눠서 봐야겠네요."

건혁은 6~70여 명 정도의 헌터를 받아들일 계획이었다.

"제1팀 팀장은 제가 맡겠습니다. 제2팀은 태형 씨가, 제3팀은 지수 씨가 맡아 주세요. 그리고 지혜 씨와 현민 씨는 제2팀으로, 유리 씨와 세형 씨는 제3팀에 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세 팀은 각각 다른 게이트를 공략하며 보수를 길드 계좌에 이체해 주십시오. 길드의 유지 관리 비용을 제외한 후, 비율에 맞춰 정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세금 역시 사무실에서 처리될 예정이니 그렇게 알아 두시면 되겠습니다."

길드원들은 살짝 입맛을 다시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마스터 없이 지금까지의 보수를 벌 수 있을까?'

'지수 씨랑 태형 씨도 대단하긴 하지만....'

'보수가 1/2로 줄어들지도 모르겠어.'

길드원들의 걱정을 이해한 듯 건혁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보수에 욕심을 가지는 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경쟁에서 밀린다면 추후 짐꾼으로 물러나 매달 4~5번의 실전 경험을 가지게 될 테니 모두들 명심해 두십시오."

건혁의 충고에 길드원들이 주먹을 세게 쥐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팀장님들은 회의실로 모여 주시고, 다른 분들은 귀가하셔도 괜찮습니다."

2~30명 규모의 사무실을 빌린 흑월.

건혁은 회의실 팻말이 걸린 방으로 들어갔다.

면접장의 대여, 면접 일정 및 수용 인원까지.

건혁은 팀장들과 회의를 진행한 다음 면접자들에게 서류 전형 합격을 통지하며 면접 장소와 일시를 공지해 주었다.

흑월로부터 문자를 받은 헌터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마치 대기업에 합격한 것처럼 말이다.

"흑월에만 들어가면 나도 매달 7~800만 원씩 벌 수 있어!"

"엄마! 아빠! 나 서류 전형 통과했대!"

"오늘은 치킨 먹는 날이다!"

"흑월의 팀장들이 30만대 후반에서 40만대 초반이랬지? 나 정도면... 2~3000만 원씩 버는 거 아니야?"

모두가 기뻐하는 와중에도 로스터 길드 전 마스터, 김유진은 스마트폰을 보며 푸욱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고정대의 수술이 무사히 마무리되고, 협회에서 각성 능력 측정을 받은 결과.

그녀는 11월 1일, 91,876위라는 서열을 부여받게 되었다.

큰 폭으로 뒤처지긴 했으나, 10만 위 안에 든 헌터임은 변하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해야겠지.

"...서류 전형은 합격인 건가."

툭.

그녀는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설마, 자신이 의족을 차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나마 유명한 매장에서 구매한 덕분일까?

의족은 마치 자신의 다리인 것 마냥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뭐, 두 다리에 2억에 가까운 돈을 투자했으니, 이 정도 성능은 당연하게 해 줘야지.

"그냥... 직접 연락해 볼 걸 그랬나?"

이력서를 제출하기보다 건혁에게 연락해 가입 의사를 밝혔다면 마음은 조금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거절을 당하더라도 하루빨리 거절을 당하는 게 낫지.

면접과 실력 검증 시험을 통해 탈락이라는 결과를 받는다면 시간만 낭비한 셈이 된다.

유진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일단, 몸이라도 풀러 가자."

그녀는 새로운 길드를 만들고자 하지 않았다.

대규모 및 중규모 길드의 가입 제의 역시 무시했으며, 임시 공략대에 참가하는 것조차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홀로 F등급 게이트를 드나들었다.

어째서냐고?

인간 불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몇 년을 함께한 동료로부터 받은 배신으로 말이다.

때문에 그녀는 로스터 길드의 마스터직을 내려 두었다.

그런 그녀가 어째서 흑월에 지원을 했느냐.

죽음, 공포, 절망 속에서 자신을 구원해 준 박건혁이란 존재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만든 흑월이란 길드는 다른 길드와는 무언가가 달랐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

그녀는 주먹을 꽈악 쥐면서 집을 나섰다.

* * *

"예, 수고하셨습니다."

강남구 역삼동에서 강의실을 대여한 건혁.

그는 10시~12시, 13시~15시, 18시~20시로 나누어 면접을 진행했다.

면접 시간은 인당 1~2분 정도로 진행됐고, 간간이 압박 면접을 섞으면서 면접자들의 본심을 조금이나마 파고들었다.

건혁과 네 팀장은 200명과 대화를 나누면서 점수를 매겼다.

그렇게 나흘간 진행된 면접으로 700명 중 300명의 합격자가 나오게 되었는데.

건혁이 자리를 비운 사이 팀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누었다.

"정말로 나오셨네요, 김유진 씨."

"그러게요. 서열은 9만대까지 떨어졌다는 모양이지만... F등급 게이트를 홀로 공략하면서 하루에 500만 원씩 번다고 들었어요."

"대단하긴 대단하죠. 그런 분이 면접장까지 방문하셔서 성심성의껏 대답하는 모습은... 조금 이상한 느낌이었어요."

건혁은 김유진이 면접장에 들어왔음에도 무덤덤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심지어 다른 면접자와 비슷한 질문과 함께 압박 면접을 진행하자 팀장들은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그나마 건혁이 매긴 점수를 보고, 팀장들은 작게 안도할 수 있었다.

 

제32화

32화. 신입 (2)

"김유진 씨라면 실력 검증 시험을 단번에 통과할 수 있겠지만...."

"마스터라면 실력만으로 평가하지 않겠죠."

태형이 말끝을 흐리자, 지수가 말을 덧붙였다.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는 태형.

"후우, 길드의 전력을 높일 수 있는 기회이건만...."

"검단산 게이트에서 보여 준 모습을 떠올려 보면, 떨어질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거예요."

두 사람의 대화에 지혜와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 검증 시험은 열흘에 걸쳐 진행되었다.

11월 14일 화요일 오전 10시.

"여러분, '평소'처럼, 그리고 '실전'처럼 공략에 임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30명으로 편성된 제1 시험조는 박건혁 및 네 팀장과 함께 F등급 게이트에 들어갔다.

잠시 뒤, 헌터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던 건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체크리스트를 박박 긁었다.

실력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

동료를 밀쳐 내며 마수를 토벌하거나, 위험에 빠진 동료들을 무시하고, 짐꾼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행위 등.

팀워크를 볼 수 없는 그들의 만행에 건혁은 악귀와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히익!'

팀장들은 건혁의 얼굴을 보고 몸을 흠칫 떨었다.

'마... 마스터가 이런 표정을 짓다니....'

'실력 있는 헌터도 꽤 보이지만, 기준에 부합되는 사람은 거의 없어.'

'미친X들. 아무리 시험이라지만 뒤로 마수를 흘려보내? 마스터가 분명 '평소'처럼, 그리고 '실전'처럼 행동하라고 말했잖아! 설마, 그 의미를 모르는 건가?'

낮은 서열의 헌터일수록 팀워크가 중요해진다.

때문에 건혁은 등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을 뽑고자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이런 아수라장이 펼쳐지게 될 줄이야.

건혁은 분노를 억누르듯 깊게 한숨을 내쉬며, 볼펜을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게이트를 빠져나온 헌터들은 상기된 얼굴을 보였다.

합격을 자신하듯이 말이다.

"예,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금일 회수한 마석들은 각자 받아 가도록 하십시오."

제1 시험조에서 나온 합격자는 고작 2명뿐.

건혁은 본인이 구상한 흑월의 구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런 식이라면 신입은 2~30명 정도가 될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낮을 수도 있겠지.

건혁은 시름을 앓으면서 자택으로 귀가했다.

그 시각, 건혁과 함께 감독을 맡은 네 팀장은 주점에 들러 금일 실력 검증 시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타앙!

테이블 위에 맥주잔을 강하게 내려 두며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린 지수.

"정말 최악이었어. 어떻게 짐꾼들한테 마수를 흘려보내?"

"대부분 실전이 처음이라고 하던데...."

지혜의 변론 아닌 변론에도 지수는 꽈득 주먹을 쥐었다.

"처음이면 준비라도 해 왔어야지! 전투를 어떻게 하는지조차 모르면서 무슨 헌터를 하겠다고...! 그리고 서열이 낮으면 협력할 생각부터 해야지, 어떻게 옆 사람을 밀쳐 가면서...."

"마스터가 그런 표정을 짓는 모습은 처음 봤어요."

유리는 건혁의 악귀 같은 얼굴을 다시금 떠올렸다.

평소 화를 내지 않기로 유명한 건혁이다.

그런 그가 그렇게까지 분노하다니.

태형은 유리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합격자는 2명이었었죠? 만약 제2~10 시험조도 제1 시험조와 마찬가지의 결과를 보인다면, 3개 팀까지 운영될 일은 없겠네요."

"...그것도 그러네요."

특별히 나쁜 결과는 아니다.

건혁과 함께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건 이득이면 이득이지 손해는 아니니까.

때문에 팀장들은 표정을 풀고 맥주를 들이켠 다음 안주를 입에 집어넣었다.

걱정 속에서 재개된 실력 검증 시험.

제2 시험조는 그나마 제1 시험조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제3 시험조는 제1 시험조와 비슷한 만행을 벌였고, 제4 시험조는 앞의 조들보다 뛰어난 모습으로 10명의 합격자가 배출됐다.

"다들 대형을 유지하세요! 거기, 방패 제대로 들어 올려요! 짐꾼한테 마수를 흘려보낼 생각이에요?!"

한 여인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헌터들.

"눈 제대로 뜨세요! 헌터가 되고 싶다면서 적에게서 눈을 감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분노를 터트리듯 소리치는 여인.

그녀의 이름은 김유진.

그래, 전 로스터 길드의 마스터이자, 헌터 서열 91,876위의 헌터다.

건혁은 그녀의 지휘에 살짝 감탄했다.

오합지졸을 데리고 저런 훌륭한 지휘력을 보이다니.

또, 그녀의 서열이 9만대라는 사실 때문일까?

시험에 참가한 헌터들은 그녀의 지휘에 순순히 따라 주었다.

"저런 멍청한...!"

서걱!

후위로 마수를 흘려보내고만 한 헌터.

초보적인 실수에 유진이 작게 욕설을 터트리며 지원을 나섰다.

검단산 게이트에서 보여 준 모습보다는 못하지만, 값비싼 의족을 착용한 덕분에 그녀는 재빨리 짐꾼 앞에 멈춰 서며 마수의 목을 베어 낼 수 있었다.

"후우...."

확실히, 그녀의 실력은 뛰어났다.

흑월로서는 고개를 숙여 가며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

그러나 건혁의 눈동자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팀장들은 그의 체크리스트를 슬쩍 살펴보면서 어깨를 살짝 움찔거렸다.

냉정한 평가.

그녀는 몇 차례나 감점을 받았다.

'저... 정말로 떨어트릴 생각이신 건가?'

'욕설과 투덜거림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아군의 사기를 깎아내리는 발언들은... 확실히 좋지 않아. 그래도 그녀를 떨어트리는 건 너무 손해인데....'

점심 식사 시간, 유진은 겁에 질려 실수를 저지른 헌터들에게 다가갔다.

설마, 화를 내려는 건가?

건혁은 슬쩍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내, 놀라운 모습이 펼쳐졌다.

헌터들을 꾸짖는 것은 물론, 조언과 함께 격려까지 해 주는 그녀였다.

그에 팀장들 역시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뭐야? 원래 저런 사람이었던 건가?'

'화를 내는 건 이해하겠는데, 조언이랑 격려까지 해 준다니....'

팀장들이 슬쩍 건혁을 바라봤다.

체크리스트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건혁.

그는 피식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마무리된 제5 시험조의 실력 검증 시험.

게이트를 빠져나온 유진은 슬쩍 건혁을 바라보곤 자리를 벗어났다.

반면, 건혁은 팀장들의 체크리스트를 확인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꽤 나쁘지 않았네요."

"그... 김유진 씨는 어떤가요?"

태형이 조심스럽게 묻자, 건혁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에 살짝 불안해진 팀장들.

"여러분들은 합격점을 주셨군요."

"예, 욕설은 추후 불화의 씨앗이 될 수도 있지만, 조금 전의 상황은 충분히 그럴 만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헌터들에게 조언과 소소한 격려를 보낸 것 역시...."

"게다가 아군을 빠르게 지원할 수 있는 실력과 상황을 판단하여 결단하는 능력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네 사람은 극찬에 가까운 칭찬을 보냈다.

그야 자신들보다 더욱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까.

그녀를 내리까기에는 자신들의 능력이 너무나도 부족하게 보였다.

그것을 알기에 건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역시 그녀에게 합격점을 주었으니 말입니다. 그녀는 제3팀에 배정될 예정입니다."

"...제3팀에요?"

지수와 유리가 살짝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이 유진 씨를 주시해 주세요. 추후 괜찮다고 판단되면 유진 씨에게 제3팀 팀장직을 맡기고, 지수 씨가 제2팀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조정할 예정입니다."

신입에게 팀장직을 맡긴다니.

그러나 유진의 화려한 경력을 고려하면, 네 사람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수의 경험으로 유진을 지휘하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

제3팀에 남게 될 유리만이 살짝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괜찮을까?'

어째선지 유진의 앞에선 살짝 기가 죽는다.

2개월 만에 51만대에서 45만대 서열이 된 것은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과거 5만대 서열이었던 유진에게는 코웃음거리일 뿐.

눈에 들어오지도 않으리라.

"유리 씨가 우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1~2개월간 그녀의 태도를 주시해 주세요. 만약 문제 된다 싶으면 곧바로 탈퇴 조치를 할 테니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도 이만 해산하죠."

제1~5 시험조에서 나온 합격자는 37명.

택시를 타고 자택으로 귀가한 건혁은 스마트폰으로 합격자 명단을 살펴봤다.

유진을 제외하고 주시할 만한 인물은 딱 두 명뿐.

짐꾼에서부터 시작해 32만대와 35만대의 서열까지 올라선 두 남매.

그들은 짐꾼에 대한 갑질을 혐오하고 있었다.

또, 실력 검증 시험에서는 짐꾼을 배려하고, 동료들을 도와주는 모습으로 고득점을 받았다.

"팀원 편성을 조금 더 고민해 봐야겠어."

그는 목을 젖히면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그렇게 제6~10 시험조의 실력 검증 시험에선 31명의 합격자가 배출됐다.

300명의 시험자 중 합격자는 68명.

해당 소식을 누가 SNS로 퍼트린 걸까?

수만 명의 사람들이 실력 검증 시험의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댓글을 달았다.

물론, 비웃음이 담긴 댓글도 잦게 보였다.

<소규모 길드에 도대체 몇 명이나 모인 거냨ㅋㅋㅋㅋ>

⤷그래도 마스터는 37,280위임.

⤷진짜 바위들 사이에 작은 보석 하나 박혀 있는 느낌이네.

⤷짐꾼도 대기업 초봉보다 많이 받는단다. 아르바이트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저 정도면 적게 모인 거지.

⤷목숨값인데 그 정도는 받아야지.

⤷짐꾼은 그렇게까지 위험하지 않아요. 대신 많이 힘들죠.

<경쟁률 존X 빡세네. 2~3천 명이 지원했는데 68명 뽑힌 거임? 무슨 공무원도 아니고....>

⤷근데 합격자 대부분이 4~50만대 헌터들ㅋㅋㅋㅋ

⤷진짜 X밥들만 뽑아 뒀구나.

⤷박건혁이 헌터로 키운다고 하잖아.

⤷박건혁 혼자 감당할 수 있으려나?

⤷걱정 마라. 김유진도 합격했단다.

⤷김유진은 또 누구여?

⤷검단산 게이트에 참가했던 로스터 길드 전 마스터임. 원래 5만대 서열이었는데, 다리가 아작나면서 지금은 9만대까지 추락하셨음.

⤷고정대 수술해서 괜찮은 의족 차면 충분히 활약 가능하다. 주유성 헌터도 의족 착용하고, 8천대 서열 유지하는 중이잖아.

⤷속성 능력자랑 육체 강화 능력자랑 비교한다고?

⤷김유진 합류하면 길드 전력은 급상승하겠네. 나도 한번 이력서 넣어 볼걸....

<나 43만대 헌터로 50번 넘게 임시 공략대에 참가했었음. X발, 그런데 왜 내가 떨어진 거지? 나보다 서열 존X 낮은 X끼도 합격했잖아. 근데 왜 내가 떨어진 거냐고!!>

⤷인성이 그 모양인데 합격하겠냐?ㅋㅋㅋㅋ

⤷댓글만 봐도 당신의 인성이 어떠한지 느껴지네요.

⤷박건혁이 사람 보는 눈은 있는 모양이네.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저런 시험을 보는 거다. X신아.

⤷실력 검증 시험이랍시고 인성 검사한 거 아니냐?ㅋㅋㅋㅋ

댓글을 살펴보던 건혁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롱하는 댓글이 많이 보였지만, 그건 앞으로 흑월이 어떻게 해 나가느냐에 달렸다.

건혁은 역삼동에서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강의실을 대여하고, 신입 길드원과 기존 길드원들을 모두 호출했다.

총원 85명의 헌터들.

단상에서 선 건혁은 그들에게 인사를 한 뒤, 길드의 운영 방침 및 새로운 구조도를 공개했다.

새 길드원을 모집할 때, 구조도의 예시를 공개했기에 반발은 적었다.

하지만....

"망할, 마스터랑 다른 팀에서 뛰어야 되는 거야?"

"야, 제3팀은 그나마 괜찮은 거야. 김유진 씨가 있잖아. 그에 비해 제2팀에는...."

"제2팀에는 우지민이랑 우진석 남매가 있어. 밸런스를 맞춘 거겠지."

30만대 서열의 남매 헌터.

그 외에도 김태형과 신현민이라는 30만대 헌터가 제2팀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불만은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제33화

33화. 신입 (3)

"제1팀은 전부 신입들로 채워졌네."

"...X나 부럽다."

길드원들의 웅성거림에도 건혁은 설명을 멈추지 않았다.

"각 팀의 제3조, 짐꾼의 급여 중 50%는 제가 부담하나, 나머지 50%는 각 팀 보수에서 지급될 예정이니 그렇게 알아 두십시오. 또한, 각 팀 제3조로 활동하게 될 짐꾼 30명은 매달 4~5번의 실전을 경험하게 될 예정입니다. 그때마다 각 팀의 전투원분들께서는 번갈아 가며 짐꾼 역할을 맡고, 그에 따른 보수는 제가 개별적으로 지급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2시간 동안 설명을 진행한 건혁.

그는 입 안이 메마른 것을 느꼈다.

손목시계를 본 건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쯤에서 마무리를 해야겠군요."

건혁은 설명회를 마무리 짓고 점심 식사를 위해 길드원 전원을 초밥 뷔페로 데려갔다.

초밥 외에도 치킨, 피자, 우동 등이 비치된 샐러드 바가 존재해, 길드원들은 즐거운 얼굴로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인당 23,000원.

총액 1,955,000원을 일시불로 결제했다.

그에 길드원들이 살짝 놀랐다.

"지금 85인분 식비를 혼자서 낸 거야?"

"대박, 200만 원 정도는 나올 텐데...."

"휴일마다 D등급 게이트에 드나들고 있다나 봐. 200만 원 정도는 하루면 충분할걸?"

"그것도 그러네."

그들의 말대로 건혁은 휴일마다 게이트를 들락거렸다.

D등급이 아닌 C등급 게이트를 말이다.

서열이 3만대까지 오르면서 C랭크 마수는 더욱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는데, 그가 휴일에 벌어들인 하루 수익은 최고 2천만 원에 육박했다.

사무실 임대 비용과 직원들의 급여 등.

길드의 운영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의미다.

"일단, 이사부터 가자."

건혁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통장을 바라봤다.

이사를 결심하며 컴퓨터를 켠 순간.

건혁의 눈동자가 살짝 휘둥그레졌다.

이게 무슨 일이지?

수서역에 청룡 기사단 지부가 새롭게 생긴다는 소식이 인터넷 기사를 통해 보도됐다.

내곡동에는 영향이 크게 미치지 않았지만, 자곡동과 세곡동 쪽 집값은 큰 폭으로 뛰어올랐다고 한다.

"그냥 세곡동이나 자곡동으로 이사를 갈까?"

어찌 됐든 수영이 전학을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니지, 내가 데려다주면... 우선, 차부터 사야 하나?"

건혁은 미간을 좁히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자곡동과 세곡동의 집값은 지금도 계속 오르는 중이다.

그러나 그 부분은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왜냐고?

서열 3만대 헌터인 그는 억대 금액을 저금리로 대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중에만 5억 원 상당의 현금이 존재한다.

'휴일마다 1~2천만 원씩 벌면....'

그래, 돈은 금세 모을 수 있다.

다른 헌터들과 달리 자신은 스테이터스 시스템을 통해 필요한 능력을 강화시킬 수 있으니까.

덕분에 건혁은 1~2만대 서열의 헌터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실적을 남겼다.

"후우, 수영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부터 물어봐야겠어."

건혁은 저녁을 먹으면서 이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사 가는 거, 수영이는 어떻게 생각해?"

"으음, 나는 별로 상관없는데... 학교는 전학 가는 거지?"

"아니, 조금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가는 거라서, 아침에는 아빠가 차로 태워다 줄 수 있어."

그때, 수영이 손을 멈췄다.

"아빠가...?"

건혁은 이미 운전면허증을 소지하고 있었다.

자동차가 없을 뿐.

"이참에 차도 한 대 사 보려고. 그것보다 집에 돌아올 때 혼자서 버스 타는 거 괜찮겠어? 그냥 새집하고 가까운 초등학교로 전학 갈 수도 있는데... 그러면 친구들이랑 헤어지게 되니까."

수영은 잠시 뜸을 들이면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버... 버스는 괜찮아. 그... 아, 아빠가 힘들지만 않으면...."

팔을 배배 꼬는 그녀의 모습에 건혁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운전하는 게 뭐 힘들다고. 일단, 겨울 방학 한 뒤에 아빠랑 같이 집 좀 둘러보자."

"응!"

수영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침실로 들어온 건혁은 지갑에 들어 있는 운전면허증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머릿속에 운전 연수를 받은 기억까지는 있는데, 이게 6~7년 전의 기억이니...."

그래, 지갑 속 운전면허증은 일종의 장롱 면허나 다름없었다.

"그냥... 운전 연수받는 게 좋겠지?"

건혁은 자동차 운전 전문 학원에서 연수를 받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11월은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평일에는 온종일 게이트에서 지내고, 주말에는 운전 학원에서 연수를 받다 보니, 수영과 함께하는 시간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12월 초, 건혁은 국내 H그룹의 준대형 검은색 세단을 구매했다.

가격은 대략 8,000만 원 정도로, 경유가 아닌 마력 에너지로 움직인다는 모양이다.

동시에 초등학교의 겨울 방학이 시작되자, 건혁은 곧바로 새집부터 알아봤다.

청룡 기사단 지부와 4~500m 떨어진 아파트 단지.

평수는 20평으로, 거실, 부엌, 발코니, 다용도실, 침실 2개, 화장실 1개로 구성된 집이다.

"이게 20억...."

평당 1억이라는 의미인가?

건혁은 살짝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연식도 오래된 주제에 이게 무슨....'

그는 단지 내 주차장과 주변을 둘러봤다.

확실히, 인프라는 훌륭하다.

아파트 옆으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붙어 있고, 수많은 상가가 즐비하게 나열되어 있으니 말이다.

웬만하면 걸어서 5분 내로 모든 게 해결되겠지.

"어때?"

"여기가 제일 마음에 들어!"

수영이 해맑은 얼굴로 대답했다.

"이 집으로 할게요."

건혁은 전 집에서 보증금을 모두 돌려받고, 현금 8억과 12억의 대출금으로 계약을 맺었다.

취득세 등의 부대 비용을 처리하고, 등기와 주소 이전 등, 모든 것이 마무리될 무렵.

건혁은 손을 덜덜 떨면서 두 눈을 감았다.

"빚만 12억 원... 세금도 장난 아니던데...."

설마, 이 정도로 큰 금액을 대출받게 될 줄이야.

"앞으로 열심히 뛰어야겠어."

물론,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이자는 연 3.3%에 불과하니까.

게다가 청룡 기사단 지부가 제대로 들어서고 나면 집값도 자연스레 올라가겠지.

그렇게 새집 생활이 시작되면서 길드 역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길드원들 역시 길드 활동에 대해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보수 비율도 딱히 불만은 없는 것 같고."

중규모 길드들이 규정한 비율을 약간 보완하여 적용했다.

덕분에 길드 내에서 보수로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임시 공략대에서 활동할 때보다 더욱 높은 보수를 받은 탓일까?

그들은 휴일마다 근처 훈련장을 찾아가 강해지겠다는 마음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가면 짐꾼으로 물러나야 될지도 몰라! 다음 달에는 반드시...!'

'다들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 훈련 시간을 지금보다 더 늘려야 돼!'

경쟁 심리와 뒤처지지 않겠다는 마음이 그들의 성장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새해가 밝으면서 흑월의 길드 공식 서열은 217위가 되었고, 길드원들 역시 평균 2~3만 명을 제치며 급성장을 이루어 냈다.

* * *

2018년 1월 6일 토요일.

모처럼의 주말에 나는 김유진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김지수가 제2팀으로 배정된 이후, 김유진은 제3팀의 새로운 팀장이 되었다.

김지수와 박유리 모두 김유진을 길드원으로 인정했다는 의미다.

"마스터."

"주말에 불러내서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그보다... 여긴가요? 소개해 주고 싶다는 의수 매장이...."

유진은 미심쩍은 눈으로 녹이 슨 간판을 바라봤다.

"일단 들어가죠."

나는 그녀를 데리고 지하로 내려갔다.

유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래, 의수 매장이라기보다는 오래된 카센터를 보는 느낌일 것이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그러나 진열대와 벽장에 전시된 의족과 의수를 보고 그녀는 표정을 살짝 풀었다.

"이 자식,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는 거야!"

모르건 의수 매장의 주인인 진철이 내게 달려왔다.

그의 덥수룩한 수염을 보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아니, 고작 3주 만에 저렇게 자랄 수 있는 건가?

안 본 사이에 10cm는 더 자랐겠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진철의 어깨동무를 덤덤히 받아들였다.

"근래 바빠져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보다 의족을 좀 보려고 왔는데...."

"뭐야, 다리라도 빠졌어?"

진철의 거친 말투에 유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의족은 뒤쪽 여성분이 보실 겁니다. 저는 의수 하나 마련하려고 왔습니다. 2급 금속인 아르베트로 만든 의수가 있습니까?"

"아르베트? 합금이 아니고?"

"예, 100% 아르베트로 만들어진 의수로 부탁드립니다."

"오올~ 요즘 꽤 잘나가나 봐? 그보다 네 팔 길이에 맞는 게...."

진철이 벽장으로 다가갔다.

그때, 유진이 눈치를 살피며 내게 다가왔다.

"수... 순수 아르베트로 만든 의수라면 3억 원대는 가볍게 넘어갈 텐데...."

"예, 시중에서는 3~5억 원 정도로 거래되더군요. 그래도 이곳에서는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습니다."

"...."

저렴해 봐야 얼마나 저렴해질까?

아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잠시 뒤, 진철이 내 팔 길이에 맞는 아르베트제 의수를 가져왔다.

나는 의수를 착용하면서 작게 감탄을 터트렸다.

"많이 가벼워진 기분이네요."

"리바늄보다 15% 가볍고, 80%나 단단하지. 장비는 네가 착용한 것과 똑같아. 재질이 아르베트라는 것뿐."

나는 장비를 수동으로 작동시키면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앞으로의 전투를 고려하면, 이 정도는 마련해 둬야지.

그보다 갑자기 가벼워져서 그런가?

적응이 잘 안 되네.

"아, 음성 인식 장치도 달아 주세요."

"오케이. 그러면 1억... 1억... 모르겠다. 그냥 1억으로 하자. 카드 줘."

"...원가는 제대로 챙긴 거 맞죠?"

"이번 달에 아르베트 값이 조금 오르기는 했는데... 뭐, 1억이면 원가는 충분히 되겠지. 그것보다 저번에 주문한 300MN짜리 마력 전지 100개 들어왔다."

"아, 전부 결제해 주세요."

"그럼, 1억...."

계산기로 향하는 진철의 손.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1억 2,100만 원입니다."

"...그래, 나도 방금 암산으로 계산했었어."

그가 슬쩍 계산기에서 손을 뗐다.

한편, 등 뒤에 서 있던 유진이 미간을 좁혔다.

"아... 아르베트제 의수가 1억 원이라고요? 그보다 300MN짜리 마력 전지 100개가 어떻게 2,100만 원이...."

"저 아저씨, 마력 전지는 마진을 남기지 않고 판매해 주고 있어요. 그리고 이곳에서 판매하는 의수와 의족은 모두 저 아저씨가 만든 거예요."

"게이트 내 광석의 재련 기술을 가지고 있단 말이에요?! 2급 금속인 아르베트를 재련할 수 있는 기술이라면 분명 고위 헌터였을 텐데...."

그녀가 말끝을 흐리자, 나는 쓰게 웃었다.

"이런저런 사연이 있다고 하네요. 하여튼, 실력 하나는 보장할 수 있어요. 여긴 서열 3천대인 이세민 헌터도 이용하는 곳이거든요."

"이... 이세민 헌터요?! 대한민국의 정예 헌터가 이런...."

"성격이 조금 괴짜이긴 하지만, 알고 보면 나름 좋은 사람이에요. 게다가 유진 씨라면 의족이나 마력 전지를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을 테고."

"이거, 다리 하나에 1억씩 들여서 구매한 건데... 100% 리바늄이고."

"...."

다리 하나에 1억씩 들였다면, 총 2억을 사용했다는 뜻인가?

그보다 100% 리바늄제 의족을 한쪽에 1억씩 구매했다니.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물론, 세상에는 유진과 같은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모르건 의수 매장처럼 장사하는 곳은 아마 몇 없을 테니까.

"뭐야, 분위기 왜 이래?"

내 신용 카드와 아르베트제 의수를 가져온 진철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나와 유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도 음성 인식 장치는...."

"그래, 달아 뒀으니까 시험해 봐. 그보다 그쪽 아가씨는 의족이 필요하다고?"

진철의 물음에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리바늄제 의족은 얼마나 하나요?"

"으음, 무장이 없다면 4,000만 원 정도는 받아야겠지?"

"아... 아하하...."

그녀의 허탈한 웃음소리에 진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헛돈이 날아갔다 생각하면 배가 아파 미칠 거다.

반대로 의심도 들 것이다.

정말로 순수 100% 리바늄인지.

 

제34화

34화. 대공원 소동 (1)

"의심되면 안 사도 상관없어. 어차피 평생 먹고살 돈은 벌어 뒀... 이거, 너무 자주 말하는 거 같은 기분이네."

진철이 머리를 긁적이자, 나는 유진을 바라봤다.

"구매를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의족과 마력 전지를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가게를 소개시켜 드린 것뿐이니까요. 오늘은 한번 구경해 보시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그러면 몇 가지 착용해 봐도 괜찮을까요?"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야, 가게 주인은 난데, 왜 네가 허락을 해?"

진철의 딴죽에 나는 작게 웃었다.

이내, 유진의 요청에 따라 적당한 의족들을 가지고 나오는 진철.

유진은 의족을 착용해 보면서 제품들을 하나씩 비교해 봤다.

"이게 1억 원이라니...."

아르베트로 제작된 의족.

금액적인 부분은 정말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거, 환불 안 되겠죠?"

그녀는 유명 매장에서 구매한 리바늄제 의족을 바라봤다.

스마트폰으로 찾아본 결과, AS 기간은 남아 있으나, 환불은 불가능하다는 모양이다.

이미 몇 개월이나 거칠게 다루었으니까.

"의족의 경우엔 의수보다 자주 사용하게 되는 만큼 리바늄제보단 아르베트제가 훨씬 낫지. 돈만 여유롭다면 말이야."

"AS도 가능한가요?"

"AS는 무슨... 수리 비용은 따로 청구할 거야."

진철의 대답에 유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수리 비용은 크게 파손되지 않는 한 2~30만 원 수준에서 가능하니까요. 무장과 음성 인식 장치 등의 교체 역시 거의 원가 수준입니다."

"그래도...."

"제 경우, 리바늄제 의수를 구매하고 반년 정도 지났음에도 수리 비용은 1~200만 원 정도였습니다. 물론, 찌그러지거나 크게 파손되는 부분이 없었기에 가능한 금액이지만요."

내 이야기에 유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르베트는 리바늄보다 훨씬 단단한 금속이다.

C등급 이하의 게이트에서 찌그러질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

"뭐, 오늘은 구경만 하고 돌아가죠. 다른 매장보다 저렴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부담되지 않는 금액은 아니니까요."

5만대 서열의 평균 수입은 1년에 3~4억 원 정도다.

심지어 서열이 9만대로 떨어진 다음부터 그녀의 수입은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그런 그녀에게 1~2억 원대의 의족을 구매하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닐 것이다.

참고로 나와 비슷한 3만대 헌터의 평균 수입은 1년에 5~6억 원 정도라고 한다.

내가 다른 헌터들보다 조금 빡세게 돌아다닌 덕분에 평균보다 큰돈을 만질 수 있었을 뿐.

뭐, 내 경우에는 레벨만 올리면 다른 헌터들보다 더욱 빠르게 강해질 수 있으니까.

더불어 근력, 체력, 민첩, 마력 등에 포인트를 투자하여 필요한 능력을 적절하게 분배할 수 있다.

'...의외로 나도 먼치킨인 거 아니야?'

나는 유진과 함께 모르건 의수 매장을 나오면서 입술을 살짝 씰룩거렸다.

유진은 100MN 마력 전지 100개가 담긴 봉투를 오른손으로 쥐었다.

마력 전지는 대형 매장에서 판매하는 것과 똑같은 제품이니까 의심도 덜 수 있겠지.

"마력 전지를 30%나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니... 이건 확실히 이득이네요. 그보다 저 사람은 정말로 장사를 할 마음이 있는 건지...."

"하하하하, 저도 처음 방문했을 때는 똑같이 생각했었습니다. 마력 전지는 마진을 남기지 않고, 의수는 대형 매장의 3~40% 가격대에 판매했으니까요. 저도 리바늄제 의수를 구매할 때, 유진 씨처럼 의심이 먼저 일어났었죠. 하지만, 세민 씨한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저 아저씨가 왜 이런 식으로 장사를 하는지 알 수 있었어요."

"2급 광석을 제련할 수 있는 기술은 흔하지 않아요. 심지어 1급 광석으로 만든 제품도 있던데... 저 정도 기술이라면 적어도 1천 이내의 서열을 가진 헌터라는...."

나는 작게 웃으면서 대답을 삼켰다.

그녀의 말대로 진철은 과거 800위대 서열의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였다.

그것도 10명의 정예 헌터를 이끄는 길드 마스터.

한때는 나름 유명했다는 모양이지만, 과거 충청남도에서 일어난 대규모 레이드로 동료와 연인을 잃고, 방구석에 처박힌 채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의수 매장을 권유한 것이 바로 이세민 헌터다.

평소 광석을 제련하는 데 재미를 붙이고 있었던 진철.

일종의 취미였지만 그의 기술을 썩히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던 세민은 자신의 의족을 만들어 줄 것을 의뢰했다.

그것이 모르건 매장의 시초였다는 모양이다.

이 이야기를 지금 유진에게 해 줄 필요는 없겠지.

"아무튼, 오늘은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3팀을 잘 부탁드립니다."

"아... 아니에요. 오히려 이런 좋은 가게를 소개시켜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죠. 그보다 점심이라도 같이...."

"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서요. 아 참, 자택까지 데려다드릴까요?"

내가 손으로 검은 세단을 가리키자,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량에 올라탔다.

평소에 바빴던 만큼 오늘은 하루 종일 수영이랑 놀아 줘야겠다.

나는 수영이와 무엇을 할지 고민하면서 생글생글 미소를 지었다.

* * *

유진은 작은 한숨과 함께 아쉬운 듯한 표정을 보였다.

그녀를 자택까지 데려다준 건혁은 곧장 차를 몰고 사라졌다.

차라도 한잔 마시겠냐는 권유를 단번에 걷어차 버린 것이다.

"아내분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었지? 그리고 초등학생 딸이 하나...."

건혁의 딸 사랑은 길드 내에서도 유명했다.

딸을 지키기 위해 몸을 내던진 건혁.

결과, 그는 왼팔을 잃고 말았는데.

게이트 공략을 마친 후, 그는 딸아이의 저녁을 준비해야 된다면서 회식조차 거부했다.

그렇다고 길드원을 홀대하느냐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맛있게 먹으라면서 회식비를 보태 줄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딸을 삶의 중심으로 두고 있다는 건 변하지 않을 거야."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자신이 건혁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진작에 깨달았다.

때문에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는 작은 충격을 받아야 했다.

외관상으로는 20대 중반쯤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초등학생 딸아이까지 두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이어, 아내와 사별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그녀는 건혁에 대한 호감을 조금이나마 짓누를 수 있었다.

"그래, 대한민국 4천 3백만 인구 중 남자만 절반인데, 마스터보다 좋은 남자 하나 없겠어?"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자택으로 들어갔다.

한편, 집으로 돌아온 건혁은 수영과 함께 점심을 먹은 뒤, 컴퓨터로 온라인 게임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초등학교 3학년생이 놀 법한 보드게임을 준비하고, 아이들 사이에서 유명한 애니메이션까지 인터넷을 통해 공부해 두었다.

수영이 1회차 인생을 겪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은 채 말이다.

'하긴, 보드게임만 계속하면 재미도 없긴 하겠지. 게다가 저런 애니메이션이라면....'

건혁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온라인 게임 속 캐릭터를 움직였다.

물 풍선을 터트려 상대방을 가두는 게임.

소설 속의 수영은 분명 FPS 게임을 취미처럼 즐겨 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3학년생에게 피 튀기는 FPS 게임을 추천할 순 없었다.

"수영아, 아빠 물 풍선에 갇혔어!"

"아... 아이템 써! 바늘 아이템 있잖아!"

"아껴 두려고 했던 건데...."

두 사람은 의외로 재밌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오후 6시가 되자 치킨을 먹으며 예능을 시청했고, 8시부터 뉴스를 보며 전국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 사고들을 살펴봤다.

"...전라남도랑 경상남도는 거의 5~60% 정도를 마수들한테 빼앗겨 버렸네."

대규모 레이드가 발생하면서 한반도 남부 지방은 큰 소란이 일어났다는 모양이다.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투입된 1천여 명의 헌터들.

부산에 본부를 둔 현무 기사단이 그들을 지휘하며, 피해자들을 구조 및 보호하고 있다는 내용이 방금 속보로 보도됐다.

이어, 보도 헬기에서 촬영된 S랭크 마수, 싸이클롭스.

높이 100m에 육박하는 외눈박이 거인이 거대한 몽둥이를 휘두르자, 괴음과 함께 지상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만들어졌다.

"...저런 걸 어떻게 토벌해?"

건혁이 허탈한 목소리로 말하자, 수영 역시 심각한 눈으로 싸이클롭스를 바라봤다.

사람들은 S랭크 마수를 보고 재앙이라 불렀다.

영웅급 헌터들만이 토벌할 수 있는 괴물.

인류는 놈들에게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6년 뒤, 인류에겐 진짜 절망이 찾아올 것이다.

'마족(魔族).'

마계 아르덴에서 넘어오는 이형의 존재들.

놈들의 능력은 제각각이었다.

C랭크 마수보다 약한 존재부터 S랭크 마수를 단숨에 소멸시켜 버리는 존재까지 다양하게 확인됐다.

홀로 S랭크 마수를 토벌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에서도 10위권 안에 들어야 할 터.

수영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콜라를 들이켰다.

'아빠한테 말해 볼까?'

수서역 인근에 위치한 광수산.

그곳이 수영의 새로운 훈련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산속에서의 훈련도 한계에 부딪혔다.

아니, 효율이 떨어진다고 해야겠지.

집에서 2~300m 거리에 위치한 제9 헌터 훈련장.

훈련장은 일반적으로 헌터증을 소지한 자들만이 입장이 가능하다.

예외가 존재한다면 보호자를 대동하거나 방문증을 착용했을 때뿐.

'주말에는 쉬니까, 보호자로 따라와 달라고....'

그녀가 각성 사실을 밝히려던 그때.

"그러고 보니, 내일은 서울 대공원에 가는 날인데 준비는 다 해 뒀어?"

"아... 응, 다... 다 챙겨 뒀어."

건혁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수영이 말을 더듬었다.

"그럼, 오늘은 일찍 자자."

TV를 끄고 테이블을 청소하는 건혁.

수영은 무언가를 망설이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내, 문득 OO월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정말로... 모르는 거겠지?'

과거 수영은 부친의 상처를 얼음으로 지혈한 적이 있다.

당시 건혁의 정신은 혼미했던 상태였다.

게다가 다량의 출혈로 지혈된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황.

자신이 각성했다는 사실은 아직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래, 내일 다녀와서 이야기하자.'

그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건혁을 도와 닭 뼈를 일반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 * *

2018년 1월 7일, 일요일.

나는 아침 일찍 6시에 일어나 챙겨 입기 시작했다.

이어, 7시가 되자마자 수영이를 깨웠다.

"오늘은 서울 대공원에 가야지?"

왼팔 의수를 볼 때마다 OO월드에서 수영이와 한 약속이 떠올랐다.

그래, 죽기 전까지 후회 없는 삶을 살아 보자.

OO월드에서 일어난 레이드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이변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렇다면 수영이와 조금이라도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이득이지 않겠는가.

'역시 자차가 있다는 건 편하네.'

버스를 타면 서울 대공원까지 1시간 이상이 걸린다.

택시를 타더라도 대로변까지 나가서 기다려야겠지.

나는 내비게이션을 찍은 다음 곧장 액셀을 밟아 도로로 나갔다.

그렇게 서울 대공원에 도착한 수영이는 내 손을 잡아당기면서 동물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로 가자! 저기!"

이렇게 신나 할 일인가?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금세 까먹어 버린다.

"이... 이게 뭐야? 아드바크?"

수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나 역시 미간을 좁혔다.

정말로 뭐지?

아드바크라고?

설명을 읽어 보니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흙돼지과 동물이라는 모양이다.

너무 오랜만에 방문한 탓일까?

나는 생소한 동물들을 보면서 수영이와 함께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다양한 장소를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제35화

35화. 대공원 소동 (2)

"아빠, 떡볶이!"

마침 가까운 가게에서 떡볶이를 파는 모양이다.

우리는 떡볶이와 간단한 음식을 구매해 점심 겸 간식을 먹었다.

이어,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고 유인원관에 도착하자,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레이드는 아니겠지?

수영이도 비슷한 생각을 한 걸까?

내 손을 꽉 붙잡으면서 소란의 중심지를 바라봤다.

"후우...."

아무래도 레이드는 아닌 모양이다.

소란의 중심에는 2~30대로 보이는 다섯 남녀가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정확히는 한 남성과 네 남녀의 다툼이다.

가능하면 말다툼 수준으로 무난하게 넘어가 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상황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특수 능력을 사용하는 살육의 현장.

"너희들이 그때 도망가지만 않았어도 세라는 죽지 않았어!"

"X발, 우리는 분명 물러나자고 말했었잖아! 그 X이 계속 고집부리다가 죽은 걸 왜 내 탓 하고 지X인데!"

"맞아, 세라가 죽은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왜 우리들까지 위험에...!"

"닥쳐! 네가 세라 지시에만 제대로 따랐다면 녀석에게 이길 수도 있었다고!"

콰앙!

유인원관에서 일어난 폭발.

붉은 화염과 보랏빛 번개가 대기에서 일렁이자, 나는 곧장 수영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X발, 왜 기분 좋게 놀러 나올 때마다 소란이야?!

유인원관에서 원숭이와 고릴라가 빠져나오고, 대공원 내에서 비상벨이 울리며 대피 안내가 전달됐다.

투콰앙!

"크윽...!"

뭐야, 왜 우리 주변으로 다가오는 건데?!

그보다 이 정도의 속성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설마, 1,000위 안에 드는 헌터들인 건가?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주변을 둘러봤다.

건물이 무너지면서 깔리게 된 사람들.

"진짜, 왜 여기서 지X인 거냐고!"

그것도 오늘 서울 대공원에서, 이 X자식들아!

인적이 드문 장소들도 많잖아!

설마, 네 남녀가 서울 대공원에 놀러 온 타이밍을 노린 건가?

그냥 하나씩 조용히 처리하지, 왜 이런 곳에서 한 번에...!

나는 속으로 불만을 토로하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툭.

"아... 아빠, 저 사람들...."

수영이가 내 소매를 당기면서 바위에 깔린 사람들을 바라봤다.

구해 주자는 말인가?

나는 주차장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자.

"제... 제발 제 아들만이라도...."

3~4살 정도의 작은 아이.

나는 머리를 박박 긁으면서 수영이를 잠시 내려놨다.

그러곤 주변을 경계했다.

다행히도 소란의 주범은 조금 멀어진 모양이다.

나는 바위를 들어 올려 맞은편으로 넘겼다.

쿵!

"허... 헌터이신가요?! 저... 저쪽에도 사람이...!"

대공원의 직원인가?

그는 다급한 얼굴로 도움을 요청해 왔다.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식물원 쪽에서 들려오는 폭발음.

넷이서 고작 한 명도 제압하지 못하다니.

"후우, 이분을 부축해서 데려가세요."

"아... 알겠습니다!"

대피를 유도하던 직원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내가 무거운 바위들을 치우면 직원들은 피해자들을 부축하여 자리를 벗어났다.

콰앙!

"으아악!"

"무... 물러나!"

1~20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나는 곧장 수영이를 등에 업었다.

그 순간, 눈앞에 들이닥친 거대한 화염구.

얼굴이 화끈 뜨거워진다.

"빙마검(氷魔劍)!"

촤아악!

전방으로 뻗어 나간 얼음의 칼날이 화염구와 충돌했다.

화염구를 막아 내려면 이걸로는 부족하다.

아니, 적어도 몸을 대피시키려면....

"크아아아!"

푸욱!

지면에 빙마검을 내리꽂자, 눈앞에 3m 높이의 얼음벽이 치솟았다.

가로 2m에 두께 1m의 단단한 얼음벽.

형태는 조잡하지만, 자리를 피할 시간은 만들어 줄 수 있겠지.

나는 수영을 업은 채 왼쪽으로 몸을 내던졌다.

얼음의 칼날 덕분일까?

화염구의 위력은 상당히 줄었지만, 얼음벽과 부딪친 그 순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나는 수영을 감싸 안은 채 폭발로부터 몸을 돌렸다.

"크으...."

등이 후끈거린다.

'제길.'

나는 만일을 위해 챙겨 둔 5급 포션을 단번에 들이켰다.

혹시 몰라서 챙겨 온 포션이 이렇게 사용될 줄이야.

잠시 뒤, 사방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압해!"

아무래도 청룡 기사단이 도착한 모양이다.

푸른색 제복을 걸친 헌터들이 소란의 중심지로 몸을 내던졌다.

"후우...."

과거 청룡 기사단에 입단하지 않은 것을 다행처럼 여겼다.

지금만큼 안도한 적은 없을 거다.

누군가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져야 하는 직업.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수영이를 바라봤다.

"어디 다치진 않았지?"

"아... 아빠는...."

"아빠는 괜찮아."

나는 걱정으로 가득한 수영의 얼굴을 보고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인명 구조에 힘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건혁 헌터님."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

고개를 들자,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비단결처럼 반짝이는 기다란 머리카락.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찰랑거리자, 수영이가 작게 목소리를 냈다.

"지... 진화 언니?"

언니라고?

설마, 아는 사이인가?

나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푸른 제복을 걸친 여성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헌터 협회 소속 청룡 기사단 부단장인 이진화라고 합니다."

"OO월드에서 아빠 구해 준 언니...."

수영의 말에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미친, 이 사람이 서열 16위 이진화라고?!

나는 화들짝 놀라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랬었군요. 이야기는 딸한테 들었었습니다. 당시에는 도와주셔서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기사단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그보다 정말로 대단하시네요. 멀리서 본 것뿐이지만, 서열 3천대 헌터의 특수 능력을 막아 내시다니...."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시간을 벌었을 뿐입니다."

두 가지 기술을 사용했음에도 화염구를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겨우 4~5초 정도 버텼으려나?

"박건혁 헌터님의 서열을 고려하면, 그 몇 초도 정말로 대단한 겁니다. 게다가 56만대 서열에서 불과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2만대 서열에 올라선 것은...."

2018년 1월에 접어들어 나는 29,967위에 올라섰다.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드디어 2만대 순위에 들어선 것이다.

진화가 극찬과 함께 경외심을 보내더니, 이내 씁쓸한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박민철 팀장이 박건혁 헌터님을 스카우트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붙잡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네요."

서열 16위인 그녀가 이렇게까지 극찬을 해 줄 줄이야.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씁쓸히 웃었다.

그때, 수영이가 내 오른손을 붙잡았다.

우물쭈물거리며 무언가를 망설이는 모습.

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침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이진화 헌터와 나를 번갈아 봤다.

"아빠, 나도 헌터... 하고 싶어."

"어?"

갑자기 무슨 소리지?

딱히 반대할 생각은 없다.

그녀는 1회차에서 100위 안에 든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였으니까.

더욱이 특수 능력을 각성한 것은 물론이고, 나보다도 더욱 다양한 전투 경험을 가지고 있다.

물론, 걱정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가능하면 내 선에서 마왕군을 마무리 짓고 싶다.

하지만 스테이터스 시스템으로 과연 주인공인 수영의 힘을 능가할 수 있을까?

나는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흑월이라는 길드를 만들어 장래 수영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 것이다.

빙마검이라는 능력을 얻은 건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사... 사실...."

입술을 잘근 깨문 수영.

진화가 수영을 향해 작게 웃어 보였다.

용기를 내라는 듯이 말이다.

"후우...."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수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수영이가 하고 싶다면 해야지. 모처럼 특수 능력까지 각성했으니까."

"...에?"

"수영이가 헌터가 될 무렵에는... 아빠도 큰 길드를 운영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힘든 일이든 부당한 일이든 언제든지 아빠한테 말하면 돼. 아빠가 어떻게든 해결해 줄게."

수영이 멍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아... 알고 있었어? 내가 각성한 거...."

나는 볼을 긁적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OO월드에서 철로에 깔렸을 때, 아주 희미하게나마 정신이 남아 있었거든. 어깻죽지하고 허리께에서 출혈을 막고 있던 얼음.... 처음에는 꿈인가 싶었는데, 지금 모습을 보니까 정말로 각성한 모양이네. 게다가 특수 능력까지...."

"...."

나는 즉석으로 생각한 이야기를 그대로 내뱉었다.

"혹시 몰라서 헌터들을 양성하는 학교도 찾아봤어. 헌터증을 발급받은 후에는 수성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게 어떨까? 물론, 집 바로 뒤에 있는 일반고도 괜찮기는 한데... 그래도 전문 교육을 받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수성고등학교라면 제가 잘 알고 있어요."

진화가 수영이와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가 수성고등학교 출신이거든요. 전문 교육도 전문 교육이지만, 각종 장학 제도와 함께 수많은 지원을 해 주고 있어서 각성한 학생들로서는 좋은 학교일 거예요."

정부와 수성그룹이 헌터 육성을 위해 운영하는 고등학교.

장학금 액수가 다른 고등학교와 차원이 달랐다.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하더라도 각성한 학생들에게 편의를 제공해 주고자 한 것이다.

수영이는 진화의 이야기에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곤 나를 바라봤다.

"그... 그리고 주말에는 훈련장에...."

"보호자로 따라가 달라는 거지?"

"응."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그래, 아빠도 수영이가 가진 능력이 뭔지 궁금하니까."

"아... 아빠랑 비슷해. 얼음으로 된 활과 화살을 만드는 거야. 이... 이렇게."

여기서 보여 준다고?

수영이 오른손에 작은 활을 만들었다.

이어, 왼손에 형성된 얼음의 화살.

진화도 수영의 특수 능력을 처음으로 본 걸까?

살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와, 우리 공주님 멋있는데?"

"능력 이름은 빙마궁(氷魔弓)이야."

"어... 아빠랑 정말로 똑같네."

뭐, 이미 알고 있지만 지금은 연기가 필요한 때다.

"이... 이런 일도 다 있네요. 부녀가 똑같은 능력을 가지게 되다니... 물론,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지만, 부모 자식 사이에서 이 정도로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례는 아마 손에 꼽을 거예요."

진화의 이야기에 나는 수영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 참, 소란을 일으킨 헌터들한테는 가 보지 않으셔도 괜찮은 건가요?"

"네, 상관없어요. 그쪽에 지휘할 사람을 따로 보내 뒀으니까요. 수영이가 헌터가 된다면, 흑월 길드에...."

"선택은 수영이한테 맡길 생각이에요. 흑월에 들어와 주면 좋겠지만요."

"요즘 세상에 신입들은 모두 힘드니까요. 그래도 수영이처럼 특수 능력에 각성한 헌터들은 그만한 대우를 받을 수 있어요. 물론, 아빠가 길드 마스터이니, 흑월에 들어가는 게 더욱 좋기는 하겠지만...."

말끝을 흐린 진화가 자세를 낮추며 수영을 바라봤다.

"우리 청룡 기사단에 들어오는 것도 한 번쯤은 생각해 주렴."

"네."

웃기는 소리.

청룡 기사단에 들어갔다간 위험천만한 장소에 강제로 끌려다녀야 하잖아!

소설 속의 수영은 청룡 기사단의 입단 제의를 거절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규제.'

그래, 기사단 내의 각종 규제들이 성장의 발목을 붙잡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국가의 치안과 안녕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바로 기사단이다.

그런데, 마왕군의 존재를 확인한 그녀가 국가의 치안과 안녕에 이바지한다?

그럴 시간에 게이트에 한 번이라도 더 들어가 강해지고 말지.

'뭐, 그렇다고 길드에 들어간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단독으로 게이트에 들어가 마수를 토벌하고, 단독 공략에 제한이 걸릴 때는 임시 공략대에 들어가서 높은 등급의 게이트를 공략하며 초고속 성장을 이루어 낸다.

어찌 됐든 수영이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는 건 박건혁이 죽게 된 다음의 일이다.

'지금의 나는 원작의 박건혁과는 다르니....'

그래, 손쉽게 죽을 일은 없을 거다.

그보다 소란도 잠재워진 모양이네.

소란의 주범들은 모두 체포되고, 피해자들 역시 청룡 기사단에 의해 구조되기 시작했다.

 

제36화

36화. 대공원 소동 (3)

"저도 슬슬 가 봐야겠네요. 구조 작업에 협력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부단장님께서는 이 근처에서 근무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오늘은 과천지부에 파견을 나왔다가...."

"아, 그랬었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화가 수영이를 바라봤다.

"수영아, 자주 연락해도 되니까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해. 알겠지?"

"네."

진화는 나를 향해 고개를 작게 숙인 뒤, 서둘러 단원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젠 놀러 가기 무서워지네."

내 중얼거림에 동의하듯 수영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OO월드에 이어 서울 대공원에서까지.

정말로 내 탓인가?

나는 수영이의 손을 잡고, 주차장으로 빠져나갔다.

'많이도 왔네.'

주차장에는 청룡 기사단 및 군인들이 한가득 배치되어 있었다.

소란을 일으킨 헌터가 3천대 서열의 헌터였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에서 탈출한 동물들 탓도 있으려나?

주차장에 주차된 차량들이 크게 파손되어 있었다.

우리에서 탈출한 동물들이 저지른 것이다.

"후우...."

나는 작게 안도했다.

다행히도 우리 차는 건들지 않은 모양이네.

지붕에 약간의 먼지만 앉아 있을 뿐.

내가 주차장을 벗어나려 하자, 기사단 측 인물이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신분 확인 가능하겠습니까?"

"예, 여기 있습니다."

나는 주민 등록증과 함께 헌터증을 제시했다.

"아, 흑월 길드의 마스터셨군요. 실례했습니다."

"아닙니다."

"조금 전, 인명 구조에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예, 수고하세요."

나는 액셀을 밟고 핸들을 돌려 도로로 나섰다.

누군가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는 건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단지, 100명의 목숨보다 수영이의 목숨을 더욱 우선시할 뿐.

나는 뒷좌석에서 잠든 수영을 보고 작게 안도했다.

'앞으로 어디 갈 때는 만반의 준비를 해 둬야겠어.'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으면서 내비게이션에 따라 핸들을 꺾었다.

오후 4시가 될 무렵, 집에 도착한 나는 수영이를 조심히 침대 위에 눕혀 주었다.

그리고 거실로 나와 곧장 샤워를 했다.

"여름에는 워터 파크에 가기로 약속했는데...."

이번에도 게이트가 열리는 건 아니겠지?

수중 마수들이라도 튀어나왔다간 골치가 아파진다.

샤워를 마친 나는 부엌에서 콜라를 가져와 TV를 시청했다.

지상파 방송국에서 속보로 보도된 서울 대공원의 소동.

―예,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금일 오후 1시 47분경, 서울 대공원에서 서열 3,701위 김준석 헌터가....

나는 그의 범행 동기를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납득할 수 있는 동기다.

동료들이 도망친 탓에 소중한 연인이 죽었으니까.

복수심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겠지.

그런데, 왜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말려들게 하는 거야?

녀석이 일으킨 소란으로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중 사망자는 무려 12명.

청룡 기사단 덕분에 특별히 중장비를 동원하지 않고 구조 작업이 진행됐다고 한다.

수백 kg의 바위를 거뜬히 들어 보이는 헌터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후, 피해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한 기자.

―갑자기 유인관 쪽에서 '펑!' 소리가 나면서....

나는 콜라를 마시면서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김준석 헌터가 소란을 일으키던 때, 마침 현장에 있었던 흑월 길드의 마스터, 박건혁 헌터가 구조 작업에 나서면서....

"푸훕!"

X발, 왜 내 이름이 저기에서 튀어나와?!

그보다 허락도 없이 왜 내 이름을 거론하는 건데!

나는 미간을 와락 찌푸리면서 곧장 스마트폰을 집었다.

이내, 방송국에 연락을 할지 말지에 대해 고민했다.

"망할 새끼들.... 이러니까 기레기, 기레기 하는 거지."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면서 곧장 방송국에 전화를 걸었다.

이름은 이미 밝혀졌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얼굴까지 까발려지는 건 사양이다.

때문에 각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얼굴 공개는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스트레스가 확 몰려오네."

누군가는 스트레스를 술과 담배로 푼다.

그러나 박건혁의 몸에 빙의한 순간, 나는 그 두 가지를 모두 끊어 버렸다.

대신 콜라와 이온 음료를 자주 마셨다.

"크으...."

톡 쏘는 맛.

콜라는 확실히 묘한 매력이 있다.

"오늘은 부대찌개라도 만들어야겠다."

나는 수영이가 깨기 전에 저녁 식사 준비하고자 부엌으로 가 앞치마를 걸쳤다.

* * *

건혁이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수영이를 깨우려던 시각.

지수는 캔 맥주를 들이켜면서 치킨을 주문했다.

즉석 밥과 순살치킨을 테이블에 차려 두고, 자리에 앉아 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 그때.

―김준석 헌터가 소란을 일으키던 때, 마침 현장에 있었던 흑월 길드의 마스터, 박건혁 헌터가 구조 작업에 나서면서....

"푸훕!"

그녀는 그만 맥주를 뿜고 말았다.

"쿠... 쿨럭! 뭐... 뭐라고?"

오후 7시경, 공중파 방송국에서 보도된 대규모 살인 사건.

범죄를 저지르는 헌터는 드물지 않았다.

때문에 '말세네, 말세야.'라고 생각하며 그러려니 했던 지수는 익숙한 이름을 듣고 눈가를 찌푸렸다.

"흐... 흑월? 박... 건혁?"

그녀는 스마트폰으로 해당 사건을 찾아봤다.

금일 서울 대공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범인이 목표로 한 대상들은 죽지 않았지만, 대신 관련 없는 사람들이 희생되고 말았다.

사건 도중 딸아이와 함께 대공원을 방문한 흑월의 마스터, 박건혁.

모자이크로 처리된 CCTV 및 사진 자료가 공개되면서 지수는 곧장 건혁에게 문자를 보냈다.

마찬가지로 태형, 지혜, 유리, 유진 등, 흑월의 길드원들은 뉴스에서 거론된 건혁의 이름을 듣고 해당 사건을 자세히 조사해 보기 시작했다.

"설마, 마스터가 놀러 가는 곳마다 소란이 일어나는 건가? OO월드에 이어 서울 대공원에서까지...."

태형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건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편, 서열 3천대,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가 소동을 일으킨 탓일까?

유X브에 업로드된 영상은 금세 조회 수 10만을 돌파했다.

<검단산 게이트에서 김유진 헌터 구해 줄 때 대충 느낌 오더라. 서열 3천대가 날뛰는데도 사람을 구조하다니... 역시 사람은 인성이 중요해.>

⤷김준석 미친X인가? 왜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사상자가 117명....

⤷그중 사망자만 12명임. 심지어 김준석 애인이 고집부리면서 무리하게 게이트를 공략하려고 했었다고 함. 이미 재판도 끝난 건데, 복수하겠다면서 저 지X을 떨었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저런 새끼는 그냥 사형시켜라. 감옥에서 우리 세금으로 밥 먹이지 말고.

⤷ㅇㅈ 세금 존X 아까움.

<김준석 사형 청원 올라갔어요. 동의 부탁드립니다! www.xxxxxxx.com>

⤷동의했습니다.

⤷저도 동의했어요.

⤷이거 동의해 봐야 큰 의미가 있나? 실질적으로 사형 제도는 폐지된 셈이잖아.

⤷그래도 무기 징역은 가석방이 가능함. 사형은 불가능하고. 저런 놈이 사회에 다시 나온다고 생각해 봐라.

⤷진짜 존X 끔찍하다.

<빛건혁! 빛건혁! 빛건혁!>

⤷흑월 내에서도 평판 엄청 좋음.

⤷내 친구가 흑월에 들어갔는데, 헌터든 짐꾼이든 똑같이 잘 챙겨 준다고 하더라. 군대에서 잘 챙겨 주는 선임 같은 느낌이래.

⤷듣기로는 딸 바보라고 함. 회식할 때 각 팀장들한테 돈 쥐여 주면서 맛있게 먹으라 하고, 자기는 딸 저녁 준비해야 된다면서 곧바로 집에 돌아감.

⤷아, X발... 혼자서 칼퇴하네.

⤷ㅋㅋㅋㅋㅋㅋㅋ

<서열 56만대에서 시작해서 그런지, 인성 하나는 정말로 좋은 분이시네요.>

⤷짐꾼 대우가 나빠지는 와중에도 흑월에서는 반대로 좋아지는 중입니다.

⤷신입 뽑을 때, 인성을 중점적으로 본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진짜, 한 번만 더 모집해 주세요!

⤷ㅇㅈ 이번에 또 모집하면 나도 지원한다.

⤷전투원 평균 월급 1,000만 원, 짐꾼 평균 월급은 540만 원임. 이것도 인원이 늘어난 탓에 크게 떨어진 거란다. 서열 4~50만대 헌터가 저렇게 버는 건 듣도 보도 못했음.

⤷혹시 몰라서 댓글 남길게요. 일반적으로 서열 4~50만대면 그냥 짐꾼 하면서 매달 2~300만 원씩 받아 갑니다. 막노동급으로 힘들면서 헌터들이 사람대우도 안 해 줍니다. 그냥 RPG 게임의 인벤토리가 되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시X, 인벤토리래ㅋㅋㅋㅋㅋ

⤷흑월, 대기업이었네.

X튜브 댓글을 확인한 태형은 살짝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박건혁이 활약할수록 흑월의 명성도 높아졌다.

다음 날, 각 게이트 앞에 집합한 흑월의 길드원들.

그들은 박건혁에 대한 이야기로 술렁였다.

그 시각, 건혁은 서초구 D등급 게이트 앞에서 대기 중인 제1팀에게 다가갔다.

저벅, 저벅, 저벅.

"인원 파악하겠습니다."

10명씩 3개의 조로 구성된 제1팀.

건혁은 인원 파악이 끝나자마자 게이트로 들어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뉴스에까지 출현했으니 무언가 말이라도 할 줄 알았던 길드원들은 살짝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몇 마리 흘려보내겠습니다. 1조, 방패 제대로 쥐고 계세요."

"알겠습니다!"

누군가가 대표로 대답했다.

건혁은 마수의 무리를 향해 달려갔다.

학살극을 벌이는 그 모습에도 길드원들은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익숙해진 것이다.

"2만대 헌터가 D등급 게이트를 공략하고 있는 건... 국가로서도 손실이지."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시킨 정부.

석유와 석탄의 경우에는 생산 자체를 큰 폭으로 감소시켰다.

그럼에도 전기세 등은 크게 높아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마석 에너지.

즉, 마력 덕분이었다.

환경 오염이 적으면서 다량의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는 마석.

지구 온난화가 심해져 가는 현 상황에서 마력이란 너무나도 이상적인 에너지 자원이었다.

수출과 수입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니, 산유국이 아닌 국가들에게도 좋은 일이겠지.

물론, 그 탓에 산유국들은 크게 몰락했다고 한다.

촤아아악!

-캬아아악!

수십 마리의 고블린을 토벌한 후, 후위로 대여섯 마리를 흘려보낸 건혁.

헌터들은 왼손으로 방패를 겨누었다.

카앙!

고블린들의 공격이 방패와 충돌한 순간.

헌터들 역시 오른손에 쥔 검을 힘차게 휘둘러 반격했다.

푸욱!

-캬아악!

검 끝이 고블린의 복부를 꿰뚫었다.

이어, 발버둥 치는 고블린을 방패로 강타했다.

쾅!

고블린이 바닥에 쓰러졌다.

헌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발걸음을 움직여 녀석에게 달려갔다.

"흐아앗!"

서걱!

고블린의 목덜미에서 핏물이 쏟아져 나온다.

첫 전투가 일단락되고, 건혁은 짐꾼들에게 마석 회수를 지시했다.

이어, 2시간 동안 2~300마리의 고블린을 토벌해 낸 제1팀.

물론, 7~80%가 건혁의 공적이다.

오후 공략에선 약간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오전에 너무 많은 고블린들을 토벌한 탓일까?

13시부터 17시까지, 건혁의 일행은 불과 117마리밖에 토벌하지 못했다.

"C랭크 27개와 D랭크 302개, E랭크 51개입니다."

길드 계좌에는 무려 5,806만 원이 입금되었는데, 보수는 추후 길드 사무실에서 세금을 처리한 다음 규정된 비율에 따라 개인 통장에 입금될 예정이다.

건혁의 경우 서열이 2만대에 접어든 후부터 세금이 2.1%까지 낮아졌다.

반면, 50만대 서열의 헌터들은 10~13%까지 세금을 떼어 갔는데.

길드 등급에 따른 혜택을 받아 3~4% 정도가 감면된다고 한다.

어째서 적게 벌수록 세금을 많이 떼어 가는 걸까?

오히려 반대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많은 사람들은 해당 부분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더한 혜택을 준다는 국가도 있는 마당에 고위 헌터들에게 높은 세율을 적용한다면, 과연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실제로 한국에서 세율을 뒤집어엎으려다가 수백 명의 헌터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거나, 수만 명의 헌터들이 각성 능력 검사를 받지 않으면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국민들은 이민을 간 헌터들을 강하게 비난했지만, 그런 비난 속에서도 헌터들은 미국의 게이트를 공략하며 부유한 삶을 누렸다.

특별한 전과가 없다면 능력 있는 헌터일수록 이민은 아주 쉽게 처리됐다.

특수 능력 각성자라면 더더욱.

 

제37화

37화. 데스펠 (1)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건혁은 길드원들에게 인사를 한 다음 차량에 올라타 집으로 돌아갔다.

반면, 삼겹살집에서 회식을 즐기는 헌터들.

그들은 사이다를 마시면서 조금 전 공략에 대해 시끌벅적 대화를 나누었다.

"크흐~오늘은 100만 원 정도 벌었던가?"

"이번 달도 1,000만 원이 넘겠구나!"

"마스터 덕분에 서열도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으니, C등급 게이트를 공략할 날도 머지않았을 거야!"

"그보다 서울 대공원에서의 일... 정말 아무 말도 안 하시고 가셨네."

"마스터 성격에 자랑이라도 하고 다니실 줄 알았냐?"

"크흐흐흐, 그건 그렇지."

고기를 집던 한 길드원이 무언가 떠올린 듯 목소리를 냈다.

"아, 그러고 보니 제2팀 팀장님도 20만대 서열에 들어섰다고 하더라."

그에 누군가가 스마트폰으로 협회 사이트에 접속했다.

"정확히는 299,102위라네. 김지수 헌터님도 321,801위가 되셨어."

"도대체 몇만 명을 제친 거야?"

"그분들은 매번 말씀하시잖아. '진짜' 헌터가 되기 위해서 흑월에 들어왔다고."

"...."

방금까지의 즐거운 분위기가 한순간에 식어 내렸다.

눈빛에 담긴 강한 열망.

그래, 자신들은 짐꾼에서 벗어나 헌터가 되기 위해 흑월에 지원했다.

'내일은 아침 일찍 나서야겠어.'

기존 흑월에서 활동하던 길드원들이 휴일마다 훈련장에 드나든다는 소문 때문일까?

그에 자극을 받은 신입들은 쉬는 날, 4~5시간씩 전문 트레이너로부터 훈련을 받았다.

몇몇은 그런다고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2018년 1월에 접어들고, 길드원들의 서열이 대폭으로 상승하면서 의심은 금세 수그러들었다.

회식을 하던 길드원들은 동료들과 눈을 마주치면서 씨익 웃었다.

"흑월에 들어오고부터 소주가 입에 안 들어가네."

"곧 따라잡아 줄 테니까, 다음에는 너희들이 짐꾼 해."

"웃기고 있네. 너희만 강해지는 줄 알아? 열심히 도망쳐 줄 테니까 어디 따라와 봐. 크크크큭."

전투원과 짐꾼이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하는 길드가 과연 대한민국에 몇이나 있을까?

대부분의 길드는 전투원은 전투원끼리, 짐꾼은 짐꾼끼리 모여 서로에 대한 뒷담을 하였다.

그러나 흑월은 회식 자리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불편했던 부분, 고마웠던 부분, 주의해야 할 부분까지 말이다.

그리고 모두가 바닥에서부터 시작한 탓인지,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관심을 가졌다.

"자아, 슬슬 일어나자고.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말이야. 뭐, 느긋하게 쉴 사람들은 근처 클럽에라도 가 보든지."

길드원들이 키득키득 웃으면서 식당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밤 9시 전까지 자택으로 귀가했다.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한편, 흑월 제3팀 팀장, 김유진은 자신의 서열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특수 능력을 더 강화시켜야겠어."

그녀의 서열은 여전히 9만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길드원들이 몇천, 몇만 명의 헌터들을 제칠 때.

자신은 고작 2~3백 명 정도밖에 제치지 못했다.

그녀는 박건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박건혁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제3팀 팀장, 김유진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 연락을 드렸습니다."

―예, 말씀하세요.

"C등급 게이트에 가시는 거... 저도 함께해도 괜찮을까요?"

―유진 씨 서열이라면 혼자서도....

"두 사람이 함께하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또, 게이트 등급과 관계없이 의족에 문제가 생길 경우, 위험한 일에 처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흐음, 그것도 그렇군요. 그럼, 게이트 위치와 시간은 문자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유진은 가슴을 쓸어내림과 동시에 한숨을 토해 냈다.

의족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 건혁에 대한 사심까지.

건혁과 C등급 게이트를 함께하고자 한 것은 세 가지의 마음이 엉키면서 만들어진 결과다.

그녀는 당장 내일의 공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건혁의 페이스에 따라가려면 만반의 준비를 해 둬야겠지.

"후우, 모처럼이니 도시락도 준비해 가자."

그녀는 서둘러 마트로 달려갔다.

식자재를 구매한 후, 새벽 6시에 알람을 맞춰 둔 유진.

그녀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유X브를 보면서 도시락을 준비했고, 어설퍼 보이는 결과물을 보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모양은 조금 이상하지만... 맛은 괜찮으니 괜찮겠지?"

자택을 나선 그녀는 자차를 타고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노적산으로 출발했다.

자택에서 50분 정도가 걸리는 거리.

서울에도 C등급 게이트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을 대규모 길드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개인이 예약하는 것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었다.

때문에 개인이 C등급 게이트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경기도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헌터들이 빈번하게 방문한 탓일까?

노적산 아래에는 식당과 주차장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주차장에서 건혁이 손을 흔들었다.

"오전에는 제가 선두에서 마수들을 토벌하겠습니다. 유진 씨는 지원을 준비해 주십시오."

"네, 알겠어요."

건혁은 특별한 대화 없이 산을 타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 유진.

두 사람은 산의 중턱에 위치한 정사각형 콘크리트 건축물 앞으로 다가갔다.

"예, 확인됐습니다."

협회의 직원이 두꺼운 철문을 열어 주자, 두 사람은 건축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눈앞에 나타난 타원형의 게이트.

건혁이 게이트로 발을 내딛자, 그 뒤를 유진이 따라갔다.

게이트의 필드 환경은 오크들이 서식하는 평야 지대.

건혁은 익숙한 듯 발걸음을 움직였다.

"이동하죠."

"네."

잠시 뒤, 정찰대로 추정되는 오크 전사들이 발견됐다.

건혁은 유진에게 대기하라는 수신호를 보내고, 곧장 놈들을 향해 달려갔다.

5~6마리의 오크 전사를 눈 깜짝할 사이에 쓰러트린 건혁.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단지, 검단산 게이트 때의 일이 트라우마처럼 몸에 남아 있을 뿐.

건혁은 안색이 굳어진 유진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습니까?"

"...네, 괜찮아요."

"힘들 것 같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곧바로 게이트를 나가겠습니다."

"정말로 괜찮아요."

억지로 따라온 것도 모자라 민폐까지 끼치다니.

유진은 떨리는 손가락을 뒤로 감췄다.

공략이 재개된 이후, 건혁은 빙마검을 휘두르며 수십 마리의 오크들을 베어 냈다.

"하아, 이걸로 40마리째네요. 슬슬 점심시간인데 조금 전에 봐 둔 공터에서 식사를 하죠."

"네."

두 사람은 공터에 돗자리를 펴고 각자 챙겨 온 도시락을 꺼냈다.

건혁의 도시락을 본 유진은 어깨를 살짝 움찔거렸다.

각종 반찬들이 가지런히 담겨 있는 깔끔한 도시락.

군침이 확 돌았다.

반면, 자신의 도시락은 어떤가.

매번 배달 음식을 주문해 온 탓에 요리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는 그녀다.

무언가를 만들어 먹는다는 생각보다도 게이트 공략과 서열 상승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졌다.

"그... 그 도시락은 마스터가 만든...."

건혁이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예전에는 배달 음식을 자주 시켜 먹었었는데, 딸이 조금이라도 건강한 음식을 먹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여러 가지 배우게 됐거든요. 물론, 김치와 같은 밑반찬은 여전히 반찬 가게에서 사다가 먹고 있지만요."

"그... 그런가요? 대단하시네요."

"대단하긴요. 오히려 부족할 따름이죠. 다른 부모님들은 더 잘 챙겨 줄 텐데...."

그는 진심으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는 못된 부모들도 많아요. 뉴스에서만 하더라도...."

유진의 이야기에 건혁이 죄책감 어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영혼은 신무영 그 자체였지만, 박건혁의 기억과 잔재가 여전히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수영에게 한 못된 짓거리들.

게다가 무영은 박건혁이 1회차에서 어떠한 짓을 저질렀는지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부모로서는 최악이나 다름없겠지.

때문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수영에게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다.

OO월드와 서울 대공원의 소동을 떠올리면, 도리어 피해를 준 것이 아닌가도 생각이 들지만....

"유진 씨도 도시락...."

"저... 저도 배달 음식을 주로 시켜 먹어서... 처음으로 해 봤어요."

기어가는 유진의 목소리에 건혁이 작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겠네요. 그럼, 어서 먹도록 하죠."

"...네."

유진은 본인의 도시락을 깨작깨작 먹었다.

건혁에게 먹어 보라며 권유를 해 보고도 싶었지만....

스윽.

그의 도시락을 보면 그럴 마음이 확 사라져 버렸다.

저렇게 깔끔하고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만든다고?

그는 자신보다 6살이나 많은 주제에 연하처럼 보이는 훈훈한 외모를 가졌다.

게다가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까지.

그뿐이랴!

그는 서열 2만대의 유능한 헌터로서 매년 2~30억 원의 수익을 벌어들인다.

"슬슬 일어나죠. 오후에는 제가 짐을 들겠습니다."

"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건혁은 묵직한 배낭을 어깨에 걸치고, 유진의 뒤를 따라갔다.

-취이익!

유진은 오크 전사를 향해 창을 내지르며 발로 걷어찼다.

그 순간, 발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충격파.

오크는 10m가량 날아갔다.

유진은 놈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른 놈들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서걱!

그 모습을 지켜보던 건혁은 고개를 몇 차례 끄덕였다.

서열이 9만대까지 추락하긴 했지만, 역시 C랭크 마수 정도는 손쉽게 쓰러트리는구나.

그녀는 2~3시간의 공략 끝에 23마리의 오크를 토벌했다.

"후우, 마력을 너무 사용한 거 같아요."

"그럼, 오늘은 이쯤에서 게이트를 나가도록 하죠."

게이트를 나선 두 사람은 곧바로 마석 및 부산물들을 처분했다.

건혁의 통장에는 3,250만 원이, 유진의 통장에는 1,920만 원이 입금됐다.

유진은 입금된 현금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C등급 게이트를 2번만 돌면 한 달 보수는 그냥 벌겠네.'

길드는 매달 7~8회 D등급 게이트를 공략하고, 4~5회는 짐꾼들의 실전 훈련을 진행했다.

유진은 팀장으로서 높은 비율의 보수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그 보수의 1/2을 불과 2~3시간 만에 벌 수 있다니.

물론, 오크의 이빨과 같은 작은 부산물들까지 챙겨 온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400만 원 정도는 더 받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앞으로도 계속 함께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공략에 몇 시간이 늘어나기는 하겠지만, 만일의 상황을 대비할 수 있다는 건 마음이 든든했다.

'게다가 2~3시간 짐꾼을 해 준 것만으로도 4~500만 원을 더 벌 수 있다면....'

건혁은 평소 마석을 제외한 마수의 부산물들은 챙기지 않았다.

배낭이 무거워질수록 체력 소모가 빨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진이 함께해 준다면 가치 있는 부산물들을 회수할 수 있게 되겠지.

"그럼, 목요일에 뵙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유진은 건혁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차량에 올라탔다.

"후우, 평소보다 조금 힘들기는 하네. 그래도... 특수 능력이 조금 강해진 것 같은 느낌이야."

그녀는 작게 웃으면서 시동을 걸었다.

"...주말에 요리 학원이라도 다녀 볼까?"

 

제38화

38화. 데스펠 (2)

월·수·금요일은 길드원들과 함께 D등급 게이트를, 화·목요일에는 유진과 C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우고, 주말에는 수영이와 함께 훈련장을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파앙!

훈련용 목각 인형이 박살 났다.

목각 인형의 정중앙에 꽂힌 얼음 화살.

나는 화살을 쏜 수영이를 향해 박수를 쳐 주었다.

초등학교 3학년생이 이토록 강력한 특수 능력을 다루다니!

주변 헌터들이 경악성을 터트린 그 순간에도 나는 크게 놀라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1회차를 경험한 이 세계의 주인공이다.

이 정도는 당연하지.

나는 수영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밝게 웃어 보였다.

"아빠도 금세 따라잡겠는걸?"

"아니, 그 정도는...."

"효과는... 아빠 거랑 거의 비슷하네?"

화살이 꽂힌 부분을 얼어붙게 만드는 효과.

나는 목각 인형의 다리를 살펴봤다.

지면에서부터 다리까지 꽁꽁 얼려 버린 푸른빛 얼음.

'D랭크 마수 정도는 발목을 붙잡을 수 있겠어.'

그녀의 실력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문장으로만 읽었던 저격술을 두 눈으로 본 순간.

나는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50m의 표적은 거의 백발백중이네.'

움직이는 대상으로는 5~60%의 정확도를 보여 주었다.

이 정도 실력이면 2~30만대 헌터들 정도는 가볍게 이길지도....

"그럼, 이제 아빠한테 한번 쏴 볼래?"

"응?"

"게이트에 들어가면 화살을 사용하는 마수들이 자주 보이거든. 그러니까 화살을 막아 내고, 회피하는 훈련을 한번 해 보고 싶어서."

"그... 그래도...."

내게 상처를 입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래 보여도 2만대에 들어선 헌터인데 말이야.

나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오른손에 빙마검을 만들었다.

"아빠는 대한민국에서도 아주 강한 헌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빠를 향해 화살을 쏴 봐."

"...응."

수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위를 당겼다.

나는 눈가를 좁힌 채 자세를 취했다.

이내, 눈앞으로 날아오는 얼음의 화살.

파앙!

나는 빙마검을 휘둘러 화살을 박살 내 버렸다.

'걱정하는 얼굴치고는... 위력이 상당히 강한데?'

수영의 화살은 급소를 피해 팔과 다리, 어깨를 향해 정확히 날아왔다.

나는 빙마검을 휘둘러 화살을 막아 내거나,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회피했다.

고블린들의 허접한 저격술과는 차원이 다르다.

잠시 뒤.

푸욱!

화살이 지면에 꽂혔다.

이내, 바닥이 얼어붙으면서 내 왼발을 붙잡았다.

너무 본격적인 거 아냐?

나는 피식 웃으면서 주먹을 쥔 의수로 지면을 내리쳤다.

콰앙!

이어, 코앞까지 날아온 화살은 몸을 회전시키면서 피해 냈다.

수영은 살짝 지친 얼굴로 활을 내렸다.

마력은 아직 충분할 터.

그렇다면... 체력의 문제겠지.

나는 빙마검을 없앤 후, 박수를 치면서 수영에게 다가갔다.

"우리 딸, 너무 대단한 거 아니야?"

"...아빠는 자리에서 1m도 움직이지 않았잖아."

역시 눈치채고 있었구나.

나는 반경 1m 내에서 화살을 막아 내고 회피했다.

100위 안에 들었던 수영으로선 살짝 자존심이 상했을지도.

아마 울컥한 마음에 내 발목을 붙잡은 것이리라.

나는 작게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수영이도 아빠만큼 강해져 있을 거야."

"...응."

그녀가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짝짝짝짝짝.

"훌륭한 대련이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냐?

간신처럼 가느다란 목소리에 그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내, 우리에게 다가온 30대 중반의 사내.

"두 분의 대련이 너무나도 훌륭해 잠시 지켜보고 말았군요. 저는 데스펠 길드 제3 인사팀 팀장인 우진혁이라고 합니다."

"예, 처음 뵙겠습니다. 흑월 길드의 마스터, 박건혁입니다."

"아이구야. 이거 정말로 대단한 분이셨군요. 박건혁 헌터님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네, 그런데 무슨 일로...."

"두 분에게 데스펠 길드의 가입을 권하고자 합니다."

두 분?

나는 미간을 좁히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게도 저는 흑월이라는 길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흑월의 길드원이라면 모두 저희 데스펠에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두겠습니다."

"...짐꾼으로 말인가요?"

"예, 안타깝게도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게 안타까워하는 얼굴인가?

길게 찢어진 눈동자가 마치 웃는 것 마냥 초승달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진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표정 역시 조금 전과는 달리 진지해졌다.

"대우라면 최대한 맞춰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기회는 쉽게 찾아오는 것이...."

"몇 개월 전, 고구려 길드의 김광석 팀장님으로부터 똑같은 제안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진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고구려 길드 제1 인사팀 팀장 김광석.

경쟁 길드인 데스펠 길드의 인사팀 팀장이 그의 이름을 모를 리는 없겠지.

"마찬가지로 제안은 거절했습니다."

"기... 김광석 팀장님의 제안을 거절했단 말입니까?"

"저는 길드원을 헌터로서 키울 생각이지, 짐꾼으로 활동시킬 거였으면 애초에 D등급 게이트 공략과 같은 귀찮은 짓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짐꾼을 헌터로 키운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만, 사실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군요."

그가 작게 조소를 터트렸다.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하고자 고구려 길드와 데스펠 길드의 제안을 거절했다니...."

"쓸데없는 일인지는 제가 결정합니다."

내가 차갑게 대답하자, 진혁이 작게 코웃음을 치면서 수영이를 내려다봤다.

"옆에는 따님이신가요?"

"...예."

"따님께서는 훌륭한 특수 능력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게다가 아직 초등학생이신 것 같은데... 데스펠로부터 지원을 받는다면 분명 훌륭한 헌터로 거듭날 수 있을...."

"아쉽게도 딸에게는 이미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있습니다."

진혁이 다시 한번 눈썹을 꿈틀거렸다.

"호오, 이번에도 고구려 길드입니까?"

비꼬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도 나는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청룡 기사단의 부단장이신 이진화 헌터님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막 내뱉으시는군요."

"전화라도 걸어 드릴까요?"

내가 스마트폰을 꺼내 보이자, 진혁이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예, 그러시죠."

나는 곧바로 진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 쓸데없는 일 때문에 대한민국 최정예 헌터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니.

하지만 데스펠에게 표적으로 찍혔다가는 흑월만 위험해진다.

놈들은 범죄 길드와도 연관되어 있으니까.

'서열 1만대를 웃도는 암살자를 두세 명만 보내더라도 흑월은 전멸하고 만다.'

때문에 청룡 기사단의 이름을 빌리고자 했다.

―여보세요.

"예, 안녕하세요. 흑월 길드 마스터, 박건혁입니다."

―아, 박건혁 헌터님! 네, 무슨 일로 전화를 주셨는지....

"죄송합니다. 데스펠 길드의 제3 인사팀 팀장이라는 분께서 이진화 헌터님께 꼭 좀 전화를 걸어 달라고 부탁하셔서요. 우리 수영이를 데스펠 길드로 데려가고 싶다고 하네요."

―...그분 바꿔 주세요.

나는 생긋 웃으면서 스마트폰을 진혁에게 건네주었다.

진혁은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진짜로 전화를 할 줄은 몰랐겠지.

아니, 허풍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화를 받은 진혁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천천히 입을 떨어트렸다.

"데... 데스펠 길드 제3 인사팀 팀장 우진혁이라고 합니다. 정말로... 이진화 헌터님이십니까?"

―어디에 계시죠? 지금 당장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제가 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위치 말씀하세요.

스피커를 눌러 두길 잘했네.

진화의 강압적인 목소리에 진혁은 진땀을 흘리면서 횡설수설 쓸데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잠시 뒤, 전화가 끊겼다.

"그... 온다고 하십니다."

진혁의 새파래진 안색에 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 들렸습니다. 그럼 조금만 기다리시죠."

진혁은 눈동자를 굴리면서 훈련장 외곽으로 가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마, 도움이라도 요청하는 건가?

30분 정도가 지나자, 장신의 사내가 진혁과 함께 내게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데스펠 길드 제2 인사팀 팀장인 유승준이라고 합니다."

"예, 처음 뵙겠습니다."

"우진혁 팀장이 실례를 저질렀다고 들어서 찾아왔습니다."

"마침 이진화 헌터님께서도 도착하셨군요."

훈련장으로 들어오는 진화.

그녀의 등장에 훈련장의 헌터들 모두가 경악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려 하자, 훈련장의 트레이너들이 그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훈련장 내 사진 촬영은 금지입니다. 만약 촬영하다 적발될 시에는 훈련장 출입이 제한될 수 있으며, 최대 3,000만 원의 벌금을 물 수 있습니다."

"아... 아니, 무슨 사진으로...."

"회원증을 발급받으실 때, 계약서에 서명하셨을 겁니다."

"...."

나는 트레이너들의 강한 목소리에 한숨을 토해 냈다.

괜히 구설수에 오르게 만든다면, 진화에게 미안해서 고개를 못 들 것이다.

한편, 진화를 본 진혁은 화들짝 놀라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대한민국 헌터 협회 소속 청룡 기사단 부단장인 이진화입니다. 데스펠 길드 제3 인사팀 팀장님께서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만?"

진화의 가시 박힌 목소리에 진혁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 승준이 진화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데스펠 길드 제2 인사팀 팀장 유승준입니다. 아무래도 우진혁 팀장이 잘 모르고 박건혁 헌터님과 따님분, 그리고 이진화 헌터님께 실례를 저지른 모양입니다.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 청룡 기사단 부단장을 여기까지 발걸음하게 만들었으면서 사과 한마디로 끝내자는 말인가요?"

"...죄송합니다."

진화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요새 데스펠 길드에서 짐꾼 대우에 대해 많은 문제들이 거론되고 있던데... 청룡 기사단이 한번 방문해 드릴까요?"

진화의 살벌한 목소리에 진혁과 승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사단에게는 레이드를 진압하는 임무 외에도 각 길드를 수색하고, 범죄를 저지른 각성자를 체포하는 권한이 주어져 있다.

청룡 기사단이 데스펠 길드에 찾아가는 날에는... 분명 수많은 특보가 쏟아져 나오겠지.

승준은 황급히 진혁의 머리를 짓누르면서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지금 당장 상부에 우진혁 팀장의 직위 해제를 요청하고,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진화는 주변의 시선을 느끼고 작게 한숨을 토해 냈다.

"한 번만 더 이런 일로 저를 부르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진혁과 승준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살벌하게 경고했다.

"가 보세요."

두 사람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곤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나 역시 이진화 헌터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런 일로 전화를 드려서...."

"아니에요. 마침 휴일인 데다가 수영이도 보고 싶었던 참이었거든요. 그보다 데스펠은 가급적 조심하도록 하세요. 박건혁 헌터님께서도 들어 보셨겠지만, 그다지 질이 좋은 길드는 아니거든요."

"네, 알겠습니다."

놈들은 낮은 서열의 헌터들을 홀려서 종신 계약과 같은 계약을 맺는다.

계약을 맺은 헌터는 추후 짐꾼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데스펠 길드는 법의 틈새를 이용해 그들에게 최저 임금 수준의 월급을 지급하면서 노예처럼 혹사시켰다.

국가로부터 구제를 받으면 된다?

확실히, 과거 누군가는 데스펠로부터 수천만 원의 보상금을 지급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보상금을 받은 헌터는 바로 며칠 뒤, 인적이 드문 산속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마수들에게 물어뜯긴 채로 말이다.

그렇게 비슷한 사례가 몇 번이나 발생한 탓일까?

데스펠과 계약을 맺은 짐꾼들은 소송도 못 하고,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살 수밖에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