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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바람이 휘날렸다.

안 그래도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데, 가끔씩 달궈진 모래까지 날아와서 몸에 붙으니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서예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뜨끈한 모래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의 손에는 검은 광택을 뿌리는 길쭉하고 두꺼운 라이플이 들렸고, 그 모습을 광학미채 길리슈트가 투명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서예인 99% vs 곽지철 98%]

상대방인 곽지철의 모습 역시 안 보이는 건 매한가지였다.

투명 길리슈트는 아니고, 봉긋 솟은 모래 둔덕 안에 숨어 있어서 그렇다.

에메랄드 마탑 소속의 대지술사.

지금 같은 사막 지대에서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대였다.

물론 마법사인 곽지철 입장에서도 총사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상대다.

사람들이 총사와 마법사가 상성이 나쁘다고 늘상 말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는 서예인과 송천혜의 배치 고사를 관전한 바 있다.

은신한 총사를 어떻게 상대하는지 송천혜를 보고 배웠고, 그녀가 썼던 전법을 똑같이 따라 하는 중이었다.

송천혜처럼 마력이 압도적이지는 않지만, 토속성 마법에 능한 그이기에 방어만큼은 더 자신이 있었다.

곽지철은 우선 마력을 몸 위에 갑옷처럼 둘렀다.

그다음 주위에 모래를 끌어 올려 둔덕을 만들고, 마나를 주입해 단단하게 굳혔다.

서예인은 그 모든 정보를 '눈'을 통해 읽어 냈다.

[매직 아머(E)]

[어스 배리어(D)]

거북이처럼 방어를 굳혀 놓은 뒤 추가로 마법을 시전하는 곽지철.

[어스 그래버(E)]

모래로 이루어진 손들이 지면을 더듬더듬 짚고 돌아다닌다.

서예인의 위치를 포착하는 순간, 저 손들이 일제히 그녀를 붙잡고 움직임을 방해할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총사를 끝장내는 건 매우 손쉬우리라.

모래의 손들은 점점 수색 범위를 넓혀 가고 있었다.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로 보인다.

저 손에 잡히지 않더라도, 그녀가 걸음을 옮기는 순간 모래에 찍히는 발자국만으로도 들킬 가능성이 매우 컸다.

"...."

그러나 서예인의 얼굴에서는 한 점의 위기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가 한 손을 폈다.

하얀 손바닥 위로 마나가 응집하며 탄환 모양으로 단단히 압축되었다.

완성된 마력탄을 라이플에 가져다 대자 스르르 안으로 스며든다.

서예인은 스코프를 통해 곽지철이 숨은 모래 둔덕을 관찰했다.

그녀의 눈이 모래 둔덕을 유지하는 마력의 흐름을 읽었다.

흐름이 부자연스럽게 툭툭 끊기는 부분.

언제나 저런 곳이 약점이었다.

침착하게 조준한 뒤 방아쇠를 당겼고,

- 콰드드득!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마력탄은 곽지철의 단단한 모래 둔덕은 물론, 그가 옅게 두른 마력 갑옷까지 산산이 깨뜨렸다.

모래 둔덕이 무너져 내리며 곽지철의 모습이 드러났다.

곽지철은 부지불식간에 시야가 확 트이자 순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으나, 금세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니, 이, 이게,"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인가?

송천혜의 장벽은 못 뚫어 놓고, 어떻게 더 방어력이 높은 자신의 배리어는 이리도 손쉽게 부수는가?

그러나 당황만 할 틈이 없었다.

'막아야 한다!'

곽지철이 황급히 모래를 그러모아 어스 배리어를 수복하려 했으나, 그 전에 두 번째 탄환이 날아와 그의 안면을 강타했다.

- 쾅!

"...."

정신을 잃고 뒤로 넘어가는 곽지철.

[서예인 Win vs 곽지철 Lose]

[대인전:630+30점]

서예인은 스코어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입꼬리를 콕콕 눌렀다.

어쩐지 살짝 올라가 있었던 것 같아서.

서포터가 다 해먹음

26화 1주 차 대인전 (4)

늦은 밤.

송천혜는 잠옷 차림으로 자기 방 의자에 편히 앉았다.

회전하는 의자 위에서 천천히 왼쪽으로 빙글, 오른쪽으로 빙글, 돌다가 학생 상점을 열람했다.

200포인트를 지불하자 리플레이 수정구 두 개가 손 위에 툭 떨어졌다.

[김호300양지홍300_대인전_1주차.replay]

[김호330양지홍270_대인전_1주차.replay]

송천혜는 김호의 배치 고사를 관전했었다.

시종일관 홍연화의 마법 세례를 버티기만 하다가, 마지막에 날려 보낸 벌새 한 마리.

[허밍버드]는 토파즈 마탑 소속이 아닌 외인도 익힐 수 있는 마법이다.

토파즈 마탑이 그것을 좌시하는 이유는 익히기는 쉬워도 숙달하기가 지극히 까다롭기 때문.

어차피 저등급 마법이기도 하고, 익혀 봤자 써먹지도 못할 테니, 어디 한번 해 보라는 식으로 놔두는 것이다.

그러니 김호가 벌새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에는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때마침 다음 배치 고사 상대가 자신이었기에 직접 상대하며 겪어 볼 생각이었는데,

- 저 기권할게요.

- 네가 이긴 걸로 치자.

그 남자는 컨디션이 안 좋다는 속 뻔한 핑계를 대면서 자리를 피해 버렸다.

설득을 시도해 보았지만 승패에도 점수에도 별 흥미가 없다는 투였다.

영웅으로서 마음가짐이 덜 되었다는 비판과는 별개로, 허밍버드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다고 300점대인 김호와 900점인 자신이 대인전에서 붙을 가능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으니, 이렇게 리플레이라도 챙겨 보는 것이다.

상대는 양지홍이라는 창술사 무인.

배치 고사 두 번째 상대였던 걸로 기억한다.

김호에게 거절당한 직후라서 화풀이 겸 조금 과하게 힘을 썼던 것도 같다.

양지홍에 대한 기억은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이제 경기 내용을 살펴볼 차례다.

송천혜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수정구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리플레이를 재생하고 막 집중하려는데,

"어?"

...경기가 끝나 버렸다.

시작되자마자 양지홍이 돌진하고, 허밍버드에 적중되어 마비 상태에 빠진다.

움직이지 못하는 양지홍을 김호가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고 끝.

두 번째 경기도 같은 양상이었다.

겨우 한 번 피하려는 시도가 추가되었지만, 곧바로 등에 허밍버드를 얻어맞고 끝.

리플레이 두 개를 합쳐서 1분이 채 안 된다.

짧아도 너무 짧다.

'내 200포인트....'

어쩐지 허위 광고에 속은 기분이었다.

겨우 이거 보여 주고 200포인트나 받아 가다니, 이렇게 양심이 없을 수가!

이런 질소만 잔뜩 든 과자 봉투 같으니!

잘못이라고는 리플레이를 저장한 것밖에 없는 김호가 욕을 먹는 와중에도, 수정구는 계속해서 리플레이를 반복 재생하고 있었다.

"...?"

뚱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송천혜의 눈이 점점 이채를 머금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허밍버드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는데, 보면 볼수록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오묘함이 느껴진다.

'뭐였지?'

한참 동안 수정구를 붙잡고, 집중해서 수십 번 반복했지만 오묘함의 정체를 정확히 짚어 내지 못했다.

하수가 고수의 기술을 보고 막연히 대단하다고 생각은 해도, 정확히 무엇이 대단한지는 짚어 내지 못하는 것처럼.

오히려 머리에 과부하가 오기 시작하는지, 벌새의 궤적을 계속해서 읽을 때마다 정신이 점점 더 멍해지는 것 같다.

그래도 조금만 더 보면 알 것 같아서 멈출 수 없었다.

정신이 약 80% 정도 멍해졌을 즈음,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송천혜는 저도 모르게 마법을 시전했다.

허공에 구조식이 떠오르고, 전류가 뭉치며 벌새가 만들어진다.

허밍버드가 방을 가로질러 날았다.

송천혜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벌새는 그녀가 방금 전까지 계속해서 눈에 담았던 궤적을 재현해 내고 있었다.

- 우당탕탕!

집기들이 죄다 쓰러지기 전까지는.

정신이 번쩍 든 송천혜가 후다닥 달려 나갔다.

* * *

이 시각 리플레이를 반복 재생하는 사람은 송천혜뿐만이 아니었다.

이수독 앞에도 리플레이 수정구가 둘.

커다란 화면에는 사진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허밍버드가 양지홍에게 날아가서 격중하기까지의 몇 초를 쪼개고 쪼개 가며 연속 촬영한 것들이다.

사진들을 응시하는 이수독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컨트롤이 극에 달했군.'

사진 하나하나에 찍힌 허밍버드의 방향이 다 달랐다.

그 짧은 시간에 수십 번이나 벌새를 조작했다는 증거다.

양지홍이 어떻게 대응했든 결과는 바뀌지 않았으리라.

저놈은 아마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수법에 당했는지조차 모르겠지.

두 번째 경기도 마찬가지다.

양지홍은 자기가 허밍버드를 피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상 허밍버드는 그가 옆으로 도약하기도 전에 이미 방향을 틀고 있었다.

처음부터 지나가게 두고 배후를 노릴 심산이었던 것이다.

'아주 갖고 놀았다.'

마무리도 깔끔했다.

마법사가 좋은 마법 놔두고 스태프로 후려친다는 점과, 휘두르는 무기가 하필 [대지의 스태프] 따위의 하급 장비라는 점이 더해져 일견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이것이 교묘하게 연막을 치고 있어서 처음 리플레이를 볼 때는 이수독도 간과하고 넘어갔었다.

자세히 뜯어보면 김호의 자세와 스태프를 휘두르는 동작에서 조금의 군더더기도 찾을 수 없다.

만에 하나 양지홍이 마비를 일찍 풀어내고 불의의 반격을 날렸더라도 정면에서 깨부쉈을 것이다.

알고 보니 마법은 눈속임이고, 사실 봉술의 대가는 아닐까 의심될 정도다.

그런데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또 허밍버드의 숙련도가 너무 높고.

문제는 그것 말고도 더 있었다.

이수독이 손을 가볍게 한 번 젓자 화면이 새로운 사진들을 띄워 올렸다.

서예인의 마력탄을 초근접 거리에서 촬영한 것들.

먼저 배치 고사 때의 사진.

이때만 해도 마력탄이 아니라 어설프게 뭉친 마력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성취가 더디기는 했지만, 신입생인 점을 감안하면 그리 이상할 점은 아니었다.

반면 정확히 이틀 뒤, 곽지철과의 대인전에서 찍힌 사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조형된 마력탄이다.

이틀 만에 사람이 이렇게 급변할 수가 있는가?

'천재.'

영웅들이 품은 잠재력이 용살학원에 입학하고 나서 폭발하는 사례는 은근히 자주 벌어지곤 했다.

아마 서예인도 비슷한 케이스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 계기를 제시한 자는 아마.

- 마력탄 부여, 래요.

서예인은 그 말을 하며 무의식중에 김호를 지목했었다.

저 마력탄 조형에 크든 작든 김호의 지분이 들어가 있다는 의미다.

이 사실이 안 그래도 복잡했던 이수독의 머릿속을 더욱 뒤엉키게 만들었다.

'도대체 뭐 하는 놈이지.'

마법과 봉술, 사격은 사실상 별개의 영역이라 봐도 과언이 아닌데.

이 셋에 동시에 능한 사람이 누가 있더라.

빌런들은 물론 현역 영웅들, 인간형 네임드 몬스터들까지 되짚어 봐도 떠오르는 자가 없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이 조금 드러나기는 했는데, 드러난 부분이 영 생소하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이수독이 미간을 찌푸렸다.

'강압적으로 나간다면.'

일단 찔러 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그러나 이수독은 이내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용살학원의 학생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고, 뚜렷한 물증 없이 일단 찔러 보는 건 그의 방식과 정반대였다.

그래서 결론은 돌고 돌아 원점이다.

지금으로서는 더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아직 윤곽조차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퍼즐을 완성시키려면 조각을 더 모아야 한다.

리플레이 분석은 당분간 계속될 듯했다.

"쯧."

그게 썩 기껍지 않았기에, 이수독은 짧게 혀를 찼다.

올해 들어 왜 이리 사서 고생을 하는지.

괜히 어울리지도 않는 교사직을 맡고, 학생 하나가 의심스럽다고 열심히 리플레이까지 챙겨 보는 신세다.

'천하의 인간 백정 다 죽었구나.'

이수독은 그런 생각을 하며 화면을 껐다.

리플레이 수정구도 치워 버렸다.

* * *

['증폭'을 사용합니다.]

['마법공학'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B->S)]

[지속시간 00:01:13]

[재사용 대기시간 00:49:13]

- 촤라라라락—

푸르게 빛나는 손이 엄청난 속도로 큐브 이곳저곳을 누볐다.

손끝이 닿을 때마다 천개에 달하는 조그마한 정육면체들의 배치가 끊임없이 변화한다.

- 찰칵, 찰칵,

어느 순간부터 큐브를 만지는 손이 조금씩 속도를 줄여 가기 시작했다.

그 대신 움직임 하나하나가 더욱 신중하고 정확해졌다.

큐브를 천천히 훑으며 검토하고,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

- 우웅—

큐브가 부르르 떨리며 공명했다.

내가 손을 멈췄는데도 저절로 조립되고 속이 비워지며, 마침내 덮개를 여닫을 수 있는 작은 상자로 변했다.

상자가 완성된 다음에는 안쪽에서부터 강렬한 녹색빛이 차오르더니, 작은 틈새 사이사이로 갖가지 식물이 자라나며 꽃이 피었다.

식물들은 금세 큐브를 온통 뒤덮어 버렸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처음부터 나무줄기 따위를 엮어 만든 상자는 아닌가 착각할 듯했다.

'완성이다.'

[생명의 큐브(B)]

생명의 큐브가 가진 효과는 단 하나.

수납하는 '생명' 계열 아이템의 효과를 1.3배로 늘려 준다.

가령 [회복의 토템]의 기본 효과가 '10초마다 범위 내 아군을 치유'하는 것이라면,

큐브 안에 토템을 넣기만 해도 7초로 시간이 줄어들며, 치유량도 증가한다.

[가공된 에메랄드]는 목토 계열 마법의 위력을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는데,

이것을 큐브에 보관하면 증가 폭에 1.3배가 곱해진다.

20% 증가라면 26%로.

게다가 상자의 용량이 허용하는 한 여러 개의 아이템을 수납할 수도 있으니, 가히 사기적인 아이템인 셈이다.

이것마저도 정상적인 루트를 타고, 연계 퀘스트를 모두 클리어해서 얻는 'S등급' 생명의 큐브에 비해서는 다소 손색이 있다.

S등급은 증가 배율이 무려 2배나 된다.

내가 만든 큐브는 시제품 설계도를 강제로 완성시킨 것이기에, 랭크도 효과도 다소 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도 충분하다.

'1.3배만 해도 어마어마하지.'

용살학원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아이템이다.

특히 4대 세력에서 군침을 줄줄 흘릴 것이다.

아마 어느 동아리에 가져가든 시즌 패스 정도는 손쉽게 내어 주리라.

그렇게 하면 고현우와의 약속은 아무 문제 없이 지켜지겠지만,

'그걸로는 부족하지.'

달랑 시즌 패스 하나 바꿔 먹고 만족할 생각은 없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27화 생명의 큐브 (1)

목요일.

수업 사이의 휴식 시간, 신병철을 복도로 불러냈다.

"왜, 무슨 일이쇼?"

"저번에 유망주 얘기한 거 있잖아."

"어, 그게 왜?"

"길드 쪽에 드루이드 유망주, 걔 몇 반이냐."

"아~ 박나리? 바로 옆 반이지. 저기 계시네."

2반을 슬쩍 들여다보니, 소심해 보이는 여학생 하나가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떠드는데, 혼자 외딴 섬처럼 떨어져서 책상 위 고양이랑 놀아 주는 중이다.

허공에 볼펜을 휘휘 저으면 고양이가 샌드백 치듯 연신 볼펜 끝을 때려 댄다.

신병철의 말에 따르면 저 소심해 보이는 애가 길드 연합의 가장 강력한 유망주, 박나리란다.

책상 위 손바닥만 한 고양이는 알고 보면 축소 마법이 걸린 호랑이고.

내가 잠시 박나리에게 시선을 고정시키자 신병철의 눈매가 점점 가늘어지면서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띠었다.

"왜, 관심 있냐? 불러 줄까?"

"아니. 안 불러도 돼."

'오게 만들면 되거든.'

이 정도 거리라면 충분할 것이다.

[생명의 큐브]를 꺼냈다.

작은 정글을 연상시키는 상자를 보고 신병철이 호기심을 표했다.

"이야.... 그거 뭐냐? 되게 귀한 아이템 같은데."

"나중에. 지금은 나랑 연기를 좀 해 줘야겠다."

"연기라. 연기 하면 또 이 신병철 님을 빼놓을 수 없지. 뭐 하면 되는데?"

큐브 덮개를 열자 싱그러운 초록빛 파동이 퍼져 나갔다.

안쪽은 당연히 텅 비어 있다.

"이 상자 안에 굉장히 흥미로운 것들이 들어 있다고 칩시다."

"정말이네요. 하루 종일 봐도 안 질리겠어요."

"앗!"

등 뒤에서 여학생의 외마디 외침이 들렸다.

십중팔구 박나리일 것이다.

뒤를 돌아보려는 신병철을 붙잡고 반쯤 돌아간 고개를 원위치시켰다.

"뒤쪽 보지 말고."

"...아하. 감 잡았쓰."

내 의도를 반쯤은 눈치챘는지 연기에 집중한다.

연기라 해 봐야 빈 큐브 속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것 외엔 없었지만.

그 상태를 유지하고 몇 초.

- 툭, 툭,

작은 무언가가 내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보니 박나리의 고양이가 내 다리에 앞발을 얹고 있다.

크기는 영락없는 새끼고양이인데, 몸의 무늬를 자세히 보면 호랑이에 가깝기는 하다.

한발 늦게 그것을 발견한 신병철이 움찔 놀랐다.

"어? 얘 언제 여기까지 왔대."

'예상한 대로지.'

생명의 큐브가 발하는 고유한 파동.

동물들이 이런 데에는 사람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오랜 세월 마나를 몸에 쌓아 온 영물이라면 더욱.

멀리서부터 파동을 감지하고 다가오리라 예상했다.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괜히 경계심만 커지니까, 먼저 나를 건드릴 때까지 모른 척한 것이고.

고양이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한쪽 앞발은 내 다리에 얹은 채, 반대쪽 앞발로 생명의 큐브를 가리켰다.

내가 큐브를 살살 흔들며 물었더니,

"뭐, 이거?"

"애옹."

긍정하는 듯 짧은 울음소리를 냈다.

나는 무릎을 굽히고 쭈그리고 앉으며 큐브와 고양이의 높낮이를 맞춰 주었다.

고양이가 덮개를 슬쩍 들어 올리더니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안에서 만족스럽게 몸을 말고 그르렁댄다.

'아주 전세 냈네.'

고양이들한테는 상자에 환장하는 습성이 있다던데, 호랑이도 비슷한 걸까.

"범아 안 돼!"

반려 호랑이를 쫓아 헐레벌떡 달려온 박나리.

나는 일부러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박나리는 연신 사과부터 했다.

"저기, 그게, 미안. 바로 데려갈게!"

닫혀 있는 생명의 큐브에 대고 살살 달래 보지만,

"범아, 빨리 가자. 그런 데 들어가면 안 돼."

고양이는 새로운 휴식처가 몹시 만족스러운 듯했다.

박나리가 덮개를 반쯤 열어젖히자, 틈새에서 조그만 앞발이 튀어나와 손을 탁 쳐 냈다.

두어 번 더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

나는 난처한 얼굴을 유지한 채 말했다.

"이제 수업 들어가야 되거든. 데려가 줬으면 좋겠다."

"...진짜 미안."

박나리가 울상이 돼서 다시금 사과했다.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생명의 큐브를 활짝 열어젖히고 두 손을 쑥 집어넣어 고양이를 붙잡았다.

자기를 붙잡은 손을 사정없이 깨물어 대는 고양이.

'거 성질 한번 더럽네.'

그래도 진심으로 깨무는 건 아닌 데다, 손을 쳐 낼 때도 발톱은 안 세우는 걸 보면 나름대로 주인과 교감이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아무튼 붙잡았으니 이제 빼내기만 하면 되는데,

"...!"

순간 박나리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소심해 보이기만 하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친다.

짧은 시간 동안 큐브를 조금 더 자세히 이모저모 뜯어본다.

'눈치챘군.'

드루이드와 가장 파장이 잘 맞는 생명의 기운.

멀리서도 범상치 않음을 직감했겠지만, 손을 넣어 큐브와 접촉한 지금은 그녀가 겪어 왔던 어떤 아이템과도 다르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리라.

"...."

그러나 박나리는 놀란 표정을 지우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양이를 꺼내 갔다.

고양이는 발버둥을 쳤지만 꼭 끌어안은 상태가 유지되자 체념한 듯했다.

박나리가 또다시 나에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 얘가 상자만 보면 들어가는 버릇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지."

내 앞 교실을 살피고 조심스레 묻는다.

"혹시 3반...이야?"

"어."

"아, 그렇구나. 아무튼 미안."

박나리는 마지막까지 미안을 연발하며 도망치듯 자기 반으로 돌아갔다.

제 책상에 앉고서야 한결 표정이 편해지는 걸 보면 이 상황이 적잖이 불편했던 것 같다.

'일단 선전은 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생명의 큐브]가 대단한 아이템이라는 건 몸소 확인시켰으니, 이제 박나리는 소유자인 나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대자연 동아리에도 이 일이 들어가게 될 테고.

거기서부터가 시작이다.

"와.... 나 '범이'가 저러는 거 처음 봐."

신병철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영물들과 친화력이 높은 생명 계열 아이템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박나리의 고양이, 아니 호랑이가 아무 거리낌 없이 상자 안으로 몸을 구겨 넣는 건지.

"무슨 아이템이길래 저렇게 좋아하냐? 척 보기에도 뭔가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좋은 아이템이지."

4대 세력의 유망주가 탐을 낼 만큼.

신병철의 추가 질문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생명의 큐브를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그리고 슬쩍 말문을 돌렸다.

"아무튼 네 덕분에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연기 잘하대."

"에이, 이런 건 연기 축에도 못 드는데 뭘. 그래도 정 고마우면 밥 한 끼 정도는? 사 주면 고맙고?"

"밥은 다음에 사고, 도움이 될 만한 정보 하나 줄게."

"정보? 뭔데?"

"네 인벤토리에 있는 거, 내일은 방에 두고 와."

내일은 1주 차 금요일이니까.

신병철은 한순간 움찔했으나, 여전히 안면에 웃음기를 잃지 않고 대꾸했다.

"에이, 그,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야. 제가 무슨 위험한 물건이라도 갖고 다니는 줄 아시나 본데, 저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뭐, 네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그냥 내가 헛소리했다고 생각해."

"...."

- ♪♬♩♪♪

수업이 시작됐기에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표정이 묘해진 신병철을 뒤로하고.

신병철이 과연 내일 '아이템'들을 방에 두고 올까?

아니.

쟤도 남의 말을 잘 귀담아듣는 성격은 아니더라.

* * *

금요일 아침.

일어나서 서예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김호:일어남?]

[서예인:으ㅇㅇ]

[서예인:(꾸벅꾸벅 강아지 이모티콘)]

[김호:밥 ㄱ?]

[서예인:ㅇㅋ]

[김호:학생 식당 앞 ㄱ]

고현우는 보나 마나 특수연공실에 살림을 차렸을 것이다.

내공 쌓는 데에 온 정신이 팔려서 식사도 벽곡단이나 칼로리바 따위로 해결하니, 같이 아침 먹자고 불러 봤자 안 온다.

해서 오늘 아침은 서예인과 둘이서 먹게 되었다.

"...."

서예인은 입이 짧아서인지 오믈렛을 반쯤 먹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조금 남은 해시 브라운만 야금야금 떼어 먹으면서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본다.

시선을 들어 올리자 회색빛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가 불쑥 이렇게 묻는다.

"갖고 싶은 거 있어?"

"...갑자기?"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된대."

"누가?"

"우리 집사가."

"...."

장비들 수준 보고 잘사는 집 아가씨겠거니 짐작은 했는데, 집사까지 두셨구만.

마력탄 수업을 해 준 보답으로 아이템을 하나 맞춰 준다면 나로서는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슬슬 하나둘 구비할 필요를 느끼던 참이기도 했고.

집사님, 누구신지는 몰라도 마음씨가 참 고우시군요.

마음속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며 답했다.

"지금 제일 필요한 거라면 이동 속도 쪽일까. 신발이 하나 있었으면 해."

"알았어."

"그리고 혹시, 이번 주 대인전 다 끝냈냐."

"응."

서예인이 대답과 함께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3승?"

- 끄덕,

1주 차 대인전을 다 끝냈다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번 주에는 더 이상 장비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투명 길리 안 쓰면, 이번 주말에만 빌려줄래?"

"좋아."

남의 장비를 빌리는 게 다소 실례되는 일이기도 해서 거절할 가능성이 꽤 크다 봤는데, 서예인은 내 우려가 무색하게도 곧바로 수락했다.

자기 인벤토리에서 잘 개어진 옷가지를 꺼내서 건넨다.

[광학미채 길리슈트(B)]

▷투명화(B) 적용

▷감지 저항(D) 적용

▷내구도 자동 회복

'B랭크답군.'

[생명의 큐브]와 마찬가지로, 신입생은 어지간해서는 하나 만져 보기도 힘든 고등급 아이템이다.

은신은 기본에, 상대방의 감지 계열 스킬을 일정 수준 무시하는 [감지 저항],

아이템이 완전히 파괴되지만 않는다면 저절로 조금씩 수리/수선되는 [내구도 자동 회복]까지.

"고맙다. 깨끗하게 쓰고 돌려줄게."

"마력탄 특강 또 해 줘."

"그래, 다음에 또 시간 맞춰 보자."

* * *

몬스터 생태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학생들 사이에서 '조옥순 여사'라 불리는, 나이 지긋하신 여성분이었다.

조옥순 여사는 반평생을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전장에서 보낸 베테랑답게 몬스터들의 생태에 매우 해박했다.

"—때문에 고블린은 초보자용 몬스터라는 인식이 강하지요. 하지만 우리 개개인이 특별하고 인간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것처럼, 고블린 중에도 특별한 개체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도 다양한 곳에서 그들과 충돌하게 될 겁니다. 고블린 챔피언과 소드마스터의 충돌 사례는 교재 76쪽을 보시면—"

이 수업의 치명적인 단점이라면, 필기 위주의 수업인 탓에 머리에 집어넣어야 하는 정보가 많다는 것.

덧붙여 조옥순 여사의 어조가 몹시 느릿하고 조곤조곤해서 듣고 있기만 해도 졸음이 밀려온다는 점이다.

서예인은 진작 수마에 굴복해서 엎어져 버렸고, 그 외에도 수많은 학생들이 고개를 떨군 상태다.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은 오매불망 시계만 바라보며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원한다.

그리고 마침내, 앞으로 남은 시간은 5분.

곧 다들 언제 졸았었냐는 듯 벌떡 일어나서 활기차게 떠들며 돌아다니겠지.

그러나 이번 쉬는 시간은 예외일 것이다.

앞 측 좌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부터인가 송천혜와 한소미의 자리가 비워져 있었다.

정확히 학생선도부의 자리만.

'앞으로 5분.'

서포터가 다 해먹음

28화 생명의 큐브 (2)

"오늘 수업 내용을 복습해 두도록 하세요. 다음 주 공략전에 도움이 될 겁니다."

조옥순 여사는 정확히 휴식 시간이 되기 직전에 수업을 마쳤다.

다른 날에는 휴식 시간에도 남아서 몇몇 학생들의 질문을 받아 주었는데, 오늘은 급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빨리 교실을 떠난다.

교사는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에 관여하지 않도록 되어 있으니까.

- ♪♬♩♪

조옥순 여사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상한 양배추처럼 축 늘어져 있던 3반 학생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유다!"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피곤이 삽시간에 씻은 듯 사라졌으며 온몸에 활력이 넘쳐흐른다.

유독 활발한 남학생 하나가 교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복도로 몸을 던졌지만,

- 텅!

"억!"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부딪혀 뒤로 튕겨 나갔다.

열린 교실 문을 더듬어 보니 투명한 막 같은 것이 가로막고 있다.

- 텅!

"읍!"

바람이나 쐬자는 심산으로 창문을 열어젖힌 여학생도,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려다가 본의 아니게 투명한 막에 얼굴을 문대는 신세가 되었다.

부딪힌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한다.

"...배리어?"

지금 교실 근방을 감싸고 있는 것은 용살학원에서 대단위로 시전한 광역 배리어.

마법사 한두 명이 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견고하다.

일개 학생의 무력으로는 뚫고 나가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뜻이다.

물론 신입생들이 그 사실을 알 리는 없었고,

눈앞의 투명한 벽을 부숴 볼까, 아니면 조금 더 기다려 볼까 고민하던 와중.

두 번째 대단위 마법이 발동되었다.

- 치지지지지직—

교실 한쪽 끝에서 자기장으로 이루어진 얇은 막이 나타났다.

그것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교실 반대쪽 끝까지 학생들을 훑고 지나갔다.

"으앗!"

"꺅!"

자기장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휙 지나갔기에, 학생들은 뒤늦게 조건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몸을 웅크리거나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곧 몸에 아무 지장도 안 생겼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사람을 해치는 용도가 아니라서 그렇다.

저 자기장의 역할은 사람을 찾는 것.

정확히는 골라내는 것이다.

"이, 이게 뭐야!"

"도대체 무슨?"

몇몇 학생들의 몸 일부분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대체로 교복 주머니, 혹은 이마.

여학생 하나가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꺼냈다.

저주 인형으로 보이는 것에서 붉은 광채가 빛난다.

자기 것이 아니라는 양 황급히 인형을 내던지지만, 다음 순간 인형과 자신이 붉은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몇몇 학생은 주머니가 빛나지 않는 대신, 이마에 큼지막하게 빨간색으로 알파벳 'I' 자가 적혀 있다.

문제가 되는 아이템이 인벤토리에 들어 있다는 의미.

소지품 검사. 밴 웨이브.

용살학원의 학생들이 소지하고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아이템들은 <학생 소지 금지 물품 목록>, 플레이어들의 용어를 빌리면 <밴 리스트>에 등재된다.

그리고 지금처럼 밴 웨이브를 발동시켜 솎아 내고, 제재를 가한다.

새 학기 첫 밴 웨이브는 매우 높은 확률로 1주 차 금요일에 이루어진다.

대다수 신입생들이 대인전을 위해 아레나에 몰려들기 시작하는 날.

며칠간 다른 학생들의 리플레이를 관전하며 자기 점수대의 실력을 가늠해 봤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쩐지 자기 실력으로는 역부족이라 느꼈을 수도 있다.

대개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도전하고, 부딪히고 깨지며 성장해 나간다.

그것이 용살학원이 학생들에게 기대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부는 편법, 즉 금지 아이템에 손을 뻗는다.

점수를 잃고 싶지 않아서.

그런 아이템을 써 봐야 단기적인 점수만 유지될 뿐이고 득 될 게 전혀 없는데도, 눈앞의 점수에 눈이 멀어 사고가 정지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용살학원은 무자비한 철퇴로 응수한다.

- 쿠쿵!

먼 곳에서 묵직한 충돌음이 울렸다.

저건 아마 조벽이겠지.

거리로 미루어 보아 1반부터 시작하나 보다.

차례차례 다가오며 3반도 거쳐 갈 예정이다.

"으음, 흥미롭구려."

고현우는 진귀한 구경이라도 하는 듯 눈을 빛내며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고, 서예인은 별 관심이 없는지 여전히 책상에 엎드린 채다.

금지 아이템을 안 갖고 있으니 붉은 기운도 찾아볼 수 없다.

반면 신병철은....

주머니도 붉고, 이마도 붉다.

이마의 'I' 자가 어찌나 짙고 선명한지 금방이라도 레이저 빔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다.

대체 금지 아이템을 얼마나 바리바리 챙겨 왔길래.

매우 유감스럽게도 곧 선도부가 와서 저걸 모조리 압수해 갈 것이다.

매우 많은 벌점과 매우 많은 징계는 덤.

도망칠 데도 없고, 아이템을 버릴 수도 없다.

진퇴양난, 사면초가.

나는 신병철에게 한심한 눈빛을 보냈다.

"아이고, 오늘 신수가 아주 훤하십니다?"

"야.... 나 놀리지 말아 봐. 나 지금 심각하다."

신병철의 표정에는 평소의 여유로운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깍두기 머리가 식은땀으로 번들거린다.

"하여간 방에 두고 오래도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뭐? 저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아니이~ 내가 이런 일일 줄 알았나? 자세하게 얘기를 해 주든가."

"얘기는 너네 동아리 부장이 해 줬을 거 아냐. 이번 주 금요일, 아니면 다음 주 월요일에 소지품 검사 할 수도 있다고."

"아니 그, 하기는 했는데, 이런 거라곤 안 했다고...."

"네가 듣다 만 건 아니고?"

"...."

정곡을 찔렸는지 입을 다무는 신병철이었다.

2, 3학년은 여러 대에 걸쳐서 쌓인 데이터를 갖고 있을 테니, 단속이 들어오는 기간은 대강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분명 몸을 사리라는 언질을 받았을 텐데, 그마저 한 귀로 흘린 대가가 이것이다.

다 본인이 자초한 일이지.

신병철이 작은 원을 그리며 제자리를 걸어 다녔다.

"아오씨, 어떡하지, 진짜 엿 됐네, 어떡하지, 이거 다 털리면 부장님한테 진짜 뒤지는데, 어떡하지, 와, 나 진짜."

"살려 줄까?"

"나 심각하다고! 자꾸 긁지 말라니깐... 뭐요?"

나에게 버럭 화를 내던 신병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식간에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되묻는다.

"...형님,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불쌍해서 살려 줄까 했는데. 싫으면 관두고."

신병철이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살려만 주십쇼, 형님. 뭐든지 하겠습니다, 형님."

"너 나한테 빚진 거다."

"물론입죠 형님."

"이쪽으로."

이미 표식이 찍혔기에 다른 학생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건 피할 수 없어도, 대놓고 하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가리는 게 낫다.

시선이 잘 닿지 않는 한구석으로 가서 [생명의 큐브]를 열었다.

"밴 걸린 거 다 집어넣어. 부피 작고 귀한 거 위주로."

"넣으면 어떻게 되는데?"

"일단 넣어. 못 믿겠으면 관두고."

"아닙니다, 형님. 넣겠습니다, 형님."

신병철은 금지 아이템들을 큐브로 옮겨 담기 시작했다.

- 쿠르르릉, 쾅!!

천둥소리가 바로 옆 반에서 울렸다.

곧 학생선도부가 3반으로 넘어올 것이다.

신병철의 손이 한층 더 빨라졌다.

[혈삼 캔디]

[우울한 구름과자]

[스킬북 - 눈먼 증오]

[드림 캔디(망나니가 되었다)]

...

...

"뭐가 이렇게 많아. 아저씨 어디 이민 가요?"

"아잇, 그냥 내가 다 미안해...."

신병철은 내 핀잔에 사과하면서도 큐브가 한가득 찰 때까지 금지 아이템들을 꽉꽉 눌러 담았다.

'괜찮은 건 없네.'

가져갈 만한 게 보이면 한두 개쯤은 달라고 했을 텐데.

하지만 나는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기회는 앞으로도 잔뜩 생길 테고, 지금은 애피타이저도 못 되니까.

[생명의 큐브]를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금지 아이템을 전부 옮긴 건 아니기에 아직도 신병철의 이마에 I 자가 떠올라 있지만, 방금 전보다는 확연히 옅어졌다.

저 정도는 본인이 알아서 감당해야지.

"동작 그만."

- 파지직!

나와 신병철 옆에 한 줄기 벼락이 꽂히더니 송천혜가 순식간에 공간을 뛰어넘어 나타났다.

장갑을 낀 손에서 위협적으로 전류를 피워 올리며 묻는다.

"거기서 뭐 하시는 거죠?"

방금 막 밴 웨이브가 발동된 데다, 신병철의 이마에 낙인까지 찍혀 있다.

그런 신병철과 내가 교실 한구석에서 등을 돌리고 있으니, 누가 보든 심히 의심스럽겠지.

나는 최대한 결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신병철도 나를 변호했다.

"맞습니다. 이 친구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그러시겠죠."

당연히 송천혜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리가 없었다.

빛나는 수정구가 박힌 단말기를 나에게 들이댄다.

밴 웨이브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아이템으로, 대상이 금지 아이템을 소지했다면 붉은색으로 변한다.

- 우웅—

아무 반응도 없다.

송천혜가 다시 수정구를 작동시켰으나 결과는 같았다.

"...."

"나 가도 돼?"

"...자리로 돌아가서 앉으세요."

2반에서 선도부원들이 계속해서 넘어왔다.

교실을 돌아다니며 금지 아이템들을 압수하고, 소유자의 학생증을 단말기에 등록한다.

금지 아이템의 등급이나 개수에 따라 추가적인 벌점과 징계가 가해질 것이다.

- 콰쾅!

저항하는 학생은 가차 없이 제압한다.

칼을 뽑아 든 남학생이 조벽의 일권을 맞고 벽에 꽂히자, 함께 반항하던 다른 남학생이 슬그머니 무기를 집어넣고 자기 아이템을 내밀었다.

"...."

한편 송천혜는 계속해서 나에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어떻게든 내 인벤토리를 열어 보고 싶은 듯하다.

하지만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으니, 강압적으로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내 인벤토리에는 금지 아이템이 잔뜩 들었는데.

'이래서 금요일 전에 완성시키려고 한 거지.'

생명의 큐브가 발하는 파동은 멀리서도 박나리의 고양이를 꾀어낼 정도로 강력하다.

두꺼운 갑옷처럼 큐브를 감싸서 밴 웨이브를 교란시키기에, 안에 무엇을 집어넣든 외부에서는 '생명' 계열 아이템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나조차도 아주 우연히 발견했던 히든 피스였다.

생명의 큐브를 이용해 신병철과 녀석이 소속된 동아리에 큰 빚을 하나 지웠고, 동시에 홍보도 했다.

밴 웨이브로부터 금지 아이템을 은폐하는 아이템.

생명 계열과 완전 동떨어진 클래스라도 갖고 싶어 미칠 테지.

* * *

수업 종료 후.

인적이 뜸한 곳에서 신병철과 합류했다.

나를 보자마자 감격에 겨워 끌어안으려 하길래 밀쳐 냈다.

엉거주춤하게 서서 감사 인사를 건네는 신병철.

"와, 진짜 고맙다야. 너 아니었으면 그거 다 털리고 나는 변사체 아니면 노예행이었어."

"빚으로 달아 둬. 나중에 톡톡히 받아 낼 거다."

"아유, 그럼요. 이런 건 절대 안 떼먹지."

신병철을 곤경에서 구해 준 빚은 나중에 받아도 상관없고, 본래 '압수당했을' 아이템을 빼내 준 값은 따로 받아 낼 생각이다.

쟤네 동아리 부장한테.

"금지 아이템은 너네 부실 가서 풀자."

"그러지 뭐. 안 그래도 부장님이 너 한번 보잰다. 바로 가?"

"갑시다."

신병철의 안내를 따라 동아리실로 이동했다.

[용살학원 심부름 서비스!]를 통한 금지 아이템 거래를 비롯해, 온갖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는 용살학원의 말썽꾸러기들.

도둑 동아리 부실로.

서포터가 다 해먹음

29화 금지 아이템이 모이는 곳 (1)

도둑 동아리 부실은 매우 후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규모나 실적으로 보면 중위권 이상은 하는데, 교칙을 하도 어겨 대는 게 문제다.

개개인의 벌점과 징계는 물론, 동아리 단위의 제재도 꽤 빈번히 가해지는 편이다.

그중에 동아리 예산 삭감도 포함이고.

그 증거로 부실 내부는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소파는 가죽이 죄다 까졌고, 의자들은 어디에서 주워 왔는지 생김새가 제각각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 주워 온 듯한 낡은 나무 테이블 위에, 도둑 동아리 부장이 걸터앉아 있었다.

검은 생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렸으며 늘씬한 키를 가진 미인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무표정하게 앉아만 있는데도 카리스마가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동아리 하나를 운영하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지.

"누님, 저희 왔습니다...."

"...."

동아리장이 말없이 검지를 까딱거렸다.

신병철이 주춤거리면서 근처까지 다가가자, 하얀 손이 깍두기 머리를 우악스럽게 콱 움켜쥐었다.

"으이그! 내가 사리라고 했냐 안 했냐?"

"악! 누님! 머리! 머리만은!"

"중요하니까! 딴짓하지 말고 들으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죄송하다구요! 악! 스탑! 나 대머리 된다!"

동아리장이 손에 힘을 줄 때마다 신병철이 애처롭게 끌려 다녔다.

이 촌극으로 머리카락, 아니 머리털이 한 움큼은 뽑혀 나간 것 같았다.

동아리장은 신병철의 머리를 놓으며 마지막으로 뒤통수를 탁!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

"넵. 죄송함다."

신병철이 아픈 머리를 어루만지며 퇴장하고, 우리는 단둘이 되었다.

동아리장이 내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나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당규영이다. 이미 알고 왔겠지만 여기 부장이야."

"김호입니다."

"바로 물건부터 보자."

당규영은 매우 직설적인 성격인 모양이다.

내 입장에서도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주고받는 것보다, 이렇게 통성명만 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 게 더 편하다.

인벤토리에서 [생명의 큐브]를 꺼내 열어 보였다.

당규영은 한가득 꽉꽉 눌러 담은 금지 아이템들을 응시하다가, 하나를 꺼내서 확인했다.

"...진짜였네. 솔직히 방금 전까지도 반신반의했거든. 밴 웨이브를 속이는 아이템이라니, 암만 들어도 거짓말 같잖아."

"세상은 넓고 아이템은 많죠."

"그런가 봐. 여태까지 안 다뤄 본 아이템이 없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머네. 야, 나 이거 훔쳐 가도 되냐?"

농담 2, 진담 8 정도가 섞인 눈빛이다.

도둑 동아리 부장인 만큼 마음만 먹으면 신입생에게서 아이템 하나 훔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럴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금방 잡힐걸요. 이래 봬도 마법공학 아이템이라."

"뭐?"

당규영이 큐브를 더 자세히 살폈다.

갖가지 식물들과 꽃들로 뒤덮여 있기에 슬쩍 봐서는 알아차리기 힘든데, 군데군데 10x10x10 설계도의 흔적이 엿보인다.

"뭐야, 마공학템 맞네? 이런 건 처음 보는데, 누가 만들었대?"

"제가요."

"야, 너 손재주 좋다?"

이러면 김샜네, 하며 미련을 버리는 당규영이었다.

마법공학 아이템의 도난 방지 장치는 일반 마법 아이템의 것보다 한 차원 복잡하다.

제작하는 단계에서 깊숙이 심어 둘 수도 있으니 찾기도 어렵고 우회하기도 어렵다.

물론 나는 그런 건 해 둔 적이 없지만, 블러핑만으로도 억제가 된다.

만약 내 말이 사실이라서 추적당하면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되니까.

"쯧, 아무튼 나한테 바라는 게 있으니까 병철이한테 안 넘기고 직접 온 거지?"

"바로 보셨습니다."

"여기 꼬라지 보면 알겠지만 우리가 좀 가난해. 이거까지 털렸으면 이번 달은 적자 났을걸."

그래서 줄 수 있는 게 마땅치 않단다.

엄살이라는 걸 알지만 나는 굳이 그 점을 꼬집지 않았다.

어차피 물질적인 대가를 바라고 온 게 아니니까.

"선배님이 충분히 해 주실 수 있는 일일 겁니다."

"말해 봐. 뭔데?"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임시 보관소."

"...!"

'임시 보관소'를 입에 담는 순간 당규영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발밑의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내 그림자는 제멋대로 다리를 타고 올라온다.

바로 눈앞에 있는 당규영의 존재감은 서서히 옅어진다.

언제든 전투가 벌어질 수 있는 상황.

"말로 합시다, 선배님. 저 무서워요."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무섭기는. 선도부에서 보냈냐?"

"아뇨. 걔네랑 사이 안 좋습니다."

"그럼 어디."

"저 혼자 왔죠."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왜 합니까?"

어차피 조금만 조사해 보면 소속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이런 사소한 거짓말을 해 봐야 득보다 실이 더 크다.

당규영은 진의를 가늠하려는 듯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고, 나는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곧 꿈틀대던 그림자들이 원상 복귀되었다.

"...후, 그래. 일단 무소속이라 치고. 임시 보관소는 어떻게 알았어."

"나름대로 추론을 해 봤습니다."

사실 추론이 아니라 경험이다.

밴 웨이브 한 번으로 전교생에게서 압수하는 금지 아이템만 수백 개에 달한다.

그런데 학기 중에 밴 웨이브가 이번 한 번으로 끝이냐?

절대 아니다.

잊을 만하면 발동해서 학생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준다.

그렇다면 그 많은 금지 아이템들은 다 어디로 가는가.

압수품 보관소가 존재한다.

그게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고인물 오브 고인물인 나조차도 정확히 모른다.

수시로 위치가 바뀌니까.

게다가 위치를 알아낸다 해도 뚫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몇몇 교장 선생님들은 거대한 아공간을 압수품 보관소로 삼고 휴대한다.

교장 선생님을, 즉 전대 용사를 쓰러뜨려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가능한 스펙이라면 그 안의 아이템을 얻는 의미가 없다.

단, 이건 보관소의 위치고,

금지 아이템들을 보관소로 옮기기 전에 짧은 기간 분류와 확인 작업을 거치는 장소가 존재한다.

바로 임시 보관소라는 곳이다.

"아마 오늘이나 내일 밤쯤에 가실 거라 봅니다."

이번 주말만 지나면 임시 보관소는 깨끗하게 비워질 터.

그 전에 그곳을 털 수 있느냐가 지금 도둑 동아리의 최대 관건.

일요일은 너무 늦어 버릴 가능성이 크고, 아마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이 이상적이겠지.

내 목적이 뚜렷하게 드러나자 당규영이 어이가 없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무임승차를 하시겠다?"

"무임승차까진 아니죠. 요금도 내는데."

그 요금이란 당연히 방금 살려 준 금지 아이템들이다.

내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인지 당규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생명의 큐브]를 뒤집어서 내용물을 와르르 쏟고, 빈 큐브를 나에게 건네며 말한다.

"후배야, 김호야, 솔직히 이것들 구해 준 건 고맙게 생각해. 적당한 대가를 지불할 용의도 있고. 그런데 이건 우리가 손해야. 거기 들인 수고가 얼만데,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달랑 얹는다? 이건 안 되지."

"그런 감이 있긴 하죠."

"그러니까 임시 보관소는 빼고 다른 거 말해 봐. 다른 거."

내가 살려 준 금지 아이템들의 값어치를 다 더해도 임시 보관소행 버스에 탑승하기에는 부족하다.

그곳은 도둑 동아리 입장에서 정말로 보물 창고나 다름없으니까.

당규영은 이쯤에서 내가 다른 걸 요구할 거라 생각했겠지만, 나는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신, 저울에 거래 재료를 하나 더 올리면 그만이다.

내가 운을 뗐다.

"임시 보관소요. 선도부가 지키고 있겠죠?"

"말해 뭐 해. 완전 철통 수비지."

밴 웨이브는 내가 입학하기 전에도 수없이 발동되어 왔다.

그때마다 도둑 동아리가 임시 보관소에 눈독을 들였으며, 그때마다 학생선도부가 모든 인원을 동원해 수성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침입하기도 어렵겠지만 일을 마치고 도주하기도 어려울 거구요."

"굳이 따지면 후자가 더 어려워."

아무도 모르게 들어갔다가 아무도 모르게 나가면 완벽하겠지만, 오가는 과정에서 수성 측의 이목에 걸려들 가능성은 꽤 컸다.

선도부는 용살학원에서 가장 강한 무력 집단.

4대 세력의 몇몇 강호들이라면 몰라도, 도둑 동아리가 비벼 볼 상대는 아니다.

맞서 싸워 봤자 순식간에 압도당하고, 도주하다가 잡히면 그대로 게임 오버.

고생고생해서 챙겨 나가던 아이템들을 다 토해 내야 한다.

내가 제시하려는 조건이 바로 이것과 연관되어 있다.

"제가 후자를 해결해 드릴 수 있다면?"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우리도 못하는 걸 네가... 잠깐만."

보란 듯이 [생명의 큐브]를 슬쩍 여닫자 당규영의 눈이 커졌다.

"...맞아. 왜 저 생각을 못 했지? 중요한 것만 모아다 넣으면...."

"확정적으로 갖고 나올 수 있죠."

밴 웨이브도, 수정구도 피해 가는 히든 피스.

침입하는 도둑 동아리 인원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붙잡히더라도, 큐브 안에 수납한 아이템은 안 걸린다.

'이건 절대 거절 못 하지.'

물론 당규영의 입장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준비한 프로젝트인 만큼, 완성 단계에 외부인이 덜컥 올라타는 건 마음에 안 들겠지.

하지만 그 프로젝트가 막바지에 엎어져 버리는 건 더 마음에 안 들 거다.

아무것도 못 건지는 건 더더욱.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최소한의 이득은 보장된다.

그것도 원하는 것들, 보관소에서도 가치가 높은 것들로만.

당규영은 거의 다 넘어온 기색이었다.

그럼에도 이 상황이 영 마뜩잖은지 은근슬쩍 역제안을 던져 보지만,

"야, 그냥 그 상자만 나한테 넘기면, 아니 잠깐 빌려주면 안 되냐? 딱 하룻밤만."

"싫은데요."

어림도 없는 소리지.

"아, 왜! 좋은 아이템 있으면 가져다주면 되잖아!"

"직접 보고 골라야 돼요."

저쪽 기준에서 좋은 아이템과 내 기준에서 좋은 아이템은 엄연히 다르다.

무엇이 나에게 쓸 만한지 내 눈으로 보고 판단해야 한다.

"하실 겁니까?"

"...."

"정 싫으시면 어쩔 수 없고."

"...한다, 해! 하면 되잖아!"

"그럼 동행하는 겁니다."

"쯧."

마지못해 거래를 받아들이는 당규영이었다.

불퉁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묻는다.

"야, 솔직히 말해 봐. 너 1년 꿇었지?"

"여기서 어떻게 1년을 꿇어요. 성적 안 나오면 바로 퇴학인데."

"내가 감이 좀 좋거든. 암만 봐도 신입생 같지가 않아서 그래."

"들켰네요. 특별히 선배님한테만 말씀드리는 건데, 제가 사실 졸업을 200번 넘게 해 봤어요."

"...에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당규영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짠데.'

서포터가 다 해먹음

30화 금지 아이템이 모이는 곳 (2)

하늘을 어렴풋이 밝히는 가느다란 초승달 하나.

그 초승달마저 짙게 낀 구름이 자꾸만 가려 대는, 평소보다 유달리 어두운 밤이었다.

그리고 이런 어두운 밤이야말로 도둑들이 활동하기 안성맞춤이다.

구교사 인근의 커다란 조각상 앞에 검은 인영들이 모여들었다.

검은색 일색의 옷을 입고 얼굴에는 복면을 뒤집어썼다.

그중에는 물론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몸매가 늘씬한 복면인이 당규영이라는 건 금방 알아보았다.

어차피 다른 사람은 원래 얼굴도 모르거든.

남학생 둘은 쌍둥이인 듯했는데, 복면을 썼음에도 체구나 행동거지 따위가 거의 똑같았다.

태블릿을 바쁘게 두들겨 대는 여학생 하나,

아주 짧은 완드를 팔에 찬 남학생 하나,

온몸으로 경박함을 뽐내는 남학생은 자세히 보니 신병철이었다.

서로 눈짓을 교환하거나 고개를 숙이는 걸 보면 복면을 쓰고도 누가 누군지 알아보는 모양이다.

반면 나는 이들과 생판 초면이라, 의아함을 느낀 쌍둥이 하나가 물었다.

"누님, 이상한 게 하나 껴 있는데, 이건 뭐요?"

"이번 일에 도움을 주실 분이다. 실례를 범하지 않게 주의해라."

"으음...."

쌍둥이는 완전히 납득한 눈치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에서 [생명의 큐브]의 존재와 성능을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다.

누가 입이라도 잘못 놀렸다간 이 안에 보관할 아이템들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으니까.

해서 일단 내 위장 신분은 당규영이 초대한 정체불명의 실력자로 해 두었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오늘 밤 잘 부탁드릴게요."

신병철이 굽실거리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돌아가는 정황이나 복면 사이로 드러난 얼굴 일부분 등으로 나라는 걸 파악한 듯하다.

이 녀석도 나름 눈치가 빠른 데다 나에게 빚도 졌으니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는 않을 것이다.

당규영이 태블릿을 든 여학생에게 물었다.

"몇 분 남았어?"

질문을 받자 태블릿을 두들기는 속도가 빨라졌다.

무언가 계산을 하는지 태블릿 위에 숫자들이 빽빽하게 떠올라 있고 시선은 하늘, 정확히는 달을 바라본다.

"앞으로 3분이요."

"좋아, 준비들 하자."

모두 마지막으로 자기 장비들을 점검하거나 마나를 끌어올린다.

당규영과 몰래 시선을 교환했다.

그림자가 꾸물거리며 글자를 그려 낸다.

'설명해 준 대로만 해.'

사전에 따로 작전 브리핑을 받았었다.

필요한 대처는 모두 저들이 알아서 한다 쳐도, 어떻게 들어가서 어떻게 나올지 정도는 파악해 둬야 실수를 안 할 테니까.

그것들을 모두 숙지한 이상, 오늘 밤 내 역할은 말썽 안 피우고 조용히 따라가는 것밖에 없다.

이런 게 버스의 묘미 아닐까?

태블릿 여학생이 언급한 3분이 가까워지자,

모여든 구름들이 달을 완전히 가렸다.

'돌입.'

[그림자 안가(安家)]

당규영에게서 뿜어져 나온 그림자가 돔 형태를 이루었고, 모두 일제히 범위 내로 모여들었다.

그림자는 곧 일행의 몸에 달라붙으며 은밀함을 한층 더해 주었다.

눈앞에서 봐도 서로의 실루엣만을 어렴풋이 확인할 정도니, 먼 거리에서 알아보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도둑 동아리는 곧 당규영을 선두로 달리기 시작했다.

여러 명이 우르르 달리는데 발소리 하나, 옷자락 스치는 소리 하나 나지 않는다.

함께 따라 달리며 당규영의 다리를 관찰했다.

정확히는 당규영의 발놀림을.

'B랭크군.'

로그 계열 클래스의 주력 이동기인 [도둑걸음].

발걸음이 빠르고 은밀해지며, 어둠 속을 이동하는 경우에는 추가 보너스가 더해진다.

3학년에 동아리장까지 맡을 실력이면 B랭크 정도는 거뜬하게 달성하는 법이다.

['복사-스킬'을 사용합니다.]

[대상의 스킬 '도둑걸음(B)'을 슬롯에 등록합니다.]

▷복사-스킬[2/2]

1. 허밍버드(E)

2. 도둑걸음(B)

큐브를 다 만들었으니 [마법공학]은 당분간 쓸 일이 없겠지.

[도둑걸음]을 쓰며 움직이자 몇몇 일행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그들 기준에서는 내 발소리가 꽤 시끄러운 편이었을 텐데, 단 몇 걸음 만에 완벽한 도둑걸음으로 바뀌었으니 신기할 만도 했다.

그러나 내가 앞만 보고 달리자 그들도 한눈을 팔 수 없다 생각했는지 시선을 거두었다.

구교사가 가까워지며 군데군데 선도부 완장을 찬 학생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서로 일정 거리를 두고 순찰을 도는 중이다.

거대한 구교사 내외부를 선도부 인원만으로 커버하려면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도둑 동아리의 정보원이 파악한바, 우리가 달려가는 이곳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부분이다.

순찰을 도는 학생 중 1학년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흥~ 흐흥흥~"

밤 산책이라도 나온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털레털레 걸어 다니는 한소미.

우리가 지나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순찰을 도는 1학년은 한 명 더 있었다.

귀공자 같은 생김새에 눈에 띄는 황금빛 검.

황금련 대공자 금조한이었다.

하필 금조한의 동선과 우리가 가는 길이 겹친다.

하지만 아무도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선두의 당규영이 기세를 끌어올리고,

[영접비행(影蝶飛行)]

그림자로 만들어진 나비가 날았다.

팔랑거리며 날아간 나비가 금조한의 어깨에 사뿐 내려앉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