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잡동사니를 뒤지다 (1)
학기 첫날임에도 마법공학 공방은 몹시 분주했다.
전투 계열 클래스들이 대인전 승패와 공략전 고득점에 사활을 걸듯, 생산 계열 클래스들은 양질의 아이템을 제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잘 만든 아이템들은 카탈로그에 실려서 포인트 벌이가 되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용살학원 외부로 팔려 나간다.
부족한 전투력으로 인한 실기 평가 점수를 성과를 내서 메꾸는 것이다.
그러니 첫날부터 뭐라도 하나 더 만들어 보겠다고 혈안이 될 수밖에.
공방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인데, 1군이 사용하는 제1공방의 시설이 가장 훌륭하고, 이 때문에 이용자도 가장 많다.
근처에만 가도 시끄러운 기계 소리가 윙윙 울려 대서 귀가 아프고, 곳곳에서 번쩍이는 푸른빛에 눈이 멀 것 같다.
반면 공방 앞에 붙은 숫자가 늘어날수록 시설의 수준도 떨어지고 자연히 사람도 적어진다.
해서 내가 제4공방에 가까워질 즈음에는 소음이 거의 잦아들어 고요해졌다.
4공방 문은 반쯤 열린 채였다.
안에서 작은 기계 소리와 함께 마나의 파동이 느껴진다.
열린 문틈으로 슬쩍 보니 학생 하나가 등을 돌린 채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며 몰두하고 있었다.
두 손에 각기 다른 공구를 들었으며 열 손가락이 모두 투명하게 푸르다.
[마법공학] 스킬이 발현되고 있다는 뜻.
- 똑똑,
손을 들어 노크를 했다.
집중을 깨뜨릴 만큼 크게, 하지만 짜증은 덜 나도록 적당히 작게.
"누구세요."
학생이 앉은 자리에서 상반신만 돌려 문 쪽을 확인했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꾸벅 인사부터 했다.
이 시각에 이런 곳에 있다면 100% 선배니까.
넥타이핀 색을 확인하니 3학년이 맞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신입생?"
"네."
"마공학 동아리 들어오려고?"
"관심이 있습니다."
같은 말처럼 들리지만 다른 말이다.
관심만 있고 가입할 생각은 없으니까.
3학년 선배는 그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아니면 알고도 신경을 안 쓰는지, 그저 하던 일이나 마저 하고 싶다는 눈치였다.
"그러면 1공방이나 가서 보지, 왜 여기까지 왔어?"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실은 거기부터 갔는데, 선배님들이 4공방부터 돌아보고 오라고...."
"아... 진짜."
3학년 선배의 얼굴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자기한테 일을 떠넘겼다는데 누가 좋아할까.
1군에서 떠넘긴 일이라 안 할 수도 없는 노릇.
정작 나는 1공방에 발을 들인 적도 없지만, 이런 거짓말이라도 안 해 놓으면 아예 무시로 일관할 듯해서 불가피하게 구라를 쳤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무구한 얼굴로 물었다.
"둘러봐도 되나요?"
"...대충 둘러보고 가. 바쁘니까 나 좀 방해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조용히 볼게요."
"...."
휘휘 손을 저어 보이고 다시 자기 일로 돌아간다.
공구들이 재가동하고 손이 푸르게 변한다.
곁눈질로 지켜보며 [마법공학]의 수준을 가늠했다.
'B랭크군.'
썩어도 준치라고, 아무리 4공방 구석에 박힌 신세라도 용살학원 3학년.
주력 스킬 정도는 B랭크를 달성한 것이다.
이곳에 온 첫 번째 목표였다.
['복사-스킬'을 사용합니다.]
[대상의 스킬 '마법공학(B)'을 슬롯에 등록합니다.]
▷복사-스킬[2/2]
1. 허밍버드(E)
2. 마법공학(B)
B랭크 아래였다면 1공방까지 돌아가서 스킬을 따로 복사해야 했겠지만, 이 선배의 성취가 의외로 높은 덕에 두 번 일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다음 목표.'
나는 정말로 공방을 견학하러 온 신입생인 양, 일부러 이곳저곳을 열심히 둘러보는 척했다.
'우와! 이건 뭐지?', '너무 신기하다!'를 연발하면서.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도착한 곳은, 정체불명의 아이템들이 가득한 잡동사니의 산이었다.
양이 얼마나 많은지 쌓인 높이가 어깨까지 온다.
나는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척하며 물었다.
"선배님, 이건 뭐예요?"
"그냥 실패작들이야."
제작 도중에 일부분이 파손되거나, 초안에 비해 결과물이 별로라 판단했거나, 재료 충당이 안 되는 등, 갖가지 이유로 만들다 만 아이템들을 쌓아 둔다.
제4공방은 반쯤 쓰레기장 역할도 겸하는 셈이다.
나는 대놓고 호기심을 드러냈다.
"와, 안에도 뭐가 많은 것 같은데, 한번 뒤져 봐도 돼요?"
"그러든가 말든가."
허락이 떨어졌다.
한계를 넘은 귀찮음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 느낌이 강하지만 어쨌든 허락은 허락.
나는 잡동사니의 산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위에서부터 잡템 쪼가리들을 한 아름씩 덜어 내 옆으로 쌓고, 계속해서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든다.
내 주위에 작은 산 여러 개가 쌓일 즈음, 손에 잡히는 게 있었다.
'찾았다.'
축구공보다 조금 작은 정육면체.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수한 손톱만 한 정육면체들이 합쳐진 것이다.
마법공학 아이템이 제작되는 방식 중 하나인 '큐브'다.
자그마한 정육면체 하나하나에 복잡한 마법 회로가 새겨져 있고, 그 정육면체들을 알맞은 장소에 배치하여 아이템으로 완성하는, 일종의 입체적 설계도인 셈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큐브는 가로 셋, 세로 셋, 높이 셋의 3x3x3으로 27개, 4x4x4로 64개 설계도를 주로 사용하는데,
내 손에 들린 이것은 10x10x10이었다.
작은 정육면체가 무려 천 개.
나름 한 솜씨 하는 장인들도 건드릴 엄두를 못 내는 초고등급 설계도라는 뜻이다.
큐브를 손에 드는 즉시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서브 퀘스트:의문의 큐브]
마법공학 공방에서 매우 특이한 설계도를 발견했습니다.
▷목표:설계도에 대해 조사하십시오.
▷보상:연계 퀘스트 수행 가능
[수락/거절]
기나긴 연계 퀘스트의 시작이다.
설계도에 대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조사하고,
선배, 선생님, 졸업생에게 자문을 구하고,
제작에 동참할 장인들을 모으고,
재료를 구하러 이 던전 저 던전 밥 먹듯이 들어가고,
특별한 재료를 구하기 위해 보스 몬스터를 잡고....
그런 기나긴 대장정 끝에 완성되는 것.
바로 S랭크 아이템인 [생명의 큐브]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생큡'이라고 불리는 매우 강력한 아이템.
'응, 안 해.'
문제는 수락하는 순간 최소 1년 이상 이 퀘스트에만 붙잡혀 있어야 한다는 것.
나는 곧바로 퀘스트를 거절하고 치워 버렸다.
내 목표는 오직 큐브 설계도뿐이다.
막 다시 집중하려는 3학년 선배에게 큐브를 가져갔다.
"저, 선배님. 저기에서 이런 걸 찾았는데요...."
"...?"
자꾸 방해를 받아서 버럭 화를 내려던 선배가 내 손에 들린 큐브를 발견했다.
그러나 여전히 심드렁한 태도인 걸 보면 잡동사니에 있을 만한 아이템이라 생각하나 보다.
"설계도네. 이게 뭐?"
"10x10x10이면 엄청난 거 아니에요? 전설의 아이템?"
"완성을 해야 전설의 아이템이지. 그건 그냥 쓰레기야. 6x6x6도 완성하기 힘든데, 어떤 욕심 그득그득한 인간이 일을 벌였나 몰라."
그 말대로, 절대로 완성되지 않을 설계도는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러니 저렇게 신포도 보듯 하는 것이고.
나는 학구열에 불타는 신입생을 가장했다.
"저 이거 너무 재밌어 보이는데, 가져가서 뜯어봐도 돼요?"
"가져가 봤자 완성이 안 된다니까? 그게 되면 우리가 벌써 만들었지."
"다 못 만들어도 보면서 공부 좀 하려구요. 제가 이런 거 모으는 취미가 있기도 하고...."
선배가 '안 돼, 자식아!' 비슷한 말을 하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적절한 타이밍에 인벤토리에서 꺼내 든 아이템을 보고.
1,000포인트를 주고 구매한 [열 촉매 시약].
마법공학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아이템이다.
"그냥 가져가긴 당연히 저도 죄송하고, 염치가 없기도 해서.... 대신 이거라도 드릴까 하는데, 어떻게 안 될까요?"
"...."
선배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쯤 머릿속이 맹렬하게 회전하는 중일 것이다.
[열 촉매 시약]의 가격은 1,000포인트.
저등급 던전 한두 번만 깨면 얻는 포인트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나에게 이 시약을 받으면 던전 한두 번을 덜 들어가도 된다.
거기에 들어갈 시간과 노력, 스트레스 등을 절약하여 온전히 마법공학에 집중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반면 저울 반대쪽에 놓인 것은 자신과 아무 관련도 없는 잡동사니 하나.
고등급 큐브 설계도라는 점이 살짝 마음에 걸리지만, 어차피 누구도 완성하지 못할 것 아닌가?
이곳에서 사라진들 누구도 찾지도, 신경 쓰지도 않을 쓰레기다.
당장 자신에게 도움이 될 1,000포인트어치 재료와 쓰레기 하나.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다.
선배가 슬그머니 손을 뻗어 [열 촉매 시약]을 챙겼다.
"...이번만 특별히 해 주는 거다. 원래 이런 거 함부로 못 가져가."
"감사합니다, 선배님!"
"다른 데에는 절대 말하지 마라. 우리끼리만 알고 있어야 돼. 부장이 알면 그거 도로 뺏어 갈걸?"
"당연하죠."
아무리 이 잡동사니들이 쓰레기나 다름없다 한들, 외부인에게 넘겨줄 권한은 동아리 부장만 갖고 있다.
그것을 사소한 포인트 절약을 위해 나에게 넘겨주는 것이니 가능한 비밀에 부치고 싶을 것이다.
거듭 당부하는 선배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저는 들어가 볼게요. 감사합니다."
"그래라."
마지막까지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4공방 문을 뒤로 닫으며 나왔다.
문 너머에서 '아싸! 천 포인트 굳었다!'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웬 어리숙한 신입생한테 쓰레기를 대동강 물 팔아먹듯 팔아먹었으니 신날 만도 하지.
하지만....
'과연 정말로 쓰레기일까?'
큐브의 연계 퀘스트를 거절한 첫 번째 이유는 시간을 지나치게 많이 잡아먹어서.
기반을 다지기에는 1학년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 봐도 과언이 아닌데, 퀘스트에만 매몰되다 보면 정작 더 중요한 히든 피스들을 획득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나 자신의 성장도 더뎌지고, 고현우와 서예인을 챙겨 줄 시간도 부족해진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내가 너무 고인물이라서 연계 퀘스트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만드는 방법을 알거든.'
서포터가 다 해먹음
22화 잡동사니를 뒤지다 (2)
[생명의 큐브] 연계 퀘스트는 S급 마공학자를 육성하기 위해 필히 거쳐 가야 하는 과정 중 하나다.
그 외에도 '생명'이라는 키워드와 연관된 수많은 영웅이 이 퀘스트의 수혜를 받는다.
내가 이 지겨운 짓을 수십 번은 반복했었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퀘스트를 거듭할수록 [생명의 큐브] 완성품이 점점 눈에 익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그냥 내가 만들어 볼까?'
어쩐지 퀘스트 없이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공부했다. 암기했다.
천 개에 달하는 정육면체들의 배치 하나하나를.
물론 외우기만 한다고 설계도가 완성품으로 뚝딱 변신하는 것은 아니었다.
손수 하나하나 짜 맞춰야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한참 헤맸지만, S급 영웅을 키울 때와 마찬가지로 한 개 두 개 완성하기 시작하면서 요령이 붙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영웅 육성에 퀘스트가 필수적이지 않다면, 그냥 건너뛰고 큐브만 챙긴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먼저 트레이닝 센터로 가서 마나연공실 하나를 골라잡았다.
특수연공실까지는 가지 않아도 괜찮다.
고현우는 [코어]의 성장이 무엇보다 급해서 거기에 모든 포인트를 쏟아붓는 중이지만, 나는 다른 곳에 쓰는 게 더 유용할 거다.
마나연공실은 몇 평 되지도 않는, 독방이나 다름없는 밀폐된 공간이다.
온 방에 마나가 넘쳐흐른다는 점만 다르다.
그 한가운데에 앉아서 큐브 설계도를 꺼냈다.
큐브에 유의미한 변화를 주기 위해서는 일정 랭크 이상의 [마법공학] 스킬이 요구된다.
최소 조건에 미달한다면 아무리 열심히 큐브를 주물러 봤자 다 헛수고다.
그리고 이 거대한 10x10x10 설계도에 변화를 주는 최소 조건은 A랭크 이상.
용살학원 내에서도 A랭크 마법공학을 가진 사람은 기껏해야 교직원 한두 명 정도일 것이다.
마법공학 동아리 부장도 B 끝자락 즈음에 걸쳐 있겠지.
그래서 연계 퀘스트 중에 외부 장인들을 초빙하는 과정이 존재한다.
내가 제4공방에서 복사한 스킬의 등급 역시 B로, 마찬가지로 조건에는 못 미친다.
'안 되면 되게 만들어야지.'
시작하기에 앞서 큐브 설계도를 면밀히 뜯어보았다.
어떻게 완성해 나갈지 미리 계획을 짜 두기 위함이다.
한참이나 이리저리 돌려 가며 내 기억 속의 완성품과 설계도를 대조하다 보니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시작해 볼까.'
['증폭'을 사용합니다.]
['마법공학'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B->S)]
[지속시간 00:00:59]
[재사용 대기시간 00:59:58]
[증폭]으로 두 단계 상승해서 S랭크.
이걸로 최소 조건은 넘어섰다.
큐브를 쥔 내 손이 선명한 푸른빛을 발했다.
열 손가락이 거미처럼 움직이며 엄청난 속도로 큐브 이곳저곳을 누볐다.
- 촤라라라라락!
큐브를 회전시키고, 접고, 펴고, 작은 정육면체 하나하나를 빼서 다른 곳에 붙이고 끼워 넣은 다음 또 돌린다.
거대한 퍼즐이 아주 조금씩 맞춰지다가,
[지속시간 00:00:00]
[재사용 대기시간 00:58:54]
1분이 지나자마자 손을 놓았다.
도중에 [증폭]의 지속 시간이 다해 랭크가 원상 복귀된 것이다.
F랭크 증폭의 지속 시간은 1분, 쿨타임은 1시간.
1시간마다 1분씩 큐브를 만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 기다리는 동안은 무엇을 하는가?
'마나는 다다익선이지.'
명상을 하며 [코어]를 가다듬으면 그만이다.
랭크를 올려서 마나량이 많아지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폭도 더 넓어지니까.
틈틈이 투자해서 나쁠 게 없다.
나는 큐브를 근처에 고이 모셔 두고 정신을 집중했다.
* * *
1시간 명상하고, 1분 큐브를 손보고, 다시 명상하고를 무아지경으로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하루가 훌쩍 넘어가고 아침이 밝았다.
큐브를 들어 살펴보면 한 귀퉁이에서 보일 듯 말 듯 한 초록빛이 흘러나온다.
생명의 기운.
큐브가 점점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다.
다만 아직은 한 귀퉁이에 불과하다.
더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아마 이 진척도라면 완성까지 3일은 걸리지 않을까?
'금요일까지 끝내려면 조금 빠듯하겠네.'
첫 주 금요일에는 '그 이벤트'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때까지 작업을 끝마쳐 둬야 뽕을 제대로 뽑을 수 있다.
어쨌든 그건 그거고,
'학교 가야지.'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러다가 늦겠어.
* * *
학생 식당에서 토스트 하나, 커피 하나를 주문해 양손에 들었다.
먹으면서 어슬렁어슬렁 교실로 걸어가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나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으니 안 봐도 누구인지 뻔하다.
"신병철."
"어오씨깜짝이야!"
놀래 주려 왔다가 되레 놀라서 펄쩍 뛰는 신병철.
따라붙어 걸으며 볼멘소리를 내뱉는다.
"아니. 야, 너는 등에도 눈이 달렸냐?"
"비슷하지."
"거, 사람이 알면서도 속아 주고, 리액션도 취해 주고 그래야 되는 거 아닌가?"
"뭔 리액션이야. 먹을 거 들고 있는데."
그러다 커피 쏟아지면 네가 책임질래?
토스트도 먹는 중이니까 말 시키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신병철은 내 퉁명스러운 반응에도 불구하고 계속 옆에 붙어서 대화를 시도했다.
"고현우 서예인은 어디 가고 혼자 가냐?"
"트레이닝 센터에서 밤 샜다. 걔도 어디 있겠지."
고현우 역시 트레이닝 센터에서 등교할 텐데, 약간의 시간 차로 엇갈린 모양이다.
아마 교실에 가면 있지 않을까.
신병철이 물었다.
"공략전은 잘 쳤냐? 어제는 바빠 가지고 끝나고 얘기도 못 했네."
"리더 보드에서 내 이름 봤을 거 아냐."
"그게, 상위권 체크하느라, 헤헤."
상위권만 보느라 내 점수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는 뜻이다.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 서운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신병철에게는 기대 자체를 안 해서 대충 중하위권쯤에 깔려 있겠거니, 하고 신경을 껐었다.
지금도 별로 안 궁금하고.
하지만 아주 많이 자신만만한 표정에다가 꼭 점수를 물어봐 줬으면 하는 눈치라, 못 이기는 척 물었다.
"몇 점인데."
"흐흐, 놀라지 마시라. 이 몸이 무려 530점으로 50% 턱걸이를 하셨다, 이 말씀이야."
"네가? 어떻게?"
솔직히 조금은 의외였다.
잘해 봐야 400점대일 거라 예상했는데, 픽스 존이라서 그런지 제법 선방했나 보다.
내가 눈을 치켜뜨자 신병철은 한층 더 오만한 표정이 되었다.
사람을 가르치는 듯한 어조로 말한다.
"인생은 요령이란다. 요령이 중요하지."
"와, 정말 대단하시네요."
"고럼 고럼. 넌 몇 점이니?"
"683점."
신병철의 얼굴이 도로 겸손해졌다.
"...너 캐스터 아니었냐?"
"맞는데?"
"아니, 송천혜가 571이고 홍연화가 640인데, 네가 무슨 수로 683을 찍었어?"
나는 신병철이 했던 말을 되돌려주었다.
"인생은 요령이란다."
* * *
교실에 가면 고현우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더 일찍 온 것 같다.
대신 의외로 서예인이 앉아 있었다.
"...."
나를 바라보며 살랑살랑 손을 흔든다.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물었다.
"너 오늘은 일찍 왔다?"
"일찍 일어났어."
"어쩌다가?"
"...."
대답 대신 부스럭거리며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더니, 열어서 안쪽을 보여 준다.
한 입 거리 크기의 공룡 모양 쿠키들.
구운 지 얼마 안 됐는지 약간의 온기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넘어온다.
일찍 일어나서 쿠키를 구웠나 보다.
생각해 보니 열차에서 그런 약속을 했었지.
- 미안. 쿠키 맛있었는데.
- 또 해 줄게.
- ...진짜?
- 응.
그 기약 없던 약속이 벌써 지켜진 것이다.
역시 사람은 베풀고 살아야 하는 법이다.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나눠 먹으니까 수제 쿠키가 돌아오지 않는가.
하나 집어 먹어 보니 맛은 이전보다 조금 발전한 것 같았다.
단맛이 적고 담백한 것은 여전하다.
전략을 바꿨는지 초코칩 대신 검은깨가 들어갔는데, 애매한 순도 65% 카카오보다는 이게 낫지, 싶다.
서예인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길래, 매우 높은 비율의 진심을 담아 칭찬했다.
"음, 맛있네. 고소해. 공룡들도 아기자기하고 귀엽고."
"...?"
서예인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잠시간 그 상태를 유지하다가 나에게 묻는다.
"...공룡?"
"공룡 아니야?"
"...."
서예인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진 것 같았다.
뭔데. 이게 공룡이 아니면 대체 뭔데.
하나 집어서 확인해 보려고 종이봉투로 손을 뻗자 슬그머니 뒤로 뺀다.
"왜, 뭔데 그래."
"...곰돌이야."
그게 곰돌이였다고???
순간 혼란스러움을 느꼈으나 나는 애써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혔다.
더 이상 당황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앞으로 수제 쿠키는 구경조차 못 하게 될 것이다.
"어쩐지. 보고 곰인지 공룡인지 살짝 헷갈렸다. 거꾸로 봐서 그랬나 봐."
"...."
"한 개만 더 먹을게. 맛있어서 그래."
서예인은 여전히 미심쩍은 눈치였지만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던 종이봉투를 도로 열어 주었다.
과자를 하나 집고 입에 넣기 전에 슬쩍 살펴보았다.
"이렇게 보니까 곰돌이 맞네. 내가 잘못 봤다."
'이게 어딜 봐서 곰돌이야.'
입에서 나오는 말과 속마음이 정반대였다.
그래도 맛에는 흠잡을 구석이 없었기에 계속 종이봉투로 손이 갔다.
서예인과 번갈아서 하나씩 쿠키를 먹다 보니 고현우도 등교했다.
"김 형, 서 소저. 좋은 아침이오."
"이거 뭐 같아?"
서예인이 대뜸 고현우에게 유사 곰돌이 쿠키를 하나 내밀며 물었다.
반색하며 받아 든 고현우가 말했다.
"오! 매우 먹음직스러운 과자요. 마치 도마뱀이 살아 숨 쉬는 것 같구려."
"...."
'아이고....'
나는 속으로 탄식을 흘렸다.
서예인의 미간이 꿈틀거렸으나, 고현우는 그 미세한 변화를 잡아내지 못했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이럴 때는 재빨리 화제를 돌리는 게 상책이다.
"어땠냐."
특수연공실에서 운공을 해 본 소감이.
고현우가 감탄한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처음 해 보는 진귀한 경험이었소. 내공이 그토록 빨리 쌓일 줄은."
"비싼 값은 하지?"
"500포인트가 전혀 아깝지 않더군. 오히려 본인이 들인 수고에 비해 과한 기연이라고 느껴질 정도였소."
리플레이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만 해도 타인이 자신의 무공을 견식 한다는 점 때문에 탐탁지 않아 했는데, 지금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달았나 보다.
특수연공실에서 코어를 다듬는 건 중하급 효율의 영약을 끊임없이 먹는 것과 비슷한 효율이니까.
"조금만 더 노력하면 벽 하나를 넘어설 것도 같소. 김 형이 조언한 대로 당분간 특수연공실에서 살다시피 할 생각이오."
"그래, 당분간은 그곳에만 집중해. 시즌 패스도 가능한 빨리 구해다 줄게."
"고맙소."
고현우가 예를 갖춰 보였다.
이렇듯 훈훈한 분위기가 감도는 반면, 교실 전체를 놓고 보면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신병철 패거리가 혼란의 중심으로, <용살학원 심부름 서비스> 명함을 나눠 주며 선전한다.
"뭐든지 구해다 드립니다!"
"새 학기 특가 할인이 적용 중입니다!"
송천혜는 그들을 매우 못마땅한 눈으로 보지만, 아직 교칙을 어긴 건 아니기에 나서지 못한다.
언제 말썽을 일으키나 벼르고 있는 듯하다.
한소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배시시 웃고만 있고.
그러나 이런 시장통은 의외로 단숨에 정리되었다.
- 드르륵,
문이 열리자 떠들썩하던 교실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이수독이 문을 연 채로 교실 내부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자리에 앉으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모두 일사불란하게 제 자리를 찾아서 착석한다.
그제서야 이수독은 안으로 들어서서 교탁 앞에 섰다.
— ♩♪♬♩
정적 속에서 울리는 멜로디가 수업 시간임을 알렸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23화 1주 차 대인전 (1)
이수독은 매우 훌륭한 대인전 교사였다.
고인물 중의 고인물인 내가 보기에도 말이다.
그는 용살학원을 졸업한 후 지금까지 수많은 악인을 잡아 죽였다.
그 경험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풀어내니 유익한 수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단점 아닌 단점이라면, 경험담들이 하나같이 살벌하기 그지없다는 점이었다.
"...두목을 보니 굴복할 눈빛이 아니더군. 그래서 척추를 붙잡고 뽑아 버렸다. 다음으로 부두목을 붙잡았지. 이제 네가 두목이니까 다 꿇려라. 아니면 다음 두목을 알아보겠다...."
3반 학생들이 몸을 떨었다.
이수독의 어조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하고 아침을 먹었다'같이 일상적이었지만,
자세히 들어 보면 누구 머리를 터뜨렸다, 아구창을 으깨 버렸다, 목을 뎅겅 잘랐다 같은 흉흉한 소리들로 가득했다.
저 인간한테는 저게 일상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는 하다.
도적단 하나를 몰살시킨 이야기를 다 풀어낸 후 이수독이 시간을 확인했다.
곧 종이 친다는 사실을 깨닫고 수업을 마무리 짓는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마치기 전에 공지 사항을 전달하겠다. 오늘부터 아레나에서 대인전을 진행할 수 있다."
이수독이 가볍게 손짓하자 칠판에 글자들이 떠올랐다.
MAP:[무작위]
RULE:[데스매치][10분 제한]
"앞으로 대인전 환경은 모두 무작위로 결정된다. 제한 시간 역시 5분에서 10분으로 증가했으니 신중히 운영할 것. 1학년은 이번 주중에 최소 3회의 대인전을 치러야 한다. 불참할 시 점수가 자동으로 감소하니 주의하도록. 이상."
설명하는 도중 이수독의 시선이 자꾸 나에게 꽂히는 것 같았다.
저 인간이 나한테 관심을 가질 건수가 있던가?
당장 짐작 가는 게 없었기에 기분 탓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이수독이 3반을 떠나고, 나는 방금 막 도착한 퀘스트를 조금 더 자세히 살폈다.
[서브 퀘스트:1주 차 대인전]
▷목표:대인전 3회 완료. (0/3회)
▷기한:~일요일 자정.
▷보상:승리 횟수에 따라 차등 지급. (0/3승)
'이건 다 이겨야겠군.'
단순히 지나가는 퀘스트처럼 보이지만, 3연승을 했을 때의 보상이 아주 후한 편이다.
[생명의 큐브] 제작 시간을 단축시켜 주는 아이템이 나올 가능성이 크니 무조건 다 이길 생각이다.
나는 고현우를 불렀다.
"아레나 가자."
"지금 말이오?"
"이런 건 일찌감치 하고 치워 버리는 게 나아. 첫날 리플레이가 더 많이 팔리기도 하고."
배치 고사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대인전인 만큼 첫날에는 다들 눈치를 본다.
비슷한 점수대의 리플레이를 챙겨 본 다음에 들어가는 게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극적으로 간만 보다가, 금요일쯤부터 본격적으로 아레나에 사람이 몰릴 것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 치르는 대인전 리플레이는 더 수요가 많다.
포인트 벌이가 된다는 말에 고현우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체할 이유가 없지. 어서 갑시다."
바로 아레나로 이동하려는데, 서예인이 내 소매를 약하게 잡아끌었다.
나와 눈을 맞추고 이렇게 말한다.
"나, 오늘 시간 돼."
"...?"
서예인의 말에 귀 밝은 영웅 지망생들이 곧바로 반응했다.
여학생들은 저들끼리 입을 가리고 빠르게 소곤거리고, 남학생들 반은 음흉한 표정, 반은 부러운 표정을 짓는다.
고현우는 이걸 빠져 줘야 하나 내 눈치를 본다.
앞뒤 다 자르고 저렇게 말하면 당연히 오해하지.
이럴 때는 빠진 단어들을 채워 넣어 줄 필요가 있다.
"마력탄 수련 같이하자고?"
"응."
"오늘 시간이 될까 모르겠다. 저녁쯤에는 확실히 알 것 같은데, 그때 다시 얘기하자."
"알았어."
지금 내 최우선 목표는 금요일까지 큐브를 완성하는 것.
3연승 보상이 내 예상대로 나와 준다면 큐브가 더 빨리 만들어질 테고, 그렇다면 서예인에게 잠시 할애할 틈이 생긴다.
대인전 결과를 보고 결정하면 되겠지.
* * *
수업이 끝나자마자 아레나로 직행했기에 우리가 처음일 것이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선객이 있었다.
다른 반 수업이 조금 더 일찍 끝났나 보다.
길쭉한 창을 든 남학생 하나, 두꺼운 양손도를 든 남학생 하나.
무기의 형태나 전신에 흐르는 기도로 미루어 볼 때 둘 다 무인으로 짐작된다.
개중 창잡이가 내 얼굴을 알아본 듯했다.
"저자는...."
"일면식이 있는가?"
"송 소저에게 기권했다는 그자일세."
"아, 저자가 그 겁쟁이로군."
"사나이 실격이지. 실로 부끄러운 일이야."
대놓고 씹어 대지만 나는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랭킹 1위로서 사람들 입에 쉴 새 없이 오르내리던 때에는 시기와 질투로 점철된 비난들도 곧잘 쏟아졌었다.
그런 것들을 하도 겪다 보니 이제 겁쟁이 같은 단어에는 별 신경도 안 쓰게 되었다.
못 들은 척 지나치려는데, 이런 일에 면역력이 없는 고현우가 자기 일처럼 화를 냈다.
"참으로 졸렬한 자들이로고. 어찌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리 함부로 입을 놀린단 말인가?"
졸렬하다는 말에 발끈하려던 두 무인이 멈칫했다.
고현우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다.
공략전 배치 고사 수석이라 나름 유명인이다.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직감한 듯, 조금은 위축된 기세로 반박한다.
"흠, 흠, 우리가 뭐 틀린 말 했는가?"
"지금도 그쪽 뒤에 숨어서 한마디도 안 하는데, 과연 누가 졸렬한 것인지 잘 생각해 보시게."
"...."
고현우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 내가 나섰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촉이 와서다.
나랑 점수대가 비슷할 것 같다는 촉이.
나는 창잡이를 지목했다.
"너 몇 점이냐?"
"...300점이다."
"나돈데. 겁쟁이랑 동점이네?"
살살 긁자 창잡이가 입가에 차가운 비웃음을 머금었다.
"점수가 같다고 너 따위 잔챙이랑 동급인 줄 아느냐? 두 번째 경기에서 송천혜를 만나지만 않았어도 600점, 아니 900점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송천혜?"
듣고 보니 이 창잡이를 어디서 본 것도 같았다.
송천혜, 두 번째 경기, 대인전, 배치 고사....
기억을 되짚어 가다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생각났다. 벼락 맞고 실려 간 거, 너 맞지?"
"...!"
내가 송천혜에게 기권하고, 몹시 심기가 불편해진 송천혜의 다음 상대가 이 창잡이였다.
경기가 시작되는 즉시 허밍버드에 몸이 마비되고, 뒤이어 꽂히는 벼락을 맞아 단숨에 승부가 났었다.
그리고 그대로 실려 가 버리는 바람에 3경기를 치르지 못하고 부전패한 것이다.
"나 한마디만 해도 돼?"
"...말해라."
"한 방에 뻗을 거면 차라리 기권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
이 말에는 고현우뿐만 아니라 양손도를 든 남학생 역시 무언의 동의를 표했다.
창잡이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한 방이 아니라 두 방이다!"
"자랑이다 새꺄. 아무튼 300점이시라고?"
"...."
더 입을 열면 손해라 생각하는지 말없이 고개만 까딱이는 창잡이.
나는 턱짓으로 무대를 가리켰다.
"지금 여기에 우리밖에 없으니까 매칭 돌리면 바로 잡힐 것 같은데, 겁쟁이랑 한판 붙지?"
"좋다. 벽을 느끼게 해 주마."
양손도 남학생 역시 고현우에게 경기를 신청했다.
서로 큰 악감정이 없어서인지 비교적 온건한 말투였다.
"600점이시오?"
"그렇소."
"마침 잘됐구려. 괜찮다면 한 수 가르침을 청하고 싶소."
"좋소. 시작해 봅시다."
무대 근처에 마련된 단말기에 학생증을 스캔했다.
각자의 점수에 맞춰서 300점인 나는 창잡이와, 600점인 고현우는 도객과 경기가 잡혔다.
순간이동 마법진을 타고 이동하자 시야가 급변했다.
어제 같은 원형 투기장이 아니라 수풀이 무성한 벌판 위였다.
불어오는 바람이 잡초들을 흔들고, 흔들리는 잡초가 다리를 간질인다.
[김 호 100% vs 양지홍 100%]
[남은 시간 10:00]
저 친구 이름이 양지홍이구만.
나는 [대지의 스태프]를 한 손에 들었다.
반대쪽 마법진에서 나타난 창잡이, 양지홍도 두 손에 창을 꼬나쥐고 나를 노려보았다.
[3]
[2]
[1]
[Start!]
"단숨에 끝내 주마!"
경기가 시작되는 즉시, 양지홍은 창날을 앞세워 나에게 일직선으로 돌진해 왔다.
제법 많은 수련을 쌓은 듯 자세가 좋고 움직임도 상당히 쾌속하다.
문제는 나를 너무 얕보고 있다는 점이지.
"그래, 단숨에 끝내자."
- 파지직!
"...!"
나에게 도달하기 거의 직전에 양지홍의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옆구리를 내려다보니 작은 스파크가 튀기고 있다.
[허밍버드]에 격중당한 것이다.
"이...이것...은...!"
"이걸 또 당하냐."
배치 고사를 친 게 바로 어제니까 아직 마땅한 대처법을 준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원체 뇌 속성 마법사가 드물다 보니까 송천혜 말고 또 누가 허밍버드를 익혔겠나, 하는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임한 것 같은데,
'그 누구가 나야.'
내가 송천혜한테서 허밍버드를 복사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으리라.
비틀거리는 양지홍에게 다가가서 대지의 스태프를 번쩍 들어 올렸다.
"자... 잠시만 기다려라...."
"미안하다. 송천혜처럼 깔끔하게 두 방으로는 못 끝내겠네."
- 퍽! 퍽! 빠각!
대지의 스태프로 양지홍의 머리를 연거푸 내리쳤다.
녀석은 몇 대 버티다가 결국 정신을 잃고 바닥에 철퍼덕 엎어지고 말았다.
[김 호 Win vs 양지홍 Lose]
[대인전:300+30점]
양지홍이 전투 불능에 빠지자 경기가 종료되고 30점이 들어왔다.
순간이동 포탈을 타고 나가서 기다리고 있자니 양지홍이 기절한 채로 땅바닥에 나타났다.
송천혜에게 당했을 때는 상태가 매우 심각해서 실려 갔었는데, 지금은 그 정도까진 아니라 교직원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적당히 힘 조절을 하기도 했고.
"헛!"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는 양지홍.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발견하고, 학생증 뒷면의 점수를 확인하곤 상황 파악을 마쳤다.
어이없는 패배가 분했는지 이를 부득 간다.
"크윽...."
"내가 이겼네?"
"...방심했을 뿐이다. 다시 붙으면 내가 이긴다."
"그래? 그럼 또 붙어."
그렇게 성사된 리벤지 매치.
이번 전투 장소는 황야였다.
[김 호 100% vs 양지홍 100%]
[남은 시간 10:00]
[3]
[2]
[1]
[Start!]
시작하자마자 뇌전으로 이루어진 벌새를 만들어 날려 보냈다.
마주 달려오던 양지홍이 허밍버드에 닿기 직전에 강하게 땅을 걷어차며 옆으로 뛰었다.
허밍버드가 스쳐 지나간 것을 확인하고, 그대로 나에게 창을 찔러 든다.
"끝이다!"
"응, 끝이야."
- 파지직!
양지홍의 몸이 마비되었다.
잘 안 돌아가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서 등을 확인하니, 스파크가 튀기고 있었다.
"이... 이런 빌어먹을...."
"피한 줄 알았니?"
허밍버드는 단순한 투사체가 아니다.
목표에 적중하거나 격추되기 전까지 술자의 조작을 따라 끊임없이 비행한다.
양지홍을 지나쳐 간 허밍버드가 곧바로 방향을 틀고, 그를 뒤따라와서 등에 꽂힌 것이다.
녀석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이냐...!"
"나중에 리플레이 돌려 봐라."
- 퍽! 퍽! 빠각!
묵직한 나무 스태프로 녀석의 정수리와 관자놀이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김 호 Win vs 양지홍 Lose]
[대인전:330+29점]
다시 마법진을 타고 밖으로 이동했다.
고현우와 도객은 아직 한창 싸우는 중인 듯하다.
내 대인전이 빨리 끝나긴 했지.
거의 자판기 수준으로 점수를 뽑아냈다.
"헉!"
정신을 차린 양지홍.
앉은 자리에서 자기 창을 붙잡고 부들부들 떨다가 입을 연다.
"...한 번만 더 붙자. 이번에는 반드시 내가 이긴다."
"싫은데. 두 판 이겼으면 충분하지."
"이렇게 끝내면 내 체면이 서지 않는다!"
"그건 네 사정이고. 피곤하니까 오늘은 그만할란다."
"크윽...."
"정 하고 싶으면—"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정 하고 싶으면 뭐냐? 라고 양지홍이 묻기 직전까지 기다렸다가, 한 손을 펴서 내밀었다.
"—수업료."
"...!"
퀘스트를 완료하려면 어차피 대인전을 세 번 치러야 한다.
이번 주 할당량이기도 하고.
하지만 일부러 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며 몸값을 올렸다.
짧은 시간 파악한 양지홍의 성격상, 내가 거는 조건을 수용해서라도 승부를 보고 싶어 할 것 같았으니까.
사실 대인전 승패라는 게 이 정도로 목숨 걸고 매달릴 일은 아니다.
준비가 덜 돼서 2패 했구나, 하고 흘려보내도 아무 문제 없다.
하지만 그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이렇게 끝내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양지홍이 품 안에서 작은 목함을 꺼내 열어 보였다.
영단 하나가 들어 있다.
"우리 가문에서 제조하는 영단이다. 이걸 주지."
"그거 괜찮네. 조건 하나만 더 붙이자."
"뭐냐."
"이번 경기는 비공개로. 리플레이 저장도 안 하고 내용도 함구하는 거다."
"좋다. 내 입장에서도 새어 나가서 좋을 게 없으니까."
경기가 성사되었다.
나는 단말기에 학생증을 찍으며 말했다.
"네가 납득할 때까지 어울려 주마."
서포터가 다 해먹음
24화 1주 차 대인전 (2)
[3]
[2]
[1]
[Start!]
"...."
양지홍은 더 이상 무모하게 돌진해 오지 않았다.
방어적인 자세를 유지한 채, 한 걸음씩 천천히 거리를 좁혀 오기 시작했다.
제법 정답에 가까웠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람이 세 번이나 당했으면 배우는 게 있어야지.'
[허밍버드]를 시전하고 날려 보냈다.
다가오는 벌새를 마주하며 양지홍이 안광을 빛냈다.
창이 뒤로 당겨졌다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허밍버드가 날아가던 도중 꿰뚫려 흩어졌다.
두 번째로 던진 것도 창을 휘둘러 베어 버린다.
'이건 너무 쉬웠나?'
봐준답시고 일부러 단조로운 궤적으로 날려 보냈는데, 가볍게 쳐 내는 걸 보니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것 같다.
다시 허밍버드를 시전했다.
벌새가 날아가면서 불규칙적으로 흔들렸다.
양지홍이 그것을 찌르려 들었으나, 벌새는 꿰뚫리기 직전 유려한 비행으로 피하곤 창대를 타고 올랐다.
양지홍이 훌쩍 옆으로 뛰자 그것마저 예상했다는 듯 궤도가 급격히 꺾이며 따라붙는다.
- 파지직!
"크으윽...."
양지홍이 오만상을 썼다.
조금은 충격을 받은 것도 같았다.
가문의 영단까지 주면서 성사시킨 경기인데, 고작 세 수 만에 끝나 버리다니.
내가 물음을 던졌다.
"납득했나?"
"이럴 수는 없다. 더 기회가 있었더라면!"
"그렇겠지. 아직이구만."
"...."
"...."
"...?"
분한 기색으로 노려보던 양지홍의 표정이 점점 의아하게 변했다.
허밍버드를 적중시켰으면 다가와서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내가 제자리에 그대로 선 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 끝낼 건가?"
"말했지. 납득할 때까지 어울려 준다고."
"...!"
"마비 풀리면 말해라."
영단까지 받았으니 수업료 값은 할 생각이다.
양지홍의 낯에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지나갔다.
그러다가 하는 데까지 최대한 해 보자고 결론을 냈는지 각오가 선 눈빛이 되었다.
곧 다시 창을 움켜쥐고 자세를 잡는다.
준비가 되었다는 뜻.
내 손 위에서 스파크가 튀겼다.
"다시 간다."
* * *
계속해서 뇌전의 벌새가 날았다.
양지홍의 실력도 대강 파악했겠다, 나는 적절하게 난이도를 조절했다.
매우 쳐 내기 까다롭도록, 그러나 아주 손도 못 쓰고 당하지는 않도록.
- 파지직!
마비 상태에 빠지면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 주고, 준비가 되면 다시 마법을 시전한다.
양지홍은 이제 자존심을 내려놓고 하나라도 더 배워 가고자 마음먹은 듯했다.
당초의 목적은 나를 쓰러뜨리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허밍버드에만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
다채로운 움직임으로 날아다니며 그를 노리는 벌새를 상대로 미친 듯이 창을 찌르고 휘두른다.
그러자 실력이 쭉쭉 늘어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 파지지직!
"큭."
여덟 번째로 허밍버드에 당한 양지홍.
나는 막간을 틈타 스코어보드로 시선을 돌렸다.
[김 호 100% vs 양지홍 93%]
[남은 시간 00:43]
대인전 제한 시간 10분이 거의 끝나 간다.
몸을 추스르는 양지홍에게 물음을 던졌다.
"이제 납득했나?"
"...납득했다."
이제는 깨달았으리라.
앞선 두 경기에서 패배한 것은 자신이 방심했거나 운이 없었던 게 아니라, 순전히 실력 차이였다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보여 주지. 받아 봐라."
['증폭'을 사용합니다.]
['허밍버드'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E->C)]
전류로 이루어진 벌새가 소환되었다.
몸집이 더 크고 뿜어내는 빛이 선명하다.
그 차이를 양지홍도 알아챘는지 바짝 긴장하며 창을 꼬나 쥐었다.
- 팟!
"!!"
허밍버드가 성큼 거리를 좁혔다.
양지홍의 시선에는 마치 한순간 공간을 뛰어넘은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랭크가 두 단계나 상승한 C급 허밍버드.
안력을 집중해도 쉽사리 움직임을 잡아낼 수 없다.
- 팟, 팟, 팟!
허밍버드가 몇 번의 도약만으로 지척까지 접근했다.
양지홍의 창끝이 잘게 떨리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앞에서 지켜봤음에도 끝내 움직임을 읽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듯 이를 악물고, 기세를 있는 대로 끌어올려 창에 담았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전방에 내질렀다.
- 콰아아아—!
막대한 경력이 지나가며 모든 것이 쓸려 나갔다.
최소한 양지홍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벌새가 그의 가슴팍에 내려앉았다.
- 파츠츠츠츠!
뇌전의 폭발이 양지홍을 집어삼켰다.
섬광이 가시자 그는 창대로 바닥을 짚고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끝내 한쪽 무릎이 바닥에 꿇리고 만다.
혼잣말을 하듯 바닥에 대고 말한다.
"실력을 한참 더 숨기고 있었나.... 처음부터 내가 이길 수 없는 승부였군."
"정진해라, 너는 가능성이 있어."
"...내가 졌다."
[김 호 Win vs 양지홍 Lose]
[대인전:359+27점]
무대 밖으로 이동하니 때마침 고현우와 양손도 남학생도 경기를 끝마친 듯했다.
모두 입가에 잔잔한 웃음기가 감도는 걸 보니 훈훈하게 마무리됐나 보다.
"좋은 승부였소."
"피차일반이오. 소협의 검기를 보고 배우는 바가 많았다오."
"다음 기회에 또 겨뤄 봅시다."
다음에 다시 만나서 바둑이나 같이 두자 같은 뉘앙스다.
고현우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이겼냐?"
"2승을 거두었다오. 김 형은?"
"난 3승 다 끝났다. 더 할 거야?"
"온 김에 세 번째까지 마무리를 짓고 가는 편이 깔끔할 듯하오. 김 형은 먼저 가시오."
아예 단말기에 학생증을 스캔해 두고 다음 상대를 기다리는 중이다.
어차피 관전도 못 하고, 끝나고도 따로 연공실에서 시간을 보낼 테니 내 입장에서는 여기서 더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라, 먼저 간다."
"내일 봅시다."
"잠깐."
걸음을 옮기려는 나를 양지홍이 불러 세웠다.
처음 만났을 때의 깔보던 기색은 온데간데없다.
나에게 정중히 예를 갖춘 다음 입을 연다.
"무례를 사과하고 싶다. 내가 사람의 일면만 보고 경솔히 판단했어. 너는 겁쟁이 따위가 아니다."
"아니. 당분간은 계속 겁쟁이인 걸로 해 둬."
"당분간은 계속 겁쟁이라...."
잠시 내 말을 곱씹어 보던 양지홍이 무엇인가 깨달은 듯 피식 웃었다.
"...그렇군. 당분간은 계속 겁쟁이인 게 좋겠다. 나만 당할 수는 없지 않겠나."
내가 계속 얕보여야 희생자가 더 늘어날 테니까.
그러면서 목함 하나를 더 꺼내 건넨다.
"영단 하나로는 셈이 안 맞겠더군. 덕분에 많이 배웠다."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나는 영단을 냉큼 받아 챙겼다.
뜻밖의 수확이다.
제일 중요한 대인전 퀘스트도 클리어했다.
[서브 퀘스트:대인전 1주 차](완료)
▷목표:대인전 3회 완료. (3/3회)
▷3승 보상:랭크 업(F)
퀘스트 보상은 큼지막하게 'UP'이 적힌 양피지 한 장.
[랭크 업]이라는 아이템이다.
사용하면 종류를 불문하고 스킬이나 특성의 랭크를 한 단계 올려 준다.
내가 막 받은 F등급 [랭크 업]이라면 어떤 F랭크 스킬이든 곧바로 E랭크로 승급시킬 수 있다.
이것의 사용처는 당연히,
['랭크 업(F)'을 사용합니다.]
['증폭'의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F->E)]
[지속시간 1:00->2:00]
[재사용 대기시간 1시간->50분]
매우 뛰어난 효용성을 자랑하는 스킬이라 최우선적으로 올려 줄 가치가 있다.
스킬을 증폭하는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났으며 재사용 대기시간도 10분 줄었다.
즉, [생명의 큐브] 완성에 들어가는 시간을 대폭 단축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원래는 금요일에 빠듯하게 맞추는 정도였다면, 이제는 수요일 중에 끝날 만큼 널널해졌다.
그리고 시간이 널널해졌다는 말은 곧,
'마력탄을 좀 봐줄 수 있겠어.'
서예인의 수련에 할애할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다.
* * *
서예인과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쳤다.
함께 트레이닝 센터로 가서 마나연공실 하나를 잡고 들어갔다.
"지금부터 1차 마력탄 특강을 시작하겠습니다."
"와—"
서예인이 소리 없는 박수를 쳤다.
곧바로 마력총을 꺼내 들길래 손을 들어 제지했다.
"총은 넣어 둬. 당분간은 안 쓸 거야."
"응."
"우선 마력탄 하나 만들어 볼래?"
직접 봐야 어디가 부족한지 파악할 수 있으니까.
내 지시를 따라 서예인이 마나를 끌어올렸다.
손 위에 모여든 마나가 압축되며 몽실몽실한 마력 뭉텅이를 형성했다.
나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진짜 대단하기는 하다....'
어떻게 이런 마력탄도 아닌, 대충 만든 마력 뭉텅이로 송천혜한테 판정패를 했는지.
게다가 서예인의 대인전 점수는 600점.
송천혜한테 패한 경기 말고는 2승을 했다는 뜻이다.
고등급 라이플이나 투명 길리슈트 등 신입생이 쓰기에 과하게 좋은 장비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전부 설명이 안 됐다.
'조작은 어떤가 볼까.'
"자, 따라 해 보세요."
마나를 조작해 원을 그렸다.
서예인도 똑같이 마나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원을 삼각형으로 바꾸자, 서예인의 동그라미도 세모로 바뀌었다.
원, 삼각형, 사각형, 별....
다양한 도형을 따라 그리게 했다.
'마나 조작은 곧잘 하는군.'
'곧잘'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굉장히 뛰어난 축에 속한다.
본인 말로는 마력 수련을 안 해 봤다는데, 그러고도 이 정도라면 그냥 타고났다고 봐야 한다.
짐작건대 내가 올바른 방향만 제시해 줘도 쑥쑥 성장할 것이다.
"오늘은 '분배'부터 배워 보자."
유리 상자를 꺼냈다.
트레이닝 센터에서 수련용으로 제공하는 아이템이다.
두 손으로 손쉽게 안을 수 있는 크기이며 한쪽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다.
"봐 봐."
구멍을 통해 마나를 불어 넣자 유리 상자가 금세 마나로 가득 찼다.
의도적으로 마나를 더 불어 넣으니 조금씩 새어 나온다.
"정확히 이 상자만큼이 F급 [마력탄]에 들어가는 정량이야. 탄환 한 발당 적절한 양을 사용하는 게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는."
유리 상자를 한 차례 흔들었다.
상자 속 마나의 색깔이 그라데이션처럼 짙은 군청색부터 흰색에 가까운 하늘색까지 단계별로 나뉘었다.
"이렇게 일부분만 마나가 짙거나 옅으면 안 돼. 완전한 단색이 되도록 고르게 마나를 분배하는 것, 그게 '분배'의 핵심이다."
서예인이 자기 어깨 위로 손을 들어 올렸다.
질문이 있다는 뜻.
"네~ 말씀하세요."
"왜 마나를 고르게 분배해야 돼?"
"보면서 얘기하자."
그라데이션을 띠던 상자 속 마나가 단숨에 일점으로 모여들며 압축되었다.
완성된 마력탄을 서예인에게 보여 주었다.
자세히 봐도 알아차리기 힘든 아주 미세한 흠집이 나 있다.
"고르게 분배되지 않은 마나는 압축되는 과정에서 구겨져. 지금은 이대로 써도 상관없지만, 일정 경지 이상부터는 이 흠집이 문제가 되지."
가령 고등급 마력탄은 이 상자에 담는 양보다 훨씬 많은 마력을 압축하는데, 이때 흠집이 나 있으면 그곳에서 마나가 줄줄 새거나 그대로 형태가 무너져 버린다.
그때 가서 몸에 밴 악습관을 고친다고 고생하느니, 처음부터 제대로 익혀 놓는 게 낫다.
"다시 정리하면, 상자의 정량에 맞춰 마나를 불어 넣기, 색깔이 다르지 않도록 고르게 분배하기. 마지막으로,"
- 딱!
손가락을 튕기는 즉시 마력탄이 만들어졌다.
"위 두 과정을 한 호흡 만에 해내기. 여기까지 할 수 있으면 '분배'는 마스터했다 봐도 돼. 이제 직접 해 봐."
서예인에게 유리 상자를 건넸다.
서예인이 구멍에 대고 마나를 불어 넣자 잉여 마나가 줄줄 흘러나왔다.
상자 내부도 각종 푸른색으로 알록달록하다.
한 호흡 만에 해내는 건 아직 꿈도 못 꾸고.
"...."
시도할 때마다 계속 실패하자 서예인의 눈썹이 조금 찡그려졌다.
조언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분히 감각적인 영역이라 이 부분에서는 별달리 해 줄 조언이 없다.
해낼 때까지 계속 연습해서 깨우치는 게 최선이다.
"난 옆방에 가 있을 테니까, 끝나면 메시지 보내."
"알았어."
말은 이렇게 했지만,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일이 아니었다.
사실상 숙제로 내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나대로 할 일이 있었다.
빈 마나연공실을 하나 찾아서 자리를 잡고, 큐브 설계도를 꺼냈다.
- 촤라라라락!
손으로는 척척 큐브를 완성해 나가며, 머리로는 딴생각을 했다.
'얼마나 걸릴까?'
과거에 육성했던 S급 총사가 한 트럭.
지금의 서예인처럼 기초부터 쌓아 올린 총사도 한 다스는 넘는다.
그중에서 제일 빠른 녀석이 '분배'를 깨우치는 데 이틀 걸렸고, 나조차도 처음에는 하루를 꼬박 썼었다.
이 정도까지는 기대하지 않지만, 아마 서예인의 재능이라면 사흘 중에는 해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서예인:끝]
서포터가 다 해먹음
25화 1주 차 대인전 (3)
['코어'의 랭크가 상승했습니다. (E->D)]
[김 호]
▷스킬
증폭(E)
복사-스킬[2/2]
1. 허밍버드(E)
2. 마법공학(B)
▷특성
코어(D)
군주(F)
복사-특성[1/1]
1. 원소 저항(S)
▷장비
교복(D)
대지의 스태프(E)
▷인벤토리
10실버
10x10x10 큐브 설계도
[대인전:386점]
[공략전:683점]
(949 +1,200pt)
오늘도 아침이 밝아 올 무렵까지 큐브 제작과 명상을 병행했다.
암흑빙정을 흡수하고 남은 마나에 양지홍에게 수업료로 받은 영단 두 개를 더해 D랭크 [코어]를 달성할 수 있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마법공학이나 허밍버드를 증폭해서 쓸 때마다 마나 소모가 극심했었다.
이제 조금 더 숨통이 트인 셈이다.
[생명의 큐브] 제작도 상당히 많이 진척됐다.
흘러나오는 초록빛 기운이 더욱 짙어졌으며, 한구석에서는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까 말까 한다.
이제 절반 이상 왔다.
하루만 더 투자하면 완성이다.
급한 일들을 처리하고 나니 서예인은 어쩌고 있나, 까지 생각이 닿았다.
큐브나 명상에 집중할 때는 반쯤 무아지경에 빠지는 이유도 있고, 하룻밤 사이에 '분배'를 깨우칠 리도 없기에 비교적 신경을 덜 썼다.
그런데 학생증 뒷면을 확인해 보니 메시지가 와 있었다.
[서예인:끝]
'끝났다고?'
하다가 싫증이 나서 그만둔다는 뜻은 아닐 테고, 정말로 '분배'를 익혔을 가능성이 큰데....
서예인이 쓰던 마나연공실로 가 보니 공실이었다.
내 답장이 한참 늦어서 그냥 갔나 보다.
[김호:님]
[김호:어딤?]
[김호:어디냐]
메시지를 몇 개 보냈으나 답장이 돌아오지 않는다.
'자나 보네.'
'분배' 수련을 하는 내내 유리 상자에 마나를 계속 불어 넣었을 테니 지칠 만도 했다.
이럴 때는 마음을 느긋하게 갖는 편이 낫다.
정말 내 숙제를 벌써 끝냈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조바심을 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만나서 확인해 보면 되겠지.
* * *
[서예인:가는 중]
[서예인:(달리는 강아지 이모티콘)]
내 추측대로 서예인은 자러 간 게 맞았다.
그것도 아주 곤히 푹 주무셨다.
어떻게 아는가 하면, 저 답장이 점심시간이 가까워서야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의 수업은 당연히 모조리 빼먹었고.
-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자 3반 학생들의 이목이 일제히 서예인에게 꽂혔다.
서예인이 무심히 그 시선들을 지나쳐 터덜터덜 자기 자리로 발걸음을 옮기는 도중,
"서예인."
이수독의 차가운 목소리가 서예인을 불러 세웠다.
매서운 눈빛을 보내며 추궁하듯 묻는다.
"왜 지각했나."
"늦자믈잣서효—"
작은 하품과 함께 답하는 서예인.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수독의 눈빛을 받아넘기는데, 오히려 상황을 지켜보던 학생들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인간 백정을 앞에 두고 저런 태도라니, 오늘 시체 하나 치우나 싶을 것이다.
어쩌면 시체도 못 찾을지도 모르고....
"뭐 하다 늦잠을 잤지."
"마력 수련을 했어요."
"무슨 수련."
"마력탄 부여, 래요."
—래요, 라고 끊는 부분에서 서예인의 눈동자가 무의식중에 나를 향했고, 이수독은 그걸 캐치한 듯했다.
갑자기 내 쪽으로 눈을 번뜩이는 걸 보면 말이다.
심지어는 눈빛이 더 강렬해진 것 같다.
'부담스럽네....'
왜 볼 때마다 저러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양반이랑 접점이 없는데....
이수독은 나와 서예인을 번갈아 노려보며 잠시 무슨 생각을 하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컨디션 관리에 신경 쓰도록. 또 늦으면 벌점이다."
"네."
수업이 재개되었다.
더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금세 점심시간이 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 * *
"'분배'를 마스터했다고?"
"응."
"한번 봅시다."
서예인이 한 손을 펴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나의 정육면체가 나타났다.
유리 상자를 쓰지 않고도 F급 [마력탄]의 정량에 맞는 마나를 사용하며, 내부의 마나 역시 고르게 분배되고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해."
조금도 흠잡을 구석이 없는 완벽한 '분배'였다.
익히는 속도도 나보다 빨랐다.
하루를 꼬박 쓴 내가 <용살학원>의 역대 최단 기록이었는데, 서예인은 그것을 반나절 만에 해내며 깨뜨려 버린 것이다.
가히 악마적인 재능이었다.
'이러면 가르칠 맛 나지.'
"오늘도 마력탄 수련할까?"
"좋아."
서예인은 내 제안을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수락했다.
우리는 어제와 똑같이 마나연공실 하나를 잡고 들어갔다.
"지금부터 2차 마력탄 특강을 시작하겠습니다."
"와—"
서예인이 다시 소리 없는 박수를 쳤다.
나는 '분배'가 끝난 마나 정육면체를 손 위에 띄워 올렸다.
"마력탄은 '분배'가 반, 그리고 '압축'이 나머지 반이야."
정육면체의 크기가 단번에 절반으로 압축되었다.
작아진 정육면체가 또 절반, 그 절반으로 계속해서 줄어들다가, 마침내 탄환 크기까지 작아졌다.
"이렇게 점점 줄이는 방식부터 해 보자."
"응."
서예인이 마나 정육면체를 만들었다.
그대로 정신을 집중하자 이곳저곳이 울룩불룩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
그러다가 결국 한쪽이 무너져서 구멍 난 풍선처럼 마나가 새어 나간다.
슬쩍 내 눈치를 살피지만 내 입장에서는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다.
원래 처음에는 다들 그렇지.
"다시."
정육면체가 위아래로 눌려 납작해졌다가 원상 복구되었다.
또 위로 길쭉하게 늘어났다가 원상 복구.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또다시 구멍 난 풍선처럼 찌그러진다.
"다시."
서예인이 계속해서 압축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만 했다.
다시, 다시, 다시.
횟수가 늘어갈수록 내 마음속의 의아함도 커져 갔다.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이 아닌데?'
서예인이 무너져 가는 마나 정육면체를 손에 든 채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하지만 어쩐지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처럼 보인다.
이런 건 직접 깨우치는 게 제일 좋은데, 약간의 방향성 정도는 제시해 줘야겠다.
"마나."
곧바로 새로운 마나 정육면체를 만드는 서예인.
나는 검지 끝에 아주 작은 마나 알갱이를 모은 뒤 정육면체를 콕 찔렀다.
- 퐁,
알갱이가 정육면체를 파고들어 정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저걸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해 봐. 밖에서는 압박하고, 안에서는 끌어당긴다는 이미지로."
"...."
살짝 고개를 끄덕인 서예인이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동안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곧 정육면체의 크기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줄어들고 또 줄어들다가 마침내 작은 탄환이 되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이걸 한 번에 성공하네.'
방향성만 제시해 줬다고 단박에 감을 잡는 게 천재는 천재구나 싶다.
서예인은 어려운 문제가 풀려서인지 조금 들뜬 기색이었다.
"이제 어제랑 똑같이 연습하면 돼. 한 호흡 만에 해낼 수 있게."
- 딱!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엄지와 검지 사이에 마력탄이 끼워져 있었다.
'분배'와 '압축'이 찰나에 이루어지면, 정육면체가 만들어지고 압축되는 과정은 보이지도 않고 탄환만이 남는다.
그 수준에 이르면 비로소 [마력탄] 스킬이 주어진다.
내 클래스가 서포터라서 그렇지, 총사였다면 지금쯤 마력탄 수준만 C랭크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옆방에 가 있을게. 스킬 얻으면 메시지 보내."
"응."
생명의 큐브를 만지면서 기다렸다.
일찍 끝나리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에 깊이 집중하지는 않았다.
과연 [증폭]을 두 번밖에 시전하지 않았는데 메시지가 왔다.
[서예인:얻었어]
[김호:마력탄?]
[서예인:ㅇㅇ]
[서예인:(덩실덩실 곰돌이 이모티콘)]
[김호:ㄱㄷ]
마나연공실에 들어서자 서예인이 보란 듯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 위에 푸른빛을 지닌 탄환이 놓여 있다.
완벽하게 조형된 F등급 마력탄이.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보면서도 안 믿기네.'
분배에서 압축, [마력탄] 스킬 습득까지 모두 합해 한나절이 안 걸렸다고 말하면 과연 누가 믿을까.
모든 과정을 지켜본 나조차도 안 믿기는데.
괜스레 욕심이 생겨난다.
시간도 한참 절약했겠다, 진도를 한 단계 더 빼도 괜찮을 것 같다.
"하는 김에 E급까지 해 볼래?"
"응."
트레이닝 센터에서 더 커다란 유리 상자를 빌려 왔다.
E급은 세 배 이상의 마나를 압축하기에 정량부터 F급보다 많다.
분배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F급에서 감은 충분히 잡았을 테니, E급은 훨씬 적은 시간을 소모할 것이다.
그날, 서예인은 끝내 [마력탄]의 랭크를 한 단계 올리는 데 성공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