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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픽스 존 (3)

[김 호, 683점, 38%]

내 성적은 리더보드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올해 기수의 전반적인 수준이 높아서인지 예상보다 다소 밀려난 편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아무 문제 없이 중위권 이상으로 공략전을 끝마칠 수 있을 것이다.

배치 고사가 제법 진행된 이 시점에서 신입생들의 대화 주제는 둘로 나뉘었다.

리더 보드와 시험 내용.

그리고 시험 내용 대부분은 앓는 소리였다.

- 아씨, 나 완전 죽 쒔다.

- 나도. 들어가니까 무슨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더라. 말을 안 들어.

- 그러니깐. 칼을 휘두르는데 칼이 느려.

- 살다 살다 고블린 잡는 게 빡센 날도 오네.

- 선배들이 싫어할 만해.

평소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스킬과 특성이 많을수록, 픽스 존의 F랭크 고정이 더 크게 체감될 것이다.

익숙해지려면 앞으로 고생깨나 하겠지.

싫어하는 것도 이해는 되지만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픽스 존]은 그리 흔한 규칙은 아니지만 잊을 만할 때마다 한 번씩은 튀어나온다.

몇몇 악명 높은 보스 몬스터들이 자기 던전에 배치하기도 해서, 잘나가던 파티가 픽스 존에서 몰살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 참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다면 최대한 빨리 익숙해지는 수밖에.

[이성현, 951점, 1위]

[한소미, 928점, 2위]

[모용준, 903점, 3위]

최상위권은 이런 악조건에도 최상위권다웠다.

한소미 위아래에 자리 잡은 이름들이 바로 신병철한테 전해 들었던 유망주들인가 보다.

이성현이 소드마스터네 아들, 모용준이 검성의 손자랬지.

그런데 얘들 실력이 한소미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고현우도 해 볼 만하겠는데.'

열차에서 한소미와 붙었을 때에도 검술로는 안 밀렸으니까.

검술 한정으로 고현우=한소미=유망주들 삼단 논법이 성립된다.

규칙도 픽스 존이라 스펙 요소가 거의 배제되었으니, 순위권에 오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과연 몇 점을 받을지 은근히 기대가 된다.

주위를 둘러봐도 눈에 안 띄고, 리더보드에 이름도 없는 걸 보면 아직 시험을 치르는 중인 듯하다.

리더 보드와 순간이동 포탈을 번갈아 바라보며 기다리는데, 고현우 대신 서예인이 먼저 걸어 나왔다.

천천히 고개를 움직이며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나를 발견하고 다가온다.

내가 물었다.

"어때, 할 만했냐."

"...어려웠어."

[서예인, 781점, 21%]

어려웠다면서 성적은 썩 나쁘지 않았다.

픽스 존은 총사나 마법사 등 마력 기반 클래스들에게 매우 불리한 규칙이다.

극히 제한된 마력으로만 점수를 내야 하니까.

고득점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차라리 나처럼 맨몸으로 다 때려 부수는 게 더 쉽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총사로서, 첫 시도에서 상위 21%는 아주 괜찮은 점수다.

손에 여전히 라이플이 들려 있는 걸 보면 내가 말해 준 방식대로 운영한 것 같다.

- 와-!

리더보드를 주시하던 학생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인가 하니.

1위가 갱신되어 있었다.

[고현우, 1,023점, 1위] New!

[이성현, 951점, 2위]

[한소미, 928점, 3위]

"오."

높은 확률로 순위권에 오르겠다 싶었는데, 기어이 공략전 수석을 달성하고 만 것이다.

그것도 차석과 꽤 큰 차이로.

관중들이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열광했다.

직접 겪어 보았기에 저게 얼마나 대단한 점수인지 아는 것이다.

- 1,000점이 가능한 점수였구나.... 나는 쥐며느리만도 못한 놈이었어....

- 쟤 어디 소속이야? 검술 동아리?

- 아니. 우리 동아리에는 없는 앤데.

- 내가 알아봤는데 무소속이래.

- 무소속이 유망주들 다 깨고 1위 먹었네.

- 쟤 아까 대인전에서 조벽이랑 붙지 않았나?

- 그랬을걸.

- 어쩐지, 아까도 잘 싸우더라.

- 이따 리플레이 챙겨 봐야겠네.

당당한 걸음으로 군중을 가로지르는 고현우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고현우가 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전부 김 형 덕분이오."

"내 덕분은. 그냥 네가 잘한 거지."

"아니. 점심시간 동안 기력을 회복해 두지 않았더라면 이와 같은 고득점은 내지 못했을 거요."

그게 그렇게 되나?

과하게 해석한 감은 있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군중들이 고현우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옆에 있는 나에게도 관심이 쏠렸다.

- 옆에 쟤는 누구야?

- 송천혜한테 기권한 걔네.

- 아~ 그 겁쟁이?

- 벌써부터 고현우한테 빌붙는 거야?

- 하여간 꼭 저런 놈이 있어요. 저럴 노력으로 실력이나 키울 것이지.

첫인상이 영 안 좋아서인지 고현우랑 대화만 나누는데도 이미지가 실시간으로 악화되는 중이다.

그런 수군거림이 귀 밝은 고현우에게 안 들릴 리가 없었다.

삽시간에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군중들에게 일갈하려는 고현우를 말렸다.

"됐어, 놔둬."

"허나 김 형."

"괜찮다니까."

"...알겠소. 김형의 뜻이 그러하다면."

내가 단호하게 끊자 입을 다물고 분을 삭인다.

여전히 표정을 굳힌 채.

수군거림이 계속 들려왔으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오늘이 학기 첫날인데 날 씹어 댈 거리라 해 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때마침 시험을 마친 송천혜에게 관심이 분산되기도 했고.

"...."

심력을 잔뜩 소모하고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는 여느 학생들과는 달리, 송천혜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었다.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지나가던 송천혜가 잠시 속도를 늦추더니, 슬쩍 곁눈질로 나를 흘겼다.

그리고 가던 길을 마저 간다.

문득 쟤는 몇 점을 받았을까 궁금해졌다.

리더 보드를 맨 위에서부터 쭉 읽어 내려갔으나,

'없네.'

40%쯤 내려왔는데도 송천혜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굳이 아래까지 샅샅이 뒤지고 싶지는 않다.

'상위권에 없으면 다 본 거지.'

썩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나 보다.

마법사들도 픽스 존에서 고전하는 편이니까 아주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신경을 끄려고 했는데, 자꾸 시선이 느껴진다.

"...."

송천혜가 내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평소의 못마땅한 기색이 아니라, 왠지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다.

시선이 마주치면 다시 홱 고개를 돌려 버린다.

'쟤는 또 왜 저런대.'

* * *

송천혜는 상당히 기분이 저조했다.

아침부터 하한가를 치기는 했지만, 급격히 뚝 떨어진 게 언제인가 돌이켜 보면 아마 점심시간이었을 것이다.

여러모로 어수선했던 대인전을 마치고, 기분 전환이나 하자는 심정으로 디저트를 주문했다.

딸기 생크림 케이크.

번화가의 고급 제과점에서 매일 한정된 수량만 제작해 들여오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만점인 디저트다.

입학하기 전부터 이 케이크가 그렇게 맛있다는 소문을 들어왔기에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고, 마침내.

때가 와야 했는데....

'품절이라니....'

워낙 인기 상품이다 보니 경쟁이 엄청났다.

이 경쟁은 오직 선착순.

지위나 배경 따위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배경 하면 다들 만만치 않으니까.

결과적으로 송천혜는 달달한 생크림 대신 패배의 쓴맛을 보게 되었다.

침울해진 그녀를 한소미가 다독였다.

"천혜야 힘내. 다음에는 있겠지. 오늘은 이거 같이 먹자."

자기 몫의 양갱을 반절 나누어 주는 한소미였다.

왜 얘는 많고 많은 간식거리 중에서 양갱을 제일 좋아하는지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으나, 먹다 보니 양갱도 은근히 괜찮았다.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도 같았고.

그러나....

조금 나아졌나 싶었던 송천혜의 기분은 금세 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김호에게 보내 준 디저트 쿠폰 사용 내역을 보고 나서.

그녀가 갖지 못했던 딸기 생크림 케이크가 그곳에 있었다.

송천혜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그 인간이...!'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녀가 화낼 일은 아니었다.

자신의 전격 마법 때문에 쿠키가 바닥에 떨어졌고,

디저트 쿠폰을 보내 주겠다고 먼저 제안한 것도 자신이었다.

김호가 그 디저트 쿠폰으로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산 건 순전히 우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다분히 이성적인 생각이고,

감성적인 부분은 마치 자기가 먹으려던 케이크를 빼앗긴 기분이 들게 했다.

솔직히 내가 잘못한 건 맞는데, 쿠키 한 조각에 최고급 케이크 한 조각은 교환비가 안 맞지 않나?

송천혜가 남은 양갱을 전투적으로 해치웠다.

* * *

그래서였을 것이다.

괜스레 그 남자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게 된 것은.

계속 외면해야지 다짐해 봐도 자꾸만 시선이 갔다.

김호는 회색 머리 여학생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예인. 대인전에서 상대로 만났었기에 똑똑히 기억한다.

던전에 입장할 준비를 하는 서예인에게 김호가 말했다.

- 라이플로 바꿔 드는 게 더 나을 거야.

- 마나 관리가 힘들면 근거리에서 헤드샷만 날리는 식으로 운영해.

'어처구니가 없네.'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말을 함부로 하지?

자기는 캐스터 계열이면서 총사한테 훈수를 둔다고?

또 던전 안에 뭐가 있는 줄 알고 권총보다 라이플이 더 좋다 확신하는 거야.

저러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책임질 수 있나?

더욱 어이없는 건, 서예인이 그 조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순순히 라이플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며 송천혜는 헛바람을 터뜨렸다.

"허."

당사자가 저러니까 맥빠지네....

이제 모르겠다. 놔두면 알아서 하겠지.

조언을 받아들이는 것은 본인의 몫,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도 본인의 몫이다.

서예인과 김호가 차례차례 포탈 안으로 사라진 후, 이내 그녀의 이름도 호명되었다.

"천혜 화이팅~"

한소미의 응원을 뒤로하며, 송천혜는 안개 숲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지옥을 보게 되었다.

온몸이 물에 푹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상태창을 열어 보니 모든 수치가 F로 하락한 상태였다.

항상 넘쳐흐르던 마나도 [코어]가 F랭크로 떨어지며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겨우 이거 갖고 뭘 할 수 있다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녀가 즐겨 쓰는 전격 마법 대부분이 통하지 않았다.

[체인 라이트닝], [벼락지대], [번개 채찍]....

모두 고블린 따위는 수십 마리 단위로 지져 버리는 강력한 광역 마법인데, 기껏해야 움직임이 조금 둔해지는 게 끝.

위력이 떨어지리라곤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어, 어떡하지....'

던전에 입장하기 전에 세워 둔 계획이 전부 무용지물이 됐다.

마법은 안 통하고, 시간은 흐르고, 몬스터는 쌓여 간다.

혼란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때였다.

그 남자의 조언이 머릿속을 스친 것은.

- 라이플로 바꿔 드는 게 더 나을 거야.

왜 하필이면 이게 떠오르나 눈썹을 찡그리면서도 송천혜는 생각을 이어 갔다.

왜 라이플로 바꿔 들라고 했을까?

권총과 라이플의 가장 큰 차이점을 꼽자면 가벼운 여러 발과 묵직한 한 발일 것이다.

'그러면 혹시.'

송천혜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검은색 장갑 위에서 생성된 전류가 뭉치고 압축되며 야구공 크기의 구체를 형성했다.

F등급 단일 대상 마법, [썬더 볼].

그것을 다가오는 고블린에게 집어 던지자,

"꽤액!"

[+4점]

허무하리만치 잘 통했다.

그랬다. 광역 마법이 안 통하면 단일 마법을 쓰면 되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 간단한 생각을 못 했을까?

송천혜는 계속해서 [썬더 볼]을 던져 댔다.

'나는 바보인가 봐.'

'나는 멍청이인가 봐.'

'바보 멍청이인가 봐!'

던질 때마다 마음속으로 되뇌면서.

그러나 중반쯤이 되자 또다시 한계에 부딪혔다.

'마나가....'

아주 바닥나지는 않았지만 남은 시간 동안 쓰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게다가 오크와 트롤의 비율이 늘어나서 [썬더 볼]만으로는 잘 안 쓰러진다.

그러자 김호의 두 번째 조언이 귓가를 스쳤다.

- 마나 관리가 힘들면 근거리에서 헤드샷만 날리는 식으로 운영해.

'근거리에서 헤드샷만....'

'이걸 나한테 맞게 해석하면....'

문득 마음 한구석에서 반발심이 고개를 들었다.

'꼭 그 사람 말대로 해야 돼?'

'아까는 어처구니가 없다고 했으면서.'

'넌 자존심도 없어?'

'그래도 리타이어하는 것보다는....'

바닥을 굴러다니던 탈락자들이 떠오른다.

자신이 그 꼴이 된다니,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것만은 절대 안 돼!'

송천혜는 결정했다.

최악보다는 차악을 선택하기로.

[라이트닝 인챈트]

장갑을 낀 두 주먹에 전류를 둘렀다.

그리고 어설픈 파이팅 포즈를 잡았다.

이런 식으로 싸워 보는 건 유치원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지만 어쩌겠는가. 달리 방법이 없는데.

"크르르르...."

트롤이 바로 앞에 서서 위협적으로 으르렁댔다.

픽스 존에서 보는 트롤이라 그런지 예전에 해치웠던 것보다 두 배는 커 보였다.

"...!!"

송천혜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뻗었다.

* * *

[남은 시간 0:00]

[현재 점수:571점]

남은 시간이 0이 되는 즉시 달려들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증발했다.

안개 숲은 처음의 적막함을 되찾았다.

그제야 송천혜는 한숨을 푹 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끄, 끝났다아...."

10분을 버텨 냈다.

10분 동안 살아남았다.

출구가 입을 여는 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잠깐만.'

밖으로 나가려던 송천혜는 문득 제자리에 멈춰 섰다.

자기 모습을 돌아보니 귀신 꼴이 따로 없었다.

하기야 끝 무렵에는 몬스터들과 엎치락뒤치락하며 막무가내로 주먹을 휘둘러 댔으니.

아무튼 이 상태로는 못 나간다.

- 치지직,

송천혜의 손끝에 짧은 전류가 감돌았다.

그것을 정수리부터 빗어 내리자 산발을 했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정돈되었다.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옷매무시를 깔끔하게 고치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전류를 흘려 먼지 한 톨까지 날려 버렸다.

[리플레이를 저장하겠습니까?]

[수락/거절]

"절대. 절대로 안 해요."

죽어도 이 흑역사가 저장되는 꼴은 못 본다.

* * *

밖으로 나온 송천혜는 항상 그렇듯 다른 학생들의 주목을 받았다.

지옥 같은 픽스 존의 10분을 겪고도 전혀 흐트러짐 없는, 자신의 모든 것을 완벽히 통제하는 모습에 누군가 감탄성을 흘렸다.

벌써부터 그녀의 이름을 찾아 리더 보드를 뒤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쉽게 찾지는 못할 것이다.

[송천혜, 571점, 47%]

그들의 기대치보다는 훨씬 낮은 점수일 테니까.

토파즈 마탑의 명성에 부합하지 못했지만, 지금 송천혜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단 거 먹고 싶다....'

끝나면 딸기우유 사 먹어야지.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돌아가던 송천혜는 군중 속에서 김호를 발견했다.

문득 그녀는 부끄러워졌다.

그의 조언을 엿듣고, 무시하고, 끝내는 그 조언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송천혜의 걸음걸이가 조금 더 빨라졌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19화 리플레이 (1)

공략전이 마무리되자, 이수독은 대인전 때와 마찬가지로 3반을 한곳에 불러 모았다.

"점수와 포인트에 대해 설명하겠다. 학생증 뒷면을 확인하도록."

학생들이 주섬주섬 학생증을 꺼내 살피니, 빈 공백이었던 곳에 새로운 항목이 추가되어 있었다.

김 호

[대인전:300점]

[공략전:683점]

(2,049pt)

동시에 이수독 옆의 빈 공간에 커다란 학생증 하나가 떠올랐다.

얼굴이 물음표인 '김아무개'의 학생증 견본.

김아무개

[대인전:300점]

+30점

-25점

"대인전은 너희가 익히 아는 제로섬 게임에 가깝다. 승리하면 점수를 얻고, 패배하면 잃지."

[공략전:500점]

+400점

+300점

"반면 공략전은 던전 공략에 성공할 때마다 점수가 계속해서 누적되는 방식이다. 두 실기 평가 모두 총 점수가 높을수록 순위가 올라가는 건 같다. 이제 집중해라."

김아무개

[공략전:500점]

(1,500pt)

김아무개의 공략전 점수 아래에 한 줄이 추가되었다.

"'가용(可用) 포인트'는 용살학원에서만 통용되는 화폐다. 너희가 추후 치르게 될 대인전이나 공략전에 도움을 주는 다양한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지. 자세한 내용은 카탈로그를 참고하도록."

주 소비처는 다른 학생의 리플레이나 던전의 간이 지도, 탈출 아이템 등.

원한다면 영약이나 스킬북, 장비까지도 구매할 수 있다.

포인트만 충분하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이 포인트는 대체 어떻게 얻는가? 눈치 빠른 놈들은 벌써 감을 잡았겠지."

김아무개

[공략전:500점] * 3.0배율

= 1,500 point

"너희가 획득하는 공략전 점수가 일정 배율(倍率)로 포인트로 환산된다. 이번 공략전은 첫 공략전이고, 픽스 존이라는 점을 참작하여 3.0배율이 적용되었다."

"아...."

학생들의 낯에 안타까운 기색이 서렸다.

아직 이 포인트라는 것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어도, 3.0이 꽤 높은 배율이라는 것 정도는 직감했으리라.

그래서 아쉬워하는 것이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할걸.

1점이라도 더 먹어 둘걸.

특히 리타이어한 학생들은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픽스 존은 너무 어려우니까 그냥 포기하고 다음부터 잘하자 싶었을 텐데, 포인트를 저렇게 잔뜩 쥐여 줄 줄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나 본인들이 자초한 일, 인제 와서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뒤늦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 보지만, 이수독이 마주 보내는 살기등등한 눈빛에 시선을 내리깔고 만다.

이수독은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던전들을 공략해서 점수를 쌓고, 그곳에서 얻는 포인트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각자 카탈로그를 보고 효율적인 방법을 고민해 보도록.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마치겠다. 충분한 휴식을 취해서 내일 수업에 지장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럼 해산."

다른 반 선생님들은 설명을 끝마치고도 한동안 자리에 남아 학생들과 질답을 주고받는데, 이수독은 곧바로 어딘가로 향하는 듯했다.

탈락자들이 마지막으로 말이라도 붙여 보려 하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간다.

저 양반은 학생들한테 관심이 없네.

공략전 자체가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 않은 터라, 저녁 식사까지는 한참 남았다.

이럴 때 시간을 때울 방법이라면,

"커피나 한잔하지."

"좋소. 본인도 그 커피라는 것에 흥미가 동하던 차였다오."

흔쾌히 수락하는 고현우.

서예인에게도 제안을 던져 보지만,

"서 소저도 가시겠소?"

"...."

서예인은 대답 대신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했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졸려. 가서 잘래...."

아까 전부터 조금씩 눈꺼풀이 처지는 게 보이기는 했다.

억지로 끌고 가느니 그냥 쉬게 놔두는 게 낫겠지.

"우리끼리 갑시다."

* * *

매점에서 아이스커피를 주문해 한 잔씩 들었다.

게임 속 세계에 들어와도 커피는 커피다.

맛이 조금 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고현우의 커피가 줄어드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대화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단숨에 원샷을 때려 버린 것이다.

그러고선 한다는 말이.

"양이 적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런 건 신경 쓰면 지는 거다.

어차피 커피는 곁가지고, 주목적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한번 봐."

먼저 고현우에게 카탈로그를 넘겨주었다.

천생 무인인 고현우가 각종 아이템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간다.

나 역시 큰 기대는 걸지 않았고, 대충 훑어나 보라는 의미로 보여 준 것이다.

예상대로, 고현우는 카탈로그를 이리저리 넘길 때마다 눈썹을 찡그렸다 폈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게 태반이라 본인으로서는 혼란스럽기만 하구려. 김 형이 가르쳐 주겠소?"

"아이템은 지금 당장은 무시해도 돼. 그래도 아예 모르면 나중 가서 불리해지니까 천천히 하나씩 파악해 둬."

"알겠소."

"지금 반드시 알아 둬야 할 게 있다면 리플레이지."

"리플레이?"

"아까 던전에서 나올 때 리플레이 저장할까요, 하고 안 물어보디?"

잠시 기억을 되짚던 고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던 것으로 기억하오. 해가 되지는 않을 듯하기에 수락했소만."

"수락하면 네가 던전을 클리어했던 과정이 낱낱이 기록된다. 그걸 다른 사람이 구매하면."

예시를 들고자 한소미의 리플레이를 구매했다.

100포인트가 차감되며 손 위에 수정구가 나타났다.

(2,049pt) -100pt

[한소미_공략전_배치_고사_928점.replay]

수정구 속의 한소미는 날렵한 보법으로 안개 숲 이곳저곳을 누비고 있었다.

손에 든 검이 번쩍일 때마다 몬스터들이 깔끔하게 잘려 나간다.

함께 리플레이를 관전하던 고현우가 감탄했다.

"오오."

"이런 식으로 열람할 수 있지. 네 리플레이도 엄청 팔리고 있을걸? 포인트 확인해 봐."

포인트를 조회한 고현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이구려. 잠깐 사이에 많이 늘었소."

"네가 공략전 수석이잖아. 1학년 중에 유일하게 1,000점이기도 하고. 엄청 팔릴걸."

1학년뿐만 아니라 2, 3학년들도 궁금해서 챙겨 볼 것이다.

지금쯤 4대 세력 쪽에서는 난리가 났겠지.

학생선도부 아니면 유망주 중 하나가 1위를 먹으리라 예상했을 텐데, 웬 듣도 보도 못한 무소속이 덜컥 튀어나와서 그 자리를 차지했으니.

'공략전 수석'이라는 타이틀이 갖는 가치는 엄청나다.

이번 안개 숲 리플레이는 물론, 앞으로 치를 공략전과 대인전 리플레이까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갈 것이다.

그러던 와중, 고현우가 무언가 떠오른 듯 물었다.

"헌데, 리플레이가 많이 팔린다는 건, 본인의 무공을 견식 하는 자가 늘어난다는 뜻 아니오?"

"그렇지. 그것도 아주 낱낱이 파헤치려 들걸."

"으음.... 마냥 좋기만 한 일은 아니구려."

리플레이 저장의 가장 큰 단점.

자신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만천하에 공개된다.

가령 던전 공략에 다른 학생의 리플레이를 참고할 수도 있으며,

대인전에서 붙을 상대의 리플레이를 미리 보고 분석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전략이다.

"네 말대로 무공을 견식 하는 사람이 많아서 좋을 건 없지. 누군가는 파훼법을 찾아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포인트. 이걸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만해."

용살학원은 드래곤에 대적할 영웅들을 육성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경쟁은 필수적이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겠다고 서로 실력을 감추기만 한다면 주객이 전도되는 셈이다.

때문에 포인트에는 남에게 실력을 공개한다는 리스크를 뛰어넘는 강력한 이점이 존재한다.

'나 같은 경우는 예외고.'

이번에는 픽스 존에서의 내 실력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리플레이를 저장하지 않았다.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인 만큼, 꼭꼭 숨기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을 생각이다.

어차피 순위권도 아니라 포인트가 많이 벌리지도 않을 텐데, 그거 조금 못 가져가면 어떤가.

나중에 그 이상의 이득을 취하면 그만이다.

"김 형의 말을 들어 보니 이 포인트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대단한 용도가 있는 것 같구려."

"그래, 그 얘기를 하려고 커피 한잔하자고 한 거야."

공략전 1위를 해서 얻은, 그리고 앞으로 얻게 될 포인트를 어떻게 써먹는 게 최선일까.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이야기가 되리라 직감했는지, 고현우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나를 똑바로 마주 보며 입을 연다.

"김 형의 고견(高見)을 들려주시오."

"오늘 확인했겠지만 네 기량 자체는 1학년 탑급들과 비교해도 안 밀려."

"김 형의 안목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소. 김 형이 그렇게 판단했다면 사실이겠지."

"다만, 네 약점은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다."

"...뼈저리게 통감하던 참이오. 오늘 일로 더욱."

고현우가 자조적인,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첫 번째 약점은 낮은 등급의 [코어]로 인한 내공 부족.

두 번째는 심심하면 깨져 버리는 무기.

무기는 당장 내가 손쓸 수 없는 영역이다.

사문의 신물이라는 고현우의 장검과 깊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

자칫하면 내가 사문의 일에 참견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고, 이건 무인에게 굉장히 큰 무례다.

서로 간에 더욱 신뢰를 쌓고, 고현우 쪽에서 먼저 손을 내민 뒤에야 도와줄 수 있다.

그러니 다시 [코어]로 돌아와서.

고현우는 한소미와 붙었을 때 내공 싸움에서 크게 밀렸다.

내가 [증폭]으로 코어를 2랭크나 올려 주고 나서야 그나마 비슷해졌고.

조벽과의 경기에서는 얼핏 비등한 승부를 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무기가 파괴된 데다 내력도 모조리 끌어다 써서, 대인전이 끝나자마자 운기조식을 해야 했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번 공략전 규칙이 픽스 존이라 1위지, 마나 싸움으로 들어가면 넌 무조건 져. 그러니 지금은 다른 걸 다 제쳐 두고 [코어]에 집중해야 한다."

"본인이 어떻게 하면 좋겠소?"

"'트레이닝 센터'로 가라."

트레이닝 센터.

단순한 체육관이 아니다.

아레나와 비슷하게, 마법공학의 정수가 가미되어 온갖 종류의 수련이 가능한 장소.

"트레이닝 센터에 가 보면 마나연공실이 있을 거다."

"...!"

"다른 곳보다 마나의 농도가 짙어서 같은 시간 운공을 해도 훨씬 내공이 빠르게 쌓이지."

"그런 곳이 있었단 말이오?"

고현우가 감탄성을 흘렸다.

몸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기색이었다.

그런 고현우를 붙잡고 설명을 이었다.

"끝까지 들어. 이게 제일 중요하니까. '특수연공실'이라는 곳이 있다. 일반 마나연공실보다 마나의 집중도가 극도로 높아. 어림잡아 열 배 이상."

"...!!"

고현우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저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연공실도 효율이 좋다는데, 그 열 배가 넘어가는 특수연공실은 대체 어떤 곳이라는 말인가?

"물론 그런 엄청난 장소가 무한정 존재할 리가 없지. 아무나 못 들어가."

"대화의 흐름상... 포인트가 필요하겠군."

"그래. 6시간 이용에 500포인트."

가히 살인적인 소모량이다.

하루에 6시간만 쓴다 쳐도 고현우가 공략전에서 얻은 3천 포인트를 태우는 데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는다.

무인들은 주말 같은 경우 하루를 모조리 연공에 투자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18시간 1,500포인트, 24시간 2,000포인트가 순식간에 증발하는 것이다.

이걸 한 학기 내내 쓰려면.... 얼마나 많이 필요할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네가 정말 포인트를 열심히 모아서 특수연공실에만 모조리 쏟아부으면 가능은 한데, 대신 다른 걸 전혀 못 사게 되겠지."

"으음.... 다른 방법은 없는 거요?"

"있어. 시즌 패스."

시즌 패스.

보유하고 있으면 한 학기 동안 포인트 소모 없이 언제든 특수연공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그런 물건이라면 얻기가 무척이나 어려울 것 같소."

"가장 쉬운 방법이 경매야. 평균적으로 3~4만 포인트 사이에 낙찰되는 편이지."

"허어, 그게 가장 쉽다니. 하면 다른 방법은 무엇이오?"

"시즌 패스는 용살학원의 여러 이권 중 하나다. 실적이 좋은 동아리들에게 우선적으로 지급되지. 검술 동아리나 백마법 동아리 같은 전통적인 강호들은 대여섯 개는 갖고 있을걸."

그런 강호들마저 1, 2, 3학년이 각각 두어 개씩 나눠 가지기도 빠듯하다.

그러니 가장 뛰어난 실력자들에게 분배한다.

"검술 동아리에 들어가서 1학년 유망주 자리를 뺏으면 돼."

"...."

문제는 모용준의 실력이 한소미, 조벽과 엇비슷한 수준이라는 점이다.

이길 수 있겠냐 묻자 고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어렵다 보오. 아무래도 시즌 패스는 보류해야겠군. 그래도 틈틈이 포인트를 투자한다면 특수연공실에 제법 자주 드나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아니, 아직 포기하기는 일러."

"...다른 방법이 더 있소?"

"그럼, 있지."

나는 나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구해다 주겠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20화 리플레이 (2)

"진정 김 형이 시즌 패스를 구해 줄 수 있다는 말이오?"

"나라면 가능하지."

"어떻게?"

카탈로그를 슬슬 흔들자 고현우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설명은 해 줄 수 있는데, 그래 봤자 못 알아들을걸."

"크흠...."

카탈로그의 아이템도 다 못 알아보는데, 내가 어떤 아이템을 무슨 용도로 써먹을지 이해할까.

"중요한 건 어떻게가 아니라, 내가 시즌 패스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 아니겠냐."

"그도 그렇군. 하면 본인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오?"

시즌 패스의 가치를 생각하면 당연히 떠올릴 만한 의문이었다.

경매에서 수만 포인트를 써서 낙찰받는 게 그나마 쉬운 길인데, 그런 귀한 아이템을 거저 구해다 줄 리가 없다.

원하는 게 있으니 이런 제안을 했다, 까지 생각이 닿았을 것이다.

"던전이라는 게 오늘 들어간 안개 숲처럼 1인 던전만 있는 게 아니야. 2인, 4인, 십수 명이 동시에 들어가는 레이드 던전도 있지."

"본인이 김 형과 함께 들어가기를 원한다는 뜻이로군."

어지간한 2인 던전이라면 나 혼자서도 깰 수 있지만, 개중에는 구조적으로 솔로 플레이가 불가능한 곳도 존재한다.

아예 두 갈래 길이거나 역할을 분담해야 하는 경우.

가령, 한 명이 퍼즐이나 함정 따위의 장치를 푸는 동안 다른 한 명이 쏟아지는 몬스터를 막아야 하는 던전도 있다.

고현우가 반쯤은 장난스러운, 반쯤은 서운한 투로 답했다.

"이거 섭섭하군. 그런 거라면 시즌 패스를 구해 주지 않아도 본인은 김 형을 도울 거요. 우리는 친우 아니오?"

"일반적인 던전이라면 그렇지."

내 표정이 여전히 진지한 것을 확인하자, 고현우도 태도를 진지하게 하고 내 말을 경청했다.

나는 발밑을 가리켰다.

"내가 노리는 곳은 훨씬 아래, 심층부 던전이다. 네 실력으로도 버거울 거야.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몰라."

"...!"

열차에서는 실상 아무 보상도 약속받지 않고 손을 보탰다.

하지만 그때는 리스크가 적었기에 나도 큰 거리낌 없이 부탁한 것이고, 목숨이 걸리는 일에까지 그럴 수는 없다.

정당한 보상을 제시해야 한다.

고현우가 질문을 던졌다.

"본인이 수락한다면, 그 심층부 던전에는 언제쯤 도전할 심산이오?"

"당연히 지금은 어림도 없지. 너나 나나 실력을 더 키워야 해. 네 성장이 빠르면 그만큼 도전하는 시기도 앞당겨질 거고."

"시즌 패스는 일종의 투자로군."

"그래. 거기에 던전 보상도 얻게 될 거야. 명검, 영약, 기연."

"으음....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얼마든지. 꼭 지금 답하지 않아도 된다."

"잠깐이면 되오."

고현우가 상념에 빠진 동안, 나는 내 몫의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기다렸다.

나도 원샷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속도가 빠른 편이라 커피가 금세 바닥났다.

그사이에 고현우는 고민을 끝마쳤다.

"김 형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확실해? 다시 말하지만 죽을 수도 있다."

고현우는 당당하게 웃음 지었다.

"본인은 무인이오. 항상 더 강해지는 길을 갈망하지. 이런 나에게 김 형이 길을 보여 주는데, 목숨이 아깝다고 걷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이만하면 단순히 치기 어린 결정이 아니라 각오가 됐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당분간은 시간 날 때마다 특수연공실에서 살아라. 포인트 아끼지 말고."

"본인이 가진 포인트로 감당이 되겠소?"

"리플레이 판매로 계속 들어올 테니까 앞으로 2주 정도는 부족하지 않을 거야. 그 안에 시즌 패스를 구해다 주지."

"2주면 적절하군. 그리 알고 기다리리다."

* * *

트레이닝 센터로 고현우를 보내고, 나는 퀘스트 창을 띄워 올렸다.

[서브 퀘스트:배치 고사](완료)

▷대인전 배치 고사에서 1승 이상 (1/1)

▷공략전 배치 고사에서 상위 50% 이상

(현재 랭킹:41%)

▷보상:[복사-스킬] 슬롯+1

복사-스킬[1/2]

1. 허밍버드(E)

2. 없음

빈 슬롯이 하나 추가되었다.

이걸로 배치 고사는 일단락된 셈이다.

이제 시즌 패스에 집중해야겠지.

어떻게 얻을 것인가?

'거래해야지.'

4대 세력에서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는 아이템으로.

상점을 열어 아이템 하나를 구매했다.

한 방에 1,000포인트가 날아갔다.

(1,949pt) -1,000pt

['열 촉매 시약'을 획득합니다.]

열 촉매 시약은 제작 재료다.

정확히는 마법공학 아이템의 제작 재료.

1,000포인트는 지금은 크게 보일지 몰라도, 학기 내내 벌어들이는 포인트에 비하면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이 시약 역시 보기만큼 귀한 아이템은 아니라는 뜻.

다만, 마법공학 아이템에 밥 먹듯이 들어가는 재료라 항상 수요가 더 많다.

이 재료를 첫 번째 미끼로 쓴다.

'지금쯤이면 한두 명은 있겠네.'

나는 걸음을 옮겼다.

마법공학 공방으로.

* * *

'저 인간이 여긴 왜 왔대?'

자료실 직원은 뜻밖의 방문자를 맞이했다.

인간 백정 이수독.

범죄자들 잡아 죽이던 양반이 덜컥 이 학교 교사가 되었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래 봤자 학교 한구석에서 묵묵히 일만 하는 자신과 만날 일이 있으랴 싶었는데.

무슨 변덕에서인지 학기 첫날부터 자료실에 찾아온 것이다.

슬쩍 눈알을 굴려 보니 하필 자료실에 자신밖에 없다.

자신이 직접 응대해야 한다는 뜻.

이수독 역시 그 사실을 확인한 듯 그에게 똑바로 걸어왔다.

"...."

풍기는 분위기가 심히 흉흉하기는 했으나 위축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일선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그 또한 한때는 A급 슬레이어.

이 정도 살기는 무난하게 받아넘길 수 있다.

또 이수독이 자신을 해하러 온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흉악한 인상과는 달리 점잖은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예,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리플레이를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리플레이? 웬 리플레이?

자료실 직원이 의아함에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리플레이라면 공략전 말씀이십니까?"

"맞습니다."

"그건.... 학생 상점에서 구매하시면 될 텐데요."

"비공개라서 그렇습니다."

비공개 리플레이.

대강 돌아가는 상황이 짐작된다.

학생 하나가 리플레이를 비공개로 돌렸고, 이수독은 그것을 열람하고자 이곳에 온 것이다.

그러나 그건 이쪽에서도 딱히 손쓸 방도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말로만 안 되네요, 하고 돌려보내는 것보다는 직접 보여 주고 납득시키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학생 이름이...?"

"김호입니다. 1학년 3반."

직원이 키보드를 두드리자 곧 스크린에 학생의 정보가 출력되었다.

공략전 성적도 함께.

[김 호, 683점, 38%]

이수독에게 보여 주듯 계속해서 리플레이 조회를 시도해 보지만, 스크린은 [열람 불가]라는 문구만 띄워 올릴 뿐이었다.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보시다시피 불가능합니다."

"...."

이수독은 말없이 그를 응시하기만 했지만, 자료실 직원에게는 '왜?'라는 질문이 들리는 듯했다.

슬슬 귀찮음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용살학원을 졸업한 양반이 이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굳이 설명을 듣고 싶나?

그러나 이수독은 '굳이' 듣고 싶은 눈치였다.

자료실 직원이 어쩔 수 없이 설명했다.

"...우리 쪽 권한이 더 높기는 한데, 이건 권한이 높고 낮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리플레이 저장 자체가 안 됐거든요. 데이터베이스에 남아 있지도 않은 걸 열람할 수는 없는 일이죠."

"...."

이수독은 잠시 얼굴을 굳히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직원은 생각했다.

'저 인간이 의외네....'

잡아 죽일 범죄자 말고는 사람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는 걸로 아는데, 그런 자가 학생 하나에 관심을 가진다?

흥미가 동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해서 직원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게 왜 궁금하십니까? 성적만 봐선 특이한 구석이 없어 보이는데요."

"...김호 학생은 들어간 지 4분도 안 돼서 나왔습니다."

"예? 그럴 리가요."

4분도 안 돼서 나왔는데 683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10분 다 채우고 나왔는데 이수독이 착각한 거겠지.

한편으로는 정말 4분 만에 그 점수라면 아무리 인간 백정이라도 궁금하겠구나 싶다.

이수독이 말했다.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시간을 잘못 봤는지."

"아, 그거라면 방법이 있습니다."

자료실 직원이 다시 키보드를 두들기며 말했다.

"리플레이는 없으니까 열람이 안 돼도, 던전 출입 로그는 확인할 수 있죠. 언제 들어가서, 언제 나왔는지."

탁, 엔터를 누르자 로그가 뜬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굳어졌다.

[김 호][안개 숲][13:31:02]

[김 호][안개 숲][13:34:28]

"...!!"

자료실 직원은 두 눈을 의심했다.

안경을 벗고 눈을 비벼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떠 보았다.

그러나 숫자는 처음 그대로였다.

이수독을 돌아보니 그 역시 얼굴을 굳히고 출입 로그를 노려보는 중이다.

31분에 입장해서 34분대에 퇴장.

이수독의 짐작이 사실임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이수독이 생각했다.

'3분에 700점 근처라면 단순 계산으로 6분에 1,400.... 10분이면 2,000점은 무조건 넘는다.'

내가 안개 숲 픽스 존에서 몇 점을 냈었더라.

3학년 말미에 1,300대 후반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교장직을 맡고 있는 전대 용사의 최고점이 1,500이 약간 안 됐다고 들었다.

그걸로도 살아 있는 전설 소리를 듣는데, 2,000점 이상은 대체....

골몰히 생각에 잠긴 그에게 직원이 물었다.

"...교장 선생님께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픽스 존에서 2,000점을 찍는 엄청난 실력자가 입학했다면 용살학원의 일원으로서 기뻐해야 할 일이다.

문제는 그 엄청난 실력자가 실력을 감추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실력을 감추는 경우 대부분은 좋지 않은 의도를 품고 있다.

용살학원은 수많은 아군만큼이나 적도 많다.

드래곤의 하수인들, 악신의 사도들, 범죄자 집단....

그들 중 하나가 학교에 잠입한 것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알리고 대책을 세우는 게 상책이리라.

그러나 이수독은 거절 의사를 표했다.

"아니오. 당분간은 더 지켜봤으면 합니다."

그는 아직은 이르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주머니 속의 송곳은 드러나게 마련.

당장 내일부터 대인전이 열릴 예정이다.

대인전은 두 명이 치르기 때문에, 양측 모두가 동의하지 않는 이상 리플레이가 무조건 저장된다.

그것을 지켜보다 보면 점점 더 실체에 가까워질 것이다.

굉장히 뛰어난 학생인지, 드래곤의 하수인인지, 아니면... 정말 드래곤인지.

그리고 결과가 후자에 가깝다면....

"제가 담임이니까요."

그의 말에는 진득한 살의가 묻어 있었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21화 잡동사니를 뒤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