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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 완전 넋이 나갔네.'

나는 홍연화에게 측은한 시선을 보냈다.

설마하니 두 경기 연속으로 붙을 줄은 나도 몰랐다.

원래 점수가 높았으니 많이 깎였겠고, 2연패를 해서 더 깎였겠고, 멘탈은 더 많이 깎였을 것이다.

'그래도 봐주는 건 없지.'

나도 퀘스트를 깨야 하는 입장이니까.

[서브 퀘스트:3주 차 대인전]

▷목표:대인전 4회 완료. (2/4회)

▷기한:~일요일 자정.

▷보상:승리 횟수에 따라 차등 지급. (2/4승)

이번 주 퀘스트 보상은 [장신구 선택권]일 가능성이 크다.

연승을 많이 할수록 고등급의 선택권을 얻을 테니 4연승이 목표.

1패도 내줄 수 없다.

'쟤는 알아서 잘 털고 일어날 것 같은데?'

두 사람을 상대하면서 지켜본바, 홍연화의 정신력은 나름대로 훌륭한 편이었다.

싱겁게 끝나 버린 1경기.

원체 바람이 많이 부는 지형이었기에 내가 [윈드포스]로 자꾸 마법 시전을 끊어 대도 전혀 못 알아챈 눈치였다.

아마 자신의 운 없음을 한탄했겠지.

그것만으로도 허탈함에 기량이 살짝 흔들렸을 법한데, 2경기에서는 오히려 더욱 나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와 서예인의 특징을 파악하고 유연하게 전투 방식을 전환했다.

윈드포스라는 뜻밖의 복병만 아니었다면 아마 홍연화 팀이 승리했으리라.

아무튼, 그런 훌륭한 정신력을 가지셨으니 놔두면 알아서 잘 회복할 것이다.

아님 말고.

'그보다 지금 중요한 건....'

"...?"

내가 말없이 바라보자 서예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현재 서예인의 성장도를 육각형 그래프로 표현한다면, '파괴력' 부분만 삐죽 튀어나온 송곳 모양에 비할 수 있다.

홍연화-백준석 듀오와의 2경기에서도 드러났듯이, 위치가 노출되는 순간 급격히 취약해진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방어, 회피나 다시 은신할 수단 등, 다양한 스킬과 특성을 골고루 익혀 두는 편이 좋다.

그리고 개중 몇몇은 다른 총사에게 전수받는 게 나아서 멘토링을 시키려는 건데,

- 귀찮아, 졸려....

정작 본인이 저렇게 의욕이 없으니.

게다가 지금은 투명 길리 뒤집어쓰고 저격만 뻥뻥 날려도 다 나가떨어지니까, 더욱 멘토링의 필요성을 못 느낄 것이다.

'쟤가 또 누구한테 한번 져 봐야 되는데.'

내가 하기에는 다소 모순된 생각이지만, 그래야 승부욕이 자극될 것 같다.

어디서 송천혜나 참수자 고블린 같은 거 하나 안 튀어나오나?

* * *

'골고루'는 나에게도 해당되는 단어다.

['윈드포스'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D->C)]

대부분의 스킬과 특성은 C등급이 정체 구간.

이때부터 랭크 올리기가 급격히 어려워진다.

아무리 내가 온갖 히든 피스와 지름길을 줄줄이 꿰고 있더라도 무작정 정체 구간을 건너뛰지는 못한다.

물론 더디고 어려운 만큼 B, A, S,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스킬의 위력이 껑충 뛰어오르니, 아예 멈춰 설 수는 없는 노릇.

'장기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봐야지.'

장기적으로 꾸준히 수련하는 것은 기본.

하지만 스킬 하나를 C에서 B로 올리느라 모든 자원을 다 쏟아붓기보다, 다양한 스킬과 특성, 그리고 장비를 갖추는 쪽이 전력 강화에는 더 도움이 된다.

그래서 내 다음 목표가 무기인 것이고.

'고현우가 잘해 줘야 할 텐데.'

그 무기를 만드는 청사진에 고현우도 포함되어 있다.

앞으로 그에게 얼마나 많은 활약을 기대할 수 있을지는, 내일 대인전을 함께 치러 보면 판가름 날 것이다.

* * *

"김 형, 본인이 해냈소."

아침 인사를 건네는 고현우의 얼굴이 밝았다.

흘러나오는 기세 역시 어제에 비해 더욱 날카롭게 벼려진 상태.

C등급 [코어]를 달성했다는 증거였다.

"고생했네, 끝나고 바로 대인전 갈까?"

"바라던 바요. 본인은 준비가 되었다오."

자신만만하게 답하는 고현우였다.

수업이 끝나고 곧장 아레나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레나는 어제보다 더욱 많은 학생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단말기에 학생증을 스캔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줄을 서야 할 지경이었다.

[김 호 457점]

[고현우 687점]

잠시 매칭이 잡히기를 기다리는 동안, 고현우가 서예인을 언급했다.

"서 소저가 남은 두 경기를 누구와 치를지 궁금하구려."

"걔 우리 말고 친구 있었나?"

"본인이 알기로는 없소. 항상 김 형과 함께 다닌 걸로 알고 있소만."

최근 2주만 놓고 보면, 서예인은 대부분의 시간을 나와 붙어 다녔다.

그 외의 활동이라곤 혼자 기숙사에 틀어박혀서 자거나, 트레이닝 센터에서 수련을 하는 정도가 끝.

아마 우리 말고 함께할 파트너는 없으리라 짐작된다.

걔 성격에 즉석에서 구인을 한다는 가정은 더 말이 안 되고.

"사실 인간관계가 협소한 건 본인도 마찬가지라오. 어떻게 팀원을 구할까 걱정이오."

그런 사정은 고현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얼굴이 받쳐 주니 인기도 많고, 사교성도 나쁘지 않아서 오다가다 안면을 익힌 사람은 꽤 되는 듯했다.

다만 학기 초 내내 특수연공실에만 처박혀 지낸 탓에, 함께 점수를 올릴 만큼 친한 인연은 쌓지 못한 것이다.

나는 괜한 걱정이라는 투로 답했다.

"파트너 없으면 그냥 랜덤큐 돌려."

"랜덤큐가 무엇이오?"

"말 그대로야. 무작위로 짝을 지어 주는 거지."

"과연, 그런 방법이 있었구려."

고현우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헌데, 무작위로 정해진 팀원과 함께한다면 불리하지 않겠소?"

미리 파트너를 구하면 시작부터 2 대 2 전투에 유리한 구성으로 들어갈 수 있고, 작전도 미리 짜 두며, 팀원과 여러 경기를 치르면서 경험도 누적된다.

반면 랜덤큐는 운이 나쁘면 마법사만 두 명, 활잡이만 두 명이 걸리기도 한다.

조합에서부터 밀리는 것이다.

덧붙여 작전을 짤 시간이 부족해서 거의 즉흥적으로 전투에 임해야 한다.

한 경기가 끝나면 바로 헤어지기에 그 파트너와의 경험이 리셋되기까지.

당연히 용살학원에서도 이런 문제점들을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랜덤큐 쪽이 평균 점수가 높게 잡혀."

"사전에 협의가 안 되는 대신 더 뛰어난 파트너를 붙여 준다는 뜻이로군."

"그렇지. 아주 형평성에 어긋나지는 않을걸."

"이해했소."

고개를 주억이는 고현우였다.

때마침 매칭이 잡혔기에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어."

"으음...!"

상대 목록을 확인하며 동시에 침음성을 흘렸다.

[김 호 457점 고현우 687점]

vs

[일공 572점 서예인 741점]

문득 어제 했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 쟤가 또 누구한테 한번 져 봐야 승부욕이 자극될 텐데.

- 어디서 송천혜나 참수자 고블린 같은 거 하나 안 튀어나오나?

...내가 튀어나왔네?

서포터가 다 해먹음

49화 3주 차 대인전 (4)

뜨거운 태양 빛이 내리쬐는 사막.

달구어진 모래가 그 위에 서 있는 이들에게 열기를 올려 보낸다.

간혹 가뭄의 단비처럼 불어오는 한두 줄기 바람도 후끈하기만 할 뿐이다.

[김 호 100% 고현우 100%]

vs

[일공 100% 서예인 100%]

"...."

서예인이 맞은편에서 살살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다.

고현우와 나 역시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답했다.

"이길 거요?"

"당연하지."

여기서 져 주면 퀘스트도 퀘스트지만 멘토링 시키기는 물 건너간다.

미안함은 잠시 접어 두고 열심히 괴롭혀야겠다.

일공은 머리를 파르스름하게 깎은 승려였는데, 교복을 입었는데도 불가(佛家)의 분위기가 강하게 풍겼다.

손에 쥐고 굴리는 염주 외에는 빈손인 것을 보면 권장법을 수련했으리라 추측된다.

고현우의 맞상대로는 안성맞춤이다.

"네가 저 빡빡... 스님이랑 붙어. 서예인은 내가 맡는다."

"그게 좋을 듯하군. 알겠소."

근접은 근접끼리. 원거리는 원거리끼리. 특별할 구석은 없는 작전이다.

상대 측에서는 일공이 짧게 몇 마디 하는 듯했으나, 과연 서예인이 그 지시대로 행동할지는 잘 모르겠다.

[3]

[2]

[1]

[Start!]

서예인의 쌍권총이 푸른 불을 뿜어 대고, 일공이 양손에 금빛 장력을 모아서 연거푸 쏟아 냈다.

- 투투투투!

- 파파파팟!

고현우와 나는 몰아치는 원거리 공격들을 피해 양쪽으로 갈라섰다.

방금까지 우리가 있던 자리가 뒤엎어지며 모래가 마구 흩날린다.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내 손에서 뇌전의 벌새가 날았다.

서예인이 빠르게 접근해 오는 허밍버드에 쌍권총을 겨누었다.

- 투투투투!

허밍버드가 쇄도하는 마력탄들을 날렵하게 피하며 점점 가까워지자, 심상치 않다 여겼는지 일공도 서예인을 도와 장력을 날렸다.

서예인에게 적중하기 직전 간발의 차로 요격에 성공했다.

'제법이네.'

마법 하나를 두 명이 요격한 것이긴 하지만, 여태 그걸 제대로 해낸 상대가 별로 없다는 걸 감안하면 칭찬해 줄 만했다.

일공도 장력이 매서운 게 600점대 실력은 되는 듯하다.

"흠!"

고현우가 철검을 꺼내 검기를 날려 보내고, 그에 장력으로 응수하는 일공.

멀리서부터 공방을 교환하며 점점 거리를 좁혀 간다.

다만 일공은 고현우에게 정신을 쏟느라 더 이상 서예인을 도와줄 수 없었다.

두 번째로 날려 보낸 허밍버드가 서예인에게 적중했다.

- 파지직!

다음 패턴은 보나 마나,

'연막탄에 투명 길리슈트.'

- 펑!

예상대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윈드포스]로 연막탄을 걷어 내자,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모래가 푹푹 패는 게 눈에 띈다.

부근의 모래가 바람에 흩날리며 투명하던 서예인의 신형이 흐릿하게 잡혔다.

그곳에 윈드포스를 집중시켰더니 서예인이 옆으로 풀썩 넘어져서 모래 위를 굴렀다.

나는 어금니에 힘을 줘서 웃음을 참았다.

"크흠...."

- 캉! 캉! 카가각!

고현우와 일공은 이제 근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철검과 맨손이 충돌하는데 금속음이 울린다.

황금빛으로 물든 일공의 손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수법(手法)과 장법(掌法)을 섞어 쓰는 모양새.

고현우도 철검만 휘두르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주먹을 내지르거나 발차기, 무릎차기 등을 곁들인다.

큰 틀에서는 고현우가 밀어붙이는 분위기다.

다시 서예인 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슬쩍 모래를 흩뿌려 보니 서예인은 바닥에 엎드린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나 고현우를 저격하려는 심산이겠지.

'맞으면 한 방.'

내가 가진 방어 계열 특성은 S랭크 [원소 저항]뿐.

원소 계열 공격은 거의 다 무시하지만, 물리 공격이나 마력만으로 이루어진 무 속성 공격 등은 고스란히 대미지가 들어온다.

서예인의 저격이 꽂히는 순간 그대로 게임 오버인 셈이다.

아마 고현우도 몇 대 못 버틸 테고.

그러니 아예 저격을 못 하게 방해하는 것이 최선이다.

- 후웅-!

서예인이 포복하고 있을 자리를 강풍이 한차례 쓸었다.

그에 반응하듯 라이플이 자리했을 위치에서 푸른빛이 번쩍였으나,

- 퉁-!

마력탄은 엉뚱한 곳으로 쏘아져 나가 자취를 감추었다.

저격은 매우 섬세한 작업이다.

[윈드포스]로 총구만 슬쩍 옆으로 틀어도 명중률이 급격히 떨어진다.

지금의 서예인에게는 내가 완벽한 천적인 셈.

더 귀찮게 바람을 이리저리 불게 해 놓고, 다시 고현우에게 시선을 옮긴다.

- 캉! 카가가각! 캉!

전투에서는 여전히 고현우가 고지를 점하고 있었으나, 무기는 그 반대였다.

고현우의 철검에 조금씩 균열이 늘어나는 반면, 일공의 손은 갈수록 선명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간다.

그리고 결국,

- 퍼석,

철검의 내구도가 다해 깨져 버렸다.

훌쩍 땅을 박차고 물러나는 고현우를 일공이 따라붙는다.

고현우가 한숨 돌릴 틈을 주려면 내가 손을 보태는 수밖에.

- 치지지직!

시기적절하게 날려 보낸 벌새가 고현우와 일공 사이에 끼어들었다.

일공이 잠시 멈춰서 쌍장을 날렸으나, 허밍버드는 살아 숨 쉬듯 잠시 뒤로 물러났다가 지그재그를 그리며 쇄도했다.

- 파지직!

그러나 허밍버드는 일공의 몸에 닿았음에도 약간의 스파크만을 튀기며 사라져 버렸다.

마비된 기색은 전혀 없다.

일공의 온몸을 뒤덮고 보호하는 은은한 금빛 기운, 호신강기(護身罡氣) 덕분이다.

'슬슬 안 통하는군.'

백준석이 허밍버드에 맞자마자 마비를 풀어 버린 것도 그렇고, 지금 일공에게는 아예 들어가지도 않았다.

앞으로 상대의 수준은 계속해서 오르고, 허밍버드가 안 먹히는 경우는 더욱 빈번해질 것이다.

여기서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건 '허밍버드'가 안 통하는 게 아니라,

'E급 허밍버드'가 안 통한다는 점이다.

[복사]한 스킬의 한계 중 하나로, 성장이 불가능하다.

송천혜에게서 복사했을 당시의 E랭크가 영원히 유지되는 것이다.

직접 익힌 허밍버드를 이만큼 숱하게 사용했다면 D나 C랭크는 달성했겠지.

E급 허밍버드는 기회를 봐서 다른 스킬로 덮어씌우는 게 나을 것이다.

일공이 괜찮은 스킬을 보여 주면 그걸 가져와도 되고.

물론 이런 허밍버드라도 일공에게서 한 호흡 정도는 벌어 주었다.

고현우가 새 철검으로 바꿔 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시 전진하며 공세에 나서는 고현우.

- 카가가각!

나는 또 서예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리저리 불게 했던 바람을 모두 위쪽으로 거둬들이고, 단번에 아래로 내리찍듯이 집중시킨다.

- 퉁-!

또 반사적으로 라이플이 불을 뿜고, 내가 선 위치 몇 걸음 근처에 마력탄이 꽂히며 모래가 팍 튀어 올랐다. 조준이 심히 엇나간 모양이다.

"흡...."

나는 입을 가려야만 했다.

입꼬리가 자꾸만 씰룩거려서 어쩔 수가 없었다.

투명 길리슈트로 몸을 숨겼기에 서예인의 자세한 모습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마 위에서 아래로 짓누르는 바람에 짜부라졌을 것이다.

효과음이 났다면 '찍'일까.

[김 호 100% 고현우 85%]

vs

[일공 72% 서예인 96%]

서예인의 체력은 많이 깎이지 않았는데, 곽지철을 두들겨 팰 때처럼 우악스럽게 윈드포스를 휘두르지 않아서 그렇다.

이번 전투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향상심을 자극하는 거니까, 방해만 해도 충분하다.

서예인은 은신 후 저격이 완전히 봉쇄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투명 길리슈트를 해제하고, 라이플도 쌍권총으로 바꿔 들었다.

- 투투투투투!

이것 역시 나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날아드는 마력탄들을 [도둑걸음]을 써 가며 피하고, 허밍버드를 연이어 두 번 시전했다.

- 파직, 파지직!

몸이 굳어진 서예인을 윈드포스로 살짝 밀었더니, 옆으로 넘어가서 모래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

회색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의욕이 빠르게 줄어드는 것이 느껴진다.

뭘 시도하든 안 통하니까 싸울 마음이 안 들겠지.

'이쪽은 끝났고.'

저쪽도 슬슬 마무리가 되어 가는 분위기다.

내내 밀리기만 하던 일공이 먼저 승부수를 띄우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고현우에게 장력을 쏟아 내는 동시에 거리를 벌리고, 일순간 기세가 급격히 치솟는다.

[능마불영금강기(凌魔佛影金剛氣)]

[대수인(大手印)]

일공이 앞으로 내민 손바닥에 모든 황금빛 기운이 집중되고 손이 두세 배는 크게 보였다.

그렇게 모여든 장력을 단숨에 발출하자 마치 커다란 금불상이 손을 앞으로 뻗어 내는 듯한 착각이 들게 했다.

[능마불영대금강수인(凌魔佛影大金剛手印)]

- 콰아아아아!!

커다란 금빛 손바닥이 고현우를 덮쳐 왔다.

고현우는 입가에 옅은, 그러나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은 채, 철검을 천천히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어디선가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주위를 맴돌았다.

뜨거운 태양에 달아오르던 일대가 삽시간에 서늘한 기운으로 뒤덮였다.

바람이 검날에 모여들어 더욱 예리한 칼날을 형성했고,

[청류(淸流)]

그것을 덮쳐 오는 금빛 손바닥을 향해 내리그었다.

철검이 끄트머리부터 서서히 부서져 내린다....

- 번쩍!

"...."

"...."

다음 순간, 고현우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철검이 깨끗하게 소멸했음에도 잠시간 투명한 검을 움켜쥔 것처럼 허공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다가 빈손에서 힘을 풀고 회수했다.

일공 역시 겉보기에는 멀쩡해서,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음...."

일공이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반쯤 꿇었다가, 다시 자세를 곧추세웠다.

몸을 가누기 힘들어하는 기색이다.

고현우가 물었다.

"더 하시려오?"

일공은 아직도 바닥을 굴러다니는 서예인에게 네 생각은 어떠냐 묻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다음으로 나를 확인했다.

그것으로 결론이 났다 판단했는지 우리에게 예를 갖춘다.

"소승의 패배입니다. 한 수 배웠습니다."

"좋은 승부였소."

[김 호 고현우 Win]

vs

[일공 서예인 Lose]

'지금 해 둘까.'

대수인이 썩 범용성이 높은 스킬은 아니지만 어차피 갈아탈 거, 잠깐이라도 빌려 쓰는 게 나을 듯하다.

일공이 떠나기 전에 재빨리 스킬을 복사한다.

['복사-스킬'을 사용합니다.]

[대상의 스킬 '대수인(D)'을 슬롯에 등록합니다.]

▷복사-스킬[2/2]

1. 대수인(D)

2. 도둑걸음(B)

한편 서예인은 그때까지도 모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다가가서 내려다보자 누운 채로 빤히 올려다보는데, 경기장이 자기 집 안방 다 됐다.

사막 한복판인데 얘는 덥지도 않나.

내가 내민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킨다.

"...."

서예인은 한동안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홱 몸을 돌려 경기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열이 받기는 하나 보다.

"서 소저가 화가 났나 보오."

"그렇겠지."

경기 내내 [윈드포스]에 시달렸으니 이건 백 프로다.

저렇게 그라데이션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할 때는 일단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해 주는 게 낫다.

대화는 그다음에 시도해 볼 일이고.

"나가자."

고현우와 나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장 다음 매칭을 잡는다.

[김 호 489점]

[고현우 717점]

기다리면서 고현우의 상태를 살폈다.

"멀쩡하네. 청류 그거 내공 엄청 잡아먹던데."

"하하, 예전의 본인이 아니라오."

조벽과의 승부에서 [청류]를 썼을 때는 내력을 거의 다 소모해서 점심시간 내내 운기조식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일공에게 같은 기술을 쓰고도 아무렇지도 않다.

[코어]의 랭크가 두 단계 상승하며 내력의 최대치가 대폭 늘어난 덕분이었다.

고현우가 씩 웃었다.

"김 형 덕분이오. 특수연공실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빨리 벽을 넘지는 못했을 거요. 어떻게, 본인의 실력은 기대에 미치는 것 같소?"

"거의. 한 경기만 더 보자."

때마침 경기가 잡히고 알림창에 상대방의 정보가 출력되었다.

[김 호 491점 고현우 718점]

vs

[왕필 460점 장삼 689점]

"...상당히 평범한 이름이구려."

"그러게."

순간이동 마법진을 타고 입장해서 맞은편 두 사람의 면면을 살폈다.

이름만큼이나 평범한 외견이었다.

왕필은 당장 객잔에 점소이로 투입해도 위화감이 없고, 장삼은 문지기 세우면 안성맞춤이다.

얼굴 보고 지나치면 3초 내에 어떻게 생겼는지 까먹을 것 같다.

나는 더 자세히 그들을 관찰하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대진운 괜찮구만."

어제 홍연화를 두 번 만난 건 유익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었고, 약간은 미안했다.

하지만 오늘은 고현우에게 아주 좋은 경험치가 되어 줄 상대들이 나왔다.

내 반응이 이해가 안 가는지 고현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저자들의 정체가 뭐길래 그러시오?"

"잘 봐 봐, 둘 다 개성이 넘치잖아."

"...?"

지나치게 평범해 보인다는 개성이.

서포터가 다 해먹음

50화 3주 차 대인전 (5)

경기 시작이 임박하자 왕필과 장삼은 각기 철검 한 자루씩을 꺼내 들었다.

눈대중으로 대강 실력을 가늠하고 고현우와 비교해 보니.

'2 대 1도 할 만하겠네.'

물론 저들이 본 실력을 내보이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제대로 붙는다면 일대일도 버거울 거다.

고현우로서는 승리를 점치기 어려운 강적이지만, 무인은 이런 강적과의 사투 속에 성장하는 법 아니던가.

이번에 내가 할 일은, 자기 실력을 꽁꽁 숨기는 왕필과 장삼이 실력 발휘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고현우에게 그럴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나는 서예인과 2 대 2를 할 때 했었던 말을 똑같이 했다.

"일단 혼자 해 봐. 위험하다 싶으면 도와줄게."

"알겠소."

[3]

[2]

[1]

[Start!]

고현우가 철검을 하단으로 늘어뜨린 채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전진했다.

왕필과 장삼은 2 대 1을 시킨다는 내 의도를 파악했는지, 나는 완전히 배제하고 고현우를 목표로 접근했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양옆으로 갈라서서 왕필은 내려베기, 장삼은 가로베기로 공격해 들어온다.

이에 고현우는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성큼 다가서며 일검을 그었다.

- 채챙!

왕필과 장삼의 검이 동시에 튕겨 나갔다.

튕겨 나가는 철검과 함께 물러났다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다시 공세에 나선다.

고현우는 고현우대로,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한 치의 물러섬 없이 검을 휘두른다.

좌우 또는 앞뒤에서 날아드는 철검들을 막고, 쳐 내고, 때때로 반격까지 가한다.

철검 세 개가 짧은 시간 수십 번 충돌했다.

- 채채채채챙!

왕필과 장삼이 펼치는 검술이 매우 익숙했다.

단조로운 베기와 찌르기만으로 이루어진 검법.

검사라면 누구든 한 번은 거쳐 가는 기본공이다.

'삼재검법.'

흔한 외견에, 이름에, 철검에, 삼재검법까지.

평범해 보이려고 무진장 애를 쓴 티가 났다.

너무 애를 써서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킨 감이 있다.

검술 정도는 다른 무난한 걸 써도 되지 않았을까?

다만, 단순히 은폐용이라기에는 삼재검법을 놀라울 만큼 잘 쓰기는 했다.

왕필은 460점, 장삼은 689점이다.

철검에 삼재검법을 고수하면서도 자기 점수대에서 몇 승씩은 챙겼다는 뜻이다.

특히 장삼은 이전 경기에서 만난 일공보다 점수가 높았다.

저자가 온전한 실력을 모두 내보인다면....

'유망주급.'

이래서 대진운이 좋다고 한 것이다.

[김 호 100% 고현우 99%]

vs

[왕필 97% 장삼 94%]

- 챙! 채챙!

고현우는 금세 2 대 1에 익숙해졌는지 적극적으로 공세를 이어 가고 있었다.

왕필의 공격을 가볍게 흘리며, 남는 여력을 모두 장삼을 압박하는 데 쏟아붓는다.

장삼의 방어가 뚫릴 때마다 체력이 조금씩 깎여 나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슬슬 때가 됐음을 직감했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삼재검법도 못 이기는 주제에 '본 실력을 보여 봐라!'라고 해 봤자 가소로울 뿐이다.

그래서 고현우에게 먼저 2 대 1을 시켰고, 큰소리칠 자격은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다음 단계는 내 몫이다.

한창 치열하게 공방이 오가는 싸움판에 끼어들었다.

"잠깐 다 멈춰 봐."

"...?"

"?"

내 말에 고현우가 순순히 철검을 회수하고 물러났다.

왕필과 장삼 역시 그대로 멈춰 서서 나에게 경계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제대로 붙으면 안 될까?"

"제대로 하는 중이다."

장삼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시치미를 떼 봤자 이미 증거가 명명백백하다.

나는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아니잖아. 한참 더 숨겨 둔 것 같은데."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근거를 제시하라면 끝도 없이 많지.

가만히 서 있는 왕필의 손을 가리켰다.

"쟤 원래는 역수(逆手)지?"

"...!"

"검 휘두르는 궤적이 자꾸 안쪽으로 굽더라. 아직 습관을 다 못 버린 것 같은데."

왕필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내 말을 듣고 한순간 동요가 스쳐 지나갔다.

곧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작게 한숨을 내쉰다.

"...눈썰미가 좋구나. 허나 우리는 더 실력을 내보일 생각이 없다."

"리플레이가 마음에 걸려? 우리는 비공개로 돌려도 상관없어. 다른 데다 말도 안 할 거고."

2 대 2 대인전에서 리플레이를 비공개로 돌리려면 경기에 참여한 네 사람 모두가 동의해야 한다.

나는 제안하는 입장이고, 고현우도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챈 것 같았다.

성격상 포인트를 다소 포기하더라도 제대로 된 승부를 보고 싶겠지.

그러니 저쪽에서만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면 되는데.

장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렇게까지 우리 실력을 보고 싶은 이유가 뭔가? 쉽게 이겨서 쉽게 점수를 얻어 가면 그만 아닌가?"

"점수만 먹어서 무슨 소용이냐, 실력이 늘어야지."

"동감이오. 이기든 지든 최선을 다해 겨뤄 보고 싶구려."

고현우가 내 말을 거들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장삼과 왕필은 영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저들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기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무인에게 숨겨진 실력을 내보이라는 요구 자체가 무례하기는 했다.

특히 저 두 사람 같은 부류는 무공에 대한 정보가 생사 여부를 가르기도 할 테니까.

"그래, 보여 주기 싫겠지. 그럼 동기 부여를 좀 해 줄까."

이럴 때는 억지만 부리지 말고 슬쩍 미끼를 던져 주는 게 더 효과적이다.

나지막이 단어 하나를 입에 담는다.

"유령무영(幽靈無影)."

"...!"

장삼이 내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

"네가 그걸 안단 말이냐?"

"궁금해?"

"궁금하다."

"이기고 물어봐."

"...."

미끼의 성능이 몹시 뛰어났다.

두 사람의 눈빛이 섬뜩한 살기를 머금기 시작한 것이다.

달라진 것은 눈빛뿐인데 이전까지 느껴지던 평범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목소리 역시 싸늘하게 변했다.

"후회하지 마라."

장삼과 왕필은 철검을 집어넣고 두 팔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기척이 서서히 희미해지더니, 바로 눈앞에 두고도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고현우가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려는 찰나.

장삼의 신형이 한 줄기 섬광이 되어 쏘아져 나갔다.

눈 깜짝할 새에 고현우에게 바짝 들러붙으며 한 손을 앞으로 쑥 내민다.

- 콱!!

산산 조각난 철검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고현우가 뒤로 나가떨어져서 몇 바퀴나 바닥을 굴렀다.

[고현우 99%]

[고현우 77%]

단번에 뭉텅 깎여 나간 체력.

내가 적절한 타이밍에 [윈드포스]를 집중시켜 뒤로 확 잡아당겼기에 공격이 얕게 들어왔으나, 그럼에도 피해량이 20%가 넘는다.

제대로 들어갔다면 치명상을 입고 전투 불능이 됐으리라.

"...."

장삼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일반적인 검보다는 짧고 단검보다는 길었다.

송곳처럼 가늘고 뾰족한 형태에 새까맣게 칠이 되어 있어, 어두운 곳에서는 알아보기 힘들 듯하다.

장삼의 정체와 매우 연관성이 깊은 무기였다.

평범함 속에 섞여들어 때를 기다리다가, 사냥에 나서는 순간에만 그 이빨을 드러내는 자들.

'살수.'

유망주들 얘기를 할 때 신병철이 언급했었다.

흑도 쪽에도 숨겨진 유망주가 한 명 더 있다고.

장삼을 처음 보자마자 저자가 그 흑도 쪽 유망주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는데, 본 실력을 들춰 보니 역시나.

"크으...."

고현우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겨우 몸을 가누고 전방을 바라보는 그에게 또다시 장삼의 찌르기가 쇄도했다.

- 쐐애애액!

고현우는 거의 손잡이만 남은 철검으로 미약한 검풍을 피워 올리면서 옆으로 몸을 날린다.

지금으로서는 가까스로 피하는 것이 최선이다.

내 뒤편에서도 왕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눈팔 여유가 있나?"

장삼과 고현우가 격돌하는 와중, 나에게 빠르고 은밀하게 다가와서 배후를 점한 것이다.

갑자기 한겨울이 된 것처럼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목덜미가 왕필의 단검에 난자당할 듯한 순간.

나는 태연하게 한 손에 장력을 그러모으며 답했다.

"있지."

['증폭'을 사용합니다.]

['윈드포스'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C+->A+)]

[대수인]

[윈드포스]

커다란 손바닥이 왕필을 덮치고,

- 펑—!!

그는 혜성처럼 한 줄기 잔상을 남기며 쏘아져 나갔다.

장삼이 고현우에게 돌진하는 속도보다 지금 왕필이 날아가는 속도가 더 빨라 보일 정도였다.

왕필은 그 속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보이지 않는 먼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김 호 100% 고현우 74%]

vs

[왕필 - % 장삼 93%]

"...!"

"...!"

고현우와 장삼이 얼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수인]은 알아봤겠지만, 사람을 대포알처럼 날려 보내는 광경은 난생처음일 것이다.

한참이나 말을 못 잇는 그들에게 공손히 손을 내밀었다.

"하던 거 마저들 하시죠."

"...왜 비공개를 제안하나 했더니."

"이럴 줄 몰랐나?"

본 실력을 보이라는 의도로 비공개 제안을 한 것이기는 한데, 리플레이가 안 돌아갈 때 신나게 날뛸 수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증폭]과 [윈드포스]를 아끼거나 가급적이면 티 안 나게 쓰는 편이지만, 비공개일 때는 그 제약에서 자유로워진다.

정말 급박한 상황이라면 [인페르노 피스트]까지 써도 되고.

물론 당초의 목적이 고현우와 장삼의 일대일 구도인 만큼, 더 이상은 손을 쓰지 않을 생각이다.

내 개입을 경계하는 장삼에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걱정 마라. 난 이제 구경만 할 테니까."

둘이 열심히 일대일로 겨루고, 고현우가 쓰러지면 그때 붙든가 말든가.

장삼이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을 하고 물었다.

"...정말 본 실력으로 겨루는 게 너희들 목표인가?"

"그렇소."

"...."

장삼은 고현우를 노려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이내 무언가 결심했는지, 새까만 송곳을 집어넣고 다시 철검을 꺼내 들었다.

"좋다. 원하는 대로 해 주마."

삼재검법으로 돌아가려는가 싶었지만 취하는 자세가 그것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었다.

피어오르는 살기 역시 지독하리만치 짙다.

송곳으로 펼쳤던 암살검을 철검으로 펼치려는 낌새인데, 아마 저것이 그의 진정한 독문무공일 것이다.

"후우...."

고현우도 길게 숨을 들이쉬고 뱉으며 심호흡을 했다.

부러진 철검을 교체하고 자세를 추스른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그를 휘감는다.

서로 준비가 끝났음을 확인하고.

장삼의 신형이 다리부터 흐릿해졌다.

단숨에 공간을 압축하며 철검을 찌르듯이 긋는다.

엄청난 쾌검이 고현우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든다.

- 쐐애애액!

그에 비해 고현우의 반응은 반 박자 느렸다.

가까스로 날아오는 철검을 후려치는 데 성공했지만,

- 쩌엉—!

자신을 완벽히 보호하지는 못해 팔에 길게 상처가 지나갔다.

[고현우 74%]

[고현우 65%]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다시 자세를 잡는 고현우와 장삼.

이번에도 장삼이 먼저 움직이며, 똑같은 찌르기로 공격해 들어왔다.

고현우는 철검을 휘두름에 앞서 그를 감싸던 바람을 움직여 전방을 압박했다.

장삼의 속도가 미약하게 줄어드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내 아랑곳하지 않고 바람을 가르며 파고들었다.

철검 두 자루가 엇갈리고,

- 쩌엉—!

[고현우 52%]

이번에는 옆구리에 일검을 허용했다.

안색이 창백하고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위태위태하다.

입가를 타고 핏줄기가 주륵 흘러내린다.

그러나 고현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솟아오르는 핏물을 삼키고 입가를 쓱 훔쳤다.

그새 반 토막 난 철검 역시 자연스럽게 새것으로 바꿔 들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

장삼은 그런 고현우에게 말없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서로 준비를 끝마쳤음에도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고, 조금 더 뜸을 들이며 상대방을 관찰한다.

고현우의 기세가 앞서와는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리라.

장삼이 물었다.

"이제 마지막인가?"

"그렇소."

"미리 초식의 이름을 들어 두고 싶군."

아마 둘 중 하나는 이 마지막 공방으로 쓰러질 테니까.

고현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급류(急流)."

서포터가 다 해먹음

51화 3주 차 대인전 (6)

고현우는 칼끝이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철검을 늘어뜨렸다.

그의 주변을 겉돌던 바람 역시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빠르게 거리를 좁혀 오는 장삼을 눈에 담고, 이번에도 반 박자 늦게 바닥에서 발을 뗐다.

돌연 거센 바람이 장삼을 향해 불어 갔다.

고현우는 마치 그 바람에 올라타기라도 한 것처럼, 흐름과 하나가 되어 질주했다.

장삼을 향해 순식간에 가까워져 가며 검을 휘두른다.

찰나 철검 두 자루와 사람 둘이 교차하고.

- 파앗!

장삼과 고현우는 서로에게 등을 보이며 서 있었다.

빈손을 앞으로 뻗은 채.

뒤늦게 한 뼘 길이도 안 되는 칼날 끄트머리가 고현우 옆 바닥에 푹 꽂혔다.

장삼 근처에도 잘게 쪼개진 파편들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두 사람은 계속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침묵했다.

나는 전투의 전말을 파악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했네.'

첫 격돌에서 고현우는 반 박자 늦게 대응했다.

그의 역량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 일부러 늦게 대응한 것이다.

상대와의 거리감, 속도, 철검에 담긴 내력 등을 더 정확히 가늠하기 위해서.

두 번째 격돌 역시 실험적인 측면이 강했다.

저 [급류(急流)]라는 초식은 원래 다른 용도가 있으리라 추측하는데,

아마 그것을 마지막 승부수를 위해 살짝 고친 것 같다.

위와 같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조금씩 피해를 입었으나, 고현우는 끝내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마지막 승부수에 모든 것을 걸었다.

순간적인 강풍을 통해 속도를 최대한 끌어올리고, 바람의 칼날을 검 끝에 집중시켜 장삼의 쾌검에 비할 만한 일검을 갖추었다.

그렇게 최선의 한 수씩을 주고받은 결과는,

'양패구상.'

두 사람이 동시에 전투 불능이 된 것이다.

지금도 미동조차 안 하고 있는데, 겉모습은 멀쩡해 보여도 몸 상태가 거의 한계에 달했을 것이다.

특히 고현우는 앞서 누적된 내상까지 합하면 더 상태가 심각하다.

"...."

"...."

당장 운기조식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억지로 몸을 움직이려 든다.

서로에게 뭐라 말하려는 모양이다.

보나 마나 좋은 승부가 어쩌고, 멋진 초식이 어쩌고겠지.

무인이란 족속들은 저런 시답잖은 것에 목숨을 걸곤 한다.

그들 나름의 낭만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저대로 입을 열게 놔뒀다간 말 대신 피를 토할 것 같았다.

해서 나는 슬슬 끼어들기로 했다.

"그만. 입 열지 마라."

[윈드포스]를 부드럽게 쓰자 둘 다 쓰러지듯 주저앉는다.

"일단 운기조식부터 하자."

"...."

"...."

시기적절하게 말할 타이밍이 끊겨서일까, 두 사람 모두 순순히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김 호 고현우 Win]

vs

[왕필 장삼 Lose]

그런 와중 스코어보드에 경기 결과가 출력되었다.

왕필은 경기장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고, 운공에 들어간 고현우와 장삼은 전투 불능, 멀쩡히 서 있는 건 나뿐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승부는 무승부지만 경기는 이긴 셈이다.

'사실 승부는 졌지.'

물론 냉정하게 따지면 장삼의 손을 들어 주어야 한다.

그가 처음 실력을 드러냈을 때, 송곳으로 찌르기를 성공시킨 시점에서 승패가 갈린 셈이니까.

일대일 상황에서 그와 같은 찌르기가 들어왔다면 내가 [윈드포스]로 도움을 주지도 못했을 테고, 그 이전에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이후 세 차례에 걸친 공방 또한 장삼이 고현우의 방식에 많이 맞춰 준 것이다.

격돌 사이사이에 잠깐씩 자세를 추스르는 시간을 가졌는데, 장삼의 입장에서는 굳이 기다려 주지 않고 몰아쳐서 끝내도 상관없었다.

그럼에도 번거롭게 기다려 준 이유는 내심 고현우의 마지막 한 수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아니었을까.

이런 점들을 고려하고도 겨우 양패구상을 했으니 둘의 실력이 같다고 볼 수는 없다.

아직은 고현우의 실력이 유망주급에 살짝 못 미친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아직은.'

그렇다고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고현우는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했고, [코어] 랭크작은 기나긴 여정의 첫걸음에 불과하다.

2주간 제법 빠른 성장을 이루기는 했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수많은 스킬과 특성들 중 하나다.

물론 고현우가 코어의 성장만으로 유망주들 턱밑까지 올라온 것은 내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지금 한소미나 조벽과 다시 겨룬다면 결국 지는 건 똑같을지 몰라도 이전보다는 훨씬 고전하게 만들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그들을 넘어서리라 확신한다.

상념에서 벗어나 고현우의 안색을 살피니 여전히 파리했다.

운공에 더 시간이 소요될 듯했다.

"...."

대신 장삼이 먼저 눈을 떴다.

고현우에 비해 내상이 얕았기에 회복도 빨랐다.

눈을 뜨자마자 스코어보드를 확인하고,

"졌군."

"그래."

패배를 담담한 태도로 받아들인다.

삼재검법을 고수하는 대목부터 느꼈지만 점수에 연연하는 성격은 아닌 듯했다.

그가 연연하는 것은 따로 있었는데....

"묻고 싶은 게 있다."

"물어봐."

"...."

장삼은 묻는다고 해 놓고선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쉽지 않은 질문인 듯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달싹거리다가, 어렵사리 질문을 던진다.

"...그렇게 티가 많이 났나?"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내가 한눈에 정체를 간파한 점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나는 일 초도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많이."

"...!"

"과하게 평범한 감이 있었지. 그래서 오히려 알기 쉬웠고."

"과하게 평범해서 알기 쉬웠다? 그게 무슨 뜻이지."

"생각해 봐. 이 학교가 뭐 하는 곳이냐."

세계 각지에서 장래의 영웅 지망생들이 총집합하는 장소.

뛰어나지 않다면 입학조차 불가능한 곳이니, 평범함이 오히려 개성이 된다.

내 말에 무언가 깨달았는지 장삼의 눈빛이 깊어졌다.

"과연. 여태까지는 잘 통했다 생각했는데, 그런 부분을 놓치고 있었군."

"그건 네 생각이고, 다른 사람들도 의심은 하고 있을걸."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나?"

나는 부자연스러웠던 부분을 하나씩 지적해 주었다.

"우선 가명부터 덜 촌스러운 걸로 바꾸자. 장삼 왕필은 좀 그렇지 않니? 외견도 덜 평범하게 꾸미고. 칼도 꼭 철검 안 써도 되겠더만. 무난하게 한 D급 정도, 많잖아. 또—"

그럴 때마다 장삼은 정곡을 찔린 듯 움찔거리더니, 결국에는 의기소침한 상태가 되었다.

면전에서 '너 옷 진짜 못 입는다.' 같은 소리를 듣는다면 누구나 비슷한 반응을 보이겠지.

어쨌든 제법 유의미한 조언이었기에 장삼이 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도움이 됐다. 새겨듣지."

그러면서 또 넌지시 질문을 던져 보지만,

"[유령무영]은...."

"이기고 물어보랬는데."

"...그랬지."

어림도 없는 소리.

우리가 이겼으니 가르쳐 줄 생각도 없다.

장삼이 약간은 미련이 남은 기색으로 말했다.

"다음에 다시 도전하겠다."

"그러든가."

사실 [유령무영]을 언급한 것부터가 계산된 행동이었다.

저쪽에서 나중에 다시 나를 찾아오도록.

그때 가서 고현우와 재대결을 시키든, 박나리에게 큐브 팔아먹은 것처럼 거래를 하든, 원하는 걸 주고받으면 된다.

"...."

"...."

잠시 대화가 끊기고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자연스레 나와 장삼의 시선이 고현우에게 옮겨 갔다.

이제 막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하는 터라 회복에는 더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기다리다 못해 장삼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능하면 몇 마디 나누다 가고 싶었건만, 시간이 여의치 않군. 좋은 승부였다고 전해다오."

"그래. 얘도 똑같이 말할 거다."

"다음에 보자."

장삼이 퇴장하고.

고현우는 예상대로 한참이 지나서야 운기조식을 끝마쳤다.

워낙 무리를 했기에 아직도 몸 상태가 저조하지만, 거동이 가능할 정도까지는 회복했다.

장삼과 마찬가지로 눈뜨고 제일 먼저 스코어보드부터 확인한다.

"이겼구려. 그자는...."

"먼저 갔어. 좋은 승부였대."

"동감이오. 김 형이 보기에는 어땠소?"

"잘 싸우더라. 탐색전 두 번 하고 마지막에 승부수, 깔끔했다."

빈말이 아니라 솔직한 감상이었다.

솔직히 질 가능성이 꽤 크다 예측했었고, 그런 승부를 양패구상까지 끌고 간 것만 해도 고무적인 성과였다.

고현우가 처한 상황에서 그보다 더 잘 운영할 수는 없었다고 본다.

나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기뻤는지 고현우의 얼굴이 밝았다.

"역시. 김 형이라면 알아보리라 생각했소."

그러나 경기장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점차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한쪽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바닥에 꽂혀 있는 부러진 칼끝을 뽑아 든다.

철검 파편이 퍼석 하는 단말마를 내뱉고 더 작게 부서져 내렸다.

알갱이들이 흩날리는 양을 지켜보며, 고현우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고민이 되는구려."

"무기 때문에?"

"그렇소. 언제까지고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겠지."

현재 고현우의 가장 큰 약점.

바로 걸핏하면 파괴되는 철검이다.

그가 익힌 무공은 검기로 일대에 바람을 일으키며, 주변 환경을 제어하는 성질을 가졌다.

어찌 보면 마법의 영역에도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셈이다.

막대한 힘을 휘두르는 만큼 내공의 소모량이 크고, 어지간한 무기로는 그 기운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일반적인 무공을 젓가락으로 돌멩이를 집어 올리는 것에 비유한다면,

고현우의 무공은 젓가락으로 바위를 들어 올리는 것에 가깝다.

그러니 매번 젓가락이 뚝뚝 부러져 버릴 수밖에.

F급 무기 정도는 용살학원 측에서 무한히 제공하니 소모품처럼 막 써도 상관없다.

모르긴 몰라도 고현우가 인벤토리에 넣고 다니는 철검만 두 자릿수는 될 거다.

문제는 부서진 철검을 새것으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빈틈이 생긴다는 점이다.

"일공하고 붙었을 때도 위험했고."

"그랬소."

일공의 실력은 고현우보다 반 수에서 한 수 정도 떨어지는 편이었는데, 그런 일공을 압도하다가도 철검이 깨지는 바람에 잠시 수세에 몰렸었다.

장삼과의 대결에서도 증명된바, 실력이 엇비슷하거나 강한 상대로는 이 빈틈이 더욱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지금 해 두는 게 좋긴 하지.'

앞으로 고현우와 히든 피스를 구하러 다닐 예정인 이상, 지금 이 약점을 최대한 보완해 둘 필요가 있다.

목숨을 건 전투에서는 무기가 깨지는 순간 죽음이니까.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너도 생각해 둔 게 있겠지. 어떻게 하고 싶은데."

"사실 해결책이야 단순하지 않겠소? 더 좋은 검을 쓰는 것이지."

등급이 높은 검일수록 더 좋은 금속을 쓰고, 불순물도 적다.

그에 비례하여 내구도도 증가하니, F급 철검보다는 E급, D급이 더 오래 버티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단지...."

"비싸지."

등급이 높은 검일수록 가격도 같이 올라간다.

한두 자루야 어떻게 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철검 깨 먹듯이 소모품으로 쓰자면 지갑에서 금화가 줄줄 새어 나가는 것이다.

사문의 신물(神物)이라는 장검을 쓰면 아무 걱정도 없겠지만, 그건 아직 자격이 안 된다던가.

결국 적당히 등급이 높은 검을 쓰기는 써야 한다는 결론인데, 사문에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하나 보다.

고현우의 표정이 어두운 걸 보면 말이다.

"부끄럽게도 재정 상황이 그리 넉넉지 못하오."

"부끄러울 게 뭐 있냐. 나는 전 재산이 10실버야."

초기 자금 5실버를 슬롯머신에서 홀랑 쓰고, 입학식 퀘스트로 5실버 받고, 신병철과 내기해서 5실버 얻었다.

그래서 겨우 10실버다.

내 말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는지 고현우가 얼굴에 슬며시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무기를 꼭 돈으로만 사라는 법은 없지."

병장기도 결국은 아이템이고, 용살학원에서 아이템을 얻을 방법은 무궁무진하게 많다.

그중에서 가장 접근성이 좋은 방법이 무엇이냐.

나는 학생 상점 카탈로그를 꺼냈다.

"포인트 얼마 있냐."

52화 잡동사니를 분해하다 (1)

학생들의 포인트 사용처 일 순위는 다른 학생들의 리플레이,

다음으로 공략전에 쓰는 보조 도구,

마지막으로 특수연공실 같은 제한적인 수련 구역에 출입하는 용도다.

보통은 이 셋에만 분배해도 포인트가 거의 남아나지 않기에 다른 곳에 눈 돌릴 여유가 없다.

그러나 포인트만 충분하다면.

학생 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는 아이템의 범위가 대폭 넓어진다.

당연히 무기도 거기에 포함되고.

고현우가 학생증 뒷면을 확인하고 답했다.

"5천 포인트가량 모였구려."

"넉넉하네."

내가 시즌 패스를 구해다 주기 전까지 특수연공실에 포인트를 모조리 쏟아부었는데, 그러고도 벌써 저만큼 쌓였다.

공략전 수석으로 스타트했기에 나름 인지도가 있고, 전체적인 실력도 유망주급은 아니지만 최상위권에 근접했다.

아마 꾸준히 리플레이를 챙겨 보는 사람 수가 제법 될 거다.

아무튼 이 5천 포인트를 어떻게 써먹는 게 좋을까.

무기를 사라는 의도로 언급한 것이기는 한데, 더 중요한 게 있다.

"먼저 [열촉매 시약] 세 개만 사자."

가격은 한 개당 천 포인트씩, 도합 3천 포인트다.

고현우는 물주로서 당연한 의문을 던졌다.

"이것들은 어디에 쓰는 물건이오?"

"제작 재료야."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법공학에 들어가는 재료다.

시약 두 개는 앞으로 고현우에게 필요한 아이템,

"또 하나는 내 공임(工賃)이다."

나는 당당하게 밝혔다.

나도 입에 풀칠은 해야지.

고현우는 거기까지 듣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3천 포인트를 털어 넣었다.

아이템들을 건네며 되레 나에게 묻는다.

"공임이 이걸로 충분하겠소? 김 형의 수고에 비해 너무 적지 않나 싶군."

객관적으로 봐도 천 포인트는 내가 만들어 줄 아이템의 값어치에 비하면 거저먹는 수준이다.

뭐라도 더 해 주고 싶어 하는 고현우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나중에. 나는 급할 거 없어."

당장 눈앞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건 고현우 쪽이다.

예산도 5천에서 2천으로 대폭 줄어서 빠듯해졌고.

내 입장에서도 사소한 욕심을 부리기보다, 나중에 던전 보상 등에서 내 몫을 더 요구하는 편이 이득이다.

나는 빠르게 카탈로그를 뒤져서 E랭크, D랭크 한손검을 하나씩 골라 주었다.

"남은 포인트로는 이거랑 이거 사면 되겠다."

"알겠소."

[표사의 장검(E)]

[표두의 장검(D)]

내구도 위주로 선택하자면 이 '표국 시리즈'만 한 게 없다.

F급 철검과 사용감이 비슷하다는 것도 장점.

그래서인지 고현우는 허공에 장검을 몇 번 그어 보는 것만으로 적응한 듯했다.

"나쁘지 않군."

"E급부터 하나씩 시험해 봐. 얼마나 버티나."

"마침 대인전이 두 경기 남았소."

오늘 나와 함께한 두 경기 외에도 랜덤큐 두 경기를 더 진행해야 이번 주 할당량을 다 채운다.

당장이라도 매칭을 잡을 기세라 고현우를 만류했다.

"아니. 오늘은 여기까지 해. 무리했다."

"아직 더 싸울 수 있소."

"싸울 수야 있겠지. 근데 상대로 장삼이 또 나오면?"

"...!"

장삼뿐만 아니라 다른 유망주급과 붙게 될 가능성 역시 작지 않다.

최고의 컨디션으로 싸워도 승리를 점치기 어려운데, 지금 같은 상태라면 필패.

고현우 역시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작게 헛기침을 했다.

"크흠.... 새 검을 써 보고 싶은 마음에 조금 들떴나 보오."

"대인전은 내일 해도 안 늦어. 오늘은 회복에만 집중해라."

"알겠소. 그게 좋겠구려."

보건실에서 마저 치료받은 뒤 특수연공실에서 코어를 다듬는 쪽으로 일정을 잡았다.

그렇게 고현우를 보내고.

아까 도착했던 알림 메시지를 다시 불러냈다.

[서브 퀘스트:3주 차 대인전]

▷목표:대인전 4회 완료. (4/4회)

▷기한:~일요일 자정.

▷보상:승리 횟수에 따라 차등 지급. (4/4승)

[장신구 선택권(C)]

▷원하는 C등급 장신구를 습득합니다.

깔끔하게 4연승을 한 덕분에 보상으로 C랭크 장신구 선택권을 받았다.

미리 정해 둔 것이 있었기에 고르는 데 몇 초 걸리지도 않았다.

[블랙 미스릴 밴드(C)를 획득합니다.]

[블랙 미스릴 밴드(C)]

▷매우 높은 마나 전도율

검은색 광택을 뿌리는 얇은 금속 팔찌.

순도 높은 블랙 미스릴을 띠 모양으로 가공한 아이템이다.

'매우 높은 마나 전도율'이라는, 듣기에 따라 애매할 수도 있는 성능을 가졌다.

팔찌를 차고 있으면 [코어] 연공에 도움이 되거나 마나 회복이 빨라지는 소소한 효과다.

그러나 이 마나 전도율이야말로 내가 다른 C급 팔찌들을 제쳐 두고 이것을 선택한 이유였다.

지금이야 소소하지만 머지않아 C급 이상의 이득을 보게 해 줄 테니까.

블랙 미스릴 밴드를 착용하고,

다음 순서는 3천 포인트어치 재료를 써먹는 것.

나는 마법공학 공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장 봉재석에게 제1공방 사용 허가를 받아 놓기는 했는데, 지금 시간대에는 정원이 꽉꽉 들어차서 발 디딜 틈조차 없을 것이다.

부장 권한으로 나에게만 예외를 둔 터라 조금은 부원들 눈치를 봐야 되고.

비교적 한산해지는 자정 무렵까지 대기하는 게 맞다.

물론 그때까지 하릴없이 시간만 때우는 건 내 성미에 안 맞기 때문에,

미리 필요한 밑 준비를 다 끝내 놓을 예정이다.

제4공방에서.

* * *

제4공방은 첫날이나, 며칠 전이나, 오늘이나, 전혀 달라진 점이 없었다.

안에도 늘상 그렇듯 한 사람뿐.

나와 10x10x10 큐브 설계도를 거래했던 3학년 선배였다.

"...."

인기척이 느껴지자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뒤돌아본다.

뭐라 말은 안 하지만 '또 너냐?' 비슷한 표정이다.

나는 후배 된 도리로서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어, 그래, 안녕."

그는 떨떠름하게 답하곤 하던 일로 돌아갔다.

내가 관심을 꺼 줬으면 좋겠는지 일부러 집중하는 티를 팍팍 낸다.

큐브 설계도 때문에 봉재석한테 깨졌었다니까, 나를 대하기가 다소 불편하겠지.

반면 나는 그런 것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4공방에 온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다.

'먼저 복사부터.'

['복사-스킬'을 사용합니다.]

[대상의 스킬 '마법공학(B)'을 슬롯에 등록합니다.]

▷복사-스킬[2/2]

1. 마법공학(B)

2. 도둑걸음(B)

짧고 굵게 썼던 [대수인]을 보내 주었다.

근접 공격 스킬이야 찾으면 많으니 나중에 새로 구하면 된다.

다음으로 한구석에 쌓인 잡동사니의 산으로 다가갔다.

봉재석 말로는 나중에 도면만 그려서 제출하면 마음껏 뒤적거리고 가져다 써도 괜찮단다.

이 안에 히든 피스가 몇 개 더 묻혀 있기는 하지만 [생명의 큐브]처럼 대단한 건 이제 없다.

굳이 더 발굴하기에는 영양가가 부족하다.

지금 내가 잡동사니들을 뒤적거리는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재료를 구해야 돼.'

고현우에게 넘겨받은 재료들은 극히 일부분.

정확히는 '포인트가 들어가는' 부분만 해결된 상태다.

사실 촉매 하나 집어넣고 멀쩡한 아이템이 불쑥 튀어나오길 바라는 건 욕심 아니겠는가.

당연히 재료를 더 모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으로서 그 재료를 별다른 대가 없이 구할 곳은 여기뿐이다.

이 잡동사니의 산을 이루는 아이템들은 대개 제작 도중, 모종의 이유로 만들다 만 실패작들이다.

바꿔 말하면, '제작하던' 부분은 생각보다 멀쩡하다.

그리고 그 멀쩡한 부분을 잘 분해하면 재료를 살려 낼 수 있다.

마법공학 동아리에서도 이 사실을 알기는 안다.

그렇다면 이 잡동사니들이 하루가 다르게 쌓여만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그 분해하는 작업이 엄청나게 수고스럽기 때문이다.

이 반쪽짜리 기계 덩어리가 대체 어떤 아이템의 일부인지,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어느 단계에서 중단되었는지 파악하는 걸로 시작해서,

알맞은 마법공학 술식을 새로 짜고, 뒤엉킨 실타래를 풀어내듯 차근차근 분해해 나가야 한다.

이 짓거리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새 재료를 구해다 쓰는 게 나을 지경이다.

'물론 나는 아니고.'

[생명의 큐브]도 며칠 만에 뚝딱 완성시켰던 나에게 이런 건 수고스러운 축에도 못 끼었다.

내 눈에는 재료들이 한가득 널린 것처럼 보였다.

유용한 것들만 쏙쏙 골라내서 모은 후 작업대로 가져간다.

마법공학을 시전하자 손이 은은한 푸른빛을 머금었다.

그 상태에서 작업대 위 공구를 조작해 실패작들을 하나씩 해체해 나갔다.

이 짓도 한두 번 해 본 게 아니라 내 손놀림에는 거침이 없었다.

제삼자의 눈에는 내가 공구를 대충대충 휘젓는데 아이템이 저절로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한쪽에는 멀쩡한 재료, 반대쪽에는 도저히 재활용이 불가능한 쓰레기를 분류하여 쌓았다.

작업을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잡동사니가 줄어들고, 산 두 개가 높이 쌓여 간다.

"...."

그런 와중 뒤편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볼 것도 없이 3학년 선배가 내 쪽을 훔쳐보는 중이겠지.

나와의 다소 불편한 관계 이전에 그 역시 한 사람의 마법공학자다.

내가 10x10x10큐브를 완성시켰다는 소문은 전해 들었을 터.

내가 일 처리를 물밑에서, 번개처럼 진행해서 소문이 덜 퍼진 거지, 마법공학자에게 [생명의 큐브] 제작은 가히 전설적인 업적이다.

그런 전설을 쓴 내가 또 잡동사니를 열심히 주무르고 있으니, 또 무슨 대단한 걸 만드나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다.

얼마간은 선배로서의 체면 때문에 참는 듯했으나, 결국에는 호기심을 못 이기고 슬쩍 근처로 다가왔다.

봉재석에게 무슨 언질을 받았는지 나에게 질문하는 태도가 몹시 조심스럽다.

"그.... 뭐 만드냐?"

"분해 중입니다. 재료 좀 구하려고요."

"그 귀찮은 짓을?"

"귀찮은 짓이라도 해야죠."

물론 말과는 달리 전혀 귀찮지 않았다.

작업이란 들이는 수고에 비해 성과가 클수록 의욕이 솟는 법.

건드리는 족족 아이템이 튀어나오는데 이 정도 수고쯤이야.

"한번 봐도 되냐?"

"예, 괜찮습니다."

재료들을 살펴보기 앞서 나에게 허락을 구한다.

그래도 아주 경우가 없는 사람은 아니네.

사실 곧장 인벤토리에 수납해도 되는 걸 저기 쌓아 놓은 건 다분히 보여 주려는 의도에서였다.

그가 재료들을 이모저모 뜯어보더니 감탄성을 흘렸다.

"분해한 건데 재료가 이렇게 깨끗하게 나와? 완전 새 건데?"

제작되고 분해되는 과정에서 두 번이나 마법공학이 가해지다 보면 작게나마 손상이 생길 법도 한데,

이 재료들에서는 거의 하자를 찾아볼 수 없다.

그대로 다른 아이템 제작에 가져다 써도 성능에 페널티를 입지 않을 정도.

S급 마공학자를 십수 명씩 키워 낸 고인물의 관록이 담겼다 보니, 내 손으로 직접 하는 분해는 완벽 그 자체였다.

"...."

선배가 연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

눈앞의 재료들이 탐나지만 나를 따라서 잡템들을 분해하기에는 엄두가 안 난다.

자신의 마법공학 실력으로는 시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작업 도중 재료에 손상을 입힐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입맛을 다시며 지켜보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슬슬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 같은데.'

일부러 깨끗한 재료들을 보여 주고 부러움을 샀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지.

마법공학 공구를 조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운을 뗀다.

"선배님, 재료 몇 개 교환하시겠습니까."

"이거랑?"

"예. 싸게 쳐 드립니다."

"나야 좋지."

선배는 내 제안에 반색을 했다.

괜찮은 재료가 많아 보이던 차에, 내가 싼값에 물물 교환을 열어 준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뭐 뭐 필요한데?"

"[쿨러]랑, [중심축], [고강도 철사], 또...."

필요한 아이템의 목록을 읊자, 선배가 줄 수 있는 것을 내어 주고 테이블 위 재료 몇몇을 챙겼다.

그렇게 내가 가진 것들을 종합해 보면,

'하나는 해결했네.'

내가 마법공학 공방에서 만들고자 하는 아이템 셋 중 첫 번째.

고현우에게 만들어 줄 아이템의 재료가 모두 모였다.

포인트 들어가는 것들은 고현우에게 받고, 잡동사니 분해로 일부를 충당하고, 마지막으로 몇 군데 뚫린 구멍을 선배와의 거래로 메꿨다.

이제 1공방에 자리가 날 때쯤 가져가서 제작하면 된다.

"야, 근데 이거.... 봉재석이 뭐라 하는 거 아니냐?"

재료를 쉽게 구해서 희희낙락한 것도 잠시, 불안한 기색을 비치기 시작하는 선배였다.

아무래도 봉재석한테 깨진 전례가 있다 보니 또 그럴까 걱정되나 보다.

"다 허락받았잖아요. 별문제 없을 겁니다."

"쓰읍.... 그래도 괜히 불안하네."

"우리가 뭐 죄짓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정 불안하시면 아예 이것도 허락을 받아 버리죠."

"...그럴까? 그럼 메시지 보낸다?"

선배가 그 자리에서 봉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방금 전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짧게 간추려서.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 쾅!

봉재석이 제4공방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 왔다.

53화 잡동사니를 분해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