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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 호 Win vs 곽지철 Lose]

"프흫흐흫흫!!"

당규영이 신나게 웃어 재끼며 내 어깨를 찰싹찰싹 때렸다.

이긴 건 나인데 본인이 더 기뻐한다.

"잘했다, 잘했어! 아주 그냥 속이 뻥~! 프흫흫흐흫흫!"

관중석의 고현우, 서예인, 신병철 역시 멀찍이서 승리를 축하하며 다가오는 중이다.

반면 에메랄드 마탑 진영은 완전 초상집 분위기였다.

곽승재가 기절한 동생을 수습하고, 목종화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대자연 동아리 쪽은 왠지 모르게 내 눈치를 살피는 듯하다.

아무튼, 이제 수금할 시간이다.

"...."

내가 다가가자 목종화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화를 삭였다.

그러나 약속은 약속, 인벤토리에서 [제작 VIP 티켓]을 꺼내서 넘긴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넘기기 싫은가 보다.

하긴 저게 어떤 아이템인데.

나는 티켓을 품 안에 갈무리한 뒤 말문을 열었다.

"제안 하나 할까요."

"...뭐냐."

"이번 결투 리플레이. 비공개로 돌리는 건 어떻습니까?"

"...!"

이번 결투가 공개되면 에메랄드 마탑은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다.

1학년끼리의 결투에 3학년 장비와 골렘을 지원해 주었고, 그러고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했다.

이리저리 밀쳐지고 당겨지고 날아다니는 곽지철의 행위 예술은 덤.

가능하다면 없던 일로 하고 싶겠지.

그래서 내가 먼저 동아줄을 내밀어 주었다.

잠시 침음하던 목종화가 되물었다.

"결투도 판돈이 걸리고서야 받아들인 놈이 우리에게 유리한 제안을 던진다라."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장사치가 따로 없군."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겠죠. 받으실 겁니까?"

목종화로서는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어떻게든 내 입막음을 하는 게 이미지가 박살 난 뒤 수습하는 것보다는 싸게 먹힐 테니까.

"쯧. 원하는 걸 말해라."

"지금은 딱히 없고, 나중에 작은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좋습니다. 그럼 저는 비공개로 돌릴게요."

선심 쓰듯 말했지만, 리플레이를 비공개하는 건 나 역시 바라는 바다.

[윈드포스]에 대한 정보는 천천히 퍼질수록 유리하니까.

목종화가 이 제안을 수락하리라 확신했기에 결투에서 윈드포스를 온갖 방식으로 펑펑 써 댄 것이기도 하다.

다른 이유로는 목종화에게 빚을 지워 두기 위해서.

에메랄드와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여기서 더 나가면 싸움이 지저분해질 가능성이 크다.

교칙 위반은 기본이요, 그 위의 위험한 선까지 넘나드는 진흙탕 싸움.

오는 족족 쓰러뜨릴 수는 있어도, 그것 때문에 내 성장이 방해를 받는다면 바람직한 결과는 아니다.

괜히 서예인이나 고현우가 피해를 보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도 반걸음 양보했고, 그 대신 목종화의 발을 묶었다.

나에게 일말의 부채감을 느끼는 동안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물론 양반은 못 되는 인간이라 나중에는 생각이 바뀔지 모르지만,

'그때는 내가 충분히 성장한 뒤겠지.'

에메랄드 마탑 정도는 가볍게 짓밟아 버릴 수 있을 만큼.

서로의 속내야 어떻든, 겉으로는 임시 휴전이었다.

목종화가 나에게 턱짓으로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그새 정신을 차린 곽지철은 내 눈을 감히 마주치지도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비틀거리며 목종화를 따라갔다.

곽승재는 나에게 담담한 시선을 한번 보낸 후 에메랄드 일행에 합류했다.

그 뒷모습들을 잠시 지켜보고 있는데, 손가락 두 개가 살며시 내 볼을 꼬집더니 주욱 잡아당겼다.

"이거이거, 보면 볼수록 완전 능구렁이네?"

"슨배님, 이거 노코 애기허시조."

당규영의 손을 볼에서 떼어 냈다.

원래도 묘하게 거리감이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동아리 영입 제안을 한 뒤로는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리플레이 비공개 그거 다 계산하고 던진 거잖아. 그러면서 손해는 하나도 안 봤고."

"눈치가 빠르시네요."

"괜히 부장이겠냐. 근데 목종화한테는 뭐 부탁할 거야?"

"나중에 차차 생각해 봐야죠. 선배님한테 했던 거랑 비슷한 수준일 겁니다."

"아, 맞다. 네가 말하니까 생각나네."

당규영도 [생명의 큐브]의 정보를 열람하는 대가로 내 '작은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었다.

그 작은 부탁이란,

- 마법공학 동아리 부장한테 소식 하나만 전해 줘요.

-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면 더 좋고.

- 신입생이 10x10x10 큐브를 완성시켰다고.

"어디까지 진행됐어요?"

"흘리는 건 진작에 흘렸지. 나한테 의뢰도 들어왔어."

"의뢰요?"

"한번 만나 보게 자리 좀 마련해 달라더라. 어쩔래?"

"잘됐네. 만나 보죠."

다음 아이템으로 넘어가기 전에, 딱 하나만 더 해 먹자.

서포터가 다 해먹음

44화 결투 (6)

"퇴부는 재고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목종화는 계속 일정한 걸음걸이를 유지한 채, 고개만 돌려 곽승재를 흘긋 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앞을 보고 걸으며 입을 연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결투 보시지 않았습니까."

"봤지. 아주 형편없는 쓰레기 같은 결투였다."

목종화의 말투에는 은은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힘없이 바닥만 보고 걷던 곽지철이 어깨를 움츠렸다.

곽승재는 그런 못난 동생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지만, 말로는 계속 변호를 이어 갔다.

"지철이가 잘했다고는 못하겠습니다만, 이건 불가항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장님의 골렘을 상대로 퍼펙트게임. 그게 가능한 자가 1학년 중 몇이나 되겠습니까?"

3학년 골렘에 [어스 클러스터]를 활용한 원거리 공격까지.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피하며 끝까지 100% 체력을 유지하는 것은 1학년은 물론, 2학년이 하기에도 어려운 기예였다.

곽승재가 김호의 입장이었더라도 몇 번 정도는 유효타를 허용했을 터.

다시 말해, 김호는 그것이 가능한 실력자라는 뜻이다.

이번 결투만 놓고 평가하면 유망주급, 혹은 그 이상.

"지철이가 패할 만한 승부였습니다. 퇴부는 지나친 처사가 아닐지요."

"그렇다 한들 저놈이 에메랄드에 먹칠을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먹칠이 정말 제 동생 혼자서 한 것입니까."

주제 모르고 날뛰다가 처맞은 것은 분명 곽지철의 잘못이다.

하지만 원인을 되짚어 보면 일을 과격하게 밀어붙인 목종화의 잘못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목종화 역시 내심 그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자신의 치부가 들춰진 것이 불쾌했기에, 말없이 제자리에 서서 곽승재를 노려보았다.

"학생선도부가 에메랄드 마탑의 행사에 관여하는가?"

"아니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조언을 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그 조언이 동생의 실수를 눈감아 달라는 말이냐? 곽승재는 매사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칼같이 일 처리를 한다더니, 그것도 옛말이군."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부장님께서 공정한 판단을 내리시길 바랄 뿐입니다."

곽승재의 얼굴은 아무 변화도 없이 무덤덤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어쩐지 화를 내 봤자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 목종화는 점차 화를 누그러뜨렸다.

목종화도 바보는 아니었다.

용살학원에서 3학년까지 살아남고, 한 동아리의 부장 자리까지 오르는 것은 요행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가끔씩 폭급해지는 성격과는 별개로 최소한의 사리 분별은 가능한 자였다.

곽씨 가문은 에메랄드 마탑의 한 축을 이루는 유서 깊은 토 속성 술사 가문.

태어날 때부터 에메랄드 마탑의 일원이었으며,

입학하기 전부터 동아리에 이름을 올렸다.

에메랄드 마탑에 심각한 누를 끼쳤다면 모를까, 이만한 일로 퇴부시키면 뒷감당이 안 된다.

"그래서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기회를 달라는 겁니다."

어떤 기회를 얼마나 줄지는 목종화의 재량에 맡긴다.

더 억지를 부린다면 퇴부를 완전히 번복하게 만들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동아리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어디까지나 조언하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또한 곽지철이 에메랄드의 체면을 구긴 것은 사실이었고, 응당 그 대가는 치러야 한다고 여겼다.

잠시 침음하던 목종화의 입이 열렸다.

"두 달. 앞으로 두 달간 랭킹을 보고 결정하겠다. 불만 있나?"

"충분합니다."

"흥."

목종화는 곽승재, 곽지철 형제를 한번 일별하곤 그들을 두고 걸어 나갔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시간을 주기 위함이 절반, 둘 다 꼴도 보기 싫어서가 나머지 절반이었다.

"...."

곽지철은 여전히 의기소침하여 고개를 못 들어 올리고 있었다.

망나니처럼 무서울 것 없는 놈이지만 제 형 앞에서는 기가 죽는다.

형이 보는 앞에서 그 추태를 보였고, 형의 도움 덕에 퇴부를 면했으니, 여러모로 면목이 없으리라.

곽승재가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사람이 들었다면 평소보다 다정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너에게 달렸다."

"...미안해, 형."

"사과보다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 듣고 싶구나."

"...최선을 다할게."

"그래, 이만 가라."

"...."

곽지철은 애써 힘찬 발걸음으로 나아갔다.

곽지철마저 보내고, 곽승재는 홀로 섰다.

그러다가 허공에 대고 말을 걸었다.

"송천혜."

"!"

골목 너머에서 흠칫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송천혜가 천천히 고개부터 내민 다음, 쭈뼛거리면서 다가왔다.

"...알고 계셨어요...?"

"전에도 말했지. 너는 몸을 숨기는 재주가 없다고."

송천혜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곽승재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아레나에는 무슨 일로 찾아왔나?"

"그냥 지나가다가 들렀는데... 요...."

"네가 시작하기 한참 전부터 관중석에 숨어 있는 걸 봤다."

"...."

속이 꽉 찬 돌직구를 얻어맞고 송천혜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이렇듯 곽승재의 성격은 솔직하지 못한 송천혜와는 완전히 상극이었다.

이어서 직설적인 조언을 던진다.

"너는 학생선도부다. 부끄러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고 당당히 너 자신을 드러내라. 적어도 어설프게 숨다가 들키는 것보다는 낫겠지."

"...명심할게요."

곽승재는 거기까지만 하고 본론으로 넘어갔다.

"결투 내용은 어떻던가."

"대단하더군요."

"직접 붙으면 제압할 수 있겠나?"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

"확신은 못 한다, 라...."

송천혜의 실력은 단연코 1학년 최상위권.

곽지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그런 송천혜조차 백 프로 승리를 자신하지는 못한다.

김호가 무엇을 더 숨기고 있을지 모르니까.

당장 이번에 선보인 바람 마법만 해도 그들이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그런 자가 300점대에서, 겁쟁이 소리를 들으며, 바짝 몸을 낮추고 있다?

곽승재와 송천혜가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손은 깨끗했다고?"

"네, 꼼꼼히 확인했어요."

김호가 그날 밤의 복면인일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었다.

[인페르노 피스트]를 썼다면 고위 대신관이 치료 마법을 들이부어도 며칠은 흔적이 남을 텐데, 그의 손에는 아주 작은 생채기 하나 없었단다.

원래는 이 시점에서 다른 용의자로 눈을 돌려야 옳지만....

자꾸만 그 신입생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모든 것을 자신의 아래로 두는 오만한 눈빛.

복면인을 마주했을 때의 분위기와 매우 흡사했다.

그러나 이 또한 심증에 불과하다.

[돋보기] 사용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라도 뚜렷한 증거를 잡아내야만 한다.

"미안하다. 네가 더 수고를 해 줘야겠구나."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에요."

"부탁하마."

송천혜는 마음속으로도 의욕을 불태웠다.

'반드시 꼬리를 잡고 말 겁니다.'

* * *

당규영과 신병철은 우리와 조금 더 수다를 떨고 싶은 눈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징계를 수행하러 갈 시간이었다.

아마 지하수로 청소 따위의 궂은일을 맡게 되겠지.

표정에서 귀찮음이 뚝뚝 떨어지지만, 그게 당규영이 택한 길인데 어쩌랴.

금지 아이템을 잔뜩 해 먹은 대가다.

"...."

서예인은 입을 작게 벌리고 하품을 꽤 긴 시간에 걸쳐서 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결투 전에 비해 급격하게 피곤해진 듯하다.

결투는 길어야 10분 정도였는데.

"기숙사 가서 자게?"

"응."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가기 전에 나에게 묻는다.

"신발 도움 됐어?"

"그래, 덕분에 한 대도 안 맞았다."

임시 보관소 침입 때도 [도둑걸음]만으로는 곽승재의 흙탄환 세례를 완벽하게 피하지 못했다.

[원소 저항]에 막혀서 티가 안 났을 뿐이지.

아마 이번에도 도둑걸음만으로 임했다면 최소한 자갈 몇 개 정도는 얻어맞았을 것이다.

그것을 완벽하게 다 피한 것은 서예인이 준 운동화의 도움이 컸다.

"...?"

우리가 신발 이야기를 하자 고현우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래로 내려가더니, 서예인과 내 운동화가 같은 것을 발견했다.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가고, 입꼬리가 따라 올라간다.

"두 분.... 언제부터 같은 신발을 신게 된 거요?"

"너 무슨 생각 하니?"

"별건 아니고, 그저 보기 좋아서 말이오."

그러자 서예인이 웬일로 제대로 된 설명을 했다.

다만 슬슬 한계에 다다르는지 말끝이 졸리다.

"김호가 마력탄 특강 해 줬어... 고마워서 선물했어...."

"그런 일이 있었구려."

"응.... 이제 가서 잘게...."

"들어가시오, 서 소저."

"푹 쉬어."

서예인이 느릿하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다음 기숙사로 향했다.

고현우와 나 역시 따로 정산할 것이 있었다.

매점에서 마실 거리를 하나씩 들고, 2주 전과 같은 장소에 섰다.

똑같이 아이스커피를 한 잔씩 들고.

달라진 점이라면 고현우가 저번처럼 한 방에 원샷을 때리는 게 아니라, 마시는 속도를 늦추며 내가 말을 꺼내길 기다린다는 점이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건넸다.

"자, 받아."

그것을 받아 든 고현우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이것이 김 형이 말했던...."

특수연공실 시즌 패스.

2주간 특수연공실의 효능을 몸소 체감했을 것이다.

내공이 하루가 다르게 척척 쌓이는데 체감이 안 될 리가 없지.

다만 2주 동안 특수연공실에 드나들며 소모한 포인트가 상당할 것이다.

공략전 수석이라 리플레이를 통한 포인트 수급량이 엄청난데도, 지금쯤이면 슬슬 부족해질 시기가 됐다.

시즌 패스를 쓰면 더 이상 포인트 소모 없이, 한 학기 내내 자유롭게 특수연공실에 드나들 수 있다.

무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보물인 셈이다.

고현우는 한참이나 흔들리는 눈빛으로 시즌 패스를 내려다보더니, 돌연 나에게 정중한 태도로 예를 갖추어 보였다.

"김 형이 약속을 지켰으니 본인도 지키겠소. 본인의 검을 필요로 한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함께할 것이오."

"기대해라. 본전 다 찾을 때까지 열심히 부려 먹을 테니까."

"하하, 기대하지."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이어서 내가 물었다.

"지금 [코어] 랭크가 어떻게 돼?"

"지난주에 벽 하나를 넘었소. D등급이라오."

"빠르긴 하네."

열차에서 고현우의 코어는 E랭크로,

1학년 중에서도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이제 마나량으로는 겨우 하위권을 벗어난 셈이다.

진척도는 제법 빠른 편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음 주 중으로 C. 가능하겠냐?"

"으음...."

고현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지금보다 더 노력한다면 가까스로 맞출 것도 같소. 헌데 어째서 C요?"

"[코어]는 C가 정체 구간이거든."

송천혜 같은 마력 괴물이 아니고서야 유망주들도 대부분 C 끝자락 즘에 걸쳐 있을 것이다.

즉, C를 달성한 뒤부터는 마력 싸움으로는 크게 안 밀린다는 뜻.

그때부터 고현우의 실력을 더욱 정확히 가늠할 수 있다.

어느 부분이 강하고, 어느 부분에서 보완이 필요한지.

'다음 주가 대인전 주간이기도 하고.'

예정대로라면 실력을 살펴보기 딱 좋은 규칙이 나올 테니까.

서포터가 다 해먹음

45화 마법공학 공방

당규영은 내가 마법공학 동아리 부장을 만나 보겠다는 의사를 밝히자마자 나를 연결해 주었다.

그렇게 메시지가 왔는데, 너무 바빠서 다른 곳에서 만날 여유는 없고, 공방에 찾아와 달란다.

'마법공학 동아리는 이해해야지.'

에메랄드 쪽에서 오라고 했을 때는 곽지철을 한 대 쥐어박고 돌려보냈지만, 그건 그들이 직접 발걸음을 할 수 있음에도 거만하게 명령조로 나와서 그렇다.

태도만 정중했어도 못 이기는 척 따라가 봤을 것이다.

반면 마법공학 동아리는 진심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제작 계열이라 항상 의뢰에 치여 살기도 하고, 특히 학기 초반인 지금은 주문이 엄청나게 밀려드는 중일 터.

그런 점을 감안하면 내 쪽에서 발걸음을 하는 게 맞다.

남은 아이스티를 마저 홀짝대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잠시 상념에 잠긴다.

'일단 토대는 만들었고.'

[서풍의 가호]로 바람 마법에 보너스.

[윈드포스]로 바람 마법에 물리력.

여기에 추가적인 바람 마법과 특성을 계속해서 더해 나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렇기에 슬슬 때가 됐다.

'무기를 구해야겠어.'

언제까지 몽둥이나 다름없는 [대지의 스태프]로 때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발을 신으면 이동 계열 스킬에 보너스를 받듯, 무기를 들면 해당 직업군에 걸맞은 보너스를 받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다른 부위보다 무기를 통해 얻는 보너스가 더 강력한 편이다.

그렇다면 그런 무기는 어디서 구하느냐,

'만들어야지.'

그리고 만든다면 종결급.

내가 아는 히든 피스를 총동원해서, EX급 환생 퀘스트에 걸맞은 무기를 제작할 생각이다.

물론 등급이 등급인 만큼 처음부터 고등급을 뚝딱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계획한 것이,

'조립식.'

퍼즐을 맞추듯, 단계적으로 완성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기나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서 지금 마법공학 공방으로 발걸음을 하는 것이다.

제1공방은 학기 첫날보다 몇 배는 더 분주했다.

부원들이 발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뛰어다니고, 푸른빛이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계속 번쩍거린다.

문가에 서서 말없이 대기하자니 선배 하나가 나를 맞이했다.

"1학년? 여긴 왜?"

"부장님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김호라고 말씀드리면 아실 거예요."

"그래? 잠깐 있어 봐."

선배가 공방 안으로 들어가고, 잠시 후 다른 사람이 나왔다.

보나 마나 마법공학 동아리 부장이겠지.

피곤에 찌든 회사원 같은 사람이었다.

덧붙여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 다급한 분위기도 풀풀 풍긴다.

내가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중간에 말을 끊는다.

"안녕하십-"

"봉재석이다. 네가 김호 맞지? 10x10x10 큐브를 완성시켰다고? 일단 가서 얘기하자. 따라와."

두다다다 기관총처럼 자기 할 말을 쏟아 낸다.

그 사람 성미 한번 급하네.

시간이 칼 들고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도망치듯 나를 이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제4공방.

지난번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고요하기만 했다.

그 고요함을 봉재석이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깨뜨렸다.

안에서 홀로 작업하던 3학년 선배가 흠칫 놀라서 돌아본다.

저 선배님도 구면이네.

봉재석이 문밖을 가리켰다.

"나가."

"...."

그러자 말없이 자리를 비워 준다.

같은 3학년임에도 부장의 위세가 이렇게 강하다.

봉재석이 나가는 선배의 뒤통수를 못마땅한 얼굴로 응시하며 입을 연다.

"함부로 동아리의 자산을 거래한 대가는 저놈이 치렀다."

내가 10x10x10 큐브 설계도를 발굴한 곳은 제4공방의 잡동사니들 속이었다.

다만 잡동사니라도 처분할 권한은 동아리 부장에게만 있는데, 방금 나간 선배는 그것을 달랑 1,000포인트짜리 재료와 교환했었다.

내가 절대로 큐브를 완성하지 못하리라는 계산 하에 교환한 것이지만, 내가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낼 줄은 몰랐겠지.

신입생 하나 등쳐 먹었다고 좋아했다가 덤터기를 쓴 것이다. 유감.

봉재석이 또다시 두다다다 자기 할 말을 쏟아 냈다.

"내 동의 없이 거래한 거라 되찾을 권리가 있기는 한데, 굳이 그럴 필요까진 못 느껴. 쓸데없이 분란을 만들기는 싫거든. 어차피 너 말고 만들 사람도 없었고. 나는 한번 살펴볼 수만 있으면 족해."

완성된 [생명의 큐브]를 분석하며 뭐라도 하나 배워 가면 충분하다는 말이다.

보여 주기만 해도 나에게 보상하겠다고.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점은.

"저한테 없습니다."

"벌써 넘겼어? 누구한테? 설마 도둑 동아리?"

"대자연 동아리요."

박나리네 고양이 집이 됐답니다.

아마 지금쯤 스크래치가 수십 개는 늘었을 겁니다.

봉재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에이씨, 시간 낭비했네. 나 간다."

"선배님."

달려 나가려는 봉재석을 불러 세웠다.

"왜?"

"아무렴 제가 빈손으로 찾아왔겠습니까. 저 그렇게 경우 없는 놈 아닙니다."

"...듣고 보니 그렇네? 뭐 가져왔는데? 보여 줘 봐."

"보시죠."

여러 번 접어 놓은 종이쪽지를 건네자 봉재석이 받아서 펼쳤다.

커다란 종이의 한 귀퉁이를 찢은 쪼가리.

본체가 워낙 큰 탓에 그 한 귀퉁이만으로도 제법 큼직하다.

종이 쪼가리를 끄트머리에서부터 살피는 봉재석이 점점 얼굴을 굳혔다.

이내 종이를 탕! 소리가 나도록 탁자에 내려놓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채 정신없이 탐닉하기 시작했다.

"진짜였네, 진짜였어.... 이걸 정말로 해내는 미친놈이 있을 줄이야...."

저 종이 쪼가리가 대체 뭐길래 봉재석이 저리 정신을 못 차리느냐.

'도면.'

10x10x10 큐브를 구성하는 천 개의 자그마한 정육면체들.

그 하나하나의 배열을 꼼꼼하게 기록해 두었다.

즉, 저 도면대로만 잘 따라서 만들면 [생명의 큐브]를 재구현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론상으로는.'

제작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물적, 인적 자원과 최소 한 학기 이상의 시간이 들어가겠지만, 그건 저쪽에서 알아서 할 일이다.

어쨌든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는 게 중요하다.

"...!?"

정신없이 도면을 탐닉하던 봉재석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도면이 잘 나가다가 도중에 찢어져 있었기 때문에.

내가 봉재석에게 건넨 부분은 비율로 치면 전체의 10%도 안 된다.

봉재석이 하늘이 무너져 내린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남은 부분... 갖고 있지? 갖고 있는 거지? 갖고 있다고 말해. 빨리."

봉재석의 눈빛에는 광기까지 깃들어 있었다.

그게 다라고 하면 사람 하나 묻어 버릴 기세.

"물론 잘 갖고 있습니다."

나는 잘 접힌 종이쪽지를 하나 더 꺼내 들었다.

크기도 크고 접힌 두께도 두툼한 것이, 펼쳤을 때 뭐가 나올지 쉽게 짐작된다.

물론 거저 내줄 생각은 없다.

맛보기는 보여 드렸으니, 이다음부터는 유료 결제를 하셔야지.

"...!"

봉재석은 내 의도를 금방 알아챘다.

시간이 촉박해서인지, 아니면 원래 급한 성격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모르지만 곧바로 흥정으로 넘어간다.

"시간 없으니까 밀고 당기면서 쇼하지 말고 빨리 끝내자. 딱 말해. 뭘 원해."

"제1공방 설비를 이용하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1공방의 설비는 마법공학 동아리 부원 중에서도 1군을 위해서만 마련된 것들.

그것들을 부외자인 내가 사용하도록 허가하는 것은 부장이 가진 최대 권한 중 하나다.

해서 제법 장고를 하고 흥정이 오가리라 예상했는데, 봉재석은 5초도 고민하지 않고 답변을 내놓았다.

"평소에는 우리가 써야 돼. 자정부터 새벽까지. 어때?"

"좋습니다."

"콜. 나머지 도면 줘."

정말이지 시원시원한 사내였다.

내가 건넨 도면을 펼쳐서 원래 갖고 있던 쪼가리와 맞춰 보고,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을 확인한다.

환희에 물드는 봉재석.

"아아...!"

도면을 조심조심 접은 뒤 가문의 비보라도 되는 것처럼 고이 간직한다.

다음으로 나에게 손을 내민다.

"학생증 보여 줘 봐."

"예."

학생증을 꺼내 보이자 봉재석은 중요한 정보 몇 개를 옮겨 적었다.

"자유롭게 출입하게 등록해 놓는다. 말썽 일으키지 말고, 자정 너머라고 말은 했지만 사람 많으면 비워 주고, 사람 적으면 자정 전에도 써도 되고, 눈치껏 잘 할 수 있지?"

"네, 선배님."

"좋았어. 난 간다."

봉재석이 벌떡 일어나서 휘적휘적 걸어 나가다가, 무언가 잊은 게 떠오른 듯 급히 나에게 돌아왔다.

"근데 너 무소속이라며. 우리 동아리 들어오는 건 어떠냐?"

품 안의 도면을 가리키며 덧붙인다.

"솔직히 이건 논문으로 만들어서 제출해도 될 정도야. 10x10x10을 직접 만든 것도 대단하고. 너한테는 충분히 자격이 있어. 아니, 넘쳐."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당규영이 먼저 침 발라 놨다더니, 도둑 동아리 들어가려고? 아니면 뒤끝 있을까 봐 걱정돼? 내가 다 처리해 줄게. 이래 봬도 제법 영향력이 있는 몸이야."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제가 어디 몸담을 생각이 없어요."

"...그래라, 그럼. 나중에 생각 바뀌면 언제든지 말하고."

봉재석은 내 결심이 확고한 것을 보고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리다가,

"아, 그리고 하나만 더."

또 뭐가 떠올랐는지 돌아와선, 4공방 한구석의 잡동사니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또 저걸로 뭐 만들 거면 가져가든가. 대신 이번처럼 도면만 그려서 줘. 그럼 아무 말 안 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이젠 진짜 진짜 진짜로 간다. 수고해."

"예, 선배님. 들어가십쇼."

봉재석이 매우 우호적으로 나와 준 덕분에 얻는 게 많았다.

제1공방 출입 허가를 받았으니, 앞으로 장비를 제작하다가 마법공학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내가 직접 손을 쓴다.

[제작 VIP 티켓]은 대장장이, 재봉, 세공 등 다른 분야에 써먹으면 되고.

게다가 4공방의 잡동사니들을 가져가게 해 준 것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생명의 큐브] 같은 대박은 더 이상 없지만, 그래도 건질 거리가 제법 많다.

여유가 생길 때마다 틈틈이 들르면 되리라.

* * *

남은 공략전 주간 내내 [윈드포스]를 수련했다.

철 인형을 무자비하게 이리저리 날려 보냈으나, 끝내 C랭크는 달성하지 못하고 D랭크 끄트머리 즈음에 아슬아슬하게 걸쳤다.

기왕이면 깔끔하게 랭크업을 하고 싶었지만 수업에 들어가야 했다.

- ♩♪♬♪

이수독은 항상 그렇듯, 수업 종이 치고 잠시 뒤에 나타났다.

3반 학생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자리에 앉아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런 사소한 일로 심기를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의외로 수업이 평탄하게 진행된다는 사실을 학습한 까닭이다.

그런데 오늘 이수독은 웬일로 A4용지 크기의 종이 뭉치를 한 다발 들고 들어왔다.

"받아라."

그리고 대뜸 그것을 허공에 대고 집어 던졌다.

- 파라라락!

정신없이 흩뿌려지던 A4용지가 정확히 한 사람 앞에 한 장씩 내려앉았다.

[멘토링 신청서]

서포터가 다 해먹음

46화 3주 차 대인전 (1)

용살학원에 입학한 신입생은 다들 어디서 천재나 신동 소리를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것이다.

그러나 입학하고 2주.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충분한 기간이다.

대인전 배치 고사로 300점씩 급을 나누고, 그렇게 나뉜 점수대에서도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공략전 역시 자기 딴에는 최선의 결과를 냈다 생각했는데, 랭킹을 보면 위에 덮개들이 잔뜩 포진했다.

덧붙여 2주 차 공략전의 [강적].

나와 서예인처럼 참수자를 맞상대해서 쓰러뜨리는 경우는 소수고, 대부분은 도망치기 바쁘다.

항상 우습게 여기던 고블린 따위에게 쫓겨 보는 경험은 난생처음일 것이다.

두렵기도 두렵지만 기분이 몹시 더럽다.

이것 또한 용살학원이 의도한 바다.

'꼬우면 강해져라, 이 말이지.'

이렇게 자극된 학생들은 열심히 트레이닝 센터를 들락거리거나, 장비나 스킬을 새로 맞추거나, 동아리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는 등 나름의 성장을 도모한다.

그러나 뚜렷한 길잡이 없이 나아가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존재하게 마련.

이 문제를 교사진이 모두 해결할 수 있는가?

개개인이 A급에 달하는 실력자인 것은 사실이나, 그들의 클래스는 정해져 있다.

무인이 마법사를 가르치거나, 활잡이가 근접전을 코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사람당 수십씩 맡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 역시 큰 문제다.

그래서 용살학원에는 멘토링이라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3학년 상위권 학생들이나 졸업생 등을 초빙해 일종의 맞춤 강의를 하는 것.

물론 이 경우에도 일대일은 아닐 가능성이 크지만, 적어도 일 대 수십까지는 안 가겠지.

이수독이 [멘토링 신청서]를 가리키며 계속 설명했다.

"멘토링에 대한 입장이 제각각일 것이다. 신청은 개인 선택에 맡긴다. 희망하는 사람만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하도록."

소속된 문파나 가문 등에서 외인에게 가르침을 받는 걸 허용하지 않거나, 혼자 힘으로 해내고 싶은 경우도 적지 않다.

해서 멘토링을 강요하지는 않고, 이번 1차 멘토링의 참여율도 썩 높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씩 깨닫게 되겠지.

받는 사람과 안 받는 사람 사이에 점점 간극이 벌어지는 것을.

'이건 안 하면 손해지.'

일부 스킬이나 특성은 멘토링을 통해 보다 쉽게 습득하거나 수련할 수 있다.

아직 스킬의 숫자가 많이 부족한 나로서는 하나라도 얻으면 이득이다.

'퀘스트도 깨야 되고.'

게다가 배울 게 없더라도 멘토링 관련 퀘스트는 놓쳐선 안 된다.

보상이 기존 대인전, 공략전 퀘스트 보상만큼 쏠쏠한 편이니까.

여러모로 대세를 따라가는 편이 이롭다.

"신청은 이번 주 내로 마감이다. 고민이 된다면 이번 주 대인전을 치러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 마침 규칙도 적절하군."

이수독이 자연스럽게 금주의 대인전을 소개했다.

MAP:[무작위]

RULE:[데스매치][2vs2][10분 제한]

다른 것은 전부 똑같은 가운데 새로 추가된 규칙 하나.

2 대 2.

"협동이 중요한 것은 지난주와 같다. 단, 이번 주는 목표가 다르다."

공략전에서는 '토템의 파괴'가 목표였기에 참수자를 상대로 싸운 사람도, 안 싸운 사람도 있다.

반면 이번에는 상대를 쓰러뜨리는 게 목표라 무조건 합을 맞춰 싸워야 한다.

그리고 상대는 자신들과 엇비슷한 실력의 학생 두 명.

"2 대 2 전투를 하다 보면 1대1로 싸울 때 드러나지 않던 단점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런 단점을 보완하는 것도 멘토링의 순기능이지. 한 주간 잘 고민해 보도록."

학생들 대부분은 이수독의 말대로, 일단 이번 주 대인전에 발이라도 담가 보고 결정하자는 눈치였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일부는 이미 거침없이 신청서를 작성하는 중이었다.

눈앞의 A4용지에 떠오른 질문은 달랑 한 문장.

그 아래에 답변을 적어 넣으면 글자들이 저절로 사라지며 다음 질문이 떠오르는 방식이다.

질문 역시 내 이전 답변에 따라 맞춤형으로 변한다.

Q:클래스 대분류를 적어 주세요.

(예시:워리어, 레인저, 로그, 캐스터 등)

A:캐스터.

Q:캐스터로서 당신의 성향은?

(예시:공격, 방어, 보조, 모두, 미정)

A:모두.

Q:파티에서 당신의 포지션은?

(예시:전위, 중위, 후위)

A:올라운더.

Q:보유한 스킬과 특성 중에서 유틸리티 계열의 비율은?

A:매우 높음.

Q:전투에서 당신의 최우선 목표는?

A:상대방을 열 받게 만드는 것.

....

대강 이런 식으로, 심리 테스트와 비슷한 감이 있었다.

학생의 성향을 세세하게 진단하고, 가장 알맞은 멘토를 연결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순식간에 신청서 작성을 마친 후 수업이 끝나는 즉시 제출했다.

"...."

이수독은 뜻 모를 눈으로 잠시 나를 응시했다.

항상 나한테 무슨 용건이라도 있는 것처럼 구는데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 말고도 신청서를 내미는 학생이 많았기에 이내 시선을 돌렸다.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자리로 돌아오는 나에게 고현우가 물었다.

"김 형, 벌써 멘토링이라는 것을 신청한 거요?"

"결정은 빠를수록 좋지. 너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소. 조금 더 알아보고 고민해 봐야 할 듯하오."

"내가 고민을 덜어 주지. 그냥 신청해."

단숨에 결론을 내리자 고현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김 형이 호언장담할 정도란 말이오?"

"그래, 절대 손해는 안 볼걸."

"설명해 주시겠소?"

"신청하면 멘토로 3학년 상위권이나 졸업생이 붙을 텐데, 네 입장에서는 선배 고수인 셈이야. 그런 사람한테 배울 기회가 또 언제 오겠냐."

"...!"

본래 무인이란 족속들은 타인에게 폐쇄적인 경향이 짙어서 자신의 무공을 함부로 공유하지 않는데, 멘토링을 핑계 삼으면 그 벽을 슬쩍 허물 수 있다.

무학에 관련해 대화를 나누거나 친선대련만 해도 얻어 가는 게 적지 않을 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반드시 해야겠구려. 조언 감사하오."

고개를 끄덕인 후 막힘없이 신청서를 작성하는 고현우였다.

워리어, 무인, 환검....

"...."

한편 서예인은 책상에 엎어진 채, 슬쩍 얼굴만 돌려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벌써 얼굴에 귀찮음이 가득한 터라, 묻기도 전에 벌써 대답을 들은 느낌이다.

"안 하게?"

"응."

"왜?"

"귀찮아, 졸려...."

'그래, 그럴 것 같더라.'

서예인은 아직 익힐 스킬과 특성이 한참 남았기에 멘토링의 중요성이 더 높다.

그러나 나는 굳이 열변을 토하지는 않았다.

서예인이 저렇게 만사에 의욕이 없어 보이기는 해도 은근히 승부욕이 강한 스타일이다.

이번 주 대인전을 하다 보면 어련히 스스로 깨닫지 않을까 싶다.

아니라면 그때 가서 설득을 해 보는 걸로.

"헌데 김 형,"

고현우가 열심히 신청서를 써 내려가며 물었다.

"금주 대인전은 누구와 함께할 생각이오? 아직 결정을 안 했다면...."

"이번에 같이 해 보자. [코어]는?"

이번 주까지 C랭크 [코어]를 달성하라는 숙제를 내줬었다.

그래야 만에 하나 마력 싸움이 될 때 허무하게 밀리지 않을 테니까.

고현우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부끄럽게도 아직이라오."

"가능하면 완성한 뒤에 하고 싶은데, 얼마나 더 걸려?"

"수요일. 아니, 내일 중으로 반드시 완성하겠소."

"그래, 하루쯤은 기다릴 수 있지."

하루 정도는 [윈드포스]를 수련하면서 때우면 된다.

나도 조금만 더 하면 C급이 될 듯도 하고.

그런데, 책상에 볼을 부비던 서예인이 갑자기 물었다.

"나랑도 하면 안 돼?"

다만 먼저 얘기를 꺼낸 건 고현우 쪽이라, 고현우의 의향을 눈빛으로 묻는다.

고현우는 고현우대로 나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금주 대인전을 최소 4차례 치러야 한다 했소?"

"어. 4회 맞아."

1주 차 대인전보다 의무적으로 치러야 하는 경기가 하나 늘었다.

멘토링 신청을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반-강제적인 도움을 주려는 용살학원 측의 배려였다.

듀오 게임이니 넷 중에 하나 정도는 말아먹지 않을까?

그러면 없던 향상심이 샘솟을지도 모르고?

마침 멘토링이라는 좋은 시스템이 존재하고?

아무튼, 의무적으로 치러야 하는 경기는 총 4회다.

고현우가 제안했다.

"하면 서 소저와 본인이 각각 2회씩 김 형과 짝을 이루는 건 어떻소?"

"좋아."

"김 형의 생각은 어떻소?"

서로 합의를 본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봤자 내가 싫다고 하면 말짱 도루묵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손해 볼 구석이 전혀 없는 제안이었다.

대신 조건을 하나 추가한다.

"나랑 두 경기씩 하는 건 상관없는데, 나머지는 다른 상대랑 해 봐."

두 경기 정도는 익숙하지 않은 학생과 팀을 이뤄 봐야 그 방면의 경험도 조금은 쌓인다.

서예인과 고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원만하게 합의가 이루어져서 다행이오. 그럼 모두 내일 봅시다."

고현우는 신청서를 제출하러 교무실로 떠났다.

그런 다음에는 내일까지 특수연공실에서 [코어]만 주구장창 연공할 듯하다.

서예인에게 물었다.

"우리도 바로 갈까?"

"응."

* * *

1주 차 첫날에는 아레나에 거의 파리가 날리다시피 했으나, 오늘은 제법 학생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가장 큰 이유로는 2 대 2 대인전이라 변수가 많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개개인의 실력은 몰라도, 두 명을 합한 실력은 싸워 보기 전까지는 정확히 파악할 방도가 없다.

그렇다면 어차피 네 경기나 치를 거, 이기든 지든 한번 들이받아 보고 그다음에 전략을 수정하자는 심산이다.

서예인과 번갈아서 학생증을 스캔하자, 단말기가 적절한 상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서예인 691점]

[김 호 386점]

2인 이상의 다인 경기는 참가자들의 평균점을 기준으로 매칭을 잡는다.

서예인과 내 점수의 평균이 539점쯤이니, 상대 역시 그에 근접한 두 명으로 잡힐 것이다.

잠시 후, 알림창에 이름과 점수가 출력되었다.

기억에 남은 이름이었기에 실소를 흘렸다.

'쟤를 여기서 또 보네.'

사람 인연이란 게 참 얄궂구나 싶다.

순간이동 마법진을 타고 경기장으로 입장했다.

시야가 변하며 거센 바람이 우리를 맞이했다.

쉴 새 없이 이리저리 바람이 불어 대는 초원.

"...!"

멀찍이 떨어진 맞은편에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학생, 그리고 갑옷을 입은 남학생 한 쌍이 우리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는데, 여학생의 눈빛이 특히 강렬했다.

[김 호 386점 서예인 691점]

vs

[백준석 388점 홍연화 690점]

4대 세력 중 <마탑회>의 유망주.

루비 마탑 소속의 화염술사.

...그리고 대인전 배치 고사에서 나에게 굴욕적인 1패를 했던.

홍연화였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47화 3주 차 대인전 (2)

홍연화는 맞은편의 서예인을 보고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을 했다.

정말 인형처럼 예쁜 사람이라고.

반은 달랐으나, 같은 반 남학생들이 '3반의 회색머리 걔' 얘기를 꺼내는 건 종종 들었다.

이렇게 직접 만나 보니 같은 여성 입장에서도 감탄이 나오는 미모였다.

다음으로 김호.

서예인의 외모에 잠시 한눈팔려 순위가 밀렸는데, 인상 깊은 정도로는 이자가 더했다.

세상 두려울 것 없던 홍연화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 주고, 절망을 느끼게 만든 사내였다.

잠시 과거 회상에 들어간 홍연화는 급격한 어지럼증과 뒷골 땡김을 느꼈다.

나를 그렇게 완벽하게 이겨 놓고, 항복을 받아 내 놓고,

나머지 두 경기를 내리 기권하다니.

- 왜?

- 왜 난 이겨 놓고 송천혜한테는 기권해?

- 난 송천혜랑 붙어도 안 지는데?

홍연화 < 김호 < 송천혜 공식이 성립하는 것 같아서 매우 억울했다.

마음 같아서는 김호의 멱살을 붙잡고 짤짤 흔들면서 왜 기권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것은 상상에 그쳤다.

자신을 내려다보던 저 남자의 차가운 눈빛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항상 불같은 성격의 홍연화였으나 김호 앞에서는 어째서인지 분노 조절이 잘되었다.

지금도 내색만 안 할 뿐, 보고 있으면 살짝 오한이 든다.

그런 그녀로서는 몹시 유감스럽게도 김호와 경기가 잡혀 버렸고, 이제 남은 선택지는 둘이었다.

싸우거나, 기권하거나.

'이길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 없다....

그녀는 분명 2주 전에 비해서는 강해졌다.

그러나 저자의 철벽같은 방어를 뚫을 만큼 강해졌느냐 묻는다면 그건 글쎄.

'그래도 해야 돼.'

기권이라는 말은 그녀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넘어서야 할 벽, 지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부딪혀 본다.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다.

1대1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2 대 2니까.

두 명이서 협공을 한다면 혹시 몰라.

[김 호 100% 서예인 100%]

vs

[백준석 100% 홍연화 100%]

백준석의 전신은 멋들어진 중갑옷으로 뒤덮이는 중이었다.

두 손에는 크고 두꺼운 대검을 움켜쥔다.

그런 백준석에게 홍연화가 지시를 내렸다.

"시작하자마자 달려. 서예인부터 잡자."

라이플 총사의 일점 파괴력은 누구에게나 큰 위험 요소.

전투가 시작되면 만사를 제치고 서예인부터 쓰러뜨려야 한다.

"알았다."

백준석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인 친분도 친분이지만 점수 차도 나고, 유망주의 위세도 있기에 홍연화의 지시를 아주 잘 따르는 편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홍연화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단숨에 끝낸다.'

상대가 누구든 그녀의 전략은 거진 비슷하다.

공격, 공격, 또 공격.

마구 맹공을 쏟아부어서 승부를 본다.

[3]

[2]

[1]

[Start!]

- 번쩍!

루비가 붉은빛을 발하고, 홍연화의 양옆에서 술식 두 개가 따로 조립되기 시작했다.

우선 빠르게 하나가 완성되었다.

완드를 불꽃이 뒤덮으며 활의 형태를 취했다.

그 활시위를 잡아당김과 동시에 두 번째 마법도 완성되었다.

불화살이 더욱 선명하고 맹렬하게 타오른다.

[플레임 애로우]

[아웃버스트]

- 피잉!

불화살이 허공을 날아, 백준석을 앞질러, 서예인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

김호는 잠시 불화살을 눈에 담더니 서예인의 팔을 붙잡고 슬쩍 옆으로 던졌다.

아무 힘도 들이지 않은 가볍디가벼운 동작이었는데,

서예인의 몸이 붕 떠올라선 한참 먼 곳에 사뿐 착지했다.

마치 투명한 거인이 서예인을 집어서 옆에 내려놓은 것 같았다.

아니면 서예인의 몸이 깃털로 이루어져 있거나.

김호는 반대편으로 몸을 날리고, 방금까지 그들이 있던 자리에 불화살이 떨어졌다.

- 콰아아아아!!

거대한 화염 폭발이 일어나며 초원이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원거리 마법인 [플레임 애로우]에 폭발 계열 마법 [아웃버스트]를 연계한 결과물이었다.

세차게 불어 대는 바람이 불을 더욱 빠르게 퍼뜨린다.

"으압!"

- 부웅!

뒤이어 도착한 백준석이 대검을 휘두른다.

본래 목표였던 서예인은 멀찍이 날아간 후 어디론가 모습을 감춰 버렸기에, 눈앞의 김호를 차선책으로 노리는 것이다.

큼직하고 두꺼운 칼날이 김호를 계속해서 추격하고, 그는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물러나기만 한다.

계속 견제를 하도록 놔두고, 홍연화는 빠르게 일대를 훑었다.

'찾아야 돼.'

언제 어디서 저격이 날아올지 모른다.

아예 모습이 사라졌다면 은신 계열 아이템이나 스킬 등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가장 정석적인 대처법은 [스캔] 등의 색적 마법을 쓰는 것이지만, 그건 홍연화가 다소 약한 분야였다.

다음으로 유효한 대처법은 광역 마법으로 넓은 범위를 때려 보는 것.

그게 좋겠다.

홍연화가 커다란 마법 술식을 빠르게 완성해 나갔다.

그런데 술식이 반쯤 완성되었을 즈음,

- 후웅-!

안 그래도 세차게 불어 대던 바람이 정면으로 불어닥쳤다.

그 기세가 어찌나 강했는지 홍연화가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뒷걸음질 칠 정도였다.

잘 시전하던 마법이 도중에 취소되어 흩어져 버렸다.

'하필!'

왜 하필 이 중요한 순간에, 바람이 이따위로 불어 대서!

다급하게 다시 마나를 끌어모아 같은 마법을 시전한다.

- 후웅-!

이번에는 좌측에서 강풍이 불며 홍연화의 몸을 옆으로 홱 돌려 버렸다.

그녀는 잠시간 균형을 못 잡고 비틀비틀거렸다.

그러면서 마법은 당연히 취소되었고.

"안 돼!"

계속 총사에게 시간을 줬다간!

- 쾅!!

...바로 이렇게 된다.

홍연화의 의식이 서서히 어둠 저편으로 멀어져 갔다....

* * *

"헉!"

"커헉!"

홍연화와 백준석이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들은 아레나 한구석에 나란히 널브러져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스코어보드를 보고 금세 파악했다.

[김 호 서예인 Win]

vs

[백준석 홍연화 Lose]

'졌네....'

서예인의 저격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뻗어 버렸다.

풀 악셀로 질주하는 화물 트럭에 치이는 느낌이었다.

혼자 남은 백준석도 비슷한 꼴이 났겠지.

[대인전 690 -35점]

'허허엉....'

뭉텅 떨어지는 점수를 보고 홍연화는 처량한 한숨을 내쉬었다.

최선을 다해 싸워 보고 졌다면 납득이라도 하겠는데, 이건 너무 허탈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지형이라는 점은 진작에 파악했다.

마법 시전이 방해받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감안하고 신중하게 임했다.

그런데 어떻게 바람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정확히 불어서 그녀를 밀쳐 낼 수가 있지?

그것도 두 번이나?

어떻게 운이 그렇게 없을 수가?

홍연화가 한참이나 멍한 상태를 유지하자, 비교적 멘탈이 덜 깨진 백준석이 격려를 보냈다.

"홍연화, 마음 다잡고 다음 경기 가자. 방금은 운이 없었다."

"...그래, 운이 없었어."

[백준석 363점]

[홍연화 655점]

홍연화는 단말기에 학생증을 스캔하며, 방금 한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래, 운이 없었던 거야.'

방금 대인전은 가끔 스쳐 가는 천재지변 같은 것이었다.

살다 보면 간혹 우연이 겹치고 겹치는 일이 생기곤 하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날인가 보다.

떨어진 점수는 앞으로 이겨서 복구하면 된다.

그러나 잠시 후 매칭이 잡히자,

홍연화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아악!!'

[김 호 422점 서예인 715점]

vs

[백준석 363점 홍연화 655점]

김호-서예인 팀을 다시 만나 버린 것이다.

평균 점수대가 비슷하니 연속으로 만날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홍연화는 오늘따라 유난히 운이 안 따라 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이동 마법진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몹시 무거웠다.

이번 지형도 초원.

그나마 바람이 잔잔해서 마음에 든다.

백준석이 맞은편을 응시하며 물었다.

"이번에도 서예인부터 노리나?"

"아니. 날 지켜."

"뭐?"

백준석이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았다.

홍연화의 입에서 '방어'와 관련된 단어가 나올 줄은 상상조차 못 했기 때문이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홍연화의 얼굴을 살핀다.

"얘가 머리를 맞더니 조금 아픈가, 지키는 거 확실해?"

"잔말 말고 해라. 방패도 꺼내."

"...알았다."

서늘한 목소리에 백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랑 똑같구나.

대검을 집어넣고 한손검과 큼직한 삼각방패로 바꿔 든다.

검방 실력도 대검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그였다.

홍연화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 작전을 바꾼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두뇌는 더없이 맹렬하게 회전하는 중이었다.

지난 경기를 되짚어 보니, 김호는 내내 백준석에게 추격당하기만 했다.

배치 고사 때도 시종일관 방어만 하다가 허밍버드를 날린 게 끝.

이렇다 할 공격 마법은 선보이지 않았었다.

'만약 방어만 강한 거라면?'

알고 보니 공격은 별 볼 일 없다면?

중갑전사인 백준석을 못 뚫는다면?

그렇다면 백준석으로 하여금 자신을 보호하게 하고, 자신은 포대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백준석이 장비를 바꿔 든 것을 확인하고, 맞은편의 김호가 입을 달싹여 서예인에게 짧게 몇 마디 했다.

서예인이 아주 살짝 고개를 까딱인다.

저쪽도 작전을 수정한 듯했다.

[3]

[2]

[1]

[Start!]

즉시 홍연화의 완드가 붉게 빛나고,

[컴버스천]

- 펑!

서예인의 상반신이 작은 폭발에 휩싸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법을 시전해 날린 것이다.

[김 호 100% 서예인 98%]

'들어갔어.'

착용한 방어구의 수준이 높아서인지 살짝 긁힌 정도였다.

그래도 일단 한 방.

- 펑!

작은 연막탄이 터지고, 서예인이 모습을 감추었다.

보나 마나 또 투명화를 했을 것이다.

홍연화가 짧게 한마디 했다.

"방패."

"알았다."

백준석의 삼각 방패에 짙푸른 마나가 피어오르더니, 홍연화 곁에 마나로 이루어진 방패가 하나 생겨났다.

홍연화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보호한다.

'급한 불은 껐어.'

저격이 들어오더라도 저 방패가 몇 번쯤은 그녀를 지켜 주리라.

"...."

한편, 김호는 멀찍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산책하듯 걸었다.

돌연 한 손을 슬쩍 올리자 전류로 이루어진 벌새가 날았다.

백준석이 허밍버드를 한손검으로 베어 내려 하고 방패로 짓뭉개려 했으나, 벌새는 모두 유려한 비행으로 피한 뒤 백준석의 가슴팍에 내려앉았다.

- 파지직!

그와 거의 동시에, 홍연화를 보호하던 마나 방패에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다.

- 쾅!

서예인이 저격을 하는 타이밍에 정확히 허밍버드로 시선을 끈 것이다.

다만 마나 방패는 아직 건재하고, 백준석도 한 호흡 만에 마비를 풀어냈다.

게다가 방어에 성공한 덕분에 저격이 날아온 방향을 특정할 수 있었다.

'저기다!'

홍연화가 미리 준비해 놓았던 술식들을 풀어내자 화염 마법이 마구 쏟아지며 초원을 불태웠다.

허공이 꿈틀거리며 잠시 서예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홍연화가 공격 스킬을 집중시켰다.

서예인의 체력이 빠르게 깎인다.

[김 호 100% 서예인 84%]

[김 호 100% 서예인 79%]

[김 호 100% 서예인 76%]

그리고 김호는 멀찍이서 손 놓고 구경만 하는 중이다.

홍연화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녀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저자는 방어력만 강했던 거구나.

계속 이렇게만 하면 승산이 보인다.

마나의 방패로 방어하고 반격하는 식으로 서예인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고, 혼자 남은 김호를 협공하면 끝이다.

그런데....

"...."

네 예상이 틀렸다고 말하듯, 느긋하게 서 있던 김호가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걷던 걸음걸이에 점점 속도가 붙으며 달린다.

- 후웅-

때마침 바람이 김호와 같은 방향에서 불어왔다.

그 모습은 마치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고, 바람을 일으키고 부리는 것 같기도 했다.

홍연화가 원인 모를 오한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반면 백준석은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었다.

"제정신이 아니군."

저번 경기에서 충분히 붙어 봤을 텐데, 상대가 되는 싸움이라 생각하고 근접전을 하러 오는 건가?

여유롭게 방패를 앞세우고 한손검을 그러쥔다.

그리고 홍연화는,

'오지 마!!'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48화 3주 차 대인전 (3)

백준석의 계획은 단순했다.

상대가 어떤 공격을 하든 방패로 막아 내고, 한손검으로 역공을 가한다.

이전 경기에서 근접전은 자신이 우위라는 걸 파악했으니, 이 단순한 전법으로도 충분하다.

'칠 테면 쳐 봐라.'

방어 하나는 자신 있는 백준석이었다.

종합적인 전투력은 다른 학생들에 비해 다소 떨어질지 몰라도, 방패 들고 버티는 건 누구한테도 안 밀린다.

김호의 공격 수준으로는 흠집 하나 못 낼 것이다.

아마 저놈도 그 사실을 알 테니, 자신을 어떤 식으로든 따돌리려 들겠지.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김호는 곧장 그를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어떤 공격 스킬의 전조도 없이 지척까지 접근한다.

백준석의 눈에는 '나 죽여 줍쇼' 하고 목을 내미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막 한손검을 들어 올려 내리치려는 찰나, 김호가 손을 얹듯이 방패에 올렸다.

- 터엉—!

막대한 힘이 가해지며 백준석의 팔이 방패와 함께 뒤로 홱 젖혀졌고, 상반신이 훤히 드러났다.

"뭐라—"

경악할 틈도 없이, 김호가 더욱 가까이 다가서서 한 손은 백준석의 팔목을 잡고, 반대쪽 손은 허리에 올렸다.

다음 찰나 백준석의 신형이 땅에서 붕 떠오르더니 공중에서 빙글 회전했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 쿵!!

중갑옷의 육중한 무게를 안고 던져졌기에 전신에 가해지는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백준석은 곧바로 전투 불능에 빠지고 말았다.

홍연화를 보호하던 마나의 방패도 스르르 사라졌다.

"...!"

졸지에 혼자가 되었으나 홍연화는 다음 주문을 시전할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이 너무 충격적이었던 탓이다.

그녀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바... 방어 계열이... 아니었나...?'

방어 마법에만 능한 서포터라는 가정하에 작전을 짰는데, 그 생각을 꿰뚫어 보듯 정면으로 쳐들어와서 백준석을 눕혀 버린 것이다.

대체 무슨 스킬에, 무슨 특성을 썼길래 풀 플레이트 갑옷을 입은 사람을 봉제 인형 던지듯 가볍게 들어서 메친단 말인가.

홍연화의 머릿속에 김호에 대한 정보가 추가되었다.

화염 마법을 마구 난사해도 1%의 피해조차 없는 엄청난 방어 마법의 소유자.

그리고 백준석을 손짓 몇 번에 날려 버릴 정도로 가공할 실력을 가진 무술의 달인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그 외에도 무언가 더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예전에는 그래도 언젠가는 따라잡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지금은 그 간극이 더욱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다.

"...."

"헉!"

김호가 한 걸음 다가서자 홍연화가 황급히 두 걸음 물러났다.

마음 같아서는 더 멀찍이 거리를 벌리고 싶었지만, 등 뒤에서 따끔한 기운이 느껴져 두 걸음에 그쳤다.

아마 서예인이 총구를 겨누고 있으리라.

"...."

김호는 더 다가오지 않고, 예전과 같은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지만, 서늘한 눈빛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겠지?

- 쓸데없는 짓을 한다면....

- 여기 이놈처럼 만들어 주마....

홍연화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항복 외의 다른 행동을 취하는 낌새라도 보인다면, 바로 백준석처럼 내던져지거나 뒤통수에 마력탄이 꽂힐 것이다.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다가, 힘겹게 입을 열어 답한다.

"져, 졌습니다...."

[김 호 서예인 Win]

vs

[백준석 홍연화 Lose]

홍연화는 경기가 끝난 후에도 한참이나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