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매점에서 마실 거리를 하나씩 사 들고 2층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생각보다 학생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다.
곽지철과 박나리는 뒤로 슬쩍 빠져 있고, 대화를 나누는 건 나와 목종화, 하수연 셋이었다.
하수연이 말문을 열었다.
"특별한 아이템을 갖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그것 때문에 오셨으리라 짐작했습니다."
사실은 짐작한 게 아니라 내가 이들을 오게 만든 거지만.
[생명의 큐브]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덮개를 열지도 않았는데 은은한 생명의 파동을 뿜어내는 상자를 보고 모두의 눈빛에 이채가 어린다.
박나리의 고양이가 품에서 빠져나와 테이블 위로 펄쩍 뛰어 올라가더니, 큐브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범아, 안 돼! 빨리 나와!"
"괜찮아. 그냥 놔둬."
"...미안."
황급히 고양이를 회수하려는 박나리에게 손을 저어 보였다.
어차피 주인 되실 몸인데 팍팍하게 굴 것 있나.
고양이가 생명의 큐브 덮개를 툭 쳐올려서 열었다.
한가운데에 앉아서 한 말씀 하신다.
"애옹."
"사실이었군...."
"정말 범이가 좋아하네요...."
보면서도 안 믿기는지 불가사의하다는 표정을 짓는 목종화와 하수연.
그러다가 하수연이 다시 표정을 관리하고 대화를 이어 간다.
"얼핏 봐도 아주 강력한 생명 계열 아티팩트 같네요. 아이템 설명을 봐도 괜찮을까요?"
"으음...."
나는 잠시 침음하는 척했다.
아이템의 성능은 곧 소유자의 무력.
함부로 보여 준다면 곧 자신의 밑천을 공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국에는 판매할 생각이기는 하지만, 보여 달란다고 냉큼 보여 주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일부러 뜸을 들이는 것이다.
내 고민을 덜어 주겠다는 듯 하수연과 목종화가 덧붙였다.
"이 정보는 절대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하겠어요. 대자연 동아리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죠."
"나 역시 에메랄드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나는 마지못해 수락하는 척 아이템 정보를 공개했다.
네 사람이 큐브 가까이 몰려들었다.
설명을 읽으며 눈이 경악으로 치켜떠진다.
"수납하는 생명 계열 아이템의 성능... 1.3배?"
"개수에 제한도 없어. 이 용량이라면 최소 10개 이상은 넣을 수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물건이...."
"이게 B랭크일 리가 없어요. 대체 어디에서 구한 거죠?"
성능이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는지 네 사람이 흥분에 가득 차서 떠들었다.
소심하며 말수가 적은 박나리마저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한다.
나는 아이스커피를 홀짝거리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조금 흥분이 가라앉은 후, 하수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눈빛 속에 불타는 열기는 숨기지 못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이 큐브를 양도하실 의향이 있나요?"
"글쎄요. 갖고만 있어도 충분히 좋은 아이템이라."
목종화가 거만한 어조로 말했다.
"물건은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자의 손에서 빛을 발하는 법. 네가 갖고 있어 봤자 생명 아이템 두어 개겠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다. 그런 데에 썩히지 말고 우리에게 넘겨라. 분에 넘칠 만큼 가격을 쳐주지."
"목종화 부장님 말씀이 지나치시기는 한데, 저도 어느 정도는 동의해요."
하수연이 열심히 부연 설명을 곁들였다.
"에메랄드와 대자연 동아리는 생명 계열 아이템을 넉넉하게 보유하고 있답니다. 이 큐브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말이죠."
반면 내가 앞으로 열심히 생명 계열 아이템을 모으더라도, 등급이나 개수에서 저들보다는 떨어질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활용할 수 있는 비슷한 가치의 장비 등으로 교환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라는 것이 두 부장들의 논지였다.
'이러면 너무 고마운데.'
내가 큐브를 판매하기로 정한 이유와 상당히 비슷하다.
생명 계열 아이템은 나와 상성이 잘 안 맞으니까.
물론 이유가 비슷하다 한들, 그 말을 파는 사람 입장에서 하는 것과, 사는 사람 입장에서 하는 것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내가 필요 없어서 판매하는 모양새가 되면 값어치가 떨어지지만, 지금처럼 저들이 원해서 구매하는 구도라면 내가 계속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것이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래도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가 없군요."
"원하는 걸 말해 보세요. 최대한 맞춰 드릴게요."
"으음...."
나는 팔까 말까, 얼마나 주면 팔까, 고뇌에 가득 찬 신입생을 연기했다.
모두가 말없이 내 눈치만 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내 대답은 고현우에게 시즌 패스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정해진 지 오래였다.
고민하는 척 끝에 손가락 4개를 펴 보인다.
"특수연공실 시즌 패스 4개. 이 정도는 돼야 넘길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곧바로 목종화가 대꾸했다.
"욕심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시즌 패스 2개라면 바로 거래하지."
"흥정은 없습니다."
"...."
목종화가 인상을 쓰고, 하수연이 대화를 받았다.
"시즌 패스가 4개나 필요할 리는 없을 테고, 동급의 아이템으로 교환하시려는 거겠죠?"
"정확히는 시즌 패스 1개, 나머지 3개는 아이템으로 받고 싶습니다."
"총 3개까지는 손해 보는 셈 치고 거래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4개는 제가 보기에도 과하네요."
"그럼 죄송하지만 이 거래는 없었던 일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수연의 눈썹 역시 조금 찡그려졌다.
나는 아쉬울 것 없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말했다.
"처음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이 큐브를 갖고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판매를 하겠다면 검술 동아리나 백마법 동아리를 찾아가도 되고.... 경매에 부쳐도 되겠죠."
"...!"
"...!"
순위를 논하자면 에메랄드와 대자연의 수준은 중상위권.
전통적인 강호인 검술 동아리나 백마법 동아리의 위세에 비하면 한 수 접어 줘야 한다.
그들에게 [생명의 큐브]를 가져갔을 때 시즌 패스 3개 이상의 값어치를 받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세력 차이가 있다 보니 하수연의 입장에서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겠지.
경매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그렇게 다른 이의 손에 큐브가 들어간다면, 시즌 패스 4개보다 비싼 값을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하수연이 난감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 그 전에 한번 들어 보고 싶네요. 시즌 패스 3개는 어떤 아이템으로 교환하실지."
만에 하나 자신들이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면, 손해를 더욱 감수하고라도 거래할 의향이 있다는 뜻.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공백 스킬북]을 원합니다."
"...!!"
공백 스킬북.
백지 수표의 스킬북 버전이라 보면 된다.
내용을 채워 넣으면 스킬북이 만들어지고, 사용하면 스킬을 배울 수 있다.
이미 존재하는 스킬을 작성하더라도, 작성하는 사람의 입맛에 맞도록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다는 게 큰 강점.
당연히 지극히 희소하다.
지금 용살학원 내에 대여섯 권은 존재할까 의문이다.
그런 아이템이니 구하는 노력까지 합치면 3.5시즌 패스 정도는 되겠지.
두 부장들 역시 그 사실을 알았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끝이 없군. 그 조건은 들어줄 수 없다."
"저희도 조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네요."
"예, 생각이 바뀌시면 말씀하십시오."
나는 태연하게 답했다.
아마 이번 주말 중에 바뀌지 않을까 싶다.
1.3배가 계속 눈앞에 아른거릴걸.
그런데,
"저, 저기!"
박나리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목소리가 순식간에 모기만 해진다.
"저한테... 한 권... 있는데...."
"나리야, 잘 생각해 봐. 스킬을 제작해 볼 기회는 흔치 않아. 이렇게 쓰기는 아깝지 않을까?"
하수연이 만류했으나 박나리는 심호흡을 한 뒤 결심을 굳힌 표정을 지었다.
"제가.... 저 공백 스킬북을 얻은 지가 엄청 오래됐는데요...."
"그랬지."
"그런데 아직까지 괜찮은 스킬이 안 떠올라요. 이대로라면 앞으로도 계속 인벤토리에 넣어만 둘 거예요."
공백 스킬북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은 만큼 사용자에게 방대한 창의력을 요구한다.
어설프게 다루면 그 잠재력을 온전히 살리지 못하고 기껏해야 하급 정도의 스킬을 만들게 될 수도 있다.
낭비도 그만한 낭비가 없으니, 만드는 입장에서는 엄청난 고민을 거쳐야 한다.
박나리는 여태까지 이렇다 할 스킬을 못 만들고 헤매는 상황.
이렇게 인벤토리에만 고이 모셔 두느니 생명의 큐브와 교환하는 게 낫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그리고.... 범이가 저렇게 좋아하잖아요."
"애옹."
고양이 범이가 짧은 울음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큐브 모서리에 턱을 부벼 댄다.
극한의 효율충인 나로서는 고작 그런 이유로? 라는 생각이 없잖아 들었지만, 집사의 마음이란 그런 게 아닐까?
반려 고양이... 호랑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 주고 싶은 마음.
아주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게다가 박나리의 표정이 꽤 진지한 걸 보면 나름대로 숙고하고 내린 결정인 듯했다.
하수연도 박나리의 눈에서 그것을 읽었는지, 잠시 마주 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래. 정 네가 그걸 바란다면."
"고마워요, 언니."
하수연이 나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지금 바로 거래하실 건가요?"
"한다면 오래 끌 이유가 없죠."
"좋아요."
박나리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으며 백색 일색으로 빛나는 스킬북을, 하수연은 멋들어진 기울임체로 Season Pass라고 적힌 카드를 나에게 건넸다.
그것으로 [생명의 큐브]는 박나리와 대자연 동아리의 소유물이 되었다.
박나리가 기쁜 표정으로 큐브를 꼭 껴안자, 큐브 안의 고양이도 만족스러운 오토바이 소리를 냈다.
자기 주인 물건이 됐다고 벌써부터 벅벅 긁어 대기 시작한다.
"그, 긁지 마! 긁지 마!"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다 똑같은 걸 보니 아마 생각도 비슷할 것 같다.
'진짜 지랄묘가 따로 없네....'
"쯧."
목종화가 혀를 찼다.
그 역시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어 시즌 패스 4개를 지불했을지 모르지만, 소유권이 넘어간 이상 다 끝난 일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직 할 말이 남은 듯했다.
"우리가 너를 찾아온 건 저 큐브 말고도 용건이 있어서다."
"예, 말씀하시죠."
또 무슨 용건으로 왔느냐,
다음 말은 곽지철이 대신 했다.
"너에게 결투를 신청하겠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40화 결투 (2)
목종화의 입김이 상당히 많이 닿은 듯한 결투 신청.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에메랄드 마탑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설욕전이겠지.
다만 저들이 놓친 게 있다면,
"싫은데?"
"뭐?"
내가 굳이 이 결투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나는 귀찮음이 가득한 태도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너 나한테 뭐 맡겨 놨냐. 네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싸우자면 싸워 줘야 돼?"
"결투는... 명예로운 것이다."
"그렇게 명예 좋아하는 놈이 둘이서 덤볐니?"
"그건!"
곽지철과 정수지가 나를 협공했다가 패배한 사건은 에메랄드 마탑에게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2 대 1로 졌다는 점도 문제고, 상대가 '겁쟁이'라는 점도 문제다.
나중에 내 평가가 어떻게 바뀌든, 당장 겁쟁이라 불린다는 게 중요하다.
그 오점을 덮으려면 공식적인 자리에서, 결투로 나를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리플레이로 남겨야 한다.
그러니 어떻게든 나를 링 위로 끌어올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딱히 아쉬울 거 없고.
"아무튼 나는 받을 생각 없다. 이미 내가 이겼는데 뭐 하러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냐."
"...."
"정 뭐하면 진 걸로 쳐 줄 테니까, 자랑하고 다녀."
겁쟁이한테 부전승했다고.
에메랄드가 그 정도로 납득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곽지철로서는 이 상황을 헤쳐 나갈 뾰족한 수가 안 떠오르겠지.
눈빛으로 목종화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목종화는 쓸모없는 버러지를 보듯 곽지철을 노려보더니, 나에게 말했다.
"겨우 한 번 이기고 도망치는 게 그야말로 겁쟁이답구나. 지는 게 두려운가?"
"겁쟁이 맞는데요. 너무 두려운데요."
목종화가 승부사들의 도발 스킬인 '쫄?'을 시전했으나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미 평판이 바닥이면 이런 때 편리하다.
목종화 역시 이건 안 먹히겠다 싶었는지, 방식을 달리해서 이번에는 나에게 미끼를 던졌다.
"쓸데없이 시간 낭비는 안 한다고 했지. 판돈이 걸린다면 받아들일 건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면요."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결투를 받아들이고 곽지철을 두들겨 패고 싶다.
그럼에도 계속 저들의 도발을 흘리면서 버틴 이유는.
'그래야 더 이득이니까.'
에메랄드는 무슨 수를 써서든 반드시 설욕을 해야 하는 입장.
미끼를 제시해서라도 결투를 성사시키려 들 것이다.
그리고 그 미끼는 내가 안 물고는 못 배기는 먹음직스러운 것일 터.
물론 실제로 미끼를 문 게 나인지, 목종화인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목종화가 인벤토리에서 작은 티켓 한 장을 꺼내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이걸 걸지."
끼어들지 않고 상황을 관망하던 박나리와 하수연이 놀란 기색을 비쳤다.
그만큼 목종화가 강수를 두었다는 뜻.
[제작 VIP 티켓]
용살학원의 장인들은 쉽게 제작 의뢰를 받지 않는다.
공급에 비해 수요가 지나치게 많은 탓에 매우 제한적으로만 받고, 그마저도 대기열이 한참 뒤까지 밀린다.
이 VIP 티켓을 사용하면 그 대기열을 무시하고 최우선으로 아이템을 제작해 준다.
특수연공실 시즌 패스와 같은 용살학원의 여러 이권 중 하나였다.
'이렇게 감사할 데가.'
안 그래도 장비가 부족하던 차였는데, 이런 귀한 티켓을 준비해 주다니.
"단, 이겼을 때만이다."
"그런 걸 거셔도 괜찮겠습니까?"
"상관없다. 이기면 그만이니까. 받아들일 테냐?"
"좋습니다. 성사된 걸로 하죠."
내가 결투를 받아들이자 목종화는 팔짱을 끼고, 곽지철이 다시 나섰다.
"날짜를 정해라."
"이틀 뒤가 좋겠네."
"...왜 이틀 뒤냐?"
나는 방금 거래한 [공백 스킬북]을 슬슬 흔들어 보였다.
"이거 익혀야 되거든."
"뭐?"
"...?"
모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공백 스킬북으로 스킬을 만드는 것도 어려운데, 그렇게 만들어서 익힌다고 끝이 아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이라 봐야 한다.
직접 제작한 스킬에 익숙해지고, 실전에 쓸 만큼 랭크도 올려야 되는데, 그 모든 것을 이틀 만에 해낸다니.
얼마나 터무니없게 들리겠는가.
"크크크크...."
목종화가 낮은 웃음을 흘리며 얼굴을 쓸었다.
적잖이 열이 받았는지 입가에 사나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곽지철 따위는 이틀 익힌 스킬로도 이길 수 있다고 해석했나 보다.
"에메랄드가 이렇게 얕보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제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거죠."
얕보는 생각이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곽지철."
"네, 형."
"이놈한테 지면 너는 퇴부다."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곽지철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용건이 끝난 이상 불편한 자리에 계속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나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이틀 뒤를 기대하지. 어디 재주껏 익혀 봐라."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티켓 잘 간수하고 계십쇼."
"...."
떠나는 순간까지도 나에게 사나운 눈길을 보내는 목종화였다.
"나, 나도 갈게. 다, 다다음에 보자!"
"애옹."
박나리가 더듬더듬 나에게 인사를 건네고, 고양이 범이도 앞발을 두어 번 허공에 저었다.
'바로 트레이닝 센터나 가야겠군.'
가서 얼른 스킬부터 만들어야지.
반쯤 남은 아이스커피를 원샷하려는데, 하수연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잠시 둘이서 대화할 수 있을까요?"
"...그러죠."
나는 엉덩이를 도로 의자에 붙였다.
플라스틱 빨대 끝을 물고 있자니 하수연이 한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먼저 사과드릴 게 있어요. 목종화 부장이 그쪽한테 지철이랑 수지 보내는 거, 눈앞에서 보고도 모른 척했어요."
"저를 시험하신 겁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맞아요. 두 사람을 상대로 어떻게 대처하나 보고 싶었죠."
'그럼 그렇지.'
내가 처음 선전을 한 사람은 분명 박나리였는데, 대자연 동아리는 움직이지 않고 곽지철-정수지 듀오가 나를 찾아왔다.
대자연과 에메랄드의 사이가 나름 돈독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하수연도 분명 이 일에 한 발을 걸쳤으리라 확신했다.
지금처럼 솔직하게 털어놓을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나도 솔직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이해는 합니다. 한 동아리를 맡는 부장으로서 신중하셔야 했겠죠. 그래도 조금 서운하군요."
"미안해요. 이걸로 화가 풀리실지는 몰라도, 받아 줬으면 좋겠어요."
하수연이 사과의 표시라며 양피지 한 장을 건넸다.
[랭크 업(F)].
지난주에 대인전 3연승 보상으로도 나왔던 아이템이다.
하나가 거저 생기면 나로서는 땡큐지.
'통이 크시네.'
나를 상대로 간을 봤다는 점이 괘씸하기는 했다.
하지만 에메랄드와는 달리 나와 직접적으로 마찰을 빚지도 않았고, 쓸 만한 아이템까지 얻었으니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런데.... 이러면 대자연 동아리 쪽이 손해 아닙니까?"
"손해죠. 원래는 큐브 거래에 더할 생각이었는데, 나리가 끼어드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하수연이 부드럽게 웃었다.
손해를 봐서 아쉽다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큐브를 거래하면서 나눴던 대화, 그리고 결투와 관련해서 나눴던 대화에서 무언가 눈치챈 모양이다.
내가 소문처럼 겁쟁이가 맞았다면, 한참 선배에다 동아리 부장까지 맡는 목종화를 그렇게 스스럼없이 대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해 미리 우호적인 관계를 다져 두는 게 좋다 판단했을 테고, 그 값으로 F급 [랭크업] 한 개면 싼 편이다, 라는 계산이 돌아갔으리라.
좋은 선택이다.
앞으로 4대 세력과 거래할 아이템은 [생명의 큐브] 말고도 한참 남았으니까.
"결투는 자신 있나요?"
"백 프로입니다."
내가 일 초도 고민하지 않고 답하자 하수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그래도 미리 경고해 둘게요. 목종화 부장과 곽지철은 그쪽의 리플레이를 전부 분석하고 대처법을 준비해 두었어요."
"그거야 기본적인 전략 아닙니까?"
"아니요. 이번에 곽지철은 동아리 차원의 지원을 받게 될 거예요."
'그렇겠지.'
결투를 신청하는 곽지철의 모습이 이상하게 자신만만하길래, 믿는 구석이 있구나 싶었다.
동아리 차원에서 내 약점을 찌르는 아이템들을 준비해 온다.
곽지철이 쓰던 장비 역시 2, 3학년용으로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무소속인 내가 이렇다 할 지원을 못 받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불공평한 결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건 온당치 못하다 생각해요. 원한다면 대자연 동아리의 아티팩트를 대여해 주겠어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공백 스킬북을 들어 보였다.
"이걸로 충분하니까요."
"...!"
이틀 만에 스킬을 제작하고 익혀서 써먹는다는 말은 진담이었다.
그러나 하수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었는지 재차 묻는다.
"...정말 새로 만든 스킬로 승부를 낼 생각이신가요?"
나는 길게 설명하지 않고 그저 웃어 보였다.
"보면 놀라실 겁니다."
* * *
트레이닝 센터.
나는 큼지막한 훈련실 한가운데에 홀로 앉아 있었다.
내 앞의 목각 인형은 지시만 내리면 언제든 나를 공격하려 들겠지만, 당장은 미동도 없이 정지한 상태다.
손에 펼쳐 든 [공백 스킬북]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온다.
마나를 불어넣으며 원하는 단어나 문장을 떠올리면 저절로 입력되는 방식이다.
보통 스킬을 새로 제작한다면 고민을 거듭하고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심혈을 기울일 텐데, 내 스킬북은 속기사가 타자 치듯이 거침없는 속도로 채워져 가는 중이었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공백 스킬북을 몇 번이나 써 봤더라.
너무 많아서 세는 걸 포기한 지 오래다.
물론 몇 번 썼는지는 잊었을지언정,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쌓인 데이터는 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공백 스킬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최적의 스킬이 작성되고 있었다.
- 어떤 서포터가 가장 유용한가?
이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유용함이란 상황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니까.
어떤 경우에는 회복이, 어떤 경우에는 보호막이, 어떤 경우에는 버프나 디버프가 더 유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 가장 상대하기 까다롭고, 짜증 나는 서포터는 무엇인가?
- 당했을 때 '저 새끼 게임 더럽게 하네'가 절로 튀어나오는 서포터 1위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는 정답이 있다.
'강제이동 서포터.'
['스킬북 - 윈드포스'를 사용합니다.]
['윈드포스(F)'를 습득합니다.]
[윈드포스]
▷바람에 물리력을 부여합니다.
똑바로 서서 목각 인형을 마주했다.
밀폐된 공간에 한 줄기 바람이 불며 머리카락을 간질이고 지나갔다.
목각 인형이 돌연 끼긱거리더니 나에게 원투 펀치를 날려 댔다.
그에 맞춰 오른쪽, 왼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인형의 가슴팍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 팡!
목각 인형이 훈련실 끝까지 날아가서 처박혔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41화 결투 (3)
['랭크 업(F)'을 사용합니다.]
['군주'의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F->E)]
군주.
EX급 환생 퀘스트를 시작하며 남겨졌던 내 밑천 중 하나다.
증폭과 복사만큼이나 막강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조건이 안 맞아 빛을 못 보는 상황.
그래도 이렇게 기회가 될 때 올려 두는 게 좋다.
다른 방법으로는 성장시키는 게 거의 불가능한 특성이니까.
[김 호]
▷스킬
윈드포스(F+)
인페르노 피스트(C)
증폭(E)
복사-스킬[2/2]
1. 허밍버드(E)
2. 도둑걸음(B)
▷특성
서풍의 가호
코어(D)
군주(E)
복사-특성[1/1]
1. 원소 저항(S)
▷장비
교복(D)
대지의 스태프(E)
▷인벤토리
10실버
심뢰옥x2
[대인전:386점]
[공략전:2,266점]
(3,123pt)
상태창에 팔려 있던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목각 인형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심히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한참 전부터.
조금 가까워졌다 싶으면 [윈드포스]가 부여된 맞바람에 뒤로 밀려나고, 또 조금 접근하면 뒤로 밀려나기를 반복하니 결국은 계속 제자리걸음만 할 뿐이다.
- 후웅—
앞으로 손을 내밀자 정면으로 불어가는 바람이 강해졌다.
목각 인형이 하릴없이 뒤로 날아가선 훈련장 벽에 부딪힌다.
[윈드포스]는 이제 막 익혔기에 F랭크지만, 바람 마법이라 [서풍의 가호]의 보너스를 받는다.
그래서 F+랭크.
F와 E의 중간쯤인 셈이다.
'결투에서 써먹으려면 최소 D+.'
스킬의 랭크가 상승하면 위력도 함께 올라간다.
윈드포스의 경우 랭크를 올릴수록 제어하는 바람의 양이 늘어나고, 부여하는 힘도 거세진다.
단순히 곽지철을 제압하는 것은 E+만으로도 가능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내 성에 안 찬다.
'아주 바닥에 패대기를 쳐 버려야 돼.'
그래서 목표를 D+로 잡았다.
공백 스킬북을 통해 작성한 스킬이라 일반 스킬보다는 랭크를 올리기가 더 까다로운 편이지만, 이틀이나 시간이 남았으니 넉넉하게 달성하리라.
훈련실 한쪽 벽에 붙은 단말기를 조작하자, 바람 부는 방향을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목각 인형이 사라지고 철 인형이 나타났다.
목각 인형보다 훨씬 무겁기 때문에 [윈드포스]로 밀쳐 내기도 더 어렵다.
'어려워야 단련이 되지.'
나는 돌진하는 철 인형을 향해 바람을 집중시켰다.
물리력이 실린 강풍이 철 인형을 조금씩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 * *
['윈드포스'의 랭크가 상승했습니다. (F->E)]
날이 밝을 때까지 윈드포스를 수련해서 기어이 E+랭크를 찍었다.
기숙사에서 아주 잠깐 휴식을 취하고 서예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김호:깸?]
[서예인:....]
[서예인:(하품하는 토끼 이모티콘)]
[김호:밥?]
[서예인:ㅇㅇ]
[김호:식당앞 ㄱ]
오늘 아침 식사 메뉴는 동글동글한 미니 주먹밥.
종류가 꽤 다양하다.
궁금한 게 생길 때마다 서예인이 나에게 물었다.
"이건 뭐야?"
"멸치 같은데."
"이건?"
"글쎄. 뭔진 몰라도 매워 보인다. 너 매운 거 잘 먹냐?"
"아니."
그러면서도 호기심이 동하는지 새빨간 주먹밥을 한 개 집는다.
서예인과 여러 가지 맛 주먹밥들을 골고루 접시에 담고, 테이블로 이동하는데,
"...!"
공교롭게도 곽지철과 정수지 듀오를 딱 마주쳤다.
정수지는 가벼운 눈인사만 하고 얼른 자리를 뜨려는 기색인 반면, 곽지철은 입가 가득 비웃음을 머금고 이죽거린다.
"스킬은 잘 만들고 계신가? 결투가 바로 내일인데 맞출 수 있을런가 모르겠네."
벌써 만들었는데.
랭크도 하나 올렸는데.
하지만 그걸 지금 말해 버리면 흥이 깨진다.
나는 짐짓 괴로운 척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게 말이다. 이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네."
"괜히 어중간한 스킬에 낭비하지 말고 공백 스킬북은 아껴 두지?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아냐. 계속 해 볼란다."
"뭐 그러든가."
"너도 준비 잘해 놔. 지면 에메랄드 퇴부라며. 나도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이죽거리던 곽지철의 얼굴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절대로 안 지니까."
"준비 많이 하셨나 봐요."
"당연하지. 무려 골—"
정수지가 옆구리를 쿡 찔러서 곽지철의 말을 끊었다.
곽지철은 그제야 자기가 매우 중요한 정보를 흘릴 뻔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내일 방과 후다. 늦지 마라."
곽지철은 그 말까지만 하고 정수지와 함께 주먹밥을 고르기 시작했다.
서예인이 물었다.
"결투해?"
"그렇게 됐다."
"쟤 약해."
생각해 보니까 서예인도 600점대, 곽지철도 600점대였지.
지난주 대인전에서 붙었나 보다.
"그래, 애가 허접하기는 하더라."
"두 방이었어."
...곽지철 저 녀석 두 방 컷이었구나.
암만 봐도 누구한테 시비를 걸고 다닐 실력은 안 되는 것 같은데, 자신감 하나는 유망주급이다.
서예인이 미니 주먹밥을 우물거리며 나를 빤히 보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한다.
"나 줄 거 있어."
"줄 거?"
"응."
인벤토리에서 주섬주섬 직사각형 모양 상자를 꺼내 내 쪽으로 밀어 넣는다.
상자를 열자 고급진 운동화 한 켤레가 나왔다.
문득 지난주에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 갖고 싶은 거 있어?
- 갑자기?
-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된대. 우리 집사가.
- 지금 제일 필요한 거라면 이동 속도 쪽일까. 신발이 하나 있었으면 해.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어련히 무난한 신발 하나 갖다 주겠거니 했는데, 내 예상보다 몇 단계는 좋은 물건이 왔다.
서예인의 운동화와 약간의 색감 차이 말고는 거의 같았다.
쟤가 평소에 차고 다니는 장비 수준을 생각해 보면 엄청난 고급품이라는 뜻이었다.
흰색 베이스에 깔끔한 푸른색 계통 배색이 들어갔으며, 곳곳에 마법공학이 가미된 흔적이 엿보인다.
[구름밟이(B)]
▷이동 계열 스킬에 보너스.
▷관성 무시(C) 적용.
▷내구도 자동 회복.
▷업그레이드 가능.
▷업그레이드 가능.
'엄청나군.'
무려 B등급 신발.
바람 마법에 보너스를 주는 [서풍의 가호]처럼, 이 신발을 착용하면 이동 계열 스킬에 보너스를 받는다.
[도둑걸음]이 B+가 된다는 뜻이다.
[관성 무시]는 달리다가 급정거를 하거나 방향을 틀 때 무게 중심이 쏠리는 것을 일정량 무시하게 해 주는 스킬.
움직임이 훨씬 매끄러워지고 빈틈이 줄어든다.
이 두 옵션만 해도 대단한데, 거기에 업그레이드 슬롯이 두 개나 더 있다.
무엇을 추가하느냐에 따라 A급, S급도 노려볼 수 있는 아이템이라는 뜻.
"이건 너무 좋은데. 받아도 되나 모르겠다."
"고마운 만큼 좋은 선물을 주랬어."
"집사님이?"
"응."
집사님, 새삼 다시 생각하는 거지만 아주 훌륭한 마음씨를 가진 분이시군요.
나는 서예인의 집사에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맙다. 잘 신고 다닐게."
"...."
"?"
"...!"
서예인이 갑자기 말이 없었다.
서서히 커져 가는 동공을 보고 접시를 확인해 보니, 새빨간 주먹밥이 사라져 있었다.
"여기 물 마셔, 물."
"...! ...!"
* * *
훈련실.
철 인형 여러 기가 사방에서 나를 노린다.
뒤로 슬쩍 물러나자 육중한 회색 주먹이 허공을 강타했다.
계속 주먹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물러나다가, 다리에 마나를 그러모으고 [도둑걸음]을 발휘해 땅을 강하게 걷어찼다.
- 탕!
단 한 걸음으로 철 인형들의 포위망을 벗어난다.
착지하며 속도를 급격히 줄이는데 다리에 부하가 거의 걸리지 않는다.
[관성 무시]가 적용되어서 그렇다.
'신발 성능 훌륭하고.'
가장 가까이에 있던 철 인형이 치고 들어왔다.
빈틈을 드러낸 철 인형의 어깨를 툭 밀치자, 메치기라도 걸린 것처럼 공중을 크게 회전하며 나가떨어진다.
- 카가가각!
뒤이어 달려드는 철 인형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람이 내 쪽으로 불며 철 인형이 끌려온다.
손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까지 끌어당긴 후, 가슴팍을 밀치며 다시 바람을 앞으로 강하게 쏘아 보낸다.
날려 보낸 철 인형이 다른 철 인형들과 충돌하며 볼링 핀 쓰러지듯 와르르 쓰러진다.
- 카가가가각!
['윈드포스'의 랭크가 상승했습니다. (E->D)]
서풍의 가호를 받아 D+.
'준비 끝.'
* * *
아레나는 한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공략전 주간이라 학생들 대부분이 던전동에서 시간을 때운다는 게 첫 번째 이유.
김호와 곽지철 둘 다 그다지 네임 밸류가 높지 않아서 관심이 없다는 게 두 번째 이유다.
궁금하면 나중에 리플레이는 챙겨 볼지 몰라도, 아레나까지 찾아오긴 귀찮다는 것.
해서 이번 결투의 참관인은 대개 김호와 곽지철의 지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에메랄드 마탑에서는 부장 목종화와 정수지.
동생의 결투를 관전하러 선도부에서 찾아온 곽승재.
대자연 동아리에서는 부장 하수연과 박나리.
그리고 무소속인 김호는 친구 몇몇이 전부.
...였어야 했는데.
목종화가 인상을 썼다.
"네가 여긴 무슨 볼일이냐."
"무슨 볼일이겠냐, 우리 후배 보러 왔지."
당규영이 씩 웃으며 답했다.
일전에 김호와 나눈 대화로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는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
에메랄드 혹은 대자연 동아리와 [생명의 큐브]를 거래한다고.
아무리 그래도 시즌 패스 4개는 어렵지 않겠나 했는데,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그걸 해냈단다.
놀라는 것도 잠시,
- 누님, 김호랑 곽지철이랑 결투 잡혔는데요?
- 아니, 거래를 했으면 한 거지 결투는 왜?
신병철이 전달하는 소식을 듣고 의아해졌다.
조사해 보니 아주 개판이 따로 없다.
발단은 목종화였다.
거래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로 곽지철과 정수지를 보내 무력시위를 했는데, 그대로 김호한테 박살이 났단다.
그것도 이 대 일로 붙어서.
'당연한 거 아니야?'
김호 쟤 곽승재도 일대일로 이겼잖아?
2학년 선도부인 곽승재와 1학년 두 명을 붙여 보면 비교가 더 쉽다.
아예 상대가 안 된다.
아무튼 그렇게 지고 끝냈으면 차라리 덜 구차했을 텐데, 설욕전을 한답시고 결투를 신청했단다.
당규영이 마구 삿대질을 해 댔다.
"으유, 쫌팽이 같은 자식. 초록색 풍뎅이 같은 자식. 그걸 또 애들끼리 결투를 시켜?"
"...도둑년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왜 아니야? 얘는 내가 아끼는 후배인데."
당규영이 친근한 투로 김호의 어깨에 팔을 척 올렸다.
김호가 눈빛으로 부담스러움을 표현했다.
'선배님, 우리 그 정도로 친하지는 않잖아요.'
'아이씨, 그냥 일단 쫌 친한 척해.'
다시 목종화에게 삿대질을 한다.
"하여간 너네 개수작 부렸다간 봐. 다 엎어 버릴라니까."
"...."
목종화는 미간만 찌푸릴 뿐 대답이 없었다.
평소에 혀가 아주 매끄럽게 굴러가던 하수연도 뒤로 빠져선 한숨만 푹푹 내쉰다.
당규영은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부려 놨나 보네?
잠시 김호를 끌고 나온다.
"야, 너 어쩌자고 이거 받았어?""
"이길 만하니까 받았죠."
"이길 만한 거 맞아? 저 음흉한 놈이 온갖 술수를 다 부려 놓은 것 같던데."
"다 알고 받은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저도 생각이 있어요."
옅은 미소에서 넘치는 자신감이 드러난다.
당규영이 이 맹랑한 후배를 많이 겪어 본 건 아니지만, 여태까지 봐 왔던 모습들을 생각해 보면 어떻게든 제 앞가림은 하는 놈이었다.
자기가 끼어들면 오히려 모양새가 이상해질 것 같다.
"에잉, 알았어 그럼."
그럼에도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당규영을 뒤로하고, 김호가 다시 곽지철 앞에 섰다.
목종화가 VIP 티켓을 꺼내 보이며 운을 띄웠다.
"시작 전에 마지막으로 조건을 확인하겠다. 김호가 승리할 시 나 목종화는 이 티켓을 양도한다."
반대로 패배할 경우에는 승리한 에메랄드가 떨어진 체면을 조금이나마 수습하게 되겠지만.
목종화가 말을 이었다.
"또한 이 결투는 리플레이로 기록되며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동의하나?"
"동의합니다."
"좋다. 그럼 시작하지."
무대 위 알림판에 지형과 규칙이 떠올랐다.
MAP:[암석 지대]
RULE:[데스매치][10분 제한]
곽지철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무작위로 결정되는 많고 많은 지형 중에 암석 지대가 걸린 것이다.
토 속성 술사의 주 무대라고 해도 좋은 곳.
모든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의기양양해서 김호에게 도발을 던진다.
"이거 어쩌나, 지형 정도는 내가 불리해야 싸움이 될 텐데. 순식간에 끝나게 생겼네."
"...."
"갑자기 말수가 적어지셨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김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유지할 뿐이었다.
아직도 자기 처지를 깨닫지 못했나 본데, 곧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은 순간이동 마법진을 타고 경기장에 입장했다.
보이는 것도 돌, 밟히는 것도 돌.
곳곳에 바위부터 자갈까지, 온통 크고 작은 돌들이 가득했다.
[김 호 100% vs 곽지철 100%]
[3]
[2]
[1]
[Start!]
- 뻐억!
바닥을 굴러다니던 주먹만 한 돌덩이가 곽지철의 안면에 작렬했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42화 결투 (4)
고현우는 관중석에서 서예인, 신병철과 함께 결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짧은 감탄성을 흘렸다.
"허어. 실로 고절한 수법이 아닌가."
고현우가 연마하는 무공 역시 바람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기에, 바람의 흐름을 읽는 안목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김호의 손 부근에서 일순간 빠르고 강맹한 흐름이 보이는 것도 곧바로 알아챘다.
그러나 그 뒤의 일까지는 그로서도 완벽하게 읽어 내지 못했다.
"...."
서예인 역시 평소답지 않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결투에 집중하고 있었고,
"뭔데? 뭔데?"
신병철만이 아예 감도 못 잡는 중이었다.
고현우는 자신이 아는 대로 설명을 하려다가, 문득 저번에 당한 것을 떠올렸다.
- 안 알려 주지~ 내일의 즐거움으로 남겨 두는 걸로.
- 허허,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도다....
"궁금하오?"
"궁금해. 갑자기 웬 짱돌이래?"
"끝나고 알려 드리리다."
"아니, 아, 쫌."
'그때 신 형이 이런 기분이었군.'
즐겁게 웃는 고현우였다.
곽승재와 3학년 부장급들은 경험이 더 풍부했기에 보이는 것도 많았지만, 그들 역시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암기(暗器)의 이해도가 높은 당규영이 가장 정답에 근접했다.
'바람 마법이네?'
김호는 결투가 시작됨과 동시에 극도로 압축된 한 줄기 바람을 쏘아 보냈다.
그 바람으로 돌덩이를 때리고, 때린 돌덩이가 정확히 곽지철의 얼굴로 날아가도록 유도했다.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솔직히 말이 안 된다.
먼 거리의 작은 표적을 맞히는 정도야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맞힌 표적으로 또 다른 표적을 맞힌다?
당규영으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자연스레 이전에 가졌던 의문을 또 갖는다.
'저거 진짜 1학년 맞나?'
"크으윽...."
짱돌에 얼굴을 얻어맞고 한참이나 제정신을 못 차리는 곽지철.
사실 이 시점에서 이미 승부가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전이었다면 저 시간에 목숨이 몇 개는 날아갔으리라.
그러나 김호는 느긋하게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마치 처음 한 방은 맛보기였다고, 이제 시작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빌어먹을... 뭐였지? 또 속임수인가?'
당사자인 곽지철로서는 매우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순간 눈앞에 불이 번쩍하고,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선배들에게 빌린 방어구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대로 기절했을 것이다.
필사적으로 자세를 다잡는 곽지철의 눈에 김호의 손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또 아무것도 못 하고 얻어맞을까 봐, 허겁지겁 마나를 끌어올려 대응 마법을 시전한다.
꼴은 다급했지만 술식이 완성되는 속도는 빨랐다.
[어스 클러스터]
지면에 잔뜩 깔려 있는 크고 작은 돌들이 자석에 이끌리듯 허공의 한점으로 이끌리고, 척척 뭉치며 커다란 구체를 형성했다.
대지를 공처럼 뭉쳐서 공격과 방어 모두에 써먹는 마법이다.
곽지철이 구체를 움직여 전방을 보호했다.
다음 순간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돌 하나가 튀긴다.
보나 마나 저놈이 날려 보냈겠지.
곽지철이 손으로 어스 클러스터를 슬쩍 훑자 구체가 점점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뭉쳐 있던 암석들이 하나둘 쏘아져 나간다.
김호는 산책하듯 느긋한 걸음으로 날아드는 투사체들을 지나쳤다.
그러면서 보내는 눈빛이 어쩐지 도발하는 것 같아서 곽지철이 이를 갈았다.
'어디 언제까지 여유로운가 보자.'
스태프에 박힌 에메랄드가 빛을 발했다.
돌들이 뭉치며 [어스 클러스터]가 하나 더 만들어졌다.
확실히 장비가 좋기는 좋다.
2, 3학년급 장비를 둘둘 말고 있으니 어떤 마법을 시전하든 평소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하다.
원래 실력으로는 [어스 클러스터] 두 개를 유지하는 것도 버거웠을 텐데, 지금은 가뿐하고도 남는다.
'이 정도라면 세 개도 가능하겠군.'
짐작대로 어렵지 않게 세 개째 구체를 완성했다.
어스 클러스터 셋이 회전하며 기관총처럼 암석들을 쏘아 냈다.
- 두두두두두!
"그래, 이거지!"
막대한 힘을 휘두르는 감각.
계속 쓰다 보니 남에게 빌린 힘이라는 자각이 조금씩 옅어지는 중이다.
나는 강하다.
질래야 질 수가 없다!
- 두두두두두!
느긋하던 김호의 발놀림이 빨라진 것만 봐도 기분이 좋았다.
지금은 요리조리 잘 피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 유효타를 허용하고 쓰러지겠지.
김호 역시 자신에게 별로 시간이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적어도 곽지철이 보기에는 그랬다.
쏟아지는 자갈 세례를 피하면서 조금씩 거리를 좁혀 온다.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까, 김호의 손에 전류가 모여들었다.
곽지철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드디어 쓰는구나?'
뇌전의 벌새가 허공을 가로지른다.
곽지철은 피하거나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가슴팍을 활짝 열어젖힌 채 허밍버드를 맞이했다.
- 파지직!
"통할 줄 알았나? 유감이군."
"...."
마비는커녕 살짝 감전된 기색조차 없는 곽지철.
일이 틀어졌다 생각했는지 김호가 다시 거리를 벌린다.
[어스 클러스터] 세 개가 쏘아 보내는 암석들을 피하기 급급하다.
곽지철은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으며 신나게 웃어 젖혔다.
"흐하하하! 이제 남은 밑천이 뭐가 있으신—"
- 쾅!
그리고 얼굴이 바닥에 처박혔다.
관중들의 눈에는 투명한 손이 곽지철의 머리를 붙잡고 힘껏 바닥으로 내던진 것처럼 보였다.
하수연이 눈빛에 이채를 머금었다.
'저게 그 스킬인가 보네.'
박나리에게 넘겨받은 [공백 스킬북]으로 직접 작성한 스킬.
정확한 효과는 모르지만, 바람을 뭉쳐서 망치처럼 내리찍었다.
저런 스킬을 만들어 내고 활용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 설계였던 거야.'
김호는 저 이름 모를 바람 마법을 활용하기 위해 함정을 팠다.
허밍버드를 미끼로 써서.
에메랄드 마탑 측에서 대응책을 가져오리라는 사실을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보란 듯이 허밍버드를 시전했다.
리플레이와 비교해 보면 모든 면에서 엉성한 허밍버드.
처음부터 별 기대를 걸지 않고, 보여 주기용으로 던진 것이다.
반면 곽지철은 자신이 마비 저항 아이템을 보유했다는 사실을 강하게 의식하고, 또 과시하려는 의도로 허밍버드를 맞았다.
그렇게 곽지철이 눈앞의 벌새에 한눈판 사이, 머리 위에는 바람이 모여들고 압축되고 있었던 것이다.
본신의 실력에 더해 치밀한 심기까지.
적으로 돌리면 반드시 피곤해질 상대다.
하수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삼 [랭크 업]을 선물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김 호 100% vs 곽지철 86%]
"크으윽...!"
곽지철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얼굴에 흙이 범벅이 되다 못해 아주 가면을 만들어 썼고, 코피 한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몸을 지탱하는 두 팔이 덜덜 떨리는 것은 단순히 충격의 여파 때문만은 아니리라.
그가 겨우 몸을 일으켰을 때, 김호는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 퍼억!
힘차게 뻗은 주먹을 맞고 곽지철의 턱이 돌아갔다.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다가 투명한 벽 같은 것에 가로막혔다.
그것의 정체가 뒤쪽에서부터 옅게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사실은 알 도리가 없었다.
- 퍼억!
다음으로 복부에 발차기가 꽂힌다.
곽지철의 허리가 격하게 접혔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대체 뭐가, 어디에서, 어떻게 잘못된 거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200%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는데.
- 퍼억!
원인을 파악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김호가 그의 얼굴을 다시 후려쳤다.
곽지철이 비틀거리며 생각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 가면 뭘 해 보지도 못하고 흠씬 두들겨 맞기만 하다가 끝난다.
그의 머릿속에 목종화와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 골렘은 가능하면 꺼내지 마라.
- 예? 왜요?
- 장비는 외관만 수수하면 3학년 것을 써도 별로 티가 안 난다.
하지만 골렘은 아니야.
- ...!
- 누가 봐도 3학년 골렘인데, 보는 놈들이 뭐라 생각하겠나?
에메랄드의 위신을 세우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안 돼.
- 이해했습니다. 골렘 없이 이겨 볼게요. 압도적으로.
...그러나 지금 자신은 압도적으로 두들겨 맞는 중이다.
골렘을 쓰고 이기면 본전치기.
하지만 이대로 아끼기만 하다가 패배하면?
에메랄드는 향후 몇 년은 비웃음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리플레이의 주인공인 자신 역시.
그리고 퇴부. 너무나 무서운 단어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그래... 좀 친다는 건 인정해 주마. 그래도 마지막에 웃는 건 나다!'
따라붙으며 주먹을 휘두르던 김호가 갑작스레 땅을 걷어차 물러났다.
- 쿠웅!
그리고 그 자리에 사람 몸통만 한 나무 주먹이 떨어졌다.
지면에 깔린 돌들이 더 잘게 부서지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거대한 나무골렘.
상체가 하체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크며, 특히 손의 크기가 비대했다.
"오오, 저것이 그 골렘이라는 것이오?"
"뭐야, 처음 보냐?"
신병철이 되묻자, 고현우는 나무골렘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확실히 용살학원에 입학하고 처음 보는 게 많구려. 헌데, 골렘은 본래 지형지물을 이용해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소만.... 본인이 잘못 안 거요?"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 안 보이는 지형에서 나무골렘이 솟아난 건 무슨 영문인가.
신병철은 방금 고현우의 괘씸한 행태를 되갚아 줄까 하다가, 그냥 설명해 주기로 했다.
"네가 알고 있는 게 맞아. 기본적으로는. 근데 지형지물에만 의존하다 보면 재료가 없을 때 아무것도 못 하게 된단 말이야. 그럴 때를 대비해서 저렇게 미리 만들어 놓는 거지."
양질의 재료, 긴 시간, 그리고 무수한 마법을 겹겹이 부여하여 정제한 골렘.
즉석에서 소환하는 것에 비해 차원이 다르게 강력하다.
그리고 저 나무골렘은 결코 1학년이 정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게 됐으면 마탑회의 유망주는 홍연화가 아니라 곽지철이었겠지.
당규영이 보자마자 욕지거리를 내뱉은 것도 당연했다.
"야! 이 양심도 없는 자식들아! 이건 아니지!"
"...."
목종화는 대꾸하지 않고 앞만 바라보았다.
곽승재는 목종화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는 듯 복잡한 표정이었으나,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당규영이 잠시 고민했다.
'이거 중단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 저거 잡을 수는 있나?'
김호가 [인페르노 피스트]를 배웠다는 건 당규영만 안다.
하지만 인페르노 피스트는 엄연한 금지 스킬.
지금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못 쓴다.
리플레이도 돌아가고 있고, 선도부 곽승재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지켜보는 마당 아닌가.
결국 불주먹 없이 해결해야 한다는 뜻인데....
'일단 애가 멀쩡해 보이기는 하는데....'
김호의 안색을 살펴보니 이전과 다를 것 없이 평온하다.
몸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골렘의 주먹들을 피하고 있지만.
당규영은 조금만 더 지켜보기로 했다.
한 대라도 맞으면 끼어들든가 해야지.
- 부웅!
묵직한 나무 팔이 바닥을 쓸었다.
뒤이어 반대쪽 나무손이 주먹을 쥐고 바닥을 내리친다.
크고 육중한 몸에 걸맞지 않게 움직임이 민첩하다.
저 육중함에 저 속도. 한 대라도 맞으면 즉시 전부불능이 되리라.
곽지철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돌아온다.
"골렘만 있는 줄 아나? 이것도 피해 봐라."
- 두두두두두!
움직임을 멈췄던 어스 클러스터가 다시 회전하기 시작했다.
김호는 골렘을 피해 도망치랴, 날아드는 돌덩이들을 피하랴 전보다 훨씬 바쁘게 발을 놀리고 있었다.
[김 호 100% vs 곽지철 74%]
그런 와중에도 체력이 100%에서 떨어지지 않은 건 인정해 줄 만했다.
모든 공격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피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과연 그게 얼마나 갈까?
골렘은 무한히 유지되지만, 저놈의 체력은 유한할 터.
곽지철이 어스 클러스터에 박차를 가하자, 구체가 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때, 김호가 정확히 곽지철을 보며 손을 저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강풍에 곽지철의 몸이 강하게 밀쳐졌고,
빠르게 회전하는 구체에 처박혔다.
"크아아아악!"
서포터가 다 해먹음
43화 결투 (5)
"크아아악!"
빠르게 회전하는 어스 클러스터가 곽지철의 얼굴을 마구 갈아 버렸다.
보호 마법이 적용되지 않았다면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다급히 어스 클러스터를 해제하여 고통에서 벗어난다.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진 잔해들이 그의 심리 상태를 대변하는 듯했다.
비슷한 수에 서너 번쯤 당하고 나면, 아무리 시야가 좁은 사람이라도 조금은 감을 잡는 법이다.
곽지철 역시 몸이 고생한 덕분에 김호의 수법을 꽤 정답에 가깝게 알아낼 수 있었다.
'바람! 바람이다!'
바람으로 자신을 밀고 당기며 농락한 것이다.
그로 인해 보였던 추태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고, 더욱 급격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정말 사람 열 받게 만드는 데에는 도가 튼 놈 아닌가.
또다시 공격 마법을 시전하려는 순간,
- 휘이잉—
미약한 산들바람이 곽지철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몸이 움찔 떨리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아무 대비 없이 공격에만 치중하면 방금 전과 같이 저놈에게 빈틈을 내줄 뿐이다.
일단은 바람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 봐야 한다.
곽지철의 스태프가 녹빛을 발했다.
방금 해제한 어스 클러스터의 잔해가 척척 쌓이며 둥그런 담벼락이 세워졌다.
- 후웅-!
그러나 다음 순간, 뒤쪽에서 갑자기 불어온 강풍이 곽지철의 등을 강하게 떠밀었다.
그는 자신이 소환한 벽에 얼굴 박치기를 하고 말았다.
"크엑! 이 개, 개... 같은 놈이!"
타의적으로 벽을 끌어안은 와중에도 스태프를 움직여 등 뒤에 벽 하나를 더 세웠다.
마지막으로 뚜껑을 덮고 빈틈을 보완하자 돌로 지은 작은 요새가 완성되었다.
다행히도 바람은 요새 안까지는 침범해 들어오지 못했다.
'한숨 돌렸군.'
지금부터는 바깥을 살피면서, 나무골렘과 원거리 마법으로 소모전을 유도하면 될 터.
"이야.... 저건 진짜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당규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주 방어, 거북이 전법.
치졸하기는 하지만 승리를 위해서는 곧잘 쓰이는 전법이기는 했다.
문제는 그 거북이 전법을 쓰는 사람이 곽지철이라는 점이다.
3학년 골렘을 빌렸으면 시종일관 완전히 압도해도 욕을 퍼먹을 텐데, 우주 방어?
당규영이 무대를 가리키며 목종화를 놀려 댔다.
"야, 솔직히 내가 저거보단 더 남자답겠다. 그치?"
"...닥쳐라."
목종화가 씹어 뱉듯이 대꾸했다.
그로서도 곽지철의 행태가 몹시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에메랄드의 위신을 세우고자 한다면 결투에서 승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투의 내용도 중요하다.
그런데 저런 추한 꼴이라니.
이제는 이겨도 본전치기조차 못한다. 그냥 무조건 손해다.
한편 당규영은 턱을 괸 채 생각했다.
'저건 어떻게 뚫으려고.'
치졸하기는 하지만 냉정하게 평가했을 때 곽지철의 요새는 제법 견고한 편이었다.
평소에도 자주 써왔는지 숙련도가 높고, 거기에 2, 3학년들 장비의 보너스까지 더해져서 더욱 강화된 상태.
- 쿵! 쿠웅!
요새 밖에서는 나무골렘이 땅을 모조리 뒤엎어 가며 공격을 퍼붓고, 곳곳에서 만들어진 어스 클러스터들이 자갈을 쏘아 보내기 시작한다.
김호는 재빠른 움직임으로 그 모든 공격들을 회피한다.
너무 빨라서 운동화 발이 흐릿하게만 보인다.
'결국에는 우리 후배님이 이길 거 같긴 한데.'
골렘을 처음 본 순간의 걱정은 이제 많이 희석되었다.
[김 호 100% vs 곽지철 68%]
[남은 시간 4:57]
김호의 체력이 100%였으니까.
여태까지 단 한 번의 유효타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반면 곽지철은 꽤 피해가 누적된 상태.
이대로 계속 피하면서 제한 시간을 모두 쓰고, 판정승으로 마무리 지어도 되겠지.
'근데 그걸로 만족할 인간 같지는 않단 말이야.'
곽승재가 보는 앞에서 인페르노 피스트를 갈기면 갈겼지, 지지부진 판정승으로 끌고 갈 성격은 아닌 듯하다.
분명 더 준비해 놓은 게 있으리라.
"...!"
"서 소저, 무언가 보이는 게 있소?"
"...!"
가장 먼저 이변을 눈치챈 것은 서예인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김호의 정보 대부분이 물음표로 보였다.
[증?]
[??포?(?+ -> B?)]
그러나 정보는 수치화되어 표시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서예인에게는 보였다.
김호의 기세가 순간 급격히 치솟는 것이.
[도둑걸음]을 극한까지 활용하며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던 운동화 발이 멈추고.
김호가 제자리에 서서 나무골렘을 똑바로 마주했다.
누가 봐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금방이라도 커다란 나무 주먹을 맞고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나무 주먹에 얻어맞기 직전, 김호가 자신의 손을 들어 가볍게 갖다 댔다.
- 텅-!
나무골렘의 주먹이 높이 튕겨져 올라갔다.
한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린 자세.
상반신이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그 빈틈투성이 가슴팍을, 김호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며 툭 밀쳤다.
"어, 어어?"
요새 안의 곽지철이 본 것은, 육중한 나무골렘의 두 발이 바닥에서 붕 떠오르더니, 자신을 향해 무섭도록 빠르게 가까워져 오는 광경이었다.
의문이 가득 담겼던 '어어'가 금세 비명으로 바뀌고,
"어어!? 어어어!! 으아아아악!!"
- 쿠쿠쿠쿵!!
곽지철의 작은 보금자리는 날아드는 나무골렘에 형편없이 짓뭉개져 버렸다.
그 안의 곽지철도.
"저...!"
"무슨...!"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순간 경악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하수연 역시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맙소사.'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김호가 [공백 스킬북]으로 만들어 낸 것은 바람의 망치 따위가 아니었다.
그보다 수십 배는 강력한,
육중한 나무골렘을 짚 인형처럼 날려 버리는 태풍이었다.
조금 전에는 김호에게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에 안도했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자신이 더 실수한 것은 없나 되짚어 보고 있었다.
'우리 화해한 거... 맞지?'
[김 호 100% vs 곽지철 61%]
그럼에도 경기가 진행 중이라는 것은, 아직 곽지철이 전투 불능이 되지 않았다는 뜻.
과연 무너진 돌무더기가 들썩거리더니 곽지철이 어기적어기적 힘겹게 기어 나왔다.
그의 얼굴은 전의를 상실하고 하얗게 질려 있었다.
"...!"
그리고 나오자마자 김호와 시선이 마주쳤다.
곽지철은 김호가 왜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손가락이 위쪽을 향하자,
- 부웅!
엄청난 부유감이 들었고, 다음 순간 그는 수 미터 높이에 떠올라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 쾅!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투명한 거인이 그를 붙잡고 아래로 내던진 것 같았다.
"크...어억...!"
겨우 몸을 일으킨 곽지철의 시야에, 김호가 또다시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는 게 보였다.
그의 눈이 커졌다.
"아, 안 돼—"
- 부웅!
곽지철이 공중에 떠오른 상태에서 다급하게 외쳤다.
"내... 내가 졌다! 항복할 테-"
- 쾅!
"...!"
- 부웅!
- 쾅!
세 번째로 패대기쳐지자, 곽지철은 결국 간신히 붙들고 있던 정신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