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리플레이 분석 (3)
던전동 지상층의 인공 던전들은 오로지 학생들의 교육과 시험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위험 요소는 거의 존재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여러 단계의 안전장치가 학생들을 보호한다.
치명적인 부상이 예측될 시 곧바로 학생을 던전 밖으로 튕겨 내는 '이탈 장치'가 대표적인 예시다.
반면 던전동 지하 깊은 곳까지 이어지는 던전들.
용살학원이 세워진 이 섬을 <던전 섬>이라고 부르게 만든 무수한 던전들.
이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은 실전이다.
공략 중에 일이 잘못 풀리면 다치는 건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 목숨마저 위험할 수 있다.
그 대신 위험도에 상응하는 보상 또한 주어진다.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다는 말이다.
던전 클리어 보상으로 주어지거나, 보스 몬스터가 떨어뜨리거나, 던전 곳곳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기도 하다.
설명을 듣던 고현우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그렇다는 말은...."
"무기도 드랍이 되지."
C급, B급 무기도.
고현우의 표정이 특수연공실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와 비슷해졌다.
그러나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는 않았다.
도중에 무언가를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나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진다.
"헌데.... 지금은 불가능하지 않소?"
"아직 대인전 주간이니까."
던전동은 공략전이 열리는 다음 주에나 열린다.
며칠간은 꼼짝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매우 큰 걸림돌이 있는데,
"어차피 다음 주에도 지하는 못 내려가."
"그건 왜 그렇소?"
"자격이 안 되거든."
목숨을 건 실전에 갓 입학한 1학년을 투입할 리가 없다.
만에 하나 후유증이 남을 만큼 큰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기라도 한다면 장래의 영웅 후보가 하나 줄어드는 셈이니까.
지상층에서 충분한 경험을 쌓고, 내·외면으로 준비가 되었음을 증명한 자들만이 아래로 내려갈 자격을 얻는다.
해서 지하로 내려가기 위한 최소 조건, 즉 F급 던전의 입장 조건은.
"공략전 누적 점수 5,000점. 포인트랑 무관하게 순수한 던전 클리어 점수만 집계해서."
"으음...."
고현우가 학생증을 꺼내 뒷면을 확인하곤 침음을 흘렸다.
보나 마나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현재 내 공략전 총점이 정확히 2,266점이다.
[픽스 존]은 683점으로 중상위권,
[고블린 늪지대]에서 서예인과의 듀오는 728점으로 최상위권,
솔로 플레이는 855점으로 볼 것도 없이 학년 1등이다. 리플레이 저장은 안 했지만.
합산 랭킹은 상위 5%에서 10% 사이인데, 이런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몇 주는 더 공략전을 진행해야 F급 던전에 발이라도 들일 수 있다.
심지어 내가 목표로 하는 건 F급 따위가 아니라 더 상위 랭크 던전들.
E급, D급, 그리고 그 위는 더 점수를 쌓거나 시험을 통과해서 순차적으로 해금해야 하니, 사실상 1학년 1학기 중에는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고현우가 물었다.
"하면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는 것 아니오?"
"공식적으로는."
"공식적으로는...?"
고현우가 내 말을 되뇌었다.
곧 그 속뜻을 이해했는지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꼭 용살학원에서 정해 놓은 대로만 하라는 법은 없지.
"몰래 들어가면 돼."
이런 때를 위해 용살학원 심부름 서비스가 있는 것이다.
도둑 동아리는 금지 아이템 거래를 비롯해 다양한 교칙 위반 사업에 발을 걸치고 있다.
자격 미달인 던전에 몰래 입장하게 해 주는 것도 그중 하나.
신병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김호:심부름]
[신병철:어디십니까손님]
[김호:매점 2층 테라스]
[신병철:바로가겠습니다손님]
"신 형을 부른 거요?"
"어. 금방 올걸."
기다리면서 슬쩍 서예인의 반응을 살폈다.
대놓고 교칙 위반을 하겠다고 떠들었는데도 그러려니 하는 태도.
지금은 마시는 아이스티에 더 관심이 많은 느낌이다.
'그러시겠지....'
예상대로 교칙 위반에 별다른 반감은 없는 것 같다.
아예 교칙에 신경을 안 쓴다는 게 더 알맞은 표현일까.
그렇다면 언젠가 서예인의 필요에 따라 함께 지하층을 공략할 일도 생길지 모른다.
저 부잣집 아가씨한테 필요한 게 뭐가 있을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소리다.
메시지를 보낸 지 5분도 안 돼서 신병철이 튀어 왔다.
심부름 서비스답게 빠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다.
"여기들 계셨구만? 어떻게 도와드릴까?"
"던전 좀 들어가려고."
"던전? 다음 주에 열리는 건 알지?"
"월요일 저녁 생각하고 있어."
"월 저녁 딱 좋지, 번호가 뭔데?"
"388번."
"보자, 보자.... 388번이면...."
신병철이 수첩 비슷한 것을 꺼내 잠시 뒤적거렸다.
던전 정보를 확인하는 모양이다.
"...[깃털뱀 제단]? D급이네?"
"어."
"4인 던전인데 누구누구 들어가?"
"나랑 얘, 둘만."
신병철이 나와 고현우를 번갈아서 보았다.
그리고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괜찮겠냐? D급에 4인 던전인데."
우리 걱정 반, 자기 걱정 반이다.
혹여 우리가 던전에 들어갔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몰래 들여보내 준 신병철도 책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D급이라면 우리 실력으로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겠지만, 네 명이서 해야 할 것을 둘이서 한다고 하면 그게 될까,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죽진 않겠지. 수틀리면 바로 튀고."
도망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다.
쟤도 자기한테 피해가 안 생긴다는 확신이 들어야 이 일을 맡을 테니까.
신병철은 고현우에게도 확인차 물었다.
"너는? 괜찮냐?"
"본인은 김 형을 믿소. 다 생각해 둔 게 있겠지."
고현우의 대답은 맹목적이라 느껴질 만큼 단호했다.
질문을 던진 신병철이 되려 머쓱해 했다.
"...에이, 그럼 그래라. 월요일 저녁에 준비해 놓을게."
"보수는?"
지하층 던전에 잠입시켜 주는 과정은 여러모로 까다롭고 위험 부담도 크다.
해서 당연하게도 일정 보수를 도둑 동아리 측에 지불해야 한다.
선불로 내기도 하고, 던전 클리어 보상의 일정 지분을 약속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병철은 손사래를 쳤다.
"아유, 우리 사이에 보수는 무슨. 저번에 빚 있지? 그냥 그거 갚은 걸로 쳐."
밴 웨이브 당시 금지 아이템을 모조리 압수당할 위기에 처했었는데, 내가 그것들을 [생명의 큐브]에 숨겨 줬다.
덕분에 신병철은 선배들에게 변사체가 될 때까지 두드려 맞을 운명에서 벗어나, 적당한 수준의 구타와 머리 뽑힘으로 그칠 수 있었고.
그 빚을 지하층 잠입을 공짜로 도와주는 거로 퉁치겠다는 말이다.
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먼저 그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는데, 다시 봤네."
"에이, 누가 들으면 무슨 은혜도 모르는 놈인 줄 알겠네. 사나이 신병철, 다른 건 다 떼먹어도 의리는 지킨다, 이 말씀이야."
"그러시군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건 다 떼먹는구나.
쟤한테는 뭐 빌려주지 말아야지.
덧붙여 신병철이 공짜 얘기를 먼저 꺼내는 데에는 그것 말고도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리고 솔직히.... 나도 지하는 딱 한 번 내려가 봤거든. 당 누님 따라서. 이번에 경험 좀 쌓자."
"...."
그 역시 1학년이라 경험이 적었던 것이다.
당규영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 본 게' 한 번이고, 미숙한 길잡이의 첫 손님은 우리가 될 예정이다.
고현우가 나에게 눈빛으로 이래도 괜찮은가 물었다.
100% 확실하게 하고자 한다면 2학년 이상을 고용하는 게 맞다.
하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신병철의 실력은 다소 못 미덥지만, 그래도 도둑 동아리로서 기본은 되어 있을 것이다.
여차하면 내가 나서면 그만이고.
"우린 상관없어. 처음이라고 대충 하지만 않으면."
"아유, 당연한 말씀입죠. 최선을 다해 모셔야지. 이걸로 끝입니까, 손님?"
"아니, 하나 더."
"또 던전? 어디."
"104번."
"104...?"
신병철이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자기 수첩을 확인하곤 미간이 더 좁아진다.
"104번...[흑사방]. B급인데. 뭐 잘못 안 거 아냐?"
"제대로 봤다. 흑사방 맞아."
"이건 심층부 던전인데.... 야, 솔직히 이건 내가 어떻게 못 도와주겠다."
신병철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S부터 B랭크 사이의 던전들은 던전동 가장 깊은 곳, '심층부'에 존재한다.
일반 학생들은 접근조차 불가능하며,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발각되는 것만으로도 최고 수준의 징계가 가해진다.
신병철의 능력으로는 데려다주기도 어렵고, 능력이 된다 한들 1학년인 그가 함부로 다룰 사안이 아니었다.
그러니 저런 대답을 돌려주는 것도 당연했다.
"나도 알아. 부장님한테 얘기나 한번 꺼내 봐."
"그 정도는 뭐, 안 될 거 없지. 물어보고 알려 드릴게. 또?"
"그게 다야."
"오케이. 그럼 난 간다. 수고들~"
용건을 다 말하자 신병철은 급하다는 기색을 풀풀 풍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후다닥 달려 나갔다.
잠시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말없이 아이스티를 들이켰다.
그런 다음 고현우에게 여태까지의 대화를 정리했다.
"큰 틀에서 우리 계획은 이래. 월요일 저녁에 D급 던전, [깃털뱀 제단]에 들어간다. 거기서 네 무기를 구할 거야."
결론만 말하자면 꽤 쓸 만한 장검을 획득할 수 있다.
그 장검이라면 당분간 고현우가 쓰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동시에 나도 나름대로 이득을 챙길 심산이다.
장검을 드랍하는 여러 던전 중에 깃털뱀 제단을 선택한 건 그런 이유에서다.
"그다음 며칠간의 준비 기간을 거친다. 도둑 동아리 쪽과 협상도 하고, 아이템도 사 놓고."
신병철이 언급했듯이, 심층부 던전은 그가 다룰 사안이 아니다.
적어도 도둑 동아리 3학년, 아마 당규영과 협상을 하게 될 것이다.
협상이 불발로 끝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다.
안 돼도 되게 만들 테니까.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아. 사소한 실수 하나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곳이야."
"각오는 되었소. 본인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이오?"
"네 역할이 중요해."
단순히 실력 좋은 칼잡이로서 고현우를 데려가는 것이 아니다.
던전 안에서 그는 철저하게 또 하나의 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던전에 대해 나만큼 알고 있어야겠지."
가져온 서류 다발을 건넸다.
받아서 한 장씩 넘기는 고현우의 눈이 이채를 머금었다.
"...!"
[깃털뱀 제단]과 [흑사방]의 공략본.
던전의 구조부터 시작해서 등장하는 적들과 위치, 우리가 어떤 경로로 이동해서 어떻게 목표를 달성할 것인가 등.
모든 것이 두 공략본에 담겨 있었다.
"외워. 한 글자도 빠짐없이."
59화 4주 차 공략전 (1)
고현우는 보고서 작성과 내가 추가로 내준 숙제로 바빠졌다.
주말 동안은 머리가 많이 고생할 것이다.
한편 나는 마법공학 공방에서 더 시간을 보냈다.
하는 일은 지난 며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4공방에서 밑 준비를 하고, 가끔 마법공학 동아리 선배들이 가져오는 실패작을 분해해 준다.
제1공방에 자리가 나면 잽싸게 들어가서 아이템을 만든다.
다만 이번에는 들어가는 재료의 수준이 훨씬 높았다.
[마력기관]
[부유석 추출물]
[웨더 칩]
여기에 다른 선배들이 의뢰 보상으로 내준 고급 재료들까지 모조리 제작에 활용했다.
그렇게 쳇바퀴 같은 며칠이 흐르고....
주말 아침.
새벽이 막 끝나고, 창밖에서는 서서히 동이 터 올 무렵.
나는 손에 든 공구를 내려놓았다.
'끝났다.'
가늘고 길쭉한 심 형태의 부품.
며칠간 이것만 붙잡고 씨름하다가 드디어 완성한 것이다.
부품에 마나를 불어 넣자, 미약한 상승기류가 발생하며 작업대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잡다한 것들이 붕 떠올랐다.
몇 센티미터가량 떠올랐을 때 마나를 끊으니 다시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
때마침 짧은 휴식을 취하던 선배들이 그 광경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에게 부담이 되리라 생각했는지 우르르 몰려들지는 않고, 봉재석과 일전에 봤던 여선배 하나만 나에게 다가온다.
두 사람 모두 얼굴에 탐구욕이 가득했다.
"무슨 재료를 그렇게 열심히 긁어모으나 했더니.... 또 신기한 걸 만들었네."
"잠깐만 봐도 돼?"
"예, 선배님."
내가 승낙하자 두 선배가 부품에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고 이모저모 살폈다.
번갈아서 감탄사를 흘린다.
"이런 구조구만...."
"부유석 추출물이 왜 필요한가 했는데, 다 쓰임새가 있었네...."
"와, 이거 봐 봐. 기가 막힌다, 기가 막혀."
이 부품의 원리는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마력기관]을 통해 마나를 공급하면,
[웨더 칩]이 일정 범위 내에 기후 변화를 일으키며,
[부유석 추출물]이 그 기후의 종류를 결정한다.
봉재석이 부품을 나에게 건네며 물었다.
"생김새가 무기에 들어가는 건가 본데, 스태프? 셉터?"
"비슷합니다."
"본체는 구했고?"
현재로서는 부품에 불과하기에 무언가에 장착해야만 아이템 구실을 한다.
인벤토리에서 1미터 남짓한 길이의 철봉을 꺼냈다.
"아쉬운 대로 이걸 쓰려 합니다."
용살학원에서 무상으로 제공하는 F등급 철봉을 살짝 뜯어고친 것이다.
부품을 끼워 넣자 무리 없이 하나가 되었다.
[부유의 철봉(E)]
▷'레비테이트 존(F)' 상시 발동
레비테이트 존. 부유 구역.
상승 기류를 일으켜 범위 내의 모든 것을 떠오르게 만드는 바람 마법이다.
사물이든 몬스터든 각자 무게가 다르고 마법 저항력도 다르니 떠오르는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렇게 조금이라도 부유하는 것들은 모두 물리력의 영향을 받기 쉬워진다.
즉, 범위 내에서는 [윈드포스]에 더 취약해진다는 말이다.
다만 이 [부유의 철봉]의 랭크는 고작 E.
상시 발동하는 [레비테이트 존]도 F급에 불과하다.
위력이 미미하고 범위도 좁다. 비유하자면 단칸방 정도일까.
'철봉을 썼으니까.'
마법공학 아이템은 부품뿐만 아니라 본체를 이루는 금속의 재질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
임시방편이기는 하나 철봉을 썼으니 잘해야 E등급이 한계.
더 좋은 금속을 써서 더 뛰어난 본체를 만들면 당연히 랭크도 성능도 상승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좋은 금속'은 어디에서 구하는가.
'내려가야지.'
던전동 지하로.
철봉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내가 떠날 때가 됐다는 사실을 직감했는지, 봉재석이 나를 바라보며 조금은 아쉬운 투로 말했다.
"이제 당분간 안 오겠네."
그가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내가 [부유의 철봉] 완성에 정확히 맞춰서 모아 둔 재료를 다 소진했기 때문이다.
뭘 더 만들 생각이었다면 조금은 남겼을 테니까.
사실이었기에 나는 부인하지 않았다.
"예, 그간 신세 많이 졌습니다."
여선배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지만,
"신세 많이 졌으면 우리 동아리 가입븝븝!"
"신세는 무슨. 또 만들고 싶은 거 생기면 언제고 찾아와라."
봉재석이 도중에 주둥이를 막아 버렸다.
내 마음이 떠난 게 보이니 차라리 쿨하게 보내 주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나는 정중하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제1공방을 나섰다.
- 아니, 왜 그냥 보내?
- 아서라, 쟤가 입부를 하겠냐. 어디 묶여 있을 그릇이 아니야.
- 그건 끝까지 모르는 거지!
- 그냥 포기해라.
공방 안쪽에서 가벼운 말다툼이 이어졌다.
* * *
남은 주말은 트레이닝 센터에서 [윈드포스]와 [코어]를 수련하며 보냈다.
월요일.
학생 식당이 아침부터 북적거렸다.
서예인과 나는 인파 속에 끼어서 아침 식사를 하기보다 밖으로 나가는 걸 택했다.
한 손에는 커피, 반대쪽 손에는 반으로 접은 와플을 들고.
교정 한켠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와플을 먹으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자니 사복 차림의 비율이 부쩍 늘어났다.
멘토링을 위해 초빙된 졸업생들.
이번 주 들어 학생 식당이 북적거리기 시작하는 건 저들의 영향이 크다.
멘토링은 학기 둘째 달인 5주 차, 즉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번 한주는 저들이 학사 측으로부터 기본적인 지침과 멘토링의 골자 등을 전달받는 기간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서예인에게 해 둘 말이 있었다.
"공지사항. 김호의 마력탄 특강은 임시 휴강입니다."
"...?"
서예인이 와플을 한입 베어 물려다 말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볼에 크림이 조금 묻었는데, 내 말에 정신이 팔려 알아채지 못한 것 같다.
회색빛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하며 '왜 휴강이지?' 이유를 묻는다.
나는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다.
"어차피 새 스킬은 다음 주 멘토링 때 익히니까 지금은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이 일주일은 내실을 다지는 게 낫겠다."
효율적으로 성장하려면 무턱대고 스킬의 종류만 늘릴 게 아니라, 보유한 스킬의 숙련도와 랭크를 올려 주는 시간도 필요하다.
누구든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과정이고, 내가 보기에는 이번 주가 아주 적절하다.
알아서 잘 수련하라고 말하려다가, 서예인은 약간의 방향성이나 목표를 제시해 주면 더 능률이 오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력탄]이랑 [사출], 둘 다 C랭크를 목표로 해 보자. 멘토 아저씨를 놀래켜 주는 거지. 아닛! 1학년이 이런 마력탄을? 하고."
아직 멘토가 졸업생일지 3학년일지는 모를 일이라 '아저씨'라는 단어에는 다소 어폐가 있지만, 아무튼 요점은 열심히 수련해서 멘토를 놀라게 해 준다는 거다.
서예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해 볼게."
기억하기로 마력탄이 D, 사출이 E니까, 일주일 만에 동시 C랭크는 사실 무리한 감이 있었다.
그럼에도 일부러 목표를 높게 잡은 이유는, 그래야 열심히 수련할 것 같아서.
또 서예인의 압도적인 재능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 때문이었다.
"야, 근데 너 볼에 크림 묻었다."
"?"
"아니, 거기 말고. 반대쪽."
"??"
"조금 옆에."
"???"
* * *
공략전 수업.
서청용 선생님이 칠판에 단어 두 개를 적었다.
[자원] [시간]
"지난 공략전은 너희들의 가장 소중한 자원, 시간을 최대한 절약하는 방향으로 진행했지."
타임 어택.
던전에서 얼마나 적은 시간으로 목표를 달성하느냐가 핵심이었다.
"여기서 손 한번 들어 보자. 사실 그 늪지대 중반쯤에 특이한 게 있었거든. 혹시 기억나는 사람?"
"...?"
3반 학생들이 어리둥절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얼굴에 이렇게 쓰여 있다.
- 그런 게 있었다고?
규칙이 규칙이라 다들 최대한 빨리 던전을 주파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던 데다가, 등 뒤에서는 참수자 고블린이 식칼을 들고 쫓아왔었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대체 누가 여유를 부리며 주변 환경을 찬찬히 훑어보겠는가.
사람이 무슨 고인물 플레이어도 아니고....
물론 나는 이럴 때 혼자 번쩍 손을 들어 올리는 관심종자는 아니었다.
한참이나 아무도 나서지 않자, 서청용이 빙긋 웃더니 칠판에 정답을 띄워 올렸다.
고블린 늪지대 중반부, 나무 밑동 부분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주의 깊게 봐도 눈에 안 띄지. 급박한 상황이면 더 지나치기 쉬워. 그래도 항상 이런 사소해 보이는 것들을 캐치하도록 신경을 써야 한단다. 왜일까?"
이 질문에는 제일 앞줄의 여학생이 대답했다.
"정말 사소한지는 확인해 봐야 아는 거니까요."
"바로 그거야."
그 사소해 보이는 것이 사실 던전의 핵심 요소라면?
가령 그것이 일대의 함정들을 가동하는 장치라면?
추가로 몬스터를 소환하는 장치라면?
숨겨진 방으로 통하는 입구라면?
무심코 지나쳐서 좋을 게 없다.
"자, 그래서 이번 주 공략전 주제는—"
MAP:[무작위]
RULE:[소탕][2인 던전][랜덤 매칭]
"—바로 소탕입니다."
소탕.
던전 내부를 얼마나 깨끗하게 청소하는가.
가령 몬스터 100마리가 존재한다면 그중 몇 마리까지 발견하고 처치하는가.
물론 100마리가 던전 입장과 동시에 우르르 몰려올 가능성은 전무하고, 곳곳에 숨어 있을 것이다.
던전 구석구석을 주의 깊게 살피고 다녀야 고득점을 얻을 수 있다.
서청용이 손가락을 하나 꼽았다.
"중요한 거 하나. 이번에는 시간제한이 없단다. 서두르지 않고 꼼꼼히 보기만 하면 누구든 최고점! 어때?"
학생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대인전에 치이고, 타임 어택에 치이고, 강적에 치이고, 2대2에 치이던 차에, 이런 쉬어 가는 공략전이라니.
서청용이 빙긋 웃으며 두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중요한 거 둘. 지형은 랜덤이야. 정글이 나올 수도 있고, 유적지가 나올 수도 있고, 동굴이 나올 수도 있고.... 사람마다 다른 던전에서 공략전을 치르는 거지."
제일 앞줄의 학생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선생님, 그러면 연습 모드랑 실전 모드도 지형이 달라요?"
"다르지."
"그럼 연습 모드 해 봤자 아무 소용 없는 거 아니에요?"
"정말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니?"
"...아."
질문을 한 학생이 무언가 깨닫곤 손을 내렸다.
매번 다른 던전에 들어가더라도 경험은 계속 쌓인다.
관찰력 역시 단련할수록 늘어난다.
그렇게 향상된 관찰력은 결국 실전에도, 나아가서 학기 중 다른 공략전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너무 점수에만 목매지 말고, 경험 삼아 여러 번 연습 모드를 해 보렴. 컨닝할 생각인 친구들도 이번에는 포인트를 아끼자."
몇몇 학생들이 뜨끔해서 서청용의 시선을 피했다.
어차피 무작위 던전이라 남의 리플레이를 보고 따라 하는 꼼수는 안 통한다.
서청용이 시간을 확인하고 수업을 마무리 지었다.
"보내 주기 전에, 이번 주에는 숙제가 있습니다."
서청용이 저주받을 단어를 입에 담자, 학생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배신감으로 물들었다.
믿었던 당신마저 숙제를 내줄 줄이야....
미안하다며 멋쩍은 웃음을 흘리는 서청용이었다.
"각자 리플레이를 보면서 지도를 그려 오면 돼. 몬스터 위치 표시하는 거 잊지 말고. 기한은 다음 주 월요일까지. 그럼 수업 끝! 다음 시간에 보자!"
오늘은 고현우 서예인과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어차피 팀원도 무작위로 정해지고,
저 둘은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니 연습 모드부터 시작해야겠지.
반면 나는 경험이 넘치도록 쌓인 놈이라 연습 모드를 해 봤자 시간 낭비다.
초장부터 실전으로 간다.
곧장 던전동 상층으로 향했다.
단말기에 학생증을 찍고, 팀원이 나타나길 기다리면서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쓸 만한 친구가 걸리면 좋겠는데....'
이번 주 퀘스트를 확인해 보면,
[서브 퀘스트:4주 차 공략전]
▷목표:공략전 던전 클리어
▷기한:~일요일 자정
▷보상:완성도에 따라 차등 지급 (??/100%)
내가 있는 이상 파트너로 누가 걸리든 완성도 100%는 따 놓은 당상이다.
솔직히 말해 하나부터 열까지 나 혼자서 다 해도 상관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쓸 만한 친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복사]로 가져올 만한 스킬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마법공학 공방에서 해야 할 일은 일단락 지었기에 [마법공학] 스킬은 당분간 안 쓴다.
그 자리를 전투 계열 스킬로 덮어씌울 생각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근처에 순간이동 포탈이 입을 열었다.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공기가 순식간에 상쾌해졌다.
지면의 높낮이가 일정하지 못한 걸로 보아 산간 지대로 추측된다.
그리고 내 파트너는....
'또 너니?'
빨간 머리와 불타는 루비.
그리고 나를 보자마자 얼굴에 핏기가 사라져 버린.
홍연화였다.
60화 4주 차 공략전 (2)
대인전에서도 두 경기 연속 상대로 만나더니,
이번에는 홍연화와 파트너가 됐다.
나랑 무슨 인연이 있길래 자꾸 붙는지 모를 일이다.
'나쁘진 않아.'
어중간한 상대와 공략전을 하느니 차라리 얘가 낫다.
유망주급이라 전투력 하나는 검증된 셈 아닌가.
전투가 필요한 부분은 다 떠넘기면 된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친근감이 느껴지는 구석도 있었다.
루비 마탑주는 예전 내 주류 픽이었고,
홍연화는 보면 볼수록 그 루비 마탑주를 많이 닮았다.
몇 년 젊어진 버전을 보는 것 같다.
'표정만 비슷하면 완전 판박이인데.'
차이점이라면 나를 보는 표정.
루비 마탑주는 그 불같은 성정을 드러내듯 항상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분위기인 반면, 눈앞의 홍연화는 잔뜩 겁에 질려 위축된 상태다.
물론 이건 내 탓이 없잖아 있었다.
만날 때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박살을 내 버렸으니 위축될 만도 하지.
그래도 저렇게 보자마자 지레 겁을 집어먹을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무슨 큰 오해가 있는 게 아닐까.
지금부터라도 세상 스윗하게 대하며 차차 오해를 풀어 나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굳이?'
꼭 풀어야만 하나?
지금 내 목표는 빠르고 효율적으로 퀘스트를 깨는 것이다.
어느 정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편이 목표 달성에는 더 도움이 될 듯하다.
해서 나는 홍연화의 마음속 이미지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나를 폭군이라 생각한다면, 폭군이 되어 주리라.
섬뜩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홍연화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탈색되었다.
* * *
홍연화는 울고 싶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잘못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던전동에 도착해서 매칭을 잡으려던 홍연화.
그러나 학생증을 스캔하기 직전, 그녀는 발견하고 말았다.
근처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김호를.
다행히 김호는 반대쪽을 바라보고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뒷모습만 보고도 홍연화의 등줄기에 오한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겨났다.
공략전 성적보다 더욱 중요한 목표가.
'파트너만은 피해야 해.'
팀원은 랜덤으로 정해지지만, 지금 학생증을 찍었다가 만에 하나 저 괴물 같은 사내와 매칭이 잡힌다면....
그리고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된다면....
상상만 해도 숨이 턱 막힌다.
홍연화는 언니 홍예화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늘 공략전은 조금 기다렸다 신청하는 걸로.
김호가 다른 누군가와 함께 던전에 들어가면, 그때 자신도 팀원을 찾으면 된다.
해서 그녀는 김호를 몰래 훔쳐보며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의 근처에 순간이동 포탈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계속 기다렸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홍연화의 자존심이 점점 더 구겨졌다.
그와 반비례해서 자괴감이 크기를 키워 갔다.
내가 명색이 차기 루비 마탑주가 될 사람인데, 이렇게 쥐새끼처럼 남 눈치를 봐야 하나?
다시 흘긋 김호를 보니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매칭이 잡힐 기미는 여전히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더는 못 기다려!'
두려움에 억눌리던 자존심이 거센 반발을 일으켰다.
계속 이렇게 눈치만 보지는 않겠다!
...그렇다고 김호와 파트너를 할 자신감이 생겨난 건 아니고, 작전만 슬쩍 변경했다.
잽싸게 먼저 들어가 버리는 쪽으로.
거기에 홍연화는 약간 더 잔머리를 굴렸다.
'실전 모드로 가자.'
저자도 사람인 이상 연습 모드를 하기는 할 거다.
그러니 자신이 연습 모드를 건너뛰고 곧바로 실전에 들어간다면, 파트너가 될 일말의 가능성마저 차단할 수 있다.
초장부터 실전이 다소 불안하기는 한데, 어떻게든 몸을 비틀면 되겠지.
홍연화가 자신의 천재성에 감탄하며 학생증을 스캔하자....
순간이동 포탈이 그녀 앞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 김호 앞에도.
홍연화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 이게 왜...?'
아니겠지?
그냥 우연히 동시에 열린 거겠지?
내 파트너는 다른 어딘가에 있는 거겠지?
홍연화가 열심히 현실을 부정하는 한편, 김호는 망설임 없이 던전에 발을 들였다.
다음은 그녀가 들어갈 차례.
그러나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평범한 순간이동 포탈이 그녀의 눈에는 지옥 무저갱으로 통하는 입구처럼 보였다.
계속 쭈뼛거리던 홍연화가 이내 크게 심호흡을 했다.
'후.... 그래, 들어가야지.'
이러고 있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
무거운 발을 억지로 떼서 던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물론 마음 한켠에는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었다.
들어가면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는 희망이.
"...."
하지만 어림도 없지.
안에서 기다리던 김호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홍연화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바닥을 향했다.
'망했네....'
설마가 사람을 잡고 말았다.
설마 김호가 실전을 신청했을 줄은.
그제야 그가 한참이나 기다린 것이 설명되었다.
이제 막 공략전이 시작된 참이라 학생들 절대다수가 연습 모드에 몰렸고, 벌써부터 실전에 들어가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아니, 없었다.
파트너가 도통 나오질 않으니 계속 기다리는 것도 당연했다.
자신이 매칭을 잡자마자 파트너가 되는 것도 당연했고.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격이었다.
'나 진짜 왜 그랬지.'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자존심 세우지 말걸,
잔머리 굴리지 말걸,
그냥 오늘 쉬고 내일 할걸....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후회한다고 지금 이 상황이 변하는 건 아니다.
홍연화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상황이 어찌 됐든 이 던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남은 몬스터 수:88]
이번 공략전의 목표는 소탕.
몬스터 88마리를 다 잡으면 100% 완성도로 만점을 받는다.
공략전 교사가 '디테일,' '꼼꼼함,' '관찰력,' 등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이 몬스터들이 제 발로 찾아올 가능성은 작았다.
분명 던전 곳곳에 교묘하게 몸을 숨기고 있으리라.
'어떻게 찾아볼까.'
팀원과 논의할 필요가 있었다.
기존에 팀을 이루었던 백준석은 생각하는 걸 귀찮아하는 탓에 대개 홍연화가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렸었다.
무식한 검사들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반면 김호는 그녀와 같은 캐스터 계열.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으리라 짐작된다.
홍연화가 논의를 위해 바닥으로 향하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즉시 김호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했고,
"...."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백준석에게는 잘만 했던 말들이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홍연화가 계속 입술만 달싹이고 말을 못 하자, 김호가 짤막하게 한 단어를 내뱉었다.
"따라와라."
"어, 어?"
그리고 저 혼자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홍연화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영문도 모르고 뒤따랐다.
한동안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던 김호가 또 저 혼자 멈춰 서더니, 숲 한쪽의 덤불을 바라보았다.
홍연화가 같은 곳을 응시했으나 별다른 특이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그 순간, 김호가 발끝으로 근처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툭 걷어찼다.
그러자 돌멩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져 나가 덤불 너머로 사라졌고,
"꽤액!"
[남은 몬스터 수:87]
외마디 단말마와 함께 남은 몬스터 숫자가 하나 줄어들었다.
홍연화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있었네?'
"케륵!"
놀라는 것도 잠시, 덤불 안에서 고블린 세 마리가 튀어나왔다.
매복했다가 동족의 죽음에 분개하여 모습을 드러낸 듯했다.
김호는 놈들을 한번 일별하더니,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고블린들의 이목은 남아 있는 홍연화에게 쏠렸고.
홍연화는 두 눈을 끔벅거리며, 떠나는 김호와 달려오는 고블린들을 번갈아 보았다.
"아니, 저기."
이래 놓고 그냥 가 버린다고?
어이없음이 정도를 지나쳐서 화도 나지 않았다.
루비가 번쩍 붉은빛을 발하고,
- 퍼펑!
[남은 몬스터 수:84]
고블린 세 마리가 숯덩이로 화했다.
사실 고블린 따위는 그녀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는 잡몹이기는 했다.
그렇게 알아서 대강 납득을 한 다음 시선을 돌려 보니, 김호가 벌써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홍연화는 놓칠세라 전력 질주로 달려갔다.
겨우 따라잡았을 즈음.
김호의 손에는 어디서 주웠는지 큼지막한 짱돌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가차 없이 인근 덤불에 집어 던지자, 또 성난 고블린 네 마리가 튀어나왔다.
이미 한번 겪어 본 터라, 홍연화는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마법을 시전했다.
- 퍼펑!
[남은 몬스터 수:80]
돌아보니 그 짧은 시간에 또 한참 거리를 벌린 김호.
홍연화가 결국 폭발했다.
솔직히 그녀의 성질머리에 이만큼 참았으면 많이 참은 것이다.
'야!! 같이 좀 가자!! 공략 혼자서 하냐!!'
—라는 말은 마음속으로만 했고.
실제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이랬다.
"야, 같이 좀."
김호를 상대로는 신기하게도 볼륨이 자동으로 조절된다.
그 조그마한 말이 들렸는지 그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걸음걸이를 늦춰 주었다.
'진짜 늦춰 주네....'
새삼스럽게 저 남자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한 홍연화였다.
어쨌든 슬슬 패턴이 몸에 익어 간다.
김호가 앞서서 걷다가 돌을 던지거나 무형의 힘을 써서 덤불이나 나무 위, 바위 뒤편 등의 매복지를 자극하면, 그에 반응해서 몬스터가 튀어나온다.
그리고 뒤처리는 홍연화의 몫.
대개 고블린이나 오크 따위의 저등급 몬스터라 어려울 건 없었다.
- 화르르륵!
[남은 몬스터 수:66]
"케륵!"
몬스터들이 모두 같은 반응을 보인 건 아니었다.
간혹 발각되자마자 등을 돌려 도망치려는 놈도 있었다.
[소탕] 규칙에서는 이런 놈이 골칫거리인데, 그렇게 도망쳐서 다른 곳에 숨으면 이미 갔던 장소를 또 돌아봐야 할 일도 생기기 때문이다.
"케륵?"
그러나 도주는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고, 놈들은 마치 투명한 벽에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나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홍연화가 소환한 화염에 삼켜져 버렸다.
- 화르르륵!
몇 번 반복하니, 처음에는 뭐가 숨겨져 있는지 감도 못 잡던 홍연화의 눈에도 조금씩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이 매복한 곳에는 특유의 위화감이 존재했다.
보면 볼수록 그 위화감이 점점 더 눈에 잘 띈다.
저도 모르게 관찰력이 쑥쑥 늘어나는 것이다.
홍연화가 김호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이상...한데?'
뭐 이렇게 쉽지?
워낙 성미가 급한 그녀라 소탕전 같은 느긋하고 세심한 작업과는 거리가 멀다.
해서 던전에 입장할 때만 해도 고생 좀 하겠구나 예상했었다.
그런데 실상은 김호가 가는 곳마다 몬스터가 튀어나오니, 그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 전부 해결되었다.
김호는 공략전 내내 일 초도 고민하지 않고 다음 장소, 또 다음 장소로 거침없이 나아간다.
마치 이런 것을 수십 수백 번은 해 본 것처럼 능숙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수십 수백 번 해 봤을 리가 없으니, 눈썰미가 엄청나게 좋거나, 그에 준하는 감지 계열 스킬을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홍연화가 머릿속으로 김호의 정보를 추가했다.
엄청난 마법 방어력, 극에 달한 권법, 그리고 매우 높은 수준의 감지 능력.
"...."
그러던 와중 또 김호가 제자리에 정지했다.
홍연화가 따라 정지해서 전방을 살펴보니, 깊게 파인 웅덩이 같은 지형이 그들 앞에 자리했다.
이 대수림의 지형이 불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편이기는 했는데, 저건 유난히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누가 봐도 수상할 정도로.
김호가 손을 가볍게 휘젓자,
- 퍼서석,
과연 웅덩이 한쪽의 흙이 무너져 내리며 토굴 입구가 드러났다.
홍연화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저게 보였다고?'
내려가서 자세히 살펴볼 만하다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단번에 찾아낼 줄은.
당황스러움을 뒤로하고 홍연화 역시 토굴을 관찰했다.
크기는 고블린들에 맞춰져 있어, 사람이 들어가려면 불편하게 몸을 웅크려야 할 것 같았다.
그때, 김호가 입을 열었다.
"확인해 봐라."
"...내가?"
"싫은가?"
김호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홍연화가 본능적인 위기를 느끼고 재빨리 답했다.
"가, 가면 될 거 아냐. 가면...."
그리고 툴툴거리면서 토굴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사실 '확인해 보라'는 말은 저 안으로 화염 마법을 써 보라는 뜻이었으나, 홍연화로서는 그 사실을 알아챌 도리가 없었다.
그녀가 들어가고 잠시 후,
- 펑! 퍼펑!
[남은 몬스터 수:35]
안쪽에서 폭발음이 몇 번 울리고 몬스터 숫자가 제법 많이 줄어들었다.
뒤이어 자욱한 연기와 함께 홍연화가 토굴에서 기어 나왔다.
온몸이 흙투성이로 지저분하고, 불쾌한 심정을 대변하듯 오만상을 쓰고 있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되는데!'
그러나 김호와 시선이 마주치자 재빨리 표정 관리를 했다.
'...생각해 보니 이런 짓 좀 할 수도 있는 것 같아.'
여태 저 남자 덕분에 편하게 갔으니까.
빠르게 합리화를 마친다.
"...."
김호는 그런 홍연화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말없이 다음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홍연화가 황급히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 * *
[남은 몬스터 수:2]
폭풍처럼 몰아치던 공략전도 어느덧 끝이 보인다.
마지막 두 마리는 힘들게 찾지 않아도 될 듯했다.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트롤.
성인 남성보다 조금 더 체구가 우람한 중형 몬스터다.
재생력이 높고 나름의 마법 저항력까지 갖춰서 마법사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편이다.
그런 트롤이 두 마리.
심지어 이놈들은 한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게 보스 몬스터 분위기를 풀풀 풍겼다.
한 놈은 큼지막한 곤봉, 다른 놈은 쌍도끼를 들었다.
홍연화가 김호에게 조심스레 어떻게 할지 묻는 눈빛을 보냈다.
김호가 그 눈빛을 몇 초간 마주 보더니 짤막하게 답했다.
"싸워 봐라."
"...나 혼자?"
"...."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홍연화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조금이라도 기대한 내가 바보지.
저 남자가 친절하게 합을 맞춰 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홍연화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곧 그녀의 주변이 서서히 열기로 달아올랐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속 트롤들이 흔들거렸다.
'나 혼자서도 충분해.'
61화 4주 차 공략전 (3)
자신 있게 나섰지만 보스급 트롤 두 마리가 그리 녹록한 상대는 아니었다.
최소한의 계획은 세워 두고 들이받아야 한다.
지금 같은 2 대 2, 사실상 2 대 1 구도에서는 원거리에서 야금야금 깎아 먹는 방식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다만 저놈들의 저항력과 재생력을 고려했을 때 그 방식은 하루 종일 걸릴 가능성이 크다.
단기간에 대미지를 누적시켜 쓰러뜨려야 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근접전.'
일반적인 마법사는 감히 떠올릴 수 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름 올라운더형 캐스터를 지향하는바.
미숙하나마 근접전 스킬도 배워 둔 게 있었다.
완드에 박힌 루비가 번쩍 붉은빛을 발하고.
[오버히트]
홍연화의 온몸에서 옅은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드를 들어 트롤 한 놈을 척 가리키는 것이 개전 신호가 되었다.
"크아아아!"
트롤 두 마리가 그녀를 노리고 돌진해 왔다.
홍연화는 똑바로 마주 걸으며 완드를 들지 않은 손에 빠르게 주문을 조립했다.
- 부웅!
휘둘러 오는 곤봉을 슬쩍 몸을 기울여 피하고, 곧장 물러나 마구잡이로 허공을 찍어 대는 쌍도끼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마법사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민첩한 움직임.
화염 계열 육체 강화 스킬, [오버히트]의 효과였다.
회피를 하면서도 계속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근접 공격이 닿을락 말락 한, 그러나 마법을 던지면 곧바로 직격할 만한 거리를.
곧 홍연화의 손에 사람 머리통만 한 화염구가 들렸고,
[플레임 오브]
- 펑!
트롤의 상반신이 불길에 휩싸였다.
놈은 뜨겁지도 않은지 아랑곳하지 않고 둔기를 휘둘렀다.
그것을 피해 조금 거리를 벌리고 살펴보니, 아직 잔불이 타오르는 상반신에 옅은 화상 자국이 남았다.
동시에 도끼를 든 놈의 육체에도 똑같은 화상 자국이 새겨졌다.
홍연화가 인상을 구겼다.
'라이프링크? 진짜 던전 꼬라지 하곤....'
[라이프링크]. 생명 공유 마법.
한쪽이 피해를 받으면 연결된 두 개체가 그 피해를 나눠 받는다.
100의 피해를 받으면 50씩.
안 그래도 마법 저항력 때문에 대미지가 90, 80으로 깎여서 들어가는데, 그것마저 절반으로 나뉘는 셈.
이렇게 나눠 받은 피해는 트롤 특유의 높은 재생력으로 금세 회복해 버린다.
'그렇게 만점 주기가 싫었나?'
마지막 두 마리에 저런 치사한 짓을 해 놓다니.
누가 이 인공 던전을 설계했는지는 몰라도, 정말 마음씨가 옹졸하고, 치사빤쓰하고, 말미잘—
- 부웅!
또다시 곤봉이 날아왔기에 홍연화의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훌쩍 물러나며 두 번째 플레임 오브를 시전한다.
'아직 할 만해.'
방금 대미지가 영 시원치 않았던 이유는 트롤들에게 걸린 [라이프링크] 탓도 있었지만, 화염구의 크기가 작아서이기도 했다.
시전 시간을 줄이기 위해 작게 만든 것은 좋았지만 위력도 함께 줄어든 것이다.
그럼 이번에는 크게 만들면 되지.
- 퍼엉!
한층 커다란 폭발이 곤봉 트롤의 상반신을 집어삼켰다.
대미지가 얼마나 들어갔는지 확인하고자 한다면, 한창 불타는 중인 곤봉 트롤 대신 쌍도끼 쪽을 보면 된다.
피해를 공유하니까.
화상 자국이 빠르게 번져 나가는 걸 보니 이번에는 유의미한 피해를 준 것 같다.
"크아아아!"
그럼에도 놈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건지, 아니면 고통을 고스란히 분노로 바꿔 싸우는 건지, 온몸이 불타는 와중에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불붙은 몽둥이가 휘둘러졌다.
그것을 피하는 찰나,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파공성을 그리며 빠르게 가까워져 왔다
- 휘리리릭!
"!"
확인보다는 당장 피하는 게 급선무였다.
홍연화가 급히 몸을 옆으로 기울이자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져 흩날렸다.
쌍도끼 트롤이 도끼를 하나밖에 안 든 것을 보고서야 방금 지나간 것이 손도끼였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크아아아!"
도끼 트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펄쩍 뛰어 하나 남은 도끼를 내려찍었다.
그에 보조를 맞추듯 몽둥이 트롤이 자세를 낮추며 바닥을 쓸었다.
상반신과 하반신을 동시에 노리는 연계 공격.
몬스터답지 않게 합이 잘 맞았다.
홍연화가 정신을 바짝 집중했다.
바닥을 가볍게 걷어차 허공으로 떠오르자 발아래에 몽둥이가 스쳐 가고,
착지하는 즉시 또 바닥을 걷어차 도끼질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리고 그사이에 완성한 플레임 오브를 집어 던진다.
- 퍼엉!
계속해서 누적되는 피해.
또 아무렇지 않게 연계 공격을 이어 가는 트롤들.
"!?"
홍연화는 위화감을 느끼고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리고 짧은 찰나 냉정한 눈으로 위화감의 정체를 파악했다.
'패턴을 반대로 바꿨어.'
몽둥이가 상반신으로 휘둘러지고, 도끼가 하체를 노린 것이다.
방금 전과 똑같이 대응했다면 뛰어올랐다가 몽둥이에 얻어맞아 크게 낭패를 볼 뻔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 휘리리릭!
등 뒤에서 파공성이 가까워져 온다.
'이게 무슨?'
황급히 몸을 옆으로 날리자 손도끼가 그 자리를 스쳐 지나가 도끼 트롤의 손에 척 잡힌다.
부메랑처럼 먼 거리를 한 바퀴 선회하고 돌아온 것이다.
[회수] 계열 마법이 걸린 투척 무기.
홍연화는 어이가 없어졌다.
'저건 반칙 아니야?'
무슨 인공 던전 보스가 [라이프링크]에 마법 아이템까지 들고 있어?
이건 정도가 지나치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오히려 오기가 생긴 홍연화였다.
'누가 이기나 보자.'
"크아아!"
짧은 시간 소강상태에 놓였던 전투는 쌍도끼 트롤이 도끼 하나를 투척하며 재개되었다.
연계 공격 자체는 계속 똑같은 방식이었다.
한 놈이 위쪽, 다른 놈이 아래.
다만 몽둥이가 불규칙적으로 위쪽을 노렸다 아래를 노렸다 하는 게 몹시 헷갈렸다.
그걸로도 모자라 중간중간 앞뒤로 날아드는 손도끼까지 피하려니, 홍연화의 손발이 급격히 어지러워졌다.
좀처럼 마법을 끼워 넣을 틈이 나지 않는 상황.
이렇게 놔두면 기껏 쌓아 놓은 대미지마저 회복해 버린다.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제일 거슬리는 건 부메랑같이 날아다니는 손도끼지만, 그걸 무력화하기는 어려워 보이고.
'...몽둥이.'
그렇다면 저 몽둥이부터 파괴하고 보자.
홍연화가 일순간 정신을 집중하여 스킬을 사용하자, 한쪽 손이 손목까지 빨갛게 달구어졌다.
휘둘러지는 몽둥이를 피하고, 회수되는 순간을 노려 강하게 움켜쥐었다.
[피닉스 그립]
- 콰드드득!
몽둥이의 중간 부분이 으스러지면서 장작으로 화했다.
트롤은 반 토막 난 몽둥이를 집어 던지더니 아예 두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뿐만 아니라,
- 휘리리릭!
뒤쪽에서 손도끼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홍연화가 피할 준비를 하는데,
- 휘리릭!
앞쪽에서도 희끄무레한 것이 빠르게 가까워져 온다.
도끼 트롤을 확인해 보니 완전 빈손이다.
홍연화는 새삼 간단한 이치를 깨달았다.
'아, 그렇네.'
손도끼 하나를 던질 수 있으면 두 개도 동시에 던질 수 있는 거지.
이건 못 피하겠는데....
짧은 찰나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맞으면 바로 리타이어인가?
머리에 손도끼가 꽂히는 건 어떤 느낌일까?
곧 알게 되겠지.
홍연화가 몸을 움츠리고 눈을 질끈 감은 순간,
- 텅! 텅—!
머리 근처에서 생소한 충돌음이 울렸다.
천천히 눈을 떠 보니 언제 왔는지 김호가 앞에 서 있고, 자신에게 날아들던 손도끼는 저만치 튕겨 난 상태.
"...!"
홍연화의 머릿속이 더 뒤죽박죽 뒤엉켰다.
그중 두어 개를 꼽자면 '여태 뭐 하다 이제 도와주나?'와 '그래도 도와주긴 하는구나!' 정도.
"크아아아!"
트롤이 저돌적으로 두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김호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놈을 맞이했다.
그러다 한 걸음 내디디며 놈의 어깨 어림에 손을 얹었고,
- 텅—!
우람한 몸뚱이가 휘청거리며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김호가 곁눈으로 시선을 보내자 홍연화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꼿꼿하게 세웠다.
김호의 입이 열렸다.
"포대(砲臺)를 서라."
"포, 포대? 무슨 마법?"
"파이어 필라."
일정 구역 내에 불기둥을 피워올리는 마법.
김호와의 배치 고사에서도 승부수로 꺼냈었는데, 그러고도 1%의 체력조차 못 깎은 아픈 기억이 있었다.
위력 하나는 압도적인 대신 단점 역시 명확한 마법이다.
적이 범위를 벗어나면 무용지물이라는 것.
해서 이 마법을 쓴다면 가장 먼저 '어떻게 적들을 묶어 둘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홍연화는 어쩐지 그 질문이 쓸데없이 느껴졌다.
해서 군말 없이 자리를 잡고 주문을 영창했다.
지면에 복잡한 문자들이 새겨지며 둥그런 원 모양 마법진이 완성되어 갔다.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는지 트롤들이 마법진의 범위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 터엉—!
김호가 그 주변을 겉돌며 놈들을 가로막고 안으로 밀쳐 넣었다.
손동작은 툭툭 가볍게 건드리는 것 같은데, 닿을 때마다 속절없이 밀려나기 바쁘다.
"크아아아!"
도끼 트롤이 손도끼를 집어 던졌다.
그러나 김호가 철봉 비슷한 것으로 툭 건드리자 괴이한 충돌음이 울리고 바닥에 꽂혔다.
주인에게 되돌아가려는 듯 부르르 떨리는 것을 그의 발이 지그시 밟는다.
- 휘리리릭!
뒤이어 두 번째 손도끼가 날아왔다.
김호는 가볍게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아채고 도로 집어 던졌다.
무서운 속도로 되돌아가 주인의 어깨에 콱 틀어박히는 손도끼.
"??? ?????"
그 광경을 보고 홍연화의 눈이 부릅떠졌다.
하마터면 잘 시전하던 마법이 취소될 뻔했으나,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해 그것만은 막았다.
'그, 그냥, 생각하지 말자....'
홍연화는 일단 방금 본 것을 머리에서 지우기로 했다.
지금은 맡은 역할을 완수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파이어 필라부터 다 만들고 보는 걸로.
눈앞의 사내가 트롤 두 마리를 어린애 갖고 놀 듯하며 원 안에 붙잡아 놓다 보니, 마법진이 선명한 붉은 빛을 발하며 완성되었음을 알렸다.
김호는 마지막까지 날뛰는 트롤을 뻥 걷어차서 안쪽으로 밀어 넣고, 가볍게 뒤로 도약했다.
다음 순간 불기둥이 맹렬하게 피어오르며 놈들을 삼켜 버렸다.
- 콰아아아아!
두 사람이 잠시 불구경을 하고 있자니 결과가 나왔다.
[남은 몬스터 수:0]
[완성도:100% = 800점]
+[클리어 보너스:200점]
—————
[총 점수:1,000점] * 0.8배율
= 800 pt
이번 주 공략전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 점수였다.
이제 서로 갈 길을 가면 되지만,
"그, 저기."
"...."
홍연화는 아직 용건이 남았다.
김호를 마주 보며 한참이나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연다.
"저, 그으.... 리플레이 좀 비공개로 해 주면 안되...냐?"
이번 공략전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여러모로 허둥지둥거리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김호 앞이라 많이 당황한 탓이다.
토굴에 기어 들어간 것이 대표적인 예시였다.
김호는 '확인해 보라'고 했었는데, 문득 다시 생각해 보니 굳이 기어 들어갈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냥 안쪽에 화염 마법을 쏟아부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것 말고도 그녀가 밤에 이불을 걷어차게 만들 흑역사들이 가득했으니....
사람들이 봐서 하등 이로울 게 없는 리플레이였다.
문제는 김호가 포인트를 포기할 만한 메리트가 딱히 없다는 점이다.
균형을 맞추려면 뭐라도 주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 홍연화가 인벤토리에서 루비 한 알을 꺼냈다.
"대신 이거...."
"필요 없어."
김호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콩알만 한 루비 갖고는 턱도 없다는 뜻인가?
홍연화가 재빨리 인벤토리에서 다른 루비를 꺼내서 건넸다.
이전 것보다 몇 배는 더 큰 놈으로.
"...."
김호가 그것을 받아 들어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침묵만 돌아오자 홍연화가 연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걸로도 안 되나? 하씨, 더 없는데.'
방금 건넨 루비가 지금 그녀가 보유한 아이템 중에는 최고로 값진 것이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김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수고 많았다."
그리고 그대로 던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
홍연화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마지막 말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수고 많았다고?"
...칭찬받았어?
62화 No.388 깃털뱀 제단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