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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No.388 깃털뱀 제단 (1)

'뭐 이런 걸 주냐.'

큼지막한 루비가 내 손 위에서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루비 마탑의 고유한 마력이 깃든 정수.

거래를 한다면 무조건 금화 단위고, 아이템의 제작이나 업그레이드에 써도 높은 등급이 보장된다.

고작 리플레이를 비공개로 돌려 주는 대가로는 과한 감이 있었다.

기실 비공개 정도는 같은 팀원끼리 도의적인 측면에서 그냥 해 줄 수도 있고, 뭘 주더라도 가볍게 간식이나 커피 정도로 해결을 보는 편이다.

해서 홍연화가 루비를 내밀었을 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다고.

그랬더니 훨씬 더 큰 루비가 튀어나온다.

또 거절했다간 다음에는 뭐가 나올지 몰라서 일단은 받았지만, 마냥 횡재했다고 좋아할 건 아니다.

이건 그냥 낼름 집어삼키면 체할 가능성이 높다.

'나중에 루비 쪽에 가져가 보고,'

그쪽 부장과 이야기를 나눠 보고 결정하는 게 좋겠다.

어차피 루비 마탑에도 찾아가 볼 일이 있을 테니.

루비를 가져가는데 손님 대접 정도는 해 주지 않을까.

문득 시간을 확인해 보니 던전동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빨리 끝나긴 했네.'

분명 이번 소탕 공략전의 취지는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꼼꼼히 살피며 관찰력을 길러 보라는 것이었을 텐데,

나와 홍연화 듀오는 무슨 타임 어택 하듯이 던전을 순식간에 주파해 버렸다.

'홍연화가 잘해 줬어.'

낭비를 줄이기 위해 극도로 효율적인 동선을 짜서 움직인 결과라 하겠지만, 홍연화가 그 동선을 잘 따라와 주어서 더욱 수월했다.

내가 금방금방 몬스터를 찾아내더라도, 처치하는 데 오래 걸리거나 놓치기라도 하면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다.

반면 홍연화는 몇 마리가 튀어나오건 순식간에 불살라 버리는 시원시원함을 보였다.

'보스 상대로도 괜찮게 싸웠고.'

쌍둥이 트롤을 상대로도 제법 분전했다.

사실 이 쌍둥이는 무작위로 정해지는 여러 보스 중에서도 뽑기운이 정말 나쁘면 나오는 놈들로, [강적] 딱지가 붙은 참수자 고블린보다 강하다.

그걸 혼자서 상대하면서 30%가량 체력을 깎았으니, 얘도 유망주 이름값은 하는구나 싶었다.

막바지 즈음에는 힘에 부치는 것 같아서 내가 가세했지만, 그때까지 필요한 만큼은 봤다.

복사할 만한 스킬을 정할 때까지는.

▷복사-스킬[2/2]

1. 오버히트(D)

2. 도둑걸음(B)

오버히트.

완성된 화염 스킬 하나를 흡수하고, 지속시간 동안 흡수한 스킬의 위력에 준하는 육체 능력을 얻는 스킬이다.

작은 화염 폭발을 일으키는 [컴버스천]보다는, 큼지막한 화염구를 만드는 [플레임 오브]를 흡수했을 때 능력치가 더 많이 증가한다는 뜻.

나에게 화염 계열 스킬은 단 하나뿐이다.

대신 아주 무지막지한 놈으로.

'인페르노 피스트.'

위력이 위력이라 흡수할 시 육체 능력도 대폭 증가하리라 예상한다.

인페르노 피스트는 금지 스킬인 만큼 상황을 많이 봐가면서 써야 하는데, 이제 리플레이가 돌아가는 중에도 오버히트 제물로는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증가한 육체 능력과 B랭크 도둑걸음, 그리고 서예인에게 받은 신발까지 더해지면....

'3학년과도 술래잡기 정도는 가능하겠지.'

기동성에서는 당분간 눈을 돌려도 무방할 것이다.

[서브 퀘스트:4주 차 공략전](완료)

▷목표:공략전 던전 클리어

▷완성도 100/100%

▷보상:[복사-특성] 슬롯+1

복사-특성[1/2]

1. 원소 저항(S)

2. (없음)

100% 소탕 보상은 [복사-특성] 슬롯 추가.

이제 [원소 저항]을 덮어씌우지 않고도 새로운 특성을 복사할 수 있게 되었다.

특성은 스킬과는 달리 발동하는 전조가 눈에 잘 띄지 않아서, 보유 여부를 파악하기가 더 까다로운 편이다.

랭크를 가늠하는 건 더 까다롭고.

EX급 환생 퀘스트의 여파로 등장인물들이 모두 교체된 지금, 다른 학생이나 교직원들의 특성을 알아내려면 다소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러니 이건 조금 미뤄 두고, 확실하게 내가 알고 있는 대상을 노린다.

지하층 던전에 자리하고 있을 보스 몬스터들을.

* * *

"김 형."

저녁.

약속 시각에 맞춰 던전동으로 향하는 길, 고현우를 마주쳤다.

나란히 걸으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공략 다 외웠냐."

"물론이오. 지시한 대로 토씨 하나 빼먹지 않았다오."

"똑같이 따라 할수록 좋고, 실수로 몇 개 틀리는 것까진 괜찮아. 너무 헤매지만 마라."

"결코 김 형이 실망하지 않도록 하겠소."

"믿는다."

던전동 입구에 다다르니, 기다리던 신병철이 우리를 보고 씩 웃으며 반겼다.

"왔구만. 준비들 되셨나?"

"그럼."

"좋아요, 좋아. 우선 이것들 받으시고."

신병철이 준비해 온 물건들을 하나씩 건넸다.

하나는 넥타이에 꽂는 은색 핀.

2학년 핀이다.

현시점에서 1학년은 지하로 내려갈 수조차 없는데, 넥타이핀이 흰색이다?

그 자리에서 선도부실행이다.

그런 불상사를 피하려면 2학년 핀으로 교체할 필요가 있다.

넥타이핀 교체는 교칙 위반이며 잡히면 가중 처벌을 받지만, 안 잡히면 그만 아니겠는가.

두 번째 아이템은 사람 얼굴 모양의 뱃지였는데, 이목구비 대신 한가운데에 큼지막한 물음표가 그려져 있었다.

[아무개 뱃지]

뱃지를 앞주머니에 달고 다른 녀석들을 돌아보았다.

고현우도 나와 신병철을 번갈아 보고 감탄사를 흘린다.

"오, 이래서 아무개로군."

두 사람의 얼굴이 흐릿한 것 같기도 하고, 스쳐 지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엉뚱한 사람의 얼굴 같기도 하다.

일종의 인식 방해 마법이 걸린 아이템으로, 사람 얼굴을 최대한 평범하게 보이도록 만들어 준다.

다만 마나를 눈에 집중하면 부자연스러운 흐름이 눈에 확 띄는 데다, 예리한 사람은 금방 위화감을 눈치채기도 한다.

여러모로 허술한 아이템이다.

그래도 대부분 사람에게는 그냥 평범한 얼굴로 보이니 그냥 지나치게 되고 얼굴도 기억에 안 남는다.

위와 합쳐서 허술하지만 의외로 잘 통하는 아이템이다.

그리고 이 아무개 뱃지 역시 불순한 의도로 많이 쓰이다 보니, 소지 금지 아이템 리스트에 올라 있다.

종합하면 던전동 지하층 무단출입, 학년별 핀 교체, 소지 금지 아이템 착용까지, 교칙 위반 항목이 벌써 3개다.

학생이 이렇게 교칙을 줄줄이 어겨도 되냐고?

'다 세계 평화를 위해서다.'

교칙을 안 어기면 히든 피스를 못 얻고,

히든 피스를 못 얻으면 성장이 늦어지고,

성장이 늦으면 추후 만날 강적들에게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세계가 멸망한다.

EX급 퀘스트가 그렇다니까 아마 맞을 거다.

신병철은 자신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자각이 없는 듯, 비열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자, 그럼 내려가 보실까?"

"그럽시다."

우리는 신병철의 안내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처음에는 지하실 계단 같던 것이, 점차 폭이 넓어지며 커다란 원형 계단으로 바뀌었다.

난간 너머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원형 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불이 제법 환하게 밝혀져 있음에도 저 깊은 아래는 어두컴컴하게 보일 정도.

한참이나 원형 계단을 밟으며 내려가다 보니 분기점이 나왔다.

이대로 계속 내려가거나, 오른쪽 통로를 통해 벗어나거나.

앞장서는 신병철이 손짓한다.

"오른쪽."

오른쪽으로 조금 가니 또 내려가는 계단.

처음 내려가던 원형 계단에 비교하면 다소 폭이 좁지만, 아래로 향한다는 점은 같다.

그렇게 한참 내려가면 다시 분기점.

두 갈래 길도 있고 세 갈래 길도 있고.

그럴 때마다 신병철은 가이드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이쪽."

"거기 말고."

"이쪽으로."

다만 일부러 외진 곳만 골라서 가는 느낌이라, 궁금증이 동했는지 고현우가 물었다.

"신 형, 하나 물어봐도 괜찮소?"

"엉, 물어보셔."

"그냥 내려가는 것과 신 형처럼 가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거요?"

그냥 처음 밟았던 원형 계단만 타고 내려가면 넓고 쾌적한데, 굳이 복잡하게 미로를 만들면서 갈 필요가 있냐는 뜻이다.

다 이유가 있다며 신병철이 답했다.

"솔직히 우리가 떳떳하지는 않잖냐. 최대한 피해 다녀야지."

당연한 얘기지만 지하층을 배회하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다.

공략전을 하는 2, 3학년은 기본이요, 선도부나 교직원들도 주기적으로 순찰을 돈다.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루트일수록 위험도가 증가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최대한 인적이 뜸한 길만 고르고 골라 내려가는 것이다.

신병철이 엄지로 본인을 척 가리키며 호언장담했다.

"걱정하지 말고 이 신병철만 믿고 따라오라! 쥐새끼 하나 마주치지 않게 해 드리지."

그러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5분도 안 돼서, 신병철이 움찔하곤 우리에게 신호를 보냈다.

다급하게 입 모양으로 이렇게 말한다.

'자연스럽게 지나가자. 자연스럽게.'

곧 아래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며 2학년 한 파티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일렬로 서서 한쪽으로 붙었고, 상대방도 반대쪽으로 붙었다.

"...."

"...."

스쳐 지나가는 순간 두어 명의 눈동자가 우리 쪽을 향했다.

마치 '우리 학년에 저런 애가 있었나?'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나 더 깊게 알아볼 필요까지는 못 느끼는지 곧 시선을 돌려 버렸다.

막 던전 공략을 끝낸 참이라 피곤하고 만사가 귀찮겠지.

우리 입장에서는 다행이다.

2학년들이 위쪽으로 사라지고,

고현우와 내가 말없이 신병철을 바라보았다.

쥐새끼 하나 마주치지 않게 해 준다며?

신병철이 즉시 변명한다.

"...방금은 운이 없었다. 나 믿지?"

"...."

고현우는 격려의 말을 건네기보다는 빠르게 화제를 전환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얼마나 왔소?"

"번호로 치면 700번대일걸."

"700번대라 하면?"

"F급. D급은 한참 더 내려가야 돼."

고현우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허어. 던전동이 광활하다고는 익히 들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소. D급까지 가는 데에만 이토록 오래 걸린다면 심층부라는 곳은 얼마나 더 내려가야 할지...."

"괜히 심층부가 아니거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일단 갑시다."

사실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느낌이 드는 건 우리가 지하층에 몰래 내려온 탓이 컸다.

걷는 게 귀찮거나 시간이 아까운 학생들을 배려하여, 지하층 곳곳에 승강기나 순간이동 마법진 등의 층간 이동 수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시설들을 이용하려면 기본적으로 학생증을 스캔해야 하고, 수정구가 설치되어 있어서 기록이 남는다.

조금 편하자고 기록을 남길 수는 없으니 보고도 무시하고 지나쳐야 했다.

가이드의 수준이 높으면 수정구를 속이는 것도 가능하겠으나, 유감스럽게도 신병철은 우리와 같은 1학년이었다.

결국 부지런히 뚜벅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 * *

목적지까지 가는 도중 2학년을 두 팀이나 더 마주쳤다.

시간대도 나름 사람이 적은 저녁 시간대를 골랐고, 최대한 인적이 뜸한 루트를 탔는데도 이렇다.

"하하.... 이거 좀 미안하네."

신병철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한 번쯤이야 운이 없다고 치부하고 넘길 수 있지만, 세 번이나 반복되면 그것도 염치가 없어진다.

하지만 나는 불평하지 않았다.

쟤도 겨우 한 번 내려와 봤다니까.

다 이러면서 경험을 쌓는 거다.

"안 잡혔으면 됐지. 다음부터 운전 잘해."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고객님. 이쪽으로 오시죠."

지긋지긋한 계단을 벗어나 개미굴 같은 통로 안쪽으로 들어섰다.

이곳저곳에 입을 벌리고 도전자를 기다리는 D급 던전들.

순간이동 포탈마다 생김새가 제각각이고, 안쪽에서 언뜻언뜻 비추는 풍경도 다 다르다.

[No.396] [대응표국]

[No.394] [제7실험실]

공통점이라면 인공 던전보다 몇 배는 흉흉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점.

우리는 그런 포탈들을 계속 지나치다가 한 곳에서 정지했다.

[No.388] [깃털뱀 제단]

"잠깐 기다려 봐."

입장하기에 앞서.

신병철이 인벤토리에서 몇몇 장치들을 꺼내더니 부산스레 돌아다니며 설치하기 시작했다.

일대를 감시하는 수정구를 잠시 교란시키고, 나중에 추적당할 여지를 안 남기기 위함이다.

이것 역시 도둑 동아리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일환이다.

빠르게 설치를 끝낸 신병철이 손을 탁탁 털었다.

"다 됐고. 얼마나 걸려?"

"금방 끝나."

"오라잇.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다."

거기까지 말하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난다.

나는 고현우와 시선을 교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례차례 포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시야가 급변했다.

63화 No.388 깃털뱀 제단 (2)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우중충한 하늘.

빽빽하게 초목이 우거진 열대우림.

그런 열대우림 사이로 보란 듯 길이 쭉 나 있다.

먼 저편에는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 눈에 띈다.

이번 던전의 핵심, 깃털뱀 제단이다.

다음 순서는 누가 보기에도 명료하다.

눈앞의 길을 따라 쭉 나아가면 목적지인 제단에 도달하겠지.

그러나 과연 그 길이 순탄할지는 의문이다.

- 쐐액!

가느다란 것 여러 개가 고현우와 나를 노리고 날아왔다.

슬쩍 옆으로 비켜서자, 우리를 지나쳐 뒤쪽 땅이며 나무에 푹푹 꽂힌다.

날카롭게 깎은 나무창이다.

뒤이어 풀숲에서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야만인들.

몸에 걸친 의복이 별로 없는 대신 붉고 흰 물감 같은 것을 덕지덕지 처발랐다.

"저러니까 좀 쎄 보이는데."

표정이 험상궂어서 더 그래 보이기도 하고.

역시 사람은 첫인상이 중요한 것 같다.

"제물이다!"

"산 채로 잡아라!"

- 쉬익!

산 채로 잡으라면서 무기를 쓰는데 거리낌이 없다.

야만인들 일부는 재차 투창을 하고, 일부는 나무창을 앞세워 돌진해 왔다.

나는 한 손을 가볍게 저었다.

[윈드포스]

물리력이 담긴 바람이 놈들의 진형을 한차례 강하게 헤집었다.

도미노처럼 와르르 쓰러지는 야만인들.

넘어지지 않은 놈들이 창을 찔러 오지만,

- 서걱!

고현우가 모두 순식간에 베어 넘겼다.

대충 정리를 하니 또 길을 따라 일단의 야만인 무리가 달려오는 게 보인다.

대화를 나눌 겨를도 없는 상황.

고현우가 나를 보고 고개를 까딱였다.

"건투를 빌겠소."

"너도."

그리고 달려 나가 야만인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철검이 번뜩일 때마다 피가 흩뿌려진다.

던전 공략을 숙지하게 하면서 미리 정해 놓은바,

지금부터는 각자 행동할 것이다.

고현우는 저대로 길을 따라 제단까지 전진하게 두고, 나는 길을 벗어나 방향도 제대로 모를 열대우림 안으로 진입했다.

미리 사 온 F급 정글도를 X자로 휙휙 휘두르며 수풀을 뚫고 나아간다.

깃털뱀 제단의 핵심 규칙은 [레이드].

대충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최대 인원인 4인 파티가 입장해서, 덮쳐 오는 야만인들을 뚫고 제단까지 도달한다.

제단에는 의식 준비가 한창이라, 더 많은 야만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놈들과 피 튀기는 사투를 벌이다 보면 마침내 보스 몬스터, 깃털뱀 제사장이 등장한다.

이때부터가 본격적인 레이드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의식을 저지함과 동시에, 제사장과 야만인들의 파상 공세를 막아 내야만 한다.

어떻게든 보스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하면 던전 클리어.

'정석적으로는 그렇고.'

당연한 얘기지만 정석적인 방식으로, 보이는 길만 따라가선 히든 피스는 꿈도 못 꾼다.

남들이 신경 쓰지 않는 곳을 열심히 파헤쳐야 뭐가 나오지.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 팍!

정글도로 강하게 후려치자 앞길을 가로막던 나뭇가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제법 트인 공간이 나왔다.

곳곳에 희미하게나마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남아 있다.

이 흔적들을 고스란히 거슬러 올라가면....

'이렇게 부락이 나오지.'

조잡하게 지은 오두막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락.

야만인들이 있으면 당연히 야만인들의 본거지도 있게 마련이다.

[깃털뱀 제단]은 워낙 노골적으로 나아갈 길과 목표를 보여 주는 편이라 놓치기 쉬운데, 이 사소한 맹점을 파악하느냐가 히든 피스의 획득 여부를 가르는 것이다.

부락 내에는 야만족의 숫자가 적었는데, 대부분이 제단 쪽으로 몰려서 그렇다.

모닥불을 피우던 놈들이 나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나는 일단 살갑게 손을 흔들었다.

"하하, 안녕들 하십니까. 식사는 하셨나요?"

"제물?"

"제물이 찾아왔다."

"산 채로 잡아라!"

- 쉬익!

그러면서 대뜸 죽창을 집어 던지신다.

그것도 정확히 내 가슴팍을 노리고.

사람은 심장이 날카로운 것에 꿰뚫리면 죽는데, 이래놓고 어떻게 산 채로 잡으려는지 모르겠다.

죽을 생각도 잡힐 생각도 없어서, 날아오는 창에 윈드포스를 집중시켰다.

창이 부르르 떨더니 급격히 속도를 잃고 내 손에 턱 잡혔다.

그것을 도로 집어 던지는 동시에 바람을 강하게 쏘아 보내자,

- 퍽!

원래 주인의 몸을 관통하고 나아가 그 뒤 야만인의 몸에 틀어박혔다.

이런 식으로 일점에 물리력을 집중시키면 투사체의 속도를 늦추거나 가속할 수도 있다.

근접 계열 클래스가 우월한 근력과 마나를 써서 던지는 것이나 원거리 계열의 고유한 투사체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보통 이상의 파괴력은 나와서 잘 써먹는 중이다.

홍연화와 공략전을 할 때는 이 방법으로 트롤의 손도끼를 받아치기도 했었다.

"강한 제물!"

"무조건 잡아야 된다!"

"산 채로 잡아라!"

동료 두 명이 쓰러졌는데 야만인들은 오히려 더욱 흥분한 기색이었다.

눈빛에서 복수심보다는 제물에 대한 맹목적인 갈망이 엿보인다.

그래도 뭐 물어보면 답변은 해 주지 않을까?

해서 넌지시 물었으나,

"족장님 안에 계신가요?"

"죽어라!!"

대답 대신 장창이 찔러 들었다.

방금은 산 채로 잡으라면서요.

그새 생각이 바뀌었나.

아무튼 이런 곳에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가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날카롭고 뾰족한 것들이 간발의 차로 스쳐 지나간다.

앞길을 가로막는 놈들은 윈드포스로 멀찍이 튕겨 내고, 손에 잡히는 건 사람 팔이든 목덜미든 족족 위로 집어 던진다.

"으아아—"

비명 소리가 하늘 높은 곳으로 멀어져 간다.

착지는 알아서들 잘할 거라 생각한다. 아님 말고.

인간의 벽을 불도저처럼 뚫으며 전진한다.

야만인 족장, 제사장을 찾으려고 이곳저곳 헤집고 돌아다닐 필요는 없었다.

그냥 부락 내에서 제일 큰 오두막으로 가면 된다.

상식적으로 제사장이란 양반이 조촐하게 부락 한구석에 거처를 마련했을 리는 없으니 말이다.

- 펑!

그때까지도 달려드는 야만인들을 가볍게 날려 보내고,

입구에 쳐진 주렴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윽한 향냄새가 나를 반겼다.

한켠에 마련된 간이 제단에서 피어오르는 듯했다.

그 앞에는 제사장으로 추정되는 중년 사내가 무릎을 꿇은 채였다.

제사장이라 그런지 온몸에 깃털 장식이 치렁치렁하고 얼굴 분장도 더 짙다.

"...."

인기척을 느낀 제사장이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나를 발견했다.

품평하듯 찬찬히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한다.

"...보기 드물게 강한 기운을 품은 놈이로다. 좋은 제물이 되겠구나."

"거 보는 놈들마다 제물 얘기밖에 안 하네. 다른 주제는 없소?"

"기르는 가축에게 긴말해서 무엇 하겠느냐. 어차피 결국에는 배를 가를 운명인 것을."

"그건 맞지."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사장이 매우 자비로운 어조로 제안했다.

"순순히 잡힌다면 고통스러운 순간도 짧아질 것이다."

"저는 잡히는 것도 아픈 것도 싫은데요."

"그건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해 보고 싶거든요."

"그러려무나."

제사장이 인자하게 웃었다.

야만인 몇 명이 따라 들어와서 내 배후를 점했고,

"잡아라."

일제히 나에게 손을 뻗어 왔다.

나는 가장 가까운 놈의 인중을 후려친 다음, 목덜미를 움켜잡고 제사장에게 집어 던졌다.

제사장 주변의 반투명한 막에 충돌하고 벽에 처박힌다.

- 텅!

'D급 배리어.'

연달아 네다섯 명을 더 집어 던졌으나 별 의미가 없는 건 마찬가지.

물론 내 노림수는 배리어를 뚫는 게 아니었다.

나가는 길을 막는 놈들을 치우는 거지.

인파 사이에 생긴 약간의 틈을 비집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 얄밉게 한마디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 잡아 봐라."

- 콰쾅!

금빛 기운이 방금까지 내가 지나간 자리를 짓이겼다.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밖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제사장이 제 거처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덧붙여 부락 내의 모든 야만인이 주변을 둥글게 포위하는 상태.

날아드는 금빛 기운과 투창을 피하며 생각했다.

'최소 조건은 클리어했고.'

[깃털뱀 제단]의 히든 피스를 얻기 위해 달성해야 하는 최소 전제조건.

바로 제사장을 부락에 묶어 두는 것이다.

제사장이 제단에 도달하는 순간 잠자고 있던 히든 피스가 저절로 제사장에게 귀속되기 때문이다.

고현우가 완전히 소유권을 가져오기 전까지는 분리해 놓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굳이 숲을 뒤져 가며 부락까지 찾아온 거고.

여태까지는 전부 계획대로 돌아가는 중이다.

- 쾅!

땅을 걷어차며 물러나자 또 황금색 빛 뭉텅이가 떨어져 내렸다.

나를 추격하던 야만인 몇 명이 대신 얻어맞고 온몸이 찌그러졌다.

저건 원소 공격이 아니라서 한 대라도 맞으면 골로 간다.

하지만 크게 걱정은 안 한다.

'안 맞으면 되지.'

피하는 것 하나는 자신 있으니까.

[인페르노 피스트]

주먹이 검붉은 불꽃으로 달구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시원하게 내지르고 싶지만, 힘 조절을 잘못해서 제사장이 죽어 버리면 고현우가 히든 피스를 얻기 전에 던전이 닫혀 버린다.

당분간은 살려 둬야 하니 참는다.

내가 인페르노 피스트를 시전한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오버히트]

주먹에 깃든 막대한 힘이 온몸으로 퍼지며 에너지를 공급했다.

날아드는 금빛 기운을 피하며 앞으로 돌진했다.

- 팟! 팟!

바닥을 박찰 때마다 시야가 휙휙 변하고 제사장의 모습이 가까워졌다.

제사장이 눈을 부릅뜨고 방어 주문을 외우려는 찰나.

내 손이 앞으로 쭉 뻗어졌다.

손은 투명한 막을 단숨에 깨뜨리며 제사장의 가슴팍에 닿았다.

- 펑—!

제사장의 신형이 거처 안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안쪽에서 와장창하고 집기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쓸만하네.'

나는 조금 얼얼해진 손을 털었다.

오버히트로 강화한 육체에 윈드포스를 담아서 후려쳐 봤는데, D급 배리어 정도는 어렵지 않게 박살 내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명색이 보스급이라 본체에는 별 피해가 없을 거다.

안쪽에다 대고 말했다.

"거, 방어에도 신경 좀 쓰고 그러세요. 너무 허술한 거 아닐까 싶네—"

즉시 고개를 옆으로 젖히자 선명한 황금빛 막대기가 지나갔다.

안쪽에서 거대한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요. 화가 많이 나셨네."

"...곱게 죽이진 않을 것이다."

- 콰콰쾅!

이제 황금빛 뭉텅이가 두 개, 세 개씩 떨어져 내린다.

이것 역시 의도대로였다.

깃털뱀 제사장의 최우선 순위는 '의식'을 진행하는 것.

어설프게 어그로를 끌면 전투 도중에 떠나 버리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려면?

잔뜩 화를 돋워 놓으면 된다.

- 콰콰콰쾅!

물론 그만큼 피하는 난이도가 어려워진다는 단점이 존재하지만 말이다.

나는 열심히 발을 놀리면서 흘긋 뒤쪽 먼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우뚝 솟은 깃털뱀 제단에서 지금쯤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잘해라, 고현우.'

나머지는 너 하기에 달렸단다.

64화 No.388 깃털뱀 제단 (3)

- 서걱!

피육음과 함께 야만족의 몸이 허물어졌다.

이놈이 마지막이었다.

고현우는 조금 금이 간 철검을 바닥에 푹 꽂았다.

머지않아 부러질 듯하니, 전투 중에 부러지게 놔두는 것보다 지금 보내 주는 게 나으리라.

인벤토리에서 새 철검을 꺼내 들고, 길을 따라 마저 이동하기 시작했다.

"...."

빠르게 걷던 고현우가 우측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를 눈에 담았다.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짙은 어둠뿐이었으나, 그는 알고 있었다.

'매복이라.'

공략본에 다 적혀 있었으니까.

적들이 선공을 가하도록 기다려 줄 이유가 없었다.

고현우가 바위 쪽으로 몸을 날리자, 숨어 있던 야만족들이 깜짝 놀라 모습을 드러냈다.

"들켰다!"

"죽여라!"

투창들이 날아들었다.

고현우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침착하게 대응했다.

철검을 부드럽게 긋자 그를 향해 쇄도하던 투창들이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고, 다음으로 야만인들의 목이 떨어졌다.

- 서걱!

고현우의 검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을 산 제물로 바치는 놈들에게 자비는 사치스러운 것이다.

유혈이 낭자한 풍경 속에서도 고현우의 표정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즉시 다음 장소로 몸을 날린다.

'낭비할 시간이 없다.'

지금쯤 김호는 목숨을 걸고 보스 몬스터와 일대일로 겨루는 중일 터.

자신이 히든 피스를 얻을 수 있도록 가장 어려운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가.

최대한 신속하게, 그리고 최대한 정확하게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깃털뱀 제단] 공략본을 모두 숙지하고 던전에 들어와서 깨달은 사실은, 실제로는 생각처럼 복잡하지 않다는 것이다.

몇 개 틀리더라도 무리 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듯했다.

아마 첫 지하 던전임을 감안해서 단순하고 쉬운 걸 내줬겠지.

그러나 고현우는 어중간하게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수행한다.'

그리하여 증명할 것이다.

이보다 더욱 위험천만한 심층부 던전에서도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다는 사실을.

고현우의 상념이 끊김과 동시에 길이 끝나며 꽤 넓은 공간이 나왔다.

깃털뱀 제단은 멀리서도 뚜렷하게 들어올 정도였는데, 눈앞에서 보니 더욱 웅장했다.

시야 한쪽이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다.

제단 앞에서는 의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곧 산 제물로 바쳐질 포로들이 줄줄이 묶여 가축처럼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순응한 듯 눈빛에 생기가 없었다.

야만족들 몇몇이 그 주위를 맴돌며 연신 바구니에 든 무언가를 뿌려 댄다.

저걸 뭐라고 불러야 하나....

'양념?'

한편, 야만족들은 나름대로 무장을 갖추고 대비를 해 놓은 상태였다.

이미 고현우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을 테니 당연했다.

사방에서 적개심 가득한 시선들이 쏟아진다.

고현우는 그 시선들을 받으며 당당한 걸음으로 인파를 가로질렀다.

"뭣들 하나! 당장 잡지 않고!"

"죽여도 상관없다!"

누군가의 외침에 장내의 모든 창칼이 고현우를 향해 겨누어졌다.

이때부터 고현우는 점점 속도를 높였다.

앞길을 막는 것은 무엇이든 단칼에 베어 넘기며 한쪽 방향으로 쭉 달렸다.

창을 찔러 오는 놈을 스치듯 지나쳤다.

다음 순간 놈의 가슴팍에 긴 상처가 생겨났다.

다른 놈이 방패를 앞세우고 검을 휘둘렀다.

고현우가 몸을 슬쩍 기울인 다음 철검을 쓱 긋자 방패와 함께 두 쪽이 나 버렸다.

"으악!"

"크엑!"

단말마들을 뒤로하며 빠르게 나아간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미리 숙지해 둔 상태.

고현우의 목적지에는 거한 하나가 서 있었다.

보통 사람보다 눈에 띄게 큰 키와 비대한 몸집.

얼굴 분장도 울긋불긋한 것이 일반적인 야만인들과 확연히 차이가 났다.

'저자가 뚱뚱이로군.'

제단에서 대기하는 인원 중에는 부제(副祭)가 둘 존재한다.

제사장의 바로 아래 지위를 가진, 쉽게 말하면 중간보스들이다.

김호의 공략본에는 '뚱뚱이'와 '홀쭉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 뚱뚱이는 괴력을 살려 굵은 통나무를 휘두르고, 홀쭉이는 날렵하게 뛰어다니며 독침을 쏜다.

- 두 명이 협공을 시작하면 몹시 상대하기 까다로워진다.

'한번 싸워 보고 싶기는 하군.'

무인으로서 호승심이 일었으나, 고현우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지금은 공략을 그대로 이행할 뿐.'

"...."

뚱뚱이는 고현우와 시선을 맞추더니, 근처 바닥에 박힌 굵은 통나무를 끌어안았다.

그대로 힘을 주자 통나무가 점점 땅 깊숙한 곳에서 빠져나온다.

그러는 동안 고현우의 신형은 시시각각 놈과 거리를 좁혀 갔다.

공략본의 다음 내용은 무엇이고 하니,

- 두 명이 협공을 시작하면 몹시 상대하기 까다로워진다.

- 하지만 굳이 두 놈을 동시에 상대할 필요가 있나?

뚱뚱이가 통나무를 다 뽑아 들기 직전.

상대가 가장 무방비해지는 그 순간, 고현우의 철검이 한 줄기 직선을 그렸다.

[급류(急流)]

등 뒤에서부터 강렬한 바람이 불어 갔다.

고현우의 일검이 그 흐름을 타고 더욱 가속했다.

장삼과의 대결을 통해 다듬어 낸 쾌검이 펼쳐졌다.

- 팟!

다음 순간, 뚱뚱이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뚱뚱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잠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가, 이내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거체와 통나무가 연달아 바닥과 충돌하며 먼지를 피워올렸다.

- 쿠쿵!

고현우는 부스러지기 시작하는 철검을 놓아주고 새 검을 뽑았다.

싸늘하게 식어 가는 뚱뚱이의 팔을 붙잡고 팔찌를 뜯어냈다.

"우선 하나."

다음 순간 홱 몸을 돌리면서 검을 긋는다.

- 따당!

무언가가 철검에 맞고 튕겨 나갔다.

바닥에 떨어진 것을 언뜻 확인해 보니 미세하리만치 얇고 짧은 독침이었다.

고현우의 눈이 그를 둘러싼 야만족들을 찬찬히 훑다가, 사이사이로 잽싸게 움직이는 그림자를 포착했다.

십중팔구 '홀쭉이'이리라.

- 쉬익!

재차 날아드는 독침을 옆으로 반보 움직여 피한다.

발사한 곳을 눈으로 좇으니 그새 다시 종적을 감추었다.

수많은 야만족을 벽처럼 세워놓고 독침을 날려 대는 전법.

'성가시군.'

고현우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무인으로서 결코 좋아할 수 없는 전법이었다.

한 가지 희소식이라면 야만족들의 방어는 박나리의 반려 호랑이처럼 견고하지 않다는 점.

뚱뚱이를 미리 치워 둔 점이 주효했다.

공략본의 다음 지시는 고현우의 마음에 쏙 들었다.

- 곧바로 홀쭉이를 추격하지 말고, 먼저 야만인들의 수를 줄여 놓을 것.

정면 승부에는 자신이 있는 그였으니까.

파도처럼 몰려드는 적들을 앞에 두고 철검의 움직임이 점차 느릿해졌다.

[청류(淸流)]

부드러운 바람이 야만족들을 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 뒤에 벌어진 일은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 카가가가각!

"크아아악!"

바람에 담긴 검기가 범위 내의 야만족 십수 명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동족이 쓰러진 빈자리를 뒤쪽의 놈들이 채웠으나 또다시 바람이 불며 목숨을 앗아 갔다.

죽음도 불사하고 달려드는 광신도 같은 놈들이었지만, 일검에 한 무더기씩 쓰러지니 별수가 없었다.

인간의 벽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며 그사이에 몸을 숨기던 사내가 드러났다.

몸이 해골처럼 깡마르며 입에는 길쭉한 대롱을 물고 있다.

고현우는 남의 외모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김 형이 별명 하나는 잘 짓는군.'

홀쭉이라는 별명이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라고.

- 훅!

독침을 쏘아 보내는 홀쭉이.

고현우의 태도는 이전과 달리 느긋했다.

계속해서 천천히 검을 허공에 긋자, 독침이 날아가던 도중 저절로 닳아 없어져 버렸다.

"!!"

홀쭉이의 눈이 경악으로 치켜 떠졌다.

잠시간 그 자리에 굳은 놈에게 고현우가 검을 똑바로 겨누었다.

마치 다음은 네 차례라고 말하는 것처럼.

홀쭉이가 화들짝 놀라 도망치려 했지만, 아무리 재빠르더라도 바람을 피해 도망칠 수는 없는 법.

[청류]가 집중되자 온몸이 마구 뒤틀리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곧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난자된 덩어리가 바닥에 몸을 뉘었다.

"...."

고현우는 홀쭉이의 시신에 다가가 목걸이를 회수했다.

뚱뚱이의 팔찌와 홀쭉이의 목걸이.

그 둘을 합쳐 보니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딱 맞았다.

그것은 구불구불하게 똬리를 틀고 온몸이 깃털로 장식된 뱀 모양 상징물이었는데, 금방이라도 하늘로 솟구칠 것처럼 역동적이었다.

'이다음은 제단을 오른다.'

제단을 오르는 동안에는 이전보다 훨씬 방해가 덜 들어왔다.

부제 둘이 목숨을 잃은 뒤 야만족의 기세가 한풀 꺾인 느낌이다.

덧붙여 제단 자체가 함부로 발을 올려선 안 되는 성지인 듯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간혹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달려드는 한두 명만 단칼에 베어 넘길 뿐이었다.

제단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는 두꺼운 석문으로 굳게 닫힌 채였는데, 고현우가 다가가자 즉시 반응했다.

손에 든 뱀 상징물이 부르르 떨리더니, 문이 환영한다는 듯 저절로 열린 것이다.

내부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장검 한 자루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금으로 만들었으나 광택은 적고, 검날에 무수한 상형 문자들이 음각되어 있다.

검보다는 예술품에 더 가까운 물건이었다.

[깃털뱀 주술검(D)]

본래 이 주술검은 깃털뱀 제사장에게 귀속된 무기다.

마지막 결전 도중 제사장이 제단 쪽으로 천천히 이동하는데, 이를 막지 않고 그대로 두면 주술검으로 무장하게 된다.

이후부터는 근거리와 원거리 전투에 동시에 능한 마검사와 싸워야 한다.

다만 김호가 제사장을 부락에 묶어 둔 상태고, 고현우가 먼저 제단에 도달하면서 주술검은 그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다.

'한 단계가 더 남았다.'

고현우가 주술검을 쥐고 제단을 나서자 보이지 않는 이질적인 기운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모든 것을 주술검이 탐욕스럽게 집어삼켰고,

[깃털뱀 주술검(D+)]

▷깃털뱀 부족의 영혼 100/100 (완료)

▷깃털뱀 부제의 영혼 2/2 (완료)

▷깃털뱀 제사장의 영혼 0/1 (진행 중)

랭크가 D에서 D+로 반 단계 올랐다.

검날의 마모된 부분들이 제법 수복되었으며 상형 문자들도 더욱 선명해졌다.

야만족과 부제들의 영혼을 흡수하며 강화된 것이다.

마지막 하나만 더 하면 강화를 완벽하게 끝마칠 수 있을 터.

'부락으로 간다.'

고현우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김호가 중간중간 표식을 남겨 두었다 했으니, 부락을 찾기는 쉬울 것이다.

* * *

- 콰콰쾅!

나는 몇 번째 날아오는지 모를 황금빛 뭉텅이들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틀었다.

잠시 멈춰서 장내를 시야에 담았다.

자연재해라도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풍비박산이 난 부락.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야만족들.

대부분은 제사장의 작품이었다.

나에게는 도망 다닌 죄 밖에 없다.

가끔 걸리적거리는 놈들을 윈드포스로 날려 보내기는 했으니 10% 정도의 과실은 인정하겠다.

"이런...!"

제사장이 열심히 마법을 퍼붓다 말고 제단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주술검과의 연결이 끊겼다는 사실이 전달된 것이다.

주술검의 소유권이 넘어갔다는 건 누군가 침입에 성공했다는 뜻이고, 그 말은 중간보스 둘이 쓰러졌다는 뜻이다.

'끝났나 보네.'

나는 매우 흡족해졌다.

지금까지 걸린 시간을 가늠해 보니 예상과 거의 들어맞는다.

공략본이 시키는 대로 잘 따라갔나 보다.

고현우가 호승심을 못 이기고 뚱뚱이와 홀쭉이를 동시에 상대했다면 시간을 많이 빼앗겼을 터.

또한 홀쭉이를 잡을 때도 내가 시킨 대로 야만인들부터 처치하지 않았다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것은 물론 이후 주술검의 목표치인 야만인 100명을 마저 처치해야 했을 것이다.

내 공략을 최우선 순위로 설정하고 이행했기에 예상한 시간 내에 끝낼 수 있었다.

'합격이야.'

이만하면 충분히 다음 히든 피스도 믿고 맡길 수 있겠다.

"놈을 막아라! 나는 제단으로 가겠다."

제사장이 나를 가리키며 몇 안 남은 야만족들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다급하게 자리를 벗어나려 했으나,

"아저씨, 혼자 어디 가요."

['증폭'을 사용합니다.]

['윈드포스'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C+->A+)]

[지속시간 00:01:57]

[재사용 대기시간 00:49:57]

- 후웅—!

정면에 맞바람을 불게 했다.

엄청난 물리력이 가해지자 제사장은 있는 힘껏 저항하려고 했지만, 이내 정신없이 뒷걸음질 치다가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외친다.

"놈!!"

"싸우다 말고 가기 있습니까? 사람 섭섭해지게."

"방해하지 마라!!"

"거기 가 봤자 뭐 없어요. 어차피 다 끝났는데."

굳이 안 가도 어차피 고현우가 이쪽으로 오는 중이다.

주술검을 강화하기 위한 마지막 목표, 바로 제사장의 영혼을 흡수하는 것이다.

오는 길에 장애물도 없겠다, 내가 표식도 남겨놨겠다.

이곳까지 오는 데 얼마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도 슬슬 끝을 봅시다."

내 주먹이 검붉은 불꽃을 머금었다.

65화 No.388 깃털뱀 제단 (4)

제사장을 처치하기는 해야 하는데, 사실 D랭크 던전 보스는 아직 고현우가 맞상대하기는 버겁다.

이건 내가 해야겠지.

불주먹을 내지르기 전에,

'미리 복사부터 해 두고.'

['복사-특성'을 사용합니다.]

[대상의 특성 '제사장(D)'을 슬롯에 등록합니다.]

▷복사-특성[2/2]

1. 원소 저항(S)

2. 제사장(D)

깃털뱀 제사장의 주요 특성인 [제사장]이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능력이 섞인 특성인데, 그 중 '마나 감응력 증가'만 해도 마법사에게 매우 유용하다.

"놈!!"

제사장이 지팡이를 뻗자 금빛 빛 뭉치가 또다시 떨어져 내렸다.

여태까지 잘만 피하던 터라 맞아 줄 일은 없었다.

가볍게 스텝을 밟아 피하며 접근한다.

한 손은 불타는 주먹을 움켜쥔 채, 반대쪽 손을 앞으로 뻗는다.

[윈드포스]

- 후웅—!

물리력이 담긴 바람이 전후좌우에서 동시에 불며 제사장을 압박했다.

몸을 움직이려 해 봤자 옴짝달싹할 수 없을 거다.

"이, 무슨...!"

제사장이 제자리에서 덧없이 꿈틀대는 사이, 나는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 갔다.

동시에 움켜쥔 주먹도 더욱 맹렬하게 불타올랐다.

그것을 보고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는지, 제사장이 삼류 악역 같은 대사를 내뱉었다.

"이게 끝이라 생각하지 마라. 다음에는 반드시—!"

"그래요, 다음에 또 봅시다."

제사장의 안면에 인페르노 피스트가 꽂히고,

전방의 모든 것이 밀려드는 화염 폭풍에 삼켜져 버렸다.

- 콰콰콰콰콰—!

"김 형!!"

뒤이어 도착한 고현우.

제법 놀란 표정이었는데, 화염 폭발을 보고 나에게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진 줄 알았나 보다.

멀쩡한 나를 보자 곧바로 안도한다.

"어, 왔냐."

"다 끝났나 보오."

"딱 너 오기 전에."

아주 훌륭한 타이밍이었다.

고현우가 제 검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제사장의 영혼을 흡수했을 테니, 안 봐도 어떤 옵션일지 뻔하다.

[깃털뱀 주술검(C)]

▷높은 수준의 내구도 보호

▷내구도 자동회복

▷원소 저항(F)

C급치고는 거창한 능력이 달려 있지 않다.

그러나 내구도 측면에서는 C급 이상이라 봐도 좋을 정도.

덧붙여 F급이나마 [원소 저항]이 붙어 있어 마법을 후려칠 때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야말로 고현우를 위한 맞춤형 아이템인 셈이다.

능력치를 확인하는 그의 얼굴이 밝았다.

"이런 성능이라니...! 전부 김 형의 안배였구려. 고맙게 쓰겠소."

"우리 둘이 같이 해낸 건데 뭐. 대신 이건 내가 먹는다."

제사장이 사라진 자리에는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나무 상자 네 개가 놓여져 있었다.

[깃털뱀 제단 랜덤박스(D)] *4

고현우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말이오? 본인은 이 검만으로도 차고 넘친다오."

"그래. 나가자."

던전이 서서히 붕괴되어 간다.

던전의 핵심이자 보스 몬스터인 제사장을 처치했기에 유지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계속 머물러 있어서 좋을 게 없으니 빨리 나가야 했다.

밖으로 나오자 신병철이 우리를 반겼다.

"오, 진짜 얼마 안 걸렸네?"

"금방 끝난다니까."

D급 던전임에도 짧은 시간 내에 완벽하게 공략했다.

고현우와 손발이 척척 맞은 덕분이었다.

밖으로 나와 돌아보니 큼지막한 문 크기였던 던전 입구가 주먹만 하게 줄어들고, 색깔을 잃어버려 흑백이 되었다.

핵심이 파괴된 던전은 저렇게 입구가 폐쇄되며 출입이 불가능하다.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핵심이 재생성될 때까지.

그때가 되면 우리가 쓰러뜨렸던 깃털뱀 부족이 고스란히 되살아나 던전 내부를 활보할 것이다.

그러면 또 누군가가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입장하고, 핵심이 파괴되고, 재생하는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겠지.

아무튼 이걸로 첫 번째 지하층 던전은 성공적으로 마쳤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돌아가는 일이 남았거든.'

우리는 지하층 던전을 공략하는 절차를 아무것도 밟지 않고, 몰래 입장해서 핵심을 파괴했다.

신병철이 흔적은 최대한 지웠어도 던전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은 감출 수 없다.

곧 누군가가 사태를 파악하러 내려올 것이다.

십중팔구 던전동을 관리하는 교직원 중 하나가.

가능한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다.

신병철이 앞장서며 우리를 재촉했다.

"빨리빨리 올라가자. 이러다 걸릴라."

* * *

계단이란 내려갈 때보다 올라갈 때가 더 힘든 법이다.

내려가는 길도 밑도 끝이 없이 느껴졌는데, 그 길을 고스란히 되돌아가려니 장난이 아니었다.

지상으로 나올 즈음엔 마나로 단련된 육체조차 고통을 호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거리라면, 올라가면서 교직원이나 선도부를 마주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올라가면서는.

밖으로 나와서 몇 걸음 떼기가 무섭게 송천혜와 한소미를 딱 마주치고 말았다.

한소미가 세상 해맑게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안뇽안뇽!"

"...."

우리는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지하층에서 나온 건 눈치채지 못한 듯하니, 이대로 자연스럽게 가자는 결론이 나왔다.

마주 손을 흔들어 주자 한소미가 손을 흔드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반면 송천혜는,

- 파지직,

신병철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손에서 스파크를 튀겼다.

그냥 만나기만 하면 무슨 나쁜 짓을 꾸미는 건 아닌가 조건반사적으로 의심을 하는 모양이다.

대머리 가발 훔치기부터 시작해서 업보를 많이 쌓기는 했지.

신병철은 또 얼굴 가죽이 보통 두꺼운 게 아니라,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넨다.

"아이고, 선도부 여러분. 굿 이브닝입니다."

"여긴 무슨 볼일이시죠."

날 선 질문에 신병철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투로 답했다.

"던전동에 무슨 볼일이겠니. 당연히 던전 공략이지."

"잘 안 믿기는데요."

송천혜가 눈가를 지그시 좁혔다.

그 뒤에 생략된 말을 대강 짐작해 보면,

'네가? 공략전을? 월요일부터? 진짜로?'

정도가 되시겠다.

신병철이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이, 속고만 사셨나? 사람 말을 못 믿네. 야야, 너도 가만히 있지만 말고 뭐라 말 좀 해 봐."

나에게 지원사격 요청이 들어왔다.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도움을 주는 게 나을 것이다.

송천혜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희도 공략전 치고 오는 길이냐."

"그런데요."

"몇 퍼센트?"

"몰라도 돼요."

"그러냐."

말하기 싫으면 말든가.

애초에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니라, 화제를 전환하려고 물어본 거였다.

신병철이 의심을 벗어난 것 같으니, 이제 '수고하고 좋은 밤 되십쇼!' 말하고 떠나면 된다.

그렇게 내가 작별 인사를 건네려는 찰나.

"아이, 뭐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 점수가 좀 안 나왔으면 말 못 할 수도 있지."

신병철이 다 된 밥에 잿가루를 한 움큼 뿌렸다.

딴에는 도와주려고 꺼낸 말일 텐데, 방향이 심히 엇나간 것 같다.

송천혜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돋은 걸 보면 말이다.

송천혜가 화를 삭이며 우리에게 말했다.

"그쪽이 몇 퍼센트인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그쪽보단 높을 겁니다."

"그건 아닐걸."

"어떻게 확신하시죠."

'그야 나는 100%니까.'

소탕전에서 100%를 넘길 수는 없지 않겠는가.

몬스터를 만들어서 잡는 게 아니고서야.

하지만 나는 일단 말을 아꼈다.

그편이 더 이득일 것 같아서.

"그냥 감이야."

"감이 부족하신 것 같네요."

"그럼 내기할까? 누구 완성도가 더 높은가."

"뭐 거는데요."

예상대로 송천혜는 물러나지 않았다.

보면 얘도 지는 걸 엄청 싫어하는 성격 같다.

"가볍게 소원권 어때."

"소원권이요?"

"어. 부탁 하나 들어주거나 궁금한 거 알려 주는 걸로."

송천혜가 잠시간 눈썹을 찡그리고 고민하다가, 이내 내기를 수락했다.

어디까지나 가벼운 소원권이라 지더라도 크게 문제는 안 되리라 생각했겠지.

"...좋습니다."

"셋 세면 동시에 말하기?"

"그러죠."

"그럼 센다. 셋."

"둘."

"하나."

"100%"

"97%"

송천혜의 얼굴에 금이 쩍 갔다.

* * *

송천혜는 한참이나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매우 사소한 내기였지만 졌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혹은 나보다 공략전 성적이 낮다는 점이 충격이었을지도 모르고.

아무튼 우리는 이때다 싶어서 잽싸게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뒷일은 한소미가 알아서 하겠지.

소원권은 당분간 마음의 빚으로 달아 두기로 했다.

어차피 거창한 요구를 하려고 건 내기도 아니었으니, 나중에 선도부 쪽 근황이나 물어볼 생각이다.

다음 날.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잠깐 비는 시간.

서예인, 고현우와 한적한 장소에 모여 앉았다.

신병철은 심부름센터 일이 바쁘단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인벤토리에서 나무 상자 네 개를 꺼냈다.

[깃털뱀 제단 랜덤박스(D)] *4

"...."

고현우가 흥미롭다는 기색으로 상자들을 내려다보고, 서예인도 드물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상자를 콕콕 찔러 보았다.

고현우가 물었다.

"이걸 열면 무엇이 나오는 거요?"

"나도 몰라. 워낙 종류가 많아서."

정말 온갖 아이템이 튀어나오는 데다 확률도 공개된 게 없어서, 나조차도 내용물을 완벽하게는 모른다.

다만 꽤 자주 나온다고 알려진 아이템이 몇 개 있는데, 그중에서 내 목표는 '제사장의~' 수식어가 붙은 아이템들.

수식어가 붙기만 하면 D등급이니, 종류는 뭐가 되었든 만족할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개봉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와—"

서예인이 소리 없는 박수를 보냈다.

영혼 없어 보이지만 저게 쟤가 할 수 있는 최대 리액션이다.

나는 랜덤박스 하나를 들어 마술쇼를 하듯 이리저리 보여 준 다음에, 마음가짐을 경건하게 하고 덮개를 열어젖혔다.

- 번쩍!

뿜어져 나오는 광채가 썩 밝지는 않다.

그래도 내용물을 확인해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

[랭크 업(E)]

'나쁘지 않아.'

랜덤박스의 등급을 고려하면 중박 정도라 하겠으나, 랭크 업은 나에게 꽤 중요도가 높은 아이템이었다.

그래서 그저 감사히 받았다.

"다음."

두 번째 상자를 개봉한다.

이번에는 제자리에 둔 채 덮개만 슬쩍 열었다.

- 번쩍—!

"오."

"오."

고현우와 내가 동시에 감탄성을 흘렸다.

첫 번째보다 확연히 강렬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제사장의 검은 팔찌(D)]

'나왔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제사장' 아이템인 데다 내가 선호하는 장신구 쪽.

거기에 앞서 나온 랭크 업까지 포함하면 본전치기 이상은 한 셈이다.

해서 나는 한결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두 사람에게 제안했다.

"한 번씩 열어 볼래?"

"그래도 괜찮겠소?"

주술검만으로 충분하다며 나에게 모든 랜덤박스를 양보하기는 했지만, 내심 내용물이 궁금하기는 한가 보다.

고현우가 조심스레 세 번째 상자를 들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뒤 덮개를 들어 올렸다.

- 달칵.

[깃털뱀 부족의 나무잔(F)]

"크흠...."

고현우가 무안한지 연신 헛기침을 해 대기 시작했다.

열 때부터 빛이 한 줄기조차 안 보이더니, 역시나.

가끔씩 랜덤박스에서 전투와는 아예 무관한 생활 계열 아이템도 나오곤 하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없군."

"김 형에게 면목이 없구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그럴 수도 있지."

대리깡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승복하기, 남 탓하지 않기가 이 바닥의 관례다.

고현우가 운이 없다 한들 맡기기로 결정한 건 나이기 때문이다.

나무잔은 고현우가 찻잔으로 쓰기로 했다.

이제 남은 랜덤박스는 하나.

고현우와 내 시선이 서예인에게 집중되었다.

분위기상 부담감을 느낄 만도 한데, 서예인은 무덤덤한 얼굴로 랜덤박스를 제 앞으로 가져가더니, 더없이 자연스럽게 열어젖혔다.

- 번——쩍——!

66화 No.388 깃털뱀 제단 (5)

- 번——쩍——!!

섬광탄을 터뜨린 것처럼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빛이 가신 뒤에도 고현우와 서예인은 한동안 멍한 상태였다.

이런 경우는 정말 흔치 않았기에 나 역시도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무슨 아이템이 나왔나 확인해 보았다.

단출한 디자인을 가진 큼지막한 쿠션.

유감스럽게도 방금 고현우가 뽑은 나무잔과 같은 생활 계열 아이템이다.

그런데 생활 아이템의 등급이 예사롭지 않다.

[깃털 쿠션(B)]

'쿠션 주제에... B랭크나 돼?'

D급 랜덤박스에서 C, B급 아이템이 나오는 건 가능은 하지만, 확률이 지극히 낮아서 그냥 없다고 치부해도 될 수준이다.

그런데 서예인이 그 기적적인 확률을 뚫고 이 쿠션을 뽑아 버릴 줄은.

B랭크는 대개 3학년들이 착용하는 등급으로, 서예인이 쓰는 [투명 길리슈트]나 일전에 선물 받은 [구름밟이]같이 귀하디귀한 것들이다.

그런 귀한 장비들과 등급이 같다는 건 쿠션의 가치도 그와 엇비슷하다는 뜻이고.

그 사실을 증명하듯 무슨 옵션이 덕지덕지 많이도 붙었다.

[깃털 쿠션(B)]

알 수 없는 신수의 깃털이 들어간 쿠션.

▷피로 해소 속도 가속

▷정신 계열 상태이상 회복

▷장기간 사용 시 정신 계열 상태이상 저항력 소폭 증가

....

….

피로 해소 가속은 쉽게 표현하면 1시간 수면으로 2시간어치 피로를 해소한다는 뜻.

정신 계열 상태이상 회복과 저항력 증가도 알차다.

그 외에도 불면증 해소, 목디스크 완화 등, 사용자의 숙면을 돕는 이로운 효과들이 가득하다.

성능만 놓고 보면 심층부 던전에서 드랍하는 장비들 못지않다고 해야겠지만....

'잘 때 쓰는 물건인 게 아쉽네.'

생활 아이템들의 옵션은 '편안하고 윤택한 생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는 전투와 성장을 중요시하는 극한의 효율충이라, 저 옵션 중 절반 정도는 별로 필요하지 않다.

자유 시간 대부분을 트레이닝 센터에서 보내기에 쿠션을 쓸 일이 적기도 하고.

물론 전투, 성장 관련 옵션만 놓고 봐도 도움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럴 바에는 처분해서 다른 아이템을 확보하는 편이 더 유용하지 않을까 싶다.

B급 생활 아이템쯤 되면 구매할 사람이 꽤 많을 테니까.

'심부름 센터 쪽에 넘겨 볼까, 경매에 내놔 볼까.'

여러 방향으로 고민을 하던 도중 서예인을 보니,

"...."

쿠션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늘상 그렇듯 아무 표정도 없지만, 회색빛 눈동자가 반짝반짝거린다.

척 봐도 엄청 갖고 싶어 한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갖고 싶냐?"

"...."

확인차 묻자 즉시 고개를 끄덕인다.

보통은 반응이 반 박자가량 늦게 돌아오는데, 이렇게 즉각적인 반응이라니.

이게 쿠션의 위력?

나는 '우린 친구니까!' 같은 감정적인 부분을 배제하고, 마음속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다.

지금 가장 중요한 질문은.

팔아먹는 게 나은가?

얘한테 주는 게 나은가?

'이건 주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서예인의 하루 수면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잠이 많은 건 확실하다.

쿠션의 피로 회복 가속 옵션을 쓰면 휴식 시간을 꽤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휴식 효율이 올라가면 그만큼 깨어 있는 시간이 늘어날 테고, 크게 보면 수련 시간이 늘어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물론 예상과는 달리 변화가 없을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도 걸어 볼 만해.'

성공했을 때 확보될 여유 시간을 생각하면, 충분히 B급 생활 아이템을 내줄 만한 가치가 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쿠션을 서예인 쪽으로 슬쩍 밀어 주었다.

"그래, 줄게."

"정말?"

내가 선뜻 준다고 하니 안 믿기는지, 아니면 남한테 뭘 받아 본 적이 별로 없는지, 반신반의한 기색이다.

나는 아예 쿠션을 들어 서예인의 품에 안겨 주었다.

"어. 선물."

"...고마워."

서예인은 잠시 자기 품속의 쿠션을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꼭 끌어안았다.

* * *

월요일부터 공략전을 뚝딱 해치워 버리고 나니, 남은 시간은 오롯이 수련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랭크 업(E)'을 사용합니다.]

['증폭'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E->D)]

[지속 시간 2:00->3:00]

[재사용 대기시간 50분->40분]

랜덤박스에서 나온 E급 랭크 업은 [증폭]을 올리는 데 사용했다.

지속 시간이 짧고 대기시간이 긴 스킬이라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만 사용하는데, 앞으로 더 등급을 올리면 그런 제약에서 보다 자유로워질 것이다.

다음은 깃털뱀 제사장에게서 복사한 특성, [제사장].

이 특성을 우선순위로 삼은 첫 번째 이유는 바로 마나 감응력 증가.

모든 마법적 행동에 긍정적인 보정이 붙고, 그중에서도 [코어]를 쌓는 속도를 가속해 준다.

관련 아이템인 [제사장의 검은 팔찌]에는 이 마나 감응력을 배가시켜 주는 효과가 있고.

거기에 일전에 얻은 [블랙 미스릴 밴드]까지 더하면, 특수연공실에는 못 미치더라도 제법 만족스러운 효율이 나온다.

'이대로 C급까지 달린다.'

보유한 스킬들의 수준이 올라감에 따라 슬슬 D급 [코어]만으로는 버거워지던 참이다.

다음 단계로 올려놓아야 전투 도중 마나 부족에 허덕일 일이 없다.

며칠 이내, 심층부 던전에 들어가기 전까지 해결을 볼 심산이었다.

나는 날이 저물고 다시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마나 연공에 매진했다.